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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패왕투 [E]

패왕투 1권(1)

2019.08.12 조회 747 추천 4


 <시작하면서>
 
 
 돌이켜보니 꽤 많은 세월이 지났고, 꽤 많은 이야기들을 세상에 선보였다.
 ‘몽검마도(夢劍魔刀)’를 시작으로 최근의 ‘불선다루(不善茶樓)’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써냈던 이야기들에 대하여 나는 몇 가지 자부심과 부끄러움을 가지고 있는데, 자부심 중의 하나가 늘 새로운 시도를 해보았다는 것이다.
 그건 그동안 꾸준히 내 글 스타일과 이야기 구조의 변신을 모색했다는 것도 될 것이며, 더 나은 것을 쉬지 않고 추구해 왔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불선다루를 끝낸 지금, 또 다른 스타일의 이야기를 독자제현께 선보이고자 한다. 바로 이 글, ‘패왕투(覇王鬪)’다.
 이 글은 ‘복수’라는 전형적인 무협의 테마를 큰 줄기로 하지만, 그것을 이끌어가는 것은 로맨스적인 코드가 될 것이다.
 강렬한 주인공이 있고, 막강한 원수가 존재하며, 그들 사이에 몇 명의 여인이 있다. 그래서 컬트적인 폭력과 로맨스의 달콤 쌉쌀함이 공존하는 것.
 이것이 내가 쓰고 싶었던 것이다.
 
 무협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주인공은 매력이 없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무협도 인간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어찌 고민과 갈등이 없을 수 있겠는가.
 나는 터미네이터 같은 기계 인간을 묘사하고 싶지 않다. 뜨거운 감정을 가지고 있는 차가운 인간을 그리고 싶다.
 그래서 이 글에서의 주인공은 고민도 하고 갈등도 하면서 변해갈 것이다. 그것을 매력없는 일이라고 한다면······
 할 수 없다. 그래도 나는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갈 테니까.
 그럼 과연 어떤 이야기가 될 것인가?
 자, 그것이 궁금한 분들은 지금부터 함께 이 이야기 속으로 여행을 떠나 보도록 하자.
 
 ***
 
 시간이 흐르거나, 다른 곳에 살거나, 죽었다고 해서 원한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사랑도 그와 같지.
 때문에 가장 지독한 원한, 그리고 가장 지독한 사랑, 그건 서로 같은 거야. 나를 미치게 하거든.
 
 
 
 
 
 제1장 미안해······.
 
 
 
 
 
 나의 삶을 채우고 있는 것은 절반의 절망과 절반의 증오다.
 나는 그것을 낙인(烙印)처럼 간직하고 산다.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두려워하지 않는다.
 더 이상 절망하지 않는다.
 다만 싸늘한 살의(殺意)를 은밀히 키우고 있을 뿐이다.
 굶주린 늑대처럼.
 
 ***
 
 비명 소리.
 가슴을 후벼 파는 처절한 단말마와 고함 소리들.
 병장기 부딪는 날카로운 소음.
 불 냄새.
 전각이 으르렁거리며 무너지는 소리.
 사부는 말이 없다.
 나도 말을 하지 않는다.
 청풍헌(淸風軒).
 사부의 거처.
 평소에는 이곳에 아무도 출입하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은 다섯 사형이 있고 내가 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텅 빈 것 같다.
 “으아악!”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또 한 번의 참혹한 비명.
 “나는······.”
 사부가 비로소 어눌하게 입을 뗀다.
 “어쩌면 가슴 졸이며 이날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생각보다 빨리, 그리고 강력하게 다가왔다는 것이 문제다.
 나는 사부가 그래서 이처럼 절망하고 있다고 짐작한다. 사부에게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까.
 “아버지!”
 문짝을 걷어차고 뛰어드는 한 소녀.
 붓 대신 검을 움켜쥐고 있다.
 “아버지! 마지막 방어진이 곧 무너질 거예요!”
 그녀가 겁에 질린 얼굴로 소리치지만 사부는 돌아보지 않았다. 내 눈을 붙들고 있을 뿐이다.
 사부와 마찬가지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다섯 사형들의 얼굴에 비통함이 더해진다.
 성미가 불같은 둘째 사형. 검을 쥐고 있는 그의 손이 푸들푸들 떨리고 있다.
 그들을 보고, 밖에서 들리는 처절한 비명 소리를 듣지만 두렵지는 않다.
 죽는다는 것. 내가 언제는 삶에 가치를 둔 적이 있었던가.
 돌이켜 보면 사부의 손에 이끌려 이곳에 오기 전까지의 내 삶은 매일매일 죽음과 직면하는 것이었다.
 지난 삼 년 동안, 사부와 사형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그런 삶을 잊고 있었다.
 내 삶이라는 것도 이처럼 행복하고 안락할 수 있다는 걸 처음 느꼈을 때의 어리둥절함.
 지금 나는 그 어리둥절함으로 나에게, 사부와 사형들에게 닥친 이 비극을 바라볼 뿐이다.
 안타깝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그리고 사저의 죽음을 예감하기 때문이다.
 나를 직시하는 사부의 볼이 창백해졌고, 주름살이 갑자기 배는 더 늘어난 그 얼굴 전체가 푸들푸들 떨리고 있다.
 사부가 당신의 폐부를 토해내듯이 힘겹게 말했다.
 “내가 달려온 곳은 여기까지다.”
 나는 말하지 않는다. 부릅뜬 눈으로 사부의 얼굴을, 흔들리는 눈을 노려볼 뿐이다.
 분을 애써 참고 있는 사형들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하지만 그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사부의 시간인 것이다.
 사형들은 그럴 각오가 이미 되어 있었다.
 삶에 대한 애착은 버렸다. 오직 그들이 사부와 함께 은밀히 지켜왔던 한 가지 일에 대한 집념이 있을 뿐이다.
 사부가 그 일에 대해서 비로소 말한다.
 “외워보아라.”
 “사부님······.”
 “시간이 없다.”
 마지막 순간이 왔다.
 나는 떨리는 음성으로 조용조용하게 그것을 외운다.
 얼마나 외우고 또 외웠던 것인가.
 늘 인자하고 따뜻하게 나를 감싸주었던 사부가 그것을 외우게 했을 때만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처음으로 사부에게 매를 맞았다. 한 구절을 틀릴 때마다 종아리를 한 대씩 맞았고, 그때마다 엉엉 울었다.
 아픔 때문이 아니다.
 맞는 일이라면 어렸을 때부터 밥 먹듯이 해온 내가 아니던가.
 몽둥이로 두들겨 맞으면서도 한 덩이의 찬밥을 악착같이 뜯어 먹던 나다.
 그런 내가 사부의 회초리에는 견디지 못하고 울었다.
 사부를 흡족하게 하지 못하는 나의 어리석음이 분해서 운 것이다.
 고작 스무 쪽 남짓한 그 책을 처음 외웠을 때는 오십 대를 맞았다.
 그리고 열흘 뒤에는 다섯 대를 맞았고, 보름이 지났을 때 나는 비로소 한 대도 맞지 않을 수 있었다.
 그때의 기쁨은 나를 미치게 할 만큼 컸다. 활짝 웃으며 안아주던 사부님 때문이다.
 내가 드디어 사부님을 기쁘게 해드렸다는 것. 그건 세상의 그 어떤 상보다 나를 들뜨고 황홀하게 했다.
 이제 그 책을 사부와 사형들 앞에서 다시 한 번 외운다.
 내 음성은 떨려 나오고,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틀리고 싶다. 그래서 사부님이 든 회초리를 맞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 그게 나를 더 슬프고 화나게 했다.
 마지막 구절은 터져 나오는 울음 때문에 알아들을 수 없는 웅얼거림이 되고 말았다.
 “장하다.”
 사부의 눈에도 물기가 가득 고였다.
 “장하다.”
 다시 한 번 말하고, 나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코에 익숙한 사부의 냄새. 나는 더욱 운다. 이제는 이 냄새를 맡을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막아라! 으악!”
 “크아악!”
 병장기 부딪는 소리. 비명 소리.
 그것이 점점 청풍헌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너희들은? 할 말이 없느냐?”
 사부가 나를 떼어놓고 비로소 다섯 사형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의 볼도 비통한 눈물로 젖어 있다.
 “사부님!”
 “저희는 사부님과 마찬가지로 이날, 장렬하게 죽을 바로 이날을 기다려 왔습니다!”
 그들이 한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리고 대사형이 내 손을 잡았다.
 “막내야, 너에게 우리 모두의 삶과 사문의 한을 떠넘겨야 하는 내 마음이 견딜 수 없이 아프구나.”
 “대사형······.”
 지난 삼 년 동안 그는 나에게 큰형 같은 존재였다. 때로는 아버지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늘 엄격하게 대했지만 그 속에 깃들어 있는 따뜻한 애정을 어찌 잊을 수 있을 것인가.
 그가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나는 비로소 내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일들을 현실로 느낀다. 싫어진다.
 이렇게 만들고 있는 바깥의 저 알 수 없는 자들에게 증오가 불붙어 오른다.
 옛날이야기를 구수하게 해주던 이사형과 꿀밤을 때려가며 무공을 가르쳐 주던 삼사형······.
 다섯 사형들을 바라보는 내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린다.
 넷째 사형은 늘 말이 없었다. 마주치면 그저 빙긋 웃었을 뿐인데, 때로는 지나가면서 슬쩍 볼을 꼬집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심통을 부렸지만, 무뚝뚝한 넷째 사형이 마음속으로 얼마나 나를 좋아하는지 너무 잘 알았다.
 그리고 나와 제일 잘 놀아주던 다섯째 사형. 그는 이제 열아홉 살이다. 한창 꿈과 희망에 부풀어 있는 그가 죽어야 한다는 게 너무 가슴 아프다.
 그것도 나 때문이라니······.
 “막내야······ 미안해······.”
 그가 내 손을 잡고 미안하다고 말한다.
 미안하다니, 그 말은 내가 해야 하는 말 아닌가.
 “사제, 미안해······.”
 나와 눈이 마주친 사저도 그렇게 말한다.
 비로소 온 세상이, 내 영혼마저도 사정없이 떨리고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녀의 말을 온몸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네 마음을 뿌리쳐서 미안해. 네 사랑을 외면해서 미안해.
 미안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가 끝이다.
 “컥!”
 의지와 상관없이 한 모금의 선혈이 토해진다. 앞자락을 적시는 붉은 피.
 사부는 꼼짝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한다.
 “우리 모두의 삶은 여기서 끝난다. 그게 운명이다.”
 나는 사부의 말을 아주 잘, 화가 날 정도로 명확히 이해하고 있다.
 사부가 말하는 ‘여기’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 지금 이 시간도 아니고, 지금 이 공간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분노와 절망, 안타까움과 슬픔으로 뛰고 있는 내 가슴속이다.
 우르르르―
 가까운 곳에서 전각 무너지는 소리가 우렛소리처럼 들려왔다. 담 밖에 있는 낙화각(落花閣)이다. 불길에 휩싸였던 그것이 기어이 재가 되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이곳에서 가장 아름답고 오래된 전각. 그것이 사라졌다.
 “받아라.”
 사부가 품속에서 한 권의 낡은 책을 꺼내 사저, 기련화(奇蓮花)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우리 사형제들 중 경공신법의 조예가 가장 뛰어난 사람이다.
 사부는 하나뿐인 자신의 딸을, 내 첫사랑을 미끼로 삼으려 하고 있다. 오직 나를 안전하게 도피시키기 위해서.
 책.
 나는 사저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들고 있는 그 책을 본다.
 그동안 외우고 또 외워서 이제는 그 내용 하나하나가 머리 속에 새겨져 버린 그것.
 
 <구양진결(九陽眞訣).>
 
 “왜!”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나의 고함 소리에 내가 놀란다.
 “왜 나입니까? 왜 나 혼자 살아야 하는 겁니까?”
 “내가 이 진결을 너무 늦게 얻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부를 노려본다. 사형들과 사저의 죽음을 보면서 나 혼자 살아야 한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다. 나도 그들과 함께 죽고 싶다.
 하지만 사부는, 사형들과 사저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왜 사부나 사형들은 그 책을 가지고 달아나지 않는 겁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소용없다.”
 사부가 내 속을 들여다보았다는 듯, 그 궁금증에 대한 대답을 해주었다.
 “우리의 희망은 바로 이 책 한 권에 있다. 그건 삶보다 무겁고 죽음보다 큰 의미다. 하지만 네 사형들은 더 이상 이 책을 통해 희망을 실현할 수 없다. 그러니 죽음이 오히려 그들을 편하게 해줄 테지.”
 사부의 말속에 진한 후회와 한탄이 섞였다.
 “그들은 그동안 너무 많은 것을 배웠고, 이제는 버릴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더 말할 것도 없지. 네 사형들과 나는 그동안 배우고 익힌 무공 때문에 이 책을 익힐 수 없단 말이다.”
 사부의 얼굴에 자조적인 웃음이 스쳐 갔다.
 “하지만 너는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여기에 와서 익힌 무공을 모두 버릴 수 있다. 잊어야 구양진결을 대성할 수 있는 것이다.”
 사부는 수십 년 동안 은밀히 천하를 뒤져서 가까스로 이 책을 찾아냈다고 했다. 삼 년 전이다.
 그리고 돌아오는 도중 길에서 나를 주웠다.
 나는 그때를 기억한다.
 허겁지겁 상한 음식을 먹은 탓에 심한 복통을 일으켰고, 아무도 돌보아주는 사람 없이 사흘을 앓다가 죽어가는 중이었다.
 저잣거리의 지저분한 골목 구석에 버려진 병든 개새끼.
 나는 그것과 다를 바 없이 몸을 웅크린 채 끙끙거리고 있었다.
 열두 살의 짧은 삶을 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것을 익히기 위해 지난 삼 년 동안 공을 들였다. 그리고 비로소 알게 되었지. 모두 다 허무한 짓이었다는 걸 말이다.”
 사형들도 마찬가지라는 걸 나는 억지로 이해한다.
 나는 그동안 배운 공부가 일천하니 그것들을 버릴 수 있을 것이라는 말도 이해한다.
 하지만 왜?
 “이것은 구양무존(九陽武尊) 곽부경(郭釜慶)이 남긴 비급이다. 이 안에는 그가 얻은 평생의 심득이 담겨 있다.”
 나는 구양무존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가 일백 년 전 무신(武神)으로 불리던 절대고수였다는 걸 어찌 알겠는가. 그가 독보강호(獨步江湖)하여 홀로 천하를 평정했고, 아직까지 그만한 자가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는 걸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이름은 이제 내 머리 속에 새겨졌다.
 사부의 말을 들으며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천목산(天目山) 오운장(梧雲莊)의 장주, 탈혼비검(奪魂秘劍) 기철목(奇鐵木).
 절정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래전부터 강호에 고수로 이름 높았던 사부와 당신이 공들여 키워낸 사형들.
 그들은 구양무존의 진결을 체득해야만 할 어떤 이유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과도 바꿀 만큼 절박한 것이리라.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사부는 물론 사형들도 지난 삼 년 동안 나에게 한마디도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사부에게는 막내 제자, 사형들에게는 막내 사제였을 뿐이다. 응석받이였다.
 그들은 어려서 부모에게 버림받고, 거지가 되어 저자를 떠돌다가 죽어가던 내 처지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그건 곧 애정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열다섯 살이 된 오늘까지, 지난 삼 년 동안 이곳 오운장에서 사부와 사형들의 보살핌과 관심을 받으며 마음껏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었다.
 그게 다였다.
 어쨌든, 나는 사부가 어쩌면 크나큰 야망을 가졌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추측한다.
 자신의 야망이 화를 불러왔고, 그것을 뉘우쳤을 때는 이미 늦은 것이리라.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비통하던 사부의 얼굴이 갑자기 근엄해졌다.
 모든 소음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고 느낄 만큼 나를 사로잡는 사부의 눈과 표정은 바위처럼 딱딱하고 무서웠다.
 그가 천천히 말했다.
 “홍화(弘和)의 누명을 벗기고 그것의 바른 이념을 반드시 세워야 한다. 나는 틀렸다. 그래서 너에게 그 짐을 물려준다.”
 “홍화?”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사람 이름인가? 이름이라기엔 좀 어색하다.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야말로 사부가 나를 택한 가장 큰 이유라는 걸 어렴풋이 짐작한다. 그 말을 할 때 사부의 눈이, 입술이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구양무존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처럼 홍화가 무엇인지 조금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해야 할 일이 어떤 건지는 이제 알았다.
 사부가 왜 모두를 희생시키면서까지 나를 살리려고 하는 건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은 여기서 끝나 버리지만 그들의 영혼은 ‘구양진결’ 속의 한 글자 한 글자에 맺혀서 내게로 넘어왔다.
 나는 이제 내가 아니다.
 “사제······.”
 유일한 사저(師姐).
 처음 눈뜬 내 사랑.
 그녀가 떨리는 음성으로 나를 부른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부탁해······.”
 그 한마디에 들어 있는 천 가지, 만 가지의 뜻을 나는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알아듣는다.
 “으악!”
 문밖에서 다시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와 나의 상념을 깨뜨렸다.
 “아버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사부를 한 번 바라본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검을 쥐고 달려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잠깐 머뭇거리다가 다시 한 번 말한다.
 “미안해······.”
 떨리는 그녀의 입을 보면서 나는 웃었다. 최대한 활짝 웃으려고 애쓴다.
 하지만 빠르게 일그러지고 경련하는 차가운 내 입술을 겨우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받아라.”
 사부가 금낭(錦囊) 한 개를 불쑥, 내밀었다.
 “백 알의 벽곡단이 들어 있다. 그걸 다 먹을 때까지는 절대로 나오지 마라.”
 “······?”
 나는 사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대신 목청껏, 분노를 실어서 부르짖었다.
 “사부! 저놈들은 누구입니까?”
 번쩍!
 대답 대신 눈앞에서 창백한 빛이 쏟아졌다. 그리고 가슴을 관통하는 서늘한 기운. 심장을 아슬아슬하게 비껴 나간 그것.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이 정수리로 치닫고, 나는 사부의 소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 빛의 정체를 생각했다.
 ‘유성비검(流星秘劍)!’
 소매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한 자루의 단검. 그것이 유성비검이다.
 사부의 최대 절기.
 유성처럼 빠르며 정확하고 무자비하다.
 사부에게 탈혼비검(奪魂秘劍)이라는 별호와 함께 평생의 명예를 안겨준 그 은밀한 검격.
 그것이 이 절박한 순간에 내 가슴을 꿰뚫었다는 걸 믿을 수 없다.
 덜컹!
 바닥이 푹 꺼진다.
 “오늘을 잊지 말라는 뜻이다.”
 사부의 말이 귓속으로 파고든다.
 ‘오늘을 잊지 말라는 것······.’
 그 말의 의미는 명백하다.
 나는 마지막으로 사부의 안타까운 눈길을 바라보며 어둠 속으로 꺼져 들어갔다.
 좌우의 어깨가 꽉 낄 만큼 좁은 공간.
 수직으로 뚫린 그것 속으로 빠르게 미끄러져 내려간다.
 쿠앙!
 쿠르르르―
 천지를 진동시키는 폭음과 함께 지진이 일어난 듯 세상이 요동을 쳤다. 머리 위에 쏟아져 내리는 흙과 바윗덩이들.
 나를 빨아들인 어둠이 그것들로 채워졌다.
 사부는 마지막 순간에 청풍헌에 설치해 놓은 폭약을 터뜨려 버린 것이다.
 
 
 
 
 
 제2장 그리고 나는 짐승이 되었다
 
 
 
 
 
 콰앙!
 우르르르―
 엄청난 폭음과 함께 그토록 아끼던 청풍헌이 무너졌다.
 탈혼비검 기철목.
 그의 노안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눈길이 닿는 곳이 모두 피바다였다.
 걸레처럼 찢겨 흩어져 있는 수하들의 참혹한 주검이 즐비하다.
 “기철목! 다 끝났다!”
 흑의복면인이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들어 겨누며 소리쳤다.
 눈앞에 버티고 서 있는 스무 명의 흑의복면괴한들. 그들을 노려보는 오운오걸(梧雲五傑)의 눈에 분노의 광망이 이글거렸다.
 “내가, 이 기철목이 고작 이따위 암습에 무너질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냐?”
 “흐흐흐, 오운장이 이 지경이 되도록 겁먹은 개새끼처럼 꼬리를 말고 숨어 있던 그 기철목 말이냐?”
 “으음―”
 “비급을 내놓아라. 그러면 너의 늙은 목숨은 살려주마.”
 “복면을 쓰고 있다고 해서 내가 네놈을 모를 줄 아느냐? 이 한은 저승까지라도 가지고 갈 테다.”
 “흐흐,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그런 말을 지껄인단 말이지?”
 음침하게 웃은 복면인이 소리쳤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이야압!”
 복면인의 수하들보다 오운오걸과 한 소녀, 기련화가 먼저 분노의 외침을 터뜨리며 달려나갔다.
 다섯 방위로 부챗살처럼 퍼져 나가는 그들의 중앙에 그녀가 있다.
 “이얍!”
 기철목도 목청이 터져라고 외치며 흑의복면인에게 부딪쳐 갔다.
 쩌르릉―
 복면인의 검에서 쇠 구슬 굴리는 소리가 났다. 검에 맺혀 있는 기운이 대기를 두드리는 소리다.
 번쩍!
 기철목의 소매 속에서 튀어나온 한줄기 창백한 빛이 그것을 거침없이 가르고 뻗어나갔다.
 유성비검.
 “흥!”
 복면인의 검이 망설임없이 그것을 끊었다. 따앙! 하는 맑고 높은 울림. 그리고 연이어 쩌르릉거리는 소리가 허공을 뒤흔든다.
 오운장의 다섯 제자와 기련화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악귀, 야차들이 되었다.
 그들의 검격이 스무 명의 흑의괴한들을 맞아 뇌전처럼 흐른다.
 따다다당―
 이글거리는 불길을 찢어내는 사나운 검기.
 여섯 개의 풍뢰검(風雷劍)이 휩쓸어가는 곳에 스무 명의 괴한들이 있다.
 그들이 펼친 구궁연환검진(九宮連環劍陣)은 거대한 늪이었다. 그것이 분노에 사로잡힌 오남일녀의 검격을 남김없이 빨아들인다.
 그리고 뻗어 나오는 스무 가닥의 뼈 시린 검기.
 슈아아아―
 허공을 조각조각 가르는 그것의 예리함 앞에서 오운장의 제자들은 주춤거리며 밀렸다.
 더욱 옥죄어드는 검진. 이리저리 닥치는 대로 부딪치며 몸부림치는 여섯 젊은이의 검이 그 속에서 점점 빛을 잃어갔다.
 “연화야, 가라!”
 기철목의 절박한 외침 소리.
 “아버지!”
 힐끔 돌아본 소녀, 기련화가 목청이 터져라고 외쳤다.
 늙은 아버지의 목을 꿰뚫고 있는 검. 기철목이 두 손으로 그것을 힘껏 움켜쥔 채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흑의복면인이 다급하게 소리치고 힘껏 검을 흔들었다.
 파아―!
 기철목의 목이 좌우로 터져 나가고, 그의 머리통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뜨고 있다.
 “사부님!”
 피를 토하며 외친 다섯 제자들이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사방으로 흩어졌던 그들이 일제히 한곳으로 뛴다.
 한 덩어리가 된 기철목의 다섯 제자들이 피눈물을 쏟아내며 검을 휘둘렀다.
 콰앙―!
 그들의 목숨을 도외시한 무모한 돌진에 검진의 북쪽 방위에 한줄기 혈로가 뚫리고, 기회를 노리고 있던 기련화가 온 힘을 다해 그 사이로 질주했다.
 “저 계집을 잡아!”
 기철목을 죽인 흑의복면인이 소리치며 훌쩍 몸을 날렸다. 그의 신형이 빨랫줄처럼 쭉, 늘어지며 허공에 긴 잔상을 남긴다.
 “우와아악―!”
 다섯 제자들이 단말마 같은 외침을 터뜨리며 그를 가로막았다.
 “비켜라!”
 파앙―
 흑의복면인이 허공에서 멈칫하며 검을 휘둘렀다. 허공이 몸부림치며 쪼개져 나간다.
 그리고 긴 채찍을 휘두른 듯, 한 가닥 맹렬한 검기가 그들을 한꺼번에 휩쓸었다.
 “크아악!”
 “아악!”
 동시에 터져 나오는 참혹한 비명.
 첫째와 둘째, 다섯째의 몸이 길게 베어져 피와 내장을 쏟으며 쓰러졌다.
 “이 악마!”
 셋째와 넷째가 피눈물을 뿌리며 미친 듯 달려들었다.
 “으하하하하―!”
 흑의복면인의 광소가 하늘로 치솟았다.
 검진을 펼쳤던 흑의괴한들은 더 이상 그들을 상대하지 않았다. 일제히 기련화의 뒤를 쫓을 뿐이다.
 기련화의 입가에 비통과 분노, 그리고 한줄기 득의의 미소가 스쳐 갔다.
 자신을 맹렬하게 뒤쫓아오고 있는 흑의괴한들.
 힐끔 뒤돌아본 그녀의 눈에 셋째 사형과 넷째 사형의 몸이 두 토막이 나 쓰러지는 광경이 보였다.
 빠드득!
 그녀가 부서지도록 이를 갈았다.
 친 오누이나 다름없이 절친했던 사형제들이다. 그들이 지금은 끔찍한 주검이 되어버렸다.
 그들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형체를 이제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저 참혹한 주검이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 주던 바로 그 사람들이라는 걸 믿고 싶지 않다.
 복수심이 그녀를 미치게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돌아갈 수 없는 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고작 이빨이 부서지도록 이를 갈 뿐이다. 그리고 최대한의 힘을 기울여 더욱 빨리 달려간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다려. 나도 곧 사형들의 뒤를 따라갈 거야.’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해졌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훌쩍, 몸을 날린 그녀가 드디어 오운장의 담을 뛰어넘었다. 눈앞에 보이는 어두운 소나무 숲을 향해 미친 듯 달려간다.
 눈앞이 횅하게 뚫렸다. 오운장 밖, 일백여 장 떨어진 곳에 있는 공터에 이른 것이다. 사방을 울창한 송림이 둘러싸고 있어서 언제나 아늑하고 고요했던 곳.
 기련화가 힐끔 그 공터 끝에 우뚝 솟아 있는 커다란 바위를 돌아보았다.
 ‘제발 잊지 말아줘, 우리 모두를. 그리고 내 모습을.’
 홀로 살아서 숨어 있을 막내에게 간절한 염력(念力)을 담아 보낸다.
 머리 위에서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나더니 눈앞에 검은 구름덩이 하나가 뚝, 떨어졌다.
 흑의복면인. 수하들보다 뒤늦게 쫓아온 그가 오히려 한발 앞질러 도착한 것이다.
 “흐흐흐, 더 이상 갈 곳은 없어. 내놔라.”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검을 들어 가슴을 가리킨다.
 기련화가 옷소매를 들어 눈물을 훔치고 이를 악물었다.
 그들이 청풍헌에서 뛰쳐나온 지 향 한 자루쯤 탈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모두 죽었다.
 그리고 오운장의 막내.
 사부와 사저, 사형들의 한을 온통 짊어진 소년은 은밀한 동굴 끝에서 그들을 보고 있었다.
 
 사저.
 나는 살아 있는 사람이 그녀 혼자뿐이라는 걸 믿을 수 없었다.
 겨우 여기까지 나를 보내기 위해서, 겨우 향 한 자루 탈 만큼의 시간을 벌기 위해서 사부와 사형들이 모두 희생당했다는 걸 아직 실감할 수 없었다. 상관없는 남의 일인 것만 같다.
 청풍헌 밑에 좁은 입구가 있던 동굴은 수직으로 두 장 남짓 떨어지다가 직각으로 꺾였다.
 나는 사부의 검에 가슴을 찔리고, 엉덩이가 바닥과 부딪치는 충격을 고통스러워할 새도 없이 급히 꺾어진 통로 속으로 몸을 굴려 넣었다.
 그리고 엄청난 굉음을 내며 돌무더기가 쏟아져 동굴 입구를 완전히 메워 버렸다.
 이제 동굴은 세상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청풍헌의 잔해를 다 들추어낸다고 해도 흙과 돌무더기로 메워져 버린 동굴 입구를 찾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구불구불 뚫린 습하고 좁은 굴 속을 나는 정신없이 기었다. 코앞에 손을 뻗어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지만 두려움 따위는 느낄 새도 없다.
 가슴을 움켜쥔 채 여기저기 부딪치고 긁히며 어디를 어떻게 기었는지도 모른다.
 저 앞에 실낱같은 빛 한줄기가 흐릿하게 보였다.
 밖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병장기 부딪는 소리들이 어슴푸레 들린다.
 “연화야, 가라!”
 사부의 마지막 음성을 어찌 잊을 것인가.
 대사형, 그리고 이사형과 삼사형······.
 비명 소리만으로도 그들의 최후를 알 수 있었다.
 나는 입술을 악문 채 흐느꼈다. 그러면서, 그들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차라리 다행스럽다고 생각했다.
 엉금엉금 기어서 드디어 지하 암도(暗道)의 끝에 이르렀다.
 커다란 바위로 가로막혀 있는데, 땅 위로 솟은 바위틈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손가락 한 개가 들락거릴 만한 그것이 바위 아래 뚫려 있으니 밖에서는 아무리 눈이 밝은 자라고 해도 발견할 수 없다.
 나는 가슴에 난 상처의 고통마저 잊은 채 그 작은 틈에 눈을 붙였다.
 울창한 송림과 텅 비어 있는 공간. 잡초가 무성하다.
 나는 비로소 내가 오운장을 빠져나와 사저와 둘이 놀곤 했던 송림 속의 공터 아래에 있다는 걸 알았다.
 이 바위는 사저가 몸을 숨기곤 하던 공터 끝의 바로 그 바위다.
 그리고 저 앞에서 사저가 복면의 괴한에게 가로막히는 걸 보았다.
 “이, 악마! 비급이 그렇게 탐나면 나를 죽여! 죽이고 빼앗아 가라!”
 사저의 울부짖음 같은 호통 소리가 비수가 되어 나의 가슴을 찌른다.
 후드득거리며 스무 명의 복면괴한들이 주위에 떨어져 내렸다. 사저에게는 더 이상 빠져나갈 길이 없다.
 “이얍!”
 나는 땀과 눈물로 흐려지는 눈을 부릅뜨고 사저가 비호처럼 흑의복면인에게 달려드는 걸 보았다.
 쨍!
 어두운 숲을 떨게 하는 날카로운 쇳소리.
 사저의 검격은 복면괴한의 몸 근처에도 이르지 못했다. 빙글 돌며 가볍게 그녀의 검을 쳐올린 복면괴한이 한 발을 불쑥 내딛어 다가서며 왼손을 뻗는 게 똑똑히 보인다.
 펑―!
 기격(氣擊).
 사저가 그 자의 일장을 감당하지 못하고 훌훌 날려간다. 그녀의 가슴이 움푹 함몰되어 있고, 입에서 뿜어내는 선혈이 허공에 긴 궤적을 남긴다.
 쿵!
 던져진 통나무처럼 이 장이나 날려가 떨어진 사저의 몸이 몇 바퀴 구르더니 멎었다.
 그녀의 온몸에 잔경련이 일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린다. 빠르게 초점이 사라져 가는 그녀의 눈이 마지막으로 붙들고 있는 곳.
 공터 끝의 바위 아래였다.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나는 주먹을 피가 나도록 깨물어서 겨우 비명을 참았다.
 저 앞에 있는 사저의 얼굴이, 그녀의 간절한 눈길이 마주 보인다. 울컥, 울컥, 피를 토해내면서도 눈물 가득한 그녀의 눈이 웃고 있다.
 ‘이게 다야. 너를 위해서 더 이상 해줄 게 없구나.’
 그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감긴다. 잠잠해진다.
 “찾았다!”
 숨이 끊어진 사저의 품을 함부로 뒤진 복면인이 기어이 구양진결을 꺼내 높이 쳐들었다.
 “크하하하하―!”
 그의 광소가 우르릉거리는 하늘 끝까지 치솟아올랐다. 그리고 그에 화답하듯 후드득거리며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내 폭우가 되어 세상을 뒤덮어 버린다.
 콰아아아―
 
 일백 알.
 사부가 준 금낭 안에는 일백 알의 벽곡단이 들어 있었다.
 하루에 그것 한 알을 먹고 버틴다는 건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사흘 만에 위와 창자는 등에 달라붙어 버렸다.
 하지만 해내야 한다.
 나는 눈앞에서 죽어갔던 셋째 사형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고, 귀를 찌르던 사형들과 사저, 사부님의 비명 소리를 떠올렸다.
 그들을 생각하면서 또 한 알의 벽곡단을 바닥에 고여 있는 물과 함께 씹어 먹는다.
 이것은 사부님이다.
 내일은 사저를, 그녀의 소중한 영혼을 씹어 먹을 것이다.
 바드득, 바드득.
 이빨에 눌려 으깨지고 침과 함께 천천히 녹아가는 벽곡단.
 나는 그것을 목구멍에 넘기기 전에 악착같이 씹고 또 씹었다.
 뜨거운 눈물이 쉬지 않고 흘러내렸다. 겨우 탈수 증세를 면했을 뿐, 형편없이 쇠약해진 몸 안 어디에 이처럼 많은 눈물이 감추어져 있던 건지 불가사의하기만 하다.
 그들은 사흘 동안이나 폐허를 샅샅이 뒤져 자신들이 살해한 자들의 주검을 모두 끌어 모았다. 흩어진 뼈와 살점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그것들을 내가 숨어 있는 동굴 앞, 공터에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나는 한 덩어리가 되어 불타오르는 사부님과 사형들의 주검을 피눈물을 뿌리며 훔쳐보았다.
 지글거리고 기름을 뚝뚝, 떨어뜨리며 일그러져 가는 그것들을······.
 그리고 사저. 기련화.
 그녀는 겨우 열여덟 살이었다.
 그 꽃보다 아름답고 고귀한 몸뚱이가 숯덩이로 변해가는 것을 바위 밑에 뚫려 있는 작은 숨구멍을 통해 똑똑히 보았다.
 눈을 부릅뜨고 그것을 지켜보며 거듭거듭 맹세했다.
 기다려라. 기다려라. 내가 세상에 다시 나올 때, 그때까지 제발 너희들의 하나뿐인 목숨을 소중하게, 잘 간직하고 살아 있어라.
 반드시 살아 있어라.
 
 나에게 겨우 향 한 자루 탈 만큼의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사부님과 사저, 사형들이 그렇게 죽었다는 게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재가 되어 바람에 날려가는 그들의 살과 피를 보면서.
 하얀 뼛조각으로 남아 쌓여 있는 그들의 흔적을 보면서.
 사부님과 사형들은 내가 이 비밀 통로 끝까지 기어오는 시간을 그렇게 예상했던 것이다.
 사저가 그 많은 길을 놔두고 굳이 이 바위 앞 공터로 도망쳐 와 죽은 것도 이제는 이해한다.
 나에게 보여주려던 것이다.
 잊지 말라고 온몸으로, 죽음으로 다시 한 번 말해준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이유.
 나를 숨겨주기 위해서였다.
 사저가 죽은 공터를 그들은 더 이상 수색하려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이곳은 오운장의 담 밖이었으니까. 그저 숲 속에 오롯이 비어 있는 백여 평의 공터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사저의 몸에서 원하던 비급을 찾아낸 뒤라 마음이 느슨해진 탓도 있으리라.
 그래서 오운장의 참극 속에서도 그 공터는 가장 안전한 장소가 되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숨구멍을 통해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똑똑히 지켜볼 수 있었다.
 사부와 사저, 그리고 사형들은 단지 그것을 원했던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사부가 남겨준 마지막 흔적인 가슴의 통증을 참으며 눅눅한 어둠 속에 누워 머리 속에 들어 있는 ‘구양진결’의 구결을 외우고 또 외우는 일이 다였다.
 진결(眞訣).
 무를 통해 지고무상한 깨달음을 얻은 자가 자신의 심득 중에서도 정수라고 할 비결을 기록해 남겨놓은 책이다.
 그것의 현묘한 이치를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사부가 그것을 나에게 준 이유는 너무도 잘 안다.
 나는 이것의 단 한 구절, 한 글자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가물거리는 정신 속에서도 꿈결처럼 구결이 떠올랐다.
 그것은 이제 내가 되었고, 사부와 사저와 사형들의 모든 것이 되었다.
 그렇게 내 정신 속에 깊이 뿌리 내려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놈.
 흑의복면인의 음성을 똑똑히 기억한다.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보름이 지났다.
 가슴의 상처에서 통증이 거의 사라졌고, 그놈들이 비로소 떠났다.
 지독해도 보통 지독한 놈들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땅과 맞닿은 바위틈. 우묵한 그곳에 뚫려 있는 작은 구멍을 통해 낮과 밤을 구분하고, 숨을 쉬고 있다.
 다시 열흘이 지났다.
 가슴의 상처가 아물어간다.
 원흉들도 모두 떠난 것 같다.
 인기척이라고는 없다.
 밤이 되면 산짐승이 내려와 폐허 속을 어슬렁거리다 인골(人骨) 한 개를 물고 돌아가곤 할 뿐이다.
 나가고 싶다는 충동이 걷잡을 수 없이 일었다. 하지만 사부는 백일을 명령했다.
 일백 알의 벽곡단이 다 떨어져야 나갈 수 있다.
 나는 사부님의 그 마지막 명령을 어겨서는 안 된다.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리고 또 닷새가 지났다. 참극이 있은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난 것이다.
 흐릿한 달빛 속에 몇 놈이 유령처럼 나타나 바위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없는 거지?”
 “한 달이 지났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걸 보면 이곳에는 귀신밖에 없는 게 틀림없어.”
 “맞아. 숨어 있는 자가 있었다면 더 견디지 못하고 나왔을 거다.”
 그렇다. 그놈들은 나처럼 끈질기게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한 달 동안 버텨왔던 것이다.
 나의 존재를 그들이 아는지 모르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칫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갔더라면?
 등줄기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그래서 나는 더욱 숨을 감추고 웅크린다.
 세 놈이 주위를 한 번 돌아보고 훌쩍 몸을 날려 사라졌다.
 텅 빈 공허와 온전한 적막. 하지만 나는 여전히 숨을 감춘다.
 두 달이 더 지났다.
 다시 몇 놈의 기척이 바위 곁에 다가왔다. 몇 마디의 말을 소곤거리고는 사라진다.
 그때까지도 이놈들은 한 가닥 가능성을 의심하고 또 의심했던 것이다.
 보통 치밀하고 지독한 놈들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극도로 피폐해져 가는 육체와 정신을 악착같이 붙들고 또 참았다.
 이제는 죽음이 코앞에 보인다.
 눈을 뜨고 있어도 환상이 보이고, 정신이 흐려진다.
 이렇게 목내이(木乃伊:미라)가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럴 때마다 머리 위의 흙을 헤치고 밖으로 나가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마음속에서 아니, 내 영혼 속에서 울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벽곡단을 다 먹을 때까지 꼼짝하지 마!’
 사부의 호통.
 ‘사제, 너에게 이처럼 큰 고통을 주어서 미안하구나.’
 사형들.
 ‘미안해······.’
 그리고 사저의 울먹이는 그 음성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주문처럼 그 저주받아야 마땅할 책, 구양진결을 외고 또 외웠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벽곡단을 손에 쥐고 있다.
 부들부들 떨리는 내 손과 그 위에 놓여 있는 대추알만 한 벽곡단을 내려다본다.
 백일. 드디어 백일이 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짐승이 되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오운장은 끝났다. 세상에서 완벽하게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나에게 정이라는 걸 알게 해준 사람들.
 오운장의 다섯 준걸로 불리던 사형들도 끝났고, 남흑봉(南黑鳳)으로 불리던 그녀도 끝났다.
 삼 년 동안의 달콤했던 내 행복도 그렇게 끝나 버린 것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오래전부터 강호에 이름을 날렸던 사부, 탈혼비검 기철목도 끝났다.
 그는 부랑아가 되어 천하를 떠돌던 나를 거두어 사랑과 행복이라는 걸 알게 해준 은인이다.
 그때 나는 열두 살이었다.
 하지만 마음에 품고 있는 증오와 원망은 내 나이의 몇 배만큼 크고 깊었다.
 나를 버린 세상과 나를 멸시하는 사람들.
 나는 그들에게서 한 덩이의 차가운 밥을 얻으면서 한 덩이의 증오도 함께 받았다.
 사부는 그런 나를 구해주었고, 사형제들은 그런 나에게 정이라는 걸 알게 해주었으며, 사저는······.
 이제 그들은 모두 사라졌다.
 나는 가슴에 사부가 남겨준 상처를 가졌으며, 그들의 영혼을 씹어서 삼켰고, 그래서 그들은 내가 되었다. 나는 그들의 삶을 살아줄 것이다.
 
 ***
 
 “비급은 쓸모없는 종잇장에 지나지 않았다.”
 툭.
 “······.”
 마른 몸집에 칼날 같은 날카로움을 두르고 있는 사내는 제 코앞에 떨어진 낡은 책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구양진결(九陽眞訣).’
 오래되어 흐릿해진 그 표제의 글자가 눈을 찌른다.
 “가장 중요한 대목마다 훼손되어 알아볼 수 없다. 이것은 더 이상 구양무존 곽부경의 절세진결이 아니야! 너는 껍데기를 가져왔다!”
 ‘그렇다면 누가?’
 사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감쪽같이 속았다는 그 사실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박힌다.
 견딜 수 없는 치욕감으로 그가 어깨를 떨었다.
 그의 눈앞, 단상에 태산처럼 앉아 있는 중년의 거한 앞에서 사내는 더욱 위축되는 자신을 느껴야 했다. 풍기고 있는 위엄만으로도 만인을 억누르기에 부족하지 않을 장중한 기도를 지닌 인물.
 세상은 그를 무극검제라고 불렀다.
 무극검제(無極劍帝) 조작량(趙爵梁).
 그는 마흔네 살의 혈기가 넘치는 장한이다.
 호목(虎目)에 호안(虎顔). 호랑이의 기상을 지니고 있는 이 시대의 절대자 중 한 명. 그가 대전 높은 단 위에서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닥에 부복해 있는 사내를 노려보았다.
 하남성(河南省) 북쪽, 산동과의 경계 아래.
 복양현(濮陽縣) 와호산(臥虎山)에 있는 거대한 보(堡)를 강호에서는 지존보(至尊堡)라고 부르며 존경하고 두려워한다.
 사십대 중반의 나이에 이미 천하제일의 고수로 꼽히게 된 조작량의 성이기 때문이다.
 그는 현 무림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실질적인 지배자나 다름없었다.
 십사 년 전, 마지막으로 있었던 마교와의 이차 정사대전에서 그는 서른 살의 청년임에도 불구하고 백도의 군웅들을 이끌고 용감히 싸워 승리를 이끌어냈다.
 그 공로가 커서 오늘날 백도 제 문파의 장문, 명숙들은 물론 흑도의 마두, 괴수들도 그에게는 한 걸음 양보해 주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그로부터 십사 년이 지난 지금 지존보의 명성은 소림과 무당을 넘어서는 바가 있었다. 무림의 제왕이 기거하는 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스스로 절대불가침의 성역을 일구어낸 거인. 그 앞에 부복하고 있는 사내는 조작량을 위해서라면 죽는 걸 영광으로 여길 심복 중의 심복이었다.
 이십 년 전부터 추종(追蹤)과 정보 수집의 달인으로 이름을 날린 천리취향(千里取香) 서문표(徐門標).
 조작량보다 다섯 살이 많은 나이지만 그는 종이고 조작량은 주인이다.
 그 주인이 아무 소득이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고집스럽게 꾹 다문 그의 입이 네 생각은 틀렸다고 소리쳐 말하고 있다.
 그의 걸걸한 음성이 대전 가득 웅웅 울렸다.
 “오운장주 기철목에게는 딸 하나와 여섯 명의 제자가 있었다.”
 “마지막 놈은 받아들인 지 얼마 되지 않는 소년이었지요. 얼굴은 물론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불쑥 튀어나온 반발심.
 ‘아차!’
 서문표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주군 앞에서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다니······.’
 절망적인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의 두려움을 더 크게 하는 조작량의 무거운 침묵.
 서문표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진땀을 뚝뚝 떨어뜨리며 조심스럽게 제 말에 대한 변명을 했다.
 “보름 동안 폐허를 뒤지고 다시 두 달 동안 숨어서 지켜보았지만 그놈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살아 있다는 증거지.”
 주군의 대꾸에 서문표는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소년이었을 때부터 삼십 년을 모셔온 이 불같은 주인이 제 실수를 눈감아줄 모양이라는 안도의 한숨이다.
 하지만 또다시 이런 실수를 한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이다.
 “구양진결의 구결이 그놈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
 “추살대를 구성해라.”
 “존명!”
 “기한은 없다.”
 “······.”
 “죽었다면 그놈의 뼈를 가져와라. 뼈가 없다면 영혼이라도 붙잡아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서문표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의 머리 위에 조작량의 마지막 말이 무겁게 떨어졌다.
 “하지만 살려서 잡아오는 게 가장 좋겠지.”
 서문표는 자신이 모시고 있는 주인의 의중을 잘 안다.
 진결을 손에 넣거나, 그놈의 죽음이 확인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날 밤.
 지존보에서 서른 명의 고수가 바람처럼 달려나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십삼 년이 지났다.
 
 
 
 
 
 제3장 내 이름은 류(流)
 
 
 
 
 
 후욱, 후욱―
 뜨거운 숨결.
 멀리서부터 밀려온 파도가 바위를 때리고 하늘 높이 창백한 비말을 날린다.
 그것조차 닿지 못하는 천 길의 벼랑 위.
 그 위에서 한 사내가 뜨거운 숨결을 토하고 있었다.
 훌쩍 키가 커서 깡마른 몸이 더욱 말라 보인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큰 눈에 독기 같은 광채가 어려 있다.
 꾹 다문 입과 단단한 턱. 차돌처럼 박혀 있는 근육들뿐, 벌거벗은 몸엔 살이 없다.
 허리까지 늘어진 길고 거친 머리카락이 해풍에 마구 흩날린다. 깃대 끝에 매달린 깃발 같다.
 
 ―지나온 나의 삶은 고통이었고, 남아 있는 것도 그렇다!
 
 까마득한 절벽 위에 꽂힌 깃대 같은 사내.
 그 사내의 뜨거운 숨결이 저 넓은 바다를 향해, 저 높은 하늘과 세상을 향해 그렇게 소리치고 있는 듯했다.
 “이야아아―!”
 자기 안의 고통을 터뜨려 버리는 듯한 고함 소리.
 벌거벗은 사내가 벼랑을 박차고 몸을 던졌다.
 새처럼 하늘을 난다.
 아니, 바윗덩이처럼 떨어져 내린다.
 으르렁거리는 푸른 파도에 닿기 전까지 그는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다.
 삶의 고통도, 증오와 회한도 없는 절체절명의 공간.
 사내의 자유로워진 영혼이 그 공간 속을 유영한다.
 그리고 끝났다.
 꽝!
 등짝이다.
 어제까지는 배와 가슴이었는데, 오늘부터는 등짝으로 바꾼 것이다.
 검푸른 파도에 부딪친 그것이 으스러지는 것처럼 고통스럽다.
 바다가 퉁, 하고 그의 몸을 튕겨냈다. 그리고 다시 떨어지는 그것을 집어삼켜 버린다.
 뼈가 산산이 부서지고 살이란 살이 모두 흩어져 버리는 것 같은 고통.
 사내의 지독한 의지는 더 지독한 그 고통을 이기지 못했다.
 의식을 잃은 채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빠져든다.
 참지 못할 그 고통 위에 온몸을 짓이길 듯 압박해 오는 수압까지 더해지고 있다.
 
 “푸하―!”
 사내의 머리통이 불쑥 솟구쳐 나왔다. 넘실거리는 커다란 파도에 온몸이 실려 떠오른다.
 사내는 바다의 호흡 속에 저를 맡겨 버렸다. 손가락 하나 까닥일 수 없는 무기력함이 그를 떠민다.
 그리고 파도는 절벽의 커다란 바위에 그의 온몸을 내팽개쳤다. 다시 한 번 뼛속까지 부수는 듯한 고통이 밀려든다.
 
 산동(山東)에서 바다로 불쑥 튀어나온 반도의 북쪽.
 일 천리(一千里)의 거리를 두고 요동(遼東) 반도와 마주 보는 발해해협에 드문드문 섬들이 떠 있는데, 그중에서도 동쪽으로 뚝 떨어져 홀로 솟아 있는 고산도(高山島)라는 곳이다.
 배들도 오가지 않고, 바다를 건너는 물새들만 들러 잠시 쉬어갈 뿐인 천애의 고도.
 무인도인 그곳에 사내가 들어온 것은 칠 년 전이었다.
 세상의 아무도 그 세월을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다. 오직 사내와 바다와 갈매기와 섬만이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그 사내는 언제나 길을 버린다.
 길이 아닌 곳이 그에게는 길이다.
 돌아가면 완만하게 올라가는 구릉이 있건만 그는 거울 같은 절벽에 달라붙었다.
 그래서 그곳이 그에게는 길이 되었다.
 찢어지고 깨져 피를 철철 흘려대는 몸뚱이를 두 팔로 끌고 있다.
 세 호흡 동안 떨어졌던 천 길의 벼랑을 기어오르는 데에는 두 시진이 걸렸다.
 그의 몸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절벽을 물들이고, 뼈마디가, 힘줄이 부서지고 끊어지는 듯 고통스럽다.
 그는 죽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죽는 일은 쉬웠지만 그 다음에 이처럼 새롭게 태어나는 일은 너무나 힘들다.
 하지만 그는 하루도 이 일을 멈추지 않았다.
 매일 아침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신(神)이 되려는 것일까?
 이곳에 온 지 이 년 뒤부터 그와 같은 일을 시작하여 오 년이 흐르는 동안 단 하루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는 정말 제 껍질을 벗어버리고 초월적인 존재로 다시 태어나기를 꿈꾸는 건지도 모른다.
 헉헉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허공을 뜨겁게 달군다. 어깨를 들썩이며 내쉬는 숨이 풀무 같다.
 살아난 것이다.
 “이야아아―!”
 다시 절벽 위에 우뚝 선 그가 또 한 번의 부활을 기뻐하듯 웅장한 외침을 터뜨렸다.
 하늘을 향해서, 저 막막한 바다를 향해서 터뜨리는 포효 같은 것이다.
 매일매일 그렇게 바다를 향해 제 몸을 내던지는 동안 그의 몸뚱이와 그 안의 뼈와 힘줄은 무쇠처럼 단단해져 갔다.
 그렇게 다시 삼 년이 지났다.
 이 섬에 찾아오기까지 삼 년을 보냈고, 섬에 들어온 지 십 년이 지난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버린 세월은 모두 십삼 년이다.
 이제 그에게는 두려움이 사라졌다. 살고 죽는 것에 대한 의식의 구분도 없어졌다.
 셀 수도 없이 천 길의 절벽을 기어오르는 동안 온몸의 근육들은 그에게 언제나 최고의 힘을 낼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사람의 그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지구력과 집념이 절로 생겼다.
 그는 지치지 않는다.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까마득한 벼랑에 매달린 몸뚱이를 지탱해 주는 열 손가락. 그것이 쇠갈퀴처럼 단단해졌고, 그것의 힘이 바위를 부술 만해졌다.
 그 높은 곳에서 떨어져 파도와 부딪치는 몸뚱이의 충격마저 이제는 대단치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처음에는 절벽을 기어올라 가는 데 두 시진이 걸렸다. 그러나 지금은 향 한 자루 탈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제는 온몸으로 매달려 조금씩 전진하는 게 아니다. 두 발로 차고 두 손으로 몸을 이끄는 게 평지에서 달리는 듯했다.
 십 년.
 천애고도인 이 무인도에서 그 긴 세월 동안 자학하듯 스스로를 괴롭히며 살아온 세월의 보상이다.
 처음에는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운 삶이더니 이제는 일상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고통을 모르는 자가 되어버렸다.
 사문의 내공심법은 잊어버렸다.
 사형들의 가르침도 잊어버렸다.
 검법과 권법과 신법의 복잡한 규칙들도 다 잊었다.
 오직 그들의 영혼만을 잊지 않고 있을 뿐이다.
 그 대가로 그는 구양진결의 구결들에 대한 깨우침을 하나씩 갖게 되었다. 외우고 또 외우며, 조용히 앉아 생각하고 또 생각하자 바람이 바람을 이끌고 구름이 구름을 불러모으듯 그렇게 저절로 다가왔던 것이다.
 처음에는 흐리고 미약한 어떤 느낌이었는데, 지난 십여 년의 세월 동은 조금씩 안개가 걷히더니 이제는 명확한 의식이 되어서 그의 본능과 어우러졌다. 구양진결은 그렇게 그의 영혼 속에 뿌리내린 하나의 원리가 된 것이다.
 하나를 깨우치고 체득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 그 다음부터는 노력이 가져다주는 성과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나가 둘을 불러오고 둘이 셋, 넷을 끌어들이니 구양진결은 갈수록 빠르게 제 비밀을 스스로 벗었다. 그는 제대로 첫 단추를 꿴 것이다.
 지난 십 년 동안 매일매일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결과 지금 그의 근골의 강함은 무쇠와 같아졌다. 피부가 등갑(藤甲)처럼 질겨졌으며 정신의 투명함이 맑은 하늘과 같다. 그리고 가슴속에 품고 있는 원한은······.
 그리하여 그는 제가 버리고 온 그 세상으로 다시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걸 알았다.
 바다 앞에서, 저 막막한 수평선을 향해, 그 너머에 있을 세상을 향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포효를 했다.
 “기다려라! 이제 내가 간다!”
 
 ***
 
 세 개의 소나무 둥치를 나란히 붙여서 칡넝쿨로 묶은 것.
 배는 아니고, 뗏목이라고 할 수도 없는 그 초라한 물건 위에 그가 팔베개를 하고 벌렁 누워 있었다.
 파도가 몸 위를 넘실거리고, 갈매기가 가슴에 내려와 날개를 쉰다.
 황동빛으로 그을린, 비쩍 마르고 단단한 몸이 사람의 그것으로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어떻게 보면 죽은 것 같기도 했다. 숨을 쉬지 않는 것 같으니 그렇다.
 하지만 그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항해를 위해 숨 쉬는 것마저도 조심할 만큼 체력을 아끼고 있을 뿐이었다.
 저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출렁거리는 바다.
 멈추어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제 길을 따라 쉼없이 움직이고 있다.
 너무 크기에 보이지 않는 움직임. 그는 눈을 감은 채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바다는 고여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강물처럼 흐르고 저 바람처럼 움직인다.
 하지만 하늘이 멎어 있는 것처럼 늘 고요하게 보인다.
 움직임을 감추고 흐름을 드러내지 않는 것.
 그것은 바다가 그 모든 것을 제 안에 담아둘 수 있을 만큼 크고 또 크기에 가능한 일이다.
 머리 속에 이미 지겹도록 외웠던 구양진결의 한 구절이 문득 떠올랐다.
 
 ―먼저 부드럽고 후에 굳세고, 먼저 느리고 후에 빠르며, 기운을 균일하게 조절하고 허실을 가르니 행동의 변화가 무쌍하다.
 하체가 온건하고 확고하며 동정(動靜)이 적합한바, 기의 흔들거림이 마치 물 위에 배가 다니는 듯하고, 정신을 집중하는 데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처럼 빠르게 정진한다.
 이를 일러 노자가 말하기를, ‘그것이 마치 용 같지 않은가’라고 했다.
 
 진결의 세 번째 장(章)에 들어 있던 구결인데, 책에서는 그 장을 ‘복룡접운(伏龍接雲)’이라고 했다.
 사내에게 아직까지 모호하게 남아 있던 구결이다. 하지만 망망대해에서 일엽편주보다 못한 세 가닥 나무토막에 의지하여 온몸으로 바다의 흐름을 느끼길 며칠째.
 저절로 그 의미가 가슴에 와 닿고 손발이 뜨거워졌다.
 마음과 몸을 삶과 죽음의 경계에 홀로 둥실 띄워놓고 이리저리 파도에 실려 떠돌다 보니 절로 바다의 호흡과 바다의 영성이 느껴진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동안 살갗을 태울 듯 뜨거운 해가 뜨고 지기를 열 번이나 했다.
 사내는 갈매기와 물고기를 붙잡아 생살을 찢고 그것의 체액을 빠는 것으로 갈증을 해소했다.
 점점 한계를 느낀다.
 하지만 그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두려움을 몰랐다.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지경이 된 지 오래다.
 그는 그것마저 잊었다.
 제 몸뚱이의 고통을 남의 것 바라보듯 관조한다.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게 아니라 덧없는 이 몸뚱이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는 것.
 눈을 감고 있으면서도 그의 의식은 명료했다.
 육체를 떠나 저 높은 곳에서 죽어가는 자신의 몸뚱이를 무표정하게 바라본다.
 또 다른 부활을 꿈꾸는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자신의 존재가 불사(不死)임을 확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표정하고 무감각하던 의식이 조금씩 흐려졌다.
 그리고 밤이 세상을 가려 버리듯 그렇게 사라진다.
 
 ***
 
 따뜻한 기운.
 언제 느껴보았던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부드러움과 안락함.
 그리고 자갈거리는 음성.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나른함 속에서 조금씩 깨어나고 있는 그의 의식이 제일 처음 들은 건 그 소리였다.
 그의 눈까풀이 바르르 떨며 움직였으리라.
 호들갑스런 사내아이의 외침이 아직 먹먹한 그의 의식을 두드려 깨웠다.
 “누나, 누나, 이리 와봐! 살아났어!”
 “얘는, 그렇게 떠들면 어떻게 하니? 아직 환자니까 조용히 해야지.”
 “아빠 말이 정말 맞았네? 히―”
 “아빠는 모든 걸 다 아셔. 아빠가 살아 있다면 살아 있는 거야. 죽었다고 박박 우긴 너는 바보야.”
 “누나도 죽었다고 했었잖아.”
 “언제 그랬니?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랬지.”
 “쳇, 그게 그거지 뭐.”
 귓속에 쟁쟁 울리는 낯선 음성. 그리고 늪 속에 빠진 듯한 무기력함.
 사내는 자신의 몸에 감각을 되살려보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여전히 육신은 그의 의식과 따로 떨어져 있을 뿐이다.
 손가락의 감촉이 돌아오지 않는다.
 가위눌린 것 같은 두려움과 고통 속으로 소녀와 사내아이의 짜랑거리는 음성이 메아리처럼 스며들고 있었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사람의 음성인가.
 사내는 온통 의식을 집중해서 귀를 기울였다. 그 음성을 조금이라도 더 듣고 싶은 마음이다.
 파도와 바람과 갈매기의 끼룩거리는 소리와는 다른 정감이 있다.
 ‘사람이라는 것······.’
 사내의 의식이 가만히 중얼거렸다.
 증오와 원망의 대상일 뿐인 그 존재에 대한 그리움 따위는 이미 다 잊었다고 믿었다.
 그런데 아직도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는 그것이 숨어 있었다.
 본능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외로움일 것이다.
 스스로 짐승이 되었다고 믿었는데, 몇 마디의 자갈거리는 음성 앞에서 불쑥 반가움을 느끼고 만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야 하는 건지, 동정해야 하는 건지 모호해진다.
 이마에 선뜻하고 축축한 느낌이 와 닿았다.
 느낌?
 사내의 의식이 화들짝 놀랐다.
 감각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마를 식히고 있는 물수건에서 비롯되었다.
 “열도 많이 내렸네.”
 신열로 미지근해진 수건이 치워지고 다시 차가운 새 수건이 이마를 서늘하게 했다.
 쩍쩍 갈라진 입술에도 감촉이 살아난다.
 따뜻한 국물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들었다. 맛은 아직 알 수 없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사내가 기억할 수 있는 날은 그게 전부였다.
 다음날, 사내는 비로소 손가락의 감각을 찾았고, 눈을 떴다.
 그의 의식도 어제보다 더 또렷하고 맑아졌다.
 그는 자신이 낡고 짠 냄새가 배어 있는 침상에 누워 있다는 걸 처음 느꼈다.
 주위를 돌아본다.
 눅눅한 비린내가 떠도는 어두컴컴한 공간.
 얼기설기 대나무를 엇대어놓은 창문으로 흘러드는 햇빛.
 그것이 침침한 어둠 속에 몇 가닥의 하얀 줄을 걸어놓고 있었다.
 구석에는 그물이며 부러진 키와 녹슨 작살, 닻, 덕지덕지 고기 비늘이 묻어 있는 나무 상자, 곡식 자루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여기저기 쥐똥 지린내도 나고 거미줄도 늘어져 있다. 헛간 겸 방으로 쓰는 용도인 게 분명했다. 평소에는 사람이 기거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둠의 한 덩어리가 왈칵 떨어져 나갔다. 그만큼의 밝은 빛이 철썩이는 파도 소리에 떠밀려 와르르 쏟아져 들어왔고, 사내아이와 두 갈래로 머리를 땋은 소녀가 그 빛을 뒤따라 들어왔다.
 “어? 저 봐! 아저씨가 눈 떴다!”
 사내아이가 소녀의 손을 뿌리치고 쪼르르 달려왔다.
 흐릿한 영상이 망막에 맺힌다. 그것이 활짝 웃고 있다.
 사내는 초점을 맞추기 위해 애썼다. 두 겹, 세 겹으로 겹쳐 보이던 얼굴이 조금씩 하나로 모인다.
 동그랗고 새까만 얼굴. 히죽 웃는 눈이 장난기를 가득 담고 반짝거렸다. 앞니가 두 개나 빠져 있다.
 “아저씨, 무슨 잠을 그렇게 오래 자?”
 ‘잠······.’
 “일하기 싫어서 꾀병 부리는 거 아니지?”
 제법 매섭게 째려본다.
 사내의 입이 비틀렸다. 무언가 말을 하려는 건데, 아직 목이 틔지 않은 듯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벌써 며칠째 이러고 있는 건지 알아? 나흘이야, 나흘. 멀쩡한 아저씨가 놀고 먹으면 되겠어?”
 ‘나흘······.’
 사내의 의식이 당황한다.
 소녀가 짓궂은 아이를 떼어냈다. 들여다보는 동글고 까무잡잡한 얼굴.
 열일곱이나 여덟 살쯤 되었을 것이다. 눈이 크고 맑다.
 “마음 푹 놓으세요. 여기는 우리 집이에요.”
 먼저 안심시킨 소녀가 사내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을 설명해 주었다.
 “새벽에 바다에 나가려고 준비하던 아버지가 당신을 발견했어요. 범바위 쪽 모래밭 위에 떠밀려 올라와 있더래요.”
 그랬었나 보다.
 “처음에는 죽은 줄 알고 놀랐는데 숨이 붙어 있었대요.”
 “아버지가 아저씨를 업고 오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그것도 모르고 내내 잠만 자고 말이야.”
 꼬마 아이가 다시 눈을 흘겼다.
 “누나도 지난 나흘 동안 아저씨를 돌보느라고 꼬박 붙어 있었어. 쳇, 하나뿐인 동생하고는 놀아주지도 않았지 뭐야. 밥도 안 차려주고.”
 소녀가 머리를 쥐어박는다.
 “귀찮게 하지 말고 잘 보고 있어. 나는 죽을 데워 올 테니까.”
 “이 아저씨가 나를 귀찮게 하면?”
 “맞을래?”
 “히―”
 소녀가 제법 사납게 눈을 치떴다. 그리고 앙증맞은 주먹을 쳐든다. 아이는 머리를 감싸고 피하는 시늉을 했다.
 어울려 사는 가족 간의 즐거움이라는 것이 왈칵 사내의 의식 속으로 흘러들었다.
 ‘즐거움······ 가족······.’
 생소한 단어와 생소한 느낌. 그래서 사내는 쓸쓸해졌다.
 힘겹게 고개를 돌리고 바라보았다. 긴 머리를 팔랑거리며 뛰어나가고 있는 소녀의 뒷모습이 하나 가득 눈에 들어온다.
 낡은 치마와 저고리를 입었고 맨발이다. 건강한 종아리가 다 드러나 있다.
 “아저씨, 나 보여?”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맑고 깨끗한 눈.
 사내는 그 눈에 자신의 눈을 맞추기가 부끄러워졌다.
 불쑥 든 이 부끄러움이라는 감정. 그것마저 낯설다.
 사람에게 사로잡힌 짐승의 불안인지도 모른다.
 아니, 사람을 동경하는 짐승의 자학일까?
 그래서 사내는 더 이상 피하지 않고 아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왜?’ 하는 오기였다.
 “와, 아저씨 눈 크다.”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새까만 녀석이었다. 얼굴 가득 ‘나는 개구쟁이래요’ 하고 써져 있다.
 “우리 누나보다 더 큰 것 같은데?”
 “······.”
 “아저씨 말 못해? 집 없어? 엄마 없어?”
 실망이 깃드는 아이의 얼굴. 사내는 이제 그것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귀찮게 하지 말랬지?”
 소녀가 귀 떨어진 나무 쟁반을 들고 들어오며 꾸짖었다.
 비로소 사내는 조금 더 뚜렷하게 그녀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소녀티를 벗고 어엿한 처녀가 되기 직전의 풋풋함이 하나 가득 느껴진다.
 문득 그녀가 떠올랐다.
 사저.
 사내가 그녀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미안해’라고 말하던 마지막 음성을 들었을 때 그녀도 눈앞의 이 순박한 소녀만 했었다.
 “좀 드세요.”
 그녀가 살짝 볼을 붉히고 말했다.
 고소한 냄새.
 사내의 기억은 그것이 전복죽 냄새라는 걸 금방 되살려냈다.
 무려 십 년이다.
 사람의 흔적도 없는 무인도에서 풀을 씹고, 고기와 새를 잡아 날로 뜯어 먹고 살지 않았던가.
 생식만으로 버텨왔던 그 오랜 세월. 그래서 이제는 사람의 음식을 다 잊어버렸다고 여겼는데, 코끝에 냄새가 스치자 금방 그것이 무엇인지 기억해 냈다.
 간사하다.
 자신의 감각이, 자신의 기억이 그렇다는 것마저 사내에게는 불만이었다.
 사내는 죽 그릇을 보고 소녀를 보았다.
 악의없는 얼굴. 맑은 그 눈이 걱정 말고 먹으라고 말하고 있다.
 꾹 닫혀 있는 입술에 소녀가 내미는 수저가 닿는다.
 따뜻하고 고소한 냄새.
 “드세요. 억지로라도 드셔야 해요.”
 하지만 사내는 입을 벌리지 않았다.
 “아저씨, 안 먹어? 그럼 내가 먹을까?”
 “저리 가지 못하니?”
 “아깝잖아. 뜨거울 때 먹어야 맛있는 건데······.”
 소녀가 아이의 다리를 걷어찼다.
 “왜 때리고 그래?”
 아이가 볼을 부풀리고 투덜거리지만 소녀는 더 상대하지 않았다. 눈을 흘겼을 뿐 사내에게 다시 수저를 내민다.
 사내는 망설였다.
 받아먹는다면 자신의 마음이 약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끝내 거부한다면?
 소녀의 크고 맑은 눈에 조금씩 실망이 어리기 시작했다.
 사내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몇 번이나 데우기를 거듭했을 것이다.
 정성과 호의. 자신의 순수한 마음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데 대한 억울함.
 소녀의 얼굴이 점점 슬퍼진다.
 ‘이건 잔인한 짓이다.’
 ‘하지만 나는 끝없이 잔인해져야 한다.’
 ‘적의와 호의도 구분할 줄 모르는 멍청이가 되어버린 거냐?’
 ‘나를 대하는 자들에게 호의가 있었던가? 경멸이 있었을 뿐이다.’
 ‘두려워하는구나?’
 나와 또 다른 나의 싸움에 사내가 종지부를 찍었다.
 입을 벌리고 그녀가 떠 먹여주는 죽을 깨끗하게 다 받아먹은 것이다.
 소녀의 맑은 얼굴이 꽃처럼 활짝 벌어졌다.
 “아버지, 아버지! 이리 와보세요. 그 사람이 내 죽을 다 먹었어요! 살아났다구요!”
 소녀가 우당탕거리며 뛰어나갔고, 아이가 허둥지둥 그 뒤를 따르며 소리쳤다.
 “나도 죽 줘!”
 
 “이름이 뭔가?”
 ‘이름······.’
 사내의 눈빛이 아득해졌다.
 “어쩌다가 그 지경이 되었던 게야? 대체 얼마나 오래 바다 위를 떠돌았지?”
 중년의 순박해 보이는 사내였다. 스스로를 장소삼(張小三)이라고 했다.
 평생 이 바닷가를 떠나본 적이 없다는 사람. 어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어부로 살아가고 있는 우직한 사람.
 그의 순한 눈과 넓은 가슴에서 바다가 느껴진다.
 “벙어리인가? 정말 그래?”
 ‘이름······.’
 사내는 그것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 사람들은 그를 ‘야!’라고 불렀다. ‘이 새끼!’라고 부르기도 했다. ‘거지새끼’라는 것도 있다.
 그래서 그게 제 이름으로 알고 살았다.
 사부님이 처음 이름을 지어주셨다.
 당신의 성을 주고, 이름이라는 것을 붙여주셨을 때 사내는 오히려 귀에 거슬렸다.
 기보연(奇保緣).
 그게 사내가 처음 가져 본 이름이었다.
 인연을 소중히 지키라는 의미임을 안 건 나중의 일이다.
 하지만 그 사부는 죽었다.
 오운장도 없다.
 그래서 사내는 그 이름을 쓰고 싶지 않았다.
 사부와 관계된 것은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 된다.
 이 세상에서 사부와 사저, 그리고 사형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어야 한다.
 지난날의 나는 죽었다.
 새롭게 태어났고, 그러니 처음으로 세상에 나의 존재를 드러내는 일이다.
 사내는 그것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저 혼자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류(流).”
 흐름이다. 나는 내 운명의 흐름을 따라갈 것이다. 저 먼 바다를 해류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건너온 것처럼.
 그리고 사부의 최고 절기, 유성비검의 첫 글자를 땄다.
 잊지 않겠다는 또 한 번의 결의이기도 한 것이다.
 “류?”
 “내 이름을 물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류란 말이군. 외자 이름이었어. 그럼 성은?”
 “없습니다.”
 “응?”
 부모를 모르니 성을 모른다. 사부가 준 성은 잊어야 한다.
 “알았네. 말하기 싫은 모양이군.”
 사내, 장소삼이 빙긋 웃었다.
 “몸이 많이 상해 있으니 좀 더 쉬도록 하게. 내 집이려니 여기고 마음 편히 가져.”
 
 사내, 스스로를 ‘류’라고 한 그는 다시 이틀 동안 꼼짝 않고 누워서 제가 이 낯선 땅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했다.
 원수에 대해서 아는 거라고는 그놈의 목소리 하나뿐이고, 그들이 쳐들어온 건 구양진결을 빼앗기 위해서라는 걸 알 뿐이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막막했다.
 처음 바다 앞에 섰을 때처럼 멍해진다.
 그리고 내린 결론.
 ‘닥치는 대로 헤쳐 나간다.’
 지금으로서는 생각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우선 밖으로 나갈 것.
 부딪쳐 오는 바람을 맞듯, 그렇게 내 앞에 다가오는 운명을 맞이할 것.
 그리고 그것의 흐름에 내맡길 것.
 그래서 엿새 만에 류는 바깥 세상으로 나갔다.
 
 
 
 
 
 제4장 은혜는 원한과 같다
 
 
 
 
 
 “어? 벌써 돌아다닐 만한가?”
 저쪽, 마당에 그물을 널어놓고 소녀와 함께 찢어진 곳을 꿰매고 있던 장소삼이 돌아보고 활짝 웃었다.
 햇빛이 이렇게 강렬할 줄 몰랐다.
 잔뜩 눈살을 찌푸린 사내, 류는 어지럼증을 느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휘청거린다.
 가까스로 문설주를 잡고 서서 헐떡거리자 소녀가 그물을 내던지고 달려왔다.
 “더 누워 있지 않고 왜 벌써 나왔어요?”
 책망한다. 그것이 류의 가슴에 더욱 따뜻한 감동을 가져다주었다.
 “이젠, 움직일 수······ 있어······.”
 “안 돼요. 죽을 정도로 탈진했던 사람이 다리 힘을 되찾으려면 보름은 정양해야 하는 거예요.”
 “움직일 수······ 있어.”
 “놔둬라.”
 소녀가 다시 뭐라고 책망하려는 듯 입술을 오물거렸을 때 저쪽에서 그녀의 아버지, 장소삼이 그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보름 동안 꼼짝할 수 없겠지만 그 사람에게는 지난 엿새도 길었는지 모르지.”
 “쳇, 고집불통.”
 소녀가 입술을 삐죽 내밀어 보이고는 쌀쌀맞게 돌아섰다.
 그녀의 그런 심통마저 류에게는 한없이 따뜻하고 다정한 것이었다. 그가 멍하니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새롭게 태어나 세상에 나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장소삼의 가족이야말로 그가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보는 사람들이다. 이전의 사람들은 모두 잊었다.
 
 우성촌(遇成村)은 열다섯 호가 모여 사는 작은 어촌 마을이었다. 집 근처에 텃밭을 일굴 뿐, 모두가 고기잡이로 연명하는 순박한 곳이다. 장소삼이 촌장이기도 했다.
 장소삼의 집은 마을에서도 뚝 떨어진 낮은 모래 언덕 위에 있었다. 집 뒤에 한 그루의 커다란 매화나무가 있어서 마을 사람들은 ‘매화나무집’이라고 불렀다.
 다음날이다.
 장소삼은 새벽같이 배를 띄우고 바다 멀리 나가 그물질을 했다.
 아버지를 배웅하고 찬 바닷바람을 맞으며 용신에게 간절히 만선을 기원하고 돌아서던 소녀, 수아(水兒)의 눈에 어슴푸레한 여명의 모래톱을 서성이고 있는 한 사람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헐렁한 옷자락이,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범바위 아래를 서성이던 그가 하얗게 밝아오고 있는 수평선을 향해 돌아섰다.
 밀려오는 파도가 쉼없이 종아리를 쓸고 가지만, 저 막막한 바다로 향해 있는 그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쓸쓸하고 적막해 보인다.
 ‘류······.’
 소녀, 수아가 천천히 모래톱 위를 걸어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발자국이 길게 남겨지고, 밀려 올라온 파도가 그것을 곧 지워버렸다.
 “떠날 건가요?”
 류가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득히 멀어져 있는 눈길이 한동안 초점을 찾지 못하고 멍했다.
 “왜 그렇게 묻지?”
 “새벽이나 저물 녘에 바닷가에 하염없이 혼자 서 있던 사람들은 누구나 떠났거든요.”
 “나는 원래 이곳의 사람이 아니었잖아.”
 “상관없어요.”
 소녀의 눈이 류를 붙들었다. 가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나무 같거든요.”
 그녀의 낮은 음성이 조금은 슬픈 빛을 띠었다.
 류가 여전히 몽롱한 눈길을 한 채 따라 했다.
 “나무······.”
 “솜털에 싸인 작은 씨앗이 바람을 따라서, 혹은 새의 깃털에 묻어서 날려와요. 그리고 땅에 떨어지면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지요.”
 어느덧 수아의 눈길도 몽롱해졌다.
 “그리고 점점 자라서 큰 나무가 된답니다. 새들이 찾아오고, 개구쟁이들이 그늘에서 놀지만 나무에게 너는 어디에서 왔느냐고, 언제 떠날 거냐고 묻지 않지요.”
 “······.”
 “나무는 그냥 거기 뿌리를 내리고 서 있을 뿐이랍니다.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궁금해하지 않고, 떠나려고도 하지 않아요. 집 뒤의 저 매화나무처럼.”
 류는 ‘운명이라는 걸까?’ 하고 잠깐 생각했다.
 그녀는 운명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류가 천천히 곁에 서 있는 수아를 돌아보았다. 먼 수평선을 향하고 있는 그녀의 눈길이 촉촉했다.
 파도에 얹혀 가라앉을 듯 위태롭게 떠 있는 아버지의 작은 배를 바라본다. 점점 멀어지고 있는 그것.
 “너도 떠나고 싶었던 거로구나?”
 “맞아요.”
 “그래서 두려워하는 거지?”
 “그것도 맞아요.”
 수아의 눈길도 류에게 향했다. 어둠이 깃들어 있고, 슬픔이 감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네 뿌리는 이미 깊이 뻗어 있어서 어쩔 수 없는 거지? 그래서 슬퍼하는 거지?”
 “아저씨는 파도 소리를 낼 줄 아는군요.”
 “응?”
 “파도는 온갖 소리를 낸답니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알아요. 언제나 제가 듣고 싶어하는 소리를 그것이 말해준다는 걸. 바다가 사람들의 마음속을 환히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소녀의 감상이라는 것.
 류의 가슴에 그것이 점점 붉어지고 있는 수평선 위의 하늘처럼 물들어왔다.
 그 어떤 것보다 달콤하면서 아늑하지만 때로는 제 스스로의 가슴을 베고,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겨주기도 하는 위험한 것. 류는 수아의 눈 속에서, 그녀의 말속에서 그것을 느끼고 보았다.
 “극락에 대해서 들어보았어요?”
 “······?”
 “그곳에는 별다른 얘깃거리가 없대요. 그저 모여서 바다의 아름다움과 바다에서 뜨고 바다로 지는 태양을 얘기할 뿐이래요.”
 수아의 눈빛이 점점 몽롱해졌다. 먼 바다를 꿈꾸듯 바라본다.
 “바다 속으로 빠져들기 전에 붉고 투명하게 변하는 커다란 태양. 사람들은 자신이 보았던 그 강렬함과 이윽고 바다와 하늘을 온통 물들여 버리는 그것의 처연한 아름다움을 말한대요.”
 그녀가 천천히 류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그러니 극락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바다를 보며 살았던 사람들인지도 몰라요. 아저씨도 그렇죠?”
 “나는······.”
 이 소녀의 감상 앞에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류는 막막해지고 말았다. 이와 같은 말들을 처음 들어보고, 이와 같은 감정을 처음 접해보는 것이다.
 수아가 가만히 류의 손을 잡았다.
 작고 부드러운 손이다. 한낮의 햇빛 아래 따뜻해진 목화 솜을 쥔 것 같다.
 “가지 마세요.”
 소녀는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 느낌이었으리라.
 류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저씨는 파도에 떠밀려온 씨앗이에요. 벌써 조금은 뿌리를 내렸는걸요?”
 두 볼이, 목덜미가 홍시처럼 붉어졌다.
 제 가슴에 뿌리내린 작은 씨앗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면 안 된다.’
 류의 이성이 조용히 경고를 발했다.
 ‘그것도 좋잖아? 이 평화롭고 따뜻한 곳에서 세상을 모두 잊고 사는 거야.’
 그의 감성이 그렇게 속삭였다. 이성이 화를 냈다.
 ‘너는 네 가슴의 상처를 잊을 수 있어? 네 안에 들어와 있는 그들의 영혼을 잊을 수 있겠어?’
 ‘다 소용없는 짓이야. 분노는 숯불과 같아. 언제까지나 이글거리며 타오르지 않지.’
 감성이, 수아의 따뜻한 손이 그렇게 속삭였다. 달콤하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식어서 재가 되어버려. 불길이 크고 맹렬할수록 저를 더 빨리 태워서, 더 빨리 재가 되어버릴 뿐이야. 네 분노라는 것도 그래. 영원한 게 아니야. 조금씩 엷어지다가 결국 사라지게 되는 거지.’
 ‘비겁한 짓이야! 생각해 봐. 무엇 때문에 너는 지난 십 년 동안 스스로를 무인도에 가두었지? 어째서 매일매일 죽음 속으로 스스로를 던져 버렸지? 겨우 이곳에 오기 위해서? 정말 그래?’
 ‘강호는 험난한 곳이야. 곳곳에 함정이 있고 덫이 감추어진 사냥터 같은 곳이지. 언제 죽을지 몰라. 하지만 여기를 봐. 저 수평선과 파도와 황금빛 백사장을 봐. 이곳에는 안락한 평화가 있잖아? 달콤한 삶이 있잖아?’
 ‘하지만······.’
 이번에는 류가 그렇게 말했다. 이성과 감성이 숨죽이고 그를 바라본다.
 ‘내게는 해야 할 일이 있어.’
 그렇게 말한 순간 이성이 그와 하나가 되었고 감성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슬픈 얼굴을 하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리고 슬픈 음성으로 말했다.
 ‘바보.’
 “바보.”
 수아의 그 한마디가 류를 놀라게 했다.
 “결국 떠날 거로군요.”
 언제 그랬던 것일까? 그녀의 손이 제 손에서 떨어져 있었다. 류는 제가 그것을 뿌리쳤다는 걸 알지 못했다.
 
 보름을 머물렀다.
 그동안 탈진했던 체력이 빠르게 돌아와 이제는 그 어느 때보다 원기 왕성해졌다.
 하지만 류는 아직 우성촌을 떠나지 못했다. 내일은 떠나리라, 하고 마음먹었을 때마다 수아의 슬픈 얼굴이, 눈이 그를 붙들었다.
 “가게나.”
 함께 힘을 다해 그물을 끌어 올리던 류가 깜짝 놀라 장소삼을 돌아보았다.
 배가 기울어질 정도로 바다 속의 그물이 무겁다.
 “뭐라고 했습니까?”
 “자네의 힘이 나보다 세 보이는군.”
 “······.”
 “원기를 완전히 회복했는데 더 있을 이유가 없지.”
 “······.”
 “자네는 나처럼 고기나 잡으며 살 사람이 아닐세. 처음 자네를 발견했을 때 알았지.”
 “그렇······ 군요.”
 “물건이 제가 있어야 할 곳에 있을 때 가치를 갖듯 사람도 그렇다네. 제가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하는 거야. 자네는 야생의 짐승과 같아. 길들일 수 없지.”
 ‘야생의 짐승······.’
 류는 장소삼의 말을 곱씹었다. 마음에 알 수 없는 쓸쓸함이 가득해졌다.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자네의 바다거북처럼 단단한 피부와 굳은 손과 이글거리는 눈이 그걸 말해주고 있어. 나는 야성에 물들어 있는 위험한 짐승이라고 말일세.”
 류가 말없이 그물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장소삼은 아예 손을 놓아버렸다.
 마르고 단단한 몸에 달라붙어 있는 차돌 같은 근육이 꿈틀거린다. 그때마다 그물이 쑥쑥 딸려 올라왔다.
 평생 그물질을 해온 장소삼으로서도 혀를 내두를 만큼 류의 팔힘은 굳세었다. 사람의 힘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위험한 짐승.’
 그 말이 류의 머리 속을 온통 지배했다.
 ‘당신은 이미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나무예요.’
 수아의 말이 그 위에 덧씌워진다.
 그것을 잊으려는 듯 류는 더욱 힘차게 그물을 끌어 올리는 일에 몰두했다.
 
 다음날 아침.
 류가 나왔을 때 마당에는 이십여 명의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넓게 편 멍석에 제각기 들고 온 말린 생선 꾸러미며 쌀과 보리, 밀 등의 곡식을 쏟아 붓고 있다.
 그걸 감독하던 장소삼이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이다.
 그뿐만 아니라 류를 돌아보는 마을 사람들은 모두 무표정했다.
 억센 바다와 바람과 운명에 시달려 곤한 기색이 가득한 사람들.
 그들의 지치고 슬픈 눈이 류의 가슴을 찔렀다.
 무언가 잔뜩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담겨 있다.
 장소삼이 그들을 달랬다.
 “걱정 말아. 내가 바다에서 주워온 청년이라는 걸 다들 알잖아? 우리 일과는 아무 상관 없어.”
 “그래도 그들이 알면······.”
 “정 걱정이 되면 나오지 못하게 하지 뭐. 그럼 되겠지?”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는 모양이다.
 손을 턴 장소삼이 천천히 다가왔다.
 “자네는 들어가서 좀 더 누워 있는 게 좋겠어.”
 “무슨 일입니까?”
 “자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네. 이건 그냥 우리 마을의 일일 뿐이야.”
 “······?”
 “글쎄, 우리 일이라니까.”
 장소삼이 완강하게 류의 등을 떠밀었다.
 헛간 같은 방 안으로 몰아넣고 문을 닫기 전에 또 말했다.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신경 쓰지 말게. 절대로 나오면 안 돼.”
 철커덕!
 빗장 지르는 소리.
 류는 제 땀 냄새 배어 있는 낡은 침상에 몸을 던졌다.
 마을에 무슨 일인가 벌어지려는 모양이다. 하지만 굳이 참견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팔베개를 하고 멍하니 시꺼멓게 빛바랜 천장의 서까래를 올려다보면서 내일은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에 걸리는 딱 한 가지는 목숨의 빚을 졌는데 갚아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천천히’ 하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잊지 않고 있다면 언젠가는 기회가 올 것이다.
 “잊지 않는다면······.”
 은혜는 원한과 같다.
 잊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이다.
 
 다시 잠이 들었던가 보다.
 꿈속인 듯, 소녀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 하고 말하던 사저, 기련화. 첫사랑. 하지만 그녀는 열여덟 살 꽃다운 나이에 죽었다.
 그녀의 비명인가?
 “잊지 말라는 것이다!”
 냉엄하게 소리치던 사부의 마지막 음성.
 “윽!”
 유성비검이 꿰뚫었던 가슴의 상처가 그때의 그 고통을 갑자기 일깨워 주었다.
 그것의 상처가 다시 살아나자 심장이 터질 듯 박동 친다. 그 고통이 불처럼 류의 온몸을 훑었다.
 “싫어요!”
 수아다. 맑고 큰 눈을 가진 소녀.
 활짝 벌어진 해당화처럼 막 피어난 우성촌의 꽃.
 “누나를 놔줘!”
 개구쟁이 해왕(海汪)이다. 악을 쓰는 소리에 울음이, 증오가 가득 담겨 있다.
 그것들이 류의 꿈을 깨웠다. 가슴의 고통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더 커진다.
 “윽!”
 가슴을 움켜쥐고 벌떡 일어서던 류가 비틀거렸다.
 이마에 진땀이 배어난다.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남의 것인 듯 바라볼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이 가져다주는 기억의 괴로움은 어쩔 수가 없다.
 류의 얼굴에 검은 그늘이 드리웠다. 눈빛이 이글거리고 악문 입술이 파르르 떤다.
 “제발, 그 아이는 아직 어리지 않습니까? 제가 대신 따라갑지요.”
 “사내는 넘치도록 많아. 우리가 필요한 건 요리 하고 빨래 해줄 계집이야.”
 “그 계집애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답니다. 오히려 나리들의 식량만 축낼 겁니다.”
 “우리 누나를 건드리지 말란 말이야!”
 “요런 맹랑한 꼬마 놈이?”
 “아앗!”
 해왕이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잠하다. 죽지는 않았겠지.
 “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
 장소삼의 악쓰는 소리.
 “이런 일은 없었지 않소!”
 “식량이 부족하잖아. 모자라는 양만큼 네놈들의 피로 채워갈까?”
 “그런, 그런 억지가······.”
 “너희 버러지들에게 손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네놈들의 피 대신 저 계집애를 데려가겠다는 거야. 그러니 감사하다고 절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악! 아버지! 살려주세요!”
 끌려가는 모양이다. 수아의 절규에 껄껄 웃는 웃음소리와 호통치는 소리들이 마구 뒤섞였다.
 “수아는 안 돼!”
 장소삼의 외침이 악에 받쳐 있다.
 그때쯤 류는 두 걸음 앞에 잠긴 문을 두고 있었다. 거북이가 기어가듯 그렇게 느릿느릿 움직인다.
 
 마을 사람들을 헤치고 미친 듯 튀어나온 장소삼의 손에는 고래를 찍어 올릴 때 쓰는 기다란 작살이 들려 있었다.
 발버둥 치며 뒤돌아보는 수아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새파랗게 질려 있다.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는 그 얼굴.
 “이 악귀 같은 놈들!”
 “이놈이 미쳤나? 내가 촌장이라고 봐줄 줄 알아?”
 퍽―!
 오직 악에 치받쳐 달려드는 장소삼의 가슴에 수아의 등을 떠밀던 험상궂은 자의 발이 박혔다.
 “으악!”
 덧없이 허공을 찌른 작살을 놓치고 나가떨어지는 장소삼.
 험상궂은 자가 칼을 뽑아 들고 히죽 웃었다.
 “이 어르신들이 오늘은 특별히 아무 짓도 하지 않고 돌아가려 했더니 기어이 피를 보게 만들겠다 이거지?”
 “좋다!”
 장소삼이 이를 악물고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나를 죽여! 그 대신 수아를 놔줘라!”
 “흐흐흐, 네놈의 모가지는 그냥 덤이다. 흥정거리가 되지 못해.”
 장한이 칼을 들어올렸다. 쨍, 하고 그것에 부딪친 햇빛이 몸부림치며 튕겨 나간다.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질렸다. 서로서로 부둥켜안은 채 외면해 버린다.
 쾅!
 팔뚝만 한 빗장이 수수깡처럼 부러졌다. 그리고 활짝 열리는 문.
 “응?”
 갑작스런 소리에 약탈자들이 멈칫하고 바라보았다.
 하체는 밝은 빛 속에 드러나 있으나 상체는 그늘에 가려 있는 한 사람.
 어둠 속에 이글거리는 두 개의 눈이 박혀 있는 듯하다.
 “웬 놈이냐!”
 우두머리인 텁석부리가 커다란 파풍도를 움켜쥐고 나서며 호통쳤다.
 사내의 벌거벗은 상체가 천천히 어둠을 벗어낸다.
 눈부신 바닷가의 햇살 아래 드러난 깡마른 몸과 늘어진 흑발.
 검게 그을린 피부가 찰흙 같아 보이고, 단단하게 박혀 있는 가슴과 팔의 근육들이 꿈틀거린다.
 뼈와, 그것에 착 달라붙어 있는 근육들로만 이루어진 것 같은 몸뚱이에 텁석부리가 침을 꿀꺽, 삼켰다.
 꺼림칙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뭐야? 이제 보니 이것들이 짐승 같은 놈 하나를 숨겨놓고 있었구만. 저놈을 믿고 감히 반항했던 거냐?”
 류.
 그가 천천히 다가갔다. 다섯 놈의 눈길을 따갑게 받고 있지만 조금도 의식하지 않는다.
 “너는 도대체 어떤 놈이냐?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나선 거냐?”
 “관심없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돌아간다면 우리도 보지 못한 걸로 해주겠다.”
 “관심없어.”
 “흐흐, 꼭 죽어야겠단 말이지?”
 “수아를 놔줘라. 그러면 돼.”
 “이 계집애 말이냐?”
 소녀의 팔목을 움켜쥐고 있던 자가 그녀를 끌고 뒤로 물러섰다.
 수아의 겁먹은 눈이 류의 얼굴에 못 박혔다.
 너무 놀라고, 너무 의외의 일이라 소녀는 갑자기 벙어리가 된 듯했다.
 “쳐라!”
 다섯 걸음 앞까지 다가와 우뚝 선 류를 노려보던 우두머리가 버럭 소리쳤다.
 “이야아아―!”
 목청껏 고함을 지르며 달려드는 자들.
 커다란 멧돼지가 씩씩거리며 돌진해 오고 있는 것 같지만 류는 움직이지 않았다.
 정말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기만 한다.
 그의 눈은 번쩍이며 떨어지는 커다란 칼을 보고 있지 않았다. 다만 제 생각에 골몰해 있을 뿐이다.
 움직임마저 불편하게 만들었던 갑작스런 가슴의 통증과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그것 때문이었다.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쉬잇!
 바람을 끊어내는 짧은 쇳소리.
 류의 몸이 그것에 떠밀린 것처럼 부드럽게 비틀렸고, 첫 칼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머리를 스치며 흘러나갔다.
 류가 비틀었던 어깨를 바로 세우며 한 걸음 내딛었다. 바람에 밀려 부드럽게 누웠던 갈대가 다시 일어서는 것 같다.
 씨잉―!
 뒷목을 쳐오던 칼이 또 한 번 아슬아슬하게 지나갔고, 정면에 있던 놈이 한 걸음 물러섰다.
 상대가 다가오는 만큼 물러서며 거리를 만드는 솜씨가 허술하지 않은 자. 텁석부리. 두목이다.
 류의 눈이 처음으로 번쩍, 하고 빛났다.
 그는 뒤에서 쫓아오는 자보다 언제나 한 걸음 빠르게 움직였고, 앞에서 거리를 만들고 있는 텁석부리와는 보조를 맞추었다.
 “죽엇!”
 주춤거리며 다섯 걸음이나 물러섰던 텁석부리가 분한 숨을 내쉬며 힘껏 칼을 휘둘렀다.
 앞발이 한 걸음 나오는 것과 동시에 칼이 떨어진다.
 그것을 보지 못한 듯, 류가 오히려 걸음을 크게 내딛었다.
 그의 몸이 불쑥 움직여 텁석부리의 가슴에 붙을 듯 다가서 버린다.
 “엇?”
 거리를 빼앗긴 놈이 헛숨을 들이켜며 급히 칼을 거두려 했다.
 그 순간 류의 어깨가 부드럽게 돌아갔다.
 빠악!
 놈의 턱에 부딪치는 강렬한 팔꿈치의 일격.
 텁석부리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허공에 붕 떠올랐다가 철퍽, 하고 처박혔다. 몇 번 꿈틀거리더니 잠잠해진다.
 코 아래가 뭉개져 없어진 그건 더 이상 얼굴이 아니다.
 숨 쉬는 기색이 없다.
 즉사.
 이상한 놈의 일격에 두목이 그 꼴이 된 걸 본 네 놈이 주춤거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 차례라는 듯 류가 질풍처럼 움직였다.
 빠악!
 엉겁결에 칼을 들어 후려치던 놈의 머리통이 산산이 부서져 사라지는 게 언뜻 보인다.
 왼쪽에서 멈칫거리는 놈을 향해 류가 허리를 비틀었다. 그것을 따라 접혀 올라가는 그의 발.
 그가 몸을 땅과 수평이 되도록 기울인 것 같았는데 퍽! 하는 끔찍한 소리가 울렸다.
 놈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무릎에 찍힌 가슴이 박살 난 뼈와 함께 안으로 쑥, 밀려들어 갔다.
 빙글 돌아선 류의 두 손이 이번에는 오른쪽 놈의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그것을 왈칵 잡아당기며 이마로 들이받아 버린다.
 빠악!
 네 번째로 들려오는 기음.
 그놈은 얼굴 전체가 움푹, 함몰된 채 앞서의 놈들과 마찬가지로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류가 천천히 돌아섰다.
 “오, 오지 마!”
 숨 한 번 쉬었을 만큼 되었을까?
 눈 깜짝할 사이에 두목과 세 명의 동료를 잃고 혼자 남은 놈은 얼이 빠져 버렸다. 허깨비를 보는 듯한 류의 빠르고 맹렬한 움직임을 믿을 수 없었다.
 그가 칼을 수아의 목에 들이대고 소리쳤다.
 “한 걸음이라도 다가오면 이년의 목을 그어버릴 테다!”
 류의 한 발이 천천히 앞으로 뻗는다.
 놈은 수아의 목을 긋지 못했다. 그녀를 질질 끌며 정신없이 뒷걸음질칠 뿐이다.
 “정말 이년이 죽는 꼴을 볼 테냐?”
 “마음대로 해.”
 “뭐, 뭐라고?”
 “대신 너를 죽여서 복수해 줄 테니까.”
 “지독한 놈.”
 홀로 남은 약탈자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걸 알았다. 모래밭 위로 밀려온 파도가 그의 발목을 핥았던 것이다.
 “좋아! 다 함께 죽는 거야!”
 그놈이 이를 악물었다. 수아의 목을 겨누고 있던 칼에 힘을 준다. 톱질하듯 소녀의 그 가냘픈 목을 그어버리려는 것이다.
 그 순간 류가 땅을 박찼다.
 파앙―!
 한순간의 이동이다. 흐릿한 그의 잔상이 다섯 걸음 사이의 허공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반 토막 난 칼이 반짝이며 하늘 높이 튕겨져 올랐다.
 땅!
 그것이 부러지는 격한 울림은 뒤늦게 터져 나왔다.
 어느새 류의 몸은 허공에 둥실 떠 있었다. 그놈의 머리통을 단단히 붙잡고 무릎으로 찍어버리고 있다.
 빠악!
 다섯 번째로 터져 나오는 끔찍한 기음.
 마지막 놈이 박살 난 머리통을 건들거리며 밀려오는 파도 속으로 처박혔다.
 수아는 서 있을 힘이 없고 정신이 없다.
 털썩 주저앉아서 멍하니 류를 바라보기만 했다.
 
 
 
 
 
 제5장 첫 싸움 그리고 첫 입맞춤
 
 
 
 
 
 “일 년에 두 차례씩 내려와 마을에서 식량을 강탈해 갑니다. 반항이오? 우리 꼴을 보시오.”
 “누가 반항을 하면 그 가족 모두를 죽여 버린답니다. 매년 죽어라고 그물질을 해서 결국 그놈들 먹여 살리는 꼴이지요.”
 “서쪽에 우뚝 솟아 있는 산이 보이지요? 맥량산(貊量山)이라는 건데, 저 속에 산채를 틀고 눌러앉은 지 벌써 십 년째라오.”
 “관군? 쳇, 그놈들이 더 지독한 도둑이라는 걸 몰라서 하는 말이오?”
 한 번 말을 꺼내놓자 마을 사람들의 푸념이 지칠 줄 모르고 쏟아졌다.
 “그나저나 이제 큰일 났소.”
 촌로가 한숨을 푹, 쉬고 한탄했다.
 “낯선 젊은이가 벌집을 건드려 놓았으니······.”
 묵묵히 앉아 있는 류를 훔쳐보는 눈길에 불만이 가득했다.
 “젊은이야 훌쩍 떠나 버리면 그만이겠지. 하지만 화(禍)는 남아서 고스란히 우리에게 돌아올 것 아니겠어?”
 “제기랄, 난 뜰라우.”
 중년의 사내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더 이상 이놈의 지긋지긋한 생활에 미련 따위는 없어.”
 “어디로 가려고? 무얼 해서 먹고살 건가?”
 장소삼이 따지듯 다그쳐 묻자 중년 사내의 낯빛이 흐려졌다.
 장소삼이 그를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
 “여기서 흔들리면 조상 대대로 지켜온 우리 마을이 무너지네. 언제까지 나쁜 날만 계속되겠어? 꾹 참고 기다리다 보면 우리에게도 좋은 날이 찾아오겠지.”
 “벌써 십 년을 기다렸소. 대체 언제라는 거요? 장 형님은 정말 그런 날이 올 거라고 믿는 거요?”
 “십 년을 기다렸으니 그만큼 가까이 다가와 있지 않겠나? 어쩌면 저 문 앞에 와 있는지도 모르지.”
 “제기랄, 내일 날이 밝으면 당장 산채의 마귀들이 돌아오지 않는 놈들을 찾아서 떼거리로 몰려올 거야. 그럼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금방 알게 되겠지. 설마 장 형님이 기다리고 있는 게 그놈들은 아니겠지?”
 모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무사히 넘어갈 리 없다는 걸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는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이번 일로 인해서 몰죽음을 당하고 마을마저 사라져 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류는 묵묵히 그들의 말을 듣기만 했다.
 삶의 터전을 버리는 일이 어디 쉬울 것인가. 그들은 새벽이 되어도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할 것이다.
 두려움과 애착 사이에서 방황하는 가여운 사람들.
 그들이 갖지 못한 건 포악한 자에게 맞서 싸울 용기와 힘일 뿐이다.
 그게 죄가 될 수는 없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만 바라보고 앉아 있던 류가 벌떡 일어났다.
 이제는 둘러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침묵을 지켰다.
 그를 바라보는 눈이, 불길이 이글거린다. 두려움 그리고 원망이었다.
 류는 그들을 외면하고 천천히 마을 뒤쪽의 언덕으로 향했다.
 별빛이 와르르 쏟아지는 밤이다.
 
 류는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홀로 앉아 있었다.
 등 뒤에 방풍림을 두었고 앞으로는 제법 넓은 자갈밭인데, 그 너머에 드문드문 이어져 있는 숲이 맥량산까지 닿아 있다.
 새벽 안개가 천천히 발목을 적시며 흘러갔다.
 옷자락이 모두 젖었고, 맨 땅에 주저앉아 있는 엉덩이가 축축하다.
 바스락거리는 소리.
 류는 그 기척이 누구의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자기와 함께 이 적막한 곳에서 적막한 밤을 꼬박 샌 사람.
 방풍림 속에 몸을 감추고 짐승처럼 웅크린 채 새벽 이슬에 젖고 있는 사람.
 ‘돌아가.’
 벌써 수십 번. 류는 마음속으로만 그렇게 말했다.
 그 사람이 조심스럽게 다가오고 있었다.
 “달아나세요.”
 류의 등 뒤에서 떨리는 음성으로 말한다.
 류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에게 완강한 뒷등을 보이며 여전히 앉아 있을 뿐이다.
 “더 늦기 전에 달아나요.”
 드넓은 자갈밭 위에 아직 남아 스멀거리는 어둠을 바라보던 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새벽 추위에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달달 떨고 있는 소녀. 어깨마저 가늘게 떨린다.
 ‘왜?’
 류의 눈은 그렇게 묻고 있었다. 수아가 그의 등을 향해 주춤,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죽을 거예요. 나는······ 당신이 죽는 게 싫어요.”
 “마을 사람들은?”
 처음으로 흘러나온 음성. 차갑고 딱딱한 그것.
 수아가 진저리를 치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망설이고 안타까워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그건, 그건······.”
 “네 아버지와 동생도 죽게 될 거야. 그건 괜찮다는 거냐?”
 “싫어요!”
 소녀가 세차게 도리질하며 소리쳤다.
 “그들이 죽는 건 싫어요! 당신이 죽는 것도 싫어요!”
 류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소녀에게서 얼굴을 돌려 다시 제 앞을 바라본다.
 입술을 악물고 그의 단단한 등을 노려보던 수아의 얼굴이 와락 다가온다.
 뒤에서 그를 감싸 안고 젖은 등에 얼굴을 파묻은 수아가 기어이 와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은혜를 입었다. 장 아저씨가 내 목숨을 구해주었고, 엿새 동안 너의 보살핌을 받았지. 언제 신세를 갚을 것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빨리 온 것뿐이야.”
 “당신은 죽게 될 거예요.”
 “그런 건 생각하지 않아.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생각할 테다.”
 “죽음이 코앞에 닥쳐도요?”
 “죽으면 할 수 있는 일도 없게 되겠지. 어쩌면 그게 더 나을지도 몰라.”
 등에 닿아 있는 소녀의 볼이 따뜻해지고 있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다시 말했다.
 “아버지와 동생을 데리고 함께 달아나요.”
 “마을 사람들은?”
 “그들에게도 달아나라고 하지요 뭐.”
 “이곳은 너와 네 아버지,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뿌리를 내린 곳이 아니냐?”
 “그래요.”
 “네가 말했지, 나무는 뿌리내린 곳에서 묵묵히 산다고.”
 “이제는 나무가 싫어졌어요.”
 “제 운명을 선택할 수는 없어. 선택은 언제나 그것이 한다.”
 “모르겠어요.”
 “약속하지. 나는 죽지 않아.”
 “정말인가요?”
 “나에게는 내 운명 말고도 몇 개의 운명이 더 있거든. 그러니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아요. 당신은 떠날 거죠? 잠시 나뭇가지에 앉아 날개를 쉰 새처럼 자유롭게.”
 “운명이 나를 그렇게 이끌고 있구나. 제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가려고 저기 저렇게 서서 기다리고 있어.”
 “그곳이 어딘가요?”
 류의 눈빛이 아득해졌다. 한참 만에야 그가 천천히 말했다.
 “강호.”
 수아의 침묵에 안타까움이 실려 있었다.
 등짝이 허전해진다. 그녀가 얼굴을 뗀 것이다. 물러앉는 소녀의 기척.
 그리고 저 멀리, 희미하게 밝아오는 자갈밭 너머의 숲에 사람들의 형체가 아스라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류가 무심한 눈길로 그런 수아를 바라보았다.
 어서 돌아가라고 재촉하는 눈빛이다.
 수아가 이를 악물었다.
 “나는 여기에서 당신을 지켜보겠어요. 그러다가 당신이 죽으면 함께 죽겠어요.”
 “······!”
 “이제는 나와 마을 사람들 모두의 운명이 당신 손에 달려 있잖아요. 당신이 죽으면 그들도 모두 죽어요. 산적 놈들에게 끌려가 욕을 당하느니 당신 곁에서 죽는 게 행복할 거예요.”
 “그렇다면 마음대로 해.”
 류의 대답은 무심하기만 했다.
 이를 악물고 노려보듯 한참 동안 바라보던 수아가 홱 돌아서더니 방풍림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
 
 우성촌으로 식량을 가지러 갔던 자들이 돌아오지 않았다.
 거기에는 그놈들이 모두 달아났거나 죽었다는 두 가지 이유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석연치가 않았다. 그래서 산채의 소두령이자 한때는 강호의 악당으로 이름을 날렸던 삼수귀검(三水鬼劍) 낙칠명(樂七明)은 그 원인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다른 결론을 내렸다.
 다섯 놈이 모두 작당해 달아났을 리는 없고, 그럴 놈들도 아니다.
 또한 저마다 칼질이며 주먹질에 이골이 나 있는 놈들 아니던가. 그런 그들을 죽일 만한 자라면 고수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궁벽한 곳에 강호의 고수가 얼쩡거리고 다닐 리가 없다.
 ‘우성촌 놈들이 겁도 없이 관에 고자질을 했단 말인가?’
 낙칠명은 그런 결론을 내렸다. 멋모르고 우성촌에 들어갔던 자들이 매복해 있던 관병들을 만나 모두 잡혀갔으리라는 것이 가장 타당한 추측이다.
 낙칠명은 그동안 고분고분하던 우성촌 놈들이 간덩이가 부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뼈아픈 교훈을 내려줄 수밖에 없다.
 맥량산 인근 삼십여 개의 부락을 세력권에 넣고 있는 산채로서는 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어야 했다. 이 일을 흐지부지하게 처리했다가는 다른 마을도 우성촌을 닮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산채의 위엄은 물론 활동에 막대한 지장이 생기지 않겠는가.
 그래서 낙칠명은 직접 수하들 대부분을 이끌고 산에서 달려 내려왔다.
 소황평(小荒坪)이라고 불리는 자갈밭을 건너는데 우성촌으로 들어가는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자가 보였다.
 ‘수상한 놈이다.’
 낙칠명은 류가 뿜어내고 있는 적의를 느꼈다.
 낯선 얼굴이다. 그래서 잠깐 망설였지만 곧 피식, 하고 웃었다.
 어쩌면 아무것도 모르는 우성촌의 촌것들이 강호의 낭객 한 놈을 초빙해 온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들이 관과 내통하더니 이제는 강호의 떨거지까지 끌어들여?’
 그런 노여움이 솟구쳤다.
 상관없다. 그렇다면 죽여 버릴 뿐이다. 누구인지는 알 필요도 없다. 죽이고 곧장 마을을 짓밟아 버리면 오늘 일과는 끝이다.
 낙칠명은 한 놈도 살려두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오늘 날짜로 우성촌은 세상에서 영영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저 언덕 위의 철없는 놈은 몇 대의 화살이면 충분할 것이다. 약탈에 앞서 부하들의 사기를 높여주는 좋은 제물이 되리라.
 “쏴! 고슴도치를 만들어 버려!”
 
 스무 명이다.
 모두 말을 타고 있었다. 창과 활을 지닌 자도 있고, 커다란 도끼와 유성추를 지닌 자도 있다.
 자갈밭을 거침없이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새벽의 적막을 요란스럽게 깨뜨렸다.
 류는 언덕 위에 우뚝 서서 한 줄로 길게 늘어져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는 자들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시잇!
 허공을 찢는 휘파람 소리.
 슬쩍 머리를 기울이자 한 대의 화살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쉬이이이―
 그 뒤를 따라 밀려오는 요란한 파공성들.
 십여 개의 화살이 온몸을 꿰뚫을 듯이 밀어닥쳤다.
 류가 허리를 조금 낮추는가 싶더니 두 어깨를 부드럽게 움직였다. 파도가 솟구치는 것 같다.
 활짝 편 두 팔이 바람을 맞는 나뭇가지처럼 흔들렸다. 젖은 옷자락이 펄럭이고 허공에 큰 원을 그리며 엇갈린 두 손의 곡선이 춤을 추듯 우아하다.
 퉁, 퉁, 퉁!
 세 대의 화살이 그 손짓에 맞아 튕겨 나갔다. 성큼 뻗어내는 발이 또 한 대를 걷어냈고, 조금 빠르고 좁게 그리는 두 손의 원 속에서 나머지 화살들이 기세를 잃었다.
 투두둑거리며 떨어지거나 튕겨 나가는 그것들.
 그리고 이파(二波)의 화살들이 밀려들었다.
 
 “정지!”
 낙칠명이 급히 말고삐를 잡아채며 한 손을 번쩍 들었다.
 히히히힝―
 그의 말이 신경질적으로 앞발을 번쩍 들고 높이 울어댔다. 달려온 제 힘을 이기지 못하고 주춤거리며 몇 걸음을 더 나아가고 나서야 겨우 멈추어 선다.
 뒤따라 달려온 자들이 일제히 말을 멈추느라 한동안 소란이 일었다.
 “이상한 놈이다.”
 낙칠명이 머리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화살들을 모두 튕겨내는 류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다. 멀리서도 그 가볍고 경쾌하며 절도있는 솜씨가 뚜렷이 보였던 것이다.
 ‘고수?’
 그렇게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움직임을 보일 수 있을 것인가.
 녹록치 않은 고수가 분명하다.
 저런 자가 왜 이 궁벽한 어촌에 와 있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비로소 경계하는 마음과 함께 호기심이 생겼다.
 “가봐라. 웬 놈인지 알아봐.”
 부하 한 놈이 명을 받고 말을 달려나갔다. 언덕 아래에 서서 소리친다.
 “너는 누구냐?”
 류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우뚝 서서 내려다볼 뿐이다.
 나를 쓰러뜨리지 않고는 한 놈도 이 언덕을 넘어갈 수 없다는 의지만 보인다.
 “우리는 맥량산의 호걸들이다! 어제 소두령 한 명이 수하들 몇을 데리고 이 너머의 마을로 갔는데 오지 않았다. 너는 그 이유를 아나?”
 “죽었다.”
 “무엇이?”
 “너희들도 모두 그렇게 될 것이다.”
 “네가 했단 말이냐? 왜?”
 류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번쩍이는 눈으로 지그시 쏘아볼 뿐이다.
 “너 혼자냐?”
 “······.”
 “이름은?”
 “류.”
 “류?”
 놈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자가 말 머리를 돌려 동료들에게 돌아가는 걸 보던 류가 슬그머니 발밑에 쌓아두고 있던 차돌 몇 개를 움켜쥐었다.
 어젯밤, 이곳에 오기 전 바닷가에서 주워온 것들이었다. 크기가 작은 달걀만 하고 쇳덩이처럼 단단하다.
 
 “혼자랍니다.”
 “나도 들었어.”
 “저놈 말대로 왕 두령과 그를 따라갔던 네 명은 모두 죽은 것 같군요.”
 삼수귀검 낙칠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떻게 할까요?”
 “류라······.”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다.
 제 본명을 밝히고 싶지 않아서 거짓말을 한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상관없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놈이다.
 “죽여 버려!”
 낙칠명의 명령에 무리들이 일제히 말을 달려나갔다. 이쪽은 스무 명이다. 고작 한 명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언덕을 거침없이 뛰어올라 오는 말들.
 류가 손 안에 감추어두고 있던 차돌을 힘껏 던졌다. 바람을 가르고 날아간 그것이 앞선 말의 머리통을 때렸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단단한 뼈를 부수고 박혀 버린다.
 말이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풀썩 고꾸라졌다.
 곁에서 세 필의 말이 거의 동시에 그처럼 고꾸라진다.
 류가 던지는 차돌멩이는 한 번도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날아가는 갈매기를 맞혀 떨어뜨리던 돌팔매질인 것이다.
 고산도에서 홀로 살아가던 지난 십 년 동안 류는 먹이를 구하기 위해 돌팔매질을 해왔다. 그게 몸에 익어서 지금은 십 장 안에서라면 그 무엇도 놓치지 않을 만큼 되었다.
 빠르고 정확하며 강렬한 그것에 순식간에 다섯 필의 말이 쓰러지고 그것을 몰던 다섯 놈이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뒤따르던 자들이 주춤거리고 우왕좌왕하느라 거칠 것 없던 기세가 다 사라져 버렸다.
 언덕 아래로 물러난 놈들은 더 이상 말을 달려 올라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낙칠명이 신음성을 흘렸다. 다섯 필의 말을 잃었다는 건 막중한 피해다.
 “죽일 놈.”
 이를 부드득 간 그가 다시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올라가! 가서 저놈의 목을 가져와라!”
 수하들이 말을 버리고 고함을 지르며 일제히 언덕을 향해 뛰었다. 그들이 뽑아 든 병장기가 새벽빛을 받아 날카롭게 번쩍였다.
 씨잉―
 차돌이 날아온다. 앞장섰던 거구의 텁석부리가 재빨리 칼을 휘둘렀다. 창! 하는 소리와 함께 그것을 쳐내고 어떠냐는 듯 우쭐거리는 순간 퍽! 하는 소리가 났다.
 “으악!”
 뒤따라온 차돌멩이에 오른쪽 빗장뼈가 으스러진 텁석부리가 칼을 놓친 채 비명을 지르며 굴러 내려갔다.
 퍽! 퍽!
 두 개의 차돌이 이번에는 두 놈의 정수리를 깨뜨리고 박혀 버렸다. 말의 머리통을 깨뜨리던 힘이니 사람의 뼈가 당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두 놈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굴러 떨어졌고, 다시 한 놈이 얼굴 복판에 차돌멩이를 박아 넣은 채 쓰러졌다.
 그렇게 몇 놈을 쓰러뜨리는 동안 나머지 놈들은 무사히 언덕 위로 뛰어올라 왔다.
 첫 번째 칼이 류의 정수리를 노리고 무지막지하게 떨어졌다.
 류는 그것을 무시한다.
 머리 속에서 자신을 중심으로 사방 반 장의 공간을 잘라내고 그 안에 보이지 않는 선을 이리저리 어지럽게 그어놓았다.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그려진 보이지 않는 선과 선의 교차점.
 그곳에 목표가 걸린 순간 그는 재빨리 움직여 그것을 찍고 때린다.
 거미줄.
 류는 자신의 의념(意念)으로 쳐놓은 반 장 넓이의 그 거미줄을 지배하는 독거미였다.
 걸린 먹이를 놓치는 법이 없다.
 쉿!
 그의 주먹이 거미줄을 따라 뻗어나갔다.
 쾅!
 얼굴이 으스러진 자가 뒤로 벌렁 나가떨어졌고, 류의 눈과 감각은 거미줄에 이어져 있는 제 날카로운 신경을 따른다.
 출렁, 하고 그것에 반응이 왔다. 뒤쪽이다.
 유성추가 쇠사슬을 풀며 무섭게 날아들고 있었다.
 류가 ‘욱!’ 하고 힘을 주어 등을 불쑥 내밀었다.
 쾅!
 굉장한 충돌음.
 그의 등을 때린 유성추가 바윗덩이에 부딪친 것처럼 튕겨 나갔다. 그리고 뒤로 휙 돌린 류의 손아귀에 쇠사슬이 쩔그렁거리며 잡혔다.
 “어?”
 유성추를 던졌던 자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저놈은 등짝에 철갑이라도 둘렀단 말인가?’ 하는 의문이 스쳐 간다. 그리고 무지막지하게 끌어당기는 힘에 놀랐다.
 그자는 쇠사슬을 놓아버릴 새도 없이 끌려갔고, 위험을 느꼈을 때는 이미 류의 발뒤꿈치에 턱이 와작, 깨지고 있었다.
 반 장의 공간.
 류는 그것을 철저히 지배했다. 조금의 침입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 안에 들어오는 것들은 무엇이 되었든 그의 손과 발과 몸뚱이의 공격을 받아야 했다. 피할 수 없이 재빠르고 맹렬하며 힘찬 것.
 류는 언제나 사방 반 장의 공간 중심에 위치했다. 그 공간을 이끌고 이리저리 옮겨다닐 뿐이다.
 두 놈이 얼굴이 으깨져서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졌고, 한 놈은 휙, 돌아서기 무섭게 찔러온 류의 두 손가락에 눈알이 뽑혔다.
 옆구리를 벼락처럼 찔러오는 검. 그러나 반 장의 공간 속에서, 류가 그려놓은 수많은 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류의 강철처럼 단단하게 단련된 억센 손이 그것을 움켜쥐어 버렸다.
 잘 벼려진 예리한 날도 소용없다.
 창!
 검이 부러졌다. 검자루를 쥐고 있는 자가 자신의 검끝이 돌아와 자신의 가슴에 박히는 걸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
 시잇―!
 짧게 바람을 끊으며 어깨에 떨어지는 또 한 자루의 칼.
 류가 몸을 살짝 기울이며 좍 편 손날로 그것을 후려쳤다.
 땅! 하는 날카로운 울림.
 한 치 두께의 파풍도가 도끼에 맞은 듯 맥없이 부러져 날린다.
 그리고 류의 빙글 돌아가는 어깨가 다른 손을 이끌었다. 칼처럼 펴진 손날이 그놈의 목덜미를 찍는다.
 퍽!
 혈관이 터져 버리고 목뼈가 부러졌다.
 뚜둑, 하는 그 끔찍한 소리의 여운이 가시지도 않았는데 류는 다시 왼쪽으로 움직여 나가고 있었다.
 반 장의 공간 속으로 들어온 또 한 놈의 창. 그것을 옆구리에 끼워 잡으며 걷어찬 그의 발등에 놈의 낭심이 걸렸다.
 “끄아악!”
 고통을 참지 못하는 참혹한 비명.
 고환이 터지고, 치골마저 으스러져 버린 놈이 눈을 까뒤집으며 뒤로 넘어갔다.
 류의 움직임은 질풍 그것이었다. 거침이 없다.
 두어 번 숨을 바꾸어 쉬는 사이에 열두 명이 죽거나 회복 불능의 중상을 입고 널브러졌다.
 언덕에 올라와 있던 낙칠명은 넋이 빠져 버렸다.
 “이, 이, 이게······ 대체······.”
 저런 걸 뭐라고 해야 할지, 저런 무공이 있기는 한 건지, 아니, 저럴 수가 있는 건지 믿을 수 없다.
 남은 자들이 더 이상 류에게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주춤주춤 물러섰다.
 칼과 창, 검과 도끼를 쥐고 있지만 다 소용없다.
 류는 숨결 하나 가빠져 있지 않았다. 두 손을 무릎 아래로 늘어뜨린 채 조용히 서서 아침 바람을 맞고 있었다.
 방금 눈앞에서 그 참혹한 피비린내를 뿌린 자라고 누가 믿을 것인가.
 “너, 너는 누구냐?”
 낙칠명이 경악으로 눈을 부릅뜬 채 소리쳤다.
 의식을 이완시켜 맹렬하게 움직인 근육의 긴장을 느슨하게 하고 있던 류가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류.”
 “네놈의 진정한 정체 말이다!”
 “나는 나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
 “좋다. 하지만 이건 꼭 알아야겠다! 그, 그건 대체 뭐라는 무공이지?”
 “이름 따위는 없어.”
 “거짓말! 소림의 나한권이나 아미의 복호권이라고 해도 그처럼 격렬하고 위력적이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름도 없는 무공이라고?”
 “뭐라고 지껄여도 좋다.”
 비웃는 듯한 눈길. 그것이 ‘곧 네놈도 뒈질 테니까’라고 말했다.
 두려움이 척추를 훑고 달려간다.
 하지만 그게 오기가 되어서 낙칠명의 가슴을 달구었다.
 한때는 흑도무림에서 제법 어깨를 거들먹거리며 살지 않았던가.
 비록 이곳까지 쫓겨와 겨우 산채에 빌붙어 목숨을 보존하고 있을망정 과거의 악독한 심사마저 물러진 건 아니다.
 “이야압!”
 삼수귀검 낙칠명의 기합 소리가 새벽 벌판을 뒤흔들었다.
 남은 자들은 여덟 명.
 스무 명을 이끌고 기세등등하게 산에서 내려왔는데 반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것도 단 한 명에게 당했으니, 이 바닥에서 쌓아 올린 자신의 명성은 오늘로 끝이다.
 낙칠명은 류라는 이 무지막지한 놈을 죽이지 못하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독한 마음이 독한 살기로 맺힌다. 그리고 그것이 고스란히 검끝으로 토해졌다.
 그가 자랑하는 삼 초식의 귀영검법(鬼影劍法)은 강호에 그 이름이 제법 알려진 절기였다.
 빠르고 어지러운 데다가 죽기를 각오한 힘이 더해지니 강렬하기까지 하다.
 그것이 종횡으로 어지럽게 검광을 뿌리며 류의 전신을 노렸다.
 그 앞에 온통 드러난 류의 몸은 무게가 없는 것 같았다. 목화 솜 한 올이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듯 검봉이 뻗어내는 살기에 떠밀려 이리저리 흘러간다.
 그러니 낙칠명이 아무리 기를 써도 그의 검은 류의 가슴 앞 한 치 되는 곳에 머물 뿐이었다. 조금도 더 나오지 못한다.
 제삼초, 분귀위옥(紛鬼爲獄)이 끝났다. 그리고 초식을 바꾸기 위한 촌각의 머뭇거림. 류의 예민한 감각이 그것을 놓칠 리 없다.
 땅!
 그의 단단한 손이 물러가는 낙칠명의 검신을 두드렸다.
 그것이 철금의 현(絃)처럼 요란하게 진동하며 웅웅거리는 울음을 토했다.
 팔목을 저리게 하고 가슴으로 퍼져 나가는 진동.
 낙칠명이 크게 놀라 물러섰다. 하지만 그는 류가 펼쳐 놓은 반 장의 그물 밖으로 한 걸음도 빠져나가지 못했다.
 류가 미끄러지듯 다가서며 다시 손을 불쑥 뻗었다.
 “헛!”
 놀란 낙칠명이 급한 중에 본능적으로 검을 쭉, 뻗어 가슴을 찔렀다.
 류의 가슴이 바람을 맞은 풍경(風磬)처럼 빙글 돌아갔다. 따라랑거리는 낭랑한 소리. 류가 잔뜩 말아 쥐었던 손가락 네 개를 차례로 펴며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는 검신을 두드린 것이다.
 팔목을 타고 올라오는 또 한 번의 진동이 낙칠명을 혼비백산하게 했다.
 그리고 갈퀴 같은 다섯 개의 손가락에 목줄기를 잡혔다.
 억세고 차갑기가 쇳덩이 같은 것.
 낙칠명의 두 눈이 튀어나왔다. 절로 혀가 내밀어지고 혈관이 터질 듯 부푼다.
 남은 놈들은 감히 달려들 엄두도 내지 못했다. 산채의 소두령이자, 검법의 고수로 이름을 날리는 삼수귀검 낙칠명이 단번에 저 괴이한 장발청년의 손에 잡혀 무기력해졌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겨우 이것밖에 되지 않는 거냐?”
 류가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낙칠명은 대꾸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숨이 목줄기에서 딱 멎자 폐가 불덩이를 담아놓은 것처럼 달구어졌는데,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끅끅댈 뿐이다.
 류는 고산도에서 나온 후 처음으로 다른 사람과 싸워보았다.
 어제 오후, 마을에서 다섯 명의 졸개들과 싸운 건 싸움이라고 치지도 않았다.
 고수라고 할 만한 자.
 삼수귀검 낙칠명은 충분히 그런 느낌을 전해주었다.
 그런데 막상 손을 섞자 실망스러웠을 뿐이다. 겨우 세 번 팔을 휘둘러 그의 멱줄을 움켜쥐지 않았던가.
 ‘어디까지인가?’
 문득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런 의문이 들었다.
 십 년 동안 외딴 섬에 스스로를 가두고 수련이라는 이름하에 극한으로 육체를 괴롭혔다.
 그리고 천 번, 만 번 거듭해 머리 속에서 구양진결을 끄집어냈다.
 아직도 그게 무엇인지, 어떤 힘을 감추고 있는 건지 모른다. 하지만 일부의 움직임은 느꼈다.
 그것은 깨달음과는 다른 무엇이었다.
 느낌이다.
 돌이켜 보면 사부의 문하에서 지낸 날들은 고작 삼 년에 불과했다.
 사부는 구양진결을 익히기 위해 폐관한 것과 다름없이 두문불출했고, 사형들은 자신들의 수련에 매진하느라 쉴 틈이 없었다.
 류는 그들이 어쩌다 한 가지씩 가르쳐 주는 사문의 기초적인 심법과 보법, 검법이며 권장법을 겨우 배웠을 뿐이다.
 하지만 류는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었다.
 적어도 이제는 자신을 ‘거지새끼’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공 따위는 어찌 되었든 상관없었다. 사형들이 어울려 놀아주는 걸 더 좋아했지, 그들이 엄하게 꾸짖으며 가르쳐 주는 건 별로 기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겨우 사문의 기본 투로와 심법을 익혔을 뿐이니, 무학이라고 하는 무공의 지고한 도리나 원리에 대해서는 알 리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 구양진결은 깨닫는 게 아니라 그저 외우고 또 외워서 잊지 말아야 하는 한(恨)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수천, 수만 번 외우고 또 외우는 동안 어떤 느낌이 왔다.
 깨달음과는 전혀 다른 무엇.
 류는 제가 몸으로 체득한 그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그 느낌은 지금 그를 이렇게 만들어놓았다.
 ‘나는 과연 어디까지 싸울 수 있을까?’
 숨이 끊어져 가는 낙칠명의 핏발 선 눈을 들여다보며 문득 그런 의문을 가졌다.
 제가 싸우는 이 방법이 무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류가 생각하는 무공이란 적어도 사부나 사형들이 펼쳐 보이던 검법이나 권각법처럼 체계적이고 아름다우며 훌륭한 것이어야 했다.
 류는 그런 것을 모두 잊어버렸다. 그가 생각하는 무공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 대신 그는 곤충의 촉수처럼 예민해진 감각과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 그리고 야수 같은 흉포함과 힘을 갖게 되었다.
 이건 기술이라고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먹이를 노리는 사마귀나 거미의 움직이며, 굶주린 맹수의 살기 같은 것일 뿐이다.
 하지만 류는 자기에게 익숙해진 그 감각으로 싸우기 위해 고산도를 나온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날들이 있을지 모른다. 내일이 마지막이라고 해도 끝나는 그 순간까지는 싸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다시 드는 의문.
 ‘나는 과연 어디까지 싸울 수 있을까?’
 나는 과연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른 고수까지 상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으로 이 통쾌한 싸움이 조금도 즐겁게 여겨지지 않았다.
 남은 놈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류는 서두르지 않았다. 어차피 잠시 뒤에는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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