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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시폐인 조탁대

2014.05.27 조회 18,164 추천 478


 파킨슨 법칙(Parkinson’s law).
 공무원의 수는 해야 할 업무의 경중이나 그 유무에 관계없이 일정 비율로 증가한다.
 ―영국 행정학자 파킨슨(Cyril N. Parkinson)
 
 Thanks very much!
 ―공무원 일동
 
 
 프롤로그
 
 1. 대마법사 알리안 로르바흐
 <필> <승> <임> <용>
 <공> <시> <합> <격>
 
 탁대는 책상에 앉아 벽에 붙여놓은 글자를 바라보았다. 저걸 써 붙일 때만 해도 좋았다. 재수 옴 붙지 말라고 고사도 지냈다.
 국가직 커트라인 82점.
 서울시 80점.
 경기도 봉황시 75점······.
 90점이나 100점도 아니었다. 까짓 다섯 과목 중에 두 과목 정도는 사뿐히 90점 맞아주시고 나머지에서 70점 대 맞으면 바로 합격할 판이었다.
 평균 경쟁률 100 대 1.
 그것도 걱정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절반은 경험 삼아 오고 그 절반의 절반은 별 실력도 없단다. 나머지에서도 공부 좀 한 수험생은 절반밖에 아니라네. 그러니 경쟁률은 잘해야 10 대 1이었다.
 게다가!
 탁대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수능 때도 그랬지만 찍는 재수가 제법 있었다. 남들은 답 사이로 막간다는데 영어를 찍어서 6문제나 더 맞춘 기록보유자였다. 물론 쪽팔려서 기네스 협회에는 알리지 않았다.
 탁대의 눈이 조금 아래로 내려왔다. 과목별 합격 비결이 누렇게 떠가고 있었다.
 
 국 어, 마른 행주 짜듯 쥐어짜고!
 영 어, 라면에 밥 말아먹듯 친숙하게!
 한국사, 치맥 먹듯 통째로 씹어서 먹어치우고!
 행정학, 자다가 옆구리 찔러도 답 나오도록 통독!
 행정법, 전공자랑 썰로 맞짱 떠도 이기도록 쌈 싸 먹자!
 
 솔직히 국어와 한국사는 과목으로 치지도 않았다. 이따위 과목이야 그냥 달달 외우면 90점은 사뿐히 넘을 테고. 행정학과 행정법도 무대뽀로 외우면 될 거라며 근자감으로 충만했다. 네 과목 90점씩 맞으면 까짓것 영어는 50점만 맞아도 합격!
 계획표를 짤 때는 그랬다. 거기다 학점 이수 때 마지못해 따둔 워드프로세서 가점이 있으니 한 일 년만 개고생하면 번듯하게 관계에 진출하는 것이다. 요즘 공무원이 뉘 집 개 이름인가? 정년 보장에 국민연금보다 우월한 공무원연금까지 보장되니 가늘고 길게 살기엔 딱이었다.
 “저, 공무원에 도전하겠습니다.”
 4년 전, 그때도 오늘처럼 설날이었다. 지잡대를 졸업하고 일 년 동안 백수로 지내던 탁대는 설날, 잔소리 폭탄을 늘어놓는 작은 아버지와 삼촌에게 폭탄선언으로 맞섰다. 그때는 가족들의 기립 박수를 받았다.
 “그래. 놀면 뭐하냐? 한 번 도전해 봐라.”
 “맞아. 경쟁률 같은 거 아무것도 아니다. 열심히 하면 다 할 수 있어.”
 돌아보면 탁대의 인생에서 그 설날이 가장 행복했던 거 같다. 부모와 친지들은 새 출발하는 탁대에게 아낌없는 박수와 지원금(?)까지 퍼주었다.
 
 탁대의 우쭐한 만용은 다섯 권의 교재를 고르면서 살짝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이게 웬 베개래?’
 아뿔싸!
 그건 수험서가 아니었다. 오죽하면 빨간 벽돌을 가져다 두께를 비교해 봤을까? 다섯 권의 교재들은 한결같이 베개와 두께를 다투고 있었다. 다섯 권의 교재와 기출문제집, 그리고 예상문제집을 차곡차곡 쌓으니 천장까지 닿았다.
 내용은 또 어떤가?
 이놈의 행정법은 까만 것은 글자요 하얀 것은 종이였다. 완전히 외계어를 배우는 느낌이었다. 들어도 들어도 그 말이 그 말 같고 그 뜻이 그 뜻이었다.
 국어는 숫제 다른 나라 말 같았다. 문제는 분명 국어 문제인데 뭘 이런 것까지 다 물어보나 싶은 요상 야릇한 문제들.
 영어는 아예 패스한다. 어차피 처음부터 다시 하려고 마음먹었으니까.
 하지만 한국사는 한마디 하고 가야겠다. 이 교재는 혹시 한국사를 쥐뿔도 모르는 외국인들이 만든 게 아닐까 싶었다. 고등학교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문제들이 우후죽순으로 돌발 출동을 해대니 어떨 때는 40점도 나오지 않았다.
 주관적으로 감히 한마디 발언하자면!
 
 완전히 퍼펙트하게 객관성이 없었다.
 
 시험출제위원회 여러분, 변명해 보시라! 아니라고는 절대로 말 못할 것이다. 이건 사람 골탕 먹이자는 것도 아니고 문제 난이도도 들쭉날쭉. 이쪽에 포인트를 맞추면 저쪽 문제를 내고, 저쪽에 맞추면 또 그 옆 것이 나온다. 진짜 욕 나온다.
 게다가 더 열 받게 하는 건, 문제는 쉬운데 답은 어렵다는 사실이다.
 무슨 말인고 하면, 시험 보고 나올 때는 어쩐지 합격했을 것 같다는 착각을 준다. 우수한 성적은 아니지만 커트라인은 넘고도 남았을 것 같은 뿌듯함.
 그러나 그건 화려한 착각이었다.
 막상 답을 맞춰 보면 전부 엑스표가 비집고 들어왔다. 그러니 사람 안 돌고 배길까?
 그 예가 작년 서울시 공채였다. 지문이 복잡하지 않았다. 솔직히 한 85점 정도는 찍은 줄 알았다. 시험이 끝나고 수애를 만났을 때도 ‘잘하면 붙을 거 같아’라며 목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막상 점수를 맞춰 보니 평균은 꼴랑 60점 대 초반이었다. 늘 탁대에게 조언을 받는 수애보다도 10점 가까이 낮았던 것이다.
 “삼촌!”
 탁대가 한숨을 쉴 때 쌍둥이 조카가 들이닥쳤다.
 때때한복을 차려입은 게 제 날 만난 눈치다. 하긴 정말 좋은 때였다. 저 복주머니에는 벌써 빳빳한 세뱃돈이 가득 차 있을 테지?
 “차례 지내래.”
 6살 난 쌍둥이들이 탁대를 잡아끌었다.
 올 것이 왔다.
 잔소리와 눈치의 지옥이 수라장을 이룰 명절의 풍경.
 아아, 대체 누가 이따위 명절을 만들었을까?
 누가 백수의 인생에서 명절을 좀 지워다오. 탁대는 갈망했지만 발은 어느새 거실을 밟고 있었다.
 ‘아야!’
 탁대는 움츠렸다.
 멀리서부터 살갗이 따가웠다. 작은 아버지와 삼촌이 눈자위를 잔뜩 구긴 채 쏘아보고 있었다.
 “얌마, 넌 나와서 상 차리는 거 정도는 도와야 하는 거 아니야?”
 선공은 삼촌 동모가 먼저 날렸다.
 “공부하느라 깜빡해서······.”
 “그렇게 열심히 하는 놈이 아직도 9급을 못 붙어? 가서 차례상에 올릴 물이나 떠와.”
 동모가 주방을 가리켰다.
 “정갈하게 담아 와라. 또 아냐? 올해는 할아버지가 덜컥 합격시켜 주실지.”
 작은아버지의 덕담은 그나마 양반이다.
 주방에는 작은엄마와 사촌여동생 유리가 있다. 그 짧은 거리를 가는 동안에도 탁대의 영혼은 마구 시들었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까? 유리는 올해 대학을 졸업하고 번듯한 공사에 들어간 신의 딸이었다.
 ‘부러운 지지배.’
 탁대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배가 아프다. 유리가 떡하니 취직을 함으로써 탁대를 향한 시선이 더 차가워진 것이다.
 “오빠, 안녕?”
 승자는 당당하다. 저 미소 좀 보라지. 옷도 번듯한 새 옷이다.
 “왔냐?”
 탁대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물그릇을 받아들 때 기어이 작은엄마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쟤는 올해도 공무원 시험본대요?”
 “그럼 어떡해? 이제 와서 포기할 수도 없고.”
 작은엄마의 톤과 달리 탁대 마더의 목소리는 어쩐지 늘어진다.
 “차라리 다른 거 시키지. 벌써 아홉 번이나 떨어졌다면서요?”
 아홉 번.
 그 말이 족쇄가 되면서 탁대의 발목을 잡았다. 해도 너무한다. 다른 건 하나도 관심 없으면서 시험에 떨어지는 횟수는 잊어먹지도 않는다.
 맞다.
 탁대는 아홉 번 떨어졌다. 9급 국가직에서 세 번, 서울시에서 세 번, 경기도 봉황시에서 세 번······.
 “공무원 시험은 한 번에 붙어야지 세 번, 네 번 넘어가면 질려서 끝이래요.”
 “엄마, 오빠 들어.”
 유리가 작은엄마를 툭 치지만 그런 걸 조심할 사람이 아니었다.
 “얘는, 내가 뭐 없는 말 했니? 대체 공부를 어떻게 하길래 그까짓 9급을 삼 년 동안 못 붙어? 우리 유리라면 행정고시도 붙었겠다.”
 탁대는 못 들은 척 걸음을 떼었다. 주방에서 거실이 너무 멀었다.
 아니, 차라리 방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거실 저편의 삼촌 목소리가 탁대 옷깃을 잡아챘다.
 “야, 물 가져오는 것도 삼 년이냐? 빨리 빨리 좀 못 와?”
 
 “올해는 자신 있냐?”
 식사를 할 때 옆자리의 동모가 물었다. 탁대는 목을 넘어가던 음식이 덜컥 식도에 걸리는 걸 느꼈다.
 “쿨럭쿨럭.”
 기침도 제대로 못했다. 다들 탁대에게 시선을 꽂아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탁대의 기침 소리는 급 한숨으로 변해 버렸다.
 “될 거 같으면 벌써 됐지.”
 작은엄마가 그냥 넘어갈 리 없다.
 “차라리 중소기업 들어가는 게 어떠냐?”
 동모는 가타부타 답을 내놓으라는 듯 탁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
 “내가 보기에도 탁대는 힘들 거 같아. 그러니 이제라도 다른 길을······.”
 작은아버지가 가세한다.
 “내 말이 그겁니다. 솔직히 9급 공무원 그거 경쟁률만 세지 우수한 애들이 오나요? 어차피 SKY나 명문대 애들은 오지도 않고 허접한 대학 나온 애들끼리 경쟁인데 그걸 못 붙으니······.”
 “요즘은 일류대 애들도 많이 온대요.”
 그래도 가재는 게 편이라고 듣다 못한 탁대 엄마가 슬쩍 편을 들고 나섰다.
 “형님, 그거 모르는 소리예요. 솔직히 좋은 대학 나온 애들이 연봉 사, 오천짜리 대기업가지 미쳤다고 연봉 2천 될까 말까 하는 9급 공무원 시험 봐요? 개나 소나 달려드니까 경쟁률만 높은 거예요.”
 “맞아요. 내 후배 놈도 한 번에 턱 붙어서 벌써 8급 달았다던데.”
 동모와 작은엄마는 쉴 새 없는 협공을 펼쳤다. 진기가 쪽 빠진 것 같은 탁대는 숟가락을 놓고 일어섰다.
 “야, 어디가? 오늘은 도서관도 쉰다며?”
 “인강(인터넷 강의) 들을 시간이에요.”
 탁대는 그 말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섰다.
 “에이, 내가 대신 볼 수만 있다면 확 붙어주겠다만.”
 동모의 목소리가 좁은 문틈으로 따라왔다.
 
 탁대는 문에 기대 한숨을 쉬었다. 진짜 도서관도 쉬는 날이다. 이런 날은 열어도 되는데 말이다. 탁대는 침대에 맥없이 누웠다.
 하긴 좀 한심해 보이긴 하다. 백수 4년에 남은 건 피골이 상접한 자존심뿐이었다. 낡은 트레이닝복 주머니는 구멍이 난 지 오래고 지갑은 날마다 말라가며 비명을 질렀다.
 ‘진짜 때려치우고 알바라도 할까?’
 탁대는 단골 고민에 휩싸였다. 부모님에게 눈치가 보이거나 잘나가는 친구들을 만나는 날이면 어김없이 찾아드는 이 집요한 자괴감.
 첫해는 경험 삼아 봤다는 핑계가 통했다.
 2년 차에는 아깝게 떨어졌다는 핑계로 모면했다.
 하지만 작년부터는 어떤 핑계도 통하지 않았다.
 미칠 것 같은 사람은 바로 탁대였다.
 공무원 비리와 부패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탁대는 생각한다. 나라면 절대 부정부패 안 한다. 월급도 반만 줘도 좋다. 휴일 없이 부려먹어도 땡큐다. 그러니 제발 합격만 시켜주세요. 여기 열심히 일할 사람이 준비되어 있다고요.
 3년이나 거푸 고배를 마시자 가족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그들끼리 웃으면 탁대를 비웃는 것 같았고 그들끼리 심각하면 탁대 얘기를 하는 것만 같았다.
 “또 떨어졌대?”
 “원, 고시를 보나?”
 옆에만 가면 환청이 달라붙는다. 찬밥도 이런 찬밥 신세가 없다. 재수생이 슬프고 백수가 슬프다지만 그건 양반이다. 공시 4수생은 아예 인간 취급을 안 해준다.
 그럴 때면 탁대도 오기가 바짝 고개를 들었다. 불행한 건 그놈의 오기가 하루만 자고 나면 씹던 껌처럼 쫙 풀어진다는 사실이었다.
 ‘보란 듯이 붙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줄 거다.’
 라고 치를 떨지만 도서관 열람실에 가림막을 설치할 때뿐이다. 앉아서 책을 펴면 바로 졸린다. 피곤할 때는 쪽잠을 자는 게 능률에도 좋대. 탁대는 그 진리의 유혹을 결코 거부하지 않는다. 자고 나면 더 졸리다. 이런 정신으로는 공부가 안 되지. 그렇게 조금 더 자다보면 스터디 친구들이 깨운다.
 “점심 먹으러 가자.”
 으아, 벌써 점심시간··· 안 되겠다. 빨리 먹고 와서 오후에는 진도 좀 확 땡겨야지라고 결심하지만 밥 먹고 나면 이상하게 집중이 되지 않는다.
 인강도 마찬가지다. 찬바람 좀 쐬고 본격적으로 들어야지 하며 휴게실에서 쉰 후에 이어폰을 끼지만, 또 졸린다.
 생각해 보라.
 100여 석 E―running실은 고요하다 못해 솜털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린다. 거기서 동강(동영상 강의)을 들으면 강사가 바로 속성 최면제다. 안 자고는 배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비실거리는 건 아니다. 이상하게도 집에 올 때가 되면 정신이 똘망똘망해진다.
 마치 초여름 갈맷빛 산맥을 갓 넘어온 햇귀처럼 싱싱하게!

작가의 말

9급 공무원 포에버 시작합니다.

공무원 광풍의 21세기, 이 글은 여러분과 함께 호흡하면서 완성하고 싶습니다.

공무원 수험생 경험, 공부 스킬, 지겨워서 교재 콱 찢고 학원에서 일어난

소소한 에피소드까지 댓글이나 쪽지 주시면 재미난 이야기로 덧붙여 보겠습니다.

아울러 상담이나 질문도 환영합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꾸벅!!!

댓글(16)

성냥깨비    
잘 봤습니다
2014.05.27 06:46
도욱    
흥미진진.... 기대 만빵입니당!
2014.05.27 07:42
조카    
우리나라 공무원들의 현실을 하나하나 해부하나요??? 기대함 해봅니다....
2014.05.27 08:22
[크레파스]    
반성했음
2014.05.27 14:09
윈나우    
새로운 기대감 만땅!
2014.05.29 11:40
윈나우    
즐거움이 하나 더 늘었네요.
2014.05.29 11:40
키나발루    
건필
2014.06.03 07:11
musado0105    
잘 보고 갑니다. 건 필하세요^^*
2014.06.05 17:54
TimeAknife    
반성....
2014.06.15 15:48
황강맨    
나도 이런류의 9인데...준공이 나인듯...
2014.06.26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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