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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2014.08.15 조회 33,691 추천 520


 콰당탕! 문이 박살나면서 한 남자가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입은 장포부터 머리카락이 피처럼 붉었지만, 그의 눈은 끓는 적의와 살의로 피보다 더 붉게 보였다. 남자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방 안을 둘러보았고, 그럴 때마다 그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방 안은 시체가 가득했다. 팔이 잘린 시체, 다리가 잘린 시체.. 허리가 잘린 시체. 끔찍한 손속이었지만 그것에 개의치는 않는다. 지극히 단순하게 남자는 분노했다.
 
 "쓸모없는 새끼들 같으니!"
 
 남자는 쿵쾅거리는 걸음으로 다가가, 가까운 곳의 시체를 발로 걷어찼다. 콰직! 재수없게 얻어맞은 두개골이 박살나면서 뇌수가 튀었지만, 이미 죽은 시체인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남자는 뺨에 묻은 회백색 뇌수를 손등으로 벅벅 닦으면서 침을 뱉었다.
 
 “이딴 것들을 호위라고..!”
 
 이를 갈면서 분기를 비쳤지만, 그는 곧 마음을 추슬렀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침입자가 어떤 호로새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털어먹을 집을 잘못 찾았다. 호위를 이렇게 도륙 낸 것을 보니 제법 실력은 출중한 모양이다만 그것도 여기까지란 말이다. 그가 누구인가? 적염수라 이도청이다. 이곳 이가장의 장주이자, 무림 10대 고수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절정고수란 말이다.
 
 “희아야!”
 
 이도청은 크게 포효하면서 쿵쾅이는 걸음으로 벽을 향해 다가가더니 주먹을 휘둘렀다. 콰앙! 휘두른 주먹에 두꺼운 벽이 박살나며 무너졌다. 여식인 이나희에게 붙인 것은 그가 손수 무공을 가르친 호위였고, 제법 정도 붙였지만 하나 뿐인 금지옥엽에게 비할 바는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맡은 바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호위해야 할 대상을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다. 만약에 살아남은 이가 있었더라면, 그들은 이도청의 손에 죽었을 것이다.
 
 가로막은 벽을 무식하게 부수면서 이도청은 나희의 방으로 전진했다. 다가갈수록 시체가 점점 많아졌다. 호위부터 시작해서 시녀, 시종들.. 그것을 볼 때마다 이도청은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지만 정신은 오히려 차갑게 가라앉았다. 피비린내가 짙었지만, 고인 피는 아직 뜨거웠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임을, 그는 오랜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문이 나타났다. 이도청은 내력을 끌어 올리면서 혹시 모를 흉수의 습격을 준비했다. 문 앞에는 어깨부터 허리까지 양단된 시체가 주저앉아있었다. 그 얼굴은 이도청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것이었다. 이가장의 대제자. 얼마 뒤이면 이나희와 혼사를 치루기로 예정된, 이가장의 예비 후계자이기도 하다. 동년배 중에서 따를 자가 없다 평해질 정도로 높은 무공을 갖고 있었음에도, 저렇게 죽었는가. 이도청은 부서질 정도로 세게 이를 갈면서 문을 열어 젖혔다.
 
 그리고 보이는 광경에 그는 굳을 수밖에 없었다.
 
 “성난 외침이 요란해서 집중도 되지 않았습니다.”
 
 침상 위에 걸터앉은 남자는 유들거리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지만, 침대에서 일어서지는 않았다. 이도청은 무어라 말을 잇지 못하고 부릅 뜬 눈으로 그를 뚫어져라 보다가, 퍼뜩 정신이 들어 침대로 시선을 옮겼다.
 
 이도청의 금지옥엽. 이도청이 애지중지하면서 키운, 무림 삼화 중 하나. 적설화 이나희. 그녀는 붉은 머리카락을 곱게 늘어트린 체 침상의 벽에 등을 기대어 앉아 있었다. 아무 것도 입지 않은 나신은 붉은 꽃이 아른거리며 피어져 있었고, 멍하니 뜬 눈에는 초점이 보이지 않았다. 작게 벌린 입술은 부어오르고 찢겨져 피가 맺혀 있었으며, 봉긋 솟은 하얀 가슴은 우악스러운 손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이, 이이이.. 이..”
 
 이도청은 말을 잇지 못했다. 괴팍한 성격이지만, 딸의 앞에서는 한없이 인자하고 자애로운 아버지였던 그다. 딸이 원하는 것은 모든지 들어주었고, 딸이 부탁한다면 죽고 못사는 술조차 입에 대지 않았다. 십 년 전에 아내를 떠나보내고 나서 품은 사랑을 모조리 쏟아 키운 딸이다. 그런 딸이, 딸이..
 
 “아진.. 총관..!”
 
 범해졌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이가장의 총관인 아진에게. 그렇다. 그가 바로 흉수였다. 이가장의 식솔을 베어죽이고, 호위무사를 죽이고, 이나희와 혼인이 약속된 대제자를 베고서, 적설화를 취한 흉수. 이도청은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진은 이도청이 이곳에 자리를 잡을 때부터 그의 곁을 지키던 심복이었다. 나희가 아저씨라고 부르면서 따른, 가족과도 같은 존재였다. 비록 피가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이도청은 그를 형제라 여겨 왔었다. 머리가 좋고 셈이 밝기는 했지만, 아진은 무공이 그리 뛰어나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총관의 자리에 올린 것은 그에 대한 이도청의 정이었고 믿음이었다.
 
 그리고 아진은 그에 충실하게, 총관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 한 번도 이도청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그가.
 
 “대체.. 왜..!”
 
 흉수다. 단 칼에 베어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아니, 단 칼에 베어 죽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우선 팔을 자르고 그 뒤에 다리를 자른다. 최대한 고통을 주면서 최대한 늦게 죽여 미치게 하는 것이 옳다. 변명은 그때 들어도 충분하다. 분명, 그런 생각으로 들어 왔을 텐데. 끌어올려 들끓는 내력은 일수에 저 흉수를 나뒹굴게 할 수 있을 텐데.
 
 그런데도 이도청은 그렇게 물어버렸다. 지독한 배신감 때문이었다. 그 질문에 아진은 잠시 이도청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미소 지었다.
 
 “슬슬 끝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대체 무엇을!”
 
 “당신이 들어봤자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아, 그나저나.. 제법 즐거웠습니다. 과연 적설화, 얼굴뿐만이 아니라 몸조차도 아름답더군요. 당신이 조금만 느긋이 와주었어도 여유롭게 즐길 수 있었을 텐데..”
 
 낮게 웃으면서 아진은 손을 뻗어 이나희의 몸을 더듬었다. 새하얀 허벅지에 아진의 손이 올라가고, 이나희의 하얀 살결을 더듬었다. 그럴 때마다 이나희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지만 그녀는 어떤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공허한 눈은 아무 것도 보지 않았다.
 
 “뭐 어쩔 수 없군요.”
 
 그 말을 뱉은 순간이었다. 아진의 손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파앗! 순식간에 뻗어진 손이 이나희의 가슴을 꿰뚫었다. 피가 튀어 올랐지만 이나희는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 다만, 무너졌을 뿐이다. 구멍 난 가슴에서는 울컥이는 붉은 피가 치솟았다. 적설화. 그 모습은 이나희에게 붙었던 무명에 너무나 잘 어울렸다. 새하얀 나신으로 피를 쏟으며 죽어가는 이나희는, 분명 하얀 눈 밭에 핀 새빨간 꽃처럼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모습은 아비인 이도청에게 있어서는 지옥처럼 끔찍하게 여겨졌다. 딸이 죽었다. 순결한 몸을 더럽히고, 믿었던 이에게 배신당하면서.. 그렇게 죽어버렸다.
 
 곧 있으면 결혼을 앞둔 딸이었다. 사랑하는 남편과 살 생각으로 들떠 언제나 배시시 웃고 다니던 아이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하나 뿐인 딸이었다. 그런 딸아이가..!
 
 이도청의 머리가 돌아버렸다.
 
 “개새끼야!”
 
 고함으로 욕설을 뱉으면서 이도청이 달려들었다. 그의 양손에 붉은 내력이 맺혀 불꽃처럼 일렁거렸다. 이도청을 무림 10대 고수로 올려놓은 그의 독문무공, 적염수라공이었다. 아진은 성난 곰처럼 달려드는 이도청의 모습을 보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이 가늘어지는가 싶더니, 아진의 양팔이 움직였다. 널찍한 소매가 흔들거리면서 가느다란 팔뚝이 드러났다. 근육으로 우락부락한 이도청의 팔에 비하자면 나뭇가지처럼 약해 보였다.
 
 쩌엉! 이도청이 뻗은 일장과 아진의 휘두른 손이 부딪혔다. 내공과 내공이 부딪히면서 방안이 흔들리고 침대가 삐걱거렸다. ㅡ물러 선 것은 이도청이었다! 이도청은 경악한 얼굴로 욱씬거리는 자신의 손을 내려 보았다. 십성 공력을 모조리 쏟아 뻗은 일장이었는데, 오히려 자신이 밀린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무림 십대 고수인 적염수라다.
 
 “..으음!”
 
 하지만 경악에 빠지는 대신 이도청은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딸의 죽음, 믿었던 총관의 배신. 그 모든 것이 그를 미치게 만드는 것이었지만, 그는 무림인이다. 대결에 있어서 흥분은 독이 되면 되었지 결코 득이 되지는 못한다. 그 정도 사리분별이 불가능하였다면 적염수라공을 대성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무림 십대 고수에 이름을 올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 냉기.. 소수마공이구나!”
 
 적염수라공은 극양의 무공이다. 일격에 상대의 내장을 불태우고 몸뚱이마저 재로 만드는 절정 무공. 그런 극양의 기운과 부딪혔음에도 아진의 손은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게다가 방금 전 격돌했을 때, 이도청은 손바닥에 닿는 차가움을 분명히 느꼈다. 저 눈처럼 하얀 손.. 틀림없다. 실전되었다 알려진 구유냉마의 무공, 소수마공이다.
 
 “너.. 구유냉마의 진전을 이었던 것이냐!”
 
 “본 적도 없는 놈입니다.”
 
 이도청의 일갈에 아진은 담담히 대답했다. 그러면서 그는 천천히 몸을 낮추었다. 굽힌 무릅이, 순식간에 땅을 박찼다. 한 번 땅을 박찬 순간 아진의 몸이 수십개로 분영하고, 사방으로 뻗어진 아진의 몸이 이도청을 덮쳤다.
 
 “처,천마환영보!”
 
 이도청은 기겁하면서 외쳤다. 걸음 한 번으로 환영을 만들면서, 그것을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며 눈을 현혹하는 것은 천마신교의 교주에게만 이어지는 천마신공, 그 중 보법인 천마환영보 뿐이다. 어찌 천마신교 교주의 무공이 아진에게 이어져 있단 말인가? 이도청의 안색이 굳어졌다. 천마신교의 무공을 아진이 사용한다는 것, 그것은 결코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었다. 천마신교는 정파 무림의 숙적이며 그곳의 소속원은 척살의 대상이다. 어쩌면 아진은 처음부터 배신을 생각하고 이도청의 곁에 머물렀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천마신교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천마신교의 마공이 두렵다 하지만, 나의 적염수라공도 만만한 것은 아니다!”
 
 이도청은 붉은 머리를 흔들며 크게 포효했다. 적염수라공의 붉은 내력이 폭풍처럼 몰아치면서, 그를 덮치던 아진의 환영을 부수었다. 동시에 이도청은 양 손을 크게 휘둘렀다. 붉은 강기에 감싸인 손이 길게 미끄러지면서 아진에게 날아왔다. 이도청의 머리 위로 떨어지던 아진은 코웃음을 치면서 허리를 비틀었다. 허리를 비틈과 동시에 다리를 휘젓는다. 파앙!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나면서 아진이 떨어지는 궤적이 뒤바뀌었다.
 
 ‘운룡대팔식!’
 
 그 모습에 이도청의 경악이 더욱 커졌다. 하지만 당장 경악에 휘둘려서는 안된다. 이도청은 침착하면서 아적이 움직이는 궤적을 따라서 손을 뻗어 냈다. 퍼퍼펑! 그의 손바닥에서 쏘아지는 적염수라공의 붉은 강기가 포탄처럼 아진을 덮치려 들었다.
 
 “폭염수라공은 분명 절세 무공이지만..”
 
 아진은 비웃음을 흘리면서 허공에서 몸을 빙글 뒤집었다. 휘두르는 양 팔에 적염수라공의 강기가 허무하게 부서졌다. 아진은 곤륜의 절기, 운룡대팔식으로 허공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다리를 크게 휘저었다. 높이 들어 올린 다리가 이도청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아니, 아니었다. 머리에 닿으려는 다리를 쳐내려 뻗은 주먹이 허무하게 허공을 꿰뚫는다. 부순 것은 희미한 잔영- 아니, 꽃잎! 퍼버벅! 바람에 나부끼는 꽃잎이 험악한 소리를 내면서 이도청의 가슴을 걷어 찼다.
 
 ‘화산의.. 매화난영각!’
 
 이도청은 울컥이는 피를 삼키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비틀거리면서 뒤로 물러선 그는 양 팔을 크게 휘둘렀다. 콰르릉! 폭풍처럼 몰아 친 양팔이 붉은 파도가 되어 아진을 덮쳤다. 여유로운 모습으로 땅에 내려 선 아진은 피식 웃으면서 손을 앞으로 뻗었다.
 
 뻗은 손에 이도청이 펼친 적염수라공의 폭풍겁화장이 가로막힌다. 아진의 팔이 빙글 움직이면서 원을 그렸다. 콰르릉! 아진이 휘두르는 대로 움직인 붉은 강기가 땅을 박살내며 퍼져나갔다. 태극무한법! 무당의 절기가 어찌 저 악적의 손에서 펼쳐진단 말인가?
 
 “대체 뭐란 말이냐!”
 
 이도청은 포효하면서 아진에게 달려 들었다. 그가 휘두른 주먹을 아진은 예의 천마환영보로 어렵지 않게 피해내면서, 뒤로 물러서는 대신에 이도청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아진은 꾹 쥔 주먹을 단전 앞에서 빙글 돌리더니, 거꾸로 돌린 손바닥을 이도청에게 뻗어냈다. ㅡ콰아앙!! 그 일격에 이도청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여..여래신장..’
 
 몸에 침투한 맑은 내력을 느끼면서 이도청은 피를 토했다. 구유음마의 소수마공. 천마신교의 천마환영보. 곤륜파의 운룡대팔식.. 거기에 이제는 소림의 여래신장이라니! 그 모든 것이 직전제자에게도 구절로만 전수되는 무공들이다. 그것을 어찌 아진이 익히고 있단 말인가. 게다가 이 위력, 수박 겉핥기식으로 익힌 것도 아니다. 지닌 내공 자체가 이도청이 평생을 쌓아 올린 것을 압도하고 있지 않은가.
 
 “끄윽!”
 
 날아가던 이도청은 급히 몸을 비틀며 땅에 내리 섰다. 순간 선 무릎이 굽혀질 뻔하였지만 이도청은 이를 뿌득 갈면서 몸을 지탱했다.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천천히 다가오는 아진을 바라보았다. 긴 세월을 곁에 두었는데도, 이도청은 아진이 저렇게 고강한 내력을 보유하였고 저런 무공을 숨기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만큼 아진의 연기는 완벽했다.
 
 “네.. 네놈.. 도대체 정체가 뭐냐..!”
 
 “말했잖습니까. 알려주어 봤자 당신이 이해할 리는 없다고.”
 
 비웃듯 아진은 웃음을 흘렸고, 이도청은 입술을 씹으면서 호흡을 골랐다. 진탕된 내력을 추스르고 몸을 점검한다. 일장을 얻어맞았고, 약간의 내상을 입기는 했지만 몸을 움직이는 것은 무리가 없다. 아진의 무공이 고강하고, 사용하는 것들이 절세의 신공이긴 하지만.. 이도청은 전의를 사그라트리지 않았다. 자신이 저 악적과 싸우다 죽는다 할 지라도, 동귀어진이라도 하여 아진을 죽이고야 말 것이다. 죽은 딸과 식솔의 복수를 하고 말 것이다. 그렇게 결심한 이도청은 생명의 근원인 진원진기까지 아낌없이 끌어올렸다.
 
 ㅡ쿠우우! 이도청의 몸이 새빨간 불꽃에 휘감겼다. 아진은 눈을 아프게 할 정도로 밝은 그 빛을 바라보면서 낮은 웃음을 흘렸다.
 
 “동귀어진을 하실 생각인가 본데.. 굳이 고통스러운 죽음을 감수하시는 군요. 차라리 자결이라도 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 입 닥쳐라, 이 빌어먹을 새끼야!”
 
 이도청이 다시 달려들었다. 어쩔 수 없지. 아진은 머리를 흔들면서 오른 팔을 들어 올렸다. 그래, 이번에는 무엇으로 해볼까. 천마신공의 천마파천권? 소림의 백보신권? 무당의 무진태극권? 떠오르는 무공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은 굉장히 힘들었다.
 
 “이걸로 하지.”
 
 작게 중얼거리면서 아진은 무릎을 낮추었다. 그 사이에 이도청이 휘두르는 주먹이 아진의 머리로 날아오고 있었다. 아진은 피식 웃음을 흘리면서 이도청의 주먹을 향해 마주 손을 뻗었다. 태산마저 부술 기세로 날아오던 주먹이, 아진의 손과 닿았다. 그 순간 아진의 손이 뱀처럼 꿈틀거리면서 이도청의 팔을 타고 올라갔다. 콰득! 가볍게 팔의 안쪽으로 손날로 두들기는 것으로 이도청의 뼈가 부러졌다.
 
 “사자추아권.”
 
 소곤거리는 아진의 목소리가 이도청의 귀에 다가왔다. 사자추아권ㅡ 그것은 분명, 권성의..
 
 그것이 이도청이 떠올린 마지막 생각이었다. 퍼버벅! 번개처럼 뻗어진 아진의 주먹이 이도청의 몸을 두들겼다. 그것은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빠르고 강했다. 느슨하게 쥔 주먹이 몸에 닿을 때마다, 굽힌 손가락이 살을 파고든다. 뚜득! 닿은 주먹이 접힐 때마다 살점이 무더기로 뜯겨가며 피가 치솟았다. 사자추아권- 그래, 그것은 주먹 하나로 무림을 평정했던 권성의 독문 무공이다. 너무 패도적이라 사파의 무공이라고까지 비난받았으나, 권성은 그런 비난을 당시 사파무림의 거두 중 하나인 흑살파를 홀로 멸문시키는 것으로 다물게 하였다. 그런 무공이 어찌.. 이도청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생각하는 것이 지금의 그에게는 더 이상 불가능했다.
 
 
 얻어맞은 이도청의 몸이 비틀거리면서 뒤로 물러났지만 아진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도청이 뒤로 물러 날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아진의 발이 앞으로 미끄러지면서 그를 쫒았다. 이도청의 팔을 분지른 왼 팔은 여전히 그의 팔에 얽혀서 이도청의 어깨를 잡고 있었고, 짧게 끊어 내지르는 오른 주먹은 끝없이 이도청의 몸을 두들겼다. 뼈가 부러지고 내장이 터졌다. 이도청의 눈이 뒤집어지고 입에서는 붉은 피가 꿀럭거리면서 넘어왔다. 콰직! 그리고, 마지막으로 휘두른 주먹이 이도청의 목에 박혔다.
 
 “사실, 한번쯤 당신을 뒈지도록 패고 싶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아진은 손을 털면서 이도청의 시체를 내려놓았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킥킥 웃었다.
 
 “아, 이제는 존댓말 쓸 필요도 없지. 꼴좋다 개새끼야.”
 
 뭐가 우정이고 신뢰란 말이냐. 귀찮은 일은 죄다 떠넘기고, 덕분에 팔자에도 없는 개고생을 얼마나 했던가. 하지만 참았다. 적설화 때문이었다. 그런데 애지중지해서 비위맞춰주고 따라주었건만, 뭐? 대제자랑 혼인을 시키겠다고? 뭐 이런 천하의 개쌍놈이 다 있단 말인가. 아진은 이도청의 시체를 향해 퉷 침을 뱉었다.
 
 ‘마침 잘 됐어. 어차피 슬슬 그만할까 생각하기도 했고.’
 
 제법 공을 들였지만 여기까지다. 아진은 천천히 손을 들어 허공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러자, 아진의 시야에만 비추던 불투명한 작은 스크린이 희미하게 무너지며 사라졌다. 설마, 마지막에 치트를 쓰게 될 줄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시작을 무공을 익히지 않고, 책사 쪽으로 방향을 잡았었으니까. 제법 재미는 있었지만 이것도 여기까지다.
 
 “로그아웃.”
 
 아진은 작게 중얼거렸다. 그 순간, 그의 몸이 안개로 무너지면서 사라졌다. 죽은 이도청은 끝내 아진이 어떻게 여태까지 무공을 숨겼으며, 그런 절세의 신공들을 능숙히 다루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대답은 간단했다.
 
 
 이곳은 게임이고
 그는 플레이어였을 뿐이다.

작가의 말


처음 뵙겠습니다.

댓글(32)

[탈퇴계정]    
헐 서장 임팩트 쩌네요
2014.08.21 00:20
김사야    
유저네; 강간은 왜함. 정상적인놈은 아닌듯
2014.08.22 13:13
잉여독자    
싱글 게임인가요? 치트 쓰는데.
2014.10.28 18:12
야근직장인    
재미있군요 언제나 잘보고 갑니다
2014.11.16 14:36
고르르    
게임에서 노가다 이벤트로 레벨업하고 나서 온갖 고생했다고 온갖 npc를 죽이는 거랑 다를바 없네요
2015.02.11 02:44
판타지스    
아 리벤징보고 왔는데 게임인가요....ㅠ
2015.05.04 13:02
판타지스    
예전 조아라의 레드에이어님의 글이 생각나네요
2015.05.04 21:35
감자개    
게임 소설이 아니라 [퓨전]이니 겜 때문에 하차하진 마시길.
2015.09.03 16:48
순향1    
살흔님 왜여깄음
2015.09.26 22:03
잘좀쓰자    
목마님작품 중 최고명작
2015.10.01 20:09
0 / 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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