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광자완흥(狂者完興)

인연(因緣)

2020.02.29 조회 15,039 추천 259


 1856년 철종 7년.
 시절(時節)은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는 동짓달 하고도 하순.
 한성부 안국방 구름재에 자리 잡은 운현궁은 흰 눈에 덮여 있었다.
 
 밤새 내린 폭설로 사랑채 마당은 이미 한 자가 넘는 눈이 쌓여있었다. 새벽부터 이를 치우는 서동 유재현(柳在賢)과 청지기 한석진(韓錫眞)은 벌써 이마에 땀이 맺히고 있었다.
 
 힘이 들자 청지기 석진이 허리를 펴며 여덟 살배기 서동 재현에게 말했다.
 “기침할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 왜 아무런 기척이 없지? 네가 도련님 방에 가봐라.”
 
 “네.”
 답한 재현은 걸음을 재게 놀려 대청마루에 올라섰다. 곧장 다섯 문 중 좌측 제일 끝 쪽 방으로 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방안에는 한 소년이 반듯하게 누워 자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앞까지 다가간 재현이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도련님, 도련님!”
 
 그러나 열두 살 이재록(李載錄)은 답이 없었다. 이에 놀란 재현은 재록의 몸을 조심스럽게 흔들며 좀 더 큰소리로 불렀다.
 “도련님, 도련님!”
 그제야 반응이 나타났다. 재록이 몸을 모로 누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귀찮게 왜 그래?”
 “벌써 기침할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제야 눈을 뜬 재록이 창호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날도 새지 않은 것 같은데?”
 “날씨가 흐려서 그렇습니다.”
 “그래? 그럼, 일어나야지.”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던 재록이 도로 누우며 말했다.
 
 “몸이 찌뿌둥한 게 좋지 않구나.”
 “그래도 대감마님과 군부인마님께 문안인사는 올려야지요?”
 “오늘 하루는 생략해야겠다.”
 “네?”
 
 평소 전혀 이런 일이 없던 이 집안 적장자의 행동에 재현은 자신이 혼이 날까 몸이 달아 다시 한 번 권했다.
 “그래도 문안인사는 드려야......”
 “이 녀석이.......”
 
 재록의 역정에 화들짝 놀란 재현이 황급히 물었다.
 “혹시 고뿔이라도 걸리신 겁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오늘따라 몸이 무겁구나.”
 “아, 네!”
 
 “그만 나가봐!”
 축객령에 재현은 울상을 지으며 방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나가자 재록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정좌(正坐)하더니 멍하니 문살을 바라보며 회상에 잠겼다.
 
  * * *
 
 
 회고하건데 자신의 전생은 평범하다면 평범한 인생이었다. S대학 자원공학과를 나와 광업진흥공사에 취업하여 보안관리 및 해외자원개발 기술지원팀에서 일했다.
 
 그 후 해외사무소 근무 등 이렇게 저렇게 해외로 돌다가 국내로 복귀해 중간에 이름이 바뀐 한국광물자원공사 이사까지 지내고 정년이 되어 은퇴했다.
 
 그 이후 평소 취미였던 모델러(Modeler:모형제작자)로서 증기기관차를 비롯한 각종 기차류, 범선을 비롯한 배의 제작, 더 나아가 자동차와 항공기 등을 제작하며 소일했다.
 
 그러다 노는 것도 따분하여 인터넷 작가로 뛰어들었다. 그가 젊은 시절 김용의 무협작품이 한때 한국에 유행했고 덕분에 무협물이 호황을 누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 당시 그도 다른 젊은이들처럼 무협물에 심취하여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런고로 그 시절을 회상하며 무협 내지는 대체역사소설을 쓰며 소일했다. 그러다 뜻밖에 위암 판정을 받고 투병하다 끝내는 69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가 환생한 곳이 조선. 그곳도 다름 아닌 흥선 대원군의 적장자로 태어났다는 것을 인지했을 때는 당혹감이 앞섰다. 그 어디를 둘러봐도 조선은 막장의 상황.
 
 번민 끝에 얻은 결론은 자신에게 전생을 기억을 갖고 이 가문에 태어나게 한 것은 조선의 역사를 더는 비극으로 끝내지 않으려는 하늘의 의지라 판단했다.
 
 그 어느 명군이 와도 멸망의 운세를 피할 수 없는 말기적 증상의 조선에, 더군다나 대원군의 적장자로 태어나게 했다는 것은 자신을 통해 조선이 망국의 길로 가지 않게 하려는 하늘의 의지로 판단하고 2살배기가 할 수 있는 최선에 착수했다.
 
 즉 영양 흡수를 통해 빠른 성장을 꾀하는 한편 글공부에 착수한 것이다. 처음은 천자문을 시작으로 소학, 사서오경(四書五經), 통감(通鑑), 사략(史略), 사마천의 사기(史記) 등 중국 고대사까지 두루 섭렵했다.
 
 이 과정에서 부친 흥선으로부터 글씨와 사군자도 배웠다. 그런데 그 재능이 놀라웠다. 마치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빠른 시간 내에 그의 서체며 화법을 깨우치니 부친 흥선도 탄복해 마지않았다.
 
 이렇게 학문과 서체, 화법에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루었다고 자부한 시점이 열한 살 무렵. 이미 그는 시중에 천재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런 속에서 부친은 중간 중간 유배에서 풀려난 추사 김정희에게 그를 소개해 그로부터 학문과 서체와 화법을 더욱 정진케 했다.
 
 그러다 근년에는 부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박규수를 스승으로 삼아 그의 집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어제는 처음으로 술까지 곁들여 문인들과 어울리다보니 밤늦게 귀가했다.
 
 그 탓인지 몸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느끼며 회상에서 깨어난 재록은 그 길로 우물로 달려가 세수를 했다. 그러고 나니 서동 재현이 와서 고했다.
 
 “도련님, 조반 드시랍니다.”
 “그래, 알았다.”
 곧 방을 나온 서준은 다섯 개의 방 중 가운데 방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벌써 세 개의 상이 차려져 있었다.
 
 독상 문화라 하나는 부친 흥선이 그 앞에 앉아 있었고, 하나는 다섯 살배기 동생 개똥이(원 역사에서 고종)가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고로 남은 하나의 상 앞에 그가 앉자 금년 37세의 젊은 흥선이 말했다.
 
 “들자.”
 “네.”
 답하며 수저를 드는 재록으로서는 안도의 한숨부터 나왔다. 문안 인사를 올리지 않았다고 책하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다른 날과 달리 영 심상치 않았다. 식사 도중이라도 궁금한 것을 묻고 오늘 일정 정도는 여느 날 같았으면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흥선은 이마를 찌푸린 채 묵묵히 몇 숟갈 뜨더니 이내 수저를 내려놓는 것이 아닌가. 이에 재록이 걱정되어 물었다.
 
 “아버님, 무슨 근심이라도 있습니까?”
 “오늘 밥상을 봐라. 여느 날과 달리 쌀이 거의 없지 않느냐?”
 그러고 보니 대부분이 좁쌀이라 자신도 껄끄러워 주저주저하고 있었다. 이에 재록이 부친께 말했다.
 
 “난이라도 한 점 칠까요?”
 “흐흠........! 글쎄다? 너무 많이 팔아먹어 이젠 얼마 쳐주려 하지 않으니......”
 
 두 사람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 흥선은 자신이 귀찮은 날이면 재록에게 난을 치도록 했다. 그 결과 시중에 풀린 석파란의 상당수가 그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른 방도라도 있습니까?”
 “에휴......! 어쩔 수 없지. 되먹지 못한 놈들의 똥구멍이라도 핥으러 다녀야지.”
 “끙.......!”
 
 괴로워하던 재록이 말했다.
 “소자라도 화식(貨殖) 전선에 뛰어들어야겠습니다.”
 “됐다. 왕손으로서 어찌 식산(殖産)에 뜻을 둔다는 말인고? 전혀 가당치도 않은 말이다.”
 
 “당장 끼니를 잇는 것도 잇는 것이지만 천하 사람이 부지런히 오가는 것도 다 재물을 얻기 위함이니 전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닌가 하옵니다.”
 “갈! 어찌됐든 이 아비가 책임질 것이니, 너는 학문에만 더욱 정진하도록.”
 
 말이 끝나자마자 부친 흥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기 시작했다.
 
  * * *
 
 이날 흥선의 일진은 길하지 못했다. 여러 집을 돌아다녔으나 허탕이었다. 그러다 종당에는 집의(執義) 홍종의 집에 갔다가 하인에게 얻어맞는 수모를 당한 것은 물론 드잡이질 중에 손까지 다쳐 피가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몸으로 천지를 둘러보니 아득했다.
 “어디 가서 또 비럭질을 해야 한단 말이냐?”
 그가 한탄할 만 했다. 높은 품계의 종친인 그이지만, 나라에서는 그에게 1년 단위로 따져 쌀 두 섬, 콩 한 섬 정도를 주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수많은 하인과 식솔들의 땔감이나 끼닛거리도 잇기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거기다 때로는 이마저 거르기 일쑤이니 왕손으로서 체통을 지키고 산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문득 생각나는 인물이 있었다. 서강에서 쌀장사를 하는 이천일이었다. 전에도 은혜를 입은 일이 있는 터라 그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서강가로 향했다. 마침내 그가 이천일의 쌀가게에 도착하니 그를 본 이천일이 뛰쳐나와 외쳤다.
 
 “아니 손에 피가 흐르지 않습니까?”
 “이게 대순가? 식속들이 굶게 생겼으니 그게 더 문젤세.”
 “우선 치료부터 하시고......”
 말과 함께 흥선을 안으로 끌어들인 이천일은 신속히 하얗게 핀 엉겅퀴 솜으로 지혈을 하고 면포로 상처부위를 감쌌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형편이 그러시다면 물건 보내라는 패지(牌紙:쪽지) 한 장이면 족하실텐데, 대감께서 예까지 친림하시다니요? 송구할 따름이옵니다. 염려하지 말고 돌아가 계시면, 내일 아침 일찍 조처하여 드리겠사옵니다.”
 “험, 험, 고맙네!”
 
 이내 돌아서서 가는 흥선의 볼에는 두 줄기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두 손은 꼭 움켜쥔 채. 어찌됐든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흥선이었으나 도통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양반가를 누비며 식량을 구하려다 식량은커녕 온 종일 굶었고, 더하여 추위마저 혹독한지라 도통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것이다.
 
 이튿날.
 흥선은 조반으로 냉수를 마시고 이를 쑤시며 이천일의 물자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런 보람이 있었던지 청지기가 달려와 고했다.
 
 “서강으로부터 많은 물자가 보내져 왔습니다.”
 “그래, 어디 한 번 가봄세.”
 “네, 대감님!”
 
 곧 한석진의 뒤를 따라 가보니 창고에는 많은 물품이 부려져 있었다. 그 물목은 다음과 같았다. 쌀 20섬, 돈 천 꾸러미, 장작나무 50바리, 정육 100근, 서초(西草:평안도에서 나는 담배) 30근 등 실로 통 큰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목을 읽는 내내 흐려져 오던 흥선의 눈이 이제는 사물이 번져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눈으로 흥선은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 은혜를 어찌 갚을꼬?”
 
 ----------

작가의 말

함께 해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더하여 댓글, 선작, 추천은 작가를 더욱 글에 정진케 합니다!

댓글(23)

crius    
쪽지 보고 왔습니다 프롤로그부터 기대가 되네요
2020.03.02 10:42
매검향    
crius님! 반갑습니다! 함께 해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요!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2020.03.02 11:41
양마루    
건필
2020.03.05 12:32
매검향    
양마루님! 반갑고 고맙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한 날 되세요!
2020.03.05 15:02
또끼슈끼럽    
연재 축하드립니다 ^^ 이번작도 꼭 함께해요 ^^ ㅜㅜ 딱 20화 쌓이면 찾아뵙겠습니다 ㅜㅜ 건강히 연재부탁드립니다 ^^
2020.03.08 07:58
매검향    
또끼슈끼럽님! 감사, 감사드리고요! 늘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2020.03.08 16:18
한정우    
신작 축하합니다. 대박나니길~
2020.03.15 05:05
매검향    
한호(碩峰)님! 반갑고 고맙습니다!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2020.03.15 09:20
설희    
오. 첫장은 마음에 듭니다. 좋은글부탁드립니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ㅎㅎ, 다음편으로 ㄱㄱ씽
2020.03.27 11:21
매검향    
설희님! 감사, 감사드리고요!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2020.03.27 12:15
0 / 3000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