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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드 엠페러 1권

2019.08.16 조회 214 추천 0


 프롤로그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은색의 갑옷을 입은 늠름한 기사 한 명이 내 앞을 지나간다.
 그걸 보고 감동한 난 외쳤다.
 “나, 나 기사가 될 거야!”
 하지만 그런 내 외침에 나의 아버지라는 분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카사노바를 해 보지 않겠니?”
 “카사노바?”
 “기사는 질이 떨어지는 직업이란다. 그에 비해 카사노바라는 건 엄청나게 멋진 직업이지!”
 “아빠, 아빠! 카사노바가 그렇게 멋진 거야?”
 “그럼!”
 “우아!”
 “기사보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멋진 직업이 카사노바란다.”
 “기, 기사보다?”
 “그래. 여자들을 보호하는 기사도 정신은 우리 카사노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우아!”
 “물론 카사노바라는 이름을 달고 여자 후리는, 아니 아름다운 생각을 가지지 못한 존재들도 있지만, 그런 존재들은 진정한 카사노바가 아니란다.”
 “······?”
 “진정한 카사노바란 모든 여자들을 지킬 줄 아는 남자란다. 그리고 많은 여자를 사랑하더라도 한 번 사랑할 때는 그 여자에게만 모든 걸 줄 줄 아는 남자지.”
 “······!”
 “그러기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 강해져야 하는 게 필수겠지? 무력이든 마음이든 말이야.”
 내가 네 살 때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다.
 그때 내가 내린 결론, 카사노바는 기사하고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되게 멋진 사람이다.
 
 누군가가 내게 물었다.
 “꼬마야, 네 꿈이 뭐니?”
 20대 초반의 여자였다.
 나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는 그 여자에게 난 당당하게 말했다.
 “원래 제 꿈은 기사였는데요, 카사노바가 더 멋져서 카사노바 할 거예요!”
 “······.”
 그 말을 듣고 여자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왜 그녀가 그런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15년 뒤 알았다.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15년 후.
 “으아악!”
 난 카사노바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절규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뼈가 부서지는 훈련과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것을 쉴 새 없이 배웠는데, 카사노바는, 카사노바는······!
 “단순히 여자 많이 사귀는 변태잖아!”
 이럴 수가, 이럴 수가!
 난 낚인 거다. 그것도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
 “아, 제로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내가 사는 곳에서 약간 떨어진 마을에 살고 있는 에린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신체지수 31, 25, 30 좋다. 상위급 몸매······ 아, 이게 아니지!
 난 반사적으로 에린의 몸매를 눈으로 재 버리는 행위를 또 하고 말았다. 그렇게 하지 말자고 다짐했으면서!
 “말하기 곤란한 거야?”
 “아니.”
 “······?”
 “곤란은 아니고 부끄러워서. 사실······ 네 생각을 하고 있었어.”
 “······.”
 발그레.
 작업용 멘트에 에린의 얼굴이 붉어졌다.
 난 겉으로는 환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속으로는 울부짖고 싶었다.
 안 한다고 했잖아!
 이제는 이런 저질적인 행동을 하지 않기로 말이다!
 하지만 왜 여자들만 보면 나도 모르게 이렇게 되어 버리는 거지? 응?!
 어렸을 때부터 너무나도 깊게 세뇌 교육을 받은 것이 이유라고 해야 할까?
 수만 번 다짐해 봐도 이젠 본능적으로 행동해 버리고 만다.
 “제로스, 너 왠지 바람둥이 같아.”
 “바람둥이라니? 난 너밖에 모르는데?”
 “그래도······. 제로스는 얼굴도 잘생겼고, 몸도 좋고, 키도 크고, 성격까지······ 너무 완벽하잖아. 그러니까 다른 여자가 있을 거 같아.”
 그 말을 하면서 에린의 얼굴이 슬픔으로 젖었다.
 난 그 말에 속으로 울부짖었다.
 지금이라도 당당하게 나란 놈에 대한 정체를 밝히자.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고!
 이런 놈이니 어서 도망가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놈의 몸은 제멋대로 반응하고 있다.
 “나는 오히려 네가 너무 완벽해서 걱정인데······.”
 “······.”
 “사랑해. 진심이야.”
 
 나란 인간에게 혐오감이 느껴진다. 아아악!
 난 인간도 아니야! 짐승도 아니야! 찌꺼기야!
 알고 있다. 이런 행동 자체가 얼마나 그녀들에게 상처를 줄지 말이다. 물론 그녀들이 다 사랑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그녀들을 모두 지켜 주고 싶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걸 말도 안 되는 개소리라고 한다.
 그리고 나도 동의한다.
 모든 여자를 사랑한다니, 그게 말이 되는 거냐?! 물론 순수하게 여자들을 지킬 줄 아는 그런 남자라면 멋지다.
 하지만 난 불순한 마음이 가득하다.
 “제길, 무슨 방법을 찾아야 돼.”
 이렇게 가다가는 ‘레전드 오브 카사노바’가 되겠다.
 어떻게 해서든 순수한 남자로 돌아가고 싶지만, 15년이라는 세월이 그렇게 쉽게 돌려지지는 않는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길들여져서 말이다.
 “너, 그거 들었어?”
 “뭐?”
 “전설이라고 불렸던 카사노바 케라인이라는 남자가 한 여자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선언했대.”
 “에? 정말?”
 “정말이라니까!”
 “말도 안 돼.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전설이라고 불렸던 카사노바가 한 여자만 좋아하다니!”
 “하지만 사실이라고 소문났어. 진짜 그 여자한테 모든 걸 바치고 있대. 다른 여자는 거들떠도 안 본대.”
 “에?”
 그때 지나가던 두 여자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된 난 깨달았다.
 지금 내가 할 일을, 내가 찌꺼기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그 방법은 바로······!
 “케라인이라는 남자를 만나는 거다!”
 가서 그의 비법을 배우는 거다.
 그러려면?
 “저기, 아름다운 아가씨들, 시간 좀 있으세요?”
 또 자기 멋대로 들이대시네.
 
 
 
 
 
 1장 출발
 
 
 
 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한눈에도 무너질 것 같은 10평 남짓한 집 한 채가 내 눈에 들어왔다.
 저렇게 곧 무너질 듯 보여도 내가 10년 이상 살았던 집이다.
 그러니 정이 든 것도 사실이다.
 난 등에 멘 보따리를 다시 한 번 단단히 추스르면서 그 집을 향해 소리쳤다.
 “난 진정한 남자로 재탄생된 뒤 멋진 기사가 되어 나타나겠어!”
 그래, 난 진정한 남자가 되어 올 것이다. 카사노바라는 이 짐승 같은 본능을 버리고 순수한 남자가 돼서 나타나겠어! 그러니 그때까지 잘 있으렴.
 난 그렇게 다짐한 채 비장하게 몸을 돌렸다.
 그래, 떠나자. 순수한 남자가 되기 위해서!
 
 얼음같이 차가운 표정의 아름다운 한 소녀가 이미 주인이 사라진 집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늦었다.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만날 수 있었을 텐데······.
 가히 천사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와 키, 모든 걸 갖춘 에르니의 차가운 얼굴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남자는 찾아야 하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이다.
 
 며칠 후, 내가 살던 마을과 제일 가까우면서도 중소 마을이라고 하기엔 제법 규모가 큰 엔데이크라에 도착했다.
 이 마을은 규모가 있어서 그런지 아무나 들여보내 주지 않는다.
 상당히 귀찮은 절차를 밟아야 하고, 제대로 절차를 밟는다 해도 모두 다 들여보내 주는 것도 아니다.
 이래서 마을이 크면 클수록 나 같은 평민한테는 그리 좋을 게 없다.
 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등 뒤에 매달려 있는 줄을 한번 매만졌다.
 그러고는 곧바로 그 줄에 갈고리를 건 뒤 한적해 보이는 성벽을 찾아 배회했다.
 그러던 중 알맞은 지점 발견!
 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성벽에 갈고리를 걸고 오르기 시작했다.
 슈우욱.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라는 게 단번에 드러났다.
 하지만 그렇게 자주는(?) 안 했으니 오해는 하지 말도록.
 그저 그 구라쟁이 아버지라는 분이 카사노바의 필수 기술이라고 해서 배운 죄밖에 없다.
 이제야 새삼스럽게 드는 의문이지만, 성벽을 몰래 타는 것과 카사노바의 연관성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것이 궁금하구나.
 그렇게 의문에 가득 차 있는 상황에서도 난 잘도 올라간다.
 사실 성벽을 타는 일은 상당히 고난이도의 작업이다.
 아무나 갈고리로 걸고 성벽 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렇게 난 번개 같은 속도로 10초 만에 성벽 위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곳을 지키고 있는 한 친숙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도 고생이 많군, 제틴.”
 난 선 자세 그대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그 남자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그러자 남자는 번쩍 고개를 치켜들더니 소리쳤다.
 “죄, 죄송합니다. 어, 어제 친구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
 “······.”
 하지만 남자와 나의 눈이 마주쳤고 우리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제틴의 입이 열렸다.
 “또 너냐?”
 “넌 또 그 변명이냐?”
 “······.”
 “······.”
 그 뒤 우리는 한참을 말없이 있었다.
 그러다 제틴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너, 그렇게 성벽 타는 거 불법이라고 내가 몇 번 말해야 되겠냐? 내가 눈감아 주는 거 알면 나 직장 잘린다?”
 “어차피 머지않아 잘릴 것 같은데?”
 “······.”
 “올 때마다 이렇게 졸고 있으니 말이야.”
 “······.”
 저분은 내가 방문(?)할 때마다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졸고 계셨다.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존경스러운 분이다.
 제틴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어제 정말 일찍 자려고 했는데 바린 형이 술 사 준다는 바람에······.”
 “하아!”
 뻔하다. 공짜라면 정열을 불태우는 제틴의 성격을 잘 아는 나로서는 정말 한숨밖에 안 나온다.
 저렇게 반복되는 생활이 지겹지도 않나?
 공짜면 술이든 뭐든 일단 달려가고 보니 매일 매일 밤을 새운다. 그리고 이렇게 성벽을 지키는 병사이면서 항상 졸고 말이다.
 그때 제틴은 내 등 뒤에 있는 짐들을 보더니 의아한 듯 물었다.
 “너 어디 가냐?”
 “어.”
 “······?”
 “케라인이라는 분 만나러.”
 “케라인?”
 “전설의 카사노바였던 남자 있어.”
 그 말에 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제틴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여자 꼬시기 배틀 붙게?”
 “······.”
 “내가 보기에는 너도 이미 전설의 반열에 들어갔으니 박빙의 승부일 거다.”
 지금 칭찬인 거야, 욕인 거야?!
 아니, 그리고 이야기를 마저 들으라고!
 난 진중하게 말했다.
 “엄연히 ‘전설이었던’이라고. 지금은 한 여자를 위해 사는 순수한 남자야!”
 “아, 그런 거야? 근데 그 남자를 왜 만나?”
 “순수해지려고.”
 “······.”
 “나도 그 남자처럼 이 카사노바의 본능을 버리려고.”
 “······.”
 “왜?”
 멍하니 나를 바라보기만 하는 제틴의 모습에 질문하자, 그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며칠 안 본 사이에 미쳤구나.”
 “이건 또 뭔 소리야!”
 “풋! 지금 장난쳐? 내가 너의 그 저질스러운 본능을 누구보다 잘 아는데, 뭐? 순수한 남자가 돼? 네가 순수한 남자가 될 확률보다 지나가던 오우거가 사람들을 도와줄 확률이 더 높겠다.”
 “······.”
 “한마디로 이상한 잡소리 그만 하세요.”
 으윽! 이 자식, 지금 날 무시하는 거야, 뭐야?
 내가 이 저질스런 본성을 버리겠다는데, 뭐? 내가 순수한 남자가 될 확률보다 오우거가 사람들을 도와줄 확률이 더 높다고?
 아, 젠장! 본때를 보여 줄 거다.
 당당하게 정말 순진하고 멋진 남자가 돼서 돌아올 것이다.
 그래서 네놈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마!
 난 그런 각오와 함께 다시 묵묵히 길을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근처에 붙어 있는 포스터 한 장이 유난히도 눈에 띈다.
 그건 범죄자 포스터였다.
 그런 포스터야 자주 보기에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는데, 저 사진 안에 있는 분의 초상화에 이상하게 관심이 갔다.
 “아, 그거 위에서 내려왔어. 완전 대단해. 상당한 귀족 집 딸을 낚아서 도망갔나 봐.”
 “······.”
 “아아, 정말 너 같은 부류가 참 많아. 말세야, 말세.”
 제틴은 나를 보면서 그런 말을 하지만, 난 포스터 속의 인물을 보고 모든 동작을 멈췄다.
 그러자 제틴도 포스터 속의 인물을 빤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근데 카사노바들은 원래 닮았냐? 너랑 왠지 흡사하게 생겼다?”
 “난 저 인간 몰라! 아악!”
 “······.”
 그러면서 난 단숨에 성벽을 뛰어내렸다.
 남이 하면 죽을 행동이지만, 나름대로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고 자란 나에게 이건 별것도 아니다.
 그리고 굳이 말하자면, 카사노바의 필수 기술에 이것도 있었다.
 ‘여자 안고 성벽 단숨에 뛰어내리기’라는 기술이······.
 
 하아······.
 난 고개를 저었다. 그 포스터에 있는 인물이 그가 아니기를 바랐건만······.
 많은 여자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한 결과 상당한 사실을 알아냄과 동시에 인정해 버렸다.
 여기서 여자한테 물어본 이유는 남자들보다는 여자들에게 대답을 듣는 게 더 빠르니까······라고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이 저질적인 카사노바의 본능이 아직도 움찔거리기 때문인 것 같기는 하다.
 그 포스터 속에 있는 남자는······ 아니, 내 입으로 말하기도 싫다.
 그래, 난 저 남자를 모른다. 모르는 거야! 그러니 관심 끄고 내 갈 길 가자.
 어서 케라인이라는 사람을 만나서 순수한 남자가 되는 거다.
 그리고 참고로 저 포스터에 걸린 남자는 죽어도 나랑은 관계없는 사람이다.
 난 몰라, 알 수가 없어!
 “저 사람, 현상수배지에 있는 남자랑 많이 닮지 않았어?”
 “저 정도로 여자 홀릴 만한 얼굴을 가진 남자가 또 있을까?”
 “수상한데?”
 “저 남자 아니야?”
 그때 최첨단 기술이자 정보 수집을 위한 카사노바의 필수 기술, ‘사람들의 자그마한 말이라도 다 도청하기’에 의해 그들의 말이 쏙쏙 내 귀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런 말을 들을수록 알 수 없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진짜 저 남자인 것 같은데?”
 “신고해 볼까?”
 “하지만 여자가 없잖아.”
 “혹시 버린 거 아니야? 아님 어디에 팔아넘겼다든가.”
 “그, 그럴 수도 있겠다!”
 “정말 잔인한 놈일세.”
 난 그들의 말에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말만은 해야 했다.
 “저기 걸려 있는 사람, 저 아니거든요!”
 “······.”
 “······.”
 “······.”
 “······.”
 빌어먹을 영감탱이, 왜 포스터에 걸려서 나한테까지 피해를 주느냔 말이다!
 
 
 
 
 
 2장 에르니
 
 
 
 포스터 때문에 난 마을을 마음껏 돌아다닐 수 없게 되었다.
 난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단지 저 포스터 속의 인물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집중적인 관심을 당하는 거다. 그리고 착각하는 사람도 많이 생기고······.
 한마디로 이제 마을 안에서는 모든 움직임이 봉쇄되었다는 거다.
 “아악! 그 영감탱이!”
 순수한 남자가 되기 위한 여행을 결심한 지 하루 만에 저런 방법으로 나를 방해하다니, 젠장!
 그렇게 난 온갖 불평을 하면서 좌절에 빠졌다.
 솔직한 심정은 내가 그 인간을 잡아서 ‘나는 결백하다!’고 밝히고 싶다.
 도대체 내가 왜 범죄자 취급을 받아야 하느냔 말이다. 그것도 좀 더 우아한 범죄자가 아닌 여자 낚아서 도망간 저질 범죄자 취급 말이다.
 “하아!”
 그렇게 한숨을 팍팍 쉬던 난 기운이 빠진 모습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걸었다.
 왜 이렇게 처음부터 꼬이는지, 하아!
 그 순간, 어디선가 나를 향해 냉기가 몰아쳤다.
 난 그 냉기를 추적하게 되었고, 그러다 한 여자를 볼 수 있었다.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소녀는 은빛의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렸고, 그녀의 손에는 냉기로 가득한 은빛 검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나도 모르게 그녀의 몸을 스캔해 본 결과······.
 ‘35, 24, 33?!’
 이런 엄청난 결과가 나왔다.
 에잇, 또 뭔 짓을! 이놈의 빌어먹을 이상한 능력 같으니.
 순수한 남자가 되기 위해 떠나는 건데 또 이 짓거리다. 흐흑!
 어찌 됐든 이건 넘어가고, 환상적인 몸매라는 걸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더욱 내 눈을 휘어잡는 건 그녀의 미모······.
 농담 안 하고 저런 미소녀는 처음 본다.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이 그녀의 미모를 가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너무나도 아름다운 외모에 오히려 그것조차 매력으로 느껴진다.
 문득 여신이 있다면 저런 외모를 가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아름다운 분을 제 눈으로 볼 수 있다니, 오늘 제게 정말 좋은 일이 생길 것 같군요.”
 “······.”
 어느새 내 입은 싱긋 미소를 지으면서 저절로 나불거리고 있다.
 아악, 이 저질적인 입아! 닥쳐, 닥쳐, 닥쳐!
 넌 이제 더 이상 그런 놈이 아니야, 더 이상!
 하지만 이렇게 속으로 다짐해 봐도 소용없다.
 15년 동안 세뇌를 당한 게 그렇게 쉽게 고쳐질 리는 없으니까.
 그 순간, 그녀의 입이 열렸다.
 그녀는 얼음이 연상되는 차가운 말투로 내게 말을 건넸다.
 “묻지 않아도 될 것 같군요.”
 “······?”
 “당신의 그 한마디로 그의 아들이라는 게 단숨에 파악될 정도니까요.”
 으응? 뭔 말? 그의 아들이라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지?
 왠지 모르게 오싹한 예감이 강타하자, 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다. 아닐 거야. 그래, 그분 때문에 오신 건 아닐 거야.
 으응, 제발 아니라고······.
 내가 고개를 젓는 동안 그녀는 냉기가 잔뜩 서린 검을 내게 천천히 뻗으며 말했다.
 “전 힘없는 자에게는 무력을 사용하고 싶지 않아요. 어서 말하세요.”
 “저, 전 무슨 말인지······.”
 “발뺌하실 생각이군요.”
 “······.”
 인정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인정하면 그 인간과 내가 연관될 것 같아서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게 정확한 내 심정이다.
 난 맹렬히 고개를 저으면서 외쳤다.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 결백 그 자체예요!”
 “말로는 통하지 않는군요.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네요.”
 “······!”
 나의 완강한 부인에 그녀의 차가운 검이 허공을 갈랐다.
 
 그녀는 자신의 두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검을 피해 냈다.
 루에티 대륙에 단 스무 명만이 존재한다는 소드 마스터의 검을 피해 냈다.
 특히 10대 소녀의 몸으로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에르니가 처음이었고, 그만큼 그녀의 실력은 완벽했다.
 이런 경우는 없었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사람이 자신의 검을 이렇게 쉽게 피해 내다니······.
 사실 차가운 겉모습과 달리 마음씨가 약한 에르니는 일반인(?)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단지 위협만 해서 진실을 알려고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피해 버렸다.
 그때 자신의 검을 피한 그 남자는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왜, 왜 이러세요?! 마, 말로 하자고요.”
 “······.”
 “이런 건 좋지 않아요!”
 마구 당황해 한다.
 뭔가 이상하다. 자신의 검을 피할 정도면 저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에르니는 그런 생각과 함께 그 남자의 마나를 느끼려고 해 보지만, 조금도 느낄 수 없다.
 아니, 생활하는 데 필수인 기본적인 마나를 제외하고는 없다고 하는 게 정확했다.
 그렇다면······.
 ‘우연?’
 우연으로 자신을 검을 피해 냈다?
 차라리 이게 더 신빙성이 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이 무지무지 희박하기는 하지만, 지금같이 마나도 느껴지지 않는 남자가 의도적으로 피해 냈다는 결론보다는 훨씬 그럴듯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이상한 느낌을 지우지 못하고 다시 위협용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런데······.
 “······.”
 또 피해 냈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자신의 검을 두 번이나 우연으로 피해 낼 수는 없다.
 하지만 저런 일반적인 마나를 가진 존재가 이런 마나의 힘을 조금도 이용하지 않고 피하다니, 그건 자신이 알고 있는 이론과는 너무나도 다르다.
 인간의 신체 능력에는 한계라는 게 있어서 그 한계점을 넘기기 위해서는 마나의 힘이 필요하다.
 하지만 방금 저 남자는 마나의 힘이 아닌 순수한 신체 능력만으로도 자신의 움직임을 따라잡았다.
 에르니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게 가능할 리가 없을 텐데?’
 
 난 검을 살벌하게 휘두른 그녀에게 말했다.
 “정말 전 몰라요! 알고 싶지도 않아요!”
 난 끝까지 잡아뗐다.
 그 인간과 연관되기 싫은 나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당신이 어떤 예사롭지 않은 능력을 가져서 섣불리 이긴다고 장담은 못하겠지만, 진심으로 살기를 담아 검을 쓰고 싶지는 않아요.”
 “그럼 쓰지 않으면 되잖아요.”
 “······.”
 “조크였습니다.”
 내 한마디에 분위기가 더욱 냉각되자, 농담할 분위기가 아니라는 걸 급속도로 알아차렸다. 이래 봬도 상황 파악은 되게 빠르다.
 그때 다시 그 얼음 미소녀는 나를 보더니 물었다.
 “당신 아버지가 있는 곳을 가르쳐 주세요.”
 “······.”
 난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
 한마디로 난 어렸을 때의 기억이 전혀 없는 불행한 과거를 가지고 있는 남자로······.
 그때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프란티스 님, 즉 당신의 아버지가 저희 언니를 데리고 간 곳을 말해 주세요. 부탁이에요.”
 그 말과 함께 그녀의 차가운 얼굴에 슬픈 기색 떠올랐다.
 “······.”
 강압적이 아니다. 오히려 나에게 부탁을 하고 있다.
 저런 미소녀의 간절한 부탁이라면 아무리 나라고 하더라도······ 크윽!
 원래 강압적이라면 내가 좀 말을 안 듣는데, 저렇게 슬픈 눈빛으로 하는 부탁이면······. 제길!
 아, 그 영감탱이! 도대체 뭔 일을 이렇게 크게 벌려 놨어!
 하지만 난 진짜 그 영감탱이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
 
 난 최대한 리얼리티를 살려 설명했다. 난 모른다고, 그 변태 영감탱이가 어디 있는지 정말 모른다고 말이다.
 그뿐 아니라, 어렸을 때 그 인간 때문에 피해를 본 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보통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잘 믿어 주지 않았지만, 나의 진심이 통했는지 그녀는 믿어 주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럼 이제 어떡해야 할까요.”
 그녀는 너무나도 슬픈 눈빛을 하였다.
 아악! 그런 아름다운 얼굴로 슬픈 표정을 지으면 모든 남자에게 슬픔이라고요!
 하지만 내가 막상 뭐라고 해 줄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저 아름다운 얼굴에서 활짝 지어지는 미소가 너무나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충동적인 느낌이랄까?
 사실 그다지 내키지는 않는다.
 나에게는 ‘순수한 남자가 되자!’라는 엄청난 과제가 있다. 그런 내가 순식간에 유턴을 해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왠지 모르게 저 아름다운 얼굴에서 미소를 보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의 일은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한다(죽어도 카사노바 본능. 순수한 본능은 없음).
 그리고 무엇보다 원인 제공은 그 인간이니까.
 난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최선을 다해 도와드릴게요.”
 “······?”
 “그 빌어먹을 저질 영감탱이 찾는 거요.”
 “왜, 왜죠?”
 내 말에 그녀는 당황해 하며 물었다.
 난 그녀의 질문에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이 아름답게 웃는 모습을 한 명의 남자로서 보고 싶다고 하면, 너무 느끼한가요?”
 
 두근두근!
 ‘왜, 왜 이러는 거지?’
 분명 저 사람은 자신의 언니를 납치해 간(?) 자의 아들이다.
 물론 이유 없이 성심성의껏 자신을 도와준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좋은 이미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당신이 아름답게 웃는 모습을 한 명의 남자로서 보고 싶다고 하면, 너무 느끼한가요?’라는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이성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분명 저분의 아버지도 이런 식으로 언니를······. 그래, 난 넘어가지 않아. 그럴 거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지만, 그녀는 애써 그 사실을 부인했다.
 
 프란티스는 크게 웃었다.
 생각 외의 상황이 터져 버린 것이다.
 사실 자신에게는 매우 좋은 상황이다.
 그 상황이란 엘렌의 여동생이라는 에르니가 자신의 아들과 같이 다니게 된 것이다.
 다른 여성들보다 음의 기운이 강한 에르니라면 자기 아들에게 충분히 진정제가 될 수 있다.
 그녀의 기운이 차가워서 음의 기운인 게 아니다.
 그녀의 아름다움.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만 아름다운 소녀일수록 음의 기운이 강하다. 그리고 그런 소녀만이 제로스가 가진 양의 기운을 억눌러 줄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제로스에게는 더욱 강한 힘을 갖게 해 주는 요소가 되고 말이다.
 
 
 
 
 
 3장 쟁반이
 
 
 
 “······.”
 “······.”
 저 차가운 미소녀 아가씨와 같이 다닌 지 한 시간이나 되었다.
 그렇지만 그동안 우리 둘 사이에 오간 말은 한마디도 없다.
 한마디로 침묵 여행이랄까?
 내 성격상 이런 침묵은 별로 달갑지 않다.
 난 조심스럽게 그녀를 향해 말을 걸었다.
 “저기, 이왕 같이 다니게 됐는데 통성명이라도······.”
 “······.”
 내 말에 나를 빤히 바라보던 그녀는 잠시 후 얼굴이 살짝 붉어지더니 고개를 휙 돌리면서 말했다.
 “에르니라고 해요.”
 아, 에르니라······.
 얼굴만큼이나 아름다운 이름인 건 분명하다.
 여기서 연애 초짜들이 자주 사용하는 게 있는데, ‘이름만큼이나 얼굴도 아름다우시네요’라는 이 멘트다.
 이제는 자제해야 한다. 너무 우려먹었다.
 차라리 안 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아, 갑자기 왜 또 이런 쪽으로 이야기가 새는 거지?
 어찌 됐든 나도 소개를 해야겠지?
 “저는 제로스라고 해요.”
 “네.”
 “······.”
 “······.”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다. 아악!
 말을 걸고 싶지만, 이상하게 내 시선을 피하는 모습과 그녀의 차가운 분위기가 섞여서 말을 걸 수 없는 상황이랄까? 정말 기록이다, 기록!
 그 순간이었다.
 ―아아아! 나같이 위대한 존재를 버리고 가다니! 이런 나쁜 인간!―
 “······.”
 인간의 목소리가 아닌 마치 무언가 울려 퍼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에 에르니는 무척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난 그 목소리가 너무나도 익숙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다.
 아, 젠장! 저 쟁반이는 놔두고 오려고 했는데, 이 자식 언제 냄새를 맡은 거냐?
 “······!”
 그때 무언가를 보고 경악해서 그대로 굳어 버린 에르니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무언가를 본 난 한숨을 내쉬었다.
 “재, 쟁반?”
 에르니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듯했다.
 아니, 나라고 해도 의심할 것이다. 저 멀리서 날아오는 건 다름 아닌 쟁반이라고 불리는 물건이었으니까. 그것도 커다란 원형 쟁반 말이다.
 사실 쟁반이란 것은 그릇 등을 받쳐 드는 데 사용하는 생활품이다. 그런데 그런 쟁반이 날아오니 믿기 힘들겠지.
 어느새 가까이까지 온 쟁반은 내 앞에 정확하게 멈추더니 허공에 뜬 채 떠들었다.
 ―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누군 줄 몰라?!―
 “쟁반이.”
 ―쟁반이가 아니라니까! 지금은 이 모습이지만 난 이래 봬도······.―
 털썩!
 “엇?!”
 쟁반이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왜냐하면 무척이나 강인해 보이던 에르니가 그대로 쓰러졌기 때문이다. 난 반사적으로 기절하는 그녀를 잡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저으면서 쟁반이를 향해 말했다.
 “제발 네 모습 좀 생각해 보지 않을래?”
 ―지, 지금 나같이 위대한 존재를 무시······!―
 난 재잘거리는 쟁반이를 잡았다.
 그러고는 있는 힘껏 멀리 던져 버렸다.
 휘익!
 ―아아악!―
 원형 쟁반이다 보니 잘도 날아간다. 물론 쟁반이의 비명은 크게 울려 퍼지고 있지만, 사뿐히 무시해 주자.
 ―나를 이렇게 대하는 존재는 네놈이 처음이야! 이 빌어먹을 인간아! 아아악!―
 하아, 정말 저 자식은 데려가기 싫은데······.
 옆에서 너무 재잘거려 싫은 데다 외형이라도 멋있으면 말도 안 하는데, 쟁반이다.
 들고 다니면 이상한 시선이 모이는 건 당연지사.
 그래서 기피하고 싶은 대상 1위이건만 저 자식은 죽어도 계속 나를 따라오려고 한다. 하아······.
 
 ‘에고 소드’라는 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들어 봤을 것이다. 그만큼 유명한 검이니까.
 에고 소드란 영혼이 들어가 있어서 엄청난 능력과 파괴력을 증가시켜 주는 검을 말한다.
 하지만 이 에고 소드라는 게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할 정도로 귀할 뿐 아니라 소드 마스터라고 불리는 분들도 가지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엄청난 기능만큼이나 희귀성도 높다.
 농담 안 하고 익스퍼트 초급 기사도 이 에고 소드만 가지고 있으면 소드 마스터와 비등하게 싸울 수 있다고 한다. 소드 마스터의 오러까지도 견디는 특별한 검이 바로 에고 소드인 것이다.
 하지만······.
 “에고 쟁반.”
 ······이라는 건 그 누구도 들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쟁반 속에 들어간 영혼이라니······.
 검과 다르게 무슨 기능이 있는지도 모르고, 실질적인 전투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 물건이 에고 쟁반이다.
 아니, 줄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쟁반 들고 머리를 내려찍는 것 정도?
 하지만 그런 짓을 하면 미친놈 소리 듣기 딱 좋다.
 어찌 됐든 그 에고 쟁반이 바로 저 쟁반이다.
 어느 날 우리 집 창고를 뒤지던 중 발견한 쟁반.
 내가 지금까지 저놈에 대해서 파악한 건 심한 잘난 척과 이상한 소리, 그리고 재잘거리는 것밖에 없다.
 어쩌면 신기한 것들을 모으는 사람들한테는 비싼 가격에 팔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으음······.”
 “아, 일어났어요?”
 그때 내 다리에 누워 있던 에르니가 깨어나는 소리가 들려오자 난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심스럽게 눈을 뜬 에르니는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가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더니 얼굴이 붉어진 채 말했다.
 “제, 제가 왜 당신의 다리에 누워······ 아!”
 “기억나셨어요?”
 “······.”
 그녀는 왜 내 다리에 누워 있는지 물으려다 방금 전의 일이 떠올랐는지 말을 멈추었다.
 잠시 후 그녀는 나를 보더니 더듬거리더니 말하였다.
 “부, 분명 재······.”
 “쟁반이 말하고 날아다닌 걸 말하고 싶은 거죠?”
 “아······.”
 “뭐, 그게 꿈은 아니고요, 들어 봤는지 모르겠는데 그게 에고 쟁반이라고 불리는 쟁반이라는······.”
 “······.”
 나의 말에 그녀는 또다시 굳어 버렸다.
 
 난 최대한 그녀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몇 분 정도 지났을까?
 그녀가 서서히 말문을 열었다.
 “제, 제가 잘못 본 게 분명해요.”
 “흐음.”
 “당신을 찾는다고 며칠간 강행군을 해서 제가 잘못 본 게 분명해요.”
 “······.”
 귀, 귀엽다!
 차가운 모습에서 저런 당황하는 모습으로 바뀌니 그 귀여움이란 말로 표현이 안 될 정도다.
 “그래요, 잘못 본 거예요.”
 얼마나 충격이 컸는지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부인하면서 결론을 내렸다.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에고 쟁반이라니,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요?”
 이제는 아예 나한테 물어본다.
 저기, 저도 잘 모릅니다만?
 사실 나도 쟁반이를 발견하고 저런 반응을 보였다. 에고 소드라면 몰라도 에고 쟁반이라니, 한편으론 엄청 섭섭했다.
 에고 소드라면 팔아먹어도 성 한 채를 사고, 직접 사용한다면 울트라 무적이 되는데 저 에고 쟁반은 영······.
 난 에고 쟁반을 발견한 후 처음으로 책이라는 걸 읽었다.
 그건 바로 영혼이 담겨 있는 무기들에 관한 책이었다.
 책에는 지금까지 밝혀진 에고들에 관한 내용이 모두 기재되어 있었다.
 대부분이 검 종류였고 간혹 가다 한두 개 정도 건틀릿, 다섯 정도가 지팡이, 그리고 기타 종류가 하나씩 있었다.
 하지만 이것들의 공통점이라면 그래도 무기라는 거다, 무기!
 쟁반에 에고가 들어가는 경우는 적혀 있지도 않았다.
 서너 번을 읽어 봤지만 무기를 제외한 다른 종류에는 영혼이 들어갈 수 없다고까지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쟁반이한테는 들어가 있다.
 “······.”
 난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그녀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손을 올리며 말했다.
 “진정하세요.”
 “······.”
 “물론 충격이 크겠지만 일단 심호흡부터.”
 원래 이렇게 극도로 당황한 상태에서는 이런 스킨십을 거부하지 않는다. 당황스럽거나 할 때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여자들의 심리라고 할까?
 그래서 이런 때 은근슬쩍 스킨십을 한 뒤 좀 더 진전된······.
 “아악!”
 난 재빨리 그녀에게서 손을 떼고 주저앉았다.
 또, 또, 또 이놈의 저질 같은 본능!
 지금 나의 여행 목적을 잊어버린 게냐?!
 난 순수한 남자가 되기 위해서 가는 거라고! 그런데 또 이런 행동을 하다니, 아악!
 ―너, 너 진짜 이러면 안 돼! 감히 나 같은 엄청나다 못해 전설적인 존재에게 이런 식으로!―
 재잘재잘.
 에르니가 진정하기 무섭게 다시 날아와서 허공을 부유하며 재잘거리는 쟁반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번에는 그녀가 쓰러지지 않았다는 것?
 하지만 여전히 굳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때 쟁반이가 에르니를 보더니 감탄한 어투로 말했다.
 ―오우, 베리 굿?! 컴 온 베이베!―
 “······.”
 ―내가 수천 년을 살아왔지만, 이런 미소녀는 처음인데? 완전 죽여! 역시 제로스 너의 그 낚아채는 능력······.―
 퍼억!
 난 남의 과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려는 쟁반이를 그대로 쳐서 날려 버렸다.
 지금 난 ‘이제 그런 저질적인 행동은 끊었다!’라고는 말 못하고 끊을 예정이라고 조심스럽게 생각은 해 본다.
 한편 날아가는 쟁반은 바락바락 악을 쓰고 있다.
 ―초대 그랜드 소드 마스터이자 전설의 알테르라고 불리던 나를 이렇게 대하다니! 넌 인간도 아냐!―
 “알테르?!”
 비명을 지르면서 날아가는 쟁반이의 말에 에르니는 기겁을 했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저, 저 에고 쟁반에 있는 존재가 알테르라고 부, 불리던 분이신가요?”
 “저야 모르죠. 자기가 알테르라고 우기니, 뭐.”
 “······.”
 “그리고 항상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가 뭔가 하는 미친 소리를 자주 해요.”
 “······.”
 “한마디로 개소리죠.”
 “······.”
 “쟁반 주제에 자기가 그랜드 소드 마스터면, 전 신입니다.”
 
 “저기······.”
 “······?”
 에르니가 나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녀는 여전히 차가운 기운을 보이고 있었지만 왠지 복잡한 얼굴을 한 채 나를 외면하면서 말했다.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나요?”
 “하아! 글쎄요······.”
 “······?”
 내가 한숨을 쉬면서 말하자 그녀는 의문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내가 한숨을 내쉰 이유는 그 인간의 어마어마한 도주 능력 때문이다.
 우리 카사노바에게는 절대 필수적이라면서 죽을 만큼 나를 닦달하며 가르친 엄청난 기술. 그게 바로 ‘여자 데리고 걸리지 않고 잘 도망가기’라는 나름대로 엄청난 기술이다.
 이 기술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마스터해야 한다고 내내 강조할 정도였으니, 이 직업에 있어서 얼마나 비중이 높은 기술인지 대략 유추가 가능할 것이다.
 어찌 됐든 그런 기술인만큼 일반인, 아니 드래곤이라고 불리는 전설의 생물체의 눈도 피해 낼 정도로 대단하다는 것이 아버지라는 분의 설명이다.
 심지어는 드래곤과 눈 맞아서 다른 드래곤들한테 쫓기더라도 들키지 않는다면서 자신만만해 하시더라.
 하아, 정말 할 말이 없다, 할 말이 없어.
 드래곤조차도 찾아내지 못하면 인간의 힘으로는 무리다. 하지만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나였다.
 유일하게 그 기술을 배운 나란 존재.
 그리고 그 기술을 잘 아는 나이기에 이렇게 한숨만이 나오는 거다.
 제길, 그 영감탱이!
 “저기, 혹시 제로스 님이 저랑 같이 있다는 소문을 내면 뭔가 위기감을 느끼고 오지 않을까요?”
 에르니가 방법을 모색해 보지만 더 들을 것도 없이 기각이다.
 왜냐하면······.
 “우리 아버지, 아니 그 영감탱이는 이러셨습니다. ‘난 너를 강하게 키웠다. 만약에 혹시라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난 너를 찾아가지 않을 테니 잘 먹고 잘 살렴’이라고요.”
 “······.”
 “그런 분인데 잘도 오시겠군요.”
 그러자 에르니는 나를 향해 당황한 어조로 말한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네요. 분명 당신은 그 남자의 아들인데······.”
 “아들이죠. 근데 에르니.”
 “······?”
 “아들을 타락에 빠트리는 아버지 봤어요?”
 “······.”
 “제가 이런 말, 에르니에게 최초로 하는 건데요.”
 말하고 싶다. 나의 비극적인 과거를 말이다.
 다른 여자에게 이런 이야기는 언급하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에르니에게는 말하고 싶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전 에르니가 생각하는 대로 여자 후리는, 아니 꼬시는 전문직(······)에 속하는 카사노바 맞아요.”
 “······.”
 “화려한 멘트, 여자가 좋아할 만한 무언가를 다 알고 있죠.”
 “······.”
 “하지만 제가 어떻게 이런 화려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겠어요? 아까 보셨다시피 우리 마을은 상당히 변방에 속해 있어요.”
 “그건 알고 있어요.”
 그런 변방에서 이런 화려한 지식을 어떻게 얻을 수 있었을까?
 정답은 하나다.
 나의 말이 이어졌다.
 “아버지라는 분이 제가 네 살 때 기사가 되려고 마음먹으니까 기사보다 더 멋진 게 카사노바라고 구라를 깐 뒤 15년 동안 세뇌 교육 시켰어요.”
 “······.”
 “그래서 지금 전 순수한 남자가 되기 위해, 진정한 기사가 되기 위해, 이 미친 버릇을 고치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 중인 거고요. 하지만 15년 동안 세뇌를 당한 탓에 쉽게 고쳐지지도 않죠.”
 “······.”
 나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그녀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말하고도 난 참으로 불쌍하기 그지없는 희생자다. 흐흑!
 잠시 후, 에르니가 잔뜩 미안함을 담은 얼굴로 내게 말했다.
 “미안해요. 저도 모르게 큰 오해를······.”
 “아뇨, 괜찮아요.”
 “······.”
 “그리고 그 덕택에 당신 같은 천사도 만날 수 있었으니 축복이죠.”
 “그, 그런 말은······.”
 그녀의 얼굴이 다시 살짝 붉어졌다.
 하지만 난 속으로 울부짖었다.
 으아악! 젠장, 또 직업병이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진실을 말하는데도 작업처럼 보이는 거지? 응?
 제발 이 저질 본능아, 사라지라고!
 
 “드레테스트 프로젝트의 진행 상황은요?”
 “약 10% 정도 진행되었습니다.”
 구깃.
 부하의 대답에 질문했던 남자가 인상을 구겼다.
 등까지 내려오는 푸른색의 긴 머리에 20대 초반의 남자는 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여자들을 설레게 할 수 있을 만큼 외모가 준수했다. 그뿐 아니라 180cm에 달하는 키와 완벽한 몸은 더욱 그를 돋보이게 해 주었다.
 다시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30% 이상 진행됐을 거라고 생각한 건 나의 착각인가요?”
 “죄송합니다.”
 “이유를 듣고 싶군요.”
 “그, 그게, 드레테스트 프로젝트의 핵심 인물인 데리타이튼 집안의 엘렌 양이 어떤 남자와 눈이 맞아서 도망을······.”
 “······.”
 황당했다. 어떤 거창한 이유도 아니고 단지 남자와 눈이 맞아서 도망가다니······.
 그것도 핵심 인물이라고 칭해지는 엘렌이 말이다.
 남자는 조용히 눈을 감으면서 물었다.
 “남자에 대한 정보는요?”
 “이름이 프란티스라는 것밖에······.”
 “더 이상은 없는 건가요?”
 “아들이 한 명 있다고 합니다.”
 “흐음.”
 부하의 보고에 다시 눈을 뜬 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프란티스라는 그 남자에게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엘렌 양을 데리고 오세요.”
 “저, 저기, 레켄 님······.”
 “······?”
 레켄이라고 불린 미남자가 부하를 쳐다보자, 곤란해 하던 부하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얘기했다.
 “프란티스라는 남자의 행적을 도저히 못 찾겠습니다.”
 “모든 정보기관을 동원한 결과인가요?”
 “네.”
 “······.”
 “마치 귀신같이 사라졌습니다.”
 “참으로 난감하군요.”
 레켄은 진심으로 난감해 했다.
 자신들은 대륙에서 최소 3위 안에 들 정도의 막강한 정보력을 가진 존재들이다. 그런데 그런 자신들이 한 남자, 아니 정확히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행적을 파악하지 못하다니, 정말 기가 막힐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프란티스라는 남자의 아들에 대해서 조사해 오십시오.”
 “······.”
 “분명 자식이라면 자신의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정도는 알 테니까요.”
 레켄은 입을 다물었고, 잠시 후 그의 등 뒤에서 검은색의 그림자가 실체화되더니 그에게 속삭였다.
 “이번 프로젝트가 실패하면, 당신들과의 계약은 모두 취소됩니다.”
 “알고 있습니다.”
 “부디 저희 마스터를 실망시키지 마시기를······.”
 “수십만 명이 희생되더라도 성공시킬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거 좋은 마음가짐이군요.”
 
 
 
 
 
 4장 탐문수사?
 
 
 
 벨르나이크 제국은 북쪽의 제리안 강을 기점으로 세워진 3대 제국 중의 하나로 다른 제국보다 강한 힘을 가진 곳이다.
 일단 탐문수사(?)를 위해 난 벨르나이크의 수도이자 에르니가 살고 있는 엘란디로 향했다.
 내가 살던 마을 또한 벨르나이크 제국에 속했기에 엘란디에 도착하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 덕택에 마차를 타고 한 이틀 정도 뒹굴뒹굴하니까 도착했다.
 엘란디에 도착하자마자 하늘이 어둑어둑해지더니 순식간에 밤이 되어 버렸다.
 에르니는 나를 보며 말했다.
 “일단 저희 집에서 묵으시고, 저희 부모님에게는 언니를 찾기 위해 제가 데리고 온 남자라고 할게요. 절대 프란티스 님의 아들이라고는 하지 마세요.”
 “네.”
 아마도 그 인간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난 쫓겨나겠지?
 나란 인간도 참 불쌍하다.
 그러고 보면 에르니는 겉으로는 차가운 모습을 보이지만, 속은 참으로 따뜻한 사람 같다. 자신의 언니와 튄 남자에게 프란티스 님이라니, 그리고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남을 배려할 줄 안다.
 아무래도 뭔가 상처가 있어서 저런 차가운 모습을 하고 있는 거겠지?
 남자로서 대충 알 것 같기도 하지만,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
 그것보다 비참하지만 에르니에게 이 말은 해야 할 것 같다.
 “저기, 에르니.”
 “······?”
 “제 얼굴이 그 영감탱이랑 흡사해서 에르니의 집에 가면 안 될 것 같은데요.”
 “아.”
 “······.”
 빌어먹을! 그 영감탱이의 현상 수배 포스터에 있던 사진 때문에 얼마 전에 들른 마을에선 행동에 제약을 받았다. 지금은 그나마 에르니가 들고 있던 후드로 얼굴을 가린 상태지만, 에르니의 부모님 앞에서조차 후드를 계속 쓰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에르니는 곤란한 모습으로 말했다.
 “그럼 어떻게······.”
 “어차피 오늘 작업을 시작해야 합니다.”
 “······?”
 “하루라도 빨리 증거가 사라지기 전에 그 영감탱이의 흔적을 잡아내야 되거든요.”
 “아, 그래도 너무 늦은 시간인데······.”
 “걱정 마세요. 에르니 양은 성에서 푹 쉬고 계세요.”
 어차피 탐문수사를 하는 동안 그녀가 할 일은 없다.
 내가 우연히 알아낸 사실에 의하면 그녀는 모든 기사들의 꿈이라는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 있다. 저 여린 몸으로 소드 마스터라는 엄청난 자리에 올라가다니, 그것도 나랑 동갑인 열아홉 살에 말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천재인지,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때 에르니는 여전히 차가운 모습이지만, 처음보다는 다소 누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저도 여기 있을게요.”
 “에? 그러실 필요는 없는데······.”
 “아뇨. 저를 도와주신다는 분을 놔두고 저 혼자만 성에 들어가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요.”
 “······.”
 하아, 정말 고개를 저을 정도다. 보통은 저런 미모에 저런 성격을 가지기 힘든데 말이다.
 나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하지만 이건 진심이다, 정말로.
 “에르니, 처음 저랑 만났을 때보다 에르니의 표정이 다소 풀어진 거 아세요?”
 “······.”
 “지금 이 모습이 더 예뻐요. 진심이에요. 원래 미인은 웃어야 한다잖아요.”
 “······.”
 내 말에 다시 최대한 차가운 표정을 지으려는 그녀였지만, 왠지 그 모습이 내게는 더욱 귀여울 뿐이다.
 아아악! 나도 모르게 또 이런 생각을!
 이놈의 작업 본능, 정말 버리고 싶다!
 하지만 마음처럼만 됐으면 난 이미 해탈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제법 괜찮아 보이는 여관을 선택했다.
 원래 지금 같은 상황에서 아버지의 가르침은 ‘이런 경우가 생기면 주인장을 협박해서 방 하나만 있다고 말하게 해라’였다.
 정말 이런 비겁한(?) 방법까지 동원하다니, 아무리 나라고 해도 전혀 내키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부터 난 업종 접었다.
 진짜다.
 순수한 남자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이고, 그 영감탱이를 잡은 이후 그 전설의 카사노바였다가 일편단심이 된 남자에게 가서 노하우를 전수받고 맑은 심성을 가진 남자로 태어나는 거다.
 그러니 절대 그런 저질적인 방법은 사용하지 않을 거다.
 그런 생각과 함께 난 여관으로 들어가 카운터에 있는 주인장에게 가볍게 방 두 개를 달라고 했다. 그런데 주인장은 예상치 못한 답을 꺼냈다.
 “방이 하나밖에 없는데요.”
 “······.”
 “······.”
 “어차피 두 분 친구이신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나와 에르니 둘 다 후드를 쓰고 있다 보니 그렇게 생각하는 듯싶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우리는 남녀라는 거다.
 난 에르니를 향해 고개를 돌린 후 말했다.
 “어차피 난 할 일도 있는데, 에르니 혼자 묵는 게 어때요?”
 “······.”
 “전 신경 쓰지 마시고.”
 “그, 그래도······.”
 “그럼 같이 잘 거예요?”
 “······.”
 그 말에 진짜 신기하게도 연기가 후드 위로 날아다닌다.
 오! 신기하다, 신기해!
 “농담이었어요. 어찌 됐든 전 이제 슬슬 작업에 들어가야 하니 에르니는 어서 푹 쉬어요.”
 “······.”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그렇게 에르니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가려는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기······.”
 “······?”
 차가운 목소리지만 뭔가 망설이는 말투였다.
 그리고 그녀의 말문이 열렸다.
 “고마워요.”
 “레이디를 배려하는 건 남자로서 당연한걸요.”
 “절대 무리는 하지 마세요.”
 “당연히요.”
 
 기세 좋게 나온 건 좋다.
 하지만 일단 필수 조건인 정보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정보에 대해서는 특히 여자들이 많이 알고 있다.
 그렇지만 정보라는 게 그냥 얻어 들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아, 안 돼! 더 이상은!”
 아무리 그 인간을 찾기 위해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지만, 또다시 그 저질적인 방법을!
 제로스, 잘 생각하라고! 넌 이제 순수한 남자라고(언제부터?)!
 그러니 그런 방법은······.
 “아가씨, 잠시 시간 좀 낼 수 있을까요? 무리한 부탁을 드려서 죄송한 마음뿐이네요.”
 어느새 난 후드를 벗은 채 달콤한 목소리로 한 여자에게 다가가고 있다.
 그리고 속으로 울부짖었다.
 누가 나 좀 말려 줘!
 
 
 
 
 
 5장 쟁반이의 납치
 
 
 
 정말 내 자신에게 회의가 들지만, 이미 업무는 끝난 상태다.
 결과적으로 또다시 입질로 정보를 캐낸 것이다. 으윽!
 어떻게 결심이 하루도 가지 않는 걸까. 정말 나란 인간도, 휴우!
 하지만 이렇게 한숨을 내쉬느니 차라리 지금까지 모은 정보를 토대로 그 영감탱이의 행방을 알아내는 게 낫다.
 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정보란 정보를 모두 접목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잠시 후.
 “베리라이트 숲? 아님 인데스트 거리?”
 두 곳 중 하나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 인간은 베리라이트 숲이나 인데스트 거리로 향한 게 분명했다.
 아직 정확한 목적지는 모르지만 그 둘이 겹치는 길목으로 쭉 가다 보면 스탄 왕국과 플렌 왕국, 그리고 케스트 제국, 이렇게 세 나라가 있다.
 한마디로 세 나라 중 한 나라로 들어갈 게 분명하다는 거다.
 하지만 나머지 단서를 찾기 위해서는 어느 쪽으로 움직였는지부터 알아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누구한테든 쫓기는 자가 어디로 갔을 것 같으냐고 물으면 모두 다 베리라이트 숲으로 도망갔을 거라고 한다는 점이다.
 워낙 복잡하게 이루어진 숲이라 도망가는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장소, 쫓는 사람들에게는 최악의 장소로 알려진 곳이란다.
 하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베리라이트 숲은 절대 아니야.”
 아무래도 숲이다 보니 여자들이 다니기에는 쉽지 않을 거다.
 항상 레이디를 절대적으로 우선시하는 그 인간이 그렇게 험한 데로 데려갈 리는 없다.
 그렇다면 남은 건 인데스트 거리.
 하루에도 수만 명이 지나다니는 거리다.
 그런 만큼 상당한 수의 병사가 있고 치안이 잘되어 있다. 그런 곳을 유유자적 빠져나갔다?
 누가 들으면 미친 소리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난 가능하다고 본다.
 그 인간의 전설적인 분장술(?)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게다가 폴리모프 마법이 아니기에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마나 탐지기에도 절대 걸리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내게 ‘여자랑 도망칠 때는 오히려 도로로 가는 게 더 안전하단다. 제일 먼저 수색하는 곳이 산 쪽이거든, 아들아’라고 하셨으니까 말이다.
 
 “엘렌 양, 곤란하게 되었네요.”
 “네? 프란티스 님, 뭐가요?”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와 엘렌이라 불린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의 대화가 이어졌다.
 남자, 프란티스는 낭만 어린 눈빛으로 밤하늘을 보더니 말했다.
 “한 남자가 우리의 사랑을 방해하려고 하는 것 같군요.”
 “그, 그게 무슨 말인가요? 아니, 모든 게 완벽하신 프란티스 님이라면 걱정 없잖아요. 지금도 그 누구한테도 들키지 않고 왔잖아요.”
 그렇다. 수만 명이 동원된 수색에서도 아주 여유롭게 빠져나온 자신과 프란티스다.
 그런데 한 사람을 들먹거리면서 유난히 걱정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프란티스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이런 말을 하면 오만해 보일지 몰라도 난 당신과 함께라면 드래곤도 충분히 따돌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사랑을 방해하려는 한 사악한(?) 존재에겐 충분히 우리를 찾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 엄청난 존재인가요?!”
 “네.”
 엘렌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엄청난 무력과 지력, 그리고 무엇이든지 해내는 능력을 갖춘 그에게는 완벽이라는 말조차도 부족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두려워하는 존재라니······.
 “도대체 그 남자는 누구인가요?”
 “대악당(?) 제로스라고 불리는 남자입니다.”
 “대, 대악당요?”
 엘렌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프란티스는 엘렌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손을 얹으며 말했다.
 “대악당일 뿐만 아니라 모든 여자한테 집적거리는 저질입니다.”
 “그, 그런······.”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그 대악당이자 모든 여자한테 집적거리는 저질한테서 엘렌 양을 반드시 지켜 드릴 테니까요.”
 “프, 프란티스 님.”
 그 말에 완전히 가 버리는 엘렌과 여자를 홀리게 하는 미소를 짓는 프란티스.
 하지만 그는 지금 속으로 또 다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걸 바로 1타 3피라고 해야 하나?
 사실 이런 상황을 두고 남들은 의도적으로 그가 자신의 아들을 위해 엘렌 양을 만났다거나 드레테스트 프로젝트를 막아 내기 위해 엘렌 양을 꼬드겨 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엄연히 우연한 일이다.
 그는 그저 엘렌과 사랑에 빠졌는데 그 엘렌이 드레테스트 프로젝트의 핵심 인물이고, 그녀의 동생이 음의 기운이 강한 엄청난 미소녀였다는 거다.
 전문용어로 1타 3피가 적용된 거다.
 당연히 드레테스트 프로젝트를 진행시킨 단체는 자신을 추적하지만 찾을 수 없고, 그렇게 됨으로써 자신의 아들 제로스를 추적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제로스는 분명 자신을 잡겠다고 방방 뛸 것이고, 참으로 아름다운 여행을 하게 됨과 동시에 많은 여자들과 얽힐 것이다.
 자신이 교육한 ‘윈드 엠페러(바람의 황제)’라고 불리는 본능으로 말이다.
 솔직히 자신의 아들이 지금 순수해지겠다고 난리를 피우고 있다는 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시작된 본능이 쉽사리 사라질 리는 없다. 그러니 프란티스도 그 점에 대해서는 별 걱정은 안 하고 있다.
 물론 제로스는 자신을 원망할 것이다.
 구라 쳐서 자신을 카사노바로 만든 아버지를 말이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는 아들을 카사노바로 교육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게 바로 제로스의 폭주를 막아 낼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제로스의 몸에는 거대한 양의 기운이 존재한다.
 그 기운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여자가 은은히 뿜어내는 음의 기운이 필요하다.
 그 말은 곧 여자와 어울려야만 그 양의 기운이 진정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게 또 묘한 점이, 한 여자만으로는 진정시키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제로스의 몸 안에 있는 양의 기운이 한 여자의 음의 기운을 파악함과 동시에 그 여자의 음의 기운은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로스는 되도록 많은 여자와 어울려야 한다.
 한마디로 카사노바의 숙명이랄까?
 물론 제로스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지만 말이다.
 현재 상태로도 제로스는 남들이 상상할 수 없는 대단한 능력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 그에게 만약 폭주가 시작된다면······.
 
 “······.”
 뭔가 상당히 기분 나쁜 느낌이 나를 휘감았다. 아주 기분 나쁜 무언가가······.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아뇨,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
 난 이제까지 알아낸 정보를 종합해서 에르니가 묵고 있는 방으로 올라와 그녀와 얘기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왠지 기분 나쁜 무언가가 나를 강타해 순간적으로 멈칫한 거다.
 누군가가 나를 비하하는 느낌이랄까? 그런 느낌이 들어서 말이다.
 그리고 참고로 말하는데, 지금은 아침이다.
 남녀 둘이 같이 있는 걸 이상하게 보는 사람을 위해서 특별히 추가 설명한 것이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에는 인데스트 거리로 갈 것 같습니다.”
 “이런 말을 하기는 그렇지만, 인데스트 거리는······.”
 “아아, 알고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 아니 100% 도망가는 상황에 처해 있다면 방금 전 언급한 베리라이트 숲으로 가는 게 당연하죠.”
 “······.”
 내 말에 그녀는 무언의 긍정을 표시했다.
 난 그런 그녀를 슬쩍 본 뒤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그 인간은 평범한 인간이 아닙니다.”
 “······.”
 “괴물입니다.”
 “······.”
 “그 인간의 능력 정도면 간단한 변장술로 인데스트 거리를 활보하겠죠.”
 “그런······.”
 “그리고 그분의 성격상 여자가 힘들어 하는 산은 타지 않을 겁니다.”
 “······.”
 “그러니 100% 인데스트 거리로 향해야 합니다.”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솔직히 잘 이해되지 않지만 제로스 님의 의견에 따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내 의견에 순순히 동의해 주는 그녀, 참으로 이해심도 많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나도 모르게 빤히 쳐다보았다.
 “왜, 왜 그러죠?!”
 에르니는 차가운 얼굴에서 당황하는 모습으로 변하더니 내게 물었다.
 난 그런 에르니에게 웃으면서 말하였다.
 “귀여워서요.”
 “······.”
 “어제 제가 차가운 표정이 조금 풀렸다고 한 뒤부터 계속해서 차가운 얼굴을 유지하려는 모습이 귀엽다고 할까요.”
 “저, 절 놀리는 건가요?”
 그녀는 당황스러워하며 소리쳤고, 난 그 말에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아뇨, 정말 귀여워서 그래요.”
 “······.”
 “그리고 그 아름다운 얼굴을 왜 굳이 그렇게 차갑게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저, 전 원래부터······.”
 “아뇨. 그런 어설픈 거짓말에 속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에요, 저.”
 “······.”
 “이유는 묻지 않을게요. 하지만 에르니는 차가운 얼굴도 예쁘고 지금 모습도 예쁘지만, 웃는 얼굴은 훨씬 더 예쁠 것 같아요.”
 “그런 말은 하, 하지 말라고······.”
 “그냥 진심만을 말했을 뿐이데요?”
 “······.”
 “어찌 됐든 그렇다는 거예요. 그냥 참고만 하시라고요.”
 정말 왜 이러는 걸까?
 다시는 이런 저질 멘트(?)를 안 하겠다고 다짐한 지 하루도 안 돼서 재탕을 하고 있다니······.
 난 끊임없이 생각한다. ‘저질 멘트 하지 말자, 이제부터는 순수한 남자가 되자’라고 말이다.
 하지만 정신을 놓으면 난 어느새 들이대고 있다.
 진짜 이 병은 고칠 수 없는 것인가? 진정으로?!
 아아, 눈물이 나오는구나.
 어서 그 영감탱이를 잡은 뒤 수련(?)을 하는 길밖에 없는 것 같다. 이미 자아의 힘으로 극복하기에는 너무나도 깊이 침투(?)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
 에르니는 미칠 것만 같았다.
 왜, 왜, 왜!
 저 남자의 한마디에 왜 이렇게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자신을 도와주고 있지만, 그의 직업이 어떤 지 잘 알고 있는 그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어할 수 없는 이 마음.
 ‘내가 웃으면 좋아할까?’
 자신도 모르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에르니는 고개를 저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저 남자는 카사노바라고 불리는 존재라고! 물론 이렇게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있지만, 저것도 엄연히 기술일 뿐이야. 그래, 에르니! 넌 언니처럼 넘어가면 안 돼! 그래!’
 흔들리는 마음을 최대한 다독거리면서 잡아 보지만, 왠지 모르게 그러면 그럴수록 힘들어졌다.
 
 일단 목적지는 정해졌다.
 그렇다고 무난히 흘러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영감탱이라면 내가 추적하는 냄새를 맡았을 게 분명하니까.
 사소한 실수가 곧바로 승부를 판가름하는 상황이다.
 “일단 거리를 좁혀야 하는데.”
 안 봐도 뻔하다.
 며칠 전부터 돌아다니는 그 인간과 나와의 거리 말이다.
 여자 때문에 천천히 간다고 하더라도 이미 벌어진 거리가 상당했다. 그 거리를 단숨에 좁혀야 한다.
 그러려면?
 “쟁반이.”
 ―난 이름이 쟁반이가 아니라니까!―
 쟁반이라는 말에 쟁반이가 벌떡 날아올랐다.
 그럼 네가 쟁반이지, 장반이니?
 저질 개그 죄송!
 어찌 됐든 쟁반이는 하늘을 부유하면서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 모습을 본 에르니는 처음보다 훨씬 나아진 표정이지만 여전히 어색해 하고 있다.
 쟁반과 어울리기가 힘들다는 건 잘 안다.
 “쟁반이, 나랑 에르니를 태우고 고속으로 직행해 줘.”
 ―뭐?―
 “다시 말해 줄게. 나랑 에르니가 네 위에 탈게. 그러면 고속으로 날아가 달라고.”
 ―지, 지금 나 같은 엄청난 존재를 비행 도구로 사용한다고?!―
 “비행 도구나 되니까 다행인 거지.”
 ―······.―
 사실 쟁반이는 크기가 좀 컸다. 보통 식당에서 운반하는 쟁반의 2.5배에서 3배 정도의 크기로, 나랑 에르니가 올라타도 그리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내가 그딴 일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
 “······?”
 쟁반이가 강하게 반발을 하다가 순종적인 말투로 순식간에 톤이 뚝 떨어졌다.
 어라, 이상하다. 분명 지랄발광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웬 순종 모드?
 이어서 쟁반이의 말이 들려왔다.
 ―좋아, 해 줄게.―
 “······?!”
 저 자식이 미쳤나. 왜 이렇게 쉽게 허락을?
 갑작스러운 쟁반이의 행동에 멍해진 내가 바라보기만 하자 다시 쟁반이의 말이 들려왔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
 “조건?”
 ―그래, 에르니 먼저 태워.―
 “그건 뭐 당연한데.”
 원래 무언가에 탑승할 때 레이디를 먼저 배려하는 건 남자로서의 도리다.
 물론 그 무언가에 쟁반이도 해당되는지 의문스럽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난 에르니를 향해 먼저 올라타라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에르니는 쉽사리 발을 떼지 못했다.
 난 에르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말했다.
 “사실 쟁반에 타는 게 위험해 보이지만, 의외로 위험하지 않아요.”
 “······.”
 “저 쟁반이의 주요 특성 중 하나가 비행하면서 흔들림이 없다는 거죠.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고 타세요.”
 “······.”
 그렇게 내가 안심을 시켜 주는 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쟁반 위에 올라가기를 꺼려했다.
 하지만 잠시 후 그녀는 결심을 했는지 쟁반이의 위로 발을 디뎠다.
 그 순간!
 ―아앙.―
 뭔가 변태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쟁반이 자식, 이제 슬슬 본색이 나오는 건가?
 제길, 한동안 조용하다 싶더니 또다시······.
 하지만······.
 콰앙!
 “······.”
 “꺅!”
 난 생각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벽을 부수고 에르니만 태운 채 날아가 버리는 쟁반이의 모습과 처음 듣는 에르니의 비명 소리에 말이다.
 잠시 후, 난 사태 파악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대로 부서진 창문을 향해 뛰어내리면서 외쳤다.
 “이 자식, 무슨 짓이야!”
 
 에르니는 정신이 없었다.
 뭔가 번쩍하더니 어마어마한 속도로 주변 풍경이 막 바뀌더니 어느새 숲 속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리고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둘만의 시간을 마련해 봤어.―
 “······.”
 ―그나저나 나의 200km의 스피드, 멋지지 않아?―
 “······.”
 에르니는 말문이 막혔다. 200km라니, 물론 상상조차도 불가능한 속도다. 하지만 그때 느낀 그 스피드는 분명 거짓이 아니었다.
 그런데 200km의 속도로 날아오면서 자신이 튕기지 않았다?
 정말 단 일순간도 흔들리지 않았단 말인가?
 이건 놀랍다 못해 기절할 만한 사실이다.
 쟁반이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널 보면서 난 알았지.―
 “무, 무슨?”
 목소리를 깔면서 말하는 쟁반이의 모습에 에르니의 차갑던 모습은 완전히 무너졌다.
 그만큼 지금의 상황이 그녀에게 당황스럽다는 뜻이었다.
 다시 쟁반이의 말이 들려왔다.
 ―너도 나를 사랑하는구나 하고 말이야.―
 “······.”
 ―하아, 정말······.―
 “그런 생각은······.”
 에르니는 급격하게 무너지는 상황 속에도 이 말은 해야 할 것 같아서 입을 열었지만, 그녀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쟁반이의 후속타가 날아왔기 때문이다.
 ―알아, 알아! 네가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
 ―그래, 난 지금 안타깝게도 쟁반의 모습을 하고 있어. 하지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전설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고 불리던······.―
 콰앙!
 “······!”
 그때 에르니의 눈에 또다시 엄청난 광경이 들어왔다.
 어느새 얼굴이 붉어진 채 자신들을 쫓아온 제로스가 쟁반이를 땅에 내리박아 버린 것이다.
 그것보다 더욱 그녀를 놀라게 한 건······.
 “어, 어떻게?!”
 쟁반이의 말에 의하면 200km 이상의 속도로 달려왔다고 한다.
 그런데 제로스는 그 속도로 날아온 쟁반이를 따라잡은 것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도, 말도 안 되는 장면이었다.
 저번에 자신의 검을 피해 냈을 때 예사롭지 않은 남자라는 건 짐작했다. 하지만 이건 그 정도가 아니다.
 인간으로서 200km의 속도로 달리다니, 어떤 인간이 그게 가능한가? 그리고 더욱 그녀를 급격히 무너지게 하는 요소는 마나가 탐지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순수한 육체의 힘만으로 저런 말도 안 되는 괴력을 보여 줬다는 것이다.
 “······.”
 에르니는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저 남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생각을 하면 할수록 미궁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드래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인간이 가능한 육체의 힘이 아니다. 그렇다면 최강의 생물이라고 불리는 드래곤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적은 마나.
 도대체 저 남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하기 그지없었다.
 
 난 쟁반이를 땅에 묻은 뒤 완전히 포커페이스를 잃어버린 에르니에게 다가갔다.
 쟁반이 때문인지 그녀의 얼굴엔 난생처음 보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얼음 같은 표정이 아니라 평범한 여자의 놀란 얼굴이었다.
 난 그런 에르니에게 조용히 말했다.
 “봐요, 그런 얼굴을 하니 귀엽잖아요.”
 “······.”
 “계속해서 그런 얼굴을 하면 모든 남자들에게 축복일 것 같지 않아요?”
 싸아.
 하지만 이런 내 말에 다시 차가운 모습으로 변하는 에르니 양.
 하아, 정말······.
 차가운 모습도 나쁘지는 않지만 방금 전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더 좋은데 말이다.
 뭐, 언젠가는 나의 이런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에르니는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후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지금 달려오신 거 맞나요?”
 그녀의 물음에 난 당연히 진실을 말한다.
 “달려온 거 맞죠.”
 “근데 어떻게 인간이 그런 스피드를······?”
 “카사노바의 필수 조건입니다.”
 “······.”
 “일명 튀기기(······) 기술이라고, 여자 안고 단시간에 힘을 튀기는 고유의 비기라고 할까요.”
 “힘을 튀겨요?”
 “설명하기는 어렵고요, 카사노바의 별별 기술 중 하나가 이 순간적으로 튀기는 힘이거든요.”
 “······.”
 나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에르니. 당연하다.
 순간적으로 힘을 튀기다니, 그녀가 이해 못하는 건 당연하다. 나도 모르니까.
 그저 아버지가 내게 주입식으로 가르쳤을 뿐이니까. 물론 카사노바의 필수 기술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대부분의 기술이 여자들을 데리고 튀는 데 집중되어 있다.
 한마디로 이루어질 수 없는 신분의 격차를 위한 기술들이라고나 할까?
 만만한 상대라면 굳이 도망갈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나저나······.
 “여기는 어디려나.”
 주변이 온통 나무로 둘러싸인 숲 속이다.
 미친 듯이 달려와서 신경 안 썼는데 이제야 마구 신경이 쓰였다.
 그뿐만 아니라 상당히 미묘하다.
 그리고 난 이와 흡사한 숲을 안다. 그건 바로······.
 “베리라이트 숲······.”
 우리의 주 목적지인 인데스트 거리와는 완전 정반대의 곳이다.
 한마디로 그 영감탱이와의 거리가 벌어졌다는 뜻이다.
 “이 자식!”
 난 묻힌 쟁반이를 마구 밟으면서 물었다.
 “너, 그 영감탱이 첩자지?”
 ―무, 무슨 소리······?―
 “너 때문에 거리가 벌어졌잖아!”
 ―······.―
 “그 인간하고는 잠시의 격차가 영원한 격차가 될 수도 있다고!”
 오버하는 것 같지만, 진실이다.
 어제 내가 도착하자마자 조사에 착수한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라면 원래 있던 증거들도 순식간에 지워 버릴 테고 난 그 증거를 지우기 전에 추적해야 한다.
 하지만 이 쟁반이의 미친 짓 때문에 그 시간 자체가 비껴 나간 것이다.
 “제길!”
 난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지금쯤이면 인데스트 거리를 벗어났을 것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왜 그래요?”
 그때 에르니가 절망하는 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고, 난 그 물음에 고개를 저으면서 말하였다.
 “놓친 것 같아요.”
 “······?”
 “그 영감탱이 정도라면 벌써 인데스트 거리를 벗어났을 거예요. 모든 흔적을 지우고.”
 “······!”
 내 말에 그녀는 할 말을 잃은 표정을 지었다.
 난 그런 그녀에게 말한다.
 “아마도 주 목적지는 스탄 왕국과 플렌 왕국, 그리고 케스트 제국 세 나라 중 하나일 거예요. 이제 남은 건 그냥 감으로 찍어서 가는 방법밖에 없어요.”
 “한마디로 무작정?”
 “그런 거죠.”
 “······.”
 확률은 3분의 1이다.
 한 번 더 삽질하면 진짜 힘들어진다.
 하지만 이 무작위 선택이 맞아떨어진다면 다시 그 영감탱이의 흔적을 잡을 수 있다.
 젠장, 이 쟁반이 자식!
 “오호, 이게 뭔 일이지?”
 “우리 같은 도망자인가? 크크.”
 “딱 꼬라지를 보아하니 온실 속의 공주님과 왕자님이 도망 오셨나 보네?”
 “여자 죽이네. 나 저년 먹어야겠다.”
 “아, 진짜 저 여자 처음 보는 미녀인데?”
 쟁반이 때문에 단서를 놓쳐서 꿀꿀해 있는 우리 앞에 나타난 남자 다섯 명.
 그들은 에르니를 향해 서슴지 않고 변태적인 말을 했다.
 그 순간!
 스윽.
 “······.”
 “······.”
 “······.”
 “······.”
 “······.”
 순식간에 뽑힌 에르니의 칼이 스쳐 지나가면서 자신들의 목 근처 옷자락을 자르자, 그들은 동시에 말이 없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무릎을 꿇으면서 빌었다.
 “제, 제가 잘못 보고······.”
 “하하, 죄송합니다.”
 “요, 용서를······.”
 “죄송합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에르니가 예사로운 존재가 아님이 드러나자, 방금 전까지 음담패설을 늘어놓던 남자들이 순식간에 비굴 모드로 들어갔다.
 그 모습에 에르니는 멈칫하더니 혼란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다시는 이런 행동을 하지 않을 건가요?”
 “물론입니다!”
 “다시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럼요! 이번만 살려 주시면!”
 “네네! 사람들을 돕고 살겠습니다!”
 온갖 아부의 말을 하는 남자들.
 그러자 에르니는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칼을 검집에 집어넣고 싸늘하게 말했다.
 “어서 가세요.”
 “고맙습니다!”
 “그, 그럼.”
 에르니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들은 부리나케 도망갔다.
 난 그런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에르니는 어린 나이에 소드 마스터라는 경지에 도달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여린 마음이 그런 그녀의 무언가를 잡고 있다.
 난 한숨을 내쉬고 있는 에르니에게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잠시 실례 좀.”
 “······?”
 
 “시발, 좆같네.”
 “아, 젠장! 저년 먹고 싶은데.”
 “저년 장난 아니야.”
 “그러게 말이야. 덕팔 형님한테 부탁해 볼까?”
 “저년 좀 잡으라고?”
 “덕팔 형님이면 가능할 거야.”
 아직도 그들은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그저 약한 자들을 상대로 강간, 겁탈, 강도질만을 일삼던 그들이 소드 마스터라는 엄청난 경지를 알아볼 리는 만무했다.
 그러니 아직도 에르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거다.
 “일단 아무 년이나 먹자.”
 “그래.”
 “크크! 시발, 그년도 기다리라고 해.”
 방금 전 비굴하게 사과하던 모습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게다가 에르니를 대신해 다른 여자를 노리는 모습은 인간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더러웠다.
 그때 그들의 앞으로 20대 중반의 한 여성이 지나갔다.
 얼굴은 꽤 예쁜 편이었고 몸매 역시 괜찮은 편이었다.
 더군다나 이 숲에 들어왔다면 무언가에 쫓기는 상황이라는 거.
 자신들이 마음 놓고 강간을 저질러도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그들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나 웃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너, 넌?!”
 “그 여자 옆에 있던 기생오라비?!”
 “너 죽고 싶어서 온 거냐?!”
 “저 자식을 잡아서 인질로 삼는 건?!”
 “그거 좋은 생각이군.”
 “크크.”
 남자들은 싸움이라고는 전혀 모를 것 같은 제로스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저놈이라면 그 여자도 꼼짝하지 못하고 당하게 될 것이다. 자신들이 시키는 대로 말이다.
 생각만으로도 욕정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순간.
 파직.
 “······.”
 “······.”
 “······.”
 “······.”
 그들은 순간적으로 세상이 정지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향해 제로스는 차갑게 말했다.
 “전 에르니 양처럼 착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 말과 함께 다시 되돌아갔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은 목과 머리가 잔잔히 불던 바람에 의해 분리되었다.
 
 “저기, 프란티스 님! 프란티스 님이 경계하고 있는 그 남자는······?”
 “다행히도 우연히 한 협력자(?)에 의해 늦춰진 것 같습니다.”
 “아, 그럼 우리 둘의 사랑을······.”
 “방해할 자가 없다는 거죠.”
 그 말에 엘렌은 살포시 프란티스의 품에 안겼고, 잠시 후 프란티스는 싱긋 웃으면서 말하였다.
 “그뿐 아니라 그 대악당에게 선물도 보냈습니다.”
 “서, 선물이요? 왜 대악당에게 선물을?”
 엘렌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악당에게 선물이라니!
 그 질문에 프란티스는 웃으면서 생각했다.
 ‘아리아라는 귀여운 여성을 선물로 보냈으니까요, 후훗. 그나저나 에르니라는 분까지 끼어들었으니 제로스에게는 축복이 될 듯하군요.’
 제로스의 힘은 날이 가면 갈수록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해졌다. 거기에 여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힘은 더욱 강해진다.
 하지만 그때 강해지는 힘은 제로스 내부에 있는 양의 힘이 폭발해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안정적인 융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제로스의 모든 힘이 완벽하게 융합을 끝낸다면, 더 이상 ‘폭주’를 걱정할 필요는 없게 되는 것이다.
 어찌 됐든 제로스는 이리저리 카사노바의 숙명인 것이다.
 
 
 
 
 
 6장 팔불출 드래곤 로드
 
 
 
 뭔가 일이 꼬이기는 했지만 우리는 유턴해서 다시 벨르나이크 제국의 수도 엘란디로 돌아왔다.
 한마디로 삽질했다는 거다.
 제길, 쟁반이 자식.
 진짜 그 영감탱이의 첩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드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아!
 일단은 그 영감탱이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내야 한다.
 찍어서······.
 하, 정말 미쳐 버리겠다.
 “이놈!”
 “헉!”
 그때 미쳐 버리겠다는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진짜로 나를 미치게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목소리는 결코 듣고 싶지 않은 나다.
 그런데 또 왜 이 목소리가······.
 콰앙!
 “······.”
 내가 일시적으로 묵고 있는 방의 벽과 문이 우르르 부서지면서 한 남자가 등장했다.
 붉은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그 남자는 190cm 정도의 키에 인간이 가질 수 없는 완벽한 미모를 가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의 분위기는 카리스마 그 자체였다.
 그렇게 등장한 그가 나를 향해 불쑥 다가오더니 물었다.
 “이 제로스 자식! 이번엔 내 딸을 어디로 빼돌린 거냐!”
 “저기, 무언가 오해를······.”
 “오해? 내 딸이 가출을 했단 말이다! 분명 네놈이 그 나불거리는 입과 얼굴로 유혹했을 거 아니야!”
 “저는 요새 접었는데요.”
 “네놈이 접어? 지나가던 개가 오우거 잡는 소리하고 있네!”
 진짜다. 아직 완전히 접지는 못했지만 접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 중이다. 그리고 나름대로 착한 일도 하고 있다.
 그런 나를 이렇게 몰아세우다니······.
 “어서 내 딸을 내놔!”
 “진짜 요새 아리아 양 만난 적도 없고······.”
 “이 자식이!”
 “진짜입니다!”
 덥석.
 “내놔!”
 “아아아.”
 내 멱살을 잡고 마구 흔드시는 그분과 힘없이 흔들리는 나.
 그때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는 짓이죠? 당장 제로스에게 손을······.”
 에르니가 나타나 내 멱살을 잡고 있는 남자에게 말한 것이다. 그는 에르니를 한 번 보더니 나를 더욱 험상궂은 얼굴로 노려보았다.
 “이 쓰레기 찌꺼기만도 못한 자식! 이제 내 딸로도 부족해서!”
 “모든 게 오해입니다.”
 “오해? 지랄하네! 네놈 아버지부터 내가 알아봤어, 이 빌어먹을 부자 자식들아!”
 “······.”
 아, 또다시 등장한 나의 아버지. 그 인간 때문에 내가 진짜 못 살겠다.
 나도 나쁜 놈이지만 내 아버지라는 분은 완전 나쁜 분이시다. 답이 안 나올 정도로 말이다.
 이런 모습을 본 에르니는 사뭇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어서 제로스에게서 떨어지세요.”
 “야, 인간.”
 “······.”
 “너, 이 제로스라는 놈이 뭐 하는 놈인 줄 알아?”
 “······.”
 “인간 말종이야! 여자 후리고 다니는 카사노바라고! 제 아비랑 똑같아!”
 “저기, 에르니는 이미 알고 있거든요?”
 “······.”
 “그리고 저 정말 접으려고 하거든요. 제발 저 좀 그만 나쁜 놈으로 만들어 주세요, 크로센트 님.”
 진심이다. 내가 순수하게 돌아가겠다는데 왜 이렇게 믿어 주는 사람이 없단 말인가.
 정말 진짜 노력 중이라고!
 그 순간 에르니가 슬며시 검을 뽑아 위협을 가하려는 자세를 취하자, 난 여전히 멱살이 잡힌 상태에서 말했다.
 “에르니, 그냥 있어요.”
 “그, 그래도······.”
 “이분 건드려 봤자 난리 나요.”
 “······.”
 “원래 성질이 개 같으셔서.”
 “뭐? 이 제로스 자식!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거냐?!”
 “아, 아뇨.”
 난 나도 모르게 나온 진심에 움찔했다.
 내가 워낙 거짓말을 할 줄 모르다 보니 이렇게 자주 진심이 튀어나오곤 한다.
 에르니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더니 물었다.
 “도대체 누, 누구시기에······?”
 난 그녀의 말에 무덤덤한 말투로 말하였다.
 “드래곤들의 수장 드래곤의 로드라고 불리는 크로센트 님이라고 하죠.”
 “드, 드래곤?! 그것도 드래곤 로드?!”
 에르니는 내 말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다. 드래곤을 실제로 본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만났다고 하더라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게 정설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살벌한 분들이시다.
 나도 아버지만 아니었으면 이분을 뵙지도 못했다.
 그때 크로센트 님은 다시 멱살을 흔들며 나를 닦달하신다.
 한마디 말과 함께 말이다.
 “내 딸 내놔!”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가만히 있는 게 최고일 것 같다.
 
 “흐흑.”
 “······.”
 “내 딸!”
 “······.”
 “아뵤오(?)!”
 에르니는 믿기 힘들었다. 사실 자신이 생각하던 드래곤은 카리스마 하나만으로도 상대방을 압도하는 존재였다.
 특히 드래곤의 수장이라고 불리는 로드라면 말이 필요 없을 터, 하지만 지금 제로스가 말한 드래곤 로드라는 존재는 자신의 생각과 정반대다.
 카리스마는커녕 카리스마의 머리카락(?)도 안 보이는 존재가 드래곤 로드라니 그녀로서는 믿을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제로스가 괜히 자신에게 그런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 저런 행동을 하고 있지만 은은히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에 그저 수긍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 딸!”
 “······.”
 “이 제로스 자식아, 책임져라!”
 “정말 왜 이러세요?”
 “왜 이래?! 지금 책임 회피인 거냐?!”
 “······.”
 정말 당황스러워 죽겠다.
 나를 무슨 범죄자로 몰아가신다.
 난 요새 아리아를 구경도 못한 사람이다.
 그런데 아리아가 가출했다고 나한테 찾아와서 이 난동을 부리는 건 무슨 의미인 거냐!
 이건 아무리 봐도 순수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억지로밖에 안 보인다.
 그 순간 그는 갑자기 주머니에서 한 장의 쪽지를 꺼내더니 내게 건네면서 소리쳤다.
 “이렇게 증거 자료가 있는데 시치미인 거냐! 이 인간 자식아!”
 “······.”
 증거 자료라니? 이건 무슨 개뼈다귀 하이 킥 하는 소리?
 난 그 말에 너무나도 당황해서 그가 넘긴 쪽지를 재빨리 펼쳐 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난 거기에 적힌 글을 보고 굳어 버렸다.
 아니, 정확히는 쪽지에 적혀 있는 친숙한 글씨체와 미묘한 내용 때문이다.
 일단 미묘한 내용은 넘어가고, 여기서 제일 문제가 될 만한 요소인 필체는······.
 “내 필체?”
 아무리 봐도 내 글씨다.
 누구에게든 특유의 필체가 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내게도 그런 필체가 있고 말이다.
 하지만······.
 “전 이런 글을 적은 적이······.”
 “뭐? 이렇게 증거가 나왔는데도 시치미인 거냐?! 이 인간 말종 자식아! 이게 내 딸의 레어에서 나왔다고! 이걸 보고 나의 사랑스러운 아리아가 가출을 한 게 분명해!”
 “······.”
 난 말문이 막혔다.
 부인하고 싶다. 이런 글은 내가 적은 적이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분명히 내 필체다. 너무나도 완벽한 증거라는 소리다.
 그리고 특히 그 글의 내용은······.
 
 아리아, 보고 싶어요. 전 아리아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해요. 아리아, 보고 싶어요. 가능하다면 ‘가출’을 해서라도 저를 만나러 와 주면 안 될까요? 나의 사랑 아리아.
 
 “······.”
 그렇다.
 내 필체로 저런 내용의 글이 적혀 있는 것이다.
 이건 내가 봐도 아리아의 가출을 유도한 글이었다.
 하지만 결코 내가 쓴 게 아니란 말이다.
 “이거 제 글씨는 맞아요. 하지만 이런 내용을 적은 기억도, 아리아에게 보낸 기억도 없어요!”
 “아니, 이런 파렴치한이!”
 “으악!”
 미쳐 버리겠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난 맹세코 저런 글을 쓴 기억도 없고 보낸 적도 없다.
 그런데 왜 내 글씨체로 버젓이 글이 적혀 있는 거냐?! 이건 무슨 날벼락······!
 “아!”
 그때 한 가지 추측이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 인간이라면······!
 “영감탱이!”
 지금 에르니의 언니인 엘렌이라는 분을 데리고 도중 중이자 요주의 현상범으로 배회하시는 그분.
 정말 말하고도 민망하지만, 일단 내 아버지라고 불리는 분이다.
 그분이라면······?
 “가능해.”
 이런 즉석 위조가 가능하다.
 솔직히 필체를 복사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할 만큼 섬세한 작업이다.
 하지만 그 영감탱이라면 손쉽게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왜 아리아를······?
 “날 봉쇄하기 위한 건가?!”
 아리아를 이용해 일시적으로 시간을 늦추려는 속셈이란 생각밖에 안 든다. 내가 추적한다는 걸 눈치 챘다면 말이다.
 “으악, 빌어먹을 영감탱이!”
 “이 빌어먹을 인간 자식아, 미친 짓 해 봐야 안 속는다!”
 저분은 여전히 나를 범인이라 확정하고 마구 몰아치신다.
 하지만 이럴수록 침착해야 한다.
 그래서 난 결백하다고 지금의 상황을 이해시켜야 한다.
 난 그런 생각으로 그분을 향해 침착하게 한마디 던졌다.
 “일단 제 이야기부터······.”
 
 난 설명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말이다.
 요약해 보면 이렇다. 난 순수한 남자가 되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그때 에르니가 나를 찾아왔다. 그 영감탱이가 에르니의 언니를 데리고 튀었기 때문이다.
 난 원래의 목적인 순수한 남자가 되기 위해 여행을 떠나야 했지만, 마냥 슬퍼하는 에르니를 보고 나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려서 그 영감탱이를 잡는 걸 도와준다고 약속해 버렸다.
 그리고 영감탱이를 추적, 하지만 나의 움직임을 눈치 챈 영감탱이가 추적을 막을 목적으로 아리아를 이용하고 지금의 상황이 연출되었다고.
 하지만 이런 내 침착한 설명에도 크로센트 님은 나를 황당하다는 듯 보더니 한마디 툭 던지셨다.
 “구라 까고 있네.”
 “······.”
 “다른 건 들을 필요도 없어. 난 한마디로 네놈의 말이 구라라는 걸 판단했어.”
 “······.”
 “네가 순수해지겠다고 한 대목.”
 “······.”
 “거기서 모든 진실은 밝혀졌다!”
 고작 그런 이유로 나의 진실을 구라로 판정하다니, 너무해요!
 난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믿어 주세요! 모든 건 진실입니다.”
 “풋! 지나가던 구더기의 말을 믿겠다!”
 “······.”
 내가 구더기보다도 믿음이 없단 말인가?! 물론 과거가 조금(?) 문란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이렇게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묻어 줘야 된다. 흑흑.
 “저기, 실례지만 제로스 님이 하신 말씀은 모두 사실이에요.”
 그때 에르니가 조심스럽게 크로센트 님에게 말을 건넸고, 그 말에 크로센트 님은 에르니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
 에르니는 갑작스럽게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이제껏 한 치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던 그녀가 말이다.
 난 다급히 그녀와 크로센트 님의 중간에 끼어들어 웃으면서 말했다.
 “크로센트 님, 그렇게 살벌한 거 마구 내뿜으면 몸에 안 좋습니다, 서로.”
 “······.”
 “그러니 거둬요. 그리고 100% 진실이라니까요.”
 “제길.”
 그는 순식간에 드래곤의 기운을 풀어 버렸다.
 그러자 에르니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무나도 압도적인 힘에 눌렸다고 해야 하나.
 나도 저 기분 안다.
 어렸을 때 훈련을 빙자해서 아버지가 데리고 온 저분과 면담을(?) 하면서 저분의 무지막지한 기운에 난 죽을 뻔했다. 그만큼 인간이 견디기에는 압도적인 기운이었다.
 물론 난 어렸을 때부터 단련되어 있으니 아무렇지도 않지만 말이다.
 그때 크로센트 님이 말문을 열었다.
 “좋아. 내 기운을 받고도 가만히 있는 걸 보니 일단은 진실인 것 같군.”
 왜 앞에 ‘일단’이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그냥 진실이라고 말해 주면 더 좋을 텐데. 흑.
 크로센트 님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아무 봐도 그 빌어먹을 네놈 아버지의 목적은 아리아를 네놈에게 보내는 것. 그러니 아리아는 네놈을 찾아올 것이다.”
 “그렇긴 할 것 같네요.”
 “그러니 대기 탄다.”
 “······.”
 난 그 말에 굳어 버렸고, 잠시 후 더듬거리면서 물었다.
 “서, 설마 그게 저랑 같이 다니겠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아니죠?”
 “잘 맞히는군.”
 “저, 개인적으로 남자랑 다니는 취미는 없는데요.”
 찌릿.
 내 말이 끝나자마자 크로센트 님은 나를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난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이번에 그런 취미 한번 만들어 보죠.”
 제길! 이 빌어먹을 영감탱이!
 
 에르니는 도무지 저 남자를 알 수가 없었다.
 단순히 여자들을 꼬드기기 위한 카사노바라고 자기의 입으로 시인한 그 남자.
 하지만 카사노바라고 불리는 존재가 저토록 범상치 않은 능력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 그걸 배웠다고 하더라도······.
 ‘드래곤······.’
 이건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처음에는 저 크로센트가 정말 드래곤인지 미심쩍은 그녀였지만, 방금 전에 당한 기운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라면 절대 보일 수 없는 위압감.
 그것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아니었다.
 무력은 그렇다 쳐도 드래곤과의 친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인간.”
 “네?!”
 그때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크로센트의 목소리에 에르니는 깜짝 놀라 대답했다.
 “저 제로스라는 놈에 대해 궁금한가?”
 “그, 그게······.”
 “궁금하겠지.”
 “······.”
 자신의 질문에 머뭇거리자 크로센트는 그것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남자와 같이 여행을 다니게 되었다고 좌절하고 있는 제로스를 슬쩍 보더니 그녀에게 말한다.
 “내가 제로스를 안 지 좀 됐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감조차도 잡기 힘들다.”
 “······.”
 “이상한 대답이어서 실망인가?”
 “아, 아뇨.”
 크로센트의 직설적인 말에 그녀는 더욱 당황했다.
 그뿐 아니라 그녀는 지금 서 있는 것 자체도 힘들었다.
 아무리 그녀가 소드 마스터라는 경지에 올랐다지만 드래곤 앞에서 숨을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크로센트의 말이 이어졌다.
 “그 대신 재미있는 걸 가르쳐 주지.”
 “······?”
 “우리 일족의 율법 중 유일하게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할 율법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에르니는 더욱 당황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하나도 되지 않는 것이다. 갑자기 드래곤 일족의 율법이 왜 나오는지 말이다.
 처음에는 마치 자신은 아는 것처럼 제로스의 정체가 궁금하냐고 묻더니 막상 자기는 모른다고 하지 않나, 이제는 갑자기 드래곤 율법에 대해 묻는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때 크로센트의 충격적인 한마디가 들려왔다.
 “그놈의 아버지인 프란티스 그 인간도 요주의 인물이지만, 율법까지는 적용이 되지 않았다.”
 “······?”
 “우리 일족의 유일한 율법, 제로스 그 자식과 적이 되는 일은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 있을 수 없다.”
 “······.”
 “그게 우리 일족의 율법이다.”
 
 “아이고, 우리 딸 아리아!”
 “······.”
 “아이고, 저 빌어먹을 부자 때문에 우리 딸이 가출을!”
 “······.”
 “너무 연약해서 인간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
 날 자꾸 그 영감탱이랑 옵션으로 묶어 대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따지기는 뭐했다.
 그 영감탱이가 저지른 행동이니 나만 쏙 빠져나가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사건은 항상 그 인간이 저지르고 그 후속타는 왜 내가 맞아야 하는지, 정말 슬플 뿐이다.
 “저기, 아리아는 굳이 걱정을······.”
 덥석.
 “이 자식이! 우리 연약한 아리아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어찌할 건데? 응?”
 “······.”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내 멱살을 잡으면서 인상을 구겼다.
 난 그 말에 이런 대답을 하고 싶다.
 드래곤이 연약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리고 성체가 안 된 헤츨링이라면 몰라도 아리아는 분명 성체가 된 드래곤이다.
 그것도 드래곤들 중 제일 강하다는 레드 드래곤 말이다.
 아무리 봐도 연약이라는 단어는 제거해야 될 듯싶은데······.
 하지만 그 말을 했다가는 저분이 또 난리 치실 거니 참자.
 여기서 한 가지, 방금 전 납치라는 말에 대해 추가해서 말하고 싶은 게 있다.
 아리아는 성체다. 한마디로 자기 마음대로 나가도 되는 짬밥이라는 거다.
 그런데 가출이라니, 진짜 오버다.
 저 못 말리는 팔불출 아버지 같으니라고.
 저 정도면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자기 딸 생일에 일이 있어서 참석하지 못한 드래곤들을 죽도록 패는 드래곤 로드가 어디 있겠는가?
 그것도 생일잔치 자리 불참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그날은 드래곤들 사이에서는 ‘피가 얼룩진 날’이라 불릴 정도이니, 더 이상 그의 만행은 언급하지 않겠다.
 그때 생각에 잠긴 나를 본 크로센트 님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더니 말했다.
 “제로스, 너 속으로 내 욕했지?!”
 “안 했습니다.”
 “그럼 아리아 생각한 거야? 이 자식!”
 “안 했어요.”
 “이 자식, 그러고 보면 아리아를 상대로 이상한 상상했지?”
 “절대 안 했어요.”
 “네놈은 하고도 남아!”
 “······.”
 “이 짐승 같은 인간이 어디서 우리 아리아를! 너 설마 야, 야한! 이 빌어먹을 제로스 자식!”
 저 정도면 내가 말한 미친 드래곤이라는 의미를 이해할 듯싶다.
 
 상황은 심각할 정도로 좋지 않게 돌아갔다.
 쟁반이 저 자식 때문에 그 영감탱이를 놓쳤을 뿐만 아니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상한 팔불출 드래곤 아저씨까지 달라붙었다.
 한시라도 빨리 그 영감탱이가 방문할 나라 3곳 중 랜덤으로 찍어서 한 곳에 먼저 가 대기 타야 하는 나의 입장으로서는 정말 앞이 깜깜했다.
 목적지도 제대로 정하지 못한 우리에게 유일한 고속 이동 수단이었던 쟁반이는 심한 만행을 저질러서 믿을 수도 없다.
 제길! 상황이 무지 좋지 않아.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아!”
 그때 내 머릿속에 엄청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크로센트 님!”
 “······?”
 그렇다. 크로센트 님이 있었던 것이다.
 비록 팔불출 아버지이기는 하지만 곧 죽어도 드래곤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드래곤이라고 하면 마법의 종족이다.
 그리고 그 마법 중에서 슈우웅! 하고 단숨에 이동하는 엄청난 마법 텔레포트가 있고 말이다.
 텔레포트라면 1분도 안 돼서 세 나라를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거다!
 난 아주 맑고 고운 순수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크로센트 님, 실례지만······.”
 “실례하지 마.”
 “······.”
 “네놈의 말은 듣고 싶지도 않아. 이 나쁜 변태 인간!”
 아, 왜 나를 자꾸만 변태 인간으로 몰고 가는 거야!
 내가 뭘 했다고.
 “젠장, 저 자식의 생각 속에서 우리 귀여운 아리아가 능욕을!”
 “안 했다니까요!”
 “그걸 뭔 수로 믿어?!”
 “······.”
 “넌 하고도 남아! 이 변태 인간 자식!”
 “진짜 안 했어요!”
 “넌 했어!”
 도대체 내가 아리아를 상대로 무슨 야한 상상을 했다고 아까부터 저 난리인지. 거듭 말하지만 난 그런 상상은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저분이 자꾸 그런 이야기를 꺼내니, 지금 살짝 나도 모르게 들기는······.
 “방금 했어! 이 자식!”
 “······.”
 “너, 너!”
 “아니, 그게 그러니까······.”
 “이 인간보다 못한 아메바 같은 자식이!”
 “······.”
 제발 누가 저분 좀 말려 줘요!
 
 그렇게 난 크로센트 님의 시달림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잘 견뎌 냈다.
 일단 아쉬운 사람은 나였으니까 말이다.
 난 한참 동안 그의 발작이 끝나기를 기다렸고, 얼마 후 발작이 멈추는 것 같아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재빠르게 말했다.
 “아까 한 이야기 말인데요, 괜찮으시다면 텔레포트 마법 정기 이용권(······)을 이용하게 해 주시면······.”
 한마디로 원할 때 사용하게 해 달라는 말을 이렇게 돌려서 한 것이다.
 무턱대고 말하는 건 좀 그러니까.
 그러자 크로센트 님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잠시 후.
 “제로스.”
 “네.”
 “너, 미쳤냐?”
 “······.”
 “지금 감히 네가 나에게 텔레포트를, 그것도 한 번도 아닌 정기 이용권을 사용하겠다니. 우리 귀엽다 못해 왕 귀여운 아리아를 납치한 네가?”
 “······.”
 제가 안 했다니까요! 왜 자꾸 저를 나쁜 놈으로 만들려는 거예요! 흐흑.
 난 아리아가 그 영감탱이의 교묘한 수작에 레어를 나왔다는 사실도 오늘 알았는데, 정말 억울해 죽겠다.
 어쨌든 크로센트 님이 나의 이런 소박한(?) 바람을 들어줄 리 없다는 것은 말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왜 말했을까?
 그건 바로······.
 “전 우연히 알고 말았어요.”
 “······?!”
 “아리아 양에게 크로센트 님의 그 이야기가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요.”
 “너, 너······! 제, 제로스!”
 “아리아 양은 아무래도 충격을 받겠죠? 자기 아버지의 만행에 말이죠.”
 “이, 이!”
 “생각만으로도 슬프군요.”
 “제로스!”
 누가 레드 드래곤 아니랄까 봐 얼굴이 심하게 붉어지고 있다.
 아무래도 조금 전에 내가 한 말이 저렇게 만든 것 같다.
 크로센트 님은 나를 향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지, 지금 나를 혀, 협박하는 거냐?!”
 너무나도 흥분해서 말씀도 제대로 못 하신다.
 난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협박이라니요. 전 그저 그렇다고······.”
 “이 자식, 그게 협박이잖아! 이 더러운 인간 자식! 아니, 내가 지금 이 순간 네놈의 흔적을!”
 “저는 사라질지 몰라도 그 사실은 아리아 양에게 들어갈 겁니다.”
 “······.”
 “제가 그것도 생각지 않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어서 말이죠.”
 “······.”
 내 말에 크로센트 님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렇게 난폭한 미끼를 던졌으면 이제 달콤한 미끼도 던져야 한다. 그래야 일이 수월하게 풀리거든.
 난 그런 생각과 함께 운을 뗐다.
 “추가로 에린 님이 좋아하는 것을 우연히, 정말 우연히, 완전 우연히 알아 버렸어요.”
 “에, 에린이 좋아하는 거?!”
 그때 굳어 있던 크로센트 님이 언제 그랬냐는 듯 흥분하셨다.
 난 그런 크로센트 님에게 슬며시 다시 한 번 말하고 말이다.
 “아, 에린 님이 좋아하는 걸 저 혼자 알고 있는 게 너무 슬프군요.”
 “······.”
 “만약 크로센트 님이 조금만 협조해 주시면 모든 게 행복할지도.”
 “······.”
 흔들.
 내 말에 드디어 크로센트 님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래, 그거야! 이제 드디어!
 잠시 후.
 “조, 좋다. 네가 원하는 대로 텔레포트를 해 주지. 하지만 에린이 좋아하는 걸 말해주는 건 확실한 거지?!”
 “물론입니다.”
 “······.”
 자자, 이제 드디어 나에게 전략적 우위가 생겨났다.
 간단히 말해 초스피드 이동력!
 텔레포트의 도움만 있으면 그 영감탱이를 잡는 것도 금방이다. 그럼 이제 에르니의 언니를 찾아 준 뒤 난 다시 순수한 남자가 되기 위해 떠나면 되는 거고 말이다.
 하지만 그 순간!
 “뭐?!”
 “······?”
 갑자기 하늘을 향해 소리친 크로센트 님은 잠시 후 나를 보더니 말했다.
 “긴급 사태다. 나중에 시간 나면 다시 오지.”
 “저, 저기······.”
 슈우욱.
 “······.”
 “······.”
 나와 에르니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갑자기 와서 나와 에르니에게 심한 민폐를 끼치더니, 텔레포트 정기 이용권을 이용하게 해 준다고 해 놓고 긴급사태라면서 가 버리다니!
 이게 뭐야?!
 
 “그게 사실이냐?”
 크로센트는 자신의 앞에 있는 케란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그러자 화이트 드래곤 케란은 심각한 모습을 한 채 말했다.
 “사실입니다.”
 “······.”
 “성체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지만 우리 일족 한 명이 인간에게 당했습니다.”
 “얼마의 인원에 당한 거지?”
 “서너 명 정도입니다.”
 “소드 마스터인가?”
 “네, 상위급 소드 마스터인 듯싶습니다, 로드님.”
 크로센트는 인상을 구겼다.
 사실 성체가 된 드래곤이 인간에게 죽으면 드래곤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헤츨링이 사냥을 당했다면 모를까 성체가 된 드래곤이 인간에게 당한 건 치욕스런 일이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개체가 많지도 않은데 그중 하나가 당했으니 저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케란의 말이 이어졌다.
 “로드님, 제가 그걸 조사하는 과정에서 약간 미심쩍은 모습을 잡아냈습니다. 마치 무언가 급격히 이동한······.”
 “케란.”
 “네.”
 “네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 일족을 해친 이유가 인간들의 어떤 비밀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고, 그것 때문에 입막음이 되었다는 소리인가?”
 “네.”
 역시 비상한 머리를 소유한 드래곤답게 간단히 요점을 파악해 내는 크로센트.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싶더니 말했다.
 “왠지 인간들이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군.”
 “······.”
 “이 대륙에도 한 명밖에 없는 상위급 소드 마스터가 세 명이 모여 다니는 일이 벌어지니 말이야.”
 이 대륙에 있는 소드 마스터 중 상위급 소드 마스터라고 해 봤자 단 한 명.
 그런데 소드 마스터 상위급으로 추측되는 인간 3명이 드래곤을 사냥했다. 간단하게 말해 대륙에 알려지지 않은 엄청난 실력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렇군.”
 그때 뜬금없는 한마디를 던지는 크로센트.
 “프란티스 네놈이 이렇게 시끄럽게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파악했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안일했군.”
 굳이 프란티스가 이 대륙을 떠들썩하게 만든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가는 크로센트였다(아주 심각한 착각).
 그는 케란을 향해 사뭇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모든 드래곤에게 경계 발령을 내려라. 인간들의 경계에 대해 강화하라고 말이다.”
 “알겠습니다, 로드. 그런데 아리아 님은······.”
 “······.”
 아리아 일은 크로센트가 워낙 난리를 쳐서 일족 모두가 아는 일이었다.
 그때 크로센트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오히려 그놈 옆에 있는 게 안전하다.”
 “그놈이라니요?”
 “상당히 저질적인 인간 놈이 있다.”
 “······.”
 “정말 이건 내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한 곳은 그 저질 제로스 놈 옆이니까 말이다.”
 
 레켄의 표정이 무척이나 굳어 있다.
 그는 나지막한 어조로 아무도 없는 자신의 방에서 중얼거린다.
 “드래곤을 건드셨군요.”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켄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
 “우리의 작전에 대해 냄새를 맡았으니 입막음을 하는 게 예의죠.”
 “하지만 섣불리 드래곤들을 자극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지금 드래곤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하지만 드레테스트 프로젝트를 눈치 채는 것보다는 저의 대응이 더 나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
 그 말에 레켄의 입이 닫혔다.
 맞는 말이다.
 지금 드래곤을 건드려 놓아 좋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드레테스트 프로젝트의 행방이 알려지는 것보다는 지금의 선택이 나았다. 만약에 드레테스트 프로젝트를 눈치 채는 순간 인간이나 마계, 천계, 정령계 할 것 없이 자신들을 공격할 테니 말이다.
 그때 레켄의 등 뒤에 있는 그림자 같은 남자의 말이 들려왔다.
 “그나저나 프란티스의 아들에 대한 건 어떻게 됐는지 저희 마스터가 궁금해 하십니다만······.”
 “제가 조사해 본 결과 그 아들이라는 자도 자신의 아버지를 찾고 있는 것 같더군요.”
 “흐음······.”
 “그래서 일단은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레켄의 말이 끝났고, 잠시 후 그 남자의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참으로 착한 척을 하시는 것 같군요.”
 “무슨 말인가요?”
 꾸깃.
 도발적인 그 말에 레켄은 인상을 구겼고, 남자는 여전히 비웃음이 가득한 어조로 말하였다.
 “만약에 저였다면 그렇게 판단될 시 그 아들이라는 놈의 피를 이용해서 프란티스라는 놈을 데리고 왔을 겁니다.”
 “······.”
 “그리고 목은 누구든지 볼 수 있는 높은 곳에 걸어 두었을 거고요.”
 “······.”
 “그러면 올 것 같지 않습니까? 프란티스라는 놈이 말입니다.”
 잔인한 말을 서슴없이 하는 남자.
 하지만 그 말을 듣는 레켄의 얼굴에도 변화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굳이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아, 물론입니다. 신경은 안 쓰죠. 하지만 너무나도 밋밋해서 말씀드린 거죠.”
 “······.”
 “어서 드레테스트 프로젝트를 완성시켜야 되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이야기는 잘 알아들었으니 이제 용건이 끝났다면 돌아가 주시지 않겠습니까. 혼자 있고 싶군요.”
 “뭐, 그러죠.”
 그 말과 함께 순식간에 인기척이 사라졌다.
 그러자 레켄은 조용히 눈을 감으면서 중얼거렸다.
 “제로스, 하필 왜 당신이라는 존재가 프란티스의 아들인 건가요.”
 믿을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들려오던 남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너무나도 청초한 목소리, 확실히 여자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7장 테로이
 
 
 
 “······.”
 “······.”
 나와 에르니 사이에 미묘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난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서든 풀기 위해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하. 조금 상황이 그러네요.”
 “네.”
 “······.”
 “······.”
 하지만 또다시 어색해졌다.
 아악! 왜 크로센트 님은 갑자기 나타나서 마구 휘젓더니 그대로 사라져 버리느냔 말이다! 에잇!
 하지만 이렇게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그럴수록 그 영감탱이와의 격차가 벌어지니 말이다.
 우선 아쉬운 대로 쟁반이를 교통수단으로······.
 하지만 이런 나의 생각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에르니, 쟁반이는요?”
 “저도 잘······.”
 쟁반이의 모습이 안 보였던 것이다.
 이 자식, 필요 없을 때는 그렇게 졸졸 따라다니더니 그나마 좀 쓸모가 생기니 사라지는 건 뭔 심보냐!
 
 한편 쟁반이는······.
 ―오우 베리 굿! 내가 누군 줄 알아? 최초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고 불리던······.―
 “꺅!”
 “재, 쟁반이······!”
 “말도 안 돼!”
 ―감동하지 마!―
 지나가던 여자들에게 공포를 선사해 주면서 껄떡대고 있었다.
 
 “일단 제게 조금의 여유가 있으니 텔레포트를 이용하는 건 어떨까요?”
 그때 절망에 허우적거리던 내게 에르니의 제안이 들려왔다.
 하지만 저 제안은 이루어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텔레포트의 규칙을 아시잖아요.”
 “아.”
 “모습을 감추면 안 된다.”
 “······.”
 그렇다. 범죄자가 텔레포트를 사용하는 것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반드시 얼굴을 들이대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난 ‘삐익!’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물론 내가 그런 ‘삐익!’ 해야 하는 일을 저지른 적은 없지만, 우리 아버지라고 불리는 영감탱이가 그런 짓을 해 놨다.
 그리고 그 영감탱이랑 너무나도 흡사하게 생긴 내 외모 때문에 충분히 오해를 살 만하고 말이다.
 저번 일을 떠올리면 대충 이해가 갈 듯싶다. 하아!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가고, 이대로 나에게는 패배만이······.
 “······!”
 그때 내 머리를 지나가는 한 가지 생각.
 그래, 그놈이라면 잘하면 비밀리에 텔레포트를 사용하게 해 줄 수도 있어!
 난 그런 생각에 나도 모르게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에르니, 잘하면 될 것 같아요.”
 “······?”
 “텔레포트요!”
 
 인기척이 아예 끊긴 골목길 안.
 난 그 안에서 조용히 눈을 감은 채 말하였다.
 “삐구루!”
 “······.”
 물론 갑자기 내가 이런 이상한 소리를 하자 에르니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건 엄연히 암호여서 말이다. 아무튼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남자가 나타났다.
 “지랄 염병을 해라.”
 “요오, 오랜만!”
 우리처럼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에게 난 반가운 어조로 말했다.
 “보고 싶었어.”
 “뭔 목적이냐?”
 “······.”
 “네놈이 남자에게 그런 미친 소리를 하는 걸 보면 뭔가 목적이 있다는 거지.”
 “······.”
 쳇, 눈치도 빨라.
 어차피 저 자식에게 뱅뱅 돌려 말하는 건 쓸데없는 짓이니까 본론부터 말하자.
 “테로이, 너 텔레포트 좀 비공개적으로 사용 가능함?”
 “왜 텔레포트를 비공개로······?”
 테로이는 내게 무언가 물으려다가 뒤에 조용히 있는 에르니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도 아저씨 따라 납치 도주?”
 “난 그런 짓 안 해.”
 “지나가던 개가 짖는 소리 하네.”
 난 그 말에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난 접었거든? 그리고 이제 순수해질 거거든?”
 “풋! 차라리 아저씨가 순수해졌다는 말을 믿으라면 믿겠다.”
 “······.”
 아니, 기분 나쁘게 왜 내가 그 영감탱이보다 더 저질로 취급되느냔 말이다!
 게다가 왜 아는 사람마다 내가 순수해지겠다고 하면 개소리로 치부하느냔 말이다. 제길!
 그렇게 나의 과거가 타락했었나? 난 나름대로 순수하게 산 것 같은데, 흐흑!
 스윽.
 그때 테로이는 갑자기 후드를 벗어 버리더니 한마디 했다.
 “더워 죽겠네, 젠장! 후드는 짜증나.”
 “동의.”
 그 인간 때문에 요새 후드 생활을 자주 해서, 후드라는 게 얼마나 짜증나게 하는지 잘 아는 나로서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에르니의 입에서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테, 테로이 왕자님?!”
 엥? 뭐, 테로이 왕자님?
 난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에르니를 바라보았고, 테로이는 에르니를 보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너 누군데 나 알아?”
 “저, 저는······.”
 그 말에 에르니는 다급하게 후드를 벗으면서 한쪽 무릎을 꿇더니 말했다.
 “데리타이튼 집안의 차녀, 데리타이튼 에르니라고 합니다.”
 “아, 에르니?”
 에르니의 인사에 테로이는 아는 척을 하며 그녀를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대륙 최고의 미녀라는 얘기가 거짓은 아니었나 보네.”
 “가, 감사합니다.”
 그 말에 에르니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다 그놈이 나를 보더니 말하였다.
 “이번에는 대륙 최고의 미녀를 낚아서 도주 중이군.”
 “아니라고 했잖아!”
 “안 그러면 비밀리에 텔레포트를 사용하게 해 달라고 할 일이 없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인데?”
 “납치된 에르니의 언니를 찾으려면 그 영감탱이를 찾아야 돼서 그래. 아니, 그것보다 하나 물어볼 게 있다.”
 “······?”
 그래, 진짜 물어볼 게 있다.
 난 진지하게 말했다.
 “너 언제부터 왕자였니?”
 “처음부터.”
 “아니, 언제 진짜 왕자를 암살하고 거기서 위장하는 중이냐고.”
 “나 진짜 왕자인데?”
 “너, 미쳤지?”
 “나 진짜 왕자야, 인마. 그것도 제1황태자!”
 “······.”
 “한마디로 내가 머지않아 이 제국의 국왕이 된다는 말이지.”
 “······.”
 난 그 말에 조심스럽게 경직되어 있는 에르니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에르니에게 물었다.
 “사실?”
 “사실이에요.”
 즉시 대답이 나왔다.
 난 그 말에 절망에 어린 표정을 지으며 한마디 했다.
 “머지않아 이 제국이 망하겠군.”
 “무슨 의미야, 이 자식아!”
 “알아서 풀이해 봐.”
 “······.”
 저런 막 나가는 놈이 이 나라의 황태자라니, 안 봐도 미래가 훤하다.
 
 한편 크로센트가 애타게 찾고 있는 그녀 아리아는······.
 “여기가 어디일까······.”
 길을 잃어서 거리를 배회 중이다.
 
 어찌 됐든 다시 주목적으로 돌아가서, 난 차근차근 지금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그놈은 나를 빤히 보더니 말했다.
 “역시 녹슬지 않았어.”
 “또 무슨 이상한 소리 하려고?”
 “아니, 아저씨를 팔아넘기면서 최고의 미녀를 꼬여 내는 너의 기술.”
 “······.”
 “안 봐도 모든 게 나와. 일단 넌 언니를 납치해 간 아저씨를 찾아 준다는 이유로 에르니에게 달라붙었지.”
 “······.”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넌 같이 다니며 그 잘난 입으로 중얼거리겠지.”
 “······.”
 “그렇게 서로가 뜨거워지고, 마지막으로 아저씨를 포획하면 넌 목적 달성인 거지.”
 “······.”
 “어때, 내 말이?”
 이런 미친! 제발 좀 믿어 달라고!
 난 진짜 그런 불순한 마음으로 에르니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고!
 난 진심으로 순수한 존재가 되려고 하는데 도대체 왜 자꾸 주변에서는 날 그런 식으로 만드는 거냐?
 그때 갑자기 테로이가 에르니를 불렀다.
 “에르니.”
 “네?”
 “저 제로스 자식이 너를 도와줄 때 뭐라고 했지?”
 “그, 그건······.”
 “사실대로 말해 봐. 괜찮아.”
 “저의 미소가 보고 싶다고······.”
 “······.”
 난 그 말에 굳어 버렸다.
 그리고 다시 나를 바라본 테로이는 싱긋 웃더니 말하였다.
 “이래도 순수해진다고 구라 깔 거야?”
 “그, 그건······.”
 “이렇게 부인할 수 없는 멘트를 치고?”
 “이, 이건 습관성이야.”
 “풋! 구라도 구라 같은 구라를 쳐야지. 에르니.”
 “네?”
 그때 테로이는 에르니를 부르더니 나를 바라본 채 말하였다.
 “제로스의 특기가 뭔지 알아?”
 “글쎄요.”
 “제로스, 여기서 밝힐까, 말까? 응?”
 “······.”
 저 자식이 나를 협박하려는 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알아요.”
 “······.”
 “카사노바라고 제로스 님이 직접 말하셨어요.”
 “······!”
 그 말에 테로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난 여유로운 모습과 함께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나의 마음이 진실이라는 걸 알겠지? 만약에 내가 에르니에게 불순한 마음이 있었더라면 정체를 말했겠어?”
 “······.”
 크크. 이제는 내가 순수해지기 위해 노력한다는 걸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렇군.”
 “······?”
 “새로운 기술이군.”
 이건 또 무슨 개소리?
 테로이는 자못 굳은 얼굴로 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네놈의 신기술, 너의 비밀을 말하는 척하면서 그 비밀로 동정심을 유발함과 동시에 순수해지겠다는 구라로 여자를 꼬이는 신기술.”
 “······.”
 “더 발전했군.”
 저 자식, 도대체 나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된 거야!
 
 그냥 포기하자.
 저 자식에게는 더 이상 순수해지겠다는 말 안 한다.
 아무리 해 봤자 나에 대한 인식이 너무 우울해서 절대 안 믿는다. 그냥 텔레포트에 대한 이야기나 하자.
 난 그런 생각과 함께 테로이를 불렀다.
 “황태자.”
 “님은 안 붙이냐?”
 “즐.”
 “이런 싸가지 없는 자식을 봤나!”
 내가 왜 네놈한테 ‘님’을 붙이냐.
 “황태자라면 당연히 비공개 텔레포트 가능한 거지?”
 내 질문에 테로이는 귀찮다는 표정을 짓더니 말하였다.
 “물론 가능하지. 그건 일도 아니고. 아니, 그것보다 돈부터 갚지?”
 “엥?”
 돈? 뭔 돈?
 돈을 갚으라니 무슨 말인 게냐?
 내가 언제 네놈한테 돈을 빌렸다고?
 하지만 잠시 후 테로이의 충격적인 말이 이어졌다.
 “아저씨가 빌려 간 4,800억 골드 갚아.”
 “······.”
 “참고로 우리 제국 1년 예산의 3분의 1이야. 아저씨가 빌려 간 바람에 지금 재정이 흔들려.”
 “······.”
 “어서 갚길 바람.”
 난 어이가 없었다. 그 영감탱이가 빌려 간 액수 때문에 말이다.
 돈의 단위는 골드, 유버, 레슨 이렇게 셋으로 나뉘는데 그중 골드가 제일 큰 단위이고, 1골드는 평민 100명 정도가 한 달간 생활비로 사용할 수 있는 금액이다.
 그런 돈을 4,800골드도 아니고 4,800만 골드도 아니고 4,800억 골드?
 “······.”
 이 인간, 심히 미친 게 분명하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액수를 빌려 가다니!
 아니, 그것보다 저 자식 아까부터 이상한 소리를 하는데······.
 “왜 그 영감탱이가 빌려 간 돈을 내가 갚아야 하는데?”
 “······?”
 내 말에 테로이는 의문 섞인 표정을 짓더니 충격적인 얘기를 꺼냈다.
 “네가 빌려 주라며.”
 “······.”
 이건 무슨 개뼈다귀 구르는 소리냐?
 내가 빌려 주라고 했다고?
 그것도 다른 존재도 아닌 그 망할 영감탱이를 위해서?
 그때 테로이는 문서 하나를 꺼내더니 내게 들이댔다.
 그 문서에 적힌 내용은 보자면······.
 
 제가 갚을 테니 우리 사랑스럽고 깜찍한 아버지한테 돈을 마음껏 빌려 주세요.
 ―제로스
 
 “······.”
 거기에는 분명 내 필체로 저런 미묘한 내용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내가 봐도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내 글씨.
 그렇지만 저건 결코 내가 쓰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영감탱이를 ‘사랑스럽고 깜찍한 아버지’라고 표현하는 것은 내가 미쳤어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건 절대 내가 쓴 게 아니다.
 게다가 이것은 아리아 사건과도 흡사, 아니 동일했다.
 한마디로 또다시 나의 글씨체를 이용해 이런 짓을 한 것이라는 소리.
 “으악! 제길!”
 이 영감탱이가 지금 내 글씨로 무슨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거냐?!
 확실한 것은 남의 글씨체로 계속해서 도용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거다. 제길!
 그때 테로이의 한마디가 들려왔다.
 “어서 돈 갚으라고 말하고 싶음.”
 “저기, 테로이.”
 “······?”
 “그거 내가 한 거 아니다?”
 “그럼 누가 한 건데?”
 “난 아님.”
 “그럼 이 글씨는?”
 “그 영감탱이야.”
 “아저씨?”
 “정답.”
 다행히도 나의 말을 바로 알아듣는 테로이, 참으로 고맙구나.
 하지만 그런 나의 감사 인사도 잠시, 그놈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한마디 하신다.
 “지랄 염병을 해라.”
 “······.”
 “분명 이건 네 글씨다.”
 “······.”
 그 말에 순간적으로 다물어진 나의 입.
 그래, 그건 인정한다. 그거 내 글씨 확실하다.
 하지만······!
 “이거 내 글씨 맞긴 한데 내가 쓴 건 아니야.”
 “······.”
 나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뜨는 테로이.
 그러더니 그는 거침없이 막말을 하신다.
 “어디서 그딴 미친 구라를 내게 까는 거냐?”
 “진실이거든?”
 “진실 좋아하네! 이 삐리리 같은 자식아, 내가 그런 거에 속을 정도로 바보인 줄 아냐?!”
 너무 상스러운 말이어서 모자이크 처리를 해 봤다.
 정말 오늘에서야 안 사실이지만, 황태자라고 불리는 놈이 저런 막말의 대가라니. 그리고 저런 놈이 황제가 되다니, 정말 이 제국의 미래가 안 보인다.
 “정말 내가 안 적었어.”
 “네가 안 적었으면 아저씨가 네놈 글씨로 조작했다고?”
 “바로 그거지.”
 정답이다. 난 안 했다.
 그러니까 그 영감탱이가 위조한 짓거리라는 결론이 나오는 거다.
 하지만 테로이는 나를 미쳤다는 듯 보더니 말하였다.
 “넌 인간이 남의 필체를 이렇게 완벽하게 복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아니.”
 “그런데 그런 개소리를 내게 함?”
 “······.”
 물론 그렇다. 인간이라면, 아니 어떤 존재라고 하더라도 타인의 필체를 이렇게 완벽하게 복사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영감탱이는 인간이 아니거든.”
 “······.”
 “괴물이야. 충분히 하고도 남아. 그 점에 대해서는 너도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
 나의 말에 말문이 막힌 테로이.
 저 자식도 그 인간의 실체를 어느 정도 알고 있기에 말문을 열지 못했다.
 잠시 후 테로이는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 좋아. 백번 양보해서 아저씨가 위조했다고 쳐. 하지만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아저씨를 만나야겠어.”
 “······?”
 그 말에 갑작스럽게 불길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설마? 그래, 아닐 거야.
 황태자라면서! 넌 무지 바쁘고 무지 귀하신 몸이라고!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테로이의 말이 들려왔다.
 “내가 직접 너를 따라가겠어.”
 “거절.”
 난 1초 만에 거절했다.
 그렇지만 테로이는 싱글 웃으면서 말했다.
 “텔레포트?”
 “······.”
 
 “근데 프란티스 님, 이렇게 많은 돈이······.”
 엘렌은 엄청난 금액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프란티스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프란티스는 미소와 함께 말했다.
 “아름다운 엘렌 양을 위해서라면 제가 모아 둔(?) 이 돈의 액수 따위는 상관없어요.”
 “프, 프란티스 님.”
 언제 모아 놓았는지 모르겠다. 제로스의 이름을 팔아서 빌려 온 주제에 말이다.
 하지만 프란티스는 당당했다.
 제로스를 살리기 위한 ‘그것’을 찾기 위해 빌려 왔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4,800억 골드는 좀······.
 
 크로센트 님이 달라붙지 않아서 축복이라고 생각한 게 얼마나 됐다고, 크로센트 님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더 미친 놈 하나가 달라붙었다.
 그 이름하여 벨르나이크 제국의 황태자이자 막말의 대가 ‘테로이’.
 지금은 저 자식 덕택에 텔레포트를 이용해서 케스트 제국으로 순식간에 왔으니 고마워해야 정상이지만, 그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 벨르나이크 제국의 황태자를 무조건 데려오라고 했다면서?”
 “우아, 이건 무슨 일이야?”
 “그러게. 같은 제국 자존심 구기게 이런 요청을 한 거 보니 뭔가 엄청난 일인 것 같아.”
 “도대체 무엇일까?”
 지금 케스트 제국은 시끌시끌한 상태였다.
 이유를 간단하게 요약해서 말해 주자면, 벨르나이크 제국은 지금 케스트 제국에 무언가를 요청한 상태다.
 그 무언가는 지금 내 옆에서 딴청을 피우고 있는 테로이라는 황태자의 수색 협조이고 말이다.
 제국에서 다른 제국에 이런 부탁을 하는 일은 드문, 아니 역사상 처음일 거다. 그만큼 지금의 사건은 어마어마한 일이었다(특히 치욕이라고도 볼 수 있는 황태자에 관련된 일이다).
 난 테로이를 보면서 물었다.
 “너, 뭔 짓을 하면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니?”
 “난 묵비권을 행사하겠음.”
 “······.”
 “더 이상 묻지 마.”
 “······.”
 자기는 묵비권을 행사하겠다지만, 모든 게 빤히 보였다.
 지금 이 정도로 상태가 악화된 거라면 완전 중죄 중의 중죄를 저지르고 도망 나온 게 분명했다.
 그리고 덤으로 이제는 저 자식의 공권력도 사용 불가라는 소리지.
 난 그런 생각이 들자 에르니를 보면서 웃은 뒤 말했다.
 “에르니, 이제 우리 둘이 출발하죠.”
 “네?!”
 “뭐시라?”
 나의 말에 에르니는 놀라고, 테로이는 기겁을 했다.
 난 테로이를 향해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절대 네가 공권력을 사용하지 못해서 외면하는 건 아냐.”
 “······.”
 “그저 난 범죄자(?)랑 다니기 싫을 뿐이야.”
 “······.”
 “너랑 같이 다니게 되면 아무래도 그 영감탱이 잡는 데 제한이 걸릴 테고 말이야. 그러니 이런 나를 야속하게 생각하지 말아 주길 바랄게. 그럼.”
 난 그 말과 함께 당황하는 에르니의 팔목을 이끌고 냉정하게 고개를 휙 돌렸다.
 “이 나쁜 놈! 단물만 빼먹고 나를 버리는 게냐!”
 먹은 단물도 없는데 뭔 소리야?
 그리고 방금 전 내가 한 말은 진실이다.
 저런 대범죄자(?)랑 다니게 되면 안 그래도 그 영감탱이의 포스터 때문에 행동에 제한이 걸린 나에게는 더 치명적인 일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다.
 “에르니, 감히 제국의 황태자인 나를 버릴 셈인가?!”
 “······.”
 갑자기 나에게서 에르니에게로 넘어가는 테로이.
 그 말에 요즘 자주 보여 주는 그녀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난 한마디 속삭였다.
 “생까요.”
 “······.”
 “무시해도 됩니다.”
 “그게······.”
 “무시하세요. 저런 미친 황태자는 버려도 되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나의 달콤한 말에 더욱 당황하는 그녀.
 그것도 잠시,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태자님만 놔두고 가기에는······.”
 “······.”
 “맞아! 지금 나를 버리는 건 제국을 배반하는 거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하아, 젠장······.”
 귀찮기는 하다. 하지만 에르니가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곧 죽어도 친구라는 놈이니까 어쩔 수 없나?
 그렇다고 그냥 받아 줄 수는 없지.
 “그럼 지금 이 상황이 연출된 이유나 들어 보고 싶은데?”
 “······.”
 테로이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사실 지금 더욱 닦달해서 알아보고 싶지만 일단 그건 보류한다.
 왜냐하면······.
 “테로이, 너 어둠침침한 애들하고 사귀냐?”
 “난 그런 애들 상대 안 해.”
 “그런가?”
 안 봐도 짐작이 간다. 이 영감탱이가 또 뭔가 사고를 쳤다고 말이다. 하아!
 젠장, 왜 뒷감당은 항상 내가 해야 하는 거냐.
 난 그런 생각과 함께 순식간에 테로이 허리춤에 있는, 모양새가 걸작인 검을 슬쩍하면서 말했다.
 “잠시 빌리마.”
 “······?”
 “······?”
 나의 이런 모습에 의아해 하는 테로이와 에르니.
 난 그런 그들을 향해 친절하게 한마디 해 주는 걸 잊지 않았다.
 “숙녀한테 피 냄새를 맡게 하는 건 정말 저질이거든.”
 
 제로스 일행이 모여 있는 곳에서 약 10km쯤 떨어진 지점에 동굴이 하나 있다.
 거기에는 검은색의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 20명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늘 그들의 목표는 제로스라는 남자의 목이다.
 그 남자의 목을 이용해서 프란티스라는 인간을 불러들일 예정인 것이다.
 그렇게 목표를 위해 단검을 점검하고 있던 그 순간 동굴에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아, 그 영감탱이가 뭔가 일을 크게 벌였나 보네요. 이런 음침한 분들이 저를 향해서 살기를 내뿜는 걸 보면 말이죠.”
 “······!”
 “······!”
 “······!”
 “······!”
 난데없이 등장한 제로스의 모습에 어쌔신들은 모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자신들과 목표의 거리는 분명 10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아직 암살을 하기 위해 출발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10km나 떨어진 곳에서 살기를 감지하고 자신들을 찾아왔다?
 이건 말도 안 된다.
 드래곤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조차도 불가능하다. 절대 말이다.
 제로스를 멍하니 바라보던 어쌔신들은 그들이 평범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금세 냉정함을 찾았고, 순식간에 제로스를 포위했다.
 “척살해라.”
 무시무시한 말이 떨어졌음에도 제로스는 오히려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적으로 판단해도 되겠죠?”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제로스는 테로이에게 빌린 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그었고 말이다.
 단 한 번의 칼질이었지만 그 결과로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초래되어 버렸다.
 단순히 검을 허공에 휘둘렀을 뿐인데 제로스의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어쌔신들의 목과 몸이 분리되어 버린 것이다.
 어느새 제로스는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테로이의 검을 검집에 넣고 인상을 찡그렸다.
 “개인적으로 피 냄새는 좋아하지 않지만, 필요하다면 별수 없죠, 뭐.”
 
 “도대체 무슨 짓을!”
 레켄은 너무나도 흥분을 해 버렸다.
 자신이 맡고 있던 일을 자신의 허락도 없이 독단적으로 처리한, 그림자라고 불리는 남자 때문이다.
 그 말에 그림자라고 불리는 남자는 담담하게 말했다.
 “너무 꾸물거리셔서 제가 도와드리려고 한 거죠.”
 “······.”
 “보는 제가 너무 답답해서 말이죠.”
 “그렇다고 제가 전담해 온 일을 이렇게 허락도 없이 진행하는 겁니까?”
 레켄은 자신의 허락도 없이 프란티스의 아들인 제로스의 목을 가져오기 위해 20명의 어쌔신을 파견한 것에 대해 심한 분노를 느꼈다.
 레켄의 말에 남자는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어차피 실패했으니 그만 아닌가요?”
 “무슨 말을 그런 식으로!”
 레켄은 너무나도 당당하게 말하는 남자를 향해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레켄에게 남자는 한마디 톡 쏘듯이 말했다.
 “자꾸 망각하시는 것 같은데, 지금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엘렌이라는 분을 데려와야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
 “그런데 그 남자의 아들에 대한 정보 입수 후 당신이 미적거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나요?”
 “······.”
 “그래서 제가 특별히 도움을 드린 건데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 되어 버렸군요.”
 “······.”
 “제가 뽑은 정예 어쌔신 20명이 단 일격에 목과 몸이 분리되었습니다. 피도 튀기지 않고 말이죠. 무슨 방법을 사용하면 자신을 둘러싼 그들을 일격에 그런 식으로 만들 수 있는 걸까요?”
 “······.”
 갑작스럽게 질문하는 남자.
 하지만 알고 있는 게 없는 레켄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제가 알기로 이 정도의 실력자는 흔치 않은데 말이죠.”
 “······.”
 “이런 엄청난 자가 적이 된다는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썩 좋지 않군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요?”
 “뭐, 어서어서 일을 진행시키자는 거죠. 그런 사적인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요.”
 “······.”
 “이 정도면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마스터에게는 보고하겠습니다.”
 스윽.
 그 말과 함께 남자는 자신의 호칭처럼 그림자가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레켄은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레켄은 방금 전까지와 달리 남성의 목소리가 아닌 여성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하필 제로스 당신이······.”
 
 갑자기 이상한 애들이 방문하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되기는 했지만, 다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이어 나가자면 난 제국의 황태자라는 놈이 이렇게 쫓기는 이유를 알고 싶다.
 그래서 난 테로이에게 순수하게 물었다(절대 버리고 간다는 협박 따위는 하지 않았다).
 어찌 됐든 하나씩 밝혀지는 모든 진실.
 그 진실은 말 그대로 놀랍다 못해 완전 미친 진실이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테로이는 성 안에서 할 짓 없이 빈둥거리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 황태자는 배울 게 많은 직위다. 예의라든가 격식, 기타 잡다한 모든 걸 말이다. 그런 황태자가 빈둥거리다니, 저 자식이 왜 이리 막장 황태자인지 알 수 있을 거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그는 일상이 너무나도 따분했다.
 좁은(?) 성 안에서는 노는 것도 마땅찮았단다.
 그러던 중 엄청 흥미가 유발되는 걸 발견했다.
 그건 바로 테로이의 아버지, 즉 벨르나이크 황제가 무척이나 아끼는 석상 하나.
 황제를 아는 사람이라면 왕비보다도 더 사랑한다는 얘기를 할 정도로 애지중지한다는 석상이었다.
 그 사실을 우연히 안 테로이는 갑자기 호기심이 일었고, 그는 몰래 아버지 서재에 들어가 그 석상에 손을 댔다.
 자기는 빌렸다지만 상대방의 동의 없이 가져오는 게 빌린다는 의미에 적용 안 되니 패스.
 어찌 됐든 그렇게 가져온 석상을 마구 살펴보던 테로이.
 하지만 아무리 봐도 보통 석상과 다를 게 없었다.
 크기도 그리 큰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렇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석상을 자기 아버지가 그리 애지중지할 이유는 없다는 생각에 그는 그것에 무언가 엄청난 비밀이 있을 거라 여기고 열심히 살폈다.
 그런 도중에 실수(?)로 깨져 버린 조각상.
 그게 지금까지의 스토리다.
 난 어색하게 웃고 있는 테로이를 보면서 물었다.
 “정말 실수냐?”
 “무, 물론.”
 “일부러 깨부순 건 아니고?”
 “아, 아니야! 실수야!”
 “······.”
 실수 아니군. 고의적으로 궁금해서 그 석상을 부순 게 분명하다.
 이런 미친 황태자 같으니!
 아무리 궁금해도 그렇지, 자신의 아버지가 아끼는 석상 안에 뭐가 있을까 하고 깨 보는 황태자 놈은 저놈밖에 없을 것이다.
 테로이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말했다.
 “이제 모든 진실을 알았으니 나와 동행해라!”
 “이제 모든 진실을 알았으니 널 데려갈 수가 없구나.”
 “그, 그건 무슨 소리야!”
 “걸리면 나와 에르니까지 옵션으로 묶여 들어가잖아?”
 “······.”
 “그러니 같이 다닐 수가 없구나.”
 “마, 말이 다르잖아!”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
 “······.”
 방금 전까지 데려가려고 했지만, 저 자식이 쫓기는 이유를 알고는 그런 마음 싹 사라졌다. 그리고 거듭 말하지만, 흉악한(?) 범죄자를 데리고 가다가 잡히면 괜히 나와 에르니에게 큰 피해가 올 것이다.
 그러니 미리 버리고 가자.
 “너, 너 이러면 안 돼!”
 “되거든?”
 “나 제국의 황태자야, 인마!”
 “황태자 범죄자겠지.”
 “······.”
 “그럼 바이, 바이.”
 난 에르니를 이끌고 당장 사라지려 했지만, 그 순간 그놈의 한마디가 나의 발을 붙잡았다.
 “나를 데려가면 황태자의 이름으로 소개팅 200번 시켜 주마!”
 “······.”
 “200번이야. 귀족이든 뭐든.”
 움찔!
 내 몸이 움찔거렸다.
 지금 무슨 소리에 흔들리는 거냐!
 저런 짐승 같은 제안에 내가 왜 흔들려야 돼!
 난 분명 순수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 그런데 저런 저질적인 제안에 왜 흔들린단 말인가!
 이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될 비극이다.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거절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무언가 알 수 없는 게 나를 붙잡았다.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 온 카사노바의 본능?
 그런 미묘한 게 말이다.
 그리고 순식간에 패닉 모드에 들어가는 나.
 이러지 말자, 제발. 여자 이야기가 나오면 흔들리는 내가 더 이상 싫다. 이제는 당당하게 거부할 수 있는 나를 원한다.
 “소개팅 300번!”
 “윽!”
 “소개팅 400번!”
 “으악!”
 “소개팅 500번!”
 “크악!”
 500번 나왔다.
 500번이면, 500번이면······!
 아악, 이건 아니야! 절대 아니야!
 순간 심장이 아파 와 난 곧바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내 옆에서 당황하고 있는 에르니를 한 번 본 뒤 다시 테로이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거절한다.”
 “이런 미친!”
 나의 거절에 테로이는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난 해냈어!
 드디어 거절했어! 여자와 관련된 일을 말이다.
 스르륵.
 “제, 제로스 님?!”
 “야!”
 그때 내 몸이 서서히 무너져 갔다.
 크윽! 너무나도 큰일을 해 버려서······.
 
 나란 인간, 정말 미치겠다.
 여자에 관련된 일을 거절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쓰러지다니.
 이건 카사노바 바이러스(······)가 내 몸에 얼마나 깊숙이 침투했는지 여실히 보여 주는 상황이다.
 이런 내 모습에 테로이는 한심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네놈의 순수해지겠다는 마음은 이제야 알겠는데, 친구로서 한마디 하마. 포기해라.”
 “······.”
 “너의 그 본성은 사라지지 않아.”
 “······.”
 “솔직히 말해서 네가 에르니를 도와주는 이유가 무엇일까? 단지 아저씨의 잘못 때문? 아니야. 내가 듣기로는 에르니의 미소를 보기 위해서라는 멘트를 쳤다지?”
 “큭.”
 사실이다. 또 그런 작업 멘트를 친 거 말이다.
 다시 테로이의 냉정한 한마디가 들려왔다.
 “한마디로 네가 에르니를 도와주는 근본적인 이유가 일단 여자이기 때문이라는 거다.”
 “······.”
 “만약 남자였다면 네 원래의 목적인 어떤 남자를 만나서 순수해지겠다는 결심을 그렇게 쉽게 버리고 도와줬을까?”
 “······.”
 “절대 아니야. 그러니 넌 한마디로 짐승 본능이야.”
 “큭.”
 난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애써 부인하고 있었지만 테로이 말처럼 난 그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에르니가 여자가 아닌 남자였다면 내가 이렇게 귀찮은 일을 했을까? 세상에서 제일 값지다는 아름다운 여자의 미소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절대 아니다. 난 남자 따위의 미소는 보고 싶지도 않으니까 말이다.
 그때 내게 슬며시 다가온 테로이는 나를 마주 보더니 말했다.
 “자, 그러니 이제 에르니를 위해서 아저씨 찾는 건 임시 중단하고, 나를 위해 한 국민으로서 위대한 황태자를 제대로 보필······.”
 그대로 날아서 하이 킥!
 
 하마터면 속을 뻔했다.
 자기를 위해서 임무를 변경하라는 말을 저렇게 뱅뱅 돌려서 하다니, 간악한 자식!
 하지만 난 다행히도 넘어가지 않았어. 휴우.
 어서 원래대로 그 영감탱이를 만나서 풀 건 풀고 내 목적을 향해 달릴 거다.
 절대 네놈에게 시간 따위를 투자하지 않아.
 그때 멍든 오른쪽 눈을 달걀로 문지르던 테로이가 분하다는 듯 외쳤다.
 “너 감히 내 옥체에 이런 걸 내다니, 정말 개념이 없구나!”
 “버리고 간다.”
 “헤헤, 개념이 많으십니다.”
 강하게 나오다가도 버리고 간다는 말에 테로이는 바로 순수(?)해졌다.
 사실 난 아직도 저 자식이 황태자라는 걸 믿고 싶지 않은 심정이다. 저런 놈이 왕좌에 오른다면 하루 만에 말아먹을 게 분명해. 휴우.
 내가 그렇게 애국심이 많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살던 곳이 하루 만에 어이없게 무너지는 건 원하지 않아서 말이다.
 그때 테로이가 궁금한 듯 내게 물었다.
 “여기서 기다리면 아저씨가 오는 거야?”
 “몰라.”
 “······.”
 “올지 안 올지는 하늘에 맡길 뿐.”
 “잠깐! 너 아무런 생각도 없이 케스트 제국으로 온 거냐?!”
 “아니. 추격할 수 있었는데 어떤 미친 쟁반 때문에 일이 꼬이는 바람에 그 영감탱이가 갈 유력한 나라 세 곳 중 하나를 랜덤으로 찍어서 온 거거든.”
 내 대답을 듣자 곧바로 멍해지는 테로이.
 어쩌겠는가. 그 간악한 영감탱이는 이미 자신의 흔적을 다 지웠을 게 분명하다.
 그저 운 좋게 목적지가 케스트 제국이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그때 다시 정신을 차린 테로이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여기로 안 오면?”
 “배드 엔딩이지 뭐.”
 “······.”
 “아니, 엔딩까지는 아니고 뭐 막막해지는 거지.”
 절대 포기하지는 않는다. 에르니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를 위해서라도 그 영감탱이는 꼭 잡아야 한다. 내 이름과 글씨로 더 이상 만행을 저지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말이다.
 
 
 
 
 
 8장 고갈
 
 
 
 어느새 시간이 흘러 밤이 되어 간다.
 그리고 밤이 되어 가자 테로이의 한마디도 들려온다.
 “아, 피곤하다, 피곤해. 제로스, 어서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방 잡자.”
 “······.”
 “아, 참고로 별 다섯 개짜리 호텔 아니면 취급 안 함. 난 황태자니까.”
 “······.”
 난 그 말에 눈을 가늘게 뜬 채 테로이를 바라봤다.
 그러자 테로이는 움찔했다.
 난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면서 말했다.
 “넌 황태자이면서 범죄자인 걸 잊지 마.”
 “······.”
 “그리고 어디서 빌붙은 주제에 별 다섯 개짜리 호텔을 찾고 난리야.”
 “······.”
 “돈을 내준다면 한번 고려는 해 보마. 돈 있음?”
 머뭇.
 돈이 있냐는 물음에 머뭇거리는 테로이.
 그리고 잠시 후 고개를 돌리면서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게 정지되어서······.”
 “그런 주제에 뭔 별 다섯 개짜리 호텔을 찾고 난리야. 참고로 난 땡전 한 푼 없다. 나도 에르니에게 항상 미안하게 얻어먹는 중이거든. 한마디로 너와 난 그냥 조용히 있으면 되는 거다.”
 “알았어, 인마.”
 불만이 가득한 말투지만 어찌할 것인가?
 아쉬운 사람이 떠나야지.
 거듭하지만, 지금 저 범죄자 황태자를 데리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위험을 짊어지고 다니는 거다.
 그 순간, 에르니의 곤란스러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제로스 님······.”
 “왜 그래요, 에르니?”
 “······.”
 그녀는 날 부르고도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여전히 차가운 표정이지만, 이제는 미세한 감정 변화는 읽을 수 있는 단계여서 그녀가 심하게 당황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난 그런 에르니에게 편안한 미소와 함께 말을 건넸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말해요.”
 “그게······.”
 “괜찮아요, 에르니.”
 “······.”
 에르니는 슬쩍 테로이를 보더니 다시 나를 보고는 말했다.
 “자금이 다 떨어졌어요.”
 “······.”
 “······.”
 
 사람에게는 돈이 필요하다.
 숙박을 하든 음식을 먹든 어떤 것을 사든 말이다.
 그만큼 돈이라는 건 중요하다.
 하지만 난 그 중요한 돈이라는 게 사실 한 푼도 없었다. 그저 몸으로 때울 생각으로 출발했으니 말이다.
 그러다 에르니를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역시나 돈이 필요한 상황은 무척이나 많았다.
 그렇지만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인 나에게 돈은 없었고, 그런 나를 대신해서 에르니가 돈을 내주었다.
 한마디로 에르니가 한 달 사용할 비용을 내가 끼어들어서 반으로 잘라먹었다는 거다.
 그뿐 아니라 다시 제국에 도착한 에르니는 돈을 충전해야 했지만,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들 때문에 집에도 들르지 못했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니 지금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
 “······.”
 “······.”
 돈이 없다.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 말도 없다.
 “미안해요.”
 그때 에르니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에 난 고개를 맹렬히 흔들면서 말했다.
 “아니에요! 미안하긴요, 제가 오히려 미안하죠.”
 “제가 이거라도 관리를 제대로······.”
 “절대 아닙니다! 그러니 그런 말 하지 마요.”
 난 차가운 모습에서 미안함을 잔뜩 드러내는 에르니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정말 그녀는 잘못한 게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때 사람 염장 지르는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이건 미안한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야! 나 같은 황태자를 무전여행 시키려는 건 중죄 중의 중죄, 이거야말로······.”
 꾹!
 “으읍!”
 난 에르니에게 개소리를 해 대는 테로이의 입을 순식간에 봉쇄해 버렸고, 잠시 후 웃으면서 에르니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아, 아뇨. 그것보다 황태자님이······.”
 그 순간에도 에르니는 입이 막힌 황태자를 걱정하고 있다.
 왠지 모르게 섭섭해지는 이유는 뭘까.
 “테로이, 지금 너의 상황을 파악해라. 이 범죄자 황태자야, 다시 한 번 그런 소리를 할 시에는 묻어 버리고 가겠음.”
 “······.”
 “진심이야.”
 “······.”
 뭘 잘했다고 괜히 들어와서 저렇게 난리를 피우는지, 원.
 안 그래도 바닥난 돈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머리가 아파지는데 말이다.
 ―내가 왔다네! 음하하하하하하!―
 “······.”
 “······.”
 “······.”
 그때 갑자기 울려 퍼지는 괴이한 목소리에 에르니와 테로이, 그리고 나까지 침묵을 지킨다.
 그 괴이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쟁반이.”
 ―나 보고 싶었던 거야?!―
 “미친.”
 ―그럴까 봐 왔지롱!―
 쟤는 처음엔 자기가 초대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고 미친 소리를 하더니, 요새는 그냥 목적 없이 미친 것 같다.
 하아, 정말 슬프군.
 미친 에고 쟁반을 봐야 하는 내 입장으로서는 정말 슬프다.
 쟁반이는 에르니 앞에 멈추더니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모든 여자들이 나를 애타게 찾았지만, 난 너를 위해서 포기했어.―
 “······.”
 ―굳이 감동까지는 할 필요 없어. 너의 미모는 내 수준에 합당하니까 말이야.―
 “······.”
 ―초대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고 불리던 이 몸의 수준 말이야. 음하하하!―
 무척이나 신기한 광경이다.
 아무리 그녀가 감추려고 해 봐도 쟁반이 앞에서는 그 차가운 포커페이스가 산산조각이 나 버린다.
 다시 쟁반이의 한마디가 들려왔다.
 ―너의 영혼의 외침은 잘 들었어. 자, 내 품에 안겨!―
 “······.”
 ―우헤헤!―
 도대체 쟁반의 어디에 안기라는 거냐?
 아니, 가끔 식당 아르바이트생들이 일 끝나고 쟁반을 안고 있는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넌 너무 크다.
 ―컴 온!―
 갑자기 안기라고(?) 달려드는 쟁반과 그런 쟁반의 행동에 미동조차도 없는 에르니.
 아마도 너무나도 큰 충격으로 굳어 버린 듯싶었다.
 이럴 때 쓰는 방법.
 탁!
 난 날아오는 쟁반이를 잡고는 소리쳤다.
 “정신 사나워, 이 자식아!”
 ―아아아악!―
 그리고 그대로 원형 쟁반을 날려 버렸다.
 원형 쟁반 날리기 대회가 있다면 내가 우승해도 될 만큼 너무나도 멋진 곡선이다.
 
 ―제길, 그렇다고 그렇게 무참하게 내던지다니.―
 구시렁구시렁.
 저 멀리 한 바퀴 돌고 온 쟁반이는 계속 구시렁거렸다.
 “그럼 바닥에 묻히는 걸 원해?”
 ―그냥 잘 날려 준 것 같아.―
 난 그런 쟁반이를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어느 순간부터 미소녀와의 단독 여행은 물 건너간 지 오래고, 웬 떨거지 나부랭이들만 모이고 있다.
 그 영감탱이를 잡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들 말이다.
 아니, 도움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방해만 하지 않아도 무지무지 고맙겠지만, 이미 저 둘 때문에 심각한 방해를 받고 있다. 그것도 아슬아슬하게 위험한 것 말이다.
 ―근데 무슨 고민 있음?―
 그때 쟁반이가 우리를 한 번 살펴본 뒤 내게 물었다.
 저 자식이 약간 미친 쟁반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은근히 눈치 하나는 빠르다.
 난 굳이 감출 필요가 없는 일이기에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금 고갈.”
 ―상거지 된 거?―
 “······.”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상거지라니,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다르다고 하는데 그냥 거지도 아니고 상거지라고 꼭 집어 말하니 정말 비참해졌다. 눈물 날 정도로 말이다.
 그때였다.
 ―그깟 돈 없는 걸 가지고 걱정하기는······.―
 “······?”
 쟁반이는 너무나도 태평하게 말했다.
 그깟이라니! 넌 쟁반이라서 돈의 필요성을 모르지만 나머지는 다 돈이 필요한 존재라고!
 그리고 여행이라는 걸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수이고 말이다.
 하지만 그 순간 쟁반이는 나를 보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하루만 뛰면 재벌 될 거잖아.―
 “······?”
 이건 무슨 소리냐?
 하루만 뛰면 재벌이라니, 어디서 뛰는데?
 쟁반이의 말이 이어졌다.
 ―호. 스. 트. 바!―
 “······.”
 ―네놈 정도의 카사노바라면 하루 만에 뭐.―
 “카사노바 아니라고!”
 접었다는데 왜 자꾸 날 카사노바라고 부르는 거냐!
 “지금 나보고 돈을 받고 여자들을 기쁘게 해 주라고?!”
 ―어.―
 “······.”
 ―이왕이면 너의 그 직업을 살리자는 거지.―
 난 쟁반이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지금은 정말 카사노바를 접었지만(왜 아무도 안 믿는 분위기지?) 아직도 내가 카사노바라 해도 그런 행동은 용납할 수 없다.
 어떻게 여자에게 기쁨을 주면서 돈을 받느냔 말이다.
 그저 여자들의 미소를 보기 위한 순수한 나의 마음을!
 “네가 말한 건 카사노바의 긍지가 아니야!”
 ―풋.―
 “지랄 염병.”
 “······.”
 나의 한마디에 비웃는 쟁반이와 욕하는 테로이.
 테로이는 나를 보더니 미쳤냐는 듯 말했다.
 “카사노바의 긍지 좋아하네.”
 “······.”
 “카사노바의 긍지가 어디 있는데? 여자 잘 꼬시는 게 전부인 카사노바한테 긍지가 어디 있어?”
 “······.”
 “긍지야, 긍지야, 한번 보자.”
 “크윽.”
 난 테로이의 비꼼에 반발을 할 수가 없었다. 다 맞는 말이니까.
 솔직히 말해 내가 말하고도 엄청 무안하다.
 카사노바의 긍지라니, 개소리다.
 하지만 어찌 됐든······.
 “난 그거 안 해!”
 호스트는 사절이다.
 
 
 
 
 
 9장 고대 몬스터
 
 
 
 “실험을 시작하겠습니다!”
 남자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 남자는 연구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실험용 샘플 용기에 담긴 액체를 바닥으로 흘렸다. 잠시 후, 그 액체에서 무언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정말 막막하다. 이렇게 할 일이 없다니······.
 사실 테로이는 범죄자 황태자고, 난 그 영감탱이와 흡사해서 오해를 받기 때문에 마을 활동에 제한이 걸려 뭘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실정이다.
 정말 답답하다.
 그렇게 속으로 마구 한숨을 내쉬던 나에게 신비의 물건이 보였다.
 너무나도 신비해서 미쳐 버릴 것 같은 물건은 바로 목재였다.
 네모난 목재, 건물을 지을 때나 내가 지금 생각해 낸 걸 할 때 많이 사용되는 것 말이다.
 난 슬며시 테로이를 바라보았고, 그런 내 눈빛을 알아차린 테로이는 기겁을 하며 물었다.
 “뭐, 뭐 하려는 거야?”
 “알면서.”
 “나, 난 황태자라고! 자각 좀 해!”
 “황태자는 차력쇼 하면 안 돼?”
 “다, 당연하잖아! 내 몸은 말 그대로 황태자의 몸!”
 “그러니 좀 더 흥미진진한 차력쇼가 되지 않을까?”
 “이 무슨! 이 짐승 같은 자식이!”
 “흐흐흐.”
 난 천천히 다가갔다.
 차력쇼, 일명 인간의 힘을 초월한 무언가의 생쇼를 보여 주는 거다.
 예를 들어 쇠파이프를 목으로 구부린다거나 방금 전에 본 목재를 머리로 연속해서 깨부수는 재주 등등 그런 것을 보여 주는 거다.
 내가 아는데, 테로이 저 자식 조금 비정상적인 맷집을 가지고 있어서 아무런 속임수 없이도 고난이도의 차력을 성공해 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에게 돈을 받을 수 있고, 모든 게 오케이다!
 그래, 순수한 방법으로 많은 돈을 벌 수 있어!
 “자자, 테로이······. 흐흐흐.”
 “지, 진짜 할 거야?!”
 “그럼 가짜로?”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나 황태자야, 황태자!”
 “그러니까 황태자가 차력쇼 하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
 “그러니 차력쇼를······.”
 “······.”
 난 그 말과 함께 테로이에게 다가갔다.
 어차피 범죄자 황태자여서 필요한 데도 없고 오히려 피해만 주던 존재인데, 이런 기회에 필요한 존재로 내가 재탄생하게 만들어 주니 이 얼마나 착한 친구란 말인가?
 하지만 그렇게 내가 테로이에게 접근했을 때였다.
 “꺄악!”
 “저, 저게 뭐야?!”
 “무슨 괴물이야!”
 “살려 줘!”
 “으아악!”
 “제, 제발······!”
 “······.”
 “······.”
 “······.”
 마을 안에서 잔혹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는 분명 케스트 제국의 수도 불란데.
 이런 곳에서 인간의 비명이 들려온다?
 치안이 절대적이라는 제국의 수도에서 비명이라니, 도무지 무슨 일인지 추측조차도 불가능했다.
 그때 에르니가 다급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어서 가 보죠!”
 
 “이건 뭐냐?”
 난 케스트 제국 안에서 일어난 괴현상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바닥에는 너무나도 잔인하게 내장을 온통 드러낸 채 죽은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3미터 이상의 크기를 가진 생전 처음 보는 괴물이 서 있었다.
 나도 <몬스터 도감>이란 걸 읽어 봐서 대충 어떤 몬스터들이 있는지 알고 있지만, 저런 괴상한 몬스터는 정말 처음 본다.
 몸 크기는 그렇다 치자. 그런데 저 커다란 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눈알들은 뭐야?
 도대체 뭐 하는 생물체냐?!
 “이게 뭐지?!”
 “무슨 이런 괴물이······!”
 “알칸, 도대체 저게 뭐냐?!”
 “내가 어떻게 알아, 인마!”
 “미치겠네!”
 “도대체 뭐야!”
 어느새 기사들이 그 괴물을 포위한 채였다.
 그나마 수도여서 그런지 상당히 빠른 시간에 출동한 듯싶었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저 이상한 괴물의 정체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상태인 것 같았다.
 그렇게 그들은 당황스러워하면서도 천천히 괴물을 향해 다가갔다.
 그 순간이었다.
 “크윽!”
 “아악!”
 “내, 내 몸이!”
 “무슨!”
 “노, 녹고 있어?!”
 괴물의 온몸을 둘러싸고 있던 그 눈알들에서 붉은빛이 나오더니 그 빛에 닿은 모든 기사들의 몸이 흐물흐물 녹고 있었다.
 아무리 비위가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인상이 찌푸려질 만한 상황이다.
 에르니는 이미 고개를 옆으로 돌린 상태였다.
 사실 에르니의 무력은 소드 마스터라는 이름답게 강하다. 그건 확실히 내가 인정하는 점이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 연약하다. 얼음 같아 보이는 외모와는 다르게 마음은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은 약한 존재다.
 뭐, 어차피 저런 나부랭이들을 에르니가 상대할 가치는 없으니까.
 난 그런 생각과 함께 괴물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방금 전 눈알 샷으로 봐서 한번 잘못 맞으면 액체처럼 녹은 저분들과 같이 될지도 모른다.
 젠장, 이럴 때는 기본적으로 거리를 잡을 수 있는 검이 있어야 하는데! 쳇!
 “야, 검 안 가져가?!”
 그때 등 뒤에서 테로이의 한마디가 들려왔고, 난 그 말에 인상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못 가져가.”
 “······?”
 “빌어먹을 그 영감탱이, 주입식이어서.”
 “······?”
 내 말을 이해하기는 힘들 것이다.
 카사노바란 우아한(?) 직업이라는 게 그분의 설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에 여자가 있을 경우 검을 사용하면 안 된단다. 검을 사용하면 피가 튀니 안 멋지기 때문이란다.
 나 참, 폼 안 난다고 제한을 걸어 버리다니,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지만 이미 길들여진(?)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정말 미쳐 버리겠어!
 그뿐 아니라 주먹으로 때려잡더라도 최대한 우아하게 개폼은 다 잡으면서 잡아야 하는 게 카사노바의 무술이다.
 별로 실용적이지 못할지는 모르지만 나름대로 힘은 있으니 사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저런 우락부락하고 이상하게 생긴 놈과 격투를 벌이려고 하니 달갑지 않다.
 그 순간이었다.
 ―제로스, 저 자식한테 다가가면 안 돼!―
 “뭔 소리야?”
 갑자기 소리치는 쟁반이를 의아한 듯 바라보자 쟁반이는 진지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크라카우스 사우트, 몸 자체가 산성이야. 주먹이든 검이든 저놈 몸에 닿는 순간 방금 전처럼 되어 버린다고.―
 “호오?”
 한마디로 근접 공격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거냐?
 그렇다면······.
 “야, 쟁반이.”
 ―······?―
 “넌 저 자식의 몸뚱이에 닿아도 이상 없어?”
 ―······.―
 “전설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면서?”
 ―물론 난 엄청나니까 아무 이상이 없지.―
 “호오, 그렇군.”
 난 그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내 모습을 본 쟁반이는 불안한 어조로 외쳤다.
 ―제, 제로스, 무슨 짓······?―
 탁!
 하지만 그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내 손에서 쟁반이는 떠났다.
 그리고 잠시 후였다.
 ―으아아악!―
 쟁반이는 우아한(?) 비명과 함께 괴물을 향해 날아갔다. 쟁반이의 파괴력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다만 곧 죽어도 에고니까 충분히 믿을 만해.
 쿵!
 “······!”
 곧 쟁반이와 그 괴상한 괴물의 만남이 이루어졌고, 그 만남의 장소는 괴물의 이마였다.
 쿠우웅!
 “헉!”
 그리고 이내 괴물의 그 커다란 몸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쟁반이랑 부딪히자 죽은 거야?
 이런 내 생각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
 그 죽어 버린 고대 몬스터의 몸 안에서 붉은색의 빛이 나오기 시작한 거다. 난 그런 이상한 빛에 또다시 부활이나 이상한 현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투 자세를 취했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과는 다르게 그 붉은색의 빛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빛이 얼마나 빠른지 내가 피해 내지 못할 정도로, 말 그대로 빛과 같은 속도로 내 몸을 덮쳤다. 그러고는 그 빛이 서서히 내 몸에 흡수되어 갔다.
 “이, 이게 뭐야?!”
 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흡수되는 그 빛에 그대로 굳어 버렸고, 그 빛은 언제 있었냐는 듯 사라져 버렸다.
 “······.”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
 순간 내 몸을 감싸 안는 불가사의한 힘과 함께 무언가 뇌리에 새겨지는 내용······.
 그리고 그걸 확인한 난 황당하다는 듯 외쳤다.
 “이, 이게 뭐야?!”
 
 우웅.
 아무도 없는 한적한 숲 속.
 난 손 위에서 웅웅거리는 붉은빛을 보고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 붉은빛은 분명······.
 “그 눈깔들이 사용하던 거?”
 내 눈이 잘못되지 않은 이상 이걸 못 알아볼 리는 없다.
 분명 그 고대 몬스터인가 뭔가가 사용하던 붉은빛이 내 손 위에서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난 나도 모르게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순간!
 파앗!
 “······!”
 그 괴물이 사용했던 기술처럼 일직선으로 붉은색의 빔 같은 게 앞을 강타해 버렸고, 그 빛이 사라진 후 남은 건 오직 녹아 버린 숲의 잔재들이었다.
 “도, 도대체 뭐, 뭐야!”
 머릿속이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
 왜 그놈의 기술을 내가 사용하는 거냐?!
 설마 고대 몬스터라는 놈들을 죽이면 그 능력을 흡수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인 거야?
 아아악!
 
 “실패인가?”
 한편 쟁반에 부딪혀서 죽어 버리는 크라카우스 사우트를 본 남자는 자신의 수첩에 무언가 끼적거렸다.
 수첩에는 ‘압도적인 파괴력에 비해 너무나도 허약한(?) 방어’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약간 의아한 듯 말했다.
 “아무리 고대의 몬스터를 부활시키는 과정에서 생긴 이상 현상이라고 하더라도 너무나 약하군. 쟁반에 그대로 죽어 버릴 정도의 방어력이라니······.”
 그렇다. 아무리 고대의 몬스터를 부활시키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라고 하더라도 이건 좀 심했다.
 쟁반에 맞고 죽어 버리는 고대의 몬스터라니······.
 하지만 자기의 눈으로 직접 본 이상 부인할 수는 없었다.
 “방어력을 보강해야겠군.”
 하지만 그건 이 남자의 심각한 오해였다.
 사실 크라카우스 사우트의 방어력은 맷집 강하기로 유명한 오우거의 스무 배 이상이다.
 하지만 부딪힌 존재가 바로 쟁반이, 즉 에고 쟁반이라고 불리는 엄청난 존재이기 때문에 죽어 버린 것이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쟁반에 ‘에고’라는 단어가 붙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하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괴이한 이 현상에 대해서 말이다.
 그렇다고 누구한테 이 기이한 현상을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까 그 몬스터가 죽으니 그놈이 쓰던 기술이 마구 내게 들어왔어요’라고 말할 순 없지 않은가.
 그나마 유일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쟁반이에게 이 이상 현상을 물어보자, 그 영감탱이라면 이 이상한 현상을 알 수도 있다고 한다.
 더군다나 파괴력 하나는 드래곤의 산성 브레스와 맞먹는다는 거다.
 그 괴물이 사용하던 것이 한 곳으로 집중되다 보니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보이는 듯싶은데······.
 이게 뭐야! 제발 누가 뭐라고 설명 좀 해 줘요!
 
 “와우.”
 ―진짜 이럴 거야?!―
 단 한 방에 저 커다랗고 괴이한 몬스터를 쓰러뜨린 쟁반이의 파괴력에 난 입을 다물지 못했고, 쟁반이는 옹알거렸다.
 그나저나 정말 이런 힘이라니, 곧 죽어도 에고 쟁반이라는 건가?
 이건 거의 에고 소드라는 애들(?)조차도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다.
 아무리 에고 소드라고 하더라도 저런 괴상망측한 괴물을 단 한 방에 보내는 건 무리다.
 하지만 우리의 쟁반이는 해냈다.
 딱 한 방에 보내는 걸 말이다.
 “멋져, 멋져.”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나의 비싼 몸을 고작 저런 저질적인 놈에게 던지다니!―
 “멋져, 멋져.”
 ―······.―
 혼자서 발광하지만 사뿐히 무시해 주자.
 상대해 줘 봤자 내 머리만 아프니까.
 그런데 오늘 참으로 엄청난 걸 발견하고 말았다.
 쟁반이의 압도적인 파괴력.
 단지 날렸을 뿐인데 저런 포스가 나오면 만약 쟁반이로 머리를 내려찍으면? 상상만으로도 대단함이 느껴졌다.
 그 어떤 존재라도 단 한 방에 보내 버릴 것 같은 그런 대단함 말이다.
 “저기에 수상한 자들이다!”
 “어서 잡아!”
 “저놈들을 잡아!”
 “어서!”
 “······.”
 “······.”
 “······.”
 그때 유일하게 후드를 뒤집어쓴 나와 에르니, 그리고 테로이를 본 기사들과 병사들이 수상하다면서 마구 소리쳤다.
 사실 우리가 조금(?) 수상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괴상한 괴물을 무찌른 사람이다.
 그러니 전혀 위축될 것이 없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들이대야 하지만 나와 테로이는 그럴 수 없는 입장이었다.
 “제길!”
 얼굴을 보이는 순간 그대로 끝!
 개인적으로 테로이 저 자식은 자기가 범행을 저질러서 저 모양이지만, 난 정말 억울해 죽겠다.
 그저 그 영감탱이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걸릴 테니, 정말 불쌍한 신세다. 제길!
 결국 우리한테 주어진 방법은······.
 “튀어요!”
 
 “······.”
 “······.”
 “······.”
 이 침체된 분위기, 멋지다.
 괜히 저 이상한 몬스터 때문에 제국은 살벌해지다 못해 얼음장 같은 분위기로 변했다.
 안전이라고 하면 최고 수준인 제국의 수도 안에서 괴생물체로 인해 몇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다른 데라면 몰라도 수도 안에서 말이다.
 제국의 수도 정도면 텔레포트 방어 마법진은 필수고, 이 수도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통로는 기사들과 병사들의 철벽 방어가 기본이다.
 한마디로 몰래 들어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거다.
 하지만 저런 괴상망측한, 그것도 크기가 어마어마한 자식이 제국의 수도 안에 유유히 들어왔으니 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나도 이해가 안 되니까.
 도대체 뭔 재주로 텔레포트가 되지 않는 길거리 한복판에 그런 괴물이 나타난 걸까?
 정말 신기 그 자체다.
 “이거 참······.”
 문제는 그놈 때문에 이제는 수상해 보이는 사람들 집중 단속이다.
 으음, 예를 들어 우리같이 후드를 뒤집어쓴 존재들?
 완전 집중 단속이다. 마법사든 아니든 말이다.
 그래서 결론은 돈 벌기는 글렀고, 그저 이 제국에서 저 눈이 시뻘건 채 수상한 자들을 탐문하는 분들에게 걸리지나 않으면 장땡이라는 거다. 하아.
 ―일이 마구 꼬이는군.―
 “동의.”
 그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참 고맙게도 쟁반이가 대신해 줬다.
 아니, 그러고 보니······.
 “야, 쟁반이!”
 ―······?―
 “너 아까 그 이상한 몬스터 어떻게 알아?”
 그렇다. 그 누구도 생전 본 적이 없는 괴물의 정체를 쟁반이는 단숨에 알아맞혔다.
 내 질문에 쟁반이는 대뜸 말했다.
 ―알면서.―
 “······.”
 ―난 위대한 그랜드 소드 마스터이잖아.―
 “······.”
 이런 미친! 내 질문과 네놈의 알 수 없는 대답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
 그때 쟁반이의 진지한 말이 들려왔다.
 ―장난은 그만 두고, 내가 저놈을 어떻게 아냐고 물었지?―
 “어.”
 ―간단해. 난 저놈을 지겹도록 봤으니까 말이야.―
 “······?”
 ―고대에 돌연변이 유전자로 탄생된 최강의 몬스터들. 하지만 그 당시 모든 종족들의 협동으로 그 몬스터들은 멸종됐어. 그리고 참고적으로 저놈은 그 고대의 몬스터 중 제일 약한 놈이라고 보면 돼.―
 “······.”
 
 고대 몬스터, 간단하게 말하면 수천 년 전에 살았던 존재들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돌연변이가 일어나서 압도적인 힘을 가진 몬스터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그 고대 몬스터라는 게 수천 년 전에 존재했던 생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수천 년 전에 존재했던 몬스터가······.
 “어떻게 제국 한복판에 튀어나온 거지?”
 그렇다. 도대체 무슨 재주로 수천 년 동안 발견되지 않았던 고대 몬스터 중 한 마리가 제국의 수도 안에 아무런 흔적 없이 들어올 수 있었던 거냐?
 아니, 그것보다 수천 년 전 모든 종족들의 연합 공격으로 멸종되었다는 고대 몬스터들이 어떻게 살아난 거야?
 “허허.”
 말이 안 나온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그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괴상한 고대 몬스터와 안면이 있는 쟁반이에게 묻는 것뿐이었다.
 “쟁반아, 아는 거 다 불어.”
 이런 내 질문에 쟁반 군은 딱 한마디 하신다.
 ―강해.―
 “······.”
 ―더럽게 강해. 그것밖에 몰라.―
 “······.”
 설마 그게 다냐?! 솔직히 강하다는 건 한 방에 모든 기사들을 날리는 그 과정에서 누구나 눈만 달려 있다면 볼 수 있으니 알 텐데?
 그걸 지금 내가 원하는 답변이라고 하는 게냐!
 그때 추가로 이어지는 쟁반이의 말이 들려왔다.
 ―정 궁금하면 한 인간을 찾아가면 돼.―
 “한 인간?”
 ―응. 너랑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지. 그는 저 고대 몬스터들에 대해서 100% 알고 있으니까.―
 “······?”
 나랑 밀접한 관계를 가진 사람 중 저 이상한 괴물들을 자세하게 아는 사람이 있나?
 난 그 말에 내 머리를 검색해 봤지만, 저 괴물들을 상세히 알 것 같은 분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 순간 쟁반이가 말했다.
 ―프란티스, 그 양반이 아주 잘 알지.―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인데?”
 ―많이 들은 정도가 아니잖아. 네 아버지잖아.―
 “······.”
 
 
 
 
 
 10장 세리스
 
 
 
 도대체 그 인간은 뭐 하는 작자란 말인가!
 왜 이번 고대 몬스터에 대한 것도 그 인간과 연결이 되어 있는 거지?!
 에르니 언니를 납치한 것도 모자라 내 이름을 들먹이더니 이제는 심지어 이상한 괴물과도 연결되어 있으시다.
 도대체 무슨 재주를 부리면 그렇게 복합적으로 연결이 되는지 난 그저 알고 싶을 뿐. 하아.
 결국 그 영감탱이를 만나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에르니의 언니를 찾는 것에 더해 이 이상한 현상을 알아내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이 영감탱이가 순순히 잡힐 인간이 아니라는 걸 잘 알기에 마음이 답답하다.
 그렇게 고민에 잠겨 있는 순간이었다.
 “밥 줘.”
 “······.”
 난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지금 상황이 어느 상황인데!
 정말 저런 놈이 황태자라니, 세상은 이미 말세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돈 없거든?”
 차력쇼를 통해 돈을 벌려던 나의 계획은 그 괴물에 의해 무산되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강화된 치안 때문에 수상해 보이는 우리는 이렇게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얌전히 있는 거고 말이다.
 “하아, 넌 여자 꼬시는 재주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구나.”
 “······.”
 그때 테로이가 나를 향해 시비를 걸어왔다.
 뭐? 여자 꼬시는 재주 말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내가 이래 봬도 얼마나 다양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데!
 예를 들어서 성벽 올라타기라든가 뛰어내리기, 도주 기타 등등 거의 모든 서바이벌 기술을 마스터했다고!
 물론 여자에 관련된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에 비해 너는?
 “네놈이야말로 할 줄 아는 게 없잖아!”
 “풋.”
 그런 내 말에 그는 비웃더니 말했다.
 “난 황태자잖아.”
 “······.”
 “그러니 괜찮아.”
 아니, 황태자라면 모든 걸 더 잘해야 정상 아니냐?!
 무슨 황태자가 할 줄 아는 거라곤 욕밖에 없는 주제에!
 ―둘 다 한심해.―
 “······.”
 “······.”
 그때 들려온 한마디에 나와 테로이는 굳어 버린다.
 그리고 그 말을 한 주범을 찾아 고개를 돌렸고, 거기에는 쟁반이가 하늘을 부유한 채 있었다.
 ―나를 봐. 모든 게 완벽하잖아.―
 “······.”
 “······.”
 ―이 우아한 자태, 이 우아한 능력, 이 우아한 미. 모두 완벽해!―
 저놈 미친 거냐? 쟁반 주제에 우아한 자태를 어디서 찾는 거냐?
 그 순간, 갑자기 에르니가 한마디 했다.
 “저기, 대화를 나누시는 건 좋지만 지금은······.”
 “······.”
 “······.”
 ―······.―
 그 말에 난 주변을 슬쩍 살펴봤다.
 물론 나뿐만이 아니라 테로이도 쟁반이도 주변을 살펴봤고, 금세 우리는 모두 굳어 버렸다.
 그나마 내가 제일 회복력이 좋기에 굳어 버린 존재들을 대표해 에르니에게 말했다.
 “많네요.”
 “네.”
 “무지요.”
 “······.”
 “무지무지 많아요.”
 어느새 우리 주변을 빈틈없이 포위한 수천 명의 제국 병사들.
 나도 모르게 난감한 표정이 떠올랐다.
 여기라면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저분들이 이곳을 찾아온 걸까?
 이건 누군가가 고발을 하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
 “설마?”
 내 머리가 마구 회전했다.
 그리고 잠시 후.
 “크로센트 님?!”
 추리를 해 보면 이렇다.
 그 영감탱이가 이 제국에 도착한다. 하지만 이상하게 제국이 시끄러움을 알아차린 그 영감탱이는 정지한다. 그 순간 이 제국을 배회하던 크로센트 님에게 발각된 그 영감탱이.
 크로센트 님은 그 영감탱이를 발견하자 앞뒤 보지 않고 달려든다.
 그렇지만 영감탱이는 그런 크로센트 님을 단 한마디로 잠재운다. 바로 아리아 이야기로 말이다.
 아무리 미친개 같은 성격이신 크로센트 님이라고 하더라도 아리아 이야기만 나오면 강아지 수준으로 돌변, 그만큼 무기력해진다.
 그런 과정 중 우연히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를 했다?
 그뿐 아니라 그 잔인하고 영리한 영감탱이는 우리를 미끼로 던져 놓고 유유자적 제국에 입성하는 스토리가 아닐까?
 “······.”
 너무 소설 같은 추리인가?
 그렇지만 지금은 그런 소설 같은 추리밖에 할 수 없다.
 도대체 이 비밀 지역을 어떻게 찾아낸 거지?!
 
 “고맙군요, 크로센트 군.”
 “크윽.”
 “아리아 양에 대한 정보는 확실하게 넘겨 드리죠.”
 “프, 프란티스······.”
 크로센트는 자신의 앞에서 여유롭게 말하는 프란티스를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딸을 낚아챈 것도 저 자식인데 그런 프란티스를 위해 좋은 일만 시켰으니 화가 나지 않을 리가 없다.
 그것보다 제로스를 배신(?)했다는 게 더욱 드래곤으로서 체면이 안 선다.
 하지만 아리아 이야기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는 그였기에 어쩔 수 없다.
 그저 속으로 한마디 할 뿐이다.
 ‘미안하다, 제로스. 크윽!’
 한편 프란티스는 속으로 웃음을 짓는다.
 자신의 생각대로 아리아가 길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제로스를 찾아가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아리아의 행방을 알려주고 그 대신 다른 여인을 제로스와 만나게 해 줄 생각이다. 그 제로스와 만나게 해 줄 분은 꼭 성으로 입성해야지만 만날 수 있는 분이고.
 
 나와 테로이, 그리고 에르니는 그대로 끌려간다(쟁반이는 그냥 보통 쟁반으로 변신).
 한번 반항을 해 볼까 생각해 봤지만 그러면 너무 시끄러워질 것 같아서 순순히 따라가기를 선택했다.
 그리고 우리는 감옥(?)에 갇혔다.
 잠시 후 우리의 정체를 확인한 그분들은 에르니의 신상을 먼저 확인하고 그 다음에 날 조사하신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그 영감탱이와 닮았을 뿐이기에 나와 에르니는 무혐의로 풀려날 뻔했으나 테로이를 조사 후······.
 “역시 잘못된 선택이었어.”
 “······.”
 풀려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어찌 됐든 현상금이 걸린 황태자와 같이 다녔기 때문이랄까?
 정말 미쳐 버리겠다.
 “으악! 내가 왜 저 자식과!”
 “······.”
 테로이만 없었다면 지금쯤 무혐의로 풀려났을 텐데 저 자식 때문에 이게 뭐 하는 것이냐!
 물론 황태자라는 신분 때문에 말이 감옥이지 실상은 감옥이 아니다.
 아주 호화찬란한 방에 가둬 놓은 거다.
 그렇지만 가둬 놓았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던 중 테로이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황태자를 위해 이 정도 희생은 필수지.”
 “죽고 싶니?”
 “······.”
 “이 자식이! 지금 네놈 때문이잖아!”
 “······.”
 아직도 개소리 해 대신다.
 나와 에르니가 미쳤다고 네놈을 위해 희생해?
 내가 길 가다 벼락에 맞아 죽는다 해도 억울하지 않겠지만, 네놈 때문에 죽는 건 억울해서 눈도 못 감을 거다.
 시끌벅적.
 “공주님, 아, 안 됩니다.”
 “들어갈 거예요!”
 “저기, 그러니까······.”
 “지금 저를 막으실 건가요?”
 “고, 공주님······.”
 “어서 문 열어 주세요!”
 “아······.”
 그때 밖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소리.
 매우 귀여운 여자 아이의 목소리와 그런 그녀를 말리는 기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무슨 일인 거지?
 이런 범죄자(?)의 방에 웬 여자 아이의 목소리가?
 턱!
 그 순간 방문이 열렸다.
 “제로스 오빠!”
 “엥? 세리스?”
 “응!”
 열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한 소녀, 특징이라면 너무나도 귀엽다는 거다.
 지금 당장 순수한(?) 마음으로 끌어안아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엽다. 에르니가 최고 대륙의 미녀라고 하면, 세리스는 최고 대륙의 귀여움을 자랑하는 소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그리고 그 순간!
 덥석.
 “세, 세리스.”
 “오빠, 보고 싶었어!”
 “······.”
 갑자기 세리스가 내 품에 안겼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왜 세리스 네가 이 제국에 성안에 있는 거야? 그리고 그 치렁치렁한 드레스는 뭐야?”
 세리스가 왜 저렇게 귀찮아 보이는 드레스를 입은 상태로 성안에 있는 걸까?
 내 품에 안겨 있던 세리스는 나와 눈을 맞추더니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나 공주니까.”
 공주니까?!
 “언제부터 공주였어?!”
 “처음부터.”
 “······.”
 “내가 그때 말 안 했어?”
 “······.”
 이건 또 무슨 일이야!
 
 사실 내가 테로이나 세리스를 알게 된 과정은 간단하다.
 어렸을 때 갑자기 우리 집에 나타난 테로이와 세리스.
 그 영감탱이는 어떤 일 때문에 그 둘을 데려왔고, 그렇게 우리는 한 집에서 살았다.
 그리고 갑자기 사라진 그들.
 테로이 같은 경우는 우연치 않게 연락이 되었지만, 세리스는 말 그대로 연락 두절이었다.
 그 이후 친동생 같았던 세리스의 소식을 알고 싶어서 난리를 쳤지만, 결국 알아내지 못했다.
 그런데 이 제국에서 공주 하고 계셨네?
 참으로 신기하군.
 “근데 오빠, 우리 이제 결혼해야지.”
 “······.”
 뜬금없이 한마디 하시는 세리스.
 결혼이라니?
 내가 굳어 버리자, 세리스는 의아한 듯 한마디 한다.
 “기억 못하는 거야?”
 “아니, 기억을 못하는 게 아니라 그때는······.”
 내가 카사노바였을 때였다.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단어는 그저 생각도 안 하고 어린 나이에 열심히 내뱉은 나.
 결혼이라는 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 이야기를 지금 꺼내니 내가 당황스러울 수밖에.
 지금이라도 진실을 말해야 하지 않을까.
 “저기, 세리스······.”
 “응!”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
 “난 네가 생각하는 그런 착한 남자가 아니야.”
 “무슨 말이야?”
 “한마디로 여자들한테는 찌꺼기만도 못한 존재! 물론 지금은 각성해서 노력 중이지만 어린 나이에 너한테 그런 건, 그리고 내 정체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리스는 너무나도 귀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미안해!
 나에게 어떤 혐오감을 느낄지 모르지만 이제는 모든 진실을 말할 때야!
 이제 더 이상은, 더 이상은······!
 “카사노바?”
 “응, 그래. 카사노바.”
 “······.”
 “······.”
 모든 게 정지되었다.
 
 “아, 알고 있었어?”
 난 생각 외의 반응에 충격으로 더듬거리면서 말했고, 세리스는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응!”
 “······.”
 “하지만 난 이해해.”
 아니, 이해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인데······.
 세리스가 눈을 빛내면서 말했다.
 “소설책을 보면 항상 이러잖아. 카사노바였던 남자이지만 한 여자의 따듯함에 넘어가서 그 남자는 순수해지지.”
 “······.”
 “그리고 그 남자는 그 여자에게 모든 걸 바치는 진실한 남자로······.”
 미안하다. 잊고 있었다.
 너 소설 마니아였지?
 그래, 네 말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
 원래 바람기 있던 사람들이 진짜로 사랑하면 목숨 거는 건 사실이다. 그건 나도 인정하는 바이고.
 하지만 말이다, 그런 경우는 흔치 않다.
 특히 카사노바라고 불리는 정식 교육(?)을 받은 분들은 말이다. 그분들은 따듯함으로 감싸 안아도 순수해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때 세리스는 두 손을 모은 채 말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하는 거야. 하필 남자에게 죽을병이 찾아온 거야!”
 “······.”
 “이제야 진정한 사랑을 얻었지만 그 둘은······.”
 세리스, 혹시 그 남자 역할 내 역할 아니지?
 절대 그 남자 역할은 사양한다.
 카사노바였던 남자가 순수해져서 한 여자를 좋아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 뒤의 이야기는 썩······.
 왜 행복해졌는데 하필 죽을병이 생기는 거지?
 궁금하다.
 그런 의문이 가시기도 전에 세리스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 둘은 너무나도 사랑했어. 그리고 남자는 후회하지. 과거 카사노바였던 타락의 시간을 말이야. 그는 진심으로 그녀에게 사과했고 죽음의 길로 빠졌어. 하지만 그걸 본 그 여자는 참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저기······.”
 “응?!”
 나의 부름에 잔뜩 감상에 젖어 있던 세리스는 나를 바라보았다.
 “왜 둘이 죽어야 되니?”
 “그게 로맨틱하잖아.”
 “······.”
 “오빠, 그치?”
 그렇다고 해라. 저 소설 마니아 분에게 뭘 바랄까.
 그저 그런 엿 같은 상황이 일어날 확률은 거의 희박하다는 걸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그리고 로맨틱한 건 그다지 못 느끼겠다. 쩝!
 “그러니 괜찮아! 너무 평범한 사랑은 낭만적이지 못해!”
 “······.”
 “아, 그러고 보면 저 여자가 내 라이벌?!”
 “······.”
 “······.”
 에르니를 발견한 세리스는 눈을 반짝이면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에르니는 무척이나 당황했다.
 그런 에르니를 향해 다가간 세리스가 한마디 내던졌다.
 “앞으로 좋은 라이벌이 되기로 해요. 사랑의 쟁취를 위한 아름다운 라이벌 말이에요!”
 “저기, 저는 제로스 님과 그런 관계가······.”
 “물론 책에도 그렇게 대답이 나오더군요. 알아요, 알아.”
 “······.”
 알기는 뭘 아는 걸까.
 세리스가 다시 나를 바라보더니 장렬한(?) 어조로 물었다.
 “어디까지 갔어요?”
 “······.”
 “안 갔어!”
 아직 나이도 많지 않으면서 무슨 소리야! 하아!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각 제국의 황태자나 공주님이라는 분들이 왜 이렇지?
 멋지고 아름답고 품위 넘치는 황태자님과 공주님은?
 한번 보고 싶다.
 
 “잘 가렴.”
 “이, 이러지 마!”
 “잘 가.”
 “아악!”
 난 제국으로 호송되어 가는 테로이를 향해 마지막(?) 인사를 해 주었다.
 다행히도 나와 에르니는 저 범죄자 황태자에게 휘말리지 않아 테로이만 호송되어 가는 상태다.
 테로이는 나를 보면서 불쌍한 표정으로 외쳤다.
 “구해 줘, 제로스!”
 “······.”
 “제로스!”
 무시하자. 이건 무시해야 해.
 “으아악!”
 마치 돼지가 사육장에 끌려가듯 테로이는 비참하게 끌려갔다.
 잠시 후 다시 그의 외침이 들려왔다.
 “난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제로스, 두고 봐!”
 “······.”
 “······.”
 그 말과 함께 테로이는 내 눈에서 사라졌다.
 어쩔 수 없구나.
 “오빠, 테로이 오빠가 왜 잡혀 가는 거야?”
 테로이가 끌려가는 이유를 몰라 세리스가 내게 질문했다.
 난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한 건 하고 도망 중이셨거든.”
 “······?”
 “뭐 하나 무지막지한 거 깨 먹었나 봐. 자세한 건 나도 몰라.”
 “여전하네.”
 “그렇지, 뭐.”
 저 미친 성격이 어디 가지를 않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오빠는 뭐 하는 거야?”
 “아!”
 난 세리스의 말에 다급히 내가 하던 일을 떠올렸다.
 너무 시끄러워서 망각했는데 내가 해야 할 일은 그 영감탱이를 잡는 것!
 아, 그러고 보면······.
 “저기, 세리스!”
 “······?”
 “내가 여기 잡혀 오기 전에 혹시 우리가 있던 장소를 알려 준 사람이 있어?”
 “으음, 자세히는 모르겠고 익명으로 누군가 고발을 했고 난 오빠의 이름이 거론되기에 달려왔지.”
 익명의 제보. 설마?
 확실한 증거는 없어도 나의 센스가 반응하고 있다. 제길! 분명 이곳 케스트 제국 안에 그 영감탱이가 있을 것이다.
 아직 신고해서 잡혀간 지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에르니, 어서 나가 봐요!”
 “아.”
 “영감탱이랑 에르니의 언니는 분명 이 제국에 있습니다.”
 “정말인가요?”
 “네. 그 익명의 고발자, 제 예측이 틀리지 않는다면······.”
 “······.”
 “그 빌어먹을 간악한 영감탱이!”
 분명 그 인간의 냄새가 난다.
 놓칠 수 없어!
 
 놓쳤다.
 아주 슬프게 말이다.
 그리고 나의 가슴을 후벼 파는 쪽지 한 장이 발견되었다.
 
 모든 게 궁금하냐? 궁금해? 궁금한 거지? 그럼 나 잡아 봐라아∼!
 
 “······.”
 무언가가 마구 끓어올랐다.
 온몸에서 파괴 본능이 일어난다고 해야 하나?
 이제는 에르니를 위해서 영감탱이를 찾기 보다 나의 이런 파괴 본능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찾아야 한다.
 그 영감탱이를 말이다.
 
 
 
 
 
 11장 강제 결혼
 
 
 
 하아.
 한숨만이 퍽퍽 나온다.
 그 인간의 카운터 한 방에 완전히 당했다.
 그뿐 아니라 그 인간에 대한 모든 단서가 사라졌다. 말 그대로 백지화되었다고 할까?
 그는 이 케스트 제국을 떠나기 전 완벽한 증거 인멸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좋지 않아.”
 처음보다 더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제 그분이 이 넓은 대륙의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힌트라도 있어서 찍었지만, 이제는 그것조차도 불가능해져 버렸다.
 막막해.
 그나마 이 상황에서 위로가 되는 것은 임시지만 우리의 거처를 마련한 일이다.
 “세리스, 고마워.”
 “당연한걸, 뭐.”
 휴우, 정말 죽다가 살아난 기분이다.
 땡전 한 푼 없이 길바닥에 내던져질 뻔한 상황이었다.
 그런 우리를 세리스 님이 거두어 주셨다.
 그것도 이런 어마어마한 VIP룸으로 말이다.
 정말 감동적이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 영감탱이를 잡을 생각을 하면 또 답답하다.
 콰앙!
 “······.”
 “······.”
 “······.”
 그때 내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타이밍과 아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부서지는 방.
 누군지 몰라도 미친 게 분명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감히 성 안에 있는 방을 이런 식으로 부수다니······.
 그 소리에 반응한 세리스는 내가 보기에는 귀엽지만 그래도 사뭇 카리스마 어린 말투로 외쳤다.
 “도대체 누가 손님 방의 문을 부수는 몰상식한 행동을······!”
 하지만 그런 세리스의 외침도 길게 가지 못했다.
 왜냐고? 그 부서진 문을 통해 버터맨 한 마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나이는 세리스보다 20살 정도 많아 보이는 35살.
 키는 160cm 정도? 몸은 그저 삐쩍 말랐다.
 그리고 그런 몸에 개폼용인지 빛나는 갑옷을 입고 계시고 얼굴은 말 그대로 버터가 생각나게 생기셨다.
 그래서 처음에 내가 버터맨이라고 한 거다.
 그 버터맨을 본 세리스는 급격히 당황하면서 고개를 숙였고, 그 모습에 버터맨은 세리스를 향해 느끼한 미소와 함께 한마디 건넨다.
 “며칠 뒤면 제 신부가 되실 분이 다른 남자와 속닥이는 바람에 너무나도 화가 나서 문을 부숴 버렸군요.”
 “······.”
 “다른 사람도 충분히 이해하겠죠?”
 “······.”
 난 내 귀를 의심했다.
 신부? 지금 저 버터맨이 자신의 신부라고 가리킨 사람이 설마?
 아닐 거야. 나이 차이만 해도 20살이잖아?
 그런데 지금의 상황을 살펴보면 여기에는 에르니와 세리스밖에 없다. 그 둘 중 버터맨의 시선은 오직 세리스에게 향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시선에 세리스는 고개를 숙인 채 가녀린 몸을 살짝살짝 떨고 있었고 말이다.
 버터맨은 떨고 있는 세리스에게서 내게 시선을 이동하더니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기생오라비 자식.”
 빠직!
 지금 누구 보고 기생오라비라는 거냐!
 저 자식이 처음 보는 사람한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악!
 버터맨은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2차 충격을 내게 선포하신다.
 “그리고 네놈의 죄에 대한 벌은 사형이다.”
 “······.”
 “남의 신부와 이야기를 한 죄다.”
 “······.”
 이런 미친!
 남의 신부와 이야기를 했다고 사형이라니, 이런 거지같은 법은 뭐냐?!
 그 순간 세리스가 당황한 채 고개를 들면서 말했다.
 “무, 무슨 말인 거예요! 제로스 오빠가 사형이라니!”
 “사형의 이유는 충분하다. 너와 나의 사랑을 방해한 죄.”
 “······.”
 “그러니 괜찮다.”
 무슨 저런 개거지 같은 자식이?!
 세리스, 안 본 사이에 취향이 독특해졌다고 하지만 너무나도 독특해졌다.
 저런 미친 남자가 취향이 되어 버리다니 말이다.
 그때 세리스가 갑작스럽게 소리를 지르면서 말했다.
 “그렇게 하면 저도 죽어 버리겠어요!”
 “······.”
 “오빠를 죽인다면 당신과의 강제 결혼도 하지 않을 거예요!”
 “······.”
 그 말에 인상이 구겨지는 버터맨.
 아니, 그리고 난 그 어떤 말보다 한마디가 심히 거슬렸다.
 강제 결혼?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싶다.
 하지만 세리스의 표정이라든가 지금의 이런 이상한 상황으로 보아 그 말이 사실인 것 같다.
 난 슬며시 세리스를 보면서 물었다.
 “세리스, 무슨 일이야?”
 “······.”
 “나한테 말해 줘. 오빠잖아.”
 “그, 그게······.”
 나의 질문에 머뭇거리는 세리스.
 하지만 잠시 고민을 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더니 세리스는 내게 우울한 어조로 말했다.
 “국가적인 일 때문에 결혼하게 됐어.”
 “······.”
 나도 익히 알고 있다. 왕가에서 태어난 여자들이 오직 권력이나 힘을 키우기 위해 결혼이라는 것에 제물로 이용된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던 여동생이 실제로 공주였고, 결혼의 제물이 된다고 하자 뭔가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았는지 버터맨이 짜증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당장 꺼져.”
 “······.”
 “어서!”
 아마도 세리스와 결혼하고 싶긴 했나 보다.
 세리스가 죽어 버린다는 말에 날 죽인다는 말을 철수했으니 말이다.
 남자의 입장으로 봐서 세리스 같은 미소녀에게는 혹할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못 가겠는데?”
 “······!”
 “그리고 이 결혼, 내가 인정 못해.”
 “뭐? 이 빌어먹을 기생오라비 자식이!”
 내 말에 마구 성화를 내는 버터맨.
 그리고 그 말에 당황하는 세리스.
 “오빠, 무슨 말이야! 그, 그러면 오빠가······.”
 “세리스, 내가 좀 저질적인(······.) 놈이기는 해. 그래서 이런 말할 자격이 없는 것도 알아. 하지만 말이야, 저런 개 같은 놈한테 시집가는 걸로 눈물을 흘리는 여자는 절대 못 본다. 그것도 내가 알던 동생이 말이야.”
 “······.”
 이건 절대 작업 멘트가 아니다. 진심이다.
 그러니 제발 오해는 하지 말도록 미리 말한다.
 어찌 됐든 나의 이런 발언에 세리스는 당황하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리고 나의 약간(?) 난폭해진 발언에 버터맨은 갑자기 자신의 뒤에 있던 다섯 명의 호위기사를 향해 소리쳤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저 빌어먹을 기생오라비 자식의 목을 지금 당장 베어라!”
 “안 돼요!”
 세리스의 만류가 들려오지만 한눈에도 강해 보이는 호위기사들은 이미 나를 향해 들어오시는 중이다.
 난 그 모습을 보고 허공에 손을 저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검을 뽑아 들어서 접근하는 그들을 한 번 본 뒤 그대로 손을 뻗어 허공을 때렸다.
 콰앙!
 “크억!”
 “뭐지?!”
 “으악!”
 “······!”
 갑작스럽게 일어난 공기의 진동 폭발에 그대로 비명과 함께 나가떨어지는 호위기사들.
 난 그런 그들을 향해 한마디 내던져 주었다.
 “발경이라고 들어 봤어?”
 “······.”
 “······.”
 “······.”
 “카사노바 필수(?) 기술이거든.”
 아버지가 필수 기술이라고 하니 믿는 수밖에.
 그런데 참 아이러니한 게 세리스를 만난 이후 몸이 더욱더 가벼워졌다.
 아름다운 미소녀를 두 명이나 봐서 그런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12장 부전자전
 
 
 
 ‘부전자전’이라는 말이 있다.
 아버지와 아들은 닮는다는 뜻처럼 지금 나의 상황과 아주 잘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오빠, 나 때문에······.”
 “아니, 괜찮아. 난 너의 웃음만 볼 수 있다면.”
 “······.”
 난 미안해 하는 세리스를 향해 또다시 작업 멘트를 쳤다.
 아악! 잠시 심각해져서 방심을 하니 금세 또다시 나오고 마는 나의 본능.
 정말 싫다, 싫어!
 무슨 이런 개거지 같은 병이 다 있냐!
 아니 그것보다······.
 “다정해 보이는군.”
 정말 다정해 보인다.
 온 나라에 붙은 포스터 두 장이 말이다.
 위에는 아버지 현상수배지고, 밑에는 내 수배지다.
 범죄 목록을 보면 아버지라는 인간은 엘렌이라는 여성을 데리고 도주 중, 그리고 아들이라는 작자는 세계 최고의 미녀라고 불리는 에르니와 세리스를 데리고 도주 중.
 참고로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세리스는 공주라는 거다.
 그것도 한 제국의 공주, 즉 상당히 난이도 높은 분이시다.
 아악, 이게 뭐야! 제길!
 갑자기 두 손가락을 마주 댄 채 눈이 초롱초롱해진 세리스.
 그녀의 말문이 열렸다.
 “근데 오빠, 그럼 이제 오빠는 비극의 멋진 남자 주인공으로 기사들한테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내 앞을 가로막는 거야?”
 “······.”
 “그리고 그걸 본 난 칼에 찔리면서 우린 같이 죽음을 맞이하는······.”
 “저기, 세르니.”
 “······?”
 또다시 소설 모드로 들어가신 세리스를 조용히 부르자, 세리스가 내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난 어색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왜 꼭 죽어야 하는 거니?”
 “소설에서 보면 대부분이 죽던데.”
 “······.”
 “이런 신에서는 항상 죽어. 그리고 두 남녀는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같이······.”
 이래서 지나친 소설 중독은 좋지 않다.
 세리스는 분명 착각하고 있다.
 소설에서야 쫓기다가 죽는 건 자극을 하기 위해 그런 거지만 지금은 실제 상황이다.
 그리고 이 카사노바라는 직업의 특성상 절대 안 죽는다.
 혹독한 훈련 속에서도 살아남은 나인데 고작 기사들한테 죽겠는가?
 이래 봬도 생명력 질긴 건 카사노바를 따를 게 없다고.
 많은 여자를 꼬시기 위해서는 오래 살아야 하는 게 기본이니까 말이다.
 뭔가 미묘하군.
 “저기, 제로스 님.”
 “······?”
 아무 말도 없이 따라오던 에르니가 말문을 열었다.
 “아까 사용한 기술이 뭐죠?”
 “······?”
 “허공에 손을 저은 뒤 무슨 발경이라고······.”
 “아, 그 기술요?”
 아마도 궁금할 거다. 이 대륙에는 존재하지 않는 기술이니까 말이다.
 아버지 말로는 다른 세계에서 가져온 기술이라고 하는데 정확히는 모른다. 그저 카사노바의 정규 과정 중 하나라고만 내게 말해 줬을 뿐이니까.
 그러고 보면 카사노바 정규 과정은 2,104가지 정도?
 나름대로 고난이도의 직업일지도 모르겠다.
 난 궁금해 하는 에르니를 향해 한마디를 할 뿐이다.
 “카사노바의 기술 2,104가지 중 한 가지라는 것밖에······.”
 “2,104가지의 기술 중 하나?”
 “네.”
 내 말에 말문이 막힌 듯 보이는 에르니.
 왜 그러지?
 
 2,104가지라니!
 지금까지 보여 준 별별 이상한 기술들도 놀랍기 그지없는데 2,104가지의 기술이 있다니······.
 그렇다면 지금 이 어마어마한 기술들도 그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소리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능력들을.
 새삼스럽게 저 카사노바라는 게 도대체 뭐 하는 직업인지 정확하게 알고 싶은 에르니다.
 
 “하하하하!”
 “······.”
 “······.”
 “······.”
 “제로스, 내가 돌아왔다!”
 난 내 귀를 의심케 하는 소리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분명 이 목소리는 지금 내가 들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이유를 찾아보자면 첫 번째로 이 인간은 텔레포트를 통해 강제로 자기 나라로 끌려갔다. 그리고 두 번째, 지금 도망 중인 우리를 찾아낼 수 없다.
 그런데 왜 이 인간의 목소리가 내 귀를 자극하는 거지?
 “제로스, 네가 나를 버려도 나를 모시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널렸지.”
 또다시 들려오는 음성에 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분명 고이 미치지 못하고 괴상하게 미친 그 인간의 목소리이다. 그리고 확실히 그 인간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오니 더 이상의 부정은 금물.
 “······.”
 그런데 저분은 누구일까?
 26살 정도의 나이에 키 180cm 정도, 그리고 시골 총각같이 순진무구해 보이는 모습의 남자.
 하지만 겉모습과 다르게 느껴지는 포스로는 예사롭지 않은 자다. 대충 봐도 에르니와 동급 혹은 에르니 이상?
 그 말은 소드 마스터라는 소리.
 그렇다면 소드 마스터라는 분이 테로이를 빼돌렸다?
 무엇 때문에 이런 대형 범죄자 황태자를 빼돌리지?
 국가에서 귀빈 대접을 받는 소드 마스터가 말이다.
 그때 에르니의 입에서 반가움을 담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케이 님?”
 얼음 공주님 입에서 말이다.
 그러자 순수 총각, 아니 케이라고 불린 남자는 얼굴이 마치 홍당무로 변하더니 버벅거리신다.
 “에, 에르니 님, 우, 우연이군요!”
 “아.”
 “저, 정말 이건 우연이에요!”
 “그러네요. 이런 곳에서······.”
 에르니 양, 저분의 말을 믿는 겁니까?
 우연은 개뿔!
 테로이가 나를 만나면 에르니까지 만나게 되는 건 당연한 사실.
 아무리 바보라고 불리는 분들이라도 손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때 에르니가 나를 보더니 케이라고 불린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소드 마스터 중 한 분이자 저한테 많은 걸 가르쳐 주신 분이에요.”
 “아, 안녕하세요.”
 그때 나를 보고 꾸벅 인사하는 케이 님.
 뭐라고 해야 하나? 상당히 색다르다.
 소드 마스터 정도면 당연히 귀족일 거다. 그뿐 아니라 에르니를 가르쳐 줄 정도라면 실력도 일정 수준 이상일 거다.
 그런 남자가 아무것도 볼 게 없는, 심지어는 범죄자가 되어 버린 나에게 인사했다.
 뭐냐, 이 아스트랄 함은 말이다.
 어찌 됐든 받았으면 돌려주는 게 예의.
 나도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테로이가 큰 소리로 웃더니 말했다.
 “크하하하! 제로스, 봤는가? 우리 제국의 자랑인 케이가 나를 따르는 모습을 말이야!”
 “······.”
 “······.”
 “······.”
 “이게 바로 멋진 나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의미지.”
 “······.”
 “······.”
 난 혼자서 즐거워하는 미친 황태자 테로이를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넌 지금 저 하트 뽕뽕 날리시는 케이 님이 너 때문에 온 줄 아니? 딱 봐도 에르니 때문이잖아!
 등신.
 
 “정말 멋지시군요!”
 “머, 멋지긴요······.”
 “아니에요. 정말 멋져요! 한 여자를 위해 현상수배 포스터에 걸릴 각오까지 하고 구출하다니!”
 “······.”
 난 심히 감동하시는 케이 님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만난 지 별로 되지 않았건만 어느새 친해져 버린 우리. 그만큼 케이 형의 성격은 엄청 좋다.
 개판 오 분 전인 황태자 씨랑은 정반대다.
 그렇게 서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들은 케이 형은 나를 부담스럽게 바라보신다.
 그나저나 난 그 어마어마한 직책과 명예를 버리면서까지 에르니를 만나러 온 케이 형의 과감한 결단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해 본다.
 난 어차피 납치 도주 중인 아버지를 둔 상태이고, 가진 것도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다.
 “근데 오빠,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그때 세리스가 내게 다가오더니 눈을 반짝이면서 물었다.
 난 그녀를 잠시 바라본 뒤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물론 그 영감탱이를 잡는 게 주목적이기는 하지만, 그 영감탱이는 귀신처럼 사라진 지 오래. 그 영감탱이를 잡기 위해서는 정보기관에 의뢰를 해야 하지만, 그것도 생각 외로 무척이나 돈이 드니······. 한마디로 말해 지금 미치겠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시간이 지날수록 이 범죄자라는 타이틀이 아주 마음에 와 닿고 말이다.
 “걱정 마! 위대한 황태자의 이름으로 내가 다시 제국으로 돌아가면 너의 하찮은 현상수배를 풀어 줄 테니 말이야.”
 “······.”
 “어차피 케스트 제국은 내가 말하면 거절 못해. 이미 비장의 무기가 있거든, 후후후.”
 “······.”
 “그러니 내가 다시 제국으로 돌아가는 날, 너의 그 악랄한(?) 범죄자의 누명도 벗게 해 주지.”
 “그거 참 고맙군.”
 벨르나이크 제국이라면 힘으로라도 나의 이 혐의를 풀어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리스의 강제 결혼도 막아 줄 수 있을 거다.
 세 제국 중에서 제일 강한 곳이 벨르나이크 제국이니 말이다.
 하지만······.
 “언제 돌아가니?”
 “글쎄.”
 “······.”
 “아버지가 뒤끝이 좀 심해서.”
 “그렇군.”
 “쪼잔한 영감탱이.”
 자기가 한 일은 생각하지 않고 황제보고 쪼잔한 영감탱이라고 말하는 테로이.
 만약 이 사실이 벨르나이크 제국의 황제님 귀에 들어간다면 개판 오 분 전이 될 게 분명하다.
 어찌 됐든 이 현상금 일과 세리스의 결혼 건은 그리 믿음직스럽지는 못하지만 세계 최고의 발언력을 가진 테로이 황태자님을 일단 믿기로 하자. 그럼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돈을 모아서 정보를 사는 건가?”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많은 돈을 모으는 건 거의 불가능이다.
 아니,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하다.
 “용병?”
 
 용병은 누구나 될 수 있다. 말 그대로 누구나 말이다.
 용병이 되기 위해 필요한 건 그저 실력일 뿐, 신분 따위를 조사하거나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기에 범죄자들이 자주 용병이 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이 용병의 세계가 막 나가는 것도 아니다.
 나름대로 세운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심한 제재가 가해진다. 심지어 의뢰인과 심한 마찰로 인해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하면 그 용병은 목숨을 내놓아야 할 정도.
 그만큼 아무나 할 수 있는 직업일지는 모르지만 규칙은 살벌한 게 용병의 세계다.
 하지만 돈은 확실히 벌 수 있는 게 용병이라는 직업이다.
 그런 용병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게 용병단이다.
 최소 인원은 셋, 최대 인원은 몇천 명까지도 있는 용병단.
 한마디로 난이도 높은 의뢰를 쉽게 해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게 용병단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이 용병단이고 말이다. 솔직히 따로따로 입장할 상태는 아니거든.
 “좋아. 내가 특별히 용병단의 리더를 맡지.”
 “······.”
 “······.”
 “······.”
 그때 테로이는 자기 혼자서 또다시 중얼거리고 있다.
 난 그놈을 보고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미친놈.”
 “뭐?!”
 “네놈이 리더가 되면 농담 안 하고 그 용병단은 한 시간 안에 사라질 게다.”
 “무슨 의미야,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지.”
 “······.”
 용병단을 하루 만에 말아먹는 기적은 만들고 싶지 않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지금 다들 얼굴이 밝혀져서는 안 되는 요주 인물들.
 두세 명은 후드를 뒤집어써도 상관없지만 전부는 좀 그렇다.
 진짜 의심스러우니까.
 하지만 그 문제의 해결책은 간단하다. 그 인간한테 배운 변신술이면 장땡.
 하아! 사실 난 이런 변신술을 사용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항상 나름대로(?) 당당하기만 했던 나.
 그렇기에 굳이 이렇게 변장을 해서 얼굴을 감추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 거라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변장이라는 걸 하게 되었으니, 뭔가 미묘하다, 미묘해.
 어찌 됐든 얼굴 관련 문제는 이렇게 넘어가고 그 다음은······.
 “이름을 정해야지!”
 “그래, 이름.”
 “판타스틱 한 용병단 이름으로!”
 “판타스틱?”
 그때 판타스틱을 찾고 계시는 테로이.
 지금 상황에서 판타스틱을 찾는 걸 보면 여전히 긴장감 따위는 갖다 버린 놈이라는 게 새삼스럽게 재확인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 있는 발언은 아니었다.
 왜냐고?
 모든 것의 첫걸음은 ‘이름’이라고 한다.
 테로이의 말처럼 임팩트가 강한 이름을 사용하면 용병단의 이름을 알리기가 쉽다.
 “저기, 테로이.”
 “어.”
 “우리는 이름을 알리면 안 되잖니?”
 “그러네?”
 “······.”
 우리는 조용히 살아야 할 존재들이었다.
 절대 튀는 이름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면 안 되는 존재들이라는 거다.
 이런 내 말에 테로이는 안타까운 말투로 한마디 했다.
 “쳇! 특별히 내 이름을 빌려 줘서 ‘테로이를 존경하는 아이들의 사랑스러운 용병단’이라는 이름을 쓰려고 했는데.”
 “······.”
 진심으로 미친 게 분명하다.
 그런 뭔가 미묘하다 못해 섬뜩한 이름을 용병단의 이름으로 사용하면 100% 시선이 집중될 뿐 아니라 집중 조사가 들어올지도 모른다.
 정말 저 자식이 황태자라는 건 재앙이야. 흐흑!
 
 네이클레버.
 우리 용병단의 이름이다.
 그리 특색이 있는 것도 아니고, 촌티 나는 이름도 아니고 딱 적당하다.
 “리더를 누구로 정해야 하지?”
 아까 말을 하다가 말았는데 용병단을 등록하려면 리더는 필수다.
 물론 테로이가 지원을 하기는 했지만 난 절대 반대다.
 차라리 용병단을 안 만들면 안 만들었지, 저런 놈이 운영하는 용병단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죽어도 없다.
 난 이런 생각과 함께 조심스럽게 에르니와 케이 형을 훑어보았다.
 그러자 그들은 기겁을 하면서 말했다.
 “저, 전 그런 건······.”
 “저도 못해요!”
 거부하신다.
 당연하지만 테로이는 패스고, 세리스는 말을 할 것도 없다.
 그럼?
 “제로스 님이 하는 게······.”
 “그래, 제로스 네가 하는 게 나도 좋을 것 같아.”
 “내가 한다니까!”
 에르니와 케이 형이 내게 하라고 말했고, 테로이는 죽어도 자기가 하겠다고 한다.
 그럼 나오는 결론은 한 가지다.
 테로이는 죽어도 용병단의 리더 불가.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내가 해야 하는 건가.”
 
 
 
 
 
 13장 용병단의 조건
 
 
 
 우리는 용병의 나라라고 불리는 탄지란으로 이동했다.
 이왕 칼을 뽑았으면 즉각 움직이는 게 좋다는 생각으로 재빠르게 이동했다.
 물론 그 과정 중 꽤 까다로운 검사를 받기는 했지만 무사통과.
 이 변장술이라는 게 마나 탐지에는 걸리지 않기에 거의 무적이라고 보면 된다. 엄청난 눈썰미를 가진 존재가 아닌 이상 못 알아보니까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이틀에 걸쳐 탄지란으로 이동했다.
 다행히도 세리스가 액세서리를 가지고 있어서 그걸 팔아 버린 우리는 자금에 부족함 없이 여행을 했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빈둥빈둥 놀면 이 자금도 다 떨어지는 게 당연지사.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정보를 사기 위해서 돈을 모아야 한다.
 끼이익.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탄지란에 들어오기만 하면 알 수 있는, 최고의 크기를 자랑하는 용병 사무실에 도착한 우리들.
 크기만 해도 수백 평 이상이어서 압도적이라고 봐도 된다.
 그렇게 난 수없이 몰린 용병들을 훑어보면서 서류를 접수하는 곳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20대 초반의 여성들이 용병들을 관리하고 있었고, 난 그런 그녀들 중 한 명에게 다가가 문의를 했다.
 “이번에 용병단을 만들고 싶어서 그러는데요.”
 “용병단요?”
 “네.”
 내가 말을 걸자 그녀는 변신술을 끝낸 나와 테로이, 케이 형을 훑어보고 추가적으로 후드로 얼굴을 가린 에르니와 세리스를 바라본다.
 그러고는 나를 보더니 물었다.
 “용병단을 만드시겠다면, 모든 분들이 용병으로 가입된 상태이신가요?”
 “요, 용병이요?”
 “네. 당연히 용병단을 만들려면 용병으로 가입된 사람들이어야지만 가능한 건데요.”
 “······.”
 난 그 여자의 말에 굳어 버렸다.
 그냥 사람 모아서 가면 용병단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단 말인가?
 용병단에 가입할 사람들은 무조건 용병이어야 되는 건가?
 이런 내 모습에 여자의 말이 이어졌다.
 “모든 분들이 용병이 아닌가요?”
 “전부 다요.”
 “그럼 만들어 드릴 수가 없는데요.”
 “······.”
 “일단 모든 분이 용병 시험에 합격하면 다시 신청해 주세요.”
 “······.”
 이런!
 “그리고 참고로 용병 등록은 저기 1번 홀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
 난 그 말에 고개를 돌렸고, 거기서 열심히 용병 등록을 관리하고 계신 20대 중반의 여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뭐, 이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말이다.
 
 나와 에르니, 케이 형은 용병이 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에르니와 케이 형은 소드 마스터라 불리는 분들이고, 나란 인간은 나름대로 이상한 재주로 간단히 용병 시험에 합격할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테로이와 세리스.”
 테로이와 세리스가 용병 시험에 합격할 확률이 0%라는 것이다.
 내가 대충 알아본 결과 용병 시험이라는 게 오크 한 마리를 이기는 건데, 테로이와 세리스는 무리다.
 거의 공격을 하지 않는다고 알려진 최약체 몬스터 슬라임도 상대할 수 없을 정도이니까 말이다.
 이 순간에는 그저 쟁반이가 있어 줬으면 좋겠다만 그놈은 저번 사건 이후로 실종.
 테로이와 세리스라 하더라도 쟁반이의 엄청난 파괴력이라면 던지는 것만으로도 오크를 한 방에 보낼 수 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문제는 쟁반이가 없다는 거지.
 “하아.”
 무슨 방법을 쓰면 테로이와 세리스를 당당하게 용병으로 등록하는 게 가능할까?
 솔직히 말해 정상적인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비정상적인 방법인데, 그 방법 중 제일 많이 쓰이는 게 돈에 관련된 거.
 하지만 우리는 뇌물을 먹일 만큼 금전적으로 풍족한 파티도 아니다.
 한마디로 난감 그 자체다.
 “용병 등록하는 사람이 여자였지?”
 그때 난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내 말에 기겁했다.
 무슨 상상을 한 거냐!
 도대체 이런 말도 안 되는!
 그래, 용병 등록하는 사람이 여자일 수도 있잖아!
 그게 뭐가 이상해?
 그래, 이상한 건 전혀 없다고!
 난 그저 그 사람이 여자였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
 하지만 알고 있다.
 내가 얼마나 짐승 같은 생각을 했는지 말이다.
 그렇지만 인정할 수는 없다.
 이제 맑아질까 말까 하는 순간인데 또다시 타락하다니! 이건 내 자신을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테로이와 세리스를 용병으로 만드는 방법은······.
 “아아악!”
 난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안 돼!
 이건 아니야! 그래, 그건 정말 아니라고!
 
 난 정말 우연치(?) 않게 용병 사무실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아까 본 용병을 관리하는 여자를 발견했다.
 그저 바람을 쐬기 위해서 나왔는데 우연히 봤다.
 믿어 달라고는 안 하겠다. 더럽게 염치없는 짓인 줄은 아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나는 살아갈 수가 없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제길, 내가 여기서 뭐 하는 짓이냐!’
 지금 내 상황을 인지하고 난 고개를 저었다.
 순수해지겠다고 말한 지 얼마나 됐다고 도대체 지금 뭐 하는 거란 말인가?!
 그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이런 잘못된 행동은 고치면 된다. 그래, 그러면 된다.
 “아, 이런! 죄송합니다.”
 “아, 아뇨.”
 “······.”
 하지만 어느새 내 몸은 생각과 달리 저절로 움직였다.
 내 몸은 이미 그 용병 등록을 관리하던 20대 중반의 여성과 부딪힌 상태다.
 에라!
 
 “······.”
 “······.”
 “······.”
 “······.”
 “하하하.”
 모든 일행은 굳어 버렸다.
 단 하루 만에 완료된 다섯 개의 용병단 배지를 보고 말이다. 거기에는 우리의 가명까지 떡하니 적혀 있으므로 절대 주워 온 건 아니라고 증명된다.
 한마디로 만들어 왔다는 거지.
 테로이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난 그놈의 시선에 당황하면서 물었다.
 “왜, 왜 그래?”
 “······.”
 “왜 그런 야리꾸리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게냐!”
 “······.”
 내가 질겁하며 외쳐도 그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다만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난 소리쳤다.
 “아니라고!”
 “······.”
 “정당하게 가져온 거야, 인마!”
 “······.”
 하지만 계속해서 나를 노려만 보신다.
 그러더니 잠시 후 한마디 내던졌다.
 “짐승.”
 “······.”
 “역시 네놈의 본능은 어쩔 수 없나 보군.”
 “지, 진짜 오해야, 인마!”
 “지나가던 개가 춤을 추는 것보다 네놈의 말은 신용도가 없다.”
 “······.”
 하아, 젠장!
 난 그 말에 그대로 뛰쳐나갔다.
 나라고 해서 하고 싶었겠냐! 엄연히 나도 희생한 거라고!
 하지만 이렇게 말해 봤자 그 누구도 나의 이런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다. 아무도 말이다.
 흐흑, 제길!
 
 인정하자.
 난 짐승이다.
 어떻게 보면 이 본능을 버린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 이제는 내가 케라인이라는 남자를 만난다고 한들 이 본능이 사라질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케라인이라는 남자, 꽤 잘나가던 카사노바였던 건 분명하다.
 하지만 그분은 일반적인 카사노바고, 나 같은 경우는 특수(?) 카사노바다.
 한마디로 같은 카사노바라는 이름을 쓰더라도 질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의 비법을 배운다고 한들 소용이 있을까 싶다.
 무엇보다 문제는 심심하면 튀어나오는 이 카사노바의 본능, 이 본능은 이미 내 온몸에 잠식을 끝낸 느낌이다.
 이미 치료할 수 없는······.
 “제로스 님.”
 “에르니.”
 뛰쳐나간 나를 쫓아온 에르니가 내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
 에르니는 기운이 빠진 나를 보더니 용기를 내라는 어조로 말했다.
 “괜찮아요.”
 “······.”
 “어차피 이번 일은 세리스 님과 테로이 님을 위한 거잖아요.”
 “······.”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배운 게 그렇게 쉽사리 고쳐질 리는 없잖아요. 그러니 좀 더 시간을 두고 노력해 보는 게 어떨까요? 제 언니를 찾아 주려는 것에 대한 보답으로 저도 제로스 님의 간절한 바람을 도와주도록 노력할 테니까요.”
 “에, 에르니.”
 난 그 말에 감동의 눈빛으로 에르니를 바라봤다.
 그래, 에르니의 말처럼 지금이라도 노력해서 이 본능을 버리는 것이다. 천천히 말이다!
 난 그렇게 나를 위로해 준 에르니가 고마워서 계속해서 쳐다보았고, 에르니는 그런 내 눈빛이 부담스러웠는지 얼굴이 붉어지면서 고개를 살짝 돌린다.
 예쁘다. 저런 모습을 보면 볼수록 너무나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열리는 내 주둥아리.
 “당신이라는 존재의 미소는 제 마음을 녹여 버리네요.”
 “제, 제로스 님······.”
 “······.”
 아아악! 결심 3초 뒤, 무너졌다.
 
 
 
 
 
 14장 첫 임무
 
 
 
 그래, 에르니 말대로 천천히 하자.
 이건 단번에 고쳐질 수 있는 병이 아니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나아진 건가?
 모르겠다. 나아진 건지 아닌지.
 어찌 됐든 이제 용병으로 다 등록된 상태고 용병단도 가볍게 만들어 둔 상태다.
 이제 할 것은 난이도에 맞는 의뢰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는 일뿐이다.
 우리 용병단의 등급은 F인데 그것은 SSS, SS, S, A, B, C, D, E, F의 등급 중에서 제일 낮은 등급이다. 하지만 한 번만 임무를 완수해도 D로 올라간다니 기다리는 수밖에······.
 그렇게 난 숙소에서 일거리가 있나 없나 용병 사무실을 들락거렸다.
 하지만 이놈의 F급 일자리는 하는 것보다 찾는 게 더 힘들다.
 그만큼 F급 일은 찾기 힘들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고 찾으면 나올 거라는 생각에 열심히 찾던 중 그 수많은 의뢰 목록 속에서 발견한 F급 의뢰.
 “아싸!”
 정말 구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거 한 번만 하면 그 다음부터는 일을 무난하게 처리할 수 있을 테니 어서 이걸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의뢰의 내용을 본 난 잠시 생각을 멈춰야 했다.
 “······.”
 그 내용이라고 하면······.
 
 ―F급 의뢰―
 의뢰 대상자: 피해 여성들.
 피해: 이상한 쟁반이 날아들어서 자신에게 공포를 심어 줌.
 내용: 주변에 쟁반이 나타났다. 피해자들에 의하면 그 쟁반은 말도 하고 날아다니는 등 기이한 현상을 보인다고 한다.
 의뢰: 그 쟁반의 정체를 밝혀라.
 의뢰비: 40레슨.
 
 무언가 너무나도 친숙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상황이다.
 특히 저 ‘쟁반’이라는 말, 무척이나 감동적이다.
 그뿐 아니라 그 쟁반이 말도 하고 여자들한테 집적거린다?
 그런 쟁반은 내가 알기로 세상에 단 하나다. 말을 하는 쟁반도 그놈뿐이지만, 여자한테 집적거리는 쟁반도 그놈뿐이다.
 한동안 실종돼 모습을 보이지 않더니 여기서 이런 짓거리를 하고 계셨던 거냐?
 
 용병단의 의뢰지만, 굳이 모두가 나설 필요 없이 나 혼자면 충분했다.
 괜히 쟁반이 찾는 작업에 다른 사람까지 동원하는 건 인력 낭비이니까.
 그나저나 이 자식, 제발 자기 모습 좀 생각하고 살라고 내가 몇 번이나 당부했건만······.
 자기가 인간인 줄 알고 심하게 착각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보통 웬만한 사람, 아니 웬만하지 않은 사람도 쟁반이 말하고 집적거리면 심히 놀랄 게 당연하다.
 그게 약간 오버해서 심장마비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소라는 거다.
 그만큼 쟁반이의 행동은 살인 행위라는 것이다.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이 자식을 잡으려면······.”
 이놈의 스타일을 알면 된다.
 쟁반이는 모든 여자들을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그중에 유난히 좋아하는 스타일이 있다.
 예를 들어 키는 대략 150∼155cm 정도?
 나이는 16∼17살, 그리고 체형은 약간 아이 같고 얼굴은 귀여운 여자.
 한마디로 아담하고 귀여운 여자 아이를 선호한다는 거다.
 자기 나이가 몇천 살이라더니, 그렇게 어린 소녀를 노리는 건 뭐 하는 플레이인지 정말 모르겠다.
 정말 남자로서 일말의 양심도 없는 행위라고밖에 할 말이 없다.
 난 그렇게 생각하면서 어느새 레이더를 가동시킨다.
 쟁반이가 미치도록 선호하는 스타일을 찾아내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런 스타일을 찾는 게 쉬운 작업도 아니고, 특히 평민들 사이에서 그런 스타일은 더욱 찾아내기 힘든 게 사실이다.
 그렇게 난 한참을 살펴보았고, 그때였다.
 “꺅!”
 “······?!”
 지금 내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못 들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난 그 비명 소리를 들었다.
 남자의 비명엔 관심 없지만, 카사노바의 기술 중 여자의 비명은 무조건 잡아야 한다는 특수 기술이 있으니 들을 수밖에 없다.
 위기에 처한 여성을 구하면 작업 들어가기가 쉽다는 것이 그 영감탱이의 말씀이셨으니까 말이다.
 아무튼 어서 이 비명의 근원지를 찾아서 가 봐야겠다.
 
 ―후에에에에.―
 “······.”
 ―흐에에에엥.―
 “······.”
 평민 중에는 미소녀가 없을 거라는 아까 한 말을 가볍게 무시할 정도로 귀여운 소녀가 쟁반이의 만행에 벌벌 떨고 있었다.
 대략 나이는 16살쯤에 키는 157cm 정도로 아담한 스타일이시다.
 정말 쟁반이가 최고로 좋아하는 여성상에서 한 치의 오차도 벗어나지 않은 완벽한 모습이었다.
 그러니 결론은 여기에 있는 쟁반은 물어볼 것도 없이 ‘쟁반이’라는 거다.
 
 ―베이베, 베이베.―
 “사, 살려······.”
 ―나도 사랑한다니까.―
 “······.”
 ―컴 온 베이비.―
 “······.”
 소녀는 얼마나 공포에 떨었는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말도 하고 날아도 다니는 쟁반이가 자신에게 천천히 다가온다.
 그러자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 순간이었다.
 “이 자식아, 좀 작작해!”
 “······.”
 ―우어억!―
 누군가가 나타나서 그 귀신(?)이 들린 쟁반을 그대로 날려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귀신 쟁반을 날려 버린 주인공은 자신을 향해 다정한 미소와 함께 말을 건넨다.
 “괜찮아요?”
 “아······.”
 “많이 충격 받으셨죠?”
 얼굴은 잘생기지 않았다.
 그저 평범 그 자체(변장술로 인해)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무언가 자신의 영혼을 끌어당기는 듯한 마력이 담겨 있었다.
 그뿐 아니라 자신을 향해 안심을 시켜 주려는 듯 미소를 지어 주는데, 그 미소조차도 말로 표현이 불가능할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한마디로 그녀는 맛이 가 버렸다.
 자동으로 사용되는 제로스의 은밀한 눈빛과 감미로운 목소리에 넘어간 것이다.
 
 “저기······?”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여자 아이의 모습에 난 당황했다.
 저 눈빛은 분명 사랑에 빠진 눈빛인데?
 난 아무런 작업도 한 적이 없는데 이건 무슨 현상(자기의 달콤한 목소리와 미소가 작업용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 순간이었다.
 그 여자 아이는 갑자기 내 품에 안기더니 말했다.
 “어, 어지러워요.”
 “······.”
 “지, 집에 좀 데. 데려다 주시면 안 될까요?”
 “안 될 건 없지만 가, 갑자기······.”
 “부탁드려요.”
 “······.”
 
 정말 이게 바로 우연의 우연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쟁반이에게서 구해 준 그 소녀, 자신을 마레나라고 소개한 소녀의 집은 내가 알고 있는 집(?)이었다.
 아니, 집이라고 하기에는 그렇고 우리가 묵고 있는 곳이랄까?
 한마디로 마레나 여관이었던 것이다.
 갈 데 없는 우리는 처음 이 도시에 도착한 이후 이곳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게 사흘 정도 된 것이다.
 “이건 운명의 만남?”
 “······.”
 글쎄다. 우연이기는 한데 이것 가지고 운명의 만남이라고 한다면, 모든 존재들이 운명의 만남에 치이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마레나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말한다.
 “요, 용병단의 리더라고 들었어요.”
 “뭐, 리더라고 해도 만들어진 지 별로······.”
 “아뇨,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리더잖아요!”
 중요하다. 충분히 말이다.
 솔직히 말해 용병된 지 이틀 된 용병 다섯 명의 리더와 몇천 명을 이끌고 몇 년을 한 용병은 하늘과 땅, 아니 비교 자체도 불가능한 수준이다.
 하지만 이분은 그저 리더라면 다 같은 줄 아신다. 휴.
 마레나는 내 손을 갑작스럽게 붙잡더니 말했다.
 “모든 걸 무료로 제공할 테니 여기서 얼마든지 머무세요! 집처럼 생각하고요!”
 “아뇨. 그건 죄송해요.”
 “죄송하다니요! 귀신 씐 쟁반한테서 저를 구해 주셨잖아요!”
 “하하······.”
 귀신 씐 쟁반이라, 나름대로 에고 쟁반이라고 자부심을 갖는 쟁반이가 들으면 눈물 날 소리다.
 하지만 뭐 어차피 들을 이유도 없으니 패스.
 “그건 좀······.”
 아무리 그대로 무료로 이용하는 건 그렇다.
 “저희 부모님도 허락하셨으니 걱정 마요!”
 “······.”
 “일행이 다섯 분이 있으시죠?! 모두 무료로 묵길 원하시면······ 아니, 저랑 평생 살아요!”
 “······.”
 평생까지 나왔다.
 평생이라면 결혼이라는 의미와 별로 다른 것 없이 들리는데 내 귀가 이상한 탓일까? 아니면 정상인 걸까?
 어찌 됐든 이런 건 너무 부담돼서 받을 수 없다.
 어차피 나도 의뢰였기에 했을 뿐이니까.
 난 그런 마음으로 그 소녀의 과도한 호의를 거절하려고 했다.
 그런데······.
 초롱초롱.
 “······.”
 초롱초롱.
 “······.”
 나를 너무나도 초롱초롱하게 바라보신다.
 마치 거절하면 내가 아주 나쁜 놈이 되어 버릴 것 같은 눈빛으로 말이다.
 난 다시 조심스럽게 그녀를 향해 말했다.
 “그건 너무 좀 그래서······.”
 “알겠어요! 그럼 저랑 오빠 동생처럼 지내 주세요.”
 “······.”
 “그러면 된 거죠? 이번에도 거절하면!”
 “······.”
 ‘거절하면’이라는 말과 함께 갑자기 살벌해지는(?) 분위기.
 난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러죠!”
 “오빠, 고마워요!”
 “······.”
 그러면서 그 소녀는 내게 안긴다.
 이건 뭔가 아이러니하다.
 
 “이런, 엄청나군.”
 “······.”
 “넌 진정 변태다.”
 “······.”
 난 테로이의 말에 묵묵히 대답을 거부했다.
 이런 내 모습을 본 테로이는 나를 향해 강렬한 어조로 말하신다.
 “어제는 배지를 만들고, 오늘은 여관 주인집 여자 아이를 꼬셔서 숙박을 무제한 무료로 제공받게 만들다니!”
 “······.”
 “너란 인간은 말 그대로 아저씨보다 짐승이다!”
 “오해야.”
 “지랄 염병! 오해 좋아하네.”
 “······.”
 “넌 어쩔 수 없는 카사노바야!”
 아악!
 그 한마디가 내 심장에 비수를 꽂아 댔다.
 그래, 부인할 수 없다.
 내 몸과 내 마음은 이미 카사노바라는 이름 아래에 잠식이 끝났다.
 하지만 오늘 일은 정말 억울하다.
 나름대로 무언가 작업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그 소녀를 쟁반이에게서 구해 주고(?), 그 소녀가 부축해 달라기에 부축해서 그 소녀의 집에 왔는데, 마침 우리가 묵고 있던 여관의 주인집 딸아이였다. 이렇게 말하면 안 믿어 줄 것 같다.
 마치 거짓말 같으니까.
 “대단해, 대단해. 물론 네놈 때문에 돈이 안 드는 건 좋은데 이제 네놈이 순수해지겠다는 생구라는 그 누구도 믿지 않아!”
 “······.”
 “더 이상 그런 생구라는 사절하마.”
 저, 정말인데.
 난 정말 순수해지고 싶다고!
 하지만 상황이 자꾸 나를 타락시켰다.
 그리고 이번 건에 대해서는 한사코 거부했는데 강제로 된 거랑 다름이 없단 말이다!
 그러니 억울해, 억울하다고!
 그래, 나의 이런 억울함을 에르니라면 알아줄 것이다.
 난 그런 생각과 함께 에르니를 바라봤다.
 그런데······.
 쌔앵.
 찬바람이 잘도 날아다닌다.
 에르니의 얼굴은 처음 만났을 당시의 그 냉기로 가득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저렇게 냉기로 가득한 분이 아니었는데 하루 만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면 저렇게 차가워지는 거지?
 나와 눈이 마주친 에르니는 고개를 휙 돌렸다.
 “······.”
 그런 모습에 난 그대로 굳어 버렸다.
 분명 저건 나를 외면하는 모습?
 그럴 리가······.
 에르니라면 나의 이 변태 본능을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에르니조차도 이해해 주지 못하는 거야?
 그런 내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돌린 에르니가 갑자기 문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난 외쳤다.
 “아악!”
 절망에 허우적거린다.
 이제는 정말 아무도 내가 순수해지기 위해 노력한다는 말을 안 믿어 주는 거야?
 흐흑, 난 정말 순수해지려고 한다고!
 그런데 왜 안 믿어 주냐고!
 그때 어느새 내게 다가온 세리스의 말이 들려왔다.
 “오빠.”
 “······?”
 평소처럼 밝은 세리스의 목소리가 아니라 왠지 날이 바짝 선 목소리였다.
 세리스는 나를 바라보며 그 귀여운 얼굴로 싱긋 웃으면서 말하신다.
 “왠지 모르게 화가 나.”
 “······.”
 “잘 먹고 잘 살아.”
 “아, 아니, 잠깐! 세리스!”
 “······!”
 휙 되돌아서서 나를 버리고 가는 세리스.
 아아악! 세리스, 너마저도!
 물론 이런 오해를 사도록 한 내 행동에도 분명 잘못이 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무참하게 나를 버리다니!
 “후후! 저게 바로 카사노바의 최후인가?”
 “······.”
 “호호호(?)!”
 그때 테로이가 유일하게 남아서 나를 비웃었다.
 난 그런 테로이를 보면서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테로이는 움찔하더니 외쳤다.
 “너, 너 뭐 하는 거야?! 그 눈빛 뭐야?!”
 “······.”
 “나, 나 황태자야! 인마!”
 “······.”
 “그리고 네가 잘못해 놓고 왜 나한테 화풀이하려는 거야, 인마!”
 “네가 말했잖아.”
 “······.”
 “이런 친구라는 자식이!”
 “아아악!”
 난 그날 나의 슬픔을 테로이와 함께(?) 풀었다.
 
 “하아······.”
 에르니는 자신이 도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왜 자신이 이렇게 화가 나는지, 왜 이렇게 마음이 어지러운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알고는 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거짓말이라고 할지 몰라도 자신의 눈에는 그래도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이 말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고 자신이 이해해 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감정은 그 누구보다 잘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한 자신이었다.
 그런데 이런 이상한 감정 앞에서는 도무지 자신을 조절할 수가 없다.
 아무리 노력해 봐도 말이다.
 
 
 
 
 
 15장 고대 몬스터 트라운 타임
 
 
 
 레켄은 다짐했다.
 도무지 제로스를 공격할 수 없다.
 차라리 제로스 대신 위험도는 높을지 몰라도 에르니라는 여자를 죽이고 그녀의 목을 갖는 게 그녀에게 유일한 타개 방법일지 모른다.
 한마디로 제로스의 목을 이용해서 프란티스를 유인하는 게 아니라 에르니의 목을 이용해서 그녀의 언니를 유인하자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그들의 행방은요?”
 레켄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레켄의 말에 그녀의 부하는 즉각 대답했다.
 “용병의 나라 탄지란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정확한 장소는 어디입니까?”
 “그건······.”
 “상관없습니다. 트라운 타임이 한바탕 소동을 벌이면 모습을 드러낼 테니까 말이죠.”
 “레켄님.”
 “······?”
 그때 레켄을 향해 부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이렇게 시끄럽게 일을 처리해도 괜찮을까요?”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알 분들은 다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존재들은 인간이 아닙니다.”
 
 “야, 쟁반이.”
 ―그런 저질적인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네가 좀 참신한 행동을 해 봐, 내가 쟁반이라고 부르나!”
 ―내가 얼마나 참신한데!―
 이런 빌어먹을 쟁반이 자식, 아직도 자신의 잘못을 전혀 모르고 있다.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민폐를 주는지, 특히 많은 여성들에게 얼마나 잊을 수 없는 공포를 주는지 말이다.
 난 그런 쟁반이에게 협박을 가했다.
 “진짜 너, 가게에 팔아 버린다?”
 ―······.―
 “참는 것도 한계가 있어, 쟁반아.”
 ―······.―
 가게에 팔아 버린다는 말에 금세 조용해지는 쟁반이.
 쟁반이도 바보가 아니기에 그 의미를 알고 있다.
 한마디로 식당에 팔아 버린다는 건 평생 쟁반으로 치욕적인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 아무리 자기가 쟁반이의 모습이라고 하더라도 쟁반으로 살아가기는 싫을 테니 말이다.
 ―제길.―
 쟁반이의 말이 들려오지만 사뿐히 무시해 주자.
 이제 좀 조용해질 생각을 하니 마음이 가볍구나.
 하지만······.
 “꺄아아악!”
 쾅쾅쾅!
 “으아악!”
 “사, 살려 줘!”
 “으아악!”
 “······.”
 쟁반이가 조용해질 거라는 생각에 좋아진 기분도 잠시,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난 멀뚱히 쟁반이를 바라봤다.
 “뭔 일이냐?”
 ―내가 알 것 같음?―
 “아니.”
 ―그런데 왜 물어?―
 “그냥.”
 네놈이 알 리가 없지.
 아무튼 이런 마을에서 사람들의 단체 비명 소리는 아주 익숙하다. 저번에 케스트 제국의 수도에서 일어난 비명 소리와 상황이 흡사하기 때문?
 설마?
 그 순간 내 머리를 지나가는 한 가지 생각.
 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고대 몬스터?”
 
 이상하게도 불길한 상상은 항상 맞아떨어지는 이유가 뭔지 개인적으로 참으로 궁금하다.
 저 2미터 정도의 몽둥이를 난폭하게 휘두르고 계신 오크 사촌님.
 진짜 말 그대로 오크 사촌이다.
 크기만 오크보다 클 뿐 다른 점이 하나도 없다. 굳이 다른 점을 찾자면 그의 몽둥이질 한 방에 모든 게 쓸려 나가는 압도적인 파괴력 정도랄까?
 “······!”
 “······!”
 그때 어느새 도착한 에르니와 테로이 님도 그 몬스터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어차피 지금 이 상황에서 굳이 정체를 감춰야 할 이유도 없고, 일단은 사람들의 목숨이 더 소중하다는 게 저분들의 생각일 것이다.
 어찌 됐든 소드 마스터 두 분이 저 변종 오크를 상대하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저 오크 사촌님은 간단히 죽음을 맞이할 거다.
 푸욱!
 푸욱!
 “······.”
 “······.”
 “······.”
 그때 내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어마어마한 속도로 그 오크 변종의 목을 꿰뚫은 두 개의 검.
 한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 괴물에게 쓸려 나가던 기사들과 병사들은 폭발적인 힘을 보여 준 에르니와 케이 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번 고대 몬스터는 너무나도 허약하네?
 ―빌어먹을!―
 “······?!”
 그때 갑자기 쟁반이답지 않게 쟁반이가 소리쳤다.
 빌어먹을이라니?!
 어디서 빌어먹음?
 저질 개그 죄송.
 그때 내 의문을 쟁반이가 아닌 저분이 풀어 주신다. 갑자기 세상이 멈추었다.
 마치 정지된 느낌이랄까?
 이상하게 나는 볼 수 있었지만 모든 사람들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난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
 그 정지된 시간 속에서 상황이 서서히 방금 전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에르니와 케이 님이 달려들기 바로 전의 상황으로 말이다.
 그리고 순식간에 상처가 회복되는 괴물.
 이건 무슨 말도 안 되는?!
 그 순간 쟁반이가 짜증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트라운 타임!―
 “그게 뭐냐?”
 또다시 알 수 없는 이름이 등장해서 내가 질문을 하자 쟁반이는 말하신다.
 ―트라운 타임, 시간을 되돌리는 고대 몬스터.―
 “······.”
 난 할 말을 잊어버렸다.
 시간을 되돌려?
 물론 방금 전 무언가 되돌아간 상황을 보긴 했지만 그게 실제로 돌아간 거라고?
 말도 안 된다.
 신들도 불가능할 것 같은 능력을 몬스터라는 생물체가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쟁반이는 이런 내 불신감을 싹 날려 주는 멘트를 치신다.
 ―저 트라운 타임은 신 중 하나가 몬스터화가 된 거야.―
 “······.”
 하하! 뭐시라?
 신이 몬스터가 돼?
 무슨 이런 개떡 같은 소리냐. 신이 왜 몬스터가 되는 건데?
 말도 안 되잖아! 아무리 내가 고대 몬스터에 대해 모른다고 해도 이런 구라는 좀 심한데, 쟁반아.
 ―절대 거짓말이 아니야! 자세한 건 모르지만 저 트라운 타임이라는 몬스터는 신이 변이된 몬스터! 충분히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 있다고!―
 “······.”
 믿고 싶지 않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말이다.
 하지만 쟁반이가 괜히 실없는 소리를 하는 놈이 아니라는 건 내가 잘 안다.
 그러니 믿어야 한다?
 “무, 무슨 일이지?!”
 “······!”
 그때 갑작스럽게 되돌려진 시간에 에르니와 케이 형이 무척 당황해 했다.
 그들에게 설명해 주고 싶지만, 설명하기에는 좀 그렇다.
 또다시 근처에 있는 사람들을 쓸어버리는 저 괴물을 보는 건 그러니까 말이다.
 “야, 쟁반이! 저 이상한 몬스터를 처리할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어.―
 “······?”
 ―시간의 속도를 넘는 거.―
 “······.”
 ―말도 안 되는 미션이지.―
 시간의 속도를 넘으라니, 그런 말도······.
 “안 되지는 않겠군.”
 시간의 속도를 넘으라고 한다.
 그 말은 시간의 속도만 넘으면 저 괴상망측한 괴물을 처리하는 게 가능하다는 거지?
 그렇다면 가능하다. 이 빌어먹을 카사노바의 직업(?) 기술 중에는 시간의 속도를 무시하는 기술이 있으니까 말이다.
 
 
 
 
 
 외전 카사노바의 필수 교과목
 
 
 
 내가 7살 때였다.
 “아빠, 카사노바랑 설거지랑 무슨 상관이야?”
 순진무구했던 난 물었다. 여자 집들을 돌아다니면서 설거지하는 이유가 궁금했기에.
 그 말에 그 영감탱이는 말하셨다.
 “카사노바니까.”
 “······.”
 
 8살 때, 난 궁금했다.
 왜 카사노바는 남의 집에 들어가서 청소를 해야 하는 걸까?
 그것도 굳이 여자의 집에만 말이다.
 난 그래서 물었다.
 “아빠, 청소랑 카사노바랑 뭔 상관이야?”
 “카사노바니까.”
 “······.”
 
 9살 때, 난 또 궁금해졌다.
 왜 카사노바라는 직업은 설거지에다가 청소도 모자라 식사 준비까지 해야 하는 걸까?
 그것도 무조건 여자 집에서만 말이다.
 난 또다시 궁금해졌고, 또다시 물었다.
 “음식 하는 거랑 카사노바랑 무슨 상관이야?”
 “넌 카사노바잖니?”
 “······.”
 
 10살, 난 이 나이 때부터 여자의 속옷을 다뤄야 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여자의 속옷이나 옷 같은 걸 직접 빨래하는 작업이었다.
 도대체 이거랑 카사노바라는 직업의 연결성을 찾고 싶지만 절대 못 찾겠다.
 그래서 난 여자들의 속옷을 빨면서 물었다.
 “이게 왜 카사노바야?”
 “넌 멋지잖니?”
 “······.”
 
 그리고 난 나이가 들어서 알았다, 그 영감탱이가 나를 이용해 먹었다는 걸 말이다.
 모든 여자들에게 밥, 청소, 설거지, 빨래까지 자기가 한 것으로 돌리고 교묘하게 어린 나를 부려 먹은 것이다.
 한마디로 일은 내가 했지만 그 영감탱이가 다 한 것처럼 되어 버린 거다.
 “빌어먹을!”
 힘껏 소리쳐 보았지만 이미 속은 후라 되돌릴 수 없었다.
 
 
 <『윈드 엠페러』 제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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