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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으로 승부합니다! 1-1권

2019.08.16 조회 1,393 추천 6


 # 001. 대박 식품의 하루
 
 온 듯 만 듯 애매한 가을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는 벌써부터 찬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이른 아침, 출근길에 나선 한지호는 언 손을 호호 불며 옷깃을 여몄다.
 ‘벌써 겨울이구나. 이제부터는 많이 바빠지겠지?’
 세상에는 계절을 타는 업종이 다수 존재한다.
 예를 들면 여름철 빙과류라던가, 삼계탕. 혹은 겨울철 사람들로 넘쳐나는 스키장과 찜질방 등이 가장 대표적일 것이다.
 개중 눈에 띄지는 않지만 만두 업계도 비교적 계절을 많이 타는 업종 중 하나였다.
 아마도 설 명절과 뜨거운 만둣국이란 환상적인 싱크로가 한국인의 입맛에 강하게 각인된 탓이리라.
 그게 아니라 해도 겨울이라 함은 찐빵의 계절로 대표되는 만큼 그와 비슷한 만두류 역시 반사 이익을 누리는 걸지도···.
 어쨌든 곧 서리가 내리는 이 계절은 만두 업계에 있어 일종의 대목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웬 만두 얘기냐고?
 ‘내 직업이 그거니까. 만두 만드는 거.’
 그랬다. 지호는 만두공장에 다녔다.
 우리가 흔히 아는 동네분식점 수제만두가 아닌 대량으로 찍어내는 ‘공장’ 말이다.
 전술했듯이 만두라는 식품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급격히 매출이 늘어난다.
 대충 11월부터 오르기 시작한 매출은 겨우내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것이 정석.
 그에 맞춰 평소에는 사장님 포함, 7인 체제로 돌아가던 지호네 만두공장도 계절적 특수를 누리기 위해 겨울만 되면 한시적으로 추가 인력을 뽑았다.
 ‘아마 다음 주쯤이면 두 명 정도 더 들어오겠지.’
 하지만 그 정도로는 턱도 없다.
 피크인 12월과 1월, 매출이 정점을 찍는 설 직전까지는 공장 인원이 두 배 가까이 늘어날 것이다.
 뭐 그렇다고 나쁠 건 없다.
 일이 많아지는 만큼 시간도 잘 갈 테니까.
 그뿐인가. 모르긴 몰라도 성격 화통하신 사장님은 설 상여금으로 꽤 두둑한 봉투도 챙겨 주실 것이다. 대목 보너스를 겸해서 말이다.
 곧 돌아올 설에도 양손 묵직하게 선물꾸러미를 들고 고향으로 내려갈 생각을 하니 지호의 가슴은 벌써부터 두근거릴 지경이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고생해요. 우리.’
 지호네 식구는 총 네 명이었다.
 세 명의 아들과 어머니.
 아버지는 없다. 아니, 돌아가셨다. 빚만 잔뜩 남겨 둔 채로.
 그래서일까.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 생업 전선에 뛰어든 지호는 정말 안 해 본 일 없이 다 해 봤다.
 그래도 최근 3년간은 나름 안정적인 생활을 해 오고 있는 편이었다. 바로 만두공장에 취업한 덕분에 말이다.
 얼마 전엔 어머니도 고향인 지방 소도시에서 식당 주방 보조 일을 시작하셨다고 들었다.
 다달이 지호가 부쳐 드리는 돈과 어머니의 월급을 합치면 나름 세 식구가 사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 많지는 않지만 빚도 갚아 나갈 수 있었고.
 ‘딱 내년까지만. 그때까지만 고생하면 우리 가족도 숨통이 좀 트일 수 있을 거야.’
 요즘은 지호 쪽 사정도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어느덧 입사 3년 차에 들어선 공장 생활.
 그간 충분히 제 몫 이상의 일을 해 온 덕에 사장님 이하, 공장 사람들 모두가 지호를 무척 신임하고 있었다. 그 결과 작년부터는 이름 대신 ‘한 주임’이란 직함으로 불리고 있었다.
 들리는 소문에 조만간 공장이 확장 이전까지 한다고 하니 그렇게만 되면 월급도 더 오를 것이고 직함도 대리로 승격될 것이다.
 사실 일곱 명밖에 안 되는 곳에서 주임이나 대리나 그게 그거지만 어쨌든 이쪽 업계에 발을 들인 이상 제대로 한번 해 보고 싶은 지호였다.
 ‘열심히 배워야지. 차근차근 성장해서 언젠간 나도 나만의 만두 브랜드를 출시할 테다.’
 
 ***
 
 하남시 외곽, 창고형 공장이 밀집된 지역.
 출근 시간이라 그런지 한꺼번에 우루루 내리는 사람만 스무 명이 넘었다.
 때마침 반대편 차선에도 버스 한 대가 도착했다.
 역시나 밀물처럼 밀려 나오는 사람들 틈으로 눈에 익은 누군가가 보였다.
 “어이, 영태! 좋은 아침!”
 “한 주임 형. 안녕하세요!”
 약간 어눌한 말투의 동글동글한 친구가 손을 흔들며 뛰어왔다.
 녀석의 이름은 윤영태.
 ‘대박 식품’의 터줏대감이다. 참, 대박 식품은 지호가 다니는 만두 생산업체의 상호다.
 올해 스물셋인 영태는 지적 장애 3급의 장애인이었다. 특수 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벌써 4년째 만두공장에서 일해 오고 있다고 들었다.
 사실 지호가 다니는 만두공장에는 영태 말고도 김 주임이라 불리는 40대 지적 장애 직원이 한 명 더 있다.
 3년 전 처음 이곳으로 출근하던 무렵.
 지호는 난생처음 장애인들과 함께 일하게 된다는 사실에 조금 어색한 기분을 느꼈다. 물론 편견을 가지고 그들을 바라보는 건 아니었지만 일종의 생소한 경험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일 뿐이었다. 함께 어울려 일하다 보니 그들도 결국 똑같은 사람이었다.
 오히려 단순 반복 작업이 많은 이곳에서는 일반인보다 영태나 김 주임이 발군의 업무 능력을 발휘하곤 했다.
 “요즘 일이 많아져서 좀 힘들지?”
 “헤헷. 아뇨, 괜찮아요.”
 “자식.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내가 사장님한테 잘 말해서 일감 조정 좀 해 줄 테니까.”
 “고마워요, 형.”
 영태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금세 공장 앞에 도착했다.
 정해진 출근 시간은 오전 9시까지.
 그런데 지호와 영태가 도착한 시간은 8시 35분이었다. 비교적 이른 출근이다.
 하지만 늘 그래 왔듯 공장 정문은 이미 활짝 열려 있었다.
 ‘보나 마나 사장님이 제일 먼저 출근하신 거겠지.’
 그리 오래 살아온 인생은 아니었지만 아직까지 지호는 이곳 사장님처럼 부지런한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항상 제일 먼저 출근하시는 것은 기본.
 늘 여타 직원들보다 1.5배 이상 일을 더 하시는 사장님이었다.
 그야말로 솔선수범 그 자체.
 덕분에 지호를 비롯한 직원들은 웬만해서는 농땡이를 피울 엄두도 못 냈다.
 그렇다고 사장님이 막무가내로 직원들을 쪼는 스타일이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오너가 먼저 움직이면 고용인은 알아서 따라오는 법.
 그것은 이곳 사장님만의 오랜 노하우였고 인생 철학이었다.
 ‘일은 저렇게 해야 하는 거지.’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지호조차도 매번 사장님을 볼 때마다 자신의 부족함을 다잡곤 했다.
 ‘대박 식품’을 운영하는 권경섭 사장.
 지호는 일적으로나 마인드적으로나 정말 배울 게 많은 분이라고 생각했다.
 “뭐 하노. 얼른들 안 들어오고.”
 쿵쾅거리며 돌아가는 진공 반죽기 앞에 서 있던 권 사장이 괄괄한 목소리로 두 사람을 재촉했다. 위생모와 앞치마를 두른 그는 벌써 밀가루 범벅이었다.
 “에이, 숨 좀 돌리고요, 사장님.”
 현관 앞에 멈춰선 지호가 장난스럽게 담뱃갑을 흔들어 보였다.
 “후딱 피우고 들어온나. 요즘 마이 바쁜 거 알제?”
 “하모요.”
 지호는 장난스레 권 사장의 사투리를 흉내 내고는 공장 뒤편 흡연 구역으로 향했다.
 “한 주임 형, 저 먼저 들어가요.”
 “그래. 수고.”
 영태를 먼저 들여보낸 지호는 담배 한 개비를 빼 물었다.
 오전 업무를 시작하기 전 유일하게 누릴 수 있는 혼자만의 시간이다.
 아주 작은 호사. 그래도 안 피는 게 백번 낫다.
 ‘끊어도 예전에 끊었어야 할 물건.’
 쓸데없이 군대에서 배워 온 이 요물은 어찌 된 일인지 아무리 용을 써도 쉬이 끊어지지가 않았다.
 ‘아직 내 의지력이 그만큼 약하다는 거겠지.’
 부디 언젠가는.
 지호는 의미 없는 금연 다짐과 함께 담뱃불을 댕겼다.
 “후우···.”
 다짐과는 별개로 싸한 아침 공기와 함께 마시는 첫 담배 맛이 구수하기 그지없다.
 그렇게 몇 모금의 담배를 태울 무렵, 비쩍 마른 몸매의 김 주임이 도착했다. 곧이어 통칭 그냥 아줌마라고 부르는 아주머니 직원이, 뒤이어 영업과 사무실 업무를 주로 담당하는 박 과장이 출근했다.
 “한 주임, 혼자 피면 맛있냐? 나도 같이 한 대만 펴 볼까나?”
 지호를 발견한 박 과장이 씩 웃으며 다가왔다.
 두 사람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 마지막 일곱 번째 직원인 사장 아들, 종욱이가 주차장 너머로 들어서고 있었다.
 종욱이 이 녀석은 반쪽짜리 날라리 직원이다.
 저희 아빠를 따라서 하도 오래 이 일을 한 관계로 일머리는 빠삭한데 아는 만큼 농땡이도 수준급이었다. 더구나 작년부터는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한다는 핑계로 점심시간만 땡 치면 후다닥 도망치기 일쑤였다.
 “이야, 두 분 다 여기 계셨네요?”
 공장 현관을 프리 패스 한 종욱은 헤헤거리며 지호와 박 부장 곁으로 합류했다.
 “우린 다 폈는데? 이제 일하러 들어가야지.”
 “에이, 과장님, 지호 형. 좀만 더 있다 들어가요. 딱 5분만요. 네?”
 “글쎄다. 과연 너희 아빠가 그때까지 기다려 주실까?”
 박 과장과 지호는 동시에 담뱃불을 비벼 끄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뭐야, 두 분 다 너무하네. 나만 미워해.”
 “반쪽짜리 직원의 숙명이다 하고 생각해라.”
 “큭.”
 “농담이야, 인마.”
 바로 그때.
 드르륵 하고 창문이 열렸다.
 “너거들 아직 다 안 핐나. 얼른들 들어온나. 시간 없다!”
 “예예, 갑니다요!”
 사람 좋고 화통하지만 일할 때만큼은 철저한 권 사장님.
 그렇게 오늘도 ‘대박 식품’의 하루 일과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002. 이상한 조짐
 
 “어, 춥다. 그럼 수고.”
 맨 먼저 일어난 박 과장이 종종걸음으로 사무실을 향해 사라졌다.
 뒤이어 일어선 지호는 화장실로 가서 대충 손을 씻은 후, 위생복으로 환복하고 작업장 문을 열었다.
 이미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는 작업장.
 지호는 권 사장이 맡고 있던 진공 반죽기를 배턴터치 했다.
 “그거 다 돌면 반죽 한 다라 더 만들어야 한데이.”
 “예.”
 곁눈질로 압력 정도를 체크한 지호가 곧바로 대답했다.
 밀가루 두 포대가 통으로 들어간 반죽기는 진공 상태로 열심히 반죽을 치대고 있었다.
 사람 손을 대신하는 진공 반죽기.
 이 기계를 사용하면 한꺼번에 많은 양을 반죽할 수 있는 것은 물론, 반죽 사이의 기포도 완벽하게 제거가 가능하다. 더불어 글루텐을 비약적으로 강화하는 효과도 얻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가수율을 높임으로써 만두 성형 시 아무리 피가 얇아도 웬만해서는 터지지 않게 된다는 뜻이지.’
 띠이이!
 타이머가 다 돌자 차임벨이 울렸다.
 벨 버튼을 해제한 지호는 곧바로 진공을 뺐다.
 ‘삐이이이···’ 하는 소리와 함께 공기 차는 소리가 피리 소리처럼 울려 퍼진다.
 그다음엔 혹시 모를 안전사고를 대비해 전원 스위치를 끄고.
 들들들들···.
 고정 레버의 핸들을 돌려서 꺼내기 쉽게 교반실을 기울인다.
 “어디 보자···.”
 지호는 습관적으로 반죽 상태부터 점검했다.
 두 포대 반의 밀가루와 물 12.5리터. 그리고 기타 부재료가 잘 뒤섞인 반죽이 네 개의 날개축에 끈적하니 들러붙어 있는 모습이 제대로 치대진 것 같다.
 이제 이걸 꺼내고 같은 배합으로 한 번만 더 반죽을 만들어 주면 오전에 사용할 분량은 준비 완료다.
 나름 섬세한 조절이 필요한 작업이다 보니 반죽 재료 배합 및 확인 작업은 권 사장과 지호가 전담하고 있었다.
 그럼 지호에게 반죽 작업을 넘긴 권 사장은 어디 갔을까?
 이미 건너편 조리실로 들어간 권 사장은 전날 직원들과 함께 다듬어 놓은 각종 속 재료와 비법 양념을 속 반죽기에 때려 붓고 계셨다.
 ‘바쁘구나, 바빠.’
 바쁜 건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김 주임은 냉장고와 비슷하게 생긴―하지만 크기는 몇 배나 더 큰―찜기의 예열준비로 눈코 뜰 새 없었다. 영태와 아줌마는 속칭 ‘가구’라고 불리는 만두 판에 깔판을 대는 작업으로 분주했다.
 눈에는 안 보이지만 날라리 종욱이 녀석도 전날 쪄서 얼려 둔 만두를 포장할 포장 기계의 예열 준비로 정신없을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각자 자신이 맡은 파트에서 알아서 척척 움직이고 있었다.
 “아줌마, 영태 형! 포장 준비 끝났어요! 얼른들 모이세요!”
 박스와 내피 용지까지 모두 준비한 종욱이가 가구 세팅을 완료한 두 사람을 호출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수백 판도 넘는 냉동만두 몇백 가구도 김 주임과 함께 이미 정리를 마쳤을 것이다.
 ‘자식, 저럴 때 보면 날라리치고 꽤 빠릿빠릿하단 말이지.’
 때마침 반죽을 모두 끝낸 지호는 성형 기계의 세팅 작업으로 넘어갔다. 속 반죽을 모두 마친 권 사장도 맞은편 기계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어, 춥다. 추워.”
 적당한 타이밍에 위생모만 대충 걸친 박 과장이 나타났다.
 간단한 사무실 업무를 끝낸―아마도 커피를 홀짝이며 웹서핑이나 하는 게 전부였겠지만―그는 종욱이와 영태, 아줌마가 한창 준비 중인 포장 작업장에 합류했다.
 “박 과장아. 봉투 압착 잘 확인하그레이. 요새 자꾸 불량 나온다고 업체마다 난리다.”
 “예, 알겠습니다.”
 “참, 지호야.”
 “네?”
 군만두용 몰드를 막 해체하고 오늘 만들 왕만두용 몰드를 조립 중이던 지호가 드라이버를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네는 만두 작업 10시까지만 하고 납품 준비 시작해라.”
 “예, 사장님.”
 봄부터 가을까지는 주로 사장님이 직접 납품을 뛰곤 했다.
 하지만 11월부터는 납품 물량이 급속도로 증가하면서 지호도 함께 동참해야 했다.
 “지호, 네까지 납품으로 빠지는 마당에 빨리 사람이 구해져야 할 긴데···.”
 원래는 다음 주가 아니라 이번 주부터 사람을 더 쓸 계획이었다. 하지만 워낙에 인력난이 심하다 보니 사람 구하기가 녹록지는 않은 모양.
 발주 물량은 점점 느는데 주요 성형 작업자 중 한 명인 지호가 납품 쪽으로 빠지다 보니 권 사장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픈 심정이었다.
 “그래도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하는기라. 안 글나?”
 “암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사장님.”
 말은 그렇게 해도 권 사장 역시 크게 걱정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늘 그랬듯 올해도 어찌어찌 필요 인원은 맞춰질 것이라 믿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어느 지역으로 납품을 나가게 될까.’
 몰드 간격 조정을 마친 지호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어렸다.
 사실 지호는 다른 어떤 작업보다 납품일이 좋았다.
 공장 안에 갇혀서 만두 성형에만 매달리다 보면 내가 기계인지 기계가 난지 모를 강제적 물아일체를 종종 경험한다.
 이따금 영태나 아줌마와 농담 따먹기로 기분 전환을 해 보지만 그것도 임시방편일 뿐.
 분당 백 개 이상 찍혀 나오는 만두를 성형하고 정리하는 일에만 매달리다 보면 하루 일과가 마무리될 때쯤에는 입에서 단내가 폴폴 풍길 지경이었다.
 반면 납품용 냉동 탑차를 몰고 원거리 드라이브를 뛸 때는 묵은 스트레스가 싹 날아가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납품처는 주로 외곽 순환이나 경부 고속도로 인근에 몰려 있어서 기본이 평균 한 시간 거리.
 거기에 하차 작업과 돌아올 거리까지 더하면 상당한 시간을 외근으로 퉁칠 수 있었다.
 때문에 그날그날 맘에 드는 라디오 채널을 맞추고 신나게 고속도로를 달리고 돌아오면 오후 작업은 반 이상이 지나가 있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건···.
 ‘바로 오늘 같은 경우겠지.’
 오늘처럼 애매하게 점심시간이 걸치는 경우에는 점심값으로 만 원짜리 한 장을 받을 수 있었다.
 평소 공장 작업에만 매달리다 보면 배달 온 식당 음식으로 점심을 때워야 한다. 하지만 외근을 하게 되면 만원 한도 내에서 자유롭게 메뉴 선택이 가능했다.
 그렇지만 지호는 이 돈도 철저하게 아꼈다.
 아예 굶을 순 없으니 간단하게 분식이나 편의점 음식으로 때운다, 쳐도 최소 오천에서 많게는 칠팔천 원까지 세이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피크 철인 겨우내 모으면 얼추 3, 40만 원은 덤으로 벌 수 있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 돈도 엄연한 남의 돈.
 때문에 처음에는 남은 잔돈을 도로 사장님께 돌려드리려고 한 적도 있었다.
 “하하, 괜찮다. 그냥 네 해라.”
 “정말요?”
 “먼 길 다녀오느라 고생했다 아이가. 그냥 네 용돈해라.”
 앗싸!
 이 또한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였다.
 
 ***
 
 바쁜 만큼 시간은 빨리 흘러갔다.
 지호가 납품 일을 겸한 지도 어느덧 두 달이 훌쩍 지나고···.
 계절도 본격적인 겨울철로 접어들었다.
 나날이 증가하는 주문량으로 공장은 늘 풀가동 중.
 이 계절 동안만 쓰는 주부 사원도 무려 여덟 명이 더 들어왔다. 작년보다 세 명이나 더 쓰는 걸 보면 확실히 올해는 매출이 더 늘어날 듯싶었다.
 또한 그만큼 지호의 배달일도 늘어서 요즘은 최소 두 탕은 기본이었다.
 덕분에 출근과 동시에 배달을 시작하는 날도 많아졌고 한 타임 뛰고 돌아온 다음 다시 나가는 시간은 점심시간과도 자주 겹쳤다. 겸사겸사 보너스 만원도 쏠쏠히 챙길 수 있었다.
 “종욱이, 영태 컴 온! 김 주임님도 잠깐만 도와주세요.”
 탑차를 댄 지호가 두 녀석과 김 주임을 호출했다. 차에 실을 물량을 나르기 위해서다.
 “김치 60박스, 고기 60박스, 왕만두 30박스! 에 그리고···.”
 겨울 특선 메뉴인 ‘표고버섯 삼색만두’도 종류별로 20박스씩 순서대로 실어야 한다.
 참고로 삼색만두란 감자 전분으로 만두피의 쫄깃함을 끌어올린 만두로써 단호박과 백련초, 시금치 가루로 색을 낸 만두였다. 만두 속은 표고로 풍미를 높였다. 덕분에 단가는 좀 세지만 설 즈음에 주문이 폭증하는 히트 상품 중 하나였다.
 “영태야, 냉면 육수도 한 박스 실어라.”
 “네!”
 ‘대박 식품’은 만두만 생산하는 업체가 아니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냉면과 육수도 종종 만드는데 겨울 전에는 생산을 중단했다. 그때부터는 오로지 만두 생산에만 주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출고되는 육수 제품은 그 전에 만들어 둔 것을 냉동 창고에 얼려 둔 것이다.
 “오케이, 이제 백련초 20박스만 실으면 끝이다!”
 넷이 함께 상차를 마친 후 검수까지 끝낸 지호가 거래 명세서를 쭉 훑었다.
 이번 물량이 갈 곳은 천현식품과 아주물류 두 곳.
 일단 아주물류부터 들러서 나중에 실은 물건들을 내려주고, 돌아오는 길에 천현식품을 들르기로 했다.
 ‘그럼 오늘은 천현에서 점심을 먹으면 되겠구나.’
 천현식품 물류 창고.
 그곳은 대박 식품 일자리를 소개시켜 준 지호의 고교동창, 이수철이 일하는 곳이었다.
 시간만 잘 맞추면 녀석네 창고에서 공짜 점심을 얻어먹을 수 있다. 친구니까 부담 없이 말이다.
 
 ***
 
 12시를 갓 넘은 시간에 맞춰 천현식품 물류 창고에 도착했다.
 미리 전화를 넣어 뒀으니 배달 음식은 당연히 2인분일 터.
 예전엔 수철에게 부담될까 봐 먹고 왔다고 거짓말을 한 적도 있었지만 어차피 식대는 별도로 영수증처리가 된다고 해서 작년부터는 부담 없이 숟가락을 얹곤 했다.
 “수철아, 나 왔다.”
 창고 입구에 적당히 주차한 지호가 손바닥만 한 사무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얼른 와라. 밥 식는다.”
 “물건은 먹고 나를 거지?”
 “그래야지. 오늘 메뉴 좋다. 너 좋아하는 돼지불백이야.”
 “오올! 완전 땡큔데?”
 지호는 목장갑을 벗어서 뒷주머니에 푹 찔러 넣고 수철의 사무실로 향했다.
 탁자 위에는 이미 랩이 벗겨진 각종 반찬과 공깃밥, 메인 메뉴인 돼지불백까지 맛깔나게 차려져 있었다.
 “그럼 잘 먹을게.”
 “양껏 들어. 밥솥에 밥도 더 있으니까.”
 허겁지겁 식사를 마친 두 사람.
 한숨 돌린 지호와 수철은 후식으로 믹스커피를 나누며 이런저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말이다, 지호야.”
 “어?”
 마지막 모금을 쭉 들이켠 수철이 목소리를 낮추며 지호를 불렀다.
 “너희 공장, 요즘 괜찮냐? 어때?”
 “왜?”
 “아니. 우리 사장한테 얼핏 듣기로는 너희 공장 사장, 요즘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다고 하던데. 왠지 낌새가 이상하다나 뭐라나.”
 “별소릴 다 한다. 걱정 마라. 아직까지 월급은 꼬박꼬박 잘 나오고 있으니까.”
 “뭐 그렇다면 다행이고.”
 수철이와 함께 하차를 마친 지호는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는 차에 올랐다.
 “흐음···.”
 시동을 걸기 위해 열쇠를 돌리던 지호가 아까 수철이 말했던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상하다니. 도대체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권 사장이 주는 점심값이 좀 줄어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3년째 늘 만 원씩 쥐여 주던 점심값이 가끔은 오천 원, 혹은 돌아와서 먹으라는 말로 대신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설마 진짜로 뭔가가 있는 걸까?’
 확실한 건 아직 모르겠지만 지호는 왠지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 003. 맛집 발견
 
 다음 날은 평택 쪽에 있는 대형 물류 업체로 납품을 나갔다.
 그쪽으로 가는 길은 지호가 가장 좋아하는 루트 중에 하나였다.
 이유는 바로 최근에 발견한 단골 분식집이 그 근처에 있었기 때문인데···.
 사실 그 집은 말이 분식집이지 판매하는 메뉴는 오직 떡볶이 하나뿐이었다. 그 흔한 튀김이나 어묵도 없었다.
 그래도 워낙에 맛이 훌륭하다 보니 평택 쪽에 업무가 있는 날은 일부러라도 찾아가서 들르곤 했다.
 ‘맛은 참 좋은 집인데··· 생각할수록 안타까워.’
 그랬다. 그 가게를 생각하면 한마디로 안타까웠다.
 비단 판매 메뉴가 떡볶이란 단일 메뉴라서만은 아니었다.
 원래 메뉴의 가짓수는 중요한 게 아니다. 오히려 너무 난잡하게 많은 메뉴를 취급하는 곳은 신뢰도가 떨어지기도 하니까.
 그런 면에서 보자면 독보적인 단품 메뉴로 승부를 보는 전략도 나쁘지는 않다. 그런 식으로 대박을 낸 맛집도 많고.
 요즘은 맛과 가격, 콘셉트만 잘 잡으면 손님들이 알아서 몰려드는 세상이다.
 하지만 지호가 좋아하는 그 떡볶이집은 아무리 맛이 좋다지만 그 한계가 너무나 명확했다.
 우선 수도권치고는 드물게 외진 이차선 국도변이란 점이 첫 번째 문제였고, 가게 바로 옆에는 공동묘지를 방불케 하는 무덤 터까지 존재했다. 가게조차도 우거진 수풀에 가려 음침하기 짝이 없었다.
 자체적인 셀프 은폐 엄폐라고나 할까.
 이건 뭐 겉모습만 봐서는 도대체가 손님을 받겠다는 건지 쫓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건물 자체도 심하게 낡고 허름한 농가 건물이다 보니 누가 봐도 식당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외관이었다. 간판? 그딴 건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따지고 보면 지호가 이 가게를 발견한 건 굉장한 우연이 아닐 수 없었다.
 ‘진짜 우연이었지. 거긴 거의 폐쇄된 도로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두 달쯤 전이었을까.
 그날따라 무슨 이유에선지 갑자기 내비게이션이 오류를 내며 잘못된 길로 안내했다. 또 마침 급하게 소변이 마려워 갓길에 잠시 차를 세웠는데 그때 어딘가로부터 엄청나게 맛있는 냄새가 흘러나와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냄새 한번 죽이네!’
 마침 배도 고프고 점심시간이고 해서 지호는 주변을 샅샅이 살핀 끝에 겨우 그 집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냥 가정집인가?’
 처음엔 아무리 봐도 음식점이란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아쉽네. 냄새는 진짜 끝내주는데.’
 그럼에도 도무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던 지호.
 그는 홀린 듯 낡은 농가 바로 앞까지 찾아갔다.
 여차하면 얼굴에 철판 깔고 밥 한 끼만 부탁해 보자 하는 마음을 품고서.
 다행히 문 앞에 붙은 누런 A4용지에서 [할배 떡볶이집]이란 상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가정집이 아니라서 다행이긴 한데···.’
 달랑 A4용지 한 장으로 간판을 대신하고 있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이란 말인가.
 혹시 TV에서만 보던 간판 없는 맛집, 뭐 그런 건가?
 일단은 들어가 보기로 했다.
 드르륵.
 “실례합니다.”
 그렇게 ‘할배 떡볶이집’을 첫 방문 한 것이 지난 11월 말이었다.
 이후 지호는 이쪽으로 볼일이 있을 때마다 무조건 할배 떡볶이집을 들렀다.
 외관과 달리 가게 내부는 나름 정갈한 식당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비록 테이블은 단 두 개뿐이었고 메뉴조차 떡볶이란 단일 메뉴뿐이었지만 인상 푸근한 할아버지가 퍼 담아 주시는 떡볶이의 맛만큼은 세상 그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최고의 맛이었다.
 하지만 이 가게는 처음에 생각했던 간판 없는 맛집 같은 건 아닌듯했다. 매번 점심시간에 맞춰서 들리곤 했지만 지호 말고는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가게 위치가 가지고 있는 약점이 너무 두드러진 탓인 듯했다.
 “실례지만 할아버지. 장사는 잘되세요?”
 “글쎄.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나름 용기 낸 질문이건만.
 연탄난로 옆에 앉아 계시던 할아버지는 뚱한 목소리로 되물으셨다.
 “음··· 손님이 좀 없는 것 같네요. 아쉽게도.”
 “맛이 없어서 그런가 보지.”
 “컥! 아닙니다. 맛은 끝내줍니다.”
 할아버지의 셀프 디스에 하마터면 지호는 씹고 있던 떡볶이가 목에 걸릴 뻔했다.
 “전 태어나서 이렇게 맛있는 떡볶이는 먹어본 적도 없는걸요. 진짭니다.”
 “허허. 말이라도 고마우이.”
 건성으로 대답하신 할아버지는 엉거주춤 주방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그런데 음식 맛에 비해 손님이 너무 없어요. 아마도 차가 거의 안 다니는 2차선 국도변에, 그것도 인적 없는 산 밑 외딴 농가에 가게를 차리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조금만 시내 쪽으로 자리를 옮기시면 정말 대박 나실 거예요.”
 “과연 그럴까?”
 “네? 다, 당연히···.”
 식재료를 다듬는 건지 설거지를 하는 건지··· 할아버지는 지호의 대답은 듣는 둥 마는 둥 아예 등까지 돌려 버리셨다.
 이런, 내가 말실수를 했나?
 하지만 할아버지의 태도를 보아하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닌듯했다. 그냥 저분은 매상 같은 거에는 아예 관심이 없는 분 같았다.
 ‘이 떡볶이 진짜 대박 날 맛인데. 이런 외진 곳에서 썩히기엔 너무 아까워.’
 태평스러운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오히려 지호가 더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더 이상의 대화는 원치 않는 듯 주방 옆 골방 안으로 들어가 버리셨다.
 ‘에휴, 내 일도 아닌데 더 다그쳐 봐야 어쩌겠어.’
 씁쓸한 아쉬움을 뒤로한 지호는 테이블 위에 천 원짜리 두 장을 올려놓고 떡볶이집을 나섰다.
 
 ***
 
 잘 뚫린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려서 다시 공장으로 돌아왔다.
 이제 두어 시간만 더 지나면 하루 일과를 마무리할 시간.
 주차장에 탑차를 댄 지호는 룰루랄라거리며 거래 명세서를 전하기 위해 사무실로 향했다.
 “이 일을 우야란 말이고. 박 과장아!”
 막 현관 손잡이를 돌리려던 순간, 사무실 안쪽으로부터 고성이 들려왔다.
 “아 그러게 사장님도 잘 알아보고 하셨어야죠. 이제 와서 저한테 따져 봤자···.”
 권 사장과 박 과장이 언성을 높이며 다투는 것 같았다.
 “네 그게 말이가, 방구가. 박 과장아, 네가 안 그랬나. 그 사람,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네가 안 글캤나?”
 “아 모르겠습니다. 그분과 전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어요. 그냥 아는 지인한테 저도 소개만 받았을 뿐이라구요. 진짭니다. 사장님.”
 “아이고, 두야···.”
 ‘풀썩’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권 사장이 소파에 주저앉은 모양이다. 뒤이어 한풀 꺾인 박 과장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사장님. 당장이라도 손을 쓰지 않으시면 그나마도 싹 다 날려 먹는 수가 있어요. 지금 당장 움직이셔야 합니다.”
 “그래그래, 알아봐야지. 알아보긴 할 건데. 휴우···.”
 지호는 괜한 불똥이 튈까 싶어 거래 명세서를 다시 주머니에 넣고 바로 작업장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찮은데.’
 권 사장과 박 과장은 평소에도 이런저런 의견 차이로 종종 다투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좀 심했다. 얼핏 듣기로는 그 내용도 좀 위험해 보였고.
 지호는 전날 수철이에게 들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우리 사장한테 듣기로 너희 공장 사장, 요즘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다던데?―
 왠지 뒷골이 서늘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퇴근 무렵 옷을 갈아입고 다시 사무실로 가 보니 박 과장이 안 보였다.
 “사장님, 과장님은 어디 나가셨어요?”
 “글마 관뒀다.”
 “예?”
 “썩을 노무새키. 이제 와서 그렇게 오리발을 내밀면 내더러 우짜란 말이고.”
 “그, 그게 무슨 말씀···?”
 지호는 용기 내어 그간의 사정을 캐물었다.
 “네는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이나 열심히 해라.”
 “괜찮으신 거죠?”
 “안 괜찮을 건 또 뭐 있노. 얼른 정리하고 퇴근이나 하그라.”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뭔가를 숨기는 듯한 권 사장.
 아무래도 공장에 무슨 안 좋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았다.
 
 ***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불안감은 날이 갈수록 그 도가 심해져만 갔다.
 “전부 다 내보내신다고요?”
 “그래.”
 박 과장이 퇴사한 지 딱 일주일 후.
 권 사장은 여덟 명이나 되던 단기 주부 사원들을 모조리 잘라버렸다.
 이후 만두 제조량도 급격히 줄어들더니 급기야 보름 후에는 제조 자체를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그사이 종호 녀석도 소리 소문 없이 결근하기 시작했고···.
 결국 설을 사흘 앞둔 어느 날, 권 사장은 지호를 비롯한 나머지 직원들을 사무실로 불러 모았다.
 “이런 말 하기는 정말 미안하다만 더는 버티기 힘들 것 같다.”
 “······.”
 “다들 알다시피 조만간 우리 공장이 확장 이전하기로 돼 있었제? 근데 그게 일이 좀 꼬여 버렸다. 전부 내 잘못이지.”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부지 계약을 하는 와중에 사기를 맞아 부렸지 뭐가. 하하··· 내 어떻게든 버텨 보려고 했는데. 이젠 힘들다, 나도. 너거들한테 미안하게 됐다.”
 허탈한 웃음이 사라진 권 사장의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그 모습을 본 지호와 직원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푹 숙였다.
 “자, 그럼 다들 그렇게 알고.”
 자리에서 일어난 권 사장은 자신의 책상으로 가더니 뭔가를 꺼내 왔다. 그것은 명절 때마다 늘 구경하던 상여금 봉투였다.
 근방의 여타 업체들보다 배는 두둑했던 저 봉투.
 뿐만아니라 그 속에는 짤막하나마 권 사장의 필체가 담긴 손편지도 함께 들어 있곤 했는데.
 총 네 개의 봉투를 손에 쥔 권 사장은 일렬로 늘어선 직원들에게 하나씩 봉투를 나눠 주기 시작했다.
 
 
 # 004. 새로운 진로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약소하지만 퇴직금이다 생각하고 넣어 두세요.”
 첫 번째 봉투가 아주머니에게 전해졌다.
 “아유 괜찮아요, 사장님. 저야 근처 아무 공장이나 다시 들어가면 되죠. 사장님도 힘내세요.”
 “고맙습니다. 아주머니.”
 김 주임과 영태에게도 차례로 봉투가 쥐어졌다.
 “미안하다, 김 주임. 그리고 영태야. 너거들 만큼은 내가 끝까지 건사해 주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일이 이래 되고 말았네. 내 네들한테 면목이 없다.”
 평소답잖은 사장님의 힘없는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맘 여린 영태는 이내 눈물까지 뚝뚝 흘리고 있었다. 굳게 입을 다문 김 주임도 애써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단 내가 아는 업체에 연락은 넣어 놨다. 조만간 너희 둘한테 연락 갈기다. 웬만하면 받아 주기로 했으니까 가서 면접 잘 보고 열심히 일해라. 가끔 전화도 하고.”
 “으앙! 사장님···.”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영태가 권 사장을 와락 끌어안았다.
 품에 안긴 영태를 몇 번 토닥여 준 권 사장은 아줌마와 김 주임에게 그만 나가 보라는 눈짓을 했고 곧이어 영태도 꾸벅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이제 사무실에는 권 사장과 지호, 둘만 남았다.
 여전히 무거운 분위기.
 권 사장은 뻘쭘하게 서 있던 지호에게 소파에 앉을 것을 권했다.
 “지호야 커피 한잔할래?”
 “제가 타오겠습니다.”
 탕비실로 간 지호는 종이컵 두 개를 꺼내고 믹스 스틱을 집어 들었다.
 주르륵.
 꼭지를 딴 스틱 하나를 첫 번째 컵에 붓고 나머지 커피 스틱도 절반 가까이 더 추가했다. 진한 커피를 좋아하는 권 사장을 위한 작은 배려였다.
 나머지 반을 자신의 컵에 따른 지호는 적당히 온수를 탄 다음 권 사장 앞에 다시 앉았다.
 “뭐라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아이다. 다시 일어서면 된다. 지호 네 내 알제?”
 그럼요. 사장님이라면 충분히.
 권 사장의 이력에 대해서라면 이미 이런저런 루트를 통해 잘 알고 있는 지호였다.
 권경섭 사장.
 그는 30대 초반의 나이에 혈혈단신, 옷 가방 하나만 들고 서울로 상경했다고 한다.
 오랜 기간 밑바닥 생활을 견뎌 내며 악착같이 돈을 모은 그는 서울 상경 5년 만에 학교 앞, 작은 점포를 빌려 분식집을 열었다.
 그곳에서 김밥과 우동, 만두 등으로 명성을 떨치며 차근차근 돈을 모아 나간 그는 약 10년 전, 드디어 자신만의 만두공장을 차리게 되었다.
 물론 그간 모은 돈뿐 아니라 상당한 빚을 더해서 세운 거긴 하지만 워낙에 만두 맛이 좋아서 나날이 거래처가 늘어 가던 견실한 사업체였다.
 ‘지금은 도로 아미타불이 되고 말았지만.’
 하지만 권 사장의 눈빛은 아직 죽지 않았다.
 자신이 포기하지 않으면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신념.
 오직 몸뚱어리 하나만 믿고 당당하게 일어선 그의 삶은 지호에게 있어 일종의 롤 모델과도 같았다.
 ‘정말 대단한 분이야. 배울 점도 많고.’
 만약에 내가 이번 사건과 같은 실패를 맞닥뜨렸다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권 사장만큼 의연하지는 못했으리라 예상해 본다.
 물론 저분도 남이 안 보는 곳에서는 쓰린 속을 부여잡고 좌절하고 무너졌겠지. 하지만 결국 다시 일어서실 거잖아?
 지호가 보기에 권 사장은 여러모로 배울 점이 많은 마음속 멘토가 아닐 수 없었다.
 “내 이렇게 네만 따로 부른 이유는 말이다. 지호야···.”
 잠시 말을 끊은 권 사장.
 그는 한동안 커피잔만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지 못했다. 뭔가 속으로 고민하는 눈치였다.
 지호는 어서 말씀해 보시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지호야.”
 “네.”
 “어떡하다 보니 일이 이렇게 됐지만 말이다. 아직 완전히 끝난 건 아니다 아이가. 그래서 말인데 네 내 좀 도와줄래?”
 “어떻게 말입니까?”
 “내 아는 지인이 조만간 자기 건물 1층에 있는 손바닥만 한 점포 하나가 빌 것 같다 카더라. 내 거기 들어가서 작으나마 손만두집을 시작해 볼라고 생각 중이다.”
 “······.”
 “진짜 작은 매장이다. 테이블 하나 놓기도 힘들 정도로. 거기서 박리다매식 테이크아웃으로 만두를 함 팔아 볼라고 생각 중인데··· 네 생각은 어떻노? 같이 갈래?”
 실로 뜻밖의 제안이었다.
 ‘하지만 나쁘진 않아.’
 솔직히 권 사장의 만두는 정말 맛있다.
 ‘그건 내가 안다. 대한민국 어디에 내놔도 절대 빠지지 않는 수준급의 만두지.’
 더구나 대량 생산으로 그런 고퀄리티의 맛을 유지한다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때문일까.
 지난 3년간 지호는 내심 권 사장의 만두소 레시피가 궁금했었다. 그렇다고 권 사장이 그 레시피를 꽁꽁 숨기고 안 알려 주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단지 각자가 맡은 파트가 다르다 보니 권 사장이 늘 직접 속을 버무려 왔을 뿐.
 아마 이번 기회에 그를 따라나선다면 그간 궁금해 하던 만두 레시피쯤은 충분히 배울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 말인즉!
 이번 제안은 정말로 좋은 찬스란 뜻이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하지만 지호는 적잖이 갈등됐다.
 왜?
 그 이유는 바로 2주전, 만두공장이 지지부진 휘청거릴 때부터 내심 속으로 생각했던 한 가지 결정 때문이었다.
 ‘이참에 할배 떡볶이집의 떡볶이를 배워 보는 건 어떨까?’
 사실 무작정 가르쳐 달란다고 그분이 가르쳐 주리란 보장은 없었다.
 당연하다. 지호는 단지 그 집 손님일 뿐이니까. 그것도 채 두세 달밖에 안 된 손님.
 차라리 무언가를 배울 생각이라면 권 사장의 만두를 배우는 게 훨씬 쉬울 것이다. 하지만···.
 ‘그 떡볶이는 정말 특별하니까.’
 권 사장의 만두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감히 할배 떡볶이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호가 굳이 따라나서지 않아도 권 사장에게는 종욱이가 있다. 녀석이 아무리 뺀질거리는 날라리라지만 나름 속 깊은 녀석이란 것쯤은 지호도 잘 알고 있다.
 아마 녀석이라면 집안 사정을 생각해서 발 벗고 나서서 아버지의 일을 도울 것이다.
 ‘그러니까 사장님한테는 굳이 내가 없어도 된다.’
 덤벼 보자. 이번 기회에.
 어차피 가진 거라곤 몸뚱어리 하나가 전부인 젊음뿐이지 않은가.
 결심을 굳힌 지호는 천천히 컵을 내려놓으며 권 사장을 응시했다.
 “사장님, 말씀은 감사하지만 전 이번 기회에 따로 생각해 둔 일을 시작해 볼까 합니다.”
 “아, 글나?”
 “······.”
 “혹시 그게 어떤 일인지 물어봐도 되나?”
 “아직 확실한 건 아니라··· 좀. 하지만 이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꼭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다. 괘안타. 네가 미안할 게 뭐 있노. 공장일이 이렇게 된 건 다 내 탓인데. 허허.”
 “······.”
 뒤끝 없는 권 사장의 웃음이 더욱 지호를 미안하게 했다.
 “네나 내나 다 잘됐으면 좋겠다. 그제?”
 “예.”
 “그래, 늦었다. 그만 가 봐라. 필요한 일 있거든 언제든지 전화하고.”
 “사장님도요. 혹여 일손이 딸리거나 하시면 아무 때고 연락 주세요. 무조건 달려가서 돕겠습니다.”
 “잠깐만.”
 막 자리에서 일어나던 지호를 권 사장이 다시 붙잡았다.
 “네 건 특별히 더 두둑이 넣어 놨다. 어무이캉 니캉 동생들 돌본다고 고생이 많제? 큰돈은 아니다만 도움은 좀 될 기다.”
 권 사장은 마지막 남은 하얀 봉투를 지호의 잠바 주머니에 쿡 찔러 넣으며 환하게 웃었다.
 차마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던 지호는 조용히 사무실 문을 닫고 나왔다.
 ‘고맙습니다, 사장님. 언젠가 반드시 사장님께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다시 돌아올게요. 그때가 되면 저도 사장님의 맛있는 만두 꼭 배우고 싶습니다.’
 그렇게 지호는 ‘대박 식품’을 퇴사했다.
 
 ***
 
 이튿날 아침.
 그 어느 때보다 일찍 집을 나선 지호는 할배 떡볶이집을 찾아 나섰다.
 ‘겁나게 머네.’
 탑차를 타고 다닐 때는 몰랐는데 대중교통으로 그곳까지 가려니 이거 보통 일이 아니었다.
 ‘휴, 이제 두 번째 시외버스만 한 번 더 타고 가면 목적지인가.’
 하지만 마지막 버스 정류장에서도 30분이나 더 걸어가야 했다.
 다시 한번 느끼는 거지만 정말 그 집은 가게 터로는 영 아닌 것 같다. 작정하고 찾아가도 이렇게나 힘들다니.
 드르륵.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힘찬 인사와 함께 지호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젊은 친구가 오늘은 일찍도 왔네그려.”
 ‘이, 일찍이요? 무려 세 시간을 달려서 겨우 찾아왔는데도요?’
 하긴 꼭두새벽부터 나선 길이다보니 늘 이곳을 찾던 점심시간까지는 아직 한참 남긴 했다.
 “여기 떡볶이 1인분 주세요.”
 주문을 마친 지호는 이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가게 안을 둘러봤다.
 달랑 두 개뿐인 홀 테이블, 그리 크지 않은 떡볶이판.
 그 뒤로는 손바닥만 한 싱크대와 간이 조리대가 보였다.
 역시 떡볶이 한 가지만 취급하는 가게답게 주방 구성이 간소하다.
 과연 저곳에서 어떤 재료가 얼마만큼 사용되고 있을까.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조리되었길래 이다지도 특별한 맛의 떡볶이가 탄생하게 된 것일까.
 그냥 손님 입장일 때 봐 오던 가게는 작고 허름하다는 느낌이 다였는데 가게를 대하는 마인드가 바뀌고 나니 그 궁금증이 실로 장난이 아니었다.
 “자네 뭘 그렇게 두리번거리나.”
 떡볶이 접시를 내려놓던 할아버지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 아뇨. 새삼 가게가 예뻐 보여서. 아무래도 그간 정이 든 모양이네요. 하하하!”
 “그 친구 싱겁긴.”
 무심한 표정의 할아버지는 별말 없이 돌아서셨다.
 “휴.”
 한숨 돌린 지호는 본격적인 음식 분석에 들어갔다.
 그 흔한 어묵 국물도, 단무지나 김치도 없는 달랑 떡볶이 한 접시.
 도대체 이게 뭐길래 지호의 마음과 입맛을 휘어잡았을까.
 일단 시각적인 첫인상은 진득한 국물떡볶이였다.
 어묵 몇 조각이 곁들여졌고 투박하게 썬 대파도 군데군데 섞여 있었다.
 ‘구성은 흔한데 때깔이 예술이야.’
 그랬다. 분명 붉은색은 붉은색인데 정확히 어떤 색이다라고 규정하긴 힘든 오묘한 빛깔의 떡볶이였다.
 일단은 그냥 식욕 돋우는 맛깔 나는 색이란 정도로 해 둬야겠다.
 ‘그럼 어디.’
 젓가락을 꺼내든 지호는 조심스럽게 첫 번째 떡을 집었다. 그 즉시 탱글한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 온다.
 도대체 떡을 어떤 식으로 익히면 이런 느낌이 나는 걸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전에 일단 맛부터 보자.’
 지호는 방금 건져 올린 떡볶이 떡을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햐!”
 역시 이 맛이야!
 씹는 순간 고기도 아닌 것이 무슨 육즙처럼 진한 향을 뿜어냈다. 온 입 안 가득히 진득하고 구수 맛의 향연이다. 통각을 자극하는 매운맛도 딱 적당했다.
 떡의 식감은 또 어떻고.
 분명 밀떡인 것 같은데 쌀떡이라 해도 믿을 만큼 탱탱하기 그지없었다.
 전체적으로 과하게 맵지도 않으면서 아릿한 풍미가 느껴졌다. 이 아릿함은 마늘과 흡사한 향신료의 느낌?
 이래저래 복잡 미묘한 맛과 향은 익숙한 듯하면서도 그 조화가 새로웠다.
 ‘완전 맛있어.’
 떡볶이 맛에 대해 분석을 해 보려던 시도는 첫 떡이 씹히는 순간 이미 머릿속에서 로그아웃되고 말았다.
 손이 저절로 움직이고 입도 따라서 자동으로 움직였다. 턱관절은 씹고 삼키고 씹고 삼키고를 무한 반복 하며 끝도 없이 떡볶이를 탐했다.
 ‘다시 한번 느끼는 거지만 이 집 떡볶이는 정말 최고다. 반드시 배우고 말겠어!’
 순식간에 한 접시를 비워 낸 지호는 깊은 심호흡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 지호의 모습을 못 본 할아버지는 묵묵히 떡볶이만 휘젓고 있었다.
 자, 드디어 결전의 시간.
 일단 배도 채웠으니 쫄지 말고 당당하게 정면 돌파 하는 거다.
 “저기요, 할아버지!”
 
 
 # 005. 첫 번째 과제
 
 지호의 부름에 떡볶이를 휘젓고 있던 할아버지의 손이 딱 멎었다.
 “떡볶이 더 달라고?”
 “아뇨. 그게 아니라 혹시 직원··· 안 필요하세요?”
 이런, 지금 내가 뭔 소릴 한 거지?
 단도직입적으로 “떡볶이 좀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말하려 했는데 그만 말이 헛나가고 말았다.
 때마침 고개를 돌리던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친 탓이다. 나도 참 은근 소심하다니까.
 “직원?”
 “네···.”
 “뜬금없이 직원은 무슨.”
 할아버지는 ‘젊은 친구가 별 시답잖은 소리를 다한다’는 표정을 지어보이셨다.
 사실 손님도 없는 이런 작은 가게에 무슨 직원이 더 필요하겠는가.
 할아버지의 저 뚱한 반응은 어쩌면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었다.
 ‘이거 초장부터 망삘이 느껴지는데.’
 느낌이 안 좋다.
 하지만 뱉은 말을 주워 담기엔 이미 늦어 버렸다. 그리고···.
 방향이 좀 어긋나긴 했지만 생각해 보니 직원으로 들어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함께 일하다 보면 이것저것 어깨너머로 배울 수도 있는 거니까.
 좋아, 그렇다면 계속 밀고 나가 보는 거다!
 “월급은 안 주셔도 됩니다. 그냥 일만 하게 해 주십시오.”
 “음···.”
 주걱을 내려놓은 할아버지는 잠시 먼 산을 바라보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지호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말없이 탁자 맞은편에 앉으셨다.
 ‘어라? 설마 이 자리에서 바로 면접을?’
 생각보다 일이 술술 풀리는 분위기다.
 “자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아, 그게··· 연로하신 사장님께서 혼자 일하시는 모습이 좀 힘에 부치시는 것처럼 보여서.”
 “내가? 힘들어 보인다고?”
 “···네.”
 뻥이다. 사실 하나도 안 힘들어 보였다. 손님이 있어야 힘이 들든 말든 하지.
 “말은 고맙네만 직원은 필요 없어.”
 역시···.
 “그래도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낫지 않을까요? 잔심부름 같은 것도 시킬 수 있고 말입니다.”
 “나 혼자로도 충분해. 그리고 자네, 젊은 친구가 그리도 할 일이 없는가.”
 “네? 그게 무슨 말씀···.”
 “뭐 뜯어먹을 게 있다고 나 같은 노인네 옆에 붙어 있으려는 게야.”
 “뜨, 뜯어먹다니요. 오해십니다.”
 “하긴 뭐 뜯길 돈도 없어. 그러니까 괜한 헛물켜지 말고 딴 데 가서 알아보게.”
 “절대 돈을 바라고 그러는 게 아닙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무급으로 일해 드린다니까요? 그러니까 부담 갖지 않으셔도···.”
 “공짜로 사람을 부려서야 쓰나. 나도 다시 한번 말하네만 진짜로 직원은 필요 없어. 말은 고맙지만 정중히 사양하겠네.”
 “아···.”
 너무도 칼 같은 거절.
 난감해진 지호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일전에 자네가 말했었지. 가게 자리가 안 좋은 것 같다고. 맞네. 아주 안 좋지. 덕분에 손님도 없어. 따라서 굳이 직원 같은 걸 둘 필요가 없지.”
 “그, 그렇겠군요.”
 잠깐! 왜 내가 설득을 당하고 있는 거야? 계획은 이게 아니잖아!
 “그러니까 오늘 얘긴 못 들은 걸로 하겠네. 떡볶이 다 먹었으면 그만 일어나시게.”
 “아, 저···.”
 완벽한 거절에 이은 완벽한 축객령이었다.
 게다가 할아버지의 냉랭한 반응을 보아하니 다시 찾아온들 좋은 소리는 듣기 힘들 것 같았다. 나름 친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지호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커흠!”
 헛기침과 함께 자리를 털고 일어난 할아버지.
 반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지호.
 그런 지호를 쳐다보는 할아버지의 표정에는 뜻 모를 마뜩잖음이 스쳤다. 마치 ‘네가 하고 싶은 말이 고작 그거였냐?’라는 느낌이랄까.
 그는 들릴 듯 말 듯 혀끝까지 차며 휭하니 돌아서더니 이내 주방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그 뒷모습에는 정체 모를 불쾌감마저 느껴졌다.
 ‘너무하시네. 무료 봉사를 해 주겠다는 말이 그렇게나 기분 나빴나?’
 갑작스러운 죄인 취급에 급 기세가 꺾여 버린 지호.
 이만 포기하고 권 사장이나 따라갈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니야. 사장님과의 관계는 언제고 열려 있지만 할아버지의 떡볶이는 달라. 이번 기회를 놓칠 경우 두 번 다시 기회는 없다.’
 가장 큰 문제는 돈과 시간.
 당장 돈이 급하다고 아무 일이나 덜컥 시작해 버리거나 혹은 권 사장의 사업에 동참하게 되면 지금처럼 시간을 낼 여유가 없다. 그러니까 뭔가를 하려면 기회는 지금뿐이다.
 ‘어차피 오늘 틀어지고 나면 다시 볼일도 없는 사이잖아. 졸지 말고 끝까지 가 보는 거다!’
 이를 악문 지호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떡볶이를 배우고 싶습니다!”
 갑작스러운 지호의 외침에 막 골방으로 들어가려던 할아버지가 멈칫했다.
 “도와주십쇼. 공짜로 가르쳐 달라는 건 아닙니다. 수업료는 지불하겠습니다.”
 지호는 자신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흰 봉투―어제 권 사장으로부터 받은― 하나를 탁자 위에 ‘탁’ 내려놓았다.
 매달 고향 집으로 생활비를 부치느라 최소한의 잔고 말고는 가진 돈이 없는 지호.
 이 돈은 현재 지호가 수중에 지닌 유일한 목돈이었다.
 ‘이 상황에 돈은 중요한 게 아니니까.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한다.’
 그러니까 아까워할 필요 없어. 나중에 이자까지 쳐서 백배 천배 더 벌면 되는 거야.
 “약소하지만 제 전 재산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도와주십쇼.”
 가게 안은 한동안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정말로 배우고 싶나, 자네?”
 기나긴 침묵을 깬 할아버지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왠지 아까보다는 한결 부드러운 말투.
 ‘됐다!’
 직감적으로 기회가 왔음을 느낀 지호는 한달음에 달려가 할아버지의 손에 봉투를 쥐여 드렸다.
 “물론입니다. 꼭 배우고 싶습니다.”
 “그럼···.”
 할아버지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봉투와 지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한번 만들어 봐.”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허허, 참.”
 “그럼 지금 바로 가르쳐 주시는 건가요?”
 몸이 단 지호는 곧장 떡볶이판 앞으로 달려갈 기세였다.
 “이 친구 성격 한번 급하군그래. 이보게, 내가 언제 가르쳐 준다고 했던가.”
 “그, 그럼?”
 “한번 만들어나 보란 말일세. 자네 손으로 직접 떡볶이란 걸 만들어 보란 말이야.”
 “저 혼자서요?”
 “그래. 자네가 보기에 내 떡볶이가 어떻던가.”
 “정말 맛있습니다. 지금껏 제가 먹어 본 떡볶이 중에 최고로요. 아마 대한민국에서 할아버지 떡볶이만큼 맛있는 떡볶이는 없을 겁니다.”
 이건 아부가 아니었다. 지호는 진심으로 그렇게 느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기본기는 갖춘 다음에라야 전수가 가능하지 않겠어?”
 아, 이제 보니 할아버지의 말씀은 지호의 실력을 한번 보고 싶다는 뜻인 듯했다.
 “혹시 할아버지의 떡볶이를 흉내 내 보란 말씀이신가요?”
 “자네 실력에 그게 가능하겠는가?”
 “······.”
 차마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었다.
 하얀 건 떡이요, 빨간 건 고추장이라··· 떡볶이란 음식에 대해 지호가 아는 거라고는 현재 그 정도가 다였다. 그런 주제에 감히 어떻게 이 명품 떡볶이의 수준을 흉내 낼 수가 있을까.
 “너무 겁먹을 필요 없어. 난 그냥 기본기가 보고 싶은 거니까. 실력껏 최선을 다해서 한번 만들어 봐. 가르칠지 말지는 자네가 만든 결과물을 보고 나서 결정하도록 하겠네.”
 그야말로 인생이 걸린 실습 과제였다.
 ‘이거 원, 손 떨려서 제대로 만들 수나 있을지 모르겠네.’
 그러나 할아버지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어느 정도 기본 밑바탕은 있어야 가르쳐 줘도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넉넉잡고 보름 주겠네. 그 안에 날 만족시킬 만한 수준의 떡볶이를 만들어 와. 그리고 이건 도로 가져가게.”
 할아버지는 지호에게 다시 돈 봉투를 넘겨 주셨다.
 “그럴 순 없습니다. 작으나마 제가 보일 수 있는 성의 표시인 걸요. 받아 주세요.”
 직원으로 일해서 수업료를 대신할 수도 없게 된 마당에 차마 돈까지 돌려받을 수는 없었다. 아니, 돌려받기 싫었다.
 ‘저 돈은 일종의 계약금 역할을 해 줄 테니까.’
 피 같은 돈이지만 나중을 위한 투자다 생각하면 그렇게 아까울 것도 없었다.
 “자네가 말했지. 돈을 벌고 싶으면 이런 외진 곳에 가게를 낼 게 아니라 시내 쪽에다 차리라고.”
 “······.”
 “그래, 돈을 벌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게 정상이지. 하지만 난 돈 같은 거엔 관심 없어. 내 떡볶이를 배우고 싶다면 돈이 아니라 자네의 정성과 열정을 보여 주게. 그거면 충분해.”
 할 말을 끝낸 할아버지는 다시 골방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정성과 열정?’
 거참 매력적인 단어였다.
 하지만 그 두 가지만 가지고 덤벼들기에는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과연 달라질 수 있을까. 할아버지의 떡볶이를 배울 수 있다면 이전까지의 팍팍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직은 백 퍼센트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할아버지가 보길 원하는 그것이 지금까지 지호가 세상을 상대해 온 가장 큰 무기란 것만은 확실했다.
 “휴···.”
 단전 저 아래에서부터 흘러나온 한숨이 긴장감과 함께 흩어졌다. 뭔가에 홀린 듯 후다닥 지나간 대화 끝에 이제야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일단 첫 단추는 순조롭게 끼운 건가.’
 절반의 성공.
 나머지는 지호 스스로가 개척해야 한다. 하지만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다시금 자신감을 회복한 지호는 탁자 위 돈 봉투를 챙겨 들고 할배 떡볶이집을 나섰다.
 
 ***
 
 보름이라···.
 오후 늦게서야 집으로 돌아온 지호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속칭 요알못의 남자, 한지호.
 때문일까.
 처음에는 주어진 기간이 길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오히려 그 점이 더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사실 아무리 음식을 못 만드는 사람이라 해도 떡볶이 한 가지를 완성하는 데 2주씩이나 걸리지는 않는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무슨 이유로 그리도 긴 시간을 주면서까지 지호의 떡볶이를 보고 싶어 한 것일까.
 ‘어쩌면 그만큼 높은 완성도의 결과물을 기대하겠다는 뜻인지도 모르지.’
 그렇게 보면 2주란 시간도 결코 긴 시간이 아니었다.
 ‘그래도 일단은 시작하고 보자. 만들고 또 만들다 보면 뭐가 나와도 나오겠지.’
 
 
 # 006. 이 노트 뭐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보름간의 시간.
 그동안 지호는 두문불출 집안에만 틀어박혀서 자신만의 떡볶이 개발에 매달렸다. 최근에는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서 하루 3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이전까지는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떡볶이란 음식.
 하지만 나름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 조금씩 결과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속된 보름의 마지막 날이 찾아왔다.
 밤을 새우다시피 한 지호는 뻐근한 어깨를 두드리며 주방 쪽창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 해가 졌는지 벌써 노을이 지고 있는 하늘.
 ‘눈부시다···.’
 다닥다닥 붙은 주택가 지붕 위로 넘어가는 저 붉은 노을이 막 떠오르는 여명과도 같은 착각이 든다.
 ‘나름 만족할 만한 작품이 나왔어.’
 오랜 노력 끝에 완성한 결과물을 보고 있자니 지호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딸칵.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떡볶이를 밀폐 용기에 담아낸 지호는 나른한 기지개를 켜며 침대 위로 쓰러졌다.
 ‘졸린다. 눈이 저절로 감기네.’
 하지만 졸음은 쏟아지는데 쉬이 잠이 올 것 같진 않았다.
 기대 반 걱정 반, 시험 전날과도 같은 긴장감.
 그래도 마음만은 뿌듯했다.
 ‘내 평생 이렇게 무언가를 열심히 해 본 적이 있던가.’
 그래, 난 할 만큼 했다. 이제 결과는 하늘에 맡기면 된다.
 지호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핸드폰 알람을 맞췄다.
 오늘은 푹 자자. 내일이 되면 뭐가 됐든 결과가 나오겠지.
 ‘부디 좋은 성과가 있기를. 그리고 밑바닥만 전전하던 내 인생도 이번 일을 계기로 180도 달라지기를.’
 지호는 저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따스한 온기가 전해오는 밀폐 용기를 끌어안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약 2주 만에 다시 찾은 할배 떡볶이집.
 드르륵.
 지호는 긴장된 얼굴로 가게 문을 열었다. 그런데!
 “어라? 이게 뭐지?”
 떡볶이집 안쪽은 전혀 뜻밖의 풍경을 하고 있었다.
 마치 폭격이라도 맞은 듯한 모습의 폐허.
 그것은 이전까지 지호가 알고 있던 가게의 모습이 아니었다.
 내가 잘못 찾아왔나?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
 혹시나 싶어 가게 밖을 다시 살폈다.
 스산하기까지 한 외진 숲속의 모습은 지난번에 찾아왔을 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그런데 가게 안쪽은 왜 이 모양인 거야. 할아버지는 어디 가셨고.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분명 보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멀쩡했었다.
 낡고 허름하긴 했지만 주인 할아버지도 계셨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떡볶이판도 있었다. 달랑 두 개뿐이긴 했지만 테이블과 의자들도 반들반들 깨끗했고 모든 것이 잘 정돈된 정갈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없다.’
 그랬다. 지금 지호가 들어선 가게는 그냥 부서지고 텅 빈 실내일 뿐이었다. 켜켜이 쌓인 먼지는 수십 년쯤 묵은 느낌마저 들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분명 할아버지는 지호에게 약속했었다.
 만들어 오기만 하면···.
 지호 자신이 직접 떡볶이를 만들어 오기만 하면 비법 레시피를 전수해 주기로 약속했었다.
 “휴우···.”
 지호의 시선이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은 비닐봉지로 향했다.
 난생처음 만들어 본 떡볶이.
 밤잠 아껴 가며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해 만들었는데.
 근데 이게 뭐야. 먹튀도 아니고.
 허탈해진 지호는 먼지 쌓인 테이블 위로 ‘툭’ 하고 떡볶이 봉지를 던져 버렸다.
 ‘똥 밟았네.’
 내 인생이 그렇지 뭐.
 다시 한번 깊은 탄식을 내뱉은 지호는 축 처진 어깨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잠시 후.
 삐걱대는 미닫이문 밖으로 사라졌던 지호가 다시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일이 틀어진 건 틀어진 거고. 애써 만든 떡볶이를 그냥 버리고 가는 건 너무 아깝잖아.’
 암, 음식은 소중한 거니까.
 지호는 살짝 민망한 표정으로 조심조심 비닐봉지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응?”
 뽀얀 먼지 탓에 봉투 자국이 선명한 테이블 위로 흐릿한 무언가가 비쳤다.
 저게 뭐지?
 그는 징그러운 벌레 만지듯 탁자 위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노트?’
 그것은 노트라기보다는 낡은 공책에 가까웠다.
 도대체 이게 언제 적 물건이야?
 빛바랜 노트 표지에는 88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헐, 30년도 넘은 노트라니. 골동품이 따로 없었다.
 봉투를 내려놓은 지호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호돌이 노트의 첫 장을 넘겼다. 그 순간, 겉표지와 첫 페이지 사이에 끼어 있던 검은 볼펜이 굴러 나오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153마크가 선명한 것이 노트만큼이나 오래된 물건 같았다.
 다시 노트 쪽으로 시선을 돌린 지호.
 삐뚤빼뚤한 글씨가 가득한 첫 페이지가 눈에 들어왔다.
 왠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지호는 ‘주르륵’ 하고 나머지 페이지도 넘겨 보았다. 하지만 첫 페이지 말고는 텅 비어 있었다. 대신!
 그 첫 페이지에는 지호가 그토록 알고 싶어 하던 할아버지의 떡볶이 레시피로 추정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오케이, 바로 이거였구나!’
 지호는 선채로 노트 첫 부분을 꼼꼼히 정독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이건 내가 만든 거랑 별 차이가 없잖아?’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노트에 적힌 레시피에는 고추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신 상당량의 고춧가루를 사용하도록 요구하고 있었다.
 ‘떡볶이에 고추장을 쓰지 말라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
 금시초문이었다. 하지만 레시피 하단에는 그의 생각이 틀렸음을 증명하듯 별표까지 체크된 주의 사항이 존재했으니.
 
 *** 통상적으로 가정식 떡볶이에 사용되는 고추장은 떡볶이 맛을 텁텁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그런가? 잘은 모르겠지만 낡은 노트가 주는 알 수 없는 권위(?) 탓에 별표 주의 사항이 왠지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더구나 할아버지의 떡볶이는 이전에도 몇 차례나 직접 먹어 봤으니 맛은 증명된 상황.
 어쩌면 고추장을 배제한 이 레시피만의 독특한 방식이 사라진 떡볶이 가게의 핵심 포인트일지도 모르지.
 ‘좋아. 대충은 알겠는데··· 이게 단가?’
 살짝 애매한 것이 2퍼센트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레시피 하단으로 어눌한 필체의 글씨들이 저절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가 직접 쓰듯 ‘슥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으아악!”
 깜짝 놀란 지호는 노트를 집어 던지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귀, 귀신?”
 심장이 쿵쾅거리며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 사실 다리만 안 풀렸다면 그길로 이 폐가 같은 가게를 뛰쳐나갔을지도 모른다.
 “헉··· 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근 1분여를 멍하니 앉아 있던 지호.
 간신히 정신을 수습한 그는 나름 용기를 짜내어 다시 노트를 집어 들었다.
 ‘아, 참. 떡볶이도 챙겨야지.’
 그리고는 후다닥 그곳을 도망쳐 나와 인근 버스 정류장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
 
 정류장 벤치에 걸터앉은 지호는 말아 쥐고 있던 노트를 다시 펼쳤다.
 ‘과연 이 노트가 내 인생의 해답이 되어 줄 수 있을까?’
 확신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제 그가 기댈 수 있는 곳이라곤 이 한 권의 노트뿐이란 사실이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지호는 다시 한번 귀신 들린(?) 노트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응?’
 그런데 첫 페이지 하단에는 아까까지 없었던 새로운 내용이 한 줄 추가되어 있었다.
 [요구 기준치 충족도를 50% 이상 충족 시, 추가 레시피 공개]
 ‘추가··· 레시피?’
 새로운 내용을 읽자마자 마치 지우개로 지우듯 마지막 줄이 스르르 사라졌다.
 “끄윽···.”
 빌어먹을 귀신 들린 노트.
 입에서 저절로 신음이 새 나왔지만 이번만큼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간신히 참았다.
 ‘침착하자. 그리고 생각해 보자.’
 저 요구 기준치란 말.
 ‘어쩌면 이 노트가 뭔가를 요구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그 요구 사항을 수행함에 있어 50%, 즉 절반 정도의 완성도를 만족시켰을 때 추가 레시피가 공개된다는 말일 거야.’
 밑도 끝도 없는 추측이었지만 그것 말고는 당장 생각나는 게 없었다.
 좋아, 그건 그렇다 치고.
 그렇다면 저 정체불명의 요구 기준치란 과연 뭘까.
 사실 호돌이 노트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레시피 내용은 지호가 만든 떡볶이와 거의 흡사했다. 고추장 대신 고춧가루를 쓰라는 정보만 빼면 말이다.
 ‘그 말은 내가 만들어 온 떡볶이 정도면 기존 레시피와 비교해서 50%는 충분히 때려 맞췄다는 소린데.’
 도대체 뭘 더 충족시키란 거지? 설마 이 노트에게 내가 만든 떡볶이를 직접 확인시켜 줘야 한다는 건가?
 상황이 하도 요상하게 돌아가다 보니 별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도 당장에 생각나는 건 그것밖에 없는걸.’
 별다른 방법이 없다면 그렇게라도 해 보는 수밖에.
 “흠, 흠!”
 헛기침과 함께 고개를 쭉 뺀 지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지?
 하긴 이런 외진 곳에 사람이 올 리가 없지.
 어차피 버스가 도착할 때까지는 할 것도 없고.
 그, 그럼···.
 지호는 미친 척하고 주섬주섬 비닐봉지를 풀었다. 그리고 노트 옆에 떡볶이가 담긴 락앤락 밀폐 용기를 내려놓은 후 뚜껑을 열었다.
 “보, 보이냐? 어때, 이 정도면 50%는 충분하지?”
 지호는 미친놈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슬그머니 밀폐 용기를 노트 쪽으로 들이밀었다.
 애매한 침묵.
 지나가는 바람 소리마저 사람을 쑥스럽게 한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결국 달라진 건 없었다.
 사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결과였다. 슥삭거리며 새로운 뭔가가 또 나타난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겠지.
 지호는 누가 볼 새라 황급히 그릇 뚜껑을 덮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50% 어쩌고 하는 내용이 사라진 자리에 정말로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영업용 떡볶이(Lv 1)’의 요구 기준치를 초과달성했습니다.]
 [추가 레시피 정보 공개]
 [설탕의 배합 비율을 조정하라. 종류별 비율은 아래 도표 참조.]
 와우!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팁 하나가 추가로 공개되었다.
 ‘떡볶이에 사용하는 설탕이 백설탕 한 종류가 아니었다니.’
 어쨌든 이 노트··· 진짜였어. 제대로 물건이다!
 역시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구나.
 인적 없는 국도변의 숨은 떡볶이집. 수상한 주인 할아버지. 그리고 단 며칠 만에 수십 년은 비어 있었던 것처럼 변해버린 가게. 마지막으로 귀신 들린 호돌이 노트까지.
 따지고 보면 뭐하나 정상적인 게 없었다.
 하지만 레시피는 말하고 있었다.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그래, 어쩌면 이 노트··· 내 인생에 있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찾아온 황금 동아줄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
 부우웅.
 때마침 도착한 시외버스가 정류장 앞에 도착했다.
 황급히 노트를 갈무리한 지호는 후다닥 버스 안으로 튀어 들어갔다.
 “아 참, 기사님. 잠시만요.”
 막 단말기에 카드를 갖다 대던 지호가 버스 기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시 내렸다.
 ‘또 까먹을 뻔했다.’
 정류장 벤치에 덩그러니 올려져 있던 떡볶이 용기를 집어 든 지호가 피식 웃었다.
 음식은 함부로 버리는 게 아니니까.
 재촉하는 눈빛의 버스 기사와 눈이 마주친 그는 감사의 목례를 한 후, 다시 버스에 올랐다.
 ‘좋아, 다시 한번 제대로 시작해 보는 거다!’
 
 
 # 007. 시스템의 이해
 
 일단 지호가 개발했던 떡볶이 레시피는 기본 중의 기본 레시피였다.
 애초에 요리와는 별다른 인연이 없었던 지호.
 사실 관심 자체가 없었다는 표현이 더 옳겠다.
 보통의 남자들이 그러하듯 먹는 건 좋아해도 만드는 건 귀찮았으니까.
 때문에 지금까지는 어머니가 부쳐 주신 밑반찬과 레토르트 식품, 인스턴트 음식 따위로 끼니를 때워 왔다. 그마저도 귀찮을 때는 배달 음식을 이용하기도 했다.
 그 결과, 아무리 떡볶이란 요리가 간단한 조리법으로 완성이 가능한 음식이라 해도 지호가 무작정 시도하기에는 나름 진입 장벽이 높은 편이었다.
 더구나 지호가 만들려는 떡볶이는 평범한 가정식 떡볶이가 아니었다. 무려 ‘영업용 떡볶이’였다. 길거리표 특유의 맛과 느낌을 살리려면 그만의 노하우가 필요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욕심을 부려선 안 된다. 하나씩 천천히. 배운다는 자세로. 일단은 나 스스로의 한계부터 명확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어.’
 그렇게 결론을 내린 지호는 기초 지식 연마와 기본기 연습을 최우선적인 목표로 삼았다.
 그를 위한 도우미로는 인터넷 웹사이트,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음식 좀 한다 하는 파워 블로거의 글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며칠 동안 검색에 검색을 거듭한 지호는 몇 가지의 주요 포인트와 공통된 재료에 관한 정보를 습득했다.
 지호가 추려 낸 기초 재료는 대략 여덟 가지 정도.
 그 여덟 재료는 다시 주재료와 양념 재료로 나뉘는데 우선 주재료로는 떡과 어묵, 대파 정도가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몇몇 레시피에서 삶은 계란 고명이나 라면 사리가 추가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단 그런 류의 곁다리는 제외하기로 했다. 어차피 할배 떡볶이에는 그런 잡스러운 재료 자체가 안 쓰이기도 했고.
 다음으로 양념에 사용되는 재료로는 고추장과 약간의 고춧가루, 그리고 올리고당, 설탕, 간장 등이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었다.
 이따금 육수 베이스를 쓰는 고급 떡볶이에서 멸치나 디포리, 다시마 등이 추가되기도 했고, 정성 가득한 엄마표 떢볶이의 경우 양배추를 비롯한 당근, 양파 등의 채소가 다량 사용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방식은 단가나 맛에 있어 영업용과는 거리가 멀었다.
 반면 양념의 맛을 강화시켜 줄 몇몇 재료는 써먹고 싶은 욕구가 들기도 했다.
 예를 들면 마늘이나 카레, 액젓, 혹은 라면 수프라든가 하는 것들.
 ‘일단은 가장 스탠더드 한 재료로 시작해 보자.’
 [초보자가 재료로 잔재주를 부리는 것부터 배우면 실력 향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
 언젠가 만두공장 권 사장으로부터 들었던 얘기가 그의 결정에 확신을 더해주었다.
 선택과 집중.
 고민 끝에 추려낸 여덟 가지 재료가 바로 떡, 어묵, 대파, 고추장, 고춧가루, 설탕, 간장, 올리고당 혹은 물엿이었다.
 여기서 하나 헷갈리는 부분은 올리고당을 쓸 것인가 물엿을 쓸 것인가의 선택문제였다.
 사실 건강에는 올리고당이 좀 더 좋지만 영업용 떡볶이같이 장시간 가열이 필요한 음식에는 물엿을 쓰는 게 더 낫다.
 그러나 아직 두 재료의 차이점에 대해 잘 모르는 지호는 다수의 블로그에서 권장하는 올리고당을 선택했다.
 ‘이 재료들로 우선 기본적인 떡볶이의 개념부터 잡아 나가는 거야.’
 워낙에 기본적인 식재료들이라 지호의 집에도 대부분 구비되어 있었다.
 지난 설에 어머니가 보내 주신 떡국용 떡이 재료비 절감에 큰 몫을 해 주었고 고추장이나 간장, 설탕류의 양념 재료들도 쓰다 남은 것들이 좀 있었다.
 2주간 주머니에서 나간 돈은 대파와 어묵, 올리고당을 산 정도뿐이었다.
 그렇게 완성한 지호 표 떡볶이의 최종본이 바로 오늘, 할배 떡볶이집에 들고 갔던 비닐봉지 속 내용물이었다.
 ‘이제 호돌이 노트의 내용을 다시 확인해 볼까?’
 “흠···.”
 처음 봤을 땐 하도 정신이 없어서 대충 넘어갔는데 역시 다시 봐도 지호의 떡볶이와 무척 흡사한 내용이었다.
 차이점이라면 고추장이 빠졌다는 정도? 아, 그리고 설탕의 배합 비율이 추가된 정도뿐이었다.
 노트 상에 적힌 설탕의 비율은 1 : 0.7이었다.
 흰 설탕 1에 갈색설탕 0.7.
 이유가 뭘까?
 모르겠다. 그 차이는 직접 만들어 먹어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걸로는 역시 뭔가 좀 부족하다.’
 과연 노트 상에 적혀있는 레시피만으로 할배 떡볶이의 맛을 재현할 수 있을까.
 그 오묘하고 진한 육즙의 맛과 알싸하고 은은한 향신료의 조화를 고추장마저 빠진 일곱 가지의 재료로 만들어내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그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 혹시···!’
 지호는 문득 [영업용 떡볶이(Lv 1)의 요구 기준치]란 내용의 사라진 메시지에 주목했다. 저 말은 현재 노트 상에 기록되어 있는 떡볶이의 수준이 1레벨이란 뜻일 것이다.
 내용만 따지면 지난 2주간 지호가 개발했던 레시피에서 약간의 변형만 가해진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가장 초보적인 단계의 영업용 떡볶이?’
 사라진 메시지 중에는 [추가 레시피 정보 공개]란 말도 있었다. 뜻 그대로 지호가 요구 기준치를 초과 달성함으로써 추가로 설탕 배합 비율이 공개되었다.
 그 말인즉, 현재까지 공개된 레시피를 근간으로 지호의 레시피를 한 단계 끌어올리면 좀 더 발전된 레시피가 공개될 수도 있다는 가정이 성립된다.
 ‘재미있군. 그냥은 안 가르쳐 주시겠다?’
 어쨌든 예측 가능한 호돌이 노트의 시스템은 그랬다. 애초에 할아버지가 지호 자신의 떡볶이를 만들어 오라고 하셨던 그 미션과 매우 흡사한 방식이었다.
 게임으로 따지면 맨 처음 주어졌던 할아버지의 요구 사항은 일종의 튜토리얼이란 거겠지. 노트를 획득한 지금부터는 본게임이 시작된 거겠고.
 ‘좋아, 일단 그 정도로 정리하고 시작해 보자.’
 고작 1레벨이지만 분명, 영업용이란 타이틀을 단 떡볶이니만큼 이것만 확실히 연마해도 당장 판매에는 지장이 없을 터.
 이후부터는 차근차근 그것을 발전시켜 나가면서 떡볶이의 수준을 한 단계씩 끌어올리면 되겠지.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떡볶이와 궁합을 맞춰 줄 어묵 국물이나 튀김 등의 부메뉴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예상대로라면 노트의 나머지 뒷공간에 그와 관련된 추가 레시피가 생성될지도 모르니까.
 혹여 그게 아니라 해도 장사를 시작하기 전에 어묵 국물 내는 법 정도는 따로 배워서 추가할 수도 있다.
 ‘그럼 재료부터 사러 나가 볼까.’
 지호는 간단한 구매 목록부터 작성했다.
 지금까지 사용했던 떡국 떡은 어제부로 바닥난 상태.
 기타 어묵이나 대파, 올리고당, 고춧가루 등도 거의 떨어져서 추가로 구매해야 했다.
 리스트 작성을 마친 지호는 집에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동네 마트를 찾았다.
 그런데 초장부터 그의 발목을 잡는 문제 한 가지가 발생했으니···.
 그건 바로 가장 중요한 재료인 떡의 선택 문제였다.
 과연 쌀떡을 써야 할 것인가, 밀떡을 쓸 것인가.
 밤새도록 찾아본 요리 블로그에서는 쌀떡의 사용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할아버지의 떡볶이는 왠지 밀떡이었던 것 같은데.’
 확실한 건 아니었다. 길이나 두께만 보면 분명 밀떡이 맞는데 쫄깃한 식감에 있어서는 결코 쌀떡에 밀리지 않는 느낌이었으니까.
 ‘정확한 건 나도 모르니까 일단 둘 다 사서 만들어 봐야겠다.’
 음? 그런데 떡 매대에는 쌀떡밖에 안 보였다. 그나마도 떡볶이 떡은 한 종류뿐이고 나머지는 다 떡국용 떡이었다. 도대체 밀떡은 어디 있는 거야?
 “저기요.”
 지호는 때마침 곁에서 물건을 정리 중이던 점원에게 말을 걸었다.
 “떡은 여기 있는 게 단가요?”
 “네.”
 “혹시 밀떡은 그럼···.”
 “밀떡이요? 그건 찾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안 갖다 놓는 걸로 아는데요.”
 “실례지만 밀떡은 그럼 어디 가면 구할 수 있는지···.”
 “글쎄요. 대형 식자재 마트 같은 곳에서는 팔는지도 모르죠.”
 식자재 마트라···.
 ‘아!’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난다.
 만두공장 권 사장이 가끔 지호를 시켜 심부름을 보내곤 하던 곳.
 주로 만두와 관련된 재료를 사러 가던 곳이 바로 식자재 마트였다.
 만두 속 재료는 항상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 상식이었지만 가끔 부족할 때가 있었다.
 개중 간장이나 소고기 다시다 같은 재료가 떨어졌을 때, 권 사장은 인근 식자재 마트에 가서 필요한 물건을 사 오도록 시키는 경우가 있었다.
 13리터들이 간장 말통이나 ‘소고기 맛나’라 불리는 2킬로짜리 다용도 다시다는 일반 가정용과는 그 양에서 ‘급’이 달랐다. 가격적인 면에서도 동네 마트보다 훨씬 저렴했다. 또한 대부분의 경우, 대용량으로 취급하다 보니 이마트나 홈플러스 같은 곳에서 판매하는 PB 제품(자체 브랜드 상품)보다도 싸다고 들었다.
 ‘거기가 아마 집에서 30분 정도 되는 거리였지?’
 만두공장 가는 길, 2차선 다리와 주유소가 만나는 도로변쯤일 것이다.
 그곳에 가면 밀떡은 물론, 기타 부재료도 훨씬 저렴한 값에 살 수 있을지 모른다. 단, 집까지 들고 가려면 상당한 노동력이 필요하겠지만.
 ‘아껴야 잘 살지.’
 이왕 이렇게 된 마당에 지호는 동네 마트는 최대한 배제하고 거리는 좀 멀지만 싸고 다양한 물건이 많은 식자재 마트를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
 
 그렇게 한참을 걸어 도착한 대형 식자재 마트.
 2층짜리 건물을 통으로 쓰는 이곳은 입구부터 수많은 식자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느낌이 좋은데?’
 왠지 앞으로는 여기 단골이 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 008. 단골 마트가 생기다
 
 점포 안쪽은 더욱 버라이어티했다.
 ‘여기가 이렇게나 크고 복잡했었나?’
 청과 코너와 정육 코너만 합쳐도 웬만한 동네 마트 규모에 버금갈 듯싶었다. 줄지어 선 각종 매대는 그 끝이 안 보일 정도였다.
 눈 돌리는 곳마다 2, 30퍼센트씩 할인하는 품목이 널렸고 같은 종류의 식자재도 보통 대여섯 가지씩, 많게는 열 가지 이상 구비되어 있었다.
 권 사장의 심부름으로 왔을 때는 미처 몰랐던 신세계.
 듣도 보도 못한 온갖 식재료의 천국은 없던 구매 욕구마저 저절로 생기게 만들었다.
 ‘워워, 진정하자. 진정.’
 괜히 싸고 좋아 보인다고 이것저것 집어 들다 보면 10만 원쯤 순삭되는 건 일도 아니다.
 아직 금전적인 여유를 부리기에는 턱도 없는 재정 상황.
 오직 절약만이 살길이다.
 그렇다고 떡볶이 연습에 방해가 될 정도로 재료를 아끼는 것도 미련한 짓이긴 마찬가지.
 최소한의 필요 품목만 추려서 구매하되 여타 저가 품목이나 간식거리에는 눈길도 줘서는 안 된다.
 ‘직진, 오직 직진.’
 십여 개의 매대를 정면 돌파한 지호는 가장 안쪽에 있는 떡볶이용 떡 매대 앞에 섰다.
 사람 키만 한 냉장 매대 위에는 수십 봉지의 떡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개중 절반 정도가 쌀떡이고 나머지는 밀떡이었다.
 ‘오케이, 제대로 찾아왔어.’
 그런데···.
 ‘용량이 장난 아닌데?’
 제일 작은 떡 한 봉이 무려 3.8킬로였다.
 저 많은 떡을 혼자 다 먹으려면 매 끼니마다 떡볶이로 먹어도 일주일은 걸리겠다.
 ‘벌써 2주 동안이나 밥 대신 떡볶이만 먹었는데.’
 질리도록 많은 양의 떡 봉지를 보니 저절로 주춤거려진다.
 ‘참자. 어차피 떡볶이 좋아하잖아. 이럴 때 실컷 먹어 두는 거지 뭐.’
 중요한 건 가격인데···.
 지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떡 봉지 아래에 붙은 가격표를 확인했다.
 “4,760원?”
 헐··· 진짜 싸다!
 못해도 한 봉지에 2, 30인분은 너끈한 양이 고작 오천 원도 안 된다고?
 이제 보니 떡볶이 장사, 진짜 할 만하네!
 ‘맛만 좋고 입소문만 잘 타면 원가 대비 무지하게 남겨 먹을 수 있겠는데?’
 물론 주재료인 떡이 싸다고 해서 양념 재룟값까지 우습게 보면 안 되겠지만 이렇게나 저렴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맘 같아서는 서너 봉지쯤 사 들고 가고 싶지만···.
 나머지 재료까지 다 사고 나면 너무 무거울 테니 일단 밀떡 한 봉지와 쌀떡 한 봉지만 집어 들었다.
 ‘다음은 어묵.’
 예상대로 어묵 역시 매우 저렴했다.
 ‘옛날 어묵’이란 이름의 듣도 보도 못한 브랜드의 사각 어묵 1킬로가 3천 원이 채 안 됐다.
 ‘일반 마트에서 살 때는 500그램짜리가 이것보다 비쌌는데.’
 이런 식으로 원가를 다운시키다 보면 떡볶이 한 접시에 2천 원씩 팔아도 반 이상은 남을 것 같았다.
 지호는 대파 한 단과 올리고당, 갈색설탕까지 챙긴 다음 마지막 구매 리스트를 채우기 위해 건조 양념 코너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살 물품은 바로 고춧가루.
 이제 고추장은 필요 없고 백설탕과 간장은 아직 남았으니 고춧가루만 구매하면 일단 기본 재료는 완성이다.
 ‘고춧가루도 큰 걸로 한 봉 사서 가면 충분···응?’
 후추와 파슬리 가루, 카레 가루 등이 진열된 코너로 막 들어서던 지호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순간 멈칫했다.
 ‘뭔 놈의 고춧가루 종류가 이렇게 많아?’
 김장 김치 만들 때나 쓰는 게 고춧가루다··· 정도로만 알고 있던 지호는 3단으로 10미터쯤 되는 진열대를 가득 채운 고춧가루를 보고 입이 딱 벌어졌다.
 일단 굵기 별로 구분된 것만 3종류였다.
 굵은 가루, 보통 가루, 가는 가루.
 거기서 또 맵기 별로 분화한 것이 4종류인데 순한 맛, 보통 맛, 매운맛, 아주 매운 맛으로 고춧가루 한 종류만 무려 12가지 품목이 존재했다. 거기에 회사별, 생산지별로 구분된 종류까지 합치면···.
 ‘으, 머리 아프다.’
 아직 전문적인 식자재 구별에는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지호는 그중에 뭘 집어 들어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질 않았다.
 느닷없고 당황스러운 고민의 시간.
 괜히 없던 선택 장애가 도질까 겁이 날 지경이다.
 그렇다고 비싼 고춧가루를 종류별로 사기에는 예산 문제가 걸리고.
 결국은 선택과 집중이 답이었다.
 지호는 가만히 눈을 감고 할배 떡볶이의 맛과 비주얼을 떠올렸다.
 ‘떡볶이에서 고춧가루의 입자는 느껴지지 않았어. 그 말은 김치 만들 때 쓰는 굵은 고춧가루는 아니었다는 뜻이겠지.’
 지호는 보통과 가는 가루 쪽을 유심히 관찰했다. 하지만 아무리 들여다봐도 도통 구별이 잘 안 됐다.
 ‘그래도 골라야 해. 킬로에 2만 원 가까이 하는 비싼 재료잖아.’
 괜히 엄한 놈으로 잘못 골랐다가는 생돈 2만 원만 날리게 된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사진이라도 찍어 올걸.’
 지호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가는 고춧가루를 찍었다.
 사실 무작정 찍기 신공을 발휘한 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할배 떡볶이에서 고춧가루의 입자는 본 기억이 없었다. 그렇다면 가는 고춧가루 쪽일 확률이 높다.
 다음 선택 사항은 맵기의 정도.
 일단 매운맛과 아주 매운 맛은 패스다.
 ‘할배 떡볶이가 칼칼하긴 했어도 심하게 맵지는 않았으니까.’
 그럼 남은 선택지는 보통과 순한 맛.
 여기서부터는 좀 헷갈렸다.
 오며 가며 주워들은 얘기에 의하면 잘나가는 음식점들의 경우, 몇 가지 종류의 고춧가루를 섞어서 사용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를 잘 조합해서 적당한 맵기를 찾아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것이다.
 지호는 큰맘 먹고 순한 맛과 보통 맛, 두 가지 모두 선택했다.
 이제 남은 건 대망의 계산대 점원과의 면담 시간.
 부디 예산 초과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만을 빌어 본다.
 지호는 ‘찍찍’ 소리를 내며 읽혀 나가는 바코드와 쌓여 가는 결제 금액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1만, 2만, 3만···.
 띡.
 합계 : 47,180원
 휴, 선방했다.
 최대 6, 7만 원까지 잡았던 예산이 생각보다 많이 절약되었다. 역시 떡과 어묵에서 세이브 한 액수가 컸다.
 계산원은 잔돈, 영수증과 함께 정체불명의 명함판 용지 넉 장을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이달 말까지 저희 마트에서 추첨 이벤트 행사를 하거든요. 만 원당 한 장씩 드리는 이 응모권에 연락처와 이름을 기입해서 출입구 옆에 보이는 응모함에 넣어 주세요. 다음 달 15일에 추첨해서 당첨되신 고객님들께 풍성한 경품을 나눠 드립니다.”
 “그래요?”
 그러고 보니 웬 항아리만 한 응모함이 벌써 절반 가까이 응모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옆으로는 자동차를 비롯한 온갖 경품들의 이미지가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었다.
 ‘한번 해 봐?’
 되면 좋은 거고 아니라도 손해 볼 건 없겠지.
 지호는 점원에게 볼펜을 빌려서 응모권을 작성하고 항아리 응모함에 네 장 모두 투척했다.
 ‘신이시여, 더도 말고 10만 원짜리 상품권 딱 한 장만 당첨되게 해 주세요.’
 
 ***
 
 집으로 돌아온 지호는 본격적인 떡볶이 만들기에 돌입했다.
 ‘우선 떡부터 준비하고.’
 지호는 밀 떡볶이를 우선순위로 잡았다. 쌀떡을 이용한 방식은 일종의 비교 분석을 위한 테스트용으로 미뤄 두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할아버지의 떡볶이는 밀떡이 확실하니까.’
 게다가 쌀떡볶이라면 지난 2주간 하도 많이 먹어 봐서 밀떡이 주는 효과를 우선적으로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밀떡은 공장표답게 일정한 길이로 다닥다닥 붙은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이걸 통째로 사용하면 난리 나겠지?’
 그랬다가는 시루떡 내지는 떡케이크 같은 모습의 결과물이 나올 것이다.
 지호는 한 가닥, 한 가닥 밀떡을 떼어 내어 채반에 담은 후, 흐르는 물에 씻어 주었다.
 몇몇 블로그에서는 장시간 떡을 불린 후에 사용하라고도 했지만 그건 가정용일 경우에 한해서였다. 제법 긴 시간 동안의 조리가 필요한 영업용은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살짝 헹궈 주기만 해도 충분히 쫄깃한 식감을 얻을 수 있다.
 사실 밀떡을 헹구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떡 표면에 붙은 이물질의 제거를 위해서다.
 이물질의 정체는 일종의 감미료인데 밀떡의 보존 기간을 늘려 주는 시큼한 감미료는 반드시 씻어 낸 후에 사용하는 것이 좋다.
 ‘다음은 부재료 썰기.’
 사각 어묵은 먹기 좋게 4등분 한 후, 각각의 조각을 다시 이등분했다. 이때는 사각보다 삼각이 보기에 더 좋다.
 그다음은 대파 썰기.
 탁탁탁탁···.
 지호의 칼질 솜씨는 요리 실력에 비해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지난 3년 동안 제일 많이 는 게 운전 실력이랑 칼질이거든.’
 만두공장에서는 이틀에 한 번꼴로 만두 속 재료를 다듬고 준비한다.
 각종 고기나 돈 지방, 무말랭이(권 사장의 비법 중 하나)는 특별히 건들 필요가 없지만 그 외, 엄청난 양이 소모되는 대파와 부추 등은 꼭 수작업으로 썰었다.
 지호도 참여하는 이 작업은 보통 1인당 스무 단에서 스물다섯 단의 부추를 써는데 만두라는 음식이 가진 특성상 엄청 잘게 썰어야 했다. 때문에 칼질 속도가 느릴 경우 정시 퇴근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때 키운 칼 솜씨가 이렇게 사용될 줄은 몰랐네.’
 눈 감고도 썰 수 있는 실력을 자랑하는 지호답게 대파 한 단이 채 1분도 되지 않아 모조리 정리되었다.
 “자, 이제 양념장만 만들면 조리 준비는 끝인가.”
 사실 떡볶이 만들기는 양념 배합이 하이라이트였다.
 아무리 떡이 좋아도, 부재료가 풍성해도 양념이 수준 이하면 떡볶이도 수준 이하가 된다.
 그야말로 맛의 핵심이었다.
 ‘영업용 떡볶이 레벨 원(One). 드디어 새로운 양념이 탄생하는 순간이구나.’
 
 <『맛으로 승부합니다!』 1-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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