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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그라운드 1권(1)

2019.08.13 조회 192 추천 2


 Zero Ground Part 1.
 - Opening
 프롤로그
 
 
 
 
 
 아버지는 군인이었다.
 시시각각 변이체들이 출몰하는 최전선이 아버지의 전장이었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국민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하지만 군대는 변이체들에게 밀렸고.
 정부는 변이체들이 쏟아져 나오는 게이트에 플루토늄 탄을 투하하기로 결정했다.
 폭발 반경에는 아버지와 다른 아버지들이 있었다.
 더불어 아버지들의 안전을 기원하며 아옹다옹 살아가던 가족들이 있었다.
 핵은 그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때 나와 시화는 군인아파트 지하 보일러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2043년 7월 XX일.
 나는 그날을 잊지 못한다.
 
 
 
 
 
 Chapter 1.
 
 
 
 
 
 “헉!”
 대성은 신음을 토하며 깨어났다.
 그날의 광경이 꿈에 나타날 적이면 하루는 꼬박 앓아누울 만큼 심한 몸살이 수반됐다.
 “일어났어?”
 오한이 몰려왔지만 낯익은 목소리에 안도감을 느꼈다.
 무게추가 얹힌 눈을 천천히 열어 보자 어슴푸레하던 윤곽들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몸이 다 젖었네.”
 하얀 건지 연한 건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실핏줄이 적나라하게 비치는 뽀얀 뺨.
 그리고 빛에 반사될 때마다 보는 사람의 눈을 부시게 하는 흑진주 같은 머릿결.
 무엇보다도 맑지만 아주 깊은, 서글서글한 한 쌍의 눈망울.
 친구 시화였다.
 “또 악몽?”
 “몇 시냐?”
 대성이 묻자 시화가 가볍게 웃고는 팔을 들이밀었다.
 남자치곤 꽤 희고 가는 손목에서 아날로그 손목시계가 빛났다.
 아마도 시화가 부모님에게 받은 마지막 생일선물일 시계는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든 먹을 것을 구해볼 테니까 넌 좀 쉬고 있어.”
 “같이 가. 혼자 나가면 위험해.”
 “됐어. 둘이 가도 똑같아. 변이체 뜨면 죽는 건 마찬가진데 뭐. 일어날 수는 있어?”
 그 말에 대성이 몸을 일으켰다.
 우드드득.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척추 뼈는 주인의 의지를 배반하고는 마디마디마다 비명을 질러댔다.
 “거봐.”
 “크윽!”
 몸이 정상적으로 움직여지지 않자 대성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어제 통조림 공장 근처에서 지하로 통하는 창고 같은 걸 봤어. 먹을 만한 게 있을지도 몰라.”
 시화는 재차 휴식을 강조하며 웃었다.
 “배 안 고파. 좀 쉬면 나아질 테니까 그때 같이 나가자.”
 “난 배고프다고. 벌써 이틀째 아무것도 못 먹었잖아. 빨리 갔다 올 테니까 한숨 더 자고 있어. 일어나면 눈앞에 고추참치가 있을 거야.”
 시화는 그 말을 끝으로, 내려앉은 먼지 층을 탈탈 털어내며 지하실 계단 위로 올라가 버렸다.
 대성은 그 뒷모습을 퀭한 두 눈으로 응시했다.
 친구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쯤 그는 시선을 돌려 이젠 잔뜩 야위어버린 팔을 보았다.
 그 순간 검은색 기운이 거칠고 가는 팔에 일렁거렸다.
 ‘아무 쓸모도 없는 힘······.’
 
 ***
 
 제로그라운드 작전.
 게이트가 열린 지역을 비롯, 경기 강원에 이르는 지역에 핵폭탄을 투하한 이 작전은 일부 성공했다.
 변이체들의 대규모 공습은 막아냈지만, 게이트를 완파하지는 못한 것이다.
 변이체들은 게이트의 틈새로 계속 침공했다. 아직도 피폭지역 곳곳에는 흉측한 생김새를 자랑하는 괴생명체들이 돌아다녔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사후처리였다.
 정부는 피폭지역에 남겨진 생존자들을 방치했다.
 방사능이 확산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 구출해도 얼마 살지 못할 거라는 섣부른 추측, 향후 50년간 피폭지역의 정화가 불가능하다는 조사결과가 이유였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올 피해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거부해 버리는 인간 본연의 이기심도.
 정부는 방사능에 노출된 생존자들이 피폭지역 밖으로 나오는 것도, 이들을 구조하러 누군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간간이 군용 헬기로 식량과 생수 따위가 든 구호물자를 던져주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인명 구출과 치료를 목적으로 폐허에 출입하는 이들이 있긴 했다.
 그러나 그들만으로 생존자들을 빼내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행위가 새로운 상식으로 자리 잡은 세상.
 그곳을 돌아다니는 것은 오로지 세 종류의 괴물뿐이었다.
 인간을 죽이기 위해 배회하는 ‘괴이한 괴물들’.
 사지가 병신이 된 채 열에 녹아내린 피부를 땅에 질질 끌어대고 있는 ‘괴물이 된 사람들’.
 살기 위해 서로를 빼앗고 죽이는 ‘사람이었던 괴물들’.
 그래.
 지옥이 존재한다면 이러한 모습일 테다.
 
 ***
 
 “으음······.”
 누군가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대성은 깊은 수면에서 깨어났다.
 현기증이 가시지 않고 머리를 찔러오고 있었지만 열이 내렸는지 한결 개운한 느낌이었다.
 “이게 뭘까~요?”
 시화가 통조림 하나를 들이밀었다.
 대성은 눈동자를 돌려 지하실 한편을 응시했다.
 백여 개에 달하는 각양각색의 통조림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저것을 다 들고 오려면 무척 힘들었을 텐데.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대박이었어. 꽉 차 있더라고. 손댄 흔적도 없고. 최소 1년은 배부르게 먹어도 될 듯.”
 “나중에 같이 가서 더 가져오자. 누가 발견해서 쓸어가 버리면 안 되니까.”
 “알았으니까 좀 먹으라고. 나 팔 떨리는 거 안 보이냐.”
 시화가 살짝 톤을 높여 소리쳤다.
 대성이 통조림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고맙다는 인사조차 할 틈 없이 내용물을 허겁지겁 입안으로 쏟아 부었다.
 “천천히 좀 먹어라. 그러다가 체한다고.”
 시화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대성은 순식간에 군 보급용 고추참치 1kg 캔을 비워버렸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넌 좀 먹었냐?”
 “이제야 물어보는 건 조금 너무하네. 저기.”
 시화는 서운한 표정으로 쓰레기를 모아두는 반대편 구석을 가리켰다.
 잠들기 전에는 보지 못했던 몇 개의 내용물 없는 빈 캔이 먼지 속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쏘리.”
 
 사흘 만에 보일러실 바깥으로 나가자 초가을의 뙤약볕이 기습했다.
 “크으-”
 대성은 일순간 시야가 상실되는 것을 느끼며 올라오는 현기증을 못 이겨 휘청거렸다.
 바깥 공기는 지독한 불쾌감을 주었다. 시체 썩는 악취가 흘러와 후각을 자극해왔다.
 주변에 움직이는 물체가 없음을 확인한 시화가 중얼거렸다.
 “뭔가 튀어나오진 않겠어.”
 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튀어나오지 않을 가능성.
 이는 필히 확인해야 하는 항목이었다.
 변이체나 무력을 앞세워 식량을 약탈하려 드는 ‘사람이었던 괴물들’의 출현은 생명을 좌우하는 커다란 위협이었으니까.
 대성이 문득 팔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미약하지만 검은색 기운이 피어올랐다.
 “뭐해?”
 “아냐.”
 “너······.”
 “가자.”
 대성이 걸음을 뗐다. 시화가 웃으며 뒤따랐다.
 그들은 시야에 자신들을 제외한 움직임이 조금이라도 포착되면 설령 그것이 바람에 나부끼는 구질구질한 천 쪼가리일지라도 숨어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반시간을 이동하여 시화가 통조림을 가져왔던 지하창고에 도착했다.
 “쩔지?”
 시화가 말했다.
 지하창고 양쪽 벽면 선반을 가득 메운 각양각색의 통조림 탑들.
 대성은 거듭 탄성을 토했다. 그것도 잠시, 대성은 이내 메고 온 등산용 배낭을 채우기 시작했다.
 하나의 식량이라도 더 챙겨야 한다는 욕심 때문인지 금세 두 개의 배낭이 가득 찼다.
 “정시화.”
 “왜?”
 “니 손등.”
 정신없이 식량을 쓸어 담다가 생긴 상처인 듯 시화의 손등에 기다란 생채기가 생겨 있었다.
 먼지투성이 회색 바탕에 수놓인 붉은 줄은 꽤 이질적인 색감의 대조를 보여주었다.
 “어? 어디 긁혔나 보네. 별 거 아니야.”
 “빨리 치료해.”
 시화가 대충 넘기려는 기미를 보이자 대성의 양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알았다, 알았어. 노려보지 마시게.”
 서슬 퍼런 눈길에 꼬리를 내린 시화는 배낭의 지퍼를 잠근 뒤, 다치지 않은 손의 바닥면을 상처를 향해 슬며시 가져갔다.
 그렇게 시화가 눈을 감고 몇 초 정도 가만히 있자, 새하얀 빛이 줄기줄기 새어 나와 상처를 부드럽게 휘감기 시작했다.
 그저 미약한 연기처럼 보이는 빛.
 하지만 느껴지는 기운만은 굉장히 포근했다.
 잠시 후 빛무리가 사라지자 언제 다쳤었냐는 듯 핏방울이 사라지고 감쪽같이 뽀얀 새살이 돋아나 있었다.
 “됐지?”
 “볼 때마다 부럽다니까.”
 “아직 외상이나 살짝 낫게 하는 정도야. 간신히 하루 세 번쯤 쓰나. 그리고 너도.”
 “됐다. 다 챙겼으면 가자.”
 둘은 속을 가득 메워 배가 잔뜩 부푼 배낭을 어깨에 짊어졌다. 그러자 성장기가 채 끝나지 않은 좁은 어깨가 땅을 향해 축 늘어졌다.
 “아오, 장난 아니게 무겁다. 들고 갈 수 있겠냐?”
 “못 걸을 정도는 아니야.”
 둘은 지하창고 입구를 은폐한 뒤 왔던 길을 묵묵히 걸었다.
 그렇게 5분이나 질질 발을 끌며 걸어갔을까.
 “시··· 화야.”
 대성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황무지의 일부분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경련에 의한 거센 진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를 본 시화에게도 강렬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
 거대한 무언가가 그들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그아아아!
 뒤이어 울려 퍼지는 초저주파의 포효 소리.
 마치 하수구 아래로 흘러가는 걸쭉한 오수 속에 전신을 담그는 것 같은, 원초적이고 지저분한 느낌이 온몸을 짓이겼다.
 변이체학 교과서에서나 보던 괴생명체 한 종류가 둘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샌······ 샌드 웜(Sand Worm).”
 괴생명체의 이름을 중얼거린 시화의 동공이 좌우로 미친 듯이 흔들렸다.
 “달릴 수 있겠어?”
 “가방이 너무 무거운데.”
 “버리자.”
 “아냐, 메고 뛸 수 있어. 일단 튀자!”
 
 “계속 뛰어!”
 대성이 외쳤다.
 샌드웜의 전반적인 이동로를 예측해 수직선상을 이용한다면 충분히 회피할 가능성이 있었다.
 “헉, 헉, 아오!”
 “무조건 멀리 가야 해!”
 급작스러운 질주에 근육이 뒤틀리고 침이 말라 단내가 났다. 허벅지는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대성과 시화는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며 뛰고 또 뛰었다.
 둘을 향해 지그재그로 돌진해 오는 샌드웜.
 자욱하던 모래구름이 걷히며 샌드웜의 몸체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길쭉한 동신 전반을 덮는 날카로운 가시 돌기.
 그리고 아파트 3층 높이에 필적하는 직경의 거대한 아가리.
 벌어진 아가리 속으로 안쪽의 내용물들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콰콰콱-
 강산(酸)이 분비되는 듯, 시체, 돌, 흙, 목재 등이 재질 관계없이 한데 섞여 기괴하기 그지없는 형상으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런! 가······ 가방이 무거워서 도저히 속도가 안 나!”
 “먹을 건 또 가져오면 되잖아! 일단 버리자고!”
 “너나 버려! 언제 또 무사히 갖고 올 거란 보장이 없잖아.”
 “지금 그게 문제냐!”
 “미친놈아, 너도 못 버리고 있잖아.”
 그아아아아아!
 샌드웜이 둘의 코앞까지 당도했다.
 “흐억!”
 “으아악!”
 대성과 시화는 과부하를 일으킨 다리의 힘을 풀어버렸다. 그러고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서로의 손을 잡은 채 죽음의 공포를 만끽하는 것뿐.
 퍼버버벅-
 강해져오는 대지의 진동.
 전신을 강타하는 암석의 파편들.
 저 날카로운 가시에 육체의 일부분이 걸리는 순간, 틀림없이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 넝마가 될 것이었다.
 그도 아니라면 저 더러운 아가리 속에 갇혀 돌기에서 분비되는 녹색의 산액에 부식될 것이었다.
 심박수가 한계점 이상으로 급상승했다.
 단 하나의 뇌세포도 이성적인 사고를 허락하지 않았다.
 공포에 굳은 성대는 비명조차 내지 못했다.
 최후란 이런 기분이구나.
 그 순간.
 대성의 몸에서 검은색 기운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눈을 감고 있던 대성과 시화는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쿠오오오오오!
 짧은 순간 몰아친 폭풍.
 “······.”
 “······.”
 주변이 조용해졌음을 느낀 대성과 시화는 조심스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샌드웜이 나타났던 반대쪽으로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어째서?’
 하늘이 그들을 가엾게 여기어 친히 보살핀 것일까.
 대성은 갸웃거리다 고개를 돌려 땅이 파인 흔적을 보았다.
 그들이 주저앉았던 위치는 샌드웜의 진행 경로에서 불과 1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이를 악물고 조금이라도 더 뛰지 않았더라면 지금 자신들은 샌드웜의 아가리 속에서 장렬한 산화 쇼를 펼쳤을 것이라고, 대성은 그렇게 생각했다.
 흙 범벅이 되어버린 대성과 시화.
 둘은 안도와 허탈이 뒤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엄습했던 공포의 여파가 가시지 않는지, 그들은 땅바닥과 맞닿은 엉덩이를 쉽사리 떼지 못했다.
 “아······ 제대로 지렸어. 시발, 개시발, 존나 시발······.”
 그가 입고 있던 면바지에서 물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고 있었다.
 시화는 이제는 까만 점이 되어 사라진 샌드웜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좀만 걸으면 되니까, 가자.”
 사실 대성 또한 양만 달랐지 찔끔 몇 방울 새어버린 상태였다. 그러나 말하고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러고 싶은데 질척해. 찝찝해 죽겠네.”
 결국 시화는 처참한(?) 심정으로 하의 실종을 감행했다.
 
 “아껴 핀다면서?”
 “이런 좆같은 날엔 하나쯤 피워야지. 솔직히 나도 아깐 심장이 멎어버리는 줄 알았으니까.”
 대성은 네 개의 흰 막대가 전부인 담뱃값을 흔들었다. 그러고는 한 대 꺼내어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고개를 돌려 머금었던 연기를 뿜어내고는 대성이 말했다.
 “우리 담배 사러 갈까?”
 시화는 머리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었다.
 “뭔 소리야. 저번에도 봤잖아. 경계 지역에 군인들 깔려서 닥치는 대로 쏘는 거. 그리고 거기까지 가기 전에 변이체한테 안 뜯기면 그나마 다행이다.”
 “지금 말고.”
 “언제?”
 “힘 키운 다음.”
 대성이 말했다.
 “그런 다음에 몰래 나가면 돼. 우리가 원자병에 걸린 것처럼 보이진 않잖아.”
 “아직까지는.”
 “그래, 그러니까. 일단 힘을 키우자. 하다못해 최하급 변이체라도 조질 수 있을 정도로.”
 “어떻게? 너나 나나 그걸 전투에 쓸 수준이 아니잖아.”
 21세기 지구의 판도를 송두리째 흔들어버린 신비한 힘, 바이오틱 리코그네이션과 바이오틱 포스를 ‘그것’이라고 퉁 치는 시화를 보며 대성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알아. 하지만 그것 말곤 없어.”
 “될지 안 될지 모르잖아. 된다고 해도 오래 걸릴 거야. 아무것도 모르고, 가르쳐 줄 사람도 없고.”
 평소 긍정문 위주의 대화를 구사하는 시화의 입에서 계속 부정문이 나왔다.
 대성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대성아. 넌 안 무서워?”
 “뭐가?”
 “이 모든 상황.”
 시화가 말했다.
 “가족도, 집도, 남아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돌아갈 곳도 없어. 오늘 하루 목숨 붙어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고, 내일 피를 토하며 원자병으로 쓰러질지,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할지도 몰라.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 난 정신 줄 제대로 붙잡고 있는 것마저 힘이 들어.”
 시화의 부정은 어느새 울분으로 바뀌어 풀려 나오기 시작했다.
 ‘너도 많이 참았던 거구나.’
 시화의 퀭하니 파인, 각기병 기운이 도진 눈두덩이 보였다.
 대성이 슬픔을 숨기며 말했다.
 “화나지 않냐?”
 시화의 양 어깨가 작게 떨렸다.
 “나는 화가 나. 이 거지같은 상황에서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이 무엇일지 모른다는 게 화가 나. 앞으로 직면해야 할 더 좆같은 역경들이 화가 나.”
 평소 길게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더욱 그럴지는 몰라도, 대성의 말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힘이 담겨 있었다.
 “나도 무섭다. 하지만 약속할게. 싸움이 끝날 때까지 칼을 집어넣는 순간까지 네 옆엔 내가 있을 거다.”
 시화의 고개가 들렸다.
 눈가에 흐르다 만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
 “······오글거려, 이 새끼야.”
 시화의 말에 대성이 미소 지었다.
 “방법은 있어?”
 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가지 방법이 있어.”
 
 2043년 9월 11일.
 희망이란 이름의 꽃망울이 개화했다.
 
 ***
 
 카가가각-!
 평소에는 들려오지 않던 소리가 지하 보일러실을 뒤흔들었다.
 고막을 긁어대는 마찰음의 주범은 대성이었다.
 그의 오른손에 손등을 살짝 덮는 크기의 시커먼 에너지 덩어리가 뭉쳐 있었다.
 “하압!”
 뾰족한 끝과 회벽이 부딪히자 격한 파작임이 일었다.
 대성은 쉬지 않고 시멘트벽에 크고 작은 흠집을 만들어댔다.
 그는 벽으로부터 전해지는 저릿한 반작용을 견디며 어금니를 세게 물었다.
 ‘조금 더······.’
 횡으로, 종으로 팔을 내지를 때마다 시멘트 가루가 여기저기 산개했다.
 검은 스파크가 사그라질 때쯤 대성은 콧잔등에 송골송골 맺힌 시멘트 가루 섞인 땀방울을 닦아냈다.
 “오, 좀 깊숙이 긁히는데? 쭉 보니까 스파크도 더 강해진 것 같아. 확실히 계속 연습하니까 바이오틱 포스의 응집력이 점점 늘어나네.”
 시화가 다가오며 말했다.
 대성은 누적 횟수가 늘어날수록 점점 깊어지는 흠집을 확인하고서는 뿌듯함을 느꼈다.
 열흘 전 처음 이 무모한 수련을 시작했을 당시엔 있는 힘껏 벽을 내려쳤음에도 불구하고 5밀리미터 정도의 홈을 파는 것이 고작이었다.
 대성은 밥 먹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열흘 내내 칼질을 계속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심지어 자고 일어나면 팔이 마비될 때도 있었지만, 그는 고통을 버텨냈다.
 그리고 그 결실로 지금은 엄지손가락 하나가 거의 다 들어가는 깊숙한 홈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누가 오기킹 아니랄까 봐.”
 시화의 악의 없는 핀잔이 들리자, 대성은 그를 향해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첫날엔 한두 시간 이러니까 체력도 포스도 방전됐는데, 오늘은 팔만 살짝 저려. 더 하라고 해도 할 수 있겠어.”
 “고작 열흘 스윙하고 바이오틱 리코그네이션이 확 세지면, 세상엔 숙달급 요원들만 돌아다니겠네.”
 말은 이래도 가시적인 발전을 이루는 친구를 보며 시화 또한 적지 않게 놀라고 있었다.
 학교에서 제공하는 기초적성검사.
 그리고 국립 바이오틱 리코그네이션 연구센터의 기초 유전자 서열 각성.
 대성은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의무적으로 시행되는 두 가지 검사만 받은 상태였다.
 전투 활용법 등은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기초적성검사 결과 대성은 파괴계열의 수치가 압도적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소위 말하는 전투 요원의 자질을 타고난 것이다.
 그럼에도 정작 대성은 국가가 영재들을 대상으로 제공하는 요원 양성 교육을 받기를 거절했다.
 이유는 다름 아닌 아버지 때문이었다.
 대성의 아버지는 하나뿐인 아들이 죽음의 위협이 일상적인 곳을 일터로 삼는 것을 반대했다.
 그런데 그렇게 바이오틱 리코그네이션과는 담을 쌓고 살아왔으면서, 열흘이라는 짧은 시간 만에 두 배 가까이 확장된 사용량을 보여주다니.
 ‘게다가 포스 양은 물론 암흑기의 응집력 역시 상당히 상승했어.’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본 시화는 경탄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운동에 한 번도 손대지 않았던 사람이 무리한 펌핑으로 일시적 근육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원리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단정 짓기엔 대성의 성장 폭이 너무 컸다.
 저 위력의 스윙이라면 평범한 인간이나 F급 변이체의 연한 조직층은 일순간에 절단당하는 참변을 피할 수 없을 것이었다.
 ‘도대체 왜 저놈은 이런 재능을 가지고서 여태 전투기술을 배우지 않은 거지?’
 시화는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조심스레 왼손을 들어 시계 반대 방향으로 작은 원을 그렸다.
 그러자 가상의 원 안에서 순백색의 탁구공 하나가 탄생했다.
 동시에 영롱한 빛무리가 특유의 침침함으로 잠겨 있던 지하실을 은은하게 밝혔다.
 대성의 그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바이오틱 리코그네이션.
 시화 역시 지난 열흘간 마냥 놀기만 한 것은 아니었고, 그 결과 이제는 희끄무레하던 치유용 연기에 사거리를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구현 횟수 역시 두 배 이상 끌어 올렸다.
 시화는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친구의 오른팔에 백색 구체를 던졌다.
 휙-!
 대성의 오른팔과 신성한 기운이 충돌했다.
 “······!”
 그러자 요란한 스파크가 튀더니 그의 손등을 덮고 있던 암흑검이 사라져버렸다.
 바이오틱 포스의 상쇄.
 큰 고통은 없었지만, 삽시간에 집중이 풀리며 몸속 깊은 곳으로부터 끓어오르던 기운이 무산되었다.
 이에 대성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시화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허탈하게 물었다.
 “왜 네 치유력은 나한테 안 먹히지?”
 “혹시나 해서 또 해본 건데 힘을 크게 할수록 반발만 커지는 것 같아.”
 “아무리 신성과 암흑이 상반 속성이라지만, 효과가 떨어진다 뿐이지 아예 치료가 안 되는 경우는 없는데. 나 그동안 병원에서도 이러지는 않았어.”
 “너도 알잖아. 난 전투력이 전혀 없는 거. 어떻게 공격을 하겠어? 이것도 치유기술이야.”
 시화는 자신의 말에 대한 진실성을 부각시키려는 듯, 동일한 구체를 하나 더 생성해 그와 한 발 쯤 떨어진 곳의 벽을 향해 던졌다.
 흰 구슬은 심지어 아무런 소리조차 내지 않고 벽과 맞닿아 사그라졌다.
 대성은 충돌 부위를 눈이 빠지듯 유심히 바라보기도 하고, 손으로 쓰다듬어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세한 생채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저 백색 포스가 공기 중으로 분산되며 남긴 은은한 프리지아 향만이 코끝을 간질일 뿐이었다.
 “싸우다가 다쳐도 네 치료는 못 받겠네.”
 대성은 그렇게 말하고는 난간에 걸터앉아 헌 페트병 속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시화가 다가와 대성의 팔을 주물러 뭉친 근육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후······ 전투법을 가르쳐 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는데.”
 “그러게. 그럼 넌 금세 강해질지도 모르겠다. 대체 왜 그 정도 재능을 이제까지 썩힌 거야. 아깝게시리.”
 “슬슬 한계가 보여. 실전에서 변이체한테 이게 먹힐지도 미지수고. 막말로 위력만 계속 키워서야 어디다가 써먹겠냐?”
 “음······ 일단 그럼 상상을 해보는 건 어때?”
 “상상?”
 대성의 되물음에 시화는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왜, 영화 같은 거 보면, 무사들이 수련할 때 그러잖아. 숙적이 앞에 있다고 상상하는 거지. 머릿속에서 적의 움직임을 떠올리며 혼자 피하고, 구르고 베고. 너도 변이체랑 싸운다고 가정하면서 수련하는 게 좀 더 효과적일 수도······.”
 짝!
 내리는 진눈깨비를 응시하던 대성은 박수를 치며 머리를 벌떡 들어 올렸다. 그의 얼굴에는 환희가 가득했다.
 “내가 왜 이제껏 그런 생각을 못 했지? 짜식, 머리 좋은데?
 “아얏! 야, 머리 걸려. 아파. 그만해.”
 손질 없이 방치된 지 백 일이 다 되어가는 머리카락은 얽히고설키어 잔뜩 꼬여 있었다.
 여기에 손가락을 파묻고 쓰다듬어대니, 당연히 뽑혀 나갈 듯한 고통이 찾아올 수밖에.
 대성은 이 대화를 계기로 벽과의 사투를 접었다.
 대신 허공과의 혈전을 시작했다.
 그것도 등을 뒤로 젖히거나 옆으로 구르는 동작 따위의 싸구려 회피가 포함된.
 시화는 그 모습을 보며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난 뭐로 힘을 키워야 하나.”
 
 대성과 시화는 하루에 10~15개의 통조림을 먹으며 수련에 매진했다.
 대성 위주의 열량 공급이었지만 그는 혼자 더 많은 양을 고집할 성격이 아니었다.
 대성은 한사코 거절하는 시화의 입으로 한 끼 당 꼭 두 캔씩 강제로 음식을 집어넣었다.
 그러다 보니 통조림이 어느덧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시화가 운을 뗐다.
 “한 번 다녀와야겠는데?”
 “말 나온 김에 당장 가자. 지금 몇 시지?”
 “세 시 삼십 분. 오늘은 별일 없겠지?”
 한 달 전의 악몽을 떠올리고 있는지 시화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난생처음으로 코앞에서 느낀 죽음의 공포에 일종의 트라우마가 자리 잡힌 듯하였다.
 겉으로는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불안이 이끌어낸 반사작용까지 속이지는 못했는지, 그의 속눈썹과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대성은 그 진동을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이번엔 내가 뚫고 올게. 뛰어갈 거야. 온몸이 근질근질하다.”
 공장의 창고까지는 지하실로부터 약 2㎞ 거리. 오르막도 없어 뛰어가기에 부담 없는 코스였다.
 “같이 가. 안 그래도 도움 되는 거 하나 없는데 짐꾼이라도 해야지.”
 “내가 그 말 하지 말라고 했지. 넌 그냥 있어주기만 해도 도움이라고.”
 “같이 가자. 그게 속 편해.”
 “후, 알았으니까 백팩이나 챙겨.”
 둘은 먼지로 더럽혀져 원래의 검은색을 상실한 회색 백팩을 어깨에 걸쳤다.
 “가자.”
 대성이 앞장섰다.
 그렇게 또 한 번의 외출이 시작됐다.
 
 지하실 밖으로 빠져나오자 차가움과 시원함의 중간쯤 되는 온도의 바람이 불어왔다.
 바야흐로 10월.
 흐린 날씨가 풀리고 파랗게 갠 하늘은 웬일로 꽤 높아져 있었다. 방사능 구름이 걷혀서 그런지 공기도 비교적 상쾌했다.
 “타이밍 굿인데? 예전에는 방진 때문에 안개 낀 것처럼 시야가 누랬는데, 이젠 좀 걷히나봐. 맑다, 그치?”
 “조용한 거 보니까 변이체도 없는 것 같아.”
 “후후······ 이런 날씨면 먹을 것 좀 싸 들고 어디 놀러 가야 되는데.”
 시화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불안이 가시지 않은 듯 몇 발자국에 한 번씩은 꼭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윽고 낯익은 스테인리스 재질의 문이 둘을 반겼다.
 시화가 손을 뻗어 그로써는 세 번째 방문이 될 보물섬의 입구를 열었다.
 그 순간 대성의 얼굴에 진한 당혹감이 서렸다.
 ‘저번에 이곳을 다녀갈 때 입구를 위장해 두었는데.’
 분명 공사판에 쓰이는 낡은 방수포를 씌우고,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끔 커다란 돌멩이들까지 얹어놓았었다.
 그러나 지금 은닉은 모조리 해체되어 있었다.
 돌멩이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방수포는 인위적으로 갈기갈기 찢어진 채 흙바닥을 나뒹굴었다.
 무엇보다 흙바닥에 찍혀 있는 어지러운 발자국.
 사이즈를 보니 자신들의 발자국도 아니었다. 그리고 형태가 온전했다. 찍힌 지 오래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들어가는 발자국만 있고 밖으로 나오는 발자국이 없었다.
 “잠깐만!”
 “응? 왜?”
 시화는 곧 자신을 반길 통조림 생각에 일말의 망설임 없이 지하창고로 들어갔다.
 “정시화!”
 대성은 황급히 시화의 뒤를 쫓아 스테인리스 문 안쪽으로 몸을 던졌다.
 쉬익-!
 창고 내부로 발을 들이자마자 육중한 무언가가 대성의 머리를 향해 섬뜩한 파공음을 토하며 날아들었다.
 파창-!
 식겁한 대성이 오른팔에 바이오틱 포스를 가동해 머리를 막았다.
 본능에서 비롯한 상당히 빠른 대응이었지만 날카로운 충격음이 울려 퍼지며 그는 1미터 가까이 튕겨져 나갔다.
 “커······ 커억, 뭐야!”
 “뭐긴 뭐야. 사람이지. 흐흐.”
 대성의 앞으로 괴인 한 명이 기분 나쁜 조소를 흘리며 창고의 안개를 파헤치고 다가왔다.
 짧은 모히칸 머리에 얼굴 여기저기 흉터가 가득한 우람한 체구의 남성.
 얼핏 보기에 20대 중반 정도로 추정되는 그는 한 손에 족히 20킬로그램은 되어 보이는 대함마를 들고 있었다.
 “······.”
 하박에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대성이 눈을 돌려 슬쩍 내려다보니 팔이 기괴한 각도로 꺾인 채 힘없이 대롱대롱 늘어져 있었다.
 “흐흐, 이놈은 그래도 좀 하나 보네. 아까 들어온 놈은 한 대 맞고 나자빠지더만.”
 “뭐··· 뭐라고?”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대성의 왼팔에 검은 불꽃이 일렁였다.
 평소보다 20센티미터는 더 길게 구현된 암흑의 송곳니.
 “이 개새끼야, 내 친구 어떻게 했어!”
 대성이 괴한에게 달려들며 좌에서 우로 체중을 실어 왼팔을 덮은 암흑 기류를 휘둘렀다.
 “글쎄올시다?”
 괴한은 대성의 필사적인 일격을 고작 대함마의 자루를 세워 잡는 동작 한 번으로 가볍게 막아냈다.
 “야, 광남아. 심심한데 저 새끼도 잡아서 갖고 놀자.”
 입구 반대편 끝의 한 귀퉁이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료가 있었나······.’
 얇실한 체구의 장발의 남자가 선반에 걸터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뱀같이 생긴 놈의 발아래에는 대성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친구가 정신을 잃은 채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시, 시화야!”
 “성질만 급하지 순 초짜구만. 어디 적을 코앞에 두고 한눈을 파시나.”
 은회색의 기류가 감도는 대함마 자루 끝부분이 대성의 명치에 꽂혔다.
 퍼억!
 “컥!”
 대성은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
 세상이 노랗게 물들었다.
 ‘아, 씨······ 씹······ 이러면 안 되는데······.’
 
 고통과 함께 대성은 정신을 차렸다. 전신이 무언가에 속박되어 움직여지지 않았다.
 눈동자를 굴리자 옆으로 누워 있는 시화가 보였다. 그 역시 수족이 포박된 채 대충 버려져 있었다.
 “끄응-!”
 대성은 손목부터 힘을 주어 구속을 풀기 위해 안간힘을 써보았다.
 매우 단단하게 묶여 있는 밧줄은 조금이나마 풀릴 기미조차 없었다. 오히려 부러진 오른팔을 자극하는 압력만 증가했다.
 성질이 끓어오른 대성은 발광하는 자벌레 꼴로 전신을 바동거렸다.
 퍽!
 “크윽!”
 갑작스럽게 복부에 내장이 역류할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보자 그를 내리깔아 보는 양아치 상 남자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눈가에 눈물 한 방울이 핑 돌았으나, 대성은 그래도 미간에 힘을 주어가며 또박또박 외쳤다.
 “풀어라, 이 개새끼야.”
 “저놈은 지가 처한 상황도 파악하지 못하고 깝치네.”
 선반 쪽에서 참치 통조림 하나를 게걸스럽게 비우고 있던 광남이 다 먹은 캔을 아무 데나 던지며 빈정거렸다.
 양아치 상의 남자는 광남을 마주 보며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아직 정신을 잃고 혼절해 있던 시화의 배를 걷어찼다.
 퍼억.
 “존나 재밌는데? 둘이 꽤 친한가 봐.”
 “한 시간은 갖고 놀 수 있겠어.”
 “이 씨발, 뭔 짓이야!”
 대성이 분에 겨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두 괴한은 그 장면을 즐기며 자기들끼리 좋아해댔다.
 시화는 급작스러운 고통이 강타하자 놓쳤던 정신 줄을 되잡고는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크으······ 너네 뭐야. 왜 우리 통조림 공장에서 이러고 있지?”
 그러자 양아치의 미간이 급격하게 찌푸려졌다. 그는 시화를 버러지 보듯 쳐다보았다.
 “우리 통조림 공장?”
 “······.”
 “보나마나 운 좋게 발견한 것 같은데, 뭐 우리도 그렇다고 해두지. 방수포를 덮어놓아서 그냥 지나칠 뻔했지만 말이야.”
 광남이 대함마를 들고 다가왔다.
 “모처럼 팔팔한 애새끼를 둘이나 주웠는데 그냥 죽이긴 아깝지 않아?”
 “창식아, 또 식인 물고기 밥으로 던지게?”
 “그건 금방 죽으니까 재미없잖아. 어떻게 한다?”
 살 궁리로 머리를 쥐어짜며 창식을 노려보던 대성은 그의 눈가가 점점 짐승의 그것으로 물들고 있음을 목격했다.
 “어이, 까만 소년. 내가 재미있는 게임을 생각해냈어. 만약 너네가 우리를 즐겁게 해주면 특별히 풀어줄 수도 있지.”
 대성은 상대하기조차 싫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창식은 그런 그를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쳐다봤다.
 “광남아. 둘이 존나 친한 거 같아서 살려주려고 한 건데, 까만 놈이 하얀 놈을 살리기 싫대. 하얀 새끼부터 함마로 찍어버려.”
 “오케이.”
 광남은 족히 1미터 50센티미터는 되어 보이는 함마를 머리 꼭대기까지 치켜 올렸다.
 대성이 외쳤다.
 “알았어! 할 테니까, 뭐든 할 테니까 걔는 건들지 마.”
 창식이 턱으로 신호를 보내자 광남의 함마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친한 친구면 서로를 위해 목숨도 버리겠네? 까만 놈은 적어도 그럴 분위긴데. 과연 흰 놈은 그럴까? 궁금하지 않아?”
 창식은 아까부터 하얗게 겁에 질려 말도 못하고 떨고 있는 시화를 트집 잡아 걸고 넘어졌다.
 “어이 곱상하게 생긴 놈.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크하핫.”
 그는 말을 이으며 생각만 해도 즐겁다는 듯 혼자 킬킬댔다.
 “지금부터 내가 니 친구한테 몇 개의 미션을 줄 거야. 근데 만약 니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항을 하면 그때마다 까만 놈 팔다리를 하나씩 자를 거야. 까만 놈 너는 내가 시키는 것을 못 하면 그때마다 니 친구 놈 팔다리를 하나씩 뜯어버릴 거고. 피라냐 소환!”
 그의 소환 명령에 지하창고의 철제 바닥이 기묘하게 변형되기 시작했다.
 이윽고 대성과 시화 주변에 푸른빛이 감도는 반 평 넓이의 호수가 생겨났다.
 그리고 호수 속을 유영하며 이따금 수면으로 아크로바틱을 시도하는 생명체들.
 성인 남성 허벅다리 크기의 식인 물고기, 피라냐였다.
 피라냐의 벌어진 아가리 속으로 날카로운 송곳니 수십 개가 보였다.
 대성과 시화는 창식의 속셈을 알아채고야 말았다.
 창식이 음흉한 웃음소리를 흘려대며 대성에게 첫 번째 미션을 지시했다.
 “우선 가벼운 것부터 시작해볼까?”
 딱, 엄지와 검지를 맞부딪히며 경쾌한 마찰음을 내자 피라냐 한 마리가 튀어 올랐다. 그러고는 대성의 발목을 단단히 동여 묶고 있던 밧줄을 물어뜯어버렸다.
 “헛짓을 하거나 말을 안 들을 생각은 하지 마. 만약 그런다면······.”
 피라냐 한 마리가 시화의 종아리 위로 올라와 엄지손톱만 한 이빨을 박아 넣었다.
 동시에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으아아악!”
 “알았어. 한다고! 그러니까 그만해!”
 그제야 피라냐는 시화의 종아리에서 아가리를 치우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자 그럼 니 친구를 어디 한번 죽도록 패봐. 별로 안 어렵지?”
 욕이 목구멍까지 넘어왔다.
 대성이 가만히 서 있자 창식은 그를 협박하며 숨통을 조이려 들었다.
 “니 친구 다리 하나 뜯겨 나가야 마음이 바뀌려나 보지?”
 피라냐 한 마리가 이번엔 시화의 허벅지로 달려들어 이빨을 박아 넣었다.
 시화가 손발이 묶인 채 고통에 발버둥 치며 대성에게 소리쳤다.
 “으아아악! 난 괜찮으니까 말대로 해줘! 제발. 으악!”
 “미······ 미안하다.”
 대성은 발길질을 시작했다.
 뺨을 타고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창식과 광남이 이를 보며 시뻘건 잇몸이 다 드러날 정도로 자지러지게 웃었다.
 “크캬캬캬, 더 세게 조져! 내 손으로 다 뜯어버리기 전에.”
 “흐하하, 야 저 새끼 피눈물 흘린다. 흐흐, 아주 눈물 없이는 못 봐줄 감동의 드라마구만.”
 두 악마는 대성과 시화의 속마음 따위는 헤아리지 않았다. 그저 장난감을 어떻게 가지고 놀지 의견을 나누며 히히덕거릴 뿐이었다.
 “키키킥. 슬슬 지겨운데 다른 거 시켜볼까? 광남아, 뭐 하고 싶은 거 없냐?”
 “둘이 사이가 멀어지면 안타깝잖아? 흐흐······ 서로 사랑을 나누게 하자.”
 “그거 재미있겠네.”
 창식은 한 번 더 엄지와 검지를 마찰시켜 피라냐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대성의 손목을 봉인하던 밧줄이 풀렸다.
 동시에 또 다른 피라냐는 시화의 발목을 억제하던 포박을 제거했다.
 임무를 마친 피라냐 두 마리는 호수로 돌아가지 않고, 시화의 양 옆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우리가 워낙 착해서 금이 간 우정을 붙여줄 타임을 마련했어요. 이름하여 화해의 장 오픈! 검은 소년은 아파하는 친구를 위해 거기를 애무해주세요. 정성껏! 키킥.”
 “흐핫핫, 진짜 재밌겠다.”
 대성은 공황에 빠졌다.
 “야, 그냥 해······ 팔다리 뜯기고 죽는 것보단 낫잖아. 어디까지 하나 보자 씨팔······.”
 대성은 눈을 감았다.
 오른팔이 심하게 부어올라 정상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에 심리적인 거부감이 합쳐지자 지퍼를 잡은 손을 움직일 수 없었다.
 “손에 힘이 안 들어가나 보네? 그럼 내가 편하게끔 찢어주지.”
 창식의 손짓에 피라냐 한 마리가 시화의 바지 윗부분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저 새끼 생긴 거와는 다르게 완전 대물인데? 땅에 질질 끌리는 거 봐. 킥킥.”
 “그러게. 꼭 개불같이 생겼군.”
 “자, 우선 세워보시죠~”
 창식은 피라냐를 조정해 시화의 그곳 끝에 날카로운 이빨을 갖다 댔다.
 그때였다.
 낯선 중저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만들 하지?”
 “뭐야, 넌?”
 벽에 기대고 선 채 창식의 게임을 구경하고 있던 광남이 옆에 세워 두었던 대함마의 자루를 움켜쥐었다.
 놀라기는 창식도 마찬가지. 한창 집중하고 있었다고 해도, 그는 인기척까지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둔한 감각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문을 가로막고 선 남자는 키가 족히 190㎝는 되어 보일 정도의 장신이었다.
 짙고 두꺼운 눈썹, 강인한 턱선, 오뚝한 콧날에서 강한 남성의 느낌이 물씬 풍겨왔다.
 “애들 데리고 뭐하는 짓이냐? 니네 부모가 니들 낳고 미역국은 처먹든?”
 
 
 
 
 
 Chapter 2.
 
 
 
 
 
 “뭐라고? 이 새끼가 감히.”
 어깨를 뒤로 힘껏 젖힌 광남은 허리의 반동을 이용해 대함마를 남자를 향해 던졌다.
 남자는 대함마를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귀찮다는 듯, 이마 앞으로 모아 세운 리젠트 스타일의 헤어를 한 손으로 쓸어내리곤 손을 내밀었다.
 파악-!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놀랍게도 남자는 날아오는 대함마의 머리 부분을 그대로 잡아냈다.
 뚜둑- 뚜둑-
 그는 함마를 쥔 채 좌우로 목을 꺾으며 광남을 비웃었다.
 “이래서 인간 말종이 괜히 인간 말종으로 불리는 게 아니라니까. 이봐, 덩치만 큰 쓰레기. 망치라는 건 이렇게 쓰는 거야.”
 슈욱- 콰작!
 대함마는 눈으로는 도저히 쫒아갈 수 없는 속도로 날아가 광남의 머리를 두부마냥 으깨어버렸다.
 그리고 그도 모자라 그가 기대고 있던 스테인리스 벽에 박혀버렸다.
 사고 기관을 잃은 광남의 몸이 그대로 기울어지며 땅으로 내동댕이쳐졌다.
 “허······ 허억.”
 사람이 풍비박산 나는 과정을 처음 보는 시화.
 B급 고어 영화 한 편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그는 붕괴되는 정신을 이기지 못하고 혼절했다.
 반면 대성은 침을 꿀꺽 삼키며 남자의 경이로운 힘에 감탄했다.
 “개새끼, 넌 오늘 좆 된 줄 알아라!”
 창식이 경악으로 굳은 안면 근육을 감추며 양팔을 큰 대(大)자로 벌렸다.
 “주제 파악이 아직도 안 되나?”
 “그건 네놈이 이제부터 해야 할 거고. 내가 누군 줄 알고. 데드 레이크(Dead Lake) 형성!”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한 발로 땅을 툭툭 치던 남자의 발아래로 검붉은 호수가 형성되었다.
 실제 수원을 소환하는 것은 아니었는지 남자가 호수 속으로 빠져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분 나쁜 검붉은색 바이오틱 포스의 호수 안에는 대성과 시화를 위협하는 데 쓰인 것보다 훨씬 많은 피라냐 떼가 헤엄치고 있었다.
 “구현계였나? 허세만 부릴 줄 알았는데, 꽤 괜찮은 잡기술이네.”
 남자는 무심히 선반을 지탱하던 철제 구조물 하나를 뽑아 들었다.
 나사로 피스 질이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맨손으로 그 일을 해냈다.
 “잡기술인지 니 목숨을 가져갈 기술인지 어디 한번 직접 느껴봐라.”
 창식은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의 전매특허인 데드 레이크는 바이오틱 포스로 구성된 스무 마리의 피라냐로 호수 위의 적을 물어뜯는 기술이다.
 죽음과 피를 먹고 자라난 이 피라냐들의 턱 힘과 흉포함은 쇳덩이도 잘게 찢어버린다.
 적어도 지금껏 만난 적 중 이 호수에 들어와 사지가 멀쩡한 채 나간 놈은 아무도 없었다.
 “뜯어라, 나의 피라냐들이여!”
 검붉은 호수의 표면에서 피라냐들이 일제히 뛰어올랐다.
 “피해요!”
 대성이 다급히 외쳤다.
 남자는 대성을 보고 싱긋 웃으며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사내놈이 멸치 몇 마리 무섭다고 도망치는 건 좀 아니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철제 구조물에 맺힌 무색투명한 바이오틱 포스가 주변의 공간을 미세하게 왜곡시켰다.
 남자는 고밀도의 힘이 응집된 철제 구조물로 튀어 오르는 피라냐를 한 마리 한 마리 찍어댔다.
 퍽! 퍽! 퍽!
 남자의 형질 없는 바이오틱 포스가 피라냐를 꿰뚫을 때마다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인위적으로 구현된 포스가 원래의 에너지 준위로 돌아갈 때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그렇게 생명력을 잃어버린 식인 물고기는 검붉은 연기로 화하여 공기 중으로 사라져버렸다.
 “어, 어어······.”
 피라냐가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을 볼 때마다 창식의 표정은 심하게 굳어갔다.
 결국 모든 피라냐가 생을 마감하고 나서야, 그는 경악에 떨리는 목소리로 남자를 향해 물었다.
 “넌······ 누구지? 왜 이렇게 강한 거냐?”
 “나 안 세. 니가 약한 거지.”
 “살려······.”
 쉬익-
 남자의 키만 한 쇠창살이 바람을 가르며 무서운 속도로 날아갔다.
 콰각!
 철제 구조물은 창식의 갈비뼈 사이로 틀어박혔다.
 “커, 커걱.”
 바람 든 신음이 저장고 내부에 메아리쳤다.
 창식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는지 두 눈을 부릅뜨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창식은 몇 초간 부르르 떤 것을 끝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대성은 그만 얼이 빠져버렸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추스르고 남자에게 인사했다.
 “고맙······ 습니다.”
 “아냐. 인간으로서 도리를 했을 뿐이지.”
 남자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시화의 하체에 입고 있던 롱코트를 벗어 덮어주었다.
 “실례지만, 이름을 여쭈어봐도 될는지······.”
 남자는 싱그러운 미소를 띠며 대성의 물음에 대답했다.
 “나? 박태민.”
 
 박태민은 스물한 살의 청년이었다. 그는 자신을 예비 전투요원이라고 소개했다.
 예비 전투요원은 전투요원 교육생으로서의 모든 커리큘럼을 수료하고 실전 배치 이전에 군 복무를 수행 중인 초급 요원을 일컫는다.
 스물한 살에 그 악명이 자자한 과정을 완수하다니.
 대성과 시화는 태민이 재능과 실력을 두루 갖추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박태민 요원님.”
 “요원님은 내가 들어도 오그라든다. 그냥 태민 형이라고 불러.”
 대성이 골절상을 입었음을 확인한 태민은 곧바로 차갑게 식어버린 창식의 티셔츠를 찢어 이를 붕대 삼아 부목을 대주었다.
 동작 동작마다 묻어 있는 군더더기 하나 없는 노련함에 그가 예비 전투요원이었다는 사실에 더욱 신뢰감이 들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쭈어보아도 될까요?”
 “응, 뭔데?”
 “이렇게 강하신데 왜 피폭지역 안에 계세요? 충분히 나갈 수 있으실 것 같은데······.”
 “뭐? 하핫.”
 시화를 흔들어 일으키던 태민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입고 있던 흰 브이넥 티셔츠를 훌러덩 벗어젖혔다.
 그의 옆구리에 흉측하게 새겨진 주먹 두 개만 한 흉터가 눈에 들어왔다.
 생긴 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는 않은 듯, 이제야 딱지가 떨어지고 붉은 새살이 돋아나고 있었다.
 “의심해서 죄송해요.”
 “괜찮아. 낯선 사람을 한번 이상 의심해 보는 것은 좋은 태도야. 그리고 난 그렇게 GP를 뚫고 나갈 정도로 강하지 않아. 이제 고작 이해-중급 단계의 맛을 본 수준이니. 이 상처는 한 달 전 GP를 강행 돌파하려다가 입은 거다.”
 바이오틱 리코그네이션은 네 단계로 나뉜다.
 
 인지(perception).
 이해(Understand).
 숙달(Master).
 초월(Unlimited).
 
 각 단계는 초, 중, 상의 세 등급으로 한 번 더 분류되며 이해-중급 단계, 숙달-초급 단계와 같은 방식으로 활용되었다.
 “소총까지는 어떻게 막아볼 만한데, 바이오틱 포스가 실린 중기관총 난사는 내 수준으로는 감당이 안 되더라고.”
 태민은 다시 티셔츠를 입으며 말을 이었다.
 “그 덕에 몇 대 맞고 다시 안쪽으로 튄 거야. 칫, 개새끼들. 안에 엄연히 사람들이 살아 돌아다니는데, 다 죽일 심산인 거지.”
 
 대성과 시화가 어느 정도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상태까지 회복하자 태민은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켰다.
 “너희를 구해줬으니 여기 있는 통조림 몇 개만 집어 가도 되겠지? 그럼, 잘 있어라.”
 “잠깐만요.”
 대성이 말했지만 태민은 선반을 뒤적거리며 입맛에 맞는 통조림을 고르는 데 여념이 없었다.
 “형, 우리와 함께 나가보지 않을래요? 가능성 있는 방법을 알고 있어요. 그리고 형이 도와준다면 우리 모두 올해 안에 나갈 수 있어요.”
 그 소리에 태민은 시선을 대성에게 옮겼다.
 “진짜예요. 발목을 잡거나 하지도 않을 거구요.”
 시화가 거들었다.
 “무슨 방법인지 들어나 보자.”
 대성과 시화는 탈출 계획에 대해 열심히 설명을 해주었다.
 집중하여 태민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GP를 맨몸으로 뚫는 것보단 확률 면에서도 높겠고. 그런데 내가 식량을 빼앗고 혼자 떠날 수도 있는데 너희는 왜 나를 꼬드기는 거지?”
 태민의 말이 맞았다.
 솔직히 자신들을 버리든 죽이든 그의 힘이라면 이곳의 통조림을 싸 들고 혼자 여정을 떠날 능력이 충분했다.
 더구나 태민의 입장에서 대성과 시화는 데려가도 필요 없는 패이자 오히려 짐이 될 공산이 컸다.
 “솔직히 말해봐. 원하는 게 있지?”
 시화가 말했다.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서 아직은 약하지만 전 치료를 할 수 있어요. 대성인 전투에 소질이 있구요. 혼자 가는 것보다 훨씬 도움이 될 거예요.”
 태민의 오뚝한 콧날이 난처함에 물들어 미묘하게 떨렸다. 그는 깎지 못한 수염으로 뒤덮여가는 거친 턱선을 매만지다가 말했다.
 “일단 알았다.”
 대성과 시화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난 너희를 이용할 거야. 너희가 강해질수록 탈출이 쉬워질 테니까.”
 태민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너희 역시 너희 스스로 강자가 되기 위해 목숨 걸고 기어올라라. 여기서든, 여기서 나가서든. 약자의 삶만큼 비참하고, 슬프고, 하지만 당연한 건 없으니까.”
 
 다음 날 아침.
 세 남자는 통조림으로 대강 식사를 때웠다.
 “큰일을 시작하려거든 철저한 계획부터 세우는 것이 우선이지.”
 태민이 허리를 눕혀 벽에 편하게 기댄 채 대성과 시화를 바라보았다.
 그의 판단으로 탈출 계획 자체는 커다란 틀을 바꿀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단, 여러 가지 변수를 파생시킬 작은 계획들에 대해 반드시 구체적으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너희가 가진 바이오틱 포스나 신체 능력, 특기를 좀 더 자세히 알 필요가 있어.”
 거기에 태민 자신의 능력까지 더한 후 이에 맞추어 적절한 수준의 행동 규범을 정해야 했다.
 “현재 수준에서 내가 너희를 지키며 처리할 수 있는 변이체는 D급까지가 한계야. C급은 하위 랭크에 있는 놈들도 일대일 전투를 치르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다.”
 “꼭 전투를 치를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형 만나기 전에는 그냥 운에 맡기고 최대한 숨어서 돌파하려고 했어요.”
 애당초 전투 능력과는 거리가 먼 시화의 말이었다.
 태민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보이는 족족 싸우며 가겠다는 게 아냐. 네 말대로 최대한 숨어 다녀야지. 너희가 말했던 가장 가까운 합류 거점이 양주랬지?”
 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지역은 아니지만 다른 지역은 변이체 수가 꽤 돼. 양주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거야.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수준은 절대 아니야. 다행인 것은 하급 변이체가 대다수라는 거다.”
 태민이 말했다.
 “그래서 일단 너희 계획을 따르되 너희의 바이오틱 리코그네이션을 좀 더 파헤쳐보고, 이후에 그에 맞게 작은 계획을 수정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바라던 바예요.”
 대성이 그렇게 말하곤 시화를 보았다.
 “오늘이 며칠이지?”
 “내 기억이 맞다면 10월 18일.”
 겨울이 불과 한 달 남은 시점이었다. 이대로 혹한까지 맞이한다면 얼어 죽을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성은 동장군이 찾아오기까지 남아 있는 시간을 활용하길 원했다.
 대성이 태민에게 말했다.
 “여기서 양주까지 가는 데에는 천천히 가도 3일. 전단에 12월까지 구호가 계획되어 있다고 써 있었으니까 11월 초쯤 출발해요.”
 “그럴 생각이다. 그럼 너희 실력을 한번 볼까?”
 대성이 일어나 몸을 풀었다.
 “바로 시작할까요?”
 “그래. 둘 다 최대한으로 바이오틱 포스를 사용해.”
 둘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대성의 멀쩡한 오른팔에서 넙치칼을 연상시키는, 짧고 뾰족한 검은 물질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에 맞추어 시화의 두 손바닥 사이, 한 뼘이 채 되지 않는 틈에서 순백의 광구가 형성되었다.
 “······!”
 태민은 놀랐다.
 대성과 시화는 여느 평범한 또래와 비슷한 수준의 바이오틱 포스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양적인 측면에서 단순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
 그들이 발현 중인 바이오틱 포스를 구성하는 힘의 ‘내용’이 문제였다.
 바로 ‘속성 밀도’가 남들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또래와 비교해서 답을 구할 문제가 아니었다. 태민은 자신이 아는 전 인류의 범위로 비교군을 확산시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럴듯한 결론을 내리는 데 실패했다.
 “역시 실망스러운가 봐요.”
 “나름 저희끼리 해보겠다고 벼락치기를 해보긴 했는데······.”
 대성과 시화는 태민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가자 동작을 중단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아냐. 계속해.”
 흑과 백의 기류가 다시 엉켰다.
 뚜렷이 전해지는 극한의 속성 밀도.
 흑색 힘에서는 한 줌의 별빛조차 허락지 않을 블랙홀 속의 깊은 암연이, 백색 힘에서는 절대적 유토피아이자 천국의 세계에 진입한 듯한 순수한 신성이 느껴졌다.
 ‘저 정도의 특질이 직접 느껴지다니!’
 바이오틱 포스 속에 오직 하나의 속성만 존재한다고 해도 쉽게 믿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말이 백 퍼센트지, 하나의 주 속성이 점유율의 오십 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케이스는 전 세계를 뒤져 손에 꼽을 정도로 희귀했다.
 비현실을 현실로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이오틱 리코그네이션이라고 할지라도 결국 인간이 사용하기 위해 존재하는 힘이었다.
 주인에게 충실한 이 힘은 절대 소유자를 해치려 들지 않았다.
 한 속성이 압도적으로 편중되어 타 속성의 점유율을 뺏는 경우가 절대적으로 희귀한 이유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이 법칙을 무시하고 한 속성이 심하게 편중될 시에는 힘의 주인에게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하였다.
 전례 또한 존재했다.
 속성 점유율이 높을수록 자신이 사용하는 힘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지고, 위력적인 면에서도 우세한 것은 맞았다.
 심지어 바이오틱 포스 자체의 성장 속도마저 빠르다는 장점까지 존재했다.
 그러나 결국 바이오틱 포스의 제물이 되어 육체가 파괴되는 극단적인 위험성이 공존했다.
 대성과 시화에게서 ‘기형아’의 가능성을 찾아버린 태민의 심경은 착잡할 수밖에 없었다.
 ‘시화는 치유력이 강하니 계속 사용해도 몸에 무리는 가지 않을 것 같다. 문제는 양대성 저 녀석인데.’
 암흑 속성은 파괴력 순으로 모든 속성을 나열하였을 때 무조건 첫 페이지에 등장했다.
 심지어 어떤 통계에서는 일 순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오로지 파괴와 환원만을 위해 존재하는 속성.
 밸런스를 무시한 암흑 속성의 극도 편중은 시전자의 몸을 망가뜨렸으면 망가뜨렸지, 절대 이롭게 작용할 리 없었다.
 대성을 바라보는 태민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이번엔 너희가 말했던 서로의 포스가 상쇄되는 걸 보자.”
 “이렇게 하면 되나요? 히힛.”
 시화는 손바닥 위에 하얀 탁구공 하나를 띄웠다.
 높은 불투명도를 과시하는 백색 구체가 빛을 발했다.
 대성은 탁구공에서 발산되는 기운에 조금이라도 더 집중하고자 눈을 감았다.
 이내 발견되는, 심장으로부터 뿜어지고 있는 시커먼 물줄기.
 “지금!”
 태민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시화가 치유의 공을 던졌다. 대성이 이에 맞추어 생체 에너지로 구성된 먹물 검을 내밀었다.
 파지지직-!
 검고 하얀 불꽃들이 주변으로 튀어 올랐다.
 태민은 그 장면을 한순간이라도 놓칠세라 노려보았다.
 몇 초 후, 격렬한 불꽃은 두 포스가 전량 상쇄됨과 동시에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으앗!”
 대성은 상쇄 현상이 끝나자마자 갑작스럽게 찾아온 짜릿한 고통에 비명을 내질렀다.
 ‘역 속성끼리 반응을 일으킨 뒤 남아 있어야 할 다른 속성의 포스가······ 전혀 없다.’
 태민은 의구심이 점점 정답에 가까워지는 게 보였다.
 검고 흰 바이오틱 포스가 충돌한 후 남은 포스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면 낮은 보유량의 한계로 존재감 자체가 미약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 결과만으로도 이들이 한 속성을 극도로 보유하고 있음을 증명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정말로 백 퍼센트······?’
 생각이 그곳까지 미치자 태민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놀라운 모순점 하나를 발견했다.
 “대성아, 너 아예 포스를 못 던지는 거냐?”
 “네. 저도 해 보려고는 하는데, 몸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포스의 흐름이 끊겨버려요.”
 “정말이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결과였다.
 대성은 백 퍼센트가 의심되는 초고밀도의 암흑 속성 포스. 시화는 고밀도의 신성 속성 포스에 약간의 공간 지각 속성 포스.
 포스의 완전 소멸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구조였다.
 위력적인 우세야 고려한 오차 범위 안에 있으니 배제하고, 시화는 공간 지각 속성을 통해 자신의 포스가 단일 속성으로 구성되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그런데 어떻게 둘 사이에서 완벽한 상쇄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정확한 상쇄의 원인은 모르겠구나. 여기서 탈출한 후에 기계적인 분석을 해봐야 명확히 알 것 같다.”
 태민은 끝없이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타래를 일단 던져버리기로 했다.
 “그나저나 저희 어때요? 많이 부족한 건 알지만······ 기대치 이하인가요?”
 태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기대 이상이다. 시화야 치료계열이라 기본 지식을 가르쳐주는 정도가 한계라 아쉽지만, 대성이 같은 경우는 출발 전까지 하드 트레이닝을 시켜볼 만해.”
 대성이 눈을 크게 떴다.
 “하······ 하드 트레이닝요?”
 
 ***
 
 “뒤다.”
 태민의 일갈과 함께 거대한 쇳덩이가 대성의 오른 어깻죽지를 스쳐 지나갔다.
 “크악!”
 거검이 떨어진 자리의 시멘트 바닥은 쩌억 금이 가 있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어깨뼈가 통째로 아작이 날 수도 있었을 상황.
 “형, 점점 과격해지는 거 아니에요?”
 “봐주면서 하면 실력이 늘겠어?”
 훈련을 시작한 지 어느덧 2주째.
 태민은 대성을 가차 없이, 그리고 쉴 새 없이 굴려댔다.
 체력 훈련은 기본이요, 실제상황을 빙자한 기습까지.
 어쩌다가 하급 변이체가 지하실 인근에서 발견되기라도 하면 기어코 들고 와서 대성에게 집어 던지기도 했다.
 “간다.”
 거검에 무색투명한 기운이 서리기 시작하더니 태민의 근육이 꿈틀거리며 부풀어 올랐다.
 바이오틱 포스를 운용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태민은 근련을 상승시킨 후 자신의 전매특허인 고속검을 사용해 대성을 쉴 새 없이 내려쳤다.
 콰직- 쾅! 콰광!
 대성은 정신없이 내려치는 금속 덩어리 사이를 요리조리 휘저었다.
 ‘집중! 바이오틱 포스를 눈에 끌어모은다!’
 대성의 눈동자는 포스를 개방할수록 더욱 새까맣게 빛났다. 포스의 활용력이 상승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많이 늘었어.”
 대성은 평범한 열일곱 소년이라고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정교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근데 언제까지 막고만 있게?”
 “갑니다.”
 대성의 신형이 높은 탄력을 자랑하는 합성 고무마냥 튕겨졌다.
 “그 정도 속도로 지금 돌진하는 건 자폭이야.”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스멀거리는 검은 기류로 둘러싸인 단검은 태민의 머리 위에 튀어나온 시멘트 천장을 향했다.
 리치는 짧았지만, 구조상 낮은 높이를 가진 천장에 닿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
 대성의 단검이 날카로운 마찰음을 일으키며 회벽과 부딪혔다.
 카가각-!
 그렇지 않아도 대련의 여파로 금이 가 있던 벽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이런!”
 저돌적인 공격에 대비하고자 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던 태민. 그는 머리 위로 떨어지는 시멘트 덩어리를 막기 위해 황급히 거검을 들어 올렸다.
 깡- 까강-
 쇳덩이에 가로막힌 돌멩이가 요란한 소음을 일으켰다.
 ‘실패인가.’
 멋지게 카운터 어택을 날리려던 생각이 수포로 돌아가자 대성은 침음성을 내뱉으며 태민의 뒤쪽으로 거리를 벌렸다.
 이대로 끝내버릴 수는 없었다.
 대성은 태민의 등 뒤로 단검을 휘둘렀다.
 “이건 의외인데?”
 태민은 거검을 비스듬히 세워 믿기 힘들 속도로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이러면 어쩔 테냐?”
 투퉁-! 투쾅!
 떨어졌던 돌덩이들이 회전력에 의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거검이 모든 것을 통째로 집어삼킬 기세로 쇄도했다.
 대성은 재빨리 거리를 벌린 덕에 회전 반경을 벗어나는 데에 성공하였으나······.
 빡!
 경쾌한 타격음이 울려 퍼졌다.
 머리로 날아드는 작은 돌멩이 하나를 미처 피하지 못한 것이었다.
 대성이 충격에 해롱거렸다.
 이를 보고 태민은 훈련을 끝냈다.
 “보름 정도 훈련한 건데, 내가 본 누구보다 실력이 붙는 속도가 빨라. 응용도 훌륭하고.”
 “아직 멀었어요.”
 “괜히 하는 소리 아냐.”
 태민이 그렇게 말하며 어림잡아도 50kg은 될 거검을 지하실 한쪽으로 던졌다.
 시화가 태민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형! 볼에 피 나는데요.”
 태민의 뺨에 얕은 혈선이 생겨 있었다.
 이내 순백의 얇은 빛줄기가 태민의 피맺힌 뺨을 훑고 지나갔다.
 화이트 포커스(White focus).
 지난 2주간 시화 역시 놀고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태민은 치유 계통으로 지식이 없었지만, 바이오틱 포스를 사용하고 통제하는 데에 익숙했기에 시화에게 그 운용적인 측면에 대해 조언을 해주었다.
 화이트 포커스는 이로부터 탄생한시화만의 첫 기술이었다.
 현재의 시화가 적당한 수준의 외상에 대하여 사용할 수 있는 화이트 포커스는 휴식 없이 한 번에 30회가량.
 바이오틱 리코그네이션의 이해도는 다소 떨어질지언정 의무병과의 어지간한 일반병을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고맙다, 시화야.”
 포근하고 가볍지만 따뜻한 온기가 그에게 전해지자 태민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그리고 탈출 계획 관련해서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가 된 것 같다.
 거칠지만 곧은 턱선을 쓰다듬는 태민을 바라보며 대성과 시화는 긴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짧은 기간 동안 대성과 시화가 판단한 태민의 성격은 꽤 차분하고 신중했다.
 그런 태민의 입에서 탈출이라는 말이 나온 것은 드디어 시기가 도래했다는 뜻일 테다.
 “긴장감을 갖는 건 좋지만 오버해서 긴장할 필요도 없어.”
 태민은 그들의 반응에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옆에 벗어둔 코트의 주머니를 잠시 뒤적이더니, 익숙한 사각형의 물체를 꺼냈다.
 “형 담배 피우셨어요?”
 “아껴 피우느라 그렇지 나도 흡연자야.”
 대성의 눈이 빛났다.
 마지막 한 개비를 처리한 지가 언제였던가.
 “뭐냐, 마치 ‘저도 흡연자인데 자대 배치 받았으니 이젠 제발 담배 좀 피우게 해주세요’ 같은 이등병틱한 표정은?”
 “하핫.”
 “자, 딱 하나만 준다.”
 태민은 대성의 담배에 자신의 연초로 직접 불을 붙여주었다.
 그러고는 대화를 본론으로 이끌었다.
 “이제 여기 떠야겠다.”
 “언제쯤 출발하는 거예요?”
 “내일모레.”
 “모레요?”
 “오늘은 쉬고 내일은 탈출에 필요한 준비물을 챙기자.”
 세 남자는 어느덧 이르게 찾아오는 어둠을 느끼며 평소보다 일찍 수면을 청했다.
 그러나 한참동안, 그들은 잠에 들지 못했다.
 
 ***
 
 셋은 지하창고와 인근 공장 등에서 먹을거리를 포함해 탈출에 필요한 물품들을 챙겼다.
 무기 활용도가 낮은 시화와 달리 대성과 태민은 무기를 신중하게 챙겼다.
 대성은 평삭기였을 기계에서 얼굴만 한 원형 톱날을 골랐고, 태민은 과자 포장을 자르고 깡통을 뚫는 데에 쓰였을, 족히 일 미터는 넘을 거대한 날과 드릴 기둥을 택했다.
 그리고 다음 날.
 세 남자는 목숨을 건 긴 여정을 시작했다.
 
 “안 힘드냐?”
 “아직은.”
 대성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화를 힘들게 하는 원인은 어깨를 짓눌러오는 육중한 짐 더미가 아니었다. 가혹하기 그지없는 주변 광경이었다.
 금이 쩍쩍 갈라진 검은 아스팔트 위로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는, 심하게 훼손되고 부패한 시신.
 마침 종잇장처럼 구겨진 차량 속에 함께 찌그러져 있는 운전자의 시체가 등장했다.
 “이런 꼬라지를 보다 죽기 싫으면 우리가 나가면 된다.”
 물이 든 드럼통을 짊어지고 선두에 서서 걷던 태민은 고개를 살짝 돌려 한마디를 던졌다.
 “형, 우리 오늘 어디까지 간다고 그랬었죠?”
 “오늘은 지행까지 간다. 물론 얼마나 작살나 있을지는 모르지만.”
 경원선 선로가 깔려 있었던 길을 따라 걷던 세 남자의 고개 너머로 한탄강이 펼쳐졌다.
 맑은 물을 잔뜩 머금고 흐르던, 어릴 적 여름마다 물놀이를 하기 위해 놀러 가곤 했던 그곳.
 강은 날아든 파편과 무너진 흙이 뒤엉켜 잔뜩 오염된 지 오래였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지저분함이 아니었다.
 “형······ 한탄대교가 무너졌어요.”
 대성은 볼썽사납게 다양한 높이로 박혀 있는 콘크리트 잔해를 허망하게 응시했다.
 “다른 다리나 길은 없니?”
 “몇 개 더 있기는 한데 한 이십 분 정도 걸어야 해요. 그리고 가장 큰 다리가 이 꼴이면 아마 가도 헛수고일 수도 있구요.”
 태민은 작은 돌을 집어 던져 수위를 확인했다.
 풍덩-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으로 보아 보기보다 수심이 꽤 깊은 듯하였다.
 그는 강둑을 타고 내려가 허리춤에 길게 매달고 있던 드릴 봉을 쑤셔 깊이를 확인했다.
 다리 길이보다 길던 쇠막대가 반쯤 물에 잠겨 사라졌다.
 “바깥쪽이 이 정도면 가운데는 꽤 깊을 거다.”
 “그래도 저 정도면 무너진 돌들을 밟고 건널 수 있지 않을까요?”
 붕괴된 다리로 다가가 유심히 여기저기를 살피던 시화가 조금은 밝은 어조로 물었다.
 비교적 간격이 넓은 구간도 있었지만, 수면에 나와 있는 돌덩어리들이 징검다리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렇긴 한데 중간 즈음이 아예 비었어. 물살을 견디지 못하고 떠내려 간 건가?”
 “그럼 헤엄을 치면 되지 않을까요? 저희 둘 다 방학 때마다 수영 다녔는데. 히히.”
 “상류부터 깡그리 피폭 당했는데 방사능 수치가 얼마나 될 줄 알고. 헛소리 할 시간에 저기 보이는 널빤지 같은 거나 주워 와.”
 태민의 손끝이 향한 곳에는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건축용 합판이 처박혀 있었다.
 어림잡아도 대성의 키를 훌쩍 넘어 보이는 건설 자재.
 그러나 족히 오 미터는 됨직한 징검다리의 빈 부분을 메꾸기엔 턱없이 부족한 길이였다.
 대성을 도와 합판 주변의 돌을 들어내던 시화가 의아한 눈으로 태민을 쳐다봤다.
 “괜히 철사 챙기자고 했겠어?”
 지난밤 탈출을 준비하던 중, 태민은 뜬금없이 녹슨 굵은 철사 한 무더기를 대성의 배낭 앞에 매달아주었다.
 철사는 원래 대성이 새로 얻은 원형 톱날의 손잡이를 만들어주기 위해 인근 공장에서 함께 챙겨 온 물건이었다.
 “다시 출발해 볼까? 콘크리트 조각이 고르지 않아서 중심을 잡기가 힘들 거다. 균형 잘 잡아.”
 어느덧 한탄강의 중심부에 다다르자 꽤나 거세진 물살이 보였다.
 색도 완연한 무채색으로 변하여 그 깊이를 쉽게 헤아리기는 어려울 듯하였다.
 데구르르, 풍덩-
 대성이 발을 살짝 헛디딜 뻔하자 떨어져 나온 콘크리트 파편 한 점이 강물을 향해 쏜살같이 굴러갔다.
 그리 덥지 않은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배낭에게 휘둘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대성의 이마에 구슬땀이 흘러내렸다.
 평소였다면 그리 고전했을 난이도는 아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무거운 짐을 메고 있다 보니 중심을 잡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태민과 시화도 발끝에 온 집중을 다하고 있는지 별다른 말이 없었다.
 “형, 여기 철사요.”
 길이 끊긴 지점에 다다르자 대성은 곧장 배낭을 내리고 태민에게 철사 무더기를 건넸다.
 “조금만 더 고생해 보자고.”
 우웅-
 중후한 공명음이 울려 퍼지자 그의 굵직한 손가락 끝에 아른대는 투명한 기운이 서렸다.
 이윽고 그 손가락으로 집게를 만들어 철사를 살살 비벼대자 마치 찰흙처럼 필요한 길이만 남긴 채 쉽게 끊어져버렸다.
 허리춤에서 인근 공장에서 챙긴 작두를 꺼내 철판과 연결하는 태민.
 합판에 작두와 드릴을 묶자, 반대편 콘크리트 더미에 알맞게 걸쳐지는 길이의 임시 발판이 탄생했다.
 대성은 먼저 발판을 밟아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뒤이어 시화가 발판을 밟는 순간······.
 촤아아악-!
 “으악, 뭐야!”
 물기둥들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반투명한 촉수 수십 다발이 튀어 나왔다.
 “자이언트 젤리피쉬다! 정시화, 빨리 이쪽으로 넘어와!”
 대성은 어느새 자신을 에워싸고 흐느적대는 그것들을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톱바퀴의 가운데에 매단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자이언트 젤리피쉬(Giant jellyfish).
 D-8급으로 지정된 수중형 변이체.
 거대한 해파리를 연상시키는 이 변이체는 바닷물, 민물 가릴 것 없이 떼로 몰려다니며 기다란 여러 다발의 촉수로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을 잡아먹었다.
 물속에 있을 때에는 거의 투명한 형태로 떠다니기 때문에 감지하기 어려웠다.
 촉수 끝에는 마비독마저 묻어 있어 순식간에 생명을 빼앗길 수도 있었다.
 “혀, 형······!”
 안 그래도 희끄무레한 시화의 얼굴은 홍조가 싹 가신 채 창백함만 가득했다.
 ‘빨리 합판을 딛고 건너야 형이 무기를 집어 들 수 있을 텐데.’
 생각과는 달리 긴장 속에 경직될 대로 경직된 몸은 단단히 굳어 움직여줄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상황을 파악한 태민은 바이오틱 포스를 전력으로 개방했다.
 세차게 펄럭이는 코트 자락.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주변을 가득 메운 고밀도의 에너지 장(Field)이 대성의 피부를 자극했다.
 “하압!”
 태민은 합판에 묶어둔 드릴 봉을 있는 힘껏 들어 올렸다.
 그러자 시화가 합판과 함께 그대로 딸려 날아왔다.
 대성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하강하는 시화를 잽싸게 받아 들었다.
 “잘했다! 다 숙여!”
 태민은 드릴 봉과 합판, 작두가 일체화된 그 조형물을 그대로 촉수를 향하여 반원을 그렸다.
 쿠아아앙!
 직경 오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달이 하늘을 수놓았다.
 달베기는 진로를 방해하는 모든 물체, 심지어 공기조차도 무자비하게 갈라버렸다.
 그 일격에 순식간에 그들을 에워싸고 있던 촉수 무더기가 양단되어 물속으로 힘없이 사라졌다.
 “뭐 하냐! 어서 강을 건너!”
 굵은 외침이 둘의 귓전을 때렸다.
 대성은 시화의 손을 잡고 오로지 앞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거대 해파리의 촉수는 마비독을 뿌리기 위해 끊임없이 그들의 진로를 거스르며 쇄도했다.
 대성은 남은 손으로 있는 힘껏 톱날을 쥐고 촉수를 베어냈다.
 스걱! 스걱!
 검은 바이오틱 포스가 허공에 잔상을 흩뿌렸다.
 식량을 잔뜩 담은 배낭은 원망스러울 정도로 무거웠지만 대성은 이를 악물고 앞으로 달렸다.
 쿠아아앙! 콰각! 콰광!
 태민은 그들의 뒤를 바짝 따라붙으며 끝이 없이 쫒아오는 촉수들에게 연이어 달베기를 선사했다.
 마침내 부서진 한탄대교의 끝 지점에 도착한 대성과 시화.
 그러나 갑자기 사력을 다해 뛰고 있던 시화가 고꾸라지고 말았다. 무리하게 허벅지 근육을 사용하다가 쥐가 올라온 것이었다.
 “아악!”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반투명한 자이언트 젤리피쉬가 소년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철벅철벅.
 기분 나쁜 점액질을 잔뜩 뒤집어쓴 파라솔만 한 몸체 속에는 내장 기관으로 추정되는 무엇인가가 들어 있었다.
 태민이 외쳤다.
 “뒤로 빨리 물러서! 지상 호흡은 우두머리 개체의 특징이다!”
 쇄애액-
 눈 깜짝할 새에 짓쳐들어오는 거대한 네 쌍의 촉수!
 적어도 D-5급에 준하는 변이체일 대장 해파리의 공격이었다.
 “안 돼!”
 대성의 다급한 외침이 방사능을 함유한 대기를 갈랐다.
 “양대성! 정신 바짝 차리고 정면부터 끊어!”
 태민이 온몸에 분산되어 있던 에너지 장을 무기로 집중시키며 있는 힘껏 공중으로 도약했다.
 퍼컹!
 드릴과 합판이 고속으로 축회전하며 태민의 손아귀를 떠났다.
 퍼서서석!
 콰쾅-!
 자이언트 젤리피쉬 우두머리가 갈기갈기 찢어발겨졌다.
 문제는 우두머리 변이체가 죽기 전 날렸던 촉수들이었다. 본체와 분리된 세 가닥의 촉수는 전혀 감속되지 않은 채 여전히 시화에게 날아들고 있었다.
 “씨발!”
 촉수가 쏘아진 경로로 몸을 던진 대성은 허리를 있는 힘껏 비틀어 칠흑의 톱날을 크게 휘둘렀다.
 파캉! 파캉!
 두 번의 충격음이 찰나의 시간차를 두고 울려 퍼졌다.
 “크아아악!”
 대성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쥐고 있던 무기를 힘없이 떨어뜨렸다.
 뎅그렁.
 미처 막아내지 못한 한 가닥의 촉수가 오른팔에 틀어박힌 것이었다.
 게다가 촉수는 본체의 명령이 없이도 살을 헤집으며 파고들었다.
 시뻘건 핏물이 강물에 흘러들자 우두머리를 잃은 자이언트 젤리피쉬들이 광분하며 그들을 쫒아왔다.
 태민은 재빨리 돌덩이 사이에 박혀버린 무기를 빼내며 다른 한 팔로 대성을 안아 들었다.
 “시화야, 뛰어!”
 “네, 넷!”
 그들은 혼신을 다하여 뛰고, 또 뛰어갔다.
 
 “크읏!”
 “허억, 허억.”
 마침내 셋은 한탄강 도하에 성공했다.
 그들이 건너온 부서진 다리 주위에는 여전히 거대한 해파리들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꿈틀대고 있었다.
 태민은 모래가 고운 강변에 대성을 눕혔다.
 “참아, 뺀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살을 찢는 지독한 고통.
 “으아아악!”
 촉수가 뚫고 들어갔던 부위로 진득거리는 붉은 폭포가 흘러내렸다.
 태민은 코트 자락을 찢어 재빨리 상처의 윗부분을 꽁꽁 묶었다.
 압박법이 효과가 있었는지 금세 출혈이 멎었다.
 “신경독 때문에 한동안 통증만 계속되고 움직이지 못할 거다.”
 “알겠어요. 근데 형······.”
 “왜?”
 “그 달베기랑 창 던지는 거 가르쳐 주세요.”
 태민이 피식거렸다.
 “이래야 너답지.”
 
 대성은 배낭을 찾아 멀쩡한 한 팔을 먼저 집어넣고, 그 팔을 이용해 나머지 배낭끈을 마비된 반대쪽 어깨에 걸쳤다.
 “내가 들고 갈 테니 이리 줘.”
 힘없이 덜렁이는 팔을 보자 시화는 가슴이 다시 아려오는 듯 울상을 지었다.
 ‘바이오틱 포스만 먹힌다면 금방 치료해 줄 수 있을 텐데.’
 대성은 독기 서린 눈으로 묵묵히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섰다.
 “나같이 오기 부리는 애들이 나중에 사기캐 되니까 방해하지 마라.”
 “그, 그래도······.”
 “태민 형부터 챙겨. 형 아니었으면 다 죽었어.”
 그러자 태민은 왼손을 휙휙 저으며 사양의 의사를 표현했다. 그래도 뒤늦게라도 자신을 알아준 것이 흐뭇했는지,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완연했다.
 “출발하자.”
 아직도 태양 빛을 받으며 한탄강 수면 위에서 반짝이고 있는 자이언트 젤리피쉬들을 뒤로한 채, 세 남자는 다음 목적지를 향한 행군을 조속히 재개했다.
 얼마나 내리 걸었을까.
 하루 중 가장 기온이 높은 시간, 약간의 더위를 느끼며 셋은 연천군을 벗어나 동두천시 하봉암동에 진입했다.
 “저기 보이는 저거, 소요산이네요.”
 학교 소풍으로 지겨울 정도로 자주 찾아가던 소요산.
 그러나 기억 속 소요산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심지어 확연히 낮아진 해발고도는 산이 핵미사일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케 해주었다.
 잠시 후 소요산역이 목전에 펼쳐졌다.
 “쩝, 처참하구먼.”
 대성은 침을 꿀꺽 삼키며, 거의 삼분지 이에 해당하는 부분이 통째로 사라져 있는 파괴된 역사를 바라보았다.
 그때 태민이 나지막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기 빼.”
 “네?”
 “저기 봐. 최근까지 누군가 살고 있던 흔적이다.”
 무너져 내린 역사의 한 귀퉁이.
 그곳에는 정말로 먹다 버린 지 얼마 안 된 음식 찌꺼기와 베개 용도로 쓰였을 법한 작은 목침, 그리고 이불로 추정되는 네모난 누더기가 나뒹굴고 있었다.
 태민은 허리에서 작두를 풀었다. 그리고 언제든 내려칠 수 있게끔 어깨 뒤로 비스듬히 걸쳤다.
 대성 또한 어색한 압각을 견디며 톱날 판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노리고 있는 걸 수도 있어. 경계를 늦추지 마라.”
 만약 흔적의 주인이 이미 이곳을 떠났거나 잠시 공석인 경우라면 별다른 위협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자신들의 접근을 감지하고 근처 어디엔가 숨어 있다면?
 대성이 소리쳤다.
 “잠시만요!”
 
 
 
 
 
 Chapter 3.
 
 
 
 
 
 “······!”
 “······!”
 “······!”
 소리의 근원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사람 한 명이 보였다. 무너진 건물의 틈바구니에 절묘하게 몸을 숨기고 있었다.
 투두두두.
 태민은 바이오틱 포스를 전력으로 개방했다.
 동시에 무식한 길이의 작두를 내려칠 준비를 하며, 낯선 이를 향해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달려갔다.
 키가 2미터에 달하는 근육질의 남자가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돌진해 오자 숨어 있던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기다란 막대를 내려버리곤 항복 의사를 표현했다.
 “고, 공격할 생각은 없어요!”
 막대의 정체는 바로 대한민국 육군 기본 화기로 알려진 KB-2 소총이었다.
 “너 뭐 하는 새끼냐!”
 태민이 으르렁거렸다.
 태민과 낯선 자의 대치를 바라보던 대성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정시화, 너 일단 숨어. 주변에 다른 놈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 아닙니다! 이곳에는 저 혼자밖에 없어요······!”
 “네 말을 어떻게 믿지?”
 남자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태민의 목소리는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천천히, 나와.”
 바스스스.
 남자는 순순히 명령을 따르며 은신을 해제했다.
 그가 있었던 공간 사이로 약간의 돌조각과 모래가 떨어져 내렸다.
 밖으로 기어 나오기 위해 자신을 향한 그의 등짝을 봐버린 순간, 여전히 남자를 향하여 작두를 겨누고 있던 태민은 순간 섬뜩함에 소름이 돋았다.
 남자의 등에는 성인 남성의 주먹만 한 혹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악성 종양의 수는 무려 열 개가 넘었다. 심지어 남자는 한쪽 다리마저 없었다.
 완연한 죽음이 깃든 그 처참한 모습에, 태민은 겨누고 있던 작두를 거두었다.
 
 자신의 이름을 준태라고 밝힌 낯선 사람의 정체는 근처 기계화보병사단 1xxx 부대의 유일한 생존자였다.
 입고 있던 전투복을 통하여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셋은 준태의 소개를 집중해서 들어주었다.
 “굳이 총을 겨냥할 필요는 없잖아. 쫄려서 베어버릴 뻔했다.”
 “미안합니다. 어차피 주, 죽을 마당에 죽임당하는 건 억울했습니다.”
 시화가 준태의 등에 새하얀 바이오틱 포스를 쏟았다.
 우우웅-
 빛무리가 종양에서 새어 나온 싯누런 고름 사이로 스며들었다.
 병을 낫게 할 수는 없을지라도, 일시적으로 통증을 완화해줄 수는 있을 것이었다.
 “계속 여기 계실 거예요?”
 혹시 모를 돌발 상황에 대비해 묵묵히 사방을 주시하고 있던 대성이 동행 의사를 물었다.
 같은 피폭자의 처지. 어쩌면 자신의 미래 모습일 수 있는 준태를 방치하는 일이 두려워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 나도 처음엔 양주로 가려 그랬는데 도저히 못 가겠······ 크하악!”
 그는 말을 하던 중 갑자기 검붉은 덩어리를 뱉어냈다.
 “크으······ 도, 동정할 필요는 없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죽을 때를 지, 직감한다고 하더니 나도 그게 느껴져.”
 갈 길이 급했지만 세 남자는 그로부터 이십여 분을 준태가 살아온 이야기를 경청하는 데에 사용하였다.
 대성은 배낭에서 참치 캔 몇 개를 꺼내어 그의 머리맡에 놓았다.
 태민과 시화는 그 행동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참치 캔을 바라보며 사뭇 자조적인 미소를 지은 준태는 잡동사니가 쌓여 있는 구석에서 작은 권총 한 정을 꺼냈다.
 “KB-5 권총이야. 소, 소총과 함께 가져가······ 도움이 될 거야. 부대에서 챙겨 온 보, 보람이 있구나.”
 “그럼 형은 어떻게······.”
 시화는 말끝을 흐렸다.
 “선물이야. 날 미, 믿어주고······ 잠시나마 통증을 덜어줬으니까. 쿨럭, 쿨럭.”
 “무리해서 말하지 마세요······.”
 “크······ 그, 그래도 끝물에나마 내 이름을 기억해줄, 나의 삶을 들어줄 사람이 있어서 좋네.”
 
 대성은 피고름이 잔뜩 묻어 있는 이불로 준태의 시신을 조심스레 덮어주었다.
 그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행동은 몇 분간의 짧은 묵념으로 떠나간 영혼을 애도하는 것뿐.
 태민은 부들거리는 손으로 이불에 불을 붙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억지로, 억지로 아이들에게 출발을 요구했다.
 “총 챙겨서 출발하자. 사용 방법은 걸어가면서 가르쳐 주마. 소총은 시화가 갖고 권총은 대성이가 호신용으로 써라.”
 “······네.”
 하늘을 수놓는 검은 연기를 올려다보며, 대성은 눈꺼풀을 덮는 희뿌연 수막을 걷어냈다.
 그러고는 지금은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할 누군가를 위해 메마른 목소리로 읊조렸다.
 “부디, 도착한 그곳에서는 행복하시길.”
 
 마치 준태의 영혼이 세 남자를 맴돌며 수호하기라도 하는 듯, 소요산역을 벗어나자 흔하디흔한 하급 변이체들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성은 거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태민의 전투기술을 배우고 있기 때문이었다.
 태민은 중병기용 절기를 대성의 전투 방식에 맞게 고쳐서 가르쳤다.
 그것이 네 시간 전이었다.
 대성은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채 이동하면서 쉴 때마다 태민이 가르쳐준 동작을 반복했다.
 “형, 근데 이 속도면 오늘 조금 더 이동할 수 있겠는데요?”
 시화가 나뒹구는 간판에 적힌 ‘동두천 중앙점’이라는 글씨를 발견하고는 말했다.
 세 남자는 동두천 중앙역으로 진입입했다.
 목적지인 지행역이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였는지, 대성과 시화의 표정은 어느새 활짝 펴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원형 톱날의 손잡이를 빙글빙글 돌리며 앞장을 서던 대성의 발치로 회색 포스 덩어리가 날아들었다.
 타앙- 타앙-
 “뭐, 뭐야!”
 징후조차 없이 들이닥친 기습.
 심장이 통째로 뒤집혀질 정도로 놀라 무기를 떨어뜨리는 찰나, 태민이 그의 어깨를 잡아당겨 멀찌감치 뒤로 던져 버렸다.
 “시화야!”
 “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태를 파악한 시화가 대성을 붙들고 부서진 건물 사이로 몸을 숨겼다.
 태민 또한 메고 있던 드럼통을 방패로 내세우고는 석벽 더미 뒤로 뛰어들었다.
 “바로 죽일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형 말대로 견제하려던 것 같은데요?”
 눈동자를 굴려 사격의 근원지를 찾고 있던 시화가 동의를 표해왔다.
 아무리 재빨리 움직였다고 한들, 엄폐를 시도하는 사이 후속 사격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반응이 올 때까지 기다려보자고. 장전 풀지 말고.”
 “네. 별일 없어야 되는데······.”
 침착함을 유지하고자 속으로 애를 써보아도 자연스러운 신체의 반응까지는 속일 수 없었다.
 그렇게 대치가 몇 분이나 이어졌을까.
 셋의 머리 위로 여성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어디 있는지 다 보이니까 무장 해제하고 나와요.”
 고지대에서 발산된 목소리에 태민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젠장······ 저기 빌딩 쪽에 있나 본데요?”
 “위치가 너무 안 좋군.”
 물론 원래의 높이를 짐작하기는 힘들었지만, 주변으로 5층 이상 남겨진 건물들이 포진한 상태.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중 하나에 자리 잡고 그들을 관찰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계속 그러고 있으면 적으로 간주하고······.”
 콰앙-!
 석벽 너머 불과 이십여 미터 위치에서 지축을 뒤흔드는 폭발이 일어났다.
 그 위력이 어찌나 거셌던지 반고리관을 어지럽히는 진동이 셋의 무릎을 타고 전해졌다.
 “이번엔 그쪽으로 던질 거예요.”
 더 이상 남은 선택지가 없었다.
 태민이 드릴 봉을 놓아두고 두 손을 들어 항복을 표시하며 걸어 나갔다.
 “우리는 구호팀을 찾아가는 생존자입니다. 조용히 지나가게만 해주시지요.”
 “일단 거기 있어요.”
 목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리창 없는 빌딩의 골조 사이에서 등장한 그녀는 후덕한 인상의 중년 여자였다.
 “지나가도 되는 겁니까?”
 “지금 시내로 가는 건 자살행위일걸요?”
 “자살행위라니요?”
 “그쪽에서는 안 보이려나? 동두천 시청 중심으로 네펜데스가 진을 쳤어요.”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셋은 가까이 위치한 2층 건물의 옥상으로 기어 올라갔다.
 눈가에 포스를 집중하며 도심 쪽을 응시하던 태민의 안면 근육이 다시금 씰룩거렸다.
 태민을 보며 대성 또한 포스를 운용했다.
 시야로 부자연스러운 검녹빛 덩어리들이 들어왔다.
 “네펜데스가 저렇게 커요?”
 “방사능이 기형 변이체를 만들어낸 것 같다.”
 네펜데스는 D-1랭크의 변이체다.
 고대신화 속 괴물의 이름을 따온 것에서 추측할 수 있듯, 킬트리와 더불어 식물형 변이체 중 가장 잘 알려진 종이다.
 그들의 공격 방식은 단순하지만 잔인했다. 가시달린 질긴 덩굴들로 희생양의 출혈을 유도했고, 이빨 달린 안면부는 그렇게 포획한 먹이를 소화하기 좋은 영양액으로 산화시켰다.
 특히 빠르게 주변 환경에 적응하여 번식하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일행의 눈에 들어온 네펜데스들은 크기만 해도 기존의 두 배에 해당하는 삼 미터에 가까웠다.
 게다가 공격의 중추 역할을 하는 덩굴의 개수 또한 정상체보다 서너 개가 더 많았다.
 “저거 뚫고 지나갈 생각은 아니죠?”
 태민이 고개를 저었다.
 둘은 옥상에서 내려왔다.
 “지나가려면 밤나무골 쪽으로 우회해야 해요. 물론 수가 적을 뿐이지 변이체가 없는 건 아니에요. 그쪽엔 기형 킬트리들이 포진하고 있어요.”
 완전무장한 여자가 말했다.
 “근처 상황에 해박하신 것 같은데, 어찌 이곳에서 계속 계시는 겁니까?”
 “그, 그건······.”
 그녀는 잠시 당황하는 기색을 내비쳤으나 이내 깊은 한숨에 이어 입을 열었다.
 “소개가 늦었네요. 제 이름은 하선희예요.”
 근처 군부대로부터 화기를 주워 온 것을 제외한다면 선희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전업주부였다.
 그녀는 천운으로 초등학생 아들과 함께 핵폭격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2주 전 그 아들마저 실종돼버린 탓에 이곳에 남겨지게 되었다.
 “가을비가 끝났을 때였어요. 먹을 것을 찾아 급하게 헤매느라 저는 심한 몸살에 시달리게 되었지요.”
 고열에 제대로 정신을 유지하지 못하는 사이, 유일하게 남은 초등학생 아들은 아픈 엄마를 위한답시고 약을 찾아 홀로 거처를 나섰다.
 남편과 첫째를 폭격에 날려 보낸 것도 서러워 미칠 지경이었건만, 그렇게 외출한 아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혼미한 와중에 들려왔던 ‘보건실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더듬어 아이가 다니던 초등학교로 넋을 잃고 걸어갔을 때, 그녀를 반기는 것은 학교의 외벽을 감싸고 있는 네펜데스 떼의 덩굴뿐이었다.
 “하필이면 제가 몸살을 앓는 바람에··· 저는 최악의 엄마일 거예요.”
 “진짜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한층 숙연해진 공기가 분위기를 가라앉히자 이를 의식한 선희가 먼저 선을 긋고 나섰다.
 “도와달라고는 안 할게요. 제 능력은 기척을 숨기는 데에 특화되어 있어요. 혼자 수를 줄여나가는 것 정도는 가능해요.”
 “일단 저희들끼리 의논을 조금 해보겠습니다.”
 
 “어차피 지나갈 거면 네펜데스 쪽을 돌파해 보는 것은 어때요?”
 “아줌마 혼자 두고 가자니 마음이 너무 아파요.”
 그러나 목숨을 보전하는 관점에서 감정에 휘둘려 결정을 내리는 것은 현명치 못한 일이었다.
 “나라고 돕지 않고 그냥 지나가고 싶을까.”
 태민은 물이 담긴 드럼통을 툭툭 차대며 깊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밤나무골로 간다고 해도 안전할 거라는 보장도 없잖아요? 거리도 너무 추가될 것 같고.”
 대성의 말에 태민이 고개를 저으며 회의적인 기색을 내비쳤다.
 한번 뿌리를 박은 이상 그 자리에서 더 이상 이동하지는 않겠지만 덩굴이 닿는 영역 안에서의 네펜데스는 동 랭크 대비 최강이었다.
 그와 대성은 근접전 위주의 전투를 구사하는 각성자. 둘에게 있어 이러한 류의 전투는 백번 지양함이 옳았다.
 그때, 머리를 쥐어짜고 있던 시화가 손바닥을 마주치며 둘을 바라보았다.
 “불! 불이에요!”
 “으음?”
 “화염병 같은 것으로 화공을 하면 굳이 가까이 갈 필요가 없어요!”
 시화는 심심할 때마다 돌려보던 전투 요원들의 영상으로부터, 네펜데스가 식물형 변이체 중에서도 유독 불에 취약하던 것을 기억해냈다.
 “생각보다 쉽게 일이 풀릴 수 있겠어.”
 
 “형, 병 다 떨어졌어요. 지금 몇 개예요?”
 “대충 삼백 개 넘은 것 같다. 그만 만들어도 될 것 같아.”
 화염병의 제작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핵에 의해 도로 표면이 뜯겨져 나가는 바람에 주유소는 휘발유가 든 탱크로리를 제공했고, 무너진 식당가에는 음료 병이 든 박스가 다수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세 남자, 그리고 한 명의 중년 여성은 기름이 담긴 병을 네펜데스 군락 경계에 위치한 무너진 건물에 옮겼다.
 은신 능력으로 지형지물을 속속들이 파악해 둔 선희 덕택에 그들은 탐색 없이 시야 확보와 엄폐를 동시에 보장받을 수 있는 곳을 얻게 되었다.
 “이모님, 살살 하세요. 이러다가 네펜데스보다 먼저 쓰러지시겠어요.”
 대성이 스무 개가량의 병이 든 상자를 나르던 그녀에게 염려를 표현했다.
 “아니에요. 저와 아들을 위한 일인걸요.”
 
 “자, 다들 준비됐지?”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자 태민은 한 명 한 명 얼굴을 바라보며 전투의 개시를 알렸다.
 “네! 그런데 형 그거······.”
 주먹을 말아 쥔 채 의연함을 표현하는 것도 잠시. 태민 주위로 쌓여 있는 수십여 개의 회색 철통에 시화는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가스통 처음 보냐?”
 “당연히 던지려고 준비한 거겠죠? 형은 진짜······.”
 “어느 세월에 하나하나 던져? 속 시원하게 뻥뻥 터뜨려 보자고.”
 그때 멀찌감치에서 인간의 접근을 감지한 네펜데스 한 기가 줄기를 뻗어 공격을 시도했다.
 철썩!
 거리 밖에 있어 별다른 피해는 없었으나, 성인 남성의 허리통만 한 채찍이 지면을 강타하는 모습은 지독한 그로테스크함을 자랑했다.
 게다가 여덟 개에 달하는 덩굴의 갯수는 해양 변이체 크라켄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저거 절대 D급 변이체 아닐 것 같은데.”
 “가까이서 보니 훨씬 더 큰데? 새로운 대형 변이체로 등재시켜도 되겠어.”
 변종 네펜데스들을 먼저 상대해 본 경력답게, 선희가 또 다른 공략법을 공유해왔다.
 “총으로 얼굴을 쏴버려야 완전히 죽일 수 있어요.”
 “흐음······.”
 네펜데스들은 영악했다.
 기형 진화를 통해 새로 얻은 줄기들을 꽃의 보호에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빈틈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을 꽁꽁 싸맨 네펜데스를 보며 태민은 조소를 머금었다.
 “이모님은 시화와 뒤쪽에서 네펜데스의 얼굴을 저격해 주세요. 틀림없이 불이 붙으면 고통에 겨워 얼굴을 감싼 덩굴을 치울 겁니다. 그럼 불쇼를 시작해볼까? 대성아!”
 그 외침을 시작으로 두 남자는 신나게 화염병의 투척을 개시했다.
 연신 채찍질을 시도하던 네펜데스와 불붙은 유리병이 부딪혀 비산음을 퍼뜨리는 순간, 거센 화염이 기름 묻은 덩굴을 타고 순식간에 세를 불려나갔다.
 삐이이익-!
 네펜데스가 고막을 찢는 듯한 고음의 비명으로 고통을 호소했다.
 스나이퍼로 돌변한 선희가 그 작은 틈을 놓치지 않고 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탄환은 네펜데스의 아가리에 적중했다. 변이체의 질긴 조직에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렸다.
 “이모 혹시 여군이었어요?”
 “상황이 나를 이렇게 만든 거지.”
 일 분도 채 되지 않아 첫 네펜데스로부터 승기를 거머쥐자 그들 사이로 사기가 북돋워지기 시작했다.
 군고구마 비슷한 냄새를 풍기며 숯 검댕이로 화해가는 식인식물.
 “역시 크기가 문제였어. 능력적으로 정상 네펜데스보다 크게 뛰어난 것 같지는 않아.”
 대성은 태민의 말에 동감했다. 그는 화염병 두 개를 집어 들며 오른쪽에 위치한 또 다른 네펜데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직접 싸워본 것은 처음이지만, 거리 밖에 있으면 별로 위협적이지는 않네요.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해볼까요?”
 “난 왼쪽 놈들에게 던질게. 불바다를 만들고 가스통으로 한 번에 보내자.”
 사인을 맞춘 둘은 이번에는 보다 넓은 반경으로 화염병을 뿌려댔다.
 여기에 건조하기 그지없는 늦가을의 북서풍이 더해져 평화로를 뒤덮은 화마를 더욱더 거세게 만들었다.
 불바다가 생겨나자 태민은 그 속을 향해 가스통을 집어 던졌다.
 꽈광-!
 반경 수 미터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붉은 화염 구름의 위용.
 “캬! 이거 완전 영화 찍는 기분이에요!”
 시화가 감탄사를 연발하던 그때.
 갑자기 화마 속에서 부자연스러운 불똥들이 튀어나왔다.
 “······!”
 “······!”
 “······!”
 그리고 그것들은 넷을 목표로 서서히 날아들었다.
 “포이즌 버터플라이!”
 네펜데스와 공생관계에 있는 D-6 랭크의 변이체다.
 꽃가루를 옮겨주는 대신 네펜데스의 입으로부터 흘러내린 산화 된 먹이를 얻어 가는 포이즌 버터플라이는 마비독을 뿌리는 능력이 있었다.
 탕- 타앙-
 다행히 거대한 체구 덕에 포이즌 버터플라이를 맞추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거대 나비들은 일행 근처로 도달하기도 전에 총알에 당해 지면 위로 추락했다.
 그렇게 비슷한 전투 패턴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자, 넷은 평화로를 점령하고 있던 대부분의 네펜데스를 소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역시 일행의 발목을 잡는 것은 변이체의 수였다.
 결전지인 초등학교만을 앞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태민을 제외한 셋의 체력은 바닥이 나 있었다.
 “형, 이제 화염병 스무 개밖에 안 남았어요.”
 “저도 앞으로 다섯 발이 한계일 것 같네요.”
 원래부터 전투와는 거리가 멀었던 만큼, 시화와 선희의 얼굴은 반쪽이 되어 있었다.
 “눈치 보지 말고 더 못 움직이는 사람은 쉬는 쪽으로.”
 “아뇨, 전 괜찮아요. 포스가 떨어지면 병이라도 더 제작할게요.”
 선희는 손사래까지 치며 거절했다.
 “겨우 이 정도에 무너지면 하드 트레이닝 받았다고 할 자격도 없죠.”
 대성까지 나서자 태민은 씨익 웃으며 안도감을 내비쳤다.
 도심 깊숙한 곳까지 퍼진 네펜데스를 모조리 소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커다란 무리가 뒤따랐다.
 그렇다고 차일피일할 경우 그사이 남겨둔 네펜데스들의 추가 번식이 이루어질 공산이 컸기에, 태민으로서는 일행의 체력을 계속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그는 주 이동 경로와 초등학교를 목표로 작전을 수립했다.
 “공격받지 않는 거리에 있어도 진이 빠진 상태에서 돌발 상황이 벌어지면 끝장이야. 그러니까 힘들면 무조건 말해.”
 그 말을 들은 시화가 손끝으로부터 몇 줄기의 화이트 포커스를 쏘아냈다.
 희끗한 궤적을 만들며 날아간 빛무리는 선희와 태민의 몸속으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형 몸부터 챙겨요. 허리에 그렇게 무리 주면 결혼해서 와이프는 어떻게 책임지려고 그래요?”
 “어엇, 그게 그렇게 되는 거야?”
 “어머. 얘네는 기혼자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어.”
 일부러 볼까지 부풀려 핀잔을 주는 그 모습에, 모두는 웃음으로 긴장을 덜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시간도 오래가지 못했다. 초등학교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잠식의 수준이 적나라하게 클로즈업되었기 때문이었다.
 “네펜데스의 본진인가 봐요. 뭐 저리 많아?”
 “수류탄이 부족하겠는데······.”
 건물 외벽을 촘촘히 둘러싸고 있는, 아니, 그도 모자라 몇 겹으로 감싸고 있는 덩굴들.
 남은 수류탄은 기껏해야 열 개 정도. 네펜데스 무더기를 완벽히 처리해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아이가 살아 있을 가능성을 대비해 섣불리 화공을 시도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에, 일행은 다시 골머리를 앓게 되었다.
 그때, 선희가 침묵을 깨고 갑작스럽게 축객의 의사를 내비쳤다.
 “여기까지 도와주신 것만으로도 분에 겹게 고마워요. 지행으로 가는 길은 확보되었으니, 세 분은 떠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자꾸 그러면 저희 진짜 삐져요.”
 “쉬운 상황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마냥 불가능한 상황으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세 남자가 이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5분. 제가 은신 능력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에요. 아이의 생사 확인에는 무리가 없어요.”
 “저렇게 꽁꽁 학교를 싸매고 있는데, 어디를 비집고 들어간다는 말씀입니까? 심지어 지친 상태에서.”
 태민의 논리정연한 반박에 선희가 머뭇댔다.
 “이건 어때요?”
 대성이 고심 끝에 절충안을 모색해냈다.
 “한쪽 벽만 수류탄으로 초토화시키죠. 그리고 거기로 다 같이 들어가요. 저 사이즈면 학교 안에서 활개 치기는 힘들 것 같은데.”
 네펜데스는 대형화를 통해 강해졌지만, 그로 인해 단점을 껴안은 상태였다.
 인간에게 적합한 사이즈로 세워진 건물들은 그들이 활동하기에는 상당히 작았던 것이었다.
 초등학교 내부는 텅 비어 있을 가능성이 컸고, 대성은 이를 놓치지 않고 캐치했다.
 “너랑 나 정도면 안에서 줄기 몇 개 쳐내는 것쯤은 쉽게 할 수 있을 거야.”
 “매달린 꼴을 보니 약점인 꽃을 쏘려면 오히려 안쪽이 편할 거 같아요. 아이를 찾으면서 저희가 엄호하고, 시화와 이모님은 꽃 위주로 총알을 먹이는 거죠.”
 선희가 말했다.
 “······고마워요. 본 지 고작 반나절 되었는데, 지금껏 제 인생에서 가장 큰 도움을 받았어요.”
 “진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학교로 들어가 봅시다.”
 태민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류탄 두 알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숨 한 번 내쉴 사이에 안전핀을 뽑아 학교의 측벽으로 던져버렸다.
 꽈광- 콰광!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시멘트 가루의 안개가 옅어지기도 전에 남은 수류탄을 모조리 집어 던졌다.
 폭발음에 이어 먼지가 가라앉자 뻥 뚫려버린 구멍이 모습을 보였다. 그곳에는 가시 돋친 줄기도, 견고한 석벽도 없었다.
 일행은 구멍의 경계면에서 탄내를 풍기며 꿈틀거리는 식물을 지나쳐 학교 내부로 들어갔다.
 “돈헌아!”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선희가 애타게 아들의 이름을 외쳤다.
 “쉿!”
 대성이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보았지만, 안타깝게도 소리의 전파 속도는 그보다 훨씬 빨랐다.
 솨아악-!
 폭발의 주범이 건물 내부에 있음을 깨달은 네펜데스들이 창문틀 안으로 줄기를 뻗어왔다.
 “으아!”
 “양대성! 이모님한테 붙어!”
 작두로 전신주 크기의 덩굴을 양분하며 태민이 다급히 소리쳤다.
 “잠깐 실례할게요!”
 “꺄악!”
 대성은 선희를 안은 채 몸을 날려 공격을 회피하는 동시에 포스를 운용해 줄기의 옆구리를 대차게 베어버렸다.
 스걱-!
 네펜데스의 체액에서 풍기는 강한 풀 냄새가 불쾌감을 유발했으나, 위기를 성공적으로 넘긴 대성의 얼굴에는 웃음이 피어올랐다.
 “후우.”
 “잘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해.”
 대성을 독려한 태민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자, 서둘러 학교를 뒤져봅시다. 목소리 크게 내지 않게 주의하시구요. 총성 때문에 네펜데스가 자극받을 수 있으니 가급적 사격도 삼갑시다.”
 넷은 그렇게 숨죽여 학교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간절한 바람과는 다르게 지나치는 모든 교실의 미닫이문을 열어보았지만 돈헌은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문을 열 때마다 보이는 아이들의 흔적이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 뿐이었다.
 
 2층 복도 끝에 놓인 보건실의 문을 열던 태민이 그 자리 그대로 망부석처럼 굳어졌다.
 심장을 철렁 내려앉게 만드는 그 행동에, 뒤따르던 셋 또한 바짝 마른 입술을 다물며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
 먼지가 내려앉은 목조 바닥 위에 놓인 작은 시체 한 구.
 그리고 다리가 풀린 채 맥없이 쓰러지는 선희.
 공포와 굶주림, 목마름 속에 죽음을 맞이한 아이가 찾고 있던 그녀의 아들임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 아아······.”
 아무도 아들의 시체를 향해 걸어가는 선희를 붙잡지 못했다.
 아이는 엄마를 기다렸고, 엄마는 아이를 찾아다녔다.
 비로소 애달픈 여정을 끝마친 둘은 그렇게 다시 재회했다.
 차가운 바닥에 꿇어앉아 살며시 아이를 안아 든 그녀의 뒷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광경이었으며, 버림받은 인간을 대변하는 현실이었다.
 “나, 여기 못 있겠어요.”
 시화가 복도로 뛰쳐나갔다.
 대성과 태민 또한 감정의 홍수가 추슬러지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모자의 마지막 인사를 위해 말없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모님, 저희와 함께 양주로 가심이 어떻습니까.”
 “저는 여기 남을게요.”
 선희는 퉁퉁 부어오른 눈꺼풀을 끔뻑거리며 말했다.
 “아들의 무덤을 좀 더 지키고 싶어요. 그래야만 제 삶의 당위성을 찾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셋은 선희가 생을 포기해버릴까봐 걱정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녀의 행동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네펜데스에게 원한을 갚기 위해 총을 메고 다시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그 기세에 셋은 더 이상의 설득을 포기하고 남하를 재개했다.
 “이제는 익숙할 것 같았는데. 아마 제 인생에서 이보다 지독한 세상의 끝은 더 없을 거예요.”
 출발하기 전부터 계속 훌쩍대던 시화가 둘에게 심경을 고백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잃는 것이 당연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태민이 착잡함에 수그렸던 고개를 들어 이제는 아득해져버린 중앙역을 바라보았다.
 “······.”
 대성은 아무 말이 없었다.
 
 방수포에 저녁 이슬이 맺힐 때쯤.
 셋은 지행역 부근의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사분지 일도 남지 않은, 흉물로 변해버린 아파트들.
 누군가의 소유였을 터전은 노란 독 모래가 내려앉아 을씨년스러운 기운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 폐허가 지행역 부근의 모 아파트 단지라는 결론을 내린 그들은, 다가올 밤을 이겨내기 위한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건물의 잔해로 접근하자 의외로 많은 부분이 보존되어 있었다.
 “이거 생각보다 쓸 만한 게 많은데요? 저지대라 아래쪽은 피해가 덜했던 건가?”
 대성은 감탄과 함께 무너진 거치대에서 멀쩡한 자전거 한 대를 찾아냈다.
 그리고는 희열에 젖어, 또다시 주울 만한 물건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태민과 시화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다.
 “이 정도면 생존자가 있어야 맞아. 그치요?”
 “그렇지. 너희를 처음 본 장소보다 훨씬 덜 망가졌어. 누가 있는지부터 확인해야겠다.”
 둘은 짐을 풀 기색조차 비추지 않으며 조용히 이곳저곳을 들쑤셨다.
 덜그럭덜그럭
 그러기를 삼십 분.
 꽤 높은 적중 예감에도 불구하고 생존자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대성은 소리를 질렀다.
 “누구 없어요?!”
 [없어요, 어요- 어요-]
 주행성 변이체가 잠에서 깨어날 것을 의식한 태민이 황급히 대성의 입을 틀어막았다.
 “······.”
 “진짜 없는 것 같은데요? 다 죽은 건가······.”
 “어찌 보면 차라리 다행이기는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난 이해가 안 간다.”
 한참 동태를 살피던 태민이 찜찜함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헤헷, 뭐 어때요. 형, 이참에 달베기 좀 도와주세요.”
 짐을 한구석에 던져버린 대성은 태민을 졸랐다.
 “당장 할 것도 없는데 그렇게 하자. 아까부터 봤는데, 대성이 너 의외로 소심하다?”
 “네? 사리거나 그러지는 않았는데······.”
 태민이 목을 축이며, 걷는 내내 들었던 생각을 털어놓았다.
 그동안 보여주었던 대성의 전투 센스나 성장 속도를 감안한다면, 다중운용을 어려워해서 안 되는 것이 맞았다.
 어떻게든 원인을 찾아내려던 태민은 기어이 그로부터 무언가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대성의 무의식적인 자기방어 습관이었다.
 체내로 포스를 순환시킬 때,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양을 줄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태민은 드릴검을 집어 직접 시범을 보여주었다.
 휘익! 휘익!
 ‘우와······ 한 번 궤도를 바꾸는 것도 어려워 죽겠는데.’
 대성은 멍청한 눈으로 광속의 달베기 연격을 바라보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수십 킬로그램에 달하는 주물을 젓가락처럼 휘두르는 광경이란.
 태민은 정확히 5초간 스물 두 번의 달베기를 마치고 대성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어깨와 허리를 잡아 직접 자세를 잡아주었다.
 “뭐, 비상사태에 대비해 힘을 아껴놓는 건 좋은데. 조금 더 포스 자체에 집중해 봐.”
 “에엑-!”
 열량만 존재하는 태민의 포스가 몸속으로 흘러 들어오자, 대성은 처음 겪어보는 포스 가이드(Force guide)에 당황의 신음을 내뱉었다.
 “포스를 근육으로 보내고 끝내지 말고, 힘 빡 주고 계속 집어넣으라고. 이 정도 양은 유지해줘야지.”
 “이, 이렇게요?”
 “좋아. 그 상태에서 이렇게! 이렇게!”
 태민은 그대로 잔 근육이 단단히 오른 대성의 팔을 낚아채 있는 힘껏 휘둘렀다.
 삭! 사삭!
 순식간에 네 번의 달베기가 구현되었다.
 비록 반강제적으로 이루어지기는 하였으나, 그토록 고대하던 첫 성공에 대성의 표정이 밝아졌다.
 “오오······!”
 “이 느낌을 잘 기억하렴. 다음번에는 네 포스로 직접 성공시켜야 한다. 전투 요원들에게 이런 운용은 필수이자 기본이니까.”
 대성은 블랙 포스를 다시금 순환시키며, 다시 맹연습에 돌입했다.
 
 ***
 
 폐허가 된 아파트 단지 내를 조금 더 돌아다닌 그들은, 사방이 막힌 피신처를 찾을 수 있었다.
 그곳은 다름 아닌 관리사무소였다.
 몇 개의 책상과 통신선, 입주민들과 관련된 장부가 꽂힌 책꽂이가 장소의 용도를 쉽게 추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물론 건물이 완벽히 멀쩡하지는 않았다.
 정면에서 보았을 때 오른편의 절반 이상이 무너져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반대쪽 몇 개의 방은 하루의 숙박을 책임지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사고는 늘 혹시나 싶은 순간에 일어나게 마련.
 붕괴의 가능성을 우려한 태민은 복도 맨 끝에 위치한 탕비실을 선택해 들어갔다.
 “형! 여기 믹스커피도 있네요.”
 피폭 후 이곳을 찾아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지, 작은 선반 위에는 관리소 직원들이 사용하던 가재도구와 간식거리들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아쉽게도 그중 유통기한이 지나지 않은 식품류는 노란색 믹스커피 세 통이 고작이었다.
 시화에 의해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쌀 과자의 최후를 바라보며, 대성은 자기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너, 이거 먹다 탈나면 안 먹느니만 못해.”
 “한 개쯤은 괜찮지 않을까?”
 “하하, 쌀 과자는 어쩔 수 없지만 오늘 저녁은 닭가슴살 통조림으로 가보자.”
 하루 대부분 몸을 사용하는 대성을 배려한 듯, 태민은 몇 개 남지 않은 단백질 보충용 식사를 꺼냈다.
 대성은 눈을 빛내며 그의 손에서 잽싸게 통조림을 낚아챘다.
 닭가슴살 통조림은 퍽퍽한 식감을 은근히 즐기는 대성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화는 여러 번 씹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왜 운동하는 사람들이 닭가슴살 통조림을 안 먹는지 알 것 같아.”
 “크큭, 짭짤한 게 좋은데 뭐. 아, 그래도 뭔가 심심한데······.”
 대성은 태민의 눈치를 슬그머니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그때뿐.
 그는 자신의 짐 꾸러미에서 조용히 3분 카레를 꺼내어 닭가슴살에 비볐다.
 “언제 또 이런 걸 숨긴 거냐. 어휴.”
 “이렇게 먹으면 진짜 맛있어요. 한번 드셔보시지요.”
 “괜찮긴 하네. 그래도 짠 거 많이 먹어서 좋을 거 없다고.”
 식사를 마친 세 남자는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며 이른 잠을 청했다.
 전날과는 달리 여정에 대한 긴장감이 어느 정도 풀어졌는지, 그들은 순식간에 단잠에 빠져들었다.
 아니, 빠져들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냐옹-”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구슬픈 고양이 울음소리.
 난데없는 소리에 카키색 소파 위에서 대충 널브러져 자던 시화가 가장 먼저 깨어났다.
 “으아아아악-!”
 “뭐, 뭐야!”
 터키시 앙고라와 코리안 숏헤어의 잡종으로 추정되는 어린 고양이는 두 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방사능에 의한 돌연변이였다.
 태민과 대성은 몸을 일으키며 반사적으로 병장기를 움켜쥐었다.
 잔뜩 겁을 먹은 기형 고양이가 소란에도 불구하고 시화의 품을 파고들었다.
 “얘, 어떻게 들어온 거지?”
 분명히 문을 잠근 것을 세 번은 다시 확인했을 텐데.
 대성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거듭 눌러댔다.
 이때, 태민이 갑자기 욕을 내질렀다.
 “씨발! 짐 챙기고 쨀 준비 해!”
 [그오오오-]
 파창-!
 낮은 진동수의 울림을 시발점으로 주인을 알 수 없는 주먹이 날아와 유리창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그제야 세 남자는 고양이가 놈들을 피해 도망쳐 왔음을 깨달았다.
 태민은 건물 밖의 불청객들을 지긋이 노려보았다.
 “좀비······ 젠장, 역시 일대가 조용한 이유가 있었어!”
 좀비 메이커(Zombie maker).
 한 뼘 정도 크기의, 기생충 형태를 가진 D-7급의 변이체.
 본체가 가진 능력 역시 일반적인 기생충과 다를 바 없어, 밟는 것만으로도 명을 달리할 정도였다.
 그러나 문제는 숙주와 결합에 성공했을 때였다.
 감염된 숙주는 마치 좀비가 된 것마냥 공격 성향을 폭주시켰다.
 기생충에 의해 새로 짜인 명령 체계는 끊임없이 파괴와 살육을 자행했다.
 그리고 숙주가 부패하여 더 이상 빨아먹을 것이 없어지면 또 다른 희생양을 찾아 같은 행위를 이어나갔다.
 기생충치고는 꽤 높은 지능을 가진 이들은 스스로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두 가지 사냥 패턴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집단행동과 대이동이 그것이었다.
 좀비 메이커들은 절대 혼자 움직이지 않았고, 거리상 가까운 네댓 개의 거점을 확보하여 숙주와 함께 주기적으로 이동했다.
 감염된 지 최소 한 달은 넘은 듯, 이제는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식된 시체 수백여 구가 건물을 에워싸고 있었다.
 잠겨 있던 문까지 덜컹거리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 벌써 관리소 복도까지 점령을 완료한 것 같았다.
 “진짜 못 해먹겠네······ 새로운 숙주 찾느라 급한 건 알겠는데, 고작 셋에 저 숫자는 너무하잖아.”
 “몰래 도망가는 것은 무리인가요?”
 “무리야. 저것들, 발견한 먹이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고. 그렇다고 얼마나 버텨야 될지 모르는데 짐을 버릴 수도 없고.”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요?”
 시화는 고양이를 내려놓으며 소총에 바이오틱 포스를 흘려 넣었다.
 겁을 잔뜩 먹었는지 총열을 받친 그의 왼팔이 격한 진동을 거듭하고 있었다.
 “어쩌긴······ 싸워야지.”
 대성은 태민의 고갯짓을 따라 창문 오른편을 마주 보고 섰다.
 다행히 바이오틱 포스는 거진 다 회복된 상태.
 그러나 난생처음 맞이한 일 대 다 상황에 지독한 공포심이 일었다.
 “생각보다 강하진 않아. 숫자가 문제지. 우리는 이 방을 지킨다.”
 태민의 선택이 옳았다.
 사방이 막혀 있는 탕비실.
 그리고 뚫려 있는 것은 성인 남성 한 명이 겨우 드나들 수 있는 크기의 창문 하나.
 언제 끝날지 몰라도 한 마리씩 없애 나가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이었다.
 “무조건 머리부터 한 방에 작살낸다. 저렇게 되기 싫으면 무조건 한 방에 끝내. 시화는 뒤에서 지원사격하고.”
 “옙!”
 태민은 두 흉기를 묶어 둔 철사를 끊었다.
 좁은 공간을 고려하여 무기의 리치를 줄일 심산이었다.
 이번에는 작두를 선택한 그는 유리창을 먼저 산산조각 내버렸다.
 쨍그랑!
 “으악, 형!”
 “파편 맞을 바에는 안에서 먼저 깨는 게 훨씬 나아!”
 [그에엑-!]
 창문을 깨기 무섭게 시체들이 괴음을 토하며 사정없이 짓쳐들어 왔다.
 숙주들은 통각 자체가 없는 듯, 유리 파편이 몸에 박히는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대성의 온몸은 차갑게 굳어버렸다.
 퍼걱-! 퍼걱!
 흡사 도살 기계를 연상시키는, 벰과 박살의 경계조차 애매한 태민의 작두질이 이어졌다.
 대성은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부패한 살점 하나가 코언저리로 튀고 나서야 검은 포스를 개방했다.
 그러고는 태민을 도와 작두질이 끊어지는 사이 여백마다 검은 초승달을 그렸다.
 고순도 포스를 감당하기엔 너무 약했던 두개골 하나가 그대로 갈라지며 최후를 맞았다.
 생각보다 별것 없는 ‘살과 뼈를 가르는 느낌’에 안도하기도 잠시.
 쾅! 쾅!
 “혀, 형! 문이 곧 부셔질 것 같아요!”
 아니나 다를까 문 밖 좀비들이 광분하기 시작했다.
 주먹질을 할 때마다 우그러지는 목제 문을 보며, 시화가 다급하게 외쳤다.
 “내가 뒤로 갈 테니까 넌 창문을 맡아! 시화는 나 신경 쓰지 말고 대성이 지원사격해! 바로!”
 보다 못한 태민이 방 안의 소파들을 창 밖으로 발사하기 시작했다.
 콰앙-!
 그 위력이 얼마나 셌던지 경로상에 있던 좀비 몇 구는 상반신이 없어지는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형, 저 믿어봐요!”
 태민은 마주 웃어주며 문을 박찼다.
 “하핫, 그래! 남자가 그 정도 가오는 있어야지!”
 태민은 문과 함께 날아간 세 구의 시체를 그대로 밟아버린 후, 복도로의 진출을 개시했다.
 아마도 퇴로를 확보할 생각인 듯하였다.
 이윽고 좀비 한 구가 창틀에 몸을 들이밀었다.
 대성은 자신만을 위하여 주어진 첫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서걱-
 중년 남성의 시체는 흑선에 제대로 된 반항 한 번 하지 못한 채 머리 째로 잘려버렸다.
 시뻘건 눈동자를 끔뻑대는 골통을 발로 차며, 대성은 다음 목표물을 향해 허리를 비틀었다.
 좀비들의 공격 속도나 패턴은 다행히도 평이한 수준이었다.
 열 구 정도를 더 무력화시킨 대성은 슬슬 자신의 처리 속도가 떨어지는 것을 깨달았다.
 위력을 배가하기 위해 체중을 싣다 보니, 다음 동작을 준비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타앙!
 강선에 의해 회전력이 가미된 포스탄이 매서운 속도로 좀비의 머리를 터뜨렸다.
 평소 즐기던 FPS 게임의 영향일까.
 적시적소에 시화의 서포트가 터졌다.
 “나이스! 몇 번 정도 더 쏠 수 있을 것 같아?”
 “느낌 상 여덟 번 정도!”
 “오케이. 지금 같이 속도 밀리면 부탁할게!”
 둘은 호흡이 척척 맞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탕비실 바닥에 쌓여가는 시체들.
 그렇게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그토록 안배를 했건만, 원체 그릇이 작았던지라 시화의 포스는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크악!”
 몸을 그대로 던져버리는 좀비를 막지 못한 대성은 거칠게 뒤로 나자빠졌다.
 이 틈을 타고 두 마리의 좀비가 더 넘어와 간신히 균형을 잡고 선 대성을 둘러쌌다.
 “대성아, 더 이상 장전이 안 돼!”
 “젠장, 아직 난 버틸 만해! 일단 태민 형 쫒아가서 치료부터 하고 있어!”
 “어떻게 널 그대로 두고 가!”
 “이런 멍청한!”
 그사이 대성과 시화 사이 5미터 남짓한 공간에는 네 번째 좀비가 들어오고 있었다.
 ‘한 번에 뚫어야 하는데······.’
 요리조리 퇴로를 찾아 눈알을 굴리며 달려드는 한 기의 좀비를 베어낸 대성은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미 빈틈은 모두 막혀버린 상태.
 억지로 탈출구를 만들어서라도 시화와 합류해야 했다.
 그러나 한 마리의 좀비를 베는 사이 다른 좀비가 공격을 해온다면 현재의 대성으로써는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연속베기밖에 없는 건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
 대성은 단 한 번도 스스로 성공시키지 못했던 초식을 시도해보기로 결심했다.
 ‘그래. 뭘 하든 간에 해보고 죽어야지.’
 대성은 태민이 잡아주었던 느낌을 최대한 떠올렸다.
 그러고는 평소보다 수배에 달하는 블랙 포스를 근육 여기저기로 확산시켰다.
 “이런 엿같은 새끼들!”
 손잡이 달린 원판에 맺힌 채 이글거리는 검은 코로나.
 시체 한 구를 그대로 내리그은 대성은, 옆구리를 물어뜯기 위하여 달려드는 또 한 마리의 좀비를 노려보았다.
 ‘그래, 지금이야.’
 설령 그것이 피든 혈관이든, 대성은 온 몸에 포스를 강제로 밀어 넣었다.
 슈악! 슈각!
 좀비 사이로 두 줄기의 흑선이 펼쳐졌다.
 대성은 재빨리 한 손으로 땅을 짚어 균형을 잡으며, 그대로 또다시 달베기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순식간에 세 개의 흑선을 그리며 남아 있는 좀비 세 마리를 세로로 양단했다.
 “시화야! 나 이거 좀 더 해봐야겠다. 여기는 나한테 맡기고 태민 형한테 가봐. 금방 따라갈게.”
 “진짜 괜찮은 거지?”
 “오케이. 이제야 어떻게 할지 보이는데 그냥 갈 수 있겠어?”
 대성이 한결 여유로워진 목소리로 달래자 시화는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복도 밖으로 물러났다.
 시화가 완전히 시야에서 벗어난 것을 확인한 대성은 그제야 벽을 짚고 부들거리는 근육을 다스렸다.
 “염병, 원래 이렇게 고통이 심한가?”
 마치 고열이 올라왔을 때처럼 근육통이 부위를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를 찔러댔다.
 대성은 어금니를 깨물고 좀비들에게 한 발 한 발 걸어갔다.
 “이제 시작이야, 새끼들아.”
 스걱- 서걱-
 탕비실을 지배하는 것은 오직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와 한 소년의 숨소리뿐.
 그들의 공격을 절대로 허용하지 마. 박살 나기 싫으면 먼저 박살 내.
 온몸을 아리는 검은베기의 부작용에 맛들린 대성은 시체를 베고, 또 베어나갔다.
 
 그렇게 명을 달리한 좀비가 근 오십에 도달할 때쯤, 반가운 소리가 창문 밖으로 메아리쳤다.
 한참의 사투 끝에 태민이 옥상 점령에 성공한 것이었다.
 “드디어 성공시켰다면서? 축하한다. 너 거기서 일단 나오지 마봐!”
 “네?! 뭔 말이에요? 으앗!”
 쾅! 콰지직!
 옥상으로부터 자동차 한 대의 크기는 됨직한 석벽들이 상식을 벗어난 속도로 투하되었다. 태민이 과격한 폭격을 하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흐······ 도대체 누가 누구보고 변이체라고 하는 건지.”
 [그아아악!]
 전세 역전.
 태민이 인간 투석기가 된 지 십여 분이나 되었을까.
 수백여 구에 달하던 눈 감지 못하던 망자는 더 이상 땅 위에 서 있지 않았다.
 망가져버린 숙주를 어떻게든 조종해 보려는 듯, 좀비 메이커는 사체를 꿈틀거리게 하며 기괴한 장면을 연출했다.
 “대성아~ 내려갈 테니까 짐 빼서 이동할 준비 하자!”
 옥상에서 기습의 종료를 다시 한 번 확인한 태민이 외쳤다.
 대성은 평소답지 않은 철없는 대꾸로 외침에 응수했다.
 “으음, 더 안 자구요?”
 “조만간 좀비 메이커들이 새로운 숙주를 찾으러 튀어나올 거다. 다른 건물을 알아보는 게 좋겠어.”
 대성 역시 태민의 결정에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평소와는 너무도 다른 몸 상태에 그저 쉬고 싶다는 충동만 밀려들었다.
 몸살에 걸렸을 때나 기력이 고갈되었을 때의 그것과는 다른 색다른 종류의 극심한 고통.
 누군가 근육과 신경을 불로 지지는 것만 같았다.
 “으으······.”
 털썩
 결국 대성은 극에 달한 통증에 서 있기를 포기했다.
 기절 후에도 지속되는 심각한 경련은 그가 단지 긴장이 풀리며 쓰러진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앗! 괜찮아? 형, 대성이 상태가 이상해요!”
 “뭐? 이런, 젠장······.”
 태민 역시 크게 당황하였는지 몇 초 정도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대성의 호흡을 조심스레 확인하고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침음성을 내뱉었다.
 밝지 않은, 무언가 복잡함이 얽힌 반응에 시화가 다급한 목소리로 재촉했다.
 “기생충이 옮겨 들어간 것은 아니겠지요?”
 “아닐 거다. 그렇다면 벌써 반응을 보였을 거야. 내 생각에 너무 무리해서 싸운 듯하구나.”
 태민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원인은 단순했다.
 파괴계열 속성의 과도한 사용으로 인한 육체 손상이 바로 그것이었다.
 적어도 인지 단계에서 겪을 법한 일은 아니었지만.
 “에휴······ 같이 데리고 올라올걸. 치유도 안 되는 데 어떻게 하지요?”
 태민은 의식을 잃은 대성을 그대로 둘러멨다.
 “······쉬면서 의식이 돌아오길 기다려야지.”
 “지금까지 살아본 것 중 가장 긴 하루네요. 후우.”
 당장 휴식 장소가 급한 상황.
 둘은 주변 건물로 거처를 옮기기로 하였다.
 그들은 관리사무소에서 100여 미터 거리에 위치한 상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때.
 기이한 진동음이 어둠으로부터 요동치기 시작했다.
 쿠웅- 쿠웅-
 “으음······?”
 진동의 원인은 쉽게 파악되었다.
 고개를 들자, 건물보다도 큰 검은 덩어리가 둘을 향해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화야······ 망했다.”
 “저거 설마······ 좀비 메이커가 네펜데스에게······.”
 검은 덩어리의 정체는 숙주화된 네펜데스였다.
 그것도 뿌리 내린 곳에서 이동이 불가능하다는 기존의 통념을 산산조각 내버리는.
 감염된 네펜데스는 줄기들을 꼬아 마치 인간의 다리처럼 활용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방사능에 의해 감수분열 자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꽃과 덩굴의 수가 수십 개에 달했다.
 “씨발, 어떻게 저따위 변이체가 존재할 수 있지?!”
 그 기괴한 모습에 경악한 태민이 병기를 움켜쥐며 쌍소리를 내질렀다.
 부들부들 떨리는 작두가 그마저 공포감에 젖어 있음을 대변했다.
 지옥에 적응하여 탄생한 괴수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왔다.
 “형! 빨리 도망쳐요!”
 “저걸 어떻게 도망쳐! 내가 시간 끌 동안 빨리 대성이 데리고 지하로 들어가!”
 “저 혼자······.”
 “정시화! 무슨 소리인지는 아는데 내가 너희 신경 쓰면 더 못 싸워!”
 너무나도 타당한 이유.
 시화는 어금니를 깨물고는 대성을 질질 끌어 계단실로 향했다.
 둘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자, 태민은 드릴 봉을 선택해 집어 들었다.
 “빌어먹을. 매번 이런 식이면 목숨이 몇 개여야 하는 거야.”
 어느새 윤곽이 뚜렷하게 보일 정도로 가까워진 변종 네펜데스.
 태민은 오른 어깨를 힘껏 젖히고는 드릴 봉에 포스를 밀어 넣기 시작했다.
 그러자 봉으로부터 거세게 휘몰아치는 광풍이 봉 주위를 수놓았다.
 [끼이이- 끼이이-]
 “이 시궁창 같은 세상에서 좆같이 태어나 죽고 나서도 고생이 많구나. 내가 편히 보내주마.”
 진심이 담긴 듯한 읊조림과 함께, 태민은 시도할 수 있는 최대의 위력으로 관통창을 쏘아 보냈다.
 투쾅-
 금속 작살이 공성 병기를 연상시키며 밤하늘을 갈랐다.
 무의 포스는 기체 입자의 존재마저 불허했고, 그 영향으로 압력 차에 의한 가속을 받은 관통창은 이상 기류마저 파생시켰다.
 좀비 네펜데스 또한 심상치 않은 위력에 긴장하였는지, 줄기들을 모조리 끌어모았다.
 쿠아앙-
 드릴 봉과 줄기들이 충돌하는 순간.
 압축된 운동량이 폭주하며 굉음과 함께 거대한 원형 고리를 탄생시켰다.
 어쩌면 박격포보다도 파괴적인 위력을 지녔을 그것은 썩어가는 덩굴들을 갈가리 찢어버렸다.
 하지만 문제는 방어에 사용된 덩굴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는 것이었다.
 드릴 봉은 네펜데스를 감싼 마지막 두 겹의 줄기를 찢어내지 못했다.
 [끼아아악!]
 “젠장, 역시 좀비 메이커의 통제를 받아서 지능이 생겼어!”
 숙주 삼은 네펜데스의 줄기가 반 이상 날아가 버리자, 좀비 메이커는 광분하기 시작했다.
 작두를 꺼내긴 하였지만, 열에 달하는 덩굴은 태민 역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쉬익-
 “크으!”
 아주 잠시, 집중력이 떨어지는 찰나.
 가시 덩굴 하나가 태민의 쇄골에 깊숙한 혈선을 그어냈다.
 그리고 드리워지는 거대한 그림자.
 “씨팔!”
 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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