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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2021.01.14 조회 596 추천 6


 황제, 세상을 삼키다
 
 
 프롤로그
 
 “그래, 결국 그만두는 건가······.”
 노인의 어조는 침통했다. 반면 그의 맞은편에 서 있는 남자의 표정은 대조적이었다. 약간의 아쉬움도 섞여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뭔가 후련하고 홀가분한 듯한 기색이 얼굴 전체에 감돌았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노인이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공을 세웠는데 오히려 처벌을 받고 결국 그것 때문에 퇴역이라······ 참, 면목이 없군.”
 “대공은 이제 사령관도 아니잖습니까. 이게 대공이 면목 없을 일입니까.”
 남자가 너스레를 떨었다. 남자의 신분은 남작, 그것도 영지조차 없는 속국의 이름뿐인 작위였다.
 남자와 노인과의 신분 차는 어마어마했지만, 남자는 노인을 마치 동네 아저씨인 것처럼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노인, 에르갈 대공 역시 남자의 태도를 크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조금이지만 기꺼워하는 기색마저 보였다.
 “모아 놓은 돈이라도 좀 있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 목숨인데. 그때그때 싹 써 버렸죠.”
 “그때그때?”
 “뭐 있잖습니까. 그렇고 그런 것들.”
 남자가 손가락으로 잔 모양을 만들어 목에 넘기는 시늉을 하며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도 잠시, 남자의 눈빛은 이내 진지해졌다.
 “하나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나 돈 없네.”
 “······제 부하들을 좀 돌봐 주셨으면 합니다.”
 남자의 말에 대공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흔쾌히 대답하기에는 남자의 부대 구성이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적성국의 귀족, 범죄자, 광신도······ 심지어 이종족까지. 정말 별별 사람들이 섞여 있는 곳이 남자의 부대였다. 남자가 없다면 통제하는 것조차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대공의 걱정을 알고 있다는 듯 남자가 말을 이어 갔다.
 “이안과 맥스에게 잘 말을 해 뒀습니다. 도저히 통제 불가능한 인원은 따로 살 곳을 마련해 주기로 했고요. 둘의 도움을 받는다면 그래도 어찌어찌 써먹을 수는 있으실 겁니다.”
 “······알겠네.”
 고민하던 대공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표정이 환해졌다.
 “감사합니다.”
 경례를 한 남자가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남자가 방을 나가기 전, 대공이 물었다.
 “그래. 자네는 어쩔 셈인가?”
 “고향에 가 볼까 합니다.”
 “고향? 라르바 말인가?”
 대공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향이 라르바인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고향에 남자의 가족이나 친지라고는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남자가 어린 나이에 동부군에 들어온 것이 지금으로부터 무려 20년 전이었다. 그리고 그때 남자는 의지할 곳 하나 없는 ‘고아’였다.
 지금 돌아간다고 해서 뭐가 있을 리가 만무했다.
 남자가 답했다.
 “그냥 이참에 한 번 가 보는 것뿐입니다. 딱히 갈 곳도 없고, 생각나는 것도 없으니.”
 “그렇군. 그럼 조심하게.”
 “네. 대공도 몸 관리 잘 하십시오. 그 나이에는 멀쩡해 보여도 언제 훅 갈지 모르는 법입니다.”
 “······뭐가 어째?”
 대공이 버럭 화를 내자, 남자는 부리나케 몸을 빼며 문을 닫았다. 문 너머에서 큭큭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부들부들하던 것도 잠시, 대공 역시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피식 웃었다.
 내내 지었던 쓴웃음과는 다른, 환한 미소였다.
 “고생 많았네. 요한.”
 
 엘빈 3세 재위 10년. 가르드 왕국 동부군의 신임 사령관 세르지 백작에 의해 이뤄진 기간테스 산맥 진공전은 실패로 끝났다.
 동부군을 산맥 깊숙하게 끌어들인 발론군의 포위 공격에 걸려든 동부군은 고전을 금치 못하다가 패퇴했다.
 전 병력의 5할, 그리고 천인장 중 셋의 목숨을 잃어버린 대패였고, 이는 동부군이 창립된 이래 유례가 없을 정도의 참패였다.
 겨우 목숨을 건져 퇴각한 세르지 백작을 맞이한 것은 중앙 귀족 회의에서 파견한 감찰단이었다. 모든 이들이 백작이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 여겼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감찰단을 맞이한 백작은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다. 이 패배는 자신의 탓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후방 경계를 맡고 있던 녀석이 멋대로 부대를 빼 퇴각했습니다. 녀석만 아니었다면 포위 전술에 걸려드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작전 실패의 원인으로 세르지 백작이 지목한 것은 동부군의 천인장 중 한 명인 요한이었다.
 백작의 항변에 감찰단은 바로 처분을 내리는 대신, 여러 장교와 병사들을 대상으로 전투에 대한 면밀한 조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감찰단의 보고를 받은 귀족회의와 그 수장 펠레스 공작이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패배에 결정적인 요인을 제공한 동부군의 제3천인장 요한을 일반 병사로 강등하고 1년간 근신에 처한다.]
 
 그리고 당사자인 천인장 요한은 징계를 받아들이는 대신, 전역 신청을 하고 부대를 떠나 버렸다. 동부군에 귀족회의의 결정이 통보된 지 단 하루만의 일이었다.
 
 
 
 황제, 세상을 삼키다
 
 
 1
 
 “요한 대장.”
 “······왜.”
 요한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예찬이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찬은 요한의 다섯 부장 중 한 명으로, 요한과 함께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예찬이 머뭇거리자 요한이 한숨을 쉬었다.
 “말해라. 괜찮으니.”
 “대체 왜 전역하신 겁니까?”
 “그럼 일반병으로 돌아가서 네놈 밑에서 구르라고?”
 요한의 목소리는 시큰둥했다.
 “하지만······ 동부군은 대장에게는 삶의 전부잖습니까.”
 “······.”
 예찬이 한숨을 쉬었다. 딴청을 피우는 요한을 보며 예찬의 한숨은 더 깊어졌다.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요한의 사정은 그중에서도 매우 특별했다. 6살 때 한 노인의 손을 잡고 부대로 왔을 때부터 30살을 눈앞에 둔 지금까지, 무려 이십 년이 넘게 동부군에서 생활해 온 것이 그였다.
 다른 이들에게 군인이 직업이라면 요한에게 있어서는 말 그대로 삶과 같았다.
 좋은 일, 나쁜 일, 기쁨, 슬픔, 고통, 환희, 친구, 추억······ 요한의 모든 것이 동부군에서 만들어졌고, 동부군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동부군에서 나와 기억도 가물가물한 고향으로 돌아간다니.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아니, 어지간한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선택일지도.
 요한이 피식 웃었다.
 “너희들만 할까.”
 “······네?”
 “고향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녀석들보단 낫겠지.”
 요한의 말에 예찬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가르드 최대의 적국인 시무르에서 망명해 온 인물이었다.
 예찬과 그가 모시는 장민(張敏)은 모두 요한 부대의 소속으로, 그들이 망명해 온 사연은 요한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몰랐다.
 “하긴. 저나 장민 아가씨가 이런 말을 할 처지는 아니로군요.”
 “아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 네 말대로 내 삶은 거의 동부군과 함께였지. 라르바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어. 어렴풋이 생각나는 마을 풍경, 그리고 집사가 가끔 해 준 얘기 정도가 전부랄까.”
 요한이 어깨를 으쓱였다.
 라르바. 그의 출신 지역이자, 지금까지 그가 군복무를 해 온 가르드의 속국. 신상명세서에 쓰여 있고 누군가가 출신 지역을 물으면 항상 대답하던 곳.
 하지만 막상 그곳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자, 요한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위화감이었다. 말조차 배우지 못했을 때니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어렴풋한 집의 모양 정도였다.
 짚으로 지붕을 올리고 나뭇가지를 엮은 담장으로 주위를 두른, 작고 초라한 집.
 “그런 집에 살았는데 귀족이라니. 그 말을 한 게 집사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집사가 남겨 준 징표가 아니었다면 누가 사기를 치려 든다고 여겼겠지.”
 “그건 그렇죠. 남작이라니. 라르바가 아무리 작은 나라라고는 해도, 귀족이 그런 곳에 산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것도 잠시, 예찬의 얼굴에는 다시 궁금함이 떠올랐다.
 “그러면 굳이 라르바로 돌아갈 이유가 있습니까?”
 “그럼 어디로 가는데?”
 요한의 반문에 예찬이 눈을 껌벅였다. 요한이 피식 웃었다.
 “네 말대로 동부군에서만 살았는데, 동부군 외에 내가 갈 곳이 있겠냐. 갈 곳이 없으니 일단 고향으로 돌아갈 뿐이다. 정확히는······ 고향이라고 ‘알고 있는’ 곳이지만.”
 “······.”
 “뭐, 혹시 아나. 그 기억이 잘못된 기억이고 내가 물려받을 수십만 골드의 재산이라도 있을지.”
 “에르갈 1년 예산을 전부 털어도 그 정도는 안 될 겁니다.”
 예찬의 대답에 요한이 크게 웃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들썩이는 어깨와, 넓은 등을 보며 예찬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그만두셔서는 안 되는 분인데.’
 그만큼 동부군에서 요한이라는 인물의 위치는 대단했다.
 가장 밑바닥부터 시작해 천인장까지 오르기까지, 그가 올린 전과는 눈부셨다.
 처음으로 백인장에 올라 자신만의 부대를 가진 이래, 요한은 크고 작은 백여 번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콧대 높은 동부 지역의 귀족들조차 그런 요한을 높이 사, 자식들이 전투에 참가할 때 이렇게 당부할 정도였다.
 
 [요한은 매번 큰 공을 세우는 것은 아니지만, 실패하는 경우는 더욱 없다.]
 [갈피를 못 잡겠다면 요한을 따라라. 그렇다면 적어도 죽지는 않는다.]
 
 불사신 요한. 동부군의 사람들은 요한을 그렇게 불렀다.
 “언젠간 꼭 돌아가시게 될 겁니다. 아니, 돌아가셔야 합니다.”
 예찬이 중얼거렸다.
 
 
 * * *
 
 요한의 고향인 라르바는 가르드의 서북쪽에 있는 소국이었다. 동부의 중심인 에르갈과는 거의 정반대에 위치했다.
 그리 급한 일이 없었던지라 요한의 행보는 여유로웠다. 작전 중이었다면 하루도 안 걸려 주파했을 거리를 사흘, 나흘씩 소비해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가기 일쑤였다.
 “뭐, 어차피 일찍 가 봤자 할 일도 없잖아.”
 때로 예찬이 너무 늦어지는 여정을 걱정할 때마다 요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행보가 늦어지다 보니, 가르드의 서북쪽 국경인 크레이덴 요새 인근에 도착했을 때는 전역한 지 거의 한 달이 흐른 상태였다.
 산 위에서 요새를 바라보며 예찬이 한숨을 쉬었다.
 “열흘이면 충분했을 거리를······.”
 “거 참 성격도 급하네.”
 요한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자 예찬이 발끈했다.
 “여비 생각은 없으신 겁니까. 덕분에 대공께서 챙겨 주신 돈이 거의 바닥났습니다. 이제부터는 대장과 제 돈을 박아야 한단 말입니다. 돈 한 푼 없이 고향에 돌아가서 뭘 어쩔 생각입니까? 말만 고향이지 집도 뭣도 없다면서.”
 “뭔가 잘못 알고 있군.”
 “네? 그럼 설마······.”
 요한의 대답에 예찬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이어지는 대답을 듣는 순간, 그의 얼굴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난 박을 돈 같은 거 없어. 빈털터리라고.”
 “······뭐라고요?”
 “그러게 돈 좀 아껴 쓰지 그랬나. 앞으로는 네 돈만 박게 생겼군.”
 요한이 말을 마치고 먼저 산길을 내려갔다. 뒤쪽에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괴성을 들으며, 요한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뭐, 적어도 심심하지는 않겠군. 당분간은.”
 
 산을 내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요한과 예찬은 크레이덴 요새 앞에 위치한 마을로 들어섰다.
 “호오.”
 요한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거의 수십 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마을 입구를 틀어막은 그들은, 마을과 그 뒤의 요새로 향하는 사람을 한 명 한 명 검문하는 중이었다.
 “전쟁이라도 난 걸까요?”
 “설마. 동쪽이나 북쪽이라면 몰라도. 서쪽은 지난 20년간 거의 침공을 받은 적이 없다. 우리 가르드에 싸움을 걸 만한 적도 없고.”
 예찬의 말에 요한이 고개를 저었다. 가르드 최대의 적국이자 예찬의 출신국인 시무르가 있는 북쪽, 옛 영토를 되찾기 위해 거의 매달 싸움을 걸어오는 동쪽과는 달리 가르드의 서쪽에는 별다른 적국이 없었다.
 가르드의 속국인 라르바를 비롯해 하르마탄 교의 본산인 하르마탄 교국, 레테 강 하구의 상업 국가인 자간 연합 등이 있었는데, 모두 가르드에 비해서는 한참 국력이 약한 나라들뿐이었다.
 “······하나 있잖습니까. 타라스.”
 예찬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하지만 요한의 얼굴은 태연했다.
 “타라스가 그럴 조짐이 있다면 애초에 우리와 발론이 싸우지도 않았겠지. 가르드와 발론이 철전지 원수라지만 어쨌건 같은 하르마탄 교를 믿는 나라니까. 타라스가 움직인다면 대륙의 전 나라가 힘을 합치는 건 불문율이잖나.”
 “그렇긴 하죠.”
 “걱정하지 마라. 그럴 것 같았으면 내가 라르바로 가겠냐. 안 그럴 것 같다는 확신이 있으니까 라르바로 돌아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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