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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1000만 전생 배우 [E](종료230728)

1000만 전생 배우 1-1권

2019.12.20 조회 3,646 추천 21


 # 프롤로그
 
 “컷―!”
 
 우렁찬 사인과 함께 감독이 뛰어나왔다.
 그는 양팔을 벌린 채 하회탈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 우리 대배우님. 어떻게 이리 연기를 잘하십니까? 아주 그냥 대사가 착착 붙어서 전율이 오네요.”
 “그냥 흉내를 잘 낼 뿐이죠.”
 “어우, 흉내라니. 보고 있는데 내가 다 칼을 맞은 거 같더이다. 혹시 남몰래 어디 가서 칼 맞아 보고 온 건 아니겠죠?”
 
 감독이 자기 딴에는 농담이라고 슬쩍 던졌다.
 그도 그럴 것이 ‘흉내’라는 말로 일축하기에는 연기가 너무나 실감 났다.
 진짜로 칼을 맞고 쓰러진 것처럼.
 그 고통과 아픔.
 두려움 따위가 절절하게 전해졌다.
 
 “뭐, 전쟁터에서 다른 장수들과 싸우다가 죽음 직전까지 몰린 경험은 있죠. 그때 느낌을 흉내 내 봤더니 비슷하게 나온 모양입니다.”
 “전쟁터······ 푸하하! 역시 대배우님은 농담도 잘하시네. 웃겨. 아주 그냥 유머가 넘치셔.”
 
 감독은 박장대소하고 진호는 그냥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사실을 말해도 안 믿어 주면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럼 다음 장면은 제가 왕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대체한 경험을 살려 보도록 할게요.”
 “오, 오. 그렇죠. 기업 합병을 해서 총수 자리에 오르는 거니까. 크. 역시 센스가 있으셔.”
 “그냥 경험이 조금 많을 뿐이죠.”
 
 백 년 단위던가, 천 년 단위던가.
 진호는 가물가물한 시간을 되짚으며 다시 촬영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신 8―3!”
 
 또다시 누군가를 흉내 낼 시간이었다.
 
 
 # Chapter1. 전생의 기억
 
 한때 전생 체험이 유행한 적이 있다.
 TV에서도 속칭 전문가라고 칭하는 이들이 우후죽순으로 모습을 드러냈었다.
 전생에 왕이었다, 노비였다, 장군이었다.
 근거라고는 전혀 없었지만 그 결과에 따라 나름의 희비는 갈렸다.
 
 [지금 시청하시는 분들도 한번 따라 해 보세요.]
 
 아마 연말 프로그램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유명세를 탄 최면술사가 나와서 대국민 전생 체험을 시켜 준다는 기획이었다.
 촛불 하나를 놓고 숫자를 셈하여 자가 최면을 거는 방식.
 
 “우리도 해 볼까?”
 “재밌겠네. 진호야 너도 할 거지?”
 “전생? 에이. 그런 거 안 믿는데.”
 
 관심이 없던 나지만 가족들의 성화에는 이기지 못했다. 작은 식탁에 둘러앉아 티비에서 나오는 지침을 따라 했다.
 
 “뭐야. 딱히 뭐 없는데?”
 “그러게요. 그냥 방송이니까 하는 말인가 봐요.”
 “쯧쯧. 괜한 짓 했네. 응? 진호야 뭐 하고 있어?”
 
 부모님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티비를 보고 있던 거의 모든 사람이 그러했다.
 이 방송 이후 최면술사는 사기꾼 타이틀을 얻고 금세 방송에서 퇴출당했다.
 하지만 한 사람만큼은 달랐다.
 
 “진호야?”
 “어머, 어머! 진호야, 왜 그래!?”
 
 나는 그날 내 전생을 엿볼 수 있었다.
 아니, 전생을 경험했다.
 수십, 수백, 수천 가지의 전생을.
 
 ***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해 보곤 한다.
 어릴 적, 전생 체험 같은 걸 시도해 보지 않았으면 어떨까 하는.
 그랬으면 무당을 찾아다니지 않았을 테니까.
 정신과를 수시로 오가는 일 따위는 없었을 테니까.
 미친놈이라고 손가락질을 받거나 재수 없는 놈이라고 따돌림당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이제 와서는 그저 공상일 뿐이지만.
 담배 한 대 태우며 시간을 녹일 때면 문득 그렇게 상상을 하곤 한다.
 
 “진호 씨. 언제까지 나가서 쉬고 있을 거야. 오후 중으로 기획안 확인해서 올리라고 했지?”
 “아, 아. 지금 들어갑니다.”
 
 하여튼 몇 분 쉬는 걸 못 본다.
 진호는 황급히 담배를 끄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사각 테이블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는 삭막한 환경.
 이곳이 그가 일하는 공간이었다.
 
 “또 서 팀장님한테 한 소리 들었죠?”
 “좀 쉴까 하면 귀신같이 냄새를 맡네요.”
 
 자리에 돌아가자 입사 동기인 지연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건치에 웃는 얼굴이 예쁜.
 남몰래 진호가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였다.
 
 “자요. 확인해야 할 곳 표시해 뒀어요.”
 “이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고마워서 어쩌죠?”
 “그렇게 고마우면 나중에 술이나 한잔 사요.”
 
 찡긋 웃는 얼굴까지 참 예쁘다.
 “꼭 사겠다.”라는 말을 건네며 기획안 쪽으로 눈을 돌렸다.
 두서없이 늘어선 문건 사이로 붉은 동그라미가 눈에 띄었다.
 
 “와. 진짜 엉망이네.”
 
 진호의 회사는 광고업체다.
 케이블이나 모바일 쪽을 주력으로 삼는.
 규모도 작고 회사 직원들 숫자도 상당히 적은 편.
 하지만 그렇다고 일이 적은 건 아니다.
 한 사람이 두세 명분 하는 건 기본이었다.
 
 “판타지 콘셉인가. 너무 전형적이네.”
 
 기획안을 쓱 훑던 진호가 품평했다.
 대충 누가 초안을 작성한 건지 가늠이 됐다.
 팀장이라고 어깨에만 힘주는 놈.
 콘셉도 촌스러운데 전체적인 방향성도 고루했다.
 요즘은 이런 식으로 광고 내보내면 되레 악영향만 끼칠 뿐이다.
 ‘컨펌받을 수도 없고.’
 나직이 한숨 쉬며 기획안을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판타지 모바일 게임이라면 차라리······.”
 
 진호가 조용히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었다.
 
 [······붉은 산. 오래된 검을 한 손에 쥐고 나는 힘겹게 올라갔다. 이미 산중에는 피로 온몸을 덮은 오크 무리가 자리를 하고 있는 상황.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서 이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기억.
 아니, 다른 삶의 경험들이다.
 산길의 흙냄새, 풀벌레 소리, 그렁거리는 오크의 숨결까지 전부 느껴졌다.
 
 “······큭.”
 
 길게 유지하지 못하고 빠져나왔다.
 숨이 차오르고 손과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깊이 심호흡하며 서랍을 열어 약통을 꺼냈다.
 손끝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후. 빌어먹을.”
 
 약을 입에 털어 먹고 나서야 증상은 멈췄다.
 휴지로 식은땀을 털어 내고 심호흡을 연거푸 했다.
 남들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런 모습 탓에 ‘미친놈’, ‘병자’ 취급받는 건 지긋지긋했기 때문이다.
 
 “산을 오르는 전사와 오크라.”
 
 하지만 덕분에 새로운 기획안 콘셉이 잡혔다.
 짧은 순간이지만 경험할 수 없는 어떤 순간을 직접 경험했다.
 이것은 단순한 공상보다 더 명료한 이미지를 제공해 준다.
 어린 시절을 날리고 청춘을 어둡게 만든 빌어먹을 전생 체험의 유일한 장점.
 남들은 가지지 못한 수많은 경험이었다.
 
 ***
 
 기획안 초안이 재가를 받았다.
 세부 내용 조율을 거쳐서 광고주의 최종 컨펌까지 갈 길은 멀지만 그래도 한고비 넘은 건 맞다.
 기획 단계에서 버벅거리는 것보다야 훨씬 나으니까.
 
 “끝나고 다들 한잔하자고.”
 
 아마 이 말만 없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혼자서 일이란 일은 다 한 듯 기지개 켜며 소리치는 팀장을 진호가 고깝게 흘겨봤다.
 술자리는 피곤하기만 하다.
 
 “아. 진호 씨는 가기 전에 잠깐 나 좀 보고.”
 “저요?”
 “잠깐이면 돼.”
 
 일적인 걸 제외하고는 딱히 접점이 없다.
 일 잘했다고 칭찬해 줄 사람도 아니고.
 무슨 용건일까.
 진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팀장의 뒤를 쫓았다.
 
 “담배?”
 “아, 네.”
 
 옥상 발코니에 한 자리 차지하고 담배를 쥐었다.
 처음 정신과에 발을 들이고 난 뒤부터 피우기 시작했으니까 벌써 10년이던가.
 담배만큼 익숙한 물건도 몇 없었다.
 
 “이번 기획안은 수고했어. 사장님도 좋다고 하더라. 아마 세부 내용만 잘 조율하면 광고주 쪽에서도 만족할 거야.”
 “잘됐다니 다행이네요.”
 “그래. 이게 다 진호 씨 덕분이지.”
 
 정말로 칭찬하려고 부른 걸까?
 뜻하지 않은 덕담에 진호가 의아해했다.
 
 “그래서 말인데, 진호 씨. 내가 한 가지만 좀 부탁해도 될까?”
 “부탁이요?”
 “어. 이번 분기에 인사이동 있는 거 알지? 조만간 사장님이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 대대적으로 움직이잖아.”
 “들어는 봤어요.”
 
 관심은 없지만 알고는 있다.
 규모가 작다고는 해도 회사는 회사.
 높은 직급을 노리는 건 대기업과 다를 바 없다.
 
 “내가 실적이 살짝 부족하거든. 그래서 이번 기획안을 우리 팀이 아닌 내 개인 걸로 보고했어.”
 “······네?”
 “알잖아, 우리 사장님. 팀이든 개인이든 딱히 신경 안 쓰는 거. 이번만 나한테 실적 좀 몰아 줘. 내가 올라가면 우리 진호 씨 잘 챙겨 줄게.”
 
 어깨를 툭툭 치며 친근하게 웃는다.
 이미 이야기가 다 끝난 듯한 분위기였다.
 진호는 담배를 문 채 잠시 멍하니 멈춰 있다 타들어 가는 불꽃에 정신을 차렸다.
 
 “잠시만요, 팀장님. 그런 건 미리 상의를 해야 할 문제 아닙니까? 갑자기 덜컥 정해 버리면······.”
 “에이. 그러니까 이제 말하잖아. 다 돕고 사는 건데, 이번 한 번만 나한테 양보 좀 해 줘.”
 “지연 씨는요? 석호 선배는 뭐라고 안 합니까?”
 
 같은 부서 나머지 둘을 거론했다.
 일은 진호가 다 했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같은 팀 소속이다.
 
 “그 둘은 이미 이야기가 끝났지. 잘되라고 다들 응원해 주더라. 진호 씨도 그렇게 해 줄 거지?”
 “······.”
 
 생각해 보니 어차피 둘은 상관없다.
 최초 기획안은 싹 다 갈아엎고 새롭게 만들었으니까.
 노동력을 송두리째 뺏기게 생긴 진호와는 입장이 다른 것이다.
 
 “제가 안 된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에이. 안 그럴 거잖아. 우리 사이도 좋은데 괜히 일 키우고 그럴 거야?”
 “그래도 그 일은 제가 다 했고, 팀적으로 보고하는 거면 몰라도······.”
 “그러면 나도 진호 씨 보호 못 해 주는데?”
 “보호요?”
 
 팀장이 진호를 보며 웃었다.
 그 웃음은 그다지 친근한 것이 아니었다.
 
 “회사 사람들은 진호 씨가 정신 병원을 집처럼 드나드는 거 모르지?”
 “뭐라는 겁니까, 지금.”
 “그냥 뭐 우연히 들은 거지. 그래도 난 진호 씨 나쁘게 안 봐. 사람이 열심히 일해서 회사에 들어온 거잖아? 안 그래?”
 “······.”
 
 작은 회사.
 정신병 이력 따위를 숨기고도 들어올 수 있는 곳을 힘들게 찾아서 합격했다.
 진호는 울컥하고 넘어오는 것을 간신히 참아 냈다.
 
 “자자. 우리 이야기는 다 된 거지? 그럼 부탁하자고.”
 
 툭툭. 팀장이 어깨를 두드리며 스쳐 갔다.
 진호는 화가 치밀어 올라 몸이 다 부들부들 떨렸지만 차마 움직일 수 없었다.
 ‘정신병자.’, ‘미치광이’ 같은 눈빛은 지긋지긋하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로.
 
 “······.”
 
 다 타 버린 담배가 발등 위로 떨어졌다.
 
 ***
 
 진호는 멍한 상태로 퇴근을 했다.
 밖에서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우산도 쓰지 않은 채 거리를 걸었다.
 문뜩 깨어나 보니 자주 가던 선술집 앞이었다.
 술이라.
 목 너머로 술이라도 쑤셔 박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 것 같았다.
 
 “독한 걸로 한 병 주세요.”
 
 자리를 잡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안주도 시키지 않은 채 빈속에 술만 털어 넣었다.
 몸이 화끈거리고 머리는 더욱 몽롱해졌다.
 
 “······빌어먹을 새끼.”
 
 일이라면 혼자서 다 했다.
 아이디어를 내고 세부 사항을 조정했다.
 두 사람분을 넘어서 팀을 혼자서 이끌었다.
 억울할 법한데도 아무 말 없이 일만 했던 건 그래도 여기서는 괜찮았기 때문이다.
 미친놈 소리 안 듣고, 병자 취급 안 받았으니까.
 그런데 여기서도 같다.
 미친놈은 미친놈이고 병자는 병자였다.
 어디를 가든 어떻게 숨겨도 결국 드러나는 것이다.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 걸까.
 뜨거운 술로도 씻겨 나가지 않았다.
 
 “세상에. 진호 씨. 무슨 술을 이렇게 마셨어요?”
 “지연 씨······?”
 
 술에 취한 걸까.
 이곳에 있을 리 없는 사람이 보이는 것 같다.
 
 “저한테 전화했잖아요. 기억 안 나요?”
 “제가요? 제가 그랬나요?”
 “네. 완전 취한 목소리로. 무슨 술을 이렇게나······.”
 
 진호는 창피함에 고개를 숙였다.
 술김에 전화를 걸었던 모양이다.
 그마저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로.
 평소 마음에 두고 있던 사람 앞에서 무슨 치태일까.
 속에 쌓인 화 위로 부끄러움이 덧씌워졌다.
 
 “무슨 일 있어요? 괜찮아요?”
 “······그냥 힘든 일이 있어서요. 제가 실수로 전화했나 보네요.”
 “괜찮아요. 힘들면 전화할 수도 있고 그러죠. 그보다 안주라도 좀 시켜요. 빈속에 술만 마시면 속상해요.”
 
 지연은 진호 옆에 자리를 잡았다.
 손짓으로 안주 몇 개를 주문하고는 자신도 잔을 받았다.
 반절 남아 있던 술을 나눠 채웠다.
 
 “지연 씨는 참 좋은 사람이네요.”
 “같은 회사 동료잖아요. 힘들 때 도와주지 않으면 누가 돕겠어요.”
 “그러게요. 회사 동료. 서로 돕고 사는 건데.”
 “자자. 뜨거운 국물이라도 좀 마셔요.”
 
 지연은 어묵탕 국물까지 퍼 옮기며 진호를 달랬다.
 술을 죽일 듯 마시던 진호도 뜨거운 국물이 속에 들어가자 조금 풀린 얼굴을 했다.
 그래도 누가 곁에 있으니 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진호 씨. 그거, 팀장님 독단 때문에 속상한 거죠?”
 “네. 네. 뭐, 그렇죠. 지연 씨는 괜찮아요? 팀 실적 뺏어 가는 건데.”
 “저야 뭐 이번 일에 지분도 없는걸요. 혼자서 일을 떠맡아 한 진호 씨만 속상하죠.”
 “지연 씨도 그 인간이 나쁘다고 생각하죠?”
 “나쁘죠. 완전 나빴어요.”
 
 지연이 팀장을 구박하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이 제법 그럴듯해 진호가 풀어진 얼굴로 웃었다.
 편들어 주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에휴. 회사 생활이 다 그렇죠. 너무 마음에 두지 말아요. 그래도 팀장 그 인간이 아주 양심이 없진 않아요. 진급하면 우리 챙겨 준다고 하잖아요.”
 “하. 그게 양심 있는 겁니까? 단물 다 빼먹고 적당히 생색내는 거지.”
 “그래도 아무 말 안 하고 입 닦는 사람보다야 낫죠.”
 “거기서 거기지 뭘······.”
 
 그래도 팀장이라고 욕하기는 싫은 걸까.
 빙빙 둘러 가는 이야기에 진호가 살짝 빈정 상했다.
 빈 잔에 남은 술을 다 털어 넣었다.
 
 “에잉. 다 마셨네. 지연 씨, 우리 한 병만 더 마셔요.”
 “너무 마셨어요. 다음에 마셔요. 네?”
 “딱 한 병만 더요.”
 “······알았어요. 그럼 화장실 다녀오는 길에 제가 주문할게요. 좀 쉬고 있어요.”
 
 지연은 어중간하게 답을 하고는 자리를 떴다.
 진호는 테이블에 턱을 괸 채 그녀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아버님. 저 계집을 탐하실 겁니까?
 
 “응?”
 
 어딘가 이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
 
 누구일까.
 진호는 지연을 쫓던 시선을 돌려서 자신의 옆자리를 바라봤다.
 
 “허?”
 
 그곳에는 잘생긴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사극에서나 볼 법한 갑주에 한 손에 들린 장창.
 그린 듯한 장군의 모습이었다.
 술집에서 사극 촬영이라도 있나 싶어 주변을 둘러봤지만, 눈앞의 남자를 제외하고 이상한 건 없었다.
 
 ―아버님. 이곳은 적진입니다. 계집의 미모에 홀려서 군을 방치함은 옳지 않다 여겨집니다.
 
 또다시 남자가 말을 했다.
 그의 시선은 완전히 진호에게 닿아 있었다.
 걱정과 근심이 온전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악래가 있거늘 무슨 걱정인 게냐.
 
 이번에는 진호의 입에서 말이 튀어 나갔다.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목소리에 말투 역시 낯설었다.
 아니, 애초에 사용하는 언어 자체가 한국어가 아니었다.
 이건 중국어.
 진호가 이해하기로는 그러했다.
 
 ―하지만 아버님! 저 계집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분명 무언가 수작을······.
 
 그 순간.
 팍 하고 무언가 진호의 몸을 흔들었다.
 눈앞의 장수 같은 남자의 모습이 사라지고 진호를 빌려 말을 하던 어떤 존재도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드러나는 건 ‘죄송합니다.’라며 스쳐 가는 다른 손님 한 명.
 보고 듣던 기묘한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이런 건 또 처음인데.”
 
 얼빠진 얼굴로 진호가 중얼거렸다.
 수십, 수백의 전생 체험을 겪어 봤지만 이렇게 생생한 적은 없었다.
 그 순간에 있는 듯한 느낌이라니.
 마치 자신이 전생 속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게 왜?”
 
 전생의 경험을 되살리는 방법에는 일종의 스위치가 있다. 비슷한 무언가를 강하게 떠올리면 얽힌 전생의 경험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지금처럼 뜬금없는 등장은 처음이었다.
 ‘아니. 뜬금없는 게 아니라면?’
 진호가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화장실이 있는 쪽으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응. 응. 자기야. 여기는 대충 마무리됐어. 저 새끼 완전 진상이지 뭐야. 지금도 술 좀 더 하자고 달라붙는데 징그러워 죽겠어. 우리 자기 진급 문제만 아니었어도 내가 이런 짓까지는 안 하는데.”
 
 지연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듣던 나긋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하여튼 이번 일만 끝나면 약속한 백은 확실하게 사 주는 거지? 걱정? 무슨 걱정이야. 진호 그 인간은 나한테 완전히 푹 빠졌다고. 적당히 구슬려서 입 닫게 할 테니까 걱정 말고.”
 
 지끈―!
 갑자기 지독할 정도의 두통이 밀려왔다.
 진호는 벽을 부여잡은 상태로 미끄러졌다.
 이명이 쏟아지고 주변 사물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아버님!! 이곳은 제가 맡겠습니다!!
 ―주군! 먼저 도망가십시오!!
 ―이곳은 지나갈 수 없다!!
 ―도망치십시오!!!
 
 데일 듯한 열기와 머리를 파고드는 목소리들.
 머리가 깨질 것 같아서 견딜 수 없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소리 없이 몸만 비틀었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모든 고통이 일순간에 사라지고 명료함만이 머리에 남았다.
 마치 태풍의 중심에 들어온 것처럼.
 
 “누가 감히 나 조 맹덕을 이용하려 한단 말인가.”
 
 이것은 누구의 목소리인가.
 진호는 확신하지 못했다.
 
 ***
 
 진호는 자리로 돌아가서 남은 술을 털어 넣었다.
 화끈한 기운이 밀려오자 눈에서 빛이 돌았다.
 취기는 그대로였지만 머리는 되레 명료했다.
 모든 것이 손에 잡힐 듯 뚜렷해진 것이다.
 
 “진호 씨. 주문하고 왔어요.”
 
 그 순간, 지연이 자리로 돌아왔다.
 그녀는 통화할 때 보여 주었던 표정은 감춘 채, 착하고 마음 넓은 동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앉아라, 계집.”
 “······진호 씨?”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건가? 난 이곳에서 네 목을 쳐도 모자람이 없다. 하지만 내 아량이 하해와 같아 한 번의 기회를 주고자 하니 잘 생각하거라.”
 
 지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혹시’라는 일말의 의문은 품고 있었다.
 
 “내 주변을 알랑거리며 잘도 적과 내통을 했었군.”
 “진호 씨. 지금 뭐 술주정이에요? 계속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통화하는 걸 봤다.”
 “아, 네? 그, 그건 그냥 친구랑 통화한 거예요. 뭔가 오해가 있었나 본데······.”
 “닥쳐라. 뱀 같은 혓바닥을 계속 놀리려 한다면 창자까지 꺼내서 죽여 주마.”
 
 살벌한 말에 지연은 입을 닫았다.
 이 말이 진호에게서 나왔기에 더 무서웠다.
 평소 얌전하던 사람이 꼭지 돌면 더 무섭다는 속설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계집 같으니. 적과 배를 맞대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을 했던 거냐?”
 “배, 배를 맞대다니요!”
 “잘 생각해라. 팀장이 승진을 한다고 네게 뭐가 떨어질 것 같나? 어차피 넌 계속 팀원일 뿐이다. 그리고 일이 잘못되었을 때, 모든 뒷감당은 네가 하게 되겠지.”
 “뒷감당이라니요?”
 
 진호는 마른 입술을 손끝으로 훑었다.
 눈앞의 계집을 손으로 쥐어짜고 싶었지만 차갑게 가라앉은 뱀의 심장이 이를 눌렀다.
 
 “내가 회사를 그만둘 테니까.”
 “그, 그만두다니요? 왜요!?”
 “뱀 같은 연놈들이 우글거리는데 내가 계속 다닐 이유가 있을까? 그리고 너라면 알 테지? 부서 내 실적의 대부분은 나한테서 나왔다는 걸. 내가 나가고 난 뒤에도 계속 그런 실적이 유지될까?”
 
 지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진호의 말대로 팀의 실적은 대부분 그가 맡고 있었다.
 팀장이야 승진해서 벗어난다 쳐도 그녀는 계속해서 팀에 남아 있어야 한다.
 
 “이제야 머리가 굴러가는 모양이군. 그래. 넌 뱀 사이에 낀 양일 뿐이다. 살고 싶다면 처신을 잘해.”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제가 뭘 어떻게 하라고?”
 “간단하다. 한 번 배신이 어려울 뿐, 두 번이 어려울까. 내일. 해가 밝거든 팀장이 기획안을 훔쳤다고 사장에게 고발을 해.”
 “뭐, 뭐라고요!? 내가 그럴 거 같아요? 그이랑 나는······.”
 “허튼소리 그만하고. 알량한 사랑 타령 할 거면 이 이야기는 없는 걸로 하지.”
 
 탕. 진호가 술잔을 내리쳤다.
 움찔, 하고 몸을 떤 지연이 그의 눈을 바라봤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은 거짓의 흔적조차 없다.
 술기운을 빌려서 헛소리하는 건 아닐까.
 잠시 기대해 보지만 그조차 이내 무너졌다.
 ‘선택해야 하는 거야?’
 사랑하는.
 아니,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남자와 출세 사이에서.
 
 “······제가 뭘 하면 되는데요?”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웠다.
 지연은 선택을 했다.
 
 ***
 
 “아, 시팔. 뭔 일이야?”
 
 팀장, 윤석호는 이른 아침에 걸려 온 전화에 볼멘소리를 쏟아 냈다.
 잠결에 들은 거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고발이라 들은 것 같았다.
 대체 누가?
 아니 왜?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장님. 부르셨습······ 어?”
 
 그렇게 평소보다 일찍 도착한 회사.
 가장 높은 곳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윤 팀장 드디어 왔군. 그쪽에 앉게.”
 “아, 네. 근데 무슨 일이죠? 저희 팀원들은 왜 이곳에?”
 “끄응. 자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
 “몰라요? 뭘 말입니까?”
 “에잉. 대체 뭐 하자는 건가? 이번에 올린 기획서. 여기 있는 홍 사원이 전부 했다면서? 그걸 자네 기획안이라고 날름 올렸던 건가?”
 
 덜컥,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다.
 윤석호는 굳은 얼굴을 한 채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스쳐 가는 시선으로 맞은편 지연과 진호를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장님. 뭔가 오해가 있었던 거 같습니다.”
 “오해는 무슨. 여기 둘에게 다 들었네. 준비 자료랑 그동안 있었던 대화 내역도 다 보여 줬다고.”
 “······.”
 
 마른침을 삼키며 석호가 지연 쪽을 흘겨봤다.
 ‘감히 네가?’라는 시선이었다.
 지연은 슬쩍 고개를 돌려 그 눈을 피했다.
 
 “자넨 팀장이라는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지금까지 실적이 전부 그랬던 건가?”
 “아, 아닙니다. 사장님. 이번 일은 진짜 무슨 오해가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아. 진호. 저기 홍 사원이 저 진급 점수 얼마 안 남았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자발적으로 한 거예요.”
 “자발적으로 했다?”
 “네. 그렇다니까요?”
 
 석호가 진호 쪽으로 강하게 시선을 던졌다.
 그에게는 쥐고 있는 패가 하나 있었다.
 동조하지 않으면 그걸 풀어 버리겠다는 강한 압박이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요. 제가 왜 그걸 자발적으로 합니까? 기획안은 어디까지나 제 작품입니다. 팀장님이 뭐가 예쁘다고 제가 그걸 넘겨주겠어요.”
 “너, 너! 그렇게 나와도 되는 거냐!?”
 “안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확 말해!?”
 “하시든가.”
 
 진호는 다리를 꼰 채 느긋하게 바라봤다.
 그 태도가 얼마나 여유로웠는지 석호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씁. 윤 팀장. 설마하니 무슨 약점 같은 거 잡아서 직원 실적을 빼먹고 그랬던 건가?”
 “아, 아니······.”
 “됐네. 더 들을 필요도 없겠군. 자네 승진 건은 취소네. 그리고 그동안 있었던 실적도 전부 다 조사를 해 봐야겠어.”
 “사장님!!”
 “그만두게. 나머지는 인사과에서 연락할 걸세.”
 
 석호는 무너지듯 소파에 몸을 기댔다.
 승진, 성공, 연인 등.
 손에 쥐었던 것이 한 번에 날아간 것이다.
 
 “······진호. 홍 사원.”
 
 그러자 천천히 분기가 치고 올라왔다.
 ‘이렇게 된 거 같이 죽자.’라는 저열한 분기였다.
 
 “사장님. 저 인간 정신병 있는 거 알고 있습니까?”
 “뭐?”
 “정신 병력 말입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정신 병원 다니고 있는데. 그건 모르고 채용하셨던 거죠?”
 
 석호가 진호를 노려봤다.
 ‘너도 한번 당해 봐라.’라는 의미였다.
 
 “네. 저 정신 병원 다니고 있습니다. 어릴 적 충격으로 인한······ 대충 그런 거죠.”
 “홍 사원? 정말인가?”
 “숨기고 싶었던 일이지만 사실입니다. 그걸 빌미로 잡아서 저 인간이 절 협박했던 거죠. 하지만 더 이상은 참고 있기가 힘드네요.”
 
 하지만 진호의 반응은 석호의 예상과 달랐다.
 그는 숨기려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되레 그걸 덤덤하게 늘어놨을 뿐이다.
 
 “어, 어 그런가. 그런 사정은 몰랐네.”
 “몰랐다고 하면 끝입니까? 사장님. 정신 병력입니다. 미친놈이 회사에서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압니까?”
 “크, 크흠. 윤 팀장. 말 좀 조심하게나.”
 “아니, 솔직하게요. 사장님도 좋은 건 아니지 않습니까. 애초에 미친놈이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게 알려지면 우리 이미지는 어떻게 합니까?”
 “끄응······.”
 
 사장은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실적을 빼돌린 팀장을 타박할 만큼 업무에 강단이 있기는 했으나 ‘미친 사람’이라 딱지 붙인 누군가를 옹호할 만큼 품이 넓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그런 사람이었을 뿐이다.
 
 “역시 달갑지 않은 모양이군요.”
 “아, 음. 미안하네, 홍 사원. 아직도 증세가 심한 건가? 통원 치료 할 정도로?”
 “음······ 뭐. 심하다면 심하죠.”
 “아니,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니네. 아무리 그래도 회사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을 두기는 좀 그렇다네.”
 
 사장의 반응에 석호가 이를 악물었다.
 ‘넌 무사할 줄 알았냐?’라고 눈으로 진호에게 묻기도 했다.
 
 “그러니 전 그만두겠습니다.”
 “······뭐?”
 “뭐라고?”
 “자, 잠깐만요!”
 
 차례대로 반응이 터져 나왔다.
 진호는 다리를 꼰 채로 소파에 몸을 기대며 그 반응을 즐겼다.
 그의 시선은 영활하며 또 오만했다.
 
 “저 같은 사람을 두지 못하겠다 하시니 그만두는 수밖에요.”
 “자, 잠깐. 지금 그만두면 이번 광고 건은 어찌하나?”
 “그야 뭐 알아서 하셔야죠.”
 “자, 잠깐! 진호 씨! 어젠 그런 얘기 없었잖아요! 갑자기 그만둔다니 무슨 소리예요!?”
 “딱히 남는다는 말은 안 했습니다만.”
 “야! 임지연! 너 어제 저 새끼랑 무슨 말을 한 거야!?”
 “오빤 좀 조용히 해 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뭐!? 이 창녀 같은 계집이!”
 “뭐라고!? 애초에 오빠가 능력 있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잖아! 무능한 인간 주제에!”
 
 꼬리를 문 뱀처럼 뒤엉키기 시작했다.
 격식을 벗어 던지고 서로를 향해 독설을 쏟아 냈다.
 그 혼란 속에서 진호만이 유일하게 웃었다.
 
 “이것이 맹덕의 방식인가.”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 Chapter2. 새 술은 새 부대에
 
 진호는 사표를 제출하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망설이는 사장과 싸우기 바쁜 팀장과 지연.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일 뿐이었다.
 
 “사, 사표를 내다니! 내가 미쳤나!?”
 
 한때는.
 지금은 아니다.
 사표를 내고 회사를 그만둔 지 정확하게 4시간 20분이 지난 시점.
 진호는 방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후회를 하고 있다.
 
 “미쳤어, 미쳤어. 백수라니! 집에는 뭐라고 말을 하지? 이번 달 공과금도 많이 나왔는데!”
 
 전생 체험이 모두 끝나자 고양되었던 감정이 모두 풀렸다. 생각과 기억은 그대로 이어졌지만 받아들이는 마음이 달랐다.
 ‘이따위 회사 때려치워 주지.’라던 당당한 마음이 지금에 와서는 오만으로 비칠 뿐이다.
 겁이 나고 앞날이 두려웠다.
 
 “······계속 그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조 맹덕.
 삼국지에서 익히 보았던 바로 그 조조다.
 왜 전생에 그런 인물이 불려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성정과 마음가짐은 매력적이었다.
 조조는 영활하고 오만하나 그만큼의 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으며 남을 지배할 만큼의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 인물의 선악을 떠나서 지금의 진호에게는 그런 강렬한 마음이 필요했다.
 
 “또 불러낼 수 있지 않을까?”
 
 진호가 바닥에 주저앉아 조조를 떠올렸다.
 Ko모사에서 익숙해진 일러스트와 익히 알고 있는 에피소드를 머리에서 계속 굴렸다.
 
 [······적벽에서 패한 조조는 병력을 수습하여 물러나는데······.]
 
 하지만 일전과 같은 일체감은 없었다.
 삽화 북을 읽는 듯한 옅은 체험감이 스쳐 갔을 뿐이다.
 
 “······끄윽.”
 
 게다가 여파도 달랐다.
 숙취마저 없던 조조의 체험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짧은 감상으로 발작 비슷한 증상이 찾아왔다.
 황급히 약을 찾아 먹어 증상을 억눌렀다.
 
 “왜지? 왜 다른 거지?”
 
 진호는 바닥에 쭈그려 앉아서 생각을 이어 갔다.
 어릴 적 전생 체험을 하고 난 뒤 10년이 넘는 세월을 이 증세와 함께해 왔다.
 갑자기 변화가 생겼다면 이유가 있어야 한다.
 ‘변화가 생긴 이유.’
 조조를 체험하게 된 것은 술집에서 지연과 만나면서부터.
 갑자기 장수 한 명이 허상처럼 나타난 직후였다.
 
 “상황이 비슷해서?”
 
 조조의 체험에서 나왔던 인물은 아마도 조앙.
 장수의 항복을 받고 난 뒤 추씨에게 홀린 조조가 가후의 계략에 당하는 순간일 것이다.
 얼추 보자면 여자에게 얽혀서 속는다는 느낌은 비슷하다.
 ‘술도 잔뜩 마셨겠다. 조조와 흡사한 상황에 몰입하다 보니 그 정도 수준에 도달했다······라는 건가?’
 앞뒤를 맞춰 보자면 그렇다.
 하지만 이 역시 확실하다고 답하기는 어렵다.
 
 “생각 좀 해 봐야겠네.”
 
 어차피 당장은 시간이 남아돌았다.
 
 ***
 
 회사를 그만두고 일주일.
 당장 세상이 무너질 것 같던 두려움도 많이 희석되었다.
 지금은 되레 일찍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점이 기쁠 뿐이다. 밤늦게까지 하는 게임도. 밀렸던 드라마를 몰아 보는 즐거움도.
 할 일 없이 뒹굴뒹굴하는 여유도.
 
 “안 돼!”
 
 자기 합리화를 하던 진호가 벌떡 일어났다.
 벌써 일주일이다.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이 시간만 보냈다.
 거울에 얼굴을 비춰 보니 수염은 거뭇거뭇하고 머리카락은 떡 져서 뭉쳐 있었다.
 이래서야 시간 많은 게 의미가 없었다.
 
 “뭐라도 해야 해.”
 
 빨래하듯 머리를 감고 대충 옷을 챙겨 입었다.
 오래된 빌라 문짝을 열고 밖으로 나와 보니 벌써 봄이었다.
 쌍쌍이 팔짱 낀 연인들이 도처에서 발생 중이었다.
 ‘다시 돌아갈까.’ 항마력 부족에 잠시 망설이다 독하게 각오하고 인근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뇌가 썩어 갈 때는 신선한 바람이라도 집어넣어서 환기할 필요가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머리 좀 식힐까.’ 하고 왔는데 인파가 쓰나미였다.
 춘계 운동회를 하는 사람들에 나들이 나온 회사 직원들까지 때맞춰서 몰려 버렸다.
 게다가 날 좀 풀렸다고 나들이 나온 가족까지 합치면 이건 숫제 여름철 해운대였다.
 
 “잠시만요! 지나갈게요!”
 
 이건 또 뭔가.
 딱 봐도 20대 초반인 대학생들이 커다란 패널 따위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가뜩이나 번잡하던 공원이 이 때문에 더 복잡해졌다.
 
 “다 가져왔어?”
 “어. 이거면 안 모자라지?”
 “대충? 선배들한테 혼나기 전에 돌아가자.”
 
 같은 과나 동아리 소속 같았다.
 우르르 몰려와서 뭘 챙기더니 또 다른 곳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공원 한쪽에 놓은 야외 단상이었다.
 지방 단체의 행사나 공연 따위에 쓰는 공간이었는데 오늘은 비어 있었다.
 
 “신입생부터 시작하자. 다들 단톡으로 전달받았지?”
 “네. 신입생에서 한 자리 뽑는다고 했죠?”
 “그래. 이번에 배역 맡았던 친구가 사정이 생겨서 빠지게 됐거든. 특별히 신입생 중 한 명 넣기로 했으니까 다들 잘해 봐.”
 
 공연 비슷한 걸 준비하는 걸로 보였다.
 멀찍이서 툴툴거리던 진호도 호기심이 생겼는지 슬금슬금 다가갔다.
 
 “후우. 근데, 선배. 꼭 이런 곳에서 해야 했나요?”
 “왜? 창피하냐?”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조금 민망하긴 하네요.”
 “그래서 하는 거야. 이 정도 시선에 쫄 거면 연기는 왜 해? 우리 동아리는 그렇게 허술한 곳이 아니라고.”
 
 연극 동아리였던 모양이다.
 진호는 아예 단상 근처 풀밭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주변을 보니 비슷한 호기심으로 다가온 커플 등이 이미 여럿이었다.
 확실히 민망할 만큼의 시선이 몰려 있었다.
 
 “다시! 감정을 담아서!”
 “발음이 엉망이잖아! 그렇게밖에 못해?”
 “대사 까먹을 거면 하지 마.”
 
 대학교 동아리 연습치고는 꽤나 빡빡했다.
 특히 눈썹이 빳빳한 여자 선배가 그러했다.
 발음, 연기, 대사 등.
 허술한 모습이 보인다 싶으면 사람이 보든 말든 대놓고 지적했다.
 
 “다들 제대로 안 할래? 연기가 그렇게 만만해? 동아리 들어왔으니까 대충 하고 말 생각인 거야?”
 “······죄송합니다.”
 “몰입을 하라고. 캐릭터에 이입을 해. 그 캐릭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슨 감정을 지니고 있는지. 고찰 없는 연기는 속 빈 강정이라고.”
 
 작정하고 말을 쏟아 냈다.
 신입생들은 바짝 얼어 서 있기만 하고 동기나 선배급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어색한 얼굴을 했다.
 진지함이 과한 상황이었다.
 
 “몰입이라.”
 
 하지만 진호에게는 딱 와닿는 말이었다.
 캐릭터에게 이입을 한다.
 감정을 이해하고 생각을 받아들인다.
 이는 한 사람이 온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진호가 조조를 체험하였던 것처럼.
 
 “확실하게 하라고. 이 사람은 자신이 모시는 사람을 위해서 자식마저 버릴 각오가 된 인물이야. 그런 각오가 어디 간단할 줄 알았어?”
 3
 그때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배역에 대한 설명인 모양이다.
 자식마저 버릴 각오가 된 인물.
 그 정도의 충정이 가능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장군께서는 절 버리고 가세요!
 
 “어?”
 
 진호가 눈을 깜빡였다.
 예의 단상 위로 허름한 우물이 겹쳐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선 핼쑥한 표정의 중년 여인도.
 
 ―부인! 그럴 수는 없습니다!
 ―상공께 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부디 제 아이를 잘 부탁합니다.
 ―미부인!!
 
 우물로 몸을 던지는 중년 여인.
 동시에 진호의 몸과 겹쳐져 있던 무언가가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을음과 먼지로 몸이 더러워져 있지만 그럼에도 감출 수 없는 용맹한 얼굴.
 
 “조운!?”
 “그렇지 조운 같은 사람.”
 
 답이 들려온 건 다른 사람의 입이었다.
 진호가 눈을 깜빡이며 그 소리를 쫓았을 때는 이미 미부인은 사라지고 난 뒤.
 후배들을 닦달하던 여자만이 진호의 시선 끝에 남아 있었다.
 
 “누구······?”
 
 어색한 침묵만 남았다.
 
 ***
 
 서한대 연극 동아리 ‘창궁’의 회장 윤아영은 약간의 당혹감을 느껴야 했다.
 사람들이 빤히 보는 이런 공개 무대에서 연습을 진행한 건 면역력을 키워 주기 위함.
 시선을 견디고 연기에 몰입할 수 있게끔 후배들을 독려하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외부인이 끼어드는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자신과 합을 맞추며.
 
 “저기, 죄송하지만 따로 연습을 하는 상황이라······.”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며 말을 건넸다.
 
 “조운 같은 사람이라면 어찌했을 것 같습니까?”
 “네?”
 “주인을 위해 자식도 버릴 수 있는 사람. 그런 인물이라면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하리라 봅니까.”
 
 하지만 상대는 수습되지 않았다.
 되레 연극 상황을 짚어 가며 묻기까지 했다.
 어릴 적 깡패로 전전하다가 자신의 가치를 알아준 한 남자에게 의탁한 인물의 이야기.
 오래된 방직 공장에 힘을 보태 일을 하다가 사기꾼과 깡패에게 은인이 몰린 상황이었다.
 
 “뭐, 받은 은혜가 있으니까 목숨을 걸어서라도 구하려고 하겠죠.”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말입니까? 단순하게 그를 지키기 위해서 폭력을 행사한다?”
 “아마도······?”
 
 아영은 자신이 이걸 왜 답하고 있는지도 의문스러웠다. 그나마 답이라면 눈앞의 남자가 너무 강경하다는 것 정도?
 답을 하지 않으면 달려들 것 같은 기세였다.
 
 “아니,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지키고자 마음먹은 사람의 각오는.”
 
 진호는 아예 단상 위로 올라갔다.
 호흡은 상당히 거칠었다.
 지금 그에게는 우물 위로 몸을 던진 미부인과 눈앞의 아영이 겹쳐 보이고 있었다.
 
 “오로지 그 사람을 위한 겁니다. 자신이 행하는 말, 행동, 생각까지. 그렇기에 망설임이 없고 두려움이 존재하는 않는 겁니다. 그냥 ‘지키겠다.’라는 표면적인 레벨이 아니라는 거죠.”
 “······그게 그거 아닙니까?”
 “아닙니다!”
 
 진호는 자신도 모르게 아영에게 훌쩍 다가갔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허공을 움켜쥐며 불을 토할 것 같은 눈빛으로 노려봤다.
 만약 지킬 수 있었다면.
 주군을 위해 미부인과 아두를 모두 구할 수 있었다면.
 천길 불구덩이라도 두려울까.
 이역만리 가시밭길이라도 고통스러울까.
 
 “꺅!”
 “······아!”
 
 순간, 짧은 비명에 진호의 이입이 깨졌다.
 몸 한가득 느껴지던 조운의 감정이 사라지고 깊은 탈력감이 몸을 휘어 감았다.
 이번에는 조조 때와는 달랐다.
 매우 짧았지만 그만큼 강렬했다.
 
 “저, 저한테 왜 이래요?”
 
 그리고 그제야 눈앞에 쓰러져 있는 아영을 발견했다.
 그녀는 질린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몰입했던 모양이네요.”
 
 천천히 주변 상황도 인지가 되기 시작했다.
 아영만이 아니라 같은 동아리 학생들도 진호를 괴이쩍은 눈으로 보고 있었다.
 어디 그뿐일까.
 나들이 나온 가족이나 회사원들도 ‘뭐 하는 거야?’라는 눈으로 진호를 봤다.
 제삼자의 시선에서는 어디까지나 난입객에 불과했으니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진호가 할 수 있는 건 사과밖에는 없었다.
 허리가 부러져라 연거푸 사과를 한 뒤 꽁지 빠지게 현장을 도망쳐 나왔다.
 얼굴은 붉고 창피함에 심장은 미칠 듯 뛰었다.
 하지만 묘하게도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
 
 “진짜 그 인간 대체 뭐냐!?”
 
 아영은 화를 내며 외투를 집어 던졌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우리 회장님은 또 뭐가 그렇게 뿔이 나셨을까?”
 “아. 서훈 선배. 오셨어요?”
 “어. 오늘 연습하러 나갔다면서. 일 끝나고 오는 길에 잠깐 들르려고 했는데 이미 없더라?”
 
 1년 전에 졸업한 동아리 선배 서훈이었다.
 현재는 방송국 FD로 일하고 있다.
 
 “말도 마요. 웬 불한당 하나가 난입해서 애들 다 놀라고······.”
 “취객이라도 들어왔던 거야?”
 “취객이면 그러려니 하지. 그 사람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확실한 건 정상이 아니라는 것 정도?”
 “뭐야, 그게. 미친 사람이었단 거?”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아! 차라리 녹화된 거를 봐요. 애들 연습 장면 확인하려고 찍어 둔 거 있어요.”
 
 이마를 툭툭 치며 아영이 컴퓨터를 조작했다.
 연습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 항상 녹화하는 버릇이 있었다.
 이번에도 두 시간 분량의 녹화본이 존재했다.
 
 “처음에는 그냥저냥 하다가······ 아. 여기부터요.”
 “조운? 갑자기 저기서 답을 한 거야?”
 “네. 그러더니 갑자기 흥분을 해서는 저한테 질문을 막 쏟아 내고.”
 “흐응. 확실히 좀 이상하긴 하네.”
 
 화면은 쭉 이어졌다.
 대담을 주고받던 진호가 무대 위로 뛰어올라 아영을 윽박지르는 장면까지.
 
 “호오?”
 “왜요?”
 “잠깐만 뒤로 돌려 볼래?”
 
 서훈은 화면 속에서 무언가를 느꼈다.
 단순히 머리가 이상해서 난입한 사람이라고 보기 힘든 어떤 이질감이었다.
 
 “어, 거기. 멈춰 봐. 그리고 다시 플레이.”
 
 몇 번을 반복해 가면서 진호의 모습을 살폈다.
 그의 동작, 얼굴, 목소리.
 모든 걸 하나하나 분해해서 살펴봤다.
 
 “이거 굉장하다고 해야 하나?”
 “엥? 뭐가요? 저 미친 사람이?”
 “어. 너, 저거 보고 아무것도 느끼는 게 없냐?”
 “뭘 느껴요? 미친 사람이라는 거?”
 “쯧쯧. 동아리 회장이라는 놈이 그렇게 수박 겉핥기식으로 봐도 되냐? 자세하게 봐 봐.”
 
 서훈의 손짓에 아영이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체 저 미친 사람에게서 뭘 보란 말일까.
 귀찮음과 불만이 섞인 심정이었다.
 
 “······어?”
 
 그러다 그녀도 발견했다.
 
 “그래. 보이지?”
 “네. 방금 저 사람 뭘 잡은 거죠?”
 “그래. 내가 보기에는 봉. 아니, 창이려나?”
 “네. 네. 그래 보이네요. 창을 잡고 격정에 휘감긴 장수? 아! 설마 조운?”
 “놀랍지?”
 
 아영이 입을 가리고 경악했다.
 이건 불가능한 일이다.
 한 사람이 캐릭터를 연기함에 있어서 그 깊이가 아무리 깊어도 한 번에 그 대상을 드러내는 건 불가능하다.
 아니, 적어도 그녀의 상식에서는 그러했다.
 
 “에이 설마요. 그냥 우리가 착각한 거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지. 짧은 화면이니까. 하지만 그래도 뭔가 있어 보이기는 해. 연극 동아리 연습 무대에 사람이 갑자기 난입하는 것도 이상하잖아?”
 “그럼 뭐, 상황에 몰입해서 진짜 조운이 되기라도 했다는 거예요?”
 “······하하. 그건 아니겠지. 그렇게 순간적인 몰입이 되는 배우라면 이미 이 바닥에 소문이 났을 테고.”
 
 서훈도 그것만큼은 부정했다.
 순간적인 모습에서 인상적인 걸 발견했다고 그 능력을 전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몇 명만 지닌 재능과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뭔가 개인적인 사정이 있다?”
 “그럴 수도 아닐 수도. 궁금하기는 하네. 혹시 이 사람 연락처나 그런 건 모르나?”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냥 이러고 사라졌는데.”
 “흐음. 그럼 이렇게 하자.”
 “네? 뭘요?”
 “영상 말이야. 올려. 인터넷에 올려 두고 이 사람 찾는다고 하면 연락이 닿지 않겠어?”
 
 서훈은 묘안이라고 의기양양했지만 아영은 회의적이었다. 하루에도 수백, 수천. 아니 그보다 많은 영상이 올라온다.
 그 가운데서 이것만 쏙 하고 봐서 연락이 오길 기대하는 건 요행수에 가까웠다.
 
 “그게 되겠어요?”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참 선배도 한결같단 말이에요. 끝에 가선 꼭 대충대충.”
 “야야. 그래도 그 실력으로 방송국에서 일하잖아. 난 일 때문에 가 볼 테니까 성과 있으면 연락하고.”
 “네, 네. 가 보세요.”
 
 아영이 손을 휘적휘적 흔들며 배웅했다.
 아이디어는 서훈이 냈지만 결국 일하는 건 그녀였다.
 ‘귀찮은데 하지 말까?’
 잠깐 30초 정도 고민도 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정리했다.
 미친 사람이든 미친 재능이든 그녀 역시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조운이라니.”
 
 삼국지를 좋아하기도 했고.
 
 ***
 
 해가 저물어 그림자가 늘어진 빌라 옥상.
 손가락 마디만큼 타들어 간 담배를 문 채 진호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
 
 “몰입이라. 몰입.”
 
 한 번이면 우연이라 할 수 있지만 두 번은 아니다.
 조조에 이어서 조운까지.
 이건 어딘가 공통된 분모가 있음이 분명했다.
 ‘상황의 유사함을 따지자면 조운은 아니야.’
 조조가 추씨에게 홀려 가후의 수작에 빠지게 된 건 자신과 흡사하나 조운은 그렇지 않다.
 그는 목숨을 걸어 충정할 만큼의 대상이 없었다.
 
 “그럼 역시 대상에 이입한 결과인가.”
 
 조조의 경우 추씨에게 홀리는 상황이 유사했다.
 당시 진호 역시 지연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으니까.
 술기운에 그 감정이 폭발하여 조조에게 이입되었다.
 ‘······이래도 빈약하긴 하네.’
 그럼 조운은 뭐가 그리 이입되었다는 걸까.
 상황에 맞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이리저리 짜 맞추어 보아도 설명이 빈약한 건 사실이었다.
 
 “······아니. 됐어. 어차피 이제 와서 이유를 알 것도 아니고. 차라리 방법을 모색하는 편이 나아.”
 
 한참을 끙끙거리던 진호가 생각의 방향을 바꾸었다.
 애초에 전생 체험이라는 것 자체가 모호한 현상이었다.
 게다가 조조에 이어서 조운이라니.
 중국계 피가 이어져 있다고 한들 동시대의 두 사람을 같은 전생으로 가지는 것도 이상했다.
 모를 일에 얽매여 끙끙대느니 차라리 이 상황을 유리하게 끌어갈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나았다.
 어찌 되었든 조조나 조운 모두 범인은 아니었으니까.
 
 “흉내라 한들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삶이 변할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 한 모금을 빨며 그리 생각해 봤다.
 
 ***
 
 사람은 누구나 기댈 곳이 필요하다.
 힘들 때 칭얼거리고 속에 쌓인 걸 털어놓을 대상.
 보통은 부모님이나 형제.
 혹은 학교의 선생님 정도가 그 범주에 속한다.
 하지만 진호는 조금 경우가 특이했다.
 
 “진호 씨. 상담은 꼬박꼬박 나오셔야죠.”
 
 일산 외곽의 석음 정신 병원.
 상담의를 맡고 있는 여은수라는 여선생이다.
 3년 전부터 진호를 담당해서 여태껏 상담 과정을 이어 왔다.
 진호에게 있어서는 부모를 제외하고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인물. 아니, 어떤 면에서는 부모보다 많은 걸 털어놓는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죄송해요. 요즘 일이 많다 보니······.”
 “응? 무슨 일 있었죠? 표정이 좀 이상한데.”
 “선생님 이제 관상도 보세요?”
 “농담으로 회피하는 건 좋은 반응이 아니라고 했죠? 무슨 일인데요. 말해 봐요.”
 
 지연에 대한 연애 상담까지 했을 정도로 격의 없는 사이다.
 속없는 농담으로 대화를 돌리기는 어려웠다.
 머리를 긁적이며 진호가 이야기를 풀어냈다.
 
 “세상에.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고 나왔다는 거예요?”
 “그럼 뭐 어째요. 계속 다닐 수도 없고. 조조······의 인격이 그런 쪽으로는 칼 같은데.”
 “진호 씨. 아예 조조라고 단정 지어서 이야기하시네요? 조금도 의심은 안 하는 건가요?”
 “이건 겪어 보지 않으면 몰라요. 무슨 제2의 인격이나 회피 반응 같은 게 아니에요. 정말로 조조라는 인물이 내 안으로 들어와서 감정과 생각을 전달했다고요.”
 
 은수는 쉽사리 반응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야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그걸 드러내는 건 대상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
 ‘인격의 해리 현상이 심화되는 건가? 완전히 객관화를 하는 것 같은데.’
 생각과 다르게 표정은 침착하게 유지했다.
 
 “그럼 혹시 그 조조나 조운이라는 사람을 지금도 불러낼 수 있을까요?”
 “아······ 그게 집에서 몇 번 시도해 보긴 했는데 쉽지가 않더라고요. 뭔가 더 몰입을 해야 하는데 제가 뭐 딱히 연기자도 아닌 터라.”
 “흐응. 몰입이라. 혹시 그 연습이라는 거 혼자서 하신 건가요?”
 “뭐, 그렇죠? 이런 걸 누구와 터놓고 할 것도 아니고.”
 
 은수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캐비닛 한 칸을 열어서 얇은 책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살인자 잭의 이야기’라는 괴상한 제목의 책이었다.
 
 “이건 뭐예요?”
 “일전에 환자 치료용으로 만들어 둔 책이에요. 자신을 잭 더 리퍼의 환생이라 여기는 사람이 있었거든요.”
 “그 살인마?”
 “네. 이 책은 그 사람의 설명을 기초로 만들었어요. 꽤나 생생하고 몰입도가 높죠. 어때요, 이걸 가지고 역할 분담을 한번 해 볼래요?”
 “살인마를요······?”
 “원래 캐릭터가 강할수록 몰입이 잘되니까요.”
 
 진호는 쉽사리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그가 조조와 조운을 거치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이들이 굉장히 강한 행동력을 지녔다는 점.
 이지를 상실하는 건 아니지만 그 순간만큼은 생각 자체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만약에라도 전생의 카테고리에 ‘잭 더 리퍼’가 포함된다면 어떻게 될까?
 
 “걱정 마세요. 문제가 생긴다 싶으면 제가 알아서 제지할게요. 이래 봬도 유도 유단자랍니다.”
 “······가차 없이 넘겨 줄 수 있죠?”
 “가능하다면 보고 싶네요.”
 “에이. 웃지 마요. 난 되게 심각한데.”
 “저도 진지하게 하는 거예요. 해 볼 건가요?”
 
 쓱, 내미는 책에 진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불안감은 둘째 치고 그도 호기심은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조조와 조운이 아닌 다른 사람도 가능한 걸까.
 가능하다면 살인마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자신이 살인마의 충동을 막을 수 있을까.
 
 “해 보죠.”
 
 호기심은 항상 이기는 법이다.
 
 ***
 
 환자가 기술한 잭 더 리퍼의 기록은 꽤 자세했다.
 1888년 메리 앤 니콜스로부터 시작되는 연쇄 살인 행각. 대상들은 모두 매춘업에 종사하는 여성이었으며 날카로운 수술용 칼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것 등.
 살인 하나하나에 대한 심리 묘사도 상세했다.
 대상을 어떻게 보고 어떤 방식으로 잡았는지.
 어떤 말을 주고받았는지도 적어 두었다.
 
 “어때요? 느낌이 오나요?”
 “대충 캐릭터는 이해했어요. 이제 어떻게 하죠?”
 “장면을 구성해 보죠. 전 피해자인 매인 앤 니콜스로, 진호 씨는 잭으로.”
 “음. 될지 모르겠네요.”
 
 대사와 상황 자체는 머리에 집어넣었다.
 진호는 속으로 전체적인 흐름을 두어 번 되짚어 본 뒤 은수를 향해서 대사를 읊기 시작했다.
 
 “너는 어찌해서 몸을 팔고 있지?”
 “네? 아. 손님이신가? 그런 거면 조금 기다려야 할 텐데.”
 “아니. 난 손님 같은 게 아니야. 네년의 지저분한 몸뚱이를······ 몸뚱이를.”
 “풋! 푸하! 진호 씨 거기서 말을 더듬으면 어떻게 해요.”
 
 말을 저는 진호의 모습에 은수가 웃음을 터뜨렸다.
 진지하게 하려고 해도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 발음마저 새는 진호의 연기는 개그 그 자체였다.
 몰입은커녕 발 연기도 이런 발 연기가 없었다.
 
 “아. 이게 아닌데. 이 캐릭터가 낯설어서 그런지 잘 몰입이 안 되네요.”
 “괜찮아요. 그럴 수 있죠. 천천히 반복해 보면서 자신이 뭘 느끼고 있는지를 알아 가는 것이 중요해요.”
 “······뭘 느끼는지?”
 
 진호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은수의 말속에 ‘전생 체험 같은 헛소리는 스스로 깨달아라.’라는 의미가 담긴 것 같았다.
 
 “다시 해 보겠어요?”
 
 하지만 은수는 그런 진호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연기를 재촉했다.
 
 “아, 네. 다시 해 보죠.”
 
 진호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제부터 살인마 잭 더 리퍼가 되는 것이다.
 살인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인물.
 스스로 거리의 청소부라 생각하여 혐오를 정당화하는 인물.
 뒤를 쫓아오는 경찰의 존재를 알고 있음에도 그 사실에서 희열과 스릴을 느끼는 인물.
 
 “자, 잠깐만요. 진호 씨. 팔을 너무 세게 쥔 것 같은데.”
 
 본디 이 거리는 깨끗했다.
 순수한 이들만이 거닐 자격이 있는 곳이었다.
 더러운 몸뚱이를 파는 오물통의 창녀들이 거닐어도 좋을 곳이 아니었다.
 이들은 죽여 없애야 한다.
 피로 바닥을 씻어 내야 하는 것이다.
 
 “진호 씨. 진호 씨!”
 “닥쳐, 썩은 내 나는 갈보 년아.”
 “······뭐, 뭐라고요?”
 “너희는 모두 오물이야. 치워야 하는 오물.”
 
 날카로운 수술용 칼 하나면 충분하다.
 목에 구멍을 뚫으면 이 더러운 오물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짧은 숨소리도.
 부들거리는 속눈썹도.
 가볍게 약동하는 저 핏줄도.
 
 “그만! 그만해요! 더 이상 하면 저도 가만히 안 있을 겁니다!”
 “쉬. 쉬. 그 입으로 뱉어도 되는 건 비명으로 충분해.”
 “진호 씨!”
 
 손끝에 창백한 피부가 닿았다.
 피부 안쪽에서 가볍게 뛰는 맥박마저 느껴졌다.
 가볍게 그러쥐면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지겠지?
 거기서 힘을 더 준다면 숨마저 막혀서 버둥거릴 거다.
 오, 가여운지고.
 더럽게 태어난 것은 죄가 아니다.
 그렇기에 직접 죽여서 정화하는 것이다.
 가녀린 목에 이 칼을 쑤셔 넣어······.
 
 “진호 씨―!”
 “컥!”
 
 순간, 둔탁한 충격과 함께 진호가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숨이 턱 막히고 강렬한 충동이 깨지듯 사라졌다.
 은수의 얼굴이 거꾸로 시야 한가득 들어왔다.
 그제야 진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시팔······.”
 
 차라리 기절하고 싶은 진호였다.
 
 
 # Chapter3. 메소드
 
 은수는 녹화된 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 봤다.
 화면 속 진호의 모습은 상당히 기괴했다.
 한 사람에서 다른 한 사람으로의 인격 전환.
 
 “외부의 정보를 바탕으로 인격을 구성했다기에는 너무 갑작스러워. 그렇다고 딱 맞는 인격이 내재되어 있다고 보는 것도 이상하고.”
 
 그렇다고 단순한 흉내라 보기도 어렵다.
 화면 속 진호의 모습은 확실히 살인마의 그것이었다.
 따라 한다고 나올 수 있는 눈빛이나 말투가 아니었다.
 자신이 정말로 ‘잭 더 리퍼’라고 믿는.
 
 “아니면 정말로 잭 더 리퍼가 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은수가 고개를 흔들었다.
 정신과 의사로서 환자의 말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전생 체험 같은 것은 어디까지나 뇌에서 벌어지는 자기 암시 반응의 일부일 뿐이다.
 
 “조조도. 조운도 같은 경우겠지.”
 
 은수가 다른 화면을 띄웠다.
 단상 위 여학생과 대치하고 있는 진호의 모습이었다.
 그가 말한 전생 ‘조운’이 몸에 들어왔던 순간.
 있지도 않은 창을 움켜쥐고 울분을 토해 내던 장면이다.
 
 “문제라면 이런 인격 변화를 제어하지 못한다는 건가. 각 인격 간의 기억 단절은 보이지 않으나, 이대로 개체의 해리가 심해지면 문제가 될 수도 있어.”
 
 현상을 막고자 한다면 아예 이런 몰입 자체를 차단해야 한다.
 하지만 은수는 그런 방식을 선호하지 않았다.
 애초에 사람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무언가에 몰입하지 않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이럴 때는 벽을 세우기보다는 다루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몰입한 캐릭터를 컨트롤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이거겠지.”
 
 툭툭.
 잠시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던 은수가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개별 처방의 시간이었다.
 
 ***
 
 아영은 어이없는 얼굴로 눈앞에 선 남자를 바라봤다.
 설마 하고 있던 일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다.
 
 “정말로 영상 보고 찾아온 거예요?”
 “네, 뭐. 전의 일 사과도 할 겸해서요.”
 
 진호였다.
 인터넷에 뜬 영상을 보고 학교까지 찾아왔다.
 서한 대학교 연극 동아리라고 하면 꽤나 알아주는 곳이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니 대번에 길을 알려 주었다.
 
 “진짜로 올 줄은 몰랐는데. 일단 좀 앉아요. 동방이 좀 어수선하죠?”
 “이 정도야 깨끗하죠.”
 
 과 잠바에 먹다 남은 과자 따위들.
 한쪽으로 쭉 밀어서 치운 뒤 엉덩이를 걸쳤다.
 동아리 방은 크지는 않았지만 꽤나 알차게 꾸며져 있었다.
 특히 벽에 붙은 대형 포스터들이 도드라졌다.
 
 “저 사람 옛날 서부 영화 주인공 아닌가요?”
 “아? 클린트 이스트우드? 유명하죠. 올드한 영화부터 최근 영화까지. 제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 중 한 명이에요.”
 “아. 요즘에도 영화를 찍었어요?”
 “······몰랐어요?”
 
 어이없다는 얼굴을 한 채 아영이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가 건넨 건 김빠진 콜라였다.
 
 “영화나 그런 쪽으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어서요.”
 “진짜요? 연기나 그쪽 전공한 사람 아니에요?”
 “전혀요. 일 때문에 정보 수집 차원으로 접한 적은 있지만, 딱히 관심 분야는 아니에요.”
 
 다른 누군가를 체험하는 건 전생으로 족했다.
 어릴 적 경험 이후로는 영화는커녕 소설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진호다.
 
 “흐응. 그런 사람이 무대 위에서 그렇게 했어요?”
 “그건 다시 사과할게요. 워낙 갑작스러운 일이라.”
 “사과는 한 번이면 족해요. 놀라서 연기를 받아 주지 못한 것도 있고.”
 “그······ 상황을 받아요?”
 “즉흥극은 연기 수업의 기본이죠. 상황은 조금 엇나갔지만 그때의 박력을 고려해 본다면 잘만 받았으면 꽤 괜찮은 장면이 나왔을 거예요.”
 
 그렇게 엉망으로 휘둘리는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건가.
 진호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연기를 배운 사람들은 다 그렇게 할 수 있나요?”
 “······신기하네요. 전 그쪽 분에게 물어보고 싶었는데.”
 “저요?”
 “네. 그 연기. 어떻게 한 거죠?”
 
 진호가 입술을 달싹였다.
 ‘전생 체험을 했습니다.’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흐응. 역시 뭔가 사정이 있나 보네요?”
 “딱히 그런 건 아니에요. 저도 잘 설명을 못 하겠어요. 그냥 무의식적으로 나온 거라.”
 “의도하지 않았는데 그런 연기를 했다?”
 “아니, 그러니까 그걸 연기라 말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아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연기도 배운 적 없는 사람이 즉흥적으로 그런 걸 해냈다? 있지도 않은 창을 눈으로 보게 할 만큼의 연기를?
 
 “진호 씨. 아니, 진호 오빠라고 부를게요. 저보다 훨씬 연상인 거 같은데.”
 “아, 네. 편하게 하세요.”
 “솔직하게. 연기 배워 본 적 없다는 거 거짓말이죠?”
 “아뇨. 진짜예요. 태어나서 한 번도 연기 같은 건 배워 본 적이 없어요.”
 “잘생긴 우리 이스트우드 배우님 걸고?”
 “더한 걸 걸어도 배운 적 없는 건 사실이에요.”
 
 아무리 봐도 거짓말하는 기색은 없다.
 그렇다면 정말로 그 순간에 즉흥적인 연기력을 뿜어냈다는 말인가?
 그게 가능한 일인가 싶었다.
 
 “안 되겠다. 한번 다시 해 봐요.”
 “해요? 뭐를?”
 “연기요. 그때 하던 거. 이번에는 좀 더 길게 뽑아서 가 보죠.”
 
 확인을 하고 싶다.
 정말로 눈앞의 인물이 그런 실력을 가졌는지.
 아니면 몇 살이나 어린 자신에게 장난질을 치는 건지.
 
 “살인자 같은 폭력적인 건 안 돼요.”
 “네?”
 “비폭력주의라······.”
 
 그것도 아니면 그냥 이상한 사람인지.
 아영이 팔을 걷어붙였다.
 
 ***
 
 평소보다 이르게 일이 끝난 서훈은 모교로 걸음을 돌렸다. 졸업한 지도 꽤 됐는데 아직은 방송국보다 학교가 더 익숙했다.
 특히, 병아리처럼 졸졸 따라다니는 동아리 후배들은 그의 몇 없는 낙 중 하나였다.
 
 “애들 데리고 삼겹살이나 때려야겠네.”
 
 밖에서야 ‘삼겹살?’이라고 물음표 때리지만 배고픈 대학생들이야 만세 삼창이다.
 삐약거릴 병아리들 생각하며 동아리 방문을 잡았다.
 
 “포기해. 이젠 늦었다. 너 혼자서 해결할 일이 아니야!”
 “응?”
 
 동아리 방 안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에게는 익숙한 아영의 것이었다.
 혼자서 연기 연습이라도 하는 걸까?
 창틈에 얼굴을 바짝 대며 안을 살폈다.
 ‘어? 저 사람······.’
 동아리 방 안에는 아영이 아닌 다른 사람도 있었다.
 
 “내게 있어서 포기라는 단어는 없다. 소, 손이 부러지면 다리로. 다리가 부러지면 어······ 이로. 이가 부러지면 잇몸으로라도. 내가 여기 살아 있는 이상 손댈 수 없다.”
 
 두 사람은 어떤 상황에 대해서 합을 맞추고 있었다.
 하지만 아영과 다르게 상대편은 연기가 약했다.
 대사를 떠는 거야 그렇다 쳐도 표현력 자체가 빈약했다.
 
 “또 그러신다. 한 장면. 한 순간에 집중하라고요. 왜 이런 대사를 하는지 상상하고.”
 “은인을 지키기 위해서?”
 “평생 신세를 진 사람이에요. 가족을 구해 주고 쓰레기 같던 인생을 구해 줬어요. 진호 오빠 같으면 어떤 마음이겠어요?”
 “고맙겠지?”
 “그 고마움에 이입해 보라고요.”
 
 그 사실은 아영도 아는 것 같았다.
 날카로운 말로 상대의 연기를 지적했다.
 ‘흐응. 역시 그 영상의 연기는 착각이었나?’
 잘 봐 줘야 신입생.
 그마저도 평생 연기와는 담쌓은 실력이었다.
 
 “고마움. 고마움이라 이거지.”
 “응?”
 
 그러다 어느 한 순간.
 상대역에 선 남자의 표정이 돌변했다.
 눈빛이 강렬해지고 얼굴이 단단해졌다.
 계속 보고 있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당장 그 손 떼!”
 “Shit!”
 
 그리고 이어지는 첫 발성.
 서훈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뱉고 말았다.
 연기를 보다 보면 한순간 어떤 스위치 같은 것이 들어갈 때가 있다.
 연기 밖과 안의 사람이 완전히 달라지는 현상.
 ‘메소드 연기?’
 완벽한 몰입이었다.
 
 ***
 
 서훈은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다.
 오가며 보는 사람들이 연예인이고 개중에는 ‘진짜’라 불릴 만한 사람도 제법 섞여 있다.
 그런 이들과 비교하자면 진호는 길가의 돌멩이.
 어떤 아우라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전에 보았던 그 연기.
 순간적인 몰입은 지금껏 봐 왔던 어떤 사람보다 강렬했다.
 
 “연기 자체는 엉망이지만.”
 “네?”
 “몰입 정도를 떠나서 순수하게 연기 자체는 엉망이었어요. 주연 캐릭터와 일정 부분 부합하기는 하지만 느낌이 상이해요.”
 
 능력에 놀란 건 부차고 사실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진호의 몰입은 분명 대단하지만 상황에 맞는 연기였냐고 묻는다면 물음표가 남는다.
 비슷하지만 어딘가 다른.
 상황 전체를 보자면 붕 뜬 캐릭터였을 뿐이다.
 
 “아. 그런 게 한눈에 보이는 겁니까?”
 “저도 나름 연기 전공이니까요. 극에서 요구하는 캐릭터를 자가 해석하는 것과 엇나가는 것 정도의 차이는 구별할 줄 알아요.”
 “방법이 뭡니까? 그 캐릭터라는 것에 몰입하면서 자기가 조종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거겠죠?”
 “······극 중 캐릭터에 몰입하는 게 아니라? 몰입 상태에서 조종하는 방법이요?”
 
 질문이 조금 이상한 것 같다.
 몰입 방식이 잘못되었다면 캐릭터를 깊이 이해하고 방향성을 수정하면 될 터.
 
 “아. 음. 전 방식이 남들과는 달라서요. 어떤 특징 같은 걸 떠올리면 제게 익숙한 캐릭터부터 몰입이 시작돼요. 이번에는 삼국지에 나오는 조운이었죠.”
 “아하. 그래서 그런 방식으로 연기를 한 거군요.”
 “네. 그러다 보니 이런 이입 상태에 휘둘리곤 하죠. 만약 그 상태를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면 연기 방향성에도 맞고······ 그러지 않을까요?”
 
 진호는 애초에 연기를 배우러 온 것이 아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전생의 인물을 체험하기 시작했을 때, 어떻게 하면 이를 조종할 수 있는가.
 스스로에 대한 제어권이었다.
 
 “메소드 연기에서 스스로를 분리하는 건 절대로 쉽지 않아요. 연기를 오래 한 분들도 캐릭터에 매몰되어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죠.”
 “어려운 겁니까?”
 “애초에 극 중 캐릭터에 빠지는 메소드 연기 자체가 쉬운 게 아니죠. 어설픈 흉내라면 대충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진호 씨 같은 몰입은······.”
 
 연기 판을 다 뒤져도 한 손에 꼽히지 않을까?
 서훈은 자신이 보고 경험한 것들을 곰곰이 따져 봤다.
 나름 연기력 좋다는 배우들?
 아니. 평면상의 연기력 자체는 그럭저럭 나올 수 있지만 진호와 같은 혼연일체의 모습은 없다.
 이건 배워서 할 수 있는 영역의 문제가 아니다.
 재능.
 그것도 세계를 다 뒤져도 손에 꼽을 만한 재능이다.
 ‘단점은 확실하지만······.’
 장점도 뚜렷하다.
 잘만 다듬으면 보석이 되지 않을까?
 서훈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진호 씨. 진호 씨는 몰입을 제어하는 방법을 배우고 싶은 거죠?”
 “아, 네. 그때 보신 것처럼 종종 사고를 일으키곤 해서요. 일상생활을 하려면 요령이 필요할 거 같은데.”
 “요령. 요령 말이죠. 그럼 이렇게 한번 해 보는 게 어떨까요?”
 “네? 어떤 거요?”
 “이번에 동아리 연합 주체로 ‘늙은 사자’라는 연극을 합니다. 실제 연극배우들도 나와서 도와주시고 각 학교 동아리에서도 사람을 차출해서 나가죠.”
 “어, 선배. 설마?”
 “거기에 객원배우로 나가 봅시다.”
 
 보석일지 아닐지는 한 번 더 봐야 할 것 같다.
 사람이 얽혀서 만들어 내는 연극 무대라면 그 빛을 감정하기 좋은 장소가 될 터.
 만약 그곳에서도 자신의 색을 낼 수 있다면.
 
 “그 뒤에 천천히 얘기를 해 보죠.”
 
 보석을 발굴해 내는 사람은 다름 아닌 서훈 자신이 될 것이다.
 
 ***
 
 진호는 한참을 고민했지만 결국 서훈의 제안을 수락했다.
 이래저래 혼자서 고민하는 것보다야 도움을 받는 편이 나았다.
 게다가 그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다른 사람의 방식을 직접 경험해 봐야 알 수 있는 부분이 있다.’라.”
 
 진호 자신의 방식은 타인의 것과는 궤를 달리한다.
 다른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캐릭터에 이입하고 빠져나오는지를 경험하고 나면 길이 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대본인데······.”
 
 서훈에게 얇은 대본 하나를 받았다.
 이 중 진호가 맡게 될 배역은 늙은 여우.
 한때는 사자 옆에서 동물 세계를 호령하던 존재였으나 후에는 버림받는 캐릭터다.
 굳이 비유하자면 한신 고사에서 나오는 ‘토사구팽’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원한다고 그 인물이 딱 집어서 전생으로 나타나리란 보장은 없다.
 나타난다 하여도 극 중 여우와 한신은 차이가 있다.
 
 “한신은 그 권세와 명성이 지나쳐서 유방이 잘라 냈다면 여우는 늙고 병든 자신을 돌보지 않아 내쳐졌다는 차이가 있지. 나이가 들어 머리가 굴러가지 않는 걸 이해하지 못한 캐릭터인가.”
 
 대본은 얇고 캐릭터 자체는 간단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생각해 볼 구석은 충분했다.
 사자는 굳이 왜 여우를 쳐 냈을까, 여우는 자신의 후일을 왜 염두하지 않았을까.
 너구리와 곰은 어째서 여우를 돕지 않았을까.
 몇 분 안 되는 분량임에도 많은 갈래들이 튀어나왔다.
 
 “내가 여우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진호였다.
 
 ***
 
 최근 연예계에서는 영역에 경계를 두는 것이 무의미하다. 아이돌이 연기하고 스포츠 스타가 예능을 하고 배우가 노래를 하곤 한다.
 박은서도 그런 경우였다.
 18살에 아이돌로 데뷔.
 그럭저럭 인기를 끌다가 적당한 시점에 해체 수순을 밟으면서 개인 활동으로 연기를 이어 가고 있다.
 그래도 나름 재능은 있어서 ‘연기돌’이라는 명함도 받았다.
 
 “그러니까 이런 행사는 꼬박꼬박 참여하는 게 좋아.”
 “귀찮은데. 내가 굳이 이런 행사까지 와야 해?”
 “야. 그래도 모교잖아. 너 입학할 때만 해도 열심히 다닌다고 하지 않았어?”
 “치. 말만 그렇게 하는 거지.”
 
 매니저의 말에 은서가 툴툴거렸다.
 모교. 정확하게는 한때 발을 담갔던 동아리 연합 행사에 그녀가 초청된 것이다.
 행사 페이도 있고 이미지상 좋은 일이기에 회사에서는 넙죽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급’이 이런 대학 행사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언니. 나도 이제 연기 좀 하잖아. 저번에 민태식 선배님도 나보고 재능이 있다고 했고. 좀 더 고급진 스케줄 없을까?”
 “고급은 무슨. 아직 멀었어, 야. 민 배우님이야 그냥 립서비스 한 거지. 너 저번에 방영한 드라마에서 연기 못한다고 욕먹은 건 기억 안 하지?”
 “그거야 날이 추워서 그런 거고. 입 풀린 후반기에는 나름 호평받았다고.”
 “퍽이나. 그때는 대사 없이 죽은 시늉만 해서 그런 거 아니냐. 연기돌 이미지 관리하려면 더 열심히 해. 그 정도 실력으로 비집고 들어가기 어려워.”
 “체. 언니는 꼭 사람 기분 망치더라.”
 “좋은 약이 입에 쓴 법이다.”
 “네, 네.”
 
 은서는 하는 듯 마는 듯 답을 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축제 기간이라 그런지 오가는 사람이 꽤 많았다.
 저 멀리 강당에서 연습하는 사람들도 눈에 들어왔다.
 한창 학교를 잘 다닐 때는 그녀도 그 무리에 섞여서 연기 연습을 하곤 했다.
 ‘재미있었나?’
 떠올려 보자면 나쁜 기억은 아니다.
 연기를 가장 열심히 연습한 것도 그때고.
 
 “뭐, 이번에 가면 후배님들한테 연기가 뭔지 가르쳐 주는 것도 재미있겠네.”
 “어? 뭐라고 했냐?”
 “아무것도 아니야. 언니는 운전이나 열심히 하세요.”
 “아오. 요 싹퉁머리 없는 것.”
 “히히. 그 매니저에 그 배우라고.”
 
 창에 몸을 기대며 실없이 웃었다.
 귀찮음은 많이 사라진 후였다.
 
 ***
 
 “아니, 이게 뭐야.”
 
 귀찮음.
 아니, 짜증이 다시 몰려온 건 차에서 내린 직후였다.
 연예인 선배가 온다면서 쫄랑거리는 후배들이 잔뜩 몰려올 거라 기대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연예인 은서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안에서 싸움이 난 모양이야.”
 “싸움? 동아리 방 안에서?”
 “어. 객원배우 때문에 그런가 본데?”
 “나, 나?”
 “아니. 너 말고. 다른 사람 하나를 섭외했는데 후배 하나가 빡친 모양이야.”
 “아. 어? 다른 사람이라고? 나 말고 누구를 섭외했는데?”
 
 본디 행사 특성상 객원배우는 최소화하는 편이다.
 해 봐야 은서 같은 휴학생 정도.
 추가로 다른 사람을 섭외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서훈 선배가 그랬다고?’
 게다가 이런 행사에 서훈이 자주 개입하는 걸 그녀는 안다.
 졸업생이며 현직 방송국 직원.
 그런 사람이 대충 아무나 끼워 넣었을 리는 없다.
 호기심에 까치발을 들고 방 안쪽을 살폈다.
 
 “어? 진호 씨?”
 
 동아리 방 중심에 서서 누군가와 대치하고 있는 사람.
 그는 은서가 아는 인물이었다.
 
 ***
 
 은서가 기억하는 진호라는 사람은 유약했다.
 광고 아이디어를 자신이 냈다고 설명하면서도 회의실 내에서는 이렇다 할 발언을 하지 못했다.
 얼굴에는 살짝 그늘이 져 있고 어깨도 굽었다.
 당시가 그룹 해체 후 막 활동을 재개할 때라 사람들을 하나하나 신중하게 접하던 시기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기억하지 못했을 거다.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아. 아. 은서 씨. 맞죠? 전에 광고 건으로 오셨던.”
 “헤헤. 기억하고 계시네요? 전에는 덕분에 좋은 광고 찍었어요. 사람들도 이미지에 잘 맞는다고 호평했죠.”
 “그만큼 은서 씨 이미지가 좋았던 거죠.”
 
 하지만 오랜만에 본 진호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전보다 표정도 밝고 어깨도 굽어 있지 않았다.
 말투에도 힘이 실려 듣는 사람이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다.
 
 “은서 언니. 오랜만이에요.”
 “우리 아영이도 안녕. 잘 지냈어?”
 “저야 뭐 잘 지냈죠. 그보다 언니. 언니가 저 사람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예요?”
 
 분위기를 쓱 보다 아영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전에 광고 건으로 만났지. 진호 씨 광고 회사에서 일하잖아. 설마 몰랐어?”
 “오. 광고 회사. 그랬구나. 전혀 몰랐어요.”
 “응? 그럼 진호 씨가 여기서 뭐 하는 건데? 무슨 광고나 이벤트 같은 걸로 불러온 거 아니었어?”
 
 딱히 행사에 광고업체가 붙을 이유까지는 없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진호가 이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설명이 안 된다.
 
 “그건 내가 설명하지.”
 “아. 서훈 선배. 와 계셨네요?”
 “자식이 선배 보면 인사부터 해라. 연기 좀 한다고 콧대만 높아져서는.”
 “에이, 제가 언제 또 그랬다고. 하여튼 나만 보면 만날 잔소리야.”
 
 서훈과 은서는 제법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서훈이 졸업하기 전, 짧은 실험 영화에도 출연한 적이 있었다.
 
 “군소리는 됐고······ 아, 그 전에 구경꾼들 좀 내보내라. 가뜩이나 시끄러운데 연예인 왔다고 하면 더 복잡해져.”
 “와. 연예인 막 굴리시네요.”
 “넌 좀 굴려도 돼.”
 
 은서가 입술을 비죽거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뜸 안 된다고 거부하지는 않았다.
 어찌 됐든 사람들 앞 연예인의 이미지는 중요한 거니까.
 
 “여러분······.”
 
 간드러진, 연예인 목소리를 내며 구경꾼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
 
 “그러니까 진호 씨가 이번 무대의 객원배우?”
 
 대충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서훈의 추천으로 진호가 객원배우로 들어오면서 이에 불만을 가진 후배가 따지러 온 상황.
 
 “진호 씨. 원래 연기를 하던 사람이었어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어쩌다 보니? 그럼 연기 경험도 없는데 객원으로 쓰는 거예요?”
 
 은서의 시선이 아영과 서훈 쪽으로 향했다.
 연합 행사 무대의 배역 관리는 회장의 역할.
 경험 없는 사람을 배역에 넣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경험은 없어도 실력은 확실해. 아마 연기를 한번 보면 다들 알 거다. 내가 괜한 생각으로 추천을 한 게 아니야.”
 “아 진짜.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선배? 졸업했으면 그냥 행사에 관심 끄세요. 왜 자꾸 끼어들어서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지.”
 “야, 진혁. 말조심해.”
 “뭘 또 조심합니까. 맞는 말 아닌가요? 연예인이라고 객원에 포함시키는 것도 짜증 나 죽겠는데.”
 
 후배, 진혁의 시선이 은서까지 닿았다.
 애초에 객원 멤버 자체를 싫어하는 인물이었다.
 ‘짜증 나네. 쥐방울만 한 게.’
 물론 은서는 그 눈빛이 짜증 났다.
 
 “그럼 직접 테스트해 보면 되겠네요.”
 “테스트라고?”
 “우리 잘나신 후배님은 실력 없는 객원이 들어올까 봐 걱정하는 거잖아. 안 그래?”
 “아, 네. 매우 걱정되네요. 어디서 연기 흉내나 내 보고 기웃거리는 사람이 많아서.”
 “아하하. 우리 후배님 평소에 화가 많나 봐? 어디 산에라도 들어가서 도 좀 닦지?”
 “이쪽은 그렇게 여유가 없어서요. 연예인 선배님은 스케줄이 널널한가 보네요.”
 
 은서는 울컥하고 올라오는 화를 겨우 잠재웠다.
 ‘이미지. 이미지.’ 몇 번이나 속으로 되뇌고는 재수 없는 후배 놈을 향해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까 시간 절약도 할 겸 테스트를 하자고. 그쪽 후배님 나. 그리고 여기 진호 씨까지. 실력으로 인정하면 다 되는 거 아니겠어?”
 “하. 직접 테스트를 하시겠다?”
 “보아하니 객원 멤버 자체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거 같은데. 왜 연기 물 조금이라도 먹은 사람을 쓰는지 알려 줘야 할 거 같아서.”
 “발 연기라고 욕먹은 주제에 퍽이나.”
 “뭐?”
 “아. 그냥 지나가는 말입니다. 그래서 테스트는 뭐로?”
 
 은서는 혓바닥까지 올라온 욕설을 겨우 삼켰다.
 
 “연기라면 즉흥 연기지. 설정 하나 주고 합을 보자고. 우리 잘난 후배님이 얼마나 실력 좋아서 선배들을 개똥처럼 보는지 한번 알아봐야겠어.”
 “아이돌 출신 연기자와 광고업체 회사원이 말이죠. 거, 퍽이나 기대가 되네요.”
 “끝나면 우리 후배님하고 술 한잔 꼭 해야겠어. 내가 아주 사회생활이 뭔지 좀 가르쳐 주게.”
 
 은서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애초에 학교 행사나 동아리 기강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자신의 연기를 얕잡아 보는 건 못 참는다.
 발 연기라도 죽어라 노력해서 예쁜 발 연기로 만든 건 자신이니까.
 
 “진호 씨, 이쪽으로 와 봐요.”
 
 본때를 보여 줄 생각이었다.
 
 ***
 
 진호는 조금 난처하던 차였다.
 무대에 서고 연기 합을 맞추는 것이 자신의 상태를 호전하는 것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
 하지만 그렇다고 억지를 부리고 싶진 않았다.
 후배라는 진혁이 조금만 더 공손했어도 그냥 말끔하게 포기하고 물러났을 것이다.
 
 “연기 경험이 없다고 했죠?”
 
 때문에 은서가 개입해 준 것이 꽤나 고마웠다.
 
 “제대로 해 본 적은 없어요. 몇 번 상황에 합을 맞춰 본 게 전부입니다.”
 “푸후. 근데 무대에 서겠다는 거예요?”
 “저도 나름의 사정은 있는 터라.”
 “그 사정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테스트 들어가면 두 가지만 딱 기억해 둬요.”
 
 은서가 진혁이 안 보이는 쪽에 서서 진호에게 속삭였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진혁이 물먹는 꼴은 꼭 보고 싶었다.
 
 “하나는 시선. 시선 처리를 따로 해야 할 상황 아니면 반드시 상대를 바라봐요. 눈과 눈이 마주치면 없던 교감도 생기는 법이니까요.”
 “시선. 시선. 명심하죠.”
 “두 번째는 호흡. 사람은 숨 쉬는 걸 인식하기 시작하면 그 자체가 불편해져요. 연기도 비슷해서 대사가 신경 쓰이기 시작하면 숨 쉬는 타이밍이 꼬이곤 하죠. 이번에는 즉흥 연기라 따로 숨 쉴 타이밍을 재기 어려워요. 그러니까 감정이 온다고 해도 대사를 너무 쏟아 내지 마요. 그러다 숨이 막혀서 붕 뜨게 되니까.”
 
 감정의 과잉을 헐떡임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고수용이다.
 초급자가 호흡에 휘둘리면 그보다 추한 것도 없다.
 
 “거기, 언제까지 속닥이고 있을 겁니까.”
 “후배님. 인내심도 없네. 경험 없는 분 배려 정도도 못 하나?”
 “못 할 거면 객원으로 오지 말았어야죠. 사회생활 하신 분이 그런 것도 모르나요?”
 “······주둥이를 비틀어 버리고 싶네.”
 “네?”
 “아하하.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 후배님 입술이 참 예쁘다 싶어서. 그럼 남자 둘에 여자 하나니까 삼각관계로 가자고.”
 
 은서가 말을 맺으며 진호의 등을 툭 두드렸다.
 나지막한 속삭임을 더하며.
 
 “캐릭터를 설정해요.”
 “······캐릭터를?”
 “삼각관계에 포함된 남자예요. 어느 쪽입니까. 뺏는 쪽, 뺏기는 쪽. 강한 쪽, 약한 쪽. 어떤 캐릭터가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는지 정해요.”
 
 쏟아지는 속삭임에 진호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는 이런 쪽의 지식이라고는 전무했다.
 연기라고는 전생 체험을 바탕으로 끌려갔던 것이 전부.
 ‘삼각관계. 연애 쪽 인물이라 이거지?’
 다급하게 여러 사람을 떠올려 봤다.
 연애에 강한 캐릭터.
 
 ―앙투아네트. 그대의 입술은 붉게 핀 장미와 같구려.
 
 그러자 무언가 느끼한 대사와 함께 확 번지는 장미 향. 중세풍의 복장을 한 여인이 요염한 얼굴을 한 채 한 발자국 앞선 곳에 나타났다.
 
 ―혓바닥은 언제나 달콤하군요, 카사노바.”
 
 아. 그 사람.
 진호가 절로 납득했다.
 
 ***
 
 설정은 주어졌다.
 여자, 은서를 중심으로 하는 삼각관계.
 과거인지 현재인지 어떤 만남인지, 세부적인 내용은 없었다.
 모든 건 즉흥에서 이루어지는 연기.
 
 “진혁아. 이제 우리 그만 만났으면 해.”
 
 선공은 은서가 먼저 했다.
 애달픈 얼굴을 한 채 진혁을 떠나보내는 연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무슨 소리야, 은서야. 이제 다 끝났다고. 그 인간하고는 정리하기로 했잖아. 약해지지 마.”
 
 진혁은 그런 은서를 ‘연인을 보내고 갈아타는 여인’으로 설정해 버렸다.
 덕분에 애달파 보이던 은서의 얼굴이 조금 퇴색되었다.
 
 “그만해. 잠깐 흔들렸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이를 떠날 수는 없어. 날 더 이상 나쁜 여자로 만들지 말아 줘.”
 
 은서는 그 상황에서 자신의 설정을 덧붙였다.
 잠깐 마음이 흔들렸던 여자.
 하지만 본래의 연인을 배신하지 못하는 그런 설정이었다.
 
 “이제 와서? 그럼 그날의 하룻밤은 뭔데? 날 향해 속삭이던 말은 뭔데? 전부 거짓말이었다고 말하는 거야? 웃기지 마, 은서! 네가 사랑하는 건 나야!”
 
 진혁은 은서의 설정에 구멍을 파 버리며 자신의 감정을 극화시켰다.
 순식간에 감정의 중심이 진혁 쪽으로 옮겨 갔다.
 ‘이 새끼. 조금 하네?’
 은서는 살짝 움찔했다.
 
 “하하. 그대의 사랑은 굉장히 편협하구려.”
 
 그 순간이었다.
 침묵하고 있던 진호가 대화 사이로 끼어들었다.
 다만, 그 어투가 너무 연극 톤이라 이질적이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던 아영과 서훈의 미간이 꿈틀할 정도로.
 
 “어찌하여 아름다운 이를 두고 다투는 것이오?”
 “너······ 음.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어. 은서의 마음은 이미 내게로 향하고 있으니까.”
 
 진혁이 살짝 흐트러지던 흐름을 바로잡았다.
 그러고는 대놓고 진호를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톤 봐라.’
 지금 상황에서 연극 톤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연기적인 면에서 완전 빵점의 대사였다.
 
 “마드모아젤의 마음은 바람과 같은 것. 한때의 흐름에 취하여 그것을 사로잡으려 한다면 그대 손에 남는 건 아쉬움뿐일 것이오.”
 “뭔······ 크흠. 그렇게 변명이나 하는 건가? 은서가 널 떠난 것이 그저 변심일 뿐이라고? 웃기지 마. 네 우스운 꼴을 보라고. 결국 네 잘못인 거야.”
 “그렇게 생각하시오?”
 
 진호는 대사와 함께 한 걸음 은서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조금 벙 쪄 있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숨이 닿을 거리로 좁혔다.
 그 동작이 얼마나 자연스러웠는지 누구도 막지 못했다.
 
 “은서. 마드모아젤. 그대의 마음이 바람에 흩날리는 꽃 무리 같다 하여도 나는 실망하지 않는다오. 햇빛을 보며 기뻐하는 해바라기처럼, 흐르는 강물에 기뻐하는 연어처럼. 그대가 그곳에 있음에 내 마음은 언제나 충만하기 때문이오.”
 “······저, 정말인가요? 날 원망하지 않는 건가요?”
 
 은서가 간신히 대사를 이어 갔다.
 분명 진호의 연극 톤은 극과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조금씩 그 분위기에 상황이 잠식되고 있었다.
 
 “오, 은서. 그대의 속눈썹이 떨 때면 내 마음은 요동치오. 그대의 입술이 떨어질 때면 내 영혼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이오. 나는 이미 그대의 포로이거늘. 어찌 주인 된 자를 원망하리오.”
 “그······ 정도로 절 사랑하시는 건가요?”
 “사랑하오. 내 영혼이 불타, 세상 끝 먼지가 되는 한이 있어도. 그대가 날 짓밟고 간다 하여도 그 흔적을 되새기며 난 사랑할 것이오.”
 
 이런 말 따위 느끼하고 역겹다.
 은서의 머리는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손을 잡은 진호의 얼굴, 눈빛, 말투.
 그리고 알 수 없이 뜨거운 분위기까지.
 한번 휩쓸리니 벗어 날 수가 없었다.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뛰었다.
 
 “그, 그만! 이제 그만 포기해! 구차하게 말로 은서를 꾀어내는 것이 네 사랑인 것이냐!?”
 
 진혁은 다급해졌다.
 그도 분위기가 진호를 중심으로 흐르고 있음을 알았다. 강하고 무거운 반전으로 흐름을 자신에게 끌고 올 필요가 있었다.
 
 “어디 말만이 구차할까. 내 얼굴, 표정, 말. 모든 것이 마드모아젤을 향한 마음에 비교하면 구차할 뿐이지.”
 “궤변이다. 말뿐인 걸로 은서를 행복하게 해 줄 수는 없어. 그렇기에 은서가 내게로 온 거잖아. 배고픈 예술가 따위는 행복의 초석이 되지 못해.”
 
 관계를 다시 정립했다.
 은서가 떠나는 이유와 흔들린 이유를 진호의 현실로 구속한 것이다.
 이건 꽤 설득력이 있었다.
 
 “사랑에는 빵이 필요하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요?”
 “그래. 허울뿐인 말로 사랑을 채워 줄 수는 없어.”
 “그렇다면 그대가 마드모아젤의 빵이 되어 주시오. 나는 시와 그림. 노래로 그녀를 채워 줄 테니.”
 “뭐, 뭐?”
 “내 사랑은 마드모아젤을 위한 것. 결코 구속하지 않는 것이오. 그녀의 행복을 위해 그대와 내가 함께할 수 있다면 그것도 또 다른 사랑이겠지.”
 
 터무니없는 설정이다.
 이런 막장 드라마 같은 걸로 설득력이 생길 리 없다.
 ‘그래야 하는데······.’
 생긴다.
 놀랍게도 설득력이 생기고 있었다.
 진호의 연극 톤의 말투나 과장된 태도가 이런 막장 설정을 그럴듯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지, 집어치워! 그딴 말에 내가 설득될 것 같아!?”
 “화내지 마시오. 그대의 마드모아젤을 향한 마음이 진실하다면 나 역시 그대에게 진실하리라. 사랑하는 자는 아름답고 아름다운 것에는 죄가 없으니. 어찌 우리가 다퉈야 하는 것이오?”
 
 진호는 이제 진혁에게 다가갔다.
 그 걸음은 바람같이 가볍고 말투는 솜사탕처럼 달콤했다.
 진혁은 자신도 모르게 볼을 붉혔다.
 
 “사랑에는 경계가 없소. 내가 마드모아젤을 사랑하는 것도, 그대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도. 나와 우리가 모두 사랑하는 것도. 오직 아름다움과 행복만이 이곳에 있거늘. 구속할 필요도, 나눌 필요도 없는 것이오.”
 
 진호는 한술 더 떠, 은서까지 당겨 왔다.
 이제 세 사람은 한곳에 뭉쳐 서로를 바라보는 관계가 됐다.
 전에 있던 설정은 모두 폐기돼 버렸다.
 지금 이 상황을 이끌어 가는 건 진호였다.
 
 “나, 나는 남자를 사랑할 마음 따위는······.”
 “아름다운 것에는 경계가 없다 하지 않았소. 그대 눈동자 안에 내가 비쳐 보이거늘. 마음을 부정하지 마시오.”
 “그······.”
 
 두근두근.
 진혁은 자신의 볼에 닿은 진호의 손길에 심장이 거칠게 뛰고 있음을 부정하지 못했다.
 모든 기준을 다 가지고 와도 진호는 이상형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그는 완전한 이성애자였다. 그런데도 심장이 요동치는 것이다.
 당장이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입을 맞추고 싶을 정도로.
 
 “그만! 여기까지만 하지.”
 “헉!”
 “꺅!”
 
 그 에로틱한 분위기를 깬 것은 서훈이었다.
 그의 말이 창이 되어 흐름을 깨고 정신 차린 은서와 진혁은 기겁하며 물러났다.
 둘 다 얼굴이 터질 듯 붉었다.
 
 “베드 신은 허락 못 한다.”
 
 세 사람 모두 답하지 못했다.
 
 ***
 
 진혁은 도망쳤다.
 ‘배역이든 뭐든 알아서 하라지!’라는 토라진 여중생 같은 말을 남기고.
 연기의 여파가 큰 터라 한동안은 나타나지 않을 기세였다.
 
 “굉장한 연기였어요. 그건 누굴 떠올리고 한 겁니까?”
 “······.”
 “진호 씨?”
 
 진호는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카사노바에 대한 여운이 남은 탓이었다.
 자신의 입으로 뱉은 말, 표정, 자세까지.
 모든 것이 뚜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여, 연기였잖아요.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요.”
 
 그리고 그건 은서도 비슷했다.
 그나마 경험이 있는 그녀가 조금 더 빠르게 스스로를 수습했을 뿐이다.
 물론, 그럼에도 붉어진 볼은 쉽사리 돌아오지 못했지만.
 
 “······연기하시는 분들은 다 이런 걸 극복하고 있는 거겠죠?”
 “자기가 했으면서 그런 말을 해요?”
 “할 때는 몰랐는데 이거 굉장히 부끄럽네요.”
 “그게 부끄러운 사람의 연기인가요? 난 완전히 심장이 터질······.”
 “터질?”
 “악! 시끄러워요. 그보다 당신. 아까 연기해 본 적 없다는 건 완전 거짓말이죠?”
 
 부끄러움을 속이며 은서가 역정을 냈다.
 그런 연기가 경험 없이 나온다는 건 믿기 어려웠다.
 
 “연기를 해 본 적이 없다는 건 사실이에요.”
 “거짓말. 그런 사람이 그렇게 연기를 해요?”
 “사실이야. 어떤 면에서 진호 씨는 연기를 하는 게 아니거든.”
 “서훈 선배. 무슨 말이에요, 그건.”
 
 서훈이 동아리 벽면에 있는 화이트보드에 진호라는 글자와 캐릭터라는 글자를 나란히 썼다.
 그리고 두 글자에 동그라미를 치며 한곳으로 모았다.
 
 “캐릭터에 대한 완전한 이입. 완벽한 메소드. 지금까지는 없던 새로운 타입의 연기자거든.”
 “메소드······?”
 “어때? 이번 행사에서 같이 연기할 마음이 생겼어?”
 
 은서는 서훈의 말을 흘리며 진호를 바라봤다.
 여전히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 뒤편으로는 자신에게 사랑을 속이던 그 캐릭터도 있을 터였다.
 
 “스케줄 조정하고 올게요.”
 
 망설임은 없었다.
 
 ***
 
 배역이 정해지고 연습이 시작되었다.
 진호의 배역은 늙은 여우.
 숲의 실세였다가 늙고 병약해지면서 점차 그 힘을 잃어 가는 캐릭터였다.
 전체 비중은 낮은 편이었지만 주인공인 사자와의 접점이 많아서 임팩트는 상당했다.
 
 “사자. 사자여. 어찌하여 네가 나에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그만두시게, 여우. 이유라면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더 이상 자네의 말을 따라 주는 동물 따위는 없네. 이제 그만 모든 걸 내려놓고 물러나게.”
 “내가 얼마나······.”
 “그만. 그만. 잠깐 멈춰 보죠.”
 
 문제라면 캐릭터에 대한 이입.
 배역을 맡고 연습을 시작한 지 벌써 삼 일이 되었음에도 진호는 마땅한 전생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도 느낌이 안 와요?”
 “밤낮으로 생각은 해 보고 있는데 뭔가 느낌이 안 오네요.”
 “아, 이러면 곤란한데. 대사야 대충 칠 수 있게 됐지만 전혀 여우 같지가 않단 말이에요.”
 
 여우의 중심 감정선은 분노에서 허망함으로 이어진다. 권세를 잃은 것에 분노하던 여우가 다른 동물들의 생각을 알게 되며 자신이 누리던 것이 얼마나 허망한지 알게 되는 흐름.
 얼핏 보자면 꽤 많은 역사 속 인물이 이것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으나 딱 잡히는 것이 없었다.
 
 “잠깐 쉬고 할까요?”
 “네. 그 편이 나을 거 같네요.”
 
 진호는 셔츠를 풀며 밖으로 나갔다.
 가슴이 좀 답답했다.
 
 “생각만큼 연기가 잘 안되나 봐요?”
 “아. 은서 씨.”
 
 그런 진호의 옆으로 은서가 다가왔다.
 그녀는 스케줄을 조정하고 이번 연극을 위해서 꽤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회사에서는 당연히 반대했지만 강행했다.
 연차 쌓인 전직 아이돌의 힘이었다.
 
 “연습하는 거 봤어요. 전의 그 연기력이 아니던데.”
 “음. 아무래도 반쪽짜리라서 그런가 봐요. 제때 몰입할 대상을 찾지 못하면 계속 제자리인 터라.”
 “흐응. 천부적인 재능의 단점?”
 “하하.”
 
 진호에게 있어서 연극 무대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이번 제안을 받아들인 건 어디까지나 ‘전생 체험’ 자체를 제어할 요령을 찾기 위함.
 무대의 성공이나 좋은 연기는 주요 쟁점이 아니었다.
 ‘그게 맞는데······.’
 손과 다리가 잘려 나간 기분이다.
 조조가 되었을 때, 조운이 되었을 때, 카사노바가 되었을 때. 그들은 감정을, 생각을, 표현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었다.
 그 자연스러움이, 해방감이 그립다.
 하나의 그림이 완성될 때의 충족감이 그립다.
 지금의 팔다리가 잘린 연기로는 얻을 수 없으니까.
 
 “그럼 이렇게 한번 해 볼래요?”
 
 그런 그에게 은서가 조언을 건넸다.
 
 <『1000만 전생 배우』 1-2권에 계속>

댓글(4)

[탈퇴계정]    
전생 빙의? 인격 변화? 뭐라고 해야할지... 암튼 빙의던 인격 변화던 쥔공 본 성격은 의지박약. 왕소심으로 보이내요....초반부터 답답함이 밀려옵니다.
2020.06.15 17:22
취익취익    
씨발 하차한다 작가야
2021.07.26 14:13
jj****    
진짜 돈아깝네요. 개연성 없는 스토리. 그냥 일기장같네요.
2022.03.16 02:09
g548    
전생이 모두 짱개족일것같네 중국아니면 글이 아나오지 ㅋㅋ
2022.03.18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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