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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P시스템 for ㈜차원 1권

2019.07.17 조회 3,115 추천 35


 VIP시스템 for ㈜차원 1권
 
 
 목차
 
 1장. 게임의 VIP시스템이라고?
 2장. 보상이 쏟아진다
 3장. 담금질의 시간
 4장. 등급 업(Up) 심사 개최
 5장. 서바이벌에 참가한 이유
 1장. 게임의 VIP시스템이라고?
 
 
 1.
 연호는 17살 당시 정말로 세상이 멸망하는 줄만 알았다.
 TV에서는 전문가가 “인류의 종말”을 거론하며 호들갑을 떨었고, 각종 커뮤니티에서는 도심을 벗어나 숨어야 한다고 야단법석들이었다.
 연호도 여자 친구 앞에선 자못 허세를 부렸지만, 몰래 지식인에 질문을 올리곤 했었다.
 
 -진짜로 사람 많은 도시에 있으면 다 죽나요? 할아버지 댁이 시골인데 거기로 피신하는 게 좋을까요? 내공 150 검. 장난 사절.
 
 당시엔 출처를 알 수 없는 유언비어들이 도시 괴담처럼 흘러 다녔다. 미신의 신봉자들이 거리에 넘쳐났다.
 상실의 시대.
 혹은 혼돈의 시대.
 편의점이나 마트를 습격해, 라면을 비롯한 생필품 따위를 훔치는 것은 화젯거리 축에도 끼지 못했다. 매일같이 영화에서나 보던 사건들이 눈앞에서 스펙터클하게 펼쳐졌다.
 “이 지옥에서 벗어나야만, 광명이 있으리라!”
 까마득한 높이의 고층빌딩에서는 하루에도 몇 명씩 투신자살을 시도했다. 본래, 명소였던 한강 다리는 아예 북새통을 이뤘다.
 지금 죽어야 진정한 천국에 도달한다나 뭐라나.
 극도로 혼란스러웠고, 누구나 “끝” 혹은 “절망”이라는 글자를 떠올렸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세상은 여전히 어떻게든 굴러가고 있었다.
 조금 팍팍해지고.
 전보다 조금 더 괴상해졌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인생은 딱히 변하지 않았다.
 
 낙엽이 수북이 쌓인 11월의 초입.
 불어오는 찬 바람에 꼬깃꼬깃한 외투를 꺼내 입은 연호의 삶도 예전과 비슷했다. 가난하고 볼품없고 기타 등등.
 연호는 손을 호호 불며 새벽 5시부터 바삐 움직였다.
 고시원에서 새우처럼 웅크려 쪽잠을 잔 탓인지, 걸음마다 뻐근하게 뭉친 근육이 비명을 내지른다.
 두드득. 두드득.
 “끄응······ 죽겠군.”
 스트레칭을 하며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는 연호.
 졸음 탓에 반쯤 잠긴 눈으로 그는 용케도 산비탈의 험한 내리막길을 성큼성큼 걸었다. 칠흑 같은 야밤에도 쏘다닐 수 있을 만큼 이 달동네에 익숙한 연호라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긴 하품이 끝나자, 목적지에 도착했다.
 
 <장가 인력사무소.>
 
 허름하기 짝이 없는 어느 동네라도 하나쯤 있을 법한 인력소.
 연호는 익숙하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짤랑.
 새벽 댓바람부터 담배 연기가 자욱하다.
 21세기에 어울리지 않는 구형 TV, 쥐가 파먹기라도 한 것처럼 보이는 낡은 소파, 벽 한편을 몽땅 차지한 작전지도까지.
 언제나 마찬가지인 일상적인 광경.
 “오. 왔냐? 피곤했나 보군. 오늘은 3등이야.”
 담배를 꼬나문 인력소장 장 씨가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했다. 연호는 꾸벅 머리를 숙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연호야, 오늘도 ‘찌’로 갈 거냐? 그러지 말고 건설이나 청소 쪽을 한번-”
 “장 아저씨, 저 생각 변함없습니다.”
 “쩝. 그래. 알았다. 어휴, 똥고집하곤. 너 성실하니까 내가 꽂아준대도 한사코 거절하네. 어이구.”
 장 씨가 입맛을 다시곤 명단에 연호의 이름을 기입했다.
 
 헌터 업무 / 비 헌터 업무.
 
 둘로 나누어진 명단 중 헌터 업무라는 글자 아래에 세 번째로 강연호란 이름 석 자가 새겨졌다.
 사건이 끝나고 깔끔하게 정리하는 청소부나 기반시설을 닦는 건설 업무가 보람찬 일임을 연호도 잘 알고 있었다.
 안전하고 돈도 적당히 만질 수 있다고 들었다.
 반면 자신이 맡는 ‘찌’ 역할은 목숨을 걸어야 했지만, 그 위험도에 비해 보수는 턱없이 짰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일이 연호의 평생 꿈이고 로망인데.
 “여러분 보이십니까? 대한민국에 단 6명밖에 없는 S급 헌터 이준호 씨가 막 전용기로 인천공항에 착륙했습니다!”
 마침 TV에서 헌터 이준호가 제트기에서 내리면서 양손을 흔드는 모습이 비춰졌다. 고급맞춤 슈트를 걸치고 명품 선글라스를 착용한 그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이에,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몰린 인파가 격렬한 환호성을 지른다. 정성스러운 응원피켓엔 <평화의 상징, 이준호! 오직 너만 사랑해.>가 LED로 반짝였다.
 “꺄악. 오빠! 여기 좀 봐줘요!”
 “언제나 응원합니다! 파이팅! 꼭 좀 지켜주세요!”
 현시대에 가장 각광받는 직업은 누가 뭐래도 헌터다.
 부, 명예, 권력까지 뭐하나 부족한 게 없다.
 ‘인류를 수호하는 초인들’이라는 거창한 대의명분 아래 국가 전체가 나서서 막대한 지원을 쏟았다. 돈이 모이자, 헌터사업은 천정부지로 성장했다.
 과거 스포츠 스타나 팝스타 그 이상의 명성을 누리는 것이 오늘날의 헌터였다. 아니, 그보다는 만화나 영화에 등장하는 히어로의 위상에 버금간다는 표현이 더 적절했다.
 이준호 일대기가 발간되자마자, 압도적 격차로 주간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으니 더 말해 무얼 할까.
 격동하는 시대, 정상에서 빛나는 꿈의 자리.
 피 끓는 청춘이라면 누구나 저 왕관을 쓰고 싶어 했다.
 연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20살이 되자마자, 헌터 라이센스를 취득했다. 이후 2년간은 헌터 대체복무로 군 의무를 수행했다.
 균열지역 통제하고 헌터들 출입관리하고 등등.
 남들은 시간만 버린다고 흉봤지만, 꽤나 유익한 날들이었다고 연호는 회상했다.
 제대 이후론 곧바로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당시엔 군대에서 경험도 쌓았겠다 싶어 자신감이 철철 넘쳤다.
 
 그리고.
 5년이 흘렀다.
 
 여전히, 그의 헌터 등급은 처음과 같은 F등급.
 평소 가성비와 효율을 입버릇처럼 주창하는 그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비효율의 극치인 찌꺼기 역을 무려 5년 가까이 맡고 있는 중이었다.
 “야. 이만 포기해. 다 널 위해 하는 말이야. 넌 리미트(Limit) 해제가 안 돼서 불가능하다고. 일반인이라고 한계가 그어진 거나 마찬가지야. 한마디로 재. 능. 부. 족!”
 하지만 연호는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꺾이면 자신의 영혼이 툭 부러질 것 같았다.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그래서 끝끝내 포기하지 못하고, 이렇게 헌터 일에 매달리는지도 몰랐다.
 TV에서 눈을 돌린 연호는 털썩 소파에 앉았다.
 “쿨······ 쿨.”
 선객으로 자리 잡은 둘은 고개를 파묻고 졸고 있었다.
 이제 겨우 20대 초반 김한수와 꺼칫꺼칫한 수염을 기른 30대 한철봉. 언제나 인력소에 가장 일찍 도착하는 건 연호를 포함한 셋 중 하나였다.
 그들의 눈물과 피땀을 연호는 익히 보아왔다.
 매일같이 샌드백을 치고, 런닝으로 육체를 단련한다. 때론 소주 한잔을 기울이며, 울분과 눈물을 삼키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27살 연호는 둘을 마주할 때마다,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보는 것 같아 착잡하고 안쓰러웠다.
 꿈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지만, 현실은 고작 F급 헌터.
 제자리걸음에 이제는 조금 지친다.
 “후우······ 쓸데없는 생각 그만하고, 잠이나 자자.”
 씁쓸한 입맛을 뒤로하고, 연호도 눈을 감았다.
 
 잠시 시간이 흘러 인력소가 사람들로 북적거릴 때쯤, 문이 덜컥 열리더니 앳된 얼굴이 들어왔다.
 본격적인 하루의 시작이다.
 “사장님, 픽업 왔습니다. 제가 처음이죠? 베테랑으로 좀 부탁드려요. 초짜 투입이라.”
 이제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한 듯 보이는 까까머리.
 찌를 픽업하러 온 클랜(Clan)의 막내였다. 나이가 어리지만, 저래 보여도 E급 헌터다.
 어느 클랜에도 속하지 못해 인력소에 모인 F급 헌터들은 그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김한수 씨. 에 그리고······.”
 잠시 이야기를 나눈 장 씨가 명단을 훑더니, 몇 명을 호명했다.
 뒤이어 이름이 불린 연호도 주섬주섬 일어났다.
 인력소를 나서니, 새하얀 입김이 절로 나오는 아침 추위가 몰아친다.
 연호는 팔짱을 끼고 총총걸음으로 대기 중인 검은 승합차를 향해 달음박질쳤다.
 “어라랏. 연호 형, 언제 왔어요?”
 “너 쿨쿨 잘 때 인마.”
 먼저 창가에 자리 잡은 김한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호는 질문에 답하며, 시트에 몸을 끼워 넣었다. 이어서 몇몇 사내가 더 올라타, 차량엔 총 6명이 탑승했다.
 연호가 안면이 있는 이들과 눈인사를 하는 와중에도, 한수는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형. 형. 꿈을 꿨는데 느낌이 좋은 거 있죠? 이거 완전 길몽이야! 오늘이야말로 리미트 해제할 거 같아요.”
 “어, 그래. 나 잊지 마라.”
 “에이. 제가 어떻게 형을 잊어요. 내가 진짜배기 헌터 되면 스쿼드(Squad) 꾸려서 잘 이끌어 드릴게. 흐흐.”
 “너만 믿는다. 인마. 동생 덕 좀 보자.”
 농담처럼 답하면서 연호는 쓰린 속을 달랬다.
 ‘빌어먹을 리미트(Limit)!’
 인간은 태초부터 육체적 한계가 존재했다.
 예를 들어, 10년 전만 해도 100미터 달리기 세계 신기록은 9초 58이었다. 당시엔 인류의 한계에 도달한 어마어마한 기록이었지만······.
 지금은? 글쎄.
 작정하고 달리면 소닉붐마저 발생시킬 수 있는 초인이 존재하는데, 그런 기록 따위가 의미가 있을까.
 10년 전 발생한 대격변.
 신화나 전설에 속하는 낯선 존재가 차례차례 현실 속으로 등장한 이후,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인간의 리미트 해제였다.
 덤프트럭을 들어 올리는 명백하게 상식을 초월한 괴력.
 “쉭쉭!” 하며 입으로 내는 소리가 아니라, 실제로 공기를 찢는 핸드 스피드.
 마라톤을 100미터 달리기하듯 전력 질주로 뛰어도 멀쩡한 심폐지구력.
 단련만 하면 인간은 이제 초인의 영역에 발을 내밀었다.
 물론, 리미트(Limit)가 해제된 자만.
 헌터 라이센스 등급을 F에서 E로 업(up)하기 위해서는 리미트 해제 인증이 필수조건이니, 이른바 ‘진짜’ 헌터와 F급 헌터 사이엔 실로 어마어마한 격차가 존재했다.
 그래서 F급 헌터는 사실상 헌터 취급도 안 해주는 거고.
 고작 한 단계지만 이를 넘기 위해, 오늘도 전국의 수많은 F급 헌터들은 땀범벅으로 단련을 빙자한 혹사를 감행 중일 거다.
 한데, 골치 아픈 문제가 하나 있었다.
 이 리미트의 해제 원리를 아는 이가 지구상에 없다는 것!
 
 -흠. 언제 깨달았냐고요? 길 가다가 왠지 소나무를 뽑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숙! 한 손으로 쉽게 뽑히던데요? 그 이후로······.
 
 S급 헌터로 유명한 이한울의 인터뷰 발언.
 국가 차원에서 무수한 연구와 실험이 이어졌지만, 속 시원히 밝혀진 바는 없었다. 학계의 전문가랍시고 앉아 있는 이들이 매년 연구 결과를 발표했지만, 영 신통치 않았다.
 그래서 F급 헌터들 사이엔 각종 스산한 괴담이나 검증되지 않는 민간요법, 확증되지 않은 이론 따위가 무수하게 굴러다녔다.
 그나마 가장 널리 알려지고 믿을 만한 설이 “최대한 균열 가까이에서 전투를 수행하면, 불현듯 리미트가 해제된다”라는 누군지 모를 이의 경험담이었다.
 ‘그거 하나 바라고 모두들 찌꺼기 처리라도 하러 가는 거지.’
 어차피 몸도 단련하고, 실전 감각도 살려야 했다.
 연호도 이런 임무 몇 번이면 금방이라도 리미트 해제하고, 당당하게 진짜 헌터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렇게 5년이 지났지만.’
 철컥.
 그때, 장 씨와 조율을 마친 까까머리가 핸들 앞 좌석에 앉았다. 안전벨트를 매며 웃는 낯으로 말을 건다.
 “오늘 잘 좀 부탁드립니다. 저희 초짜들 현장 분위기 익힐 겸 투입하는 거라. 경험은 그쪽 분들이 훨씬 많으실 겁니다.”
 초짜란 말에 사내들이 웅성거렸다.
 헌터가 초보라는데 어느 누가 안심하고 “예예.” 하겠는가.
 까까머리는 안심시키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여차하면 저희 클랜에서 인원 대기 중이니, 안전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하하.”
 
 -콰콰쾅!
 
 ‘안전은 개뿔.’
 연호는 미소 짓던 까까머리를 떠올리곤 욕설을 뱉었다.
 방금, 머리를 내밀었던 F급 헌터의 머리통에 검은 침이 푹푹 하고 박혔다. 그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절명했다.
 스팅 스네일(Sting Snail)의 침이다.
 본래라면 레드경보 <위험도 0.3> 정도 되는 달팽이 주제에 지금은 무지하게 뿔이 났다.
 모든 건 그 빌어먹을 초짜들의 실수 탓이었다.
 ‘대체 아카데미에서 뭘 배우고 온 거지?’
 사무국 놈들이 필시 리미트 해제만으로 판단해 라이센스를 발급한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연호는 몸을 날렸다.
 ‘헌터 자격도 없는 놈들. 지닌 힘도 제대로 못 쓰는 멍청이들!’
 푹푹푹!
 방금까지 그가 머물던 벽에 무수히 작은 구멍이 뚫렸다.
 연호가 스팅 스네일들의 연사 속도를 계산해서 간발의 차로 피한 것이다.
 ‘여유시간 14초. 각도 45도 방향. 후속타는 7초 간격.’
 이내 다음 침 역시 벽을 뚫고 쏟아졌지만, 연호는 한 번의 구름으로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비록 F급 헌터라지만, 연호는 풍부한 경험과 지식으로 무장한 노련미 넘치는 전사였다. 괜히 5년이나 업계에서 몸 성히 지내온 게 아니다.
 스윽-
 간이거울을 통해 동태를 살피니, 꾸물꾸물 이동하는 놈들이 눈에 들어왔다. 스팅 스네일은 이동과 공격을 동시에 못 한다.
 ‘좋아. 시간은 제법 벌었어.’
 연호는 부서진 벽에 기대 숨을 몰아쉬는 한수에게 달려갔다. 한수의 복부에선 붉은 피가 연신 새어 나왔다.
 “어라랏······ 형······ 오늘 나······ 꿈이 좋았는······ 데······ 대······ 체 왜······.”
 “말하지 마. 나만 믿어라. 내가 너 반드시 살린다.”
 “큭······ 불······ 가능한······ 거······ 형도 알잖아······ 지금 이······ 때 얼른······ 도망가. 형이라면······ 살 수 있잖······ 아······.”
 털썩.
 몇 마디 뱉던 한수가 끝내 정신을 잃었다. 연호는 어금니가 부러져라 꽉 깨물었다.
 아직 포기하긴 이르다.
 설령 한수가 포기할지라도, 연호는 그를 저버릴 수 없었다.
 연호는 끙끙거리며 그를 둘러멨다. 단련된 연호의 육체는 거뜬히 성인남성을 들어 올렸다. 스며든 피에 어깨가 축축해졌지만, 연호는 개의치 않고 내달렸다.
 ‘젠장! 나에게 그 애송이들 같은 힘만 있었더라도!’
 연호는 많이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약간의 재능.
 리미트가 헐거워지는 미약한 재능. E등급 턱걸이만 가능할 정도라도!
 그것만 있었어도, 저 스팅 스네일을 모조리 도륙할 자신이 그에겐 있었다. 머릿속 시뮬레이션으론 수십 수백 가지 루트가 그려졌지만, 현실의 육체가 따라주질 않는다.
 “끄응······.”
 안간힘을 써 눈여겨 둔 2차 안전지에 도착했다.
 벽이 이중삼중으로 쳐진 곳이라, 관통력 우수한 달팽이의 침도 통하지 않을 장소.
 그 사이, 스팅 스네일들은 이동을 멈추고 공격 모드로 태세전환 중이었다.
 연호는 숨을 죽이고 눈치를 살폈다. 아까처럼 침 세례를 유인할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안전지대라도, 계속 공격을 허용하면 언젠간 뚫린다.
 웅크린 채론 살길이 없다.
 ‘좋은 꿈 꿨다더니. 이게 뭐냐. 최악의 악몽이구만.’
 한수에게 한마디 중얼거리고 발을 떼려는 순간, 갑작스럽게 연호의 머릿속에 팡파르가 울렸다.
 
 따다단-!
 
 <어서 오세요! 강연호 고객님. VIP시스템에 방문하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첫 방문이신 강연호 님께만 드리는 특별한 혜택 3가지를 확인하세요.>
 <오늘의 출석 보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엉?”
 놀란 연호가 실소를 뱉고 말았다.
 
 
 2.
 대격변 이후 10년이 지난 지금, 서울 지형도 참 많이 변했다. 이젠 아무도 구나 동으로 행정구역을 표기하지 않았다.
 대신 동, 서, 남, 북 그리고 중앙이라고 간단히 지칭했다.
 연호를 태운 승합차는 어스름한 새벽을 뚫고, 그 서울 동쪽 끝자락을 향해 달려갔다.
 
 <현재 시각 오전 7시.>
 
 인력소를 출발해 약 한 시간 가까이를 차에서 보낸 F급 ‘찌’ 헌터들에게 영역 다툼이 끊이질 않는 최전선 구역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규모 균열의 발생지!
 천지개벽 수준으로 세상이 변했다지만, 역시나 가장 근본적인 변모는 ‘균열’이다.
 총 7가지 색으로 반짝이는 균열을 처음 보면, 누구나 우주의 은하수를 본 것처럼 황홀한 표정을 짓곤 했다.
 그곳에서 이계의 괴생명체가 튀어나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신화에 나올법한 추악하고 기괴한 외형. 전설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괴상망측한 존재감.
 균열에서 튀어나온 그들은 마치 식민지를 개척하는 양 대지에 눌러앉았다.
 당당히 지구의 주인임을 자처하던 인류에게 최악의 도전자가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바퀴벌레 뺨치는 적응의 동물이 또 인류 아니던가.
 ‘생존’의 일념으로 이 균열을 제거할 방법을 결국 찾아냈다. 방법은 간단했다.
 균열로 침투해 놈들의 세계에서 코어를 부수고 탈출하면 된다.
 ······이 간단한 원리를 알아내기 위해 죽은 이들의 숫자만 수백만이다. 그사이, 지도에서 지워진 국가만 해도 두 자릿수.
 그럼에도 제거하지 못한 균열이 여전히 세계에 태반이고.
 끼이익.
 버려진 도심의 4차선 도로를 따라 달리던 승합차가 멈춰 선다. 창밖의 을씨년스러운 풍광을 보니, 연호는 원전 사고 이후 황폐화된 체르노빌이 떠올랐다.
 으스스하고 삭막한 게 딱 그 짝이다.
 제거하지 못한 균열은 원전사고나 다를 바가 없었다. 민간인이 모두 도망간 이 땅엔 이제 사냥을 위해 머무는 헌터와 전선을 유지하기 위한 군대만 남았다.
 LED 경광봉을 흔들어 서행을 유도한 군인이 다가왔다.
 “충성.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
 “네. 여기 그린문(Green Moon) 클랜 소속증이고요. 오늘 작전허가서입니다. 모두 헌터 라이센스 보유자들입니다.”
 까까머리 오민혁은 능숙하게 행정절차를 해치웠다. 민간인을 균열지역으로 들일 수 없기에 이런 절차는 필수였다.
 엄연히 작전통제구역이니까.
 잠시 멈췄던 차량이 움직이자, 다물고 있던 한수의 수다도 다시금 시작됐다.
 “형. 형. 그래서 내가 좀 알아봤는데요. 이번에 F급 헌터 제도가 없어질 수도 있대요.”
 “······넌 대체 그런 헛소리를 어디서 매일 주워듣고 오는 거야?”
 “커뮤니티죠. 하여튼 진짜래요! 헌터 사무국에서 자격심사 요건을 좀 더 까다롭게 바꾼대요. 이제 리미트 해제된 자들만 헌터로 받는다고.”
 “지금도 개판인데 더 개판되겠네.”
 “그냥 루머긴 한데, 그래서 등급 업 심사도 일 년에 한 번으로 줄인다는 말이 있어요. 1월에만 심사개최 한다고. 그러면 우린 어쩌죠? 형.”
 연호는 한참 동안 묵묵히 한수의 말을 들어줬다.
 가끔 이놈 입에 모터가 달렸나 살펴보기도 하고, 목덜미를 쳐서 기절시켜 버릴까 고민하면서.
 그렇게 조금 더 달려, 마침내 목적지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구우우-!
 승합차에서 내리니, 저 멀리 거인의 눈을 닮은 붉디붉은 타원형의 균열이 연호를 반겼다.
 5층짜리 낡은 빌딩 위에 자리 잡은 균열은 확실히 이세계의 징표 같은 묘한 위압감이 있었다.
 가장 낮은 레벨인 레드균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정전기 같은 찌릿찌릿한 기운에 솜털이 올올이 선다.
 ‘으흣. 역시! 이거 때문에 균열 근처로 오는 거지. 뭔가 강해진 기분이 팍팍 들거든.’
 분주히 내리는 와중에, 캠프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 둘과 여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 작업의 의뢰인들.
 그중 30대 남자 이제수가 냅다 소리부터 지른다.
 “야! 오민혁! 빨리빨리 안 다니냐?”
 “죄, 죄송합니다. 조금 차가 막혀서······.”
 “시간이 돈인 거 몰라? 거기다 여기 오는 데 무슨 차가 막힌다고. 변명도 좀 그럴싸하게 해야 속아주지. 아, 씨파. 너 지금 나랑 장난하냐?”
 상사가 눈살을 확 찌푸리자, 까까머리 민혁이 연신 고개를 숙였다.
 F급 헌터들은 딱히 신경 쓰지 않고 스트레칭에 열중했다. 이 업계 사람치고 성질 안 더러운 사람 찾기가 힘들다. 항상 전쟁터에 투입되는 이들처럼 신경이 바짝 서 있는 게 대부분이다.
 그러니 저런 화풀이 정도야,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무뎌진 거다.
 개 같은 일이지만, 악습도 반복되면 익숙해진다.
 연호도 한수와 같이 무던하게 몸을 풀었다.
 종갓집 시어머니를 닮은 호통이 한동안 이어졌다. 그렇게 혼나는 민혁 뒤편에선 웬 남녀가 멀뚱멀뚱 F급 헌터들을 훔쳐봤다.
 막 E급 헌터 라이센스를 취득한 그린문 클랜 소속 김수판과 배아영이다.
 “오빠, 저 사람들 다 F급 헌터야?”
 “응. 오늘 찌 해주는 놈들.”
 “찌가 뭐야? 별명이야?”
 “응. S급 헌터는 가디언이라고 부르잖아. 그거처럼 별명이야. 흔히 찌꺼기 같은 삶을 산다 해서 그렇게 부르지. 킥킥.”
 빠직.
 딱히 말소리를 죽이지도 않은 채, 대놓고 들으라고 지랄이다.
 순간, 욱한 연호가 매섭게 놈을 노려봤다.
 딱 보니 처음이라는 그 E급 초짜 같은데, 그딴 놈한테 기 싸움에서 숙이고 들어갈 정도로 연호는 물렁하지 않았다.
 “뭐야 그 눈깔은? 불만이라도 있어?”
 연호의 거친 눈빛에 김수판도 눈알을 부라리며 반응한다.
 대게 F급 헌터들의 일이란 단순했다.
 균열로 돌입해서 코어를 파괴하는 건 언감생심이고, 그냥 레드균열에서 튀어나온 놈들만 정리하면 되는 일이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이른바 찌꺼기 정리 역.
 혹은 주로 미끼 역할을 맡는다 하여 루어를 뜻하는 ‘찌’라고 칭하기도 했다. 그런 F급 헌터들에게 김수판의 말은 모욕 중의 모욕이었다.
 “형. 형. 왜 그래요. 참아요. 응?”
 “수판아, 그만해라.”
 충돌하기 직전, 한수와 이제수가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연호는 오물이라도 본 듯 고개를 홱 돌렸고, 수판은 마지막까지 노려보다 이죽거리며 침을 뱉었다.
 “참 내. 뭣도 아닌 게 개폼만 살아선.”
 “김수판!”
 “네. 네. 그만할게요, 삼촌.”
 김수판은 물러나 아영의 허리를 감싸 안고 낄낄거렸다. 이제수는 지끈지끈거리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그린문 클랜 리더인 김철현의 친동생만 아니었으면, 반쯤 죽여 놓을 텐데. 어릴 적부터 알던 사이지만, 그는 인성에 하자가 좀 있었다.
 소동 탓에 분위기가 조금 어수선했지만, 곧 정리가 완료됐다.
 그들은 일을 하러 온 거다.
 무슨 사정이 있든, 맡은 바 업무에 철저한 것이 프로.
 진정이 되자, 이제수가 앞으로 나서 브리핑을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D급 헌터 이제수입니다. 오늘 작전은 간단합니다. 헌터넷에 동봉한 작전 계획서를 보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헌터넷(Hunter Net).
 
 범국가적 차원에서 인류의 생존을 위해, 헌터에게 필요한 모든 종류의 정보와 편의 사항을 총망라한 앱의 일종.
 헌터 관련 대부분 일들은 이 앱으로 간단하게 처리가 가능했다.
 “오전엔 레드경보 <위험도 0.3>인 스팅 스네일을 사냥할 겁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금기만 조심하면 딱히 위험하지 않은 놈이죠. 미끼가 되셔서, 열심히 모아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F급 헌터들이 스마트폰 앱을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편한 일이다.
 속도가 빠른 놈이라면 목숨을 걸어야 하지만, 오늘은 느리기로 명성이 자자한 달팽이가 상대다.
 설렁설렁해도 안전할 듯 보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기에, 익히 아는 사실임에도 연호는 스팅 스네일의 특징을 한 번 더 암기했다.
 이동속도, 행동반경, 특성, 금기사항 등등.
 반면, 김수판은 앱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아영의 몸을 더듬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후엔 오렌지균열 구역으로 넘어가 <위험도 1.8> 칼날숭이(Blade Monkey)를 상대할 겁니다. 다만, 그땐 저희 클랜 리더이신 C급 헌터 김철현 씨가 직접 와서 전반적인 상황을 통제할 예정이니 안심하세요.”
 F급 헌터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균열의 경계 침범만 조심한다면, 안전하게 귀가하는 본인들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제수가 환하게 웃었다.
 “너무 걱정 마세요.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니고. 저도 D급 헌터 ‘방패병’입니다. 각자 역할만 해내면,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 * *
 
 “엉?”
 연호는 전투 중에 어지간하면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작은 미스가 곧바로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익히 숙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스팅 스네일(Sting Snail) 수십 마리가 자신과 한수의 목숨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경우엔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지금 들린 헛소리에는 저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무슨 개소리야? VIP시스템이라고?’
 당연히 무시하고 발걸음을 떼려고 했지만, 연호의 발은 바닥에 착 달라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갑자기 눈앞에 튀어나온 홀로그램 탓이다.
 왼쪽 시야 상단엔 본인의 초상화가 덩그러니 놓여 있고, 오른쪽 시야 하단에는 둥그런 테두리에 [던전 진입]이라고 적혀 있다.
 상단에는 메일(Mail) 같은 형태가 쉼 없이 깜빡였다.
 눌러달라고 떼를 쓰는 아이처럼.
 연호는 이 디자인에서 왠지 모를 익숙함을 느꼈다.
 ‘이건······ 예전에 유행했던 폰 게임 아냐?’
 대격변 이전 스마트폰 게임이 들불처럼 유행했을 때가 있었다. 지금이야 세상살이 팍팍해져 사장됐지만, 당시엔 너도나도 폰겜을 붙들고 즐겼었다.
 ‘딱 그 모양새인데. 혹시······?’
 연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초상화를 꾹 눌렀다.
 
 [이름 : 강연호]
 -남자, 27살 / 혼 0
 체 력 F  마 력 0
 파 워 F  내구력 F
 스피드 F  저항력 F
 성장 가능성(잠재력) F
 
 총합 : F의 화신, 일반인 그 자체.
 보유 기술 : 무(無).
 특수능력 : VIP시스템 이용자.
 특이사항 : 불쌍해서 출석 보상 하나 꼽사리 끼워줌. 2개 줄 만큼 애처롭진 않음. 개소리라고 욕해서 보상등급 하나 낮춤. 베-!
 
 “어······ 어?!”
 연호는 본인이 누르고선, 깜짝 놀라 얼어버렸다.
 예상하긴 했지만 실제로 홀로그램이 튀어나오니, 평정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심장이 미친 듯 뛴다.
 연호는 심호흡을 하며,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이능력 중에 이런 건 듣도 보도 못 했는데?’
 헌터 일 관련해선 더없이 박학다식한 연호로서도 생전 처음 보는 현상. 연호는 이어서 메일도 터치했다.
 
 <VIP시스템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의 출석 보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E급 성장비약 x2
 -차원재화 혼(魂) 200 지급.
 <처음 방문하신 강연호 님을 위한 특별한 혜택 3가지!>
 -랜덤 B등급 이하 펫(Pet) 소환권 x1
 -랜덤 B등급 이하 장비 소환권 x1
 -초보자를 위한 성장 경험치 추가서(60일) x1
 <수령 받은 물건들은 가방에서 확인이 가능합니다.>
 
 “하하, 하. 무슨 게임이냐······?”
 연호는 찬찬히 글귀를 읽어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극에 이를 정도로 황당하면 웃음이 나온다는 것을 연호는 새삼 깨달았다.
 하지만, 노련한 헌터답게 한편으론 이것이 현실임을 빠르게 체감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스르륵!
 생각만 하면 웬 연구소 시약처럼 생긴 앰플이 손바닥에 쥐어지니, 도무지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조금 전, 인벤토리에서 꺼낸 따끈따끈한 앰플.
 가방을 떠올리면, 게임에서 흔히 볼 수 있던 5개의 칸이 나타났다. 수령 받은 물건이 하나씩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이게 바로 가방! 즉, 인벤토리 능력.
 이것만으로도 더없이 신비로운 이능력이다.
 연호는 손아귀의 앰플을 이리저리 굴렸다. 겉 라벨엔 큼지막하게 [E급 비약]이라고 필기체로 새겨져 있었다.
 “비약이라······ 수상하군. 더럽게 수상해.”
 바다를 닮은 푸른 액체가 출렁인다.
 연호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굴러갔다. 수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본능적으로 활용 방안에 대해 그려본다.
 결국, 앰플을 노려보다 연호는 과감하게 뚜껑을 열었다.
 “그래도 여기서 물러서면 남자가 아니지.”
 그러곤 망설이지 않고 입으로 털어 넣었다.
 꿀꺽꿀꺽.
 
 <E급 성장비약을 섭취하셨습니다. 어떤 능력치를 올리시겠습니까?>
 
 연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거야 당연히······.
 
 
 3.
 레드경보 <위험도 0.3> 스팅 스네일(Sting Snail).
 1미터에 다다른 민달팽이.
 이 존재를 묘사하자면, 이 이상 적당한 표현은 없었다.
 집 없는 달팽이를 닮은 이것들은 그저 꾸물꾸물 기어 다닐 뿐, 생명체에게 해를 끼치진 않았다. 질척질척한 점액질을 뿌리고 다녀 미관상 더러울 뿐.
 온순하여 절대 선공을 하지 않고, 설사 공격을 맞더라도 끄르륵거리며 반항 없이 소멸한다. 실로 해삼보다 무해한 종(種).
 이런 존재가 균열초기 인류에게 어마어마한 피해를 끼쳤다고 한다면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이는 이계 생명체 정보에 대한 중요성을 인류에게 알려준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손꼽혔다.
 무지(無知)가 낳은 참사.
 인류 금기(禁忌)목록 작성의 시발점.
 스팅 스네일에게 어떤 짓을 해도 상관없었지만, 툭 튀어나온 외눈만은 절대 건드려선 안 됐다.
 세 살배기 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톡 만져도,
 ······스팅 스네일(Sting Snail)은 폭주했다.
 몸속에서 길쭉한 못처럼 생긴 침을 생성해, 무차별로 난사하는 것이다. 침의 관통력이 얼마나 우수한지, 근거리라면 바위라도 우습게 뚫었다.
 골치 아픈 건 그뿐만이 아니다.
 이렇게 한 마리라도 폭주하면, 근방의 모든 스팅 스네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호응했다.
 한순간에 사방팔방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쟁터로 변하는 격.
 근방의 모든 생명체를 절멸시킬 때까지 멈추지 않는 지독함 속엔 이 종(種)의 숨겨진 광기가 엿보였다.
 이때의 흉흉함은 옐로경보 <위험도 2.9> 수준!
 그래서 아카데미에서는 꼭 동영상으로 이 달팽이들의 위험성에 대해 주지시켜 주곤 했다.
 “제발 부탁이니까 눈만 건드리지 마라! 제발, 이 새끼들아!”
 그것만 제외하면 그야말로 무해한 생물이긴 했다. 지금처럼 변변한 반항도 못 하는.
 촤악! 촥!
 
 <오전 9시경>
 
 D급 슈트를 걸친 김수판이 헌터 전용 검을 휘두르며,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끄에엑.”
 “하하하! 봐봐. 꿈틀거린다. 아영아. 역시 별것도 아니라니깐? 앱이고 뭐고 볼 필요 없어. 이 오빠만 믿어라.”
 “으······ 징그러. 오빠.”
 수판이 점액질을 가르고 푹푹 찔렀지만, 스팅 스네일은 그저 꿈틀거리며 이동하려고만 했다.
 “다른 곳은 공격해 봤자 안 죽습니다. 중앙에 있는 핵을 노리세요.”
 “알아요. 알아서 할 테니, 신경 끄세요.”
 답답해서 충고한 오민혁에게 김수판은 손을 홰홰 저었다.
 그 이후로도 수판과 아영은 어설픈 몸짓으로 핵을 노리려 애썼지만, 미끈미끈한 점액질 때문에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아씨. 생각보다 잘 안 되네. 형은 동영상보니까 잘하던데.”
 “오빠, 이거 기분 나빠.”
 “꾸에엑.”
 옅은 상처가 늘어날수록, 구슬픈 비명을 지르는 스팅 스네일.
 이곳의 책임자인 이제수는 멀찍이 떨어져 통화에 한창일 뿐, 현장엔 딱히 관심도 없어 보인다.
 ‘어휴. 개판이군. 어떻게 헌터 라이센스를 취득한 거지?’
 연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판단하기에 둘은 전형적인 힘만 믿고 설치는 답 없는 부류였다. 경험도 지식도 일천한.
 사무국에서 그저 리미트 해제만으로 무작정 자격증을 쥐여준 게 틀림없었다.
 인류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헌터는 많을수록 좋을 테니.
 ‘센스도 기술도 뭣도 없군. 육체도 미개발 상태고······.’
 막 올라온 E급 헌터는 육체 성능에 있어서는 F급과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실제로 둘이 붙으면, 기술을 오래 단련한 F급이 이기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하지만, 클랜에서는 적어도 E급에 이른 헌터만 받아준다.
 왜냐면 E급은 앞으로 더욱 성장할 가능성을 품은 유망주지만, F급은 이미 포텐셜이 꽉 차 성장 불가 판정을 받은 이들이니까.
 누구는 별다른 노력 없이 계속 강해져 부와 명성을 얻을 텐데, 본인은 아무리 노력해도 이게 성장의 한계라니.
 연호는 새삼 억울해졌다.
 촤륵! 챡!
 “끄에엑.”
 “아싸! 성공! 별것도 아니네.”
 마침내, 핵을 반으로 가르자 스팅 스네일이 소금이 뿌려진 달팽이처럼 흐물흐물해졌다. 수판은 15분이나 걸리고선, 여자 친구를 향해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폈다.
 클랜의 육성 계획이야 뻔했다.
 이런 식으로 오전엔 기 좀 세워주고, 오후엔 칼날숭이로 헌터의 위험성을 각인시킨다. 당근과 채찍이라는 전형적인 육성법.
 ‘······일이나 하자.’
 잠시 지켜보던 연호는 계속해서 ‘찌’ 역할 수행을 위해 움직였다.
 찌그러진 차들과 황폐해진 건물들이 그를 맞이한다. 10년 전만 해도 활기차던 장소가 이제는 무인지경의 버려진 도시가 돼버렸다.
 연호는 허리춤 홀스터에서 헌터봉을 꺼냈다.
 촤르륵.
 보급용으로 제작된 헌터봉이 4단으로 촥 펴지더니, 제 형태를 갖춘다. 고작 F급이라지만, 강철(탄소강)을 기반으로 이계 생물마저 섞어 만든 헌터 전용 물건.
 무척 비싼 가격이라 연호가 애지중지하는 무기였다.
 레드균열 영역이지만, 사주 경계를 풀지 않고 연호는 나아갔다.
 투드득. 투득.
 텅 비어버린 편의점의 해진 입간판이 툭 하고 떨어진다. 그 위를 균열의 영향인지 유난히 거대해진 쥐새끼가 찍찍거리며 지나갔다. 쥐를 따라 수북이 쌓인 먼지가 뭉텅이째 굴러다닌다.
 연호는 쓰러진 전봇대를 피해, 좁은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스팅 스네일을 그러모았다. 때론 잡화점 내부에 숨은 놈들을 유인하기도 했다.
 그렇게 무료한 시간이 흘렀다.
 시계를 보니 12시.
 대략 30분 정도면 오전 업무도 끝이다.
 헌터봉으로 스팅 스네일의 꽁무니를 쿡쿡 찔러 몰고 가자, 달팽이 열 마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연호의 눈에 들어왔다.
 ‘미친. 고작 이걸 아직도 처리 못 한 거야?’
 6명의 헌터가 부지런히 모아오니, 김수판과 배아영의 느린 사냥 속도가 양을 감당하지 못한 것.
 김수판은 여전히 어설프게 검을 휘두르고 있고, 배아영은 턱을 괸 채 앉아서 쉬고 있다. 까까머리 민혁은 팔짱을 끼고 방관 중이고.
 “형, 왔어요?”
 “어. 이제수 씨는?”
 총책임자가 안 보여 묻자, 한수가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민혁 씨한테 물어보니까, 한 30분 전에 캠프로 돌아갔대요. 민혁 씨가 자기한테 다 맡기고 논다고 욕을 한 사발이나 하더라고요. 킥킥.”
 그새 까까머리 민혁과 한수가 제법 친해졌나 보다. 연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호 형, 나 운동 계획이나 좀 봐줘요. 이게 최적화일까요? 벌킹스택이랑 어울리려나.”
 별일 없이 마무리될 거 같아 현장엔 느슨한 분위기가 만연했다.
 헌터들은 서로 수다를 떨고, 일부는 담배마저 꼬나물었다.
 한편, 종아리를 토닥토닥 매만지던 아영의 눈빛이 반짝였다.
 ‘역시······ 다시 봐도 잘생겼어! 어쩜 좋아.’
 연호가 달팽이를 몰고 올 때마다, 아영은 몰래 그를 훔쳐봤다. 사실, 연호는 어릴 적 준수한 외모로 나름 동네에서 유명했다.
 고등학교 시절엔 인터넷 쇼핑몰 피팅 모델 알바도 종종 했었다.
 자연 반 곱슬머리라 파마한 것처럼 보이는 헤어 스타일에 우수에 젖은 눈빛은 거적때기를 입혀놔도 패션으로 소화했다.
 사장들이 ‘분위기 깡패’라고 엄지를 추켜세웠고, 그를 메인 모델로 삼기 위해 물밑 암투가 벌어졌다는 소문마저 돌 정도였다.
 비록 지금은 헌터 업무 때문에 피곤에 시달려 다크서클이 짙어 퀭해 보였지만, 그것마저 묘한 퇴폐미를 풍겼다.
 아영은 연호가 보일 때마다, 자세를 고치고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괜히 코트의 매무새도 다시 점검한다. 특별히 어떻게 해보려는 게 아니라 순수한 본능(?)에 가까웠다.
 이걸 빠르게 캐치한 건, 남자 친구 김수판이었다.
 ‘아씨. 쟤 또 눈 돌아갔네. 허우대만 멀쩡한 F급 헌터가 뭐가 좋다고. 역시 아까 패버릴걸.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더니.’
 그때부터 김수판의 검이 크게 흔들렸다.
 스팅 스네일을 상대하면서, 주의는 온통 아영과 연호에게 쏠렸다. 혹여나 둘이 대화라도 할까 싶어 전전긍긍한다.
 아영이 슬쩍 눈웃음을 치자, 수판의 눈에서는 불똥이 튀었다.
 그때, 턱! 하고 검이 스팅 스네일의 점액질에 걸렸다. 수판은 오만 짜증을 부리며 팔뚝에 힘을 줬다.
 “아씨. 뭐야? 이거-”
 스읏! -틱!
 그것은 실로 경미한 상처였다.
 튕겨 나온 칼날에 스팅 스네일의 둥그런 눈알이 살짝 아주 살짝 스쳤다. 공격한 수판 본인도 잘 모를 정도로 미미한 상흔.
 하지만, 스팅 스네일은 격하게 반응했다.
 금기를 범한 이를 향한 분노의 폭주!
 “빼애애액!”
 괴성을 지른 놈의 젤리 같던 몸통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순식간에 길쭉한 못대가리가 생성되더니, 사출 준비까지 끝마친다.
 잔뜩 붉어진 외눈깔이 흉험하게 범인을 찾았다. 이내, 눈앞의 건방진 생명체들을 포착하고선 분노를 표출한다.
 10마리가 넘는 스팅 스네일이 준비 동작도 없이 총알처럼 침을 쏘아냈다.
 푹푹푹!
 바람을 갈기갈기 찢으며 날아간 침은 가로막는 건 무엇이든 관통해 버렸다.
 “크학!”
 무방비 상태로 있던 헌터들은 때아닌 횡액을 맞이했다.
 가까이에 있던 일부는 구멍이 송송 뚫려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거리가 떨어진 이도 고슴도치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네일 건에서 못이 발사되듯 연속 사출된 침은 자비 없이 일대를 휩쓸었다.
 이 갑작스러운 재앙에 연호도 반응이 조금 늦었다.
 “빼액-” 소리를 듣자마자 본능적으로 피하려 했건만, 긴장이 풀려 버린 하체는 한 박자 늦게 움직였다.
 연호가 끌고 온 스팅 스네일이 복수라도 하려는 것처럼 매섭게 그를 노려본다.
 그러곤 섬뜩한 파공음이 귓가를 울렸다.
 푹!
 ‘회피 불가! 피해라도 줄인다.’
 순간적으로 판단한 연호는 최대한 몸을 비틀었다. 일단 한 대 맞더라도, 후속타만 피하면 목숨은 건진다.
 연호는 고통에 대비해,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형! 위험해!”
 한수가 끼어들어 연호를 밀쳤다. 튕긴 연호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미처 말릴 새도 없이,
 푹푹!
 침은 매정하게도 한수의 복부를 뚫었다. 손가락만 한 2개의 구멍으로 맞은편 시야가 훤히 보인다.
 배에서 천천히 피가 번지기 시작했다.
 “쿨럭······ 어······ 형······ 흐흐······.”
 털썩.
 피로 물든 몸뚱어리가 무너져 내렸다. 연호는 급하게 자세를 낮추고 쓰러진 한수를 끌어당겼다.
 “한수야! 정신 차려! 시발.”
 가까스로 벽 뒤로 피신하자, 한수가 쿨럭거리며 피를 한바탕 쏟아냈다. 그러곤 붉게 얼룩진 입술로 웅얼거린다.
 “형······ 포······ 기하고······ 도망······ 쳐!”
 “닥쳐! 내가 반드시 너 살린다. 정신 꽉 붙들고 있어.”
 연호는 필사의 도주를 감행했다.
 
 * * *
 
 그렇게 한수를 데리고 연호는 피신했고, VIP시스템이라는 능력을 각성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비약을 단숨에 들이켠 연호의 선택은 속도였다.
 포위망을 구축한 스팅 스네일을 찢어버리기 위해선 무엇보다 기동력이 필요했다.
 띠딩-!
 
 [스피드 F → E(52.3%)로 등급이 상승합니다.]
 <축하합니다. 처음으로 격을 뛰어넘는 성장을 경험하셨습니다. 잠재력이 올라갑니다. 업적 보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E급 성장비약 x1
 
 청량감이 온몸을 감싼다.
 연호는 황홀감에 잠시 눈을 감았다. 목구멍을 넘어간 비약은 이내, 연호의 육체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뿌드득뿌드득.
 뼈가 비틀리며 골격이 요동친다.
 근섬유가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변이한다.
 이건 애벌레가 나비로 변태하듯 다른 생명체로 재탄생하는 과정에 가까웠다. 지구의 과학으론 설명 불가능한 신비한 진화!
 “후우······.”
 그는 곧바로 남은 E급 비약도 들이켰다.
 
 [내구력 F → E(19.7%)로 등급이 상승합니다.]
 [파 워 F → E(41.9%)로 등급이 상승합니다.]
 
 연호는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풀었다.
 온몸에서 힘이 넘친다.
 얽매이던 중력에서 자유로워진 것처럼 몸이 더없이 가볍다. 치렁치렁 매달려 있던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제거한 것처럼 활력이 돈다.
 가볍게 주먹을 뻗었다.
 슉! -팡!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핸드 스피드.
 연호는 자신이 벽을 넘어섰음을 깨달았다. 극한으로 단련된 육체가 드디어 족쇄를 풀었다.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재능의 한계라는 리미트(Limit).
 마침내 그 지긋지긋한 한계가 해제된 거다.
 이제 누가 뭐래도 연호는 당당한 E급 헌터였다.
 5년이나 걸려서, 드디어 원하고 원했던 헌터로서의 출발선에 섰다. 괜히 눈시울이 시큼해졌지만, 연호는 꾹 참았다.
 아직 멀었다.
 당면한 위기를 뚫고, 앞으로 더욱 비상할 일만 남았는데 여기서 만족의 눈물이라니.
 연호는 자기를 구하고 쓰러진 한수를 주목했다.
 정신을 잃었지만, 아직 숨은 붙어 있다. 응급처치도 했겠다, 최대한 빨리 상황을 정리하고 치료한다면 충분히 살릴 수 있다.
 리미트가 해제된 지금이라면 몇 분 만에 모조리 도륙할 자신이 있었다.
 연호는 가볍게 몸을 풀었다.
 새로운 육체가 얼른 날뛰고 싶다고 근질거린다. 마치 신형 스포츠카를 뽑고, 엑셀을 신나게 밟고 싶은 고양감(高揚感).
 “좋아. 가볼까.”
 
 
 4.
 “허억······ 허억······.”
 그린문 클랜 소속 E급 헌터, 이른바 까까머리라고 불리는 오민혁은 거친 숨을 감추지 못했다.
 김수판의 멍청한 짓거리에 말로만 듣던 스팅 스네일의 폭주까지.
 사건 사고 사례 모음집을 보면서 “저 병신들. 킥킥” 하고 비웃었었는데, 그런 사건에 자기가 휘말리게 되다니.
 내일이면 헌터넷 커뮤니티에 대문짝만하게 이 병신 짓거리가 올라올 거고 모두의 조롱거리로 전락할 거다.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온다.
 주르륵.
 민혁은 반쯤 부서진 벽에 쪼그린 채, 식은땀을 흘렸다.
 사실 그도 아슬아슬했다.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어 간신히 회피했다지만,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도 오른팔엔 구멍이 뻥 뚫려 있고.
 힐 젤(Heal Gel)을 덕지덕지 발라놨지만, 욱신거리는 고통이 점차 심해진다.
 그래서 지금 옆에서 달달 떨고 있는 수판을 정말 미치도록 패고 싶었다. 간신히 구한 수판은 고개를 파묻고 오들오들 떨기만 했는데, 그 짝이 딱 겁먹은 거북이 같았다.
 수판이 생존한 건 전적으로 형 철현이 건네준 D급 슈트 덕이었다. 혹시나 싶어 입혔는데, 그게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근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대부분 흡수한 것.
 이후 정신 놓고 어버버 하는 것을 민혁이 모가지 끌고 피신시켜, 아직까지 목숨 줄을 붙여 놓았다.
 ‘젠장. 클랜 리더 동생만 아니면 그냥 죽게 놔두는 건데.’
 그사이, 무력한 F급 헌터들만 줄줄이 죽어나갔다. 방호력을 갖춘 장비도 없고, 리미트가 해제된 육체 능력도 없으니 속절없이 죽어나갈 뿐이었다.
 ‘우리 말곤 다 죽은 건가?’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하며 민혁이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푹! 푹!
 어디서 날아온 건지 모르겠지만 검은 침이 뺨을 스친다. 민혁은 기겁하며 다시 머리를 집어넣었다.
 폭주 모드는 말만 들었지, 그 세부사항까지는 관심이 없어 공격 속도나 범위를 민혁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씨······ 고작 <위험도 0.3>짜리를 누가 주의 깊게 본다고.’
 이제 와서 후회되지만 별수 없다. 그때.
 “······줘······ 오빠······ 살려······줘······.”
 어디선가 들리는 희미한 목소리.
 민혁은 깜짝 놀랐다. 웅크리고 있던 수판도 귀를 쫑긋한다.
 또 한 명의 E급 헌터 아영의 목소리다. 구멍으로 살피니, 다 부서진 옷가게로 보이는 안쪽에 숨은 그녀가 보였다.
 바닥엔 핏자국이 길게 이어져 있다.
 ‘죽은 줄 알았더니. 어떻게 살았지?’
 사실, 그녀는 꽤 잘나가는 중소기업 딸이었다.
 금수저까지는 아니라도, 은수저 정도는 되는 집안. 민혁은 미처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녀의 코트는 D급 소재로 제작된 명품이었다.
 방어력은 조금 낮추고 대신 패션을 살린 트렌치코트.
 그게 구사일생의 한 수가 됐다.
 비록 지금은 다 찢어졌지만, 한 번은 그녀의 목숨을 구했다. 황천에서 억지로 목숨을 건져 올린 거다.
 민혁이 아미를 찌푸렸다.
 ‘지금 어떻게 살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지. 앞으로 어쩌지?’
 아영의 상태는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긴 다리엔 피가 잔뜩 묻어 있고 결정적으로 아킬레스건에 침 하나가 박혀 있다.
 기동력 제로(Zero).
 은신처도 그다지 좋지 않다. 한쪽이 뻥 뚫려 있으니까.
 그저 구조만을 바라며 입만 뻥긋뻥긋하는 게 그녀의 현 사정이다. 민혁은 골치 아픈 눈으로 수판을 바라봤다.
 현재 앱으로 구조 요청을 했으니, 버티기만 하면 살 가능성이 있었다. 한데, 여기서 엄호 밖으로 뛰쳐나가 그녀를 구한다?
 모험을 할수록 생존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하지만, 수판이 그녀의 남자 친구인 게 문제였다.
 ‘분명 그녀를 살려달라고 난리 칠 건데······ 어떻게 한번 시도라도 해봐?’
 민혁이 작전 의논을 위해 입을 열려는 찰나,
 “······안 돼!”
 “네?”
 “지금 아영이 구하려고 하는 거잖아요. 그러다가 댁이 덜렁 죽어버리면 전 누가 지켜줘요? 이미 늦었어요. 그녀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예요.”
 수판이 도리질을 치며 격하게 중얼거렸다.
 민혁은 잠시 얼이 빠졌다. 의논이고 자시고, 수판은 벌써 마음 정리를 끝마쳤다.
 수판에게 그녀는 이미 죽은 사람이나 매한가지였다.
 잔뜩 겁에 질린 그의 눈은 안위 보전 이외에는 남김없이 지운 상태다.
 “그녀는 포기합시다. 살 사람이라도 살아야죠.”
 “······나쁜······ 놈······.”
 이야기를 엿들은, 아영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고작 저 정도 남자였다니, 그녀는 자신의 안목이 원망스러웠다.
 “비겁한······ 놈.”
 수판은 귀마저 막고 웅크렸다.
 민혁도 입맛이 썼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수판이 도와준다면 유인한 다음 뛰쳐나갈 수 있겠지만······.
 혼자는 도저히 무리다.
 꾸물꾸물.
 마침, 스팅 스네일 한 마리가 꿈틀거리며 다가왔다.
 평상시엔 허접 그 자체인 녀석이 지금은 붉은 안광을 번뜩이는 걸 보니 사신이 따로 없었다. 기어온 놈은 숨어 있는 아영을 정확히 포착했다.
 일직선 시야에 그녀를 담아, 이동을 멈춘 스팅 스네일(Sting Snail).
 특유의 공격 모드로 전환하면서, 자연스레 부글부글 끓는 침이 준비된다. 아영은 마지막을 예감했다.
 마스카라가 번진 시커먼 눈물이 바닥을 적셨다.
 푹-!
 부모님을 떠올리며, 아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붕!
 예상했던 고통은 없고, 대신 기묘한 부유감이 그녀를 휘감는다.
 동시에 자신을 지탱해 주는 탄탄한 근육질이 느껴졌다. 무쇠 같은 팔뚝이 등과 허벅지를 받쳐준다.
 이른바 공주님 안기 자세.
 그녀는 누군가 자신을 구해줬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아영이 살짝 실눈을 떠 올려다본다. 야생마같이 흩날리는 앞머리와 거친 눈빛이 한순간에 그녀를 사로잡았다.
 오로지 앞만을 바라보는 유려한 턱선에 매료된다.
 “아······?”
 F급 헌터 강연호다.
 반쯤 허물어진 천장에서 틈을 살피던 연호가, 한순간에 그녀를 낚아채 구조한 것이다.
 지금은 전력 질주로 현장을 벗어나는 중이고.
 푹! 푹!
 연호가 가속도를 붙여 치고 나갈 때마다, 뒤편으론 스팅 스네일의 침이 촘촘히 박힌다. 하지만, 사람 하나를 안고도 연호의 속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아니, 더 빨라진다.
 땅을 박찰 때마다, 도로가 쭉쭉 뒤로 밀려난다.
 그렇게 놈들의 연사 공격을 용케도 피해, 연호는 코너로 사라졌다. 이후, 안전한 장소에 이르렀다 싶자 아영을 내려놨다.
 그녀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 거듭해서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흑······ 저, 정말······ 어찌······.”
 “여기 가만히 계세요.”
 “어······ 어딜 가시려고요? 위험해요!”
 연호가 몸을 일으키자, 아영이 급하게 만류했다. 흉흉한 놈들의 기세와 비교했을 때, 별다른 장비도 없는 연호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보였다.
 촤르륵.
 이에 씩 웃으며 연호가 익숙한 동작으로 헌터봉을 펼친다.
 “복수해 줘야죠.”
 “아······.”
 순간, 아영이 볼을 붉혔다. 그러곤 급히 얼굴을 가렸다.
 ‘서, 설마. 내가 다쳐서 복수해 주려고······?’
 이런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심장이 폭발할 것처럼 거세게 뛴다.
 아영은 급히 그를 막으려 했다. 자신을 아껴주려는 그 마음은 너무 멋있지만, 그보다는 목숨이 더 중하다.
 “그, 그럴 필요 없어요! 전 괜찮······ 응?”
 휘이잉.
 이미, 연호는 사라진 뒤였다.
 그곳엔 ‘한수에 대한 복수’를 오해한 그녀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후우. 다행입니다. 살았어요.”
 “······.”
 민혁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송장 치르나 싶었는데, F급 헌터가 극적으로 그녀를 구조했다. 날쌔기가 흡사 야생짐승과 버금갔다.
 자신도 저렇게 움직일 자신이 없었다.
 ‘위기상황에서 리미트가 해제된 건가?’
 종종 생명의 위기가 닥치면 리미트가 풀리는 사례가 있어, 놀랍긴 해도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저렇게 용기 있게 남을 구한다는 게, 퍽 인상 깊게 다가왔지만.
 그렇게 민혁이 연호에게 감탄하는 반면, 수판은 얼굴을 뚱하게 굳히고 있었다. 자신이 버린 여자 친구가 살아남았으니, 마음이 복잡하겠다 싶어 민혁은 가만히 놔두었다.
 다다닷!
 그때, 괴상한 소리가 둘의 고막을 울렸다.
 누군가 빠르게 다가오는 발소리. 지원이 온 건가 싶어, 민혁은 고개를 들었다.
 ‘헉! 돌았네. 죽고 싶어 환장했나?’
 그곳엔 옷자락을 펄럭이며 육상선수처럼 뛰어오는 연호가 있었다.
 도로변을 따라 연호가 달려오자, 곧장 스팅 스네일들이 반응을 보였다.
 푹! 푹! 푹!
 사방으로 흩어져 있던 달팽이들이 저마다 각자의 방위에서 침을 쏜다. 눈으로 보면 한발 늦는 치명적인 공격들이 360도로 쏟아졌다.
 이에 연호는 급정거로 맞대응했다.
 당황한 기색은 아니다. 오히려 기다리던 눈치.
 스윽.
 연호는 많이 움직이지도 않았다.
 딱 한 발자국.
 마치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멈춰서 뒤로 발을 물리자, 아슬아슬하게 침들이 벽으로 박힌다.
 그 후, 그는 능숙한 앞구르기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푹! 푹!
 와장창.
 건물 내부도 안전하지 않다는 걸 증명하듯, 침들이 유리를 깨며 들이닥친다. 연이어 몸 어딘가에 반드시 구멍을 뚫겠다는 기세로 침들이 쏟아졌지만, 그의 발끝도 스치지 못했다.
 ‘폭주 상태의 스팅 스네일은 3번 연속으로 공격하지. 그리고 잠깐의 빈틈이 생겨. 3······ 2······ 1!’
 공격이 딱 끊기자, 기다리고 있던 연호가 튀어나왔다.
 스팅 스네일들의 연사 속도를 계산해 만든 찰나의 틈새를 연호는 비집고 들어갔다. 때론 놈들의 각도를 역이용하기도 하고 때론 장애물들을 교묘한 방패로 삼아 빠르게 접근한다.
 ‘미친. 말도 안 돼! 저게 다 파악이 된다고? 지가 박쥐야 뭐야?’
 마침내, 민혁도 연호가 어떤 짓을 하고 있는 건지 깨달았다.
 저건 단순 육체 성능이 발휘하는 퍼포먼스가 아니다.
 오히려, 연호는 예측과 계산이라는 불명확한 요소를 이용하여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놈들의 특성과 능력 그리고 성향까지 모조리 암기해 적재적소에 활용한다.
 말이 쉽지 한 끗만 어긋나도 바로 황천행이다.
 스팅 스네일을 완벽히 파악한 자만이 펼칠 수 있는 기예(技藝).
 타닷.
 마침내, 연호가 스팅 스네일 앞에 도달했다.
 지켜보던 민혁도 혀가 바짝 말랐다.
 최대한 빠르게 처리해야만 한다. 잠시라도 지체한다면, 일제히 공격이 쏟아져 구멍 뚫린 치즈 꼴을 면치 못할 거다.
 연호의 헌터봉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질척거리는 점액질 몸통 아래에서부터 45도 각도.
 점막을 뚫고 헌터봉은 쑥 들어갔다. 그러곤 민들레 씨가 내려앉듯 가볍게 핵을 건드린다.
 톡! 와르륵.
 스팅 스네일이 일수에 형체를 잃고 무너졌다.
 소요 시간은 단 3초.
 민혁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D급 헌터 이상이라면 누구나 한 큐에 스팅 스네일의 핵을 박살 낼 수 있다. 하나, 저건 달랐다.
 가장 취약한 약점을 파고들어, 최소한의 힘으로 핵의 중심부를 타격한다. 이론상으로는 가장 완벽한 사냥법이다.
 이론상으론!
 군더더기를 일체 배제한 놀라운 솜씨에 민혁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일순간 연호가 무방비 상태가 됐지만, 너무 빠른 사냥 속도에 침이 준비되지 않은 건 스팅 스네일들도 마찬가지였다.
 즉, 최고의 찬스다.
 연호는 곧바로 질풍처럼 다음 먹잇감을 향해 땅을 박찼다.
 “말도 안 돼······ 고작 F급 따위가······.”
 수판이 어이가 없다는 듯 멍하니 쳐다본다.
 민혁도 얼이 나간 채로 있다가 급하게 수판의 어깨를 붙잡았다.
 “방금 들었어요?”
 “······뭘요?”
 “저 사람 해치우고 뭐라고 중얼거렸잖아요.”
 분명, 연호는 헌터봉에 묻은 점액을 털며 혼잣말을 했다. 수판은 못 들었지만, 민혁은 똑똑히 들었다.
 그리고 본인의 귀를 의심했다.
 “이제야 좀 적응이 되네. 더 속도를 올릴까.”
 연호의 움직임이 더 빨라졌다.
 2장. 보상이 쏟아진다
 
 
 1.
 ‘상쾌하다.’
 마음껏 질주하며, 연호가 느낀 첫 감상이었다.
 쏜살같이 지나가는 풍경과 시원한 바람도 마음에 들었지만, 그보다는 육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니 속이 뻥 뚫렸다.
 엔진이 다르니 뿜어져 나오는 출력 자체가 비교를 불허한다.
 경차를 몰던 카레이서가 이제야 제 기량을 뽐낼 차량에 탑승한 기분.
 촤르륵.
 급제동, 급가속, 급선회까지.
 머릿속으로만 구상해 오던 것이 아무런 부담도 없이 펼쳐진다. 예전 같으면 당장 인대와 관절이 비명을 지를 동작도 전혀 무리가 없다.
 이런 상태라면 폭주한 스팅 스네일 할애비가 와도 한 대도 안 맞을 자신이 있었다. 남들이 보기엔 기예에 가깝겠지만, 연호의 입장에선 당연히 수순에 불과했다.
 상대의 정보를 샅샅이 알고 있으면, 예측이 가능하고 그러면 당연히 피할 수 있지 않은가? 리미트 해제 전에도 단순 회피는 가능했다.
 연호는 진심으로 이 정도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조우한 폭주 모드 스팅 스네일(Sting Snail).
 옐로경보 <위험도 2.9>.
 폭주 상태일 땐, 일정 수준 이상 육체를 개발하고 장비마저 갖춘 D급 헌터 정도는 되어야 대적이 가능한 종(種).
 사실 평상시엔 전혀 반항이 없어 위험도가 낮지만, 질척거리는 점액질의 몸통 때문에 사냥에 난처함을 호소하는 이도 많았다.
 말랑말랑한 젤리 혹은 푸딩을 연상케 하는 기이한 몸체가 핵을 끈질기게 보호하기 때문이다.
 E급 헌터의 물리력 정도는 물컹거리며 흡수하거나, 찐득하게 달라붙으니 기대 않던 엿을 먹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수판도 15분이나 걸려 잡지 않았던가.
 따라서 육체 성능이 향상되면 그저 힘으로 뭉개거나 혹은 산산조각을 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일 거다.
 스팅 스네일의 치명적인 약점을 대부분 모르는 것은.
 고작 레드균열 수준에서 나오는 게임으로 치면 초반 슬라임 같은 존재라 알 필요성이 없다는 게 더 적절했지만.
 한데, 스팅 스네일에게는 불행히도 그 약점을 낱낱이 꿰고 있는 이가 등장했다.
 5년째 F급 헌터 강연호.
 연호는 무척 성실했다. 하루 일과도 단순 그 자체.
 헌터 전용 피트니스 센터-전장-고시원.
 매일 육체를 단련하고 헌터넷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며, 사냥감의 정보를 공부한다. 취미라곤 비싼 돈을 주고 유명 클랜이나 컴퍼니의 블루 혹은 인디고급 ‘균열공략’ 동영상 시청뿐.
 술, 담배도 안 한다.
 여자는 10년 전 고등학교 때, 잠깐 사귀었던 게 마지막이었다.
 주변에서 외모가 아까우니까 아무나 사귀라고 핀잔을 주곤 했지만, F급 헌터로서 그런 건 사치라고 연호는 생각했다.
 그렇게 전투 수도승 같이 보낸 세월이 5년.
 적어도 공개된 이계 생명체 중에서 연호가 모르는 종은 없었다.
 스팅 스네일 역시 마찬가지.
 그 때문에 연호는 서슴없이 발을 디뎠다.
 ‘체고 1미터 20㎝. 몸길이 2미터 10㎝. 중앙 핵 45도 각도 아래에 얇은 통로가 하나 있다. 놈의 숨구멍.’
 유도의 태클 자세로 무게중심을 낮춰 최단 루트로 접근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찌른다.
 효율성이 극도로 집약된 일격.
 톡! -와르륵.
 스팅 스네일이 모래성이 무너지는 것처럼 스러졌다.
 그렇게 탄생한 3초라는 기적. 연호는 짜릿한 감각에 소름이 돋았다.
 리미트가 해제된 육체는 연호에게 비상할 수 있는 날개를 제공했다. 여태껏 갈고닦은 노력의 성과를 세상에 마음껏 펼칠 판을 깔아준다.
 이어서 감미로운 목소리가 연호의 귓가에 울렸다.
 띠딩!
 
 <축하드립니다. 처음으로 F급 이차원 존재를 사냥하셨습니다. 업적 보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E급 성장비약 x1
 
 황홀한 울림이었지만, 연호는 이를 무시하고 곧바로 몸을 날렸다. 전투에 방해되니, 알람은 일단 뒤로 치웠다.
 타다닷!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리미트가 해제되고, 점점 적응이 될수록 연호는 효율적으로 근육을 짜내기 시작했다.
 미세한 시계의 초침을 맞추듯 오차 조정을 계속한다.
 갑작스럽게 증가한 스피드와 힘을 주체 못 할 법도 한데, 금세 익숙하게 다뤄간다.
 동시에 꽉 막혀 있던 잠재력의 상승으로, 육체는 미친 듯이 성장을 거듭했다.
 
 [체 력 F(99.9%) → E(11.9%)로 등급이 상승합니다.]
 [스피드 E(52.3%) → E(61.2%)로 등급이 상승합니다.]
 [파 워 E(41.9%) → E(52.0%)로 등급이 상승합니다.]
 
 단련의 시간은 헛되지 않았다.
 5년 동안 대답 없던 땀이 이제야 달콤한 보상으로 답을 했다. 노력의 성과가 지금에서야 올바르게 반영된다.
 이후, 연호는 광풍이 되어 날뛰었다.
 주저 따윈 없이, 스팅 스네일들의 품속으로 파고든다. 갈수록 빨라지니, 저승사자나 다를 바가 없었다.
 미친 듯 울리는 알람이 축복의 팡파르처럼 들렸다.
 띠딩!
 
 <축하드립니다. 처음으로 F급 이차원 존재를 다섯 마리 사냥하셨습니다. 보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처음으로 F급 이차원 존재를 열 마리 사냥하셨습니다. 보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강연호 고객님의 급격한 성장에 감탄하며 소정의 상품을 보내드립니다.>
 ······.
 
 총 21마리의 스팅 스네일을 모조리 몰살하고 나서야, 연호는 멈춰 섰다. 쩍쩍 갈라진 아스팔트 도로엔 흙탕물이 고인 것처럼 누런 젤리만이 남았다.
 미용에 좋다는 소문 때문에 제법 인기가 좋은 스팅 스네일의 사체들.
 “후우······.”
 연호는 가만히 서서, 긴 숨을 몰아쉬었다.
 단숨에 호흡이 안정을 되찾는다.
 짝짝짝.
 어디선가 들리는 박수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민혁과 수판이 벽 뒤에서 기어 나오고 있었다.
 마치 인간 물개라도 된 것처럼 손뼉을 치는 까까머리 민혁은 감탄을 넘어 감동에 가까운 표정이다. 반면, 수판은 장례식장에라도 온 것처럼 음울함 그 자체였다.
 상처 때문에 팔을 움켜쥐고 다가온 민혁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대, 대단하십니다! 이런 건 저 처음 봤어요.”
 수판이 돌멩이를 걷어차며 조용히 투덜거렸다.
 “뭐가 대단하다고······ 나중에 등급 오르면 이ㄸㆍㄴ 건 쉽잖아요.”
 “막 리미트를 해제하셨는데, 이런 기량이면 정말 대단한 거죠! 거기다 적의 공격을 예측한 그 움직임은 정말이지······.”
 연호는 가만있는데 오히려 민혁이 흥분해서 주절주절 설명을 늘어놓는다. 마치 스포츠 스타의 현란한 기술을 보고도 시큰둥한 일반인에게 그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설명하는 모양새다.
 왠지 수다스러운 게 한수와 비슷한 것 같아 연호가 급하게 막아섰다.
 “잠시만요. 그······ 다친 여자분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전 한수를 데려오죠.”
 “아, 한수 씨도 살았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힐 젤(Heal Gel) 혹시 필요하신가요?”
 헌터들의 필수 의약품 힐 젤(Heal Gel).
 끈적끈적한 연고 형태로 지혈 및 상처 수복에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는 제품. 이는 이계와의 접촉 이후 가파르게 성장한 의약 산업의 쾌거라고도 불렸다.
 하나, 연호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딱히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치료 앰플 x3
 
 인벤토리에 얌전히 놓인 소정의 선물.
 이 VIP시스템이 제공한 약품을 믿어보기로 했다. 민혁도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불쑥 무언가 내민다.
 뭔가 싶어 보니, 핸드폰이다.
 “저······ 형님이라 불러도 됩니까?”
 “······.”
 “번호 좀······.”
 나중에 하자는 말을 남기고 연호는 급하게 한수에게 달려갔다. 부서진 돌덩이를 헤치고 나아가자, 1층 안쪽에 그림자가 보였다.
 정신을 잃은 한수는 그 모습 그대로 누워있었다.
 다만,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고 복부에선 연신 피를 흘리는 걸 보니 심상치 않아 보였다. 거기다 불길하게 입가엔 옅은 미소마저 띠고 있다.
 마치 “다 불태웠어.” 이런 느낌으로.
 “얌마. 누가 너 마음대로 죽게 한 대냐?”
 상의를 걷으니, 발라둔 힐 젤을 뚫고 붉은 피가 꾸물거리며 튀어나온다.
 스르륵.
 연호는 지체 없이 인벤토리에서 치료제를 꺼냈다.
 
 [치료 앰플]
 : 어떤 상처라도 이거 하나면 거뜬하다. 다만 회복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체력을 소모한다. 영양소 보충이 부족하면 굶주림 때문에 사망할 수도 있다.
 
 ‘뭔가 불길한데’라고 생각하면서도 연호는 일단 뚜껑을 땄다. 그리고 상처에 조심스럽게 앰플 용기의 액체를 흘렸다.
 졸졸졸 흐른 푸른 액체는 놀랍게도 스스로 상처를 찾아 흘러 들어갔다. 2개의 구멍을 자연스럽게 막더니, 안에서부터 서서히 살이 차오른다.
 한수의 숨이 점차 평온해지고, 눈에 띄게 안색이 편해진다.
 그제야 연호도 긴장을 풀고 주저앉았다. 맥이 풀리고 그 자리에 안도감이 자리 잡는다.
 만약 한수가 자기 대신 죽기라도 했으면 평생 트라우마로 남아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을 거다.
 “정말 다행이다······.”
 연호는 쪼그려 앉아 본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제야, 상단 시야에 깜빡이는 메일(Mail)이 눈에 들어온다.
 아까 전 미뤄놨던 보상들.
 마치 스팸 메일처럼 한데 쌓여 있다.
 연호는 궁금증에 일괄수령을 손으로 눌렀다.
 
 <모든 보상을 일제히 수령합니다.>
 -건축허가서 x1
 -차원쟁투장 티켓 x1
 -차원재화 혼(魂) 200 지급.
 -E급 성장비약 x1
 
 <가방의 공간이 부족하여 메일함에 보관됩니다.>
 <메일함의 보관된 메일은 30일이 지나면 사라지니, 그전에 꼭 수령하시길 바랍니다.>
 
 30일 보관 기능마저 살린 꼼꼼함이 돋보인다.
 비록 이 VIP 능력 때문에 리미트를 해제했다지만, 현재까지 연호의 감상은······.
 ‘이거 완전 예전 모바일 게임 같네.’
 분명 차분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었다.
 왜 이런 능력이 생겼는지 따위는 솔직히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
 연호는 평상시에 균열의 생성 원인에 관한 <100분 특집 토론방송> 때에도 시큰둥했으니까. TV에서 양 패널이 열심히 논박할 때 “왜 저런 헛지랄을 하지?”라고 중얼거리는 게 연호였다.
 다만, 이 능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선 분명 숙지해야 하는 룰이 있을 거다.
 연호는 그게 알고 싶었다.
 띠딩!
 
 <강연호 님 앞날에 무궁한 발전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앞으로도 즐거운 VIP시스템 이용되시길! 저희는 언제나 강연호 님의 든든한 서포터가 되겠습니다. VIP시스템이 마음에 드셨으면, 추천 한 번 꾹 눌러주세요. for ㈜차원.>
 
 “······이거 설마 ㈜차원에서 서비스 제공하는 거냐?”
 연호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지금도 무언가 새로운 기능들이 금빛으로 반짝인다. 튜토리얼을 끝내면 조금씩 잠금이 해제되는 형식이 딱 게임방식이다.
 
 <추천을 누르시면 차원재화 혼(魂) 50을 지급해 드립니다. 지금 기회 절대 놓치지 마세요!>
 
 “······이런 건 또 받아야지.”
 연호는 뭔지 모를 추천을 일단 누르고 혼을 받았다.
 인벤토리를 보니 새하얀 솜사탕처럼 생긴 혼이란 것이 어느덧 450이나 쌓여 있다. 이걸 어떻게 쓰는 거지 고민하는 찰나,
 띠딩!
 
 <특수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연호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글을 읽었다.
 “뭔 퀘스트인데?”
 
 
 2.
 퀘스트(Quest).
 게임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 이용자가 수행해야 하는 임무 또는 행동을 통칭하는 용어.
 아마 대한민국, 아니, 인류 전체에서 이 말의 뜻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제는 일상이 된 게임용어니까.
 다만, 그게 이런 식으로 튀어나올지는 전혀 몰랐다지만.
 연호는 상단에 깜빡이는 퀘스트를 떨리는 마음으로 터치했다.
 
 [특수퀘스트 -혼 수집을 배워보자!]
 : VIP시스템의 초보 이용자인 당신을 위한 지침서! 차원재화 혼(魂)이 언제나 부족하시죠? 간단하게 혼을 수집하는 방법을 익혀봅시다.
 [보상 : 인벤토리 5칸 확장.]
 
 안 그래도 이 혼(魂)이라는 것에 대해 궁금증을 느끼고 있었다.
 일단 혼(魂)이 VIP시스템에서 재화 즉 돈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분명 ‘차원재화’라고 적혀 있으니까.
 한데 이젠 수집하라니?
 연호는 얼핏 보면 실뭉치 혹은 솜사탕처럼 보이는 인벤토리의 혼을 주시했다. 가상의 홀로그램 칸에 얌전히 웅크린 그것은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흐물흐물.
 반딧불처럼 영롱하게 빛나고 가끔 꿈틀거리는 게 살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띠딩!
 그때, 바닥에 화살표 하나가 스르륵 새겨졌다.
 VIP시스템 특유의 홀로그램이다. 연호는 표시가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화살표가 가리킨 것은 곤죽으로 변해 있는 스팅 스네일의 사체.
 
 <혼(魂)을 수집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생물의 사체에 손을 올리고 [수집] 명령만 내리시면 됩니다. 사후시간이 너무 흘러 버리면 수집을 못 하니 주의하셔요! [보관] 명령을 내리시면, 인벤토리에 사체가 수납됩니다.
 p.s 이차원 존재면 얻을 수 있는 혼이 두 배! 더블!>
 
 보통 이런 이계 생명체의 사체는 국가기관, 연구소, 기업 등에서 매입하곤 했다. 이계의 존재는 현대문명의 신소재로서 무궁무진한 연구 가치를 지니고 있으니까.
 실제로 대격변 이후 의학, 전자공업, 첨단소재, 신에너지 기술, 각종 융합산업 등등 인류 문명은 눈부신 속도로 발전을 거듭 중이었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처럼, 이계의 존재는 치명적인 상흔을 남겼지만 동시에 보물로 가득 찬 신세계를 열어준 것이다.
 그중 스팅 스네일 같은 경우는, 근본이 달팽이 종(種)이라 그런지 미용에 좋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이계의 달팽이 성분함유 로션, 에센스, 데이크림 세트 절찬 판매 중!>이라는 광고는 길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다.
 턱.
 연호는 망설이지 않고 끈적끈적한 웅덩이가 되어버린 사체에 손을 올렸다.
 “수집.”
 슈슈슝!
 마치 한순간에 재로 변하듯 혹은 다른 차원의 세계로 빨려가듯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몸체.
 
 [혼 보유량이 451로 상승하셨습니다.]
 <특수 퀘스트 완료로 인벤토리 5칸이 확장됩니다.>
 
 “고작 1이라니······ 너무 짠 거 아냐?”
 아무래도 레드균열에서 튀어나온 녀석이라 그런지 혼이 극소량으로 차올랐다. 연호는 실망감에 시무룩해졌다.
 그래도 퀘스트 보상으로 인벤토리가 늘어나, 메일함에 있던 보상 선물들을 다 받았으니 그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무엇이든 첫술에 배부를 순 없다.
 거기다 앞으로 더 강한 균열의 이종족을 사냥하면 혼도 많이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활용 방도는 아직 미정(未定)이지만, 어렴풋이 강해질 노선이 보였다.
 “으챠.”
 연호는 무릎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어깨를 쫙 펴고 서서, 이물(異物)과의 전투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은 도시를 눈에 담았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하늘엔 새파랗게 물든 적란운이 넘실거리고, 지상엔 파괴되어 폐허로 몰락한 도심의 풍광이 비쳤다.
 항상 작업을 마치고 이렇게 전장 한복판에 서면, 짙은 공허함이 몰려왔지만 오늘은 달랐다.
 희망이라곤 도통 안 보이던 연호의 인생길에 한줄기 서광이 비친 것이다. 연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런 행운이 갑자기 찾아온 이유?
 미안한데 그딴 건 관심 없다.
 그런 건 먹물 찬 소위 전문가들이나 거시적 관점에서 세상을 논한다고 칭하는 윗대가리들이나 고민하라고 하지.
 우연이든 신의 장난이든 상관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이 VIP시스템을 최대한 이용해서 반드시 꿈을 이루겠다고 연호는 다짐했다.
 ‘남자로 태어났으면, 정상을 찍어봐야지.’
 연호는 한동안 이계의 균열과 그로 인해 부서져 버린 도시를 굽어봤다.
 훗날 거인으로 성장할 자신의 미래를 꿈꾸며.
 
 “빨리! 이쪽에 부상자가 있어.”
 헌터넷(Hunter Net)의 긴급 구조신호를 받고 파견된 의료팀이 바삐 움직인다. 적십자 마크의 완장을 찬 이들은 쓰러진 한수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엇? 이 환자 외상이 없는데요?”
 “뭐? 보자.”
 치료 앰플의 효과 덕에 겉으로 한수는 멀쩡해 보였다. 살이 올라 상처를 메꾸는 형식이라 그런지 흉터도 일체 남을 것 같지 않다.
 눈을 까뒤집어 살펴보는 의료진에게 연호가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아까 전에 절 구하려다가, 벽에 세게 부딪쳤거든요. 혹시 모르니까 병원으로 이송해 주시겠어요? 어딜 다쳤는지 몰라도 입에서 피를 뿜더라고요.”
 “알겠습니다. 걱정 마시죠.”
 피투성이인 한수인지라 그들은 연호의 거짓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연호로서는 치료 앰플의 부작용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영양소가 부족하면 사망할 수도 있다니.
 ‘이참에 병원으로 보내두면 확실하겠지.’
 의료진에게 실려 가는 한수를 보며 그제야 연호는 마음을 완전히 놓았다.
 “여- 형씨. 이야기 들었어. 이거 다 자네 솜씨라며?”
 근방을 둘러보던 30대 후반 장한이 친근하게 말을 건다.
 서울 동쪽 지역에서 활동하는 붉은여우(Red fox) 클랜 소속 돌격 스쿼드(Squad) 대장 백안일. 그는 UDT 특수부대원들이 착용할 법한 검정색 헌터 전용 베스트를 걸치고 히죽 웃었다.
 고글을 슬쩍 들어 올리자, 서글서글한 눈매가 튀어나온다.
 “막 리미트 해제한 거 같은데. 폭주 달팽이를 모두 처리하다니. 자네 실력이 좋은데?”
 “과찬이십니다.”
 “푸하하. 이거 겸손한 친구구먼. 헌터가 그래서야 쓰나. 요즘은 자기 PR 시대라고. 자신 없어도 자신 있는 척 그래야지!”
 그린문 클랜의 구조요청을 보고 만사를 제쳐두고 뛰어온 백안일.
 하지만 그가 그린문과 친밀한 사이든가 딱히 그런 건 아니었다.
 오히려 사사로이 붉은여우와 그린문 양 클랜은 유명한 앙숙 즉 라이벌 관계로 유명했다.
 한데, 그가 버선발로 뛰어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평생 놀림감으로 삼을 만한 이 추태를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지 그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백안일이 연호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은근히 입을 열었다.
 “어이 젊은 친구. 자네 혹시 우리 클랜에 들어올 생각 없나?”
 “······네?”
 사실 오랫동안 F급에 머물던 이가 리미트를 해제하면, 곧바로 클랜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들어오긴 했다.
 왜냐면 독기와 끈기가 입증되었을 뿐만 아니라, 갓 라이센스를 취득한 생초짜보다 가르치기도 쉽고 말귀도 잘 알아먹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거기다 연호 같은 경우엔 홀로 폭주한 스팅 스네일 무리를 처리하는 성과를 올렸으니 제법 매력적인 카드였다.
 “나 이래 봬도 B급 헌터야. 사람들이 우리랑 그린문 클랜을 라이벌이라 칭하는데 사실 비교가 안 돼. 우린 더 높이 올라갈 걸세. 저 위까지.”
 백안일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킨다.
 “하이패스로 말이야.”
 붉은여우 클랜의 스카우트 제의.
 평범한 F급 헌터라면 고민도 없이 승낙할법한 솔깃한 제안이다.
 연호도 잠들기 전, 어떤 클랜에 들어갈까 헤아릴 때 슬며시 3순위 정도에 올려둔 클랜이기도 했다.
 규모는 작지만 저력이 있는 클랜.
 하지만.
 지금의 연호에게는 성에 차지 않는다.
 “너무 급작스러운 이야기라······ 제안은 감사하지만 조금 생각해 봐도 되겠습니까?”
 “푸하하. 그래, 그러라고. 단, 붉은여우 클랜의 최고 장점 하나는 꼭 듣고 가라고. 정말 딴 클랜엔 없는 조건이니까.”
 “······뭔가요?”
 “클랜 리더가 예뻐.”
 “······.”
 “그것도 무지하게.”
 얼굴은 모르지만, 확실히 예쁘다고 소문이 자자하긴 했다.
 백안일은 파안대소를 터뜨리고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확실히 털털하니 괜찮은 사람으로 보인다. 팀워크나 빠릿빠릿한 움직임들을 보니 클랜원들 훈련도 잘되어 있고.
 ‘하지만 아냐. 아직은.’
 연호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었다.
 거기다 VIP 능력이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능력이라는 것 역시 충분히 자각 중이다. 그러니 클랜에 드는 것은 신중해야만 했다.
 자신의 능력을 정당하게 평가받으려면.
 그 때문에 아직은 시기상조라 여겼다.
 연호가 생각을 정리하며 걸어 나오니, 마침 오늘 사건의 주인공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이번 작전의 총책임자이던 이제수부터 민혁 그리고 원흉인 수판까지.
 한데 모인 3명의 그린문 클랜원 전부가 죽을상이다.
 -끼이익.
 그리고 마침내, 그 울상의 화룡점정을 찍을 이가 도착했다.
 거친 드리프트 끝에 도로에 긴 스키드마크를 남기며 지프 한 대가 서고, 선글라스를 낀 한 사내가 내렸다.
 화려한 꽃무늬 셔츠에 뾰족한 구두, 질겅질겅 씹는 껌까지.
 결코 전장에 적합한 차림새는 아니다.
 그린문 클랜의 리더이자 김수판의 친형 C급 헌터 김철현.
 우람한 체구 탓에 터질 듯 쫙 달라붙은 셔츠가 불쌍할 지경이다. 중노동에 힘겨워하는 셔츠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러곤, 냅다 이제수의 배부터 걷어찼다.
 “야 이 새꺄. 일을 뭘 이따위로 처리해? 사람 빡치게.”
 “컥.”
 “내가! 쪽팔리잖아!”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지만, 복부의 충격에 이제수가 헛바람을 삼킨다. 그는 땀을 흘리면서 다시 차렷 자세를 취하려 애썼다.
 퍽! 퍽!
 몇 차례 더 손찌검이 오간다.
 손바닥이 뺨에 닿을 때마다 이제수의 몸이 갈대처럼 휘청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맞아 쌍코피가 터진 이제수를 뒤로하고, 철현은 동생 수판에게 눈을 돌렸다.
 수판은 벌벌 떠느라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철현은 복잡한 표정으로 동생을 쳐다보다 그의 볼을 툭툭 건드렸다.
 “야 이 멍청한······ 어휴, 아니다.”
 “혀, 형······ 미안······.”
 “됐다. 어휴, 이 멍청한 새끼야.”
 클랜(Clan)의 본질적인 속성은 사냥을 위한 무력단체다.
 그 때문에 리더의 성격에 따라, 클랜의 성향 역시 판이하게 달랐다. 철저한 상명하복의 군대식 조직이 있는가 하면 느슨하게 운영하는 팀제 회사 같은 분위기도 있었다.
 최근엔 프로다움을 강조하는 기업식 용병단체 같은 분위기가 대부분을 차지했는데, 그중에서 그린문 클랜은 조금 특이했다. 구식이라면 구식.
 옛 조폭 스타일.
 아니, 김철현은 본래 유명한 조폭이었으니 그는 예전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만, 그 폭력의 대상이 인간에서 괴물로 바뀌었고, 그로 인해 대중에게 떳떳하게 찬사를 받는다는 점만 변했을 뿐.
 저벅저벅.
 그런 그린문 클랜 리더 김철현을 향해 연호는 당당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수가 급하게 귓속말로 철현에게 말을 건넨다. 잠시 이채를 띤 철현이 다가온 연호를 향해 활짝 웃었다.
 사채업을 하며 숱하게 지은 업무용 미소.
 “아이고, 연호 씨. 우리 할 이야기가 참 많을 것 같은데요? 그렇죠?”
 “그렇습니다.”
 “흐흐. 우리 연호 씨. 딱 보니까 똑똑해 보여요. 그런 말 많이 듣죠? 이야- 리미트 해제한 것도 축하합니다. 대성할 기운이 팍팍 느껴지네요. 홍복이에요, 홍복.”
 철현은 박수까지 쳐가며 박장대소했다.
 겉으로 보기엔 십년지기 절친처럼 친밀해 보이는 광경인데, 이를 지켜보던 그린문 클랜원들은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김철현이 웃는 건 절대 좋은 징조가 아니다.
 스윽.
 불현듯 내민 철현의 오른손.
 그의 악수 요청을 연호는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 상태로 철현은 씹어내듯 말을 뱉었다.
 “그러니까······ 우리 조용조용하게 처리합시다.”
 선글라스를 벗으니, 야수같이 흉흉한 눈빛이 번뜩인다.
 “더 이상 일 크게 만들지 말자고. 응? 넉넉히 챙겨줄 테니까.”
 살기 섞인 협박.
 찌릿찌릿한 기운에 등골이 서늘할 법도 한데, 연호의 태도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태연자약했다.
 “······이야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게 있지 않습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철현이 고개를 갸웃한다. 연호가 손가락으로 누군가를 가리켰다. 지목된 이가 움찔 어깨를 떤다.
 바로 철현의 동생 수판.
 “사과부터 하시죠. 그쪽 동생분.”
 “뭐?”
 “당장 사과부터 하라고. 이 X새끼야.”
 
 
 3.
 “허, 우리 연호 씨 그렇게 안 봤는데······.”
 내민 손을 주머니에 넣으며 철현이 이죽거린다.
 “입이 좀 험하네. 어린 새끼가.”
 동시에 폭사되는 C급 헌터의 농밀한 살기. 철현의 등 뒤에서 마치 아지랑이 같은 일렁거림이 피어올랐다.
 흔히 헌터 세계엔 크게 세 가지 벽이 있다고 논해진다.
 첫째, ‘진짜’ 헌터와 일반인을 구분 짓는 리미트 제한.
 둘째, 내재된 기(氣)를 격발시키는 오러(Aura)의 사용 유무.
 셋째, S급으로 오르는 관문인 2차 리미트 해제, 이른바 각성.
 이 중 철현은 분명 오러의 사용자였다.
 유형화된 압박이 연호의 의지를 찍어 눌렀다. 당장 살을 찢고 척추를 꺾는다고 겁박한다. 무릎 꿇고 굴복하라고 귀신이 치렁치렁한 혀를 내민다.
 하나, 연호는 태연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근처 공원으로 산보를 나온 이처럼 유유자적하게 보였다.
 외풍에도 흔들림 없는 의지.
 연호의 눈은 오로지 정면만을 바라봤다. 천년을 버틴 소나무의 기개와 기상처럼 단단하기 그지없다.
 이내 철현도 협박이 통하지 않음을 눈치챘다. 가끔 이렇게 강단 있고 독기 서린 놈들이 있다.
 이건 누가 가르쳐주거나 혹은 강제로 주입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그저 그 사람의 기본적인 성품.
 철현은 작전을 바꿨다. 마치 두 얼굴의 사나이처럼 순식간에 태도가 180도 바뀐다.
 능청스럽게 들썩거리는 어깨와 능글맞은 비웃음.
 “허허. 근데 내 동생이 사과를 하라니, 뭔 말인지 도통 모르겠네.”
 “······.”
 “스팅 스네일들이 폭주한 건 F급 헌터가 ‘찌’ 역할을 하다가 실수해서 그런 거잖아요.”
 그러곤 뻔뻔하기 짝이 없는 수작을.
 “본래 계약서대로라면 딱히 저희가 지급해야 할 돈은 없겠지만, 그래도 저희 작전 때문에 불미스러운 사고가 발생했으니······ 유가족에겐 넉넉한 지원금이 돌아갈 겁니다. 그렇죠?”
 터무니없이 부린다.
 F급 헌터의 삶은 고달프다.
 보험? 사망률이 가장 높은 직업에 그딴 게 있을 리가.
 일용직으로 일거리를 얻는 헌터의 경우, 앱으로 작전계획서에 동의하는 순간 흔히 독소조항이 삽입되어 있다.
 
 <귀하의 헌터 작전에 관하여 불의한 사고 및 사망 등 이하 명시된 사항에 대하여 본인에게만 책임이 있음을 동의합니까?>
 
 즉, 어지간하면 작전 도중 사망으로 클랜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었다.
 결국, 김철현의 요지는 이랬다.
 이번 사건을 죽은 F급 헌터의 실수 탓으로 돌리자. 대신 본래 지급할 리 없는 돈을 주겠다.
 이걸로 퉁 치자고 이야기하는 거다.
 연호는 어이가 없어 가만히 쳐다봤다. 놈들은 철면피처럼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오직 까까머리 민혁만이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딴 게 가능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증거와 증인이 버젓이 있는데.”
 “증거? 아하. 멀티캠?”
 장비에 부착이 가능한 초소형 카메라의 일종인 멀티카메라.
 이는 대격변 이후, 헌터 업계에 있어 필수 아이템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마치 차량의 블랙박스처럼.
 온갖 시시비비가 멀티캠의 영상 하나로 판독이 가능하니, 딱히 지참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연호가 지적한 것도 그것이었다.
 비록 F급 헌터들은 멀티캠을 지니고 있지 않았겠지만, 수판이 걸친 D급 슈트라면 분명 영상이 기록되어 있을 테니.
 그 순간.
 슈팟 -팡!
 채찍 같은 소리와 함께 수판의 상체에 붙어 있던 멀티캠이 산산조각이나 비상했다. 조그만 렌즈 조각이 땅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진다.
 수도(手刀) 형태로 손을 쭉 뻗은 철현이 히죽 웃었다.
 “웁스. 없어져 버렸네요. 클라우드 보관도 오면서 삭제하라고 했으니······ 대체 뭔 증거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네.”
 연호의 눈엔 동작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철현은 이미 오래전 리미트를 해제하고 여러 실전을 거친 전사다. 그런 그가 오러까지 활용해 작정하고 수를 쓰니 격차가 여실히 드러났다.
 이제 겨우 ‘진짜’ 헌터 세계에 발을 내디딘 연호에게는 아직 벅찬 상대. 연호가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었다곤 하지만 상대는 이미 창공을 날고 있던 매였다.
 철현은 렌즈 조각이 묻은 손을 탈탈 털었다.
 실력행사를 했으니, 마무리를 지을 속셈.
 “증인은······ 요즘 세상이 하도 험해서 말이에요. 어제도 옆집 할배가 급성 심장마비로 꿱 하셨더라고. 길거리에서 나자빠져도 경찰 나리가 달려올 것도 아니고. 아니면 균열로 바쁜 군인이 튀어오겠어요? 흐흐.”
 죽기 싫으면 좋게 가자는 말을 연호가 못 알아먹을 리 없다.
 철현은 내심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제야 막 ‘헌터’가 되었는데, 클랜 리더인 자신과 척을 져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 그저 더러운 꼴 당했다 생각하고 지나치면 되는 거다. 한두 푼 돈으로 위안을 삼으면서.
 세상 돌아가는 현실이 그런 걸 어쩌겠는가.
 “증거라······.”
 하나, 연호의 행동은 그의 예상을 벗어났다.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일 거라고 여겼는데 웬걸 연호는 오히려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말한 증거는 그쪽이 아니었는데요.”
 “······?”
 “이리 오시죠. 아영 씨.”
 벽 뒤에서 모포를 걸친 아영이 부축을 받으며 절뚝거리며 다가온다. 그녀의 등장에 수판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요동쳤다.
 반면, 철현은 그녀를 부축한 이의 얼굴을 확인하고,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특수부대원 복장을 본뜬 장비에다가 오른팔 완장엔 붉은여우 심볼 마크(Symbol Mark)까지. 돌격 스쿼드 대장 백안일이 아영을 호위하고 나타난 것이다.
 절뚝절뚝.
 원망 어린 눈빛으로 잠시 수판을 노려본 아영이 모두의 앞에 당당하게 섰다.
 그녀는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심호흡을 하더니, 소리쳤다.
 “제가 증인입니다. 똑똑히 다 봤어요. 거기다 제 코트에도 멀티캠이 부착되어 있습니다. 전부 기록되고 저장되었으니 언제든지 확인해 볼 수 있어요.”
 “큭. 이년이.”
 욱한 철현이 발걸음을 떼려 하자, 백안일이 막아선다. 아영을 완전히 몸 뒤로 가리곤 턱 하니 서자, 인간방패가 따로 없이 듬직했다.
 “어이, 또라이. 거기까지. 이 아가씨 방금 우리 클랜 소속 됐거든? 머리카락 하나라도 다치게 하면 뒈진다.”
 “흐흐흐. 짭새 새끼가. 쌍으로 지랄이구나.”
 대격변 이전 경찰이었던 백안일과 조폭이었던 김철현은 서로 구면이었다. 물론, 사이는 더럽게 안 좋았다.
 어떻게든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던 백안일과 각종 비릿한 수법으로 요리조리 도망치던 김철현.
 오늘날 두 클랜이 사사건건 부딪치는 배경엔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존재했다.
 “자,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를 해 볼까요.”
 때가 무르익었다 싶어 연호가 앞으로 나섰다.
 사실 연호는 아영을 포섭해 둔 지 오래였다. 이 업계 더러운 거야 한두 해 일도 아닌지라, 혹시나 개지랄할 때를 대비한 거다.
 뼛속까지 수판을 증오하게 된 아영은 홀린 표정으로 연호의 제안을 승낙했다.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부터 하시죠. 안 그러면 이야기는 없습니다.”
 “······.”
 냉정한 연호의 말에 흐르는 정막.
 숨 막히는 고요함에 누군가 침을 꿀꺽 삼킨다. 11월의 겨울바람보다 더 싸늘한 냉기가 연호의 목소리에 담겨 있었다.
 결국, 머리를 벅벅 긁던 철현이 수판의 등을 밀었다. 완력에 튕겨 나온 수판이 어리바리한 표정으로 형을 쳐다봤다.
 “혀······ 형.”
 “사과해, 인마. 일단.”
 연호와 아영의 싸늘한 눈빛이 수판에게 쏟아진다. 잠시 덜덜 떨던 수판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털썩.
 찬바람 부는 아스팔트 도로 위에서 결국 수판은 고개를 조아렸다.
 사색으로 변한 수판이 손을 덜덜 떨며 웅얼댔다. 그건 비겁한 핑계로 점철된 변명에 가까웠다.
 “죄, 죄송합니다! 연호 씨. 그리고 아영아. 정말 그땐 내가 조금 미쳤었나 봐. 절대 그럴······.”
 “아뇨. 틀렸습니다.”
 그리고 서릿발 같은 연호의 음성이.
 “당신은······ 죽은 헌터들에게 제일 먼저 사과했어야죠.”
 사과를 거부했다.
 연호는 몸을 홱 하니 돌렸다.
 무릎을 꿇은 채 절망스럽게 올려보는 수판을 뒤로한다.
 “헌터 사무국에 인류 금기목록을 어긴 죄로 신고하겠습니다. 증거 영상까지 제출하면 금방 재판에 회부되겠죠. 헌터들만 모아둔 감옥이 그렇게 안락하다니 거기서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인류 금기목록.>
 
 국제법으로 지정한 헌터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항목들이다. 스팅 스네일의 폭주 역시 대표적인 목록 중 하나였다.
 이를 어기는 순간 인류의 이익에 극심한 침해를 입혔다 판단하여 <헌터 사무국> 소속인 소위 ‘인간 잡는 헌터’들이 움직인다.
 그렇기에 수판의 경우 재판장으로 가면 빼도 박도 못하고 감옥 신세다.
 그러다 사망 확률이 매우 높은 균열 따위에 사면을 조건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처지가 될 거다.
 “감옥에서 열심히 사과하시길 바랍니다. 김수판 씨.”
 연호는 죽은 헌터들을 떠올리며, 도로변을 따라 걸었다.
 
 * * *
 
 월세 18만 원의 누리끼리한 고시원.
 예전에는 수험생 또는 대학생 등이 주로 머물렀던 이곳은 대격변 이후 F급 헌터들을 위한 쉼터의 역할을 10년 가까이 톡톡히 해내는 중이었다.
 ‘허름하다’를 형상화한다면 딱 이 고시원이 생성될 테지만, 저렴한 가격 때문에 언제나 빈방은 없었다.
 끼익.
 샤워 후 젖은 머리를 탁탁 털며, 연호가 고시원 방에 들어섰다.
 겨우 팔굽혀펴기만 할 수 있을 정도의 감옥 독방 정도의 크기였지만, 연호는 개의치 않고 자리에 앉았다.
 하루 동안 꽤나 많은 일이 있었다.
 폭주 소동에 리미트 해제에다가 김철현까지.
 마지막에 김철현이 이를 갈며 “두고 보자. 이 새끼야”라고 협박했지만, 이는 샤워 중에 연호의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대범하여 자잘한 일에 신경을 쓰지 않는 건 연호의 장점 중 하나.
 그는 이미 철현과의 트러블을 사소한 일로 치부하고 잊어버렸다. 대신 그 심력을 그보다 더 중요한 과업에 쏟기로 했다.
 VIP시스템!
 뜬금없이 나타난 이 능력은 분명 연호 인생의 전환점이 될 만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그래서 차분하게 이 행운을 탐구해 보려고 마음먹었다.
 “좋아. 일단 상태창부터.”
 시스템을 떠올리니 손쉽게 홀로그램이 튀어나온다.
 10년 전 흔했던 모바일 게임의 메인 창을 보는 것 같다. 왼쪽 상단엔 증명사진 같은 초상화가 떠 있고 오른쪽 하단엔 무언가 아이콘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자세히 읽어보니 [던전 진입] [나만의 농장] [가방] [차원쟁투장]들이 황금빛으로 반짝인다. 그중 던전 진입이 둥그런 테두리라 크기가 제일 컸다. 나머지도 있었는데 흐릿한 걸 보니 비활성화 상태로 보였다.
 연호는 슬쩍 던전 진입을 눌렀다.
 띠딩!
 
 <경고! 아직 나. 약. 하. 신 강연호 고객님에게는 생사를 건 고난이 펼쳐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진입하시겠습니까?>
 
 마치 보스 레이드 전에 존재하는 세이브존처럼 친절한 설명.
 슬쩍 구경이나 해보고 싶었지만, 연호는 일단 그 마음을 색종이 접듯 고이 접어두기로 했다.
 지금 샤워를 마친 직후라 팬티 바람이다.
 이 꼴로 던전이라는 곳을 활보하는 건 미친 짓이다.
 연호가 이어 가방을 터치하니, 확장된 인벤토리 칸이 나타났다. 생각만 해도 작동하고 건드려도 반응하는 친절한 시스템.
 슥 훑어보니 오늘 보상으로 얻은 전리품들이 연호를 반겼다.
 
 -차원재화 혼(魂) 451, 랜덤 B등급이하 장비 소환권 x1, 랜덤 B등급이하 펫 소환권 x1, 치료 앰플 x2, 성장 경험치 추가서(60일) x1, 건축허가서 x1, 차원쟁투장 티켓 x1, E급 성장비약 x1
 
 “많기도 하다.”
 연호는 하나씩 써보기로 했다.
 일단 그의 흥미를 가장 끈 것은 다름 아닌 펫(Pet)!
 온라인 게임에서 흔히 펫이라 하면, 귀여움의 대명사이자 모두의 친구가 아니던가. 또한 다양한 버프나 기능으로 유저들의 편의를 돕는 대표적인 옵션 중 하나였다.
 거기다 B등급 이하라니!
 랜덤이라는 용어가 좀 걸리긴 했지만, 뭔가 대단한 게 나올 것 같았다. 연호는 조심스레 펫 소환권을 사용했다.
 따라랑!
 마치 탄산음료 광고 같은 청량한 소리와 함께 눈앞에 세 장의 카드가 튀어나온다. 하나씩 순서대로 뱅그르르 돌더니, 홀로그램 영상과 능력치 시트가 나열됐다.
 
 [이계 지렁이(Parallel Earthworm)]
 체 력 : E   마 력 : 0
 파 워 : F   내구력 : D
 스피드 : E   저항력 : D
 성장 가능성 : B
 
 총합 : E+. 하지만 허접한 당신에겐 감지덕지.
 보유 기술 : 땅파기. 소화.
 특수능력 : 대지를 비옥하게 해준다.
 특이사항 : 이계에 사는 지렁이. 작다고 무시하지 마라. 작은 고추가 매운 법. 무엇이든 소화시키는 위장은 매우 튼튼하다.
 
 “흠. 이건 꽝이군. 패스.”
 흔히 랜덤 선택이라 하면 꼭 하나쯤 꽝을 넣어두는 법. 10㎝ 정도 길이로 보이는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건, 과히 좋아 보이진 않았다.
 연호는 팔짱을 끼고 다음 카드를 주시했다.
 
 [염소 황제(Goat Emperor)]
 체 력 : F   마 력 : 200
 파 워 : D   내구력 : D
 스피드 : C   저항력 : B
 성장 가능성 : A
 
 총합 : D. 조금 사나움. 조금.
 보유 기술 : 뇌전. 박치기. 침 뱉기
 특수능력 : 번개가 치면 뿔에 전력을 모을 수 있다.
 특이사항 : 성질이 더럽기로 유명한 염소. 자기를 황제라 생각해 항상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비실비실한 체력이지만 뇌전만큼은 무시무시하다. 기분 나쁘면 끈적끈적한 침을 얼굴에 뱉곤 한다.
 
 노란 왕관을 척 하고 쓴, 눈매가 더러운 염소가 연호를 노려봤다. 그러곤 툴툴거리며 이동하더니 땅에 침을 퉷 하고 뱉었다.
 연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게 최선이냐. 정말로?”
 
 [진흙 장군(Mud General)]
 체 력 : B   마 력 : 500
 파 워 : C   내구력 : D
 스피드 : B   저항력 : D
 성장 가능성 : B
 
 총합 : C. 조금 있으면 성장을 모두 마친다.
 보유 기술 : 분신술. 일격필살. 대지조종.
 특수능력 : 진흙이라 마력이 있는 한 계속 전투가 가능하다.
 특이사항 : 유명한 장군의 영혼이 깃든 찰흙 인형. 작지만 여러 전투에서 유용함을 입증했다. 만약 얻게 되면 절하고 모시도록 하자.
 
 그나마 마지막으로 괜찮아 보이는 게 나왔다.
 키는 어린아이만 한 장군 형태의 토기 인형이 창을 들고선 늠름하게 앞을 바라봤다. 무력을 과시하려는 듯 매서운 기세로 창을 휘두르기도 했다.
 연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여기서 하나가 랜덤으로 선택된다.
 ‘이계 지렁이는······ 어디다 쓸지 잘 모르겠고. 진흙 장군은 정말 괜찮아 보여. 염소황제는 성질은 더러워 보이지만 잠재력이 제일 높은 A급이야.’
 촤르륵.
 카드 세 장이 휘리릭 돌더니 뒷면이 등장한다. 그러곤 빙글빙글 회전하며 섞이기 시작했다. 마치 능숙한 딜러의 현란한 셔플을 보는 듯한 광경이 몇 초 이어지더니.
 따단!
 한 장의 카드가 선택됐다.
 “이······ 이건?”
 
 
 4.
 “이······ 이건?”
 네온사인 같은 화려한 섬광이 번뜩이더니 방 중앙에 무언가 소환되기 시작했다. 무언가 전송되는 모습에 연호가 긴장된 눈으로 주시했다.
 이내, 빛이 서서히 사라지더니 자그마한 형체가 드러난다.
 한데······.
 작아도 너무 작다.
 “뀨우?”
 약 10㎝ 정도의 지렁이를 보고 연호는 침묵을 유지했다. 결국 셋 중 이계 지렁이가 선택되고 만 것이다.
 ‘나······ 혹시 운이 좀 없는 편인가?’
 고민하는 사이, 이계 지렁이는 꿈틀거리며 조금씩 연호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슬며시 엄지발가락에 얼굴을 비빈다.
 ‘에효. 그래 이 녀석에게 뭔 죄가 있겠냐. 괜히 실망하는 모습 보이면 안 되지. 첫 만남인데. 그나저나 뀨우 라니······ 보통 지렁이가 아니니 그럴 수도 있지 뭐.’
 연호는 손바닥으로 이계 지렁이를 올렸다.
 얼굴을 자세히 보니 둥그런 것이 좀 귀엽기도 했다. 이계 지렁이의 생김새는 지구의 같은 종(種)과 판이하게 달랐다. 일단 색깔이 칙칙한 갈색이 아니라 형형색색의 초록빛이다.
 그리고 몸체에는 미끈한 비늘이 달려있었는데, 그래서 지렁이가 아니라 얼핏 보면 실뱀처럼 보였다. 얼굴 부위엔 뎅그런 눈동자가 사파이어처럼 영롱하게 반짝인다.
 “안녕. 잘 부탁한다.”
 “뀨우-”
 이계 지렁이가 기쁜 듯이 손가락 사이를 빙빙 돌아다녔다.
 띠딩!
 
 <축하드립니다! 처음으로 펫(Pet)을 분양받은 강연호 고객님. 펫 역시 생명체임으로 관심을 기울여주시지 않으면 사망할 위험이 있습니다. [나만의 농장]으로 이동하셔서 펫 하우스를 지어주는 게 어떨까요? 바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안 그래도 아이콘을 하나씩 확인할 요량이던 연호는 고민 않고 승낙했다.
 슈슈슝!
 고시원의 풍경이 한순간에 스러진다.
 마치 물감이 녹는 듯 기이한 현상 끝에 연호는 허허벌판의 우주에 팬티 바람으로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달에 홀로 도착하면 이런 기분일까.
 연호는 살며시 몸을 일으켰다.
 ‘아니, 나만의 농장이라며?’
 초원 같은 곳을 예상했는데, 전혀 예상외다.
 하늘엔 장막이 쳐진 것처럼 어둠이 끝없이 넘실거렸고, 바닥엔 콘크리트처럼 새하얀 땅이 펼쳐졌다. 삭막한 경치에 연호는 신비함과 동시에 고독함을 느꼈다.
 “야- 호.”
 메아리로 변해 돌아오는 목소리.
 연호가 잠시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바닥에 내려둔 이계 지렁이는 뽈뽈 거리며 땅을 파고 들어가려 했다. 본래 어떤 땅이든 너끈하게 침투 가능한 이계 지렁이였지만, 이 대리석을 닮은 대지는 너무 딱딱했다.
 “뀨우······.”
 실망감에 몸을 축 늘어뜨린 이계 지렁이를 연호는 손가락으로 살짝 쓰다듬었다.
 “흠. 보자.”
 광활한 지평선만 보일 뿐 아무것도 없자, 연호는 홀로그램으로 눈을 돌렸다. 본래 [던전 진입] 자리였던 곳엔 못 보던 아이콘들이 한가득 존재했다.
 건물처럼 보이는 걸 선택하니, 정보창이 주르륵 뜬다.
 
 [황혼의 대장간]
 : 차원 최고의 장비를 제작 가능한 ‘영원의 불’을 구비한 대장간. 자존심이 강해, 아무나 상대하지 않는다. 뛰어난 전사들도 번번이 거절당해 악명이 높다. (필요 혼 10만)
 
 [펫 하우스]
 : 펫들을 위한 안락한 쉼터. 어떤 펫이라도 지상낙원을 느껴 행복해한다. 펫을 사랑하는 당신이라면 하나쯤 꼭 건설해 주자. (필요 혼 1,000)
 
 [목각인형 수련터]
 : 아직 체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당신을 위한 맞춤 수련 장소. 자동으로 움직이는 목각인형은 다양한 난이도와 변화무쌍한 전략으로 당신의 실력증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필요 혼 3,000)
 
 [앰플 제조소]
 : 여러 가지 앰플을 제작하는 공방. 재료와 혼을 대가로 다양한 앰플을 주문 제작한다. 잠재력의 한계에 도달한 이라면 앰플 제조소를 방문하자. (필요 혼 3만)
 
 “너희 양아치니? 악덕 기업이야?”
 비싸다.
 압도적으로 비싸다. 그 외에도 수많은 건물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공통적으로 하나같이 혼이 어마무시하게 필요했다. 황혼의 대장간은 혼이 무려 10만이나 필요했다.
 그것도 자격을 얻으려면 고생 꽤나 해야 하는 뉘앙스를 잔뜩 풍기며.
 애당초 펫 하우스조차 혼이 1,000이나 필요하니, 보유 혼이 500도 채 안 되는 연호로서는 건물 하나 올리지 못하는 신세였다. 그제야 퍼뜩 생각나는 건축허가서.
 연호는 급하게 인벤토리를 뒤졌다.
 
 [건축허가서]
 : 혼 3만 이하의 건물을 무료로 지을 수 있다.
 
 건축허가서란 이름에 걸맞은 효과다.
 하지만 펫 하우스를 이걸로 짓기엔 날아가는 2만 9천의 혼이 너무 아깝다.
 발치엔 이계 지렁이가 제집을 찾지 못하고 안타깝게 방황하고 있었다. 가끔 “뀨?” 하며 귀엽게 올려다보기도 한다.
 연호는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에 빠졌다.
 본래 게임에서 너무 많은 기능을 제공하면 유저는 혼란에 빠진다. 이른바 정보의 홍수 상태.
 괜히 공략집으로 최대한 효율적인 루트를 설계하는 것이 아니다. 한데 이 VIP시스템은 정보가 턱없이 부족해 최선의 길이 안 보였다.
 연호로서는 맨땅에 헤딩하듯 하나하나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는 형편.
 그때, 신경질적으로 건물 목록을 훑던 연호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밭]
 : 농작물을 기를 수 있는 5평 크기의 대지. 다양한 이계의 작물을 기르고 수확해 보자. (필요 혼 400)
 
 ‘유레카! 이거다.’
 이계 지렁이라도 종(種)은 지렁이다. 이 녀석이 땅을 좋아하는 건 명백했다. 지금도 기회만 생기면 드릴처럼 땅으로 파고들려고 하니까.
 연호는 밭이라면 이계 지렁이에게 훌륭한 집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거기다 이 녀석에겐 대지를 비옥하게 만들어 주는 특성까지 있었다.
 게임으로 치면 콤보가 형성될 만한 조합.
 나중에 뭐든 구해서 심으면 쓸만하겠지 라는 생각에 연호는 결국 밭을 구입했다.
 띠딩!
 
 <처음으로 건물을 구입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업적 보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건축허가서 x1
 
 이내, 흔히 타이쿤 게임에서 보던 초록색 3D가 등장했다. 연호는 이리저리 옮기다 적당한 곳에 밭을 설치했다.
 두드득.
 석회가루를 사방에 뿌려둔 모양새의 바닥이 쩍 갈라지더니, 이내 보슬보슬한 흙이 가득 채워진다. 테두리엔 새하얀 자갈들이 솟아나 틀을 이뤘다.
 눈 깜빡할 사이, 약 5평 정도 크기의 밭이 생겨났다. 지켜보던 연호의 심정이 왠지 묘해졌다.
 ‘내 땅을 가진다는 꿈을 이렇게 이루다니.’
 잠시 만지작거리며 흙 내음을 맡는데, 이계 지렁이가 쏜살같이 튀어왔다. 그러곤 순식간에 땅을 파고 쑥 들어갔다.
 
 <토양의 기운이 강해집니다. 질 좋은 작물이 자라날 환경이 조성됩니다.>
 
 밭이 반짝거리더니, 기이한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이계 지렁이는 좋다고 흙 속을 꾸물꾸물 기어 다녔다.
 “좋냐?”
 “뀨우!”
 “네가 좋으면 됐다. 이름도 지어줘야 하는데······.”
 대충 생각하던 연호는 ‘초롱이’이라고 지어줬다. 색깔이 형광 초록색이라 그냥 붙여줬건만,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몹시 기뻐했다.
 남은 2장의 건축허가서를 떠올린 연호는 일단 뒤로 미루기로 했다. 무려 총 혼 6만이 걸린 문제다.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여 최대한도의 효율을 뽑아내야 했다.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어······ 귀환?’
 슈슈슉!
 순식간에 고시원으로 바뀌는 풍경.
 드넓은 공간에 있다 좁은 고시원으로 돌아오니, 연호는 갑갑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 닭장 같은 생활도 얼마 안 있으면 청산이 가능할 터.
 리미트 해제와 [나만의 농장]에서 연호는 그 희망의 편린을 봤다.
 “뀨우?”
 “어라? 초롱아 너도 따라왔어? 그냥 쉬지 왜.”
 어느새 어깨 위에 올라선 초롱이가 눈을 반짝이며 연호를 바라본다. 방금까지 흙 속을 뒹굴었는데도 불구하고, 먼지 하나 안 묻은 매끈한 몸통은 코팅이 된 것처럼 반질거렸다.
 목을 칭칭 감으며 응석을 부리는 것을 연호는 그냥 놔두기로 했다.
 귀엽기도 하고, 적적함도 달랠 겸.
 이후, 초롱이와 같이 땅바닥을 뒹굴며 연호는 정보를 수집했다. 도움말 따윈 없는 불친절한 VIP시스템을 해부라도 하는 것처럼 샅샅이 살폈다.
 어딘가 있을 공략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이어, 연호는 과감하게 B등급 이하 장비 소환권도 사용했다.
 촤르륵.
 익숙한 카드 형상 세 장이 나오더니, 어지럽게 돌아간다. 차례대로 현대식 방탄조끼, 날카로운 예기를 뽐내는 검, 거무튀튀한 팔찌가 등장했다.
 능력치를 훑어보니, 셋 다 연호로서는 꿈에만 그리던 상급의 물건들이었다. 지닌 장비라곤 F급 헌터봉 뿐이니 뭐든 좋게 보였다.
 꽝이 없는 선택지.
 “좋아, 아무거나 걸려라.”
 곧, 섬광과 함께 카드 하나가 선택되었다.
 
 띠띠- 띠띠- 띠띠.
 고시원의 아침을 알리는 우렁찬 전자음.
 익숙한 알람 소리에 연호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급히 핸드폰 알람을 끄니, 시간이 새벽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힘차게 기지개를 켜는 연호.
 띠딩!
 
 <좋은 아침입니다. 강연호 고객님. 오늘의 출석 보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차원재화 혼(魂) 50
 
 연호가 보상을 수락하며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오케이, 좋은 아침이다.”
 머리맡에서 쿨쿨 자고 있는 초롱이를 쓰다듬던 연호는 문득 부르르 울리는 진동을 느꼈다.
 생소한 느낌에 아래를 내려보니, 핸드폰이다.
 시계와 알람 그리고 헌터넷 앱만 사용해서 그 이외의 기능이 있다는 걸 한동안 까먹고 있던 폰에 문자가 도착한 것이다. 의사소통이라는 본래의 기능을 참으로 오랜만에 수행하는 연호의 핸드폰이었다.
 누군가 싶어 보니, 어제 번호를 교환한 아영이다.
 
 [연호 오빠, 일어나셨어요? 이 시간에 기상하신다고 하셔서 모닝콜 대신 문자 안부 드려요. 아, 그리고 이건······.]
 
 장문의 문자가 주르륵 이어진다.
 폰을 만지작거리며 연호는 어제를 회상했다.
 그렇게 그린문 클랜과의 일을 마무리하고 백안일의 차를 얻어 타고 헤어지기 직전, 아영이 헐레벌떡 연호에게 다가왔다.
 쭈뼛쭈뼛 접근한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뗐다.
 “저······ 연호 씨. 혹시······.”
 “네. 말씀하세요.”
 “혹시 팬클럽 있으신가요?”
 유명한 헌터 중엔 팬클럽이 존재하는 이가 있었다.
 뛰어난 실력과 외모를 바탕으로 준 연예인으로 활동하는 이들.
 광고가 항상 완판되고, 수많은 팬을 구름떼처럼 몰고 다니는 그들은 그칠지 모르는 인기를 누렸다.
 목숨을 걸고 인류를 수호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울림인가. 훈련으로 다져진 그리스 조각상을 방불케 하는 남녀가 지구를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리얼(Real)이 가미되니 어떤 영화도 선사할 수 없었던 엔터테인먼트 제공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때문에 현재 팬클럽 커뮤니티의 상위권은 모조리 헌터들이 독식하고 있었다.
 ······물론 이는 연호와는 일절 상관이 없는 별나라 이야기이기도 했다.
 어제까지 오늘은 어떤 ‘찌’ 역할을 수행할까 고민하던 F급 헌터 연호에게 팬클럽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아니, 애당초 팬도 없었다.
 연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면······.”
 이에 아영이 손을 한데 모으더니,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제, 제가 팬클럽 회장이 되어도 될까요?”
 “······네?”
 연호에게 무척 황당한 제안이 들어왔다.
 3장. 담금질의 시간
 
 
 1.
 몇 달 전, S급 헌터 ‘망국(亡國)의 공주’ 크리스티나의 SNS 팔로워 수가 4억 명을 돌파해 인터넷상에서 화제가 됐었다.
 그다음으론 ‘완벽의 귀공자’ 마르커스가 3억 5천만 명의 팔로워로 많은 이의 주목을 받았다.
 국내로 한정한다면, ‘반도의 수호자’로 유명한 이준호의 팬클럽 회원 숫자가 300만 명을 달성하기도 했다.
 즉, 오늘날 헌터의 인기는 상상 초월로 팬클럽 따윈 당연시되는 세상이었다.
 그럼에도.
 연호는 순간 표정관리에 실패했다.
 “······네?”
 “저 옛날에도 운영해 본 적 있어서 잘해요! 연호 씨한테 방해 안 되게 서포터만 할게요. 네?”
 전혀 생각도 못 하던 제안이라.
 “너무 갑작스러워서. 저따위 팬 하셔도 재미없으실 텐데요.”
 완곡히 거절함에도 오히려 아영은 눈을 반짝였다.
 “아뇨! 제가 보기에 연호 씨는 분명 성공할 거예요! 리미트 해제 직후 그렇게 적응을 잘하시는 분은 처음 봤어요. 거기다가 마음가짐도 훌륭하시고 어, 얼굴이랑 분위기도······.”
 “······.”
 “제가 꼭 팬 1호가 되고 싶어서 그래요. 팬클럽······ 만들어도 될까요?”
 “하아······. 어······.”
 잠시 고민하던 연호는 결국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와아.”
 당사자의 허락에 아영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리고 그 이면에 도사린 응큼한 마음이 슬쩍 고개를 내민다.
 ‘이대로 인연을 만들고 친해져 종래에는······ 아하항.’
 착착 세워지는 그녀만의 분홍빛 미래설계.
 몇몇 헌터의 팬클럽 활동을 하고 있는 아영이 보기에 연호는 스타 자질이 충분했다.
 출중한 외모와 특유의 시크한 분위기는 분명 나중에 마니아를 형성할 게 뻔했다. 후에 팬클럽이 만들어지고 분통이 터질 바에야 자기가 총대를 메고 모두를 관리하는 게 속 편했다.
 괜히 수작 거는 년들도 자기 선에서 처리할 수 있고.
 그렇게 아영이 열의를 불태우는 동안, 연호는 쑥스러움에 뒷머리를 긁었다.
 그녀의 순수한(?) 호의에 고마워진 연호가 저도 모르게 부드러운 미소를 날렸다.
 마치 그림처럼 해맑게.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평생 기억할게요, 아영 씨.”
 “아······.”
 또다시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 널뛰기를 반복한다.
 잠시 몽롱한 표정을 짓던 아영이 호주머니에서 화들짝 폰을 꺼내 들었다.
 “사, 사진, 아니, 동영상! 한 번만 더 그렇게 웃어주세요! 연호 씨 아니, 연호 오빠!”
 어설프게 웃는 연호와 곁에서 꼭 사진으로 남겨야 한다고 난리를 떠는 아영.
 이상이 어제 있었던 소동의 전말이었다.
 회상을 마친 연호가 마저 그녀의 문자를 읽었다.
 
 [······이 링크가 사이트 주소예요. 일단 제가 초안을 만들어봤는데 보시고 마음에 안 드시면 말씀해 주세요.]
 
 팬클럽 창설하고 하루 만에 사이트를 뚝딱 완성하다니!
 이쪽을 잘 모르는 연호지만 그 열정만은 분명히 느껴졌다.
 행동력에 감탄하며 연호가 링크를 눌렀다.
 
 <헌터 강연호 님만을 위한 응원 공간!>
 
 파스텔 톤의 알록달록 소녀 감성 그윽한 홈페이지가 등장한다.
 대문엔 연호의 얼굴이 포토샵으로 합성되어, 오리 배에 실려 떠다녔다. 가끔 웃으며 손까지 흔든다.
 “······왠지 토할 것 같군.”
 블링블링한 사이트를 둘러보니, “이건 아니다” 싶었지만 돌이키기엔 한발 늦었다.
 이미 루비콘강을 건너 버린 것이다.
 결국 연호는 한숨과 함께,
 
 [감사합니다. 아영 씨. 계속 좀 부탁드릴게요.]
 
 라는 의례적 문자를 남길 수밖에 없었다.
 ‘알아서 하겠지, 뭐. 적당히 하다가 그만둘지도 모르고.’
 그녀에게 연락을 취하고, 연호는 팬클럽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
 구조에 대한 보답으로 충동적으로 탄생한 팬클럽이니 금방 열의가 사그라지겠거니 생각한 거다.
 더군다나 연호는 지금 VIP시스템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때문에 이런 자잘할 일은 금세 머릿속에서 잊혀졌다.
 하지만.
 이는 아영을 너무나 과소평가했음을 훗날 연호는 깨닫게 된다.
 그녀는 예상외로 덕질(?) 계통 재능이 월드클래스급으로 출중했던 것이다.
 다만, 아직은 먼 이야기.
 
 서울 동쪽에 위치한 어느 헌터 전용 피트니스 센터.
 낡은 판잣집이 대부분인 달동네에 어울리지 않는 이 현대식 5층 건물은 위풍당당한 자태를 자랑했다. 1층부터 5층까지 모두 헌터만을 위한 단련장으로 꽉꽉 채워진 곳.
 돈을 아끼지 않고 최신식 운동기구를 그러모아 언제나 헌터들에게 인기가 많은 체육관이었다.
 그 1층 로비에 동이 채 뜨기도 전에 연호는 도착했다.
 “이제 완전 겨울이네. 춥다.”
 11월의 찬바람에 검정 트레이닝복을 여민 연호가 익숙하게 리더기에 카드를 갖다 댔다.
 지잉.
 내부로 들어서니, 깔끔한 인테리어와 최신 운동기구들이 그를 맞이한다. 전신을 관찰할 수 있게 벽면 전체가 거울로 이루어졌고, 바닥엔 안전을 고려한 검정 매트가 끝없이 깔려 있는 훈련장.
 연호는 트레이닝복 상의를 벗고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오밀조밀하게 드러난 근육과 쩍 벌어진 어깨.
 과하게 벌크 업만 한 것이 아닌, 실전으로 단련된 육체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노력의 결정체였다. 리미트 해제 전에도 많은 이들이 연호를 보고 ‘가장 실전에 적합한 육체’라고 감탄하곤 했다.
 적당히 몸을 푼 연호는 곧바로 실험에 들어갔다. 일단 전투 중에 발생한 괴상한 현상부터 확인해야만 했다.
 머릿속으로 능력치를 떠올리니, 이내 홀로그램이 등장했다.
 
 [이름 : 강연호]
 -남자, 27살 / 혼 101
 체 력 E(11.9%) 마 력 0
 파워 E(52.0%) 내구력 E(19.7%)
 스피드 E(61.2%) 저항력 F(43.0%)
 성장 가능성 E
 
 총합 : E. 자만하지 마라! 이 약해빠진 놈아.
 보유 기술 : 무.
 특수능력 : VIP시스템 이용자
 특이사항 : 팬클럽 생겼다고 헬렐레하지 마러! 베.
 
 ‘뭔가 악의가 섞인 거 같은데. 착각인가?’
 연호는 고개를 갸웃하고 능력치를 훑어봤다. 그리고 그중 체력에 눈이 머물렀다.
 비약 없이 전투 중에 스스로 상승한 능력치.
 분명 99.9%였다가, E급으로 진화했다.
 강해질 실마리를 찾았다 생각한 연호가 잽싸게 움직였다.
 일단, 벤치를 30-40도 각도로 조절하고 고(高)중량의 바벨을 세팅한다. 헌터 전용으로 제작된 지라, 일반인이 본다면 입을 쩍 벌릴 만한 무게다.
 “후우······.”
 이후, 몸을 기대고 벤치 프레스 바벨 운동을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낑낑거릴 무게가 더없이 가볍게 들린다. 외형의 근육은 변함이 없는데, 내부구조가 아예 달라진 느낌.
 확실히 리미트 해제는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 힘의 작용임을 새삼 깨닫는다.
 연호는 대흉근의 긴장을 즐기며, 워밍업으로 간단히 세트를 반복했다.
 그러자,
 
 [파 워 E(52.0%) → E(52.2%)로 등급이 상승합니다.]
 
 능력치가 올랐다.
 예상이 들어맞자, 회심의 미소를 짓는 연호.
 한번 잠재력이 E급으로 오르면 비약 말고도 순수 단련만으로 성장이 가능함이 증명된 것이다.
 ‘느리긴 해도 능력이 꾸준히 오른다.’
 체력, 스피드, 파워는 어떻게 하면 상승시킬지 곧바로 감이 왔다. 다만 문제는 이외의 능력치들.
 마력은 일단 뭔지도 모르겠으니 기각.
 내구력과 저항력을 두고 연호는 고심했다.
 ‘내구는 맷집이겠지. 격투기 선수들 훈련 스케줄 따르면 되겠지. 저항력은 질병 종류의 저항을 말하는 건가? 설마 독이라도 마셔야 하나.’
 연호는 진지하게 전갈 독이라도 쪽쪽 빨아야 하나, 고심했다.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잘 조절해서 섭취하면 저항력이 늘지 않을까.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을 성격의 연호.
 그는 인터넷으로 약재상이라도 둘러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일단 일어섰다.
 제법 오래 근력운동을 했는데, 땀 한 방울이 고작이다.
 그리고 약간의 뻐근함이 전부.
 근본적인 변화로 단련 계획을 전부 처음부터 새로 작성해야만 했다. 초인의 길에 들어선 헌터에 맞는 훈련법으로.
 벤치에 가볍게 기대, 연호는 앞으로의 뜻을 세웠다.
 “일단은 1월에 있을 등급심사. 수석이 목표다.”
 리미트 해제만으로 곧바로 E급 헌터 자격을 주는 것은 아니다. 공신력을 위해 일 년에 두 번 전국의 모든 헌터를 모아 등급 업(Up) 심사가 개최된다.
 F급 헌터는 물론이거니와 무늬만 E급 헌터들도 더 높은 등급을 위해 모였다. 지금 이름을 떨치는 루키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탄생했다.
 대한민국의 S급 헌터 6인도 이 등급 업 심사의 수석 출신들.
 연호는 자신도 못할 게 없다 생각하여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등급심사까지 단련만 하자.”
 혼을 모으고 돈을 벌기 위해 곧바로 전장으로 향하는 건 자살행위다. 연호는 때론 인내와 준비가 가장 큰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는 사내였다.
 달콤한 과실을 탐하려면 지금은 무엇보다 담금질이 필요했다.
 위윙.
 그때, 자동문이 열리며 으슬으슬 찬 공기가 들어온다. 동시에 익숙한 형체가 보였다.
 “으하암. 꼭두새벽부터 혼자 뭐라고 구시렁거리냐?”
 꺼칫꺼칫한 수염에 보디빌더같이 우락부락한 알통을 소유한 한철봉.
 시린 날씨 탓에 귀가 빨갛게 오른 그가 손을 비비며 말을 건넸다. 덩치에 안 어울리게 춥다며 온갖 수선을 떤다.
 장가 인력사무소의 F급 헌터 삼인방 중 하나이자, 한수와 더불어 연호와 가장 친한 사람이기도 했다.
 “오셨어요? 형님.”
 “어젯밤에 병문안 갔다 왔다. 한수 녀석 내가 사간 바나나 한 송이를 그 자리에서 다 처먹더라고. 아주 팔팔하더라.”
 다행히 한수는 별 탈이 없나 보다.
 연호는 히죽 웃으며, 플랫 벤치 위에 오른쪽 무릎과 오른손을 올렸다. 그리고 미리 세팅해 둔 고중량 덤벨을 갈비뼈 방향으로 당겼다.
 1초간 버텼다가, 다시 본래의 자세로.
 본래라면 후들후들 떨려야 할 터인데 아무렇지도 않다.
 중량을 높여야 하나 고민하는 연호에게 철봉이 슬렁슬렁 다가왔다.
 “야.”
 “흡하. 네, 형님.”
 “축하한다.”
 철봉의 덤덤한 축하 인사.
 하지만, 그 눈빛 안쪽에는 숨길 수 없는 부러움과 약간의 질시가 섞여 있었다.
 F급 헌터에게 리미트 해제란 건 그만큼 의미가 크다. 많은 뜻을 내포한 한마디에 연호는 어떤 단어를 뱉어야 할지 몰랐다.
 어설픈 위로? 의미 없는 동정? 기만 같은 격려?
 그래서 그는 그저 고마운 마음만 남겼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 이제 헌터 일 그만두기로 했다.”
 “네?!”
 순간, 당황한 연호의 자세가 흐트러져 덤벨을 놓칠 뻔했다. 놀란 마음을 추스르는데, 철봉은 별거 아닌 어투다.
 “뭘 그렇게 놀래. 이제 이곳 일 제대로 해보려고.”
 그는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그렇다.
 사실, 그는 이 5층짜리 피트니스 센터의 당당한 주인이었다.
 탱자탱자 놀아도 돈을 번다는 그 유명한 건물주.
 그럼에도 왜 돈도 안 되고 위험하기만 한 F급 헌터 ‘찌’ 역할을 하냐고? 간단하다.
 그에게 헌터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꿈’이었으니까.
 철봉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사실······ 주아가 애 가졌대.”
 “아.”
 “마누라 마음고생도 이쯤 시켜야지. 헌터 일 나갈 때마다 머리끄덩이 잡고 말렸는데 내가 항상 억지를 부렸잖냐. 그런데 이제 애까지 생겼는데, 차마 더 이상은 못 하겠다 싶더라.”
 그의 복잡한 심경이 느껴졌다.
 누구는 이런 철봉을 꿈을 저버린 사내로 보겠지만 연호에게는 한 가족을 책임지려는 가장으로 보였다. 슬쩍 E급 성장비약이 떠올랐지만, 마음 깊이 묻어 놨다.
 본래 연호는 철봉과 한수에게 비약을 건네 리미트 해제를 도우려 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철봉은 관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부인과 아이까지 있고 지금도 돈은 넉넉히 번다.
 더 이상 위험을 자초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그저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게 된 지인에게 축복을 건네기만 하면 된다고 연호는 생각했다.
 그래서 진심을 담아 환하게 웃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형님.”
 “그래서 말인데······.”
 진지한 철봉의 얼굴이 쑥 다가온다. 그러곤 손가락으로 연호의 단단한 가슴을 쿡 찔렀다.
 히죽 웃는 철봉.
 “내가 너 몸 하나는 어디 가서 안 꿀리게 만들어주려고.”
 
 
 2.
 헌터 전용 육체개조 프로젝트. by 철봉 버전.
 이를 입에 담고서 철봉은 씨익 웃었다.
 대격변 이후 헌터란 직업이 새롭게 대두되면서, 많은 트레이닝법이 발달했다.
 헌터가 상대해야 하는 적은 실로 다양하다.
 때론 영화에서나 보던 빌딩만 한 괴수와 다퉈야 하고, 때론 조막만 하지만 스피드는 월등히 빠른 이계의 종과 사투를 벌이기도 한다.
 급변하는 환경에 무리 없이 적응해야 하고, 변화무쌍한 특성의 이종족을 상대로 물러섬이 없어야 했다.
 이처럼 육체적 혹사가 가혹한 직업이기에 무엇보다 정밀한 훈련법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인간의 한계를 넘은 자들에게는 여태껏 과는 전혀 다른 훈련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근력 및 근지구력, 유연성, 심폐지구력 등등 모든 측면에서 월등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프로젝트를 지금 철봉은 언급하는 것이다.
 “우리 센터 시설이 중앙이랑 비교해서 부족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다. 며칠 전에 크라이오 테라피(Cryo Therapy) 도입하려고 냉각사우나 설치한 거 봤지?”
 “네. 엄청 비싸 보이던데요.”
 “응. 엄청 비싸.”
 “······형수님한테 안 혼나셨어요?”
 “크흠. 그건 말하기 싫다. 아무튼! 너도 진짜 헌터가 됐으니까 올라가서 한 번 사용해 봐야지?”
 “어······ 형님 그런데 제가 아직 돈이······.”
 이제 막 리미트를 해제한 연호다.
 F급 헌터일 때도 리미트 해제에 좋다는 건 가리지 않고 먹고, 균열 영상이란 영상은 모조리 탐독하느라 모은 돈이 많지 않았다.
 철봉은 오히려 무슨 소리를 하냐는 얼굴로 되물었다.
 “응? 얌마. 설마 내가 너한테 돈 받으려고 말 꺼냈겠냐?”
 “너무 죄송한데요. 제가.”
 연호는 남에게 폐 끼치는 걸 병적으로 싫어했다.
 지금도 당연히 정가 다 내고 센터에 다닌다.
 본래 연호는 두 달 동안 저축해 둔 돈을 모두 써서 단련에만 투자하려고 했다. 항상 해오던 ‘찌’ 역할도 잠시 그만두고, 훈련에만 올인할 계획.
 물론 피트니스 센터의 냉각 사우나처럼 비싼 ‘고급 코스’는 언감생심이고, 기존의 시설만 이용하려고 했다.
 진짜 ‘헌터’들이 애용하는 4, 5층은 진짜 억 소리가 나올 정도로 비싸다. 최신식 기기들을 갖춘 최첨단 시설들이니까.
 맛도 좋고 건강도 챙기는 영양소가 듬뿍 들었지만 ‘그림의 떡’이다.
 연호가 손사래를 치자, 철봉이 팔짱을 낀다.
 “연호야. 내가 너랑 처음 만난 지가 언제지?”
 “10월쯤이니까, 벌써 한 4년 가까이 됐네요.”
 “그래. 인력사무소에서 널 처음 봤지. 그때는 우리 데면데면하게 말 한마디도 안 했잖냐?”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서로 씩 웃었다.
 F급 헌터가 진짜배기 되어보려고 위험한 ‘찌’ 역할도 감수하고, 인력사무소에 출석 도장을 찍었다. 구멍 파진 소파에 찌그러져 같이 대기하면서 철봉과 연호는 조금씩 친해졌다.
 얼굴만 아는 사이에서.
 슬쩍 안부를 묻고 커피 한 캔씩 주고받고.
 그러다, 헌터 업무를 한두 탕 같이 뛰니 어느새 형 동생 하는 사이가 됐다.
 “그게 벌써 4년이다. 너는 나보다 1년 더 했으니, 무려 5년이지.”
 “······.”
 “5년 동안 넌 꾸준했어. 난 무엇보다 성실의 힘을 믿는다. 그것도 눈부신 재능이야. 보통이라면 꼬꾸라지고 포기할 상황에서 넌 결코 굽히지 않았지.”
 “형님.”
 연호는 자세를 바로 하고 묵묵히 귀를 기울였다. 철봉은 말을 잇다 멈추고 천장을 바라봤다. 피트니스 센터의 째깍거리는 분침 소리만이 둘 사이를 맴돈다.
 잠시 그러고 있던 철봉은 이내 타오르는 눈으로 연호를 직시했다.
 “너라면 내 몫까지 해줄 거 같아서 그래. 나는 비록 꿈을 이루지 못하고 다른 길로 가지만, 너는 끝까지 달릴 놈이란 걸 알고 있으니까.”
 연호의 가슴을 주먹으로 툭툭 치는 철봉.
 “믿으니까. 내가 보고 겪었던 강연호란 남자를. 그의 심장이 얼마나 뜨겁고 단단한지 아니까.”
 “······.”
 “언젠가 TV를 보면서 야! 강연호 저거 내가 키웠어! 내가 저놈이랑 형 동생 하는 사이야! 이렇게 말 하고 싶으니까.”
 철봉은 솥뚜껑 같은 손을 들어 연호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러니까 내가 너 전담 트레이너하게 해주라.”
 그의 진심에.
 “······잘 부탁드립니다. 형님.”
 연호가 결국 머리를 숙였다.
 객관적으로 연호는 그저 이제 막 F급 헌터에서 리미트를 해제한 한 명의 헌터에 불과하다. 이 피트니스 센터에만 10명이 넘는 ‘진짜’ 헌터들이 다니고 있다.
 이런 과한 믿음을 줄 이유 따윈 1도 없었다. 그럼에도 철봉은 무한한 신뢰의 눈빛을 보내오고 있다.
 연호는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저 마음에 실망을 안겨주기 싫었다.
 그 때문에 보여주리라 다짐했다.
 어떤 결과를 예상하듯 그 기대치 이상의 성장으로.
 
 * * *
 
 “으아. 완전 겨울이네.”
 클랜에 가입한 후 첫 임무를 마치고 복귀한 D급 헌터 기수는 피트니스 센터로 들어서며 손을 호호 불었다.
 어느덧 11월 말경.
 날씨는 초겨울에 다다라 연신 매서운 한파가 몰아쳤다. 기수는 그런 추위를 뚫고 아침 10시부터 훈련을 거르지 않는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이야. 여기는 언제나 똑같네.”
 피트니스 1층 내부에는 오늘도 구슬땀을 흘리는 헌터들로 가득했다. 기수는 안을 둘러보며 파카를 프론트에 맡겼다.
 그러자 드러나는 무채색 트레이닝복.
 순간, 시선이 쏠린다.
 왜냐면 기수의 트레이닝복은 이곳 피트니스 센터의 4, 5층 전용 복장이니까. 한마디로 리미트를 해제한 ‘진짜’ 헌터란 증표다.
 1층은 F급 헌터들뿐이니 부러움의 시선이 쏟아졌다. 우쭐한 기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며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소하지만 드는 우월감에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 나 이런 사람이야.’
 클랜에서는 막내라지만 여기에선 귀족이나 다름없다. 몇몇 아는 얼굴들과 인사하면서 기수는 계속 올라가 4층에 도달했다.
 스르륵.
 카드를 대니 열리는 자동문.
 기수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과연 아래와는 공기부터가 다르다.
 ‘이게 바로 클라스 차이지. 암.’
 곧바로 아침 해결부터 하러 룸으로 들어갔다.
 운동은 무엇보다 먹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이곳 피트니스 센터엔 언제나 먹거리가 구비되어 있었다.
 달걀, 오렌지, 오트밀, 닭 가슴살, 채소 샐러드 바, 다진 쇠고기, 구미베어까지.
 웬만한 식당 부럽지 않은 식단들이다.
 기수는 통곡물빵을 한입 물고선 작은 유리창으로 훈련장 내부를 살폈다.
 헌터들과 코치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무언가 구경하는 것 같다. 가끔 오! 하는 기함 소리와 무언가 기록한다.
 궁금해진 기수가 젤리 하나를 씹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야. 몇 초냐?”
 “잠깐만. 지금 4분 37초다. 미쳤네. 진짜.”
 웅성거리는 헌터 중 한 명에게 기수가 어깨를 둘렀다.
 “뭐가 그렇게 엄청난데?”
 “어? 기수야. 간만이네. 거의 한 달만 아니냐?”
 “클랜 때문에 좀 바빴어. 근데 뭐가 엄청나냐니까.”
 말없이 가리키는 손가락.
 기수가 슥 보니 스텝 레더(Step Ladder)다. 이른바 줄사다리.
 폭발적인 움직임으로 순발력을 향상시키려는 목적의 훈련법이다. 물론 고급 코스에 멋대가리 없는 줄사다리를 놔둘 리 없었다.
 바닥엔 최신식 압력기가 설치된 사각형의 판넬들이 마치 체스판처럼 4줄로 100미터까지 늘어져 있었다.
 정해진 신호가 들어오면 바닥의 판넬에 랜덤으로 불이 들어온다. 그러면 3초 안에 중심부를 정확히 밟아야 하는 것이다. 계속 이동하면서.
 성공하면 밝은 녹색.
 실패하면 빨간색으로 물든다.
 살짝이라도 삐끗하면 실수한 시간이 누적된다. 거기다 리미트를 해제한 헌터들은 맨몸으로 훈련을 하지 않았다.
 10㎏의 모래주머니를 양 발목과 팔목에 착용하고 시작한다.
 몸은 무겁지, 판넬의 색은 빠르게 튀어나오지.
 웬만한 헌터들도 혼이 쏙 빠질 법한 트레이닝.
 퍼펙트하게 클리어하면 5분이라는 시간이 나온다지만, 대부분 이를 초과하기 일쑤였다.
 3초보다 더 빨리 밟아, 5분 이내로 기록을 줄이는 건 생각하기도 힘든 기예였다.
 기수는 젤리를 와작와작 씹으며, 스텝 레더 훈련 중인 이를 주목했다.
 딩! 딩! 딩!
 경쾌한 성공음과 함께 판넬이 온통 푸르게 물든다. 마치 리듬게임을 하는 것처럼 흥겹다.
 검은 쫄쫄이를 착용한 채 몸을 날리는 그는 생소한 얼굴이었다. 압도적인 외모가 일단 시선을 사로잡는다. 앞머리가 흩날리며 땀방울이 튀자, 무슨 화보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다.
 “누구냐? 신입인가.”
 “어. 아직 해제한 지 한 달도 채 안 돼. 근데 관장님이 직접 붙어서 스파르타로 지도해 준다더라.”
 “그래?”
 그러고 보니 관장 한철봉이 손뼉을 치며 연신 소리를 지르고 있다. 헌터 일 한다고 코빼기도 보기 힘들던 관장이 저러고 있으니 기수는 왠지 어색했다.
 -띵!
 “허억. 허억.”
 마침내 모든 판넬의 불이 꺼졌다.
 신입은 무릎에 손을 올리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전신에서 마치 수증기처럼 옅은 열기가 새어 나온다. 스톱워치로 시간을 재던 코치에게 모두의 얼굴이 돌아갔다.
 “기록은?”
 “5분······ 24초.”
 “우와. 쩌네.”
 울려 퍼지는 감탄사.
 기수도 나름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신입이라던데 저 정도 기록이면 이번 등급 업(Up) 심사에서 나름 상위권 성적을 거둘지도 몰랐다. 한철봉이 신입의 어깨를 두드렸다.
 “집중력 흐트러뜨리지 말고. 10분 휴식.”
 동시에 돌아가는 타이머. 휴식시간까지 철저한 계산에 의해 이뤄졌다. 이때, 다음 헌터가 주섬주섬 준비를 한다.
 서로 교대로 이뤄지는 스텝 레더 훈련.
 한 명이 쉬는 동안 다른 이가 훈련을 하는 거다. 지켜보던 기수가 씩 웃으며 나섰다.
 “나! 나. 내가 한번 할게.”
 본래 준비하던 헌터는 별말 없이 모래주머니를 넘겨줬다. 기수는 익숙한 동작으로 모래주머니를 착용했다. 묵직한 중력이 정겹게 느껴진다.
 기수가 나선 이유는 별게 아니었다.
 현재 피트니스 센터 스탭 레더 최고 기록의 보유자는 기수 자신이다. 5분 10초.
 그런데 신입이 자기 기록을 위협하니, 선배로서 무언가 보여주고 싶었다. 다들 환호하는 게 조금 배알이 꼴리기도 했고.
 몸을 푼 기수가 자세를 잡았다.
 “3, 2, 1 스타트!”
 기수는 잽싸게 움직였다. 예측 불가능한 판넬의 불빛을 미친 듯이 쫓는다. 위치를 확인하더라도 정중앙을 밟지 않으면 무효 처리되니 정확도와 스피드가 생명이다.
 그사이 판넬은 쉬지 않고 색이 바뀐다.
 극한의 민첩성과 체력 그리고 판단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훈련.
 기수는 연속으로 콤보를 이어갔다. 한 달 정도 전장에서 굴렀더니, 실력이 더 늘어난 것 같다.
 기수는 신기록의 예감에 들떴다.
 딩!
 마침내 훈련이 종료됐다. 막판에 집중력이 흐트러져 몇 개 틀린 거 말고는 그야말로 퍼펙트.
 “허억. 허억. 몇 초야?”
 “5분 9초.”
 “아싸! 신기록!”
 기수가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만세 자세를 취했다. 그러면서 슬쩍 신입을 쳐다봤다. 기수는 마음속으로 ‘아직 멀었어. 애송아’라고 중얼거리며 사소한 우월감을 맛보았다.
 한데, 주변의 반응이 시큰둥하다.
 칭찬세례가 쏟아질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런 리액션이 없다. 기수가 슬쩍 손을 내리며 의아하게 물었다.
 “······야? 왜들 그래. 나 신기록 세웠다니까. 5분 9초 안 보여?”
 “기수야, 창피하다. 이리 와라.”
 기수와 가장 친한 이가 얼른 뛰어와서, 그를 데려갔다. 끌려가면서도 기수는 계속해서 “왜? 왜?”라고 소리를 질렀다.
 작은 소동에 아랑곳하지 않고 신입이 다시 판넬 위에 올라선다.
 딱 정 시각이 되자, 다시 판넬이 작동했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신입을 뒤로하고 기수는 친구에게 분통을 터뜨렸다.
 “분위기 왜 이래? 내가 신기록 세워서 열 받았나?”
 “어이구! 이 화상아. 너 저 신입 언제부터 저러고 있었는지 아냐?”
 “어······ 땀 보니까 한 시간 정도?”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 인마. 제일 빨리 온 사람이 6시인데 그전부터 저러고 있었단다.”
 “뭐? 그러면······.”
 적어도 4시간 넘게 저러고 있었다는 뜻.
 기수는 하루 4시간 운동하고 회복에 열중해야 근육이 성장하는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리미트 해제 이후, ‘완전회복’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여 유명무실해진 ‘일반인’을 위한 이론이었지만 여전히 초인들에게도 적용된다고 믿었다.
 그런 그에게 신입의 저런 행동은······.
 “진짜 무식한 놈이네. 저러면 오히려 몸 상해.”
 “그리고 저 녀석 무게 일반적인 게 아냐.”
 “뭐?!”
 “아마 한 짝 당 20㎏일 거다.”
 “미친놈!”
 80㎏이면 성인 장정 한 명 무게다. 그 무게를 업고 저런 움직임을 선보였다고? 그건 말 그대로 미친 짓이다. 기수는 놀라서 혀를 내둘렀다.
 과연 주변의 반응이 싸늘한 이유를 알만했다.
 이건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 아닌가? 그것도 신입을 상대로 되지도 않는 잘난 체를 부리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다 화끈거린다. 한데 기수에게는 불행하게도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친구는 얼굴을 감싸며 벽에 기대어진 화이트보드를 가리켰다.
 “저건 직접 보고 와라. 어휴.”
 불안감에 떨며 기수가 슬금슬금 보드 판을 들췄다.
 수많은 기록이 나열되어 있지만, 제일 상단이 유독 눈에 띈다.
 “이런 미친······.”
 
 [강연호, 4분 43초.]
 
 신기록은 이미 갱신된 지 오래였다.
 4장. 등급 업(Up) 심사 개최
 
 
 1.
 일 년에 두 번 있는 등급 업 심사.
 새해 첫날인 1월 1일과 무더위가 기승인 7월 1일은 이제 국가적 차원의 축제 날이나 다름없었다.
 “야, 이번엔 누가 수석 할 거 같냐?”
 “아마 중앙이나 서쪽에서 나오지 않을까? 언제나 강세잖아.”
 “이번 기수 준비하는 루키들이 어마어마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역대 최고래.”
 “참 내. 매년 하는 소리.”
 예전 미국이 곧잘 하던 이른바 ‘영웅 만들기 프로젝트’.
 헌터 사무국은 이를 고대로 차용했다.
 인류에게 이계라는 미증유의 위기가 닥친 지금, 사람들은 무엇보다 희망을 원했다. 위험 앞에서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며, 전설 속에나 등장할 법한 영웅의 탄생을 목 놓아 기다렸다.
 이를 위한 뉴페이스 루키의 등장은 언제나 환영하는 바.
 오늘날 이 등급 업 심사로 무명에서 일약 스타덤에 오르는 일 따윈 비일비재했다. 대대적인 홍보와 의도적으로 구성된 맞춤 띄워주기 전략에 대중은 언제나 열광했다.
 이제 등급 업 심사는 온가족이 모여 TV로 참가자의 활약상을 체크하고 응원을 보내는 연례행사의 일종이다.
 이 심사의 기저에 깔린 것은 무엇보다 철저한 실력주의.
 등급 업 심사에서 잘못된 판단을 보여주면 이른바 욕받이(?)가 되어, 헌터 생활 내내 조리돌림으로 굴욕을 당했다. 인터넷 짤은 디지털 풍화가 일어날 때까지 놀림거리로 써 먹히곤 했다.
 그토록 중요한 날이기에 버스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부르릉.
 동쪽 지역에서 중앙 등급 업(Up) 심사장으로 향하는 순회고속버스.
 모인 F급과 E급 헌터들은 눈을 반짝이며 경쟁자들을 눈여겨봤다. 버스에 탄 이들의 면면은 크게 두 종류였다.
 일단 아카데미에서 F급 판정을 받고 뒤늦게 리미트를 해제하여 등급을 올리러 가는 이른바 떨거지 테크.
 두 번째는 아카데미에서 곧바로 E등급 판정을 받고, 실전에서 활약하다 이번에 등급 업을 노리러 가는 엘리트 코스.
 여기서 진짜배기 로얄 코스는 이번 심사를 거쳐 단박에 C급으로 비상한다.
 비록 수석과 차석 고작 둘 정도라지만.
 상위 200명 정도는 D급 헌터로 승급하고, 나머진 오랜 시간 동안 실적을 쌓아야만 하는 처지로 전락한다.
 헌터들에게 등급 업 심사는 그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 도약의 계단.
 다들 눈을 번뜩이며 그 점프의 주인공이 자신이길 바랬다.
 끼이익.
 동쪽 구역에서 마지막으로 멈추는 버스.
 여기서 남은 인원을 태우곤 심사장까지 멈추지 않고 달릴 예정이다. 모두의 시선이 새로 탑승하는 마지막 경쟁자들에게 쏠렸다.
 속속들이 올라오는 헌터들.
 우락부락한 덩치도 있고, 일부러 개성 넘치는 복장으로 기선제압을 시도한 이들도 보였다.
 저마다 품평회를 하듯 평가를 마친다.
 ‘흠. 별 볼 일 없어 보이는데? 이 정도면······.’
 ‘내가 제일 낫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사내가 올라섰다.
 일동 숨을 삼킨다.
 헌터들은 대부분 야생짐승처럼 감각이 예민했다. 그렇기에 알았다. 지금 들어선 남자의 기이한 분위기를.
 눈을 마주치자마자 압도되는 느낌.
 마치 균열에서 튀어나온 이계의 생명체를 마주한 생소한 감상.
 실로 독특한 기세에 척추가 곤두서는 것도 잠시, 곧 장내를 짓누르던 압박이 씻은 듯 사라졌다.
 ‘후아. 뭐, 뭐지? 방금 뭐였지?’
 ‘착각인가. 순간 전장에 있는 것 같았는데······.’
 그제야 뒤늦게 남자의 외모가 눈에 들어온다.
 180㎝ 훌쩍 넘는 키에 태평양같이 발달한 어깨.
 꼬불꼬불한 앞머리를 기른 우수에 젖은 눈빛.
 비록 다크서클이 짙어 조금 흠으로 작용했지만, 그것마저 묘한 매력으로 소화하는 사내였다. 간단한 추리닝 복장도 명품으로 소화하는 이른바 분위기 깡패.
 그는 복도 쪽에 앉은 여성에게 말을 건넸다.
 “잠깐······ 지나가도 되겠습니까?”
 젊은 여성은 얼이 빠진 채 그를 구경하다 반응이 조금 늦었다.
 “아? 아! 아아, 네. 그럼요.”
 황급히 다리를 오므려주자, 자연스럽게 창가 좌석에 앉는다.
 여성은 곁눈질을 하며 그를 훔쳐보기 바빴다. 턱을 괸 모습이 그렇게 어울릴 수가 없다.
 한참을 염탐하듯 보는 그 순간,
 “뀨우?”
 사내의 팔목에서 뱀 같은 게 튀어나왔다.
 “어머나!”
 깜짝 놀란 여성이 앳된 비명을 질렀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주변의 시선이 한데 모인다.
 여성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그러곤 모기 같은 소리로 어리둥절한 그에게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바, 방금······ 배, 뱀이······.”
 “착각이시겠죠.”
 부드럽게 웃는 사내.
 “아, 네. 그, 그런가 봐요. 호호.”
 그 태연한 태도에 설득된다.
 여성은 애꿎은 자신의 머리를 톡 하고 쳤다.
 요즘 심사 준비 때문에 잠이 부족했구나 스스로를 탓하면서. 혹은 너무 잘생긴 남자라 내가 긴장했나 생각하면서.
 동시에 창가에 앉은 사내 강연호는
 ‘초롱아, 얌전히 있으라니까.’
 ‘뀨우······.’
 펫(Pet)인 이계 지렁이 초롱이를 혼내는 중이었다. 팔찌 형태로 얌전히 있으라 했는데 그새를 못 참고 꾸물거리다 그만 들켜 버렸다.
 연호의 말에 초롱이가 다시 얌전히 둥근 팔찌 형태를 갖췄다.
 왼손엔 거무칙칙한 팔찌, 오른손엔 옥빛 팔찌.
 양손에 하나씩 액세서리를 착용한 모습이 퍽 특이하다.
 그 상태로 연호는 창밖의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감상했다. 고속도를 타고 흘러가는 풍광에는 지난 2달의 시간도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누군가 시간을 압축시킨 느낌으로 보낸 두 달.
 연호는 사력을 다해 효율이란 효율은 뽑아냈다. 시야 아래에 반짝이는 글자도 그 증거 중 하나.
 
 [추가 성장 경험치 제공 : 남은 시간 (36시간 24분)]
 
 ‘시간이 어중간하니 조금 아깝네.’
 연호는 철봉 프로젝트를 시작한 당일 곧바로 ‘추가 성장서’를 뜯었다. 단련과 동시에 능력치 역시 가파르게 상승했다.
 지금 대부분 수치가 99.9%인 게 그 증거다.
 하지만 의외의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연호의 잠재력은 고작 E급.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리미트를 해제할 때처럼 한계에 턱 막혀 버린 것이다.
 거대한 벽처럼.
 VIP시스템을 뒤지다 해결책을 알아냈다.
 연호에게는 D급 성장비약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절실히.
 결국 방법을 알아냈다지만, 시간이 조금 부족했다. 지금도 [나만의 농장]에서 열심히 앰플을 제작 중이지만······.
 ‘후우. 어쩔 수 없어. 최선을 다했다. 이걸로 부딪쳐 보는 수밖에.’
 한철봉의 적극적인 지지로 최신기기의 효능을 아낌없이 받았다.
 VIP시스템의 독특한 능력으로 불가능한 기회를 얻었다.
 주변의 도움은 이쯤 하면 됐다.
 이젠 그저 자신이 증명하기만 하면 된다.
 등급 업(Up) 심사에서 당당히 수석을 따낼 자격이 있음을.
 
 끼이익.
 옅은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오전 8시.
 마침내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거대한 세트장이 준비된 심사장엔 아침부터 방송국 카메라들로 북적북적했다. 기자들이 저마다 마이크를 들이대며, 헌터들에게 임하는 각오 따위를 묻느라 바쁘다.
 긴장한 채 더듬더듬 말을 잇는 이도 있고, 활짝 웃으며 자기를 주목해달라고 어필하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헌터들을 매의 눈으로 주시하는 이들이 펜스 한편에 자리 잡았다. 각종 이름난 클랜들부터 유명 컴퍼니들까지.
 대한민국 6대 세력만 빼고 모든 조직이 다 모인 것 같다.
 일 년에 단 두 번 있는 스카우팅을 위해.
 “이번 기수는 어떻게 봅니까?”
 “아무래도 3강이겠죠.”
 “그 셋 말곤 딱히 안 보이긴 하죠.”
 헌터 매거진에서 뽑은 유망주 3명.
 <1월의 등급 업 심사, 이들을 주목하라!> 특집으로 편성되어 6페이지에 가까운 지면을 할애받았지만, 충분히 주목할 가치가 있는 원석들이었다.
 육성(六星) 컴퍼니 회장의 막내아들, 박세광.
 언니를 따라 헌터의 길을 걷는 재능 이도희.
 헌터 아카데미 수석 기록을 갈아치운 황현수.
 다른 기수였다면 능히 수석을 넘볼만한 재목이라 평가받는 이들이 무려 셋이나 겹쳤다. 비공식으론 이 셋을 이미 C급 헌터로 평가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 정도로 출중한 기량들.
 물론 다른 헌터들도 호시탐탐 ‘수석’ 타이틀을 노리고 있었다.
 또한 언제든 낭중지추의 인재가 빛을 보는 것이 이런 대회의 진정한 묘미 아니겠는가?
 지난날 돌연변이 그 자체였던 ‘괴력’의 소유자 S급 헌터 이한울처럼.
 스카우터들과 방송국은 그때처럼 예상치 못한 행복한 변수를 기대했다. 그렇게 한참 화젯거리를 찾아 헌터들을 카메라에 담던 PD들의 눈이 한쪽으로 일제히 돌아갔다.
 동시에 점점 커지는 함성 소리.
 “우와아와!”
 “이야. 역시 장난 아니게 예쁜데?”
 “2번 카메라 돌려! 붉은여우 클랜 리더 이연희 떴다!”
 두 달간 한창 상승세를 타고 있는 동쪽 지역의 다크호스 클랜인 붉은여우. 처음엔 클랜 리더의 아름다운 외모만 화제가 됐었다.
 하지만 지금은 실력에 있어서도 소수정예라고 입소문이 퍼지는 중인 떠오르는 샛별.
 고성능 카메라가 줌인으로 이연희를 과감하게 땅겼다.
 이내, 드러나는 여신 같은 얼굴.
 새하얀 백설기 같은 피부에 우주를 담은 듯 영롱한 눈동자, 오뚝한 콧날에 옅은 핑크빛 입술이 화면에 잡히자 다들 할 말을 잃었다.
 자그마한 얼굴에 완벽한 균형을 이룬 이목구비는 청순한 여배우를 연상케 했다.
 “이거 순간 시청률 폭등이다. 놓치지 말고 잡아!”
 “네넵.”
 블랙&화이트 체크숄 머플러를 두른 그녀는 당당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보보마다 스타킹을 신은 각선미가 아찔하게 드러난다.
 “히잉. 오늘은 내가 주인공인데······ 또 언니가!”
 그리고 그 등을 포커스가 뒤로 밀려 버린 비운의 동생, 이도희가 투덜거리며 따라왔다.
 숏컷으로 가지런히 헤어를 정리한 이도희는 톡톡 튀는 상큼한 매력이 있는 소녀였다. 살포시 한숨을 내쉰 그녀는 이내 그러려니 했다.
 자매긴 해도 너무 예쁜 언니라 항상 이랬으니까.
 새삼 놀랍진 않았다.
 “같이 가! 언니. 또 어디 가는 거야?”
 또각또각.
 쏟아지는 카메라 세례와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이연희는 거침없이 누군가에게 다가갔다.
 다들 “어어?” 하는 사이,
 홱.
 불쑥 소매를 잡는다.
 “안녕하세요, 연호 씨. 아영이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
 잡혀 버린 사내, 연호가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돌렸다.
 헌터넷 앱으로 도감을 살피느라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기에 무슨 일인지 순간 상황파악이 안 된다.
 앞을 보니, 세상 이기적인 외모의 여자가 생글거리며 웃고 있다.
 “······죄송한데, 누구시죠?”
 “네, 넵?! 네?! 저, 저 모르시나요?”
 딱히 이연희가 공주병인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업계에서 자신의 얼굴을 모르는 남자를 만나리라곤 생각 못 했다. 의문에 가득 찬 연호의 눈빛엔 가식이라곤 일절 없다.
 이 남자 정말 모른다.
 당황한 이연희가 얼른 소매를 놓고 허둥거렸다.
 “어······ 어 죄송해요. 매일 아영이한테 이야기를 들어서 왠지 모르게 반가워서.”
 연호의 팬클럽 회장 아영은 여전히 포기를 모르고, 왕성한 활동 중이었다. 그 모양새가 딱 포교에 전념하는 순례자다.
 이연희도 대표적인 그 희생양이었다.
 클랜에서 시도 때도 없이 연호 이야기를 들으니, 저도 모르게 그에게 친숙함을 느낀 것.
 이에 연호를 직접 보자, 불현듯 말을 걸고 싶은 강한 충동이 들었고 그대로 실천했다.
 이연희는 몸가짐을 바로 하고 고개를 숙였다.
 “방해해서 죄송해요. 붉은여우 클랜 리더 이연희입니다.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아, 네. 강연호라고 합니다.”
 붉은여우 클랜이라면 일전에 얽힌 적이 있던 곳.
 백안일에게 스카우트 제안을 받기도 했다.
 연호는 ‘무슨 수작이지?’라고 생각하며 머리를 굴렸고, 연희는 ‘내가 왜 말을 걸었지?’라며 패닉에 빠졌다.
 이런 속사정을 모르고 겉만 본다면 화기애애하게 미소 짓는 선남선녀 그 자체.
 주변 카메라가 이 투샷을 한 화면에 담았다.
 
 “이야. 이거 그림 나오는데?”
 “근데 누구죠? 대형 스캔들인가.”
 기대와 달리 둘은 어색한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연호는 말을 건 건 저쪽이니 기다렸고, 연희는 순간 머리가 믹서기에 돌아가는 것처럼 뱅글뱅글 돌았다.
 슬슬 불편함에 연호가 한마디 하려는 순간,
 “언니! 차암. 뭐 하는 거야? 오늘은 수석을 차지할 내가 주인공이라고!”
 뒤편에서 도도도 달려온 이도희가 팔짱을 끼며 끼어든다.
 “그럼 이만.”
 타이밍 좋게 시선이 분산되자, 연호는 슬쩍 목례를 하고 앞서갔다. 그는 곧바로 폰을 꺼내 헌터넷 앱의 이계 종족 도감을 다시 켰다.
 이도희가 어리둥절함에 쳐다본다.
 “누군데? 근데 어디서 본 얼굴인데······.”
 “아······ 아휴.”
 왠지 아쉬워진 연희가 손을 뻗으려 하다, 그만뒀다. 멍청하게 행동한 자신을 꾸짖으며 입술을 매만진다.
 “바보같이. 내가 왜 그랬지?”
 “응? 뭐라구? 오늘 도희 님이 수석을 차지할 것 같다고? 나 말고는 인재가 없다고? 알고 있어. 언니. 깔깔.”
 “요 녀석이. 너무 긴장 풀지 마!”
 가지각색의 헌터들이 모인 심사장.
 등급 업 심사 개최가 고작 30분 앞으로 다가왔다.
 
 
 2.
 등급 업 심사는 매년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조금씩 강화해 왔다. 볼거리를 추가하고 다양한 스토리를 만드는 등 대중들이 열광하도록.
 혹자는 이를 고대 로마시대 콜로세움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며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먹혔다.
 그것도 아주 잘.
 사람들은 이계의 균열이 가져다주는 공포를 잠시나마 잊고, 헌터들을 보며 “우리들은 안전하네”라며 일상생활을 영위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선 미처 닫지 못한 바이올렛균열로 인해 대지가 오염되고 수없이 사상자가 발생 중임에도 불구하고.
 마음껏 환호하고 열기를 즐겼다.
 “······이런 풍토는 문제가 아닐까요? 그러니까 이런 식의 등급 업 심사는 그만둬야 하는 게······.”
 “얌마! 헛소리 그만하고 얼른 준비나 해! 참가자들 들어온다. 스탠바이. 원. 투. 고(Go)!”
 우르르.
 세계의 정세를 걱정하던 알바생.
 그는 이내 밀려오는 사람의 파도에 묻혀 생각을 멈췄다. 거시적인 염려도 좋지만, 지금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을 직면해야만 했다.
 “우헉. 컥. 지, 질서를 유지······.”
 덩치 좋은 헌터들에게 치이자, 온몸이 고릴라에게 맞은 것처럼 쑤셔온다.
 휴일 놀이공원에서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인파에 파묻힌 격.
 비명 소리만이 알바생의 힘든 하루를 예견했다.
 
 -아아. 안내 방송 드립니다. 사람이 많아 혼잡함이 예상되오니, 질서를 유지하시고 지시에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와. 이곳이 바로······.”
 “그 유명한 심사장이구나.”
 헌터들은 광활하게 펼쳐진 광경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부서진 동쪽 도심을 그대로 재현해 둔 구역, 아마존을 옮겨온 듯 열대 식물들이 울창하게 늘어진 밀림, 건조한 모래로 가득 찬 사막까지.
 실로 다양한 환경들이 헌터들을 테스트하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또한 구석구석 설치된 CCTV와 허공을 점유한 드론 카메라들이 헌터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을 준비까지 끝낸 상태다.
 “드디어 내가 등급 업 심사에······.”
 “꼭 톱 따낸다.”
 “엄마, 보고 있어요? 여기! 여기!”
 헌터들은 구역들을 둘러보며, 각자의 방식으로 긴장을 풀었다.
 주변인과의 수다로 긴장을 해소시키려는 사람.
 헌터넷 앱을 탐독하는 자.
 쉐도우 복싱으로 천천히 엔진을 가열시키는 이까지.
 2천 명에 가까운 사람 수만큼이나 방법도 각양각색이다.
 그중엔 정자세로 나무에 매달려 풀업을 반복하는 연호도 있었다.
 콰직.
 한계를 넘어선 악력에 나뭇가지가 손가락 모양으로 짓눌린다.
 그 상태에서 연호는 거북이 같은 속도로 오르락내리락 반복했다.
 정해진 동작만 수행하는 실로 로봇 같은 모양새.
 일체의 군더더기가 없어 물리엔진이 고장 났는지 눈을 의심해 볼 법한 장면이 한동안 이어졌다.
 “후읍. 후읍.”
 연호가 등급 업을 앞두고 운동에 열중하는 이유는 하나.
 
 [추가 성장 경험치 제공 : 남은 시간 (34시간 10분)]이 너무 아까우니까!
 
 이미 E등급 99.9%까지 단련을 완료했지만, 일전의 경험으로 알아챈 게 있었다. 분명 F급 99.9%였던 체력이 잠재력이 올라가자 E급으로 성장했다.
 즉, 성장 경험치는 사라지지 않고 누적된다는 점이다.
 잠재력의 제한만 풀리면 단련한 만큼 폭업이 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보너스 성장 시간을 흐지부지 흘려 버릴 순 없었다.
 연호 성격상 뭐라도 하지 않으면, 두드러기가 날지도 몰랐다.
 한 손 풀업으로 가뿐히 마무리하고, 땅바닥에 내려선 연호.
 이후 호주머니에서 곧바로 팩을 꺼내 쪽쪽 빨았다.
 미량의 독극물을 섞어 제조한 한방 비소 농축액.
 저항력을 높이기 위해 섭취했는데, 제법 쏠쏠하게 능력치가 올라갔다. 단점은 혀가 얼얼하게 마비된다는 점.
 그리고 가끔 심한 두통 끝에 환각을 본다는 것?
 부르르.
 “역시 이 맛이지.”
 지금 연호라면 사약을 한 사발 들이켜도 죽지 않을 거다.
 그렇게 몸에 좋은 독약(?)을 모두 먹어치우자, 곧 문이 닫혔다.
 마침내 2천 명의 헌터가 내부로 모두 입장한 것이다. 동시에 스피커에서 안내음성이 새어 나왔다.
 
 -헌터 등급 업 심사에 오신 걸 모두 환영합니다! 일단 전원 장비를 지급한 이후, 룰을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안내에 따라, 연호도 탈의실로 들어갔다.
 스판으로 이루어진 슈트 한 벌, 두툼한 단말기 하나, 누구나 애용하는 국민 헌터봉 하나가 연호를 맞이한다.
 압력센서가 달린 슈트는 방호력을 기대하긴 힘들어 보였다. 금세 옷을 갈아입고, 허리춤 홀스터엔 헌터봉을 다리 옆 주머니엔 단말기를 지참했다.
 밖을 나오니, 다들 헌터답게 빠르게 슈트 착용을 마친 후다.
 
 -그러면 심사 룰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매년 규칙은 조금씩 달라졌다.
 몇 개의 큰 틀이 있기는 하나, 언제나 변화무쌍한 옵션들을 추가하여 대중의 흥미를 유발하는 전략.
 모두의 시선이 스피커로 모인다.
 
 -이번 등급 업 심사 종목은······ 서바이벌(Survival)입니다! 여러분은 7일 동안 이계의 생명체는 물론이거니와 같은 헌터들에게서도 몸을 숨겨야 하실 겁니다!
 
 “쳇······ 서바이벌이라니!”
 “젠장.”
 “앗싸. 생존기술은 내 전문이지.”
 불만 섞인 탄성과 환호하는 함성 소리가 어지럽게 섞인다.
 저마다 이전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전략을 짜내느라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룰은 간단합니다. 이계 종족을 처치해서 점수를 획득하십시오. 헌터를 처치해서 점수와 장비를 약탈하십시오. 물론 헌터까지 실제로 죽이란 건 아닙니다.
 
 전광판에 영상이 띄워졌다.
 슈트가 나오더니, 여러 수치가 나열된다. 헌터가 슈트를 주먹으로 가격하자, 표시된 수치가 팍 줄어들었다.
 
 -슈트엔 압력감지 기능이 있습니다. 일정 이상의 데미지를 입어 체력이 0이 되었다고 판단되면 그 즉시 탈락입니다. 체력은 단말기에 표시되니, 언제나 소중하게 가지고 다니시길.
 
 연호는 단말기를 꺼내 샘플을 확인했다.
 
 [체력 100]
 
 풀 상태다.
 
 -또한 난이도를 위해 총 30개로 나누어진 구역이 일정 시간이 지나면, 폐쇄 상태가 될 겁니다. 이때 구역 내에 있으면 체력이 지속적으로 감소하니 생존하고 싶다면, 끊임없이 이동하셔야 합니다.
 
 전년도와는 다른 룰의 추가에 웅성거리는 헌터들.
 
 -그렇게 7일이 지나고 종료 벨이 울렸을 때, 생존자 중 가장 많은 점수를 획득한 이가 우승을 차지합니다.
 
 헌터로서의 자질을 평가하는 본래 기능과 오락을 제공한다는 부분이 묘하게 맞물려 탄생한 지금의 등급 업 심사.
 많은 전문가가 여러 심사 종류 중 가장 까다로운 방식으로 이 ‘서바이벌’ 모드를 꼽았다.
 이계 종뿐만 아니라 같은 헌터들도 견제해야 하는 상황.
 극한의 환경에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뼛속까지 지치는 강행군의 연속.
 사람의 바닥까지 낱낱이 살펴볼 수 있는 이 시험은 어찌 보면 헌터의 자질을 평가하는 데 가장 맞춤일지도 몰랐다.
 
 -지시에 따라 랜덤 위치로 이동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 알림에 헌터들은 안내에 따라 각자 구역으로 흩어졌다.
 
 -지금부터 등급 업 심사를 시작하겠습니다! 모두들 행운을 빕니다!
 
 삐이이익.
 귀를 찢는 신호음과 동시에 연호는 곧바로 단말기부터 꺼냈다.
 단말기는 이 서바이벌에서 필수품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의 체력뿐만 아니라, 지도, 점수까지 모든 정보가 총망라되어 있기 때문이다. 연호는 곧장 자신의 위치부터 살폈다.
 가로 6칸(알파벳) x 세로 5칸(숫자)의 구역.
 현재 연호의 위치는
 
 F1!
 
 동쪽 상단 끄트머리다.
 주변 환경은 부서진 도심.
 연호는 무게중심을 낮추고 재빠르게 은·엄폐를 위해 움직였다.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이계 종의 동태파악과 보급품 확보다.
 이 구역에 서식하는 이종족을 확인해야 대략적인 전략을 짤 수 있고, 식량을 비롯한 필수물자들은 7일 동안 생존에 필수적이다.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포기를 선언하는 헌터는 매년 있었다.
 부서진 벽을 엄호물 삼아 이동을 반복하던 연호에게 곧 점수(?)가 등장했다. 어기적거리며 무언가 주워 먹고 있는 놈.
 아무것도 없는 바닥을 마치 비둘기처럼 쪼고 있다.
 누더기 미라(Rags Mummy).
 2미터가 훌쩍 넘는 큰 키에 기아를 연상케 하는 홀쭉한 몸체.
 하늘하늘하게 움직이는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오렌지균열 <위험도 1.5> 생물.
 과연 테스트를 위해 적합한 녀석을 준비해 놨다.
 마구잡이로 움직이는 붕대는 큰 타격은 아니라지만, 이 슈트엔 확실히 데미지를 누적시킬 수 있다. 기술이 없으면 까다로운 상대. 하지만,
 타닷!
 연호는 지체 없이 달려들었다.
 ‘지금은 극 초반이다. 테스트할 게 있으면 이 타이밍에 해야 돼.’
 서로 눈치를 보고 환경에 적응하느라 미적미적할 시간.
 연호는 곧바로 치고 나왔다.
 촤르륵.
 홀스터에서 자연스럽게 헌터봉을 빼낸다.
 연호를 확인한 누더기 미라가 “캬악!” 하는 괴성을 뱉더니 등 뒤에서 붕대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슉! 슉!
 눈앞 가득 검정 때가 잔뜩 탄 붕대들이 쏟아졌다.
 이에 연호는 당황하지 않고
 부드럽게 헌터봉을 휘저었다.
 어린아이가 골목에서 나뭇가지를 휘두르며 놀 듯.
 스르륵.
 하나, 결과는 놀라웠다.
 날을 꼿꼿이 세우고 덤벼들었던 붕대들이 봉과 접촉하자, 순한 양이 되어 흐물흐물하게 변했다. 풍차처럼 휘몰아치던 공세를 단숨에 제거한 연호는 슬라이딩으로 미끄러지듯 놈의 하단을 장악했다.
 ‘누더기 미라는 키가 커서 하반신 공격에 취약하지. 거기다 한번 원거리 붕대 공격을 시도한 뒤엔 잠깐의 경직이 있어. 물론 마지막 발악으로 한 번 더 공격이······.’
 “캬악!”
 연호가 생각하기 무섭게, 미라의 기다란 팔이 아래로 내리꽂힌다. 예상하고 있던 연호는 가뿐히 회피하며 오히려 팔뚝을 향해 야구 배팅하듯 휘둘렀다.
 빠각!
 미라답게 약한 내구력이다.
 단번에 뼈가 부려져 덜렁덜렁거린다. 고통에 차 비명을 지르는 누더기 미라의 주변을 돌며, 연호는 매타작을 시작했다.
 뻑! 빠각.
 이미 E급 최상위 근력을 지닌 연호에게 미라의 내구력은 너무 나약했다. 꺽다리가 뎅겅 꺾여 어린 소녀처럼 W 자세로 주저앉는다.
 F급 헌터일 때는 상상도 못 할 무력 과시.
 예전이라면 머리론 알고 있어도, 빠른 붕대 공격에 허우적대다가 칭칭 감기는 결말을 맞이했을 거다.
 리미트 해제 이후 겨우 두 달 만에 연호의 무력은 놀라울 정도로 수직 상승했다.
 놈을 무기력하게 만든 연호는 이내 붕대를 들어 간단한 테스트를 실시했다. 붕대로 자신의 슈트를 때려본다.
 찰싹.
 그러곤 단말기 확인.
 
 [체력 100]
 
 “이 정도 충격까진 괜찮구나.”
 몇 번 더 반복해, 결국 체력이 99가 되고서야 실험을 멈추는 연호. “캬악” 하며 이빨을 내보이는 미라를 마저 처리하고서 점수까지 확인했다.
 
 [현재 점수 10]
 
 “한 마리당 10점이네.”
 연호는 가뿐히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며 전략을 세웠다.
 ‘이 정도면 충분히 가능해.’
 두두두두두!
 그 순간,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굉장하게 들린다. 여러 대의 헬리콥터는 동시다발적으로 무언가 떨궜다.
 낙하산에 실려 하강하는 물품들.
 일정 시간마다 내려오는 보급품들!
 연호의 눈도 매섭게 반짝였다.
 연호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가장 가까운 낙하지점으로 뛰었다.
 
 
 3.
 이전에 치러졌던 등급 업(Up) 서바이벌 심사의 경우, 보급품은 크게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미리 숨겨 둔 고정 보급품.
 두 번째는 정해진 시간마다 헬리콥터로 떨궈주는 낙하 보급품.
 둘 중 무엇을 우선시해야 더 나은지는 말하기 힘든 문제다. 단지, 전략의 차이일 뿐이니까.
 숨겨둔 보급품은 찾기가 힘들지만 경쟁자가 적은 반면, 투하되는 보급품은 근방에서 몰린 헌터들과 이전투구의 각축장을 벌여야 했다.
 하지만 누구나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바는 있었다.
 초반에 보급품을 획득한 자가 압도적으로 유리해진다는 것.
 타다다닷!
 그 이점을 누리기 위해, 지금도 헌터들은 내달렸다.
 폭탄이라도 떨어진 듯 황량하게 부서져 버린 도심의 건물들.
 그 사이를 헤집으며 마치 파쿠르 선수처럼 헌터들은 거침없이 움직였다. 창공에서 촬영 중이던 드론 카메라 화면에 보급품 주변으로 마치 개미 떼처럼 모여드는 이들이 고스란히 담겼다.
 연호도 곁눈질을 하며 창문 하나를 뛰어넘었다.
 ‘어떻게 할까? 조금 기다렸다가 뒤를 노릴까.’
 이곳은 지금 호시탐탐 상대방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기회만 노리는 야생의 세계나 다를 바가 없었다.
 물품 수령 직후를 노리는 것은 사냥의 기본 중 기본.
 문제는 모두 동일한 생각을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너무 늦게 끼어들면 닭 쫓는 개 신세가 된다.
 헌터들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 사방팔방 인기척만 요란했다. 그 때문에 막상 보급품에 도달한 이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폭풍전야의 분위기가 알싸하게 감돈다.
 타닷!
 연호도 보급품 낙하지점이 가까워 오자 직선 루트를 틀어 둥글게 선회했다. 그렇게 담벼락을 짚으며 점프하는 순간.
 “헉!”
 “······!”
 막 모퉁이를 돌아 튀어나오던 헌터와 딱 마주쳐 버렸다.
 귀신을 본 것처럼 깜짝 놀라는 20대 청년.
 ‘기회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먼저 움직인 것은 연호였다.
 무형의 귀신이 무서운 게 아니라 사람이 무섭다는 걸 가르쳐줄 속셈.
 파공음과 함께 곧장 헌터봉을 수직으로 내려찍었다.
 바다라도 가를 기세로 내리치는 연호의 공격에 상대방은 미처 봉도 꺼내지 못하고 팔뚝으로 급히 막았다.
 -퍽!
 “크흡.”
 ‘이 정도면 체력 30 정도.’
 상대가 고통에 비명을 삼키는 사이, 연호는 곧장 사이드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상대도 똑같이 리미트를 해제하고 단련을 거듭한 헌터.
 곧장 주먹으로 반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는 연호가 기다렸던바.
 라이트 훅이 아슬아슬하게 허공을 가르는 순간, 연호의 헌터봉이 카운터로 불을 뿜었다.
 퍼벅! 퍽!
 가슴 한 방. 목덜미 한 방.
 처음 공격까지 총 세 방이 적중하자, 헌터의 슈트 체력이 삽시간에 0으로 내려앉았다. 어리둥절한 사내가 제정신을 차리고 반격하려는 순간.
 파지직!
 “끄허억.”
 슈트에서 흘러나온 전류가 사내의 몸을 감전시킨다.
 속절없이 기절하는 헌터.
 체력이 0으로 전락한 탈락자의 최후였다.
 “후.”
 단숨에 한 명을 해치운 연호는 숨 고를 틈도 없이 곧장 몸을 날렸다. 시야각으로 살피니 묘한 기척들이 들썩거린다. 주변의 살기에 살갗이 올올이 반응했다.
 ‘쳇. 타깃(Target)이 됐군.’
 이런 첨예한 대치 상태에서 이목을 끄는 자는 흔히 타깃으로 지목되곤 한다. 지금 같은 경우에는 소동을 일으킨 연호일 게 뻔했다.
 연호는 주변을 경계하며 바삐 현장을 벗어나려 시도했다.
 하지만.
 붕!
 카페테라스 기둥에서 불쑥 봉이 튀어나오는 것이 더 빨랐다.
 연호는 림보를 하듯 허리를 꺾어 피하곤 봉을 반사적으로 쭉 뻗었다.
 타닥!
 묵직한 감촉이 살이 아니다.
 ‘제법 하는군.’
 상대방의 평가를 중(中)으로 수정한 연호는 버려진 의자를 팽개쳐 시선을 끌고 냅다 앞으로 달렸다.
 와장창!
 연호가 쭉쭉 치고 나가자 기둥 뒤에 몸을 숨긴 헌터도 똑같이 달음박질친다. 새하얀 안광이 도깨비불처럼 길게 늘어져 따라붙었다. 일격을 겨룬 결과 육체 능력은 비슷한 정도.
 슉슉.
 기둥을 사이에 두고 두 헌터가 빠르게 이동한다. 놈은 끈덕지게 틈을 노렸다.
 건물 끝 모서리가 보이는 지점에 이르러 연호는 승부수를 던졌다. 버려진 원형 테이블을 밟고 수직으로 점프.
 훅!
 연호의 몸이 순식간에 2층으로 사라지자, 놀란 헌터가 튀어나왔다.
 단, 하나가 아니라 둘이.
 연호를 졸졸 따라온 한 놈과 모퉁이에서 기습을 위해 대기하던 놈까지. 어부의 낚싯바늘에 걸린 두 물고기가 수면으로 튀어 올랐다.
 “헉!”
 “시발!”
 마주친 둘은 깜짝 놀라다, 이내 지들끼리 사투를 벌였다.
 그사이, 연호는 카페 난간을 부여잡고 2층으로 기어 올라갔다.
 콰콰쾅! 퍼버벅!
 연호가 신호탄이 된 걸까.
 사방에서 신음 소리와 함께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됐다. 헌터로서 자격을 증명하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에 구역 전체가 몸살을 앓는다.
 연호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살폈다.
 F1 구역에 있던 헌터란 헌터는 다 몰린 것처럼 분주하기 짝이 없다. 연호는 슬쩍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였다.
 깔끔하다. 현 상황이 더없이 만족스럽다.
 파지직!
 “허억. 허억.”
 슬쩍 아래를 보니, 결판이 났다. 하나는 꼬꾸라져 감전 중이고, 하나는 숨을 헐떡이느라 순간이지만 경계심이 흐트러졌다. 지체 없이 연호가 뛰어내렸다.
 흡사 부엉이가 먹이 다툼에 지친 쥐를 사냥하는 것처럼.
 단숨에 목덜미를 내려친다.
 “이런 젠······ 커헉!”
 맥없는 한마디를 남기고 똑같이 감전 신세로 전락한 사내.
 연호는 사내의 품에서 홀스터와 헌터봉 하나를 여분으로 챙긴 뒤 몸을 풀며 자세를 잡았다.
 잠시 속으로 숫자를 헤아리자.
 와장창! ······데구르르.
 이번엔 눈앞의 잡화점 유리창이 박살 나며 두 헌터가 나뒹굴며 등장했다. 2천 명이나 되는 헌터가 모여 있으니 초반부터 전투가 쉼 없이 벌어졌다.
 연호는 헌터봉을 축 늘어뜨리고 전방을 보다 히죽 웃었다. 이제 겨우 시작이다. 7일간 펼쳐지는 대장정의 고작 출발선.
 하지만, 이 순간 그는 확신했다.
 “적어도 F1 구역은 내가 먹는다.”
 헌터 강연호의 이름이 처음으로 TV에 방영된 날이었다.
 
 * * *
 
 “이건······ 좀 쓸만해 보이네.”
 주변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연호는 물건들을 정리했다.
 낙하 보급품은 결국 연호가 차지했다. 나머진 모두 탈락하거나 연호의 무력 과시에 혼비백산 흩어졌다.
 수확이 제법 짭짤하다. 일단 ‘인간’사냥으로 점수를 꽤 많이 얻었다.
 
 [현재 점수 184]
 
 헌터를 사냥하면 기본 10점에 그 헌터가 가진 점수의 10%를 보너스로 준다. 참가자 중엔 아예 작정하고 이계 생명체가 아닌 헌터만 노리는 이도 있을 정도였다.
 연호는 물건을 뒤적거려 주르륵 나열했다.
 에너지 바를 비롯한 전투식량과 통조림. 수면용 간이침낭.
 헌터들의 만병통치약에 가까운 힐 젤(Heal Gel)과 빈 앰플 뭉치들. 각 구역엔 이계의 식물들이 곧잘 웃자라 있으니 그걸 조합해 써먹으란 소리다.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배터리를 들어 올렸다.
 신용카드처럼 생긴 배터리를 슈트 팔뚝 코드에 꽂자, 이내 소모되었던 체력이 조금씩 차올랐다.
 
 [81, 82, 83······.]
 
 실제 체력이 오르는 건 아니지만, 묘한 안정감이 든다. 체력 바를 풀로 채운 연호는 짐들을 전투배낭에 몰아넣고 곧바로 움직였다.
 방금 큰 전투가 벌어졌다.
 곧 하이에나들이 냄새를 맡고 몰려올 테니, 재빨리 피하고 보금자리를 마련해야 했다. 연호는 단말기 지도를 띄워 E2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어차피 외곽부터 하나씩 폐쇄될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초장부터 중앙으로 이동하는 것도 실력에 자신이 있다면 상관없었다.
 조금씩 이동하자, 날이 어둑해질 때쯤 E2 구역에 도착했다.
 오후부터 내리던 옅은 눈발이 소복이 쌓인 밀림이 연호를 환영한다. 마치 새하얀 열매가 주렁주렁 맺힌 것 같다. 진눈깨비를 포함한 찬바람이 세차게 불자, 연호의 육체가 으슬으슬 떨려왔다.
 아무리 리미트를 해제한 초인이라도 추위는 느낀다.
 다만 덜 느낄 뿐.
 일반인 같으면 1월의 날씨에 야외에서 잠이 들면 그대로 동사하겠지만, 헌터들은 입이 돌아가는 정도랄까.
 그래서 최상의 컨디션을 위해선 준비가 필수였다. 연호는 울창한 밀림을 돌아다니며 이계 식물 ‘바카르’를 끌어모았다.
 붉은색으로 반짝이는 이 풀잎은 오렌지균열 너머에서 발견되는 식물로 열을 발산하는 특징을 가졌다.
 연호는 ‘바카르’를 배낭에 넣는 척하며 차곡차곡 인벤토리에 저장했다. 바카르는 꽤나 쓸모가 많아, 보이는 대로 꾸겨 넣었다.
 우끼끼. 우끼끼.
 머리 위 나무를 타고 원숭이 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린다.
 밀림을 돌아다니며 살피니, 이 구역의 주인은 <위험도 1.8> 칼날숭이(Blade Monkey)였다. 하지만 오히려 좋았다.
 연호는 칼날숭이 특성을 되새겼다.
 난폭하고 사나워 오렌지균열 상위권 종족이지만, 밤이 되면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려 잔다. 이때는 죽은 듯이 잠자는 것으로 유명했다.
 즉, 칼날숭이와는 오직 낮에만 부닥치면 된다. 대신 밤은 서로 암묵적 평화조약을 맺는 거다.
 이 정도면 괜찮은 계산이 아닐까?
 연호는 이내 바카르 잎을 엮어 덮개처럼 만들곤 나무둥치에 머리를 기댔다. 바카르 잎이 세상 어떤 핫팩보다 더 뜨뜻하게 달궈진다. 나른하게 마치 온돌처럼.
 그 상태로 언제든 출수할 수 있게 헌터봉을 옆에 두고 연호는 눈을 감았다.
 곧 색색거리며 깊이 잠이 든 연호.
 여태껏 어떤 강심장이라도 연호처럼 쉽게 잠드는 이는 없었다. 생소한 환경에 놓였고 사방엔 적이 득실거린다. 거기다 날씨는 혹한기 훈련인 양 시리다.
 그래서 첫째 날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이들이 많았다.
 한데 연호는 개의치 않고 숙면을 취하니, 카메라로 지켜보던 이들이 미쳤냐고 감탄할 정도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새벽 3시경.
 부스럭.
 풀잎을 헤치고 웬 검은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등급 업 심사에 참가한 헌터. 그는 처음부터 오직 이때만을 기다렸다.
 ‘흐흐. 멍청한 놈들. 칼날숭이를 보고 안전하다 여겨 밀림에서 수면을 취하는 이가 많을 줄 알았지. 난 잠든 이들만 노려 점수를 획득하면 돼. 이게 바로 똑똑한 사냥이지.’
 이미 졸음을 참지 못한 두 명을 똑같은 방식으로 처리한 뒤였다.
 헌터는 살금살금 정글을 헤치고 다음 목표를 쳐다봤다. 세상모르고 편하게 잠든 청년이 보인다.
 ‘허 참. 여기가 지네 안방이야? 필요 이상으로 대범한 놈이군. 그게 네놈 탈락의 원인이 될 거다.’
 소리를 죽여 접근한 헌터는 봉을 높이 들었다.
 그 순간, 바람에 우스스 흩날리는 이파리 사이로 달빛이 내리쬔다. 어두컴컴한 숲을 관통하는 한 줄기 빛에 무언가 반짝 반응한다.
 부릅떠진 두 눈동자.
 “허억!”
 연호와 눈이 마주치자, 헌터는 깜짝 놀라 헛바람을 삼켰다.
 이때는 이미 연호의 다리가 바닥을 쓸고 있는 후였다. 둥근 원을 그린 연호의 다리걸기에 헌터의 몸이 균형을 잃고 붕 떠올랐다.
 무방비 상태로 허공에 떠오른 그의 가슴에 연호의 헌터봉이 작렬했다.
 퍽! 콰당!
 파지직!
 테이저건에 당한 범죄자처럼 전류에 지져지는 헌터.
 상쾌한 얼굴로 연호는 가볍게 목을 풀었다.
 “미안한데, 나한테 기습은 안 통해.”
 “뀨우!”
 땅바닥에서 불쑥 초롱이가 얼굴을 내밀고 동의했다.
 연호가 이처럼 안심하고 잠이 들 수 있었던 비밀은 민감한 보초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펫(Pet) 이계 지렁이(Parallel Earthworm) 초롱이!
 본래 무척 예민한 초롱이는 땅속에 있으면 어떤 기척이라도 감지할 수 있었다. 제 딴엔 살금살금 왔다지만, 초롱이에게는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시계나 다를 바가 없었다.
 눈짓으로 감사를 표한 연호는 헌터를 뒤적거렸다.
 “오. 팔꿈치 보호대. 좋은 거 얻었네.”
 제 딴엔 기습이라 여긴 행동이 오히려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드미는 건 줄은 꿈에도 몰랐을 거다.
 연호는 앞으로도 쭉 숙면을 취할 생각이었다.
 ‘이런 놈은 계속 올 테지. 밤을 이용하는 것도 공략의 한 방법이니까. 그렇다면, 난 그걸 역이용해 맛있게 점수를 먹으면 돼.’
 연호는 뼛속까지 ‘헌터’였다.
 
 
 4.
 등급 업 심사 서바이벌이 개최된 지 어느덧 5일이 지났다.
 24시간 서바이벌을 방영하는 전용 채널만 3개.
 TV에선 매일 새로운 이슈가 하이라이트로 정리되어 송출되었다. 또한 유명 헌터를 초빙해, 참가자들의 실력을 분석하고 코멘트를 남기는 프로그램이 엄청난 시청률로 고공 행진을 지속했다.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모두가 즐기는 축제 기간.
 이러한 인기에 걸맞게 인터넷 커뮤니티를 가장 활발하게 달군 것은 단연 ‘위클리 영상 랭킹’이었다.
 조회 수별로 매겨진 영상 랭킹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하위권은 주로 <누더기 미라와 마주친 초짜 헌터 반응>, <지레 혼자 기겁함> 등 개그 소재로 쓰일 법한 영상이 주를 이뤘지만, 상위권은 달랐다.
 헌터들의 활약상이 OST와 세련된 편집을 거쳐 영상미 넘치게 펼쳐졌다.
 이 중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건 단연코 탑 10위권 영상들.
 이는 대부분 3강에 대한 소스들로 채워졌다.
 전부터 유명했던 3명 -박세광, 이도희, 황현수.
 과연 탈 유망주라 불릴 만한 실력을 셋 다 스스로 증명한 것이다.
 우선 붉은여우 클랜 리더 이연희의 동생으로만 유명했던 이도희는 귀신같은 활 솜씨로 유명세를 탔다. 초기엔 잠잠하던 그녀의 점수가 활을 얻자마자 천장을 뚫고 수직 상승했다.
 그녀가 쏘아낸 화살은 백발백중.
 신궁(神弓)의 재림(再臨).
 단발을 흩날리며 누더기 미라의 미간을 꿰뚫는 솜씨는 누가 봐도 경탄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한 가지 특별한 소신이 그녀의 인기를 더했다.
 
 -이도희는 결코 사람을 상대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덤비는 자들만 최소한의 호신 행위로 떨쳐 버리곤 나머지 점수는 모두 순수 이종족 사냥으로만 쌓았다.
 그야말로 ‘헌터’라는 명칭에 걸맞은 활약.
 
 “전 헌터잖아요. 헌터는 이물(異物)을 사냥하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시험이라도 사람한테 활을 쏘고 싶지 않아요.”
 
 어울리지 않게 근엄한 표정으로 남긴 이도희의 코멘트.
 
 -멋있다. 양궁협회의 비밀병기 아냐?
 -솔직히 도희가 언니보다 예쁘다. 고양이 같은 매력.
 -그건 좀······ 눈깔 사시세요?
 
 그녀의 인터뷰 및 활약상 영상에는 댓글들이 수백 개씩 달렸다.
 하지만, 이런 그녀의 영상도 고작 3위에 그쳤다.
 마치 교본같이 서바이벌을 진행 중인 ‘육성(六星)’ 컴퍼니의 막내아들 박세광도 2위에 머물렀다.
 1위는 바로 아카데미 수석 기록을 갈아치운 황현수였다.
 그는 한 가지 공약과 눈부신 활약으로 5일 내내 ‘위클리 영상 랭킹’의 선두자리를 고수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였다 하면 그의 공약이 이뤄질지 여부를 따졌다.
 여러 전문가가 패널로 나서 공약의 성공 여부 및 확률을 읊어댔다.
 
 5일 전 서바이벌 개시 직후.
 “아아, 들리십니까? 여러분. 제가 이 자리에서 공약 하나를 걸겠습니다. 만약 실패하면 전 재산을 기부하죠.”
 풀숲에 숨겨진 카메라 정면을 응시하며 황현수는 능글맞게 웃었다. 소프트 모히칸으로 바짝 세운 헤어 스타일에 번개 모양 스크래치를 새긴 그는 개성이 흘러넘쳤다.
 손으로 머리카락을 닭 볏처럼 스윽 세운 그는 선언했다.
 “톱! 차지하겠습니다. 하지만 이계 종족으로는 점수를 모으지 않겠습니다. 오직 ‘헌터’ 사냥으로만 점수를 모으겠습니다.”
 당당한 PK 예고.
 서바이벌이니 당연히 헌터들끼리 다툼이 인정된다. 하지만 황현수처럼 처음부터 헌터만 잡겠다고 공약을 거는 미친놈은 없었다.
 “저보다 점수 많은 놈이요? 당연히 모두 처리할 겁니다. 제가 이빨이 튼튼해서 뭐든지 잘 씹어 먹거든요.”
 아그작 아그작.
 현수는 상어인 양 무언가 씹는 흉내를 냈다.
 그리고 씨익 웃었다.
 “저랑 같은 기수에 심사를 치르게 된 헌터분들께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6개월 뒤에 다시 도전하세요. 그럼, 가뿐하게 100명 사냥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엌 ㅋㅋㅋㅋㅋ. 미친놈.
 -싸가지 존X 없네. 저런 놈은 인성부터 글렀어.
 -근데 황현수 아카데미부터 실력 하나는 알아준다던데?
 
 그야말로 댓글창이 폭발했다.
 사람들은 신선한 또라이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그의 인성을 욕하는 한편, 어디까지 올라갈지 궁금해서 지켜보는 이들도 많았다.
 
 그리고 5일이 지난 지금.
 적어도 아직까진 황현수의 앞을 가로막는 자가 없었다.
 아니, 그의 일수를 제대로 버티는 자가 드물었다. 마주쳤다 하면 단숨에 제압해 버리는 그의 실력은 결코 가짜가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 허풍쟁이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어서 빨리 3강끼리 진검승부를 펼칠 날만을 오매불망 기다렸다.
 그리고.
 이런 열기와 하등 동떨어진 세상에 연호가 있었다.
 연호도 하위권에 영상이 올라가긴 했다. <금잠남! 금방 잠드는 남자>로. 기이할 정도로 빠르게 꿈나라로 빠지는 영상이 웃기다고 잠깐 화제가 됐었다.
 
 -누가 마취침 쐈냐?ㅋㅋㅋ
 -ㅋㅋ 저 상황에서 눕자마자 잠드네. 우리 아빠냐?
 -근데 좀 잘생긴 듯.
 
 그 이후로 야습도 막고 몇몇 활약을 선보이긴 했으나, 딱히 연호를 주목하는 이는 없었다. 5일 동안 연호가 취한 노선은 안전과 실리였으니까.
 그 덕에 장비는 엄청난 업그레이드를 거쳤다.
 각종 보호대를 비롯하여 보급품이 지급하는 풀 세트를 맞추기 직전. 거기다 알뜰살뜰 모아둔 배터리의 숫자만 해도 10개가 넘었다. 식량도 다람쥐처럼 넉넉히 모아두었다.
 하지만 뭔가 부족했다.
 연호도 이를 자각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D랭크로 등급 업(Up)할지 몰라도 수석은 언감생심이야. 슬슬 승부수를 던져야 할 터인데······ 어때? 초롱아.’
 ‘뀨우······.’
 도리도리.
 잠시 [나만의 농장]에 다녀온 초롱이가 고개를 젓는다. 제작 중인 비약이 더럽게 오래 걸렸다. 예상시간을 훨씬 초과했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어제 이미 완성됐어야 하는데.’
 리미트를 해제할 때도 그러더니 빌어먹을 잠재력이 계속 말썽이다. 현재 연호의 잠재력은 여전히 E.
 때문에 육체 능력이 E급 99.9%에 머물러 있어 제약이 심했다.
 객관적으로 탑10은 가능하더라도 우승은 ‘글쎄?’ 할 법한 전력.
 가볍게 한숨을 쉰 연호는 빙글빙글 꼬아 만든 ‘바카르’ 잎 매듭을 가방 속에 넣었다. 그러곤 단말기를 꺼내 위치를 확인했다.
 어느덧 14개 구역이 폐쇄됐다. 3시간 정도 흐르면 하나 더 폐쇄되리라.
 ‘다음은 D3 구역이 폐쇄군.’
 연호는 슬슬 더 안쪽으로 이동하리라 마음먹었다.
 다음 목적지 좌표는 D2.
 달려드는 칼날숭이들을 두들겨 패며 이동을 시작했다.
 
 * * *
 
 “흐아암. 지루하네.”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화제를 몰고 다니는 황현수는 크게 하품을 했다. 눈앞의 헌터 둘이 합공으로 덤벼들었지만, 그의 눈엔 지루함이 가득했다.
 슥. 슥.
 종이 한 장 차이로 공격을 회피하며, 가벼운 스텝으로 접근한다. 마치 복서들이 거리를 좁히듯 경쾌한 스텝이 이어졌다.
 상대방 둘도 분명 리미트를 해제한 헌터다.
 그런데.
 “어어?”
 너무도 어이없이.
 퍼버벅!
 동시에 나뒹굴었다.
 “어어는 무슨.”
 너무 빠른 속도에 순간, 현수를 놓쳤고 이에 무방비 상태로 공격을 허용한 것.
 공격 자체를 보지도 못했다.
 그저 한 명은 복부에 충격을 한 명은 목덜미에 강한 타격을 입고 체력이 0이 되었을 뿐이다.
 쓰러져 바들바들 떠는 둘을 뒤로하고 황현수는 D2 밀림구역을 제집처럼 활보했다.
 “여러분 참 쉽죠? 어랏, 근데 지금까지 몇 명이더라. 100명 넘고 나서는 세질 않아서······ 나중에 끝나면 확인하게 잘 정리해 두세요.”
 카메라를 보고 찡긋 윙크하는 현수.
 극한의 서바이벌임에도 지극히 여유로운 그 모습에 사람들은 감탄했다. 거기다 아직까지 헌터봉을 꺼내지 않은 것도 화제가 됐다.
 그는 오직 두 주먹만으로 모두 제압했다.
 만화 속 주인공들의 필살기처럼 무기를 아껴둔 모습에 많은 이들이 궁금증을 토로했다.
 
 -점마 왜 무기 안 쓰냐?
 -제일 강하니까. 4명한테 둘러싸였을 때, 헌터봉 슬쩍 꺼내려 하다가 “이 정도면······ 아직은”이라고 중얼거리는 거 내가 들었어.
 -개소리하고 있네. 무슨 흑염룡이 꿈틀거리는 환자냐? 그냥 맨손 격투가 더 익숙하겠지.
 -말이 되냐? 주먹보다 무기가 훨씬 센데?
 -저 새끼 폼 잡으려고 무리하는 거야. 성격상 틀림없다.
 
 황현수는 유유자적 바닥에 쌓인 이파리를 즈려 밟으며 걸었다.
 이 정도 퍼포먼스는 그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중학생이 초등학생한테 이겨 봤자 별 자랑거리가 못되듯, 이 등급 업(Up) 심사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경계하는 대상은 같은 3강으로 묶인 이도희와 박세광뿐.
 ‘사실 도희도 별거 아니지. 한 번도 날 이기지 못했으니까.’
 황현수와 이도희는 같은 아카데미 기수 즉, 이른바 동기였다.
 이도희 역시 상당한 기록을 세웠지만, 모조리 황현수에게 꺾이고 말았다. 계속 신기록을 경신해 가는 현수를 보며 다들 혀를 내둘렀다.
 ‘차라리 박세광이 궁금해.’
 현수에게 이도희는 이미 낱낱이 파헤쳐진 상대.
 꽤 하긴 하지만 자기한텐 못 미친다.
 반면, ‘육성(六星)컴퍼니’의 막내아들인 박세광의 실력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더군다나 본래 ‘육성기업’하면 대격변 이전부터 대한민국을 넘어서 세계에서 알아주던 기업 아닌가.
 그런 대기업이 컴퍼니로 변모한 것이 현재의 대한민국 6대 세력 중 하나인 ‘육성컴퍼니’였다.
 한마디로 박세광은 금수저 중의 금수저.
 ‘날 재밌게 해줄 수 있으려나.’
 히죽 웃은 현수의 눈앞에 다음 희생양이 보였다. 주변을 경계하는 은·엄폐 실력이 제법 뛰어났지만, 그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
 훑어보니 장비들이 꽤나, 아니, 상당히 훌륭하다.
 만났던 이들 중 최고 수준.
 머리엔 방탄헬멧, 가슴엔 어디서 구했는지 두툼한 조끼, 양팔과 다리에는 각종 보호대까지.
 중무장한 모습이 서바이벌 테스트를 치르는 게 아니라, 균열로 진입하기 전 헌터 같았다.
 재밌는 소재가 생겼다 생각하며 현수는 카메라를 보고 활짝 웃었다.
 “여러분! 황금 고블린이 떴습니다. 보이시나요? 저 장비들. 어떻게 구했는지 신기할 정도네요. 금방 잡고 제 몸뚱어리 강화 좀 해야겠습니다.”
 말을 마친 현수는 허벅지에 가득 힘을 줬다. 슈트가 터질 듯 부풀어 오른다.
 파앙!
 제자리에서 용수철로 튕겨 나가듯 현수의 몸이 쏘아졌다. 순식간에 당도한 그는 익숙하게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언제나처럼 이 한 방에 끝나리라 믿었다. 앞으로 무궁무진 세계로 뻗어 나갈 헌터 황현수의 1승 제물이라고만 생각했다.
 한데.
 탁!
 막혔다.
 그것도 무척 허무하게.
 어느새 꺼내 든 헌터봉이 현수의 주먹을 막고선 오히려 반격을 위해 교활하게 움직인다.
 ‘어랏? 이 자식······.’
 너무도 자연스러운 동작에 살짝 당황한 현수.
 그런 그를 헬멧을 쓴 연호가 차갑게 노려봤다.
 
 커뮤니티가 발칵 뒤집혔다.
 -야, 야! 대박! 대박! 채널 4번 봐봐.
 -뭔데 그래? 세줄 요약 바람.
 -채널 4번 볼 필요 없어. 지금 전 채널에 다 나온다.
 처음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언제나처럼 황현수가 상대를 제압하고 카메라에 대고 V자를 그릴 줄 알았다.
 그런데 풀 장비로 무장한 헌터는 놀랍게도 첫수를 막았다. 그러곤 반격까지.
 그래도 그때까지만 해도 금방 끝날 줄 알았다.
 -잘 싸우는데? 졌지만 잘 싸웠다.
 -황현수만 아니었으면 더 높이 올라갔을 텐데. 아깝네. 누구냐 근데.
 
 그렇게 30분, 1시간이 지났다.
 여전히 승부는 나지 않았다. 이때부터 인터넷이 무섭게 들끓기 시작했다. 입소문이 퍼지고 급하게 특집방송이 잡혔다.
 모든 카메라가 둘을 주목했다. 하나둘 바뀌던 채널이 이내 전부 같은 장면만 틀어줬다.
 짐승처럼 맞붙는 격투가 생생한 풀 HD 화면에 그대로 담겼다.
 -와, 미친! 황현수 상대로 개잘 싸워.
 -이거 설마 이기는 거 아냐?
 
 그렇게 훌쩍 두 시간이 흘렀다.
 둘은.
 여전히 싸우고 있다.
 5장. 서바이벌에 참가한 이유
 
 
 1.
 갑작스러운 싸움이 이렇게 길어지리라곤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마주친 둘조차도.
 그래서 당황한 와중에 일말의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상대의 정체에 대해.
 연호의 경우 어렴풋이 상대가 3강이라 불리는 황현수임을 눈치챘다. 이번 심사를 위해 정보를 모으다, 얼핏 <헌터 매거진>의 특집기사를 스쳐본 기억이 났다.
 닭 볏처럼 바짝 세운 머리에 번개문양 스크래치는 잊어버리기엔 너무 강렬했다.
 반면, 황현수는 고속도로를 운전하다 갑작스러운 개구리 비를 만난 운전자처럼 당혹스러웠다. 3강 말고는 고려대상도 아니었는데, 이상한 곳에서 발목이 잡혔다.
 ‘아니, 이도희보다 더 잘 치는 것 같은데······.’
 슉!
 연호의 헌터봉이 매섭게 허공을 가른다. 생각을 멈춘 현수는 스웨잉(Swaying)으로 회피 후 주먹을 뻗었다. 마치 채찍처럼 날카로운 공세가 휘몰아친다.
 샌드백마저 뚫어버리는 거력(巨力)이 담긴 일격.
 콰앙!
 묵직한 타격음이 울린다.
 정통으로 맞았다면 결코 무사하지 못했을 터.
 하지만.
 왼쪽 팔뚝보호대를 방패처럼 들이민 연호는 교묘하게 충격을 흡수했다. 그 대가로 보호대는 쩌억 갈라졌지만, 제 임무는 톡톡히 해냈다.
 절호의 반격 기회.
 연호는 그대로 몸을 들이대면서, 봉을 펜싱처럼 쭉 뻗었다. 직선 루트로 찌르는 공격에 현수는 급하게 물러섰다.
 ‘젠장! 이 자식이 또······.’
 육체 능력의 차이는 명백했다.
 백번 고려해도 현수가 압도적 우위.
 한데, 연호는 이 격차를 장비와 기술로 커버하고 있었다.
 일 점을 노린 헌터봉이 뱀처럼 끈덕지게 따라붙는다. 결국 현수의 어깨에 살짝 스쳤다.
 “크윽.”
 현수는 무빙으로 체력 감소를 최소화하고선 어퍼컷으로 봉의 중앙을 뎅겅 부서뜨렸다.
 콰직!
 보급용이라지만 이렇게 부서질 물건이 아니다.
 TV를 보던 장비 제작자의 안타까운 비명을 뒤로하고 헌터봉은 조각나 허공으로 비상했다. 그렇게 뎅겅 박살 나는 동안.
 연호는 기다렸다는 듯 손을 놓고 물러섰다.
 그러곤 허리춤 홀스터에서 새 헌터봉을 꺼낸다.
 촤르륵.
 신상(?)을 움켜쥐고, 연호는 자세를 잡았다.
 “아, 진짜. 몇 개째야. 대체?”
 현수가 손을 탈탈 털며 불만을 터뜨렸다.
 2시간이 넘는 혈투 끝에 연호가 모아왔던 장비 대부분이 박살이 났다. 헬멧은 발치에 굴러다녔고, 각반을 비롯한 보호대는 현수의 괴력을 견디지 못해 부서졌다.
 그나마 제일 멀쩡한 조끼도 여기저기 찢어진 상태.
 부족한 피지컬을 장비로 메꾸면서 연호는 끈질기게 버텼다. 연호는 장비가 망가지는 걸 겁내지 않았다. 체력이 닳을 위기가 되면 그저 장비 하나를 바치고 위험에서 벗어났다.
 현수가 펼친 회심의 한 수가 이런 식으로 무마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 자식. 눈이 엄청 좋네.’
 연호의 기술은 실로 독특했다.
 보통이면 반응도 못 할 스피드의 주먹을 ‘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예측’해서 피했다. 미세한 육체의 힌트로 예상하고 계측하는 거다.
 이 지근거리에서 수를 나누는 동안.
 보고도 믿기지 않는 센스.
 ‘내가 본 사람 중에 두 번째로 전투 감각이 뛰어나.’
 오만한 황현수마저 적잖이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부족한 육체 능력을 메꾸는 그 천부적 센스만큼은 놀라웠다.
 ‘만약 육체가 조금만 더 개발됐더라면 정말 몰랐을지도.’
 허튼소리라 생각하며 현수는 피식 웃었다.
 사실 싸움 자체는 일방적이었다.
 현수가 조금 난처하다고는 하나, 그래도 시종일관 밀어붙였다.
 축구로 비유하자면 점유율을 70% 이상 차지하고 가둬 패는 것과 흡사했다. 그러다 가끔 연호가 반격하면, 현수가 살짝 공세를 늦추는 게 현재까지 전투 양상이었다.
 다들 놀랐던 건, 그 황현수를 상대로 이렇게까지 버틴 인물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
 “그것도 이제 끝이지만. 아저씨 장비 다 바닥났죠?”
 부서진 헌터봉을 뒤로 던지며 현수는 이죽거렸다.
 넝마로 변해 숨을 헐떡이는 연호와는 대조적으로 현수는 여전히 저력이 남아 쌩쌩했다.
 팔을 빙빙 돌리며 건재함을 과시하는 현수.
 그런 상대를 연호는 냉철하게 주시했다.
 연호는 처음 부닥친 순간, 이기긴 무리란 걸 알았다.
 육체 능력 격차가 너무 심하다. 상대는 오러(Aura)를 깨우쳤다 해도 믿을 정도의 스피드와 파워였다.
 간신히 흘렸다지만, 은은한 충격에 팔뚝이 저려 왔다.
 그래서.
 시간을 끌기로 했다.
 그저 견디기로만.
 2시간을 목표로 삼았고, 그만큼 시간이 흘렀다. 이제 됐다.
 타이밍이 왔다. 바로 지금!
 타닷!
 예고도 없이, 연호가 뒤로 튕기듯 몸을 날렸다. 그러곤 우거진 밀림을 헤치고 곧장 내달렸다.
 독수리 등장에 땅굴로 숨는 미어캣처럼 민첩하기 그지없다.
 “엇?”
 의기양양하게 웃던 현수가 멈칫했다.
 결코 물러서지 않고 투견처럼 싸우던 이가 급작스럽게 몸을 빼니, 왠지 김이 팍 새는 기분이다.
 ‘하긴 장비도 다 부서졌으니. 승산이 없지. 어떻게 할까.’
 현수는 부리나케 도망가는 연호를 바라봤다.
 이대로 놓아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리되면 상대의 명성만 높여 주는 꼴이다.
 
 -황현수랑 2시간 동안 싸웠는데, 결국 승부를 못 냈잖아. 이 정도면 동급 아님?
 -황현수 개거품 아니냐. 딴 헌터들이 존X 약해서 양학한 거지. 실상은 별 볼 일 없음. ㅅㄱ.
 ······이런 식으로.
 저치가 올라갈수록 시소처럼 현수가 쌓아 올린 명성의 탑은 무너질 거다.
 ‘내가 또 그 꼴은 못 보지.’
 현수는 단말기를 꺼내 이동 경로부터 살폈다.
 ‘어디로 가는 거지? 그쪽 방향은 D3인데. 어랏? 여기는 방금 전에······ 칫! 생각보다 약았네.’
 연호의 생각을 알아챈 현수가 이를 악물었다. 곧장, 땅을 박차고 표범처럼 추격을 개시했다.
 드론 카메라가 밀림에서 펼쳐지는 추격전에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휙! 휙!
 빠르게 주파하면서, 사방으로 무언가 던지는 연호.
 마치 경단 혹은 찰떡처럼 뭉쳐진 그것은 허공을 쉼 없이 날았다. 튕겨져 잎에 찰싹 붙은 ‘그것’은 이내 화르륵 타올랐다.
 정체는 ‘바카르’ 잎을 뭉쳐 만든 즉석 발화탄.
 본래 열기를 내뿜는 성질을 가진 이계 식물인 ‘바카르’를 비율에 맞게 잘 조제하면 이처럼 화염을 일으킬 수 있었다.
 연호는 틈틈이 만들어둔 바카르 뭉치를 인벤토리에서 꺼내 계속 던졌다.
 화르륵! 화르륵!
 밀림이 삽시간에 불타오른다.
 넘실거리는 화마가 모든 걸 집어삼킬 기세로 일어났다. 뜨거운 혓바닥을 날름날름 내미니, 열기에 피부가 따끔따끔 달아오른다.
 그런 화염 속을 연호는 서슴없이 나아갔다.
 뒤따라 달리던 현수는 어이가 없어져 그 뒷모습을 노려봤다.
 “이거 완전······ 미친놈 아냐?”
 갑작스러운 불 잔치에 놀란 건 현수만이 아니었다.
 우끼끼- 우끼끼.
 본래 D2 구역에 서식 중이던 칼날숭이들도 비명을 지르며 거칠게 날뛰었다. 그러다 끝내는 인간이 원흉이라 판단했는지, 분노에 찬 기습을 시도했다.
 나무 위에서 툭툭 떨어지는 칼날숭이 떼거지.
 귀찮은 진로 방해에 현수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현수는 덤벼드는 칼날숭이들을 족족 까버리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아니, 왜 나만 노리는데? 저놈은?!”
 화염과 칼날숭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는 현수.
 반면, 연호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오로지 달리기에만 열중했다. 비밀은 스리슬쩍 온 슈트에 바르고 있는 번질거리는 액체였다.
 이는 5일 동안 연호가 앰플에 애지중지 모은 칼날숭이의 체액.
 정확히 말하면 죽을 때 지린 오줌이다.
 ‘공포’라는 감정이 잔뜩 담긴 동족의 페로몬에 칼날숭이들은 연호에게 접근하길 꺼려 했다.
 타다닷!
 제멋대로 튀어나온 나무뿌리 위를 날듯이 점프한다. 불꽃에 휩싸인 이파리들을 뚫으면서 연호는 점차 거리를 벌렸다.
 뒤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현수를 무시하고 마침내 D3 구역에 도달했다.
 이곳은 바로 조금 전에 폐쇄된 구역!
 연호가 2시간 동안 꾹 견디던 이유가 드러났다. 폐쇄된 구역에 머물면 체력이 깎인다는 이번 서바이벌의 기본 룰.
 그게 아이러니하게도 생존을 위한 책략이 됐다.
 단말기로 확인하니 체력이 무섭게 떨어지는 중이다.
 
 [현재 체력 44, 43, 42······.]
 
 연호는 가방에서 지체 없이 배터리를 꺼내, 팔뚝 코드에 부착했다. 기잉 하는 소리와 함께 체력이 차오른다.
 
 [현재 체력 40, 41, 40······.]
 
 슈트 체력 바의 제자리걸음.
 이 정도면 충분하다. 자신을 쫓아오려면 똑같이 배터리 소모를 각오하거나 빙 돌아와야만 했다.
 연호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계속해서 남쪽으로 내려갔다.
 배터리로 충전 중이라 하더라도, 조금씩 체력은 떨어진다. 즉, 이대로 죽지 않으려면 최대한 빨리 D3 구역을 돌파해야만 했다.
 ‘몸 상태는 나쁘지 않네. 다만, 장비는 조끼 빼고 모두 소실상태. 배터리도 전부 소모 예정.’
 어느새 살갗을 태우던 불꽃도 기분 나쁘게 메아리치던 “우끼끼” 소리도 저물어간다.
 다행히 누군가 쫓아오는 기색은 없었다.
 연호는 충전이 끝날 때마다, 재빠르게 다음 배터리로 교체를 감행했다. 배터리 소모가 극심했지만, 탈락하는 것보단 나았다.
 ‘수석을 노리고 나왔는데, 여기서 무너질 순 없지.’
 그렇게 마지막 배터리 공급이 딱 끊기는 타이밍에 연호는 마의 D3 폐쇄 구역을 벗어났다. 급히, 단말기를 켜 확인부터 한다.
 
 [현재 체력 28]
 
 위치는 D4.
 ‘후아. 일단은 살았네.’
 연호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어차피 서바이벌이란 특성상 한 번은 강적과 부딪칠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상외로 더 힘든 상대였다.
 황현수는 기이할 정도로 대인전에 능했다.
 경박스러운 언행과는 별개로 그에게는 오랜 시간 단련한 흔적이 역력했다.
 연호는 잠시 숨을 정돈하곤 곧바로 보급품을 찾아 움직이려 했다.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니, 복구하려면 쉴 틈이 없었다.
 그렇게 한 발자국 떼려는 순간,
 슈우욱!
 수풀에서 섬광처럼 무언가 튀어나온다.
 그러곤 연호와 정면으로 부닥쳤다.
 쾅!
 연호는 마치 트럭에 부딪힌 보행자처럼 튕겨져 땅으로 처박혔다.
 콰콰쾅-
 자욱하게 일어나는 흙먼지.
 그 사이로 뾰족하게 세운 머리가 드러난다. 이어 번개 모양 스크래치까지.
 연호와 마찬가지로 D3 폐쇄구역을 뚫고 온 황현수였다. 그는 투덜거리며 팔뚝에 꽂힌 배터리를 바닥으로 던졌다.
 “아 참. 배터리 다 썼잖아요. 거기다 기술까지 쓰게 만들다니. 3강 만날 때까지 아껴두다가 딱 멋있게 공개하려고 했는데. 망했네.”
 중얼거리는 현수의 몸 전체에 아지랑이가 일렁거린다.
 오러(Aura).
 과연 염려대로 현수는 오러 사용자였다. 그것도 순간적으로 강화까지 가능한 수준급 강자.
 황현수는 한번 찍은 사냥감을 놓칠 생각이 요만큼도 없었다.
 그래서 손해를 감수하고 끝까지 추적했다. 배터리 부족 때문에 오러까지 사용해서 쫓았다. 반동으로 날뛰던 오러를 연호는 서서히 갈무리했다.
 “아휴, 지쳐라. 아저씨. 우리 쉽게 갑시다. 솔직히 진짜 선방했어요. 나 다시 봤다니깐? 이런 인재가 숨어 있었다니. 그러니까 그냥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해요.”
 “쿨럭.”
 연호는 흙먼지 속에서 꿈틀거렸다. 부들부들 떨리는 하체를 진정시키려 애쓴다.
 후드득.
 소리와 함께 조끼가 갈라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지막 장비도 생명이 다했다.
 
 [현재 체력 9]
 
 타격 순간 몸을 비틀어 피해를 줄이지 않았으면 바로 탈락으로 향하는 급행열차를 탈 뻔했다.
 하지만.
 연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몸을 웅크리곤 다음 수를 따졌다. 연호라는 남자는 언제나 그랬다.
 절망 속에서도 끈질기게 앞만 보고 달리는 남자.
 그런 그의 시야에 마침내 그토록 기다리던 낭보가 들렸다.
 “뀨우!”
 땅바닥을 뚫고 [나만의 농장]에 다녀온 초록빛 몸뚱어리가 에메랄드처럼 반짝였다. 초롱이는 입에 물고 있던 앰플을 얼른 연호에게 건넸다.
 
 [D급 성장비약]
 
 그토록 기다렸던 비약이 드디어 완성됐다. 연호는 더 생각도 않고 곧바로 뚜껑을 땄다.
 그사이, 황현수는 이죽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숨겨진 카메라를 보면서 여유도 부리고.
 승자의 기분을 만끽했다.
 “아저씨, 지금 탈락해도 클랜에서 연락 올걸요? 내가 상대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너무 자신감 잃지 말고요. 다음 심사 때, 수석 먹으면 되겠네.”
 “그래. 자신감은 언제나 중요하지.”
 건들건들 다가오던 현수의 발이 멈춘다.
 전투 시작 이후, 처음 듣는 상대의 목소리다.
 꽃미남스러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생각보다 낮은 중저음.
 뚜드득.
 목을 꺾는 뼈 소리가 요란하다. 흙먼지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일어났다. 앞머리를 흩날리며 연호가 우뚝 섰다.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미묘한 경종이 현수의 머릿속을 울렸다.
 달라진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하는 현수.
 “어라. 뭐지? 아저씨 뭐 도핑이라도 했어요?”
 “······근데 아까부터 누구보고 자꾸 아저씨래. 이 닭 볏이.”
 “이거 방송 나온다고 2만 원이나 주고 했거든요? 그보다 아까처럼 안 튀어요? 얼른 꽁지 빠지게 도망가세요. 아. 저. 씨.”
 현수의 도발에 연호는 피식 웃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연호의 육체는 미친 듯 성장 중이다.
 잠재력이라는 족쇄를 풀자, 두 달간의 단련이 한순간에 정산됐다.
 수없이 떠오르는 알람을 보니, 도무지 질 것 같지가 않았다.
 지금부터 전개는 조금 전과는 조금 다를 거다.
 “제대로 붙어보자. 2만 원짜리 닭 벼슬.”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연호의 주먹이 먼저 닿았다.
 
 
 2.
 땅을 박차고 멧돼지처럼 돌진하는 연호.
 전력 질주로 뛰어서, 주먹을 최단 루트로 뻗는다.
 단순한 일직선이다.
 하지만.
 전과는 속도도, 실린 파괴력도 수준이 다르다.
 보통이라면 스웨잉을 시전 할 현수도 회피는 생각도 못 하고 급히 가드부터 했다. 오감이 발달한 헌터의 본능과도 같은 방어.
 그게 현수를 살렸다.
 콰콰쾅!
 현수는 핑퐁처럼 튕겨져, 요란하게 처박혔다.
 가드를 한 슈트 팔뚝엔 연호의 주먹 자국이 선명히 새겨졌다. 믿기지 않는 파워에 현수의 머리털이 꼿꼿이 섰다.
 우드득.
 주먹을 휘두르고 여유롭게 목을 꺾는 연호.
 경쾌한 뼈 소리가 요란하다. 연호는 주먹을 털며 몸을 풀었다.
 ‘한 방 먹이니, 기분이 더없이 상쾌하네.’
 지금도 능력치는 멈출 줄 모르고 상승 중이었다.
 
 [체 력 E(99.9%) → D(46.9%)로 등급이 상승합니다.]
 [스피드 E(99.9%) → D(41.2%)로 등급이 상승합니다.]
 [파 워 E(99.9%) → D(79.0%)로 등급이 상승합니다.]
 <축하합니다. 격을 뛰어넘는 성장을 경험하셨습니다. 잠재력이 올라갑니다. 업적 보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잠재력이 D로 올라간 결과, 육체 계수가 요동쳤다.
 새로운 힘이 깃드는 현상은 연호에게 극상의 쾌감을 안겨줬다.
 부르르.
 ‘역시 이때가 제일 짜릿해.’
 연호는 눈을 반개하고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성장할 때의 느낌은 오르가즘 혹은 고(高)순도의 마약에 비견될 만한 쾌락이었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청량한 기운이 감돈다.
 맥동치는 혈관을 따라 맴도는 활력이 또렷이 느껴졌다. 심장에서 펌프질 된 더운 피는 투쟁본능을 자극한다.
 이에 맞춰 육체도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좀 더 전투에 적합하도록.
 조금 더 수월하게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우선, 미묘하게 키가 자라 183㎝에 육박해졌다. 내부의 근섬유들은 모종의 진화를 통해 올올이 거력을 품었다. 살짝 어긋났던 육체 밸런스가 귀신처럼 맞춰진다.
 과학을 뛰어넘는 신비를 연호는 체감했다.
 대격변 이전이라면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근본적인 변화.
 겉으론 미약하지만 내부는 다른 종(種)이라 칭할 만큼 급격히 달라졌다.
 연호는 리미트를 해제할 때처럼, 또 하나의 벽을 넘어섰음을 깨달았다.
 불현듯 이걸 얻기까지 2달간 [나만의 농장]에서 개고생한 지난날이 떠오른다.
 설명서 하나 없는 불친절한 VIP시스템.
 농장에 나열된 건물의 숫자만 해도 거의 무한대에 가까웠다.
 바다를 담은 거대 워터파크, 천공을 노니는 고래섬, 별도 없는 곳에서 뭘 관찰하라는지 모를 천문대, 기괴한 이계 종(種)이 노니는 아쿠아리움, 디펜스 게임에 나올 법한 포탑까지.
 기상천외하고 다양한 종류의 건물들이 연호를 압도했다.
 ‘농장이 아니라 도시 만들기 수준인데. 심시티 저리 가라잖아.’
 연호는 다양한 선택지 앞에서, 31가지 종류의 아이스크림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어린아이의 심정을 맛보았다.
 당시, 연호에게 주어진 [건물허가서]는 단 2장.
 고민 끝에 연호는 당면한 과제 중 ‘잠재력’에 주목했다.
 모든 헌터에게는 각자 정해진 잠재력이 있다.
 F면 일반인일 거고, E등급부터는 이른바 리미트 해제를 경험한 이일 것이다. 그 뒤엔 각자 본인의 잠재력만큼 노력으로 성장이 가능했다.
 한데 연호의 경우는?
 5년 넘게 바닥에 머문 ‘잠재력 F급’의 훌륭한 사도 아닌가.
 본래라면 리미트 해제 자체도 불가능했다. 따라서 연호는 이 VIP시스템을 이용해서 강제로 잠재력을 끌어올려야만 했다.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지상과제.
 그렇게 뒤지고 뒤져 고른 건물이 딱 3만 혼이 필요한 [앰플 제조소]였다.
 쿠구궁.
 건축허가서를 사용하자마자, 바닥이 갈라지더니 뾰족한 지붕이 솟아올랐다. 현대건축기술을 무시하는 마법 같은 광경.
 그렇게 2분 만에 그럴싸한 건물 하나가 소환을 끝마쳤다.
 앰플 제조소는 SF영화에 나오는 미래지향적인 연구소 같은 외형을 뽐냈다. 깔끔한 내부엔 소독약 냄새가 가득 풍겼고, 카운터에는 덩그러니 재료 투입구만 하나 놓여있었다.
 자판기 같은 투입구엔 모니터가 붙어있었는데, 그곳에 제작 가능 목록이 주르륵 나열됐다.
 곧장 훑어보니 [D급 성장비약]제조에 필요한 재료는.
 
 -‘바카르’ 뿌리 x100, ‘마수카’ 이파리 x100, ‘졸파’ 줄기 x100, ‘렌지’ 열매 x100
 연호는 보자마자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모두 ‘옐로균열’급에서 나오는 이계 식물의 일종들.
 하찮은 ‘레드균열’의 부산물도 값이 꽤 나가는데 그 이상은 말할 것도 없다. 전 재산을 털어도 수량을 다 못 채운다.
 “젠장. 씨앗이라도 구하면 다행이겠네. 왜 이렇게 비싼 거야. 어? 잠깐만······.”
 그 순간, 불현듯 스치는 생각.
 연호의 고개가 덩그러니 놀고 있는 밭으로 돌아갔다. 한참 흙더미 사이에서 오물거리던 초롱이가 의아해서 고개를 든다.
 “뀨우?”
 이계 지렁이 초롱이는 자신의 집인 밭을 매일 열심히 가꾸었다.
 아침 일찍 나와 꾸물거리며 전 흙을 돌아다녔고, 매일 분변토를 생산해 거름을 제공했다.
 그 결과, 탄생한 이 세상에서 가장 기름지고 비옥한 대지.
 실험으로 식물을 심으니, 시간을 빠르게 감은 것처럼 곧장 자라났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싹을 틔우더니 줄기가 돋고 열매까지.
 실로 기적 같은 광경에 연호는 한 줄기 희망을 보았다.
 “아휴. 예쁜 것. 네가 정말 최고의 행운이다.”
 “뀨우!”
 이런 어여쁜 펫을 꽝이라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을 욕하는 연호였다. 그 앞을 초롱이는 의기양양하게 기어 다녔다.
 일사천리로 일은 진행됐다. 헌터넷 앱으로 씨앗을 구한 뒤 밭에 심었다. 시간이 지나자, 마치 추수철 밀밭처럼 이계 식물들이 가득 자라났다.
 알록달록 물드는 밭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연호는 농부의 심정을 이해했다.
 거기서 끝이면 좋으련만.
 꺄악. 꺄라악.
 수확할 때가 다가오자, 웬 조류들이 잔뜩 꼬였다. 커다란 날개를 퍼덕이는 하늘의 재앙들.
 놈들은 밭을 엉망으로 만들며 패악질을 부렸다.
 “시발, 아니,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땅에선 기이한 이계 해충들까지.
 근 2달 동안 연호는 밤마다 밭을 지키기 위해 파수꾼이 되어 눈을 부릅떴다. 그의 다크서클이 날로 짙어진 데에는 이런 속사정이 있었다.
 그렇게 탄생한 [D급 성장비약].
 실로 감회가 새롭다.
 낮에는 오바이트가 쏠리는 하드트레이닝 밤에는 비몽사몽 견디는 파수꾼 역할.
 두 번 다신 겪기 싫은 최악의 일정을 보낸 연호는 거칠 것이 없었다. 고생의 보답으로 차오른 힘이 그걸 증명했다.
 거기다 마침 분풀이를 할 만한 상대가 눈앞에 있지 않은가.
 콰콰쾅! 퍼벅!
 피륙으로 이루어진 두 육신이 부딪치는데, 생각하기 힘든 굉음이 터져 나온다.
 덤벼들었던 황현수가 속절없이 밀려났다. 빠르게 접근해 원 투를 날렸건만, 이전과 달리 연호는 능수능란하게 피했다.
 그저 고개만 까닥까닥.
 상대를 무시하는 듯 가벼운 동작.
 육체 격차가 심했을 때도, ‘예측’으로 회피가 가능했다.
 그런데 지금은?
 피지컬 차이가 없어졌다. 호각이거나 근소한 차이.
 그렇다면
 남은 건 기술과 순수한 전투 센스 즉, 실력뿐.
 결국, 공방 끝에 견디지 못하고 튕겨 나간 것은 현수였다.
 촤르륵.
 긴 고랑을 남기며 물러선 현수가 바닥에 침을 뱉었다.
 “퉷. 뭐, 좋은 거라도 드셨어요? 아저씨.”
 분노로 울긋불긋 달아오른 뺨, 잔뜩 일그러진 미간.
 현 상황이 믿기지 않아 휘둥그레진 눈동자까지.
 현수는 혼란스러웠다. 분명 육체 레벨이 한참 아래였는데, 한순간에 자신을 따라잡았다. 이건 대격변 이후의 상식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했다.
 어떤 도핑도 이 정도까지 육체 능력을 높여주진 않는다.
 거기다.
 ‘빌어먹을. 이런 곳에서 또 벽을 느끼다니. 지긋지긋하군.’
 분하지만, 전투 센스는 상대가 더 뛰어났다.
 현수는 잠시 누군가를 떠올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곤 이내, 기존전략을 대대적으로 수정했다.
 여태껏은 한 수 아래로 봤다면, 지금부터는 인정해야만 했다.
 동수 혹은······.
 그 이상!
 “좋아요. 인정! 아저씨 실력 인정할게요. 근데······ 아저씨 체력 지금 10 미만이죠?”
 이런 격차에도 아직까지 승부가 나지 않았던 건, 전적으로 연호 슈트의 체력 탓이었다.
 싸움에서 이기면 뭐하나.
 이 서바이벌은 슈트 체력이 0이 되면 탈락하는 게임이다. 체력이 고작 9인 연호로선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까닥 잘못하면 공격했는데, 체력이 더 깎일 수도 있다.
 서로 치다 보면 전투는 이겨도 전쟁은 지는 꼴.
 황현수는 씨익 웃으며 육상선수처럼 크라우칭 스타트 자세를 취했다. 허리를 높게 올리고 체중은 앞다리에 싣는다.
 “지금부턴······ 좀 창피하더라도 이기는 데만 초점을 맞출게요.”
 현수의 몸에서 오로라 같은 기운이 새어 나왔다.
 눈을 번뜩이더니.
 파앙!
 제로백 4초에 도전하는 스포츠카처럼 치고 나온다.
 서로 죽자는 그 기세에 연호는 최대한 방어 및 흘리기 위주로 몸을 사렸다.
 콰콰쾅! 콰쾅!
 연신 물러나는 연호와 잡아먹을 듯 공격하는 현수가 엉킨다.
 과격하게 밀어붙이는 현수의 수법에 연호도 맞달리기로 대응했다. 둘은 꼬리를 남기는 유성처럼 길게 늘어져 남쪽으로 달렸다.
 퍼버벅!
 달리면서 끊임없이 주고받는 공방.
 어느새 D4 구역 중심부 이른바 ‘버려진 도심’까지 들어온 둘.
 파바밧!
 뒤엉킨 둘이 지나갈 때마다, 콘크리트 조각들이 어지럽게 튀어 올랐다. 진로에 있던 입간판이 요란하게 부서진다.
 타격음이 황폐화된 도시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허억. 허억.”
 오러를 소모 중인 현수는 급격하게 지쳐갔다. 이마엔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하나, 동시에 연호의 슈트 체력 역시 바닥을 찍고 있었다.
 
 [현재 체력 9, 8 ······ 6!]
 
 간신히 버티지만 곧 한계에 봉착한다.
 이를 눈치챈 연호는 근처 빌딩으로 쑥 들어갔다. 괴수의 습격을 그대로 재현해둔 반파된 4층 건물.
 그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간다.
 현수는 잘됐다 싶어 얼른 따라붙었다. 드디어 상대가 궁지에 몰려 최악의 수를 뒀다.
 ‘위는 도망갈 곳 없는 옥상. 최후의 장소론 꽤나 좋은걸? 카메라를 신경 쓴 건가.’
 어차피 예정된 패배.
 방송 중이니 임팩트를 생각하는 건지도 몰랐다.
 
 <3강 황현수를 상대로 끝까지 버티다, 옥상에서 최후!>
 
 드론 카메라로 상공에서 잡으면, 꽤나 그림이 나온다.
 그렇게 좁디좁은 계단을 빠르게 돌파하는 둘.
 곧, 옥상으로 향하는 문에서 눈부신 햇빛이 쏟아졌다. 그 빛살 속으로 연호는 우직하게 달려갔다.
 그 등 뒤를 바짝 추격하며 현수는 이런저런 생각에 빠졌다.
 ‘참나. 대단한 양반이긴 하네. 이 정도면 위에 말해서······ 으읏?!’
 그것은 찰나의 방심.
 옥상을 마지막 대전 장소라 생각했던 현수.
 그리고 앞을 가린 연호의 등판 때문에 시야 확보가 불가능한 상황.
 그 미세한 빈틈을 이용해 연호가 승부수를 던졌다.
 미안하지만 그는, 포기 따윈 모르는 남자다.
 촤르륵.
 급제동으로 멈추면서, 빙그르르 회전하는 연호.
 단순한 그 행동 하나로 순식간에 연호와 현수의 위치가 뒤바뀐다. 현수가 앞으로 튕겨 나갔다.
 “어어?”
 그러곤 자연스럽게 작렬하는 연호의 돌려차기!
 연호의 발과 목소리가 동시에 황현수의 귓가에 닿았다.
 “너도 좀 하니까, 자신감 잃지 말고.”
 “지금 뭐 하는?!”
 현수는 급히 상단을 막았지만 발차기에 밀려나는 것마저 저지할 순 없었다.
 붕.
 “?!”
 현수는 발바닥의 익숙하지 않은 감촉에 당황해서 허우적거렸다.
 튕겨진 몸이 공중을 부유한다. 예상과 달리 이곳은 옥상이 아니었다.
 이미 반파되어 오직 계단만 남은 허공에 불과했다.
 완벽하게 속았다.
 ‘어떻게?’라는 의문을 가지기 이전, 살기 위해 현수는 손을 뻗었다. 이 높이에서 떨어지면, 볼 것도 없이 체력이 0이 된다.
 부서진 난간이라도 잡기 위해 뻗은 현수의 손.
 그리고 매정하게도 그런 현수 위로 내려 찍히는 연호의 무릎.
 “커헉.”
 체중을 실어 벼락처럼 찍는 연호의 공격에 현수는 정신을 못 차렸다. 복부에 니킥을 날린 연호는 그 상태로 현수를 아래로 찍어 눌렀다.
 중력의 법칙에 가속도까지 더해 빠르게 추락한다.
 쾅!
 충격에 솟아오르는 흙먼지들 사이로,
 대자로 뻗은 현수와 그를 이용해 안전하게 착지한 연호가 드러났다.
 마침내 결판이 났다.
 현수의 몰골은 처참 그 자체였다.
 부러진 갈비뼈와 체력 0의 페널티인 감전 때문에 현수는 게거품을 물었다. 아마 여기서 탈락하리라곤, 아무도 상상 못 했을 터.
 TV를 지켜보는 모두에게 충격적인 이 영상이 고대로 송출되었다.
 바들바들 떠는 그를 툭 건드리고 연호는 몸을 일으켰다.
 “다음에 만나면 형님이라 불러라. 2만 원짜리 닭벼슬.”
 대답 없는 현수를 뒤로하고 연호는 벽에 몸을 기댔다. 단말기를 들어 확인하니
 
 [현재 체력 2]
 
 실로 아슬아슬했다.
 동귀어진의 수가 될 뻔했지만, 살았으니 됐다. 연호는 슬쩍 땅바닥에서 고개를 내민 초롱이에게 감사를 표했다.
 ‘뀨우!’
 이번에도 초롱이의 공간지각 능력이 빛을 발했다. 정말 몇 번이나 도움을 받았는지 모를 정도다. 초롱이가 근처 지형을 파악했고, 이를 이용해 연호는 함정을 팠다.
 놈을 확실히 옭아매도록.
 그리하여 결국 잡았다. 이건 분명 우승으로 향하는 쾌거.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이제 조금 쉬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뀨우!’
 초롱이의 급한 경고가 귀를 찌른다.
 타닷.
 곧, 가려진 어둠 속으로 누군가 뚝 떨어졌다. 첩첩산중이란 단어가 절로 생각난다.
 ‘하하. 그래. 이거 서바이벌이지. 비록 체력이 2라도 이 녀석 같은 3강만 아니면 할 만하지 않겠어?’
 그렇게 자세를 잡는 연호에게 서서히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160㎝의 아담한 키. 찰랑거리는 단발머리.
 고양이 같은 눈매의 예쁘장한 얼굴.
 그리고.
 활시위에 팽팽하게 당겨진 화살까지.
 신궁의 재림.
 3강 중 한 명인 헌터 이도희가 등장했다.
 
 
 3.
 이도희는 경악했다.
 D4 구역에 머물면서 누더기 미라를 사냥하고 있던 오후.
 요란스러운 소동이 들린 건, 미라의 가슴팍에서 화살을 회수한 직후였다.
 그리고 보았다.
 버팔로 같은 둘이 뒤엉켜 싸우는 것을.
 ‘황현수?!’
 놀라운 건 싸우는 한 명이 황현수고 오히려 그가 더욱 지쳐 보인다는 점이었다. 아카데미 동기라 황현수의 실력은 누구보다 잘 꿰고 있는 그녀였다.
 경박하고 입이 가벼운 남자지만, 그와 별개로 실력 하나는 으뜸이다.
 그런데 저렇게 오러까지 방출해가며 싸우다니.
 깜짝 놀란 그녀는 잽싸게 둘을 추적했다. 치고받는 싸움을 따라가며 면밀하게 살폈다.
 잠깐의 관찰결과 깨달았다.
 ‘히잉. 둘 다 나보다 잘 싸워.’
 그리고 마침내 4층 건물에서 둘이 떨어지고 승자가 결정되었을 때, 도희는 크나큰 유혹에 휩싸였다.
 황현수는 강력한 경쟁자고 우승 후보다.
 그런데.
 그런 그가 꼬꾸라졌다. 갑작스레 튀어나온 저 남자에 의해.
 ‘······지금 칠까? 딱 봐도 체력이 얼마 없어 보여.’
 황현수를 잡고 지친 지금이 사냥의 최적기일지 몰랐다. 하지만, 그녀가 고민하고 이유는 다름 아닌 본인의 ‘캐릭터’ 때문이었다.
 방송 인터뷰 때, 사람은 상대하지 않겠다는 선언!
 실상 그녀는(실제로 사람한테 활을 쏴본 적은 없지만) 얼마든지 인간 머리통에 바람구멍을 뚫어줄 용의가 충분한 여자였다.
 성격도 인터뷰 때와 달리 훨씬 더 재기발랄했다. 천방지축에 가까운 성격인데 진중한 척하느라 힘들었다.
 즉 방송상, 보여주는 ‘캐릭터’를 연기한 거다.
 
 <오직 사냥에만 전념하는 헌터.>
 
 멋지지 않은가. 그리고 어차피 대인전으로는 황현수에게 상대가 안 되는 걸 염두에 둔 술책이기도 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새로운 선택지가 생겨났다.
 이제 결정해야만 했다.
 이 기습으로 우승권을 잡든지, 아니면······.
 저벅저벅.
 생각을 정리한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경계 자세를 취한 채로.
 벽에 기대 숨을 몰아쉬는 연호와 활시위를 겨눈 도희의 눈빛이 어지럽게 섞인다.
 첨예한 대치상황에 막상 둘보다 이를 지켜보던 수많은 대중이 더 긴장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삭막한 바람이 공간을 맴돈다.
 이때, 엉뚱하게도 도희의 머릿속을 사로잡은 건 한 가지 궁금증이었다.
 ‘······어디서 봤는데? 왜 이렇게 얼굴이 왠지 익숙하지.’
 꼬불꼬불한 파마에 퇴폐미를 풍기는 얼굴을 도희는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 순간 섬광처럼 스치는 기억.
 “아영 언니! 그분이죠?!”
 “······?”
 떠올려보니, 클랜에 새로 들어온 아영이 매일 같이 전도(?)하는 사내였다. 잘생겨서 슬쩍 보긴 했지만, 이렇게 마주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도 연호는 긴장을 풀지 않고 상대를 주시했다.
 먼저 공격할 순 없다. 체력 2 주제에 감히 어딜.
 하지만 전후좌우 어디든 움직일 수 있도록 대비했다.
 “설마 등급 업 심사에 참여했을 줄이야. 거기다 황현수도 잡고. 어쩌면 아영 언니 말대로 거물이 될······.”
 “잠깐만요. 절 공격하실 겁니까?”
 “······글쎄요?”
 말을 얼버무리는 도희.
 결국, 그녀는 방송용 ‘캐릭터’를 지키기로 했다. 하지만 우승은 하고 싶다.
 그래서.
 이 남자를 ‘견제’하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서 놓치지 않고 따라붙어 은근슬쩍 방해할 속셈.
 원거리 무기인 활을 이용해서 먼저 사냥하고, 배터리 및 장비 획득에 훼방을 놓으면 견딜 수가 없을 거다.
 참다못해 자기를 공격하면, 정당방위로 해치운다는 게 계획의 골자였다.
 도희의 말을 떨어지자마자, 연호가 홱 몸을 돌렸다. 활시위가 겨누고 있음에도 일말의 망설임이 없다.
 정확한 의도는 모르겠지만 이 여자가 먼저 자신을 공격하지 않으리란 건 알았다. 그렇다면, 당장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알겠습니다. 전 제 할 일을 하죠.”
 말을 남기고 훌쩍 달려가는 연호.
 “어······ 같이 가요!”
 그 뒤를 도희가 황급히 따라붙었다.
 
 3시간 전까지 분명 가장 화제의 인물은 황현수였다.
 하지만 단숨에 분위기가 반전됐다. 지금 실시간 검색어 1위는 다름 아닌 연호였다. 이름이 아니라, ‘황현수 상대’ 혹은 ‘황현수 이긴 사람’ 이딴 걸로 올라가긴 했지만.
 모든 커뮤니티가 한바탕 뒤집어졌다.
 
 -엌. ㅋㅋㅋㅋ ‘어차피 황현수가 우승!’ 지껄이던 앵무새들 어디 갔냐?
 -세 글자로 웃겨드립니다. ‘어황우’ ㅋㅋㅋ.
 -빨리 전 재산 기부해라. 기부해! 기부해!
 -와, 근데 저렇게 무너지리라곤 상상도 못 했네.
 -근데 대체 누구냐? 어디서 튀어나온 작자지.
 
 강력한 퍼포먼스를 보이던 현수의 몰락은 생각보다 더 큰 파장을 불러왔다.
 SNS에 계속해서 이름이 오르락내리락하고, 특집방송으로 빌딩에서 추락하는 장면을 연속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벌써부터 유머사이트에는 첫날 의기양양 웃던 황현수와 빌딩추락 후 발발 떨던 모습을 교차 편집한 짤방이 돌아다녔다.
 이처럼 황현수의 명성이 심해로 다이브 하는 동안, 반대로 연호가 수면 위로 급부상했다.
 사람들은 급히 연호에 대한 정보를 뒤적거렸다.
 하지만.
 없다!
 인터넷의 바다를 아무리 뒤져봐도 없다!
 헌터가 되자마자, 군대 2년을 보내고 줄곧 F급 밑바닥 생활을 한 연호였다. 고등학교 시절, 잠깐 모델 활동했던 패션몰은 이미 망해서 사라진 지 오래.
 즉, 정보가 전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떠오른 건, 두 달 전 만들어졌던 한 팬클럽이었다.
 바로 아영이 만들어둔 [연호Love 팬클럽].
 사람들은 정보를 얻기 위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X발. 뭐냐? 이 화면 너머 전해지는 블링블링함은?
 -ㅋㅋㅋㅋ. 정보 얻으려고 이런 데 가입까지 다 하네. 어휴.
 -선발대 탐사 중······ 항마력이 부족해 토할 것 같다 오바.
 
 이 기회를 이용해 발 벗고 나선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아영이었다.
 컴퓨터 앞에 전사처럼 앉은 그녀는 곧장 홍보에 나섰다.
 ‘덕질’ 능력을 살려 영상을 편집하고 재미난 짤방을 제작했다. 이를 각 인기 커뮤니티 유머사이트에 돌리자, 금세 퍼져 나갔다.
 대중들에게 ‘강연호’란 이름이 각인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겨우 이름 석 자라지만 이전까지 없던 ‘명성’이 생겨났다.
 이제 서바이벌을 지켜보는 이들의 제일 관심사는 이도희도 박세광도 아니었다.
 헌터 강연호.
 태풍의 핵이 되어버린 그에게 모든 관심의 시선이 쏠렸다.
 
 -야, 우승 누가 할 것 같냐?
 -그래도 이도희나 박세광이지. 강연호는 그냥 거품이야.
 -두고 보면 알겠지.
 -강연호가 우승이다. 황현수 잡은 거 보면 각 나오지. 떠오르는 루키라고.
 
 그렇게 어느덧 서바이벌 마지막 날이 도래했다.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이틀 동안 연호는 꽤나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이도희.
 그녀는 우수했다.
 연호에게는 불행하게도 더럽게 실력이 뛰어났다. 항상 일정 거리를 두고 그를 졸졸 따라다녔으며, 사냥을 하려고 하면 먼저 손을 썼다.
 연호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쏘아대는 화살보다 빠를 순 없었다.
 흔히 고의 스틸이라 칭해지는 행위.
 화살에 쓰러지는 미라를 앞두고, 연호는 심사가 복잡해졌다.
 “후우. 이제 우리 좀 헤어지죠?”
 “전 그냥 제 갈 길 가는 것뿐인데요.”
 “그럼 먼저 가시죠. 전 좀 기다렸다 가겠습니다.”
 “아오. 다리 아파. 나도 좀 쉬어야겠다.”
 생글생글 웃으며 자리를 잡는 도희. 그녀는 다리를 토닥토닥 두드리더니, 배낭에서 먹거리를 꺼냈다.
 “오빠, 에너지 바 좀 드실래요?”
 “······친한 척하지 말아주시고 좀 멀리 가주실래요?”
 “에이. 우리가 그래도 이틀 동안 같이 다녔는데. 섭섭하게 왜 그래요? 자자 먹어요. 우물우물.”
 연호에게 에너지 바를 하나 던지고, 자기 몫을 다람쥐처럼 입에 넣는 그녀였다.
 ‘실로 뻔뻔하기 짝이 없군’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연호는 에너지 바를 입에 물었다.
 이도희는 지독한 기생생물에 가까웠다.
 이틀 동안 빼앗긴 점수가 얼마인지 세기 힘들 정도다.
 찰거머리 같은 그녀를 떨쳐내려고 막무가내로 달린 적이 있었지만, 얼마나 민첩한지 수월하게 따라붙었다. 민첩성만큼은 참가자 중 제일 뛰어난 그녀였다.
 그렇다고 그녀와 생사결을 치르기엔 여건이 좋지 않았다.
 현재 연호의 슈트 체력은 고작.
 
 [32]
 
 그사이 배터리를 하나 구해 제법 올랐다지만 여전히 어중간한 수치다. 그녀와의 승부를 결코 장담할 수 없는.
 쏘아내는 화살을 뚫고 그녀를 제압할 수 있을까?
 모험을 걸기엔 너무 불확실한 요소가 많았다.
 계속해서 질척질척한 수렁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지만 딱히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렇게 둘은 불편한 동행을 해온 것이다.
 근 이틀 동안.
 하지만 오늘. 서바이벌 게임의 막바지에 이르러 이 짓도 끝이란 걸 연호는 알았다.
 이제 남은 구역은 고작 6개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모두 폐쇄 상태.
 이제부터가 진정한 진검승부다. 연호 역시 피부로 느껴지는 분위기를 체감하고 있었다. 여태껏 남은 생존자들이 저마다 은밀하게 움직였다.
 폭풍전야 같은 살벌한 느낌에 살짝 전율이 일려는 순간.
 “흐흐흥~ 흐흥~.”
 맥이 다 빠지는 그녀의 콧노래 소리.
 “······뭡니까. 그 괴팍한 허밍은.”
 “으엑. 이 노래 몰라요? 요즘 유행하는데. 역시 나이 차가 7살이나 나니까 영······.”
 어깨를 으쓱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꼴을 보며, 연호는 진지하게 한판 붙을지 여부를 고민했다.
 ‘체력 44 정도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첫 번째 화살을 회피하고 대가리를 두드려 패면······.’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지만, 역시나 불명확하다. 그녀는 경계하지 않는 척, 언제나 촉을 날카롭게 세우고 있었다.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변수’가 필요했다. 맞붙는 걸 포기하고 연호는 차분하게 그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오매불망 기다리던 ‘변수’가 발생했다.
 “쿠오오오오오!”
 보스(Boss)의 등장.
 몸이 마비될 것 같은 흉성을 내뿜는 생명체가 거대한 몸체를 과시했다. 10미터가 넘어가는 뚱뚱한 체구에 망태기를 둘러맨 존재를 확인한 헌터들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미친! 난이도를 이딴 식으로 올려버리면······.”
 “도망쳐! 시발!”
 그린균열 <위험도 4.8> 돼지머리 수집가(Pig Head Collector)의 등장에 다들 혼비백산 도주한다. 명백하게 오버 밸런스의 등장이었다.
 본래 서바이벌 모드에서는 마지막 종료를 앞두고 엔터테인먼트를 위해 이른바 ‘보스’라 칭해지는 존재를 투입시켰다.
 딱히 잡으라고 내보내는 놈은 아니다.
 그저 열심히 피하라고 만든 그야말로 ‘유흥’을 위한 존재.
 남은 시간 동안 6개 구역을 돌아다니며, 수집가는 헌터들을 모두 망태기에 처넣을 것이다.
 헌터들이 그렇게 헐레벌떡 도망치는 와중, 카메라에 특이한 것이 잡혔다. 모두가 도주하는 거대한 흐름을 헤치고 나아가는 이가 있었다.
 이 상황에서, 오직 한 남자만이 수집가에게 똑바로 걸어갔다.
 수라를 겁내지 않는 발걸음.
 뚜벅뚜벅.
 잠시 얼이 빠져 있던 도희가 갑작스러운 연호의 행동에 급히 소리를 질렀다.
 “자, 잠깐만요. 오빠. 방향이 잘못됐잖아요? 반대로 가야죠! 저건 절대 못 잡는······.”
 “······도희 씨는 서바이벌에 왜 참여했습니까?”
 그녀의 목소리에 잠깐 발을 멈춘 연호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두드득. 두드득.
 그러곤 가뿐하게 몸을 푸는 연호.
 도희는 당황해서 말을 얼버무렸다.
 “네? 그, 그야 우승하고 싶고······ 또 등급 업도 하려구······.”
 “마찬가지입니다.”
 스트레칭으로 몸을 다 푼 연호가 그녀를 돌아봤다.
 “저는 여기 놀러 온 게 아닙니다.”
 연호는 손가락으로 보스(Boss) 돼지머리 수집가를 가리켰다.
 
 “우승하러 왔죠.”
 
 
 4.
 ‘육성(六星)’기업의 막내아들 박세광.
 다른 이들과 달리, 그에게 등급 업 심사는 딱히 중요한 의미가 아니었다. 세간에서는 유망주 3강이라 칭하며 치켜세워줬지만, 그다지 감흥이 생기진 않았다.
 어릴 때부터 세계적 기업 오너의 자식으로 온갖 부를 누리고 살아온 세광이다. 남들의 감탄사 따위는 중학교 때 졸업했다.
 그에게 헌터 일은 조금 위험한 이를테면, 익스트림 스포츠 같은 거였다.
 외향적인 취미를 즐겨 하던 어느 날 리미트가 해제됐다. 초인 같은 능력에 재미도 퍽 봤다. 재력과는 다른 피가 들끓는 스릴이 이쪽 세상엔 있었으니까.
 나름 유명 헌터를 초청해 기술도 배우고 최고의 전문 트레이닝 센터에서 단련도 했다. S급 헌터로 명성이 자자한 ‘육성’컴퍼니 대표에게 조언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딱 그뿐.
 박세광은 헌터 업계에 몰두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생존율 5%의 위험한 균열로의 돌입?
 세상을 지키기 위한 헌터로서의 발자취?
 미안한데, 세광은 호텔 침대에 여자와 누워 돈다발을 세는 걸 더 좋아했다. 짜릿한 경험을 좋아하긴 하지만, 필요 이상의 위험을 자초할 생각은 없는 남자가 바로 박세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세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주했다.
 휘리릭!
 한 끗 차이로 뒤에서 따라오던 헌터 둘이 잡히더니, 놈의 망태기 속으로 쑥 들어갔다. 망태기 속 기이한 독무로 인해, 잡힌 헌터들은 곧 잠에 빠졌다.
 두 번 확인할 것도 없이 탈락행이다.
 “크르르르. 크릉······.”
 이에, 거대한 돼지머리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그린균열 <위험도 4.8> 돼지머리 수집가(Pig Head Collector)는 분명 필요 이상의 괴물이었다. 번들거리는 기름을 연신 뿜어내는 10미터의 거체는 매우 미끈거려 공격이 쉽게 박히질 않는다.
 덩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괴력은 또 어떠한가?
 무엇보다 문제는 놈이 내지르는 피어(Fear)였다.
 일정 범위 내 존재의 발을 멈춰버리는 대표적인 놈의 공격.
 이 기술 때문에 헌터들은 아예 수집가를 상대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가까이 가면 굳어버리니, 방도가 없었다.
 적어도 오러를 다룰 줄 아는 C등급 헌터 이상이여야만 대적이 가능한 괴물. 등급 업 심사에 참여한 헌터들로서는 그저 날파리처럼 도망치는 것 외에는 길이 안 보였다.
 대중들의 ‘유흥’을 위해 피해 다니라고 풀어둔 괴수가 울부짖었다.
 “크오오오오!”
 돼지머리 수집가는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쾅!
 콘크리트 건물이 주먹 한 방에 무너져 내린다. 수집가는 떨어진 철근 뭉치를 줍더니, 냅다 사방으로 돌팔매질을 시작했다.
 슈우우웅!
 콰쾅! 콰콰쾅!
 마치 유성처럼 떨어지는 덩어리들이 땅과 건물들에 꽂혔다.
 콘크리트 가루들과 거대한 조각들이 어지럽게 튄다. 한참을 내달리던 박세광은 S자 형태의 커브를 따라 잽싸게 몸을 틀었다. 혼이 쏙 빠질 듯 벅찬 뜀박질이 이어졌다.
 콰쾅!
 그 순간, 건물의 외벽에 꽂히는 철근 덩어리.
 중심축을 건드렸는지, 4층 빌딩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러곤 도미노처럼 앞으로 쓰러진다. 집채만 한 콘크리트가 하늘을 메웠다.
 쿠쿠쿵!
 순간 세광의 앞이 컴컴해졌다.
 이젠 탈락이 아니라 생존을 걱정해야 할 처지다. 범위 밖으로 몸을 날렸지만, 쓰러짐이 조금 더 빨랐다.
 ‘미친! 고작 이딴 곳에서!’
 그때.
 쑤욱!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억센 손아귀 하나가 세광의 목덜미를 꽉 쥐었다. 그러곤 잽싸게 안으로 당긴다.
 콰콰쾅!
 “허억. 허억.”
 아슬아슬하게 짓뭉개지는 걸 피한 세광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두컴컴한 건물 안쪽에는 자신의 목숨을 구한 남자와 웬 활을 착용한 단발 여자가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허억.”
 진짜 죽을 뻔했기에 이건 진심이 100% 담긴 인사였다.
 세광은 등급 업 심사가 끝나자마자, 이 남자 계좌로 0이 많이 붙은 액수를 쏴줄 생각이었다. 아니면 멋진 신형 차라도 한 대 뽑아줄 만큼 고마웠다.
 “별말씀을.”
 세광의 목숨을 구한 이는 가볍게 말하고선 팔짱을 꼈다.
 그제야 조금 여유가 생긴 세광은 둘을 바라봤다.
 ‘이런! 이도희잖아? 남자는 누군지 모르겠지만.’
 바로 돼지머리 수집가의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연호와 도희였다.
 세광을 구하느라 잠시 끊어졌던 대화가 다시 이어졌다.
 “······그래서 왜 따라온 겁니까? 도희 씨.”
 “그, 그냥요. 궁금해서.”
 “왜요. 보스도 똑같이 스틸할 생각입니까?”
 “······누, 누가 스틸했다고 그래요?! 그냥 동일한 사냥감을 제가 먼저 잡은······.”
 얼굴이 달아올라 변명하는 그녀.
 피식 웃은 연호는 손을 내밀었다.
 “배터리 두 개. 그걸로 퉁 칩시다. 이틀간 지랄한 거 이걸로 잊어줄게요.”
 “네?! 제가 뭔 배터리 공장인 줄 아세요?”
 펄쩍 뛴 도희는 씩씩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체력 풀로 채운다고 상대가 가능할 것 같아요? 애당초 저건 못 잡는 거예요. 여태껏 S급 헌터 이한울 말고는 서바이벌에서 보스를 잡은 사람이 없잖아요.”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세광의 안색이 노래졌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이 둘은 지금 보스를 잡는 걸 논하고 있었다.
 실로 터무니없는 대화 주제다. 마치 초등학생이 고등학교로 쳐들어가는 계획을 듣는 것만 같다.
 듣던 연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뭐가 그렇게 겁나죠?”
 “당연히 저놈과 싸우다 탈락할 수도-”
 “탈락하면······ 죽습니까?”
 순간 말문이 막힌 도희.
 “등급 업 심사. 서바이벌. 이런 거 이전에 우린 헌터 아닙니까? 저런 이계 생명체와 싸우는 대가로 부와 명성을 얻는.”
 연호의 묵직한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그는 눈을 똑바로 뜨고 어딘가를 응시했다. 마치 빈 허공을 바라보는 듯했지만, 바른 정기가 넘쳐흘렀다.
 “전 도망치는 것도 버릇이라고 생각합니다.”
 “?!”
 “여기서 도망치면, 실전에서도 당연히 도망치겠죠.”
 “그, 그건······.”
 “저에겐 이 상황이 안전하게 그린균열의 존재와 싸울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보입니다. 가능성이 있다면. 헌터라면. 충분히 도전해 볼 만한 상대 아닙니까?”
 이야기를 듣던 도희와 세광은 마침내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지금 연호는
 자신들에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그는 이 자리에 없는 이들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카메라 렌즈 너머 이 화면을 시청하고 있는 이들에게. 인터넷 스트리밍으로 숨을 죽이고 방송을 보고 있을 사람들에게 외치는 거다.
 대중을 향한 강력한 어필!
 자기 존재감의 과시.
 “설사 탈락하더라도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3강 둘을 제치고 사람들은 오로지 연호만 응시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이목이 쏠렸다.
 연호의 분위기가 모두를 압도했다.
 “전 헌터니까요.”
 지금 이 순간 헌터 강연호가 오롯이 빛이 났다.
 누구보다 밝고 찬란하게.
 이 무대의 주인공이 있다면 그건 분명 연호였다.
 “그러니까······ 배터리 2개로 퉁 칩시다. 이도희 씨.”
 “으윽?!”
 마치 가슴에 칼을 푹 찌르는 것 같은 한마디.
 숨 막히는 분위기에 도희는 당황했다.
 그녀도 지금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깨달았다. 지금 배터리를 건네주지 않으면 자기만 나쁜 년이 된다.
 마치 위대한 도전을 원하는 헌터를 방해하는 그런 류의.
 무형의 압박감이 몰려왔다. 앞으로의 헌터 생활에 대한 걱정도 슬며시 고개를 든다.
 ‘히힝! 나는 그냥 우승하고 싶었던 것뿐인데 왜 이렇게 된 거지?’
 심란한 마음을 감추고 도희는 결국 배터리 두 개를 건넸다.
 “······여기요.”
 “이걸로 다 잊겠습니다.”
 배터리를 익숙하게 팔뚝 코드에 꽂은 연호는 곧장 창문으로 다가갔다. 세광과 도희는 입술을 우물거렸으나, 끝내 아무 말도 뱉지 못했다.
 아무리 봐도 가능성이 없는 걸, 당당히 이루겠다고 말하는 연호가 신기할 뿐이다.
 “그럼 잠시 후에 뵙죠.”
 전투배낭을 메고 훌쩍 빛 속으로 사라져 버린 연호.
 남은 세광과 도희는 맥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승산이 있다고 보세요?”
 “전혀요. 절대. 네버(Never)!”
 “그렇다면 혹여 사냥에 성공하면······ 정말 대한민국이 흔들리겠군요.”
 
 연호는 차오르는 체력 바를 체크하며 조금씩 이동했다.
 누구나 그를 보고 무모하다고 욕할 것이다. 그냥 도망 다니면서, 헌터끼리 싸우라고 종용할지도 몰랐다. 그게 현명하다고.
 모두가 그렇게 한다고.
 하지만 그는 위대한 업적을 세우고 싶었다.
 평범한 수석을 차지하는 것으론 성에 차지 않았다.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이 서바이벌 시험 기록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자 했다.
 그렇기 때문에 애당초 서바이벌 보스(Boss)를 잡는 건 그의 플랜 중 하나였다.
 도희와의 불편한 동행에서 굳이 위험을 감수하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어차피 우승을 가릴 행방은 이 보스전에서 갈린다.
 꾸준히 점수를 모았고, 황현수마저 잡았다.
 이제 보스만 처치한다면 그 즉시, 이견 없이 압도적 우승이다.
 스틸? 그딴 게 가능할 리 없지.
 방송을 보는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기량을 보여 줄 테니까. 더군다나 VIP시스템도 연호의 편이었다.
 
 [특수퀘스트-돼지머리 수집가를 처치합시다!]
 : 돼지머리 수집가는 생명을 수집하는 걸 좋아합니다. 특수 망태기에 보관한 생명체를 거처에 박제해 두는 것이 놈의 고약한 취미죠. 아직 당신의 수준에선 벅찬 상대지만 때론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있습니다.
 [보상 : 혼탁한 마력비약]
 
 보스가 등장하자마자 나타난 퀘스트 메시지.
 아주 완벽한 판이라 생각하며 연호는 입술을 축였다.
 준비는 끝났다.
 남은 건 실천뿐.
 만약 실패하면 입만 산 희대의 멍청이가 되는 거고.
 성공한다면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질 거다.
 쿠쿠쿵.
 10미터 크기의 수집가는 열심히 건물을 헤집으며 인간들을 잡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개미집을 습격한 개미핥기를 보는 듯했다.
 연호의 허벅지가 터질 듯 부풀어 오르더니, 가속도를 더해 접근한다.
 타다닷!
 서바이벌의 보스는 나름 면밀한 과정을 통해 선발된다.
 강력해야 하지만 살상력이 뛰어난 종이면 등급 업 심사에 적합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상태이상’을 거는 종류가 대부분 선택받았다.
 돼지머리 수집가도 마찬가지.
 빠르게 접근하는 연호를 확인한 놈은 익숙하게 ‘피어’를 끌어올려 전방으로 뱉었다.
 “크와아아아앙!”
 이 한 방이면 인간들은 속절없이 멈추곤 했다. 서바이벌에 참여한 수많은 헌터들을 좌절하게 한 기술이 펼쳐졌다.
 하지만 쩌렁쩌렁한 울음의 범위 속으로 연호는 멈추지 않고 오히려 뛰어들었다.
 “······!”
 방송을 지켜보던 이들이 헛바람을 삼켰다.
 이대로 꼼짝없이 연호의 걸음이 멈추고, 돼지머리 수집가의 손아귀에 잡힐 것만 같았다.
 휘릭!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거칠게 쓸어가는 놈의 손바닥.
 거센 바람이 지나간 그 자리엔,
 수집가의 손가락 위에 올라탄 연호가 있었다.
 
 -와 시발! 뭐야?!
 -왜 안 멈춰? 설마 피어를 견디는 오러 사용자인 건?
 -아냐! 오러를 사용하면 티가 난다고.
 -오러가 문제가 아니라, 아예 영향을 안 받는 거 같은데?
 
 바깥세상의 아우성을 뒤로하고 연호는 매달려 균형을 잡았다.
 ‘계획대로. 다만 머리는 조금 아프군.’
 은밀하게 반짝이는 거무칙칙한 왼쪽 팔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서바이벌 개시부터 연호와 함께한 액세서리다.
 첫 보상으로 얻은 [B등급 이하 랜덤장비 소환서]에서 나온 팔찌가 드디어 세상의 빛을 봤다.
 
 [상태이상 무효의 뱅글 팔찌] 등급 B
 : 착용자의 저항력을 B등급까지 올려준다. 각종 상태이상에 강한 면역을 제공한다. 다만 능력이 발동될 때마다, 정신력을 소모하기에 두통이 일어나는 부작용이 있다.
 
 연호는 두통에도 불구하고, 상쾌한 기분을 만끽하며 준비한 다음 수를 꺼냈다. 전투배낭에 손이 쑥 들어간다.
 하나 뒤지는 건 인벤토리.
 무언가 움켜쥔 주먹이 곧 튀어나왔다.
 지켜보던 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뭐야? 뭔데?!
 -확대! 줌인으로 당겨봐!
 
 
 to be continued

댓글(4)

아린날    
구매라면 좀 망설일지 모르는데 대여로는 가성비 괜찮은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끝마무리가 조금 아쉽습니다만 가격 생각하면 살만 합니다
2019.08.02 01:12
n5***********    
대여기간이 너무 짧다. 읽지도 못하고 끝남. 2번 결재하기는 쩝
2019.08.11 12:52
tr****    
또 혼자만 시스템 이런건가
2019.08.12 09:10
레종그린    
대여로는 가성비 괜찮은 작품이라는데 1표 추가요~
2019.08.25 23:54
0 / 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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