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레벨업하는 남궁세가 소공자님 [E]

레벨업하는 남궁세가 소공자님 1-1권

2019.08.06 조회 831 추천 2


 # 프롤로그
 
 “······.”
 
 누군가 내 몸을 흔들었다.
 ···뭐지?
 분명, 죽었는데.
 모든 감각이 살아난다. 소리가 들리고, 묘한 분향이 비강을 찌른다.
 눈을 감을 때까지 점점 죽어 가던 감각들이었다. 그런데 대체 왜?
 
 “···공자님, 소공자님?”
 
 소공자?
 눈꺼풀을 천천히 밀어 올린다. 처음은 시야가 희뿌예서 살포시 눈살을 찌푸렸다.
 
 “괘, 괜찮으세요?”
 
 눈앞의 흐릿한 인형이 내게 말을 걸고 있다. 괜찮냐고 한다면······.
 전혀, 전혀 아니다.
 펼쳐진 손바닥에 고정된 시야가 점차 제 색을 되찾았다. 가냘프고, 고운 손이다. 고생했던 세월의 흔적이 보이지 않고 그저 어린아이처럼 여린 손.
 이게 뭐야.
 두 눈을 부릅뜨고 있으니 앞에서 헉 소리가 났다.
 
 “공자님!”
 
 별안간 눈앞의 여성이 내 얼굴을 잡곤 저를 똑바로 보게 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쏟아 낼 듯, 눈시울이 붉었다.
 
 “저, 저 기억나세요? 소유예요. 당소유. 소공자님이 거둬 주신 아이요!”
 
 ======
 
 [정보를 확인합니다.]
 
  ̄이름: 당소유
  ̄레벨: 1
  ̄성향: 선 · 질서
  ̄문파: 정파(남궁세가)
  ̄내공: 없음
  ̄등급: F
 
 [종합 능력치가 50 미만인 경우, 스텟이 보이지 않음.]
 [무술에 재능이 없음.]
 [강시술에 대한 특별한 재능이 있음.]
 [관리, 회계에 탁월한 잠재력 보유.]
 [남궁세가에 대한 충성심이 높음.]
 [멸문한 당가의 마지막 후예.]
 
 ======
 
 능력치?
 그것보다······.
 
 “너.”
 
 당소유가 불에 데인 것처럼 갑자기 손을 뗐다. 그리고 호들갑을 떨었다. 마치 죄라도 지은 것처럼.
 
 “죄,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아니.”
 
 순간 내가 교통사고로 죽기 전, 밀쳤던 아이의 얼굴과 오버랩된 것 같았다. 왜 여기 있냐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으니까. 그만큼 닮았다. 울음으로 얼굴을 잔뜩 뭉갠 채 위험한 도로를 뚜벅뚜벅 가로지르던 중학생 아이랑.
 키가 좀 더 크고 조금 더 성숙해 보인다는 게 다를 뿐. 그래도 눈앞의 여자는 그 아이가 아니다. 당소유랬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는 살아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누군가의 몸을 차지한 듯했다. 그것도 지구가 아닌 다른 곳에 있는.
 뭐가 뭔지 제대로 이해하기 전에, 우선 당소유를 먼저 달랠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내 미세한 표정 변화에도 얼굴색이 시시각각 변했다. 애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아. 무슨 공포 영화를 찍는 것도 아니고.
 대체······.
 어지럼이 핑 돌길래 머리를 감싸 쥔 채 신음을 흘리자, 당소유가 또 호들갑을 떤다.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그녀를 달래곤 잠깐 쉬게 해 달라며 보냈다.
 그 아이, 괜찮겠지. 빠른 속도로 짓쳐들어오던 차가 있던 차선 밖으로 밀어 보내긴 했는데. 그 후론 시야가 새까맣게 암전되더라.
 고요한 충격과 함께 몸뚱어리가 실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을 구르고, 온몸이 딱딱하게 마비된 채 천천히 죽어 간 게 내 마지막이었다. 평범한 직장인, 김유진의 마지막.
 거기에 또 다른 기억들이 섞여 들어온다. 내가 차지하고 있는 몸의 옛 주인, 남궁현의 기억.
 여긴 내가 소설이나 만화로 접했던 무협이라는 세계를 그대로 옮겨 온 듯했다.
 애독가인 남궁현이 읽은 책 중에, 명문정파나 장산풍, 의천검 간장과 막야 등 전혀 낯설지 않은 단어들도 보였다. 거기에 화룡점정을 찍은 건 무림이라는 단어. 내가 설마, 무협지 속의 사람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그리고 소공자라더니 형제가 여럿이다. 또 별로 좋지 않은 기억들이다.
 역대 수많은 영웅을 배출한 남궁세가는, 여러 검가(劍家) 중 명가(名家)로 알려져 있다. 그렇게 검에 대한 재능이 타고난 가문임에도, 병약한 그는 무(武)와 인연이 없었다. 때문에 재능이 꽃핀 형제들 사이에서 거의 왕따였고.
 그나마 닿는 길이라면 상계(商界). 어렸을 계산과 상거래에 관심이 많던 남궁현. 그럼에도 미운 오리 새끼 수준으로 천대받던 그는 테스트라는 명목하에 안휘성에 자리한 남궁세가를 벗어나 이곳, 호북 지역으로 보내지게 됐다.
 한마디로 세가에서 인정받고 싶으면 자수성가로 성공해 보라는 거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허름한 객잔만 줘 놓곤.
 그러나 환경이 너무 열악한 나머지, 처음부터 이곳에 적응하지 못했던 남궁현은 지병을 앓았다. 그럼에도 가문은 그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아니 애초에 관심조차 없는 게 맞다.
 결국 그는 여기서 죽었으니까. 나는 죽은 그의 몸에 깃들었던 거고.
 그저 웃음만 나온다. 사실은 집안 다툼의 희생양이나 다름없다. 평범한 출신인 어머니와, 무(武)에 아무런 소질이 없는 자신이라서 더 좋은 먹잇감이 됐으리라. 어머니와 아버지, 한수아와 남궁천은 분명 좋은 사람이지만··· 세가 내 다른 이들은 잘 모르겠다.
 허리를 세워 금이 간 거울을 본다. 만 십오 세의 앳된 얼굴. 괜히 기생오라비라 듣던 게 아니구나. 이것 때문에 질투를 받은 기억도 있다.
 시선을 허름한 문지방에 두고, 느릿하게 슴벅인다.
 지구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마 돌아가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곳의 나, 김유진은 온몸이 아작 나서 죽었으니.
 때문에 당혹스럽고 상심하는 게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오히려 상심보다는, 기분이 묘했다.
 반복되는 출퇴근, 끊임없는 야근. 그리고 계속되는 연애, 결혼, 승진, 자기계발 등에 대한 압박들.
 단 하루도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던 지겹고 괴로운 나날.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냐고 한다면, 결코 아니다. 한때는 무책임하게도 자살 기도까지 한 적이 있었을 정도로, 너무나도 힘들었던 현실이었다.
 어쩌면 이건 내게 주어진 두 번째 인생인지도 모른다. 무림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는 것도, 마치 나를 도와주려는 것처럼 나타나는 시스템 창도 전생에서 소녀를 도와준 것에 대한 보상이 아니었을까.
 비록 상황이 안 좋긴 해도, 모든 압박에 시달리던 대한민국 김유진의 삶보단 낫잖아? 이왕이면 새로 시작해 보는 거다.
 남궁현의 삶으로.
 그나저나 당소유의 능력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면, 내 능력치도 확인할 수 있는 건가 생각했더니, 기다렸다는 듯 눈앞이 일렁였다.
 
 ======
 
  ̄이름: 남궁현
  ̄레벨: 3
  ̄성향: 선 · 무력
  ̄문파: 정파(남궁세가)
  ̄내공: 없음
  ̄등급: F
 
 [종합 능력치가 50 미만인 경우, 스텟이 보이지 않음.]
 [만년백청사(萬年白靑蛇)의 내단을 먹었으나, 미적응 상태임.]
 [무술에 재능은 없으나, 막대한 잠재력 보유.]
 [관리에 탁월한 능력 및 잠재력 보유.]
 
 [대기만성(大器晩成)]
 
 ======
 
 어라. 레벨도 낮고, 성향도 무력함이 섞여 있는 데다, 등급도 낮지만 만년백청사(萬年白靑蛇)의 내단을 먹었다고 한다.
 만년을 산 희귀한 영물의 내단. 남궁현의 기억에 따르면, 남궁세가에서 단 한 개를 보관 중이었으나 홀연히 사라진 걸로 안다.
 그런데 그게 저가 꿀꺽한 거라니. 심지어 꿀꺽한 기억도 없다. 누가 먹였던 걸까?
 무(武)에 대한 재능은 없지만 잠재력이 크고, 관리 면에서도 탁월한 잠재력을 보유 중이라.
 대충 뭐가 뭔지는 알겠다. 특히 몸속에 어마어마한 내단을 가진 채 비실대고 있다는 것도. 그런데 정작 나는 그걸 어떻게 쓸 수 있는지 모른다.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으면 남궁현은 죽지 않고 진즉에 고수가 됐을 텐데.
 이런 건 머리 아프니 나중에 생각하자. 다른 건 다 제쳐 두고, 분명 죽었음에도 다시 살아난 것에 당황했을 이를 불렀다. 당소유 말이다.
 
 “유야, 거기 있느냐?”
 
 입에 감기는 느낌이 어색해도, 몇 번이나 불러본 것처럼 익숙하다. 아마 김유진, 남궁현의 기억이 섞이는 과정일 터다. 노력하면 금방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들려온다. 멀리 나간 것도 아니고 그냥 문에 착 들러붙어 있었던 모양이다.
 
 
 # 1장 풍문객잔
 
 당소유는 어릴 때부터 남궁현을 곧잘 따랐다. 무슨 일이든 잘 도와주고. 곤란을 겪으면 저가 막아 주고. 왜 그렇게 잘해 준 건지, 기억을 더듬고 나니 이유를 대충 알 것 같았다.
 안타까워서. 형제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남궁현이 안타까워서였다.
 게다가 남궁현이 남궁세가를 나올 때, 그곳에 남을 수 있었는데도 구태여 남궁현을 따라온 걸로 안다. 세가의 보호까지 저버리며 따르려 한 것이다.
 심성이 착하고 고왔다. 순간 남궁현이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도 집 떠나면 고생이라 듯, 고생이 많았다. 객잔을 관리하지도 못하고, 지병을 달고 살던 남궁현을 계속 간호했으니.
 잘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궁현이 못해 준 것 이상으로.
 
 “···들어오거라.”
 
 끼익, 조심스럽게 문이 열린다. 그 사이로 당소유가 긴장한 얼굴을 들이민다.
 
 “부르셨어요, 소공자님?”
 
 소공자. 어차피 남궁세가에서 버려진 이상, 그렇게 불릴 필요는 없을 듯한데.
 나이도 별로 차이나는 것 같지 않고. 그래도 갑작스레 말을 놓으면 이상하게 여길 거다.
 
 “시장하구나.”
 
 마침 배꼽시계가 우르릉 울렸다.
 
 “그럼 아침을 가져다······.”
 “아니다. 우리 객잔으로 가자.”
 “객잔에요?”
 
 당소유가 놀라 두 눈을 휘둥그레 뜬다. 여태 가 본 일이 없어서 그런가.
 풍문객잔.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말곤 기억이 없다. 점소이 소초초가 꾸준히 관리해 주고 있는 걸로 아는데, 지금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 오랜만에 가 보고 싶구나.”
 “아, 네!”
 
 오랜만의 외출이 반가운 모양이다. 엷게 웃은 당소유가 외출을 준비했다.
 그런데 자꾸 거추장스러운 걸 걸치려 한다. 호화스러운 장식들 말이다. 그래야 무시당하지 않을 거라고. 옷도 아무런 장식 없이 새하얗고 허름해서 미안해하던데. 신경 쓰지 말라고, 괜찮다는 말로 일축했다.
 그때 당소유의 눈은 참 볼만했다. 이분이 왜 이러시지, 하고 당황스러운 눈.
 거리는 수많은 볼거리와 요깃거리로 가득했다. 바삐 움직이는 행상들, 이 사람 저 사람 붙잡으며 사 달라 떼를 쓰는 상인들. 그 사이로 오가는 무수한 말들이 마냥 신기했다.
 말도 그냥 단순한 말이 아니라, 사투리처럼 약간 어그러진 듯한 말이다. 뭐, 뭐 보슈. 당께. 이렇게 보니 그냥 사투리다.
 당소유는 그들을 보는 나를 신기해했다. 타인의 얼굴을 뚫어지게, 그것도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면 실례라는 걸 알 텐데.
 
 “왜 그러느냐?”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제야 황급히 고개를 돌린다. 민망한지 귀가 불처럼 바알갛다. 아직 어려서 그런가, 감정의 변화가 너무 눈에 잘 띈다.
 저도 모르게 흐뭇한 웃음이 지어지길래, 내심 내가 얼마나 늙었는지 알겠더라. 겉 말고 속 말이다.
 
 “싱겁기는.”
 
 풍문객잔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람들이 자주 왕래하면서도, 나름 꽤 좋은 위치에 자리한 객잔이다.
 인기도 많은 모양이다. 문 앞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든 걸 보아하니······.
 낌새가 좀 이상한데. 들어가려고 하는 것보단, 심각한 얼굴들로 수군대는 게 마치.
 
 “이상해요. 저희 객잔에 사람이 저렇게 모일 리가 없는데.”
 “······.”
 
 그럼 서둘러 들어가 봐야지.
 인파의 파도를 헤치고 들어가기 직전,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연이어 걸걸한 욕지기와 함께 고성방가도.
 
 “아이고, 나으리!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발 한 달만······.”
 “됐고, 당장 빼!”
 “지금까지 참아 줬으면 됐지. 늙은이가 노망이 나가지곤.”
 
 대체 이게 뭔 상황인가 싶었다.
 걸걸한 목소리나 행동거지답게, 인상도 사납고 흉흉하게 생긴 왈패들이 말 그대로 객잔을 박살 내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에요!”
 
 당소유가 소리를 내지르자, 모두의 이목이 이쪽으로 집중된다.
 그때 내 눈앞이 흐릿하게 일렁였다.
 
 [퀘스트를 얻었습니다.]
 
 퀘스트?
 
 [왈패 무리를 처치하시오.(0/3)]
 [당신은 풍문객잔의 주인으로서, 강압적으로 자릿세를 얻어 내려는 왈패 무리를 처치해야 합니다. 만약 실패할 경우, 명성이 크게 하락하고 나쁘면 풍문객잔을 빼앗길지도 모릅니다.]
 [성공 시 소량의 경험치 획득, 소량의 명성 획득, 왈패 무리가 가진 소지금 및 소지품 찬탈 가능.]
 [실패 시 명성 하락, 풍문객잔 식솔의 신뢰도 대폭 하락, 풍문객잔의 소유권이 박탈될 수 있음.]
 
 ======
 
 [정보를 확인합니다.]
 
  ̄이름: 서걸두
  ̄레벨: 2
  ̄성향: 혼돈 · 악
  ̄문파: 정파(개방)
  ̄내공: 없음
  ̄등급: F
 
 [종합 능력치가 50 미만인 경우, 스텟이 보이지 않음.]
 [무술에 대한 재능이 없으나, 수많은 막싸움으로 싸움에는 도가 텄음.]
 [잠재력 없음.]
 [오늘, 내일만 보며 사는 인생임.]
 
 ======
 
 ======
 
 [정보를 확인합니다.]
 
  ̄이름: 서갈두
  ̄레벨: 2
  ̄성향: 혼돈 · 악
  ̄문파: 정파(개방)
  ̄내공: 없음
  ̄등급: F
 
 [종합 능력치가 50 미만인 경우, 스텟이 보이지 않음.]
 [무술에 대한 재능이 없으나, 수많은 막싸움으로 싸움에는 도가 텄음.]
 [잠재력 없음.]
 [오늘, 내일만 보며 사는 인생임.]
 
 [······.]
 
 ======
 
 걸두, 갈두 형제를 비롯한 모두의 정보가 눈앞에 뜬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소속이 엄청 뜻밖이다. 무려 구파일방 중 하나인 개방. 아무리 거지들이 많은 곳이라곤 해도 이런 식으로 약자를 협박하고 핍박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그나저나 이 퀘스트, 실패하면 패널티가 엄청 크다.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는 퀘스트였다.
 이제 막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 괄괄한 덩치들이랑 싸우라고.
 
 “초초 어르신, 이분들은 대체 누구예요?”
 “아이고오, 소유냐. 그게······.”
 
 그들 사이를 걸두와 갈두가 가로막았다. 아예 대화도 못 하게. 둘 다 키가 거의 육칠 척은 되는 듯하다.
 
 “계집, 자릿세는 언제 줄 거냐.”
 “자릿세라뇨? 여긴 엄연히 남궁세가 소유의 객잔······.”
 “남궁세가?”
 
 쾅, 바닥을 내리찍은 갈두가 당소유를 사납게 쏘아본다.
 
 “더 말해 봐, 남궁세가 소유의 객잔이라며.”
 “이익······.”
 
 당소유는 겁을 먹은 듯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과, 관군들이 오면, 당신들 절대 무사하지 못해!”
 “그 전에 뜨면 되거든. 적당한 인질 좀 잡고. 그래, 계집. 너로 하자. 생긴 것도 반반하니 밤이 즐거울 것 같구나. 으흐흐.”
 “······!”
 
 갈두가 손을 내뻗자, 당소유가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기 들어서서 퀘스트를 마주했을 때만 해도, 눈앞이 깜깜하긴 했는데.
 
 “···뭐냐?”
 “소, 소공자님?”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의 기본을 익혔습니다.]
 
 지금은 아니다. 어렸을 때 보았던 형제들의 수련과 검법, 그 기억을 떠올린 것만으로 기본을 익힐 수 있었다.
 무(武)와는 인연이 없었던 남궁현의 몸으로.
 움켜쥔 갈두의 손을 힘껏 밀었다. 당황했는지 놈이 어어, 소리를 내며 몇 걸음 물러난다.
 
 “소유, 빠져.”
 
 솔직히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리 기본기를 익혔다 한들, 검을 제대로 다뤄 본 적이 없으니. 심지어 지금은 검도 아닌 바닥을 구르는 각목이다.
 그래도 한번 해 보자.
 
 “소, 소공자님······.”
 “빨리.”
 
 내가 표정을 딱딱히 굳히자, 당소유가 그제야 뒤로 빠진다.
 관군들을 데리고 왔으면 좋겠는데, 그보다 내가 더 걱정이 되는 건지 두 손을 맞잡은 채 절망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
 
 “소공자라,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랐겠구먼. 그 약한 팔로 되겄수? 자릿세만 내놓으쇼. 그러면 곱게 갈 터이니.”
 
 강압적으로 뺏으려는 놈들한테 뭘 줘.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이쁘장한 우리 소공자님의 얼굴에 흉터 좀 만들어 드려야겠수.”
 
 선수필승(先手必勝). 성큼 다가오던 갈두의 손을 후려친다.
 
  ̄빡!
 “어?”
 
 놈의 팔이 확 꺾이는 틈에, 곧바로 들어가 배 쪽으로 각목을 힘껏 휘두른다.
 
  ̄뻐억!
 “커억!”
 
 인상이 찌푸려진다. 손이 다 얼얼하다. 오래 힘을 쓰지 않았던 탓에 근육이 아우성을 쳐 댔다.
 오래 가면 내가 힘들다. 그러니 빨리 끝내야만 했다.
 방심한 갈두의 몸이 확 접힌 틈을 타, 재차 각목을 휘둘러 놈의 얼굴을 후려쳤다.
 
  ̄빠아악!
 
 한 대.
 아직 끝이 아니다.
 팔이 다시 크게 포물선을 그렸다. 이윽고 두 대를 먹이는 순간, 단단하던 각목이 통째로 박살 났다.
 말 그대로 파사삭, 각목의 일부가 박살 나며 허공에 비산한다.
 
 [왈패 ‘서갈두’를 처치했습니다.]
 [왈패 무리를 처치하시오.(1/3)]
 [소량의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소량의 명성치를 획득하였습니다.]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  ̄ 기본’의 숙련도가 +1 상승했습니다.]
 
 사방이 고요하다. 방금 전에 그 난리를 치던 거한이 곤죽이 된 채 뒹굴고 있어서.
 
 “다음.”
 
 박살 난 각목이 바닥을 구른다. 그러나 각목은 그것 말고도 많았다. 객잔을 어찌나 열심히 박살을 냈는지.
 다음 타자가 뒤늦게 반응했다.
 
 “이, 이노오옴!”
 
 걸두가 쿵, 쾅, 쿵, 쾅 발소리를 내며 뛰어온다. 동시에 입을 쩌억 벌리며 괴성을 내지르는데, 꼭 형제의 복수를 하러 달려오는 거대 원숭이를 보는 듯하다.
 
 “소공자님!”
 
 알고 있다. 곤봉까지 내팽개치고 달려오면서 두 팔을 좍 벌린 걸 보니, 끌어안고 으스러뜨릴 작정이다. 잡히면 위험하다.
 쓰러진 채 골골대는 덩치를, 원숭이가 오는 쪽으로 힘껏 걷어찼다.
 
 “어어······!”
  ̄쿠다당!
 
 덕분에 두 놈이 뒤엉켜 우스꽝스레 쓰러진다. 그 꼴을 보고 뒤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둘을 한꺼번에 때려잡을 수 있는 일망타진(一網打盡)의 기회.
 
 “조심!”
 
 여기엔 두 놈 말고도 다른 놈이 하나 더 있었다.
 쉬익, 허공을 베는 소리가 났다.
 아슬아슬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베인 건 하얀 천 쪼가리가 아니라 살색 살점이었을 거다.
 
 “젠장! 아쉽군.”
 
 다가오는 줄 몰랐다. 낌새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원숭이에게 너무 집중한 탓이다.
 남궁세가에 전해지는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의 기본기를 익혔어도, 아직까지 능력치가 낮은 탓에 놈이 은밀하게 움직이는 걸 못 느낀 듯했다.
 
 “조금만 더 방심하지 그랬어. 소공자님.”
 
 킬킬, 놈이 비릿하게 웃는다.
 그랬으면 목이 달아났겠지. 두 번째 인생도 제대로 못 살아 보고.
 이번 상대는 특히나 긴장하게 된다. 숙련된 듯 단검을 화려하게 다루는 왈패다. 앞서 상대한 두 놈과는 확실히 다르다.
 끙끙대는 원숭이가 일어서기 전에, 서둘러 놈을 때려눕혀야 했다.
 두 눈은 계속해서 놈의 손과, 발을 주시했다.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떻게 행동하게 되는지. 내가 언제쯤 접근해야 좋은 건지.
 급해도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이런 상황에서 급하게 행동했다간 변을 당하기 쉽다.
 여전히 주도권은 내게 있다. 이미 두 놈을 눕힌 이상 시간은 내 편이다.
 
 “뭘 그리 생각하는 거지?”
 “네 생각.”
 “네?”
 
 당혹성을 흘린 건 당소유였다. 너 말고.
 왈패가 빙글 웃었다. 생긴 것도 쥐처럼 생겨서, 웃는 것도 쥐 같았다.
 
 “이거, 당돌한 공자님이네. 남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반반하게 생긴 공자님은 좋아하지. 어때, 나랑 하고 싶어?”
 
 그런 의미가 아닌데. 으윽, 이맛살을 구기는 틈에 놈에게 돌진했다.
 
 “이런 야비한!”
 
 내가 반응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하긴, 뭣 모르는 공자라면 저 수법에 욱하며 가만두지 않겠다니 뭐라니 했을 것 같은데.
 아쉽게도 나는 아니다. 그럼에도 왈패의 반응은 빨랐다.
 
  ̄콰득!
 
 단검이 각목에 비스듬히 박힌다. 놈이 뽑으려 하자, 까득까득 마찰음이 났다.
 그러나 정작 단검이 안 떨어진다. 마치 각목에 뿌리를 내리기라도 한 듯.
 
 “······!”
 
 서로 두 눈을 치떴다.
 놈은 단검이 빠지지 않는 것에.
 나는 뭔가가 확 왔다는 느낌에.
 이건 기회였다!
 
 “크악!”
 
 냅다 놈의 허리를 끌어안고 땅에 몸을 던졌다. 동시에 놈과 굴러다녔다. 어떻게든 위를 뺏기지 않으려고.
 그러다 배에 주먹이 꽂히자, 뇌리를 강타하는 강렬한 통증에 잠깐 입술을 깨물곤, 반사적으로 놈의 얼굴을 한껏 후려쳤다.
 
  ̄퍼억!
 
 주먹이 아작 날 것 같다. 뭐가 이렇게 단단해. 괜히 뒷골목에서 구르던 몸뚱이가 아니다.
 
 “이 새끼······.”
 
 한 번 더 몸이 울렸다. 헛기침이 나왔다. 속이 거꾸로 뒤집히는 듯했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주먹으로 놈의 코를 뭉갰다.
 고통에 눈알이 거꾸로 튀어나오고, 피까지 머금은 와중에도 놈은 내 목을 붙잡고 졸랐다. 그리고 고통에 희열을 느끼는 광인(狂人)마냥 키득키득 웃어 댔다.
 숨이 점차 가빠져 온다. 나는 계속해서 놈의 얼굴을 때리고 또 때렸다. 주먹에서부터 느껴지는 통증을 잊은 지 오래다.
 결국 내가 죽거나, 놈이 죽거나.
 뒤에서 당소유가 뭐라 외치는 소리가 나는데, 결국 누군가에게 제지당하는 듯했다.
 놈의 손아귀에 실린 힘이 점점 빠지고 있다. 끝끝내 내 목을 조르던 손이 힘없이 내려앉는다.
 숨을 거칠게 헐떡이면서, 가만히 놈을 내려다본다. 얼굴이 거의 피떡이 됐다. 맞으면서도 웃을 수 있다니. 내가 만나 본 미치광이 중 제일 미친놈이었다.
 
 [왈패 ‘개갈’을 처치했습니다.]
 [왈패 무리를 처치하시오.(2/3)]
 [소량의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소량의 명성치를 획득하였습니다.]
 [의지 스텟이 +1 상승했습니다.]
 [새로운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 사생결단(死生決斷)]
 [업적 보너스를 획득했습니다.]
 [‘사생결단(死生決斷)’ 업적 보너스로 추가 의지 스텟이 +1 상승했습니다.]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  ̄ 기본’의 숙련도가 +1 상승했습니다.]
 
 근데 아직 퀘스트가 다 끝난 게 아니네. 미처 마무리를 못 지은 원숭이가 있었지.
 온몸이 무겁다. 눈물이 핑 돌았다. 무협지를 보면, 주인공은 그렇게 잘 싸우고 화려하게 상대를 이기던데. 왜 내가 하니 개싸움이 되지?
 헛웃음이 나왔다.
 
 “내 동생과 형제를 잘도 망가뜨려 놨겠다.”
 
 뒤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제대로 화났네, 화났어.
 
 “보지만 말고 제발, 좀 도와주세요!”
 “소유.”
 
 당소유는 울음보가 터지기 직전의 얼굴이다. 그녀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해야지.
 
 “우와아아악!”
 
 내가 뒤로 돌아서자마자, 놈이 황소처럼 달려들었다.
 놈의 공격이 너무 단순무식해서 그런가. 피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연이어 슬쩍 다리를 거는 것도.
 
 “크아악!”
  ̄쿠당탕!
 
 놈은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고, 그대로 어지러이 흩어진 가구더미에 얼굴을 처박았다.
 와하하하, 그 모습에 뒤에서 다시 또 한 차례 웃음이 들끓었다.
 물론, 나는 그걸 마냥 지켜보진 않았다. 바닥에 있는 굵고 튼실한 각목 하나를 주워들곤, 하늘 높이 치켜 들린 놈의 궁둥짝을 힘껏 쳤다.
 
  ̄짜아악!
 “으아아아아······.”
 
 놈의 비명 소리가 애처로이 울려 퍼진다. 내가 각목을 던진 건, 그 비명이 끊어진 직후였다.
 
 [왈패 ‘서걸두’를 처치했습니다.]
 [왈패 무리를 처치하시오.(3/3)]
 [소량의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소량의 명성치를 획득하였습니다.]
 [근력 스텟이 +1 상승했습니다.]
 [민첩 스텟이 +1 상승했습니다.]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  ̄ 기본’의 숙련도가 +1 상승했습니다.]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퀘스트 보상을 획득했습니다.  ̄ 소량의 경험치, 명성치 추가 획득. 전리품은 직접 획득하시기 바랍니다.]
 
 “소공자님!”
 “우와아아아!”
 
 눈물을 글썽이는 당소유에게 피식 웃어 보이려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물밀 듯 밀려들어 온다. 점소이, 초초도 그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명성이 올라서 그런가. 혹은 저들에게 핍박당하던 이들도 있었거나. 보니까 몇몇은 쓰러진 왈패들에게 앙갚음을 하거나, 막 꿈틀대던 왈패를 마구 괴롭히던데. 어느 쪽이던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가장 좋아하던 건 소초초와 당소유였으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소공자님! 공자님 덕분에 저희 풍문객잔의 존립이······.”
 
 소초초의 두 눈망울이 역동적인 파도를 그린다. 이제 보니 독특하게 생기신 분이다. 얇은 턱에 달린 새하얀 수염은 거꾸로 산을 그리고 있고, 광대뼈 밑으론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그렇게 초췌한 몰골에도 두 눈은 마치 왕방울처럼 커다랗다. 특히 갈색 땡땡이형의 안경을 끼고 있어서 그런가.
 
 “아니다, 초초가 고생이 많았어. 저 왈패들이 온 게 한두 번이 아니었을 건데.”
 
 왈패들이 말하는 모양새를 보면, 한두 번 온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소초초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심지어 당소유에게도.
 
 “아이고오······.”
 
 소초초가 내 팔을 부여잡으며 통곡한다. 그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 모양이다.
 당소유가 말없이 그의 등을 토닥여 준다.
 그나저나 일단 이 난장판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들을 에워싼 사람들도 보내야 하고.
 
 “소공자님.”
 
 당소유는 묻고 싶은 게 많은 눈치다. 언뜻 미심쩍은 시선도 있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생각과 달랐다.
 
 “소공자님, 괜찮으세요?”
 
 당소유는 다른 것보다도 내 몸을 걱정했다.
 잠깐 멈칫했으나 자연스레 고개를 주억인다.
 
 “괜찮아. 나는 그것보다 저들을 어떻게 상대했는지에 대해 물어볼 줄 알았는데.”
 
 과거의 남궁현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병약하고, 여린 서생과 같던 남궁현이 길바닥에서 구르고 구른 왈패들과 주먹다짐을 한다?
 솔직히 나라도 못 믿겠다. 남궁현의 기억을 갖고 있는 나라서 특히나.
 
 “글쎄요.”
 
 당소유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인다. 그리고 꿈꾸듯 몽롱한 미소를 짓는다.
 
 “공자님이 힘을 숨기셨던 게 아닐까, 생각하는 중이에요. 그것도 아니면 잠깐 숨이 멎으셨다가 깨어나셨을 때 깨달음을 얻으신 거예요! 반로환동(返老還童)한 고수의 그것처럼요!”
 “······.”
 
 당소유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울고 나서인지, 벌겋게 빛났다.
 근데 그게 가능한가? 숨이 잠깐 멎었다가, 깨어나고 깨우침을 얻어? 영웅 설화도 아니고. 너무 터무니없는 이야기인데도 당소유는 진짜 그럴 거라 믿는 눈치였다.
 
 “힘을 숨겨? 잠깐 숨이 멎었다고? 그게 무슨 소리냐?”
 
 당소유는 아차 싶은 표정이다.
 소곤소곤 얘기한다고 해도 소초초는 내 옆에 찰싹 들러붙어 있었다.
 그녀가 당황하며 손을 붕붕 휘젓는다.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소초초는 나에 대해 잘 모른다. 정확히 말하자면 남궁현에 대해. 그저 검의 명가(名家)인 남궁세가의 소공자라는 것 말곤.
 
 “잠깐 몸이 좀 안 좋았어. 그나저나 초초, 여길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이왕이면 이분들을 보내 드리는 것도 좋고.”
 “아! 여러분, 잠시만······!”
 
 자연스레 당소유의 위기를 넘겨 준다. 궁금함이 얼굴 곳곳에 다 드러나던 소초초가, 손님이라는 말에 크게 반응했다.
 역시 장사하는 사람은 다르구나.
 변명하려던 당소유가 멀뚱히 눈을 깜빡인다. 그러다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곤 나를 본다.
 
 “···초초 어르신을 잘 다루시는데요?”
 “그래?”
 “역시, 깨달음을 얻으신 게 분명해요!”
 
 뭐, 그렇게 생각해 주는 것도 나쁘진 않지. 차라리 의심보단 그게 낫다.
 그보다······.
 
 “어라.”
 
 순간 눈앞이 크게 이지러진다. 옆구리가 불에 지져진 듯 화끈했다.
 반사적으로 시선과 손이 옆구리를 향한다.
 새하얀 천 쪼가리와 살점을 뚫고 삐져나온 작은 단도가 보였다.
 살수(殺手)다. 그것도 이렇게 사람들이 섞인 틈을 노린, 영악한 살수(殺手). 날 끝이 피와 함께 노랗게 번뜩이는 걸 보니 독이 묻은 것 같았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단검을 뽑았다.
 그리고 티잉, 튕기는 소리가 나자마자 모든 게 눈앞에서 느릿하게 펼쳐진다.
 환하게 웃다가, 조금씩 경악으로 바뀌어 가는 당소유의 표정. 옆구리를 짚은 손에 조금씩 묻어나는 선홍빛의 피. 그리고 저도 모르게 힘이 빠져 풀리는 두 다리. 놀라 입을 쩍 벌린 채 비명을 내지르는 사람들. 등을 돌린 채 빠르게 무리에서 벗어나는 흑의인(黑衣人).
 당소유가 천천히 무너지는 나를 급히 끌어안을 때까지, 아무런 생각도 못 했다. 이게 뭔가 싶었다. 묻지 마 살인인가?
 그러다 뭐라, 뭐라 입술을 달싹이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당소유를 보고 알았다.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걸. 남궁현의 기억을 조금만 더 뒤져 봤다면, 세가 내 집안 다툼이 생각보다 심하다는 걸 알았을 텐데.
 그래도 자객(刺客)을 보낼 줄은.
 참, 기분이 엿 같았다. 내가 조금이라도 더 강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약하다고 이렇게 대놓고 노골적으로 노려지는 일도 없을 거고.
 
 ‘강해지고 싶어?’
 
 [특별 퀘스트(연계)를 얻었습니다.]
 
 까만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울린 듯하다. 사방이 고요에 잠긴 와중에도, 옥구슬이 구르는 듯 고운 목소리만은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람들이 혼비백산하며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검은 면사포를 쓴 신비인은 요지부동이었다.
 강해지고 싶다.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 더 강해지고 싶었다.
 
 ‘나를 찾으러 단정절벽(斷情絶壁) 위로 와.’
 
 [······.]
 
 그게 내가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었다. 어떻게든 정신 줄을 붙잡으려 노력했으나, 의식의 끈이 끊어지는 게 먼저였다.
 
 ***
 
 “···허억!”
 
 허리를 세운 채 거칠게 숨을 헐떡인다. 낯선 방안이다. 코끝을 찌르는 지독한 약 향에 코끝을 찡그렸다가, 문득 허리를 짚는다. 두터운 붕대가 칭칭 감긴 허리. 그 부위에 손을 가져다 댔는데, 통증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뭐지. 그러고 보니 몸이 좀 변한 것 같다? 나쁜 쪽이 아니라, 좋은 쪽으로. 그것도 크게.
 앙상해야 할 상체가 생각보다 근육이 잡혀 있고 튼튼해 보였다. 장성한 성인의 몸은 아니지만, 성장기에 만들 수 있는 균형 잡힌 체형이라고 해야 하나. 더군다나 몸에 알 수 없는 활력이 돌았고.
 이게 뭐지?
 급히 당소유를 찾았다. 그러나 굳이 나가려 하지 않아도 그녀를 찾을 수 있었다. 의자에 기댄 채 자고 있는 그녀를.
 많이 피곤했나 보다. 이렇게 불편하게 잘 정도면.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곤히 자는 걸 보니 깨우기는 또 그렇고.
 내가 두른 이불을 덮어 줬다. 그 과정에 잠깐 뒤척이긴 했는데, 깨진 않았다. 그저 무슨 맛있는 꿈이라도 꾸는지 냠냠, 입을 다시는 정도?
 그녀에게서 눈을 돌려 잠시 눈을 깜빡이며 상황을 정리했다. 칼에 찔렸으나, 다행히 치료를 받았고. 그 과정에서 내 몸이 커졌다? 이런 경우가 있던가.
 때마침 걷힌 천막 사이로, 허리가 굽은 노인이 들어왔다. 약방의 주인인 듯했다.
 
 “일어나셨수?”
 “네.”
 “그 유명한 남궁세가의 소공자라지. 나도 잘 알고 있으니 말은 높이지 않으셔도 된다우. 끌끌.”
 “아닙니다.”
 
 나를 살려 주신 분이 아니던가.
 노인은 빙글 웃는다. 그리고 끓고 있던 약을 마저 달인다. 한숨처럼 흘러나온 새하얀 연기가, 노인의 얼굴을 뒤덮었다가 서서히 흩어진다.
 
 “마음대로 하시게. 나 같은 노인이 귀한 세가의 사람에게 존중을 받아 보는 일이 있군.”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런 거창한 건 없고. 여기 사람들은 나를 황 노인이라 부른다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황 노인.”
 “끌끌끌, 감사는 밤새 간호한 그 아이에게 하게나. 소공자가 깨어나기를 오매불망 기다렸으니까.”
 “소유가······.”
 
 당연히 고마운 아이다. 손을 뻗어 당소유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는다.
 
 “아, 소공자의 몸에 생긴 변화 말일세. 알고 있었나?”
 
 나도 궁금해하던 거였다. 하룻밤 만에 앙상하고 비실비실하던 몸이, 이렇게······.
 
 “아뇨.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반은 추측만 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처음에 능력치 창을 보고 놀랐던 거. 그게 아니면 지금의 상황이 설명이 안 되니까.
 갑자기 노인이 단검을 들었다. 순간 미간이 일그러진다. 그 자객이 나를 찔렀던 단검이다.
 
 “이걸 보게.”
 
 그리고 별안간 그걸 벽에다 꽂는다. 영문을 모르는 눈으로 바라보자, 얼마 지나지 않아 단단하던 벽이 자글자글 포자처럼 들끓었다.
 
 “이 단검의 날에는 만년백청사(萬年白靑蛇)의 극독이 묻어 있었네. 아주 소량의 극독임에도, 사람의 목숨을 손쉽게 앗아갈 수 있다네.”
 
 만년백청사(萬年白靑蛇)의 극독. 내가 내단을 먹었잖아.
 
 “심지어 찌를 당시에는 독이 더 많이 묻었을 걸세. 날이 거의 녹슬었으니까. 그래도 소공자는 죽지 않았어. 오히려 소공자의 몸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극독을 흡수한 것 같네.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그 말씀은······.”
 “그렇네. 아마 그 때문에 몸이 변했을 가능성이 높네. 그러니 내가 달리 한 것도 없었다네. 상처가 덧나지 않게 붕대로 칭칭 감아 준 것 말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소공자가 모르면 누가 알겠나?”
 
 바로 내 능력치를 확인했다.
 
 ======
 
  ̄이름: 남궁현
  ̄레벨: 5
  ̄성향: 선 · 호전
  ̄문파: 정파(남궁세가)
  ̄내공: 3성
  ̄등급: E
 
 [만년백청사(萬年白靑蛇)의 내단이 조금씩 녹아들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보유 중인 내공이 점차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내단 복용 효과로 인해 모든 종류의 독에 저항하게 되었으며, 또한 역으로 흡수가 가능합니다.]
 
 [스킬(1/?)]
 [업적(1/?)]
 
 [근력: 20]
 [민첩: 12]
 [체력: 13]
 [지력: 7]
 [행운: 5]
 [분배 가능 포인트: 1]
 
 [만독불침지체(萬毒不侵之體)]
 [대기만성(大器晩成)]
 
 ======
 
 내 생각이 맞았다.
 행운이 따랐던 것인지, 만년백청사(萬年白靑蛇)의 내단이 조금씩 녹아들기 시작했다.
 거기에 모든 독에 대하여 저항하고 흡수까지 가능하게 됐다. 죽음까지 이르렀음에도 녹아들지 않던 그 내단이었는데.
 암살이 아니라, 구원이었다니. 분명, 죽이려는 의지를 가지고 찔렀을 텐데 멀쩡히 잘 살아 있는 걸 보면 눈이 뒤집히겠지.
 저도 모르게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옅게 웃는다.
 
 “음, 아는 거라도 있나?”
 
 반사적으로 입을 열려다 멈칫한다. 만에 하나 알려 줬다가 황 노인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그냥 아무도 모르는 게 낫겠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많이 황당하군요.”
 “그렇겠지. 아쉽구만, 그래. 극독에 얽힌 비밀을 풀 수 있나 했더니.”
 
 애써 미안한 표정을 감춘다.
 단검에 묻었던 독이, 자신의 몸에 있는 내단과 반응해서 성장과 흡수 등 여러 연쇄 반응을 일으킨 게 맞다. 게다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겠어. 급작스러운 변화는 적응하기 힘든 법이니까.”
 
 급작스러운 변화······.
 
 “알겠습니다. 그런데 황 노인.”
 “왜 그러시나?”
 “이 대화는 비밀로 해 주시겠습니까? 당분간은 제가 살아 있는 것도.”
 
 황 노인은 내 말의 의도를 이해한 듯했다. 그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떠나려는 건가?”
 “······.”
 
 그래도 잠시뿐이다.
 
 “다시 돌아오겠구만.”
 “네.”
 “이 아이에게 말은 해 두고 가시게. 갑자기 소공자가 떠나 버리면 곤란해할 테니.”
 
 다시 얕게 웃었다. 문득 상상을 하고 말았다. 내가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나라 잃은 표정으로 돌아다닐 것 같은데. 그건 단순히 곤란한 정도가 아니다.
 
 “그렇겠죠. 가기 전에 준비를 시켜 두려 해요.”
 “무슨?”
 
 펼쳐진 손바닥을 그러모은다.
 
 “풍문객잔이 최고의 객잔으로 거듭나기 위한, 준비요.”
 
 시선을 세상모르고 자는 소녀에게로 옮긴다.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되려는지도 모르고, 곤히 자는 당소유.
 
 “그리고 그 주인공은 제가 아니라 당소유일 겁니다.”
 “너무 큰 짐을 지게 하진 마시게나.”
 
 황 노인은 끌끌끌, 웃음을 흘리곤 볼일 좀 보러 가겠다며 천막을 나간다.
 바닥을 내려다보며 그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몸이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 심마(心魔) 혹은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여러 책에서도 빠짐없이 나오던 내용이다.
 그러니 내단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선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필요하다면 이곳을 떠나서라도.
 눈을 감기 직전에 봤던 신비인이 생각났다. 살아나면 자신을 찾아오라던. 누구였을까.
 그나저나 퀘스트 내용을 마저 다 못 봤다. 특별 퀘스트였는데.
 
 [단정절벽(斷情絶壁) 위에서 신비인을 만나시오.]
 
 어라? 못 읽었던 퀘스트가 곧바로 떠올랐다.
 좀 신기한데. 처음에 내 능력치를 확인하려 했을 때도 그렇고, 남궁현의 형제들이 수련하고 대련하는 모습을 보고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의 기본을 익힌 것도. 다 내가 생각해서 떠오르고 익힌 게 아니었던가.
 괜찮은 거 하나 알았다. 목표를 알았으니 지체 없이 움직여야겠지.
 그전에 해야 할 게 있다.
 가지런히 포개어진 흰 도복을 입고 천막을 나서기 전에 꾸벅, 꾸벅 고개를 까닥이는 당소유를 잠깐 바라봤다. 자는 모습이 마냥 귀엽고 천진하기만 하다.
 
 “소공자님······.”
 
 깼어?
 
 “응?”
 “제겐 소공자님이 최고예요, 음냐음냐······.”
 
 픽 바람 빠진 웃음을 짓는다.
 그냥 단순히 잠꼬대였다. 꿈속에서 나를 만난 모양이다. 무슨 꿈을 꾸나 궁금하긴 한데, 몇 번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자리를 떠난다.
 내가 찾으려던 초초는 거의 근처에 있더라. 뭘 한 다발로 싸 들고 오던데, 나를 본 표정이 완전 가관이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소, 소공자님?”
 “초초.”
 
 소초초의 시선이 내 몸 위, 아래를 바삐 훑는다. 망부석처럼 쩌적 굳은 그의 짐을 거들어 준다.
 
 “어, 어떻게······.”
 
 멀쩡하냐고.
 
 “그리고 몸은 도대체······.”
 
 역시, 내 몸에 생긴 변화가 눈에 띄는 모양이다.
 
 “가면서 설명해 줄게.”
 
 따로 소초초와 함께해야 할 일이 있었다. 가면서 이야기해 주는 것도 빠지지 않았다. 길게 얘기한 건 아니고. 치료 과정 중에 내 몸에 변화가 생겼다는 이야기? 그 대목에서 엄청 놀라긴 했는데 좋은 변화라니 납득하더라.
 객잔으로 간 건 아니다. 남궁세가에 연락을 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고.
 
 “여긴······.”
 
 낡고 어딘가 허름한 집. 내가 머물렀던 숙소였다.
 풍문객잔으로 가기 전에 너무 거추장스러워서 착용하지 않았던 게 있다. 손에서 굴려 보니 데굴데굴 소리가 났다. 목걸이, 반지를 비롯한 각종 겉치레 장식들.
 처음 봤을 땐 뭔 쓸모가 있나 싶었는데, 지금 보니 엄청 쓸모 있다. 어어엄청 많이.
 
 “잘 어울리실 것 같습니다.”
 “하하, 그래?”
 
 반지도 껴 보고, 목걸이도 껴 보고. 그렇게 소초초에게 껴 주니 훨 낫다. 금가락지 두어 개랑, 목걸이 하나 걸쳐 줬을 뿐인데. 분위기가 확 살아난다. 마치 부유한 초로의 상인을 보는 듯하다.
 
 “소초초가 더 잘 어울리는데?”
 “소, 소공자님!”
 “장난이었어, 장난.”
 
 키득키득 웃는다. 그리고 얼굴을 다시 굳힌다.
 
 “이거, 다 팔면 얼마 정도 할까?”
 “이, 이걸 파신다고요?”
 “응. 이걸 팔아서 풍문객잔을 재건하려고 해. 낡은 현판도 갈아야 하고. 왈패들이 뒤집고 간 바람에 가구들도 다 박살 났으니까. 이참에 새로 짓는 거지.”
 “······.”
 
 소초초의 안면이 연신 씰룩인다. 두 왕방울만 한 눈은 일그러지고, 입술은 추위에라도 시달리는 듯 바르르 떨린다. 꼭 감동의 물결이 얼굴을 휩쓰는 것 같았다.
 소초초와 당소유. 둘 다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이다. 그러니 뭐든 해 줄 수 있는 거라면 해 주는 게 당연하다. 마냥 뒤에 숨을 게 아니라.
 별거 아닌 일인데, 소초초는 엄청 고마워했다. 내 두 손을 맞잡으며 뚫어져라 쳐다보는 눈길이 조금 뜨겁다.
 
 “소공자님.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저 소초초 비록 늙은 홀몸이오나, 이 한 몸 목숨이 다할 때까지 소공자님께 충성을 맹세하겠나이다!”
 
 [‘소초초’의 신뢰를 얻었습니다.]
 [소량의 명성치를 획득하였습니다.]
 [새로운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 충신(忠臣)을 얻다.]
 [일정 수준의 명성치를 달성했습니다.]
 [새로운 칭호를 획득했습니다.  ̄ 호북의 작은 귀인(貴人).]
 [이제 호북 지역의 사람들이 당신을 알아볼 것입니다.]
 [이제 그들과 빠르게 친화력을 쌓을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보호를 요청할 경우,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런 것도 있구나. 새로운 칭호라. 내가 한 건 별로 없는데. 어쨌든 보호를 받을 수 있다니. 좋네. 더 이상 왈패들이 들이닥칠까 걱정할 필요 없겠다.
 목걸이를 뺀 소초초가 새끼손가락에 낀 금가락지를 빼면서 낑낑댄다. 너무 작아서. 그걸 보고 도와줄까, 싶었다가 잠시 턱을 긁적인다.
 
 “초초, 그 반지는 남겨도 되지?”
 “네? 이거요? 상관없긴 한데. 어차피 목걸이만으로도 충분해서······.”
 
 목걸이만으로도 충분하단다. 그래도 만일을 위해 하나 더 팔아 두고.
 
 “작은 건 나한테 줘.”
 “네!”
 
 궁금할 텐데, 그는 군말 없이 작은 금가락지를 빼서 내게 준다.
 
 
 # 2장 강해지기 위해서
 
 금붙이를 파는 일은 소초초에게 맡겼다. 내가 오래 얼굴을 노출하면 저쪽도 내가 살아 있는 걸 알 테니까.
 물론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만, 가급적 늦게 아는 편이 훨씬 낫다.
 그리고 그와 헤어지기 전에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잠시 호북을 떠나 있을 거라는 이야기. 풍문객잔의 재건을 부탁한다는 이야기, 소유에 대한 부탁 등.
 그래도 많이 혼란스러워하길래, 어찌어찌 다독여서 보내 주긴 했다. 당소유 버전2라 느껴서 그런가, 데자뷰를 느끼는 것마냥 익숙하더라.
 천막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의 표정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두 큼지막한 눈을 뎅그렇게 뜨고 입을 떡 벌린 말 그대로 나라 잃은 표정. 그래서 웃음이 절로 비어져 나왔다.
 딱 황 노인의 천막에 도착할 때까지만.
 멀리서 본 검은 그림자가 우두커니 선 채 미동 없길래, 저런 인형이 있었나? 싶었는데.
 가까이 다가가서 확인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을 데르륵 굴리게 된다.
 당소유였다.
 나를 보고 안심하기라도 한 듯 그녀는 천천히 양쪽 허리에 두 손을 꽂는다. 뾰로통한 입술을 보니, 삐진 것 같다. 잠을 못 자서 퉁퉁 부어오른 얼굴을 보면 웃음이 날 것 같다만.
 
 “소유?”
 “···대체 어딜 다녀오신 거예요? 몸도 크게 다치셨는데······.”
 
 당소유는 금방 뭐라 할 것 같다가도, 표정을 완전히 누그러뜨리곤 이윽고 얼굴을 짚는다.
 
 “저, 소공자님을 또 잃는 줄 알았어요. 이럴 줄 알고 잠을 안 자려고 했는데. 막상 깨어나셨을 때 안 계신 거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시냐구요······.”
 
 손등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며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궁시렁궁시렁, 그런데 귀엽다. 두 볼이 퉁퉁 부어올라서 더.
 
 “진정해, 소유. 나 괜찮아. 봐 봐.”
 
 가까이 다가가 당소유의 팔을 잡아 이끈다. 또 눈가가 촉촉한 거 보니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그녀에게 내 배를 푹푹 찌르는 시늉을 보였다. 푹푹 해도 시큰둥해서, 그냥 퍽퍽 쳐 봤더니 빽 반응한다.
 
 “뭐 하시는 거예요?”
 
 네 반응 좀 보려고. 기특한 아이가 귀엽기까지 하니까, 은근 놀려 주고 싶었다. 물론 그걸 입으로 꺼내진 못하겠고.
 
 “봐, 멀쩡하잖아. 다친 곳도 이제 안 아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정말요?”
 “그러엄.”
 “······.”
 
 그녀가 마저 눈가를 닦아 냈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지, 연한 다크서클이 눈가를 둥그렇게 뒤덮고 있다. 거기에 펑펑 울었는지 눈두덩이도 퉁퉁 부었네.
 얼굴도 퉁퉁, 눈두덩이도 퉁퉁. 한겨울도 아닌데 이러다 눈사람 되겠다. 물론 원인은 나 때문이지만.
 내 기억 속의 당소유는 이렇게 울음 많은 아이가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죽은 걸 본 데다, 또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니까 많이 흔들린 것 같았다.
 
 “너무 무서웠어요, 소공자님······.”
 
 푸에엥, 얼굴을 일그러뜨린 당소유는 꼭 내 어린 시절 여동생 같았다. 오빠, 오빠, 하면서 나를 그렇게 잘 따랐는데 크면서부턴 주먹질을 하더라. 그때부턴 상남자였지. 오빠 대신 야라는 말을 입에 담고. 이번에는 소공자니까, 안 그러겠지?
 말없이 당소유를 안고 다독여 줬다.
 내 품속에서 차츰 안정을 찾아가는 모양이다. 한참을 꼼지락거리던 당소유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몸이 좀 커지셨어요.”
 “아, 그래?”
 
 오늘 여러 번 듣네.
 갑자기 손이 슥 올라온다. 당소연이 손날로 머리 위에서 칸 재기를 한다. 내 머리 위까지 올라갔을 때야 손날이 슥 내려간다.
 
 “네. 원래 저보다 한 뼘이었는데, 이젠 두 뼘쯤······. 팔도 길어지신 것 같고.”
 “넌 왜 안 크니?”
 “······.”
 
 부글부글, 당소연의 머리 끓는 소리가 난다. 계란 올려놓으면 노릇하게 잘 익을 것 같다. 속으로 쿡쿡 웃었다.
 
 “확실히, 달라지신 것 같아요.”
 
 못 알아채는 게 이상하지. 왈패들에게 달려들 때부터, 장난스럽게 대해 주는 것까지.
 뭐, 반로환동한 사람이니, 깨달음을 얻은 사람 같다 해도 기분이 이상할 거다. 내가 알던 어제의 사람과, 오늘의 사람이 다를 때의 그 느낌은 정말이지, 별론데.
 그래도 아무리 남궁현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도, 답답해서 남궁현이 하던 것처럼은 못하겠더라. 매번 당소유가 하자는 대로 해, 말도 제대로 안 해. 무력하고 쫄보라, 뭔 일에 제대로 나서려는 것도 못해.
 
 “그러고 보니 기억이 잘 안 나는구나.”
 “네, 네에······?!”
 
 당소유가 놀라서 토끼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이왕이면 그냥 이 컨셉으로 밀고 나가자. 부분 기억상실증 걸린 사람.
 
 “내가 널 어떻게 대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나. 다른 사람들한테 어떻게 대했는지도. 뭔가 안개 속을 걷는 기분이랄까. 못할 짓 했다면 잊어 주렴.”
 
 소설 잘 쓴다, 잘 써. 터무니없어도 당소유는 너무나 잘 믿어 주고 있다.
 
 “그래도 기억해야 할 건 다 기억하고 있어. 소유가 어린 시절부터 날 따라 준 거, 도와준 거. 날 따라온 거.”
 “가주님도 기억하시죠? 그··· 형제들은요?”
 “당연하지. 나한테 형제가 있었나? 왜, 기억해야 해?”
 “아··· 다행이에요. 잊는 편이 훨씬 좋아요.”
 
 눈에 띄게 좋아라 한다, 사실은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지만. 그들이 하던 악행들이, 뇌리에 확실하게 각인된 듯 기억에서 떠나질 않아. 거기에 암살까지.
 그래서 더욱 강해져야겠더라. 앞으로 다신 나와 내 식솔들을 못 넘보게.
 
 “음, 소공자님은 좋은 분이셨어요. 물론 저는 지금의 소공자님이 더 좋아요.”
 
 당소연이 부끄럽게 웃는다.
 가슴이 이상하다.
 햇빛이 그녀의 얼굴 위로 점점 걸터앉고 있어서 그런가, 엷은 홍조가 잔잔히 번져 가는 게 보였다. 그래 봐야 퉁퉁 부은 소녀긴 한데.
 내가 아무런 대꾸도 안 하니 무안해지는 것 같다. 분위기도 이상하고.
 그러니 황급히 당소유가 입을 연다.
 
 “그, 그나저나 어디 다녀오셨어요?”
 “우리가 머물렀던 숙소.”
 “거긴 왜요?”
 “금붙이들 좀 팔려고. 그래야 객잔을 크게 만들 수 있을 테니까.”
 
 엥, 당소유가 당황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다.
 
 “그건······.”
 
 그녀가 뭘 말하려는지 안다. 남궁세가에서 만들어 준 증표이자, 상징이라고.
 애초에 풍문객잔이 성공하기 위해선 무자본으론 힘들다. 천천히 입소문을 타면 다르겠지. 그러나 그것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제일 좋은 방법은 돈이다.
 돈이 있어야 풍문객잔이 커지고 성공한다. 그러니 증표 같은 건.
 
 “필요 없어. 이건 너 가지고.”
 
 팔지 않고 남겨 둔 금가락지다. 다행히 당소유의 손가락에 딱 들어맞았다.
 
 “······!”
 
 그녀가 두 눈을 부릅뜬 채 쩌적, 굳은 걸 보니 실없이 웃게 된다. 너무 뜻밖의 선물이라 그런가.
 나는 당소유의 어깨를 짚고 허리를 숙여 두 눈을 맞췄다.
 
 “소유, 내가 하는 말 잘 들어야 해.”
 “네?”
 
 그녀의 얼굴에 서서히 어둠이 드리운다. 눈치가 빠르네.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생길 거라는 걸 안 모양이다. 그것도 안 좋은 일 말이다.
 시기가 많이 빠르다는 건 안다. 그래도 하루라도 빨리 강해져야 한다.
 나를 노리고 있을 녀석들이, 당소유와 소초초에게 언제 손길을 내뻗을지 모르니까.
 
 “이제부턴 네가 풍문객잔의 주인이야.”
 
 당소유의 동공에 힘이 탁 풀린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초초에겐 다 말해 뒀어. 앞으론 소유가 네가 풍문객잔의 주인으로서, 풍문객잔을 잘 이끌어 줘야 해.”
 
 그녀는 말없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이다.
 
 “금방 올 거야.”
 
 언제가 되리라 장담은 못 하겠다. 물어보면 좀 곤란할 것 같았는데.
 다행히 그에 대해선 묻지 않는다.
 당소유는 당혹스러운지 여전히 묵묵부답. 영문 모를 이 상황이 매우 불만족스럽다는 듯 묵언으로 시위를 한다.
 어른스러운 면이 있긴 해도, 막상 이렇게 보면 어리긴 어려. 그래서 잘 컸으면 하는 맘이 있다.
 
 “외롭진 않을 거야. 네 또래의 식구들이 늘어날 테니까.”
 
 소초초에게 부탁해 뒀다. 풍문객잔이 커지려면, 점원도 꽤 필요했다. 그래서 소유가 또래의 아이들을 구해 달라고. 성격이 활발하니까 내가 없더라도 잘 어울릴 거다.
 결국 마지못해 받아들이기로 한 것 같았다. 그녀는 더 떼를 쓰기보단, 자포자기한 듯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인다.
 
 “꼭, 무사히 돌아오셔야······.”
 
 고개를 푹 숙인 당소유는 끝말을 맺지 못했다. 그리고 낌새가 이상하길래, 미처 붙잡을 새도 없이 호다닥 도망친다.
 말을 다 못 하겠나보다. 그럴 만하지. 나도 많이 아쉬우니까.
 그래도 강해지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지금도 생각하면 간담이 사늘하다. 소리, 기척도 없이 다가왔던 살수(殺手)가.
 비록 내단이 녹아들고 있다곤 해도 다음엔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 내가 아닌, 당소유나 소초초에게까지 그 손길을 내뻗을지도 모르지. 내 한 몸 지키기도 이렇게 힘든데, 그땐 그들까지 지킬 수 있을까.
 그러니 내 몸, 내 가족도 제대로 못 지키는 무능력한 이가 되긴 싫다. 게다가 운 좋게 두 번째 인생을 살게 된 건데, 또 죽었다간 개로 살게 될지 어떻게 알아. 혹은 또 다른 인생 따윈 없을 수도 있고.
 당소유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길 위를 잠깐 보다가, 고개를 돌려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
 
 단정절벽(斷情絶壁)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고서에서 본 기억이 있다. 신선(神仙)이 살고 있다거나, 신비한 영물들이 살고 있어 천외천(天外天)이라 불리는 곳. 구름 너머까지 올려다봐도,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곳. 결코 멀쩡한 사람이라면 오를 엄두조차 내지 않는 곳. 그야말로 소문만 무성한 미지의 장소.
 아무리 경공술의 귀재나 고수라도 눈앞의 깎아지른 절벽을 타고 오르는 건 쉽지 않을 듯했다. 심지어 나는 익혀 둔 경공술 자체가 없다. 그러니 몸으로 때워야 했다.
 이 위에 그 신비인이 있다고 했지. 없기만 해 봐라.
 나는 천천히 돌을 하나씩, 하나씩 잡고 가파른 단정절벽(斷情絶壁)을 오르기 시작했다.
 어디쯤 올라왔을까. 돌무더기 틈에 기댄 채 가쁜 숨을 고르며 아래를 내려다본다.
 발치에 자욱하게 깔린 하얀 구름.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땅과 초록빛 숲. 순간 아찔함을 느낄 정도로 까마득한 높이였다.
 바로 고개를 돌렸다. 더 보고 있다간 아래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아서.
 엄청 많이 올라왔구나. 흐르는 땀을 닦으며 고지를 올려다본다. 아직도 끝이 보이질 않아.
 그래도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올라가야만 했다.
 
 [의지 스텟이 +1 상승했습니다.]
 
 이 와중에도 능력치가 오르네. 그러고 보니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을 때부터 능력치가 꾸준히 오르고 있다. 특히 의지와 체력이라는 스텟.
 절벽 등반이라는 거, 의외로 좋다. 체력도 키우고, 능력치도 올리고. 다만 다시 하라고 하면 못 할 것 같다.
 긴 심호흡 후에 손을 뻗어 돌을 잡았다.
 
 “허억, 허억······.”
 
 시선이 거꾸로 천천히 뒤집힌다. 욱씬거리는 두 팔과 다리를 죽 뻗은 채 누웠다. 서늘한 바람이 온몸을 차갑게 어루만진다.
 드디어 올라왔다. 아득한 하늘과 마주한 가슴이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한다.
 이걸 올라오다니. 마냥 가슴이 뻐근하다.
 
 [새로운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 단정절벽(斷情絶壁)을 오르다.]
 
 또 하나 달성한 업적. 이번에는 보너스 같은 게 없네. 아쉽지만 절벽을 오르는 동안 얻은 능력치만 해도 어딘가.
 눈을 감고 벅찬 호흡을 차분히 고른다. 토할 것만 같던 속이 차츰 진정되어 간다.
 이제 신비인을 만나면 된다.
 다시 눈을 뜨자, 누군가의 눈과 마주친다.
 새파랗다. 새파랗다 못해 타오르듯 이글거리는 것만 같은 거대한 동공. 숨을 쉴 때마다 크게 씰룩이는 평평한 코. 그 위엔 새하얗게 성에가 돋아난 것 같은 털이 빼곡하다.
 몸이 딱딱하게 얼어붙는 듯했다. 손가락 하나 까닥했다간,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서.
 놈의 시선이 내 전신을 샅샅이 훑는다. 미동 없던 눈동자가 내 허리춤에 이르렀을 땐 작은 파문을 그렸다. 동시에 위협에 가까운 낮은 그르렁 소리가 고막을 두드린다.
 검을 본 것 같았다. 자신에게 해를 끼칠지 모른다고 생각한 듯.
 지능적이다.
 대체 어디서, 이런 괴물이 나타난 거지? 다가온 것도 몰랐다. 그 짧은 순간에 소리, 기척도 없이 이렇게 올 수 있다고? 이런 거대한 덩치로?
 내가 별 반응 없으니, 놈의 미간이 서서히 좁혀 들어간다. 그리고 길게 죽 찢어진 입술이 천천히 들썩이기 시작한다. 그 사이로 누르스름하고 말뚝이 굵은 이빨들이 점점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런 전의가 없음에도, 놈이 나를 대하는 태도는 마치······.
 명백한 적개심이었다.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은, 자신만의 땅을 침범한 침략자를 향한 적개심.
 나는 그저 퀘스트를 따라왔을 뿐인데? 설마, 함정일 리가.
 
 ‘피해!’
 
 그 목소리다. 풍문객잔에서 들었던 옥구슬. 잘못 온 건 아니구나.
 급히 옆으로 굴렀다.
 
  ̄쿠웅!
 
 땅을 내리찍은 여파가 온몸을 파도처럼 휩쓸었다. 동시에 박살 난 땅의 파편들이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린다.
 빠르고, 강하다.
 절대로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정신이 바짝 들었다. 저 단단한 솥뚜껑 같은 주먹에 한 대라도 맞았다간 골로 갈지도 모른다.
 구르듯 일어서서 멀찌감치 놈과 거리를 뒀다.
 다행히 놈은 바로 공격해 오진 않았다. 다만, 나를 놓친 것에 대해 분개하듯 으르렁거릴 뿐.
 
 “어디 계십니까?”
 
 감당하기 힘들 것 같으니 도움을 요청하려 했다. 그런데 목소리의 주인이 대답을 안 하더라. 구원의 손길이라도 받을 줄 알았는데, 기분만 싸했다.
 
 “저기요?”
 
 내 말은 못 듣는 건가. 뭐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해. 저쪽에선 텔레파시마냥 내 머릿속을 웅웅 울리며 말하는데, 나는 어떻게 하는지 몰라 혼잣말을 하고 있으니 환장할 노릇이다.
 그런데 그게 거슬린 모양이다. 오히려 등을 돌린 놈의 성질을 더 돋우게 됐다.
 
  ̄크와아아악!
 
 다음엔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제 가슴을 연거푸 두들기던 놈이 땅을 거칠게 박차며 쫓아온다.
 젠장, 젠장.
 
 ‘강해지고 싶다고 했지?’
 
 이제야 대답을 하시네. 그런데 이건 강해지는 거랑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검과 검도 아니고, 부지깽이와 솥뚜껑인데 상대가 될 리 있나.
 일단 어떻게든 놈과 거리를 벌리려 했다. 가급적 놈과 가까워지지 않게.
 
 ‘강해지고 싶다면 놈을 이겨. 성성이조차 이길 수 없다면, 자격은 없어.’
 “······.”
 
 목소리는 얼음처럼 냉락했다.
 까득, 입술을 짓씹는다.
 
  ̄쿠와아아아!
 
 쿵, 쿵, 쿵, 땅이 거칠게 요동친다. 어느새 속도가 붙은 놈과의 거리가 지척이다.
 더는 피해 다닐 수만은 없는 거리.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놈을 잡아야만 했다.
 속도를 줄이자마자 공기를 찢어발기는 파공성이 들려왔다.
 
  ̄부웅!
 
 가까스로 허리를 숙여 피한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빙글 돌아 내리찍는 주먹을 휘두르는 성성이.
 
  ̄쿠우웅!
 
 아슬하게 피했으나, 볼썽사납게 앞으로 뒹굴어야만 했다.
 
  ̄크와아아아아!
 
 지능적이면서도, 변칙적이다. 울부짖는 것 말곤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다.
 입술을 꾹 말고 얼른 자세를 잡았다. 허리를 낮춰, 도복에 붙어 있던 검집에 손을 가져간다.
 지구에서 검도를 배워 본 경험이 없었다면, 검을 꺼내는 데에 많이 망설였을 거다. 사실상 처음이라 쥐는 것도 어색하고, 쓰는 것도 어색할 테니까.
 
  ̄스르릉!
 
 검과 검집이 맞물려 청량한 소리가 났다. 햇빛에 반사된 검날에 날카로운 예기가 흐른다. 잘 벼려진 장검이다. 이런 것까지 신경 써서 챙겨 주다니. 생각보다 무겁지 않았다. 다만 각목보다는 조금 무거운 느낌?
 
 ‘놈의 살은 단순한 검으로 뚫을 순 없어.’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아는 법이다.
 놈이 다시 또 뜀박질을 하며 주먹을 크게 붕 휘두르는 순간, 빠르게 파고들어 허리를 찔렀다.
 
  ̄깡!
 
 그러나 손끝으로 전해져야 할 감각이 부드럽다기보단 딱딱했다. 마치 바위에 검을 부딪친 것 같았다.
 
  ̄크와악!
 
 얼른 허리를 뺐다. 내가 들어갔던 자리에, 성성이의 주먹이 내리꽂힌다. 동시에 땅이 거뭇한 신음을 토한다.
 목소리의 주인 말대로였다. 검이 전혀 안 통해. 짐짓 표정을 심각하게 굳힌다.
 약점을 노려야 하나?
 위험을 감수해 보기로 했다. 한 대 정도는 맞을 심산으로, 계속해서 인파이팅을 시도했다.
 
  ̄까앙! 깡, 까아앙!
 
 명치. 그다음엔 다리. 팔. 겨드랑이. 사타구니. 사람이라면 주요 약점이 될 법한 부위들을 노렸으나, 오히려 검에 점점 자잘한 생채기가 났다.
 단단해.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어.
 내 저돌적인 공격이 끝나자마자, 놈이 반격을 시작했다. 그것도 엄청 화난 얼굴로.
 급히 검을 옆으로 틀어 놈의 휘두르는 공격을 대처하려 했다. 이번에는 피할 수 없다.
 
  ̄퍼억!
 
 순간 눈이 180도 핑 돌았다. 뒤로 땅을 몇 번 데굴데굴 구른 것 같다.
 
  ̄크오오오!
 
 땅에 코를 박은 채 인상을 와락 찌푸린다. 뒤늦게 통증이 찾아왔다. 테이저건이라도 맞은 듯 온몸이 잠깐 동안 저릿하고, 속이 파도처럼 울렁거렸다.
 
 “크윽······.”
 
 피하려고 했다가, 반은 제대로 피하지 못한 탓이다. 더군다나 풀파워였다. 그렇게 힘을 담아 주먹을 휘두르고 휘둘렀는데도 전혀 지치지 않는 모양이다.
 
  ̄쿵!
 
 또 땅이 울린다. 나는 저게 꼴사납게 누워 있지 말고, 일어나라고. 한 번 더 솥뚜껑을 휘두르겠다는 메시지로 들려왔다.
 법랑질을 잘근 깨물었다.
 땅 위에 거꾸로 꽂은 검을 받침대 삼아, 억지로 일어선다. 테이저건과도 같던 주먹 때문에 다리가 자꾸만 후들거렸다.
 어떻게, 놈을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내공을 써. 검에 너의 기를 불어넣어. 그렇게 해서 검기를 만들 수 있다면, 만년한철이 아닌 이상 베어 내지 못하는 건 없어.’
 
 검기(劍氣). 내공을 검에 불어넣어 눈에 보일 정도로 기를 발하는 것.
 뒤로 돌아서자마자 땅을 박차고 치달리는 성성이가 보였다.
 당연하지만 그게 간단히 될 리가 없다. 특히나 이렇게 놈의 공격을 피하고, 피하는 정신없는 와중엔. 게다가 어떻게 쓰는지를 모르잖아.
 
 ‘집중해. 너의 몸에 정체되어 있을 내공에, 그리고 검에.’
 
 집중, 집중하자.
 잔잔히 몸 내부를 흐르던 물에 파문이 일었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내 의지를 따라 내부를 일주천하기 시작한다. 내 몸에서 한 바퀴, 두 바퀴를 돌 때쯤 검에 변화가 나타난다.
 
  ̄츠으읏!
 
 조금씩 검에 어리던 노르스름한 빛이, 이윽고 완전히 검을 뒤덮는다.
 
 “······!”
 “······!”
 
 놀랐다. 이게, 검기(劍氣)였다.
 
 [새로운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 검기(劍氣)를 만들다.]
 [업적 보너스를 획득했습니다.]
 [행운 능력치 보정으로 인해, 획득한 업적 보너스가 2배가 됩니다.]
 [‘검기(劍氣)를 만들다.’ 업적 보너스로 전체적인 스텟이 +2 상승했습니다.]
 [새로운 칭호를 획득했습니다.  ̄ 검기(劍氣)를 만들어 본.]
 
 ‘흐응.’
 
 콧소리를 들었다. 동시에 내 변화에 낯설어하는 성성이의 괴성도 들었고.
 느낄 수 있다. 달라진 내 힘을. 이전에는 마냥 생으로 부닥친 기분이었다면, 지금은 아니다. 힘이 가져다주는 충만함 때문에 뭐든 할 수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크와아아아악!
 
 쾅쾅, 성성이가 두 팔을 힘껏 위로 치켜든다. 그러나 나는 피하지 않았다. 놈의 공격을 그대로 받았다.
 
  ̄쩌어엉!
 
 콰득, 땅이 원을 그리며 움푹 파여 들어간다. 연이어 주륵, 발이 뒤로 미끄러진다.
 두 주먹과 잇댄 검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그러나 통증은 전혀 없다. 활발하게 일주천하기 시작한 내공 덕분이다.
 검을 강화하고, 신체를 강화한다. 제대로 다뤄 본 적도 없는데, 마치 몇 번 써 보기라도 한 듯 익숙하게 다룰 수 있다. 상황이 상황이라 그런가. 위기 상황이 되니 뭐든 받아들이고 스펀지처럼 흡수하려는 것 같았다.
 성성이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구겨진다.
 
 ‘놈의 공격을 그대로 받지는 마. 받더라도 흘리듯이, 공격을 쳐 내.’
 
 검을 하단으로 비스듬히 꺾는다. 옆에서 보면 아마 내가 힘을 못 이겨 검을 떨구려는 모양새로 보일 거다.
 
  ̄크와악!
 
 성성이는 그게 자신이 이겼다는 걸로 보일 거고. 어딜 봐서 네가 이긴 것처럼 보이냐. 착각도 유분수지.
 나는 팔을 강화해, 놈의 두 주먹을 위로 힘껏 쳐냈다. 그리고 땅을 박차 단숨에 놈의 배에 검을 찔러 넣었다. 검집만 남겨놓을 기세로 깊숙이.
 
  ̄푸우욱!
 
 손끝에 착 감겨오는 이 느낌, 단단한 두부를 찌르는 것 같았다.
 드디어 공격이 통했다!
 
  ̄크와아아!
 
 얼른 검을 빼서 공기를 가르는 솥뚜껑 주먹을 피해 물러난다.
 싸움의 기세가 확 기운 듯했다.
 검 끝에 묻은 푸른색의 피를 훅 털어낸다. 새파란 눈동자답게 피도 새파랬다.
 
 ‘아직 안 끝났어.’
 
 그대로 일단은 잠시 서로의 싸움이 소강상태로 들어섰다.
 성성이는 놀란 듯, 자신의 뱃구멍을 자꾸만 매만졌다. 새파란 피가 꿀럭꿀럭 흘러나오는 구멍. 그렇게 매만지다간 상처가 더 벌어질 텐데.
 그런데.
 
 ‘놈은 만년설미후(萬年雪美猴)라는 영물이다. 무슨 공격을 입어도, 웬만하면 잘 죽지를 않아. 더군다나 상처를 입을 때마다 단시간에 강해지는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나는 녀석을 이곳을 지키는 문지기로 두고 있어.’
 “······.”
 
 문지기라니, 테스트였어?
 
 ‘너에게 좋은 파트너가 될 거야.’
 
 눈을 돌려 만년설미후(萬年雪美猴)를 바라본다. 손가락 크기만큼 꿰뚫린 뱃구멍이 금세 아물었고, 몸이 조금 커져 있다.
 이걸,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지?
 
 ‘물론 기절하면 말해. 성성이를 물려 줄 테니까.’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기절하면 말을 못 하지 않나?
 
  ̄크와아아아악!
 
 성성이가 목을 기울여 크게 울부짖는다.
 
 ‘최선을 다해 놈을 상대해.’
 
 굳이 최선을 다하라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다.
 응당 그러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위험할 테니. 기절해야 성성이를 물려 주겠다는 말, 절대 농담이 아니다. 설령 농담이더라도 내가 그 상황까지 몰릴 즈음엔, 성성이가 나를 어떤 식으로든 박살을 낼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내가 먼저 놈을 제압해야만 했다. 목을 날려 버리든, 토막을 쳐 버리든 간에.
 그리고 검기(劍氣)를 계속, 오래 쓸 수 없다. 내공이 무한정 공급되는 오일 탱크가 아닌 이상, 언젠가는 바닥을 드러낼 테니까.
 세심한 내공 컨트롤이 필요했다. 필요할 때에 검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말이다.
 노르스름하게 물들었던 검이 제 색을 되찾았다. 햇빛에 반사되는 하야말간 빛, 검기에 휩싸여 보이지 않던 상흔과도 같은 생채기의 흔적.
 이걸로는 오래 못 쓸 것 같은데. 더 좋은 검이 필요하다.
 
  ̄크르르륵!
 
 바로 눈치 깠네.
 
  ̄쿠웅, 쿵!
 
 성성이가 곧바로 나를 향해 뛰어온다.
 나도 마주 내달리며 정체된 내공을 돌렸다. 여전히 느리지만 전보다 좀 더 빠르게 내공의 일주천이 끝났다.
 슥, 노르스름한 검기가 허공에 흐릿한 잔영을 남긴다. 동시에 휘둘러지던 성성이의 팔뚝이 뚜욱 떨어진다.
 이윽고 말끔히 잘린 단면에서, 둑이 터지듯 새파란 피가 터져 나왔다.
 
  ̄크와아아악!
 
 기회다. 이 기회를 놓칠 내가 아니다. 앞으로 파고들자마자 남은 성성이의 팔이 파공음을 내며 나를 향해 휘둘러진다.
 
  ̄까앙!
 
 주르륵, 옆으로 크게 밀려났으나 버텼다. 놈이 한 호흡을 가쁘게 내쉴 때, 바로 놈의 손과 손목을 베어 낸다.
 
  ̄츄확!
 
 다시 또 새파란 피분수가 튀었다. 내 얼굴에, 내 하얀 도복에. 사방을 온통 새파랗게 물들이고 나서야 성성이의 두 눈에 공포심이 어린다.
 그리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며 도망치려 한다. 어딜 도망치려고.
 성성이의 찢어질 듯한 괴성을 배경으로 삼아 굶주린 늑대처럼, 피를 보고 달려드는 피라냐처럼 치달려 놈의 머리통을 그어 냈다.
 
  ̄스각!
 
 데구르르 머리통이 바닥을 구르고, 주인을 잃은 몸뚱이는 마임을 하듯 허공을 휘젓다 뒤로 쓰러진다.
 잡았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덕분이다. 놈의 완전한 죽음을 확인하자마자 털썩 주저앉는다.
 가슴이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한다. 묘한 탈력감이 온몸을 무겁게 짓누른다. 동시에 어지럼이 핑 돌았다.
 
 ‘···잘했어. 녀석을 상대로 엄청 선전했어. 설마 단시간 내에 검기(劍氣)를 잘 다루게 될 줄은.’
 
 마냥 냉락하기만 했던 목소리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째선 지 열기가 느껴진다. 타고난 무인은 상대를 가리지 않고 호승심을 느낀다던데. 이것도 그런 게 아닌가.
 
 ‘이해도 빠르더구나. 급박한 상황에서도 침착하고, 유연하게 잘 대처했어.’
 
 칭찬을 듣고 기분 나빠할 이는 아무도 없을 거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빡세긴 빡세더라. 절벽 위로 오른 직후, 잠시 동안 숨만 돌리고 바로 붙었던 탓에 몸이 더 무거운 것도 있고. 저런 무지막지한 영물은 처음 상대해 본 터라.
 물론 이렇게 투박하고 단순한 방식으로 싸우지 않아도, 성성이를 쉽게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다만 체력과 내공의 소진도 동시에 빠를 테니 지금은 가급적이면 쓸 일이 없기를 바랐건만.
 
 “······.”
 
 잠깐 눈을 느릿하게 슴벅였다. 하, 한숨과도 같은 웃음이 천천히 흘러나왔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땀이 찬 손바닥을 그러모아 쥔다.
 내 몸 앞으로 생긴 그늘이, 점점 위로 쑥쑥 커간다.
 살아난 것이다. 목을 말끔히 잘라 내고, 두 팔까지 잘랐음에도 불구하고.
 이거,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있기는 한가?
 
  ̄쿠우우우······.
 
 놈의 숨소리가 완전히 달라졌다. 상처를 흡수해 더 강해지고 성장한 듯했다.
 
  ̄쾅!
 
 흙먼지가 성을 내듯 몸을 잔뜩 불린다. 또 애꿎은 땅을 박살 낸 성성이.
 
  ̄크으?
 
 의문성은 왜. 설마 제 공격을 피할 거라 생각은 못 했나 보다.
 검을 중단으로 쥔 채 놈을 마주한다. 새파랬던 동공은 어디로 가고, 거꾸로 뒤집힌 듯 새하얀 흰자위만 보였다. 몸은 조금 위압적으로 다가올 정도로 커져 있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더 이상 부활하지 못할 때까지, 놈을 죽이면 되는 거라고.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 제1초식 창궁약연(蒼穹躍撚)을 익혔습니다.]
 
 성성이와 제대로 놀아 줄 수 있는 방법, 초식(招式). 각 초식마다 정해진 일련의 동작과, 내공의 조화를 통해 하나의 무공을 만드는 과정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 숙련도와 내공에 따라서 무공의 파괴력이 극대화된다. 땅을 가르고, 숲을 일거에 베어 버리듯이.
 
  ̄크와아아아!
 
 놈이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 제1초식 창궁약연(蒼穹躍撚).
 나도 섬전처럼 놈에게 뛰어들었다. 빛처럼 빠른 속도로 놈의 주요 부위를 꿰뚫는다. 1초식, 창궁약연(蒼穹躍撚)은 빠르게 찌르는 쾌검이었다.
 
 [새로운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 초식(招式)을 사용하다.]
 
 후웅, 바람이 거칠게 불었다.
 
  ̄쩌어엉!
 
 콰드득, 콰드득 땅이 신음을 토한다. 이맛살을 살포시 찌푸린다. 확실히 놈은 더 강해졌다.
 그러나 그 힘을 도로 흘려 보낸다. 무식하게 놈의 공격을 받아 낼 필요가 없다.
 
  ̄쿠왁!
 
 검을 하단으로 꺾자마자 주먹을 위로 쳐 냈다. 동시에 옆으로 불어 닥치는 다른 손을 피해 허리를 숙인다.
 찢어질 듯한 파공성이 고막을 두드린다. 마냥 허리를 숙이지만 않고, 원을 그리듯 빙글 돌아 놈의 다리를 그어 냈다.
 
  ̄스각!
 
 새하얀 털로 뒤덮인 두툼한 허벅지에 커다란 균열이 생긴다. 이윽고 피분수가 치솟았다.
 
  ̄크우우우!
 
 다리를 공격할 거라 생각은 못 했겠지. 균형을 잃고 몸이 기울어진 놈에게 재차 섬전처럼 달려든다.
 
  ̄스각, 스각, 스각!
 
 연거푸 세 번은 베었다. 팔, 다리, 허리. 애써 붙었던 팔이 또 날아가고, 반쯤 덜렁거리던 다리가 완전히 찢어지며. 허리는 반쪽이 날아간다.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 제1초식 창궁약연(蒼穹躍撚)의 숙련도가 +1 상승했습니다.]
 
 놈만 강해지고 있는 게 아니다. 나도 강해져 가고 있었다.
 내공은 쓰면 쓸수록 파괴력이 더해지는 힘. 더군다나 내 몸엔 만년백청사(萬年白靑蛇)의 내단이 있다. 기하급수적으로 내공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세심하게 컨트롤하면 내공 탱크까진 아니더라도, 적어도 지쳐 쓰러질 때까지 내공을 쓸 수 있었다.
 어느새 빠르게 회복한 성성이가 내게 발을 휘둘렀다.
 
  ̄깡!
 
 그리고 싸우는 순간에도 조금씩이지만, 경험치가 쌓여 가고 있다. 굳이 퀘스트나, 성장하지 않아도 지속적인 싸움만으로 경험치를 얻을 수 있는 모양이다. 잠깐 흘겨본 내 레벨이 어느새 13을 향해 가고 있으니까. 그야말로 미친 듯이 레벨업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언제 한번 능력치를 봐야겠다. 13레벨까지 올랐음에도, 그동안 얻은 분배 가능한 포인트를 제대로 안 썼던 터라.
 쉴 새 없이 성성이를 베고 벤 나도 슬슬 지칠 법도 한데, 오히려 자신감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싸울 수 있을 것 같아서.
 못 써 본 초식들의 구결이 자꾸만 머리를 맴돌았다. 마치 써달라고 아우성대는 것처럼 말이다.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 제2초식 창궁개벽(蒼穹開闢)을 익혔습니다.]
 
 제1초식이 쾌검이라면, 제2초식은 파괴력을 지닌 쾌검이다.
 그저 찌르기에 불과했던 공격이, 이윽고 베는 것과도 같은 위력으로 발전했다.
 성성이의 주요 부위가 뭉텅뭉텅 잘려 나갔다.
 
 ‘흐응······.’
 
 그걸 또 회복하겠지. 이젠 볼 수 있다. 어떻게 회복하는 건지. 조각난 살점들이 들러붙어 가며 몸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회복하는 속도가 눈에 보일 정도로 느려. 몇 번이고 죽어서 그런 것 같았다.
 그래도 만만하지는 않지. 회복하면 회복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지니까.
 
 
 # 3장 파천신검(破天神劍) 백홍연
 
 지금까지 검을 몇 번이나 휘둘렀는지 모르겠다.
 성성이를 한 번 더 죽였을 때, 레벨이 15가 됐다.
 두 번 죽였을 때, 새로운 업적이 떴다.
 
 [새로운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 영물학살자(靈物虐殺者).]
 
 세 번 죽였을 때, 내 스텟이 전체적으로 올랐다.
 
 [근력 스텟이 +2 상승했습니다.]
 [민첩 스텟이 +2 상승했습니다.]
 [체력 스텟이 +2 상승했습니다.]
 
 스멀스멀, 너덜너덜해진 성성이의 살점끼리 꽁기꽁기 모이는 걸 지켜보며 생각했다.
 이거, 무한정 능력치 파밍이 가능한 거 아니냐고.
 계속해서 오르는 레벨. 그저 잡기만 했을 뿐인데 저절로 달성하는 업적. 마찬가지로 조금씩이지만 오르는 스텟.
 점점 힘들어지긴 해도 개꿀이잖아. 비록 이젠 성성이의 몸이 고개가 뻐근할 때까지 주욱 올려다보아야 할 정도로 커졌지만.
 어떻게든 잡으면 그만이다. 추하더라도 이빨을 쓰든, 검이 아닌 손과 발을 쓰든. 뭐든 하면 되지.
 입가에 들러붙은 성성이의 살점을 거칠게 털어 낸다. 말라붙은 푸르른 피도 손목으로 닦아 냈다.
 원래 구릿한 냄새가 났었는데, 어느새 코가 적응한 것 같다. 아무런 냄새도 안 나.
 계속 피를 묻혀 줘서 고오맙다. 냄새에 적응 못 했으면 싸우기도 전에 혼미해지거나 질식해서 죽었을 거니까.
 상반신을 두르고 있던 허연 도복을 찢었다. 피와 땀에 물들어서 무겁더라. 비 오듯 흐르는 땀으로 번들거리는 상반신이 그대로 밖에 노출된다. 검을 입으로 물고, 도복을 허리에 묶듯이 두른다.
 
  ̄크와아악!
 
 이젠 다 회복한 듯 포효하는 성성이를 보며 검을 천천히, 굳게 꼬나 쥔다.
 이윽고 네 번 죽였을 때, 내가 사용했던 초식들의 숙련도가 크게 상승했다.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 제1초식 창궁약연(蒼穹躍撚)의 숙련도가 +5 상승했습니다.]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 제2초식 창궁개벽(蒼穹開闢)의 숙련도가 +5 상승했습니다.]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 제3초식 창궁수화(蒼穹水和)의 숙련도가 +5 상승했습니다.]
 
 가슴에 묵직한 돌을 끼얹은 것 같아. 몸이 눈에 띄게 무거워진다. 군데군데 이가 빠진 검을 받침대 삼아, 헐떡이며 숨을 골랐다.
 어쩐지 잘 안 죽더라. 노르스름하게 빛을 발하던 검기(劍氣)도 제대로 먹혀들지 않기 시작했다. 찌른 곳을 또다시 찌르고, 베어 낸 곳을 다시 또 베어 내야만 했다.
 
 ‘괜찮아?’
 “잘 모르겠습니다.”
 ‘어때, 강해지는 느낌은?’
 “······.”
 
 강해지는 느낌이 어떻냐고요?
 그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더 힘들어지고 있는 터라.
 그저 허하게 웃었다. 분명 강해지는 느낌은 드는데. 원래 내가 알던 그 무협이 아닌 것 같았다.
 짱짱 센 사부에게 엄청난 무공비급과 웅혼한 내공을 전수받고 순식간에 일류급 고수로 거듭나는, 그런 무협 말이다.
 그런데 나는 아니잖아. 무공비급? 내공? 그런 거 없이 보다시피 거의 방치형 제자로 성장 중이다. 더군다나 절벽을 오르면 본인이 아닌 새하얀 털북숭이가 덮쳐 줄 거라는 말도 없었어.
 ···아무튼 기절할 때까지, 라고 했지.
 이번에 잡을 땐 힘들어서 반쯤 정신이 나갔던 것 같았다. 입술을 계속 짓씹고, 잘근잘근 깨물었다. 피가 나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다음은 더 힘들어지겠지.
 뽈뽈뽈 뭉쳐 드는 살점 덩어리를 보면서 그런 생각도 들었다.
 먹어 버릴까?
 영물이 되기 위해선 최소 천 년에서, 만 년 정도의 초월적인 세월이 흘러야만 한다. 그리고 그런 영물의 몸속에 기가 축적되어 만들어진 게 내단이다.
 만년설미후(萬年雪美猴)의 내단을 내가 먹어 버리면, 놈처럼 살점 단위로 분해되어도 살아나는 거의 불사(不死)에 가까운 몸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아직 내 몸에 다른 영물의 내단이 녹아들고 있다.
 만년백청사(萬年白靑蛇)의 내단. 만약 저걸 먹고 몸속에서 서로 다른 내단의 기운들이 충돌이라도 했다간,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일단 지금은 참자. 과욕은 화를 부르는 법이니까.
 눈꺼풀을 느릿하게 말아 올린다. 억지로 검을 쥔 손에 힘을 들였다.
 
 ***
 
 마침내 다섯 번을 죽였다. 그 대가로 내 왼쪽 팔이 형편없이 뭉개진 채 너덜거렸다.
 안 죽는 놈을 한 번 더 죽인 대가치곤 너무 비싼데.
 
 “젠장.”
 
 입 안이 물기 빠진 고무처럼 텁텁했다. 연거푸 메마른 입술을 핥으며 눈을 뻐끔뻐끔 깜빡였다.
 이제야 직감했다. 영물이 괜히 영물이 아니라는 걸. 수천, 만년이라는 그 기나긴 억겁의 세월을 살 수 있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구나.
 그나저나 새하얗고 잘 벼려졌던 장검이 반으로 두 동강 났다. 쥐고 있던 검집을 던지듯 버렸다.
 이제 더는 검기(劍氣)를 쓸 수 없다. 하다못해 권법이나, 외공이라도 익혔으면 좀 괜찮았을 텐데. 내가 익힌 건 검법이라.
 괜히 미안하네. 이렇게 허무하게 박살을 내 버려서. 나를 위해 준비해 준 비싼 검이었을 건데.
 성성이의 몸이 점점 커져 간다. 처음에는 상대했을 땐 팔 척이었다가. 구 척, 십 척···. 마침내 높디높은 태산처럼. 이젠 주먹이 내 몸뚱어리만큼 컸다. 아름드리나무처럼 아득하다, 아득해.
 꾸우욱 주먹을 말아 쥐었다. 검만 있으면 한번 해봤을 건데.
 다시 말아 쥔 주먹을 푼다.
 검이 있어도 생채기조차 안 날 것 같아.
 몸에 힘을 죽 뺀 채 뒤로 드러누웠다.
 중천에 떠올랐던 밝은 해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있다. 여기선 하늘이 더 잘 보였다. 공기가 너무 깨끗해서 그런가, 우수처럼 아름다운 별들이 햇빛 너머로 드문드문 보인다.
 하늘이 참말로 아름답네. 저도 모르게 구수한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성성이가 울었다. 젠장, 참말로 뭣 같다.
 
 ‘뭐 하는 거야?’
 “기절하려 합니다.”
 ‘그러다 죽어.’
 
 이젠 솥뚜껑 주먹이라 보기 힘들다. 한 대 맞으면 골로 갈 것 같은 주먹이다.
 눈을 질끈 감으니까 은근 무섭다. 어차피 눈 뜨고 있으면 더 무서운 터라 감든, 뜨든 매한가지다.
 그냥 믿기로 했다. 목소리의 주인이자, 내 스승이 될 사람 말이다.
 비록 무공비급이나 내공을 전수해주지 않은 아쉬운 점이 있어도, 그 짧은 시간에 내게 많은 걸 가르쳐 줬다. 검기(劍氣)를 다루는 법부터 해서 공격을 흘리는 방법까지.
 그리고 가장 큰 거, 눈앞의 만년설미후(萬年雪美猴)는 그 사람이 키우고 있다는 거다. 말하는 걸로 봐선 자유자재로 부르고 불러들일 수 있고.
 
 ‘이봐!’
 
 마지막으로 제일 큰 거. 너무 피곤하다. 일어설 땐 팔팔했는데, 막상 드러눕고 나니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다. 졸음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온다.
 
 “···피곤해요.”
 
 그나마 남아 있던 희미한 의식이, 깊디깊은 수면의 심연 속으로 천천히 잠겨 들어간다.
 
 ***
 
 달짝지근하고 감미로운 향.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나, 살아 있구나.
 
 “깼으면 일어나.”
 
 눈을 뜬다. 갈색의 천장이 눈을 가득 물들인다.
 그때 들었던 목소리완 또 느낌이 달랐다. 약간 기계음이 섞인 듯했다면, 지금은 부드럽고 생생한.
 천천히 시선을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본다. 하늘하늘하고 단아한 흰색의 경장. 명상이라도 하는 듯 가부좌를 틀고 있는 순백의 여성.
 
 “몸은 괜찮아?”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나는 그녀의 두 눈을 마주했고.
 뭐라 말을 하려 입술을 달싹이는데, 그녀가 만들어 내는 독특한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멍하니 쳐다보게 된다.
 너무 아름다워서.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풍성하고 윤기 있는 흑발. 도톰하게 죽 뻗은 일자형의 아름다운 눈썹. 매혹적인 라인을 그리는 눈. 그와 정반대의 싸늘하다 싶을 정도로 착 가라앉은 눈동자. 가늘고 죽 뻗은 콧등 아래는, 얇고 도톰한 앵두빛 입술이 자리해 있다.
 신비로웠다. 낯선 아름다움이라고 해야 하나.
 처음 봤다. 이렇게 아름다우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은.
 갸웃, 그녀가 고개를 기울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다. 대답도 안 하고 무슨 실례를······.
 
 “아, 네.”
 “죽은 듯이 잘 자더구나.”
 “얼마나?”
 “이틀.”
 “······.”
 
 이마를 둥글게 감싸 쥔다. 어떻게 그리 오래 잘 수가 있지? 덕분에 머리와 기분이 상쾌하긴 하다. 쉼 없이 움직였던 탓에 삐걱대고 결리던 몸도 말끔히 씻긴 듯 다 나은 듯하고.
 그나저나 이런 생각할 때가 아니다.
 급히 일어나 포권지례(抱拳之禮)를 올린다. 앞으로 내 스승이 될 사람에게 올리는 정중한 인사였다.
 
 “남궁세가의 남궁현이라고 합니다. 저를 도와주시던 목소리의 주인이 맞으신지요?”
 
 확실하게 확인하기 위해 한 번 더 물어본다.
 
 “···맞아.”
 
 입을 뗀 그녀의 입술이 미미하게 호선을 그린다.
 거기에 또 시선을 빼앗긴다. 이건 어쩔 수가 없다.
 그녀에게 표정 변화라는 건 없을 것 같았다. 무미건조한 빛을 띤 눈동자가 너무 차가워서.
 그래서 엷은 미소를 지은 것만으로도 주변이 화악 밝아지는 듯하다. 비단 내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나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거다.
 멀리 있으면서 내게 말할 때 엷게 웃는 소리나, 콧소리를 낼 땐 이런 사람은 상상하진 않았는데. 내가 머릿속으로 그려 낸 건 그냥, 인상이 차갑지 않고 지금보다 좀 더 웃음이 많은 사람?
 
 “나는 백홍연이야.”
 
 ======
 
 [정보를 확인합니다.]
 
  ̄이름: 백홍연
  ̄레벨: ??
  ̄성향: 혼돈 · 중용 · 은둔 · 냉혈
  ̄문파: 멸문( ̄)
  ̄내공: ???
  ̄칭호: 파천신검(破天神劍)
  ̄등급: ?
 
 [종합 능력치가 본인보다 너무 높아서 볼 수 없음.]
 [멸문한 파천문(破天門)의 칠 대 제자.]
 [천재(天才)의 기질을 타고났음.]
 [높디높은 검의 경지를 이룩함.]
 
 [스킬(??/??)]
 
 [환골탈태(煥骨奪胎)]
 [반박귀진(返璞歸眞)]
 [신검합일(身劍合一)]
 [삼라만상(森螺萬象)을 관철하는 자]
 [검신(劍神)]
 
 ======
 
 능력치를 보자마자 두 눈이 부릅떠진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성향에 이것저것 다닥다닥 들러붙은 건 그렇다 쳐도. 그녀가 이룬 경지가 실로 어마어마했다.
 
 “···뭘 보고 있어?”
 “아, 아무것도요.”
 
 급히 고개를 저으며 부인한다.
 백홍연은 궁금하다는 듯 내 눈을 뚫어지게 봤다. 어째 생각을 읽히는 느낌이 들어, 능청스레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한다.
 무려 검신이다. 수많은 영웅호걸이 등장하고, 무림에서 화려하게 활약했어도 검신이라는 경지를 달성한 이는 손에 꼽는다.
 물론 칭호에 검신이 붙는 경우는 있지. 사람들이 마음대로 붙여 주는 거니까. 그러나 진짜와 가짜의 실력 차는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그녀처럼 되기 위해선 태어날 때부터 각종 희귀한 영약들과 약초로 벌모세수(伐毛洗髓)는 물론이거니와, 자라는 과정에서 단 한 번도 번뇌에 들지 않고 꾸준히 자신을 갈고닦아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깨달음을 얻어야 하고.
 사실 이론이 그렇지, 그렇게 해도 그녀처럼 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천재(天才)가 아니라면 감당할 수가 없으니까. 그야말로 천외천(天外天)의 경지였다.
 그런 그녀에 비해 나는 천재(天才)가 아니다. 벌모세수(伐毛洗髓)를 겪지도 않았고.
 주인공 버프 어디 갔어.
 그래도 좋게, 좋게 생각하자. 이런 사람을 무림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행운이다. 또 사부로 모시게 됐잖아. 어쩌면 그게 주인공 버프일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파천문(破天門)이라, 들어 본 적이 없다. 애독자이자 거의 모든 것에 관심 있던 남궁현의 기억에도 없는 걸 보아하니, 전혀 알려지지 않은 문파 같은데.
 묘한 적막이 감돌았다. 내가 그녀에 대해 상념을 이어갈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포기한 그녀는 마냥 손을 느릿하게 꼼지락대고 있었다.
 어째, 나를 어색해하는 것 같다. 아니면 사람이 어색한 건가?
 
 “···나는, 누구를 제자로 받아 본 적 없어.”
 
 아. 속으로 작은 탄식이 흘러나온다.
 그런 거구나. 오로지 검만 잡고 살아온 인생.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렇게 지냈던 걸까. 환골탈태를 겪었다고 했으니, 많은 시간을 들여 경지를 달성했을 것이다. 어쩌면 나이가 수십, 수백은 넘을지도.
 그런데 행동거지나 말투만 봐선 어려 보이는데.
 
 “이제 스물일곱 해가 지난 것 같아.”
 “네?”
 “내가 태어난 해부터, 스물일곱 해.”
 “······.”
 
 그 수많은 경지를 달성했는데, 나이가 고작 스물일곱이라고? 작게 벌어진 입이 다물릴 생각을 않는다. 얼마나 더 놀라야 하지.
 게다가 지구에 있을 때의 나보다 한 살 더 어렸다.
 사실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니 별의별 상상이 다 떠오른다. 사실은 이게 주인공이 백홍연이고, 나는 엑스트라인 무협 소설이라는. 줄거리는 우리들의 만남부터 시작된다거나.
 그래도 많이 배우자. 그녀에게서 배우면 배울수록, 나도 더욱 더 강해질 수 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나도.”
 
 꼬르르륵, 누군가의 배가 울렸다.
 반사적으로 내 배를 짚었다. 무려 이틀을 굶었으니 내가 공복인 건 맞는데. 내 배꼽시계가 울린 적은 없다. 울리면 끓듯이 몸 안에서 반응이 오거든.
 백홍연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말하면 굉장히 실례가 될 듯해서.
 이윽고 한 번 더 꼬르르륵 소리가 났다.
 
 “······.”
 “······.”
 
 확실하다. 실례를 무릅쓰고···. 백홍연의 얼굴을 살짝 본다. 내리깐 시선, 두 볼엔 엷은 홍조가 떠올라 있다. 그녀는 민망해하고 있었다. 당연히 민망하겠지.
 소리가 상당히 컸으니까. 특히 우리 사이에 조용한 적막이 감돌아서 더 컸다.
 
 “혹시, 배고프십니까?”
 
 내가 챙겨 드려야겠다.
 
 스승께 점수를 딸 기회였다.
 
 “응.”
 “평소엔 뭘 드세요?”
 
 설마 이슬만 먹고 살진 않을 거 아냐.
 
 “이슬.”
 “······.”
 
 은근 장난치는 거 좋아하시는 듯하다. 기절할 때까지 성성이랑 싸우라고 하시는 것도 그렇고. 근데 그게 장난이 아니더라. 진짜 기절할 때까지 싸웠잖아.
 
 “나 같은 경지가 되면, 이슬만 먹고 살아도 돼.”
 
 꼬르르륵, 백홍연의 배가 울린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당황스러운지 아랫입술을 깨문다.
 
 “몸이 왜 이러지······.”
 
 얼른 밥 달라는 거죠, 왜 그러겠어요.
 
 “···그럼 요리해 보신 적 없으세요?”
 
 단 한 번도?
 그녀가 작게 고개를 주억인다.
 이런.
 
 “아, 너를 오랫동안 지켜봐서 그런 것 같아. 성성이와 겨룰 당시 너에게 말을 걸기 위해 적지 않은 내력을 소모했으니까.”
 
 당황스러워서 변명까지 한다. 뭐지, 귀여운데?
 당소유는 어린아이 같은 귀여움이 있다면, 백홍연은 반전 매력이었다. 두 눈을 보고 있노라면 북풍한설이 휘몰아치는 듯한 싸늘함을 느끼는데, 정작 행동거지를 보면 그렇지가 않다. 어디 한 군데 맹한 곳이 있었다.
 검만 보며 살아온 외골수라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괜찮아. 이슬을 마시면 돼.”
 “아뇨.”
 
 그러면 내가 곤란하다. 꼬르르륵, 이번에는 내 배에서 소리가 났다.
 나도 무진장 배고프니까. 벌떡 일어난다.
 백홍연이 그 기세에 놀라서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제가 해 오겠습니다.”
 “아, 그럼 나도.”
 “같이 가시게요? 그러지 말고 스승님은 딱, 여기 계세요.”
 
 엉거주춤 일어선 백홍연을 도로 자리에 앉힌다.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야겠다. 당당한 포부로 스승님의 집을 나선다.
 한번 떠올려 보자. 무림에선 주로 뭘 먹는지.
 
 [랭크 F 요리 스킬을 익혔습니다.]
 [만든 요리에 따라 요리 경험치가 쌓이며, 좋은 걸 만들수록 능력치 및 업적 보너스가 부여됩니다.]
 
 무림에서 먹는 건 지구에 있을 때와 달랐다. 더군다나 만드는 법도 몰라서 힘들 것 같고. 내가 지구에 있을 땐 주로 찌개를 끓여 먹었는데, 여기서도 재료를 구할 수 있으려나?
 언제 한번 찾아봐야겠다.
 지금으로선 제일 좋은 건 고기다. 특히 영물들이 많다고 했으니, 분명 영물이 아닌 동물들도 많을 것이다.
 
  ̄쿠웅!
 
 힘차게 나아가던 내 앞길을 가로막는 존재가 있었다. 새하얀 털, 눈에 띄게 작아진 덩치. 천천히 고개를 올려 보니 나와 박 터지게 겨뤘던 놈이다.
 만년설미후(萬年雪美猴). 예상대로 내게 엷은 적개심을 드러낸다.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검이 있어야 할 자리가 허전하다. 두 동강 났었지.
 
 “지금은 바빠. 너랑 싸우고 싶은 생각 없으니 비켜 줘.”
 
 그러나 비켜 줄 생각을 않는다. 이게. 그리고 성성이의 돌발 행동에 눈도 커지고, 눈썹이 치켜 올라간다.
 녀석이 내 앞에 쭈그려 앉아, 등을 보였다.
 
 ‘타. 성성이를 타면 더 빠를 거야.’
 
 ***
 
 바람이 칼날처럼 얼굴을 벤다. 멀었던 정경들이 순식간에 눈앞을 스쳐 간다.
 설마 어제의 적이 오늘의 아군이 될 줄은.
 빠르다, 빨라. 굳이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쓸 필요 있나, 싶었는데. 절로 작은 탄성이 비어져 나올 정도로 엄청 좋다.
 게다가 똑똑해. 내가 바닥을 모조리 훑는 건 힘드니까, 좀 도와달라고 부탁했더니 한 번씩 멈춰서 휙휙 고개를 돌려 주고 있다.
 덕분에 사냥이 빠를 것 같다. 그리고 첫 사냥감은 새까맣고 덩치가 한 아름처럼 큰 멧돼지였다. 마침 한 군데에 머물러 포식 중이었던 터라 다가가기 쉬웠다.
 
  ̄쿠웅!
 
 멧돼지 바로 근처에 착지한 성성이가.
 후웅, 곧바로 큼지막한 팔을 휘둘러 멧돼지를 쳐 낸다. 퀘엑, 날선 비명이 울려 퍼지자마자, 아름드리나무에 몸을 부딪친 멧돼지가 그대로 옆으로 고꾸라진다. 녀석의 배가 반쯤 터져 버렸다. 잔혹하네.
 새삼 성성이의 근력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멧돼지가 방심한 것도 한몫했다. 포식하는 데 정신이 팔려서 그런지, 도망갈 낌새조차 없더라.
 멧돼지가 죽은 걸 확인한 순간, 성성이가 포효하며 엄청 좋아라 한다.
 
  ̄크와아아악!
 
 그리고 스리슬쩍 나를 본다. 나는 이 정도 하는데, 너는 뭐 하냐고 묻는 듯하다.
 엷게 웃었다.
 이 녀석, 나를 견제하고 있구나. 귀엽기는.
 어디선가 바스락 소리가 났다. 시선이 돌아간다. 한 아름 정도 되는 덩치에, 짙은 흑색의 털빛. 또 다른 멧돼지다.
 곧바로 튀려는 것 같길래, 얼른 성성이의 등을 박차고 뛰었다.
 
  ̄크악!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간다. 몸놀림이 전보다 훨씬 더 가볍다. 약하게 뛰었을 뿐인데도, 멧돼지와의 거리가 점점 좁혀 들어갔다.
 
  ̄쿵, 쿵!
 
 뒤늦게 성성이가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점프 한 번이라도 하면 나보다 앞지를 수 있을지도.
 그러니 더 빨리, 더 빠르게 발을 놀린다. 눈앞의 파노라마가 찌그러지며 시야에서 사라져 간다.
 멧돼지와의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진다.
 뚝, 근처에 있는 나뭇가지를 꺾었다. 내공이 눈 깜짝할 새에 몸 내부를 돌았다.
 쑤우욱 자란 노르스름한 검기가 나뭇가지를 덮는다. 전보다 그 색이 눈에 띄게 선명해지고, 굵기도 굵어진 듯하다.
 확실히 강해졌다.
 타닷, 땅을 박차 멧돼지를 덮친다. 동시에 녀석의 머리 위에 나뭇가지를 찍고 거칠게 비틀었다.
 
  ̄뚜둑!
 
 비명조차 없었다. 멧돼지는 달리는 속도 그대로 눈 위를 미끄러지다, 성성이의 발치에서 멈췄다.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는 눈길을 느꼈다.
 태연히 멧돼지의 머리 위에서 걸어 나온다. 성성이 좀 골려 줄까.
 고갯짓으로 성성이가 들고 있는 멧돼지를 가리킨다. 터져 버린 배에서 시뻘건 내장이 뚝뚝 흘러나오고 있다.
 
 “배가 터져서 아쉽네. 나처럼 깨끗하게 잡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크르륵······.
 
 녀석의 위협에 지지 않고 마주 노려본다. 먼저 걸어온 도발을 마냥 참고 넘어갈 순 없더라. 아니면, 더 강해졌으니 또 이틀 전처럼 한번 박 터지게 싸워 볼까 봐.
 서로의 호승심이 점차 짙어지는 순간.
 
 ‘그만해.’
 
 백홍연이 제지한다.
 어깨를 으쓱인다.
 
 ‘사냥은 끝난 거야?’
 “네.”
 
 원래는 한 마리만 잡으려 했다. 뜻하지 않게 한 마리를 더 잡았으니, 이제 돌아가도 될 것 같았다.
 
 ‘돌아와.’
 
 후웅, 기다렸다는 듯 성성이가 나를 두고 뛰어간다. 얼마나 꽉 쥐고 뛰었으면, 멧돼지의 터진 배가 더욱 벌어지는 걸까. 더군다나 저렇게 쥐다간 찌그러져서 먹을 것도 안 남겠다.
 성성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사라진다.
 피식 웃음이 흘러나온다. 쫌생이네, 쫌생이. 내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언제 한번 날 잡아서 참교육을 해야지.
 입술을 핥는다.
 그것도 아니면, 다시 살아나지 못하게 먹어 버리는 것도 있고.
 멧돼지를 어깨에 두르고 천천히 하산한다.
 내가 하고 싶은 요리는 바비큐였다. 잡아 온 멧돼지 둘의 털을 말끔히 벗겨 낸 후, 배를 갈라 내장을 모조리 꺼낸다. 그리고 쓱싹쓱싹 씻긴다.
 물은 성성이가 길러다 주고 있다. 나랑 어울리긴 싫어하는데, 백홍연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따르는 모양새다.
 미리 준비해 둔 꼬챙이에 멧돼지의 머리부터, 꼬리까지 힘을 실어 꽂는다. 다른 하나도 똑같이 꽂아 주고.
 이것저것 하다 보니까 몰입한 듯했다. 지금까지 뚫어져라 바라보던 두 쌍의 시선을 잊고 있었다.
 내가 바라보자마자 눈을 피하며 얼굴을 긁적이는 백홍연, 팔짱을 낀 채 뚱한 얼굴로 먼 산을 바라보는 성성이.
 신기한가 보다. 비스듬히 웃고는, 다시 내 할 일에 집중했다. 꼬챙이를 고정시키고, 불을 피우면······.
 
 “······!”
  ̄······!
 
 완성이다.
 지글지글, 멧돼지가 노릇하게 익기 시작했다.
 
 [새로운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 요리를 하다.]
 [업적 보너스를 획득했습니다.]
 [‘요리를 배우다’ 업적 보너스로 전체 스텟이 +1 상승했습니다.]
 [요리(랭크: F)의 숙련도가 +1 상승했습니다.]
 [요리 목록에 ‘바베큐’가 추가되었습니다.]
 [‘요리’스킬 보정으로 ‘바베큐’의 맛이 조금 좋아집니다.]
 [‘요리’스킬 보정으로 굽는 시간이 단축됩니다.]
 [‘요리’스킬 보정으로 향신료를 사용하지 않아도, 좋은 맛을 낼 수 있습니다.]
 
 오, 다행이다. 향신료도 없고, 시간이 많이 걸릴 듯해서 좀 걱정했는데.
 이제 꼬챙이를 끼릭끼릭 돌려 주면서, 잘 익혀 주는 게 중요하다.
 그나저나 더는 못 참겠나 보다. 백홍연이 뚜벅뚜벅 내 쪽으로 걸어와 옆에 걸터앉는다.
 
 “뭐 하는 거야?”
 “바베큐요.”
 
 영어잖아. 이런 말 하면 모를 건데.
 
 “바베큐?”
 “네. 그냥, 통으로 굽는 거예요. 이렇게 요리조리 돌려서 골고루 잘 익게 해 주고.”
 “아···. 이런 건 처음 봐.”
 
 백홍연의 차가운 눈동자에 작은 호기심이 피어난다.
 그걸 보는 내 가슴은 찢어질 것만 같다. 젠장, 바베큐를 못 먹어 봤다니.
 어쩜 이렇게 안타까운 경우가 있지. 당장 무림에 가면 이보다 더한 대접을 받으실 수 있는 분이다. 정파의 인물 중 가장 강하다는 현 무림맹의 맹주도 검에 대해 일가견이 있으나, 그녀에게는 못 미칠 거라 확신했다.
 진짜 잘해드려야겠다. 비록 요리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이것저것 배워서 먹여 드려야겠다.
 
 “···또 알 수 없는 표정.”
 “별생각 안 했어요. 그냥, 스승님께 맛있는 거 많이 만들어 드려야겠다?”
 “나한테?”
 “네. 이슬만 먹고 사셨다면서요.”
 “응, 여러 욕구에 대해선 초탈하게 됐으니까. 그리고 신공을 운용하면, 배가 전혀 고프지 않아. 최소한의 물, 이슬만 마셔도 살아갈 수 있어.”
 “······.”
 
 신공(神功)? 남궁현의 기억상으론 내공을 운용하고 쌓는 방법이라고 했다. 일명 심법(心法)이라는 거다. 그걸 통해서 내공을 증진시키는 것도 가능하고.
 그나저나 그거 하나로 배가 고프지도 않고, 이슬만 마셔도 살아갈 수 있다니.
 인간은 본디 오욕칠정(五慾七情)이라는 게 있다.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가지게 되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와 감정들 말이다. 그런데 신공 하나로 그 욕구를 억누를 수 있다고, 그녀는 그리 말하고 있다.
 무림에서 가장 유명하고 세력이 큰 오대세가 중 하나인, 남궁세가의 비기 창궁대연신공(蒼穹大衍神功)조차도 그런 건 없는데.
 무공은 필히 파천문(破天門)에서 배웠을 것이다. 들어본 적 없는 신비문파. 그 문파의 칠 대 제자라고 했으니, 분명 그 위로 백홍연보다 더 강한 사람들이 여섯 명은 더 있을 터다.
 그런데 멸문했다고 한다. 그처럼 강한 이들이 소속된 신비문파가 멸문했다는 게······.
 이상하다.
 애써 생각을 뇌리 저편으로 밀어 둔다. 당사자가 눈앞에 있잖아. 당사자가 말해 주는 게 아니라면, 사실 모든 게 다 불확실한 거다.
 상태창을 너무 과신하고 있었다.
 물론 내게 도움이 될 때도 많지만, 그걸 과신해서 혼자 결론을 내리는 짓은 하지 말자.
 지금은 몰라도, 나중에 가면 이게 극히 위험한 요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항상 조심할 필요가 있다.
 
 “혹시나 해서 그러는데요, 스승님.”
 “응?”
 “···그거 쓰신 건 아니죠?”
 
 백홍연의 시선이 잠깐 왼쪽으로 갔다가 돌아온다.
 
 “······.”
 “······.”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얼굴에 다 쓰여 있네. 나, 썼다고. 그래도 태연하게 거짓말하면 되는데, 거짓말을 못 하시는 모양이다.
 꼬르르르륵, 나만 손해네. 손해야.
 
 “아아···. 배고프다.”
 
 꼬챙이를 돌리다 말고 배를 감싸 안은 채 웅크린다.
 
 “현아, 쓰면 안 돼?”
 
 처음으로 백홍연이 내 이름을 불러 줬다. 비록 지구에서의 이름이 아니라, 여기 이름이긴 하지만. 귀에 부드럽게 감겨 올 정도로 목소리가 좋았다.
 한 번만 더 들어 보자.
 
 “···네?”
 “쓰면 안 되는 건가 해서.”
 “에이, 상관없어요. 그전에 절 뭐라고 부르셨죠?”
 
 백홍연이 고개를 살포시 기울인다.
 
 “···현아.”
 
 입가에 흐뭇한 피소가 피어난다.
 힘나네, 힘나. 속은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아저씨가, 고작 이름 듣는 걸로 기운 내다니. 주책맞네, 정말로.
 
 “네, 제가 현입니다. 하하.”
 
 그래도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지. 어차피 아무도 모르잖아.
 이야기를 하다 보니 멧돼지가 금방 노릇하게 구워졌다. 하나는 나와 백홍연 거.
 다른 하나는 노릇하게 구워진 멧돼지를 죽일 듯이 보는 성성이 거.
 굳이 녀석에게 안 줘도 되는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멧돼지를 잡을 때 내가 이겼으니, 승리자의 아량으로 베풀어 주는 거다.
 
 “야, 성성아.”
  ̄크륵?
 
 시비 거려는 거 아니다, 이 자식아.
 받침대에 걸린 꼬챙이를 빼서, 녀석에게 힘껏 던져 준다.
 
  ̄······!
 
 녀석이 반색하며 꼬챙이를 잡는다. 표정은 언제 먹구름이 꼈냐는 듯 환했다. 물론 뜨겁디뜨겁게 달아오른 꼬챙이를 잡기 전까지만.
 
  ̄갸아아악!
 
 뜨겁다고 발광하는 녀석을 보며 키득키득 웃는다. 그게 그렇게도 좋니.
 어라. 옆에 있던 백홍연도 희미하게 웃음소리를 낸다. 그녀도 성성이가 춤추는 꼴이 우스운 모양이다.
 그 때문에 그런가, 성성이는 성내지 않았다. 전처럼 뚫어져라 노려보지도 않고. 그저 빙글 돌아 앉아 멧돼지를 게걸스레 뜯어먹기 시작한다.
 우리도 먹어야지.
 
 “뜨거우니까 조심히 드세요.”
 “응.”
 
 고기를 보던 백홍연의 눈길에 기대감이 어려 있다. 처음 먹어 보는 거니까, 부디 맛있으면 좋겠다. 앞으론 이슬 대신 고기도 드셔야 할 텐데.
 나는 바로 먹지 않고 백홍연이 먹는 모습을 봤다. 모락모락 올라오는 살점 사이로 본 긴장한 얼굴이, 이윽고 천천히 살점을 한입 베어 무는 순간.
 표정이 묘하게 변한다.
 설마.
 잠깐 굳었다가, 서서히 옴뇸뇸 씹어 먹는다. 예상보다 표정이 안 좋길래 맛없나 싶었는데, 그녀의 얼굴 위로 잔잔한 화색이 피어났다.
 
 “···맛있어.”
 
 [‘바베큐’ 요리가 극찬을 받았습니다.]
 [소량의 명성치를 획득하였습니다.]
 [요리(랭크: F)의 숙련도가 +1 상승했습니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남궁현이라서 정말 다행이다.
 그나저나 이대로라면 진짜 공복으로 죽을 것 같다. 배가 꼬르르륵 대는 소리로 터지기 전에, 나도 얼른 멧돼지 다리를 뜯어먹었다.
 한번 맛을 본 순간, 눈이 흡 하고 치떠진다. 대박이다.
 양념은 전혀 하지 않았는데. 쫄깃쫄깃하고, 속에 든 허연 속살은 녹아들 듯 뜨거웠다. 야생의 식감이 입 안에서 폭발하고, 달달한 육즙이 입 안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거기서 그대로 고개를 파묻었다.
 
 <『레벨업하는 남궁세가 소공자님』 1-2권에 계속>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