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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S급 공무원 01권

2019.08.02 조회 3,271 추천 40


 SSS급 공무원 01권
 
 목차
 
 프롤로그
 1장
 2장
 3장
 4장
 
 
 프롤로그
 
 
 공무원이 일등 신랑감이던 시대가 있었다.
 그때는 9급 공무원 경쟁률이 무려 100:1을 넘어갔고, 노량진과 신림 일대가 공시생들로 가득 찼다.
 하지만 제법 많은 세월이 흐른 현재.
 사람들은 더 이상 공무원을 꿈꾸지 않는다.
 지금은 바야흐로 헌터의 시대다.
 헌터들은 연예인보다 많은 인기를 누리며 스포츠 스타보다 많은 돈을 벌어들인다.
 세계 최초로 7성 몬스터를 사냥하는 광경이 생중계됐을 당시, 각국의 역대 시청률이 모조리 갱신됐을 정도다.
 오죽하면 학창 시절 별다른 꿈이 없던 내가 장래희망에 헌터를 적어냈겠는가.
 사실 국가공인 테스트에서 월등한 수치가 나왔을 때는 정말 헌터가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공무원이 되어 있었다.
 
 
 1장
 
 
 늘 만나던 카페에서 보자는 여자 친구의 전화를 받는 순간 정후는 이별을 직감했다.
 얼마 전부터 태도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싶더니 결국 헤어지려는 모양이다.
 ‘그래. 어차피 마음 떠난 마당에 쿨하게 놔주자. 결혼을 약속했던 것도 아니잖아.’
 그렇게 생각하고 약속 장소에 나갔건만, 막상 여자 친구 미정의 환한 얼굴을 보자 기분이 언짢았다.
 바람피우는 거 뻔히 알고도 눈감아줬는데 이별할 때만이라도 티 안 내면 어디 덧나나.
 눈은 스마트폰 화면을 쳐다보면서 미정이 입을 열었다.
 “할 얘기가 있어.”
 “응. 꺼져.”
 얼마나 당황했는지 미정의 반응은 한참 늦었다.
 미정과 만나는 동안 욕은커녕 싫은 소리 한 번 안 했던 정후이기에 충격이 더했다.
 “······뭐?”
 “헤어지자는 얘기하러 온 거 아니었어?”
 틀린 말은 아니기에 미정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거야 그렇지만.”
 “뭐, 그럼 더 얘기할 필요 있나? 서로 갈 길 가자. 넌 클럽에서 만난 남자 잘 사귀고, 난 하던 일 계속하고.”
 아직 입도 대지 않은 커피를 쳐다보며 정후는 기어이 한마디 더 했다.
 “아, 그 남자 잘 나가는 헌터라며. 잘됐다. 너 헌터랑 만나고 싶어 했잖아.”
 미정이 눈을 치켜떴다.
 “너, 나 뒷조사했니? 공무원이 그래도 돼?”
 물론 뒷조사를 한 건 아니다.
 상대 남자가 새 애인이라며 미정의 사진을 자랑하는 자리에 우연히 정후가 있었을 뿐.
 하지만 정후는 해명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이제 와서 믿어줄 미정도 아니고.
 “끝까지 그놈의 공무원 소리······ 지겹지도 않냐?”
 솔직히 정후도 어느 정도 마음이 떠난 상태였다.
 항상 헌터와 비교하며 은근히 공무원인 정후를 깔아 내리는 미정의 태도에.
 그래도 중, 고등학교 동창에 첫사랑이라 의리를 지키려 했는데, 적당히 속물이어야지.
 “왜? 자격지심 들어? 그럼 너도 헌터하지 그랬니? 아, 미안. 그럴 능력은 안 됐지.”
 미정의 유치한 도발에도 정후는 웃기만 했다.
 그녀는 자신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 일부러 업무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진 않았다. 나름 숨겨야 하는 기밀이기도 했고.
 그래도 그녀에게 사준 선물이며, 함께 다닌 여행하며, 대충 감은 잡아야 정상 아닌가.
 평범한 공무원 월급으론 절대 불가능한 수준이란 걸.
 “자격지심은 너한테나 어울리는 얘기지. 친구 중에 헌터랑 사귄다고 질투하던 건 벌써 까먹었어?”
 “찌질한 새끼!”
 마시던 커피를 정후 얼굴에 쏟아부은 미정은 뒤도 안 돌아보고 카페를 빠져나갔다.
 홀로 남겨진 정후는 테이블 위에 쏟아진 커피를 쳐다보고 혀를 찼다.
 “처먹지도 않을 거면 시키지나 말지. 하여간 그 나이 되도록 용돈만 받아 써서 그런가, 돈 아까운 줄을 몰라요.”
 “저기요.”
 막 이별한 정후에게 다가온 건 창가 쪽에 앉아 있던 여자였다.
 새로운 사랑의 시작은······ 물론 아니었다.
 나이는 이십 대 중반 정도. 대학생도 직장인도 아닌 독특한 분위기. 정후는 어렵지 않게 그녀의 정체를 짐작했다.
 업계 사람이군.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여자가 테이블에 쏟아진 커피를 가리켰다.
 “방금 배리어로 커피 막으신 거 맞죠?”
 찰나의 순간 정후가 스킬을 발동시키는 걸 본 모양이다.
 눈썰미 80점. 전투력은 70점쯤 되려나. 가슴은······.
 정후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와! 대단하시다. 그렇게 바로 앞에서 막으려면 오러(Aura) 반응속도가 기본은 넘어야 하는데.”
 오러는 헌터가 스킬, 그러니까 쉽게 말해 초능력을 사용하기 위한 에너지다.
 “잘 아시네요. 혹시 업계 사람이신가?”
 “아, 소개가 늦었죠? 전 이런 일을 하고 있어요.”
 정후는 여자가 내미는 명함을 건네받았다.
 
 [팀 블랙호크 에이전트 박미나]
 
 이런 명함이 어색하지 않게 된 건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이다.
 갑작스레 게이트가 생성되고 그 안에서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면서 세상은 혼란에 빠졌다.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난 게이트는 점점 확장되며 공간을 집어삼켰고 몬스터들은 살아 있는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습격하여 먹어치웠다.
 군부대가 투입됐지만 고전을 면치 못했다.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는 중화기도 몬스터들에겐 비효율적이었다.
 다행히 언제나 그렇듯 인류는 방법을 찾아냈다.
 게이트를 소멸시키는 방법, 몬스터를 상대하는 방법, 대피 시스템과 보상 체계가 차례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인류를 멸망시킬 거라 우려되던 몬스터는 언젠가부터 인류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거의 모든 산업에 몬스터의 시체가 사용되고, 몬스터 연구를 통해 새로운 기술이 탄생했다.
 그 중심엔 헌터가 있다.
 몬스터를 전문적으로 사냥하는 초인들. 그들은 때로는 개인으로, 때로는 조직에 소속되어 활동한다.
 컴퍼니(Company)가 기존의 기업들이 헌터들을 고용해 만든 조직이라면, 정후 앞의 박미나가 속한 팀(Team) 같은 경우, 개인들이 연합하여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블랙호크라면 꽤 괜찮은 팀이라고 들었는데.”
 “알고 계셨구나! 아직 신생이라 인지도는 떨어지지만 실력자가 많아서 앞으로 발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답니다. 혹시 생각 있으시면······.”
 영입 제안이었다.
 정후가 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한데 제가 공무원이라.”
 “······공무원이요?”
 들떠있던 박미나의 반응이 확 가라앉는다. 그도 그럴 게 이 시대는 헌터가 각광 받는 시대다.
 판검사나 의사도 헌터 앞에서 한 수 접고 들어가는 판에, 하물며 공무원은 오죽할까.
 “그럼 아까 그 스킬은?”
 “운 좋게 스킬이 개방되긴 했거든요. 잠깐이지만 헌터 자격시험 준비도 했었고.”
 “······아.”
 그제야 박미나는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게이트가 생성되면서 인류에겐 오러라는 힘이 주어졌다.
 하지만 스킬을 개방하지 못하면 오러는 아무 짝에 쓸모가 없었다. 휘발유를 담는다고 드럼통이 달릴 순 없는 것처럼.
 통계적으로 스킬이 개방되는 비율은 인류의 1퍼센트 정도. 하지만 몬스터와 대항할 수 있는 수준의 스킬을 개방한 이들은 0.1퍼센트도 되지 않았다.
 헌터가 될 수 없는 초능력자들은 일반인보다 조금 편한 삶을 살 뿐이다.
 이를테면 정후처럼 애인이 쏟는 커피를 막는다던가.
 “실례했습니다. 괜히 귀찮게 해서 죄송해요.”
 고개를 숙여 보이고 물러나는 박미나에게.
 “뭐, 그래도 인연이니 나중에 보면 인사라도 해요. 제가 이쪽 업계 담당이라.”
 정후는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사실 담당 공무원이라고 해봐야 헌터를 보조하는 역할이다. 더군다나 정후 정도 나이면 몬스터 사체 수거 따위나 할 게 뻔했다.
 ‘뭐, 그것도 일단은 공무원이긴 한데.’
 딱히 관심은 없는 박미나였다. 애초에 헌터를 스카우트하려고 했던 거니까.
 박미나가 창가 자리로 돌아갔을 때였다.
 쿠우웅!
 땅이 흔들렸다.
 예전이라면 지진을 의심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어?”
 “설마?”
 카페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직접 경험하지 않더라도 다들 게이트가 어떻게 생성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방송에서 주기적으로 교육받았으니까.
 “하지만 게이트 생성 예보는 없었는데?”
 기상청의 일기예보나 지진예보처럼 게이트가 생성되는 지역엔 사전에 경고 방송이 나갔다.
 문자메시지 폭탄이 쏟아지고, 사이렌이 울리기도 다반사. 하지만 방금까지만 해도 그런 낌새는 전혀 없었다.
 “그냥 지진인가?”
 커플로 보이는 남녀가 말하는 순간.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유리창이 와장창 깨져나갔다.
 “꺄아아악!”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박미나는 신중하게 주변을 살폈다.
 있었다.
 카페 출입문 밖에 지면 위로 3미터쯤 일그러진 공간이.
 게이트였다.
 박미나가 재차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여전히 게이트 생성 관련 정보는 없었다.
 재난관리본부는 물론이고 관계자들만 접속 가능한 커뮤니티에도.
 “설마······.”
 그 순간 박미나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미감지 게이트였다.
 헌터들 사이에서 속칭 로또라 불리는, 시스템에 절대 감지되지 않는 게이트.
 로또라 불리는 이유가 있었다.
 미감지 게이트는 대체로 일반적인 게이트에 비해 훨씬 위험하다.
 그리고 위험한 만큼 몬스터 사체에서 나오는 부산물의 가치도 컸다. 게이트 내부의 전리품도 마찬가지.
 하지만 로또는 당첨되는 경우보다 꽝인 경우가 훨씬 많다.
 지금처럼 주위에 지원해 줄 인원이 없을 때, 미감지 게이트는 말 그대로 꽝이었다.
 박미나가 발을 동동 굴렀다.
 “젠장! ······어쩌지?”
 헌터를 영입하는 에이전트는 자신 역시 헌터인 경우가 많다. 헌터의 자질을 알아보는 안목과 실력을 갖춰야 하기 때문.
 박미나 역시 헌터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혼자 게이트를 마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홀로 벗어날 자신은 있었지만 다른 사람을 구하거나 게이트를 공략하기란 무리였다.
 당황한 박미나, 혼란에 빠진 사람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정후만은 유난히 침착했다.
 “자자. 여러분, 진정하세요. 저는 국가재난관리본부 소속 공무원 이정후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안내에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누구도 안심한 표정이 아니었다.
 실력 있는 헌터라면 몰라도 공무원은 전혀 의지할 존재가 아니었다.
 “공무원? 경보는 어쩌고 이제 와서 뒤늦게 안내하는 척이야! 세금 도둑 같으니라고!”
 카페 사장은 삿대질까지 해가며 항의했다. 하지만 정후는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민원은 나중에. 여러분, 일반적으로 게이트 생성 이후 몬스터 출현까지는 3분에서 5분이 소요됩니다. 몬스터가 게이트를 찢고 나오기 전에 대피하십시오. 개체에 따라 다르지만 몬스터 행동반경은 평균적으로 반경 1킬로미터. 그 이상 대피하시되 다른 사람을 보면 위험 사항을 전파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후로부터 주의 사항을 전달받은 사람들은 황급히 카페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제길!”
 카페 사장도 머뭇거리다 결국 탈출했다. 어차피 보험도 들어 뒀고 국가에서 보상금도 나올 테니 목숨 걸고 가게를 지킬 이유가 없었다.
 사람들이 탈출한 것을 확인한 정후가 박미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쪽은요?”
 박미나가 하고 싶은 질문이었다.
 보통 공무원은 사건이 종료된 후에나 현장에 나타난다. 오죽하면 공무원을 청소부라 비하하는 헌터들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정후는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헌터라고 하셨죠. 여기서 나오는 몬스터들 사냥하실 건가 보네. 근처에 지원 인원 있어요? 아니면 솔로잉?”
 지원 인원은 없다. 솔로잉 할 배짱은 더더욱 없고.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게이트 안으로 진입은 불가합니다. 아시죠? 게이트 내부로 들어가려면 허가받아야 하는 거. 제가 공무원이라 이런 쪽은 깐깐해서.”
 결국 참지 못하고 박미나가 물으려던 그때, 게이트의 균열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이런. 벌써 나오나 보네. 아직 2분 27초밖에 안 지났는데.”
 박미나는 하려던 말도 잊고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정후를 쳐다봤다.
 ‘당신, 여기 남아서 뭐 하나 했더니, 시간 재고 있었어?’
 정후는 한술 더 떠 팔짱까지 끼고 균열 안을 주시했다.
 “자아, 뭐가 나오려나.”
 마치 생일 선물을 확인하는 아이 같은 모습에 박미나가 머리를 움켜쥐는 찰나.
 스으윽.
 균열을 비집고 거대한 형체가 나타났다.
 가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고작 지름 3미터 남짓의 균열에서 어떻게 그렇게 거대한 몬스터가 튀어나올 수 있는 것인지.
 지금이 그런 경우였고, 박미나는 욕설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X발.”
 게이트에서 나타난 것은 몸길이만 10미터에 달하는 몬스터였다.
 바위장갑으로 둘러싸인 피부, 날름거리는 잿빛의 혓바닥.
 그건 명백히 뱀이었다.
 박미나의 머릿속에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다. 본 적은 없었고 들은 적이 있을 뿐이다.
 바위뱀.
 4성 몬스터.
 C급 이하 헌터 절대 접근 금지.
 그렇다고 B급 헌터가 잡을 수 있는 몬스터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었다.
 그저 ‘관전’하는 게 허용될 뿐.
 그것도 근처에 바위뱀을 완벽히 제압할 실력자들이 존재한다는 가정하에.
 그리고 지금 이곳엔 B급 헌터인 박미나 자신과 건장한 청년이긴 하지만 일개 ‘공무원’인 정후뿐이다.
 바위뱀이 눈을 껌뻑이는 찰나의 순간, 박미나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그냥 뒤도 안 돌아보고 튀었어야 됐는데 무슨 꼴을 보겠다고 여기 남아 있었을까. 젠장, 이게 다 저 정후라는 남자 때문이다. 애인한테 차였으면 집에 가서 소주나 깔 것이지, 괜히 나까지 휘말리게!’
 박미나의 원성을 들은 걸까.
 정후가 다시 옆을 돌아봤다.
 “바위뱀이네요. 사냥하실 건가요?”
 ‘X발, 지금 나 놀리는 거지?’
 “뭐, 내키지 않으면 말고요.”
 마치 다른 방법이 있다는 말투여서 박미나는 은근히 기대했다.
 ‘하긴 아무리 그래도 아무 대책 없이 남아 있었겠어?’
 그리고 그녀의 기대를 무너뜨리듯.
 스윽.
 정후가 꺼내든 물건은 스마트폰이었다.
 “뭐 해요? 지금?”
 “전화기로 전화 말고 뭘 하겠어요? 인증샷이라도 찍을까?”
 “그럼······ 지금 지원 요청하려고?”
 끄덕끄덕.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이는 정후의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건물 벽을 무너뜨린 바위뱀이 정후 바로 앞까지 접근한 것이다.
 박미나가 정후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원래 바위뱀은 상황 인식이 늦다. 사냥감을 포착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의미다. 하지만 일단 사냥감을 지정하면.
 쩌어어억!
 절대 놓치지 않는다.
 바로 지금처럼.
 난생처음 바위뱀의 습격 장면을 목격한 박미나가 입을 벌렸다.
 ‘아니, 이 머저리 같은 인간아, 전화를 할 거면 진작에 하던가! 통화음 울리기도 전에 잡아먹히게 생겼다고!’
 ······같은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진심을 담아 외쳤다.
 “피해요!”
 그 순간.
 삐-
 정후의 스마트폰 너머에서 단 한 번의 발신음이 울렸다.
 
 * * *
 
 “······!”
 박미나는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보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맞았다.
 실제로 발신음이 울린 이후의 상황은 그녀의 반응 수준을 훨씬 넘어 진행되었다.
 먼저 정후를 집어삼키려던 바위뱀의 입이 그대로 벌려졌다. 바위뱀이 원한 것이 아니다.
 발신음이 울리기 무섭게 허공에 나타난 형체가 바위뱀의 턱관절을 강제로 탈구시켰다. 그와 동시에 다른 형체가 바위뱀을 강타했다.
 파파파파팍!
 너무 빨라서 몇 번이나 쳤는지 박미나의 눈엔 보이지도 않았다.
 자욱하게 일어나는 흙먼지가 실은 바위뱀의 피라는 사실 역시, 그녀가 알 리 없었다.
 “어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얼빠진 소리를 내뱉는 사이. 쿠웅, 소리를 내며 바위뱀이 쓰러졌다. 거대한 몸이 건물 벽에 부딪히며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걸로 끝이었다.
 바위뱀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정말 돌이라도 된 것처럼 건물의 잔해 속에 파묻혀 있었다.
 ‘죽은 거야? 정말? ······이래도 되는 거야?’
 눈을 깜빡이는 박미나 옆을 누군가 슥 지나갔다.
 정후였다.
 바위뱀의 사체를 확인하나 했는데 아니었다. 정후는 무너진 건물 벽을 살피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놔, 건물 다 무너졌잖아. 어쩔 거야. 이거.”
 비로소 박미나는 볼 수 있었다.
 방금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낸 초인들을. 그중 한 남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박미나의 입에서 삼단 고음이 터져 나왔다.
 “꺄아아아아악!”
 여중, 여고를 나왔지만 아이돌 콘서트에 가는 친구들을 이해 못 했던 박미나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후 앞에서 입맛을 다시는 근육질의 미남.
 ‘틀림없어!’
 박미나가 눈을 빛냈다.
 방송을 통해 몇 번이나 본 적 있다. 한국에서 실력만 놓고 보면 항상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헌터.
 게다가 인기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자성. 그여야만 지금 상황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는 공간 이동이라는 말도 안 되는 스킬을 개방한 초인. 그렇기에 그 짧은 순간에 이곳으로 올 수 있었던 거다.
 이자성임이 확실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보험 들어놨겠지. 그리고 어차피 형 돈으로 보상해 줄 것도 아니면서 엄살은.”
 국내 S급 헌터 중에 가장 젊다는 이자성이니만큼, 정후에게 존대하는 게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곧 고개를 갸웃거리는 박미나였다.
 ‘아니. 잠깐만. 방금 뭐라고? 형? 둘이 닮은 거라곤 눈, 코, 입이 있다는 정도니 친형제일 리는 없고. 서로 형, 동생 할 만큼 친하단 말이야?’
 무려 이자성에게 형이라 불린 정후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민원 들어온다고. 네가 공무원의 고충을 알아?”
 이자성보다 제법 나이 들어 보이는 남자가 스윽 목을 그어 보였다.
 이자성과 동행할 정도면 그 역시 유명한 사람일 텐데, 박미나의 기억엔 없었다.
 “어차피 민원 들어와 봐야 팀장님 아랫선에서 해결되지 않습니까?”
 “어허. 이분 큰일 날 소리를 하시네. 남들이 들으면 오해한다니까.”
 갑자기 정후가 박미나를 돌아봤다.
 두근.
 이자성만큼 잘생긴 것도, 다른 남자만큼 분위기 있는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르게 정후의 시선에 가슴이 설레는 박미나였다.
 “박미나 씨라고 하셨죠? 이 사람들 하는 말 듣지 마세요. 이미 들었으면 잊어버리고. 죄다 거짓말쟁이니까.”
 “저분은?”
 이자성이 관심을 보였다.
 아아!
 어쩔 줄 몰라 하는 박미나를 대신해 정후가 말했다.
 “팀 블랙호크라고 알지? 거기 에이전트분이셔. 야,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정후가 대답했다.
 “나 영입 제의받았다? 말했지? 나 아직 현역이라고.”
 “······현역으로 뛰어본 적은 있고?”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보다.”
 갑자기 정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번 달만 벌써 세 번째다. 점점 빈도가 늘고 있다고. 이러다 정말 뭔 일 터지는 거 아니냐.”
 “그건 형이 알아봐야지. 그러라고 나라에서 월급 받는 거잖소.”
 “월급 같은 소리 하네. 후, 하고 불면 날아가는 푼돈 가지고.”
 “그럼 그만두시던가. 나도 팀장님이랑은 계급장 떼고 한번 붙어보고 싶으니까.”
 연장자는 아무래도 어려운지 정후가 두 손 들었다.
 “살벌하게 저한테 그러지 마시고. 스파링 파트너라면 여기 자성이도 있고 팀원 중에도 사람 많으니까요.”
 이내 스마트폰을 다시 꺼내 드는 정후였다.
 “잠시만.”
 이번에도 발신음은 단 한 번만 울렸다. 계속 대기라도 하고 있다가 받는 걸까.
 “일단 초기형 몬스터는 바위뱀 나왔거든? 내부 상태는 지금 스캔해 볼게.”
 정후가 게이트로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스마트폰을 들고 있지 않은 손을 갖다 댔다.
 지잉-
 박미나로서는 전혀 예상 못 한 상황이었기에 당연히 말리지도 못했다.
 “잠깐······!”
 “괜찮으니까 잠자코 지켜보기나 해요.”
 이자성이었다.
 중년 남자 역시 정후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게이트가 얼마나 위험한지 누구보다 잘 알 텐데, 어째서 괜찮다는 걸까.
 지잉-
 다시 전자음 비슷한 것이 울리고 정후가 손을 뗐다.
 “F타입. 3급. 주변 통제 끝났지?”
 스마트폰 너머 목소리를 들은 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그럼 헌터들 허가 내주고 투입해.”
 통화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아 끝났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 박미나는 몇 번이나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돼······.”
 어째서 게이트 안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는지. 어떻게 손을 갖다 댄 것만으로 게이트 타입과 등급 판정이 가능한지.
 “말 돼요. 정후 형이니까.”
 이자성의 말에 박미나가 눈을 깜빡였다.
 “저분이 누군데요?”
 어느새 호칭이 바뀌었다. 애인한테 차인 무능한 공무원에서 저분으로.
 “그건 비밀. 알고 싶으면······ 지금 헌터 등급이 어떻게 되죠?”
 초면에 헌터 등급을 묻는 건 실례라 이자성의 태도는 조심스러웠다.
 “B급이에요. 이제 30포인트 막 넘겼고요.”
 B급이라고 다 같은 B급이 아니다.
 오러 용량, 스킬 레벨, 신체 능력, 사냥 업적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포인트를 산정하고 포인트 100점을 채우면 상위 등급 시험을 치를 자격을 갖는다.
 “그럼 4등급만 올리시면 되겠네.”
 싱글A, 더블A, 트리플A를 거쳐야만 도달하는 등급.
 선택받은 인류라는 헌터들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
 이자성은 S급 헌터가 되어야 정후의 정체를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자연히 박미나의 의문은 점점 커졌다.
 ‘대체 누구야, 저 남자.’
 “대단한 분인가 봐요. 아까 애인이 얼굴에 커피 부을 때만 해도 그렇게 안 봤는데······.”
 움찔.
 정후가 미처 막을 새도 없이 이자성이 박미나에게 달려들었다.
 “정말요? 정후 형, 차였어요?”
 “야, 말은 똑바로 하자. 내가 찬 거야.”
 다섯 살이나 어린 동생 앞에서 마지막 자존심은 지키고 싶은 정후였다.
 
 * * *
 
 “형! 첫사랑, 그까짓 거, 다 부질없어요!”
 잔뜩 취한 이자성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이별주를 나누기 위해 정후가 이자성과 함께 찾은 곳은 밀폐된 룸 술집.
 이자성의 얼굴이 알려졌기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덕분에 바로 앞에 마주 앉아 이자성의 술주정을 고스란히 받아주게 된 정후다.
 “X발, 네가 사랑을 아냐?”
 “푸하하핫! 올해 들은 말 중에 제일 웃겼다! 형, 지금까지 여자 몇 명 사귀어 봤는데?”
 “······한 명.”
 죄지은 것도 아닌데 정후의 목소리는 기어들어 갔다.
 “쯧쯧. 그러니까 한 번 까였다고 울고 그러지. 자자! 우리 형님, 울음 뚝! 이별은 만남으로 잊으라고, 멋진 동생이 여자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잘나서 좋겠다.”
 이자성은 정말 잘난 놈이긴 했다.
 얼굴도 잘생기고 몸도 좋고 돈도 많이 벌고 딱 하나 단점이 있다면 입만 열면 깬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싫다는 여자가 없었다. 오히려 너무 완벽하면 부담스럽다나.
 ‘하여간 있는 놈들만 잘 나가는 세상이라니까.’
 정후가 애꿎은 술잔만 비우는데 이자성이 본격적으로 여자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한 명, 두 명······.
 통화하는 표정만 봐선 결과가 나쁜 거 같지 않은데, 이자성은 자꾸만 새로운 번호로 전화를 걸어댔다.
 “야, 지금 뭐 하냐?”
 “재촉하지 좀 마요.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안달 나가지고.”
 “······.”
 결국, 다시 혼자서 술잔을 채우는 정후였다.
 소주를 내리 세 병째 비웠을 때.
 문이 덜컥 열렸다.
 그런데 방에 들어온 건 한 명이 아니었다. 심지어 몇 분의 간격을 두고 계속해서 여자들이 들어왔다.
 그것도 다들 정말이지 눈이 돌아갈 정도로 예뻤다. 외모만 놓고 보면 정후가 사귀었던 미정이 제일 떨어질 만큼.
 “형이 어떤 취향일지 몰라서 스타일 별로 불러봤는데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너, 이 새끼······!”
 정후의 감격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분노로 바뀌었다.
 여자들이 죄다 이자성에게서 떨어지질 않았던 것.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들은 그저 이자성을 보려고 이 자리에 나온 게 분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후가 아무리 노력한들 결과가 좋을 리 없었다.
 “너, 이 개새끼······.”
 결국, 시린 옆구리를 감싸 쥐고 집으로 돌아온 정후였다.
 
 방 2개에 주방과 거실. 그리고 화장실이 딸린 오피스텔.
 주말이면 찾아왔던 여자 친구 미정이 없으니 오늘따라 휑하게 느껴졌다.
 “······망할 년, 나 차고 얼마나 잘 사나 보자.”
 뒤끝 작렬하던 정후가 무심코 달력을 확인했다.
 “······!”
 순식간에 동공이 확장되고 입이 쩍 벌어졌다. 내일, 아니, 자정이 지났으니 오늘은 무려······ 월요일.
 “안 돼! 인정할 수 없다!”
 정후는 공무원답게 월요병 말기 환자였다.
 
 * * *
 
 공무원은 박봉이라는 편견이 있다.
 실제로 공무원 보수는 사기업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하지만 예외인 곳이 있다.
 바로 국가재난관리본부에 소속된 3개 팀.
 여기선 누구나 ‘억’ 소리 나는 연봉을 받는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세상 좋아졌어. 우리 때는 말이야······.”
 지금은 현역에서 은퇴해 교관으로 활동하는 강태영이 입만 열면 꺼내는 말이었다.
 국가에 소속되어 활동한 최초의 헌터. 그가 첫 달 받았던 보수는 차마 입에 올리기 부끄러울 정도다.
 “애국 페이가 따로 없었지.”
 군인들에게 최저임금보다 훨씬 적은 월급만을 지급해 왔던 대한민국 행정부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게이트가 생성되고 나서도 국가는 터무니없는 금액으로 헌터들을 후려치려 했다.
 강태영처럼 애국심 하나로 국가의 부름에 응한 헌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헌터는 한국을 떠나거나 사기업 소속으로 활동했다.
 그사이 헌터의 전략적 가치가 부각되었고 헌터라는 최고의 전략 자산을 외국 혹은 사기업에 내준 국가는 비난에 직면했다.
 그때서야 부랴부랴 정부가 나서고 국회가 움직였다.
 파격적인 보수 규정이 신설되고, 온갖 혜택과 특권이 주어졌다. 그중 하나는 지금 정후가 보는 화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흠. 어제 사냥한 바위뱀 벌써 거래됐네. 어디 보자······ 올해 평균 거래 가격보다 조금 높게 올려놨었는데.”
 슥슥.
 인증을 마친 거래소 사이트 화면을 터치하자 거래 내역이 떴다.
 “또 대성그룹 계열 제약 연구소야? 아예 거래소를 통째로 털어먹을 기세네. 뭐, 우리 관할은 아니긴 한데.”
 거래 내역 외에 몬스터 사체에 대한 정보 내역도 확인했다.
 길이와 체중, 부산물의 보존 상태에 이르기까지. 모두 담당 공무원이 입력한 수치다.
 국내에서 사냥 된 몬스터 사체는 ‘전략물자’로 분류돼 국가에서 관리한다.
 사체를 수거해 창고에 보관하고, 필요할 경우 부산물을 추출하는 작업도 수행한다.
 거래소를 운영하는 주체 역시 국가다. 물론 몬스터 사체의 소유권 자체는 직접 사냥한 개인이나 기업에 있다. 거래 가격을 정하는 것 역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그들 자유.
 국가에 거래세만 납부하면 된다.
 하지만 재난관리본부에 소속된 헌터들은 이 거래세 자체를.
 ‘면제’받는다.
 그 증거로 정후의 거래 내역에는 세금 항목이 삭제되어 있었다.
 “얼만데?”
 정후 뒤에서 불쑥 나타난 건 이자성이었다. 정후가 그에게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하, 얼마 안 되네.”
 이자성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건 전적으로 녀석의 기준에서일 뿐.
 “3억이면 대부분의 사람에겐 얼마 되는 돈이야. 로또 당첨돼도 세금 떼고 하면 이거랑 얼마 차이 안 난다?”
 “형이 나를 잘 몰라서 그래. 내가 돈 쓸데가 얼마나 많은데.”
 어지간한 재벌 3세 못지않게 많은 돈을 버는 이자성이다. 씀씀이가 재벌 총수 뺨쳐서 문제였지만.
 정후는 거래소 사이트 화면을 닫았다. 거래가 끝났으니 더 신경 쓸 것도 없다.
 거래 대금 3억은 오늘 내로 계좌에 입금될 것이다. 그리고 그 돈은 고스란히 임무에 투입된 헌터들의 몫이다.
 거래세는 물론 향후 소득세도 내지 않아도 된다. 심지어 이건 재난관리본부 소속 헌터들이 누리는 혜택의 일부다.
 “모르긴. 너 번 돈 여자들한테 다 퍼주고 다니는 거, 옆 팀 신입도 알걸? 진짜 너 같은 놈한텐 세금 팍팍 걷어야 하는 건데.”
 “조국을 위해 염가 봉사하는 사람한테 너무하네.”
 “흠.”
 정후는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국가는 각종 특권을 제공하는 대가로 초일류 헌터들의 노동력을 헐값에 이용하고 있다.
 재난관리본부 3개 팀 소속 헌터들의 연봉은 몇억, 경우에 따라 몇십억이 넘지만······ 그들 기준에선 분명 ‘헐값’이 맞으니까.
 “그건 그렇고 너 오늘 비번 아냐?”
 재난관리본부엔 시도 때도 없이 출동 명령이 떨어진다. 게이트가 사람 사정 봐줘 가며 생성되진 않기 때문, 따라서 헌터들은 교대로 당직을 선다.
 물론 같은 교대 근무라도 내용을 뜯어보면 파격 그 자체. 당직을 서고 나면 3일 휴식이 기본이었다.
 이자성은 어제 당직을 섰으니 수요일까지는 출근하지 않아도 됐다.
 “쉰다고 집에 있음 뭐 해. 나와서 운동하는 게 낫지.”
 확실히 난 놈은 난 놈이다.
 국내에 얼마 없는 S급 헌터임에도 절대 자만하지 않는다. 과연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그럼 나도 오랜만에.”
 거기까지 말한 정후는 멈칫했다.
 사무실 전체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렸던 것이다.
 “······구경이나 해야겠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시선들.
 “여기선 무슨 말을 못 한다니까.”
 사무실을 나온 정후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런데 이자성이 버튼에서 손을 떼질 않았다.
 “누구 기다려?”
 “저기.”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걸어오는 중년 남자가 보였다. 어제 이자성과 함께 바위뱀을 쓰러뜨렸던 바로 그 남자, 장민석이다.
 “집에서 쉬시지 않고?”
 “근처에 헬스장이 마땅찮아서 말입니다.”
 그야 당연하다. 거기 있는 건 성인 남성 표준에 맞춘 운동기구일 테니까.
 장민석이 올라타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는 순간.
 “잠깐만요!”
 한 명이 더 탔다.
 이번엔 여자였다.
 포니테일 머리에 여자치곤 장신인 172센티.
 물론 장민석과 이자성 옆이라 크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애초에 정후도 180센티는 넘었고.
 “팀장님!”
 대뜸 정후의 어깨에 손을 얹은 여자, 천이설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녀는 왠지 즐거운 얼굴이다.
 “어제 차이셨다면서요?”
 “아니에요. 어디서 헛소문 듣고 오셨구나.”
 기껏 정색까지 했지만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에이. 직접 본 사람한테 들었는데.”
 “야.”
 정후가 뭐라 따지기도 전에 이자성이 발뺌했다.
 “형 저 못 믿어요? 전 진짜 아니에요.”
 “내려.”
 “아, 형!”
 “운동해야 된다며. 계단 오르내리는 거보다 좋은 운동 없다.”
 “제가 나이가 들어서 무릎이 시리고 막······.”
 “엄살 하나는 진짜.”
 옥신각신하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건물 지하 2층에 도착했다.
 띠링-
 문이 열리자.
 최신식 체육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반인들은 구경조차 하기 힘든 고가의 운동기구와 시설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한쪽에는 스파링이 가능한 링도 있다. 일반 규격보다 훨씬 넓은 면적이 특징.
 이게 끝이 아니다.
 지하 3층은 트랙이 깔린 운동장.
 지하 4층부터는 수심 40미터. 스쿠버 다이빙까지 가능한 수영장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모든 시설을 재난관리본부의 3개 팀만이 사용한다. 각종 지원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들을 제외하면 고작 서른 명 남짓한 인원에게 허용된 공간인 것이다.
 “좋았어. 가볍게 몸부터 풀어볼까.”
 ‘가볍게’라고 말했지만 이자성의 준비운동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어지간한 운동선수도 소화 못 할 강도로 몸을 풀기 시작하는 이자성. 그에 맞춰 정후의 시선도 움직였다.
 이자성의 근육 상태, 호흡, 움직임부터 오러의 미세한 변화까지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확인한 정보는 머릿속으로 옮겨져 기존 데이터에 합산된다.
 ‘빠르진 않지만 분명 꾸준히 발전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자성을 천재라 말한다. 하지만 정후의 기준에서 이자성은 노력파에 가까웠다. 부족한 점을 끝없이 채워나가는.
 정후의 관찰 대상은 이자성으로 끝나지 않았다. 장민석과 천이설은 물론이고 다른 팀 소속 헌터들까지 움직임을 관찰하고 데이터를 머릿속에 입력했다.
 어느새 정후의 머릿속에선 가상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데이터베이스에 들어 있는 몬스터들과 헌터들의 대결.
 양측의 전투 방식과 행동 패턴을 적용한 교전은 실시간 대전 게임만큼이나 치열하게 진행된다.
 시뮬레이션을 통해,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한 최적의 조합과 대형을 찾아내는 것.
 정후의 일 가운데 하나였다.
 물론 정후가 천재여서 기계의 도움 없이도 이런 일이 가능한 건 아니다.
 오러를 컨트롤해 뇌의 기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킨 덕분이다. 브레인스톰이라 이름 붙인 이 스킬은 무려······.
 “와! 형 일하는 거 완전 오랜만에 보는 듯?”
 정후의 생각을 끊은 건 운동을 마친 이자성이었다.
 어느새 4시간이 흘러 있었다.
 “나처럼 일 열심히 하는 사람 없다. 적어도 공무원 중엔.”
 “맙소사.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하면 안 민망해?”
 “하나도 안 쪽팔리니까 운동 끝났으면 올라가자. 밥이나 먹게.”
 “형은? 우리 하는 거 구경만 하고 끝?”
 “그게 내 일인데, 뭐.”
 이자성이 멀찍이 떨어져서 팔뚝을 쓸었다.
 “으아! 소름 돋았어! 방금 완전 홍보영상 찍는 줄.”
 “멋있기만 하던데요?”
 은근슬쩍 천이설이 끼어들었다.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자 이자성이 황급히 손사래 쳤다.
 “형, 아무리 막 솔로 돼서 외로워도 이 여자는 절대 안 돼! 완전 괴물이라고!”
 천이설이 눈을 깜빡였다.
 “어머, 이렇게 예쁜 괴물도 있나?”
 “웁웁!”
 이자성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천이설에게 동의해서가 아니라 제압당한 탓이다.
 물론 전력으로 상대한다면 저렇게 쉽게 당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괴물이라는 사실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천이설.
 난다 긴다 하는 헌터들만 모인 정후 팀에서도 그녀는 분명 특별했다.
 여러 가지 의미로.
 
 * * *
 
 건물 지하 1층 뷔페식당.
 보통 초인이라고 하면 어마어마한 식사를 하는 광경을 떠올리지만, 정후 일행의 테이블은 잠잠했다. 일반적인 점심 식사와 다르지 않은 풍경.
 헌터들의 대사량이 일반인에 비해 월등한 것은 맞다. 다만 여기 있는 실력자들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영양소를 최대한 흡수하여 최고의 효율을 끌어내는 것이다.
 그렇다곤 해도······.
 “팀장님, 너무 조금 드시는 거 아니에요? 그러다 쓰러지면 제가 감사합니다, 하고 업어갈지도 모르는데?”
 정후의 점심 식사는 누가 봐도 빈약했다.
 “형, 새로운 수련법이에요? 치사하게 혼자만 알지 말고 같이 공유합시다. 한 팀 아닙니까!”
 “음.”
 말없이 고기를 썰던 장민석까지 관심을 보였다.
 결국, 정후는 해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게 아니고······ 어제 너무 마셨더니 술병 나서 그래.”
 “아, 맞다. 어제 차이셨다고 그랬지.”
 “······.”
 납득하는 이유가 어째 못마땅했지만, 정후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식사를 마치고.
 “전 회복 훈련만 끝내면 들어갈 건데 형도 같이 퇴근해요. 해장술로 내가 소맥 기가 막히게 말아줄게.”
 또다시 술자리를 권하는 이자성이었다.
 “난 너랑 다르게 주 5일제 근무라 아직 퇴근 못 한다.”
 “어차피 일도 거의 안 하면서.”
 “하아. 오후에 교육 잡혀 있거든?”
 핑계가 아니었다.
 
 10년 전.
 부산에 생성된 게이트 내부에서 초유의 인명 사고가 발생한 이후. 몇 가지 조치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헌터 훈련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성 교육과 안전 교육.
 오늘 정후의 오후 일정이기도 했다.
 
 * * *
 
 ‘어째 해가 갈수록 더 늘어나는 것 같단 말이지.’
 아카데미 강당엔 헌터 훈련생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최종 합격자만 교육을 받게 하면 서로 편하련만 어떤 인간 머릿속에서 나온 지침인지. 누가 공무원 아니랄까 봐.’
 속마음과 달리 정후가 웃는 얼굴로 마이크를 잡았다.
 “반갑습니다. 오늘 교육을 진행할 국가재난관리본부 소속 공무원 이정후라고 합니다.”
 대학교로 따지면 교양과목 같은 교육이라 훈련생들은 별다른 호응이 없었다. 박수를 기대한 건 아니었기에 곧바로 교육을 진행하는데.
 “게이트 내부에선 소속과 관계없이 서로 연대 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지나친 경쟁은······.”
 킥.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지는 빈정거림.
 “누가 들으면 게이트 안에 한 번이라도 들어가 본 줄 알겠네. 상황 종료되면 쓰레기 수거나 하는 주제에.”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건장한 훈련생은 교육 내내 떠들었고 친한 동기들이 맞장구까지 치는 통에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보조 강사의 주의도 소용없었다.
 
 쉬는 시간.
 보조 강사가 커피와 함께 대신 사과해 왔다.
 “죄송합니다. 이번 기수에서 유명한 꼴통이라······ 저희도 통제가 힘들어요.”
 “이유가 그것만은 아닐 텐데요?”
 정후의 날카로운 지적에 보조 강사가 머리를 긁적였다.
 “이건 어디 가서 말씀하지 마세요.”
 쌓인 것이 많았는지 보조 강사의 넋두리가 이어졌다.
 “저놈 배경이 장난 아닙니다. 헌터자격 인증원에도 연줄이 상당한 거로 알아요. 솔직히 최종 합격하기엔 실력이 모자란 데 벌써부터 합격을 당연시하는 분위깁니다.”
 헌터 자격시험은 엄격하게 치러지지만, 부정이 아예 없다곤 못했다.
 “그거 곤란하네요. 실력 없는 사람이 헌터가 될지도 모른다니.”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의사 면허를 주면 의료사고가 나는 것처럼 기량 미달의 헌터가 얼마나 위험한지 아는 정후였다.
 “게다가 인성도 별로고.”
 뒤끝이 느껴지는 정후의 한마디에 보조 강사가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괜한 소리를 해가지고. 잊어버리세요. 얽히면 강사님만 피곤해집니다.”
 정후의 진정한 정체를 모르는 보조 강사로선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길고 가늘게 살자’가 인생 모토입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슬슬 준비해 주세요. 안전 교육 마저 진행해야지요.”
 넉살 좋게 안전 교육에 들어갔지만 문제의 훈련생 태도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게이트가 생성된 지역에서 부상자를 안전하게 대피시키는 상황.
 성실하게 임하는 다른 훈련생들과 달리 그는 교육용 마네킹을 축구공처럼 뻥뻥 걷어찼다.
 “강준만 씨,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분명히 부상자 대피 상황이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정후의 지적에 문제의 훈련생 강준만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봐야 마네킹 아닙니까. 실전에서만 잘하면 그만인데 너무 오버가 심하시네.”
 쿡.
 옆에서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 하지만 정후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부상자를 도울 때는 마네킹보다 훨씬 조심해야 합니다. 마네킹조차 험하게 다루는 사람에게 부상자를 어떻게 믿고 맡길 수 있을까요?”
 구구절절 맞는 말임에도 강준만에겐 아니꼽게 들리는 모양이었다.
 “그만하시라니까. 진짜.”
 강준만이 위협적으로 눈알을 부라렸다. 보통 이러기만 해도 상대는 위축되곤 했다. 강준만의 인상이 험악할 뿐만 아니라 덩치마저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후는 조금도 위축된 모습이 아니었다. 심지어 성큼 강준만에게 다가서기까지 했다. 순간 움찔했던 강준만이 자책하는 사이.
 “강준만 씨를 위해 하는 말이 아닙니다. 도움이 필요한 부상자가 강준만 씨 같은 사람을 만나면 너무 불쌍하잖아요?”
 이어진 정후의 일침에 강준만은 기어이 욕설을 내뱉었다.
 “아이 X발, 진짜.”
 주먹까지 쥐는 강준만을 친하게 지내는 훈련생들이 달라붙어 말렸다.
 “준만이 네가 참아. 헌터들한테 매일 치이며 사는 인생. 훈련생한테라도 센 척하고 싶겠지.”
 그 말에 기분이 풀린 강준만이 어깨를 으쓱였다.
 “궁금하네요. 내가 헌터가 되고 나서도 그딴 식으로 말할지.”
 정후는 그저 미소만 지었다.
 
 * * *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교육이 끝나고 정후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이번 기수 자격시험 총감독관 정해졌습니까?”
 강준만이 들었다면 기절초풍할 통화가 오갔다.
 “정해졌으면 바꾸세요. 내가 합니다. 이번 기수 총감독.”
 통화를 끝낸 정후가 세단에 올라타며 피식거렸다.
 이 맛 때문이라도 이 일을 못 그만둔다니까.
 
 * * *
 
 정후의 일상은 대체로 평화롭다.
 사무실에 출근해 전날 있었던 사건, 사고에 대한 보고를 받고 대응 방안을 지시한다.
 이후 상태 점검이란 명목으로 팀원들과 노닥거리다 정시 퇴근.
 특별한 일이라곤 정말 가끔 걸리는 비상 상황 정도다.
 1개 이상 팀의 투입이 필요한 늑대 태세.
 외부 컴퍼니와 팀의 추가적인 지원이 필요한 호랑이 태세.
 범세계적 협력이 필요한 ‘용’ 태세.
 하지만 근래 2년 동안은 국내에서 늑대 태세조차 발령된 적이 없었다.
 이래저래 평화로운 일상이 계속되면 자극이 필요해지는 법이다. 아침부터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나온 정후가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지금 도착! 지하 주차장에서 기다리는 중임. 5분 내로 안 나오면 버리고 감~ ㅅㄱ.
 
 이자성이 남긴 메시지였다.
 옷장에서 정장을 고르는 정후의 손놀림이 가벼웠다.
 평소 거들떠보지도 않던 넥타이까지 질끈 동여매고 마치 수험생 같은 기분으로 현관을 나서는 정후였다.
 물론 진짜 수험생들은 따로 있다. 정후는 그저······ 그들의 운명을 결정할 시험 감독관이다.
 
 * * *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
 매끈하게 빠진 외제 스포츠카가 서 있다. 하필이면 색상도 눈에 팍팍 띄는 빨간색.
 “······오늘 영화 찍어?”
 “그러는 형은 선보러 감?”
 조수석에 올라탄 정후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오랜만에 매서 그런지 아무래도 갑갑하다.
 “솔직히 멋있지?”
 “전혀. 우리 집에서 키우는 다롱이한테 정장 입혀도 형보다 잘 어울림.”
 “······인정.”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도로는 한산했다. 덕분에 여유 있게 시험장에 도착한 두 사람이다.
 스르륵.
 창문을 내린 이자성이 새삼 감탄했다.
 “여긴 언제 봐도 끝내준다니까.”
 서울 외곽. 최첨단 시설을 갖춘 시험장은 부대시설까지 합할 경우, 여의도의 20배 면적을 자랑한다.
 서울, 인천, 대전, 광주, 부산 등등······. 한국의 주요 도시 번화가를 실제 사이즈 그대로 재현시킨 시가지.
 게이트 내부 환경을 완벽하게 구현한 원형 돔(Dome)에 이어 몬스터 행동 방식을 입력한 대전용 로봇을 보관 중인 전시장까지.
 “그런데 형, 솔직히 로봇보다 몬스터로 시험 치는 게 맞지 않아? 로봇 상대한 경험만 믿고 설치다가 변칙 패턴에 당하는 신입들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정후도 일부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입력된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과 실제 몬스터는 엄연히 다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살아 있는 몬스터를 시험장에 넣을 순 없는 일.
 “그랬다가 누구 하나 잡아먹히면? 자격시험은 몬스터로부터 사람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치르는 거야. 설령 몬스터를 투입하는 방식이 효율적이라도 위험을 감수할 순 없어. 그리고······.”
 정후가 이자성의 어깨를 툭하고 쳤다.
 “그런 경험 없는 신입들 도와주라고 선배들이 있는 거잖아.”
 “선배라.”
 이자성이 때마침 대형버스에서 내리는 여자 훈련생들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이번 기수는 얼마나 괜찮은지, 선배의 엄격한 안목으로 확인해 봐야겠군.”
 “그래. 가서 여자나 꼬셔라. 그게 너한테 어울리니까.”
 “형은 어디 가는데?”
 20대 여자 훈련생의 늘씬한 다리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이자성이 던진 물음에 정후가 공무원증을 흔들어 보였다.
 “일해야지.”
 
 * * *
 
 시험장 뒤편의 VIP 주차장.
 이곳엔 고급 세단과 스포츠카들이 가득하다. 가끔 눈에 띄는 밴마저도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정차한 차량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내릴 때마다 철조망 밖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꺄아아아악!”
 “오빠! 여기에요! 여기!”
 “우봉수 나랑 결혼해!”
 경비원들에게 가로막혀 주차장으로 들어오진 못한 채 철조망 밖에 서 있는 무리는 어젯밤부터 돗자리며 텐트까지 치고 대기한 극성팬들.
 그리고 그들이 환호하는 대상은.
 당연히 헌터들이다.
 물론 VIP인만큼 평범한 헌터는 결코 아니다. 대형 팀이나 컴퍼니에 소속된 에이전트들.
 가능성이 보이는 루키를 영입하기 위해 직접 시험장을 찾은 것이다.
 심지어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방송이나 SNS를 통해 널리 알려진 슈퍼스타들이었다.
 실력 있는 루키를 영입하기 위해선 팀의 이름값만큼이나 개개인의 명성 역시 중요하기에.
 “아저씨!”
 유명 헌터들을 향한 환호성 속에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섞였다.
 좋아하는 헌터 지윤호를 보기 위해 등교까지 포기하고 이곳으로 달려온 여고생.
 그녀가 노려보는 것은 정장 차림의 사내였다. 줄무늬 넥타이가 어색해 보이는.
 “비켜요! 아저씨가 우리 오빠 얼굴 가리고 있으니까!”
 여고생이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간 사내. 정후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나이도 비슷한데 누군 아저씨고 누군 오빠란다.
 괜히 정장 입었나.
 그 순간 불현듯 재밌는 생각이 떠오른 정후였다.
 “오빠? 그럼 혹시 윤호 씨 동생이에요?”
 좋아하는 헌터 이름이 나오자 여고생 태도가 갑자기 싹싹하게 변했다.
 “그건 아니고요. 가까운 미래에 부인될 사람이에요. 그런데······ 우리 윤호 오빠 아세요?”
 ‘그래. 네가 바로 과대망상 말기 환자구나.’
 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아주 잘 알죠.”
 “헉! 실례했습니다!”
 90도로 고개를 숙이며 사과한 여고생이 공손하게 물었다.
 “그럼 오빠와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윤호 오빠 매니저? 친구?”
 “흐음. 이거 밝혀도 되나 모르겠네.”
 어느새 여고생뿐만 아니라 주변의 시선이 온통 정후에게 집중됐다.
 “괜찮으니까 말해보세요!”
 거듭되는 성화에 정후가 수줍게 고백했다.
 “팬이에요. 나도 윤호 씨 좋아합니다.”
 뒤늦게 장난이란 사실을 깨달은 여고생이 고릴라처럼 철조망을 흔들었다.
 “으아아아!”
 괴성을 지르는 여고생을 내버려 두고 킬킬거리며 시험장 안으로 사라지는 정후.
 그제야 지윤호 옆에 있던 컴퍼니 여직원이 물었다.
 “윤호 씨, 아는 사람 아니죠?”
 끄덕끄덕.
 “누군지는 몰라도 완전 유치하네. 나이 먹고 저러고 싶을까. 아마 여자들한테 인기 없을 거예요, 저 남자.”
 그때 지윤호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메시지 발신자는 이정후였다.
 
 -방금 그 여고생, 윤호 씨 팬이라니까 사인이라도 해서 돌려보내요. 그리고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분위기 맞춰주려고 그냥 있던 거죠? 아는 척하기 쪽팔려서 그런 거 아니죠?
 
 뜨끔.
 지윤호가 황급히 답장을 보냈다.
 
 -설마요. 당연히 분위기 맞춰드리려고 그런 거죠. 그나저나 오늘 팀장님 멋있던데요?
 
 첫 답장에 이어.
 방금 밖에 여고생들 팀장님 보고 눈에 하트 뿅뿅······ 까지 썼던 지윤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사무실이 강남 근처라고 하셨죠? 조만간 뭐라도 사 들고 한번 찾아뵐게요. 자성이 형 얼굴도 볼 겸. 바빠서 그런가, 요즘 통 연락이 안 되네요.
 -선물은 5만 원 안 되는 거로 사 오세요. 규정에 걸려서.
 
 빈말로라도 괜찮다는 소린 절대 안 하네.
 
 -아, 그런데 자성이도 여기 와 있는데? 한번 연락해 봐요. 여자들한테 작업 걸고 있어서 전화를 받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전 만날 사람이 있어서 이만. 나중에 봐요.
 
 스마트폰을 집어넣은 지윤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휴, 그 형은 아직도 그러고 사나 보네.”
 지윤호가 떠올린 건 이자성이었다.
 둘은 훈련생 동기.
 지윤호도 같은 기수 중에 제법 성공한 편이었지만, 이자성만큼은 아니었다.
 그런 이자성이 술자리에서 소개해 준 사람이 정후다. 대한민국 최고의 헌터들만 상대하는 대단한 사람이라며.
 이자성 말이라 틀림없겠지만······ 솔직히 지금도 긴가민가하다.
 당장 여기 모인 헌터들만 해도 어딜 가나 VIP 대접을 받는 유명 인사들이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정후 얼굴을 알아보는 이가 없다.
 그렇게 대단한 거물이면, 이 중의 한 명쯤은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법도 한데······.
 
 * * *
 
 그 시각.
 정후는 시험장 건물에 위치한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직접 커피를 타온 장년의 남자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거······ 귀한 분이 오셨는데 밖이 소란스럽군요. 즉시 조치하겠습니다.”
 “괜찮습니다. 곧 조용해지겠죠. 그런데 밖에 VIP들 와 있던데, 안 나가보셔도 됩니까?”
 “허허. 아래는 다른 사람 내려보냈으니 괜찮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VIP면 팀장님은 VVIP잖습니까. 마땅히 제가 접대해야지요.”
 남자는 대한민국의 헌터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인물이었다.
 헌터자격 인증원 원장 한성수.
 그런 거물과 마주하고 있음에도, 정후의 태도는 방금 여고생을 대하던 것처럼 여유가 있었다. 오히려 원장의 태도가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말입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갑자기 자격시험 총감독을 맡겠다고 하신 이유가 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것 때문에 인증원 내부가 발칵 뒤집혔었습니다. 뭔가 문제가 있어서 감찰이라도 들어오는 건 아닌지······.”
 “감찰이라니요.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커피 잔을 들며 정후가 미소 지었다.
 “사실 지금 저희 팀 예비 엔트리를 확충하고 있거든요.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혹시 아나요? 이번 기수에 미래의 우리 팀원이 숨어 있을지.”
 “아! 그러셨군요!”
 한결 안색이 밝아진 원장이 맞장구를 쳤다.
 “그렇잖아도 각 지역 지부장들이 말하더군요. 이번 기수는 아주 기대주가 많다고요.”
 정후가 눈을 빛냈다.
 “그거 정말 기대되네요.”
 
 * * *
 
 “여기 모인 수험생 여러분은 조국의 미래입니다. 대한민국이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뻗어 나가기 위해서는······.”
 
 30분 전.
 시험 시작을 앞두고 헌터자격 인증원 원장 한성수가 연단에 올랐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내려오지 않고 있다.
 감독관들만 출입 가능한 시험 본부.
 정후가 하품을 하며 스마트폰을 쳐다봤다.
 ‘쩝. 개회사 좀 짧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걸 깜빡했네. 폰 게임도 질렸고. 시작 전까지 뭐하지.’
 시험 본부는 최신형 모니터로 가득했다.
 시험장 곳곳의 마이크로 카메라들이 담아낸 화면이 모니터에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었다.
 수험생 개개인마다 할당된 전담 카메라. 거기에 시험장을 분할하여 사각지대 없이 촬영하는 고정 카메라들까지.
 그걸 확인하고 점수를 매기는 건 전적으로 감독관들 소관이다.
 그리고 그 감독관들을 감독하고 시험 전체를 총괄하는 것이 총감독관 정후의 업무였다.
 ‘······졸려.’
 정후가 다시 입을 가리며 하품했을 때. 드디어 개회사가 끝나고, 진행 요원의 안내에 따라 수험생들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수험생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모니터에 비쳤다.
 각자의 긴장한 표정엔 기대와 불안이 공존하고 있다.
 지원 인원 2,982명.
 사실 대한민국에 헌터를 꿈꾸는 이들이 어디 그뿐일까.
 하지만 헌터가 되고 싶다고 해서 누구나 자격시험을 치를 수 있는 건 아니다.
 먼저 기본 능력을 검증하는 국가공인 테스트를 통과하고, 헌터자격 인증원에서 운영하는 전국 각지의 아카데미에 입소.
 2년 교육과정을 수료해야 비로소 응시 자격이 주어진다. 지금 모니터에 비치는 훈련생들은 그 모든 과정을 거친 엘리트인 것이다.
 “이번 기수 정원이 몇 명이었죠?”
 정후를 보조하는 수석 감독관이 대답했다.
 “1,100명입니다.”
 “그럼 오늘 시험 치는 사람들 가운데 거의 2천 명 가까이가 재수생이란 얘긴데. 안타깝네요.”
 재수생만 있겠는가. 장수생도 많다.
 물론 합격 정원이 적어서 재수생이 생기는 건 아니다.
 헌터 자격시험은 절대평가로 진행되기에 합격 정원이 정해져 있지 않다.
 극단적으로 가정하면 전원이 합격할 수도 있고. 반대로 전원이 불합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채점하는 감독관에게.
 정확히는, 총감독관인 정후에게 수험생 전원의 운명이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20분 정도 지났을 무렵.
 진행 상황을 무선으로 전달받은 수석 감독관이 정후에게 보고했다.
 “총감독관님, 시험 준비 끝났답니다.”
 “좋습니다. 시작하세요.”
 정후의 지시가 무선을 통해 진행 요원들에게 전달되고.
 시험 시작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시험장 전체에 울려 퍼지는 순간.
 
 [훈련 상황! 훈련 상황! 모든 수험생은 신속하게 슈트로 갈아입고 보급 물자를 지참하여 지정된 버스에 탑승하기 바람!]
 
 모니터에 비치는 수험생들의 움직임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거의 변신 로봇처럼 뚝딱 슈트로 갈아입는 수험생이 있는가 하면, 긴장한 나머지 슈트 구멍을 찾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는 수험생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움직임은 감독관들에게 체크되는 중이다. 감독관들이 개인 단말기에 입력한 점수가 실시간으로 중앙 서버에 기록되어 나타난다.
 세부적인 진행 상황까지도.
 
 [17번 버스 전원 탑승 완료. 현장으로 이동합니다.]
 
 버스에 탑승할 인원은 무작위로 선정된다.
 상대적으로 우수한 팀에 배정된 수험생은 금방 버스에 탑승해 출발하게 되지만.
 “빨리빨리!”
 “내가 도와줄게! 다리 뻗어!”
 팀에 고문관이 걸린 경우, 팀원 전체가 시간에 쫓길 수밖에 없다.
 워낙 상황이 운에 좌우되기에, 이때는 소요 시간보다는 대응 방식과 태도에 중점을 두어 평가한다.
 이를테면 분을 이기지 못해 욕하는 수험생은 감점하는 식으로.
 출발이 지체된 수험생들이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가장 먼저 출발한 17번 버스는 벌써 1차 현장에 도착했다.
 
 [D구역에서 부상자 구조 요청! 부상자를 응급조치하고 안전하게 버스로 이송 바람!]
 
 버스 문이 개방되고 슈트 차림의 수험생들이 차례로 내렸다.
 사전에 편성된 팀이 아니기에 보통은 단독 행동이 나오게 마련이다. 과연 582번 수험생이 가장 먼저 시가지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모니터를 응시하던 정후가 피식 웃었다.
 “저 친구, 과감한데요?”
 물론 감독관들 누구도 감점 항목에 체크하지 않았다.
 단지 단독 행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론 감점을 받진 않는다. 솔로잉에 특화된 헌터들이 존재하는 법이니까.
 반대로 팀플레이에 치중한 수험생들이 손해 보는 일도 없다. 안정성과 팀워크에서 가산점이 주어지므로.
 시험 시작 20분 경과.
 가장 먼저 돌입한 582번 수험생은 기대 이상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중이었다.
 맨홀 뚜껑 아래 숨어 있던 1성 몬스터 독거북들을 차례로 제압한 동시에, 껑충 뛰어올라 상가 건물 3층의 유리창을 깨며 내부로 난입했다.
 2성 몬스터 거미손이 설치해놓은 부비트랩을 해체하고, 부상자를 응급조치하여 버스로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랩타임을 체크한 감독관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3년 이내 기록을 통틀어도 순위권입니다!”
 감독관들도 인간이다.
 수험생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열광하고 기뻐한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들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기 때문이다.
 물론 채점할 때는 예외.
 냉정하게 수험생의 모든 행동에 점수를 부여한다.
 예를 들면, 독거북이 내뿜는 가스를 효과적으로 차단했는지 같은.
 다른 버스에서도 속속들이 인질 구출에 성공한 수험생들이 나왔다.
 최고 기록뿐만 아니라 평균 기록 역시 예년을 웃도는 수준. 아직 시험 초반부긴 해도 분명 눈에 띄는 결과였다.
 “됐어!”
 수석 감독관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해관계를 떠나 수준 높은 헌터가 많이 배출되는 것은 국가의 경사였기 때문이다.
 상기된 표정으로 수석 감독관이 정후를 돌아봤다. 일반 감독관들과 달리 그는 정후의 직책을 안다.
 정후의 눈치를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총감독관님은 어떻게 보셨습니까?”
 “정말 대단하네요.”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정후는 입조차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느리지?”
 “과연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군요. 워낙 쟁쟁한 헌터들만 봐오셨을 테니.”
 물론 수석 감독관도 정후 팀원들의 면면까진 알지 못한다. 그저 실력 있는 헌터들이겠거니 짐작할 따름.
 하지만 정후의 비교 대상은 수석 감독관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애초에 숙련된 헌터들과 수험생들을 비교하긴 무리. 정후의 비교 대상은······ 가장 가까이에 있었다.
 
 사실 초기와 비교해 헌터 자격시험은 나날이 쉬워지고 있다고 봐야 했다.
 시험 내용이 쉬워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내용이나 평가 항목 자체는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반면 지급되는 장비나 물자의 수준은 올라가면서, 상대적으로 난이도가 내려간 것이다.
 “슈트 상태 봐라. 우리 때랑 비교하면 아주 그냥 때깔부터 다르네.”
 괜히 시험을 관전하는 VIP들 사이에서 장난 섞인 투정이 나오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너희 때는 3세대 슈트였지. 나는 2세대 슈트 입고 뛰어다녔다.”
 “보급형 2세대면······ ‘개구리’ 말씀하시는 거죠? 컴퍼니 물자 창고에 처박힌 거 보니까 디자인 완전 촌스럽던데.”
 “디자인만 촌스러우면 다행이게? 방호 능력도 아주 개판이었어. 가래침 뱉으면 구멍 뚫린다는 소리까지 있었다니까?”
 당연히 과장이 섞이고 허풍이 들어간 대화들.
 그렇다고는 해도 VIP들이 자격시험 당시 입었던 슈트와 비교하면 이번 기수 수험생들이 사용하는 5세대 슈트는 단연 ‘물건’이었다.
 “기록 잘 나온다고 감탄만 할 게 아니라니까. 다 장비빨이야, 저거.”
 “하긴 내가 저거 입고 뛰었으면 역대 기록 싹 갈아치웠지.”
 팔짱을 끼고 중계 모니터를 쳐다보던 남자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서라. 너, 역대 기록이 어떤지 알고서 떠드는 거야?”
 VIP들만 모인 이곳에서도 남자 유필준은 조금 특별했다. 그가 초대형 컴퍼니 DK 소속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유필준은 대한민국에서 일 년에 단 한 명 배출되는 ‘수석’ 출신이었다.
 아무리 이 자리에 날고 긴다 하는 헌터들이 많더라도, 수석 출신은 유필준이 유일했다.
 자연히 호언장담하던 헌터도 자세를 낮췄다.
 “······사실 잘은 모르죠. 인증원에서 역대 기록을 외부에 공개하는 것도 아니니까.”
 관전이 허용된 것도 근래의 일이다.
 본인 기록이라면 모를까 다른 사람의 기록을 알긴 쉽지 않았다.
 “아, 혹시 필준 형님이 역대 1위 찍으셨나요?”
 “아니.”
 “그럼 이자성 그 사람이려나. 아니, 뭐 그 사람보다 실력 좋은 헌터들도 있지만, 그래도 가장 최근 기수잖아요.”
 “이자성······ 대단한 녀석이지.”
 유필준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건 묘한 경쟁심이었다. 그가 이자성과 라이벌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하지만 녀석도 아냐.”
 유필준은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우연히 헌터 자격시험 역대 기록을 접했을 때의 충격이.
 보안상의 이유로 이름은 없고 숫자만 남은 기록들을 본 순간. 유필준이 갖고 있던 ‘수석’ 출신이란 자부심은 처참하게 박살 났다.
 지금도 눈만 감으면 숫자 4개가 비밀번호처럼 머릿속에 떠오른다.
 시간 총합 57분 38초.
 나머지 평가 항목 만점.
 솔직히 측정 오류인 줄 알았다.
 그만큼 1위와 그 아래 기록은 터무니없을 만큼 차이 났다. 그렇다고 상위권 기록이 형편없이 낮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유필준이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었다.
 심지어 폐기물 취급을 받고 최단기간 은퇴 기록을 세운, 1세대 슈트 ‘매미’를 입고 세운 기록.
 문득 유필준은 궁금해졌다.
 ‘그’가 최신 슈트를 입고 시험에 임한다면 대체 어떤 기록이 나올지······.
 
 * * *
 
 “그나저나 슈트 정말 좋아 보이네요. 일선에서 헌터들이 쓰는 장비와 비교해도 크게 손색이 없어 보입니다. 아, 이건 비꼬는 거 아닙니다.”
 정후의 칭찬에 수석 감독관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하. 인증원 산하 연구소에서 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정부에서 지원도 많이 해줬고요. 덕분에 초창기 슈트에 비하면 천지개벽 수준의 물건이 탄생했지요.”
 “초창기면 ‘매미’ 말씀하시는 거겠네.”
 “이야! 출시 3개월 만에 생산이 중단된 물건을 기억하고 계시다니. 혹시 착용도 해보셨습니까? 저는 당시 현역이어서 시제품 착용해 봤는데······ 어휴! 한숨이 절로 나오더라고요.”
 다른 감독관들도 귀를 쫑긋했다.
 그들 대부분이 은퇴한 헌터들. 현역 시절의 주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당연했다.
 “착용이야 해봤죠. 너무 답답해서 1시간도 안 돼 벗어던지긴 했지만.”
 “1시간이면 오래 버티셨네. 그때 시착해 본 팀원들끼리 술값 내기도 했었는데. 한 친구는 잠깐 입어 보더니 그냥 자기가 술값 낸다고 하더라고.”
 수석 감독관이 너스레를 떨었다.
 “아차! 이런 얘기는 함부로 하면 안 되는데. 저쪽에 서 있는 친구가 그거 입고 자격시험 치른 기수라 민감해서.”
 정후와 눈이 마주친 감독관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혹시나 했지만 기억엔 없는 얼굴이었다. 하긴 10년이 훨씬 지난 일이다. 같은 시험장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기억날 리가 없다.
 “아무튼, 늦게라도 국가에서 장비 개발에 관심을 보여서 다행입니다. 앞으로는 장비 문제로 생기는 사고가 줄어들었으면 좋겠네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수석 감독관을 끝으로 시험 본부가 잠시 숙연해졌다.
 그들 대부분이 사고로 현역에서 은퇴한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장비 결함이나 성능 미달로 죽은 동료들을 기리는 마음이 컸다.
 다시는 그들 같은 희생자가 나오지 않기를. 시험 본부의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다.
 
 * * *
 
 시험 시작 5시간 경과.
 아직까진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무엇보다 별다른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고무적이었다.
 아무리 주의해도 기수마다 부상자들이 속출하고 가끔 사망자까지 나오는 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이번 기수는 모범적인 사례였다.
 아직 긴장의 끈을 늦추진 않았지만 수석 감독관의 표정도 한결 밝았다.
 “이대로만 마무리되면 정말 좋겠는데요.”
 “그러게요.”
 물론 정후의 속마음은 달랐다.
 사고가 나지 않은 것은 반길 일이다. 하지만 기왕이면 여기까지 온 김에 괜찮은 재목을 발견했으면 했는데 아무래도 욕심이 과했나 싶다.
 그렇담 원래 목적에 충실해야겠지.
 정후의 시선이 시험 본부의 모니터를 일시에 훑었다.
 가공할 수준의 동체 시력이 찾아낸 것은 슈트 차림임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체격이 드러나는 수험생.
 오늘 정후를 이곳까지 오게 만든 강준만이었다.
 아까부터 틈틈이 관찰한 결과 강준만의 퍼포먼스는 합격시키기엔 분명히 부족했다.
 원래라면 정후가 나설 필요도 없이 탈락했겠지만.
 ‘빙고. 그 보조 강사 제보가 맞았네.’
 헌터 자격시험 실기는 감독관 3명이 버스 1대. 그러니까 20명을 동시에 평가하는 시스템이다.
 수험생의 입장에선 감독관 3명에게 평가받는다고 보면 된다.
 감독관 3명이 매긴 점수의 평균이 바로 최종 성적이 되는 것이다.
 ‘감독관 둘은 합리적으로 채점했군. 하지만 나머지 감독관이 점수를 퍼주는 바람에 불합격이 합격으로 둔갑할 판이야. 그런데도 확인 작업을 생략해? 이거 구려도 너무 구린데.’
 부정을 방지하기 위해 감독관끼리 점수 편차가 크면 상급 감독관이 확인 절차에 들어간다.
 개인 영상을 판독하여 평가가 잘못됐다고 판단되는 경우. 점수를 재조정한다.
 잘못 평가한 감독관에게 징계가 주어지는 것은 물론이다.
 ‘감찰 찌르면 간단하겠지만 내가 그렇게까지 정의의 사도는 아니고.’
 정후는 직접 강준만의 점수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인성 0점. 팀워크 1점. ······아냐.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지.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객관적으로 평가하자.’
 다시 새로운 점수를 입력한 정후는 결재 버튼을 눌렀다.
 이제 정후의 허가 없이는 누구도 강준만의 점수를 수정하지 못한다.
 
 오후 5시.
 시험 시작으로부터 7시간 경과.
 드디어 시험이 종료됐다.
 아직까지 최종 집결지에 도착하지 못한 수험생은 자동으로 탈락 처리된다.
 종료 시점을 기해 시험 본부에서도 우렁찬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고생하셨습니다!”
 “다들 고생했어요.”
 물론 아직 끝이 아니다.
 최종 검토를 마치고 결과가 발표되는 것은 저녁 6시.
 그때까지 수험생들은 간단한 검진을 마친 다음. 주최 측에서 준비한 저녁 식사를 제공받는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든 시험을 마친 상황.
 밥이 꿀맛처럼 느껴질 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결과 발표를 기다리는 수험생들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간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도 아니어서 합격을 확신한 수험생들은 표정이 밝았다.
 강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합격을 확신하는 이유는 남들과 달랐지만.
 “준만아!”
 훈련생 동기가 강준만이 앉은 식탁 반대편에 앉았다.
 “대단하다. 아직 발표도 하지 않았는데 밥이 넘어가? 역시 우리 기수 에이스라 그런가.”
 입에 발린 아부에 스테이크를 우물거리던 강준만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나야 당연히 합격이니까. 너는 어때?”
 “솔직히 모르겠다. 실수를 많이 해서.”
 “자식,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오늘 내가 4차까지 책임질 테니까 긴장 풀어.”
 친구 앞이라 허세를 부리긴 했지만, 사실 강준만이 생각해도 자력 합격은 무리였다.
 이번 시험을 치르면서 확실히 깨달았다. 세상엔 정말 괴물이 많다는 걸.
 그래도 걱정은 되지 않았다.
 아버지 연줄이라면 상위권까진 아니어도, 막차 태워 합격시키는 정돈 일도 아닐 테니까.
 드디어 오후 6시.
 팽팽한 긴장감 속에 대기실 전광판에 합격자 이름과 총점이 뜨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헌터 자격시험에 집중되는 국민적 관심은 수능을 능가했다.
 당연히 방송사들도 경쟁적으로 현장을 카메라에 담는 중이었다.
 지금 촬영한 영상은 수석 합격자의 인터뷰와 함께 9시 뉴스에 헤드라인으로 보도될 것이다.
 “으아아아! 합격이다!”
 “엄마! 붙었어요! 합격했다고요!”
 결과를 확인한 합격자들이 기쁨의 고함과 눈물을 쏟아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강준만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지막 페이지. 거기에 강준만이란 이름이 쾅쾅 박혀 있을 거라고.
 하지만······ 없었다.
 어디에도 강준만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이게 아닌데.”
 당황한 강준만이 입술을 깨무는 순간.
 스마트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수험생 개인마다 발송된 메시지. 거기엔 강준만의 점수와 함께 ‘불합격’이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
 “X발!”
 그냥 불합격도 아니었다.
 “이게 말이 되냐고!”
 합격 커트라인에서 -1점.
 그야말로 한 끗 차이로 불합격한 것이다. 아버지의 청탁을 받은 감독관들이 일부러 1점 차로 떨어뜨렸을 리는 없다.
 일이 잘못된 것이다.
 ‘젠장! 큰소리 떵떵 치더니 이게 뭐냐고! 꼰대 말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처음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눈앞의 식탁을 엎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사방에서 질질 짜는 인간들을 보니 그나마 기분이 풀렸다.
 강준만은 그들과는 다르다. 실력으로 1점이 모자랐으면 그저 운이 없었던 거니까.
 ‘그래도 생각보다 쉽네. 내년엔 꼰대 도움 없이도 합격하겠는데.’
 물론 그거야말로 강준만의 착각이었다.
 
 대기실을 비추는 모니터를 통해 강준만의 얼굴을 응시하는 사내.
 정후였다.
 원래 객관적으로 평가한 강준만의 점수는 커트라인에서 13점이나 모자랐다. 말이 13점이지. 재수하더라도 극복하기 힘든 점수였다.
 ‘내가 또 우리 준만이 좌절하는 모습은 못 보지.’
 그래서 좀 더 썼다.
 원래 점수에 12점을 더해 커트라인에서 딱 1점 모자란 점수를 만들었다.
 너무 아까워서 발을 동동 구르게. 내년엔 자력으로 합격할지도 모른다고 기대하게.
 정후의 눈앞엔 벌써부터 내년 이맘때의 상황이 그려졌다.
 자신만만하게 시험장으로 들어서는 강준만. 그리고······ 어김없이 시험 본부에서 모니터를 응시할 자신의 모습이.
 정후는 모니터를 보며 미소 지었다.
 ‘준만아, 내년에 또 보자.’
 말 그대로 살인미소였다.
 
 
 2장
 
 
 합격자 발표가 끝나고 썰물처럼 대기실을 빠져나가는 수험생들. 하지만 처음 시험장에 들어섰을 때와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희비가 엇갈린 표정들.
 당연히 걸음걸이에도 차이가 난다.
 그러나 가장 달라진 것은 그들 스스로가 아니라 그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였다.
 “오은솔 양! 이번 자격시험에서 1위로 합격하셨는데요!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대기실 입구에서부터 열띤 취재 경쟁이 벌어졌다.
 영화제 레드 카펫처럼 쉬지 않고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스포트라이트는 오직 승자들만을 위한 것이었다.
 “오은솔 씨! 혹시 염두에 두고 계신 팀이 있나요?”
 이번 기수 수석 합격자 수험 번호 582번 오은솔이 잠시 멈칫하는 순간 에이전트들이 카메라 앞으로 뛰어들었다.
 “가이아 컴퍼니입니다! 계약하지 않으셔도 되니 대화만이라도 가능할까요? 잠깐이면 됩니다!”
 급기야 몇몇은 오은솔에게 저돌적으로 달려들기까지 했다.
 “죄송하지만 생각해 둔 곳이 있어서요.”
 단번에 카메라가 오은솔의 얼굴에 집중됐다.
 “거기가 어딥니까?”
 “DK.”
 짤막하게 답하고는 유유히 걸음을 옮기는 오은솔. 기자들은 당장 인터넷에 속보를 업로드했다.
 
 [헌터 자격시험 수석 합격자 오은솔. DK 컴퍼니로 행선지 정해!]
 [역대급 루키 영입한 DK! 케이원과 대성 제치고 업계 1위 등극하나?]
 
 오은솔을 주시하던 에이전트들은 입맛만 다셨다.
 “뭐야? 벌써 사전에 합의 끝난 거였어?”
 “오은솔 친척 중에 DK 관계자가 있다는 소문이 정말이었나 보네.”
 이미 훈련생 시절부터 두각을 드러낸 오은솔이다. 눈독 들이는 이들이 많았지만 결국 그녀의 선택은 DK였다.
 직원들을 대동한 DK컴퍼니 에이전트 유필준이 오은솔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오은솔 씨. DK 컴퍼니 에이전트 유필준입니다. 짧게 대화 괜찮으십니까?”
 “길게도 괜찮아요.”
 만족스러운 대답에 유필준이 눈짓하자 홍보팀 여직원이 취재진을 막아 세웠다.
 “보도자료 돌릴게요. 계약서 내용까지 촬영하실 거는 아니잖아요?”
 여직원이라지만 탄탄한 몸에서 느껴지는 박력은 성인 남성 못지않았다. 결국, 입맛을 다시며 물러나는 취재진이었다.
 
 * * *
 
 같은 시각. 대기실에서 멀리 떨어진 복도를 걷는 두 사람.
 “형, 이번에 수석 차지한 애 봤지? 오은솔이라고.”
 “보기야 했지.”
 “걔, 우리 팀에 영입하자. 내가 보기에 팀에 반드시 필요한 인재야.”
 “왜? 네 취향이야?”
 정후와 이자성이었다.
 “그런 거 아니고, 진짜 실력이 괜찮은 거 같아서 그래.”
 “됐고 자꾸 헛소리할 거면 차 키 내놓고 걸어서 집에 가.”
 “······이봐요. 내 차거든요?”
 “헌터특별법 제17조 2항. 재난관리본부 팀장 이상 직위자는 공무상 필요한 경우, 민간 차량을 강제 수용할 수 있다.”
 “그런 법도 있어?”
 “방금 내가 만듦.”
 “아, 진짜! 애도 아니고!”
 투덜거리던 이자성이 갑자기 소리쳤다.
 “형! 저기! 젠장! 벌써 DK가 선수 쳤잖아!”
 유필준과 나란히 걷는 오은솔을 발견한 이자성이 정후를 떠밀었다.
 “어서! DK에 뺏기기 싫으면 서두르라고!”
 정후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돌아보자 이자성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인다.
 “파이팅!”
 “참나······ 어이가 없네.”
 하지만 정후는 의외로 순순히 오은솔을 향해 걸어갔다.
 정후의 접근을 막아선 것은 DK 홍보팀 여직원이었다. 목소리에서 진한 피로감이 느껴졌다.
 “저기 촬영은 자제해달라고 분명히 말씀드렸는데······.”
 “촬영 아니고요.”
 홍보팀 여직원을 지나친 정후는 오은솔에게 다가갔다.
 “······설마.”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정후가 지갑을 뒤적이더니 명함을 꺼내 들었다. 한발 늦게 홍보팀 여직원이 정후의 어깨를 붙들었다.
 “이봐요! 당신 어디 소속인지는 몰라도 상도덕도 없어요? 지금 우리와 계약 논의 중인 거 뻔히 봐놓고!”
 “지금 퇴근 시간 지나서 제가 마음이 급해요. 잠깐이면 되니까 양해 부탁합니다.”
 “아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뜻밖의 소란에 오은솔이 정후를 쳐다봤다.
 과연 이자성의 레이더망에 포착된 이유가 있었다. 슈트를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은 오은솔은 놀랍도록 매력적이었다.
 아이돌 멤버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청순한 외모, 거기에 매너까지 갖췄다.
 “여기까지 찾아와주신 성의는 감사하지만······.”
 “나도 미안해요.”
 스윽.
 오은솔을 지나친 정후가 유필준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괜히 그쪽 설레게 만들어서.”
 “······!”
 전혀 예상 못 한 상황에 오은솔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유필준 역시 명함과 정후를 번갈아 보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뭡니까?”
 이 순간에도 유필준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유필준 씨 되시죠?”
 “그런데요?”
 “초면에 실례지만 영입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설마 자신이 영입 제안을 받게 될 줄은.
 “영입? 나를요?”
 “예.”
 정후의 스마트폰엔 국내 정상급 헌터들의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돼 있다. 전력 분석 담당 직원들에 의해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되는.
 현재 시점에서 관찰 대상은 200여 명. 당연히 데이터베이스의 모두가 영입 리스트에 오르진 않는다.
 정후가 생각한 그림에 맞아떨어지는 조각만 영입 대상이 된다.
 “이봐요. 나, DK 소속입니다.”
 목소리에 묻어나는 건 자부심이었다. DK니까, 국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회사니까.
 물론 정후에겐 그건 전혀 고려 사항이 되지 않았다.
 “원하시면 컴퍼니 스케줄과 병행 가능합니다. 팀원 중에도 그런 친구들이 많고요.”
 DK라는 이름을 듣고도 전혀 주눅 들지 않는다.
 조금은 관심이 생겼을까.
 유필준이 명함을 받아 확인했다.
 
 [국가재난관리본부 알파팀 팀장 이정후.]
 
 “······공무원?”
 들은 적이 있다.
 국가에서 비밀리에 운영하는 최고수준의 팀이 있다고.
 ‘설마 이게 그건가?’
 “명함에 QR코드 보이실 겁니다. 영상 확인해 보시고 연락 주십시오. 세부 조건은 그때 만나서 조율하지요. 바쁜 시간 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1분 남짓한 대화.
 그리고 명함 하나.
 정후와 유필준······ 그리고 오은솔의 첫 만남이었다.
 정후가 사라지고, 명함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유필준이 오은솔을 불렀다.
 “오은솔 씨.”
 “······예? 아, 예! 듣고 있어요.”
 시험 내내 보이던 당찬 모습이 아니었다. 오은솔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어려서는 예쁜 외모 덕에 훈련생 이후로는 압도적인 재능까지 부각되어 주위의 관심을 독차지한 그녀다.
 오늘 역시 그녀를 위한 무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로라하는 헌터들마저 그녀를 영입하기 위해 안달 나지 않았던가.
 하지만 정후는 달랐다.
 그에게 당한 굴욕감은 오은솔로서는 처음 맛보는 것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기에 유필준이 담담하게 물었다.
 “우리 식구 되기로 마음 굳힌 거죠?”
 “······네. 최고가 되기 위해선 최고의 팀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VIP 주차장에 주차된 최고급 세단의 문을 열어주며, 유필준이 제안했다.
 “회사로 가는 동안 같이 봅시다. 입사 선물이라 생각하고.”
 “정말 그래도 되나요?”
 사실 오은솔도 궁금하던 참이다.
 정후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가 영상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명함의 QR코드를 스캔하자 스마트폰과 연결된 노트북에서 동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이건······.”
 유필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오은솔은 아예 입을 다물지 못했다. 벌어진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 * *
 
 서울로 돌아가는 스포츠카 안에서 이자성은 내내 투덜거렸다.
 “이렇게 뒤통수치기 있음?”
 “뭐가 불만인데.”
 “오은솔 영입해 준다며.”
 “내가 언제.”
 “그럼 아까 나랑 주고받은 눈빛은 대체 뭔데.”
 “먼저 나가서 차에 시동 걸라고. 눈치 없는 자식아.”
 “······그런 거였군.”
 때마침 울리는 스마트폰.
 발신자를 확인한 정후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정후입니다.”
 -팀장님, 아까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대단한 분을 몰라뵙고······.
 스마트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DK 컴퍼니 에이전트 유필준.
 “무례는 제가 저질렀죠. 퇴근 시간이라 민감해서. 하하.”
 웃음기를 거둔 정후가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영상은 확인하셨나요?”
 -······다섯 번이나 돌려봤습니다. 지금 재생 버튼 다시 누르려다 말고 전화 드리는 겁니다.
 꼴깍.
 침을 삼키는 소리에 이어 유필준의 상기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하지만 영상 뒷부분도 받아볼 수 있을까요?
 
 잠시 후.
 정후가 웃는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이자성이 룸미러로 정후를 쳐다보며 물었다.
 “누구?”
 “유필준.”
 “뭐야? 그럼 아까 오은솔이 아니라 유필준 영입하러 들이댄 거였어?”
 “당연한 소리를. 오은솔은 아직 한참 멀었다. 지금은 백업 멤버도 힘들어.”
 “그럼 유필준은? 실력으로 보나 외모로 보나 솔직히 내 하위 호환 아닌가.”
 피식 웃으며 정후가 스마트폰에 저장된 영상을 재생시켰다.
 “이거 보면 생각이 달라질걸.”
 “그래 봐야 유필준이지.”
 차를 갓길에 세울 때까지만 해도 이자성은 별다른 기대가 없었다.
 하지만 영상에서 유필준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반응은 180도 달라졌다.
 “괜찮지?”
 괜찮은 정도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끝내줬다.
 유필준이 전장에 합류하는 상황을 떠올려본 이자성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건······ 그림 나오겠는데.”
 “이제 밑그림 정도지. 작품 완성시키려면 아직 멀었다.”
 진심이다.
 정후가 구상하는 팀은 지금에 비해 규모나 화력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으니까.
 “뭐, 이 정도면 나도 영입하는 거 찬성. 그런데 유필준 성격 까다롭기로 유명하잖아. 사전 작업도 없이 어떻게 바로 낚았어? 대체 떡밥이 뭐야?”
 조수석에 머리를 파묻으며 정후가 대답했다.
 “내 컬렉션.”
 
 * * *
 
 “여기가 바로······.”
 강남 한복판의 고층빌딩.
 유필준의 시선이 빌딩을 훑었다.
 그가 소속된 DK 컴퍼니 사옥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외관.
 물론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겉모습 이상의 무언가가 저 안에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정부 청사라 DK 본사건물에 비하면 많이 모자랍니다. 담당 공무원이 워낙 센스가 없어서요.”
 정후의 안내가 이어졌다.
 시험장에서와 달리 편한 복장. 여전히 여유로운 말투.
 “아니요. 충분히 훌륭합니다. 마음에 들어요.”
 최대한 정중하게 대답하며 유필준의 눈동자가 정후를 향했다.
 ‘이렇게 보면 정말 평범한 인상인데······.’
 영상의 인물과 동일 인물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다.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정후의 지시에 따라 대한민국 최고의 헌터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광경을.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라면 충격에 빠지진 않았을 것이다.
 유필준 본인도, 오은솔도.
 최적화된 동선, 화력의 집중, 적절한 상황판단에 따른 신속한 대처까지.
 정후는 완벽한 야전사령관이었다.
 일반적인 지휘관과 차이가 있다면 가장 위험한 곳에 있음에도 경호원 하나 없다는 사실.
 오만도, 허세도 아니었다.
 유필준의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까.
 게이트의 균열을 찢고 나온 몬스터들이 정후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것을 그리고 몬스터들이 공중에서 산화하듯 찢겨져 나가는 모습을.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라고 묻고 싶은 것을 유필준은 간신히 참아냈다. 헌터의 스킬에 대해 묻는 것은 일종의 금기이기 때문이다.
 정후는 스스로를 공무원이라 소개했지만······.
 유필준의 생각은 달랐다.
 이 남자는 ‘진짜’ 헌터다.
 “들어가시죠. 오늘은 방문 일지 쓰셔야 되지만, 계약서에 도장 찍으면 바로 고정 출입 허가 떨어질 겁니다.”
 빌딩의 유리문을 밀며 정후가 지나가듯 물었다.
 “오은솔······ 맞죠? 어제 DK에서 영입한 루키분 성함이.”
 “그렇습니다만.”
 “어제 영상 같이 보셨나 봐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유필준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애초에 유출이 금지된 영상도 아니고.”
 “다행이네요. 그런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정후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얼마 전에 SNS를 시작했거든요.”
 SNS? 그것만 가지곤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팔로워도 거의 없는데 어제 알람이 뜨더라고요. 누가 게시물에 ‘좋아요’ 눌렀다고.”
 “설마 그게······.”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유필준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제 1일 차라고 해도 오은솔은 엄연히 DK 소속 헌터다. 그런데 SNS로 스토킹하다니 그것도 공직자를 상대로.
 “죄송합니다. 단단히 주의 주겠습니다.”
 “하하. 당돌해서 좋던데요. 궁금해서 잠 못 자는 것보단 그게 본인한테 나을 수도 있고.”
 그 말에 유필준은 눈가에 다크서클이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어젯밤 잠을 못 잔 사람은 다름 아닌 그였던 것이다.
 “어쨌든 루키는 루키고. 우리는 우리 일을 해야겠죠?”
 정후는 유필준을 팀장실로 안내했다.
 고문 변호사와 지원 업무 직원에게 잠시 대기하라고 지시한 다음, 정후가 유필준에게 자리를 권하며 물었다.
 “냉수랑 온수 중에 어떤 거로?”
 헌터들은 먹고 마시는 것에 민감하다.
 몸에 냄새가 배는 담배는 물론이고, 술도 입에 대지도 않는 헌터까지 있을 정도다. 카페인과 탄산 역시 기피 대상 중 하나였다.
 “냉수 부탁합니다.”
 종이컵에 생수를 따라 가져온 정후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계약서에 도장 찍기 전에 각오해 두셔야 하는 부분이 있어요.”
 영상을 보자마자 유필준은 두 가지를 생각했다.
 하나는 정후의 팀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었고, 다른 하나는 적응이 쉽진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영상에 비치는 헌터들은 모두 유필준 이상의 실력자들이었기에.
 “바로 팀에 합류하진 못합니다. 조금 민감한 얘기일 수도 있는데 아직 유필준 씨는 부족해요. 조금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들었다면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지도 모른다. 사실 여부를 떠나 그만큼 굴욕을 느낄 만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상대는 정후.
 대한민국 최고의 헌터들을 지휘하는 사람이다.
 유필준의 목소리에 오히려 기대감이 묻어나는 이유였다.
 “그럼 팀장님께서 직접 지도해 주시는 겁니까?”
 “제가 가르치는 쪽은 전공이 아니라서. 대신 최고의 교관을 섭외해 놨습니다. 그분과 함께라면 한 계단 올라서실 수 있을 겁니다. 유필준 씨의 각오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정후가 진지한 눈으로 유필준을 응시했다.
 “저는 3개월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3개월.
 유필준의 잠재력을 끌어올려 첫 작전에 투입시키기 위해 필요한 시간.
 사실 유필준 정도 경지에 오르면 자연히 성장이 더뎌질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받을 레벨도 아니고 조언을 듣는다고 갑자기 실력이 급상승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교관이 누구냐에 따라, 앞의 설명은 완전히 무색해질 수 있다.
 그는 지금부터 생각도 못 했던 성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껍질을 깨고 나온 독수리처럼.
 각오를 다지듯 유필준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팀장님, 계약서 주십시오.”
 이미 계약 내용에 관한 대화는 주고받았다. 세부 조건까지 어느 정도 합의가 끝난 상황.
 남은 것은 계약서를 검토하고 도장을 찍는 일뿐이다.
 
 30분 후.
 정후는 흡족한 표정으로 팀장실을 나섰다. 그가 유필준을 데리고 향한 곳은 지하 2층 체육관.
 전과 달리 이번엔 그들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50대로 보이는 얼굴. 그런데도 20대 못지않게 탄탄한 근육을 자랑하는 사내.
 유필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사내가 억센 손을 내밀었다.
 “반갑네. 팀장님으로부터 얘기 들었어. 유필준이라고? 나는 오늘부터 자네를 지도할 강태영이라고 하네.”
 역시!
 유필준은 양손으로 강태영의 손을 잡고 허리를 직각으로 굽혔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강태영 선배님!”
 “나를 아나?”
 “당연히 알지요. 업계의 살아 있는 전설 아니십니까. 은퇴하신 후로 소식을 접할 길이 없었는데 여기 계실 줄은.”
 “돌아다니면서 강연도 하고 그랬는데 여기가 제일 편하더라고. 아무튼, 서로 소개도 끝났으니 슬슬 시작해 보자고. 나이 먹으니까 마음만 급해져서.”
 지켜보던 정후가 피식 웃었다.
 “분위기 보니까 서로 트러블 생길 일은 없겠네요. 유필준 씨, 아까 계약서 가져온 친구가 필준 씨 담당하기로 했는데요. 일단 며칠 지켜보시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귀띔해 주세요. 바로 교체해드리겠습니다.”
 개인 매니저.
 팀원들에게 주어지는 아주 사소한 혜택 중에 하나다.
 “그럼 이동해 볼까요?”
 그들이 이동한 곳은 체육관에 딸린 검사실.
 국가공인 테스트와는 격이 다른, 그야말로 인간의 잠재력을 극한까지 끌어내어 측정하는 공간.
 “여긴······.”
 “검사실입니다. 지금부터 이곳에서 간단한 테스트를 진행할 겁니다. 결과는 훈련의 참고 자료 정도로만 사용되니 전혀 부담 갖지 마시고요.”
 통제실에서 직원이 시스템을 세팅하는 동안 정후가 테스트 방식을 설명했다.
 “일명 피하기 게임이라고 해보셨는지 모르겠네.”
 유필준도 심심풀이로 해본 적이 있었다.
 플레이어를 향해 날아드는 장애물을 얼마나 오랫동안 피하는지 겨루는 게임.
 “그거랑 골격은 비슷하지만 디테일에서 조금 차이가 나요.”
 조금이라는 표현에 강태영이 피식 웃었다. 사실은 차이가 엄청 많이 나기 때문이다.
 “이게 테스트에 쓰이는 구체에요.”
 정후가 보여준 것은 탁구공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평소엔 정지해 있지만, 테스트가 시작되면······.”
 정후의 손가락 위에서 소리 없이 구체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회전하면서 필준 씨에게 날아들 겁니다. 처음엔 1,800RPM(분당 회전수)으로 시작하는데, 야구로 치면 145킬로 패스트볼이 날아든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단계가 올라갈수록 당연히 속력과 RPM도 증가할 거고요.”
 정후가 회전하는 구체를 움켜쥐었다.
 “물론 특수 제작된 슈트를 입고 테스트에 임하시기 때문에 맞더라도 통증은 없습니다. 단지 타격 부위와 강도에 따라 예상 피해치가 측정되지요.”
 구체에 스치는 것과 정통으로 맞는 것은 다르단 뜻이었다.
 “물론 계속 피하기만 하면 답답하겠죠? 구체를 타격해 터뜨릴 수도 있습니다. 별도의 무기는 제공되지 않지만 스킬은 얼마든지 사용 가능합니다. 잠시 전으로 돌아가서······ 피하거나 방어하는 과정에서도 스킬 사용이 가능해요.”
 정후가 손가락 사이에 구체를 끼고 빙글빙글 돌렸다.
 “물론 구체가 무작정 터지진 않습니다. 일정량의 피해를 입혀야 터지는데 예외가 있다면 여기.”
 정후의 손가락이 바늘구멍처럼 작은 점을 가리켰다.
 “이곳을 정확히 타격하면 보다 적은 위력에도 구체가 폭발합니다. 요컨대 공격력과 정확성을 동시에 요구하는 셈이에요.”
 설명을 마침과 동시에 직원이 머리 위에 양손으로 원을 그렸다.
 “준비 끝났답니다. 이제 슈트로 갈아입고······.”
 유필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죄송하지만 시범 가능할까요? 제가 설명보다 직접 눈으로 보고 이해하는 타입이라.”
 물론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정후의 퍼포먼스를 확인하고 싶었다. 영상이 아니라 눈앞에서 직접.
 “제가요? 여기 교관님도 계시는데.”
 강태영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어허. 나는 신경 쓰지 마요. 그리고 사실 현역 은퇴한 나보다야 팀장님 시범이 훨씬 도움 되지.”
 핑곗거리를 잃은 정후가 입맛을 다셨다.
 “하아. 그래요. 계약서에 도장도 찍어주셨으니 오늘 하루만 특별히······. 대신 맛보기만이에요. 끝까지 진행하려면 너무 오래 걸리니까.”
 그러면서 밖을 살피는 정후였다.
 “누가 보면 피곤해지거든요. 훈련 파트너 해달라고 어찌나 달라붙는지. 다들 바쁜 사람 괴롭히는 거에 맛 들여 가지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정후가 검사실 내부로 들어가자.
 “사실 별로 참고는 안 될 거야.”
 강태영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팀장님······ 정후 씨는 조금 많이 특별하거든.”
 그게 무슨 뜻이냐고 유필준이 물으려는 순간, 통제실 직원이 마이크를 잡고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3, 2, 1. 테스트 시작하겠습니다!”
 우웅-
 직원이 시스템을 가동시키자 사방의 벽이 개방되며 수백 개의 구체가 정후를 향해 날아들었다.
 “······!”
 구체의 속도는 유필준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빨랐다.
 “저게 시속 145킬로라고?”
 그럴 리가 없었다. 정후의 수준에 맞춰 처음부터 난이도를 올린 것이다.
 물론 놀라움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순식간에 코앞까지 도달한 구체들은 거짓말처럼 정후를 비껴갔다. 운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사각지대라도 있는 건가? 저걸 어떻게 피하지?’
 유필준의 생각도 틀렸다.
 정후는 처음부터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구체가 도달하지 않는 사각지대를 만들어냈을 뿐이다. 방출된 오러를 컨트롤해 구체의 탄도를 바꾼 것이다.
 정후가 검사실 밖의 유필준을 힐긋 쳐다봤다. 입은 열지 않았지만 마치 이런 식으로 피하는 거라고 설명하는 듯하다.
 퉁!
 빗나간 구체가 벽에 부딪히며 가속했다. 더욱 빨라진 구체의 궤적을 쫓기 위해 유필준이 안간힘을 쓰던 그때였다.
 마치 그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구체들이 허공에 떠오른 채로 정지했다.
 “뭐야······ 저게?”
 유필준이 머리를 쥐어짜 경우의 수를 떠올리려는 찰나.
 펑!
 구체들은 한순간에 폭죽처럼 터져 나갔다.
 어느새 검사실 안엔 정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테스트 종료됐습니다.”
 직원의 뒤늦은 종료를 알리는 소리가 들리고 정후가 문을 열고 검사실을 내려왔다.
 그만큼 엄청난 능력을 보여줬으면 최소한 휘청거리기라도 할 법한데 정후는 말짱했다.
 “대충 이런 식이에요. 방금은 가장 무난한 방식이고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먹혀요.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눈만 껌뻑이는 유필준에게 정후가 검사실 문을 열어주며 손짓했다.
 “이제 유필준 씨 차례에요. 긴장하지 말고 평소대로.”
 
 당연하게도 유필준은 평소의 실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했다.
 정후의 퍼포먼스가 계속해서 눈앞에 어른거려 집중하지 못했던 것.
 결국 유필준은 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검사실을 빠져나왔다. 밖에서 테스트를 지켜보던 강태영이 그의 어깨를 두들겨줬다.
 “그래도 처음치고는 나쁘지 않았어. 너무 풀 죽진 말고. 우리 팀에선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거니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유필준이 물었다.
 정후가 보이지 않는다.
 “······팀장님은요?”
 “잠시 자리 비우셨어. 다른 팀원들 체크한다고.”
 “저기······.”
 막상 질문하려니 강태영이 어렵게 느껴지는 유필준.
 다행히 강태영은 인상과는 달리 넉살이 좋았다.
 “선배라 불러도 되고 교관이라 불러도 되고. 사석이면 형님도 괜찮은데 여기선 좀 그렇지?”
 “그럼 선배님, 하나만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아까 그건 뭐였냐고?”
 진지한 표정의 유필준을 바라보며 강태영이 설명했다.
 “간단히 설명하면 오러 컨트롤.”
 오러는 스킬을 사용할 때마다 소모되는 에너지라 알려져 있다. 바꿔 말하면 오러를 컨트롤해 일으키는 현상을 스킬이라 부르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해선 이해가 힘드니 가장 기본적인 스킬인 가속을 예로 들자고. 가속은 오러를 다리 근육에 집중시켜 움직임을 빠르게 만드는 거잖나.”
 쉽게 설명했지만 절대 간단하진 않다.
 배꼽 근처. 코어에 저장된 오러를 다리 근육으로 이동시키는 과정도 어렵지만, 사전에 단련시켜놓지 않으면 육체가 오러를 견뎌내지 못하고 붕괴되고 만다.
 “넓은 의미에서 가속은 몸속에서의 오러 컨트롤에 포함되지. 그럼 가속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공간 이동은 어떨까.”
 마치 학창 시절로 돌아간 심정으로 유필준이 대답했다.
 “······외부에서의 오러 컨트롤에 포함되겠지요.”
 “그래. 하지만 원리가 공개됐음에도 공간 이동은 여전히 최상위권 헌터들의 전유물이지. 이유가 뭐라 생각하나.”
 “외부로 방출된 오러는 급속도로 손실될 뿐만 아니라 통제력마저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오러는 외부에 방출되는 순간 90퍼센트 가까이 손실된다고 알려졌다.
 통제력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정답. 알다시피 수학 문제처럼 간단해. 100P의 오러가 방출되면서 10P가 되고, 다시 거기서 통제 가능한 오러는 1P로 쪼그라들지. 우리는 외부에 방출된 오러 가운데 고작 1퍼센트만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뜻이야.”
 여기서 손실률을 얼마나 줄이고 통제력을 얼마나 키우느냐에 따라······ 헌터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
 “그런데 말이야.”
 강태영의 눈동자가 멀리 떨어진 정후의 뒷모습을 향했다.
 “외부로 방출되는 오러를 완전무결하게 컨트롤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기존의 상식을 완전히 깨부수는 새로운 스킬들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손실률 0퍼센트.
 통제력 100퍼센트.
 헌터들에겐 그야말로 꿈의 영역.
 “그래 봐야 그건 말 그대로 이론······. 잠깐. 그럼 설마! 팀장님은 벌써 거기까지 도달한 겁니까?”
 “나야 모르지.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어떤 헌터보다도 가장 근접한 것만은 분명해.”
 강태영이 유필준을 돌아보며 웃었다.
 “이젠 이해되나? 아까 본 광경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동시에 마구잡이로 샘솟는 의문들.
 “어째서죠? 그런 능력을 갖고도 왜 헌터로 활동하지 않는 겁니까? 지금보다 훨씬 많은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을 텐데.”
 “자네도 모르는군. 하긴 당연한가. 워낙 오래된 일이기도 하고. 이젠 기억하는 사람도 얼마 없지.”
 예전 일을 떠올리며 강태영이 살며시 눈을 감았다.
 “팀장님도 한때는 헌터였다네.”
 “······!”
 믿기지 않았다. 저런 실력자라면 이름이 알려지고도 남았을 텐데.
 이정후라는 이름은 들은 기억이 없다. 유필준의 의문에 대답하듯 강태영이 입을 열었다.
 “3개월.”
 아까 정후가 유필준에게 말한 3개월과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헌터 이정후가 업계 정상에 오르는데 걸린 시간이라면 믿어지나? 그가 만든 화랑이란 팀도 그동안 엄청난 성과를 이룩해냈지.”
 그때의 정후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과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치던 시절. 당연히 신중함과도 거리가 멀었다.
 “만일 시간이 그대로 흘러갔다면 그는 누구도 넘보지 못할 헌터가 됐을 거야. DK? 케이원? 과연 그들이 고개나 들고 다닐 수 있었을까?”
 반전을 암시하듯 강태영의 목소리는 착하고 가라앉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미안하지만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 팀장님이 한때는 최고의 헌터였다는 것. 그리고 여전히 가공할 실력을 갖고 있다는 것. 나머지는 본인에게 직접 들으라고.”
 솔직히 실망했지만 내색할 만큼 경솔하진 않았다.
 조용히 고개를 돌린 유필준은 정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누구보다 화려했던 전력. 그리고 말 못 할 비밀을 간직한 남자.
 그의 과거가 궁금해졌다.
 
 * * *
 
 오후 4시.
 퇴근 시간이 한참 남았음에도 정후는 책상을 정리했다.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수고들 하세요.”
 “수상해. 우리 팀장님 외부 일정도 없는데 벌써 퇴근하신다니.”
 “어머! 설마 그건가? 헤어진 여자 친구랑 재결합한 거 아니에요? 오늘 재결합 기념으로 데이트한다든가.”
 “에이, 설마. 카페에서 얼굴에 커피 쏟았다는데.”
 ‘······다 들려. 이 여자들아. 나가고 나서 떠들든가.’
 여직원들이 떠드는 소리를 뒤로하고 사무실을 나선 정후는 세단에 올라탔다.
 평소라면 운전기사가 대기했겠지만, 오늘은 혼자다.
 퇴근 시간 전이라 아직은 교통 체증이 덜한 도로를 달린 끝에 정후가 도착한 곳은 서울 시내의 납골당이었다.
 오는 길에 집에 들러 갈아입은 검은 양복, 검정 구두. 그리고 한 손엔 꽃집에서 사 온 국화를 들고서 일렬로 늘어선 사진들 앞에 섰다.
 ‘어느덧 13년인가.’
 유리 너머, 사진 속 사람들의 모습은 그대로였다. 여전히 젊었고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유리를 매만지는 정후의 눈가로 13년 전의 과거가 거슬러 올라왔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데뷔 3개월 차.
 정후는 이미 한국에서 최정상급의 헌터였다. 그리고 그가 이끄는 화랑 역시 최고의 팀이었다.
 언론 노출보다 사냥에 집중했기에 대중엔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각국의 유명 헌터 그리고 초대형 컴퍼니와 팀 중에선 정후를 모르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때문에 정후에게 지원 요청이 들어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목적지는 마리아나 군도의 괌이었다. 미국 영토지만 한국과 일본 관광객들 역시 즐겨 찾는 관광지.
 그곳에 게이트가 생성된 것이다.
 초기엔 ‘호랑이’급으로 알려졌지만, 선발대가 전멸하면서 ‘용’급으로 격상됐다.
 미국은 물론이고 인접한 일본과 필리핀에서도 헌터들을 파견했고, 한국에선 정후가 이끄는 화랑 팀이 나섰다.
 지금 생각하면 성급한 결정이었지만 그때는 자신 있었다. 한국을 넘어, 세계에서 인정받겠다는 포부를 품고 오른 원정길.
 시작은 성공적이었다.
 정후가 이끄는 화랑 팀은 세계적인 팀들에 뒤지지 않는 저력을 과시하며 몬스터들을 돌파했다.
 그러나 게이트 핵심부에 진입하는 순간, 각국에서 모여든 헌터들은 깨달았다.
 절망이 무엇인지.
 ‘용’급 이상.
 인류가 정복하지 못한 게이트를 일컫는 비공식 명칭 ‘절망’이 그때 생겼다.
 게이트 핵심부에 진입하기까지 이미 2할의 희생자를 냈던 연합팀은 그 3배가 넘는 인원을 잃고 나서야 게이트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마저도 정후의 신들린 활약과 영웅 제이의 희생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13년이 흐른 지금.
 괌은 여전히 세계지도에서 검게 칠해져 있다.
 알래스카와 고비사막과 더불어 대표적인 미수복 지역.
 그나마 게이트가 집어삼키는 공간에 한계가 있었기에 다행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마리아나 군도 전역이 검게 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 동료들을 남겨두고 돌아온 정후에게는 그런 사실은 전혀 위안이 되지 않는다.
 국화꽃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알고는 있다.
 국화꽃 한 송이로는 그들의 넋을 달래지 못한다는 것을.
 그럼에도 이따금 이곳을 찾는 것은 잊지 않기 위함이다. 길었던 방황을 끝내고 복수를 다짐하던 그 날의 기억을.
 납골당을 빠져나오는 정후의 머리 위로 새하얀 눈이 내렸다.
 13년 전,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어 인천공항으로 귀국하던 날처럼.
 “벌써 겨울인가······.”
 
 * * *
 
 주말을 앞둔 금요일.
 “팀장님, 오늘 일정입니다.”
 개인 비서로부터 일정을 확인한 정후는 입맛을 다셨다.
 “역시나 오늘도 바쁘네.”
 “······.”
 오전엔 내부 일정과 더불어 학회 참석, 오후에는 사전에 제작 주문한 팔목 보호대 시제품 검사.
 정말 오랜만에 일과가 꽉꽉 채워졌다.
 “학회 관련 자료는?”
 “노트북에 준비해놨습니다.”
 “그럼 이건요?”
 “자료 요약본입니다. 학회 참석 전에 간단하게 참고하시라고.”
 정후는 서류 파일을 천천히 넘겼다.
 가장 눈에 띄는 건 한국의 게이트 생성 지역 분포도. 분명 흥미로운 주제다.
 원래 초창기만 하더라도 게이트는 그야말로 무작위로 생성됐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규칙성이 나타나고 있다.
 일단 미수복 지역엔 게이트가 추가 생성되지 않는다.
 ‘인류 입장에서야 미수복 지역이지만 몬스터들 입장에서 보면 식민지. 어차피 점령이 끝났으니 추가로 병력을 보낼 필요가 없다는 거겠지.’
 게이트 생성 빈도와 난이도 역시 나날이 높아지는 가운데 레이더에 감지되지 않는 미감지 게이트의 출현 빈도가 부쩍 늘었다.
 ‘일반 게이트와 미감지 게이트의 연관성 연구. 이건 확실히 확인해 볼 가치가 있겠어. 그렇잖아도 요즘 미감지 게이트가 늘어나는 추세니까. 서울대 김종찬 교수라······.’
 서류 파일을 덮으며 정후가 미소 지었다.
 “깔끔하게 정리됐네요. 고마워요. 이것만 있으면 학회장에서 졸아도 문제없겠네.”
 농담이 아니었다.
 정후는 실제로 학회장에서 졸아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학회가 끝나고 참석자들이 학회장을 빠져나가는 가운데 잠에서 깨어난 정후는 눈을 비비다 가방을 정리 중인 노학자를 발견했다.
 서울대 김종찬 교수.
 미감지 게이트 분야에서 국내 일인자로 꼽히는 전문가다.
 “교수님.”
 뿔테 안경을 고쳐 쓰며 김종찬 교수가 정후를 쳐다봤다.
 뒷자리에서 고개를 처박고 졸던 사람이 누군가 했는데 아는 얼굴이었다.
 “팀장님?”
 정후가 멋쩍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자료 공부까지 하고 왔는데 깜빡 졸아버렸네요.”
 “워낙 공무가 바쁜 분이니 이해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미감지 게이트 관련해서 질문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미감지 게이트의 생성이 일반 게이트와 연관이 깊다고 하셨는데. 혹시 별도의 공식이 존재하는지.”
 김종찬 교수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일단 연구 과제로 선정은 했지만 아직 데이터가 부족해요. 워낙 변수도 많아서 공식을 공개하기는 시기상조입니다.”
 “개인적으로 확인해 보고 싶어서요. 당연히 외부에 공개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국가재난관리본부 알파팀의 수장.
 그게 의미하는 바는 결코 작지 않았다. 결국, 김종찬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무에 참고가 될지 모르겠지만······.”
 자료를 받아든 정후가 정중하게 허리 숙였다.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알아보고 유의미한 데이터 얻게 되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다음 목적지인 세강 연구소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김종찬 교수의 자료를 확인하는 정후였다.
 ‘미감지 게이트는 해당 지역에 생성된 일반 게이트 등급 총합에 비례하여 나타난다.’
 김종찬 교수가 주장하는 이론이다.
 변수가 많긴 하다. 해당 지역을 어디로 특정할 것인지, 기간을 언제부터 언제까지로 잡을지. 입력 값에 따라 결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하지만 자료를 검토한 끝에 정후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잠깐만, 부실한 데이터를 채워 넣으면 공식이 얼추 맞아떨어질지도 모르겠는데.’
 김종찬 교수가 전문가라고는 하나 정부 관계자는 아니다.
 특히 게이트 발생 초기, 정부가 의도적으로 은폐한 사례들까지 감안하면 당연히 확보한 데이터가 상대적으로 미흡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후는 게이트와 관련된 모든 자료 열람이 가능하다.
 ‘일단 시험 삼아 서울 지역의 데이터만 공식에 대입해 보자.’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정후는 한참 동안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건······!’
 
 * * *
 
 대전에 위치한 대덕 연구 단지.
 15년 전. 이곳에 설립된 세강 연구소는 장비 주문 제작 분야에서 국내 최고로 꼽힌다.
 헌터들이라면 몬스터를 사냥해 얻은 부산물로 이곳에서 맞춤형 장비를 제작하길 원하지만, 그런 행운을 누리는 헌터는 소수에 불과하다.
 물론 정후의 알파팀은 그들 중에서도 특별했다.
 “팀장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문까지 정후를 마중 나온 이는 무려 세강 연구소 부소장.
 콧대 높기로 유명한 그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무척 들뜬 얼굴이다.
 “시제품 준비됐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서 직접 확인하시지요.”
 “전에 왔을 때보다 분위기가 조금 한산하네요?”
 한산한 정도가 아니었다.
 휴가철이라 착각할 만큼 생산라인이 휑하니 비어 있었다.
 부소장이 입맛을 다셨다.
 “요즘 대성그룹 산하 연구소에서 거래소에 나오는 부산물을 싹쓸이하잖습니까. 신약과 백신 개발. 물론 중요하죠. 충분히 이해는 되는데. 그래도 이번엔 너무했어요. 장비 제작에 핵심인 부산물까지 몽땅 매입해 버리면 우린 어쩌라는 건지.”
 “조만간 공정거래위에서 조사 들어갈 겁니다.”
 기본적으로 부산물 거래는 시장 자유에 맡기는 편이지만, 이번처럼 독점이 의심되는 경우는 다르다.
 “빨리 해결돼야 하는데. 매출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자꾸 쉬기만 하면 감각이 죽거든요.”
 천생 제작자다운 마인드에 정후는 미소 지었다. 저러니까 명장(名匠) 소릴 듣는 거다.
 실험실에 들어가자 연구원이 검은 박스를 들고 왔다.
 한정판 도서가 담겼을 법한 크기. 하지만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책이 아니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상자를 열자 칠흑을 원색 그대로 담아낸 팔목 보호대가 나왔다.
 누가 봐도 시선을 강탈당할 만한 자태였지만.
 “잠시만요.”
 정후는 성능 검사표부터 확인했다.
 숫자를 꼼꼼히 살펴본 후에야 정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기대 이상인데요.”
 물론 측정값만 보고 끝낼 생각은 없다.
 전신 슈트도 아니고 고작 팔목 보호대지만, 그 가치는 돈으로 환산하기 힘들다. 무려 6성 몬스터 갑각지네의 표피가 재료로 들어갔으니까.
 당연히 직접 확인해 봐야 한다.
 시험 삼아 오러를 주입해 본 정후의 눈이 빛났다. 상당한 양의 오러를 주입했음에도, 팔목 보호대엔 아주 작은 균열조차 생겨나지 않았다.
 이만하면 5성급 몬스터의 공격은 가볍게 무시해도 좋은 방어력이다.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는 정후.
 “부소장님은 항상 실망시키는 법이 없네요.”
 부소장의 표정이 급격히 밝아졌다.
 홍보 효과? 매출 상승?
 그딴 건 아무래도 좋다.
 그가 제작한 장비를 최고의 헌터들이 사용한다는 것. 그 사실 하나면 충분하다.
 “나머지 물량도 이대로 제작 부탁드립니다. 팀원들이 목을 빼고 기다리는 중이에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개인적으로 주문하신 장비는 어떻게 하실 건지.”
 “오늘 인수하겠습니다.”
 “실례지만······ 어디에 쓰실 건지 여쭤 봐도 될까요?”
 정후가 개인적으로 주문한 슈트.
 성능과 디자인은 나쁘지 않다. 오히려 괜찮은 편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최상위권 헌터들에게 어울리는 장비는 아니다.
 대부분의 초일류 헌터들은 장비를 1세트만 갖고 있지 않다. 여러 세트를 구비해 두고 상황에 적합한 장비를 사용한다.
 산성액을 내뿜는 몬스터를 상대할 때는 부식되지 않는 장비를, 속도에 특화된 몬스터를 상대할 때는 초경량 장비를 착용하는 식으로.
 당연히 특색이 강할 수밖에 없는 데 비해, 정후가 주문한 슈트는 너무 무난했다.
 보급형이면 모를까. 최상위권 헌터들이 선호할 장비는 아닌 것이다.
 “축하해 줄 사람이 있어서요.”
 그 순간 정후가 떠올린 건 오래된 친구의 얼굴이었다.
 
 * * *
 
 약속 장소로 가는 동안 정후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김종찬 교수의 공식에 데이터를 대입한 결과가 계속해서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공식대로면 오늘 중으로 서울 어딘가에 미감지 게이트가 하나 생성될 텐데.’
 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검증되지도 않은 공식을 근거로 서울 전역에 비상 대기령을 발효할 수는 없잖은가.
 정후의 권한이 막강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닌 것은 아니다.
 ‘괜히 확인했나. 신경만 쓰이게.’
 고민하는 사이 약속 장소인 고깃집에 도착한 정후였다. 직원에게 물어 방으로 들어가자 엄청난 환영 인사가 쏟아졌다.
 “저거 봐라. 내가 말했지? 제일 꿀 빠는 자식이 항상 늦는다니까.”
 “내가 내는 세금으로 저놈 월급 준다고 생각하니까 일할 맛도 안 나. 그냥 확 그만둘까?”
 “그만두면?”
 “아. 맞다. 난 정후 저놈처럼 연금 안 나오지.”
 악의 없이 낄낄거리는 고등학교 친구들.
 “대신 퇴직금 나오잖아. 대전 출장 갔다 오느라 늦은 거니까 양해 좀 해줘라.”
 넉살 좋게 받아친 정후가 자리에 앉았다.
 벌써 한 잔씩 걸쳤는지 다들 얼굴에 술기운이 가득하다.
 고등학교 동창 모임······ 까지는 아니고, 친한 친구들끼리 가끔 모이는 정도다. 그마저도 다들 직장에 가정에 바빠서 모이는 빈도가 뜸해졌었는데 이번엔 큰맘 먹고 모두 모였다.
 “주인공은?”
 무려 사수 끝에 헌터 자격시험에 합격한 동섭이를 위해.
 “화장실 갔는데.”
 “저기 오네.”
 정후가 들어왔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박수가 쏟아졌다.
 동섭이 민망한 얼굴로 자리에 앉자 정후가 입을 비죽 내밀었다.
 “뭐냐. 사람 차별해?”
 “약속 시간 맞춰서 왔으면 너도 손뼉 쳐줬다. 뺨 안 때린 걸 다행으로 알아.”
 킬킬거리며 친구가 정후의 잔에 소주를 채웠다.
 “자자! 세금 도둑도 왔으니까 거국적으로 한잔!”
 “위하여!”
 가볍게 소주를 단번에 마신 지혜가 입술을 핥았다. 모이는 친구 중에 유일한 홍일점이다.
 “이럴 줄 알았음 결혼 안 하고 동섭이 기다리는 건데.”
 지혜와 몇 년 전 결혼한 강석이 콧방귀를 뀌었다.
 “기다렸으면? 동섭이가 받아준대?”
 “흥! 나 아직 매력 있거든? 그치이이? 동섭아아아.”
 “야. 동섭이 부정 타니까 면상 치워.”
 말이야 저렇게 해도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찰싹 붙어 다닌 커플이다. 얼마나 보기 좋은가.
 “야, 그러고 보니 미정 씨는?”
 “물어볼 걸 물어봐. 딱 보면 몰라? 커플링도 안 끼고 왔잖아.”
 “어? 정후 헤어졌냐? 와! 겹경사 났네!”
 젠장. 보기 좋다는 말 취소다. 바퀴벌레 커플 같으니라고.
 애꿎은 소주만 마셔대던 정후는 결국 밖으로 나왔다.
 밤바람을 맞으며 머리를 식히는데 누군가 옆에 와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건넸다.
 “마셔. 날도 추운데.”
 “고맙다. 잘 마실게.”
 헌터 자격시험에 합격한 동섭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녀석이 이번에 시험을 치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정후다. 하지만 총감독관임에도 동섭의 점수엔 손을 대지 않았다.
 부족한 점수로 합격해 봐야, 실전에서 목숨만 위태로워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동섭은 자신의 실력으로 자격시험에 통과했다. 헌터의 자격을 당당하게 입증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축하한다는 말도 못 했네. 축하한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진심 어린 정후의 축하에 동섭이 미소 지었다.
 “다 네 덕이야. 정말 고맙다. 사실······ 이 말 하려고 쫓아 나온 거야.”
 “야, 네가 열심히 한 걸 나한테 고맙다고 하냐.”
 “나 계속 시험 떨어지고 흔들릴 때, 네 덕에 마음잡았거든. 너 아니었음 아마 다른 일 알아보고 있었을 거다.”
 “뭔 소리 하나 했네. 술 몇 번 사준 거 가지고.”
 동섭은 말없이 정후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술 몇 번 사주고 만 게 아니다. 수험 생활 때문에 책임지지 못한 여동생 학비, 어머니 병원비. 그 모든 걸 눈앞의 정후가 대줬다는 걸 얼마 전에야 알았다.
 남몰래 ‘화랑’재단이란 단체를 통해.
 사실 공무원 월급이야 뻔하다.
 그 얼마 안 되는 월급을 아껴 도와준 정후의 마음 씀씀이를 생각하니, 너무 고맙고 또 미안했다.
 하지만 그걸 대놓고 말할 순 없었다. 정후가 숨긴 것엔 다 사정이 있을 것이기에.
 “아무튼 고맙다. 돈 벌면 진짜 제대로 한잔 살게.”
 “당연히 그래야지. 그건 그렇고 겨울이라 그런가, 밤 되니까 완전 춥다. 빨리 들어가자.”
 술자리는 생각보다 이른 시각에 끝났다.
 서로 꼬집고 찌르다 불이 붙은 바퀴벌레 커플이 가장 먼저 귀가했고 나머지 친구들도 아내의 소환에 굴복해 사라져갔다.
 결국, 둘만 남게 된 정후와 동섭이다.
 “정후야, 오랜만에 집까지 걸어갈까?”
 어릴 적 정후와 동섭은 같은 아파트에 살았다. 초, 중, 고 모두 같은 곳에 다녔고, 당연히 등하교도 함께였다.
 “옛날얘기도 할 겸.”
 “야, 나 이사 간 지가 언젠데.”
 “아. 맞다. 미안하다. 내가 많이 취했나 봐. 내 생각만 했네.”
 사과하는 동섭을 보니 마음이 약해진 정후였다.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착한 녀석인데.
 “알았다. 어차피 내일 쉬는 날이고, 약속도 없으니까.”
 맞다. 선물 줘야 하는데.
 걸어가자고 했으니 공영 주차장에 세워둔 차까지 가기도 그렇다.
 무엇보다 지금 분위기에서 선물까지 줬다간, 왠지 길바닥에서 엉엉 울 것 같기도 하고.
 나중에 주지 뭐.
 정말 오랜만에 정후는 어릴 때 살던 동네를 걸었다. 꽤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동네는 달라지지 않았다.
 야자를 째고 친구들과 함께 갔던 피시방도, 더운 날 아이스크림을 사 먹던 슈퍼도.
 그 자리, 그대로였다.
 “정후야! 저 오락기 기억나냐? 너 초딩 때 나한테 져서 엉엉 울고 그랬었잖아.”
 “동섭아, 기억 날조하지 마. 형은 싸움이든, 게임이든 남한테 져본 적이 없단다.”
 “얼씨구? 오랜만에 한판 붙을까? 짤짤이도 많은데.”
 “까짓거 못 붙을 것도 없지. 제대로 참교육시켜주마.”
 기세등등하게 문방구 앞 오락기로 향하던 정후가 멈칫했다.
 우우웅.
 스마트폰에 전송된 메시지.
 
 -용산구 미감지 게이트 생성.
 
 김종찬 교수의 이론이 맞아떨어진 건 아니다.
 연달아 새로운 메시지가 날아들었으니까.
 
 -성북구 미감지 게이트 생성.
 -종로구 미감지 게이트 생성.
 
 미감지 게이트가 생성된 지역은 한 곳이 아니었다.
 “미친······.”
 정후가 입술을 질끈 깨물던 그때.
 쿠우웅!
 땅이 흔들렸다.
 그리고 간발의 시간차를 두고-
 콰아아아아앙!
 멀리 보이는 아파트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검은 하늘. 번쩍이는 섬광 사이로 일그러진 공간이 보였다.
 게이트였다.
 당연히 사전 경보는 없었다. 이곳에도 미감지 게이트가 생성된 것이다.
 일반적인 게이트와는 균열의 크기부터 달랐다. 아파트 옥상 위, 하늘에 일그러진 타원형의 균열은 그 지름만 10미터 이상.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던 정후와 달리, 동섭은 미친 듯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게이트를 향해, 정확히는 그 아래 있는 아파트를 향해서.
 그제야 정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릴 적, 몇 번이나 놀러 갔던 그곳.
 화성아파트 704동.
 게이트가 생성된 곳은 바로 동섭의 가족이 사는 아파트 상공이었다.
 그 순간, 다시 한번 섬광이 번쩍였다. 균열을 찢고 아래로 쏟아지는 몬스터들이 보였다.
 통설을 깨고, 게이트가 생성된 지 10초도 지나지 않아 몬스터들이 나타난 것이다.
 앞서 달리는 동섭의 절박한 움직임이 정후의 시야에 들어왔다. 녀석도 헌터이니만큼 오러를 컨트롤해 가속을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너무 느렸다.
 아파트 주민들이 희생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고.
 시간을 맞춰 도착하더라도 몬스터들을 제압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행이다. 그냥 집에 안 가서.”
 아까 바로 집에 돌아갔다면 평생 후회했을 것이다.
 스마트폰과 연결된 블루투스 이어폰을 한쪽 귀에 꽂으며.
 파앗!
 정후가 바닥을 박찼다.
 “나야. 각 팀 당직 인원 2인 1조로 용산, 성북, 종로 미감지 게이트 생성 구역에 투입하고. 비번인 팀원들도 전부 비상 소집해.”
 미친 듯이 뛰고 있는 동섭의 모습이 순식간에 점처럼 작아졌다.
 “강동? 여긴 괜찮아.”
 어느새 균열 바로 아래 도달한 정후가,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몬스터들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덧붙였다.
 “내가 있으니까.”
 
 * * *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우는 것처럼 균열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들은 본능적으로 사냥감을 찾는다.
 하지만 강동구에 나타난 4성 몬스터 조디악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사냥감이 알아서 찾아왔으니까.
 촤아아악!
 검은 날개를 펼치며 조디악들이 정후에게 달려들었다.
 거대한 독수리처럼 생긴 조디악은 드릴만큼이나 위력적인 부리를 갖고 있다. 부리로 사냥감에 구멍을 뚫고 단숨에 피를 빨아들이는 것이 놈들의 사냥 방식이다.
 급강하하는 조디악들을 바라보던 정후가 허공에 떠오른 채로 살며시 움직였다.
 최소한의 이동. 절제된 동작.
 피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선두의 조디악에게 접근한 정후가 주먹을 뻗었다. 허리를 회전시키며 체중을 싣는 정석적인 펀치.
 빡!
 조디악의 머리가 휘청했다. 순간적으로 의식이 날아간 것이다.
 주변의 다른 조디악들이 발톱으로 공격해 왔지만, 정후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대로 기절한 조디악에게 달려들어 연달아 주먹을 꽂았다.
 파파파파팍!
 눈에 담기도 힘들 만큼 빠른 펀치가 조디악의 몸을 강타했다.
 살점이 터져 나가고 뼈가 으스러졌지만 멈추지 않는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조디악들을 동물적인 감각으로 피해내며 계속되는 공격.
 이미 눈앞의 조디악은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들다. 그제야 정후는 몸을 돌렸다.
 광전사처럼 싸워댔음에도 호흡과 맥박 모두 흔들림이 없다. 바닥에 서 있는 것처럼 편안한 자세. 눈빛 역시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
 언젠가부터 몬스터를 사냥하는 방식에 변화가 생겼다.
 부산물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지워버린다.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그그그극!
 동족의 죽음을 보고도 오로지 본능에 따라 달려드는 조디악들.
 정후가 팔을 뻗어 조디악의 부리를 낚아챘다.
 원래 조디악의 부리는 경계 대상이다. 방어력을 갖춘 장비에조차 손상을 입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후는 현재 맨손이다. 단지 오러를 둘러 강화한 상태.
 부리를 절단함과 동시에 양손을 조디악 머리 양쪽 관자놀이에 얹었다.
 조디악과 정후의 눈이 마주쳤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눈.
 “뭐라고 말이라도 해봐라.”
 물론 언제나 그렇듯 대답은 없다.
 그대로 양손을 치듯 꾸우욱 누르자 압력을 견디지 못한 조디악의 눈동자에 핏발이 솟구치더니 퍽하고 터져 나갔다.
 이어 밀가루 반죽처럼 뭉개지는 머리와 통제력을 상실한 몸은 축하고 늘어져 움직이지 않는다.
 탁탁.
 손을 털던 정후의 고개가 숙여진다.
 휙!
 머리 위로 조디악의 발톱이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몸통을 돌리며 발을 올려 찼다.
 빠아악!
 턱뼈가 박살 난 채로 날아가는 조디악을 따라붙은 다음, 움켜쥔 주먹을 철퇴처럼 내리찍었다.
 하나씩. 그러나 확실하게.
 조디악들의 수가 줄어간다.
 ‘몸은 대충 풀었고.’
 팽팽하게 긴장된 육체가 새로운 적을 찾아 꿈틀거린다. 목표는 새롭게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벼락원숭이들.
 조디악과 다르게 날개가 없는 놈들은 배를 애드벌룬처럼 크게 부풀려 서서히 하강한다.
 얼핏 보기엔 착지 전까지 무방비 같지만, 근접전은 금물이다. 벼락원숭이는 생명체와 접촉하는 순간 고압의 전류를 흘려보낸다.
 물론 상대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정후는 손으로 권총 모양을 만들었다.
 “탕.”
 마치 장난치듯 중얼거린 목소리에 손가락 끝에서 오러를 응축시킨 탄환이 쏘아졌다.
 밤공기를 가르며 날아간 탄환은 풍선처럼 부푼 벼락원숭이들의 배를 찢어놓았다.
 펑펑펑!
 벼락원숭이들이 공중에서 스파크를 일으키며 산화하는 광경은 마치 불꽃놀이를 보는 듯했다.
 물론 정후는 이미 눈을 돌려 균열을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추가적인 움직임이 없는 거로 봐서 1차 투입은 끝났군. 2차 투입이 시작되기 전에 게이트를 폐쇄하면······.’
 하지만 생각을 정리할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엄마아아아!”
 갑자기 들려온 비명에 정후의 고개가 돌아갔다.
 게이트가 생성될 당시 아파트에 전해진 충격이 생각 이상으로 심각한 모양이었다.
 반쯤 부서진 외벽 사이로 치솟는 불길과 매캐한 연기.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하는 것을 보면 대다수 주민은 빠져나왔지만 아직 탈출 못 한 사람이 존재하는 듯하다.
 많은 사람이 잠들었을 시각에 게이트가 생성됐으니 모두가 대피하긴 힘들었겠지.
 동섭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건물 안으로 들어갔을까.
 녀석만 믿기엔 아무래도 방금의 비명이 마음에 걸린다.
 ‘2차 투입이 시작되면 피곤해지겠지만······.’
 정후는 비명이 들려온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무엇보다 사람 목숨이 우선이다.
 ‘분명히 꼭대기 층이었어.’
 산소호흡기도 없이 연기가 자욱한 복도로 뛰어들었다.
 헌터라고 불사신은 아니다. 연기를 들이마시면 호흡기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마찬가지.
 하지만 정후는 거침없었다.
 숨을 최대한 참으며 와르르 무너지는 복도 위를 달렸다.
 ‘어디지.’
 정후의 의문에 대답하듯.
 “으으으······.”
 어디선가 신음이 들려왔다.
 여기다.
 콰앙!
 몸을 부딪쳐 문을 부수고 안으로 돌입했다. 불길을 헤치며 분주하게 주변을 훑었다.
 제발 무사하기를.
 ‘아!’
 정후는 소리 없는 탄식을 내뱉었다.
 반쯤 쓰러진 장롱을 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여자아이 그리고 장롱 밑에 다리가 깔린 중년의 여인.
 어린 딸은 엄마를 구하기 위해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던 거다.
 “꼬마야, 옆으로 비키렴.”
 뜻밖의 목소리에 여자아이가 고개를 돌렸다. 정후를 발견한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아······.”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눈물을 흘리며 아이가 정후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저씨! 우리 엄마 구해주세요. 저를 지켜주려다가······ 제발······ 우리 엄마 좀······.”
 정후는 아이를 향해 미소 지어 보였다.
 “이제 괜찮아.”
 쓰러진 장롱을 옆으로 치워놓고 중년 여인을 살폈다. 다리가 부러졌지만 다행히도 생명에 지장은 없는 상태.
 “저기······.”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얼굴.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무리해서 말씀하지 마시고 저한테 업히세요. 따님은 제가 안겠습니다.”
 정후가 쓰러져 있던 중년 여인을 일단 일으켜 앉히려는 순간.
 콰아아아앙!
 다시금 폭음이 들려왔다.
 천장이 와르르 무너지며 시멘트 가루가 쏟아져 내렸고 휑하니 뚫린 구멍으로 모처럼 미세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밤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스윽.
 구멍으로 고개를 들이민 것은.
 그르르륵.
 이목구비가 촛농처럼 흘러내리는 송장청소부였다.
 5성. 체격은 대형.
 전봇대처럼 거대한 송장청소부의 팔이 내려오자 여자아이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엔 송장청소부의 공포가 너무도 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천천히 눈을 뜨자, 상상도 못 한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정후가 손바닥을 뻗어 송장청소부의 팔을 막아낸 것이다.
 체격 차이는 10배 이상.
 하지만 오히려 팔이 부들부들 떨리는 쪽은 송장청소부였다.
 “꺼져.”
 정후가 손바닥에 오러를 집중시키며 밀어내자 송장청소부의 거대한 몸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
 “우리도 가자.”
 정후는 중년 여인을 업고 아이를 팔에 안은 채로 몸을 날렸다.
 정후에게 안긴 채로 여자아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저씨······ 헌터에요?”
 어린아이도 헌터의 존재를 아는 시대.
 하지만 정후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전혀 달랐다.
 “아니, 공무원.”
 중년 여인과 아이를 안전한 곳에 내려놓은 정후가 다시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때서야 자유낙하 속도로 떨어지는 송장청소부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발긴 다음, 정후는 게이트 안으로 진입했다.
 
 * * *
 
 사이렌을 울리며 구급차와 경찰차가 화성아파트로 속속들이 들어섰다.
 통제선이 펼쳐지고 부상자들에 대한 응급처치가 이뤄지는 가운데.
 동섭은 어머니와 막내 여동생의 상태를 확인했다.
 어머니가 다리에 골절상을 입긴 했지만 그래도 무사해서 다행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죄책감과 자괴감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헌터가 됐으니 가난과는 안녕이라고 생각했다. 가족이 위험해지는 일도 없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눈앞에서 가족이 위기에 빠졌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다니.
 땅이 꺼질 만큼 한숨을 내쉬는 동섭에게 정후가 다가왔다.
 “이게 무슨 일이래. 날벼락이 따로 없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
 하지만 정후를 바라보는 동섭의 표정은 미묘했다.
 들것에 실린 중년 여인과 여자아이. 정확히는 동섭의 어머니와 막내 여동생을 발견한 정후가 머리를 긁적였다.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역시 이런 식으로 넘어가긴 무리겠지?”
 동섭이 뭐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 정후를 알아본 동섭의 막내 여동생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어! 아까 우리 구해주신 공무원 아저씨다! 아저씨! 감사합니다!”
 잠자코 듣던 동섭이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 아니야.”
 “그럼?”
 동섭은 조용히 정후를 응시했다.
 녀석의 정체가 뭐든 무슨 상관인가.
 친구들에게까지 비밀을 숨긴 거?
 그게 뭐가 문젠데.
 녀석은, 이정후는······.
 “내 친구야.”
 
 
 3장
 
 
 동섭과 헤어진 정후는 택시를 타고 재난관리본부 건물에서 내렸다.
 새벽임에도 건물 전체가 등대처럼 환하다.
 “고생 많아요. 커피라도 사 왔어야 하는데 상황이 워낙 긴박해서.”
 정후의 등장에 보안 요원들이 가볍게 묵례했다.
 “흐흐. 팀장님 빼고 벌써 저희끼리 마셨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보안 카드를 스캔하자 끼익 소리를 내며 상황실 출입문이 열렸다.
 여러 개의 시선이 정후에게로 모여든다.
 “오셨습니까, 팀장님.”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것을 정후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인사는 생략하고 바로 시작합시다.”
 상황실 과장이 대형 모니터에 영상을 띄워놓고 상황을 브리핑했다.
 “오늘 자정을 기해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미감지 게이트가 생성됐습니다.”
 책상 위에 놓인 자료를 조용히 검토하는 정후다.
 이미 보고받은 대로 미감지 게이트가 생성된 지역은 서울만이 아니었다. 전국적으로 무려 10곳에서 미감지 게이트가 생성됐다.
 서울 4곳. 지방 6곳.
 현재 종로구. 그리고 정후가 개입한 강동구의 게이트는 폐쇄됐지만 8곳은 아직 전투가 진행 중이다.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의 안색이 어두운 이유였다.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계속 대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나마 10개 외에 추가로 생성되는 게이트는 없다는 사실이 유일한 위안거리.
 “현장에서 전송된 영상입니다. 순서대로 보시겠습니다.”
 용산구와 성북구는 거의 마무리 단계, 나머지 6개 지역은 몬스터 사냥이 한창이었다.
 “보시다시피 게이트 6곳은 폐쇄까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물론 지방에도 국가재난관리본부의 지부가 존재한다.
 다만 정후의 팀에 비해. 그리고 본부의 다른 팀들에 비해서도 격이 떨어지는 것은 분명한 사실.
 상대적으로 작전 수행이 늦어질 수밖에 없다.
 “다음은 현장 영상과 보고를 토대로 작성한 이번 미감지 게이트 분석보고서입니다.”
 몬스터의 종류와 개체 수, 균열의 크기와 형태.
 새로이 입력된 데이터들이 머릿속에 저장되며 분석 결과를 내놓는다.
 ‘타입은 다르지만 난이도 자체는 유사해.’
 시간은 조금 걸릴지 몰라도 폐쇄하는 데 문제없을 것이다. 정후가 거기까지 결론을 내렸을 때였다.
 갑자기 옆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완전 대박이네요. 이거.”
 홍보팀장이다.
 언론에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대변인 역할을 수행한다. 여론 반응 모니터 역시 그녀의 일이다.
 “뭔데 그래.”
 “아무리 그래도 신성한 회의 시간에 소란은······.”
 그러면서도 다른 참석자들 역시 홍보팀장의 스마트폰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거 분명히······.”
 다들 피로에 눌렸던 눈꺼풀이 올라가고 눈빛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뭔데 저러지.
 괜히 정후까지 신경이 쓰이는 찰나.
 “솔직히 오늘 언론에 신나게 두들겨 맞을 각오 했었는데.”
 안경 너머 홍보팀장의 눈동자가 정후에게 머물렀다.
 “우리 팀장님 덕에 걱정 없겠네요.”
 “저요?”
 홍보팀장이 스마트폰을 정후에게 건넸다.
 검색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가 눈에 들어온다.
 1위. 미감지 게이트.
 이거야 당연하고.
 2위. 강동구 다크나이트.
 뭐지 이건.
 영상을 재생시키자 흔들리는 화면이 잡힌다.
 3분 남짓한 동영상.
 화면 속에서 몬스터들을 학살하는 사람은 바로······ 정후였다. 누군가 정후의 활약상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것이다.
 검색 사이트뿐만 아니라 각종 SNS에서도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댓글을 대충 훑어본 정후가 피식 웃었다.
 “그나마 다행이네.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어서.”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돌려주며 정후가 회의를 마무리했다.
 “······홍보팀장님은 언론사에 보도자료 돌리고 기자회견 준비하세요.”
 미감지 게이트 10곳 동시 생성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국민을 안심시킬 필요가 있었다. 사실 인터넷 반응을 봐선 걱정하는 사람도 없어 보이지만.
 ‘이래서 익숙함이 무서운 거야.’
 게이트 생성 초기만 해도 세계 각지에서 생필품 사재기에 약탈 방화까지 일어났지만, 지금은 달랐다.
 인류는 익숙해진 것이다.
 게이트와 몬스터가 있는 삶에.
 
 상황실을 나온 정후는 시간부터 확인했다.
 벌써 새벽 4시.
 지금도 게이트를 폐쇄했다는 낭보가 실시간으로 날아드는 중이지만 아직 퇴근은 언감생심이다.
 비상 소집한 헌터들을 방치할 수는 없기에.
 “야식이라도 사 줘야겠는데.”
 알파팀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일동 기립!”
 의장대처럼 경례를 올려붙인 것은 이자성이었다.
 “임무를 마치고 귀환한 우리의 영웅 강동구 다크나이트를 위해 박수!”
 뭐 하나 했더니.
 “맞는다. 진짜.”
 “어허. 아이들의 영웅이 입버릇하고는.”
 “······누가 아이들의 영웅이래. 야식이라도 사다 주려고 했더니만 너는 글러 먹었다.”
 이자성이 번쩍 손을 들었다.
 “치킨.”
 “짬뽕이요. 곱빼기로 다가.”
 “식단 조절 중이긴 한데······ 그래도 이런 기회 놓치기 아깝지. 팀장님, 저는 족발로 하겠습니다.”
 곳곳에서 연쇄적으로 들려오는 목소리.
 “하아.”
 한숨을 내쉬면서도 정후는 기꺼이 야식을 대령해 왔다.
 눈을 반짝이는 천이설부터 시작해 팀원들에게 주문한 야식을 일일이 돌렸다.
 이자성이 눈을 껌뻑였다.
 “형, 나는?”
 “알아서 가져가. 애도 아니고 내가 떠먹여 주기까지 해야겠냐?”
 냉큼 비닐봉지 안을 확인한 이자성이 활짝 웃었다.
 “우와! 무지 많이 사 왔네. 나를 향한 사랑이 이렇게 넘침?”
 “아니. 먹고 뒈지라고.”
 넓은 대기실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야식을 먹는 팀원들을 보며 정후가 입을 열었다.
 “드시면서 들으세요. 아직 외부엔 미공개된 내용인데. 한국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미감지 게이트가 다수 생성됐습니다.”
 “······.”
 팀원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새로운 몬스터와의 격돌이 기대되는지 상기된 표정을 짓는가 하면 우려 섞인 한숨을 내뱉기도 했다.
 “팀장님, 정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려는 겁니까?”
 “아직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각국과 게이트 관련 정보를 공유해 분석까지 마쳐야 뭐라도 결론이 나올 겁니다.”
 각국은 알래스카 협약에 따라 게이트 관련 정보를 공유한다. 늦어도 내일 오후면 각국의 재난관리부서에서 관련 정보가 날아들 것이다.
 우우웅.
 스마트폰을 확인한 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대구까지 상황 종료됐네요.”
 원래라면 모두 함께 귀가하면 되건만 팀원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저도 인터넷에 올라온 동영상 봤어요. 정말 잘하시던데요?”
 오해 소지가 다분한 천이설의 대화를 시작으로.
 “팀장님, 나와도 한번 합시다. 훈련.”
 항상 그렇듯 의욕을 불태우는 중년 남자 장민석까지.
 “저기······ 지금 새벽 5시가 넘었습니다만.”
 “비상 상황 아닙니까. 이럴 때일수록 철저하게 대비해야지요. 그리고 솔직히 그런 영상을 봤는데 집에 간들 잠도 오지 않을 겁니다.”
 “자장가라도 불러드릴까요?”
 정후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이자성의 결정타에 무너졌다.
 “이대로 가버리면 SNS에 올릴 거야. 형이 강동구 다크나이트라고.”
 이자성은 팔로워만 천만 명이 넘는 스타. 사람들이 정후의 얼굴을 알아보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체념한 정후가 팀원들을 돌아보았다.
 “좋습니다. 전부 하실 건가요?”
 “물론입니다.”
 누군가는 목소리로. 누군가는 눈빛으로 호승심을 불태운다.
 어느새 진지해진 눈빛으로 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룰은 기억하십니까?”
 정후와 팀원들이 대련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때 합의한 규칙.
 먼저.
 “오늘 제가 이기면 앞으로 3개월 동안은 스파링 신청 금지입니다.”
 가속 외엔 스킬 사용금지.
 승리 조건도 일반적인 대련과는 다르다.
 제한시간 10분.
 선수들은 센서가 부착된 보호구를 입고 링에 오른다. 일격이라도 허용하면 정후의 패배.
 반대로 정후가 승리하려면 10번의 정타를 명중시켜야 한다.
 만일 양쪽 모두 승리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면 재대결.
 정후에게 극단적으로 불리한 룰이지만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초기에 대결에서 너무도 손쉽게 정후가 승리하면서 룰이 점차 수정된 것이다.
 “누가 먼저 하실 겁니까?”
 정후의 물음에 먼저 손을 들어 올린 사람은 장민석이었다.
 팀에서 승부욕이 가장 강한 팀원. 처음은 당연히 장민석일 거라 생각했기에 정후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려갑시다.”
 
 건물 지하 2층 체육관.
 어둠이 깔린 가운데 가로세로 30미터의 정사각형 링 위에만 조명이 비춰졌다.
 링에 오르는 장민석의 표정은 결전을 앞둔 로마 시대의 검투사만큼이나 비장했다.
 정후의 팀에 합류하기 이전, 그는 오랫동안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로 솔로잉에 매진해 왔다.
 최고라는 자부심 때문이었다. 자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장민석은 그럴 만한 실력을 갖춘 헌터였다.
 하지만 정후를 만나면서 장민석의 자부심은 무너져 내렸다. 정후는 장민석보다 강했다.
 좋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하지만 언젠가는 정후보다 강해지리라.
 굳센 다짐. 그리고 그때부터 시작된 혹독한 훈련.
 이제 준비는 끝났다.
 증명만이 남았을 뿐.
 “시작하겠습니다.”
 복싱처럼 가볍게 주먹을 부딪치며 뒤로 성큼 물러나는 정후와 장민석.
 타이머의 시간이 줄어들기 무섭게.
 팟!
 먼저 바닥을 박찬 장민석의 얼굴은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10여 미터를 질주해 날린 삼단 차기가 빗나가고 이어진 회심의 팔꿈치 공격마저 실패하는 순간 장민석은 깨달았다.
 지난 여덟 차례의 대결에서 정후는 단 한 번도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리고 지난밤 대한민국을 뒤흔든 동영상의 퍼포먼스조차 정후에겐 일상에 불과했음을.
 퍽!
 묵직한 한 방에 장민석의 가드가 풀렸다.
 훅!
 내려간 가드 사이로 정후가 잽을 뻗었다.
 장민석은 두 다리로 바닥을 밀어내며 물러났지만, 보호구에 부착된 센서가 울리는 것마저 막진 못했다.
 삐비비비빅-
 마치 망가진 것처럼 울려대는 센서.
 “······거짓말이지?”
 간이의자에 앉아 지켜보던 팀원들이 모두 벌떡 일어났다.
 그들도 정상급의 헌터다.
 당연히 정후의 잽이 여러 차례 적중했다는 사실 정도는 안다. 하지만 정확한 횟수는 누구도 파악하지 못했다. 정후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직접 상대하는 장민석 역시 정후의 움직임을 놓친 것은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는 보호구를 통해 전해지는 충격을 느꼈다.
 가슴에 세 방. 뒤로 물러나는 찰나 복부에 두 방.
 정후 입장에선 가볍게 날린 잽이었을 텐데 충격이 상당하다. 합금을 덧댄 보호구가 종잇장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럼에도 장민석의 얼굴에 떠오른 건 희열이었다.
 ‘이거지.’
 충격을 털어내듯 자세를 바로잡는 장민석.
 정후 역시 상대에게서 열기를 느꼈다.
 평소라면 좀 더 합을 맞췄겠지만, 오늘은 아니다.
 퉁!
 정후는 용수철처럼 몸을 튕기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도약한 상태에서 깔끔한 발차기로 장민석의 시선을 빼앗고 가뿐하게 착지하며 연타를 퍼부었다.
 장민석은 모든 신경을 방어에 집중하며 연타를 피해냈지만, 정후의 다음 움직임은 완전히 놓쳤다.
 땅이 꺼지듯 가라앉은 정후가 다리로 바닥을 쓸었다.
 빡!
 정강이에 정타를 허용한 장민석이 휘청거리는 사이. 정후가 다시 연타를 퍼부었다.
 이번엔 제대로 먹혔다.
 삐비비비빅!
 센서가 울리고 넋이 나간 장민석에게 정후가 손을 내밀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패배.
 “뭘요. 덕분에 한 수 배웠습니다.”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링을 내려가는 장민석이었다.
 승부욕이 강한 그였지만 패배를 인정할 때는 누구보다 시원시원했다.
 이후의 대결은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관절기가 주특기인 팀원은 정후의 옷깃조차 건들지 못했고, 이자성이 괴물이라 평가한 천이설은 물론. 다른 팀원들 역시 정후와의 대결에서 포인트를 따내지 못했다.
 원래 개인당 주어진 시간은 10분.
 그러나 정후가 팀원 전원을 상대로 승리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7분 48초에 불과했다.
 분명히 그랬는데······.
 어째서 벌써 시간이 이렇게 돼버린 거지?
 정후의 스마트폰은 오전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고장이 아니었다. 체육관 곳곳에 걸린 시계들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팀장님, 고생하셨어요. 덕분에 불금 제대로 보냈네요.”
 “우리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오랜만에 사우나라도 가야겠네.”
 패배했음에도 얻은 것이 있기에 기분 좋게 건물을 나서는 팀원들.
 하늘에서 내리쬐는 아침 햇살.
 그제야 정후는 잃어버린 3시간을 기억해냈다.
 팀원들의 요청으로 자세를 교정해 주고 훈련 방법을 조언하는 사이 3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것이다.
 괜찮아, 토요일은 이제 시작됐을 뿐이니까. 지금부터 집에 돌아가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잠들었다가 오후 늦게 일어나 배달 음식을 먹으며 소파 위에서 뒹굴뒹굴······.
 우우웅.
 ‘뭐지? 아침부터 스팸 문자?’
 스마트폰을 확인한 정후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진짜······ 이건 아니잖아.’
 
 -팀장님, 출근하셨나요?
 
 출근했냐고 물어보기 전에 퇴근했는지부터 물어봐야 되는 거 아닐까.
 답신하려다 그마저도 귀찮아진 정후는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야. 아침부터.”
 사소한 용건일 거다. 휴게실에 커피믹스가 떨어졌다든가.
 -미국 쪽에서 자료가 넘어왔는데요.
 으아악!
 -팀장님이 직접 확인하셔야 되는 자료라서.
 대답이 없자 스마트폰 너머 목소리가 정후를 불렀다.
 -팀장님?
 “잠시 뭔가 생각하느라. 다들 아침은?”
 -아직······.
 “샌드위치랑 커피라도 사 들고 올라갈게. 커피는 항상 마시는 거로?”
 -그럼 감사하죠! 잠시 후에 봬요.
 상대방의 목소리는 밝아졌지만, 정후 표정은 그대로다.
 전화를 끊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방금까지만 해도 햇살이 쏟아지던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하다.
 “자성아, 알고 있을지 모르겠는데 세상엔 인과응보라는 말이 있단다.”
 나직하게 중얼거린 정후가 스마트폰의 호출 버튼을 눌렀다.
 삐-
 발신음이 울림과 거의 동시에 이자성이 공간 이동으로 눈앞에 나타났다.
 그새 사우나에 갔는지 수건 하나만 두른 모습이다.
 “뭐야! 무슨 일이야!”
 “야, 졸리지?”
 “그렇긴 한데 뜬금없이 그런 질문을······.”
 심상찮은 분위기를 간파한 이자성이 말끝을 흐렸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커피 마시면 잠이 깬대. 신기하지 않냐?”
 “······.”
 정후는 이자성을 질질 끌고 재난관리본부 직원 전용 카페로 데려갔다. 눈치를 살살 보던 이자성이 탈출을 위해 용기를 냈다.
 “형, 알겠으니까 일단 옷이라도 입게 해줘.”
 “그건 걱정하지 말고. 마침 저기 오네.”
 정후의 메시지를 받은 직원이 쇼핑백을 들고 왔다.
 “속옷부터 양말까지 세트로 준비했거든. 감기 걸리기 전에 빨리 입어.”
 “이제 와서 걱정해 주는 척은.”
 툴툴거리면서도 옷을 입은 이자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 * *
 
 재난관리본부 팀장실.
 정후가 보안 코드를 입력하자 비로소 미국 측에서 전송한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이자성의 입이 점점 벌어지더니 급기야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건······.”
 그러다 정후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자성이다.
 “맙소사! 형도 처음임?”
 “말이라고.”
 괴수도감이란 간행물이 있다.
 세계 각지에 나타난 몬스터들의 정보를 망라한 것으로 국제기구에서 주기마다 목록을 갱신하여 발행한다.
 지금도 정후의 머릿속엔 괴수도감 최신판이 통째로 저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영상 속의 몬스터는 조금 달랐다.
 안테나처럼 솟은 더듬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여섯 개의 다리. 드럼통처럼 펑퍼짐한 엉덩이. 거기까진 기존의 귀신개미와 흡사하다.
 2성이지만 집단으로 몰려다니는 경우가 많아 주의가 필요한 몬스터다.
 하지만 정후가 아는 귀신개미와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저거······ 엉덩이 위에 알집 아냐?”
 이자성은 물론이고 정후조차 처음 보는 타원형의 점액질 물체.
 물체 표면은 투명해서 내부가 고스란히 들여다보였다.
 달칵.
 확대시킨 화면을 들여다본 이자성이 소리를 질렀다.
 “맞네! 알집!”
 물체 속에서 바글거리는 것은 귀신개미를 빼닮은 생명체들이었다.
 몸길이가 1미터에 달하는 귀신개미에 비해 크기는 100분의 1도 되지 않지만.
 영상 확인을 마친 정후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야단났군.”
 여태껏 게이트를 통해 넘어온 몬스터들은 개체 수를 떠나 공통점을 지녔다.
 절대 번식하지 않는다는 것.
 방치하더라도 수가 늘어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보내온 영상은 그런 상식을······ 편견을 완전히 깨버렸다.
 “영상 이게 전부야? 알에서 깨어나는 장면은?”
 재촉하는 이자성의 마음이 이해됐다.
 정후도 궁금하긴 마찬가지다.
 부화까지 얼마나 걸리며 성체로 성장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 그리고 어째서 저런 놈들이 갑자기 나타난 것인지.
 “형이 우리나라 말고 외국에서도 미감지 게이트 생성됐다고 했었잖아. 그거랑 관련 있는 건가?”
 출력한 자료를 들춰보던 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많이.”
 “그럼 우리가 운이 좋았던 건가? 어젯밤 생성된 게이트에서 저런 케이스는 없었잖아?”
 “운이 좋다고는 못하지. 데이터를 하나도 얻지 못했으니까.”
 몬스터를 상대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데이터.
 공격 패턴이나 약점 등을 알고 상대하는 것과 무지(無知)한 상태에서 상대하는 것은 차이가 크다.
 “어차피 다른 나라에서 자료 주잖아?”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맞는 말도 아니다.
 “야. 외국에서 제공하는 정보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어.”
 각국의 이해관계가 개입되는 건 당연한 일. 알게 모르게 사실이 누락되고 축소되게 마련이다.
 지금만 해도.
 “촬영만 하고 자국민의 안전을 위해 전부 소각했다는데 믿어지냐?”
 정후는 자료를 집어던지며 이를 갈았다.
 “개소리지.”
 당연히 연구를 위해 샘플을 남겼을 것이다.
 “워워, 진정해. 귀신개미가 번식한다고 문제가 되겠어?”
 귀신개미는 다른 몬스터들에 비하면 크게 위협적이지도 않고, 돈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정후의 생각은 달랐다.
 “그건 성체의 경우지. 알이나 유충은 어떨지 모르니까 문제야.”
 “······완전 답답하네. 몬스터가 온 곳으로 우리도 갈 수 있으면 간단할 텐데. 거긴 귀신개미 증조할아버지까지 살고 있을 거 아냐.”
 이자성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품는 의문.
 게이트는 일종의 연결 통로다.
 그렇다면 게이트를 통한 인류의 역습도 가능하지 않을까?
 실제로 게이트 내부에 대한 연구는 초창기부터 많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아직까지 다른 행성이나 차원으로 이동하는 통로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거라면 역시 내가 봤던 그거겠지만.’
 물론 정후도 확신은 못 한다.
 괌의 ‘절망’급 게이트 내부에서 봤던 것이 정말 이계로 통하는 관문이 맞는지.
 다만 그때 느꼈던 감정은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9성 몬스터 사막군주 앞에서도 초연했던 정후이지만 그때만큼은 달랐다. 괴기스러운 벽에서 흘러나오던 압도적인 존재감이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정후가 중얼거렸다.
 “언젠가는 오겠지. 놈들 안방에 한 방 먹일 날이. 물론 그러기 전에 일단 퇴근부터 해야겠지만.”
 정후는 서둘러 보고를 끝마쳤다.
 더불어 해외 출장 기안까지 올렸다.
 “자성아, 너도 올렸다. 출장 서류.”
 “또 어딜 끌고 가게.”
 “미국.”
 그러나 정후가 귀신개미 조사를 위해 미국에 가는 일은 없었다. 국내에서도 알집을 품은 귀신개미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과 달리······.
 한국에서 출현한 귀신개미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 * *
 
 화요일.
 이자성은 기세 좋게 팀장실 문을 열었다.
 “형!”
 하지만 정후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키보드를 두드리던 여비서만이 이자성을 맞을 뿐이다.
 “오셨나요.”
 “팀장님은요?”
 여비서가 벽에 걸린 화이트보드를 가리켰다.
 정후의 일정표.
 나름 빼곡한 다른 주의 일정과 달리 이번 주는 간단했다.
 “······휴가? 나더러 조만간 미국 가자더니?”
 하루 이틀도 아니다.
 무려 1주일 내내 휴가.
 더군다나.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도 휴가 아니었어요?”
 기가 막힌 이자성이다.
 “평소에도 사실상 겨울잠 모드인 인간을 휴가 보내주는 이유가 뭐지? 대체.”
 여비서가 인사정보시스템 화면을 보여줬다.
 상단에 떡하니 박혀 있는 문구.
 최종 결재권자 팀장 이정후.
 이자성의 눈이 뒤집어졌다.
 “아니! 이게 뭐야! 자급자족도 아니고. 그럼 형은 놀고 싶을 때마다 마음대로 결재하고 휴가 가버린다는 거잖아요?”
 끄덕.
 “설마 연봉도 자기 마음대로?”
 끄덕끄덕.
 “고소할 거예요! 신고할 거라고!”
 “사실 연봉은 농담이에요.”
 여비서가 싱긋 웃었다.
 “팀장님 좋아하는 마음은 알지만 이럴 때는 쉬게 두세요.”
 “좋아하긴요! 성실한 납세자로서 내가 납부한 세금이 헛되이 쓰일까봐 걱정돼서 이러는 건데.”
 이자성은 당장 스마트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정후가 받지 않자 초조한지 애꿎은 손톱만 물어뜯는 모습.
 그걸 지켜보며 여비서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우우우웅.
 계속해서 진동하는 스마트폰.
 발신자는 이자성이다.
 “집요한 자식, 폰을 꺼둘 수도 없고.”
 결국 전화를 받은 정후였다.
 곧바로 스마트폰 너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우리 형을 납치하고 계신 분이라면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당장 풀어주세요.”
 “······그건 무슨 콘셉트냐.”
 “뭐야. 무사했음? 괜히 걱정했네.”
 바로 시큰둥해지는 이자성이다.
 “지금 어디임?”
 “근무 중이야.”
 “거짓말하지 말고. 내가 지금 사무실에서 전화하는 거거든?”
 “자택 근무. 용건 없음 끊는다.”
 정후는 스마트폰을 집어넣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인기가 너무 많아도 곤란하다니까.”
 정후가 앉은 공원 벤치엔 음료수 캔이 여럿 놓여 있었다.
 공원에서 몸을 푸는 모습을 보고 여자들이 다가와 건넨 것이다.
 아기자기한 포스트잇을 붙여서.
 
 -운동하시는 모습 완전 멋있으세요! 부담스럽지 않으면 아래 번호로 연락 부탁드려요♥
 -혹시 여친 있으세요? 아까부터 계속 지켜봤는데 완전 제 이상형이라서.
 
 근래 헌터의 인기가 상한가를 치면서.
 남녀를 불문하고 헌터를 이상형으로 꼽는 사람들이 급증했다.
 특히 방송과 SNS를 통해 정후의 동영상이 유명세를 타면서 요즘 헌터에 대한 인식은 최고조였다.
 정후 역시 수혜자.
 밖에서 운동할 때면 그를 헌터로 오인한 여자들에 의해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오빠, 포카리 드실래요?”
 하아. 이놈의 인기.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뒤를 돌아본 정후가 흠칫했다.
 “······선아니?”
 늘씬한 키에 학생답게 앳된 얼굴.
 친구 동섭의 여동생 선아다.
 병원 근처 공원에서 동섭과 만나기로 했는데 여동생이 먼저 도착한 것이다.
 민망한 얼굴의 정후에게 선아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말씀 들었어요. 오빠가 엄마랑 진아 구해주셨다고.”
 “그게 그렇게 됐어. 그보다 어머님은 괜찮으셔? 일이 바빠서 병문안도 못 갔네.”
 “아직 휠체어 타고 다니시긴 하는데 단순 골절이라 금방 완치되실 거래요.”
 “다행이다. 걱정 많이 했는데.”
 “마침 저기 오시네요. 오빠! 여기!”
 동섭이 어머니의 휠체어를 밀고 왔다.
 “미안. 늦었지?”
 “나도 방금 왔다.”
 정후가 공손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몸은 좀 어떠세요?”
 휠체어에 타고 있음에도 동섭의 어머니 표정은 밝았다.
 “덕분에 괜찮아. 사실 그날 구해준 사람이 정후 너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동섭이랑 어울려서 말썽 피우고 다닐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쩜 이리 듬직하게 컸니.”
 “하하. 어머니. 이제 와서 말씀드리는 건데 말썽은 동섭이 혼자 피웠어요. 저는 뒷수습하는 쪽이었고요.”
 “그랬니? 내가 그건 몰랐구나.”
 환한 동섭의 어머니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정후는 오래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려운 집안 형편 탓에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던 그를 아들처럼 챙겨줬던 분이다.
 아침마다 싸주신 도시락만 해도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
 오랜만에 웃음꽃을 피우는 가운데.
 휠체어 뒤에서 불쑥 나타난 것은 동섭의 막내 여동생이었다.
 평소처럼 쾌활한 모습.
 다만 이번엔 호칭이 달랐다.
 “오빠! 안녕하세요!”
 동섭의 영향이겠지.
 “그래. 안녕.”
 동섭이 물었다.
 “그런데 정말 괜찮아? 출근하지 않아도?”
 “휴가니까 신경 쓰지 말고. 그보다 도착할 때가 됐는데.”
 때마침 공원 입구가 떠들썩해졌다.
 모여든 사람들 너머로 검게 도색한 트럭이 보인다.
 일반적인 택배 트럭은 아니다.
 헌터 장비를 전문적으로 배송하는 업체 헬포지에서 특수 제작한 트럭.
 제품 손상을 방지하기 위한 완충장치를 갖췄으며 배송 기사는 무려 은퇴한 헌터 출신.
 당연히 배송 비용도 만만찮았다.
 “우와! 여기서 드라마 촬영하나?”
 헬포지 트럭은 헌터 소재 드라마에서 곧잘 등장했기에 생긴 오해.
 하지만 트럭이 공원에 나타난 것은 본연의 임무 때문이었다.
 작업복차림의 배송 기사가 주위를 돌아보며 외쳤다.
 “백동섭 씨? 여기 백동섭 씨 계십니까?”
 동섭이 얼떨결에 손을 들었다.
 “전데 무슨 일로······.”
 배송 기사가 장비보관 케이스를 들고 동섭에게 다가왔다.
 “배송 부탁하신 물건 가져왔습니다. 본인 인증 번호 입력 부탁드립니다.”
 케이스는 인증 번호를 입력하지 않으면 개봉이 불가능하다.
 워낙 고가의 장비가 많기에 도난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
 하지만 동섭은 아무것도 몰랐다. 인증 번호도. 어째서 헬포지에서 배송 기사가 찾아왔는지도.
 “생년월일 눌러.”
 정후의 말을 듣고서야 상황을 파악한 동섭이다.
 모두가 정후의 작품인 것이다.
 삐비빅-
 키패드에 생년월일을 입력하자.
 진공 상태였던 케이스가 열리며 슈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험장에서 입어본 보급형 슈트와는 격이 달랐다.
 자칫 소홀히 하기 쉬운 마감 처리까지 공을 들인 명품(名品).
 감히 손도 대지 못하고 침만 꼴깍 삼키는 동섭에게.
 “합격 축하한다, 친구야.”
 정후가 손을 내밀었다.
 “원래 진작 주려고 했는데 조금 늦었다. 뭐 해? 입어보지 않고.”
 “······그래.”
 혹시라도 맞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완벽하게 동섭의 체격에 맞게 제작된 슈트.
 온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착용감은 침대에 누운 것처럼 편안했다.
 수많은 장비를 봐온 배송 기사 역시 감탄한 얼굴이었다.
 “확인은 끝나셨습니까?”
 넋이 나간 동섭을 정후가 잡아 세웠다.
 “가속해 봐.”
 덕분에 흥분을 조금 가라앉힌 동섭이 다리에 오러를 주입했다.
 “······!”
 오러를 컨트롤하는 과정에선 필연적으로 방출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오러가 손실된다는 의미.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오러를 잡아주는 느낌.
 착각이 아니었다.
 착용한 슈트에 내재된 기능이었다.
 “대박! 진짜 끝내준다!”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감탄사.
 “확인 끝나셨으면 여기 서명해 주시면 됩니다.”
 물품을 인수했다는 서명을 마치자 배송 기사는 정중한 인사와 함께 트럭을 타고 사라졌다.
 한참 만에 현실로 돌아온 동섭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후야, 정말 이거 내가 받아도 되는 거냐?”
 맞춤형 슈트를 제작하려면 어마어마한 비용이 든다.
 베테랑 헌터들에게도 뼈아픈 지출인데 하물며 이제 헌터자격을 얻은 동섭이야 오죽할까.
 동섭의 어머니 역시 조심스러웠다.
 “그래. 아무리 친구끼리라지만 너무 과한 선물인 듯싶어.”
 정후가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세요. 어머니. 지인이 쓰던 물건이라 많이 저렴해요.”
 중고는 무슨.
 누가 봐도 공방에서 방금 출시된 따끈따끈한 제품이다.
 “선아야, 여기서 엄마랑 기다리고 있어. 막내 어디 가지 못하게 하고. 잠깐 얘기하고 올게.”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건네며 동섭은 거절 의사를 분명히 했다.
 “나 이거 못 받는다. 더는 너한테 부담 끼치고 싶지 않아.”
 “나한테 전혀 부담 안 된다면 받을 거냐?”
 “정후야, 네가 평범한 공무원이 아니란 건 충분히 알겠거든? 그래도 이건 너무 과해. 전에 보니까 너도 슈트 없던데.”
 사실 궁금한 대목이다.
 장비를 갖추지 못한 헌터의 전투능력이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
 정후는 어떻게 슈트도 없이 엄마와 막냇동생을 구해준 걸까.
 “없긴. 지금도 입고 있는데.”
 “농담해?”
 현재 정후는 가벼운 운동복 차림.
 당연히 농담이라 생각했지만 정후의 표정은 진지했다.
 다음 순간.
 스스슥.
 순식간에 정후의 몸에 칠흑의 갑주가 덧씌워졌다.
 허벅지와 발목. 팔에서 손목까지 빠짐없이 감싼······.
 마치 처음부터 입고 있었던 것처럼 주인과 완벽히 동화된 장비들.
 동섭은 숨이 턱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설마······ 투명화?”
 “그건 마음대로 생각하고.”
 딱!
 손가락을 튕기자 갑주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젠 이해하겠지? 나한텐 그 정도 선물 정돈, 전혀 부담 안 된다는 거.”
 넋이 나간 동섭의 손에 정후가 미리 준비한 쇼핑백을 들려줬다.
 “어머니 병원비에 보태. 동생들 맛있는 것도 사주고.”
 “정후야! 이정후!”
 뒤늦게 동섭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성공해서 갚아.”
 그게 끝이었다.
 정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공원을 빠져나갔다.
 
 * * *
 
 그날 늦은 오후.
 정후는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아무리 휴가 중이라도 정해진 운동량은 반드시 채워야 했기에.
 규칙적인 호흡. 안정된 자세.
 모든 것이 완벽했다.
 주택가를 지나 허름한 공터에 이르기 전까지는.
 평소 다니지 않는 길이어서 새로운 풍경에 신선함을 느끼던 찰나.
 고등학생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소주병과 손에 들린 담배도.
 평소라면 모른 척하고 지나갔겠지만.
 이번만큼은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냥 가던 길이나 가세요. 맞고 나서 후회하지 말고.”
 가래침을 뱉으며 눈알을 부라리는 남고생 때문은 아니었다.
 무리에 둘러싸여 무릎 꿇은 학생들이 정후의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교복도 똑같고 나이도 비슷해 보였지만 처지는 전혀 달랐다.
 얼마나 구타를 당했는지, 얼굴은 피투성이였고 입술도 완전히 터진 상태.
 그러고도 모자라 불이 꺼지지 않은 담배꽁초를 피해자들 머리 위에 띄워놓고 킬킬거렸다.
 정후의 눈이 빛났다.
 스킬이다. 그것도 상당한 수준.
 아직 어린 나이.
 이런 장소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재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정후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저벅.
 발소리가 들려오자 벽에 기대어 서 있던 이학준이 실소를 흘렸다.
 국가공인 테스트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그는 장래가 기대되는 헌터 유망주였다.
 물론 실력과 인성은 완전히 별개.
 “X발. 돌았네. 꼰대 새끼가.”
 이학준의 눈짓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던 남학생 셋이 몸을 일으켰다.
 고등학생 치고는 체격이 좋은 편이지만, 정후의 눈엔 그저 어린애로 보일 뿐이다.
 “다들 애들은 어리니까 죄를 지어도 기회를 줘야 된다고 하더라. 몰라서 그러는 거니까. 크면 알아서 철들 거라고.”
 100퍼센트는 아니더라도 99퍼센트에 해당하는 이야기.
 “뭐라는 거야. 병신이!”
 남학생이 다짜고짜 주먹부터 날리는데도 정후는 웃을 뿐이다.
 “그런데 말이야. 난 그렇게 생각 안 하거든.”
 날아드는 주먹을 잡은 다음.
 “쓰레기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쓰레기야. 그런 쓰레기 재활용하겠다고 쓰레기통 뒤지는 인간은 바보고.”
 우두둑!
 꺾어버렸다.
 “끄아아아악!”
 비명 지르는 얼굴에 주먹을 꽂아주자 조용해진다.
 뒤따라 달려들던 남학생 둘을 한꺼번에 집어던졌다.
 콰아아앙!
 벽에 처박힌 놈들 역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X발! 뭐 해! 조져!”
 애들을 시켜 정후를 막게 만든 이학준이 바닥에서 짱돌을 집어 들었다.
 “뒤져! 병신새끼야!”
 날아드는 짱돌에 실린 것은 오러.
 당장 현역 헌터로 활약해도 모자람이 없는 기예였다.
 하지만 회심의 일격도 정후 앞에선 무의미했다.
 맹렬한 속도로 날아가던 짱돌이 허공에서 멈춰버린 것이다.
 “너는 인생 걱정 없었겠다. 이렇게 양아치 짓하고 살다가도 헌터만 되면 부와 명예가 따라올 테니까.”
 “X발! 뭐야? 뭐냐고! 대체!”
 이학준은 지금의 상황 자체가 믿기지 않았다.
 피할 수야 있다 쳐도 저걸 어떻게 공중에서 멈출 수가 있는지.
 어디 이것도 막나보자!
 어느새 꺼내든 나이프에 오러를 실어 던지는 이학준이었다.
 “그렇게 쓰라고 주어진 힘이 아닌데.”
 오러는 몬스터를 상대하라고 주어진 힘이다.
 그걸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쓰는 놈들을 보고 있자면 역겹기 짝이 없다.
 우뚝!
 나이프마저 허공에서 멈추자 이학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제 확실히 알겠다.
 상대는 헌터다.
 지금까지 봐온 누구보다도 강한.
 그 순간 이학준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골목길에 설치된 CCTV였다.
 헌터관리법에 따르면 헌터는 민간인을 공격할 경우 가중처벌을 받는다.
 CCTV 근처까지만 가면 정후도 어쩌지 못하리라.
 골목으로 후다닥 달려가며 이학준이 소리쳤다.
 “X발! 감옥 가고 싶으면 쳐봐!”
 “저거 믿고 그래?”
 펑!
 정후의 손가락질 한 번에 골목을 비추던 CCTV가 폭발했다.
 “아님 저거?”
 퍼엉!
 전봇대에 달려 있던 다른 CCTV 역시 폭발하자 이학준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미친······!”
 꿀꺽 침을 삼키며 이학준이 황급히 스마트폰을 꺼냈다.
 하지만 스마트폰은 주인의 믿음을 저버리고 정후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다.
 콰직!
 스마트폰마저 박살내 버린 정후가 이학준을 향해 성큼 다가섰다.
 “내일 국가공인 테스트 다시 받아봐. 아마 깜짝 놀랄걸.”
 퍼억!
 오러가 실린 정후의 주먹이 이학준의 코어를 강타했다.
 순식간에 십여 명의 고등학생을 제압한 정후는 아직까지도 무릎 꿇고 있는 피해학생들에게 다가갔다.
 “택시 타고 병원 가라. 이걸로 택시비랑 병원비 내고.”
 “······쟤들은요?”
 “알게 뭐야.”
 우우웅.
 때마침 진동하는 스마트폰을 받아들며 정후는 골목길로 걸음을 옮겼다.
 “말해.”
 -경기 남부 지부에서 게이트 관련 보고 들어왔는데요. 영상 확인하니까 아무래도 그거 같습니다.
 “그게 뭔데.”
 -얼마 전에 팀장님이 말씀하신 번식하는 귀신개미 있잖습니까. 영상이랑 거의 일치합니다. 게다가······ 그거 말고도 괴수도감에 없는 몬스터까지 출현했다고.
 정후의 눈빛이 한층 가라앉았다.
 “현장 통제하고 샘플 확보해. 다각도로 영상 촬영해 두는 것도 잊지 말고.”
 -그런데 그게 말입니다. 대성 쪽에서 냄새를 맡았는지 밀고 들어오려고 한답니다.
 “장난해? 대성이든 케이원이든 DK든 무조건 막아.”
 -지금 현장에 대성 인원이 워낙 많다고······. 게다가 그쪽 담당자가 돌입 허가까지 내준 모양입니다.
 “어디야, 거기. 좌표 불러.”
 좌표를 전달받은 정후가 정확히 세 걸음 옮기는 순간.
 정후의 모습은 골목길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난생 처음 보는 광경.
 남겨진 피해 학생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을 뿐이다.
 “······뭐였지? 방금 그건?”
 
 * * *
 
 경기 남부 중소 도시.
 새로운 몬스터가 나타난 게이트 인근 지역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당신들 무슨 근거로 막는 건데? 돌입 허가 나왔다니까!”
 버럭 소리를 지르는 남자는 대성 컴퍼니 경기 남부 지사 3팀장 오일수였다.
 현장 통제를 위해 출동한 경찰들은 대성이라는 간판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그냥 들어가! 어차피 허가 떨어졌어!”
 대성 소속 헌터들을 밀어 넣으려는 오일수 앞에.
 “당신이 책임잡니까?”
 정후가 나타났다.
 “그런데요?”
 “방금 허가 취소됐으니까 철수하세요.”
 “무슨 헛소리를······!”
 헛소리가 아니었다.
 “3팀장님! ······이거 보십시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유효하던 돌입 허가가 취소된 것이다.
 너무나도 당황스러웠지만 대성 소속답게 오일수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 분명히 허가 떨어진 상태였고요. 그거 보고 막대한 비용 들여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돌아가라고? 당신이 비용 물어줄 거요?”
 지방에서만 활동했기에 오일수는 정후의 얼굴을 전혀 몰랐다.
 당연히 평소처럼 대성 간판만 믿고 윽박지르면 통할 거라 생각했다.
 출동한 헌터만 20명. 동행한 직원들 인건비에 장비며 설비 운영비까지.
 일개 공무원 선에서 책임질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정후의 반응은 오일수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알았으니까 철수하세요. 지금 당장.”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모양인데. 여기 내가 데려온 헌터만 스무 명이 넘어. 몸값이 얼만지나 알고······.”
 오일수의 말은 정후에 의해 끊겼다.
 “얼만데.”
 도발적인 정후의 물음에 순간 말문이 막힌 오일수다.
 ‘어쭈. 세게 나온다 이거지?’
 오일수가 거느린 팀은 하루만 운용해도 비용이 10억을 우습게 넘긴다.
 물론 지금처럼 작전 투입 없이 철수한다면 액수가 대폭 절감되지만, 그래도 10억은 질러줘야 지레 겁을 먹지 않겠는가.
 오일수가 입을 열려는 찰나.
 “20억.”
 정후가 먼저 베팅했다.
 한발 늦은 오일수가 눈을 껌뻑였다.
 “······뭐라고요?”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일부러 넉넉히 잡았어요. 나중에 다시 이런 일 생기면 그땐 아예 회사에서 출발도 하지 마시라고.”
 정후가 가볍게 스마트폰 화면을 터치했다.
 “오케이. 지금 송금했으니까 재무팀에 연락해서 확인해 보세요.”
 “······!”
 주위가 술렁였다.
 사실 대성 컴퍼니 소속 헌터들 정도 되면 20억이 터무니없는 돈까진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라도 정후처럼 편의점에서 담배 하나 사듯 대뜸 20억을 송금하진 못한다.
 무엇보다 그만한 거금을 계좌에 묶어두는 경우도 거의 없고.
 “저기 3팀장님······.”
 직원의 표정만 봐도 입금 여부를 확인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정후는 정말 20억을 보내버린 것이다.
 반쯤 넋이 나간 오일수의 귀에 정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러요.”
 무슨 소린지 감도 오지 않았다.
 완벽하게 정후의 페이스.
 “방금은 비용 처리고. 이번엔 이름값. 말해 봐요. 얼마 얹어주면 대성이 어쩌니 헛소리 집어치울 건지.”
 오일수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이건 대성 전체에 대한 모욕이다.
 눈앞의 남자는 그게 어떤 의민지 알고나 지껄이는 걸까.
 “하긴 당신이 그걸 정할 사이즈는 아니지. 좋습니다. 어쨌든 이쪽 계산은 이제 끝났으니까.”
 오일수는 꺼지라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사실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비용까지 보전해 줬으니 당장은 물러날 수밖에.
 으득.
 이를 갈며 오일수가 지시를 내렸다.
 “전원 철수!”
 대성 헌터들과 직원들이 마지못해 차량에 올라탔다.
 물론 이대로 물러날 생각은 없다.
 대성그룹을 건드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줄 것이다. 인맥을 총동원해서라도.
 하지만 오일수는 몰랐다.
 “잠깐만요. 퇴근하는 사람 붙잡아서 미안한데.”
 여전히 공격권은 정후에게 있다는 것을.
 “그쪽 계산은 마저 하셔야지. 공무집행방해에 전략물자관리법 위반. 오늘 안에 본사로 벌금이랑 과징금 고지서 날아갈 겁니다. 본사 기둥 하나 뽑힐 각오 정도는 해두시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오일수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주둥이만 살아서 나불거리는 공무원 하나 때려눕히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하지만 뒷감당이 될까.
 “무슨 생각하는지는 알겠는데. 너무 앞서가시네. 폭행죄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폭행은 남을 때려야 성립되는 거니까.”
 정후는 뒷짐을 지고 느긋하게 오일수를 쳐다보았다. 마치 들어올 테면 들어와 보라는 여유 넘치는 태도.
 결국 오일수가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려는 순간.
 위이이잉!
 사이렌 소리와 함께 장갑차들이 줄지어 장내로 들어섰다.
 “뭐야?”
 “설마······!”
 헌터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었다.
 차라리 경쟁 업체인 DK나 케이원 소속 차량이라면 놀라움이 덜했을 것이다.
 하지만 새롭게 등장한 장갑차들엔 CHT라는 표식이 선명했다.
 통칭 대(對)헌터팀.
 게이트가 생성된 이후. 한동안 사회에선 헌터에 의한 범죄가 문젯거리로 부상했다.
 기존 경찰력으론 도저히 헌터들을 제압할 수 없었던 것.
 결국 정부는 경찰 내부에 대헌터팀을 신설하고 능력자들을 합류시켰다.
 대헌터전에 특화된 전투 요원들.
 그게 바로 지금 눈앞에 나타난 CHT의 정체였다.
 척척.
 위장슈트로 무장한 CHT 요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차량에서 내렸다.
 정후에게 다가오는 40대 남자의 어깨엔 만개한 무궁화 표식이 나란히 얹혀 있었다.
 치안감을 상징하는 2개의 무궁화.
 거기에 담긴 의미는 컸다.
 ‘맙소사!’
 오일수가 소리 없이 탄식했다.
 상대는 무려 CHT의 2인자인 것이다. 대성의 고위 간부들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클래스.
 어느새 남자에게 달려간 오일수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다년간 조직 생활로 다져진 생존 본능에서 나온 행동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성 컴퍼니 경기 남부 지사 3팀장 오일수라고 합니다.”
 초면이니만큼 최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남자는 인사를 받아주는 대신 경례를 올려붙였다.
 “오랜만입니다, 팀장님. 저희가 늦진 않았는지요?”
 “아뇨. 적절하게 오셨어요. 그보다 여전히 딱딱하시네. 이런 자리에선 경례 생략하셔도 괜찮다니까.”
 ······어어?
 오일수는 고개 숙인 채로 굳어버렸다.
 CHT 2인자가 고개를 숙여?
 심지어 경례한 대상은 방금까지 오일수와 설전을 벌이던 정후.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겠다.
 입장이 난처해졌다. 아주 많이.
 “마침 팀장님도 계시니 제가 지휘할 필요는 없겠군요.”
 대성 소속 직원들은 진작 차에 탔지만 아직 시동도 걸지 못한 상태였다. CHT요원들이 주변을 완전히 통제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일수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정후가 진압 명령을 내린다면 엄청난 참사가 일어날 것이다.
 현장에 출동한 대성 소속 헌터들에 비해 CHT의 화력이 압도적이니까.
 “저기 말씀 나누시는데 죄송하지만······.”
 뒤늦게 오일수를 인지한 CHT 부대장이 정후에게 물었다.
 “누군지 아십니까?”
 “대성측 사람인데 조심하세요. 협박은 일상에다가 흥분하면 주먹까지 쓰려고 하니까.”
 맞는 말인데도 왠지 억울한 오일수였다.
 “잠깐만요. 주먹을요? 팀장님한테?”
 입가가 씰룩씰룩하는가 싶더니, CHT 부대장은 기어이 허리를 젖히고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하!”
 “······웃을 일이 아닌데. 저는 심각합니다.”
 그제야 CHT 부대장이 정색했다.
 “실례했습니다. 하긴 팀장님을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을 테니까요. 어떠십니까? 아예 이참에 저처럼 견장 하나 다시는 게?”
 “말씀은 감사하지만.”
 정후의 시선이 저기 멀리 생성된 게이트를 향했다.
 “몬스터 상대하는 데 계급장까지 필요할까요.”
 두두두!
 때마침 프로펠러 소리가 들려왔다.
 팀원들이 현장에 도착한 것이다.
 “팀장님! 저희 왔어요!”
 헬기에서 손을 흔드는 팀원들을 발견한 정후가 미소 지었다.
 “물론 견장 자체를 폄하하는 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각자에게 주어진 임무가 다르니까요. 제겐 필요 없더라도 다른 사람에겐 의미 있는 물건일 수 있겠지요.”
 “무슨 말씀인지 잘 압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현장 통제 부탁드릴게요. 마무리되는 대로 연락드릴 테니, 저녁이나 같이 드시죠. 팀원들 전부 데리고. 제가 한턱 내겠습니다.”
 “우리 애들 먹성이 장난 아닌데 감당되시겠습니까?”
 정후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제가 오늘 지갑을 털려서 무리는 못 하고, 대게 괜찮으세요? 요즘 제철이라던데.”
 “이야, 대게 좋죠! 애들도 아주 좋아할 겁니다. 출입 통제는 저희가 확실히 책임질 테니 마음 놓고 용무 보십시오.”
 헬기에서 내리는 팀원들에게 합류하기에 앞서, 정후가 오일수를 돌아봤다.
 아예 넋이 나가버린 얼굴.
 “아까 대성 경기 남부 지사 오일수 3팀장님이라고 하셨죠?”
 오일수는 지금까지 그의 이름을 기억하려는 사람을 수도 없이 만났다.
 눈도장이라도 찍고자 애써 웃고, 현금 봉투에 명절 선물에, 고급 술집에서의 접대도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정후는 그들과는 목적이 달랐다.
 “우리는 앞으로 자주 볼 것 같네요.”
 법정에서.
 뒷말은 아끼는 정후였다.
 전략자산관리법 3조.
 새롭게 발견된 몬스터는 전략자산으로 분류되어 정부에서 통제한다.
 일반인도 아는 이 법률을 재난관리본부 공무원이 모를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재난관리본부 안에 대성 컴퍼니와 손잡은 내부자가 있다는 소리다.
 ‘하필 나한테 걸렸으니 옷 벗는 거론 안 끝날 거야.’
 앞으로 진행될 수사를 기대하며 몸을 돌리는 정후를, 팀원들이 목청 높여 불렀다.
 “팀장님! 여기 좀 와보셔야 되겠는데요!”
 게이트 주변에 펼쳐진 전경을 확인하는 순간.
 “······.”
 정후는 미국 측에서 보내온 영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기억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한국이 아닌 미국이 정보 공유를 위해 매달릴 상황.
 하지만 완벽한 반전에도 정후는 웃지 못했다.
 귀신개미들의 행동을 보고 있자면 누구라도 정후와 같은 심정일 것이다.
 “팀장님!”
 “보고 있어요.”
 집게를 이용해 땅을 파헤친다.
 파내진 흙은 뒷다리를 통해 지상으로 뿌려진다.
 한두 마리만 그러는 거라면 무심코 넘길 수도 있겠으나 수백, 수천 마리에 이르는 귀신개미가 똑같은 행동을 반복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개발 계획이 무산된 이후 버려졌던 땅이 공사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강 박사님.”
 정후 팀에서 유일한 연구원 출신인 강소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세요, 팀장님.”
 보다 심도 높은 연구를 위해 안정된 직장까지 사퇴하고, 헌터 자격시험을 치른 강소라다.
 박학한 지식에 현장 경험까지 더해진 지금, 그녀는 이제 팀에서 없어선 안 될 존재였다.
 정후의 손가락이 귀신개미들이 파헤친 구덩이를 가리켰다.
 “제가 보기엔 저놈들, 집이라도 짓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강소라 눈에도 마찬가지다.
 본래 귀신개미는 그 생김새만을 보고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눈앞의 광경은, 귀신개미가 외형만 개미와 닮은 게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개미류의 특징.
 집단 거주, 공동생활.
 “확실히 개미굴의 초기 형태에 가까워요. 이건 학계에 파장이 크겠는데요. 단일 개체가 아닌 군체의 등장이라······.”
 “그럼 저기 사나워 보이는 놈들은 병정개미 정도 되겠군요.”
 또 다른 특징은 서열에 따른 역할분담.
 정후가 무선마이크를 통해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귀신개미들 주위에 경계서는 놈들 보이죠? 그놈들 실력 좀 봅시다.”
 “그 말씀만 기다렸습니다!”
 구덩이에서 50미터 정도 떨어져 대치 중이던 팀원들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정후의 시선이 병정개미로 추정되는 몬스터에 머물렀다.
 귀신개미보다 2배 이상 거대한 체격, 파괴적으로 발달된 톱니.
 반면 퇴화된 눈동자는 전혀 움직임이 없다. 40m, 30m, 20m······ 계속해서 거리가 줄어듦에도.
 하지만 팀원들이 10미터 이내로 접근하자.
 스으윽.
 병정개미들이 일제히 몸을 돌렸다.
 눈동자는 여전히 정지된 상태.
 ‘소리? 냄새? 뭐에 반응한 거지?’
 콰직!
 선두의 팀원이 휘두른 도끼가 병정개미의 머리를 박살 내버렸다.
 귀신개미와 별반 다르지 않은 죽음.
 그러나 정후는 똑똑히 확인했다.
 병정개미가 날아드는 도끼에 반응해 톱니를 치켜드는 모습을.
 적어도 귀신개미보다 우월한 것이다. 귀신개미였다면 아예 반응조차 못 하고 죽음을 맞이했을 테니까.
 정후의 평가는 정확했다.
 솨아아악!
 도끼를 회수하는 팀원 뒤로 병정개미의 앞발이 내리 찍힌다.
 “어딜!”
 잽싸게 뛰어올라 피해내자.
 표적을 잃은 앞발은 애꿎은 바닥만 쪼개놓았다. 순식간에 깊이가 2미터에 달하는 구멍이 생겨났다.
 귀신개미와는 격이 다른 파괴력.
 ‘과연.’
 정후가 감탄하는 사이.
 다른 팀원이 병정개미에게 몸통을 들이박았다. 쭈우욱 밀려난 병정개미의 목을 조르며 그대로 체중을 실었다.
 쿵!
 바닥에 떨어진 충격으로 목이 부러졌는지, 여섯 개의 다리를 바르르 떨다가 이내 경련을 멎는다.
 뒤늦게 다른 병정개미들이 달려들지만 기습은 실패.
 벌떡 일어나 양손으로 병정개미 둘을 들어 올리는 팀원의 모습은 초인 그 자체였다.
 콰직!
 병정개미를 무릎 위에 수직으로 내리찍자 몸뚱이는 정확히 절반으로 쪼개졌다.
 거기까지 지켜본 정후가 강소라를 돌아봤다.
 손가락 네 개를 펼쳤다가, 검지를 접는다.
 “4성 주기엔 살짝 부족하네요.”
 현실은 게임과는 다르다.
 몬스터 머리 위에 별이나 정보창이 나타나는 일은 없다.
 몬스터의 공격력과 방어력, 위험도를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등급 판정이 내려진다.
 병정개미 역시 등급 판정과 함께 새로운 명칭으로 괴수도감에 실릴 것이다.
 “저는 그래도 3성보다는 4성에 가깝다고 생각하는데요.”
 강소라의 주장에 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여줬다면 그러고도 남겠지요. 물론 강 박사님 말씀대로 지금 모습만으로도 4성 판정을 내릴 수도 있겠지만.”
 개미류의 조직적인 움직임은 페로몬을 통한 소통 덕분. 하지만 눈앞의 귀신개미나 병정개미들은 그런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
 기대엔 미치지 못하는 강함.
 정후가 무선마이크를 톡톡 건드렸다.
 “제대로 찍혔지?”
 촬영팀에서 오케이 사인이 나왔다.
 오늘처럼 중요한 작전엔 영화제작만큼이나 많은 인원과 고성능의 카메라가 투입된다.
 사각지대 없이 선명한 영상을 담아내려면, 아무래도 헌터들이 휴대한 액션캠만으론 한계가 있다.
 “그림도 담았겠다. 슬슬 정리하고 대게나······.”
 정후는 말을 잇지 못했다.
 지이잉-
 게이트에서 느껴지는 진동.
 추가 투입이다.
 어느새 게이트 아래 상공을 까맣게 덮은 것은······ 귀신개미와 병정개미 중간 정도 크기의 새로운 몬스터들이었다.
 기본적인 외형은 흡사하지만 등에 반투명한 날개가 달려 비행이 가능하다.
 강소라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개미류에 대입한다면 수개미 포지션이겠네요.”
 개미 군체 중에 수개미는 결코 강한 편이 아니다. 오로지 여왕개미와의 짝짓기를 위해 태어난 놈들.
 하지만 그 강함을 확인해 볼 가치는 있었다.
 “원호준 씨.”
 정후의 무전에 장발의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전직 군인 출신 원호준.
 정후 팀에선 특등 사수라 불릴 만큼 원거리 요격에 능한 헌터다.
 달칵.
 바이올린 가방처럼 생긴 케이스를 열자 저격총이 매끈한 자태를 드러냈다. 외관은 일반적인 저격총과 비슷하지만 성능은 압도적.
 후우욱.
 공기를 들이마셨다가 3분의 2쯤 내뱉은 지점에서 숨을 멈추고, 그 즉시 방아쇠를 당긴다.
 타앙-
 경쾌한 소리와 함께 총신이 오러를 뿜었다. 오러를 탄환에 주입해 발사하는 고난도의 사격술.
 효과는 굉장했다.
 뭉쳐 있던 수개미들이 단발에 터져나갔다.
 정후의 눈이 빛났다.
 ‘피하지 않았어.’
 그렇다고 가만히 있던 것도 아니다.
 수개미들은 탄환을 향해 모여들었다. 마치 무언가를 보호하는 것처럼.
 그게 뭔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강 박사님, 수개미가 있다는 건 역시.”
 강소라가 립글로스만 바른 입술을 핥았다.
 “여왕개미도 있다는 뜻이겠죠.”
 이상 현상은 땅에서부터 일어났다.
 개미굴에서 기어 나온 귀신개미들이 병정개미의 시체를 나르기 시작했다.
 “박사님, 저건?”
 “······개미들은 동족의 시체를 절대 방치하지 않아요.”
 강소라의 설명.
 “먹기라도 합니까?”
 “아뇨. 시체 방에 묻어줍니다.”
 개미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습성.
 그렇다면 여왕개미의 존재도 헛된 망상은 아니리라.
 그동안에도 천천히 날갯짓하며 지상으로 내려오는 수개미들.
 정후가 눈짓하자 원호준의 저격총이 다시 오러를 뿜었다.
 타타타타탕!
 난사에 가까운 발사 속도. 그럼에도 격발은 안정돼 있다.
 수개미들의 시체가 먼지가 되어 흩어진다.
 그 순간. 또다시 이상 현상이 일어났다.
 속수무책으로 학살당하던 병정개미들이 대오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로마 시대의 군단병처럼 앞발을 치켜들고 천천히 진군하는 병정개미들.
 “뭉친다고 달라지나?”
 촬영팀에서 나온 비웃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팀원이 가벼운 마음으로 휘두른 도끼가 병정개미의 앞발에 튕겨져 나왔기 때문이다.
 누구보다도 놀란 것은 직접 도끼를 휘두른 마강혁이었다. 그는 단지 남자답다는 이유로 도끼를 사용하는 그는 가공할 괴력의 소유자.
 “······뭐야?”
 물론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니다.
 본디 오러는 유한하다.
 재충전 없이 마구 사용하다간 바닥을 드러내고 만다. 그래서 헌터들은 상대하는 몬스터에 따라 오러를 배분한다.
 정확히 상대를 제압할 만큼만 힘을 투자하는 것이다.
 마강혁처럼 실력 좋은 헌터는 힘의 배분이 거의 완벽했다. 정후는 바로 그것 때문에 병정개미가 살아남았다고 판단했다.
 마강혁은 아까와 동일한 힘을 사용했지만 병정개미가 강해진 것이다.
 타타타탕!
 공중 역시 상황은 비슷했다.
 방금과 달리 수개미들의 날개는 오러가 실린 탄환을 모조리 튕겨냈다.
 “이런 썩을!”
 마강혁이 힘을 실어 도끼를 내리찍었다.
 콰직!
 치켜든 병정개미의 앞발을 잘라내는 것까진 성공.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카아앙!
 도끼가 튕겨져 나왔다.
 병정개미의 장갑을 뚫지 못한 것.
 지켜보던 강소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적어도 5성.”
 불과 몇 분 만에 병정개미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바뀐 것이다.
 지금까지 온갖 몬스터를 봐온 강소라다. 그러나 눈앞의 병정개미는 다른 몬스터들과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방금까진 4성이었으나 지금은 5성 이상의 방어력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팀장님!”
 정후를 부르는 목소리가 커졌다.
 어느새 병정개미들은 촬영팀과 지원팀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마강혁과 다른 팀원이 뒤늦게 오러를 끌어올렸지만, 수백 마리에 달하는 병정개미를 몰살시키기엔 시간이 필요한 상황.
 정후는 결단을 내렸다.
 “비전투 인원은 지금 즉시 안전 지역으로 후퇴할 것.”
 촬영팀과 지원팀이 일사불란하게 주변을 벗어났다.
 일반인이라고는 하나 오랜 기간 헌터들과 호흡을 맞춰왔기에 가능한 움직임.
 이제 정후가 포지션을 잡을 차례였다.
 아까보단 속도가 느려졌지만 수개미 쪽도 원호준의 저격에 의해 정리되는 중.
 굳이 정후가 나설 필요까진 없었다. 뒤로 물러나 음료수라도 마시며 지켜보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은 여왕이 마음에 걸렸다.
 “적어도 낯짝 정도는 직접 확인해 볼까.”
 저벅.
 마음을 정한 정후가 한 발자국 내딛는 순간.
 오늘만 들어 세 번째 이상 현상이 발생했다. 병정개미와 수개미들이 일제히 정후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다른 인간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움직임. 당연히 방금처럼 질서 정연한 진격이 아니었다.
 쿵쿵쿵!
 전차처럼 돌격하는 병정개미들 위로 수개미들이 날개를 활짝 펼친다.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러니까 더 보고 싶어지잖아.”
 정후가 다리에 오러를 한가득 주입했다.
 투웅!
 흙먼지 하나 날리지 않는 깔끔한 도약.
 병정개미들이 허둥지둥 벽을 쌓아 올린다.
 스스로의 판단이 아니다. 누군가의. 아마도 여왕이 내렸을 명령에 따라 순식간에 높이 10미터에 달하는 개미 장벽이 세워졌다.
 그러나 정후의 몸은 이미 그보다 높은 상공을 통과하는 중이다.
 이제 그를 막아설 것은 수개미들뿐, 놈들은 전투 능력이 없다. 단지 체온을 높여 몸을 폭발시키는 것이 유일한 공격이자 방어 수단.
 사방에서 정후를 향해 날아든 수개미들이 일제히 폭발했다.
 콰아아아앙!
 
 * * *
 
 5분 전.
 개미굴 중심부에 사뿐히 내려앉은 것은 몸길이 20미터에 신장은 5미터가 넘는 여왕개미.
 수개미들이 둔중한 육체를 가려줬기에 인간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
 착지하기 무섭게 여왕은 페로몬을 방출시켜 자식들을 강화시켰다.
 페로몬에 의해 강력해진 병정개미들은 여왕의 지시에 따라 진격을 시작했다.
 인간들이 달려들지만 강화된 병정개미의 장갑을 뚫어내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아픔을 호소하는 자식들.
 여왕은 눈앞의 인간들이 만만찮은 상대임을 깨달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식들은 인간들에게 목숨을 잃을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자식은 다시 낳으면 된다.
 자식들이 목숨을 희생해 인간을 저지하는 동안 진화만 마치면 그만.
 그르르륵!
 여왕은 일개미들이 가져온 알을 마구잡이로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인류의 예상과 달리 귀신개미의 엉덩이에 얹힌 알집은 번식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여왕의 진화를 위한 식사.
 포식을 거듭할수록 여왕의 몸은 오히려 작아진다. 열량을 태워 정제된 육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최대 속도와 최대 근력을 내기에 적합한 체중은 250킬로. 목표 체중을 위해 식사에 몰두하던 여왕이 순간 멈칫했다.
 압도적인 존재감!
 지금까지의 인간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전투력!
 여왕은 빠르게 판단했고 페로몬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모든 병정개미와 수개미가 새로운 표적에게 달려들었다.
 다시 시작된 식사.
 하지만 이번에도 여왕은 목표를 달성하기 전에 식사를 중단하고 말았다.
 데굴데굴.
 여왕 앞에 떨어진 것은 병정개미의 머리통.
 하나가 아니었다.
 수백 개의 머리통이 사방에 굴러다녔다.
 깔끔하게 잘려 나간 단면으로 보아 완벽에 가까운 절삭력.
 여왕이 더듬이를 치켜세워 페로몬을 내보냈다. 하지만 반응하는 것은 나약한 일개미들뿐.
 여왕은 식사에 몰두하느라 자식들의 죽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지금 귀신개미들 네가 움직인 거지? 수개미들 자폭시킨 것도 너고.”
 여왕은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눈앞의 정후가 아까 표적으로 삼은 인간임은 안다.
 어떻게 놈은 이토록 짧은 시간에 이곳까지 당도한 것일까. 수개미들의 폭발에 휘말린 게 아니었나.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여왕의 날개가 펼쳐졌다.
 파르르륵!
 미완성의 육체.
 하지만 애초에 인간은 여왕의 상대가 아니다.
 바닥에 파묻은 다리가 흙덩이를 퍼 올린다. 페로몬이 첨가된 흙덩이의 강도는 강철 이상.
 각각의 다리에서 발사된 여섯 개의 흙덩이가 대포알처럼 정후를 향해 날았다.
 여왕과 정후와의 거리는 10미터.
 흙덩이의 시속은 300킬로를 넘는다.
 불과 0.1초도 되지 않아 정후에게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후는 오러를 집중시킨 눈으로 지켜볼 뿐이다.
 0.1초가 다시 0.01초 단위로 쪼개지며 흙덩이의 궤적이 시시각각 눈에 들어온다.
 흙덩이가 눈앞에 다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지막 순간에 몸을 틀어 피해낸다.
 “궤적을 바꾸진 못하는 건가?”
 음식을 품평하듯 나른한 목소리.
 정후는 여왕을 응시했다.
 분명히 공중에서 얼핏 봤을 때만 해도 여왕은 훨씬 거대했다. 그리고 지금보다 턱없이 약했다.
 갑작스러운 변화······.
 정후의 시선이 여왕의 입에 머물렀다.
 푸른색 입술에 묻어 있는 부스러기들은 바닥에 떨어진 알집과 모든 면에서 유사했다.
 “먹은 건가?”
 정후는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답을 내렸다.
 “그렇군. 포식(捕食)을 통해 강해지는 거였어.”
 이어지는 물음.
 “먹으면 먹을수록 강해지는 건가? 얼마나 더 강해질 수 있지?”
 순수한 호기심.
 하지만 그걸 위해 혹시 모를 위험을 자초할 생각은 없다.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기에.
 시간을 주는 대신 정후는 여왕에게 다가갔다.
 “그래도 역시 이거 하나는 알아보고 싶어서 말이지.”
 콰직!
 아직 먹지 않은 알집을 밟아 뭉개며 정후가 여왕을 바라보았다.
 빙고.
 도발은 제대로 먹혔다.
 여왕이라고는 하나.
 이성적인 인간과 달리 본능에 의존하는 하등한 존재.
 먹이를 건드린 정후의 행동은 여왕을 극도로 분노케 만들었다.
 촤르르륵!
 펼쳐진 날개를 격렬하게 움직이며 여왕은 허공으로 솟구쳤다.
 순식간에 바닥이 시야에서 멀어지고 일개미와 인간들이 쌀알처럼 작아졌다.
 도주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고도 비행. 그리고 이어지는 수직낙하로 정후의 숨통을 단번에 끊을 생각.
 마침내 원하는 고도에 이른 여왕이 날개를 접으며 진행 방향을 반전시켰다.
 이제 남은 것은 강하뿐.
 그러나 낙하하려는 순간.
 덥석.
 어느새 상공까지 따라온 정후의 손이 여왕의 목덜미를 붙들었다.
 “경치 좋네.”
 여왕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어진 수직낙하는 여왕의 예상보다 훨씬 빨랐고, 전혀 생각지 못한 결과로 이어졌다.
 콰아아앙!
 추락한 여왕은 다시는 날개를 펴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왕의 시체가 처박힌 곳은 귀신개미들이 파놓은 개미굴.
 세계 최초로 여왕이 사냥 되는 순간이었다.
 
 * * *
 
 “국내에서 세계 최초로 신종 몬스터가 발견됐다는 소식입니다! 현장에 나와 있는 김미려 기자!”
 방송 카메라가 기자회견장을 비춘다. 쉬지 않고 터지는 플래시. 밀집한 기자들.
 “잠시 후 이곳에서 기자회견이 열릴 예정인데요. 재난관리본부에서는 신종 몬스터에 대해 낱낱이 밝히겠다는 입장입니다. 말씀드린 순간 관계자가 기자회견장으로 들어섰습니다!”
 보안 요원들에게 둘러싸여 등장한 것은 정후가 아닌 재난관리본부 홍보팀장이었다.
 꼼꼼히 보도자료를 검토한 그녀가 카메라 앞에서 입을 열었다.
 “이번에 발견된 신종 몬스터는 귀신개미의 상위 종(種)으로······.”
 
 * * *
 
 같은 시각. 재난관리본부.
 “외국 기자들도 많이 보이네. 오오! 앞쪽에 금발 여자 괜찮은데? 남자 친구 있으려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기자회견 생중계를 시청하는 남자는 이자성이었다.
 띵!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지만 문은 열리지 않는다.
 관계자 외에는 사용이 철저하게 통제되는 엘리베이터.
 당연히 보안도 까다롭다.
 정후가 보안 카드를 통과시키고 홍채까지 인식시키고 나서야 비로소 문이 열렸다.
 “뭐야? 사체까지 오늘 공개하는 거였어?”
 기자회견장에선 신종 몬스터 사체가 담긴 수정관이 공개되는 중이었다.
 “저래도 되는 거야? 국익을 위해 연구 끝나고 공개한다며.”
 “원래 그럴 생각이었는데.”
 정후 역시 스마트폰으로 중계를 지켜보고 있었다.
 약품 처리를 마친 몬스터 사체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
 아마 지금쯤 각국에선 난리가 났을 것이다. 기존의 관행을 완전히 엎어버린 한국의 파격적인 행보에.
 “역시 떡밥 정도는 풀어줘야겠다 싶어서. 저렇게들 좋아하잖아.”
 어느새 지하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내리자마자 복잡한 보안 절차가 이어졌다.
 “전자기기와 신분증은 이곳에 보관하시고 안전복으로 갈아입으십시오.”
 이중, 삼중의 보안.
 하지만 투덜거리기 일쑤인 이자성마저도 불만을 갖지 않는다. 이곳 연구실에 어떤 것들이 보관되고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열람 요청하신 12번 보관실 오픈하겠습니다.”
 끼이익.
 특수 합금으로 제작된 문이 열리고 거대한 수정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에 담긴 것은 죽음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여왕이었다.
 “······!”
 이자성의 눈이 반짝였다.
 촘촘한 그물처럼 이어진 날개. 흠집 하나 없이 광택을 뿜어내는 외피.
 여왕의 사체는 누가 봐도 탐낼 만했다.
 “이건 대체······.”
 놀라움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이자성이 뒤를 돌아봤다.
 “아까 방송에서 보던 거랑 완전 다른데?”
 “당연하지. 그건 병정개미였고.”
 수정관 안을 확인한 정후가 홍채를 인식했다.
 이곳은 진귀한 몬스터의 사체와 부산물 등을 보관하고 각종 실험을 진행하는 연구실.
 보안이 철저하게 유지되는 것은 물론이고 내용물 반출 또한 반드시 정후가 참관한 상태에서만 이뤄진다.
 치이익.
 압축된 기체가 빠져나가며 수정관이 열렸다.
 “이건 여왕이니까. 세계에 하나뿐인.”
 병정개미를 대중에 공개한 것은 치밀한 계산에서다.
 병정개미에 세계 각국의 이목이 쏠린 사이, 여왕 사체를 연구해 결과를 얻어내는 것이 최고의 시나리오.
 “팀장님, 오셨어요?”
 슈트 대신 흰색 가운을 걸친 강소라 박사가 생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확실히 현장보다 연구실에서 더욱 빛나는 그녀였다.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고 들었는데요.”
 강소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잖아도 남한테 얘기해 주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던 참이에요. 크게 주목할 점은 3가지. 먼저 팀장님도 경험하셨다시피 다른 개미를 부리는 페로몬.”
 연구원이 시험관에 담긴 푸른색 액체를 가져왔다.
 “미리 경고하는데 마실 생각 하지마라.”
 이자성이 움찔하자 강소라가 웃음을 참으며 설명했다.
 “여왕의 몸속엔 페로몬을 주기적으로 생성하는 장기가 존재해요. 거기서 생산된 페로몬을 내보내 개미들을 조종하는데······ 일단 여길 보시겠어요?”
 아이패드를 조작하자.
 살아 있는 귀신개미를 페로몬으로 유인하는 실험 영상이 재생됐다.
 “보시다시피 여왕이 아니더라도 페로몬만으로 개미를 유인 가능해요.”
 “여왕처럼 구체적인 지시를 내릴 수는 없습니까?”
 “지금으로선 불가능해요. 페로몬의 성분 분석이 끝나면 시도해 볼 수는 있겠지만. 두 번째는 여왕의 외피. 강도는 방어력이 뛰어난 몬스터들의 그것에 비하면 조금 떨어져요. 하지만 무척 가벼워서 경량 슈트 재료로선 충분한 가치가······.”
 이자성이 정후의 팔을 붙들었다.
 “형! 내가 살래! 나한테 팔아!”
 “팔더라도 경매 진행할 거야. 팀원들 모두에게 기회가 돌아가도록.”
 “제발!”
 매달리는 이자성을 외면하며 정후가 물었다.
 “마지막 하나는 뭡니까?”
 강소라가 황홀한 표정으로 바라본 것은.
 바로 여왕의 날개.
 “솔직히 가능하다면 전 재산을 투자해서라도 제가 인수하고 싶을 정도예요.”
 “형태가 예뻐서는 아닐 거고. 이유가 뭔가요?”
 “여왕이 보여준 폭발적인 가속. 기억하시나요?”
 “물론입니다.”
 정후는 여왕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날개를 펼치며 시작된 여왕의 비상은 그에게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렇게 폭발적인 가속이 가능한 몬스터를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으니까.
 “연구팀이 분석한 결과 가속의 비결은 바로 날개에 있어요.”
 몬스터 부산물이 괜히 천문학적인 가치를 인정받는 게 아니다.
 몬스터 부산물엔 지구에 존재해 온 물질보다 월등히 강력한 에너지가 담겨 있다.
 인류에게 주어진 ‘오러’에 대응하여 ‘마력(魔力)’이라 불리는 에너지.
 물리법칙을 무시하고 상식마저 파괴하는 마력은 몬스터가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몬스터의 부산물을 재료로 장비를 제작해도 마찬가지.
 마력은 장비에 깃들어 영원히 머문다. 다만 장비 제작자와 사용자에 따라 마력의 활용 폭이 달라질 뿐.
 “여왕의 날개로 장비를 제작한다면 그 가속력을 얻게 된다는 뜻이군요.”
 꼴깍.
 이자성이 침을 삼켰다.
 “형, 내가 그 장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을 알고 있는데.”
 “그러냐? 나돈데.”
 이자성의 눈빛에 은근한 기대가 담겼다. 스피드라면 어디 가도 꿀리지 않는 그이기에.
 “형이 생각하는 사람은 누군데?”
 “너도 아주 잘 아는 사람.”
 “설마······.”
 “그래. 바로 나야.”
 마치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가한 아이돌처럼 당당한 손짓.
 눈앞이 아찔해진 이자성이다.
 “······경매는?”
 “사냥한 사람이 갖겠다는데 경매는 무슨.”
 정후의 단호한 태도에 이자성은 입맛만 다셨다.
 “괜히 봤네.”
 보지나 않았으면 아쉽지나 않을 것을.
 그러거나 말거나, 정후는 강소라와의 대화를 이어갔다.
 “강 박사님이 생각하기엔 어떻습니까?”
 이제껏 몬스터들은 인간을 잡아먹고 구조물을 파괴하는 행동 패턴만을 보여 왔다.
 하지만 여왕의 존재는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놓았다.
 지구에 주거지를 만들고 번식을 시도하는 몬스터의 등장. 놈들은 단순한 침공을 넘어서 식민지 건설을 꿈꾸기 시작한 것이다.
 “과연 개미들뿐일까요? 집단 지성을 가진 몬스터들이.”
 “······.”
 강소라의 얼굴이 어둡다.
 그녀 역시 생각한 바다.
 만일 개미들 이상으로 강력한 몬스터들이 명령 체계마저 갖추게 된다면?
 인류는 지금까지보다 훨씬 많은 것을 내어줘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모든 것을······.
 걱정을 털어내듯 강소라가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너무 염려 마세요. 설령 그런 일이 벌어지더라도 대응할 방법을 연구해 볼게요. 개미들의 행동 패턴을 다각도로 분석해서.”
 “아주 믿음이 가네요. 박사님이 팀에 합류해 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제가 영광이죠.”
 정후와의 첫 만남을 떠올린 강소라가 수줍게 미소 지었다. 당시 그녀는 적잖이 감동했고 아주 잠깐이지만······ 설렜었다.
 정후가 가볍게 고갤 숙였다.
 “그럼 이만 올라가 보겠습니다. 저를 찾는 사람이 있어서.”
 사실 정후를 만나기 위해 안달 난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 가장 마음이 급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이 남자다.
 대성 컴퍼니 상임 이사 최태욱.
 오죽하면 예정된 해외 출장까지 취소하고 직접 움직였을까.
 심지어 약속 장소도 최고급 호텔이나 고풍스러운 한정식집이 아닌 작고 조용한 카페.
 하지만 최태욱은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미안합니다. 이런 곳으로 오시라고 해서.”
 직접 의자를 빼서 최태욱 앞에 앉은 남자.
 정후는 그런 수고를 감내하고서라도 만날 가치가 있는 거물이기에.
 “신종 몬스터 관련한 기자회견 때문에 본부에 워낙 기자들이 많이 몰려서요. 아무래도 이사님을 목격하는 사람이 생기면 억측이 돌지 않겠습니까.”
 최태욱 이사는 맞장구를 치는 대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팀장님, 죄송하게 됐습니다.”
 최태욱은 고개를 숙일 일이 거의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언제든 무릎까지 꿇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은 모두 저희 쪽에 있습니다.”
 최태욱은 이번 일을 크게 키운 장본인 오일수를 떠올렸다.
 조직 생활을 하다 보면 당연히 상부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긴다.
 정후의 얼굴을 몰랐던 것도 충분히 이해되는바. 하지만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다짜고짜 협박한 경솔함은 용서의 여지가 없다.
 “이미 관련자를 문책했고 자체 조사를 거쳐 중징계를 내릴 예정입니다. 또한.”
 명배우가 대본을 읽듯 최태욱의 목소리는 거침이 없었다.
 “팀장님께서 저희 측에 입금하신 금액은 법정이자를 적용해서 전액 반환 조치하겠습니다.”
 여기까지는 그야말로 기본 중의 기본.
 협상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그리고 최태욱은 이 협상을 성공적으로 끝낼 자신이 있었다.
 정후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뭔가 착각하시는 거 같은데······ 저는 겨우 20억 돌려받자고 여기 나온 게 아닙니다.”
 
 
 4장
 
 
 최태욱 이사는 일단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차분히 상대의 반응을 살피기 시작했다.
 자금력도 충분하니 상대의 목적이 돈이라면 대응하기 편하련만, 상대는 재난관리본부의 최고 실무자 이정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고지서는 받아보셨습니까?”
 최태욱이 어색하게 웃었다.
 “······확인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액수가 조금 부담스럽더군요.”
 숫자의 힘이란 참으로 대단하다.
 고지서에 찍힌 12자리 숫자 때문에 대성 법무팀과 재무팀이 발칵 뒤집혔다.
 최태욱은 한 달 전에 잡힌 해외 출장까지 취소하고 여기 앉아 있으니 말이다.
 “원래 과징금이란 그런 겁니다. 징벌적 의미가 담겨 있지요.”
 “그렇다곤 해도 이건 너무······.”
 “세계 최초의 발견. 세계 최초의 사냥 업적. 세계 최초의 장비 제작. 대성에서 이번 일을 계획대로 실행했다면 따라왔을 보상입니다. 당연히 과징금은 그보다 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정후의 목소리는 확고했다.
 사실 과거엔 국가에 100억대 손해를 입혀도 과징금 몇억이 고작이었다. 그나마도 이런저런 이유 갖다 붙여서 상당 액수를 감면해 줬었고.
 하지만 몬스터 부산물 관련 산업이 급성장하자 정부도 정책 노선에 변화를 줬다.
 징벌적 과징금 말고는, 기업들의 탐욕을 잠재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팀장님, 과징금 내고 나면 저희 죽습니다.”
 앓는 소리를 냈지만 소용없었다.
 “이사님, 이게 뭔지 아시죠?”
 정후 손에 들린 것은 대성의 분기별 재무제표.
 최태욱은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대성의 매출과 이익은 계속해서 늘어나는 중이었기에.
 “소나기 한번 온다고 홍수가 나진 않잖아요. 오히려 땅이 단단해지지.”
 과징금 내고 앞으로 잘하라는 의미.
 난처해진 최태욱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러지 말고 조금만이라도 감면해 주십시오. 고용도 많이 하고 세금도 꼬박꼬박 내겠습니다.”
 “고용은 회사가 필요하면 하는 거고요. 세금도 원래 부과된 만큼 내는 겁니다만.”
 정후가 턱을 괴고 최태욱을 바라봤다.
 “이사님, 과징금 가지고 협상하실 거면 정계 쪽에 알아보세요. 그쪽 전문이니까.”
 대성에서 빨대 꽂아둔 곳이 어디 재난관리본부뿐이겠는가.
 당연히 유력한 정치인들에게도 선을 대놨다. 하지만 이번 일과 관련해 그들에게 들은 답변은 부정적이었다.
 명목상으로는 국익을 내세웠지만.
 진짜 이유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정후는 유력정치인들조차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사람인 것이다.
 하아.
 최태욱은 보이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후에게 선물하기 위해 고가의 선물과 현금 다발을 준비해 왔지만 꺼낼 생각도 들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은 뇌물로 구워삶기 쉽지만 간혹 역효과가 나는 경우가 있다.
 최태욱이 판단하기에 눈앞의 정후는 명백히 후자였다.
 “알겠습니다. 이사회를 소집해 전액 납부하는 쪽으로 매듭짓겠습니다.”
 사실상의 항복 선언이었다.
 “당연한 대답을 듣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렸네요.”
 “죄송합니다.”
 “아뇨. 이사님을 비난할 뜻은 없습니다. 세상엔 당연한 일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이 워낙 많으니까.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정후의 목소리가 다소 누그러졌다.
 “최근 미감지 게이트의 생성이 늘어난 데다. 신형 몬스터까지 나타난 바람에 불안이 고조되는 중이잖습니까. 실제로 앞으론 지금까지보다 훨씬 강력한 몬스터들이 대거 침공해 올 수도 있고요.”
 “그렇습니다. 적절히 대처하지 않으면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겠지요.”
 “잘 알고 계시네요. 한마디 더 보태자면, 그와 관련해 대성의 역할이 중요해질 겁니다.”
 사실상 대성에게 만회할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계속되는 채찍질 끝에 주어진 당근.
 빈손으로 돌아갈 생각에 눈앞이 캄캄하던 최태욱에겐 구원의 빛이나 마찬가지였다.
 “감사합니다! 팀장님.”
 “이런. 부탁 하나 드리려고 하는 타이밍에 감사 인사를 받으니 민망하네요.”
 “아닙니다.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그럼 사양 않고.”
 정후가 서류 봉투를 최태욱에게 건넸다.
 “이게 뭡니까?”
 “대성에서 인재 채용한다는 얘기가 들리더라고요. 제가 마침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을 몇 명 알고 있어서, 이력서 받아왔습니다.”
 순간 실소가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낸 최태욱이다.
 뇌물이라곤 절대 받지 않을 것처럼 굴더니만 인사 청탁이라니. 하지만 그냥 낙하산도 아닌 황금 낙하산이다. 거절했다간 무슨 불똥이 튈지 모를 일.
 그걸 알기에 최태욱의 입에선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술술 나왔다.
 “이런 행운이······ 그렇지 않아도 인재영입에 골치가 아팠는데 말입니다. 팀장님 추천이니 당연히 능력 있는 인재들이겠지요.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실례지만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중요한 미팅이 또 있어서요.”
 민망한지 먼저 자리를 뜨는 모습.
 역시 인간이란 똑같군.
 정후가 사라지길 기다렸다가 최태욱은 서류 봉투를 열었다.
 두툼하다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10장도 넘는 이력서가 우수수 쏟아졌다.
 ‘기가 막히는군. 이건 낙하산을 넘어서 아예 공수부대 수준이잖아.’
 정치인이나 관료들로부터 수많은 인사 청탁을 받아왔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진짜 적당히 해야지.’
 하지만 손에 잡힌 이력서를 펼쳐 드는 순간.
 최태욱의 표정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설마······.’
 착각이 아니었다.
 다음 이력서도. 그다음도.
 마침내 모든 이력서를 확인한 최태욱은 침을 꼴깍 삼켰다.
 이력서에 부착된 사진들은 전부 최태욱이 아는 얼굴이었다.
 단순한 친분 관계가 아니다.
 그들은 뇌물을 받고 대성의 편의를 봐주던 재난관리본부 소속 공무원들.
 비로소 최태욱은 깨달았다.
 정후는 인사 청탁을 한 게 아니었다. 대성과 연관된 내부자들을 모조리 쳐낼 거라고 통보한 것뿐.
 대성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쌓아 올린 인맥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최태욱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차갑게 식은 커피 잔을 집어 들었다.
 간신히 커피 한 모금을 마셨을 무렵.
 우우우웅.
 스마트폰이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숙청이 시작된 것이다.
 
 * * *
 
 재난관리본부 팀장실.
 개인 비서마저 내보낸 정후는 의자에 등을 파묻고 생각에 잠겼다. 그의 손엔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최태욱에게 넘기지 않은 단 한 장의 이력서.
 거기 부착된 사진을 바라보는 정후는 복잡한 심정이었다. 이럴 때면 사람들이 왜 담배를 피우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똑똑.
 “팀장님.”
 노크 후에 이어진 것은 개인 비서 목소리였다.
 “아까 말씀하신 손님 말인데요. 지금 들여보낼까요?”
 “잠시만.”
 손에 쥐어진 이력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후는 한숨과 함께 천장을 올려다봤다.
 화르르!
 어느새 불길에 휩싸인 손바닥 안엔 한 줌의 재만이 흩날릴 뿐이었다.
 “들어오라고 해요.”
 덜컥.
 문이 열리고 깔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팀장님.”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갤 숙이는 남자.
 “죄송합니다. 면목 없습니다.”
 그의 이름은 임석진.
 정후의 팀에서 지원 업무를 맡은 수십 명의 직원 가운데 한 명이었다.
 대성과 유착을 저지른 내부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석진 씨.”
 빙글 의자를 돌려 앉은 정후의 손엔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저녁에 회나 한 접시 합시다.”
 
 * * *
 
 강남의 고급 횟집.
 정후는 말없이 광어회를 집었다.
 “석진 씨도 들지 그래요. 이거 자연산이라 맛이 기가 막힌데.”
 횟집에 들어온 이후 한마디도 하지 않은 임석진이다.
 정후의 권유에 젓가락을 들어 한 점 집긴 했지만, 여전히 먹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광어회를 먹고 물까지 마신 정후가 물었다.
 “어차피 다 끝난 마당에 이유나 들어봅시다. 왜 그랬어요?”
 한참 만에 임석진이 깊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빚이 있었습니다.”
 임석진의 아버지가 도박으로 진 빚.
 그걸 임석진과 다른 가족들이 알았을 때는, 이미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치달아 있었다.
 사채에까지 손을 대는 바람에, 사채업자들이 임석진의 직장으로 쫓아간다고 협박을 해댔고, 여섯 식구가 사는 집은 경매로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평생 일군 모든 것을 잃기 직전, 악마의 유혹이 다가왔다고 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대성 측에서 접근을 해왔습니다. 빚을 갚아주겠다고. 대신 간단한 부탁 몇 가지만 들어주면 된다고 하더군요.”
 처음엔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가장으로서 다른 가족들도 생각해야 했다.
 나이 드신 어머니와 아내. 아직 학생인 동생, 거기에 자식들까지. 그들을 데리고 길바닥에 나앉을 생각을 하니, 결국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말았다.
 “그때는······ 나중에라도 대성에서 빌려준 돈을 갚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아무 일도 없던 게 될 거라고······.”
 실제로 임석진은 월급을 아껴 상당한 액수를 변제했다.
 하지만 빚을 갚는다고 그가 저지른 잘못이 없던 일이 될 순 없는 법.
 결국, 오늘에 이르고 만 것이다.
 실은 이미 내부감사를 통해 보고받은 사실이었다. 단지 본인에게 직접 듣고 싶었을 뿐.
 “한 잔 따라줄래요?”
 쪼르륵.
 임석진이 정후 잔을 채웠다.
 “지금 팀이 나한테는 두 번째에요. 이 팀을 만들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요?”
 13년 전. ‘화랑’이란 팀을 비극으로 떠나보낸 정후다.
 오랜 방황 끝에 다시 팀을 만들기로 결심했을 때는, 당연히 그만한 각오를 했었다.
 “절대 팀원들을 죽게 하지 않을 거라고. 아무도 힘들지 않게 하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어요. 과장 좀 보태면 팀원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그런 것까지도 신경 써주려 했는데······.”
 챙.
 술잔을 부딪친 정후가 단숨에 잔을 비웠다.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석진 씨만의 잘못은 아니니까.”
 진심이었다.
 정후는 팀원을 케어 못한 책임감을 느꼈다.
 임석진의 사정을 미리 알고 도와줬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아는 임석진은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부정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실제로 임석진의 혐의는 다른 내부자들에 비하면 매우 적은 편이었다.
 다시 몇 잔의 술을 비워낸 정후가 지나가듯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알아봐야지요.”
 갑작스러운 퇴직.
 준비가 되어 있을 리 없다.
 빚도 아직 남아 있을 테니 당장 일가족을 먹여 살릴 방법이 요원한 것이다.
 “이거 받아요.”
 정후가 임석진에게 건넨 건 명함이었다.
 “거기 연락하고 찾아가면 일자리를 주선해 줄 겁니다. 지금처럼 인정받는 자리는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수입은 좀 더 나을 거예요.”
 재난관리본부 팀원들이 엄청난 연봉을 받는다고 하나 그건 헌터들에 국한된 이야기.
 일반 직원들은 일반 공무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받는 수준이다.
 여섯 식구의 생활에 빚까지 갚아나가기가 쉽지 않았는데, 수입이 늘어난다면 임석진 입장에선 오히려 반가운 얘기였다.
 하지만 이내 임석진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미 팀장님께 폐를 끼쳤습니다. 더 이상은 부담을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나한텐 전혀 부담되지 않아요. 낙하산이나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일자리 주선해 주는 것뿐이니까.”
 정후가 임석진의 술잔을 채워주며 덧붙였다.
 “가족들을 생각해요.”
 
 * * *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임석진은 고민을 그만뒀다.
 어머니 눈가의 주름. 삶에 찌든 아내. 더 이상의 고민은 사치였다.
 처지를 생각하면 불법적인 일이라도 해야 될 상황.
 정후가 주선해 준 일자리를 거절하는 건 백번 생각해도 멍청한 짓이었다.
 결국 명함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건 임석진이다.
 조금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상대는 흔쾌히 만날 것을 제안했다.
 
 오후 8시.
 약속 장소인 강남의 빌딩에 도착한 임석진이다.
 지나가면서 여러 번 본 적 있는 건물.
 그때마다 임석진은 생각하곤 했다.
 ‘대체 이 건물의 주인은 누굴까. 이런 건물 하나, 아니, 여기 딸린 점포 하나만 갖고 있어도 평생 돈 걱정은 없겠지?’
 “임석진 씨?”
 지식인풍의 남자가 로비에서 그를 불렀다.
 변호사라 자신을 소개한 그가, 임석진을 데리고 간 곳은 빌딩 관리사무실.
 “여기 계약섭니다. 검토해 보시고 사인하세요. 출근은 내일부터니까 늦지 마시고.”
 너무 일사천리라 사기가 아닌가 싶을 정도.
 정후의 소개로 만든 자리가 아니었다면 벌써 돌아갔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놀라움은 끝이 아니었다.
 계약서 내용을 확인한 임석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기요. 계약서 잘못 주신 거 아닙니까?”
 “아뇨. 그게 표준 계약서에요.”
 “하는 일에 비해 너무 급여가 많은데요.”
 “하하. 여기 일하는 사람들 다 그렇게 받습니다. 청소하는 분들도 마찬가지예요.”
 “아니, 그럼 적자 아닌가요? 하긴 이런 데는 임대료를 워낙 많이 받으니 괜찮나.”
 변호사가 피식 웃었다.
 “여기 임대료, 강남이 아니라 서울에서도 최저 수준이에요. 전국 어딜 가도 이만한 조건 찾아보기 힘들 걸요?”
 “맙소사. 여기 건물주가 재벌 2세라도 되나요?”
 돈이 넘쳐나는 재벌 2세라면 사회에 부를 환원하는 셈 치고, 이럴 수도 있지 않을까.
 “에이. 재벌 2세는 태어나면서부터 재벌인데. 노력해서 돈 벌어본 적도 없는 인간들이, 어려운 사람들 사정을 어떻게 알아.”
 “그럼 대체 뭐 하는 분인데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오셨구나? 나한테 그쪽 소개해 준 사람. 그분이 여기 건물주세요.”
 “예?”
 임석진은 너무도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의자 뒤로 자빠질 뻔했다.
 상사인 정후가 고위직 공무원이란 건 당연히 알았지만, 설마 강남 한복판의 고층 빌딩 소유주일 줄이야!
 “아니? 어떻게!”
 “정말 몰랐어요? 하긴 워낙 티를 안 내시는 분이라. 그건 그렇고 너무 놀라신 것 같은데, 물이라도 마시고 진정하세요.”
 변호사가 건네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나서야, 가까스로 흥분을 가라앉힌 임석진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의문이 풀린 건 아니었다.
 공무원 월급으론 천 년을 모아도 살 수 없는 건물.
 ‘그렇게 안 봤는데 금수저였던 건가, 팀장님.’
 한편 변호사는 놀란 임석진을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말 안 하길 잘했다 싶지만.
 한편으론 궁금하긴 하다.
 이 거리 전체가 정후의 소유란 사실을 알면 임석진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 * *
 
 강남에 헌터들이 모여 사는 부촌이 있다.
 세련된 디자인의 고급 주택들이 한강을 따라 늘어선 이곳은 일반인은 물론이고 같은 헌터들에게조차 동경의 대상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단골 배경으로 등장할 정도.
 미정 역시 오랫동안 이곳에서의 삶을 꿈꿔온 사람 중 하나였다.
 그리고 오늘.
 그녀는 마침내 꿈을 이뤘다.
 “오빠! 정말 여기가 우리 집이야?”
 변두리긴 해도 번듯한 고급 주택.
 모르긴 해도 수십억은 하겠지. 의사와 결혼한 친구를 질투하던 일상과도 이제 작별인 것이다.
 ‘똥차 가고 벤츠 온다더니.’
 새삼, 전 남자 친구 정후와 헤어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정후가 형편없는 남자까진 아니었다.
 외모 준수하고 성격 차분, 거기에 가끔씩이지만 고가의 선물을 사주고 해외여행도 보내줬었다.
 미정의 기준에도 평균은 넘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래 봐야 태생이 공무원.
 정후와 계속 사귀었다면 불가능했으리라. 이런 집에 사는 것도, 최신형 스포츠카를 타고 드라이브하는 것도.
 “오빠?”
 미정이 계속해서 부르는 데도 새로운 남자 친구 하승길은 대답이 없었다.
 바득.
 미정이 이를 갈았다.
 하승길은 애인이 옆에 있는데도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고 있었다.
 포니테일 머리에 170센티 정도 되어 보이는 키, 탄탄한 엉덩이 아래 쭉 뻗은 다리. 거기에 이국적인 얼굴까지.
 누가 봐도 매력적인 여자였다.
 물론 미정도 외모는 자신 있는 편.
 ‘나도 관리만 제대로 받으면.’
 미용 클리닉 다니는 횟수를 늘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미정이 하승길의 팔을 잡아끌었다.
 “오빠!”
 그제야 고개를 돌리는 하승길이다.
 “미정아,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아는데, 오해야. 저분 업계에서 유명한 헌터라 쳐다본 거라니까? 들어봤을 거야. 천이설이라고.”
 하승길은 필사적으로 변명했지만 사실 무의미한 일이었다. 어느새 미정 역시 넋이 나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끼이익.
 길가에 정지한 세단에서 문을 열고 내리는 남자를 보느라.
 그는······.
 이자성.
 현재 한국에서 가장 핫한 헌터였다.
 방송 섭외 1순위를 다투는.
 어쩜 선글라스를 벗는 모습까지 저리 멋있을까.
 괜히 하승길과 비교하게 된다.
 하승길이 잘나가는 헌터라고는 해도 이자성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하물며 외모는 이자성의 압승.
 저런 남자와 사귀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그저 미정의 헛된 바람일 뿐이었다.
 
 “계속 쳐다보네.”
 이자성이 보란 듯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당연하지. 여자든 남자든 나의 마성에 넘어오지 않을 사람은 없으니까.”
 “그것도 병이야. 이참에 병원이나 가보지그래.”
 천이설은 실소를 흘리며 뒷좌석에 올라탔다.
 운전대를 잡은 이자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굳이 뒷좌석에 앉는 이유가? 아하! 정후 형 앉으라고 조수석 비워둔 거구나. 매너 좋네.”
 “아니거든? 팀장님 나랑, 내 옆에 앉아서 가실 거거든?”
 “내기할까? 정후 형이 누구 옆에 앉는지?”
 “그래. 그럼.”
 갑자기 가방과 쿠션 따위를 조수석에 한가득 올려놓는 천이설이다.
 “뭐 하냐. 지금.”
 “어차피 앉을 사람도 없는데 어때.”
 “마음대로 하세요. 네가 아무리 꼼수를 써도 정후 형은 나를 선택할 테니까.”
 이윽고 차를 출발시킨 이자성이 백미러를 쳐다봤다.
 “어디서 봤나 했는데. 방금 건너편에 서 있던 남자. 하승길 아닌가?”
 “그게 누군데. 나는 팀장님 말고는 다른 남자 관심 없어서 몰라.”
 “다른 남자들도 너한테 관심 없다.”
 천이설이 생긋 웃었다.
 “뒈지기 전에 누군지 설명하렴.”
 생명에 위협을 느낀 이자성이 침을 꿀꺽 삼켰다.
 “······원래 어디였더라. 카오슨가? 아무튼, 어떤 팀에서 활동하다 공금 횡령으로 추방당했을걸. 요즘엔 학원 열어서 헌터 지망생들 등쳐 먹는다는 소문이 돌더라. 여자 훈련생들 건드렸다는 얘기까지 있는데 그건 사실인지 모르겠고.”
 잠자코 듣던 천이설이 혀를 찼다.
 “완전 악질이네.”
 “그러게. 옆에 여자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인간 만나는지 몰라. 하아. 이럴 때는 정말 안타깝다.”
 “뭐가?”
 “내가 세상 모든 여자를 구원해 주고 싶어도 몸이 하나라 불가능하잖아.”
 “우웩!”
 이자성이 호들갑을 떨었다.
 “야야! 내려서 토해! 어제 세차했어!”
 “미안. 상상해 버렸어.”
 “······.”
 한 방 먹은 이자성은 조용히 액셀을 밟았다. 그러다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는 순간 갑자기 급정차하며 소리쳤다.
 “정후 형이다!”
 황급히 화장을 고치는 천이설을 보고 낄낄대는 이자성이었다.
 “푸하하! 거짓말인데!”
 “세워.”
 천이설이 이자성의 목을 조르려는 찰나.
 똑똑.
 누군가 자동차 창문을 두드렸다.
 “여전히 사이좋네요.”
 정후였다.
 이자성의 이중 낚시에 당한 것이다.
 민망해진 천이설이 이자성의 목을 감았던 팔을 어색하게 풀었다.
 “어머. 팀장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휴가 다녀온 이후로 처음인가.”
 조수석에 타려던 정후는 가득 쌓인 짐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잠깐만!”
 이자성이 서둘러 가방과 쿠션을 뒷좌석으로 집어 던졌다.
 “여기 앉아.”
 “정말 괜찮아?”
 “어차피 필요 없는 물건이야.”
 “아니. 그게 아니라.”
 정후를 따라 뒷좌석을 쳐다본 이자성이 황급히 시선을 회수했다.
 “출발해야겠네. 이러다 늦겠어.”
 쥐구멍에 들어가는 목소리로 덧붙인다.
 “형, 절대 나 버리고 어디 가면 안 돼. 나 진짜 죽을지도 몰라.”
 가방과 쿠션을 손톱으로 움켜쥐고 애써 웃는 천이설과 함께 정후를 태운 세단이 목적지인 컨벤션 센터로 출발했다.
 
 * * *
 
 강남 컨벤션 센터.
 최근 늘어나는 게이트와 관련해 대책이 발표되는 자리였다.
 자리를 채운 사람들은 하나같이 업계에 내로라하는 거물들. 유명 팀이나 컴퍼니의 간부들부터, 저명한 학자와 연구자들까지.
 지정된 자리에 앉아 발표자의 등장을 기다렸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재난관리본부 홍보팀장이었다.
 “초청에 응해주신 참석자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오늘 자리는······.”
 참석자들은 발표 내용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홍보팀장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미리 발표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집중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늘도 홍보팀장님만 열일하시네. 형은 도대체 언제까지 뒤에서 꿀만 빨게?”
 “아쉽네요. 마이크 잡은 팀장님 완전 섹시한데.”
 옆에 나란히 서서 잡담하는 이자성과 천이설.
 정후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사람마다 주어진 역할이 다르니까요.”
 오늘 발표될 정책 가운데 핵심은 게이트 돌입 관련 절차 간소화였다.
 행정절차를 간소화하여 늘어나는 몬스터의 침공에 대비하려는 것이다.
 물론 안전 문제 때문에 모두에게 동일한 정책이 적용되진 않는다.
 높은 평가를 받는 회사일수록 보다 높은 등급의 게이트에 돌입할 권한이 주어졌다.
 특히 대성과 케이원, 그리고 DK는 늑대급 바로 아래 1급 게이트까지도 사전 신고만 하면 돌입이 허가됐다.
 “이거지.”
 “됐어!”
 곳곳에서 나직하게 터지는 탄성.
 대부분 참석자들이 변경된 정책을 반겼다. 규제를 풀어주겠다는데 당연히 기쁠 수밖에.
 이어 발표된 정책들 역시 크게 반발은 없었다.
 대성에 유리한 정책도 발표됐지만, 경쟁사인 케이원과 DK 모두 넘어가는 분위기다.
 얼마 전에 수천억의 과징금을 납부한 대성이기에.
 “그럼 지금부터 질문받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미감지 게이트 생성규칙은?”
 이자성이 툭 하고 던진 질문에 정후의 대답이 이어졌다.
 “아직 생성 지역을 특정할 방법이 없어서 발표 보류. 대신 게이트 생성이 유력한 날에는 대기 인원을 늘리는 식으로 대처하려고.”
 “그게 언젠데?”
 “일단 가장 가까운 날은······.”
 데이터를 확인한 정후가 입맛을 다셨다.
 “오늘.”
 “······!
 “혹은 내일.”
 “뭐야. 깜짝 놀랐잖아.”
 이자성이 헛웃음을 짓는 찰나.
 갑자기 주위가 웅성거렸다.
 “뭐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사람들.
 정후도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한남대교 상공 미감지 게이트 생성.
 
 상대적으로 늦은 보고.
 이유가 있었다.
 미감지 게이트가 생성된 지역은 헌터들이 거주하는 부촌과 밀접해 있다.
 자택에서 머물던 헌터들이 게이트 생성을 인지하고, 지인들에게 먼저 연락한 것이다.
 “벌써 균열에서 뭔가 튀어나오는데?”
 “괜찮을까? 가봐야 하지 않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이해는 간다.
 참석자들 상당수가 해당 지역에 주소지를 두고 있기에.
 갈수록 커지는 혼란 속에 정후가 움직였다.
 “잠시만 지나갈게요.”
 “누구야. 정신 사납게.”
 뒤늦게 정후의 얼굴을 확인한 케이원 컴퍼니 상무가 말끝을 흐렸다.
 “팀장님······.”
 “인사는 나중에 드리겠습니다, 상무님.”
 더는 양해를 구할 필요가 없었다.
 썰물처럼 옆으로 갈라지는 사람들.
 ‘누구예요?’ 같은 질문은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마침내 정후가 단상에 올랐다.
 “마이크 부탁합니다.”
 홍보팀장에게서 마이크를 건네받은 정후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고요해진 장내.
 착석한 사람들.
 정후가 입을 열었다.
 “재난관리본부 알파팀장 이정훕니다. 일단 현장 화면부터 보시겠습니다.”
 벽면에 걸린 대형 스크린에 게이트 생성 지역 화면이 나타났다.
 정후는 레이저포인터를 이용해 균열 바로 아래 지점을 가리켰다.
 “균열의 크기와 형태. 그리고 이미 밖으로 튀어나온 몬스터 종류를 확인한 분들은 충분히 짐작하셨을 겁니다. 지금까지 확보한 데이터에 따르면 이런 경우 출현이 확실시되는 몬스터는.”
 화면 구석에 새로운 이미지가 나타났다.
 32개의 거대한 다리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초대형 몬스터.
 “크라켄입니다. 놀라셨을 마음 이해합니다만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크라켄은 크기와 연령에 따라 등급 판정이 달라지지만 최소한 6성 몬스터다.
 더불어 스카이피쉬와 함께 출현하기 때문에 매우 상대하기 까다로운 것으로 알려졌다.
 “상황을 다각도로 검토한 결과 재난관리본부는 이번 사태를 ‘늑대’급으로 선포합니다. 또한, 추후 현장 상황에 따라 ‘호랑이’급으로 상향 조정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참석자들이 침을 꿀꺽 삼키는 가운데 정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민관의 합동작전이 요구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균열을 중심으로 작전구역을 나누겠습니다. 1구역은 저희 알파팀에서 맡을 것이며 2구역은 대성 컴퍼니. 3구역은······.”
 순식간에 작전구역과 개요를 설명한 정후가 마이크를 껐다.
 “그럼 바로 작전 개시하겠습니다.”
 장내에 울려 퍼지는 정후의 육성을 신호로 참가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들 역시 크게는 컴퍼니에서 작게는 팀을 통솔하는 실력자들.
 돌발 상황이 발생했음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모습이었다.
 
 * * *
 
 대책 회의 참석 때문에 부촌에 거주하는 많은 헌터가 자리를 비웠다고는 하나 그곳에 남아 있던 헌터들 역시 상당한 실력자였다.
 독자적으로 몬스터를 막으려 한 건 당연한 일.
 게이트 돌입은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만 가능하지만, 외부로 나온 몬스터들은 특별한 지침이 없는 이상, 자유롭게 사냥이 가능했다.
 물론 헌터자격을 갖춘 이들에 한해서.
 그러나 그들의 용기는 최악의 결과로 이어졌다.
 “X발! 이쪽으로 오지 말라고!”
 주거지가 몬스터들의 표적이 되고 만 것.
 하늘을 날며 부식액을 내뱉는 스카이피쉬들은 어떻게든 상대 가능했다. 하지만 균열 사이로 거대한 다리를 내민 크라켄을 대적하기란 역부족.
 콰아아앙!
 크라켄의 공격에 고급 주택 한 채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미친! 어떻게 장만한 집인데······.”
 “뭐 해! 여기 있다가 죽어! 지원 온다니까 우린 일단 빠지자!”
 서둘러 주거지를 이탈하는 헌터들.
 그러나 아직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집에 남아 있는 이들도 있었다.
 “오빠, 밖에서 무슨 소리 나지 않았어?”
 대낮부터 방음 처리된 침실에서 하승길과 격하게 포옹하던 미정이 물었다.
 그러나 잔뜩 흥분한 하승길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무슨 소리. 신음?”
 답답한 미정이 하승길을 밀쳐냈다.
 “진짜 밖에서 소리 났다니까? 뭔가 부딪치는······.”
 콰아아아앙!
 천장을 뚫고 날아든 것은 크라켄의 다리였다. 그대로 바닥에 내팽개쳐진 하승길은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오빠?”
 대답이 없는 하승길을 내버려 두고 새로운 표적을 찾아 크라켄의 다리가 움직였다.
 미정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오빠 헌터잖아! 빨리 일어나서 나 좀 구해줘!”
 미정은 몰랐다.
 헌터로서의 하승길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가 쌓아 올린 부도 사실은 남들을 등치고 착취한 산물임을.
 “아아······.”
 죽음의 공포에 굴복한 미정이 눈을 감는 순간.
 누군가의 팔이 그녀를 안아 올렸다.
 콰아앙!
 크라켄의 다리가 벽을 강타했지만 미정은 이미 그곳을 벗어난 후였다.
 단단한 가슴에 안긴 미정이 천천히 눈을 떴다.
 구해준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는 순간 미정은 하마터면 까무러칠 뻔했다.
 미정을 구한 것은 이자성이었다.
 크라켄의 다리를 피해 공중으로 솟구치며 그가 물었다.
 “괜찮아요?”
 미정이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지상에선 다른 헌터들이 크라켄의 다리를 공격하는 중이었다.
 그들의 면면은 너무나 화려해서 일반인인 미정도 아는 얼굴이 여럿 있을 정도였다.
 헌터들의 협동작전 속에 스카이피쉬 수백 마리가 바닥에 떨어지고, 크라켄의 다리가 썩둑 잘려 나갔다.
 남자 친구 하승길은 손도 쓰지 못하고 당했는데.
 헌터끼리도 격이 다름을 몸소 확인한 미정이다.
 “끝내주죠?”
 정말이지 끝내줬다.
 허공에 떠오른 채로 이자성의 품에 안겨 있는 느낌도, 지상에서 펼쳐지는 헌터들의 퍼포먼스도.
 마침내 근처의 몬스터들이 모조리 쓸려 나가고, 지상의 헌터가 양팔로 원을 그려 보였다.
 신호를 확인한 이자성이 무선마이크를 켰다.
 “1구역 클리어.”
 이자성의 시선이 멀리 떨어진 또 다른 주거지역을 향한다.
 미정도 덩달아 고개를 돌렸지만 너무 거리가 멀어서 흐릿하게만 보였다.
 “이걸로 봐요.”
 이자성이 건넨 것은 망원렌즈.
 망원렌즈를 통해 멀리서 벌어지는 상황을 확인한 미정이다.
 그곳에서도 엄청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블랙버스터 영화를 능가하는 광경에 미정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오는 외침.
 “4구역 클리어.”
 “······!”
 미정은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방금 무전을 보낸 남자는 송민호.
 최고 시청률을 자랑하는 헌터 서바이벌 프로그램 멘토로 유명한 헌터였다. 이자성만큼이나 유명세를 자랑하는 인기스타.
 미정 또한 송민호가 케이원 컴퍼니 소속이란 사실까지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하지만 송민호가 끝이 아니었다.
 경쟁적으로 사방에서 들려오는 무전.
 “3구역 클리어!”
 “2구역 클리어!”
 각각 대성과 DK 소속 헌터들이었다.
 역시 대중에 널리 알려진 최고의 헌터들.
 이미 남자 친구 하승길은 안중에도 없어진 미정이다.
 그리고 그녀는 보았다.
 무전을 마친 헌터들의 시선이 어디론가 향하는 것을, 작전을 수행한 헌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두의 시선이 모이는 그곳에······.
 정후가 있었다.
 “······!!!”
 순식간에 머릿속이 새하얘진 미정이 눈동자만 껌뻑이던 그 순간.
 정후의 입이 열렸다.
 “초동 작전 완료. 대기 인원 각자 위치로. 작전 완료한 팀은 지금 즉시 게이트로 접근할 것.”
 미정과 얘기할 때처럼 차분한 목소리. 하지만 그 파장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파파파팟!
 정후의 지시가 끝나기 무섭게 사방에서 헌터들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미정을 이자성이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제 안전하니 남편분에게 가보세요. 구급대원들이 응급조치했는데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다고.”
 “저기······ 잠깐만요.”
 “죄송해요. 저도 가봐야 돼서.”
 이자성이 한발 늦게 날아올랐다.
 덩그러니 남겨진 미정이 황급히 정후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결과, 그녀는 보고 말았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믿기 어려운 광경을.
 무전을 마친 정후가 날아오르고 있었다. 먼저 도약한 어떤 헌터들보다도 빠르게 균열 바로 아래에 다다라.
 “전원 돌입.”
 짧은 한마디만을 남긴 채 게이트 안으로 사라지는 정후.
 미정은 자신도 모르게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 * *
 
 게이트 돌입에 대한 행정절차는 매우 까다롭다.
 헌터들의 등급, 보유한 장비, 사냥실적 등등.
 문서로 명시된 조건들을 하나라도 충족하지 못하면 허가가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한남대교 상공 게이트에 돌입한 헌터들은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했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게이트 내부가 두렵지 않은 건 아니다.
 게이트 내부는 미지의 영역.
 언제나 낯설고 수많은 돌발 변수가 존재하기에.
 그럼에도.
 그들의 표정엔 분명 여유가 있었다.
 지금처럼 정예들이 한데 모이는 경우가 드물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저게······ 그거 맞죠? 말로만 들었지 직접 보는 건 처음이네.”
 “난 두 번째 보는 건데도 모르겠단 말이야. 저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
 정후의 존재였다.
 청진기로 진찰하는 의사처럼 게이트 내벽에 손을 대고서 집중하는 모습.
 지이잉-
 비프음과 함께 게이트 내부의 정보가 손바닥을 거쳐 정후의 뇌로 흘러들었다.
 급이 낮은 게이트의 경우 외부에서도 스캔이 가능하지만, 파장이 심한 늑대급 이상 게이트는 지금처럼 안에 들어와서 스캔해야 한다.
 미로의 구조, 몬스터의 종류와 배치, 내부의 환경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숫자와 기호로 이뤄진 정보를 간단히 요약해 내뱉는다.
 “G타입, 늑대급.”
 정후의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헌터들. 특히 알파팀원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난하네. 전력도 충분하고.”
 “솔직히 이만한 인원이면 호랑이급이라도 괜찮지 않나.”
 물론 반신반의하는 얼굴들이 훨씬 많았다. 대부분이 정후와 함께 작전을 수행한 경험이 없는 헌터들.
 그도 그럴 게, 정후는 거의 모든 작전을 알파팀과 수행해 왔다.
 외부인이 그 능력을 직접 확인할 기회는 거의 없었던 셈.
 그렇기에 일반적인 상식으로 상황을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슨 능력인지는 모르겠지만, 게이트 내부를 저렇게 쉽게 판단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아무리 베테랑이라도 게이트 내부에서 속단은 절대 금물이다. 익숙하게 느껴지는 지형도 사실은 전혀 다른 형태일 수 있기에.
 당장 앞에 보이는 기둥만 해도, 그 뒤에서 어떤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일.
 그런데 정후는 마치 돋보기로 들여다본 것처럼, 게이트 내부 상황을 줄줄 읊는 것이다.
 우수한 헌터를 다수 보유한 미국과 중국조차 게이트 내부를 탐색하는 데 골머리를 앓건만.
 쏟아지는 의혹 속에서 정후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해명은 아니었다.
 “원호준 씨, 전방의 기둥들 부탁드립니다.”
 원호준이 일말의 의심조차 없이 저격총을 꺼내 들자, 누군가 우려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린 건 예정된 수순.
 “구조물 건드리다 게이트 리셋(Reset) 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게이트가 단순한 통로인지. 아니면 그 자체로 하나의 유기체인지에 대해선 아직까지도 논란이 많다.
 그러나 구조물을 함부로 파괴할 경우 리셋이 일어난다는 사실엔 이견이 없다.
 리셋은 게이트 환경이 완전히 재구성되는 현상.
 미로는 더욱 복잡해지고 몬스터들의 배치도 훨씬 까다로워지는 것이다.
 중얼거림을 들었음에도 정후는 일일이 대꾸하지 않았다.
 어차피 결과로 보여주면 될 일.
 원호준의 저격총이 오러를 뿜었다.
 타앙!
 탄환이 날아들자 기둥은 급히 옆으로 이동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눈썰미가 좋은 헌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페이퍼맨이었나.”
 얼핏 보기엔 기둥 같았지만 실은 몬스터였던 것.
 처음 이의를 제기했던 헌터는 민망한 표정으로 몬스터를 쳐다보았다.
 페이퍼맨. 4성.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기업 페이퍼 컴퍼니에 빗대 명명된 몬스터로 위장술에 능해 4성 판정이 내려졌다.
 지형지물로 변해 있다가 지나가는 인간을 급습하는 게 놈들의 패턴.
 하지만 지금처럼 실체가 발각되고 나면 4성이란 등급이 무색하게 취약하다.
 촤아악!
 앞으로 대시한 헌터 하나가 도검을 휘둘러 페이퍼맨을 찢어발겼다.
 많은 헌터가 오러의 손실률이 높은 총기보다, 위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근접용 무기를 선호한다.
 그중에서도 도검은 가장 인기 높은 무기.
 페이퍼맨들의 죽음을 확인한 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찢어지겠습니다. 먼저 DK는 여기 남아 도주로 확보해 주세요.”
 “알겠어요.”
 도주로 확보는 분명 매우 중요한 일임에도 맡기를 꺼리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래도 몬스터를 상대하는 일이 적다 보니 배분 과정에서 소외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DK의 누구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미 게이트에 돌입하기 전에 정후는 분배 관련 룰을 정했다.
 보통 직접 사냥한 사람이 사체의 소유권을 갖지만, 지금처럼 대규모 인원이 투입되는 경우 ‘표준’ 룰을 적용하곤 한다.
 총액에서 부상자와 사망자 보상금을 제하고 거기에 비용 처리까지 마친 다음 나머지 금액을 공평하게 나눠 갖는 것.
 “대성에선 척후 역할 맡아주시고.”
 “알겠습니다.”
 물론 이렇게 하면 실수한 팀에 보상금이 집중되는 역설이 생긴다.
 하지만 사냥 업적이 깎이고 다음 작전에서 불이익을 받게 되므로 뒷말이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케이원은 후방에서 화력 지원 및 엄호 부탁합니다.”
 “예.”
 마지막으로 정후가 팀원들을 돌아봤다.
 “알파팀은 핵심부에 진입해 ‘심장’을 파괴할 겁니다. 모두 알고 있겠지만 화력 집중을 위해 가급적 오러 사용을 아껴주십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맡겨만 주세요.”
 “통신 도중 노이즈 발생하더라도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위치 사수해 주시고요.”
 헌터들이 사용하는 통신 장비는 최신 기술의 집약체.
 하지만 게이트 내부에선 언제 노이즈가 발생할지 모르기에 미리 경고해두는 것이다.
 “그럼······.”
 정후가 모두를 돌아봤다.
 사실 게이트에 돌입할 때보다 이 순간이 가장 두근거린다.
 그것을 말해주듯 헌터들의 얼굴은 한껏 상기돼 있다.
 “작전 시작하겠습니다.”
 척후조인 대성 소속 헌터들이 가장 먼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천장엔 종유석들이 고드름처럼 매달려 있고, 바닥은 움푹 파인 지형.
 경험 많고 순발력 좋은 헌터를 앞세워 조금씩 전진해 나간다.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몬스터, 곳곳에 숨어 있을 함정. 모든 게 경계 대상.
 -전방 좌측 천둥사자 무리 발견. 전투 개시하겠음.
 곧바로 척후조에서 보내온 영상이 정후의 스마트 기어에 나타났다.
 저돌적인 천둥사자들에 맞서는 척후조의 움직임이 가볍다.
 “새끼가 없네. 수컷들만 정리하고 그대로 전진하세요.”
 컨트롤 타워인 정후가 지시를 내리기 무섭게 새로운 무선이 쏟아졌다.
 -후방 우측 갈림길에서 산티아고 다수 접근 중.
 -전방 좌측 천둥사자 무리 계속해서 출현. 근처에 천둥사자 서식지 있는 것으로 추정.
 어느덧 작전개시 1시간 경과.
 전방과 후방을 동시에 교란하는 움직임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팀장님, 지원해야 되지 않을까요?”
 실제로 대성과 케이원 모두 고전하는 중이었다.
 아직 위험한 정도까진 아니지만,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처리하느라 발이 묶인 것은 사실.
 “아뇨. 지원은 하지 않습니다.”
 무선을 통해 추가 지시를 내리는 정후였다.
 “대성은 천둥사자 서식지 수색하시고. 케이원도 산티아고 추격해서 궤멸시켜 주세요.”
 곧바로 우려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겠습니까? 우두머리 수컷과 조우하면 당분간 합류 불가능합니다만.
 -산티아고는 워낙 움직임이 날래서, 추격하려면 본대와 거리가 멀어질 텐데요.
 “문제없으니까 별도 지시 있을 때까지 그대로 움직이세요.”
 그걸 끝으로 무선마이크를 꺼버린 정후가 피식 웃었다.
 “게이트만 들어오면 감시당하는 기분이라 짜증 난다니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게이트의 ‘심장’은 ‘눈’을 통해 내부에 진입한 인간들을 철저히 감시한다.
 그리고 대응한다.
 같은 몬스터를 상대하더라도 게이트 내부에서의 사망률이 훨씬 높은 이유.
 “물론 나도 뭐라 할 입장은 못 되지만.”
 정후가 팀원들을 돌아봤다.
 “신호하면 화력 퍼부을 준비하세요.”
 지시를 내린 정후의 시선은 종유석들이 잔뜩 매달린 천장을 향한다.
 돔처럼 탁 트인 천장은 아직까지 아무런 조짐이 보이지 않지만 정후는 스캔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게이트 안에서 가장 강력한 몬스터가 바로 근처까지 와 있음을.
 ‘원하는 대로 판을 깔아줬잖아. 뭘 망설이는 건데?’
 하위 등급 몬스터들로 시선을 끌고 주력은 본대를 습격.
 이것만 봐도 확실히 알 수 있다.
 게이트는 지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정후를 상대로는 전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서로 패가 까발려진 도박은 결국 좋은 패를 가진 쪽의 승리로 끝나는 법이니까.
 쿠우웅!
 좌우의 벽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팀원들의 주의가 분산됐지만 정후의 눈동자는 여전히 천장에 머물렀다.
 ‘거기 있는 거 다 아니까 나와라. 셋, 둘, 하나······.’
 콰콰콰쾅!
 마침내 천장을 부수며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정후의 손가락에서 발사된 오러 탄환이 몬스터의 미간을 정확히 꿰뚫었다.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몬스터가 종유석 파편과 함께 바닥으로 추락하는 순간.
 “공격!”
 신호에 맞춰 달려든 팀원들이 놈의 몸을 찢어발겼다.
 몬스터는 파르르 몸을 떠는 것으로 울분을 토해냈다. 제대로 공격도 못 해보고 당했으니 억울할 수밖에.
 때마침 들려오는 무선.
 -천둥사자 서식지 파괴 완료.
 -산티아고 격멸시켰습니다.
 대성과 케이원의 지휘자 모두 목소리에서 자부심이 느껴진다.
 그럴 만하다.
 평소보다 훨씬 시간을 단축시켰으니.
 일종의 경쟁 효과라고나 할까.
 하지만.
 “알파팀도 방금 악마눈 제압했습니다. 개인 정비 서둘러 주세요. 즉시 핵심부로 돌입하겠습니다.”
 정후의 무선을 듣는 순간 다들 숙연해진다.
 천둥사자와 산티아고들 모두 상대하기 까다로운 몬스터들이라고는 하나 7성 악마눈에 비할 바는 아니기에.
 핵심부로 진입, 심장 파괴 이후 게이트 폐쇄까지. 이후의 과정은 매우 조용히 그리고 굉장히 빠르게 진행되었다.
 게이트에 돌입한 지 4시간 15분.
 모든 작전이 마무리됐다.
 전력이 압도적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통상적으로 늑대급 게이트를 폐쇄하는데 12시간 가까이 소요된다. 자칫하다 리셋이라도 일어나면 24시간 이상 걸릴 때도 있다.
 장기전까지 각오했던 헌터들은 허탈해질 수밖에.
 어느새 정후를 향한 의문의 시선도. 서로의 전과를 자랑하려는 근질거림도 완전히 사라진 후였다.
 모두가 그저 경외심 가득한 눈빛으로 알파팀을 바라볼 뿐.
 
 * * *
 
 작전을 마무리하고 확인한 결과.
 서울은 물론 전국 어디에서도 추가적인 미감지 게이트 생성은 없었다.
 원래는 컨벤션 센터에서 만찬이 예정돼 있었지만.
 작전 직후라 취소.
 대신 작전에 투입된 팀들의 수뇌부들이 참관하는 가운데 부산물의 수거가 이뤄졌다.
 역시나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악마눈.
 앞서 사냥한 크라켄도 상위 등급 몬스터지만 악마눈의 가치에 비할 바는 아니기에.
 “팀장님, 혹시 천사의 눈물은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신지?”
 케이원 상무의 질문에 모두의 관심이 정후에게 집중됐다.
 공정하게 배분하겠다고 했지만, 처분방식은 전적으로 정후에게 달려 있다.
 시장가치에 따라 인수한 다음 대금을 나눠주고 끝낼 수도 있는 것이다.
 “모두들 고생해 주셨으니 기쁨도 함께 나눠야지요. 나누면 몇 방울씩밖에 돌아가지 않겠지만······.”
 정후가 모두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시잖아요?”
 “물론입니다!”
 악마처럼 교활하고 잔인해 악마눈이란 이름이 붙었지만, 정작 놈의 눈물샘에서 짜낸 부산물은 천사의 눈물이라 불렸다.
 실명된 눈을 회복시키고 월등한 시력을 갖게 해주기 때문이다.
 당연히 수요가 엄청났지만 거래소에 매물이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케이원 상무를 비롯한 사람들이 반색하는 이유였다.
 
 상황이 완전히 마무리되고 다른 팀원들마저 퇴근한 시각.
 그때까지 남아 있던 이자성이 정후에게 다가왔다.
 “형, 나 고백할 게 있어.”
 “뭔데. 설마 사무실 냉장고에 넣어둔 초코바 네가 먹었냐?”
 “그런 게 아니고. 형 전 여친 아까 거기서 봤다?”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사진을 통해 미정의 얼굴을 알고 있던 이자성이다.
 “자성아.”
 정후가 이자성의 어깨에 턱하고 손을 얹었다.
 “그 얘긴 그만하자.”
 이미 끝난 얘기다. 미정이 어떻게 사느니 누굴 만나니 관심도 없다.
 그래도 옛날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처음 만날 때만 해도 정말 괜찮은 애였는데.
 어째서 그렇게 변해버린 걸까.
 “형, 여자 소개시켜 줄까?”
 “됐어. 내가 무슨 발정 난 원숭이도 아니고.”
 그 말은 정확히 세 걸음 후에 이렇게 바뀌었다.
 “······번호만 줘봐. 내가 알아서 할게.”
 저녁을 먹기 위해 이동하는 동안.
 소개받은 여자와 메신저로 대화하던 정후가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이자성을 돌아봤다.
 “야, 카톡 서버 터진 거 같은데?”
 이자성은 스마트폰을 확인한 후에 어깨를 으쓱였다.
 “뭔 소리야. 난 멀쩡하구만.”
 “아냐. 아까부터 카톡 대화창에 1이 안 사라져.”
 “······.”
 차마 웃지 못하는 이자성이었다.
 아무래도 밥 대신 술이나 마셔야 될 분위기다.
 
 * * *
 
 치이이익-!
 기름을 두른 불판 위에서 고기가 익어가고 있다.
 마늘이나 버섯 따위를 같이 올리는 사람도 많지만, 정후는 순수하게 고기만을 즐기는 타입.
 지글거리는 고기를 뒤집으며 정후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2년 만이던가.”
 “그쯤 됐을걸.”
 정확히는 26개월 만이다. 한국에 늑대급 게이트가 출현한 건.
 “형,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게이트 생기면 닫고, 몬스터 나오면 죽이고. 간단하잖아?”
 지극히 헌터다운 생각.
 하긴 저게 맞는 건지도 모른다.
 고민한들 크게 바뀌는 것도 없으니까.
 지금이야 그나마 미감지 게이트 생성주기라도 예측 가능하게 됐지만.
 언제 손바닥 뒤집듯 주기가 바뀔지 모르는 것이다.
 “다 익었다. 먹어.”
 “끝내주네. 역시 고기 굽는 것도 스킬인가.”
 감탄하는 이자성.
 정후도 고기를 한 점 베어 물었다.
 고소한 육즙 위로 살점이 눈처럼 사르르 녹아내린다.
 소고기나 돼지고기로는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풍미.
 대표적인 식용 몬스터 유니 고기다.
 순식간에 한판을 모조리 먹어치운 이자성이 다시 불판에 고기를 올렸다.
 “도저히 이 맛을 끊을 수가 없다니까.”
 사실 초창기엔 몬스터 식용을 두고 거부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징그러운 생김새는 둘째 치더라도 식인 습성이 문제였다.
 사람을 잡아먹은 몬스터 고기를 먹으면 간접식인이라는 논리.
 실제로도 인간을 잡아먹은 몬스터 몸속엔 H바이러스라는 유독 성분이 생성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그럼에도 현재 몬스터 고기는 식용으로 인기가 높다.
 무엇보다 가장 논란이던 간접 식인문제가 해결된 게 컸다.
 이제 검사를 통해 H바이러스가 검출된 몬스터 사체는 유통 자체가 금지된다.
 하지만 불법을 저지르는 인간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
 마침 TV에선 관련 뉴스가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오늘 경찰은 H바이러스가 검출된 몬스터 사체를 빼돌려 유통한 혐의로 26세 정 모 씨 등 7명을······.]
 
 “형도 알지? 일부러 저런 고기만 찾아서 먹는 사이코 새끼들 있는 거.”
 H바이러스는 일종의 마약과 같다.
 성분이 함유된 음식을 먹는 것만으로 환각 상태에 빠지며 면역력이 저하된다.
 “야, 밥맛 떨어진다. 다른 손님도 없는데 채널이나 돌려.”
 사실 사태는 뉴스에서 보도한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
 단지 바이러스가 검출된 육류를 불법으로 유통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일부러 인간을 몬스터에게 던져주고 잡아먹히는 과정을 촬영, 제작한 영상을 몬스터 고기와 함께 파는 조직까지 존재한다.
 오죽하면 정후도 휴대용 검출기를 들고 다니겠는가.
 식당 주인에게 양해를 구한 이자성이 TV채널을 돌리며 혀를 찼다.
 “흉흉한 세상이야.”
 “뭐, 조만간 훈훈한 뉴스 하나 나올 거다. 가끔은 좋은 소식도 들려줘야지.”
 원래 치료용 부산물은 만일을 대비해 일정량을 연구실에 보관해 둔다.
 악마눈을 잡고 나온 천사의 눈물도 마찬가지.
 다만 천사의 눈물은 재고가 비교적 충분했다. 남는 양으로 한 사람 정도는 빛을 보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일도 하고 재난관리본부에 대한 인식도 높이고.
 이게 공무원이 하는 일 아니겠는가.
 “그나저나 주위에 여자도 많잖아. 지금까지야 여친 있어서 거리 뒀다고 쳐도. 슬슬 누구라도 만나보지? 자꾸 나한테만 의존하지 말고.”
 “누구? 천이설?”
 정후의 물음에 기겁하는 이자성이다.
 “워워. 진정해. 그 여잔 아니야.”
 쪼르륵.
 술잔을 채웠다.
 유니 고기가 맛있긴 하지만 술이랑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역시 소주엔 삼겹살이지.
 “네가 그렇게까지 말리지 않아도 어차피 만날 생각 없어.”
 “왜? 설마 사내 연애는 안 된다는 신념 같은 거라도 있나?”
 “그런 건 아니고.”
 반쯤 채워진 술잔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자니 오래전 일이 떠오른다.
 미정과는 중, 고등학교 동창이지만 남녀 관계로 만나기 시작한 건 한참 후다.
 미정과 사귀기 전, 그러니까 정후가 헌터로 활동했던 시기.
 정후는 작전 수행을 위해 도착한 괌에서 제이라는 이름의 헌터를 만났다.
 한국보다 훨씬 인재풀이 넓은 미국에서도 손꼽히던 천재 헌터.
 은색의 긴 머리가 너무도 잘 어울리던 그녀. 작은 호감과 설렘으로 시작된 감정.
 하지만 그 감정이 미처 커나가기도 전에 그녀는 죽었다.
 화염에 휩싸인 채로 어서 가라고 외치던 제이를 보며 생각했다.
 앞으론 헌터를 이성으로 대하기 힘들 것 같다고.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릴 게 분명하니까.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 소주병을 기울였다.
 “시작부터 너무 달리는 거 아냐? 아직 초저녁인데.”
 “자성아, 넌 몰라. 아마 평생 모를 거야.”
 “하아, 이 양반 벌써 취했네.”
 투덜거리면서도 정후의 빈 잔에 소주를 채워준다.
 이럴 때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나이는 아무 상관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함께 마시고, 함께 웃고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이를 떠나 친구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 * *
 
 열흘 후.
 “팀장님, 맡겨주신 여왕의 날개 있잖습니까.”
 세강 연구소 부소장으로부터 걸려온 전화.
 “일단 1차 가공은 끝났는데 한번 보러 오시겠습니까? 팀장님이 보유하신 슈트 중, 어떤 걸 개조할지 결정도 하셔야 되니.”
 다른 헌터들과 마찬가지로 정후 역시 여러 벌의 슈트를 갖고 있다.
 정후는 그중에 여왕의 날개와 가장 어울리는 걸 골라 업그레이드할 계획이었다.
 기존에 모아놓은 부산물들까지 재료로 써서.
 물론 지금도 정후의 장비는 최고수준이지만, 그럼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장비를 계속해서 업그레이드해 가는 즐거움 때문이리라.
 하지만 정후는 그 즐거움을 뒤로 미뤘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일정이 있어서요. 내일 오후에 어떠신가요?”
 “저야 아무 때나 상관없지요. 그럼 내일 오후 스케줄 비워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뵐게요.”
 전화를 끊은 정후가 강성 의료원으로 들어섰다.
 질병 치료에 효과가 탁월한 몬스터 부산물이 속속들이 나타나면서.
 의사와 병원의 존재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섣부른 예측이 있었다.
 하지만 의사들은 몬스터의 시대에도 살아남았다.
 몬스터 부산물을 이용한 시술은 부작용을 동반하게 마련.
 의사들은 시술에 적합한 건강 상태를 조성하고, 부작용을 억제하는 역할까지 수행한다.
 똑같은 시술이라도 의료팀의 실력에 따라 성공 확률이 천차만별.
 바로 정후가 강성 의료원을 파트너로 선택한 이유다.
 강성 의료원은 몬스터 부산물을 이용한 시술에 있어 단연 국내 최고였다.
 오늘 천사의 눈물을 활용한 시력 회복 수술도 반드시 성공해낼 것이다.
 “팀장님, 여기에요.”
 정후를 알아본 중년 여자가 손을 흔들었다.
 병원 안이라 목소리를 낮췄지만 그녀는 분명 상기된 얼굴이었다.
 복지 단체 간부로 활동하면서 온갖 어려움을 겪는 그녀이기에 오늘의 모습은 분명 색달랐다.
 “제가 조금 늦었죠?”
 “아니에요. 벌써 오실 줄 알았으면 미리 마중 나가는 건데.”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건네며 정후가 물었다.
 “시술 준비는 차질 없나요?”
 “그럼요. 팀장님이 워낙 실력 좋은 담당의를 소개해 주셔서.”
 갑자기 여인이 허리를 넙죽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팀장님.”
 “이러지 마세요. 저보다 팀원들 공이 크고요. 그리고 아시다시피 홍보 효과 때문에 하는 거예요. 벌써 기자들도 불러놨습니다.”
 여인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고작 홍보 효과 때문에 거액의 사비를 써가며 남을 돕는 사람이 있을까.
 한 표가 귀한 정치인들도 기껏해야 악수나 하고 다니는 게 현실인데.
 수술실로 향하는 동안 여인은 쉬지 않고 말했다.
 “오늘 시술받을 철희네 가족 말인데요. 저희 단체가 활동한 지 10년이 넘어가지만, 그런 가족은 처음이에요.”
 “모자가정이라고 했었죠?”
 “예. 배우자 사별하고 엄마랑 아들이 같이 살았는데, 철희 어릴 때 집에 큰불이 났었어요. 근처 식당에 일 나갔던 엄마가 급히 돌아와서 구해내긴 했는데······ 철희는 무사했지만 엄마는 시력을 잃고 몸을 많이 다쳤어요.”
 보통 부모가 장애가 있으면 자식은 어린 마음에 위축되게 마련이다.
 남들에게 부모를 드러내는 사소한 일조차 부담을 갖고, 심한 경우 그릇된 길로 빠지기도 한다.
 “그런데 철희는 달랐어요. 우리 봉사자들 처음 만났을 때도 엄마 손 꼭 붙잡고 소개하고. 어린 나이에도 거동 불편한 엄마 돕고, 그러면서 학교생활까지 얼마나 잘하는지. 글쎄, 학원 한 번 못 가본 애가 반에서 1등까지 했다니까요.”
 마치 자기 자식을 자랑하듯 들뜬 모습.
 복지 단체라 간판만 걸고 세금에 후원금까지 횡령하는 족속들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의사 돼서 엄마처럼 눈 못 보는 사람들 고쳐주겠다고 하는데, 얼마나 대견하고 또 안타깝던지. 아시다시피 철희 엄마는 기존 의학으론 시력 회복이 불가능했으니까요.”
 여인이 다시금 정후의 손을 꼭 붙잡았다.
 “정말 팀장님이 나서주시지 않았다면······.”
 여인이 말해주는 철희 모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보호자 대기실 앞이었다.
 대기실 의자에 앉아 철희와 인사를 나누는 여인.
 잠시 후에 묵주를 꺼내든 여인이 문득 물었다.
 “팀장님은 종교가 어떻게 되시나요?”
 “저는 신을 믿지 않습니다.”
 정후는 고개를 들어 수술 중이라고 적힌 표시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신이 존재한다면 저 모자에게만큼은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 같군요.”
 마침내 수술이 끝나고.
 철희의 어머니가 휠체어를 타고 의료진과 함께 대기실로 들어왔다.
 벌떡 일어나 달려가는 여인.
 그리고 애써 침착하게 어머니에게 다가가는 철희.
 하지만 의젓한 모습도 잠시뿐.
 “······철희야.”
 감정이 북받친 목소리로 어머니가 부르자.
 다가가 어머니를 껴안는 철희의 눈가에서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아들의 뺨과 코와 턱을 차례로 쓰다듬으며, 흐느끼는 어머니.
 어릴 때 이후로 보지 못한 아들의 얼굴이다.
 평생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 순간 모자가 느끼는 감정을, 감히 제3자가 말로 설명할 순 없으리라.
 정후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재난관리본부 홍보팀장이 정후에게 물었다.
 “기자들 들여보낼까요?”
 이미 카메라를 들고 대기 중인 기자들을 지나······.
 정후의 시선이 여전히 서로를 부둥켜안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모자에게 머물렀다.
 “아니요. 저대로 두세요.”
 소리 없이 문을 닫은 정후는 건물을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푸른 하늘.
 그리운 얼굴이 사무쳤다.
 “어머니······.”
 
 * * *
 
 다음 날.
 정후는 오전 일정을 마치자마자 차를 몰고 대전으로 내려갔다.
 “팀장님, 신문 보셨습니까?”
 철희 모자의 이야기를 하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세강 연구소 부소장은 스크랩한 기사를 정후에게 보여줬다.
 “공정위 조사 결과 정황은 의심되지만 물증이 없어 경고만으로 끝낸다고.”
 대성 연구소에 관한 이야기였다.
 거래소 독점에 대한 조사가 끝난 모양.
 “공정위에서 그렇게 판단했다면 믿어야지요.”
 물론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정후는 순진하지 않다.
 재난관리본부에서도 비리가 터진 마당에 공정위라고 다를까.
 “어쨌든 경고라도 받았으니 대성에서도 당분간 자중할 겁니다.”
 세강 연구소를 비롯한 몬스터 부산물 관련 종사자들에게 자그마한 위안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전에 방문했을 때와는 달리 부소장은 정후를 가공소로 안내했다.
 땅땅-
 경쾌한 망치 소리.
 마치 옛날 대장간을 연상시키는 분위기.
 보급형 슈트와 달리 맞춤형 장비는 이곳에서 99퍼센트 수작업으로 만들어진다.
 부소장이 찾아왔음에도 제작자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심혈을 기울여 작업에 몰두하는 모습.
 “항상 느끼지만 장인(匠人)이란 정말 대단한 분들 같아요. 저도 장인정신을 본받아야 하는데.”
 “덕분에 흰머리만 자꾸 늡니다. 너무 완벽주의도 문제에요. 그만하면 됐다 싶은데도 계속 매달리니.”
 정후는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몬스터 부산물은 원석이나 마찬가지.
 찬란한 보석이 되느냐 그러지 못하냐는 오직 제작자의 손에 달려 있다.
 비용이 다른 곳보다 곱절로 들어감에도 한사코 세강 연구소만을 찾는 이유다.
 “전화로 말씀드렸다시피 일차 가공만 마친 상태입니다. 확인해 보십시오.”
 꿀꺽.
 직접 여왕을 사냥한 당사자임에도 정후는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가공을 마친 여왕의 날개는 그야말로 별빛처럼 반짝였다.
 촘촘한 그물 형태를 그대로 간직한 가운데 불순물만을 완벽히 제거해낸 것이다.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는 솜씨!
 한참을 감상한 끝에 정후가 물었다. 여전히 시선은 여왕의 날개에 고정시킨 채로.
 “적합도 결과는 어떻게 나왔나요?”
 거듭 강조하지만 장비 제작은 결코 간단하지가 않다.
 찰흙 만들기처럼 아무 재료나 마구잡이로 섞다가는, 최악의 경우 마력을 잃기도 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적합도 검사다.
 몬스터 부산물끼리 거부반응을 일으키진 않는지 사전에 검사하는 것이다.
 기존 몬스터들이야 데이터가 존재하지만 정후가 세계 최초로 사냥한 여왕은 당연히 백지상태.
 당연히 표본을 추출해 다른 몬스터의 부산물들과 반응을 살펴봐야 한다.
 “그게 조금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샘플을 개미지옥에서 나온 흙에 가까이 뒀더니 아주 격렬한 거부반응을 일으키더라고요.”
 개미지옥은 살아 있는 흙더미다.
 주변에 지나가는 사냥감이 있으면 구멍 안으로 끌어들여 집어삼킨다.
 “물론 귀신개미니 개미지옥이니 인류가 붙인 이름이긴 합니다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쩌면 게이트 너머의 세상은 지구와 비슷한 환경일지도 모르겠다고.”
 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다만 그곳은 지구처럼 인류에게 친절하진 않겠지요. 그건 그렇고 개미지옥 외엔 특별히 거부반응은 없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정후가 준비해 온 제작 의뢰서를 꺼냈다.
 “이대로 만들어주십시오.”
 부소장은 의뢰서 내용을 확인하는 대신 제작자를 불렀다.
 “워낙 섬세하게 다뤄야 하는 재료라 여기 이 친구가 모든 작업을 도맡을 겁니다. 일차 가공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다만 아무래도 혼자 작업하니 시간은 평소보다 훨씬 오래 걸릴 텐데······ 괜찮으신지?”
 “물론입니다.”
 머리를 산발한 제작자는 의뢰서와 재료만을 챙기더니, 인사도 없이 공방으로 사라졌다.
 “죄송합니다. 사회성이 부족한 친구라.”
 “괜찮습니다.”
 “그래도 실력만큼은 확실합니다. 원래 혼자서 공방 운영하던 친군데······ 보시다시피 영업엔 소질이 없어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을 어렵게 설득해 데려왔지요. 절대 실망하시지 않을 겁니다.”
 부소장 역시 명장의 반열에 오른 제작자다.
 그런 사람이 의뢰서도 보지 않고 작업을 일임했으니 믿어도 좋으리라.
 “사실 저 친구 말고도 한 명 더 탐내던 인재가 있었는데. 여러 문제가 얽혀 내부적으로 고민하는 사이 중국에서 낚아챘어요. 아쉽지만 잘 풀리길 바랐는데 결국 폐인이 돼서 돌아왔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고용주와 트러블이 심했다고.”
 부소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몇 년이나 지난 일인데도 지금까지 생각납니다. 무리를 해서라도 우리가 잡았어야 했는데.”
 부소장이 지나가듯 물었다.
 “혹시 팀장님도 그런 경험이 있으십니까?”
 
 * * *
 
 차에 올라 영입 리스트를 차례로 확인했다.
 정후라고 지금까지 원하는 대상을 모두 영입한 것은 아니었다.
 세강 연구소 부소장처럼 해외에 뺏긴 헌터들만 해도 수두룩하다.
 문득 그들의 근황이 궁금해진다.
 다들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우우웅.
 타이밍 좋게 스마트폰이 울렸다.
 하지만 정후가 기다리던 전화는 아니었다.
 “무슨 일이세요? 부대장님.”
 경찰 대헌터팀 CHT 부대장으로부터 걸려온 전화.
 여왕개미 사냥 이후로는 연락할 일이 없었는데.
 -정말 이런 부탁드리기 민망합니다만. 저희가 가진 자료가 너무 부실해서요.
 부대장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정후의 기억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강승호? 기억합니다. 분명히 영입 리스트에 올려놨었는데.”
 정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CHT와 얽혔다면 좋은 일은 아닐 거고. 무슨 사고라도 쳤습니까?”
 -레드문이라고 신흥 범죄조직인데 혹시 들어보셨는지요?
 “······레드문이라면.”
 정후의 표정이 굳어졌다.
 레드문은 최근 혜성처럼 등장해 급성장한 범죄조직.
 H바이러스가 감염된 몬스터 고기를 주로 취급한다는 소문이었다.
 다시 말해 마약을 유통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요. 레드문 부회장이 바로 강승홉니다.
 “레드문 회장이 얼마 전에 붙잡혔다고 들었는데요.”
 -회장은 바지였어요. 강승호가 실질적인 넘버원이었던 겁니다.
 CHT도 명색이 헌터 범죄자들을 상대하는 경찰조직이다.
 당연히 상대의 신상 명세 정도는 파악한 상태.
 하지만 강승호의 경우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아무리 찾아봐도 헌터 자격시험 이후론 강승호와 관련된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차라리 별거 없는 하바리면 모르겠는데. 감시하던 우리 인원이 셋이나 놈에게 당했어요. 그래서 염치 불구하고 부탁드리는 겁니다.
 3명의 희생자.
 이름은 모른다. 하지만 분명 아는 얼굴일 것이다.
 재난관리본부에 몸담은 이후 CHT 요원들과 마주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니까.
 자연히 정후의 목소리에 감정이 묻어났다.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요. 제가 갖고 있는 자료도 몇 년 전 거라.”
 원래 영입 리스트에 올리면 지속적으로 데이터를 갱신한다.
 하지만 예외는 있다.
 완전히 전력 외라고 판단을 내리면 더는 데이터를 수집하지 않는다.
 하필 강승호가 그런 케이스였다.
 “일단 이거라도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저한테까지 연락하신 걸 보면 많이 급하신 모양이네요.”
 -실은 레드문이 중국 업자들과 거래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는데 그게 당장 오늘입니다.
 정후가 다시 강승호의 자료를 검토했다.
 몇 년 전에 수집한 데이터만 놓고 봐도 충분히 위협적인 상대.
 그동안 성장했을 것까지 감안하면 아무리 CHT라도 희생이 불가피하다.
 더군다나.
 “잠깐만요. 얼마 전부터 백사회와 오성파 감시하느라 CHT 사정이 빡빡하다고 들었는데.”
 -알고 계시는 그대롭니다. 그쪽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라 인원 빼기가 쉽지 않아요.
 헌터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준법정신 투철하게 살진 않는다.
 탈세는 애교 수준.
 일반인을 대상으로 각종 범죄를 일으키는가 하면.
 H바이러스에 감염된 육류 유통이나 몬스터를 이용한 불법 도박처럼, 강력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CHT가 바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방금 보낸 자료는 확인하셨습니까?”
 -······엄청나네요. 어쩐지 단기간에 조직을 그만큼이나 키워냈다 싶더라니.
 “CHT의 능력은 인정합니다만. 인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강승호를 상대하긴 쉽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거래하는 중국 업자들도 경호원들을 데려올 텐데.”
 -어쩌겠습니까. 그게 우리 일인데요. 그리고 이번 기회 놓치면 언제 다시 기회가 올지 모릅니다. 이미 강승호도 경찰이 쫓는다는 사실 알기 때문에 크게 한탕하고 잠적하려는 거고요.
 안다. 알기에 말릴 수가 없다.
 “작전은 언젠가요?”
 -인천항 부두 인근 창고에서 오후 11시입니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알아보고 자료 얻으면 그전에 보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역시 연락드리기를 잘했네요.
 전화를 끊은 정후는 조용히 강승호의 자료를 응시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실력만 놓고 보면 알파팀에 합류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당시에 영입을 포기한 것은 팀워크 때문.
 장비에 아무 재료나 집어넣으면 엉망이 되듯이.
 팀워크를 갖추지 못한 팀원은 오히려 팀에 해가 될 뿐이다.
 지금도 그 판단이 틀렸다곤 생각하지 않지만,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시동을 켜며 세강 연구소 부소장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때 무리를 해서라도 영입했다면 강승호의 삶은 달라졌을까?
 
 * * *
 
 쏴아아-
 인천 하늘 위로 겨울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올해는 예년보다 기온이 올라가면서 눈을 보기 힘들어졌다.
 “나쁘지 않아.”
 창고 건물 지붕 위로 쏟아지는 빗물을 바라보며 강승호는 연초를 꺼냈다.
 옆의 부하가 라이터로 불을 붙여준다.
 치이익-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평범한 담배가 아니다.
 아귀풀이라는 식물형 몬스터에서 추출한 각성제 성분을 넣은 연초.
 가라앉았던 텐션이 순식간에 올라간다.
 동시에 선명해지는 시야. 또렷해진 감각.
 “역시 좋군.”
 이러니까 헌터를 그만둔 거다.
 헌터가 아무리 대접받는 세상이라고는 하나 자유와는 거리가 멀었기에.
 마음대로 마약하고 살인하고 강간하고.
 얼마나 좋은가.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삶이란.
 연초를 마저 태운 강승호가 꽁초를 빗속에 집어 던지며 물었다.
 “짱깨 새끼들은?”
 때마침 빗줄기를 뚫고 검은 세단들이 비추는 불빛이 보였다.
 “가자. 오늘 한탕 하고 당분간 여길 뜨는 거다.”
 자신만만하게 걸어가는 강승호의 머리 위로 부하들이 우산을 받쳤다.
 거래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중국 업자들은 레드문의 물건에 만족했고 약속한 돈을 건넸다.
 하지만 마지막마저 순탄하진 않았다.
 위이잉-
 사이렌이 울리며 CHT 장갑차들이 창고 주변을 에워쌌다.
 “이런 X발! 끝까지!”
 설상가상으로 중국 업자가 고용한 경호원들이 강승호의 부하들을 급습했다.
 예정된 배신이었을까.
 아니면 함정에 빠뜨린 것에 대한 응징일까.
 어느 쪽이든 강승호에겐 최악이었다.
 “형님! 피하셔야 합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거래까지 무산된 이상 더는 이곳에 머물 이유가 없다.
 파파파팟!
 강승호는 가속을 사용해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특정 좌표로 이동하는 공간 이동은 비효율적이다.
 혹시라도 그곳에 적들이 대기하고 있으면 아주 난감해진다.
 오러를 극도로 소모한 상태에서 전면전은 불리할 수밖에 없으니까.
 강승호의 판단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무것도.
 쏴아아-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 속에 낯선 그림자가 보였다.
 상대도 강승호를 발견했는지 쓰고 있던 우산을 들어 올렸다.
 하필 이곳에서 마주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정후는 강승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강승호 씨.”
 
 * * *
 
 아귀풀에서 추출한 각성제 효과는 탁월했다.
 덕분에 정후를 보자마자 강승호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기다린 것.
 정후의 정체가 어느 정도 머릿속에 그려진다.
 어느새 뒤로 감춘 왼손엔 오러가 감겼다.
 “짭새는 아니겠고.”
 CHT 요원이라면 굳이 사복 차림으로 혼자 대기할 이유가 없다.
 “누가 보냈지?”
 찰박찰박.
 말하는 도중에도 강승호는 자연스럽게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CHT 요원들이 뒤를 쫓고 있을 것이다.
 빠르게 목만 베어버리고 여길 뜨는 거다.
 “뭐, 나한테 원한 있는 놈이 청부업자라도 고용한 모양인데. 그런 놈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청부를 받고 살인을 저지르는 헌터.
 강승호가 떠올린 정후의 이미지였다.
 어느새 정후 바로 앞까지 다다른 강승호가 오른팔을 내질렀다.
 쉭!
 매서운 잽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페이크.
 진짜는 오러가 감긴 왼손이다.
 하지만 정후는 잽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뭐지? 속임수인 걸 알아차렸나?’
 의문도 잠시.
 강승호의 표정에 확신이 담겼다.
 어차피 대비해도 이건 못 막는다.
 뻗었던 오른팔을 거둬들인 강승호가 돌아 나온 왼손으로 일격을 날렸다.
 파아앙!
 공간의 한 점을 정확히 타격하자 동심원 형태로 충격이 일파만파 퍼져나간다.
 급기야.
 정후 뒤편 벽에까지 충격이 전해졌다.
 쩌저저적!
 거미줄처럼 금이 가더니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시멘트벽.
 누가 봤다면 당장 스마트폰을 꺼내SNS에 올렸을 법한 광경이건만.
 강승호는 전혀 만족스럽지 않았다.
 정작 정후는 멀쩡했기 때문.
 심지어 여전히 우산까지 쓰고 있었다.
 ‘설마 빗나간 건가?’
 “빗나간 거 아니에요. 내가 피한 거지. 그나저나 강승호 씨.”
 정후가 무너진 벽을 돌아보며 말했다.
 “왜 이렇게 망가졌어요?”
 진지한 말투였지만 강승호에겐 비웃음으로 들렸다.
 게다가 등까지 보여?
 “이런 건방진 새끼가!”
 분노한 강승호가 정후에게 달려들며 연달아 공격을 퍼부었다.
 흥분한 것처럼 보였지만 강승호는 어느 때보다 냉철했다.
 왼쪽 상단에 두 번 잽을 날리고 이어지는 하단 차기.
 이후 거리를 파고들어 정후를 붙들고 복부에 무릎을 꽂아 넣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두 번의 잽은 일부러 합이라도 맞춘 것처럼 빗나갔으며.
 하단 차기는 허공을 갈랐다.
 강승호의 생각대로 펼쳐진 장면은 서로의 거리가 좁혀진 것뿐.
 그마저도 거리를 좁혀온 것은 정후였다.
 “······!”
 너무나도 빠른 접근에 강승호가 반응 못 하고 굳은 순간.
 쉬익!
 얼굴 옆으로 주먹이 스치고 지나갔다.
 거의 동시에 들려오는 파열음!
 꽈아아아앙!
 그래선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강승호의 고개가 본능적으로 뒤로 돌아갔다.
 등 뒤에 펼쳐진 건 폐허 더미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거기엔 분명히 4층짜리 폐건물이 있었을 텐데.
 “난 솔직히 강승호 씨가 이 정도까진 성장했을 줄 알았거든요.”
 그제야 강승호는 깨달았다.
 위력만 다를 뿐이지, 정후와 자신이 사용한 스킬은 결국 같다는 것을.
 발경(發勁)의 원리를 응용한 스킬 ‘충격파’를 저토록 완벽하게 재현하다니.
 입고 있는 속옷을 눈앞에서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뭐냐. 너 뭐하는 새끼야, 대체!”
 강승호의 의문 따윈 아랑곳없다는 듯, 정후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 혹시나 착각할까 봐 말해두는데, 넌 피한 거 아니야. 내가 일부러 빗나가게 한 거지.”
 “······!”
 그게 결정타였다.
 지금까지 도주를 위해 힘을 아껴둔 강승호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전력을 다해 눈앞의 정후를 죽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팟!
 순식간에 정후 앞에 도달한 강승호가 오러가 담긴 주먹을 미친 듯이 휘둘렀다.
 한 방, 단 한 방이면 저 낯짝을 뭉개버릴 텐데.
 강승호의 주먹은 매번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속도를 높여도 결과는 마찬가지.
 오냐. 어디 이것도 피해 봐라!
 남은 오러를 밑바닥까지 쥐어 짜낸 강승호가 필살의 일격을 날렸다.
 후우우욱!
 빗줄기를 뚫고 공기마저 짓이기며 날아가는 주먹.
 하지만 이번에도 딱 1센티가 모자랐다.
 사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피해선 충격에 휘말려야 하건만.
 이상하게도 정후는 멀쩡했다.
 애꿎은 바닥만 포탄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움푹 파였을 뿐이다.
 “하아······ 하아······.”
 결국 모든 기력을 소진한 강승호가 팔을 떨어뜨린 채로 입에서 허연 김을 뿜어냈다.
 “X발! 대체 뭐냐고!”
 고함을 내지른 강승호가 대(大)자로 바닥에 나자빠졌다.
 이젠 손을 들어 눈과 입에 쏟아지는 빗물을 막아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저벅.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정후가 강승호를 내려다봤다.
 우산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이 툭 하고 강승호의 뺨을 때렸다.
 살면서 맞은 것 중, 제일 기분 나쁜 빗방울이었다.
 물론 이제 욕할 기운도 없는 강승호다.
 “뭐였냐. 유령은 아닐 테고. 설마······ 전부 보고 피한 거냐?”
 강승호의 추측은 옳았다.
 정후는 여왕을 상대할 때처럼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강승호의 공격을 피해냈다.
 움직임을 훤히 들여다보는 동체 시력, 거기에 상대보다 훨씬 빠른 속도를 갖춰야 가능한 일.
 압도적인 실력 차이에 독종으로 소문난 강승호마저 백기를 들었다.
 “죽일 거면 빨리 죽여라. 시간 없으니까.”
 실제로 사이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후는 강승호를 죽이는 대신 얇은 파일을 꺼내 들었다.
 경찰을 통해 입수한 강승호의 범죄기록.
 “6건의 살인. 8건의 살인교사. 17건의 강간. 마약 유통 및 불법 도박, 대출 사기. 밝혀지지 않은 건까지 합치면 훨씬 많겠지.”
 빗줄기가 더욱 거세지고 있음에도 정후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렸다.
 “대단해. 나쁜 의미로 역대급이야.”
 이토록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고도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강승호의 전투력이 그만큼 뛰어나단 뜻이다.
 게다가 뻔뻔하기까지.
 “어쩌라고. 그래 봐야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자포자기 상태로 받아치던 강승호는 문득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다.
 정후가 압도적인 실력을 가진 것은 맞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행동으로 미루어 청부업자는 아니었다.
 킬러였다면 진작 죽였을 테니까.
 어쩌면······.
 희망이 생긴 강승호다.
 “왜? 막상 죽이라니까 못 죽이겠냐?”
 질퍽거리는 바닥을 짚고 힘겹게 몸을 일으킨다.
 “하긴 사람 죽이는 것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거든.”
 목소리에 묻어나는 은근한 자부심.
 사이렌 소리에 이어 사방에서 불빛이 나타났다.
 지금처럼 경찰이 반가운 순간이 있었을까.
 “잘 있어라. 개새끼야. ······오늘 이겼다고 너무 건방 떨진 말고. 한 10년 썩다가 광복절 특사로 나오면, 하아, 네 가족부터 전부 찾아내 죽일 거니까.”
 너무 자극했나 싶었지만 여전히 정후는 반응이 없었다.
 정말 생각이 있었다면 벌써 찢어 죽였을 텐데.
 “병신 새끼. 평생 법이나 지키고 살아. 호구처럼.”
 뒤늦게 들려온 대답.
 “그럼. 법은 지키고 살아야지.”
 순간 움찔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어느새 공터를 비추기 시작하는 불빛.
 경찰이 바로 코앞까지 들이닥친 것이다.
 강승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찰나.
 정후가 입을 열었다.
 “강승호. 1993년 6월 27일 인천 출생.”
 “새끼, 울 엄마도 모르는 내 생일을 알고 있네. 왜? 사식으로 케이크라도 넣어주게?”
 농담까지 할 정도로 여유가 생긴 강승호다.
 물론 정후는 담담하게 선고를 이어나갈 뿐.
 “금일 자정, 심장마비로 사망.”
 “뭐 하자는 거냐? 네가 무슨 저승사자라도 돼? 아니면 그 만화 뭐냐, 데스노튼지 뭔지······ 컥!”
 갑자기 강승호가 가슴을 더듬었다.
 가슴 언저리가 뻐근해지고 숨이 막혀오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입에 손가락을 넣어 기도를 확보하려는 강승호.
 발악이 무색하게 정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혹시 이런 생각해 봤어? 남의 오러가 네 몸속을 헤집고 다닌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정후는 우산을 접어 물기를 툭툭 털었다.
 어느새 비는 멎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봐. 빨리. 5초 남았다.”
 째깍째깍.
 방금까진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손목시계 초침 움직이는 소리가 귓가에 쿵쿵 울렸다.
 5, 4, 3······.
 설마 이놈, 오러로 심장과 통하는 혈관을 모조리 막아버린 건가?
 그게 가능해?
 하긴 이제 와서 원인이 뭐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강승호는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소설이나 영화처럼 기억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침내.
 툭.
 강승호의 팔이 바닥에 떨어졌다.
 의식이 끊긴 귓속으로 정후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강승호 씨, 사망하셨습니다.”
 바로 그때.
 번쩍!
 한발 늦게 현장에 도착한 CHT 요원들이 라이트를 비췄다.
 “손들고 뒤돌아!”
 “부대장님, 저에요. 이정훕니다.”
 그제야 정후의 얼굴을 알아본 CHT 부대장이 헬멧을 올렸다.
 “팀장님?”
 부대장의 시선이 바닥에 쓰러진 강승호에게 머물렀다.
 “설마······ 강승호입니까?”
 끄덕.
 “확인해 봐! 어서!”
 CHT 요원들이 경계 태세를 유지하며 강승호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미 강승호가 죽었다는 것을.
 “강승호 맞습니다. 그런데······.”
 “뭔데 그래.”
 “심장이 뛰지 않습니다.”
 잠시 정후를 쳐다봤던 부대장이 지시를 내렸다.
 “구급차 불러! 응급조치 실시하고!”
 요원들이 현장을 수습하는 동안 부대장은 무너진 건물을 바라보았다.
 정후와 강승호의 격돌.
 그 결과물이리라.
 “공적은 필요 없습니다. CHT에서 잡았다고 보고하십시오. 어차피 제 관할도 아니고.”
 정후가 들것에 실려 나가는 강승호의 시체를 가리켰다.
 “사망 원인은 심장마비로 나올 겁니다. 혹시 걱정하실까 봐.”
 강승호가 마약에 찌들어 살았다고는 하나.
 느닷없이 심장마비로 죽었을 리는 없다.
 정후가 처리한 거겠지.
 그럼에도 부대장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천벌 받았군요. 그나저나······.”
 부대장의 시선이 정후 손에 들린 파일에 머물렀다.
 “여기까지 직접 오신 이유가?”
 “전화로도 말씀드렸다시피 몇 년 전에 강승호를 영입 리스트에 올려놨었습니다. 사실 그때부터 이미 싹수가 노랗긴 했는데, 영입 불가 결정만 내리고 그냥 넘어갔어요. 어쩌면 미련 같은 게 남았던 건지도 모르죠.”
 정후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가 갠 밤하늘은 드문드문 별까지 보일 정도로 깨끗했다.
 “사실 부대장님 연락받고 이런 생각을 했어요. 만일 그때 내가 강승호를 무리해서라도 영입했다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
 “결론은 내리셨습니까?”
 정후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이렇게 됐을 겁니다. 사람의 본성이란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요.”
 공터를 걷던 정후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한없이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부대장님, 그······ 순직한 요원들, 장례식은 끝났습니까?”
 “예, 나흘 전에 발인하고 합동으로 장례 치렀습니다.”
 “앞으론 그런 일이 없어야겠지만······ 혹시라도 생기면 저도 불러주십시오. 마지막 가는 길, 작별 인사라도 해주고 싶어서요. 소속은 달라도 같은 나랏밥 먹는 처지 아닙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목례로 답하고는 멀어져가는 정후의 뒷모습을.
 CHT 부대장은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몇 년 전 강승호를 영입 리스트에 올려놨다는 이유만으로, 이 늦은 밤에 인천까지 달려왔다고?
 그럴 리가.
 통화 중에 잠깐 언급한 요원들의 죽음 때문일 게 분명하다.
 얼굴만 몇 번 보았을 뿐인, 이름조차 모르는 그들의 복수를 위해 달려와 준 것이다.
 그 진심을 알기에, CHT 부대장은 정후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정중히 경례했다.
 경의를 담아.
 
 * * *
 
 이튿날 출근하자마자 이자성에게 시달리는 정후였다.
 “형, 그거 알아? 이번 주 내내 지각인 거?”
 “오늘은 좀 봐주라. 어제 진짜 힘들었어.”
 “어제 오후 되자마자 퇴근하신 분이 할 말씀은 아닌 거 같은데.”
 “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내가 일을 안 하는 건 아니란다.”
 “내 눈에 보인다고 형이 일을 하는 것도 아니지.”
 “하아. 너, 진짜 내 동생이었으면 매일 두들겨 맞아서 치아 하나도 안 남았을 거야.”
 “귀엽다고 하도 쓰다듬어서 머리카락이 남아나지 않았겠지.”
 “······.”
 더 이상 상대하기 싫어진 정후는 컴퓨터 전원을 켰다.
 메일을 확인하는데, 옆에서 훔쳐보던 이자성이 눈을 번뜩였다.
 “제이? 누군데? 이 여자?”
 어떻게 들었는지, 순식간에 팀장실로 달려온 천이설이었다.
 “팀장님! 당장 기자회견 열고 해명하세요.”
 “······천이설 씨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고요.”
 “그럼 메일 봐도 되나요?”
 “당연히 안 되죠.”
 딸칵.
 곧바로 메일함을 닫아버리는 정후였다.
 천이설이 혀를 살짝 내밀었다.
 “너무 하신다. 우리 사이에 비밀이라뇨. ······그런데 진짜 누구예요? 제이? 외국 사람인가?”
 장난기가 발동한 이자성이다.
 “정후 형을 너무 모르네. 딱 보면 몰라? 제이! 알파벳이잖아. 만나는 여자가 하도 많아서 이름 기억하기 피곤하니까, A부터 Z까지 알파벳으로 부르는 거지.”
 “헐! 팀장님 진짜 그렇게 안 봤는데. 그럼 전 뭐예요? 이름 이니셜 따서 C? 아니면······.”
 천이설이 은근히 가슴을 강조했다.
 “가슴 사이즈 따라 D는 아니겠죠? 그럼 너무 부끄러운데.”
 “어차피 뽕이잖아?”
 이자성의 도발에 스윽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피식 웃는 천이설이다.
 “그러지 말고 너도 뭐라도 채워 넣으렴. 누나가 안쓰러워서 그래.”
 발끈하는 이자성을 보고 정후가 머리를 움켜쥐었다.
 “제발 나가요. 둘 다.”
 이자성과 천이설이 티격태격하며 팀장실을 나가자 비서가 싱긋 웃었다.
 “오늘도 변함없이 활기찬 시작이네요.”
 “그래 보여요? 진심으로?”
 정후는 생수를 따라 벌컥벌컥 들이켰다.
 “누군 속이 이렇게 타는데.”
 정후를 빤히 쳐다보던 비서가 불쑥 물었다.
 “그런데 진짜 누구예요?”
 “그러게요. 누굴까요. 나도 궁금하네.”
 은근슬쩍 받아넘긴 정후가 모니터를 응시했다.
 ‘생각도 못 했네. 벌써 그렇게 됐구나.’
 세월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빠르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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