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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드가 빙의헀다 1-1권

2020.01.02 조회 3,416 추천 26


 # 프롤로그
 
 펠레, 마라도나, 크루이프, 그리고 리오넬 메시······.
 월드 클래스 선수들조차 우러러보는 압도적인 선수들.
 위대한 선수들의 경기를 볼 때면 늘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정말 인간 맞나?’
 시간이 멈춘 듯한, 혹은 미래를 내다보는 듯한 플레이.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는 번뜩임.
 저런 말도 안 되는 재능은 대체 어떻게 얻게 된 걸까.
 끊임없는 연습? 경험? 웃기지도 않는 얘기다.
 축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다.
 절대 노력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클래스가 있다는 걸.
 그러면 저 모든 건 다 우연인가.
 천부적인 재능, 그런 게 있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축구의 신이라도 있는 걸까.
 그런 의문이 강해질 때쯤,
 “위대한 선수가 되고 싶나?”
 어느 날 머릿속에서 레전드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 레전드를 만났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립니다! 리오넬 메시 선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 레알 마드리드를 5:0 스코어로 침몰시킵니다!”
 “참, 말도 안 되는 플레이예요. 컨디션이 좋을 때 메시는 비교 대상이 없어요. 자기 자신이 경쟁 상대입니다. 참 믿을 수 없는 선수예요.”
 “네! 정말 그렇습니다! 이대로 가면 올해 발롱도르도 수상이 유력한데요, 어떻게 보십니까?”
 그는 스마트폰의 중계 영상을 껐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해트트릭이라.’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되는 건 대체 어떤 기분일까. 전 세계를 통틀어 자신보다 실력이 뛰어난 선수가 없는··· 그 역시 그런 선수가 되고 싶었다.
 물론 어림없는 이야기였다. 그가 24년 축구 인생에서 유일하게 얻은 교훈은 단 하나였다.
 ‘어설픈 재능은 위험하다.’
 초등학교 시절엔 월드컵 우승이라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적어도 어린 시절엔 그보다 축구를 잘하는 녀석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세상에 축구 잘하는 사람은 널리고 널렸다.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서른 번쯤 느낀 뒤 성인이 되면······.
 이산. 24세. 파트타임으로 잉글랜드 5부 리그 선수로 뛰면서 커뮤니티 칼리지(Community college) 안의 피자집 알바나 하고 있는 지지리 궁상.
 중학교 시절, 몇몇 프리미어리그 유스 팀의 입단 테스트 제안을 받고 섣불리 영국행 비행기에 오른 게 실수였다. 한국에선 U―15 대표팀 출신의 기대받는 유망주일지 몰라도 잉글랜드에선 수많은 유소년 중 하나에 불과했던 것이다.
 챔피언십, 리그 1, 리그 2······ 지원하는 팀 수준은 계속해서 낮아지고. 결국은 5부와 4부 리그를 오가는 내셔널리그 팀.
 매 순간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건만,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차악을 선택한 것뿐이었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한 추락.
 이런 종류의 실패가 늘 그렇듯, 지나고 나서야 끊임없이 자기 합리화를 거듭해 왔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결론은 간단했다.
 같이 축구했던 동료들이 국내에서 하나둘 자리 잡아 가는 동안 그도 이도 저도 아닌 선수가 되어 버렸다.
 ‘아니, 내가 축구 선수가 맞긴 한가?’
 그는, 실패했다.
 
 ***
 
 “일주일만 기다려 주세요. 알바비 나오면 드릴게요, 아니, 짐을 그렇게 막무가내로 빼시면 안···.”
 집주인이 전화를 끊자 이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휴대폰의 연락처를 계속 뒤적거려 봐도 영국은 물론 한국에조차 선뜻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
 ‘한국 가기도 어렵다, 어려워.’
 모든 것을 내려놓은 뒤, 가장 먼저 맞닥뜨린 현실은 돈이었다. 비행기 표 살 돈은커녕 당장 밀린 월세도 해결하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이산은 휴대폰을 앞치마 주머니에 꽂고 다시 오븐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구워진 피자를 꺼내고 커팅 칼을 손에 쥔 순간, 뒷문 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밖으로 나가자 험상궂게 생긴 불량배 서넛이 누군가를 두들겨 패고 있었다.
 ‘뭐 돈이라도 뜯으려고 하는 건가?
 평소였다면 경찰에 신고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돌아섰을 것이다. 그러나 자포자기한 탓이었을까, 이산은 왠지 그러기 싫었다.
 “아, 저기. 하하, 그만하는 게 어떨까요?”
 “넌 뭐야?”
 ‘으엑, 술 냄새.’
 뭔가 일이 잘못돼 간다는 걸 느꼈지만, 이제 와서 달리 어찌할 방법도 없었다.
 “여기 직원인데요, 이러시면··· 커헉!”
 복부에 주먹이 제대로 꽂혔다. 이산은 배를 감싸 쥔 채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발길질. 구타는 이후 오 분여 동안이나 계속됐다.
 ‘이 새끼들, 이렇게 다짜고짜 패다니.’
 뻐억!
 이윽고 구타가 잦아들고, 깡패 녀석 중 한 명이 마지막으로 명치 부근을 세게 걷어찼다.
 이산은 맞는 순간 뭔가 크게 잘못됐음을 느꼈다. 비명도 못 지를 정도로 아팠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이게 주마등이구나. 익숙한 장면들이 그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우리 아들, 축구 하고 싶어?”
 초등학교 시절이다. 축구부 선생이 집에 찾아온 날, 아버지는 꽤나 기뻐하셨지.
 “엠브이피는 부일중, 이산 선수입니다!”
 ······이때가 아마 인생의 전성기였던 것 같다. 토너먼트 11골 2도움, 아니 3도움이었던가. 저 때 받은 트로피는 아직도 우리 집 거실에 그대로 있다.
 “······아마 입단은 어려울 것 같다. 내셔널리그 팀을 알아보는 게 어때? 홈그로운 자격부터 노리고 보는 거야.”
 재능이 없다는 걸 받아들였던 것은 이쯤이다.
 우습게도 마지막 순간, 떠오르는 건 온통 축구에 대한 장면뿐이었다.
 의식이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결말도 나쁘지 않을지 모르겠다.
 
 ***
 
 회백색 천장. 퀴퀴한 냄새, 소스가 여기저기 묻어 있는 앞치마와 유니폼.
 직원 휴게실이었다.
 누워 있는 그를 동료 직원 하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리, 괜찮아? 그 깡패 새끼들, 뭐야? 사람을 이 지경으로···.”
 잠시 멍하니 그를 응시하던 이산은 상황을 인식하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별 시답잖은 깡패들한테 두들겨 맞은 것도 부끄러웠지만, 그것보다 이대로 죽는 게 마음 편하겠다는 생각이 든 게 더욱 부끄러웠다.
 ‘정신 차리자 이산 이 자식아. 대체 할 생각이 없어서··· 어디까지 망가지는 거야?’
 이산은 씁쓸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어디까지 망가지긴, 보니까 아주 바닥이군.’
 누군가의 목소리가 이산의 귀에 또렷이 들렸다.
 “뭐, 뭐야? 누구야?”
 “리, 정신 차려. 나야 나! 괜찮아? 매니저 불러올까?”
 “휴우······ 괜찮아, 괜찮아. 걱정 마. 조금 놀랐을 뿐이야. 금방 나갈게.”
 이산은 동료 직원을 밖으로 내보낸 뒤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역시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다시 일어나려는데.
 “여기야 여기, 임마.”
 정면에 있는 벽이 기묘하게 울렁거린다 싶더니, 말쑥한 정장 차림의 중년 남자 한 명이 걸어 나왔다. 드디어 정신병까지 생긴 건가. 이산은 한참 동안 얼어 있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기··· 누구시죠?”
 몰라서 하는 질문은 아니었다.
 큰 키에 포마드를 발라 넘긴 단정한 머리, 수트 위에 트렌치코트를 입은 말쑥한 차림새.
 오만한 듯하면서도 자신만만하게 번뜩이는 눈빛.
 축구를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 모를 리 없는 인물이었다. 그의 눈앞에 서 있는 건 네덜란드와 아약스, 그리고 바르셀로나의 레전드. 요한 크루이프였다.
 ‘···다시 기절할 것 같은데.’
 
 ***
 
 어차피 믿느냐, 믿지 않느냐 둘 중 하나였다.
 그러나 좀처럼 판단을 내리기 힘들었다.
 지난 삼 일간의 대화 끝에 그가 헛것이 아니라는 건 가까스로 인정할 수 있었다. 이런저런 질문을 던져 본 결과 그는 진짜 크루이프 본인이 맞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는 아무래도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가 이산에게 한 말들은 자신이 만들어 낸 환상이라 해도 납득이 갈 정도로 달콤한 말들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저를 도와··· 주려고 오셨다구요?”
 “또 처음부터 다시 얘기해 주랴?”
 크루이프는 팔짱을 낀 채 이산을 바라봤다.
 ‘너는 임마. 나를 만난 걸 행운으로 알아야 돼. 내가 현역 시절엔 말야······.’
 ‘그 얘기 한 번만 더 들으면 백 번 되겠어요.’
 ‘그럼 한 번 더 들어. 그라운드의 총사령관. 마에스트로. 코치. 감독. 에, 또 뭐냐.’
 ‘어련하시겠어요.’
 ‘······어쨌든 네 인생의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이거야.’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병원에 가 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이산이었다.
 
 ***
 
 잉글랜드 내셔널리그, 맨스필드 FC의 홈구장.
 이산은 주차장에 차를 대고 클럽하우스로 들어섰다.
 선수당 미팅을 마치고, 유니폼을 갈아입고 피치에 나서는 순간까지도 이산은 고민하고 있었다.
 사실 팀을 그만두겠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크루이프는 어서 경기장으로 가라고 성화였고, 자신도 모르게 이끌리듯 온 것이다.
 “자, 오늘은 승점 3점이 꼭 필요한 경기다. 반면 상대 팀은 꼭 이기려고 들진 않을 거야. 비겨도 남는 장사니까. 전반 초반부터 강하게 압박해서 녀석들을 몰아붙이는 거야. 알겠지!”
 크루이프는 그의 옆에 팔짱을 끼고 서서 감독의 일장연설을 듣고 있었다.
 ‘···저게 감독이냐?’
 이산은 크루이프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아, 됐다. 어쨌든 뛸 순 있는 거지?’
 ‘아마··· 한 칠십 분쯤 지날 때까지 골이 안 들어가면 넣긴 하겠죠?’
 ‘···너 그 입 좀 다물면 안 되냐?’
 그리고 잠시 후,
 킥 오프.
 경기 초반부터 꽤나 뜨거운 분위기였다.
 그가 잉글랜드의 축구 문화를 부러워하는 건 바로 이런 부분이었다. 한국에서는 2부 리그 아래로만 내려가면 관중석이 텅텅 비는 경기들도 있는데······ 동네 리그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관중이 어림잡아 수백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이 새끼야! 뒷공간 좀 봐!”
 “크로스 똑바로 안 올리냐! 우리 할머니도 그거보다는 잘 올리겠다!”
 다소 거친 응원과는 다르게 그라운드에서는 다소 지루한 양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맨스필드 FC는 윙백의 오버래핑을 통해 사이드 플레이를 시도하려고 하는 반면, 상대 팀은 윙어까지 수비 진형 깊숙이 내려앉아 버스를 세우고 있었다.
 이런 경우엔 뚫어 내기가 만만치 않았다. 할 수 있는 거라곤 포워드 머리를 노리고 크로스를 올리는 것뿐. 하지만 고만고만한 실력들이니 딱히 결정적인 장면이 나올 리가 없었다.
 전형적인 한 골 싸움이었다.
 그리고 후반. 약 이십 분 정도 지났을 무렵 코치가 산에게 몸을 풀라고 지시했다. 선수들도 슬슬 지쳐갈 시점이었다.
 크루이프가 터치라인에 서서 몸을 풀고 있는 이산의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왔다.
 ‘······너라면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하겠냐?’
 ‘글쎄요, 저는 윙어니까, 중앙으로 파고들어서 수비에 균열을 내야겠죠? 아니면 드리블로 측면을 부순다?’
 사실 정답은 중요하지 않았다.
 5부 리거지만 이산 또한 엄연한 프로 선수였다. 밥 먹고 축구만 한 세월이 수십 년인데 그걸 모르겠는가. 그건 이산은 물론, 그라운드에 있는 선수들 모두 그랬다.
 어떤 선택이 옳은 선택인지는 누구나 알고 있었다. 다만, 그걸 실행에 옮길 능력이 부족할 뿐이었다.
 이산은 그 사실이 서글펐다.
 ‘그럼, 해 봐.’
 그라운드에 발을 내딛자마자 이산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어, 어? 이거 뭐예요? 뭐야?’
 몸에서 힘이 샘솟는 듯한 느낌. 분명히 자신의 몸인데 다른 사람의 몸 같은 이질적인 느낌에 이산은 당황했다.
 발에 밟히는 잔디의 감촉, 코끝에 와닿는 촉촉한 공기. 그리고 관중들의 응원 소리. 모든 것들이 생생한데 뭔가 붕 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는 달려 나갔다.
 왼쪽 미드필더 진영에서 공을 받고 사이드라인을 따라 뛰어 올라간다. 마크가 붙었지만 순간적인 상체 페인팅만으로 쉽게 제쳐진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주변에 있던 미드필더에게 공을 내주고 박스 안쪽으로 진입, 페널티 에어리어 바로 앞에서 리턴패스를 받아 벼락같은 오른발 감아차기.
 어마어마했다.
 보통 반 박자 빠른 슈팅이라고 하지 않던가?
 반 박자가 아니라 최소 두 박자는 빨랐다.
 골키퍼를 포함해 박스 안에 있는 6명의 상대편 선수들이 일제히 망연자실해 이산을 바라봤을 정도였다.
 더 놀라운 건 감아차기 전, 리턴패스를 받을 때의 동작이었다. 터치도 필요 없었다. 패스의 결을 그대로 살린 원터치 슈팅.
 이산은 남은 시간 내내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경기 종료.
 4골 2도움. 6:1로 경기가 마무리되자 벤치에서 감독이 경악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감독이라곤 하지만 고등학교 선생 노릇을 하며 파트타임으로 뛰고 있는 준프로 수준 감독일 뿐이다.
 이 정도 퀄리티의 플레이를 여기서 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딱 그런 표정이었다.
 로커 룸으로 돌아가자 동료들이 아산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리! 요새 뭐 따로 연습해?”
 “아까 그 슛은 어떻게 한 거야? 알려 줄 수 있어?”
 ‘그걸 나한테 물어봐 봤자······.’
 띠링―!
 그 순간 갑자기 머릿속에서 신호음 비슷한 것이 울리더니, 시야 오른쪽 하단에 안내 문구 한 줄이 떠올랐다.
 [스킬 트리가 생성되었습니다.]
 스킬 트리? 이산은 다시 크루이프에게 시선을 돌렸다.
 ‘대체 제가 방금 했던 게 뭐죠?’
 ‘그게 바로······.’
 이산은 침을 꿀꺽 삼켰다. 팀을 나가겠다고 말하려 했던 건 이미 까맣게 잊은 지 오래였다.
 ‘존(Zone) 이라는 거다.’
 존(Zone). 인간의 집중력이 극에 달하면 들어서게 되는 극한의 영역.
 오감이 극도로 예민해지다 못해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톱클래스 선수조차 일생에 한두 번 정도밖에 경험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희귀한 현상이었다.
 이산은 영화에서만 보던 그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다는 사실에 경악했고, 경기가 끝나고 주변에 아무도 없어지자마자 크루이프에게 다급하게 말을 걸었다.
 “···대체 이게, 저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엄청난 반응 속도와 예민한 감각, 그리고 본능에 가까운 듯한 판단 속도. 과장 조금 보태 평범한 소형차를 타고 다니다 슈퍼 카를 탄 듯한 느낌이었던 것이다.
 “크흐흐, 놀래긴. 왜. 마음에 안 드냐?”
 “아니 그게 아니라 이런 거였어요? 위대한 선수로 만들어 준다느니, 뭐 그런 말씀을 하신 게?”
 크루이프가 씨익 웃었다.
 “어때, 이 정도면 내 말을 좀 믿겠냐?”
 이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허, 하고 한숨 비슷한 소리를 냈을 뿐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래, 그 말이 맞는다고 치자구요. ···그런데.”
 “또 뭐.”
 크루이프가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다 알겠는데요. 대체 왜 저한테?”
 “너는 이 상황에서 한다는 말이 겨우 그거냐?”
 김샜다는 듯이 인상을 팍 찡그리는 크루이프였다.
 “아니, 상식적으로 그렇잖아요. 저보다 가능성 있는 놈들이 널리고 널렸을 텐데 하고많은 선수들 중 왜 하필 저한테 오신 건지 궁금해서요. 저는···.”
 “네가 원했잖아.”
 크루이프는 짐짓 말을 돌렸다.
 “너. 위대한 축구 선수가 되려면 꼭 필요한 덕목이 뭔 줄 아냐?”
 “글쎄요.”
 “바로 의지다. 위대한 선수가 되겠다는 의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 높은 무대에 서고 싶다는 의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해내고야 말겠다는 그런 거.”
 “···그래서 저한테 그런 게 있다구요?”
 크루이프는 피식 웃었다.
 “뭐 그거야 모를 일이지. 어쨌든·····.”
 아마 몸이 있었다면 뒤통수라도 한 대 얻어맞았겠지. 이산은 생각했고, 크루이프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할 거냐, 말 거냐?”
 다른 대답이 있을 리 없었다.
 더군다나 직접 몸으로 경험해 본 터였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 내려온, 사실인지 상상인지조차 의아한 이 기회를 믿어 보기로 했다.
 
 ***
 
 사실 믿어 보겠다고 생각하진 했지만, 아직까지도 얼떨떨한 것이 사실이었다. 대체 누가 100% 믿을 수 있겠는가? 죽은 사람이 눈앞에 있다는 걸, 그리고 그의 말을 들으며 훈련을 하고 있다는 걸.
 오히려 이산의 마음을 움직인 건 그간의 허송세월이었다.
 돌이켜보면 기회가 아주 없던 건 아니었다. 한 단계 위의 팀으로 이적할 수 있었던 기회도 있었고, 활약하기만 했다면 주목받을 만한 경기도 있었다.
 결국 그가 잡지 못했을 뿐이다.
 이번엔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한번 결정을 내린 뒤부터는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갔다.
 크루이프는 이산의 상태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당장 다음 날부터 해야 할 일을 차근차근 제시했던 것이다.
 ‘빨리 뛰어! 지금 네 체력으로는 동네 꼬마랑 달리기 시합해도 지겠다.’
 ‘터치가 그게 뭐야! 공 받기 전에 생각해, 생각!’
 크루이프가 했던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이래서 감독님이라고 부르라고 했나.’
 개인 훈련은 물론 팀 훈련까지 졸졸 따라다니며 계속되는 잔소리에 제대로 숨도 못 쉴 지경이었지만, 투덜거리면서도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사소한 볼 터치 하나부터 전술적인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크루이프가 하는 말은 전부 옳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5부 리그 선수인 이산이라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세세한 지도 방식이라니.
 ‘······하긴 그러고 보니 이 양반 감독으로도 성공했었지. 빅클럽 선수들은 모두 이런 훈련을 받는 건가?’
 이 정도 훈련을 어렸을 때부터 받았다면 진작에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치밀한 훈련이었다.
 ‘능력에만 기대면 안 돼! 구십 분 내내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기본기를 길러야지. 자, 다시 패스해!’
 존의 효과는 엄청났지만 자주 사용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모든 신체 능력을 끌어올리고, 이전의 그였다면 절대 하지 못할 플레이를 할 수 있게 해 주지만···.
 반동이 엄청나게 컸다. 경기가 끝난 다음엔 거의 제대로 서지도 못할 지경이었던 것이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끔찍한 고통. 보통 때 경기를 했을 때 느끼는 피로의 몇 배에 달하는 피로감이었다.
 연습 경기 때 단 오 분 사용했는데도 이 모양이었다.
 그러니 기본기를 길러야 했다.
 꼭 필요한 상황에서만 능력을 쓸 수 있도록. 아니, 나머지 팔십 오 분 동안 그나마 사람 다운 플레이를 할 수 있도록.
 오전 일과가 끝나면 전술 공부를 빙자한 정신적인 고문이 이어졌다.
 크루이프가 갖고 있는 축구 지식은 이산 입장에서 엄청나다 못해 질릴 정도였다. 적어도 30―40년 동안 축구계에서 벌어진 일이란 일은 몽땅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방대한 축구 전술 지식과 헤게모니를 꿰뚫는 통찰력, 또 역사에 남은 레전드 팀들의 플레일 스타일과 강점, 당대 스타플레이어들의 장단점까지.
 이 모든 걸 머리에 넣자니 그야말로 코피가 날 지경이었다. 그 또한 선수였고, 선수 이전에 축구 팬이긴 했지만 태어나서 이렇게 축구 생각을 열심히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 평소에 축구 전술에 관심 있는 편이라는 게 다행이었다.
 그러나 고된 일정 속에서도 이산은 전에 없던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도 능력의 영향인가?’
 할 수 있는 최대까지 몸과 마음을 혹사시켰다는 뿌듯함. 무언가 100% 소화했다는 느낌은 그의 인생에서 굉장히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던 것이다.
 
 ***
 
 이후 리그 경기에서의 이산의 공격포인트는 4경기 10골 6도움. 무시무시한 스탯이었다.
 중원 싸움부터 플레이 메이킹, 찬스 메이킹, 득점까지 하프라인부터 페널티 에어리어까지 이르는 지역을 모두 커버하는 전천후 플레이.
 뛰고 있는 무대의 수준을 감안하긴 해야겠지만, 지금의 이산에게 내셔널리그 선수들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따라서 짧은 기간 사이에 팀 내 제일가는 스타플레이어가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물론 동네 꼬마들이나 따라다닐 정도였지만.
 ‘지금 이 레벨에서는 딱히 능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때그때 지시하는 것만 잘 따라가도 충분할 테니 내 말만 믿고 잘해 봐.’
 능력을 아예 사용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최소한도로 줄이는 것은 가능했다.
 무엇보다 크루이프의 조언은 그런 것 없이도 얼마든지 이전과 다른 플레이를 하게 만들었다.
 경기 중 특정 국면에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따라서 어떤 위치로 이동해야 공을 받을 확률이 높고 다음 플레이를 어떻게 가져가야 하는지.
 이 모든 것들을 피치 위에서 직접 뛰는 자신보다 더 상세히 읽어 냈던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변화는, 새롭게 얻게 된 능력이었다.
 스킬 트리.
 RPG 게임에서의 스킬 트리와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성장해서 하나씩 가지를 뻗어 나가고, 그때마다 다른 능력들이 하나씩 주어지는 방식.
 당연하게도 스킬 트리 창 중앙엔 ‘존‘이 있었고, 사방으로 5―6개의 가지가 뻗어 나가 있었다. 아직은 <???>밖에 볼 수 없는 빈칸이었지만, 이게 다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
 
 퍼억!
 한편, 맨스필드 FC의 주전 윙어 다니엘 윌리엄스는 유니폼을 로커에 거칠게 집어 던졌다.
 ‘젠장, 저 망할 녀석······.’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마 전만 해도 그의 후보 선수에 불과했던 녀석이었다. 변변찮은 피지컬로 팀 동료들에게 은근한 무시를 받던 녀석이었고, 동양인이라고 무시받던 걸 그가 나서서 만류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전세가 역전돼 있었다.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플레이를 보여 줬다. 주전 자리 또한 이산에게 뺏긴 지 오래였다. 그는 관중들이 이산을 환호할 때마다 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 원래 그 환호는 모두 그가 받아야 할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연습 시합에서의 창피를 떠올리면,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얼마 전 실시한 11 대 11 연습 경기에서 이산은 보기 좋게 다니엘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렸다.
 ‘드리블 돌파만 다섯 번······ 으드득.’
 그는 이를 갈았다. 이산은 별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듯 자신을 몇 번이고 제쳐 냈던 것이다. 상체 페인팅으로 한 번, 간단한 드래그 백으로 한 번, 마지막은···.
 ‘대체 단기간에 사람이 그렇게 빨라질 수가 있나?’
 그냥 치고 달리는 동작뿐이었는데도 도저히 그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산의 달리기 기록이 원래 그보다 훨씬 뒤진다는 것을 감안하면, 의아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작은 팀이었지만 에이스로 오래 군림하고 있던 다니엘에게 이만저만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의문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겨났다.
 ‘어디 두고 보자.’
 다니엘은 이를 갈았다.
 
 ***
 
 그라운드. 아무도 없는 빈 스탠드. 이산은 선수들이 모두 돌아간 후에도 멍하니 앉아 피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겉으론 그렇게 보였다.
 ‘임마. 누가 그렇게 공을 오래 끌래? 너 더 위 레벨에서 그런 플레이가 통할 것 같아? 그러면 바로 벤치야 임마. 공은 선수보다 빠르다, 몰라? 동료 선수들을 이용하란 말야.’
 ‘공간 보는 눈도 떨어져. 늘 최선의 선택을 하란 말야. 마지막 공격 때 너는 사이드로 파고들 게 아니고 상대편 수비수를 끌고 들어갔어야 해.’
 마치 전담 코치와 24시간 같이 붙어 지내는 느낌이었다.
 ‘네, 네. 제가 더 잘할게요, 감독님. 그런데 뭐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
 ‘감독님은 어쩔 계획이신 거예요. 이제 남은 리그 경기가······ 모레 열릴 경기까지 포함하면 열다섯 경기네요. 전반기에 너무 성적이 안 좋아서. 다 이겨도 올 시즌엔 승격은 힘들겠는데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컨디션 조정이나 똑바로 해.’
 ‘컨디션 조정이요? 어차피 이겨도 져도 별 상관없는···.’
 크루이프가 이산의 말을 끊었다.
 ‘에잉, 넌 어떻게 죽은 나보다도 더 모르냐? 쯧쯧······ 그러니 요 모양 요 꼴로 살고 있었지. 자, 이번 달 팀 일정이 어떻게 되지?’
 ‘뭐 특별한 게 있나요. 리그 경기 두 개랑, FA컵이랑······.’
 이산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FA컵이 있었다.
 하위 리그 팀이 프리미어리그 팀과 시합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 FA컵.
 그건 곧 자신이 주목받을 수 있는 무대라는 뜻이었다. 달리 말해, 프리미어리그 스카우터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무대.
 그러나 그는 아직 자신의 능력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삼 주 뒤,
 FA컵 64라운드.
 첫 번째 기회가 눈앞에 다가왔다.
 
 
 # FA컵의 루키
 
 올해로 164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FA컵.
 프리미어리그부터 챔피언십, 리그 1, 리그 2, 내셔널리그까지 8개 리그 100여 개 팀이 참가하는 유서 깊은 대회.
 대진에 따라 최상위 리그 팀과 최하위 리그 팀이 만나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때때로 예상치 못했던 자이언트 킬링이 일어나기도 했다. 상위 리그 팀 입장에서는 리그, 챔피언스리그 일정에 따라 FA컵에 2군을 내보내는 일이 대부분이었지만, 하위 리그 팀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승리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군소 클럽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중계권료였다. 빅클럽들이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금액이었지만 내셔널리그 팀 입장에선 일 년 예산을 상회할 정도로 엄청난 금액. 그렇기에 하위 리그 팀 입장에서는 상위 라운드 진출을 목표로 사력을 다하기 마련이었다.
 한편, 맨스필드 FC의 홈구장. 선수들을 모아 놓고 다음 경기에 대해 브리핑하는 감독의 말투에는 자신감이 없었다.
 “하아······ 얘들아. 이번에도 어렵겠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의 64강 상대는 바로 프리미어리그 중하위권의 다크호스, 스토크시티였다. 최근 몇 년 동안 하락세에 접어든 팀이긴 했지만 그래도 프리미어리그 팀이었고, 맨스필드 FC 입장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거대한 벽이었다.
 “하필 첫 경기부터······.”
 “경기 봤어? 쟤들 피지컬을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최근 팀 스타일이 조금씩 바뀌고 있긴 하지만 “남자의 팀”이라고 불리던 프리미어리그의 다크호스 아니던가. 그만큼 하부 리그 팀 입장에서 스토크시티는 그야말로 저승사자에 가까웠고, 선수단이 술렁거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산은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크루이프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흠······. 자신 있으시죠?’
 ‘조금만 더 잘 얘기하면 남 얘기하는 것처럼 들리겠다?’
 내셔널리그에서조차 수비진이 탄탄하지 못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맨스필드 FC다. 그럭저럭 평균 정도긴 했지만, 프리미어리그 공격수의 거친 면을 감당하긴 어려울 터였다. 무엇보다 반면 스토크시티는 평균 신장 2m의 떡대들이 드글거리는 팀이다.
 피터 크라우치, 라이언 쇼크로스, 스티브 은존지······.
 거기에 바르셀로나 시절, 메시의 재림이라 불렸던 보얀 그르키치와 ‘제2의 즐라탄’ 마르코 아르나우토비치까지.
 1군이 전부 나오진 않겠지만 저 중 몇 명만 나와도 어려운 상대인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스승과 함께라면 어떻게든 해낼 수 있다.
 ‘근거 없는 희망인지 아닌지는 붙어 봐야 알겠지.’
 
 ***
 
 스토크시티의 홈구장 BET365 스타디움.
 일반적인 관중들과는 다소 이질적인 분위기의 남자가 관중석 한편에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세련된 회색 정장에 타이까지 갖춰 맨 차림.
 바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영연방 담당 스카우터인 대런 존슨이었다.
 오늘의 경기는 FA컵 64강전,
 스토크시티와 맨스필드 FC의 경기.
 ‘별거 없을 거 같긴 하지만······.’
 이런 경기엔 보통 출장 허가가 떨어지지 않는다. 스토크시티 선수들에 대한 정보는 이미 충분했다. 그렇다고 5부 리그 팀인 맨스필드 FC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뛸 만한 선수가 있을 리 없었다.
 휴가까지 써 가면서 이 경기를 굳이 보러 온 이유는 그저 맨스필드 시티가 그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선수에 대한 기대는 아주 미미했다.
 하지만 잠시 후,
 「맨스필드 FC! 다시 공을 탈취합니다! 그야말로 헌신적인 플레입니다! 오늘 정신 무장을 단단히 하고 나왔군요」
 「특히 7번, 리 선수가 굉장히 눈에 띄는데요, 저 선수는 어떤 선수죠?」
 「별다른 정보는 없습니다. 저번 시즌 맨스필드가 영입한 윙어인데요······ 아마 이 경기가 끝나면 꽤나 관심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스토크시티의 4―4―2에 대비해 맨스필드 FC가 들고나온 포메이션은 4―2―3―1이었다.
 사실 대비랄 것도 없었다.
 압도적인 약팀에 가까우므로 파이브 백으로 수비 라인을 형성하고, 미드필더까지 수비형 미드필더 임무를 수행한다. 공격에 나서는 것은 공격수 둘 뿐. 처진 스트라이커를 활용해 최소한의 공격 시도만 이어 가며 골문을 꽁꽁 걸어 잠근다. 철저하게 무승부를 노린 전략이었다.
 맨스필드 FC가 선전을 펼치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이산의 존재였다. 맨스필드 FC의 감독은 테크니컬 에어리어에 서서 이산의 플레이를 골똘히 지켜보고 있었다.
 경기 삼십 분 전, 평소엔 별 얘기도 없던 이산이 찾아오자 그는 적잖이 놀랐다.
 “4―2―3―1 포메이션으로 바꿔 주세요. 이길 수 있습니다.”
 아무리 5부 리그라 한들 감독 권한은 절대적이었다. 월권에 가까운 행위에 순간 화가 치밀었지만 순순히 그러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지난 몇 주간 엄청난 플레이를 보여 줘서기도 했지만 눈빛에서 왠지 모를 자신감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들린 말에 감독은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산의 입에서 나온 것은 스토크시티를 이기기 위한 전략이었다.
 전략은 보기 좋게 적중했다.
 맨스필드 FC의 4―2―3―1은 꽤나 수비적인 형태였다. 라인을 어느 정도 내린 후 포 백과 두 명의 볼란치를 두는 형태. 윙어 또한 적극적으로 수비에 가담하는 형태였다. 따라서 온전히 상대편 진영에 머물러 있는 건 이산과 스트라이커 하나.
 그가 동료들에게 주문한 건 단 한 가지였다.
 첫째는 협력 수비를 통해 상대편 크로스를 저지하는 것. 애초에 크로스를 허용하면 실점 위기가 될 확률이 높았다.
 꽤나 오만한 요구였지만 누구 하나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이산은 동료 선수들 사이에서 엄청난 신뢰를 얻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설까, 아슬아슬한 장면은 몇 있었지만 맨스필드 FC의 선수들은 어떻게든 공을 막아 내고 있었다. 개개인의 클래스 차이로 뚫릴지언정 팀 차원에서의 수비에 빈틈은 없었고,
 맨스필드 FC 선수단 사이에서 묘한 자신감이 감돌고 있었다.
 반면, 스토크시티 선수들은 생각지 못한 두 줄 수비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좀처럼 패스를 줄 공간이 많지가 않았다.
 더군다나 현재 스토크시티 미드필더들은 후보 선수와 유소년팀에서 막 승격한 2군 자원뿐. 중원에는 오밀조밀하게 짧은 패스를 넣어 가며 공간을 쪼갤 만한 플레이어가 없었다.
 그나마 보얀 그르키치가 밑으로 내려와서 공을 받아 주고는 있었지만 타이트한 간격으로 압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롱패스로 반대편 측면으로 전환하자니, 금세 협력 수비로 달라붙어 줄 만한 선수가 없다.
 반면, 이산은 전반 내내 상대 진영에 머물러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팀원들을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산은 다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상대방 수비수와 미드필더 사이의 공간에서 때를 노리고 있었다.
 바로 상대편 수비 라인의 방심을 기다리며.
 전반 종료 후 중계진이 집계한 점유율은 80:20. 압도적인 수치였다.
 확실히 수비 성공 후 세컨 볼까지 따내는 것은 맨스필드 FC 선수들 입장에서는 무리였다. 그렇게 서서히 한계를 느껴갈 때쯤,
 타앗―
 수비수 몸에 맞고 흘러나온 세컨 볼을 잡은 맨스필드 FC의 미드필더가 상대 수비 진영 가까이 접근한 이산에게 그대로 공을 전달했다.
 “후반 어느 시점이 되면 내가 하프라인 위에 올라가 있을 거야. 그때가 공격 신호야”
 경기 전 그렇게 일러둔 이산이었다.
 
 ***
 
 일방적으로 맨스필드 FC의 수비 라인을 두들겨 대기만 칠십여 분. 스토크시티의 수비 라인은 조금씩 조금씩 위로 올라와 있었다. 수비수까지 공격 가담을 적극적으로 하려는 찰나.
 그걸 놓칠 이산이 아니었다.
 스티븐 은존지가 뒤늦게 쫓아와 이산에게 들이닥쳤지만. 빙글 돌아 가볍게 제친 뒤 오프사이드 라인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포워드에게 스루패스를 보냈다.
 와아아!
 관중석에서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무려 스티븐 은존지였다. 이번 시즌 리그 내 수위권 미드필더로 성장했다는 평가를 받는 수비형 미드필더. 그런 그의 맨마킹을 간단한 턴 동작만으로 떨쳐 낸 것이다.
 그리고 이산은 동시에 빈 공간을 찾아 달려 나갔다.
 공격수가 그대로 이산에게 리턴패스를 보내고.
 원터치로 바로 쏘아 보내는 예리한 인프런트 킥.
 뒤늦게 달려온 수비수들이 몸을 던졌다. 하지만 공은 단 하나의 루트. 수비수들과 골키퍼가 손을 쓸 수 없는 그 길로 낮고 빠르게 빨려 들어갔다.
 “골! 들어갑니다! 리 선수!”
 관중들이 이산의 이름을 계속해서 외치고 있었다.
 뒤늦게 교체에 나선 스토크시티였지만 이미 넘어간 흐름을 뒤집긴 무리였다.
 더군다나 맨스필드는 선제골 이후 텐 백으로 전환해 골문을 단단히 걸어 잠궜다.
 몇 번의 의미 없는 공격 시도 후에 결국은,
 삑! 삐익!
 최종 스코어 1:0.
 맨스필드 FC의 자이언트 킬링이었다.
 대런 존슨은 말도 안 되는 경기 전개에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었다.
 얼핏 근성의 승리인 듯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바로 맨스필드 FC의 7번인 이산(Lee San). 그에 의해 철저히 계산된 승리였다.
 경기 내내 감독은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았다. 맨스필드 FC의 감독은 경기 내내 테크니컬 에어리어에 서서 경기를 지켜보기만 할 뿐, 별다른 제스처를 보이지 않았다.
 후반에 들어서서 선수 교체를 하긴 했지만 체력이 고갈된 미드필더 자리에 똑같은 유형의 선수를 넣었을 뿐, 전술적인 교체라고 보기엔 어려웠다.
 그냥 당연한 교체를 했을 뿐,
 그가 보기에 감독의 역할을 한 건 필드 플레이어였다.
 실제로 수비 라인 컨트롤부터 미드필더 역할 조정, 그 외 세세한 전술 지시까지 도맡은 건 이산이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 플레이······.’
 공을 받을 때의 위치 선정부터 공격수에게 주고 공간을 찾아 들어가는 움직임. 또 2:1 패스 후 다이렉트 슈팅까지.
 미숙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절대로 5부 리그 레벨이 아니다.
 그의 스카우터로서의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한편, 이산은 관중들의 열띤 환호를 받으며 그라운드에 서 있었다. 홈, 원정 할 것 없이 이산의 플레이에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어때?’
 스승이 이산에게 물었다.
 ‘······축구가 이렇게 재밌는 건 줄 몰랐어요.’
 스스로도 깜짝 놀랄 정도로 감상에 젖어 있는 이산이었다.
 프리미어리그 팀과의 경기에서 골을 기록하고, 그것도 모자라 승리하게 되다니.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그런 것쯤 전혀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상쾌한 기분이었다.
 
 ***
 
 [스토크시티, 5부 리그 맨스필드 FC에 충격패!]
 [5부 리그 팀, 자이언트 킬링에 성공하다!]
 다음 날 아침, 언론은 일제히 스토크시티와 맨스필드 FC의 경기에 대해 보도했다.
 스토크시티 팬들은 달가워하지 않을 테지만, 대중은 약팀이 강팀을 이겨 내는 스토리를 좋아하기 마련이었다.
 ‘선수들의 근성을 높이 평가한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뭉친 결과다.’
 ‘앞으로도 좋은 경기 보여 주도록 노력하겠다.’
 구단주, 감독, 선수들 할 것 없이 언론에 대고 쉼 없이 떠들어 대는 중이었다. 이산은 감독의 인터뷰 영상을 다소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걸 보고 딴지를 걸지 않을 크루이프가 아니었다.
 “······왜, 네가 다 해 놓고 덕은 다른 사람이 봐서 억울하냐?”
 “설마요. 제가 왜 그러겠어요. 저도 기분은 좋은데요?”
 “말이나 못 하면.”
 이산은 하하, 하고 웃었다. 크루이프는 한참 동안 팔짱을 끼고 텔레비전 화면을 들여다봤다.
 “인터뷰라면 신물이 나는군. 내 살아생전에 저것들한테 얼마나 시달렸는지······.”
 그의 스토리에 대해선 이산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아니, 축구인이라면 과연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감독님.”
 이산이 입을 열었다.
 “감독님은 어떻게 그렇게 축구를 잘하게 되셨어요?”
 “······그렇게 뜬금없고 바보 같은 질문은 처음 듣는데.”
 크루이프가 이죽거렸다. 이산은 텔레비전 화면에서 시선을 떼고 그에게 열변을 토했다.
 “아뇨, 축구 동영상 보면서 그런 생각해 본 적 있거든요. 왜, 천재들은 어릴 때부터 천재라고 하잖아요? 실제로 메시만 봐도 어릴 때 축구하는 거랑 지금 축구하는 거랑 별반 다를 바가 없고······.”
 “하, 그 녀석이 너 같은 놈이랑 같냐? 레오는 라 마시아에 오지 않았어도 성공했을 녀석이었지. 갑자기 걔는 왜?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아니 뭐 혹시, 이런 선수들도, 감독님도 혹시 저처럼······.”
 “이 자식이 정말.”
 따악.
 크루이프가 이산의 꿀밤을 때렸다.
 아니, 실제로는 주먹이 이산의 머리를 통과한 것에 불과하지만.
 “아니, 솔직히 말해 믿어지지가 않아서 그래요. 재능의 차이가 이렇게 큰 건가요?”
 이산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크루이프를 바라봤다.
 “······그렇게 틀린 생각은 아니다.”
 “에? 정말이에요?”
 “‘그렇게’ 틀린 생각은 아니라고 했지 누가 맞는 생각이라고 했냐?”
 크루이프가 눈을 사납게 떴다.
 “머릿속에서 어떤 목소리 같은 것이 들릴 때가 있었다는 소리다.”
 “목소리요?”
 “정확히 말해 목소리라기보단, 어떤 직감이라고 해야겠지.”
 크루이프는 약간 신난 듯한 기색으로 말했다.
 “머릿속에서 누가 속삭이는 것처럼 내가 뭘 해야 할지 알 때가 있지.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어디로 패스를 줄지. 수비수는 어떻게 움직이는지······.”
 계속 내버려 뒀다간 끝도 없이 말할 기세였다.
 “······거참 대단하시네요.”
 이산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
 
 이어진 32강 역시 승리는 예견된 일이었다.
 상대는 리그 1의 월솔 FC.
 원래의 맨스필드 FC였다면 승리를 확신할 수 없는 상대였으나,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 같은 이산의 활약에 어렵지 않게 2:1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16강 상대는 달랐다.
 몇 주 뒤, 맨스필드 FC의 홈구장.
 ‘절대 못 이겨.’
 크루이프의 단호한 말에 이산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저번 경기처럼 몸이 부서져라 뛰어도요? 감독님 지시대로 하니까 그대로 됐잖아요.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넌 스토크시티 경기에서 뭘 느꼈냐.’
 말문이 막혔다.
 사실, 이산이 느끼기에 스토크시티전 승리는 행운에 가까웠다. 선수들의 노력을 폄하하자는 건 아니지만, 애초에 경기 플랜 자체가 강팀의 방심을 전제로 하는 전술이었기 때문이다.
 스타팅 멤버에 1군은 단 2명에 별다른 경기 플랜도 없이 나온 듯한 분위기. 당연히 이기는 경기라고 생각하는 듯한 선수들의 태도까지.
 스토크시티는 그 정도로 방심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맨스필드 FC의 입장에서는 행운이었다.
 반면, 다음 라운드에서는?
 5부 리그 팀이건 뭐건 상황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1군 멤버를 대거 출전시켜 전반 초반부터 밀집 수비를 깨는 데 주력할 게 뻔했다. 프리미어리그, 아니 2부인 챔피언십 리그 팀 수준만 돼도 어렵지 않게 맨스필드 FC를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운이 좋았죠.’
 ‘그래.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혼자 모든 경기에서 이길 순 없어. 하물며 지금 네 팀이 어디 바르셀로나인 줄 알아? 어느 것 하나 되는 게 없는데, 아마 놈들 입장에선 경기 내내 하고 싶은 플레이는 다 할 거다.’
 그들이 이렇게 비관적인 말만 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FA컵 다음 라운드 상대가 발표된 것이다. 이긴다는 상상조차 잘 안되는 엄청난 강팀.
 바로 아르센 벵거의 아스널이었다.
 
 ***
 
 아스널.
 알렉시스 산체스, 메수트 외질, 산티 카솔라, 테오 월콧, 아론 램지, 로랑 코시엘니······.
 이름만 들어도 속이 울렁거릴 것 같은 스타플레이어들.
 아름다운 축구만을 지향한다는 비판, 만년 4위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이 있긴 했지만 아스널은 아스널이었다.
 그 이름도 유명한 ‘벵거볼’.
 빈 공간을 향한 빠른 볼 순환과 선수들의 빠른 전진패스, 드리블로 박스 안 템포를 극도로 높인 아름다운 축구.
 프리미어리그 무패 우승의 위업은 아무나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와, 내가 아스널이랑 붙는다고?”
 “외질 한번 만나 봤으면 좋겠네.”
 클래스 차이가 너무 엄청나서일까. 저번 라운드에 엄청난 이변을 만들어 낸 맨스필드 FC 선수들이었지만 그뿐이었다. 빅클럽과 경기한다는 사실에 두근거리는 분위기.
 승리를 기대하는 사람은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그건 이산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달라졌다 한들, 그는 아직까지 자기 확신이 부족한 상태였던 것이다.
 스토크시티와의 일전에서 그가 느낀 건 프리미어리거의 수준이 상상 이상으로 높다는 거였다. 골은 기록했지만 몇몇 장면에서는 버겁다는 느낌도 받았으니까.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비등하게 맞서는 것만 해도 꿈도 못 꿀 일이었지만······ 하물며 아스널이면 더하면 더했지 못할 리가 없었다.
 고민하는 이산에게 크루이프가 불쑥 말을 걸었다.
 ‘이번엔 너 혼자서 한번 해 봐.’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못 이겨도 좋아.’
 ‘그러면요?’
 ‘내 마음에 드는 장면 하나만 만들어 봐.’
 이산은 크루이프의 말에 뭔가 숨은 의도가 있다고 느꼈다.
 
 ***
 
 FA컵 3라운드, 아스널 대 맨스필드 FC.
 아스널의 홈구장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의 분위기는 꽤나 과열돼 있었다.
 최근 아스널의 분위기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저번 시즌 메수트 외질의 영입에 이어 이번 시즌 알렉시스 산체스의 영입까지. 두 시즌 연속 빅네임을 영입한 아스널이었지만 생각보다 성적에는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경기력이 상승한 것이 보이긴 했지만 그뿐, 최근 리그 경기에서는 꼭 이겨야 할 상대에게 무승부를 거두고 말았다.
 팬들이 원하는 건 간단했다.
 우승. 즉 트로피였다.
 리그나 챔피언스리그에 비해 중요도는 떨어지지만 아스널 입장에서는 가장 우승 확률이 높은 것이 FA컵이었다. 적어도 지금 상황에서는 리그 경기만큼이나 중요한 경기였다.
 ‘······쟤네 거의 다 1군인데요?’
 경기 전 워밍업 타임. 이산은 피치 위에서 동료 선수와 패스를 주고받으며 아스널 선수들이 모여 있는 곳을 힐끗 바라봤다.
 올리비에 지루, 알렉시스 산체스, 메수트 외질, 아론 램지······ 수비형 미드필드로 나온 알렉시스 코클랭을 제외하면 골키퍼까지 전원이 1군 멤버였다.
 ‘몇 명은 쓸 만해 보이지만, 뭐 외질 빼곤.’
 이산은 메수트 외질을 흘끔 바라봤다. 레알 마드리드 시절만 못하다곤 하지만 무려 독일 국가 대표인 그였다.
 알렉시스 산체스 또한 마음에 걸렸다. 한국에선 “메없산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그다. 메시가 없으면 산체스가 왕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최근 크랙으로서의 본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그였다.
 이산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
 
 [경기 시작합니다! 저번 경기에서 말도 안 되는 이변을 연출한 맨스필드 FC인데요, 과연 아스널을 상대로도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요?]
 [아마 힘들 거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아스널은 1군 멤버 거의 그대로 나오지 않았습니까? 전반 초반부터 거센 공격이 예상됩니다.]
 아스널의 전술은 4―3―3.
 최전방엔 올리비에 지루, 알렉시스 산체스, 산티 카솔라가 섰고 미드필더 진영에는 메수트 외질과 아론 램지, 미켈 아르테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맞서는 맨스필드 FC의 포메이션은 3―5―2. 스토크시티전과 동일한 포메이션이었다. 이산의 위치는 중앙 미드필더.
 ‘선수비 후 역습밖에 없나······.’
 이렇게 된 이상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었다.
 삐익―!
 킥 오프 휘슬이 울렸다.
 메수트 외질이 로랑 코시엘니에게, 다시 코시엘니는 미켈 아르테타에게, 아르테타는 침투해 올라간 오른쪽 윙백, 엑토르 베예린에게.
 ‘······대단해.’
 이산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끊임없이 볼을 순환시키며 전진하는데도 움직임에 어색함이 없었다. 한 선수가 공을 잡으면 주변에 있는 선수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패스를 받기 좋은 위치로 이동한다.
 팀 전체가 한 몸이 되어 있는 듯한 유기적인 움직임.
 왜 ‘아름다운 축구’라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치잇, 공도 아예 못 건드리겠는데.”
 “같이 압박해!”
 서로 적극적으로 콜까지 해 가며 압박에 나선 맨스필드였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런 압박쯤은 아무렇지 않은 듯이 떨쳐 버린다.
 이산은 하프라인 조금 아래쪽에서 중원 싸움에 힘을 보태고 있었다. 그의 마킹 상대는 메수트 외질. 기술적인 면은 누구나 인정하는 월드 클래스지만, 프리미어리그의 거친 피지컬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도 있었다.
 그러나 공을 잡고 있는 외질에게 다가간 이산은 적잖이 당황했다.
 ‘이게 피지컬이 약하다고?’
 능력을 발동시키지 않으면 경합조차 힘들 정도였다. 그리고 그 섬세한 볼 터치라니.
 휙―
 공을 노리고 발을 뻗어 보는 이산이었지만 왼쪽 발에 붙어 있던 공을 순식간에 오른쪽 발로 보내면서 이산을 제치는 외질이었다.
 팬텀 드리블.
 이산의 근처에 있던 미드필더가 수비에 가세했지만 그 역시 간단하게 뚫려 버렸다.
 그리고 오른쪽 윙어인 산티 카솔라에게 패스. 카솔라는 잠깐 템포를 끌면서 엑토르 베예린이 올라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를 예상한 맨스필드의 수비수들이 베예린을 마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지체 없이 경기장 반대편, 알렉시스 산체스에게 롱패스를 보내 공격 방향을 전환시켰다. 마치 어떤 방법으로 골을 만들어 볼까, 여유 있게 생각하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아론 램지 또한 호시탐탐 침투할 기회를 노리며 센터 서클 부분에 머물러 있었다.
 파앙!
 다시 다음 순간, 알렉시스 산체스가 최전방의 올리비에 지루에게 패스를 보냈다.
 지루는 양팔로 수비수를 견제한 뒤 안정감 있게 공을 받았다. 수비수를 두 명이나 달고 있음에도 전혀 밀리는 기색이 없었다.
 그리고, 볼을 등지고 있는 지루의 오른쪽으로 아론 램지가 침투해 들어갔다.
 지루는 센스 있게 원터치로 공을 돌려준 뒤 빙글 돌아 다른 곳으로 침투해 수비수를 끌고 들어갔다.
 “젠장, 막아!”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며 뛰어가는 이산이었지만 이미 늦었다.
 ‘···저건 골이다.’
 골대 바로 앞까지 접근한 아론 램지였지만 앞에 수비수가 세 명인 있어 슈팅 각도를 만들기 쉽지 않았다.
 침착하게 공을 키핑한 뒤 파 포스트를 향해 낮은 패스를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 패스가 향한 곳에 있는 건.
 역시나,
 이산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알렉시스 산체스가 골키퍼가 나오는 것을 침착하게 보고 있다가 감각적인 칩샷을 시도했다.
 툭, 출렁!
 타이밍을 뺏긴 골키퍼는 공조차 만져 보지 못한 채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스코어 1:0.
 모든 것이 이산의 짐작대로였다.
 전반 시작한 지 15분도 안 돼서 실점을 허용한 맨스필드 FC였다.
 “그림 같은 움직임입니다! 단 다섯 번의 볼 터치로 골을 만들어 낸 아스널입니다! 이게 바로 아스널이죠!”
 “지루의 플레이가 아주 좋았어요. 욕심내지 않는 플레이. 감독 입장에서 좋아할 수밖에 없는 선숩니다”.
 “거기에 알렉시스 산체스의 침착한 마무리는 어떻구요.”
 이산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카솔라의 측면 전환부터 지루의 등지는 플레이, 아론 램지의 침투와 패스까지. 이 모든 플레이를 해내는 데 걸린 시간은 겨우 15초 정도였다. 스토크시티전에서도 느꼈지만 역시 빅 리그 선수들은 플레이가 달랐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감도 생겼다.
 바로 방금 전, 아스널 선수들의 플레이를 예측했을 때의 기묘한 감각 때문이었다.
 막연하게 무언가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이었다.
 이산의 눈동자가 반짝― 하며 이채로운 빛을 냈다.
 띠링―
 스킬 트리를 활성화하시겠습니까?
 오른쪽 하단에 알 수 없는 안내 문구가 떴다.
 ‘그래, 이거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쥔 이산이었다.
 그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스킬 트리를 살펴봤다. ‘천재성’ 항목 위로 가지가 두 개 뻗어 있었다.
 눈앞에 놓인 두 개의 분기점은,
 ‘앵커맨’과, ‘플레이메이커’.
 
 ===
 앵커맨 : 맨마킹 능력이 상승합니다. (경기당 상대 선수 한 명을 선정, 그 선수에 대한 1:1 마크 능력이 상승합니다.)
 플레이메이커 : 예측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합니다. (3초 뒤의 미래를 볼 수 있습니다.)
 ===
 
 평소 MMO RPG류의 게임을 꽤나 즐겨 왔던 그였다. 어떤 시스템인지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한 번 분기점을 건너면 되돌아올 수 없다는 거군.’
 소위 ‘잡캐’가 되지 않으려면 능력 선택에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초반에 어떤 분기점을 택하느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기 마련이니까.
 
 ===
 ‘플레이메이커’ 특성을 선택하시겠습니까?
 ===
 
 이산은 머릿속으로 결정 버튼을 눌렀다. 앵커맨도 좋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쓸 만한 건 플레이메이커 특성이었다. 티어 1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는 걸로 봐선······ 아마 점점 능력을 강화하는 것도 가능할 테고.
 예측력이라. 존과 결합하면 쓸 만할 터였다.
 이산은 피치를 바라봤다.
 전반 21분.
 선제골 이후 맨스필드 선수들은 꽤나 얼어붙어 있었다.
 가까스로 막아 내고는 있지만 추가 득점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맨스필드의 게임 플랜 자체는 그리 잘못되지 않았다.
 아스널의 전술은 강한 전방 압박으로 공을 탈취한 뒤, 빠른 속공과 스위칭 플레이로 상대편 골문을 공략하는 것.
 따라서 해답은 정해져 있었다.
 미드필더와 수비수 사이의 간격을 극도로 좁혀 패스 플레이를 어렵게 만든 뒤 속공.
 또한 피지컬이 우수한 선수들로 중원을 누른다.
 바로 조세 무리뉴가 아스널을 상대할 때 즐겨 사용하던 전략이었다.
 ‘물론······ 그럴 클래스의 선수가 없다는 게 문제지만’
 맨스필드에는 프랭크 램파드도, 마이클 에시앙도, 클로드 마케렐레도 없다.
 그러니 그냥 꾹 참고 버티는 수밖에.
 ‘······할 수 있는 일만 하자.’
 이산이 생각하기에 아스널의 약점은 단 한 가지였다.
 바로 속도감 있는 오른쪽 윙어의 부재.
 테오 윌콧, 알렉스―옥슬레이드 채임벌린의 부상으로 아스널의 오른쪽 측면은 플레이메이커로 대체됐다.
 바로 산티 카솔라와 아론 램지.
 엄청난 선수들인 것은 맞지만 터치라인을 파고드는 직선적인 플레이보다는 패스를 주고받으며 잘게 썰어 나가는 플레이에 더욱 적합한 선수들이다.
 그 말은 곧, 직접적인 타격은 왼쪽 윙어 알렉시스 산체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걸 의미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공격은 왼쪽 윙어, 알렉시스 산체스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아스널이 가진 가장 큰 문제기도 했다.
 즉, 공격의 특정 시점에서는 반드시 알렉시스 산체스가 있는 곳으로 방향을 전환한다는 것.
 ‘볼 줄기를 끊어야 하는데······.’
 이산은 상대편 진영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파앙!
 미켈 아르테타가 오른쪽 측면을 향해 롱패스를 보냈다. 공을 받은 선수는 산티 카솔라.
 이번엔 올라오는 윙백을 기다리지 않고 직접 박스 쪽으로 공을 몰고 돌진하는 카솔라였다.
 맨스필드의 수비수가 두 명 따라붙었다.
 ‘아직 마음이 안 꺾였나 본데.’
 생각보다 맨스필드 선수들의 압박이 만만찮았다. 전반에 득점에 성공하긴 했지만 완전히 경기를 압도한다는 느낌은 없었다.
 메수트 외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특별히 어려운 경기라는 느낌은 없지만 이상하게 불편하다. 잡음이 끼어드는 것 같은······.
 이유는 저 녀석,
 맨스필드의 7번, 이산.
 공을 잡고 카솔라나 램지에게 전진패스를 보내려고 하면 높은 확률로 이산이 패스 길을 가로막고 있다.
 마음먹고 보내려면 못 보낼 것도 아니었지만 깔끔하지 않은 느낌이 싫었다.
 더욱이 점점 윙어들과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골을 더 넣으려면 자신이 더욱 골대와 가까워질 필요가 있다.
 외질은 오른쪽 측면으로 전진했다.
 카솔라와 함께 오른쪽에서 경기를 풀어 나갈 생각이었다.
 반면, 이산은 포백 바로 앞까지 내려와 볼 순환에 가담하고 있었다.
 필요할 때는 센터백 자리까지 내려가 쓰리 백을 형성, 좌우 윙백이나 미드필더들에게 안정적으로 패스를 보냈다.
 라 볼피아나(Lavolpiana)
 크루이프가 귀가 닳도록 일러 준 전술이었다.
 
 ***
 
 라 볼피아나.
 후방 빌드업 전개시 두 명의 센터백이 라인을 좌우로 넓게 벌린 뒤, 수비형 미드필더가 그 사이로 들어가 일시적으로 스리백의 형태를 띠는 것.
 맨스필드 FC의 센터백들은 다소 불안한 마음으로 이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훈련 때 몇 번인가 연습한 전술이지만 실제로 해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산은 센터백 위치로 들어옴과 동시에 좌우 윙백에게 전진을 주문했다. 또한 윙어들은 하프라인을 조금 넘어선 위치에서 침투 준비.
 다니엘 또한 똥 씹은 표정으로 이산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말을 듣는데 자신만 안 그럴 수는 없잖은가.
 전술의 효과는 명확했다.
 아스널의 공수 간격이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간단한 이야기였다. 이산이 최후방 라인까지 내려와서 공을 받게 되면 아스널 선수들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바로 후방에서부터 더욱 라인을 끌어 올리거나 공격수의 전방 압박만으로 공을 탈취해 내는 것.
 아스널이 택한 방법은 두 번째였다.
 알렉시스 산체스와 지루는 이산이 공을 잡을 때마다 집요하게 전방 압박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공수 간격이 벌어지는 상황이었다.
 외질이 느낀 위화감 또한 같은 맥락이었다.
 반면 이산은,
 “헉, 허억······.”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확실히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지루와 산체스의 전방 압박을 따돌리기 어려웠다.
 그만큼 위압감이 엄청난 두 선수였다. 하지만 우는소리만 할 순 없었다.
 최후방까지 이산이 내려온 이유는 단 하나, 경기장을 넓게 바라보며 전진 패스를 찔러 줄 곳을 찾기 위함이었다.
 ‘플레이메이킹 능력을 언제 발동시켜야 하나······.’
 이산의 마음이 놀랍도록 냉정해졌다. 이런 마음을 전에는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무언가 해야 된다는 생각.
 어려운 상황이지만 기회가 있다는 생각.
 “간격 더 좁혀! 패스할 공간 주지 마!”
 이산은 동료 선수들에게 외쳤다.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바로,
 에이스로서의 책임감이었다.
 실제로 이산의 분투로 중원 싸움에 점점 숨통이 트이고 있었다. 볼 점유율도 약간이지만 올라갔다.
 요한은 이산을 다소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그의 제자가 생각보다 훨씬 더 뚝심이 있었던 것이다. 잘 해낼까 반신반의하는 마음이었지만 현재까진 옳은 선택을 하고 있다.
 ‘능력이 개화했나?’
 
 ***
 
 다니엘은 이산이 찔러주는 전진 패스를 받아 상대 진영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치잇······.”
 녀석의 의도대로 끌려간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기 멋대로 전술을 바꿔 버리다니.
 더 열받는 건 그가 생각하기에도 옳은 선택이라는 거였다.
 파앙!
 다니엘은 전진하려다 다시 중앙 미드필더에게 공을 돌렸다. 뒤에서 그 장면을 바라보던 이산은 혀를 찼다.
 ‘저거 일부러 저러는 거 같은데?’
 알게 모르게 자신을 향해 적의를 드러내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어린애 같은 행동까지 할 줄이야. 다니엘에게 공을 받은 미드필더는 압박을 이겨 내지 못하고 패스미스.
 미켈 아르테타가 공을 가로챈 뒤 아론 램지에게 패스를 보내려는 찰나,
 ‘이때다.’
 이산은 플레이메이커 능력을 사용했다.
 3초 뒤의 미래.
 미켈 아르테타는 아론 램지에게 짧은 패스를 보내고······ 빈 공간으로 들어가 2:1 패스. 그리고 아르테타의 마지막 패스를 받는 건······.
 왼쪽 윙백 나초 몬레알이다.
 아르테타가 램지와 2:1패스를 하는 타이밍에 맞춰 나초 몬레알의 근처까지 이동했다.
 스리백 위치에 계속 머물러 있던 이산이었기에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움직임이었다.
 아르테타 또한 몬레알에게 패스를 보내고 나서야 이산의 접근을 눈치챘을 정도였다.
 타앗!
 인터셉트에 성공한 이산은 최전방 공격수에게 전진패스를 보냈다.
 아슬아슬하지만 공을 지켜 내는 데 성공.
 이산은 그대로 왼쪽 사이드라인으로 달려 들어간 뒤 공격수를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능력 발동.
 리턴 패스를 받은 이산에게 아론 램지와 미켈 아르테타가 달려든다. 하지만 미켈 아르테타는 압박 타이밍이 조금 늦고······ 아론 램지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달려드는 수비를 할 뿐이다.
 “······이런!”
 어렵지 않게 둘 사이를 빠져나가는 이산이었다. “이거, 생각보다 괜찮은데?” 이산은 그렇게 생각하며 동료 선수들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장 좋은 위치에 있는 건 중앙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다니엘이었다.
 ‘저 녀석 이번엔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다니엘에게 공을 건네려는 순간,
 위치를 잘 잡고 있던 녀석이 일순 수비수가 밀집해 있는 지역으로 들어가 버린다.
 “저 새끼가···!”
 이산은 욕설을 내뱉었다. 저쯤 되면 그냥 경기를 던지자는 거지.
 포기하고 반대편 윙어에게 패스를 보내려는 순간,
 타앗!
 엑토르 베예린이었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속도다. 이산의 공을 가로챈 베예린이 하프라인을 지나 맨스필드 FC 진영 페널티 에어리어 부근까지 무서운 속도로 달려나갔다.
 근처에 있는 수비수들이 재빨리 따라붙으려고 했지만 이미 속도가 붙은 베예린을 제어하긴 역부족이었다.
 터치라인 끝에서 중앙으로 침투하는 메수트 외질에게 그대로 컷백.
 철렁―!
 외질의 왼발 슛이 골대 왼쪽 상단으로 빨려 들어갔다.
 허무하게 추가 골을 헌납해 버렸다.
 스코어 2:0.
 “야.”
 이산은 다니엘에게 다가갔다. 목소리가 차갑게 식는 것이 느껴졌다.
 “방금 그 플레이는 뭐야?”
 “······뭐?”
 다니엘은 당황해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주변 동료들 또한 다니엘과 이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뭐 한 거냐고.”
 “이 새끼가!”
 그가 이산의 멱살을 잡았다.
 탁!
 이산은 거칠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따위로 할 거면 그라운드에서 나가. 난 이길 마음 없는 놈하고는 뛰고 싶지 않으니까.”
 “너 이······.”
 이산은 대답을 들을 가치조차 없다는 듯이 뒤로 돌아 센터 서클로 향했다.
 다니엘은 아무 말 없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축구화 끈을 만지작거렸다.
 ‘죽여 버릴 테다.’
 석연치 않게 끝나 버린 전반전이었다.
 
 
 # 첫 빙의
 
 아르센 벵거는 테크니컬 에어리어에 서서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라 볼피아나라니······ 이런 팀에서 이렇게 수준 높은 전술을 볼 줄은 몰랐는데.’
 개념은 간단하지만 의외로 시행하기 쉽지 않은 전술이다. 웬만한 재능 없이는 저 위치, 즉 스리백의 중간 위치를 맡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경기장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시야와 예측력이 필요했다.
 벵거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전 세계 유망주란 유망주는 전부 꿰뚫고 있는 벵거였지만 저 선수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스카우팅 리포트에서 받아 본 이산의 정보는 극히 평범했다.
 나이도 스물네 살. 사실 유망주라 하기에는 너무 많은 나이였다.
 ‘일찍 발견했다면 괜찮은 선수로 키웠을 수도 있을 텐데.’
 좀 더 어린 나이에 만났으면 아론 램지, 잭 윌셔 정도는 거뜬히 해낼 재능이었다.
 벵거는 이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저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실 뿐이었다.
 
 ***
 
 삐익―!
 올리비에 지루의 슈팅이 골문을 크게 벗어났다.
 지루가 탄식하며 땅바닥을 후려쳤다.
 ‘···두 골이나 앞서고 있으면서 왜 저래?’
 이산은 잠시 경기가 중단된 틈을 타 중앙 미드필더들에게 다가갔다.
 “다른 건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 외질한테 최대한 달라붙어서 귀찮게 해.”
 “그걸로 괜찮을까?”
 “······나 전반 내내 그 녀석 공 한 번도 못 건드려 봤어.”
 동료 선수 한 명이 자신 없다는 투로 말했다.
 이산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줬다.
 “괜찮아. 그냥 압박만 해.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어차피 도박이었다.
 아스널 선수들 중에서도 볼 다루는 기술이 가장 뛰어난 축에 드는 메수트 외질이다.
 그만큼 실수를 유발하긴 쉽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외질이 공격 진영으로 올라왔다는 데 힌트가 있었다.
 ‘목표는 산티 카솔라다.’
 이산은 빠르게 판단했다.
 외질은 밑에서 공을 풀어 주기보단, 직접적인 찬스 메이킹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전반 내내 외질의 패스를 가장 많이 받은 선수가 바로 산티 카솔라였다. 외질이 그에게 공을 주는 타이밍에 잘 맞춰 능력을 사용하면, 충분히 실수를 유발할 수 있었다.
 이미 두 골을 앞서가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템포는 그대로였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공격만을 추구하는, 아스널의 축구는 그런 축구였으니까.
 메수트 외질이 잭 월셔에게, 잭 월셔가 다시 산체스에게, 산체스가 나초 몬레알에게,
 왼쪽 측면에서 공이 계속해서 순환하고 있었다.
 이산은 동료 선수들의 위치를 잡아 주며 동시에 오른쪽 측면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는 산티 카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다 순식간에 속공이 들어올 터였다.
 “더 붙어!”
 이산이 외쳤다.
 다들 생각보다 잘 해내고 있었다. 공을 빼앗진 못하고 있지만 적어도 길목은 확실하게 막고 있다.
 급작스레 외질이 박스 앞쪽에서 공을 잡는 것을 본 이산은 순간적으로 존을 발동, 재빨리 달려가 외질 앞을 막아섰다.
 재빠른 대처에 외질은 순간 당황했다.
 ‘이 녀석 뭐지?’
 시험 삼아 살짝 왼쪽으로 상체 페인팅을 줘 봐도 낚이지 않는다.
 외질을 흘끗 뒤를 바라보았다. 전담 마크 두 명이 그를 향해 압박해 들어오고 있었다.
 “···쳇.”
 외질은 귀찮다는 듯 공을 옆쪽으로 길게 치고 달리려고 했다.
 그러자 이산이 능숙하게 어깨를 먼저 밀어 넣으며 공을 뺏어 버렸다.
 외질은 순간 자존심이 상했다.
 공을 탈취해 전방으로 공을 보내려는 이산의 뒤에다 대고 스터드를 살짝 들어 올려 거친 태클을 시도했다.
 “으악!”
 주심이 휘슬을 울리며 다가왔다.
 이산은 잠시 오른쪽 다리를 부여잡고 누워 있다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일어났다. 옳지. 계속해서 신경을 긁어 댄 보람이 있다.
 여전히 날카로운 패스를 뿌려 대곤 있었지만, 살짝 신경질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후 십여 분, 아스널의 공격은 다소 답답한 형태로 변했다.
 페널티 에어리어 부근까지는 수월하게 접근했지만 정작 골로 연결되는 결정적인 패스가 없었다.
 지루에게 공이 연결될 때마다 이산이 어떻게든 클리어링을 해냈다.
 몸을 아끼지 않는 허슬플레이였다.
 정작 그 자신은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지만.
 ‘능력은 앞으로 오 분 정도가 한계인가······.’
 더 써 버렸다간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기도 전에 탈진해 버릴 것 같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산은 공을 커팅해 낸 뒤, 정신을 집중해 전방을 바라봤다. ‘플레이메이커’ 특성이었다.
 똑같은 상황을 계속 버텨 내길 수십여 분, 공을 탈취한 이산의 눈에 드디어 기회가 보인 것이다.
 ‘이거 정말 멋진데.’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상대편 페널티 에어리어 바로 앞이었다.
 맨스필드 FC의 중앙 공격수가 아슬아슬하게 오프사이드 라인에 걸쳐 이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행히 코시엘니는 눈치를 못 챈 상태였다.
 ‘센터 서클로 드리블하는 척하면서 길게 롱패스를 뿌리고··· 공격수는 오프사이드 라인을 허물고 왼쪽으로 침투에 성공하고··· 윙어는 오른쪽 터치라인을 따라 전력 질주, 그리고 나는 다시 박스 쪽으로 침투해서 공을 받고.’
 이 모든 것들이 순간적으로 눈앞을 스쳐 갔다.
 파앙!
 이산은 경기장 중앙으로 몇 미터 전진한 뒤 길게 롱패스를 뿌렸다.
 공이 보기 좋은 포물선을 그리며 경기장 중앙을 지나 공격수에게 도달했다.
 아주 세밀한 패스는 아니었지만, 하부 리그 수준을 아득히 상회하는 패스 실력이었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롱패스 시도를 거의 하지 않았던 이산이었다. 그가 그런 패스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한 아스널 선수는 한 명도 없었다.
 슈체츠니가 고함을 지르며 수비 라인을 조정했다.
 ‘암만 그래도 이미 늦었지.’
 이산은 그대로 페널티 에어리어 바로 앞까지 달려 나갔다. 아스널 수비수들은 잔뜩 긴장한 채 박스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맨스필드 FC 진영에 있던 램지, 외질이 수비 가담을 위해 달려오는 중이었지만 거리가 턱없이 멀었다.
 ‘역시 코시엘니.’
 코시엘니는 슈체츠니 바로 앞에 철통같이 서서 맨스필드 FC의 공격수가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건 못 뚫겠지.’
 아스널 수비수들과 정면으로 맞닥뜨린 공격수는 공을 다니엘에게 보냈다.
 그리고 다시 리턴.
 나초 몬레알이 다니엘에게 바짝 붙어 볼 전개를 방해하고 있었다.
 2:2 상황이면 보통 공격수가 유리한 상황이지만 아스널 수비수들 상대로는 버거운 것이 사실이었다.
 이산은 페널티 에어리어 왼쪽 부근에 서서 공격수에게 소리를 질렀다.
 “여기! 나한테 줘!”
 이산의 콜에 공격수가 공을 패스했다.
 코시엘니가 치잇, 하고 신음했다.
 이산을 포함해 아스널 진영에 머물러 있는 맨스필드 FC 선수들은 3명, 아스널의 수비수는 코시엘니와 나초 몬레알 단 두 명이었다.
 ‘···역시 엄청난걸.’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코시엘니는 이산의 발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공격수를 마냥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이산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그대로 골대 쪽으로 접근했다.
 코시엘니가 뒷걸음질 치면서 슈팅 각도를 줄였다.
 ‘내가 아니야. 바보야.’
 툭툭, 탁!
 이산은 놀랍게도 반대쪽에 노마크 상태로 있던 다니엘에게 공을 띄워 로빙 패스를 보냈다. 다니엘이 놀란 눈으로 이산을 바라봤다. 왜 나에게?
 이산은 그의 마음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 씨익 웃어 보였다.
 ‘어찌 됐든 똑같은 한 골이니까.’
 다니엘은 분함인지, 부끄러움인지 모를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힌 채 공을 받았다. 그리고,
 팡!
 다니엘은 왼발로 골대 왼쪽 상단을 노려 강슛을 날렸다.
 다소 엉성한 폼이었지만 그럭저럭 힘이 실려 있는 슈팅이었다.
 공은 슈체츠니의 손끝에 살짝 스친 뒤 골문으로 그대로 빨려 들어갔다.
 「골! 골입니다아! 맨스필드 FC! 한점 따라붙습니다!」
 「만들어 내는 과정이 좋았습니다! 아스널을 상대로 이런 모습을 보여 주다니요!」
 관중들의 환호성 소리가 점점 커졌다.
 이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못 넣는 줄 알았네.’
 스코어 2:1.
 일방적인 경기 양상이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스널 선수들은 다시 한번 투쟁심을 끌어올렸다.
 “···젠장할!”
 추격골이 들어간 지 십 분 만에 이산은 욕설을 내뱉으며 잔디를 발로 찼다.
 솔직히 말해 더 이상 뭔가 해 볼 만한 체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산의 위험성을 눈치챈 아스널 선수들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올리비에 지루는 공격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이산과의 경합에만 집중했으며, 윙어들이 쉴새 없이 스위칭 플레이를 하며 맨스필드 FC의 골문을 두들겼다.
 어떻게든 막아 보고 있긴 하지만 곧 추가골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시점이었다.
 맨스필드 FC 선수들의 얼굴에 패색이 짙게 서렸다.
 “힘드냐?”
 이산은 양손으로 무릎을 잡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다 고개를 들어 크루이프를 바라보았다. 한창 경기 중인 그라운드에, 양복 차림의 유령이 서 있는 건 확실히 언밸런스했다.
 이산은 다른 선수들이 허공에 대고 말하는 걸 눈치채지 못하도록 손으로 입을 가렸다.
 “허억, 헉··· 그래도 이 정도면 잘한 거 아닌가요?”
 “곧 죽어도 말은.”
 크루이프가 낄낄 웃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이었다.
 “···놀리려고 오신 거예요?”
 “당연히 도와주러 온 거지. 임마. 똑바로 서 봐.”
 이산은 의심스런 눈초리로 요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크루이프가 저벅저벅 걸어 들어와 정확히 이산과 같은 위치에 섰다. 그의 몸이 유령처럼 희미하게 변하며 이산의 몸을 그대로 통과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이게 대체 운동선수 몸이냐?”
 크루이프가 가볍게 제자리 뛰기를 했다. 이산이 가볍게 제자리 뛰기를 했다. 또 크루이프가 오른팔을 빙빙 돌려 어깨를 풀었다. 이산이 오른팔을 빙빙 돌려 어깨를 풀었다.
 이산이 머릿속으로 크루이프에게 말했다.
 ‘어, 어떻게 된, 뭐죠? 몸이 안 움직여요!’
 “시끄럽게 깩깩대지 좀 마라.”
 크루이프가 이산의 입을 빌어 말했다. 주변에 있던 동료 선수들이 그를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자, 남은 시간 십 분, 역전까지 두 골.”
 이산이, 아니 크루이프가 씨익 웃었다.
 “잘 보고 배워라.”
 
 ***
 
 알렉시스 산체스의 슈팅이 키퍼의 손을 맞고 골라인 아웃됐다.
 메수트 외질이 오른쪽 코너 플래그로 걸어가 코너킥을 준비했다.
 ‘···이런 게 되는 거였어요?’
 이산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머릿속으로 물었다. 이럴 거면 애초에 고생할 필요 없이 빙의해서 혼자 다 해 먹으면 될 게 아닌가? 다른 선수도 아니고 무려 요한 크루이프인데.
 그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 크루이프가 혀를 찼다.
 ‘왜, 내가 매번 대리라도 뛰어 주랴? 한심한 놈. 그렇게 프라이드가 없어서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이산은 부끄러운 듯 말끝을 흐렸다.
 ‘어차피 매번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잘 봐라.’
 크루이프는 페널티 에어리어 바깥에 서서 맨스필드 FC 선수들의 포지셔닝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감독님이라도 힘들지 않겠어요? 혼자선 플레이하는 데 한계가 있다면서요?’
 ‘너는 못 하지.’
 크루이프가 씨익 웃었다.
 ‘나는 할 수 있고.’
 ‘···감독님 살아 있을 때 주변에 사람 별로 안 남아 있었죠?’
 그렇게 말하는 사이 외질이 왼발로 코너킥을 찼다.
 제법 그럴듯하게 페널티 에어리어 안으로 휘어 들어가나 싶더니만, 웬일인지 킥이 조금 길었다. 공은 골문과 조금 떨어진 곳에 도달했다.
 맨스필드 FC의 수비수가 공을 급하게 걷어 냈다. 높게 뜬 공이 크루이프에게로 향했다.
 “헉!”
 주변에 있던 선수들이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그냥 공이 떨어지는 지점에 오른발을 가져다 댔을 뿐인데 접착제라도 바른 것처럼 착 달라붙었다.
 직접 자기 몸이 움직이는 것을 느끼고 있는 이산 또한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우와···.’
 크루이프는 여유 가득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달려온 아론 램지가 크루이프의 앞을 가로막았다.
 크루이프는 잠시 램지를 등지고 왼쪽으로 드리블을 하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오른발로 공을 긁으며 뒤돌아서 돌파했다.
 이미 무게 중심이 왼쪽으로 기울어진 램지는 방해조차 못 하고 간단하게 제쳐졌다.
 이산의 플레이를 지켜보고 있던 관중들, 특히 크루이프를 직접 본 적 있는 나이 든 관중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
 휘청거리는 듯하면서 탄력 있는 움직임, 중심을 잡기 위해 크게 휘두르는 두 팔, 그리고 성큼성큼 뛰어가는 폼까지.
 요한 크루이프를 그대로 빼다 박았던 것이다.
 “오, 이럴 수가···.”
 “리! 리! 리!”
 「엄청난 볼터치입니다! 크루이프 턴! 마치 나이프로 버터를 바르는 듯한 개인기입니다아!」
 「···점점 후반으로 갈수록 여유가 있어지는 것 같아요. 판타스틱합니다! 저 선수는 어디서 나타난 선수죠?」
 간단히 램지를 돌파한 크루이프는 상대방 진영 중앙으로 돌진했다.
 ‘사이드로 빠지는 게 낫지 않아요?’
 ‘아까도 말했지 않나? 그건 너 같은 애들이 하는 거라고.’
 이산의 주제넘은 참견에 크루이프가 코웃음 쳤다.
 알렉시스 코클랭, 나쵸 몬레알, 로랑 코시엘니···.
 크루이프는 앞을 가로막는 아스널 선수들을 차례차례 제쳐 냈다.
 특별한 동작은 아니었으나 단순한 가속, 감속. 드래그백만으로도 간단히 타이밍을 뺏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곤 한번 제쳐지면, 도저히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달려 나갔다.
 이산은 자신도 모르게 크루이프의 명언 하나를 떠올렸다.
 ‘상대방보다 빨리 움직이면, 내가 빨라 보인다.’
 왠지 중2병스러운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니 정말 맞는 말이다.
 돌파에 성공할 때마다 엄청난 환호성 소리가 들려왔다.
 한 명, 또 한 명···.
 이산은 꿀꺽 침을 삼켰다. 자신의 존을 발동할 때와의 플레이와는 차원이 달랐다.
 자신의 경우 신체 능력으로 어찌어찌 돌파하는 듯한 느낌이라면, 크루이프의 경우 정확히 꼭 필요한 만큼만 힘을 쓴다는 느낌이 있었다.
 몸에 힘을 뺀 듯 느슨하지만, 더할 나위 없이 예리하다.
 어느새 크루이프는 슈체츠니와 마주 보고 있었다.
 슈체츠니는 다급한 표정으로 크루이프에게로 달려 나오면서 각을 좁혔다. 크루이프는 잠시 골문 쪽을 흘깃 바라보는가 싶더니, 발끝으로 공을 톡 차서 올렸다.
 공은 정확히 포물선을 그리며 골대로 향했다. 허를 찔린 슈체츠니가 황급히 뒷걸음질 쳤지만, 이미 떠난 공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온 힘을 다해 손을 뻗었지만 공은 그대로 골포스트 상단을 스치며 골문으로 들어갔다.
 「골! 고오오올! 고오오오오오올! 엄청난 피니시입니다!」
 크루이프를 쫓던 아스널 선수들이 허탈하게 주저앉았다.
 크루이프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센터 서클 주변까지 달려가더니, 허공에 뛰어오르며 어퍼컷을 했다.
 “으하하하하!”
 ‘···좀 전까진 멋있다고 생각했는데요.’
 ‘뭐야? 오랜만에 골 넣고 세리머니도 못 하냐?’
 ‘그렇게 좋으신가 해서요.’
 ‘이 자식이 정말? 아무튼···.’
 휘청, 이산은 갑작스러운 현기증을 느꼈다.
 ‘여기까지가 한계다.’
 몸의 주도권이 다시 이산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어, 어? 더 안 하실 거예요?’
 스코어 2:2, 남은 시간 4분.
 이산이, 아니 크루이프가 보여 준 엄청난 플레이에 아스널 선수들은 의욕을 잃었다.
 그에 비해 가까스로 동점까지 따라붙은 맨스필드 FC 선수들은 한데 뭉쳐 전의를 불태웠다.
 “자! 다들 오 분만! 오 분만 버티자!”
 맨스필드 FC 골키퍼가 선수들을 독려했다.
 알렉시스 산체스만이 전의를 활활 불태웠지만, 조급한 마음에 마무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삑, 삐이익!
 이윽고 경기 종료.
 FA컵 16강에서 무승부란 곧 재경기었다.
 원정팀 관객석에 있던 맨스필드 FC 서포터들은 마치 챔피언스리그 우승이라도 한 것처럼 난리였다.
 이산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라운드에 서 있었다. 동료 선수들이, 저 투덜거리던 다니엘 놈까지 그에게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
 
 ‘잉글랜드 5부 리그 메시.’
 최근 한국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크게 회자되고 있는 영상의 제목이었다.
 업로드 일주일 사이에 영상을 본 사람만 무려 삼백만 명 이상.
 얼마 전 방송했던 FA컵 아스널 VS 맨스필드 FC의 경기였다.
 ― 뭐 하던 선수지?
 ― 예전에 서울 유스로 뛰던 선수임. U―15 국대였을걸?
 ┕ U―15가 무슨 국대, 어린애 장난 아님? ㅋㅋㅋㅋㅋ
 ┕ 조축 일반인 VS U―15?
 ― 와... 센스 있네 근데. 저 정도면 챔피언십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 나이가 너무 많은 듯. 24살? 25살?
 ― 플레이 스타일이 메시보다는 앙리에 가까운 거 같은데?
 축구 커뮤니티에서도 이산의 경기 영상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다.
 그 사실을 이산이 모를 리 없었다.
 “······미쳤네. 팔로워가 백만 명이라고?”
 이산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스마트폰 액정을 들여다봤다.
 “그게 뭐냐?”
 “이게··· SNS 모르세요?”
 “아, 그 시간 낭비하는 거?”
 크루이프는 한심하다는 듯이 그를 내려다봤다.
 의외로 이산의 표정 또한 그리 밝지 않았다.
 아스널전의 플레이가 계속해서 떠올랐던 것이다. 엄청난 능력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크루이프에 비하면 그냥 신나서 날뛰는 애송이였을 뿐이다.
 그런 자각은 다시 이산을 위축되게 만들었다.
 이산의 표정을 본 크루이프가 입을 열었다.
 “못 이긴 게 네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감독님.”
 “잘했다.”
 “웬일이세요? 칭찬을 다 해 주시고.”
 “기대치보다 한 서른 배 이상은 잘했지.”
 “······대체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 거예요?”
 “축구 못하는 놈.”
 이산은 피식 웃었다.
 ‘걱정하지 마. 점점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날 거다. 나도 그랬지.’
 이 양반이 뭘 알고 하는 얘긴가?
 ‘스킬 얘기를 하시는 건가요?’
 ‘스킬? 그게 뭐냐.’
 ‘존이니, 플레이메이커니··· 제가 갖고 있는 능력들 말이에요.’
 ‘아아, 너는 그런 식이군.’
 너는? 이산은 의아함을 느꼈지만 딱히 질문하지 않았다.
 ‘잘은 모르겠다만 이거 하나는 확실하지.’
 ‘뭔데요?’
 ‘너는 앞으로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될 거다. 지금 너의 능력은 아주 미미한 수준이야. 그걸로 뭘 할 수 있는지 알게 되면 아주 놀라 까무러칠 거다.’
 한 번도 이런 말투로 단언한 적이 없는 크루이프였다.
 ‘······그러려면.’
 이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우선 다음 라운드도 잘해야겠지. 그래야 좋은 팀으로 이적할 게 아니냐?’
 당연한 말에 김이 빠진 이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스카우팅 본부.
 대런 존슨은 스카우팅 본부 사무실 안에서 누군가에게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이 선수, 분명히 지켜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제 커리어를 걸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자네가 보내 준 영상을 본 바로는······ 마지막 플레이 빼놓곤 뭐 그렇게까지 특별한 점은 없는 것 같은데? 피지컬도 별로고.”
 “그게 다가 아닙니다. 이 선수, 경기하는 걸 보면 지네딘 지단 같다니까요? 직접 보셔야 합니다. 절대로 5부 리그에서 썩고 있을 재능이 아닙니다.”
 “지단이라니, 자네 너무 오바하는 거 아닌가? 유나이티드에서 뛸 수 있는 자질이 있다기엔······.”
 “팀장님!”
 대런은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큰 관심이 없을 줄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지는 몰랐다.
 하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입장에서 어디서 뛰고 있었는지도 모를 24살 동양인에 관심을 가질 리 있겠는가.
 이적은커녕 하다못해 영입 희망 리스트에도 올리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좀 더 구단의 관심을 끌어야 되는데······.’
 이산, 24세, 대한민국.
 “대한민국이라······.”
 이야기를 마치고 나오던 대런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나야, 대런.”
 수화기 너머로 머뭇거리는 기색이 느껴진다.
 “웬일이야? 이렇게 갑자기 전화를 다 주고,”
 “내가 너한테 전화도 못 하냐. 괜찮은 선수가 하나 있는데”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다시 말하지만 마레즈는 안 돼.”
 “스왑 딜 같은 거 아냐. 관심 가는 선수가 하나 있어서 지켜봐 달라고 연락한 거지.”
 대런으로서는 상당한 모험 수였다. 친한 친구 사이긴 했지만 어쨌든 같은 리그에서 뛰고 있는 경쟁 팀의 스카우터다. 대런이 다른 팀 스카우터에게 정보를 줬다는 걸 구단에서 알게 되면 좋을 건 없었다.
 하지만 위험을 감수해 볼 가치는 충분했다.
 리그 내 다른 팀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면, 분명히 구단 측에서도 관심을 가질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언젠가 영입할 날도 오겠지.
 “그게 누군데?”
 “이산이라고 하는데······.”
 통화를 마친 대런은 곧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인간이랑은 통화하기 싫었는데.’
 “접니다.”
 “아! 스카우터님!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죠.”
 자신도 모르게 무미건조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전화 주실 줄은 몰랐는데. 어떻게, 생각 바뀌신 건가요?”
 “······여전하시네요. 밑도 끝도 없이 본론부터 말씀하시는 거.”
 “에이,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반가워서 그러죠, 스카우터님.”
 무엇보다 말끝마다 스카우터님, 스카우터님, 하는 게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번에 말씀하신 계약 건은, 제가 한번 구단에 보고 올려 보죠.”
 “잘 생각하셨어요. 애초에 이렇게 좋은 기회가 없는데, 왜 안 한다 하나 몰라?”
 느물거리는 말투에 대런은 눈살을 찌푸렸다.
 왜 안 한다고 하긴. 네 녀석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지. 대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요?”
 “선수 한 명만 봐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제가요?”
 대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 능구렁이 같은 놈한테 이산을 소개해 주는 게 과연 옳은 선택일까.
 “FA컵에서 발굴한 선수입니다.”
 하지만 그의 생각에 이산을 띄워 주기에 이만한 적임자는 없었다.
 전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슈퍼 에이전트.
 빅클럽들의 눈엣가시.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와 폴 포그바, 앙트완 그리즈만 등 수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의 에이전트.
 다름 아닌 미노 라이올라였으니까.
 
 <『레전드가 빙의했다』 1-2권에 계속>

댓글(3)

다크라이    
괜찮네요. 다만 역시 스포츠물이다보니.. 경기와훈련의 연속. 한편씩이면 모르겠지만 이렇게 책으로 한번에 보면 8권은 좀 기네요. 6권이후로는 휙휙넘긴듯.
2021.05.19 12:04
생사람    
수준있는 내용이 많이 엿보입니다. 다만 윗분 말씀대로 계속해서 경기, 경기, 경기. 한사람의 인생을 풀어가는데 오직 그것밖에 없다는게 좀. 그냥 실력이 늘고. 그에따른 성과를 얻지만, 딱히 희노애락을 느끼지 못하고 나중에는 뒷내용이 점점 궁금해지지 않는다는게 좀. 저도 7권부터는 그냥 스킵
2021.06.02 01:22
su*******    
지금 완주하고 댓글 답니다. 장점 : 필력 뛰어남. 술술 읽힘. 축구 사전지식 해박. 단점 : 경기 장면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 같지만, 머릿속에서 잘 이미지화되지는 않음. 너무 선수로서의 성장에만 집중되어 있다보니 사람으로서의 주인공은 없음. 하여, 비슷한 내용의 반복이라 뒤로 갈 수록 그냥 넘기게 됨 그래도 간만에 만난 좋은 작품!
2021.06.07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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