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너는 용이 되어 1
그리고 너는 용이 되어 Part. 1
프롤로그
나, 헤르만 예거는 아직 한 명도 죽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용에게 선택받기 전까지는.
너, 에리히 아벨은 세 자릿수에 달하는 사람을 죽였다고 말할 수 있었다. 너는 헤르만 예거보다 훨씬 많은 사람을 죽였다.
내가 용에게 선택받기 전까지는.
1장. 장검의 방
회색 건물로 가득한 프로이센의 날씨는 우울했다. 마치 앞으로의 일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구름의 그림자는 검은 제복을 입고 도열해 있는 황실 친위대의 군인들을 무겁게 덮는다. 총기와 마법무기를 골고루 장착하고 있는 그들은 섬뜩한 위압감을 주었다.
친위대는 황태자를 선두로 음울한 낯빛을 띠고 있었다.
“이놈들부터 일단 총살시켜라.”
황태자가, 그의 앞에 서서 경례를 올리고 있는 육군 장성의 계급장을 우악스레 뜯어내며 한 말이었다. 황태자 옆쪽에 있던 친위대원이 어리둥절한 그들을 연행해 갔다.
숙청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잠시,
‘헤르만 예거’라는 육신 아래엔 두 가지 영혼이 있다. 손님 에리히 아벨, 주인 헤르만 예거.
친위대원으로 활동하지 않을 때는 헤르만 예거가 이 몸을 차지하고 에리히는 잠들지만, 친위대원일 때는 에리히 아벨이 주도권을 잡는다. 헤르만은 그저 지켜보는 역이다.
그러니, 이 황태자의 숙청을 지켜보는 사람은 ‘우리’였으나 실제로 집행하는 자는 에리히 아벨이었다.
우리는 소집된 육군 장교들을 전부 체포했다. 몇몇은 끝까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고 몇몇은 도망치려 했다.
“반역자들을 놓쳐선 안 된다! 잡아라!”
친위대원들은 반으로 나뉘어서 한쪽은 도망친 자들을 추격하고 나머지 반은 그들 외의 ‘반역자’의 집을 급습해 체포하는 역할을 맡았다. 우리는 그 중 후자였다.
벌써 세 명을 체포한 뒤, 우리는 프로이센 시장의 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어주지 않았기에 나무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친위대는 원래 황실근위병에서 유래한, 육군과 해군을 포함해 도이체스의 3대 군사력이다. 그러나 앞의 둘과는 다르게, 친위대는 약간 다른 속성도 가지고 있다.
경찰. 물론 일반 경찰조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친위대 비밀경찰은 일반 경찰보다도 더 수사에 우선권을 갖는다. 수도 프로이센에서는 아예 모든 경찰을 친위대원으로 대체했다.
이러한 친위대는 온갖 흉흉한 소문의 진원지였고, 친위대의 부패와 비효율성, 비윤리성은 그 소속인 우리가 가장 잘 알았다. 소문은 대부분 사실이었고, 사실은 더 끔찍하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 사태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그동안 우리가 체포한 사람 중에 진짜 반역자가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국가가 원한다면 그들은 반역자이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진실을 바란다면 친위대에서 버티지 못한다. 양심에 눈 돌린 돼지가 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친위대였다.
그러나 앞에서 무고한 사람 세 명을 체포했다는 생각 때문인지, 우리는 이번에도 무고한 사람을 체포한다고 여긴 것 같았다. 우리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은 것은 텅 비어 있는 집 거실 한가운데에 있는 푸른색 암석을 보았을 때였다.
그 암석은 시장저택 2층을 거뜬히 넘어설 정도로 컸다. 바위 주변에는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문외한의 눈에는 그저 악취미적인 예술품 정도로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우리의 눈에는 다른 게 보였다.
“리히······ 리베라······ 하흐투······ 미사, 미루, 미테! 전부 나가요! 저건 봉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외친 순간, 문양에서 은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리둥절해서 길을 막고 서 있는 친위대원을 확 밀치고 대문으로 뛰어갔다. 그대로 서 있는 사람이 반, 우릴 따라 뛰어나가는 사람이 반이었다.
굉음.
봉인을 감싸고 있던 암석이 폭탄 파편처럼 사방에 튀었다. 대기를 덮치는 충격파에 보도블록이 박살나고 나무가 온몸을 떨었다.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땅이 흔들려서 우리는 잠시 중심을 잃고 허우적거렸다. 시장 저택의 지붕이 박살나서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부서진 건물 벽에는 헐벗은 철골이 드러났다.
그 모든 파괴의 중심에는 흑룡 하나.
용이었다. 빛이 반사되지 않는 흑단 같은 비늘이 온몸을 감싸고 있다. 집채만큼 커다란 몸통, 유연하게 움직이는 긴 목 위에는 그 어느 파충류보다도 무시무시한 머리가 있다.
악어처럼 쩍 벌린 입 안에는 상아처럼 흰 이빨들, 그리고 선분홍색 혀. 숯처럼 검은 용에게서 새하얀 이빨은 유달리 눈에 띄었다.
수도 프로이센 한복판의 광경이라기엔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태산처럼 거대한 덩치를 올려다보았다. 긴 목이 서서히 움직이며 머리를 낮췄다. 우리는 용의 붉은빛 눈동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붉은 눈동자의 용. 그것이 의미하는 건 단 하나.
광폭화.
용의 입이 쩍 벌어지더니 고막을 울리는 포효를 내뿜었다.
“도, 도망쳐!”
패닉에 빠진 누군가의 외침을 시작으로, 친위대원들은 파편을 타넘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들고 있던 소총마저 내팽개치고 허겁지겁 달려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직 도망치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우리처럼, 다리 힘이 풀린 사람이라든지.
용의 이빨 사이로 새하얀 김이 새어나왔다. 푸르스름한 빛이 입 앞에 나타나더니 복잡한 문양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문양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비테, 리, 슈마흐, 리비······?”
용이 사용하는 마법은 거의 대부분이 원소계다. 그러나 저 용이 사용하는 건 그 어떤 것도 아니었다. 푸른빛이 폭발하는 순간, 우리는 저것이 어떤 마법인지 알 수 있었다.
용과 일직선상에 있는 건물 한 채가 통째로 파괴. 보이지 않는 신의 손이 압살한 것처럼 우그러진다. 그것을 본 다른 인간들의 비명소리.
곧이어 달아나던 친위대의 검은 제복이 공중에 떠올라 용에게 날아갔다. 공중에서 허우적거려 보지만 속수무책. 그렇게 날아간 인간들은 용이 후려치는 앞발에 맞아 망가진다.
“으아, 으아악! 죽어, 죽어, 죽어!!”
패닉에 빠진 한 친위대원이 소총을 들어 용을 겨누어 마구 쏴갈겼다. 용이 한 차례 더 포효. 용의 비늘을 간지럽힌 총알은 똑같은 속도로 반대 방향을 향했다. 총을 쏜 친위대원의 손목에 명중.
누군가 외쳤다.
“역린을 쏴! 역린을 쏘라고!”
역린. 용의 비늘 중 유일하게 거꾸로 붙어 있는 비늘. 용의 치명적인 급소다. 광폭화된 용을 사살하려면 역린을 쏘아 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누가 용에게 총구를 겨눈단 말인가? 눈앞에 있는 것은 재앙 그 자체였다.
정신을 차린 친위대원들이 소총을 들어 용을 쏘기 시작했다. 그러나 번번이 빗나갔다. 애초에 이런 위치에서 맞출 수 있는 부위가 아니었다.
간신히 서 있던 우리의 육군사관학교 동기이자 같은 친위대원인 폰조는 용의 붉은 시선이 그에게 닿자 비명을 질렀다.
“주, 죽기 싫어! 난 죽기 싫다고! 여자, 누가 여자를 데려와!”
폰조는 그렇게 말하며 달려 나갔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시민 한 명이 그의 시선에 들어왔다. 폰조는 우악스런 손길로 여자를 잡아끌고 왔다.
“빠, 빨리 저것을 막아! 막으라고!”
고대부터 용에게 접근할 수 있는 존재는 여자밖에 없었다. 따라서 폰조의 대응은 상식선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보통이라면 가장 정석적인 대응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저 용은 눈동자가 붉다는 것이다. 광폭화 된 용을 막을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흑룡은 여자를 앞에 내세운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쿵쿵거리며 그쪽으로 달려갔다. 두꺼운 근육에 감싸인 다리가 허공에 붕 떠오르더니 수직 하강했다.
“안 돼!”
나는 잠깐 이 육신의 주도권을 잡은 뒤 짧게 외치며 몸을 날렸다. 여자의 허리를 감싸고 온 힘을 다해 옆으로 굴렀다. 쿵 소리가 나며 방금 전까지 우리와 그녀가 있던 자리가 용의 발밑에 깔렸다. 우리는 독수리의 발톱 같은 용의 거대한 발톱이 꿈틀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분노한 용의 시선이 우리에게 닿는다.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제국에서 가장 부패한 조직에 몸담은 대가를 드디어 치르는 것일까? 그동안 벌인 죗값을 지금 치르는 것일까?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릴 거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악한 짓들을 했나?
이대로, 『나의 친애하는 적』을 말살하기도 전에 먼저 죽는 것일까?
순간 나의 머리를 강타하는 ‘이상한 느낌.’ 심장이 전에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고동으로 움직인다. 그러는 동안 흑룡의 비늘 틈 사이로 은빛이 새어나왔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광폭화의 효과가 풀리고 있었다.
용의 눈은 용암이 꺼져가듯이 서서히 붉은빛을 잃어가다가 마침내는 까맣게 변했다.
광폭화가 풀렸다.
그러나 여전히 상황은 좋지 않았다. 우리는 남자다. 용에게 접근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 품에 안겨 떨고 있는 여자는 날 구해줄 만큼의 정신이 남아 있지 않았다.
용의 머리가 서서히 내려왔다. 아마 우리가 서 있었다면 다리를 미친 듯이 떨었을 것이다. 용은 그런 생물이었다. 마주하는 것조차 엄청난 용기를 품어야 하는.
용의 까만 눈동자가 우리를 응시했다. 우리는 용의 비늘 하나하나를 볼 수 있었다. 용은 우리에게 점점 다가왔고, 마침내, 우리의 코앞까지 다가와,
우리를 슬쩍 밀었다.
가벼운 동작이었지만 용 정도의 생명체였기 때문인지 우리는 확 밀려났다. 넘어진 우리에게 용이 다가와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우리는 이 동작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어리광이었다! 용이, 우리에게, 마치 강아지처럼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
우리는 용기를 내어, 벌벌 떨리는 손을 내밀어 용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용은 가만히 있었다. 우리가 쓰다듬기 시작하자, 용은 그 손길을 느끼기라도 하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주위의 경악한 시선만큼이나 놀라면서 우리는 계속 용을 쓰다듬었다. 비늘은 강철 갑옷처럼 단단했다. 어느새 손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그때, 공중에서 포효가 들렸다. 흑룡이 고개를 들었다. 우리도 흑룡의 시선을 따라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용 네 마리가 날아오고 있었다. 용들의 몸통에는 띠가 둘러져 있었다. 안장을 매는 끈이었다.
세 마리의 용은 공중에 머물렀고 한 마리의 용은 공터에 착지했다. 육중한 무게에 바닥이 쩍 갈라졌다.
용 위에 타고 있던, 붉은 머리의 여자가 사뿐하게 뛰어내렸다. 육군 정복을 입고 있으며 계급은 중장. 까마득히 높은 사람이다.
여자는 우리와, 경계하고는 있지만 얌전히 우리 손에 머리를 맡긴 용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세상에, 벌써 광폭화가 끝난 거야? 의식도 안 치른 야생 용과 감응해서?”
흑룡이 눈을 깜박였다.
붉은 머리의 여자는 우리 제복과 계급장을 보더니 묻는다.
“관등성명은?”
“상급돌격지도자(육군에 대입하면 중위에 해당) 헤르만 예거입니다!”
“호오, 꽤 사내다운 이름인데?”
붉은 머리의 여자가 ‘사내다운’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녀가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우리와 머리 하나 정도 차이가 났다. 얼굴만 보면 그 나이에 중장까지 올라간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여자가 우리와 바짝 붙어서 섰다. 이 거리, 지나치게 가깝다. 게다가 여자가 능청스러운 웃음을 짓자 우리는 더 불안해졌다.
여자는 우리 앞으로 성큼 다가와서 부담스러울 정도로 우리를 응시했다. 그녀는 씩 웃더니 순식간에 우리의 계급장을 떼어 버렸다.
그 순간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아까 베르논 황태자가 반역자들의 계급장을 떼며 총살하라고 말하는 장면이었다. 수도 한복판에서 벌인 소란으로 처형되는 것일까? 하지만 저 용은 우리가 갖다놓은 것도 아닌데.
“용을 진정시켜 수도의 파괴를 막은 귀관은 지금부터 대위다.”
“네?”
하늘같은 별 앞에서 이런 식으로 대꾸하는 것을 보면 분명 경을 칠 일이었으나 우리는 방금의 사태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얼빠진 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더듬거렸다.
“하, 하지만 저는 친위대 소속입니다.”
그녀는 분명 육군이었다. 우리의 직속상관도 아닌 그녀가 어떻게 날 진급시킨단 말인가?
여자가 또 다시 씨익 웃었다.
“이제는 아니야.”
여자는 그렇게 선언했다.
“귀관은 앞으로 루프트바페(Luftwaffe)의 용기사가 될 것이다. 이의는 받지 않겠어. 내일 오전까지 육군본부로 찾아와라. 이상.”
여자는 자기 할 말만 다 한 뒤 우아하게 뒤로 돌아서서 그녀의 용에게로 향했다. 우리는 뜻밖의 사태에 놀라 멍청하게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용을 타고 날아올랐고, 공중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나는 피리를 불었다. 그러자 흑룡이 몸을 일으키더니 거대한 날개를 펼쳤다. 흙먼지가 피어오르더니 용이 날았다. 그녀는 계속 피리를 불었고, 흑룡은 그녀가 가는 대로 쫓아갔다.
우리를 포함해서 사람들은 멀어져 가는 용들의 실루엣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긴장이 풀려 주저앉자, 바닥에 엎어져 있던 폰조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헤르만, 너 사실 여자였던 거냐?”
“절대로 아니.”
“용기사는 여자만 할 수 있다. 너는 방금 용기사가 됐다. 그러므로 헤르만 예거는 여자다. 맞지?”
“아니라니까!”
그러나 폰조는 통 믿으려 들지를 않았다.
우리는 바닥에 떨어진 계급장을 주웠다. 그제야 사람들은 침묵에서 벗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용이 떠나간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우리와 흑룡 아바셋과의 첫 만남이었다.
소속이 붕 떠버린 나는 다음날 육군본부로 가기 전까지 루프트바페에 대해 찾아보았다. 직역하면 하늘의 병기.
도이체스 제국의 군인은 세 종류밖에 없었다. 육군, 해군, 그리고 친위대. 루프트바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육군 소속인 내 육군사관학교 동기들에게 물어보려 했지만 다들 날 만날 수 없는 상태였고, 나는 지금 연락이 되는 유일한 동기를 불러냈다.
“그건 신생 조직이다.”
내 앞에 앉아 있는 금발벽안의 미인이 맥주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갑작스럽게 불러냈는데도 흔쾌히 저녁 시간을 할애해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는 차가운 인상의 여자는 이텔 마리아 폰 프로이센.
금발은 머리를 묶을 수 있을 정도로만 짧게 잘랐다. 긴 머리는 군인에게 불편하다고 여기는 탓이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그녀의 안경. 차가운 푸른 눈동자와 더불어 그녀의 싸늘한 외모를 배가시키고 있다. 전반적으로 선뜻 말을 걸 수 없는 인상이다.
이 금발의 미인은 도이체스 제국의 황녀이자 황실의 맏이, 그리고 육군 중령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내가 유일하게 진정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다.
“용병기는 역사가 오래되었지만, 용을 타고 다닐 수 있게 된 지는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용기사는 군에 도입이 늦었지. 하지만 일단 육군 항공대와 해군 항공대 형식으로 용을 편성해 시범적으로 운영하고 있어. 이번에는 아예 용과 용기사만의 병력을 새로 만들어내려는 것 같더군.”
“공군······말입니까?”
“그래. 그게 바로 루프트바페다. 너는 친위대 소속이라 내막을 몰랐던 것 같군. 이쪽도 영관급 장교 이상만 알려준 정보니까.”
나의 동기들은 대부분 위관급 장교이다. 당장 나만 해도 육군 체계로 따지자면 중위였고, 승진이 빠른 녀석도 대위 정도였다.
내가 아는 영관급 장교는 지금 나와 술을 마시고 있는 이텔 중령밖에 없었다.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텔을 고른 것이었지만 뜻밖에도 맞는 패를 뽑아든 것이다.
이텔이 그 나이에 중령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황족이기 때문이었다.
정계로 뛰어든 베르논 황태자와는 다르게 이텔 황녀는 육군사관학교에 자진 입학해 군인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황족이기 때문에 순식간에 중령 자리까지 올라갔다.
“아쉽게 되었어. 같은 육군이 아니었을 때부터 느꼈던 감정이지만, 일이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저도 아쉬웠습니다. 이로써 저하와는 소속이 더 멀어지게 되었군요.”
“또, 또 그런다. 헤르만. 사석에서는 편히 부르라 하지 않았던가?”
“시정하겠습니다!”
내가 약간 장난스럽게 말하자 이텔이 쿡쿡 웃었다. 지금 이 모습만 본다면 얼음 같다는 평을 듣는 이텔 황녀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헤르만이 용기사라······, 상상도 못할 일이야.”
“말도 마십시오. 레이디 퍼스트라며 양보까지 당했습니다.”
“그대가 진짜로 레이디였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게 됐군. 그랬다면 레이디끼리의 비밀도 공유할 수 있었을 것이야.”
나는 답할 말을 찾지 못해서 그저 마주 웃었다. 이텔은 맥주 한 잔을 더 시켰다. 나도 내 앞에 놓인 맥주를 마셨다.
새 맥주가 오자 이텔이 말했다.
“정식 감응의식도 치르지 않은 용을 상대로 감응해 광폭화를 억제하다니.”
이텔이 맥주를 쭉 들이킨 뒤 잔을 내려놓았다. 우아한 제국의 황녀와는 거리가 먼 동작이었다. 그러나 이텔 중령에게는 어울렸다.
“그나저나 사상 초유의 사태군. 남자 용기사라니. 헤르만, 좋겠어. 청일점이네.”
나를 실컷 놀린 폰조 상급돌격지도자가 마지막에 내린 결론도 그것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여자가 싫은 게 아니다. 나도 남자다. 하지만 한 군대 병력 내의 유일한 남자가 되는 건 다른 문제였다.
“너라면 잘해낼 거다. 넌 레이디의 마음을 잘 헤아리니까.”
눈앞에 있는 사람은 레이디와는 백만 광년쯤 떨어진 사람이었지만 나는 고맙다고 대답했다. 이텔은 나를 위로해주고 있었으니까.
나는 맥주를 마시고 말했다.
“안경은 새로 바꾸셨습니까? 이전보다 머리카락과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안경 너머 푸른 눈이 이채를 띠었다.
“후훗, 그런가. 잘 어울린다는 말을 들으니 기쁘군. 헤르만 너는 빈말을 하지 않으니까.”
나는 빈말을 잘한다. 아주 잘한다. 다만 정말 친한 사람에게는 그러지 않을 뿐이었다.
치장하는 것에 관심 없는 이텔이 유일하게 신경 쓰는 것이 바로 안경이었다. 사실 이텔의 시력은 그렇게 나쁜 편이 아니었다. 앞쪽에서 중간쯤 되는 자리에 앉아도 칠판의 글씨를 볼 수 있는 시력이었다. 하지만 이텔은 다른 안경 착용자들이 그렇듯이 항상 안경을 끼고 다녔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안경은 멋있는 물건이었다. 멋부리는 사람들은 눈이 좋아도 도수 없는 안경을 끼기도 했다. 이텔은 안경이 자신을 좀 더 군인다운 인상으로 만들어준다고 좋아했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안경을 쓴 이텔은 더 어렵고 다가가기 힘든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마침 프로이센에 계셔서 다행입니다. 나중에 『단검』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자 이텔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이텔은 한참 동안 침묵했다. 그녀가 포크로 소시지를 찌르며 말했다.
“이럴 때마다 느끼지만 헤르만 너는 너무 위태로워.”
“중간에 발각될 수도 있고, 그것을 피하더라도 나중에 『단검』이 제 목을 찌르겠지요. 하지만, 그래서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언제나 조심하고.”
“에리히도 안부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이텔과 작별인사를 하고 집에 돌아온 나는 옷도 안 갈아입은 채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많은 일이 벌어진 하루여서 그런지 피곤했다.
잠에 빠져들기 직전 고양이 카트리나가 내 손을 살짝 물었다.
“카트리나, 나 오늘 너무 피곤한데 내일 놀아줄게.”
그러자 카트리나가 야옹 하고 울었다. 나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카트리나를 바라보았다. 이 샴고양이는 날 자게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나는 조금 냉혹해지려 했다. 아무리 그렇게 쳐다봐도 소용없었다. 나는 잘 것이다. 네가 무척 귀엽다지만 소용없어. 그런 눈으로 봐도 안 통해.
카트리나가 서글프게 울었다.
결국 한 시간이나 놀아줬다. 나도 카트리나도 녹초가 되었다. 나는 카트리나가 좋아하는 찍찍이 인형을 던져 준 뒤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육군본부로 갔다. 그 여자가 이름도 안 알려 준 데다가 우리의 상관이 어제부터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좀 일찍 갔다.
그러나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도, 두 사람 다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아무리 떼써도 소용없어. 헤르만은 이미 내 거야!”
“억지 부릴래?”
우리의 상관 아달베르토 프리드리히 집단지도자(중장에 해당)와 그 여자가 육군본부 한가운데에서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둘에게 다가갔다.
여자의 눈이 커졌다.
“오, 우리 헤르만, 왔어?”
“예거가 언제부터 자네 거였냐!”
“지금부터. 이리 와, 헤르만.”
타군의 장교라 해도 우리는 상급돌격지도자(소속이 바뀌었다면 대위)에 불과했고 이쪽은 중장이다. 우리는 명령에 따랐다.
여자는 우리 어깨에 손을 턱 얹더니 갑자기 헤드락을 걸었다.
“아참, 내 이름도 얘기 안 했네. 난 델 피셔. 사령관님이라고 부르면 돼.”
“델. 네가 하는 건 월권행위다. 예거 같은 인재를 멋대로 데려갈 수는 없어.”
“우웅, 하지만 용기사라고? 그것도 최초의 남자 용기사. 내가 놓칠 것 같아?”
“차라리 용병기사로 데려가는 거면 몰라, 새로 생겨서 쓸모도 용도도 불분명한 곳으로 빼돌리는 건 용납 못한다.”
“오호라, 아달베르토. 마음에도 없는 소리잖아, 그거. 용병기사로 데려간다고 했으면 겨우 그런데 데려가려고 헤르만을 빼가냐고 반대했을 거 아냐?”
아마 그랬을 것이다. 감응을 못하면 용의 등에 타지도 못하는 용기사와는 달리 용병기사는 감응력이 좋을수록 위력이 상승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용병기에 담긴 마력에 따라 위력이 좌우되었다. 대체로 여자보다 감응력이 떨어진다고 알려져 있는 남자들이 용병기사로 배치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 말은, 굳이 우릴 집어서 데려갈 이유도 없다는 뜻이었다.
아달베르토 집단지도자의 말문이 잠깐 막혔다. 델 중장이 헤드락을 건 팔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
“앞으론 루프트바페가 전쟁의 판도를 바꿀 거야. 오, 물론 육군에서도 해군에서도 새로운 무기가 나오겠지. 하지만 공중은 아직 미지의 세계. 적들이 드러누워 있는 동안 빨리빨리 하늘을 정복해야 한다고. 헤르만이 남자라서가 아니야. 우린 용기사가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해. 친위대에서 썩고 있기는 아깝지.”
“친위대의 일을 무시하지 마라.”
“응?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단지 우리 헤르만은 친위대보다는 루프트바페에 더 필요한 인재라는 거지.”
“그게 그거잖냐!”
그 뒤로 둘은 아달베르토 집단지도자의 사무실로 자리를 옮긴 뒤 한참을 더 다투었다. 한 시간의 입씨름 뒤 둘은 결론을 내렸다.
“남은 건 하나뿐이네?”
“좋다.”
“그럼, 반씩 나누어 가지는 걸로.”
!파라의 현자 솔라의 재판입니까? 그것보다, 반씩 나누면 죽는다고요?
(!파라: !파라는 흑발에 보라색 눈동자를 지닌 이종족이다. 그들은 일반인보다 훨씬 강하고, 민첩한, 그리고 아름다운, 인간을 초월한 신체를 가진 이들로, 하나하나가 일당백을 하는 뛰어난 전사다. !파라는 그냥 ‘파라’라고 읽지 않고, 혀를 한 번 튕긴 다음에 말한다. 느낌표 기호는 혀를 한 번 튕기라는 것으로, 오직 !파라에게만 있는 음소다.)
두 사람이 잠시 협의를 하더니 델 중장이 즐거운 얼굴로 사무실을 나섰다.
“루프트바페가 된 걸 축하해, 헤르만 예거 대위!”
델 중장은 손 키스를 날리는 시늉까지 한 뒤 문을 닫고 나갔다. 아달베르토 집단지도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감쌌다.
“예거 상급돌격지도자.”
“예!”
내가 묵직하게 대답하자 그가 말했다.
“넌 이제부터 루프트바페의 용기사다.”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나.
사실 우리도 루프트바페로 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친위대로 있으면 우리가 찾는 걸 수사하기가 더 쉽다. 하지만 루프트바페는? 그럴 시간이 있을까?
“하지만 친위대원으로서의 네 보직은 그대로 유지한다.”
우리는 그 말에 아달베르토 집단지도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자네는 내가 준 특별 임무를 띤 친위대원으로서 루프트바페의 용기사가 되어라. 육군 항공대와 해군 항공대는 단위 면적 당 용의 개체수가 가장 많은 곳. 이제 그 둘이 루프트바페로 합쳐져 개편된다. 분명히 그들은 루프트바페를 노린다.”
“······계몽결사 말씀이십니까.”
아달베르토 집단지도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몽결사는 도이체스 제국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는 반정부단체였다. 이름에서 보다시피 주된 목적은 ‘계몽’이다.
아르모리카 왕국이 왕의 목을 단두대에서 자르고 프랑크 공화국이 된 것처럼, 이 도이체스 제국도 공화정으로 ‘계몽’하려는 것이다.
당연히 황실의 전복을 목적으로 하고 있고, 황실과 적대적이다.
그러나 한 단체가 무너뜨리기에는 이 제국이 너무나 컸다. 그렇기에 계몽결사는 용병기에 집착했다. 더 강력한 무기에.
현대 이전의 용병기 삼분의 이는 소실되었는데, 그것을 훔쳐간 세력이 계몽결사라고 보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고대마법, 즉 그다지 위력적이지도 정교하지도 않은 마법이 담긴 구식 용병기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절실한 것이다.
현재는 여러 군에 흩어져 있던 용기사들을 루프트바페라는 조직에 하나로 모으고 있다. 당연히 용도 거기에 모일 것이다. 계몽결사가 루프트바페를 노리는 것은 당연한 추론이었다.
“원래 자네는 계몽결사 추적 임무를 맡지 않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군.”
아달베르토 집단지도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시간부로 자네를 최상급돌격지도자로 임명한다. 계몽결사는 분명 루프트바페에 손을 뻗칠 거다. 찾아내.”
“네!”
아달베르토 집단지도자는 내가 어제 다시 달아놓은 상급돌격지도자 계급장을 떼더니 최상급돌격지도자 계급장을 손수 붙여 주었다.
“승진 축하하네, 예거.”
친위대원 보직을 잃지 않았다. 아직 끈을 남겨둔 것이다.
그 뒤로는 이사 준비를 실컷 했다. 루프트바페 기지가 위치한 바이어의 독신 장교 숙소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살고 있는 곳도 독신 장교 숙소여서 딱히 불만은 없었다. 짐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다만 카트리나를 동물 이동용 가방에 넣느라 진땀을 뺐다. 카트리나 입장에서는 이동장에 끌려가기만 하면 동물병원에서 주사를 맞았기 때문에 꺼리는 것이 이해는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유달리 힘들었다. 나는 마침내 간신히 가방 지퍼를 닫을 수 있었다.
카트리나가 화난 목소리로 야옹 하고 울었다.
짐을 다 싼 나는 숙소 밖으로 나왔다. 루프트바페에서 운전병과 자동차를 제공해 주기로 했다.
군용 트럭이 한 대 오더니 갈색 머리의 운전병이 차에서 내렸다. 육군 전투복을 입고 있다. 계급은 상병. 운전병이 내려서 경례를 올린 뒤 물었다.
“헤르만 예거 상급돌격지도자 맞으십니까?”
이런. 어제 갑자기 진급한 탓에 에리히의 계급이 잘못 알려졌나 보다. 하지만 이 거리에서는 내 계급장이 보일 텐데?
“헤르만 예거는 맞고 상급돌격지도자는 틀렸다. 아직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나 보군.”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최상급돌격지도자도 아니었다. 나는 지금 친위대원이 아니라 용기사로서 그 자리에 선 것이니까. 지금의 나는 에리히가 아니었다.
운전병은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텔이 먼 데 있는 칠판을 보려고 할 때 짓는 표정과 똑같았다. 곧 운전병은 사색이 되었다. 시력이 나빠서 내 계급장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군.
나는 잠시 운전병을 바라보았다. 운전병이 점점 긴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징계감이니까.
“됐다. 의도한 실수도 아니고 잘못 전달받았을 테니. 짐 옮기는 것 좀 도와라.”
운전병은 죽다 살아난 표정이 되었다.
운전병과 함께 짐을 다 싣고 트럭에 탔다. 나는 운전병에게 물었다.
“육군 소속인가?”
“상병 이바하르트 블라우! 아닙니다. 루프트바페 소속입니다!”
예상했던 바다. 루프트바페의 사령관 델 중장도 육군 정복을 입고 있었다.
“루프트바페는 아직 제복이 없나?”
나는 친위대 제복을 입고 있었다. 루프트바페에서 새 제복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사복을 입고 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래도 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친위대 제복을 입었다.
“예. 아직 제복이 지급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해군 항공대 출신 병들도 해군복을 입고 있습니다.”
나는 살짝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새로 생겨서 쓸모도 용도도 불분명한 곳으로 빼돌리는 건 용납 못한다.’
아달베르토 집단지도자가 했던 말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새로 생겼다는 말을 듣고 각오하긴 했지만 아직 제복조차 마련되지 않았을 줄은 몰랐다.
“그렇지만······.”
이바하르트 상병이 말했다.
“얼마 전에 루프트바페 홍보자료 사진을 촬영하면서 제복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곧 나올 겁니다. 장교님들과 병이 나란히 찍었습니다.”
“그래? 어떻게 생겼지?”
“일단 장교님들 제복은 지금 당신이 입고 있는 옷과 디자인이 비슷합니다. 대신에 색이 짙은 남색이지요. 체련복이나 전투복들도 거의 푸른 계열입니다. 친위대보다는 못하겠지만 육군보다는 훨씬 세련되었습니다.”
친위대는 제복이 멋있기로 정평이 나 있다. 제복 보고 입대한 녀석도 있을 정도이니.
그나저나 이 사람, 꽤 능숙하다. 운전 이야기가 아니었다.
친위대만의 독특한 관습이 있다. 첫째, 계급명에 님을 붙이지 않는다. 둘째, 나보다 높은 계급일지라도 당신이라는 호칭을 쓴다.
이것은 경직된 문화를 없애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아달베르토 프리드리히 집단지도자에게 ‘님’자를 붙이지 않고 그냥 ‘집단지도자’라고 부른다. 아니면 ‘당신’이라고 부르거나.
이 규칙은 육군과 해군 같은 외부 군인이 자기보다 높은 친위대원을 만났을 때도 그대로 적용된다. 당연히 계속 실수한다.
그런데 이바하르트 상병은 이 규칙을 이해하고, 상병쯤 되었으면 호칭이 습관처럼 뿌리박혔을 텐데도 곧바로 실행에 옮긴 것이다. 바이어에 도착하기 전까진 친위대원이므로.
난 이바하르트 상병만큼 잘 할 자신이 없다. 당분간 ‘당신’이라는 말 자체를 아예 안 쓸 생각이다. 계급 뒤에 ‘님’을 붙이는 건 똑바로 정신 차리고 있으면 할 수 있겠지.
이바하르트 상병이 말했다.
“친위대에서 오신 분은 처음 봅니다. 작전본부로 가십니까?”
“아니, 내 보직은 용기사다.”
그렇게 말하자 차가 갑자기 심하게 덜컹거렸다. 이바하르트 상병이 핸들을 확 꺾었기 때문이었다.
“조심히 몰아라. 고양이가 있으니까.”
이바하르트 상병은 내 말을 듣고 겁에 질린 것 같았다. 그러나 경악 쪽이 더 큰 것 같았다.
“용기사이십니까?”
“신기한 건 이해하지만 그만 놀라줬으면 좋겠군.”
이바하르트 상병은 주제넘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입을 다물었다. 벌을 주려면 줄 수도 있겠지만 누구나 놀랄 법한 일을 가지고 벌을 주기는 싫었다. 우선 도착해서 빨리 카트리나를 풀어주는 게 급하다.
이바하르트 상병이 양 옆에 나무가 우거진 도로로 접어들었다. 확실히 프로이센과는 느낌이 달랐다. 좀 더 자연적이고, 좀 덜 도시 같았다. 뭐, 프로이센은 제국의 수도다. 그 번화한 곳과 비교한다면 공정하지 못하겠지.
그렇게 바이어의 독신 장교 숙소에 도착했다. 나는 오른손에 카트리나가 든 가방을, 왼손에 짐가방을 들었고 이바하르트 상병이 나머지 짐을 짊어졌다. 밖에서 본 숙소는 갓 지은 태가 났다.
이바하르트 상병은 조금 긴장한 기색이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는데,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여자들의 경악한 시선을 받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나와 이바하르트 상병이 이 공간의 유일한 남자였다.
이바하르트 상병의 말대로 여자들은 육군복과 해군복이 섞여 있었다. 육군 항공대와 해군 항공대가 통합된 조직이라 그런 모양이었다. 친위대 제복을 입고 있는 나는 명백히 외부인이었고, 내 성별과 더불어 정말 튀는 요소였다.
304호 열쇠를 받고 계단을 올라갔다. 3층까지 가는 내내 어딘가 한 구석이 찜찜했는데, 304호 앞에 도착하자마자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2인 1실······?”
맙소사, 독신 장교 숙소를 2인 1실로 운영하다니. 친위대에서는 이러지 않았다. 아니, 당연히 육군도, 어쩌면 해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2인 1실 숙소는 정말 예산이 열악한 곳에나 생긴다고 들었다. 허술한 건 제복뿐만이 아니었단 말인가? 나는 카트리나도 있는데?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어쩌면 2인 1실이지만 나 혼자에게만 방을 배정했을 수도 있다. 특별대우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상식이 그러했다. 나는 당연히 혼자 방을 써야 마땅했다!
명패의 글씨를 읽었다. 히데······ 프롬······.
“누가 봐도 여자잖아!”
히데 프롬이라니. 분명 여자다. 2인 1실인 것도 모자라, 여자랑 같은 방을 쓴다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빌어먹을 붉은 머리가!”
“어머, 그건 나에게 하는 말일까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나는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육군 정복을 입은 델 피셔 중장이 싱글거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경례를 올렸다.
“대위 헤르만 예거! 그런 사실 없습니다!”
“방은 마음에 들어? 이런, 아직 들어가 보지도 않았구나. 어머! 이건 고양이야? 귀여워!”
나는 카트리나를 가방에서 꺼내 델 중장의 품에 넣어주었다. 카트리나는 붙임성 좋은 고양이답게 델 중장의 품에서 골골골 소리를 냈다.
부럽구나. 하늘같은 별 앞에서 그럴 수 있다니.
나는 델 중장이 카트리나를 쓰다듬는 틈을 타 말했다.
“사령관님, 방에 무슨 착오가 있는 것 같습니다.”
좋아. 실수하지 않았다. ‘님’ 자를 붙였어.
“착오? 그런 건 없는데?”
“하지만 룸메이트가······.”
“아, 그거? 제대로 된 것 맞아! 딱 한 자리 남은 거에 네가 들어온 거라서.”
델 중장이 싱긋 웃었다.
“새 숙소를 짓자니 그쪽은 한 명이구, 한 명만을 위해 건물을 새로 짓는 건 지금 상황으론 무리라서 말이지. 그냥 빈 자리에 넣어버렸어!”
웃으면서 말할 게 아니잖아!
“혹시나 해서 와봤는데 잘 됐네. 칼레샤, 헤르만 잘 교육시켜.”
“예.”
델 중장 뒤편에 서 있던 금발머리의 여자가 대답했다. 그녀는 말랐지만 강단 있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델 중장이 고양이를 돌려준 뒤 가버리자 나는 눈앞의 여자에게 물었다.
“그냥 외부에 집을 구해다 살면 안 됩니까?”
독신 장교 숙소는 의무가 아니었다. 소위 정도라면 눈치 보여서 빠지기 힘들지만 나는 대위다. 부대 인근에 작은 방 하나를 얻는다면 출퇴근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 유감스럽지만 루프트바페가 워낙 보안에 민감한 곳이라서. 작전본부 소속이었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용기사는 전원 영내 거주다. 어쩔 수 없어. 짐을 정리하고 나서 본부로 오도록. 옆의 상병이 안내해줄 거다.”
그러자 이바하르트 상병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나와 있을수록 원래 근무를 내뺄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내 이름은 칼레샤 알트하우스. 편대장님이라 불러라. 넌 제1비행대대 제3편대 소속이다. 올 때는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오도록.”
나는 그녀의 계급장을 힐끗 보았다. 소령이었다.
보통 육군이었다면 대위 계급은 중대 하나를 통솔하는 위치다. 즉 지휘관으로서의 성격이 더 강했다. 하지만 용기사는 장교만으로 편성한다. 그러니 위관급 장교들이 실질적으로 병처럼 통솔을 받고 영관급 장교들이 위관급 용기사들을 통솔하는 구조가 된 것이다.
어쩌면 제설작업도 우리가 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내 옆의 이바하르트 상병 같은 병도 있으니 그들이 하려나?
나는 문을 열었다.
널찍한 방에는 침대가 두 개 놓여 있었다. 머리맡에는 투박한 책상이 놓여 있었고 책장이 그 위로 짜여 있었다. 방의 왼쪽에는 개인 화장실이 있었다.
저번 숙소는 공용이었는데 이것은 좀 마음에 들었다. 만약 이곳도 공용이었으면 난 새벽 4시에 씻어야 했을 것이다.
저번에 살던 독신 장교 숙소의 약 1.5배 정도 넓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이 같은 방을 쓰니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이바하르트 상병의 얼굴에 부러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생각해보면 일반 병이 장교 숙소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될까.
오른쪽 침대는 이미 주인이 있었다. 이불과 베개는 진홍색이었고 책상 위에 놓인 물건들도 붉은색 계열이 많았다.
왼쪽 침대에도 옷가지 같은 것이 잔뜩 올려져 있었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빈 침대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여자 속옷이 보여서 나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룸메이트가 차지한 책장 한 칸은 화장품이 놓여 있었고 나머지는 전부 책으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주로 역사책이 많았다.
책상에는 연필보다 좀 더 긴 크기의 뾰족한 막대기가 있었다. 『살인자』와 살아오면서 지겹도록 보았기 때문에 나는 저게 무엇인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토라손. 경전을 손으로 짚으면 더러워지기 때문에 저 막대기를 이용하여 글씨를 훑는 것이다.
나의 새 룸메이트는 유일신 야와를 믿는 !파라라는 종족이었다.
나는 짐을 내려놓자마자 가장 먼저 카트리나를 풀어준 뒤 고양이 화장실에 모래를 채워 주었다. 카트리나는 신이 나서 화장실로 달려갔다. 책상 위에는 고양이 간식을 빼놓았다. 힘든 여행길을 다녔으니 간식을 줘야 했다.
이바하르트 상병이 카트리나를 보는 것을 눈치 챘다.
“귀엽지?”
“상병 이바하르트 블라우! 그렇습니다! 정말 귀엽습니다!”
“당연하지. 카트리나인데. 룸메이트가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마지막 말은 거의 나에게 하는 혼잣말이었다. 카트리나는 정말 사랑스러운 고양이었지만 털짐승을 싫어하는 사람도 분명 있었다. 내 룸메이트가 그런 사람이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짐을 전부 정리하고 본부로 향했다. 이바하르트 상병이 감탄하는 게 느껴졌다. 무언가를 착착 정리하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 짐정리도 순식간에 끝냈다. 물론 이바하르트 상병이 없었다면 더 늦어졌을 것이다.
본부에 도착하고 이바하르트 상병을 떠나보냈다.
칼레샤 소령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칼레샤 소령은 나를 불러놓고 이것저것 물었다. 주로 내가 육군사관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친위대에서 하는 업무가 무엇인지 하는 것이었다. 내가 사관학교 시절에 마법학이 주전공이었다고 말하자 칼레샤 소령이 말했다.
“그럼 따로 교육받을 필요가 없겠군.”
들어보니 루프트바페는 아직 체계가 잡힌 게 아무것도 없어서 장교들 교육 수준도 전부 제각각이었다.
그러나 용기사들은 반드시 마법학을 수료해야 했고, 마법학을 듣지 못한 장교들은 임시로 마련된 교육기관에서 마법학을 듣는다. 학부 때 썼던 마법학 교재를 안 버리고 가지고 있기를 잘한 것 같았다.
“내일부터 훈련에 같이 돌입해도 되겠군. 모르는 건 히데 소위에게 물어봐라. 같은 제3편대원이니까.”
“예.”
나는 내 룸메이트의 이름을 떠올렸다. 히데 프롬. 나는 그 사람이 불쌍해졌다. 그동안 혼자서 방을 잘 써오고 있었을 텐데 남자 룸메이트라니. 거의 날벼락 수준이 아닌가.
오늘은 첫날이기 때문에 나는 훈련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엄청 눈에 띄는 친위대원 제복을 입고 돌아다니기는 조금 그랬기 때문에 나는 숙소로 일찍 돌아왔다.
숙소를 돌아다니는 여성 장교들은 내 존재가 정말 충격적인 모양이었지만 친위대 복장 때문인지 선뜻 나에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수군거리는 말 중 들려온 게 있었다.
“······, ······도깨비······.”
사람에게 쓰면 실례되는 말인데 너무하다. 저건 진짜 ‘도깨비’에게도 써서는 안 될 말이지 않나.
카트리나에게 간식을 주고 나는 밥을 일찍 먹으러 갔다. 구경거리가 되는 건 딱 질색이었다. 앞으로도 지겹게 구경거리가 될 운명이었지만, 적어도 첫날부터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내 불쌍한 룸메이트를 기다렸을까, 드디어 문손잡이에 열쇠를 넣고 돌리는 소리가 났다.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석탄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을 양갈래 머리로 묶은 소녀.
소녀였다. 155센티미터도 안 되어 보이는 키에 앳된 얼굴. 육군 전투복은 그녀에게 너무 커서 헐렁해 보이기까지 했다. 달려 있는 건 소위 계급장.
자수정 같은 보라색 눈동자가 나를 응시한다. 새하얀 얼굴엔 붉은 색으로 복잡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전투화장이었다.
!파라. 흑발에 보라색 눈동자를 지닌 이종족. 그들은 일반인보다 훨씬 강하고, 민첩한, 그리고 아름다운, 인간을 초월한 신체를 가진 이들이었다. 그들 하나하나가 일당백을 하는 뛰어난 전사. 소총의 시대가 오기 전까진 그들을 막아낼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워낙 폐쇄적인 종족인 탓에 그들의 고향 하르트란트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벗어난다면 대개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경우다.
도이체스 제국의 일반인이 !파라를 볼 확률은 0에 수렴했다. 제국민이 !파라를 접하는 경로는 보통 신문에 나오는 하르트란트 독립전쟁이나 그 연장선으로 벌이는 테러행위였다. 그래서 !파라하면 테러리스트로 낙인이 찍혀 있었다.
그 모든 것과는 별개로 처음 !파라를 보는 이들은 그들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멍하니 바라보고는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파라에 익숙했다.
나를 본 히데 프롬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살아서 돌아갈 생각 하지 마라, 변태.”
내가 무어라 항변을 하기도 전에, 히데 소위가 땅을 박차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꽉 쥐어진 작은 주먹은 정확히 내 명치를 강타한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고개를 갸웃하는 카트리나였다.
-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칼레샤 소령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끌어내려진 내 바지와 속옷을 본 칼레샤 소령이 마치 더러운 걸 본 것마냥 인상을 썼다. 저기, 너무 대놓고 그러시면 슬퍼지는데요.
칼레샤 소령이 지시했다.
“일단 바지부터 올려.”
그러자 주황 머리의 여자가 나서서 나에게 다가왔다. 아까 내 바지를 내렸던 여군이었다! 나는 그녀의, 살짝 음흉하기까지 한 표정을 보고 공포에 질려 이리저리 몸부림쳤지만 가차 없이 잡혔다.
결국 바지는 원상태로 돌아왔고 나는 이제야 문명인답게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귀갑묶기로 결박된 상태는 여전했지만.
칼레샤 소령은 히데 소위를 제외한 나머지들을 전부 쫓아 보낸 뒤 그녀에게 말했다.
“숙소를 증축하면 따로 살 수 있을 거다. 히데, 불편하겠지만 당분간만 같이 살아라.”
분명 델 중장은 숙소를 증축하겠다는 말 비슷한 것도 꺼내지 않았다. 그냥 하는 말이 틀림없었다.
히데 소위는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은 표정이었다. 부조리하다. 이 상황 전체가 부조리하다. 하지만 여기는 군대였다. 그런 부조리마저 따라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나는 !파라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히데 소위의 말에 나는 잠시 멍하니 그쪽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말할 줄 몰랐다. !파라는 정말 자존심이 세고 반골 기질이 있는 종족이었다. 그토록 뛰어난 전사의 체질을 타고났으면서도 군에 부적합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들은 흉폭하고, 잔인하고, 오만한······.
“지금 바로 풀어드리겠습니다.”
소녀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나는 보석 같은 보라색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내가 히데에게 『살인자』를 투사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히데는 !파라였다. 그러나 히데는 그녀가 아니었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히데 소위는 가위도 없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 점을 칼레샤 소령도 눈치 챘는지 뭐라 한 마디를 보태려 했다. 하지만 나는 가만히 있었다.
히데 소위는 내 몸의 매듭을 잡더니 힘으로 전부 뜯어내 버렸다.
칼레샤 소령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파라는 정말 강력한 종족이었다. 이 정도 일은 저렇게 조그만 소녀도 해낼 수 있었다.
“비록 남녀 사이라지만······.”
히데 소위가 슬쩍 내 계급장을 곁눈질했다. 친위대 대위 계급장. 그러나 이름은 없다. 나는 내 이름을 말했다.
“헤르만 예거.”
“예거 대위님. 아무 일도 없으리라 믿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안광을 빛내며 나를 내려다보는 이 맹랑한 소위는 나를 협박하고 있었다! 히데 소위의 손에는 너덜너덜해진 붉은 밧줄이 들려 있었다.
보통의 남자라면 겁을 집어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파라에 익숙했다. 이 정도 실력행사는 예상하고 있었다. 나는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으니 나도 문제 삼지 않겠어, 히데 소위. 잘 지내보자고.”
칼레샤 소령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방금 히데 소위가 한 짓은 엄밀히 말하면 하극상이었다. 벌을 주려면 언제든지 줄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넘어가는 것을 택한 것이다.
히데 소위의 바람과는 다르게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얼굴 맞대고 살아야 하는 사이다. 첫인상은 최악이었지만 더 나쁘게 만들 이유는 없다.
상황이 종료되자 칼레샤 소령은 나갔다.
사실 칼레샤 소령도 히데 소위를 징계하려면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은 이유는 그녀도 히데를 이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아침에 남자 룸메이트가 생겨버린 어처구니없는 이 상황을.
나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여기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지? 너랑 같은 편대라고 하던데.”
“편대장이신 칼레샤 프랑크 소령님, 대위님, 알비 하스 소위, 그리고 저까지 합쳐 총 4명이 제1비행대대 제3편대입니다. 훈련 단위는 비행대를 기준으로 합니다.
오전 6시 30분에 기상해 6시 40분에 아침점호 및 체력단련을 한 뒤 7시 20분에 아침식사를 합니다. 그 뒤 오전엔 마법학 강의를 수료하고, 듣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대신 체력단련에 들어갑니다.
12시부터 한 시간 동안 점심식사를 합니다. 오후에는 용기사 관련 훈련이 있습니다. 18시에 저녁을 먹고, 그 이후에는 자유시간입니다만, 가끔 행군 등의 훈련이 있으면 하기도 합니다. 이상입니다.”
꼭 군인이 아니라 사관생도 같은 스케줄이었다. 나는 마법학을 수료했다고 말한 것을 후회했다. 체력단련을 한다니!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하고 수업이나 듣고 있으면 좀 나았을 거다.
“넌 마법학 수업을 들어?”
“아닙니다. 마법학은 미리 공부해왔기 때문에 체력단련에 참여합니다.”
히데 소위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파라이니 체력단련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나는 조금 마음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파라에게서 저런 순수한 표정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히데가 살짝 주저하면서 물었다.
“예거 대위님, 어떻게 여기로 오시게 된 겁니까?”
내가 남자라는 사실을 빼고서라도 나는 특이한 존재였다. 나는 프로이센 한복판에서 만났던 용과 델 중장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용을 만져보셨단 말입니까······.”
그렇게 말하는 히데 소위의 얼굴엔 부러움이 가득했다. 나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루프트바페의 용기사인데, 아직도 용을 타보지 않은 거야?”
“저 멀리 하늘을 나는 것밖에 못 봤습니다. 물론 감응력은 특수 기구를 이용해 테스트했지만, 그동안은 용을 타기 위한 예비 훈련만 실컷 받았습니다. 실제로 용을 타본 사람은 편대장님 이상부터입니다.”
그 뒤로 이야기를 더 나누었고, 나는 히데 프롬 소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히데 소위는 하르트란트에 있을 때부터 용과 용기사를 동경해왔고, 마침내 도이체스 제국으로 가출해 군대로 들어갔다. 나이 때문에 입대하지 못할 뻔했지만 !파라는 더 어린 나이에 지원할 수 있었기 때문에 통과되었다. 그렇게 여자가 병사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의무병이 되었다.
그리고 1년간 군 생활을 한 뒤 감응력 테스트를 받을 나이가 되자 응시했다. 다행히 히데는 감응력 테스트에서 합격점을 받았고, 곧바로 소위로 임관해 육군 항공대에서 훈련을 받다가 루프트바페로 넘어왔다고 했다.
“용감했네. 네가 !파라가 아니었다면 정말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어.”
“확실히 보통 사람이라면 위험한 일을 많이 겪었을 겁니다. 수작을 부리는 자들도 몇 있었죠. 길 가다가 뜬금없이 체포된 적도 있었고요.”
그러나 다 때려눕혔습니다, 라는 말이 생략되었다. 하르트란트는 도이체스 제국의 식민지 중 가장 가까운 곳이었지만 그래도 국경을 넘는 일이다. 여자애 혼자서 육군에 들어가기까지 온갖 고초를 겪었을 것이다. 보통 여자였다면.
하지만 나와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은 밧줄을 손아귀 힘으로 뜯어내는 종족이었다. 그 누가 !파라를 건드린단 말인가? 아마 히데의 손에 작살난 불운한 인간들은 히데의 !파라 중에서도 빼어난 미모와 자그마한 몸집만 보고 만만하게 본 놈들이었을 것이다.
한참을 이야기 나누는데 카트리나가 히데에게 다가가 얼굴과 턱 밑을 비볐다. 히데 소위는 눈에 띄게 뻣뻣하게 굳어 당황한 기색이었다.
“카트리나가 사람을 많이 좋아해. 너도 마음에 들었나보다. 고양이는 처음이야?”
“그, 그렇습니다.”
“나도 혼자 살게 될 줄 알고 데려온 건데, 조금 미안하게 됐네. 카트리나도 잘 부탁해.”
싫어도 어쩔 텐가. 난 대위고, 히데는 소위다. 카트리나가 싫어도 어쩔 수 없는 거다.
“쓰다듬어 봐도 됩니까?”
“물론. 배는 만지지 말고.”
히데 소위는 긴장한 기색으로 카트리나의 등을 쓰다듬었다. 뻣뻣하게 굳은 몸과는 다르게 손길은 퍽 부드러웠다. 카트리나는 기분이 좋았는지 골골골 소리를 냈다.
히데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위님, 이 아이, 모터를 삼킨 게 아닙니까? 이상한 소리를 냅니다.”
조그만 소녀가 잔뜩 심각한 표정으로 그렇게 묻는 것이 너무 귀여워서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히데가 부루퉁해졌다.
“기분 좋으면 내는 소리야. 완전히 정상이니 안심해도 좋아.”
“그렇습니까······.”
표정이 풀어지며 카트리나를 쓰다듬던 히데 소위는 손에 묻어나온 하얀 털을 보며 다시 표정이 굳어졌다.
음, 저건 어쩔 수 없다. 매일매일 빗질을 해주지만 고양이는 고양이였다. 털이 무지막지하게 빠졌다. 어쩔 수 없다. 히데는 털과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그나저나 대위님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친위대원에서 루프트바페의 용기사가 된 경위는 들었으니 그 이전을 이야기해달라는 뜻이었다.
“난 정말 별 거 없어. 우선 어머니 혼자서 날 기르셨는데, 그만 돌아가시는 바람에 아버지에게 가게 되었지.”
귀족의 사생아로 태어났다가, 어머니의 죽음으로 아버지 쪽 가문에 들어갔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었지만 다행히 후견인을 만나서 시설로 가진 않았고,”
아버지와 그 가문은 숙청당했고, 그들을 도륙한 『살인자』가 나를 거두어 성인까지 길러 주었다.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어서 안정적인 군인을 하기로 했어. 굳이 친위대를 고른 건 도시에서 근무하고 싶었기 때문이었고.”
『나의 친애하는 적』을 말살하기 위해, 군에서 가장 부패하고 비밀스러운 조직으로 들어갔다.
“적당적당히 일했지.”
부패한 조직이 시키는 대로 손을 더럽혔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그리고 루프트바페로 온 건 아까 이야기했고. 그냥 이정도.”
내 말은 진실과 거짓이 섞여 있다. 그리고 히데 소위는 내 거짓말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파라란 그런 존재였으니까.
이들은 보통 사람은 인지할 수조차 없는 미세한 표정을 잡아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
“······저도.”
히데 소위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부모님이 없습니다. 저는 시설에 들어갔어요. 그 높다란 담벼락에 가로막혀 갇혀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늘이 너무 부러웠어요. 창공을 가르는 용, 그리고 용기사에 대해 알게 된 순간부터 그들이 되고 싶었습니다.”
히데 소위의 설명은 간략했고 이 말을 하는 것조차 껄끄러워 보였다. 마치, 내 쪽에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쪽에서도 억지로 쥐어짜낸 느낌이었다.
“그렇구나.”
나는 웃으며, 이렇게만 대답했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덧 소등시간이 다 되었다. 나는 잘 생각이 없었지만 우선 잠옷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히데 소위의 잠옷은 심플한 검은색이었다. 나는 곧 애도를 표했다. 검은 잠옷이니 카트리나의 털이 붙으면 정말 눈에 띌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저것이 잠옷이라는 것일까. 나는 검은색 친위대 제복에 붙은 털을 떼어내느라 아침에 5분은 잡아먹었다.
“뒤돌아 있을까?”
“감사합니다. 뒤돌아보시면 죽여 버릴 겁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상관을 협박하는 데 도가 텄다.
스륵, 스르륵, 옷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옷이 살결과 스치는 소리, 다른 옷과 부딪히며 바스락거리는 소리.
히데 소위는 나를 의식해서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순식간에 옷을 다 갈아입었다. 나도 히데 소위에게 뒤돌아 있으라고 부탁한 뒤 옷을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히데 소위의 벽장은 휘장으로 가려져 있었다. 히데 소위는 휘장을 걷고 벽장에서 천 꾸러미 하나를 꺼냈다. 꾸러미에서는 양쪽에서 말린 두루마리가 나왔다. !파라교의 경전 토라였다.
히데 소위는 토라를 펼쳤다. 잠시 주저하며 내 쪽을 바라본 히데 소위는 곧이어 토라를 암송하기 시작했다. 거의 8년 만에 듣는 토라였다.
『살인자』도 이렇게 홀로 토라를 펴놓고 암송하곤 했지.
마침내 10시. 소등시간이었다. 히데 소위는 암송을 끝냈다. 나는 미리 준비해 둔 스탠드를 켜고 마법학 책을 빼들었다.
“······안 주무십니까?”
토라를 집어넣은 히데 소위는 벌써 침대에 드러누웠다. 나는 놀라서 반문했다.
“소등시간 됐다고 바로 자는 거야?”
“군에서 내려 준 소등시간입니다.”
히데 소위가 스탠드 불빛 때문에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히데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한 마디 하려 했지만, 곧 내가 더 상관임을 상기했는지 그냥 아무 말 없이 불빛이 안 보이는 쪽으로 돌아누웠다.
나는 노트를 꺼내서 마법학 책의 내용을 복습하기 시작했다. 따로 교육을 안 받는다지만 내가 모든 내용을 기억하고 있으리라는 자신도 없고, 필요할지도 모른다. 한참을 적어 내려가는데 히데 소위가 말했다.
“조금 조용히 해주실 수 없습니까?”
이번엔 숨길 수 없는 짜증이 묻어 있었다. 군에 적응했다지만 !파라는 !파라인 모양이었다. 겨우 종이에 펜으로 사각거리는 정도였다. 그러나 !파라에게는 무척이나 크게 들렸던 모양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다음날 나는 히데 소위와 함께 아침을 먹으러 갔다. 히데 소위는 나에게 같은 제3편대원인 알비 하스 소위를 소개시켜 주었다.
알비 소위는 남색 바지, 그리고 흰 상의에 푸른색 세일러 칼라가 있는 해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키가 껑충하게 크고 호리호리했다. 원래라면 조금 헐렁했어야 할 세일러복은 풍만한 가슴 때문에 터질 듯 팽팽했다. 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비죽 튀어나온 귀는 끝이 뾰족했다. 나는 같이 아침을 먹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랑이야?”
“헤헷, 반만요. 어머니 쪽이 아랑이었어요!”
조심스럽게 물어본 것이 무색하게 알비 소위는 쾌활했다. 도이체스 제국에서 아랑으로 살아가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도 구김살 없는 아가씨였다.
“예언은 못해요.”
알비 소위가 덧붙였다. 예언은 아랑 중에서도 극소수만 발현되는 능력이다. 혼혈인 알비 소위에게 나타날 리 없었다.
그렇게 밥을 먹으면서, 나는 우리 쪽을 보며 수군거리는 여군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구경거리가 되는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다. 앞으로 익숙해져야 할 일이지만.
“편대장님은 남부 출신인가 봐?”
칼레샤 소령의 악센트는 상당히 강했다. 두 사람 다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뭐더라······, 빈드발드에서 오셨다고 그랬던 것 같기도······.”
빈드발드. 어렴풋하게 기억나는 이름이다. 숲이 무성한 시골로, 정말 아무 특색 없는 깡촌이다. 지금 내가 이름을 아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였다.
지금 제3편대원의 구성원은 이렇다. 일명 ‘도깨비’로 분류되는 !파라와 아랑, 그리고 루프트바페 용기사 중 유일한 남자. 편대장 칼레샤 소령은 남부 시골 출신.
이 편대, 지뢰다.
너무나 눈에 띄는 조합이었다. 군에선 무엇이든지 눈에 띄면 좋지 않았다. 무능해서 눈에 띄든, 유능해서 눈에 띄든. 전쟁 상황이라면 모를까 이런 때 튀는 사람은 실수도 더 잘 눈에 띈다. 아마 여기에 돌고래까지 추가된다면 현존하는 세 종류의 이종족이 전부 모였을 텐데.
나는 앞으로의 군 생활이 걱정되어 한숨을 내쉬었다.
친위대에서 복무할 때는 비밀경찰 일을 좀 더 많이 했다. 몸 쓰는 일이라고는 체포할 때의 몸싸움밖에 없었다. 몸싸움에는 이골이 나 있었고 자신도 있지만 용기사가 지상에서 싸움박질 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지금부터 하게 될 훈련을 제대로 따라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나저나 대위님, 무서운 분인 줄 알았는데 부드러우시네요!”
“내가? 내가 왜 무서워.”
“그거야······ 아무래도 친위대니깐? 보통 사람들이 친위대를 볼 일은 체포당할 때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좀 맹금류 같으시고······ 얼굴에 그거······ 전투화장이신가요? 히데처럼?”
맹금류라. 이텔도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내 샛노란 눈동자는 매의 눈처럼 상대를 꿰뚫어본다고.
“아니야. 원래 얼굴에 있는 거야. 멍 자국인지 뭔지는 모르겠는데, 어릴 때 갑자기 생겼어.”
내 오른쪽 얼굴엔 이상한 자국이 있다. 오른쪽 눈 밑에서 구불구불하게 흘러내리는 세 줄의 문양. 난 이 자국이 언제 생겼는지 기억할 수 없다.
문신만큼 진하지는 않아 화장하면 가릴 수 있다. 그러나 항상 하는 건 아니다. 헤르만 예거일 때는 맨얼굴 그대로, 친위대원 에리히 아벨일 때는 화장으로 문양을 가린다.
전투화장이라.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겠다. 내 눈동자는 보라색이 아니지만 이것 때문에 히데와 비슷한 부류로 여겨졌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머리카락도 새까맣다.
진갈색 정도야 흔했지만 석탄처럼 시커먼 머리색은 달랐다. 일반인 사이에서도 어쩌다가 유전자가 농간을 부려 이런 흑발이 생겨나기도 했지만 대체로 이런 식의 흑발은 !파라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어제 그렇게 수군거렸을 테고.
알비 소위가 말했다.
“그랬었다는 이야기에요. 지금은 전혀! 하여튼 그날 밤에 온갖 말이 다 나온 걸요.”
무슨 말이 나왔을지 별로 알고 싶지 않다.
“그래서 말인데-”
“하스, 보안을 질질 새며 다니는구나.”
알비 소위의 말을 뚝 잘라먹으며 끼어든 사람이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가장 먼저 보인 쪽은 진갈색 빛이 도는 흑발에 녹색의 눈동자가 인상적인 미인이었다.
미인. 그녀를 수식하는 데는 이것이면 충분했다. 최근 들어 본 사람 중 가장 아름다웠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병약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금발의 여자. 바로 이 자가 알비 소위의 말을 자른 사람이다. 이 무례한 아가씨는 맵시 있는 해군복을 입고 있었다. 치켜 올라간 눈에 날카롭게 쨍한 푸른빛의 눈동자. 한 성격하게 생겼다. 계급은 중위.
나는 금발의 여자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귀관은?”
“중위 클로리스 슈타인.”
“이쪽은 헤르만 예거다.”
그녀의 이름을 들은 나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한다.
“슈타인 가의 영애인가?”
“그렇습니다.”
클로리스 중위는 분명 내 계급장을 봤다. 알비 소위가 ‘보안’을 어겼다손 치더라도 대위와 대화중인데 그 사이에 끼어드는 건 굉장히 무례하다. 그럼에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던 건 그녀의 뒷배경 때문일 것이다.
친위대 출신인 나는 귀족 가문을 전부 외우고 있었다. 클로리스 중위가 말했다.
“화제의 중심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리고 클로리스 중위의 얼굴이 약간 오만하게 변했다. 귀족 가문을 외우고 있는 건 저쪽도 마찬가지일 터. 그 데이터베이스에 예거라는 성은 없다.
“나야말로, 슈타인 가의 아가씨를 만나게 되어 영광이야. 해군에서 복무했었나?”
세일러복을 입고 있는 클로리스 중위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질문이었다.
아마 클로리스 중위가 남자였다면 이 질문은 생략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눈앞에 있는 자는 백작 영애다. 보통의 경우라면 백작 영애가 군에 투신하는 경우가 흔치 않다. 이텔 황녀는 예외 중의 예외였다.
“아니요. 재미 삼아 해본 감응력 테스트가 꽤 높게 나와 지원한걸요. 루프트바페로 바로 편성되었어요. 굳이 해군을 선택한 건, 옷이 예쁘니까.”
도이체스 제국의 제복은 꽤 멋있는 축에 들었다. 가장 세련된 것이 친위대 정복이고 두 번째로 깔끔한 것이 해군복이다. 육군복도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객관적으로 괜찮았지만, 아무래도 이 둘만은 못했다.
육군 항공대를 거쳐 온 히데 프롬은 소위, 해군 항공대를 거쳐 온 알비 하스도 소위. 그러나 루프트바페에 바로 들어온 클로리스 슈타인은 중위다.
나처럼 이전에 군에 복무했던 인물도 아님에도 이런 이유는 그녀가 귀족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이텔 황녀가 중령을 빨리 단 것처럼.
어쩌면 클로리스 중위는 곧 내 계급을 추월할지도 모른다.
“그래, 귀관에겐 해군복이 더 어울릴 것 같군.”
이 말은 진심이었다. 클로리스 중위의 쨍한 푸른 눈과 파란색 세일러 칼라는 잘 어울렸다.
나의 말에 클로리스 중위는 깜짝 놀랐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은 것처럼. 클로리스 중위가 잠시 미소를 지었고, 그 오만한 표정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의견이 일치해서 기쁘군요, 대위님. 훈련 때 뵙죠. 저는 같은 비행대의 제1편대 소속이에요.”
클로리스 중위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더니 멀어져 갔다.
그녀를 맞이하는 무리의 구성원은 약 열 명. 편대장을 제외하면 제1비행대대의 인원은 열 명이다. 그 중 날 포함한 세 명은 여기서 밥을 먹고 있다. 즉, 다른 편대원뿐만 아니라 다른 대대의 인원도 섞여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중심에 클로리스 중위가 있었다.
나는 오믈렛의 마지막 조각을 포크로 찌르며 물었다.
“편대장을 제외한 다른 장교들의 계급은 어떻게 되지?”
“다른 대대는 잘 모르지만 우리 대대는 클로리스 중위님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소위입니다. 급하게 임관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맞아요. 헤르만 대위님 오기 전까진 우리 대대에서 클로리스 중위님이 가장 높았어요. 그래서 왕고 역할을 하셨죠.”
그러면서 알비 소위가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 기대에 부응해주지 못해서 아쉽다. 클로리스 중위가 사람을 휘어잡으며 왕고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중위라서가 아니라 백작 영애이기 때문일 것이다.
친위대 출신 대위라곤 하지만 평민인 내가 클로리스 중위의 세력을 빼앗아 올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 클로리스 중위가 이쪽으로 온 것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려고 온 것 같고.
밥을 다 먹은 우리는 아침 점호를 하러 갔다. 연병장에 제1비행대대가 전부 집합했다. 편대장 뒤에 한 줄로 나란히 서는 방식이었다. 나는 제3편대가 있을 위치쯤에 갔다가 칼레샤 소령에게 손목을 잡혔다.
의아해하며 바라보자 칼레샤 소령이 말했다.
“넌 도중에 전입해온 인원이다. 대대원들에게 소개가 있을 거다. 따라오도록.”
굳이 손목까지 잡을 필요는 없었는데. 나는 칼레샤 소령의 그을리고 거친 손등을 잠깐 바라본 뒤 그녀를 따라 걸었다.
우리는 단상 옆쪽에 섰다. 나는 제1비행대의 인원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우선 제1편대에 4명. 그 중에는 클로리스 중위와 그 인상적인 미인도 있었다. 제2편대는 3명, 내가 속한 제3편대는 총 4명, 제 4편대는 3명. 편대장들은 전부 소령이었다.
도합 13명의 여자가 호기심어린 눈길로 나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대대장이 왔다.
요한나 쿤츠 중령. 제1비행대대의 대대장. 그녀가 단상 위에 섰다.
“제군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우리 비행대에 새 인원이 들어왔지. 보다시피 남자이지만, 사령관님이 검증하신 인재다. 헤르만 예거 대위는 앞으로 제1비행대대에 들어가 모두와 함께 동고동락할 것이다.”
그렇게 나를 소개해주고, 또다시 시선이 확 쏠리고, 아침 점호가 끝났다.
알비 소위는 마법학을 들으러 떠났고, 그 외에도 대대원의 삼분의 일 정도가 마법학을 수강하러 갔다. 남은 사람은 체력단련이었다. 조교는 칼레샤 소령이었다. 편대장들이 돌아가면서 조교 자리를 맡는 모양이었다.
나는 히데와 나란히 달렸다. 어차피 낙오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여자와 남자의 체력 차는 꽤 크니까. 적어도 히데와 동등하게 달려야 좀 해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남들이 한 바퀴를 뛸 때 우리는 두 바퀴를 달려 달리기 행렬의 뒤꽁무니를 지나치게 되었다. 꼴지로 한참 처진 사람은 아까 클로리스 중위와 함께 있던 미인이었는데, 누가 봐도 상태가 엄청나게 좋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스쳐 지나가며 조금 불안해졌다. 그녀는 쓰러질 것처럼 위태위태했다. 그러나 얼굴만 아는 사이에 다른 편대원을 선뜻 챙기기에는 조금 그랬기 때문에 나는 그녀를 지나쳤다.
계속해서 히데와 나란히 달렸다. 점점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옆에서 달리던 히데 소위가 나직하게 말했다.
“대위님, 힘들면 군장을 좀 나눠 질 수 있습니다만.”
“마음은 고맙지만 됐어.”
!파라의 체력과 보통 인간의 체력을 비교하는 건 당연히 어리석은 짓이었지만, 나는 오기로 버텼다.
“딱히 염려해서라기보다는, 대위님 숨소리가 너무 시끄럽습니다.”
“너 어제부터 정말 너무하다니까.”
그러는 동안에도 그 미인은 점점 낙오되기 시작했다. 결국 칼레샤 소령이 그녀를 멈춰 세운 뒤 병원으로 보내버렸다.
체력단련을 마치고 2등으로 성과를 내는 데 성공했지만 벌써 크게 지쳐버렸다. 1등은 당연히 히데였다. 정말 오랜만에 이렇게 운동한 것 같다. 다음날은 백 퍼센트 근육통이다.
입맛이 없었지만 점심을 억지로 먹은 뒤 오후 훈련에 들어갔다. 이제 정식으로 모두가 용기사 훈련을 받는다. 나는 살짝 들떠 있었다. 히데 소위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그냥 침묵했다.
요한나 쿤츠 중령은 연병장에 사열한 제1비행대대에게 말했다.
“오늘은 화생 훈련이다.”
나는 표정관리에 실패했다. 화생 훈련? 그걸 왜 지금 한단 말인가? 사관생도 때 하고 다시는 인연이 없을 줄 알았다.
힐끗 곁눈질을 하니 다들 경악한 기색이다.
“우리의 신인이 놀란 모양이니 설명을 해주지.”
나를 정확히 바라보며 요한나 중령이 말했다. 나는 몸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분명히, 다른 이들도 경악했다. 그러나 요한나 중령은 굳이 나를 지목해서 말했다. 나는 그제야 요한나 중령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맑은 푸른색이었다.
“화생 훈련은 모든 군인에게 중요하다. 적이 비열하게 화학무기나 생물학 무기를 쓸 수도 있기 때문이지. 그러나 루프트바페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적이 가장 먼저 무력화하려고 시도할 곳이 루프트바페이므로. 그렇기에, 육군보다도, 해군보다도 더 화학전?생물학전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왜냐고? 제군들. 루프트바페는 넓다. 좆나게 넓어. 이 광활한 대지를 폭격했다간 3년은 족히 걸릴 거다. 하지만 화생무기는 간편하지. 몇 발 뿌리기만 해도 기지가 순식간에 무력화된다. 이 간단한 사실은 적들도 당연히 알고 있지.”
요한나 중령이 느릿하게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녀는 나를 지나쳐 알비 소위에게 향했다.
“무슨 불만이 있나?”
“소위 알비 하스, 그런 사실 없습니다!”
“표정이 그게 뭐야? 정신상태가 썩어빠졌군. 전원, 엎드려.”
그렇게 갑작스러운 얼차려가 시작되었다. 루프트바페에 오고 나서 처음 겪는 것이었다. 나중에 히데 소위가 루프트바페에서는 ‘동기부여’라고 에둘러 말한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동기부여가 끝나고 나자 모두가 땀범벅이 되었다. 나는 마음 한 구석이 정말 찜찜해졌다. 설마? 조금만 두고 보면 알 것이다.
화생 훈련은 크게 두 가지다. 적어도 내가 사관생도였을 때는 그랬다. 첫 번째로 방독면을 포함한 보호의 착용, 두 번째로 방독면 사용법을 실습하며 익히는 가스실습.
방독면을 제대로 착용한다면 별 문제가 안 되지만 문제는 가스를 터뜨려놓고 그 안에서 온갖 것을 다 시킨다는 것이다.
보통 절차는 밀폐된 공간 안에서 최루가스를 발생시킨 뒤 방독면을 벗고 몇 분간 참다가 다시 방독면을 착용하고 퇴실한다. 루프트바페는 어떤 식으로 할지 잘 모르겠지만 괴로울 거라고 미리 생각해 두면 편할 것이다.
연병장에 보호의가 하나씩 놓였다. 각각 상하의, 보호장화, 보호수갑, 방독면이었다. 편대장들과 요한나 중령이 착용하는 시범을 보여 주었다. 친위대에 있다 보니 가물가물해져 있었기 때문에 시범 자체는 문제될 게 없었다.
그런데 왜 대대장마저 번거롭게 시범을 보인단 말인가?
우리는 보호의를 앞에 두고 착용 지시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맨얼굴인 우리 앞에 방독면을 쓴 여군들이 나란히 서 있는 장면은 꽤나 기괴했다.
요한나 중령이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손에는 뭔가 쥐고 있었다. 우리 앞으로 다가선 요한나 중령은 손에 쥐고 있는 것을 허공에 던졌고,
그것은 최루탄이었다.
히데 소위의 대응은 빨랐다. 대대원들 중에서 가장 먼저 튀어나가 방독면을 집어 들었다. 순식간에 착용을 완료한 뒤 거의 몸을 던져 넣다시피 하면서 하의를 입고 지퍼를 잠근다.
나를 포함한 일반인들은 히데 소위가 하의를 입기 시작할 때쯤에야 비로소 보호의를 입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미처 숨을 참지 못하고 최루가스를 들이켜 숨넘어가도록 기침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방독면을 착용한 뒤 재빨리 하의를 입었다. 마음이 급해서 그런지 끈이 제대로 묶이지가 않았다. 상의는 그럭저럭 잘 묶였다. 나는 온몸이 더워지는 것을 느끼며 착용을 완료했다.
대대원의 삼분의 일 정도는 방독면을 착용하는 타이밍이 늦었다. 아마 그 안에서 온갖 분비물이란 분비물들은 다 흘리고 있을 것이었다.
“정렬! 이것들이 아주 빠져가지고.”
방독면 너머로 답답한 요한나 중령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요한나 중령은 한 명 한 명의 상태를 지적한 뒤 동기부여를 시켰다. 방독면을 쓴 채로! 나도 하의의 끈이 덜 묶여서 동기부여를 받았다. 요한나 중령이 한 바퀴 돌고 나자 서 있는 사람은 클로리스 중위와 히데 소위밖에 없었다.
요한나 중령은 클로리스 중위를 대충 보고 지나간 뒤 히데 소위의 주변을 맴돌았다. 사소한 트집 하나만 걸리면 잡아내겠다는 듯이.
그러나 히데 소위는 완벽하게 해낸 모양이었고, 나는 방독면과 보호의 안에서 울려 퍼지는 내 숨소리 사이에서 요한나 중령이 쯧 하고 혀를 차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최루 가스가 다 사라지고 우리는 방독면을 벗었다. 최루가스를 마신 바람에 눈물 콧물범벅이 된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방금 받은 동기부여 때문에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다.
요한나 중령이 말했다.
“방금은 예비연습이었다. 제군들의 상태는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절망적이군. 추가 훈련에 들어간다.”
그 말에 최루가스를 마셨던 인원이 사색이 되었다.
진짜 정식 화생훈련이 시작되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괴로운 시간이었는데, 사관생도 때와는 다르게 삼십 분이나 했기 때문이었다.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였다. 해산하는 사람들 얼굴에는 더 이상 최루가스 입자가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엉엉 울며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건 아니야, 싫어, 돌아갈래. 울지 않는 다른 사람들도 참담한 표정인 건 마찬가지였다.
“알비.”
나는 소곤거렸다. 알비 소위가 돌아보자 나는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말했다.
“평소에도 대대장님이 이래?”
화생훈련 때는 대대장이 직접 안에 들어가 교관 역할을 했는데, 정말 사소한 것까지 꼬투리를 잡아서 제3편대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알비 소위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내가 들어와서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훨씬 이전부터 제3편대원들을 싫어했던 것이다.
하지만 왜?
사실 짐작 가는 건 있었다. 이 비행대대의 유일한 이종족 둘이 전부 한 편대에 있었으니까.
그렇게 제1비행대대가 독신 장교 숙소로 들어가자 1층의 로비에 있던 이들이 기겁하며 도망쳤다. 알비 소위가 투덜거렸다.
“으아아······, 병균 취급 받았어요.”
“어쩔 수 없지. 털어낸다고 털어냈는데 입자가 아직 남아있을 거야. 더 민폐 끼치기 전에 빨리 씻어야겠지.”
“대위님은 어떻게 그렇게 잘 하세요?”
“잘 하긴 뭘. 나도 기합 엄청 받았는걸.”
“그치만 처음 들어갔을 때 엄청 침착하셨잖아요!”
“그거야 처음 겪는 게 아니니까······. 사관학교에서도 했는걸. 이렇게 길게 하지는 않았지만.”
“우와, 사관학교······. 아참, 친위대에서 오셨지. 그럼 당연히 사관학교 나오신 건데, 계속 깜박하네요.”
“너흰 안 나왔지?”
“네네. 감응력 테스트 받고, 육군 항공대에 소위로 바로 임관됐어요. 거기서 기초훈련 받는 도중에 루프트바페로 왔어요.”
내가 짐작한 그대로였다. 알비 소위가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
“음······. 히데는 안 그런 경우지만, 대부분은 저처럼 이럴 거예요.”
“그렇구나. 그럼 들어가 봐.”
“네, 대위님도요! 히데, 너도 잘 들어가.”
알비 소위는 그렇게 인사를 하고는 건너편 동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우리도 우리 숙소로 향했다. 히데 소위는 3층으로 올라가는 내내 말이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카트리나가 야옹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가 질색하며 나와 가장 먼 쪽으로 뛰어갔다. 히데 소위가 말했다.
“대위님이 먼저 씻으십시오.”
내가 더 상급자이니 먼저 씻으라고 하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야. 네가 먼저 씻어.”
그러자 그녀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히데 소위에게 말했다.
“!파라는 정말 강하고 민첩하지만······, 동시에 예민한 감각도 가지고 있지. 그래서 !파라는 아픔을 참으며 자라난다고 들었어. 하지만 그게 안 아픈 건 아니니까. 우리보다 몇 배는 더 아프잖아.”
나도 아직 조금 따끔거린다.
“힘들었을 테니까 너 먼저 씻어.”
히데 소위의 보라색 눈동자가 깜박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히데 소위는 나를 지나쳐 가 화장실로 향했다.
“······고맙습니다.”
속삭이듯이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히데도 나도 빨리 씻었기 때문에 식당에는 생각보다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히데 소위는 머리를 반만 말린 채였기 때문에 머리를 길게 풀어헤쳐 늘어뜨리고 있었다.
식당에는 알비 소위가 먼저 와 있었다. 우리는 그쪽으로 향했다. 알비 소위의 옆에는 회색 머리칼의 여자가 있었다. 아까 화생훈련에서 군가를 부르게 되었던 사람이었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대위님도 빨리 나오셨네요!”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럽게 시선을 옆쪽으로 돌린다. 내 시선을 받은 회색 머리의 여자가 말했다.
“소위 라인스 윈터입니다.”
“저랑 방도 같이 써요!”
알비 소위가 쾌활하게 말했다.
순간, 나는 어떤 두근거림을 느꼈다. 두근거림이라기에는 미묘했지만, 라인스 소위를 향한 무언가가 있었다. 이 세상에 없는 특별한 존재를 알아본 듯한 느낌.
라인스 소위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녀 역시도 무언가를 느낀 듯했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이나 서로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느낄 때쯤에야 비로소 나는 라인스 소위에게 말했다.
“아까는 놀랐어. 노래를 무척 잘하던데?”
“감사합니다. 제 유일한 자랑거리 중 하나죠.”
“으엑, 라인스. 그게 왜 ‘유일한’ 거야. 네가 얼마나 잘하는 게 많은데! 대위님, 라인스는 되게 똑똑해요. 마법학 배우는데 벌써 교수님보다 잘한다니까요?”
그렇다면 정말로 머리가 좋은 것이다. 나도 마법학을 배웠기에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았다. 마법학은 얼핏 보면 무작정 암기해야 하는 과목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외가 많기는 했지만 마법학은 중심 원리를 따르고 있었다.
그 법칙을 이해한다면 다른 응용마법도 쉽게 외울 수 있고, 더 나아가 새로운 마법을 고안해낼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마법학은 수학에 비유되고는 했다. 뛰어난 수학자들이 취미로 마법학을 연구하기도 했다.
나의 경우는 기본적인 마법과 중급 단계의 응용마법을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저번 쿠데타 사건 때의 마법들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정도만 해도 4년밖에 마법학을 공부한 사람치고는 괜찮은 성과였다. 그 이상은 무리다.
지금은 아직 1년도 안 되었으니 간단한 과정만 배우고 있겠지만 그 중심원리를 깨우친다면 천재가 교수를 앞지를 수 있다. 라인스도 그런 부류인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정말 대단한데. 연구원을 할 생각은 없었던 거야?”
그러자 라인스가 살짝 웃었다.
“하늘을 날고 싶었습니다.”
그 말에는 숨길 수 없는 열의가 있었다.
“하지만 열정만으로는 군인으로 거듭나기 어렵더군요. 아마 제가 제1비행대대에서 가장 뒤떨어진 것 같아요. 여러모로 민폐를 많이 끼쳤어요.”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냥 아직 덜 익숙해진 거야.”
“항상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알비.”
나는 밥을 먹으면서 제1비행대대 구성원들의 이름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편대장부터 외우고, 그 다음에 각 편대원들을 외우고. 사람 이름 외우는 건 자신 있었기에 금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친 히데 소위가 숙소로 돌아가려는 것을 보고 물었다.
“벌써 들어가게?”
“······딱히 밖에 볼일은 없습니다.”
얼핏 둘러본 것에 불과했지만 여기엔 다양한 편의시설이 있었다. 육군이었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사람들끼리 어울려 놀기 좋은 곳이었다. 히데 소위는 그런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도깨비’와는 어울리려 하지 않기 때문에?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이 근처를 잘 몰라. 안내를 부탁하고 싶어서.”
히데 소위는 잠시 주저하더니 승낙했다.
물론 비행단을 전부 둘러볼 수는 없었다. 비행단은 그 어떤 육군 기지보다도, 친위대 본부보다도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용이 머무를 면적과 도약할 장소를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속한 제1전투비행단의 한가운데는 텅 비어 있었다. 그곳이 용이 도약하는 장소였다. 그 도약광장을 원형으로 둘러싼 형태로 축사가 있다. 바로 용이 지내는 곳이다. 그리고 인간들이 그 도넛 모양의 축사 바깥쪽을 원형으로 빙 둘러서 거주하고 훈련을 받는다.
건너편 부대까지 건너가려면 도약광장을 가로질러 가면 된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용이 이륙하는 데에 그렇게 넓은 공간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축사 바로 앞까지 다가가지만 않는다면 용의 진로를 방해할 일도 없다.
대신 광장을 통과할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 그 외의 시간에는 광장에서 용을 산책시키기 때문이었다. 그게 바로 광장이 본래 용도보다 더 넓은 이유였다. 용을 좁은 우리 속에만 가둬놓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제1비행대대 주위에는 수영장과 도서관이 있었다. 나는 히데 소위의 책장을 가득 메운 책을 생각했다. 히데 소위가 좋아할 만한 장소가 가까이에 있는 셈이다.
원을 시계방향으로 돌면 제2비행대대가 나오는데, 그곳엔 극장과 기타 유흥거리를 제공하는 가게들이 있었다. 반시계방향으로 돌 경우 제4비행대대가 나오며, 그쪽은 온갖 식당이 들어서 있다. 제1비행대대와 가장 먼 대대는 원의 반대편 끝에 있는 제3비행대대였다.
“거기엔 어떤 시설이 있어?”
“옷가게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직접 가보지 않은 거야?”
“사실, 돌아다니지를 않아서······.”
“그럼 한 번 가보지 않을래?”
그러자 히데 소위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네엣? 하지만······.”
“마침 지금은 광장통과가능시간이잖아. 가면서 용도 슬쩍 볼 수 있을지 모른다고.”
“용······.”
그러자 히데가 갈등했다. 히데 소위는 분명 용을 본 나를 부러워했다. 이 기회에 용도 보면 좋을 것이다. 순간 가기 싫은 사람을 너무 억지로 끌고 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히데가 거절한다면 그 이상 권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히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 용, 보고 싶습니다. 같이 가요.”
그래서 우리는 축사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입구에 다다르자 보초를 서고 있던 용유지관리전대의 여군이 황급히 나를 막아 세웠다.
“남성은 광장 출입 금지입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이 분은 용기사다.”
히데 소위가 말했다.
“용과 감응할 수 있는 분이다. 들어갈 수 있어.”
그러자 보초가 곤란한 표정이 되더니, 결국 상부에 무전을 넣었다. 몇 분 기다리자 우리는 통과할 수 있었다.
“여기서 가로막힐 줄은 몰랐네.”
“오신 지 얼마 안 되셨으니까요. 곧 제1전투비행단 전체가 대위님의 존재를 알게 될 겁니다.”
“하하, 그건 별로 달갑지 않은데 말이지······.”
그렇게 떠들며 축사 근처로 갔지만 놀랍게도 냄새가 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용은 먹이사슬 최상위에 있다. 그런 생물이 냄새를 풍기며 돌아다닌다면 먹이들은 일찌감치 도망칠 것이다.
그러나 히데 소위는 코를 몇 번 킁킁거리더니 말했다.
“이것이 용의 냄새로군요.”
나도 맡아보려 했지만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나는 깨끗이 단념했다. 히데 소위는 !파라이니 겨우 맡아낼 수 있었던 거다.
광장 전체는 도로에 쓰는 바닥재로 덮여 있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도로에 쓰는 건 아니었다. 그것보다 훨씬 단단하고, 대신 시끄러운 재질이었다. 용이야 별 소음을 내지 않을 테지만, 자동차가 지나가면 꽤나 시끄러울 것이다.
제3비행대대를 향해 하염없이 걷고 있을 무렵, 갑자기 큰 소리가 났다. 거대한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우리 둘 다 뒤를 돌아보았다.
회색의 용이었다. 그 옆에는 병사들이 용의 고삐를 잡고 유도하고 있었다. 남자가 근처에 가면 공격받을 테니 전원 여군이었다. 그 옆에 서 있는 사람은 낯익은 사람이었다.
“제2편대장님 맞지?”
“예. 비놀라 슈베르트 소령님입니다.”
비놀라 소령은 익숙한 동작으로 회색용의 등 뒤에 탔다. 안장에 몸을 단단히 고정하고, 앞에 있는 무언가를 잡았다.
용이 한 차례 머리를 흔들더니 박쥐와 같은 갈퀴날개를 쫙 펼쳤다. 날개가 한 번, 두 번 오므려지더니 점점 횟수가 늘어났고, 용의 두 다리가 바닥과 떨어졌다.
이륙한 용은 광장 주변을 선회하면서 점점 고도를 높였고, 마침내 작은 점으로 보일 때까지 높이 날아간 용은 저 멀리로 날아갔다.
“저것이 용······.”
히데 소위가 중얼거렸다.
“가까이서 보니 저 정도 크기였군요. 항상 하늘에서만 본 탓에 잘 몰랐습니다.”
히데 소위의 얼굴은 묘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렇게나 좋아할 거면서 왜 이쪽으로 얼씬도 안 한 건지 잘 모르겠다.
나는 용을 보면서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그냥 두근거리는 것과는 달랐다. 굳이 비유하자면 아까 라인스 소위를 봤을 때 약하게 느꼈던 그 감정과 비슷했다.
‘나도 참, 어린애처럼 들떠가지고.’
마음 한 구석에선 용을 동경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비놀라 소령뿐만 아니라 다른 대대에서도 정찰비행을 위해 용이 드문드문 나와 이륙했고, 히데 소위는 그럴 때마다 그쪽으로 다가가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그래서 마침내 제3비행대대가 있는 반대쪽 끝에 도착했을 때에는 꽤나 어둑어둑해진 뒤였다.
제3비행대대 쪽으로 가며 히데 소위가 말했다.
“언젠간 우리도 저렇게 타고 다닐 수 있겠죠?”
“그럴 거야. 반드시.”
제3비행대대 주변에는 히데 말대로 옷가게가 있었다. 옷가게라기보다는 화장품과 여러 악세사리, 잡화도 함께 파는 소형 백화점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친위대 시절 프로이센에서 산 옷이 많았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다. 그냥 지나치려는 찰나, 나는 히데 소위가 옷가게를 아련하게 바라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들어가서 구경할까?”
“아, 아뇨. 괜찮습니다.”
“잠깐만 해보자고. 혹시나 예쁜 옷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러자 히데 소위는 주저하며 따라왔다.
옷가게 안은 사람이 많았다. 용기사는 전부 여자이고 용을 관리하는 용유지관리전대가 여자인 루프트바페의 특성상 군대인데도 마치 일반 사회처럼 여자가 많았다. 아니, 거의 여자밖에 없었다. 나와 히데가 들어가자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홱 쏠렸다.
“히데. 뭐가 필요해?”
“······최근 셔츠가 하나 필요하긴 했습니다.”
그 말에 나는 여성복 쪽으로 가서 히데와 같이 옷을 보았다. 그러는 동안 나는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도깨비가······.”
“징그러워······.”
“옆의 남자가 소문의 그 사람?”
“······얼굴에······.”
히데 소위가 왜 잘 돌아다니지 않았는지 알 것 같다. 나에게도 들린다면 초인적인 감각을 지닌 !파라에게는 당연히 전부 들리겠지. 혼자서 저 수군거림을 감당하기에는 벅차다.
나는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바라보았다. 한 명 한 명씩. 수군거림이 잦아들자 나는 웃으며 그쪽을 향해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요? 와서 이야기해 봐요.”
그들의 눈동자를 하나하나 바라본다.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 그러나 이것은 헤르만의 시선이 아닌, 에리히의 시선이다. 그러자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시선을 피하더니 다 같이 자리를 떴다. 그들의 뒷모습을 본 뒤 나는 히데에게 돌아서서 말했다.
“그 둘 중에 고민하고 있는 거야?”
히데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뜸을 들인 뒤 히데 소위가 말했다.
“예.”
“한 번 옷을 대 봐.”
히데 소위가 두 개의 옷을 번갈아 가며 대어 보았다. 나는 왼쪽 셔츠가 더 낫겠다고 말해 주었다. 이래보여도 옷 고르는 솜씨는 꽤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히데도 동의하는지 결국 그 옷을 골랐다.
내가 계산하자 히데 소위가 당황하며 말했다.
“대위님. 제 옷이니 제가 계산해야 합니다.”
“응? 괜찮아. 안내해달라는 부탁을 들어줬잖아.”
“······상관이 부하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업무적인 내용이라면 당연한 건데, 지금은 사적인 시간이잖아? 그 시간을 나를 위해 쓴 거고. 입 닦으면 오히려 그쪽이 얌체인거지.”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히데 소위는 결국 옷을 받아들었다. 옷가게를 나오고 나서 주위를 더 둘러보았다.
그 외에 눈에 띄는 건 사격장이었다.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었으나 시간이 너무 늦은 관계로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도약광장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원을 빙 둘러 제1비행대대로 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둑한 밤길을 걸으며 투덜거렸다.
“확실히 넓구나. 자전거를 사야겠어.”
이곳에서는 자동차보다 자전거 쪽이 더 편할 것이다. 아까 보았던 백화점에서 자전거를 팔까? 분명 수요가 있을 텐데.
히데 소위는 말이 없었다. 나도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느새 둘 사이엔 침묵이 자리했다.
밤의 비행단은 꽤 서늘하고 으슥한 편이었지만 나는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파라와 함께 있는데 무슨 걱정이겠는가.
제1비행대대에 도착할 때쯤 히데 소위가 불쑥 말했다.
“재미있었습니다.”
내가 그쪽을 바라보자 히데 소위가 말했다.
“용도, 옷도······, 그리고······.”
히데 소위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때 화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히데 소위는 그 말만 남기고 갑자기 뛰어가 버렸다. 나는 사라져가는 히데 소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소등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렇게 급한 건 아니었기에 나는 천천히 걸어서 독신 장교 숙소에 도착했다. 나는 환히 불이 켜진 복도를 뚜벅뚜벅 걸어갔다.
갑자기, 뒤에서 누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아까 보았던 사람이다. 비놀라 슈베르트 소령.
비놀라 소령은 너무 울어서 눈이 빨개져 있었다. 그녀는 나를 지나칠 때까지도 계속 울었다. 나는 놀라서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물어볼 수도 없었기에 나는 별 수 없이 숙소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잠들면서 별 일 아닐 거라며 속으로 되뇌었지만, 내 직감이 경고해주었다. 무슨 일이 있다고.
다음날, 그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아침점호는 취소다. 전원 숙소에 대기. 그리고-”
제24전투비행전대 전대장 엘리자베트 아우스트 대령이 직접 와서 말했다. 옆에는 요한나 쿤츠 중령이 뻣뻣하게 서 있었다. 엘리자베트 대령이 말했다.
“제1비행대대 제3편대는 따로 나와라.”
정확히, 우리를 지목해서.
2장. 공조수사
칼레샤 소령까지 포함해 제3편대원들은 본부로 끌려갔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게 어제 보았던 비놀라 소령과 관련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것이 엄청나게 심각하다는 것도. 전대장이다. 전대장인 엘리자베트 대령이 직접 나설 일인 것이다.
우리는 본부로 향했다. 헌병들이 우리를 에워싼 채로 걸어갔다. 흡사 연행되어가는 범죄자와 마찬가지였다. 본부의 전대장실에 들어가자 문이 쾅 하고 닫혔다.
전대장은 자리에 앉고, 요한나 중령은 책상 앞에 서서 뻣뻣하게 선 우리를 노려보았다. 긴장이 최고조로 달한 때에, 요한나 중령이 입을 열었다.
“4~5일 전, 저번 주 목요일과 금요일에 무엇을 하고 있었나?”
요한나 중령의 시선이 칼레샤 소령에게 닿았다. 칼레샤 소령이 말했다.
“소령 칼레샤 알트하우스! 제3편대 단체휴가로 쉬고 있었습니다! 목요일에는 제2비행대대 근처의 시설을 이용했으며 금요일에는 바이어 시내로 나갔습니다.”
“그동안 네 행적을 증명해 줄 사람은?”
“목요일은 극장 티켓과 카페 영수증이 있습니다. 금요일은 없습니다.”
요한나 중령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말했다.
“대위 헤르만 예거! 그때는 친위대원으로서 프로이센에서 복무 중이었습니다.”
“바이어에 온 때는 언제였지?”
“저번 주 일요일이었습니다.”
요한나 중령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좋아. 넌 더 물어볼 필요도 없겠군. 다음.”
차례로 알비 소위와 히데 소위에게도 질문이 돌아갔다. 다들 휴가를 각자의 방식으로 어떻게 보냈는지 대답했다. 알비 소위는 칼레샤 소령처럼 바이어로 나갔다 왔고, 히데 소위는 도서관에서 잔뜩 빌려온 책을 하루 종일 읽었다고 했다.
요한나 중령이 말했다.
“자, 종합해보면, 여기 우리의 신인을 제외한 나머지는 이틀간의 알리바이를 완벽히 제공하지 못한다는 이야기군?”
알리바이라는 이야기가 나온 시점에서 우리가 용의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의?
그러나 그 궁금증은 곧 풀렸다.
“용이 죽었다.”
그러자 다들 숨을 헉 하고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비놀라의 파트너 프리데리케가 어젯밤 쇠약사했다. 은퇴를 앞둔 늙은 용이었지만 타살임이 명백하지. 프리데리케에게는 마력이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제야 왜 비놀라 소령이 어제 울면서 들어왔는지 알 수 있었다.
파트너 용이 죽었다. 그것도 타살.
“마력은 용을 이루는 근간. 고갈되면 버티지 못한다. 물론 용도 생물이기에 자연회복할 수 있지만, 용이 감당하지 못할 속도로 마력이 빠져나갔다면 용의 신체가 붕괴하기까지 약 4~5일. 용과 가장 많이 접촉하는 사람들은 용유지관리전대. 하지만 그들의 감응력은 보통보다 살짝 높은 정도다. 그들은 용의 마력을 빼낼 수가 없다.”
요한나 중령이 우리를 노려보았다.
“그러니, 이런 짓을 할 사람은 용기사밖에 없다. 이 근방에서 최고로 높은 감응력을 가진 인간들이니까. 내 대대와 제4비행대대는 그때 장거리 행군 중이었기 때문에 제외. 제3비행대대는 그 이틀간 기지방호훈련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외. 그 시간동안 행적을 알 수 없는 사람은 그때 휴가를 나간 너희들밖에 없다.
자, 다시 한 번 묻지. 정말로, 자기 행적을 증명할 만한 수단이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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