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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가면의 용병왕 [E](종료231004)

가면의 용병왕 1권

2019.08.19 조회 309 추천 1


 서장. 산적 등쳐먹는 놈
 
 
 
 
 산에는 많은 것이 있다.
 우거진 나무, 졸졸 흐르는 시냇물, 수많은 동물과 그들이 간혹 찾는 작은 샘. 그리고······ 산적들.
 아이덴의 아이저만 지방, 그 부근에 있는 헤닝 산에는 대략 다섯 개 가량의 산적 소굴이 있다.
 볼튼은 그 산적 소굴의 두목, 그의 말을 빌려 고상하게 이야기하자면 보스다. 수십 명의 산적이 그의 밑에서 열심히 일을 한다.
 그들이 열심히 일을 할수록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볼튼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다. 오히려 부하들에게 더욱 열심히 일을 하라고 매질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많은 부하를 두고 있는 볼튼은 지금 그물 침대에 누워 느긋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마을에서 데려온 여인 하나가 그에게 맛있는 과일을 떠먹여 주고 있는 지금의 그에게 근심은 전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산적들은 안다. 그렇게 편해 보이는 그에게도 말을 꺼내지 못하는 근심이 하나 있음을 말이다.
 “두모옥!!”
 멀리서 부하 하나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다.
 “쯧. 그토록 보스라고 부르라고 했건만······ 교육을 좀 더 시켜야겠군.”
 헐레벌떡 뛰어온 부하 녀석의 다급한 모습을 보면서도 볼튼은 느긋하기만 했다.
 “두, 두목! 두목!”
 “쯧쯧. 보스라고 부르라고 하지 않았냐? 새끼! 얼마나 더 맞아야 정신 차릴래?”
 “두, 두목! 아, 아니 보스! 그게 지금 중요한 게 아니라!”
 “중요한 게 아니라니! 네가 좀 덜 맞았구나? 지금 이 보스의 위신이 달린 문제인데!”
 “그게 아니라니까요! 두······ 아니 보스! 옵니다!”
 “오긴 뭐가 와? 네가 치매기가 온다고?”
 “그게 아니라······ 그놈이······ 그놈이······ 온다구요!”
 그놈이라는 말에 볼튼의 얼굴에 살짝 불안한 기색이 어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어 그 생각을 지웠다.
 ‘왔다 간 지 얼마 안 되었잖아. 다음에 오려면 한참 남았지!’
 “뭐? 그놈? 스스로 여기에 올 놈이 있으면 당연히 환영해야지! 뭐 해? 몽땅 털어 먹을 준비 안 하고?!”
 “그, 그게 아니라니까요! 그놈이라니까요! 두목이 항상 말하는 그! 비열하고 멍청하고 짜증나고 재수 없는 그놈!”
 “뭐? 비열하고 멍청하고 짜증나고 재수 없는 그놈? 내가 아는 놈 말고 또 누가······. 헉!”
 “누가 비열하고 멍청하고 짜증나고 재수 없다는 말입니까?”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볼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목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이는 츠바이핸더를 뒤에 멘 20세 가량의 청년이었다.
 “헤헤! 오, 오셨습니까?”
 콰당!
 다급하게 일어서려 하다가 그물 침대가 뒤집혀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지만, 볼튼은 아픈 내색조차 못하고 실실거리며 웃음을 지어야 했다.
 “어떻게······ 연락도 없이······.”
 “언젠 연락하고 온 적이 있었습니까?”
 퉁명스럽게 대답한 청년은 볼튼에게 과일을 먹여 주고 있었던 여인을 슬쩍 바라보았다.
 “혹시······. 잡혀 오셨습니까?”
 볼튼의 안색이 살짝 굳으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정당한 보수를 주고 데려온 겁니다. 날마다 먹여 주고, 재워 주고······. 거, 뭐시냐······ 강······ 아니, 강제로 뭘 하진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그의 변명에 청년은 여인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여인도 볼튼의 말에 동조하는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하긴, 그렇게 맞았는데 또 그런 짓을 하면······ 살 생각이 없는 겁니다.”
 청년에게 죽기 직전까지 맞아 봤던 볼튼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나, 납치를 했으면······.’
 하지만 그는 이내 표정을 수습하고 말을 꺼냈다.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로······ 지난번에 필요한 것을 가져가지 않으셨습니까? 혹시 또 무슨 필요한 것이라도······?”
 “여행에 필요한 장비가 필요합니다. 여분의 장비가 있습니까?”
 “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난데없이 여행 장비라니요? 어디 멀리 떠나기라도 하십니까?”
 “네.”
 청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확답에 볼튼의 표정은 환희로 빛나기 시작했다.
 ‘이건 기적이야! 이 지긋지긋한 놈이 떠나다니!’
 “물론 여분이 있습니다! 여분이 없으면 쓰고 있는 놈 걸 뺏어서라도 드리겠습니다. 암요! 그래야지요!”
 한없이 느긋한 산적 두목의 모습을 보이던 볼튼의 움직임이 급격히 빨라졌다. 부하들에게 명령해 여행 장비를 구해 오고 먼 곳을 갈 수 있도록 여비까지 마련하였다. 오래 보관할 수 있는 휴대 식량과 꽤 먼 곳까지 지리를 알고 있는 안내자까지 마련하였다.
 일사천리로 이 모든 일을 처리한 볼튼은 자신들의 영역 입구까지 청년을 배웅하였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아니요! 별말씀을요! 저희가 오히려 더 고마웠지요! 나쁜 짓만 하던 저희에게 인간의 도리를 알려 주셨지 않습니까?”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럼······ 다시 볼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꾸벅 목례를 한 청년은 안내인을 앞세우고 추적추적 걸어가기 시작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먼 길 평안히 가십시오!”
 수십 명의 산적의 배웅 속에 청년의 뒷모습은 시야 너머로 사라졌다.
 청년이 사라지자 볼튼의 시선은 옆에 있던 부하 하나에게 돌려졌다.
 “안내자는······ 확실하겠지? 정말 길을 잘 아는 거겠지?”
 “물론입니다. 두, 아니······ 보스!”
 “그래. 그래야지. 혹시라도 그놈이 길을 잊어버리고 다시 돌아올지도 몰라.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 크크크크크! 드디어 해방이다.”
 “맞습니다, 두목! 드디어 해방입니다!”
 “자! 길 앞에 팻말 하나 걸어 놔라! 오늘은 편안하게 지나가시라고! 잔치를 벌이자! 드디어 해방이라고!”
 “오오오오오!”
 잔치를 벌인다는 말에 주변의 산적들이 거대한 환호성을 터트렸다. 그런데, 한 녀석이 조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볼튼에게 말했다.
 “그런데 두목······ 그놈······ 다시 볼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라고 했었는데요?”
 꼭 이렇게 초를 치는 놈이 있다. 그런 짓을 하는 놈은 그 다음날 새파란 색조 화장을 하고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가해자는 싸늘한 얼굴을 하고 있는 볼튼이 될 것이다.
 
 
 
 
 
 1장. 블러디 로즈
 
 
 
 
 산속의 중앙에 난 길에 수십 구의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열다섯가량의 사람들이 그 시체들을 짓밟으며 흉험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 중 하나를 제외한 모두가 낡고 허름한 옷을 입고 있는, 산적으로 보이는 남자들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눈에 확 들어올 정도로 선정적인 옷을 입고 있는 여인이었다.
 놀랍게도 열다섯가량의 남자들은 단 한 사람의 여인과 싸우고 있었다.
 “이 악마 같은 년! 죽어라!”
 “죽어!”
 동료의 죽음에 분노한 산적들의 눈은 언제부터인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들의 입에선 끊임없는 욕설과 저주가 흘러나왔다.
 그에 비해 그들과 상대하는, 이리저리 찢어져 더욱 선정적으로 보이는 옷 사이로 슬쩍슬쩍 아름다운 몸매를 드러내는 여인의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흘러나오지 않고 있다. 여기저기서 묻은 피로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얼굴 사이로 드러나는 날카로운 눈이 여인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분노는 더욱 크다는 것을 말이다.
 휘리릭!
 그녀의 손에 들린 강철 채찍은 지옥의 촉수라도 되는 것처럼 산적들을 옭아매었다. 채찍은 목이든 팔이든 다리든, 가릴 것 없이 감기만 하면 찢어 버렸다. 바닥에 나뒹구는 시체들의 참혹한 모습이 그 증거였다.
 하지만 산적들도 이젠 쉽게 당하지 않았다. 동료를 잃은 경험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까지 살아남을 만큼 강하고 노련하기 때문인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그녀의 채찍을 잘도 피하고 있었다.
 채앵!
 한 산적의 검에 맞은 채찍이 주인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힘없이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다른 산적 하나가 팔을 뻗더니 채찍의 끝을 잡아 버렸다.
 “흐압!”
 힘껏 당긴 산적의 손길에 이제껏 한 여인을 지켜 주던 채찍은 그녀의 손을 벗어나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흐흐흐!”
 무기를 잃어버린 여인의 모습에 음흉한 미소를 터트리는 산적들.
 “흥!”
 여인은 싸늘한 코웃음과 함께 바닥을 나뒹구는 롱 소드 하나를 걷어찼다. 솟아오른 롱 소드를 잡아채는 그녀의 모습에 산적들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가 이내 풀렸다.
 “흐흐. 익숙하지도 않은······.”
 쉬익!
 칼을 쥔 그녀를 보며 이죽거리려 하던 산적이 돌연 말을 멈췄다.
 “케엑!”
 단발마의 비명과 함께 산적의 머리가 몸통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의 잘린 목에서 분수처럼 솟구친 핏물이 그녀의 머릿결을 타고 흘러내렸다.
 굳은 표정으로 자신에게 재차 무기를 겨누는 산적들. 하지만 그녀는 그들에게는 관심도 없다는 듯 롱 소드를 치켜들었다. 칼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물을 혀끝으로 핥는 그녀의 얼굴이 요염하게 빛났다.
 “호홋! 채찍만 쓸 줄 알았어?”
 “이익!”
 분노한 산적들의 돌진으로 싸움이 재개되었다.
 그녀의 검은 빠르고 날카로웠다.
 산적들의 검을 회피하는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그녀의 검이 요염한 여인의 혓바닥처럼 산적들의 전신을 훑어 내리자 또 한 사람의 산적이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그렇게 열 명의 산적이 쓰러졌다. 하지만 그녀에게 특별히 유리해진 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움직임 역시도 상당히 둔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챙! 휘잉!
 지치지 않았다면 쉽게 피했을 일격을 여인은 힘겹게 막아냈다. 힘이 빠진 그녀는 격돌의 충격을 이기지 못해 그만 롱 소드를 놓치고 말았다.
 “그만 포기해라. 더 이상 반항하면······ 죽인다.”
 무방비가 된 그녀의 목에, 이젠 네 명만 남게 된 산적 중 하나가 클레이모어를 겨누었다.
 “흥!”
 칼의 위협에 목을 치켜든 그녀의 모습은 오히려 여왕처럼 도도해 보였다.
 “이제 어쩔 셈인가? 가짜 산적 나으리들?”
 네 명의 남자가 움찔 몸을 떨었다. 도톰한 그녀의 입술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어색한 욕설에, 격식 있는 검술. 정말 산적이었다면 벌써 도망쳤겠지? 안 그런가 기사 나리들?”
 침묵에 잠겨 있던 남자들 중 하나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과연······ 크림슨 울프라는 건가?”
 크림슨 울프.
 거칠고 험악한 아이덴의 용병들 모두가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있으니 크림슨 울프가 바로 그들이다.
 아무리 어려운 의뢰라도 홀로 해결하며, 그만큼 강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핏빛 늑대들. 그들 중 하나라면, 연약한 여인의 손에 수십의 기사들이 죽임을 당한 이 광경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그래, 명예로운 기사 나리들께서는 무슨 이유로 미천한 용병 하나를 단체로 습격했을까?”
 이들의 비겁한 습격을 꼬집는 그녀의 말에, 그녀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젊은 남자의 얼굴이 살며시 붉어졌다. 하지만 그녀에게 클레이모어를 겨누고 있는 남자에게서는 아무런 흔들림을 찾을 수 없었다.
 “네년은 고귀하신 분께······ 상처를 입혔다.”
 “아아! 내가 병신으로 만든 놈 중에 그 고귀하신 분이 있었던 모양이지? 과연! 고귀하신 분이 자손도 보지 못하게 생겼으니 이럴 만도 하네?”
 “함부로 말하지 마라!”
 남자의 클레이모어가 그녀의 목에 한 방울의 피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용병이 돈의 노예라면 기사는 귀족들의 노예. 여자나 겁탈하는 주군의 명령이라도 서슴없이 따르는 것이 명예로운 기사라지? 그런데 사실은 명예로운 노예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호호호홋!”
 “이 마녀 같은 년이!”
 퍼억!
 뒤에 있던 남자가 검집을 들어 여인의 어깨를 후려쳤다. 하지만 그녀는 인상 한번 찡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고혹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드레 경! 그만 하게!”
 “단장님! 하지만 이년이!” ///
 여인의 목에 검을 겨눈 남자의 말에 다시 한 번 그녀를 후려치려던 남자가 움직임을 멈췄다.
 “최대한 상처 없이 데려오라던 명을 잊었나?”
 “하지만 이년은······.”
 안드레라 불린 남자는 주변에 있는 수십 개의 시체를 바라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우리의 희생보다 더 큰 대가를 받게 될 걸세.”
 안드레는 한참 동안 여인을 노려보다가 뒤로 물러섰다.
 바로 그 순간.
 “도와줘요!”
 조금 전부터 기사들의 뒤쪽을 응시하던 여인의 입에서 어울리지 않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네 사람 중 세 사람의 시선이 살짝 뒤로 향했다. 그 틈을 타서 여인은 바닥에 떨어진 무기를 집으려 몸을 숙였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녀의 뜻대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그녀를 위협하던 기사단장도 움찔 몸을 떨기는 했지만 시선만은 여전히 그녀에게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발이 빠르게 움직여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
 퍼억!
 “꺄악!”
 새된 비명과 함께 배를 움켜쥔 채 괴로워하는 그녀를 바라보는 기사단장의 눈은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큭! 크크크큭!”
 기사단장의 어깨가 거칠게 들썩이고 있었다.
 “크림슨 울프 중에서도······ 접근하는 남자는 벌레처럼 밟아 죽인다는 블러디 로즈가 이런 조잡한 속임수나 쓰는 년이었다니! 크하하하!”
 광소에 가까운 기사단장의 웃음이 갑자기 멈췄다. 미소 짓던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으며 천둥 같은 일갈이 터져 나왔다.
 “웃기지 마라! 헛소문에 부풀려진 용병 따위에게 이 많은 동료가 죽었단 말이냐!”
 부르르 떨리는 클레이모어. 그와 맞닿은 여인의 목에서 한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기사단장의 입에서 튀어나온 한마디가 여인의 신분을 짐작하게 만들었다.
 블러디 로즈.
 크림슨 울프로 분류된 사람들 중에 유일한 여성으로 알려진 그녀는 아름답고 요염한 자태로도 유명하지만 그보단 남자를 증오하는 그녀의 성격으로 더욱 유명하다.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것처럼 접근해 오는 남자들을 짓밟아 버리고 심지어 죽여 버리기까지 하는 그녀를 아는 남자라면, 아무도 그녀에게 접근하지 않는다.
 그런 그녀에게 수십 명의 기사를 파견하였으니, 그녀에게 당한 귀족의 분노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녀가 어떤 일을 겪게 될 것인지도······.
 “묶어라!”
 간신히 분노를 억누른 기사단장의 목소리에 조금 아쉬운 표정의 기사 하나가 블러디 로즈를 단단히 결박하였다.
 “단장님!”
 꽁꽁 묶인 그녀를 서늘하게 내려다보던 기사단장이 주변을 경계하던 기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기에 누가 오고 있습니다.”
 기사가 가리킨 손가락의 끝에 누군가 걸어오는 모습이 걸려 있었다.
 “큭! 정말 누가 오긴 오는군!? 게다가 남자 아닌가?”
 기사단장의 비웃음에 블러디 로즈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지고 있었다.
 “안드레 경!”
 “예, 단장님!”
 “경이 저자를 데려오겠소?”
 “알겠습니다.”
 기사 안드레가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기사단장의 입에서는 잔인한 미소가 감돌았다.
 “정말 잘되었군. 답답한 마음을 풀 곳이 없었는데 말이야.”
 최대한 상처 없이 블러디 로즈를 잡아 오라는 명령 때문에 기사들은 아무리 화가 났어도 그녀에게 손을 댈 수는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우연히 지나가던 사람을 잡아 오라고 하였으니 그 뒤에 벌어질 상황은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네년 덕분에 애꿎은 사람 하나가 죽는 것이다. 크큭! 아니군, 블러디 로즈라면 같이 즐기겠군?”
 꽁꽁 묶인 블러디 로즈의 눈에서 경멸의 기색이 어렸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내려갔던 기사 안드레가 다시 올라왔다.
 “조금 늦었군. 안드레 경!”
 “······.”
 기사단장의 물음에도 기사 안드레는 아무 말이 없었다.
 “왜 말이 없는 건가, 안드레 경?”
 안드레 경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그는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이야기하려 하였지만, 그의 입에선 말 대신 한 모금의 핏물이 흘러나왔다.
 “다, 단장······ 님.”
 쿠웅!
 핏물 사이로 힘겨운 말 한마디를 쏟아 낸 안드레의 몸이 힘없이 쓰러졌다. 쓰러진 그의 뒤로 낯선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회색빛의 후드를 뒤집어쓰고, 그 위에는 망토를 걸친 여행자의 모습이었다.
 여행자는 머리를 덮고 있던 후드를 끌어 내리며 자신의 얼굴을 드러냈다.
 “이거 참! 영업을 하시는 중에 죄송······.”
 아직 앳된 청년의 얼굴을 드러낸 여행자가 반가운 표정으로 말을 꺼내다가 갑자기 얼굴을 굳혔다. 밝은 음색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넌 누구냐!”
 청년은 기사단장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말없이 묶여 있는 여인과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산적이면 여비나 좀 얻어 내려 했더니······ 아니었군요.”
 “하! 우리가 산적 따위로 보인단 말이냐!?”
 기사 한 명이 발끈하였지만 청년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산적보다 훨씬 나쁜 놈은 여자를 때리는 남자고······.”
 청년은 뒤에 매던 짐을 내려놓았다. 등짐 뒤로 거대한 검, 츠바이핸더가 모습을 보였다.
 “여자를 때리는 남자보다 훨씬 나쁜 놈은 여자를 팔아먹는 놈들이라고 아버지가 말씀하셨을 때는 그냥 그렇거니 했었습니다.”
 혼잣말을 늘어놓으며 신발 끈을 고쳐 매는 청년을 보는 기사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막상······ 인신매매단을 직접 보게 되니······ 이제야 이해가 됩니다. 무척 화가 납니다! 당신들······.”
 “뭐, 뭐랏! 인신매매단!?”
 등 뒤에 메인 츠바이핸더를 손을 가져간 청년의 입에서 싸늘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일단 좀 맞읍시다!?”
 “이런 미친놈이!”
 후웅! 퍽!
 칼날 같은 강풍과 함께 거친 타격 음이 터져 나왔다.
 “끄악!”
 청년에게 손가락질을 하던 기사 하나가 비명과 함께 튕겨나가 옆에 있던 나무에 과격하게 부딪쳤다.
 그 기사가 있던 자리에 수백, 수천 장의 낙엽이 비산하였다. 비산하는 낙엽 사이로 청년의 츠바이핸더가 얼핏 보였다.
 “기, 기습을 하다니! 이 비겁한······.”
 동료가 당하는 모습을 본 다른 기사 하나가 욕설을 내뱉으며 달려들었다.
 파앗!
 청년이 있던 자리, 바닥에 두텁게 깔렸던 낙엽들이 모조리 날아올랐다. 맨얼굴을 드러낸 바닥에서 자욱한 먼지가 일어났다.
 후웅! 퍼억!
 마찬가지로 강한 바람 소리를 동반한 타격 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또 다른 기사 하나가 멀리 날아가 거친 땅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가 서서히 떨어져 내리는 낙엽들 사이로, 제법 멀리 떨어져 있던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헛!”
 기사단장은 떨리는 눈으로 청년을 노려보며 자세를 낮추었다. 청년을 겨눈 그의 검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준비되지 않은 상대를 공격하다니! 그대는 명예도 모르는가! 네놈에게 결투를 신청······.”
 하지만 준비했던 기사단장도 별다르지 않았다.
 후웅!
 강한 바람 소리와 함께 낙엽들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챙그랑!
 그의 클레이모어가 깨어지며, 그 조각들이 낙엽 조각에 구멍을 뚫어 놓았다.
 퍼어어억!
 동시에 터진 타격 음과 함께 기사단장의 몸이 허공을 가득 메운 낙엽 사이를 꿰뚫었다.
 “크허어어어억!”
 청년은 바닥에 떨어지고 나서도 수십 걸음을 밀려가는 기사단장을 심드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청년의 목에선 금빛으로 빛나는 작은 츠바이핸더 모양의 펜던트가 살짝 튀어나왔다가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청년은 츠바이핸더를 등 뒤에 다시 메었다.
 휘이이이잉!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아직 바닥에 떨어지지 않은 낙엽들을 이리저리 흩어 놓았다.
 “결투? 기사라도 되는 줄 착각하나 보군요. 기사단장이든 인신매매단장이든 저와는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여자 하나 때문에 서로를 죽이는 사람들에겐 그런 착각할 자격 없습니다.”
 다양한 무기에 죽임을 당한 시체들을 슬쩍 바라본 청년은 품속에 손을 넣으며 묶여 있는 블러디 로즈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놀라워하던 블러디 로즈의 몸이 움찔 떨렸다. 경계심이 어린 눈초리로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너무나 단단히 묶여 있었다.
 “헉!”
 청년은 품 속에서 날카로운 단도를 꺼내들었다. 그것을 본 블러디 로즈의 두 눈이 독사의 그것처럼 표독스럽게 변했다.
 그녀는 너무나 많은 남자를 보아 왔다. 아름다운 모습에 침을 흘리며 달려드는 자들을 말이다. 처음에는 웃음을 짓고, 순진한 척 다가오던 남자들은, 그녀가 무방비의 순간이 되었다고 판단하면 순진한 가면을 벗어던지고 달려들었다.
 그것이 그녀가 증오하는 남자였다.
 지금의 그녀는 반항할 힘이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
 “네놈도 나에게······.”
 날카롭던 그녀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툭! 투둑!
 청년의 단도가 그녀의 목이나 옷이 아닌, 그녀를 묶은 질긴 끈을 끊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바짝 밀착된 청년의 시큼한 땀 냄새가 그녀의 코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블러디 로즈는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굳어만 있었다.
 그녀의 자유를 되찾아 준 청년이 먼지가 가득 묻은 망토를 벗어 들었다.
 “그런 차림으로 다니니까 이런 놈들이 달려드는 겁니다. 앞으론 조심하십시오.”
 저벅. 저벅.
 청년은 그가 왔던 길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청년이 덮어 준 망토가 흘러내려 블러디 로즈의 맨 어깨가 드러났다. 하지만 멀어져 가는 청년의 등을 바라보는 블러디 로즈는 망토를 추스를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녀는 한참 동안 청년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리고 청년이 놓아두고 간 단도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단도를 움켜쥐고 일어섰다.
 기절한 네 명의 기사에게 걸어가는 그녀의 두 눈은 표독한 독사의 그것과도 같아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걸음을 멈추며 뒤를 돌아보았다.
 저벅. 저벅.
 발걸음 소리와 함께 사라진 줄 알았던 청년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블러디 로즈는 자신도 모르게 손에 쥔 단도를 등 뒤로 숨겼다.
 꾸벅.
 청년은 조금 어색한 표정의 그녀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그대로 그녀를 지나쳐 기절해 있는 네 명의 기사에게로 다가갔다.
 청년의 발이 높이 치솟았다.
 뿌지직!
 “끄아아아악!”
 기절했던 기사 하나가 비명을 토해 내며 사타구니를 움켜쥐었다. 부들부들 떨기까지 하던 기사는 결국 게거품을 물며 다시 기절해 버렸다.
 잠자코 청년의 행동을 주시하던 블러디 로즈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뿌지직!
 “끄아아아악!”
 뿌지직!
 “끄허어억!”
 신기하게도 거의 동일한 반응을 보이는 기사들을 잠시 내려다보던 청년이 고개를 블러디 로즈에게로 돌리더니 뒷머리를 긁적였다.
 “깜빡했습니다. 이런 놈들을 보면 반드시 이렇게 하라 말씀하셨거든요.”
 꾸벅.
 청년은 다시 그녀에게 살짝 목례를 하고는 왔던 방향으로 사라져 갔다.
 “······.”
 블러디 로즈는 복잡한 눈으로 게거품을 문 기사들을 바라보다가 다기 청년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설마······.”
 블러디 로즈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쥐고 있던 단도를 청년이 놓아두었던 곳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잠시 후.
 저벅. 저벅.
 청년이 다시 나타났다.
 꾸벅 목례를 한 청년이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단도 하나 못 보셨습니까?”
 블러디 로즈는 말없이 청년의 단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역시 여기 있었군요. 깜빡했었습니다.”
 꾸벅!
 청년은 또 한 번 목례를 하곤 걸어온 방향으로 사라져 갔다.
 또 한 번의 정적.
 청년의 모습이 사라진 지 한참이 흘렀지만 블러디 로즈는 하염없이 청년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모를 기대감을 얼굴에 품고서 말이다.
 그리고······
 저벅. 저벅.
 발걸음 소리와 함께 청년이 다시 나타나자 그녀의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어렸다.
 청년은 그녀에게 또 한 번 고개를 숙여 보였다.
 “크레비츠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혹시 아십니까?”
 블러디 로즈는 말없이 손가락을 들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청년이 오갔던 방향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이것 참······.”
 청년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떠오르는 것을 본 그녀의 입이 살포시 열렸다.
 “안내······ 해 드릴까요?”
 날카로우며 고혹적이던 원래의 목소리와는 달리 조금은 수줍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청년은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블러디 로즈의 얼굴이 아주 조금 붉어졌다.
 청년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키리히 베오포르트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클라우디아 모셀만······ 이에요.”
 멈칫멈칫하던 블러디 로즈의 손이 살며시 청년의 손에 닿았다. ///
 
 
 
 
 
 2장 사상 최강의 초보 용병
 
 
 
 
 ‘내가 왜······.’
 클라우디아는 복잡한 얼굴로 몇 걸음 앞서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블러디 로즈라는 악명이 불릴 정도로 남자들을 증오하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비록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스스로 동행을 요청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벅. 저벅.
 “.......”
 “.......”
 그녀의 복잡한 심정 때문인지 산길을 걷는 두 남녀 사이에는 벌써 몇 시간째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 풀숲을 헤치는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만이 오랜 침묵의 사이를 메우고 있을 뿐이었다.
 꼬르륵!
 질식할 것 같은 침묵 덕분에 클라우디아의 배가 울리는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앞서가던 키리히가 걸음을 멈추었다.
 “······.”
 말없이 바라보는 키리히의 시선에 클라우디아는 살짝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에 키리히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키리히는 등짐을 내려놓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왜 부끄러워한 거야!’
 동행의 짐이나 지키는 신세가 된 블러디 로즈는 알 수 없는 자신의 반응에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의 상념이 깨어진 것은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 때문이었다. 저도 모르게 긴장을 했던 그녀의 손이 살며시 풀어졌다.
 “많이 기다렸습니까?”
 어느새 그녀의 곁에 다가온 키리히가 한쪽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멧돼지 한 마리가 드리워져 있었다.
 “······?”
 멧돼지의 크기는 결코 작지 않았다. 웬만한 바위보다 훨씬 무거워 보였다. 그런 멧돼지를 마치 토끼 한 마리를 건네주듯 내미는 모습에 블러디 로즈는 멍한 시선을 보였다.
 “왜 이걸······?”
 “요리할 재료입니다.”
 “네에?”
 그녀는 다시 한 번 당황하였다.
 요리를 배울 시간에 채찍 한 번, 칼 한 번 더 휘둘렀기에 오늘날의 블러디 로즈가 있었다. 그녀는 요리라고는 전혀 할 줄 모른다.
 “저, 저기······.”
 “요리······ 못합니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클라우디아.
 키리히의 얼굴에 서리는 진한 실망감을 발견한 클라우디아는 조금만 요릴 배워 둘 것을 하며 잠깐의 후회를 하다가 화들짝 놀랐다.
 ‘내가 왜 남자 따위를 위해서······.’
 수줍게 붉혀졌던 그녀의 얼굴이 다시 예전처럼 돌아갔다.
 날카로운 눈빛, 조금이라도 건들면 물어 버릴 듯한 그녀의 모습에도 키리히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저 한숨 섞인 표정으로 주저앉았을 뿐이다.
 “여자들은 다들 요리를 잘한다고 들었는데······.”
 작은 칼을 든 키리히의 손길에 멧돼지의 몸이 알몸으로 변했다. 부위에 따라 순식간에 해체되는 모습을 보아하니 전문적인 도축업자가 비탄에 젖을 정도의 솜씨였다.
 걸어오는 길에 피를 많이 뺏는지 선혈이 낭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성의 앞에서 거리낌 없이 할 만한 짓은 아니었건만, 키리히의 손길은 거침이 없었다.
 그 모습을 날카롭게 바라보던 클라우디아의 눈길에 약간의 이채가 감돌았다.
 그녀가 보아 왔던 남자들의 대부분은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남자들은 간이고 쓸개고 모두 빼 줄 듯한 표정으로 온갖 친절을 베풀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이 지나면 그 선량한 표정이 얼마나 추악하게 변하는지를 그녀는 너무나 많이 보아 왔다.
 그런 남자들만 보아 오던 블러디 로즈의 눈에 키리히의 모습은 색다르게만 보였다.
 ‘아, 안 돼!’
 저도 모르게 경계심이 흐트러짐을 느낀 클라우디아가 다시 한 번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멧돼지 고기를 토막 내고 굽기 시작하는 키리히. 예상보다 맛있는 냄새에 그녀의 입 안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침이 고이고 있었다.
 “먹어요.”
 처음에는 느긋하던 블러디 로즈의 손길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빨라졌고, 앵두같이 붉은 입술은 기름기로 번질거리게 되었다.
 만든 과정이 어떠했건, 키리히의 음식은 아주 맛있었다. 키리히와 클라우디아는 한 끼 식사로 멧돼지의 절반을 먹어 치워 버렸다. 그중 대부분은 키리히가 먹은 것이었다.
 엄청나다고 할 수 있는 그의 식성에 클라우디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기서 노숙하지요.”
 날이 어두워진 후 노숙하기 적당한 장소를 발견한 키리히는 그녀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주변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냥 가만히 있으십시오. 내가 하겠습니다.”
 어설프게 자신을 따라 하는 클라우디아를 슬쩍 바라본 키리히는 자신의 자리를 만들고 클라우디아의 자리마저도 손봐 주었다.
 키리히의 등짐에서 모포 두 장이 튀어나오더니 순식간에 푹신푹신해 보이는 잠자리 하나가 만들어졌다. 능숙한 손길이 모닥불 하나를 금세 피워 냈다.
 “······.”
 모포 자락을 들치고 그 안에 들어가려던 키리히가 불현듯 고개를 들어 클라우디아를 바라보았다. 그동안에도 그녀는 멍하니 키리히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키리히의 시선이 모포 두 장으로 만들어진 잠자리와, 평평해졌지만 아무것도 깔려 있지 않은 클라우디아의 잠자리를 번갈아 훑었다.
 “후우.”
 싫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일어선 키리히가 아무 자리에나 드러누웠다.
 “여기서 주무십시오.”
 그가 입고 있던 망토조차 클라우디아에게 빌려 준 덕분에 밤이슬에 고스란히 적셔질 신세다.
 “잘 자요.”
 잠들기 전의 일상적인 한마디를 뱉어 낸 그의 숨소리가 고르게 변할 순간까지도 클라우디아는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서서히 고개를 들어 잠들어 있는 키리히를 노려보았다. 독거미의 그것처럼 음습한 시선이었다.
 ‘역시······ 이 녀석도 똑같아!’
 그녀는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상대에게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왠지 넋을 잃고 있는 자신의 태도에도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키리히의 호의는 날카로운 비수처럼 느껴졌다. 비록 그 호의가 마지못해서 한 것이라 해도 말이다.
 ‘죽여야 해. 이자······ 분명 무언가 노리고 나에게 접근했을 거야.’
 클라우디아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으려 끊임없이 되뇌었다.
 ‘죽이자. 죽이는 거야. 죽여야 해.’
 블러디 로즈가 소리 없이 움직여 키리히에게 다가갔다. 날카로운 눈을 번뜩이며 손을 치켜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벌떡!
 갑자기 키리히가 일어서자 깜짝 놀란 클라우디아는 치켜든 손을 재빨리 뒤로 감추었다.
 “으음.”
 멍한 눈으로 주변을 바라보던 키리히의 시선이 클라우디아의 스쳐 지나갔다. 클라우디아의 등줄기에선 식은땀이 흘러내렸지만 키리히는 아무 표정 없이 시선을 돌리더니 휘적휘적 자리를 벗어났다. 주변을 기웃거리며 무엇인가를 찾는 기색이었다.
 잠시 후 다시 돌아온 키리히는 이상하다는 얼굴로 몸을 뉘었다.
 “이상하네. 분명 소변이 마려운 것 같았는데······.”
 혼잣말 같은 그 소리가 오히려 클라우디아를 기겁하게 만들었다.
 ‘살기를······ 느꼈다고?’
 그녀는 더 이상 키리히를 해칠 생각을 감히 품지 못했다. 오히려 마음을 졸여 가며 모포를 뒤집어썼다.
 
 짹. 짹짹.
 지저귀는 새 소리에 클라우디아는 살며시 눈을 떴다. 아침나절의 싸늘한 공기에 그녀는 몸을 덮고 있는 모포를 꼭 감싸 안았다.
 ‘이렇게 편하게 자 본 적이 도대체 몇 년 만······.’
 한가로운 생각을 하던 그녀의 얼굴이 돌연 굳었다. 그러더니 모포를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충격이 그녀의 얼굴을 휩쓸었다.
 ‘내가······ 내가······ 남자의 곁에서 편안히 잠들어?’
 충격이 얼마나 큰지 그녀는 한동안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째잭. 짹.
 그녀의 돌발적인 행동에 놀란 산새들이 다시 노래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터엉! 우지지지직!
 거대한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그녀의 귀를 간질인다.
 소리를 따라 걸어간 그녀는 웃통을 벗어 든 채 나무를 베고 있는 키리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도끼가 아닌 츠바이핸더로 나무를 베고 있었다.
 츠팟!
 그의 손에서 시작된 빛줄기가 나무의 밑동을 갈랐다. 그리고 거대한 나무 하나가 힘없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위, 위험······!”
 키리히를 향해 쓰러지는 나무를 본 그녀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가 놀란 눈으로 입을 다물었다.
 나무에 깔릴 것만 같던 키리히의 손에서 재차 빛살이 터져나왔던 것이다.
 터더더더덩!
 성인 남자 두 명이 두 팔을 쫙 펼쳐야 간신히 감쌀 수 있을 정도로 두터운 나무. 그 나무가 공중에서 수십 조각으로 쪼개지며 떨어졌다.
 폭포수처럼 떨어진 나뭇조각들이 키리히의 양옆으로 떨어져 내리는 장관에 클라우디아의 입이 저도 모르게 벌어졌다.
 “대, 대단해!”
 날도 제대로 서지 않은 츠바이핸더로 나무를 베어 버린 것도 놀랍기는 했지만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쓰러지는 나무를 공중에서 수십 조각으로 갈라 버리는 것은 엄청난 힘과 속도가 있다 해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후읍!”
 그런 것을 눈앞의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우고선 가는 숨을 토해 내고 있었다. 역동적으로 꿈틀거리는 남자의 등 근육 위로 수증기와 같은 것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아침 햇살의 역광 속에서 아름답게 음영이 진 남자의 뒷모습에 그녀는 다시 한 번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뚱하게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대단하긴 뭐가 대단합니까?”
 “네에?”
 “나무하는 거 처음 봅니까?”
 “나, 나, 나무를 한 거라구요?”
 말을 더듬는 그녀의 얼굴엔 황당하다는 기색이 어렸다.
 크림슨 울프 중 한 사람이 입을 쩌억 벌리고 감탄할 정도의 수련 장면이 사실은 나무를 하는 모습이었다니.
 한편으로는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왜 나무를······?”
 “바봅니까? 돈이 없으니까 나무를 하는 겁니다. 오늘 점심 즈음이면 크레비츠에 도착한다고 들었습니다만?”
 “하. 하하하하하.”
 그녀의 입에서 어이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바보냐는 말을 들었지만 별로 기분 나쁘지는 않은 기색이었다.
 혼란한 이 세상에 가장 절실히 필요한 재능은 바로 무력이다. 힘만 있다면 돈은 얼마든지 벌 수 있다.
 그리고 그녀가 본 키리히라는 남자는 크림슨 울프 몇을 동시에 상대할 만큼 대단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나무를 패어 돈을 마련한다고 한다. 그녀의 기준에서 볼 때는 미련한 행동이었다. 미련한 사람에게 바보라는 소리를 듣는다고 기분이 나쁠 리가 없는 것이다.
 “진심······ 이에요?”
 키리히는 말없이 자신이 자른 나뭇조각들을 한군데로 모아 묶었다. 작은 언덕이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갑시다?”
 옷을 입고 장작더미를 짊어진 키리히가 앞장을 섰고, 그 뒤를 클라우디아가 따라갔다.
 묵묵히 걸음을 옮기던 키리히가 갑자기 고개를 뒤로 돌렸다.
 “혹시······ 짐 챙겼습니까?”
 “······.”
 그녀의 침묵에 키리히는 말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산더미 같은 장작더미를 짊어진 청년의 출현에 잠깐의 소란이 일었지만 두 사람은 무사히 크레비츠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성문 입구에서 장작더미를 늘어놓았던 키리히는 순식간에 그것을 팔아 버리고 달랑 은화 한 닢을 손에 쥐었다. 자꾸만 은화를 내려다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그를 보는 클라우디아로서는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많이······ 버셨네요?”
 “그렇습니다! 정말 많이 받았습니다!”
 비꼬듯이 던진 말에도 아이처럼 좋아한다.
 흥정에 익숙지 못한 클라우디아였지만 조금 전의 거래에서 이 순진한 청년이 큰 손해를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작······ 한 번도 팔아 본 적 없어요?”
 키리히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무시하지 마십시오. 매일같이 이렇게 돈 벌었습니다.”
 매일같이 바가지를 뒤집어쓰면서도 멍청하게 웃는 청년의 모습이 클라우디아의 뇌리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예전에 있던 곳에서도 이런 가격에 팔았어요?”
 “무슨 소립니까!”
 정색을 하는 키리히의 모습에 클라우디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아는 사람이라고 제대로 가격을 쳐 줬나 보네?’
 “이것보다 훨씬 적게 받았습니다. 큰 도시라 그런지 장작도 비싼 모양입니다.”
 끄덕여지던 고개가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
 ‘순진한 건지······ 아니면 멍청한 건지······.’
 “오늘 판 정도면 30쿠퍼 정도를 받았습니다.”
 “그 정도로 생활이 가능해요?”
 “산에서 혼자 살았습니다. 필요한 건 대부분 산에 있습니다. 그래도 약간 부족하면 열심히 나무를 베었습니다.”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남자가 얼마나 많은 나무를 했는지를. 사람들에게 바가지를 써서, 제 가격을 못 받은 덕분에 더욱 많은 나무를 해야 했을 것이다.
 그것도 도끼가 아닌 츠바이핸더로 말이다.
 ‘그래서 그런 엄청난 실력을 갖춘 건가?’
 말도 안 되는 상상에 그녀는 살포시 웃음을 지었다.
 ‘설마······ 그런 걸로 실력이 좋아지면 이 세상의 나무꾼은 죄다 특급이게?’
 “후훗. 그래도 어이가 없네요. 그런 실력을 썩혀 두고, 나무를 해서 돈을 벌다니요.”
 안타까운 마음에 그녀가 말했지만 키리히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제 나무하는 실력이 어떻다고 그럽니까?”
 “그 실력으로 용병 일을 하면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텐데요?”
 “용병 말입니까? 지금 농담하십니까?”
 “농담이라뇨?”
 “용병은 강한 사람들만 하는 겁니다. 어중간한 사람들이 용병 일을 하다간 죽기 십상이라 들었습니다.”
 “네?”
 키리히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에 클라우디아의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는 입을 열었다.
 “혹시······ 스스로 강하다는 생각······ 해 본 적 없어요?”
 그녀의 물음에 키리히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그들의 주변에는 아무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저······ 말입니까?”
 “맞아요. 당신 말이에요.”
 “하. 하하하하.”
 “······.”
 키리히의 어이없다는 웃음에도 클라우디아는 침묵을 지켰다. 그 침묵이 대답을 강요했는지 키리히는 멋쩍어 하며 말을 꺼냈다.
 “보통 사람보다 조금 강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있지만, 특별히 강하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이없다는 표정이 클라우디아에게로 전염되었다.
 ‘보통 사람 수백 명이 덤벼도 당신을 못 이긴다고!’
 “하지만······ 저를 구해 주실 때는······?”
 “산에서 살다 보면 간혹 산적을 만나곤 합니다. 그들 정도를 이기지 못하면 산에서 살 수 없습니다. 그거야 아무나 다 하는 것 아닙니까? 하물며 인신매매범 정도 쯤이야!”
 클라우디아는 다른 의미로 놀랐다.
 “인신매매범······ 이라구요?”
 “산속에서 여자 하나를 묶어 둔 채, 서로 싸움을 벌이는 녀석들이 인신매매범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채찍을 놓쳤던 클라우디아가 롱 소드로 기사들을 상대했던 흔적을 키리히는 이런 식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무를 그런 식으로 베어 내는 것은 정말 어려운······.”
 “나무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싸우는 상대는 움직입니다.”
 “그건······.”
 “산에 있으면서 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몇 가지 수련을 계속해 오긴 했습니다. 덕분에 완력이 좀 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뿐입니다.”
 “······.”
 “실전에서 단련되지 않은 강함은 언제라도 부서질 수 있는 모래성과도 같다. 사람이 강한 것은 힘이 세기 때문이 아니라 상황을 파악하여 상대를 자신의 의도대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아는 사람이 진정으로 강한 사람이다, 라고 아버지가 말씀하셨습니다.”
 “후후.”
 결국 클라우디아는 웃음을 지었다.
 사람은 본인의 잣대로 세상을 판단하는 법.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말만을 듣고 산속에서 수련만 해 온 순진한 청년에겐 아버지의 말이 절대적인 진리인 것이다.
 그것이 가끔 틀릴 때도 있음을 깨달으려면 직접 느끼는 수밖에 없다. 게다가 키리히가 자신의 힘을 자각하지 못한다고 해서 클라우디아에게 손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옳은 말씀이시네요. 그럼 더더욱 용병이 되어야겠네요. 산속에서 홀로 있으면서 그렇게 열심히 수련했다는 것은, 강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이겠지요?”
 “물론입니다.”
 “그럼, 강해지기 위해선 실전을 겪어야겠지요? 그런데 어디에서 실전을 겪을 건가요? 아무나 잡고 시비를 걸 건가요? 아니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산적을 찾아 헤맬 건가요?”
 “······.”
 “게다가 그 엄청난 식성을 어떻게 감당할 건가요? 도시 안에 있으면 이제까지처럼 산짐승을 잡을 수는 없을 텐데요. 장작을 파는 걸로는 부족할 거예요.”
 한 끼 식사로 멧돼지 반 마리를 먹어 버리는 키리히를 클라우디아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용병이 되면 합법적으로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죠. 싸울 만한 상대가 있는 장소의 정보도 알 수 있고, 의뢰를 해결하면 꽤 많은 돈도 받을 수 있죠. 그리고 처음 시작하는 용병들 대부분은 실전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누구나 처음은 그런 법이죠.”
 클라우디아가 꼽는 장점들은 키리히의 마음을 강하게 유혹하고 있었다.
 “훌륭······ 하군요.”
 “그렇죠. 어떤 사람은 용병이 돈에 목숨을 파는 노예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틀린 말은 아니에요. 단점들도 꽤 많구요. 하지만 그 단점들을 모두 덮을 정도로 장점이 많죠. 특히나 아이덴과 같은 나라에서라면요. 어때요?”
 “으음.”
 넘어올 듯하면서도 넘어오지 않는 키리히를 보며 클라우디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전 따로 할 일이 있습니다. 찾아야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합니다.”
 “찾아야 할 사람이라면······?”
 “열두 살짜리 어린아이를 산속에 버려뒀던 사람, 바로 제 아버지입니다. 만나면 힘껏 때려 줄 겁니다.”
 ‘당신이 힘껏 때리면 죽을지도 모른다구.’
 클라우디아는 식은땀이 가미된 웃음을 지었다.
 “그럼 더욱 잘되었네요. 용병 길드에서는 그런 정보도 가르쳐 주거든요. 물론 가입되어 있는 용병들에 한해서요. 게다가 특별히 한곳에 매여 있을 필요는 없어요. 아무 제약이 없거든요. 그러니 의뢰를 받지 않았을 때는 평범한 여행자나 다름없죠.”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에 비로소 키리히의 마음이 움직였다.
 “좋습니다. 용병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바로 등록을 하도록 하죠.”
 
 용병 길드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시끄러운 소음 소리가 두 사람을 감싸 안았다.
 길드의 안은 여러 용무로 용병 길드를 찾은 용병들로 상당히 붐비고 있었다.
 “사람들이 제법 많습니다.”
 키리히는 무의식중에 부딪혀 오는 용병들로부터 클라우디아를 보호했다. 그런 키리히의 행동에 클라우디아의 눈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두고 보라고! 이번 의뢰는 반드시 성공시킬 테니까!”
 퍼억!
 누군가 뒷걸음질 치며 소리를 지르다가 그만 키리히와 부딪혀 버렸다. 키리히의 몸이 워낙 굳건한 덕분에 부딪혀 왔던 용병이 뒤로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미안합니다.”
 “뭐야! 눈알을 어디다 달고 다니는 거······!”
 큰 소리를 지르던 용병은 갑자기 입이 얼어붙기라도 한 것인지 말을 멈췄다.
 “브, 브······ 블러······.”
 넘어진 용병은 사색이 된 얼굴로 키리히의 뒤를 가리키다가 갑자기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자신의 사타구니를 가렸다.
 [여생을 남자로 살고 싶다면, 그녀의 앞에서 블러디 로즈라부르지 말라.]
 아마 이런 말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주저앉은 채로 뒷걸음질을 치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이 오줌을 지리고 도망치는 개의 모습이었다.
 “음?”
 영문을 모르는 키리히로서는 남자의 행동이 의외였지만 그에 대해 깊이 신경 쓰지 않았다.
 갑자기 침묵에 빠져든 길드의 상황이 더욱 신기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클라우디아에게 말을 거는 키리히의 행동에 주변 여기저기에서 히익! 거리며 놀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이 왜 이렇게 변했는지를 능히 짐작하는 클라우디아는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호홋. 모두 시끄러운 게 싫은가 보죠. 저도 조용한 게 좋아요!”
 조용한 것이 좋다는 그녀의 말에 길드의 안에서는 숨소리조차 사라져 버렸다.
 “흐음. 상당히 조용하군요.”
 키리히와 클라우디아가 걸어감에 따라 혼잡하게 얽혀 있던 사람들이 강줄기가 갈라지듯 좍 갈라졌다. 그 덕분에 클라우디아를 감쌀 필요가 없어진 키리히가 그녀에게서 살짝 떨어졌다. 하지만 클라우디아는 오히려 약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여기가 원래 좀 그렇죠. 호홋.”
 클라우디아의 웃음에 따라서 미소를 보이는 키리히. 그의 그 모습에 이곳저곳에서 다시 한 번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 뜨고 보지 못할 일이 벌어질 것이라 예상한 몇몇 사람이 두 눈을 질끈 감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두 남녀는 그저 접수대를 향해 걸어갔을 뿐이다.
 “신규 등록을 하러 왔어요.”
 접수원은 사색이 되어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정상적인 남자라면 누군들 그녀의 앞에 서고 싶겠는가? 그녀의 웃음이 매혹적으로 느껴질수록 그들은 식은땀을 흘린다.
 그런데 지금 블러디 로즈로 유명한 여인이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운 미소를 보이고 있다.
 그녀는 기분이 나쁠수록 아름다운 미소를 짓는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알고 있다.
 ‘의, 의리 없는 인간들. 나도 피하고 싶다고!’
 하지만 블러디 로즈가 자신에게 용건이 있는 듯하니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다.
 “신규 등록을 하러 왔다니까요!”
 “느, 느느느넷!”
 벌떡 일어나 차렷 자세로 대답하는 접수원의 모습에 클라우디아의 이마가 살포시 일그러졌다. 그러자 접수원은 더욱 사색이 되어 버렸다.
 “어휴. 빨리 서류나 줘요. 배고프니까.”
 “아, 아, 알겠습니다.”
 서류를 작성하는 키리히와 그의 옆에서 서류 작성을 돕는 클라우디아를 바라보는 접수원은 약간의 여유를 찾을 수가 있었다.
 최소한 블러디 로즈의 목표가 자신은 아니라는 확신이 섰으니 말이다. 물론, 그녀의 앞에서 어설픈 미소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여전했지만 말이다.
 여유를 찾고 보니 이상한 점이 눈에 보였다.
 ‘왜 남자와 함께······?’
 크림슨 울프가 누군가와 함께 다닌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보다 더 이상한 것은 블러디 로즈가 남자와 같이 다닌다는 것이리라. 그보다 더 이상한 것은 그녀가 그토록 증오하는 남자의 앞에서 간혹 웃음을 짓곤 한다는 것이다.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는 이 광경을 뒤늦게 깨달은 접수원이 소리 없이 입을 쩌억 벌렸다.
 ‘설마 그녀에게 남자가 생겼다는······? 에이 아니겠지.’
 서류 작성에 열중하는 키리히의 옆모습을 슬쩍 바라본 접수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렇게 순진하고 어리바리해 보이는 녀석을 블러디 로즈가 마음에 들어 할 리 없잖아! 차라리 저 여자가 블러디 로즈가 아니라고 믿는 것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슬쩍 클라우디아에게로 고개를 돌린 접수원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바로 했다.
 ‘맞잖아!’
 독사와 같이 날카로운 시선이 접수원을 훑고 지나갔던 것이다. 매혹적이지만, 그만큼 더 위험한 시선이 말이다.
 더 이상 딴 짓 할 생각을 못한 접수원은 가까스로 키리히가 내민 서류를 받아 처리를 했다.
 “실력 테스트 같은 것은 없습니까?”
 “가, 감히 누구의 추천인데 실력 테스트를!”
 “그렇습니까? 하지만 그게 그렇지 않다고 들었는데······.”
 “원하는 등급을 말씀하십시오. 어떤 등급이든······.”
 “등급은 어떤 식으로 나뉩니까?”
 접수원은 차라리 키리히와 이야기하는 것이 마음에 편했다. 최소한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열심히 설명을 했다.
 “S 등급에서 F 등급까지 다양한 등급이 있습니다. S 등급이 가장 높고, 평범한 용병들로서는 가늠하기 힘든 실력이죠. 그건 누구보다 잘 아실 것이고······.”
 주절주절 이어진 접수원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던 키리히가 불쑥 말했다.
 “그럼 E 등급으로 등록해 주십시오.”
 “네?”
 접수원은 순간 잘못 들었다는 듯이 반문했다.
 “E 등급 말입니다.”
 “E 등급이라면······?”
 일반 성인이 F 등급이라면 E 등급은 그보다 약간 더 강한 정도이다.
 보통의 신입 용병이라면 E 등급으로 시작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블러디 로즈와 함께 다니는 남자다.
 하지만 키리히는 충분히 이상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뭔가 문제가 있습니까?”
 키리히의 옆에서 눈썹을 모으고 있는 클라우디아를 본 접수원이 기겁을 하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문제라니요! 당장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여, 여기 용병 패를 받아 가시면 끝입니다.”
 “친절하시군요. 고맙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키리히의 목례에 접수원은 거의 직각으로 몸을 꺾으며 큰 소리로 인사했다. ///
 키리히와 클라우디아가 길드의 밖으로 나가자 모두 거친 숨을 몰아쉬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누구야. 저 녀석은······.”
 “누군진 몰라도······. 조만간 얼굴을 못 보게 될걸?”
 “이번의 제물은 저 바보 같은 남자······ 인가?”
 경직되었던 용병 길드는 한참 후에야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키리히를 여관에 안내해 준 클라우디아는 그녀가 마음을 놓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인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집에는 클라우디아와 바텐더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클라우디아의 바로 앞에는 풍만한 몸매의 여성 바텐더가 빈 술잔을 마른 헝겊을 닦고 있었다.
 “라이너 백작가에서 널 잡으려고 기사단을 파견했다던데, 용케도 피한 모양이네? 이거 조금 아쉽게 된걸?”
 클라우디아의 입술에 미소가 슬쩍 걸리자 여성 바텐더는 눈을 크게 떴다.
 “만났······ 던 거야?”
 “응. 크레비츠로 통하는 산길에서······. 서른가량이 떼거리로 덤벼들더라고.”
 “휘유!”
 바텐더는 닦던 술잔을 공중에서 회전시키며 휘파람을 불었다.
 “이거, 블러디 로즈에 대한 평가를 조정해야겠는데? 나는 블러디 로즈가 납치당한 줄로만 알고 애들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농담조가 어리는 바텐더의 말에 클라우디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마테우스의 검은 손’의 서브 마스터께서 과연 쓸데없는 곳에 손을 쓰셨을까?”
 이렇게 말을 하긴 했지만 만약 자신이 잡혔더라면 이 절친한 친구가 자신을 분명히 구해 줬을 것이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 평범해 보이는 바텐더에게는 그만큼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마테우스의 검은 손.
 주로 정보를 다루지만 암살 의뢰를 받기도 하고 귀중한 물품을 훔치는 일을 하기도 하는 이들은 아이덴 전역에 걸쳐 세력을 떨치고 있다. 하지만 검은 손이라는 이름답게 이들은 철저하게 어둠 속에 숨어 있다.
 알고자 하면 국왕의 속옷 색깔이라도 알 수 있고, 훔치고자 하면 황실의 보물이라도 훔치며, 죽이고자 하면 사신의 목이라도 따 버린다는 마테우스의 검은 손. 그곳의 서브 마스터라면 충분히 그녀를 구할 능력이 되는 것이다.
 “쓸데없다니? 블러디 로즈 하면 용병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잖아? 이름값만 해도 어딘데. 구출하면 무언가 떨어지는 것이 있을 텐데! 어쩌면 블러디 로즈가 마테우스의 검은 손에 가입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
 “후훗.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다이앤. 이미 누군가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거든.”
 “이거 놀라운데? 세상에 블러디 로즈를 돕는 사람도 있다니! 그것도 한 개 기사단에 맞서서!? 설마 백마 탄 왕자님이라도 나타나신 건가?”
 클라우디아는 말 없는 미소를 지으며 와인이 들어 있는 술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저, 정말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난 거야? 아, 아니지. 어느 나라의 왕자가 아이덴에 들어섰다는 정보는 없었으니······ 아무튼 남자인거지? 맞지!?”
 클라우디아는 더욱 진한 웃음을 보였다. 그 웃음에 다이앤은 한동안 멍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이야?”
 홀짝.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며 대답을 회피하는 클라우디아의 모습은 담담하게 느껴졌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마테우스의 검은 손의 서브 마스터께서는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이거 특급 정보잖아! 블러디 로즈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람이 다름 아닌 남. 자. 라니! 게다가 그 모습을 상상하는 블러디 로즈가 흐뭇한 웃음을 짓는다니! 너 설마······?”
 멀뚱한 눈으로 다이앤을 바라보던 클라우디아의 표정은 이어진 말에 무너지고 말았다.
 “도플갱어 아니야? 맞지? 천하의 블러디 로즈가 그럴 리가 없어! 대륙의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인 블러디 로즈가······ 남자를 생각하며 웃음을 짓는다니! 이럴 수는 없다고! 세상이 멸망하려는 거야.”
 “지, 진정해. 그렇다고 자살하는 시늉을 할 것은 없잖아!”
 클라우디아는 미소를 지으며 칼로 자신의 목을 찌르려는 친구의 손목을 붙잡았다.
 “호호호홋!”
 “후훗!”
 그 겨를에 눈이 마주친 두 명의 여인은 갑작스레 웃음을 터트렸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다이앤은 정말 기쁜 표정이었다. 얼마나 기쁜 것인지 그녀의 얼굴에선 한줄기 눈물마저 흘러내리고 있었다.
 “정말 다행이라고······.”
 갑자기 울먹이는 그녀의 모습에 클라우디아는 쓴 웃음을 지었다.
 술잔을 다시 든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난 원래부터 괜찮았어. 네가 죄책감을 느낄 이유는 원래부터 없었으니까.”
 “흐흑. 정말······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같은 말만을 반복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친구의 모습에 클라우디아는 낮은 한숨과 함께 다시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진정이 된 친구의 모습을 본 클라우디아가 조용히 일어섰다.
 “벌써······ 가는 거야?”
 “응. 이제부턴 와인을 줄여 보려고. 다음 의뢰를 마치면 또 오도록 할게.”
 “그래. 다음에는 그 남자랑 함께 와! 그때는 내가 이백 년 묵은 칼루아를 내놓도록 할게.”
 “고마워. 기대하고 있을게.”
 술집 문의 손잡이에 손을 대던 클라우디아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었다.
 “저기······ 말이야.”
 “응?”
 “······.”
 “말해 봐! 무슨 말을 하려는 건데?”
 “만약······ 크림슨 울프 중 한 사람이 압도당할 정도의 사람이 초보 용병이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글쎄······.”
 흥미로운 가설을 들었다는 표정이 다이앤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만약 정말로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 아이덴이 발칵 뒤집혀지겠지.”
 “무엇······ 때문에?”
 “아이덴은······ 영웅을 갈망하니까.”
 의미 모를 다이앤의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클라우디아는 고개를 살며시 끄덕거렸다.
 “그렇······ 겠지?”
 “하지만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초보 용병이 그런 실력을 갖출 리가 없잖아!?”
 왠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는 두 사람이었다. 그런 무거운 분위기가 싫었던 것인지 다이앤이 밝은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농담 같은 말투가 그녀의 입술을 뚫고 나왔다.
 “만약 정말로 그런 사람이 나타난다면, 사람들은 그를 두고 이렇게 말할 거야. 사상 최강의 초짜라고 말이야. 호호호.”
 클라우디아도 따라 웃으며 술집을 나갔다.
 그녀가 나간 후 다시 닫힌 술집의 문을 잠시 바라보던 다이앤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돌렸다.
 “훗. 설마!”
 
 
 
 
 
 3장 오우거의 싸대기를 후려치다
 
 
 
 
 “그러니까, 길드의 정보망을 이용하여 사람을 찾으려면 의뢰를 몇 번 해결해서 신용 등급을 올려야 한다는 말이에요. 아무나 그것을 이용해서 일손이 부족해지면 정작 필요한 사람은 이용할 수 없게 되잖아요.”
 한시라도 빨리 아버지를 찾고 싶어하는 키리히에게 그녀는 최대한 간결하고 핵심적인 것만을 이야기해 주었다.
 “게다가 돈도 없잖아요? 사람을 찾는 정보를 얻는 데에도 돈이 들게 마련인데, 그럴 돈은 있으세요?”
 키리히는 클라우디아의 말을 한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있던 산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스스로의 의지였다.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가 지금 밟고 있는 곳은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곳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규칙을 따라야 했다.
 이제껏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돈과 규칙이었다.
 “그렇······ 군요. 알겠습니다. 먼저 의뢰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키리히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떤 의뢰를 하고 싶은가요?”
 “되도록이면 빨리 신용을 쌓을 수 있는 의뢰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뢰일수록 위험한데요? 능력을 벗어나는 의뢰를 받는 것은 용병이 빨리 죽는 이유 중 하나랍니다.”
 “음.”
 “그럼 이렇게 하도록 해요. 비교적 간단하고 쉬운 의뢰로 먼저 감을 잡는 것으로요. 제가 길드에 가서 적당한 의뢰를 알아볼 테니, 키리히 씨는 먼저 식당에 가서 자리를 잡고 있으세요. 지금쯤이면 식당이 붐빌 시기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키리히와 클라우디아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갈라졌다.
 
 블러디 로즈의 방문에 용병 길드의 크레비츠 지부는 다시 한 번 뒤집혀야만 했다.
 “헉! 다, 당신은!”
 그녀의 출현에 귀신이라도 놀라는 용병들의 모습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얼마 전에 방문했을 때의 부드러운 눈빛은 어딘가 버려 버리고, 다시 예전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보이는 크림슨 울프를 막을 수 있는 용기 있는 용병은 없었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의뢰를 받으러 왔다.”
 싸늘한 목소리가 접수원의 전신을 떨게 만들었다.
 “의, 의뢰를 말입니까? 왜 대리인을 통하지 않으시고······?”
 “내가 직접 받으면 안 된다는 뜻인가?”
 “아, 아닙니다. 상관없습니다.”
 그녀의 출현에 용병들과 접수원이 지나치게 놀라는 것은 그녀가 항상 대리인을 통해 의뢰를 받고, 완료된 의뢰를 보고해 왔기 때문이다.
 “어떤 의뢰가 있지?”
 날카로운 그녀의 눈매에 접수원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의뢰 대장을 내밀었다. 미완료된 모든 의뢰가 적혀 있는 장부였다.
 “흐음.”
 사락! 사락!
 의뢰 대장을 넘기는 그녀의 모습은 고혹적이고 우아하게 보였지만 주변의 사람들은 감히 그녀에게 눈조차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탁.
 “헉!”
 “이걸로 하지!”
 장부를 탁 덮는 그녀의 행동에 화들짝 놀라던 접수원은 그녀의 고운 손가락이 빼놓은 서류를 볼 수 있었다.
 “트, 트롤 퇴치······ 입니까? 이번에도······ 역시 혼자서······?”
 “아니. 이번에는 이 사람과 함께.”
 블러디 로즈는 두 개의 용병 패를 꺼내어 놓았다. 그중 하나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S라는 문자가 선명했고, 나머지 하나에는 거무튀튀한 색의 E라는 문자가 선명했다.
 E라는 문자가 새겨진 용병 패에는 키리히 베오포르트라는 이름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E······ 등급의 용병과 함께······ 말입니까?”
 “안 되나?”
 그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자 접수원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닙니다! 안 될 리가 있나요! 됩니다. 되고말고요!”
 “흥!”
 코웃음을 친 그녀가 나가자 얼어붙어 있던 사람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며 부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블러디 로즈에 대한 이야기였다.
 
 클라우디아와 헤어진 키리히가 찾은 곳은 ‘라베 짐의 오두막’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중급의 음식점이었다. 이곳이 클라우디아와 만나기로 약속했던 곳인 것이다.
 끼이익!
 문을 열고 음식점 안으로 들어섰다가 문득 멈춰 선 키리히. 그의 얼굴에선 조금 난감한 기색이 어리기 시작했다.
 식당 안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단 하나의 빈 탁자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혼잡함에 비해 식당 안은 너무나 묘한 정적에 잠겨 있었지만, 난처한 입장의 키리히는 그것에 대해서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걸 어떻게 한다······.”
 출입구 옆에 기대어 누군가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길 기다렸지만 도무지 자리가 빌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클라우디아가 오기 전에 자리를 맡기로 했던 키리히로서는 상당히 난감해지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아!”
 그런 키리히의 눈에 중앙의 커다란 탁자에서 홀로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들어온 것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었다.
 뚜벅. 뚜벅.
 키리히는 그 탁자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움직임을 수많은 사람의 눈동자가 따라 움직이고 있었지만, 키리히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키리히가 다가간, 넓은 탁자 위에서 홀로 식사하고 있는 사람은 상당히 험악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우람한 체구에 수많은 흉터를 보이는 이 사람은 수많은 실전으로 다져진 용병임이 분명해 보였다.
 키리히는 그 수많은 상처를 슬쩍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실례합니다.”
 “······.”
 흉터가 많은 남자는 키리히의 말을 무시한 채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사람을 무안하게 만드는 태도였지만, 키리히는 조금 다른 것을 느꼈다. 원인 모를 긴장감을 느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부끄럼이 많은 사람인가?’
 무수히 많은 흉터를 본다면 지극히 어이없는 상상을 하면서 키리히는 재차 말을 걸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음?”
 그제야 남자가 고개를 들어 키리히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가?”
 남자의 목소리는 어둡고 탁하게 느껴졌다. 듣는 사람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떨 정도의 어둠이 그 속에 느껴졌다. 하지만 키리히는 그것이 느껴지지도 않는지 할 말을 다 하고 있었다.
 “같이 합석을 해도 되겠습니까?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려 했는데, 일행이 올 시간이 다 되어 갑니다.”
 남자는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키리히를 살펴보다가 살짝 눈에 힘이 들어갔다.
 “애송이······ 인가?”
 그 순간, 남자의 전신에서 금세라도 베일 것 같은 기운이 흘러나와 키리히를 덮쳤다. ///
 경험 많은 용병은 이 기운이 바로 살기라는 것을, 그것도 노골적인 살기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경험이 별로 없는 키리히는 이것이 뭔지 몰랐다.
 “으음. 소변이 마려운 건 아닌 것 같은데······.”
 “크크.”
 흉터 많은 남자의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수많은 사람에게 살기를 흘려보냈던 그였지만, 지금 눈앞의 키리히와 같은 반응을 보였던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대부분이 새파랗게 질리며 한마디도 제대로 꺼내지 못했었다.
 남자의 실소가 키리히에게는 허락의 웃음처럼 받아들여진 모양이었다.
 “아! 고맙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제 일행이 올 겁니다. 그때까지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넉살 좋은 키리히의 행동에 사내는 더 이상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다시 음식을 묵묵히 먹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흉터 많은 사내가 앉아 있던 자리는 가시방석이라는 표현이 오히려 부족할 정도의 자리였다. 흉터 많은 남자의 험악한 인상도 그렇고, 아무 말이 없는 그의 태도도 그러했지만, 그보다 더 불안케 만드는 것은 왠지 모르게 집중된 주변 사람의 시선이었다.
 흡사 서커스에 끌려 나온 몬스터라도 구경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흉터의 사내와, 사내의 옆에 앉아 있는 키리히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떤 이는 식사는 전혀 하지 않고 오로지 둘을 노려보는 것에만 전심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당연히 식사가 제대로 넘어갈 턱이 없건만 흉터 많은 남자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잘만 음식을 먹고 있었다. 노려보는 사람들이 허탈할 지경이었다.
 그런 무신경함은 옆에 앉아 있던 키리히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부터인가 키리히에게도 무서운 시선이 쏠리고 있었다. 하지만 키리히는 사람을 기다리는 모습만을 보여 줄 뿐, 아무런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키리히의 태연한 태도에 흥미가 생긴 것일까.
 “자네······ 내가 누군 줄 모르나?”
 식사에 열중하던 흉터 많은 남자가 고개를 들어 키리히를 바라보았다.
 “저를 아십니까?”
 “모르네.”
 “우린 예전에 본 적이 없지요?”
 “아마 그런 것 같군.”
 “당신도 저를 모르는데, 제가 당신을 알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어찌 보면 당돌하게 느껴질 키리히의 말에 사내는 비웃음에 가까운 웃음을 터트렸다.
 “큭큭큭. 어리석은 질문에 현명한 답이로군. 하지만 말일세. 거친 세상에서 오래 살아남자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는 법이지. 예를 들자면, 나 같은 사람을 미리 알고, 접근하지 않는 것도 살아남는 한 가지 방법이 되겠지.”
 “그렇습니까?”
 키리히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그런 그의 표정이 남자의 얼굴에 또 하나의 미소를 만들어 냈다.
 “크큭. 이보게, 어린 사람. 똑똑히 들어 두게. 내가 바로 시밀 벤더스라네.”
 “그쪽도 잘 새겨들으십시오. 제가 바로 키리히 베오포르트입니다.”
 흉터 많은 사내, 시밀 벤더스는 한 방 먹은 얼굴이 되어 버렸다. 그가 예상했던 반응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 키리히에게서 튀어나왔던 때문이다. 시밀 벤더스라는 이름은 그만큼 유명한 이름이었다.
 하지만 세상 물정을 모르는 키리히는 그 이름이 크림슨 울프 중 한 사람의 이름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 크림슨 울프 중에서도 광전사라는, 피 내음이 흠씬 풍기는 별명의 사람이 가진 이름이라는 것을 말이다.
 “크크크크크.”
 사내는 비웃음처럼 느껴지는 웃음을 끊임없이 터트리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의 웃음소리에 주변의 사람들의 시선도 더욱 따가워지고 있었다.
 이상야릇한 이 식당의 분위기는 살짝 손을 대기만 하면 금세라도 터질 듯한 긴장감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마치 학살을 야기시킬 듯한 긴장감.
 하지만 그 긴장감은 누군가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는 소리에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정확히 말하면 그 소리를 내며 들어선 사람 때문이겠지만 말이다.
 “여기 있었군요. 키리히.”
 영롱하게 목소리가 식당 안을 맴돌았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클라우디아 모셀만, 또 하나의 핏빛 이름을 지닌 여인이었다.
 “브, 블러디 로즈!”
 식당 안은 얼어붙었다.
 누군가 신음을 토해 내듯 어떤 단어를 토해 내다가 다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평소라면 민감하게 반응했을 그 이름에도 클라우디아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이 자리에 키리히가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키리히의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그녀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용케 자리를 맡았네요?”
 잠시 굳은 얼굴을 하던 그녀가 이내 표정을 풀며 다가와 앉았다.
 “여기 이 사람은······?”
 “무슨 용건인가, 붉은 장미?”
 애써 시밀에게서 시선을 돌리던 클라우디아의 표정이 살포시 일그러졌다.
 “아! 당신이었군요. 시밀? 정말 오랜만이죠?”
 키리히에게는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죽일 듯한 시선으로 노려보는 클라우디아. 웬만한 용병들은 얼어붙어 버리는 그녀의 시선에도 남자는 그저 비릿한 웃음만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렇군. 오랜만이군. 크큭!”
 식당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기묘한 분위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블러디 로즈의 출현과 함께 식당 안의 사람들은 하나둘 사라지고 있었다. 붐비던 식당이 순식간에 한산해져 버렸다.
 “두 사람이 아는 사이였습니까?”
 왠지 반가운 듯이 들려진 키리히의 목소리에 클라우디아와 시밀은 거의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씽긋 웃고 있는 키리히의 모습이 그들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아는 사이라니 잘되었습니다. 조금 전부터 화장실에 가고 싶었거든요. 클라우디아 씨가 돌아왔으니 저는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가득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도망쳐 버리고 키리히마저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자, 식당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를 풍기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서로 노려보는 두 사람의 눈에는 싸늘한 기운이 어리고 있었다.
 “큭. 배짱 좋은 녀석인 줄 알았더니, 붉은 장미에 눈이 멀어 버린 녀석이었군.”
 “미쳐 버린 전사는 여전히 복수에 불타는 사람들을 몰고 다니는군요.”
 “그렇게 복수에 불타는 자들도 붉은 장미가 나타나니 꼬리를 말아 버리지 않나? 대단해. 아주 대단해.”
 “훗. 그들을 불타게 만든 광전사에 비교할 수나 있을까요?”
 클라우디아와 시밀은 서로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잠시의 침묵이 있은 후, 시밀이 다시 말을 열었다. 날카로웠던 조금 전과는 달리 느긋한 어조였다.
 “의외로군. 붉은 장미가 애송이 남자 용병을 끌고 다니다니······ 동생이라도 되는 건가?”
 “몇 년 동안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해 보지 못한 광전사와 함께 식사할 정도의 사람이지요.”
 “겁을 상실한 녀석이 아니라?”
 클라우디아는 싸늘한 미소로 화답했다.
 “피로 물든 당신을 보게 되어도 그는 도망치지 않을 거예요.”
 단순히 겁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클라우디아의 말에 시밀은 피식 웃어 버렸다.
 “과연 그럴까?”
 눈을 감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시밀을 보며 클라우디아는 손톱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던 시밀이 벌떡 일어섰다.
 “이만 가 봐야겠군. 너무 오래 있었어.”
 “그러시죠.”
 “크크크크큭.”
 괴소를 흘리며 걸어 나가는 시밀을 클라우디아는 배웅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키리히가 돌아왔다.
 “같이 있던 사람은 어디에 갔습니까?”
 “바쁜 일이 있는지 급히 일어서더군요.”
 “그렇습니까?”
 키리히는 왠지 아쉬운 표정이 되었다.
 “무섭지 않던가요? 그 사람이?”
 “제가 왜 무서워해야 합니까? 오히려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런가요?”
 그녀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이름이라도 알고 있나요?”
 “시밀 벤더스라 들었습니다.”
 아쉬워하는 키리히의 모습에 클라우디아는 잠시 웃음을 짓다가 갑자기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그 이름의 의미를 알고 있나요?”
 “네?”
 “광전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죠. 크림슨 울프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크림슨 울프라는 말은 들어 봤죠?”
 “대단한 사람들이라 이야기하더군요. 아주 강한 사람들이라고······.”
 “시밀은 그 크림슨 울프 중 한 사람이에요. 하지만 사람들에게 좋은 인식은 얻지 못하고 있죠. 광전사라는 별명 그대로 싸움이 시작되면 반쯤 미쳐 버리거든요.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못하고 모조리 죽여 버리죠.”
 “동료를······ 공격한다는 말입니까?”
 고혹적인 클라우디아의 미소였다.
 “동료뿐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죽을 때까지 그의 검은 멈추지 않아요. 때문에 광전사라 불리고, 수많은 사람이 복수를 위해 그를 따라다니죠. 조금 전에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도 대부분 그에게 복수하기 위해 따라다니는 사람들일 거예요.”
 “그런데도 아직까지 멀쩡하게 살아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강하기 때문이죠. 아직도 그가 무섭지 않나요?”
 “으음.”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튀어나온 키리히의 말은 클라우디아를 깔깔 웃게 만들었다.
 “그가 불쌍하게 느껴집니다.”
 “호호호호호.”
 아무도 그를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동료나 아는 이들이 그의 손에 죽어 복수에 불타거나, 혹은 무서워할 뿐이다. 하지만 키리히의 말을 듣고 보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클라우디아는 평소 때의 시밀이 사람들을 해친 적이 없다고 들었다. 원래 성격이 흉폭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제어할 수 없는 행동 덕분에 동료 하나 만들 수 없고, 누군가와 식사할 수도 없으며, 항상 살기 어린 시선을 받아 내야 하는 사람이 불쌍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역시······ 이 사람은 생각이 특이해.’
 웃음 뒤에 잠시 동안의 침묵. 키리히는 갑자기 무언가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살짝 긴장하고 있던 클라우디아는 진정으로 의외의 이야기를 들어 버렸다.
 “그런데······ 깜빡 잊고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게 있는데, 우리 동행은 크레비츠에 도착할 때까지가 아니었던가요?”
 “네, 넷?”
 당황하는 클라우디아.
 “게다가, 주변의 반응들을 보니 꽤 유명한 용병이시더군요? 저는 인신매매범에게 납치당하시는 것을 보고 연약한 분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 그건······.”
 키리히의 말처럼 크레비츠에 도착하는 즉시 헤어져야 하는 동행이었다. 하지만 크레비츠에 와서도 키리히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 일행으로 받아들여졌다 생각한 클라우디아로서는 전혀 의외의 말이며, 꽤 화가 나는 말이었다.
 “그, 그걸 왜 이제 와서 말하는 건데욧!!”
 눈시울이 약간 붉혀지며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는 그녀의 모습을 믿을 수 없어 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키리히로서는 당황스럽기만 했다.
 “아, 아니······ 그것이······.”
 “이제까지 저를 놀린 건가요? 그런 건가요?”
 “그게 아닙니다. 사실은······.”
 키리히는 큰 비밀을 말하려는 듯이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예욧!”
 입장이 바뀌어 이제는 클라우디아가 화를 내고 있었다. 그렇게 화를 내는 와중에 클라우디아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어떤 기억들이 있었다.
 그녀와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왠지 모르게 깜빡깜빡 잊는 일이 많았던 키리히의 모습을 그녀는 떠올릴 수 있었다.
 “혹시······ 건망······ 증?”
 침중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키리히에게 클라우디아는 그저 황당하다는 표정밖에 지을 수 없었다.
 “건망증은 우리 집안 내력입니다.”
 “······.”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클라우디아 씨와 저와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든 정리하는 겁니다.”
 “······.”
 “연약하게만 보였던 아가씨가 사실은 유명한 용병이고,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듯하더군요. 대단하다는 크림슨 울프, 광전사 시밀이라는 사람과 마주하면서도 전혀 꿀리지 않고 있더군요. 마치 동급의 사람이라는 듯이 말입니다. 덕분에 꽤 놀랐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다 보고 있었잖아!’
 “동행이라면 서로에 대해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하나의 의뢰를 같이 해결할 동료라면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말을 마친 키리히는 묵묵히 클라우디아의 눈을 바라보았다. 심연을 감춘 듯한 그 눈빛에 발가벗겨지는 듯한 기분을 느낀 클라우디아는 입술 끝을 살짝 깨물었다.
 “저는······.”
 한없이 진지한 눈으로 클라우디아를 바라보던 키리히가 불현듯 웃음을 지었다.
 “열두 살에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칠 년 동안 홀로 산에서 살며 수련을 하다가 아버지를 찾아 세상 밖으로 나온 키리히 베오포르트라 합니다.”
 긴장된 얼굴로 키리히를 바라보던 클라우디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살며시 미소를 짓고 있는 키리히의 얼굴을 본 순간 그녀의 얼굴에선 긴장이 사라지며 한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환한 표정을 지은 그녀가 말했다.
 “살아남기 위해 열아홉 살에 용병이 되고 칠 년이 지난 지금은 크림슨 울프 중 블러디 로즈라는 별명으로 불립니다. 클라우디아 모셀만이라 합니다.”
 그녀의 얼굴에 흘러내리는 한줄기의 눈물이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
 
 트롤이 서식한다는 습지대로 이동하며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숨겨야 할 것은 숨기고, 이야기해야 할 것은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덕분에 키리히는 클라우디아라는 한 여인에 대해 조금은 더 알게 되었다. 하지만 클라우디아의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무겁기만 했다.
 어느 정도 이야기를 나눈 그들은 이어서 의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트롤을 잡기만 하면 되는군요. 잘 알겠습니다.”
 오우거보다는 못하지만 경험 많은 용병에게도 공포의 의미로 다가오는 트롤. 끈질긴 재생력과 흉포하고 잔인한 성격은 진정 상대하기 어렵다 할 수 있었다.
 때문에 무척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낸 클라우디아였지만 담담하기만 한 키리히의 반응에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걱정되지 않나요? 트롤이라구요!”
 “제가 걱정하면 일이 수월하게 풀립니까?”
 “아니······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의뢰를 받아 왔다는 것은 자신이 있어서가 아닙니까? 제가 걱정된다고 하면 의뢰를 포기하실 겁니까?”
 “그, 그건······.”
 키리히는 더 이상 말을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를 따라붙던 클라우디아는 그의 등이 꽤 넓다고 느꼈다. 흐뭇한 표정으로 그의 등을 바라보던 클라우디아는 갑자기 고개를 돌리는 키리히의 행동에 눈웃음을 짓다가, 그만 멍하니 얼어붙어 버렸다.
 “그런데······ 트롤이 어떤 몬스터입니까?”
 “······.”
 그녀도 깜빡 잊고 있었다.
 이 남자는 세상에 대한 지식이 한참 부족하다.
 
 습지대.
 수분을 듬뿍 함유하고 있는 이곳은 수많은 식물과 동물들, 그리고 몬스터들이 살아가고 있는 하나의 완벽한 생태계이다.
 대륙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습지대처럼 아이덴의 크레비츠 부근에 있는 습지대에도 많은 생물이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는데, 이 정점에 있는 것이 바로 십여 마리의 트롤이다.
 대체적으로 평화롭던 이곳이 난데없는 홍역을 앓고 있었다.
 그 원인은 먹이를 찾아 이동하는 다섯 마리의 오우거가 트롤의 영역인 이곳 습지대를 침범했기 때문이다.
 천성적으로 타고난 엄청난 힘과 민첩함으로 트롤보다 오히려 우위에 선 오우거들은 트롤들과는 달리 이리저리 이동을 하며 살아간다. 아무리 많은 동물들이 사는 곳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식성을 감당할 수는 없다.
 오우거가 한 달 이상 머무르게 되면 모든 동물들의 씨가 말라 버려 황폐하게 변해 버린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보금자리를 옮기곤 한다.
 먹이를 찾아 습지대를 찾아온 다섯 마리의 오우거와 습지대의 원래 주인이랄 수 있는 십여 마리의 트롤이 내뿜는 살기에 습지대의 모든 동식물들이 숨을 죽이고 꼬리를 말았다.
 그 긴박한 상황을 전혀 모르는 두 남녀가 습지대에 발을 들이밀었다.
 습지대에 들어선 키리히의 첫 마디는 이랬다.
 “물이 많습니다.”
 “달리 습지대가 아니니까요. 해가 뜨면 숨 쉬기가 약간 거북할 거예요.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돌아가도록 하죠.”
 습기 찬 공기에 자꾸만 피부에 달라붙는 머리카락을 떼어 내는 클라우디아는 아무래도 이곳의 공기가 불쾌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키리히가 느끼는 것은 그런 음습함 따위가 아니라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는 막막함이었다.
 “트롤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습니까?”
 “아니요. 몰라요.”
 살며시 돌아보는 키리히의 모습에 끈적끈적함을 약간이나마 덜어 낸 클라우디아가 자신감 가득한 웃음을 지었다.
 “지금부터 찾으면 되죠.”
 
 “여기 이 자국을 보세요.”
 클라우디아의 손길을 따라 시선을 돌린 곳에는 칼로 그어 놓은 듯한 자국이 난 나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것은······?”
 “트롤의 손톱자국이에요.”
 “꽤 큰 녀석인 모양입니다.”
 손톱자국은 키리히의 키의 두 배 정도 되는 높이에 새겨져 있었다.
 “이 정도면 크다고 볼 수는 없어요. 더 큰 녀석도 많은걸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은 이 자국이 그것들의 영역을 표시한다는 것이에요.”
 “영역······ 말입니까?”
 클라우디아의 설명에 의하면 트롤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주변의 나무에 손톱자국을 새겨 놓는 습관이 있다고 하였다.
 “트롤들은 보금자리와 가까운 곳일수록 낮은 곳에 자국을 새겨요. 덕분에 녀석들의 보금자리가 어디인지를 수월하게 알 수 있죠.”
 “이해할 수 없군요. 왜 일부러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겁니까?”
 클라우디아는 혀를 쏘옥 내밀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내가 트롤인 줄 아나요? 어떻게 그걸 알겠어요?”
 “그게 아니라······.”
 “호호홋. 알아요. 무슨 뜻인지. 정확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짐작 가는 것은 있어요. 그것들이 무척 강한 몬스터라는 거죠. 인간들도 먹이 이상으로는 보지 않는 몬스터들이니까요.”
 “자신이 있기 때문에······ 드러내 놓고 산단 말입니까?”
 “이렇게 자국이 표시된 트롤의 영역은, 그들의 집이라 할 수 있어요. 집 안에서 조심스럽게 숨어 사는 사람은 별로 없잖아요?”
 클라우디아의 알기 쉬운 설명에 키리히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트롤의 보금자리에 다가가면서 클라우디아는 키리히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습지대에 살고 있는 여러 생물에 대한 정보들을 시작으로, 그들을 상대하는 데 주의해야 할 점, 발자국을 읽는 방법 등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키리히를 위해 세심한 설명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의 지식이 부족함을 잘 아는 키리히도 그녀의 설명을 귀담아들었기에 원래는 긴장으로 가득했어야 할 시간도 상당히 유쾌하고 유익한 시간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클라우디아도 말수를 줄이기 시작했다. 키리히의 키 정도 높이에 나 있는 손톱자국 아래에 또 하나의 손톱자국을 발견한 때부터였다.
 그녀가 속삭였다.
 “어린 트롤의 자국이에요. 보금자리에 상당히 가까워졌다는 자국이기도 하죠. 아직 약하기만 한 어린 트롤이 돌아다닐 정도로요. 트롤들은 청각이 예민하니 최대한 말을 아끼세요.”
 키리히의 귓가에 속삭이던 클라우디아는 준비해 온 주머니에서 검은색의 가루를 꺼내 들어 키리히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숯가루예요. 냄새를 없애 주죠. 녀석들은 냄새도 잘 맡거든요.”
 키리히가 전신에 숯가루를 바르는 것을 꼼꼼히 확인한 클라우디아는 자신의 몸에도 꼼꼼하게 숯가루를 발랐다.
 이어서 그녀는 날이 선 단검과 투명한 물이 든 병을 하나 꺼내 들었다.
 퐁!
 작은 소리와 함께 개봉된 병의 내용물을 단검 전체에 골고루 뿌린 그녀는 이어서 그녀의 강철 채찍 끝에 단검을 매달았다.
 휘리릭! 휘릭!
 몇 번 채찍을 휘둘러 단검이 잘 매달렸는지를 확인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채찍으론 트롤에게 상처를 주기가 힘들어요. 게다가 얕은 상처는 금방 재생시켜 버리죠. 그래서 저는 녀석들의 재생력을 둔화시키는 약을 바른 단검을 채찍 끝에 매달죠. 하지만 당신에겐 필요 없을 거예요.”
 눈짓으로 왜냐고 묻는 키리히의 모습에 클라우디아는 씽긋 웃으며 그의 츠바이핸더를 가리켰다.
 “거기에 팔다리가 잘리면 제아무리 트롤이라도 쉽게 재생하지 못해요. 게다가 녀석들도 목이 떨어지면 죽어 버리죠.”
 완력이 부족한 클라우디아와는 달리 키리히의 힘이라면 트롤에게 치명상을 입힌다는 이야기였다.
 고개를 끄덕인 키리히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클라우디아의 말처럼 얼마 걷지 않아 움집 형태의 커다랗지만 허술하기 짝이 없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를 낮추고 조심스러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키리히는 갑자기 뒤에서 그를 잡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클라우디아였다.
 ‘왜······?’
 클라우디아는 흙을 한 움큼 쥐어 공중에 살짝 흩날렸다. 트롤들의 보금자리 쪽으로 날아가는 흙먼지를 보며 키리히는 그녀가 무슨 의도로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바람을 등지고 있어 트롤들이 그들의 체취를 맡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키리히는 잠자코 클라우디아의 인도에 따라 크게 선회를 하였다. 걸어왔던 반대 방향에서, 바람을 가슴에 안고 보금자리를 향해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수록 키리히의 얼굴은 더욱 진지하게만 변해 갔고, 클라우디아의 얼굴도 키리히를 만나기 전처럼 날카롭게 변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트롤의 보금자리 안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하압!”
 클라우디아의 손짓에 맞추어 키리히는 거센 기합을 토해 내며 트롤의 움집 안으로 뛰어들었다. 키리히가 들어가는 입구의 반대 방향에 나 있는 창문 밖에는 클라우디아가 긴 채찍을 늘어뜨리며 대기하고 있었다.
 필시 소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 움집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가 않았다.
 클라우디아의 얼굴에 키리히에 대한 걱정이 깃들 무렵,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은 키리히가 움집 밖으로 나오며 말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이내 들려온 괴성 소리에 묻혀 버렸다.
 [꾸워어어어어어어어어억!]
 습지대 전체를 진동시킬 듯한 그 괴성 소리는 키리히와 클라우디아가 있는 곳과 상당히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트롤이 아니에요.”
 클라우디아의 긴장된 표정은 방금 전의 괴성 소리가 결코 심상치 않음을 가르쳐 주었다.
 키리히가 괴성이 들려온 방향을 주시하고 있는 사이에 클라우디아는 다람쥐처럼 주변의 나무 위에 올라 괴성이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맙소사! 오우거예요!”
 우지직!
 비명과도 같은 그녀의 목소리에 대답이라도 하려는 듯이 나무를 쓰러트리며 거대한 몬스터가 나타났다.
 [꾸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
 고막을 찢어 버릴 듯이 울려 퍼지는 그 괴성 소리의 주인공을 키리히는 야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 녀석은······.’
 오우거라는 몬스터가 어떤 몬스터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저런 모습의 몬스터를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2년 전의 일이었다.
 키리히가 머물고 있던 산의 주인은 산적도, 몬스터도 아닌 키리히였다. 그곳은 키리히의 영역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난데없는 침입자가 나타났다. 바로 저렇게 생긴 몬스터, 이제야 그 이름이 오우거라는 것을 알게 된 몬스터였다.
 당시의 키리히는 멧돼지를 사냥하여 자신의 작은 보금자리로 가져가는 중이었고, 그 상태에서 오우거와 마주치게 되었다.
 마침 배가 고팠던 오우거는 키리히와 멧돼지를 보고 달려들었고, 키리히는 사냥감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싸워야 했다.
 하지만 당시의 키리히는 오우거를 당해 내지 못했고, 멧돼지를 빼앗기고 말았다. 또한 오우거에 의해 보금자리마저 강탈당하고 말았다.
 키리히에게는 무척 모욕적인 사건이었고, 자신이 결코 강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였다.
 그리고 키리히는 현재까지도 그 모욕을 가슴에 깊이 새겨 두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것을 갚아 주리라는 다짐으로.
 
 키리히를 노려보던 오우거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 있는 인간의 반응이 이제껏 그가 보아 왔던 생명체들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산천초목이 부르르 떠는 그의 괴성 소리가 들리면 대부분의 생명체가 꼬리를 말고 도망치기 바빴으며, 노릿한 그의 눈과 시선이 마주치게 되면 오줌을 지리며 저항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그에겐 익숙했다. 심지어 이 습지대의 주인인 트롤조차도 그의 앞에선 도망을 쳤다.
 그런데, 트롤보다 훨씬 약한 인간이 시끄럽다는 듯이 눈썹을 모으며 귀를 후비는 행동을 하고 있으니 오우거로서는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꾸워어어어억!”
 눈앞의 인간의 귀가 조금 이상해진 것이라 생각한 것일까? 오우거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소리를 질렀다. 최대한 큰 목소리를 내기 위해 고개를 살짝 추어올렸다.
 잠깐 동안의 시간이 흐른 후, 오우거는 흐뭇하게 보이는 표정으로 시선을 내렸다. 눈앞의 인간이 겁에 질린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쫘아악!
 내려지던 그의 고개는 커다란 충격을 받아 홱 비틀어졌다.
 그가 고함을 지르는 사이, 눈앞의 인간이 그의 앞에 달려들어, 츠바이핸더의 넓은 면으로 뺨을 후려친 것이다.
 한쪽 코에서 피를 흘리며 천천히 고개를 바로 하는 오우거를 향해 인간이 말했다.
 “시끄럽습니다.”
 단 한 마디에 나무에서 급히 내려오던 클라우디아의 긴장된 표정이 확 풀려 버렸다.
 순간 웃을 뻔한 그녀였지만, 상황이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는 것을 나무 위에서 본 그녀였다.
 “장난할 시간이 없어요. 한 마리가 아니란 말이에요.”
 “알겠습니다.”
 그녀를 살짝 돌아본 키리히는 여전히 진지한 얼굴로 훌쩍 뛰어올랐다.
 쫘아악!
 제자리로 돌아오던 오우거의 고개가 반대쪽으로 꺾였다.
 “키리히잇!!”
 그녀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 주춤주춤 뒤로 물러선 키리히는 조금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남에게 치욕을 주려면 뺨을 때리라 하셨습니다.”
 “피해요!”
 뺨을 맞는다는 것이 무척 기분 나쁘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된 오우거 한 마리가, 쌍코피를 주르륵 흘리며 키리히에게 덮쳐 오고 있었다. ///
 쉬익!
 거대한 손바닥이 키리히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당신도 부끄럽습니까?”
 키리히는 자세를 낮추며 오우거의 손바닥을 피하다가 몸을 펴는 탄력으로 힘껏 뛰어올랐다.
 쫘아악!
 키리히는 놀랍게도 자신의 키의 세 배 정도로 큰 오우거를 뛰어넘으며 정면으로 얼굴을 후려쳤다.
 “쿠우우우웅.”
 “물론 당신이 그때 그 오우거는 아니겠지만······.”
 코를 움켜쥔 오우거의 두 눈은 활화산처럼 불타오르고 있었지만 키리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이었다.
 “2년 전의 모욕은 이것으로 잊도록 하겠습니다.”
 
 트롤을 상대할 만반의 준비를 했다가 난데없이 오우거와 마주치게 된 클라우디아는 상당히 당황스러운 심정이었다.
 실력에 비해 힘이 약하다는 약점을 가진 그녀는 민첩함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강철 채찍을 무기로 약점을 보충해 왔다.
 덕분에 두터운 가죽이나 껍질을 지닌 몬스터들에게는 약한 면을 보여 왔다. 특히 민첩함까지 갖춘 오우거는 그녀가 상당히 힘들어 하는 몬스터였다.
 하지만, 함께 온 키리히가 여유롭게 장난까지 치는 모습을 보니 황당하긴 했지만 약간은 안심할 수 있었다.
 “세 마리가 더 있어요! 이젠 장난치지 말아요!”
 경고음 속에 웃음기를 실을 정도로 말이다.
 촤라락!
 그녀는 채찍을 휘둘러 키리히를 향한 오우거의 시선을 돌리려 하였다.
 채찍 끝에 달린 단검이 오우거의 등판을 할퀴었다. 하지만 오우거는 그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고 키리히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휘이익!
 바람 소리가 들릴 정도로 빠른 주먹이 키리히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칼날 같은 바람이 키리히의 뺨에 긴 상처를 남겼다. 비명을 지르며 뒹굴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였다.
 하지만 키리히는 비명 대신 앞으로 달려들었다.
 주먹질에 드러난 오우거의 옆구리가 키리히의 시야에 확대되어 들어왔다.
 푸욱!
 “꾸워어어어!”
 옆구리를 움켜쥐며 비명을 지르는 오우거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던 키리히는 다시 훌쩍 뛰어오르는가 싶더니 거친 동작으로 칼을 휘둘렀다.
 쉐액!
 거대한 나무를 단숨에 갈라 버린 칼질이 다시 한 번 펼쳐지더니,
 털썩!
 오우거의 거대한 머리가 바닥에 굴렀다.
 지상 최강의 몬스터라 일컬어지는 오우거가 허무하리만큼 간단하게 목숨을 잃어버린 것이다.
 “잘했어요!”
 그녀는 오우거가 튀어나온 방향을 노려보며 조그맣게 이야기했다.
 그곳에서 세 마리의 오우거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방금 키리히가 죽인 오우거보다 훨씬 덩치가 큰 녀석들이었다.
 “꾸워어어어억!”
 동료의 죽음을 발견한 오우거들은 분노의 괴성을 지르며 키리히에게 달려들었다.
 클라우디아는 이 싸움에서 자신이 도울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채찍 끝에 달린 단검은 두터운 오우거의 껍질을 뚫지 못했다. 뚫더라도 생채기 수준의 상처를 남겼다. 그런 수준으로 동료의 피를 잔뜩 뒤집어쓴 키리히에게 달려드는 오우거를 막을 수는 없었다.
 네 명이 복잡하게 얽혀 싸우는 곳에 끼어들 여지 따위는 없었기에, 그녀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상황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언제라도 키리히가 위험에 처하면 달려들 준비를 하고서 말이다.
 ‘정말······ 대단해!’
 전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오우거 세 마리와 싸우는 키리히의 실력은 그녀의 짐작 이상이었다.
 설령 크림슨 울프라 하더라도 쉽지 않을 상황을 초보 용병 키리히가 완전히 주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움직임에 오우거들은 헛손질을 하기 십상이었고, 서로 부딪혀 키리히를 놓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키리히의 움직임은 한 마리를 상대할 때와는 달랐다. 그때처럼 힘껏 뛰어올라 목을 노린다면, 다른 오우거의 손을 허공에서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인지 절대 뛰어오르지 않고, 오우거 사이의 간격을 적절히 이용하여 공격을 거듭해 나갔다.
 오우거들의 하반신이 점차 피로 덮여 가는 동안, 키리히에게는 상처 하나 생기지 않고 있었다.
 슈악!
 틈을 보아 강하게 휘두른 일격에 한 마리의 다리가 썩둑 잘려 나갔다.
 “훌륭해!”
 감탄을 토해 내던 클라우디아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의 응원에 화답하려는 것인지, 여유 만만한 키리히가 클라우디아를 바라보았다.
 웃음을 지으려던 그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위험합니다!!”
 갑자기 키리히가 경고음을 토해 내며 클라우디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클라우디아도 무언가 문제가 생겼음을 알았다. 밝은 하늘에 갑자기 그림자가 끼이기 시작한 것이다.
 싸움 구경에 정신을 팔다가 주변을 돌아보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녀답지 않은 실수였다.
 “꾸워어어어!”
 바로 뒤에서 들리는 고함 소리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구른 그녀는 볼 수 있었다.
 쉬익!
 회피하는 그녀의 움직임에 맞춰 빠르게 내려오는 거대한 손바닥을 말이다.
 죽음을 예감하며 이를 악 깨문 순간, 그녀는 부드러운 충격이 등 뒤에서 가해짐을 느꼈다. 그 충격에 오우거의 다리 아래로 되굴러가던 그녀는 보았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한 남자가 엎드려 있는 모습.
 그 남자의 등판 위로 원래는 자신이 맞아야 했을 거대한 손바닥이 떨어지는 그 모습을.
 콰아앙!
 막대한 충격에 땅거죽마저 들썩거리는 바로 그 모습을!
 “키리히이!!”
 사타구니 아래에서 들리는 찢어지는 비명에 한 남자를 눌러 죽인 오우거가 흠칫 몸을 떨었다.
 
 ‘모두······ 내 잘못이야.’
 죄책감에 늘어놓는 자기 비하가 아니었다. 그것이 진실이었다. 진실로 그녀의 책임이었다.
 ‘내가 아니었다면 이 일에 끼어들지도 않았을 텐데······.’
 키리히를 이 의뢰에 끌어들인 것은 그녀였다.
 ‘확인했더라면 좀 더 준비를 철저히 해 왔을 텐데······.’
 평소라면 의뢰를 나가기 전 마테우스의 검은 손에서 정보를 확인했었던 그녀가, 이번에는 확인하지 않았다.
 ‘내가 주변을 확인하고 있었더라면······.’
 그리고 키리히는 멍청히 서 있던 클라우디아를 대신해서 오우거의 손바닥에 맞아 죽었다.
 모든 것이 그녀의 책임이고 잘못이었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그녀가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다시 한 번 미쳐 가는 자신을 느꼈다.
 “호호호홋!”
 교소를 터트리며 강철 채찍을 말아 쥐는 그녀가 웃으며 피눈물을 흘리는 지금의 모습은,
 “호호호홋!”
 피처럼 붉게 빛나는 머리카락이, 장미 꽃잎처럼 하늘로 치솟은 그 모습은······.
 “꺄하하하핫!”
 3년 전, 그녀를 블러디 로즈라 불리게 만들었던 바로 그 모습과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휘익! 촤아악!
 악마조차 섬뜩해 할 미소와 함께 그녀는 채찍을 후려쳤다.
 키리히를 눌러 버린 오우거의 사타구니가 피로 물들었다.
 “꾸워어어억!”
 촤아악!
 고통에 찬 비명을 토해 내며 사타구니를 움켜쥔 오우거의 목에 그녀의 머리카락과 동일한 색으로 빛나는 강철 채찍이 감겨들었다.
 치지직!
 미소 지으며 당겨진 채찍에 오우거의 목둘레가 반 이상 잘려 나갔다.
 빠아악!
 붉은 기운을 머금어 창처럼 곧추세워진 채찍이, 쓰러지는 오우거의 눈구멍과 두개골 사이를 관통해 버렸다.
 “오오호호호홋!”
 뇌수를 빨아먹는 것처럼 꿈틀거리다가 스르륵 힘을 잃은 강철 채찍은 어느새 블러디 로즈의 손에 되감겨 있었다.
 촤아악! 촤아악!
 거칠게 바닥을 후려치는 채찍이 흙을 움켜쥔 채 허공에 튀어 올랐다.
 떠오른 흙더미가 얼어붙은 오우거 세 마리의 시야를 가리는 순간, 피에 젖은 붉은 장미가 오우거를 향해 뛰어들었다.
 “냐하하하핫!”
 비명과,
 “꾸워어어어억!”
 괴성과,
 후두두두둑!
 피 비가 내리는 소리가 감돈 그 자리에는 블러디 로즈만이 홀로 남아 왠지 슬프게 느껴지는 웃음소리를 터트리고 있었다.
 “오호호호!”
 한 남자에게 충분히 상처를 입은 오우거는 블러디 로즈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슬픈 웃음소리의 주인공이 한 남자가 죽었을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 남자를 깔아뭉갠 거대한 손바닥을 바라보던 그녀의 웃음소리가,
 “호호호······ 호?”
 서서히 잦아들었다.
 거대한 손바닥을 뚫고 비죽이 솟아오른 거검을 그녀는 이제야 보았다.
 꿈틀꿈틀.
 그것이 살아 있는 듯이 꿈틀거리는 모습을 이제야 보았다. 그리고 그 거대한 손바닥이 뒤집어지는 것도 보았다. 그 안에서 한 남자가 꾸부정한 허리를 펴는 모습도 보았다.
 “아아, 온몸이 욱신욱신거립니다.”
 거검을 움켜쥔 채 손바닥을 들어 올린 남자가 엄살 부리듯이 허리를 두드리는 모습에 그녀의 슬픈 웃음소리가 완전히 멎었다.
 붉게 빛나며 추켜올려진 머리카락은 어느새 가라앉아 있었다.
 흘러내리던 피눈물도 어느새 멎었다.
 “살아······ 있어?”
 “아아, 죽을 정도로 아픕니다!”
 “살아 있었어!!”
 “어디 아프십니까?”
 “키리히이!!”
 “어엇! 그렇게 달려들면 어쩝니까. 허리 아프단 말입니다!”
 “······.”
 “미안합니까? 그렇다고 기절한 척할 필요는 없잖습니까?”
 “······.”
 “무겁습니다아.”
 습기 가득한 바람이 얼싸안은 두 사람을 포근하게 감싸 주었다.
 
 습지대에서 크레비츠로 돌아오는 와중에도, 그녀는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며 미안하다 이야기했다.
 “미안해요.”
 “그만 우십시오.”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저는 멀쩡합니다. 그러니 그만 우십시오.”
 키리히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미안하다 이야기하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그렇지 않은 척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는 그녀의 울음도 그치게 되었지만, 키리히는 여전히 아픈 내색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진정을 한 그녀는 조심스럽게 키리히가 살아난 경위에 대해 물었다.
 “엎드린 상태에서 칼을 치켜세웠습니다.”
 오우거의 손바닥을 뚫은 츠바이핸더가 키리히의 말을 증명하고 있었다.
 “덕분에 힘이 약해진 모양입니다. 게다가 저는 원래 몸이 튼튼했습니다.”
 약해졌다고는 하지만 땅바닥이 꺼질 정도로 강한 일격이었다. 그런 공격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만큼 키리히의 신체가 단단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런데, 왜 자꾸 미안하다고 한 겁니까? 아무도 죽지 않았잖습니까?”
 “······사실은······.”
 클라우디아는 키리히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였다. 그녀가 키리히의 위기를 방조하게 된 모든 이유를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키리히에게 이해조차 되지 않았다.
 “아이덴은 영웅을 갈망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아이덴 사람들은 용병들 사이에서 영웅이 나오기를 원하고 있어요. 그만큼 현재의 상황이 힘드니까요.”
 “현 상황이 힘들단 말입니까?”
 키리히에게는 그리 와 닿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가 본 풍경은 대체로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아이덴은 용병의 나라라 불린다.
 척박한 토양과 지정학적인 유리함이 없기 때문에 용병이 많은 나라이기도 했지만, 아이덴을 건국한 초대 왕도 용병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현재의 왕실은 완전히 썩어 버려 신망을 잃어버렸고, 귀족들은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럼에도 아이덴이라는 나라가 유지되는 것은 오로지 아이덴의 무수히 많은 용병 때문이다.
 힘든 세상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만들었다.
 난세를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힘. 강한 자를 중심으로 아이덴의 용병들은 강한 용병을 중심으로 여러 번 뭉치기를 반복하였지만, 왕족과 귀족들의 강한 견제로 그때그때 제거되고 무산되곤 했다.
 “그게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당신과 같은 나이에, 당신과 같은 실력을 갖춘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요. 심지어 크림슨 울프라 불리는 저조차도 당신의 실력을 보면 압도당해요. 당신은······ 사상 최강의 초보 용병이에요.”
 “으음.”
 “당신이 이야기한 것처럼 실전에 다듬어질 때까지는, 진정으로 강해지기 전까지는 숨겨 주고 싶었어요. 제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검은 손의 서브 마스터인 그 애가 알게 되면······ 당신은 틀림없이 주목받을 테니까요.”
 마침내 긴 이야기를 끝낸 클라우디아는 숨을 죽이며 키리히의 대답을 기다렸다. 동료이면서도 사정을 모두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분명 그녀의 잘못이었다.
 그녀의 심장은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
 무심한 듯하면서도 친절한 그의 눈빛은 모든 남자를 증오하던 클라우디아의 가슴에 어느새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것을 그녀는 키리히가 죽었다고 여겼을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 숫처녀와 같은 심정으로 그녀는 키리히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생각에 잠겨 있던 키리히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의 깊은 눈이 클라우디아의 눈앞으로 빨리듯이 들어왔다.
 “그러니까······.”
 “······.”
 “모두 저를 위해서 했다는 말입니까?”
 키리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럼 됐습니다. 이만 돌아갑시다.”
 의외의 반응이었다. 소리쳐 화내기를 예상했었다. 그런데 그냥 아무 말 없이 그냥 가자 한다. 너무 담담하기에 오히려 더 불안하다.
 “자, 잠깐만요.”
 “또 무슨 이야기가 남았습니까?”
 “괘, 괜찮은가요? 저는 당신을 속였어요.”
 “절 위해서 그랬다고 이야기했잖습니까?”
 “그치만······.”
 “그럼 된 겁니다.”
 다시 그녀의 손목을 잡는 키리히. 하지만 클라우디아는 다시 한 번 그의 손을 뿌리쳤다.
 “거, 걱정되지도 않나요? 귀족들이······ 당신을 죽이려 할 거라구요!”
 어쩌면 그녀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가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자신의 거짓말을 부드럽게 받아들인 키리히의 반응을 다시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키리히의 말은 무뚝뚝하고 엉뚱하기만 했다.
 “그게 저랑 무슨 상관입니까?”
 “네?”
 “저는 영웅이 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아버지를 찾아서 한 대 치겠다는 생각뿐입니다.”
 “하지만, 귀족들은 그렇게 생각하질······.”
 “누군가 저를 죽이려 하면.”
 키리히는 조금은 비릿하게 느껴지는 웃음을 지었다.
 “제가 먼저 그를 죽일 겁니다.”
 너무나 자신만만한 그 한마디에 그녀는 걱정스럽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들은 많아요. 혼자서는 당해 낼 수 없어요!”
 “그렇습니까? 그럼 어딘가 숨어 버리면 됩니다. 아니면 얼굴을 숨기고 다니던가요.”
 끝까지 아무 문제 없다는 키리히의 고집에, 클라우디아도 결국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래······ 안 되면 어딘가 숨어 버리면 되겠지. 그는 원래 산에서 홀로 살았으니까.’
 그녀는 결국에는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걸어갔을까? 갑자기 키리히가 클라우디아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의뢰는 어떻게 된 겁니까?”
 “······.”
 클라우디아는 멍하니 키리히를 바라보았다.
 
 
 
 
 
 4장 그녀를 노리는 사람들.
 
 
 
 
 “형님. 소문 들으셨습니까?”
 “응. 무슨 소문?”
 “블러디 로즈가······ 남자를 데리고 다닌다는 소문 말입니다.”
 “뭐라고!?”
 크레비츠의 뒷골목을 대표하는 암흑 조직, ‘둥켈 카이저’의 아지트에서는 오가는 이야기였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 그 미친년에게 남자라니!? 말이 되는 소리야?”
 “하지만 사실입니다. 대략 한 달 전부터 그년과 함께 다니는 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함께 다니고 있습니다. 애들을 시켜 확인해 보았습니다. 아무래도······.”
 형님이라 불리던 자는 한쪽 입술을 끌어 올렸다.
 “그렇단 말이지. 그래, 같이 다닌다는 그놈은 유명한 놈이냐? 실력은 어떻고?”
 “키리히 베오포르트라 하더군요. 신출내기 용병입니다. 실력도 고작 E 등급에 불과합니다.”
 “크큭! 그렇군. 블러디 로즈에게 약점이 생겼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형님!”
 “복수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군.”
 “예! 형님!”
 형님이라던 자가 일어섰다.
 일어선 그의 사타구니 사이에는 무언가를 보호하는 형태의 보형물이 채워져 있었다.
 
 짜악!
 뺨을 때리는 주점의 안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블러디 로즈의 뺨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감히 블러디 로즈에게 모욕을 주는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주점 안에 있는 세 사람 중 그 누구도 놀라는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는 당사자인 블러디 로즈조차도 아무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뺨을 때린 사람은 그녀의 절친한 친구인 다이앤이기 때문이다. 따귀를 때린 주제에 흐느끼고 있는 그녀의 마음이 자신을 걱정하기 때문임을 누구보다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흑흑.”
 “미안.”
 “걱정했었단 말이야. 내겐 말도 않고······. 오우거들이 영역 이동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네가 그곳으로 의뢰를 해결하러 갔다는 이야기에······. 흑흑.”
 “미안해.”
 언제나 의뢰에 앞서 위험한 점이 있는지를 파악하고, 그녀의 안전을 챙겨 주던 다이앤이었다. 그것이 죄책감 때문이든, 아니면 친구로서의 우정 때문이든, 지금의 클라우디아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흐느끼고 있는 자신의 친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아 줬을 뿐이다. 언제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이 소중한 친구를 말이다.
 “난 괜찮아. 그리고 3년 전에 비해서 훨씬 강해졌어. 오우거 다섯 마리쯤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알고 있단 말이야. 기사단 하나를 당해 내지 못하고 잡힐 뻔했다는 걸. 라이너 백작가의 기사들이 복귀를 했단 말이야.”
 “그들이······ 복귀했다고?”
 부드럽던 클라우디아의 눈이 갑자기 날카로워졌음을 울고 있던 다이앤은 알아채지 못했다.
 “응. 그들이 말했어. 블러디 로즈를 거의 잡을 뻔했다고······. 만약 의문의 괴한들이 널 도우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잡았을 거라고. 기사단 하나도 당해 내지 못하면서 어떻게 오우거 다섯을 잡아!”
 “의문의 괴한······ 들······ 이란 말이지?”
 날카로웠던 클라우디아의 눈이 묘하게 반짝였다.
 ‘어수룩해 보이는 청년에게 당했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한 모양이지?’
 상황은 뻔하게 짐작이 되었다.
 차라리 유명한 블러디 로즈에게 모조리 당했다고 이야기를 하지, 어수룩한 청년 하나에게 당했다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몸에 난 상처가 그녀의 무기로는 낼 수 없는 상처였기에 의문의 괴한들이라는 가공의 사람들을 지어 낸 것이리라.
 키리히의 정체가 드러나질 않길 바라는 클라우디아로서는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랬구나. 그럼 이번에도 의문의 괴한들이 난입을 했나 보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아이덴 최강의 정보 조직이라는 마테우스의 검은 손, 그곳의 서브 마스터께서 정보의 진위조차 가리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런 흔적들은 없었어. 넌······ 지금 나를······ 속이고 있잖아! 네게 행여 무슨 일이 생길까 노심초사하는 나에게······.”
 “다이앤.”
 클라우디아는 다시 울먹이려 하는 그녀의 친구를 감싸 안았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난 예전처럼 약하지 않아. 약점도 없고······.”
 “······.”
 다이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클라우디아도 아무 말도 않은 채 그녀의 친구를 감싸 안기만 했다. 주점을 청소하던 종업원도 묵묵히 청소만을 계속했기에, 그 청소하는 소리만이 한동안 주점을 감돌고 있었다.
 잠시 후, 어느 정도 진정된 다이앤을 확인한 클라우디아가 말을 끄집어냈다.
 “그런데······ 알고 싶은 정보가 있어. 알아봐 줄 수 있겠니?”
 “······응?”
 “루카스라는 사람을 찾아 줘. 나이는 대략 40대 이상일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 아마 이 부근에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루카스······? 다른 특징은 없어?”
 “응. 특이한 이름이니까 아마 찾아낼 수 있을 거야.”
 “너와······ 관계있는 사람이야?”
 “아니······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찾고 있는 사람이야.”
 “너와 같이 다닌다는······?”
 클라우디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네가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인들 못해 주겠니.”
 “고마워.”
 대강의 용건을 마친 클라우디아는 여러 가지 사소한 잡담들을 다이앤과 나누다가 와인 한 잔을 마시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음부터는 의뢰에 나가기 전에 반드시 이야기를 할게.”
 “응. 그래.”
 “다음에 또 보자.”
 다이앤은 클라우디아가 나간 이후, 그녀의 빈자리를 한참 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친구 앞에서 보였던 연약한 표정은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그 자리에는 마테우스의 검은 손의 서브 마스터다운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런 그녀의 입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키리히 베오포르트라······.”
 복잡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다이앤의 입술이 열리며 짤막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한스!”
 “네, 마스터!”
 말없이 청소만을 하고 있던, 30대 초반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생각해?”
 “블러디 로즈가 있던 주변에 의문의 괴한들의 흔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기사들의 상처는 둔탁한 무언가에 강하게 맞은 자국들, 단 한 사람에 의한 상처였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그 키리히 베오포르트라는 사람일까?”
 “분석 결과로는 그 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후훗. 내가 지금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하고 있는 걸까? 아직 열아홉밖에 되지 않은 사람이 오러 익스퍼트 상급의 기사단장을 포함하여 네 명의 기사를 일격에 폐인으로 만들어 버렸어. 그렇게 어린 사람이 말이야. 그게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
 “아니면······ 사상 최강의 초보 용병이 실재하는 걸까?”
 “······.”
 한스라 불린 30대 초반의 남자는 묵묵히 그녀의 이야기를 듣기만 할 뿐 아무런 의견도 내어놓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말이지, 누군가에게 의견을 구하는 말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한스!”
 “네! 마스터.”
 “일단 길드의 정보망을 움직여서 루카스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봐 줘. 그 애가 말한 조건에 맞는 사람을 말이야. 그리고······.”
 다이앤은 망설이는 듯이 말꼬리를 늘였다.
 “키리히 베오포르트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알아봐 줘. 이건 길드의 정보망을 움직이지 말고, 네 개인적인 수단을 사용해서. 아무래도······ 그 사람이 드러나지 않길 바라는 모양이니까.”
 “알겠습니다, 마스터!”
 명령을 내리고 난 후에도 한참 동안 생각을 하던 다이앤은 잠시 후 항상 하던 것처럼 술잔을 정성 들여 닦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점은 언제나처럼 평범한 분위기가 되었다.
 
 키리히와 클라우디아는 잠시 거리를 걸으며 휴식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키리히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것으로 생각했던 클라우디아였지만, 생각 외로 그의 상처가 깊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그는 하루 정도를 근육통에 시달렸을 뿐, 다음날이 되자 멀쩡해져 버렸다. 엄청난 강골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음날이 되어서, 키리히는 또 다른 의뢰를 받으려 했지만 클라우디아가 가로막았다.
 “일을 하는 것은 좋지만, 최적의 몸 상태를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해요. 과도하게 욕심을 부리다가 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키리히는 휴식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는 그녀의 강압 아닌 강압에 결국 굴복하였다. 덕분에 이렇게 한가롭게 거리를 거닐며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휴식이라 하지만 키리히의 머리는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세 가지 거짓말이 있다고 하죠. 혼기를 놓친 처녀가 시집가기 싫다는 말과, 늙은 노인이 어서 죽어야지 하는 말······ 그리고 다른 한 가지가 장사꾼이 밑지고 판다는 말이에요.”
 억척스럽게 생긴 아주머니 하나와 가격 흥정을 벌이고 있는 장사꾼을 바라보며 한 말이었다.
 “정말 밑지고 파는 거란 말입니다. 더 이상은 깎을 수 없어요. 아주머니가 제 단골이라서 이러는 거라니까요.”
 “밑지고 팔긴! 다 이문이 남으니까 그러는 거지! 그러지 말고 조금만 더 깎아 줘!”
 그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가 키리히와 클라우디아의 귀에 스며들었다.
 “저게 거짓말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저런 말을 하죠. 계속 듣다 보면 정말로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요. 아무튼, 장사꾼들이 제시하는 곧이곧대로 들었다가는 큰 손해죠. 지난번에 장작을 판 일도 그래요.”
 클라우디아는 키리히가 처음 크레비츠에 와서 장작을 아주 싼 가격에 판 것을 또 하나의 예로 들었다.
 “제가 보기에도 더 받아 낼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하지만 당신이 만만하게 보여서 더 가격을 깎은 거죠. 당신은 그러려니 하고 그냥 팔아서 그만 손해를 보고 말았구요.” ///
 “으음. 그렇습니까?”
 “저도 이런 일에 익숙하지는 못하니까, 그건 여기까지만 설명할게요.”
 그녀는 키리히를 데리고 크레비츠의 이곳저곳을 끌고 다니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여러 가지 요령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었다. 산속에서 거의 혼자 살다시피 한 키리히에게는 상당히 생소한 이야기였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모두 공감이 가는 이야기들이었다.
 이야기를 듣는 키리히에게도 유익한 시간이었지만, 클라우디아에게는 더욱 즐거운 시간이었다.
 블러디 로즈라는 악명이 붙으면서 이런 평범한 즐거움은 전혀 느끼지 못했던 그녀였다. 이런 것이 있는지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비록 옆에 있는 남자가 꽤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은 남자였지만, 그녀는 그것조차도 행복하게 느껴졌다.
 시장의 이곳저곳을 한참이나 기웃거렸을까?
 갑자기 시장의 한쪽 구석에서 마차가 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 마차가! 피해!”
 혼잡한 거리를 무법자처럼 가로지르는 마차. 좌판을 늘어놓던 사람들 중 일부는 간신히 몸을 피하기는 했지만, 늘어놓은 좌판의 물건들이 마차에 짓밟혀 못 쓰게 되고 말았다.
 “저래도 되는 겁니까?”
 엉망이 된 물건들 앞에 털썩 주저앉아 울상이 되어 있는 몇몇 상인들과 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져 가는 마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키리히가 조용히 물었다.
 “귀족들이니까요. 그들은 사람들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아요. 자신에게 세금을 바치는 존재. 영지 전에서는 방패막이로 내세우고, 기분이 나쁘면 화풀이 삼아 죽일 수 있는 존재로만 여기고 있죠. 그나마 이곳은 용병들이 많기 때문에 귀족들도 조심하고는 있지만, 용병들이 별로 활동하지 않는 곳은 처참할 지경이죠. 물론, 그렇지 않은 귀족들도 있겠지만······ 극소수예요.”
 “으음.”
 키리히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했지만 별로 관심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그와는 직접적으로 상관이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던 일을 계속하도록 하죠.”
 키리히와 클라우디아는 다시 사람들을 헤치며 걷기 시작했다.
 우뚝.
 걷고 있던 키리히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어딘가에 시선을 주었다.
 좌판에 여러 가지 물건을 늘어놓고 울상을 짓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 클라우디아의 눈에 들어왔다.
 소년의 좌판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조각상들이 놓여 있었는데, 조금 전 질주했던 마차에 피해를 입었는지 상당수의 조각상이 처참하게 깨어져 있었다.
 “어린 아이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에요. 귀족들은 그런 것 신경 쓰지 않으니까요.”
 “······.”
 키리히는 말없이 소년을 바라보다가 그 좌판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키리히가 관심을 보이는 듯하자 울상을 짓던 소년이 어색하게나마 웃음을 지었다.
 겨우 열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소년의 웃음이 왠지 모르게 지쳐 보였다.
 “조각상 하나 사세요. 행운을 가져다줄 거예요.”
 부서지지 않은 조각상 중에는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매의 조각도 있었고, 전쟁의 여신을 상징한다는 칼과 방패의 모양도 있었다.
 “네가 직접 만든 거니? 손재주가 좋네?”
 “헤헤. 제가 만든 것도 있지만, 몇 개 안 돼요. 대부분은 다른 사람이 만든 거죠. 예쁜 누나!”
 소년의 순수한 칭찬에 작은 미소를 얼굴에 건 클라우디아는 키리히가 한 가지 조각상에 집중하고 있음을 보았다.
 시선을 따라가니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조각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키리히의 것과 같은 종류의 츠바이핸더를 들고 있었다. 게다가 밋밋한 얼굴 부분은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클라우디아가 그 조각상을 가리켰다.
 “이건 네가 만든 거니?”
 “아, ‘가면의 용병상’이네요? 애석하지만 그건 제가 만든 게 아니에요. 제가 아는 어느 할아버지가 만든 거죠.”
 “가면의 용병이라······. 누굴 조각한 건지는 아니?”
 정체를 숨기기 위해 가면을 쓰고 다니는 용병이 몇몇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들 중 이렇게 조각으로 만들어질 정도로 유명한 사람은, 클라우디아가 알기엔 없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워낙 괴팍하신 분이라 물어도 쉽게 대답해 주질 않으시죠. 그걸 사시겠어요?”
 “얼마니?”
 “1실버만 주세요.”
 “1실버?”
 클라우디아는 똥그란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다가 키리히의 귀에 속삭였다.
 [너무 비싸요. 좀 더 깎을 수 있을 거예요.]
 키리히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간 클라우디아의 뺨이 살짝 붉게 물들었지만 키리히는 그걸 볼 수 없었다.
 조각상은 사용된 나무도 평범하였고, 특별한 예술적 가치가 있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손재주가 있는 사람이 몇 시간만 투자하면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
 “조금 비싼 편이구나? 특별히 비싼 이유라도 있니?”
 클라우디아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소년은 빙긋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그 웃음 지은 얼굴에서 갑자기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
 클라우디아와 키리히는 조금 당황하였지만, 아무런 말 없이 소년이 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잠시 동안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던 소년은 이내 눈물을 진정시키더니 약간 목이 멘 목소리로 말했다.
 “아, 죄송해요. 갑자기 동생 생각이 나서······. 헤헤. 역시 좀 비싼가요?”
 E 등급의 용병이 한 번의 의뢰로 받을 수 있는 금액이 1실버 정도이니 평범한 조각상의 가치로는 꽤 비싸다 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클라우디아가 그렇다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오빠아아!”
 갑자기 골목에서 병약해 보이는 소녀 하나가 비틀거리며 걸어 나오더니 좌판을 늘어놓은 소년을 부둥켜안았다.
 “루이제!”
 여동생을 본 소년은 급히 얼굴을 문질러 눈물자국을 지웠지만 그것이 완전히 지워질 리가 없다.
 “왜 또 울고 그래! 울지 마, 바보야! 나 이제 안 아프단 말이야!”
 “너! 왜 밖으로 나왔어! 먼지를 마시면 안 된다고 했잖아! 오빠가 나오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싫어! 나 더 이상 누워 있는 것, 싫단 말이야. 나 때문에 오빠만 고생하는 거잖아! 이제 내 약값은 내가 벌 거야!”
 “네가 무슨 수로 돈을 벌어! 당장 집에 들어가!”
 지금 키리히의 눈앞에 있는 소녀와 소년과 같은 경우는 흔히 있는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오빠를 생각하는 여동생의 마음이 키리히의 마음을 움직인 것일까. 키리히는 말없이 가면의 용병상을 집어 들며 1실버도 아닌 2실버라는 거금을 내려놓았다. 클라우디아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소녀가 눈을 치켜뜨며 키리히를 노려보는 것이 아닌가!
 “우린 거지가 아니에요.”
 키리히의 얼굴에 조금 당황하는 기색이 어렸다.
 “루, 루이제! 무슨 짓이니! 착한 형아한테 그런 말 하는 게 아니야!”
 “이런 돈 필요 없어! 이런 돈 때문에 오빠가 운 것 같잖아! 오빠가 나 때문에 우는 것도 싫지만, 이런 돈 때문에 우는 건 더 싫어!”
 “루, 루이제!”
 키리히는 조금 난처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매의 조각을 한 개 집어 들었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클라우디아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도 사도록 할게. 그럼 된 거지?”
 “고마워요, 형!”
 키리히의 마음을 안 것인지 소년은 티 없는 미소를 띠며 웃었다. 소녀도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힘내십시오.”
 키리히는 한마디를 소년과 소녀에게 남기고 클라우디아와 함께 일어섰다. 묵묵히 키리히의 옆에서 걸어가던 클라우디아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그 애들······.”
 “알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바가지를 썼다는 것은······. 소녀도 아픈 척하기는 했지만, 실제론 아프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었어요?”
 클라우디아는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보기에 불쌍한 듯한 신세를 이야기한 소년의 말은 상당히 인위적인 냄새가 풍겼던 것이다.
 때를 맞춰 튀어나온 소녀도 너무 공교로웠고,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소년의 행동도 어색하게 보였다. 그래서 그녀는 그 작은 꼬맹이들이 사기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가격을 더 받아 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키리히는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제값의 두 배를 주었다고 이야기를 한다. 이제까지 장사꾼에게 속지 말라 했던 클라우디아의 말은 무엇이란 말인가.
 “도대체······.”
 “아버지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이후로······ 저도 저 아이들과 똑같은 신세였습니다. 도와줄 사람을 간절히 원했고, 나쁜 짓을 할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자존심을 버릴 생각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
 나쁜 짓을 하고 자존심을 버리는 키리히의 모습을 클라우디아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아무리 어린 시절의 키리히라 하더라도 무뚝뚝하지만 당당하게 살았을 거라는 생각이 클라우디아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클라우디아는 묵묵히 키리히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나름대로 힘을 내면서 살아가는 아이들입니다. 대견하게 생각됩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어수룩한 청년 하나가 조금의 도움을 줬다고 생각하면 별로 억울하지도 않습니다. 무엇보다 청년에겐, 약간의 여유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트롤을 퇴치하는 의뢰로 대략 90골드가량의 의뢰금을 받았다. 일반인이 상상하지도 못할 정도의 거금이다.
 그중에서 2실버 정도를 쓴다 해서 크게 피해가 가는 것은 아니다.
 키리히의 자상한 면에 클라우디아는 흐뭇한 미소를 몰래 지었다.
 “아버지의 행방에 대한 단서를 쥐고 있는······ 루카스 씨에 대한 것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용병 길드에도 이야기했고, 정보 조직에 속한 제 친구에도 알아봐 달라고 했어요. 생각보다 단서가 적긴 하지만 조만간 알 수 있게 될 거예요.”
 
 며칠 후.
 클라우디아는 다시 한 번 다이앤의 주점을 찾았다. 다이앤은 여전히 반가운 얼굴로 그녀의 친구를 맞이했다.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클라우디아가 다이앤에게 물었다.
 “저번에 알아봐 달라고 하던 일은 어떻게 되었어?”
 “음. 루카스라는 사람에 대한 조사······ 말이지?”
 “응.”
 “지금 알아보고 있는 중이야. 아무리 우리 조직이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이름만으로는 조금 한계가 있거든. 단서가 너무 적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계속 알아봐 줘.”
 “그야 당연히 그럴 거지만······ 그런데 클라우디. 최근에 이상한 소문이 들리더라?”
 “응?”
 무슨 짐작을 했는지 클라우디아의 볼이 아주 살짝 붉어졌다. 하지만 다이앤의 입에서는 의외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블러디 로즈가 약해졌다는 소문.”
 “응?”
 키리히와 함께 다니면서 웃음 짓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짐작하는 것과 동일한 내용의 이야기였지만, 그 의미는 정반대로 불길한 냄새를 풍기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 소문 때문인지, 최근에 블러디 로즈를 노리는 사람들이 있어. ‘둥켈 카이저’라고 알고 있지?”
 “둥켈 카이저?”
 어둠의 황제라는 거창하고도 어두운 느낌의 뜻을 가진 단어. 하지만 클라우디아에겐 생소한 이름이었다.
 “크레비츠의 뒷골목을 장악한 조직이야. 그곳의 보스가 너에게 당한 적이 있어. 부하 중에서도 꽤 많이 당했지. 조직 자체가 무너질 뻔했으니까. 넌 기억 못하는 모양이지만······.”
 “아, 그 어설픈 녀석들?”
 크레비츠의 뒷골목 조직들은 용병들의 위세에 눌려 제대로 힘을 쓸 수가 없다. 용병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들을 깡그리 청소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을 정리한다 해도 곧 비슷한 부류가 생길 것을 알기에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클라우디아의 기억에 전혀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녀석들이 나를 노린다고?”
 평화롭기만 하던 클라우디아의 표정이 갑자기 섬뜩하게 변했다. 부드럽던 눈빛이 독랄하게 변했다.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블러디 로즈의 진정한 모습이다.
 그 표정을 대한 다이앤은 조금 안심이 된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약해졌다는 말은 헛소문이었던 모양이네. 후훗. 하지만······.”
 “하지만?”
 “너와 함께 다닌다는 그 사람은······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
 “······.”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짓던 클라우디아가 갑자기 폭소를 터트렸다.
 “파하하하핫! 그 소리를 들으니 왠지 우습다, 얘.”
 “농담이 아냐.”
 “알아.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걸.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음?”
 “그딴 녀석들 모두가 달려들어도 눈썹 하나 꿈틀거리지 않을 사람이니까.”
 그 이야기를 들은 다이앤의 눈이 살짝 빛나고 있음을 클라우디아는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그렇게 강한 사람이야?”
 “그래. 나이에 비해 좀 강한 사람이지. 용병 등급으로 치면······ 대략 C 등급은 될걸?”
 “호오. 열아홉이라고 얼핏 들은 것 같은데 그 정도 실력이라고? 대단하네? 그 정도면 그 나이 때의 너만 한 실력이잖아?”
 “그렇긴 하지. 아직은 약하지만 그런 녀석들에게 당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지. 그런 녀석들에게 당한다면 나랑 함께 다닐 자격도 없어.”
 “흐음. 그래? 그럼 내가 괜한 걱정을 한 거구나.”
 다이앤은 살며시 미소 짓고 있었다. ///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지?”
 클라우디아는 어느 음식점에서 키리히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다이앤의 주점에 다녀오는 동안, 키리히는 장비를 손본다면서 대장간으로 향했다. 오우거에게 눌린 그의 츠바이핸더가 상당 부분 파손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대략 다섯 시간 후에 이곳 주점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약속했던 다섯 시간에서 30분가량이나 더 지났는데도 키리히는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설마······.’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클라우디아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훗. 그럴 리가 없잖아. 그딴 녀석들에게······.’
 다이앤이 했던 이야기가 왠지 신경 쓰이는 클라우디아였다. 오랜 기다림에도 여인의 마음은 짜증보다는 걱정이 서리고 있었다.
 음식점 안의 손님은 클라우디아와 몇몇 아가씨들이 유일했다. 남자 손님들은 그녀가 등장하는 순간 하나둘 나가기 시작했고, 간혹 음식점의 문을 열고 들어선 남자 손님들은 그녀의 얼굴을 발견한 순간 두려운 얼굴로 발걸음을 돌리곤 했다.
 한숨 쉬던 주인장이 붉은 장미가 그려진 팻말을 출입구에 붙여 둔 이후론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클라우디아의 얼굴에 걱정스러움이 스며들 즈음에 음식점의 출입문이 열리며 수십 명의 사람이 들어섰다.
 놀랍게도 그들은······ 남자들이었다.
 ‘흐음?’
 클라우디아는 그들을 슬쩍 바라보긴 했지만 이내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잠시 후,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변했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던 남자들 중 몇몇이 그녀의 등 뒤로 살금살금 다가오는 것을 느낀 것이다.
 ‘훗.’
 작은 비웃음과 함께 순진해 보였던 그녀의 얼굴이 날카롭게 변했다.
 “죽어라!”
 뒤에서 달려들던 남자가 작은 단도로 그녀의 등을 찌르려 하였지만, 이미 그녀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촤르륵!
 그녀는 자신을 공격한 남자의 목을 강철 채찍으로 감은 채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소문을 믿는 멍청이들이 있긴 있구나.”
 서릿발이 내려앉은 목소리와 함께 고함 소리와 비명, 채찍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음식점 안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아이고 이 일을 어째!”
 음식점의 주인은 테이블 뒤에 숨어서 제발 많이 부서지지 않기만을 빌었다.
 
 싸움은 순식간에 끝났다. 남자들은 모두 어설프고 형편없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남을 찌를 수 있을 정도의 독기는 갖추고 있었지만 실력도 없었고, 조직적이지도 않았다.
 그런 자들은 수십이 아니라 수백이 달려들어도 블러디 로즈를 상대하지 못한다.
 “죽고 싶은 모양이지?”
 요염한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를 직접 듣는 남자는 숨 쉬기 괴로운지 컥컥대고 있었다. 그녀의 강철 채찍이 그의 목을 휘감고 있었던 것이다.
 클라우디아에게 잡힌 녀석은 은연중에 이 무리를 지휘하던 사람이었다.
 “자, 이제 이유를 들어 볼까? 거짓말은······ 통하지 않아.”
 강철 채찍이 풀리자 컥컥거리며 숨을 고르던 남자.
 수하들조차 완전히 제압당한 상태였지만 그의 눈에선 여전한 독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캑. 여, 역시 소문이 맞았군.”
 “호오? 무슨 소리지?”
 “네년이 약해졌다는 소문! 예전 같았으면 우린 모두 이미 병신이 되었겠지. 크큭!”
 “꽤 당당하군? 원한다면 병신으로 만들어 주지.”
 “크! 과연 네년이 그럴 수 있을까?”
 “못할 이유가 있나?”
 잔혹한 표정으로 남자의 사타구니에 올려지던 그녀의 발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었다.
 “우리는······ 네년을 따라다니는 놈을 잡고 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이들의 정체를 대충 짐작하고 있다. ‘둥켈 카이저’라는 허약한 뒷골목 조직임을 말이다.
 “헛소리는 죽음의 지름길이야.”
 “크큭. 헛소리? 뭘 모르는군. 우리가 힘만 쓸 거라 생각하는 건가?”
 사타구니에 묵직한 발이 얹어져 있음에도 남자는 당당하기만 했다.
 “······.”
 “어수룩한 놈이더군. 그런 놈이 미인계에 수면제를 탄 술을 먹고도 과연 제대로 싸울 수 있을 것 같나? 크크큭! 지금쯤이면······.”
 클라우디아의 안색이 살짝 변함을 보고 깔려 있던 남자는 비열하기 그지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키리히가 세상 물정에 어둡다는 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클라우디아. 남자의 말이 그럴듯하다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 그런 모양이군.”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좀 더 짙은 웃음으로 뒤덮였다.
 “그런 짓을 했다면······ 죽을 각오는 되어 있는 것이겠지?”
 촤르륵!
 허공을 가르는 강철 채찍에 그녀의 분노가 고스란히 담겼다.
 “크억!”
 비웃음을 터트리던 남자는 자신의 심장에 박혀 있는 채찍의 끝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숨을 거두었다.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인 모양이로군! 잠시 따라다니는 남자의 안위에 마음이 약해질 거라고 생각했나?”
 촤아악!
 강철 채찍이 또 한 번 허공을 날아 한 남자의 머리통을 반으로 부숴 버렸다.
 “그러니 네놈들 같은 허섭스레기들이 덤벼드는 것이겠지? 호호호홋!”
 “끄아악!”
 채찍이 춤추고, 공포에 질린 남자들은 비명을 질렀다. 클라우디아의 채찍은 더 이상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잔혹한 방법으로 남자들을 산산이 부숴 버렸다.
 순식간에 다섯 명이 죽어 버리자, 남자들은 땅바닥을 기어서라도 도망치려 하였다. 하지만 강철 채찍이 가장 선두에 있는 자의 몸을 꿰뚫어 버리자 남은 자들은 구석에 몰려 벌벌 떨고만 있었다.
 클라우디아의 우아한 발걸음이 그들의 앞으로 옮겨졌다.
 촤르르르.
 피와 뇌수, 그리고 살점이 엉겨 붙어 있는 강철 채찍을 늘어트리는 그녀의 표정은 매혹적이기에 더욱 무서웠다.
 “브, 블러디 로즈.”
 누군가가 비명처럼 토해 내는 말처럼, 그녀는 사람의 피를 빨아들이는 붉은 장미였다.
 “궁금한 것이 있는데, 물어볼 자들이 너무 많이 남았군. 좀 더 정리를 해 볼까?”
 “사, 살려 주십시오. 무엇이든 말하겠습니다.”
 공포에 질려, 생존의 욕구만이 남은 남자들은 무엇이든 말을 할 기세였다.
 
 ‘제발······!’
 겁에 질린 남자 하나를 앞세우고, 그 뒤를 느긋하게 뒤따르고 있었지만, 한 남자의 무사함을 비는 그녀의 마음속은 다급하기만 했다. 하지만 서두를 수는 없었다. 약점일수록 그렇지 않은 척해야 한다는 것을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히익! 브, 블러디······.”
 피에 젖은 장미를 연상시키는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험악한 인상의 용병들도, 좌판을 늘어놓고 있던 상인들도, 건들거리며 길을 막고 있던 불량배들도 매혹적이기에 더욱 섬뜩한 그녀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꽁지가 빠져라 도망을 쳤다.
 “휴우. 십년 감수했네. 저 모습······ 오랜만에 보는군.”
 “그러게 말이야. 도대체 누가 블러디 로즈를 건든 거지?”
 “누군지는 몰라도······ 그놈 오늘 죽겠군.”
 그녀의 모습이 사라진 후, 숨죽이며 그녀의 행차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사람들을 질식시키는 그녀의 조용한 행차는 ‘둥켈 카이저’의 아지트까지 계속되었다.
 그곳으로 가는 동안 그녀는 이들의 비겁한 술수에 대해 모두 들었다.
 그들이 관리하는 업소에서 독한 심성을 가진 여인 몇을 선별하여 함정을 팠다.
 키리히가 지나가던 길에서 일부러 그 여인들은 위기에 빠지게 되고, 키리히가 그녀들을 구해 주게 된다는 계획이라 하였다.
 감사의 표시로 키리히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여인들은 그 음식에 오우거도 잠들 정도의 수면제를 탈 것이다.
 그리고 수면제를 먹어 무방비 상태가 된 키리히의 사지를 끊어 놓는다는 것이 이들의 계획이었다. 충분한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제발······ 무사해 줘요.’
 녀석들의 아지트로 다가가는 클라우디아의 마음은 간절하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었다.
 근심 어린 그녀의 얼굴이 약간 변하게 된 곳은 그들의 아지트로 향하는 골목길에 들어섰을 때였다.
 골목으로 들어서는 출입자들을 막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몇 명의 남자가 어딘가 한 군데씩 박살이 난 가운데 기절해 있었던 것이다.
 아지트를 향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렇게 쓰러져 있는 자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었으며, 아지트 바로 앞에는 족히 오십은 될 듯한 불량배들이 무더기로 쓰러져 있었다.
 모두 어딘가 박살이 난 상태였다.
 희망을 품으며 아지트 안으로 들어간 클라우디아는 전혀 의외의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무릎을 꿇은 채로 의자를 들고 있는 다섯 명의 아가씨와, 그들의 앞에서 일장 훈계를 늘어놓고 있는 키리히의 모습을 말이다.
 놀랍게도, 독한 심성을 가졌기로 유명하다는 그 아가씨들이 눈물 콧물을 모조리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
 “훌쩍. 이제 그만 하세요.”
 “저희가······ 흑흑······ 잘못했어요.”
 ‘설마······ 손을 댄 건가?’
 멀쩡하고 말쑥해 보이기까지 하는 키리히의 모습에 긴장은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그러고 나니 묘한 의문이 들었다.
 여인을 때리는 남자를 경멸하는 키리히를 알고 있기에 설마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가씨들을 살펴보아도, 어딘가 맞은 듯한 흔적은 없었다.
 “키리히!”
 훈계를 늘어놓고 있던 키리히가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반가운 표정을 짓는다.
 “아! 클라우디아! 여긴 어쩐 일입니까?”
 정말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묻는 키리히였다. 클라우디아의 이맛살이 살포시 찌푸려졌다.
 “왜 여기 있는 거예요! 약속 시간이 넘어도 오질 않아서 걱정했잖아요?”
 클라우디아의 말에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이 뜨끔 하는 표정을 보이는 키리히였다.
 ‘깜빡 잊은 거로군.’
 키리히의 건망증에 대해 익히 알고 있는 클라우디아는 허탈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괜찮다니······ 다행이네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는 그녀의 행동에 키리히는 좀 더 미안한 표정이 되었다.
 “사과할 필요까진 없어요.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저 아가씨들은 뭐예요?”
 클라우디아는 무릎을 꿇은 채 무거운 의자를 들고 있는 아가씨들을 가리켰다.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 아가씨들에게 이야기할 것이 좀 남아 있습니다.”
 블러디 로즈의 출현에도 오히려 무언가에 해방된 듯한 표정이었던 아가씨들이 다시 죽을상을 지었다.
 “제······ 제발 이제 그만······.”
 “흑흑······ 저희가 잘못했어요. 이제 다시는 안 그럴게요.”
 키리히는 아가씨들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조금 전에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습니까?”
 “모두 말했다구요. 흑흑······ 모두······.”
 “다들 생각이 나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럼 처음부터 다시 이야기해야겠습니다. 들어서 나쁠 것 없는 이야기 아닙니까?”
 키리히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여인들의 마음가짐이 어떻고, 어떤 일을 하면 안 되며, 어떤 식으로 행동을 해야 사랑받을 수 있는지······ 등등. 모두 옳은 이야기이긴 했지만, 그만큼 식상한 이야기들이었다.
 그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으음.”
 한참이나 이야기를 하던 키리히가 갑자기 시선을 한쪽으로 돌렸다. 기절해 있던 불량배 하나가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퍼벅!
 그곳으로 걸어가 깨어나는 녀석을 다시 기절시킨 키리히가 아가씨들의 앞으로 걸어왔다. 아가씨들의 얼굴에 공포감이 어렸다.
 “조금 전에 어디까지 이야기했습니까?”
 “흑흑흑.”
 “모, 몰라요.”
 “으음, 제 이야길 제대로 듣지 않으셨군요. 그럼 처음부터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키리히의 연설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클라우디아는 벌을 서고 있는 아가씨들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었다. 키리히의 건망증이 자꾸만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게 만든다는 것을. 그 덕분에 벌써 몇 시간째 저러고 있었을 것을.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도 눈치 챘기에 더욱 힘이 들게 마련이고, 급기야 저렇게 눈물 콧물 모두 찍어 내며 참회하는 것이리라.
 “후훗!”
 키리히를 방해할 생각이 없었던 그녀는 주변을 살펴보며 기절해 있는 불량배들을 좀 더 괴롭혀 줄까 생각을 하다가,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피 웅덩이가 만들어진 곳 위에 어떤 조각상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얼마 전 키리히가 구입했던 ‘가면의 용병상’이었다.
 ‘싸우다가 떨어트린 모양이지?’
 피 웅덩이 속에서 그걸 주은 클라우디아는 조각상에 흥건하게 묻어 있는 피를 쓰러져 있던 불량배 하나의 옷에 닦았다.
 그 조각상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려던 그녀가 갑자기 그 행동을 멈추고 조각상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글씨지?’
 자세히 살펴보니 아주 미세하게 음각된 곳으로 피가 스며 들어가 제대로 닦여지지 않았다. 닦여지지 않은 핏덩어리가 모여 묘한 글씨를 이루었다.
 [그분을 기억하며······. 루카스.] ///
 
 
 
 
 
 5장 포로가 된 용병들.
 
 
 
 
 소년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가면의 용병상’을 샀던 그 자리에 돌아왔지만 소년을 찾을 수는 없었다.
 “여기에서 조각상을 팔던 소년을 혹시 아십니까?”
 “음······ 조각상? 그런 걸 파는 녀석이 있었던가?”
 “조각상을 팔던 소년을 혹시 보셨습니까?”
 “그런 녀석이 어디 있는지 알 게 뭐람! 개시부터 재수 없게! 그냥 다른 데 가서 알아봐!”
 클라우디아가 물어보면 부르르 떨기만 하고 제대로 대답조차 못했기에 키리히가 나섰지만,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어떤 상인 하나가 알려 주는 이야기에 소년이 사라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녀석······ 매일 자리를 옮기면서 장사한다오. 혹시라도 조각상을 사간 사람이 돌아와 돈을 돌려달라고 할까 봐.”
 이야기를 해 준 상인은 처음에는 말을 하지 않으려 하였지만 절대 해를 끼칠 생각은 없다는 키리히의 말과 공손한 행동에 어렵게 이야기를 해 주었다.
 어느 정도 윤곽은 잡혔지만 막연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크레비츠에 상주하는 인원은 십여만. 유동 인구까지 포함한다면 대략 십오만이 날마다 크레비츠를 드나든다. 그 많은 사람의 틈에서 매일 자리를 옮기는 소년을 찾는 것은 무척 난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래도······ 꽤 어렵겠습니다.”
 “하지만 아버님······ 의 행방을 아는 사람에 대한 단서를 쥐고 있는 아이잖아요? 어렵겠지만 찾아야죠.”
 “그렇긴 하지만······.”
 “다행히 제게 방법이 있어요. 아마도······ 하루면 될 것 같네요.”
 그녀의 표정은 키리히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와 키리히가 찾아간 곳은 다이앤의 주점이 아닌 용병 길드였다.
 “헉. 클라우디아님께서······! 의뢰를 받으러 오신 겁니까?”
 그녀와 키리히가 들어서자 예전보다는 침착하지만 여전히 소란스러운 반응이 있었다.
 여전히 굳은 안색으로 맞이하는 접수원에게 클라우디아는 의외의 말을 꺼내 놓았다.
 “아니. 이번에는 의뢰를 맡기려고 찾아왔어.”
 “클라우디아님께서······ 의뢰를요?”
 “꼬맹이 하나를 최대한 빨리 찾고 싶은데······.”
 용병인 그녀가 용병 길드에 의뢰를 내건 것이다. 정확히는 현상금을 내걸었다. 3골드라는 거금을 말이다.
 “이렇게 생긴 녀석이지. 대신 상처를 입히지 말고 내 앞으로 데려와야 해. ‘여행자의 쉼터’로 찾아오면 돼!”
 
 크림슨 울프인 그녀는 단 한 번의 의뢰로 백여 골드에 버금가는 의뢰금을 받곤 하지만 평범한 실력의 용병은 그만큼을 벌지 못한다.
 C 등급의 용병이 한 번의 의뢰로 받을 수 있는 돈이 대략 75실버가량임을 생각한다면 겨우 소년 하나를 찾는 데 3골드라는 금액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액수라 할 수 있었다.
 거기에 의뢰자가 다름 아닌 블러디 로즈이다. 그녀를 두려워하는 용병들이 많지만 그녀의 강한 실력과 아름다운 외모를 동경하는 부류들도 많았다.
 장사를 하고 있는 소년 소녀들의 얼굴을 확인하는 용병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 결과로 키리히에게 조각상을 팔았던 소년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클라우디아의 앞에 끌려왔다.
 “수고했어요. 의뢰금은 여기!”
 “가, 감사합니다.”
 “이만 가 보도록 하세요. 아이들은 여기에 놓아두고요.”
 3골드를 받은 용병은, 조금이라도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날카로운 눈빛 한 방에 꼬리를 말고 사라져 버렸다. 어쨌건 거금을 벌게 되었으니 무척 재수가 좋다 해야 할 것이다.
 험악한 인상의 용병에게 잡혀 온 소년은 상당히 겁에 질려 있었다.
 “저, 저기······ 돈은······ 돌려 드릴게요.”
 키리히의 순진한 얼굴을 본 소년은 이제야 사정을 대충 짐작했다는 표정이 되었다. 겁에 질린 어린 새와 같은 그들의 모양새에 클라우디아는 살포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걸로 되겠니? 우리가 너를 찾는 데 쓴 돈만 해도 3골드나 되는데?”
 소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사, 삼 골드요?”
 “그래. 그러니 어떻게 하니? 2실버로는 너무 부족한데?”
 “도, 도대체 왜······.”
 아이로서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고작 2실버를 되찾자고 그 백오십 배에 달하는 3골드를 쓰는 사람을.
 “제, 제발 살려만······ 주세요.”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니?”
 “······.”
 그녀의 농담 어린 말에 거의 죽을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니, 아마 끌려오면서 블러디 로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그럼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겠네? 감히 블러디 로즈에게 사기를 치고도 무사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겠지?”
 “흐흑.”
 새파랗게 빛나는 그녀의 눈을 어린아이의 간담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모양인지 급기야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억지로 눈물을 감추려 하는 모습이 제법 사내답게 느껴졌다.
 “저희는······ 죽는 건가요?”
 마치 죽음을 각오한 듯이 비장하게 이야기하는 소년과, 눈을 꼭 감고 소년의 소매를 부여잡고 있는 소녀의 모습에 클라우디아는 다시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너희가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한번 들어 볼래?”
 꼬마들의 눈에 활기가 돌아오는 듯했다. 클라우디아는 키리히에게서 ‘가면의 용병상’을 건네받고 소년의 눈앞에 가져왔다.
 “이 조각상······ 만든 사람을 가르쳐 주면 살려 주도록 할게. 그리고······.”
 그녀는 품속에서 1골드짜리 주화를 하나 꺼내 소년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것도 줄게. 어때?”
 너무나 달콤한 유혹이었다. 목숨을 버릴 것인지, 아니면 이야기를 하고 1골드를 받을 것인지 말이다. 소년에게 1골드는 너무나 큰돈이리라.
 하지만 그 유혹을 대하고도 겁에 질린 소년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굳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을 진지하게 생각한 소년의 입에서는 클라우디아가 예상치 못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죄송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요.”
 자신의 죽음을 생각한 것인지 공포에 떨고 있었지만, 소년의 대답은 단호하기만 했다.
 “음? 왜 그런 거니?”
 “제가······ 그 할아버지의 행방을 이야기하면, 할아버지에겐 나쁜 일이 생기겠죠? 이렇게 거금을 들여 찾으려는 것은······. 죄송하지만, 오갈 곳 없는 우리를 도와준 그분을 배신할 수는 없어요. 차라리······ 그냥 죽이세요.”
 “흐음. 정말 그런 생각이니? 너도 같은 생각이야?”
 클라우디아의 말이 소년의 소매를 굳게 잡고 있는 소녀에게로 향했지만, 소녀는 그저 눈을 감고 소년을 꼭 붙들고 있을 뿐이었다. 소년에게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표현이었다.
 클라우디아의 눈이 감탄으로 물들었다.
 “우린······.”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키리히의 손짓에 그녀의 말문이 막혔다.
 “우린 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생각이 없습니다.”
 어린 자신에게 존대를 하는 키리히의 모습에 숙여졌던 소년의 고개가 들어 올려졌다.
 “나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고아와 같은 시절을 겪었습니다. 돌아오시겠다던 아버지는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셨습니다. 7년 동안이나······. 혹여 돌아오지 못하면, 이곳의 루카스라는 사람에게 행방을 물으라 하시더군요.”
 “······그 할아버지는 루카스라는 이름이 아니에요.”
 헛짚었다는 소년의 이야기에 키리히는 말없이 조각상을 꺼내 보였다. 피가 엉겨 붙어 루카스라는 이름이 드러나 있는 그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제 아버지를 찾을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정중한 어조로 키리히가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소년의 눈빛이 복잡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같은 고아의 심정에서, 부모님을 찾고 싶다는 그 심정을 어찌 모를까. 게다가 어리디어린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
 소년은 자신을 잡은 용병에게 꽤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블러디 로즈라는 이름과 그 위치, 위명에 대해서······.
 눈물을 흘리며 풀어 달라 애걸하기도 하였지만, 블러디 로즈의 의뢰라면 어떻게든 잡힐 것이라면서 차라리 빨리 잡히는 것이 낫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소년을 잡은 용병은 꽤 강해 보였지만, 그런 그조차 블러디 로즈라는 이름을 말할 때는 한줄기의 공포감을 보였었다.
 그렇게 대단한 블러디 로즈와 일행인 듯이 보이는 사람이었다. 보아하니 서로 대등한 관계처럼 보인다. 그런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진솔하게 이야기를 한다.
 ‘이 형······ 진심이야.’
 자신의 입을 열게 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소년은 알고 있다. 하다못해 옆에 있는 소녀의 목숨을 가지고 위협하더라도, 소년의 마음은 흔들릴 것이다.
 차라리 죽이라는 이야기는 어린 치기에 불과하다고, 소년은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눈앞에 있는 어른들은, 블러디 로즈라는 악명을 가지고 있는 여인은 과연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하지만 이 사람은 그런 모든 방법을 모두 제쳐 두고, 자신에게 진심을 털어놓았다. 어린 자신에게 머리를 숙여 부탁한다.
 어리디어린, 아무것도 아닌 자신에게······.
 키리히의 진심이 소년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진심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고 했던가. 결코 입을 열지 않을 듯이 보이던 소년이 조그만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할아버지는······ 자신의 이름이 헤르만이라고 했어요.”
 
 소년은 친절하게도 헤르만이라는 할아버지가 살고 있다는 집으로 직접 키리히를 안내해 주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아무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디로 가신 걸까?”
 “할아버지는 자주 집을 비우세요. 용병 일을 하고 있거든요. 아마 의뢰를 떠나셨을 텐데······ 이번에는 조금 늦으시는 것 같아요.”
 “의뢰? 육십 대의 할아버지라고 하지 않았니?”
 “그렇지만 아직 쌩쌩하신걸요.”
 “그래. 그렇겠구나. 그렇지만 무슨 일을 당하진 않으신 건지 걱정되는구나. 이 누나가 한번 알아볼 테니, 그분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겠니?”
 
 클라우디아는 소년에게 들은 특징들을 다이앤에게 이야기하였다. 조금 투정을 부리며 그에 대해 알아보겠다던 다이앤은 의외로 하루 만에 그의 행방을 알아왔다. 헤르만이라는 가명을 쓰는 그는 정말 의외의 장소에 있었다.
 “산적 소굴에 있던데?”
 “산적······ 이었어?”
 “아니. 네 말대로 용병이 맞아. 나이가 있으니까 처음에는 나도 용병이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보호자 일을 하고 있더라.”
 용병이 가장 많이 죽는 때는 바로 세상 물정도 모르고, 겁도 모르고, 실력도 없는 초보 용병 때다. 허무하게 죽어 가는 초보 용병들을 보호하기 위해 용병 길드에서는 신청자에 한해서 경험 많고 노련한 용병들을 붙여 준다. 특별한 무력이 중요한 자리가 아니기에 나이 많은 헤르만도, 아니 루카스도 계속 용병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 산적 토벌을 하다가?”
 “그래. 길드의 정보가 잘못되었나 봐. 토벌하러 갔던 용병들 상당수가 죽고, 일부는 포로가 되어 버렸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산적 패들이 포로들의 몸값을 요구했어. 그들이 내민 명단 중에는 헤르만이라는 이름도 끼어 있더라.”
 “산적 따위가······.”
 “그렇게 쉽게 볼 건 아니야. 거기에 달려간 용병들은 백 명이 훨씬 넘었거든. 대부분 D 등급이었긴 했지만 C 등급도 상당수가 있었어.”
 “뭐라고?”
 일개 산적 패가 상대하기에는 불가능한 전력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반대로 나오고 상당수가 포로로 잡혔다고 하니, 일개 산적 패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뜻이 된다.
 “덕분에 길드에선 난리지. 포로가 된 용병들을 그냥 내버려 두면 길드의 명예에 치명적이니까. 그렇다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도 문제고. 그렇다고 또 다른 토벌대를 보냈다가는 포로로 잡힌 용병들이 처형당할 염려도 있으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편이지.”
 “그렇구나.”
 자신의 이야기에 생각에 잠겨 있는 클라우디아를 보며 다이앤은 미소를 지었다.
 “설마 거기로 갈 생각은 아니겠지? 아무리 너라지만 위험할 거야.”
 “무리라고 생각해?”
 “응.”
 “그럼 크림슨 울프 두 사람이 동시에 끼어들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해?”
 “흐음. 무슨 일이든 혼자 처리하는 크림슨 울프가······ 두 명이나 이 일에 끼어들 리가 없잖아? 게다가 지금 크레비츠에 있는 크림슨 울프는 너를 제외하면 광전사 시밀뿐인데······ 너 설마?”
 “후훗. 아무리 나라도 그 사람과 함께 일하는 짓은 하지 않아!”
 “그럼?”
 “아무튼 고맙다. 역시 너에게 물어보길 잘했네.”
 클라우디아는 그녀의 절친한 친구를 살짝 안아 주곤 주점을 나서려 하였다. 막 주점의 문을 열고 나서려는 순간, 다이앤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클라우디.”
 “응?”
 “······조심해.”
 “걱정 마. 괜찮을 거니까.” ///
 
 “산적 말입니까?”
 처음에는 키리히도 클라우디아처럼 가벼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점점 무거운 표정이 되었다.
 “쉽진 않겠습니다.”
 “어떻게 할 거예요? 이대로 포기할 건가요?”
 “아버지의 행방에 대한 유일한 단서를 잡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결코 포기할 수는 없다는 말.
 “역시 결론은 그거죠? 그럼 계획을 세워 볼까요?”
 클라우디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생긋 웃음을 지었다.
 
 클라우디아는 키리히와 함께 용병 길드로 찾아갔다. 활기찼던 평소 때와는 달리 그곳의 분위기는 상당히 무겁고 어두웠다.
 그런 와중에 클라우디아가 출현하였지만 그들의 표정이 오히려 밝아졌다. 얼핏 보니 그녀를 반기는 기색까지 느껴졌다.
 “흐응. 이게 어찌 된 일일까나?”
 그리고 잠시 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용병 길드의 크레비츠 지부장이 나와 클라우디아를 맞이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지부장은 클라우디아와 키리히를 작은 밀실로 안내하였다.
 “이건 무슨 일일까요?”
 평소와는 다른 반응에 클라우디아는 고소를 머금었다. 짐작 가는 일이 있었지만, 짐짓 모른 척하는 것이다.
 “사실은······ 길드에 약간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데릴 쉬퍼라는 이름의 지부장은 클라우디아도 평소에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비록 친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혹은 그녀의 명성 때문인지 지부장은 쉽게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용병 길드에 문제라······ 흥미로운데요?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을까나?”
 “아마 잘 모르고 계실 겁니다. 사실은······.”
 “산적 때문인가요?”
 “헛! 그걸 어떻게?”
 자신이 하려 했던 이야기를 클라우디아가 먼저 꺼내자 지부장은 깜짝 놀랐다.1
 “저라고 귀가 없는 것은 아니니까요. 아무리 용병 길드에서 숨기려 해도, 이 정도 일이면 금방 소문이 나게 마련이죠.”
 용병 길드에서는 이번 일을 쉬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알려져서 좋을 일은 아니니 말이다. 그리고 비밀리에 클라우디아를 수소문했는데, 그녀가 이미 이 일에 대해 알고 있으니 놀랄 만도 했다. 놀라던 지부장은 잠시 후엔 오히려 편안한 표정이 되었다.
 “알고 계시다니······ 이야기가 쉽겠습니다.”
 “길드에선 어떻게 하기로 했나요? 협상을 하기로 했나요?”
 “그것이······.”
 “퇴치하는 것으로 결정했나 보군요? 하긴······ 포로가 된 용병들과는 그저 계약 관계에 불과하니 그들의 안전을 고려할 필요는 없겠죠?”
 “그걸 어떻게······?”
 “뻔하잖아요? 특별히 이렇게 밀실까지 모셔 주셨다는 것만 봐도? 제가 필요하다는 말이겠죠. 협상을 하는 데 크림슨 울프가 필요하진 않을 테니까.”
 “으음.”
 지부장은 그저 침음성만을 토해 냈다.
 “크레비츠에 있는 크림슨 울프는 블러디 로즈와 광전사 시밀뿐. 하지만 광전사에게 부탁할 수는 없었겠지요. 그가 나서면 포로고 뭐고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을 테니까. 그럼 길드는 포로의 안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소문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될 것이고······. 하지만 제가 가게 되면 최대한 그들의 희생을 막으려 했다는 변명이나마 할 수 있겠죠?”
 “······.”
 “이렇게 변명을 할 수도 있겠군요. 원래 블러디 로즈에게 부탁해서 몸값을 협상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몸에 혹한 산적들이 치근거리다가 분노한 그녀에게 몰살당했다. 그 와중에 포로들도 어쩔 수 없이 휘말려 버렸다.”
 “설마 저희가······.”
 지부장은 제대로 말을 잇지도 못하고 식은땀만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점점 그 규모를 불려 가고 있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저와 원한이 생기게 되니 길드에서도 꺼려지겠지요. 하지만 산적들의 세력이 블러디 로즈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서, 둘의 공멸이 예상된다면?”
 “그, 그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지부장은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정말 그녀의 이야기처럼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논리적이었고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다.
 당사자인 자신조차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야기였기에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발언을 한다면 그 순간 이곳의 용병 길드는 황폐화가 될 것이다.
 “······.”
 당황하던 그는 이내 자신의 반응이 과했음을 깨닫고 더욱 안색을 굳혔다. 그녀와 협상을 해야 하는데 결정적인 약점을 드러내 버렸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정말 그럴 생각이었나 보네요? 호호홋!”
 지부장은 화를 내는 그녀보다 웃음을 짓는 터트리는 그녀가 더욱 무서웠다.
 ‘크레비츠의 용병 길드도······ 이젠 끝인가?’
 그는 블러디 로즈를 농락한 자들의 최후가 어떤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녀를 노렸던 자들은 하나같이 처참한 죽임을 당했다.
 그 숫자가 많건 적건, 얼마나 강하건 약하건, 블러디 로즈는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눈을 질끈 감은 지부장의 귀엔 뜻밖의 소리가 들려왔다. 천상의 목소리처럼 감미롭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장난은 그만 하십시오, 클라우디아.”
 “어머? 제가 너무 심했나요?”
 옆에 있던 남자가 그녀의 분노를 가로막은 것이다. 게다가 눈앞에서 혀를 살짝 빼물며 귀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블러디 로즈라니······. 그녀가 변했다는 소문을 어느 정도 들었던 지부장이었지만, 눈앞의 익숙하지 않은 광경에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물론, 그럴 생각은 없었을 거라 믿어요.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으니까요.”
 “그런 방법이······ 있습니까?”
 “물론이죠.”
 눈에 띄게 기뻐하는 데릴 지부장의 모습에, 그녀는 밝게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이번 일을 블러디 로즈에게 맡기는 거죠. 정확히 말해서 그녀와 그녀의 동료를 믿고서요. 물론 용병 길드도 블러디 로즈가 하라고 하는 일을 해야겠지요?”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지부장은 몸을 숙이며 경청하는 자세가 되었다.
 “그럼 먼저 이런 소문을 하나 퍼트려 주세요.”
 
 [블러디 로즈가 산적들과 몸값 협상을 위해 출발했다.]
 불길처럼 번져 가는 그 소문과 함께 이번 일의 자세한 배경에 대해서도 알려졌다.
 용병들은 산적들의 의외의 전력에 대해서 놀라워하면서도, 길드의 기민한 반응에 경탄을 터트렸다.
 “길드도 정말 대단한데? 설마 블러디 로즈를 협상자로 내세울 줄이야. 이거, 산적들도 똥줄이 타겠는걸?”
 “그래. 누가 감히 블러디 로즈를 건드리겠어? 협상을 하면서도 부들부들 떨걸?”
 소문의 한쪽 끝자락에는 블러디 로즈와 함께 가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지만, 워낙 대단한 그녀의 명성에 눌려 그리 중요시되지는 않았다. E 등급의 용병 따위를 크림슨 울프에 비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까? 그 크림슨 울프가 E 등급의 용병에 대해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고 있음을.
 
 “정말 대단해요. 키리히의 말대로더군요? 데릴 지부장이 놀라는 모습이라니 호홋. 블러디 로즈가 이렇게 영리한 줄은 생각지도 못했을걸요? 덕분에 이렇게 길드를 움직일 수 있게 되었네요.”
 “······.”
 거듭된 칭찬에 키리히는 얼굴은 살짝 붉어지고 있었다. 클라우디아는 그런 키리히의 반응을 즐겼다.
 “산에서만 살았다면서 어떻게 이런 계획을 세울 수 있었을까? 정말 대단해요. 혹시 뭔가 다른 정체가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런 것······ 없습니다.”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그의 반응에 그녀는 깔깔거리며 좋아하였다.
 “지금쯤이면 산적들도 소문을 들었을 겁니다.”
 “어머, 너무 그렇게 서두르지 말아요. 아버지를 빨리 찾고 싶다는 심정은 알지만 먹을 건 다 먹어야 하지 않겠어요?”
 열심히 숟가락과 포크를 놀리는 그녀에게서 큰 싸움을 앞둔 사람의 초조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 이제 슬슬 출발할까요?”
 느긋한 발걸음으로 음식점에서 나온 키리히와 클라우디아는 산적들의 소굴이 있다는 산 부근에서 두 방향으로 갈라섰다.
 
 “블러디 로즈로 보이는 여자가 하나 올라오고 있습니다.”
 “과연 오는군.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기분 나쁘다고 해야 할까? 이렇게 당당하게 올라오는 모습이라니······. 그것도 혼자서!”
 “아무리 크림슨 울프라도 설마 우리와 싸울 생각이야 가지고 있겠습니까?”
 “그렇겠지. 하지만 수틀리면 싸우려 들겠지. 하하. 보고 싶기도 해. 아이덴 놈들이 그렇게 자랑하는 크림슨 울프라는 놈들을 말이야.”
 “백작님께서 원하신다면 충분히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래······ 그렇지. 그럼 일단 성대한 환영식을 준비해 보도록 할까?”
 “그리고 백작님······.”
 “뭔가?”
 “혹시 모르니······ 그걸 준비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허허. 쓸데없는 일이래도. 정말 자네의 노파심은······ 말릴 수가 없군. 알았네. 그것도 준비해 두도록 하게.”
 “네. 백작님!”
 이 대화는 어느 백작가의 집무실이 아닌, 클라우디아가 향하고 있는 산채에서 오가는 대화였다.
 
 ***
 
 블러디 로즈가 산적들과 협상하려 한다는 소문은 산적들의 산채에만 전해진 것이 아니었다. 비열하고 잔혹한 계획을 세우는 것으로 그 이름이 조금 알려진 다이크 헤르비그란 사람에게도 이 소문은 들려왔다.
 수많은 사람을 파멸시키는 방법으로 많은 재산을 모은 그는, 이 소식을 듣고 또 하나의 잔혹한 계획을 세웠다.
 그는 먼저 광전사 시밀에게 복수하기 위해 따라다니는 사람들에게 접근했다.
 “시밀 벤더스에게 복수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 그럼 당신들은 나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
 “저, 정말이오?”
 복수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광전사 시밀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너무나 강인한 그의 무력에 방법을 찾지 못해 서서히 지쳐 가고 있던 그들에게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다이크의 말은 진정으로 반가운 소식이었다.
 “물론이지. 내 방법을 쓰면 녀석을 반드시 죽일 수 있어. 하지만 그냥 가르쳐 줄 수는 없지! 당신들이 가진 재산 모두를 나에게 준다면 확실히 그놈을 죽여 주지.”
 “다, 당신이 그를 죽인단 말이오?”
 대신 복수해 주겠다는데도 복수에 미친 이 사람들은 오히려 화를 내었다.
 “헛소리 그만하시오! 우리 손으로 그놈을 죽일 거요!”
 다이크는 비열한 웃음을 터트렸다.
 “크큭. 알겠어. 당신들이 원하는 게 무언지. 그럴 수 있게 해 주지.”
 다이크는 복수하려는 자들을 모두 모아 두고 계획을 이야기했다.
 “다들, 블러디 로즈가 산적 소굴로 협상을 하러 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을 거야.”
 “그게 그 미친놈과는 무슨 상관이오?”
 “왜 상관이 없지? 같은 크림슨 울프가 아닌가?”
 “크림슨 울프는 함께 다니지 않지 않소?”
 “그렇지. 하지만 블러디 로즈가 있는 곳에 광전사를 끌어들인다면? 어차피 결국에는 둘 다 지칠 거야. 물론, 끌어들이기 위해서 한 명 정도는 희생을 해야겠지만.”
 “그, 그건······.”
 복수에 미친 사람들이긴 했지만, 지금 다이크가 말한 방법이 위험하고 피해가 크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칫하다가는 산적소굴에 포로로 잡혀 있는 용병들이 죽을 수도 있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높다. 블러디 로즈가 그냥 광전사를 피해 버린다면 포로로 잡힌 용병들만 허무하게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다. 도의적으로 해서는 안 될 짓이라는 것을 복수에 미친 사람들도 알았다.
 그런 그들을 보며 다이크가 비웃음을 터트렸다.
 “크큭! 네놈들의 복수심은 그렇게 어설픈 것인가? 복수만 할 수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모두 동료나 지인, 가족들을 그의 손에 잃었을 것이다. 그놈들은 죽어서도 네놈들이 복수해 주기를 원하겠지? 이렇게 망설이는 네놈들을 보면 그놈들이 통곡을 하겠군.”
 복수자들이 하나같이 몸을 움찔 떨었다.
 “네놈들은 복수에 미친 것들이 아닌가? 그런 놈들이 뭘 가리는 거지? 아니면 다른 방법이라도 있나? 네놈들 모두가 덤벼들어도 그놈을 이기지 못하지 않나?”
 그들을 자극하기 위한 다이크의 독설이 한참 동안 이어졌다. 자극받은 복수자들의 눈이 서서히 광기에 물들어 가고 있었다.
 “좋소! 하겠소!”
 “나도······ 복수를 할 거요! 방법을 가르쳐 주시오!”
 “크큭! 좋아! 그럼 방법을 가르쳐 주지.”
 다이크는 그들의 앞에 작은 두루마리 하나를 내보였다.
 
 ***
 
 ‘지금쯤이면······ 충분히 뒤로 돌아갔겠지?’
 키리히와 헤어져 산 위로 오르기 시작한 클라우디아는 느긋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키리히가 제안한 이 계획은 간단하다면 무척 간단하달 수 있는 계획이며, 허점도 상당히 많은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에 크림슨 울프이자 블러디 로즈라는 명성을 지니고 있는 한 여인과, 그 실력이 어디까지인지 파악하기 힘들면서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 초보 용병 하나를 대입시키자 완벽에 가까운 계획이 되었다.
 ‘떠들썩하게 소문을 낸 용병 길드가 명예 때문에라도 설마 협상이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고······. 그 협상자가 블러디 로즈라면 온 신경이 그곳에 집중되는 것은 당연지사······.’
 크림슨 울프들을 두고 일인 군단이라 부르는 이들도 있다. 그렇게 대단한 명성을 지닌 존재를 상대하자면 전력을 집중시켜야 한다. ///
 ‘그렇게 시선이 집중되는 중에 키리히가 인질들을 구한다면······? 후훗!’
 7년 동안이나 산에 살았기 때문에, 산에 무척 익숙한 키리히는 정체를 숨기고 잠입하는 것이 자신 있다 이야기했다. 그토록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대해 자신하지 못하는 키리히다. 어찌보면 소심하다고도 할 수 있을 터인데, 그런 그가 자신하는 일이라면 얼마나 확실한 일일 것인가.
 키리히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블러디 로즈의 실력에 묻혀 얕잡아 보는 사람까지 있다.
 ‘깜짝 놀라게 될 거야, 모두들. 후훗!’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그녀의 표정이 흐뭇하게 변해 갔다.
 멀리서 산적들의 산채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산채에 도착하자 대기하고 있던 산적들이 좍 갈라지며 길을 만들어 주었다.
 그것이 단순한 환영이라면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언제라도 칼을 들이밀 수 있는 산적임을 생각한다면 위협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당당하면서도 오만하게까지 보이는 표정으로 그 사이를 지나쳤다.
 그녀의 그 모습이 인상이 깊었던 것일까? 산적들 사이로 열린 길 끝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남자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과연, 크림슨 울프. 이름이 헛되지 않아. 게다가 아름답기까지 하군.”
 감탄을 토해 내는 남자는 얼마 전 백작이라 불렸던 그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의 말투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게 들린다.
 “각하. 위험한 여자입니다.”
 옆에서 말하는 자의 목소리도 어딘지 어색하게 들렸다. 그 느낌을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덴 사람답지 않은 말투였다.
 “그렇겠지. 하지만 그래서 더욱 매력적이지 않은가? 아름답고 가시 없는 꽃은 금방 시들기 마련이거든.”
 “각하!!”
 “아아. 그렇게 큰 소리 내지 말게. 벌써부터 내 정체를 드러낼 셈은 아니겠지?”
 “죄, 죄송합니다.”
 “하하. 그렇게 당황할 것은 없네. 이제 아름다운 레이디를 맞이해야 할 시간이 아닌가?”
 백작이 한 걸음 나서자 옆에 있던 자도 이내 표정을 수습한 채 뒤를 따랐다.
 
 “이렇게 환영해 주시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요?”
 “아름다운 레이디를 맞이하는데 이 정도의 환영 행사는 당연한 것이 아닌가?”
 대담하게도 백작은 그녀에게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가서야 그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요염한 표정으로 살포시 웃음을 지었다.
 “그 환영 인파가 칼을 들고 있지 않았다면 더 좋을 뻔했네요.”
 “하하. 이건 실수로군. 본업이 워낙 험악한 놈들이라 비무장으로 있으래도 말을 듣지 않더군. 하지만 설마 그것이 레이디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는 않았겠지? 유명한 블러디 로즈께는 익숙한 모습이 아닌가?”
 블러디 로즈라는 명칭을 그녀의 앞에서 부르는 것은 금기. 그런데 면전에다 대고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클라우디아의 눈썹이 살며시 오므려졌다가 다시 펴졌다.
 “그쪽이 두목이 아닌가 보네요? 아니면 수하들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하던가?”
 “하하. 두목! 그거 듣기 좋은 소리군. 그렇지 않나?”
 “그렇습니다, 두목!”
 입을 맞추어 대답하는 산적들의 모습에선, 산적답지 않은 충성심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클라우디아의 눈썹 사이가 조금 더 좁혀졌다가 다시 펴졌다.
 “그런데······ 언제까지 사람을 이렇게 세워 둘 셈인가요?”
 “이것 참! 오늘 연이은 실수를 하는군. 일단 자리를 옮깁시다.”
 
 
 
 
 
 6장 그를 흥분케 하지 마라
 
 
 
 
 키리히가 살았던 아이저만 부근에는 다섯 군데의 산적 소굴이 있었다. 일반 사람들에게 산적들은 무섭기만 한 존재였지만, 키리히에게는 필요한 물건을 공급해 주는 사람들일 뿐이었다.
 그런 연유로 키리히는 산적 소굴에 대해 좀 알았다. 그들의 산채 구조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서, 산적들이 어떤 식으로 생활을 하는지 말이다. 다섯 곳의 산채가 크게 다른 점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번 일도 수월하게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은 여태껏 그가 보아 왔던 산적 소굴들과는 상당히 달랐다. 구조부터가 달랐다.
 산만하게 느껴졌던 다른 산적 소굴과는 달리, 체계적으로 느껴지는 곳이었고, 산적들의 눈빛도 방만하지 않게 느껴졌다.
 하지만 키리히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 봐야 산적 소굴이지.’
 산적은 그에게 필요한 물건을 공급해 주는 공급처라는 인식이 강했던 것이다.
 조금 당황하고 있는 키리히의 눈에 산적 셋이 발을 맞춰 지나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여태껏 겪었던 산적들과는 다르게 절도가 느껴졌지만 제압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흐읍. 흡! 흡! 케엑!?”
 소리를 질러 동료들에게 알리려 했던 산적 둘이 잔혹하게 맞아 기절해 버리자, 나머지 하나는 감히 소리 지를 생각을 못했다.
 “포로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산적 하나가 침을 탁 하고 뱉었다.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런 걸 대답할 것 같나? 퉤!”
 “산적 소굴에 있으니 산적 아닙니까?”
 “우리로 말할 것 같으면······ 켁!”
 어쩐 일인지 흥분한 산적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주변에 알리려는 눈치였다. 그래서 키리히는 그를 기절시켰다.
 다른 산적에게 질문을 계속하려 고개를 돌린 키리히가 갑자기 멈칫했다.
 ‘아차, 모두 기절시켰구나!’
 키리히는 다시 한 명을 두들겨 깨웠다. 깨어난 산적이 주변을 돌아보다가 쓰러져 있는 자신의 동료에게 시선을 주고는 비웃음을 터트렸다.
 “흥. 다른 녀석들에겐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내 입에선 아무 말도 못 들을 거다!”
 그 산적은 자신이 기절한 후, 꽤 시간이 많이 지났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들은 키리히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지금쯤이면 클라우디아가 산채에 도착했을 텐데······.’
 시간을 맞추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쉽게 생각한 산적은 이렇게 대차게 나왔다. 덕분에 조금······ 흥분해 버렸다.
 
 10살의 키리히의 앞에서 그의 아버지가 한참 동안 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절대 흥분하면 안 된다. 그 이유를 아느냐?”
 “전투 중에 흥분하면 자신도 모르게 실수가 나옵니다. 필요 없는 움직임이 생기고 빈틈이 생깁니다.”
 “그렇다. 하지만 우리 가문의 남자들에겐 흥분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괴로운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아버지의 얼굴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흥분하면······.”
 키리히는 침을 꼴깍 삼켰다.
 “흥분하면······.”
 심각해지는 아버지의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졌다. 그리고 아버지의 얼굴에 새롭게 떠오른 표정 하나. 그것의 정체는 당혹감이었다.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던 아버지의 입술이 힘겹게 열렸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했지?”
 “······.”
 키리히는 흥분한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흥분하면 할수록 건망증이 심해진다는 말이었음을······.
 
 절대 흥분하지 말라던 아버지의 이야기도 지금 키리히의 뇌리에서는 잊혔다. 키리히가 무거운 안색으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아무 이야기도 하지 마십시오.”
 무슨 뜻이냐는 얼굴이 된 산적의 얼굴이 고통에 물들기 시작했다.
 퍽! 퍼퍽!
 구타가 시작되었다. 한 방에 온몸을 부숴 버릴 듯한 힘이 실려 있었다. 인간이 견딜 수 있는 타격이 아니었다.
 또한 타격은 부위를 가리지 않았다. 남자의 중요한 부위를 걷어차는가 하면, 때린 부분을 또 때리고, 잘못 맞으면 죽게 되는 부분도 맞았다.
 꼿꼿하던 산적의 마음이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그만······.”
 그 말이 들리지 않는지 꾸준히 주먹을 드는 키리히였다.
 “제발······ 그만! 말하겠다. 말할 테니까······.”
 “말? 무슨 말 말입니까? 시간 없습니다. 닥치고 맞기나 하십시오!”
 그러면서 계속 때리기 시작했다.
 전혀 말을 들을 기색이 없는 키리히의 모습에 산적의 얼굴은 공포에 질리기 시작했다.
 ‘이, 입은······.’
 산적은 필사적으로 입을 가로막았다. 이 악몽 같은 구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입만은 성해야 한다는 본능 때문이었다. 입이 없으면 말도 못한다.
 퍼억! 우수수수수!
 하지만 키리히의 주먹은 산적의 처절하기까지 한 노력을 모른 채 산적의 입을 뭉개 버렸다.
 산적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 이놈······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 전혀 없어.’
 맞아 죽는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산적의 입이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마, 마, 맘······.”
 퍼벅!
 “마, 망하겜음니당. 크엉!”
 급기야 눈물까지 쏟는 그의 모습에 키리히의 주먹이 잠시 멈췄다. 조금 진정을 한 기색이었다.
 “뭔가 할 말이 있었습니까? 바쁩니다. 빨리 말해 주십시오.”
 “포, 포로드릉 주앙 망사 지하엥 잉씅니당.(포로들은 중앙 막사 지하에 있습니다.)”
 진정한 키리히의 모습에 산적은 잠시 멈칫하며 말을 했다. 키리히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안심하던 산적이 표정이 다시 급변했다.
 “그렇습니까? 그럼 계속 맞읍시다.”
 더 아프게 맞기 시작했다.
 산적은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내, 내가 거짓말한 걸 알아챈 거야. 이자, 고문의 전문가다.’
 오직 진실만이 이 지옥 같은 상황을 벗어나게 해주리란 것을 깨달았다.
 “자, 장몽행씅니당. 그망 때리셍용.(잘못했습니다. 그만 때리세요.)”
 눈물을 주르르 흘리는 처참한 모습에 키리히의 주먹이 잠시 멈춰졌다.
 “시끄럽다는 거······ 알고 계십니까?”
 “아, 아잉니당. 조옹히 망하겡승니당. 이젱 충붕히 마자씅니당. 사싱을 망하겠승니다.(아, 아닙니다. 조용히 말하겠습니다. 이젠 충분히 맞았습니다.)”
 처절한 울부짖음과 같은 그의 외침에 동정심이 든 것일까? 키리히는 조금 진정을 할 수 있었다.
 갑자기 무거운 안색이 된 키리히를 보던 산적은 전혀 의외의 말을 들으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데······ 왜 맞고 계셨습니까?”
 
 ***
 
 백작이 안내한 곳에는 거대한 테이블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산에서 나는 신선한 과일들과 함께 화려하고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단 하나, 이곳이 야외라는 것을 제외한다면 시중을 들기 위해 늘어선 사람들과 의자와 음식들의 배치 등은 제대로 격식을 맞추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클라우디아는 그것을 이내 눈치챘지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초대를 받은 이유가 식사 때문은 아닌 줄로 알고 있었는데요?”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꽤 시장했을 것이 아니요? 협상도 협상이지만 모두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니 일단 먹는 것부터 해결하도록 하지.”
 잠시 백작을 노려보던 클라우디아는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하인 복장의 남자가 꺼내 주는 의자에 앉았다.
 제대로 된 격식에 맞춰진 식사가 끝날 때까지 백작과 클라우디아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하인의 복장을 한 이들만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을 뿐이었다.
 “어떻소?”
 식사가 끝난 후에야 백작이 입을 열었다.
 “어떤 걸 묻는 건가요?”
 “그거야······.”
 “음식에 독이 있는가 없는가는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겠죠. 제대로 된 격식을 보아 보통 평민은 아닌, 아마 귀족이라는 것도 알겠어요. 또한 말투로 보아 당신이 아이덴 인이 아닌 살레바니아 사람이라는 것도 알겠어요. 혹시 다른 걸 물은 건가요?”
 살레바니아는 아이덴과 옆에 붙어 있는 나라로 양국의 국민은 서로 결코 편하지 않은 관계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아이덴의 멍청한 귀족들은 살레바니아의 귀족들과 상당히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말이다.
 그런 관계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한 나라의 귀족이 남의 나라에 몰래 숨어 들어와 산적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은 숨겨진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다.
 그녀의 말에 백작은 짐짓 당황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하하. 생각보다 눈이 날카로운 레이디였군. 본인의 비밀을 모조리 파헤치다니 말이오. 하지만 나도 알게 된 것이 있군. 레이디께서도 평민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야. 평민이 그렇게 기품 있게 식사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야.”
 “······.”
 클라우디아는 대답 대신 우아하게 손수건을 집어 입 주변을 닦았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 하고, 이제 그만 협상을 시작하도록 하죠. 물론 그전에 서로 가진 패를 확인해야겠지요?”
 포로들의 생사부터 확인하려 드는 그녀에게 백작은 엉뚱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내가 가진 패라······. 두 개의 기사단과 삼백 명의 병사······ 그리고 약간 명의 인질들이 되겠군? 그쪽은 어떤 패를 가지고 있나?”
 클라우디아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저런 식으로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전력까지 드러내는 말에 상대의 자신감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이 평범한 산적이 아니라는 것은 대충이나마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그걸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기사단이 두 개······.’ ///
 그녀는 그 표정을 이내 수습하였지만, 백작은 그녀의 당황함을 이미 느긋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것이라면, 이곳은 아이덴이라는 지리적인 이점과 용병 길드라는 거대 조직, 그리고 저의 실력을 들 수 있겠군요.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겠군요?”
 “레이디께서는 날카로운 눈과 입을 가지셨지만 협상에 능한 편은 아니로군. 지금 당장 레이디께서 쓸 수 있는 패는 단 하나뿐인 것 같은데? 아아. 물론 숨겨 둔 다른 패도 있겠지? 나도 물론 숨겨 둔 패가 있으니까 그건 당연한 말이겠지.”
 “······.”
 “그건 그렇고 몸값은 얼마나 준비해 오셨소?”
 다시 표정을 관리한 그녀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300골드.”
 “부족하군. 부족해!”
 “뭐가 부족하단 말인가요? 살아남은 30명의 몸값으론 충분하다 생각하는데요?”
 느긋하기만 하던 백작의 표정에 음흉한 미소가 감돌았다.
 “충분하지 않지. 왜냐하면 인질은 31명이거든. 30명이야 300골드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겠지만, 나머지 한 명은 좀 다르지. 피처럼 붉고도 아름다운 장미는 비싼 법이니까.”
 ‘날 노리고 있었다?’
 그녀의 안색이 굳어졌다.
 
 ***
 
 “크와아아아아아아아!”
 처절한 광기가 절절히 느껴지는 외침이었다.
 남자는 거친 목소리와 함께 앞으로 달렸다. 아직도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을 향해서!
 무슨 수를 쓴 것인지, 쫓기고 있는 남자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도망을 치고 있었다. 때때로 뒤를 돌아보며 화살을 날릴 여유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쫓기는 남자의 얼굴에선 여유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오히려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를 쫓고 있는 사람이 시밀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림슨 울프.
 광전사 시밀.
 그런 대단한 명성과 실력을 갖추고 있는 자에게 쫓기는 입장이 된다면 여유롭지 못한 그의 표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전투의 살기와 피의 비릿함에 미쳐 버린 그에게 따라잡히는 순간이 죽음의 순간이라는 것은 그 어느 누구보다 쫓기는 사람이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쫓기는 남자와 쫓는 남자.
 둘의 모습은 크림슨 울프 중 한 사람인 블러디 로즈가 있는 산채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이후, 대략 오십에 달하는 사람들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굳은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싱글거리는 표정을 하고 있는 자의 이름은 다이크 헤르비그였다.
 
 ***
 
 산적이 안내를 자청했기에 키리히는 보다 수월하게 포로들이 잡혀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저, 저기가 포로들이 잡혀 있는 곳입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양쪽으로 나 있는 길이 있는데······ 거기서 오른쪽으로 꺾은 후에······ 잊지 않으셨지요?”
 “으음.”
 지하로 통하는 문 앞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본 키리히는 소란 없이 그들을 제압하기가 쉽지 않을 것임을 깨닫고 낮은 신음성소리를 흘렸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들은 산적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버리고 말았다.
 ‘설마 잊어버렸다며 다시 돌아와서······ 또 때리려는······?’
 “제,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산적은 직접 안내를 자청했다. 그런 일을 하면 자신은 파멸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보단 눈앞의 키리히가 잊어버렸다고 말하는 것이 더 두려웠던 것이다.
 “기사님들.”
 산적은 포로들이 갇힌 감옥 앞을 지키는 자들을 부르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덕분에 기사들의 시선이 그 병사에게 쏠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얼굴은 왜 그렇게 되었지?”
 “배, 백작님께서 기사님들께······.”
 ‘기사?’
 산적이 그들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것을 보며 잠시 의아해 하던 키리히는, 그들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쏠리는 것을 보자 바람처럼 튀어나갔다.
 쉬익! 퍼퍽!
 “끄윽!”
 주의가 흐트러진 틈이라 기사들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헉!”
 키리히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산적조차도 놀라 무언가 소리를 지르려다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입을 가로막았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황급히 기사들의 품을 뒤져 열쇠를 꺼냈다.
 “계, 계속 안내하겠습니다.”
 자신이 돕고 있음을 잊어버리고 또 때릴까 봐 그는 두려웠다.
 
 ***
 
 “호호호호호!”
 그녀의 웃음소리가 산채에 길게 메아리쳤다. 웃던 그녀가 매혹적이면서도 날카로운 표정으로 백작을 노려보았다.
 “내가, 지금 포로로 보이나요? 과연 당신이 나를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요?”
 “후후후.”
 블러디 로즈의 날카로운 눈빛은 뭇남성들의 살을 떨리게 하는 것이건만 백작은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그럼 도망칠 셈인가? 30명이라는 포로를 놓아두고? 그럴 셈이었다면 처음부터 이렇게 찾아오진 않았겠지. 어디론가 몰래 숨어들었을 거야. 일부러 소문을 퍼트리지도 않았을 테고. 도망가지 않는 그대는 이미 포로나 다름없지 않은가?”
 “흐응. 그 말도 일리가 있군요.”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여전히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제안을 하도록 하지.”
 변함없는 그녀의 모습에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 다섯 명과 이긴다면 그대는 물론이고, 다른 용병들도 모두 풀어 주겠소. 물론 몸값은 받지 않을 것이고.”
 “다섯 명이 한 여자에게, 한꺼번에 달려든다는 말이 무척이나 정당하게 들리는군요?”
 “하하. 블러디 로즈가 이리도 말을 잘하는 여자였던가?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야. 한꺼번에 달려들 생각은 없소. 우리 기사들은 그렇게 약하지가 않거든.”
 자존심을 건드려 협공을 못하게 만들려는 것이 그녀의 의도였다. 하지만 백작은 그 의도를 뻔히 읽었으면서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굳이 쉬운 길을 돌아서 가려 하는 이유라도 있나요?”
 “글쎄. 레이디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라고 한다면 이상하게 들리나?”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에 클라우디아는 피 내음이 물씬 풍기는 미소를 지었다.
 “잘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군요. 나에 대해 모르고 있지는 않을 텐데요?”
 “물론 알고있지. 남자를 증오하는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는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지. 하지만 최근에는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하더군.”
 “호홋. 웃기지도 않는 경우란, 바로 이런 경우를 말하는 거로군요. 감히!”
 “하하! 보면 볼수록 매력적이군.”
 백작의 얼굴에 감탄의 기색이 어렸다.
 아무리 말문이 막힐 상황이어도, 화를 낼 상황이어도, 불리한 상황임에도 여전한 그녀가 진정 감탄스러웠던 것이다.
 “좋아요. 조건을 마저 들어 보도록 하죠.”
 아직, 그녀가 질 경우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다섯 명의 기사가 지면, 그대와 삼십 명의 떨거지들은 자유로운 몸이 되는 거지. 그리고 그대가 지게 되면, 붉은 장미 한 송이를 꺾을 기회를 나에게 주는 것이 어떨까?”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말.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그녀를 강제로 취하겠다는 말이다.
 이곳에 더 이상 클라우디아는 없었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는 블러디 로즈가 시리도록 차가운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좋아요. 그렇게 하도록 하죠.”
 ‘키리히. 서둘러 줘요.’
 
 ***
 
 허술하지 않았던 밖과 마찬가지로, 안도 복잡하고 체계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행여 포로들이 도망치더라도 길을 헤매도록 미로와 같이 얽혀 있었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지하 감옥이란 말이 어울리는 곳이었다.
 만약 산적이 안내하지 않았더라면 꽤나 시간을 허비하였을 것이다. 덕분에 제법 빠르게 용병들이 갇혀 있는 감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초췌한 몰골로 갇혀 있던 용병들은 누군가가 등장하자 공허한 시선을 돌렸다. 자신들의 몸값을 내어줄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고 희망을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쉬익! 채재쟁!
 “구하러 왔습니다. 어서 나오십시오.”
 키리히가 감옥의 창살을 부순 후에야 그들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하지만 아무도 나올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언가에 제압당하고 있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의아해 하고 있는 키리히에게 몇 명의 용병들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감격한 표정을 보아하니 뒤늦게야 현재의 상황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키리히는 두 눈을 찡그렸다.
 ‘표정들이······ 어색해.’
 무언가 이상하여 키리히는 한 발자국을 물러섰다.
 바로 그때, 구석에 있던 누군가가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조심하시오. 그놈들은 용병이 아니라······ 커억!”
 소리를 질렀던 자의 목에 단검과 같은 형태의 물건이 틀어박혔다.
 “쳐라!”
 키리히에게 다가오던 자들은 더 이상 어색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음습하고 어두운 표정이 그들에겐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였다. 달려드는 그들의 손에는 검게 칠해진 단검들이 쥐어져 있었다.
 지하의 어둠 속에 그들의 무기는 흐릿하게만 보였다.
 
 ***
 
 터엉! 털썩!
 세 명째의 기사를 쓰러트리며 그녀는 들끓어오르는 숨을 가늘게 내뱉었다. 자신이 지쳐있음을 필사적으로 숨기려 하였지만, 백작의 날카로운 눈빛은 그녀를 해부라도 하려는 듯 날카로웠다.
 “그대는 기사들의 검술에 익숙한 모양이군. 왠지 약점을 알고 상대하는 느낌이야.”
 클라우디아는 백작의 말에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기세를 잃지 않기 위해 대꾸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거칠어진 숨을 달래는 것이었다. 지쳐서 빠져나가는 힘을 조금이라도 되찾아야 할 때였다.
 백작의 말처럼 그의 기사들은 약하지 않았다. 하나하나가 얼마 전 상대했던 기사단장과 비슷한 실력이었다.
 그들의 검에는 하나같이 푸르스름한 기운이 얽혀 있었다.
 오러. 정점에 다다른 기사들만이 사용한다던 그 기운들을 하나같이 뿜어내는 자들이었다. 그것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그녀도 마찬가지의 기운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블러디 로즈의 강철 채찍에 스며들어 있던 붉은 기운이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
 “붉은 오러라······. 특이해. 블러디 로즈에게 딱 어울리는 색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아이덴의 어느 귀족가에서 그런 오러를 내뿜는 검술을 사용했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군. 몇 년 전에 몰락했다고 들었는데······ 아마도 홀스트 자작가였지?”
 백작의 이야기에 신경 쓰지 않으려 했던 클라우디아의 몸이 자신도 모르게 움찔 떨렸다.
 그녀의 반응에 백작은 비릿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좋군. 좋아! 몰락한 귀족가의 여식이라. 가면 갈수록 마음에 쏙 드는 점만 튀어나오는군. 또 무슨 비밀을 품고 있는지 볼까? 네 번째는 프란시스 경이 나서 줬으면 싶군.”
 조금 전부터 흔들림 없는 눈으로 클라우디아를 주시하고 있던 40대의 기사가 몸을 일으켰다.
 침중한 눈으로 검을 곧추세우는 그의 눈빛에서는 오랜 수련으로 인한 경륜과 강대한 힘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나이트 프란시스요. 리용 기사단의 기사단장 직을 맡고 있소.”
 클라우디아의 눈빛이 더욱 무겁게 내려앉은 그 순간,
 삐이이이익!
 먼 곳에서 고음의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백작은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하 감옥이 있는 방향이로군.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쥐새끼가 숨어든 모양이야.”
 힘든 상황의 클라우디아로서는 한줄기 빛줄기와 같은 소리였지만, 예상과는 달리 백작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궁금하군. 과연 쥐새끼가 티에리의 다크 어쌔신들을 이길 수 있을지. 하지만 지금은 눈앞의 대결의 결과가 더욱 궁금하군. 시작하도록 하게.”
 살레바니아에는 전설이라 불리는 암살자가 한 명 있다.
 티에리 바르도.
 무려 700여 번의 암살을 성공시키고도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의문의 암살자. 그가 은퇴하고 난 후에야 그의 이름이 밝혀졌다.
 나이가 든 전설의 암살자는 초야에 묻혀 자신의 기술과 경험을 다른 어쌔신들에게 전수해 주었다고 한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어쌔신들은 다른 어쌔신들에비해 탁월한 실력을 보였기에 그런 자들을 따로 분류하여 티에리의 다크 어쌔신이라 불렀다. 남에게 원한을 살 만한 인물이라면 누구라도 두려워하는 이름이었다.
 ‘키리히!’
 그 이름을 떠올린 클라우디아의 얼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
 
 쉬쉬쉭!
 그들의 칠흑빛 단검은 소리조차 적어서 귀 기울이지 않으면 제대로 들리지도 않을 정도였다. 움직임은 날카롭고, 그 공격들은 하나같이 치명적인 부위를 노리고 있었다.
 단검의 위협에 키리히는 정신없이 움직여야 했다.
 “크헉!”
 이곳까지 안내했던 산적이 목에 칼을 꽂으며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어둑하게나마 주변을 밝히던 횃불들이 일제히 꺼져 버렸다. ///
 햇볕이 들어오지 않는 주변은 칠흑과도 같은 어둠에 잠겨 버렸다.
 어둠이 깔리자 암살자들의 검은 그 소리조차 없애 버렸다.
 쉬익!
 단검의 소리가 들렸다고 느낀 것은 그의 살이 검은 단검에 베어지며 작은 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살며시 오른손으로 상처를 감싸 쥔 키리히는 상처에서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건?!’
 그들의 단검에는 강한 독이 발려져 있었다.
 차라리 이곳에 있는 모두가 적이었다면, 상황이 이렇게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어둠 속 어딘가에는 용병들이 있다. 용병 중에는 그의 아버지의 행방을 알고 있는 루카스도 있다.
 적인 줄 알았다가 루카스를 베어 버린다면 아버지의 행방을 찾을 길이 묘연해진다.
 스스스.
 공격조차 못하는 키리히를 향해 암살자들의 검이 날아들었다.
 
 ***
 
 광전사에게 쫓기던 남자의 발걸음은 더 이상 재빠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를 쫓고 있는 광전사의 발걸음은 전혀 느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미쳐 날뛰고 있었다.
 쫓기던 남자는 더 이상 뒤를 돌아보는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뒤를 돌아보면 금방이라도 자신을 죽일 듯한 광전사의 모습에 모든 것을 포기할 것 같았기에.
 ‘헤이스트가 깨어질 줄이야.’
 남자가 예상치 못했던 것은, 광전사의 외침에 마법을 깨트리는 힘이 있다는 것이었다.
 다이크 헤르비그가 준비한 두루마리는 헤이스트라는, 시간의 흐름을 살짝 조절해 움직임을 빠르게 해 주는 마법이었다. 그 마법이 광전사의 미칠 듯한 외침 한 번에 깨어져 버렸다.
 덕분에 그는 이렇게 헐떡이며 도망치고 있었다.
 ‘조금만 더······.’
 그의 시야에 산적들의 산채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기까지만······.’
 질식할 듯한 고통이 남자를 덮치고 있었다.
 ‘죽는 것쯤이야······. 복수만 할 수 있다면!’
 이 일을 맡겠다고 했을 때부터, 자신의 목숨 따위는 버렸던 사내였다. 산적들이 있는 곳에, 블러디 로즈가 있는 곳까지만 이 미쳐 버린 광전사를 데려간다면 그의 일은 끝난다.
 남은 복수는 뒤에서 따라오는 동료가 완성해 주리라는 것을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쉬익!
 ‘조금만······ 더······ 크헉!’
 이를 악다물며 뛰던 그의 눈이 갑자기 부릅떠졌다.
 천천히 시선을 내린 그는 자신의 심장에 퀘렐 한 대가 꽂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화살의 끝에 달린 비둘기의 깃이 파르르 떨리며 한 방울의 피가 흘러내리려는 찰나.
 “크아아!”
 어느새 뒤를 따라온 광전사의 일격에 힘껏 도망치던 그의 머리통이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찌지지직!
 “크와아아아!”
 단순히 머리통을 떨어뜨린 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 것인지, 광전사는 남자의 시신을 들어 갈가리 찢어 버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쉬익!
 또 한 대의 퀘렐이 광전사를 향해 날아들었다.
 터업.
 미쳐 날뛰는 와중에도 그 화살에 실린 기세를 느꼈던 것일까? 잔혹한 행동을 하던 광전사가 재빠른 동작으로 몸을 비트는가 싶더니, 한 손으로 날아든 퀘렐을 잡아 버렸다.
 “크으으으!”
 광기에 가득한 그의 눈이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돌려졌다. 그곳에서는 사냥꾼과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는 서른가량의 사람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그의 검은 과연 기사단장이라 자부해도 될 정도로 강했다. 다른 기사들의 검보다 훨씬 강했으며, 그의 검에 맺혀 있는 푸른색의 오러도 다른 기사들의 그것보다 훨씬 짙었다.
 온전한 그녀였다 하더라도 상대하기 쉽지 않을 지경인데, 지금은 잔뜩 지친 상태. 게다가 옆에서 누군가가 간교한 혀를 놀려 그녀의 신경을 갉아 먹고 있었다.
 “포로들은 지하 감옥에 갇혀 있다오. 햇볕 한 점 들지 않는 곳이지. 걸려 있는 횃불이 꺼지면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에 덮여 버리지.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티에리의 다크 어쌔신은 어둠 속에서 무적이라오.”
 키리히가 도와주길 기다리던 상황에서 오히려 키리히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된 그녀의 채찍은 그 진정한 위력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쥐새끼들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 없소.”
 그녀의 심정을 알고 있는 것인지 백작은 비릿한 웃음으로 거대한 충격을 선사했다.
 “이미 죽었을 테니까!”
 촤악!
 푸른빛을 머금은 기사단장의 검이 그녀의 어깨를 훑고 지나갔다.
 푸악!
 붉은 피가 튀며 가냘픈 어깨 한쪽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녀는 아픔을 잊은 것인지 무서운 눈으로 백작을 노려보고 있었다.
 “크흠!”
 기사단장은 자신도 모르게 몇 걸음을 뒤로 물러섰다. 절호의 기회였지만, 왠지 모를 기세가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오랜 경험은, 지금 공격해 들어가면 자신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해 주고 있었으니까.
 슈우욱!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세가, 섬뜩하기 그지없는 기세가 그녀의 전신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파르르르르.
 어깨를 덮고 있던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이내 머리카락 전체가 틀어 올려졌다. 붉은 기운이 머리카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는 블러디 로즈의 그것이었다. 폭주한 것과 같은 그녀의 입에선 귀신의 비명 같은 웃음소리가 금세라도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에선 그런 귀기로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가요?”
 그녀의 고혹적인 미소는 심장을 얼려 버릴 듯한 한기를 보이고 있었다. 과거와는 상당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지켜보는 이의 반응도 평범하지는 않았다.
 “흐음. 그게 진정한 블러디 로즈의 모습인가?”
 기사단장의 실력을 자신하고 있는 것인지, 백작의 표정은 흥미롭게만 보였다.
 그 순간이었다.
 삐이이이익!
 또 한 번의 호각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하 감옥의 방향이 아닌, 출입구 쪽에서 들린 호각소리에 백작의 고개가 살며시 모로 꺾였다.
 “호오. 반대편에도 쥐새끼가 있었던 건가? 하지만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출입구는 카라바카 레인저들이 지키고 있으니까.”
 카라바카 레인저.
 살레바니아와 퍼스텐버그 제국의 경계는 카라바카라 불리는 험난하기로 이름난 산이 가로막고 있다. 카라바카 레인저란 그곳을 지키는 레인저들을 말하며, 400여 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그 400여 명이 2만에 달하는 제국의 군대를 몰살시켰을 때, 대륙은 그들의 이름을 깊이 각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들이 백작의 숨겨진 패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클라우디아의 표정에서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호오! 진정한 블러디 로즈는 피도 눈물도 모르는 마녀라더니! 과연!”
 “······.”
 백작이 무슨 이야기를 하건, 그녀에겐 관심 밖의 일일 뿐이다. 애초에 출입구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으니까.
 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밉살스럽게 입을 놀리는 이 귀족의 입을 뭉개 버리고 지하 감옥에 달려가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눈앞의 기사단장을 먼저 해치워야 한다.
 “이젠······ 죽을 시간이에요.”
 그녀의 요염한 미소와 함께, 강철 채찍이 회오리처럼 휘감기며 기사단장을 향해 날아갔다.
 “크흠!”
 갑자기 달라진 그녀의 기세보다 더욱 큰 변화를 보인 것은 강철 채찍의 움직임이었다. 기사단장은 그녀의 채찍을 제대로 막지 못해 연방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휘리리리!
 채찍은 더 이상 채찍이 아니었다.
 그녀가 변하기 전까지는 그래도 채찍다운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노련한 기사단장으로서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변화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손에 매달려 있는 채찍은 더 이상 채찍다운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한 마리의 붉은 독사와 같았다.
 상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꺾여 들어와 그의 몸을 노린다. 하염없이 떨리는 채찍의 편두에서는 먹이를 노리는 독사의 머리와 같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도저히 힘이 실리기 어려울 것 같은 채찍의 타격에 돌로 된 바닥이 쩍쩍 갈라지고 있었다.
 붉은 기운을 머금은 채찍은 무서우리만큼 집요하게 기사단장을 노리고 있었다.
 채래래래랭!
 기사단장을 몰아붙이던 채찍이 어느 순간 방향을 틀더니 단장의 검을 휘감았다.
 “크헛!”
 채찍을 타고 흘러 들어온 알 수 없는 기운이 기사단장의 손을 마비시켰고, 이내 그의 손에서 유일한 무기를 빼앗아 버렸다.
 무방비 상태가 된 그의 목을 노리고, 붉은 뱀이 달려들었다.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바로 그 순간,
 채앵!
 옆에서 비열하게 입을 놀리기만 하던 백작이 끼어들어 붉은 뱀을 쳐 냈다. 클라우디아는 의외로운 눈으로 백작을 바라보다가 이내 요염한 미소를 흘렸다.
 “다섯 번째는······ 당신인가요?”
 한기 어린 그 음색에 백작은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앞에 마주 섰다.
 “사가모르 가문의 가주이자 클레멘티의 기사단장, 그리고 조만간 블러디 로즈를 첩으로 맞이할 클레멘티 사가모르 백작이오.”
 백작의 몸에서 한줄기의 기세가 일어나 클라우디아의 몸을 거칠게 감싸 안았다.
 그 기세는, 클라우디아의 그것보다 더욱 진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7장 그를 분노케 하지 마라
 
 
 
 
 검고 두꺼운 천으로 두 눈을 완전히 감싼 어린 키리히를 향해 아버지는 비정한 목소리로 말했었다.
 “모두가 정정당당하게 싸울 것 같으냐?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적보다 더욱 무서운 것이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적이다.”
 숲 속, 늘어진 느티나무의 줄기마다 날카로운 단검들이 늘어트려져 있었으며, 그 사이에 열 살도 채 되지 않았던 키리히가 있었다.
 실 끝에 달려, 거칠게 흔들리는 단검들은 어린 키리히의 몸을 꿰뚫을 듯한 기세로 달려들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싸우다 보면, 어느 순간 온몸이 오싹함을 느껴질 때가 있다. 죽이려는 상대의 의지, 살기를 느껴서이다. 하지만 실력만 된다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는 그런 공격은 전혀 두렵지 않다. 네가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그런 살기조차 없는 공격이다.”
 무수히 많은 단검이 여린 소년의 몸을 할퀴며 지나갔다.
 
 ***
 
 ‘잊고 있었군.’
 키리히는 그때의, 1년간의 기억들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 악몽 같은 기억들을 떠올리는 것은 결코 정신 건강에 좋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의 기억이 필요했다.
 키리히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나 뜨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은 같았다. 하지만 그때의 느낌과 기억을 다시 느끼기 위해서는 차라리 눈을 감는 것이 좋았다.
 ‘크음.’
 처음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또 하나의 상처를 입고 말았다. 소리조차 없이 다가오는 단검은 무서울 정도로 날카로웠다.
 키리히는 더욱더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간신히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계기가 떠올랐다.
 ‘흐름······ 이었지.’
 무언가 표현하기 힘든 미묘한 것이 하나 있다. 키리히에게는 그것이 흐름이라고 느껴졌다.
 모든 움직임은 그 흐름을 따라 움직인다.
 움직임이 변하면, 흐름도 변화한다.
 공기도, 오러나 마나와 같은 기운도 아니다. 설명할 수 없는 그것을 느끼기 위해서, 어린 키리히는 무수히 많은 상처를 입었었다.
 흐름이라는 것을 느낀 후에야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오른쪽.’
 키리히의 몸이 자연스럽게 한 걸음을 옮겼다. 오른쪽 옆구리를 파고들던 단검이 허무하게 그의 몸을 비켜 지나갔다.
 묘한 흐름을 느낀 키리히가 손을 뻗었다.
 물컹!
 무언가 그의 손 안에 가득 들어왔다.
 “흐윽!”
 손을 꽉 틀어쥔 순간, 억눌린 숨소리가 어둠을 비집으며 흘러나왔다.
 물컹거리던 그것은 잠시 경련을 일으키다 축 늘어지고 말았다.
 날카로운 무언가의 흐름이 느껴졌다.
 ‘머리!’
 살짝 옆으로 튼 머리카락을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스치며 지나갔다.
 ‘이건······.’
 전신을 향해 몰아치는 흐름을 느낌과 동시에 키리히의 츠바이핸더가 폭풍처럼 움직였다. ///
 휘리리리. 팅팅팅팅!
 사방에서 몰아치던 그것이 츠바이핸더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졌다.
 그 후, 잠시 동안 어떤 공격도 없었다.
 하지만 키리히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걸음의 끝에서 키리히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사람과 같은 형체가 움직이는 그 흐름의 끝이 키리히의 억센 손에 붙잡혔다.
 꽉!
 또 하나가 경련을 일으켰다.
 
 ***
 
 카라바카 레인저.
 2만에 달하는 정규군을 몰살당한 입장의 퍼스텐버그 제국에서는 이들의 이름이 악몽으로 통한다. 잔혹하고 위험한 자들. 험난한 카라바카 산의 지배자라 불리는 이들의 눈이 지금 거침없이 떨리고 있었다.
 마치, 악몽을 꾸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핑! 핑! 핑! 핑! 핑! 피핑!
 그들의 손에 들려 있는 리피팅 크레인퀸 보우에서는 지금도 수십 개의 퀘렐이 연이어 나가고 있었다.
 리피팅 크레인퀸 보우.
 카라바카 레인저를 대표하는 무기이며, 2만의 제국 정규군을 몰살시킨 주역이다. 대략 50여 발가량의 석궁용 화살을 초당 1발씩 뿜어내는데, 이 화살의 위력이 풀 플레이트 메일을 관통시킬 정도로 엄청나다.
 웬만한 갑옷만큼이나 무거운 이 괴물을 양손에 들고 산을 평지처럼 뛰어다니는 카라바카 레인저들은 분명 제국군들의 눈엔 괴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괴물들은 자신들보다 더한 괴물을 보고 있었다.
 피피피핑!
 30여 개의 리피팅 크레인퀸 보우에서 소나기처럼 튀어나온 퀘럴들은 광전사 시밀에게 하나같이 집중되고 있었지만, 그의 몸에 제대로 박히는 퀘렐들은 하나도 없었다.
 “크롸롸롸롸롸!”
 시밀은 가히 짐승이라 불러도 좋을 움직임으로 퀘럴들 사이를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간혹 위험한 부위로 날아다니는 퀘렐도 있었지만, 강철 집게 같은 그의 손에 하나도 남김없이 잡혀 버렸다. 중갑옷을 관통시키는 괴력의 퀘렐들을 잡으면서도 그의 손은 전혀 상처 입지 않는 듯이 보였다.
 파바박!
 꼬리를 물고 광전사에게 날아든 퀘렐들은 간혹 두터운 나무나 단단한 바위에 가로막히기도 했다.
 2만여의 제국 정규군을 상대할 당시엔, 카라바카 레인저들의 듬직한 방패가 되어 주었던 것들이 지금은 오히려 방해가 되고 있었다.
 티팅! 팅!
 괴물 같은 광전사의 움직임에 당황한 레인저들은 미친 듯이 리피팅 크레인퀸 보우를 난사했고, 마침내 50여 발을 머금고 있던 퀘렐 통들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퀘렐의 비가 뜸해지자 광전사의 움직임도 멈추었다. 조금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지만, 놀라울 정도로 멀쩡한 모습이었다. 천오백여 발에 달하는 퀘렐들이 단 하나도 그의 몸에 꽂히지 않은 것이다.
 “크와아아아!”
 그동안 피하기만 했던 상황에 대한 분노일까? 광기 어린 외침에는 참을 수 없는 분노의 기운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과, 광전사 시밀!”
 광기를 터트리며 달려오는 그의 모습에 어떤 이름을 떠올린 레인저들 중 하나가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쓸모없어진 리피팅 크레인퀸 보우를 집어 던진 레인저들은 저마다 무기를 꺼내 들며 미친 전사를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하지만 가장 익숙한 무기를 잃어버린 그들은, 사자를 앞에 둔 양 떼처럼 공포에 질려 있었다.
 “크와아아아!”
 그 양 떼 무리의 중앙에 뛰어든 광전사가 미쳐 버릴 듯한 광기와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다.
 피와 광기로 살점이 흩날리는 춤이었다.
 
 ***
 
 “흠! 제법이오!”
 채쟁! 챙!
 “이거 상당히 위험하군! 헛!”
 말로는 그녀를 칭찬하며 자신의 위험을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사가모르 백작의 안색은 평온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 마리의 독사처럼 영활하게 뻗어 가는 그녀의 채찍은 사가모르 백작의 방어에 철저하게 막혔다.
 채찍에 맺힌 붉은 기운은 강렬한 파괴력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사가모르 백작의 검에 맺힌 푸른 기운은 더욱 강렬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활기찬 움직임을 보이던 붉은 뱀은 푸른 기운에 부딪힐 때마다 뱀잡이의 작대기에 걸린 듯이 발버둥을 치기 바빴고, 그 붉은 기운도 차츰차츰 옅어지고 있었다.
 “호호호!”
 블러디 로즈의 입에서 터져 나온 한기 서린 웃음과 함께 붉은 기운이 다시 한 번 짙어졌다. 붉은 기운의 강철 채찍은 다시 한 번 힘을 얻은 듯 탄력을 얻어 사가모르 백작의 검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호오! 아직도 기운이 남아 있단 말인가? 대단하군 그래.”
 감탄을 터트린 백작은 여전한 안색으로 차근차근 붉은 뱀을 막아 냈다. 침착하기 이를 데 없는 그의 표정을 뒤흔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듯이 보였다.
 이전과는 달리, 붉은 뱀은 한동안 맹위를 떨치며 맹렬하게 푸른 검을 압박해 들어갔다. 푸른 기운에 부딪히고서도 그 기세를 잃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쥐고 있는 블러디 로즈의 안색은 점차 일그러지고 있었다. 얼음처럼 한기가 풀풀 날리던 그녀의 기운이 점차 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계에 거의 도달했다.
 “여기까지인 것 같군.”
 백작은 여태껏 봐주었다는 식으로 말을 꺼냈다. 그의 말처럼, 블러디 로즈의 붉은 뱀은 급격히 그 힘을 잃어 가고 있었다.
 장미의 꽃잎처럼 하늘 위로 뻗쳐졌던 그녀의 머리카락도 그 힘을 잃고 땅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힘을 잃어버린 그녀의 얼굴은 평소 수족같이 다루던 강철 채찍을 들기조차 힘겨워 보였다.
 “흐흐흐.”
 손에 든 검에 주입하던 푸른 기운을 멈춘 백작은 이제 더 이상 음흉하고도 비열한 웃음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조용히 먹이가 힘이 빠지기를 기다리던 관찰자의 시선이, 이젠 맛있는 먹이를 탐닉하기 위한 포식자의 눈으로 바뀌었다.
 그의 눈앞에 있는 블러디 로즈는 이미 생기를 잃고 시들어 가는 가냘픈 꽃에 불과했다.
 “후후후! 정말 기대되는군. 생기 넘치는 아이덴 계집의 몸뚱이는 어떤 느낌일지 말이야. 후후후!”
 “호호호호호!”
 힘없이 서 있던 그녀가 미쳐 버릴 듯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에겐······ 더 이상의 힘이 없었다. 이미 모든 기력을 폭발하듯 쥐어짰건만, 눈앞의 이 남자를 어쩌지 못했다.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다.
 무력감.
 힘이 없음을 통탄해 본 적이 있는가.
 분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손톱이 벗겨질 정도로 흙바닥을 움켜쥔 적이 있는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도 아픔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통한에 젖어든 적이 있는가.
 그 느낌을 알고 싶다면 지금 여기 있는 이 여인을 보라.
 항거할 수 없는 힘에 모든 힘을 소진한 채, 초췌하게 서 있는 그녀를 보라.
 더 이상은 길이 없어 그저 미친 듯한 웃음만을 터트리는 그녀를 웃음소리를 들어 보아라.
 그 웃음소리조차 제대로 터트리지 못하고, 포악한 자의 발길질에 땅 구석에 나뒹구는 그녀의 고통을 느껴보아라.
 이것이 바로 소중한 이를 도울 힘이 없는 자의 심정일지니······.
 
 ***
 
 흐름 속에서 더 이상 움직이는 이는 없었다. 구석에 몰려 바르르 떨고 있는 수십 개의 형체가 키리히의 느낌에 들어왔다.
 키리히는 바닥에 떨어진 횃불을 들어 불을 붙이며 눈을 떴다.
 화악!
 어두컴컴한 빛이 감옥 안을 비추어 잠시 동안 눈을 아프게 만들었다. 그 빛 속에서 키리히는 구석에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포로로 잡혀 있던 용병들이다. 키리히와 클라우디아가 구하려 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 모두를 믿을 수는 없었다. 어쌔신으로 보이는 자들이 이들 사이에 숨어 있었다. 지금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러분이······ 산적들에게 잡힌 용병들입니까?”
 “······.”
 “그, 그렇소!”
 “맞아, 우리가 그 용병들이라고!”
 용병들은 주변의 눈치를 보다가 어렵게 대답을 하였다.
 “여러분 중에 용병이 아닌 사람이 있습니까?”
 키리히는 이 중에 또 다른 어쌔신이 끼어 있음을 확신했다. 키리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용병들이 떠들기 시작했다.
 “이놈이오! 이놈이 바로 어쌔신이오!”
 “아니오! 지금 말을 하는 저놈이 바로!”
 용병들은 급기야 주먹 다툼까지 벌이려 했다. 도대체 몇 명이 숨어 있을지 모르는 키리히로서는, 한시라도 빨리 클라우디아를 도우러 가야 할 키리히로서는 난감할 뿐이었다.
 촤라랑!
 키리히의 츠바이핸더가 지하 감옥의 벽을 거칠게 긁어 내렸다. 귀를 자극하는 그 소음에 용병들의 움직임이 멎었다.
 “다들, 용병 패를 꺼내 주십시오.”
 얼어붙은 용병들이 주춤주춤 용병 패를 꺼내기 시작했다. 압수당하지는 않은 것인지 다들 용병 패를 소지하고 있었다. 그것으로는 누가 어쌔신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걸 본 순간 키리히의 머리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헤르만이라는 가명을······ 사용한다고 했었지?’
 “용병 패를 한데 모아 저에게 주십시오.”
 용병들은 조심스럽게 용병 패를 한 사람에게 모아 주었다. 강압적인 키리히의 태도에도 아무도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키리히는 이미 그들에게 압도적인 무력을 보여 주었다.
 그들 사이에 숨어 있는 어쌔신들을 정확히 밝히지 않으면, 모두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다.
 용병 패를 손에 쥔 키리히는 패에 적힌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했다. 이름이 불릴 때마다 한 사람의 용병이 대답을 했다.
 계속 이름을 부르던 키리히의 손에 마침내 눈에 익은 이름이 적혀 있는 용병 패가 쥐어졌다.
 “헤르만!”
 “나다!”
 깐깐하게 들리는 목소리의 노인 하나가 일어서며 대답을 했다. 조금 수척해 보이긴 했지만, 조각상을 팔던 소년이 설명했던 것과 비슷한 생김새를 지닌 노인이었다.
 키리히는 다음 용병 패를 보는 척하며 또 하나의 익숙한 이름을 불렀다.
 “루카스!”
 키리히의 호명에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단 한 사람이 움찔 어깨를 떨었을 뿐이다. 하지만 조금 전부터 그를 주시하던 키리히의 눈에는 너무 큰 움직임이었다. 어깨를 움찔 떤 것은 헤르만이었으니 말이다.
 ‘다행이로군.’
 그가 찾던 사람은 어쌔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믿을 수 있는 한 사람을 찾아냈으니 그다음은 일사천리였다. 키리히는 루카스를 자신에게 다가오게 하였다.
 “어르신께서 이야기해 주십시오. 누가 어쌔신입니까?”
 루카스는 묘한 눈으로 키리히를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들어 몇 명을 지목하였다.
 “발각됐다!”
 “쳐!”
 어쌔신들은 일제히 정체를 드러내며 키리히에게 칠흑빛 단검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싸우는 법을 떠올린 키리히에겐 그들의 공격이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았다.
 채재쟁!
 주변의 용병들을 보호할 정도로 여유롭게 그들을 처리한 키리히는 이상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루카스 노인을 애써 무시했다. 그리고 여기까지 안내해 왔던 병사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지하 감옥은 미로와 같이 얽히고설켜 있었다. 몇 번째 갈림길까지는 기억을 했지만 그 후로는 완전히 잊어버렸다.
 “혹시······ 나가는 길을 알고 계시는 분은 없으십니까?”
 “······.”
 모두 고개를 흔들었다.
 ‘하긴, 포로에게 길을 가르쳐 줄 사람은 없겠지.’
 시간을 두고 길을 찾는다면 결국 이 미로를 빠져나갈 수 있겠지만 지금은 급박하다. 이미 약속했던 시간에서 많이 늦어 버렸다.
 잠시 고민을 하던 키리히의 눈에 어떤 결심의 빛이 떠올랐다. 키리히는 늘어트렸던 츠바이핸더를 굳게 움켜쥐었다.
 “모두 물러서십시오.”
 
 “기사들은 오러라 불리는 것을 사용한다. 그것을 사용하는 기사들은 무섭지. 단단한 쇳덩이도 오러와 마주하면 손쉽게 잘려 나가곤 하니까. 또한 오러는 신체 능력을 높여 주는 효과도 있지. 그 위력에 반한 기사들은, 오러를 사용하는 순간부터 체력 단련을 소홀히 하게 된다. 그런 기사들조차도 무섭지. 하지만 너는 그걸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12살이 되던 때까지 아버지의 훈련을 군말 없이 받아 왔던 키리히였지만, 그때의 이야기에는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압도적인 힘으로 눌러 버리면 된다. 오러를 기르는 것보다 그 힘을 수련하는 것이 오히려 좋다.”
 “하지만, 쇳덩어리조차 종잇장처럼 잘라 버린다면 어떻게 상대합니까? 맨몸으로 그 오러라는 것에 부딪힙니까?”
 “츠바이핸더다. 우리에게는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츠바이핸더는 오러에도 흠집 하나 나지 않는다.”
 “하지만······ 신체 단련은 한계가······.”
 키리히의 아버지는 말없이 츠바이핸더를 치켜들었다.
 “봐라. 우리 가문의 수련법이자 싸움법을······.”
 츠바이핸더를 치켜든 아버지의 온몸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
 
 키리히의 몸도 그때 보았던 아버지의 몸과 동일한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변화는 손끝에서 시작되었다.
 우두둑!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소리와 함께 키리히의 손끝에서 어깨까지의 근육들이 두 배로 가까이 부풀어 올랐다.
 어깨에서 시작된 그 변화는 삽시간에 전신으로 전달되었고 발끝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덕분에 날렵한 근육을 가진 청년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전신이 근육으로 뭉쳐진 사나이가 서게 되었다.
 “후우웁!”
 낮은 기합 소리와 키리히의 검이 빛살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휭! 휘휘휘휭!
 압도적인 빠르기, 압도적인 속도였다.
 손과 검의 잔상이 남아 수십 개로 보일 지경이었다. 그 수십 개의 검의 잔상이 지하 감옥의 낮은 천장으로 향했다.
 콰콰콰콰콰쾅!
 단단한 지반이 흙탕물이 튕기듯 부서져 내렸다. 사람 하나가 쏙 들어갈 만큼의 지반이 한 번에 무너져 푸른 하늘이 모습을 보였다.
 “후우!”
 인간이 단련할 수 있는 근력의 한계치를 훌쩍 넘어서게 만들며 동시에 오우거에게 밟히고서도 멀쩡할 정도의 강인한 신체를 선사하는 최강의 신체 단련법이자, 평소의 수십 배의 힘과 속도를 선사해 주는 최강의 공격법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베, 베일런트 투술!”
 격정 어린 루카스의 목소리를 아래로 한 채로, 키리히는 구멍을 통해 지상으로 훌쩍 몸을 날렸다.
 “안전해지면 따라오십시오.”
 라는 말을 용병들에게 남겨 둔 채로.
 
 솟아 나온 키리히를 맞이한 것은 중무장을 한 채로 지하 감옥의 입구 옆에서 뚫린 구멍을 지켜보고 있는 일단의 기사 무리였다.
 “당신들은······?”
 그들이 바로 클레멘티 기사단이었다.
 무덤에서 솟아오른 언데드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 키리히의 몸에 내리꽂혔다.
 “쥐새끼······. 살아날 생각은 하지 마라!”
 지하 감옥의 입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기사는 클레멘티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이자, 오러 익스퍼트 중급의 실력자인 나이트 프랑소와였다.
 앞으로 나선 그의 외침에 클레멘티의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그 순간,
 “호호호호호!”
 비통한 마음이 그대로 묻어나는 클라우디아의 웃음소리가 키리히의 귀를 파고들어 왔다. 그 소리에 조금은 여유로워 보였던 키리히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 버렸다.
 “막으실 겁니까?”
 “헛소리 마라! 쥐새끼 같은 놈! 어딜 도망치려고!”
 “제 앞을 가로막는 자는······.”
 츠바이핸더가 치켜 들리자 거기에 묻어 있던 흙덩이들이 바닥으로 후두두 떨어졌다.
 “용서하지 않습니다.”
 츠파앗! 콰과광!
 한줄기의 섬광이 기사들의 사이에서 거대한 폭음을 불러일으켰다.
 
 ***
 
 콰과광!
 발길질에 바닥을 나뒹구는 클라우디아를 향해 걸어가던 사가모르 백작은 멀리서 들려온 폭음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크큭! 제법 소란을 떠는군.”
 하지만 이내 비릿한 웃음을 터트린 그는 그대로 걸음을 재촉해 클라우디아의 앞에 섰다.
 그녀는 널브러진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옷이 잘려 나가 드러난 어깨의 맨살은 사냥꾼의 화살에 부상당한 사슴을 연상시켰다.
 “흐흐흐흐.”
 어깨에서 머물던 시선이 크게 융기하는 가슴에 닿았다. 사가모르 백작은 음흉한 미소와 함께 그녀의 가슴을 향해 서서히 손을 뻗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크와아아아!”
 괴성 소리가 근처에서 들려와 시선을 돌린 사가모르 백작은 분노한 기색으로 얼굴을 쳐들었다.
 “감히, 방해를 하다니!”
 그의 걸음이 거칠게 이끌어지는 곳의 끝에는, 그의 병사들을 도륙하고 있는 한 명의 광인이 있었다.
 크림슨 울프 중의 한 사람.
 광전사라 불리는 그는 주변에 보이던 병사들과 기사들을 모조리 도륙한 다음, 그 핏빛 시선을 사가모르 백작을 향해 돌렸다.
 “큭! 그래. 죽을죄를 지었다면 죽어야지! 아이덴의 쓰레기 주제에 이 몸의 유희를 방해했으니 죽어 마땅하지!”
 우우우웅!
 백작의 분노를 대변하기라도 하듯 그의 손에 들린 롱 소드는 푸른 기운을 뿜어내며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의 몸을 중심으로 압도적인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멈칫!
 상대가 만만치 않음을 느낀 것일까? 멈추지 않을 듯하던 광전사의 돌진이 멈추었다.
 “크와아아아!”
 하지만 이내 다시 달려들었다.
 분노에 찬 사가모르 백작과 광기에 찬 광전사가 격돌했다.
 쿠아아!
 사가모르 백작은 클라우디아를 상대했던 때처럼 수비에 치중하지 않았다.
 푸른 기운이 더욱 짙어진 그의 검은 거친 소음과 함께 광전사를 향해 짓쳐들었다.
 광전사의 검에서도 연둣빛의 오러가 빛나고 있었다. 푸른 기운보다는 어쩐지 약해 보이는 기운이었다.
 “크르르르!”
 본능적으로 자신의 비세를 느낀 광전사는 무기가 맞부딪히는 것을 피하며 꺾어질 수 없는 방향으로 몸을 비틀었다.
 푸확!
 비틀어진 그의 몸이 있던 빈자리에 사가모르 백작의 푸른 검이 쑤셔 박히며 주변의 공기를 진동시켰다.
 “크와아아아!”
 폭발의 여파가 광전사의 몸을 할퀴고 지나갔다.
 옷이 찢어짐과 동시에 흥건한 선혈이 묻어 나왔다. 상당히 큰 상처. 고통스러울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광전사는 자신의 고통 따윈 상관없다는 듯이 괴성을 터트리며 백작을 향해 자신의 이빨을 들이밀었다.
 “크롸아아아!”
 “흠! 들어 본 적이 있다.”
 사가모르 백작은 거칠기 이를 데 없는 공격을 하면서도 여전히 여유로워 보였다.
 “크림슨 울프라 했던가? 아이덴이라는 좁은 동네에선 꽤 인정받는 놈들 중에 미친놈 하나가 있다는 소리를! 두려워하는 놈들이 많다더군.”
 백작은 연둣빛이 어린 광전사의 검을 목을 살짝 흔드는 것만으로 피해 냈다.
 “하지만!”
 퍼억!
 슬쩍 몸을 돌린 백작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는 광전사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본능적으로 몸을 비튼 광전사였지만, 백작의 발길질을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우물 안 개구리일 뿐이지.”
 상처 위에 가해진 거센 발길질은 미쳐 버린 그의 머리에도 고통을 전달한 것일까? 광전사의 얼굴이 고통에 살짝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크와아아아아아!”
 광전사는 괴성을 지르며 다시 일어나 자신을 비아냥거리는 백작을 향해 온몸을 부딪쳤다.
 “훗! 무식하기는······.”
 털썩.
 하지만 백작이 여유로운 몸놀림으로 피해 버리자, 제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을 나뒹굴고 말았다.
 “크와아아아!”
 피에 젖은 광전사가 다시 일어섰다.
 그들의 싸움은 거칠기만 한 멧돼지와 숙련된 사냥꾼의 싸움을 연상시켰다.
 멧돼지는 거센 숨을 토해 내며 사냥꾼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사냥꾼은 우습다는 듯이 멧돼지의 돌진을 피해 내곤, 한 대의 화살을 날려 멧돼지의 화를 더욱 돋웠다.
 하늘하늘거리는 사냥꾼의 움직임에 자극받은 멧돼지는 더욱 거칠게 돌진을 했다.
 하지만 사냥꾼은 가벼운 움직임으로 돌진을 피해 버리곤 단검으로 멧돼지의 등을 찔러 상처를 늘려 놓았다.
 피를 철철 흘리는 멧돼지는 더욱 투지를 불태우며 달려들었지만, 결국 사냥꾼의 움직임을 잡지 못하고 서서히 지쳐 갔다.
 “크와아!”
 사냥꾼에게 사냥 당하는 멧돼지와 마찬가지로 기민하고 본능적이던 광전사 시밀의 움직임도 서서히 둔해지고 있었다. 화산처럼 불타오르던 그의 눈빛도 폭풍우를 앞둔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퍼어억!
 호시탐탐 그의 틈을 노리고 있던 사가모르 백작은 크게 드러난 광전사의 하체에 거칠게 발을 우겨 넣었다. 강한 타격에 광전사는 그만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크롸아······!”
 쓰러진 광전사는 온몸을 뒤틀며 일어서려 안간힘을 다했지만, 그 힘을 다한 것인지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 일어서지는 못했다.
 “흠. 벌레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는군. 꽤 버티긴 했다만 내겐 이길 수 없지!”
 백작은 느긋하게 걸음을 옮겨 광전사 시밀의 앞으로 섰다. 그리고 여전히 푸른 빛이 감도는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영광으로 알아라. 이 고귀한 몸이 직접 죽음을 내리는 것을.”
 아이덴의 용병들 사이에 단연 발군인 크림슨 울프. 그중 한 사람이 지금 이 자리에서 허무하게 스러지려 하는 순간이었다.
 
 촤아아악!
 갑자기 공기를 찢는 파공음이 들려와 황급히 고개를 돌린 백작은 붉은 기운을 머금은 뱀처럼 몸을 비틀며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치잇!
 백작은 재빠르게 피했지만 얼굴에 긴 상처가 생기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두 명의 크림슨 울프를 연이어 상대하면서도 아무 상처를 입지 않았던 그에게 처음으로 생긴 상처였다.
 털썩!
 채찍을 던지는 것으로 있는 힘을 다했는지, 클라우디아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무너지듯 바닥에 쓰러졌다.
 “······.”
 그녀의 쓰러지는 모습을 힐끗 바라본 백작은 아무런 말 없이 손가락을 들어 얼굴에 난 상처를 살짝 닦아 내었다.
 그의 손가락에 묻은 피도, 그가 쓰레기라 부르던 아이덴 인들의 그것처럼 붉디붉은 색이었다.
 “······.”
 아무런 말 없이 손가락에 묻은 붉은 피를 바라보던 백작. 그의 표정이 서서히, 아주 서서히 변화하고 있었다. 평온하던 그의 얼굴이 분노에 물들어 가고 있었다.
 “감히······ 노예 계집 주제에 이 몸의 고귀한 얼굴에 상처를 내?”
 클라우디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는 백작.
 “크크! 조상들의 말이 틀리지 않군. 아이덴의 잡종들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는 그 말이 한 치의 틀림이 없어.”
 클라우디아를 향해 옮기는 그의 발걸음에는 그가 느끼는 분노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었다.
 “장미의 날카로운 가시는 주인의 손을 찌르는 법이지. 그 가시······ 내가 꺾어 주마!”
 퍼억!
 백작의 발길질에 그녀의 고운 얼굴이 뒤로 홱 젖혀졌다. 거칠고 무도한 발길질이 그녀의 전신을 두들겼다.
 귀족답게 교양 있는 모습만을 보여 주던 백작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난폭한 행동은 그의 본성을 원래 이러하였음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자신의 자존심을 긍지로 여기며, 스스로에 대한 약간의 손해조차 감수하지도 못하는 독선. 자기중심적이며 잔혹한 그의 성품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크큭! 울어라. 비명을 질러라! 잘못했다 빌어라! 살려 달라 빌어라!”
 퍼억! 퍼억! 퍼억!
 하지만 클라우디아의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살려 달라는 말은 고사하고 신음조차도 흘리지 않았다. 그것이 마지막 자존심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꼴에 자존심은 있다는 거냐! 큭! 그딴 자존심, 산산이 부숴 주마!”
 백작은 진흙이 묻은 신발을 클라우디아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그 발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빌어라. 살려 달라 빌어라!”
 굴욕적인 자세로 빌라 한다. 목숨을 들어 협박하며 굴종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녀의 입술은 오히려 꼭 다물어졌다. 분한 심정이 그녀의 눈을 타고 흘러나왔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울지 않았다.
 이 눈물은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라고! 단지 힘이 없음이 서러워 우는 것이라 항변하듯 오히려 표독하게 눈을 치떴다.
 “크큭! 그래. 쉽게 꺾이리라 생각지는 않았다.”
 백작은 웃음과 함께 그녀의 머리에서 발을 내렸다. 그리고 그녀의 입 앞에 발을 가져다 대었다.
 “핥아라. 그렇지 않으면······.”
 검을 들어 그녀의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어떤 협박에도 굴하지 않았던 그녀다. 여인의 생명인 얼굴을 상처 입힌다 해서 굴할 그녀가 아니었다.
 헌데, 그녀의 눈빛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얼굴에 닿은 검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동자의 초점은 먼 곳의 풍경을 담고 있었다. 먼 곳에서 달려오는 한 사람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격렬하게 떨리는 그녀의 눈은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말하려 하고 있었다. 더러운 흙발에 밟혀 이그러지는 입을 뻥긋거리며 무언가를 말하려 하였다.
 하지만 지쳐 버린 그녀의 성대는 아무런 소리를 뱉어 내지 못했다.
 그녀의 눈망울에 비친 사람의 모습이 점차 확대되어 갔다.
 눈망울에 비친 사람이 말했다.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겁니까.”
 낮은 목소리. 침착하게 절제된 그의 목소리에서는 꺼진 듯하면서도 속으로는 활활 타오르는 휴화산의 냄새가 풍겼다.
 백작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앞을 가로막는 클레멘티 기사들을 처참하게 부숴 버린 키리히는 급하게 웃음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머리가 한 남자의 발에 짓밟히고 있는 모습을 말이다. ///
 눈물을 흘리며 입을 벙긋거리는 그 모습을 보았다. 목소리는 흘러나오지 않았지만, 키리히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도······ 망······ 쳐······ 요.]
 간절한 눈으로 그녀가 도망치라 말을 한다. 그토록 굴욕적인 요구를 당하면서도 그녀는 키리히를 걱정하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그녀와 키리히는 동료다. 동료가 위기에 처하면 구해 주는 것이 당연하다. 아무리 강대한 적이 있더라도 동료의 위기를 외면해선 안 된다.
 키리히의 아버지는 그렇게 이야기하곤 했었다. 키리히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도망치라는 그녀의 말을 키리히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 앞에 발을 들이밀고 하는 백작의 말을 들었다. 그 말이 그의 귀에 닿은 순간 도망치라는 말의 의미 따위는 키리히의 머릿속에서 삭제되었다.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겁니까.”
 고개를 돌린 남자의 입매를 따라 비웃음과 짜증이 묻어났다.
 “또 쥐새끼인가? 오늘따라 이 몸을 방해하는 놈들이 많군. 하여간 아이덴의 쓰레기들은 예의를 몰라!”
 “······?”
 “크큭! 왜? 불만인가?”
 “여인의 머리를 짓밟고, 신발을 핥으라 협박하는 것도 예의입니까?”
 “쓰레기들에게 그에 걸맞는 취급을 해 주는 것도 예의지.”
 “풋!”
 키리히는 피식 웃어 버렸다. 키리히는 한껏 웃음을 머금은 채로 이야기했다.
 “당신의 예의, 저에게도 좀 가르쳐 주십시오.”
 “······.”
 어이가 없는 것인지 백작은 멍한 눈으로 키리히를 쳐다보았다.
 “크하하하! 우습군. 우스워! 아이덴의 쓰레기들은 정말 재미있어! 좋아! 가르쳐 주지! 강자에 대한 약자의 예의를!”
 키리히는 그의 말이 채 끝이 나기도 전에 싸늘한 눈의 그를 향해 짓쳐 들어갔다.
 “헛!”
 놀라움의 경악성을 토해 낸 백작. 키리히의 돌진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시밀을 상대했을 때처럼 살짝 피해 내려 하였다.
 하지만, 몸을 피한 백작의 바로 앞에서, 그를 스쳐 지나가려 하던 키리히의 몸이 급격히 방향을 바꾸었다.
 도저히 피할 수 없다 판단한 백작이 검을 들어 막았다.
 콰앙!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치곤 지나치게 강렬한 소리와 함께 둘의 몸이 튕기듯 떨어져 나왔다.
 “오! 제법인걸? 오러를 사용할 줄은 모르는 듯한데······ 검은 멀쩡하군? 보검인가?”
 백작은 여전히 느긋하면서도 호기심 어린 말투였다. 하지만 그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키리히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나는 순간!
 또다시 돌진하는 키리히에 의해 또 한줄기의 빛줄기가 지면 위에 새겨졌다.
 콰아앙!
 조금 전보다 훨씬 거대한 충돌음과 함께 또 한 번 둘의 몸이 튕겨지듯 떨어졌다.
 백작은 이번에도 그의 돌격을 피하지 못했다.
 “힘은······ 좋군. 제법이야.”
 백작은 쥐고 있던 검을 자연스럽게 반대편으로 옮겨 잡았다. 그러며 원래 손은 등 뒤로 살짝 옮겨 잡았다.
 “그런데······.”
 콰아앙!
 백작이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는 찰나, 또 한 번의 충돌음이 일어났다.
 또다시 튕겨져 떨어지는 두 사람.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키리히의 몸은 충돌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지만, 백작의 몸은 날듯이 뒤로 튕겨졌다. 바닥에 착지한 그의 몸이 순간적으로 비틀거렸지만 이내 균형을 되찾았다.
 “좋군. 힘이 대단해. 그럼, 나도 이젠 정식으로······.”
 “시끄럽습니다.”
 차가운 눈으로 키리히가 말했다.
 “당신이 말하는 강자란 싸움 중에 쓸데없이 주절대는 사람을 말합니까?”
 “큭!”
 키리히의 예상 밖의 실력에 말을 걸어 시간을 끌어 보려던 수작이었다. 스스로 그걸 알기에 백작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백작은 다급하게 양손으로 검을 붙잡아야 했다. 키리히가 다시 한 번 부딪혀 왔기 때문이다.
 속이 뒤틀리고 손에는 경련이 일고 있었지만 막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죽으니까. 하지만 그는 키리히의 근육이 살짝 부풀어 있음을 알지 못했다.
 또 하나의 빛줄기.
 콰아아앙!
 “컥!”
 백작은 거칠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키리히의 느긋한 걸음으로 백작에게 다가갔다.
 “적 앞에서 드러눕는 것이 당신의 예의입니까?”
 “감히!”
 백작은 용수철처럼 몸을 튕겨 일어나더니 검을 잡고 기운을 집중시켰다. 푸른 기운이 그의 검에 넘실거렸다.
 그 순간, 또 하나의 빛줄기가 허공에 그어진다. 조금 전보다 더욱 가늘면서도 긴 빛줄기였다.
 콰아아아앙!
 거센 부딪힘.
 백작은 더욱 거세게 튕겨나며 바닥에 구겨지듯 처박혔다.
 크림슨 울프 둘을 거꾸러트렸던 만큼의 기운이었다. 키리히의 검에는 아무런 기운도 보이질 않았다. 그럼에도 키리히의 검에는 작은 흠집 하나만이 나 있을 뿐이었다.
 저벅. 저벅.
 키리히의 발걸음은 여전히 느긋하게만 보였다. 하지만 그의 눈은 싸늘함을 벗어나 활화산처럼 불타오르고 있었다.
 “크아아악! 이 내가······!”
 잠시 고통에 떨며 바닥에 몸을 비벼 대던 백작은 자신의 그 모습이 무척 추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괴성을 터트리며 일어섰다.
 “네노오오옴! 죽여 버리겠다! 죽여 버리겠어!”
 그의 검이 순간적이나마 푸르게 빛났다. 온 힘을 집중시켰는지 그의 이마에선 힘줄이 불끈 돋아 있었다.
 “해 보십시오!”
 키리히는 망설임 없이 그가 기다리는 곳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전신은 지하 감옥을 탈출했을 때보다 더욱 크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부딪혔다.
 콰과과과광!
 산을 무너트리는 듯한 굉음이었다.
 그 굉음이 귀에 닿는다는 느낌이 들기도 전에, 흐릿한 그림자 하나가 빛살처럼 튕겨 나와 바닥을 나뒹굴었다.
 피에 절어 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 바닥에 쓰러졌다. 전신의 뼈가 으스러진 듯, 뼈 없는 동물처럼 흐느적거리고 있는 그는 바로 사가모르 백작이었다.
 “크아아아악!”
 백작은 한 덩이의 핏물을 토해 내며 고통에 겨워했다. 더 이상 일어설 힘이 없어 보였다. 키리히는 그런 그를 향해 걸어가며 치켜들었던 츠바이핸더를 서서히 내렸다.
 백작의 롱 소드는 그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오러로 한껏 감싸 안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충격을 감당하지 못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버렸다.
 그에 비해 키리히의 두터운 츠바이핸더는 이리저리 깊이 팬 자국이 있긴 했지만 멀쩡히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저벅. 저벅.
 키리히의 온몸 구석구석에도 많은 상처가 나 있었다. 치명적으로 보이는 것도 두어 개 있었다. 그럼에도 키리히는 아무 상처를 입지 않았다는 듯,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사가모르 백작을 향해 다가갔다.
 일어서지 못하는 백작의 멱살을 부여잡아 억지로 일으켜 세운 키리히는,
 쫘악!
 “크헉!
 손바닥을 들어 백작의 뺨을 거세게 후려쳤다. 목이 부러질 듯한 기세로 백작의 얼굴이 돌아갔다.
 “상대에게 받은 모욕을 돌려주고 싶으면!”
 쫘악!
 “크흑!”
 백작의 목이 반대편으로 급격히 꺾였다.
 “분이 풀릴 때까지 따귀를 때리라 하셨습니다.”
 쫘악!
 “크흐!”
 “그런데!”
 쫘악!
 “끄으······.”
 “아무리 때려도 분이 풀리지 않습니다.”
 쫘악!
 “······.”
 “아무리 후려쳐도 분이 풀리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쫘악!
 “······.”
 “가르쳐 주십시오. 당신이 말한, 강자에 대한 약자의 예의!”
 쫘악!
 “······.”
 “당신의 몸으로 보여 주십시오.”
 쫘자자자작!
 좌우로 격렬히 흔들리는 백작의 입술이 수천 개의 핏방울을 허공에 흩뿌렸다. 잇몸에 붙어 있던 이빨들은 이미 떨어져 나간 지 오래다. 그는 더 이상 신음조차 내지 못했다.
 “보여 달란 말입니다!”
 쫘아아아악!
 섬뜩한 소리가 났다. 그 충격이 얼마나 대단한지 백작은 허공에서 한참을 팽이처럼 돌다 바닥에 떨어졌다.
 “보여······ 달란······ 말입니다.”
 목이 반쯤 꺾이고 혀를 반쯤 빼 문 백작의 머리 위에, 흐느낌이 섞인 키리히의 목소리가 힘겹게 쏟아져 내렸다.
 
 
 
 
 
 8장 자격 없는 자, 복수를 말하지 말라
 
 
 
 
 사지가 부러지고 으스러져 연체동물처럼 기묘하게 꺾여 있었고, 피투성이가 된 얼굴에서 유일하게 그 원형을 짐작할 수 있는 입술은 원래보다 다섯 배가량 부어오른 채 핏물을 흘리고 있었다.
 “······.”
 그렇게 처참한 형색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가모르 백작을 바라보는 키리히의 두 주먹은 굳게 쥐어 쥔 채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사가모르 백작의 가슴이 숨 가쁘게 들썩이고 있었다. 그런 형색을 하고서도 그는 죽지 않은 것이다. 마지막 순간, 키리히는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손에 들어간 힘을 대부분 뺐던 것이다.
 흥분한 상태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키리히의 주먹은 언제라도 뻗어 나갈 준비가 된 것처럼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힘줄이 불끈 솟을 정도로 꽉 쥔 주먹에선 피마저 배어 나왔다.
 하지만 키리히는 결국엔 주먹에서 힘을 풀었다. 마지막에 힘을 뺀 이유를 깨달았다.
 “나머지는······ 그녀의 몫입니다.”
 3일 동안 한숨도 자지 않은 사람의 표정으로 키리히는 쓰러져 있는 클라우디아에게 다가갔다.
 조금 전부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강한 그녀가.
 “왜······ 울고 계십니까.”
 그녀는 무언가를 이야기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목에선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목을 다친 것인지, 자신의 입에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안 그녀가 답답해 하는 기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지만 키리히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들었다. 입술을 읽는 것은 그의 아버지가 남겨 준 기억 중 하나이니까.
 [괜······ 찮······ 은······ 가······ 요?]
 키리히는 속에서 울컥하는 무언가를 느꼈다.
 ‘당신 몸이나 걱정하란 말입니다!!’
 하지만 힘든 그녀를 배려한 그의 입에선 침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괜찮습니다. 이까짓 상처, 별것 아닙니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키리히의 대답에 살짝 놀란 표정을 보이던 그녀가 힘겹게 웃음을 보였다.
 [다행······ 이에요.]
 “다행은 무슨 다행입니까!”
 퉁명스럽게 말을 뱉은 키리히는 간신히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렸다.
 시선을 돌린 키리히의 얼굴에 일단의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적이 아니라,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용병들이었다. 용병들의 후미에는 루카스의 모습도 보였다.
 “이건······ 도대체!”
 광전사 시밀이 만든 참상과, 키리히가 만든 장면으로 장내는 참혹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 장면에 놀란 용병들이 얼어붙은 듯 멈춰 서 있었다.
 “누가······ 저자를 좀 업어 주시겠습니까?”
 키리히는 클라우디아를 품에 안으며 참혹하게 널브러져 있는 백작을 가리켰다. 그러자 주춤하며 눈치를 살피던 용병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왔다.
 앞으로 나오던 그의 움직임이 멈춘 것은, 일단의 무리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클라우디아를 품에 안고 일어서려던 키리히는 이번에 나타난 사람 중에 눈에 익은 사람이 있음을 알았다.
 광전사 시밀에게 복수하기를 원하는 사람들. 음식점에서 보았던 사람들 중 일부의 사람들이었다.
 “복수······ 입니까?”
 그들이 어떻게 이 자리에 오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목적은 알 수 있었다. 쓰러져 있는 광전사 시밀에게 복수를 하기 위함이리라.
 복수자들도 장내에 펼쳐진 충격적인 장면에 놀란 기색이었다. 하지만 키리히의 짐작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이내 정신을 차린 그들은 복수에 불타는 눈으로 시밀에게 다가서기 시작했다.
 “······.”
 키리히는 묵묵히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신경을 끊어 버렸다.
 광전사 시밀을 한 번 만나보기는 했다. 꽤 괜찮은 느낌이 들던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저들의 복수를 막을 정도로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클라우디아의 복수라는 이유로 한 사람을 처참하게 만든 그이기에, 복수를 원하는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 갑자기 키리히의 품속에 안겨 있던 클라우디아가 갑작스러운 움직임을 보였다. 경련과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
 [막······ 아······ 주······ 세······ 요.]
 그녀의 입술을 읽은 키리히는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저들의 복수를 제가 막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는······ 저를······ 구······ 해······ 줬······ 어······ 요.]
 힘겹게 말을 마친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키리히의 품 안에서 축 늘어져 버렸다. 기절해 버린 것이다.
 키리히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벌떡 일어섰다.
 “멈추십시오.”
 모든 것을 버릴 각오로 복수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일생의 목표가 눈앞에 있는데 멈추라고 멈출 사람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키리히의 말을 듣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우릴······ 막으려는 건가? 무슨 이유로······.”
 끔찍한 장내의 풍경 속에서, 멀쩡한 사람이다. 그만큼 강하다는 것을 복수자들은 느꼈다. 키리히가 자신들을 막는다면 자신들도 복수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미친놈과 이야기하던 놈이잖아!”
 누군가 키리히를 알아보고 소리를 질렀다.
 “그와······ 아는 사이요?”
 복수자들의 얼굴에 암담함이 어렸다. 키리히가 그들과 시밀의 사이를 완전히 가로막았던 것이다. 시밀을 죽이기 위해선 무척 강해 보이는 키리히를 넘어서야 했다.
 “이 사람은 제 동료의 목숨을 구해 줬습니다. 당신들이 복수를 하겠다면, 나는 그 빚을 갚아야 합니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그 단호한 의지에 복수자들은 쉽게 움직일 생각을 못했다.
 그들 사이에 있던 다이크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에게도 반드시 사람들을 움직여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불과 한달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자네가 다이크인가?”
 “네, 넷! 백작님!”
 다이크는 영문도 모른 채 라이너 백작가에 끌려가 백작의 앞에 무릎 꿇게 되었다.
 “소문은 간혹 들었네. 아주 비열하다 하더군?”
 다이크는 자신의 행동 중 무언가가 라이너 백작의 심기를 거슬렀다고 생각했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무슨 소릴 하는 겐가? 혹시 우리 가문에 뭔가 잘못한 것이라도 있나?”
 “그, 그게······.”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던 백작은 느닷없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뭔가 오해를 하고 있나 보군. 그런 게 아닐세, 내가 자네를 부른 것은 뭔가 부탁할 것이 있어서야.”
 “부, 부탁······ 말입니까?”
 “그래, 부탁! 우리 가문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자가 한 있네. 그자를 죽여 주게.”
 “그, 그런 거였습니까?”
 그제야 다이크는 약간 안심을 할 수 있었다. 귀족들이 더러운 일을 저지를 때는 자신의 심복들조차 모르게 하는 경우가 간혹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누구를?”
 “블러디 로즈!”
 “네······ 넷? 어, 어떻게 그런······ 저는······.”
 “비열한 다이크라 불리는 자네라면 틀림없이 방법이 있을 것이라 믿네. 만약 이 일이 성공하면 자네에게 준 남작의 지위를 주도록 하지”
 평민이 귀족의 위치에 올라서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다.
 “저, 정말이십니까!”
 “물론이지.”
 “아, 알겠습니다. 반드시······!”
 “하지만! 만약 실패하게 되면 각오를 해야 할 게야!”
 실패는 곧 죽음이라는 백작의 말에도, 다이크는 그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살떨렸던 기억을 떠올리며 잠시 마음을 다진 다이크가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고작 E 등급 주제에 어디서 겁도 없이 나서?”
 그의 말에 복수자들의 얼굴에 황당함이 어리다가, 이내 분노의 표정이 새겨졌다.
 앞으로 나선 자는 다이크 헤르비그. 복수에 미친 이 사람들에게 계획을 알려 준 사람이었다. 그는 사전에 충분한 조사를 끝낸 상태였다. 클라우디아와 함께 다니는 남자의 실력에 대해서도 조사를 마쳤다.
 “네깟 놈이 무슨 수로 이들의 복수를 막는다는 거야?”
 복수자들 사이에 감도는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다이크의 말이 키리히의 실력을 보잘것없다 말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그들이 망설이는 이유는, 어떤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 불안감의 근원에는 알 수 없는 기세를 뿜어내며 우뚝 서 있는 키리히가 있었다.
 “복수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면서, 저런 초보 용병 때문에 포기한다고? 웃기는 사람들이군. 크큭!”
 다이크의 말에 복수자들이 또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가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네놈들이 복수를 하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고!’
 가만히 다이크를 바라보던 키리히가 그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저는 키리히 베오포르트라 합니다.”
 “누가······ 네놈 이름 따위를 알고 싶다고······.”
 “제 앞에서 이름을 밝히지도 못할 정도로 떳떳하지 않습니까?”
 키리히가 발견한 것은 그와 다른 복수자들 사이에 느껴지는 묘한 괴리감이었다. 그것을 발견한 순간 왠지 저 사람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흥! 못 밝힐 건 없지! 이 몸의 이름은 다이크 헤르비그다!”
 “그렇군요. 다이크 씨······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쓸데없는 소릴랑······.”
 “그렇게 복수하고 싶으면 당신이 직접 나서지, 왜 다른 사람을 부추깁니까? 다른 사람들에겐 모든 걸 버리고 복수하라면서 왜 정작 당신은 모두 버리지 않습니까?”
 “······.”
 다이크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그의 태도가 이상함을 느꼈던 것일까? 복수자들의 분위기도 약간은 달라졌다.
 “······.”
 “뭐야! 네놈들은 복수를 원했고, 나는 방법을 알려 준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그런 눈으로 보는데!?”
 “복수할 방법을 가르쳐 준다라······. 당신도 역시 이 사람에게 원한이 있는 겁니까?”
 “켈. 비열한 다이크가 원한을 가질 사람이 있을 리가 있나? 다이크를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겠지만 말이야!”
 물음에 대한 대답은 키리히의 등 뒤에서 흘러나왔다. 키리히는 몸을 돌려 말을 꺼낸 헤르만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놈은 사기꾼이다. 간사한 말로 사람들을 조종하지. 복수를 대신해 주는 것도 저놈이 하는 일 중 하나야. 그런데 문제는, 저놈이 끼어들면 항상 일이 크게 벌어지고 잔혹한 광경이 벌어진다는 거야. 복수에 미친놈들이야 어떨지 모르지만, 그 때문에 애꿎은 사람들은 큰 피해를 보지.”
 “······.”
 “이번 일만 해도 그래. 복수할 기회를 준답시고, 블러디 로즈와 광전사를 싸움 붙이려는 계획을 세운 모양인데······.”
 루카스에게는 많은 나이만큼이나 풍부한 경험이 있었다. 그런 그가 노기에 찬 눈으로 다이크를 노려보았다.
 “만약 이 자리에 광전사보다 강한 자가 없었더라면 여기에 있는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을 거야. 사로잡혔던 우리도 모두 죽었을 테고! 크큭!”
 “뭐, 뭐야!”
 “저놈이 그런 짓을!”
 포로로 잡혀 있던 용병들은 그제야 다이크의 계획에 자신들이 희생될 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분기를 터트리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키리히는 오히려 웃음을 터트렸다.
 “훗! 돈······ 때문입니까? 겨우 돈 때문에 이 많은 사람을 죽이려 한 겁니까? 그 돈으로 이 사람들의 목숨을 저울질한 겁니까?”
 궁지에 몰린 다이크는 조금 창백한 안색이었지만, 이내 얼굴을 붉히며 소리 질렀다.
 “흥! 결국은 아무도 안 죽었잖아! 그런데 네놈이 무슨 상관이야. 세상은 돈이라고! 내가 돈 좀 벌겠다는데 왜 네가 막고 그러냔 말이다!”
 “후후후. 잘되었습니다.”
 키리히의 입에선 낮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아 답답했었는데······ 정말 잘되었습니다.”
 잠시 멈추었던 걸음을 옮겨 다이크에게로 향했다.
 “당신에게 죽어야 할 이유가 있다는 것이······.”
 그 순간, 키리히가 움직였다. 다이크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움직임으로 그의 앞에 다가섰다. 그는 키리히가 눈앞에 나타나고 나서야 깜짝 놀라 두 눈을 부릅떴다.
 “허업! 이, 이게······!”
 키리히의 전신 근육이 거칠게 부풀어 올랐다. 그렇게 부풀어 올라 정점에 오른 힘이 그의 오른 손바닥에 가득 맺혔다.
 패애애애앵!
 손바닥이 작렬했다. 다이크의 얼굴이 놀라운 속도로 회전했다. 쉼 없이 회전하여 닭 모가지처럼 비틀렸다.
 그 비틀어짐이 절정에 달한 순간,
 뚜두둑!
 기묘한 소리와 함께 목이 찢겨 날아올랐다. 공중에 뜬 상태에서도 그의 목은 거세게 회전하며 바닥에 떨어졌다.
 “제겐······ 정말 다행입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도, 무언가 말을 하려 한 사람도. 모두가 말을 잊고 멍한 시선이 되었다.
 나름대로 끔찍한 장면을 많이 보아 온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죽는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떤 심정으로 때려야 사람을 이렇게 만들 수 있는지, 얼마만큼의 힘이 있어야 이렇게 만들 수 있는지 짐작할 수조차 없다.
 조용해진 사람들의 머리 위에, 침착한 키리히의 목소리가 내리깔렸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사람은 제 동료를 구해 주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놓아두고 그냥 갈 수는 없습니다. 막으신다면······.”
 키리히는 말끝을 흐리며 시밀을 등에 업었다. 그를 업는 와중에, 꿈틀거리는 그의 기색이 느껴졌다.
 “왜 나를······ 돕는 건가······. 저들의 복수는······ 정당하네.”
 “시끄럽습니다.”
 업혀 있던 시밀의 몸이 경직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내 경련과도 같은 떨림이 느껴졌다.
 “크크크크크.”
 낮은 그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키리히는 클라우디아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눈이 갑자기 크게 치떠졌다.
 스스스스스.
 널브러져 있던 사가모르 백작의 몸이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키리히가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점점 옅어진 백작의 몸은 마침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마, 마법!”
 누군가가 지르는 소리에 그 원인을 알게 되었다. 키리히는 잠시 굳은 얼굴로 그가 사라진 자리를 쳐다보다가 다시금 클라우디아에게로 향했다.
 “어차피······ 병신입니다.”
 시밀을 등에 업고, 클라우디아를 끌어안은 키리히가 산 아래로 발걸음을 돌리자, 앞을 막고 있는 사람들이 수더분하게 길을 열어 주었다.
 그들 사이를 지나가던 키리히는, 잠시 멈칫하더니 한마디 말을 내뱉고는 산 아래로 사라져갔다.
 “버그허트 씨가 헤르만 씨에게 전할 말이 있답니다. ‘아침의 자유’ 여관에 가면 만날 수 있을 겁니다.”
 키리히의 말에 전신을 부르르 떠는 한 사람의 이름은 바로 헤르만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는 루카스 노인이었다.
 버그허트 베오포르트.
 키리히의 아버지의 이름이었다.
 
 ***
 
 “크, 클라우디!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클라우디아의 처참한 모습을 본 다이앤은 비명부터 질렀다.
 키리히가 클라우디아를 데려간 곳은 그녀가 자주 찾곤 했던 다이앤의 주점이었다.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지만, 위치는 알고 있었다.
 키리히는 묵묵히 안고 있던 클라우디아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이게 도대체······!”
 키리히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조심스럽게 클라우디아의 상태를 살핀 다이앤은, 잠시 후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한스!”
 “네, 마스터!”
 “약초사를 데려와 줘요!”
 “알겠습니다, 마스터!”
 다이앤은 시밀을 바닥에 내려놓고 한숨을 쉬고 있는 키리히를 바라보았다. 블러디 로즈에 이어 광전사라 불리는 사람까지 데려온 사람이다.
 흥미가 생길 법도 했지만, 그보다 먼저 악감정이 그녀의 마음속에 머리를 치켜들었다.
 “당신······ 클라우디와 함께 다닌다는 사람이죠?”
 “그렇습니다.”
 키리히는 죄를 지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런 모습에 무엇을 상상했던 것일까?
 “클라우디아가 다친 건······ 당신 때문이겠죠?”
 “······.”
 키리히는 아무 말도 않았다.
 다이앤은 복잡한 눈으로 키리히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클라우디아에게 커다란 은혜를 입었다. 클라우디아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도 은혜를 입었다.
 반역이라는 명목으로 멸문한 홀스트 가문. 그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가 바로 다이앤이었으니까.
 그녀의 안전한 도망을 위해 홀스트 가문의 기사였던 클라우디아의 아버지가 목숨을 바쳤다.
 숨어 살다가 정체가 들통날 뻔했던 다이앤의 안전을 위해 클라우디아의 어머니가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삼 년 전에는, 다이앤을 구하려던 클라우디아가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당했다. 그 후로 클라우디아는 블러디 로즈가 되었다.
 의자매처럼 절친했던 다이앤과 클라우디아. 지금도 여전히 친한 친구로 남아 있지만, 다이앤에게는 클라우디아에 대한 지울 수 없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소중한 친구가 심각한 상처를 입은 채로 돌아왔다. ///
 “지난 3년 동안 한 번도 다친 적이 없던 아이예요. 그런데 당신을 만난 이후로는······.”
 마테우스의 검은 손의 서브 마스터인 다이앤. 그녀의 귀에 들려오는 많은 정보 중에는 절친한 친구의 정보도 들어 있다.
 그녀와 키리히가 만난 이후로 겪었던 대부분의 일을 알고 있다. 위험한 상황이 많았다.
 “미안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당신을 지키려다 이렇게 다친 클라우디를 보면?”
 “······.”
 키리히로서는 할 말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키리히를 지켜 주다 다친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그녀가 이렇게 심하게 다친 것은 루카스를 만나려는 키리히를 도우려 했기 때문이기에.
 “나가 주세요. 당신 덕분에 클라우디의 얼굴이 밝아진 것은 좋았지만, 지금은 당신 얼굴을 보기가 싫네요. 제발······ 지금은 나가 주세요.”
 “······.”
 “동료는······ 서로 지켜 줄 수 있는 사람이에요. 일방적으로 해만 끼치는 사람이 동료라 할 수 있나요?”
 다이앤의 말이 키리히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혀 들었다.
 복잡한 눈으로 클라우디아를 바라보던 키리히는, 망설임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도 치료를 해 주십시오. 그녀의 목숨을 구한 사람입니다.”
 키리히는 이 말을 끝으로 다이앤의 주점에서 사라졌다.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뒷모습이 왠지 모르게 애처로워 보였지만, 그걸 바라보는 다이앤의 시선은 날카롭기만 했다.
 
 복잡한 심정으로 다이앤의 주점을 나선 키리히는 헤르만과 약속했던 ‘아침의 자유’라는 여관을 찾았다.
 여관에 들어선 순간 구석진 자리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루카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루카스와 시선을 마주친 키리히에게는 7년 전의 그날 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오르고 있었다.
 
 “만약에 말이다. 내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면······ 그래서 이 아버지를 찾고 싶으면, 크레비츠에서 루카스라는 사람을 찾아보거라. 그가 이 아버지의 소식을 알고 있을 거다. 하지만, 최소한 너 자신을 지킬 힘을 기른 후에 찾아라.”
 
 그 한마디 때문에 7년을 기다려 왔던 키리히였다. 하지만, 그렇게 만나길 원하던 사람이 눈앞에 있음에도 키리히의 눈빛에서는 별다른 기쁨이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그 이름······ 자네가 어떻게 아는 건가?”
 “······.”
 생사를 함께한 동료가 자신 때문에 심하게 다친 마당이다. 우울한 기분에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받았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말해보게! 어떻게 그 이름을 알고 있는지!”
 “······제 이름은 키리히 베오포르트입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터져 나온 한마디.
 한숨 섞인 키리히의 말에 루카스의 눈빛이 부르르 떨렸다. 세상의 풍상을 대부분 맞아 어지간한 일에는 변화 없을 그의 눈빛이 하염없이 떨렸다.
 “베오······ 포르트라고?”
 “제 아버지의 이름은 버그허트 베오포르트입니다.”
 “정말······ 네가 정말 버그허트의 아들이란 말이냐.”
 용병으로 60대라면 정말 오랜 시간 동안 모진 풍상을 겪어 왔을 것이다. 그만큼 힘들 일도 많았을 것이고, 슬픈 일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한 일을 겪는 동안 점점 감성이 무뎌졌을 루카스의 노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눈물뿐만이 아니라 콧물까지 흘러나와 그 얼굴이 온통 지저분하게 되었지만 닦을 생각조차 않았다. 루카스는 부르르 떨리는 손을 내밀어 키리히의 어깨를 붙잡았다.
 “신이여······ 감사드립니다.”
 거세게 부둥켜안았다. 마치 죽은 아들이 돌아온 것처럼.
 “왜 이러십니까?”
 키리히에게는 노인의 반응이 의아스럽기까지 했다.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감격에 겨운 노인은 키리히의 목소릴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키리히는 잠자코 노인이 진정하길 기다리다가 입을 열었다.
 “제 아버지는 어디에 있습니까?”
 간신히 진정을 한 루카스의 시선이 다시금 복잡하게 변했다. 차마 이야기하지 못할 것을 이야기하려는 듯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네 아버지는······ 버그허트는······.”
 죄인의 눈빛을 한 채로 힘겹게 뒷말을 이었다.
 “실종······ 되었다.”
 “아버지가······ 실종되었단 말입니까?”
 키리히는 망연한 눈으로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그래. 실종되었다. 선조의 유산을 찾으러 떠난 이후로······ 돌아오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키리히는 아버지를 안다. 어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그를 혹독하게 훈련시켰던 그의 아버지를.
 매정했던 그였지만, 자신을 얼마나 아꼈는지를 잘 안다. 그걸 알기에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렇게 찾아 나선 것이다.
 또한 그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안다. 세상에 나온 이후, 알게 되었다.
 아버지란 사람의 그 무지막지한 강인함을. 어느 정도 강해진 키리히의 잣대를 들이대더라도, 아버지는 괴물이었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십니까?”
 “······알고 있다.”
 모른다는 대답을 예상했다. 그렇기에 의문스러웠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디로 간 것인지는 안다면서······ 어떻게 실종되었다 하는 겁니까?”
 “일단 자리를 옮기자. 여기는 자리가 좋지 않다.”
 루카스는 키리히의 손을 잡고 여관을 나섰다.
 
 조용한 밀실이었다.
 “너는 네 선조가 어떤 분인 줄은 알고 있느냐?”
 “잘 모릅니다.”
 키리히의 말에서는 약간 퉁명스럽다는 느낌이 새어 나왔다.
 키리히의 아버지는 할아버지나 혹은 그 윗대의 조상들에 대해서 한 번도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혹독한 훈련에 살아남기에도 바빴던 키리히에게도 그에 대한 궁금함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또한, 지금도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지금 궁금한 것은 아버지의 행방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하지만 키리히는 묵묵히 노인의 말을 기다렸다.
 그의 눈앞에 있는 노인은, 왠지 그가 이야기를 들어주길 간절히 바라는 듯하였기에.
 “이야기해 주마. 위대한 너의 선조의 이야기를, 이 땅의 진정한 왕의 이야기를!”
 루카스의 이야기는 사백 년 전, 아이덴이 건국되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갔다.
 “황무지뿐인 아이덴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제대로 무리조차 이루지 못했다. 힘을 모으지 못해, 이웃 나라인 살레바니아에 반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용만 당하고 모진 탄압을 받던 세월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이 키리히의 귀를 간질였다.
 “그때 한 용병이 나타났다. 츠바이핸더를 사용하는 뛰어난 용병이었지. 그분이 바로 너의 선조, 이 땅의 진정한 왕, 베일런트 베오포르트님이시다.”
 베일런트 베오포르트는 뛰어난 카리스마와 강한 실력으로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동시에, 살레바니아에 대항하였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결국에는 아이덴이라 불리는 나라를 세울 수가 있었다.
 “하지만, 누가 알았겠느냐. 최후의 순간······ 배신자가 나타날 줄은······. 그분을 따르던 사람들 중, 따로 세력을 일구고 있던 자. 사람들이 아이덴의 건국왕이라 부르는 헤르베르트 슈타우다허가······ 그분의 등에 비수를 꽂았다.”
 “······.”
 끓어오르는 피를 억제하지 못한 듯한 목소리로 분기를 토해 내고 있었지만, 그 이야길 듣는 키리히에게는 별다른 표정이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슈타우다허는 베일런트님의 모든 것을 빼앗아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분의 명성, 그분을 따르던 사람들, 심지어는 그분을 상징하는 문장까지도! 그리고 그 비열한 배신자의 후손들은 아직까지도 왕족의 지위를 누리고 있지. 게다가 호시탐탐 아이덴을 노리고 있는 살레바니아의 유혹에 빠져 왕의 구실조차 못하고 있다.”
 아이덴의 건국에 얽힌 놀라운 이야기였다.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크게 놀라워할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게 아버지가 실종된 것과 무슨 상관입니까?”
 키리히에게는 딴 나라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그가 듣고 싶었던 것은 아버지의 실종 이유일 뿐, 선조가 왕이 될 뻔했든 배신을 당했든 별로 상관이 없었다.
 루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어째서······ 네 가문의 사람들은······.”
 배신을 당하지 않았으면, 지금의 키리히는 왕족이 되어 떵떵거리고 살고 있었을 것이다. 욕심이 있다면 반드시 그러할 터인데 키리히의 반응은 너무 담담하다 못해 냉정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루카스는 답답해 하면서도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등 뒤에서 배신의 칼을 맞았지만, 그분은 살아나셨다. 그분도 너나 너의 아버지와 같았다. 겨우 나라가 세워진 마당에 배신의 사건을 알리면 혼란이 온다면서, 그러면 살레바니아에게만 좋은 일이라며 복수를 포기하셨다. 그리고는 가면을 쓰고 다니시며 정처 없이 세상을 돌아다니셨지. 여든을 넘기신 그분은 혼란을 완전히 없애시겠다면서 그분을 증거하는 모든 것들을 가지고 잠적하셨다. 자손들에게조차 아무 말을 하지 않으셨다.”
 “팔십을······ 넘겼단 말입니까?”
 별다른 의미가 없어 보이는 말에 키리히가 해연히 놀랐다.
 “그래. 그분은 오래도록 사셨지. 게다가 나이가 드실수록 더욱 강해지셨다. 때문에 더욱 안타까웠다고 한다. 충분히 나라를 되찾을 능력이 되심에도 그러질 않으셨으니까.”
 “정말······ 정말 그렇게 오래 사셨습니까?”
 루카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지난 사백 년 동안, 그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분의 안식처를 찾았었지만 찾을 수 없었지. 그런데 팔 년 전, 그분의 안식처로 짐작되는 곳을 찾게 되었다. 난 그 소식을 네 아버지인 버그허트에게 알렸단다.”
 “그럼, 그때 찾아오신 분이······.”
 “그래. 바로 나였단다. 처음에는 버그허트도 아무 관심이 없다고 했지. 하지만 일 년 정도가 지난 후, 그분이 남긴 물건 중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서 그곳으로 갔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으셨습니까?”
 루카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찾아가지 않으신 겁니까? 왜 찾아보지 않으신 겁니까! 실종된 곳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버그허트는 다른 동료는 모두 데려갔으면서도 오직 나만은 남겨 두고 갔으니까. 혹여 자신이 돌아오지 않으면, 언젠가 찾아올 너에게 자신의 소식을 전해 달라고 했다. 혹시라도 사고가 생긴다면, 그를 찾으러 갔다가 나마저 실종된다면, 네 아버지를 찾을 길이 없으니까.”
 거기까지 이야기한 루카스는 괴로운 표정이 되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키리히도 그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난 칠 년 동안 그가 얼마나 괴로웠으리라는 것을. 친우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하는 심정이 얼마나 괴로웠으리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토록 강인하던 아버지조차 실종되었는데, 루카스가 실종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으리라.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저 잠시 동안 동료였던 이와 헤어지게 된 것조차도 이렇게 답답한 심정인데.
 “알겠습니다. 이제 제가 왔으니 너무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키리히는 묵묵히 노인이 진정되길 기다렸다.
 
 
 
 
 
 9장 왕가의 문장
 
 
 
 
 키리히가 루카스를 만난 날로부터 대략 2개월 전의 일이었다.
 크레비츠에서 북쪽으로 칠 일 정도를 걸어가면 황무지 가운데 두 개의 높고 넓은 봉우리가 솟아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여인의 가슴처럼 생겼기에 브레스트 탑(Breast Top)이라 불리는 이 봉우리의 북쪽 경사면에는 전에는 발견할 수 없었던 동굴 하나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동굴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는 귀족들이나 사용할 법한 거대하고 화려한 천막이 쳐져 있었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천막의 내부에는 두 개의 흔들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그 흔들의자 위에는 두 명의 귀족이 앉아 있었다. 그 귀족 중 한 사람이 바로 사가모르 백작이었다.
 나체에 가까운 차림의 미녀 열 명의 손길에 느긋한 얼굴이 된 사가모르 백작이 입을 열었다.
 “잊혔던 왕가의 유물을 찾게 되었으니 이는 아이덴 왕실의 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오! 물론, 본인이 이곳에서 왕실의 문장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꿈에도 몰랐겠지만······. 그렇지 않소, 에머리히 남작?”
 “물론입니다. 어리석은 우리 아이덴 사람들은 저희 왕실의 문장이 여기에 박혀 있다는 것을 수백 년 동안이나 몰랐었으니······. 만약 공께서 저희 아이덴에 오시지 않았다면 영원히 발견되지 않았을 겁니다. 다시 한 번 살레바니아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도움이라니요! 원래 살레바니아와 아이덴은 형제 국이라 불릴 정도로 가깝지 않소. 당연한 일을 한 거요.”
 “아무튼 국왕 폐하께서도 이번 일을 아주 흡족하게 생각하십니다. 특히 공께서 데려오신 미녀들에 대해서는 더욱 흡족하게 생각하십니다. 웃음을 감추질 못하셨어요.”
 “하하! 그것참 다행이오!”
 두 귀족의 입가에 조금은 음흉한 웃음이 걸렸다.
 “국왕 폐하께서 최근 귀국의 입욕식 문화를 아주 기꺼워하신다는 소문 들어 보셨습니까?”
 “아름다운 문화는 널리 퍼져 나가는 것이 아니겠소!”
 “국왕 폐하뿐만이 아닙니다. 최근에는 아이덴의 귀족들 사이에서도 선풍적인 인기입니다. 저만 해도 최근에 털이 풍성한 여자 노예 두 명을 새로 구입했는걸요!”
 “자랑은 아니오만, 우리 살레바니아의 입욕식 문화는 아주 훌륭하다오. 미풍양속이지! 오랜 전통 끝에 다듬어지고 전해져 내려온 것이니까! 하지만, 그걸 더 재미있고 아름답게 즐기는 방법도 있소. 어떤 방식이냐 하면······.”
 두 귀족은 음흉한 웃음을 지은 채 이야기꽃을 피워 나갔다. 그들의 이야기가 깊어져 갈수록, 주변에서 시중을 들던 여인들의 얼굴이 붉어져 가고 있었다. ///
 두 귀족은 그녀들의 그런 반응에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즐거워하였다.
 그런 그들의 웃음이 갑자기 멈춰지는 일이 생겨 버렸다.
 천막을 들추고 누군가 들어선 것이다. 들어온 사람은 가죽으로 된 방어구와 칼을 착용하고 있는 기사였다.
 침중한 표정으로 천막 안에 들어온 기사는 아이덴 귀족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무슨 일이냐?”
 “사고가 생겼습니다.”
 “사고?”
 웃고 있던 아이덴 귀족, 에머리히 남작의 얼굴이 한순간에 바뀌어 버렸다.
 “전문적인 트레져 헌터가 필요하대서 지원해 주었다. 일꾼들이 필요하다고 해서 백여 명을 지원해 주었다. 마정석이 필요하다고 해서 구해다 주었다. 그런데도 사고가 생겨? 감히 국왕 폐하께서 정해 주신 기한을 어길 셈이냐!!”
 기사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더욱 떨어뜨렸다.
 “던전 안의 트랩이 갑자기 복잡하고 위험하게 변했습니다. 때문에 이전과 같은 수준으로 생각한 마법사들이 그만 실수를 하여 세 명이 죽었······.”
 “실수? 지금 실수라고 했나? 한시라도 빨리 폐하께 결과를 보고드려야 할 마당에 지금 실수라고!? 네 이놈!”
 죽은 이들에 대한 애도의 기미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사가모르 백작께서 계신 자리다! 그 자리에서 그따위 보고를 해서 내게 수치를 주다니! 네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그 말에 사가모르 백작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렇게 화를 내지 마시오. 무식한 평민들이 하는 일이 원래 그렇지 않소?! 게다가 겨우 세 명밖에 안 죽었다지 않소이까? 무지렁이 같은 놈들 몇 죽었다고 화를 내는 건 귀족답지 못한 일이오.”
 “그게 아니라······ 허허, 이거 참.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공의 마법사들이 이번 일에 빠진 것이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폐를 끼칠 뻔했어요.”
 “만약 내 마법사들이 있었다면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도 않았을 거요.”
 “하하! 그렇지요? 아무래도 살레바니아 사람들이 아이덴 사람들보다 뛰어나니······. 마법사라 해도 다르지 않을 테지요. 게다가 공께서 데리고 있는 마법사라면 두말할 필요가 없을 테지요!”
 외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자신의 나라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약간은 겸손하게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에머리히 남작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겸손의 정도를 넘어 굴복하는 수준으로 느껴졌다.
 두 귀족은 기사를 앞에 꿇어앉힌 채 살레바니아와 아이덴의 문화적 차이에 대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략적인 내용은 살레바니아가 얼마나 위대하고 아이덴이 얼마나 초라한지에 대한 것이었다.
 한참 동안이나 늘어진 잡담이 끝난 후에야 에머리히 남작이 기사에게 말을 꺼냈다.
 “그래도 시일이 늦춰지지는 않겠지?”
 “트랩의 수준이 높아져서 마법사들과 트레져 헌터들이 난색을 표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좀 더 신중하여야······.”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이런 미친놈을 봤나!”
 벌떡 일어선 에머리히 남작의 손에는 끝에 가시가 달린 채찍이 쥐어져 있었다.
 “지금도 폐하께서는 목이 빠져라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그런데 속도를 더 늦춘다고? 서둘러도 모자랄 판에? 네놈들이 미친 게로구나! 미친놈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는 살레바니아 속담이 틀린 말이 아니로구나! 이놈! 이놈! 이놈!”
 에머리히 남작은 채찍을 들어 기사를 내려쳤다. 머리, 어깨, 얼굴 가릴 것 없이 내려쳐서 기사의 몸이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어 버렸다.
 은근한 열기가 담긴 미소를 지으며 기사가 맞는 모습을 바라보던 사가모르 백작은 기사가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되어서야 에머리히 남작의 손을 잡았다.
 “이제 그만 하시오. 양탄자가 더러워졌지 않소?”
 그의 말대로 양탄자는 기사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
 “이, 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군요. 죄송합니다.”
 “별말씀을. 살레바니아건 아이덴이건 의욕이 없는 쓰레기가 여기저기에 널려 있기는 매한가지 아니겠소이까?”
 “너무 화가 나서 그만······. 이대로라면 폐하께서 정해 주신 시간에 맞추지 못할 터인데······ 정말 걱정입니다. 무슨 방법이 없겠습니까?”
 “하하하. 위대한 살레바니아라 하지만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방법이 있을 듯하오!”
 “역시! 살레바니아가 아이덴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이럴 때 가슴 깊이 느낍니다. 도대체 어떤 방법입니까?”
 사가모르 백작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굳이 명칭을 붙인다면 쓸모없는 쓰레기를 처리하는 방법······ 이랄까?”
 
 ***
 
 키리히와 루카스의 대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 몇 개월 전부터 귀족들이 얼씬거리기 시작했지. 그곳에 그분의 문장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 왕가의 유물이 묻혀 있다면서 던전을 발굴하기 시작한 거야.”
 “으음.”
 “일개 용병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지.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단다. 그런데 일 개월 전부터 일단의 사람들이 그곳으로 끌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끌려 들어간 사람들 중 던전 밖으로 나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이 죽었을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던 키리히의 얼굴이 굳어졌다.
 “다시 돌아가는 몇몇을 몰래 뒤따라갔다. 그들은 내가 잡혀 있었던 산으로 들어가더군. 감시가 심해서 더 이상은 들어갈 수 없었지.”
 “그래서······ 산적 소굴을 토벌하는 임무에 따라가셨던 것입니까?”
 “그렇지. 어떻게 된 일인지는 확인하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생각 외로 그들의 전력이 대단했던 게야. 잡힌 용병들 중 일부는 다시 어디론가 끌려갔다. 아마도 그들은······.”
 “그곳으로 끌려갔겠군요.”
 루카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키리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고맙습니다.”
 “거기에 가려는 게냐?”
 “가지 못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위험하다고 말릴 생각은 루카스에게도 없었다. 다만 혼자 보낼 수는 없었다.
 “나도 같이 가겠다.”
 “어르신······ 께서도 말입니까?”
 루카스의 실력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산적들에게 사로잡힐 정도라면 방해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키리히는 그를 말릴 수 없었다.
 그의 팔목을 굳게 잡고 있는 노인의 손에서는 칠 년간 친구의 소식을 알기 위해 전전긍긍했던 집념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같이 갑시다.”
 
 루카스와 함께 대장간에서 무기를 수선하고,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한 키리히는 다이앤의 주점 앞을 우연히 지나가게 되었다.
 “뭔가 일이 있는 게냐?”
 열리지 않는 주점의 문을 잠시 바라보던 키리히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위험한 길에 아직 회복되지도 않은 그녀를 데려갈 수는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아버지의 행방을 알고 싶은 키리히에겐 그녀가 회복되길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음. 이렇게 경비가 심하지는 않았었는데······.”
 루카스와 함께 그곳에 도착한 키리히는 삼엄한 경비가 펼쳐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산채가 무너졌다는 걸 알게 된 게야. 아니면 발굴이 거의 끝나 가고 있거나······.”
 수심에 가득 찬 루카스와 함께 키리히는 밤이 되길 기다렸다.
 날이 어두워지고 깊은 밤이 되었지만 경비병들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늘어나고 있었다.
 “좀 더 기다려 보자. 시간이 지나면 분명 틈이 생길 게다.”
 조급함을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려는 키리히의 팔을 루카스가 잡았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그렇다고 귀족들과 부딪힐 수는 없지. 저들이 살레바니아의 귀족이라면 이렇게 대놓고 활동하지는 못해.”
 아이덴의 귀족이라는 말이었다.
 “아이덴 땅에서 아이덴의 귀족과 싸우는 것은 결코 좋지 않은 일이야.”
 경험 많은 루카스의 조언이었다. 마음이 급한 키리히였지만 그의 말을 듣기로 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름을 숨기고 계셨습니까?”
 이제야 떠올랐다는 듯이 키리히가 물었다.
 “그건······ 만약을 대비해서였다.”
 “만약······ 이라니요?”
 “네 아버지는 꽤 유명한 사람이었지. 때문에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나 귀족이라는 것들은······ 네 아버지를 중심으로 인해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지.”
 “그렇다면······ 혹시?”
 “그래. 난 버그허트의 실종이 귀족들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와 함께했던 나도 얼굴과 이름을 바꾸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 대신······ 너라면 관심을 보일 듯한 조각상에 내 이름을 새겨 이곳저곳에 팔곤 했지.”
 “그랬······ 습니까.”
 오랜 세월 동안 마음을 졸이며 기다려 왔을 루카스의 심정이 키리히의 마음에 다시 한 번 스며 들어왔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서서히 동이 트려 하고 있을 때, 루카스가 몸을 일으켰다.
 “가자.”
 “지금······ 말입니까?”
 “이 시간이 가장 졸리는 시간이다. 그리고 해가 뜨기 직전은 가장 어둡게 느껴지는 시간이지.”
 키리히와 루카스는 먼 곳으로 돌아서 브레스트 탑으로 올라갔다. 봉우리의 끝에 올라서, 단단한 바위에 준비해 온 밧줄을 동여매었다.
 “내가 먼저 내려가마.”
 “아닙니다. 제가 먼저 내려가겠습니다. 혹여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동굴의 앞을 지키고 있는 경비병들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을 확인했지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다면 무력이 강한 키리히가 내려가는 것이 옳았다.
 “좋다. 먼저 내려가거라.”
 키리히는 조심스럽게 줄을 잡고 소리 없이 봉우리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명이 뜨기 직전의 어둠 속에 키리히와 루카스가 은밀하게 밧줄을 타고 내려갔다.
 탁!
 내려서며 작은 소리가 났지만 졸고 있던 병사들이 깨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키리히는 가만히 손을 뻗어 그들을 기절시켰다.
 “흐읍!”
 작은 신음과 함께 쓰러지는 그들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 동굴 벽에 살짝 기대어 놓았다. 누가 보더라도 잠든 것으로 보일 터였다.
 잠시 후, 루카스도 내려와 둘은 조심스럽게 동굴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동굴 안으로 사라지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아무도 없는 허공중에 누군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역시······.”
 모습을 드러낸 자의 얼굴은 얼마 전 산채에서 사가모르 백작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대외적으론 사가모르 백작가의 집사로 알려진 그는 키리히와 루카스가 들어간 던전을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둘 것이라 생각했나?”
 그는 주변에 무언가를 설치하며, 그 중앙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원형의 큰 바탕 안에 기묘한 기호와 같은 것이 무수히 새겨지기 시작했다.
 
 동굴 안의 통로는 거의 일직선으로 쭉 뻗어 지하를 향하고 있었다. 곳곳에 횃불이 빛을 발하고 있어 움직이는 데 불편한 점은 없다.
 “다행이야. 동굴 안은 지키는 사람이 없어서. 만약 있었다면 무척 곤란했을 게야.”
 키리히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굴 속을 걷다가 어떤 문장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날개를 활짝 편 매가 거대한 츠바이핸더를 움켜쥐고 있는 문장이었다.
 “사백 년 전의······ 그분의 문장이다. 다들 아이덴 왕실의 문장이라고 잘못 알고 있지만······.”
 루카스의 말에 키리히는 그의 목에 걸려 있던 펜던트를 끄집어냈다. 상당히 오래된 듯이 보이는, 작은 츠바이핸더 모양의 펜던트였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키리히는 다시 그것을 옷 안으로 집어넣고 걸음을 옮겨 나갔다.
 걸어가는 동안 여러 가지 흔적들을 볼 수 있었다. 그중에는 설치되었던 함정들을 해제한 흔적도 있었다.
 “잠깐, 잠깐만!”
 루카스는 그 흔적에 흥미가 생겼는지, 앞장서서 걷는 키리히를 제지했다.
 “이 자국은······ 그리 오래된 자국이 아닌데······. 길게 봐야 대략 20년? 그 정도 시간 안에 설치된 함정이다.”
 “20년밖에 안 된단 말입니까?”
 루카스의 말에 흥미가 생긴 키리히가 걷던 걸음을 되돌려 함정을 살폈다. 사백 년 전의 사람이 잠든 곳에, 이십 년 전에 설치된 함정이 있다는 말은, 이곳을 찾은 누군가가 있다는 말이었다.
 “혹시······ 아버지의 일행이 설치한 것 아닙니까?”
 “네 아버지가 무슨 이유로 함정을 설치하겠느냐?”
 루카스의 말대로 유물을 얻으러 간 버그허트가 함정을 설치할 일은 전혀 없어 보였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으니, 일단 안으로 계속 들어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래야겠지······.”
 루카스는 미심쩍어 하면서도 힘겹게 다리를 폈다.
 꽤 많은 거리를 걷자, 쭉 뻗어 있던 동굴도 서서히 방향을 틀기 시작하더니, 얼마 후에는 이리저리 비틀린 굴곡을 보이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앞에 누군가가 있다고 해도, 우리가 먼저 발견될 일은 없을 것 같구나. 음?”
 “······.”
 작은 소리로 말을 하며 걷던 루카스는 갑자기 멈춰 선 키리히의 등에 부딪히고 말았다.
 “무슨 일이냐?”
 “······.”
 키리히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루카스는 이내 키리히가 멈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도 키리히가 보고 있는 것을 보았으니 말이다. ///
 “어떻게······ 이런······ 일이······.”
 루카스의 눈앞에 커다란 폭발의 흔적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한쪽 구석에 허름한 복장을 한 사람들의 시체가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폭발 때문인지 팔다리가 찢겨 나가, 몇 사람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런 사람들의 처참한 시체가 쓰레기 버려지듯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다.
 “이······ 이 썩을 놈들이······.”
 루카스는 말을 잊지 못했다.
 산채에서 산적을 가장하며 사람들을 잡았던 이유가 이제 밝혀졌다. 던전을 빨리 탐사하기 위해 이들을 희생시킬 작정이었다.
 “······.”
 키리히는 무거운 안색으로 희생자들의 시체에 다가갔다. 꽤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 시체에서 구더기와 같은 것들이 우글거리고 썩은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키리히는 가만히 죽어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공포에 떨고 있는 표정이었다.
 “이 사람들······ 자기들이 죽을 걸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무심하게 들리는 키리히의 속에 억눌린 무언가가 있음을 루카스는 알 수 있었다.
 동굴은 길었다. 그 긴 동굴에 수많은 트랩들이 파헤쳐지거나 부서져 있었다.
 그리고 그 흔적들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시체의 무덤이 있었다.
 쓰레기처럼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시체들을 보며 루카스와 키리히의 안색은 더욱 무겁게 굳어 가고 있었다.
 걸으면 걸을수록 함정의 규모는 커지고 있었고, 그에 비례하여 시체의 숫자도 많아지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죽음의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일단의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 중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고 있는 자들이 소리를 질렀다.
 “죽고 싶은 거냐! 어서 앞으로 걸어라!”
 수십 명의 기사가 용병 복장의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함정이 있을 것이 분명해 보이는 곳으로 걸어가라 강요하고 있었다.
 “나와 같이······ 산채에 잡혔던 사람들이다.”
 루카스의 조용한 말을 들으며 키리히는 등 뒤의 츠바이핸더를 앞으로 내렸다.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마찬가지라면! 차라리 네놈들과 싸우다 죽겠다!”
 희생 양으로 끌려온 사람들은 대략 30여 명, 그들 중 반이 용병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수적으로도 실력으로도 기사들에게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는 무기 하나 없었다.
 입고 있는 방어구들이 약간씩 있었지만, 기사들의 검을 막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것들이었다.
 용기 있게 앞으로 나선 용병의 말에 기사들의 뒤에 서 있던 귀족의 얼굴이 스산하게 변했다.
 “웃기는 놈이로군. 죽여라. 되도록 잔인하게.”
 2개월 전 사가모르 백작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에머리히 남작이었다.
 무기도 들지 않은 사람을 찔러 죽이는 것이 기사들이 말하는 명예에 어긋남을 알면서도, 기사들은 서슴없이 칼을 끄집어냈다.
 “무슨 짓이냐!”
 그 모습을 본 키리히가 검을 들고 앞으로 걸어가는 것을 본 루카스가 작게 소리를 질렀다.
 “보고만 있으란 말입니까?”
 “저자는······ 귀족이다. 귀족을 죽이면 평생 쫓겨 다녀야 한단 말이다! 게다가 기사들이 많지 않느냐!”
 키리히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대로 숨어 있길 바라십니까?”
 “······.”
 “그런데 어쩝니까. 손바닥이 근질거립니다.”
 아무 말도 못하는 루카스를 남겨 둔 채 키리히가 앞으로 나섰다.
 “무기도 없는 사람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두고 기사라 하는 겁니까?”
 “누, 누구냐!”
 등 뒤에서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에머리히 남작이 깜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이곳에 들어온 거지!?”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끌고 와서 죽음으로 몰아넣는 사람을 두고 귀족이라 하는 겁니까?”
 기사들이 검을 빼 들고 에머리히 남작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키리히의 걸음은 전혀 느려지지 않았다.
 “당신들 때문에 죽은 이들의 시체조차 쓰레기 버리듯 버려두는 당신이 과연 사람입니까?”
 기사들이 자신을 둘러싼 후에야 에머리히 남작의 안색에 안심의 기운이 어렸다.
 “흥! 비천한 평민 놈이 뭘 안다고! 쓰레기니까 쓰레기처럼 버린 것이다. 애초에 평민이란 것들은 귀족들을 위해 존재하는 거다!”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 비천한 평민의 발악을!”
 말과 함께 키리히의 검이 에머리히 남작의 앞을 가로막은 기사들을 덮쳐 나갔다.
 콰앙!
 거대한 폭음과 동시에 기사 하나가 갑옷과 함께 반으로 잘려 나갔다.
 투캉! 퍼억!
 쇠가 부딪히는 타격 음과 함께 동굴 벽에 처박힌 기사는 뇌수를 주르르 흘리며 쓰러졌다.
 째재쟁!
 키리히의 츠바이핸더를 막은 기사들의 검 몇 개가 와르르 깨어져 나감과 동시에 세 명의 목이 동시에 떨어졌다.
 키리히의 검이 움직임을 보일 때마다 한 명 이상의 기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사신과 같은 움직임으로 기사들 사이를 파고들며 그들의 목숨을 취했다.
 사람의 생명을 취함에 한 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 키리히의 모습에 에머리히 남작의 입에서 신음 같은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사, 사신······.”
 더 이상 싸움이라 불릴 수 없었다. 이것은 학살이었다. 잔혹하기만 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죽음을 목전에 뒀던 용병들과 사람들의 눈에는 한없이 통쾌한 장면이기도 했다.
 “잘한다! 죽여 버려! 더 처참하게!”
 “다 죽여 버리라고!”
 불과 몇 분의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수십 명의 기사는 모조리 싸늘한 시체로 변했다.
 갑옷과 함께 찢겨 죽은 처참한 그들의 사이에 에머리히 남작만이 홀로 남아 벌벌 떨고 있었다.
 “어떨 것 같습니까? 쓰레기에게 죽는 기분은?”
 “가, 감히 이 몸을 죽일 셈이냐. 나는······ 왕가의 명을 받고······.”
 쫘악!
 “크악!”
 키리히는 에머리히의 따귀를 후려쳤다.
 “아픕니까?”
 “가, 감히! 이 몸을······”
 쫘악!
 “크흑!”
 에머리히 남작은 뺨을 가린 채 비틀비틀 뒷걸음질을 쳤다.
 “아픕니까?!”
 “네, 네놈이!”
 쫘악!
 “컥!”
 점점 강해진 타격에 급기야 남작은 동굴 바닥에 뒹굴고 말았다.
 “아프냐고 물었습니다.”
 “다, 당연히······.”
 연이은 타격에 남작에게 약간이나마 남아 있던 귀족이라는 자부심도 죽어 버렸다. 키리히는 그런 남작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짜아악!
 “크윽!”
 키리히에게 잡힌 남작에겐 쓰러질 자유조차 없었다.
 “아픈 게 좋습니까?”
 남작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짜아아악!
 “그걸 알면서!”
 짜아악!
 “왜 남을 아프게 합니까!”
 짜아악!
 “그걸 알면서!”
 짜아악!
 “왜 남을 죽입니까!”
 수없이 반복되는 따귀 세례에 남작의 얼굴은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었다.
 키리히가 남작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러자 비틀거리는 남작이 털썩 땅에 주저앉았다. 공교롭게도 그가 주저앉은 곳은 용병들이 있는 바로 앞이었다.
 나머지는 당신들의 몫이라는 듯, 키리히가 물끄러미 용병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
 갑자기 나타나 기사들을 몰살시켰다. 그리고는 귀족의 따귀를 때리는 상상도 못할 행동을 하는 키리히를 용병들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고, 고맙소!”
 뒤늦게 자신들의 분노를 깨달은 용병들은 죽은 기사들의 검을 집어 들고 남작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네, 네놈들이 감히······ 어, 어쩔 셈이냐!”
 “······.”
 “나, 날 살려 주면 금화를 주겠다. 100골드! 아, 아니! 천 골드! 만 골드라도 주겠다!”
 용병들에게 둘러싸인 남작은 비명 같은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의 말을 귀담아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분노에 눈이 벌게진 사람들에게 남작의 말은 개소리에 불과했다.
 “끄아아아악!”
 죽음을 알리는 처절한 비명.
 용병들의 손길에는 그동안 느껴 왔던 분노가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었다.
 “우린······ 쓰레기가 아니란 말이야!!”
 분노의 절규였다.
 남작은 자신이 쓰레기처럼 취급하던 자들의 손에 수십 조각으로 찢어진 채로 죽었다. 그러고도 분을 풀지 못한 용병들은 아직도 펄떡이는 그의 시체를 짓밟고 그 위에 오줌을 갈겼다.
 남작의 시체는 이제까지 보아 왔던 그 어떤 시체보다 처참하고 구역질나는 모습으로 버려졌다.
 귀족으로 태어나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면서 평민들을 쓰레기 취급해 왔던 에머리히 남작은, 그렇게 쓰레기와 같은 모습으로 죽었다.
 “크하하하! 통쾌하다! 통쾌해!”
 “에이, 더러운 놈! 자알 죽었다! 정말 잘 죽었어!”
 “이딴 놈 때문에······ 이런 놈 때문에······.”
 웃음을 터트리는 자도 있었다.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복수할 기회를 주셔서······.”
 마침내 진정을 한 용병들이 키리히에게 몰려왔다.
 “죽는 것은 겁나지 않았지만, 저놈을 못 죽인다는 것이 한스러웠는데······ 이렇게 원을 풀게 되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용병들은 키리히의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보고 있으면서 말을 낮추지 않았다. 한 사람이 무언가를 말하려다 잠시 멈칫하더니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이런······ 우린 아직 은인의 이름도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소! 이름을 가르쳐 주시오. 나 비록 무도한 놈이지만, 은혜를 모르는 놈이 되긴 싫소.”
 “······.”
 키리히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을 지켜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에게서 이름을 듣기는 어려울 듯이 보였다. 보다 못한 루카스가 앞으로 나섰지만,
 “켈! 똑똑히 새겨듣게! 이 청년의 이름은······.”
 “어르신!”
 키리히의 목소리에 제지당했다.
 “이름을 밝힐 만한 일이 아닙니다.”
 왜 말리냐는 루카스의 시선에 대한 답변이었다.
 “왜 이름을 밝힐 일이 아닙니까!”
 “그보단 시간이 없습니다. 출구에 있던 병사를 기절시켜 두었는데 빨리 나가지 않으면 깨어날 겁니다. 나가실 생각 없습니까?”
 동굴 안에 있던 기사들은 일부에 불과했다. 밖에는 더 많은 병사와 기사들이 있었다.
 “아니면 귀족을 죽였다고 떠들고 다니고 싶으신 겁니까? 저는 그럴 생각 없습니다.”
 그 말에 용병들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알겠습니다.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서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요.”
 용병들도 수긍을 하고서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찰나였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던전 전체에 울려 퍼졌다.
 [흥! 그렇게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누구냐!”
 목소리는 던전의 이곳저곳에서 동시에 들리는 듯 느껴졌다.
 [네놈이 이곳으로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행스럽게도······ 신께서 내게 복수의 기회를 주는구나!]
 목소리의 근원을 알 수는 없었지만, 말투를 보아 아이덴 사람이 아닌 살레바니아 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법사다. 그것도 고위의······.”
 루카스의 말을 듣자 키리히의 머리에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마법의 힘에 의해 사라졌던 사가모르 백작.
 “당신이······ 사가모르 백작을 구해 간 마법사입니까?”
 [후후. 바보는 아니로구나. 그렇다고 죽음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백작님을 그렇게 만들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지는 않았겠지?]
 누가 죽어 달라고 쉽게 죽어 줄 생각이 없는 키리히였다. 상대가 설령 뛰어난 수준의 마법사라 하더라도 말이다.
 “누가 당신 뜻대로······!”
 [이제 그만 죽을 시간이다!]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가득 스며들어 있었다. 그리고 보다 더 거대하면서도 많은 부분을 울리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스 퀘이크!]
 우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목소리가 신호라도 되는 듯 서서히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이건······ 도대체 무슨!”
 흔들리기 시작한 땅 때문에 잠시 비틀거렸지만 이내 균형을 잡은 키리히의 눈에, 던전의 천장에서 흙먼지가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마법이라는 것을 볼 기회가 별로 없는 용병들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 위험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몰랐다.
 “마, 마법! 지진을 일으키는 마법이다! 어서 빨리 입구로!”
 그나마 상황을 파악한 것은 역시나 루카스. 그의 말에 용병들과 키리히는 정신없이 입구 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호오?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하지만 던전 밖의 마법사는 입구를 향해 달리는 이들을 철저히 비웃고 있었다.
 후두두두둑!
 그의 말에 증명이라도 하는 듯, 던전의 천장에서 떨어지는 먼지 속에 돌멩이들이 섞여 떨어지는가 싶더니 사람 머리보다 더 큰 바윗덩이까지 떨어지기 시작했다.
 “으아악!”
 그 바윗덩이에 맞은 사람 하나가 쓰러지며 처절한 비명을 토해 냈지만 아무도 그를 돌보지 못했다. 그럴 시간이 없었다. 던전의 입구까지는 너무나 멀었기 때문에······.
 “끄허억!”
 굴곡진 길을 틀기 위해 던전의 벽에 손을 짚은 한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던전의 벽이 쩌억 갈라지며 그의 손을 집어삼킨 후, 다시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다.
 “이이이이익! 제기랄!”
 벽 사이에 손이 끼어 신음을 토해 내던 그 용병은 고통에 겨워하다가 검을 들어 자신의 손목을 잘라 버렸다.
 “끄으윽!”
 자신의 손목을 자른 용병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다시 달리기 시작했지만, 허망하게도 떨어지는 바윗덩이에 깔려 버렸다.
 “벤슨! 어, 어어어어엇! 으아악!”
 그를 아는 듯, 이름을 부르며 용병 하나가 달려갔지만, 갑자기 바닥에 구멍이 뚫리더니 그 사이로 떨어져 버렸다.
 잠시 후엔, 달려가던 용병들을 망연자실케 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쿠르르르.
 던전의 천장에서 아주 거대한 바윗덩이 하나가 떨어져 그들이 나갈 길을 가로막아 버린 것이다. 체력이 약한 루카스를 부축하고 있던 키리히조차 나갈 길이 사라져 버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죽어라! 마법의 위대함을 느끼며! 크하하하!]
 정체를 알 수 없던 목소리가 멀어져 감과 동시에 땅을 뒤흔드는 진동이 절정에 달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벽을 틈틈이 메우고 있던 횃불들이 떨어지는 흙더미에 하나둘 묻히기 시작했다.
 “위험하다!”
 점점 어둠에 젖어들기 시작하는 던전의 안을 바라보고 있던 키리히는 누군가 자신을 밀쳐 내는 것을 느끼며 바닥을 뒹굴었다.
 마침내 모든 횃불이 꺼져 버렸다. 어둠에 젖은 던전 안에는 여전히 격렬한 진동이 계속되고 있었고, 그 어둠의 이곳저곳에서 격렬한 비명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으아아아악!”
 
 
 
 
 
 10장 어둠 속에서
 
 
 
 
 “으으으음!”
 “크, 클라우디! 정신이 들어? 클라우디!”
 온몸을 격렬하게 흔드는 듯한 소리를 들으며 클라우디아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온몸에 힘이 빠진 상태였지만 간신히 눈을 뜨는 것만은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힘겹게 눈을 뜬 클라우디아는 그녀의 절친한 친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지켜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 이앤?”
 “그래! 나야! 다이앤이야! 정신이 들어? 정신이 드냐고!?”
 어깨를 부여잡고 소리를 지르는 다이앤 덕분에 머리가 지끈 아파져 왔지만, 클라우디아는 억지로나마 웃음을 지었다.
 “괜······ 찮······ 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이 계집애야! 8일 동안 기절해 있었던 주제에! 난······ 난······ 네가 죽는 줄로만 알았다고! 흐흑!”
 한참 전부터 눈시울을 붉히고 있던 다이앤이 결국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난······ 괜찮······ 으니까.”
 클라우디아는 자신을 부여잡고 울음을 터트리고 있는 다이앤의 어깨에 간신히 손을 올렸다.
 “다······ 이앤······.”
 “······흐흑······ 말해.”
 “아······ 파.”
 “흐흑······ 응?”
 “아······ 파······ 어깨······.”
 클라우디아의 말에 다이앤은 자신이 그녀의 상처 난 어깨를 부여잡고 있음을 알고 깜짝 놀라며 손을 떼어 냈다. 그 와중에 어느새 울음을 그친 다이앤을 보며 클라우디아가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미······ 미안해.”
 “아냐······ 괜찮아······ 그러니까······ 이젠······ 미안하단 말······ 하지 마.”
 “으응.”
 “그런데······ 혹시······ 못 봤어? 남자······ 하나······?”
 “남자?”
 “응······ 내 목숨을 구해 준······ 사람······.”
 “광전사? 그 사람이라면······.”
 “아니······ 그 사람 말고······ 나와······ 같이 다니던······.”
 “키리히라는 사람?”
 “응······ 그 사람.”
 다이앤의 얼굴이 붉어지며 거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사람이 어떻게 네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야! 너 때문에 목숨을 건진 사람이지!”
 “무슨······ 소리야?”
 “네 목숨을 구해 준 광전사는 지금 옆방에서 치료를 받고 있어! 그리고 네 덕분에 목숨을 건진 사람은 쫓아내 버렸어! 그 사람 때문에 네가 다쳤잖아!”
 갑자기 몸을 일으키려 한 클라우디아의 이마가 살포시 일그러졌다.
 “클라우디!”
 한 달 동안 절대 움직이지 말고 안정을 취하라는 약초사의 말이 아니더라도,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는 클라우디아가 움직이는 것은 위험해 보였다.
 다이앤은 필사적으로 일어나려는 자신의 친구를 말렸지만, 클라우디아는 끝내 자신의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간신히 아물고 있던 상처가 다시 터져 피가 흘러나왔지만, 클라우디아의 얼굴은 별다른 고통을 느끼지 않는 듯이 보였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야······. 나와 광전사······ 시밀을 구한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인데!”
 “뭐, 뭐라고?”
 “나와 시밀을 쓰러트린 녀석을······ 그 사람이 쓰러트렸다고! 그런데······ 왜······ 그 사람을 쫓아내······?”
 “크, 클라우디······ 나, 난······.”
 “······.”
 잠시 표정 없는 눈으로 다이앤을 바라보던 클라우디아가 말했다.
 “다이앤······ 부탁할게······ 그 사람······ 찾아와 줘.”
 “아, 알았어!”
 다이앤은 클라우디아를 남겨 둔 채 황급히 뛰어나갔다.
 ‘뭐, 그렇게 오해할 만한 상황이니까······. 조금 기분이 나빴을지도 모르지만······ 오해는 풀면 되니까. 마테우스의 검은 손이라면 금방 찾을 테니까.’
 클라우디아는 자신의 친구가 금방 돌아오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 그녀의 친구가 돌아오지 않자,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선 불안감이 서서히 감돌기 시작했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서야 그녀의 친구가 다시 들어왔다.
 “그 사람은······?”
 “크, 클라우디······.”
 ‘아니겠지······.’
 왠지 조심스럽게 느껴지는 친구의 기색에도 클라우디아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그 사람은······ 어디에 있어?”
 “그게······ 클라우디······ 그 사람······ 사라져 버렸어. 검은 손의 정보망을 총동원했지만······ 찾지 못했어!”
 “뭐······ 라고?”
 그렇지 않아도 핏기가 없던 클라우디아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
 
 똑. 똑. 똑. 똑.
 어두웠다. 너무나 어두웠다.
 작은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만이 적막하고 조용한 던전의 침묵을 깨트리고 있었다.
 “쿠, 쿨럭! 쿨럭쿨럭!”
 그 소리와 함께 호흡기를 가득 메운 먼지의 답답함에 의식을 되찾은 키리히였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던전이······ 무너졌었지.’
 잠깐 동안의 기억의 단절. 하지만 정신을 집중하자 이내 그때의 기억들이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급박하게 달렸던 사람들, 그보다 더 빠르게 무너졌던 던전.
 ‘나만······ 살아남은······ 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누군가 그를 밀쳐 냈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벽에 머리를 부딪쳤는데 갑자기 바위 하나가 머리에 떨어져 정신을 잃었었다.
 “쿨럭쿨럭쿨럭!”
 또다시 답답함이 몰려와 기침을 토해 낸 키리히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눈을 감아 버렸다.
 “후으으으읍!”
 조심스러운 심호흡과 함께 정신을 집중했다. 흐름을 느끼기 위하여. 어린 시절의 그 악몽 같았던 기억들이, 지금의 키리히에게는 가장 절실한 기억이 되어 있었다.
 똑. 똑. 똑. 똑.
 작은 물방울이 낙하하는 흐름이 느껴졌다. 움직이고 있는 것일수록 흐름을 파악하기 쉬웠다.
 키리히는 좀 더 정신을 집중했다.
 후드드드득!
 부스러져 떨어지는 흙 알갱이의 움직임에 이어, 전체적인 던전의 모습이 서서히 그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힘겹게 경련하고 있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살아 있습니까?”
 생명체가 분명한 그것을 향해 키리히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손을 내저어 그 물체를 만져 보았다.
 형체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사람의 하반신은 거대한 바위에 깔려 있었다.
 가는 경련과 함께 죽어 가고 있었다.
 “어, 어르신!?”
 치료할 수단도 방법도 없음에 고통이나 줄여 주고자 목을 더듬던 키리히는, 그 피부에서 느껴지는 세월에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어르신!”
 죽어 가는 사람은 다름 아닌 루카스였다.
 “키······ 키리히······ 냐?”
 “어르신!”
 “살아······ 있었구나. 잘······ 되었다.”
 꺼져 가는 노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선 입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대야 했다. 그런 키리히에게 불현듯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기억을 잃기 직전, 자신을 밀쳐 냈던 사람. 그 사람의 감촉이 왠지 모르게 익숙하게 느껴졌다. 마침 루카스가 누워 있던 자리도 그곳과 가까운 곳처럼 느껴졌다.
 “설마······ 어르신이 저를······?”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나보단······ 네가······ 살아야······ 쿨럭!”
 말을 하던 루카스의 입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흘러나와 키리히의 귀를 적셨다. 그와 함께 비릿한 내음 키리히의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왜······ 왜······ 그런 짓을!”
 오우거에게 밟히고도 멀쩡할 정도로 강한 체력을 지닌 키리히다. 거대한 바위에 깔린다 하여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키리히를 대신해, 연약한 루카스가 바위에 깔려 버렸다.
 “왜······ 저를······!”
 그보다 더 답답한 것은, 그와 루카스가 만난 지 불과 열흘도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항상 퉁명스럽게만 대답하던 키리히였다. 그런 놈을 뭐가 예쁘다고 대신 구한단 말인가.
 키리히에게 루카스라는 노인은, 그저 아버지의 행방을 알려 줄 사람에 불과했다.
 “쿨럭······ 왜······ 냐하면······ 넌······ 너의 가문의 사람들은······ 나의······ 꿈이었······ 으니까.”
 하지만 루카스에게 키리히는 다른 의미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원망스럽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남은 생에 유일한 희망이기도 한.
 “내 선조는······ 그분을······ 베일런트님을 따르던······ 사람 중 하나였다. 어려웠지만······ 힘들었지만······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고······ 기록하셨더구나······. 선조께서는······ 평생을······ 베일런트님의 흔적을 찾기 위해······ 노력하셨다. 후손들에게도······ 그걸······ 강요하셨지. 우습게도······ 쿨럭!”
 루카스가 베일런트 베오포르트에 대해 얽힌 비사를 알고 있던 이유.
 “내 아버지도······ 내게······ 강요하셨지······ 그분의 흔적을······ 찾으라고······. 난······ 싫었다······. 과거의 사람에게······ 얽혀서······ 시간을······ 인생을······ 낭비하긴······ 싫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어르신! 이제 그만 말하십시오.”
 루카스의 입에서 한마디가 흘러나올 때마다, 생기가 흐트러지고 있는 듯이 보였다. 키리히가 막았지만 루카스는 필사적이라 해야 할 정도로 말을 계속하려 했다.
 “나도······ 되고······ 싶었다······. 그런······ 빛과 같은······ 사람이······. 하지만······ 20년이 지난 후에야······ 나란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가니······ 가족들은······ 모두······ 죽어 있더구나······. 귀족들에게······ 돈을 많이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때부터는······ 나도 그분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루카스의 숨결이 점차 가빠지기 시작했지만, 키리히는 그의 말을 차마 막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죽을 것이 확실한데, 그의 마지막 말이나 들어주자는 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버그허트에게서······ 네 아버지에게서······ 그분의 흔적을 발견했을 때······ 뛸듯이 기뻤다······. 하지만······ 이내 실망했었다······. 내가 생각했던 모습과는······ 달랐으니까······. 큰 것을 보기보다는······ 작은 것을······ 주변의 사람들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것이 실망스러워 자주 설득하곤 했었지만······ 듣지 않더구나. 쿨럭쿨럭쿨럭!”
 격렬하게 기침을 토해 내는 루카스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죽을 것같이 보였다. 그렇게 루카스는 마지막 말을 짜내듯이 토해 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도······ 나쁘지······ 않아······ 멋있게······ 느껴지는구나······. 너도······ 너도······ 네······ 아버지······ 처럼······ 멋지게······ 살아······ 다······ 오. 후회······ 없이······ 멋······ 지······ 게······.”
 결국, 루카스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목을 감싸 안고 있던 키리히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 가는 루카스의 피부를 느끼면서도 한동안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못했다.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에······.’
 키리히는 자신의 가슴속을 거칠게 채워 오는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었다.
 만난 지 겨우 일주일 정도밖에 되지 않은 사람의 죽음이었다. 그저 잠시 동안의 동행일 뿐이었다.
 ‘도대체 왜······.’
 그런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이렇게 이상한 기분을 느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저 아버지와 관계된 사람이 죽었다는 이유로 이런 기분에 젖어들 이유는 없었다.
 특별한 유언을 남긴 것도 아니다. 그저 후회 없이, 멋지게 살라고 이야기했다. 원래 그렇게 살아가려 마음먹었던 키리히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후우우우.”
 답답한 기분에 키리히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키리히는 억지로 그 기분을 털어냈다.
 ‘살아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한 마당에······.’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스스로 흐름이라 이름 붙인 그것을 느끼려 애를 썼다.
 기분이 이상해서인지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기분을 제공한 루카스를 살며시 원망도 했지만 이내 그만두고 기분을 진정시켰다.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그 흐름이라는 것을 느낀 것은, 키리히의 노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른 무엇인가의 움직임이 느껴진 때문이었다.
 사사사삭!
 정적에 빠져 있는 곳이어서 그런지, 그것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이건······.’
 키리히는 벌떡 일어섰다. 흐름 속에 느껴진 그것의 형태는 인간이 아니었다. 납작하고도 둥근, 그렇지만 어지간한 사람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사각사각사각사각.
 살아 있던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루카스와 마찬가지로 가늘게 경련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가늘게 경련하던 그의 위에 납작한 무언가가 합쳐지는가 싶더니 이내 무언가를 갉아 먹는 소리가 들려왔다.
 “끄으으으!”
 힘겨운 신음도 들려왔다. 나타난 무언가는 죽어 가는 사람을 갉아 먹고 있었다.
 “멈춰!”
 키리히는 큰 소리를 지르며 그 행동을 막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시각이 차단된 상태에서 흐름에만 의지해서는 빠르게 움직일 수 없었다.
 사람이 갉아 먹히는 그곳에 도달하기도 전에, 비명은 멎어 버렸다. 가늘게 경련하는 느낌조차도 사라져 버렸다.
 그가 죽었음을 키리히는 깨달았다.
 “크하압!”
 뒤늦게 그곳에 도착한 키리히가 츠바이핸더를 들어 그 납작한 무언가를 내려쳤다. 분노한 키리히의 기운이 츠바이핸더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태앵! 바지직!
 하지만 키리히의 예상과는 달리, 납작한 것은 부서지지 않았다. 납작한 그것을 지탱하던 무언가가 으스러지는 것은 느껴졌지만, 츠바이핸더가 내려쳐졌던 곳은 멀쩡했던 것이다.
 “찌지지지직!”
 다리가 부러져 고통스러운 것인지 바닥에서 버둥거리고 있는 그것을 향해 또 한 번의 공격이 가해졌다. 조금 전보다 훨씬 더 강인한 힘이 실린 공격.
 파지직!
 그제야 단단한 무언가를 파고드는 느낌과 함께, 납작한 것이 부서져 내렸다.
 “후우.”
 생각 외의 단단함에 잠시 당황했던 키리히가 한숨을 내쉬다가 몸을 굳혔다.
 ‘포위당했다!’
 방금 키리히가 죽였던 것과 비슷한 형태의 무언가가 키리히를 사이에 두고 포위하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지지지지지!”
 거기에 더해 바닥의 갈라진 틈을 따라서 한 마리씩 새롭게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사사사삭!
 “하압!”
 주변을 포위한 그것들이 일제히 덮쳐드는 움직임에 맞춰 키리히의 츠바이핸더가 거친 바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후우우우!”
 키리히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끈적끈적한 액체가 묻어 있는 츠바이핸더를 내려놓았다. 그의 주변에는 거의 오십여 마리에 달하는 그것들이 으스러진 채로 나뒹굴고 있었다.
 갈라진 틈에서도 더 이상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이놈들은······ 뭐지?”
 그것들의 껍질을 깨기 위해서는 키리히조차도 꽤 힘을 써야 했다. 게다가 그것들의 움직임은 재빠르기까지 했다.
 그런 녀석들을 오십여 마리나 상대하였으니 아무리 키리히라도 힘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조심스럽게 그것들의 형태를 확인한 결과.
 “바퀴벌레?”
 타원형의 딱딱한 등껍질을 가시가 달린 열 개가량의 다리가 받치고 있었다. 크기가 어지간한 사람만 하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영락없는 바퀴벌레의 모습이었다.
 “이놈들이 튀어나왔다는 것은······?”
 약간은 어이없는 생각을 하던 키리히의 머리에 어떤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인가?’
 원래 이곳에서 살았음직한 괴물들이다. 그 괴물들이 지나다니던 통로가 있다는 말도 된다.
 ‘어쩌면······ 지상으로 통하는 길이 있을지도······.’
 실낱같은 희망이 생김을 느낀 키리히는 주변을 돌아다니며 죽어 버린 용병들의 옷가지 등과 흙더미 속에 묻혀 있는 횃불들을 모았다.
 화르륵!
 횃불에 불이 붙었다. 어둠에 눈이 적응되었던 키리히는 아주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조금 복잡한 눈으로 손에 들린 부싯돌을 바라보았다.
 필요할지도 모른다면서 루카스가 챙겨 주었던 부싯돌이었다. 잠시 부싯돌을 바라보던 키리히는, 모아 놓은 것들을 들고 거대한 바퀴벌레들이 튀어나왔던 구멍을 향해 몸을 집어넣었다.
 
 통로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좁은 곳이었다.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좁았다. 그 와중에 마주친 몇 마리의 거대 바퀴벌레들을 키리히는 상당히 힘겹게 죽이고 계속 통로를 기어갔다. 횃불이 밝히는 약한 빛과, 흐름에 모든 것을 의지하면서 말이다.
 ‘넓어진다.’
 다행스럽게도 비좁기만 했던 통로가 조금씩 넓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키리히가 제대로 걸을 수 있을 정도의 통로로 변했다.
 통로는 계속 넓어지고 있었다. 급기야 오우거 세 마리가 나란히 지나갈 정도가 되었다.
 ‘어째서······?’
 키리히가 보았던 거대한 바퀴벌레들이 지나다니기에는 지나치게 거대한 통로였다. 그렇지만 인간의 손길이 닿은 것 같지는 않았다. 통로의 벽이 너무 울퉁불퉁했던 것이다.
 마치 단단하고 거대한 무언가가 억지로 그 몸을 들이밀다가 남은 흔적처럼 보였다.
 ‘설마······.’
 키리히는 아닐 것이라 생각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거대 바퀴벌레들이 언제 튀어나올지를 모르기 때문에 주의에 주의를 거듭하면서 말이다.
 키리히의 예상을 또 한 번 어긋난 것이 있다면, 그렇지 않아도 넓다고 생각했던 통로가 거의 세 배가량으로 넓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의외의 흔적들이었다. 싸움의 흔적이었다.
 “이것들은······ 도대체······.”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오는 광경 앞에서 키리히는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
 오십 마리만으로도 꽤 힘을 써야 했던, 단단하기가 강철보다 더 뛰어나고, 덩치에 맞지 않는 재빠른 움직임에 고생해야 했던 그것들의 사체가 주변에 널려 있었다.
 그것도 수천 마리나!
 횃불의 불빛이 미치는 끝까지 벌레들의 사체로 장식되어 있었다.
 무슨 이유로 이 대단한 벌레들이 떼죽음을 당한 것인지 조금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인간의 손길에 닿은 채로 죽어 있었으니까.
 강렬한 화염에 껍질이 녹아내린 채로 죽어 있는 것도 있었고, 화살이 깃만 보일 정도로 깊숙이 머리에 박혀 있는 것도 있었다.
 단검에 찔린 것들과 둔중한 것에 으깨어진 것들. 그리고 아예 반으로 잘려 나간 것들도 있었다.
 그 모든 흔적들이 이들에게 인간의 손길이 닿았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인적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이 깊은 지하의 어둠 속에서!
 이런 흔적이 있다는 것은, 이 벌레들을 죽인 사람들이 들어왔을 또 다른 통로가 있음을 예상케 만들었지만 키리히는 기뻐할 수가 없었다.
 ‘혹시······?’
 키리히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걸으며 벌레들의 사체 사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한참이나 걸어갔을 때, 키리히의 눈에 들어오는 무언가가 보였다.
 동굴의 벽에 기대어 있는 백골 하나였다. 그 해골의 손에는 괴상한 통을 부착한 거대한 석궁이 쥐어져 있었다. 다른 손에는 반으로 부러진 단검이 하나 들려져 있었다.
 키리히는 무거운 안색으로 걸음을 계속 옮겼다.
 또 하나의 해골이 발견되었다. 그 해골의 손에는 아무것도 쥐어져 있지 않았다. 대신 그의 앞에는 고풍스럽고 어딘가 신비로워 보이는 지팡이 하나가 바닥에 꽂혀 있었다.
 그 지팡이를 중심으로 어떤 강렬한 충격파가 퍼져 나간 것처럼 보였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지팡이를 중심으로 백여 마리의 벌레가 껍질이 완전히 녹아 버린 채로 죽어 있었다. 강렬한 화염이 자신들을 죽였다고 웅변하는 것처럼.
 앞으로 앞으로 계속 전진해 갔다.
 이번에 발견된 백골은 앞서의 그것들보다 월등히 큰 골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 옆에는 오우거의 머리통만 한 추를 앞에 단 쇠막대기 하나와 거기에 맞은 듯, 으스러진 벌레들의 사체 수십 개가 널브러져 있었다.
 듬성듬성 흩어져 있는 백골들을 애써 무시하며 키리히는 계속 걸었다.
 ‘아니길······.’
 가슴 속에 스멀스멀 차오르는 불길한 예감을 억지로 털어 내려 애쓰면서.
 끝없이 이어질 듯하던 벌레들의 사체 행렬도 마침내 그 끝을 보였다.
 그 끝에 거대한 철벽과 비슷한 것이 키리히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헛!”
 키리히가 깜짝 놀란 이유는, 그저 벽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 사실은 벽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벌레들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거대한 벌레였다.
 너비만 해도 12셀가량 정도는 되어 보였고, 8셀 정도는 되어 보이는 천장에 거의 닿을 듯한 체고(體高)를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몸길이는 무려 30셀(m)가량.
 진정으로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괴물이 죽어 있었다.
 “이런 놈을······ 어떻게······.”
 더욱 놀라운 것은, 키리히가 온 힘을 다해 내려쳐도 흠집조차 남지 않는 껍질을 가진 이 괴물이 정확히 반으로 갈라져서 죽어 있다는 것이었다. 하늘에서 거대한 검이 떨어져 이 벌레를 반으로 잘라 버린 것처럼.
 “설마······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닐 거야! 대지 가르기는······ 그걸 쓰면······!”
 차마 그 뒷말을 잇지 못한 키리히가 떨리는 손으로 괴물이 갈라진 절단면을 더듬었다. 그 흔적은 키리히에게 너무나 익숙한 흔적이기도 했다.
 “아닐 겁니다! 그렇지요? 분명 아닐 겁니다!”
 비명 같은 외침을 토해 내며!
 다행스럽게도!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옮긴 키리히의 예상과는 달리, 괴물의 머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대신하듯 날개를 편 매 모양의 펜던트 하나만이 괴물의 머리에 걸려 있었다.
 
 키리히는 아버지의 강건한 신체를 안다. 칼로 찌르면 오히려 칼날이 부러질 정도로 강인한 피부. 뼈 하나 제대로 갉아 먹지 못하는 벌레들이 아버지의 몸을 갉아 먹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만약 그가 죽었다면, 온전한 시신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겁니까!”
 불길한 예감이 어긋났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행방은 또다시 미궁으로 빠져 버렸다.
 “그러고 보니······.”
 키리히는 자신의 목에 걸린 것을 끌러 내렸다. 그의 목에서 나온 츠바이핸더 모양의 펜던트. 양손에 두 개의 펜던트를 쥔 키리히의 뇌리 속에 과거의 어떤 대화 한 토막이 떠올랐다.
 
 “이 비밀 공간 보이지? 만약 뭔가 전할 말이 있다면 여기에 넣어 두도록 하마!”
 
 “절 납득시키지 못하면······ 알아서 하십시오!”
 키리히는 살며시 떨리는 손으로 활짝 벌려져 있는 매의 발톱에 츠바이핸더의 손잡이를 쥐여 준 채 두 바퀴를 돌렸다.
 끼리릭!
 나무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벌려져 있던 매의 발톱이 오므라들며 츠바이핸더의 손잡이를 강하게 쥐었다.
 그 상태로 키리히는 매의 배를 살짝 어루만졌다.
 카라락!
 그러자 매의 입이 활짝 열리며 그 안에서 둘둘 말린 종잇조각 두 개가 튀어나왔다.
 키리히는 그중 하나를 펴 보았다.
 깨알 같은 글씨로 장문의 글이 써져 있었다.
 
 [아마도, 넌 날 원망하고 있겠지? 어린 너를 버려두고 그대로 떠나 버렸던 날 말이다.
 하지만 이 못난 아비는 가만있을 수가 없었단다. 루카스 씨에게서 베일런트라는 우리 선조의 이야기를 알게 된 순간 말이다.]
 
 또박또박한 글씨와 담담한 어투.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내용은 키리히가 한숨을 쉬게 만들 만한 이야기였다.
 
 [너도 알 것이다. 우리 가문의 남자들 중 사십을 넘긴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이토록 강인한 몸을 가진 주제에 40이 다 되어 가면 반드시 병이 들어 죽어가는 묘한 내력이었지. 다들 너무 강렬한 수련법의 부작용이라 생각했었다. 나도 루카스 씨에게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그럴 것이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처음 이 베일런트 투술을 만들었다는 베일런트라는 우리 선조는 달랐다는구나. 최소한 80살이 될 때까지도 멀쩡하게 살았으며, 그가 사용하던 투술은 우리가 사용하는 것보다 월등히 강한 위력을 보였다더구나.
 그뿐만이 아니라, 단 한 번만 사용해도 죽을 지경에 빠지는 대지 가르기를 몇십 번이나 연이어 사용하고서도 멀쩡했다고 들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는 반드시 과장되고 미화되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루카스가 들고 온 책은 내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사백 년 전의 그 책은 베일런트라는 우리 망할 조상을 옆에서 모셨던 루카스의 조상이 직접 기술한 책인데, 거기에 너무나 생생하고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었단다.
 이쯤 되면 너도 화가 날 게다.
 후손들은 단명하게 만들어 놓고 정작 본인은 오래오래 잘 먹고 잘살았다는 그 조상에 대해서 말이다. 아버지도 정말 화가 났다.
 하지만 이미 죽은 사람에게 뭐라고 할 수야 있겠느냐. 어쩌면 집안 대대로 내려온 건망증이 다시 도졌을 수도 있는 문제고······.
 흠흠. 하여간 아버지는 그 인간에게 양심이 있다면 죽기 전에 해결책을 남겨 뒀으리라 생각하고 그 인간이 잠들었다는 그곳으로 간다.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라.]
 
 그저 잠시 다녀오겠다는 간단한 종류의 글이었다. 아마도 떠나기 전 어린 키리히에게 전해 줄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키리히의 마음에도 원망이 적게 남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또······ 깜빡하신 겁니까?”
 키리히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다음 종이를 펼쳐 들었다. 이번에는 별로 편안하지 않은 상황에서 기록한 듯, 찢어진 부분도 있었고 글씨도 고르지 않았다. 심지어는 번진 부분까지 있었다.
 
 [그놈의 무덤이라는 곳을 찾긴 찾았는데······ 나보다 먼저 찾은 놈들이 있더구나. 티탄버그라는 놈들이다. 이놈들은 강철 같은 등껍질에 빠르고, 날아다닐 수도 있어서 대단히 상대하기 어렵단다. 지상에서는 오우거보다도 더 까다로운 놈들이지.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수백 년 전에 모습을 감춘 녀석들이기도 하지.
 그런데 이곳 지하엔 이놈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더구나. 어림잡아 수천 마리 이상이나 말이다. 사실, 그놈들은 별로 문제가 안 된다. 이 아비가 꽤 능력이 있어서 시간만 좀 투자하면 그놈들을 모조리 죽여 버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이 지하의 깊은 곳에 살고 있는 티탄버그 퀸이라는 녀석이다.
 보통 티탄버그는 알을 못 낳아서 그냥 박멸해 버리면 그만이지만, 삼백 년 이상 먹은 티탄버그는 일 년에 한 번씩 수백 개의 알을 까기 때문에 제때 처리하지 않으면 주변이 티탄버그로 뒤덮여 버린다. 게다가, 이놈들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크기가 커지고 껍질도 단단해지기 때문에, 과연 이 아버지의 칼도 먹힐 것이라 자신하진 못하겠다.
 베일런트라는 사람이 잠든 곳으로 통하는 통로도 그놈이 가로막고 있더구나.
 아들아.
 어쩌면 이 아버지와 동료는 모두가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녀석들도 모두 동의를 했다. 나와 함께 이곳에 뼈를 묻자고.
 이놈들 중, 단 한 마리라도 이곳을 빠져나갔다가, 시간이 지나면 세상은 이놈들 천국이 될 테니 한 마리도 빠져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 때문에 놈들이 나가지 못하도록 함정을 깔아 두었다.
 이제 아비는 친구들과 함께 저놈들을 없애러 간다. 언젠가 네가 들어올 길이니 이 아비가 먼저 청소해 둬야겠지. 평생 널 괴롭히기만 했으니, 이젠 제대로 된 아버지 노릇 한 번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느냐. 아들아. 사랑한다. 부디 오래오래 살아 다오!
 아 참, 부탁할 것도 하나 있는데······.]
 
 눈시울이 핑 돌았다. 그 아래에 무언가 더 이야기가 적혀 있었지만, 더 이상은 볼 수가 없었다.
 종잇조각에 적혀 있던 것처럼, 평생 그를 괴롭히기만 하던 아버지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키리히에게 모질고 혹독한 훈련을 시켰던 아버지였다. 어린 자신을 놔두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아버지였다. 때문에 많이도 원망했다.
 하지만 이젠 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시켰던 혹독한 훈련들이 살아남는 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를.
 그가 훌쩍 떠나 버린 것은 바로 키리히를 위해서라는 것을.
 그리고······.
 그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알 수 없는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키리히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또 행방을 감췄다 이겁니까!”
 문제는, 찾았다고 생각했던 아버지가 또 모습을 감췄다는 것.
 가끔 나무를 팔면 볼 수 있는 자식과 부모 사이의 모습을, 자신도 한 번쯤 누려 보기를 바랐다. 그런데, 힘들게 찾아온 곳에는 아버지는 없고, 어처구니없는 내용을 담고 있는 편지 두 장만이 덜렁 남아 있다.
 “아무래도······ 한 방으론 안 되겠습니다!”
 클라우디아가 들었다면 기겁할 소리를 하며 키리히는 거대한 티탄버그 퀸의 사체를 넘었다.
 그 뒤로도 무수히 많이 깔린 티탄버그들의 사체를 지나서,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내는 육중한 철문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거대한 철문의 중앙에 작은 홈이 나 있었다. 합쳐진 펜던트를 집어넣는다면 정확히 맞을 듯한 홈이었다.
 키리히는 그 홈에 펜던트를 집어넣었다.
 화아악!
 홈에 정확히 들어간 매의 조각상이 갑자기 밝은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활짝 펴져 있던 날개가 접혀졌다. 그리고 다시 펴졌다. 그렇게 매의 조각상이 날개를 퍼덕였다.
 끼기기기기긱!
 그와 동시에 빗장이 열리는 듯한 소리가 철문에서 들려오고.
 쿠웅!
 거대한 소리와 함께, 물샐틈없어 보이던 철문에 실낱같은 틈이 생겼다.
 키리히는 그 철문의 양쪽에 손바닥을 대고 힘껏 밀었다.
 끼이이이익!
 철문이 열리고, 갑자기 환한 빛이 밝혀졌다.
 오랜 세월이 지난 흔적인지 뽀얀 먼지가 쌓여 있는 대전이 펼쳐졌다.
 그 대전의 끝에는 돌로 만들어진 커다란 의자 하나가 있었다.
 의자의 끝에는, 빛의 산란에 밝게 빛나는 츠바이핸더를 한쪽 손에 들고, 다른 손엔 은빛의, 투박하게까지 보이는 가면을 든 창백한 사람 하나, 죽은 지 사백 년이 넘었음에도 썩지도 않는 사람 하나가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고요하게 앉아 있는 그의 전신에서는 알 수 없는 위압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크윽!”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알 수 없는 위압감이 키리히에게 무릎 꿇으라 강요하는 것만 같았다. 거대한 산이 키리히의 어깨를 짓누르는 듯이 느껴졌다.
 키리히는 이를 악다물었다.
 “내가······!”
 필사적으로 다리에 힘을 주었다.
 단 하나!
 무릎을 꿇지 않기 위해서. 어찌 무릎을 꿇을 수 있을까!
 “후손들은 내버려 둔 채, 혼자만 오래오래 잘살았다는 당신에게!”
 치아에서 으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입술을 따라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키리히는 움츠러들었던 어깨를 떨쳤다.
 “무릎이라도 꿇을 성싶습니까아아아!”
 가슴이 터져 나갈 듯한 그 외침에, 대전 안에 가득 내려앉아 있던 먼지 더미들이 자욱하게 일어나는 순간.
 한쪽 손에 가면을 쥐고 있던 시체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저벅. 저벅.
 시체가 걸어올수록 키리히의 어깨를 짓누르는 압력은 거세게 변해 갔다.
 키리히의 전신도 불끈 부풀어 올랐다. 시체의 걸음이 점점 다가오자 그조차도 버티기 힘이 들었다.
 “크윽!”
 언데드라도 되는 것처럼, 생기 없는 걸음을 천천히 옮긴 시체는 압력에 저항하는 것만으로도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키리히의 바로 앞까지 걸어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오른손에 들려 있던 은빛의 가면.
 시체의 손길에 따라 은빛의 가면이 키리히의 얼굴에 서서히 덧씌워졌다.
 가면의 시체의 손에서 떨어지는 것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파스스스스.
 시체의 몸이 무너지더니 먼지로 화해 버렸다.
 
 ...
 ..
 .
 그로부터 3년의 세월이 흘렀다.
 
 2권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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