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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령검주 1화

2014.07.03 조회 4,922 추천 77


 만년설(萬年雪)이 산허리까지 드리운 백색(白色)의 산.
 도저히 생명체가 살 수 없을 것만 같은 그곳에서 스승과 제자는 이별을 앞둔 채, 같은 곳을 바라보며 섰다.
 제자를 둔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젊은 모습을 한 사부의 두터운 입술이 벌어지며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들을 용서했느냐?”
 지명은 사부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사부가 다시 물었다.
 “용서하지 않고 돌아가려는 것은 복수를 하고자 함이더냐?”
 지명은 여전히 입을 다문 채였다.
 남쪽 하늘을 바라보던 사부가 지명을 돌아보며 한없이 따뜻한 미소를 머금는다.
 “왜 대답이 없는 게지?”
 지명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제자는 아직까지 제 마음을 잘 모르겠습니다. 해서 물음에 답을 못하겠습니다.”
 말을 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입김이 두 사람의 얼굴을 쓸고 지나간다.
 사부는 어둡게 가라앉은 제자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말했다.
 “세상에는 그 어떤 경우가 닥쳐도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라는 게 있느니라. 천륜(天倫)이 그것이고 또 하나는 인륜(人倫)이라는 것이지. 하찮은 인간 따위가 어찌 하늘의 법도라는 천륜을 논할 수 있겠느냐마는, 인륜은 다르지 않겠느냐. 이 사부는 네가 그것을 저버리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지명의 가라앉은 눈빛이 서늘하게 변해 간다.
 그러다 감정을 억누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인륜을 저버린 것은 그들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아버지가 아들을 쫓아내었습니다. 그것이 인륜을 저버린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지명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간신히 억눌러두었던 증오심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인데.
 휘이잉!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이 두 사제의 몸을 쓸고 지나간다.
 한없이 따뜻한 눈으로 제자를 바라보던 사부는 다시 시선을 들어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지명은 그런 사부의 옆모습을 응시하며 잠시 감정을 다스리지 못했던 스스로를 책망했다.
 “명아.”
 “예. 사부님.”
 “그들을 원망하면 안 되느니라. 하물며 너를 낳아준 부모가 아니냐. 이 사부는 네가 그러지 않을 거라 믿는다.”
 “…….”
 “믿어도 되겠느냐?”
 지명은 망설이다 대답했다.
 “약조할 순 없으나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제자의 솔직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을까?
 사부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간다.
 반대로 지명의 얼굴은 그늘이 드리우고 있었다.
 이제 곧 사부와 헤어져야 한다. 이것이 끝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나저나 이놈들은 대체 어디를 갔기에 지금껏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겐지. 쯧쯧쯧.”
 “제자가 떠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며 북쪽 산맥으로 사냥을 가셨습니다.”
 “허허허, 그랬느냐? 하긴 너를 자식처럼 돌보았으니 그럴 법도 하겠구나.”
 “예.”
 지명은 사부를 더 이상 쳐다보지 못했다.
 보고 있자니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아서였다.
 다시는 울지 않겠노라고 스스로에게 맹세했던 그것이 깨질까 두렵기도 했다.
 끼아아아!
 거대한 독수리가 푸르디푸른 창공을 선회하며 구슬프게 울고 있다.
 이제 헤어질 때라고 여겼음일까?
 먼 곳을 바라보던 사부가 지명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이제 그만 떠날 때가 되었구나.”
 “다시 뵈올 그날까지 부디 강녕하십시오. 사부님.”
 지명은 절을 하기 시작했다.
 아홉 번의 절이 끝났을 때, 사부는 사라지고 없었고 창공을 선회하며 구슬프게 울어대던 독수리도 보이지 않았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사부가 서 있던 자리에 깊숙이 박혀 있는 한 자루 검뿐이었다.
 파르르…….
 눈동자에 파랑(波浪)이 일었다.
 사부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검.
 그것을 잡아 가는 지명의 손은 눈동자만큼이나 떨리고 있었다.
 
 유아독존(唯我獨尊).
 
 검의 손잡이에 쓰여 있는 글귀가 갑자기 흐려졌다.
 지명은 기어코 눈물을 쏟아냈다.
 
 * * *
 
 휘이잉!
 그쳤던 바람이 다시 거세게 불어 댄다.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는 거목들이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둘렀던 눈을 쏟아낸다.
 푸스스!
 지명은 눈보라를 헤치며 걸었다.
 그가 지나온 눈 위에는 흔적조차 없었고, 거세게 들이치는 바람은 그의 육신을 건들지 못하고 굽이쳐 저 먼 곳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화령(火靈)의 기운이 네놈의 육신을 한 줌 재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난데없는 목소리와 함께 전방의 설원에서 거대한 불꽃이 일었다.
 화르륵!
 더불어 주변의 눈들이 녹아들며 부글부글 끓어댔다. 불꽃은 이내 거대한 호랑이로 변했다.
 크아앙!
 시뻘건 화염을 온몸에 두른 거대한 호랑이가 지명을 향해 송곳니를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호랑이의 날카로운 발톱이 지명의 가슴에 닿을 즈음, 사방에서 얼음 기둥이 치솟아 오르더니 지명의 몸을 에워쌌다.
 짜자자작!
 화르륵!
 얼음 기둥에 부딪힌 호랑이가 수천, 수만 조각으로 찢겨 날아가더니 이내 연기로 화해 소멸되었다.
 지명은 수증기에 둘러싸인 채, 주변을 살펴보았다.
 또다시 한줄기 외침이 울렸다.
 “어디, 이것도 한번 막아보아라! 이놈!”
 짜자작!
 전방에서 눈보라가 일더니 얼음 기둥이 대지를 뚫고 치솟아 올랐다.
 지명을 불꽃으로부터 지켜주었던 것보다 두 배는 더 큰 얼음 기둥들이 순식간에 검의 형태로 바뀌어 허공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쐐애액!
 조금 전, 거대한 호랑이로 변했던 불꽃이 이번에는 지명의 몸을 감싸며 솟아올랐다. 그러더니 거대한 화벽(火壁)을 형성했다.
 파파팟!
 얼음 검들은 화벽의 뜨거움을 이기지 못하고 수증기로 화해 사라졌다.
 지명은 또다시 뿌연 수증기에 휩싸였다.
 “검을 뽑지 못할까!”
 어디선가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
 지명은 지금껏 사부의 검을 뽑지 않았다.
 “흥! 네놈이 과연 언제까지 검을 뽑지 않을지, 두고 보겠다!”
 콰우우우!
 난데없이 폭풍이 일었다.
 일순간 거대한 회오리가 일더니 주변에 있던 모든 눈을 빨아들였다.
 콱!
 콱!
 지명은 두 다리를 얼어붙은 땅속에 박았다.
 그리고 두 손을 들어 맹렬하게 밀려드는 회오리를 향해 힘껏 뻗었다.
 쩌어엉!
 지명이 발출한 힘과 회오리가 정면으로 충돌하자 주변 공간이 일그러지는 현상이 일어났다.
 뒤이어 모든 것을 쓸어버릴 듯 광포하게 몰아치던 폭풍이 미풍으로 변하더니 지명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고 지나갔다.
 살랑!
 지명은 자신의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땅속에 박았던 두 다리를 빼내었다.
 그리고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눈과 눈에 덮인 나무들뿐이었다.
 지명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고는 한 걸음 내디뎠을 때였다.
 어디선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아름다운 여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호호호! 천상천하 제일미녀인 나를 견뎌내지는 못할 것이다!”
 팍!
 저만치 앞에 눈꽃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다.
 사내라면 보는 순간 심장이 터질 것을 걱정해야 할 정도의 아름다운 여인이 앞에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명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여인은 지명을 향해 매혹적인 미소를 머금으며 살랑살랑 다가섰다.
 “천하에 나의 섭혼술을 견뎌낸 사내는 없었지. 그건 너도 마찬가지일 거야. 호호호!”
 섭혼술(攝魂術).
 말 그대로 사내의 혼을 빼앗을 만큼, 여인은 아름다우면서도 고혹적인 자태를 뽐냈다.
 그녀가 살랑살랑 걸어오니 주변의 눈들이 빛을 잃어 갔다.
 그럼에도 지명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 검을 뽑아 네 허벅지를 찔러도 참지 못할걸?”
 얼음을 깎아 만든 듯, 곱고 긴 손가락을 살짝 흔들자 농염한 육신을 가렸던 옷자락이 어깨까지 흘러내렸다.
 그때였다.
 “에헤이! 그건 아니지!”
 “저거 정신병자 아이가?”
 “제자 앞에서 뭔 지랄이여!”
 스스슥!
 요란한 외침과 함께 유령처럼 나타나는 사람들. 하나같이 특이하게 생긴 그들은 여인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여인은 어깨까지 흘러내렸던 옷을 끌어올리며 붉은 입술을 놀렸다.
 “쳇! 저놈이 다 막아내니까 나도 모르게 최강의 섭혼술을 쓰려 했지. 그렇다고 정신병자는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지명은 투덜대며 걸어오는 여인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하마터면 심장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지금 장난해? 눈 하나 깜박이지 않던데 심장이 멎기는 개뿔.”
 말은 매섭지만, 지명을 바라보는 눈빛은 한없이 따뜻했다.
 여인은 흐트러진 지명의 머릿결을 매만지며 자신이 걸쳤던 하얀 털조끼를 벗어 지명에게 건넸다.
 “입고 가. 곧 있으면 세상이 다 얼어붙을 거야.”
 “사부님들 덕분에 추위 따위는 능히 견딜 수 있게 된 것을 잊으셨습니까?”
 “자꾸 그러면 옷 벗는다?”
 “……주십시오.”
 지명은 서둘러 조끼를 어깨에 걸쳤다.
 다른 세 명이 다가왔다.
 보고 있자니 마치 고대 촉한의 영웅들인 유비, 관우, 장비가 현신을 한 것 같았다.
 지명은 그들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사냥을 가신다고 하여 제자, 섭섭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널 사냥하러 왔지 않느냐?”
 지명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들은 지명의 또 다른 사부들이었다.
 단아함이 학사의 그것을 닮은 첫째 사부 유진걸(柳進杰).
 수염을 배꼽까지 기른 둘째 사부 관패(關覇).
 호랑이의 머리를 뚝 떼어다가 얹은 듯한 셋째 사부 장우(張祐).
 마지막으로 여신이 강림을 한 듯, 천하절색의 넷째 사부 설운지(雪雲芝)가 그들의 이름이다.
 그리고 산 위에서 지명을 배웅했던 중년인은 감히 서열을 정할 수 없는 대사부였다.
 유진걸이 지명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빙그레 웃는다.
 “수련을 게을리 하는 것 같더니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구나. 그 정도면 어디가도 칼 맞고 죽지는 않을 듯하니 이제야 비로소 내 마음이 놓이는구나.”
 “사부님들께서 돌봐주신 덕분입니다.”
 관패는 눈을 부라렸다.
 “갈구는 놈이 있으면 연락해라. 가서 대갈통을 부숴줄 테니까. 알았느냐?”
 “그리 하겠습니다.”
 장우는 히죽 웃는다.
 “같이 가주랴?”
 “가긴 어딜 가요!”
 휙!
 장우를 밀어낸 설운지가 지명의 옷을 만져주며 눈시울을 적신다.
 “끼니 거르지 말고, 술도 조금만 마시고, 꼬리 치는 계집애들 조심하고. 알았지?”
 “예.”
 지명은 울컥하는 속을 간신히 참았다.
 유진걸이 나서며 말했다.
 “놈. 사내는 우는 법이 아니다.”
 그러는 유진걸의 눈시울이 벌겋다.
 “해 떨어지기 전에 얼른 내려가야지.”
 지명은 넷을 향해 아홉 번의 절을 하고 돌아섰다.
 넷은 지명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설운지는 기어코 눈물을 쏟았다.
 장우가 코를 실룩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그나저나 이놈은 지 사형이 떠나는데 어딜 간 거야?”
 “아침에 보니까 질질 짜면서 산 위로 올라가더라.”
 “짜기는. 나중에 곧 볼 텐데.”
 “얼른 가요. 우리보다 대형이 더 섭섭하실 텐데, 술이라도 한잔 따라드려야죠.”
 휘이잉!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바람에 날린 눈가루가 세상을 뒤덮어 갈 때, 넷은 비로소 모습을 감추었다.
 
 * * *
 
 이지명(李知明)은 두 눈을 한껏 벌려도 한눈에 담지 못할 만큼 거대한 성(城)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칼 밥을 먹으며 살아가는 무사들의 세상인 무림(武林)에서 하늘 밖의 또 다른 하늘(天外天)로 군림해오고 있는 그곳의 하늘은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지명의 두 눈도 하늘을 닮아 잿빛을 띠었다.
 대리국(大理國)의 특산물인 대리석을 세워 그 안에다 글귀를 새겨놓은 거대한 현판이 지명의 동공에 선명하게 맺혔다.
 백야성(白夜城).
 지명은 불멸의 신화를 간직한 그곳의 정문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2화에서 계속)

댓글(5)

이리애    
천륜과 인륜을 잘못 이해하신 듯 하네요.
2014.07.12 02:16
핫스팟    
이거 다음이 백야쟁천인가요?? 백야쟁천에 나오는 월령검이 이것아닌가 음
2014.10.09 15:23
디콘북    
핫스팟님// 안녕하세요, 디콘북입니다. 월령검주는 백야쟁천 2부입니다. 이용에 참조하시면 될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2014.10.30 11:27
프로    
시작이 좋은데용~ 너무 가볍지 않고 너무 신파극처럼 무겁지 않은 정도의 무협이 될 듯 ^^
2015.04.03 14:34
pk******    
잘 읽었습니다
2022.07.22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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