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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천무적 1-1

2019.09.16 조회 2,011 추천 10


 승천무적(昇天無敵) 1권
 
 목차
 서(序)
 1장. 장강은 멈추지 않는다
 2장. 수상비(水上飛)
 3장. 새로운 흐름
 4장. 합심(合心)
 5장. 무호에 부는 바람
 6장. 폭풍이 불다
 7장. 전설의 서막
 8장. 난제(難題)
 9장. 인연이기에
 10장. 비룡호풍(飛龍呼風)
 11장. 일당백(一當百)
 12장. 지옥에서 춤추는 용
 
 
 
 서(序)
 
 
 
 파사검룡(破邪劍龍) 주윤평이 죽었다.
 장강을 질타하던 젊은 영웅은 결국 강 위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가 감당하기엔 불사교룡(不死蛟龍) 상일극은 너무 강하고 노련한 상대였다.
 두 용의 싸움에 장강이 요동쳤고, 그 요동은 나아가 천하를 울렸다.
 당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수로맹의 맹주가 주가상단의 단주를 죽인 것이다.
 강호는 숨죽이며 수로맹을 주시했다.
 바야흐로 장강의 공기는 터지기 직전까지 치닫고 있었다.
 
 파사검룡 주윤평.
 그의 죽음이 전설의 시작이라는 것을, 강호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1장. 장강은 멈추지 않는다
 
 
 
 왕이정은 충실한 하오문도다.
 위험한 걸 뻔히 알면서 안휘성 안경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그래서이다.
 그는 잔뜩 겁을 먹었으면서도 기어코 안경에 발을 들여놓았다.
 칼 밥을 먹는 강호인이라면 오늘이 얼마나 위험한 날인지 모를 리 없었다.
 오죽하면 하오문 상부에서도 왕이정에게 안경의 상황을 염탐하라는 명령을 내릴 때 미안해했다.
 그러나 그놈의 호기심이 문제였다.
 왕이정은 덜컥 명을 받아들였고, 이게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안경에 다다라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쓰벌-! 내가 미쳤지, 미쳤어.”
 그는 안경 중심의 신평객잔에서 화주를 들이키며 신세한탄을 하고 있었다.
 신세한탄이라지만 혹시 누가 들을까 조용히 중얼거리는게 다였다.
 오늘 그가 안경에서 본 고수만 벌써 세 명이었다.
 그것은 일개 하오문도인 왕이정이 알아볼 정도로 유명한 사람만 세 명이라는 뜻이다.
 기척을 숨기고 있을 무림인들을 생각하면 이 조그만 도시는 복마전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거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오늘이 바로 파사검룡 주윤평이 죽은 지 사십구 일째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혈혈단신으로 주가상단을 일으킨 주윤평의 죽음은 만만치 않은 후폭풍을 몰고 왔다.
 우선 유일하게 장강수로맹과 타협하지 않던 주가상단이 쑥대밭이 되었다. 수로맹의 오랜 염원이던 장강 일통이 이뤄진 것이다.
 예로부터 수로맹은 구대문파나 삼대명가의 상선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정파 무림도 위험을 감수하고 수로맹을 자극할 일은 없었다.
 둘 사이에 암묵적인 협약이 존재하는 셈이다.
 그러나 구파나 세가에 속하지 않은 군소 상단과 표국들은 모두 수로맹에게 보호금을 지불해야 한다.
 따지고 보면 새로울 것도 없는 강호의 관례이다.
 다만 구대문파 이상의 세력을 과시하게 된 수로맹이 질서의 주인이 된 것뿐이다.
 주윤평이 무위를 휘날릴 적엔 뒤에서 그를 응원하던 상단들은 금방 입을 씻고 주가상단의 상권을 나눠먹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수로맹과 타협했다.
 어차피 상계(商界)에 강호의 도의 따위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주가상단을 떠나 파사검룡 주윤평이라는 한 인물만을 놓고 봤을 땐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는 상단의 단주였지만 동시에 무림의 젊은 영웅이었다.
 주윤평과 교분을 맺었던 무인들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들 역시 최고의 위세를 자랑하는 수로맹에게 대놓고 덤빌 수는 없는 입장이다. 그러나 강호인들이 불만을 가지는 것은 수로맹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수로맹은 주윤평이 죽은 지 사십구 일째 되는 날 안경에서 시신을 반환하겠다고 공표하였다.
 이렇게 해서라도 상일극과 주윤평의 비무는 공정한 것이었다고 말하려는 속내였다.
 왕이정은 이미 죽은 시신을 내놓겠다는 수로맹도 이해가 안 갔고, 그 시신을 보기 위해 안경에 모여든 무림인들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 때문에 자신이 이런 위험지구에 기어들어 와 숨을 죽이고 있는 게 아닌가.
 왕이정은 얌전히 있다가 시신이 인수되는 것만 보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때 속으로 불만을 늘어놓던 그의 귓가로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으시면 합석을 해도 되겠는지요?”
 왕이정의 눈앞에 어느새 비단옷을 곱게 차려입은 귀공자가 서 있었다.
 어디를 봐도 부잣집 막내도령인데 허리에 검을 찬 모양새가 우스웠다.
 그나마 가죽으로 된 검집은 깨끗한 비단옷과 달리 낡아빠졌다.
 “보시다시피 객잔에 다른 자리가 없어서요. 합석을 허해주신다면 대협이 드신 것도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청년은 구김살 없이 웃으며 말했다.
 왕이정에겐 그가 딱 벗겨먹기 좋은 사냥감으로 보였다.
 아무리 위험한 곳에 있어도 이런 호구를 그냥 지나칠 순 없었다.
 하오문도로서 체면이 있는 것이다.
 “크흠, 뭐 내가 계산이나 대신해 달라고 그러는 것은 아니고. 강호가 다 동도라 하지 않았나? 어디까지나 순수한 의미에서 합석을 허하는 것일세. 나 이래 봬도 융통성 있는 사람이야. 커허허!”
 산적처럼 생긴 왕이정이 대협인 척하는 게 무척 우스웠다.
 그러나 청년은 개의치 않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대협 덕에 발품을 더 팔지 않아도 되겠군요.”
 “나 같이 좋은 사람을 만나 다행으로 알게. 그나저나 통성명도 안 했구먼.”
 “저는 주이(周二)라고 합니다.”
 “주씨 가문의 둘째? 요새도 그런 성의 없는 이름이 있었던가. 나는 왕이정일세. 강호에는 천하무쌍이란 별호로 더 유명하지, 험험.”
 왕이정은 객잔 안의 다른 사람이 들을까 봐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게 천하무쌍이란 별호가 있을 리 없었다.
 기껏해야 밑바닥 정보로 먹고사는 하오문에서 중간 간부인 게 고작이다.
 하지만 순진한 주이는 눈을 빛내며 왕이정을 다시 쳐다봤다.
 “아, 천하무쌍 왕 대협이셨군요. 제가 식견이 짧아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나 융통성 있는 사람이라니까. 그나저나 어린 친구치고 싹수가 있구먼. 자네는 무슨 일로 안경에 왔나?”
 왕이정은 워낙 노숙해 보이는 외모 때문에 중년으로 보였다. 그래서 실제 나이가 비슷함에도 주이를 강호의 후배처럼 대했다.
 “돌려받을 것이 있어서 안경까지 오게 됐습니다. 그런데 오다 보니 저잣거리 분위기가 심상치 않더군요.”
 “크허! 거 답답한 친구일세. 그럼 자네 아무것도 모르고 안경엘 왔단 말인가? 그것도 버젓이 검까지 차고서 말이야.”
 “왕 대협께선 무슨 일이 있는지 아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누군가, 천하무쌍 왕이정이야! 강호의 일에 나만큼 빠삭한 사람이 몇이나 있다고.”
 왕이정은 주이가 집에서 가출한 풋내기 도령이라고 확신했다.
 이제 현란한 말솜씨로 혼을 쏙 빼놓고 더불어 주머니도 쏙 빼먹고 유유히 사라지면 되는 것이다.
 강호초출을 놀려먹는다 생각하니 굳었던 표정이 저절로 밝아졌다.
 주이가 왕이정의 말도 안 되는 허풍을 듣는 동안 식탁 위로 새로운 요리들이 가득 들어찼다.
 “자네 정말 주가상단의 일을 모르는가? 주가상단이 개박살 나고 식솔들도 뿔뿔이 흩어진 게 언제 적 일인데. 이게 다 파사검룡이 죽었기 때문이지. 쯧쯧, 아깝게 됐어. 조금만 지났어도 강호에 획을 그었을 인물인데. 수로맹주랑 붙기엔 너무 젊었지. 아무튼 그 파사검룡의 시신이 반환되는 날이 오늘 아닌가! 바로 이 안경에서 말이야. 그러니 안경에 고수들이 득시글한 것이고. 자네도 몸조심하게. 잘못했다간 한 방에 가는 수가 있어.”
 주이는 왕이정의 설명에 자못 놀란 눈치였다.
 왕이정은 자신의 말에 놀아나는 주이의 모습이 우스웠으나 더 겁을 주면 이대로 달아날까 두려워 몇 마디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걱정 말게. 자네는 날 만난 걸 행운으로 알아야 될 거야. 천하무쌍 왕이정 옆에만 붙어 있으면 몸이 상하는 일은 없을 걸세.”
 “감사합니다. 오늘 왕 대협을 만나지 않았으면 크게 흉을 볼 뻔했군요.”
 “커허허, 뭐 이것도 다 자네의 운인 게지. 어서 들게. 음식 식겠네, 이 사람아.”
 모두가 주이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차려진 음식이었다. 하지만 왕이정은 자연스럽게 주인 행세를 했다.
 그는 말을 많이 해 목이 말랐는지 독한 화주를 물처럼 들이켰다.
 “그런데 왕 대협, 지금 안경에 와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대단한 고수들인지요?”
 “내가 오늘 누구를 봤는지 안다면 까무러칠걸. 아무리 강호초출이래도 이름 석 자 정도는 들어 봤을 테니.”
 왕이정은 무인들의 이름을 말해줘도 눈앞의 샌님이 누군지 알기나 할까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오늘 본 무인들은 격이 다른 인물이었다.
 강호를 동경하는 풋내기 도령이라면 분명 그들의 별호를 들으며 망상을 키웠으리라.
 “호북성 최고의 낭인인 무음창(無音槍) 진훈이 강변에서 수로맹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네. 저잣거리엔 삼통신개 육방언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지. 육방언이면 개방의 후개로 거론되는 후기지수 아니겠는가. 이게 다가 아니야! 가장 거물은 따로 있다네. 금란파도(金蘭波刀) 도세준! 파사검룡이 생전에 금란회의 인물과 교분이 있는 줄은 몰랐네만, 지금 안경 저자가 난리도 아닐세. 허리에 칼 찬 인간들은 도세준의 등장에 다 얼어붙었지. 진훈이나 육방언이 최고의 후기지수라 해도 도세준에게는 한 수 접어줘야 할 정도니 말일세. 이만하면 자네가 오늘 얼마나 대단한 곳에 와 있는지 알겠는가?”
 “무음창 진훈, 삼통신개 육방언, 그리고 금란파도 도세준까지. 파사검룡이 대단하긴 대단한가 봅니다.”
 “아무렴, 아무한테나 장강의 영웅이란 말을 붙일까. 상계 놈들이야 워낙 의리가 없으니 잠잠하다고 쳐도 애초에 말이 되는 비무인가. 이제 고작 서른인 주윤평이 수로맹주와 붙은 거 말이야. 원래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
 “왕 대협. 대협께선 이전에 파사검룡과 면식이 있으셨던가요?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니 그를 상당히 좋아하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크, 크흠. 그렇게 들리던가? 내가 천하무쌍 왕이정이긴 해도 강호가 좀 넓어야 말일세. 비록 파사검룡을 대면한 적은 없지만 강호인치고 그를 싫어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배경 없이 성장해서 강호를 질타한 그의 인생이야말로 모든 무인들의 귀감 아니겠나, 이 말일세.”
 왕이정은 벌컥벌컥 들이켠 화주 기운이 맴도는 것을 느꼈다.
 주책 맞게 죽은 파사검룡이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일면식도 없지만 주윤평은 모든 삼류 무인들의 희망이었다.
 왕이정 역시 철저한 삼류무인으로서 주윤평의 삶을 동경해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안주를 뒤적거리며 주이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이 이렇게 흥분하며 연설을 늘어놨으면 감동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강호초출인 녀석이 감동은커녕 묘한 얼굴로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이런 맹한 도령들이야말로 주윤평의 이야기를 가장 좋아하는 부류인데 말이다.
 머쓱해진 왕이정이 뭐라 쏘아붙이려던 찰나였다.
 객잔 문이 열리며 일단의 무리가 들어왔다.
 “헉!”
 왕이정은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키며 눈을 내리깔았다.
 객잔 안으로 들어온 세 명의 사내가 그의 시선을 잡아끈 것이다.
 “어디 불편하신지요?”
 주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갑자기 왕이정의 안색이 파래지자 제 딴에 걱정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왕이정은 손가락을 입술에 붙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쉿! 절대 고개 돌리지 말고 내가 하는 말만 듣게.”
 끄덕끄덕-
 눈을 크게 뜬 주이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왕이정이 단순히 겁을 주려고 헛소리를 하는 건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잔뜩 쫄아 있었다.
 “방금 들어온 세 명이 누군지 아는가?”
 “모릅니다.”
 “하긴, 자네라면 당연히 그러겠지. 저들은 잔인하기로 악명 높은 장강삼흉이네.”
 “장강삼흉?”
 “수로맹에 속하지 않은 수적 중에서 가장 강한 자들이지. 주가상단과도 악연이 있었다고 하던데··· 이 기회에 수로맹에 들어갈 작정인가? 저들이 왜 나타난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객잔 중앙에 자리 잡은 장강삼흉은 거들먹거리며 위세를 과시했다.
 그들이 나타난 뒤로 객잔 내부는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다들 장강삼흉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알아서 기는 것이다.
 그런 분위기가 마음에 든 듯 장감상흉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져 갔다.
 비슷하게 생긴 세 명이서 술잔을 돌리며 건방진 말을 잔뜩 늘어놓았다.
 “형제들! 드디어 우리가 수로맹에 입성하는 날이 왔군.”
 “강호의 시선이 집중된 오늘이야말로 두 번 다시 없을 길일이지. 아니 그런가?”
 “하하하! 맞습니다, 맞아요. 천하의 장강삼흉이 수로맹에 들어가기에 딱 좋은 날이 아니겠습니까!”
 듣자하니 장강삼흉은 오늘을 기해 수로맹에 입맹할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오늘일까.
 그들이 파사검룡 주윤평의 시신을 반환하는 날에 입맹하려는 의도는 불순하기 짝이 없었다.
 “주윤평, 그 재수 없는 놈의 낯짝을 더 이상 안 봐도 되니 속이 다 시원하네!”
 “그러게 말이네. 그놈 덕에 무림이 안경을 주목하고 있으니 우리의 이름도 확실하게 각인될 걸세.”
 “죽은 주윤평을 거름 삼아 장강삼흉의 위명이 천하를 진동시키겠지요, 흐흐흐!”
 셋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객잔 손님들은 하나같이 분노를 느꼈다.
 아무리 죽은 사람이라지만 그래도 장강의 영웅이었던 주윤평의 시신이 돌아오는 날이다.
 망자에 대한 예의가 있다면 저따위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객잔 안에서 장강삼흉에게 시비를 따질 만큼 담력이 큰 사람은 없었다.
 괜히 나섰다간 칼밥을 먹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불 안 가리는 장강삼흉이라면 사람 많은 객잔에서도 칼부림을 일으킬 수 있었다.
 평소 주윤평을 흠모했던 왕이정도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주먹만 꽉 쥐고 있었다.
 “망할 놈들. 오늘이 어떤 날인데 저딴 소리를 지껄이고 지랄이야.”
 바로 옆에 앉은 주이는 왕이정의 혼잣말을 똑똑히 들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겨 버렸다.
 성질머리는 고약해도 무공 실력은 뛰어난 장강삼흉이 그의 속삭임을 들은 것이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고수는 아주 미세한 소리도 놓치지 않는다.
 왕이정은 분을 가누지 못해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고 말았다.
 “방금 지껄인 놈이 누구야?”
 “어떤 새끼가 겁도 없이 장강삼흉의 대화에 끼어들어? 뒈지고 싶다, 이거지!”
 아니나 다를까, 장강 삼흉이 술병을 거칠게 내려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누가 혼잣말을 했는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그들의 기세에 객잔 안의 손님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왕이정도 행여 들킬까 봐 다리를 덜덜 떨었다.
 덥수룩한 턱수염에 산적 같은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게 소심한 모습이었다.
 “아무도 안 나와? 확 객잔 전체를 박살 내버릴까 보다!”
 호랑이가 없는 곳에서 여우가 왕 노릇을 한다더니, 무림인이 없는 객잔에서 장강삼흉은 맘껏 패악질을 부렸다.
 객잔 주인은 살벌해지는 분위기를 보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러다 칼부림이라도 나면 장사를 접어야 할 판이다.
 “마지막으로 경고한······!”
 피슉-!
 그때였다.
 장강삼흉의 막내가 고함을 치던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젓가락이 기둥에 꽂힌 것이다.
 얇은 젓가락은 장강삼흉이 서 있는 바로 옆의 기둥에 반쯤 박혀 있었다.
 누가 어디서 젓가락을 날렸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했다.
 엄청난 공력을 지닌 고수가 객잔 안에 있다는 뜻이다.
 기세등등한 장강삼흉조차도 젓가락을 던져 기둥에 박을 자신은 없었다.
 더구나 모두의 시선을 피해 젓가락을 날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누, 누가 감히!”
 주제를 모르고 막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상황 파악이 빠른 우두머리가 팔을 뻗어 동생을 만류했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레 말했다.
 “어느 고인이 계신지 정체를 밝혀주시오.”
 나름대로 우두머리랍시고 제법 눈치가 빨랐다. 거칠었던 말투도 어느새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젓가락을 던진 고수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았다.
 “우리 장강삼흉의 언사에 불만이 있으신 듯한데··· 떳떳하다면 모습을 보이는 것이 어떻소.”
 계속된 제의에도 불구하고 객잔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결국 장강삼흉의 첫째도 울분을 토해내고야 말았다.
 “끝까지 안 나오겠··· 커억!”
 쐐애액-
 그는 말을 끝맺기도 전에 비명을 질렀다.
 또다시 날아온 젓가락이 오른쪽 귀를 뚫고 반대편 기둥에 박혔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는 여인네들처럼 귀고리 구멍이 생기고 말았다.
 물론 강제로 뚫린 구멍에선 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형님!”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젓가락은 사천당가의 암기처럼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날아와 귓불을 꿰뚫었다.
 그러고도 힘이 남아 기둥에 박혔으니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장강삼흉은 눈 뜬 장님이 된 기분이었다.
 뭔가 번쩍하더니 모든 게 끝났다. 이번에도 젓가락이 날아온 방향을 파악하지 못했다.
 ‘상상할 수 없는 고수가 있다!’
 붉게 물든 귀를 부여잡은 첫째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젓가락이 목을 노렸다면 지금 그는 싸늘하게 식은 주검이 됐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 이상 객잔 안에 있을 수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어, 얼른 나가야겠다!”
 “예, 형님.”
 “여긴 터가 안 좋은 것 같네.”
 허둥지둥하며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는 장강삼흉의 모습은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객잔 주인과 손님들도 통쾌하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놈들 목에 힘주더니 꼴좋구먼!”
 “누군지 몰라도 객잔 안에 대협께서 계시는 듯해.”
 “놈들이 줄지어 도망치는 뒷모습을 보았나? 오늘 밤은 잠이 잘 오겠네, 허허허허!”
 다시 객잔의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긴장하고 있던 왕이정도 술잔을 비우며 허풍쟁이로 돌아왔다.
 “크으- 아쉽네, 아쉬워. 내가 나서서 장강삼흉을 한 방에 보내려고 했는데!”
 “정말입니까?”
 “그럼, 정말이지! 이름 모를 고인이 나서는 바람에 기회를 놓치고 말았어.”
 “좋은 구경을 할 뻔했는데, 아쉽군요.”
 주이는 왕이정의 말을 믿는다는 듯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봐도 허풍인데 혼자만 모르는 것 같았다.
 ‘이거 샌님 중에서도 완전 백치 수준이잖아?’
 왕이정은 그런 주이를 보며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적당히 놀려주려고 했는데 지나치게 순둥이인 것 같았다.
 그가 뭐라고 입을 열려는 찰나, 객잔 바깥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왕이정이 무릎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장강수로맹이 도착할 시간이 다 된 것이다.
 그는 가만히 앉아 있는 주이를 일으켜 세웠다.
 이왕 이렇게 얽혔으니 안전하게 구경이라도 시켜줄 작정이었다.
 “어서 따라오게. 그리고 절대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말고. 알겠지?”
 “이제 강변으로 나가는 겁니까?”
 “여기까지 와서 구경을 안 할 수도 없으니까. 좋은 자리를 잡으려면 서둘러 움직여야 해.”
 주이는 그의 손에 이끌려 객잔 밖으로 나갔다. 그 와중에 계산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빨리 가자고!”
 “알겠습니다.”
 워낙 급하게 움직여서일까.
 인파를 헤치며 달려가는 왕이정은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말았다.
 바로 그들이 앉았던 탁자 위에 젓가락이 한 쌍만 남았다는 점이다.
 주이의 자리에는 짝을 잃은 숟가락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
 
 강변에는 벌써 수많은 구경꾼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적어도 배짱 하나만큼은 타고난 인물일 것이다.
 주윤평을 기억하는 무림인들과 장강수로맹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도 위험을 감수하고 구경을 나왔으니 말이다.
 그렇게 따지면 왕이정의 담력도 보통은 아니었다.
 자신보다 강한 무인 앞에서는 설설 기지만 하오문 안에서는 나름 독종으로 통하기도 했다.
 “내 옆에서 떨어지면 큰일 나! 정신 바짝 차려야 하네.”
 “왜 큰일이 난다는 건지······.”
 “여기 분위기를 보고도 모르겠나?”
 군중들 틈을 비집고 강변으로 다가가던 왕이정이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이라는 청년은 얼마나 귀하게 자랐는지 몰라도 말귀를 못 알아먹는 재주를 타고난 것 같았다.
 “일단 따라오기나 해. 아, 거 좀만 비킵시다.”
 왕이정은 주이를 이끌면서 능숙한 동작으로 사람들 사이를 헤쳐 나갔다.
 그가 땀을 뻘뻘 흘리며 애쓴 덕에 둘은 강변 끄트머리에 다다를 수 있었다.
 강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구경하기에 딱 좋은 장소였다.
 “봤나? 내가 아니었으면 이런 명당은 꿈도 못 꿨을 거야.”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뭐가 그리 위험하다는 말인지요?”
 “이 답답한 사람아. 객잔에서도 설명을 했는데!”
 “그랬었나요······?”
 “그럼, 그랬지! 잘 생각해 보게. 주윤평과 친분을 나눴던 쟁쟁한 후기지수들이 한자리에 모였네. 그들이 수로맹과 웃으며 인사를 하겠나? 칼부림이 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야.”
 “후기지수들은 혈기를 억누르지 못할 것이고, 수로맹도 거는 시비를 그냥 넘길 곳은 아니고. 뭐 그렇다는 말입니까?”
 “바로 그거지! 더구나 주윤평의 시신을 누가 돌려받을지도 정해지지 않았네. 그는 일찍이 부모를 잃었고, 주가상단도 풍비박산 났으니······.”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응? 그게 무슨 말인가?”
 “시신을 돌려받을 사람이 있으니까요.”
 “크흠음?”
 왕이정은 눈을 크게 뜨고 주이를 노려봤다.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 갑자기 헛소리를 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왕이정이 의문을 품기도 전에 강 건너편에서 커다란 뱃소리가 울려 퍼졌다.
 뿌우우우-!
 “왔다! 수로맹의 함선이 도착했어!”
 “우와-! 말은 많이 들었는데 진짜 군함보다 더 튼튼해 보이잖아?”
 “황실도 손 놓은 장강을 통일했으니 저 정도는 되어야지.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구먼, 대단해.”
 구경꾼들은 멀리서 다가오는 수로맹의 배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형 군함 한 척이 중형 전투선 세 척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나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하아······! 이러니 주가상단이 박살 나는 게 당연하지. 파사검룡 주윤평이 너무 무모했어, 쯧쯧.”
 왕이정도 넋을 잃고 위풍당당한 함대를 쳐다봤다. 그의 목소리에는 짙은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장강수로맹······.”
 주이도 뭔가 느끼는 것이 있는지 낮은 음성으로 혼잣말을 읊조렸다.
 “오래 기다렸어, 형.”
 과연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왕이정이 고개를 돌렸지만 주이는 대답 없이 강 위를 바라봤다.
 넘실거리는 강물 사이로 폭풍의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주이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고 있었다.
 
 
 
 2장. 수상비(水上飛)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강을 사이에 두고 일렬로 늘어선 무림인과 수로맹의 배들은 주변의 공기를 완전히 바꾸었다.
 이윽고 중형 전투선 세 척을 거느린 대형 군함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느긋하게 강변 가까이 다가온 군함의 갑판 위로 우람한 풍채의 사내가 올라왔다.
 멀리서도 한 눈에 알아볼 만큼 덩치가 큰 사내는 내공을 담아 포효를 터트렸다.
 “맹주님의 명을 받들어 주윤평의 시신을 돌려주러 왔다. 누가 대표로 나설 텐가!”
 중년 사내의 쩌렁쩌렁한 외침이 강변을 흔들었다.
 그의 사나운 기백에 웬만한 무인들은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강변과 군함 사이의 거리는 삼백보(三百步). 그럼에도 불구하고 맹수 같은 기운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그때 강변 오른쪽에서 구릿빛 피부의 무인이 한 자루 창을 높이 들고 군중들을 밀어냈다.
 “나는 주윤평의 친우, 무음창 진훈이다! 먼저 별호와 이름을 밝혀라. 한낱 낭인인 내게도 법도가 있다. 수로맹은 정녕 근본 없는 집단이란 말인가?”
 무음창의 등장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수로맹의 위세에 압도당하던 군중들이 웅성거리며 침착함을 회복했다.
 그러나 군함 위에 홀로 선 사내는 진훈을 노려보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고작 창으로 밥이나 벌어 먹고사는 애송이가 말버릇이 험하구나.”
 “시비를 건다면 마다하지 않겠다.”
 내공을 가득 담아 오가는 둘의 대화는 천둥처럼 사방을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어진 사내의 말은 더욱 놀라웠다.
 “용기가 가상하군. 좋다! 나는 수극함의 함주, 수극도 추상곤이다.”
 수극도(水克刀) 추상곤.
 그 이름이 지닌 무게감은 진훈과 비교하기 힘들었다.
 무음창이 날고 기는 후기지수라고 해도 장강수로맹의 함주는 차원이 다른 무인이다.
 애초에 군함이 나타났을 때부터 함주의 등장을 의심했어야 한다.
 추상곤이 이름을 밝히자 진훈은 말없이 창을 부여잡았다.
 당분간은 팽팽한 대치가 지속될 것 같았다. 그사이 왕이정 옆에 서 있던 주이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왕 대협, 추상곤이라는 자가 유명한 모양이군요.”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입으로 뱉었으니 말이지요.”
 “참 답답한 친구로구먼.”
 참다 못한 왕이정이 가슴을 치며 설명을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샌님을 달고 다니려니 가르쳐 줄 게 너무 많았다.
 “장강수로맹이 뭔지는 알고 있겠지?”
 “당연하지요.”
 “수로맹에는 맹주 밑에 세 명의 삼협장로가 있네. 그 아래에서 각 지역을 지배하는 무인들이 바로 열여덟 명의 함주란 말이야.”
 “왜 하필 열여덟 명입니까?”
 “그거야 장강 수로 십팔채의 전통을 계승했으니 당연한 거지! 군함을 지닌 함주들 밑으로 전투선을 이끄는 선주가 있고, 뭐 대충 이렇게 수로맹이 유지되고 있다네. 이제 좀 알겠는가?”
 “역시 왕 대협은 모르는 게 없으십니다.”
 주이는 또 한 번 감탄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추상곤을 쳐다봤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가 대단한 무인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함주가 직접 왔단 말이지······.’
 주이의 눈에 기묘한 빛이 서렸다. 고개를 돌린 왕이정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말이다.
 “무음창 진훈이 밀리는 것 같구먼.”
 강변의 분위기를 살핀 왕이정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실제로 기세 싸움에서 진훈이 조금씩 밀리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구경꾼들 사이엔 걸출한 인물이 남아 있었다.
 삼통신개 육방언과 금란파도 도세준.
 후기지수의 격을 넘어섰다고 평가받는 두 명의 젊은 무인이 진훈을 돕기 시작했다.
 “딸꾹-! 이거 취기가 오르네? 수극도 추상곤 대협의 헛소리를 안주로 삼아야겠어, 낄낄낄.”
 경박스럽게 웃으며 너스레를 떠는 청년은 개방의 후개로 거론되는 육방언이었다.
 봉두난발에 땟국물이 줄줄 흘러도 그를 무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추상곤도 무림의 배분으로는 육방언을 압박하기 힘들 정도였다.
 “긴말하지 않겠다. 윤평의 시신은 내가 돌려받는다.”
 육방언 옆에서 조각 같은 외모의 무인이 짧고 굵은 말을 내뱉었다.
 복건성을 지배하는 금란회주의 수제자, 도세준의 음성은 그의 칼처럼 묵직했다.
 진훈에 육방언, 그리고 도세준까지. 연배가 어리다고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조합이다.
 하지만 추상곤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과연 장강을 떨어 울리는 수로맹의 함주다운 뱃심이었다.
 “다들 혓바닥이 짧구나! 세 놈을 모아서 물고기 밥으로 만들어주랴?”
 채앵-
 추상곤의 도발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도세준이었다.
 그는 긴말하지 않고 허리춤의 칼을 뽑았다.
 금빛이 감도는 칼을 든 채 우뚝 서 있는 도세준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추상곤의 위세에 눌려 있던 구경꾼들도 환호성을 터트리며 도세준을 칭찬했다.
 “주가상단이 박살 났어도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군. 과연 금란파도 도세준이야.”
 “그러게 말일세. 구대문파도 등을 돌렸는데··· 젊은 친구가 대단허이.”
 중인들이 수군거리자 강변의 분위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한 자루 칼로 공기의 흐름을 바꾼 도세준은 추상곤을 노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윤평의 시신을 돌려놓고 꺼져라.”
 “네놈이 금란회주를 믿고 과하게 설치는구나.”
 추상곤은 정말로 화가 난 것 같았다.
 내공이 실린 그의 음성에는 값싼 흥분 대신 진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사실 무공과 명성으로 따지면 도세준이 수로맹의 함주를 감당하는 건 아직 무리다.
 그러나 벗의 시신을 돌려받는 자리에서 꼬리를 말 순 없었다.
 그의 모습에 용기를 얻은 육방언과 진훈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도 소협이 용맹하다더니 명불허전이네, 딸꾹! 어디 한 번 신나게 놀아보실까?”
 “나도 함께하겠다.”
 육방언이 딱딱한 술병을 들었고 진훈은 창대를 허리에 붙였다.
 수로맹의 배가 다가오면 곧바로 뛰어들 준비를 마친 것이다.
 상황이 급변하자 무공을 모르는 구경꾼들은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자칫하면 수로맹과 무림인들의 시비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거 사태가 심각해지는 것 같네.”
 왕이정도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꽈악!
 그때 주이가 왕이정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제까지와는 다른 목소리를 흘려냈다.
 “여기 있으세요. 재밌는 구경을 하게 될 테니까.”
 “으응? 그, 그게 무슨 말인가.”
 주이는 왕이정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수극함 갑판에 서 있는 추상곤이 결정적인 외침을 터트렸기 때문이다.
 “수로맹의 수극함주가 맹주님을 대신하여 파사검룡 주윤평의 시신을 반환한다. 허나 그와 별개로 도세준, 육방언, 진훈. 너희 세 놈의 애송이들에게 장강의 매서움을 가르쳐 주마!”
 추상곤의 말이 끝나자 수극함 옆에서 작은 조각배 하나가 떠내려 왔다.
 스르르륵-
 노 젓는 사람도 없이 물살을 따라 강변으로 흘러오는 조각배는 하얀 천으로 덮여 있었다.
 아마 조각배의 흰 천 아래에 주윤평의 시신이 놓여 있을 것 같았다.
 “주윤평이다!”
 “파사검룡의 시신이야!”
 몇 명이 호들갑을 떨자 강변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조각배를 쳐다봤다.
 천천히 떠내려 오는 조각배에 장강을 울렸던 젊은 영웅의 시신이 실려 있다.
 어떤 이는 눈물을 글썽거렸고, 또 어떤 사람은 숙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구대문파와 장강의 상계는 수로맹의 손을 들어줬지만 이름 없는 강호인들은 그를 잊지 않았다.
 그러나 이어진 추상곤의 호통은 사람들의 슬픔을 날릴 만큼 거칠고 사나웠다.
 “강변으로 배를 붙여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극함과 세 척의 전투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웅!
 군함 한 척과 전투선 세 척이면 중소문파를 쓸어버릴 전력이다.
 그들이 위압감을 뿜어내며 강변 가까이 다가오는 모습은 살벌하게만 느껴졌다.
 조금 앞에서 떠내려 오는 주윤평의 조각배가 거칠어진 물살에 흔들거렸다.
 도세준은 칼을 꽉 쥔 채 친우의 시신이 실린 조각배를 주시했다. 그러면서도 수극함이 다가오면 뛰어나갈 준비를 마쳤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지만 수로맹의 뻔뻔한 태도를 용납할 수 없었다. 육방언과 진훈도 같은 뜻을 품고 있을 터였다.
 ‘와라.’
 마음을 굳게 먹은 도세준의 눈이 빛났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강변 반대편에서 누군가 몸을 날린 것이다.
 쐐애액-
 강렬한 파공성 때문에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추상곤도 갑작스레 쏘아진 폭발적인 기운을 느끼고 눈을 부릅떴다.
 “저, 저건······!”
 이윽고 구경꾼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정체불명의 청년이 강물을 박차고 허공으로 튀어 오른 것이다.
 물 위를 달린다는 절정의 경지, 수상비(水上飛).
 하얀 물방울이 부서지며 새로운 영웅이 장강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세요.”
 “그 무슨?”
 수극함이 강변으로 다가올 즈음, 갑작스러운 주이의 말에 왕이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궁금해하는 것도 잠시 뿐, 천하무쌍을 자처했던 왕이정은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샌님처럼 곱상하게 생긴 주이가 스스로의 얼굴 가죽을 벗겨 버렸기 때문이다.
 투두둑!
 “인피면구?”
 왕이정의 경악스러운 외침에 주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롭게 드러난 그의 진짜 얼굴은 이전과 미묘하게 달랐다.
 마냥 곱상한 부잣집 도령에서 조금 더 선이 굵은 남자로 변한 것이다.
 ‘낯이 익은 인상인데······?’
 왕이정은 다시 한번 의문에 휩싸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질문을 던질 틈도 주어지지 않았다.
 인피면구를 벗어버린 주이가 다짜고짜 강을 향해 달려 나갔기 때문이다.
 파악!
 땅을 박찬 주이의 신형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순간적으로 뿜어진 박력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왕이정은 점점 멀어지는 주이의 등을 바라보며 넋을 놓았다.
 “저, 저놈 뭐지?”
 다른 말은 나오지 않았다.
 물 위를 달리는 고수 앞에서 천하무쌍이라고 거들먹거렸던 게 생각나 혀를 깨물고 싶었다.
 그때 다른 사람들도 주이의 수상비를 바라보며 경악성을 토해내고 있었다.
 “대체 누구지?”
 “도세준과 진훈, 육방언도 놀란 얼굴인데? 게다가 수극도 추상곤도 말을 잃었어!”
 “주가상단과 인연을 맺었던 신진고수의 등장인가?”
 구경꾼들의 웅성거림이 커지는 가운데 주이는 거침없이 주윤평의 시신이 담긴 조각배로 전진하고 있었다.
 파악- 파악!
 ‘나쁘지 않아.’
 주이가 강바람을 가르며 미소를 지었다.
 발바닥이 수면에 닿는 순간 무지막지한 내공을 뿜어내는 게 수상비의 원리다.
 간단하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경지를 서른도 안 된 주이가 펼쳐내고 있었다.
 파파팟!
 그의 발에서 쏘아진 내공이 수면을 때릴 때마다 물방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슈욱-
 찰랑거리는 강물을 밟고 공중으로 떠오르는 주이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사실 추상곤도 수상비를 펼칠 수 있다. 다만 주이가 보여주는 것처럼 유려하고 부드럽게 물 위를 달리긴 힘들었다.
 타악!
 모두의 시선을 뺏으며 강물을 거슬러 오른 주이가 조각배 위에 안착했다.
 그는 하얀 천으로 뒤덮인 조각배의 끄트머리에 선 채 추상곤을 쳐다봤다.
 강변으로 배를 움직이던 추상곤은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정체모를 젊은이의 눈빛에 장강수로맹의 함주인 추상곤이 위축된 것이다.
 “네놈은 누구냐!”
 추상곤은 당황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더 큰 소리를 냈다.
 그러나 쩌렁쩌렁한 그의 외침은 주이에게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했다.
 “목청이 참 좋으시네. 수로맹은 목소리 크기로 함주를 뽑나 봐요?”
 손가락으로 귀를 파며 능청스레 질문을 던지는 주이의 모습은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당연히 그런 태도는 추상곤의 심기를 자극했다. 뻔한 도발이지만 뻔하기에 더욱 잘 먹히는 것이다.
 “건방진! 정체를 밝히지 않겠다면 그대로 물귀신을 만들어주마.”
 “머리가 있으면 생각이란 걸 해보세요, 수극도 추 대협. 오늘이 무슨 날입니까?”
 “그거야 주윤평의 시신을 돌려주는······!”
 “그럼 내가 왜 갑자기 튀어나왔을까요.”
 순간 추상곤을 비롯해 도세준과 진훈, 그리고 육방언까지 모두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수상비를 펼치며 등장한 의문의 사내가 주윤평과 인연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파사검룡 주윤평은 칠 년 전 땅에서 솟아나듯 강호에 나타났었다.
 그렇기에 강호출도 이전의 인연은 알려져 있지 않았다.
 어쩌면 느긋한 말투로 추상곤을 농락하는 청년 고수가 주윤평의 과거를 아는 사람일지 모른다.
 화아아악!
 그때 조각배의 뒤쪽, 주이의 등 뒤에서 불꽃같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다름 아닌 금란파도 도세준이 칼끝을 주이에게 겨눈 것이다.
 “이름을 밝혀라.”
 도세준을 비롯해 육방언과 진훈의 눈빛도 예사롭지 않았다.
 주윤평의 시신을 실은 조각배 위에 몸을 의지한 주이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수로맹의 함대와 강변의 무림인들 사이에서 모두의 표적이 되고 있었다.
 영웅의 시신이 돌아오는 자리에 누군가 난입했으니 다들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주이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도세준의 부름을 기다렸다는 듯 조각배 위에서 몸을 돌렸다.
 “이 얼굴을 모르겠습니까? 꽤나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도세준을 똑바로 바라봤다.
 무공을 익혔기에 강변과 조각배 사이의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도세준은 주이의 이목구비를 확인하곤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진훈과 육방언도 마찬가지였다.
 죽은 주윤평을 기리기 위해 강변에 나온 그들이 같은 반응을 보인 것이다.
 이윽고 다시 몸을 돌려 추상곤을 향해 똑바로 선 주이가 입을 열었다.
 “내 얼굴을 보세요. 떠오르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너! 너는······!”
 추상곤도 그제야 떠오르는 게 있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주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파사검룡 주윤평의 유일한 혈육, 주윤건이 형의 시신을 찾으러 왔다-!”
 주이, 아니 본명을 밝힌 주윤건은 이제까지와 달리 거친 포효를 터트렸다.
 동시에 그의 몸이 작은 조각배를 박찼다.
 후우우웅!
 허공에 떠오른 주윤건은 다시금 수상비를 펼치며 추상곤을 향해 나아갔다.
 거대한 수극함의 갑판을 노리고 정면으로 달려드는 것이다.
 고작 한 사람이 육중한 군함을 마주 보며 강물을 박차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스윽-
 주윤건은 강물을 밟으며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하오문의 왕이정이 장식용이라 비웃었던 검은 물방울을 맞으며 날카롭게 빛났다.
 파아악!
 순식간에 수극함 앞에 다다른 주윤건이 온 힘을 다해 수면 위로 뛰어올랐다.
 놀랍게도 그는 성벽과 같은 수극함의 뱃머리보다 더 높이 떠올랐다. 그러고는 추락하는 힘을 이용해 갑판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까앙!
 주윤건의 검과 추상곤의 칼이 부딪치며 강렬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허공에서 떨어지며 검을 휘두른 주윤건은 자연스럽게 갑판에 섰다.
 그러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이제껏 보이지 않던 수로맹의 맹도들이 갑판 위로 올라왔기 때문이다.
 추상곤의 뒤쪽에 나타난 무인들의 수는 족히 스무 명을 상회했다.
 수극함에 탄 백여 명의 수로맹도 중에서 나름 칼 좀 쓴다는 무인들만 나온 것 같았다.
 이십 대 일의 수적 열세.
 뿐만 아니라 수극함 옆에는 중형 전투선 세 척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게다가 수극도 추상곤은 장강을 떨어 울리는 무인이다.
 구대문파의 고수라고 해도 장강에선 추상곤에게 한 수 접어줄 것이다.
 주윤건은 죽을 자리를 찾아 들어온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주윤평의 복수라도 할 셈이냐?”
 평정을 되찾은 추상곤이 칼을 비스듬히 세우며 물음을 던졌다.
 하지만 주윤건의 대답은 그의 예상을 한참 벗어났다.
 “그럴 리가. 나 그렇게 무모한 사람은 아닙니다만.”
 “그럼 뭘 하자는 건가!”
 “내가 주윤평의 형제임을 증명하려는 거지요. 얼굴만으론 부족하니까, 무공으로.”
 다시 얄미울 만큼의 여유로운 태도를 보인 주윤건은 고개를 까닥거리며 추상곤을 지목했다.
 “시신을 받으려면 이 정도 증명은 해야지. 안 그렇습니까?”
 “형제를 쌍으로 묻어주마. 아무도 나서지 마라!”
 결국 추상곤은 또 한 번 주윤건의 도발에 넘어갔다.
 그는 수많은 부하들을 제지시킨 뒤 칼을 높이 들었다.
 수극함의 갑판은 무지막지하게 넓어서 한바탕 싸움을 펼치기에 손색이 없었다.
 “짧게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어디 혓바닥처럼 검도 매서운지 보자!”
 전혀 다른 둘의 말이 끝나자 곧바로 파공성이 뿜어졌다.
 강변에 모인 사람들과 수로맹도들은 숨을 죽인 채 갑판 위의 전투를 지켜봤다.
 대부분 추상곤의 칼이 주윤건을 꿰뚫을 거라고 확신했다.
 화아악-!
 살벌한 크기의 직도(直刀)가 허공을 갈랐다. 스치기만 해도 허리가 통째로 절단 날 것 같았다.
 피슉!
 그러나 주윤건은 아슬아슬하게 칼날을 피해냈다.
 “제법이구나!”
 흥이 오른 추상곤은 연달아 외침을 터트리며 갑판 끝으로 주윤건을 몰아붙였다.
 어느새 둘은 갑판을 가로질러 뱃머리까지 이르렀다. 여기서 더 물러서면 강물에 떨어진다.
 추상곤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자신의 절기를 펼쳤다.
 물살을 거스르는 극강의 도법, 수극도의 위력이 고스란히 발휘됐다.
 후와아악-
 칼날에서 쏟아진 바람에 날카로운 기운이 담겨 있었다.
 주윤건의 호리호리한 몸으로는 맹렬한 도풍(刀風)을 받아내지 못할 것 같았다.
 허나 신나게 칼을 뻗어내던 추상곤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순간적으로 확인한 주윤건의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쩌엉!
 곧이어 주윤건의 얇은 검이 정확하게 칼끝을 찔렀다.
 허무할 정도로 가볍게 수극도의 힘을 무너트린 주윤건은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한 줄기 빛이 추상곤의 허리를 스쳐 갔다.
 쐐액-!
 엄청나게 빠른 섬광이 그의 허리끈을 잘랐다.
 주윤건은 멈추지 않고 다시 어깨를 움직였다. 그의 어깨가 튕길 때마다 얇은 검이 벼락처럼 쏘아졌다.
 스르륵.
 이번엔 추상곤의 반대쪽 허리끈이 잘려졌다.
 지지대를 잃은 그의 바지가 속절없이 흘러내렸다.
 수극도 추상곤의 속옷이 만인 앞에 노출된 것이다.
 하지만 민망함을 느낄 틈도 없었다. 바람보다 빠르게 쏘아진 주윤건의 검이 마지막 세 번째 빛살을 뿜어냈기 때문이다.
 슈우욱!
 “······.”
 추상곤은 식은땀을 흘리며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주윤건의 검이 그의 목젖 바로 앞에서 멈춘 것이다. 조금만 움직여도 목이 꿰뚫릴 위치였다.
 그야말로 극쾌(極快)의 경지에 이른 찌르기였다.
 고작 세 번의 검격으로 추상곤을 제압한 주윤건은 평소처럼 태연자약한 표정이었다.
 “이게 뭔지 알아보겠지요?”
 “사, 삼룡격······.”
 추상곤은 목젖으로 살기를 느끼며 입을 열었다.
 삼룡격(三龍擊)은 파사검룡 주윤평이 생전에 선보였던 성명절기다.
 오직 그만이 펼치던 무공을 재현했으니 주윤건의 정체도 명확해졌다.
 “그럼 형의 시신은 내가 가져갑니다.”
 스릉.
 주윤건은 한바탕 잘 놀았다는 듯 그대로 검을 거뒀다. 그러고는 아무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추상곤이 칼을 들고 서 있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새파랗게 어린 주윤건에게 철저히 농락당한 추상곤은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오늘의 모욕··· 절대 잊지 않으마.”
 “그러거나 말거나 마음대로 하시고. 대신 수로맹주에게 한마디만 전해줬으면 좋겠는데.”
 “무엇이냐.”
 “언젠가 만나게 될 테니까. 그때까지 늙어 죽지 말고 건강하라고 전해주시지요.”
 주윤건은 자기의 방식대로 수로맹주에게 경고를 날렸다.
 할 말을 마친 그는 추상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갑판을 박찼다.
 파앙- 파앙!
 경쾌하게 수면을 박차며 달려 나간 주윤건은 강변 가까이 떠내려간 조각배 위에 올라섰다.
 강변에 서 있던 수많은 구경꾼들은 일제히 박수와 환호성을 보내며 그를 반겼다.
 처음엔 정체를 의심했지만 쏙 빼닮은 얼굴과 삼룡격을 보였으니 주윤평의 동생인 게 분명했다.
 “와아아아-!”
 “파사검룡에게 동생이 있었구먼. 자네 들어봤는가?”
 “금시초문일세. 그래도 똑똑히 보지 않았나. 파사검룡의 동생이 추상곤을 가지고 놀았어. 이거 장강에 다시 폭풍이 불겠구먼.”
 사람들은 새로운 영웅의 등장에 힘을 실어줬다.
 그에 부응하듯 조각배 위에 선 주윤건이 손을 높이 들었다.
 “쉬잇!”
 “조용해 해봐. 뭔가 말하려는 것 같잖아.”
 환호성을 보내던 사람들이 일순 조용해졌다.
 주윤건은 그제야 손을 내린 뒤 내공을 실어 자신의 뜻을 알렸다.
 “형이 돌아오는 자리에 이렇게 많이 모여주셔서 감사합니다. 함께 나눌 음식과 술은 없지만, 형도 외로워하지 않을 것 같군요.”
 그의 말을 들은 누군가가 앞장서며 외쳤다.
 “파사검룡을 위하여!”
 이윽고 사람들 사이에서 그 외침이 전염병처럼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위하여!”
 “위하여-!”
 주윤건은 형을 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 그래도 칠 년 동안 헛살지는 않았네.’
 조각배의 하얀 천 아래 잠들어 있는 주윤평도 웃고 있지 않을까.
 주윤건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헌데 그때 사람들의 외침을 뚫고 굵은 음성이 들려왔다.
 “윤평의 아우, 주윤건. 복수는 하지 않을 생각인가?”
 수로맹의 배는 돌아갔어도 도세준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의 질문은 여러모로 묵직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주윤건은 예상했다는 듯 막힘없이 대답을 늘어놓았다.
 “복수? 지금 당장 수로맹주를 찾아가 검을 겨누는 게 복수입니까?”
 “그게 아니면 뭐지?”
 “나의 형, 파사검룡 주윤평이 이루고자 했던 꿈을 살펴볼 겁니다. 그리고 그 꿈을 내가 이뤄줄 생각입니다.”
 “윤평의 꿈을······.”
 도세준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놀란 얼굴이었다.
 주윤건은 그에게 남은 말을 덧붙였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 꿈의 끝에 수로맹주가 있겠지요. 이게 내가 꿈꾸는 복수입니다.”
 “너의 진심을 알겠다.”
 도세준이 주윤건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먼 길을 떠나 버린 친우, 그리고 그의 형제가 걸어갈 새로운 길을 인정한 것이다.
 주윤건은 말없이 웃으며 강물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조각배와 함께 형의 꿈이 깃들어 있는 장강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끝까지 의지를 꺾지 않았던 파사검룡 주윤평의 꿈이 새롭게 잉태되는 순간이었다.
 
 
 
 3장. 새로운 흐름
 
 
 
 강호의 소문은 장강의 물결보다 빠르게 퍼진다.
 중원 무림은 주윤건이라는 신진고수의 등장을 주목하고 있었다.
 젊디젊은 강호초출이 수로맹의 함주인 수극도 추상곤을 농락한 이야기는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주윤건이 선보였던 수상비와 삼룡격을 막아낼 무인이 중원에 몇이나 될까.
 파사검룡 주윤평이 허무하게 떠난 대신 그보다 더 강한 동생이 폭풍을 몰고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주윤건은 강호의 소문 따위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형의 시신을 실은 조각배와 함께 장강을 유랑하는 중이었다.
 내공을 쌓은 무인의 시신은 쉽게 부패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죽은 주윤평과 함께 조각배에 몸을 싣고 물결을 따라 장강을 둘러볼 수 있었다.
 ‘무림과 상계는 형을 버렸지만 장강의 민초들은 주가상단을 기억하고 있어.’
 주윤건은 장강과 밀접한 마을을 거치며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아무것도 모르는 촌민들과 어부들은 주윤평의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낌없이 환대를 베풀었다.
 어느 마을에선 갓 잡은 생선을 내주었고, 또 다른 어촌에서는 조각배를 정박시킬 항구와 잠자리를 빌려주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 주가상단의 몰락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적어도 주윤평의 주가상단은 장강의 민초들을 최우선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로맹과 그에 빌붙은 상단들이 장강을 통일한 이후 민초들의 삶은 더없이 빡빡해졌다.
 과도한 보호세는 물론이고, 장강의 물길을 이용하려면 엄청난 대금을 치러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대문파는 침묵을 지켰고, 장강의 다른 상단들은 수로맹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이런 실정에서 주윤평의 동생이 나타나 새로운 길을 선포했으니 민초들이 환영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아-”
 조각배 위에 앉은 주윤건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여정 동안 민초들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형인 주윤평이 어떤 꿈을 꿨는지도 분명히 느꼈다.
 장강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사람들이 다 함께 웃을 수 있는 새로운 시대.
 그것이 주윤평과 주가상단의 꿈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를 열기엔 구태의연한 무림 세력과 상계의 힘이 너무 컸다.
 주윤건은 세상의 벽을 넘어서고자 노력했던 형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여튼 무모한 인간이라니까.”
 그러나 한숨 끝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은 왜일까.
 사실 주윤건은 죽은 형이 무척이나 자랑스러웠다.
 초라한 시신이 된 후에도 민초들의 환영을 받는다는 건 장강이 그의 진심을 알아줬다는 뜻이다.
 비록 불가능해 보이는 무모한 도전이지만 새로운 시대를 향한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제 주윤건이 그 꿈의 주인이 된 것이다.
 찰랑찰랑-
 장강의 물결이 작은 조각배를 부드럽게 밀어냈다.
 주윤건은 대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의 손길을 느끼며 하얀 천 아래 잠들어 있는 형에게 말을 걸었다.
 “형, 이왕이면 조금만 더 참고 세상으로 나가지 그랬어. 사부님의 무공을 완성하고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늦었지만··· 형이 조금은 원망스럽다.”
 죽은 주윤평은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주윤건은 살아 있는 사람과 말을 나누는 것처럼 두런두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장강을 따라 천천히 흘러가는 조각배 위에서 칠 년 만에 재회한 형제의 대화가 꽃피는 것이다.
 “그거 기억나? 고아로 떠돌던 우리를 사부님이 거둬주셨을 때 말이야. 무조건 고수가 돼서 함께 강호를 질타하기로 했었잖아. 내 꿈은 그거였는데.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냥 형이랑 강호를 주유하고 싶었어.”
 늘 밝고 여유로운 주윤건의 목소리에 촉촉한 물기가 젖어든 것 같았다.
 그러나 슬픈 기색은 금방 사라졌다.
 주윤건은 다시 활짝 웃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형도 잘 알겠지만, 내가 눈물이나 질질 짜는 성격은 아니잖아? 슬픔과 분노로 인생을 갉아먹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 대신 형과 함께 같은 꿈을 꾸는 거야. 새로운 시대, 새로운 길. 그 끝에 수로맹주라는 영감탱이도 기다리고 있겠지.”
 시신을 돌려받는 자리에서 도세준에게 했던 말과 일맥상통하는 각오였다.
 주윤건은 이제 형을 보내줄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조각배를 타고 장강을 주유하면서 이별의 의식은 모두 치루었다.
 그는 시신을 묻을 묘지도 마련하지 않았다.
 파사검룡 주윤평이 일생을 바쳐 사랑했던 장강이야말로 가장 어울리는 무덤이다.
 “편히 쉬어, 형.”
 마지막 말을 마친 주윤건이 조각배를 박차고 허공으로 떠올랐다.
 일부러 천근추의 내공을 실었기에 작은 조각배가 속절없이 부서졌다.
 주윤건은 공중에 뜬 채 강물 밑으로 가라앉는 형의 시신을 쳐다봤다.
 푸슈우욱-
 곧이어 푸른 물결이 주윤평의 시신을 완전히 감쌌다.
 수장(水葬)을 마친 주윤건은 허공에서 떨어져 수상비를 펼쳤다.
 물 위를 달려 강변의 육지에 도착한 그는 유장하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주윤건이 장강의 흐름을 주도해야 할 시간이었다.
 
 ***
 
 손님이 찾아왔다.
 주윤건이 조각배와 함께 여행하는 동안 줄곧 육로로 뒤를 쫓았던 사람이다.
 그는 조각배와 주윤평의 시신이 장강에 잠기고 나자마자 곧장 자신을 드러냈다.
 물론 주윤건도 그가 다가올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많이 기다렸지요.”
 주윤건은 마치 오래전부터 알았던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의 능청에 상대가 약간 당황한 것 같았다.
 “기,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윤평을 보내줄 때까지.”
 “보다시피 방금 작별 인사를 마쳤습니다. 한결 홀가분하군요.”
 “그게 전부인가?”
 안휘성 안경에서부터 주윤건을 따라온 손님, 무음창 진훈은 소문대로 진중한 사내였다.
 그는 내심 주윤건이 조금 더 슬퍼하고 분노하길 바라는지 모른다.
 하지만 진훈의 기대는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죽은 사람 붙잡고 있어봐야 뭐 하겠어요.”
 “너의 형이다! 그따위로 말할 수 있나?”
 진훈이 언성을 높이며 눈을 사납게 떴다. 호북성 최고의 낭인답게 광폭한 기세가 휘몰아쳤다.
 그러나 주윤건은 진훈의 기운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대신 밝게 웃으며 뜻밖의 대답을 할 뿐이었다.
 “강물에 묻었어도 내 가슴엔 살아 있습니다. 우리 형제만의 방식이 있다는 거, 모르겠습니까?”
 “······.”
 진훈은 말없이 주윤건의 눈동자를 주시했다.
 시신을 돌려받는 자리에서도 느꼈지만 가벼운 태도 속에 진중함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이제껏 주윤건의 뒤를 따라온 것도 그 느낌을 믿었기 때문이다.
 “할 말이 있을 텐데요.”
 주윤건은 진훈의 눈빛을 피하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뭔가 큰 결심을 한 듯 진훈이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너와 함께하고 싶다.”
 “음.”
 “윤평의 꿈을 이루겠다는 너의 길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뜻이다.”
 진훈이 도와준다면 큰 힘이 될 것이다.
 당장 아무런 기반이 없는 주윤건으로선 거부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하지만 역시 주윤건은 보통 사람과 달랐다. 그는 무작정 손을 잡기 전에 진훈을 시험했다.
 “무음창 진훈. 호북성 낭인 바닥을 평정했고, 후기지수를 너머 무림의 중견 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서른을 갓 넘긴 나이가 무색하게 신중하기 그지없고, 출신이 불분명해도 거대 문파의 제자들보다 뛰어난 성취를 보여왔다. 맞습니까?”
 “나에 대해 꿰뚫고 있군.”
 “안경에서 이것저것 주워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로는 부족하다 이 말인가?”
 “오히려 넘칩니다. 그런데.”
 “그런데······?”
 “형의 그림자를 쫓는 거라면 함께할 수 없습니다. 나는 형과는 다른 사람이니까. 같은 꿈을 꾸기로 했지만 나만의 강호를 살아갈 겁니다.”
 주윤건의 전신에서 묵직한 기파가 뿜어졌다.
 수극도 추상곤을 위축시킨 힘이 진훈의 마음을 울리고 있었다.
 이미 대답은 정해졌다.
 한평생 낭인으로 떠돌던 무음창이 드디어 뿌리 내릴 곳을 찾은 것이다.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터전이지만 그는 주윤건의 가능성에 운명을 걸었다.
 이렇듯 무모한 도박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무림인이고 또한 낭인이다.
 처억!
 창대를 치켜세운 진훈이 굵은 음성을 토해냈다.
 “주. 윤. 건. 너에게 이 창을 맡긴다. 받아주겠나?”
 꽈악-
 주윤건은 주먹이 으스러지도록 강하게 포권을 취했다. 그러고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합니다, 무음창.”
 
 ***
 
 검룡제(劍龍弟).
 이것이 주윤건의 첫 번째 별호였다.
 파사검룡의 아우라는 뜻이지만 굉장히 강렬한 느낌의 별호다.
 진훈과 함께 이동하며 자신의 별호를 들은 주윤건도 꽤 만족하는 눈치였다.
 더불어 혹자는 그를 수상비룡(水上飛龍)이라고도 불렀다.
 처음 등장하며 보여준 수상비가 사람들의 뇌리에 워낙 깊이 각인된 탓이었다.
 “둘 다 멋있지 않아요? 검룡제, 수상비룡. 하여튼 이름들은 참 잘 짓는단 말이지.”
 주윤건은 저잣거리에서 어린아이처럼 당과를 손에 들고 걷는 중이었다.
 그의 말에 진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느덧 열흘 넘게 동행하며 꽤 친해졌지만 주윤건의 성격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진훈은 서른을 갓 넘겼고, 주윤건의 나이는 스물일곱이다. 그러나 여유로운 겉모습 속에 진면목을 숨긴 주윤건은 때때로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기에 진훈은 동생이 아니라 새로운 주가상단의 단주로서 주윤건을 대우하고 있었다.
 “체통을 지키는 게 좋을 것 같다만··· 우리 둘뿐이지만 넌 이제 주가상단의 후계자다.”
 “또 지겨운 소리를. 그보다 여기가 어딘지 확인부터 하지요.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난 굳이 이곳에 온 것 자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여기가 어때서요?”
 “그게 아니라 고작 하오문도를 찾기 위해 발품을 파는 것 말이다.”
 “두고 보면 알 거라니까 그러네.”
 주윤건은 진훈의 말을 자르며 주위를 살폈다. 아무래도 곧 목적지에 도착할 것 같았다.
 진훈은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보다시피 주윤건이 말을 높여도 실제적인 수장은 진훈이 아니었다.
 연배에 따라 대화를 편히 하는 것뿐, 둘 중에 우두머리를 꼽자면 단연 주윤건이다.
 진훈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철저히 주윤건의 의견에 따르고 있었다.
 저벅저벅.
 이윽고 둘은 저잣거리 중심을 지나 으슥한 뒷골목에 접어들었다.
 점점 인적이 드물어지는 게 썩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하지만 주윤건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비슷한 모양의 건물들을 살폈다.
 “찾았다!”
 그의 입에서 탄성이 튀어나왔다.
 나무로 만든 대문 구석에 새겨진 독특한 문양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문양은 다름 아닌 하오문의 것이었다.
 주윤건과 진훈은 하오문의 지부를 찾아 열흘을 넘게 달려온 것이다.
 쿵쿵!
 하오문 지부 앞에 선 주윤건이 대문을 두드렸다.
 인적 드문 뒷골목의 건물이지만 대문 뒤쪽에서는 여럿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끼이익-
 곧이어 문이 열리며 몇 명의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갑자기 나타난 두 명의 방문자를 경계하는 눈치였다.
 “누고요?”
 사내들 중 삐쩍 마른 염소수염이 질문을 던졌다.
 진훈은 주윤건을 대신해 앞으로 나서며 스스로를 밝혔다.
 “무음창 진훈이다. 그리고 이쪽은 주윤건이라고 한다.”
 둘의 이름을 들은 하오문 사내들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무음창? 그리고 수상비룡 주윤건?”
 요즘 강호에서 가장 큰 화젯거리는 단연 주윤건이다.
 그 장본인이 일개 하오문 지부를 방문했으니 놀라는 게 당연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염소수염을 기른 사내가 황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대문을 지키는 자신들로는 감당할 수 있는 손님이 아니었다.
 진훈과 주윤건은 다른 하오문도들의 시선을 느끼며 대문 앞에 서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건물 안쪽에서 풍만한 살집을 지닌 중년 여성이 후다닥 뛰어나왔다.
 “호호호! 많이들 기다리셨나요?”
 하오문 지부장을 맡을 정도면 밑바닥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중년 여인은 호들갑스러운 웃음을 터트리며 주윤건을 맞이했다.
 당황한 기색이 보였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최선을 다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두 분께서 저희 지부에는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호호.”
 “찾고 싶은 사람이 있다.”
 “의뢰인가요?”
 “글쎄. 그럴지도 모르겠군.”
 진훈은 하오문 지부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대화를 주도했다.
 주윤건은 한 발 뒤에서 분위기를 파악하며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추하지만 안으로 들어가서 차라도 올릴게요. 자세한 이야기는 따뜻한 방에서 나누시는 게 어떠실까요.”
 “알겠다.”
 “참, 저는 이곳을 맡고 있는 지부장 풍덕이라고 해요. 소개가 늦었네요, 호호호호!”
 풍덕은 연신 웃음을 흘리며 살가운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진훈은 무뚝뚝한 대응으로 일관하며 냉기를 풀풀 풍겼다.
 낭인 출신이기에 하오문이 얼마나 저열한 집단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일단 들어갑시다, 진 형.”
 “그래.”
 주윤건은 그런 진훈을 이끌고 풍덕의 뒤를 따랐다.
 막상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규모가 생각보다 컸다.
 중심이 되는 전각 주위에는 하오문도와 무사들이 머무는 작은 숙소도 몇 채 더 있었다.
 이런 지부가 중원 대륙에 족히 백여 개는 될 것이다.
 다들 무시하지만 새삼 하오문의 저력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쪼르르륵.
 풍덕은 지부장만 들어갈 수 있는 방에서 손수 차를 따랐다.
 그녀는 마치 하오문 문주가 오기라도 한 것처럼 극진한 예를 다했다.
 “부족하지만 용정이랍니다, 호호.”
 “잘 마시겠습니다.”
 뭔가 불만스러운 얼굴의 진훈 대신 주윤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들었다.
 코끝으로 기분 좋은 향을 느끼며 용정차를 한 모금 마시자 풍덕이 본론을 꺼냈다.
 “찾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하셨는데 더 여쭤봐도 되려나요?”
 “그 이야기는 제가 하지요.”
 찻잔을 내려놓은 주윤건은 웃음기를 띈 채 말을 이어갔다.
 “하오문에 천하무쌍이란 별호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까?”
 “천하··· 무쌍? 정말 대담한 별호지만, 금시초문이랍니다.”
 “역시 그렇군요. 그럼 왕이정이란 이름은 들어본 적 있습니까?”
 “왕이정? 아, 그 왕이정!”
 풍덕은 생각이 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의 얼굴이 움직일 때마다 두툼한 목살이 함께 출렁거리는 모습은 꽤 신기했다.
 “왕이정이라면 본 문에서도 물불 안 가리고 여기저기 뛰어들기로 유명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두 분께서 찾는 사람이 왕이정인가요?”
 “맞습니다. 가능하다면 빨리 만나고 싶습니다.”
 “이유를 여쭤 보아도 될런지······.”
 “그를 빌리고 싶습니다. 물론 하오문에게 양해를 구해야겠지만.”
 “네?”
 풍덕은 눈을 크게 뜨며 주윤건과 진훈을 번갈아 쳐다봤다.
 단 한 번의 등장으로 장강을 요동시킨 수상비룡. 그리고 대륙 전체에 명성이 자자한 무음창.
 강호의 주목을 받는 신진고수 두 명이 하오문의 왕이정을 찾다니, 게다가 주윤건은 분명 그를 빌리겠다고 말했다.
 풍덕이 지부장으로 있으면서 이와 같은 일은 처음이었다.
 밑바닥에서 온갖 험한 꼴을 다 봤지만 이번 의뢰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말 왕이정이 필요하신 건가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두 분께서.”
 “문제라도 있습니까?”
 “문제라니요, 호호. 그저 조금 놀라워서··· 다른 뜻은 없으니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과드리겠어요.”
 풍덕은 다시 호들갑을 떨며 평정심을 찾았다.
 이어서 그녀가 주윤건이 원하던 답을 들려주었다.
 “왕이정을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문주님께도 전서를 띄워야 할 것 같아요. 그러니 부근에서 며칠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좋습니다. 허나 너무 오래 기다리는 건 곤란합니다.”
 “호호호, 어찌 감히 두 분을 오래 기다리게 만들겠어요. 심려 놓으세요.”
 별다른 걸림돌 없이 목적을 이룬 주윤건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에 반해 진훈은 처음부터 끝까지 딱딱한 얼굴이었다.
 그는 아직까지 하오문도를 찾는 주윤건의 의중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주윤건을 따르기로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잠잠히 있는 것뿐이다.
 ‘의심하지 말자. 어차피 내 그릇으로 담을 인물이 아니다. 장강에서 보지 않았는가?’
 진훈은 복잡한 상념을 가라앉히며 주윤건의 옆모습을 쳐다봤다.
 파사검룡 주윤평과 닮았지만 조금 부드러우면서도 독특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에게 모든 것을 건 진훈은 스스로의 선택을 믿었다.
 씨익-
 진훈의 마음을 알아서일까, 아니면 풍덕과의 대화가 흥미로워서일까.
 주윤건은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눈을 반짝였다.
 그의 머릿속에 과연 뭐가 들어 있는지 감히 누구도 짐작하기 힘들었다.
 
 ***
 
 “쓰벌, 왜 바쁜 사람더러 오라 가라야?”
 저잣거리를 걷는 왕이정의 입이 한 주먹이나 튀어나왔다.
 안휘성 안경에서 대사건을 겪은 후 그는 나름대로 자중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대뜸 안경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의 하오문 지부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왕이정에게 있어 안경은 두 번 다시 발을 들이고 싶지 않은 장소였다.
 그 근처라고 해도 꺼림칙하긴 마찬가지다.
 그는 주이, 그러니까 주윤건을 떠올리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뭐? 검룡제, 또 수상비룡 주윤건? 아주 잘나셨구먼. 어리숙한 도령 행세를 잘도 하더니··· 크으! 그런 인간 앞에서 천하무쌍이라고 허풍을 떨었으니 다시 만나면 날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하다고.”
 그는 혹시라도 길에서 주윤건을 마주칠까 전전긍긍이었다.
 물론 드넓은 중원에서 그를 다시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완벽하게 뒤통수를 맞았기에 왕이정의 간담은 잔뜩 쪼그라든 상태였다.
 “크으! 아무튼 쓸데없는 일로 부른 거기만 해봐라. 그냥 확 뒤엎어 버릴 테니까.”
 연신 툴툴거리며 걸음을 재촉한 그는 인적 드문 골목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어느새 그의 눈앞에 익숙한 표식이 새겨진 대문이 보였다.
 잠시 숨을 가다듬은 왕이정은 거친 손길로 문을 두드렸다.
 쿵쿵! 쿵쿵!
 “뭐야? 사람 불러놓고 빨리빨리 안 나와?”
 이런 작은 지부에는 왕이정보다 계급이 높은 문도가 드물 것이다.
 그렇기에 목소리에 힘을 주며 위세를 부릴 수 있었다.
 끼이익-
 “누구신지?”
 잠시 후 문이 열리며 하오문 문도들이 왕이정을 맞이했다.
 허나 억지로 여기까지 불려온 왕이정은 심통을 부리며 대답했다.
 “니들이 불러놓고 누군지도 모른다고? 크흠, 나 왕이정이다. 됐냐?”
 “아! 지부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부장이란 이야기가 나오자 왕이정도 성질을 죽였다.
 어쨌든 지부장은 지부장이기에 무작정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그는 대문을 지키던 하오문도의 안내를 받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드르륵.
 방 안에서 잠시 기다리자 풍만한 몸집의 여성이 웃음소리를 흘리며 나타났다.
 “호호호!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왕이정 동문. 제가 이곳의 지부장인 풍덕이랍니다.”
 “그, 그렇소? 아··· 나는 알다시피 왕이정이라오.”
 왕이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풍덕에게 예우를 갖추었다.
 하오문 내에서의 직급은 비슷해도 연배로 따지면 풍덕이 선배였다.
 물론 왕이정도 산적 같은 생김새만 보면 중년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 나이는 고작 서른 중반이었다.
 그에 비해 풍덕은 두툼한 살집 덕에 어려 보여도 마흔을 넘긴 여인이다.
 당연히 서로 예의를 갖추는 게 옳았다.
 밑바닥 문파인 하오문이라고 해서 위계가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문파일수록 나름의 위계질서가 더욱 엄격하게 마련이다.
 “차부터 드릴게요. 잠시만요, 호호.”
 인사를 나눈 풍덕은 아랫사람을 시켜 차를 내왔다.
 어색하게 찻잔을 잡은 왕이정은 왠지 모를 불안감이 커지는 느낌이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고 이렇게 잘해주지? 괜히 찝찝하구먼.’
 그의 표정을 읽었는지 풍덕이 슬슬 대화의 화제를 돌렸다.
 “방금 기별을 보냈으니 곧 손님들께서 오실 거예요.”
 “손님들이라면?”
 “왕이정 동문을 만나려는 분들이죠.”
 “그 사람이 누구기에 문주님의 도장이 찍힌 명령서까지 내려온단 말입니까? 당최 이해가 안 가서 말이오.”
 “조금만 기다리면 알게 될 거예요. 그보다 다른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커허. 뭐 지부장께서 궁금한 게 있으시다면야.”
 “파사검룡의 시신이 반환된 그날, 안경에 계셨다면서요?”
 “그건 왜 묻는 거요?”
 그날의 이야기가 나오자 왕이정이 안색을 굳혔다.
 이미 상부에 정식으로 보고서를 썼기 때문에 절차상의 문제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지부장이 그날 일을 물어오니 괜히 의심스러웠다.
 호기심이 넘치는 대신 눈치 하나로 칼 맞지 않고 살아온 왕이정이기에 제법 촉이 뛰어났다.
 하지만 풍덕은 일부러 경망스러운 웃음을 터트리며 교묘하게 질문을 이어갔다.
 “호호, 호호호! 다름이 아니라 개인적인 궁금증 때문에요. 그날 정말 많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겠어요? 그 자리에 계셨으니 생생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뿐이랍니다.”
 “흐음··· 정말이오?”
 “정말이고 말고요. 쓸데없는 호기심으로 가득한 게 우리 같은 사람들의 공통점 아니겠어요. 그러니 염려 말고 목격담을 말해주세요, 왕 동문.”
 풍덕이 은근한 말로 유대감을 자극하자 왕이정도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사실 왕이정처럼 나서기 좋아하고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거 뭐 그렇다면야··· 내 특별히 그날의 장관을 말해 드리겠소, 크음.”
 “아무래도 가장 화제는 검룡제이자 수상비룡의 등장이잖아요. 대체 어떤 사람이던가요?”
 “수상비룡? 그 인간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산더미 같소!”
 “그날의 인상이 깊었나 보군요, 호호호.”
 “깊다마다. 내 평생 그 인간처럼 능글맞은 사람은 본 적이 없을 정도니까. 거 뭐랄까, 양의 탈을 쓴 구렁이랄까?”
 “양의 탈을 쓴 구렁이라. 세간의 평가와는 완전히 다르네요. 수로맹의 권위에 맞서 호탕하고 여유롭게 추상곤을 농락한 신진 영웅이라고 난리가 났는데 말이에요.”
 풍덕이 주윤건에 대한 강호의 평가를 말해주자 왕이정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거야 뭣 모르는 강호인들의 소문이 아니겠소. 사실 그렇게 젊은 나이에 수극도 추상곤을 농락할 무공과 입담이면 보통은 아니지. 헌데 성격이 문제란 말이오, 성격이!”
 “수상비룡의 성격이 어떻기에 그러세요, 호호호.”
 “사람 가지고 노는 걸 좋아하고, 순진한 가면 속에 음흉함을 숨긴··· 아무튼 능구렁이라니까 그러오. 무공이며 심계며 하나같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 확실한 것 같소.”
 말은 이렇게 해도 왕이정은 주윤건의 대단함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에게 속아서 천하무쌍이라고 허풍을 쳤던 기억을 제외하면 하나부터 열까지 놀랍기 짝이 없었다.
 죽은 파사검룡이 서른인데 그의 동생이라면 아직 젊은 후기지수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무림이 알아주는 수극도 추상곤을 가볍게 다룬 건 설명하기 힘든 일이었다.
 수극함의 갑판 위에서 바지춤이 잘려 속옷을 보인 추상곤의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마지막의 그 일격.
 주윤평의 무공인 삼룡격으로 추상곤의 목젖을 겨눴던 모습은 누구도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순간만큼은 왕이정도 환호성을 터트리며 흥분했었다.
 주윤평이 자신의 죽음을 제물 삼아 엄청난 괴물을 장강에 불러온 것 같았다.
 대체 이런 형제가 어디서 나왔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벌써부터 장강수로맹이 주윤건의 뒷조사에 들어갔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크으··· 어쨌거나 그날을 평생 잊지 못하겠지. 그런데 날 찾는다는 손님은 왜 이리 안 오는 거요?”
 “성질도 급하셔라. 이제 오실 때가 되었어요.”
 풍덕은 자신이 왕이정에게 건네준 찻잔을 쳐다봤다.
 뜨겁게 끓여놓은 차가 식은 걸 보니 주윤건과 진훈이 도착할 때가 된 것 같았다.
 그들이 들어오면 왕이정의 얼굴이 어떻게 변할까.
 그걸 상상하니 괜스레 미소가 나왔다.
 따지고 보면 풍덕도 왕이정을 놀리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중원 대륙에 안 가본 곳이 없는데다 온갖 잡학을 꿰뚫고 있는 왕이정이지만 이렇듯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물론 그의 외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성질이었다.
 그때 방 문 밖에서 하오문도의 목소리가 울렸다.
 “지부장님, 그분들께서 오셨습니다.”
 “어서 모시어라.”
 풍덕은 대뜸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 옆에 시립했다.
 그녀의 태도가 사뭇 공손한 것을 확인한 왕이정도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과연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 자기를 찾았는지 궁금증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드르르륵-
 드디어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진훈과 나란히 들어온 주윤건은 왕이정을 보자마자 미소를 지었다.
 “천하무쌍 왕이정 대협!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흐억-! 커, 커허어······.”
 활짝 웃는 주윤건과 달리 왕이정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쿠당탕!
 이윽고 뒷걸음질 치던 왕이정이 다리가 꼬여 볼썽사납게 넘어졌다.
 그 모습을 본 풍덕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호호호호! 왕 동문, 왜 그렇게 놀라시나요?”
 “아, 아니 그게··· 그러니까 왜 내게 이런 일이······!”
 왕이정은 차라리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허나 그를 바라보는 주윤건은 처음 객잔에서 만났을 때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이 왕이정에겐 더욱 무서울 따름이었다.
 ‘젠장할-! 역시 이 동네엔 오는 게 아니었어!’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러봤자 이미 늦었다.
 주윤건은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태연하게 자리에 앉았다.
 수상비룡 주윤건과 무음창 진훈, 그리고 자칭 천하무쌍 왕이정의 만남은 얼핏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이날의 회동이 역사의 시작이라는 것을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오직 주윤건만 알 듯 모를 듯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4장. 합심(合心)
 
 
 
 하오문 지부장인 풍덕의 도움으로 왕이정을 찾은 주윤건은 자리를 옮겼다.
 아무래도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려면 술이 빠질 수 없다.
 주윤건과 진훈, 그리고 영문도 모른 채 비운의 희생양이 된 왕이정은 별실에서 술상을 받았다.
 쪼르르-
 호리병을 잡은 주윤건이 직접 술을 따라줬다.
 왕이정은 어정쩡한 자세로 술잔을 받았다.
 평소라면 사족을 못 쓰는 화주지만 오늘만큼은 술맛이 안 날 것 같았다.
 그러나 술잔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무뚝뚝한 표정의 진훈이 당장 창을 들고 일어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단 한 잔 하시지요.”
 주윤건이 잔을 들자 진훈도 팔을 뻗었다. 왕이정 역시 눈치를 보며 건배를 했다.
 째앵-
 맑은 소리가 울리며 세 사람이 동시에 술을 들이켰다.
 단숨에 술잔을 비운 주윤건은 웃음을 지으며 왕이정을 똑바로 쳐다봤다.
 왕이정의 입장에서는 환하게 웃는 주윤건의 얼굴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주, 죽을죄를 졌습니다요!”
 결국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왕이정이 대뜸 무릎을 꿇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단순히 강호에 유람을 나온 샌님인 줄 알고··· 그래도 나쁜 뜻은 없었으니 제발 살려만 주십쇼! 저 이래 뵈도 순박한 사람입니다요.”
 “왜 이러십니까, 왕 대협. 누가 왕 대협을 죽이기라도 한답니까?”
 주윤건은 자리에서 일어나 왕이정을 일으켜 세웠다.
 한껏 거들먹거리던 왕이정이 이제 와서 쩔쩔매는 게 반갑지 않은 모양이다.
 진훈은 도무지 주윤건의 속을 알 수 없어서 잠자코 앉아만 있었다.
 “저를 벌하려고 찾은 게 아닙니까? 고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천하무쌍이라 허풍을 떨었으니··· 크으으, 제가 도대체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요.”
 “덕분에 안경의 상황과 정세에 대해 알 수 있었습니다. 그 고마움을 표하고자 왕 대협을 찾은 겁니다.”
 왕이정은 주윤건이 자신을 놀리는 건지 아니면 진심인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분위기로 보아 장난을 치는 것 같진 않았다.
 “정말 다른 뜻이 있으신 건······?”
 “다른 뜻이 있긴 한데, 해를 끼치진 않을 테니 염려 놓으세요.”
 주윤건은 왕이정을 진정시킨 뒤 다시 술잔을 채웠다. 그러고는 혼자 잔을 비워버렸다.
 술을 마시는 모습에서 사내다움이 느껴졌다.
 시종일관 여유롭고 능청스러운 태도를 보이지만 내면에 자리 잡은 사나움이 언뜻 엿보이는 것이다.
 “왕 대협. 아니, 그냥 편하게 왕 형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네? 여, 영광이구머요!”
 “그날 안경에서 내가 어떤 뜻을 세웠는지 모두 봤겠지요.”
 “금란파도 도세준에게 하셨던 말씀이라면 똑똑히 들었습니다만, 크흠.”
 “바로 그겁니다. 형의 꿈을 이어받아 장강의 질서를 재편하고 싶습니다. 그 길에 왕 형이 함께해 주길 바라는 거지요.”
 “제가요?”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에 왕이정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아무리 잘 쳐줘도 자신은 하오문의 그저 그런 중간 간부일 뿐이다.
 헌데 대체 뭘 보고 이런 제안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진심이신지······.”
 “물론 진심입니다.”
 “전 무공도 제대로 못 배웠고 학식도 짧습니다요. 겸손을 떠는 게 아니라 도움이 될 만한 구석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데 어째서······.”
 “사람은 나쁘지 않은 것 같더군요.”
 주윤건의 대답에 왕이정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진훈도 얼이 빠진 모양이었다.
 내심 아는 게 많아 도움이 될 것 같다 등의 대답을 기대했던 왕이정은 그야말로 어이가 없었다.
 당사자를 눈앞에 두고 사람은 나쁘지 않은 것 같다니. 고작 그런 이유로 자신을 영입하려 한다는 게 장난 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주윤건은 농담이 아니라는 듯 힘주어 말을 계속했다.
 “사람이 안 나쁜 것보다 중요한 덕목이 있을까요?”
 “그, 그거야 그렇지만서도.”
 “그럼 내 손을 잡겠습니까? 물론 하오문주께는 풍덕 지부장의 도움으로 양해를 구해 놓았습니다.”
 왕이정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민을 거듭했다.
 순간의 선택이 남은 인생을 가를지도 모른다. 하오문주도 허락을 했으니 이 자리에서 대답만 하면 된다.
 “크흐으으음.”
 왕이정 특유의 한숨 소리가 커졌다.
 상식적으로 무조건 거절해야 마땅한 제안이다.
 그와 주윤건 사이의 짧은 인연으로 손을 잡기엔 너무 거대한 일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구대문파도 눈치를 보는 수로맹에 반기를 들겠다는 뜻 아니던가.
 역시 평범한 하오문도로 한평생 탈 없이 살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안······.”
 왕이정은 거절을 뜻을 밝히려 했다.
 그런데 말을 끝맺기 전에 주윤건의 눈동자를 마주 보고 말았다.
 기묘한 빛으로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에 빨려드는 기분이었다.
 순간 안경에서 봤던 광경이 떠올랐다.
 새하얀 물방울을 튀기며 강물 위를 달리던 젊은 청년. 그가 육중한 수극함 갑판에서 추상곤을 농락한 모습은 무림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었다.
 왕이정은 하오문에 들어오며 접어뒀던 어린 시절의 꿈이 요동치는 것 같았다.
 현실에 순응하며 사느라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주윤건이 마음을 들쑤셔 놓았다.
 영웅의 기상을 풍기며 강호를 질타하고 싶다는 무림인의 근본적인 본능이 고개를 들이민 것이다.
 평범하고 안락한 삶을 사느냐, 위험하지만 가슴이 뜨거운 삶을 사느냐.
 너무도 극단적인 선택 앞에서 왕이정은 즉흥적으로 결정을 내려 버렸다.
 “합니다! 그러니까 함께하겠다는 소립니다요!”
 말을 해놓고도 후회가 된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그러나 왕이정은 가슴 깊은 곳에서 스스로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꽈악!
 주윤건은 그의 어깨를 잡으며 한 가지 약속을 남겼다.
 “잘 생각했습니다, 왕 형. 이제 허풍이 아니라 진짜 천하무쌍으로 만들어 드리지요.”
 왕이정은 이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그리하여 평범한 하오문도였던 왕이정이 새로운 주가상단의 일원으로 합류하였다.
 
 ***
 
 주윤건은 풍덕에게 사례의 표시로 은자를 줄 작정이었다.
 하지만 돈이라면 환장하는 하오문 지부장답지 않게 풍덕은 한사코 은자를 사양했다.
 대신 하오문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겨달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렇게 왕이정을 데리고 지부를 나선 주윤건은 근처의 객잔에 며칠 더 머무르기로 했다.
 두 명에 불과하지만 진훈과 왕이정이라는 사람을 얻었으니 이제 서로의 마음을 합할 차례다.
 그래서인지 주윤건은 하루도 빼먹지 않고 밤마다 술상을 차렸다.
 그는 얼마 전에 친형의 시신을 확인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시종일관 유쾌한 모습으로 한량다운 면모를 발휘하고 있었다.
 끝까지 존댓말을 사용하기로 한 왕이정도 슬슬 마음의 경계를 풀만큼 뛰어난 친화력을 보였다.
 “자-! 이제 우리가 뭘 해야 할지 이야기해 봅시다. 일단 건배부터 하고!”
 주윤건의 말에 따라 맞은편에 앉은 둘이 술잔을 치켜세웠다.
 무뚝뚝한 진훈도 어느새 제법 섞이고 있었다.
 짜안!
 술잔이 부딪치며 영롱한 소리가 퍼져 나갔다.
 단숨에 잔을 비운 주윤건은 왕이정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제 우리도 다음 단계로 나아갈 때가 되었지요, 왕 형?”
 “예, 예. 그렇습니다요.”
 어색한 존대를 고집하는 왕이정의 말투는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주윤건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계속했다.
 “그럼 무엇을 하면 좋겠습니까.”
 “제가 감히 다음 행보를 어찌······.”
 “내 꿈과 목표가 무엇인지는 이미 말했습니다. 그걸 이루는 과정에선 진 형의 무력과 왕 형의 지모가 꼭 필요합니다. 염려하지 말고 뭐든 말해도 됩니다.”
 그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알다시피 주윤건은 강호초출이다.
 물론 믿을 수 없는 무공과 배짱을 갖췄지만 무림의 정세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한평생 강호를 떠돌며 눈칫밥을 먹어온 왕이정은 그에게 딱 맞는 책사였다.
 진훈도 고개를 끄덕이며 왕이정을 쳐다봤다.
 과연 그가 동료로 인정해 줄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판단하려는 것 같았다.
 왕이정은 부담과 기쁨을 동시에 느꼈다.
 그동안 무림의 밑바닥에서 쌓아왔던 경험과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일생일대 기회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크흐음, 그럼 주제넘게 한 말씀을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요.”
 “기대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름을 얻는 게 가장 중요하고 급한 일인 것 같습니다요.”
 “이름이요?”
 주윤건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에 이어 진훈 역시 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이름을 얻겠다는 건 무슨 뜻인가.”
 “주가상단이라는 이름을 다시 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 윤평을 기리기 위해서라면 주가상단의 이름을 계승하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같은 이름을 쓰지 않아도 파사검룡 주 대협의 꿈은 우리 모두에게 남아 있습니다요. 그리고 어느 곳이든 이름에는 정체성이 깃들어 있게 마련입지요.”
 주윤건은 동의한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거 맞는 말입니다. 형의 꿈을 이어받았지만 결국 우리가 이뤄가야 할 길! 새로운 이름을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주가상단을 재건하여 주윤평의 꿈을 이루려면 새로운 단체를 세워야 한다.
 그 초석이 바로 진훈과 왕이정이다.
 강호인들은 비웃을지 몰라도 주윤건은 둘을 오른팔과 왼팔 삼아 장강의 판도를 바꿀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좌우를 든든히 갖춘 다음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새로운 이름을 정해 무림에 널리 알리는 게 순서였다.
 자금을 확보하고 건물을 짓는 것, 또 더 많은 사람을 모아 상단의 기반을 다지는 것은 이후의 문제다.
 과연 어떤 상단을 만들 것인지, 주윤건이 꿈꾸는 장강의 모습은 무엇인지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이름을 찾아내야 한다.
 왕이정은 주윤건이 자신의 뜻을 알아주자 자신감을 갖고 목소리를 높였다.
 “장강 바닥에도 이름 지어주는 걸로 밥 먹고사는 점쟁들이 꽤 됩니다만은. 그것보단 다른 식으로 접근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요.”
 “단순히 멋있는 이름을 짓는 거라면 당장에라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의미가 없겠지요.”
 “맞습니다요! 차라리 장강을 유랑하며 어떤 이름으로 새출발을 해야 할 지 알아보는 건 어떨런지··· 장강의 민초들과 무림인들, 그리고 수많은 상인들이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 답을 얻을 때 우리는 수로맹에 대항할 명분과 이름을 얻게 될 거구먼요.”
 “장강의 민심이 담긴 이름!”
 “바로 그겁니다요, 크흐흐.”
 왕이정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윤건과 진훈은 감명을 받은 듯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일방적으로 멋진 이름을 짓고 무림에 공표하자는 것이 아니다.
 장강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두루 살피며 그들과 함께 호흡한 뒤 알맞은 이름을 찾겠다는 뜻이다.
 이런 발상 자체가 실로 파격적이었다.
 왕이정은 무림의 가장 낮은 곳에서 살아왔기에 민심이 뭔지 알고 있었다.
 “좋습니다! 왕 형과 함께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주윤건은 고민하지 않고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원래 무공이 강할수록 권위적으로 변하는 게 무림인의 속성이다. 하지만 주윤건은 달라도 뭔가 달랐다.
 그는 편견을 갖지 않고 가슴을 열어 사람을 대했다.
 주윤평의 동생이라서, 또는 무공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이러한 남다른 면모 때문에 진훈의 마음이 움직였는지 모른다.
 왕이정도 새삼 주윤건의 색다른 모습에 감탄하고 있었다.
 ‘나 같은 놈을 믿어주는구나!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이 사람을 위해서라면 뭐든 해봐도 괜찮을 것 같단 말이야.’
 자신을 향한 눈빛을 느낀 주윤건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왕이정의 제안을 바탕으로 그의 심계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장강을 유랑하며 민심을 살피고 이름을 얻는 것에는 여러 의미가 숨어 있다.
 우선 드넓은 장강을 돌아다니며 존재감을 각인시킬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효과다.
 무림에서 가장 우선시되는 것을 꼽자면 단연 명예이다. 구주천하 중원 대륙에서 명예를 쌓는 것보다 힘든 일은 없다.
 주윤건은 이미 강렬한 등장으로 이름을 알렸지만 아직 부족했다.
 장강을 유랑하며 무림인들 모두가 알 수 있도록 명예를 쌓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되면 본격적으로 상단을 설립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것이다.
 무명소졸이 상단을 열어봐야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수로맹에 대항하려면 그들을 뛰어넘는 유명세를 갖춰야 했다.
 이것 외에도 장강 유랑으로 얻을 수 있는 소득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주윤건은 그저 코앞의 일만 바라보지 않았다.
 이제 막 강호에 발을 내디딘 초출이지만 보다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대체 어떤 배경을 지녔기에 스물일곱 청년이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파사검룡 주윤평도 걸출한 영웅이었지만 주윤건은 형보다 더 뛰어난 것 같았다.
 수극도 추상곤을 어린아이처럼 가지고 논 무공부터 측량할 수 없는 심계까지, 그의 한계가 어디인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어찌됐든 깊은 밤의 술자리를 통해 일행의 다음 행보가 정해졌다.
 장강의 흐름을 따라 중원을 가로지르는 것.
 그 길에서 무엇을 얻게 될지 기대감이 무르익는 밤이었다.
 
 ***
 
 장강은 말 그대로 대륙을 관통하는 거대한 줄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단체도 장강의 끝에서 끝을 모조리 다스릴 수는 없다.
 수로맹이 장강을 일통했다고 평가받는 것도 가장 중요한 영역을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호북, 호남, 안휘, 강소, 강서.
 이렇게 다섯 개의 성을 지나는 부분이 장강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호북성에는 무당파가 있고 안휘성에는 남궁세가가 있다.
 그들이야말로 각 성의 실질적인 지배자이다.
 하지만 성 전체가 아니라 장강의 물줄기와 그 부근은 수로맹의 영역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수로맹은 단일 문파로서 막대하게 넓은 지역을 다스리는 셈이다.
 그저 세력만 넓은 게 전부가 아니었다. 실질적인 영향력은 더욱더 어마어마했다.
 무림제일을 자부하는 무당파도 중원 곳곳의 속가문파들과 교류를 해야 한다.
 자존심 강한 남궁세가도 자질구레한 물자를 주고받아야 한다.
 결국 구대문파와 삼대명가도 장강의 수로(水路)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 장강수로맹은 필요악과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어도 웬만하면 눈을 감고 인정해주는 것이다.
 이것이 무림의 현실이었다.
 이제 막 유랑에 나선 주윤건 일행은 수로맹의 거대한 벽을 실감하고 있었다.
 무려 다섯 개 성을 떠도는 것만 해도 만만찮은 일이다.
 게다가 행적이 노출되면 수로맹의 견제에 시달려야 할 것 같았다.
 수로맹 입장에서 주윤건은 눈에 가시나 다름없었다.
 무림의 시선과 명분 때문에 대놓고 살수를 쓰진 못해도 기회가 주어지면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진훈과 왕이정은 신경이 바짝 곤두선 모양이었다.
 “이거 괜히 뒤통수가 따갑구먼.”
 “여기저기서 기척을 숨긴 무인들이 느껴진다.”
 왕이정이 불안한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고, 진훈도 사방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느린 걸음으로 강변을 걷고 있는 주윤건은 한없이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그는 수로맹의 강성함을 충분히 느꼈지만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뜻 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 형이 어설픈 상대에게 당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거대한 적이니까 형의 꿈을 무너트릴 수 있었겠지. 하지만 지켜봐. 난 밑바닥에서부터 천천히 일어설 거야.’
 장강 곳곳에서 느껴지는 수로맹의 힘이 주윤건을 기분 좋게 자극하고 있었다.
 그는 형과 자신의 꿈을 걸고 싸워야 할 상대가 강하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겼다.
 별것 아닌 상대였다면 의욕이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가 멀지 않았습니다.”
 주윤건이 활기찬 목소리로 두 명의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그들은 무호라는 지역을 코앞에 뒀다.
 무호는 그리 큰 도시는 아니지만 안휘성 안에서 수로맹의 거점이 되는 고을이다.
 “이제와 이런 말을 꺼내기엔 늦은 감이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왜 하필 무호인가?”
 묵묵히 움직이던 진훈이 질문을 던졌다.
 주윤건은 그의 말에 담긴 뜻을 금방 알아챘다. 그러고는 잔잔한 어조로 대화를 이끌어갔다.
 “첫 번째 목적지부터 수로맹의 거점이 있는 고을이라 불편한 것이지요?”
 “그렇다. 두려운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마라. 다만 시기상조가 아닐까 염려하는 것뿐이다.”
 “벌써부터 수로맹과 직접적인 마찰이 일어나면 골치 아플 테니까. 그건 동의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주윤건의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
 진훈과 왕이정은 사뭇 집중하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름을 얻으려면, 그리고 우리 셋의 이름도 알리려면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야지요. 사람이 있어야 사건이 있고, 사건이 있는 곳에서 이름이 나는 법입니다.”
 “충돌이 일어나도 피하지 않겠다는 뜻이로군.”
 “무서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우린 잃을 게 없는 몸인데.”
 주윤건은 정확하게 현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워낙 유명한 형 덕분에 등장부터 시선을 모았지만 주윤건은 강호의 신진고수로 여겨질 뿐이다. 아직까지 무림의 판도를 뒤흔들 존재로 인정받진 못했다.
 게다가 진훈도 낭인 출신이다.
 호북성 최고의 낭인이지만 거대문파의 제자들이 주류를 이룬 무림에선 늘 비주류 취급을 당해왔다.
 하오문에서 데려온 왕이정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주윤건은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잃을 것이 없으면 남들보다 무모하고 용감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가진 게 너무 많은 수로맹은 견고하지만 그만큼 경직돼 있다.
 하지만 주윤건 일행은 훨씬 자유롭고 담대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장점을 살려 저돌적인 행보를 보이기로 마음먹었다.
 “조금만 더 힘을 내도록 하지요. 오늘 안에 무호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친 주윤건이 선두에서 일행을 이끌었다.
 무호에 도착해도 수로맹도들이 다짜고짜 시비를 걸진 않을 것이다.
 그들도 강호의 거대문파가 된 이상 예전처럼 수적 노릇을 할 수는 없다. 명분 없이 싸움을 일으키면 무림의 지탄을 받기 때문이다.
 주윤건은 그 점을 이용해 사건을 일으킬 작정이었다.
 무호의 상단과 어민들을 만나서 수로맹에 대한 불만을 들어주면 민심을 파악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런 행동 자체가 수로맹의 신경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먼저 시비를 걸어준다면 반갑게 맞아주지.’
 주윤건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그는 몇 수 앞을 내다보며 무호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새로운 주가상단의 장강 유랑은 폭풍의 눈이 될 것 같았다.
 
 ***
 
 “저 사람이 주윤건이라고?”
 “맞다니까! 파사검룡 주윤평의 동생이라잖아.”
 “쯧쯧. 안 됐긴 했는데 이미 몰락한 주가상단의 후광으로 뭘 어쩌려는지······.”
 “그래도 저 친구가 수로맹에게 한 방을 먹였어. 무려 함주가 손도 못 써보고 바지춤이 잘렸다는데?”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수로맹이 어떤 단체인데 상대가 되겠냐고. 바람 앞에 등불이지.”
 “그거야 그렇지만서도.”
 주윤건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귀를 기울였다.
 객잔과 골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마냥 흘려듣는 것도 좋지 않았다.
 저잣거리의 소문이야말로 민심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왕 형. 지금 상황이 어떤 것 같습니까?”
 한동안 무호의 중심가를 쏘다닌 주윤건이 입을 열었다.
 그의 질문을 받은 왕이정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대답을 했다.
 “일단 민심은 우호적인 편입니다요. 파사검룡의 인품이 워낙 훌륭했고, 수극도 추상곤을 농락한 등장도 무척 인상적이셨으니 말입니다. 헌데······.”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수로맹에 맞서 주가상단을 부활시킬 거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습지요. 고작 세 명이서 뭘 할 수 있겠냐며 안타깝게 바라보는 시선이 대다수라서, 크흠.”
 왕이정은 말을 해놓고도 머쓱했는지 괜한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주윤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왕이정의 분석을 치켜세웠다.
 “정확합니다. 역시 왕 형의 눈치와 상황 판단은 알아줘야 한다니까요.”
 “치, 칭찬이십니까요?”
 “물론입니다. 그럼 내친김에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커허허!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칭찬을 받은 왕이정이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잔머리가 비상한데 반해 이럴 때만큼은 순진하기 그지없었다.
 주윤건은 짙은 미소를 흘리며 물음을 이어갔다.
 “무호에 있는 수로맹 거점의 위치와 책임자, 그리고 부근의 상단들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만.”
 “대략적인 것은 알지만··· 제게 시간을 좀 주시면 확실히 알아올 수 있습니다요.”
 “얼마나 드리면 될까요.”
 “이틀이면 충분합지요. 정보를 긁어오는 걸로 평생을 살아왔으니 믿어주십시오, 흐흐흐.”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왕이정은 오랜만에 자신감 넘치는 얼굴이었다.
 중원 곳곳의 소식을 수집하고 정보를 모으는 건 하오문이 전문이다.
 특히 밑바닥 하류층의 정세는 개방도 두 손, 두 발을 다 들 만큼 하오문의 독보적인 영역이었다.
 더구나 주윤건이 원하는 정보는 특별한 비밀이 아니다.
 그저 무호의 정세를 파악하려는 것이니 이틀이면 차고 넘칠 것이다.
 그때 진훈이 주윤건의 의중을 물어왔다.
 “어째서 그런 정보를 원하는 것인가?”
 “이유야 간단합니다.”
 “듣고 싶군.”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야 하니까요.”
 “그게 무슨······.”
 “두고 보면 알게 될 겁니다.”
 진훈을 향해 눈을 찡긋거린 주윤건이 저만치 앞서 나갔다.
 그는 이틀이란 시간 동안 무호의 속사정을 모조리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 뒤에는 왕이정의 정보를 바탕으로 행동을 개시하면 된다.
 ‘이틀이라, 이틀. 재미있는 일을 벌여줄 테니 다들 기대해도 좋아.’
 주윤건의 마음속에선 이미 여러 사건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을 바꾸려면 강한 인상을 남겨야 한다.
 그는 수로맹에 맞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는 세간의 평가를 뒤바꾸고 싶었다.
 무호는 첫 번째 무대가 되기에 적합한 곳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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