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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어 확률 제로 1권

2019.07.22 조회 3,463 추천 23


 클리어 확률 제로 1권
 
 
 목차
 
 1장 프롤로그
 2장 플레이어 수용소
 3장 정보 수집
 4장 신성 교단
 5장 밀고자
 6장 탈출 계획(1)
 1장 프롤로그
 
 
 때는 2020년.
 난데없이 게이트가 열리고 헌터란 직업이 생겨났다.
 이후 대레이드 시대가 열리게 되었고, 일찍이 헌터로서 재능을 검증받게 된 나는 헌터가 되어 게이트 세상을 누비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0년 후.
 내가 못 잡을 몬스터는 없었고, 두려운 것 또한 없었다.
 나는 항상 1등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긴 어디야?’
 클리어 확률 0%.
 절대로 깰 수 없는 불가능한 게임에 던져졌다.
 2장 플레이어 수용소
 
 
 -플레이어께선 ‘갓 아너’ 난이도를 선택하셨습니다.
 -플레이 난이도는 이지, 노말, 하드, 익스트림, 나이트메어, 헬, 레전드, 갓 아너 순으로 올라가며 총 8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현재까지 각 난이도별 클리어 성공률은 96%, 64%, 13%, 0.3%, 0.0012%, 0%, 0%, 0%로 집계되어 있습니다.
 -알림! 권위와 위엄이 서려 있는 주시자의 눈이 그대를 지켜봅니다.
 -갓 아너를 선택한 플레이어의 오만에 경의를 표합니다.
 
 정민이 한 차례 몸을 떨며 의식을 차렸을 땐 시야를 어지럽히는 메시지들로 정신이 무척 사나웠다.
 ‘뭐지?’
 정민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눈앞에 떠다니는 메시지를 치우려 했다.
 하지만 그게 무의미하다는 건 금방 알아차렸다. 손을 아무리 휘저어도 시야를 어지럽히는 메시지는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Act I, scene #01 Starting······.
 -액트 1 ‘플레이어 수용소’를 시작합니다.
 -현재 플레이어는 수용소에 위치해 있습니다.
 -갓 아너 난이도에서 정상적인 성장을 기대하는 건 아주 어리석은 짓입니다.
 -경고! 오만함엔 그만한 대가가 따르는 법.
 -죽음만이 플레이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짜증나는 메시지가 신경 쓰였던 건 아주 잠시.
 정민은 온몸에 채워진 구속구들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이건 또 뭐야?’
 마치 죄수가 된 느낌.
 여기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려 애써 보았지만 전부 헛수고였다.
 ‘기억나질 않아. 아무것도······.’
 정민은 떠오르지도 않는 기억에 집중하는 것보다 몸을 구속하고 있던 족쇄와 구속구를 떼어내기로 했다.
 이럴 때 쓰는 게 바로 마나.
 정민은 아주 유명한 헌터였다. 그렇기에 마나를 끌어내면 마치 흙을 움켜쥐듯 금속조차 긁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다.
 ‘힘이 전부 사라진 건가?’
 정민은 구속구를 떼어내지 못한 채 주변을 살펴보았다.
 어두침침한 내부 공간.
 그곳엔 낡고 냄새나는 침대가 여러 개 있었고, 주변엔 사람처럼 두 발로 걷는 몬스터 무리가 있었다.
 고블린에 오크, 불곰에 허수아비 같은 게 뒤뚱뒤뚱 걷고 있었다. 전부 다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있었고, 정민과 마찬가지로 구속구를 차고 있었다.
 
 -팁! 정보가 곧 힘.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 정보를 수집하십시오. 어떤 정보는 퀘스트를 클리어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그때 낡은 방문이 세차게 열리며 험악하게 인상을 구긴 간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빨리빨리 안 튀어나와! 집합이다!”
 영문도 모른 채 돌아가는 주변 상황은 정민에게 진행만을 강요하고 있었다.
 여긴 어디이며, 저기서 소리치는 녀석은 또 누구란 말인가?
 집합 소리에 정신없이 밖으로 향하던 고블린 하나가 움직일 생각도 없이 머리만 싸매고 있던 정민을 발견했다. 그 고블린은 다짜고짜 정민에게 다가가 목소리에 날부터 세웠다.
 “빨랑빨랑 안 움직여! 지금 집합이잖아!”
 안 그래도 짜증나 죽겠는데 소리까지 치다니.
 정민이 고개를 들어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흡!”
 얼마나 살벌하게 노려봤는지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킨 고블린이 쭈뼛 얼어붙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고블린은 제 위치를 상기하며 오히려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 이 새끼가 지금 어디서 눈을 부라려! 눈깔을 콱!”
 고블린은 조막만한 두 손가락을 세우며 정민을 위협했다.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게 자신을 위협하니, 정민은 그저 한숨만 나왔다.
 정민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주변 분위기에 맞춰 일단 움직여 보기로 했다.
 ‘상황 파악은 천천히 하자.’
 정민은 산송장처럼 움직이는 무리를 따라나섰다. 방문을 지나고 낡은 복도를 지나니 계단에 닿았다.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낡은 계단.
 그 계단을 내려오니 탁자 위에 두 다리를 올려놓고 제법 여유롭게 책장을 넘기고 있는 자가 보였다.
 두꺼운 가죽 외투, 외투 안쪽에 비치는 갈색 정복을 보니 아까 방문을 박차고 들어와 집합을 외치던 자와 비슷한 부류로 보였다. 느낌상 이곳의 감독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대충 내가 수감자고, 저 사람은 여기 간수로 보이는데······.’
 정민은 우르르 몰려나가는 무리에 섞여 건물 밖으로 나왔다. 주변은 어두침침했고, 날을 너무 추웠다. 살을 찢는 추위, 바람은 왜 이리 세차게 부는지.
 
 -플레이어의 체온이 급속도로 낮아지고 있습니다.
 -플레이어의 냉기 저항력은 -40%입니다. 이는 갓 아너블 난이도 보정에 따른 것입니다.
 -경고! 급격한 체온 저하는 쇼크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보온 대책이 절실합니다. 보온 대책을 강구하십시오.
 
 최상위 헌터였던 정민조차 힘을 잃은 이상 추위를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누더기 같은 얇은 옷. 메시지가 말하는 -40%에 육박하는 냉기 저항력.
 세상이 미쳐 있었다.
 ‘미친 듯이 추운데?’
 마나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몸은 예전 기억을 비웃기라도 하듯 잔인한 고통을 선사하기 시작했다.
 딱딱딱!
 정민이 이까지 부딪히며 잠시 미친 듯이 떨고 있자, 산송장처럼 걸어 나오던 무리가 일제히 오와 열을 맞춰 줄을 서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흡사 군인들이 대대장 훈시를 듣기 위해 연병장에 모이던 모습과 똑같았다.
 ‘진짜 더럽게 춥네. 이러다 얼어 죽는 거 아냐?’
 정민은 주변 분위기에 맞춰 줄부터 서고 봤다.
 하지만 머릿속은 온통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민이 아무 줄 사이에 끼어들자, 앞뒤로 불편한 시선들이 쏘아졌다. 이를 이상하게 여기는 것도 잠시, 정민의 귓전을 파고드는 선전포고와도 같은 고성이 이어졌다.
 “뒤로 안 꺼져! 여기 줄서는 것도 짬밥 순인 거 몰라?”
 고개를 돌리니 웬 리자드맨 하나가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놈의 혓바닥부터 뽑고 봤겠지만, 정민은 조용히 뒤로 가 섰다.
 정민이 선 자리는 대열의 가장 뒷줄이었다. 뒤바람까지 가세하자 혈관 속 피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맹추위가 정민의 정신을 아득히 만들었다.
 이러다 영문도 모른 채 동사(冬死)할 거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을 때, 정민은 살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농담 아니야. 이러다 진짜 죽는다.’
 혹한 속을 걷다가 그대로 동사한 동물 이야기가 비단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정민은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주변부터 살폈다. 그러다 한 곳에서 시선이 멈췄다.
 ‘파이어 골렘?’
 활화산처럼 타고 있는 존재가 보였다. 그것은 놀랍게도 전신에 구속구를 차고 있는 파이어 골렘이었다.
 정민은 다짜고짜 파이어 골렘이 서 있는 대열 가장 끄트머리에 섰다.
 잠시 후.
 단상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자가 있었다. 인간이었고 중년 남성이었다. 그는 보기에도 탐이 나는 두꺼운 동물 가죽으로 된 외투를 망토처럼 걸치고 있었다.
 단상 위에 올라선 그가 추위에 떨고 있던 수감자들에게 입을 열었다.
 “오늘은 짧게 전달할 사항이 있다. 며칠 뒤면 이곳에 귀한 분이 찾아오실 예정이다.”
 그는 수감자들을 내려다보며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어렵사리 주워 듣기론 유난히 깔끔을 떠시는 분이라고 하니, 하찮기 그지없는 우리들이 거기에 맞춰 드리는 게 나름 도리가 아니겠나? 그런 의미에서 오늘부터 구석구석 청소 좀 해. 방에 냄새 나는 것 좀 치우고. 똥간도 좀 비우고.”
 말을 마치며 그는 추위에 벌벌 떨고 있는 수감자들을 내려다보며 밉살맞게 비웃음을 흘렸다.
 “그럼 오늘 하루도 충직한 개새끼가 되어주길 바란다. 전부 해산하고 바로 일 시작해!”
 이름도 모를 그가 소리침과 동시에 정민의 시야에 메시지가 추가됐다.
 
 -‘철광석 채굴’ 반복 퀘스트가 추가됩니다.
 [메인 퀘스트(0)]
 [서브 퀘스트(1)]
 *철광석 채굴(0번 완료)
 -현재까지 플레이어는 철광석 채굴 퀘스트를 0번째 완료하셨습니다.
 
 세상에! 퀘스트란다.
 이게 무슨 게임이라도 되는 건지.
 정민은 오와 열이 무너지자마자 곧장 파이어 골렘 뒤로 가 섰다. 퀘스트고 지랄이고 나발이고 간에 얼어붙은 몸부터 녹이는 게 순서였으니까.
 그런 정민 옆으로 작은 고블린 하나가 찾아와 섰다. 정민과 마찬가지로 얼어붙은 몸을 녹일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이를 본 파이어 골렘이 꽉 말아 쥔 주먹으로 고블린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고블린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정민은 반사적으로 파이어 골렘과 거리를 벌렸다.
 ‘뭐야 이 골렘은?’
 그 다음으로 정민을 노리려 했던 파이어 골렘은 정민이 알아서 거리를 벌리자, 정민을 무시하고 제 갈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갓 아너 난이도에서 정상적인 성장을 기대하는 건 아주 어리석은 짓입니다.
 -죽음만이 플레이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멀어져 가는 파이어 골렘.
 이에 맞춰 정민의 몸도 빠르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붙으면 뚝배기가 깨진다.
 하지만 떨어지면 동사.
 갈등하는 사이 정민은 연병장에 그대로 얼어붙은 두 명의 불쌍한 수감자를 보게 됐다.
 추위에 떨다가 동사한 고블린과 얼어붙은 드워프.
 전부 자신처럼 대열 뒤에 서서 세찬 바람을 그대로 맞았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서 있는 채로 죽었다.
 ‘얼어 죽었어······.’
 그들을 보자 정민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무조건 붙어야 돼.’
 그 생각밖에 안 들었다.
 하지만 너무 대놓고 붙으면 안 됐다. 성깔 더러운 골렘이 그 즉시 뚝배기를 깨버릴 테니까.
 파이어 골렘은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오는 정민을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자기 주변엔 많은 인원들이 걸어가고 있었고, 그들은 파이어 골렘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가 내뿜는 온기를 반기고 있었으니까.
 
 -주의! 플레이어의 냉기 저항력이 매우 낮습니다.
 -동사할 확률이 증가합니다.
 -알림! 현재 플레이어의 모든 원소 저항력은 -40%입니다.
 -화염 저항력 역시 -40%로 불과 접촉 시 심각한 화상을 입을 수 있으므로 플레이어의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시야를 어지럽히는 메시지들은 계속됐다. 화염 저항력이 낮다는 메시지가 올라왔지만 어차피 파이어 골렘과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했음으로 무시했다.
 그보다 정민을 더 괴롭히는 건 ‘대체 왜 이곳에 있느냐’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잠자다 깨어나 보니 기억에도 없는 수용소였다.
 ‘다 게임 같아. 이게 뭐야? 무슨 가상현실 게임이야?’
 걸으면서 이것저것 생각해봤지만 속 시원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걷기를 몇 분.
 ‘어디로 가는 거야. 막사는 그쪽이 아니잖아.’
 정민은 파이어 골렘과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하며 어디론가 향했다. 내심 막사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건 혼자만의 바람일 뿐, 그 누구도 막사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근처에 위치한 광산이었다. 집합 교육을 받았던 연병장으로부터 걸어서 10분 거리. 광산 안은 바람이 안 불어서인지 바깥보다 춥지 않았다.
 광산에 도착한 무리는 말없이 곡괭이부터 들었다.
 정민도 그들을 따라 얼떨결에 곡괭이를 잡았다. 곡괭이까지 잡자 정민을 괴롭히던 생각은 더욱 강렬해졌다.
 ‘진짜 뭔데! 나는 왜 여기 있는 거냐고!’
 그때 퀘스트 메시지가 떠올랐다. 메인 퀘스트 시작을 알리는 나름 상징적인 메시지였다.
 
 -메인 퀘스트가 점화됩니다.
 -메인 퀘스트 ‘여긴 어디야?’가 시작됩니다.
 -알림! 플레이어는 영문도 모른 채 플레이어 수용소에 갇혔습니다. 주변으로부터 정보를 수집하여 퀘스트를 해결하십시오.
 [메인 퀘스트(1)]
 *여긴 어디야?
 [서브 퀘스트(1)]
 *철광석 채굴(0번 완료)
 
 ‘×발 아주 난리 났네.’
 속에서 오만가지 욕이 튀어나왔다.
 여기 온 이유에 대해 계속 생각했더니 이번엔 아예 대놓고 퀘스트 형식으로 나오는 게 아니겠는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내가 무슨 올드보이도 아니고. 대체 뭐냐고!’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거 원래 아무 정보도 없이 시작하는 건가?’
 영화 올드보이도 그랬다. 주인공은 영문도 모른 채 이상한 곳에 갇혔는데, 갇히게 된 이유가 영화 후반부에 나왔다. 처음부터 알고 갇힌 게 아니란 소리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 떨어진 이유를 모르고 시작한다는 건데······ 메인 퀘스트 어쩌고 하는 거 보면 내가 앞으로 알아내야 할 숙제 같은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정민은 제 시야에 떠다니는 메인 퀘스트라는 것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자 놀랍게도 간략하게 나오던 메인 퀘스트가 더 자세하게 표시됐다.
 게임으로 치자면 퀘스트 창을 열람한 것이다.
 
 -현재 진행 중인 메인 퀘스트를 열람합니다.
 -특정 퀘스트를 열람할 시 해당 퀘스트의 진행 사항을 보다 자세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메인 퀘스트(1)]
 *여긴 어디야?
 -영문도 모른 채 수용소 같은 데서 깨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곳에서 깨어난 이유를 모르겠다. 일단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 어떤 상황인지 대강 알아봐야겠다.
 
 퀘스트를 열람하니 해당 내용이 나왔다.
 대충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자는 내용.
 ‘그렇다는 건데.’
 하지만 지금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물을 처지가 아니었다. 정민의 두 손엔 곡괭이가 쥐어져 있었으니까.
 정민은 내친김에 서브 퀘스트도 확인해 봤다.
 
 [서브 퀘스트(1)]
 *철광석 채굴(0번 완료)
 -오늘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분명 얼어 죽을 것이다. 무조건 일일 할당량을 채워 살아남도록 하자. 참고로 일일 할당량은 자기 덩치의 20배 이상이다.
 
 퀘스트 내용을 확인하기가 무섭게 어떤 고블린 하나가 쩌렁쩌렁 소리쳤다.
 “빨랑빨랑 움직여 이 굼벵이들아! 오늘 할당량 못 채운 새끼들은 석탄 못 받을 줄 알아!”
 석탄?
 설마 퀘스트 보상이 석탄이란 말인가?
 정민이 의아해하는 것도 잠시.
 수감자들이 일제히 곡괭이질을 하기 시작했다. 정민은 그들을 보며 짧은 감상평을 내놓았다.
 ‘별의별 놈들이 다 있었네.’
 고블린에 오크. 리자드맨.
 정민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귀가 유난히 뾰족한 이들과 난쟁이처럼 보이는 족속도 있었고, 골렘이나 해골도 있었다.
 전부 그 생김새가 가지각색이었지만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정민처럼 온몸에 구속구와 족쇄를 달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죄인처럼.
 ‘개 같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곡괭이질을 시작한 정민은 어느 샌가 땀으로 범벅이 됐다. 밖은 추워 죽겠는데, 갱도 안은 힘들어서 죽을 지경이다.
 ‘내가 고작 이 정도에 땀을 흘린다고?’
 정민은 나름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곳에서 깨어나기 전, 정민은 모두가 알아주는 국가 공인 S급 헌터였다. 그런 헌터 중에서도 천상계 랭커였고, 그 천상계에서도 항상 1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맨손으로 전설급 트롤도 때려잡았는데, 그랬던 자신이 고작 곡괭이질 몇 번에 힘들어 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구속구가 문제인 거 같은데······ 대체 누가 이걸 달아놓은 거야?’
 일을 만만하게 봤던 모양인지 벌써부터 온몸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곡괭이질이 너무 힘들었다. 정말 힘들었지만 정민은 이를 악물고 제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묵묵히 곡괭이질을 반복했다.
 복종의 의미가 아니었다. 의지의 관철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비춰지는 그 모습은 굉장히 순종적이었다.
 그 모습을 고블린 작업반장이 놓칠 리 없었다. 죄수 중에서 제법 짬밥이 되는 이들은 간수의 똥꼬를 빨고 작업반장이란 타이틀을 달게 된다. 곡괭이질에서 나름 열외가 되어 같은 수감자들을 감시하는 것인데, 그런 작업반장이 개처럼 일하고 있는 정민을 놓칠 리 없었다.
 간수에게 받은 붉은 완장을 자랑하듯 차고서 주변을 서성이던 고블린 하나가 정민을 보고 씩 웃었다.
 ‘신참 새끼네. 첫 인상과 다르게 아주 맘에 들어.’
 그러던 그가 갑작스레 돌변했다. 근처에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어설픈 곡괭이질로 제 신경줄을 긁는 엘프를 봤기 때문이다.
 “아미르 저 새끼 또 저런다. 하여간 어딜 가나 엘프 새끼들이 문제라니까. 야! 오늘 할당량 못 채우면 석탄 없을 줄 알아!”
 그렇게 시작한 채굴 작업은 12시간 뒤 종료됐다.
 정민은 간신히 제 할당량을 채울 수 있었다.
 ‘빌어먹을. 병신 다 됐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곡괭이질만 12시간.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곡괭이를 꽉 쥐었던 손아귀는 힘이 다 풀려 무엇 하나 쥘 수 없는 상태였다. 단언컨대 내일 곡괭이질을 장담할 수 없는 상태.
 ‘내일은······.’
 그런 정민 어깨를 툭툭 치며 지나치는 이가 있었다. 정민이 막사에서 굼뜨고 있을 때 대놓고 으르렁거리며 정강이를 걷어찼던 그 고블린이었다.
 “신참, 아주 맘에 들어.”
 누런 이를 드러내며 고블린이 씩 웃어주었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일하는 거야. 개처럼.”
 동시에 확인되는 퀘스트 클리어 메시지.
 
 -‘철광석 채굴’ 서브 퀘스트를 ‘1번’ 완료하셨습니다.
 -보상으로 플레이어에게 곰팡이 핀 빵 1개, 석탄 1개가 지급됩니다.
 -보상 지급은 막사에서 이뤄집니다.
 
 12시간 동안 개같이 일했는데, 주는 보상이 아주 예술이었다.
 ‘뭐? 지금 뭘 준다고?’
 12시간 개같이 일하고 고작 썩은 빵 하나와 석탄 쪼가리 받으려고 그 짓을 했단 말인가?
 어이가 없어 말조차 안 나왔다.
 돌아온 막사 안.
 정민은 냄새 나는 빵과 석탄 쪼가리를 받았다.
 이것도 보상이라고 주는 건지. 두 보상을 손에 쥐고 오만가지 생각을 하고 있던 정민에게 작업반장의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병신 같은 새끼가 일도 못하면서 신만 찾고 지랄이네!”
 오늘 갱도 안에서 작업반장에게 찍혔던 아미르라는 엘프가 돌아온 막사 안에서 제 신을 찾아 기도를 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보고 빡친 고블린 작업반장이 목에 핏대를 세운 것이다.
 “네 새끼가 그런다고 없는 빵이랑 석탄이 생기냐! 병신 같은 짓 그만하고 내일 할당량이나 채워!”
 정민이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고블린 작업반장이 뭐라 지껄이든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고블린 작업반장의 일갈은 계속됐다.
 “잘 들어 새끼들아! 여기선 빵과 석탄이 우리의 신이다. 이것 외에 네놈들이 알고 있는 신이 있다면 당장 이 난로 속에 던져버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따뜻할 테니까.”
 지린내 나는 침대에 엉덩이를 걸터앉고 있던 정민은 한기를 느꼈다. 갱도에서 얻었던 열기가 다 가시자 이제 끝없는 추위가 다시 찾아온 것이다.
 정민은 중앙에 있는 난로에 다가가 섰다.
 겁 없는 신참 하나가 석탄 쪼가리를 믿고 난로에 다가서자, 난로 근처에 서 있던 두 붉은 리자드맨이 낮은 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그런 두 리자드맨을 막은 건 다름 아닌 고블린 작업반장이었다.
 “됐어. 그 새끼 오늘 곡괭이질 열심히 했다. 쐬게 놔둬.”
 그런 배려에도 정민은 별 생각이 없었다.
 굳이 고블린이 제 편을 들지 않았더라도 이들과 싸움이 났다면 두 리자드맨의 관자놀이를 무엇으로든 찍어버렸을 테니까.
 ‘대체 여긴 뭐하는 곳이냐.’
 별로 따뜻하지도 않은 난로 옆에 서서 정민은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시궁창보다 못한 곳에서 평생 곡괭이질만 하고 버텨야할까?
 ‘아니, 나는 못 해.’
 정민은 이곳에 온 지 하루도 안 돼 새로운 목표를 잡았다.
 ‘이 거지같은 곳에서 나간다. 무조건!’
 정민이 그렇게 마음먹었을 때, 옆에 서 있던 두 리자드맨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나저나 이 새끼는 신삥 치고 조용하네? 보통 여기 오면 여기가 어디야? 하면서 부산 떨기 바쁜데.”
 “그러다 한 대 쳐주는 재미가 쏠쏠한데 말이야. 끌끌.”
 정민은 자기를 두고 뭔가 아쉬움을 흘리는 두 리자드맨을 쳐다보았다. 자세히 보니 둘의 생김새가 똑같았다.
 마치 쌍둥이 같은 느낌이랄까?
 아무리 다 같은 리자드맨이라 해도 저리 똑같이 생길 순 없었다. 쌍둥이 형제처럼 보였다.
 정민이 쳐다보자 두 리자드맨의 입매가 살며시 요동쳤다.
 “어디서 인간 나부랭이가.”
 “콱 죽여 버려?”
 두 리자드맨은 우월한 체격으로 정민을 깔보듯 내려다보았다.
 반면 정민은 둘을 보며 속으로 독기를 품었다.
 ‘정녕 죽고 싶은 건가?’
 근처에 있던 고블린 작업반장이 끼어들었다.
 “다 너희 같은 줄 알아? 전부 한 가닥씩 하던 놈들이라 다르다고. 저기 저 새끼도 왔을 때 딱 이 새끼처럼 가만히 있었어. 닥치고 눈깔만 아주 버라이어티하게 굴려댔지.”
 정민은 꼭 자기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정보를 수집하는 차원에서 고블린 작업반장이 가리키는 한 남자를 쳐다봤다.
 그는 근처 낡은 침대에 앉아 조용히 쉬고 있었다.
 정민은 계산적으로 그를 분석했다.
 ‘나와 같은 인간에다가 나이는 서른 후반 정도. 외모는······.’
 잘생기긴 했는데 자신과 같은 동양인은 아니었다.
 꼭 판타지에 나올법한 이국적인 외모라 할까?
 정민은 그를 더 자세히 살펴봤다.
 전체적으로 무게감이 있었으며 특징이라면 갈색 머리칼에 군데군데 흰 머리가 눈에 띄었다.
 ‘새치가 많네. 유전인가?’
 근처에 있던 고블린 반장이 추가적인 말을 덧붙였다.
 “하여간 요한 저 새끼는 그냥 마음에 안 든다니까.”
 제 이름을 언급해서일까?
 가만히 앉아 있던 요한이 그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마치 외로운 늑대가 바라보는 것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섬뜩함이 그들에게 전달되었다.
 그 늑대의 시선이 느껴지자 고블린과 두 리자드맨은 일제히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피웠다. 마치 늑대 앞에서 꼬랑지를 내리는 개처럼. 딱 그 꼴이다.
 하지만 정민만은 달랐다. 정민의 눈동자는 마치 경쟁자를 앞에 둔 듯 살벌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이름이 요한이라고?’
 두 남자는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맹수끼리의 시선 교환이었다.
 그러다 먼저 시선을 치운 쪽은 요한이었다. 요한이 시선을 치우자 정민은 그 의도를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괜한 분란은 피하려는 거군. 딱 나처럼.’
 정민이 생각하기에 요한은 전형적인 주시자의 모습이었다. 아니, 그건 그만이 아니었다.
 요한을 의식한 뒤 주변 수감자들을 하나씩 살펴봤더니 전부 요한 같은 느낌이 짙었다. 전부 자기 색과 독특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늑대 같거나.
 불곰 같거나.
 아니면 악당 같거나.
 전부 다 일반인이 쉽게 가질 수 없는 자기만의 색을 갖추고 있었다.
 ‘전부 다 어디서 놀다 온 거 같아. 단순히 느낌이지만 뭔가 있어 보여.’
 물론 아닌 녀석들도 있었다. 지금 자신 옆에서 깝죽거리는 고블린 반장 녀석과 양아치처럼 거들먹거리는 두 리자드맨은 여기서 예외였다.
 정민은 이런 부류를 이렇게 생각했다.
 ‘잔챙이.’
 하지만 조용히 있는 다른 수감자들은 아니었다.
 이쯤에서 정민은 이런 의문이 들었다.
 ‘전부 뭐하는 녀석들이지?’
 문득 수감자들의 배경이 궁금해졌다.
 하지만 자기가 묻는다고 해서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 하는 그들이 대답해줄 것 같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게다가 정민 자신도 힘든 몸을 이끌고 간신히 난로 옆에 서서 몸을 데우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시궁창에서 몇 날 며칠, 어쩌면 한 달 이상을 살아온 그들이 말이라도 받아줄까?
 ‘귀찮아하겠지. 굳이 대답할 이유도 없고.’
 그때였다. 고블린 반장이 갑작스레 픽 쓰러진 아미르를 보고 입을 열었다.
 “저기 저 새끼 봐라. 자기 신을 찾다가 결국 뒈져 버렸네?”
 고블린 반장이 가리키는 곳엔 기도하다 쓰러진 아미르라는 엘프가 있었다.
 정민도 그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고블린은 상당히 비아냥거렸다.
 “기도하던 신이 아주 바쁘셨나봐. 뒈져가는 몸도 안 챙겨주시고. 그러니까 누가 기도 같은 거 하래! 기도할 시간에 철광석이나 더 캐라고!”
 정민은 쓰러져서 골골대는 아미르라는 엘프를 살펴봤다.
 끼니를 얼마나 걸렀는지 몸이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보일 정도.
 정민이 보기엔 저 엘프는 별로 가망이 없어 보였다.
 그때 요한이라는 남자가 벌떡 일어나 난로 옆으로 다가왔다. 그의 손이 난로 위에서 눈과 얼음을 녹이고 있던 주전자로 향했다.
 그러자 고블린 반장이 낮은 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이봐. 지금 뭐하려고?”
 “저 엘프에게 물 좀 먹이려고 한다. 뭐라도 마시면 괜찮을 거야.”
 “안 돼. 우리 먹을 것도 없어.”
 요한이 고블린 반장에게 무서운 시선을 흘리자, 고블린 반장이 움찔거렸다. 방정맞은 입과 다르게 겁은 또 많은 모양.
 여기서 두 리자드맨은 나서지 않았다. 별로 끼어들고 싶어 하는 눈치가 아니다.
 하긴, 잔챙이인데 감히 늑대 일에 간섭하겠는가?
 정민은 굳이 나서지 않고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그때 어딘가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저 엘프 그냥 죽게 내버려둬. 어차피 얼마 못 살 놈이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정민이 앞서 살펴봤던 여러 수감자 중 불곰처럼 생긴 자였다. 아니, 불곰처럼 생긴 게 아니라 그냥 불곰이었다.
 덩치 큰 불곰이 시뻘건 눈을 부라리며 사람처럼 말을 하고 있었다.
 “다 죽어가는 놈 때문에 우리가 희생할 필요는 없지.”
 요한이 그에게 시선을 주자 불곰이 자리에 일어나 섰다.
 정민은 이쯤에서 느낌이 왔다. 다 죽어가는 엘프로 인해 둘의 자존심이 부딪혔다는 것을.
 살리려는 자와 죽이려는 자.
 불곰이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요한을 위협했다.
 “그렇게 살려줘 봤자 어차피 내일 아침이면 아사하거나 동사할 거다. 내일 퀘스트 할당량도 못 채울 테고, 그럼 무조건 죽어.”
 불곰이 위협하자 요한도 목소리를 냈다.
 “그렇다고 이자를 이렇게 보내는 건 도리가 아니야. 내가 마실 걸 나눠줄 테니 너는 신경 꺼라.”
 “뭐? 네가 마실 걸 나눠주겠다고?”
 “내가 마실 걸 주겠다는데 문제 있나?”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저딴 엘프를 살려야겠나?”
 “그래야 여기 있는 모두가 납득할 테니까.”
 분란은 그렇게 종료됐다.
 불곰도 자기 마실 것을 내놓겠다는 요한에게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불곰이 나섰던 것도 다 죽어가는 엘프 때문에 나머지가 희생하는 꼴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 혼자 희생하겠다는데 굳이 말릴 필요까지야. 어차피 남의 일이었다.
 상황이 종료되자 이를 잠자코 지켜보던 정민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놀랄 노자다. 정말 별의별 인간이 다 모였군.’
 빵조각과 석탄 쪼가리로 굴러가는 이 아슬아슬한 생태계에서도 나름의 법칙이 있었고, 개념이 있었다.
 그걸 두고 정민은 웃었던 것이다.
 ‘이 비좁고 냄새나는 방 안에 이리도 재밌는 인간들이 모여 있다니. 아주 기가 막히는군.’
 수감자 개인당 마실 물은 석탄을 가져온 자에 한하여 하루 두 컵씩 제공된다.
 정민은 물 한 잔을 마시고, 남은 자기 몫은 아까 분란을 일으켰던 요한에게 가져다주었다.
 정민이 물 한 잔이 담긴 컵을 건네자 침대에 앉아 있던 요한이 늑대의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면서 의문을 표했다.
 “뭐냐?”
 “뭐긴, 물이지. 자 마시라고.”
 정민이 요한에게 물을 건넨 건 나름 이유가 있었다. 아까 요한은 아미르란 엘프를 살리기 위해 제게 할당된 물 두 컵을 주었고, 그 모습을 정민이 본 것이다.
 물 없이 하루를 버티는 게 얼마나 고된 일인지 정민은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 물 한 잔 주고 정보를 얻기 위해 선심을 쓴 것이다.
 ‘이래야 내가 원하는 정보를 뱉을 테니까.’
 정민이 물컵을 건네자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경계하던 요한은 목이 말랐는지 마침내 그가 건넨 컵을 받아들었다.
 요한이 빠르게 목을 축이자 정민은 자연스레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제 목적을 관철시켰다.
 “당신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물어볼 게 있다고?”
 요한이 옆에 앉은 정민을 훑어보았다.
 흑발에 흑안.
 같은 인간이었지만 자신과 생김새가 많이 달랐다. 평소라면 귀찮다고 무시했겠지만, 그가 건넨 물을 마셨으니 뭐라도 보답을 해줘야만 했다.
 요한이 입을 열었다.
 “그렇군. 신참이군.”
 “내가 궁금한 게 좀 많아. 몇 가지 질문에 대해 당신이 대답 좀 해줬으면 좋겠어.”
 “좋아. 물을 얻어먹었으니 대답해주지.”
 요한의 반응이 호의적이자 정민은 가장 궁금하던 것을 물어보았다.
 “여긴 어디야? 그리고 나는 왜 여기 있는 거지?”
 “다들 하는 질문이군.”
 요한이 미묘한 웃음을 흘렸다.
 정민이 뚫어지게 쳐다보자 요한의 입은 머잖아 다시 열렸다.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당신과 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지. 여긴 어딜까? 왜 우린 여기에 있을까.”
 “뭐야? 그럼 당신도 왜 여기 있는지 모른다는 거야?”
 “모른다. 다만 여기 있는 모두는 생김새도, 종족도, 출신 성분도 다 다르지만 몇 가지 공통점이 있지.”
 “공통점?”
 “구속구. 여기 이 족쇄와 마나의 흐름을 제어하는 이 장치를 말하는 거다.”
 요한은 제 목에 채워져 있는 금속 구속구를 가리켰다.
 “이게 있는 한 예전처럼 마나를 다루는 일은 없다.”
 “그건 나도 알아. 나도 이것만 없었으면······.”
 “그리고 하나가 더 있지.”
 “하나가 더 있다고?”
 “여기 온 뒤로 이상한 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허공에 글자 같은 게 보이고, 퀘스트라는 이상한 임무 같은 게 생겼지.”
 여기서 정민은 해머로 머리를 얻어맞는 느낌을 받았다. 게임처럼 변한 게 비단 자기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래?”
 “그래? 자넨 별로 당황하는 눈치가 아니군. 혹시 이것에 대해 알고 있나?”
 “게임처럼 변한 거?”
 “게임?”
 아쉽게도 요한은 게임에 대한 건 모르는 듯싶었다.
 “그런 게 있어. 아무튼 나에겐 그리 낯설지 않아.”
 “그거 다행이군. 나는 적응하는데 무척 힘들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아직도 적응이 안 돼.”
 “그렇단 말이지······.”
 정민의 표정은 짐짓 심각해 보였다.
 게임 시스템이 자신한테만 적용된 게 아니란 소리다.
 요한의 말은 계속 됐다.
 “처음엔 마녀의 농간인 줄 알았다. 마녀에게 홀려 이상한 게 보였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비단 나만 보이는 게 아니었어. 여기 있는 모두가 이상한 걸 보고 있다. 그리고 나처럼 무척 혼란스러워하고 있지.”
 “충분히······ 이해 돼.”
 정민은 그 상황을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게임 시스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자신도 솔직히 어리둥절했는데, 그런 시스템 자체를 모르는 이들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리고 이런 우리들을 시어(Seer)들은 이렇게 부르지.”
 “시어? 그게 뭔데?”
 요한은 이상한 눈초리로 정민을 쳐다봤다.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냐는 시선이었다.
 “시어는 여기 간수들을 말한다. 그들을 보통 시어라고 부르지. 그들 위엔 오버시어가 있고, 그 위에 군주인 오버로드가 있다.”
 “그래?”
 “이 개념에 대해선 잘 모르는 것 같군. 당신, 어디서 왔지?”
 “그런 걸······ 굳이 대답해야 하나?”
 요한은 의심의 눈초리로 정민을 다시 훑어 내렸다. 의심 가는 상대였지만, 이곳도 워낙 미스테리한 곳인지라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흠······ 아무튼 그 시어들은 우리를 이렇게 부르지.”
 잠시 뜸을 들이던 요한이 비쩍 말라붙은 입술을 뗐다.
 “플레이어라고. 그리고 여길 플레이어 수용소라 하더군.”
 요한의 말을 들었을 때 정민은 대략적으로나마 자신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여기 있는 전부가 영문도 모른 채 이곳에 있는 것이다.
 자신처럼.
 “플레이어······.”
 정민이 플레이어란 단어를 낮게 읊조리자 근처에 있던 다른 수감자가 조용히 말을 흘렸다.
 “저주 받은 거야. 마녀가 저주한 거지.”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정민과 같이 있던 요한도 부정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 모든 게 마녀의 농간일지도.”
 그들은 마녀란 존재에 유독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정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마녀야 여기 이야기겠지. 마녀는 아닐 거야.’
 한평생 살아오며 마녀 같은 자와 마주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누굴까?
 몬스터?
 헌터라는 직업 특성상 몬스터와는 자주 부딪혔지만, 이런 일을 꾸밀 정도로 대단한 몬스터는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애당초 나와 마주쳐서 살아난 몬스터가 없는데.’
 요한은 물 한 잔의 고마움을 잊지 않았는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정답은 없어. 마녀가 그랬다고 여기 있는 모두가 공감하는 건 아닐 테니까. 자네도 마찬가지인 거 같고.”
 “마녀는 아니야. 한평생 살아오면서 마녀 같은 거와 마주친 적이 없거든.”
 “그래? 그럼······ 마녀는 아니겠군. 하지만 아직도 의심은 하고 있다. 딱히 마녀 외엔 떠오르는 게 없거든.”
 “왜 마녀란 존재에게 그렇게 집착하는 거지?”
 “이건 저주야. 어느 날 갑자기 헛것이 보이고 나만의 아공간이 생겼는데, 이걸 저주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나?”
 “저주? 미안하지만 이건 저주 같은 게 아니야.”
 “저주가 아니라고?”
 “적어도 내가 아는 상식선에선 저주 같은 게 아니야. 좋다고도 말은 못하겠는데, 아무튼 저주는 아니야.”
 “그래? 이상하군······. 여기 사람들은 이걸 무조건 저주라 생각하거든. 나도 마찬가지고.”
 “왜 저주라고 생각하는 거지? 플레이어라는 게 그렇게 불편한가?”
 “불편해?”
 요한이 작은 웃음을 흘렸다.
 “그건 아니야. 솔직히 인벤토리라 불리는 공간에 무언가를 숨길 수 있다는 건 분명히 좋은 재주니까. 생각해봐. 도둑질 할 때 꽤나 유용한 능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그래, 어떻게 보면 좋은 거잖아? 그러니까 저주는 아니지.”
 그 말에 요한은 고개를 저었다.
 “어느 날 특별한 힘이 생겼다고 해서 이게 저주가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순 없는 거야. 막말로 악마에게 홀린 자나 마녀에게 농락된 자도 비범한 능력을 갖게 되지. 물론 우리와 다르게 정신 상태는 온전치 않겠지만.”
 “아무튼 여기선 플레이어라는 게 굉장히 부정적이고 저주 같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리고 이런 데 수감되는 걸 당연시 여기고 있어. 고백하자면 나도 여기 오기 전까지는 플레이어란 존재를 극도로 경계했었다.”
 “플레이어라는 게······ 밖에도 있어?”
 “있다. 그들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성장하지 않고도 비범한 능력을 발휘했어. 태생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극한 검사나 대마법사의 비범함을 보였지. 굉장한 자들이었어. 그들은 존재 자체가 두려움이었다.”
 “그럼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도 여기 오는 건가?”
 “그건 나도 모른다. 알게 되면 좋겠군.”
 “그래?”
 이때 정민의 시야에 메시지 하나가 올라왔다.
 
 -메인 퀘스트가 갱신되었습니다.
 [메인 퀘스트(1)]
 *여긴 어디야?(진행 중)
 -나는 요한이라는 수감자에 물어 이곳 정보를 알아냈다. 이곳은 플레이어들을 가둬놓는 수용소 같은 곳이라고 했다. 이곳에 끌려온 이유야 아직 알 수 없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이곳에서 나가는 일이다. 이제 슬슬 다른 정보를 알아봐야겠다. 나는 이곳에서 무조건 나갈 생각이다.
 -영문도 모른 채 수용소 같은 데서 깨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곳에서 깨어난 이유를 모르겠다. 일단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 어떤 상황인지 대강 알아봐야겠다.
 
 물 한 잔이 아깝지 않은 대화였다.
 만약 정민이 아무 것도 희생하지 않고 이 정보를 캐내려했다면 절대 불가능했으리라.
 정민은 요한에게 다른 걸 물어보았다.
 “당신은 여기 온 지 얼마나 됐지?”
 요한은 초췌한 몰골로 설핏 웃어 보였다.
 “대략 2주 정도 됐다.”
 “2주?”
 “이것도 많이 버틴 거지. 여긴 길어야 며칠 버티는 곳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수감자가 죽어나가지.”
 정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요한의 말은 계속 됐다.
 “집회 때 동사하거나 자다가 얼어 죽거나. 아니면 굶어죽거나. 위장이 약한 녀석은 곰팡이 핀 빵을 먹고 하루 종일 설사만 하다가 죽기도 하더군. 여긴······ 그냥 지옥이라 생각하면 편해.”
 정민은 요한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이곳은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초인의 영역에 들어섰던 정민조차 이곳 환경에 대해선 혀를 내둘렀다. 자신도 얼마나 버틸지 미지수였다.
 정민은 그 탓을 제 힘을 구속하고 있는 금속 쇳덩이로 돌렸다.
 ‘이게 다 이 빌어먹을 구속구 때문이다. 이걸 어떻게든 떼어내야 돼. 이것만 떼어내면······.’
 모든 걸 때려 부술 수 있으리라.
 하지만 현재로선 나무 벽을 뚫고 들어오는 한기조차 못 버티는 나약한 몸뚱이에 불과했다. 한계치까지 단련된 신체를 제외하고도 최소한 마나만이라도 운용할 수 있다면 상황은 반전되겠지만, 마나의 흐름을 철저히 제한하는 구속구가 그걸 허락할 리 없다.
 ‘이걸 어떻게 떼어낸다?’
 근처에 공구라도 있었다면 구속구를 떼어내기 위해 무슨 시도라도 했을 터.
 하지만 그런 공구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었다.
 대화가 끝나자 요한이 정민에게 투박한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내 이름은 요한이다.”
 살가운 반응에 정민은 꽤나 정색했다.
 “나는 당신과 친구 되자고 한 적 없는데?”
 요한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서로 도움 될 일이 분명 있을 거다. 하나는 비록 약하지만, 뭉치면 강해지지. 서로를 의지하고 버틴다면 이 지옥에서 버티는 날이 조금이라도 더 길어지지 않겠는가?”
 정민이 요한에게 물을 건넨 건 순전히 이곳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지, 그에게 호감을 사거나 친구로 지내기 위함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자신의 살을 깎아가며 남을 도우는 오지랖은 정민이 그다지 반가워하는 부류가 아니었다. 이런 부류는 같이 다닐 때마다 항상 자신을 귀찮게 했으니까.
 “하나만 물어보지.”
 하지만 그가 마지막에 말했던 뭉치면 강해진다는 말에 정민도 이번만은 특별히 예외로 두기로 했다. 그만큼 이곳 환경이 지랄 맞았으니까.
 “아까 저 삐쩍 마른 엘프 말이야. 어차피 죽을 텐데 대체 왜 살린 거지? 당신 마실 물까지 내주면서 살리는 건 내가 봐도 좀 아니었는데.”
 정민이 턱짓으로 엘프를 가리키며 묻자 요한은 피식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내가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이거든. 어렸을 때부터 그랬고, 줄곧 그래왔지. 내 신념 같은 거다.”
 “성가신 성격이군. 그래서 이 시궁창에서 얼마나 버틸 거 같아?”
 “그래도 당신보단 오래 버텼다. 당신은 고작 하루 버텼지만 나는 벌써 2주를 버텼어.”
 2주 버텼다는 게 왜 그리도 훈장처럼 느껴졌는지.
 정민은 그가 내민 손을 맞잡아주었다.
 “솔직히 당신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서로 알아둬서 나쁠 건 없겠지. 나는 정민이다. 편하게 정민이라고 불러.”
 “정민? 특이한 이름이군.”
 정민이 요한과 악수를 나누고 있을 때, 그들이 있던 방문이 열리며 시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갈색 정복을 입은 간수.
 그가 손에 쥐고 있던 칼자루로 나무문을 탕탕탕! 세차게 두들기며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집회 때 뭘 들은 거야! 전부 청소 시작해! 그만 쉬고 움직이라고!”
 12시간 곡괭이질을 하고 들어온 수감자들을 그대로 놔줄 생각이 없는지, 시어는 목청이 터져라 수감자들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시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난로 옆에서 떠나질 않던 고블린 반장이 손수 나서며 어수선한 주변을 향해 세차게 일갈했다.
 “야 이 새끼들아, 빨랑빨랑 안 움직여! 시어님께서 청소하라시잖아!”
 듣기 싫은 소리.
 정민은 표정을 구기며 저와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요한에게 고블린 반장에 대해 물어보았다.
 “저 고블린 녀석은 여기서 얼마나 버틴 거지?”
 “저 녀석은 나도 모른다. 꽤 오래 버틴 거 같기는 한데······ 집합 때 앞줄에 설수록 오래 버텼다고 생각하면 돼. 버티면 버틸수록 남들보다 앞줄에 서게 되니까.”
 “그럼 저 녀석은 가장 앞줄인가?”
 “가장 앞줄이지. 그러니 완장까지 차고 우리에게 뭐라고 하는 거야. 보통 시어들이 제 심부름꾼으로 눈에 익은 놈을 시키거든. 앞줄에 서게 되면 다른 수용자보다 시어 눈에 잘 띄게 되지. 그런 거야.”
 조막만한 키는 정민의 반도 안 됐지만 반장 완장을 찬 고블린의 목소리는 그 누구보다도 컸다.
 우르르 몰려 나가는 수감자와 뒤섞여 밖으로 향하며 정민은 자기 옆에 서 있던 요한이라는 자에게 아까보다 더 중요한 질문을 해보기로 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요한이 시선을 주자 정민은 가장 하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여기서 어떻게 하면 빠져나갈 수 있지?”
 그 물음에 있어 요한은 대답 대신 웃었다.
 요한은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해. 여기서 살아서 나갈 순 없다. 버티다 끝나는 게 일반적이니까.”
 그들의 대화를 어떤 수감자가 엿들었는지 비웃음과 함께 정민에게 말을 흘렸다.
 그는 턱수염이 요란한 드워프였다.
 “이거 미친 새끼네. 그래, 지금 당장 두 발로 뛰쳐나가봐라. 그대로 얼어 죽을 테니까.”
 -40% 냉기 저항.
 이것은 정민에게 있어 또 다른 족쇄였다.
 ‘틀린 말은 아니야. 이대로 뛰쳐나가면 죽어. 걷다가 얼어붙을 거다.’
 솔직히 이곳 시어들의 경계가 느슨하긴 했다.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는 느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도망치는 게 쉬우냐?
 그건 절대 아니었다. 애당초 주변 환경 자체가 도망치는 게 불가능하게 설정되어 있었다.
 시어들의 감시가 느슨한들 그 누가 이 혹한을 뚫고 도망치겠는가?
 오히려 시어들은 그대로 놔둘 게 뻔했다. 그러면서 팔짱끼고 뒤에 서서 가만히 지켜보겠지. 시어들도 개인적으로 이 혹한을 뚫고 도망치는 수감자가 얼마나 멀리 나갈 수 있을지 내심 궁금할 테니까.
 ‘이게 만약 게임 같은 거라면······ 진짜 지랄 맞은 게임이다. 빌어먹을. 무슨 난이도가 헬이라도 되는 건가?’
 정민은 이곳에서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때 봤었던 난이도 관련 문구를 상기했다.
 ‘갓 아너······.’
 신의 위상에 도전하는 난이도.
 결코 깰 수 없는 난이도.
 그게 바로 갓 아너의 난이도였다.
 ‘누가 그딴 난이도로 설정해 놓은 거지? 난 그런 난이도를 허락한 적이 없는데?’
 정민의 표정이 짐짓 심각해졌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열이 받은 것이다.
 표정을 보아하니 지나가다 누구와 시비가 붙으면 한 대라도 칠 기세였다.
 그런 표정을 짓고 있으니 복도에서 매의 눈초리로 수감자들을 지켜보던 시어가 놓칠 리 없었다.
 왼쪽 눈가를 크게 가로지르는 도흔.
 구속구가 없이 갈색 정복을 차려입은 인간 시어는 아무 말도 없이 정민 앞에 우두커니 섰다. 그가 손에 쥐고 있던 칼자루를 뻗으며 정민의 가슴을 밀쳐냈다.
 치켜 뜬 눈이 의외로 살벌했다.
 “너 이 새끼. 뒷간으로 가라.”
 재수 없게 뒷간행을 당첨 받은 정민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시어는 제 옆을 미꾸라지처럼 지나치려던 수감자 하나를 제 팔로 멈춰 세웠다.
 “잠깐.”
 정민에게 꽂혀 있던 시선이 옆쪽으로 옮겨지며 전보다 더 살벌한 기운을 뿜어냈다.
 하지만 그 입매는 길게 휘어져 있었는데, 그 모습은 흡사 악마의 미소와 같았다.
 “우리 황자님께서도 같이 따라가셔야죠. 제가 황족에 걸맞은 특급 대우를 해드리겠습니다. 이 녀석하고 같이 사이좋게 뒷간으로 가시죠.”
 황자?
 정민의 시선이 자연스레 옆쪽으로 향했다.
 정민 옆엔 건장하게 생긴 청년 하나가 시어를 노려보며 입매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갈색의 긴 곱슬머리.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모델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잘생겼다.
 황자라 불린 청년은 분한 모양인지 지금 당장이라도 주먹을 휘둘러 시어의 턱주가리를 칠 기세였으나, 그 기세는 금세 사그라졌다.
 황자라 불렸던 수감자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이를 본 시어는 피식 웃더니 턱짓으로 어디론가 가리켰다.
 황자가 체념한 채 움직였고, 가만히 서 있던 정민도 앞서가던 요한을 잠시 쳐다보다가 이내 황자 뒤를 따르고 말았다.
 둘은 막사 뒤편에 위치한 뒷간에 도착했다. 뒷간이 바깥에 있을 줄 몰랐던 정민은 황자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바깥으로 나가자 저도 모르게 오만가지 인상을 썼다.
 ‘뭐야, 밖이었어?’
 눈보라를 보고 도망칠까 생각하던 정민은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놈한테 찍히면 오래 못 버틴다.’
 정민은 이를 악물고 뒷간을 향해 나아갔다.
 막사와 뒷간 사이의 거리는 대략 20m.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민은 온몸이 얼어붙는 지옥을 맛보았다.
 ‘개춥네!’
 
 -주의! 플레이어의 체온이 급속도로 낮아지는 중입니다.
 -주의! 동사할 위험이 커지고 있습니다. 보온 대책을 강구하십시오.
 
 정민은 저보다 먼저 뒷간 앞에 도착하여 몸을 벌벌 떨고 있는 황자 앞에 섰다. 둘은 맹추위에 벌벌 떨면서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둘 사이에 대화는 사치였다.
 그러다 황자의 시선이 이글거리는 게 느껴졌다.
 누군가를 증오할 때 짓는 그런 눈빛.
 하지만 그 시선은 오래가지 못했다. 정민이 뒤돌아보자 그곳엔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나온 시어가 보였다.
 방금 전 둘을 뒷간으로 보낸 시어였다.
 “춥죠? 하하하. 꽤 추울 겁니다.”
 인상이 꽤 강한 시어였다.
 정민은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저 시어가 꽤 지랄 맞다는 걸 금방 알아차렸다.
 시어는 벌벌 떨고 있는 둘 앞에 서서 시가 하나를 입에 물었다. 그리곤 불을 붙이더니 그것을 멋스럽게 빨아재꼈다.
 후~
 독한 시가 연기를 뿜어내던 시어가 그 시선을 황자에게 두며 입을 천천히 열었다.
 “오늘 오버시어 말씀 잘 들으셨겠죠. 곧 찾아오실 귀인께서는 유난히 깔끔을 좋아하신다고 하니, 우리 황자님께서 나름 수고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
 둘의 관계가 심상찮아 보였다.
 괴롭히는 자와 괴롭힘을 당하는 자라고 할까?
 딱 봐도 시어는 황자를 괴롭히기 위해 뒷간으로 불러낸 것 같았다. 여기서 얻어걸린 정민만 불쌍할 뿐.
 시어는 떠나기에 앞서 둘에게 말을 남겼다.
 “그럼 똥간 청소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황자님.”
 그가 냉정히 돌아서자 정민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를 불러 세웠다.
 시어가 무서운 시선을 흘렸다.
 정민은 죽기 살기로 말을 뱉어냈다.
 “똥이 얼어서, 너무 깡깡 얼어서, 청소가, 아예 안 될 텐데요.”
 똥을 청소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 추위에 버틸 재간이 없었다.
 이렇게 있다간 무조건 동사였다.
 “그래서 뭐?”
 “여기에, 무슨 불이라도, 붙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민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엔 다 타서 재밖에 안 남은 모닥불이 있었다.
 그런 정민을 가만히 곱씹어보던 시어가 그 뒤에서 금방이라도 얼어 죽을 것 같은 황자를 보았다.
 시어의 입매가 다시 휘어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좋습니다. 제가 특별히 배려란 걸 해드리죠. 우리 황자님께서 이런 데서 갑자기 동사라도 하신다면 제가 많이, 아주 많이 심심하지 않겠습니까? 불이라도 피우고 작업하셔야죠.”
 시어가 입에 물고 있던 시가를 모닥불을 향해 던졌다. 그러자 화르륵! 불꽃이 일면서 순식간에 모닥불에 불이 붙었다.
 정민은 그게 마법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저 시어는 보기와 다르게 상당히 수준 높은 마법사로 보였다. 그래봤자 정민의 전성기에 비하면 새 발의 피겠지만.
 시어가 떠나가자 서브 퀘스트 메시지가 올라왔다.
 
 -서브 퀘스트가 추가됩니다.
 [서브 퀘스트(2)]
 *뒷간 청소(진행 중)
 -재수 없게 뒷간 청소에 걸렸다. 세상에 얼어붙은 똥을 치우란다. 보상도 없을 거 같은데. 이건 분명 미친 짓이다.
 *철광석 채굴(1번 완료)
 
 정민은 서브 퀘스트 따윈 확인하지도 않고 모닥불 근처에 서서 몸만 무섭게 떨어댔다.
 정민과 같이 뒷간에 온 황자도 마찬가지였다. 황자도 무섭게 몸을 떨어대고 있었다. 그만큼 무서운 추위였다.
 “뒷간 청소하다가 얼어 뒤질 뻔했네.”
 정민이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황자도 입을 열었다.
 “잘했다. 여기에 불이라도 안 피웠으면 우리는 분명 죽었을 거다.”
 “당신. 당신 진짜 무슨 황자 같은 거야?”
 “황자는 무슨. 너희는 버려진 것도 황자라 하느냐? 나는 더 이상 황자가 아니야.”
 “저 새끼가 황자라잖아.”
 “다 지난 일이다.”
 황자는 다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차피 나는, 어떤 식으로든 죽게 될 거다.”
 여기서 죽든.
 나가서 죽든.
 황자는 씁쓸한 뒷말일랑은 그대로 삼켜 버렸다.
 둘은 뒷간 청소는 엄두도 못 내고 모닥불 근처에서 몸만 녹여댔다.
 “이봐. 청소는 어떻게 해?”
 “나도 모른다. 일단 사는 게 먼저겠지.”
 “뒷간은 무슨! 누가 이 지랄 맞은 추위에 똥을 치워!”
 둘이 뒷간을 치울 엄두를 못 내고 있을 때, 그들이 있던 모닥불 근처로 걸어오는 해골 하나가 있었다.
 언데드 수감자였다.
 “여기 계셨군요.”
 놀랍게도 언데드는 추위에 면역인 것으로 보였다.
 하긴 뼈밖에 없는 몸인데 무슨 추위를 타겠는가?
 모닥불 근처로 나온 언데드는 추위에 벌벌 떨고 있는 두 남자에게 말을 붙여왔다.
 “저도 뒷간을 청소하러 나왔습니다. 구석에 숨어 있다가 시어한테 걸렸거든요.”
 정민과 황자는 그저 듣기만 했다.
 “두 분께선 청소를 다 하셨습니까?”
 언데드가 제 앞에 보이는 뒷간을 보고 물었다.
 정민은 자신과 마주보고 있던 황자의 눈치를 보다가 거짓말을 했다.
 “우린······ 청소했어.”
 “아 그렇습니까? 그럼 제 몫만 남았겠군요.”
 언데드는 두 남자 뒤에 있던 뒷간에 들어갔다.
 잠시 후 언데드가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고 황자가 낮은 목소리로 우려를 표했다.
 “이봐. 우린 아무 것도 안 했잖아?”
 “살고 봐야지. 아니면 당신이 들어가서 청소할 거야?”
 그 말에 황자는 고개부터 저었다.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었다면 아마 청소를 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생사의 문제였다.
 잠시 후 낑낑거리던 언데드가 모닥불 근처로 걸어 나왔다.
 “세상에, 똥이 너무 얼어서 안 퍼집니다. 이거 어떻게 합니까?”
 그 물음에 정민이 답했다.
 “뜨거운 물을 부어야지. 안에 들어가서 냄비 같은 거라도 가져와. 눈이라도 녹여서 뿌리게.”
 “오호라. 그렇군요. 그건 제게 맡겨주십시오.”
 언데드는 정민의 말에 따라 충실히 이행했고, 그렇게 뒷간 청소는 끝날 수 있었다.
 
 -서브 퀘스트가 갱신되었습니다.
 [서브 퀘스트(1)]
 *뒷간 청소(완료)
 -뒷간을 다 치웠다. 언데드 녀석이 도와줬는데, 아마 이 녀석이 없었다면 뒷간 청소는 불가능했을 거다.
 -재수 없게 뒷간 청소에 걸렸다. 세상에 얼어붙은 똥을 치우란다. 보상도 없을 거 같은데. 이건 분명 미친 짓이다.
 *철광석 채굴(1번 완료)
 
 눈앞에 아른거리는 퀘스트 목록을 확인한 정민은 모닥불 근처에 서 있는 해골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네?”
 “당신은 이 추위가 안 느껴져?”
 “보다시피 저는 언데드입니다. 죽지 않지요. 그러므로 추위도 안 탑니다.”
 “그럼 왜 여기 있는 거야? 당신이라면 이 지옥을 뚫고 도망칠 수 있잖아.”
 그 물음에 있어 언데드는 낮게 웃음을 흘렸다.
 “수용소 밖에 보이지 않는 결계가 있습니다.”
 “결계?”
 모르던 내용이었다.
 “그 결계를 지나치게 되면, 여기 이 목에 달린 구속구가 작동하게 됩니다. 저 같은 경우 턴 언데드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그래서 그 결계를 벗어나려고 하면 이 구속구가 작동하여 저를 죽이게 되지요.”
 “그게 정말이야?”
 “아마 당신에게는 다른 마법이 걸려 있을 겁니다. 턴 언데드는 언데드를 죽이는 마법이니까요.”
 그 말을 듣고 정민은 황자를 쳐다보았다.
 황자도 처음 듣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신도 몰랐어?”
 “몰랐던 사실이다. 결계도 있었다니.”
 “하하. 그 사실을 모르고 계셨군요. 하긴, 제가 짬밥 좀 됩니다. 여기 오래 있었거든요. 아마 그 결계에 대해 아는 사람도 얼마 없을 겁니다. 물론 시어들은 잘 알고 있겠죠.”
 갓 아너.
 괜히 갓 아너가 아닌 모양이다.
 정민이 적잖은 충격을 받았을 때, 메인 퀘스트가 갱신되었다.
 
 -메인 퀘스트가 갱신됩니다.
 [메인 퀘스트(1)]
 *정보 수집(진행 중)
 -뒷간 청소를 하는 도중에 언데드 하나를 만났다. 그 언데드에게 왜 도망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수용소 근처에 보이지 않는 결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전혀 몰랐던 내용이다. 아무래도 수용소 밖 보이지 않는 결계에 대한 대책이 필요할 듯싶다.
 *여긴 어디야?(완료)
 -나는 요한이라는 수감자에 물어 이곳 정보를 알아냈다. 이곳은 플레이어들을 가둬놓는 수용소 같은 곳이라고 했다. 이곳에 끌려온 이유야 아직 알 수 없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이곳에서 나가는 일이다. 이제 슬슬 다른 정보를 알아봐야겠다. 나는 이곳에서 무조건 나갈 생각이다.
 
 ‘생각보다 만만한 곳이 아니야. 또 뭐가 있을지 몰라.’
 정민은 그 즉시 언데드에게 다른 걸 물어보았다.
 “그 결계가 몇 갠데? 하나는 아닐 거 아냐?”
 언데드가 집게손가락으로 제 턱을 긁적이며 답했다.
 “그거까지는 모릅니다. 저도 결계가 있다는 소리만 들었지 어떤 결계가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거든요. 아마 시어는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희가 그걸 물을 순 없겠지요.”
 정민은 난이도를 생각했다.
 가장 어려운 난이도. 그 난이도를 따져본다면 수용소 밖 결계가 하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순전히 내 추측이지만 결계가 하나가 아닐 수 있어. 그만큼 난이도가 살인적으로 높으니까. 아무튼 결계가 있다는 건 좀 골치 아프군.’
 그때 황자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정민을 불렀다.
 “이봐. 그런 건 왜 묻는 거지? 어차피 그걸 안다고 해서 여기서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정민은 정색하며 황자를 노려봤다.
 “그건 모르는 거지.”
 “모른다고?”
 황자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고개부터 젓는 걸 보니 이미 탈출하는 걸 포기한 모양.
 “어리석은 짓이다. 여기서 살아나갈 순 없어.”
 “그럼 당신이나 여기서 곱게 뒤져. 나는 당신과 다르니까.”
 황자는 정민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대신 저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 그게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르겠군.”
 그는 모든 걸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귀신처럼 시어가 등장했다.
 “편하게 잡담들 하시고 있는 거 보니, 청소는 다 하셨나 봅니다.”
 정민과 황자에게 뒷간 청소를 맡긴 그 시어였다.
 “제가 시킨 일인데, 농땡이를 피웠을 리는 없을 테고. 수고하셨습니다. 황자만 남고 나머진 가시길.”
 밉살맞은 시어는 황자만 남기고 정민과 언데드는 그대로 놓아주었다.
 방으로 돌아가는 길.
 정민이 옆에서 걷고 있던 언데드에게 물었다.
 “저 시어 알아?”
 “알다마다요. 3층을 총괄하는 시어 게넨바인입니다.”
 “게넨바인?”
 “네, 이름이 게넨바인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수감자들은 보통 독사라고 부릅니다.”
 “뭐 독사? 하······ 별명 한 번 죽이네.”
 언데드는 독사에 대해 더 말해주었다.
 “한 번 물면, 죽을 때까지 독을 풀어놓는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입니다. 지금까지 저 시어에게 찍혀 살아남은 플레이어가 없지요.”
 정민은 다른 걸 물어보았다.
 “당신도 플레이어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저 역시 플레이어입니다.”
 “언데드 플레이어는 처음 봐서 그래. 당신도 허공에 이상한 게 보이고 그러나?”
 “하하, 그럼 전 다른 게 보이는 줄 아십니까? 저도 퀘스트 창이 보이고 인벤토리 창도 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탯도 찍을 수 있지요.”
 말을 마친 언데드는 2층 복도에서 작별을 고했다.
 “저는 2층입니다. 그럼 살펴 가시길.”
 이상한 언데드였다. 정체 모를 친절함으로 묘한 인상까지 남겼으니까.
 정민은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
 “왜 부르십니까?”
 “난 정민이다. 그쪽은 뭐지?”
 오래 수감됐다기에 아는 게 많을 것 같아 정민이 먼저 통성명을 요구했으나 언데드의 반응은 그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걸 알아서 뭐합니까? 어차피 며칠 뒤면 송장이 되실 텐데요.”
 언데드는 자기 이름을 말하지 않고 떠나갔다. 보기보다 시크한 면이 있는 언데드였다.
 정민은 그의 이름은 알지 못했지만 얼굴은 기억해뒀다.
 ‘나중에 물을 게 더 있을 거야.’
 정민이 돌아온 방은 밖이랑 별반 차이가 없었다. 난로로 달궈지던 방은 석탄이 떨어지자 금세 얼음 동굴이 됐다.
 얼음장 같은 방안.
 ‘더럽게 춥네.’
 정민을 포함한 모두가 오들오들 떨고 있을 때, 어둑한 방안으로 랜턴을 든 시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 아침 집합부터 저녁 청소 개시까지, 전부 저 시어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름 모를 시어는 방 안을 둘러보다 입을 열었다.
 “얼어 뒤진 새끼가 있는지 어서 확인해봐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조막만한 고블린 반장이 일어나 목청을 높였다.
 “뭐해! 빨리 옆 사람 확인해! 뒤진 새끼가 있는지 빨리 확인해보란 말이야.”
 추위에 떨고 있던 모두는 건성으로 제 옆을 훑었다.
 대답이 없자 고블린 반장이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듯 방안 구석구석을 훑으며 죽은 자를 찾아보았다. 그러다 거의 숨이 끊어져가는 엘프 앞에 멈춰 섰다.
 “시어님, 여기.”
 그 순간 요한이 다가와 다 죽어가는 엘프를 변호해주었다.
 “그 엘프 아직 살아 있다. 죽지 않았어.”
 “뭐, 살아?”
 그 말에 대꾸하려던 고블린은 뒤에 있는 시어를 의식했는지 하려던 말을 도로 집어삼켰다.
 고블린 반장이 요한을 지그시 노려보고 있을 때 시어가 엘프 근처로 다가와 섰다.
 “이 새끼, 죽은 거 아냐?”
 고블린 반장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시어가 다 죽어가는 엘프를 발끝으로 툭툭 건드려 보았다.
 그러자 아미르라는 엘프가 미약한 신음소리를 흘렸다. 폐타이어처럼 질긴 목숨이었다.
 시어는 헛웃음을 터트려주었다.
 “하하, 이 새끼. 명줄 한 번 더럽게 기네. 엊그제부터 골골거리더니 아직까지 버티고 있네?”
 시어는 곧장 뒤돌아서서 엄지로 제 콧구멍 안을 긁더니 방안에 수감된 자들을 훑어보며 무섭게 말을 흘렸다.
 “잘 들어라. 오늘 여기서 이 새끼 시체 건드리는 놈 있으면, 내일 나한테 다 죽는다. 알아들었냐?”
 시체를 왜 저리 신경 쓰는 걸까?
 잠시 고심하던 정민은 그리 어렵지 않게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빌어먹을.’
 그건 죽어가는 엘프를 배려하는 게 아니었다. 잔인한 생각이지만, 워낙 먹을 게 없다보니 수감자들이 시체까지 넘보는 것이다.
 고블린 반장도 목소리를 높였다.
 “시체 넘보다 방안 수감자가 전부 뒤지는 일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야. 내가 있는 방에선 절대 그런 일 없으니까 특히나 거기 구울 새끼. 너 조심해라. 내가 계속 지켜볼 테니까.”
 고블린 반장은 구석에서 시뻘건 눈으로 엘프를 쳐다보고 있는 구울에게 수차례 경고했다.
 시어는 나가기 전 다시 한 번 안을 살펴봤다.
 “더 없냐? 다 살아 있고?”
 그러다 등을 보이고 누워 있는 드워프에게 다가가 발끝으로 툭툭 건드려보았다.
 반응이 없었다.
 시어는 살벌한 눈으로 드워프를 다시 한 번 훑어 내렸다. 굳이 저 몸뚱아리를 뒤집어 그 콧구멍에서 바람이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확인해보지 않아도 시어는 알 수 있었다.
 “야. 처리해.”
 시어는 그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시어가 나가자 고블린 반장은 등을 보이고 누워 있는 드워프에게 다가와 툭툭 건드려 보더니 이내 숨 쉬는지 확인해봤다.
 동사였다.
 “야 요한. 네가 치워라.”
 아까 엘프 일 때문이었을까?
 고블린 반장은 콕 집어 요한을 불러냈다.
 요한은 말없이 일어나 드워프 근처에 섰다. 그러면서 정민에게 묘한 시선을 흘렸다. 혼자서는 힘드니 도와달란 의미였다.
 정민은 속으로 인상을 썼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섰다.
 ‘어차피 물어볼 게 있었어.’
 그렇게 합리화시켰지만 귀찮은 일에 휘말렸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요한과 정민은 드워프 시체를 들고 막사 왼편으로 향했다.
 그곳엔 활활 타고 있는 시체 더미가 있었다. 전부 죽은 수감자였다
 “꺼지지 않는 불꽃이지.”
 요한이 말을 흘리자 정민은 일단 얼어가는 몸부터 녹였다.
 ‘좋다.’
 이런 걸 보면 시체 치우는 일이 비단 귀찮은 일만은 아닌 듯싶었다.
 하지만 요한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시어들이 지켜보고 있다. 오래 있으면 안 돼.”
 말은 그렇게 했으면서 정작 본인도 발걸음이 떨어지지가 않은 듯했다.
 정민은 시체 타는 불꽃 속에서 무언가를 보았다.
 이곳에서 무조건 탈출하는 자신을.
 정민은 열기를 쐬다말고 요한에게 결계에 대해 물어보았다. 방안에선 고블린 때문에 못 물어보던 거였다.
 “당신도 여기 결계에 대해 들어봤어?”
 “결계? 그게 무슨 소리지?”
 “아예 모르는 거야? 하긴, 다 아는 거였으면 그 녀석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겠지.”
 “그게 무슨 소리야? 결계라니.”
 “이 수용소 밖에 결계가 있다고 하더군.”
 “그래?”
 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정민은 아까 방안에 들이닥쳤던 시어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름은 알아?”
 “필립이라고 들었다.”
 “특징은 있어? 별명 같은 거라든가.”
 “글쎄. 딱히 모르겠군. 관심이 없어서 말이야.”
 “글러먹었군.”
 그 말에 요한이 정민을 흘겨보다가 의문스레 물었다.
 “설마, 여기서 나갈 생각은 아니겠지?”
 그 말을 듣자 정민은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이내 정색했다.
 “입조심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입조심할 거 없다.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니까.”
 “불가능하긴 개뿔이. 나는 무조건 한다면 하는 놈이야. 여기서 뒤질 생각 추호도 없다. 뒤져도 나가서 뒤질 거야.”
 “그래서 어떻게 나가려고? 여기 시어들만 해도 대부분 황금의 효교단에서 파견 나온 하이 클래스다. 그런 자들이 당신을 곱게 놔줄까?”
 정민은 독사라 불리는 시어가 순식간에 불을 지피던 게 떠올랐다.
 거기에 마법 영창은 없었다. 그 정도 수준이라면 확실히 잔챙이는 아니리라.
 “그래서 뭐? 그놈들이 대단하니까 여기서 얼어 뒤지라고? 지금 그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시어들이 보기엔 좀 허술해 보여도 내가 볼 땐 절대 아니야. 그들이 감시하지 않아도 주변엔 우리를 지켜보는 눈이 있어.”
 “그 정도는 나도 알아. 그래도 한 번 해보겠다는데 왜 지랄이야? 도와주진 못할망정.”
 “플레이어가 된 건, 어쩌면······ 죄악일 수 있다. 우린 잘못된 거야.”
 그 말에 정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요한의 멱살을 잡아 쥐었다. 그리곤 벽으로 밀쳤다.
 “정신 차려. 내가 말했잖아. 플레이어는 저주 같은 게 아니라고. 그러니까······.”
 그러다 정민은 복도 저편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꼈다. 거의 감이었다.
 정민은 반사적으로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잠시 후 그들 앞으로 시어 하나가 귀신처럼 다가와 섰다.
 정민은 처음 보는 시어였다.
 “감이 좋군.”
 이름 모를 시어는 제 뒤로 족쇄를 찬 트롤을 두 마리나 데리고 있었다.
 트롤의 거대한 덩치에 비해 시어는 한없이 작았으나, 트롤의 죽어 있는 눈빛을 보니 시어의 힘이 느껴졌다.
 시어는 정민과 요한을 번갈아보더니 이내 끊었던 말을 이었다.
 “하긴. 여기 수감된 녀석 중에 어중이떠중이는 없었지.”
 둘을 노려보던 시어가 그들을 지나치며 말을 남겼다.
 “돌아가라. 곧 취침시간이다.”
 정민과 요한은 조용히 고개만 숙였다.
 수감자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정민은 아까 마주쳤던 시어에 대해 생각했다.
 ‘기척을······ 아예 못 읽었어.’
 최상위 헌터로 군림하던 정민조차 기척을 읽지 못했다. 갑자기 고개를 돌린 것도 순전히 운이었다.
 ‘느낌이 싸하다 싶었는데 진짜일 줄이야.’
 더욱 놀라운 것은 제 뒤로 족쇄를 찬 트롤을 두 마리나 데리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도 기척조차 못 느낀 것이다.
 ‘골치 아프군. 이번엔 운이 좋았지만 다음엔······.’
 그때 같이 걷고 있던 요한이 말을 흘렸다.
 “쉐도우 스텝이다. 기척을 죽인 채 귀신처럼 움직이는 마법이지.”
 “쉐도우 스텝?”
 “여러 은신술 중 하나지. 기척이 안 느껴질수록 상대의 수준이 높다고 생각하면 돼. 그런데 당신, 생각보다 감이 좋군. 나는 낌새도 못 차렸는데 말이야.”
 요한이 정민을 대견하게 쳐다봤다.
 정민은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손까지 휘저었다.
 잠시 후 그들은 방 앞에 섰다.
 방으로 들어서기 전, 요한이 정민에게 정보 하나를 흘렸다.
 “여기서 나가고 싶다면, 안에 있는 불곰에게 말해봐. 그자도 나가고 싶어 하니까.”
 3장 정보 수집
 
 
 정민이 플레이어 수용소에 온 지 하루가 지났다.
 살을 찢는 추위.
 정민은 너무 추워 한숨도 못 잤다.
 ‘잠을 잘 수 있는 환경도 아니야. 진짜 오지게 걸렸네.’
 날이 밝았다는 건 창가로 들어오는 빛을 통해 알았다.
 ‘애당초 살려고 만든 수용소가 아니다. 여기 있다간 나를 포함해서 누구도 오래 못 버틴다.’
 정민은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나가는 게 상책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늦장을 부릴 수 있는 환경 자체가 아니었던 것이다.
 ‘무조건 탈출해야 돼. 지금이야 온 지 얼마 안 돼서 버티고는 있지만 이것도 곧 한계에 부딪힐 거다.’
 요한은 이곳에서 2주를 버텼다고 했다.
 ‘대단한 정신력이지.’
 2주를 버텼다는 점에선 대견스러웠으나 실망스러운 부분 또한 없지 않았다.
 정민은 요한의 죽은 눈을 떠올렸다.
 ‘의지가 없어.’
 죽어버린 눈동자.
 희망도 없는 그 눈동자는 죽음을 의미했다.
 정민은 침대에서 일어나 제 손으로 턱을 긁적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정리하자. 어제 알게 된 건 수용소 밖에 결계가 있다는 거야. 그리고 시어들 수준이 내가 가늠했던 것보다 높다는 것.’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다. 어제는 운이 좋아 몇몇 정보를 얻게 됐지만 그것뿐이다. 이 부족한 정보를 메우기 위해선 다른 수감자와의 대화가 더 필요해 보였다.
 ‘하지만 요한 같은 녀석은 별로 도움이 안 돼.’
 요한 같은 경우는 이미 체념한 상태다.
 이런 자는 의지가 없어 정보 수집이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나갈 의지가 있고, 노력하는 녀석과 접촉해야 돼. 그게 맞아.’
 정민은 방안을 둘러보다 자신처럼 침상에 엉덩이를 걸터앉고 있는 불곰과 눈이 마주쳤다. 불곰치고 앙상한 몸은 안쓰럽기 그지없었으나, 그 눈빛만은 아직까지 죽지 않고 강렬하게 살아 있었다.
 불곰과 시선이 마주치자 정민은 그에 대해 궁금해졌다.
 ‘저 녀석은 얼마나 버텼을까. 몸을 보면 꽤 버틴 거 같은데.’
 불곰은 자신을 응시하는 정민을 살벌하게 노려봤다.
 짐승의 눈빛은 날이 선 듯 섬뜩했으나 정민은 기죽지 않았다.
 ‘시어만 무섭지, 여기 있는 수감자들은 아니야.’
 수감자들은 전부 구속구가 있기 때문에 위협적인 대상이 아니라는 게 정민의 판단이었다. 그러니 불곰과 눈이 마주쳐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계속 부딪혀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정적을 깨고 불곰이 말을 던져왔다.
 정민은 대답 없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데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오해다. 그냥, 여기 있는 사람 중에 깨어 있는 사람이 당신밖에 없어서 그래.”
 방안은 적당히 넓었고, 둘 사이의 거리는 대략 7m 정도 되었다. 불곰은 주변을 훑더니 이내 시선을 치웠다.
 정민은 그런 불곰을 보고 생각할 게 많았다.
 ‘저놈도 시간이 얼마 없어.’
 여기서 나갈 생각이 있고, 그게 간절하다면 누구든 처절할 수밖에 없었다. 정민은 그런 자를 원했고, 그자는 저기 앉아 있는 불곰으로 보였다.
 ‘나보다 여기저기서 수집한 정보가 많을 거다. 저 곰하고 무조건 접촉해야 돼.’
 그 순간 메인 퀘스트가 갱신되었다.
 
 [메인 퀘스트(1)]
 *정보 수집(진행 중)
 -어젯밤 요한에게서 불곰에 대한 정보를 넘겨받았다. 확실하진 않지만 불곰과 접촉하여 이곳 수용소 정보를 더 얻어 봐야겠다.
 -뒷간 청소를 하는 도중에 언데드 하나를 만났다. 그 언데드에게 왜 도망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수용소 근처에 보이지 않는 결계 이야기를 해주었다. 전혀 몰랐던 내용이다. 아무래도 수용소 밖 보이지 않는 결계에 대한 대책이 필요할 듯싶다.
 *여긴 어디야?(완료)
 
 메인 퀘스트를 확인한 정민은 어젯밤 골골거리던 엘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엘프는 쥐 죽은 듯이 등을 보인 채 누워 있었다. 단순히 저 모습만 봐서는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새벽에 그 일이 있었지.’
 한숨도 자지 못했던 정민은 새벽에 있었던 소란을 모르지 않았다.
 구울 하나가 엘프를 탐하려다가 어둠 속에서 부엉이처럼 지켜보고 있던 고블린에게 딱 걸린 것이다.
 “너 이 새끼. 내가 지켜본다고 했지?”
 정민에겐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고블린이었지만 이곳에선 나름 권력자였다.
 고블린은 자신과 자주 어울리는 두 리자드맨과 함께 구울 하나를 정리했다. 그리곤 그 일을 시어에게 보고하고 끝냈다.
 누굴 죽여 놓고 단순히 보고만 하고 끝낸 것이다.
 ‘저 녀석이 문제야. 시어에게 너무 충성하고 있어.’
 같은 수감자였지만 정민이 보기엔 시어에 대한 충성심이 우려될 정도로 높았다. 만약 시어가 제 구두를 핥으라고 한다면 단순히 핥는 시늉만 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핥을 것이다.
 ‘일단 저 고블린 녀석은 조심하기로 하고.’
 정민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낡은 문이 세차게 열리며 시어 필립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상! 전부 기상해!”
 아침이 되자 정민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방안 수감자 중 두 명이 밤중에 동사했다는 것과 요한이 살피던 엘프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이다.
 ‘목숨이란 게 쉽게 끊어지지만 어떨 땐 엄청 질기기도 하지.’
 어차피 엘프야 죽든 말든 정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단지 그 질긴 목숨에 감탄할 뿐.
 그날 집합도 전날과 같은 식으로 진행됐다.
 정민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파이어 골렘이 서 있는 맨 뒷줄에 가 섰다. 그러면서 가장 앞줄에 선 자들을 눈여겨봤다.
 고블린 반장이 보였고, 어제 대화를 나눴던 언데드도 보였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것은 불곰.
 불곰은 고블린 반장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짬밥 좀 되는데?’
 집합 때 짬밥 순으로 선다고 했으니 불곰의 짬밥도 꽤 되는 듯싶었다.
 ‘하긴, 저 몸만 보면 며칠 산 게 아니긴 하지. 최소한 한 달은 넘겼어.’
 그렇게 생각한 정민은 여기서 한 달을 버틸 자신이 없었다. 불곰이야 워낙 덩치가 좋으니 제 살을 태워가며 지금까지 버텼을 것이다.
 하지만 군살 없이 탄탄한 근육질인 정민에겐 남의 일이었다.
 ‘나는 저렇게 못 버텨. 몸에 지방이 별로 없거든.’
 몸 좋은 게 여기서 죄악이 될 줄이야.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정민은 살을 무식하게 찌워 100kg를 훌쩍 넘겼을 것이다.
 ‘여기 올 줄 알았다면 말이지.’
 집합 때 단상에 모습을 드러낸 오버시어가 입을 열었다.
 “모레면 비즈니스차 교단에서 아주 귀한 손님이 찾아오실 거다. 다른 곳도 아니고 교단에서 찾아오신 손님이니 결례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바란다. 그리고 청소는 내일까지 확실히 끝내놓도록. 아 그리고.”
 오버시어는 굶주리고 추위에 벌벌 떨고 있던 수감자들을 비웃듯 말했다.
 “혹시 이중에 교단에 속한 신자가 있나? 있다면 그날만큼은 기대해도 좋을 거다. 자비로운 교단에선 모두가 버린 그대들조차 챙길 테니까.”
 정민에겐 당장 이해가 안 되는 말이었다.
 애당초 이곳 사람이 아니었으니 감도 못 잡았다.
 말을 마친 오버시어가 해산을 명했다.
 “그럼 해산하고 작업들 시작해.”
 전날과 마찬가지로 정민은 광산으로 끌려가 곡괭이질을 시작했다. 곡괭이를 쥔 손에 힘이 안 들어갔다.
 ‘미치겠군. 몸이 너무······.’
 그런 정민 곁에는 요한이 있었다.
 요한은 곡괭이질을 하다 말고 떨고 있는 손을 심각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정민에게 말을 걸었다.
 “손이 왜 그래? 혹시 스탯을 안 찍은 건가?”
 “스탯?”
 정민이 쳐다보자 요한이 스탯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이 구속구가 우리가 가진 본래 힘을 전부 봉쇄시켰지만 그래도 우린 플레이어다. 근력을 찍으면 좀 나아질 거야.”
 그 말을 듣고 정민은 지금까지 관심도 없었던 스탯창을 오픈시켜 보았다.
 
 Lv. 1 수감자
 등급 : 플레이어
 [스테이터스] 1
 근력 : 3(+)
 민첩 : 3(+)
 정신 : 5(+)
 마력 : 0(+)
 최대 체력 : 75
 최대 마나 : 0
 [상태 효과]
 *인간 종족은 가장 기본적인 능력치를 갖습니다. 모든 스탯이 5부터 시작합니다(종족 특성 효과).
 *난이도 선택에서 신에게 오만함을 보였습니다. 레벨업에 필요한 경험치가 대폭 증가합니다(난이도 적용 효과).
 *난이도 선택에서 신에게 오만함을 보였습니다. 모든 스탯이 2만큼 하락합니다(난이도 적용 효과).
 *난이도 선택에서 신에게 오만함을 보였습니다. 마력 스탯이 3만큼 하락합니다(난이도 적용 효과).
 *모든 원소 저항이 -40%부터 시작합니다(난이도 적용 효과).
 *신체 능력이 크게 제한됩니다(장비 아이템 효과).
 *마나 생성이 크게 제한됩니다(장비 아이템 효과).
 *마나 흐름이 크게 제한됩니다(장비 아이템 효과).
 *플레이어는 남다른 강인한 정신력을 가졌습니다. 정신 스탯이 2만큼 상승합니다(플레이어 개인 특성 효과).
 *퀘스트 수행으로부터 얻는 경험치와 보상 효과가 증가합니다(난이도 보정 효과).
 *몬스터로부터 얻는 경험치와 보상 효과가 증가합니다(난이도 보정 효과).
 
 마력을 제외한 전체 스탯이 정말 한심할 정도로 낮았다.
 이게 현재 정민의 상태였다.
 ‘이거 엄청 낮은 거 아닌가?’
 정민이 스탯창을 열자 시스템 메시지도 추가됐다.
 
 -레벨업당 1스탯이 추가적으로 지급됩니다.
 -각 스탯이 5보다 낮을 경우 심각한 능력치 하락 효과가 따릅니다. 5스탯이 기본입니다.
 -현재 플레이어는 구속구 착용으로 본래 힘이 제한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기가 막히군.”
 제 스탯창을 보고 정민이 내뱉은 첫 마디였다.
 요한은 근력 스탯을 운운하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근력 스탯을 올리고 한 번 해봐. 전보다 훨씬 나을 거야.”
 하마터면 정민은 그의 말만 듣고 무작정 근력 스탯에 투자할 뻔했다. 근력 스탯이 5 이상은 되어야 정상적인 곡괭이질을 할 수 있을 테니까.
 ‘잠깐만. 이거 마력도 올릴 수 있잖아?’
 마력 스탯을 올리면 마나가 생길 것이고, 마나가 있으면 두려울 게 없었다. 문제는 마력 스탯이 현재 0이라는 점이다.
 그에 반해 당장 필요한 건 곡괭이질을 위한 근력 스탯.
 정민이 요한에게 물었다.
 “여기서 마력을 올리면 어떻게 되지?”
 “마력을?”
 요한은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마력 스탯은 다 0이잖아?”
 “맞아.”
 “그럼 올릴 필요가 없지. 어떤 스탯이든 기본 스탯이 5라고 들었다. 이 5가 넘어야 기본이 되는 거야. 하지만 현재 우리들의 마력 스탯은 너무 낮아서 올릴 필요가 없어. 곡괭이질만 더 힘들어질 뿐이야.
 “레벨을 올리면 스탯을 찍을 수 있지 않나?”
 “지금 내 레벨이 3이야. 2주 동안 이 짓을 하고 겨우 3이 됐지. 우린 인간이라서 무조건 근력 스탯을 찍어야 곡괭이질을 잘 할 수 있어. 근력 스탯이 무조건 5가 돼야 정상인처럼 곡괭이를 휘두를 수 있으니까.”
 요한은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내가 그동안 근력을 안 찍고 마력에 투자했다고 생각해봐. 지금 이 자리에 내가 있을 수 있을까? 설령 있다고 해도 마력 스탯 3은 큰 의미가 없어. 1클래스 마법이라도 쓰려면 마력 스탯이 최소 6은 넘어야 하니까. 그리고 설령 6스탯이 돼도 이 구속구가 있는 한 마법은 꿈도 못 꾸는 일이야.”
 요한은 제 목에 채워진 금속 구속구를 가리켰다.
 마나의 생성과 흐름을 모두 제한하는 장치.
 정민은 낮게 욕지거리가 나오려는 간신히 참아냈다. 확실히 난이도가 지랄 맞았다. 마력을 올리기도 힘들었지만 그렇게 올려도 마법을 쓸 수 없다니.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결계를 뚫고 나가려면 무조건 마법이 필요할 텐데······.’
 아무리 사용이 제한되어 있어도 마법은 탈출을 위해선 필수로 보였다.
 “잠깐만. 내가 상태창을 보니까 종족이나 플레이어 보정 같은 게 다 있던데, 맞나?”
 “맞아. 다들 그런 보정을 받긴 했지. 나도 민첩을 2스탯이나 보정 받았다.”
 ‘민첩을?’
 정민에겐 없는 이야기였다.
 “그럼 정신은?”
 “정신? 정신은 보정 받지 못했지.”
 그래서 정신 상태가 그렇게 약해빠진 건가?
 정민은 요한에게 다른 걸 물어봤다.
 “그럼 근력이나 마력 스탯을 보정 받은 녀석도 있겠네?”
 “그거야······ 그렇겠지. 다들 무언가를 보정 받았다고 하니, 찾다 보면 있겠지.”
 이때 정민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마력 스탯. 수감자 중에서 그걸 보정 받은 녀석을 찾아야 돼.’
 그의 눈이 전에 없이 빛나고 있었다.
 
 -알림! 플레이어가 가진 마력 스탯이 높을수록 하이 클래스 마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1클래스 마법을 배우기 위한 최소 충족 여건은 마력 6 이상입니다. 2클래스의 경우 마력이 9가 넘지 않으면 배울 수 없습니다.
 
 이어지는 메시지에 정민은 눈가를 좁혔다.
 ‘1클래스가 마력 6을 넘어야 하고 2클래스가 마력 9를 넘어야 한다라······.’
 요한이 용케 2주를 버텨 레벨 3이 되었단다. 이 말은 요한만큼 버틴 플레이어가 최대로 추가할 수 있는 여분의 스탯이 고작 3개밖에 안 된다는 소리였다.
 정민이 지금부터 마력 스탯을 올린다 해도 2주 뒤면 겨우 3밖에 되지 않는다. 마력 3으론 1클래스 마법조차 쓸 수 없었다.
 ‘나나 요한이나 마력 스탯을 올리는 건 의미 없어.’
 그렇다면 마력 스탯을 보정 받은 플레이어는 어떨까?
 ‘내가 정신이 5고, 요한이 민첩이 5야. 찾다 보면 마력이 5인 녀석이 분명 있을 거야.’
 시작과 동시에 마력 5인 플레이어가 추가적으로 마력 스탯을 올린다면, 요한처럼 2주를 생존했을 때 마력 수치가 무려 8이나 된다. 그건 정민과 요한에겐 절대 불가능한 일이 다른 플레이어에겐 가능하단 소리였다.
 ‘어쩌면 이 시궁창에서 벗어날 마지막 동아줄일지도.’
 동아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곧 그를 찾는 물음으로 이어졌다.
 “혹시 마력 스탯을 보정 받은 플레이어를 알고 있어?”
 “마력 스탯?”
 요한이 이상한 눈초리로 정민을 쳐다봤다.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물음이었다.
 “그건 왜 묻는 거지? 어차피 마력이 높아도 이 구속구 때문에 마법은 사용할 수 없어.”
 그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그 문제도 차차 알아보면 될 일.
 ‘별의별 녀석들이 다 모인 곳이다. 이중에 이 구속구를 풀거나 잠시 억제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진 녀석이 있을 수 있어.’
 요한의 대답에 정민은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그것도 알아보면 돼. 세상에 그냥 죽으란 법은 없으니까.”
 정민이 비친 열정.
 그것을 보자 수용소에 갇힌 이후로 줄곧 탈출을 포기했었던 요한의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말 여기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왜? 안 될 것도 없잖아. 어차피 다 게임 같은 건데. 세상에 못 깰 게임은 없는 거야.”
 요한은 다른 건 몰라도 그가 가진 열정만큼은 부러워했다.
 자신도 그의 반만 따라갔으면 싶었다.
 “부럽군. 나는 처음부터 포기했었는데. 하지만 자네를 보면 자꾸만 내가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왜 자네처럼 나갈 생각을 못했을까. 그냥 불가능하다고 못을 박으면서 의지조차 꺾어버렸지.”
 “당연하지. 정신도 스탯이야. 기본 스탯이 5라 치면 3인 녀석이 정상적으로 버틸 리 없잖아. 안 그래?”
 정민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어 짤막하게 위로해주었다. 그리곤 다시 곡괭이를 잡았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요한이 잠시 후 그에게 물음을 던졌다.
 “혹시, 내가 자네를 도와준다면 나도 따라갈 수 있게 해주겠나? 나가서 할 일이 있어.”
 곡괭이질을 멈춘 정민이 그와 마주보며 탐탁찮은 표정을 지었다.
 “왜? 당신은 이미 포기했잖아.”
 “포기했었다. 자네를 만나기 전까지는. 하지만 생각이 아주 조금, 아니 바뀌었어. 자네랑 함께라면 나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정민은 죽어 있는 요한의 눈동자에서 아주 작은 불씨를 보았다.
 밖으로 나가고자하는 열망. 그게 아주 희미하지만 보이고 있었다.
 “좋아. 대신 전심전력으로 날 도와줘야 돼. 그만큼 여긴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니까.”
 요한이 옅게 웃었다.
 “물론이다. 자네한테 최대한 협력하도록 하지.”
 “그런 의미에서 다시 묻겠는데, 마력 스탯을 보정 받은 플레이어를 정말 모르는 거야?”
 “마력 스탯?”
 요한은 근처로 다가오는 시어를 의식하며 곡괭이를 잡았다. 요한은 잠시 말을 멈추고 곡괭이질을 하다가 시어가 떠나가자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나도 몰라. 서로 다르다는 것만 알았지 누가 마력 스탯을 보정 받았는지는 관심이 없었거든. 하지만 그자가 한 말을 떠올려보면 마력 스탯을 보정받기는 꽤 어려운 모양이야. 대부분의 수감자는 나처럼 민첩이나 근력을 보정 받으니까.”
 “그자가 누군데?”
 “자네가 오기 전까지 자네 침대를 쓴 양반이 있지. 한셈이라고 있어. 불곰과도 친했다.”
 “그 사람은? 죽었어?”
 “죽었지. 죽고 나서 자네가 온 거야. 그자도 자네처럼 정신 스탯을 보정 받았었지. 나가려는 욕구가 꽤 강했어.”
 “그거 좀 아쉽게 됐군.”
 “아무튼 마력 스탯을 보정받기도 힘들고, 받아도 큰 의미가 없기 때문에 오래 버티지 못해.”
 “하긴.”
 마력 스탯은 구속구가 있는 한 가장 쓸모없는 스탯이었다. 그러니 근력 스탯을 보정 받은 플레이어보다 오래 버틸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종족 이야긴데, 자네나 나 같은 인간은 기본적으로 3스탯씩 받는다고 하더군. 근력 3, 민첩 3, 정신 3 이렇게 말이야. 그러다 개인 특성을 보정 받아 자네나 나처럼 정신이 5가 되고, 민첩이 5가 되는 거지.”
 정민은 요한의 말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요한은 할 말이 많은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오크나 트롤 같은 종족들은 근력을 더 보정 받는다고 하더군. 오크 같은 경우를 보면 기본 스탯이 근력 4에 민첩이 2라고 하더군. 정신은 3이고.”
 “그건 종족 특성이겠지?”
 “종족 특성이긴 한데 그래도 총 합계 스탯은 같아.”
 “흠······.”
 “그리고 저 불곰.”
 요한은 눈짓으로 곡괭이질을 우직하게 하고 있는 불곰을 가리켰다.
 “저 불곰도 종족 특성으로 근력을 많이 보정 받은 모양이야. 우리들 중에 곡괭이질을 가장 잘해. 근력 스탯이 보기보다 높은 거 같아.”
 정민은 요한이 가리키는 불곰을 보았다. 앙상한 몸이었지만 곡괭이는 제법 힘 있게 내려치고 있었다.
 “그래?”
 “어제도 말했지만 저 불곰하고 이야기를 해보는 게 좋을 거야. 하지만 내 얘긴 하지 마. 아미르 때문에 날 싫어할 테니까.”
 다 죽어가는 엘프를 두고 요한과 불곰이 마찰을 일으켰던 것을 정민은 모르지 않았다.
 “이름이 뭔데?”
 “주변에선 블락이라고 부르더군. 그렇게 들었다.”
 “블락?”
 정민은 곡괭이질을 하다 말고 블락을 쳐다보다가 이내 그쪽으로 향했다.
 “곰하고 말 좀 섞고 올게.”
 “조심해. 성격 좋은 녀석은 아니니까.”
 정민은 우직하게 벽을 내리치고 있던 불곰 뒤에 서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곡괭이질 잘하네. 근력이 꽤 높은 모양이야?”
 블락이 곡괭이질을 하다 말고 뒤돌아서서 정민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왜 아침부터 시비지?”
 “시비? 시비가 아닌데.”
 블락이 곡괭이를 내팽개치더니 이내 정민의 멱살을 잡아 쥐었다.
 “시어가 지켜보고 있다고 해서 그 주둥아리 함부로 나불거리지 마. 너 같은 건 한 입 거리도 안 되니까.”
 블락이 멱살을 잡았던 손을 거칠게 놓았다.
 그가 다시 곡괭이를 쥐려고 하자 정민은 그가 혹할 만한 말을 던져주었다.
 “나가려고 한다. 이 시궁창에서.”
 블락이 내리치려던 곡괭이가 허공에 붙잡혔다. 블락이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정민을 향해 물었다.
 “뭐? 지금 뭐라고 지껄였지?”
 정민은 주변 눈치를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나가고 싶다고. 이 시궁창에서.”
 블락이 정민을 보았다.
 한셈이 죽고 나서 새롭게 들어온 수감자.
 그는 한셈과 같은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혹시······ 너도 정신을 보정 받았나?”
 그 말에 정민은 씩 웃어 보였다.
 “그렇다면?”
 “대단하군. 여기서 나갈 생각을 하다니.”
 블락은 보란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알고 있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 시궁창에서 나갈 방법이 없다는 것을. 블락은 한셈이 죽은 뒤로는 모든 걸 체념한 상태였다.
 그걸 모르고 정민이 찾아온 것이다.
 “당신 여기 오래 있었지? 보기보다 아는 게 많은 거 같은데? 어때? 나갈 생각이 있으면 협조 좀 해주지 그래.”
 “협조? 협조를 바란다면 시어에게 잘 협조해주지. 여기 도망치고 싶어 주둥이 나불거리는 녀석이 있다고. 시어!”
 갑작스레 블락이 시어를 불렀다.
 정민이 당황하자 블락이 이까지 드러내며 정민을 위협했다.
 “여기서 나갈 생각을 하느니 차라리 네놈을 팔고 빵 하나 더 얻어야겠다.”
 적잖이 당황한 정민이 주변을 훑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 하나 팔고 빵 하나 얻어서 얼마나 더 살 거 같아?”
 블락은 대답 없이 정민만 노려봤다.
 정민은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계속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하루? 이틀? 가죽하고 뼈밖에 없는 그 몸뚱이를 생각해. 넌 곰이야. 빵 먹고 오래 못 버텨.”
 “그 아가리 닫아.”
 “내가 볼 땐 당신, 이제 얼마 안 남았어. 그럼 묻지. 여기서 그냥 뒈질 거야? 아니면 나랑 같이 나갈 거야?”
 그 물음에 블락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시어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왜 불렀나?”
 시어는 블락과 정민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블락은 시어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아닙니다. 이 녀석이 와서 자꾸 시비를 걸기에.”
 “이거, 천하의 블락이 곰돌이가 다 됐네? 네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이니까 이런 녀석들이 와서 살살 기어오르는 거다. 여기서 누구 하나 뒈져도 이상할 거 없으니까, 앞으로 그런 일이 있으면 바쁜 나를 찾지 말고 너 혼자 알아서 처리하란 말이야. 어? 알아들었어!”
 시어가 정민까지 노려보자 정민은 고분고분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시어는 둘을 노려보다 이내 자리를 떴다.
 “다시 한 번 그딴 일로 불렀다간 너희 둘 다 죽을 줄 알아라.”
 시어가 떠나가고 자리에 남은 블락이 정민에게 말했다.
 지난 이야기였다.
 “한셈이 죽고 다 포기했었지. 어차피 무슨 발악을 해도 못 나갈 알았으니까.”
 “그 사람이 남긴 자리, 내가 대신 이어주지. 당신은 나만 믿고 따라와.”
 “네가 한셈 자리를 대신하겠다고?”
 블락이 정민을 비웃듯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놈은 어떤 의미에서든 대단한 녀석이었다. 내가 오기 전부터 있던 놈이었으니까. 하지만 시어에게 찍혀 결국 죽었다. 독사에게 물렸지.”
 “독사? 그 사람이 독사에게 물렸었나.”
 “자신 있나?”
 “무슨 자신?”
 “여기서 나갈 자신.”
 “있지. 그런데 목소리가 너무 큰 거 같지 않아? 이런 건 비밀 이야기야.”
 “비밀 이야기긴 한데, 심심하면 수감자끼리 하는 이야기가 전부 그 이야기다. 너무 신경 쓰지 마. 오히려 작게 수군거리는 게 더 의심스러우니까.”
 “그래도 조심은 하자고.”
 정민은 전과 다른 눈빛으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당신한테 물어볼 게 아주 많아. 협조 좀 잘해줬으면 좋겠어.”
 “단순히 정보만 주는 거라면 좋게 협조해주지. 그런 거야 별로 어려운 게 아니니까.”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걸 원한다. 그래야 이쪽도 계획이란 걸 세울 수 있거든.”
 정민과 대화를 나누면서 블락은 정민과 한셈이 자꾸만 겹쳐 보이는 걸 부정하지 못했다.
 한셈.
 그는 이 시궁창에서 유일하게 나가고 싶어 했던 오크였다. 그는 강한 정신력으로 어느 샌가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이 시궁창에서 나갈 궁리를 했다. 지금의 정민처럼 말이다.
 “무엇이 궁금하지? 나 혼자 주저리주저리 떠들 순 없고, 물어보는 것부터 가르쳐주지.”
 정민은 내내 궁금해 하던 것들을 하나씩 물어보기로 했다.
 “수용소 밖 결계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것에 대해 아는 게 있나?”
 “어제 굴러 들어온 놈이 그건 어떻게 알았지? 그건 누구한테 들었어?”
 “2층 해골한테 들었다. 우연히 뒷간 청소를 같이하게 됐거든.”
 “해골? 파커로군. 이상한 놈이지. 도통 생각을 읽을 수가 없어.”
 “파커? 그 해골 이름이 파커였나?”
 “수감자 중에 유일하게 추위를 안 타는 놈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추위를 전혀 안 타.”
 “언데드라서 그렇다는데?”
 “언데드라서? 그게 무슨 개소리야. 언데드라도 이 혹한은 못 버텨. 그래, 파커가 거짓말을 나불거렸군.”
 블락은 주변을 둘러보며 파커가 있는지부터 확인해봤다.
 블락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거짓말을 한 거다. 그놈만 추위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어.”
 “언데드가······ 추위를 안 타긴 할 텐데?”
 “일반적으론 그렇지. 하지만 냉기 저항이 -40%나 되는데 아무런 데미지도 안 입을까? 적어도 내가 아는 언데드 중에서 얼어 죽지 않는 건 그 녀석이 유일해. 언데드라서 추위를 안 탄다는 건 다 핑계야. 분명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어.”
 “그거 아는 사람은 없는 거야?”
 “놈이 이 수용소에서 가장 오래 버텼다. 가장 오래 버텼으니 놈이 가진 비밀을 알고 있는 자가 없지. 알던 놈들은 죄다 죽어 버렸으니까.”
 “그래?”
 정민은 파커라는 해골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냥 넘기려 했을지도. 만약 사실대로 말했다면 귀찮았을 테니까.’
 파커에 대한 건 잠시 접어두고 정민은 다른 걸 물었다.
 “그건 그렇고, 마력을 보정 받은 플레이어는 알아?”
 “마력을 보정 받아?”
 한셈도 마력 쪽에 관심을 두었었다. 결계가 처진 수용소를 탈출하기 위해선 마법사가 필수라는 걸 알아차렸던 것이다.
 “한셈이 알아본 바로는 엘프가 그런 보정을 받는다고 하더군. 모든 종족 중에서 마나 친화력이 가장 높은 게 바로 엘프거든. 아마 엘프라면 마력 보정을 받았을 거다.”
 “엘프?”
 엘프 이야기가 나오자 정민은 수감된 이들 중 엘프가 있는지 떠올려봤다.
 생각나는 엘프가 별로 없었다. 있다면 딱 한 명 정도.
 하지만 정민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부터 저었다.
 “엘프 말고는 없는 거냐?”
 “엘프 말고? 글쎄······ 엘프 외엔 잘 모르겠군.”
 “엘프라······ 아는 엘프 중에 누가 있었지?”
 “있잖아. 다 죽어가는 그 엘프 녀석.”
 “아미르? 지금 요한이 도와줬던 그 엘프 말하는 거냐?”
 무슨 말이 필요할까?
 블락은 바로 긍정했다.
 “맞아. 그 골골거리는 녀석 있잖아.”
 “그 엘프는······ 가망이 없잖아. 금방 죽을 거다.”
 “맞아. 곧 죽겠지.”
 “다른 엘프는 없는 거야?”
 “내가 알기론 없어. 엘프들은 대부분 마력을 보정 받거나 드물게 민첩을 보정 받지만 아쉽게도 정신을 보정 받지 못해. 모든 종족 중 가장 정신 스탯이 낮지.”
 엘프의 정신력이 그렇게 낮았었나?
 정민은 그 생각이 들었다가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자신이 통상적으로 아는 엘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자신이 아는 엘프라고 해봤자 톨킨 소설에 나오는 그런 엘프였으니까.
 그런 와중에 블락이 갑작스레 정민에게 질문을 던졌다.
 “하나만 묻지. 정신 스탯이 2보다 낮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나?”
 그 난데없는 질문에 정민은 이상한 눈초리를 지었다가 반문했다.
 “어떻게 되는데?”
 “신을 찾게 되지. 그 아미르라는 엘프처럼 말이야. 안 그러면 못 버티거든.”
 놀랍게도 수감자가 신을 찾는 이유가 있었다.
 신을 찾지 않고서는 정신력이 약한 플레이어는 단 한순간도 못 버티는 것이다.
 “엘프가 그렇게 정신력이 약해?”
 “당신이 아는 엘프가 어떤 건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엘프라면 설명이 돼. 그들은 여왕을 모시고 있고, 여왕을 위해선 무엇이든 하지.”
 “여왕? 갑자기 여왕 이야기는 왜······.”
 “엘프들에게 여왕은 정신적 지주야.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여기 온 엘프들은 그 여왕에게 버려졌다. 평생 모시던 자에게 매몰차게 버려진 거지.”
 이쯤에서 정민은 대략 눈치챘다. 엘프가 왜 정신력이 낮을 수밖에 없는 지를.
 “생각해봐. 그런 자들이 맨 정신으로 버틸 수 있겠나? 못 버텨. 그래서 일찍 죽는 거다.”
 정민은 오히려 반문했다.
 “그런 것치곤 꽤 버티던데?”
 “맞아. 웃기게도 엘프들은 자연의 축복을 받았지. 맹추위에도 잘 버티게 설계되어 있어. 단지 정신력이 못 받쳐주니까 일찍 죽는 거다. 여기선 정신력도 꽤 중요하거든.”
 버틸 수 있는 몸만큼이나 중요한 게 정신력이었다. 정신력이 못 따라준다면 아무리 상태가 좋아도 얼마 못 버티리라.
 정민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다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엘프들이 축복을 받았다고?”
 “그래 대자연의 축복을 받았지.”
 “그렇다면 정신만 온전하면 우리들보다 오래 버티겠네?”
 “그렇다고 볼 수 있지. 하지만 그렇게 오래 버틴 엘프는 못 봤다. 대부분 여왕을 그리워하거나 신을 찾다 허무하게 가더군.”
 “한심하네. 여왕이 그렇게 중요해?”
 “엘프 이야기다.”
 정민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마력 보정 플레이어에 대한 단서를 찾긴 했는데, 딱히 가망이 없어 보였으니까.
 “그럼 앞으로 얼마나 버틸까?”
 “그 엘프를 말하는 거냐?”
 “그래.”
 “내 경험상 그런 녀석들은 얼마 못 가. 당장 죽어도 이상할 거 없잖아? 단지 버티고 있는 이유가 있다면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됐다는 것과 정신적으론 이미 무너졌어도 신체적으론 우리보다 버티기가 수월하다는 거지. 대자연의 축복. 그걸 무시하면 안 돼.”
 “언제 왔는데?”
 “당신보다 이틀 정도 먼저 온 거 같은데, 하루 비실거리더니 곧장 골골거리더군. 꼴사납게 말이야.”
 여왕에게 버려져 정신적으로 무너진 엘프.
 정민이 그 엘프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블락이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냐?”
 블락은 그 물음과 함께 죽은 한셈을 떠올렸다.
 이럴 때 한셈은 이렇게 답했을 것이다.
 “취익. 당연히 살려야지. 췩. 마법사 없인 못 나가. 무조건 마법이 필요하다고.”
 정민의 대답 역시 블락이 예상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단 살려야지. 구속구 문제가 있긴 하지만, 나는 마법사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든.”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나저나 그 녀석은 어디 있지? 안 보이는데?”
 정민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아미르를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아미르를 찾을 수 없었다.
 블락이 답했다.
 “방에 남아 골골거리고 있겠지. 빵을 얻을 의지도 없는 녀석이다. 죽어 마땅한 녀석이지.”
 “뭐라고?”
 정민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 말은 지금 수감자 하나가 방구석에 놀고 있는데 시어들이 그냥 놔준단 말이냐?”
 그 의문에 대해선 블락이 해결해주었다.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그대로 놔두면 굶어 죽거나 얼어 죽는데. 그건 시어들이 바라는 일이라고.”
 광산에 나오지 않는다는 건 삶을 포기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광산에 나와서 퀘스트를 깨야만 빵과 석탄이 나오기 때문이다.
 즉, 광산에 나오는 건 플레이어에게 주어진 선택사항이지 강제사항이 아니라는 것.
 블락이 추가적인 말을 해주었다.
 “여기 있다 보면 자연히 알겠지만, 이곳은 우리를 살리려고 지은 교화 시설 따위가 아니야. 우리를 죽이기 위한 시설이다. 단지 이렇게 구차하게 살려두는 것은 우릴 가둔 녀석들의 비즈니스지. 이런 혹한 속에서 곡괭이질을 할 자들이 어디 있겠어? 우리밖에 없는 거지.”
 “그럼 그 엘프가 지금 숙소에 남아 있다는 소리야?”
 “그렇겠지.”
 “살아 있을까?”
 “그건 왜 묻는 거지? 어차피 얼마 못 갈 녀석이다. 설마······ 살리려는 건 아니겠지?”
 “왜, 못할 것도 없잖아?”
 “그럼 네 몫에서 무언가를 떼서 그 엘프에게 줘야 한다.”
 일도 안 하는 자, 먹지도 말라.
 하지만 그런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건······.
 블락은 살짝 거칠어졌다.
 “아무 것도 안 하고 방구석에 처박혀 신만 찾는 녀석에게 뭔가 내줄 생각은 아니겠지?”
 블락의 말은 틀린 게 없었으나 정민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그 엘프를 살리기로.
 “그 엘프는 내가 볼 땐 동아줄이야. 썩은 동아줄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챙길 건 챙겨야지. 살릴 거다, 일단은.”
 “구속구는 어떻게 하려고? 구속구가 있는 한 여기서 마력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스탯이다. 여기서 필요한 건 빵과 석탄을 얻을 수 있는 근력 스탯뿐이야.”
 “그것도 해결할 방법을 찾으면 돼. 여긴 별의별 녀석들이 다 모인 곳이잖아? 찾다 보면 구속구 문제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내 생각이다.”
 “어리석은······.”
 블락은 무언가를 말하려다 중도에 멈췄다. 한셈과 많이 부딪혀본 경험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어차피 자신이 말하려는 건 상대방을 말리려는 의도밖에 없었다.
 반면 그는 무엇이라도 시도하려는 자. 변화 없는 자신이 변화를 일으켜 기적을 행하려는 자를 막아서 뭐가 좋을까?
 블락은 한셈보다 정신력이 약했지만 그렇다고 어리석진 않았다.
 “그래. 한 번 살려봐. 나한테 폐만 안 끼친다면 굳이 말리진 않겠다.”
 그 말에 정민은 고개부터 저었다.
 “내가 살린다면 당신도 같이 살리는 거다. 뭔가 대단히 착각하는 모양인데, 우린 이제 한 팀이야. 내 일이 곧 당신 일이라고.”
 “뭐?”
 블락이 철판도 뚫을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아까 내가 한 말을 잊은 모양이군. 잘 들어라.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단순히 정보 제공뿐이야. 내가 나서서 무언가를 하는 건······.”
 “잊지 마. 당신한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거. 그럼 뭐라도 해야지 않겠어?”
 다 같을 줄 알았던 정민이 한셈과 다른 점이 있었다. 그건 한셈보다 많이 약았다는 점이다.
 “말빨 조지는 거냐? 그러다 제명에 못 갈 거다.”
 “그래서, 도와줄 거지?”
 불곰은 바로 반박하지 못했다.
 정민이 설핏 웃었다.
 “침묵은 긍정이라고. 잘 생각해봐. 내가 먹을 것도 없는데 엘프한테 뭘 주겠어? 서로 조금씩 모아야 한 사람께 나오는 거야. 십시일반 몰라? 하긴, 여긴 십시일반도 모르겠군.”
 “그게 헛짓이면 우리 명줄만 줄어드는 거 모르나?”
 “여기서 구차한 명줄 챙겨봤자 의미 있는 건 아니잖아? 어떻게든 나가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거라고.”
 블락이 보기엔 정민은 이상하게 말을 잘했다.
 “보기보다 주둥아리를 잘 나불거리는군. 인간의 농간이라 보면 되나?”
 “설득이라도 됐나 봐? 주둥아리 잘 나불거린다는 소리가 나오는 걸 보니까.”
 “하지만 구속구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할 거다. 그게 있는 한 마력은 가장 쓰레기 스탯이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스탯이라고.”
 “내 묻겠는데, 그 구속구에 대해 아는 건 없고?”
 “한셈도 너처럼 알아봤었다. 그러다 문제가 생겼지.”
 “문제? 무슨 문제?”
 한셈이 죽게 된 이유.
 그 일을 떠올리며 블락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내부에 밀고자가 있었다.”
 “밀고자?”
 블락이 주변을 훑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수감자는 다 같을 거라고 생각한 한셈의 실수였지. 한셈은 오크였지만 보기보다 정이 많았다. 결국 그 정이 일을 그르친 거야. 여기저기 손을 벌리다 결국 독사에게 덜미가 잡혔지. 그 다음 독사에게 물려 죽었다. 대충 무슨 의민지 알겠지?”
 “이봐. 그런 일이 있었으면 더 조용히 말해야지. 다 듣잖아?”
 “그거랑 상관없는 일이다. 중요한 건.”
 블락이 강조하듯 다음 말을 이었다.
 “믿을 수 있는 녀석들과 함께하는 거다. 그게 가장 중요한 거야.”
 블락과 대화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정민의 시야에 메시지가 올라왔다.
 퀘스트 메시지였다.
 
 -메인 퀘스트가 갱신되었습니다.
 [메인 퀘스트(1)]
 *정보 수집(진행 중)
 -불곰의 이름은 블락이다. 블락과 대화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블락이 말하길, 엘프가 마력 스탯을 보정 받는단다. 내가 알고 있는 엘프는 단 한 명. 방구석에 처박혀 골골거리는 아미르란 녀석이다. 아무래도 그 엘프와 접촉해 봐야겠다. 어쩌면 아미르가 우리 모두를 구원할 마지막 동아줄인지도 모른다.
 -어젯밤 요한에게서 불곰에 대한 정보를 넘겨받았다. 확실하진 않지만 불곰과 접촉하여 이곳 수용소 정보를 더 얻어 봐야겠다.
 *여긴 어디야?(완료)
 
 갱신된 퀘스트를 확인한 정민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곡괭이질을 시작했다.
 그런 정민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이가 있었으니, 바로 표정부터 썩어 있는 고블린 반장이었다.
 ‘신참이 왜 블락에게 말을 건 거지? 블락은 왜 저리 친절한 거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새파란 신참이 블락에게 말을 건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블락이 다정하게 말을 받아준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
 단정 지을 순 없지만 무언가 구린내가 났다. 이건 자신의 오랜 경험에서 나온 결론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놈, 눈빛이 살아 있어. 허튼짓 하다가 뒈져버린 한셈처럼 말이야.’
 문득 정민과 한셈이 겹쳐 보이는 건 왜일까?
 고블린 반장은 말없이 곡괭이질을 하기 시작했다. 정민과 블락이 마주치는 장면을 계속 생각하면서.
 광산 일이 끝나자 정민은 남들보다 빠르게 숙소로 돌아와 아미르의 상태부터 살폈다.
 “이봐, 살아 있으면 말 좀 해봐. 도와줄게.”
 엘프가 미약한 신음을 내뱉었다. 정말이지 놀랍고도 질긴 생명력이었다.
 정민은 폐타이어보다 질긴 생명력에 경의를 표했다.
 ‘내가 이 엘프였다면······.’
 어떻게 보면 신이란 자는 공평해 보였다. 정민에겐 나약한 육체를 보완할 정신을 주었고, 엘프에겐 나약한 정신을 보완할 대자연의 축복을 주었으니까.
 ‘다행인 게 아직 살아 있어. 언제 죽을진 모르겠지만.’
 그때 정민의 뒤에서 기분 나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놈은 왜? 곧 뒈질 놈은 왜 확인하는 거지?”
 고블린 반장이었다.
 정민은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고블린 반장을 보았다. 놈은 표정부터 썩어 있었다.
 정민은 제 성격을 최대한 억누르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뭘 하든 말든 무슨 상관인데?”
 “상관이야 있지. 여기 대장은 바로 나니까.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무조건 나한테 보고해야 돼. 그게 맞으니까.”
 “네가 시어라도 돼?”
 고블린 반장 뒤로 두 리자드맨이 섰다.
 “신삥 새끼가 미쳐가지고. 어디서 그 주둥아리 나불거리나?”
 “저 새끼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한 번쯤 밟아줘야 돼. 그래야 안 기어오르지.”
 정민은 그들과 대치하며 섰다. 아무래도 양아치 셋과 크게 대거리를 해야 할 듯싶었다.
 3 대 1.
 쪽수론 밀렸지만 질 것 같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이참에 관자놀이를 다 뚫어버려야 정신 차리지.’
 그때 요한이 다가와 정민 옆에 섰다.
 “이봐, 무슨 일인데?”
 요한이 주변 상황을 보았다. 상황 자체는 알 수 없었지만 요한은 정민 편에 섰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서로 귀찮은 일은 피했으면 하는데?”
 요한이 가세하자 분위기는 3 대 2로 바뀌었다.
 고블린과 두 리자드맨이 눈치 보는 상대가 하나 더 늘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때 그들 뒤로 불곰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굳이 소란을 피우겠다면 나도 껴주마.”
 고블린 반장이 그것을 보며 표정을 구겼다.
 굴러가는 상황이 썩 내키지 않았다. 요한이야 어제부터 신참이랑 자주 붙어 다녔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블락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곧 그를 향한 물음으로 이어졌다.
 “왜 끼어드는 건데? 네가 낄 자리가 아니잖아?”
 고블린 반장이 퉁명스럽게 묻자 블락은 그에게 드리워지는 그림자를 더 크게 하며 대꾸했다.
 “이게 신참을 감싸는 걸로 보이나? 알잖아. 내가 신경 쓰는 건 오직 여기 시어뿐이야.”
 “흥,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거냐?”
 “시끄럽고! 조용히 꺼져. 소란 피울 생각이 없으면.”
 고블린 반장은 정민과 블락을 번갈아보더니 마지못해 자리에서 물러났다. 쪽수도 안 되고, 블락과 마찰을 빚어봤자 손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고블린을 따라온 두 리자드맨 역시 정민에게 세운 엄지로 목을 긋는 시늉으로 위협하더니 물러났다.
 그런 리자드맨을 정민이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정민의 눈에서 화르륵! 불이 일었다. 이참에 저들의 관자놀이를 뚫어 버리리라.
 정민이 표정을 달리하고 한 발자국 나서자 그 앞을 블락이 막아섰다.
 “그만! 이쯤에서 멈추는 게 좋아. 화가 나도 참아라.”
 “참으라고?”
 천하의 차정민이 여기서 참다니.
 정민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내가 참는다고?’
 정민은 블락 너머로 떠나가는 두 리자드맨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내 별명이 저승사자였어. 거슬리는 새끼들은 전부 저승으로 보내 버렸으니까.’
 정민이 블락을 무시하고 지나치려하자, 블락은 다시 한 번 그를 막아섰다.
 “내가 말했지. 참으라고. 곱게 살아남으려면 내 말 듣는 게 좋을 거다. 당장 저 새끼가 문제가 아니라 시어에게 찍히면 얼마 못 버텨.”
 정민은 블락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꾸했다.
 “이봐. 내가 천지분간도 못하고 이렇게 날뛰는 줄 알아? 당신도 알잖아. 저런 녀석들 이렇게 놔주면 나중에 또 기어오를 거다. 내가 움직이는 건 그거 때문이야.”
 정민이 다시 한 번 블락을 지나치려하자 블락은 무지막지한 힘으로 정민을 밀어냈다. 힘 하나는 장사였다.
 블락이 다른 식으로 말했다.
 “그럼 내가 해결하지.”
 “당신이 해결한다고?”
 뒤돌아선 블락은 곧장 두 리자드맨에게 다가가가 다짜고짜 방구석으로 밀어붙였다. 얼떨결에 방구석에 몰린 두 리자드맨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성난 불곰의 포효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불곰의 포효 소리가 아군을 독려하고 적에게 끝없는 공포를 선사합니다.
 -10초 동안 사기 진작됩니다. 모든 능력치가 1씩 상승합니다.
 
 ‘버프······.’
 놀랍게도 블락의 포효는 버프가 되어 정민에게 이로운 영향을 미쳤다.
 반면 구석에 몰린 두 리자드맨에겐 공포가 되었다.
 블락은 전에 없이 험악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제 발치에 쓰러져 있는 두 리자드맨에게 구두로 경고했다.
 “더 이상 시비는 없다.”
 공포에 질려 꼬랑지를 내린 두 리자드맨은 그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정민이 봤던 것처럼 확실히 잔챙이였던 것이다.
 이후 블락이 고블린 반장을 노려보자, 고블린 반장은 내키진 않은 듯했지만 마지못해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여줬다.
 이를 확인한 블락이 다시 정민에게 돌아왔다.
 “봤겠지만, 더 이상 소란은 없다.”
 확실히 불곰다운 일처리 방식이었다. 그다지 마음에 드는 전개는 아니었지만 불곰이 저렇게까지 수고한 것에 대해선 답례가 필요했다.
 정민은 이번 일은 조용히 넘어가기로 했다.
 “알았다. 무시하지.”
 “그래, 그게 서로한테 좋은 거야.”
 그때 그들 방안으로 불청객이 찾아왔다.
 “이게 무슨 소란이야!”
 시어 게넨바인이었다.
 독사는 혼자 오지 않았다. 그의 손엔 개목줄이 들려 있었고, 그 뒤엔 목줄에 묶인 누군가가 있었다.
 그는 정민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바로 황자라 불렸던 남자.
 독사가 시끄럽던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빨리 튀어나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블락이 독사 앞에 섰다.
 불곰이 제 덩치보다 작은 인간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눈빛을 죽였다.
 독사가 독니를 드러냈다.
 “이 곰탱이가 미쳐가지고. 여기가 네 집구석인 줄 알아?”
 “죄송합니다.”
 “왜 시끄럽게 소리 지르고 지랄이야.”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블락은 계속 죄송하단 말만 반복했다.
 독사는 독기 어린 눈으로 안쪽을 훑어보다 이내 표정을 바꾸었다.
 그의 입가가 잔인하게 휘어졌다.
 “그건 그렇고.”
 독사가 이 방에 찾아온 이유가 따로 있었다. 결코 시끄러운 것을 지적하기 위해 찾아온 게 아니었다.
 독사가 찾아온 이유.
 그건 자신의 새로운 애완동물을 그들에게 소개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번에 말이야. 내가 한셈을 대신할 새로운 애완동물을 찾게 됐지.”
 모두의 시선이 황자에게 머물렀다. 황자는 그들의 시선을 피했다.
 정민이 알게 모르게 표정을 구겼다. 누군가를 악질적으로 괴롭히는 건 정민이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아니, 가장 싫어했다.
 ‘저 새끼······.’
 독사는 애완동물인양 끌고 다니며 황자를 훈련시키고 있었다.
 “짖어봐. 키우는 개새끼면 개새끼답게 짖어야지.”
 시어의 말이 끝났음에도 개목줄에 채워진 황자는 조용했다.
 차디찬 침묵이 이어지자 독사가 감춰뒀던 독니를 다시 드러냈다.
 “뭐하나. 어서 인사해야지.”
 “왈······ 왈왈.”
 황자는 죽은 눈으로 의미 없게 짖어댔다.
 독사의 표정이 풀어졌다.
 “옳지. 귀여운 내 새끼.”
 만족감을 드러낸 독사는 개목줄이 차인 황자를 데리고 떠나갔다.
 수감자 방은 조용해졌다. 아무도 개처럼 짖어댄 황자를 보고 비웃지 않았다. 그건 비단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언제든 독사에게 찍히면 자신도 저리 되리라.
 요한이 표정이 굳어 있던 정민에게 말을 흘렸다.
 “한셈도 저렇게 갔다. 독사한테 제대로 물렸지.”
 요한은 두 손바닥을 바닥에 붙이고 독사에게 농락당했던 한셈을 기억해냈다.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독사는 한 명만 노린다. 대신 물리면 끝이야. 죽을 때까지 안 놓아주니까.”
 시어 이야기가 나오자 요한은 내친김에 다른 시어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었다.
 “그리고 2층 시어 중에 프랑켄슈타인이 있어. 그놈도 나름 악질인데, 듣기론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 있으면 샌드백처럼 달아놓고 패 죽인다고 하더군. 평소엔 아주 조용한데, 재수 없게 걸리면 끝이라고 들었다.”
 “다른 시어는?”
 “글쎄. 다들 악질이라 누구부터 말해야 할지······.”
 정민은 시어 이야기를 듣자, 수감자보다 시어를 더 경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감자들끼리의 사소한 다툼 따위야 악질적으로 나오는 시어에 비하면 새 발의 피처럼 느껴졌으니까.
 정민은 머잖아 청소 시작을 알릴 시어 필립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럼 여기 담당 시어는 어때?”
 그 물음에 답은 어느 샌가 다가온 블락이 대신해줬다.
 “필립은 다른 시어에 비하면 착한 편이지. 대신 돈을 밝혀. 뭔가 잘못 되면 잘못을 묻기 전에 돈부터 찾지.”
 “우리한테 돈이 어디 있어? 병신 같은 몸에 부랄 두 짝만 차고 있는데.”
 정민이 반문하자 블락은 방문 쪽을 의식하며 대답해주었다.
 “당장 가지고 있는 돈은 없겠지. 하지만 아는 정보를 돈으로 만들 순 있다고 들었다. 아무도 모르는 보물 창고 위치라든가 혼자만 알고 있는 던전 정보를 시어에게 넘기게 되면 그게 돈이 되는 거지. 정보 거래는 보통 시어들이 맡아. 그 정보가 유용하면 외부에서 시어에게 돈이 지급되는 형식이지.”
 “그래?”
 이런 시궁창에서 그런 식으로 돈을 만들어 내다니.
 블락은 구석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고블린 반장을 두고 말을 이었다.
 “저기 그린 있지.”
 “그린?”
 “너랑 시비 붙었던 저 고블린 말하는 거다.”
 “이름이 그린이었어?”
 “보통 반장이라고 부르지. 아무튼 저 녀석도 시어 필립에게 몇몇 정보를 팔고 저 자리를 꿰찼지. 아는 게 많은 놈이야.”
 “원래 뭐였는데?”
 “얼핏 듣기론 황금 고블린이었다고 들었다.”
 “황금 고블린? 그게 뭔데?”
 “몸에 금칠을 하고 다니는 고블린 장사꾼이지. 모르긴 해도 우리들 중에 가장 부자일 거다. 황금 고블린은 세상에서 가장 탐욕스러운 장사꾼이니까. 그리고 세상에 있는 모든 정보를 거래하지.”
 세상에 있는 모든 정보를 거래한다는 말에 정민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어쩌면 구속구에 대해 알지도 몰라. 그럼 이 빌어먹을 구속구를 떼어낼 수 있겠지.’
 정민은 블락에게 바로 물었다.
 “그럼 이 구속구에 대해 알고 있는 거 아냐? 모든 정보를 취급한다면 이 비밀도 알고 있겠지.”
 블락은 그 즉시 고개를 저었다.
 “아까 밀고자가 있다고 했지? 그게 누군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어. 현재로썬 시어만 알고 있지. 내 생각이지만······ 그 밀고자가 저 녀석일 확률이 커. 녀석은 시어랑 친했으니까.”
 블락이 턱짓으로 가리키는 대상은 고블린 반장인 그린이었다.
 그 시선을 느꼈기 때문일까?
 우연히 그린과 그들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뭘 꼬라보는데?”
 성격 더러운 고블린은 말도 더럽게 했다.
 그린이 성질 더럽게 쏘아붙이자 그린을 쳐다보고 있던 셋은 일제히 시선을 치웠다.
 블락이 끊어졌던 대화를 다시 이어나갔다.
 “저 녀석이 한셈을 팔아넘겼다면. 구속구에 대해 묻는 순간 우린 끝이야. 그 즉시 시어에게 일러바칠 테니까.”
 “그런데 왜 한셈만 끝장난 거지? 너는? 일을 꾸민 건 혼자가 아니잖아.”
 “한셈이야 본보기였고 나머지는 개처럼 부려먹어야 했으니까. 이번에 교단에서 귀한 손님이 온다고 했지? 사실 여기 시설 전부 다 교단 소유다. 그리고 교단에선 매달 일정 수준의 채굴량을 원하지. 여기 철광석이 냉기 속성을 가지고 있어 아주 특별하거든.”
 “냉기 속성?”
 “아티팩트도 아닌데 냉기 속성이 추가된다고 하더군. 꿀이지. 아무튼 그 채굴량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플레이어 수가 급감하면 안 돼. 그 당시 그 일에 엮인 녀석만 스무 명이 넘어갔다. 여기 인원이 얼마나 된다고 그 스무 명을 다 죽이겠어? 절대 못 죽이지.”
 “그래서 비즈니스 때문에 나머진 살려줬다?”
 “그런 거지. 어차피 그들 중 태반이 죽었어. 굳이 죽일 필요도 없이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죽게 되는데, 뭐 하러 그런 짓을 하겠어. 차라리 철광석이나 더 캐라고 하지.”
 “교단에선 누가 오는데?”
 “보통 파견 사제장과 사제들이 찾아오지. 교단 측에서 우리가 일을 잘하고 있나 감시하려고 찾아오는 거야. 하지만 그들이 온다고 해서 오버시어가 귀인이 온다고 말하진 않았을 거야. 귀한 분이 온다고 말할 정도면······ 주교? 잘 모르겠군.”
 “오래 있었으니까 뭐라도 알 거 아냐. 교단에서 누가 온 적 없었어?”
 “내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성녀가 온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성녀? 성녀가 이런 델 와? 올 이유가 없잖아.”
 성녀 이야기가 나오자 조용하던 요한이 나섰다.
 “성녀가 이런 곳까지 왔다면······ 어쩌면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겠군.”
 조용하던 요한이 입을 열자 정민과 블락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에게 향했다.
 요한은 그 시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자기가 들었던 소문에 대해 말해주었다.
 “나도 들은 이야기다. 확실하진 않지만 나름 수긍하고 있지.”
 4장 신성 교단
 
 
 “무슨 이야긴데?”
 “소문이다. 성녀는 보통 남자를 멀리하게 되지. 그게 성녀가 지켜야 할 당연한 의무이고 교단의 교리거든.”
 요한의 말은 계속됐다.
 “하지만 성녀도 알게 모르게 남자를 바란다고 하더군.”
 정민이야 애당초 모르는 이야기였고, 블락 역시 탄생 성녀와 관련된 은밀한 뒷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건 오직 요한만 아는 이야기였다.
 “교단에서 선출한 12명의 탄생 성녀는 신성 교단의 명실상부한 얼굴 마담이자 교단의 강력한 철퇴지. 민심을 모을 탁월한 미모와 마스터조차 압살하는 무력을 갖춘 그녀들의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야. 교단의 비호 아래 전 대륙을 누비는 그 위상은 왕족이나 황제에 버금갈 정도지.”
 “그래서?”
 “그런 성녀들에게 무언가를 부탁하고 싶을 때 어떻게 하겠나? 뭘 줄 수 있는데? 성녀들은 정말 모든 걸 가졌어. 부와 권력, 다 가졌지. 교단에서 미친 듯이 밀어주니까. 하지만 그녀들에게 없는 게 딱 하나 있지.”
 정민은 넘겨짚듯 물었다.
 “남자?”
 “그래 맞아. 바로 남자야. 성녀도 따지고 보면 여자지. 절대 남자를 마다하지 않아. 오히려 엄격히 금기시됐기에 그 누구보다도 이성과의 로맨틱한 사랑, 욕정 등을 남모르게 갈망하고 있지.”
 요한의 말은 의외로 설득력이 있었다.
 “물론 모든 성녀가 그렇다는 건 아니야. 대부분의 성녀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교단에 충성하는 신성한 존재지. 하지만 소수는 타락했어. 그런 성녀들에게 무언가를 부탁하기 위해 이따금씩 남자를 밀어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타락한 성녀에겐 남자가 최고의 선물일 테니까.”
 “그래서 여기로 온다?”
 “잘 생각해봐. 여긴 남자밖에 없어. 그리고 곧 죽을 남자들이지. 이런 곳에 성녀가 왜 오겠나?”
 “위쪽 비즈니스겠지.”
 “맞아 비즈니스야. 성녀에게 남자를 밀어주고, 여기 윗대가리들은 성녀에게 무언가를 얻으려 하겠지.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정민은 고개를 끄덕였고, 같이 있던 블락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그러다 정민이 불쑥 물음을 던졌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말해봐.”
 “그 성녀 말이야. 남자와 뒹굴다 걸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요한의 표정은 꽤 진지했다.
 “이성과 접촉도 금기시되지만, 만약 그런 사실이 발각되면 그 즉시 이단 심문관들이 찾아와 남자는 거세시킨 채 살가죽을 벗겨내고, 성녀는 그대로 화형에 처하지. 신이 간택한 여자를 건드리는 일은 신성모독이나 다름없거든.”
 “신성모독이라······.”
 이 대화도 성녀가 찾아와야만 비로소 의미가 있었다. 성녀가 아닌 주교가 찾아온다면 쓸데없는 이야기.
 “그런데 그 성녀가 안 올 수도 있잖아?”
 “확실한 건 아니다. 주교가 올 수도 있어. 주교가 온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
 “그런데 성녀란 게 12명이나 돼? 생각보다 많네.”
 “이 대륙엔 12명의 여신이 있지. 성녀들은 그 여신의 환생이라고 보면 돼. 그리고 일평생 한 명과 마주칠까 말까야. 이런 걸 생각해보면 그다지 많은 편도 아니지.”
 “그렇군.”
 성녀 이야기가 대충 마무리되자 정민은 옆에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 아미르에게 관심을 돌렸다.
 “이봐, 정신 차려봐.”
 아미르는 대답도 없이 옅은 신음소리만 반복했다.
 “미치겠네. 의식도 없어.”
 “신경 꺼라. 어차피 죽을 녀석이다.”
 블락은 옆에서 팔짱낀 채 말했다.
 정민은 난로에 다가가 주전자에 담겨 있던 물을 한 잔 떠왔다.
 “이봐, 이 물 좀 마셔봐.”
 어렵게 물을 마시게 한 뒤에야 엘프가 힘겹게 눈을 떴다.
 엘프가 의식을 차리자 정민은 그를 강제로 일으켜 세운 뒤 뺨부터 가볍게 때렸다.
 엘프가 다 죽은 눈으로 제 뺨을 때린 정민을 응시했다.
 왜 때리냐는 눈빛이었다.
 “정신 차리라고. 여기서 죽을 거야?”
 엘프도 할 말이 있는지 아주 힘겹게, 그 입을 열었다.
 “어차피······ 죽어.”
 “뭘 죽어? 나가면 사는 거지.”
 “못······ 나가.”
 아미르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모두는 죽어 있었다. 물론 살아서 움직이긴 했지만 시체가 움직이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런 자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아미르도 희망을 잃게 되었고, 자기도 곧 죽은 자가 되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살아 있는 사람을 보았다. 그의 눈은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의 눈을 본 순간 심연 깊숙한 곳까지 꺼져가던 아미르의 정신이 아주 천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살아있어······.”
 정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 엘프는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 것인지.
 “살아있다고.”
 아무래도 뺨을 더 맞아야 정신 차릴 듯싶었다.
 
 * * *
 
 아침 집합 시간.
 오버시어가 추위에 떨고 있는 수감자들에게 말했다.
 “오늘 교단에서 귀한 손님이 찾아오신다. 만약 그 손님과 마주칠 일이 있다면 최대한 공손하고 댄디하게 행동하도록.”
 오버시어가 말을 마치자 모두는 광산으로 향했다.
 어제부터 정민 근처에는 세 명의 파티 플레이어가 함께하고 있었다.
 요한과 블락. 그리고 엘프 아미르였다.
 아미르는 정신을 차린 직후 놀라보게 달라졌다.
 시름시름 앓던 것도 이제 예전 일.
 지금은 근처에 있는 동료들과 제법 말을 섞을 정도는 됐다. 그 정도로 기운을 차린 것이다.
 아미르가 입을 열었다.
 “내가 가진 마력이······ 의미가 있다고?”
 아미르는 마력을 보정 받은 플레이어였다.
 종족 특성으로 기본 스탯은 근력 2, 민첩 3, 정신 2, 마력 2. 여기다 개인 특성까지 마력으로 보정 받아 마력 스탯은 무려 4나 되었다. 수감자 중 오직 아미르만 마력이 4인 것이다.
 그 물음에 정민이 답했다.
 “당장은 의미가 없겠지. 하지만 곧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거다. 아니 무조건 찾아야 돼.”
 사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아미르를 이 파티에 끌어들인 것도 정민이었다. 만약 아미르가 합류한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짐덩이만 늘어나는 꼴이리라.
 어제부터 아미르의 몫까지 곡괭이질을 더 하느라 무리를 했던 탓일까?
 요한이 무너졌다.
 “좀 쉬어야겠어. 이런 말하기 정말 싫지만······ 힘들군.”
 요한이 힘에 겨워 벽에 등을 기댄 채 맥없이 주저앉았다. 이들 중 가장 근력이 높은 블락도 지쳤는지 잠시 곡괭이를 내려놓았다.
 그나마 곡괭이를 잡고 있는 건 정민 정도였다. 정민은 자신 외에 맥없이 앉아 쉬고 있는 동료들을 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 없어. 온 지 얼마 안 된 나야 요한처럼 몇 주 버티겠지. 하지만 요한은 이미 한계고, 저 불곰도 시간이 얼마 없어.’
 전부 다 제대로 먹지 못한 탓이었다.
 정민은 그들에게 먹일 게 없다는 사실이 그저 분하기만 했다.
 ‘하루에 썩은 빵 하나. 이런 걸로 어떻게 버티라고.’
 그때 아미르가 그들 대신 곡괭이를 쥐었다. 전날부터 아무 것도 안 하고 빵과 물을 얻어먹었으니 보답이라도 할 생각이었으나, 아쉽게도 곡괭이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근력이 2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뚱이.
 블락이 그런 아미르를 비웃었다.
 “괜한 짓 집어치워. 너같이 비실비실한 놈이 제대로 휘두르기나 하겠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불곰도 힘들어하는 게 여기 곡괭이질이었다.
 아미르는 오기로라도 곡괭이를 들려 했으나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곡괭이가 너무 무거웠다.
 그런 아미르를 두고 정민이 생각했다.
 ‘근력이 너무 낮아. 애당초 저 엘프는 곡괭이질을 할 수 없어.’
 아미르는 애당초 혼자서는 성장이 불가능한 플레이어였다. 여기서 경험치를 얻기 위해선 곡괭이질이 필수인데, 그 곡괭이질을 아예 할 수 없는 몸이었으니까.
 다만 파티 플레이를 하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이는 동료로부터 경험치를 나눠 받기 때문이다.
 아미르까지 무너지자 남은 건 정민 혼자가 되었다.
 정민은 쉬고 있는 동료들의 몫까지 대신하기 위해 곡괭이를 전보다 더 세게 움켜쥐었다.
 “됐어. 어차피 저 엘프한테 곡괭이질을 바란 건 아니니까. 부족한 건 내가 채운다.”
 의미 없는 희생인 것 같아 블락의 불평은 갈수록 늘어만 갔다.
 “이런 식이면 저 의미 없는 녀석 때문에 우리가 죽는 시간만 앞당겨질 뿐이야.”
 블락은 아무 것도 못 하는 아미르가 항상 불만이었다.
 그런 불만을 정민이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최대한 긍정적으로 가려고 했다. 아미르를 데려온 건 자신의 결정이었으므로.
 “죽더라도 다 같이 죽자고.”
 그 말을 하며 정민은 곡괭이를 휘둘렀다.
 모두는 말없이 곡괭이질을 이어가는 정민을 쳐다보았다. 다른 건 몰라도 정신력 하나는 정말 대단한 자였다.
 근력도 5가 안 되는 마당에 계속 곡괭이질을 하는 것도 모자라 부족한 동료들의 몫까지 채우려 했으니까.
 그렇게 정민이 말없이 곡괭이를 내리치고 있을 때 시어가 나타나 소리쳤다.
 “동작 그만! 전부 멈춰!”
 곡괭이질을 닦달해야 할 시어가 작업을 중지시키자, 모두는 의아한 시선으로 시어를 쳐다보았다.
 시어는 일을 멈춘 플레이어들을 지나치며 목소리를 냈다.
 “지금부터 자기가 잘생겼다. 몸이 좋은 거 같다. 나름 괜찮게 생겼다. 이런 생각을 하는 녀석은 앞으로 나와라.”
 대체 무슨 소리일까?
 모두는 어리둥절했다.
 “뭣들 하나! 귀가 먹었어? 빨리 튀어 나와!”
 시어의 일갈에 몇몇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러자 시어는 제 손으로 직접 데려갈 인원들을 선별하기 시작했다.
 “너 앞으로 나와. 너도. 넌 뒤로 빠지고. 그래 너도 앞으로 나와. 몸이 좋군.”
 정민과 아미르가 영문도 모른 채 선별됐다.
 둘은 영문도 모른 채 선별된 인원들과 함께 시어를 따라 광산 밖으로 나왔다.
 아미르는 저와 마찬가지로 시어를 따르는 이들을 보며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정민은 시어를 따라가는 열댓 명의 인원을 두고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러다 어제 성녀 이야기를 했던 게 떠올라 사색이 됐다.
 ‘설마······.’
 그 설마는 곧 현실이 됐다.
 정민을 포함한 열댓 명의 수감자들은 수용소에 와 처음으로 따뜻한 물에 몸을 씻었다.
 여기엔 영문도 모른 채 몸을 씻는 자들도 있었지만 정민처럼 대강 그 이유를 짐작한 자들도 있었다.
 “구석구석 말끔하게 씻어라! 귀한 분 뵈러가는 자리니 냄새 안 나게 박박 문질러!”
 정민은 시어가 보는 앞에서 몸을 씻으며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걸리면 안 되는데. 이걸 어떻게 하지? 좀 모자라게 보일까?’
 만약 성녀에게 간택이라도 받는다면 누군 좋아하겠지만 정민은 절대 아니었다.
 ‘걸리면 거세시키고 살가죽을 벗겨낸다고 했었지. 재수 없게 꼬이면 안 돼.’
 정민은 아미르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려 했으나 시간이 없었다.
 몸을 깨끗하게 씻은 수감자들은 이후 어디론가 불려갔다. 그들이 불려간 곳은 밖과 다르게 따뜻했고, 달콤한 향기가 났다. 그곳은 수용소에 찾아온 귀인들이 며칠 묵다가는 침실처럼 아늑하고 평온한 곳이었다.
 방에는 오버시어가 대기하고 있었고, 붉은 성복을 입은 노인도 벽 쪽에 앉아 있었다.
 방에 불려온 수감자들은 일렬로 섰다.
 준비가 되자 오버시어가 목소리를 냈다.
 “여기서 고르시면 됩니다. 최고들로 엄선했습니다.”
 그러자 한 여자가 수감자들 앞에 섰다.
 붉은 베일로 얼굴을 가린 여자.
 베일 아래로 비치는 얼굴이 정말 예사롭지 않았다.
 불려온 몇몇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녀를 보고 속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는 오버시어가 데려온 인원들을 찬찬히 살펴보며 저만의 품평회를 열었다.
 “별로. 아니야. 쯧.”
 그러다 정민 앞에 섰다.
 정민은 정말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표정을 약간 이상하게 지었다. 간택되지 않으려는 발악이었다.
 “얜 뭐야? 좀 모자라 보이네.”
 기준에 한참이나 미달되는 자가 보이자 그녀는 주교에게 살벌하게 시선을 흘렸다. 그러자 붉은 성복의 노인이 오버시어를 무섭게 노려봤고, 오버시어는 어쩔 줄 몰라 헛기침만 남발했다.
 “크흠, 큼!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더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오버시어가 죄스러운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정민 옆을 지나치며 말을 흘렸다.
 “그래도 몸은 좋네. 나는 이런 몸이 좋더라.”
 떠나가는 그녀의 손끝이 정민의 가슴을 미묘하게 쓸었을 때 정민은 크게 안도할 수 있었다.
 ‘좋아, 살았다.’
 그녀가 다음으로 선 것은 아미르 앞이었다.
 엘프답게 정말 잘생기긴 했지만, 역시나 삐쩍 마른 몸이 별로였다.
 앙상하게 마른 몸.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타입이었다.
 “엘프긴 한데······ 몸이 너무 별로다. 이래서 힘이라도 쓰겠어?”
 그녀는 아쉽게 생각하며 다음 남자 앞에 섰다.
 “더 별로야. 얼굴이 이게 뭐야?”
 그렇게 품평회를 열던 그녀가 딱 멈춰선 곳이 있으니, 불려온 이들 중 가장 잘생긴 남자 앞이었다.
 그녀가 딱 찍은 남자.
 모두가 아는 이였다. 왜냐면 그는 독사의 새로운 장난감이었으니까.
 “낯이 많이 익은데······ 우리 어디서 봤더라?”
 황자는 그녀의 시선을 애써 피하려 했지만 반대로 그런 모습이 다른 매력을 낳고 말았다.
 “귀엽네.”
 그녀는 황자 앞에서 입술을 핥으며 농염한 눈짓을 보였다. 아무래도 그녀가 찍을 남자가 결정된 듯싶었다.
 희생양이 결정되자 몇몇은 정민처럼 안도했고, 몇몇은 정말 아쉬워했다. 그만큼 베일 속에 비치는 그녀의 미모가 대단했기 때문이다.
 “이 남자로 하겠어. 나머진 필요 없으니 나가봐.”
 줄지어 나가는 무리는 더 이상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비란 걸 베풀어주었다.
 “나갈 때 선물 챙겨가고. 여기선 먹을 게 최고라며?”
 선물? 무슨 선물일까?
 그들이 의문을 가지고 밖으로 나왔을 땐 준비된 탁자 위에 먹을 게 가득 차 있었고, 그 앞엔 시어 필립이 서 있었다.
 방에서 나온 수감자들은 탁자 위 음식들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군침까지 삼키는 그들을 보며 시어 필립은 그들에게 종이봉투를 나눠주었다.
 “종이봉투를 하나씩 나눠줄 테니 먹을 만큼만 담아가도록. 말했지만 먹을 만큼만 담아가라고 했다.”
 시어 필립은 그들을 비웃듯 말했다.
 모두는 커다란 종이봉투를 받았고, 종이봉투가 터질 때까지 갓 구운 빵과 신선한 과일, 육포 등을 담기 시작했다.
 정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진행이 너무 좋아.’
 썩은 빵 하나로 연명하던 곳이었다.
 그런 곳에 성녀에게 간택 받지 못했다고 먹을 걸 이리 챙겨줄 수 있을까? 무엇 하나 해준 게 없는데?
 ‘잠깐만. 아무리 교단의 자비라고는 하지만 뭔가 이상해······.’
 그러다 정민은 불곰이 말했던 걸 떠올렸다. 그의 얘기 어디에도 간택 받지 못한 이들이 먹을 걸 챙겨왔단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만약 이런 일이 그때에도 있었다면 불곰이 기분 좋게 말했을 거다. 성녀에게 간택 받지 못한 이들이 교단의 자비로 먹을 걸 한 아름 싸왔다고.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없었다.
 절대로.
 ‘만약 같은 성녀가 찾아왔다면 뭔가 있는 거다. 이걸 챙겨도 결국 가져갈 수 없는 거야.’
 순조롭게 흘러가는 진행은 그런 의심을 할 수 없게 만들었지만, 정민은 자신에게 주어진 최악의 난이도를 상기시켰다.
 심심하면 뒤통수를 쳐도 되는 게 바로 어려운 난이도가 아니겠는가? 아무렴 가장 어렵다는 갓 아너인데.
 ‘이걸 중도에 뺏긴다 치면 다른 데 담아가야 돼. 그렇다면 어디다······ 그래 맞아, 인벤토리.’
 눈에 보이는 종이봉투가 아니라 인벤토리에 숨겨 가면 저들도 모르리라.
 ‘인벤토리를 쓸 일이 아예 없어서 까먹고 있었어. 이거 그냥 인벤토리에 챙겨가도 될 텐데?’
 정민은 허겁지겁 종이봉투에 먹을 걸 챙겨 넣는 척하며 아무도 모르게 인벤토리에도 먹을 걸 채워 넣기 시작했다. 그러다 옆에서 저처럼 허겁지겁 먹을 것을 담고 있는 아미르에게도 그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주었다.
 “거기 말고 인벤토리에 담아.”
 정민은 최대한 작게 속삭였다. 주변의 눈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미르의 시선이 정민에게 잠시 머물렀다.
 ‘인벤토리?’
 거의 대다수 수감자들에게 인벤토리나 플레이어와 관련된 모든 것들은 아직도 생소하고 낯선 것이었다.
 아미르도 그런 수감자 중 한 명.
 아미르는 정민이 인벤토리를 언급하기 전까진 종이봉투에 음식을 담는 것만 생각했지 인벤토리에 무언가를 넣어갈 생각까지는 못하고 있었다.
 ‘인벤토리에 담으면 더 많이 챙겨갈 수 있어.’
 아미르는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정민처럼 탁자 위 음식들을 인벤토리에도 몰래 담기 시작했다.
 잠시 후 탁자 위 음식들은 불도저가 밀고 간 것처럼 빠르게 정리되었다.
 텅 빈 탁자와 수감자들이 들고 있는 종이봉투를 보며 시어 필립이 눈가를 좁혔다.
 단순한 느낌이지만 전과 비교해서 무언가가 살짝 달라 보였던 것이다.
 ‘뭐지? 그냥 느낌인가?’
 저번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종이봉투는 터질 듯이 빵빵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빵빵하긴 했는데 무언가 모자란 느낌이 들었다.
 ‘착오가 있었나?’
 그때 시어 필립의 눈에 빵을 씹고 있는 정민이 보였다.
 “지금 뭐하는 거냐?”
 종이봉투를 한 아름 안고 빵을 씹고 있던 정민이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시어 필립을 보았다.
 “누가 여기서 먹으래.”
 시어 필립은 무어라 더 말하기도 전에 방안에 계신 높은 분을 생각했다.
 이번 이벤트는 그분이 기획한 것이다. 만약 이 이벤트가 실패하여 누를 끼친다면 그건 자신의 잘못이 되리라.
 시어 필립은 자신이 한 번 지적했음에도 계속해서 빵을 삼켜 넘기는 정민을 노려보다가 조용히 놓아주었다.
 “여기 말고 숙소에서 먹어. 여기서 처먹으라고 나눠준 게 아니야.”
 정민은 씹지도 않은 빵을 욱여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어 필립은 그런 정민이 못마땅했지만 이내 놓아주기로 했다. 어차피 굶거나 동사해서 죽을 녀석인데, 여기서 음식 몇 개 챙겨먹는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챙겼으면 빨리 꺼져. 나가는 문은 저쪽이다.”
 모두는 행복한 표정으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챙겨간 음식만 한 아름. 이 정도 양이라면 몇 주는 거뜬히 버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그들이 1층 복도로 나오는 순간, 그들 앞에 독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전부 동작 그만!”
 시어 게넨바인이 그들 앞을 막아섰다.
 모두는 어리둥절했으며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선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단 한 명, 정민을 제외하고선 말이다.
 독사는 악질적으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전부 손에 들고 있는 걸 바닥에 내려놓는다. 실시.”
 손에 든 걸 내려놓으란다.
 몇몇은 감도 잡지 못했지만, 몇몇은 그 즉시 다음 상황을 예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발 아니길 빌었다. 왜냐면 이것은 교단의 자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사에게 교단의 자비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누가 이런 걸 챙겨 나오라 했지?”
 “안에서 저희 보고······.”
 누가 말대꾸를 하려 하자 독사가 독기 어린 눈으로 쏘아보았다. 마치 메두사가 노려본 것처럼 무언가를 말하려던 수감자가 그 자리서 얼어붙었다. 독사 앞에서 더는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독사는 섬뜩한 눈으로 수감자 앞을 거닐며 말을 이었다.
 “너희들은 죄악이다. 마녀의 저주를 받은 쓰레기 중에 쓰레기지. 그런데 교단에서 자비를 베풀어? 흥. 뭔가 대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교단이 너희에게 내릴 건 자비가 아니라 철퇴다.”
 그러다 독사는 입에서 무언가를 오물거리고 있던 정민을 보게 됐다.
 독사의 눈이 크게 떠졌다.
 “너 이 새끼. 누가 먹으랬어?”
 정민은 다 씹지도 않은 빵을 일단 목구멍으로 넘기고 봤다.
 정민의 변명이 이어졌다.
 “저희 주는 줄 알고······.”
 전혀 모르고 그랬다. 그냥 먹어도 되는 줄 알았다.
 그런 변명에 독사가 오만가지 인상을 썼다.
 “이 새끼가! 얼마나 처먹었나!”
 독사의 날 선 물음에 정민은 전후 사정을 모두 꿰뚫어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 일을 꾸민 자는 앞에서 으르렁거리는 독사보다 더 지독한 악질로 보였다.
 ‘누가 기획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악질이 많네. 이것도 다 시나리오였어. 줬다가 뺏는 거.’
 그렇게 복도의 수감자들이 곤경에 처하자 이를 비웃는 자들이 있었다. 오버시어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고, 주교 역시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성녀 가넷 블러드는 황자에게 몸을 밀착시키며 그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 있잖아. 정말 다 가졌어. 그래서 말이야. 어떤 일이든 무덤덤해진지 오래야.”
 황자는 가만히 들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교단의 빵빵한 지원을 받고 있는 12명의 탄생 성녀가 남부럽지 않게 살아간다는 것을.
 그녀들은 굶주림을 전혀 몰랐고, 제 말을 듣지 않는 이들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성녀들이 모든 일에서 무덤덤해지는 것이야 당연한 일.
 가넷 블러드의 속삭임은 계속됐다.
 “그런데 있잖아. 내가 언제부터 다시 쾌감을 느끼게 된 줄 알아?”
 황자가 경멸의 시선을 흘렸다. 확실히 타락한 성녀답게 벌이는 짓 또한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매혹적으로 움직였다.
 “남을 괴롭힐 때. 성녀는 있잖아, 여신의 환생이라 남을 괴롭히면 절대 안 되잖아. 그렇지? 그래서 저런 이벤트를 해주면 너무 재밌어.”
 악질 성녀.
 황자는 이 여자와 있는 이 순간을 증오했다.
 “특히나 저 이벤트처럼 희망이란 걸 주고 다시 빼앗을 때 있지. 그들이 짓는 표정을 보면 너무 짜릿한 거 있지? 나 정말 나쁘지 않아?”
 그러다 가넷 블러드는 그와 처음 만났던 장소를 기억해냈다.
 그녀는 핏빛 눈동자로 황자를 뜨겁게 핥아 내렸다.
 “기억났다. 우리 황실 연회 때 보지 않았어? 누가 당신 보고 유어 하이니스라고 부르던데?”
 황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오버시어를 쳐다보자, 오버시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어머, 황족도 플레이어가 될 수 있나 보네. 황족도 마녀의 저주를 피해갈 순 없나봐.”
 과연 이 여자가 성녀라 할 수 있을까?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황자가 자꾸만 치근덕거리는 그녀에게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 여기서 이러면 안 돼.”
 “뭘?”
 “이런 거 걸리면······ 걸리면 당신이나 나나······.”
 “죽는다고? 걱정 마. 절대 안 걸려.”
 이어지는 그녀의 말은 황자에겐 비수같이 날아와 꽂혔다.
 “여기 이 사람들은 나와 한패고 당신은 여기서 비참하게 죽을 테니까. 그런데 무슨 일이 생긴다고 그래? 절대 아무 일 없어.”
 가넷 블러드가 누더기 같은 황자의 윗옷을 벗겨냈다.
 곱게 자란 남자답게 살결이 아주 좋았다. 그 살결에 파묻히며 성녀가 뜨겁게 숨결을 내뱉더니 이내 방안에 있던 둘에게 시선을 흘렸다.
 “언제까지 있을 생각이야? 눈치껏 나가야지.”
 헛기침을 연발하며 오버시어가 주교와 함께 방을 나가자 가넷 블러드가 황자를 침대 쪽으로 밀었다.
 침대 위로 엎어진 황자 위로 성녀가 무릎으로 섰다. 그녀는 육감적인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붉은 성복을 하나씩 벗었다.
 매끄러운 살결을 따라 떨어지는 붉은 성복.
 눈을 질끈 감았던 황자가 다시 한 번 그녀를 말렸다.
 “이러면 안 된다고. 이거 걸리면······.”
 “어머, 이미 끝났어. 이 몸을 봤으니 당신 최소 사형이야.”
 가넷 블러드가 침대 위에 놓여 있는 과일 쟁반에서 포도알 하나를 집어 들었다.
 포도알은 그 즉시 그녀 입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입안에 있는 포도알을 굴리며 황자에게 농염한 눈짓을 날렸다.
 “그보다 이거 먹어볼래? 여기선 먹을 게 최고라며.”
 그런 야릇한 안쪽 분위기와는 달리 시어의 질책이 쏟아지는 복도 쪽은 꽤나 시끄러웠다.
 독사의 질책에 정민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답했다.
 “그게······ 과일 한 개랑 빵 두 개 먹었습니다.”
 “이 거지새끼가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걸린다고 그걸 다 처먹어!”
 먹은 걸 지금 와서 뱉어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독사가 독기를 뿜어내며 다시 한 번 일갈하려다 간신히 참아냈다.
 ‘조용히 넘겨야 돼. 여기 이벤트는 끝났으니까.’
 자신은 자비롭지 않더라도 교단은 항상 자비롭게 남아야했다. 그래야 이 이벤트를 다시 진행하여 수감자들에게 끝없는 절망감을 안겨줄 테니까.
 어차피 음식 봉투도 다 회수했겠다, 독사는 이쯤에서 멈추기로 했다.
 “꺼져라.”
 독사가 놓아주자 몇몇은 정민을 부러워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정민처럼 욕을 먹어서라도 입 안에 무언가를 욱여 넣었을 테니까.
 “잠깐.”
 독사가 다시 그들을 붙잡았을 때 정민과 아미르는 식겁했다.
 인벤토리에 담긴 음식들.
 하지만 독사는 다른 걸 물었다.
 “내 애완동물은? 그놈은 어디 있는 거지?”
 그 물음에 수감자 하나가 방 쪽으로 시선을 흘렸다.
 독사의 표정이 알게 모르게 구겨졌다. 제 장난감을 엄한 여자한테 뺏기게 생겼으니까.
 성녀에게 간택 받지 못한 모두는 빈손이 되어 전부 광산으로 돌아갔다.
 단, 두 명만은 예외였다. 정민과 아미르였다.
 정민은 광산 안에 도착한 직후 아무도 모르게 요한과 블락에게 먹을 걸 챙겨주었다.
 갑자기 먹을 게 생기자 다 죽어가는 요한의 눈에 생기가 돌았고, 불곰의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뭐야? 이게 뭔데?”
 정민은 주변 눈치를 보며 조용하게 말했다.
 “몰래 챙겨왔으니까 안 들키게 먹어. 누가 보면 안 되니까.”
 요한과 불곰은 정민이 넘겨준 음식들을 입안에 통째로 욱여 넣었다.
 무언가를 먹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요한과 불곰을 보며 정민은 작은 안도감을 느꼈다. 마치 하루밖에 안 남은 시간이 며칠 더 늘어난 느낌이다.
 ‘운이 좋았어. 역시 운도 따라줘야 돼.’
 구차한 목숨 며칠 더 연명해봐야 의미가 없다는 걸 정민은 모르지 않았다.
 궁극적으로 이곳을 탈출해야 의미가 있으리라. 그 의미를 찾기 위해 정민은 큰마음을 먹었다. 바로 밀고자일지도 모를 고블린 반장과 접촉해 보기로 한 것이다.
 
 -현재 진행 중인 퀘스트를 열람합니다.
 [메인 퀘스트(1)]
 *정보 수집(진행 중)
 -탈출하려면 가장 먼저 구속구를 없애야 한다. 이 구속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황금 고블린이었다는 그린과 접촉해볼 생각이다. 부디 탈이 없기를······.
 -블락으로부터 황금 고블린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어쩌면 고블린 반장이 구속구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블락은 고블린 반장이 밀고자가 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블락의 정보대로 아미르는 마력을 보정 받은 플레이어였다. 대신 근력이 낮아 곡괭이질을 할 수가 없다. 아미르가 성장하기 위해선 우리가 희생을 해야 한다. 정말 힘든 일이지만 탈출을 위해선 아미르에게 투자해 보기로 했다.
 *여긴 어디야?(완료)
 [서브 퀘스트(2)]
 *타락한 성녀
 -가뭄의 단비 같은 이벤트로 요한과 불곰이 생기를 되찾았다. 하지만 이렇게 버티는 건 의미가 없다. 무조건 나가야 한다.
 -성녀에게 간택 받지 못했다. 하지만 나갈 때 먹을 걸 잔뜩 챙길 수 있었으나 독사가 우리 앞을 막아섰다.
 -교단에서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왜 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철광석 채굴(4번 완료)
 
 정민은 퀘스트 내용에 나와 있는 것처럼 반장 녀석과 만나볼 생각을 했다. 그것을 실행하기에 앞서 정민은 팀원들의 의견을 구했다.
 “탈출하려면 이 구속구부터 해결해야 돼. 그래서 저기 고블린한테 물어볼 생각인데, 어때?”
 그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블락이었다.
 블락은 다짜고짜 정민의 손목을 낚아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런 다음 나름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정민에게 경고했다.
 “미친 짓이다. 놈이 밀고하면 우린 다 끝이야.”
 틀린 말이 아니었지만 정민이 반박했다.
 “나도 알아. 하지만 저 녀석 외에 이 구속구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잖아.”
 정민은 요한과 아미르도 쳐다보았다. 지금보다 좋은 생각이나 아는 게 있다면 말해달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둘은 조용했다. 말할 게 없다는 의미다.
 둘에게 의견이 없다는 걸 확인한 정민이 다시 블락에게 말했다.
 “나도 저 고블린이 재수 없어. 하지만 어쩌겠어? 이 구속구를 해결하려면 무조건 물어봐야 돼.”
 “그러다 시어에게 우리 일을 고자질하면? 저놈만큼 시어에게 충성하는 놈이 없는데.”
 “그런 걸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해. 아니면 저 고블린 말고 물어볼 사람이 있기나 해?”
 그 물음에 블락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가 이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한 명을 언급해주었다.
 “하나······ 있긴 해.”
 “그게 누군데?”
 블락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역시나 그는 보이지 않았다. 항상 보이지 않았으니 이상할 것도 없지만.
 “파커다. 놈이 이 수용소에서 가장 오래됐지.”
 “아, 그 언데드?”
 정민은 뒷간 청소를 할 때 만났던 언데드를 떠올려봤다.
 이상한 언데드였다.
 “확실해?”
 “확실한 건 아니야. 하지만 오래 있었으니 비밀도 많이 알겠지. 어쩌면 구속구에 대해 알지도 모른다.”
 “그럼 파커한테 물어볼······.”
 블락이 다시 한 번 정민을 잡아끌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심각했다.
 “그놈도 수상하긴 마찬가지야. 예전에 그 녀석도 한셈 계획을 알고 있었으니까. 전에도 말했지만 그때 누가 밀고자였는지는 아무도 몰라. 밝혀지지 않았으니까.”
 “그래?”
 정민은 선택의 갈림길에 놓였다.
 고블린과 언데드.
 둘 중 하나와 접촉하여 구속구에 대해 무조건 물어봐야만 했다. 그리고 재수 없으면 둘 중 하나는 밀고자일 것이다.
 요한이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정민은 고심하다 입을 열었다.
 “일단 저 고블린 반장부터 구슬려볼게. 내가 가진 무기에 콧구멍이 벌렁거릴 녀석은 저기 저 녀석밖에 없거든?”
 타락한 성녀의 짓궂은 장난으로 운 좋게 챙긴 음식들.
 그것에 반응할 녀석은 뼈밖에 없는 언데드보다 저기 굶주려 흙이라도 파먹으려는 고블린이었다.
 광산에서 돌아온 무리는 축 늘어진 채 제 숙소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그린도 마찬가지였다.
 그린은 숙소로 돌아가며 방에 있을 따뜻한 난로와 굶주린 배를 채울 썩은 빵만 생각했다.
 그래도 자신은 양반이었다. 반장이니 반에 있는 그 누구보다 상태 좋은 빵을 건질 수 있을 테니까.
 그때 그린의 어깨를 툭툭 치는 이가 있었으니, 그는 뒤따라오던 정민이었다.
 “뭔데, 그때 일은 끝난 거 아니었어?”
 퉁명스럽게 쏘아보는 그린에게 정민은 아무도 모르게 사과 하나를 보였다.
 “너, 그거!”
 정민은 손을 뻗어 방정맞은 고블린 입부터 틀어막았다. 그리곤 남은 손으론 자기 입술 위에 검지를 세웠다.
 “쉬~ 조용히.”
 그린은 정민이 숨기는 사과를 보며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린이 조용해지자 정민이 주변 눈치를 보며 말했다.
 “당신한테 몇 가지 물어볼 게 있거든. 황금 고블린이었다면 이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알 거 아냐. 어때 딜?”
 그린의 시선이 정민이 숨긴 사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린이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이자 둘은 막사 3층에 위치한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린이 다짜고짜 사과의 출처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거 어디서 구한 거야?”
 새파란 신참 녀석이 자기는 구경도 못한 사과를 들고 있으니 눈깔이 뒤집어질 수밖에.
 “어디서 구하긴. 아까 선별돼서 끌려간 거 몰라? 거기서 몰래 챙겼다.”
 “그거 걸리면 죽어.”
 “죽긴 왜 죽어. 대놓고 나눠주던데. 중간에 독사가 가로채긴했지만.”
 “뭐 가로채? 흥, 바보 같기는. 그거 다 장난친 거다. 여기 새끼들 그런 장난 엄청 좋아해. 주는 척하면서 다시 뺏는 거 어제오늘 일이 아니야.”
 정민이 손에 쥔 사과를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그 움직임에 맞춰 그린의 시선도 자연스레 따라붙었다.
 정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때, 먹고 싶지?”
 “그걸 말이라고 해? 너무 배고파서 흙이라도 파먹고 싶은 심정인데.”
 “정보만 확실하다면 줄 수도 있어. 물론 통째로.”
 “그걸 다 줘? 너 많이 챙겨왔군. 그거 걸리면 끝장나는 거 몰라?”
 “그래서 알려줄 거야, 말 거야. 내가 원하는 대답은 따로 있는 거 알잖아?”
 그린은 고개부터 끄덕였다. 무엇을 묻든 알려주고 사과를 넙죽 받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뭐가 궁금한데?”
 “황금 고블린이었다고 들었다.”
 “큭큭큭, 누구냐? 그딴 소리 지껄인 게. 설마 블락이냐?”
 “그건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긴. 블락이 가르쳐준 거 어차피 뻔한데. 그래서 뭘 묻고 싶은 건데?”
 이쯤에서 그린은 대충 감을 잡았다.
 죽을 일밖에 없는 이곳에서 황금 고블린이었다는 자신에게 찾아와 무언가를 묻는다?
 그건 뻔했다. 탈출과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다.
 “뻔하잖아. 이거, 이거에 대해 아는 거 있어?”
 정민은 목에 차고 있는 금속 구속구에 대해 물었다.
 그린은 그 즉시 입가를 길게 휘었다.
 “그렇군. 너도 한셈처럼 여길 나갈 생각이냐?”
 “아니야. 그게 아니라 너무 불편해서 그래. 이거 때문에 곡괭이질이 너무 힘들거든.”
 능청스레 변명해 봤으나 씨알도 안 먹히는 일.
 그린은 고개부터 저었다.
 “거짓말하지 마. 죽을 일밖에 없는 이곳에서 그딴 걸 왜 묻겠어? 그거 묻는 놈들은 전부 탈출할 생각으로 묻는 거야.”
 “어찌됐건 불편한 건 사실이거든. 그래서 알려줄 거야, 말 거야?”
 “그보다 이건 어때?”
 그린이 사악한 미소를 드리웠다.
 “나는 시어랑 친해. 지금 네가 먹을 걸 가지고 있다는 걸 당장 가서 고자질할 수도 있지. 그렇게 되면 난 빵 하나를 얻게 될 거야. 물론 너는 가지고 있는 모든 걸 탈탈 털리게 되겠지. 그럼 게임은 끝. 넌 끝이야.”
 “아, 그 곰팡이 핀 빵? 지금 줘도 안 먹는 그 빵을 말하는 건 아니지?”
 정민이 비아냥거리자 그린은 살포시 표정을 구겼다.
 정민은 입을 멈추지 않았다.
 “그딴 쓰레기 주워 먹으려고 시어에게 고자질하겠다면 말리진 않겠다. 하지만 말이야. 나한테 협조하면 그딴 쓰레기보다 이 사과가 생기게 되지. 그것도 교단의 자비로 받게 된 아주 싱싱한 사과가 말이야.”
 그린은 대꾸도 없이 침만 삼켰고, 정민은 그런 고블린의 관자놀이를 집게손가락으로 쿡쿡 눌러주었다.
 “이봐. 보기보다 멍청한 거 같지도 않은데 왜 이리 머리를 굴려. 서로 좋게 가자고. 여기 와서 이 사과 맛 본 적 있어? 잘 봐. 여길 이렇게 콱 깨물면 과즙이 그냥.”
 정민이 사과를 베어 먹으려는 시늉을 하자 놀란 그린이 폴짝 뛰며 사과를 낚아채려 했다.
 하지만 실패.
 사과는 여전히 정민의 손에 있었다.
 “안 되지. 머릿속에 든 걸 곱게 말하기 전까진 그렇게 구경만 할 거다.”
 결국 그린이 포기했다.
 “좋아. 다 말해주마. 네가 원하는 거 다 말해줄게.”
 그린의 입이 열리자 가장 반가워한 것은 정민이었다.
 “굳. 역시 말이 통하는 친구였어.”
 “일단 사과부터 내놔. 그 다음에 말해주지.”
 “안 돼. 정보가 먼저야.”
 “네놈을 어떻게 믿고? 나한테 정보를 얻은 다음에 그 사과를 안 줄 수도 있잖아.”
 “이봐. 믿음을 가지라고 고블린 친구.”
 “개소리 집어치워. 내가 이 시궁창에서 단맛 쓴맛 똥맛까지 다 맛본 놈이야. 그거 내놓기 전까진 이 주둥아리에서 뭔가 튀어나올 거라고 절대 기대하지 마.”
 독한 마음을 먹고 버티는 걸 보니, 정민도 한 발자국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절충점을 제시할 수밖에.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여기서 반을 주마. 나머지 반은 듣고 나서 준다. 오케이?”
 먼저 반을 준다는 소리에 그린도 마지못해 수긍했다.
 “좋아. 그렇게 해.”
 정민은 다짜고짜 그린의 멱살을 쥐고 자기 앞까지 끌어당겼다. 그리곤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살기 어린 시선으로 그린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시어만 네 명줄을 쥐고 있다고 착각하지 마. 여기서 조그마한 거짓말이라도 나불거렸다간, 그땐 내 손으로 네놈 모가지를 꺾어버릴 테니까.”
 그 말에 그린은 콧방귀부터 뀌었다.
 “아니, 절대 거짓말 안 해.”
 정민이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그린은 씩 웃어 보였다.
 “나도 따라갈 생각이거든.”
 “뭐? 지금 뭘 따라간다고?”
 “다 들었잖아. 따라간다고. 설마 이 시궁창에서 나가고 싶은 게 당신뿐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언제 나간다고 했어. 나는 단지······.”
 “그만. 내가 병신으로 보여? 뻔한 거 왜 자꾸 둘러대고 그래. 재미없게.”
 정민이 시선을 내리자 앙상한 몸뚱이를 가진 그린이 보였다. 그린은 방에서 대장노릇을 하고 있었지만, 오래 버틴 만큼 그 몸은 보기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당장 내일모레는 아니었지만 언젠간 굶어죽을 것은 자명한 일.
 그린이 정민을 응시하며 재차 강조하듯 제 뜻을 알렸다.
 “무조건 따라갈 생각이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안 돼.”
 정민은 단칼에 잘라냈다.
 블락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있었다. 밀고자 이야기.
 “이미 꽉 찼다. 네가 낄 자리는 없어.”
 늑대 같은 인간과 곰, 엘프까지 있었다.
 자신까지 합하면 총 넷.
 여기서 고블린이 끼어들게 되면 다섯이다.
 정민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으며 부정의 뜻을 내비쳤다.
 “다시 한 번 말하겠는데 안······.”
 그린이 두 눈을 부라리며 그의 말을 중도에 잘라냈다.
 “그럼 아무것도 알려줄 수 없지.”
 “사과.”
 “그딴 사과 먹어봤자 하루나 이틀 더 버티겠지. 그래서 뭐가 남겠어?”
 그린은 꽤 진지했다.
 “없어. 이 시궁창에서 나가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거라고, 친구.”
 자신이 생각하던 그대로를 그린이 말하니, 정민은 어이가 없었다. 순간 헛웃음까지 나오려 했다.
 그린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정민을 재차 위협하기 시작했다.
 “나를 데려갈 생각이 없다면 당신이 지금 계획하는 거, 지금부터 동네방네 다 떠들고 다닐 생각인데, 어때?”
 “이거 미친놈인가? 내가 그렇게 놔둘 거 같아?”
 “여기서 소란을 피우면 어떻게 될 거 같아? 잘 생각해보라고. 시어들이 병신으로 보여?”
 시어 하나만 믿고 그린은 세게 나갔다.
 “다시 한 번 경고하는데, 여기선 시어가 이거야.”
 그린은 엄지를 세웠다.
 “그 시어에게 찍히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너도 블락이랑 붙어먹었으니 한셈이란 오크 새끼가 어떻게 갔는지 잘 알 거 아니야?”
 정민은 좋게 타일러 보기로 했다.
 “당신까지 데려가기엔 이쪽 사람이 너무 많아. 당신도 알잖아? 비밀을 공유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유지가 힘든 거. 입이 네 개에서 다섯 개로 늘어나는데 내가 그걸 가만히 놔둘 거 같아?”
 “그래서 구속구 정보는 어떻게 얻을 생각인데? 수용소 밖 결계는? 모르겠지? 그거 아무도 모를 거야. 여기서 오직 나만 알고 있거든. 물론 시어는 잘 알고 있겠지. 그럼 시어에게 물어보던가. 독사가 잘 가르쳐줄 거다.”
 구속구와 결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고블린.
 그다지 반가운 녀석은 아니었지만 그냥 내칠 수도 없었다.
 협박하는 고블린과 팔짱을 끼고 버티는 남자.
 둘 사이에 소리 없는 냉전이 시작됐다.
 하지만 이 자리서 아쉬운 건 비단 정민만이 아니었다. 무조건 나가고 싶어 하는 고블린도 철저한 을이었던 것이다.
 냉전을 제 손으로 종식시킨 그린은 하소연하듯 정민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봐. 나를 봐. 이 몸뚱이로 얼마나 버티겠어? 한 달? 두 달? 노노, 아니야. 나도 이 시궁창에 너무 오래 있었어.”
 그린은 삐쩍 마른 몸을 정민에게 들이밀며 정에 호소하기 시작했다.
 “나도 시간이 얼마 없다고. 여기서 무조건 나가야 돼. 그러니까 이렇게 부탁할게. 나도 데려가줘.”
 “그냥 사과만 받고 정보만 뱉어. 네가 할 일은 그거뿐이야.”
 “당신도 알잖아? 사과 받아봤자 아무 의미 없다는 거. 이 시궁창에서 며칠 더 살아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니까?”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 시궁창에 며칠 더 버텨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어떻게 하지. 쉽게 안 떨어질 거 같은데······.’
 결국 그린이 쥐고 있는 구속구 정보는 꼭 필요했다.
 “하지만 네가 고자질하면? 그땐 다 끝장인데 내가 반길 거 같아?”
 그린은 사정하듯 정민에게 매달렸다.
 “내가 미쳤어! 그걸 ×발 고자질하게! 나도 여기서 나가고 싶어 하는 놈이야. 그걸 왜 일러바치겠어? 대가리에 화살 맞은 것도 아니고 절대 아니야. 절대 아니라고!”
 그린이 사정사정하자 정민은 한셈이란 오크가 왜 무너졌는지 알게 됐다.
 모르긴 해도 수감자가 지금 그린처럼 매달리면 답이 없었다. 왜냐면 지금 그린이 하는 말은 거짓이 없기 때문이다.
 이 지옥에서 과연 나가길 거부할 수감자가 있을까? 시어에게 고자질하여 썩은 빵 하나 얻는 것보단 여기서 도망치는 게 백 배 천 배는 더 가치 있는 일인데.
 “너희 중에 밀고자가 있다고 들었어. 블락은 너를 지목했고.”
 “잘 들어. 그 일은 나도 잘 알아. 내가 시어랑 친하다는 것도 물론 알고 있지. 하지만 말이야, 그때 그 계획을 시어에게 일러바친 건 내가 아니었다고! 그걸 내가 왜 일러바치는데! 나도 나가고 싶어 지랄 발광하는 놈인데, 나는 절대 아니라고!”
 “증명할 수 있어?”
 “그걸 어떻게 증명해! 아니면 내가 시어한테 가서 그때 일 내가 밀고했냐고 물어봐줄까, 응? 증명할 수 없다고.”
 거짓말 탐지기도 없는 이상 정민은 그린이 거짓말을 하는지 안 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정민이 갈등하자 그린은 다른 말을 꺼냈다.
 “잘 들어. 그때 일은 나도 잘 알아. 그래서 내린 결론이 있어.”
 “결론? 무슨 결론. 너희들 중에 밀고자가 있다 뭐 그런 결론?”
 “그게 아니야.”
 그린은 수용소에 있는 그 누구보다 왜소한 체격을 가졌지만 잘 굴러가는 머리와 말빨 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여기 수감자 중에 나가기 싫어하는 놈은 단연코 없어. 이건 당신도 잘 알 거 아니야.”
 “맞아. 틀린 말 아니지.”
 “물론 머리가 멍청하거나 정신질환을 가진 녀석이라면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말이야. 이 수용소에 들어온 놈치고 그런 병신 같은 놈은 단 한 명도 없어. 이건 내가 장담해. 왜냐면 여긴 대륙 최악의 수용소고, 신에게 욕보인 가장 죄스러운 플레이어들이 총집결하는 장소니까. 그러니까 정상적으로 사고 못할 병신은 없다고.”
 그린의 입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그런데 내부에 밀고자가 있었어. 그 일은 나도 잘 알아. 우리들 중에 누군가 시어에게 일러바쳤고, 한셈은 독사의 장난감이 되어 비참하게 죽었지. 하지만 말이야. 그때 내가 내린 결론이 있어. 수감자 중에 이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 녀석은 단 한 명도 없다고.”
 “요점이 뭐야? 길게 끌지 말고 요점만 말해.”
 그린의 표정이 전에 없이 진지해졌다.
 “수감자 중에 시어가 있는 거야. 그게 아니면 우리 중에 수감자가 아닌 녀석이 끼어 있는 거지.”
 “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정민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수감자 중에 시어가 있다니?”
 “잘 들어. 그 당시 다들 나처럼 나가고 싶어 했어. 계획도 무척 순조로웠고. 그런데 갑자기 어떤 놈이 찬물을 끼얹은 거야. 탈출 계획을 시어한테 그대로 까발렸으니까. 그때가 막바지 단계였거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할 수가 없는 거야. 당신 말대로 그딴 썩은 빵 하나 얻자고 일을 그르치는 건 도저히 말이 안 되거든.”
 “그래서?”
 “날 봐. 내가 병신으로 보여? 난 병신이 아니야. 그딴 곰팡이 핀 빵보다 저기 바깥 공기를 그 누구보다도 갈망하고 있다고.”
 “그 말, 또 누구한테 했어?”
 “아무한테도 안 했어. 이걸 또 누구한테 말하겠어? 그냥 나 혼자 생각하고 덮어둔 거지.”
 정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린이 한 말은 허무맹랑했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가능성이 있었다.
 ‘내부에 시어가 있다? 확실한 정보는 아니지만······ 그냥 무시할 것도 아니야. 오히려 일리가 있어.’
 그린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래,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고 그 생각은 지금도 유효해. 그리고 잠잘 때마다 그때 일을 떠올리며 우리 중에 누가 일러바쳤을지 계속 생각해봤지. 그래서 나온 결론이야. 수감자 중에 정체를 숨긴 시어가 있어.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돼. 다들 배고파 뒤지겠는데 다 된 밥상에 재를 뿌리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거든? 만약 뿌렸다면 배때지가 부른 놈만 가능하겠지. 그리고 그런 녀석은 내가 볼 땐 시어뿐이야.”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 수용소는 애당초 나가는 게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졌다.
 ‘괜히 갓 아너가 아닌 거야. 보이지 않는 시어까지 있다면 탈출은 더 힘들어지겠군.’
 그럼에도 정민은 나갈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그럼 녀석을 솎아내야겠군.”
 “솎아내는 건 불가능해. 왜냐면 여기서 당신이 알아야 할 마법이 있어. 체인지 마법이라는 거지.”
 “그게 뭔데?”
 “그 마법을 쓰게 되면 체형이나 얼굴을 변형시킬 수 있어. 만약 그 시어가 있다면 언제든 모습을 바꿔서 우리와 함께하고 있을 거야.”
 “그러면 너무 난해하잖아?”
 “그래서 한셈이 ×된 거지. 그놈은 너무 여기저기 손을 많이 벌렸어. 바보 같은 새끼가 자기 밥그릇만 챙겨야지, 남의 것까지 다 챙기려다 그 꼴이 난 거니까.”
 “한셈 얘기는 그쯤 해. 어차피 도움도 안 되니까. 그건 그렇고 구속구는?”
 “사과.”
 “이봐, 같은 배를 타기로 했으면 사과는 없던 이야기 아니야?”
 “배고파. 너무 배고파서 주둥아리가 안 벌려져.”
 정민은 들고 있던 사과를 둘로 쪼개 반쪽을 먼저 주었다.
 그 사과를 맛있게 냠냠한 그린이 전보다 더 행복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구속구, 그래 사실 이 구속구만 없으면 여기 플레이어들은 자력으로 탈출이 가능해. 내가 알기론 여긴 엄청난 거물들만 모이는 곳이거든.”
 “그래서 어떻게 하면 풀 수 있는데?”
 “푸는 건 애당초 불가능해.”
 “뭐?”
 정민이 다짜고짜 그린의 멱살을 잡고 자기 앞까지 끌어당겼다.
 “지금 그딴 소리 들으려고 사과를 먹인 줄 알아. 지금부터 네놈 뱃속에 든 사과를 끄집어내주지. 꽤 고통스러울 거다.”
 “워워. 이지이지. 진정하라고 친구.”
 그린은 정민을 두 손으로 밀어내며 거리를 벌렸다.
 “이게 그렇게 쉽게 풀릴 거면 이 수용소는 예전에 개박살 났어. 그게 불가능하니까 천하에 날고 기는 녀석들이 전부 모여서 병신처럼 갇혀 있는 거 아니야.”
 “그래서 뭐? 구속구는 풀 수 없으니까 포기하라 이 말이냐?”
 “그건 아니야. 풀 순 없지만 잠시, 아주 잠시 동안 이 구속구를 바보로 만들 순 있지.”
 “바보?”
 “이 구속구가 가진 특성을 이용해 잠시 바보로 만드는 게 가능하단 소리야. 그리고 그 방법은 오직 나만 알고 있지.”
 “그 방법이 뭔데?”
 “사과.”
 “안 돼. 일단 듣고 나서 준다.”
 “사과.”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줄다리기가 진행됐다.
 승자는 정민이었다.
 “그래 좋아. 일단 이야기부터 하고 사과를 받도록 하지. 어차피 할 이야기가 그걸로 끝이 아니거든.”
 그린이 짓는 미소는 나름 의미심장했다.
 “이 빌어먹을 개목걸이 말이야. 공허석(空虛石) 안에 아다만티움이라 불리는 금속으로 뼈대를 박아놓은 거야.”
 “아다만티움?”
 정민도 들어본 적이 있는 금속이었다.
 전 세계에 영문을 알 수 없는 게이트가 생기고 대레이드 시대가 열렸을 때, 헌터들은 비단 몬스터뿐만 아니라 게이트 안쪽 세상에서 지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여러 금속들을 발견하게 됐다.
 그중 아다만티움이라 불리는 금속이 있었는데, 이 금속은 너무 단단하고 반응성이 없어 현대 과학 기술로는 다룰 수가 없었다.
 재련이 불가능한 절대 금속.
 아다만티움.
 “지금 이 구속구 안에 그 아다만티움이 박혀 있다고? 용광로에도 안 녹여지는 그 괴물 같은 금속을 말하는 건 아니지?”
 “그거 녹일 수 있어.”
 “녹일 수 있다고? 어떻게?”
 “이건 나름 고급 정보인데······ 뭐 말해줘도 상관없겠지. 일반 용광로에선 절대 안 녹아. 말도 안 되게 단단한데다 원소에 대한 내성이 엄청나거든. 그니까 불로는 못 녹인다는 소리지.”
 “그래서?”
 “하지만 마나 용광로엔 녹아.”
 “마나 용광로? 그게 뭐야?”
 “그런 게 있어. 아무튼 마나 용광로에 네 모가지랑 손모가지 넣을 생각이 없다면 열쇠가 필요해. 하지만 열쇠는 여기에 없지.”
 “그럼 어디에 있는데?”
 “나도 몰라. 하지만 주워 듣기론 저기 하늘에 있다고 들었다.”
 “뭐, 하늘?”
 그린이 천장을 가리키자 정민은 묘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나랑 장난치는 거 아니지? 열쇠가 하늘에 있다고?”
 “내가 장난을 왜 쳐. 재미도 없는데.”
 그린이 틀어진 대화 주제를 다시 원위치 시켰다.
 “아무튼 구속구의 강도는 아다만티움에서 나오고, 힘을 제한하는 건 여기 금속처럼 생긴 공허석이 담당하고 있지.”
 “공허석? 그게 뭔데.”
 “마나를 무한정 흡수하는 정체불명의 돌덩이야. 정확한 정체는 나도 몰라. 아무튼 그 공허석이 마나를 다 빨아들여서 콩그레이츄레이션! 우린 다 병신이 되는 거야.”
 “공허석이 마나를 빨아들이고 있다고?”
 “공허석 앞에선 아무리 강대한 마법이라도 힘을 못 써. 왜냐면 마나를 다 빨아먹으니까.”
 “그럼 뭐야? 뭘 어떻게 하면 이걸 바보로 만들 수 있다는 건데?”
 그린이 검지를 세웠다.
 “공허석이 가지는 특징이 있지. 공허석엔 마나 흡수율이란 게 있는데, 이 마나 흡수율이 생각보다 천천히 변한다는 거야.”
 “그 말은 마나 흡수량이 급격히 변하지 않는다?”
 “그렇지. 그래서 일정량 이상의 마나가 갑자기 생기게 되면 공허석이 다 빨아들이지 못 하고 남게 돼.”
 정민이 두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냈다.
 “그럼 공허석이 흡수하지 못하는 마나로 마법을 쓸 수 있다?”
 “그렇지! 이 구속구도 따지고 보면 만능이 아니라고.”
 구속구에 그런 약점이 있을 줄이야.
 흥분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던 정민이 다시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주변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일정량 이상의 마나를 확보할 수 있지?”
 “거기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 가장 일반적인 건 플레이어가 가진 특징을 이용하는 거야. 스탯을 투자하지 않고 모아뒀다가 필요할 때마다 마력 스탯을 올리는 거지.”
 “이유는?”
 “마력 스탯이 올라갈 때마다 체내 마나 생성량이 전보다 높아지게 돼. 이렇게 되면 공허석이 당장 흡수하지 못하는 마나가 체내에 남게 되지. 그 마나로 마법을 쓰는 거야.”
 “아, 그런 게 있었군.”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야. 이건 예전에 한셈하고 이야기가 다 됐던 거니까.”
 이미 있었던 이야기란다.
 “이미 했던 이야기라고?”
 “그럼 우리가 그때 아무것도 안 하고 손가락만 빤 줄 알았어? 아니야 절대 아니야. 지금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못하지 않았어.”
 “그러면 블락은 왜 몰라? 구속구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던데?”
 “그야 한셈이랑 나만 그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블락은 모르는 거지.”
 “다른 사람한테 안 알려준 거야?”
 이번엔 그린이 정민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그의 눈빛은 전에 없이 진지했다.
 “아까 네 입으로 말했잖아. 입이 많아지면 비밀 유지가 힘들다고. 그 당시 내가 한셈에게 내건 조건이 있어. 내가 준 특이 정보는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 것. 설령 시어에게 걸려도 발설하지 말라고 했어.”
 “그럼 구속구에 대해선 블락도 모르고, 아무도 모른다는 소리냐?”
 “모르지. 한셈은 내 말을 잘 들었거든. 오크답게 멍청하니까.”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비밀 유지를 위해선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인원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기 때문이다.
 아무리 믿음직스런 동료라 할지라도 때론 모르는 게 약이 되는 법.
 정민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대충 알겠군.”
 “너도 마찬가지야. 지금부터 내가 말한 정보는 오직 너만 알고 있어야 돼. 그리고 절대 시어에게 걸려도 입 하나 뻥긋하지 마. 이건 나중에 있을 탈출을 위해서라도 네가 꼭 지켜 줘야 하는 거야.”
 “내가 나 말고 다른 사람 일에 관심이라도 있을 거 같아?”
 “어차피 계획이 발각된 순간 넌 죽게 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을 거라면, 남에게 폐는 안 끼쳐야지. 안 그래?”
 “흥.”
 “그걸 못 지킨다면 나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겠어.”
 “알았어, 알았어. 그 일은 걱정 마. 내 입은 보기보다 무거우니까.”
 그러다 정민은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이 녀석은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다. 전에 탈출을 주도했던 한셈보다도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탈출을 주도했던 건 이 고블린이 아니라 한셈이란 오크였다.
 “아는 게 꽤 많은 거 같은데······ 그 당시 왜 네가 안 나서고 한셈이 주도한 거지? 내가 볼 땐 한셈보다 네가 더 나았을 거 같은데?”
 틀린 말은 없었다.
 하지만 여기엔 영악한 자의 이유가 있었다.
 “한셈은 총대를 멘 거야. 그리고 본보기로 처형당했지. 이봐, 난 머저리가 아니라고. 내가 미쳤다고 총대 메고 탈출 계획을 주도하겠어? 아니야. 난 절대 그런 미련한 짓은 하지 않아. 그리고 이건 이번에도 마찬가지고.”
 “아, 총대는 내가 메고 너는 뒤에서 졸졸 따라만 오겠다?”
 “그렇지. 그래야 내가 아낌없이 퍼줄 수 있거든. 왜냐면 난 안전하니까.”
 “이거 웃긴 놈일세.”
 그린이 아까 구속구 이야기로 다시 화제를 돌렸다.
 “아까 하던 이야기부터 끝내자고. 일정량 이상의 마나를 확보하는 건 그것 말고도 또 있어.”
 “나도 하나 알아.”
 “뭔데?”
 “마나 포션.”
 “잘 알고 있군. 맞아. 사실 스탯을 모아뒀다 올리는 것보다 마나 포션을 빠는 게 가장 효과적이지. 마나 포션은 체내의 마나 생성량을 급격하게 올려주거든.”
 “구속구도 확실히 만능은 아니군. 마나 포션에 착용자의 마법을 허용하는 거 보면.”
 “확실히 만능은 아니지. 하지만 그게 있는 한 마나를 모아둘 순 없어. 정상적인 마법 활동이 불가능하지.”
 “신체 능력도 봉쇄되는 거고.”
 “초인 같은 신체 능력도 따지고 보면 다 체내에 있는 마나를 활용하는 거야. 그 마나가 봉쇄되니 신체 능력도 범인보다 못한 수준으로 떨어지는 거고.”
 “그럼 다음 이야기. 결계에 대해 말해봐.”
 순순히 협조하던 그린이 갑작스레 태도를 바꾼 것은 이쯤이었다. 그린은 정민에게 남은 반쪽 사과도 요구했다.
 정민이 약속대로 사과 반쪽을 넘겨주자 그린은 일단 배부터 채우고 봤다.
 사과를 다 먹은 그린에게 정민은 아까 하던 질문을 재차 반복해주었다.
 “자, 다 먹었으니 이제 결계 이야기를 해주실까? 이것도 많이 궁금하거든.”
 “노노. 사과 하나로 해줄 말은 그거뿐이야.”
 “뭐? 이봐, 따라오기 싫어?”
 정민이 으르렁거리자 그린은 콧방귀부터 뀌었다.
 구속구뿐만 아니라 결계 정보를 가지고 있는 자신이 철저하게 갑이란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린은 있는 그대로 영악한 고블린이었다.
 “그렇게 협박 식으로 나오면 재미없을 줄 알아. 그때 한셈은 나한테 결계 이야기를 듣기 위해 매일같이 찾아와 절까지 했어. 툭 까놓고 말해서, 넌 그런 것도 없잖아?”
 “없지. 대신 이게 있지.”
 정민의 손엔 어느 샌가 다른 사과가 쥐어져 있었다.
 그린이 침을 삼켰다.
 “그래, 그렇지. 그게 또 있을 줄 알았어.”
 “네가 그딴 식으로 나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이쪽도 좀 더티하게 갈 거다.”
 “이봐, 이지이지. 캄 다운. 진정하라고 친구. 우린 친구잖아?”
 “친구? 하하, 누구 보고 친구래?”
 “하하, 이 친구 보소. 섭섭하게.”
 그린이 주변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결계는 사실 별거 없어. 3중 결계고, 가장 안쪽부터 감지 결계, 빙결 결계, 마지막으로 트리거 결계가 있지. 감지 결계는 말 그대로 결계 밖으로 나가려는 자를 감지해서 시어에게 알리는 거고, 빙결 결계는 결계 위를 지나치는 모든 것들을 빙결시키지. 마지막으로 트리거는······.”
 그린의 시선이 정민이 쥐고 있던 사과에 고정됐다.
 정민은 내키지 않아 하다가 마지못해 손에 쥔 사과를 그린에게 던져주었다.
 사과를 받아 인벤토리에 챙긴 그린은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해주었다.
 “구속구마다 해당 플레이어와 관련된 부비트랩 마법들이 걸려 있어. 마지막 결계는 그 마법을 발동시키는 일종의 트리거 같은 거야. 예를 들어 언데드라 치면 마지막 결계를 넘어설 때 구속구에 걸려 있는 턴 언데드 마법이 발동되는 거지. 그럼 그 언데드는.”
 그린은 제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꽥. 영문도 모른 채 비명횡사하는 거지.”
 “그 얘기는······ 예전에 들었어.”
 “들었다고? 그걸 누가 해줬는데? 아는 놈이 없을 텐데.”
 “파커. 2층에 있는 언데드다.”
 “아, 그 녀석?”
 그린은 무언가 내키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옆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정민을 쳐다보았다.
 “아무튼 내가 결계에 대해 해줄 말도 그거뿐이야. 나머진 네 몫이고.”
 “결계가 있는 위치는 알고 있어?”
 “그걸 알면 내가 시어지 여기 수감자겠어? 물어볼 걸 물어봐. 그것도 던전 정보 다 팔아가면서 필립한테 가까스로 얻어낸 건데. 그때 내가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알아?”
 “쓸모없기는.”
 “뭐?”
 “아니야. 말이 헛나왔거든.”
 구속구에, 결계 이야기까지 필요한 이야기는 다 들었다.
 이쯤 되자 정민은 그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결계 문제만 해결하면 탈출은 다 끝난 이야기지. 저놈하고 붙어먹을 이유가 없어.’
 매몰차게 뒤돌아서는 정민을 그린이 다시 불러세웠다.
 “아, 마지막으로 네가 알아야 할 게 있는데.”
 정민이 딱 멈춰 섰다.
 또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걸까.
 그린은 뒤돌아보지도 않는 정민을 향해 말했다.
 “그 당시 한셈이랑 나랑 구속구 문제랑 결계 문제까지 다 해결했었지. 하지만 말이야. 마지막으로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딱 하나 있었어. 사실 그거 때문에 한셈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다가 독사에게 덜미가 잡힌 거고, 그 다음 모든 계획이 전부 물거품이 됐으니까.”
 “그게 뭔데?”
 정민이 뒤돌아서며 먹음직스런 빵을 꺼내 보이자, 그린은 꽉 찬 배를 두들기며 씩 웃어 보였다.
 “그게 말이야. 배가 불러서 입이 안 벌어지네?”
 “이거 줄게. 이거면 되는 거 아냐?”
 “방금 배부르다고 말했잖아. 어차피 시간이야 많으니까, 결계 문제부터 해결해 보라고. 내가 볼 땐 그게 순서인 거 같으니까.”
 “그냥 알려주면 안 돼? 어차피 결계 문제를 해결하다가 같이 알 수도 있는 거 아냐?”
 “맞아.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말이야. 이건 내가 널 테스트해보는 거야. 네가 결계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하면 사실 다음 문제를 알려주는 것보단 너를 시어에게 넘겨서 썩은 빵이라도 받는 게 나아. 왜냐면 마지막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결국 3중 결계를 뚫고 나가도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거든.”
 정민은 그린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이내 무언가를 떠올리게 됐다.
 ‘설마 그건 아니겠지.’
 5장 밀고자
 
 
 시간이 흘러도 플레이어가 적응할 수 없는 게 몇 가지 있었다. 그중 하나가 살을 파고드는 추위다.
 침대 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은 정민은 몸을 덜덜 떨며 그린에게 들었던 결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 결계를 뚫고 가려면 일단 결계를 무력화시켜야겠지.’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정민이 가진 지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거였다.
 ‘나는 헌터지 소설 속 마법사가 아니니까.’
 레이드를 뛰는 헌터가 마나를 다루는 건 맞았다.
 하지만 소설 속 마법사처럼 다양한 술식과 술법 등을 전문적으로 구사하진 않았다.
 대레이드 시대가 열리고 헌터란 게 등장한 것도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의 일.
 헌터들은 원시적인 형태로 마나를 활용해서 자기 신체를 강화시키거나 원소 능력을 끌어내는 게 전부였다.
 ‘따지고 보면 마법이란 게 없었지. 그냥 제멋대로 사용했으니까. 하지만 여긴 아니야. 여긴 결계 같은 것도 있고, 그걸 풀 마법도 있을 거야.’
 정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요한과 아미르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아까 대화를 나눴었던 그린을 쳐다보았다.
 이때 그린도 알게 모르게 정민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 그런 말을 했었지.’
 그린은 수감자 중에 시어가 있을 가능성에 대해 말해줬었다.
 그게 생각나자 정민은 요한과 아미르 중 요한이 시어일 가능성부터 짚어보기로 했다.
 ‘아니야. 요한은 아닐 거야. 처음부터 정체를 감춘 시어였다면 너무 피곤한 연기를 했어.’
 정민은 시어의 입장에서 생각해봤다. 그리고 그 시어의 입장에서 봤을 때, 다 죽어가는 수감자를 위해 그렇게까지 피곤한 연기를 할 이유가 없었다.
 ‘나중에 시어가 죽은 요한의 탈을 쓴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 다음으로 살펴볼 건 아미르였다.
 정민은 요한과 마찬가지로 아미르 역시 시어일 가능성은 아주 낮다고 생각했다.
 ‘그때 본 눈을 아직도 기억해. 그때 봤던 건 분명히 죽은 눈이었어.’
 정민은 다 죽어가는 아미르에게서 보았던 그 눈빛을 잊지 않았다. 그 눈빛은 의심할 것도 없이 죽은 눈빛이었다. 만약 시어였다면 결코 그런 눈빛은 짓지 못했으리라.
 ‘시어는 여기서 느끼는 절망감에 대해 전혀 모르거든.’
 오직 모든 걸 체념하고 절망했을 때 지을 수 있는 눈빛이 바로 정민이 보았던 아미르의 눈빛이었다.
 ‘그래서 둘 다 시어일 확률은 거의 제로야. 그냥 믿어도 돼.’
 생각을 마친 정민은 요한과 아미르 앞에 섰다.
 이때 요한과 아미르는 아까 정민이 그랬던 것처럼 침대 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있었다.
 정민이 찾아오자 요한이 주변 눈치를 보다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 일은 어떻게 됐어?”
 요한은 정민과 만난 후로 놀라보게 달라졌다. 탈출에 대해 그 태도가 더 적극적으로 변한 것이다.
 “결계에 대해 알아내긴 했어. 3중 결계고 감지, 빙결, 트리거 결계라고 들었거든.”
 그린은 자신과 한 이야기는 남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정민은 신경 쓰지 않았다. 필요할 땐 해야 했으니까.
 “그런데 이걸 어떻게 뚫어야 할지 모르겠어.”
 “뚫는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지. 하지만 어떤 경우든 마법이 필요해. 그리고 그 마법을 활용하려면 이게 없어야지.”
 요한은 자연스레 자기 구속구를 가리켰다.
 정민이 다시 물었다.
 “결계를 풀려면 무슨 마법이 필요한데?”
 그 물음은 같이 있던 아미르가 대신 대답해주었다.
 “그건 디스펠 마법만 있으면 됩니다.”
 아미르는 그들과 어느 정도 친해지자 이상하게도 존댓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게 이상하긴 했지만 모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디스펠 마법?”
 “그 마법만 있으면 결계를 포함해서 어떤 마법이든 무력화시킬 수 있죠.”
 산 넘어 산.
 하나를 해결하면 또 다른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 마법은 또 어떻게 구하지······.”
 “제가 알고 있어요.”
 이미 알고 있다는 말에 정민은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요한은 반대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힘을 잃었을 뿐이지 머릿속 지식까지 다 잃은 건 아니니까. 엘프가 마법에 특화된 건 모두가 아는 상식이야.”
 요한이 설명해주자 정민은 그제야 수긍할 수 있었다.
 “그럼 문제는 이 구속구라는 거네?”
 “네,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아미르 역시 전과 비교해서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의 눈엔 생기가 가득했고, 병자처럼 골골거리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구속구 문제는 걱정하지 마. 잠시 동안 바보로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까.”
 요한과 아미르는 일제히 물음표를 띄웠다.
 정민은 그 방법에 대해 말하기 전 복도 위를 지나치는 시어가 있는지부터 살폈다.
 복도 쪽은 조용했다.
 “마나 포션만 있으면 돼. 아니면 마력 스탯을 모았다가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투자해도 되고. 그럼 체내 마나 생성량이 달라져서 구속구가 있어도 마법을 쓸 수 있거든.”
 “그런 게 가능하다고?”
 “진짠지 아닌지 시험해 보고 싶지만, 일단 그렇다고 하더라고.”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그린은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표정들을 보아 하니 내가 알려준 걸 다 까발리고 있는 모양이군. 내가 시어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분명히 경고했는데 무슨 자신감으로 저리 떠벌리는 거지?’
 불만이야 있었지만 어쩌겠는가?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아니면 저 두 놈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하긴 내가 시어라도 벌써부터 작업치진 않았을 거야. 그렇게 철두철미한 놈들이었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눈에 불을 켜고 우리를 감시하고 있을 테니까.’
 그린이 나름 조용한 방안을 말없이 훑어보았다.
 열 명도 안 되는 인원이 있었고, 전부 초췌한 몰골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부터 슬슬 작업치겠지. 우선 저놈부터.’
 그린이 주시하고 있는 건 정민이었다.
 이때 정민은 그린이 말했던 숨은 시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들 중에 시어가 있다고?”
 요한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수감자들과 섞인 시어가 있다니.
 “그럴 리가······.”
 “생각해보니까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아. 오히려 여기 난이도를 생각해보면 그게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어. 그게 맞으니까.”
 “흠······.”
 요한이 여러 생각들을 하며 긴 침음성이 흘렸을 때, 아미르가 걱정을 내비쳤다.
 “그럼 어떻게 하죠? 시어가 이들 중에 숨어 있다면 저흰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요.”
 “맞아. 수감자 중에 시어가 숨어 있다고 치면 우린 아무것도 못해. 당장 뭘 해도 걸릴 테니까. 하지만 내가 볼 땐 여기에 시어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아.”
 정민이 생각한 바는 그린이 생각하던 것과 똑같았다.
 “그렇게 철두철미했으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감시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아니잖아. 한 놈은 코빼기도 안 보이는 독서광이고, 다른 녀석은 변태새낀지 지 애완동물만 찾기 바쁘니까.”
 정민이 언급한 두 명은 시어 필립과 시어 게넨바인이었다.
 요한은 제 콧등을 긁적이며 대꾸했다.
 “그야 여기서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니까. 그러니까 감시도 소홀할 수밖에.”
 “내가 볼 땐 말이야. 여기 시어들이 보기엔 느슨해 보여도, 감시를 게을리 하진 않을 거야. 왜냐면 여기서 단 한 명이라도 나가게 되면 그땐 끝이거든.”
 플레이어를 가두고 감시하는 이유.
 그건 그들이 가진 잠재력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정민은 플레이어란 개념을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기에 플레이어가 아닌 자들이 갖는 공포와 두려움을 모르지 않았다.
 “여기 와서 계속 생각해봤지만 우리를 가둬두는 이유는 단 하나야. 우리가 성장하는 게 두려운 거지.”
 머리가 나빠도 마력 스탯을 찍고 조건만 충족시키면 어느 날 8클래스 마법사가 되는 게 바로 플레이어란 존재였다. 그러니 두려워하고 경계할 수밖에.
 “아무튼 정체를 숨긴 시어가 존재할 가능성이 커. 오히려 없다는 게 이상해. 내가 볼 땐 있어.”
 “그럼 어떻게 하지? 만약 그런 자가 감시하고 있다면 우린 정말 아무것도 못 해.”
 “맞아.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정민은 그린과 대화한 이후로 계속 생각하던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었다.
 “그 감시를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내가 옆에 두고 감시하려고.”
 아리송한 말이었다.
 요한이 곧장 의문을 표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내부에 시어가 있다 한들 그 수는 많지 않을 거야. 수용소에 있는 시어의 수를 고려해봤을 때 많아야 2명? 아니, 내가 볼 땐 1명 정도면 충분할 거야. 여기 수용소 규모가 그리 큰 게 아니니까. 그래서 그 1명을 이쪽으로 불러들이려고. 그러면 그 녀석만 경계하면 되잖아.”
 “너무······ 무모한 거 아니야?”
 요한이 내비치는 우려에 정민은 그렇지 않다고 봤다.
 “아니야. 오히려 이상한 타이밍에 찾아오는 것보단 나아. 그땐 모두를 의심해야 하니까. 어차피 일을 벌이면 벌일수록 시어도 바보가 아닌 이상 따라붙을 거야. 그때 예상되는 녀석에게 적당한 미끼를 던지고 따돌리면 돼. 차라리 그게 나아. 속 편한 거지.”
 “그렇군요.”
 먼저 수긍한 건 아미르였다.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저희가 곁에 두고 감시하는 게 낫겠죠. 만약 그런 시어가 진짜 존재한다면요.”
 “시어를 옆에 두고 감시한다고?”
 요한은 내키지 않은 표정이었다.
 “시어를 너무 물로 보는군. 시어를 그렇게 만만하게 봐선 안 돼.”
 “그건 우리가 잘 하면 돼.”
 “잘하면 된다라······ 그래서 어떻게 부를 생각이지?”
 정민은 아무도 없는 문밖을 다시 확인했다.
 복도 쪽은 아직도 조용했다.
 “내가 시어라면 수감자들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감시할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봤지. 너희들은 그런 생각 안 해봤지?”
 요한과 아미르는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수가 있어. 다 감시할 필요도 없고 딱 몇 놈만 감시하면 돼.”
 “그게 누군데?”
 “정신 스탯이 5 이상인 녀석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 거야. 아니면 모르나?”
 요한은 이해한 눈치였고, 아미르는 모르는 듯했다.
 “그게 어쨌다는 거죠?”
 “정신 스탯이 5 이상인 녀석들만 여기서 나갈 생각을 하거든. 그러니까 그 녀석들만 주시하면 모두를 감시하는 거나 마찬가지란 소리지. 어때, 굉장히 효율적이지 않아?”
 “그런데 시어들이 그걸 알고 있을까요? 저처럼 모를 수도 있잖아요.”
 “알겠지. 나름 베테랑들인데. 내가 만약 여기 시어라면 그런 식으로 감시하겠어. 그럼 다 감시할 필요도 없이 미리 봐둔 몇 놈만 감시하면 되니까.”
 정민이 다시 문 밖을 확인했을 때, 우연히 방안을 감시하던 시어 필립과 눈을 마주치게 됐다.
 그 시선.
 확실한 건 방안의 분위기를 훑는 느낌이 아니라 정민을 감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짙었다.
 정민은 시어 필립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시어 필립이 떠나가자 정민은 하던 대화를 계속 이어나갔다.
 “아까 복도에서 반장하고 얘기할 때 저놈이 멀리서 지켜보는 걸 봤거든. 그런데 또 나를 쳐다보네.”
 정민은 마찬가지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고블린 반장을 두고 말했다.
 “저놈이 지금 당장 시어한테 찾아가 적당히 양념질만 해주면 돼. 그러면 내일 정체를 숨긴 시어가 찾아올지도 몰라. 그럼 빙고지.”
 정민은 내일 있을 몇 가지 일들을 예상해 보았다.
 “내가 만약에 정체를 숨긴 시어라면 이렇게 접근할 거야. 뜬금없이 접근해도 되고, 아니면 새로 들어온 수감자처럼 연기하면서 이렇게 말하겠지.”
 정민은 어느 정도 확신했다.
 “나가고 싶다고. 그냥 날 떠보는 거지.”
 대화를 마친 정민은 곧장 그린을 찾아갔다.
 정민이 찾아온 이유에 대해선 그린은 큰 의문을 표하진 않았다.
 다만 정민을 아니꼽게 생각하는 두 리자드맨 형제는 그린에게 다가와 태연히 말을 거는 정민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정민을 평소와 다른 태도로 대하는 그린을 보고 또 의문을 가졌다.
 둘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두 리자드맨은 나중에 물어볼 생각으로 조용히 그들을 지켜봤다.
 그 사이 정민은 그린에게 무언가를 부탁하고 있었다.
 그 내용을 다 듣고 난 그린의 반응은 역시나였다.
 “미친 거냐?”
 “어떻게 보면 기발한 거지.”
 “내가 볼 땐 넌 미친놈이다. 세상에, 시어에게 고자질하라고 부추긴 놈은 네가 처음일 테니까.”
 “그래서 도와줄 거야 말 거야?”
 그린은 그 부탁을 들어주었을 때 자신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따져보았다. 그다지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시어가 내 친구도 아니고, 내가 확실하지도 않은 정보를 가지고 고자질할 수는 없잖겠어? 네가 말한 대로 그렇게 애매하게 고자질할 거면 나도 좀 그래.”
 애매하게 고자질하기.
 이게 정민이 부탁한 내용이었다.
 “부탁 좀 하자고. 너도 무임승차할 거 아니면 우리를 위해 뭔가 해줘야 하지 않겠어?”
 “누가 무임승차를 한다고 그래. 나도 뱉어낸 정보가 있는데.”
 “아무튼 해줄 거야 말 거야. 분명히 말해 두지만 꼭 필요한 일이야.”
 그린의 표정이 썩었다.
 한셈처럼 바보는 아닌 것 같은데 조금 무모한 부분이 보였다.
 “그러다 없던 감시가 붙으면 어쩌려고? 그게 더 손해인 거 몰라?”
 정민은 부정의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갓 아너.
 이 난이도에선 무조건 어렵게 생각하는 게 가장 쉬운 거였다. 그리고 그 생각은 확고했다.
 “여기 시어가 병신이 아니라면 감시는 무조건 붙을 거란 게 내 생각이다. 그럴 거면 이쪽이 선수 치는 게 좋은 거 아니겠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좀 무모한 거 같은데······.”
 “총대는 내가 멨는데 왜 네가 걱정해주고 그래? 너는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해주면 돼.”
 그린에게 있어서도 정민이 이제 마지막 희망이었다.
 “나도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고. 이제 너밖에 없는데 네가 그딴 식으로 일을 그르치면 내가 좋아하겠어?”
 “이봐, 내가 일을 그르치려고 그러는 줄 알아? 다 생각이 있으니까 부탁하는 거야.”
 그린은 내키지 않아 했지만 정민이 계속 밀어붙이니 어쩔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린은 그래도 미련이 남았는지 정민을 흘깃하다가 이내 밖으로 나가 저 먼 곳에서 책을 펴고 앉아 있는 시어 필립에게 다가갔다.
 그때 필립은 독서 중이었다.
 그린이 찾아오자 필립은 책장을 넘기며 시선을 고정한 채 입만 열었다.
 “뭔데?”
 “그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봐. 듣고 있으니까.”
 “그······ 저번에 들어온 신참 말입니다. 저희 방에 있는 인간 녀석 있잖습니까.”
 필립은 다 듣지도 않고 피식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의 의미를 그린은 절대 모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듯합니다.”
 “알아.”
 “예?”
 “귀 먹었어? 알고 있다고.”
 필립이 무서운 시선을 흘리자 그린은 침을 삼키며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계속 눈에 밟히는 놈이라 주시하고 있었지. 그래서?”
 필립은 그 이상의 무언가를 요구했다.
 수상하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고, 원하는 건 자세한 내용이었다.
 그린은 죽을 맛이었다. 지금 이렇게 될 걸 알았기에 아까 정민이 부탁했을 때 내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게······ 딱 그 말만 전해드리려고. 저는 단지 수상한 녀석이 있기에 바로 보고 드린 겁니다.”
 시어의 눈이 서슬 퍼런 칼날처럼 섬뜩해졌다.
 그린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이것도 나름 위기였다. 무언가를 던져주지 않고서는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하리라.
 “그게······.”
 그린이 말을 머뭇거리자 필립은 가볍게 웃고는 곱게 놔주었다.
 “됐으니까 가봐. 다음에 올 때는 확실한 걸 물고 오란 말이야. 한셈처럼.”
 필립이 그린을 놔준 이유는 단순했다. 그는 그린을 믿었던 것이다.
 그린은 저를 놔준 필립에게 넙죽 허리를 숙이고는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필립은 책장을 넘기다 시선을 돌려 방안으로 들어가는 그린을 보았다.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시어 게넨바인이었다.
 필립은 책장에 놔둔 시선은 그대로 둔 채 입만 열었다.
 “내 방에서 대가리 굴리고 있는 새끼가 하나 있거든.”
 “그게 누군데?”
 “있어. 인간 새끼.”
 가소롭게 생각한 모양인지 필립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다.
 “아, 설마 그 새끼인가?”
 자기가 담당하는 방은 아니었지만, 게넨바인은 그리 어렵지 않게 한 인물을 떠올릴 수 있었다.
 교단의 귀인이 찾아와 장난을 쳤을 때, 먹을 걸 입안에 욱여 넣었던 그 주인공을 말이다.
 “눈이 살아 있었어. 한셈처럼.”
 “나도 첫눈에 알아봤지. 이 새끼, 나중에 대가리 굴릴 새끼라고.”
 “어떻게 할 거야? 그대로 둘 거야?”
 “일단 속은 떠봐야지.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알아야 하니까.”
 눈이 살아 있는 수감자.
 그들의 오랜 경험에 비추어봤을 때 이런 부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게 된다.
 방금 전 고자질을 했던 그린처럼 이 지옥 속에 적응하며 밀고자가 되든가, 아니면 한셈이란 오크처럼 밖으로 나가려 하든가.
 둘 중 하나였다.
 “만약 한셈 같은 놈이라면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긴. 이번에도 가지고 놀아야지. 그때도 엄청 재밌으려다 말았는데.”
 “한셈은 너무 재미가 없었지. 그놈은 머리가 너무 안 돌아갔어.”
 그들의 대화는 놀라웠다. 마치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탈옥하려는 수감자를 가지고 놀려는 여유까지 부리고 있었다.
 “그때 마나 포션도 몰래 흘려주고, 결계 위치도 대강 알려주고, 정말 별의별 짓을 다 했었지.”
 “그래봤자 못 나가는데.”
 “그러니까.”
 “가드너가 좋아하겠군. 오랜만에 일거리가 생겼으니까.”
 
 
 
 그린은 방으로 돌아와 정민을 찾아갔다.
 “네놈 때문에 식겁했다. 아무튼 부탁했던 대로 정보는 흘렸으니까 그리 알아.”
 “반응은?”
 “이미 의심하고 있더군.”
 “그래?”
 이미 예상했던 내용이었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정민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을 확신으로 굳힐 수가 있었다.
 ‘확실해. 여긴 그냥 어렵게 생각하면 돼. 그게 제일 쉬운 거야.’
 날이 저물었다.
 보석이 깨알같이 박힌 듯한 밤하늘이 떠오르고, 그 하늘이 다시 밝아졌을 때 정민은 침대에서 일어나 벌써부터 관자놀이를 짓누르고 있었다.
 며칠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여기서 자는 사람들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다.
 정민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잠에 익숙하지 않은 수감자들과 시선이 마주쳤다. 모두들 죽은 눈빛으로 정민을 보았고, 정민은 그들과 다른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졌지만 정민과 그들 사이에 무언의 대화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열린 방문으로 한 수감자를 둘러업은 트롤 두 마리가 터벅터벅 걸어오더니 이내 빈 침대 위에 새로운 수감자를 던져놓고는 그대로 나가버렸다.
 ‘나도 저렇게 왔었나?’
 여태까지 새 수감자가 어떤 식으로 추가되는지는 쭉 의문이었다. 그 의문이 풀리게 되자 정민은 오히려 허탈해했다.
 ‘별거 없었네.’
 그러다 다른 의문이 생겼다.
 ‘그럼 트롤들은 저 수감자를 어디서 데려온 거지?’
 계속 생각해봤지만 썩 괜찮은 답이 나오진 않았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정민의 관심사는 이제 새로 들어온 두 수감자에게 있었다.
 ‘어디 내 생각대로 되는지 지켜보자고.’
 정민은 앉은 채로 눈을 감고 흘러가는 시간에 몸을 맡겼다. 그런 정민이 다시 눈을 뜨게 된 것은 방에서 큰 소란이 일어났을 때였다.
 “여긴 어디야! 여긴 어디냐고!”
 새로 들어온 수감자 하나가 난리치기 시작했다. 그는 나이가 서른 정도로 보이는 인간 남자였고, 별다른 특징은 없었다.
 “너희들이 데려왔지! 그렇지?”
 이때 나선 것은 다름 아닌 그린이었다.
 “이놈의 새끼가 여기가 네 집인 줄 알아! 조용히 못 해!”
 그린이 소리치기가 무섭게 두 리자드맨이 나서서 시끄럽게 떠들던 수감자를 그대로 밟기 시작했다.
 소란을 피우던 수감자는 흠씬 두들겨 맞고는 조용해졌다.
 “집합이다! 전부 나와!”
 시어 필립이 찾아와 아침 집합을 알렸다.
 정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와 마찬가지로 밖으로 향했다.
 두 리자드맨에게 신나게 두들겨 맞았던 새 수감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정민을 따라오며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정민이 시선을 흘리자 그는 불쌍한 표정과 함께 질문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디죠? 난 왜 여기 있는 거죠? 가르쳐 주세요. 제발요.”
 새로 들어온 수감자라면 당연히 거치는 과정.
 정민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가 이내 뿌리치고 밖으로 나갔다.
 방에 남게 된 수감자는 이내 다른 수감자에게 붙어 이곳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애매하네.’
 막상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저런 식으로 다가오니 좀 헷갈렸다.
 ‘일단 요주의 인물로 두고.’
 정민은 요한, 아미르, 블락을 포함한 저와 친분이 있었던 모두에게 오늘 하루 자신에게 말을 걸지 말라는 말을 어제 했었다. 의심 대상을 솎아내기 위해서였다.
 아침 점호가 끝나고 광산 채굴이 진행됐다.
 매일같이 있는 일이지만 정민은 그전과 다르게 한 인물을 매 시간마다 의식하며 곡괭이를 내리쳤다.
 하지만 아침에 말을 걸어온 뒤로는 자신에게 또 접근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애매한 의심만 남았을 때, 정민에게 뜬금없이 말을 걸어오는 자가 있었다.
 언데드 파커였다.
 “아직도 살아있었군요. 보기보다 질긴 목숨입니다.”
 뜻밖의 인물이 찾아와 말을 걸자 정민의 혼란은 더욱 가중됐다.
 ‘이 녀석은 또 뭐야?’
 파커는 도통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였다. 뒷간 청소 때도 그랬고, 뜬금없이 나타나 말을 거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나한텐 무슨 일인데?”
 “아니 왜 이렇게 쌀쌀맞으신 겁니까? 저번엔 이름까지 가르쳐주셨잖습니까.”
 “그럼 갑자기 말을 걸어오는데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뜬금없다니요. 저희가 언제 그런 사이였습니까?”
 파커는 주변의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정민만 마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당신만 눈이 살아 있군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당신 같은 눈을 가진 자는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아, 한셈 이후로 처음인 거 같군요. 혹시 정신 스탯을 보정 받으신 겁니까?”
 파커의 물음에 정민은 주변을 살폈다.
 시어는 없었고, 주변에 있는 수감자들은 전부 제 곡괭이를 내리치기 바빴다.
 ‘혹시?’
 정민은 급히 새로 들어온 수감자를 찾아보았다. 왜냐면 저번에 그린이 말해줬었던 체인지 마법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의심이 무색하게 새로 들어온 수감자는 저 먼 곳에서 묵묵히 곡괭이를 내리치고 있었다.
 ‘같은 인물이 아니야. 그럼 둘 다 다른 사람이라는 건데······.’
 내부에 숨은 시어가 있다고 한들, 그 수가 하나 정도밖에 안 된다는 생각은 아직도 유효했다. 여러 정황상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으니까.
 ‘내 생각이 맞다면 이 녀석이랑 저 녀석 중 하나가 정체를 숨긴 시어라는 건데.’
 정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파커는 제 할 말만 떠들어댔다.
 “저는 먹지 않아도 살 수 있기에 사실 여기까지 나오는 일이 드뭅니다. 평상시라면 어딘가에 짱 박혀 죽은 시늉을 하고 있겠죠. 하지만 이따금씩 무료함을 느끼게 되면 여기로 나와 필멸자들이 살아가는 걸 가만히 지켜보게 됩니다.”
 그러다 정민과 거리를 좁히며 그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떠보기 시작했다.
 “혹시 말입니다. 저번에 저한테 결계에 대해 물어보셨는데, 혹시라도 나갈 생각이 있는 겁니까?”
 파커는 아예 대놓고 물었다.
 정민은 파커의 정체가 의심되기 시작했다.
 ‘설마 이 녀석인가?’
 어제 생각한 대로라면 오늘 자신에게 찾아와 대놓고 탈출 계획에 대해 묻는 자가 내부에 숨은 시어였다.
 ‘헷갈리네.’
 일단 여기서 해야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아니, 그럴 생각 없어.”
 “없다고요? 허허, 거참. 눈빛이 살아 있어 내심 기대했는데, 역시나 당신은 그린 같은 족속이군요.”
 “무슨 소리야?”
 “당신처럼 눈빛이 살아 있는 수감자를 말하는 겁니다. 이런 부류는 대개 두 가지로 나뉘게 되죠. 예전에 한셈이란 오크처럼 이곳을 나가려 하던가, 아니면 저기 있는 고블린처럼 내부 밀고자가 되어 시어랑 붙어먹는 겁니다. 여기서 당신은 후자겠군요.”
 정민의 시선이 그린에게 향했다.
 ‘설마 저 녀석도 정신이 5인가?’
 정민이 그린을 쳐다보자 파커는 정민에게 두었건 관심을 거두려는 듯, 떠날 모양새를 취했다.
 “내심 기대했습니다만 그런 태도라면 어쩔 수 없겠군요. 없던 이야기로 하겠습니다.”
 파커가 떠나려하자 정민이 그를 붙잡고 무언가를 물어보았다.
 “하나만 묻자. 나한테 다가와서 그런 소리를 한 이유가 뭐야?”
 “이유가 따로 있겠습니까? 만약 탈출할 생각이셨다면 몰래 따라갈 생각이었죠.”
 어차피 아니라고 했다.
 정민은 가정하듯 말했다.
 “만약 내가 탈출할 생각이었다면 당신은 나한테 뭘 해줄 건데?”
 “뭘 해주다니요. 다 같은 수감자가 아닙니까? 서로 돕고 살아야지요.”
 “개소리는. 그건 무임승차야. 만약 내가 나갈 생각이 있어도 자선사업은 하지 않아.”
 “호호호, 그렇군요. 그렇지만 이건 아셔야죠. 여기서 제가 가장 오래됐습니다. 그런 이유로 아는 것도 많지요.”
 “그래서?”
 “결계가 어디 있는지 그 위치를 대강 알고 있지요. 이건 오래 있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되는 겁니다.”
 정민은 생각하듯 눈가를 좁혔다.
 파커가 결계 위치를 알고 있다고 자신에게 밝혔다.
 ‘그럼 저 녀석도 필요하단 소린데······.’
 어찌됐건 의심이 생겼으니 정민은 갑자기 말을 바꾸거나 하진 않았다.
 “됐어. 어차피 여기서 나갈 생각은 없었으니까. 여긴 못 나가는 곳이잖아.”
 “하하, 그렇군요. 하긴 그렇게 나가기 쉬웠다면 예전에 다 나갔겠지요.”
 파커가 떠나갔다.
 정민은 떠나는 파커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모르겠어. 의심은 가지만 그냥 이상한 놈이야.’
 그런데 갑자기 그린이 찾아와 정민에게 말을 붙였다.
 “파커가 와서 뭐라고 했어?”
 “뭘?”
 “와서 뭐라 씨부렸을 거 아니야.”
 “그게 궁금해?”
 “나는 저 언데드 녀석을 의심하고 있다고. 그러니 안 궁금하고 배겨?”
 그린은 정민에게 처음부터 파커가 수상하다고 말했었다.
 “그보다 너도 정신 스탯이 5냐?”
 정민의 물음에 그린은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
 “저 언데드가 그랬거든. 여기서 정신 스탯이 5인 녀석만 눈빛이 살아 있다고.”
 “맞아. 내가 봐도 그랬어. 정신 스탯이 5가 넘어가면 두 가지 부류가 되지. 나처럼 반장 형식으로 남아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악하든가, 아니면 여기서 나가려고 발버둥을 치든가.”
 “그래?”
 정민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좋은 수라도 생각났어?”
 “말은 못해 주지만, 대답은 예스야.”
 “아무튼 저 파커 놈은 믿지 마. 속내를 알 수 없는 놈이야.”
 “하지만 결계 위치는 대강 아는 것 같더군.”
 그 말에 그린은 눈에 쌍심지를 켰다.
 “정신 차려! 여기 시어들이 얼마나 영악한지 모르는 거야? 그 새끼들은 적당한 미끼를 던져주면서 우릴 가지고 놀 새끼들이야. 어떤 녀석이 밖으로 나가는 정보를 알려준다고 해서 절대 방심하면 안 돼. 그 새끼가 시어일 수도 있으니까.”
 그린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정민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악질이란 소리냐?”
 “네가 여기 얼마 안 있어서 감을 잘 못 잡는 모양인데, 내가 말했었잖아? 교단에서 온 그 창녀만 악질이 아니야. 여기 있는 시어들도 우리를 가지고 노는 데 도가 튼 녀석들이야. 녀석들을 봐. 얼마나 심심하면 매일같이 책만 읽고, 계속 괴롭힐 애완동물을 만들겠어? 그런 놈들이 우릴 가지고 놀려고 하면 얼마든지 가지고 놀 수 있다고. 절대 방심하지 마.”
 “그러니까 네 말은 정보를 준다고 해서 바보같이 믿지 마라?”
 “알아들었으면 파커 놈을 경계해. 나는 그놈이 가장 수상하니까.”
 광산 채굴이 끝났다.
 방으로 돌아온 정민은 아까 광산에서 뜬금없이 접근한 파커 일만 떠올리고 있었다.
 ‘그럼 놈이 시어인가?’
 물론 파커를 100%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오늘 아침 자신에게 도와달라고 말을 건넨 새로운 수감자 녀석도 수상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새로운 수감자 녀석이 갑자기 방문 쪽으로 뛰어가 복도 쪽을 내다보는 모습을 보게 됐다.
 그 난데없는 행동에 정민은 의문을 표했다.
 ‘뭐하는 거지?’
 그러던 새 수감자는 밖을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전하! 설마 웨일스 전하십니까!”
 모두의 시선이 새 수감자에게 모였다.
 그는 방문을 열고 나가 독사의 장난감으로 있던 황자와 마주보며 섰다.
 “전하가 맞으시군요. 접니다. 알프레도!”
 “알프레도!”
 놀랍게도 둘은 아는 사이로 보였다.
 하지만 이를 곱게 놔둘 독사가 아니었다.
 “이 새끼는 뭐야? 당장 네 방으로 안 꺼져?”
 목줄이 채워진 황자를 보고 발끈한 알프레도가 황급히 주변을 훑었다. 그러다 걸레가 보이자 그것을 쥐고 독사를 향해 내리칠 포즈를 취했다.
 “이게 무슨 무례란 말이냐! 그분은 황족이시다! 너 같은 녀석이 가지고 놀 분이 아니란 말이다! 당장 그 목줄을 풀어드려라!”
 소란이 일자 복도 밖으로 수감자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독사의 새 장난감이 황자라더니, 진짜 황자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로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알프레도는 죽지 않을 만큼 독사에게 맞고 나가떨어졌다. 그리고 황자는 독사에게 끌려갔다.
 정민은 그 모든 일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진짜 황자였어?’
 하지만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겠는가? 어차피 황족 대접도 못 받는 그런 자인데.
 독사에게 얻어맞은 새 수감자는 그린이 주도하여 방안으로 데려갔다. 시어에게 맞고 골골거리는 녀석에게 관심을 주는 이는 없었다.
 정민도 마찬가지였다. 대신 정민은 그 정체를 의심하고 있었다.
 ‘아침에 말을 걸었던 건 그냥 우연인가? 보니까 시어는 아닌 거 같은데.’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정민은 고개를 저었다.
 그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런 놈들이 우릴 가지고 놀려고 하면 얼마든지 가지고 놀 수 있다고. 절대 방심하지 마.”
 만약 시어가 마법이나 아이템을 써서 모습을 감춘 뒤, 황자의 측근으로 연기를 했다면?
 ‘머리 아프군. 모르겠어. 진짜 그렇게 할 수도 있잖아.’
 정민은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어차피 나랑 관계도 없는데 무슨 상관이야. 여기서 나가는데 별 상관없다면 정체가 뭐든 그냥 무시하면 돼.’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알프레도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모든 수감자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중엔 정민도 있었다.
 “전하를 저렇게 놔둘 순 없다. 부탁한다. 제발 전하를 여기서 나가게 해줘! 보상이라면 뭐든 해주겠다!”
 정민은 할 말이 없었다.
 만약 이자가 정체를 숨기고 접근했다면 이보다 완벽할 순 없었다.
 ‘골 때리네.’
 파커 역시 수상하긴 마찬가지.
 하지만 이날 하루 동안 정민에게 말을 건 녀석은 이 둘이 유일했다.
 그린이 있긴 했지만, 정민은 그린을 의심하진 않았다. 만약 그린이 밀고자였다면 이미 시어에게 일러바쳤을 테니까.
 ‘그렇다면 둘 중 하나.’
 누가 밀고자일지 모르는 와중에 정민은 생각을 굳혔다.
 ‘그냥 둘 다 멀리하면 돼. 결계 위치를 대강 알고 있는 파커 정도만 신경 쓰이는데, 뭐 그건 나중에 생각해보고.’
 생각을 마친 정민은 다짜고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난로 근처로 가 섰다.
 ‘그럼 생각해 뒀던 걸 이제 실천으로 옮길 차례군’
 그 순간 정민이 한 말은 방안에 있는 모두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지금부터 이 방의 반장은 앞으로 내가 한다.”
 그 말에 가장 놀란 건 그린이었다.
 “뭐? 저놈이 미쳤나. 지금 뭐라고 한 거야?”
 “귀 먹었냐? 앞으로 이 방의 앞잡이는 내가 한다고. 아침 점호 때 맨 앞줄에 서는 것도 앞으로 나다.”
 사전에 없던 이야기라 발끈한 그린이 소리쳤다.
 “저 미친 새끼가!”
 그러자 두 리자드맨 형제가 나섰다.
 “내 저럴 줄 알았다. 저 새끼가 사고 칠 줄 알았지.”
 “저런 놈은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그랬던 두 리자드맨이 정민에게 정리된 시간은 불과 몇 초 남짓. 정민은 거들먹거리며 다가오는 두 리자드맨의 관자놀이를 주먹으로 다 뚫어버렸다.
 모두들 순식간에 두 리자드맨을 정리하고 선 정민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서 공통된 생각을 했다.
 ‘괴물이다.’
 정민이 그린을 도발했다.
 “불만 있으면 너도 나와. 여기 이 녀석들처럼 제대로 눕혀줄 테니까.”
 그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저 녀석이 갑자기 왜 저러는 것일까?
 그러다 아까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정신 스탯이 5인 녀석은 두 가지로 부류된다고.
 자기처럼 반장이 되든가, 아니면 한셈처럼 나가려 하든가.
 정민은 시어를 속이기 위해 반장이 되는 척 연기를 시작한 것이다.
 ‘저렇게 나올 거면 미리 말이라도 했어야지!’
 그린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차피 여기서 죽으면 반장 짓도 끝이다. 그러니 이제는 나갈 때가 됐다.
 “×발. 네 ×대로 해.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모르니까.”
 그린이 포기하고 방에서 서열 2위인 블락도 조용히 있자, 그렇게 정민은 이 방의 새로운 반장이 됐다.
 “그럼 공식적으로 말하지. 앞으로 여기 반장은 나다. 시어에게 뭘 보고하는 것도 전부 나니까 다들 그렇게 알고 있어.”
 6장 탈출 계획(1)
 
 
 반장이 된 정민은 그 즉시 시어 필립을 찾아갔다.
 “뭐야?”
 시어 필립은 난데없이 찾아온 정민을 두고 의문을 표했다.
 정민은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말했다.
 “앞으로 제가 그린을 대신할 겁니다. 제가 2번 방 반장입니다.”
 “뭐?”
 그가 반장을 하겠다는 건 기존에 반장을 하고 있던 그린이 죽었거나 아니면 암묵적으로 동의했다는 걸 의미했다.
 나름 반장의 위치가 크기 때문에 시어 필립은 그린을 물고 늘어졌다.
 “그린한테 맡긴 걸로 기억하는데?”
 “그린도 동의했습니다.”
 정민은 웃으며 말했다.
 남은 건 시어 필립의 몫.
 “그게 말이 돼? 놈이 좋게 내줄 일이 없는데.”
 시어한테는 깍듯이 대해도 수감자들에겐 다른 게 바로 그린이었다.
 그린은 그리 성격 좋은 고블린이 아니었다. 하물며 자기 자리까지 빼앗겼는데 가만히 있었겠는가?
 “안 내주면 어쩌겠습니까? 맞아야죠. 제가 모르긴 해도 그린보다 반장 역할은 잘 할 겁니다.”
 시어 필립이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제 뺨을 긁적이며 생각했다.
 ‘탈출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그린 같은 놈이었나?’
 “알았어. 가봐. 그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지.”
 “예.”
 고개를 숙이고 떠나는 정민.
 그런 정민을 놔두고 다시 책장을 넘기는 시어 필립에게 독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저놈은 왜?”
 “반장이 바뀌었다고 하더군. 녀석이 2번 방 반장이래.”
 “뭐?”
 시어 게넨바인이 떠나가는 정민의 뒤통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럼 그린과였나? 한셈과가 아니라.”
 시어 필립은 대꾸하지 않았다.
 시어 게넨바인만 가늘어진 눈매로 정민을 살필 뿐이었다. 그는 뾰족한 제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했다.
 “그린과라······ 하긴 여기서 나가는 건 불가능하니 어쩌면 저게 현명한 거겠지. 아무리 발버둥 쳐 봤자 여기서 나갈 수 없을 테니.”
 게넨바인이 내린 결론이 있었다.
 이 수용소에서 탈출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당장 나가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나가게 되면 더 큰 문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설사 결계를 무력화시켜도 이 문제는 절대 풀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가드너가 돌아오면 다시 물어보자고. 그나저나 아쉽게 됐군. 탈출하려고 마음먹었으면 한셈보다 더 밀어줬을 텐데. 그래야 막판에 이르렀을 때 끝없이 좌절했을 테니까.”
 정민이 방으로 돌아오자 몇몇이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정민이 말한 게 있어 말을 걸거나 하진 않았다.
 그렇게 날이 저물고, 다시 날이 밝았다.
 똑같은 하루가 시작됐다.
 정민은 어제와 다르게 요한과 아미르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그가 다가오자 요한이 조용히 말을 붙였다.
 “어떻게 됐나?”
 마치 주변을 의식이라도 한듯 그는 정민을 보지 않고 물었다.
 정민 역시 그런 요한과 마찬가지로 곡괭이를 내리치며 대화에 응해주었다.
 “어제 두 놈이 말을 걸어왔어.”
 “지켜봤다. 세 놈이더군.”
 “그린은 빼고. 그린은 아니야.”
 꽤나 단호한 그 어조에 요한은 토를 달지 않았다.
 “그래? 그래서 누가 시어 같은데?”
 그때 블락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왜 나만 빼놓고 대화하는 거지?”
 정민이 대꾸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보다 어제 반장 자리를 뺏더군. 대체 무슨 생각이야?”
 “무슨 생각이긴. 시어들 생각에 최대한 부합해 준 거지. 이제 녀석들도 긴가민가할 거야. 혼란을 줬으니까.”
 “그린이 가만히 있는 걸 보니 둘 사이에 무슨 얘기가 있었던 모양이군. 순순히 자리를 내줄 녀석이 아닌데.”
 “녀석도 우리랑 함께하고 싶어 해.”
 “뭐? 하긴 놈도 나가고 싶어 하겠지.”
 이쯤에서 정민은 어제 봐뒀던 두 명에 대해 이야기해 줬다.
 “아무튼 의심 가는 놈은 둘이야. 파커랑 어제 새로 들어온 신입이지. 그런데 하나만 물어볼게.”
 정민은 자신이 모르는 게 있으면 무조건 주변 동료들에게 물어서 해결했다.
 “그린이 했던 말을 들어보니 시어가 모습을 바꿀 수 있다고 해. 이게 가능하다고 치면 그 사람의 흉내까지 내는 게 가능해?”
 새 수감자를 의심하는 말이었다.
 그 물음에 대해서는 내내 조용히 있던 아미르가 입을 열었다.
 “네, 가능해요. 황금의 효교단에서 파견 나온 시어들은 타인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책으로 집필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들었거든요.”
 모두들 아미르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가만히 들었다.
 “물론 장미십자회에 속한 마법사들도 가능하다고 들었습니다.”
 “장미십자회?”
 “장미 제국에 속한 마법사들이죠. 파가 다르긴 하지만 황금의 효교단과 비슷한 부류라고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다만 추구하는 게 다를 뿐이죠.”
 황금의 효교단과 장미십자회.
 지금 당장 필요한 정보는 아니었기에 아미르도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해 버렸다.
 ‘그게 가능하다고?’
 이렇게 되면 새로 들어온 신참이 더욱 의심스러워졌다.
 정민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뭐 상관없겠지.’
 하지만 자신과 관계없다고 생각했는지 무시하기로 했다.
 어차피 신참이야 황자와 관련된 인물이고, 그 인물은 탈출에 있어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시어의 시선도 잠시 따돌렸겠다.’
 정민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의 눈동자는 진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슬슬 나갈 생각을 해보자고.’
 
 -메인 퀘스트가 갱신됩니다.
 -플레이어는 현재 액트 1 ‘플레이어 수용소’를 플레이하는 중입니다.
 -현재까지 갓 아너 난이도에서 액트 1을 클리어한 플레이어는 0명입니다.
 -헬 난이도에선 121명, 레전드에선 21명의 플레이어가 액트 1을 클리어했습니다.
 -알림! 권위와 위엄으로 무장한 주시자의 눈이 플레이어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메인 퀘스트(1)]
 *탈출 계획(진행 중)
 -대략적으로 모든 정보가 수집된 거 같다. 슬슬 나가 보려고 한다.
 *정보 수집(완료)
 *여긴 어디야?(완료)
 [서브 퀘스트(3)]
 *버려진 황자(진행 중)
 -알프레도라는 수감자와 만나게 됐다. 그가 말하길 평소 황자라 불리는 녀석은 장미 제국의 제4 황자인 웨일스 렌프루란다. 그를 여기서 탈출시키면 보상해 주겠다고 말했다.
 *타락한 성녀(완료)
 *철광석 채굴(완료)
 
 퀘스트 내용을 확인한 정민은 동료가 있는 자리에서 가장 먼저 결계 이야기를 꺼냈다.
 “중요한 건 결계야. 그런데 아미르가 마력 스탯을 올린다고 한들, 고작 1클래스밖에 안 되는데, 가능하겠어?”
 정민이 계속 고민하는 문제였다.
 현재 아미르가 마력 스탯을 올린다고 한들 겨우 1클래스 마법밖에 사용할 수 없었다. 2클래스 이상의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마력 스탯이 9가 넘어야 했으니까.
 “불가능하죠.”
 아미르의 말에 모두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건 잠시였다.
 “일반적으론 불가능하단 소립니다. 1클래스 마법사가 4클래스 마법 결계를 깰 순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게 제게 해당되는 말은 아니죠.”
 미쳐버린 난이도를 따지기에 앞서 모두는 한 가지를 염두에 둬야 한다. 수용소에 모인 이들이 전부 괴물이란 점이다.
 아미르 역시 결코 평범하지 않은 자였다.
 “저는 사실 마법사라기보다는 정령술사에 가깝죠. 정령들과 친하고, 마법도 대부분 정령들의 도움을 받아 해결하거든요.”
 모두는 아미르가 하는 말을 그저 듣기만 했다.
 “제가 가진 마력 스탯은 제가 2레벨이 된다고 쳤을 때 겨우 1클래스를 달성하게 됩니다. 아니면 블락이 제게 버프를 걸어줘도 1클래스가 될 수 있겠군요. 아무튼 제 수준은 고작 1클래스 정령술사밖에 안 됩니다.”
 “잠깐만. 만약 그렇다 치면 1클래스 마법사가 자기보다 높은 수준의 마법 결계를 무력화시킬 순 없을 텐데?”
 수용소 밖 결계가 정상적이라면 현실적으로 1클래스 마법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제가 다루는 정령들은 다르죠.”
 “그래서?”
 “정령들을 다루는 제가 가장 처음 불렀던 존재가 누군지 아세요?”
 모두는 감도 못 잡아서 서로의 눈만 쳐다봤다.
 대체 누굴까?
 “그게 누군데?”
 “정령왕이요. 이건 제가 어렸을 때를 말하는 겁니다. 그때 마력 수준은 1클래스밖에 안 됐어요.”
 “1클래스 마법사가 정령왕을 소환했다고?”
 딴죽을 건 것은 다름 아닌 블락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지? 불가능해.”
 “사실 바로 정령왕을 소환하진 않았습니다. 가장 처음 불러낸 건 하급 정령이었어요. 하지만 그 하급 정령이 중급 정령을 불러냈고, 중급 정령이 상급 정령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상급 정령이 정령왕까지 불러냈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마법사들은 이걸 연쇄 마법이라 부르더군요.”
 “그게 가능해?”
 “전 가능했어요. 그리고 해냈죠.”
 “정령 친화력이 엄청 높나 보군. 보통이라면 불가능할 텐데.”
 “아무튼 결계는 제가 불러낸 정령들의 도움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 묵묵히 곡괭이를 내리치던 정민이 작게 웃어 보였다.
 ‘좋아. 그럼 결계 문제는 해결했어.’
 아미르를 살린 보람이 있었다. 괜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남은 건 결계 위치 정도겠군. 마법이야 블락이 버프만 걸어줘도 계속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까.”
 버프를 걸어줄 수 있는 블락이 있는 한 애당초 마나 포션은 그들에게 필요가 없는 아이템이었다.
 ‘결계 위치는 파커만 알고 있다고 했어.’
 이게 거슬렸다.
 바로 결계의 위치.
 “그럼 결계의 위치가 문젠데······ 이건 어떻게 하지?”
 “그린도 모르는 건가?”
 블락이 묻자 정민은 고개부터 저었다.
 “모른다고 했어. 알면 그놈이 시어겠지.”
 “하긴.”
 “그것도 정령들의 도움을 받으면 전혀 불가능하진 않아요. 아니, 가능하죠. 충분합니다. 결계 위치는 정령들이 말해줄 거예요.”
 아미르가 구세주였다.
 모두는 선망의 시선으로 아미르를 쳐다보았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줄 알았던 엘프가 사실 나가는 데에 있어 핵심이었던 것이다.
 “좋아 다 해결했다. 이제 나갈 수 있겠어.”
 정민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그린을 찾아갔다.
 그린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어제 제 자리를 뺏어간 정민이 찾아오자 표정부터 구기고 봤다.
 “뭔데?”
 정민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결계 문제는 해결했다.”
 “어떻게?”
 “아미르가 정령술사거든.”
 그린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흥분한 그린이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아, 그래? 저 엘프가 정령술······.”
 정민이 손을 뻗어 그린의 입을 틀어막았다.
 “쉬······ 누가 들을라.”
 그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민이 손을 떼며 다시 곡괭이를 잡았다.
 “결계 문제까지 해결했으니 여기서 나가는 건 이제 시간문제야.”
 기분 좋게 웃고 있는 정민과 다르게 그린의 표정은 점차 어두워졌다.
 그린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기분 좋은 표정으로 곡괭이질을 이어가던 정민에게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결계 문제를 해결했다고 해서 다 끝나는 일이 아니야.”
 “또 뭔데? 결계만 해결되면 끝나는 거 아니었어?”
 “내가 예전에 말하려다가 만 거 있지?”
 현실이란 건 때론 비정한 법이다.
 “여기가 섬이거든.”
 정민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수용소 밖 결계까지 해결했는데 도망칠 수 없다면, 그 이유는 딱 한 가지밖에 없었으니까.
 ‘바다에 둘러싸인 섬이나 하늘에 떠있는 부유성 같은 거라고 생각은 했었는데······.’
 나름 정확하게 짚었건만 표정이 그리 밝지는 않았다.
 “뭐야 그 표정은?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그린이 예상했던 것보다 정민의 표정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 경우는 본인이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말이 된다.
 “그때 어느 정도 감을 잡은 모양이군.”
 “당연히 눈치챘지. 아니길 빌었지만.”
 이곳이 섬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자 정민의 머릿속은 새하얀 도화지처럼 변해갔다.
 아침 집합 때마다 수용소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눈보라가 시야를 가려 여기가 섬이란 건 이제야 알게 됐다.
 “집합 때는 눈밖에 안 보여서 여기가 섬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다 그래. 누군 아닌 줄 알아? 나도 마찬가지였어. 그러다 알게 된 뒤에 절망했지. 그러면서 안도도 했어.”
 “안도? 여기서 안도를 왜 해.”
 “그야 내가 총대를 안 멨으니까. 대충 보니까 일이 잘못돼도 죽이진 않을 거 같더라고. 교단에선 매월 일정량의 채굴량을 원하고 있고 여기서 시어들이 탈출에 가담한 인원들을 전부 죽이게 되면 그 할당량을 못 채우게 되거든.”
 “자랑이다.”
 “자랑은 아니지. 아무튼 섬 밖으로 탈출할 방법을 알아내야 돼. 결국 섬 밖으로 나갈 방법을 찾지 못하면 결계를 무력화시켜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
 그때 그린은 한셈의 이야기를 꺼냈다.
 “한셈 말이야. 그놈이 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는지 알아?”
 “대충 알겠어.”
 “물론 그놈이 멍청하고 정이 많은 것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섬 밖으로 도망칠 방법을 찾기 위해 이놈저놈한테 다 물어본 거야. 제 딴에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한 거지. 그런데 문제가 뭔지 알아? 수감자 중에 시어가 숨어 있다는 걸 알지 못한 거야. 수감자면 다 같은 수감자인 줄 알았던 거지. 그게 실수였어.”
 “그래서 방법은 찾았고?”
 “방법을 찾았으면 내가 그 따위로 말했겠어? 결국 방법을 못 찾았으니까 내가 널 테스트해 본 거 아니야.”
 “잠깐. 여기가 섬이라면 나갈 방법이 아예 없잖아?”
 “그러니까 찾아보라고. 이 빌어먹을 섬에서 나갈 방법을 말이야.”
 표정을 구긴 정민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다 욱신거리는 머리통을 지압하기 시작했다.
 “골 때리는군.”
 “골 때리지? 나도 골 때려.”
 이렇게 모든 걸 체념할 순 없었다. 무조건 나가기로 한 이상, 바다에 떠다니는 빙산을 타고서라도 이 지옥을 벗어나고 싶은 게 정민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뒤져도 나가서 뒤질 거다.”
 “그럴 줄 알았어. 나도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같이 방법을 찾아보자고.”
 머리를 굴리던 정민이 급히 교단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들이 이 섬에 사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럼 그들이 타고 온 배가 있을 터.
 “그래, 교단에서 왔잖아. 그럼 걔들이 타고 온 배가 있을 거 아니야?”
 “왔었지. 그런데 이미 갔을 거야. 성녀라는 게 그리 한가한 직업도 아니고, 여기저기 부르는 사람들이 많으니 진작 떠났겠지.”
 “떠나는 걸 봤어?”
 정민은 타락한 성녀가 잘생긴 황자 앞에서 농염한 눈짓을 날리는 걸 잊지 않았다. 그 눈빛을 떠올려 보건데, 절대 하룻밤 있다가 갈 모양새가 아니었다.
 “그 여자가 벌써 가진 않았을 텐데? 솔직히 그 여자가 여기 말고 욕정을 풀 데가 어디 있겠어? 이왕 온 김에 뽕은 뽑고 가야 할 거 아니야.”
 물론 그건 정민의 생각이었다.
 그린의 생각은 달랐다.
 “걔들이 그렇게 한가한 줄 알아? 찾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쌓인 욕정을 다 풀고 갈 만큼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고.”
 “그래서 간 건 봤어?”
 “못 봤지.”
 “그러면서 어떻게 확신을 하지?”
 “이봐, 나 황금 고블린 출신이야. 내가 아무리 몰라도 그걸 모를까?”
 “안 갔을 수도 있잖아? 내 느낌에 그 여자 아직 안 갔어.”
 “그럼 네가 찾아보던가. 나한테 따지지 말고.”
 정민은 미간을 구겼다가 급히 두 손가락을 마찰시켜 소리를 냈다.
 “그래, 황자.”
 정민이 떠나가자 그린은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뭐, 황자?’
 그린은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래, 그놈이랑 뒹굴었었지. 떠났다면 그놈이 알고 있겠군.’
 정민은 시어와 주변 수감자들의 눈치를 보며 황자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런 그의 시야에 저기 구석에서 폐인처럼 서 있는 황자와 그에게 붙어 있는 알프레도가 보였다.
 둘은 정민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수감자 중에 가장 잘생긴 황자가 알프레도에게 의문을 표했다.
 “큰 형님께서······ 날 버린 게 아니었다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윈저 황태자 전하께서 웨일스 전하를 얼마나 아끼셨는데요.”
 웨일스는 부정하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런 소리 하지 마. 내가 아는 큰 형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니셨어.”
 웨일스는 남들이 없는 곳에서 자신을 멸시하던 황태자의 눈빛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비루한 자작가 출신의 황비, 아벨린 렌프루.
 그녀가 낳은 제4 황자가 바로 웨일스였다.
 “그럴 리가요.”
 “그야 너는 큰 형님의 진짜 모습을 못 봤으니까 그렇지. 큰 형님은 절대 날 위해 그런 짓을 벌이지 않아.”
 “하지만 사람을 보낸 건 진짜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뭐하러 사람까지 보냈겠습니까? 다 전하를 위해섭니다.”
 “확실히 죽이려고 보낸 거겠지. 살아있는 내가 눈엣가시일 테니까.”
 “말도 안 됩니다. 여기 수감자들 평균 수명이 채 일주일도 안 되는데 황태자 전하께서 굳이 사람까지 보내 죽이려 하겠습니까? 어차피 도망도 못 가는 곳인데. 여기 악명은 다른 누구보다도 전하께서 가장 잘 아시지 않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죽이려 했다면 가만히 지켜봐도 될 일. 굳이 수고스럽게 사람까지 필요가 없었다.
 “그럼 네 말을 믿으란 소리냐?”
 “믿으셔야죠.”
 그때 정민이 불쑥 찾아와 그들에게 말을 붙여 보았다.
 “미안한데, 내가 끼어들어도 될까?”
 웨일스와 알프레도는 일제히 시선을 돌려 정민을 쳐다보았다.
 그는 채굴장의 까만 먼지를 뒤집어 쓴 몸 좋은 청년이었다. 제법 탄탄한 근육질에 황자와도 안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는 알프레도가 정민을 막아섰다.
 “물러서라! 이분이 누군지 아느냐?”
 정민은 곧장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알아. 무슨 황자라며.”
 “안다고?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알프레도가 이까지 드러내며 으르렁거리자 가만히 있던 황자가 나섰다.
 “됐다. 나한텐 무슨 일이지?”
 그는 정밍과는 뒷간 청소로 이어진 인연이었다.
 정민이 작은 목소리로 운을 뗐다.
 “그쪽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우리 구면이었지?”
 “그때 봤었지. 물론 기억하고 있다.”
 정민은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하지. 당신이랑 떡친 여자 있잖아. 그 여자 어디 갔어? 벌써 간 거야? 당신이 잘해 줬으면 벌써 가진 않았을 텐데.”
 “그건 왜 묻는 거지?”
 민감한 질문인지라 황자는 표정부터 어두워졌다.
 “나한텐 아주 중요한 문제거든.”
 “왜? 그녀에게 간택이라도 받고 싶은가?”
 웨일스가 비웃음을 흘리자 정민은 고개부터 저었다.
 “미쳤어? 그년하고 뒹군 순간 교단에서 척살령이 떨어진다는데.”
 “잘 알면서 왜 묻는 게냐?”
 “필요하니까 묻는 거지. 그래서 갔어?”
 황자는 대답을 머뭇거렸다. 묻는 의도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분명 무슨 의도가 있어 묻는 것일 터.
 “무슨 의도로 물어보는 거지?”
 “굳이 알 필요는 없잖아? 그냥 갔냐 안 갔냐만 알려주면 돼.”
 그때 알프레도가 정민을 살피는 눈초리가 심상찮았다.
 하지만 정민은 개의치 않았다. 왜냐면 적당한 변명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황자가 그 입을 굳게 다물자 정민은 미리 준비해두었던 변명 거리를 꺼냈다.
 “그래 솔직하게 말할게. 그때 우리가 끌려갔을 때 있잖아. 그때 간택은 못 받았어도 먹을 건 봤었거든. 그 기회가 또 생길까 해서 묻는 거다.”
 무언가를 기대했던 황자의 낯빛에 실망의 기색이 짙어졌다. 그는 한숨 섞인 어조로 물었다.
 “어차피 아무것도 못 챙겼을 텐데?”
 “챙기진 못 했어도 나름 재미는 봤거든.”
 “재미를 봤다고? 어떻게?”
 “일단 먹고 봤으니까. 왠지 못 가져갈 거 같았거든.”
 “현명하군. 그건 잘한 거다. 본래 줄 생각이 없었다고 들었다.”
 “아무튼 그 여자는 어떻게 됐어? 갔어, 안 갔어?”
 “아직 안 갔다. 언제 갈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언가를 말하려다 황자가 말끝을 흐렸다.
 정민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그의 어깨 위로 손을 얹으며 묘한 미소를 날려주었다.
 물론 근처에 있던 알프레도가 발끈하며 나서려 했지만 그것을 황자가 제지시켰다.
 “또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게냐? 이야기는 다 끝난 거 같은데.”
 “아직 할 말이 남았거든.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단둘이 이야기했으면 좋겠는데?”
 “단둘이?”
 황자가 옆에 있는 알프레도를 살폈다.
 당연히 반가워할 알프레도가 아니었다.
 “안 됩니다, 전하. 저자가 무슨 짓을 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됐다. 어차피 더 잃을 것도 없는 몸이다. 잠시 비켜 서거라.”
 “하오나 전하.”
 “그만. 그쯤하면 됐다.”
 황자는 알프레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민과 따로 자리하게 됐다.
 이때 정민은 주변에 듣는 귀가 있는지 조심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건 당신만 알고 있으면 좋겠어. 우리 같은 수감자 중에 정체를 숨긴 시어가 섞여 있다고 들었다.”
 “뭐? 그게 무슨······.”
 “쉿! 조용히. 누가 들을라. 당신은 그냥 듣기만 해.”
 황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민은 하던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충고하겠는데, 절대 아무도 믿지 마. 당신 똘마니처럼 행동하는 저 녀석도 내가 의심하는 녀석들 중 하나거든.”
 “알프레도는 아니야. 그는 내가 보증해 줄 수 있다.”
 “물론 아닐 수도 있어.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안 그래?”
 “그런데 그런 이야기는 뭐 하러 하는 거지?”
 “그야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게 저 녀석 귀에 들어가면 안 되니까 그러는 거지. 어때? 약속해 줄 수 있겠어?”
 “약속이라······.”
 황자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좋아, 약속하지. 장미 제국의 4황자로서 웨일스란 이름과 렌프루 가문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겠다. 이 대화는 절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다.”
 “그럼 말하지. 지금 당신이랑 심심하면 떡치고 있는 그 여자 말이야. 계속 붙잡아뒀으면 좋겠어.”
 “붙잡아?”
 황자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녀와 계속 엮이는 건 그가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그건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다. 그녀는 나를 끝없이 욕보이고 있다. 그런데 그런 여자를 계속 붙잡아달라고? 나는 못한다. 그렇게는 못해.”
 진저리를 치는 걸 보니 더럽게 싫은 모양이었다.
 그런 황자를 회유하기 위해선 정민도 어쩔 수 없이 미끼를 던져줘야만 했다. 너무 근사하여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미끼를.
 “이 시궁창에서 나가게 해주마.”
 “나가게 해준다고? 그대가 나를?”
 “당신이 그 여자만 제대로 붙잡고 있어 준다면 약속하지. 이 시궁창에서 데리고 나가 줄게.”
 “마음은 고맙지만 여기서 나가는 건 불가능······.”
 “아니, 가능해. 믿어. 나갈 수 있다고.”
 “그게······ 정말인가?”
 “지금 내 눈을 봐. 내가 거짓말하는 것처럼 보여?”
 황자는 그 어느 때보다 진중해진 정민의 눈을 들여다보며 강한 신뢰감을 느끼게 됐다.
 살아 있는 눈빛.
 산송장만이 돌아다니는 이곳에서 절대 찾아볼 수 없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눈빛만으로 그를 신뢰하기에는 황자는 그리 어수룩한 사람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지금까지 당해왔던 독사의 짓궂은 장난 역시 황자가 정민을 믿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됐다.
 “아까 정체를 숨긴 시어가 있다고 했지? 그게 당신일 거라고는 생각 못해 봤나.”
 “설마 내가 독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이미 지겹도록 당했어. 이번엔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건가?”
 황자는 지난 악몽들이 떠오르자 그것을 잊기 위해 머리채를 크게 흔들었다. 그의 표정은 침울했고, 기운 또한 없어 보였다.
 정민은 자신에게 등을 보이려는 황자를 잡아 끌고 자신과 마주보게 했다.
 “진짜야. 믿으라고. 아니면 평생 여기서 썩을 생각이야?”
 “말로는 무얼 못할까? 다 할 수 있어.”
 “그럼 어떻게 하면 믿어줄 건데?”
 “그대가 독사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면. 그땐 믿어주지.”
 눈빛이 살아 있다는 건 비단 몇몇 수감자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시어들 역시 그 눈빛이 정민과 다르지 않았으니까.
 “나는 독사가 아니라니까?”
 황자는 고개부터 저었다.
 정말 진저리나게 당했던 모양이다.
 “말도 안 되는 탈출 이야기를 믿을 바에야 그냥 여기서 죽는 게 낫겠지.”
 정민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등을 보이려던 황자를 끌어당겼다.
 “그걸 떠나서 내가 부탁하는 게 그렇게 어려웠나? 내가 부탁하는 건 그냥 그 여자를 붙잡고 있는 거잖아. 그게 그렇게 어렵나고.”
 “그렇게 쉬워 보이면 당신이 하지 그래?”
 “이봐. 나는 간택을 안 받았잖아. 그걸 내 입으로 말해야겠어?”
 그때 둘을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거기 두 놈.”
 그는 제 장난감을 찾아 광산 안을 둘러보고 있던 독사였다.
 “서로 떨어져라.”
 독사를 보자 황자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알게 됐다.
 “미안하게 됐군. 저 녀석에게 너무 당해서 믿을 수가 없었다.”
 정민 역시 독사를 의식하며 빠르게 말을 남기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해.”
 황자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제부턴 암구호를 정할 거야. 서로를 확인할 수 있는 신뢰지. 앞으로 내가 사과를 말하면, 당신은 백설공주를 말해.”
 “백설공주? 그게 무슨 소리야?”
 “아무튼 그렇게 알고 있어. 서로를 확인하는 암구호니까. 알았지?”
 정민은 다가오는 독사에게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서 조용히 물러났다. 그러면서 아까 황자가 물러나게 했던 알프레도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끝내 찾진 못했다.
 ‘녀석은 어디로 간 거지? 안 보이는데.’
 어디로 갔을까?
 알 수 없었다.
 독사는 자꾸만 눈에 밟히는 정민을 매섭게 쏘아보다가 근처에 있는 황자를 향해 반사적으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우쭈쭈 내 새끼. 여기 있었나?”
 “······.”
 황자는 이제부터 시작될 악몽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체념했다.
 독사는 황자를 개처럼 부리기 전, 슬슬 거슬리기 시작하는 정민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런데 저놈 말이야. 자꾸 거슬리는데 와서 뭐라고 했지?”
 가장 싫어하는 인물에게 굳이 이실직고할 이유가 있을까?
 “별일 아닙니다.”
 “그럴 리가. 말해봐. 저놈이 와서 무슨 말을 했어.”
 핑계거리는 필요했다.
 독사가 괜히 독사겠는가? 자신이 원하는 답변이 나올 때까진 끝까지 물고 늘어질 사람이었다.
 “······저한테 좋았냐고 묻더군요.”
 “좋았냐고? 그게 무슨 소리야.”
 “······성녀 이야기입니다.”
 독사는 그 즉시 손을 뻗어 황자의 주둥이를 틀어막았다. 그리곤 독기를 뿜어내며 황자를 강하게 윽박질렀다
 “미쳤나! 그 이야기를 왜 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성녀가 이곳에 남긴 비밀은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비밀 이야기였다. 장난으로도 떠벌려서는 안 되는 이야기.
 그렇기에 독사가 이리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이 미친 새끼야. 니들은 죽을 팔자라도 나는 아니라고. 그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새면 어떻게 될 거 같아? 찾아온 이단심문관들이 과연 성녀만 죽이고 끝날 거 같아?”
 독사는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아니야. 나까지 죽은 목숨이라고.”
 독사는 틀어막았던 황자의 입을 거칠게 놓아주었다.
 “물론 너는 두말 할 것도 없겠지. 성녀랑 놀아난 장본인이니까.”
 독사는 앞서 떠나간 정민을 찾아보았다.
 저기 보였다. 그는 평소 어울리는 수감자들과 함께 곡괭이질을 하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거슬리던 놈이다.
 독사가 정민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저놈은 계속 거슬리는군.’
 정민을 노려보던 독사는 그 시선을 고정시킨 채 제 바지 주머니에서 개목줄을 꺼내 황자 앞에 보였다.
 개목줄을 본 순간 황자의 표정이 빠르게 식었다.
 “또 괴롭히는군.”
 곡괭이질을 하다가 멈춘 요한이 저 멀리서 황자를 괴롭히는 독사를 보고 말했다.
 “불쌍하네요. 어쩌다 저렇게 됐는지······.”
 아미르도 독사에게 당하는 황자가 불쌍한지 고개를 저었다.
 반면 블락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대놓고 무시하려고 했다.
 “남의 일에 신경 쓰지 마. 그냥 무시해 버리라고!”
 블락은 동료들의 관심을 돌리려는 듯 더 힘차게 곡괭이를 내리찍었다.
 그 소리가 점차 커져감에도 불구하고 요한과 아미르의 시선은 한동안 황자에게 고정된 채 떠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때 정민은 황자와 있었던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거지같은 타이밍에 찾아오는군. 아니야, 오히려 잘 됐어. 내가 독사가 아니라는 확신이 섰을 테니까. 다시 찾아가서 말을 걸면 돼.’
 요한은 말없이 곡괭이질을 이어가던 정민을 불렀다.
 “그런데 황자는 왜 찾아간 거지?”
 “필요했거든.”
 “필요했다고?”
 요한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미르도 정민을 쳐다보며 물음표를 띄웠다.
 블락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놈은 왜?”
 블락이 갑작스레 표정을 구겼다. 한셈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설마 한셈처럼 오지랖 넓게 이놈저놈 다 들쑤시고 다닐 생각은 아니겠지? 그런 바보 같은 짓이라면 당장 때려치워!”
 “그게 아니야. 꼭 필요해서 그래. 그리고 우리랑 같이 갈 거다.”
 “결계 문제는 여기 아미르가 다 해결했잖아. 그런데 뭐가 더 필요하다고 그래?”
 이러다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
 정민은 소란이 일기 전에 사실을 알렸다.
 “여기가 섬이라서 배가 필요했거든.”
 “뭐?”
 모두는 충격과 공포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세상에, 섬이라니······.
 정민은 앞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이야기를 전해듣자, 모두에게 깊은 절망감이 내려앉았다.
 요한이 좋지 못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배가 필요하잖아?”
 “저 녀석이 배를 갖고 있지는 않아. 하지만 배를 가지고 있는 성녀랑 친하지. 저 녀석이 성녀를 붙잡아둘수록, 배는 항구에 계속 정박해 있을 거야. 그럼 그 배를 타고 도망치면 돼.”
 그제야 모두는 수긍할 수 있었다. 괜히 황자에게 찾아가 말을 붙인 게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요한의 표정은 계속 어두웠다.
 “표정이 왜 그래?”
 “만약 데려간다 치면······ 그건 더 큰 문제를 낳을 거다.”
 정민은 요한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강 눈치챌 수 있었다.
 황자는 성녀랑 잤던 장본인이었다.
 “저자가 성녀와 잤다는 걸 잊지 마. 만약 여기서 탈출하게 되면 교단에서도 우릴 쫓겠지만, 저 녀석과 잔 성녀는 과연 가만히 있을까? 아니, 절대 그렇지 않아. 만약 그 사실이 조금이라도 알려지게 된다면 그 여자도 죽은 목숨이거든.”
 그 말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긴 남자랑 잤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 여자도 끝이겠지.”
 “막연히 교단에서 쫓는 것과 탄생 성녀가 직접 추격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야. 급이 다르다고. 탄생 성녀의 추격에서 도망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해.”
 탄생 성녀가 가진 막강한 영향력과 그 무력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아미르와 블락은 그 표정이 벌써부터 창백해졌다.
 다만 감을 잡지 못하는 정민만 표정 변화가 거의 없을 뿐이다.
 “탄생 성녀라는 게 그렇게 대단해?”
 요한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교단에서 선출한 12명의 탄생 성녀는 교단 내에서도 가장 뛰어난 무력을 갖추고 있지. 그에 반해 우릴 봐.”
 요한은 구속구가 차인 손을 들어 보였다.
 “우린 성녀의 추격으로부터 도망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해. 그냥 죽은 목숨이지.”
 조용하던 블락이 나섰다.
 “그럼 황자는 중간에 버리고 가야겠군. 그놈이 말썽을 일으키기 전에 바다에 던져버리자고.”
 그 말에 요한이 눈을 치켜떴다.
 “그건 안 돼. 우리 좋으라고 그를 바다에 버리는 건 내 신념에 반하는 짓이다.”
 “개소리 하지 마! 그래, 못하겠다면 내가 대신해 주지.”
 둘 사이에 신경전이 팽배해지자 정민이 나섰다.
 “둘 다 그쯤 해. 어차피 황자를 바다에 버린다 쳐도 이미 우리가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이상 그 여자가 우릴 곱게 놔줄 거란 생각은 안 드니까. 끝까지 쫓아올 거다.”
 “그래도 직접 잔 녀석이 가장 큰 문제겠지! 그놈은 산 증거니까.”
 “그걸 아는 우리들도 결국 문제라니까?”
 “아무튼 그놈 하나 때문에 모두가 피해보는 건 내가 용납 못해. 놈은 바다에 던져 버릴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블락은 날카로운 송곳니까지 드러내며 제 뜻을 확실히 알렸다.
 정민은 그 문제에 대해선 나중에 생각할 문제라고 판단했다. 일단 나가는 게 우선이었으므로.
 “아무튼 황자는 필요해. 아 그리고 이제부턴 암구호가 필요해졌어.”
 “암구호?”
 “서로를 확인하는 수단이지. 정체를 숨긴 시어 이야기는 예전에 해줬잖아? 이건 그걸 위해서다.”
 정민은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인원만큼은 확실히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만약 대화 전에 사과라고 물으면 너희들은 백설공주라고 답해. 이건 너희들끼리도 마찬가지야. 서로 대화하기 전에 이걸 먼저 확인하라고.”
 모두는 수긍했다.
 광산 채굴이 끝나자 정민과 그 동료들은 숙소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정민은 광산 밖에서 우연히 새 하나를 안고 있는 알프레도를 보게 됐다.
 이 추위에 저 새는 대체 어디서 구했는지.
 알프레도는 주변에 시어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선 손에 쥐고 있던 새를 창공을 향해 날려 보냈다.
 ‘뭐하는 짓이지?’
 알프레도가 날린 새는 짙은 눈보라를 뚫고 계속해서 나아갔다.
 ‘짜증나게 수상한 짓만 골라서 하고 있네. 무슨 소식이라도 전하려는 건가?’
 황자가 아니면 엮일 일도 없건만.
 이미 황자와 엮였으니 알프레도란 수감자 역시 나름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숙소로 돌아온 정민은 가장 먼저 황자부터 찾아갔다.
 하지만 찾아간 황자는 방에 없었다. 분명 독사가 데리고 있거나 성녀와 뒹굴고 있거나 둘 중 하나.
 사라진 황자가 방으로 돌아온 건 그로부터 한 시간 뒤였다.
 정민은 간단한 눈짓만으로 황자를 불러냈고, 둘은 따로 자리하게 됐다.
 “사과.”
 아까 정한 암구호에 대해 말하자 황자는 표정부터 구겼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사과는 왜?”
 별 생각 없이 첫 마디를 내뱉었던 정민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럼 다른 건?”
 정민이 능청스럽게 대꾸하니 황자는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다른 거라니?”
 정민이 알게 모르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잠시 실수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상대는 제가 했던 말을 번복하려는 낌새가 없었다. 묘한 느낌을 남겼음에도 황자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은 아까 나눴던 대화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소리다.
 정민은 상대방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말을 꾸며내기 시작했다. 뜬금없이 사과를 말했던 것에 대한 변명은 꼭 필요했으니까.
 “그 여자랑 뒹굴면서 먹을 것도 챙겼을 거 아냐? 정말 아무 것도 안 챙겨왔어?”
 “미안하지만 아무 것도 안 챙겨왔다. 설마 그런 걸 물어보려고 날 불러낸 거냐?”
 “그럼 그거 말고 뭐가 있는데?”
 “그런 이야기라면 됐다.”
 “이봐, 어디 가?”
 황자가 등을 보였다.
 정민은 떠나는 황자를 구태여 붙잡진 않았다.
 황자는 수감자의 방이 아니라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았다. 그러면서 정민이 있던 자리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돌아간 모양.
 황자는 2층으로 내려오면서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뒤 느닷없이 무언가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건 자신에게 걸려 있던 마법을 해제하는 주문이었다.
 이윽고 황자의 탈을 벗어낸 시어 게넨바인이 표정을 구기며 모습을 드러냈다.
 ‘아닌가?’
 독사는 자신이 잘못 짚은 것에 대해선 크게 개의치 않은 눈치였다.
 ‘느낌이 이상해서 한 번 떠봤는데 별거 없군.’
 때마침 3층으로 올라가려던 시어 필립이 표정을 구기고 있던 독사와 마주치게 됐다.
 “뭐야, 무슨 일인데?”
 독사 주변에 남아 있는 마나의 잔향.
 같은 마법사인 필립이 이를 놓칠 리 없었다.
 “뭘 한 거야? 설마 모습을 바꾼 거야?”
 필립은 둘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시어가 수감자의 흉내를 낼 수 있다는 것은 그들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기에 그러했다.
 “한 놈이 계속 거슬려서 한 번 떠봤어. 있잖아 그 새끼. 몸 좋은 놈.”
 딱히 붙일 별명이 없어 독사는 정민을 몸 좋은 놈이라 부르고 있었다.
 시어 필립도 곧장 알아들었다.
 “알지. 왜? 그놈은 그린과잖아.”
 “이 녀석이 자꾸 내 애완동물에게 관심을 보이기에 뭔가 있을 줄 알고 접근해봤거든.”
 “그래서?”
 “별거 없더군. 그냥 굶주린 거지 새끼였어. 황자가 성녀한테 자주 불려가니까 어디 떨어질 콩고물이 없나 건드려 본 거지.”
 필립은 그때 일을 상기시키며 말했다.
 “그때 말이야. 그놈이 먹을 걸 봐서 그래. 그거 아니었으면 아마 관심도 안 가졌을걸?”
 “하긴. 그놈만 먹을 걸 처먹었었지.”
 독사는 무언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턱밑을 긁적였다.
 “왜. 또 뭐가 걸리는데?”
 “별일은 아니고. 아까 그놈 말이야. 방금 나랑 만난 일을 황자에게 물어보면 그게 골치라서 그래.”
 만약 물어봐서 의심이 생긴다면 누군가 황자의 탈을 썼다는 걸 알아낼지도 모를 일이다.
 “대화는 짧게 끝냈지?”
 “당연하지. 길게 끌어봤자 좋을 게 없는 상황이니까.”
 “그럼 됐어. 눈치는 못 챌 거야.”
 “어떻게 확신해? 대가리를 굴리는 놈인데.”
 “그냥 잊어버려. 그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잘 지내왔잖아.”
 “가장 확실한 건 황자 놈의 머리통을 들쑤시는 건데······.”
 “먼저 간다.”
 필립은 독사를 지나쳐 3층으로 향했다.
 독사는 자리에 남아 상대방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마법에 대해 생각해봤다.
 ‘편하긴 한데, 리스크가 크단 말이야······ 뭐 별일 없겠지.’
 정민은 황자가 2층으로 내려간 걸 확인한 직후 방으로 돌아갔다.
 방으로 돌아간 정민은 가장 먼저 알프레도를 살펴봤다. 역시나 자신을 주시하는 눈빛이 심상찮았다.
 의심 가득한 눈빛.
 ‘저놈이 문제야. 저놈이 있으니까 아무 것도 못하겠어.’
 정체가 수상한 알프레도가 감시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니 행동도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
 ‘한 번 떠볼까?’
 만약 알프레도가 정체를 숨긴 또 다른 시어라면 시도해볼 가치는 있었다.
 정민은 다시 방 밖으로 나갔다. 그리곤 3층 복도 위를 살폈다. 그리고 때마침 3층 복도로 올라온 시어 필립이 탁자 앞에 앉는 걸 보게 됐다.
 ‘타이밍 좋고.’
 정민은 그 즉시 시어 필립을 찾아갔다.
 “저기,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열중 쉬어 자세로 서 있는 정민에게 필립은 시선을 주지 않고 입만 열었다.
 “뭔데?”
 “저희 방에 수상한 놈이 하나 있습니다.”
 두 가지 의도가 있었다.
 시어인 필립을 떠보는 것과, 반장 역할에 충실이 하는 것.
 어떤 이유에서든 지금 이 타이밍에 시어 필립에게 말을 붙인 건 최고의 선택이리라.
 “수상한 놈? 그게 누군데?”
 필립은 지금 막 펼치려던 책장을 다시 접고 정민을 쳐다보았다.
 “그게 알프레도라고, 이번에 새로 들어온 수감자입니다.”
 “알프레도? 그래서 뭐가 수상하다는 거지.”
 “오늘 광산 앞에서 말입니다. 제 눈으로 그가 새를 날리는 걸 봤습니다.”
 “새를 날려?”
 “그것도 그렇지만, 황자랑 계속 붙어 다니는 것도 거슬립니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 아닐까요?”
 말하는 와중에 정민은 필립의 표정 하나하나를 살폈다.
 필립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 흠······ 알았으니까 가봐.”
 말도 건성건성.
 “그 녀석을 그냥 놔두시는 겁니까? 제가 볼 땐 많이 수상한데요?”
 정민이 의아한 얼굴로 묻자, 다시 책장을 펼친 필립이 살벌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봐.”
 정민은 대답 없이 그의 눈만 쳐다보았다.
 “판단은 내가 알아서 한다. 넌 신경 끄고 보고만 해. 알아들었나?”
 재수 없는 놈.
 정민은 고개를 숙였다.
 “주제넘었군요. 죄송합니다.”
 “알았으면 꺼져.”
 정민은 속으로 짧게 욕지기를 내뱉었다.
 정민이 떠나려 하자 필립이 갑자기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 거기 서봐.”
 정민이 고개를 돌리자 그는 책장을 넘기며 무언가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건 그의 비즈니스였다.
 “혹시 말이야. 너만 알고 있는 던전 정보나 특정 단체에다가 팔 수 있는 고급 정보를 알고 있나? 아니면 귀족들이 비밀로 간직한 사생활이나 발설해서는 안 되는 비밀 이야기 같은 거라도 좋아.”
 의도가 뻔했다.
 하지만 전혀 다른 세상에서 찾아온 정민에겐 그저 요원한 일이었다.
 “전혀······ 모릅니다.”
 “그래? 그럼 그 자리에 오래 못 있을 거다. 조만간 다른 놈에게 넘길 생각이니 그렇게 알아.”
 정민이 살며시 표정을 구겼다.
 ‘돈을 밝히는 놈이라고 하더니 진짜네. 그래, 그전에 밖으로 나가주마. 너도 어디 한 번 ×돼 봐라.’
 정민은 그를 엿 먹일 방법은 여기서 탈출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알아서 ×되리라.
 방으로 돌아온 정민은 반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자신을 알게 모르게 감시하고 있던 알프레도를 찾아갔다.
 “뭐, 뭐야?”
 당황한 알프레도가 따져 묻자 정민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왜 자꾸 날 그런 눈으로 감시하는 거지?”
 “누, 누가 감시했다는 거야.”
 알프레도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도움의 시선을 보냈으나, 자기 일도 바쁜 이들은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정민은 전에 없던 살벌한 표정으로 알프레도에게 경고했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거다. 그리고 그건 굉장히 거슬려.”
 “당신이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그들 뒤로 불곰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알프레도의 정체가 수상하다는 건 정민에게 이미 들었던 내용인지라 블락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었다.
 하얀 송곳니를 드러내며 블락이 알프레도를 다시 한 번 위협했다.
 “너는 앞으로 이 방에 들어온 순간 저 벽만 쳐다본다. 만약 조금이라도 고개를 돌린다면 그땐 네 모가지를 날려주마.”
 이때 정민은 알프레도의 표정 하나하나를 유심히 관찰했다. 또한 손이나 다리의 움직임 역시 놓치지 않았다.
 “아, 알았어. 그렇게 할 게. 나원 참.”
 알프레도는 불곰까지 찾아와 자신을 위협하자 그들에게 등을 보이며 벽만 뚫어지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이때 정민과 블락은 서로 마주보며 공통된 생각을 가지게 됐다.
 정민의 표정은 전과 다르게 심상찮았다.
 ‘겉으론 우릴 속일 수 있어도 사람 눈이란 건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아. 이 녀석 정체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우릴 같잖게 여기고 있어.’
 정민과 블락은 요한과 아미르를 찾아갔다.
 이 넷은 지금 이 순간에도 벽만 쳐다보고 있는 알프레도를 예의주시했다.
 블락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겁에 질린 인간들을 수도 없이 많이 봐왔다. 하지만 저 녀석은 아니야. 나를 두려워하기는커녕 우습게보고 있어. 오히려 내가 위협을 느꼈다. 뭐라 단정 지을 순 없지만 저놈은 나보다 상위 포식자야. 내가 먹잇감이다.”
 동물적 감각이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블락이 그렇게 말하자, 정민을 포함한 모두는 딴죽을 걸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멀리서 지켜보던 요한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나도 사람 보는 눈은 꽤 정확한 편이야.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나봤지. 저자가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체를 숨겼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뭔가 있어.”
 그들 중 알프레도를 의심하지 않은 건 아미르뿐이었다.
 “그럼 저 사람이 시어인가요?”
 블락이 부정하듯 고개부터 저었다.
 “날 두려워하지 않는 건 2층에 있는 그 언데드놈도 마찬가지야. 그놈은 나보다 상위 포식자라는 느낌은 들지 않지만 적어도 나를 두려워하진 않아.”
 그 다음으로 입을 연 건 정민이었다.
 “아니야. 만약 둘 중에 정체를 숨긴 시어가 있다면 나는 저 녀석보다 파커란 녀석을 의심할 거야.”
 아미르가 의문스레 반문했다.
 “왜죠?”
 “그야 저 녀석은 우릴 너무 우습게봤거든. 진짜 시어였다면 저렇게 어설프게 행동 안 해. 제대로 연기했겠지.”
 정민이 블락과 요한에게 시선을 주자 둘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알프레도가 보였던 모습은 흡사 어린애들 장난에 맞장구 쳐주는 어른 같은 느낌이었다. 정체를 숨긴 시어라면 절대 그런 실수는 안 하리라.
 알프레도를 예의주시하던 정민은 무언가를 확신한 듯 입을 열었다.
 “분명 우리들과 전혀 관계없는 다른 꿍꿍이가 있을 거야. 그리고 숨긴 실력은 최소 시어급이야. 그게 아니면 시어들이 벌써 눈치 깠을 테니까.”
 요한과 블락은 동의하는 눈치였다.
 아미르는 아직 감을 잡지 못한 듯 정민이 한 말을 되뇌기 시작했다.
 정민은 무슨 말을 더 하려다 모두를 조용히 시켰다.
 시어 필립이 문 밖까지 찾아와 안쪽을 살펴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정민에게 가 있지 않았다. 그때 필립은 아까 전 정민이 수상하다고 말한 알프레도를 살펴보고 있었다.
 “전부 조용히 해.”
 정민은 반장답게 나서며 모두를 조용히 시켰다.
 이와 맞물려 방문이 열리더니 필립이 안쪽을 향해 목소리를 냈다.
 “이름이 알프레도라고 했지? 나 좀 보자.”
 시어의 호출.
 벽만 쳐다보고 있던 알프레도는 그 부름에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요한이 물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내가 고자질 좀 했거든. 저 녀석이 하는 짓이 수상하다고.”
 하지만 정민도 확신할 순 없었다.
 ‘이상하네. 내가 고자질할 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는데······ 이제 와서 생각이 바뀐 건가?’
 둘의 대화 내용을 듣기 전까진 알 수 없는 일.
 알프레도가 불려가자 정민은 다른 것으로 대화 주제를 바꿨다.
 탈출에 관한 거였다.
 “아무튼 결계 문제는 해결됐고, 남은 건 밖의 추위를 버티는 거랑 나갈 타이밍인데······ 밖에 있는 눈보라는 어떻게 하지?”
 자기 혼자 생각하기엔 벅찼기에 모두에게 물었다.
 그에 자신 있게 입을 연 건 아미르였다.
 “추위 문제도 제가 해결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또 정령이야?”
 “네. 화염 정령을 부르면 돼요. 그 정령이 우릴 지켜줄 거예요.”
 “좋아. 그럼 추위 문제도 해결한 거네?”
 모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무슨 문제?”
 “하급 정령이라도 부르려면 마력 스탯이 최소 6은 되어야 하는데, 지금 당장 스탯을 추가해도 5밖에 안 돼요.”
 아미르의 레벨은 아직 1이었다.
 “2레벨까지 경험치가 얼마나 남았는데?”
 “조금이요. 내일은 아슬아슬하고 모레까지 광산에서 레벨업을 하면 2는 찍을 수 있을 거 같긴 한데······.”
 “그럼 이틀 남았네. 배 위치만 알면 바로 나갈 수 있겠어.”
 “그리고 이건 제 생각인데, 마나 포션이 하나 정도는 필요할 거 같아요.”
 “뭐?”
 “계속 생각해봤는데, 제가 만약 스탯을 몰아 찍어도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마나가 부족하면 그땐 끝이잖아요? 거기에 대한 최소한의 대비는 해놔야죠.”
 “여기서 마나 포션을 어떻게 구해?”
 블락이 험악하게 표정을 구겼다.
 “차라리 칠면조 요리를 구해오라고 해. 여기서 마나 포션을 대체 어떻게 구하라는 거야?”
 요한이 나서며 블락을 진정시켰다.
 “왜 화를 내고 그래? 아미르는 그냥 마나 포션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말했을 뿐이야.”
 “물론 당신이 주는 버프가 있긴 하지만 그건 너무 시끄럽죠. 그건 안 돼요.”
 정민이 맞장구쳤다.
 “맞아. 틀린 말은 아니야. 혹시 모르니 나름 대비는 해놔야지.”
 정민이 생각하듯 미간을 모았다.
 ‘그런데 어디서 구한다?’
 그때 그들 뒤에서 고블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빼고 무슨 말들이 그리 많아? 나도 한 팀 아니었나?”
 모두는 경계하는 눈초리로 그린을 쳐다보았다.
 그린은 웃으며 그들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좋은 이야기가 있으면 나도 끼워달라고. 너희들끼리만 쑥덕거리지 말고.”
 블락이 송곳니를 보였다.
 “꺼져라. 갈기갈기 찢어버리기 전에.”
 블락의 위협에도 그린은 콧방귀부터 뀌었다.
 “자신 있으면 해봐. 나는 여기서 비명만 지르면 되니까.”
 정민이 그린을 살폈다.
 딱히 수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사이도 아니었으니 시어가 탈을 쓰고 있을 확률도 극히 낮았다.
 탈을 썼다면 요한, 아미르, 블락 중 하나일 터.
 하지만 이들은 이미 확인을 끝마친 상태.
 물론 시어 자체일 수도 있었으나 정민은 그럴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봤다.
 만약 그린이 숨은 시어였다면 누군가 황자의 탈을 쓰고 정민을 떠보는 일은 아마 없었으리라. 왜냐면 그린이 밀고하여 이미 다 알고 있을 테니까.
 정민은 별 의심 없이 마나 포션에 대해 물어보았다.
 “혹시 마나 포션에 대해 알아?”
 “아, 마나 포션. 당연히 알고 있지. 내가 하나 꼬불쳐둔 게 있긴 하거든.”
 “네가 어떻게?”
 “그때 한셈이 가지고 있던 마나 포션은 지금쯤 어디로 갔을까? 그때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설마 땅으로 꺼졌을까? 아니면 하늘로 솟았을까.”
 “설마 너한테 있냐?”
 “물론이지. 보여줘?”
 그린은 그들과 거리를 벌린 뒤 인벤토리에 고이 모셔두었던 파란색 물약을 몰래 꺼내 보였다.
 “봤지? 이래도 날 무시할 생각은 아니겠지?”
 정민이 동료들과 시선을 교환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좋아, 데려가줄게. 대신 마나 포션은 이쪽으로 넘겨라.”
 “미친 소리. 내가 미쳤으면 너희들한테 넘겨주겠지.”
 “아니면 넌 우리 계획에 끼지 못해.”
 “그렇게 하시던지. 나는 뭐 아쉬울 거 없으니까.”
 “좋아. 네 맘대로 해. 대신 필요할 땐 꼭 넘겨라.”
 “두말 하면 잔소리지. 앞으로 잘해 보자고, 친구들.”
 유난히 ‘친구들’이란 단어를 강조해서 말한 그린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물론 정민을 포함한 그 누구도 그린을 반기지 않았다.
 하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마나 포션이 그린의 인벤토리에 있는 이상, 탈출을 위해선 무조건 데려가야 했으니까.
 “어차피 저놈도 우리랑 같은 생각이니까, 말썽은 안 피울 거야.”
 “꼭 데려가야 하나요?”
 그들 중 그린을 가장 반기지 않았던 건 바로 아미르였다.
 아미르는 자신이 앓아 누웠을 때 악담을 서슴없이 퍼부었던 그린을 잊지 않고 있었다.
 마나 포션만 아니었다면 상종도 안 했으리라.
 “예전 일은 잊어. 어차피 나가면 두 번 다시 안 볼 사이니까.”
 
 -메인 퀘스트 내용이 갱신됩니다.
 [메인 퀘스트(1)]
 *탈출 계획(진행 중)
 -재수 없는 고블린 녀석이 우리 일에 불쑥 끼어들었다. 내치려고 했지만 놈이 마나 포션을 가지고 있단다. 별로 내키진 않지만 아무래도 이 녀석과 함께해야겠다. 하지만 계속 같이 하진 않을 것이다.
 -역시 아미르가 구세주였다. 아미르는 화염 정령을 불러내어 우리를 추위로부터 지켜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미르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마나 포션이 한 개 정도는 필요하다고 했다. 마나 포션을 대체 어디서 구하지······.
 *정보 수집(완료)
 *여긴 어디야?(완료)
 [서브 퀘스트(3)]
 *버려진 황자(진행 중)
 -자꾸만 나를 감시하는 것 같아 블락과 함께 몰아붙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를 가소롭게 여기고 있었다. 정체가 무척 수상하다. 이 녀석 대체 뭘까?
 -알프레도라는 녀석이 수상하여 시어 필립에게 일러바쳤다. 하지만 시어 필립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눈치다. 뭔가 있는 걸까?
 -알프레도가 광산 밖에서 아무도 모르게 새를 날리는 것을 보게 되었다. 무척 수상하다.
 -알프레도라는 수감자와 만나게 됐다. 그가 말하길, 평소 황자라 불리는 녀석은 장미 제국의 제4 황자인 웨일스 렌프루란다. 그를 여기서 탈출시켜 주면 보상해 주겠다고 말했다.
 *타락한 성녀(완료)
 *철광석 채굴(완료)
 
 시어 필립에게 불려나간 알프레도는 복도가 아닌 심문실까지 끌려갔다.
 알프레도를 따로 불러낸 시어 필립은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의 멱살부터 잡았다.
 “이봐, 내가 각별히 조심하라고 누누이 말했지? 여기 지켜보는 눈이 대체 몇 갠지 알아? 이거 걸리면 우리 둘 다 끝장이라고!”
 알프레도는 그에게 두 손바닥을 보이며 일단 진정시키고자 했다.
 “진정해. 지금까지 아무 일 없었잖아? 숨어드는 것도 완벽했고.”
 “아까 거기 반장 새끼가 나한테 와서 꼬질렀어. 당신 수상하다고. 거기서 빌어먹을 새는 대체 왜 날린 거야!”
 “왜 날리긴, 필요하니까 날린 거지.”
 “이봐, 이 일이 알려지면 내가 어떻게 될지 생각해봤어? 나는 여기서 모가지라고!”
 “그래서 두둑이 챙겨줬잖아. 왜 이제 와서 그래?”
 “지금 내 목숨이 달렸다니까!”
 저도 모르게 목청을 높였던 필립이 멱살을 잡았던 손을 거칠게 놓아주며 급히 주변을 살폈다. 이건 남이 들으면 무척이나 곤란한 내용이었다.
 필립은 격양된 마음을 가라앉히며 무언가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발끝에서 시작한 작은 마나 파동이 내실을 훑고 복도까지 퍼져나갔다.
 다행히 그의 감지 마법에 걸린 이는 아무도 없었다.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힌 필립이 알프레도의 면상에 삿대질을 했다.
 “조심해. 이거 걸리면 당신이나 나나 여기서 끝장이니까.”
 “걱정 마. 다 잘 될 거야. 앞으로도 문제없을 거고.”
 “그리고 그 약속은 꼭 지켜. 나는 오직 그거 하나만 보고 이러는 거니까.”
 “친필 서한은 이미 보여줬잖아? 걱정하지 마. 그 약속은 꼭 지켜질 테니까.”
 대화를 마친 둘은 심문실을 나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자리로 돌아갔다.
 
 * * *
 
 광산에서 기계처럼 곡괭이를 내리찍던 정민은 어젯밤 시어 필립에게 끌려갔던 알프레도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별일 없이 그냥 돌아왔어. 분명 내가 꼬질러서 불려갔을 텐데, 왜 그냥 돌아온 거지?’
 정체를 감춘 일이나 시어 필립에게 끌려가 아무 일 없이 돌아온 일이나 모든 게 수상했다.
 ‘이상해. 그린이 말하는 걸 보면 보통 곱게 안 놔준다는데.’
 정민이 알프레도를 노려보며 의심하고 때, 알프레도 역시 그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시한 채 오직 황자에게만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가 여길 찾아온 이유.
 플레이어 수용소에 갇힌 장미 제국 제4 황자 때문이었다.
 ‘어제 보냈으니, 오늘 배를 띄우겠지. 그럼 내일 저녁이나 늦어도 모레 새벽이면 여길 벗어날 수 있어.’
 그가 정민을 대놓고 무시하는 이유가 있었다. 여기서 남아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늦어도 모레 새벽이면 황자와 함께 감쪽같이 사라질 터.
 그러니 수감자의 불편한 시선 따위가 신경 쓰이겠는가?
 알프레도는 주변 눈치를 보더니 황자에게 몰래 접근했다.
 “전하, 접니다. 알프레도.”
 웨일스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특히 정신적으로는 이미 무너져 내렸다. 그는 영혼이 없는 얼굴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전하.”
 재차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웨일스가 고장 난 태엽인형처럼 고개를 돌렸다.
 “늦어도 모레 새벽이면 여길 빠져나갈 겁니다. 전하께선 그때까지 버텨 주시면 됩니다.”
 “여길 나간다고······ 그래 나가야겠지. 나가야 돼.”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소리에도 황자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알프레도는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구겼다.
 ‘상태가 너무 안 좋아. 이러다 일이 틀어지는 건 아니겠지?’
 알프레도는 근처에 있던 시어가 다가오자 다급히 황자와 거리를 벌린 채 딴청을 피웠다.
 잠시 후 알프레도가 다시 황자를 찾았을 때, 그는 정민과 마주보고 있었다.
 정민은 저만치 떨어져 있는 알프레도를 의식하며 황자의 뺨을 살짝 때렸다.
 “이봐, 정신 좀 차려.”
 뺨을 몇 대 얻어맞고서야 황자의 흐리멍덩한 눈동자에 겨우 초점이 잡혔다.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상태가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다.”
 초췌한 몰골의 황자가 등을 보이려하자 정민이 잡아끌었다.
 “전에 하던 이야기 까먹었어? 사과.”
 “사과······.”
 사과란 말이 나오자 황자가 어제 일을 기억해냈다.
 “그래, 백설공주.”
 “맞네. 정신차려봐. 할 말이 있으니까.”
 알프레도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물러서거라. 그분이 누군지 알고 그리 함부로 대한단 말이냐.”
 “나는 당신한테 볼일 없으니까 조용히 해. 시어가 들을라.”
 황자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알프레도가 정민을 밀쳐내려고 하자 황자가 알프레도를 향해 손을 뻗으며 제지시켰다.
 “그만. 됐다.”
 취하는 행동을 보니 정민에게 뺨을 얻어맞고 정신을 차린 것으로 보였다.
 황자는 알프레도를 물리고 정민과 따로 자리했다.
 정민은 저만치서 자신을 살피고 있는 알프레도를 경계하며 입을 열었다.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어제 일은······ 별로 기억하기 싫군.”
 아무래도 독사가 어제 있었던 일을 감추기 위해 황자를 지독하게 괴롭힌 모양이었다.
 정민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제 한 이야기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지?”
 “날 여기서 꺼내주겠다고 했지.”
 “그리고 이건 우리끼리의 얘기니까 어제한 약속 꼭 지켜. 저 새끼한테 절대 말하지 마.”
 “나는 한 입으로 두말 하지 않는다. 괜한 걱정이다.”
 “좋아. 당신 그 여자만 잘 붙들고 있어.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그래서 언제 나갈 생각이냐.”
 “내일 저녁쯤? 그쯤 생각하고 있어.”
 내일이란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어. 배가 어디 있는지 알아야 돼. 이걸 모르면 내일 못 나가.”
 
 
 to be continued

댓글(2)

ds****    
현재 12권 읽는 중.... 8~9권까지는 정말 재미있음 후에 급하게 전개하면서 본래 컨셉과 설정 붕괴가 시작 12권에 가선 분위기도 무너지도 모든게 무너지기 시작함 지금 12권 40%까지 읽었는데 더 이상 읽기가 무서워짐.
2020.02.23 18:08
최종변론    
능력치가 족쇄인가.. 스탯에 의해서 기존 피지컬이 다 봉인 돋보이는 설정 아니면 말이 안되는 전개인데
2020.02.25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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