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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작농의 아들이 더 행복함 1-1권

2019.10.30 조회 4,435 추천 38


 # 1. 그랜드 마스터의 죽음
 
 제국력 322년. 제국의 영광과 번영이 대륙의 끝까지 이르렀을 때, 그들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마왕 벨리알과 그 휘하 거대 군단의 어마어마한 파도.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침공이었다.
 그 끝을 알 수 없던 그들의 군세에 대륙의 국가들은 순식간에 영토의 절반을 빼앗겼다.
 어떤 이들은 도망쳤고, 어떤 이들은 맞서 싸웠으나, 모두가 합심하지 않는 이상 이길 수 없는 전투였다.
 아니 모두가 힘을 합친다 해도 승리를 보장받을 수는 없는 현 상황이 그들을 더욱 절망케 했다.
 결국 살아남은 이들과 아직 침범당하지 않은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초강대국 ‘글라시안 제국’을 중심으로 한 비상 대책 회의가 시작되었다.
 제국을 포함한 일곱 개의 국가 중 이미 멸망해 버린 세 왕국은 제외되어, 고작 네 개 국가 간의 초라한 회의였다.
 회의라고 해 봤자 그들에게 남겨진 방법은 모든 병력을 총동원하여 맞서는 것 외에는 특별한 방법이 없었다.
 결국 각 국가를 대표하는 다섯 명의 용사들은 대륙 최고의 전사. 글라시안 제국의 영웅 ‘에른스트 노이벨레 공작’을 필두로 연합군을 조직했다.
 제국이 본격적으로 이 전쟁에 참전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마왕의 군대에 맞섰다.
 ‘글라시안 제국 기사단장’.
 ‘유일무이의 그랜드 마스터’.
 ‘대륙 제일 검’.
 ‘드래곤 슬레이어’.
 모두 에른스트 노이벨레 공작 한 사람을 위한 호칭이었다.
 마족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던 인간들은 제국과 에른스트 공작의 전선 합류를 기점으로 승리를 거머쥐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승전의 소식이 그의 검으로부터 나왔다는 이야기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에른스트 노이벨레 공작은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마족들보다 더 악귀 같은 형상으로 그들을 도륙했다.
 결국 연합군은 공작의 활약 아래 마왕군을 대륙의 끝으로 몰아넣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마침내 길고 길었던 전쟁의 마지막 순간이 왔다.
 대륙의 최남단에 이미 멸망해 버린 ‘그레이스톤 왕국’이 다스리던 지역.
 그곳에서도 가장 끝자락. ‘대륙의 끝’이라 불리던 그곳에, 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마력에 둘러싸인 마왕 벨리알이 특유의 마기를 내뿜으며 서 있었다.
 이미 그곳은 마족과 인간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있었으며, 그들로부터 흘러내린 피는 이미 썩어 버린 이들의 형체를 알 수 없는 부패물들과 뒤섞여 검붉은 빛의 호수를 만들었다.
 전투의 무대를 제공한 그레이스톤 왕국은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마왕을 추종하던 마왕군들이 모두 전멸하였음에도 그의 모습은 아직 여유가 넘쳐 보였으며, 단지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바라보는 이들의 생명을 갉아먹을 정도의 마기를 뿜어내고 있다.
 마왕에게 맞서고 있는 다섯 명의 용사. 그들의 갑옷과 옷가지는 이미 대부분 파괴되었으며, 살갗은 벗겨져 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였다.
 그 다섯 명 중에서도 가장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던 자.
 온몸이 피로 뒤덮여 그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는 남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마왕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와 맞서고 있는 자.
 그가 바로 이번 전쟁의 일등 공신, ‘에른스트 노이벨레 공작’이었다.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피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도 가늘게 뜬 그의 눈빛은 아직 마왕을 향하고 있다.
 “허··· 인간 따위가, 나에게 이 정도 타격을 입힐 줄이야··· 아쉽구나. 용사여, 저딴 버러지들이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너와는 조금 더 재미있게 놀아 볼 수 있었을 텐데. 저따위 버러지들을 보호한답시고 네 녀석의 귀중한 생명을 갉아먹다니··· 쯧쯧.”
 남자는 마왕과의 전투 중에도, 동료들을 보호하는 데 애썼다.
 홀로 마왕과 맞섰다면, 마음 놓고 본인의 실력을 내뿜을 수 있었으리라.
 그럼에도 공작은 전혀 후회하지 않는 듯했다.
 오만으로 가득 찬 마왕의 이례적인 찬사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소롭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흥··· 그게 마족과 인간과의 차이점이지. 내가 죽을 위기에 처하더라도 동료를 최우선하는 것.”
 마왕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클클··· 인간이 동료를 최우선한다? 가장 이기적이며, 더러운 종족. 그게 인간이다. 차라리 모조리 새까맣기만 한 마족이 훨씬 더 순수할 정도니까.”
 마왕의 앞에서 여유를 부리던 공작이었지만, 사실 그에겐 싸울 힘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다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그는 결국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자기희생 주문’.
 자신의 육체를 주문의 매개로 삼아 상대를 공격하는 것,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지만, 쉽게 말해 자폭 주문이다.
 시전자의 목숨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 그랜드 마스터인 그의 육체와 그의 육체에 깃든 마나의 양이라면, 상대가 아무리 마왕 벨리알이라 할지라도 결코 죽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에른스트 공작은 함께 싸워 준 동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려 했다.
 함께 해 줘서 고마웠다고. 나를 믿고 따라와 줘서 고마웠다고.
 그가 웃음 띤 얼굴로 동료들을 향해 돌아서려던 그때, 뒤쪽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토른 왕국의 성녀 ‘순백의 일리나’였다.
 “에른스트 님, 마왕의 말이 사실인가요? 저희가 없었다면 마왕을 쓰러뜨릴 수도 있었다는 것이?”
 공작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한 것인가. 공작은 옅은 미소로 괜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나 그녀의 입에서 다시금 내뱉어진 말은 공작의 예상을 훨씬 벗어난 것이었다.
 “이게 다 에른스트 당신 때문이군요. 혼자 싸울 수 있었다면 그냥 혼자 싸울 것이지. 왜 우리까지 굳이 끼워 넣어서는···.”
 에른스트 공작은 본인의 귀를 의심했다.
 공에 눈이 멀어서 중간에 갑자기 끼어든 것은 너희들이잖아.
 게다가 지금 그게 순백의 성녀라는 작자가 할 소리야?
 공국 하멜른의 대전사 ‘마운틴 울라프’도 한마디 거들었다.
 “대륙 최고라고 그러더니 별것 없구만, 고작 우리 하나 지켜 내지 못하고, 이봐 용사 양반, 당신이 다 책임지라고.”
 이것들이 지금 뭐라는 거야. 세계 최고의 탱커는 자신이라며, 방어는 모두 자신에게 맡기라고 깝죽대던 것은 네놈이잖아. 겨우 마왕의 공격 한 번에 종잇장처럼 나가떨어져 버리고서는.
 마왕 벨리알이 흥미로운 얼굴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
 왠지 흐뭇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는 마치 이렇게 써 있는 듯하다.
 ‘역시 인간들은 재밌어.’
 이야기를 듣다 못한 글라시안 제국의 마법병단장 ‘푸른 불꽃의 엘렌’ 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유일하게 에른스트 공작과 같이 글라시안 제국을 대표해 전장에 투입된 용사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고 현명하였으며 또 상냥한 여자였다.
 그녀는 분노에 찬 표정으로 일리나와 울라프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다들 무슨 소리들을 하시는 겁니까! 여기까지 올 수 있던 것은 모두 다 에른스트 공작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와서 그를 탓하다니요!”
 역시, 믿을 사람은 동향 출신뿐인가. 하긴 이 마당에 굳이 저들을 탓할 필요는 없지.
 “공작님, 함께 싸울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저 자식들의 말은 너무 담아 두지 마세요.”
 약간 감동받은 얼굴의 공작은 그녀를 바라보며 상냥하게 대답했다.
 “엘렌, 고마워. 나도 함께 싸울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
 그녀가 갑자기 두 손으로 에른스트 공작의 손을 꽉 잡았다.
 그녀 얼굴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하나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것도 역시 공작님뿐이지요.”
 “뭐?”
 그리고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의 크기로 살며시 속삭였다.
 “공작님에겐 자기희생 주문이 남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갑작스럽게 돌변한 그녀의 태도에 에른스트 공작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녀는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뭐야. 이 여자 무슨 힘이···.
 애처롭다기보다는 뻔뻔한 얼굴의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공작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것 아시잖아요. 마왕이 쓰러진 세상에 당신 같은 규격 외 강자는 더 이상 필요치 않을지도 몰라요. 부탁입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희생해 주세요.”
 그녀의 궤변에 에른스트 공작이 발끈했다.
 내 능력이 필요 없어지면 그냥 농사라도 지으며 얌전히 살면 되잖아. 난 사실 그렇게 사는 것이 꿈이라고.
 공작의 머릿속이 매우 혼란스러워졌다.
 이 미친 것들은 가만히나 있었으면 내가 알아서 펑 하고 희생했을 텐데 자신들의 이기적인 욕망을 드러내 상황을 오히려 망치고 있다.
 흥미롭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마왕과 눈이 마주쳤다.
 방금 전까지 그에게 인간들의 동료애를 지껄여 댔으니 갑자기 마왕을 볼 낯이 없어졌다.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공작 본인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도 감정이 있는 사람이었기에 분노로 인한 망설임이 생겨 버렸다.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엘렌 네가 그렇게 구차하게 살아 돌아간다면 폐하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할 수나 있겠어?”
 엘렌이 피식 웃어 보였다.
 “당신을 가장 부담스러워하는 것은 바로 황제 본인이라는 것을 잘 아실 텐데요? 그는 당신이 가진 인기를 매우 시기하고 있어요. 지금은 당신의 뛰어난 능력과 인기에 편승하는 것으로 당신을 이용하고 있지만 전쟁이 끝난 후의 당신은 이용 가치가 없을 거예요. 영웅에서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보다 차라리 지금 희생해서 모두의 기억 속에 영원한 영웅으로 남는 것이 당신에게도 가장 현명한 방법일 테죠.”
 젠장. 평생을 제국의 검으로 살아온 결과가 겨우 이것이란 말인가.
 에른스트 공작은 그들의 이기심에 절망했지만, 엘렌의 말에 거짓은 없다는 것을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사실에 더 화가 났다.
 ‘젠장, 차라리 혼자 살아날 길이라도 있었다면.’
 어차피 자신이 아니면 마왕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공작 혼자 희생하거나, 아니면 공작을 포함한 전 인류가 마왕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하나 황제에 대한 평생의 충정과 몇 번씩이나 목숨을 구해 준 동료의 희생이 이런 식으로 취급받을 것이라면, 나 역시 그들을 위해 혼자 목숨까지 바칠 이유가 없다.
 ‘그냥 다 같이 죽어 버릴까.’
 하지만 눈앞의 이 배은망덕한 것들은 일단 제외하더라도 내가 희생한다면 살아남아 집으로 돌아갈 이들이 있다.
 바로 기사단의 동료들, 그들은 살리고 싶다.
 가족이 없는 나에게는 그들은 가족 같은 이들이었으니까.
 ‘씨발··· 개 같은 인생이었다.’
 에른스트 공작은 결심한 듯 갑자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를 지켜보던 엘렌의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공작은 주문을 외움과 동시에 유일하게 자신을 비난하거나 선택을 강요하지 않았던 한 사람, 푸른 숲의 엘프들의 대표, ‘은빛 화살의 모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공작을 외면했다.
 ‘그래, 방관자도 똑같은 쓰레기지. 이왕 죽기로 결심한 마당에 대체 무얼 기대한 거야.’
 “잘 먹고 잘살아라. 개 같은 새끼들아.”
 남은 이들에게 몇 마디 저주를 퍼부은 그였다.
 ‘자기희생 주문.’
 비로소 자기희생 주문이 발동되었다.
 공작의 내부에서 어마어마한 신성력의 폭풍이 불기 시작했다.
 여유롭게 인간들의 추악한 분쟁을 관람하던 마왕의 표정에 당혹감이 몰려왔다.
 “이런, 미친놈. 저따위 것들을 위해 자기희생 주문이라니!”
 마왕의 입장에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농락하던 배신자들을 위해 본인의 목숨을 버린다?
 절대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일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마왕은 주문의 매개가 되어 자신에게 달려드는 에른스트 공작의 몸뚱이와 함께 거대한 폭발 속으로 휘말렸다.
 “이런 제기랄!!!”
 공작의 몸이 마법의 재료가 되어 분해되고 있던 그 순간, 그는 생각했다.
 온전히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기에 가능했던 여유로운 순간이었다.
 ‘씨발··· 이번 삶은 너무 지쳤어. 신이 있다면 들어라. 이 개새끼야. 다음 생이 있다면 이번처럼 고단함의 연속이 아니라··· 제발 편안한 삶을 내놔···.’
 공작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몇 초 후 그의 몸이 폭발 속에서 완전히 분해되었다.
 의식이 완전히 끊겼다고 생각했던 순간, 어디선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나 불렀냐? 근데 뭐? 씨발? 개새끼? 이 자식 웃기는 새끼네. 네놈의 삶이 고단한 것, 지금 그게 내 탓이라고?]
 
 
 # 2. 신의 목소리
 
 ‘뭐지? 무슨 목소리가 들렸는데, 그것도 굉장히 흥분한 사람의···.’
 주문의 매개가 되어 몸이 산산이 부서졌던 공작은 혼란 속에서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곳, 이미 죽어 버린 자신이 어째서 아직까지 의식이 있는 것인지, 또 들려왔던 목소리는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나라고 이 새끼야. 네가 방금 전에 그렇게 욕하던 신.]
 ‘아. 그래 나는 죽었다. 맞아. 자기희생 주문을 사용했지. 그렇다면 여기는 저승인가.’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은 ‘들린다.’라고 표현하기보다는 ‘울림’에 가까웠다.
 그 울림은 너무도 웅장하며 경이로운 것이었다.
 에른스트 공작은 본인을 신이라고 소개한 그 울림의 주인공에게 공손히 물었다.
 “저는 죽은 것인가요?”
 [대답해 주기 전에, 뭐 하나만 물어보자.]
 “네. 물어보세요.”
 [네 삶이 그토록 고단했던 것이 나 때문이라고?]
 예상외의 질문이었다.
 공작은 당황했지만 비교적 침착하게 대답했다.
 ‘이미 죽었는데 솔직하게 이야기해도 별문제 없겠지. 설마 죽은 사람 또 죽이기야 하겠어?’
 “꼭 그렇다기보다는··· 우리 삶은 신께서 인도하시는 것이니, 신께서도 일말의 책임이···.”
 [와. 이 자식 뻔뻔함 보게나. 좋아. 그냥 넘어가기엔 내가 너무 억울하니까, 우리 하나하나 따져 보자.]
 ‘무슨 신이라는 작자가 이렇게, 쪼잔하지. 이미 억울하게 죽은 사람한테 지금 이게 할 소리야?’
 [다 들려 개새끼야.]
 “아··· 죄송합니다. 제가 방금 죽어서 많이 혼란스럽군요.”
 마음속 생각까지 읽어 내는 것을 보니 공작은 지금 이 상황이 ‘꿈 아니면 목소리의 주인공이 정말로 신이 맞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정말로 그냥 꿈속이라든가.
 사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생각할 것도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냥 그와의 문답을 계속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생각 다 끝난 것 같으니, 이제 말해도 되냐?]
 “네. 말씀하세요.”
 [잘 들어. 좀 기니까.]
 “네.”
 [내가 인마, 너 천애 고아로 태어나게 한 것은 조금 미안한데, 대신에 너에게 마스터의 자질을 부여했잖아. 그러면 그것 가지고 적당히 강해진 다음에, 적당한 미인이랑 알콩달콩 잘살았으면 될 일이지, 결혼도 안 하고 무(武)에 미쳐 가지고 하루도 안 쉬고 자신의 몸을 혹사시키더니, 결국 내가 부여한 마스터의 자질을 뛰어넘어 그랜드 마스터가 되더라? 근데 들어오는 혼사도 모두 거절하고, 황제에게만 병신처럼 충성해서 아까운 세월 다 날려 보내? 황제가 네 마누라야? 결국 자살 부대도 아니고 자폭 주문으로 여기까지 온 것도 네 선택 아니었냐? 그런데도 내 탓이다?]
 “그러게 왜··· 저에게 주제넘은 마스터의 자질을 부여하셔서는···.”
 [와 이 새끼 봐라. 뻔뻔함이 도를 넘었네. 아 더워. 야, 인마. 남들은 가지고 싶어도 갖지 못하는 것을 일부러 신경 써서 부여해 줬더니 뭐라고? 그것도 내 탓이다? 그리고 마스터의 자질을 부여받은 사람의 8할 이상이 마스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알고 있냐? 그러니까 너도 그들처럼 적당히 놀고먹었으면 비교적 평화롭게 살았을 거잖아. 나머지 2할의 이들이 뛰어난 재능과 노력으로 마스터가 되잖아? 근데 걔네들은 그 능력으로 평화롭게 권세를 누리고 산단 말이야. 알아? 그런데 너는 왜 하루도 쉬지 않고 훈련에, 훈련에 훈련만 해서 내가 부여한 재능을 뛰어넘어 그랜드 마스터가 되더니 이제 와서 그게 너무 힘들었으니 나를 탓한다?]
 와··· 말 졸라 많다. 신급 속사포였어.
 하지만 듣고 보니 그가 생각하기에도 신이란 이의 말이 틀리진 않은 것 같았다. 그동안 무얼 위해 이토록 자신을 혹사시키며 살았던 것인가. 오로지 제국의 안정을 위해서? 아니면 보다 높은 무(武)를 추구하기 위해서?
 에른스트 공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그냥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는 것이 좋았을 뿐이다. 단지 인정받기 위해 계속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을 뿐. 나 자신을 위해 살았던 삶은 아니야.’
 결국 하이 레벨의 관심 종자였지. 그 관심병 덕분에 그랜드 마스터가 될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네놈이 늦게나마 주제 파악은 하는구나]
 뭐 어쨌든, 죽기 전에 모든 책임을 그에게 돌리고 그를 욕한 것은 사실이니, 사과를 해야겠다.
 공손하게. 신의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되니까.
 “제가 죽음을 앞두고, 좁디좁은 마음으로 신께 무례를 범했습니다.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길 간청드립니다.”
 [흠··· 뭐 그렇게까지 이야기한다면야···.]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아니 정말로 신이라면 사람은 아닌가.
 조금 누그러진 이 분위기에 다시 질문을 던져 보자고 생각한 공작이었다.
 “제가 처음 죽어 봐서 잘 모르는데, 앞으로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래. 그래.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가지. 좀 전에 네가 죽은 것이냐고 물었지?]
 “네. 그렇습니다.”
 [넌 지금, 생과 사의 중간 정도에 있다. 원래는 이미 죽었어야 했는데, 내가 잠시 진행을 멈췄지.]
 ‘저 말이 사실이라면 참으로 대단하다. 겨우 나한테 잔소리하려고 죽음의 진행까지 멈춘 거야?’
 [아니라고 이 자식아. 자꾸 속으로 내 욕할래?]
 “아 죄송합니다.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남에게 들린다는 것이 익숙지 않아서···.”
 [그냥 생각 자체를 하지 마. 기분 나쁘니까.]
 ‘그냥 자기가 안 들으면 되잖아··· 아, 참. 취소할게요. 죄송.’
 [여하튼 인마.]
 “······.”
 [아! 너 땜에 까먹었잖아! 확 그냥 다시 죽여 버릴까. 어휴···.]
 “······.”
 [아. 생각났다. 원래는 저승으로 가야 할 너를 이곳에 불러 세운 이유는 말이지, 너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기 위해서다.]
 “기회요······?”
 [그래. 그동안 너를 쭉 지켜보니, 신의 이름으로 수많은 마족을 해치우기도 했고, 또 신의 이름으로 선행도 엄청 많이 했더라고? 최근에는 마왕도 해치웠고 말야. 그거 다 내 이름으로 한 거잖아. 네가 “신의 이름으로”라고 내 이름을 여러 번 팔아 준 덕분에 내가 요즘 신계에서 평판이 꽤 좋아. 덕분에 어깨 좀 펴고 살지.]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마지막에도 공로를 나누어 준다고 별 그지 같은 일행들만 참전시키지 않았어도 네가 이긴 게임이었어. 그 마왕은 너보다 약했다고 인마. 게다가 마지막까지 병신처럼 희생하는 꼴을 보니, 어휴··· 내 맘이 어디 좀 아프겠냐고.]
 “거···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의 공손함에 그의 말투가 조금 더 들뜨고 있다.
 [아무튼 그동안의 너의 선행을 종합하여 보니, 넌 참 괜찮은 놈이더구나. 그래서 너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고자 한다. 물론 ‘에른스트 노이벨레’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야.]
 “그게 무슨···.”
 [일단 가 보면 알아, 내가 너에게 ‘기억’이라는 큰 선물을 남겼으니 잘 활용하고. 아무튼 화내서 미안하다. 원래는 좋게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네가 갑자기 내 욕을 하는 바람에 그런 것이니 좀 이해하고. 이번엔 부디 행복하게 잘 지내고. 응? 어디 가서 말하지 말고, 어차피 믿는 사람도 없겠지만.]
 “저기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잘···.”
 에른스트 공작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몸은 또다시 밝은 빛에 휩싸였다.
 자기희생 주문 때와는 또 다른 꽤 편안한 느낌의 빛이었다.
 빛과 함께 그의 눈이 저절로 감겼다.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공작은 생각했다.
 ‘이 상황이 꿈이었는지 정말로 신과의 만남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차피 난 죽었으니까 뭐 상관없겠지···.’
 
 ***
 
 “헉···.”
 공작의 의식이 돌아왔을 때는 여전히 캄캄한 어둠 속이었다.
 ‘음···?’
 그의 귀에 누군가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성의 목소리.
 이번에는 ‘울림’의 형태가 아닌 귀를 통해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다.
 그의 신체에서 느껴지는 감각도 왠지 익숙한 것이 왠지 조금 전의 두둥실 떠 있는 듯한 느낌과는 다른 현실의 것이었다.
 ‘뭐야. 나 지금 누워 있는 것인가···?’
 공작은 팔을 들어 올려 이리저리 휘저어 보았다.
 ―텅.
 공작의 팔이 채 다 펴지기도 전에 무언가에 가로막혔다.
 그는 감각을 끌어올렸다.
 제일 먼저 아주 익숙한 냄새가 났다.
 ‘나무··· 인가?’
 공작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사방이 막혀 있는 좁은 공간.
 그 크기는 내 몸에 딱 맞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공작은 머릿속에서 지금의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자, 정리해 보자.’
 나무로 된 재질과 냄새.
 내 몸에 딱 맞을 정도의 사방이 막힌 무언가의 안.
 그리고 그 안에 누워 있는 나.
 ‘뭐야··· 설마 이거 관이야?’
 손에서 느껴지는 목재의 질감.
 공작은 힘을 주어 그의 위쪽을 가로막고 있는 나무판을 밀어내려 했으나, 평소와는 달리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깟 관 뚜껑 따위야. 공작은 관 뚜껑을 밀고 있던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끼이이익.
 나무가 휘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곧이어 고정되어 있던 못들이 빠지는 소리와 함께, 관 뚜껑으로 예상되는 그것이 비로소 부서지는 소리.
 ―콰직!
 환한 빛이 눈가를 어지럽혔다.
 공작은 한쪽 손을 들어 올려 빛을 가렸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뭐야. 나 지금 살아 있는 것인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작은 농가였다.
 공작은 자신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의 흙이 파헤쳐져 있었고 그 안에 관으로 보이는 나무 상자가 있었다.
 방금 공작이 몸을 일으킨 그곳 말이다.
 이곳은 누군가의 무덤으로 보였다.
 하나 아직 완전히 파묻지 않은 무덤. 땅을 파고 그 안에 관을 안치해 놓았지만, 아직 흙을 덮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자기희생 주문으로 완전히 분해되었을 텐데···.’
 “리··· 리암!”
 뒤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톤이 높은 것이 여성이었다.
 아까의 흐느낌과 같은 사람이다.
 공작은 목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쿵.
 목소리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여자가 갑자기 힘없이 쓰러졌다.
 ‘뭐지. 관 속에서 등장하는 사람 처음 보나···? 그리고 ‘리암’은 뭐야, 누군가의 이름 같은데···.’
 공작은 뭔가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시야가 평소보다 조금 낮아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공작은 양손을 앞으로 내밀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익숙하지 않은 느낌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뭐야··· 손도 작아졌어. 키도 작아진 것 같고.’
 그때였다.
 머릿속에 갑자기 수많은 기억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기억.
 ‘크윽···.’
 갑작스러운 기억의 파도에 혼란스러웠던 공작은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휘청거렸다.
 기억의 주인은 ‘리암’이라는 소년이었다.
 지금 그의 기억이 공작에게 강제로 주입되고 있다.
 공작이 그 사실을 인지할 때쯤 갑자기 기억들의 파도가 멈췄다.
 ‘으으··· 이번엔 또 뭐야···.’
 다음은 정리의 단계였다.
 그 기억들은 공작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되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의 것이었던 양,
 아주 체계적으로.
 공작은 이 ‘리암’이란 소년의 기억을 천천히 따라가 보았다.
 기억의 최종 부분까지 더듬어 본 공작이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아···.”
 소년 리암.
 그는 오늘 죽었다.
 
 
 # 3. 환생한 것 같다
 
 참으로 혼란스러운 순간이었다.
 그 혼란스러움 속에서 공작은 냉정함을 찾으려 애썼다.
 그랜드 마스터로서 온갖 아수라장을 모두 겪으며 살아온 그는 어떤 가혹한 상황에서도 언제나 방법을 찾으려 애썼고, 대부분의 경우 그 방법을 찾았으니까.
 ‘죽은 소년의 기억이 대체 왜 나에게···.’
 그리고 소년의 기억 속에 등장했던 여인.
 방금 공작의 앞에서 정신을 잃은 바로 그 여인이다.
 소년의 기억 속에 그다지 좋은 인상으로 남아 있지 않던 그녀.
 그녀는 바로 소년의 어머니였다.
 ‘오히려 원망의 대상에 가까웠지.’
 공작은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녀가 입은 낡아 빠진 천 옷은 군데군데 기워진 흔적들과 함께이다.
 하나 지나칠 정도로 비루한 행색마저도 그녀의 미모를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으니, 눈앞의 여인의 미모는 상당한 것이었다.
 ‘조금 전 이 여인은 분명 ‘리암’이라고 중얼거리며 쓰러졌어. 역시 죽은 아들 때문에 충격이 큰 모양이야.’
 공작은 땅바닥에 쓰러진 여인을 들어 올렸다.
 하나 가녀린 여인의 외관과는 달리 그녀의 무게는 제법 묵직했다.
 ‘큭··· 왜 이렇게 무거워.’
 드래곤의 사체까지도 홀로 운반한 이력이 있는 그였음에도 이 가녀린 여인 한 사람을 들어 올리는 것이 이다지도 힘들 줄이야.
 공작에겐 아무래도 정리의 시간이 필요했다.
 죽었다가 살아난 듯한 지금의 상황도 그렇고, 체격이 작아진 듯한 느낌도 그렇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아니 혼란스럽다 못해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공작은 조금 전부터 시작된 두통이 점점 심해지는지 미간을 한껏 찡그렸다.
 ‘일단은 눈앞의 여인 먼저 편한 곳으로 옮겨 놓고··· 상황을 정리해 보자.’
 공작은 여인을 안은 채 눈앞의 농가를 향해 걸었다.
 그곳은 기억 속 소년의 집. 동시에 이 여인의 집이었다.
 그녀를 안고 농가로 향하는 그의 다리는 심하게 후들거리고 있었다.
 겨우 도착한 낡은 가옥, 문은 열려 있었다.
 “계십니까?”
 공작은 안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소년의 기억대로라면 이곳에는 소년의 아버지도 함께 살고 있었으니까.
 하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공작은 하는 수 없이 여인을 안고 열린 문 사이로 들어갔다.
 ‘무단 침입이지만, 상황이 상황이니까.’
 가난한 농사꾼의 집. 공작은 자신의 어린 시절 생각이 났다.
 천애 고아로 죽도록 고생하던 그 시절의 기억.
 이 집의 상황도 그 시절 자신이 지내던 가난했던 농가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작은 공간 하나에 별의별 것들이 다 널브러져 있다.
 ‘얼씨구.’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 독립된 듯 어설프게 분리해 둔 공간. 아들의 방이다.
 공작은 짚더미 위에 여인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뺨을 타고 땀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오른쪽 손을 슬쩍 들어 올려 땀을 닦아 낸 공작은 방 한쪽 구석의 낡은 거울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헉··· 이게 뭐야···.”
 충격과 공포의 순간이었다.
 거울 속 공작의 모습은 ‘에른스트 노이벨레’가 아닌, 조금 전에 강제로 주입된 기억의 주인.
 ‘리암 브릭슨.’
 바로 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이게 말이 돼?”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에른스트 공작은 혼란스러움에 농가를 뛰쳐나갔다.
 거울은 손에 쥔 채였다.
 공작은 조심스레 거울을 들어 올려 다시 한번 거울 속의 자신을 확인했지만, 여전히 리암 브릭슨. 그 소년의 모습이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소년의 기억이 주입된 것도 그렇고,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 죽다 살아나서 정신이 이상해졌나? 아니 일단은 죽었던 내가 살아난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지···.’
 그때 공작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그래, 신.
 ‘신’이라 주장하던 이와의 대화.
 그는 분명 이렇게 말했다.
 한 번의 기회를 주겠다고.
 하나 에른스트 노이벨레로서의 삶은 아닐 것이라고. 그렇다면 설마 지금 이 소년으로 환생한 것이란 말이야?
 ‘정리해 보자. 기억 속 소년에겐 삶의 의지가 없었어. 가난한 처지를 비관만 하던 철없는 녀석이었지···.’
 부모님에 대한 원망만이 삶의 전부였던 소년.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가 그녀에게 치근대던 하급 귀족의 손을 잡길 바라던 소년.
 하급 귀족이라도 귀족은 귀족이라고 생각했는지 귀족의 배다른 자식이라도 되길 원했던 그였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가며 소년의 뒷바라지에만 매달리던 아버지가 떡하니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공작은 소년의 기억 속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 아버지란 사람. 가난한 소작농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비교적 잘 먹이고 입혔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에 대한 원망은 우스울 정도였지, 아버지란 사람에 대한 감정은 거의 증오에 가까웠어.’
 가난한 집에 태어난 것은 불운이라 할지라도, 일말의 노력조차 하지 않고 삶을 비관하기만 하던 소년은 결국 죽음을 택했다.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고 하기도 애매한 상황이긴 했지만.
 ‘극한까지 삐뚤어진 자의 극단적인 선택.’
 소년은 그의 부모를 협박하려고 목을 매다는 시늉을 하다가, 탁자에서 발을 헛디뎌 그대로 죽어 버렸다.
 아무리 철없는 어린 소년이라 할지라도, 그의 죽음에 애도할 기분은 생기지 않았다.
 단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소년의 부모였다.
 삐뚤어질 대로 삐뚤어진 소년을 그래도 자식이라고 지극 정성으로 살피던 그들의 마음은 소년의 죽음과 함께 아마도 갈기갈기 찢어져 버렸겠지.
 상황 판단이 빠른 공작이 머릿속에서 현 상황을 정리했다.
 ‘그래. 물론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나는 죽었고, 생과 죽음 사이에서 만난 신이란 존재의 말대로 한 번의 기회를 얻었다. 같은 날 죽어 버린 소년의 환생으로. 그렇다면 이 약해 빠진 육체도 이해가 돼. 신께서는 삶의 의지가 없는 소년을 대신하여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인가.’
 조용한 곳에서의 조용한 삶. 그리고 가족. 모든 것이 공작이 바라던 삶이었다.
 부족한 것은 재물뿐이다.
 하나 그랜드 마스터 시절에도 재물에는 큰 미련이 없던 그였다.
 게다가 지금의 공작에겐 전생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태.
 ‘그 신이란 작자. 큰 선물이란 것이 바로 이것이었나···.’
 ‘전생의 기억’. 이것은 정말 엄청난 선물이다.
 그랜드 마스터로서의 경험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이니까.
 마나의 운용이라면 세상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는 잠시 농가 옆에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가려진 짚 더미 뒤쪽에 양반다리를 한 채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조용하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소년의 몸 안에 자리한 탁한 기운들. 우선은 그것을 몸 밖으로 내보낼 생각이었다.
 공작은 일반인이라고 해도 너무할 정도로 형편없는 소년의 몸속에 아주 작은 마나를 이용해 몸 안의 기운들을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공작 아니 소년의 이마에 땀방울들이 맺히기 시작했다.
 공작은 탁한 기운들을 모두 몸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완전히 비워진 소년의 몸속으로 주변의 기운들을 끌어모아 양질의 청결한 마나를 채워 넣기 시작했다.
 소년의 그릇이 너무 작았기 때문일까, 주변의 정화된 마나를 채워 넣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소년의 몸속 마나가 포화 상태가 되었다.
 “큭··· 아직은 이 정도인가. 이거 정말 너무한걸.”
 단 한 톨의 마나도 밖으로 새어 나가지 말아야 한다.
 공작은 천천히 마나의 갈무리를 마무리했다. 아직도 형편없는 마나의 양이었지만, 그래도 조금 전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이미 소년의 몸속 마나의 양은 일반인의 수준은 훨씬 넘는 상태였으니까.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엉덩이에 묻은 지푸라기들을 탁탁 털어 내었다.
 그리고 짚 더미 밖으로 나와 주변을 조금 둘러보았다.
 ‘감자밭’.
 잘 정돈된 밭이지만, 소년의 부모, 그들 소유의 밭은 아니다.
 소년의 기억을 근거로 그들은 드넓은 영주의 땅에 아주 일부분을 대여받은 소작농에 불과했으니, 아마도 수확량의 일부를 영주에게 갖다 바치겠지.
 게다가 이들의 사는 꼬락서니를 보아선 영주가 그리 좋은 녀석은 아닌 듯하다.
 아마도 꽤나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아냐. 그건 나중 문제고··· 자, 이제 어떻게 한다.’
 공작은 고민에 빠졌다.
 조금 혼란스러운 상황이지만, 이게 꿈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기왕 새 삶을 얻은 것은 좋은데, 이들의 아들인 척 살아야 하는 것이 과연 저 선량한 두 사람을 위한 것일까.
 아닐 수도 있다. 잘못했다간 저들의 가슴에 칼을 두 번 꽂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이 리암이란 소년은 이미 죽은 아들이었으니, 그냥 죽은 거로 두고, 나의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좋은 것일까.
 이것도 다른 쪽으로 생각해 본다면 그렇지 않다.
 죽은 아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자신의 심장이라도 내어 주는 것이 부모니까.
 ‘아, 어렵다. 진정한 신의 시련이구만.’
 한참을 고민하던 공작이 마음의 결정을 내렸는지 무언가 결심한 얼굴을 했다.
 ‘그래. 신께서 이 소년의 몸으로 환생하도록 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그랬겠지. 당분간은 ‘리암 브릭슨’, 이 녀석으로 살아 보자. 꿈에 그리던 농사도 지어 보고 말야.’
 일단 결심을 하고 나니, 공작이 머릿속이 바빠졌다.
 ‘자 그럼 무엇부터 한다. 게다가 두 사람에겐 뭐라고 하면 좋을까. 이미 죽었던 아들이 살아 돌아오는 상황이란 말이지···.’
 처음부터 안 죽었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부활했다고 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정말로 솔직히 “당신 아들 몸으로 환생했어요.”라고 해야 하나.
 아무리 대륙 전체에 현명하기로 이름난 에른스트 노이벨레 공작이라고 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다.
 공작은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는 일단 이 허약한 육체를 단련시키면서 적당한 방법을 떠올려 보기로 했다.
 일단은 팔 굽혀 펴기, 공작의 경험상 운동은 정신력이다.
 인간의 육체는 사실 정신력에 따라 많은 것들이 좌우된다.
 팔 굽혀 펴기도 마찬가지다. 정신력이 강한 이는 같은 체력으로도 훨씬 더 많은 횟수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에른스트 노이벨레’, 그는 그랜드 마스터까지 오른 자였으니 누가 대체 그 앞에서 정신력을 논할 것인가.
 공작이 팔 굽혀 펴기를 시작했다.
 생전의 그는 무제한에 가까운 팔 굽혀 펴기를 할 수 있었으니, 아무리 허약한 소년의 몸일지라도, 금방 단련시킬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고···. 큭.”
 열 개를 다 채우지 못하고 근육에 경련이 왔다.
 “씨발··· 이 쓰레기 같은 몸은 대체 뭐야.”
 해도 해도 너무한 육체. 아무래도 순수한 육체의 강화에는 약간의 시간이 걸릴 모양이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근육 경련, 젊은 시절 육체를 단련할 때 자주 겪던 상황이었다.
 공작은 헛웃음이 나왔지만, 과거를 되돌아봤을 때, 성취의 과정만큼 쾌감을 주는 것도 흔하지 않았기에 다시 한번 그것들을 느껴 볼 생각을 하니 왠지 설레는 기분마저 들었다.
 ‘아··· 아냐, 이번 생은 너무 빡세게 살면 안 되겠지. 그냥 적당히, 적당히 놀고먹는 거야.’
 하나 공작은 잠시 후 다시 한번 팔 굽혀 펴기를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 이건 이 쓰레기 같은 몸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야. 기본적으로 건강은 챙겨야 하잖아? 절대 나 자신을 혹사시키는 것이 아니라고.’
 수없이 찾아오는 근육 경련에도 공작은 운동을 지속했다.
 거의 ‘무’라고 해도 무방한 육체에서 다시 시작하는 느낌은 다시 생각해도 신선한 것이었다.
 ―저벅, 저벅.
 휴식 중에 어디선가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흐느끼는 소리.
 “흐으으윽··· 미안하다. 미안해···.”
 공작은 본능적으로 짚 더미에 몸을 숨겼다.
 짚과 짚 사이의 붕 떠 있는 공간으로 발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곧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칼튼 브릭슨’, 기억 속 소년의 아버지다.
 그의 모습은 처량하다 못해 처참한 수준이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음에도 여전히 울고 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작은 물건 하나가 들려 있다.
 ‘십자가···.’
 보통 무덤 위에 세워 두는 십자가와는 별개로, 관 속 시신 옆에 함께 놓아 두는 작은 물건이다.
 귀족 장례의 필수품. 하나 보통 농민들은 하지 않는 행위다.
 왜냐하면 저건 꽤나 비싼 물건이니까.
 물론 소년의 아버지 손에 들린 것은 싸구려 십자가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작농 따위가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다.
 소년의 이룰 수 없는 꿈이었던 귀족. 그것을 위한 선물이었을까. 무슨 대가를 치렀을지는 몰라도 꽤나 무리한 선택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런 젠장. 산 사람 생각도 해야 할 것 아냐.’
 공작은 그의 어리석음에 답답함이 몰려왔지만, 부모의 마음을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비틀거리며 소년의 무덤 앞에 도착한 그는 부서진 관 뚜껑과 사라진 시신을 보고 적잖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아··· 안 돼. 리암··· 여보!!!”
 그가 자신의 집으로 뛰었다.
 문을 부술 듯 박차고 집 안으로 들어간 그가 울부짖기 시작했다.
 
 
 # 4. 소작농의 아들이 되다
 
 공작은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아. 지금 들어가기 전에 미리 불렀어야 했나. 아무튼 더 이상 지체하면 안 되겠어. 시신까지 사라졌다고 생각한다면 저들이 미쳐 버릴지도 몰라.’
 마음을 다잡은 공작은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부서질 듯 삐걱거리는 문을 살며시 밀어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공작 아니, 죽었던 아들 소년 리암 브릭슨이 갑작스럽게 등장했다.
 그것도 관 뚜껑을 부수고.
 그의 등장에 아버지 칼튼 브릭슨은 소스라치게 놀랐고, 방금 깨어난 듯한 어머니 세라 브릭슨은 다시 한번 혼절할 위기였다.
 “리, 리암···.”
 공작의 머릿속이 다시 한번 혼란스러워졌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던 그는 할 수 없이 기억 속 소년의 말투를 흉내 냈다.
 “씨발. 뭐야. 죽다 살아난 사람 처음 봐?”
 두 사람의 눈이 마치 금붕어처럼 커졌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공작은 최대한 ‘리암 브릭슨’처럼 보여야 했다.
 그리고 리암의 기억들이 그것을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하나 눈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이 리암의 기억을 통해 충분히 그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이들이라고 해도, ‘에른스트 노이벨레’ 공작의 입장에서는 처음 만나는 두 사람이었다.
 공작은 순간 무례한 언사에 대한 사과의 말을 전해야 할지 망설였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지금 자신은 온전히 ‘리암 브릭슨’인 채여야 하니까.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도 믿기 어려운 일인데, 그 몸을 자신이 차지했다고 밝히는 것은 그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라는 생각이 더 크게 자리 잡은 공작이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 리암··· 넌 분명히···.”
 살아 돌아온 자신의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리암의 아버지 ‘칼튼 브릭슨’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한 채, 부들부들 떨리는 두 손을 내밀어 아들의 얼굴을 만지려 했다.
 하나 공작은 그의 손을 외면했다.
 그리고 약간은 짜증 섞인 말투로 눈앞의 남자에게 말했다.
 “사람이 죽었는지 제대로 확인하고 묻어야 할 것 아냐!”
 거친 말들을 내뱉는 공작의 마음도 편치 않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지금 상황에서 하하호호거리며 돌아올 순 없으니까.
 칼튼의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몇 번이고 확인하지 않았던가. 믿기 힘들었던 아들의 죽음을.
 혼란스럽다.
 혹시 지나친 슬픔이 자신의 정확한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던 것은 아니었나.
 하나, 아들의 죽음을 두고 섣부른 판단을 내린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도 생생히 느껴지는 차가웠던 아들의 얼굴.
 그리고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치유사의 마지막 한마디···.
 칼튼은 자신이 절대 잘못 보았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냐, 리암이 눈앞에 이렇게 살아 있는데,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그래. 모두 다 내 잘못이야.’
 지독한 슬픔.
 특히 리암의 어머니였던 세라는 싸늘하게 식어 버린 아들의 모습을 보고 몇 번이나 실신했다.
 그가 자신의 아들을 서둘러서 관에 안치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 과정에서 혹시 자신이 놓친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칼튼은 그렇게 생각해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눈앞의 이 광경을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까.
 “미··· 미안하다. 리암. 정말 미안해···.”
 칼튼이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산 채로 아들을 관 속에 집어넣은 아빠, 그것이 지금 그가 느끼는 죄책감일 것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지만.
 그의 눈물에 다시 한번 곤란해지는 공작이었다.
 공작은 어떻게든 화제를 돌려야만 했다.
 “아. 됐고. 배고프니까 먹을 것 좀 줘.”
 그의 투정에 어머니 세라 브릭슨이 깜짝 놀라며 반응했다.
 “아··· 알았어. 리암. 잠시 기다리렴.”
 곧이어 주방에서 삶은 감자를 들고 세라가 돌아왔다.
 이미 한참 전에 식어 버린 듯한 초라한 모습의 감자 두 개. 공작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입에 넣었다.
 “흠···.”
 솔직히 맛이 없다.
 한데 그것과는 별개로 무언가 아련한 느낌이 들었다.
 어렸을 때 먹어 본 듯한 느낌의 퍼석함이 입 속에 퍼졌다.
 사실 최근엔 이런 음식을 먹어 본 기억이 없다.
 이래 봬도 공작의 위치에 있던 몸이니까. 화려한 음식을 추구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기본적으로 나름 괜찮은 음식들을 먹고 지내야 하는 위치였으니.
 어머니 세라는 남은 한 개의 감자도 마저 먹으라는 듯 눈짓을 보냈다.
 공작은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 들어 반으로 쪼갰다.
 그리고 반쪽의 감자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는 눈앞의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먹어.”
 두 사람은 마치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을 본 사람처럼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손사래를 쳤다.
 “아··· 아냐, 리암. 우린 괜찮아. 어서 마저 먹으렴.”
 공작은 일부러 짜증을 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 먹을 리가 없는 두 사람이었기에.
 “아!!! 빨리 좀 먹으라고!”
 “아··· 알겠어. 리암.”
 두 사람이 서둘러 공작의 손안에 있던 감자를 가져갔다.
 그리고 의문에 찬 얼굴로 그것을 먹기 시작했다.
 그것은 음식을 나누는 아들의 기특함에 감격한 표정이 아니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기에 오늘따라 안 하던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인지 불안해하는 그런 얼굴이었다.
 설마 산 채로 묻은 것에 대한 복수라도 할 생각이었는지 말이다.
 그만큼 소년은 망나니 중에 상 망나니였다.
 리암의 기억 속에서 이들은 거의 피죽도 못 먹고 지냈다.
 물론 이 몸뚱이의 주인 리암 역시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한데 이 후레자식은 집안의 음식을 본인이 다 축내고도 항상 배고프다며 난리를 쳤다.
 비록 넉넉한 집안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사리 분별은 할 수 있는 리암의 나이였으니, 이 소년이 얼마나 괴팍한 성향을 가지고 있었는지 짐작되는 부분이다.
 ‘이것 참 답이 안 나오는 놈이었구만.’
 눈앞의 두 사람은 공작의 눈치를 보느라 반쪽짜리 감자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다.
 이 얼마나 개 같은 광경인가.
 공작은 눈앞의 자신이 잠시라도 사라져 줘야 그들이 마음 놓고 식사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리··· 리암! 어디 가니?”
 한 번 잃었다고 생각했던 아들이었기에,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조차 불안한 듯 서둘러 뒤따라 나오는 두 사람.
 “멀리 안 갈 테니까 걱정 마. 감자밭이나 좀 걷다 올게.”
 착잡한 마음을 안고 집 앞 감자밭으로 걸음을 옮긴 공작이었다.
 이런 후레자식임에도 지극정성으로 챙기던 두 사람.
 저 모습이 진정한 내리사랑인가.
 물론 지나친 과잉보호를 하며 키운 탓에 리암이란 소년의 정신은 매우 삐뚤어져 있었다.
 자식을 잘못 키워도 한참 잘못 키운 그들이었다.
 하나 어린 시절 사랑받아 본 기억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던 공작의 입장에서는 이토록 무조건적인 부모의 사랑은 매우 익숙지 않은 것이었다.
 마음이 복잡해지는 공작이었다.
 5분쯤 걸었을까. 어느새 집 앞에 펼쳐진 감자밭에 다다랐다.
 그리 넓지 않은 규모.
 남의 땅을 빌려 경작하는 이들은 망나니 아들의 뒤치다꺼리에 그마저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감자 농사라···.’
 마침 계절은 늦서리가 끝나가는 계절, 곧 있으면 새싹이 자라나는 계절이다.
 ‘응? 잠깐···.’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공작은 서둘러 농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들어간 집 안에는 때마침 두 사람이 식사를 막 마친 모양이다.
 기껏해야 감자 반쪽이었으니, 한입이면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두 사람은 나가자마자 돌아온 나를 보고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저기, 아버지 오늘이 몇 년 몇 월이지?”
 아버지인 칼튼이 흠칫 놀랐다.
 그리고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 제국력 323년 3월 2일이지. 왜··· 머리가 아픈 것이냐? 기억이 잘 나지 않아?”
 제국력 323년 3월 2일. 오늘이다. 바로 소년 리암이 사망한 그날.
 그리고 공작 자신 역시 마왕과의 마지막 전투에서 사망한 바로 그날.
 리암의 의식이 끊어진 마지막 순간과도 일치하는 날짜다.
 ‘그럼, 리암이란 소년과 나는 같은 날 죽은 것이로군. 그리고 나는 이 소년의 몸으로 들어왔다. 그렇다면 마왕은 정말 쓰러진 것인가? 만약 아니라면 이곳도 무사하진 못할 텐데. 소년의 기억대로라면 이곳은 토른 왕국의 변방···.’
 하나씩 정리가 되어 가기 시작했다.
 그랜드 마스터인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었던 주문이었기에, 마왕은 분명히 죽었을 테지만, 토른 왕국은 글라시안 제국의 먼 후방에 위치하였으며, 지금 서 있는 이곳은 그 안에서도 매우 구석에 자리한 곳이었으므로 아직 마왕군의 공격을 받지 않았을 뿐일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이곳에서 최신 정보들을 그리 빠르게 접할 수 있는 것도 아닐 테니, 정확한 소식은 따로 알아봐야 할 것이다.
 만약 마왕이 죽었다고 한다면, 새 삶을 살아가야 할 에른스트 공작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이곳이라면 제국의 눈에 띄지 않고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모습이 완전히 변해 버렸기에 알아보는 이도 없겠지만.
 생각의 정리가 어느 정도 끝난 공작은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감자밭을 향해 걸었다.
 ‘일단은 복잡한 생각은 하지 말도록 하자. 마왕은 분명히 죽었다. 이제 대세는 농사야.’
 심각한 얼굴로 다시 한번 밭으로 향하는 아들을 보며, 두 사람은 여전히 의문에 찬 얼굴을 하고 그 모습을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공작은 다시 한번 아까의 감자밭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때마침 봄 파종의 시기로군. 이왕 이렇게 된 것 농사일이나 하며 지내는 것도 좋겠어. 어차피 은퇴하면 농사나 짓고 살려고 했으니, 은퇴가 좀 앞당겨졌다고 생각하면 되려나···?’
 공작은 밭 주위를 돌며 밭의 정확한 규모 등을 살폈다.
 늦서리가 끝나고 얼었던 땅이 녹아내리고 있다.
 그에게 전문적인 지식은 없었지만, 은퇴 후 적당한 곳에 자리 잡아 농사를 지을까 생각하고 있던 그였기에, 농업에 대한 약간의 잡지식 정도는 가지고 있던 그였다.
 한참을 둘러보던 공작이 나름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보다 자세한 것은 뭐 칼튼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아니, 이제 아버지라고 해야 하나···?’
 어느새 공작의 머릿속엔 소년 리암의 몸으로 이곳에서 살아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원해서 이리된 것은 아니지만, 달리 다른 방법도 없었고, 공작이 그토록 원하던 여유로운 삶. 농사를 위한 농지와 자신만을 바라봐 주는 가족이 있다.
 이건 필히 신이 주신 선물이다.
 공작은 죽음과 동시에 찾아왔던 신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말 많다고, 욕해서 미안합니다. 그리고 정말 ‘리암 브릭슨’으로 살아 봐도 괜찮다면··· 한번 살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공작 아니, ‘리암 브릭슨’은 흥분된 가슴이 도저히 진정되지 않자, 갑자기 팔 굽혀 펴기를 시작했다.
 
 
 # 5. 리암 브릭슨
 
 운동. 이것은 공작의 습관이기도 했고, 또한 리암의 쓰레기 같은 몸뚱이를 위한 단련이기도 했다.
 멀리서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소년의 아버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의 눈가는 어느새 또다시 촉촉하게 젖어 있다.
 “저기 저 녀석, 지금 운동하는 거지···?”
 함께 지켜보던 소년의 어머니가 대답했다.
 “그··· 그런 것 같아요. 여보.”
 지금도 감정이 복받치는 듯, 콧물까지 훌쩍거리던 그가, 자신의 왼쪽 가슴에 손을 올린 채로 말했다.
 그의 모습은 무언가에 감격한 듯이 벅차오르고 있었다.
 “아까 들었어···? 저 녀석··· 좀 전에 나에게 아버지라고 그랬어···.”
 “여보···.”
 “마지막으로 아버지라고 했던 게 벌써 5년도 더 지난 일이라고.”
 “앞으로 다 잘될 거예요. 죽었다고 생각했던 우리 리암이 살아 돌아왔잖아요···.”
 그의 어깨를 토닥이는 아내 세라의 손길에, 소년의 아버지 ‘칼튼 브릭슨’은 어깨를 들썩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결국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라도 아들이 자신의 울음소리를 들을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리암은 아버지의 울음소리를 들었지만 그냥 모른 척하기로 했다.
 죽었던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을 포함해서 지금은 여러 가지로 마음이 복잡할 테니까.
 아니 제정신이 아닐 것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지금은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왕 이곳에서 ‘리암 브릭슨’으로 살아가기로 마음을 먹은 그는 이 집안의 생활 방식부터 개선해야 했다.
 그동안 두 사람은 못난 아들의 뒤치다꺼리로 매우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했었기에, 그것을 정상으로 만드는 것이 그에게는 최우선 과제였다.
 사실 이들 집안의 상태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형편없었다.
 공작은 왠지 그게 모두 자신 때문인 것 같다는 죄책감마저 들기 시작했다.
 자신이 ‘리암 브릭슨’으로 살아가기로 결정한 이상, 리암이 이 집안에 입힌 피해들까지 본인이 갚아 나가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야 두 사람을 속인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고.
 그는 이 몸의 주인 ‘리암 브릭슨’에 대해 정리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의 기억을 하나씩 더듬어 보면서.
 ‘일단은··· 개망나니.’
 로 시작한 ‘리암 브릭슨’이란 소년의 특징은 소작농으로 태어나 귀족의 삶을 꿈꿔 왔다는 것.
 그리고 친구를 포함해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다.
 고작 소작농의 아들이 그가 꿈꿔 오던 귀족과의 친분이 있을 리도 없는 데다가, 그렇다고 그가 주변의 농민들과 어울린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저 주변의 거주민들을 오다가다 마주친 정도.
 생각보다 주의해야 할 사항들이 별로 없다는 것을 확인한 공작은 나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리암이란 소년의 성격이 갑자기 바뀌었다고 해도, 그것을 알아챌 이가 없다는 말이기도 했으니까.
 일단 정체에 대한 부분은 안심해도 되겠다고 생각한 그는 처음에 생각했던, 집안의 생활 개선에 중점을 두기로 했다.
 ‘그래. 이 정도 밭의 넓이면, 넉넉하진 않아도 먹고 살 만하겠어. 토지의 상태도 생각보다 비옥한 것 같고.’
 단 세 식구가 살아가는 데 많은 것은 필요 없었다.
 토지의 주인인 영주에게 보내고 남는 일정량의 감자면 충분하다.
 고기는 때때로 본인이 사냥을 해 오면 될 것이다.
 질 좋은 맹수의 고기들은 아무래도 당장은 무리겠지만.
 그것은 리암 브릭슨의 육체가 너무나도 형편없기도 했지만, 평생을 집 안에서 썩어 오던 그가 갑자기 돌변해서 거친 야생 동물을 사냥해 온다면 그것도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비현실적인 일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래, 서두르지 말자. 이번 생은 최대한 여유롭게, 즐기면서 지내는 거야.’
 리암은 고개를 들어 하늘 위를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과 청명한 바람.
 새 삶을 살기로 마음을 먹었더니 이 모든 것들이 너무도 소중하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을 느끼던 그가, 문득 방 안 구석에 수북하게 널브러져 있던 무언가가 생각났다.
 바로 ‘씨감자’.
 감자의 파종을 위한 종자였다.
 그것을 방 안 구석에서 본 것 같다.
 일단은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하겠지만.
 그리고 집 안의 농기구들도 한번 훑어봐야겠다.
 ‘물론 먼저 저 울음이 그쳐야겠지만.’
 여전히 서럽게 울고 있는 그의 아버지 칼튼이었다.
 아버지의 울음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었기에, 리암은 조금 더 떨어진 곳으로 나가 보기로 했다.
 일단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파악해 보는 것도 중요한 것이니까.
 주변에는 몇 가구의 농가가 더 있었으며, 그 바깥쪽으로는 작은 숲이 보였다.
 그 반대쪽 방향에는 아직 올해 농사가 시작되지 않은 썰렁한 모습의 밀밭과 밀밭 너머 언덕 위에는 영주의 성이 보였다.
 하급 귀족의 것들이 다 그렇듯 성이라고 부르기에 그 규모는 조금 작은 편이다.
 ‘페르디난트 하이데거 남작’.
 어머니 세라에게 흑심을 품은 하급 귀족, 하이데거 가문의 주인.
 바로 그의 성이었다.
 기억 속의 리암은 그를 동경했다.
 정확히는 그 자체를 동경했다기보다 그가 귀족임을 동경했다.
 어머니를 팔아서라도 귀족인 그의 서자가 되고 싶어 했으니까.
 서자들의 최후가 대부분 그리 유쾌하지 않다는 것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망나니 꼬마 입장에서는 추호도 몰랐겠지만.
 아무튼 이 하이데거 남작 역시도 마왕과의 전투에 많은 사병들을 차출당했을 테니, 한동안은 영지의 안정에 온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최대한 오랫동안 귀찮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일단 하이데거 남작은 제쳐 두더라도, 문제는 또 있다.
 바로 치안.
 영주의 병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영주의 권력이 줄어들지는 몰라도, 그 이야기는 다시 말해서 도적이나 몬스터들로부터 영지를 방어할 이들도 부족하다는 것이니까.
 ‘최소한의 힘은 길러야 해. 가족과 자신을 보호할 정도의.’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르는 혼돈의 시대였다.
 자신과 주변 사람을 지킬 힘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절대 자신을 혹사시키는 것이 아니다.
 리암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조용히 팔 굽혀 펴기를 시작했다.
 약간의 운동과 주변 탐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조금 앞쪽에 농가의 주민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마주 보는 위치에서 걸어오고 있다.
 리암은 왠지 그녀가 자신의 얼굴을 유심히 보는 느낌이 들었다.
 왠지 익숙한 모습의 그녀는 리암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인물이다. 그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거주하는 소작농.
 미첼 아주머니다.
 리암은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물론 예전의 그였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다.
 “에그머니나!”
 그리고 곧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의 표정.
 눈앞의 아주머니가 왜 놀라는지 대충 예상이 되는 그였다.
 주변 농가의 사람이라면 그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확률이 높을 테니.
 그는 이상한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그녀에게 자신은 원래 죽지 않았다는 듯의 의사 표현을 했다.
 “반쯤 죽다 살아났습니다. 저 안 죽었어요. 너무 놀라지 마시길.”
 웬일인지 공손한 태도를 보이는 리암의 모습에 미첼 아주머니는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가졌지만, 죽은 줄로만 알았던 리암이 살아 돌아온 마당에 그런 사소한 것까지 세세하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 그래··· 축하한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의 미첼 아주머니는 리암을 스쳐 지나자마자 도망치듯 그에게서 멀어졌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표정이었다.
 그나마 이곳이 매우 외진 곳이었다는 것이 참 다행이다.
 리암에게 친구가 거의 없던 것도 다행이고.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한동안은 신경 쓸 것이 많을 것 같다고 생각한 리암이었다.
 ‘그래도 새 가족이 생긴 첫날인데, 나름의 축하는 해야겠지.’
 그의 눈이 숲속을 훑었다.
 비록 쓰레기 같은 몸과 형편없는 마나의 양이었지만, 그의 기억엔 그랜드 마스터의 경험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리암의 경계망에 토끼 한 마리가 걸려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토끼 한 마리쯤이야.”
 그는 작은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별다른 준비 동작 없이 휙 하고 돌을 던졌다.
 곧이어 “끼잉”거리는 소리와 함께 토끼가 픽 하고 쓰러졌다.
 “좋아.”
 쓰러진 토끼를 집어 든 리암은 씨익 웃으며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끼익.
 낡은 나무문이 열리며 오래된 느낌의 삐걱거림이 들렸다.
 “리암. 잘 놀다 왔니?”
 어느새 자연스럽게 그를 맞이하는 어머니 세라였다.
 두 사람은 아마도 마음의 정리를 어느 정도 끝내고 티를 내지 않기로 말을 맞춘 모양이다.
 “응. 오다가 주웠으니까, 요리해, 엄마.”
 그는 좁디좁은 주방에 토끼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두 사람은 깜짝 놀라며 축 늘어진 토끼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세라가 말했다.
 “어머낫! 이것을 주웠다고?”
 “응. 그렇다니까. 배고프니까 빨리 만들어 줘.”
 아들의 재촉에 칼튼이 토끼를 집어 들고는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알겠다. 내가 빨리 손질해 가지고 오마.”
 요리에 들어가기 전 토끼의 가죽을 벗기는 등 기본적인 손질이 필요했기에 그의 아버지가 나섰다.
 칼튼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체온이 아직 남아 있는 토끼를 만지작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곧이어 손질이 막 끝나 피가 뚝뚝 떨어지는 토끼를 들고 아버지가 돌아왔다.
 “이리 주세요.”
 리암의 어머니가 토끼를 넘겨받았다.
 그리고 곧이어 그녀의 요리가 시작되었다.
 메뉴는 감자가 들어간 ‘토끼스튜’.
 칼튼과 세라에게도 꽤 오랜만의 고기였다.
 고기만 따로 구워 먹는 것이 아니라, 감자와 함께 스튜를 만들었기에, 토끼 한 마리에 불과할지라도 세 사람이 먹기에 충분한 양이 완성되었다.
 어머니 세라가 스튜를 그릇에 담아 나누어 주며 말했다.
 “리암 덕분에 오늘 맛있는 것을 먹는구나.”
 하나 리암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칼튼 역시 몇 번의 대화를 시도해 보았지만, 반응 없는 아들 덕분에 냉랭한 분위기의 저녁 식사가 이어졌다.
 한참을 말없이 식사에 집중하던 리암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저기 아버지, 엄마.”
 그의 부름에 두 사람은 재빨리 반응했다.
 어머니 쪽이 먼저 대답했다.
 아버지는 리암 쪽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리암. 왜 그러니?”
 “내일 씨감자를 심어 볼까 하는데, 나는 잘 모르니까 좀 도와달라고.”
 두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리··· 리암. 엄마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방금 뭐라고 했니? 감자가 먹고 싶다고?”
 “아니. 씨감자를 좀 심어 본다고. 집에만 있으려니 심심해.”
 “아··· 그··· 그래. 좋은 생각이다. 리암. 암. 가르쳐 주고말고.”
 자신이 소작농의 아들이라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던 아들이었다.
 당연히 농사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런 아들이 감자를 심어 보겠다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그것도 감자를 심는 시기에 딱 맞추어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은, 어쩌면 농사에 나름의 관심과 지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칼튼이었다.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돌아온 이후부터 무언가 아들의 성격이 변했다는 것을 느끼던 두 사람이었지만, 그들은 의아한 생각이 들면서도 그것이 싫지는 않았다.
 언제나 꿈꾸던 아들과 함께하는 하루 일과. 그것이 실현되려 하고 있었으니까.
 
 
 # 6. 씨감자를 심어 보자!
 
 그들이 생각하던 아들과의 일과에는 당연히 농사도 포함된다.
 또다시 감격의 눈물이 흘러나오려는 두 사람이었지만, 아들의 앞에서 눈물을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그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스튜를 먹었다.
 두 사람은 감동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는 중이었지만 정작 그 이야기를 꺼낸 리암은 약간의 후회감이 밀려왔다.
 ‘아··· 너무 서둘렀나? 아들의 성격이 너무 바뀌었다고 의심하는 것 아냐?’
 개망나니였던 아들이 갑자기 너무나도 일상적인 대화들을 꺼낸다는 것이 두 사람의 의심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 원체 마음이 약했던 공작이었기에, 대놓고 망나니짓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리암은 스튜를 그릇 채로 들어 후루룩 마셔 버리고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운동하고 올게. 급하게 먹었더니 더부룩하네.”
 허둥지둥 밖으로 나간 리암은 또다시 바닥에 엎드려 팔 굽혀 펴기를 비롯한 운동을 시작했다.
 다음 날 이른 새벽 그의 아버지가 리암을 깨웠다.
 아직 3월이라 새벽 공기는 조금 차가웠다.
 칼튼은 아들이 행여라도 감기에 걸릴까, 그를 깨우기 전에 미리 장작 등을 모아 불을 피워 놓은 후였다.
 리암이 졸린 눈을 비비며 집 밖으로 걸어 나왔다.
 “하아암―”
 크게 하품을 하는 리암이었지만, 새벽에 일어난 아들이 대견한지 칼튼은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리암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데 정작 심어야 할 씨감자가 보이지 않는다.
 “뭐야. 바로 감자 심는 것 아니었어?”
 아들의 물음에 칼튼이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리암. 일단 밭부터 갈아엎어야 하고, 또 감자를 심을 이랑도 만들어야 한단다.”
 “아. 그렇지.”
 머리를 긁적거리는 리암을 바라보며 곡괭이를 집어 든 칼튼이 밭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힘든 작업이니까, 리암 너는 옆에서 구경하고 있거라. 졸리면 들어가서 좀 더 자도 되고.”
 리암에게 힘든 농사일을 시키는 것이 칼튼에게 있어서도 맘이 편한 일은 아니었다.
 그저 아들이 옆에서 본인이 하는 일을 바라봐 주기만 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아니, 사실 리암이 씨감자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 준 것, 그리고 이 새벽에 졸린 눈을 비비며 이렇게 잠깐 나와 준 것만으로도 이미 그동안의 아픔을 보상받은 느낌이었다.
 한데 칼튼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리암은 방 안으로 들어가기는커녕 창고에서 예비 농기구들을 챙겨 오는 것이 아닌가.
 그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심심하다고 했잖아. 나도 할래.”
 또다시 울컥함을 느끼는 칼튼이었다.
 그렇게 두 부자의 밭 갈기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익숙지 않은 모습의 리암이었지만, 아버지인 칼튼의 가르침에 따라 금방 요령을 익혀 가는 그였다.
 금세 능숙해지는 아들의 모습에 칼튼은 꽤나 놀란 모습이다.
 “아니, 리암 네가 이렇게 농기구들을 잘 다룰 줄은 몰랐구나.”
 왜냐고? 그랜드 마스터였던 그의 익숙한 손놀림은 현존하는 각종 병장기들을 다룰 수 있었고, 농기구 역시 도구를 다룬다는 그 커다란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물론 농사일에 대한 요령은 오랜 시간 동안 익혀야 하는 것이었고, 리암의 육체가 생각보다 잘 따라와 주진 않았기에 조금 헤매는 과정은 거쳐야 했다.
 아버지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지는 그였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밭을 갈 뿐이었다.
 밭은 그리 넓지 않아, 두 사람이 하루 종일 작업하면 2―3일이면 끝날 정도였다.
 해가 떠올라 아침이 밝아 올 무렵. 어머니 세라가 먹을 것들을 가지고 밭으로 왔다.
 메뉴는 또 감자였다.
 이 지역은 일 년에 두 번 감자 농사를 짓는다.
 봄 파종과 가을 파종. 감자는 파종으로부터 3개월이면 거의 자라기 때문에 봄에 심은 감자는 한 여름이 오기 전에, 가을에 심은 씨감자는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수확이 가능하다.
 그렇게 수확한 감자는 일정량이 영주에게로 보내지고, 나머지는 내다 팔거나, 직접 소비한다.
 참고로 밭의 넓이에 따라 영주에게 보내지는 양은 정해져 있다.
 수확량의 몇 퍼센트 이렇게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최대한 많은 감자를 수확하면 소작농에게도 이득이 된다.
 일정량만 보내면 나머지는 모두 우리가 갖는 것이니까.
 물론 그 일정량이라는 것이 만만치가 않은 것이 문제지만. 그래서 수확량이 형편없는 해는 소작농의 몫이 거의 없기도 하다.
 리암의 망나니짓에 농사일에 집중할 수 없었음에도 아직 감자의 비축분이 있는 것을 보니, 이 땅은 꽤나 비옥한 모양이다.
 아니면 두 사람이 엄청나게 검소했다거나.
 그래도 아껴 쓰는 것은 한계가 있을 테니.
 이런 땅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행운이다.
 물론 영주의 흑심이 충분히 포함된 경작 토지의 분배였겠지만.
 ‘흠··· 대책을 마련해야 하나.’
 조만간 다가올 변화에 대비해 리암은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영주의 마음이 언제 변해 버릴지 모르는 일이니까. 게다가 화목해진 가족의 모습을 본다면, 아마 그 시기는 그리 멀지 않았으리라.
 자신에게 복종하는 소작농에게는 질이 좋은 토지를 경작하게 하고, 괴롭히고 싶은 자에게는 돌무더기의 쓰레기 땅을 경작하도록 하는 방법은 귀족들이 자주 써먹던 수법이었으니까.
 “무슨 생각 하니, 리암?”
 한참을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는 리암에게 엄마 세라가 물었다.
 “아니. 별것 아냐.”
 오후에는 엄마와 함께 씨감자를 잘랐다.
 씨감자의 양이 충분치 않았기에 절반 정도로 잘라서 밭 전체에 골고루 나누어 심는다고 했다.
 리암과 세라가 감자를 자를 동안, 칼튼은 창고에서 커다란 자루를 꺼내 왔다.
 그리고 그것을 집 앞 공터에 뿌렸다.
 조금 쌓일 정도로. 마른 낙엽이었다.
 가을에 모아 둔 모양이다.
 곧이어 그가 새벽에 태워 두었던 장작더미에서 살아 있는 불씨를 찾더니, 마른 낙엽에 불을 붙였다.
 낙엽들은 빠르고 강렬하게 타올랐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 재가 되었다.
 “자 이제, 자른 감자에 재를 묻히는 거야.”
 리암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이 짓은 대체 왜 하는 거야?”
 “일종의 소독이란다. 자른 단면을 바로 흙에 넣으면 감자가 썩어 버리기도 하거든.”
 어머니 세라가 대신 대답했다.
 리암은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감자의 하얀 단면을 중심으로 감자 전체에 골고루 재를 묻혔다.
 세 사람이 작업을 진행하니, 재를 묻히는 이 작업은 비교적 금방 끝이 났다.
 재를 묻힌 감자는 3일 정도 보관했다가 단면이 어느 정도 아물게 되면 그때야 파종을 시작한다고 했다.
 그사이 아버지와 나는 밭 갈기를 마무리하고 감자를 심을 준비를 해야 한다.
 ‘농사란 쉽지 않구나. 세세하게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아.’
 원래는 해가 지기 전까지 밭 갈기를 계속해서 진행해야 하나, 리암이 금세 요령을 익혀 도와준 덕분에 오늘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진척이 있었다.
 칼튼은 리암을 대견스러워하며, 오늘의 작업을 마치기로 했다.
 아들을 너무 고생시키고 싶지도 않았고, 한편으로는 너무 빠른 시간 내에 작업을 끝내 버린다면 아들과 보내는 행복한 이 시간이 줄어들 것 같았으니까.
 “리암. 오늘 고생 많았다. 덕분에 일이 금방 진행될 것 같아.”
 “내일도 같은 시간에 깨워 줘. 나는 잠시 바람 좀 쐬고 올게.”
 또다시 주변을 둘러보러 가는 그를 어머니 세라가 불렀다.
 그녀의 얼굴은 어제보다 훨씬 좋아 보인다.
 “리암. 저녁은?”
 “다녀와서 먹을게. 남겨 둬.”
 쿨 내 풍기는 태도로 어머니에게 대답한 리암은 또다시 주변 탐색을 시작했다.
 그가 이토록 주변 탐색에 신경 쓰는 것은 남다른 이유가 있었다.
 ‘페르디난트 하이데거 남작’.
 마왕이 죽었다는 가정하에, 마왕과의 전투로 혼란스러웠던 시국이 정리되면, 하이데거 영지의 주인인 남작이 다시 이곳으로 찾아와 행패를 부릴 것이다.
 아름다운 리암의 어머니 ‘세라’를 차지하려는 욕심이 차고 넘치는 사람이니까.
 물론 우리는 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경우 남작이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수는 더 이상 우리가 자신의 땅에서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한마디로 한순간에 생활의 터전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소작농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청천벽력 같은 일이지만 사실 그것은 그의 말 한마디면 가능하다.
 물론 토른의 법에 따라 관련 서류들로 최종 통보를 하게 되겠지만, 그것은 며칠 동안의 시간 벌기에 불과하다.
 그리고 리암의 기억 속의 그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영주의 영지 안의 토지라면, 토지의 주인인 영주에게 생산된 작물의 일정량을 바쳐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대신에 안전한 경작이 가능하다.
 적어도 영지 안이라면 도적이나 몬스터들의 습격으로부터는 보호받을 수 있을 테니까.
 요즘 같은 시국이야 그마저도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렇다.
 하나, 영지의 밖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그곳은 당연히 영주의 사병들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곳이다.
 그리고 특히 몬스터 서식지로 분류된 곳은 국가에서도 위험 지역으로 취급하는 버려진 땅이나 마찬가지다.
 예외로 모험가들이야 아이템의 획득이나 길드의 의뢰를 통해 종종 그런 곳들을 찾아다니기도 하지만 순수한 농민의 입장에서는 사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곳이다.
 리암의 최종 목표는 그런 버려진 땅의 개간이었다.
 그런 토지를 개간한다면 왕국에서도 개간자의 소유권 또는 경작권을 인정해 줄 것이다.
 일단 손 안 대고 많은 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데다가, 버려진 토지를 개간한다는 것은 전에 없던 새로운 세금이 발생한다는 것이니까.
 하나 말처럼 만만한 작업은 아니었다. 그런 사례들은 사실 거의 없었으니까.
 첫째로 조건에 맞는 장소를 찾아야 하고, 그다음엔 그 지역의 몬스터를 토벌, 마지막으로는 농지가 아닌 척박한 그곳을 처음부터 개간해야 한다는 무지막지한 과정들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일단은 주변 탐문을 통해 마땅한 장소를 찾자. 그리고 천천히 힘을 길러야 해.’
 리암은 자신의 첫 번째 목표를 위해 오늘도 정신없이 주변을 돌아다녔다.
 다음 날도 감자밭의 발 같기는 계속되었다.
 하루하루 흐를수록 아버지 칼튼의 얼굴 역시 생기를 찾아가고 있다.
 처음 보았을 때는 산 사람의 얼굴이라고 말하기가 민망할 정도였지만 사실 그는 어머니 세라에 비견될 정도의 외모를 가진 남자였다고 한다.
 전성기로 되돌아가기엔 조금 늦은 감이 있어 보이지만, 마음의 안정을 되찾는다면 그의 인상도 더 좋아질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마음의 안정을 찾도록 하는 일은 아들인 리암 자신의 역할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에른스트 노이벨레, 그는 원래 심하게 오지랖이 넓은 성격이었다.
 원래 그의 성격대로 라면 밭을 갈며 끝없는 수다를 뿜어 댔을 테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조금 답답했다.
 한데 그것은 아버지인 칼튼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들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은 그였지만 혹시라도 아들의 심기를 건드려 아들과의 시간을 날려 버릴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던 그였으니까.
 사실 지금은 이 정도로도 충분히 행복하긴 했지만.
 그렇게 두 사람의 말 없는 밭 갈기가 끝나고, 3일 차에는 비로소 이랑을 만드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지름이 한 뼘 정도 되는 작은 나무를 통으로 잘라 만든 리암의 키보다 조금 작은 원기둥.
 리암은 그것을 비스듬히 세워 밭을 가로지르며 밀고 다녔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듯한 일직선으로.
 그가 지나가는 길마다 흙이 파이며 고랑이 생겼다.
 칼튼은 그것을 더 넓히며 미진한 부분을 보강하는 작업을 했다.
 작업은 일부 농기구와 자신의 손을 사용했다.
 “흙냄새 좋네···.”
 자신도 모르게 나온 중얼거림이었다.
 바로 옆에 칼튼이 있다는 것도 잠시 잊어버린 채.
 그만큼 안쪽의 흙에서 풍기는 향기는 매우 훌륭한 것이었다.
 리암의 중얼거림에 칼튼이 물었다.
 “예전엔 그렇게 흙냄새를 싫어하더니···.”
 “죽다 살아나서 그런가, 이런 것도 좋네.”
 죽다 살아났다는 아들의 말에 칼튼의 몸이 움찔했다.
 “미안하다··· 리암.”
 자동적으로 나오는 그의 사과.
 “아니, 아버지 탓이 아니야. 내가 스스로 택했던 바보 같은 짓이었으니까. 그러니까 그 일은 그만 신경 끄고, 어서 작업이나 마저 해.”
 아들의 말에 칼튼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요즘 들어 눈물이 헤퍼진 그였다.
 한동안의 작업 끝에 두둑과 고랑이 적당한 폭과 길이로 만들어졌다.
 아버지와 아들 두 사람이 고생한 결과물이다.
 물론 어머니의 역할도 결코 작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많은 도움을 주었으니까, 단지 강하게 힘을 쓰는 일들이 주로 두 남자의 몫이었을 뿐, 전반적인 작업들과 음식의 준비 등 여러 가지 궂은일을 도맡아 온 그녀였다.
 “어디 보자···.”
 완성된 이랑은 나름 숙련된 농사꾼인 칼튼이 보아도 제법 훌륭한 것이었다.
 그는 군소리 없이 이 모든 작업을 도와준 아들이 너무도 대견했다.
 “휴우··· 이제 이랑이 거의 완성된 것 같구나. 농사를 그리 싫어하던 리암 네가 이 아빠보다 훨씬 나은데?”
 “흥···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그만하고, 어서 씨감자나 들고 오자구.”
 아들의 빈정거림에 칼튼이 행복한 미소를 풍기며 집 안으로 향했다.
 곧이어 아내와 함께 씨감자가 담긴 자루를 힘겹게 끌고 나왔다.
 리암도 그들에게 달라붙어 감자를 나눠 들었다.
 들고 온 감자는 일단 각 고랑마다 조금씩 나누어 들이부었다.
 고랑은 배수로의 역할도 하고, 농부들이 오가는 길의 역할도 한다.
 그곳에 일단 감자를 가져다 놓고 하나씩 심을 계획이다.
 씨감자를 심는 곳은 불룩 튀어나와 있는 두둑.
 이미 적당한 크기의 구멍까지 파 놓은 상태였으니, 이제 그곳에 감자를 심어 넣고, 흙을 덮으면 일단은 완성이다.
 물론 그것이 감자 농사의 끝은 결코 아니었지만.
 “자. 이제 씨감자를 심고, 흙으로 덮어 보도록 하자.”
 씨감자를 심는 작업은 어머니 세라도 함께 했다.
 미리 사전 작업을 해 둔 덕에 감자 심기 작업은 생각보다 빨리 마무리되었다.
 사전 작업과 더불어 가족 모두가 달라붙어 감자를 심었던 것도 시간 절약의 큰 이유였다.
 씨감자를 심은 곳에는 창고에 보관 중이었던 마른 낙엽과 풀들을 가져다가 덮었다.
 ‘부농’들은 농업 전용 포션으로 작물에 영양 보충을 하기도 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것 같지만 사실 확실한 정보는 아니다.
 하나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리암의 집은 그런 고가의 아이템을 구입할 정도의 형편이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곳은 영양분이 충분한 대지였기에 이 정도만 해 두어도 감자가 잘 자란다고 했다.
 어느새 감자 심기의 마지막 작업까지 마무리한 리암의 가족이었다.
 “휴우··· 이제 대충 마무리되었구나.”
 “다들 고생했어요.”
 “······.”
 서로의 이마의 땀방울을 닦아 주는 두 사람이었다.
 세라는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던 아들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도 닦아 주려 했지만 당연하게도 리암은 고개를 돌려 그것을 피했다.
 “하지 마.”
 퉁명스럽게 말한 그가 스스로 자신의 땀을 닦아 냈다.
 이미 예상한 듯한 세라의 얼굴은 결코 서운함이 담긴 표정은 아니었다.
 단지 약간의 아쉬움이라고 할까.
 어느새 미소 짓는 얼굴로 스스로 땀을 닦는 아들을 바라보는 그녀였다.
 리암은 엄마의 시선을 느꼈지만, 굳이 그 시선에 답하지 않고 그냥 못 본 척하기로 했다.
 쑥스러웠으니까.
 그리고 서둘러 다른 생각을 하려 애썼다.
 ‘그래 농사와 관련된 생각을 하자.’
 리암이 겪어 본 농사.
 요령이 없어서 조금 힘이 들었지만, 제법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더군다나 세 사람이 함께했기에.
 만약 혼자였다면 이만큼 즐겁진 않았겠지.
 ‘가족이라는 것도 참 좋은 것 같고 말야···.’
 방금 엄마의 손길을 피한 이유도 행복함에서 오는 어색함과 쑥스러움이 가장 컸던 그였다.
 망나니 리암을 연기해야 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보다 확실한 이유는 그가 그런류의 다정스러운 손길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천애 고아였던 그에게 가족의 손길 따위는 이룰 수 없는 꿈에 불과했었으니까.
 아직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공작은 ‘리암 브릭슨’으로서의 생활이 너무도 만족스러웠다.
 소소한 행복이란 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던 절대자, ‘그랜드 마스터’로 지내면서도 느껴 보지 못한 그런 감정이었다.
 또다시 감상에 젖어 들 뻔한 그였지만, 눈앞의 두 사람이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흠··· 운동이나 하러 가야겠다. 올 때 토끼라도 잡아 올게.”
 칼튼과 세라는 리암의 “동네 한 바퀴”가 이제는 익숙한 듯 손을 흔들며 그를 배웅했다.
 빨개진 얼굴을 애써 감춘 그가 도망치듯 뛰어나왔다.
 ‘휴··· 이거 정말 익숙해지지 않는군.’
 자신의 얼굴을 몇 번 찰싹 때려 겨우 현실로 돌아온 그는 최근 구상하고 있던 일들을 떠올렸다.
 최근 계속해서 진행했던 ‘감자 심기’ 그리고 ‘새 터전을 위한 탐색’ 마지막으로 ‘운동과 마나 운용’ 이 세 가지가 요즘 그가 생각하던 가장 중요한 일들이었으며 일과였다.
 ‘이제 마나의 양도 조금씩 늘어 가고 있어.’
 마나를 담는 그릇. 그것은 바로 개개인의 육체다.
 쓰레기 같은 신체를 가진 리암이었지만, 계속되는 운동과 전신의 근육을 모두 사용해야 하는 농사일은 그의 신체, 즉 그릇을 제법 단련시켰다.
 그리고 그 단련된 그릇에 마나를 채워 넣는 일은, 리암의 마나 운용을 통해서 진행되었다.
 그랜드 마스터의 마나 운용에 관한 이론은 이미 리암의 머릿속에 가득 채워져 있었으니까.
 리암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에서 이제 조금씩 풀들이 솟아오를 기미가 보였다.
 적당한 곳에 자리하여 엉덩이를 붙인 채 앉은 그가 눈을 감고 명상을 시작했다.
 곧이어 빠른 속도로 리암의 몸속에 마나가 채워졌다.
 대기에서, 대지에서, 주변의 풀과 나무에서.
 미세하게 흘러들어온 마나는 어느새 리암의 일부가 되었다.
 ‘휴···.’
 그의 이마에 또다시 땀방울이 맺혔다.
 ‘제법 속도가 붙고 있어. 이 속도라면 머지않아 엑스퍼트(Expert)의 경지까지는 갈 수 있을 거야.’
 엉덩이의 흙먼지를 탁탁 털며 일어난 그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는 처음의 비틀거리던 약골 꼬맹이가 아니라, 제법 달리는 맛을 알아 버린 망아지처럼.
 리암은 꽤나 빠른 속도로 주변 탐색을 시작했다.
 오늘은 조금 더 멀리 가 볼 생각이다.
 ‘한군데 둘러볼 곳도 있고···.’
 넓게 펼쳐진 밭들 사이로 군데군데 지어진 농가들이 보인다.
 대부분 소작농들의 집이다.
 이곳은 모두 페르디난트 하이데거 남작의 영지였으니.
 다시 말해 이 주변의 땅은 모두 남작의 소유라는 이야기다.
 리암은 재빠르게 이동해 남작의 영지를 벗어났다.
 영지를 벗어나서도 한참을 달려간 곳.
 그곳은 위험 지역인 ‘오크 서식지’로 알려진 숲이었다.
 오크들의 특성은 부락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필시 자신들이 집단으로 거주할 만한 넓은 공간에 그들만의 집을 짓고 살아가는 종족이다.
 단순히 숲속과 나무들을 벗 삼아 자연과 동화되어 살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저 숲 안쪽에는 이미 오크들이 나무를 베고 그 뿌리를 뽑아낸 다음 대지를 다져 만들어 놓은 꽤나 널찍한 공간이 있을 것이란 이야기다.
 오크 한 부족이 살아갈 만한 넓이면 아마 농사를 짓고도 남을 정도겠지.
 일단은 탐색이 목적이었다.
 리암은 재빠르게 숲 안쪽으로 진입했다.
 숲 안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 오크들의 것이었다.
 느껴지는 살기로 보아 그 수는 최소한 50마리 이상.
 그중에 특히 강력한 살기를 내뿜는 이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투사급.
 그들은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다.
 ‘흠··· 이 정도라면, 당분간은 무리겠어.’
 재빨리 머릿속에서 상황을 정리한 리암은 현재 자신의 실력으로는 이곳의 공략이 어렵다는 것을 바로 수긍한 채 숲에서 빠져나갔다.
 하나 일단 장소를 선정해 두었으니, 적어도 한 가지는 해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농사를 짓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곳일 확률도 있겠지만, 이 주변의 토지의 질로 보아 그럴 확률은 매우 낮다.
 ‘정리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리겠어. 남작이 최대한 늦게 찾아와 주면 좋겠는데 말야.’
 하나 하이데거 남작이 리암의 바람대로 기다려 줄 것이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그는 계획을 조금 더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토끼를 몇 마리 사냥했다.
 어느 정도 끌어 올린 지금의 능력으로는 멧돼지급의 사냥도 충분히 가능할 테지만, 지금 멧돼지를 들쳐 매고 집으로 돌아간다면 부모님이 깜짝 놀라 뒤로 나자빠지겠지.
 그런 상황은 최대한 피해야 하기에, 아쉬워도 당분간은 토끼로 만족해야 했다.
 토끼 몇 마리를 손에 들고 집으로 들어서니 집 앞에 아버지와 누군가가 이야기 중이었다.
 브라운 아저씨다.
 근처 농가의 소작농.
 리암에게 때때로 진심 어린 충고를 건네주던 몇 안 되던 사람. 물론 그때마다 그는 쌍욕으로 갚아 주었지만.
 현재의 리암은 그가 직접 한 짓도 아닌데 왠지 자신이 숙연해짐을 느꼈다.
 반성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리암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 브라운 아저씨가, 그를 바라보며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구나. 리암. 살아 있었어···.”
 “흥, 제가 살아 있는 것이 못마땅하신가 봐요?”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 일부러 모진 말들을 뱉어 낸 리암이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헹, 네 아버지 말이, 죽다 살아난 뒤로 꽤나 착해졌다고 하더니 정말이로군.”
 ‘윽···.’
 나름 리암을 따라 한다고 한 것인데 아무래도 오리지널 망나니는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것인가 보다.
 “흥··· 시끄럽고 이거나 받아요.”
 리암은 브라운 아저씨에게 토끼 한 마리를 던졌다.
 지독한 망나니라고 자신을 슬슬 피해 다니던 마을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브라운 아저씨는 그를 바로잡아 주려 했던 몇 되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리암의 입장에서는 나름 은혜를 갚는 것이랄까.
 뭐 토끼 한 마리 가지고는 턱도 없겠지만.
 살아 돌아온 리암과 처음 마주쳤던 조금 전의 순간보다 더욱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짓는 브라운 아저씨였다.
 
 
 # 7. 로열 스위티
 
 이 개망나니가 자신의 먹을 것을 나눠 주다니.
 그의 얼굴이 놀라움에서 푸근한 웃음으로 바뀌었다.
 “허허,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구나. 아무튼 잘 먹겠다. 리암.”
 리암은 브라운 아저씨의 인사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나머지 토끼 두 마리를 아빠에게 건넸다.
 “손질.”
 그리고는 바로 집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그였다.
 리암이 집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 칼튼과 브라운은 오묘한 표정의 미소를 지었다.
 “허허··· 망나니 아들이 제법 정신을 차렸구만. 분위기가 아예 달라졌어.”
 “그러게 말야. 요즘 살맛 난다네.”
 잠시 행복한 미소를 보인 칼튼이 갑자기 브라운의 등을 떠밀었다.
 “이봐, 이제 그만 가 보라구. 난 아들 녀석이 잡아 온 토끼를 손질해야 하니까.”
 “알았네. 알았어. 밀지 말라고. 간다니까.”
 졸지에 억지로 등 떠밀려 집으로 돌아가게 된 그였지만,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가 진심 어린 축하의 말을 건넸다.
 “아무튼 축하하네, 칼튼.”
 “고맙네, 친구.”
 칼튼은 집으로 돌아가는 친구에게 아주 잠시 인사하고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서둘러 아들이 잡아 온 토끼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는 어느새 콧노래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리암, 마왕이 결국 쓰러졌단다.”
 갓 구운 토끼의 다리를 리암에게 건네며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아마 조금 전 브라운 아저씨에게 마을의 최신 소식을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역시 마왕은 죽었구나. 하긴 누구의 주문이었는데.’
 리암은 변수가 생기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고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거 잘됐군요.”
 별로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툭 던지듯 대답했던 리암이었지만, 사실 그로서는 누구보다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지금의 평화로운 생활을 유지하려면 그것은 꼭 필요했던 전제 조건이니까.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매우 관련이 깊은 일이었으니까.
 본인이 마왕을 골로 보내 버린 장본인이기도 하고.
 리암이 속으로 안도하며 토끼의 다리를 뜯었다.
 노릇노릇한 것이 정말 잘 익었다.
 “초중반까지 전장에서 활약했던 에른스트 공작은 마왕과의 전투 초반에 사망했다더구나.”
 리암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아들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발견한 칼튼이었지만 에른스트 공작과 리암의 현재 관계를 알 리가 없는 그였기에 대수롭지 않은 듯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글라시안 제국의 대마법사 엘렌 경의 활약이 컸다는구나.”
 이번엔 리암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아니··· 이 쌍년을 보았나. 나 홀로 희생하면 명예는 지켜 준다는 식으로 지껄이더니, 본인이 모든 공을 가로챈 거야?’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했던가, 결국 뒤진 사람만 손해다.
 잔뜩 인상을 일그러뜨리던 리암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던 부모님의 얼굴을 확인하고 황급히 끓어오르던 분노를 억지로 진정시켰다.
 ‘그래. 이왕 이곳에서 평화롭게 살기로 한 것, 깔끔하게 다 잊어버리자. 그깟 부와 명예 다 가져가라지.’
 아들의 표정이 수시로 변하는 것을 주의 깊게 바라보던 칼튼이었다.
 이야기를 한참 이어 가던 그는 리암의 표정이 몇 번이나 무섭게 변하는 것을 확인하고 잠시 이야기를 멈추었다.
 하나 어느새 아들의 표정이 원래대로 무덤덤하게 돌아온 것을 확인한 그는 리암의 눈치를 살피며 계속해서 마왕과의 전투에 관한 이야기를 이었다.
 전 세계의 사람들이 모두 궁금해하던 흥미로운 이야기였으니까.
 아버지의 입장으로서는 아들에게 마을의 최신 소식을 전해 준다는 것에 대한 나름의 자부심이 있었다.
 그리고 분명히 자신의 아들 역시 관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이유였다.
 “왕국의 자랑. 성녀 일리나 경도 큰 활약을 펼쳤다는 소식이야. 역시 우리 토른의 성녀답구나.”
 ‘성녀는 개뿔··· 전장에서도, 나에게 몇 번이나 추파를 던졌었지··· 내가 거절하자 결국 울라프랑 몇 번을 뒹굴어 대더만···.’
 갑자기 밥맛이 떨어지는 리암이었다.
 그는 뜯어 먹던 토끼의 다리를 식탁 위에 살포시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이 안 좋아. 운동 좀 하고 올게. 고기는 둘이서 다 먹어.”
 “리··· 리암?”
 식사 중에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는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며 조금 더 먹기를 권하려던 세라였지만 그녀가 말을 붙일 틈도 없이 리암은 빠른 속도로 집 밖으로 나가 버렸다.
 밖으로 나온 리암의 속은 타들어 가다 못해 폭발 직전이었다.
 ‘으··· 개 같은 자식들. 갑자기 럼주가 먹고 싶다. 이럴 땐 독한 술 몇 잔 마시는 것이 제일인데.’
 하나 15세 소년의 몸으로 술을 마시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망나니였던 전생의 리암도 술은 마시지 않았다.
 ‘시발··· 이 망나니 자식은 그렇게 쓰레기처럼 살았으면서 왜 술은 안 마신 거야.’
 망나니인 척 술 한잔 마실 수도 없는 상황의 그는 입 밖으로 별의별 쌍욕을 다 내뱉으며 또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가슴이 답답할 때는 운동만큼 그것을 해소시켜 줄 수 있는 행위도 드물었다.
 팔 굽혀 펴기를 시작한 그의 입은 어느새 백 단위를 세고 있었다.
 턱 끝을 따라 흘러내리는 땀방울.
 “허억. 허억.”
 그날 리암의 운동은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다음 날 아침 리암은 뻐근한 팔뚝을 주무르며 밭으로 나갔다.
 자로 잰 듯 반듯하게 정돈된 밭의 모습의 참으로 아름답다.
 어제까지 씨감자를 심는 작업은 모두 마무리되었기에 이제는 감자가 자라는 것을 기다리면 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 손을 놓는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중간 작업들이 필요했지만, 그것들은 처음의 작업들보다는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들은 아니었다.
 그는 종종 아버지와 함께 감자 싹을 솎아 내고, 주변의 풀들을 정리했다.
 처음의 작업들과 비하면 비교적 힘이 덜 드는 작업이었다.
 어머니 세라도 함께했다.
 덕분에 리암에겐 감자 농사의 초반보다는 많은 여유 시간들이 주어졌다.
 어떤 날은 하루의 거의 전부를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그는 자신의 단련에 거의 모든 시간을 쏟아부었다.
 집 안에 놓여 있던 아버지의 호신용 검.
 어렵게 아버지의 허락을 얻어 검의 연습도 시작했다.
 겨우 볼품없는 숏 소드에 불과했지만 지금의 리암에게는 충분한 물건이었다.
 그 나이 또래의 남자아이들이 검에 흥미를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니, 칼튼 역시, 큰 의심 없이 검을 가지고 놀게 해 줬다.
 물론 조심히 다루라는 주의는 잊지 않았다.
 검을 쥔 리암은 실력을 급속도로 성장시켰다.
 검으로 갈 수 있는 최고의 수준까지 닿았던 에른스트 공작이었기에, 타인의 육체라 할지라도 쉽게 능숙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본인의 능력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리암은 다시 한번 오크들의 서식지로 향했다.
 그리고 냉정하게 상황 판단을 한 그가 비로소 서식지 내부의 탐색을 시작했다.
 내부 탐색 중에 오크들에게 발각되어도 재빨리 빠져나올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끌어올린 상태였기에 이제는 계획을 실행에 옮겨도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기를 두어 달.
 어느새 집 앞 텃밭의 감자 줄기가 꽤나 자라 올라왔다.
 기온 역시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 있는 것이 한낮에는 꽤나 덥다.
 하나 그것과는 정반대로 오크 서식지에 서식하는 오크들의 숫자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다.
 모두 리암의 작품이었다.
 ‘소드 엑스퍼트(Sword expert)’.
 오러로 만든 ‘무형의 검’을 생성할 수 있을 정도의 단계는 아니더라도 오러(Aura)로 검 주변을 두를 정도의 경지이다.
 소드 마스터로 가는 길목 정도라고 보면 되겠다.
 어느새 리암은 자신의 실력은 엑스퍼트의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물론 공작의 전성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미약한 실력이지만, 보통의 기준으로 볼 땐, 꽤나 훌륭한 수준이다.
 실력을 회복하고 있던 그는 조금씩 서식지의 오크들을 제거해 나갔다.
 숲의 외곽부터 한 마리 한 마리씩.
 그들의 숫자가 꽤나 많았기에, 아직도 많은 수의 오크들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리암은 차근차근해 나갈 생각이었다.
 감각도 날이 갈수록 점점 예리해지고 있다.
 오늘도 오크 서식지의 오크들의 숫자를 쥐도 새도 모르게 줄여 나가려던 그였지만, 오크 녀석들도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모양이다.
 바로 어제만 해도 없던 순찰조가 돌아다니질 않나, 서식지 입구에는 어제의 배나 되는 인원이 경계를 서고 있으니까 말이다.
 ‘흠··· 아직 전면전은 무리인데.’
 리암은 눈앞의 커다란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순찰조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두 마리의 오크 전사가 나무 바로 아래쪽을 지나갈 무렵, 공격을 시작했다.
 그의 숏 소드가 오크 전사의 머리통을 그대로 찍어 내려갔다.
 “끅···.”
 머리 위에서부터 그대로 관통당한 녀석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나머지 한 녀석이 동료가 쓰러지고 나서야 상황을 눈치챘다.
 녀석은 오른손의 도끼를 치켜들고는 리암에게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검이 오크의 머리통에 깊게 박혀 잘 빠지지 않자, 리암은 검에 오러를 둘러 관통 부위를 넓혔다.
 ―카앙!!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다.
 간신히 빼낸 리암의 숏 소드가 오크 전사의 도끼를 막아 냈다.
 그리고 그것을 능숙한 타이밍으로 옆으로 흘려낸 그의 검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오크 전사를 공격했다.
 오크 특유의 강인한 육체도 오러를 두른 검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리암의 숏 소드가 오크 전사의 몸통을 갈랐다.
 도끼를 휘두르며 저항한 오크였지만, 승패는 이미 갈린 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크는 몸 곳곳에 상처를 입고 그대로 쓰러졌다.
 “휴우··· 아직 근력이 딸리는구만.”
 머리를 따라오지 못하는 육체가 조금은 답답했지만, 그래도 빠른 속도로 감각을 끌어 올리는 도중이었기에, 조급해하지는 않기로 했다.
 리암이 쓰러져 있는 오크들의 품을 뒤졌다.
 “응···?”
 쓸만한 것은 별로 나오지 않았지만, 처음에 공격당한 녀석의 몸통에 낡은 가죽 자루 하나가 매달려 있다.
 왠지 모를 설렘을 품고 리암은 가죽 자루 안을 뒤졌다.
 “뭐야 이건?”
 금붙이라든지의 값나가는 귀중품을 기대했던 리암이었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가죽 주머니 안에는 작물로 보이는 무언가가 들어있다.
 생긴 것은 영락없는 고구마지만 색깔은 영롱하다 싶을 정도의 빨간색.
 “설마···?”
 ‘로열 스위티(Royal sweety)’.
 농민들의 언어로는 ‘사과 고구마(Apple sweet potato)’.
 오래전 제국에서 먹어 본 적이 있는 녀석이다.
 당도가 높은 정도를 넘어 달콤한 사과 맛이 나는 고구마로 오죽하면 농민들이 붙인 이름이 사과 고구마일까.
 이 녀석은 귀족들의 디저트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던 녀석이다.
 그 맛은 호박 고구마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런 귀한 녀석을 오크의 낡은 가죽 자루에서 발견하게 될 줄이야.
 ‘공급은 딸리는데 귀족들의 무분별한 수요로 인해 씨가 말라 버렸다고 들었는데, 이런 곳에 숨어 있었냐.’
 로열 스위티의 희귀성을 고려했을 때, 가방 안의 열 개가 넘는 이것은 단지 이 녀석의 개인 소지품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순찰 중에 일부 열매를 수확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녀석은 주로 숲속에서 잘 자라니까.
 ‘이 숲 어딘가에서 자라고 있구만.’
 예상이 맞는다면 정말 귀중한 수확이다.
 정말로 이 숲 어딘가에 로열 스위티의 밭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조만간 본인이 이 숲을 차지했을 때, 그것까지 통째로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 생각하는 리암이었다.
 ‘일단 오늘은 돌아갈까.’
 
 <『소작농의 아들이 더 행복함』 1-2권에 계속>

댓글(7)

k8***************    
가끔 이런 소설 쓰는 작가 양반 주위 인간들이 얼마나 인성이 글러 먹은 인간들 뿐일까 싶다 솔직히 인간이 더러워도 저런 상황에서 저런 반응은 사패들이나 가능한 반응이다
2020.01.19 15:31
대여평가원    
원래 대여면 3권까진보는데 오랜만에 포기한다...
2020.09.28 02:15
창천낙화    
인간의 이기심이라는 상투적인 클리셰를 이렇게까지 실망스럽게 써나갈 수 있다니....
2020.09.30 11:41
030327gf    
으음_ 욕설이 쫌~ 너무~ 그렇타! 난 도망
2020.10.01 13:21
또또집사님    
난 잼나는데.. 욕이 주를 이루는 것도 아니고 캐릭터 특성 상 잠깐 나오는 정도라고 느껴지는데... 사실 개취라 상관없지만 댓글이 너무 별로라고만 써있어서 댓씀 잼나요 작가님ㅋㅋ
2020.10.03 04:35
threeon    
이건 무슨... 대화 행동들이 절대자들이 아닌데...? 그냥 갑자기 힘만 쎄진 초딩들 아닌가..? 특히 주인공 이고깽하러온 초딩인가?
2020.10.15 16:14
s4*****    
이건 제목과 글의 내용이 이정도로 불일치 할줄이야 힘이있고 조용히 사는게 힘들고 어느정도 사이다는 넘어가려했는데 그냥 존나빠르게 원래힘찾아가면서 복수활극인듯 그럼 왜 제목이 이따위인거냐 ㅋ 수준존나 낮네 ㄷㄷ
2021.12.10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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