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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기사 1-1권

2019.11.13 조회 1,840 추천 9


 클라인 백작가의 둘째
 
 
 
 
 
 
 클라인 가문은 제논 왕국의 개국공신 가문으로 그 유서가 깊고 대대로 명망 깊은 가문이다. 문사 가문인 클라인 가문은 후작가문으로는 드물게 영지를 소유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귀족들에게 무시를 당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다른 귀족들이 클라인 가문의 눈치를 살피는 실정이었다.
 이유인즉, 클라인 가문이 제논 왕국의 내정을 좌지우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항간에는 국왕마저도 클라인 가문이 하는 일에 대해서 왈가왈부 하지 못한다는 말이 떠돌 정도로 권력이 대단했다.
 하지만 그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클라인 가문의 권력이 너무 대단하다보니 다른 귀족들은 물론, 국왕까지 클라인 가문을 경계하고 나섰다.
 대대로 왕가에 충성을 받쳐온 클라인 가문으로써는 다른 귀족들은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들의 군주인 국왕마저 등을 돌리게 만들 수 없다는 생각에 무력부분에서는 완전히 손을 놓기로 했다.
 다른 귀족들은 기사단을 몇 개씩 만들어도 클라인 가문만은 안전을 위한 호위 기사를 제외한 다른 병력을 구성하지 않았던 것이다.
 귀족들과 국왕은 아무리 대단한 권력을 쥐고 있는 클라인 가문이라고 해도 그것을 뒷받침해줄 무력이 없으면 자신들의 위협상대가 안된다고 판단하고 더 이상 클라인 가문에 대해서 경계를 하지 않았다.
 한동안은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흘러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제논 왕국에 내란이 벌어지면서 이것이 큰 문제가 되었다.
 당시 천재라고 불리던 로버트 클라인 후작이 재상자리에 오르면서 제논 왕국은 최절정의 번영을 이루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것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국왕이 타락하기 시작했고, 귀족들 역시 조금씩 딴마음을 먹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어이없게도 로버트 클라인 후작이 일을 너무 잘했기 때문이었다.
 완벽.
 로버트 클라인 후작은 모든 일을 너무나도 완벽하게 해냈다.
 로버트 클라인 후작이 국정을 주도하면서 귀족들은 물론 평민들의 집까지 곡식이 넘쳐날 정도가 되었다. 이 덕분에 모든 사람(노예를 제외한)의 얼굴에 웃음꽃이 떠나지를 않았다.
 국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다른 여덟 왕국들은 감히 제논 왕국을 넘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언제나 자신들이 최고라고 칭하며 다른 왕국들을 무시하던 대륙 유일의 제국, 코사드 제국도 로버트 클라인이 있는 제논 왕국만큼은 인정한다고 할 정도였다.
 다른 왕국들은 물론 저 오만한 제국마저도 자신들을 인정해주자, 사람들은 자신들이 제국민이 된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이런 식으로 10년이 흘러가자 국왕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나태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이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아도 왕국이 너무나도 잘 돌아가자 국왕은 골치 아픈 정치문제를 모두 로버트 클라인 후작에게 떠넘겼다.
 이후 국왕은 매일 매일 파티를 열어 음주와 가무를 즐겼다. 이대로 간다면 과도하고 과다한 파티로 인해 국고가 바닥이 날 것 같았지만, 로버트 클라인 후작이 너무나도 일을 잘해 국고는 언제나 풍족했다.
 이렇게 되면 국왕이 주지육림에 빠져 있어도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지만, 귀족들의 입장에서는 그게 또 그렇지가 못했다.
 문제는 로버트 클라인 후작이 다른 귀족들을 너무 조른다는 것이었다.
 대대로 충신가문이었고, 국왕파인 로버트 클라인 후작은 국왕이 점점 나태하고 탐욕에 빠질수록 국왕에게 충정어린 질책을 하기보다는 다른 귀족들이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그들 행동에 제재를 가했다.
 가령 귀족들이 가질 수 있는 사병의 수를 제한한다거나, 귀족들이 이동을 할 때 미리 목적지와 가는 목적을 신고하게 한다거나, 요직에 있는 귀족들의 자제들을 왕실에서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수도로 불러드려 그들을 철저하게 감시했다.
 그렇지 않아도 왕권이 너무 강화되어 자신들의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던 귀족들은 이대로 간다면 종국에는 자신들에게 허울뿐인 귀족이라는 이름만 남을 것이라는 위기의식에 내란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도 너무 쉽게 제압되고 말았다. 왕국내의 크고 작은 일에 대해서 자신의 손바닥 보듯이 뻔히 보고 있던 로버트 클라인 후작은 사전에 이 모든 정보를 취합하여 그들이 본격적으로 일을 벌이기 전에 모두 체포해버린 것이다.
 내란은 이렇게 쉽게 종식되는가 싶었는데,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왕실 기사단 소속의 기사 몇몇이 로버트 클라인 후작을 살해한 것이다.
 이들은 결코 내란에 관련된 자들이 아니었다. 그런대도 이들이 로버트 클라인 후작을 살해한 것은 평소 로버트 클라인 후작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버트 클라인 후작은 천재 중에 천재였다. 그리고 너무나도 오만했다. 평소 자신이외의 사람들은 모두가 바보라고 생각하던 그는 특히, 기사들을 별로 좋지 않게 생각했다. 툭하면 칼부터 뽑고, 무식하게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한다며 언제나 기사들을 깔보았다.
 원활한 국정운영을 위해 왕실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던 로버트 클라인 후작은 왕실기사단과 마주칠 일이 많았는데, 그럴 때면 언제나 기사들의 신경을 거스르는 말을 툭툭 내뱉기 일쑤였다.
 결국 참다못한 기사들이 내란이 벌어진 것을 이용하여 로버트 클라인 후작을 살해한 것이다.
 기사들은 잡혀온 귀족들을 풀어주고 그들의 내란에 동조하기로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좀 더 일을 키워서 자신들이 한자리 차지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일은 생각대로 되지가 않았다.
 그동안 로버트 클라인이 영주나 다른 귀족들의 힘을 철저하게 제한을 시켜 많은 수의 귀족들이 내란에 동참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군대를 만들 수가 없었다. 결국 이들은 국왕파의 토벌군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이 일로 인해 제논 왕국의 많은 것이 바뀌게 되었다.
 로버트 클라인이라는 거목이 사라지자,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수많은 귀족들이 그의 뒤를 잇기 위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그들은 로버트 클라인이 움켜쥐고 있던 권력을 탐내었다.
 하지만 로버트 클라인이 움켜쥐고 있던 권력은 너무나도 막대해서 한 개인이 차지하는 것은 무리였다. 결국 귀족들은 로버트 클라인이 쥐고 있던 권력을 나눠먹기로 했다.
 그리고 귀족들은 제 2의 로버트 클라인이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썼다. 원래라면 로버트 클라인의 아들이 후작의 작위를 계승해야 했지만, 그 아들이 아직 제대로 된 공적을 쌓은 것이 없다는 억지 논리를 펼쳐 클라인 후작가문을 백작가문으로 강등시켰다.
 더불어 그동안 공신가문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했다면 클라인 가문에 영지를 하사했다.
 얼핏 보면 영지를 하사받은 것은 클라인 가문 자체적으로 잘된 일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못했다.
 다른 귀족들이 클라인 가문에 영지를 하사한 진짜 이유는 이제는 중앙정치에서 손을 떼라는 일종의 경고였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기사단 하나 없고, 로버트 클라인마저 죽었다고 하지만, 클라인 가문이 왕국 내에 끼치는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했다.
 그래서 영지라는 보상을 주면서 중앙 정치에서 손을 떼라는 경고를 보낸 것이다.
 만약 클라인 가문이 끝까지 제논 왕국의 내정을 자신들의 뜻대로 하려고 한다면 왕국에는 크나큰 피바람이 불 것이 자명했다.
 왕가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클라인 가문사람들은 자신들로 인해 왕국의 국력이 소모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더불어 그렇게 해봤자 자신들만 손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자신들도 나름의 실속을 챙기면서 다른 귀족들이 원하는 대로 한 발짝 물러나기로 했다.
 이리하여 클라인 가문은 후작 가문에서 백작 가문으로 강등이 되었고, 국경지대에 위치한 랄프 산맥의 한 귀퉁이에 위치하고 있는 요르크 영지를 가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클라인 가문은 더 이상 문사의 가문이 아니게 되었다.
 아무리 높은 권력을 손에 거머쥔다고 해도 결국 무력을 갖추지 못하면 한순간 파도에 의해 사라지고 마는 모래성과 같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게 된 클라인 가문은 문이 아닌 무를 숭상하게 되었다.
 로버트 클라인 후작이 청렴하고 부정부패를 저지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클라인 가문이 가난한 것은 아니었다. 원래부터 재산이 많았던 클라인 가문은 재산을 불리는 것에도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비록 중앙에서 밀려나기는 했지만 재산이 많았던 클라인 가문은 그 막대한 자금을 들여 상승의 검술서를 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십 수백의 검술서가 모이자 클라인 가문의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연구하여 보다 뛰어난 검술서를 만들어 냈다.
 이제는 최상승의 검술서라고 알려진 클라인 검술서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클라인 가문은 이렇게 무력을 갖추게 되었지만, 중앙으로 복귀하는 것은 좀처럼 쉽지가 않았다. 클라인 가문의 무서운 저력을 잘 알고 있는 중앙귀족들은 클라인 가문이 중앙정치에 복귀하는 것을 결코 반기지 않았다.
 평소에는 서로 죽기 살기로 싸우던 귀족들이 클라인 가문이 중앙으로 복귀하려는 작은 낌새만 보여도 언제 그랬냐는 듯 정답게 손을 맞잡고서 방해공작을 펼쳤던 것이다.
 클라인 가문으로써는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던 찰나에 이웃하고 있던 어빙스 후작 가문이 클라인 가문에 한 가지 제안을 해왔다.
 한 가지 제안, 그것은 두 가문이 혈연관계를 맺어 함께 중앙에 진출하자는 것이었다.
 클라인 가문으로써는 이득이 있으면 있었지, 결코 손해 볼 것은 아니기에 곧바로 수락했다.
 어빙스 후작 가문.
 어빙스 후작 가문 역시 개국 공신 가문이다. 어빙스 가문은 클라인 가문과 달리 무를 숭상하는 가문이다. 이들은 골치 아픈 정치싸움보다는 실질적인 무력을 갖추어 권력을 누리려고 했다.
 어빙스 가문은 100년 전 클라인 가문이 중앙에서 쫓겨나자 크게 비웃었다.
 이때만 해도 어빙스 가문은 이제부터 자신들의 시대가 도래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헌데 웬걸,
 어빙스 가문은 엄청난 양의 재물과 공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에는 발끝도 내밀지를 못했다. 온갖 음모와 암투가 난무하는 정치판에 대해서 눈곱만큼도 알지 못하고, 오로지 저돌적인 돌진밖에 몰랐던 어빙스 가문은 다른 귀족들에게 실컷 이용만 당하다가 결국 버려지고 말았다.
 이때부터 어빙스 가문 역시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가문내의 여론에 의해서 그들도 정치판에 대해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헌데 정치에 대해서 공부를 하면 할수록 정치라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어빙스 가문은 그동안 중앙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무력을 늘리는 것에만 관심을 집중하다보니 중앙에 이렇다 할 연줄이 없었다.
 연줄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문제가 되었다.
 평소에는 서로 못 잡아먹어선 안달인 중앙 귀족들이 지방의 귀족이 중앙으로 진출하려고 하면 합심을 하여 방해공작을 펼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지방 귀족의 중앙 진출이 상당히 어려웠는데, 그래도 중앙에 제법 튼튼한 연줄이 있으면 중앙에 진출하는 것이 결코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어빙스 가문은 뒤늦게 이것을 알고서 어떻게든 중앙에 연줄을 만들려고 했지만 이것이 결코 만만치 않으며, 설사 그렇게 연줄을 만들어 중앙에 진출한다고 해도 정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면 예전처럼 중앙의 귀족들에게 이용만 당할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자신들이 국경지대의 군권을 가지고 있는 후작 가문이라고 해도 중앙에 한발 걸쳐놓지 않으면 종국에는 중앙귀족들의 꼭두각시 노름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어빙스 가문은 그동안 제대로 된 기사단 하나 없다고 비웃었던 클라인 가문에 손을 내밀게 된 것이다.
 혼자서는 중앙에 진출하는 것이 힘들지만 두 가문이 힘을 합친다면 결코 불가능하지 않았다. 클라인 가문과 어빙스 가문이 서로 간에 부족한 점을 메워준다면 중앙의 귀족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에 두 가문은 정략결혼을 하게 되었다.
 현 클라인 백작가문의 가주인 앤쏘니 클라인 백작과 현 어빙스 후작가문의 가주인 다론 어빙스 후작의 딸인 에지나 어빙스가 바로 그 당사자였다.
 비록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두 사람이었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진실로 상대를 대하게 되었고, 결혼 한지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원만한 부부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들 둘을 두게 되었는데, 그중 첫째인 찰스 클라인은 두 가문의 좋은 점만을 가지고 태어나 문과 무에서 뛰어난 재능을 선보였다. 사람들은 그런 찰스 클라인을 가리켜 제2의 로버트 클라인이라고까지 불렀다.
 이는 그만큼 찰스 클라인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뜻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는 중앙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 어빙스 가문과 클라인 가문인데, 그 후계자마저 저렇게 뛰어나니, 머지않아 어빙스 가문과 클라인 가문이 중앙을 완전히 장악하게 될 것이라고 중앙귀족들은 크게 우려했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근심과 걱정 속에 살아가던 중앙귀족들에게 어느 날 뜻밖의 낭보가 전해졌다.
 그 낭보란 아주 흉악한 소문이었다.
 클라인 가문에는 찰스 클라인 말고도 둘째인 램버트 클라인이 있는데, 그 둘째가 사악한 주술에 빠져 사람의 피를 마시며 생살을 씹어 먹는다는 소문이었다.
 소문의 진위여부보다는 어떻게든 어빙스 가문과 클라인 가문에게 해가 되는 여론몰이에 열을 올리던 중앙귀족들은 이거다 하고서는 소문을 더욱 부풀려 수도권은 물론 제논 왕국전체에 악의적으로 퍼뜨리기 시작했다.
 이를 테면 클라인 가문의 모든 사람들이 악마를 숭배하는 사이비 종교에 빠져 사람의 피와 살을 즐기며 심지어 갓 태어난 아기의 골수를 디저트로 먹는다는 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이에 제논 왕국의 귀족이고 평민이고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불같이 들고 일어나 클라인 가문을 엄단에 쳐해야 한다고 성토했다.
 여기에 클라인 가문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누군가의 악의적인 모함이라고 항변했다. 그리고 이런 얼토당토하지 않는 소문을 퍼뜨린 자가 누구인지를 알아내어 기필코 죗값을 치르게 하겠다고 나섰다.
 클라인 가문이 너무나도 당당하게 나서자 중앙귀족들은 혹시 자신들이 클라인 가문에 역으로 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었다.
 이를테면 클라인 가문에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소문을 은근슬쩍 흘려놓고 중앙귀족들이 그것을 덥석 물면, 미리 준비해둔 그 모든 것이 허위라는 증거를 들이밀며 이 일에 조금이라도 관련된 중앙귀족들을 쳐내기 위한 그런 음모가 아닐까 하고 의심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중앙귀족들이 자체적으로 이번 일에 대해서 은밀히 조사를 해보니, 소문의 근원지가 바로 클라인 가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제야 중앙귀족들은 이 모든 것이 클라인 가문의 음모였음을 깨닫고 더 이상 소문이 확산되지 못하게 막았다. 더불어 자신들의 힘으로 이 소문을 와해시켜 자신들은 이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증명하려고 했다.
 중앙귀족들의 이런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어 클라인 가문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은 점점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이번일의 원흉이 이웃하고 있는 적대 국가 루지왕국이라는 소문이 돌기시작하면서 제논 왕국사람들은 이번일의 진정한 피해자는 클라인 가문이라고 다들 생각하게 되었다.
 쾅!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한 앤쏘니 클라인 백작이 평소 끔찍이도 아끼던 골동품 테이블을 주먹으로 강하게 내리치고 말았다. 무시무시한 분노가 서린 그의 주먹에 강력한 보존 마법이 걸려있다는 골동품 테이블은 결국 ‘쩌저적’ 하는 소리와 함께 보기 흉할 정도로 금이 가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의 앤쏘니 백작에게는 그것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으드득
 “네놈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내 앞에서 그런 헛소리를 지껄인단 말이냐?!”
 “아니 노예 하나만 더 달라고 하는데, 그게 그렇게 화를 내실 일입니까?”
 “이, 이놈이 그래도!”
 인내의 한계에 달한 앤쏘니 백작은 당장에라도 검을 뽑아들 기세이다.
 “백작님, 제발 고정하십시오. 그리고 둘째 도련님도 그만 하십시오.”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크윽, 내 저놈을.”
 “아 진짜, 알았어요. 알았어. 그깟 노예하나 얼마나 한다고.”
 클라인 백작가의 둘째 램버트 클라인은 휭 하니 아버지인 앤쏘니 백작의 집무실에서 나가버렸다.
 “저, 저, 저놈이...”
 “진정하십시오. 백작님.”
 “에휴, 저놈이 제 형의 반만, 아니 그 반에 반만 닮았어도...”
 “둘째 도련님이 아직 어리셔서 그런 겁니다. 조금만 참고 기다려 보시지요.”
 “어려? 16살이 뭐가 어리단 말인가? 그리고 자네 눈으로 직접보지 않았나, 그 지옥 같던 광경을? 그런데도 그런 말이 나온단 말인가?”
 앤쏘니 백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집사 하론도 더 이상 뭐라고 할 말이 없었는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이제껏 클라인 가문의 집사노릇을 하면서 볼 것 못 볼 것 다 보아왔다고 자부하는 집사 하론이었지만 얼마 전에 보았던 그날의 광경은 정말이지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그만큼 그날의 광경은 끔찍하고 무시무시했다.
 집사인 하론은 물론 램버트의 아버지인 앤쏘니 백작마저 학을 떼게 만든 사건, 그것은 바로 제논 왕국을 강타했던 바로 그 소문의 진실이었다.
 그날은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무척이나 평범한 날이었다.
 집사 하론은 언제나 그랬듯 정해진 일과를 충실하게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동안 잊고 있었던 일 하나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것은 한 달 전 램버트 둘째 도련님이 개인적으로 필요하다고 해서 2명의 건장한 노예를 보내주었던 일이었다.
 그때는 이것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헌데 오늘 아침에 램버트 둘째 도련님이 찾아와서는 또 다시 건장한 남자 노예 한명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일전에 보내준 노예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또 다른 노예가 필요하다니,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이어, 2년 전부터 램버트 도련님이 사비로 노예를 사 모으고 있다는 이야기가 어렴풋이 떠오르면서 왠지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졌다.
 명확한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2년 전부터 집밖으로 자주 출타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노예들을 데려다 쓸 만한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건장한 남자 노예들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이 불길한 생각을 하게 만든 것이다.
 2년 전, 램버트 도련님이 구석에 있는 오래된 창고를 자신만의 개인 공간으로 개조한 후 두문불출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오르면서 더욱 확신에 차게 되었다.
 집사 하론은 ‘설마, 아닐 꺼야.’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램버트가 거의 살다시피 하는 창고를 향해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끼익-
 녹이 슬었는지, 잘 열리지 않는 창고 문을 힘겹게 여는 집사 하론의 머릿속에는 온갖 불결하고 추잡한 모습들이 상상이 되었다.
 벌거벗은 건장한 남자 노예들과 마찬가지로 벌거벗은 램버트 도련님이 뒹굴고 있는 구역질나는 모습을 떠올리던 집사 하론은 어떠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더라도 결코 놀라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지만, 정작 창고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본 순간 너무나도 놀라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누구야? 내가 분명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고 했지!”
 한참 작업에 열을 올리던 램버트는 뜻하지 않는 방해꾼으로 인해 일에 차질이 생기자 화가 났다. 도대체 어떤 간 큰 놈이 자신의 지엄한 명을 어기고 자신만의 창고 안으로 들어왔는지 혼을 내려고 했다.
 “뭐야? 집사였어? 집사가 여긴 웬일이야?”
 손가락하나 까닥하지 못하는 집사 하론이 램버트의 말에 대답할리 만무했다.
 짝-짝-
 램버트가 정신을 차리라고 뺨을 때리자 집사 하론은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도, 도련님, 도, 도대체 여기서 무엇을 하시고 계셨던 겁니까?”
 “알 것 없어. 그나저나 집사가 여긴 웬일이야? 나는 분명 아무도 여기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도대체 이게다 무슨 짓입니까?!”
 쉽사리 화를 내지 않는, 특히나 자신의 상전인 클라인 가문의 사람에게는 무슨 일이 있던지 공손하게 대하던 집사 하론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는 천인공노할 광경에 집사 하론은 이것저것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아, 진짜, 그러니까 내가 함부로 여기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 괜히 들어와서는... 오늘일은 못 본 걸로 해.”
 “그,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십니까?”
 “그럼? 지금 이걸 아버지께 말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아버지가 얼마나 역정을 내실지 알고 하는 말이야?”
 “그러기에 왜 이런 일을 저지르셔서...”
 집사 하론은 아직도 기가차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처음 이 광경을 보았을 때보다는 많이 나아진 상태였다. 그래서일까, 좀 전보다는 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가 있었다.
 물론 가장 올바른 방법은 자신이 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앤쏘니 백작에게 알리는 것이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램버트의 말대로 앤쏘니 백작이 크게 역정을 낼 것이고, 더불어 이 일이 자칫 외부로 알려지기라도 하면 클라인 가문은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하론의 집안은 대대로 클라인 가문의 집사노릇을 하면서 충성을 다해왔다. 그런 하론 이기에 클라인 가문에 해가 되는 일은 할 수가 없었다.
 집사 하론은 지금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하고 생각했고, 이윽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집사 하론이 내린 결론, 그것은 오늘 자신이 본 일에 대해서 죽을 때까지 함구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작게는 램버트 도련님께 피해를 주지 않고 나아가서는 클라인 가문을 지키는, 그야말로 양쪽 다 피해를 주지 않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집사 하론이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자신의 뜻을 막 램버트에게 말하려고 하던 찰나, 뜻하지 않은 또 한사람이 창고에 막 발을 들였다.
 “집사, 도대체 여기서 무엇을...헉! 이, 이게 다 무슨 짓이냐?!”
 집사 하론에게 은밀하게 시킬 일이 있던 앤쏘니 백작은 집사 하론이 램버트의 개인 창고로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홀로 창고로 향했다.
 이때 만해도 한동안 신경을 쓰지 못했던 둘째의 얼굴도 볼 겸, 집사에게 일도 시킬 겸 겸사겸사 창고로 왔는데, 그로 인해 이제껏 둘째가 저지르고 있던 천인공노할 짓거리를 보게 될 줄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충격.
 그것은 너무나도 엄청난 충격이었다.
 차라리 집사 하론이 상상하던 것처럼 램버트가 남색을 즐기고 있었다면 앤쏘니 백작이 받은 충격은 덜했을지 모른다. 귀족 중에서 남색을 즐기는 자는 생각 외로 많았다. 이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말하고 다니지는 않는 그런 일이었다.
 각설하고, 지금 앤쏘니 백작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16살이 된 자신의 아들이 남색을 즐기는 것 보다 더한 충격을 선사했다.
 “이, 이게 다 뭐란 말이냐?! 네 이놈!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이냐?!”
 “웬일이래요? 아버지가 이 누추한 곳까지 몸소 다 오시고?”
 램버트는 격노하고 있는 앤쏘니 백작을 향해서 살짝 비아냥거렸다.
 “이, 이, 이놈이!”
 앤쏘니 백작은 당장에 검을 뽑아 램버트를 벨듯했다. 만약 집사 하론이 그 자리에 없었다면 진정 그리했을지도 모른다.
 “백작님, 진정, 진정하십시오. 화를 내시는 것은 나중에라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보다는 이 일이 외부로 알려지지 않게...”
 “헛! 그렇지.”
 집사 하론의 말에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언인지 깨달은 앤쏘니 백작은 재갈이 물린 채 나무 침대에 묶여있는, 살려달라는 애원의 눈길을 끝없이 보내고 있는 노예의 목을 가차 없이 베어버렸다.
 괜한 동정심으로 살려주었다가는 오늘 일에 대해서 새나갈 수 있기에 앤쏘니 백작은 손속에 인정을 두지 않았다.
 “어? 아직 써야 하는데...”
 “이놈이 그래도!”
 “아, 알았어요. 알았어. 겨우 노예 몇 놈 때문에 그렇게 화를 내시다니...”
 “저, 저 저놈이 그래도...”
 “백작님, 제발, 제발 진정하십시오. 그리고 도련님도 그만하십시오.”
 “쳇.”
 램버트는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표정으로 창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이고, 저런 놈이 내 아들이라니.”
 앤쏘니 백작은 밀려오는 두통에 골치가 아파왔다.
 “백작님, 여기서 이러고 계실 시간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이곳의 일을 알기 전에 이 모든 것을 없애야 합니다.”
 “그, 그래 그렇지. 헌데 그게 가능하겠나?”
 “맡겨만 주십시오.”
 “그래, 내 집사만 믿겠네.”
 오늘 일로 십년은 더 나이가 들은 듯한 앤쏘니 백작이 비틀 비틀 거리며 힘없이 창고를 빠져나갔다.
 뒤이어 집사 하론이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집사 하론은 은밀히 술 저장창고로 들어가 그중에서 가장 독한 술들을 꺼내왔다.
 처음에는 기름을 사용하려고 했지만 창고를 완전히 불태울 만큼의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괜히 바깥에서 기름을 사왔다가 나중에라도 누가 의심을 할까 싶어서 저택에 있던 독한 술들을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대부분이 앤쏘니 백작이 거금을 주고 구한 오래된 명주들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아까워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집사 하론은 오래된 명주들을 모두 창고에 들이 부은 후 창고에 불을 질렀다.
 확실히 술이 독한 만큼 불길도 거세게 타올랐다. 창고 안에 있는 것들은 모두 재로 만들어야 했기에 집사 하론은 불을 끄러온 노예들에게 불을 끄지 못하게 했다.
 대신 불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못하게 주변을 에워싸도록 했다.
 불을 끄려고 하다보면 다칠 수도 있었다.
 헌데 집사가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자 노예들은 속으로 ‘얼씨구나.’ 하고 ‘좋아라.’ 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불타올라 재로 끝나는가 싶었는데, 창고 안에 있던 뼈들 중에 전부 타지 않은 뼈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노예들이 재가 된 창고를 청소하다가 타다만 뼈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어떻게 외부로 흘러나가 흉악한 소문으로 와전이 되었다.
 여기에는 램버트의 평소행실이 어느 정도 일조하기도 했다.
 클라인 가문의 노예들은 평소에도 램버트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가족들은 모두 활달하고 자애로운 것에 반해 램버트는 평소에도 무척이나 음침했고, 노예들이 저지르는 작은 실수에도 불같이 화를 냈다.
 거기다가 램버트의 창고로 노예들이 들어가는 것은 다들 보았는데, 이상하게도 여태껏 단 한명도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해 다들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자기들끼리 상상의 나래를 펴던 노예들은 오직 램버트만이 사용하는 창고에서 뼈가 발견되자, 램버트가 혹시 악마를 숭상하는 사교에 빠진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소문이라는 것이 한 다리 거치고 두 다리 거치면 없던 이야기도 생기고, 더 부풀려지듯이 노예들끼리의 이야기가 어떻게 외부로 흘러나가더니 걷잡을 수 없이 크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소문이라는 것이 정말로 소문에 그친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데, 노예들이 상상해낸 이 이야기가 사실에 거의 근접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어설프게 대응했다가는 더 큰 타격을 받을 거라는 우려에 앤쏘니 백작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한순간, 소문을 거꾸로 이용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렇게 하려면 클라인 가문의 힘만으로는 부족했다. 자신들의 반대파인 중앙귀족들 사이에서 동조여론을 만들어야 했는데, 그렇다고 이것이 또 불가능 한 것은 아니었다.
 정치라는 것이 그랬다.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아군도 없었다. 필요에 따라서 적과 힘을 합치기도 하고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다 싶으면 같은 편이라고 해도 가차 없이 잘라버리는 것이 바로 정치였다.
 앤쏘니 백작이 일전에 집사 하론에게 은밀히 시킬 일이라는 것이 바로 이 일이었다. 반대파 귀족 중에 앤쏘니 백작과 이래저래 소통하는 자들이 몇 명 있었다.
 앤쏘니 백작은 돈을 주고 그 자에게서 그 반대파의 정보를 사왔다. 이렇게 함으로써 앤쏘니 백작은 반대파가 어떻게 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서 발 빠르게 대응을 했고, 상대 귀족은 앤쏘니 백작에게 받은 돈을 정치자금으로 사용해 반대파 내의 자신의 입지를 더욱 굳건히 했다.
 앤쏘니 백작은 램버트 때문에 나가지 않아도 될 돈이, 그것도 엄청난 거금이 나가게 되어 속이 무척이나 쓰렸지만 우선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는 것이 상책이었기에 막대한 돈을 들여 역 공작을 펼쳤다.
 그리고 그것이 생각이상으로 잘 먹히자 앤쏘니 백작은 그제야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이게 불과 한 달 전의 일이다.
 앞으로 자중함은 물론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어야 할 둘째 놈이 지금에 와서 한다는 소리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방해했으니, 일을 마무리 짓게 또 다시 노예를 사달라는 것이었다.
 램버트가 두 눈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뻔뻔한 표정으로 이런 말을 하는데, 앤쏘니 백작이 어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으으- 저놈의 망종을 이대로 두면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집사!”
 “예, 백작님.”
 “저놈을 당장 쫓아내도록 하게.”
 “헉, 백작님 어찌 그런 말씀을, 그래도 아드님이신데...”
 “아들? 저놈은 아들이 아니라, 원수야 원수!”
 “그래도...그리고 마님께서 이 같은 사실을 아시면 가만히 있으시겠습니까?”
 “끄응- 그렇다고 저놈을 저대로 둘 수도 없지 않나? 그나마 어찌 어찌 해서 이번 일을 막았다 하지만 한번만 더 저놈이 사고를 치며 그때는 정말로...”
 “그것도 그렇긴 합니다만...아!”
 “뭔가? 뭐 좋은 생각이라도 난 것인가?”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게 씁니까?”
 집사 하론이 뭐라고 소곤소곤 거리며 말을 하자 앤쏘니 백작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군. 그렇게 몇 년 만 지내다 보면 저 놈도 정신을 차리겠지. 이보게, 집사.”
 “예, 백작님.”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그렇게 처리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다만 마님께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자네는 자네 일에 최선을 다하게.”
 “예, 알겠습니다. 백작님. 그럼 소인은 이만.”
 앤쏘니 백작은 집무실을 나가는 집사의 모습을 보며 실로 오랜만에 미소를 지었다. 그 일이 있고나서 처음으로 짓는 미소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날 그 광경을 보고나서는 식욕도 싹 달아났고, 밤에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눈만 감았다 하면 그날 본 그 지옥 같은 광경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떠올라,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헌데 오늘만큼은 이상하게도 두발 쭉 뻗고서 편히 잠자리에 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것은 집사 하론도 마찬가지였다.
 “쳇, 내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이러는 거야?”
 심드렁한 표정의 램버트는 기분이 영 좋지가 않았다. 겨우 노예 몇 놈 때문에 자신을 영지로 쫓아내다니, 어떻게 아버지가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최소한, 최소한 자신이 왜 그랬는지, 한번쯤은 그 이유에 대해서 물어볼 수도 있었다. 헌데 아버지는 그 일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 뭐, 아버지가 그 이유에 대해서 물어보았다고 해도 정직하게 대답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그래도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는 것이 무척이나 기분 나쁘고 섭섭했다.
 ‘과연 찰스 형이 그렇게 했더라도 나한테 하신 것처럼 하셨을까?’
 램버트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데...아마도 찰스 형이 그렇게 했다면 분명 그 이유에 대해서 물었을 것이다. 아니 이유를 묻기도 전에 잘했다고 칭찬부터 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언제나 형에게 그랬다.
 형이 무엇을 하던 오직, 칭찬, 칭찬! 칭찬밖에 해주지 않았다.
 그에 비해 램버트에게는 언제나 꾸중이었다. ‘넌 왜 네 형처럼 하지 못하냐? 넌 왜 네 형의 반만큼도 하지 못하냐? 넌 그냥 가만히 있어라, 사고 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가문과 형을 위하는 일이다.’
 아버지는 언제나 입만 열면 형! 형! 형! 형이었다.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단 한번만이라도 형을 볼 때의 그 따뜻한 시선으로 ‘너도 나의 자랑스러운 아들이다.’라고 단 한마디만 해주기를 바랐는데, 언제나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시선뿐이었다.
 “쳇, 잘됐어. 아버지가 그렇게 나오면 나도 내 마음대로 하겠다 이거야. 내가 손해 볼게 뭐있어? 손해를 보면 아버지가 보는 거지. 아버지, 나중에 가서 땅을 치며 후회하지 마십쇼.”
 방금 전까지 심기가 편치 않아보이던 램버트의 표정이 삽시간에 바뀌더니 뭐가 그리도 재미있는지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옆에서 봤다면 심각한 정신병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이 들 정도였다.
 “흐흐흐, 어차피 그놈이 마지막이었어.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확인 작업을 했으면 좋았겠지만 알고자 하는 것은 전부 다 알아냈으니, 그걸로 만족해야지.”
 손에 들린 책을 바라보는 램버트의 얼굴에 섬뜩 하리 만큼 무서운 광기의 미소가 어리었다.
 다른 건 다 필요가 없었다. 이 책만 있으면 됐다.
 가족? 아버지? 형? 엿이나 먹으라지.
 ‘쩝, 그래도 어머니는...’
 어머니, 가족 중에 유일하게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주는 어머니.
 이렇게 영지로 쫓겨 내려간다면 언제 어머니를 뵐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 한곳이 아려왔다.
 “에이씨- 안 울어, 내가 왜 울어. 청승맞게.”
 램버트는 말은 이렇게 하고 있지만 누군가가 툭 하고 건드리면 당장에라도 주르륵 하고 눈물을 흘릴 것처럼 눈가에는 이미 이슬이 한가득 맺혀있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렇게 잔인한 짓을 저지른 악마 같은 자에게도 눈물이 있을까 하겠지만, 램버트의 나이 이제 겨우 16살이었다. 어려서부터 사랑을 갈구해왔고, 지금도 한창 사랑을 받으며 커야할 나이였다.
 램버트가 그러한 일을 저지른 이유도 알고 보면 가족으로부터 사랑을 받기 위해서였다.
 램버트의 나이 14살 때.
 램버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인 앤쏘니 백작으로부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검술수련을 하는데 있어서 형만큼, 아니 형의 반만큼도 하지 못한다고 앤쏘니 백작이 크게 역정을 냈는데, 램버트는 그걸로 크게 상처를 입었다. 램버트가 앤쏘니 백작에게 혼나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지만, 그날은 다른 날과 달랐다. 그날은 바로 램버트의 생일이었던 것이다.
 생일축하는 고사하고 아버지로부터 호된 꾸지람만 받게 되자 램버트는 너무나도 서러워졌다. 자신이 일부러 못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애를 써도 형처럼 안 되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그날 밤 램버트는 이대로 콱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다. 헌데 막상 죽으려고 하니 겁이 났다.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아 죽을 수도 없었다.
 “쳇, 내가 이렇지 뭐. 자살할 용기? 그딴 게 나한테 있을 턱이 없지.”
 램버트는 씁쓰레한 미소를 지었다. 어린 나이에 자살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만큼 심적 아픔이 크다는 증거였다.
 남들은 램버트의 성격이 음침하고 음흉하며 악독하다고 생각하지만, 원래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램버트의 원래 성격은 너무나도 여려서, 작은 일에도 쉽게 상처를 받은 타입이었다.
 그때, 그 일만 아니었다면, 아니 그때 형인 찰스가 램버트의 시선을 외며하지 않고 아버지 앤쏘지 백작이 무섭도록 차갑게 바라보지 않았다면...
 램버트가 그렇게까지 삐뚤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각설하고 이때까지만 해도 램버트의 마음속에는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은 남아있었다. 더불어 음침한 성격이나 음흉한 성격도 지금처럼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정도의 차이랄까?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것은 잔인한 면은 눈곱만치도 없었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여린 마음에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했다. 어쩌면 당당하게 자기할말을 하지 못하고 혼자서 꽁해 있는 그런 모습이 남들에게는 음침하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때까지만 해도 램버트는 그저 사춘기의 반항기어린 그저 그런 소년일 뿐이었다.
 그런 램버트에게 뜻하지 않은 운명이 찾아왔다.
 자신이 사라지면, 아니 죽으면 아버지가 자신을 찾기는 할까? 하는 생각에 자신의 방이 아닌 사람들이 거의 오지 않는 구석에 위치한 창고를 자살 장소로 선택했다.
 목을 매기 바로 직전까지도 언제쯤 아버지는 내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될까? 나의 죽음을 슬퍼하기는 할까? 어쩌면 변변치 않은 아들이 죽었다고 오히려 기뻐하지는 않을까? 하는 별의별 생각을 다했었다.
 그러다가 밧줄을 목에 거는 순간 너무나도 겁이 나서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왔다.
 머릿속으로 생각할 때는 쉬워보였는데, 막상 진짜 자살을 하려고 하니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렇게 자살에 실패하고 괜히 이 어두컴컴하고 음침한 곳을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잇, 그냥 방에서 할 걸. 괜히 여기로 왔잖아.”
 들어올 때는 몰랐는데, 막상 이곳을 나가려고 하자 왜 이렇게 어두운건지. 거기에 자살할 용기조차 없는 자신에게 너무나도 화가 났다. 솔직히 말하면 진짜 자살할 마음은 없었다. 그저 단순히 자살하려는 흉내만 내려고 했다.
 목에 밧줄을 감아, 밧줄자국을 만들어 아버지에게 보여줄 심산이었다.
 이를테면 나는 자살을 생각할 만큼 힘이 든다. 그러니 제발 나에게도 사랑을 다오. 뭐 이런 생각이었다. 헌데 워낙 겁이 많다보니 목에 밧줄을 살짝 거치자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던 것이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나약하고 겁이 많은 자신에게 화가 난 램버트는 눈앞에 뭐가 있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신경질적으로 발길질을 해됐다.
 이를테면 허공의 발길질인 셈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이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가슴속에 맺힌 이 울화를 어떻게든 풀고 싶어 무작정 발길질을 해됐다.
 툭
 발에 무언가가 부딪히는 느낌이 들더니 곧이어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뭐야?”
 램버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지금 있는 창고에 있는 것들은 가문대대로 내려오는 물건들 중에서 더 이상 쓸모가 없다고 여겨진 것들이다. 더불어 골동품 애호가인 아버지 앤쏘니 백작이 어디서 주워온 이상한 쓰레기들도 함께 보관하고 있는 일종의 폐품 창고였다.
 집사 하론은 이렇게 모인 것들을 언제고 날을 잡아 한꺼번에 처리하려고 하고 있었다.
 램버트 역시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눈앞에 떨어진 물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뭐야? 이 쓰레기는? 그러고 보니 여기 있는 쓰레기들은 도대체 언제 버리려고 하는 거야?”
 무엇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램버트는 신경질적으로 그 물건을 집어 들었다.
 부서석
 얼마나 낡았는지 손에 약간만 힘을 주었는데, 가루가 되어버렸다.
 “뭐, 뭐야? 얼마나 오래됐기에...엥? 책이잖아?”
 램버트는 그제야 자신의 발 앞에 떨어진 물건이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창고 자체가 어두웠고, 지금은 모두가 잠든 새벽이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일을 치를 동안 다른 사람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불을 켜지 않아 창고 안은 더욱 어두웠다.
 “책을 왜 여기다 뒀지?”
 램버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쇄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이곳은 책이 매우 귀했다. 책은 부유한 상인이나 귀족이 아니면 구경하기가 쉽지 않은 물건이다. 더군다나 이곳은 클라인 가문이 아닌가.
 비록 예전처럼 문을 숭상하지 않는다고 해도 여전히 책을 가까이 하고 있었다. 그런 클라인 가문에서 책을 이런 창고 안에 방치해 둔다?
 이것은 뭔가 이상했다.
 이것이 램버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램버트는 조심스럽게 그 책을 집어 들었다.
 푸스슥
 얼마나 오랜 된 책인지 조심한다고 했는데도 또다시 책의 일부가 부서져버렸다.
 램버트는 조심스럽게 책을 들고 창고 밖으로 나갔다. 창고 밖은 세 개의 달이 세상을 밝게 비추고 있어서 창고보다 밝았다.
 “보자. 이게 그러니까...헉!”
 워낙 오래된 책이다 보니 군데군데 글자가 뭉개져서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 사이에 희미하게나마 읽을 수 있는 하나의 이름을 보고서 램버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책에 언급되어 있는 이름.
 로버트 클라인.
 제논 왕국사람이라면 누구나가 한번쯤을 들어보았을 그 이름.
 클라인 가문의 사람이라면 결코 잊어서도 잊을 수도 없는 그 이름.
 그 이름이 이 책에 언급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조상인 로버트 클라인에 대해서는 램버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설마?”
 램버트는 이 책이 자신의 조상인 로버트 클라인이 남긴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조심스럽게 뭉겨져있는 앞뒤 글자들을 조합해 보니, ‘나 로버트 클라인은 이것을 이렇게 정리한다.’라고 쓰여 있는 것이 아닌가.
 램버트의 얼굴에 기쁨과 놀람이 교차했다.
 부서석
 “이런!”
 자신도 모르게 살짝 힘을 줬는지, 또다시 책이 부서져나갔다.
 “이걸 어떻게 한다?”
 참으로 난감했다.
 아직 전체적인 내용은 확인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조금만 읽으려고 하면 곧바로 부서져버리니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아! 그렇지.”
 순간적으로 램버트의 머리에 무언가가 번뜩였다.
 조심스럽게 책을 내려놓은 램버트는 곧바로 자신의 방으로 뛰어갔다.
 램버트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다시 돌아왔는데, 그의 두 손에는 종이와 필기도구가 들려있었다.
 “조심, 조심. 조심.”말 그대로 램버트는 조심스럽게 책을 다루었다. 램버트는 한 글자씩 자신이 준비한 종이에 조심스럽게 옮겨 적었다.
 “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램버트의 이마에는 땀이 한가득 이었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한가득 이었다.
 필사하는 과정에서 원래의 책은 영영 읽을 수 없게 되었다. 골동품 애호가인 앤쏘니 백작이라면 귀한 물건을 허망하게 잃었다고 크게 낙심 했을 테지만, 램버트는 그런 것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는 이제는 마음 놓고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더 기뻤다.
 헌데 필사한 책을 읽어가는 램버트의 표정이 그리 밝지가 않았다.
 “젠장!”
 램버트는 그토록 힘겹게 필사한 책을 집어던졌다.
 책의 내용을 보아하니 분명 로버트 클라인이 쓴 것은 맞았다. 문제는 내용이었다. 로버트 클라인이 대단한 천재라기에 분명 이 책에도 무언가 특별한 내용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던 것이다.
 책에 있는 내용이라고는 오늘 날씨가 어떻다는 둥, 오늘 식사로 무엇이 나왔는데 무척 맛있다는 둥, 전혀 쓸데없는 그런 내용들뿐이었다.
 그랬다.
 이 책은 로버트 클라인의 일기장이었던 것이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일기를 쓰지 않는다. 그렇다고 전혀 안 쓰는 것은 아니었다. 일부의, 극히 일부의 귀족 중에서 일기를 쓰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이 일기를 쓰는 이유는 자신의 부를 자랑하기 위해서였다.
 종이는 귀한 것이다.
 그 귀한 것에 자신이 오늘 무엇을 했는지를 적는다는 것은 집안에 돈이 썩어날 정도로 있지 않고서는 하기 힘든 일이다. 아니 돈이 썩어나다 못해, 깔려 죽을 정도로 있어도 어지간한 사람은 일기를 쓰지 않았다.
 그 비싼 종이에다가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한단 말인가. 정신이 올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결코 그 짓을 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로버트 클라인은 그 쓸데없는 짓을 했다.
 남들은 왕국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로버트 클라인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했지만 당사자인 로버트 클라인에게는 다른 뚜렷한 이유가 있었다.
 로버트 클라인이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글을 배우면서였다.
 당시에는 그저 남들보다 빨리 글을 익히고자 하는 생각에 한 것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일기를 쓰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로버트 클라인은 계속해서 일기를 써나갔다.
 일기를 씀으로 해서 로버트 클라인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날 있었던 일중에 잘한 일은 무엇이고 못한 일은 무엇인지를 정리하며 자신의 장점을 더욱 키울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그날 있었던 세세한 일들에 대해서 다시금 떠올리면서 기억력은 물론 두뇌의 전체적인 활용 능력이 좋아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기를 쓰는 것이 자신에게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로버트 클라인은 남들이 뭐라고 하던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로버트 클라인이 생각하기에도 일기를 쓰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가장 질이 좋지 않은 종이에다가 일기를 썼다.
 로버트 클라인이 쓴 일기장이 정확히 몇 권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몇 백 권이라고 말하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천권이 넘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각설하고 이 일기장들은 로버트 클라인이 죽고 나서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과연 그는 거기에 무엇을 기록했을까, 천재 중에 천재였던 그였기에 분명 일기장에도 범상치 않은 것들을 기록해 두었을 거라고 다들 생각했다.
 헌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기대했던 보물은 보이지 않고, 여느 사람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그런, 일상의 소소한 것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내심 큰 기대를 가지고 있던 클라인 가문 사람들은 허탈한 마음에 곧 이 일기장에 대해서 관심을 끊어버렸다. 클라인 가문사람들은 이 쓸모없는 물건을 없애버리려고 했지만, 그런 사소한 것보다 우선 가문을 안정화 시키는 일이 더욱 중했기에 우선은 이 물건을 창고에 처박아 두기로 했다.
 졸지에 백작가로 강등되고, 수도에서 변방으로 쫓겨 가게 생겼는데, 쓸모없는 일기장에 누구하나 신경을 쓸 사람이 있겠는가.
 어찌어찌 하다 보니 일기장도 요르크 영지로 같이 내려가게 되었다. 다들 정신이 없던 판이라, 이건 버릴 것, 이건 챙길 것 하면서 나눌 정신이 없었다. 영지에 내려가서 나누면 된다고 생각하고 전부 가지고 내려 간 것이다.
 헌데 막상 영지로 내려가니 또 그럴 정신이 없었다. 우선 영지를 안정화 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수모를 갚기 위해서는 변변한 검술서라도 하나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왕국 내는 물론 대륙전체에 퍼져있는 검술서란 검술서를 전부 사 모으는데 총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이렇다보니 일기장은 또 창고의 어느 구석에서 무사히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흘러, 지금으로부터 19년 전 찰스 클라인이 태어났을 때, 클라인 가문 사람들은 수도 라크리시아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그토록 염원하던 중앙으로 복귀를 하게 된 것이다.
 이때 영지의 창고 구석에 있던 일기장과 다른 골동품들이 수도로 올라오게 되었다.
 원래라면 창고에 그대로 푹푹 썩고 있어야 하지만 골동품 애호가인 앤쏘니 백작이 전부 가져오게 한 것이다.
 언제가 되었던 창고정리를 한번쯤은 해야 했기에 이번기회에 하자는 생각에 앤쏘니 백작이 대대적인 창고정리를 명한 것이다. 그와 중에 값비싼 골동품들이 다수 모습을 드러내어 앤쏘니 백작을 기쁘게 했다.
 일기장 역시 다시금 빛을 보게 되었지만, 살짝 만지기만 해도 부서지고, 그렇다고 중요한 내용이 적힌 책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 지금의 허름한 창고로 옮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로 일기장은 영원히 어둠에 묻힐 것 같았지만 오늘 뜻하지 않게 램버트에게 발견이 된 것이다.
 과연 이런 일이 또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우연인지 운명인지, 이렇게 로버트 클라인의 일기장은 그 후손인 램버트 클라인에게로 전해졌다.
 램버트는 이전에 일기장을 보았던 사람들처럼 일기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에잇- 진짜, 괜히 기대심만 갖게 만들고, 이게 뭐야! 게다가 자기 일기장에 자기 이름은 왜 써?”
 화가 난 램버트는 필사한 종이를 발로 마구 마구 짓밟았다.
 깨끗하던 새 종이가 너덜너덜하게 변하자 그제야 분이 풀린 램버트는 거듭 씩씩 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가만, 근데 진짜 자기 일기장에 자기 이름은 왜 쓴 거야?”
 의문이 들었다.
 일기라는 것이 자신의 소소한 일상을 적은 것인데, 거기다가 자기 이름을 쓸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자신의 이름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분명 ‘나 로버트 클라인은 이것을 이렇게 정리한다.’라고 쓰여 있었다.
 뭔가가 더 있다고 판단한 램버트는 엉망이 되어있는 필사한 종이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았지만 특별한 내용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분명 ‘나 로버트 클라인은 이것을 이렇게 정리한다.’라는 문장은 있었지만 그에 관련된 내용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아마도 일기가 너무 많이 훼손되어 그 내용부분도 사라진 듯 보였다.
 “아 진짜! 하필이면 왜 그 부분만 없는 거야!”
 또 다시 짜증이 밀려왔다. 그리고 그와 함께 번쩍하고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이건 일기잖아. 분명 일기장은 이 한권이 아닐 거야. 그래 맞아. 분명 다른 일기장이 또 있을 거야.”
 왜 이렇게 일기장에 집착을 하는지 램버트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일기장은 이것이 마지막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100년이라는 시간은 아주 긴 시간이다. 다른 일기장들 역시 이 일기장처럼 보관이 되고 있다면 분명 온전히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설사 나머지 일기장들을 찾아낸다고 해도 램버트가 기대하는 어떤 비밀이 있으리라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램버트는 미친 듯이 창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과연 램버트는 왜 이러는 것일까?
 단순한 호기심? 아니며 아버지가 쓰레기라고 방치한 것들 중에서 보물을 찾아내어 절대적으로 아버지가 옳은 것만은 아니다 라는 것을 말하기 위한, 일종의 사춘기 반항심에?
 아니면 어떤 운명의 이끌림?
 뭐 따지고 보면 이유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램버트가 결국에는 로버트 클라인이 작성한 나머지 일기장들을 찾아냈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그 일기장에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놀라운 것들이 기록되어 있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분명 램버트 이전에 이 일기장을 본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아무도 이 일기장에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지는 못했다. 영원히 어둠속에 묻힐 뻔한 일기장이 램버트의 손에 들어가게 된 것은 어쩌면 운명이 아닐까?
 일기장의 비밀을 알게 된 램버트는 광분해서 외쳤다.
 “삐뚤어질 테다! 그리고 그 누구도 나를 무시하지 못하게 할 테다! 설혹 아버지와 형이라고 해도 이제는 날 막을 수 없어.”
 
 
 일기장의 비밀
 
 
 
 
 
 
 일기장의 필사를 마친 램버트는 굳게 결심했다. 일기장에 적힌 것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독하게 마음을 먹어야했다. 어차피 아버지가 바라는 것도 자신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날 이후로 램버트는 더욱 음침하고 음흉하게 변했다. 그리고 무척이나 잔인해졌다.
 사실 일기장의 비밀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단순한 정리였다.
 이를테면 모월 모일 날씨가 어떻고, 무엇을 먹었으며 어떤 일을 했고 어떤 책을 읽었다가 일기의 주 내용이라면 자신이 읽은 책의 내용에 대해서 로버트 클라인 자신은 이렇게 생각하며 이런 식으로 정리를 한다고 일기 말미에 적어놓은 것이다.
 이런 정리나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것이 모든 일기에 적혀있는 것은 아니었다.
 램버트가 창고 구석에서 발견한 일기장은 232권이었는데, 그중 이런 정리가 되어있던 것은 책으로 하면 6권정도의 분량밖에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그저 그런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그렇다고 모든 내용이 그렇게 쓸모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한 예로, 왕실기사단의 부 기사단장이 한 말에 로버트 클라인은 자존심이 상했다고 언급했다.
 로버트 클라인이 평소처럼 기사를 깔보는 말을 툭 내뱉었는데,(로버트 클라인 본인은 기사들을 다소 무시하는 경향은 있어도 깔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거기에 발끈한 부 기사단장이 참다못해 한소리 한 것이 일의 발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잘난 사람이 어찌 검도 제대로 휘두를 줄 모르냐?’는 말에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로버트 클라인은 자신이 마음만 먹으며 금방이라도 어지간한 기사는 물론 왕실기사단의 기사들보다 더 뛰어난 실력을 갖출 수 있다고 말하고 만 것이다.
 이에 꼬투리하나 잡았다고 생각한 부 기사단장이 말로는 누군들 그렇게 못하냐면 한번 증명을 해보라고 했고 로버트 클라인 역시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고 만 것이다.
 나중이 되어서야 자신이 너무 흥분해서 얼토당토않은 약속을 했다고 자책했지만 그렇다고 한번 내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만큼 로버트 클라인은 자존심이 강했다.
 결국 이 일로 로버트 클라인은 어떻게 하면 보다 빨리 상승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하고 진지하게 연구하기 시작했다.
 국왕도 함부로 하지 못할 권력을 움켜쥐고 있다 보니 어지간한 자료는 손쉽게 손에 넣을 수가 있었다. 특히 왕실 소유의 검술에 관련 기록서들이 많았는데, 로버트 클라인은 그런 것들을 자기 마음대로 볼 수가 있었다.
 운명의 장난일까, 로버트 클라인이 이론 연구에 막바지를 달리던 찰나, 뜻하지 않게 왕실기사단의 기사들로부터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때 클라인 가문에서도 로버트 클라인이 검술에 대해서 색다른 이론을 연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뭔가 잔뜩 기대를 하고 있다가 로버트 클라인이 어이없이 생을 마감하자 그가 남긴 서류란 서류는 급하게 몽땅 챙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 서류들 중에 일기장이 포함되어있었는데, 잔뜩 기대했던 것과 달리 소소한 내용밖에 없자 초반부분만 읽고 더 이상 일기를 읽지 않고, 창고에 처박아 두었던 것이다.
 만약 그들이 수백 권 아니 천권이 넘을지도 모를 로버트 클라인의 일기를 끝까지 읽어보았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하긴 로버트 클라인이 연구하던 이론이 별도의 책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고 일기장에 있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보면 램버트는 정말이지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운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일기장이 질이 나쁜 종이로 만들어 진되다가 100년 전의 것으로, 보관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보니 군데군데 글이 뭉개져있어서 몇몇 부분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이런 부분들은 램버트가 어림짐작으로 알아맞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문제 축에도 들지 않았다.
 진짜 문제는 로버트의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는 방법이었다.
 로버트 클라인은 무척이나 바쁜 사람이었다. 국정운영을 도맡아 하다 보니, 짬을 낼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그는 이론연구에만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확인되지 않은 로버트의 이론을 몸으로 직접 실험해봐야 하는 사람은 램버트였던 것이다.
 아무리 로버트 클라인이 천재였다고 하지만 그의 이론서만을 보고(그것도 군데군데 알아볼 수가 없는 불완전한.) 곧바로 자신의 몸에 적용시킬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안전이 우선이었던 램버트는 생체실험을 할 대상이 필요했다.
 자신이 로버트 클라인의 새로운 이론서를 발견했다고 아버지에게 알린다면 그토록 고대하던 칭찬을 받을 수 있었지만 램버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칭찬은 순간이다. 길어야 두세 달 갈까?
 그 기간이 지나면 아버지는 또다시 평소의 차가운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발견한 이 이론서는 형의 차지가 될 것이 뻔했다.
 겨우 칭찬 한번 받고 형 좋은 일 하라고 이것을 갔다 받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럴 바에는 ‘내가 좀 더 연구해서 익히는 것이 더 이득이다.’ 라고 생각한 램버트는 홀로 이 로버트의 이론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로버트 클라인이 천재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었다.
 기존의 검술서는 반강제적이며 주입식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기초수련방법에서부터 본격적인 상승 검술에 이르기까지 무조건 이렇게 해라라고 쓰여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문제가 되느냐, 그것은 아니었다.
 검술서는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전통 있는 명가의 상승 검술서는 짧게는 수 백 년에서 길게는 천년을 훌쩍 넘어선 것들이었다.
 명가의 상승 검술서는 수 백 년, 혹은 그 이상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서 체득한 것들을 기록해온 것이다. 만약 어딘가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세월이 흐르면서 그 부분을 고치거나 혹은 고칠 수 없다면 기록에서 아예 삭제해 버렸다.
 다시 말해 남아있는 부분은 검술을 익히는데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고 괜한 시간을 들여서 이게 맞는 건지 틀린 건지를 생각할 필요 없이 그냥 검술서에 쓰여 있는 대로 검술을 익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램버트는 이제까지 이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헌데 로버트의 이론서를 보는 순간 ‘이제껏 왜 이런 생각은 하지 못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로버트 클라인은 이런저런 검술서들을 보면서 이런 의문을 제기했다.
 ‘검술을 이런 식으로 펼치면 왜 이런 위력이 나오는 건가?’
 만약 검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상승의 경지에 있는 기사에게 위와 같은 질문을 했다면 백이면 백, 전부 이런 대답을 할 것이다.
 ‘그거야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런 위력이 나오니까 그렇게 움직여서 그 기술을 쓰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런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 이런 이런 과정을 거치는 것이라는 대답이다.
 여기에 로버트 클라인은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그렇다면 꼭 그 과정을 거쳐야 그런 결과가 나오는 건인가? 다른 과정을 거치고도 똑같은 결과가 나올 수 있게 할 수는 없는가? 그리고 왜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것인가?
 이런 의문들이었다.
 로버트 클라인은 짧은 시간 안에 보다 높은 상승의 경지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 의문들을 해결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만의 답을 내놓았다.
 로버트 클라인만의 해답.
 과연 그 해답이란 무엇일까?
 인간의 몸에는 피가 흐른다.
 피는 곧 생명의 원천이다.
 인간의 몸에는 피만 흐르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몸에는 마나도 흐른다.
 마나는 곧 힘의 원천이다.
 짧은 시간 안에 보다 높은 상승의 경지를 이루기 위해서는 몸속에 있는 마나를 보다 원활히, 그리고 보다 많이 흐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 로버트가 정립한 이론서의 핵심이었다.
 그럼 이 마나를 보다 원활하고 보다 많이 흐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로버트는 피가 혈관을 타고 흐르듯이 마나 역시 마나로드라는 것을 타고 흐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마나로드에 자극을 주면 마나로드가 강화, 확장되어 짧은 시간 안에 보다 높은 상승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로버트의 이론서에는 마나로드를 어떻게 자극하면 되는지도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램버트는 이제껏 이런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너무나도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는 로버트 클라인의 이론서를 보니,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하지만 당장에 그것을 자신의 몸에 시험해 볼 수는 없었다.
 우선 일기장이 여기저기 훼손되어 자신이 임의대로 끼워 맞춘 내용이 맞는 건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인체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지 못했다. 로버트의 이론을 따르려면 인체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알고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것이 이론일 뿐이라는 것이다. 로버트 클라인은 마나로드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기만 했지 마나로드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 또한 자신의 자극 단련법이 제대로 되는 것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이론과 실제는 항상 같을 수 없다.
 아무리 로버트 클라인이 천재였다고 해도 그의 이론서만을 철썩 같이 믿고서 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램버트는 이번 일에 신중을 기하기로 했다.
 램버트는 우선 인체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은밀히 시체를 하나 구입했다.
 그에 앞서 일기장을 발견한 창고에 있던 쓰레기들을 모두 갖다 버리고 그 창고를 자신만의공간으로 개조했다.
 시체를 해부하는 것은 생각이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꼭 해야 되는 일이라고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였지만 칼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려서 제대로 시체를 가를 수가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시체를 가르기는 했지만 곧이어 찾아오는 역겨움에 속에 든 것을 모두 토해내고 말았다. 그러고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한참동안 손을 부들부들 떨어야만 했다.
 처음에는 시체하나만 열어보면 인체에 대해서 전부 알게 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을 가졌었다. 하지만 직접 시체를 갈라보니, 그것이 얼마나 무지몽매한 생각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전까지 램버트는 사람의 몸이 그렇게 신비롭고 복잡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쥐꼬리만 한 용돈으로 음지의 길드에서 갓 죽은 시체도 사고, 인체에 대한 책도 사서 열심히 공부했지만, 갈 길이 너무나도 멀어보였다. 시체는 너무 금방 부식되었다. 게다가 냄새도 너무 심했다.
 인체에 대해서 1/10도 알기 전에 시체를 버려야만 했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어렵지가 않았다. 어느새 시체를 해부하는데 능수능란해진 램버트는 두 번째, 세 번째 시체를 해부하면서 인체 구조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 수가 있게 되었다. 하지만 시체를 가지고 연구를 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었다.
 램버트가 정작 알고 싶은 것은 마나로드였다. 헌데 마나로드는 시체에게서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말해 살아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시체를 사는데 너무 많을 돈을 써 노예를 살 돈이 부족했다.
 램버트는 어쩔 수없이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사랑하는 어머니를 찾아가 용돈을 달라고 갖은 아양을 다 떨었다. 그렇지 않아도 램버트가 요즘 들어 더욱 바깥출입이 뜸해지고 주눅이 든 것 같아 걱정이었던 램버트의 어머니는 오랜만에 아들이 찾아오자 기쁜 마음에 많은 용돈을 주었다.
 램버트는 그 용돈으로 건장한 남자 노예를 샀다.
 시체는 남몰래 조심해서 들고 들어올 수가 있었지만 살아있는 노예는 그렇지가 못했다. 그렇다고 자신의 용돈으로 노예를 샀는데 뭐라고 할 사람도 없었다. 다만 자신이 하는 일이 조금 그렇다보니 조심하는 정도였다.
 램버트는 광기어린 눈으로 살아있는 사람의 피부를 벗겨냈다. 물론 노예는 꼼짝달싹 하지 못하게 포박을 해놓은 상태였고, 입에는 재갈이 물린 상태였다.
 노예가 생각이상으로 몸부림치자 램버트는 만약을 생각해서 준비한 수면제로 노예를 잠재웠다. 그리고 노예의 몸을 살아있는 그 상태 그대로 갈랐다. 이미 시체로 몇 번 갈라봐서 그런지 별다른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묘한 흥분감이 들었다. 이제야 말로 그토록 고대하던 마나로드를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흥분한 것이다.
 ‘진짤까? 진짜로 마나로드라는 것이 있을까?’
 가슴이 두근 두근 거렸다.
 “후우~”
 한차례 호흡을 고른 램버트는 전심전력으로 마나를 끌어 모았다.
 램버트는 나름 열심히 수련한다고 했지만 그 성과는 무척이나 미비했다. 마나소드 익스퍼트 초입(상승 검술은 소드 비기너로 시작하여, 그 다음 단계인 마나소드 익스퍼트 초입 - 초급 - 중급 - 상급 - 최상급 - 마스터로 나누어진다. 현재 램버트가 도달한 초입단계는 상승 검술서를 3~4년 정도만 수련하면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다.)
 에 겨우 턱걸이한 램버트는 그마나 몸속에 얼마 없는 마나를 오른손 검지에 끌어 모았다.
 “헉, 헉. 모, 모았다.”
 손톱만큼의 마나를 모으는데도 너무나도 힘이 들었다.
 그마나 다행한 일이라면 로버트의 이론서에 적혀있기를 이 정도만 되어도 마나로드를 확인할 수 있고, 마나로드를 자극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램버트는 마나로드가 정말로 존재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살가죽을 벗겨낸 노예의 동맥에 겨우겨우 끌어 모은 마나를 가져다 되었다.
 파지지직
 “으앗.”
 갑자기 손끝에 스파크가 일었다.
 “오! 정말이었어. 정말로 마나로드는 존재했어!”
 램버트는 기쁨에 환호성을 질렀다. 로버트의 이론서는 이론서일 뿐이었다. 로버트 역시 마나로드를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니라, 그저 외부의 마나와 인체 내부의 마나가 만나면 어떤 반응이 있을 거라고 서술했지, 그 반응이라는 것이 스파크라고는 언급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도 램버트는 확신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들이 공이 모두 허사가 되는 것은 물론 영원히 아버지에게 천대받으며 지금처럼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램버트는 스파크가 일어난 이유는 마나로드 때문이라고 굳게 믿었다.
 가장 쉬운 방법은 다시 한 번 더 하면 되는 일이지만 이제 겨우 마나소드 익스퍼트 초입에 들은 램버트로써는 손톱만큼의 마나를 모으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2시간을 쉬고 난 램버트는 다시금 마나를 모아 방금 전의 그 부분에 가져가 보았다.
 없었다.
 아무런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엔 자신의 착각이었나 하는 생각에 허탈감이 밀려왔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아냐! 마나로드는 있어. 아니 있어야 해! 그래 마나로드는 반드시 있어!!”
 언제까지 아버지에게 못난이 취급을 받으며 살 수는 없었다. 램버트의 두 눈은 광기로 번뜩였다. 램버트는 분명 자신이 착오를 저질렀다는 생각에 다른 동맥에다가 마나를 가져가 보았다.
 파지지직
 “엇! 오~ 역시 마나로드는 있었어!”
 또다시 스파크가 일었다. 램버트는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근데 왜 아까 전에는? 호, 혹시...”
 램버트는 곧바로 로버트의 이론서를 뒤적였다.
 “있다. 있어.”
 로버트의 이론서에 램버트가 원하는 해답이 있었다.
 우리 몸에는 많은 양의 마나가 내재되어 있는데, 평소에는 이것을 전부 쓰지 못한다는 것이다. 로버트는 인체 내에 많은 양의 마나가 내재되어 있다는 증거로, 위기상황 시 순간적으로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는 것을 예로 들었다.
 마나는 곧 힘의 원천.
 몸속에 많은 양의 마나가 없다면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 로버트의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평소에는 왜 이 마나를 쓸 수 없는가?
 그 이유는 간단했다.
 마나로드가 활성화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마나로드가 활성화 되어있지 않은 일반인은 마나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그나마 고된 수련으로 어느 정도 활성화가 되어있는 기사들은 일부의 마나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처음 질문으로 돌아와서 처음에는 반응을 보이던 노예의 마나로드가 두 번째는 왜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가?
 이것의 해답은 아주 간단했다.
 노예는 마나로드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마나로드가 있기는 하지만 별도의 수련을 거치지 않은 노예의 마나로드는 외부의 자극(램버트의 손톱만한 마나)에 과부하가 걸려서 타버린 것이다.
 한번 타버린 마나로드는 회복마법으로도 회복이 되지 않는다. 자연적으로 회복이 되기를 바래야 하는데, 로버트의 이론서에 따르면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언급하고 있었다.
 “휴- 역시 노예한테 실험해 보기를 잘했다니까, 빨리 확인해 본다고 내 몸에 직접 했으면 어쩔 뻔했어. 마나로드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 계속 노예를 써야겠어.”
 이후로 램버트는 노예의 몸을 사용하여 실험을 계속했다.
 우선 몸속에 마나로드가 어디 어디에 있는지부터 확인해야만 했다.
 로버트의 이론서에는 마나로드는 필시 동맥과 겹칠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이후로 램버트는 마나로드에 대한 이해와 어떻게 하면 마나로드에 적절한 자극을 주어 타버리지 않고 확장, 강화시킬 수 있는 지에 대해서 심도 깊게 연구하였다. 그 과정에서 9명의 노예가 희생이 되었는데, 램버트는 노예의 죽음에 대해서 일말의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지 못했다.
 램버트는 생체 실험이 거듭될수록 피와 죽음에 대해서 점점 무감각해져갔다.
 램버트는 많은 실험을 했다.
 가령 인체가 절단되면 마나로드는 어떻게 되는 가를 보기 위해 살아있는 노예의 팔과 다리를 잘랐고, 사람이 죽으면 마나로드도 곧바로 소멸되는지를 알기 위해 노예의 목을 가차 없이 베기도 했다.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생체 실험을 함으로 해서 마나로드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는 물론 인체에 대한 많은 지식을 축적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나로드를 손상시키지 않고 자극을 하는 방법도 터득하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정말로 마나로드를 적절하게 자극하면 마나로드가 확장, 강화되는 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헌데 문제가 생겼다. 더 이상 노예를 살 돈이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어머니에게 갖은 아양을 다 떨어 자금을 충당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몇 번이고 그렇게 했다가는 어머니가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자신을 걱정할까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램버트는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사랑해 주는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집안에 노예도 많지 않는 가.
 그 많은 노예들 중에 한둘 어떻게 된다고 해도 누가 자신에게 뭐라고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혹 뭐라고 해도 잠깐 잔소리 듣고 말지 하는 생각에 집사 하론에게 말해 노예를 건네받았다.
 그렇게 두 명의 노예를 희생시킴으로 해서 램버트는 마나로드의 적절한 자극법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로버트의 이론서가 옳다는 것을 최종적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이제는 정말 마지막 단계만 남아있었다.
 지난 2년 동안 3구의 시체와 11명의 노예를 희생시키며 축적한 모든 지식을 사용할 때였다.
 “오오- 성공이다. 성공. 성공이야!”
 램버트는 너무나도 기뻤다. 아침에 데려온 노예의 몸에 있는 마나로드를 강제로 활성화 시킨 것은 물론 그것을 적절히 자극하자 미세하지만 마나로드가 강화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램버트는 그동안 수많은 생체 실험을 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마나로드를 느끼는 감각이 극대화 된 상태였다. 그래서 노예의 마나로드가 어떻다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었다.
 이제 최종적으로 확인을 했으니 남은 것은 단하나 자신의 몸에 직접 해보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전에 좀 더 노예의 몸에 해보고 하자. 그래, 혹시 내가 모르는 부작용이 있을지 모르니까, 그래 그래, 신중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이렇게 마음먹고 또다시 노예의 마나로드를 자극하려고 하던 찰나,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집사 하론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램버트는 순간적으로 화가 났다.
 아무리 자신이 가족들에게 사람 취급을 못받고 있다고 해도 집사 하론은 자신의 아랫사람이었다. 그 아랫사람이 결코 들어오지 말라는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저렇게 들어오니 이제는 아랫것들도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끓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 집사 하론의 목을 베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분명 집사 하론는 램버트의 아랫사람이었다. 하지만 집사 하론을 직접적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은 클라인 가문의 가주인 아버지 앤쏘니 백작밖에는 없었다.
 실질적으로 자신이 집사 하론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떠올린 램버트는 끓어오르는 화를 억지로 참으며 말로써 집사 하론을 회유하기로 했다. 클라인 가문에 대한 충성심이 남다른 집사 하론이라 램버트의 말에 넘어오는 듯 싶었다.
 헌데 곧이어 나타난 뜻밖의 존재에 의해서 이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뜻밖의 존재, 그는 바로 램버트의 아버지 앤쏘니 백작이었다.
 이제 마지막 점검 단계만 거치면 되는데, 아버지 앤쏘니 백작이 나타나 그것을 방해하지 램버트는 더욱 화가 났다.
 ‘아버지는 왜 내가 뭔가를 하려고 할 때마다 방해를 하는 거야!’
 램버트는 의도적으로 아버지가 자신의 앞길을 막는다고 생각했다. 심통이 난 램버트는 이번 일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체 창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에 앤쏘니 백작이 길길이 날뛰며 뭐라고 호통을 쳤지만 램버트는 어디서 웬 개가 짓나 하는 표정으로 앤쏘니 백작의 말을 한 귀로 흘려버리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 달.
 앤쏘니 백작은 그래도 양심이 있어서 램버트가 방에 틀어박혀 자중한다고 생각했지만 램버트는 지난 한달 동안 이제껏 얻은 지식들을 다시 한 번 점검하며 최종 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음, 이론은 이제 완벽한데...”
 아쉬움이 남았다.
 혹시 모를 부작용에 대해서 최종적으로 확인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큰 마음먹고 아버지를 찾아갔더니, 돌아온 것은 영지로의 추방이었다.
 아니 어찌 아버지가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그 많은 노예들 중에 3명을 임의대로 썼다고 영지로 쫓아내 보내다니, 이건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것이 아닌가.
 램버트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아버지에게 바락바락 대들었지만 영지로 내려가던지, 아니면 이 집에서 나가던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아버지의 협박에 울며 겨자 먹기로 영지로 내려가기로 했다.
 “빌어먹을! 젠장! 아버지 한번 두고 봅시다. 결국엔 누가 웃는지.”
 영지로 내려가는 마차 안에서 램버트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기보다 혼자 있기를 더 좋아해, 친한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랑하는 여인이 수도에 있는 것도 아니었음에도 램버트는 영지로 내려가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 이유는 편리함 때문이었다.
 수도에서는 돈만 있으면 하고 싶은 것은 뭐든지 할 수가 있었고, 돈만 있으면 사고 싶은 것은 뭐든지 살수가 있었다.
 가령 생체실험에 쓰기 위해 구입한 시체나 노예들은 지방에서는 쉽사리 구할 수가 없었다. 물론 돈만 있으면 지방에서도 구할 수가 있기는 하지만 수도에서는 금방 구하는 것을 지방에서는 꽤 오랜 시간을 들여서, 그것도 겨우 구할 수가 있었다.
 한번 편리함을 맛본 인간은 좀처럼 그 편리함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지방에 살던 귀족이 수도에 올라오면 금방 수도의 생활에 익숙해지지만, 수도에서 태어나서 자란 귀족이 수도외의 지역으로 가게 되면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게 된다.
 비단 이러한 이유 때문에 램버트가 이렇게 짜증을 내는 것만은 아니었다.
 램버트는 자의가 아닌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서 영지로 쫓겨 간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분이 나빴다.
 아버지 소유의 노예 세 명을 해치운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이란 말인가?
 램버트는 그동안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아버지가 드디어 꼬투리 하나를 잡아 기어코 자신을 영지로 쫓아냈다고 여겼다.
 “젠장! 나는 자식도 아니라 이거지? 나중에 어떻게 될지 한번 두고 봅시다! 잘나신 앤쏘니 백작-님!!”
 램버트는 억지로 영지로 내려온 것도 기분이 나빴는데, 영지에 도착하니, ‘영주성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라는 백작님의 엄명이 있었습니다.’ 라고 말하는 호위 기사들의 말에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그렇지 않아도 수도보다 볼 것도 없고 할 것도 없어서 심심한 영지에서 영주성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말라고 하니, 그야말로 창살 없는 감옥 생활이 아닌가.
 램버트는 기가차고 어이가 없었지만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여기는 수도의 집이 아니었다.
 수도의 집에는 자신의 절대적인 후원자이며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주신 어머니가 계셨지만, 영지에는 자신을 위해 나서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클라인 가문의 기사들은 충성심이 무척이나 높았다.
 그래서 가주의 명령이라고 하면 그야말로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현 클라인 백작가의 가주인 앤쏘니 백작이 램버트가 다시는 허튼짓을 하지 못하게 하라고 엄명을 내려놨으니 기사들이 이를 지키려고 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아악! 이런 시골 촌구석에 온 것도 기분 나쁜데, 뭐? 영주 성을 벗어나지도 말고, 노예 놈들도 건드리지 말라고? 그럼 나보고 어떻게 살라는 거야?! 그래 좋아, 끝끝내 아버지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지. 나도 어지간하면 얌전히 있으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이렇게 나오면 나도 가만히 못 있지. 그래,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무언가를 계획하는 듯한 램버트.
 헌데 영주성에 머물게 된 램버트는 자신이 내뱉은 말과 달리 쥐죽은 듯 얌전하게 지냈다.
 그것도 자신의 방에 틀어박힌 체 외부출입을 일체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앤쏘니 백작의 신신당부에 행여나 램버트가 무슨 큰일을 저지르지나 않을까 하고 잔뜩 긴장하고 있던 기사들은 일순간 허탈해질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기사들이 완전히 마음을 놓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앤쏘니 백작이 그렇게 신신당부를 할 정도면 언제가 되었던지 간에 램버트가 사고를 쳐도 크게 한번은 칠거라는 생각에 램버트에 대한 감시를 소홀이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한 달이 지나고, 석 달이 지나고, 반년이 지나, 일 년이 지날 때까지 램버트는 외부출입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기사들은 오히려 램버트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일 년 동안 방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영주성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해도 방밖으로 나와 영주성의 넓은 정원이라도 한번쯤 돌아보는 것이 정상일 텐데, 그것조차 하지 않자, 혹시 램버트가 충격을 받고 정신이 살짝 이상해 진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큰 문제는...
 
 영지의 문제아 램버트
 
 
 
 
 
 
 “끄응-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앤쏘니 백작을 대신하고 있는 영주대리이자, 클라인 가문의 자랑인 라이온 기사단의 단장을 맡고 있는 토마스 클라인은 밀려오는 두통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토마스 자작님. 우리끼리 이럴 것이 아니라 백작님께 다시 한 번 연락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허허, 자네가 백작님께 직접 다녀오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가?”
 토마스 자작의 말에 요르크 영지의 행정을 책임지고 있는 루베인 야슬 남작의 입이 쏙 들어가 버렸다.
 “도대체 날 보고 어떻게 하라는 건지. 에잉-.”
 토마스 자작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회의실에 있던 다른 행정관들과 기사들이도 덩달아 인상을 찌푸리며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덜컥
 “자, 자작님!”
 “어허! 중요한 회의를 하고 있는데, 아무런 노크도 없이 그렇게 불쑥 들어오다니, 이 무슨 무례란 말인가?!”
 “죄, 죄송합니다. 자작님, 일이 너무 시급하다보니.”
 “일? 혹 전쟁이라도 터졌단 말인가?”
 “그, 그것은 아닙니다만...”
 “그럼 무슨 일인가?”
 “그, 그것이...”
 “어허, 이 사람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영지의 중임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네, 이들 앞에서 못할 말이 뭐란 말인가?”
 “그, 그게, 램버트 도련님과 기사단에 관한 일이라서...”
 “끄응-.”
 램버트라는 말에 토마스 자작의 머리가 또다시 아파왔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회의의 주 안건이 바로 램버트에 관한 것이었다.
 일 년 전만 해도 램버트가 영지로 내려온 것은 나약한 램버트를 강하게 키우기 위한 조치라고 다들 생각했다. (램버트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앤쏘니 백작과 집사 하론 밖에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기사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제법 강도 높은 수련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헌데 램버트가 영지에 오자마자 방안에 틀어박혀서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앤쏘니 백작의 조치에 마음이 상해서 그런다고 생각했다.
 짧으면 이틀 길어봤자 일주일이면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서 방밖으로 나올 것이라고 다들 생각했다.
 헌데, 한 달이 지나도록 램버트가 방밖으로 나오지 않은 것이다.
 그때서야 토마스 자작을 비롯한 기사들은 뭔가 일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토마스 자작은 어떻게든 램버트를 회유하여 방밖으로 나오게 하려고 했지만 램버트는 그런 토마스 자작의 말에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허락 없이 방으로 들어오는 자가 있으면 그자의 직위와 상관없이 엄단에 처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토마스 자작은 램버트가 설마 진짜로 그렇게 하겠냐는 안일한 생각에 방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헌데 진짜로 검이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토마스 자작은 그제야 램버트의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토마스 자작은 너무나도 화가 났다.
 자신이 비록 방계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램버트의 숙부이고, 영주를 대리하고 있는 임시 영주인데 이렇게 무턱대고 검을 휘두르다니, 만약 토마스 자작이 냉철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면 램버트는 토마스 자작이 휘두른 분노의 검에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램버트의 방을 나온 토마스 자작은 곧바로 수도로 사람을 보내 램버트가 왜 저러는지, 그리고 추후의 일처리를 어떻게 해야 되는 지를 앤쏘니 백작에게 물어 오라고 시켰다.
 이때만 해도 앤쏘니 백작이 해결해 주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웬걸, 앤쏘니 백작은 오히려 잘됐다며 그냥 내버려 두라는 것이 아닌가.
 이때서야 토마스 자작은 램버트가 영지로 내려온 것에 숨겨진 진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명확하게 알지는 못했다. 단지 일전에 있었던 괴소문과 램버트가 관련이 있지 않는가 하고 조심스럽게 추측할 뿐이었다.
 본인이 방에서 나오기를 거부하고 앤쏘니 백작역시 그대로 방치해 두라고 하니 토마스 자작으로써는 달리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그저 제 때에 방으로 식사를 넣어주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램버트가 조금 안됐다고만 생각할 뿐, 골치 아픈 문제를 일으킬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램버트가 문제를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램버트의 어머니 에지나 어빙스였다.
 토마스 자작처럼 램버트를 좀 더 강하게 키우기 위해 영지로 내려 보냈다고 알고 있던 에지나는 아버지인 다론 어빙스 후작에게 연락해 램버트에게 검술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다론 어빙스 후작은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한 것이다.
 문제는 이 다음부터였다.
 마나소드 마스터인 다론 어빙스 후작이 검술을 가르치기 위해서 몸소 움직일 리 없었다. 그 대상이 아무리 자신의 외손자라고 해도 말이다. 다론 어빙스 후작은 외손자인 램버트를 자신의 영지인 햄트리로 데려 오라고 명했다.
 하지만 토마스 자작은 그 명에 따를 수가 없었다. 우선 자신의 주군인 앤쏘니 백작이 램버트가 영주성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라고 명을 내렸고, 또 램버트 본인이 자신의 방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토마스 자작으로써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한 다론 어빙스 후작은 토마스 자작이 감히 자신의 명을 거역했다고 노발대발 하고 나선 것이다.
 아무리 클라인 가문과 어빙스 가문이 사돈지간이고, 앤쏘니 백작이 두 가문을 대표해서 수도에 머물고 있다고 해도 실제 힘은 어빙스 가문이 더 앞서고 있었다.
 이에 다급해진 토마스 자작은 행정책임관인 루베인 야슬 남작을 앤쏘니 백작에게 보내 이 일에 대한 보고를 하게 했다.
 토마스 자작은 일이 이쯤 되면 앤쏘니 백작이 램버트에게 내린 외출금지령을 취소할거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그렇게 된다면 램버트의 마음도 풀려 방밖으로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헌데 앤쏘니 백작이 무슨 배짱인지, 절대 램버트를 영주성 밖으로 내보내지 말라고 엄명을 내려 보낸 것이다. 그렇다고 장인인 다론 어빙스 후작을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토마스 자작이 알아서 잘 하라는 말만을 보내왔다.
 이게 무슨 얘들 장난도 아니고 알아서 잘 하라니.
 토마스 자작은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다.
 뾰족한 수가 없던 토마스 자작은 램버트가 독감에 걸렸다는 둥, 햄트리 영지로 가다가 갑자기 말이 난동을 부려 낙마해 다쳤다는 둥의 핑계를 되며 그동안 시간을 끌어왔다.
 하지만 핑계거리를 만들어 내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말도 안 되는 핑계만을 되자, 결국 다론 어빙스 후작이 참지 못하고 불같이 화를 내게 되었다.
 결국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토마스 자작만 중간에서 골머리를 감싸야 했다.
 이 와중에 또 램버트가 무슨 문제를 저질렀다고 하니 어찌 골치가 더 아프지 않겠는가.
 “그, 그래, 이번엔 또 뭔가?”
 “그, 그게 영주 성을 나가시겠다고 합니다.”
 “뭐?!”
 토마스 자작은 너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그게 정말이냐?”
 “예.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잘된 것이 아니냐?”
 법보다 주먹이 더 무섭다고 할까, 분명 자신의 주군은 앤쏘니 백작이고, 앤쏘니 백작의 명령은 램버트가 절대로 영주 성을 나가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분노로 이글거리는 다론 어빙스 후작이 더 무서웠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응? 또 뭐가 있단 말인가?”
 “이것 참 말씀드리기가...”
 “어허, 이 사람이 또! 어차피 알게 될 사실을 가지고 왜 그렇게 뜸을 들이나? 어서 빨리 말해보게.”
 “예, 램버트 도련님이 영주 성을 나가시겠다고 하시는데, 혼자가 아니라, 부하들을 데리고 가시겠다고 하십니다.”
 “응? 부하? 램버트에게 부하들이 있었나?”
 “그, 그게...”
 “어허, 또!”
 “죄송합니다. 램버트 도련님의 부하라는 자들이, 비안코와 덤프, 라이안, 오스틴, 자이얀, 피터, 마르코, 에드워드, 폴턴 그리고 스미스입니다.”
 “비안코와 덤프 그리고 라이...가만, 이들은 모두 우리 라이온 기사단의 훈련생들이 아닌가?”
 “마, 맞습니다. 그들은 모두 라이온 기사단의 훈련생들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램버트 도련님의 방을 지키던 자들입니다.”
 토마스 자작은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싶었다.
 앤쏘니 백작이 램버트를 철저하게 감시하라고 명해서 일반 병사가 아닌 기사들에게 램버트를 감시하라고 시켰다. 그렇다고 그들이 정식 기사는 아니었다. 아직은 좀 더 배워야 하는 기사 훈련생들이었다.
 기사 훈련생들이라고 해도 그들은 분명 라이온 기사단 소속이었다. 가주인 앤쏘니 백작이라고 해도 라이온 기사단에 관한 일은 단장인 자신에게 먼저 묻거나 양해를 구하고 일을 처리하는데, 가문 내에서 내놓다 시피하고 있는 램버트가 자기 마음대로 기사 훈련생들을 자신의 부하라고 칭한다고 하니 토마스 자작은 기가 차다 못해 이제는 화가 날 지경이었다.
 “이제 막나가겠다 이건가?”
 그렇지 않아도 램버트 때문에 골치가 아파 램버트가 좋게 보이지 않았다. 그간 어떻게 혼을 내줄 좋은 핑계거리가 없나 하고 남몰래 고심했는데, 이렇게 알아서 좋은 구실을 선사해 주니, 이 순간만큼은 램버트가 너무나도 기특하게 여겨졌다.
 토마스 자작은 겉으로 내색하지는 못했지만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헌데 이어지는 부하의 말에 그 기분이 오래 가지를 못했다.
 “문제는 그 열 명의 훈련생들이 하나같이 램버트 도련님의 부하를 자청하고 있다는 겁니다.”
 “뭐? 뭐라?!”
 머리를 둔기로 맞은 듯한 아찔함에 토마스 자작은 그 자리에 그대로 털썩 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기사의 덕목 중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 바로 충성심이다.
 국가에 대한 충성, 영주에 대한 충성, 그리고 기사단장에 대한 충성.
 얼핏 생각하기에는 국가에 대한 충성이 가장 먼저이고 가장 클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기사들에게 가장 우선시 되는 충성은 바로 기사단장에 대한 충성이었다.
 이를테면 국가의 명이나 영주의 명이 있다고 해도 기사단장이 그것을 명하지 않으면 소속 기사는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되었다. 그만큼 기사들에게 있어서 기사단장의 말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휘하의 기사들이, 아니 아직 정식 기사도 되지 못한 훈련생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소속을 바꾸고 상관을 바꾼다는 것은 그야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배신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훈련생들의 철없는 배신행위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만약 정식 기사였다면 지금의 배신행위에 대해서 그들 스스로가 책임을 지겠지만, 지금 같은 훈련생 신분으로 행한 배신행위는 그 상관인 기사단장의 책임이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번 배신행위에 대한 지탄을 받는 것은 토마스 자작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그놈들이 왜 램버트 도련님의 부하를 자청한단 말이냐?!”
 부기사단장인 헬리오스가 발끈하고 나섰다.
 “그게 저로써도...”
 보고를 하러온 부하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아닌데도, 식은땀을 줄줄줄 흘리며 어쩔 줄을 몰랐다.
 “허- 어떻게 이런 일이...”
 토마스 자작은 반쯤 넋이 나간 듯 보였다. 하지만 평소 냉철한 이상을 소유한 그답게 이내 정신을 차렸다.
 “좋다. 가보자. 지금 이게 사실인지, 또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됐는지 내가 직접 알아야겠다.”
 토마스 자작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보고를 하러온 부하가 허리를 굽실굽실 거리며 램버트에게로 안내했다. 회의실에 있던 다른 사람들 역시 토마스 자작의 뒤를 따랐다.
 자신 때문에 성안이 발칵 뒤집혀졌는데도, 램버트는 시종일관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에 반해 램버트의 뒤에 시립해 있는 10명의 훈련생들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있었다.
 “으흠, 램버트야, 내가 방금 전에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게 사실이냐?”
 “오~ 토마스 숙부, 그렇지 않아도 만나려고 했는데, 잘됐네요. 이제 이 지긋지긋한 영주 성을 나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나와 내 부하들의 수발을 들을 노예들을...아니다. 노예 보다는 병사들이 더 좋겠네. 병사들을 좀 내주세요.”
 “그게 무슨 말이냐? 부하들이라니? 너한테 언제부터 부하들이 있었단 말이냐? 그리고 병사를 내달라니? 어찌 병사들을 사사로운 일에 내달라고 한단 말이냐?”
 “에잇, 숙부도 딱딱하게 왜 그러십니까? 병사들을 다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조금만 내달라고 하는데 그렇게 정색할 필요는 없잖아요?”
 “네 이놈! 내 그동안은 네놈이 가문의 적통이라는 이유로 봐주고 있었는데,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나로 말하면 사사로이는 네놈의 말처럼 너의 숙부가 되고, 공적으로 말하면 라이온 기사단의 단장은 물론 영주 직을 대리하고 있는, 이 영지의 제일 어른이다. 아무리 네놈이 가문의 적통이라고 해도 내 앞에서 지켜야할 예의가 있는데, 감히 내 앞에서 이토록 무례하게 나오다니. 네놈이 정녕 크게 혼이 나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토마스 자작이 살기등등하게 나오자 뒤따라오던 다른 사람들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그동안 다들 램버트 때문에 마음고생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는데, 토마스 자작의 호통에 십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듯한 시원함을 느꼈다.
 이에 반해 램버트의 뒤에 시립해 있던 10명의 훈련생들은 안색이 더욱 하얗게 질리면서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보였다.
 “어이쿠, 숙부,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그렇게 무섭게 나오십니까?”
 “무, 무슨 잘못? 이놈이 아직도! 좋다. 네놈이 모르겠다고 하니, 내 네놈의 잘못을 알려주마. 첫째, 네놈은 그동안 방밖으로 출입을 하지 않음으로 해서 그동안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심적으로 괴롭혀 왔다. 둘째, 네놈은 영주님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사단장도 아니면서, 네 마음대로 라이온 기사단 소속의 기사들의 소속을 바꾸었다. 이것은 결코 좌시할 수 없는 크나큰 잘못이다. 내가 말한 것들은 증인과 증거가 명백하니 결코 모른다고 잡아떼지는 않겠지?”
 “그것 참 이상합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냐?”
 “이상하지 않습니까? 내가 내방에서 나오던 말 던 그것이 숙부와 무슨 상관이라는 겁니까? 아니 그러면 나는 방에서 나오고 들어갈 때도 숙부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십니까?”
 “그, 그건 아니지만...”
 “그리고 또, 제 뒤에 있는 이 친구들의 소속을 제 마음대로 바꾸었다고 하시는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니, 이게 어떻게 된 것인가?”
 토마스 자작은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보고를 한 기사를 쳐다보았다.
 “아닙니다. 제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저기 저 훈련생들은 램버트 도련님의 부하를 자청했고, 램버트 도련님도 저들이 자신의 부하들이라고 했습니다. 분명합니다.”
 기사는 자신의 말이 틀림없다고 확신에 차있었다. 토마스 자작 역시 그런 기사의 말을 믿었다.
 “내 부하는 저렇게 말하는데?”
 “아, 저 말이 맡기는 맞습니다.”
 “그것 봐라. 네놈이 드디어 이실직고를 하는구나!”
 “숙부, 그렇게 안 봤는데, 성격이 너무 급하시군요.”
 “뭐?”
 “사람 말이라는 건 끝까지 들어봐야 알 수 있는 겁니다. 우선 저 사람이 말한 것은 모두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문제가 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왜냐? 제 뒤에 있는 이 친구들은 벌써 라이온 기사단에 탈퇴서를 제출했다 이겁니다.”
 “뭐, 뭐시라?!”
 “분명, 숙부의 말씀대로 소속이 분명한 기사를 제 임의대로 소속을 바꾸었다면 큰 문제가 됩니다만, 지금처럼 탈퇴서를 제출하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텐데요.”
 램버트의 말에 토마스 자작은 달리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램버트의 말이 맞기는 했다. 하지만 탈퇴서라니, 토마스 자작은 물론 다른 사람들은 이 탈퇴서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정식 기사는 자기마음대로 탈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만약 정식 기사가 자기 마음대로 탈퇴를 하게 되면 그는 곧 배신자로 낙인이 찍히고, 다른 기사단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게 된다.
 훈련생들은 아직 정식 기사가 아니라는 점에서 마음대로 탈퇴가 가능했고, 다른 기사단에서 받아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어떻게 되었던지 탈퇴는 곧 배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탈퇴서를 내고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탈퇴를 했다고 해도 다른 기사단에서 탈퇴한 기사 훈련생을 받아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야말로 탈퇴서는 있으나 마나한 것이기에 토마스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탈퇴서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탈퇴를 하다니, 저들은 아직 상승 검술에 대해서 제대로 배우지 못했을 텐데, 왜 탈퇴를 한 것이지? 설마, 램버트가 클라인 검술을 가르쳐준다고 하고 저들을...’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던 토마스 자작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램버트 저 녀석이 가주께 클라인 검술을 배우기는 했지만 그동안 진도가 느려서 기초 중의 기초밖에 배우지 못했다고 했다. 클라인 검술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놈이 그런 어쭙잖은 실력으로 저놈들을 회유할 수는 없었을 거다. 그럼, 램버트 저놈이 도대체 뭐라고 했기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골치만 아파왔다.
 “자- 그럼 아무런 문제도 없는 거지요 숙부?”
 “끄응- 그래도 안 된다. 가주이신 너희 아버지가 명하기를 너는 결코 영주 성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이제 네가 네 방에서 나오던 말 던, 저놈들이 기사단을 탈퇴하고 네놈 밑에 있든지 말든지 상관은 없지만, 영주 성을 벗어나는 것은 내가 결코 좌시할 수 없다.”
 “그렇군요. 그 문제가 남았군요. 그건 숙부의 말씀을 따르도록 하지요. 헌데 외할아버지께서 무척! 이나 절 보고 싶어 하신다고요?”
 “끄응-.”
 ‘이놈이 그 문제는 왜 또?!’
 “듣기로는 외할아버지께서 화가 많이 나셨다고 하던데...”
 “뭐냐? 도대체 말하고 싶은 것이 뭐냐?”
 “듣자하니 아버지가 외할아버지께 한마디도 해주지 않아서 숙부께서 고생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냔 말이다.”
 “이래도 문제고 저래도 문제라면 숙부께 조금 편한 쪽을 택하는 것이 어떠한가 뭐, 이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토마스 자작은 뒤늦게 램버트가 하려는 말이 무슨 말인지를 깨달았다.
 말인즉, 자신을 햄트리 영지로 보내달라는 말이었다. 이것은 방금 전까지 토마스 자작이 생각하던 바였다. 비록 주군인 앤쏘니 백작의 명령을 거역하는 일이 되기는 하지만, 그 일의 책임은 자신만 짊어지면 되는 것이었다.
 마나소드 마스터인 다론 어빙스 후작의 분노는 너무나도 무서웠다. 그가 요르크 영지에 와서 약간의 분풀이만 해도 요르크 영지가 입는 피해는 엄청날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토마스 자작은 어떻게든 요르크 영지가 입을 피해를 줄이는 것이 클라인 가문에 대한 충성이기도 하다는 생각에 그렇게 하려고 했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을 접어버린 상태였다.
 토마스 자작도 사람이다.
 램버트가 저렇게 나오는데, 아무리 냉철한 토마스 자작이라도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다. 이성적으로는 램버트가 말하는 대로 하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램버트가 잘되는 꼴은 죽어도 보기가 싫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램버트를 햄트리 영지로 보낸다고 해도 이미 화가 날 때까지 난 다론 어빙스 후작의 화를 누그러뜨리기에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흥, 말도 안 되는 소리! 기사는 죽어서도 충성을 다 받쳐야 한다. 나는 라이온 기사단의 단장 토마스 클라인이다. 나의 주군인 앤쏘니 클라인 백작님의 명령은 죽어서도 지킨다. 나는 네놈의 뒤에 있는 배신자! 녀석들과 다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너는 결코 영주 성 밖으로 나갈 수 없다!”
 “흠, 그러시군요. 역시 숙부는 기사들의 모범이십니다.”
 “알았다면 그만 돌아가라. 다시 말하지만 너는 결코 영주 성을 벗어날 수 없다.”
 토마스 자작의 확고한 모습에 램버트는 졌다는 듯 조용히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토마스 자작의 귀에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께 들으니 외할아버지 성격이 장난이 아니라던데, 평소에는 세상 누구보다 인자하지만, 한번 화가 나면 눈에 뵈는 게 없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전부 박살을 내놓는다고 하던데...”
 “끄응-.”
 토마스 자작의 머리가 다시금 지끈 꺼렸다.
 다론 어빙스 후작의 성격은 제논 왕국 내에서 제법 유명했다.
 평소에는 남들은 불같이 화를 낼만한 일에도 그저 허허 웃으며 넘기지만, 한번 화가 났다하면 그때는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때려 부셔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론 어빙스 후작을 ‘잠자는 개차반’이라고 불렀다.
 다론 어빙스 후작은 자신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자신이 정치에 나설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위인 앤쏘니 백작이 현재 두 가문의 대표로 중앙정치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덧붙여, 다른 사람 같았으면 토마스 자작의 말도 안 되는 핑계에 당장에 발끈하고 나섰을 테지만, 다론 어빙스 후작은 무려 일 년이나 참아왔다. 원래 성격이 그런 면도 있지만, 사사로이는 자신의 사위의 영지이고, 공적으로는 합작하고 있는 상대 가문인지라, 지금껏 인내하고 참아온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은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게 된 다론 어빙스 후작은 당장에라도 요르크 영지를 박살을 낼 기세였다.
 미리 심어 놓은 첩자(?)에게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드디어 올 것이 오는구나 하고 난감해 하던 찰나, 램버트까지 저렇게 일을 저지르니, 토마스 자작의 속이 어찌 썩어 문드러지지 않겠는가.
 게다가 저렇게 지나가듯한 말투로 염장을 지르니 더욱 화가 났다.
 ‘어휴, 저놈이 끝까지...그냥 성질 같아서는 확!’
 “그러고 보니 나한테 마침 좋은 수가 있기는 한데...”
 “뭐?!”
 램버트의 말에 토마스 자작의 눈과 귀가 번쩍 뜨였다.
 “그, 그게 무슨 말이냐?”
 체면이고 뭐고, 없었다. 이제는 앤쏘니 백작이 왜 그렇게 램버트를 싫어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생각 같아서는 다시는 램버트와 말도 섞고 싶지 않았지만, 좋은 수가 있다는 말에 혹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만큼 다론 어빙스 후작에 대한 심적 고통이 컸었다.
 “응? 혼자 말이었는데, 듣고 계셨습니까?”
 ‘저, 저놈이...’
 분명 자기보고 들으라고 한 소리면서 저렇게 시침미를 뚝 떼다니.
 역시나 얄미운 놈이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흠, 흠, 어쩌다 보니 듣게 되었다. 그래 좋은 방법이 있느냐?”
 “외할아버지의 화를 확실하게 누그러뜨릴 좋은 수가 있기는 한데...”
 “근데 또 뭐냐? 도대체 뭘 바라는 거냐?”
 “하하하, 바라다니요, 이를테면 정당한 거래, 뭐 이런 거지요?”
 “정당한 거래?”
 “예, 지금 이대로라면 외할아버지의 화를 피할 길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제가 외할아버지의 일을 깔끔하게 처리해 주는 대신, 숙부님께서는 앞서 제가 말씀드린 대로, 병사들을 좀...”
 “그, 그건...”
 “안된다고 하시면 할 수 없고요. 저야 어차피 손해 볼 것도 없는데요. 뭐, 외할아버지가 영주 성을 박살을 내놓던 말 던, 그것 때문에 클라인 가문과 어빙스 가문이 갈라선다고 해도, 어차피 이놈의 영주 성을 벗어나지도 못하는 처지의 제가 딱히 손해 볼게 있겠습니까?”
 ‘저, 저놈이... 네 놈은 클라인 가문의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자작님, 우선 램버트 도련님의 말이라도 한번 들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단장님. 결정은 그 다음에 해도 되지 않습니까?”
 “그, 그럴까?”
 토마스 자작은 행정 책임관 루베인 남작과 부기사단장 헬리오스의 말에 못이기는 척하며 램버트의 이야기를 들었다.
 토마스 자작들은 처음에는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저 하도 답답하다 보니, 그냥 어떤 이야기인지 들어나 보자는 생각이었다.
 헌데 램버트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고개가 절로 끄덕여 지는 것이 이거면 한번 해볼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램버트가 제시한 방법, 그것은 바로 병이었다.
 병, 정확하게는 전염병이었다.
 말인즉, 램버트가 원래부터 몸이 약한데, 수도에서 영지로 내려오는 동안 피로가 누적되었고, 물갈이 또한 심하게 해서 며칠 앓아 누워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며칠 몸보신을 하면 완쾌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이상으로 병이 심해서 한 달이 지나도록, 병상에서 일어나지를 못했다.
 그때서야 무언가 이상하다고 여긴 영주대리 토마스 자작이 마법사를 불러 조사하게 했고, 단순한 몸살이 아니라, 큰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일반 병이 아니라 지독한 전염병이라는 것을.
 토마스 자작은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 램버트를 치료하려고 했지만, 포션은 물론 마법사의 회복 마법으로도 치료가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 왜 이 사실을 외부, 다론 어빙스 후작에게 알리지 않았냐?
 일전에도 클라인 가문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이 왕국전체에 돌았는데, 이번에는 단순한 소문도 아닌 전염병이, 그것도 가문의 적통인 램버트가 걸렸다는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게 되면 반대파 귀족들이 이것을 꼬투리 삼아, 우리 영지에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그동안 숨겨왔었다.
 더불어 어떻게든 클라인 가문의 힘으로 이 전염병을 퇴치시켜보려고 했는데,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이러는 동안 시간만 잡아먹어, 다론 어빙스 후작님께 그동안 말도 안 되는 핑계만을 둘러 됐었다.
 그것에 관해서는 정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럼 이제 와서 밝히는 이유는 뭐냐?
 다른 분도 아닌 다론 어빙스 후작님께 언제까지 이 일을 비밀로 할 수 없어서, 밝히기로 했다. 진즉에 밝혔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정말 죄송하다.
 더불어 클라인 가문의 힘만으로는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여, 외부의 성직자를 부르기로 했다. 성직자라면 분명히 램버트를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너무 심려치 마시라.
 이렇게만 말하면 다론 어빙스 후작도 몸소 요르크 영지에 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램버트가 자신 있게 말했다. 과연 듣고 보니 그럴 듯 했다.
 마나소드 마스터라고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남들보다 더 건강하고 잘 걸리지 않을 뿐이었다. 게다가 전염병이 아닌가. 그것도 마법사가 치료하지 못하는 지독한 전염병.
 다론 어빙스 후작은 걸리지 않는다고 해도 수행해서 온 기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자칫 햄트리 영지까지 전염병이 돌 수도 있었다.
 아무리 외손자를 사랑하는 다론 어빙스 후작이라고 해도 그런 위험부담을 앉으면서까지 램버트를 만나러 올 리 없었다. 또한 요르크 영지에 화풀이 하러 올 리도 없었다.
 그렇다고 램버트의 이야기가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마법사는 클라인 가문의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토마스 자작이 시키는 대로 할 것이니 문제가 없었는데, 성직자는 달랐다.
 성직자는 외부인이다.
 그가 진료를 하면 램버트가 전염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을 곧바로 눈치 챌 수가 있었다.
 한순간에 거짓말이 들통 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할 거냐는 토마스 자작의 말에 램버트는 싱긋 웃으며 그 또한 대책이 있다고 말했다.
 램버트는 지난 일 년 간 자신의 방안에서만 틀어박혀서 마나로드 수련에 열을 올렸다. 그리고 비약적인 실력의 향상을 이루어냈다. 성과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램버트는 임의적으로 마나로드를 뒤틀어 자신의 몸이 진짜로 병에 걸린 것처럼 보이게 만들 수도 있게 되었다.
 즉, 성직자가 왔을 때, 마나로드를 비틀어 아픈척하고 있다가 성직자가 치료를 시작하면 그때 원래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램버트는 마나로드나 로버트의 이론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수도에 있을 때 우연히 가짜로 아파보이게 하는 약을 손에 넣었다고 둘러 됐다. 그리고 곧바로 그 약을 먹는 척 하며 마나로드를 비틀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램버트의 몸은 거짓말처럼 할쭉해지더니, 점점 골골 거리는 몰골로 변하면서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보였다.
 이 거짓말 같은 광경에 토마스 자작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뛸 뜻이 기뻐했다. 이제는 더 이상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될 필요도 없고, 언제 다론 어빙스 후작의 불호령이 떨어질지 걱정할 필요도 없어진 것이다.
 다음날, 토마스 자작은 사람을 보내 그동안의 사정에 대해서 다론 어빙스 후작에게 알렸다.
 처음에는 요르크 영지에서 온 사람이라고 하니 다론 어빙스 후작이 당장에라도 찢어죽일 듯 했지만, 램버트가 말해준대로 차근차근 말했더니, 다론 어빙스 후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를 해주었다는 것이다.
 더불어 램버트의 치료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는 말과 함께 램버트가 완치가 되면 그때 천천히 램버트를 보내주어도 괜찮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요르크 영지는 다론 어빙스 후작의 화를 피해갈수가 있었지만 랄프 산맥의 몬스터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다론 어빙스 후작은 토마스 자작이 보낸 사람에게는 이해한다고 했지만 전신을 불태울 것 같은 화는 결코 가라앉지가 않았다. 어떻게든 이 끓어오르는 화를 풀어야 했던 다론 어빙스 후작은 그날, 곧바로 랄프 산맥으로 들어가 몬스터란 몬스터는 닥치는 대로 모두 두들겨 패버렸다.
 한동안 랄프 산맥의 몬스터들이 내지르는 비명소리에 햄트리 영지의 사람들이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동안 쌓인 울화가 어느 정도인지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토마스 자작도 앤쏘니 백작만큼 램버트가 싫어졌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었다. 토마스 자작은 약속대로 램버트에게 병사들을 내어주었다. 그리고 영주성 밖으로도 나갈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조건이 있었다.
 첫째, 요르크 영지를 벗어나지 말 것.
 둘째,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말 것.
 셋째, 어쩌다가 다른 사람의 눈에 띄어도 일의 책임은 모두 램버트가 진다. 즉, 영주 성 밖으로 나간 것이 앤쏘니 백작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토마스 자작이나 다른 기사들의 감시를 뚫고서 램버트가 강제적으로 나간 것을 한다.
 토마스 자작은 이 세 가지 조건만 충족시킨다면 램버트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했다.
 이에 램버트는 흔쾌히 받아드렸다. 일단의 준비를 마친 램버트는 10명의 기사 훈련생들과 500명에 달하는 병사들을 이끌고 영주 성을 빠져나갔다.
 토마스 자작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수가 없었다.
 우선 병사들을 너무 많이 붙여준 것도 걱정이 되었고, 아무리 조건을 붙였다고 해도 가주인 앤쏘니 백작의 명을 어기고 램버트를 영주 성 밖으로 내보낸 것도 무척 걱정되었다.
 “토마스 자작님, 굳이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루베인 남작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 역시 그동안 램버트로 인해 이래저래 고생이 많아 은근히 램버트를 싫어하고 있었다. 그런 램버트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다들 속으로는 무척이나 좋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주인 앤쏘니 백작의 명을 거역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혹시라도 백작님께서 아시게 되면 어쩌시려고...”
 루베인 남작의 걱정 어린 말에 토마스 자작은 그저 싱긋하고 웃어주었다.
 루베인 남작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램버트를 영주성 밖으로 내보낼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앤쏘니 백작의 허락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앤쏘니 백작도 걱정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장인의 성격에 대해서는 그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번만큼은 영지에 큰 피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헌데 전염병이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장인의 화를 누그러뜨릴 줄은 전혀 생각도 못했었다.
 영지에 피해가 없는 것이 기쁘기는 했지만, 그보다 더 기쁜 것은 장인과 아무런 앙금 없이 이번 일을 해결했다는 것이었다.
 앤쏘니 백작은 사람을 보내 토마스 자작을 크게 칭찬했다.
 때마침 램버트가 토마스 자작에게 위의 세 가지 조건을 붙이면서 제의를 해왔다.
 말인즉, 자신은 부하들을 이끌고 랄프 산맥으로 들어갈 테니, 영주 성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완강하게 버티던 토마스 자작은 계속되는 램버트의 설명에 조금씩 빠져들기 시작했다.
 감정적으로는 절대 램버트의 말을 들어주고 싶지 않았고, 가주인 앤쏘니 백작의 명을 어기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램버트가 하려는 일이 요르크 영지에, 아니 클라인 가문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할 수 없던 토마스 자작은 마침 자신을 찾아온 앤쏘니 백작이 보낸 사람을 통해서 램버트의 의견을 앤쏘니 백작에게 전달하도록 시켰다.
 앤쏘니 백작은 분명 램버트를 싫어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램버트는 아들이었다. 세상 그 어떤 부모가 아들이 잘못되기를 바라겠는가.
 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앤쏘니 백작의 화도 많이 누그러진 상태였다. 거기다가 그토록 강하게 키우려던 아들이 이제는 손수 나서서 그렇게 하겠다는데, 굳이 반대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영주 성 밖으로 내보내지 말라고 한 자신의 말을 철회 할 수도 없었다. 평범한 가정집의 일이라면 그렇게 해도 무방했지만 말이다.
 귀족.
 그것도 명망 높은 가문의 가주로써 자신이 한번 내뱉은 말을 쉽게 주워 담을 수가 없었다. 앤쏘니 백작은 트롤이나 오우거 같은 포악한 몬스터는 전혀 두렵지 않았지만 세간의 이목과 체면, 그리고 명예가 실추되는 것은 너무나도 두려웠다.
 그래서 앤쏘니 백작은 토마스 자작에게 자신이 허락했다는 사실을 숨기라고 명했다.
 그저 램버트가 제시한 세 가지 조건을 들어준다는 핑계로 토마스 자작이 독단적으로 벌이는 일로 처리 하는 것이 앤쏘니 백작의 명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속사정을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토마스 자작을 걱정했지만 토마스 자작은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그렇다고 토마스 자작이 정말로 아무런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토마스 자작이 알고 있는 램버트의 실력은 정말이지 형편이 없었다. 함께 하기로 한 기사 훈련생 10명 역시 램버트와 비교해서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토마스 자작은 500명이나 되는 병사들을 지원해 주었던 것이다.
 아무리 램버트가 싫어도 램버트는 가문의 적통이다.
 그런 램버트가 혹시라도 어떻게 된다면 그 아버지인 앤쏘니 백작이 크게 화를 낼 것은 자명한 일이고, 외할아버지인 ‘잠자는 개차반’ 다론 어빙스 후작 역시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끄응- 어떻게 된 게, 램버트 이놈은 옆에 있으나 없으나, 이렇게 골치가 아픈 건지. 하여튼 우환거리라니까.”
 램버트를 따라온 비안코들도 토마스 자작처럼 걱정이 이만저만 한 것이 아니었다.
 어쩌다보니 욕심에 눈이 멀어 라이온 기사단도 탈퇴하고 램버트를 따라오기는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들이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되었다.
 비안코들은 다른 훈련생들에 비해 타고난 자질이 떨어져, 훈련생들 중에서도 실력이 한참 떨어졌다. 그래도 충성심만은 남들 못지않아, 절대 배신 같은 것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만 것이다.
 “어이, 비안코 우리 이대로 정말 괜찮은 거야?”
 “그, 글쎄.”
 둥그렇게 둘러앉아 세상의 모든 근심걱정을 다 짊어진 듯한 비안코들의 모습에 램버트는 피식하고 웃고 말았다.
 “어이, 너희들 뭐하고 있냐?”
 “헛, 램버트님.”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소심한 녀석들. 그래도 당분간은 저 녀석들 키우느라 심심하지는 않겠군.’
 “다들 이리로 와봐라.”
 “예.”
 램버트가 자리 잡은 랄프 산맥.
 이 랄프 산맥은 제논 왕국과 루지 왕국를 가르는 경계가 되고 있다. 광활하기가 끝이 없는 랄프 산맥은 험준하기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사나운 몬스터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있다고 알려져, 세간에는 몬스터들의 천국이라고 까지 불리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배신을 했다는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운 비안코들인데 이런 랄프 산맥에, 물론 상대적으로 몬스터들이 적게 출몰한다고 알려진 랄프 산맥의 초입부분이라고 해도, 이런 곳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 비안코들의 불안한 마음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만약 램버트가 이루어주겠다고 한 그것이 아니었다면 비안코들은 일찌감치 이곳에서 도망을 쳤을 것이다.
 “난 한번 한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킨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희들 모두를 한꺼번에 그렇게 해줄 수는 없다. 그러니 오늘부터 내가 지명하는 한명씩 돌아가면서 시술을 받도록 한다. 알겠나?”
 “예.”
 “그러고 당연한 말이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라이온 기사단에서 배운 대로 수련에 열중하도록.”
 “예.”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렇게 불안에 떨 필요는 없다. 이미 이 주변은 500명의 병사들이 지키고 있다. 이정도면 어지간한 몬스터는 감히 이곳에 나타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니 다들 마음 편히 먹고 수련에만 열중해라.”
 “예, 알겠습니다.”
 ‘대답은 잘하는군.’
 “첫번째는 비안코다. 따라와라.”
 “예.”
 램버트를 따라 천막 안으로 들어가는 비안코를 바라보는 나머지 훈련생들의 눈에는 어떤 갈망이 꿈틀되고 있었다. 램버트가 약속한 그것, 단기간에 자신들을 최소 마나소드 익스퍼트 중급에 도달하게 해주겠다는 램버트의 말에 배신자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쓰며 램버트를 따라왔다.
 처음에는 단순히 자신들을 떠보기 위한 램버트의 사탕발림이라고 생각했다. 램버트의 자질이 많이 떨어져 실력이 형편없다는 것은, 클라인 가문 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로 치부되고 있었다.
 비안코들 역시 램버트가 자신들과 비교해서 대동소이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들보다도 실력이 더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헌데 그런 램버트가 영지에 온지 일 년 만에 마나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실력을 자신들 앞에서 들어낸 것이다.
 처음에는 자신들이 모르는 어떤 속임수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램버트의 실력이 진짜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더불어 그동안 램버트가 했던 말이 자신들을 희롱하기 위해서 단순히 내뱉은 말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비안코들이 한순간에 배신을 한 것처럼 보였지만, 비안코들도 그동안 나름 많은 고민을 해왔다. 기사단을 탈퇴하여 배신자로 낙인찍힐 것이냐, 아니면 단기간에 마나소드 익스퍼트 중급에 도달할 것이냐.
 이 두 가지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하던 비안코들은 자신들의 자질로는 아무리 수련을 한다고 해도 중급이상을 이루기 힘들다는 판단 하에 램버트를 따르기로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동안 피나는 수련을 함께 해돈 동료들에게서 손가락질 받는 것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비안코들의 속은 시궁창보다 더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이런 찰나에 드디어 그 배신자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선택한 것에 대한 대가를 받게 된다고 생각하니 다들 감회가 새로워졌다. 더불어 잘만하면 마나소드 익스퍼트 상급 이상의 경지에도 도달할 수 있다는 램버트의 말이 떠오르면서 열의가 불타오르기도 했다.

댓글(5)

바봉    
돈 내고 결제했지만 도저히 2권 2편에서 더 나아갈수가 없다.
2022.04.08 12:27
쩔었어    
참 간결이라는걸 모르구나
2022.04.09 11:53
os*****    
와 이건 소설이 아니라 설명집이다
2022.04.13 18:41
힌데미트    
조딩의 첫 장편 도전?
2022.04.23 13:26
n7**************    
읽지마셈 열린결말 정도가 아니라 연중작이라 봐도 됨
2022.04.23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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