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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암의 귀환자 1권 01

2014.07.18 조회 2,461 추천 22


 흑암의 귀환자
 제1권 시간을 거슬러
 
 
 
 프롤로그
 
 
 
 엘레힘 신성력 1305년 7월 11일.
 
 어둠이 짙게 깔린 지하 던전 최하층.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이어지던 혈전이 기어이 끝나는 순간, 던전 안으로 한 줄기 빛이 천장을 뚫고 내려왔다.
 쉬지 않고 이어지던 전투 속에서 네 명의 남녀는 녹초가 되어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손으로 암흑의 화신 제이블란트를 쓰러뜨렸음에도 조금도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제이블란트는 소멸되어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 부활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봉인이라는 방법을 써야만 한다.
 문제는 그 봉인을 위해서 필요한 요소 두 가지 중 하나에 누가 자원하느냐의 일이 남았다는 것이다. 20년이란 긴 세월, 아니면 그 이상이 될지 모르는 시간을 검과 함께 봉인되어야 하는 운명 앞에서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휴우…….”
 그들 중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청년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내가 할게.”
 “카일!”
 “괜찮나요?”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까?”
 그를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카일을 바라봤다.
 “나야 부모 없는 고아이고 고향에 두고 온 정혼자도 없으며 딱히 높은 직책에 있는 것도 아니니 우리 중에 가장 적합하잖아?”
 그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오른손을 뒤로 내밀었다.
 “페이서, 성검(聖劍) 레디언스(Radiance)를 나에게.”
 페이서라 불린 청년은 쥐고 있던 성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막상 카일에게 마지막 임무를 맡기려고 하니 강한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괴로워하지 마. 이건 우리 중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야. 그리고 내가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것에 불과해.”
 카일은 뒤로 내민 손을 까닥거리며 빨리 검을 건네라고 독촉했다. 결국 페이서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성검 레디언스를 카일에게 건넸다.
 카일은 성검을 검끝이 아래로 향하도록 양손으로 쥐었다.
 이대로 제이블란트가 사라진 자리에 검을 꽂아 넣으면 봉인이 시작되고, 봉인이 안정화될 때까지 성검을 쥔 자는 최소 20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 동안 검과 함께 석화되어 시간을 보내야 한다. 아니, 어쩌면 성검과 함께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너희들에게 부탁 한 가지만 할게.”
 카일은 검을 아래로 내려찍던 도중 멈추고서 두 눈을 감았다.
 “내가 있던 고아원, 거기에 넉넉하게 기부나 좀 해줘라.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고작 그것만?”
 “나 없으면 돈 떨어져서 당장에라도 폐쇄될지도 몰라.”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돌아올 20년 뒤까지 지원해 주겠습니다.”
 제럴드의 대답에 페이서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하지만 남은 한 명은 동의 대신 카일의 등을 향해 손을 뻗었다.
 “카일, 차라리 제가…….”
 “기껏 결심했는데 다시 마음 흔들리게 하지 말라고, 카트리나.”
 카일은 여전히 등을 보인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전쟁이 끝나면 나 같은 용병 출신은 일거리가 없어서 굶어 죽기 십상이야. 아, 그건 너무 과장됐나? 아무튼 20년 정도 지나면 미리 자리 잡은 너희에게 달라붙어 편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겠지. 안 그래?”
 결국 카트리나는 내밀었던 손을 거두며 물러섰다.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성호를 그으며 슬픔을 억누르는 일밖에 없었다.
 “페이서, 제럴드, 그리고 카트리나.”
 카일은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너희와 함께한 5년, 그리 나쁘지 않았어.”
 일개 용병으로 끝날 수 있었던 그의 인생은 이 자리에 함께한 세 명을 만나면서 극적으로 변했다. 생사가 끊임없이 오고 가는 전쟁터 속에서 많은 이가 스쳐 지나갔지만, 죽은 이들을 제외하면 진정 전우라고 말할 수 있는 이는 지금 이 자리에 함께한 세 명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카일은 그 세 명의 전우에게 그동안 신세진 걸 갚으려는 마음이다.
 “그러면 20년 후에 보자.”
 카일이 쥐고 있던 성검이 지면에 박히자 검에 봉인되어 있던 마법진이 지면에 새겨지며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어둠으로 점철된 카일의 시야를 빛이 감싸면서 그의 의식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제1장 20년이란 시간
 
 
 
 세상을 공포에 빠뜨렸던 암흑의 화신 ‘제이블란트’의 봉인 이후, 사람들에게 평화가 찾아왔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으며 기적을 창출해 낸 세 명의 영웅 페이서와 제럴드, 그리고 카트리나는 많은 이의 환호성 속에서 각자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20년에 걸친 전란으로 황폐해졌던 대륙은 조금씩 예전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어둠으로 뒤덮였던 대지 위에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졌고, 전쟁의 먼지가 쌓였던 풀잎 위엔 맑은 이슬이 맺혔다.
 모두 쓰라린 아픔을 잊고 다시는 그러한 비극이 오지 않으리라 믿었다.
 
 1
 
 20년 전 세상의 운명을 결정짓는 혈전이 벌어졌던 지하 던전 안은 평소와 다름없이 고요했다.
 지상으로부터 일직선으로 뚫린 구멍을 통해 한 줄기 빛이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빛났다. 그 빛 한가운데에 성검 레디언스를 바닥에 꽃은 채로 석화된 카일이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석화된 그의 어깨와 머리에 두껍게 쌓여 있는 먼지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러갔는지 증명하고 있었다.
 우드득.
 순간 석화된 그의 얼굴에 금이 생기더니 빠른 속도로 몸 전체로 퍼져갔다. 생겨난 틈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오자 천장에 붙어 있던 수십여 마리의 박쥐들이 놀라 빛줄기를 타고 위로 날아올랐다.
 돌 부스러기가 바닥에 우수수 쌓이더니 카일의 몸이 강렬한 빛을 내뿜었다.
 잠시 후 빛이 사라지자 오랜 시간 동안 멈춰 있던 카일의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그는 고개를 천천히 들더니 머리 위에 쏟아지는 햇살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20년 동안 움켜쥐고 있던 성검 레디언스에서 손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보자 온몸이 돌로 변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봤던 광경과 비슷했다.
 “설마 나 안 죽은 건가?”
 카일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뱉기를 반복했다.
 “캑! 콜록콜록!”
 연달아 숨을 쉬던 도중 바닥에 피어오른 먼지를 한가득 들이켠 카일은 기침을 반복했다.
 그렇게 한참을 난리법석을 피운 후에야 카일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실감했다.
 “어, 설마…….”
 그는 마법진 한가운데에 박혀 있는 성검 레디언스를 응시했다. 검자루를 양손으로 쥐고 잡아당겼지만 뽑히기는커녕 미동조차 없었다. 자세를 낮춰 망가진 곳이 없는지 확인했지만 성검에도 마법진에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봉인은 여전히 건재하군. 다행이야.”
 영원히 잠들어 버릴 수도 있는 운명을 각오하면서까지 이루어낸 봉인이 깨지지 않은 걸 확인하고 카일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보자 석화되기 전 펼쳤던 지겨운 혈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두 눈을 감자 흐릿하게 떠오르던 영상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몬스터와 마족을 무수히 베어 넘겼고, 붉은 피에 흠뻑 젖을 정도로 전투가 계속되었다. 마족들의 비명 소리와 몬스터의 괴이한 소리가 귓가에 쉴 새 없이 울러 퍼졌고,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지하 던전을 한 층 한 층 내려갔다.
 그리고…….
 “나는… 녀석들과 함께 제이블란트를 쓰러뜨리고 다시 부활하지 못하도록 마법진 안에 성검을 찔러 넣어 봉인했지. 그리고 난 그대로 석화가 진행되어서…….”
 그는 오른손을 얼굴 가까이 가져갔다.
 군데군데 찢어진 장갑 사이로 딱딱하게 굳은 살점이 드러났다. 왼손으로 살점을 쿡쿡 눌러보자 거친 감촉과 함께 돌이라면 있을 리 없는 체온이 전해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정말 20년이 지나갔다고 생각하기엔 실감이 안 나. 그 이상 흘렀을지도 모르고. 직접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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