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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언(引言)

2021.04.20 조회 1,030 추천 12


 인언(引言)
 
 
 
 
 
 “뭐? 술 한 번 마시고 고수가 됐다고? 헹! 웃기고 자빠졌네.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씨부리고 있어!”
 마도일세 구마련의 중추라 할 다섯 명의 마존 중 일인인 흑마존(黑魔尊) 오천상이 코웃음을 치며 삿대질을 해댔다.
 “뭐? 진짜라고? 흥! 그런 놈이 있다면 어디 한 번 데려와 봐! 만약 네 말이 사실이라면, 이 흑마존 어르신께서 성을 갈고 두 손에 장을 지진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흑마존 오천상은 육천상이 되었다.
 그리고 양손 장을 지진 덕분에 한 달 동안 떠먹여 주는 밥만 먹어야 했다.
 서(序)
 
 
 
 
 
 장우상은 평생을 술과 함께했다.
 술을 잘 마시는 것은 물론이고, 잘 만들기까지 했다.
 그의 술 빚는 재주는 천하의 모든 이들이 인정할 정도였다.
 장우상의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각양각색이었다.
 저잣거리 일반인부터 무림의 귀신같은 고수까지 그의 술을 사랑했다.
 심지어 황제마저도 때마다 장우상에게 술을 청했다.
 그 때문에 장우상이 만든 술은 비쌌다. 말년에 이르러 그가 빚은 술은 황금 수백 냥을 호가했다.
 덕분에 그의 가문은 풍족했다.
 그리고 장우상은 자신과 가족들만을 위하지 않았다. 벌어들인 돈 중 상당한 금액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썼다.
 그렇게 덕(德)을 쌓았다.
 사람들은 장우상을 칭송했다.
 넉넉한 인품과 뛰어난 양조(釀造) 솜씨를 빗대어 ‘주선(酒仙)’이라 불렀다.
 그런 장우상은 여든둘의 나이로 귀천(歸天)했다.
 호상(好喪)이었다. 적지 않은 연배에 잔병치레 하나 없이 자다가 조용히 숨을 거두었으니.
 그렇게 장우상의 육신은 흙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의 혼백(魂魄)은 하늘로 올라갔다.
 
 ***
 
 꾸벅꾸벅.
 장우상은 졸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두 동이의 술 단지가 놓여 있었다. 옥황상제(玉皇上帝)와 염라대왕(閻羅大王)에게 바칠 술이었다.
 천계(天界)에 와서도 장우상은 술을 빚고 있었던 것이다.
 한 해에 한 번, 두 동이의 복주(福酒)를 빚어 천계와 지옥의 수장에게 헌납했다.
 그냥 술이 아니다. 천계와 지옥의 귀한 약재들을 잔뜩 넣어 빚은 보양주다.
 장우상이 빚은 술을 마심으로써 옥황과 염라는 신력(神力)을 길렀다.
 물론 신력의 근원이 되는 것은 아니고, 지닌바 신력을 더욱더 융성하게 한다. 마치 무공의 고수가 영약을 먹어 내공을 불리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아무튼, 너무도 귀한 술이다.
 장우상은 몇 달 전부터 심혈을 기울여 술을 빚었다. 그리고 그 완성품이 코앞에 있는 술 단지들에 담겼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천계와 지옥의 시종들이 찾아와 술을 가져갈 터였다.
 술을 빚으며 크게 무리한 탓일까. 장우상은 그새를 참지 못하고 잠이 들고 말았다.
 
 끼이익.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그리고 새하얀 털로 뒤덮인 얼굴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원숭이였다.
 “흐흐.”
 머리에 금빛 고리를 두른 그 원숭이는 졸고 있는 장우상을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살금살금 안으로 들어와 조심스레 술 단지들을 가지고 나갔다.
 그 움직임이 어찌나 은밀한지, 장우상은 술동이를 도둑 맞은지도 모르고 잠에 취해 꾸벅거릴 뿐이었다.
 
 ***
 
 “꺼어억!”
 제천대성(霽天大聖)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트림했다.
 장우상의 거처에서 훔쳐온 술 중 한 동이를 깔끔하게 비워 버린 그의 얼굴은 이미 불콰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 주선, 주선 하더니만!”
 과연 허명(虛名)이 아니었다. 옥황상제와 염라대왕이 왜 그리 장우상을 아끼는지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거, 이런 좋은 술을 매번 지들끼리만 먹었단 말이지? 아주 못쓰겠네.”
 제천대성, 손공이 히죽거렸다.
 화과산의 돌원숭이로 태어난 그는 천계와 지상, 지옥을 종횡무진 누빈 악동이다. 법사(法師) 현당과 천축에서 불경을 가져온 이후, 제천대성이라는 칭호를 얻고 한동안 조용히 살던 그였다.
 하지만 타고난 악동 기질이 시간이 흐른다고 사라질쏘냐.
 손공은 삼계(三界)를 오가며 크고 작은 사고를 쳐댔다. 장우상의 술을 훔친 것 정도는 그런 사고 중 하나에 불과했다.
 분명 손공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놈! 제천대성!”
 벼락같이 쩌렁한 호통이 손공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흐억, 흐어으으윽!”
 깜짝 놀란 손공이 늘어진 육신을 퍼뜩 바로 세웠다.
 몽롱한 시야로 살기등등하게 다가오는 두 인영이 보였다.
 옥황과 염라였다.
 그들은 장우상에게 술을 도둑맞았다는 소식을 듣고 대번에 손공의 소행임을 직감했다. 그래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공을 찾아 나선 길이었다.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손공은 복숭아를 아주 좋아했고, 이곳 천계에는 삼계를 통틀어 가장 맛있는 복숭아 열매가 열리는 나무가 있었으니.
 그 나무가 있는 곳이 바로 여기였다.
 “손공! 이 빌어먹을 원숭이 새끼!”
 염라의 짙은 눈썹이 역 팔(八)자로 휘었다. 그의 호통에 따라 천둥이 쾅쾅 쳐댔다.
 그 모습에 손공이 꼬리를 슬쩍 말았다.
 술 한 동이 훔친 것 가지고 염라가 이토록 화를 낼 줄 몰랐다.
 “헤, 헤헤! 염라대왕님. 고작 술 몇 잔 때문에 그렇게 역정을 내실 필요는······.”
 “뭐라? 술 몇 잔?”
 이번에는 옥황이다. 백미백염(白眉白髥)을 파르르 떨며 두 눈을 부릅떴다.
 “터진 주둥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옥황이 분노에 찬 음성을 내뱉자 번개가 번쩍거렸다.
 “하, 하하······.”
 손공의 옆얼굴을 따라 식은땀 한 방울이 또르르 흘렀다.
 ‘이거 된통 걸렸네.’
 내심 중얼거리며 두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이대로 있다가는 두 신(神)들에게 치도곤을 당할 듯싶다. 빠져나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손공의 속셈을 눈치챈 염라가 콧방귀를 뀌었다.
 “아서라, 원숭이 놈아. 얄팍하게 머리 굴리는 소리가 예까지 들리는구나. 허튼 짓 말고 지금처럼 꼬리 말고 가만히 있어라. 그 허연 털, 내 지옥염(地獄炎)에 몽땅 태우기 싫다면 말이다.”
 “하, 하하······.”
 손공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와 동시에 옥황과 염라가 손을 썼다. 천둥과 번개, 폭우와 바람이 손공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손공은 허공 높은 곳으로 신형을 뽑아 올린 상태였다. 그의 발밑에는 새하얀 구름이 뭉쳐져 있었다.
 “이런 제길! 진짜 해보자는 거지!”
 손공이 악에 받쳐 소리치며 독문병기인 여의금강곤(如意金剛棍)을 뽑아들어 옥황과 염라를 향해 쏘아져 갔다.
 그 위세가 무시무시했으나 옥황과 염라는 코웃음 치며 손을 뻗었다. 그들이 뿜어내는 거력이 손공을 찢어발길 듯했다.
 콰콰콰콰쾅!
 “끄아아아아아!”
 거대한 폭음과 함께 손공이 추락했다.
 하지만 정신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는지, 지면에 몸이 닿기 직전에 휙 몸을 뒤집었다.
 “크으······!”
 손공이 이를 악물며 머리털을 쥐어뜯었다.
 하얀 털들은 뽑히기 무섭게 손공과 똑 닮은 모습으로 화했다.
 “가라!”
 수십 명의 손공들이 옥황과 염라를 향해 뛰쳐나갔다.
 이에 염라가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그 손길을 따라 청백색의 무시무시한 불길이 일어났다. 그리고 달려들던 손공들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그사이, 진짜 손공은 옥황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쯧.”
 옥황이 혀를 찼다.
 그에 자존심이 상한 손공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등에서 황금빛 기운이 일렁거렸다.
 “금강기(金剛氣)? 고작 그따위 기운으로 내게 덤비는 것이냐?”
 옥황은 진심으로 어이가 없었다. 아예 손공에게서 고개를 돌리기까지 했다.
 “미쳤나, 옥황!”
 손공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감히 이 제천대성의 쇄도로부터 고개를 돌리다니. 이 몸이 그리도 우습단 말인가. 알려주마! 내가 왜 삼계를 누비며 온갖 요괴들을 굴복시킬 수 있었는지.’
 손공의 금강기가 더욱 진한 빛을 띠었다.
 바로 그때였다.
 허공에서 한 줄기 백색뇌전(白色雷電)이 번뜩였다.
 그와 동시에 손공이 땅에 코를 박으며 쓰러졌다. 언제 쇄도를 했느냐는 듯 온몸을 벌벌 떨어대기까지 한다.
 옥황의 절기, 백뢰아(白雷牙)에 강타당한 것이다.
 “쯧쯧, 수십 번 보여줬던 백뢰아조차 못 피하다니. 네놈, 그 성질머리를 고치지 않는다면 평생 내 옷자락도 못 건드릴 것이다.”
 “제, 제기랄······!”
 손공이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몸에서 누린내와 함께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원숭이 놈!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해도 모자랄 판에 덤비기까지 해? 네놈을 무간옥(無間獄)에 처넣어 주마!”
 염라가 콧김을 씩씩 뿜어내며 말했다.
 그러자 이제껏 상황을 주시하기만 하던 이들이 움직였다. 옥황과 염라의 수하들이었다.
 손공은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백뢰아에 적중 당한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았던 것이다.
 ‘젠장! 이대로 무간옥에 끌려가기엔 너무 억울하단 말이다! 고작 술 한 동이 가지고······ 응? 술 한 동이?’
 암울하게 변하던 손공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어차피 이 자리를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무간옥에 끌려가 수십 년을 갇혀 있어야 할지도 모를 판이니, 마지막으로 옥황과 염라를 골탕 먹이고 싶었다.
 다른 이들이라면 상상하지도 못할 생각이지만, 삼계 제일의 악동 손공이 아닌가.
 손공은 기가 죽은 모양새로 고개를 푹 숙였다.
 염라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옥황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놈이 저렇게 쉽게 포기를 해? 아무리 백뢰아를 정통으로 맞았기로서니······.’
 손공의 성정을 잘 아는 옥황이 의심 어린 빛을 보였다.
 그사이, 바닥을 나뒹굴던 술 단지 중 하나가 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옥황과 염라는 들었다.
 단지 안에서 찰랑거리는 소리를!
 그렇다.
 손공이 단지 하나는 아직 열지 않은 것이다.
 옥황과 염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두들겨 패도 시원찮을 손공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고마웠다.
 염라가 기쁜 듯 말했다.
 “이놈, 손공. 양심은 있었구나. 단지 하나는 건드리지 않았으니 무간옥으로 데려가는 것은 취소······ 엥?”
 염라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동시에 옥황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어느새 손공이 허공으로 몸을 띄워 술 단지를 낚아챈 것이다. 술 단지를 차지한 손공이 히죽 웃었다.
 장난기 가득한 손공의 전형적인 웃음.
 옥황과 염라에게 불안감이 엄습했다.
 “너, 너 설마······!”
 옥황과 염라가 급히 손을 쓰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손공이 움직였다.
 “에라, 이놈의 술! 저 멀리 날아가 버려라!”
 손공이 있는 힘을 박박 긁어모아 술 단지를 저 멀리 던져버렸다.
 쒜애애애애애액!
 술 단지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갔다.
 그것이 향하는 쪽은 천계도 지옥도 아닌 인간계(人間界)였다.
 옥황과 염라는 급히 술 단지를 쫓아가려 했다. 하지만 수하들이 막아서며 고개를 내저었다.
 옥황과 염라도 알고 있었다.
 하나의 세계를 책임지고 있는 자신들이 인간계에 준비 없이 강림하면, 인간계의 섭리가 뒤틀리고 질서가 흔들린다.
 그러면 그간 준동하지 못했던 온갖 잡귀신들과 요괴들이 난립할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지금 손공이 집어 던진 술 단지 하나로 인해 계층의 균열이 발생했을 수도 있다.
 그것은 안 될 일이었다.
 그렇기에 옥황과 염라는 눈물을 삼키며 발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그 아쉬움이 달랜다고 달래지나. 숨을 고를수록 분노는 무섭게 커졌다.
 그리고 그것은 고스란히 손공에게 전해졌다.
 “이 개 같은 원숭이 놈!”
 “네 이놈, 손공!”
 천계와 지옥의 두 수장이 정말 분노하여 손공에게 달려들었다.
 자신에게 앞으로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는 손공이다. 하지만 그는 승리자의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게 바로 삼계를 누빈 싸움대장, 제천대성 손공의 진정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손공이 인간계로 던진 천계복주(天界福酒)는 잠시나마 옥황과 염라의 소관을 벗어났다.
 하지만 옥황과 염라는 미처 알지 못했다.
 이 복주 하나로 인해 인간계에 어떠한 일이 벌어지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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