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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토리얼만 1만년 했다 1-1권

2019.09.11 조회 16,352 추천 97


 # 프롤로그
 
 튜토리얼.
 그것이 내가 끌려온 세상을 부르는 이름이었다.
 스스로를 오성신의 사자라 부른 천사들은 나를 비롯한 아홉 명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은 오성신께서 예언한 구원자들입니다.》
 다가올 침공에 맞서 인류를 지킬 아홉 명의 왕들.
 《이제부터 여러분은 튜토리얼에서 각자 어떠한 조건들을 만족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왕이 되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튜토리얼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보내든, 현실의 시간은 거의 흐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말씀드리면, 튜토리얼에서 천 년을 보내셔도 현실에선 1년밖에 안 지납니다. 물론 튜토리얼을 천 년이나 할 리는 없으니··· 실제로는 그 이하라고 보셔야겠지요.》
 튜토리얼에선 나이를 먹지 않는다고 덧붙이는 천사들.
 더불어 튜토리얼에선 몬스터와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다행히 죽어도 부활할 수는 있단다.
 《몬스터는 튜토리얼을 나간 이후에도 여러분이 맞서 싸워야 할 적입니다.》
 이후로도 몇 가지 조언을 해 준 천사들은 우리를 떠났다.
 빌어먹을 상황이었다.
 납치당한 것만으로도 미칠 노릇인데, 몬스터와 싸우라니.
 하지만 우리는 곧 정신을 수습하고, 협력해서 역경을 헤쳐 나갔다.
 3년이 지났을 무렵, 고블린들 군락을 궤멸시키고 오크와 싸울 만큼 강해졌다.
 5년이 지났을 무렵, 우리는 오크 왕국을 겨우 멸망시켰다.
 10년이 지났을 무렵, 폭군으로 군림한 오우거를 쓰러트렸고,
 20년이 지났을 무렵, 온몸이 뼈로 이루어진 6성급 몬스터 본 드래곤을 사냥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우리들 중에 왕이 나왔다.
 “나는 금색의 왕이다.”
 금색의 왕은 바로 떠나지 않았다.
 조금 더 강해지기 위해, 그리고 우리를 돕기 위해 함께 싸웠다.
 그의 지휘하에 차례차례 친구들은 왕으로 각성했다.
 “나는 백색의 왕이야.”
 “나는 청색.”
 “나는 적색이다.”
 오직 나만 왕이 되지 못했다.
 “성도빈, 넌 왜 왕이 못 되지?”
 나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지쳤다.
 시간이 의미 없이 흘러가자 모두가 나를 포기했다.
 “미안해요, 성도빈.”
 “우리는 나가야 해. 천사들의 말로는··· 조금 있으면 몬스터들이 지구를 침공한대.”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 우리 가족과 나라를 지켜야 한다.”
 나는 원망하지 않았다.
 그들의 사정을 이해하니까.
 입장이 바뀌었다면 나 역시 그랬으리라.
 “나가고 싶다면 얼마든지 나가.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주라.”
 “말해라.”
 “내가 튜토리얼에 남는 동안 우리나라 좀 도와줘.”
 내가 애국자인 것은 아니었다.
 다만 부모님과 형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친구들이 우리나라를 지켜 준다면 부모님과 형 역시 무사할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렇게 하마. 성도빈, 네 도움도 많이 받았으니까.”
 “그럼 나중에 보자.”
 친구들은 그렇게 떠나갔다.
 오직 나만 왕이 되지 못한 채 튜토리얼에 남아 싸움을 계속했다.
 《백 년이 지났습니다, 성도빈. 당신만 아직 왕이 되지 못했군요.》
 “그러게. 오성신인지 뭔지 하는 작자들이 사람 잘못 본 거 아니야?”
 백 년 동안 쌈박질을 했더니 친구들보다도 강해졌다.
 그런데도 아직 왕이 되지 못했다.
 도대체 왕이 되기 위한 조건이 뭔지 모르겠다.
 진짜로 내가 왕이 될 수 있는 거 맞아?
 《무엄하군요. 오성신은 절대적인 분들! 그분들의 예언이 틀릴 리가 없습니다.》
 “그러냐? 근데 나도 답답하다. 왕이 되는 조건도 모르잖아? 너희가 알려 주면 참 좋을 텐데.”
 《조건은 우리도 모릅니다. 당신 스스로 알아내야 합니다. 그게 왕이 되기 위한 조건······.》
 “알았다. 내가 알아서 왕 될 테니까 신경 꺼라.”
 언젠가는 나도 왕이 될 수 있겠지.
 그렇게 믿으며 싸웠다.
 《3백 년이 지났습니다. 아직도 멀었나요?》
 “좀 닥쳐 봐! 알아서 한다니까!”
 점점 초조해졌다.
 《5백 년이 지났습니다.》
 세월이 내 숨통을 조르는 것만 같았다.
 《성도빈, 천 년이 지났습니다.》
 “씨발······.”
 어느 순간에 이르렀을 때.
 나는 모든 것을 놓아 버렸다.
 《성도빈, 멀었나요? 2천 년이나······.》
 “썅, 알 게 뭐야!? 될 대로 되라고 해―!”
 싸우고, 먹고, 자고.
 반복되는 삶에 염증을 느꼈다.
 이맘때쯤, 나는 깨어 있는 것도 귀찮아서 억지로 잠을 잤다.
 그러다 보니 한 가지 특이한 기술(?)이 생겨 버렸다.
 《세상에. 성도빈, 그거 알아요? 당신 잠들면서 싸웠어요.》
 “···농담이겠지?”
 《농담 아니에요. 쿨쿨 잘만 자면서 검으로 화염거인을 동강 내 버렸다구요! 와,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하지? 술 취해서 구사하는 권법이 취권이니, 당신의 검법은 잠검이라고 해야 하나요? 아님 몽검?》
 “닥쳐 좀.”
 나를 거칠게 쏘아붙이고 다시 눈을 감았다.
 긴 세월 동안 잠만 잤다.
 인간의 한계라 불리는 9성급에 올라서 더 이상 강해질 수도 없을 지경.
 정신을 차린 것은 가뭄에 콩 나듯이 아주 조금이었다.
 여전히 나는 왕이 되지 못했다.
 《튜토리얼에 정신 보호 기능이 없었다면 당신은 진즉 미쳐 버렸을 거예요. 하지만 그래도 힘들 텐데··· 괜찮아요?》
 “차라리 미쳤으면 좋겠다.”
 미쳤으면 더 이상 괴롭지도 않을 텐데.
 그런데 이놈의 정신 보호는 내가 미치는 것도, 알츠하이머에 걸려 기억을 잃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어라?》
 오랜만에 나를 보러 온 천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성도빈, 당신 왕이 됐어요!》
 “그런 걸로 놀리면 재밌냐?”
 얘가 나를 놀리네.
 새로 나온 희망 고문인가?
 《아니, 진짜요! 마침내 흑색의 왕이 됐다구요!》
 천사의 놀란 얼굴을 보고서야 나도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흑색의 왕’이 됐음을.
 《이제 지구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성도빈. 지금껏 고생했어요. 솔직히 저도 믿기지 않지만, 드디어 당신도 볕 들 날을 맞이하네요.》
 “대체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야?”
 《만 년입니다.》
 “진짜로?”
 《진짜로요. 리얼리.》
 “거짓말하면 오성신은 천하의 썩을 연놈들이다.”
 《진짜라니까 왜 오성신을 들먹거려요!?》
 “허, 허허허······.”
 어이가 없었다.
 내가 만 년이나 살았다니.
 거의 수천 년을 잠에 취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네.
 잠깐, 이럼 지구는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야?
 《지구 시간은 10년이 좀 넘게 지났습니다.》
 “졸지에 10년간 행방불명된 불효자가 됐군.”
 사망자로 처리됐어도 이상할 게 없다.
 《당신 친구들은 지구에서 자기만의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당신도 얼른 돌아가서 몬스터들의 침공에 대비하세요.》
 “한 가지만 묻자.”
 《뭐죠?》
 “지구를 침공한 몬스터들은 너희들이 만든 거냐?”
 《아닙니다.》
 “그럼?”
 《지구를 공격하려는 세력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종말의 제국’이라고 칭하는 자들이죠. 그들이 몬스터를 만들었습니다. 저희는 그들이 만든 몬스터들을 훔쳐 여러분을 교육시켰을 뿐이에요. 》
 “종말의 제국······.”
 《놈들에게서 지구를 지켜 주세요.》
 “그래, 그래야지.”
 부모님과 형은 살아 있겠지.
 가족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럼 바로 돌려보내 줘.”
 《잠깐만요. 그전에 당신에게 줄 혜택이 있습니다.》
 “혜택?”
 《당신은 여태껏 몰랐지만, 지금껏 몬스터를 사냥하면서 공적치가 쌓였습니다. 자애로운 오성신께서는 당신의 지난 노고를 높이 사셔서, 몇 가지 혜택을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졸라게 고맙다, 씨발.”
 《고운 말 쓰세요!》
 잊지 않고 타박한 천사가 키보드 자판을 치는 것처럼 손가락을 놀렸다.
 내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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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다음 중 한 가지를 보상으로 고를 수 있습니다.]
 [1. 천사의 동행]
 [2. 전설 등급의 무기]
 [3. 전설 등급의 스킬]
 [4. 이계상회의 주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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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계상회?”
 《각 차원을 돌며 진귀한 물건들을 사고파는 상인들입니다. 우리도 그들과 커넥션을 가지고 있으며, 당신 역시 지구로 돌아가면 그들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주식이라면 그거 맞지? 회사의 주인이 되는 개념.”
 《맞습니다. 1%라고 하면 그리 커 보이지는 않겠지만, 주주가 되는 만큼 매년 배당금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호오.”
 《하지만 저는 1번인 천사의 동행을 추천합니다.》
 “왜?”
 《제가 당신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
 “4번을 선택한다!”
 《1초도 고민하지 않았어!?》
 “당근이지! 주주가 되면 숨만 쉬어도 돈방석에 앉잖아!”
 이계상회가 얼마나 큰 회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일 안 하고 편히 돈을 버는 갓수가 될 기회였다.
 포기하면 병신 아닌가?
 《알겠습니다. 흥, 당신 혼자 잘 먹고 잘살겠다는 거지요?》
 천사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딴에는 삐졌다는 것을 귀엽게 티를 내려는 것 같은데, 만 년이나 얘를 봐서 그런지 이제는 얼굴 보는 것도 지겹다.
 “아, 그런데 너. 이름이 뭐였더라?”
 《유리엘입니다! 이미 수십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이젠 슬슬 기억하시죠?》
 “귀찮아. 만 년이나 살아서 기억 용량에 한계가 왔어.”
 《으으, 내가 이런 인간을 만 년 동안이나······!》
 “저런, 너도 만 년이나 살아서 늙었는데 이를 갈면 안 좋아. 늙어서 잇몸 나빠지면 고생해.”
 《저는 바깥에서 살아서 만 살이 되진 않았거든요? 가끔씩만 당신 보러 왔을 뿐이거든요? 천사치고는 아직 파릇파릇하거든요?》
 “이상, 조선 시대보다 오래 살았던 자칭 이팔청춘 천사의 발언이었습니다.”
 《끄으으!》
 뒷목 잡는 천사가 꽤나 재밌지만 장난은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됐고, 어서 여기서 내보내 줘.”
 《하아, 알겠습니다. 어서 빨리 가서 몬스터들을 무찌르세요.》
 “어벤져스부터 볼 거다! 마지막 편을 못 봤어! 표까지 예매했는데 너희들 때문에 끌려왔다고!”
 《타노스는······!》
 “스포일러하지 마, 이년아!”
 
 
 # 1화 막가파 귀환자
 
 군산.
 쇠락한 항구 도시인 이곳에선 때아닌 패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죽어, 이 새끼야―!”
 “너나 죽어, 씹새끼야!”
 조폭 간의 항쟁이었다.
 한쪽은 마약을 들여온 조직, 다른 한쪽은 마약을 유통하는 조직.
 두 손을 잡고 쎄쎄쎄 하기로 한 조직은 마약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어제의 동맹도 잊고 미친 듯이 혈전을 벌였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쩌저저저저적―!
 하늘에서 검은 균열이 열렸다.
 너무 큰 소리였기에 누구도 무시하지 못했다.
 패싸움이 멈추고 모두가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봤을 때, 누군가 중얼거렸다.
 “···던전 게이트?”
 던전 게이트.
 그것은 몇 년 전부터 나타난 이상 현상이었다.
 이계의 몬스터들이 침공하는 통로.
 “으아아아악!”
 “튀어! 모두 튀어!”
 방금까지 피 튀기는 싸움을 벌였던 조폭들은 멀찍이 도망쳤다.
 사시미 들고 날뛰는 조폭도 맨손으로 인간을 찢어 죽이는 몬스터를 당해 내지는 못하기 때문.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도망치지 마라! 약한 놈이면 우리가 잡으면 된다!”
 소수였지만, 조폭에 소속된 각성자들도 몇 명 있었다.
 헌터가 될 자질이 있음에도 인류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을 거부하고, 사회의 기생충이 된 자들이었다.
 길드의 헌터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들도 각성자인 만큼 가장 약한 1성급 몬스터는 사냥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들 앞에 나온 것은 몬스터 따위가 아니었다.
 “뭐야. 여긴 또 어디야?”
 사람이었다.
 남루한 행색, 그러나 꽤나 젊은 남자였다.
 조폭들은 당황한 나머지 방금 전까지 싸웠던 사실도 잊고 서로를 황망히 돌아봤다.
 “어이, 던전에서 사람이 나오는 경우도 있냐?”
 “던전을 공략하러 들어간 사람이라면 나올 수도 있지.”
 “병신아, 여기에 원래 던전 게이트가 있었냐? 저놈이 갑툭튀한 거잖아.”
 의논한다고 몰랐던 영문을 알 리가 없다.
 한편 던전 게이트에서 나온 남자, 아니 성도빈은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의 모습에 새삼 감동했다.
 ‘사람이다.’
 튜토리얼에서 천사들을 보기는 했지만, 자신과 같은 사람은 수천 년 만에 만난다.
 모르는 사람이라도 반가울 수밖에.
 “흠, 그런데 다들 어째 한 인상파씩 하는구만. 연장도 들고 있고 말이야. 혹시 조폭?”
 조폭을 앞에 두고도 주눅 든 기색이 전혀 없다.
 조폭들은 기가 퍽퍽 막혔지만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던전 게이트에서 나온 정체불명의 인간 아닌가?
 그런데 정체불명의 인간이 뜬금없는 말을 했다.
 “음, 초면에 이런 부탁을 하긴 미안한데 차 좀 태워 줄래요? 서울까지 가야 하는데 길을 몰라서.”
 바다가 있는 걸로 보아 이곳은 서울이 아니었다.
 문제는 성도빈이 땡전 한 푼 없는 신세라는 거지.
 지갑은 있지만, 현금은 아예 없고 카드는 유효기간이 다했다.
 한마디로 택시도 못 탄다.
 “이야, 저거 완전 미친놈이구만. 야, 총 있냐?”
 “아,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총기의 소유가 엄격히 금지된 나라지만, 이 자리에 있는 조폭들은 만약을 위해 권총을 밀수했다.
 “잘 가라, 미친놈.”
 정신에 뭔가 이상이 있는 놈이었다.
 그런 놈이 제대로 된 각성자일 리가 없지.
 방아쇠를 당기자 총구가 불을 뿜었다.
 타앙!
 모두들 이마에 구멍이 난 채 너부러진 시체를 예상했다.
 하지만,
 “요즘 조폭은 다짜고짜 총부터 갈기나? 이거 참······.”
 “어떻게!?”
 조폭들이 깜짝 놀랐다.
 머리에 구멍이 나기는커녕 검지와 중지 사이에 총알이 잡힌 게 아닌가?
 그야말로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일이 현실에서 벌어진 것이다.
 “총알의 속도가 대략 음속이었나? 빛살날개보다는 느리네.”
 5성급 몬스터 빛살날개.
 총알이 아무리 빨라도 음속의 열 배로 날아다니는 암살 몬스터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리고 성도빈은 그런 놈들을 무수히 잡아 봤다.
 ‘현재 내 마력이··· 흐음, 여전히 9성급 수준이군.’
 성도빈은 살짝 혀를 찼다.
 무려 만 년이나 튜토리얼에서 굴렀는데도 천 년 전과 다를 게 없다니.
 만 년의 세월이 무상하다.
 ‘하긴, 인간은 9성급이 한계라고 했으니까 당연한 건가.’
 그 이상의 경지는 사실상 없다고, 천사 유리엘도 말했었다.
 ‘스킬은 8성급에서 멈춰 있고.’
 각성자는 마력의 경지에 비례해 스킬을 습득한다.
 9성급의 경지에 오른 성도빈이었지만 스킬은 8성급 전용까지밖에 습득하지 못했다.
 9성급 스킬을 구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상관없지. 어차피 8성급만 해도 웬만한 놈들은 죽일 수 있고.’
 웬만한 놈들엔 당연히 눈앞의 조폭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쩝, 사람은 오랜만에 만나는데 패야 한다니 참으로 애석하구만.”
 내뱉은 말과 달리 성도빈의 얼굴엔 애석한 기색이 전혀 없다.
 귀찮다는 기색만 옅게 깔려 있지.
 조폭들이라고 해 봤자 어차피 일반인.
 드물게 각성자들도 있는 것 같지만 죄다 허접이었다.
 진짜 실력을 발휘할 필요도 없다는 의미.
 ‘그래도 혹시 모르니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까?’
 튜토리얼에서 만 년을 사는 동안 다종다양한 스킬을 습득한 성도빈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얻지 못한 그만의 스킬도 존재했다.
 ―측정안.
 대상의 능력을 수치로 표시하는 측정 스킬.
 조폭들 사이에 있는 각성자들의 능력이 조목조목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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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도형]
 ―종족: 인간
 ―성향: 악
 ―마력: 1성급
 ―잠재력: 80%
 ―포지션: 탱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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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전은 없었다.
 다른 놈들도 이놈처럼 고만고만한 수준.
 ‘3성급 마력 정도면 충분하겠군.’
 
 ***
 
 잠시 후, 군산 앞바다의 항구엔 곡소리들만이 가득했다.
 “아이고, 내 허리······!”
 “으아악! 잘못했어요! 때리지 말아 주세요!”
 사람 잡는 조폭들이 자존심도 내팽개치고 엉엉 울었다.
 성도빈의 얼굴에 짜증이 솟구쳤다.
 “씨발, 우는 놈들은 저 앞바다에 수장시켜 버린다.”
 울음이 뚝 그쳤다.
 조폭들이 성도빈의 살기를 느끼고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린 것이다.
 실제로 성도빈이 힘 조절을 안 해서 몇 명이 바다로 풍덩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성도빈은 쥐뿔도 개의치 않았다.
 ‘다 큰 성인이라면 알아서 빠져나오겠지, 뭐.’
 참고로 지금 계절은 겨울이었다.
 성인이고 나발이고 바다에 빠지면 동사하기 딱 좋다!
 게다가 요즘 바다는 그냥 춥기만 하지 않았다.
 “꾸어어어어엉!”
 파도를 뚫고 나오는 거대한 뱀!
 그것이 4성급 몬스터, 씨 서펜트라는 사실을 깨달은 조폭들은 사색이 됐다.
 반면 성도빈은 눈을 반짝였다.
 “오오, 육회!”
 소고기 비슷한 맛이 나는 씨 서펜트.
 튜토리얼에서 굴렀을 때도 가끔씩 별미로 먹었다.
 굴러다니는 콘크리트 조각을 주운 성도빈이 마력을 듬뿍 담아 던졌다.
 6성급 마력이 담긴 짱돌.
 다음 순간, 조폭들은 보이지 않는 절규를 내뱉었다.
 콰아아아앙!
 머리가 사라진 씨 서펜트의 거대한 동체가 힘없이 쓰러진 것이다.
 바다에 빠진 조폭들로 만찬을 즐기러 온 몬스터가 일용한 양식으로 전락했다.
 성도빈은 스킬로 시체를 띄웠다.
 ―염동마경!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아공간, [무한의 주머니]를 소환한다.
 [무한의 주머니]는 살아 있는 생물만 빼고 모든 것을 보관할 수 있는 창고 스킬.
 성도빈은 새하얀 뼈를 갈아서 만든 검을 꺼냈다.
 6성급 몬스터인 본 드래곤을 갈아서 만든 검이지만, 이 순간엔 몬스터를 해체하는 회칼일 뿐이었다.
 “좋군. 아주 좋아!”
 조폭들로선 미칠 노릇이었다.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공격한 놈이 이런 괴물일 줄이야?
 머리는 빨리 도망치라고 재촉하는데 몸이 공포에 질려 움직이지 않는다.
 ‘큭큭, 도망칠 수는 없단다.’
 성도빈은 유쾌하게 웃었다.
 조폭들은 이미 그의 살기에 제압되었다.
 총을 쏜 게 괘씸했지만, 차를 얻어 탈 예정이라 그냥 제압만 해 둔 것.
 어디 그뿐인가?
 ‘10년간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들을 수 있겠지.’
 
 ***
 
 “흠, 그러니까··· 9년 전부터 몬스터들이 나타났다는 거지? 초인적인 힘을 쓰는 각성자들이 길드를 세우고 몬스터들을 때려잡고?”
 “아, 예.”
 성도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엘에게 들었던 것과도 대부분 일치했다.
 “혹시 왕들은 없나?”
 옛 친구들, 그들이 공식적으로 활동했다면 진즉 두각을 드러냈을 터였다.
 “호, 혹시 팔색의 왕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요?”
 “팔색의 왕?”
 “예예, 세상에서 가장 강한 헌터들이지 말입니다. 그들이 이끄는 길드는 세계적인 규모입니다.”
 “맞는 것 같은데.”
 튜토리얼을 떠났을 때의 친구들은 6성급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유일하게 금색의 왕만 7성급.
 몬스터 침공 이전부터 그만큼 강했으니 헌터들을 규합하기도 한층 쉬웠을 터였다.
 “한국에도 그들의 세력이 있지 말입니다. 금색의 왕과 적색의 왕, 녹색의 왕이 각각 자기네 길드의 한국 지부를 세웠지 말입니다.”
 ‘내 부탁을 잊진 않았군.’
 천만다행이었다.
 혹시 그들이 약속을 저버렸으면, 그래서 한국이 멸망했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좋아, 그건 그렇다 치고··· 야.”
 “예?”
 “너 씨발, 왜 아까부터 군대 말투냐? 군대 시절 생각나게스리. 아니지, 원래 군인들도 그런 말투는 안 쓰지. 너 이 시키, 나 놀리냐?”
 발끝에 채인 조폭이 컥 하면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단단한 콘크리트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갈 지경!
 그나마 튼튼한 각성자라서 죽음은 면했지만, 게거품을 문 조폭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큰일 났다. 이 새끼 완전 또라이잖아?’
 ‘지, 지금이라도 살려 달라고 빌어야 하나?’
 조폭들 입장에선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
 성도빈이 혀를 끌끌 찼다.
 “머리 굴리는 거 다 보인다, 새끼들아. 너희들도 조폭이면 엉? 영화에 나왔던 것처럼 말이야, 엉? 우리 식구를 건드리다니 쌍칼파의 이름으로 용서할 수 없다! 이렇게 외치면서 달려들어야 하는 거 아니냐? 하여간 깡이 없어요, 깡이.”
 “······.”
 조폭들로서는 억울하겠지만 어쩌겠는가?
 죽고 싶지 않으면 입도 벙긋하지 말아야 했다.
 
 ***
 
 성도빈은 조폭들의 차를 얻어 타고 서울에 도착했다.
 송파구 잠실에 길게 늘어선 아파트 단지들.
 10년 전까지만 해도 깨끗한 새 아파트들이었지만 어느덧 세월의 흔적이 드문드문 묻어났다.
 “단지 몇 개는 재건축 중인가?”
 10년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아파트가 사라졌기에 나온 질문.
 성도빈이 무서워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조폭들이 움찔했다.
 “얘들아, 형이 묻는데 대답 안 하니? 뒈지고 싶어 환장했구나?”
 “죄, 죄송합니다! 그게··· 재건축이 맞기는 한데, 아파트가 오래돼서 재건축을 하는 건 아닙니다.”
 “그럼?”
 “몬스터 때문입니다.”
 “몬스터가 왜?”
 “던전을 공략하지 못하면 몬스터들이 밖으로 나오거든요. 그런데 반년 전에 송파구에 5성급 던전이 나타나는 바람에······.”
 “던전 공략 안 했어?”
 “던전에 들어간 헌터들이 살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아무도요. 몬스터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밖으로 쏟아졌고요.”
 “허, 5성급한테 쓸렸다고?”
 5성급 몬스터가 강하긴 하다.
 하지만 한국의 헌터들이 쓸렸다니.
 “그래서 어떻게 했어?”
 “군대가 출동했습니다. 전투기 뜨고 난리도 아니었죠. 그다음에야 헌터들이 싸웠는데, 간신히 이겼을 겁니다.”
 “한국 헌터들이 좀 약한가?”
 “좀이 아니라 많이 약합니다.”
 조폭이 쓰게 웃었다.
 비록 그가 사회를 좀먹는 암적인 기생충이라지만, 한국의 헌터 전력이 약한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군.”
 성도빈은 짧게 대답하곤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리고 물었다.
 “그런데 어벤져스 마지막 편은 블루레이 나왔냐? VOD나?”
 “어벤져스요?”
 “엔드 게임 말이야, 새꺄. 이 형이 그걸 꼭 보고 싶었거든? 그걸 보는 게 인생 버킷 리스트다.”
 “아, 네. 그야 뭐 나왔겠죠······.”
 진지한 얘기를 하던 중에 갑자기 어벤져스로 화제가 건너뛰자 조폭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오케이, 나왔단 말이지. 조만간 사러 가야겠네.”
 아예 그 이후 시리즈까지 모두 섭렵하자고 결심한 성도빈이었다.
 물론 부모님부터 찾아뵙는 게 우선이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면서 몸을 누이는데, 문득 그의 감지 능력에 무언가 걸려들었다.
 ‘몬스터?’
 정련되지 않은 거친 살의.
 이런 기운을 뿌리는 놈은 몬스터들밖에 없다.
 때마침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치는 광경이 성도빈의 눈에도 들어왔다.
 거대한 녹색 도뱀이 날개를 퍼덕거리면서 빌딩 사이를 날아다녔던 것이다.
 “썅, 와이번이잖아! 저런 놈이 도시에는 왜 있는 거야!?”
 성도빈이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조폭들까지 쌍소리를 내뱉었다.
 성도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던전에서 몬스터가 나온 건가?”
 “그, 그게 아니라··· 미수복 구역에서 넘어온 놈 같습니다.”
 “미수복 구역?”
 “몬스터가 점령한 땅입니다!”
 “미치고 팔짝 뛰겠네. 몬스터에게 땅도 빼앗겼어?”
 와이번은 4성급 몬스터.
 신고를 받았는지 헌터들이 출동했지만, 하늘 높이 날아다니는 와이번을 건드리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한숨 나온다. 아니, 뭐 기다리면 와이번이 알아서 땅에 내려오냐? 원거리 스킬로 잡아야 할 거 아냐.’
 성도빈은 새삼 한국의 헌터 전력이 약하다는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거기 운전하는 떡대, 창문 열어.”
 “예? 하지만······!”
 “새끼야, 뒤지고 나서 열래, 아니면 그냥 열래? 문 부서지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나쁜 말로 할 때 당장 열어.”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었다.
 살기 어린 으름장에 낯빛이 창백해진 조폭이 서둘러 창문을 열었다.
 성도빈은 창문 사이로 손가락을 내밀었다.
 “뭐, 뭘 하시려고요?”
 “보면 알아.”
 한쪽 눈을 감고 엄지와 검지를 제외한 세 손가락을 말아 쥔다.
 마치 총으로 저격하는 모양새.
 곁눈질로 성도빈이 하는 짓을 본 조폭들은 심장이 쿵쾅 뛰었다.
 ―대공저격!
 성도빈의 손가락 끝에서 섬광이 발출, 수백 미터를 격하고 날아가 와이번을 관통했다.
 졸지에 몸통에 구멍이 난 와이번은 비명을 지르면서 추락했다.
 “끝.”
 “······.”
 조폭들이 벙쪘다.
 4성급 와이번을 이렇게 쉽게 죽였다고?
 ‘그런데 이 인간은 똑같은 4성급인 씨 서펜트도 짱돌로 죽였잖아.’
 ‘걸어 다니는 인간 병기네, 이거.’
 [대공저격]은 6성급 스킬.
 기껏해야 1, 2성급 경지인 조폭들은 그게 뭔지도 몰랐지만, 성도빈은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귀찮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와이번 시체는 회수 안 하셔도 됩니까?”
 “회수를 왜 해?”
 “돈이 되잖습니까. 4성급 몬스터라면 마정석의 가격만 해도······.”
 “거지냐? 4성급 몬스터 마정석에 연연하게?”
 “······.”
 몬스터의 마정석은 아티팩트 등의 재료가 되기 때문에 가치가 높다.
 1성급이 대략 3백만 원 안팎이고, 2성급이 천만 원 안팎이었다.
 3성급은 열 배가 넘는 1억 원.
 4성급은 10억을 훌쩍 넘는다.
 그런데 그걸 왜 줍냐니?
 “10억 원이 넘는데요.”
 “잠깐, 차 좀 세워 봐라.”
 조폭들은 실소했다.
 그럼 그렇지. 아무리 강한 인간이라도 10억짜리를 안 챙길 리가······.
 “저 가게에서 블루레이 팔잖아! 어벤져스 있을지도 몰라!”
 “그, 그렇군요.”
 4성급 몬스터가 10년 지난 영화보다 못한 대우를 받다니.
 조폭들은 이 순간만은 와이번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
 
 블루레이 보따리를 한 아름 든 성도빈은 아파트 입구에 들어섰다.
 10년 전까지는 이 아파트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다.
 옛날 집에 돌아오니 기대감과 걱정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지금도 이 아파트에 사실까? 여기로 이사 왔을 때는 전세였는데······.’
 계약 기간이 끝나 다른 곳으로 이사 갔을 수도 있지만, 일단 아파트 입구를 여는 마스터카드를 꺼내 봤다.
 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난 10년 사이에 리뉴얼된 모양.
 별수 없이 호출 벨을 누르는데, 낯선 아이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에, 누구세요?]
 “혹시 성백호 씨 계십니까?”
 성백호는 아버지의 성함이었다.
 [그런 분은 안 계신데요. 여긴 저희 아빠 집이에요!]
 성도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째 불길하다 싶더니 진짜로 이사를 간 모양이다.
 아쉬움을 삼키며 몸을 돌리는 그때였다.
 [어머, 얘! 성백호는 할아버지 성함이잖니! 할아버지 성함도 아직 못 외우면 어떡해?]
 “하, 할아버지?”
 [성백호 씨는 제 시아버지세요. 그런데 누구시죠?]
 “성백호 씨 둘째 아들인데요.”
 [···도련님?]
 “···형수님?”
 성도빈, 주민등록상의 나이로 서른세 살에 형수인 정해연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
 
 “도빈아!”
 “형!”
 “이 녀석, 너 진짜 도빈이 맞지? 10년 전에 행방불명된 내 동생!”
 “형도 형 맞지?”
 “응?”
 “왜 이렇게 살이 쪘어?”
 “······.”
 “어휴, 내가 몸 좀 신경 쓰라고 누누이 말했잖아. 스트레스를 먹는 걸로 푸는 버릇은 아직도 못 고쳤구만? 운동은 좀 해?”
 “허, 허허······.”
 성도훈은 어이없이 웃었다.
 설마 동생과 재회하자마자 살쪘다는 타박을 들을 줄이야!
 하지만 눈앞에 있는 청년이 동생이라는 것은 확실하게 실감했다.
 몸 관리하라는 잔소리는 동생이 그를 볼 때마다 했던 말이었으니까.
 “그러는 너는 하나도 안 늙었네. 그런데 옷은 왜 이렇게 난민 꼴이야? 그동안 뭘 하고 살았길래?”
 “얘기하면 길어.”
 튜토리얼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바로 집으로 왔기에 옷은 누더기였다.
 처음엔 조폭들 옷을 빼앗아 입으려고 했지만, 맞는 사이즈가 하나도 없어서 포기했다.
 “무슨 몬스터 가죽을 엮어서 만든 옷처럼 생겼······.”
 성도훈이 표정을 굳혔다.
 성도빈이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던 것이다.
 “나중에 설명할게. 그런데 아버지랑 어머니는 어디 계셔? 함께 살아?”
 “두 분이 따로 사신다. 이 집은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거야.”
 “오, 전세 난민에서 탈출했구만.”
 “···너 하나도 모르는구나?”
 “방금 전에 집에 왔으니까. 가족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당연히 모르지.”
 “으음, 알겠다. 그런데 아버지는 지금 뵙기 힘들 거야.”
 “해외로 가셨나?”
 “아니.”
 “그럼?”
 성도훈은 씁쓸한 얼굴이 됐다.
 “던전에 들어가셨어.”
 
 ***
 
 9년 전, 몬스터들이 침공했을 때 인류는 떠올렸다.
 피식자가 되는 공포를.
 땅을 빼앗기는 두려움을!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살아날 구멍은 있다는 말처럼, 오성신의 사도를 자처한 천사들이 강림했다.
 ―두려워하지 말라, 인간들이여! 자애로운 오성신께서는 그대들을 구원할 길을 마련하셨노라. 그대들 중 재능 있는 이들이 몬스터와 싸울 힘을 얻을 것이다. 우리 또한 그대들을 도울 것인즉, 부디 용기를 잃지 말라.
 천사들의 말처럼 불특정 다수의 인간들이 각성했다.
 각성자들은 몬스터들의 침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집단을 이루었고, 시간이 지나서 길드로 거듭났다.
 “아버지도 각성자가 되셨어. 심지어 처음부터 강하셨지.”
 성도빈과 성도훈 형제의 부친 성백호는 각성자였다.
 게다가 각성 초기부터 강력한 스킬을 손에 넣었다.
 그 힘을 기반 삼아 점점 더 강해졌고, 대기업의 후원을 받으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20대 길드 중 하나인 백호 길드를 창설했다.
 “아버지는 길드 마스터가 되셨어. 나는 변호사 자격증을 따서 백호 길드의 법률 고문이 됐고.”
 “길드 이름이 백호야? 진짜로?”
 성도빈이 뜨악했다.
 “형, 난 아버지를 존경하지만··· 백호라는 이름은 좀 아닌 것 같아.”
 자매품으로 청룡 길드나 주작 길드, 현무 길드도 나와야 할 것 같은 이름이지 않은가!
 “인마, 놀란 포인트가 거기냐?”
 “물론 아버지가 길드 마스터가 되신 건 놀랍지. 한국에서 20위 안에 드는 길드라는 것도 놀랍고.”
 어떻게 부자가 되셨는지 알 것 같다.
 헌터가 되어 돈방석에 앉으신 것이다.
 성도훈의 말을 들어 보니 마정석과 몬스터 부산물이 연구와 가공을 목적으로 꽤 비싼 값에 팔리는 듯했다.
 ‘쩝, 돌아오면 집도 사 드리고, 새 차도 사 드리고, 효도하려고 했는데.’
 금전적으로 효도할 부분은 없을지도 모르겠단 위기감(?)이 들었다.
 “아무튼 아버지가 던전에 들어가셨단 말이지? 어디 짱박힌 던전이야?”
 “구리시··· 잠깐, 너 설마?”
 “어, 그 설마.”
 노령의 아버지가 싸우고 계신데 가만있을 수가 있나.
 던전에 한번 찾아가 볼 생각이다.
 “얌마! 던전이 어디인 줄 알고 함부로 가!?”
 “그래요, 도련님! 위험하니까 집에 계시는 게 좋아요!”
 “삼촌, 던전 가는 거야?”
 차례대로 형과 형수님, 조카인 성혜미였다.
 참고로 성혜미는 올해 6살로,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형, 나도 각성자야. 내 몸 정도는 스스로 지킬 수 있어.”
 “우와, 삼촌! 대단해!”
 “그래, 그래. 삼촌이 꽤 대단하단다. 그런데 아버지가 들어가신 던전은, 어디 보자··· 오, 구리역에 있구만. 찾기 쉬운 곳에 있네.”
 “뭐야! 언제 내 폰을 슬쩍한 거야?”
 성도훈은 경악했다. 그가 모르는 새에 동생이 스마트폰을 슬쩍해서 메시지 내역을 들여다본 것이다.
 “식은 죽 먹기지. 형이 알려 주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찾아갈 거야.”
 “하아··· 알았다. 아무튼 성격은 급해 가지고. 차 태워 줄 테니 따라와라.”
 “여보!”
 “어쩔 수 없잖아. 혼자서 택시 타고서라도 갈 기세인데.”
 “역시 형은 나를 너무 잘 알아. 사랑해, 형.”
 “징그러워, 이 짜식아!”
 
 ***
 
 잠실에서 구리시까지는 꽤 가깝지만, 그래도 몇십 분은 걸린다.
 성도훈은 차를 타고 가는 중에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봤다.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지낸 거야? 왜 연락도 없었어?”
 “튜토리얼이라고 알아?”
 “튜토리얼?”
 모르는 눈치였다.
 “그럼 팔색의 왕은?”
 “왜 모르겠어. 그 사람들은 너무 유명해서 우리 혜미도 알아.”
 “걔들하고 함께 있었어.”
 “뭐?”
 “원래는 팔색의 왕이 아니야. 구색의 왕이지. 10년 전에 나는 다른 왕들과 함께 튜토리얼이란 곳으로 끌려갔어.”
 성도빈이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장심에서 검은색 마력이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흑색의 왕이 된 이후.
 힘을 발휘하면 이처럼 검은색으로 물든 마력이 발산됐다.
 “나는 흑색의 왕이야.”
 “뭐······!”
 너무 놀란 나머지 중앙선을 침범해서 다른 차와 부딪힐 뻔했다.
 “워워, 진정해. 형. 내가 있으니 죽지는 않겠지만 비싼 외제 차 날려 버릴 뻔했잖아.”
 “그게 문제냐! 방금 한 말, 그거 진심이야?”
 “농담 같아?”
 성도훈은 말을 잇지 못했다.
 동생이 10년 만에 나타나서 시답잖은 농담을 할 리 없다는 것은 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후우, 그래. 네가 흑색의 왕인지 뭔지라고 치자. 왜 다른 왕보다 늦게 나타난 거냐? 그것도 10년이나······.”
 “나는 왕이 되는 게 늦었거든. 어쨌든 이제라도 돌아왔으니 뭐 다행이지.”
 성도훈의 심정이 복잡해졌다.
 동생의 말대로 지금이라도 돌아온 것은 다행이지만, 한국의 정세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대형 길드들이 힘을 겨루는 각축장.
 그 판에 동생이 뛰어든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치솟았다.
 ‘어휴, 나도 모르겠다. 복잡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 줘야지 원.’
 어쨌든 지금은 아버지를 찾아뵙는 게 먼저니까.
 “아버지는 오늘 아침에 출발하셨어. 지금쯤이면 던전에 들어가셨을지도 몰라. 전화해 봤는데 안 받으시더라.”
 “타이밍이 안 맞았군.”
 “던전에 들어가셨다면 공략하기 전까지는 못 나오셔. 우리가 들어갈 수도 없고.”
 “왜?”
 “그게 던전의 규칙이야. 기존 도전자들이 전멸하기 전에는 다른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어.”
 지금 도착해도 꼼짝없이 던전 앞마당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말.
 성도빈은 개의치 않았다.
 “일단 가 보자고.”
 ‘안 되면 힘으로 열지 뭐.’
 형의 말대로 던전 입장에 제한이 걸려 있을지라도, 시도는 해 볼 참이었다.
 마음먹고 힘을 쓰면 던전의 문을 강제로 열 수도 있을 테니까.
 “다 왔다.”
 던전이 있는 구리역.
 성도빈은 거대한 검은 웜홀이 홀로그램처럼 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튜토리얼에서는 던전이 따로 없었기에 이번에 처음 보는 것이었다.
 도로에는 바리케이트가 설치돼 있고 경찰들이 교통 통제를 하고 있는 중.
 구경꾼들이 바리케이트 밖에서 웅성거렸고, 기자들이 카메라 앞에서 무어라 말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 대피 안 시키나? 공략 실패하면 몬스터 나온다며.”
 “그렇게 갑자기 나오진 않아. 이곳 던전은 오늘 아침에야 나타났어. 웨이브가 터지려면 몇 달은 걸려.”
 “그렇군.”
 “일단 주차해야 하니까 기다··· 야!”
 “나 먼저 갈게. 형은 천천히 따라오셔.”
 주차할 때까지 기다릴 마음은 터럭만큼도 없는 성도빈이었다.
 대뜸 창문을 열고 나가더니 보닛 위로 자리를 옮겼다.
 “이 미친놈아! 정신 나갔냐―!”
 아무리 각성자라도 위험하다!
 성도훈이 기겁해서 고함을 쳤지만 성도빈은 히죽 웃기만 했다.
 ―헤르메스의 날개!
 5성급 스킬 [헤르메스의 날개].
 둥실 떠오른 성도빈이 소리보다 빠른 속도로 쏘아졌다.
 파공음이 울려 퍼졌을 때는 이미 저만치 앞서 나간 뒤.
 운전석에서 동생이 멀어지는 모습을 본 성도훈은 넋이 나갔다.
 “와, 저 자식······.”
 성도빈의 말대로.
 10년 만에 돌아온 동생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한편, 성도빈이 나타나자 거리의 웅성거림은 더욱 커졌다.
 기자들도 퍼포먼스처럼 나타난 성도빈을 발견하고 눈을 반짝였다.
 “아, 방금 각성자 한 명이 하늘에서 날아왔는데요! 무슨 스킬을 쓴 건지 모르겠지만 곧장 던전 게이트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바리케이트를 넘어간 성도빈을 보고 경찰들이 당황했다.
 성도빈은 그들을 지나쳐서 가볍게 착지했다.
 던전 게이트까지는 불과 30미터 떨어진 거리.
 가까이서 보니 던전 게이트 주변에 푸른 스파크가 쉴 새 없이 방전되고 있었다.
 성도빈은 바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제지당했다.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백호 길드가 먼저 던전에 입장했어요.”
 “당신은?”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슈트 차림의 안경 남자.
 남자가 크흠 헛기침을 하며 신분증을 꺼냈다.
 “재난관리부 소속의 공무원 정찬우입니다.”
 “재난관리부가 뭡니까?”
 “그것도 모릅니까?”
 “모르는데요.”
 성도빈의 당당함에 도리어 정찬우가 당황했다.
 몬스터 침공 이후, 수많은 나라들이 헌터와 던전의 효과적인 관리를 위해 새로운 부처를 신설했다.
 재난관리부도 그런 일환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부처.
 그 위상은 행정부, 국방부와 동급이다.
 그런데 재난관리부를 모른다니?
 ‘이 사람도 헌터 같은데 모르나? 아니면 사실 알면서도 시비를 걸려고 물어보는 건가?’
 빠른 속도로 날아온 걸 보면 헌터가 맞긴 맞는 것 같았다.
 아니, 설령 헌터가 아니라도 한국에 사는 이상 재난관리부를 모를 수는 없었다.
 “아무튼 더 이상 접근하시면 안 됩니다. 저기 보이시죠?”
 정찬우가 가리킨 곳.
 방패 모양의 마크를 왼쪽 가슴에 새긴 사람들이 있었다.
 “쉴드 길드의 헌터들입니다.”
 “저 사람들이 왜 여깄습니까?”
 “만약을 위해 참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지만··· 백호 길드가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서 말입니다.”
 구리역에 나타난 던전은 4성급.
 반년 전에 나타난 5성급 같은 재앙은 아니지만, 20대 길드라도 안심할 수 없는 난이도였다.
 그 증거로, 백호 길드 마스터인 성백호가 직접 정예 헌터들을 이끌고 던전에 들어갔다.
 ‘아무리 각성자라도 이제는 은퇴하실 나이가 되셨는데··· 하아!’
 정찬우는 속으로 탄식했다.
 성백호는 한국의 헌터 업계가 인정하는 강호였지만, 이제는 그도 많이 늙었다.
 “어디서 오신 분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던전 내부의 상황이 궁금하시면 저 사람들과 함께 화면이나 보십시오.”
 “화면이라면 저쪽의 TV?”
 헌터들이 보고 있는 TV.
 스크린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성도빈은 힐끔거리면서 화면을 엿봤다.
 “예, 이계상인들의 아티팩트로 던전 내부의 영상을 실시간으로 전송하는 겁니다. 그래야 후발 주자들이 정보를 얻으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쉴드 길드의 헌터들이 들어갈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만.”
 쉴드 길드의 헌터들이 들어간다는 것은 백호 길드가 실패한다는 뜻이니까.
 성도빈은 정찬우의 표정에 섞인 조바심을 읽고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사람이 아버지를 걱정해 주는 게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낯설기도 했다.
 “백호 길드를 걱정하는 겁니까?”
 “당연하죠. 그런데 당신은 대체 어디 소속이길래······.”
 그때였다.
 “헉! 헉! 인마, 좀 천천히 가라! 아무튼 성격하고는······!”
 숨을 헐떡이면서 달려온 성도훈.
 앞서간 동생을 따라가느라 가쁘게 숨을 몰아쉰 그는 뒤늦게 정찬우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처남?”
 “···매형?”
 “처남? 매형?”
 성도빈은 눈을 껌벅거리다가, 한 박자 늦게 말뜻을 깨닫고 헛웃음을 흘렸다.
 “뭐야, 둘이 그런 사이였어?”
 정찬우는 성도훈의 부인인 정해연의 동생이었다.
 고로 성도훈은 정찬우의 매형이 되는 셈.
 성도훈으로부터 성도빈이 동생이라는 사실을 들은 정찬우도 아연해졌다.
 “해, 행방불명된 동생분이 있다는 건 들었습니다만······.”
 “우리 아버지 좀 뵈러 던전에 들어가는 겁니다.”
 상대가 형수님 동생이라는 것을 알았어도 거침이 없는 성도빈이었다.
 하지만 정찬우는 완강하게 앞을 막아섰다.
 “아무리 매형 동생이라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함부로 접근하면 감전사할 수도 있다구요!”
 던전의 입구는 불안정했다.
 스파크가 튀고 있는 만큼 가까이 다가가면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다.
 그러나 그런 걸 신경 쓸 성도빈이 아니었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마운데, 괜한 걱정이에요.”
 “처남, 이 녀석이 똥고집이라서 나도 못 말렸어. 이번만 부탁할게. 그냥 비켜 줘.”
 성도훈까지 가세했다.
 동생이 팔색의 왕과 같은 강자라면 고작 던전의 스파크를 맞고 감전사하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정찬우는 짐짓 인상을 썼다.
 “매형까지 왜 이러세요? 아시잖습니까! 던전 입구는 한 번 닫히면 이미 들어간 사람들이 전멸하기 전까지는 다시는 열리지 않습니다.”
 “알아. 하지만 이 녀석에게는 방법이 있는 모양이야.”
 “대체 무슨······.”
 “설명해 봤자 이해도 못 할 테니까 설전은 그만합시다.”
 정찬우는 일반인이었다.
 아무리 공권력의 권위를 빌려도 성도빈이 작정하면 막지 못한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이 성도빈의 앞길을 방해했다.
 “젊은 친구가 성격 참 급하군.”
 쉴드 길드의 헌터였다.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사십 대 초반의 사내.
 졸지에 길이 막힌 성도빈은 고개가 삐딱해졌다.
 “댁은 뉘쇼?”
 “쉴드 길드의 마스터 박재준이라고 하네.”
 “길드 마스터?”
 길드 마스터라고 하니 호기심이 동했다.
 
 ======
 
 [박재준]
 ―종족: 인간
 ―성향: 중립 · 선
 ―마력: 4성급
 ―잠재력: 70%
 ―포지션: 원거리 딜러
 
 ======
 
 ‘능력은 쓸 만하군. 잠재력이 꽤 되는데.’
 잠재력 옆에 표시된 퍼센티지는 계발된 정도를 의미한다.
 박재준은 본인이 타고난 잠재력의 70%를 계발한 상태.
 남은 30%를 계발하면 5성급까지는 무난하게 올라가리라.
 ‘어쩌면 6성급까지 노려볼 수도 있겠어. 그 이상은 힘들겠지만.’
 순순히 물러날 생각은 없다.
 절차를 개무시하는 건 아니다. 다만 자신을 막는 이유가 위험하기 때문이라면,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우려를 불식시키면 된다고 생각했다.
 “순서 지키라는 겁니까? 아님 위험하니 물러나라는 겁니까?”
 “후자일세. 아들이 아버지를 걱정하는 거야 당연하지. 하지만 정찬우 씨의 말대로 던전 게이트는 닫혔어. 초조하더라도 지금은 차분히 기다리는 것이······.”
 박재준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성도빈이 그를 지나쳐서 던전 입구 앞까지 가 버린 것이다.
 바로 앞에 있으면서도 움직임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박재준으로서는 둔기로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만약 성도빈이 공격할 마음을 품었다면, 반격도 못 해 보고 목숨을 내줬을 것 아닌가?
 ‘설마 나보다 강하단 말인가? 4성급인 나보다?’
 20대 길드의 마스터들의 평균 실력이 4성급이었다. 가장 강한 3대 길드의 마스터들은 그 이상이지만, 설령 그들이라도 박재준을 이런 식으로 농락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달리 말하면 성도빈이 3대 길드의 마스터 이상이라는 의미.
 “이보게! 잠깐만 기다······!”
 성도빈은 기다리지 않았다.
 “허, 생물도 아닌 새끼가 앙탈을 부리네?”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던전 게이트의 스파크가 강하게 튀었다.
 정찬우의 말이 이해가 됐다. 일반인이 맞았다면 골로 갔을 테고, 각성자라도 2성급 이하라면 상당한 충격을 받았으리라.
 물론 성도빈은 개의치 않았다.
 던전의 빗장이 아무리 튼튼해도 그에겐 간단히 무력화시킬 수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제개방!
 
 ***
 
 7성급 스킬 [강제개방].
 잠긴 문이나 봉인된 장소를 강제로 뜯어내는 스킬이었다.
 던전에 시험해 본 적은 처음이지만 보기 좋게 성공했다.
 
 ======
 
 [함정 미로]
 ―난이도: 4성급
 ―입장 정원: 20명
 ―몬스터 숫자: 92
 ―공략 조건: 함정을 돌파하고 몬스터를 궤멸시킬 것.
 ―공략 보상: 4성급 희귀 등급 스킬북
 ※당신은 [강제개방]을 써서 던전의 문을 억지로 열었습니다. 입장 정원과 상관없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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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던전의 마력과 접촉하는 순간 뜬 메시지.
 입장 정원이니 공략 보상이니, 설명은 길었지만 성도빈은 그딴 자질구레한 정보는 가뿐하게 씹었다.
 가장 맨 윗줄에 적힌 던전 이름만 보고 미간을 좁혔다.
 “함정 미로라. 딱 봐도 좆 돼 보라는 악의가 팍팍 풍기는데?”
 “···미로형 던전에는 곳곳에 함정이 설치돼 있네. 그런데 던전 게이트를 열다니, 대체 어떻게 한 건가?”
 간신히 정신을 수습한 박재준이 물었다.
 이미 닫힌 던전 게이트를 열다니, 이런 각성자는 듣도 보도 못했다.
 “스킬로 열었죠.”
 “정말인가? 그런 스킬이 있다고?”
 “구구절절 얘기할 시간이 없군요. 근데 던전 함정은 누가 설치했답디까?”
 “던전의 몬스터들. 영상에서는 언데드가 눈에 띄더군.”
 “해골 병들 말이군.”
 “4성급 던전이니 해골 병만 나오지는 않을 테지. 해골 기사나 해골 마법사도 나올 터. 어쩌면 레서 리치가 나올지도 모르네.”
 3성급인 해골 기사나 해골 마법사는 그렇다 쳐도, 4성급인 레서 리치는 박재준도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는 몬스터였다.
 성도빈이 그의 안목으로 가늠하지 못할 강자만 아니었다면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리는 한이 있어도 말렸을 터였다.
 “정말 혼자 가도 괜찮겠나?”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혼자 가는 게 더 편합니다.”
 미처 말릴 새도 없이 던전 게이트에 몸을 내던진 성도빈.
 정찬우가 식겁했다.
 “매형, 동생분이 너무 무모한 거 아닙니까!? 4성급 던전에 장비도 없이 뛰어들다뇨?”
 “음, 뭐······.”
 성도훈도 할 말을 잃었다.
 동생이 팔색의 왕과 동급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설마 최소한의 장비도 없이 맨몸으로 들어갈 줄이야?
 사실 성도빈은 [무한의 주머니]라는 아공간에 장비를 보관하고 다니지만, 그는 아직 그것을 몰랐다.
 ‘대체 무슨 생각이냐, 도빈아?’
 성도훈이 동생의 안전을 걱정하는 그때, 성도빈은 공기가 변한 것을 감지하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무거움, 끈끈함, 불쾌함.
 마치 던전의 모든 것이 자신을 적대하는 듯한 느낌.
 매우 익숙했다.
 튜토리얼에서 맨날 맛보던 공기였으니까.
 이제는 미세먼지 가득한 도시의 공기보다도 이쪽이 친숙했다.
 ‘쯧! 지구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몬스터 잡으러 오다니, 내 인생도 참 어지간히 글러 먹었어.’
 뭐 어쩌겠는가. 지구로 돌아와서 평탄하게 살 팔자는 아니라는 것쯤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에잉, 아버지나 빨리 찾아야지.’
 유감스럽게도 게임처럼 미니맵 같은 게 뜨진 않았다.
 주변에 보이는 거라곤 벽돌을 쌓아 만든 미로뿐.
 시야가 제한되었으니 볼 수 있는 것도 그만큼 한정됐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지형 스캔! 광범위 감지!
 성도빈을 중심으로 검은 마력이 주변 일대를 휩쓸었다.
 주변의 지형지물을 스캔하는 6성급 스킬 [지형 스캔].
 그리고 마력이 미치는 범위 내의 생물체 위치를 감지하는 5성급 스킬 [광범위 감지]!
 마치 맵핵처럼 던전의 지형 및 헌터들과 몬스터들의 위치가 성도빈의 머릿속에 입력됐다.
 이미 함정이 발동됐는지 백호 길드원들은 뿔뿔이 흩어진 상태.
 ‘4성급 각성자가 중심부에 있군. 보스 몬스터에게 가까워지고 있어.’
 아마도 아버지이리라.
 성도빈은 아버지에게 향하는 최단 루트를 계산했다.
 남들 하는 대로 순순히 미로를 통과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냥 길 뚫으면 되는데 뭐 하러 삽질을 해?’
 주먹을 들어 올려 힘껏 쳤다.
 목표는 앞을 가로막은 벽!
 쿠아아아아아앙!
 
 ***
 
 “···매형, 매형 동생 사람 맞아요?”
 “으음, 아마도?”
 바깥에서 영상을 통해 성도빈의 만행(?)을 목격한 성도훈과 정찬우는 가슴이 퍽퍽 막히고 말문이 턱턱 막혔다.
 쉴드 길드의 헌터들도 매한가지였다.
 던전의 벽을 뚫어서 길을 내다니?
 박재준도 혀를 내둘렀다.
 “발상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백호 길드가 바보라서 미로를 헤맨 게 아니었다.
 미로형 던전의 벽은 4성급 스킬 [항마의 벽]이 걸린 장애물.
 인류가 만든 가장 단단한 건축물이라는 후버댐과 동급의 강도다.
 저딴 식으로 벽을 깨부순다면, 보스 몬스터와 만나기도 전에 마력이 다 떨어져서 잡몹들에게 죽었을 것이다.
 ‘게다가 방향을 가늠하기도 쉽지 않으니 함부로 부술 수도 없지. 성백호 마스터의 아들은 아버지가 있는 방향을 특정한 모양이군. 대체 경지가 얼마나 높아야 저런 짓이 가능한 거지?’
 그는 성도빈을 여기까지 데려온 성도훈을 돌아봤다.
 “자네 동생, 대체 뭐 하던 친구인가?”
 헌터 업계에서 일하다 보니 두 사람은 구면이었다.
 나이도 박재준이 열 살은 많았기에 편하게 대하는 편.
 성도훈이 머쓱해하며 대답했다.
 “10년간 행방불명됐는데, 저도 그동안 뭘 했는지는 잘 모릅니다.”
 대충은 알지만, 동생의 정보를 남에게 함부로 노출할 수는 없는 까닭에 대답을 얼버무렸다.
 “행방불명?”
 “오늘 돌아왔습니다.”
 오늘 돌아왔다는 말에는 박재준도 얼떨떨해졌다.
 “비밀이 많은 친구로군.”
 “당사자에게 직접 들으시는 게 빠를 겁니다.”
 순순히 말해 줄지 모르겠지만, 성도빈도 딱히 스스로를 감출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럼 나중에 물어봐야겠군. 우리는 이만 가겠네.”
 “가시는 겁니까?”
 “저 무대에 우리가 끼어들 자리가 없으니까. 여기 있어 봤자 시간만 허비하는 꼴 아닌가.”
 성도훈은 쓴웃음만 지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성도빈이 던전에서 목숨을 잃을 가능성은 없었다.
 “살펴 가십시오. 전 영상을 봐야 하니 배웅은 못 할 것 같습니다.”
 “그럼 나중에 보자고.”
 쉴드 길드가 떠나는 것을 일별하고 성도훈은 다시 영상을 돌아봤다.
 때마침 백호 길드의 헌터들이 사투를 치르고 있는 곳을 향해 성도빈이 가고 있었다.
 
 ***
 
 던전 몬스터들은 인간에게 한없이 적대적이었다.
 성도빈은 자신을 향해 적의를 드러내는 해골 병들을 향해 씩 웃었다.
 남들은 꿈에서조차 보고 싶지 않을 비주얼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귀엽게만 보였다.
 “어휴, 허접들이 죽자 살자 달려드는구나.”
 물론 봐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해골 병 어린이들, 이제 삼도천으로 갈 시간이에요!”
 무서운 언데드를 어린이로 취급하는 성도빈.
 악당처럼 썩소를 지은 그가 일격을 날렸다.
 콰아앙!
 맥을 못 추고 박살 나는 해골 병들.
 성도빈이 멈춰서 휘파람을 부는 그때,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르륵··· 인간··· 못 지나간··· 다.]
 “해골 기사네?”
 2성급 몬스터인 해골 기사는 어눌하지만 말을 할 줄 안다.
 다만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되는 것은 아니고, 녹음기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인간··· 못 지나간······.]
 “시꺼, 새꺄!”
 해골 기사 따위에게 할애할 시간 없다.
 전광석화처럼 거리를 좁힌 성도빈의 일권이 놈의 안면을 후려쳤다.
 그래도 나름 기사랍시고 갑옷도 입고 투구도 쓴 해골 기사였지만, 던전의 벽조차 쳐부순 성도빈의 일권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해골 기사를 처치했습니다.]
 [당신의 경지가 너무 높아 경험치가 오르지 않습니다!]
 “그려그려. 정신 사나우니까 지방방송 좀 끄자, 시스템아.”
 오성신의 축복을 받은 각성자는 자기가 쓰러트린 몬스터의 경험치, 즉 마력 정수를 흡수함으로써 경지를 높인다.
 그러나 인간의 한계인 9성급에 도달한 성도빈은 마력 면에서는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
 시스템의 메시지를 봐 봤자 신경만 거슬릴 뿐이지.
 명령으로 시스템을 꺼 버린 성도빈이 다시 한번 정권을 뻗었다.
 주먹은 불과 수십 센티를 가로지를 뿐이지만, 정권에 어린 마력은 수십 미터까지 날아갔다.
 콰앙―!
 또 다시 일직선으로 구멍이 뚫린 던전의 벽.
 그 너머에서 힘겹게 사투를 벌이고 있던 백호 길드의 헌터들은 난데없는 사태에 깜짝 놀랐다.
 “뭐, 뭐야······?”
 성도빈은 그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마침 그가 지나가는 길에 이들이 있었기에 구했지만, 아버지는 이곳에 계시지 않았다.
 “4성급 주제에 면적은 겁나게 넓구만. 거기 당신!”
 “네, 넵!?”
 성도빈은 [측정안]과 감지 능력으로 가장 강한 헌터를 지목했다.
 아마도 그가 임시 리더일 터.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언데드 좀 청소해 드리지. 대신 다른 데로 새지 말고 여기 있어요. 알겠습니까?”
 “하, 하지만 우리는 몬스터를 잡으러 왔는데······.”
 “그래서, 싫다?”
 눈을 부라리는 성도빈.
 그가 토해 낸 무서운 살기에 헌터들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을 죽이는 본능밖에 남지 않은 언데드들까지 덩달아 얼어 버렸다.
 남자 역시 겁에 질려 속사포처럼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절대로 다른 데로 가지 않겠습니다! 붙박이장처럼 꼭 붙어 있겠습니다!”
 “그래요. 우리 약속했으니까 꼭 지킵시다. 안 지키면 내가 댁들을 어떻게 대할지 나도 모르겠거든.”
 헌터들로서는 황당하고 억울하겠지만 이 자리에 있는 게 나았다.
 괜히 다른 곳으로 샜다가 함정에 덜컥 걸리기라도 하면 다시 구하러 와야 하는데, 성도빈은 귀찮게 여러 번 일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헌터들은 백골이 되다 못해 진토가 된 해골 병들을 보고 성도빈의 말을 듣기를 잘했다고, 진심으로 안도했다.
 “그, 그런데 당신은 누굽니까?”
 “댁들이 모시는 길드 마스터의 아들이요.”
 그 말만 하고 훌쩍 가버린 성도빈.
 헌터들은 당혹스러웠다.
 “길드 마스터 아들은 성도훈 변호사님 아니었어? 설마 숨겨 둔 자식 같은 건 아니겠지?”
 “그, 글쎄?”
 모든 헌터들이 길드 마스터의 사생활을 아는 것은 아니었다.
 극히 일부만이 알고 있다.
 공교롭게도, 성도빈이 구한 헌터들 중엔 그들도 존재했다.
 “혹시 대재앙이 닥치기 전에 행방불명됐다는 둘째 아들 아닐까?”
 “아, 그러네! 둘째 아들이 있다고 했지.”
 “그런데 던전엔 어떻게 들어온 거야? 입구 닫히지 않았어?”
 “···그러게?”
 성도빈은 그들이 뭐라고 떠들던 신경 쓰지 않고 길을 뚫었다.
 이미 아버지는 보스 몬스터와 교전 중이었다.
 빨리 보스 몬스터를 처치하고 헌터들을 구하실 생각이었으리라.
 마력 흐름을 보건대 아버지가 조금씩 밀리는 중이었다.
 ‘4성급 던전이니 보스 몬스터도 4성급이겠지. 느껴지는 기세로 보면 레서 리치일 가능성이 크다.’
 언데드 끝판왕인 아크 리치나 데스나이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레서 리치도 나름 강력한 몬스터.
 게다가 던전이 놈의 앞마당인 만큼 사전에 많은 준비를 해 뒀을 게 뻔했다.
 초반에 기세를 잡지 못하면 밀릴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그래, 이쯤은 준비해 뒀겠지!’
 아예 새로운 길을 뚫었는데도 불구하고 성도빈을 향해서도 갖가지 함정이 날아들었다.
 바닥이 꺼지거나, 벽에서 화살이 날아오는 것은 예사였다.
 천장에서 산성액이 떨어졌고, 악령들이 기어 나와 공격을 가했다.
 해골 기사나 해골 마법사들이 떼로 뭉쳐서 방해하기도 했다.
 물론 성도빈은 가볍게 짓밟았다.
 9성급의 마력을 가진 그에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마침내.
 콰아아아앙!
 장렬하게 가루가 된 보스룸의 벽.
 한창 헌터들을 밀어붙이고 있던 보스 몬스터가 멈칫했다.
 거적때기를 두른 해골.
 뻥 뚫린 눈구멍에서 초록색 안광이 귀화처럼 피어오르는 놈은 성도빈의 예상대로 레서 리치였다.
 [그르륵, 너는··· 누구냐!]
 가래 끓는 목소리이긴 해도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해골 기사나 해골 마법사와 달리 자아가 있는 만큼 의사소통도 된다.
 그러나 성도빈은 레서 리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아버지.”
 
 ***
 
 은발을 질끈 묶은 거구의 노인.
 삼국지의 관우처럼 언월도를 든 노인은 나이에 맞지 않게 우람한 근육을 길렀다.
 성도빈은 노인을 응시했다. 노인도 성도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10년 만에 만난 두 부자의 눈빛이 허공에서 뜨겁게 얽혔다.
 성백호의 눈이 흔들렸다.
 “서, 설마······!”
 아무리 시간이 오래 지났다 한들.
 앨범 속 사진을 보면서 아들을 그리워한 그가 성도빈의 얼굴을 몰라볼 리가 만무했다.
 성도빈도 마찬가지.
 운동이라곤 조기 축구밖에 안 했던 아버지가 터미네이터 뺨치는 근육질이 됐음에도 한눈에 알아봤다.
 두 부자의 재회는 참으로 격정적이었다.
 “이 자식아, 살아 있었다면 연락을 했어야지! 게다가 그 상거지 꼴은 뭐야? 옷을 왜 그따위로 입어!? 네가 무슨 원시인이냐!”
 “그러는 아버지야말로 왜 히피처럼 입고 있는데요? 그리고 머리는 왜 묶었대? 하나도 안 멋있거든요!”
 “이놈아, 이게 사나이의 패션이다! 네가 멋을 모르는 거야!”
 만나자마자 서로의 패션 센스를 맹비난했다.
 갑작스러운 재회의 어색함을 그런 식으로 푸는 것이다.
 졸지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된 헌터들만 어색해졌다.
 게다가 아직 상황 파악도 되지 않았다.
 갑자기 벽 뚫고 나타난 인간이 자기네 길드 마스터를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바로 상황 파악하면 그게 이상한 것이었다.
 그때였다.
 [이, 이놈들···! 감히 나를 앞에 두고 지들끼리 잡담을 해?]
 레서 리치는 진노했다.
 감히 자신을 앞에 두고 딴짓거리를 하다니!
 심상치 않은 살기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선 성백호가 다급하게 외쳤다.
 “이런, 이놈을 깜박했구나. 지금은 이놈을 쓰러트리는 게 더 급하다!”
 “아버지는 뒤에 계세요. 나이 든 양반이 몸 함부로 움직이면 탈 납니다. 슬슬 관절염도 신경 쓰셔야죠?”
 “아버지 그렇게 안 늙었다! 육체 나이는 젊어! 요즘도 보디빌더 대회 나가면 우승한다고!”
 성백호는 오랜만에 만난 아들이 각성자가 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던전의 벽을 깨부수며 왔는데 모를 수가 있나.
 ‘10년 동안 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보다 훨씬 강하다.’
 머리로는 아들이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부모이기에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시끄럽다!]
 레서 리치가 일갈했다.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강맹한 마력이 휘몰아쳤다.
 성백호는 신음했고, 헌터들은 침을 꼴깍 삼켰다.
 “조심해라, 도빈아! 4성급 스킬이 올 거다!”
 성도빈은 콧방귀를 끼고는 마력의 폭풍 속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순간, 전광석화처럼 레서 리치의 앞에 나타났다.
 [아니!?]
 경악하면서도 스킬을 발동했다.
 ―포이즌 플레임!
 독성이 든 불꽃을 광범위하게 뿌리는 스킬이었다. 마력이 약한 사람은 연기를 들이마시기만 해도 순식간에 죽어 버린다.
 그러나 레서 리치는 운이 없었다.
 ―스킬 봉인!
 격렬하게 끓어올랐던 마력이 산들바람처럼 흩어졌다.
 [강제개방]과 마찬가지로 7성급 스킬인 [스킬 봉인] 때문이었다.
 4성급 이하의 스킬을 강제로 취소하는 악마적인 효능을 갖고 있었다.
 [네놈, 무슨 짓을······!]
 “미안, 이 엉아가 너를 깜박했네. 만나서 반가운데 악수라도 할까?”
 이죽거리면서 손을 뻗은 성도빈.
 레서 리치가 회피하기도 전에 앙상한 손을 잡아 버린 그가 대뜸 놈의 팔을 뽑아 버렸다.
 [크아악!]
 레서 리치가 비명을 질렀다.
 팔뿐만 아니라 팔과 연결된 마력까지 강제로 끊어 낸 탓이다.
 외팔이 된 레서 리치를 내려다보며 성도빈이 히죽 웃더니, 팔로 머리를 후려쳤다.
 [컥.]
 통렬한 한 방에 레서 리치가 쓰러졌다.
 본능적으로 반격을 하려고 했지만 [스킬 봉인] 때문에 번번이 막혔다.
 성도빈은 레서 리치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아무래도 넌 엉아가 참교육을 시켜 줘야겠구나. 엉아랑 함께 진실의 방에 가자.”
 [이, 이놈! 놓지 못하겠느냐!]
 발버둥도 못 치고 질질 끌려가는 레서 리치.
 상상을 초월한 광경에 성백호와 헌터들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지금 자기들이 뭘 보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됐기 때문이다.
 헌터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성도빈은 레서 리치를 끌고 자기가 부순 벽을 빠져나와 멀리 진실의 방(?)으로 향했다.
 다만 헌터들이 워낙 귀가 밝아서, 거리가 멀어져도 집중하면 잘만 들린다는 게 문제였다.
 환상적인 대화가 오갔다.
 ―오랜만에 아버지를 만나서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데.
 ―크악!
 ―그지 같은 잡것이 훼방을 놓네? 야 이 개시키야, 뒤지려고 환장했지? 뼈 하나하나 분해해서 동네 개들한테 나눠 줘? 엉?
 ―가, 감히!
 ―닥쳐.
 진짜로 닥쳤다.
 ―한마디만 더 씨부렁대면 목 아래는 개들한테 주고 목 위는 컵으로 써 버린다. 이 엉아가 왕년에 네 동족들 대갈빡을 컵으로 많이 썼어요.
 원효대사 해골 물을 실생활에서 실천한 성도빈이었다.
 실제로 지금도 [무한의 주머니]에는 무려 아크 리치의 두개골로 만든 컵이 보관되어 있다.
 ―이 엉아가 뭐라고 했냐?
 ―씨, 씨부렁거리면 컵으로 만든다고······.
 ―말이 짧다?
 ―씨, 씨부렁거리면 컵으로 만든다고 하셨습니다!
 협박으로 몬스터를 굴복시키는 위상.
 그러나 레서 리치의 수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알면서 왜 씨부렁거리니.
 ―쿠엑!
 지가 말 시켜 놓고 대꾸했다고 폭력을 휘두르는 성도빈이었다.
 자기가 맞는 게 아닌데도 헌터들은 움찔했다.
 찰진 구타 음이 울릴 때마다 왜 자기가 맞는 착각이 드는 걸까?
 안색이 창백해진 그들이 성백호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눈빛으로 물었다.
 그러나 성백호도 딱히 해 줄 말이 없었다. 사실은 그 역시 현실을 따라갈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목숨 걸고 싸웠던 레서 리치가 복날 개 잡듯 처맞을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것도 아들에게 말이다.
 ―야야, 벌써 죽는 거 아니지? 근성으로 버텨. 넌 할 수 있어! 언데드는 쉽게 죽지 않아서 손맛이 특별하다고! 넌 이렇게 허망하게 죽어선 안 돼!
 ―크아아아아아악!
 매타작이 뚝 끊겼다.
 결국 레서 리치가 견디지 못하고 죽은 모양.
 곧이어 성도빈이 개운치 않은 얼굴로 돌아왔다.
 “에잉, 언데드답지 않게 근성 없는 놈 같으니.”
 그러더니 활짝 웃으며 달려와서 성백호를 안았다.
 “아버지!”
 “커흠, 진짜로 내 아들 맞지?”
 아들인 걸 확인했는데도 굳이 다시 확인하는 성백호였다.
 10년 만에 다시 만난 아들이 일진처럼 구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예전엔 가끔 기행을 했어도 상식적이었는데······.
 “그럼 당연하죠. 아까는 별 그지 같은 해골바가지 때문에 인사를 제대로 못 드렸어요.”
 “음, 그래. 그렇구나······.”
 그지 같은 해골바가지에게 목숨을 잃을 뻔한 성백호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함정에 걸려 헤어진 헌터들을 떠올리곤 아차 했다.
 아들과 재회해서 기쁘고,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왜 집에 돌아오지 못했는지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당장은 곤란했다.
 “도빈아, 미안하지만 자세한 얘기는 던전을 나가고 나서 하자. 먼저 헌터들부터 구해야 한다.”
 그는 아버지이지만, 백호 길드의 마스터였다.
 아들의 얘기는 나중에 들을 수 있지만, 헌터들은 당장 구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지 몰랐다.
 하지만 이어지는 성도빈의 말은 또다시 상상을 초월했다.
 “아버지 부하들이라면 오는 동안 다 구했어요.”
 “···구했다니?”
 “뭐, 겸사겸사?”
 성도빈 자신과는 관계없는 사람들이지만, 죽으면 아버지가 슬퍼하실 테니까.
 다른 데로 새면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도 곁들인 결과, 보스 몬스터가 죽은 지금도 모두 제자리에 박혀 있었다.
 ‘싸움 끝났으니 계속 그 자리에 두긴 뭣하지만.’
 4성급 스킬인 [전음].
 원래는 가까이 있는 사람들한테 귓속말처럼 은밀하게 목소리를 전달하는 스킬이지만, 성도빈은 자신의 감지 범위에 들어온 백호 길드 헌터 전원에게 [전음]을 썼다.
 한쪽 귀에 손을 얹고 말했다.
 [백호 길드의 헌터분들, 내 말이 들릴 겁니다. 댁들 구해 준 사람이니까 놀라지는 말고요. 내가 뚫어놓은 길을 따라 보스룸까지 오십쇼. 이상 전달 끝.]
 자세한 설명은 일절 생략한, 일견 성의 없는 안내 방송이었다.
 그러나 성도빈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봤다.
 ‘내가 뚫어 놓은 길로만 오면 싸울 일은 없으니까.’
 아직 모든 몬스터가 죽은 건 아니지만, 성도빈이 뚫어 놓은 길에는 한 마리도 없었다.
 그들이 오는 즉시 대단위 스킬을 펼쳐 양학을 할 것이다.
 
 ***
 
 “백호 길드다!”
 “던전을 공략했어!”
 “맙소사, 들어간 지 몇 시간도 안 됐잖아? 어떻게 이렇게 빨리 던전을 공략했대?”
 “몰라. 일단 가자고!”
 던전 밖의 기자들.
 던전 게이트를 빠져나온 백호 길드를 보고 그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몇 명은 인터뷰를 따내려고 바리케이트를 넘어오려고 했다.
 던전 게이트가 수축하고 있었기에 경찰들도 막지 않았다.
 던전을 공략한 헌터들이 인터뷰에 응하는 것은 일종의 관례였다.
 “아버지! 도빈아!”
 “어르신!”
 성도훈과 정찬우가 가장 먼저 달려왔다. 그들은 가장 먼저 성백호의 몸부터 살펴봤다.
 성도빈이 있는 만큼 공략을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보스룸에는 카메라 아티팩트를 달지 못했기에 성백호의 안위를 살펴볼 수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성백호는 찰과상만 좀 입었을 뿐이었다.
 “나는 괜찮으니 다른 사람들부터 살펴라. 구급차도 부르고. 죽은 사람들은 없지만 몇 명이 다쳤다.”
 “안 그래도 이미 불렀습니다. 도빈이 너도 고생했다. 덕분에 아버지랑 헌터들이 무사했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어. 7성급 던전이었어도 빨리 구했을걸.”
 “짜샤, 칭찬을 해 주면 그냥 고맙다고 좀 해라. 꼭 그렇게 잘난 척을 해야겠어?”
 “응.”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이 한국 최강임을 깨달은 성도빈은 오늘부터 겸손과는 담쌓고 살기로 했다.
 “내가 너무 압도적으로 강해서 겸손 떨어봤자 사람들은 밥맛이라고 생각할걸. 그럴 바엔 그냥 솔직하게 잘난 척하고 말지.”
 “잘난 척을 솔직하게 한다는 놈은 세상에 너밖에 없을 거다.”
 성도빈은 낄낄거렸고, 성도훈은 못 말리겠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성백호는 두 아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두 아들과 함께하니 새삼 옛날로 돌아간 듯했다.
 “기자들 인터뷰하러 오니 잡담은 이쯤에서 끝내자.”
 “그거 꼭 해야 해요?”
 성도빈이 귀찮음을 드러내자 성백호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잘난 척하고 싶다면서? 잘난 척은 기자들 앞에서 해야지. 전 국민이 네 잘난 척을 듣지 않겠냐.”
 “아, 그러네.”
 성도빈도 납득했다.
 우루루 몰려온 기자들이 시끄럽게 굴자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기자님들, 죽고 싶지 않으면 입 좀 닥칩시다.”
 
 ***
 
 상상을 초월한 폭언.
 시끄럽게 질문 세례를 퍼부었던 기자들은 까닭 모를 매서운 살기에 오한을 느꼈다.
 ‘성질 더러운 놈이었구나!’
 ‘우, 우리는 일반인인데 손찌검을 하진 않겠지?’
 에이, 설마.
 아무리 헌터라도 그런 짓을 하면 다음 날 대국민 사과를 해야 할 텐데.
 “끄, 으으······.”
 “흥.”
 물론 성도빈은 쥐뿔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인생은 실전이란 말 못 들어 봤니, 좆만이들아? 어디서 시끄럽게 떠들고 지랄이야?”
 도떼기시장도 아니고 귀 아파서 죽는 줄 알았다.
 잔뜩 뿔이 난 성도빈은 기자들 한 사람 한 사람과 살기 어린 눈을 마주쳤다.
 기자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고 몸이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렸다.
 그러게 처음부터 잘할 것이지 왜 매를 벌어.
 ‘그나저나 이 수법을 여기서 써먹네.’
 교차하는 시선 속에 살기를 아로새겨 심신을 제압하는 수법.
 튜토리얼에서 한창 구르던 당시, 우연히 만든 고유 기술이었다.
 작정하고 쓰면 7성급 몬스터들도 벙어리로 만들 수 있는.
 7성급 몬스터한테 쓰는 것만큼 강하게 걸진 않았지만, 심신을 제압당한 기자들은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얌마, 기자들한테 무슨 그런 말을 해? 기사 잘못 나가면 어쩌려고?”
 기술의 영향권에 포함되지 않은 성도훈만 기겁하며 속삭였다.
 잘못하면 백호 길드는 물론 가족의 이미지도 나빠질 수 있었다.
 “안 그래.”
 “어떻게 알아?”
 “그냥 그런 게 있어.”
 자신이 만들었지만 성도빈도 아직 이 기술을 이론화하지 못했다.
 구구절절 설명할 자신도 없고, 해도 이해하지 못할 게 뻔했다.
 그때, 잠자코 있던 성백호가 성도훈을 말렸다.
 “일단 도빈이를 믿어 보자.”
 사실 속이 시원했다.
 안 그래도 피로감 때문에 죽을 지경이었는데 기자들이 촉새처럼 떠들어 대서 머리가 아팠던 것이다.
 그런데 성도빈의 말 한마디에 조용해지니 얼마나 좋은가.
 후환이 걱정되긴 했지만, 아들이 저렇게 자신하니 한번 믿어 볼 참이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니 성도훈도 더는 나서기가 뭐했다.
 “제발 사고 치지 마라. 난 대국민 사과 자리 만들고 싶지 않아.”
 “안 만들어.”
 자신 있게 나서는 성도빈.
 오만한 눈빛으로 기자들을 한차례 내려다본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기자들이 헌터들을 기삿거리 물어다 주는 황새처럼만 보는 것 같아서 마음에 안 들었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파란을 일으켜 볼 셈이었다.
 ‘차라리 잘됐어.’
 여기서 정체를 밝혀 두면 이후로 쓸데없이 개기는 놈이 없겠지.
 그래도 개기는 놈은?
 ‘묻어 버리지 뭐.’
 어차피 사람들 눈치 보는 것은 성격상 맞지 않았다.
 개썅 마이 웨이를 고집하는 게 몸도 마음도 편했다.
 “일단 다친 헌터들부터 옮깁시다. 그래도 사람들 지키겠답시고 그 고생을 하며 싸웠는데, 그 정도는 해 줘야 예의 아냐?”
 의외로 상식적인 발언이었다.
 방금 전에 기자들한테 살기를 줄줄 내뿜지만 않았어도 설득력을 얻었을 텐데.
 하지만 힘이 깡패라고, 기자들은 떫은 표정만 지었다.
 “자자, 협박한 건 미안하지만, 너무 원망 마쇼. 질서만 지켜 준다면 특종 거리를 드릴게.”
 특종이라는 말에 기자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자고로 기자라면 특종이라는 말에 끌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준비할 게 별로 없기 때문에 기자 회견은 비교적 빨리 이루어졌다.
 질서 있게 자리를 잡은 기자들의 모습에 성도빈의 입가에도 웃음이 번졌다.
 오늘, 그가 돌아왔음을 다른 왕들도 알게 되리라.
 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참으로 궁금했다.
 
 ***
 
 “먼저 내가 누군지 말씀드리지.”
 마침내 시작된 기자 회견.
 기자들은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활짝 열었다.
 성도빈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정체를 털어놓았다.
 백호 길드 마스터의 아들이라는 것, 10년 전에 튜토리얼이란 곳에 들어갔다는 것까지.
 그리고.
 “파, 팔색의 왕과 함께 몬스터들과 싸웠다고요?”
 특종이었다.
 폭탄으로 따지면 핵폭탄급.
 “그럼 설마······?”
 “천사들이 안배한 왕은 애초에 아홉 명이었던 거지. 난 마지막 왕인 흑색의 왕인 거고.”
 성도빈의 손을 따라 검은색 마력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자, 잠깐만요. 한성일보의 조윤현 기자입니다! 실례지만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방금 그 발언, 증명하실 수 있습니까? 마력이 검다는 걸 빼면 다른 각성자들과 별다를 것도······!”
 “보여 주면 되나?”
 ―하늘 베기!
 성도빈을 중심으로 검은 마력의 파동이 해일처럼 뻗어 나갔다.
 마력이 없는 기자들도 질식할 것 같은 압박감에 사색이 됐을 정도.
 ‘서, 설마 우리를 죽이려고······?’
 ‘억울해! 질문만 했을 뿐인데!’
 완벽한 오해였다.
 성도빈이 쓴 스킬의 목표는 기자들이 아니었으니까.
 ‘쯧쯧, 화상들아. 죽일 거라면 8성급 스킬을 쓰지도 않았어.’
 8성급 스킬.
 [하늘 베기]는 성도빈이 쓸 수 있는 최강의 스킬 중 하나였다.
 “저, 저길 봐! 하늘이······!”
 뒤늦게 하늘을 올려다본 기자들이 눈을 부릅떴다.
 한쪽에서 대기했던 백호 길드의 헌터들도 마찬가지였다.
 성도빈은 짙푸른 창공에 검은 선을 그어 버렸다.
 도화지를 찢은 것처럼 검게 벌어진 선 때문에 태양까지 가려진 상태.
 개기일식처럼 세상이 일순 어두워졌다고 느꼈을 때, 검은 선이 팽창하듯 폭발했다.
 ······!
 소리는 없었다.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주파수를 아득히 넘은 음파의 충격.
 헌터들과 기자들이 머리를 감싸 쥐며 고통의 신음을 내질렀다.
 성도빈이 마력으로 보호해 주지 않았다면 뇌가 터져 죽었으리라.
 “이래도 내가 흑색의 왕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이 있으려나?”
 질문했던 한성일보의 기자는 해쓱해져서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성도빈이 씨익 웃었다.
 “좋군. 다음 질문?”
 “미, 민족신문의 송선화 기자입니다! 방금 전의 스킬은 뭐였습니까?”
 “대답해드리지. 8성급 스킬 [하늘 베기]. 이름 죽이지?”
 방금 전과는 다른 충격이 기자들의 머리통을 강타했다.
 팔색의 왕도 처음 나타났을 때는 6성급이었다.
 그런데 오늘 나타난 흑색의 왕이 8성급 스킬을 보유했다?
 한국의 정세, 아니, 세계정세가 바뀔 대사건이었다.
 헌터의 전력이 국력이 된 세상에서 강력한 각성자는 그만큼 요주의 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꿈에도 몰랐다.
 ‘검 안 써서 스킬 위력 좀 줄었다고 하면 더 난리 나겠지?’
 검을 안 썼기 때문에 스킬의 위력이 반타작밖에 안 나왔다.
 성도빈은 굳이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지금 보여 준 것만으로도 충격을 선사하기는 충분했으니까.
 “대한신문의 유세길 기자입니다! 흑색의 왕께서는 앞으로 뭘 하실지 궁금합니다!”
 “완전 좋은 질문이네. 이 질문이 나오길 원했는데.”
 씩 웃은 성도빈이 말을 이었다.
 “아까 말했죠? 백호 길드 마스터가 우리 아버지라고. 그럼 내가 어느 길드로 들어가겠어요?”
 “아!”
 기자는 깨달음을 얻은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성백호와 성도훈 부자의 표정은 애매해졌다.
 “도훈아, 도빈이 저 녀석이 언제 우리 길드에 들어왔냐?”
 “···방금 길드 가입서에 사인했어요.”
 그러는 동안에도 문답은 계속됐다.
 “그, 코리아 포스트의 기자 윤채영이라고 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성도빈 씨가 마음속에 품은 포부를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연로하신 아버지를 은퇴시키고 내가 길드 마스터가 되는 거!”
 자랑스럽게 ‘썩시딩 유 파더!’를 선언하는 성도빈이었다.
 성백호가 이마를 치켜떴다.
 “나 안 늙었다니까, 저놈이······!”
 “으음.”
 성도훈은 그동안 던전에서 싸우느라 고생하신 아버지께 이제 그만 은퇴하시라고 할지, 아님 망발을 일삼는 동생을 말려야 할지 살짝 헷갈렸다.
 그러나 기자들은 성도빈이 길드 마스터를 계승하는 것을 확신하는 분위기.
 “흑색의 왕! 길드 마스터가 되면 길드를 어떻게 운영하실 건가요?”
 “구체적으로 결정한 바는 아직 없습니다. 다음 질문!”
 “그럼 목표는요? 백호 길드를 최강의 길드로 만들겠다거나, 미수복 지역을 수복하겠다거나, 그런 건 없습니까?”
 “마음 같아선 세계 최강! 이라고 하고 싶지만 당장은 좀 힘들겠지? 일단 소소하게 한국 최강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무려 한국 최강이라는 타이틀이 소소한 목표로 격하된 순간이었다.
 기자들이 어색하게 웃자 성도빈이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히, 내가 혼자 던전 공략해도 한국 최강은 찍을 것 같거든.”
 “그, 그렇겠지요. 하지만 현재 20대 길드, 특히 가장 강한 3대 길드는 왕들이 세운 길드의 한국 지부입니다. 신경 쓰이지는 않으신가요?”
 “3대 길드 마스터들 경지가 몇 성입니까?”
 “대외적으로는 5성이라고 알려졌습니다.”
 성도빈은 김이 팍 샜다.
 “뭐야. 별거 아니네. 아, 그래도 지금까지 우리나라를 지켜 준 게 고맙기는 해요. 내 부탁 때문에 지켜 준 건지, 아님 사심이 있어 지켜 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부탁이요?”
 “전에 팔색의 왕들에게 우리나라가 멸망하지 않게 잘 부탁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가 멸망하면 우리 가족도 위험해질 테니까.”
 이쯤이면 기자 회견을 끝내도 되지 싶었다.
 기자들도 특종을 건져 만족한 눈치.
 성도빈의 눈짓을 받은 성도훈이 마무리를 지으러 나왔다.
 “그럼 기자 회견을 이만 끝내겠습니다. 기자분들 모두 고생하셨고, 멀리까지 와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대충 정리되는 분위기 속에서 성도훈이 이마의 땀을 훔쳤다.
 오늘 동생 덕분에 여러 번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것 같았다.
 “후, 죽는 줄 알았네.”
 “뭘 죽기까지야.”
 태연하게 지껄이는 성도빈.
 성도훈이 눈을 흘겼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이젠 어디로 갈 거야?”
 “어머니 뵈러 가야지.”
 “뵈면 좀 많이 놀랄 거다.”
 “엉?”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성도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도훈이 쓴웃음을 지었다.
 성백호도 같은 표정이었다.
 “가 보면 알아.”
 
 ***
 
 평창동.
 성도빈은 재벌 총수나 살 법한 커다란 전원주택의 정문을 넘어섰다.
 “아드으으으으을!”
 성백호의 아내이자 성도빈과 성도훈 형제의 어머니.
 최옥혜는 버선발로 달려와서 10년 만에 만나는 아들을 맞이했다.
 “어머니!”
 웃으면서 마주 어머니한테 달려간 성도빈.
 하지만 어머니를 보자마자 달리는 자세 그대로 경직됐다.
 “댁은 뉘쇼!?”
 “아들, 엄마 얼굴을 몰라!?”
 “아니, 아는데··· 아는데 이건······!”
 분명 어머니였다.
 기억 속의 얼굴 그대로였다.
 문제는 그게 열 살 때의 기억이라는 거지!
 왜 아버지랑 형이 어머니 보면 놀랄 거라고 한 건지 이해됐다.
 “너무 젊잖아요! 어머니, 보톡스 맞으셨어요?”
 “엄마라고 불러, 아들! 그리고 보톡스라니!? 자연산이야!”
 “말도 안 돼!”
 어떻게 보나 삼십 대였다.
 아무리 현대 의학이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이건 말이 되지 않았다.
 “엄마도 각성자라서 그래.”
 “무슨 회춘하는 스킬이 있는 것도 아니······.”
 있긴 했다, 그런 스킬이.
 “···[이팔청춘]?”
 “오, 아들도 알고 있구나. 튜토리얼이란 곳에서 익혔니?”
 어머니도 TV로 기자 회견을 보셨나 보다.
 “아뇨. 너무 희귀한 스킬이라서 익히지는 못했어요. 다른 녀석이 익힌 것만 봤죠.”
 어찌나 희귀한지 왕들 중에서도 단 한 명만이 익혔다.
 ‘튜토리얼에선 나이를 먹지 않고, 튜토리얼을 나가서도 노화가 더디게 진행된다고 들어서 별로 부럽지는 않았지만.’
 일단 전투 스킬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수명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었다.
 얼굴과 몸만 젊어질 뿐, 수명은 그대로다.
 물론 젊어지는 것만으로도 대단하긴 하지만, 긴 수명과 불로를 누리는 왕들에게는 있으나 마나 한 스킬인 것이다.
 그때 성백호가 말했다.
 “그런데 밥은? 던전에서 굴렀더니 배가 고픈데.”
 “안 그래도 차려 놨어요. 우리 도빈이 좋아하는 걸로.”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식탁에 맛깔나는 음식들이 가득했다.
 성도빈은 감동했다. 튜토리얼에서는 맨날 몬스터 고기만 먹었는데 드디어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구나.
 “아들, 엄마가 아들 주려고 열심히 만든 거야.”
 “오오, 잘 먹겠습니다.”
 냠냠.
 “어때, 맛있지?”
 “음, 맛은 있는데··· 그게······.”
 뭔가 이상했다.
 분명 맛은 있는데, 어머니의 손맛이 아니었다.
 “잠깐만요. 이거 옛날에 다른 곳에서 먹어 본 맛인데··· 분명 아버지랑 어머니 일하러 가셨을 때 사 먹었던······.”
 “아들, 너무 옛날까지 기억할 필요는 없어! 현실로 돌아와!”
 “기억났다! 수미네 할머니 반찬 가게 반찬이잖아요!”
 어머니는 절망하면서 아버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흑흑! 어떡해, 여보! 도빈이가 기억해 냈어!”
 “그러게 내가 솔직하게 말하자고 했잖아······.”
 왠지 허허로운 얼굴이 되어 먼 산을 바라보는 아버지였다.
 그렇다. 어머니는 요리를 못했다.
 몬스터 침공 전에는 아버지랑 함께 맞벌이를 하셨기에 손수 요리를 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슬프게도 아들에 대한 사랑이 깊어진다고 해서, 요리의 손맛까지 깊어지지는 않았다.
 
 
 # 2화 썩시딩 파더 (1)
 
 그 후로 TV며 인터넷 뉴스며 가릴 것 없이 떠들썩했다.
 설마 아홉 번째 왕이 나타날 거라고는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그것도 한국인이 말이다.
 [대박! 스킬로 하늘 베어 버린 거 완죤 존멋······;;]
 ┕[기자들 아무 말도 못 하는 거 꿀잼. 그 와중에 흑색의 왕이 썩시딩 유 파더 드립 치는 것은 더 꿀잼.]
 [드디어 한국에도 왕이 ^^]
 ┕[크, 주모 여기 국뽕 한 그릇 추가요!]
 한국은 헌터 전력이 약하다고 평가받는 나라였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웃 나라인 미중일러는 모두 팔색의 왕이 있었다.
 그런데 한국에 새로운 왕이 나타났으니 국민들이 열광할 수밖에.
 흑색의 왕이 있는 만큼 한국도 강해질 거라고 낙관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못 믿겠다. 기자들 앞에서 보여 준 게 8성급 스킬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냐? 그리고 10년 동안 뭐 하고 자빠졌다가 이제야 기어 나와?]
 ┕[ㅇㅇ. 저 사람이 뭐라고 증거도 없이 믿냐? 진짜 저 인간이 왕이라면 다른 팔색의 왕들이 인증해야 함.]
  ┕[응, 매국노는 꺼져^^]
  ┕[ㅋㅋㅋ 증거 없다고 했을 뿐인데 매국노로 모는 클라스 보소.]
 국민들이 불이 붙었다.
 흑색의 왕이 진짜냐부터 시작해서 팔색의 왕이 인증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해외도 시끄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보다 못한 팔색의 왕이 움직였다.
 영국의 기사왕, 백색의 왕.
 그리고 러시아의 짜르, 회색의 왕.
 뉴스 나간 지 3시간 만에 인증해 버렸다.
 ―성도빈은 흑색의 왕이 맞다. 그는 우리와 함께 튜토리얼에 있었다.
 ―그가 늦게 나온 것은 늦게 왕이 됐기 때문일 뿐. 튜토리얼을 나온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한국의 3대 길드도 입을 열었다.
 [히드라 길드 마스터, 입을 열다! 적색의 왕에게 직접 들어······.]
 [용혈 길드, 흑색의 왕의 한국 귀환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미다스 길드, 흑색의 왕이 진짜임을 증명하다.]
 팔색의 왕의 세력이 인증한 덕분에 의심은 조기에 불식됐다.
 이쯤 되자 국민들도 기자 회견을 믿고 성도빈에게 희망을 걸었다.
 [우리나라도 왕 있다! 헌터 강국 가즈아아아아!]
 [사실 우리나라도 헌터 전력이 아주 그렇게 밑바닥은 아님. 팔색의 왕이 있는 나라들이 깡패인 거지.]
 따지고 보면 이웃 국가들에 죄다 팔색의 왕이 있는 게 한국이 약해 보이게끔 한 주된 원인이었다.
 그런데 흑색의 왕이 생겼으니 볕 들 날이 온 것이다.
 성도빈이 백호 길드, 나아가 한국 헌터계를 이끈다면 그만큼 한국의 위상도 올라가지 않겠는가.
 “후, 어벤져스··· 좋은 영화였다. 감동에 눈물이 줄줄 흐르는구나. 끈질기게 살아온 보람이 있었어.”
 ···정작 당사자는 집에 처박혀서 10년 지난 히어로 무비나 보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지만 말이다.
 심지어 댓글도 안 본다.
 실제로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 없었다.
 “좋았어. 이젠 스파이더맨2다!”
 그딴 것보다는 새로운 영화를 보는 게 더 중요했다.
 성도훈이 혀를 내둘렀다.
 “너는 신경이 둔한 거냐, 아니면 무심한 거냐? 국민들이 난리가 났어. 길드엔 청와대 전화까지 왔고. 대통령이 너 만나고 싶다더라.”
 심지어 집밖에도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점심때 기자 회견을 했지만 화제의 중심인물인 만큼 조금이라도 더 인터뷰를 따내기 위해서였다.
 “정치인들 만날 생각은 없으니까 형이 적당히 커트해 줘.”
 “그게 내 마음대로 되냐?”
 “아 몰랑. 암튼 영화 다 볼 때까지는 집 밖에 안 나갈 거야.”
 청와대가 10년 지난 히어로 무비에게 밀리다니.
 ‘에휴, 그래. 오늘 돌아왔는데 쉬게는 해 줘야지.’
 솔직히 자신 같았어도 쉬고 싶을 것 같긴 했다.
 다만 지금은 히어로 무비나 볼 때가 아니었다.
 “일어나자. 가야지.”
 “어딜?”
 “너 돌아온 기념 파티. 우리 와이프랑 혜미도 불렀다.”
 “쩝.”
 형수와 조카가 왔다는 말에는 성도빈도 어쩔 수 없이 움직였다.
 정원엔 기다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한쪽에서는 출장 요리사들이 고기와 해산물을 숯불에 굽는 중.
 요리사들의 시선이 자신을 따라붙는 것을 느꼈지만, 성도빈은 요리만 쳐다봤다.
 규모는 작아도 호화로웠다.
 “휘유, 헌터가 돈을 많이 벌긴 버는 모양이야. 옛날 같았으면 이런 파티는 꿈도 못 꿨을 텐데.”
 재벌들만 산다는 평창동의 호화 주택을 사고, 출장 요리사들을 불러 파티를 여는 클라스라니.
 성도훈이 쓰게 웃었다.
 확실히, 옛날 같았으면 꿈도 못 꿨을 일이었다.
 “몬스터 시체는 돈이 되니까.”
 하지만 그만큼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
 
 가족들과 술과 고기를 먹으며 못다 한 얘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형수가 조카를 재우러 먼저 올라가고, 어머니도 뒤따랐다.
 성도훈도 곯아떨어져서 멀쩡한 사람은 성도빈과 성백호밖에 없었다.
 성백호는 취기가 오른 불콰한 얼굴로 물었다.
 “도빈이 너, 진짜로 길드 마스터가 될 생각이냐?”
 “연로하신 아버지를 염려하는 아들의 효심이죠. 바다처럼 깊고 우주보다 넓은 효심.”
 “효심은 개뿔이!”
 “농담처럼 말했지만 진심이에요. 아버지도 알잖아요. 이제 몬스터를 사냥해도 경험치가 안 올라가는 거. 억지로 올리려고 하면 위험해요.”
 “너, 그걸 어떻게······?”
 성백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성도빈의 말대로, 1년 전부터 경험치를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몰랐지만, [측정안]을 갖고 있는 성도빈한테는 뻔히 보였다.
 
 ======
 
 [성백호]
 ―종족: 인간
 ―성향: 선
 ―마력: 4성급
 ―잠재력: 99%
 ―포지션: 탱커
 
 ======
 
 20대 길드를 이끄는 길드 마스터답게 4성급의 경지.
 문제는 잠재력이었다.
 99%까지 계발했다면 지금보다 높은 경지에 오를 가망성이 없다.
 경험치가 오르지 않는 것도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
 계속 사냥하면 쥐꼬리만큼 오르긴 하겠지만, 그게 더 위험했다.
 억지로 한계 이상의 경험치를 받아들이려고 하면 몸이 버티지 못하고 뻥 터져 버리기 때문이다.
 ‘잠재력 자체를 키울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러나 시간이 오래 걸리고, 엄청나게 고생해야 한다.
 남들은 평생 만져 보지도 못할 돈을 번 아버지가 굳이 그 고생을 하면서 강해질 필요가 있을까?
 성도빈은 회의적이었다.
 “이제 그만 은퇴하시는 게 아버지를 위해서도 좋아요.”
 “흥! 아버지 아직 쌩쌩하다. 뒷방 신세 질 정도는 아니야.”
 “환갑이면 뒷방 갈 때죠.”
 “에잉, 버릇없는 놈. 술맛 떨어진다, 이놈아!”
 투덜거리면서도 성백호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백호 길드를 한국 최강으로 만들 자신 있냐?”
 “별로 어렵지도 않은데요.”
 “너 혼자 잘 싸우면 일인 군단이지. 그건 길드가 아니야.”
 성도빈이 후후 웃었다.
 “우리 아버지, 걱정도 팔자시네.”
 타인의 잠재력을 측정하는 [측정안]과 성도빈 자신의 노하우.
 게다가 아공간인 [무한의 주머니]에 보관된 수많은 아이템들.
 그것들을 쓰면 백호 길드를 최강으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백호 길드가 아니라 저 밑바닥, 순위조차 모를 최하위 길드라도 한국 최강으로 만들 자신이 있다.
 ‘그 이후가 문제지.’
 한국 최강으로 만족해선 안 된다.
 팔색의 왕이 이끄는 길드만큼 강해져야 뭔가 해 볼 만하다.
 “1년 봅니다. 그때까지 백호 길드를 한국 최강으로 만들 겁니다.”
 “1년 가지고는 택도 없다.”
 “내기하시죠? 제가 이기면 아버지 다시는 던전에 안 들어가시는 걸로.”
 “지면?”
 “그건 아버지가 정하시고요.”
 “좋아! 지면 장가가라.”
 엥?
 “뭘 그런 표정을 짓냐. 도빈이 너도 이제 서른셋이다. 이 아비는 아들이 독수공방하는 거 못 본다.”
 “아니, 그건 좀······.”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는 성도빈이었다. 지옥 같은 튜토리얼을 이제야 겨우 졸업했는데 결혼이라니!
 결혼 생활을 해 본 팔색의 왕과의 대화가 저절로 오버랩됐다.
 ―도빈, 넌 절대로 결혼하지 마라.
 ―왜?
 ―그냥 하지 마, 씨발.
 결혼 생활이 오죽 끔찍했으면 그런 말을 하겠는가?
 자신도 언젠가는 결혼할지 모르지만, 그전까지는 최대한 자유롭게 즐기며 살고 싶었다.
 “왜, 겁나냐?”
 “후, 이거 참. 이렇게 되면 죽을힘을 다할 수밖에 없는데······.”
 부자간에 참으로 흉흉한 미소가 오간다.
 그렇게 자유를 건 내기가 시작되었다.
 
 ***
 
 아침 7시.
 아침 해가 고개를 내미는 시간에 성도빈은 대뜸 욕부터 내뱉었다.
 “아오, 썅. 또 이거냐?”
 분명 침대에서 잤는데 침대가 아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몬스터 시체가 널려 있다.
 “망할 놈의 몽유병!”
 잠들었을 때 몬스터와 싸우는 몽유병이 도진 것이다.
 심지어 던전 안에서 얌전히(?) 있는 몬스터들을 굳이 찾아가서 죽여 버렸다.
 =====
 [축하합니다! 보스 몬스터를 쓰러트렸습니다!]
 [186마리의 몬스터를 전멸시켜 공략 조건을 만족했습니다!]
 [공략 보상은 ‘오성신의 신전’에서 수령하실 수 있습니다.]
 [출구가 개방됩니다.]
 =====
 오성신의 신전이라.
 간밤에 아버지에게 듣긴 했다.
 한국을 비롯해 각국에 천사들이 신전을 세웠다고.
 그러나 성도빈은 시큰둥했다.
 찾아가기 귀찮았기 때문이다.
 워낙 강한 탓에 스킬 보상 따위 별 의미도 없었다.
 9성급 스킬을 준다면 모를까?
 “쩝, 집에나 돌아가자.”
 다행히 [무한의 주머니]에 형이 사 준 스마트폰이 있었다.
 10년이 지났지만 대재앙이니 뭐니 하는 문제들이 경제와 산업에도 악영향을 줘서 IT 기술은 크게 발전하지 않았다. 덕분에 성도빈은 요즘 스마트폰에 어렵지 않게 적응했다.
 던전을 나와 지도 앱으로 위치를 검색하니 북한산이었다.
 집에서 4킬로 떨어진 곳.
 멀지만, [헤르메스의 날개]를 써서 2분 만에 도착했다.
 그런데 집에 들어가기 전, 성도빈은 얼굴을 구겼다.
 ‘이런 찰거머리 새끼들을 봤나.’
 기자들이었다.
 어제부터 진을 치더니 아침에 다시 모여든 것.
 성도빈은 자기도 모르게 옷차림을 살펴봤다.
 잠들다가 나왔지만 츄리닝을 입었기 때문에 딱히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진심으로 귀찮다. 피할까?’
 기자들의 이목을 피해 몰래 들어가는 거야 일도 아니다.
 ‘그런데 내가 왜?’
 자고로 남자는 언제 어디서나 정면으로 당당하게 가는 법!
 성도빈은 오만하게 턱을 치켜든 채 보무도 당당하게 걸었다.
 “앗, 흑색의 왕이다!”
 “성도빈 씨! 데일리 뉴스에서 나왔습니다. 인터뷰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성도빈이 삐딱하게 쳐다봤다.
 “무슨 인터뷰? 할 말은 어제 다 했는데?”
 “하하, 워낙에 짧지 않았습니까. 국민들은 성도빈 씨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합니다!”
 “나 참, 그쯤 알려줬음 됐지. 또 뭐가 궁금하답디까?”
 “이것저것 많지요. 혹시 청와대에서 연락 오진 않았습니까? 대통령께서 성도빈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신다는 소문이 돕니다.”
 “연락이야 왔지. 씹었지만.”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즉답한다.
 기자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그, 그렇군요.”
 다른 기자가 물었다.
 “원뉴스에서 나왔습니다! 혹시 다른 팔색의 왕들을 만나 보실 생각은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어째서입니까?”
 “귀찮습니다. 만나서 할 것도 없는데 뭐 하러 해외까지 나가?”
 “아, 음······.”
 귀찮다니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댁들이 남의 집 앞에서 진 치고 있는 거, 따지고 보면 민폐 아닌가? 생각해 보니 빡치네? 콧구멍에 확 딜도를 꽂아 줘? 엉!?”
 상상 초월의 협박.
 한국 역사상 언론 앞에서 이따위 막말을 늘어놓는 인간은 성도빈밖에 없지 않을까?
 그런데 이 인간이라면 정말 자기 말을 실천하고도 남는다.
 콧구멍에 ‘남자의 크고 아름다운 상징’이 꽂히는 것을 상상한 기자들은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죄, 죄송합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해 주실 수 있을까요? 국민들이 성도빈 씨께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새로운 희망이라면서요.”
 “지랄하고 자빠졌네.”
 “예?”
 “아니, 씨발? 왜 멋대로 나를 희망으로 삼고 지랄이야? 우리 아버지 때문에 길드 마스터 하는 거지, 불특정 다수의 희망이 될 생각은 쥐 좆만큼도 없다고!”
 “······?!”
 “정말 희망으로 생각한다면 후원이나 하라고 하쇼. 내가 주는 희망은 유료 서비스니까.”
 “······.”
 “왜, 한 말씀 해 달라며? 해 달라는 대로 해 줬구만 또 뭐가 불만이야! 내가 어디까지 해 줘야 하는데!?”
 거듭되는 막말에 기자들은 멘탈이 붕괴했다.
 
 ***
 
 집에 들어갔더니 성도훈은 이미 출근할 준비를 갖춘 차림이었다.
 “아침부터 어딜 갔다 온 거야?”
 “아침 운동.”
 성도빈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몽유병에 걸려 잠만 자면 몬스터를 학살하러 나간다는 말을 굳이 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맨발로?”
 “어?”
 아차, 맨발로 나갔구나.
 맨발로 나간다고 상처가 나진 않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엔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오늘 밤부턴 신발 신고 자야겠네.’
 당장 몽유병을 고칠 수는 없으니 말이다.
 “맨발로 훈련하는 게 효과가 좋거든.”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성도빈이었다. 물론 훈련 따위는 쥐뿔도 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집 앞에 있던 기자들이 싹 다 사라졌네. 너 때문이지?”
 성도훈이 혀를 끌끌 찼다.
 안 봤어도 다 안다는 것처럼.
 성도빈은 콧방귀만 꼈다.
 “남의 집 앞에서 진을 치고 있잖아. 짜증 나게스리.”
 “그 사람들은 그게 일이잖냐.”
 “알아. 그래서 곱게 인터뷰해서 돌려보냈어.”
 “줘 팬 게 아니라?”
 “진짜로. 말만 했다니까?”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성도훈은 의심스럽다는 듯이 눈매를 가늘게 좁혔지만, 성도빈은 태연하게 연기를 했다.
 현장에 없었다면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못 들었을 것 아닌가?
 “뭐, 어쨌든 일찍 일어났으니 잘됐다. 아버지도 방금 일어나셨으니까 나갈 준비해.”
 “또 어딜 가는데? 나 어제 밀린 영화 봐야 해.”
 성도훈은 동생의 철없음에 새삼 한숨이 나왔다.
 “영화는 나중에 봐도 되잖냐. 오늘은 길드에 가야 해. 길드 마스터가 되겠다고 한 이상 얼굴은 비춰야지.”
 “음, 그런가.”
 “일하시는 아주머니께서 죽 만드셨으니까, 얼른 씻고 부엌으로 와.”
 호화 주택에 사는 부자답게 집엔 일하는 아주머니가 상주했다.
 어제는 휴일이라서 쉬었지만.
 “밥 먹고, 아버지랑 함께 길드에 갈 거야. 간부들 앞에서 널 소개할 거다. 너도 할 말 준비해 둬. 이상한 말은 하지 말고.”
 성도훈은 동생이 간부들 앞에서 폭탄을 터뜨리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
 “끝내주는 연설을 해 주지.”
 “끄응!”
 엄지를 치켜드는 성도빈.
 성도훈은 불안감에 휩싸인 채 다시 한번 한숨을 내뱉었다.
 
 ***
 
 백호 길드는 종로에 사옥을 두고 있었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성도빈은 연신 싱글거렸다.
 “역시 돈이 좋아. 이런 비싼 차도 마음껏 탈 수 있고. 생전에 롤스로이스를 타 볼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부러우면 하나 사 주랴?”
 성백호가 통 크게 말했다.
 무려 7억을 호가하는 차였지만 그에게는 큰돈이 아니었다.
 “의자가 푹신푹신해서 마음에 들긴 하는데, 제 취향은 아니네요. 나중에 마음에 드는 거 찾으면 제가 살게요.”
 땡전 한 푼 없는 신세지만 상관없었다. 본격적으로 업계에 뛰어들면 돈을 갈퀴로 긁어모을 텐데 뭘.
 ‘사실 일할 필요도 없긴 하지만.’
 [무한의 주머니]에 보관된 아이템들 중엔 값비싼 마정석도 많았다.
 한국에는 존재하지 않는 7성급 마정석이 컨테이너 세 개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큼 쌓였을 지경이었다.
 8성급 마정석도 제법 되는 편.
 낮은 성급의 마정석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우야, 다 팔면 마정석값 무지 떨어지겠네.’
 무려 만 년 동안 긁어모은 마정석들을 모두 풀어 버리면 전 세계의 마정석 가치가 폭락해 버릴 터였다.
 한번 그 꼴을 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지만, 별 이득은 없는 것 같아 그만두기로 한 성도빈.
 한편, 아들이 속으로 어떤 무서운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성백호는 성도훈과 함께 회의 안건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창 시간을 보낼 때였다.
 “도착했습니다.”
 기사의 말과 동시에 차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성도빈은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백호 길드의 사옥은 예전 금은방 거리였던 종로 3가에 있었는데, 기존 상가들을 싹 밀었는지 20층 이상의 빌딩들이 즐비했다.
 “어째 여기는 10년 전보다 더 발전한 것 같은데?”
 “요즘은 다이아몬드 거래소를 마정석 거래소로 쓰고 있거든. 길드들이 자기들 편하려고 이쪽에 사옥을 지은 거야.”
 백호 길드뿐만 아니라 다른 길드들도 이 주변에 사옥을 지었다는 말.
 성도훈의 말처럼 고층 빌딩들엔 길드명이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그때였다.
 “백호 길드 마스터다!”
 “맙소사, 흑색의 왕도 있어!”
 이른 아침이지만 직장인들에게는 출근 시간이었다.
 사람들이 성도빈을 알아보고 달려왔다.
 때마침 백호 길드의 사옥에서 경비원들이 나오지 않았다면 세 사람은 순식간에 인파에 휩싸였으리라.
 “사인 좀 해 주세요!”
 “으악, 여러분! 이렇게 밀치시면 안 됩니다! 제발 질서를 지켜 주세요!”
 경비원들도 나름 훈련된 사람들인데도 숫자 때문에 밀린다.
 마치 레드 카펫 밟는 스타에게 몰려가려고 달려드는 팬들 같은 광경.
 성백호와 성도훈은 처음 보는 광경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성도빈은 히죽 웃으면서 성도훈에게 손을 내밀었다.
 “형, 펜하고 종이 좀.”
 “저, 정말로 사인해 주게?”
 사람들이 뭐라 떠들든 신경도 쓰지 않은 성도빈답지 않았다.
 “재밌잖아. 사인해 준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해 주지 뭐.”
 “음, 그, 그래. 그런데 종이는 A4 용지밖에 없는데······.”
 “상관없어.”
 즉석 사인회가 그렇게 열렸다.
 테이블하고 의자가 세팅됐다.
 경비원들의 통제를 따라 사람들이 차례대로 줄을 섰다.
 “오, 오빠. 어제부터 팬 됐어요.”
 가장 앞에 선 여고생이 떨리는 목소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촉촉하게 젖은 눈빛을 보낸다.
 성도빈이 흐뭇하게 웃고는 사인한 종이를 건네주었다.
 “자, 받으렴.”
 “고맙습니다! ···어?”
 싸인 받았다고 방방 뛰는 여고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 오빠! 사인 대신 凸자가 적혀 있는데요.”
 “응, 그게 내 사인이야.”
 “···엿 먹으라고요?”
 “어허, 엿이라니! 내가 간밤에 맛본 북한산의 정기를 표현한 그림인데!”
 어딜 보나 Fuck↗ you↘였지만, 낯짝 두껍게 큰소리친다.
 “돌겠다······.”
 부끄러움은 뒤에서 보고 있던 성도훈의 몫이었다.
 
 ***
 
 폭풍 같은 사인회가 지나간 뒤.
 성도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털레털레 들어왔다.
 “내가 너 때문에 화병으로 죽을 것 같다. 제발 하루라도 평화롭게 좀 넘어가면 안 되겠니?”
 “그래도 재밌었잖아.”
 “너만 재밌었지!”
 성도훈은 울상이 됐다.
 이미 인터넷에서는 사인회의 일이 일파만파 퍼지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좋은 말이 나올 리는 만무.
 그러나 성도빈은 와하하 웃었다.
 “괜찮아! 이렇게 했으니 다음에 귀찮게 하지는 않을 거야!”
 “그래그래, 아예 전 국민을 네 안티로 만들어라. 욕 많이 처먹어서 천년만년 살면 되겠네!”
 “그건 큰일인걸. 만 년 살아 봤자 별로 행복하지는 않은데 말이지.”
 오히려 정신 보호와 자살 금지 때문에 죽지 못해 살았었지.
 새삼 튜토리얼 시절을 떠올린 성도빈은 쓰게 웃었다.
 하나 그도 잠시였다.
 분위기가 심각해지기 전에 성도훈의 등을 팡 치며 위로했다.
 “뭐, 이번에는 재밌어서 사인회 했지만 다음에는 안 할 거야. 내가 연예인도 아닌데 인기에 연연할 필요는 없잖아.”
 “누가 그런 사인을 받고 싶겠냐?”
 성도훈은 끝까지 툴툴댔지만,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열렸기에 입을 다물었다.
 먼저 엘리베이터에 탄 삼십 대 초반의 남자가 형제를 보고 놀란 눈빛을 해 보였다.
 “서, 성도훈 고문님?”
 “아, 강 팀장님. 어제는 잘 쉬셨습니까?”
 성도훈도 아는 척을 했다.
 강민우는 정예 헌터들을 이끄는 1팀장으로, 어제 구리시의 4성급 던전에 백성호와 함께 입장했다.
 성도빈이 중간에 들어가 깽판을 치는 바람에 별 활약은 못 했지만.
 강민우의 입가에 쓴웃음이 드리웠다.
 “염려해 주신 덕에 잘 쉬었습니다. 그런데 옆의 분은··· 혹시?”
 강민우는 성도빈을 알아봤다.
 어제와 달리 머리를 스타일리시하게 다듬었고, 옷도 청바지에 재킷 차림으로 캐주얼하면서도 깔끔했다.
 길드 간부들을 만나는 자리인 만큼 강제로 메이크업을 시킨 것이다.
 하지만 어제 봤던 인상이 워낙 강렬했던 만큼 알아보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혹시 저 기억하십니까? 어제 던전에서 뵈었는데요.”
 “아, 예. 뭐······.”
 기억 안 나는데요.
 우리 언제 만났나요?
 성도빈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사실 강민우는 그가 던전에서 처음으로 구해 준 헌터들을 이끈 임시 리더였다.
 다른 데로 가지 말라는 협박을 직접 들은 당사자.
 ‘흐음, 본 것 같기도 하고. 기억이 날 듯 말 듯······.’
 기억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불현듯 떠올랐다.
 ‘아하, 그 양반이었구만.’
 
 ======
 
 [강민우]
 ―종족: 인간
 ―성향: 중립 · 선
 ―마력: 3성급
 ―잠재력: 54%
 ―포지션: 근접 딜러
 
 ======
 
 성도빈의 기준에서는 별거 없는 경지였지만, 잠재력이 쓸 만했다.
 54%까지 계발했다면, 아직 46%의 여력이 있다는 뜻.
 이 정도면 박재준인지 뭔지 했던 쉴드 길드 마스터와 비슷했다.
 아직 젊으니 정진하면 5성급까지도 오를 수 있으리라.
 ‘나중엔 우리 아버지보다도 강해지겠군. 좋아, 이 인간을 기준으로 삼자.’
 기왕 길드까지 왔으니 헌터들의 잠재력을 알아볼 작정이었다.
 잠재력이 높다고 무조건 높은 경지에 오르는 건 아니지만, 옥석을 가릴 최소한의 기준은 된다.
 잠재력을 높이는 방법은 워낙 희귀한 아이템이 많이 들어서 아무에게나 함부로 쓸 수 없었다.
 “강 팀장님도 회의실로 가시는 겁니까?”
 “예, 마스터께서 부르셨으니까요. 아마도··· 성도빈 씨 때문이겠지요?”
 “네. 아버지께서 은퇴를 발표하실 겁니다.”
 “역시.”
 강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아들에게 길드를 물려주면 재벌 상속이나 다를 바 없지만, 성도빈한테 물려주는 것은 달랐다.
 굳이 비유하자면 성도빈은 헌터계의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였다.
 아버지의 길드를 물려받지 않아도 제 손으로, 그것도 빠르게 최강의 길드를 만들 수 있는 능력자.
 ‘보상으로 받은 스킬북을 뿌리기만 해도 헌터들을 단숨에 강자로 만들 수 있을 테니까.’
 강민우 역시 높은 경지에 오르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
 때문에 성도빈에게 잘 보여야만 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미리 말하지만, 나갈 기회는 지금밖에 없어요.”
 “예?”
 “내가 길드 마스터가 되면 최강의 길드를 만들기 위해 댁들을 빡세게 굴릴 예정이거든. 곡소리 나게 굴릴 테니까 각오하라는 말입니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성도빈이 입꼬리를 올리는데, 어째 그 모습이 악마 같다.
 강민우는 왠지 모를 오싹함에 식은땀을 흘렸다.
 성도훈은 겁부터 주는 성도빈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모이라고 한 이유는 다들 짐작했겠지. 나는 오늘을 기해 은퇴를 할 겁니다.”
 간부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성백호가 선언했다.
 그의 말마따나 간부들도 어느 정도는 짐작했다.
 단지 시기가 예상보다 빨랐을 뿐이었다.
 ‘빨리 은퇴하시네. 몇 달은 더 있으실 줄 알았는데······.’
 ‘하긴, 길드 마스터도 곧 환갑이시니 이제 그만 은퇴하셔야지.’
 어차피 언젠가는 일어나리라고 예견된 일이었다.
 간부들은 금방 감정을 수습하고 성백호 뒤에 선 성도빈을 돌아봤다.
 ···눈을 부릅뜨고 자신들을 노려보는 모습이 어째 무섭다.
 ‘저 사람이 흑색의 왕.’
 ‘눈매 엄청 치켜뜨네. 자기한테 잘 보이라는 경고인가?’
 ‘레서 리치를 구타했다고 하던데··· 개기면 우리도 줘 패는 거 아냐?’
 간부들의 머릿속에서 온갖 추측이 휘몰아쳤지만, 그들 생각과 달리 성도빈은 눈빛으로 경고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
 살짝 실망감이 들었다.
 ‘쓸 만한 놈들이 없네.’
 그나마 강민우가 5성급까지 오를 가능성이 보였지만, 그를 제외한 2팀과 3팀의 팀장은 잠재력이 별로였다.
 2팀장 김영수는 4성급이 한계였고, 3팀장 박지혜도 피장파장.
 나머지 간부들은 예산이나 마케팅 부서라서 각성자조차 아니었다.
 ‘끄응, 팀원들은 좀 다르려나? 다르면 좋겠는데 말이야.’
 지금은 약할지라도 잠재력은 빵빵하다면 기대를 걸어 볼 만했다.
 “도빈아, 너도 한마디 해라.”
 성도빈이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동안 성백호는 간부들에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던 것이다.
 자기 차례가 되자 성도빈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기자 회견에서도 말했지만 제 목표는 한국 최강의 길드를 만드는 것입니다. 고난과 역경이 있겠지만, 저를 믿고 따라와 주시면 언젠가 여러분은 한국 최강 길드의 일원이 된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패기 있으면서도 상식적인 발언.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성도빈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여러분이 거부해도 최강의 길드로 만들 겁니다. 앞으로 7성급 이상의 난이도 높은 던전들이 나오면 어쩔 수 없이 제가 들어가야 할 텐데, 저 혼자 뺑뺑이 돌면 좆같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들도 좆같은 기분을 느껴 보라고 무지막지 굴릴 겁니다. 그게 싫으신 분은 지금 사표 쓰세요. 바로 수리하겠습니다.”
 “······.”
 간부들은 깨달았다.
 새로 부임한 길드 마스터는 최강일지는 몰라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튜토리얼만 1만년 했다』 1-2권에 계속>

댓글(14)

fl*******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주인공 성격이 너무 개 파탄자임 작가가 쿨하게 컨셉 잡았는지 몰라도 너무 선을 넘네요. 그만 읽습니다.
2019.11.05 14:54
k5257    
주인공 가오잡을 때마다 골방구석 사회성 재기꾼이 킬킬대며 쓴거같음
2020.01.24 00:36
窮理    
ㅋㅋㅋ23살먹고 1만년 살앗다는데 주인공 정신 연령은 이중깽 중2병 같네요
2020.01.27 16:51
제이팔일    
2 투명드래곤
2020.01.30 10:02
n7****************    
1만년이 우습나 ...10년만해도 사람이 어떻게변하는데
2020.02.03 00:51
신노화    
개노잼이다 하차함 . 더는못보겟음
2020.05.04 01:18
노란거울    
난 바보가 아님 할인한대 5페이지를 분량을 10페이지로 해놓고 할인이래
2020.05.04 05:23
쏘맥치맥    
만년동안 혼자 살았는데 성격 저정도면 매우 이성적인거 아닌가? 힘이 있고 만년을 또라이짓하면서 혼자 살다가 이제서야 사회생활하는건데 설정 매우 잘잡았다 생각합니다
2020.05.08 09:00
야옹고    
자면서 수천년이 지났다고 하네 작가도 잠자면서 글쓴거아냐? 글보니깐 잠이오네 하암~ 졸립다 잠잘오는 소설이네 굿
2021.08.06 17:27
콩알이네1    
결제하고 뒤로 갈수록 재미없고 지루함 보다가 포기
2021.08.14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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