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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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명도 1권(1)

2019.08.12 조회 567 추천 2


 시작하면서
 
 
 
 
 이 글은 엉뚱한 주인공이 엉뚱한 사건 속에 뛰어들어 좌충우돌해 가는 이야기입니다.
 무언가 통쾌하면서 유쾌한 그런 인물을 하나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그놈 스스로 점점 엉뚱한 인간으로 진화해 가는 느낌이 들더군요.
 어쨌거나 무협적인 코드에 충실하려고 애썼으며, 재미와 유쾌함을 기본으로 삼고 거기에 통쾌함을 덧붙여 보고자 하는 의도로 시작했습니다.
 좌충우돌하다가 뜻하지 아니한 횡재도 하고 횡액도 겪고 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어려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중 누군가의 모습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긴, 무협이든 판타지든 순문학이든, 소설이라는 건 배경과 공간과 시간을 초월해서 이 시대의 정서와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겠지요.
 이 글의 배경은 가상이고 공간도 가상이며 시대와 등장인물들도 철저하게 허구이지만, 소설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상 이 글 역시 현재의 시점을 반영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혹자는 이 글 속에서 풍자를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고, 혹자는 시대적인 비극이나 아이러니를 읽어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상징을 잡아낼 수 있는 무서운 독자 분도 계실 줄 압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읽지 못하고 그냥 스토리만 따라가는 독자도 있겠지요.
 어떤 분은 재미있다고 할 것이고, 어떤 분은 재미없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독자에게 글을 보이는 작가의 입장에서는 그 어떤 분이 더 소중하고 덜 소중하고 하지 않습니다.
 일단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 모두가 소중한 사람들이랍니다.
 그분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자판을 두드리겠습니다.
 지켜봐 주시기를······.
 
 매미 소리 귀 따가운 한여름 낮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시작하는 인사를 드립니다.
 
 
 
 
 
 <발문>
 
 무림맹주가 납치당했다.
 
 
 
 
 
 제1장 풍운조의 신화
 
 
 
 
 
 
 
 
 
 
 
 
 
 
 절대무제(絶對武帝) 적무광(赤武光).
 그는 강호의 절대자로 군림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무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의 유천신공(遊天神功)으로 무림을 제패한 지 이십 년이 지났고, 천하제일인으로 불린 지도 이십 년이 지났다.
 그런 그가 패천마련(覇天魔聯)에 납치당했다.
 무림맹이 생긴 이래 그런 일이 있은 적이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헛소문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사상 초유의 그 사태에 무림맹은 할 말을 잃었다.
 이때라는 듯 패천마련의 대공세가 시작되었고, 맹주가 없는 무림맹은 전력의 오 할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사방에서 밀리고 밀려 절강성 안탕산 기슭으로 쫓겨나 웅크리니, 천하가 사마(邪魔)의 연합 세력인 패천마련의 수중에 떨어질 날이 멀지 않아 보였다.
 무림맹이 겨우 수비하고 있는 절강과 복건도 날이 갈수록 위태로워졌던 것이다.
 
 * * *
 
 대전 안에 무거운 적막이 감돌았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유등의 불길이 풍전등화라는 말을 실감나게 한다.
 평소에는 이십여 개의 유등에 일제히 불을 밝혔는데, 오늘은 고작 두 개에 불이 붙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넓은 대전 안은 밤이나 다름없는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급히 선출한 새 무림맹주.
 남천검왕(南天劍王) 사자성(史紫星)이 그 음침한 어둠 속에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의 명성은 천하를 떨쳐 울리기에 부족하지 않지만, 납치당한 무림맹주 적무광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누구나 그걸 알았고, 본인도 인정하기에 무림맹의 장악력이 떨어졌다.
 그러자 결속력이 약해졌고, 사자성은 효과적으로 무림맹의 전력을 운용할 수 없었다.
 남천검왕 사자성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다는 걸 느꼈다.
 게다가 시간이 촉박했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자기 대에서 무림맹이 멸망해 버리는 일만은 막아야 한다고 거듭 생각했다.
 정파 무림을 위해서, 또한 자신과 가문을 위해서도 그렇다.
 그렇지 않으면 제 이름 석 자가 씻을 수 없는 치욕이 되어 후대에까지 전해지지 않겠는가.
 그게 두려워 한사코 맹주 위를 사양했지만 십이 장로의 집요한 설득을 끝내 뿌리치지 못했다.
 그 결과 지금 그는 이렇게 텅 빈 대전에 홀로 앉아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것이다.
 “으으음.”
 깊은 침음성이 낮게 흘렀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안다는 듯 유등의 불꽃이 금방이라도 꺼질 듯 마구 흔들린다.
 
 그그그긍―
 두터운 철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리고 한 사람이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당당한 체구에 불굴의 기세가 느껴진다.
 이글거리는 눈이 어둠을 뚫고 곧장 쏘아져 왔다.
 맹주는 순간적으로 한 마리의 야수가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받았다.
 저벅저벅―
 바닥에 깔려 있는 흑오석을 거침없이 밟으며 다가오는 자.
 그를 지그시 바라보는 남천검왕 사자성의 심경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장팔봉······. 얼마 전까지 풍운조의 조장이었다지?’
 이름이 촌스러운 자라는 생각에 마음 한편에 불안이 깃든다.
 무림맹의 수많은 영재들을 젖혀두고 열두 장로가 굳이 저놈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새롭게 들었다.
 ‘과연 저놈이 제대로 해줄까?’
 하지만 더 이상 대상을 물색하고 있을 여유가 없는 지금으로서는 그가 해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뿐이었다.
 무림맹주.
 이 시대가 배출한 두 번째 절대자.
 남천검왕 사자성이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기 위해 볼을 씰룩였다.
 
 * * *
 
 이십여 일 전의 일이다.
 
 풍운조(風雲組)가 있다.
 무림맹의 전위 조직인 풍운당(風雲堂) 소속인데, 풍운당 내에서도 최전방에 나서서 활동하는 조였다.
 열 명의 조원들이 있지만 한 번 적과의 싸움이 있을 때마다 살아 돌아오는 자는 한두 명에 불과했다.
 그래도 매번 새로운 인물로 곧 채워졌는데, 지금은 사정이 그렇지 않았다.
 “개자식들.”
 빠드득 이를 갈며 어둠 속에 납작 엎드려 있는 자는 체구가 크고 강단있게 생긴 사내였다.
 아니, 얼굴은 물론 온몸에 독기를 서리서리 감고 있는 살벌한 자다.
 풍운조의 조장인 장팔봉이었다.
 패천마련과의 전쟁이 시작된 뒤 벌써 열다섯 번이나 바뀐 조장이기도 했는데, 그는 앞서의 조장들과는 다른 데가 있었다.
 다섯 번의 척후 임무를 마쳤고, 열여덟 번의 매복 임무를 수행했지만 여전히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지난번의 치열했던 싸움에서 열 명의 조원은 모두 죽었다.
 얼마 전에 새 조원을 충원받았는데, 고작 여섯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중 어제의 매복 작전에서 두 명이 죽었다.
 나머지 네 명의 목숨도 오늘 밤까지일 것이다.
 “개자식들!”
 장팔봉이 다시 낮게 으르렁거렸다.
 풍운당의 당주 이하 각 타주들을 싸잡아 욕하는 것이다. 가슴속에 그들에 대한 증오심이 이글거린다.
 열 명도 부족한데 고작 여섯 명만 충원해 준 데 대한 불만이었고, 그 여섯 명도 전투 경험이라고는 전혀 없는 새파란 신출내기들이라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저희들은 한 번도 이런 지옥 같은 곳에 와보지 않으면서 주둥이는 살아서 늘 호통만 쳐대지. 당주 이하 다섯 타주만으로 매복조를 만들어서 사흘 밤낮을 엎드려 있게 해보고 싶다. 하루도 견디지 못하고 죄다 달아나 버릴걸? 아니면 죄다 뒈져 버리겠지. 흥, 그런 것들은 다 뒈져 버리는 게 무림맹을 위한 길이야.”
 “저기, 조장님······.”
 “뭐야?”
 “우리 지금 매복 중인데요?”
 “그래서 어쨌다고?”
 “저기, 음성이··· 조금······.”
 신참의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매복조는 숨소리마저 죽이고 엎드려 있어야 한다고 교육받았는데, 조장이라는 자가 계속 중얼거리고 있으니 불안한 것이다.
 게다가 분해서 씩씩거리며 음성마저 조금씩 높아지고 있지 않은가.
 “왜? 발각될까 봐 두려우냐?”
 “그게 아니라······.”
 “잘 봐. 바로 저기에 놈들의 척후가 숨어 있다. 보여? 벌써 들통이 난 거야, 이놈아.”
 “예?”
 신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잔뜩 위축되어서 두리번거리는 것이 영락없이 겁먹은 토끼다.
 장팔봉이 혀를 찼다.
 “쯧쯧, 이런 한심한 놈 같으니······.”
 아무리 눈에 힘을 주고 살펴봐도 신참의 눈에는 어둠과 적막만 가득할 뿐 수상한 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마저 멎어서 나뭇가지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저를 놀린 거로군요. 아무것도 없는데 괜히 겁주지 마세요.”
 “그래? 그럼 내가 보여주지.”
 장팔봉이 칼을 놓더니 큼직한 돌멩이 한 개를 집어 들었다.
 자기가 가리켰던 어둠을 향해 힘껏 던진다.
 잠잠하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신참의 눈이 더욱 커졌다. 비로소 느낀 것이다.
 땅에 떨어지는 소리도, 무엇에 부딪치는 소리도 나지 않는다는 건 곧 누군가가 있어서 그것을 받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의 반응이 이내 왔다. 맹렬한 것이었다.
 “우와아!”
 갑자기 숨 막히던 적막을 찢어놓는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시커먼 그림자들이 쏟아져 온다.
 “저, 저, 적!”
 신참이 놀람으로 턱을 떨 때, 장팔봉은 숫자를 세고 있었다.
 “···넷, 다섯··· 여섯 놈이군.”
 그들이 스무 걸음 앞까지 밀려왔다.
 장팔봉이 매복해 있는 곳은 낮은 언덕 위였다. 그곳에 구덩이를 파놓고 들어앉아 있었던 것이다.
 놈들의 달려 올라오는 속도가 조금 느려진다.
 “가자!”
 그때를 기다렸던 듯 장팔봉이 버럭 외치며 칼을 쥐고 구덩이에서 뛰어나갔다.
 “끼요옷!”
 몸을 일으키자마자 언덕에 우뚝 올라서서 기괴하게 외치더니 힘껏 도약한다.
 쾅!
 열 걸음을 단번에 뛰어 건넌 그의 칼이 앞섰던 놈의 정수리를 쪼개 버렸다.
 그리고 그는 미쳤다.
 “끼야아―”
 여전히 굉렬한 소리를 질러대며 미친 듯 좌우로 휩쓸어가는데, 칼 빛이 번쩍이는 곳마다 단갑이 쩍쩍 벌어지고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으아악!”
 적의 비명 소리가 그 뒤를 따라 쏟아진다.
 순식간에 네 놈이 장팔봉의 칼에 맞아 죽거나 운신 불능의 중상을 입고 나뒹굴었다.
 비로소 용기가 살아난 신참들이 그 뒤의 공격에 가세하자 싸움은 두어 번 숨을 쉬는 사이에 결판이 나고 말았다.
 “으아아!”
 두 번째 싸움에서 보기 좋게 승리하고 전과를 올린 신참들이 함성을 질러댔다. 흥분이 곧 사기가 되어 하늘을 찌를 듯 솟구친 것이다.
 “병신들.”
 장팔봉이 그런 신참들을 흘겨보며 발아래 퉤, 하고 침을 뱉었다.
 
 “예? 여기를 버린단 말인가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길목이고 요충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조금 전까지는 그랬지.”
 “그럼······.”
 “병신아, 너는 설마 방금 우리가 죽인 여섯 놈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또 있다는 겁니까?”
 신참의 얼굴에 다시 두려움이 서렸다.
 조장인 장팔봉이 겨우 제 이름 석 자나 쓸 줄 알고 읽을 줄 아는 무식쟁이라는 건 익히 들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누구도 갖지 못한 장점이 있었는데,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정확하게 판단하고 결단한다는 거였다.
 수많은 싸움을 치르는 동안 스스로 깨우치게 된 지혜이면서 산지식이다.
 그러므로 장팔봉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살아남을 확률이 그 어떤 조보다 높다는 걸 신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장팔봉이야말로 그들에게 신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장팔봉에게는 그런 신참들이 지겨운 짐이기만 했다.
 ‘대체 이런 것들을 데리고 얼마나 더 싸워야 한다는 거야? 이것들이 언제 제 구실을 하겠어?’
 신참들을 둘러보는 장팔봉의 얼굴에 한심해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그러면서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이놈들이 하나라도 더 배우고, 그래야 하루라도 더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그놈들이 들이닥치면 우리는 모두 죽고 말 거다. 그전에 도망쳐야겠지?”
 “······.”
 “그리고 이곳은 이미 노출되었으니 더 이상 요충지가 아니다. 쓸데없이 여기서 개죽음당할 필요 없겠지?”
 신참들이 비로소 이해했다는 얼굴로 일제히 머리를 끄덕였다.
 장팔봉은 거듭 한심하기만 했다.
 쩝, 하고 쓴 입맛을 다신 장팔봉이 되도록 친절한 얼굴을 하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놈들은 척후에 불과해. 그것도 첨병이지. 지금쯤 척후대가 비명 소리를 듣고 이리 달려오고 있을 것이다. 첨병만 여섯 명을 운용한 걸로 보아 척후대는 서른 명쯤 될걸?”
 그런 말까지 친절하게 해줘야 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이건 뭐, 애들을 돌보는 보모도 아니고··· 참 나.’
 “헉!”
 장팔봉의 설명을 들은 신참들의 얼굴에 공포의 기색이 역력하게 떠올랐다.
 ‘쯧쯧, 한심한 것들.’
 장팔봉은 속으로 혀를 찼다.
 서른 명쯤은 나 혼자서도 해치워 버리겠다는 오기가 없고서는 하루도 살아남기 힘든 상황이다.
 하지만 신참들은 제 살 궁리를 하기에만 급급했지 적을 죽여야 나에게 살 길이 생긴다는 걸 눈곱만큼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자.”
 장팔봉이 지난 이틀 동안 뿌리내린 바위처럼 지키고 있던 언덕을 미련없이 버리고 재빨리 이동하기 시작했다.
 
 어둠 속이라 어디가 어디인지도 분간할 수 없다.
 희미한 달빛에 의지해서 신참들은 죽어라고 장팔봉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았다가는 그를 놓치게 될 거라는 두려움에 다른 생각을 할 정신이 없는 것이다.
 장팔봉이 몸을 낮추면 신참들도 그렇게 했고, 그가 박박 기면 신참들도 그렇게 했으며,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조금씩 천천히 전진하면 신참들도 그렇게 했다.
 왜 그래야 하는 건지 의아해하기보다 그를 따라 해야만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컸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그는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신이니까.
 그래서 그들은 한 마리의 뱀처럼 되었다.
 숨소리마저 최대한 억제한 채 엎드려서 배로 땅을 스치듯 하며 소리없이 나아간다.
 앞섰던 장팔봉이 한 손을 들어 올리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신참들이 즉시 움직임을 멈추고 납작 엎드린다.
 장팔봉이 다시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고서야 그들은 저희들이 어디로 왔는지 알았다.
 ‘왜······?’
 일제히 이해할 수 없다는 눈길을 장팔봉에게 보낸다.
 저쪽, 어둠 속에 둥그렇게 솟아 보이는 곳.
 그곳은 자신들이 버리고 떠났던 바로 그 매복지가 아닌가.
 어둠 속을 멀리 한 바퀴 맴돌아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럴 거면 무엇 때문에 이 고생을 했나 싶은 불만이 싹튼다.
 곁에 있던 신참이 장팔봉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니, 다시 저리로 가는 겁니까?”
 “저곳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요충지야. 길목이란 말이다. 그걸 버리면 되겠어?”
 “아까는 이미 노출되었으니 이제 필요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병신아, 아까는 그랬고 지금은 다시 필요하단 말이다. 이해가 가냐?”
 “······.”
 ‘이런 놈들을 데리고 매복조가 되어 최일선에 나섰으니 나도 참 한심한 놈이지.’
 그런 진심까지 말해줄 필요는 없다.
 장팔봉이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이듯 말했다.
 “이번 싸움은 찍소리 한마디 새어 나가지 않게 해야 한다. 극히 은밀하고 신속하게 해치워야 하는 거야. 아까처럼 고함을 질러대는 놈은 내가 죽여 버리겠다.”
 ‘왜?’
 바라보는 신참들의 눈길이 하나같이 그런 의문을 담고 있다.
 한숨을 쉰 장팔봉이 다시 속삭였다.
 “소리를 내면 조금 있다가 다가올 본대의 놈들이 우리가 기습했다는 걸 알지 않겠냐? 너희들 같으면 이리로 오려고 하겠어?”
 “본대라고요?”
 한 녀석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했다. 속삭인다고 했지만 놀란 바람에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무섭게 노려보는 장팔봉의 눈길을 받은 그놈이 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
 장팔봉이 즉시 몸을 더욱 낮추고 숨을 죽였다.
 적막이 지루하게 흐른다.
 다행히도 언덕 위의 요충지를 차지하고 있는 놈들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이곳에 매복해 있던 자들이 모두 달아났다고 여기고 방심한 게 틀림없다.
 안심한 장팔봉이 다시 속삭였다.
 “지금쯤 척후조는 본대로 돌아가 이곳의 상황을 보고하고 있을 것이다. 이곳이 정리되었다는 보고를 받으면 본대가 움직일 것 아니겠느냐? 반 시진쯤 뒤에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당도할걸?”
 “그럼 저 위에는······.”
 “많아야 대여섯 놈쯤 남아 있겠지. 확보한 교두보를 지킨답시고 말이다.”
 그 정도라면 해볼 만하다고 여긴 신참들이 눈을 반짝이며 언덕 위를 바라본다.
 “단궁을 쓸까요?”
 한 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들은 모두 두어 뼘 정도 되는 크기의 단궁(短弓)을 지니고 있었는데, 석궁(石弓)을 휴대용으로 개조한 것이다. 한 번에 세 대의 짧은 화살을 쏘아낼 수 있었다.
 근접한 거리에서 기습을 가할 때 매우 유용했고, 위력적이다.
 장팔봉이 고안했고, 신참을 받으면 그들에게 제일 먼저 그것을 만들어 지니게 했다.
 잠깐 생각한 장팔봉이 머리를 가로저었다.
 “안 돼. 정확하게 목줄기를 꿰뚫지 않으면 비명을 지르게 된다.”
 역시 찍소리를 낼 새도 없이 죽이려면 칼이나 검으로 강력한 타격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할 수 있는 한 정수리나 목덜미를 찍어라. 정확하게 심장을 쑤셔 버리든가. 엉뚱한 짓을 해서 놈들에게 비명을 지를 여유를 주는 놈은 내가 죽여 버리겠다. 명심하도록.”
 윽박지른 장팔봉이 앞서 조금씩 기어 나가기 시작했다. 신참들이 제발 제 몫을 잘해주기를 간절히 빈다.
 
 핏!
 장팔봉의 칼날이 벼락처럼 떨어졌다. 웅크리고 있던 놈의 목덜미를 반으로 쪼개며 박혀 버린다.
 그와 거의 동시에 소리도 없이 언덕 위의 매복지로 뛰어든 신참들의 도검도 매서운 바람 소리를 뿌려댔다.
 “억!”
 “크윽!”
 억눌린 낮은 비명 몇 마디가 새어 나온 걸로 순식간에 상황이 끝나 버렸다.
 장팔봉의 예측대로 정확하게 여섯 놈이 남아서 느긋하게 본대를 기다리고 있다가 왜 죽는지도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죽어버린 것이다.
 “좋았어.”
 장팔봉이 처음으로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신참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매끄럽고 깨끗하게 처리해 주었기 때문이다.
 싹수가 보이는 놈들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놈들은 조금만 더 가르치면 제법 많이 살아남겠는걸.’
 그런 기대감이 생기기도 했다.
 
 온다.
 어둠 속에서 꾸물거리며 움직이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다 헤아릴 수가 없다.
 이내 온 숲이 와사삭거리고 저벅거리는 발소리로 가득 찼다.
 “니미럴, 좆 됐다.”
 장팔봉이 찍, 침을 뱉더니 중얼거렸다.
 “백 명도 넘겠는데?”
 신참들의 얼굴이 그 즉시 사색이 되었다.
 “작전을 바꾼다. 여기를 버려야겠어.”
 “또요?”
 “그럼 악착같이 이 빌어먹을 곳을 지키다 죽으리?”
 “······.”
 “하지만 버릴 땐 버리더라도 본때를 보여주긴 해야겠지?”
 “······?”
 “단궁에 살을 올려. 꽉꽉 채워서 실어라.”
 장팔봉이 세 대의 화살을 단궁에 채워 넣고 벌떡 일어섰다.
 그새 놈들의 선봉은 언덕 아래까지 다가와 있었다.
 “끼야아!”
 장팔봉이 다시 괴성을 질러대며 미친 듯 언덕을 달려 내려갔다.
 두려움도 없이 힘껏 도약하여 놈들 속으로 뚝 떨어진다.
 쉿쉿쉿!
 그 즉시 세 대의 화살을 쏘았고, 세 놈이 가슴에 화살을 박은 채 비명을 터뜨리며 나뒹굴었다.
 “끼야아!”
 장팔봉의 괴성이 다시 터져 나왔다. 단궁을 버린 그가 칼을 휘두르기 시작한 것이다.
 뒤따라 달려 내려온 신참들이 가세했고, 그들의 주위에서도 괴성과 함께 적의 비명성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들도 장팔봉이 했던 것처럼 단궁을 쏘아 먼저 적의 기선을 제압하고 도검을 휘두르며 마구 소리치고 있었다.
 순식간에 열댓 놈의 마졸이 죽어나갔다.
 “이쪽이다! 따라와!”
 장팔봉이 다시 한 놈의 머리통을 쪼개고 몸을 틀며 버럭 소리쳤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왼쪽을 향해 달려간다.
 안심하고 행군해 왔던 놈들의 선봉은 갑작스럽고 맹렬한 기습에 우왕좌왕했다. 상대가 몇 명인지도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
 장팔봉이 앞에 있는 놈들을 무조건 찍어 넘기며 기어이 왼쪽을 뚫고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정면으로 치고 들어와 한바탕 휘저어놓고 왼쪽으로 빠져나간 것인데, 어림짐작으로도 스무 놈 넘게 죽여 버렸으니 기습의 전과치고는 상당히 괜찮은 편이었다.
 크게 놀라고 당황한 놈들은 잠시 전진을 멈출 것이다.
 앞에 또 어떤 매복이 있을지 몰라 조심하며 웅크리고 척후를 사방으로 풀어놓을 것이다.
 그들의 보고를 기다리고 전황을 파악하느라 바쁘게 움직이다 보면 날이 밝으리라.
 그러면 야습의 효과는 사라져 버린다.
 장팔봉은 그걸로 제 임무는 넘치도록 했다고 생각했다.
 보상 따위는 바라지 않지만, 당으로 돌아가면 적어도 그 보기 싫은 당주라는 자로부터 욕은 얻어먹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됐지 더 이상 뭘 바라겠어? 제기랄.’
 와사삭거리며 정신없이 숲을 뚫고 달리던 장팔봉이 비로소 멈추어 서서 거친 숨을 헐떡였다.
 뒤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두 명뿐이었다.
 두 명은 기어이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낙오되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빌어먹을!”
 장팔봉이 땅을 굴렀다. 이제부터는 두 명의 신참만을 데리고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살아 있어도 산목숨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풍운당에서 인원을 보충해 주기 전에 다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제2장 그놈의 목은 내 거다
 
 
 
 
 
 
 
 
 
 
 
 
 
 
 “쓸모없는 것들!”
 휙―
 재떨이로 쓰고 있던 놋쇠 항아리가 가볍게 허공을 난다.
 퍽!
 그것이 장막 입구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놈의 면상에 처박혔다.
 피가 튀고 뇌수가 터져 나와 흩어진다.
 어깨 위의 물건을 잃어버린 놈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철퍼덕 쓰러졌다.
 “이 한심한 밥벌레들!”
 쐐애액―
 이번에는 장죽이다.
 그것이 화살처럼 날아갔다.
 퍽!
 또 한 놈의 면상을 꿰뚫고 뒤통수로 반쯤 삐져나온다.
 “끄으으―”
 그놈이 기괴한 신음성을 흘리며 벌러덩 나자빠졌다.
 또 뭐가 없나 두리번거리는 노인의 눈에 핏발이 가득했다. 터져 버릴 것 같다.
 “처, 천주··· 고정하소서.”
 노인의 곁에 서 있던 중년의 사내가 떨리는 음성으로 진언했다. 곁에서 노인을 보좌하는 참모다.
 “이러시면 아랫것들의 사기가 더욱 떨어질 것입니다.”
 “응? 사기?”
 “이럴 때일수록 천주께서 관용을 보이시는 게 사기 진작에 도움이······.”
 퍽!
 던질 걸 찾지 못한 천주 노인의 주먹이 그대로 중년 사내의 면상 속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또 지껄일 놈 없느냐?”
 “······.”
 “없어?”
 “없습니다!”
 퍽!
 큰 소리로 대답했던 놈의 면상에 박혀 버린 건 바람이었다.
 보이지 않고 흔적도 없는 한줄기 지풍(指風)이다.
 천주 노인이 신경질적으로 손가락 한 개를 까딱했을 뿐인데 그것에서 쏘아져 나간 지풍이 그놈의 얼굴에 구멍을 내버렸다.
 바람이 뚫고 들어간 곳의 구멍은 콩알만 한데, 그것이 빠져나온 뒤통수의 구멍은 사발만 했다.
 털썩!
 장막 안에 남아 있던 자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는다. 더 이상 숨도 크게 쉬는 자가 없다.
 “쯧쯧, 정말 한심한 것들뿐이라니까.”
 어느 정도 분풀이가 되었던지 천주 노인의 기세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내가, 대패천파련의 마환천주(魔幻天主)인 이 무심적괴(無心赤怪) 도적성(都赤星)이, 그래, 피라미 같은 것들 몇 명 때문에 이런 치욕을 당해야 되겠어? 그것도 무림맹 총단을 코앞에 둔 이곳에서 말이다.”
 “······.”
 “그래, 안 그래?”
 “······.”
 이제는 나서서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오직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바위처럼 굳어 있을 뿐이다.
 “쯧쯧, 쓸모없는 것들 같으니······.”
 혀를 찬 마환천주 도적성이 손짓을 했다.
 장막의 문이 활짝 열리고 흑의를 입은 음침한 인상의 장한 한 명이 꽁꽁 묶인 청년을 끌고 들어왔다.
 아무 말 없이 대뜸 무릎을 걷어차 꿇린다.
 청년은 풍운조에 속해 있는 자였는데, 지난밤의 싸움에서 사로잡혔다.
 마환천주 도적성을 바라보는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를 끌고 들어온 흑의장한이 도적성에게 깊이 허리를 숙여 보이고 청년의 등 뒤에 섰다.
 마환천주가 청년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무심한 어투로 물었다.
 “이름은?”
 “저, 저, 정필교입니다.”
 “어디 출신이냐?”
 “화, 화산의 삼대제, 제자입니다.”
 “쯧, 화산파의 어린애였구먼.”
 혀를 찬 도적성이 은근한 눈길을 보냈다.
 “그래, 너희 장문이신 천은노선께서는 안녕하시냐?”
 “예?”
 “내가 한때 천은노선과 내기 바둑도 두고 그랬던 사람이니라. 노선이 무심적괴 도적성에 대해서 말하지 않던?”
 “······.”
 “하긴, 너희들 어린것들이 뭘 알겠느냐.”
 포로가 된 청년 정필교의 얼굴에 한 가닥 안도의 기색이 어렸다. 패천마련의 오천주 중 한 명인 눈앞의 대마인이 장문인과 친분이 있는 듯하니 그렇다.
 ‘잘하면 살 수 있겠는데?’
 “그놈 이름이 뭐지?”
 “예?”
 “우리 애들을 박살 내고 다니는 그놈 말이다. 풍운조라고 하던가?”
 “아, 예. 장팔봉이라고 합니다.”
 “음, 장팔봉이란 말이지?”
 도적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름에서 촌티가 팍팍 났기 때문이다. 그런 이름을 가진 놈들치고 변변한 자가 없다.
 “그놈은 사문이 어디냐?”
 “그건 저도 잘······.”
 “몰라?”
 “구대문파 출신이 아닌 건 분명합니다.”
 “그럼 그놈 사부는 누구래?”
 “그것도 잘······.”
 “······.”
 도적성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정필교가 즉시 소리친다.
 “이름 있는 강호의 명숙이 아닌 건 분명합니다!”
 “몇 살이나 먹었대?”
 “말해주지 않아서 모릅니다. 짐작에 한 스물서넛은 된 것 같은데······.”
 “그럼 네가 아는 게 뭐냐?”
 “죄송합니다.”
 “좋다. 그놈이 배운 무공은 뭐지? 어떤 초식을 주로 써?”
 “그게 저기······.”
 “그것도 몰라?”
 “일정한 초식 같은 게 없어서··· 무공이라고 하기에는 그게 조금······.”
 “그래도 우리 애들을 그렇게 박살 내고 다니는 걸 보면 뭔가 비장의 초식이 있을 것 아니겠느냐?”
 “잘 모릅니다.”
 마환천주 도적성이 한심하다는 듯 정필교를 바라보고 그의 등 뒤에 서 있는 흑의장한을 바라보았다.
 이런 놈을 무엇 때문에 잡아왔느냐고 책망하는 것 같다.
 “이건 도대체 아는 거라곤 제 이름밖에 없는 놈 아니냐?”
 “아니, 아닙니다!”
 위기를 느낀 정필교가 고개를 발딱 들고 소리쳤다.
 “풍운조가 다음에는 어디에 매복할지 그 장소를 압니다!”
 도적성이 눈으로 묻는다.
 정필교는 정신이 없었다. 바로 이곳이, 지금 이 순간이 제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극히 중요한 곳이고 때라는 생각에 더욱 절박한 심정이 된다.
 “풍운조는 이틀 뒤에 다시 출동하는데, 이번에는 당태령 너머의 잡목 숲이 될 것입니다! 그곳에 참대로 가려져 있는 언덕이 하나 있는데 거기 매복할 거라고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게 다냐?”
 “예?”
 “풍운조가 전부 몇 놈인지, 언제부터 언제까지 매복할 건지, 주변에 몇 개의 매복조가 함께 포진하는 건지, 그 위치는 어디며 누가 매복조들을 통솔하는 우두머리인지, 뭐, 그런 게 같이 나와줘야 하는 것 아니겠어?”
 “그게··· 그러니까··· 그동안 몇 명이 보충되었는지 몰라서······. 그리고 저는 말단 조원인지라 거기까지는 잘······.”
 “파하―”
 한숨을 내쉰 도적성이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데리고 나가라는 것 같다.
 ‘살았다!’
 정필교의 얼굴에 기쁨이 번졌다.
 그 순간, 그의 등 뒤에 있던 흑의장한의 허리춤에서 번쩍하고 한 가닥 싸늘한 빛이 뻗어 나와 허공을 갈랐다.
 파아―
 정필교의 목이 어깨에서 뚝 떨어져 제 무릎 앞에 뒹굴고, 이내 붉고 뜨거운 선혈이 허공으로 확 뿜어졌다.
 “잘했다. 쓸 만한 솜씨야.”
 도적성의 칭찬에 흑의장한이 깊이 허리를 숙인다. 여전히 말 한마디 없는 자였다.
 “이틀 뒤에 다시 치는데, 이번 선봉은 네가 맡아라.”
 “존명!”
 도적성의 군령에 흑의장한이 크게 복명했다.
 “장팔봉이라는 놈의 목에 현상금을 건다. 누구든 그놈을 생포해 오면 황금 다섯 관을 주겠다. 죽여서 목을 가져오면 세 관을 준다.”
 “아!”
 그 말에 그때까지 복지부동하고 있던 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 하나같이 탐심이 가득하다.
 쯧쯧, 하고 혀를 찬 도적성이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그놈이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인지 매우 보고 싶어진단 말씀이야. 그런 놈이 어떻게 무림맹 따위에 붙어 있는지 몰라? 오히려 내 밑에 있었으면 더 어울렸을 놈 아니겠어?”
 
 * * *
 
 “이건 뭔가 기분이 좋지 않은데? 매우 안 좋아.”
 “저기, 조장님.”
 “뭐.”
 “우리 지금 매복 중이거든요?”
 “그래서 뭐?”
 예상했던 대로 보충은 없었다. 그래서 이제는 두 명뿐인 조원이다. 아껴주고 존중해 줘야 한다.
 이의를 제기한 자는 이가춘(李加春)이었다. 무당파의 속가제자다.
 묵묵히 왼쪽에 엎드려 있던 자, 공동파의 제자인 왕소걸(王小杰)이 속삭이듯 말했다.
 “또 발각되었나요?”
 “언놈이 왔어야 발각되거나 말거나 하지.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다.”
 장팔봉이 이제는 아예 몸을 일으키더니 구덩이 위에 걸터앉았다.
 그와 함께 몇 번의 싸움을 치렀고, 아직 살아 있게 된 이가춘과 왕소걸도 처음과는 달리 대담해져 있었다.
 그들도 일어나더니 장팔봉의 좌우에 걸터앉았다.
 “기분이 영 아니란 말씀이야.”
 “뭐가 말입니까?”
 “낚시해 봤냐?”
 “갑자기 그게 무슨······.”
 “미끼를 던지기 무섭게 피라미들이 아귀처럼 달라붙다가 어느 순간 싹 사라져 버릴 때가 있지.”
 “······.”
 “찌가 말뚝처럼 요동을 하지 않는 거야. 그러면 바보 낚시꾼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긴다.”
 “당연한 거 아닐까요?”
 “천만에. 그건 대어가 오고 있거나 왔다는 증거야. 그놈이 오니까 피라미들이 싹 사라져 버린 거지. 더욱 긴장하고 미끼에 신경을 쓰고 있으면 반드시 팔뚝만 한 놈이 낚인다.”
 “아!”
 “말뚝처럼 움직이지 않던 찌가 한순간 까닥이지도 않고 그대로 쑥 빠져 버리지. 긴장하고 있지 않다가는 고기는커녕 낚싯대마저 그놈에게 빼앗겨 버리고 만다.”
 “그 말씀은······.”
 “지금이 바로 그때 같단 말이야. 봐, 바람도 없다. 너무 조용하지 않냐?”
 “······.”
 “가자.”
 “예?”
 “자리를 옮기자고. 이럴 때는 자리를 바꿔야 해.”
 이가춘과 왕소걸이 어리둥절해서 장팔봉을 바라본다.
 “아니, 조금 전에 한 낚시 얘기하고는 다른데요?”
 “능숙한 낚시꾼은 이럴 때 더욱 긴장하고 기다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병신들. 지금 우리가 낚시하고 앉아 있냐?”
 침을 퉤, 뱉은 장팔봉이 주섬주섬 제 물건을 챙기더니 아무 망설임 없이 웅덩이를 벗어났다.
 그를 바라보는 이가춘과 왕소걸의 얼굴에 망설임이 가득하다.
 “저건 명령 위반 아닌가?”
 “병신.”
 이가춘이 발아래 침을 뱉고 중얼거렸다.
 “조장이 어디 제대로 명령을 지키는 거 봤어?”
 “하긴.”
 머리를 끄덕이면서 왕소걸은 어느새 이가춘이 장팔봉의 말투나 행동을 그대로 닮아가고 있다는 걸 알고 속으로 놀랐다.
 무당파에서 배웠던 그 엄숙하고 절제된 행동이 건달처럼 변해 버린 것이다.
 ‘나도 혹시 그런 것 아닐까?’
 왕소걸은 새삼 제 몰골을 훑어보았다. 어디에도 공동파의 제자라는 자부심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그 또한 꾀죄죄하고 거친 몰골이 되어 있었다.
 “병신들.”
 누구에게랄 것 없이 툭 뱉어낸 왕소걸도 다리를 건들거리며 제 짐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저쪽에서 이가춘이 짐을 들고 일어선다.
 “이런 일에는 그저 조장의 명령만 들으면 되는 거야. 다른 병신들이야 뭐라고 짖어대든 상관할 거 없어.”
 
 그놈의 목은 내 거다.
 천주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는 영광을 입었다.
 그러니 더욱 분발해서 반드시 장팔봉이라는 놈의 목을 가져가야 한다.
 아니, 놈을 생포해서 천주 앞에 무릎 꿇려야 하리라.
 검은 옷의 장한, 흑섬마도(黑閃魔刀) 이릉파(李陵派)는 결의를 새롭게 했다.
 그는 섬서 지방에서 마명을 떨치는 고수였는데, 패천마련의 부름이 있자 기꺼이 저의 근거지를 부수고 달려왔다.
 한 자루 묵도(墨刀)를 귀신같이 빠르게 쓰는 자로 강호에 널리 알려져 있다.
 무정하고 가혹한 손속은 그의 칼을 마도로 만들어주는 데 손색이 없었다.
 제 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이릉파였지만 온갖 마귀들이 득시글거리고, 각 방면의 고수들이 우글거리는 패천마련인지라 제 이름을 빛낼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이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시간.”
 그가 속삭이자 곁에 바짝 붙어 있던 자가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좋아.”
 풀숲에 납작 엎드려서 눈앞의 언덕을 노려보는 이릉파의 숨결이 차가웠다.
 참대나무가 빼곡하게 자라 있는 언덕이었다.
 저곳에 장팔봉이라는 놈이 조원들을 거느리고 엎드려 있으리라.
 ‘제 매복지가 알려졌다는 걸 놈은 까맣게 모르고 있을 테지. 그렇다면 이건 해보나마나 한 싸움이다.’
 이미 결과가 드러난 거나 다름없다는 생각에 이릉파는 느긋해졌다.
 그가 야습의 전초로 자원하자 황기령주가 펄쩍 뛰었다.
 “전초는 당신 같은 고수가 할 만한 일이 아니야. 그야말로 당장 뒈져도 아깝지 않은 자들의 몫이지.”
 전초로 나가는 자는 무조건 죽는다. 그게 황기령주의 머릿속에 강하게 박혀 있는 의식이었던 것이다.
 여태까지 야습의 전초로 나가서 무사히 돌아온 자가 거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기가 바닥이다.
 패천마련의 전위부대에게 그런 생각을 심어준 장본인이 바로 풍운조였다.
 풍운조의 조장인 장팔봉이다.
 그걸 생각할수록 이릉파의 호승심은 더욱 불타올랐다.
 ‘장팔봉이라고? 흥, 그놈이 어떤 놈인지 내 눈으로 보고 말 테다.’
 눈앞에 우뚝 솟아 있는 언덕을 노려보면서 이릉파는 내심 이를 갈았다.
 “조금 더 접근한다.”
 그의 명령에 전초로 따라나선 스무 명의 마졸들이 몸을 더욱 낮추고 조금씩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런 일을 위해 많은 훈련을 받았고, 실전에도 몇 차례 투입되었던 경험자들답게 소리 하나 내지 않고 꿈틀꿈틀 움직여 나아간다.
 그들과 스무 걸음쯤의 거리를 두고 이릉파는 전진을 멈추었다.
 전초가 풍운조를 급습하면 그들에게 대항하는 장팔봉을 지켜보려는 심산이었다.
 몇 수만 구경해도 그놈이 어떤 문파의 어떤 무공을 사용하는지 알아낼 수 있다. 그러면 그놈에게 대응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낼 수 있고, 필승하리라고 믿는다.
 
 ‘봤지?’
 장팔봉의 눈짓이 그렇게 말했다.
 이가춘과 왕소걸이 정신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들의 눈에는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제 앞을 뱀처럼 기어 지나가고 있는 자들이 무려 스무 명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그자들이 언덕을 향해 멀어지고, 한 놈이 멈추어 서는 게 보였다.
 그자가 전초를 이끄는 조장이라는 건 짐작하지만, 그가 흑섬마도로 불리는 이릉파라는 건 알지 못했다.
 장팔봉이 눈짓으로 명령했다.
 ‘저놈은 내 몫이다. 내가 들이치면 너희들은 앞서간 놈들의 뒤통수를 까버리는 거다. 알았지?’
 이가춘과 왕소걸이 눈짓으로 대답하고 검 자루를 움켜쥐었다.
 그자, 흑섬마도 이릉파가 천천히, 아주 조심스런 걸음으로 다가왔다.
 제 발아래 장팔봉이 매복해 있다는 걸 까맣게 모르고 있다.
 그가 몇 걸음 더 언덕 쪽으로 나아갔을 때, 장팔봉이 불쑥 몸을 일으켰다.
 “끼야아!”
 느닷없이 뒤통수를 후려치는 괴성.
 “깜짝이야!”
 그 뜻밖의 고함에 이릉파는 간이 떨어질 만큼 놀랐다.
 움찔한 그가 기겁을 하고 돌아설 때 머리 위에서 강력한 일격이 쳐내려오고 있었다.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볼 새도 없다.
 새하얀 빛을 뿌리며 낙뢰처럼 떨어지는 것이 검인지 칼인지도 알아볼 새가 없다.
 이릉파가 헛숨을 들이켜며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다.
 쉬아앙―
 그의 옆머리를 훑듯이 하며 아슬아슬하게 일격이 흘러갔다.
 그리고 연이어 쏟아져 들어오는 제이격과 삼격.
 이릉파는 미처 칼을 뽑을 여유조차 잡을 수 없었다.
 “이야아―!”
 와사삭거리며 뛰어나가는 두 놈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이가춘과 왕소걸인데, 그들을 본 순간 이릉파는 다 틀렸다는 생각에 아뜩해졌다.
 기습을 하기 위해 왔다가 오히려 기습을 당한 것이니 더욱 당황스럽다.
 “피해?”
 귓속으로 악귀처럼 부르짖는 소리가 파고든다.
 이릉파가 온몸의 힘을 두 발에 실었다.
 실전에서 적을 쫓아 들어가던 추명보(追命步)가 지금은 적의 칼을 피해 달아나는 퇴명보(退命步)가 되었다.
 그 수치심에 이가 갈리지만 눈앞에 있는 자는 찰거머리 같았다.
 떼어놓을 수가 없다.
 “끼야아―!”
 소리는 또 왜 그렇게 질러대는 건지.
 귀가 다 먹먹해지고 정신이 혼란해진다.
 장팔봉은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한 칼이면 충분하리라고 자신했는데 벌써 다섯 번째나 칼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고도 잡지 못했다.
 ‘자존심!’
 그걸 떠올린 장팔봉이 더욱 크게 악을 써서 소리치며 좌우로 무지막지한 칼부림을 해댔다.
 씽씽 쏟아져 나가는 칼바람 소리에 제 귀가 얼얼해질 정도였다.
 무섭게 달려들던 그가 멈칫했다.
 발끝에 돌부리라도 채인 건지 모른다.
 눈 깜짝할 순간에 불과한 아주 작은 틈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미처 눈치 채지도 못했을 테지만 묵섬마도 이릉파에게는 그것이 커다란 대문처럼 보였다.
 활짝 열려 있다.
 그게 함정이고 속임수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이놈!”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몸을 뺀 이릉파가 칼을 잡았다.
 그의 손끝이 칼자루에 닿았다 싶은 순간 무시무시한 일격이 뇌전처럼 뻗어나간다.
 캉!
 그것이 쳐내려오는 장팔봉의 칼을 가로막았다.
 묵직한 충격이 온몸에 전해져 온다.
 이릉파의 입가에 냉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칼을 뽑은 이상 이놈의 목은 내 것이라고 확신한다.
 더 이상 밀리지 않을 것이다.
 장팔봉이 주춤하며 진격을 멈추는 게 크게 보였다.
 그래서 더욱 확신한다.
 하지만 두 번째 도격을 날리려던 이릉파는 멈칫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왜?’
 맹렬히 끓어올라야 할 진기가 가슴에서 딱 막히는 건지, 그래서 호흡이 급격히 끊어지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의 눈에 두어 걸음 물러서서 활짝 웃고 있는 장팔봉의 얼굴이 크게 보였다.
 그가 입을 열어 무어라고 말한다.
 “이 병신아, 너 같으면 다섯 번씩이나 헛칼질을 했는데 또 칼질을 하고 싶겠냐?”
 “뭐, 뭐라고?”
 “다른 수단을 생각해야지. 안 그래?”
 이릉파가 그의 눈짓을 따라 천천히 제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언제 그랬던 것인지, 거기 한 개의 수전이 꼬리만 남기고 박혀 있었다.
 천천히 피가 흘러나온다.
 “이, 이 비겁한······.”
 이릉파는 더 말하고 싶었지만 그의 몸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허파가 펄펄 끓는 물에 던져진 것처럼 뜨거워지더니 말을 하려고 입을 벌릴 때마다 울컥울컥 선혈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그의 절망적인 눈에 제 목을 향해 떨어지고 있는 하얀 칼 빛이 보였다.
 “비겁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뒈진 놈이 병신이지.”
 퉤, 하고 침을 뱉는 장팔봉의 발아래 이릉파의 머리통이 뒹굴고 있었다.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있다.
 
 * * *
 
 대승이다.
 그래서 더 의심할 여지 없이 장팔봉의 풍운조는 신화가 되었다.
 장팔봉과 이가춘, 왕소걸 세 명이서 무려 스무 명이나 되는 패천마련의 척후조를 전멸시킨 것이다.
 장팔봉이 들고 돌아온 이릉파의 수급을 본 당주와 분타주들은 하나같이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묵섬마도 이릉파가 어떤 자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 자가 장팔봉의 매복에 걸려 목이 잘렸다는 게 한편으로는 믿어지지 않기도 했다.
 “한 스무 냥쯤 있수?”
 이릉파의 수급을 풍운당주인 비호검(飛虎劍) 마득량(馬得梁)의 발아래 내던진 장팔봉이 손을 내밀었다.
 마득량이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무의식적으로 품에 손을 넣었고, 두둑한 전랑을 꺼내 장팔봉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어라? 제법 많은데? 한 오십 냥은 되겠다. 고맙수.”
 두어 번 추슬러 본 장팔봉이 히죽 웃고 돌아섰다.
 “얘들아, 가자. 오늘 내일은 휴가다.”
 “저기, 조장님.”
 장팔봉을 보고 다시 당주 마득량의 눈치를 보던 왕소걸이 걱정스런 얼굴로 불렀다.
 “또 뭐?”
 “아직 당주님의 허락이······.”
 “그럼 네가 받아와.”
 장팔봉이 미적거리는 이가춘의 등짝을 밀며 재빨리 멀어져 간다.
 
 * * *
 
 “염병!”
 퍽!
 또 한 놈.
 막 보고를 올렸던 놈이 애꿎게 놋쇠 항아리에 맞아 머리통이 터졌다.
 “그러고도 너희가 나의 수하들이냐!”
 퍽!
 얼떨떨해하던 또 다른 놈이 영문도 모르고 장죽에 면상이 꿰뚫린다.
 “엉? 너희들이 그러고서도 마환천의 고수들이야?”
 책상 위를 더듬지만 더 잡을 게 없다.
 퍼퍼퍽!
 그러자 도적성이 신경질적으로 손가락을 사방으로 튕겨댔다.
 “천주!”
 한 놈이 우렁차게 외치며 장막의 문을 젖히고 뛰어들다가 그 꼴을 보았다.
 우뚝 멈추어 서서 눈만 뒤룩거린다.
 “너는 또 뭐냐?”
 저쪽을 가리키고 있던 도적성의 손가락이 천천히 돌아서 그자의 면상을 가리켰다.
 금방이라도 튕겨낼 듯 꼼지락거리고 있다.
 털썩.
 즉시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 자가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보, 보고 사항··· 입니다.”
 “그래? 어디 지껄여 봐라.”
 마환천주 도적성은 이제 수하들의 보고에 대해서 기대감을 버렸다.
 ‘들어보나마나지.’
 보고가 끝나는 즉시 그놈의 면상도 뚫어버릴 작정으로 여전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다.
 “그, 그, 그놈이, 그놈이······.”
 “그놈이라니?”
 “풍운조의 조장··· 그놈이······.”
 “응?”
 도적성이 몸을 똑바로 한다.
 “자꾸 더듬거릴래?”
 “아닙니다!”
 벌떡 몸을 일으킨 놈이 천리마가 달리듯 빠르게 입을 나불거렸다.
 “그놈이 풍운당을 떠났답니다. 수하 두 명을 데리고 우성현의 저자로 향했다는 정보입니다. 내일까지 휴가랍니다. 묵섬마도의 수급을 준 대가로 당주로부터 거금을 강탈해 가지고 나갔답니다!”
 “언제?”
 “오늘 아침나절이라는 보고였습니다!”
 “그래?”
 도적성이 턱을 괴었다. 그가 무언가 심각한 결정을 하기 전에 늘 하는 버릇이다.
 “천라지망을 펼칠까요?”
 “천라지망이라······. 그것도 좋겠지. 한데 말이다.”
 “······?”
 “그놈이 어디로 갔다고?”
 “우성현입니다.”
 아직 무림맹이 꽉 잡고 있는 곳이다.
 고착된 이곳의 전선을 뚫고 풍운당을 무너뜨린 다음에야 수중에 넣을 수 있다.
 “우성현이라······.”
 다시 턱을 괴고 허공을 바라보던 도적성이 씨익 웃었다.
 “어떤 놈인지 궁금하군. 좋아, 가서 직접 보겠다.”
 “예?”
 벌떡 몸을 일으키는 도적성을 바라보는 눈들이 일제히 찢어질 듯 커졌다.
 
 
 
 
 
 제3장 늙은 이무기와의 조우
 
 
 
 
 
 
 
 
 
 
 
 
 
 
 ―먼저 보는 자가 이긴다.
 
 사부의 곁을 떠난 이래 불변의 진리로 간직하고 있는 장팔봉의 좌우명이다.
 그래서 그는 언제 어디에 있든 모든 상황을 한눈에 파악하는 게 습관처럼 되어버렸다.
 아무리 즐거운 자리라고 해도, 아무리 술에 취해 있어도 그 습관은 사라지지 않는다.
 “뭐야, 저 늙은이는?”
 독한 화주를 한입에 털어 넣은 그가 거칠게 잔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조금 전에 한 늙은이가 종으로 보이는 수행원 두 명을 대동하고 들어왔는데,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풍채가 좋은 노인이었다.
 비단 화복을 입고 점잔을 빼는 것이, 세도가 제법 당당한 지주쯤 되어 보인다.
 어디 친척이나 친구 집에라도 방문하러 가는 길인지도 모른다.
 노인을 수행하고 있는 자들은 두 명의 중년 사내였다.
 한 놈은 덩치가 듬직했고, 한 놈은 그와 반대로 호리호리한 체구다.
 허름한 갈색 마의를 입고 낡은 신을 신은 것이 종처럼 보였다.
 겉으로 보아서는 의심할 만한 건수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장팔봉은 제 느낌을 믿었다. 그게 벌써 여러 번이나 저를 살려주었고, 풍운조를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피부에 와 닿는 공기의 흐름과 그 속에 섞여 있는 미약한 기운들을 느끼고 잡아내는 예민함이 갈수록 정교하고 정확해지고 있었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긴박한 순간을 밥 먹듯 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생겨난 생존 본능인지도 모른다.
 그 본능이 자꾸만 경고를 발하고 있었다.
 ‘저놈들은 고수다. 조심해.’
 “뭐가요? 어디 수상한 자라도 있나요?”
 마주 앉아 있는 왕소걸이 장팔봉의 심상치 않은 기색을 눈치 채고 의아한 시선을 보낸다.
 “왼쪽 구석에 있는 늙은이 말이야. 쳐다보지 마!”
 장팔봉이 낮게 꾸짖었다.
 왕소걸은 찔끔했으나 기어이 그쪽을 돌아본 이가춘이 피식 웃었다.
 “그냥 부잣집 노인장 같은데요, 뭐.”
 “그럴지도 모르지. 내 신경이 너무 날카로워져 있는 거야.”
 장팔봉이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한 얼굴을 하고 다시 한 잔의 화주를 들이켰다.
 
 “저놈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들은 바대로의 인상착의입니다.”
 “흠, 그런데 뭐 특별한 구석이 있는 녀석 같지도 않구나.”
 “그저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얼굴이군요. 보통 사람보다 조금 더 악착같고 지독한 놈이라는 느낌을 주는 인상이랄까요?”
 “체구는 저만 하면 어딜 가든 듬직하다는 소리를 듣겠는데요?”
 “그렇지?”
 노인, 마환천주 도적성이 제 생각도 그렇다는 듯 머리를 끄덕이고는 턱을 쓰다듬었다.
 “여기서 요절을 내버릴까요? 하명만 하십시오.”
 호리호리한 자가 눈빛을 번쩍이며 말했다.
 도적성이 잠시 무엇을 생각하는 듯 침묵하더니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금 더 지켜보자.”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빌어먹을! 너희들은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어!”
 술잔을 부술 듯이 거칠게 내려놓은 장팔봉이 술병을 들고 벌떡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더니 다른 곳도 아닌 도적성의 탁자를 향해 곧장 다가온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그 걸음걸이에 힘이 넘쳐 나고 오기가 뚝뚝 떨어졌다.
 그걸 본 도적성이 빙긋 웃었다.
 탁!
 탁자에 술병을 내려놓은 장팔봉이 술기운으로 붉어진 눈을 부릅떴다.
 도적성과 두 중년의 사내를 훑듯이 몇 번이나 바라본다.
 두 중년 사내의 얼굴에 불쾌하다는 기색이 떠올랐고, 살기마저 은은히 감돌았지만 도적성은 태연하기만 했다.
 장팔봉의 부리부리한 눈길을 빤히 마주 보며 여전히 의미가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한 미소를 띠고 있다.
 “나를 아쇼?”
 ‘아쇼?’
 ‘이런 찢어 죽일 놈이! 감히 천주님에게!’
 두 중년 사내의 눈빛이 금방 살벌해졌다.
 잡아먹을 듯 장팔봉을 노려본다.
 하지만 천주가 가만히 있으니 어쩔 수가 없다.
 “너는 나를 아느냐?”
 도적성이 턱수염을 쓰다듬고 나서 느긋하게 대꾸했다. 장팔봉이 머리를 갸웃거린다.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하고··· 혹시 당나무골의 염 선생 동생이나 형이 아니시오? 아닌가?”
 “그 사람이 누군데?”
 “사부님의 친구인데, 가끔 놀러와 마작을 두곤 하는 별 볼일 없는 양반이지. 그 양반과 닮은 것도 같단 말씀이야.”
 “네 사부의 함자를 들으면 나도 생각이 날지 모르겠다.”
 “왕필도.”
 간단하게 사부의 이름을 입에 올린다.
 도적성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제 머릿속에 들어 있는 강호의 고수들을 죄다 더듬어보는 건데, 아무리 떠올려 보아도 왕필도라는 이름은 들어 있지 않았다.
 “모르겠구나.”
 “그럴 줄 알았지. 염병. 나도 실은 당나무골 염 선생을 모르거든.”
 장팔봉이 두 중년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도적성과 마주 앉았다.
 “그냥 한번 해본 소리니 신경 쓰지 마쇼. 자, 술이나 한잔하시려오?”
 도적성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이놈이 나를 놀려?’
 하지만 태연히 잔을 내민다.
 콸콸 넘치도록 화주를 따라준 장팔봉이 어서 마시라고 눈으로 재촉했다.
 독하기만 할 뿐 맛이라고는 없는 화주를 천천히 마시는 도적성을 두 중년인이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는 원래 미주가효가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이처럼 너저분하고 소란한 주루에서 맛없는 화주를 태연하게 마시고 있으니 제 눈이 의심스러워진 것이다.
 ‘대체 천주님이 이토록이나 참고 있는 이유는 뭘까?’
 ‘설마 이놈이 정말 신비의 고수란 말인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노인이 한 잔의 술을 다 마시는 걸 본 장팔봉이 껄껄 웃었다.
 “그 술에는 사실 독이 들어 있소. 먹으면 황소도 뒈지지.”
 “뭐라고?”
 “이런 죽일 놈이!”
 그 말에 두 중년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하지만 도적성은 태연했다.
 “그렇다면 나 혼자 마실 수는 없지. 자, 너도 내 잔을 받아라.”
 빈 술잔을 장팔봉에게 건네준다.
 장팔봉이 그것을 받았는데, 손이 노인의 손가락과 맞닿은 순간 쥐가 오른 것처럼 짜르르하고 뜨거운 느낌이 왈칵 밀려들었다.
 ‘어라?’
 깜짝 놀랐지만 장팔봉은 내색하지 않고 노인이 따라주는 화주를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켜 버렸다.
 “독이 들어 있다면서 잘만 마시는구나?”
 “이 빌어먹을 세상이 온통 독이잖아.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이 공기도, 주고받는 말도, 바라보는 눈길도, 속마음도 모두 그래. 독 아닌 게 없지. 그래서 적응하지 못하는 놈들은 다 뒈져 버려. 하지만 나는 벌써 오래전에 적응했거든. 아예 만독불침지신이 되었지.”
 “그래?”
 “보아하니 당신은 나보다 더 잘 적응한 것 같은데? 그러니까 이렇게 늙도록 잘 살아 있는 게지.”
 “흘흘,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정말 나에게 독주를 줄 생각이었느냐?”
 “응.”
 “어째서? 우리는 서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인데?”
 “그냥, 기분이 나빴거든.”
 “단지 그것뿐이란 말이냐?”
 어이가 없다.
 이런 놈은 패천마련의 수많은 마두들 중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기가 막혔다.
 꺽, 하고 트림을 한 장팔봉이 태연하게 말했다.
 “사람이 짐승을 죽일 때는 잡아먹겠다는 목적이라도 있지.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죽일 때는 다른 목적이나 이유가 있는 게 아니거든. 그냥 기분 나빠서 그러는 거야.”
 “어이없는 놈이로구나.”
 도적성이 혀를 찼다.
 자신이 아무리 마두들의 우두머리이고 세상을 놀라게 한 마존이지만 기분 나빠서 그냥 누구를 죽이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건 정말 대책이 없는 악종이면서 대마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런 놈이 어떻게 무림맹에 속해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기도 한다.
 장팔봉의 지껄임이 그런 도적성의 면상에 척척 달라붙었다.
 “원수를 만났지? 그럼 기분이 좋겠어? 나쁘겠지? 그러니까 죽이는 거야. 전쟁터에서 적을 만났지? 그럼 반갑겠어? 기분 나쁠 거 아냐. 그러니까 죽이는 거지. 술집에서 마련의 첩자 새끼를 봤다고 쳐. 기분이 좋겠어? 나쁘겠지? 그러니까 죽이는 거야. 안 그렇소?”
 “······.”
 “우연히 죽었다고 알고 있던 친구를 만났다고 쳐. 그럼 기분 나쁘겠어? 환장하게 반갑고 좋겠지? 그러니까 안 죽이는 거야. 내 말이 틀렸소?”
 “그렇다면 너는 나를 처음 보고 나도 그런데 어째서 나에게 기분이 나쁘단 말이냐? 나는 네 원수도 아니고 이곳은 전쟁터도 아닌데 말이다.”
 “느낌.”
 장팔봉이 주먹으로 제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이놈이 그렇다는 거야. 노인장이 아주 기분 나쁘대. 꼭 마련에서 나온 늙다리 첩자 같다는 걸? 정말 그렇수?”
 “흘흘, 그놈 참······.”
 도적성이 주름진 얼굴을 활짝 펴고 웃었다. 실로 오랜만에 유쾌해지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엉뚱한 말을 지껄이고 엉뚱한 짓을 하는데, 그 속에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게 하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가슴을 뜨끔하게 하기도 한다.
 얼핏 보면 영락없이 버르장머리 없고 막돼먹은 놈이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무언가 사람의 마음을 이끄는 묘한 매력 같은 게 있다.
 그때 이층의 계단이 소란스러워졌다.
 “싫다는데 왜 이래요?”
 앙칼진 여자의 음성에 사람들의 눈길이 모두 그곳으로 쏠렸다.
 “이년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왜 앙탈이야!”
 걸걸한 음성에 이어서 짝, 하고 뺨을 때리는 소리가 들린다.
 “어라?”
 그곳을 바라본 장팔봉이 눈을 부릅떴다.
 한 시커멓게 생긴 장한이 이층의 계단에서 곱상하게 생긴 아가씨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쯧쯧, 저 개차반이 또 술에 취했구먼.”
 “모른 척해. 눈에 띄었다가는 괜히 얻어터진다.”
 아래층의 주객 대부분이 그 장한을 알아보았다.
 우성현이 무림맹의 영향력 아래 있는 곳인지라 주루에 출입하는 사람 중 상당수는 무림맹의 무사들이거나 그곳에 속해 있는 권속들이었다.
 그래서 늘 조용조용하고 차분했는데 오직 한 사람, 흑수노룡(黑手怒龍) 무병랑(武兵郞)은 예외였다.
 그는 풍운당과 함께 무림맹의 최일선을 담당하고 있는 적호당(赤虎堂) 소속이었다.
 다섯 개의 말단 조를 거느리는 기호분타(騎虎分舵)의 분타주이기도 하다.
 평소에도 거칠기로 이름난 자인데, 술에 취하면 주사가 심했다. 누구도 말릴 수 없다.
 닥치는 대로 두드려 부수지 않으면 아무나 가리지 않고 두들겨 패기 일쑤였다.
 그렇지 않은 날은 반드시 여자를 찾는다.
 오늘이 그런 날인 모양이었다.
 주루의 가녀(歌女) 초앵이가 재수없게 걸린 것이다.
 철금을 타는 노인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지만 무병랑의 포악함을 익히 아는지라 나서지도 못한다.
 “이 어르신이 귀여워해 주겠다는데 불만이냐? 엉?”
 철썩!
 기어이 초앵이가 계단 위에 철퍼덕 쓰러졌다. 어깨를 들썩이며 서럽게 운다.
 그런 초앵이의 가냘픈 손목을 움켜쥔 무병랑이 아랑곳하지 않고 소금 자루를 끌 듯이 그녀를 잡아끌었다.
 우당탕거리며 계단 아래로 끌려 내려오는 초앵이의 비명 소리가 찢어지는 듯하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를 돕기 위해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무림맹 내에서의 신분으로도 실력으로도 이곳에서 무병랑보다 높은 자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저런 개자식이!”
 장팔봉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탁자와 의자를 걷어차며 곧장 무병랑에게 다가간다.
 “흠―”
 그걸 바라보는 노인, 마환천주 도적성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나 좀 봅시다.”
 대뜸 무병랑의 어깨를 움켜쥐는 손길이 우악스럽다.
 돌아본 무병랑이 눈을 끔벅였다.
 “뭐야? 너 풍운조장 장팔봉이 아니냐?”
 “그렇소.”
 만취한 상태에서도 대뜸 알아본다.
 그만큼 장팔봉의 존재는 이 일대에서 유명했던 것이다.
 풍운조 하면 장팔봉을 떠올리고, 장팔봉을 떠올리면 그의 무용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누구나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시끄러우니까 좀 조용하게 해결합시다.”
 “이 새끼가, 눈에 뵈는 게 없나? 내가 누군지 몰라? 앙!”
 무병랑이 핏발 선 눈을 부릅뜨고 떡메 같은 주먹을 들어 올렸다.
 “잘못했소.”
 장팔봉이 던지듯 말하고 미련없이 돌아섰다.
 어리둥절하던 무병랑이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흐흐, 웃었다. 그리고 다시 초앵이를 잡는데 그의 어깨에 척 걸쳐지는 손 하나가 있었다.
 “또 어떤 새끼야!”
 무병랑이 신경질적으로 돌아섰다.
 히죽 웃고 있는 장팔봉의 얼굴이 코앞에 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까 잘못은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것 같단 말이야?”
 빠악!
 면상에 무지막지한 주먹이 박혀 버린다.
 “어흑!”
 무병랑이 얼굴을 감싸 쥐고 비틀거릴 때, 연이은 주먹과 발길질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퍽퍽 하는 소리에 섞여서 가끔씩 마른 박 쪼개지는 소리도 난다.
 장팔봉은 사정을 두지 않았다.
 후려치는 주먹에 어깨가 함께 돌아나가고, 허리가 그것을 이끈다.
 걷어차는 발끝이 창처럼 굳세게 무병랑의 옆구리며 배를 쑤시고 박혔다.
 그가 고통으로 몸을 웅크리면 번쩍 들어 올렸던 발뒤꿈치로 사정없이 뒤통수며 등짝을 내리찍어 버린다.
 불과 두어 번 숨을 쉬는 사이에 거구의 무병랑이 패대기쳐진 개구리처럼 쭉 뻗어버렸다.
 죽은 것 아닌가 싶은 걱정이 들 정도였다.
 “다음에 또 이런 짓을 하면 그때는 목을 따버릴 테다. 명심해.”
 퉤, 하고 등짝에 침을 뱉어준 장팔봉이 돌아섰다.
 “가가!”
 초앵이 그의 옷소매를 붙들었다. 얼굴에 감격과 기쁨이 가득하다. 언제 울부짖었나 싶다.
 배시시 눈웃음마저 흘린다.
 우성현의 꽃이라고 불리는 그녀가 장팔봉의 팔에 찰싹 붙어 매달리며 코맹맹이 소리를 했다.
 “장 가가, 정말 고마워요. 이 은혜는 제가······.”
 “놔.”
 “예?”
 “나 지금 손님 접대 중이거든? 그러니까 좋은 말로 할 때 놔라.”
 “······.”
 툭 뿌리치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장팔봉의 뒤통수에 초앵이의 째려보는 눈길이 따갑게 달라붙었다.
 
 “후환이 걱정되지 않느냐?”
 “저 새끼 때문에 말이오?”
 무병랑은 아직도 계단 아래에 쭉 뻗어 있었다. 날이 밝을 때까지 그럴 것 같다. 드르렁드르렁 코 고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일 아침에 깨어나면 뒤통수를 긁적이며 찾아올걸? 죽이지 않아서 고맙다며 술 한잔하러 가자고 할 인간이니 걱정 끄쇼.”
 “······.”
 도적성의 얼굴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갔다.
 ‘이건 뭔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려 있는 무림맹의 무리들이라고는 볼 수 없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우성현의 분위기 자체가 그랬다. 조용하고 엄숙한 중에 굳건한 기운이 살아 있었다.
 잘 정제되었고, 군기가 엄정한 느낌이다.
 그런 속에서도 조금 전과 같은 소란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건 무림맹에 속한 무사들의 사기가 아직 팔팔하게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어려워. 이건 점점 어려워지겠어.’
 외향적으로는 패천마련이 머릿수에 있어서나 보급 물자 등에 있어서 모두 우월했다. 그렇기에 여전히 공세적인 위치에 있다.
 하지만 무림맹이 아직도 이처럼 활기를 띠고 있으니 심난했다.
 지금쯤은 사기가 바닥에 떨어져 초상집 분위기 같을 것이라고 예상했기에 실망이 더 크다.
 ‘이놈도 과연 만만하게 볼 놈이 아니야.’
 장팔봉을 건너다보는 눈길에 그런 마음이 실렸다.
 무공이야 그저 그렇다고 쳐도, 불같은 성격과 그것을 그대로 터뜨려 버리는 과감성은 남다른 것이었다.
 게다가 주체할 수 없는 정의감을 숨기고 있으니 그건 마련에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누구나 장팔봉의 조금 전과 같은 모습을 본다면 강렬하다고 느끼리라. 절로 탄복하고 고개를 숙이게 될 것이다.
 ‘게다가 자신감에서 오는 여유와 느물거림이 살아 있다. 감각 또한 곤충의 촉수처럼 예민하고 정확해. 흠―’
 그 감각이 바로 장팔봉의 가장 큰 장점이면서 그를 무섭게 하는 무기라고 생각했다.
 ‘이런 놈을 상대하려면 보통 수단으로는 안 되겠군.’
 지금처럼 척후나 강습조를 보내는 것만으로는 결코 장팔봉을 제거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지금 죽여 버리면 깨끗할 것이다. 후환도 없다.
 죽이고 떠나면 그만인 것이다.
 도적성은 어떤 놈도 자신의 앞을 가로막지 못하리라고 믿었다.
 사실이 그랬다. 우성현에는 마환천주의 상대가 될 만한 무림맹의 고수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적어도 총단에서 전주나 장로 급 인물이 달려와야 할 텐데 그때쯤이면 도적성은 유유히 우성현을 벗어나고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내 얼굴에 침을 뱉는 짓이지.’
 패천마련의 오천주 중 한 명인 자기가 고작 무림맹의 말단 조장 한 놈을 패 죽였다면 그 손이 불명예스러워지지 않겠는가.
 자신을 호위하고 있는 두 사내를 시켜서 그렇게 해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입들이 일제히 쩨쩨하고 속 좁아터진 도적성이라고 비난할 것이다.
 그래서 도적성은 지금처럼 그냥 대범한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커흠.”
 헛기침을 한 도적성이 물끄러미 장팔봉을 바라보았다.
 ‘뭐?’
 장팔봉의 눈이 그렇게 묻는다.
 “술 잘 얻어 마셨네.”
 “벌써 가시려고?”
 “언제든 기회가 되면 그때는 내가 한잔 내지.”
 “그러시구려.”
 두 중년 사내가 무섭게 째려보지만 장팔봉은 개의치 않고 손을 내저었다. 파리를 쫓듯 한다.
 도적성이 주루를 떠나자 그가 비로소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잔뜩 몸을 굳혔다.
 “휴―”
 긴 한숨을 내쉬고 의자 등받이에 털썩 기댄다.
 마치 힘든 싸움을 하고 난 사람처럼 지쳐 있었다.
 “제기랄, 마련의 늙은 이무기 한 마리를 상대하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장팔봉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다시 말했다.
 “아니지. 잡혀 먹히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 아닌가? 그렇지. 나는 과연 대단한 놈이야.”
 허공을 향해 중얼거리고 히죽히죽 웃는 것이 미친 놈 같았다.
 
 * * *
 
 다시 한 번의 매복과 정탐의 임무를 수행했다.
 여전히 충원은 없었다.
 풍운조는 이제 장팔봉과 이가춘, 왕소걸 세 명으로 굳어져 버린 것 같다.
 “저놈이 이번에는 정말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거야.”
 장팔봉이 그 두 명의 조원을 데리고 어슬렁거리며 풍운당을 떠나는 걸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렇게 말하며 혀를 찼다.
 하지만 장팔봉은 죽지 않았다. 두 명의 조원도 악착같이 살아서 돌아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이 이제 불사귀가 되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때쯤 이변이 일어났다.
 장팔봉의 풍운조가 세 번째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새벽이 되어 복귀했을 때다.
 
 “어이구, 장한 내 새끼들! 고생 많았지?”
 당주가 활짝 웃으며 달려나와 맞이했는데, 예전 같지 않아서 장팔봉은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잘했어. 정말 잘해주었다.”
 ‘이 인간이 또 무슨 트집을 잡으려고······.’
 “지난밤에 너의 풍운조가 세운 공은 막중해. 놈들의 야습을 너희들만으로 막아냈지. 그 덕분에 우리 본대가 무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 반격에 나섰다. 오후에는 놈들을 박살 냈다는 승전보를 받을 수 있을 거야. 이게 다 너의 풍운조가 세운 공이다.”
 사설을 줄줄이 늘어놓으며 반색을 하는 게 더 수상쩍다.
 ‘원래 이런 인간이 아닌데?’
 무슨 꿍꿍이속을 가지고 있는 건지 더욱 경계심이 생긴다.
 당주인 비호검 마득량이 그처럼 살갑게 구는 이유는 곧 드러났다.
 “총단으로 가라.”
 “지금 뭐라고 했소?”
 “총단으로 발령이 난 거야. 제기랄,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싸움터를 떠나게 된 거란 말이다. 그런데 그 얼굴은 대체 뭐야? 기쁘지 않냐?”
 장팔봉이 제 뒤에 쭈뼛거리며 서 있는 두 명을 돌아보았다.
 그동안 저만 믿고 그 지옥 같은 싸움터를 헤쳐 나온 놈들이 아닌가.
 여섯 명이 와서 네 놈이 병신처럼 뒈지고 저 둘만 살아남았다.
 “그럼 나더러 풍운조를 떠나라는 거요?”
 “쯧쯧, 말귀를 그렇게 못 알아듣느냐? 이제 풍운조 따위는 잊어버려.”
 “니미럴!”
 장팔봉이 땅을 굴렀다.
 “내 목숨과 언제나 함께했던 풍운조였소. 그동안 수많은 조원들이 죽어나갔지. 그들의 죽음과 희생으로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풍운조란 말이요. 그런데 그걸 버리라고?”
 “아니, 풍운조는 그대로야. 너만 꺼지는 거다.”
 “나만?”
 “저놈에게 풍운조를 맡기겠다. 그동안 너를 따라다니며 잘 배웠을 테니 조장이 되기에 충분할 거야. 물론 조원도 새로 충원될 거다.”
 당주에게 지목을 받은 신참 이가춘이 얼떨떨해서 제 코를 가리킨다.
 마득량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 곁에 서 있는 왕소걸을 손가락질했다.
 “저놈에게는 뇌신조를 맡기겠다. 이틀 전에 조장이 죽어서 지금 공석이거든.”
 그 정도면 사지에서 임무를 완수하고 살아 돌아온 충분한 보상이 될 것이다.
 싱글벙글하는 두 신참을 바라보는 장팔봉은 영 마음이 편치 못했다.
 ‘멍청한 놈들. 그게 미끼라는 걸 모르고 좋아하는 꼴이라니. 쯧쯧······.’
 그런 속마음을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다.
 다가간 장팔봉이 두 놈의 어깨를 잡고 근엄하게 말했다.
 “잘 들어둬.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는 비결을 가르쳐 주겠다.”
 꿀꺽!
 이가춘과 왕소걸이 잔뜩 긴장해서 마른침을 삼키며 눈에 힘을 주었다.
 “언제나 내가 먼저 적을 봐야 하는 거다. 그러면 절대로 뒈지지 않아. 그러니 항상 눈을 크게 뜨고 사방을 두리번거려라. 나머지는 그동안 나를 따라다니면서 본 대로 하면 돼.”
 두 놈이, ‘에계, 겨우 그거야?’ 하는 얼굴로 장팔봉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가 눈을 부라리자 부동자세를 취하고 버럭 소리쳤다.
 “명심하겠습니다!”
 
 * * *
 
 승승장구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총단으로 옮겨갔던 장팔봉이 며칠 지나지 않아서 질풍단의 단주가 되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풍운당처럼 최일선에서 활약하는 전초부대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중요했는데, 이선을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었으므로 인원도 풍운당보다 많았고 물자도 풍부했다.
 장팔봉이 분타주도 거치지 않고 곧장 당주 급으로 격상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놀라는 한편 머리를 끄덕였다.
 “진작 그렇게 되었어야 해. 그동안 그놈이 세운 공이 어디 한두 가지야?”
 “그래도 아직 맹의 수뇌부가 살아 있긴 하군. 장팔봉이를 즉각 단주에 기용한 걸 보면 말이야. 아직 희망이 있어.”
 “자, 자, 열심히들 싸우자고.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게 증명되었잖아.”
 하지만 그들의 그런 말은 다시 며칠이 지난 뒤에 쑥 들어가고 말았다.
 “어떻게 된 거야?”
 “수뇌부가 산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나 본데?”
 “하긴, 뭐··· 세상이 온통 미쳐 돌아가는데 그들이라고 온전한 정신 상태겠어?”
 장팔봉이 다시 총단으로 옮겨가 이번에는 정의전주(正義殿主)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그게 있을 수 있는 일이냐며 일제히 빈정거렸다.
 장팔봉의 공이야 인정하지만 며칠 새에 그가 총단을 수호하는 정의전의 전주 자리에 올랐다는 건 누구도 인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림맹에는 여덟 개의 전이 있는데, 그 수장인 전주들은 모두 강호의 원로 명숙들이었다.
 천하를 오시할 만한 절정고수들이다.
 그들 속에 장팔봉이 끼었다니 어이가 없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며칠에 지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가 무림맹의 모든 비밀과 첩보를 담당하는 풍향사(風向社)의 군주가 되었다는 믿지 못할 소식이 은밀히 떠돌았다.
 드디어 맹주가 미친 모양이라고 다들 수군댔지만 며칠 전처럼 대놓고 비아냥거리지는 못했다.
 풍향사의 군주를 결정하는 건 맹주의 고유 권한이었기 때문이다.
 그 일을 두고 비아냥거린다는 건 곧 맹주를 비웃는 것과 같다. 참수당할 중죄인 것이다.
 
 장팔봉 본인도 어이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처음 총단에 불려와 질풍단의 단주 직을 받았을 때는 그저 조금 놀랐을 뿐이다.
 기쁘기는 했지만 즐겁지는 않았다.
 무덤덤한 얼굴로 집무실의 푹신한 의자에 앉아 며칠 지냈다.
 지겨워졌다.
 풍운당 소속 말단 조장으로 있을 때와 비교하면 질풍단의 단주로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심심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피 말리는 전쟁터에 대한 그리움이 솟구쳐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다시 풍운조장으로 돌아가겠다고 한차례 떼를 썼더니 뜬금없이 정의전주 자리가 떨어졌다.
 “이것들이 지금 나를 놀리는 거 맞지?”
 사령장을 받아 든 장팔봉은 어이가 없었다.
 “좋아. 어디까지 얼마나 놀리는지 두고 보자.”
 오기가 생겼다.
 주먹을 불끈 쥐고 정의전주의 자리로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그리고 업무를 파악하기도 전에 다시 자리를 옮겼다.
 “뭐시라? 풍향사의 군주라고?”
 장팔봉은 기가 막혀서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그 자리는 대대로 맹주의 최측근이 붙박이로 꿰차는 자리였다.
 수시로 맹주와 면담할 수 있고, 팔전의 전주들보다 한 단계 위의 보직이면서,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장로들마저 우습게 여길 수 있는 기막힌 자리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직 신임 맹주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했고, 맹주와 실낱같은 연줄도 없었다.
 “미친 게야. 신임 맹주라는 위인이 제정신이 아닌 게야. 쯧쯧쯧, 내가 이거 여기 계속 붙어 있어야 하는 건가 몰라?”
 부임하여 넓은 집무실에 들어선 그가 풍향사의 군주로서 중얼거린 최초의 말이었다.
 
 하는 일이 뭔지 알 수 없는, 생전처음 보는 자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며 온갖 것들을 보고했지만 그중 장팔봉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결재 서류가 산처럼 쌓여만 갔다. 그러나 장팔봉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거들떠본들 뭘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 건지 알 리도 없다.
 그래서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의자에 푹 파묻혀 종일 코를 골아대거나, 무료하면 뜰에 나가 허공을 상대로 주먹질, 발길질을 해대는 것이었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야 비로소 만족하고 돌아와 다시 코를 곤다.
 무림맹의 업무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다.
 그러나 맹주는 무슨 생각인지 조금도 상관하지 않았고, 장로들마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니 무림맹의 실무를 책임지고 있는 팔전의 전주들만 속이 탔다.
 장팔봉에게 그건 남의 일이었다. 그들의 속이 타거나 말거나, 무림맹이 가라앉거나 말거나 이제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사문의 명예를 되찾을 숭고한 사명과 기회를 너에게 주노라.”
 
 사부의 그 말이 아니었더라면 처음부터 무림맹에 발을 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망해 버린 삼류 문파를 계승하고 있으면서도 사부는 당신의 사문이 정파 무림의 한구석에 자리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던 순진한 사람이었다.
 패천마련이 발호하자 사문의 명예를 되찾을 때는 이때라며 노구를 이끌고 무림맹에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 사부를 가로막을 수 있는 사람은 이 넓은 천하에 장팔봉 한 사람뿐이었다.
 유일한 제자였으니까.
 사부가 노구를 이끌고 무림맹에 가봐야 어차피 허드렛일밖에는 하지 못할 텐데, 그런 꼴을 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제가 가지요’ 하고 호기롭게 소리쳤는데,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부가 사문의 명예니 숭고한 사명이니 하는 엄숙한 말로 등을 떠밀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렀다.
 사부가 지금의 제 모습을 본다면 드디어 사문의 명예를 되찾았다며 감격의 눈물을 펑펑 내쏟을 것이다.
 자기 제자가 대무림맹에 들어갔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인데, 가서 잡부가 아니라 어엿한 무사가 되었으니 어깨춤을 덩실덩실 출 만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승승장구하더니 풍향사의 군주가 되지 않았는가.
 그것도 아직까지 무림맹의 역사에 없었고, 앞으로도 다시는 없을 최단 시간의 기록이다.
 사부는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었다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게 뻔했다.
 내 제자야말로 천하제일의 기재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것이다.
 하지만 지금 장팔봉에게는 이 모두가 개똥 같은 짓이었다.
 ‘대체 이것들이 나를 언제까지 희롱하는지 두고 보자.’
 이런 오기가 아니었다면 벌써 때려치우고 사부 곁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팔다리 하나를 떼어달라면 눈 꾹 감고 떼어줄 수는 있어도 놀림감이 되고서는 참을 수 없다는 게 장팔봉의 평소 신념이었다.
 만약 무림맹주가 저를 가지고 노는 거라면 맹주고 뭐고 가리지 않고 들이받아 버릴 작정을 하고 이를 빠드득 갈았다.
 그러던 참에 맹주가 자신의 거처이자 집무전인 호천각(護天閣)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전갈이 왔다.
 꿈같은 일이지만 장팔봉은 기뻐 날뛰지 않았다.
 그만한 자리에 오르고 보니 저도 모르게 관록이라는 게 붙고, 느긋하고 오만한 후광을 두르게 된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팔봉에게는 그런 일도 모두 개똥일 뿐이었다.
 “어디 그럼 맹주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위인인지 얼굴이나 한번 볼까?”
 그게 장팔봉의 불경한 본심이었다.
 그가 저를 희롱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높은 자리에 있는 놈들은 사람을 희롱해도 참 야릇한 방법으로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아무리 맹주라고 해도 따끔하게 일침을 가해주지 않을 수 없다.
 
 “사나이는 말이다, 칼보다 자존심이 더 강해야 하는 법이다. 자고로 실력은 좀 달리더라도 자존심을 지키다 죽으면 영웅, 호한 소리를 듣지만, 제 칼 솜씨만 믿고 까불다가 뒈지면 병신 소리밖에는 들을 게 없는 법이야. 명심해야 하느니라. 커흠.”
 
 사부의 그 말씀이 백번 옳다고 굳게 믿는 장팔봉이었다.
 사부가 제대로 가르쳐 줄 실력이 없어서 변명 삼아 한 말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장팔봉에게 사부의 말은 한마디도 흘려들을 게 없는 진리이고 길인 것이다.
 그가 무림맹에 들어가겠다고 하자 사부가 장하다며 금과옥조 같은 말씀을 하사하셨는데, 아무리 살벌한 싸움터에서도 반드시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이라는 것이었다.
 
 “살고 싶지? 그러면 언제, 어떤 상황에서라도 당황하지 말고 내가 먼저 적을 볼 수 있으면 돼. 먼저 보는 놈이 무조건 이긴다.”
 
 장팔봉은 풍운조에 배속받은 뒤부터 그 말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고, 그대로 행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 결과 지금 이렇게 맹주의 호출을 받는 위치에까지 이르렀으니 과연 내가 사부 하나는 잘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4장 네가 해줄래?
 
 
 
 
 
 
 
 
 
 
 
 
 
 
 그그그긍―
 육중한 소리를 내며 등 뒤에서 철문이 다시 닫혔다.
 이제는 맹주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 나갈 방법이 없다.
 ‘제기랄.’
 장팔봉은 은근히 켕기는 심정이 되어서 맹주의 눈치를 보았다.
 저 앞쪽, 높은 단 위에 앉아 있는 그가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게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친근한 얼굴이다.
 ‘기죽을 것 없다. 기죽어서는 안 된다. 단단히 따지겠다고 잔뜩 벼르고 오지 않았는가. 자존심을 지키자.’
 ‘염병할’을 덧붙이며 장팔봉은 아플 만큼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다가간다.
 저벅저벅―
 제 발소리에 제가 흠칫흠칫 놀라 절로 눈이 커졌다. 부릅뜨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육중한 철문보다 더 무겁게 정수리를 눌러오는 이 기도는 대체 뭐란 말인가.
 과연 무림맹주는 보통 사람과 다르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친근한 미소를 띠고 바라볼 뿐인데도 이렇게 기가 죽고 오금이 저려오지 않는가.
 우뚝.
 맹주가 앉아 있는 높은 단 아래 장팔봉이 멈추어 섰다.
 자신을 향하고 있는 맹주의 눈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단단히 얼어붙어 버린 것이다.
 
 ‘이건 역시 대단한 놈 아닌가. 흠―’
 남천검왕 사자성은 장팔봉이 말로 듣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자라는 걸 인정했다.
 자신의 앞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저렇게 눈을 부릅뜬 채 노려보고 있으니, 저와 같은 기세는 늙고 노련한 장로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늙은 생강이 맵다더니 역시 장로들이 사람을 고르는 안목이 있어.’
 한사코 싫다고 하는 제 등을 떠밀어서 억지로 맹주 자리에 앉힌 장로들에 대한 미움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흐뭇한 마음으로 장팔봉을 내려다보던 맹주가 한껏 위엄을 실은 음성으로 말했다.
 “삼절문(三絶門)의 계승자라지?”
 “그렇소.”
 ‘그렇소?’
 말투가 귀에 거슬린다.
 잠깐 눈썹을 꿈틀거렸던 맹주였지만 이내 생각을 달리했다.
 ‘역시 배짱이 대단한 놈 아닌가. 믿음직해.’
 그게 장팔봉의 습관화된 말투라는 걸 알 리가 없는 것이다.
 무식하고 막돼먹은 탓이라는 것도 알지 못한다.
 패천마련을 상대로 한 거친 싸움터에서 아귀처럼 살아온 이력이라고 이해했다.
 그래서 더욱 듬직해 보였다.
 ‘저런 자를 여태까지 풍운조의 조장으로 부렸다니. 쯧쯧··· 호랑이로 겨우 토끼 사냥이나 하고 있었던 셈 아닌가.’
 잠깐 그런 후회를 한 맹주가 더욱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각설하고, 너에게 장차 도탄에 빠져 있는 무림맹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예?”
 “강호의 대정지기를 수호하는 수호자가 되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
 그거야 사부에게서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으로 듣던 말이다.
 사부는, ‘모름지기 남자로 태어났으면 이 땅에서 악을 멸하고 정의를 지키는 데 내 한 목숨 바쳐야 하며, 칼을 들었으면 온갖 비겁을 일도양단하고 협의를 드높이는 걸 사명으로 삼아야 하느니라’라고 늘 말했다.
 그게 사나이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라는 것이다.
 마주 앉아 밥을 먹을 때마다 했던 똑같은 말이다.
 그 말이 아주 지겨워 죽을 지경이었는데 이처럼 무림맹주의 입에서 들으니 전혀 새로운 느낌이 든다.
 “네가 그 일을 해주겠느냐?”
 “······!”
 바로 이거라는 생각이 번갯불처럼 번쩍 뇌리를 스쳤다.
 ‘빌어먹을. 하는 일 없는 돼지를 배불리 먹여주고 피둥피둥 살이 찌게 돌봐주는 이유는 오직 잡아먹기 위해서라더니, 딱 그 말이 맞는군.’
 지난 며칠 동안 일자무식인 저를 초고속 승진시켜 주고 호의호식하게 해준 건 역시 바라는 게 있어서였다.
 맹주 사자성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장팔봉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저놈, 망설이는군. 하긴, 선뜻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지.’
 하지만 물러설 수 없는 그가 회심의 한마디를 던졌다.
 “삼절문이라면 이름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문파지?”
 “뭐, 그렇죠.”
 “······.”
 발끈할 줄 알았는데 대뜸 돌아오는 대꾸가 너무 시큰둥하다.
 ‘이놈이 나의 격장지계를 눈치 챘나?’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야 없지.’
 작정한 맹주가 빙긋 웃었다.
 “삼절문같이 이름도 없는 문파에서 자네처럼 걸출한 인물이 나왔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이지.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꽃이 피고 개천에서 용이 난다더니 과연 그렇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구나.”
 ‘응?’
 장팔봉이 아주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칭찬 같기도 하면서 비웃는 것 같기도 해서 아리송했던 것이다.
 그가 맹주의 말뜻을 파악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곰곰이 생각하는 장팔봉을 보면서 맹주는 다시 한 번 탄복했다. 자신의 비아냥거림에도 끄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놈이 참을성도 대단하구나. 제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심계도 훌륭해. 과연 인중용이야.’
 내친걸음이다. 계속해야 한다.
 “자네는 그런 훌륭한 인재이니 당연히 사문의 이름을 드높일 수 있겠지. 자네 사부가 아주 기뻐하실 걸세.”
 슬쩍 한 걸음 물러서며 사부를 들먹였더니 즉각 반응이 왔다.
 “지금도 충분히 기뻐하실 거요.”
 “하지만 자네가 정파 무림의 위기를 구해내고 불세출의 영웅이 된다면 더욱 기뻐하시겠지. 세상 사람들이 삼절문의 위대함을 칭송할 게야.”
 장팔봉에게 있어서 그건 상상만 해도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존심을 한껏 살리는 일이면서, 귀에 못이 박힌 정의니 협의지심이니 하는 걸 제대로 실천해 보이는 일이지 않은가.
 그러면 사부는 밥상머리에서 다시는 그 소리를 하지 않을 것이다.
 장팔봉에게는 그게 불세출의 영웅이 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었다.
 “그 일을 네가 해주었으면 좋겠다.”
 “좋시다.”
 ‘좋시다?’
 말투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사자성은 애써 그것마저 ‘저놈이 겁없는 전사가 틀림없어. 이 일에 제격인 놈이야’ 하고 좋게 생각했다.
 “너도 알다시피 전대 맹주께서 패천마련에 납치당하는 치욕스런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그래서 내가 맹주의 자리에 앉았지만 나의 힘으로는 전대 맹주의 일을 대신할 수가 없구나. 내 그릇이 부족한 때문이지.”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잘하고 있소이다.”
 ‘뭐시라? 그럴지도 몰라? 이, 이―’
 장팔봉으로서는 진심으로 위로한답시고 던진 말이었다. 달리 마땅한 말을 찾을 수 없었거니와 그럴 능력도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래가 사교적이지 못한 인물이고, 따라서 사교적인 어휘가 풍부하지 못한 위인인 것이다.
 끙, 하고 눌러 참은 맹주 사자성이 다시 말했다.
 “지금으로서는 패천마련의 공세에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겨우 절강과 복건 지역을 지키고 있을 뿐이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건 그렇소이다.”
 “내 대에서 무림맹의 위세가 볼품없어지고, 더 나쁘게는 패천마련에 먹혀서 사라져 버리는 걸 원치 않는다.”
 “나도 마도의 개새끼들이 강호를 독차지하는 건 싫소. 대의가 사라지고 협의지심이 사라질 것이며, 무엇보다 사나이 자존심이 짓밟히는 일이거든.”
 “오호, 과연 너는 영웅의 기상을 지니고 있는 호한이로다.”
 사자성이 진심으로 감탄하여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
 ‘이놈이 그래도 제 사부에게서 무사로서의 정신만은 제대로 배웠군. 기특한 놈이야.’
 그런 마음으로 조금 전까지의 무례함에 대한 불쾌감은 싹 씻어버렸다.
 “지금으로서는 맹주를 구해오는 것만이 최상인데··· 그건 불가능하겠지?”
 “지금 나에게 한 말이오?”
 “그냥 그렇다는 거다. 그래서······.”
 왠지 무시당하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조금 나빠진 장팔봉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맹주도 바쁜 양반이고 나도 알고 보면 바쁜 사람이니까 사설은 빼고 그냥 본론만 얘기합시다.”
 장팔봉은 어서 이 기분 나쁜 곳을 떠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자성이 받은 느낌은 달랐다.
 ‘저놈이 호걸답게 화통한 면도 있군. 암, 호한이라면 자고로 그래야지. 미적거리는 자들처럼 얄미운 놈들이 없거든.’
 “커흠, 좋다. 네가 패천마련의 뇌옥에 들어가 줬으면 좋겠다.”
 “뭐라고요?”
 그건 장팔봉에게 너무나 뜻밖의 말이었다. 제 귀를 의심한다.
 “나에게 지금 패천마련 놈들에게 잡혀가서 뇌옥 구경이나 하라고 하신 거요?”
 “그래주기를 바란다.”
 “어째서?”
 “거기에 맹주가 갇혀 있을 테니까.”
 “그럼 구해오라는 거요?”
 “아니.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네가 더 잘 알 텐데?”
 ‘뭐야, 나를 무시하는 거 아냐?’
 맹주의 말은 진심이었지만 장팔봉은 그렇게 받아들였다.
 불끈 오기가 솟구쳤다.
 ‘자존심!’
 “만약 내가 맹주를 구해오면 어떻게 하실 거요?”
 “네가? 허허허, 그 뜻은 가상하다만 무리할 것 없느니라. 그러다가 실패하면 너도 죽을 뿐 아니라 애꿎은 맹주의 목숨마저 위태로워질 테니까.”
 장팔봉은 하긴 그렇다고 생각했다. 앞뒤 생각없이 나설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럼 대체 내가 뭘 해주기를 원하는 거요?”
 “뇌옥에 들어가거든 은밀히 맹주와 접선해라.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해야 한다.”
 “결론은?”
 “맹주의 절세신공인 유천신공을 얻어오면 좋겠지. 하지만······.”
 “왜? 내 자질이 부족할 것 같소?”
 ‘눈치도 빠른 놈이군. 아둔한 것 같지만 또 어찌 보면 지독히 영악한 놈이야. 다루기가 쉽지 않겠어.’
 쓴웃음을 지은 사자성이 달래듯 말했다.
 “그런 건 아니고, 그걸 배우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겠느냐? 지금 무림맹이 풍전등화요, 누란지세의 처지인데 그럴 만한 시간이 없다는 거지.”
 ‘풍전등화? 누란지세? 대체 그게 뭐지?’
 알 수 없는 말이 나왔을 때는 그저 무시하는 게 제일이라는 걸 장팔봉은 그동안의 제 경험을 통해서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
 맹주의 그 말을 싹 무시하고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하긴 그렇기도 하군요. 지금 같아서는 어디 단 열흘인들 이 무림맹이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소이다. 무언가 특단의 대책을 세우지 않고서는 힘들어. 암, 그렇고말고.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단 말씀이야.”
 제법 심각하게 머리마저 주억거리며 중얼거린다.
 “네가 생각하고 있는 특단의 대책이라도 있느냐?”
 “자객을 보내서 패천마련의 거령신마(巨靈神魔)라나 뭐라나 하는 그자를 죽여 버리는 거요.”
 사자성이 피식 웃었다.
 “그것보다는 우리도 패천마련의 마종인 그 거령신마를 납치해 오는 건 어떻겠느냐?”
 “그건 불가능할 거외다.”
 “어째서?”
 “그 정도 되는 거마라면 자존심도 무지 셀 텐데 납치당하겠소? 그런 상황에 내몰리면 차라리 자결을 해버리고 말 테지. 자존심 문제니까.”
 “그렇다면 전대 맹주께서는 그 자존심이 없어서 패천마련에 납치당했다는 거냐?”
 “어? 아니, 내 말은 뭐 꼭 그렇다는 게 아니라······.”
 장팔봉은 비로소 제가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진땀이 났다. 수습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동안 맹주의 싸늘한 눈길 앞에서 우물쭈물하던 그가 겨우 한마디 했다.
 “뭔가 사정이 있었겠지요.”
 
 * * *
 
 천하에는 수많은 보물이 있는데, 그중 강호의 무리가 가장 탐내는 보물은 딱 세 가지였다.
 한 자루의 칼과 한 명의 절세미녀, 그리고 한 알의 영단이다.
 그 세 가지 중 한 자루의 칼이 으뜸으로 꼽히는 건 사연이 있기 때문이었다.
 
 봉명도(鳳鳴刀).
 
 보도(寶刀) 중의 보도로 알려진 그 칼은 그 자체로서 둘도 없는 보물이지만, 더 큰 가치는 그것에 감추어져 있는 비밀에 있었다.
 봉명도에는 봉명삼절도법(鳳鳴三絶刀法)의 구결과 심법, 검초 도해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누구든 그것을 얻기만 해도 칼의 위력을 빌어 절세의 고수가 될 수 있을뿐더러, 그 안의 비밀을 밝혀내 봉명삼절도를 익힌다면 그 즉시 천하제일의 고수가 된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그 봉명삼절도법이 지극히 패도적인 도법이라 했고, 어떤 사람은 지극히 정밀한 도법이라고 했으며, 사람의 혼백을 사로잡는 사악한 도법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었다.
 아직 누구도 봉명도를 구경해 보지 못했고, 그 안이 비밀에 접근해 본 자가 없으니 온갖 말이 떠돌았던 것이다.
 그 봉명도는 누군가 지어낸 환상일 뿐이라고 믿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두 번째 기보로 꼽히는 한 명의 절세미녀는 실존하고 있는 인물이므로 거짓이나 환상이 아니었다.
 
 삼선밀교(三仙蜜嬌) 진소소(秦素昭).
 
 그녀는 단지 타고난 경국지색의 미모만으로 보물이 된 게 아니었다.
 그녀를 얻는 자 곧 천하를 얻으리라는 말이 정설이 되었을 만큼 지니고 있는 재주와 능력이 세상의 모든 여자 중 으뜸이었던 것이다.
 학식은 삼교구류를 꿰뚫었고, 무공은 무산과 곤륜, 아미 삼선의 진전을 물려받아 측량이 불가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두 번째 보물로 꼽히기에 부족한 면이 있었는데, 그걸 채워준 게 바로 그녀의 재력(財力)이었다.
 그녀는 중원에서 가장 거대하다는 천화상단(天華商團)의 소유주였던 것이다.
 물론 제 아비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기는 하지만 아가씨의 몸으로 그것을 탈 없이 이끌어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경이로운 일이었다.
 이십대 중반의 나이에 그처럼 대단한 존재가 되었으니 그녀, 삼선밀교 진소소는 가히 천하의 모든 남자들이 꿈에서도 선망하는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게다가 덤으로 붙어 있는 또 한 가지 그녀만의 신비가 있었다.
 바로 그녀의 체질이 천지음화지체(天地陰化之體)라는 것이다.
 그녀를 마누라로 삼아서 음양교접을 할 때마다 남자의 내공이 절로 증진된다고 했다.
 그녀의 음기가 양기를 북돋아줄뿐더러, 남자의 몸 안으로 흘러들어 음양의 조화를 이루게 해주기 때문이다.
 십 년만 함께 붙어산다면 저절로 삼화취정, 오기조원의 경지에 오르게 될 것이다.
 그것도 애써서 힘들게 운기행공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밤마다 천하제일의 미녀를 품고서 지극한 쾌락과 열락을 맛보는 중에 절로 그렇게 될 것이니 무공을 익힌 남자들로서는 듣기만 해도 환장할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두 번째 보물이다.
 
 천령호심단(天靈護心丹).
 
 세 번째 보물인 그것은 천하에 하나뿐인 영단이고 선약이지만 삼선밀교 진소소로 인해 빛을 잃은 셈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두 번째 보물로 꼽혔을 것이다.
 그것은 도교의 일맥이면서 신비하기로 으뜸인 나부문(羅府門)에서 그들의 모든 비방을 집대성해 만들어낸 영단이었다.
 커다란 알밤만 하다고 한다.
 냄새만 맡아도 만독을 해독할 수 있으며, 쌀알만큼만 떼어 먹어도 당장 십 년의 내공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것을 널름 통째로 삼켜 버리면 그 즉시 환골탈태하는 건 물론, 늙은이는 반로환동하고 불로장생하게 된다고 했다.
 원하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우화등선한다는 영약 중의 영약인 것이다.
 하지만 세 번째의 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 * *
 
 “봉명도가 감추어진 곳을 맹주가 알고 있다.”
 “예? 아니, 그런 물건이 있다는 게 사실이었단 말이오?”
 장팔봉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도 귀가 있는지라 천하삼보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하나도 믿지 않았다.
 역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사부의 훈육 덕분인데, 사부는 마주 앉아 차를 마실 때마다 말했다.
 
 “보물 따위는 다 헛것인 거야. 그걸 쫓다 보면 평생 비럭질이나 해서 먹고사는 한심한 인간밖에는 될 게 없다. 그러니 스스로 열심히 노력해서 사는 게 떳떳하고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다. 사나이는 자고로 자존심 빼면 시체인 거야. 커흠.”
 
 밥 먹을 때와 차 마실 때마다 들었던 말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으니, 바로 ‘자존심’이라는 단어였다.
 그래서 장팔봉은 자존심이야말로 사나이가 가져야 하고 지켜야 하는 유일한 보물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그 봉명도가 실재한다니 그런 믿음이 흔들리려고 한다.
 맹주, 남천검왕 사자성이 음성을 낮추어 말했다.
 “지금 무림맹 내에서의 너의 지위는 나 다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네가 슬쩍 잡혀주기만 하면 패천마련에서는 춤을 추며 기뻐할 게 틀림없지. 절대로 너를 죽이지 않을 테니 그 점은 안심해도 된다.”
 ‘염병, 그래서 나를 그렇게 초고속으로 승진시킨 거였구먼.’
 비로소 그 까닭을 확연히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무를 수도 없었다. 이미 장팔봉이라는 놈이 무림맹 풍향사의 군주가 되었다고 만천하에 소문이 났을 테니까.
 어쨌든 죽지는 않을 거라니 그 점은 안심이 된다.
 “너를 고문하겠지. 하지만 그 정도의 고통은 겪어야 영웅, 호한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런 다음에 그들은 너를 뇌옥에 가두어둘 것이다. 그러면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되겠지.”
 “그 안에서 전대 맹주를 찾으라는 거요?”
 “찾기만 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맹주를 만나 이런 사정을 전해드리고, 봉명도가 숨겨져 있는 곳의 위치를 알아와야 한다.”
 “그러면 무림맹에서 그것을 찾아 그 안에 들어 있다는 비밀을 풀 셈이군요?”
 “그렇지. 그렇게 해야만 패천마련을 무찌르고 무림맹을 이 풍전등화와 누란지세의 위기에서 구할 수 있게 되느니라.”
 “그러면 그 봉명삼절도법은 누가 익히게 되는 거요? 설마 나는 아닐 테고······.”
 예리한 그의 질문에 맹주가 난처한 기색으로 우물쭈물했다.
 “커흠, 그러니까··· 그걸 익히려면 최소한 내공의 화후가 삼화취정의 경지에는 들어 있어야 하고, 무공에 대한 깨달음도 높은 수준에 올라 있어야 할 텐데··· 무림맹 내에서도 그런 사람은 드물지. 하지만 나라면··· 커흠.”
 ‘니미럴, 그러니까 결국 저를 위해서 나더러 죽을 고생을 해라 이거 아냐?’
 하지만 여기서 못하겠다고 하면 겁먹었다고 비웃을 것 아닌가.
 그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지난 보름 동안 많은 혜택을 누렸고, 사부를 기쁘게도 해드렸으니 맹주에게 신세를 진 거라고도 할 수 있었다.
 사나이라면 물 한 그릇의 신세를 졌으면 내 피 한 됫박으로 갚아주어야 하는 거다.
 그렇게 할 자신이 없으면 어찌 신세를 질 것인가.
 그게 자존심이라는 거라고 생각했다.
 “좋시다!”
 ‘좋시다?’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말투다. 하지만 어쨌든 하겠다는 의사 표시 아닌가.
 사자성이 환하게 웃었다.
 “좋아, 역시 너는 사내로구나. 내가 사람을 잘 봤어. 네가 반드시 해낼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지그시 장팔봉을 바라보던 그가 신중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 계획이라도 있느냐?”
 “패천마련의 뇌옥에 걸어 들어갈 계획 말이오?”
 “없다면 이쪽에서 마련해 줄 수도 있다. 이미 준비되어 있기도 하고.”
 “그 정도는 스스로 알아서 해야지. 그런 것까지 일일이 맹주의 신세를 진다는 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오. 그렇지 않겠소?”
 “그래?”
 “잡혀가 주는 일에도 계획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듣느니 처음이오.”
 “그렇다면 네 생각은?”
 장팔봉이 씩 웃고 당당하게 말했다.
 “이런 일에는 무계획이 계획인 법이라오.”
 “무, 무계획······.”
 
 * * *
 
 그그그긍―
 영영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철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맹주와의 면담을 끝내고 저벅저벅 걸어나가는 장팔봉의 속은 편치 않았다.
 ‘뭐지, 이 기분은? 꼭 사기당한 것 같기도 하면서 아닌 것 같기도 하면서··· 참 묘하군. 제기랄.’
 저에게 그렇게 막중한 임무를 맡겼다는 건 그만큼 저를 높이 쳐준다는 거니 우쭐해져야 할 일이다.
 하지만 자꾸 무언가 꺼림칙한 느낌이 남아 떨떠름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도 다 있잖아? 내 사문이 삼절문이고, 사부님에게서 배운 도법이 삼절도법인데, 봉명도 속에 숨겨져 있는 게 봉명삼절도법이라고? 이건 참 드문 우연이군.’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어느새 꺼림칙하던 느낌은 잊고 피식피식 웃는다.
 
 
 
 
 
 제5장 무계획이 계획이다
 
 
 
 
 
 
 
 
 
 
 
 
 
 
 터벅터벅―
 한 필의 말이 머리를 끄덕이며 제멋대로 걸어가고 있었다.
 복잡한 저자의 한복판을 느릿느릿, 지겹다는 모습으로 그렇게 지나가는 것이다.
 말 위의 무사는 장팔봉이었다.
 허름한 마의에 긴 머리를 새끼줄로 질끈 묶었고, 낡은 허리띠에는 술 호로를 매달았으며, 너덜거릴 만큼 낡고 빛바랜 가죽신을 신었다.
 등에 칼 한 자루를 짊어지고 있으니 무사지 그렇지 않으면 영락없이 저자에서 날품을 팔아먹고 사는 잡배의 몰골이었다.
 하지만 그가 타고 있는 말은 그렇지 않았다.
 누가 보더라도 한눈에 명마라는 걸 알 것이다.
 잡티 하나 없이 검은빛이 자르르 흐르고,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몸은 조각을 한 것처럼 미끈하게 빠졌다.
 그런 놈이 매우 지겹고 한심하다는 기색으로 머리를 끄덕거리며 느릿느릿 걷고 있었다.
 가끔씩 투레질을 해서 주위의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 이만저만 불만을 가진 게 아니다.
 장팔봉이 달리게 해주지 않으니 그랬다.
 하루에 천 리를 달리고도 힘이 남을 놈인데, 장팔봉은 마치 늙은 노새 한 마리를 몰듯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을 파시지 않겠소?”
 길 건너의 찻집에서 한 사람이 뛰어나오더니 성급하게 말고삐를 잡았다.
 장팔봉의 눈가로 득의의 웃음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내려다보니 잘 차려입은 것이 돈 꽤나 있는 집안의 사내가 분명했다.
 “얼마면 되겠소?”
 품을 뒤적이는 것이 돈을 꺼낼 기세였다. 성질도 급한 자다.
 “얼마나 있는데?”
 “여기 삼백, 아니, 삼백오십두 냥이 있소이다.”
 사내가 빳빳한 두 장의 전표와 제법 묵직해 보이는 금괴 한 개, 그리고 부스러기 은자를 죄다 꺼내놓았다.
 금괴와 은자는 알지만 전표에 얼마짜리라고 쓰여 있는지 장팔봉은 모른다. 어쨌든 모두 삼백오십두 냥이라니 그럴 것이다.
 장팔봉이 피식 웃었다.
 “가져가서 마누라 옷이나 한 벌 해 입혀.”
 “이보시오, 이보시오!”
 그냥 가자 사내가 다급하게 부르며 따라붙었다.
 장팔봉의 눈가에 또 한 차례 음흉한 웃음이 재빨리 스쳐 지나간다.
 “그럼 대체 얼마를 원하시오?”
 “일천 하고 삼백오십두 냥 하고도 세 푼. 에누리 없이.”
 엄청난 돈이다.
 열 식구 대가족이 장원 같은 집에서 족히 삼 년은 떵떵거리며 먹고살 만한 액수인 것이다.
 제 식구 수만큼 종을 부려도 삼 년 안에 그 돈을 다 쓰려면 고생 깨나 할 것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액수를 덜컥 부른 건 팔지 않겠다는 뜻 아닌가.
 하지만 사내에게는 정말 그 흑마가 탐나는 모양이었다.
 고삐를 움켜쥔 채 서서 자못 심각하게 망설인다.
 “그런데 이 말이 정말 당신 거요?”
 “왜? 어디서 훔쳤을까 봐?”
 “당신의 행색과 이 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으니 그렇소이다.”
 “그래? 그럼 보여주지.”
 장팔봉이 즉시 말에서 뛰어내렸다. 안장을 들추고 안쪽을 보여준다.
 무림맹 풍향사의 낙인이 찍혀 있었다. 그곳에 속한 말이라는 뜻이다.
 그걸 본 사내의 눈이 반짝였는데, 이번에는 장팔봉이 알아채지 못했다.
 “가라!”
 그가 갑자기 말의 볼기짝을 철썩 때렸다.
 놀란 말이 앞발을 번쩍 들고 히히힝 하고 울부짖더니 그대로 질주해 갔다.
 그 많은 사람들을 헤집고 내달리면서도 누구 하나 다치게 하지 않는다.
 질풍처럼 거리 저쪽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눈 깜짝할 새의 일이다.
 “어? 어? 저거······!”
 사내가 눈을 까뒤집었다.
 “말을 잃어버리지 않았소이까? 이런, 이렇게 무모하고 멍청한 사람이라니······.”
 “그럴 것 같아?”
 흥, 하고 코웃음을 친 장팔봉이 입속에 손가락을 쑤셔 넣더니 삐익― 하고 날카롭고 긴 휘파람을 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사내는 얼이 빠진 듯이 말을 바라볼 수 있었다.
 두두두두―
 어디에서인가 말발굽 소리가 들린다 싶었는데 뒤쪽에서 흑마가 질주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장팔봉 곁에 우뚝 서서 다시 히히힝― 하고 길게 울부짖는다.
 비로소 한바탕 맘껏 달리고 와서 속이 시원하다는 듯했다.
 “봤지? 이놈은 어디에 있든지 내 휘파람 소리만 들으면 즉각 달려오도록 길들여져 있지. 그러니까 내 말이라는 거야. 맞지?”
 “좋소, 사겠소!”
 사내가 호기롭게 소리쳤다.
 장팔봉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흑마를 바라보며 쓰다듬는데 사랑스러워 못살겠다는 듯했다.
 ‘병신.’
 속으로 비웃은 장팔봉이 손을 내밀었다.
 “지금 그만한 돈이 내게 있겠소? 또 있다 한들 가지고 다닐 수 있겠소? 수레에 실어도 한 수레는 될 텐데.”
 “그럼 없다는 거야?”
 “우리 집으로 갑시다. 거기에서 주면 될 것 아니겠소?”
 “그러지. 나야 어디에서든 돈만 받으면 되니까.”
 
 절강성에, 그것도 안탕산에서 멀지 않은 촌마을에 이런 집이 있었던가 싶게 으리으리한 장원이었다.
 내당까지 들어가는 데만도 무려 일곱 개의 문을 지났다.
 그동안 본 정원만 해도 다섯 개인데, 하나같이 작은 동산을 방불케 하는 규모였다.
 게다가 어찌나 공들여 정교하게 꾸며놓았는지 보는 내내 눈이 휘둥그레져서 이제는 아플 지경이었다.
 드문드문 경장 차림의 무사들도 보였는데, 다들 사내를 보기가 무섭게 공손하게 인사하고 한쪽으로 물러섰다.
 원가장(元家莊)이라고 불리는 이 거대한 장원을 지키는 호장무사들인 것이다.
 장팔봉은 저자에서 불쑥 만난 이 사내가 의외로 대단한 위인이라는 걸 짐작했다.
 그는 자신을 원명환(元明環)이라고 했다.
 원가장의 유일한 상속자라며 으스대기도 했다.
 장차 주인이 될 몸인 것이다.
 그러니 천만금을 선뜻 쓸 수 있을 만큼 부유한 자인 게 틀림없다.
 사내 원명환이 장팔봉을 안내한 곳은 내당 중에서도 후원 쪽에 치우쳐 있는 독립된 정자였다.
 연꽃이 가득한 연못과 태호석을 숭숭 박아놓은 석산을 끼고 있었는데, 난간에 앉아 울창한 대숲을 바라볼 수 있어서 좋았다.
 크고 작은 나무와 풀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고, 기화이초가 가득해서 마치 그윽한 골짜기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운치가 우러나기도 한다.
 장팔봉이 흐뭇해하는 걸 본 원명환이 아리송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돈을 마련하자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이오. 그러니 불편한 대로 이곳에서 잠시 쉬면서 기다려 주지 않겠소?”
 “좋시다. 그런 큰 거래를 하는데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할 수는 없지. 이박 삼일이 걸려도 좋으니 느긋하게 준비하시오. 나도 여기서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고맙소. 그럼······.”
 원명환이 인사를 하고 물러났는데, 그의 눈은 저쪽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흑마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잠시 보지 못하게 되는 것마저 서운한 모양이다.
 
 슬금슬금 시간이 꽤 흘러갔다.
 하지만 돈을 가지고 돌아오겠다던 원명환에게서는 아무 소식도 없었다.
 정자 난간에 걸터앉아 기둥에 등을 기대고 꾸벅꾸벅 졸고 있던 장팔봉이 잠꼬대인 것처럼 중얼거렸다.
 “슬슬 입질이 올 때가 되었는데? 내가 잘못 짚은 건가?”
 허여멀겋게 생긴 그 사내, 원명환이 어쩌면 정말 말에 미쳐서 무작정 달려든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말 한 필에 천 냥이 넘는 돈을 선뜻 내겠다는 미친놈이 있을 리가 없잖아?”
 무계획.
 그게 장팔봉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계획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부닥치면 다 길이 뚫리게 되어 있는 거야.’
 그런 뱃심으로 무림맹을 나온 건 믿는 구석이 있기도 해서였다.
 ‘패천마련 놈들이 죄다 바보가 아닐 텐데 가만히 있겠어?’
 그거였다.
 무림맹 풍향사의 군주가 움직이면 제일 먼저 그걸 알 놈들이 바로 패천마련의 개 후레자식들이라고 믿은 것이다.
 무림맹에 그것들과 내통하는 자가 있건 없건, 그까짓 건 장팔봉에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움직이면 무조건 입질이 온다.’
 그게 중요한 사실이고, 믿음이었다.
 그러면 그때 가봐서 상황에 맞게 적당히 처신하면 되는 것이다.
 제 몸뚱이를 미끼로 내던진 셈인데, 매복해 있으면서 놈들이 언제 올까 하고 기다리는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느긋해졌다.
 ‘그것들이 나를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 믿음에서 오는 배짱이고 여유이기도 하다.
 ‘왔다!’
 실눈을 뜨고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던 장팔봉이 질끈 눈을 감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는 비결을 이미 꿰뚫고 있는 그가 아닌가.
 장팔봉은 조금 전과는 다르게 흔들리고 있는 대나무 숲을 보았고, 바람결에 실려 있는 이질적인 냄새를 맡았던 것이다.
 그건 거의 차이가 없을 만큼 극히 미약한 징후였는데, 예민할 대로 예민해져 있는 장팔봉의 감각은 그 실낱같은 징후를 놓치지 않았다.
 절대로 지나쳐 보내는 일이 없다.
 그의 신경들이 올올이 곤두서서 파르르 떨었다.
 이제는 공기의 흐름까지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장팔봉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난간에 비스듬히 기대앉아서 낮게 코를 골고 있었다.
 품에 안고 있던 칼이 스르르 미끄러져 떨어지더니 바닥에 닿았다. 그러자 손잡이가 딱 잡기 좋을 만큼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잠결에 그렇게 된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일이었다.
 잠시 주춤했던 기운이 다시 움직이는 걸 피부로 느끼며 장팔봉은 내심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병신들.’
 들켰다는 것도 모르고 저렇게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꼴들이 우습다.
 자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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