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재벌 말고 슈퍼리치

비통한 죽음

2020.09.29 조회 78,654 추천 780


 “사장님...”
 
 사색이 된 얼굴로 경리부장이 뛰어왔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경리부장 김경오.
 김부장의 표정만 봐도 결과가 어찌됐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여신권의 경매처분을 연장하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 다닌 김부장. 그의 얼굴에 짙은 절망이 묻어 있었다.
 
 “죄송하긴 이 친구야. 자네가 왜 죄송해. 다, 내가 못 나서지.”
 “면목 없습니다.”
 
 김부장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괜찮네. 괜찮아. 퇴근 시간도 훌쩍 지났는데, 어서 퇴근해야지.”
 “죄송합니다.. 채권단 입장이 워낙 견고해서요..”
 “어허..괜찮대도. 수빈이 전화 안 왔어? 아빠 언제 퇴근하냐고? 어서 들어가. 퇴근하고 딸이랑 놀아주는 게 자네 인생의 큰 기쁨이라면서. 내 걱정 말고 그만 들어가.”
 “예...알겠습니다..사장님.”
 
 여섯 살 딸아이 수빈이라면 목숨도 내 줄 수 있다던 김부장.
 회사를 위해 궂은일 마다 않던 강철심장 김부장.
 그는 여섯 살 딸아이 앞에선 한 없이 자상한 아빠였다.
 
 나를 보던 김부장의 눈에서 곧이라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눈치를 살피던 김부장이 조심스레 사장실을 나갔다.
 
 후우우-
 
 참으려고 했는데, 이겨내려고 했는데, 꾹 눌렀던 한숨이 흉곽을 뚫고 터져 나왔다.
 버티고 버텼는데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졌다.
 
 경원 산업 대표이사 허인범.
 책상위에 놓인 명패를 허망하게 내려 봤다.
 
 ‘이제.. 내일이면 최종 파산인건가?’
 
 목구멍이 뜨거워졌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제길..”
 
 어디서부터 잘 못 된 건가?
 
 한때는 정부로부터 500만불 수출탑 상을 받기도 했던 경원산업이 아니던가.
 비록 중소기업이지만 분명 잘 나가던 때도 있었다.
 
 [이번 공장증설로 우리 회사는 제2의 도약을 준비할 겁니다.]
 [허인범. 허인범.]
 [경원산업 만세.]
 
 제 2 창업을 선언했을 때 직원들은 환호했고, 나 역시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설비와 공장증설을 위해 유상증자를 했고, 그것으로도 부족해 대규모 차입을 실시했다.
 
 사재를 전부 털어 회사에 박아 넣었고, 그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빚도 많이 졌다.
 소규모 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제2출사표였고 몸부림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곳에서 문제가 터졌다.
 
 일본과 한국이 역사와 정치문제를 빌미로 무역전쟁을 벌였고 일본은 한국정부를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했다.
 경원상사는 블루투스 칩을 생산해 해외로 수출해 먹고 사는 중소기업.
 그런데 칩의 핵심 원료인 TPE에 대한 일본의 수출규제가 시작되면서 회사는 직격탄을 맞았다.
 
 재고는 소진됐고 공장은 멈췄다.
 유럽과 중동의 오퍼가 끊겼고 거래처들은 계약을 해지했다,
 일본의 규제가 시작되자 회사는 60일을 못 버티고 자금경색에 빠졌다.
 
 2010년 후반부터 중국이 칩 산업에 뛰어들었다. 세계시장에서 경원산업의 마진율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고 일본의 수출규제라는 쓰나미가 회사를 덮쳤다.
 
 마진율 감소는 곧바로 경영악화로 이어졌다. 영업이익이 급감했고, 직원들 월급이 밀리기 시작했다.
 
 나로서는 배수진을 치고 실시했던 유상증자와 차입경영이었다.
 그나마 가족 같은 직원들이 있었기에 이만큼이라도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이자가 연체되고 세금까지 체납되자, 결국 은행에서 경원산업의 압류 자산을 경매 처분했다.
 
 내일이면 성난 채권자들이 저 문을 통해 달려들 것이다.
 
 “일본 놈들만 아니었더라면....”
 
 일본놈들만 아니었어도 개발 중인 신제품을 통해 재기에 성공했으리라.
 
 물론 회사가 이지경이 된 것은 꼭 일본 놈들 탓만도 아니다.
 
 잘 나가던 회사에 망조가 든 또 하나 이유.
 
 대한민국 재벌.
 
 우리 같은 중소기업들에게 빨대를 꽂아 단물이 빠질 때까지 빨아 먹는 한국의 재벌들.
 납품단가를 후려치고, 노예계약에 가까운 독소조항으로 영세기업을 착취하는 몇 몇 악덕 재벌 .
 
 블루투스 칩 사업을 하기 전 우리 회사는 IT 산업의 핵심 소재인 불산을 만들어냈었다.
 일본과의 무역분쟁이 일어나기 15년 전에 우리는 불산 국산화에 성공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원천기술을 태영그룹에게 빼앗겼다. 경원산업의 불산 프로젝트 총괄자를 고액 연봉으로 꼬드겨 빼내간 것.
 
 
 고검장,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만 30명이 넘는다는 슈퍼 법무팀을 갖춘 태영그룹.
 그들에게 경원산업의 원천기술을 사실상 도둑맞았다.
 
 “사장님, 태영은 한국의 최고 권력입니다. 대통령 임기는 5년이지만 태영그룹 총수의 임기는 무한하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이쯤에서 소송을 포기하시는 게...”
 
 밤의 대통령 태영을 상대로 특허권 소송을 벌였을 때 법률 자문을 해주던 장형식 변리사와 그 직원들이 했던 말이다.
 
 “이번 싸움에서 내가 주저앉으면 한국에서 중소기업 하는 사람들, 죄다 바보 됩니다. 누군들 태영의 파워를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2, 제3의 허인범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싸울 겁니다.”
 
 그러나 세상일은 의욕과 패기만으로 해결되진 않았다.
 결국 경원산업은 패소했고, 불산 제조 원천기술은 태영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
 도둑질 하듯 빼낸 불산 원천기술을 태영은 상용화 하지 않았다.
 추가적인 연구개발비를 투입하느니, 일본에서 수입하는 게 수지에 맞다는 이유로.
 그들은 십수 년간 불산의 국내 생산을 미룬 채 원료 조달을 일본에 의존했다.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감히 한국의 최고 권력 태영에게 소송을 벌였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낙인찍혔다.
 
 어느 순간부터 점점 국내산업계에 발을 붙이기 어려워졌다.
 해외로 눈을 돌려야만 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일본과의 무역전쟁이 시작됐을 때, 악덕 재벌 태영이 우릴 향해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무역전쟁 후.
 
 정부는 화이트리스트 배제로 인해 피해받는 기업들에 대한 지원방안을 발표했다.
 업체별로 최소 30억원에서 많게는, 100억원까지 지원을 해준다는 내용.
 
 “30억원만 지원 받아도 당장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겁니다.”
 “사장님, 우리도 TPE로 직격탄을 맞았으니 지원금을 받을 수 있을 거에요.”
 “이번 위기만 잘 막아내면 신제품 TCR 3000으로 독일 시장을 뚫어 숨통이 트일 겁니다. 중국산 보다 성능이 뛰어나고 가격경쟁력까지 갖추고 있으니까 승산이 있어요.”
 
 정부 지원금을 신청하러 가던 날, 고문식 팀장과 김경오 부장을 끌어안고 울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산자부 담당 서기관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지원금 신청서류를 처리해주지 않았다.
 
 “허사장. 이거 어쩌지...서류를 좀 보정해 줘야겠어.”
 “이거, 어쩌죠? 정부 지침이 약간 변경돼서요...구비 서류가 많이 바뀌었네요..”
 “담당자가 시외 출장을 가서..죄송하지만 다음 주에 한 번 더 방문해 주실래요?”
 
 산자부 과장과 직원들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뒤늦게 알 게 된 사실이지만, 태영에 찍힌 탓에 산자부도 담당직원들도 난처했단다.
 심지어 태영 쪽에서 우리에게 지원금을 주지 말라는 역로비를 벌였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피가 거꾸로 솟았지만 물증이 없었다.
 
 맨주먹으로 500만불 수출탑 신화를 쓰며 승승장구했던 내 인생은 그렇게 무너져 내렸다. 촉망받는 중소기업 CEO로 MBA과정을 밟고, 대학에 초청 강연도 나갔었던 나는 한순간에 파산 위기의 채무자로 전락했다.
 
 대외적으로는 일본,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재벌이라는 괴물 앞에서.
 
 슬픔과 분노가 교차했다.
 
 콰앙-
 
 화가 나서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털썩-
 
 순간 책상위에 세워뒀던 액자가 쓰러졌다.
 
 수출탑 500만불 표창장을 받고 직원들과 찍었던 기념사진.
 사진 속 직원들은 희망에 부풀어 있었고, 모두들 밝게 웃고 있었다.
 그들에게 스톡옵션을 약속하며 장밋빛 미래를 꿈꿨었다.
 
 “사장님. 우리 코스닥 등록 되면 부자 되는 거죠?”
 “당연하지. 지금은 500만불이지만, 5년 내로 5,000만불 수출탑을 달성할거야. 내가 늘 말했죠? 내 목표는 사장이 아니라고. 저는 계열사를 거느린 회장이 될 겁니다. 그리고 여기 계신 여러분들, 여러분 모두를 사장으로 만들어 줄 겁니다.”
 “우와, 그럼 저도 사장 되는 겁니까?”
 
 지금도 권승철 과장의 그때 그 들떠 있던 표정이 눈에 선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그들에게 공수표를 날린 꼴.
 
 보름 전,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던 저 직원들을 내 손으로 50%나 명퇴시켰다. 그나마 그들에게 위로금과 퇴직금을 지급했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
 
 액자를 책상위에 반듯하게 세우려 할 때 가슴 한 중앙에서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크흡.”
 
 드르륵-
 
 재빨리 책상 서랍을 열었다.
 
 자금경색이 시작되고 채권자들의 독촉에 시달리면서 스트레스로 인한 흉통이 생겼다.
 
 프라프라놀.
 
 급성 협심증 치료제인 프라프라놀 약통을 들어 올렸다.
 약통 뚜껑을 연 순간... 나는 헛바람을 삼켜야 했다.
 
 “제길..”
 
 회사 일과 채권단을 설득하러 다니느라 병원에 약 타러 가는 것을 깜빡했던 것.
 그 순간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이 가슴 한 켠에서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온 몸이 마비된 듯 뻣뻣해지면서 나는 앞섶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전화기를 잡으려고 했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게 죽는 건가... 이렇게.....뜻 한 번 펼쳐보지 못하고........ 억울하다.....일본 놈들..그리고 재벌 놈들의 반칙만 아녔어도......’
 
 눈앞이 캄캄해졌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태어난다면... 감히 재벌 따위는 쳐다볼 수도 없는, 일본, 중국이 넘볼 수 없는 그런 부자가 되고 싶다.... 재벌 같은 시시한 거 말고 진짜..부자. 슈퍼리치... 모두의 존경을 받고 감히 내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정도의 슈퍼 부자가 되고 싶다......’
 
 나는 그렇게 죽었고, 이내 다시 태어났다.
 
 
  ==========================
 
  본 작품은 100% 픽션으로 글 속 등장하는 인물과 배경, 사건 등은 역사적 사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댓글(92)

지놓    
재벌 같은 시시한 거 말고...! 기대됩니다!
2020.09.29 16:31
ni****    
왠지 타도삼성 느낌이 드네요...
2020.09.30 01:59
배라모스    
감사합니다^^
2020.09.30 22:22
풍뢰전사    
건필하세요
2020.09.30 18:44
배라모스    
바람과 벼락의 전사님,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0.09.30 22:23
n3**********    
잘 봤습니다
2020.09.30 22:54
배라모스    
감사합니다~즐거운 추석명절 보내십시오
2020.10.02 19:17
동렬이도가    
기대됩니다.
2020.10.01 15:44
마카포    
선작과 추천 드립니다. 어떤 환생을 시작할지 기대되네요.:) 건필하세요!
2020.10.02 19:58
배라모스    
감사합니다^^
2020.10.02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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