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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용 1권 1화

2014.11.17 조회 12,670 추천 86


 서장
 
 
 
 남극은 점차 옛 모습을 잃어 가고 있었다. 과거에는 혹한만이 지배하던 대지에 열기가 깃들며, 하루에도 몇 번씩 대량의 빙산이 무너지는 소리가 울렸다.
 
 우르르릉.
 
 “환경문제가 심각하긴 심각한가 보군.”
 
 러시아의 부호, 세르게이는 역사의 뒤편으로 내달리는 얼음 대륙을 밑바닥에서부터 올려다보고 있었다. 대단한 환경론자는 아니었지만 이럴 때는 마음이 착잡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남극대륙의 2.1㎞ 아래에 있는 빙저(氷低)호수였다. 호수는 이름 그대로 두꺼운 얼음 층 아래 물결 한 점의 소요도 없이 조용히 고여 있었다.
 
 한때는 세계적으로 빙저호수 열풍이 불었던 적도 있었다. 각 나라는 연구팀을 꾸려 수천 년간 대기의 손길이 닿지 않은 호수에서 무언가를 찾아내고자 분투했다.
 
 하지만 초반의 몇몇 발견을 제외하면 대체로 시원찮은 결과였다. 그러다 결국 몇 년 전, 미국과학재단의 지원이 끊기며 빙저호수에 대한 탐사는 사실상 중단되었다.
 
 그리고 그런 다 폐기된 연구에 눈독을 들인 사람이 바로 세르게이였다. 러시아 군부를 좌지우지하는 세력가의 장남인 그는 평소 매일같이 한탄하곤 했다.
 
 
 
 -너무 늦게 태어나 더는 개척할 곳이 없구나!
 
 
 
 물론 아직 세상에 험지는 차고도 넘쳤다. 그러나 모두 인간의 발걸음이 닿은 장소들뿐. 남다른 모험심의 소유자인 그는 그런 곳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러다 그는 우연히 빙저호수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됐다. 태곳적부터 인간의 발길이 범접지 못한 그곳은 세르게이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세르게이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들여 빙저호수까지 길을 냈다. 단순히 열수드릴로 시료를 채취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직접 오르내릴 수 있도록 크게 뚫었다.
 
 그리고 반년이 지난 지금, 그는 바라 마지않던 소망을 이뤘다. 수십 세기 동안 외부 세계와 철저하게 격리돼 있던 빙저호수에 인류 최초로 발을 내디딘 것이다.
 
 “오오, 이곳이…….”
 
 첨벙.
 
 감탄사를 내뱉은 세르게이는 간이용 승강기를 나와 휴대용 보트를 펼쳤다. 버튼 하나로 작은 고무 덩어리가 4인용 크기의 보트로 변해 수면에 나타났다.
 
 “내가 드디어 이곳에 첫발을 내디뎠다!”
 
 동행한 팀원들이 맞장구를 쳐 줬다.
 
 “정말 대단합니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나도 놀랍다네. 하! 정말 흥미진진하군.”
 
 일행은 연신 감탄사를 발하며 수㎞ 너비의 빙저호수 수면을 둘러봤다. 사람의 손길이 한 번도 닿지 않은 검푸른 물은 순수로 뭉친 결정체 그 자체였다.
 
 랜턴을 내려놓은 세르게이는 경건한 몸짓으로 물을 한 모금 떠 마셨다. 기분 좋은 차가움이 뼛속까지 스며들며 산만하게 고조됐던 정신을 일깨워 줬다.
 
 “넓지는 않은 것 같으니 우선 한 바퀴 돌아봅시다.”
 
 “네, 알겠습니다.”
 
 승강기의 위치를 야광 부표로 표시해 둔 일행은 앞쪽으로 노를 저어 갔다. 그러면서 주위를 살펴보거나 벽에 붙은 얼음을 채취하는 등 바쁜 시간을 보냈다.
 
 “엇!”
 
 한창 랜턴으로 빙벽 이곳저곳을 비춰 보던 세르게이가 놀라 탄성을 내질렀다. 빛을 반사하는 빙벽 사이로 거무스름한 물체를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잠깐! 저기, 저기로 가 보세.”
 
 다급한 재촉에 연구원들은 노를 저어 세르게이가 말한 쪽으로 향했다. 근처에 도착하자 세르게이는 보트 앞에 서서 랜턴을 들어 올렸다. 빙벽이 환히 밝혀졌다.
 
 “이, 이게 무슨……!”
 
 세르게이가 발견한 것은 정체불명의 괴물체였다. 수천 년 만에 빛을 받은 그것은 은은한 먹빛 광택을 발산하며 랜턴의 빛을 모조리 흡수하고 있었다.
 
 얼음 속의 실루엣을 관찰하던 세르게이는 침음을 흘렸다. 놀랍게도 그것은 어느 생물의 잔해였다. 검은 빛깔은 촘촘하게 박혀 있는 비늘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다만 어류는 아니었다. 비늘이라고 해도 생선의 그것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그보다 더 단단하고 촘촘한, 이를테면 파충류 생물의 그것과도 같았다.
 
 “헉! 공룡일까요?!”
 
 “뒤로, 뒤로 가 봅시다. 빨리!”
 
 일행은 근처를 돌며 발광봉들을 꺾어 설치한 뒤 노를 저어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비로소 빙벽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그들은 입을 쩍 벌렸다.
 
 환히 밝혀진 인공의 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 잔해는 역시 거대한 파충류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생물인지, 인공물인지는 쉽게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짐승의 잔해는 그 크기만 200m를 가뿐히 넘어갔다. 아무리 아득한 과거에 용반류가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단언컨대 이만한 몸집의 주인은 없었다.
 
 상식 이전의 문제였다.
 
 세르게이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잔해를 살폈다.
 
 우선 익히 본 대로 몸 전체가 까만 비늘로 뒤덮여 있었다. 그런데도 상하거나 깨진 곳이 한 군데도 없는 것을 보면, 분명 강건하기 그지없는 육체였을 것이었다.
 
 등으로 추정되는 부분에는 뾰족한 가시가 고대의 전차 바퀴 테두리처럼 위압적으로 세워져 있었다. 등 뒤로는 하얀 뼈만 남은, 하지만 남아 있다면 몸통 전부를 가렸을 거대한 날개가 새의 그것처럼 접혀 있었다.
 
 가장 압권은 짐승의 머리였다. 고령의 나무처럼 성인 몇 명이 손을 맞잡아야 겨우 둘레를 잴 수 있을 커다란 두개골이 장엄하게 올려져 있었다.
 
 “으윽!”
 
 먼 옛날 두 눈이 있었으리라 짐작되는 퀭한 공동 안에는 붉은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세르게이는 불꽃이 꼭 자신을 노려보는 것만 같아 신음을 발했다.
 
 그만큼 붉은 불꽃은 생명체였던 자신의 실체를 생생하게 알리고 있었다. 비늘 안으로 들여다보이는 하얀 뼈마디만 아니었다면 정말 살아 있다고 믿었을 정도였다.
 
 너무나도 노골적인 모습!
 
 세르게이는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드래곤…….”
 
 빙벽 안의 잠든 짐승은 신화 속의 존재.
 
 용이었다.
 
 
 1장 마지막 휴일
 
 
 
 “으으…….”
 
 밤새 곤히 잠들어 있던 도하는 굉장히 불유쾌한 기분으로 기상했다. 방의 공기는 후덥지근한 수준을 넘어 푹푹 찌는 탓에, 숨조차 제대로 내쉬기 버거웠다.
 
 머리맡을 더듬는 도하의 손길에 리모컨이 잡혔다. 하지만 아무리 전원을 꾹꾹 눌러도 에어컨은 무반응. 아마 잠든 사이에 고장이라도 난 모양이었다.
 
 평소였다면 한참을 더 뭉그적거리다 마지못해 일어났겠지만, 날씨가 이러니 버틸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거실로 나간 도하는 탁자 위를 보고 눈을 비벼 댔다.
 
 “저건 또 왜 저래?”
 
 정전 따위의 재난에도 대비할 겸, 장식용으로 사다 놓은 양초가 축 늘어져 있었다. 도하는 황당해하며 다가가 건드려 봤다. 겉이 푹 들어가며 지문이 찍혔다.
 
 “설마.”
 
 도하는 몇 발짝 걷지도 않았는데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아 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럴 리가 있겠는가! 아무리 덥다고 해도 양초가 녹아내릴 리가 말이다.
 
 거실의 에어컨을 튼 도하는 TV를 켰다. 마침 뉴스가 송출되고 있었다. 꽃무늬 반소매 블라우스를 입은 아나운서가 종알거렸다. 오늘 대전의 날씨는-.
 
 “45도?!”
 
 어마어마한 온도에 아연한 도하는 재차 확인했다. 하지만 아나운서의 대본은 물론이고, 화면에 출력된 표기까지 모두 45℃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긴 45도면 양초가 녹아내릴 만도 하지.”
 
 놀랍기는 해도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몇 년 전부터 급격히 더워지기 시작한 여름은 작년에 이미 40도를 넘어선 바였다. 올해 45도라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기상 관측 이래 최고 기온이라는 아나운서의 호들갑 다음으로 원자력 발전소와 관련된 뉴스가 흘러나왔다. 충남 바닷가에 건설 중인 140kW짜리 발전소였다.
 
 발전소 건설 현장에 나가 있는 중계 카메라가 시위에 한창인 환경 단체를 비췄다. 하지만 뜻밖에 시위는 격렬하지 않았다. 게다가 지역 주민도 거의 없었다.
 
 살인적인 온도도 온도였지만, 그보다는 환경 변화 탓이 더 컸다. 여름이건 겨울이건 괴상하게 변한 기온 탓에 대한민국 전역은 전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니 말하자면 저 31번째 원자력 발전소는 국민 모두의 총의인 셈이었다. 멜트다운 이전에 더위로 돌아가실 지경이니 반대론자들은 다 역적이 된 상황이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구나.”
 
 도하는 에어컨 바람 아래 몸을 누이며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기자도 참 대단한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이 무더운 날씨에 무거운 카메라까지 들고 촬영을 나가다니!
 
 하지만 도하는 곧 자신도 저 땡볕 아래를 기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잊고 있었는데, 저번 시험을 죽 쓴 탓에 오늘 학교에서 보충수업이 잡혀 있었다.
 
 도하는 다 죽어 가는 얼굴로 창밖을 바라봤다. 아스팔트 위로 농밀한 아지랑이가 공간을 일그러뜨릴 기세로 일렁이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엄습했다.
 
 “헉! 양초도 황당한데 우체통까지.”
 
 아지랑이보다 더 놀라운 건 집 앞의 우체통이었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다리가 녹아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바깥 온도가 짐작이 가는 광경이었다.
 
 나가기 싫어 미적거리는 도하의 정신을 뻐꾸기 시계가 일깨워 줬다. 큰 울음 1번에 작은 울음 4번, 해서 9시였다. 보충수업은 10시부터이니 슬슬 준비해야 했다.
 
 “도윤아! 아직 자냐?”
 
 도하는 여동생의 방문에 대고 소리쳤다.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당장에 튀어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여동생 방의 에어컨은 멀쩡한 듯싶었다.
 
 “그러게 일찍 좀 들어오지.”
 
 여동생은 어제도 늦게까지 업무에 매달리다 새벽 나절에야 겨우 집구석으로 기어 들어왔다. 최근 새 프로젝트를 시작해 그 초안을 잡느라 굉장히 바쁘다고 했다.
 
 평소 같았으면 들어가 끌어냈겠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관계로 바로 아침 준비에 들어갔다. 도하는 손에 쥔 달걀 2개를 툭 깨뜨려 프라이팬에 투하했다.
 
 달걀이 익어 가는 사이 양배추를 먹기 적당한 크기로 잘라 그릇 위에 올렸다. 그 뒤 달궈진 프라이팬 구석에 베이컨 한쪽과 토스트를 구우면 아침 완성이었다.
 
 “나 학교 간다! 아침 차려 놨으니까 꼭 먹고.”
 
 앞치마를 벗어던지며 말하는데, 여동생이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반쯤 흘러내린 분홍색 잠옷과 잠이 덜 깨 흐리멍덩한 눈이 그렇게 추레할 수가 없었다.
 
 “오늘 토요일인데 학교는 왜 가?”
 
 “보충수업. 너도 알다시피 내가 시험을 망쳤잖니.”
 
 “알아, 아주 잘 알고말고. 정말 멍청하기가 한량없는 오라버니여! 나처럼 국가 인재 추천으로 대학을 가면 고등학교 같은 건 졸업 안 해도 되잖아?”
 
 “그게 되면 내가 지금 이러고 있겠냐.”
 
 도하는 현관까지 쫄래쫄래 쫓아와 ‘바보바보’ 노래를 불러 대는 여동생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대답했다. 국가 수준의 천재인 그녀이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럼 간다. 도로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가지 말고.”
 
 “오늘 주말이거든? 더 잘 거야!”
 
 “에구구, 알았어. 그래도 적당히 자.”
 
 여동생의 도발에 어깨를 축 늘어뜨린 도하는 현관을 나서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전례 없이 무더운 기온과 대비되는 청량한 서천(暑天)이 거기에 있었다.
 
 
 
 매앰, 매앰.
 
 플라타너스에 달라붙어 애처롭게 울어 대던 매미가 차도 위로 툭 떨어졌다. 다리를 바동거렸지만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는 곧 매미를 죽음으로 인도했다.
 
 여름 곤충도 못 견디는 혹서의 현장을 바라보던 도하는 교문 안으로 들어갔다. 20분 남짓한 등굣길로 벌써 푹 퍼져 버린 그의 발걸음이 위태로웠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사실은 보충수업의 참가자가 도하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성적이 비슷한 급우 셋과 이런 상황을 만들어 낸 원흉인 담임이 있었다.
 
 “이런 젠장, 근데 왜 아무도 없어?”
 
 텅 빈 교실을 둘러본 도하는 억울해하며 이를 바득바득 갈아 댔다. 현재 시각은 10시 20분. 지각했음에도 불구하고 급우는 고사, 담임조차 보이지 않았다.
 
 교실 창문이 열려 있지도 않은 걸 봐서는 다들 늦거나 기다리다 돌아간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지랄 맞은 날씨에 출발조차도 안 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교실을 환기한 도하는 담임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고 통화가 연결됐다. 담임은 무려 방금 막 잠에서 깨어난 듯 착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도하냐? 아침부터 무슨 일이니?
 
 “저기 선생님, 오늘 보충 말인데요.”
 
 -보충? 당연히 안 하지. 오늘 기온이 몇 돈데 할 리가 없잖냐. 거기 도착할 때쯤에는 땀에 절어 새우젓이 될걸. 그런데 설마 너, 학교 간 건 아니겠지?
 
 “…….”
 
 통화를 뚝 끊어 버린 도하는 돌아갈 힘도 없어 자기 책상을 찾아가 앉았다. 도대체 어떤 인간이 가져다 둔 건지는 몰라도 책상 위에 바나나 우유가 올려져 있었다.
 
 “누가 내 책상에 우유를…….”
 
 어쩌면 수줍은 많은 여학생이 차마 도하에게 고백하지 못하고 바나나 우유로 마음을 표현해 놓은 것일지도 몰랐다. 물론 도하는 눈곱만큼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랑은 아니지만, 도하는 성격이 그리 좋지 못해 친구가 거의 없었다. 하물며 누군가에게, 그것도 또래 여학생에게 무언가를 받을 만한 일은 더더욱 없었다.
 
 “비참하다, 언 놈이 쓰레기만 만들어 놓고.”
 
 책상 위에 엎드려 있던 도하의 눈에 바나나 우유가 들어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표면에 송골송골 한 물기가 맺혀 있었다. 만져 보니 방금 사 온 듯 시원했다.
 
 도하는 의아해하며 복도로 나가 살폈다. 하지만 사람 하나 없는 학교에는 여름 괴담에 어울릴 법한 적막감만이 기이한 긴장감을 타고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이 날씨면 못해도 15분 전에 사다 놨다는 건데.”
 
 꿀꺽.
 
 우유를 내려다보는 도하의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어떤 고마운 이가 가져다 놨는지는 몰라도 바나나 우유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료였다.
 
 ‘먹으라는 뜻이겠지?’
 
 도하는 우유의 뚜껑을 개봉했다.
 
 퐁!
 
 
 2장 포식자
 
 
 
 도하는 한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갑자기 이게 뭔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학교에 있었는데, 어째서 동강 난 전함처럼 바닥 깊은 곳으로 침강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그 밖에도 궁금한 점은 많았다. 몸은 왜 또 안 움직이고, 물속에 있는데 숨은 왜 안 막히고, 그리고 지금 겪는 이 상황이 과연 현실인지, 아니면 꿈?
 
 “…….”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머리가 돌아가지를 않았다. 마치 안개가 낀 듯 모호하여 생각이 떠올라도 이내 산산이 흩어졌다.
 
 그렇게 도하는 해류에 몸을 맡긴 해파리처럼 그저 가라앉기만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핏 수면에서 거뭇한 무언가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버려진 폐유 덩어리 같은 그것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친숙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도하는 자신의 주변을 빙글빙글 맴도는 구체를 향해 상냥하게 손짓했다.
 
 그리고 콰직!
 
 ‘으악!’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나타난 놈이 반가워 내민 손이었는데, 놈은 도하와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듯했다. 갑자기 입을 벌려 깨무는 것을 보면 말이다.
 
 도하는 비명을 지르며 손을 털어 냈지만, 놈은 떨어지지 않았다. 도리어 손가락을 전부 먹어치우고 손목을, 팔목을, 마침내 어깨까지 전부 삼켜 버리고 말았다.
 
 꾸르륵!
 
 발버둥 치던 도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커, 커억! 쿨럭쿨럭.”
 
 수풀 안에서 쥐 죽은 듯 누워 있던 도하가 컥컥거리며 일어났다. 전날 과음한 사람처럼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사위 분간이 잘되질 않아 정신이 없었다.
 
 길게 자란 풀을 사락거리며 지나가는 바람이 도하의 몸에 으슬으슬한 소름을 만들어 냈다. 팔짱 낀 몸으로 부르르 떨어 대던 도하는 깜짝 놀라 외쳤다.
 
 “뭐, 뭐야? 여긴 또 어디야?”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니 낯선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종아리까지 자라난 풀숲 너머에는 수십 년은 족히 묵었을 법한 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분명 교실이었는데…….”
 
 도하는 황당해하며 머릿속 기억을 더듬었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 가고,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바나나 우유를 마시고,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진다 싶더니만.
 
 일어나 보니 웬 숲 속이었다.
 
 그제야 바나나 우유에 무언가 들어 있었음을 깨달은 도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돌이켜보면 정말이지 멍청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그걸 먹긴 왜 먹는가!
 
 ‘이, 일단 진정하자.’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힌 도하는 조심스레 일어나 사방을 헤집었다. 어쩌면 자신을 이곳에 옮겨 놓은 장본인들이 아직 근처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 봐도 납치범은 고사하고 인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풀숲을 살필 때마다 이름 모를 날벌레들이 우수수 날아올라 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없어. 아무도 없어. 왜 아무도 없지?’
 
 누가 자신을 숲에 처박아 놓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설마 할 짓이 없어서 이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원하는 게 있다는 말인데,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꼬박 1시간을 더 살핀 도하는 그제야 자신이 홀로 남았음을 인정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어떤 속셈인지는 몰라도 일단 숲을 벗어나 인가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시발.”
 
 욕설이 절로 나왔다.
 
 
 
 도하는 일단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어갔다. 그냥 그쪽으로 가고 싶었다. 어차피 이곳이 어디인지를 모르니 어느 쪽으로 가던 사정은 같았다.
 
 ‘아으, 환장하겠네.’
 
 두 시간 정도를 걷던 도하는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이놈의 숲은 산속에 있는 것도 아닌데 어찌나 넓은지,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녹음의 향연만이 반복됐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모기나 벌, 표범이나 멧돼지 같은 맹수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일지도 몰랐다. 슬슬 어둠이 내려오고 있었다.
 
 아직은 하늘이 불그스름한 정도였지만 숲의 밤은 유난히 빨리 찾아온다. 그 점을 상기해 보면 계속해서 전진하는 것은 자살 행위라고 할 수 있었다.
 
 ‘나무 위에서 자는 게 가장 안전하겠지?’
 
 도하는 긴장으로 식은땀으로 흥건한 이마를 훔치며 근처를 둘러봤다. 다행히 바로 옆에 올라가기 딱 좋도록 목피가 꺼끌꺼끌한 나무가 버티고 서 있었다.
 
 막 나무를 타고 올라가려던 도하는 문득 기이한 위화감에 사로잡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귀가 따가우리만치 울어대던 풀벌레들이 지금은 서늘하도록 조용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본 모 다큐멘터리의 내용이 딱 이랬다. 생존 전문가가 말하길, 숲이 돌연 고요 속으로 빠져드는 경우는 단 한 가지 원인밖에 없다고 했다.
 
 바로 포식자의 등장!
 
 ‘그, 그때는 어떻게 하라고 했더라?’
 
 어떻게 하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가라고 했다.
 
 도하는 마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귀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두근거리는 고동 소리가 한없이 커지며 열중을 방해하는 가운데, 문득 이질적인 소음 하나가 울렸다.
 
 바스락.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들리지도 않았을 만큼 작고, 은밀하기 짝이 없는 소리였다. 소음의 간격은 점점 좁아지고, 더욱 커다랗게 들려왔다.
 
 말인즉슨, 무언가가 도하를 목표로 접근해 오고 있다는 설명이 됐다. 물론 그를 해하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살금살금 다가올 이유가 없지 않은가!
 
 ‘뭐지? 소리가 작은 걸 보면 고양잇과 같은데. 그럼 표범인가? 아니면 호랑이? 하지만 걔들이 우리나라에서 멸종한 지가 언젠데. 혹시 그냥 사람인가?’
 
 맹렬하게 머리를 굴려 봤지만, 관련 지식이 없는 도하가 발소리만으로 상대방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어찌 됐든 취할 행동은 두 가지였다.
 
 도망가든가, 아니면 기다리든가.
 
 물론 이성적으로 보자면 지금 당장 도망가야 한다. 하지만 ‘어쩌면?’ 하는 한 줄기 기대감이 도하의 발길을 붙잡았다. 만약 도하와 같은 사람이라면?
 
 게다가 지금 와서 도주는 무리일지도 몰랐다. 상대방은 멀리서도 그를 정확히 포착하고 꾸준히 접근해 오고 있었다. 길도 모르는 그가 뿌리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 일단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기다리기로 한 도하는 상의를 벗어 온몸을 문댔다. 하루 온종일 숲을 헤매고 다녀서 그런지 금세 땀으로 축축해졌다. 그는 그것을 수풀 너머로 휙! 던졌다.
 
 혹시 몰라 바람이 지나가는 곳을 택했다.
 
 다음으로 한 일은 무기를 찾는 것이었다. 때마침 바닥에 알맞은 길이의 나뭇가지가 떨어져 있었다. 주변을 더 뒤져 뾰족한 돌멩이 하나도 손에 넣었다.
 
 도하는 입이 터져라 막대를 문 채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다. 도중에 기껏 발견한 돌멩이가 아래로 떨어졌다. 하지만 다시 내려가기엔 시간이 없었다.
 
 울창한 녹음 사이에 몸을 숨긴 도하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이제 바로 지척! 그는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곧 모습을 드러낼 상대를 기다렸다.
 
 ‘왔다!’
 
 잠시간의 기다림 끝에 이윽고 상대방이 저물어 가는 태양 아래 정체를 드러냈다. 다리, 몸통, 팔, 머리가 뚜렷한 그것은 분명 사람의 형상이었다.
 
 ‘역시 사람이었구, 헉!’
 
 반색하던 도하는 곧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수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실루엣은 분명 사람의 것! 하지만 무언가가 이상했다.
 
 일단 추적자는 두 발로 걸어 다녔다. 눈과 귀가 두 개, 코와 입이 하나. 이목구비의 개수도 사람과 같았지만 그게 꼭 사람이라는 말은 아니었다.
 
 “크륵.”
 
 추적자의 녹색 피부가 땀으로 번들거렸다. 시선을 조금 더 위로 올려 보면 험상궂은 입이 나오고, 그 양옆에 돋아난 사람 검지만 한 길이의 어금니가 보였다.
 
 반쯤 벌어져 걸쭉한 침이 뚝뚝 흘러내리는 입안의 치아도 사람의 그것과는 달랐다. 퉁방울만 한 눈, 작은 키는 차라리 구전 속의 도깨비와 닮아 있었다.
 
 ‘유, 유전자 조작?’
 
 도하는 솟구치는 섬뜩함과 혐오감을 억누르며 추적자의 행동을 지켜봤다.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던 추적자는 도하의 속옷이 떨어진 수풀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어느새 늘어뜨렸던 손도끼는 중단에 둔 채였다. 그것만으로도 추적자의 목적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그는 도하를 도끼로 토막 내 버릴 심산이었다.
 
 스륵, 스륵.
 
 추적자의 발걸음은 사뭇 신중했다. 그야말로 재규어가 사냥감에게 다가가듯 1분 내내 열 걸음도 걷지 않았다. 풀이 눕는 소리가 들려도 바람 탓이라 착각하도록!
 
 그렇게 수풀 바로 앞까지 다가간 추적자는 ‘이때다!’ 하는 얼굴로 도끼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수풀을 향해 팍! 찍어 버렸다.
 
 “크릉?”
 
 기대하던 손맛이 느껴지지 않자 추적자는 도끼를 들어 올려 살펴봤다. 날 끝에 매달린 속옷이 그를 놀리듯 흔들렸다. 그는 못내 분한지 킁! 콧김을 내뿜었다.
 
 도하는 그 장면을 지켜보며 고민했다.
 
 ‘지금이라도 도망가야 하나?’
 
 이미 상대방과 대화를 나눠 보겠다는 멍청한 생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대화는 고사하고 머릿속에서 경종이 맹렬하게 울어 댔다. 위험신호였다.
 
 도하가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추적자는 빠르게 도하의 자취를 거슬러 올라왔다. 그리고 마침내 도하가 숨은 나무의 지척까지 다다라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제발 그냥 가라!’
 
 도하는 혹여나 추적자가 시선을 느낄까 싶어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면서도 헛짓이라고 생각했다. 냄새만으로 속옷을 찾아내는 후각이 사람을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막대기를 쥔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문득 추적자의 숨소리가 멈췄다. 도하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나뭇잎 사이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보인 것은 짐승 같은 벽안! 그는 줄곧 도하를 노려보고 있었다.
 
 “킁!”
 
 잘 걸렸다는 듯 투레질하는 추적자의 눈동자에는 확고한 이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도하는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그의 내심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추적자는 ‘먹기’ 위해 사냥을 나온 것!
 
 “이런 염병!”
 
 파악!
 
 가지를 박차고 뛰어내린 도하는 추적자의 정수리를 노리고 막대기를 휘둘렀다. 나름 회심의 일격이었지만 추적자는 이를 피하지도 않고 오른손만 내밀어 막아 냈다.
 
 낙하 속도가 있으니 제법 충격이 있었을 터인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내려친 도하도 공격이 먹히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숫제 바위를 친 느낌이었다.
 
 도하는 낙담하지 않고 무릎을 굽혀 낙하의 충격을 완화했다. 잰 듯한 타이밍으로 날아오는 주먹을 튕기듯 일어나 피한 그는 통렬한 중단차기를 날렸다.
 
 퍼억! 정확히 꽂혀 들어간 일격이었지만 역시나 보는 것만 그랬다. 감각적인 측면으로는 아무런 시원함도 전해져 오지 않았다. 추적자의 화만 돋웠을 뿐이었다.
 
 “크아아아아!”
 
 비리비리한 사냥감에게 두 번이나 공격당했다는 사실이 치욕적이었는지, 추적자는 분노의 함성을 내지르며 도하에게 달려들었다. 직후 도끼가 바람을 갈랐다.
 
 쉬익!
 
 콧잔등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가는 도끼날에는 군데군데 녹이 슬어 있었다. 하얀 날과 도낏자루에 덕지덕지 말라붙어 있는 검붉은 핏자국이 생생했다.
 
 겨우겨우 도끼를 피한 도하는 오싹 돋아나는 소름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선회한 도끼가 도하의 정수리 바로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도하는 반사적으로 막대기의 양 끝단을 잡고 들어 올렸다. 하지만 애초에 얇은 나무 막대로 도끼를 막는다는 발상 자체부터가 잘못된 일이었다.
 
 쩌억!
 
 장작을 패는 듯한 소리와 함께 도끼가 막대기에 푹! 박혀 들어갔다. 그래도 덕분에 찰나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도하는 그 틈을 이용해 몸을 뒤로 던졌다.
 
 한참을 굴러 가 멈춘 도하는 정신없이 주변을 더듬었다. 아까 떨어뜨렸던 돌멩이가 손에 착 감겨 왔다. 도끼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허억, 허억!”
 
 “크르륵!”
 
 짧은 공방이었지만 도하의 등줄기는 이미 식은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눈앞에서 도끼날이 오락가락하는데, 긴장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있어야지 말이다.
 
 반면 녹색 피부의 추적자는 여유만만이었다. 그는 쥐를 희롱하는 고양이처럼 결정타를 날리지 않고 도하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호흡도 처음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것도 이내 질린 모양인지, 추적자는 도끼를 까딱거렸다. 도하도 주먹도끼를 마주 들어 올려 자세를 잡았다. 두려웠지만 이상하게도 떨리지는 않았다.
 
 “크아아아아!”
 
 괴성을 지른 추적자가 확! 짓쳐들어왔다. 도하는 바로 성큼 물러섰다. 피한다고 피했는데, 애석하게도 도끼날이 그의 허벅지를 긁고 지나갔다. 피가 팍 튀겼다.
 
 다행히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었지만, 출혈이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고 싸우는 와중에 지혈할 수도 없으니 끝은 뻔했다. 더군다나 상처는 갈수록 늘어만 갔다.
 
 ‘뭐 이런, 제기랄! 내가 왜 이런 놈하고!’
 
 도하는 세상의 부조리함에 이를 갈았다. 평범한 고등학생인 자신이 왜 이런 곳에서 괴물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인가! 문득 억울해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그러나 우는 것도 살아남아야 가능한 일!
 
 도하는 그 뒤로도 몇 번의 공격을 시도했지만 전부 헛짓이었다. 애초에 무기의 길이 차이가 너무나도 심한 탓에 대적 자체가 불가능했다.
 
 흉기 대 흉기, 특히 날붙이 대 날붙이의 싸움에서는 거리가 곧 힘이고 승리의 향방이었다. 아무리 단검을 귀신같이 놀려도 장검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 한다.
 
 하물며 도하는 싸움의 고수 같은 실력도 아니었다. 그런 주제에 단검을 들고 장검과 대적하는 꼴이니, 간신히 피해 내는 작태가 용할 지경이었다.
 
 “커헉!”
 
 도하가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빠르게 접근한 추적자가 발을 내질렀다. 도하는 미처 피하지도 못하고 퍼억! 복부를 그대로 얻어맞고 말았다.
 
 추적자의 힘이 어찌나 센지, 도하는 저만치 날아가 나무 등걸에 등을 호되게 부딪치며 바닥을 굴렀다. 숨이 턱 막혀 오는 가운데, 추적자는 저벅저벅 다가왔다.
 
 “염, 염병!”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지만 이대로 주저앉아 목을 헌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도하는 쿨럭쿨럭 마른기침을 토하면서도 사력을 다해 일어났다.
 
 쉬익!
 
 그리고 막 뒤를 돌아본 도하는 빠르게 떨어져 내리는 도끼날을 보고 모골이 송연해졌다. 곧이어 쩌억! 정체불명의 소리가 들리고, 눈앞에서 새하얀 불꽃이 튀겼다.
 
 어깨의 격통은 맨 마지막이었다.
 
 “으아아아아악!!”
 
 공황 상태에 빠진 도하는 핏발이 잔뜩 선 눈을 부릅뜨며 고함을 내질렀다. 그 삶의 집념이 가득 담긴 눈빛에 추적자는 괜스레 섬뜩해져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도끼가 빠지지를 않았다. 그렇다면 바로 놓고 물러났어야 했는데, 다 잡은 사냥감이라고 방심하며 억지로 빼려 한 것이 화가 됐다.
 
 파악!
 
 추적자의 주저하는 순간을 절묘하게 파고든 도하가 앞으로 크게 한 발짝 나아갔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그의 어깨에서 푸악! 피가 분수처럼 터졌다.
 
 하지만 이미 각오한 바!
 
 도하는 그때까지도 놓지 않고 있던 돌을 위로 올려쳤다. 사각에서 시작된 공격인 탓에 한발 늦게 눈치챈 추적자가 피하려고 고개를 뒤로 확! 젖혔다.
 
 하지만 딱 한 걸음이 부족했다.
 
 퍼억!
 
 “끄우에에엑!!”
 
 도하의 전력을 다한 일격이 추적자의 안면에 작렬하고, 주먹도끼가 추적자의 안와를 함몰시키며 폭 들어갔다. 그는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부여잡았다.
 
 현명한 도하는 상대의 고통을 감상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즉시 다리를 걸어 추적자를 주저앉힌 다음 결정타를 먹일 준비를 서둘렀다.
 
 그즈음 용케도 정신을 차린 추적자는 한쪽 눈으로나마 도하를 무시무시하게 노려봤다. 도하는 섬뜩한 두려움을 느끼며 온 힘을 다해 그의 정수리를 내려찍었다.
 
 빠악!
 
 끔찍한 소리와 함께 축 늘어진 추적자의 몸이 부르르 경련했다. 도하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면서도 간신히 일어나 재차 그의 얼굴을 퍽퍽퍽! 내리찍었다.
 
 같은 행위를 한참이나 반복하던 도하는 돌을 내던지고 옆에서 나뒹구는 도끼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머리를 찍자 쩍! 소리와 함께 끔찍한 광경이 펼쳐졌다.
 
 “우욱, 우웨엑!”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는 모습에, 도하는 땅에 머리를 박고 토악질을 해 댔다. 누런 위액 위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며 기괴한 색감을 만들어 냈다.
 
 “사, 살았다.”
 
 다시금 추적자의 시체를 확인한 도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털썩 주저앉았다. 수차례 확인 사살을 할 만큼 추적자는 두렵고도 무서운 존재였다.
 
 목숨을 건 투쟁에서 승리했지만, 도하도 썩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어깨에서는 피가 문자 그대로 샘처럼 퐁퐁 솟아났고, 도끼가 지나간 허벅지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지, 지혈. 지혈해야…….”
 
 도하는 어지러운 정신을 수습하며 상의를 벗어 결대로 쭉쭉 찢었다. 그러고는 길게 매듭지어 상처가 난 어깨의 윗부분을 꽉 묶어 지혈을 시도했다.
 
 겨우 긴박에 성공한 도하는 자투리 천을 뭉쳐 상처를 꾹 압박했다. 피는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사실 멈춰도 더러운 천 탓에 파상풍으로 죽을 것만 같았다.
 
 ‘도끼에 녹도 있었지.’
 
 도하는 점성 높은 침을 퉤! 내뱉으며 힘겹게 일어섰다. 이대로라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움직여 근처의 인가나 사람을 찾아내야만 했다.
 
 비틀비틀 걸어가던 도하는 얼마 가지도 못하고 추적자의 근처에 몸을 누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역시 세상사, 승자도 패자도 없다는 말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아니, 뭐 이런 개 같은 상황이…….”
 
 도하는 허탈하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봄날 아지랑이처럼 가물거리는 시야에 무언가가 잡혔다. 네모반듯한 나무로 짜인 갈색의 천장이었다. 오래된 시골집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정겨운 광경이었다.
 
 ‘나, 살아 있나?’
 
 물에 젖은 솜처럼 푹 늘어져 있던 도하는 겨우 상황을 인지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로 꼼짝없이 골로 가겠다 싶었는데, 누군가가 구해 준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몸이 꼼짝하지를 않았다. 고개 하나 까딱하는 것조차 할 수가 없었다. 대신 눈알은 데구루루 잘만 굴러 갔다. 옆으로 세숫대야가 보였다.
 
 꽈악, 쪼르르륵.
 
 누군가의 손이 물수건을 쥐어짰다. 위치상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도하는 분명 여자일 것으로 생각했다. 고생한 흔적이 가득한 손이었지만 작고 부드러워 보였다.
 
 이불을 살짝 걷어 낸 손이 도하의 어깨를 정성스럽게 닦아 냈다. 동시에 끔찍한 통증이 찾아왔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현실감이 결여된 듯한 아픔이었다.
 
 “끄으…….”
 
 도하가 신음을 흘리자, 상처를 닦던 여자가 깜짝 놀라며 바라봤다. 여전히 희미한 시야 사이로 그녀의 얼굴이 들어왔다. 다행이라는 듯 미소 짓고 있었다.
 
 “……?”
 
 그녀가 뭐라고 말했지만, 도하는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귓가에 벌 떼가 들고 일어난 듯 윙윙거리는 이명이 끊이지를 않아서였다.
 
 도하는 게게 풀린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그녀는 다 안다는 듯 웃어 주며 걷었던 모포를 도로 덮어 준 뒤 양동이와 수건을 챙겨 들고 나갔다.
 
 끼익.
 
 문 열리는 소리가 두 번 울리고, 여자가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나무 그릇을 들고 있었다. 다가온 그녀가 도하의 머리를 받쳐 줬다.
 
 도하는 여자가 먹여 주는 죽 같은 음식을 꼴깍꼴깍 잘도 받아먹었다. 반가량을 먹자 여자는 그를 도로 눕혀 줬다. 눈을 감기가 무섭게 수마가 찾아왔다.
 
 도하는 오랜만에 단잠에 빠져들었다.
 
 
 
 “으으.”
 
 점점 호전되어 가던 도하의 상태는 갑작스레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통나무처럼 딱딱하게 굳은 몸으로 연신 신음만 흘려 댔다. 오한과 둔통도 번갈아 찾아왔다.
 
 여자가 도하를 발견한 것은 마을 뒤편의 숲 속에서였다. 값비싼 버섯을 채취하려 숲 깊숙이까지 들어갔다가 시체나 다름없는 도하와 만났던 것이다.
 
 20대 초반의 여자가 타인의 도움 없이 건장한 청년을 업고 숲을 빠져나가는 일은 전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기어코 도하를 집까지 데리고 왔다.
 
 그저 안쓰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렇게나 착한 심성의 소유자인 그녀가 도하의 병세가 악화했다고 도로 버릴 리는 만무했다. 그녀는 이제 물도 제대로 못 삼키는 도하를 성심성의껏 돌봐 줬다.
 
 꾹꾹.
 
 여자는 시간이 날 때마다 점점 굳어져 가는 도하의 몸을 주물러 줬다. 식사 때도 반을 넘게 흘렸지만 언짢은 기색 하나 없이 힘내라며 도하의 손을 꼭 잡아 줬다.
 
 심지어는 대소변까지 받아 내며 쾌차에 필요한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도하는 극심한 발열에 혼절하고 깨어나기를 반복하면서도 고마움에 눈물을 흘렸다.
 
 헌신적인 여자의 간호 덕분인지, 도하는 일주일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게 됐다. 그래 봤자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정도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녀에게 감사를 표현하기에는 말이다.
 
 도하는 일어나 여자에게 큰절을 올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
 
 여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으, 진짜 환장하겠네.”
 
 도하는 여자를 앞에 두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녀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고, 도하가 잘못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이 빌어먹을 상황이 문제였다.
 
 “그…… 아이엠 프롬 코리아.”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말해 봤지만, 여자는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만 했다. 벌써 한 시간째 반복되는 상황에 도하의 속은 아궁이처럼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침대에서 일어난 도하는 여자에게 감사의 절을 올렸었다. 잠시 당황하던 그녀는 이내 싱긋 웃으며 겸양으로 ‘짐작’되는 말을 해 줬다.
 
 문제는 도하가 그녀의 말을 단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든 도하는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결과는 같았다.
 
 아연한 도하는 조금이라도 할 줄 아는 언어란 언어는 다 꺼내 봤다. 한국어는 물론이고 영어, 일어, 중어, 불어 등 여러 외국어로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여자는 그 어떠한 말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녀도 다양한 언어를 말해 줬지만 흡사 짜고 치는 것처럼 다 모르는 언어였다.
 
 “아아아…….”
 
 깊은 한숨을 내쉰 도하는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키며 “도하.” 하고 소개했다. 다행히 이건 알아들었는지 그녀도 도하와 같은 방법으로 “사니델.” 하고 말해 줬다.
 
 하지만 통성명을 했다고 막막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사니델은 시무룩한 도하를 염려스럽게 바라보다가, 무언가 말을 한 뒤 아기를 안고 나가 버렸다.
 
 도하는 멀뚱멀뚱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지만 그녀는 오래도록 소식이 없었다. 아마 밖에 무슨 용무가 있다거나, 아니면 일을 하러 간다는 말이었던 것 같았다.
 
 사니델을 기다리는 동안 도하는 주변을 살펴봤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눈은 달려 있었다. 아직 밖에 나갈 만큼 몸이 회복된 것은 아니어서, 우선 집안을 탐색했다.
 
 “그러니까, 일단 정리를 해 보자.”
 
 먼저 도하를 구해 준 사니델은 20대 초반의 젊은 여자였다. 갈색 눈에 갈색 머리카락 그리고 피부도 비슷한 색이었다. 피부가 어두운 동양인의 느낌이었다.
 
 그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가구.
 
 다섯 평 남짓한 방 안에는 그 흔한 플라스틱 하나 보이지 않았다. 대신 온통 나무들 천지였다. 수프를 떠먹여 줬던 숟가락도 나무였고, 담고 있던 그릇도 나무였다.
 
 그밖에 침대도, 의자도, 바닥도 전부 같았다. 집에서 나무가 아닌 것이 있다면 오직 흙을 바른 벽과 한쪽 구석에 만들어져 있는 작은 벽난로 정도가 전부였다.
 
 “너무 친환경적인데.”
 
 이렇듯 사니델의 집에서는 발달한 문명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간혹 아토피가 심한 자녀를 둔 가정이 이러고 산다고 들었지만, 그건 아닌 듯싶었다.
 
 사정은 사니델이 입고 있던 옷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녹색 치마와 상의를 입고 있었는데, 재질이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최소한 합성섬유는 아니었다.
 
 “저게 무슨 천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제기랄, 나도 모르겠다!”
 
 한탄하듯 외친 도하는 도로 누워 버렸다. 고민한다고 당장에 뭐가 어떻게 되는 일도 아니었다. 몸이 낫고 밖에 나가 공중전화를 찾으면 전부 해결될 문제였다.
 
 그래도 도하는 불안감에 밤새워 뒤척였다.
 
 
 
 “꺄르르륵.”
 
 이제 막 돌이 지난 사니델의 어린 딸이 의자를 잡고 우뚝 섰다. 며칠 전부터 걸음마를 연습하려는 듯 저렇게 가구를 잡고 일어섰다, 앉기를 반복했다.
 
 사니델은 사랑스러운 딸을 바라보며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어머니만의 얼굴인지라, 도하는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바라봤다.
 
 “리아넨.”
 
 도하가 부르자 바닥에 앉아 있던 아이 리아넨이 아장아장 기어 왔다. 도하는 아이를 들어 품에 안았다. 아이는 기특하게도 울지 않고 까르륵! 웃기만 했다.
 
 손짓 발짓으로 대화를 나눠 보니, 사니델은 이제 겨우 19살이라고 했다. 처음 20대 초반이나 중반으로 봤던 것은 고된 농사일로 나이가 들어 보였던 탓이었다.
 
 도하는 자신과 겨우 한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는 그녀에게 경외심을 느꼈다. 더욱이 리아넨은 그녀의 두 번째 아이라고 했다.
 
 “첫째는 어디 갔나요?”
 
 눈치 없는 도하는 손가락을 꼽으며 물어봤다가, 사니델의 애통한 얼굴을 봐야만 했다. 그걸로 학습한 도하는 남편의 일을 묻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해가 저물고 리아넨이 잠에 빠져들자 도하와 사니델은 촛불을 켜 놓고 손짓으로 대화를 나눴다. 도하는 그런 와중에 조금씩 말을 배워 가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3장 보름달
 
 
 
 이틀이 지나자, 도하의 몸은 산책하러 나갈 수 있을 만큼 회복됐다. 아직도 움직일 때마다 전신이 욱신거렸지만 가장 심했던 어깨의 상처는 다 아물었다.
 
 사니델은 팔을 이리저리 돌려 대는 도하를 보고 깜짝 놀라 달려왔다. 그리고 붕대를 풀어 상처를 확인했는데, 흉측하게 갈라졌던 상처는 흉터만 남은 채였다.
 
 사실 도하도 어깨가 완치되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최소 힘줄이 잘리거나, 아니면 외팔이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도끼는 그만큼 깊숙이 박혔었다.
 
 끼익.
 
 도하는 사니델의 부축을 받아 집 밖으로 나섰다. 나무문을 열자마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 왔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집 주변을 둘러싼 키 작은 벽돌 담장이었다.
 
 담장 한편에는 판자를 덧대어 만든 닭장이 있었다. 안에는 서너 마리의 닭들이 꼬꼬댁거리며 사료를 먹고 있었다. 어쩐지 아침마다 뭐가 푸드덕거린다 싶었다.
 
 닭장 안에는 생뚱맞게 잿빛 멧비둘기가 한 마리 끼어 있었다. 도하가 바라보자 다가와 구구거렸다. 닭과는 달리 이놈은 사람이 낯설지 않은 모양이었다.
 
 솨아아아아.
 
 정강이까지 자라난 수풀이 불어오는 바람에 속절없이 흔들리며 도하의 발치를 간질였다. 파릇파릇한 풀과 후덥지근한 바람을 보면 한창 여름인 모양이었다.
 
 뒤쪽으로는 도하가 발견된 숲의 경계가 시작되고 있었다. 본래 이 집도 숲 속에 있었던 것 같았다. 나무를 다 베다 보니 숲이 저만치 후퇴한 것이다.
 
 그 증거로 집 주변에는 희생된 나무들의 그루터기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꼭 무질서하게 늘어선 묘지의 비석들 같아, 어딘지 모르게 음산한 느낌이 들었다.
 
 언덕 아래로는 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경치는 좋은데 여기가 도대체…….”
 
 도하는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마침 사니델의 집은 언덕 위에 있어서 아래에 펼쳐진 마을의 풍경을 한눈에 다 담을 수 있었다.
 
 수백 호가량의 마을은 온통 나무집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아스팔트 대신 갈색 흙길 위에는 다양한 복장의 사람들이 느긋하게 길을 걸어가는 중이었다.
 
 마을 앞에는 광활한 개활지가 펼쳐져 있었다. 대부분 농지로 쓰이는 듯 다 익은 보리가 누런 이삭을 가득 팬 채 황금빛 물결을 이루며 솨아아 파도쳤다.
 
 “저건 도대체 왜 세워 놓은 거야?”
 
 특이하게도 나무 방책이 농지와 개활지를 구분하고 있었다. 무얼 막으려 쌓아 둔 것인지는 몰라도, 높이 4미터의 방책은 마을과 농지를 둥글게 감싸고 있었다.
 
 방책의 가운데 출입문에는 경비로 보이는 사람들이 창을 들고 서 있었다. 양옆의 높은 망루에도 사람이 한 명씩 올라가 있는 모습이 작게나마 눈에 들어왔다.
 
 무엇보다 도하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마을의 구성물이었다. 그 안에는 아스팔트나 가로등, 자전거, 오토바이, 플라스틱 등 문명의 잔재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사니델이 쓰는 말을 듣고 이곳이 어딘가 먼 외국이라는 사실은 익히 짐작하고 있었던 도하였다. 하지만 이건 좀 아니잖은가! 혹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도하는 돌연 치미는 현기증에 비틀거렸다. 옆에 나란히 서서 마을을 내려다보던 사니델이 깜짝 놀라 그를 잡아 줬다. 도하는 그녀에게 더듬더듬 물었다.
 
 “도, 도대체 여기가 어디죠?”
 
 혼란스러운 마음에 한국말이 튀어나오자 알아듣지 못한 사니델은 대답 대신 걱정스러운 얼굴로 도하의 볼을 어루만져 줄 뿐이었다. 문득 눈물이 핑 돌았다.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도하는 땅바닥을 가리키며 줄기차게 손가락질을 해 댔다. 사니델이 이해하지 못하자, 바닥에 여러 채의 집들을 그려 보였다.
 
 “음?”
 
 입을 비죽 내민 사니델은 한참을 고민하더니 아! 하고 손바닥을 탁 쳤다. 그리고 그녀는 지명, 혹은 국가 이름으로 생각되는 세 단어를 도하에게 알려 줬다.
 
 “햄들, 라니스, 루노스.”
 
 먼저 사니델은 마을을 손가락질하며 햄들이라고 말했다. 도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도 바닥에 쭈그려 앉아 무언가를 끼적였다. 그가 그렸던 마을이었다.
 
 그림은 햄들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
 
 다수의 햄들을 그린 그녀는 동그라미를 그려 햄들들을 하나로 묶어 라니스라고 칭했다. 그런 뒤 햄들과 라니스를 표시하는 글자가 무엇인지를 적어 가르쳐 줬다.
 
 “햄들, 라니스.”
 
 도하는 단어를 찍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사니델은 라니스라는 단어를 여러 개 적고 다시 원으로 묶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루노스라고 했다. 도하는 그림을 들여다보며 나름대로 정리했다.
 
 “그러니까 이 마을 이름이 햄들이고…… 아니, 그냥 마을이라는 뜻인가? 어쨌든 라니스는 햄들이 많이 모였으니까 나라 정도 되겠네. 그리고 아홉 개의 나라가 있는 대륙 전체를 루노스라고 부른다…… 시발.”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도하는 울 것 같은 얼굴이 됐다. 옆에서 사니델이 어깨를 쓸어 주며 위로해 줬다. 리아넨도 ‘꺄아’ 하면서 손짓했다.
 
 “하아아…….”
 
 도하는 절망을 담아 길게 탄식했다.
 
 그 모습이 마치 순식간에 나이를 먹어 버린 듯했다.
 
 
 
 다음 날, 도하는 사니델과 함께 마을을 둘러봤다.
 
 인구가 1천 정도 되는 마을은 제법 넓었다. 가운데의 널따란 광장을 중심으로 네 갈래의 대로가 뻗어 있고, 그 길을 따라 관청과 집들이 오밀조밀 밀집해 있었다.
 
 ‘계획도시구나.’
 
 언덕에서 조망했을 때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가정집과 상점의 경계가 뚜렷한 것을 보고 확신했다. 상점은 식료품 가게나 잡화점, 여관, 식당 등이 있었다.
 
 상점도 있었지만, 주민의 절대 다수는 농업 종사자들이었다. 덕분에 거리는 한산했다. 일손이 안 되는 노약자들과 장사치들, 외지인들만이 거리를 기웃거렸다.
 
 도하는 지나쳐 가는 사람들을 자세히 관찰했다. 대체로 사니델과 비슷한, 짙은 갈색 피부의 인종들이었다. 간간이 백인처럼 새하얀 사람도 보였다.
 
 도하는 오가는 이들의 허리춤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저거 설마 진짜 칼은 아니겠지?’
 
 외지인들은 대부분 허리춤에 칼을 차고 있었다. 살벌한 분위기가 어깨라도 부딪혔다간 칼부림이 일어날 것 같았다. 도하의 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그런데 하고 많은 사람 중 도하와 비슷한 외모를 가진 행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회색 머리카락은 있어도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는 보이지 않았다.
 
 사니델이 가끔 그의 머리를 만져 보거나 눈을 빤히 들여다봤던 것은 아마 신기해서 그랬던 모양이었다. 도하와 같은 외모는 정말 드문 것 같았다.
 
 “아이고.”
 
 “도하?”
 
 도하는 고작 10분 남짓의 산책으로 진이 다 빠져 버리고 말았다. 사니델이 그 기색을 읽고 이름을 불렀지만, 설명할 수 없는 그는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아마존 밀림같이 미지의 장소라고 하기에는 독자적인 문명이 있고. 그런데 지금 세상에서 그게 가능한가?’
 
 사니델의 집에서 주변을 조망했을 때 도하는 일자로 그어진 대지와 푸른 하늘의 경계를 목격했다. 날씨도 맑았으니, 평원의 넓이는 못 해도 5㎞ 이상일 것이다.
 
 ‘미지의 장소’ 설은 여기서부터 막혔다. 클릭 몇 번만 하면 일반인도 전 세계의 위성 지도를 손에 넣을 수 있는 세상에서, 이런 미개척지가 존재할 수 있을까?
 
 ‘아아, 설마 여긴…….’
 
 도하는 치미는 어지럼증을 애써 참으려 땅바닥만 내려다보며 걸었다. 그 심정을 까맣게 모르는 사니델은 도하의 발걸음이 느려지자 소매를 잡고 이끌었다.
 
 “도하.”
 
 “어, 사니델.”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어 보인 사니델은 마을 구석의 식당으로 도하를 안내했다. 들어가니 이미 열댓 명의 선객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다들 사니델과 친밀한 관계인지, 너도나도 대화를 멈추고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활기차게 인사를 받아 주자 도하도 억지로 하하! 웃어 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도하를 가리키며 무어라 물었다. 그러자 사니델이 설명해 줬는데, 중간에 도하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오는 걸 봐서는 그를 소개하고 있는 듯했다.
 
 “도하.”
 
 사니델이 부르자 대충 눈치챈 도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먹서먹한 얼굴로 인사를 해 보였다. 사람들은 밝게 웃으며 너도나도 본인들의 이름을 밝혔다.
 
 이어진 저녁 식사는 두어 종류의 빵과 으깬 감자, 과일 샐러드, 양젖을 끓여 만든 수프와 닭 두 마리였다. 개중에는 알코올 냄새가 진한 과일주도 끼어 있었다.
 
 도하는 술을 마실 기분이 아니었지만, 사니델이 하도 권하는 통에 입만 살짝 댔다.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달짝지근한 냄새가 입안에 확 퍼졌다.
 
 ‘아, 완전 가시방석이네.’
 
 노골적으로 날아오는 적의 섞인 시선에, 도하는 오늘로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적대적인 눈빛의 주인공들은 전부 젊은 남정네들이었다.
 
 아마 사니델은 인기가 참 많은 듯했다. 거리를 걸으며 본 여자 중 그녀만큼 뛰어난 미인은 본 적이 없으니 분명할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지금 과부가 아닌가!
 
 그러니 남자들의 생각은 뻔했다. 곤궁한 집안이니만큼 수작 몇 번 걸면 사니델이 쉽게 넘어올 것이라 여기고 이제껏 공을 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도하가 나타났으니!
 
 ‘애는 어떻게 하려고?’
 
 예쁘면 그만인 것은 어딜 가나 공통인 모양이었다.
 
 부담 가득한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어느새 날은 어둑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마을의 대로는 대낮처럼 환하게 밝았다. 도하는 넋을 놓고 주위를 둘러봤다.
 
 촛불 따위를 킨 것은 아니었다. 빛은 길 곳곳에 일렬로 늘어서 있는 긴 막대기에서 펴져 나오고 있었다. 대충 현대의 가로등과 비슷한 용도인 듯했다.
 
 ‘저건 또 뭐야?’
 
 도하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니델을 이끌고 다가갔다. 1m 정도의 막대기에서 나오는 빛은 그렇게 강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파장이 긴지 넓은 범위를 포용했다.
 
 막대는 가로등과는 다르게 눈이 부시지도 않고 은은하여 인공적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도하의 취향에 딱 맞았지만, 그는 전혀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가 아는 범위 내에서 세상에 이런 종류의 가로등은 존재하지 않았다. 즉, 신기술이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벌써 이렇게 보급됐을 리가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혹?
 
 “꺄아.”
 
 막 일그러진 얼굴로 결론을 내리려는데, 리아넨의 호기심 어린 칭얼거림이 들려왔다. 옆을 돌아보니 리아넨이 하늘을 향해 손을 뻗고 꼼지락대고 있었다.
 
 도하와 사니델은 ‘위에 뭐가 있나’ 하고 위를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은 어느덧 완연한 어둠의 장막을 드리우고 만물을 보듬어 안고 있었다.
 
 무서울 만치 새까맸지만 두려움 따위의 감정은 들지 않았다. 마냥 어둠만 있는 것은 아닌 덕분이었다. 다른 의미로는 오히려 가로등보다 더 밝았다.
 
 “아…….”
 
 밤하늘의 이쪽에서 저쪽까지 은하수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별은 꼭 소금을 한 움큼 집어 후두둑 뿌린 것처럼 가득해서, 도무지 혼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생경한 도하와는 다르게, 사니델은 19년 동안 질리도록 바라봐 온 밤하늘이었다. 얼마간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녀는 칭얼거리는 리아넨을 달래며 비틀비틀 걸어갔다.
 
 그런데 도하가 따라오지를 않았다.
 
 뒤늦게 그의 빈자리를 깨달은 사니델이 뒤를 돌아봤다. 도하는 조금 전의 자세 그대로 하염없이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불러봤지만 미동도 하지 않았다.
 
 멍하게 서 있던 도하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하하! 이거 너무 흔한 설정 아냐?”
 
 도하는 달무리를 짓고 있는 달들을 바라봤다. 푸르고 붉은 모습이 꼭 종(種)이 다른 사과 같았다. 휘황한 두 개의 달은 도하에게서 마지막 힘을 빼앗아 갔다.
 
 가정했던 최악이, 달의 모습으로 현현했다.
 
 
 
 도하는 온종일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언뜻 봐도 아무런 매가리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 보통 중증이 아니었다. 과거에 딱 한 번, 저런 얼굴을 본 기억이 있는 사니델이었기에 걱정은 더 깊었다.
 
 열 살 때였던가, 용맹한 기사를 꿈꿨던 소꿉동무가 하나 있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마차에 치여 팔이 심하게 부러지더니, 검을 잡을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그때의 친구도 지금의 도하와 같은 얼굴을 했다. 아무런 희망도, 의욕도 없는 얼굴로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그러다 영영 돌아오지 못할 여행을 떠났다.
 
 몇 날 며칠을 안절부절못하던 사니델은 찬장에서 비장의 물건을 꺼냈다. 집 밖에서 멍하게 바람을 맞던 도하는 그녀가 눈을 질끈 감으며 내민 물건을 받아 들었다.
 
 “이게 뭐예요?”
 
 열어 보니 꿀에 푹 절인 과일 조림이었다.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난 듯 내용물은 다 흐물거렸다. 그래도 예사 과일이 아닌 듯 냄새가 향긋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간식일 뿐이었다. 도하가 ‘이걸 왜 주지?’ 하는 얼굴로 바라보자 사니델은 손짓으로 설명했다. 알고 보니 간식 주제에 대단히 귀한 것이란다.
 
 안에 들어간 과일들은 하나같이 최상급으로, 귀족들에게만 진상되는 것이라고 했다. 특히 꿀이 굉장했는데, 아슬아슬한 절벽에서만 소량 채취되는 석청이라고.
 
 이를 흙바닥에 끼적이며 설명한 사니델은 과일 하나를 집어 도하의 입속에 쏙 넣어 줬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녀는 끝내 손을 대지 않았다.
 
 도하는 돌연 가슴이 먹먹해졌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생각해 보면 참 염치없는 짓이었다.
 
 아무리 이곳 사람들이 17살이면 결혼을 한다지만, 그래도 19살에 갓난애 딸린 과부가 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보통은 아이를 버리고 새 삶을 찾는다고 했다.
 
 하지만 사니델은 리아넨을 키우며 억척스럽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도하는 은연중에 그녀를 다 큰 어른으로 여기며 기대고 의지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사니델은 지구의 여고생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감성을 소유하고 있었다. 혼자 있으면 외롭고 단 것을 좋아하는, 그런 평범한 여고생.
 
 “하하…….”
 
 도하는 자신의 한심함에 너털웃음을 흘렸다.
 
 고작 자신보다 한 살 더 먹은 사니델은 졸지에 늘어난 군식구를 먹여 살리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에만 몰두했다. 그런데 식객인 자신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인가?
 
 밥값은 고사하고 일주일 내내 달이나 쳐다보며 궁상이란 궁상은 다 떨고 있었다. 그것도 남자가 되어서. 웬만한 뻔뻔함으로는 못할 짓임이 분명했다.
 
 ‘난 여자한테 얹혀살 팔자인가?’
 
 도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 됐다.
 
 도하는 지금도 이곳이 어디인지 감도 잡지 못했다. 다른 세상인 것 같지만 실감도 안 나고, 또 그것이 맞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도.
 
 하지만 지금은 그따위 생각을 할 때가 아니라 현실에 순응해 움직여야 할 때였다. 자신을 구해 준 사니델을 위해서라도, 아니, 사람의 염치를 차리기 위해서라도.
 
 와삭.
 
 “이거 맛있네. 사니델도 먹어 봐요.”
 
 과일 조림을 씹어 삼킨 도하는 커다란 조각 하나를 집어 사니델의 입에 쏙 넣어 줬다. 단맛에 놀란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환하게 웃었다.
 
 도하는 열심히 입을 오물거리는 그녀에게 도로 과일 단지를 건네줬다. 사니델은 벌레가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스레 밀봉하고는 다시 찬장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녀는 곧 밭일을 하러 떠났다.
 
 ‘여기는 중세 시대 정도인가?’
 
 도하가 보기에, 이곳은 중세와 비슷했다.
 
 다만 알고 있던 지식과는 조금 달랐다. 도하의 상식으로 중세의 농민은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살아가던 존재들이었다. 가난 속에서 평생 일만 하다 삶을 마감하는.
 
 그런데 마을을 둘러보니 구걸하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거지는 고사하고 다들 키가 170㎝ 후반대로 큰 편에 속했다. 영양 공급이 평균은 된다는 방증이었다.
 
 게다가 오물이 득실거린다는 말과 다르게, 거리는 비교적 깨끗했다. 사람들도 항상 깔끔하게 하고 다녀서, 사니델만 해도 이틀에 한 번은 반드시 목욕했다.
 
 이런 마을에서 전문 기술을 지니지 못한 도하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농사 정도. 그래도 어렸을 적 시골에서 방학을 보낸 도하였다.
 
 ‘대충 어떻게든 되겠지.’
 
 굳게 마음먹은 도하는 가장 먼저 사니델의 일과를 관찰했다. 그녀의 하루는 단순하면서도 고달픔의 연속이었다. 아침, 점심, 저녁을 내내 노동으로만 보냈다.
 
 가장 먼저 아침에 일어나면 물을 길어 왔다. 그다음 엊저녁에 구워 놨던 빵으로 아침을 먹은 뒤, 장작을 패거나 닭들에게 모이를 주고는 밭으로 떠났다.
 
 해질 녘이 되면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었다. 그 뒤 날이 아직 저물지 않았으면 달걀을 내다 팔고, 만약 날이 저물었으면 촛불을 켜고 길쌈을 했다.
 
 그러면서 도하에게 이곳의 말을 가르쳐 줬다.
 
 도하는 물을 긷는 일부터 시작했다.
 
 마을 광장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가득 길어 오는데, 아무래도 집이 언덕에 있다 보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서너 번을 왕복해야 해서 힘은 배로 더 들었다.
 
 “도하!”
 
 그래서인지 아침에 일어나 물이 한가득 찰랑거리는 물통을 본 사니델의 얼굴은 환했다. 어쩔 줄을 몰라 하던 그녀는 쭈뼛거리다 도하를 꽉 끌어안기까지 했다.
 
 별것도 아닌데 지나치게 좋아하니 오히려 미안했다.
 
 물 떠오는 일이 고단하기는 했지만 대단할 것 하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이토록 기뻐하는 것은 도하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 그 자체이리라.
 
 평소와는 다르게 느긋한 아침을 보낸 사니델은 손도끼를 들고 장작을 패기 시작했다. 식기를 정리한 도하도 늦을세라 뒤따라가 그녀가 하는 양을 관찰했다.
 
 “로, 로.”
 
 사니델은 도하에게 잘 보라는 듯 손짓했다. 처음에는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도끼를 휘두르며 시범을 보여 주더니, 이내 가볍게 들어 올려 나무를 찍었다.
 
 사니델이 장작을 패는 모습은 신기 그 자체였다. 가는 팔로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도끼날을 휘둘러 장작을 툭툭! 두들긴다 싶으면 이내 쩍! 하고 두 동강이 났다.
 
 살짝 친 것 같은데도 어른 허벅지만 한 나무는 찰나를 버티지 못하고 양쪽으로 몸을 뉘었다. 사니델은 몇 번의 시범을 더 보여 주고 도하에게 도끼를 건넸다.
 
 손도끼는 겉보기와는 달리 제법 묵직했다. 도하는 장작의 위치를 잘 가늠한 뒤 도끼를 내리쳤다. 다행히 장작의 정수리 부분을 제대로 찍었다.
 
 “어럽쇼! 잘 안 되네.”
 
 손도끼는 장작에 살짝 박히기만 했을 뿐 쪼갤 기미는 쥐뿔도 보이지 않았다. 보기에는 쉬웠는데, 막상 직접 해 보니 의외로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어리둥절한 도하의 표정이 재미있는지 옆에서 지켜보던 사니델이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무안해진 도하는 장작을 바닥에 세워 놓고 전력을 다해 팍! 내리찍었다.
 
 도끼는 조금 전보다 더 깊숙이 박혔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여전히 사니델이 했던 것처럼 깔끔하게 쪼개지 못했다. 도리어 반발에 손만 찌릿찌릿 아파졌다.
 
 “후후후.”
 
 한참을 구경하던 사니델은 도하의 어깨를 툭툭 쳐 주고는 밭일을 하러 내려갔다. 입맛을 쩝! 다신 도하는 양손에 침을 퉤 뱉고는 도끼를 꽉 움켜잡았다.
 
 그리고 마구 내리찍었다.
 
 팍, 팍, 팍.
 
 부스러기만 속절없이 튀기자 오기가 생긴 도하는 하루를 꼬박 도끼만 휘둘렀다. 사니델이 밭일은 아직 무리라며 말렸기에 할 일은 이것밖에 없었다.
 
 사흘의 오후쯤 되자, 도하의 도끼질에도 어느덧 요령이 붙기 시작했다. 무심코 휘두른 도끼가 우연히 잘 맞았는지 사니델의 그것처럼 쫙! 갈라 낸 덕분이었다.
 
 도하는 당시 도낏자루를 타고 흘러 들어왔던 감각에 한참을 매달렸다. 처음에는 죽어도 안 되다가, 두 번째 성공한 이후부터는 간단하게 해낼 수 있게 됐다.
 
 “여긴가?”
 
 쭈그리고 앉아 가만히 장작을 들여다보던 도하가 도끼를 들어 툭! 찍었다. 기이하게도 마치 찍어 달라는 듯 울렁거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곳이 장작의 약점이었다.
 
 툭! 치면 팍! 동강이 나니, 도하는 곧 도끼질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쉬운 것을 지금껏 왜 못 하고 갈피를 못 잡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느새 쌓여 있던 장작이 동났다.
 
 “아! 속 시원하다.”
 
 마지막 장작을 처리한 도하는 반쯤 빈 물통을 도로 채워 놓고 몸을 씻었다. 냉골같이 차가운 물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 씻은 그는 햇볕 아래 몸을 널었다.
 
 깜빡 잠이 든 사이 집에 돌아온 사니델은 마당에 차곡차곡 쌓인 장작을 보고는 심하게 좋아했다. 그러면서 무안하게 머리를 긁적이는 도하를 쓰다듬어 줬다.
 
 비로소 작으나마 도움이 된 기분이었다.
 
 그렇게 1개월의 시간이 흘러갔다.
 
 
 
 “윰!”
 
 이른 아침, 입이 찢어지라고 하품을 하던 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사니델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묘하게 생기가 넘쳐 나는 웃음이 매력적이었다.
 
 “윰! 많이 졸려요?”
 
 “아뇨, 그냥 습관, 거예요.”
 
 이 주일 전부터 사니델은 도하의 이름이 낯설다며 윰이라는 귀여운 애칭을 만들어 줬다. 그러고 나서 ‘그렇게 불러도 돼요?’ 하고 허락을 받기에 도하는 대수롭잖게 여기고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쪽 세상에서 애칭이라는 것은 정말 친한 사람, 이를테면 가족이나 연인이 아니라면 입에 담지도 않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했다.
 
 그래서 도하는 조금 감동했다. 생면부지의 타인을 구해준 것은 물론이고 가족으로까지 대해 주다니! 웬만한 목석이 아닌 이상 감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내일부터 보리 수확에 들어가기로 했어요.”
 
 “나도, 도와, 주?”
 
 “그러면 정말 고마울 거예요. 몸은 이제 괜찮아요?”
 
 도하는 대답 대신 어깨를 두어 번 돌려 보였다. 예전에는 그래도 장작을 패면 조금 쑤셨는데, 이제는 그런 것도 다 사라져 장마가 내려도 쌩쌩했다.
 
 “그럼 부탁할게요. 윰이 얼마나 잘할지 기대돼요.”
 
 “하하! 기대, 마요. 나 안, 해 봤어요.”
 
 “아니에요. 난 윰처럼 그렇게 말을 빨리 배우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농사일도 금방 배울 수 있을 거예요.”
 
 도하는 그녀의 말에 멋쩍게 웃어 보였다.
 
 지구에 살 적에는 10년 넘게 영어를 배우고서도 자격증 하나 따지 못해서 쩔쩔맸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고작 한 달 배운 정도로 더듬더듬 회화가 가능했다.
 
 ‘사람들이 이래서 유학을 가는구나.’
 
 도하가 갑자기 똑똑해진 것은 물론 아니었다. 낮에 리아넨을 안고 마을을 돌다 보면 말 거는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덕분에 싫어도 그의 회화 능력은 일취월장했다.
 
 아마 그의 외모가 독특하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여행객이라는 사람은 대장간에서 장작을 패는 데까지 그를 따라와 집요하게 파고들어 여러 가지를 물어봤다.
 
 나중에 사니델에게 그자가 노예 상인이라는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랐다. 혹시 몰라 다른 대륙의 귀족이었다며 지구 이야기를 각색해 들려줬던 게 다행이었다.
 
 
 
 “이제 가요, 윰!”
 
 다음 날, 식사를 마친 도하는 사니델과 함께 집을 나섰다. 보리를 수확하기 위해서였다. 리아넨은 오늘의 애 보기 담당 할머니에게 맡겨 두고 밭으로 향했다.
 
 이제 막 동이 터 오는 무렵인데도 부지런한 농사꾼들은 일찌감치 나와 사각사각 낫을 갈고 있었다. 사니델도 촌장의 아들에게 낫 두 자루를 받아 숫돌에 갈았다.
 
 사람들이 다 모이자 촌장이 간단하게 설명했다.
 
 “오늘부터 나흘간 보리 수확에 들어가네. 매년 하는 일이지만 올해는 풍년이니 특히나 힘이 나는군. 모두 그렇지 않나? 그럼 뱀 조심하고, 슬슬 시작합세다.”
 
 촌장에게 구역을 할당받은 마을 사람들은 조원과 함께 흩어졌다. 도하도 사니델의 손을 잡고 같은 조원이 된 사냥꾼 집안의 사람들과 함께 움직였다.
 
 사니델은 걸어가며 여러 이야기를 들려줬다.
 
 알고 보니 농지 대부분은 영주의 소유라고 했다. 사람들은 마음이 맞는 몇몇 집끼리 소작을 신청하고, 일정한 농지를 받아다가 공동으로 재배한다고 말했다.
 
 다만 수확만큼은 온 마을 사람들이 합심하여 빨리 끝낸다고 했다. 모두에게는 맡은 지역을 다 끝냈어도 잠시 쉰 뒤 남의 구역을 도와주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자요. 손 베이지 않도록 조심해요.”
 
 “고마워요.”
 
 사니델은 도하에게 수확 시범을 보여 줬다.
 
 낫을 건네줄 때부터 알아봤지만, 사는 세상은 달라도 수확 방법은 대개 비슷비슷했다. 보리의 밑단을 잡고 낫으로 벤 뒤 어느 정도 모이면 구석에 쌓아 두면 된다.
 
 그러면 아이들이 밭을 돌며 보리를 회수, 탈곡 조에게 전달했다. 건장한 남자들이 도리깨질로 이삭을 털어 내면 이번에는 아낙들이 달려들어 체로 낱알만 골라냈다.
 
 ‘키가 없다는 것만 빼면 옛날과 비슷하네.’
 
 이런 것을 보면, 설혹 세상은 달라도 사람 사는 모습은 어디든 다 비슷한 것 같았다. 사람의 의지가 만든 흐름일까, 아니면 초월적 의지의 안배인 걸까?
 
 처음에는 어설프게만 보였던 도하도 시골에서 살았던 재간이 있어서 그런지 금방 능숙해졌다. 갈수록 보리를 베는 속도가 빨라지더니, 나중에는 아주 날아다녔다.
 
 “역시 잘하네요, 윰!”
 
 “아니, 뭘 이런 가지, 고…….”
 
 4시간여 만에 허리를 편 도하가 멋쩍게 말했다.
 
 본래라면 초심자인 도하는 분당 한 번씩은 허리가 끊어진다며 억새처럼 으악거리는 게 정상이었지만 그는 새참 때를 제외하면 한 번도 쉬지 않았다.
 
 덕분에 그가 할당받은 밭을 반나절 만에 해치울 수 있었다. 보통 하루가 꼬박 걸린다는 점을 생각하면 굉장히 빠른 속도였다. 같은 조원들이 엄지를 치켜세워 줬다.
 
 ‘이상하게도 안 지친단 말이야.’
 
 도하는 숲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던 이후 자신의 체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된 것을 깨달았다. 예전에도 체력에는 자신 있었지만, 이제는 숫제 기계가 된 느낌이었다.
 
 ‘하여간 나도 별일을 다 겪는구나.’
 
 도하는 허리를 두드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허리 주물러 드릴게요.”
 
 도하가 힘들어하는 줄 안 사니델이 뒤쪽으로 다가와 허리를 만지작거렸다. 옆구리가 유난히 약한 그는 악악거렸다. 사니델은 엄살 부리지 말라며 더 세게 눌렀다.
 
 마을 사람들이 둘을 보며 피식거렸다.
 
 수확은 나흘 내내 계속됐다.
 
 도하는 그동안 집 안에만 처박혀 있어 갑갑했다는 듯 도움을 원하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그리고 가히 일당백이라고 할 만큼 보리를 모조리 베어 냈다.
 
 사니델은 그런 도하의 옆을 따라다니며 물을 주거나 땀을 닦아 주며 알콩달콩 시간을 보냈다. 하마터면 배알이 꼴린 마을 남자들과 싸움이 일어날 뻔했다.
 
 “올해는 정말 풍년이네요.”
 
 “그래요? 잘, 모르겠, 작년엔?”
 
 “올해의 반 정도밖에 안 됐어요.”
 
 사니델은 아응! 허리를 펴며 말했다.
 
 과연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밝았다. 한국 같았으면 풍작이 들어도 곡물 값이 떨어진다며 울상을 지을 텐데, 이곳은 그런 것도 없었다.
 
 어차피 영주에게 바쳐야 하는 곡식은 소작의 3할이었다. 많이 수확하면 수확할수록 마을 사람들이 얻는 양도 많아졌다. 어쩌면 목돈을 만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렇게 보면 여기도 나쁘지 않네.”
 
 도하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수확이 끝난 다음 날, 수확제가 열렸다.
 
 수확제라고 해도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올 한 해 농사가 무사히 끝났고, 그리고 내년의 풍년을 바라는 마음에서 다 같이 모여 먹고 마시는 마을 축제였다.
 
 사람들은 광장에 커다란 모닥불을 피워 놓고 그 근처에서 축제의 시작을 기다렸다. 먼저 영주성에서 파견 나온 관리가 단상 위에 올라 사람들의 노고를 위로했다.
 
 다음으로는 신전에서 방문한, 대지의 신을 모시는 견습 사제가 기도문을 읊으며 마을 사람들과 대지를 대상으로 축복을 내렸다. 가장 호응이 좋은 부분이었다.
 
 마지막으로 촌장이 등장하자 사람들의 눈빛이 확 변했다. 촌장도 젊었을 적 저들 사이에 있었으니 그 심정을 잘 알았다. 정말 짤막한 말만 하고 후다닥 내려왔다.
 
 그러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수확제가 시작된다.
 
 마을 사람들은 모닥불의 화광을 받으며 그동안 못 다 한 이야기를 나눴다. 주점에서 협찬하고, 또 마을 공금으로 구매한 맥주 통이 광장 여기저기에서 굴러다녔다.
 
 한편에는 돼지 다섯 마리가 쇠꼬챙이에 걸려 느릿느릿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네 마리는 풍년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영주가 내렸고, 한 마리는 대장장이가 냈다.
 
 지난 1년간 수고했다는 덕담이 오가는 가운데, 마을 젊은이들이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앞으로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수확제의 진짜 주인공들이었다.
 
 젊은 남녀는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찾아가 살며시 손을 내밀었다. 거절한다면 뒷모습을, 허락한다면 상대의 손을 맞잡고 모닥불 앞에서 춤을 췄다.
 
 다만 상대방에게 춤을 신청할 수 있는 사람은 30세 이하, 그리고 배우자가 없는 사람들 한정이었다. 그러니 그야말로 젊은이들만을 위한 이벤트라고 할 수 있었다.
 
 “이것도 나름 장관인걸.”
 
 도하는 군무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춤은 왈츠나 탱고 따위의 고급스러운 종류가 아니었다. 다만 서로의 손을 마주 잡고 몸을 밀착시킨 채 모닥불 근처를 뱅글뱅글 도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단순한 만큼 오히려 사람의 심령을 자극하는 면이 있었다. 충천하는 주홍빛 화광이 젊은이들의 마음 깊숙이 스며들어 숨어 있던 정열을 끄집어냈다.
 
 그러면 그럴수록 청년과 처녀는 더욱 열정적으로 몸부림쳤다. 몸을, 시선을, 그리고 애정을 맞부딪치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행복한 얼굴로 장래를 속삭였다.
 
 그렇다고 문란한 느낌은 거의 들지 않았다. 남녀가 서로 그리는 것은 태초의 의지라 주장하듯 본능적이면서도 그 무엇보다도 순수했다.
 
 옛날 원시 시대의 사람들도 이랬을까!
 
 “윰! 우리도 춤춰요.”
 
 “네?”
 
 사니델은 우물거리는 도하의 팔을 확! 낚아채어 앞으로 뛰어나가 모닥불 대열에 합류했다. 막 그녀를 노리고 다가오던 남자들이 으득으득 이를 갈아 댔다.
 
 분위기에 취한 도하와 사니델은 그들이 원망하는 것도 알지 못했다. 다만 어색하면서도 환한 미소로 모닥불 주변을 돌고, 돌고, 꺼질 때까지 또 돌았을 뿐이었다.
 
 
 4장 침습
 
 
 
 “으으, 춥다.”
 
 나무문을 열고 들어오는 도하의 뒤로 새하얀 눈가루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닫히기 직전의 문틈 사이로 보이는 눈발이 매섭게 흩날리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이제 가을의 중반에 접어들 시기인데, 이곳은 북반구인지 벌써 초겨울이 찾아왔다. 첫눈도 수확제가 끝나고 몇 개월 지나지도 않아서 내렸다.
 
 표고(標高)가 높은 산골짜기도 아니고, 너른 벌판에 이 정도 기온이니 다가올 겨울은 혹독하기 그지없을 것이 분명했다. 추위에 약한 도하는 벌써부터 걱정이었다.
 
 “넘어지진 않았어요?”
 
 “네, 눈이 그렇게까지 많이는 안 와요.”
 
 물통에 물을 붓고 온 도하가 벽난로에 손을 쬈다. 사니델은 반쯤 조는 리아넨을 품에 안고 흔들의자에서 뜨개질을 뜨고 있었다. 겨우내 리아넨이 쓸 모자였다.
 
 잠시 그 목가적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도하는 의자에 앉아 담요를 덮었다. 이곳에 온 지도 벌써 6개월 남짓. 이제 이런 광경은 낯설지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도하는 운이 참 좋았다. 숲에서 정체불명의 괴인을 만나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간 것은 불운이었지만, 사니델을 만나 이렇게 살아 있으니 말이다.
 
 만약 사니델이 반나절만 더 늦게 그를 발견했다면 도하는 그대로 숲의 양분이 됐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전에 피 냄새를 맡고 모여든 짐승들의 한 끼 식사가 됐으리라.
 
 문득 도하가 물었다.
 
 “사니델, 혹시 나 구할 때 옆에 뭐 없었어요?”
 
 “으음, 혹시 잃어버린 물건이라도 있나요?”
 
 “아니, 물건이 아니라. 그, 시체인데 녹색 피부에…….”
 
 사니델은 알았다는 듯 손바닥을 짝 쳤다.
 
 “아! 오크요? 네, 있었어요.”
 
 “오크?”
 
 “그 마물을 오크라고 불러요. 힘이 아주 세요. 가끔 숲 깊은 곳에서 나타나니까 숲에 들어갈 때는 정말 조심해야 해요. 그럼 오늘은 이종족에 대해 말씀드릴까요?”
 
 “부탁할게요.”
 
 사니델은 따뜻하게 데운 양젖을 건네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 이외의 종족에 대해서였다. 유사인종은 오크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세상에는 오크는 물론이고 엘프와 드워프, 요정 등 온갖 기이한 존재들이 저마다의 문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중 오크는 마물로 분류되며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했다.
 
 오크를 제외한 이종족들은 사람들과 만나기를 매우 꺼려 사니델로서도 세세하게 알지는 못했다. 다만 구전으로 전승되어 온 이야기 정도를 들려줬을 뿐이었다.
 
 설명을 다 들은 도하는 생각했다.
 
 ‘확실히 지구는 아냐. 진작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계속 언급되니 뼈가 아픈데. 환장하겠다, 정말.’
 
 도하에게 이질적인 부분은 이종족이나 마물만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 전체였다. 사람, 마을, 도시, 나라, 생활 방식 모두가 두려울 정도로 낯설었다.
 
 도리어 어느 면에서는 위의 이종족보다도 더 서툴렀다. 평생을 민주주의가 당연하다는 듯 살아왔으니 왕정 체제나 연합 국가, 교국 등은 정말 별나라 이야기였다.
 
 “오늘부터는 글도 배워요. 햄들은 작아서 없지만 영주성이나 번화한 도시에 가면 도서관이 있어요. 이용료가 비싸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사니델은 벽난로 주변에 널어놓았던 모래를 한데 모아 글을 배울 판을 만들었다. 꾸벅꾸벅 조는 리아넨도 깨워서 옆에 앉혔다. 조기교육의 원대한 꿈이었다.
 
 뎅뎅, 뎅뎅.
 
 그녀가 막 기본적인 글자를 적으려는데, 마을 쪽에서 시끄러운 종소리가 들려왔다. 도하는 깜짝 놀라 일어났다. 습격이 있을 때 울린다고 들었던 탓이었다.
 
 “걱정할 거 없어요. 마물이 침입한 건 아녜요.”
 
 “휴, 아니에요?”
 
 “네, 두 번씩 나누어 울렸으니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광장으로 모이라는 신호예요. 급한 일 같으니까 저희도 어서 가야겠어요. 추우니까 털장갑은 꼭 끼세요.”
 
 영하 날씨에 리아넨을 단단히 무장시킨 도하와 사니델은 언덕에 섰다. 아직도 점점이 떨어지는 옅은 눈발 사이로 마을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을 사람들이 광장에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는 가운데, 말을 탄 사람 다섯과 스물 정도의 병사들이 날카로운 창을 세우고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서는 한 남자가 촌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른 자들과는 다르게 고급스러운 차림새의 그는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30대였다.
 
 “위험한 거 아니에요?”
 
 “괜찮아요. 영주님이 오셨을 뿐인 걸요.”
 
 사니델은 리아넨을 안고 눈길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내려갔다. 도하는 왜인지 불안했지만, 그녀가 앞장서니 믿고 걸음을 옮기는 수밖에 없었다.
 
 광장에 도착한 둘은 마을 사람들 사이로 슬쩍 끼어들었다. 사니델이 주변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누는 사이 도하는 영주와 기사, 병사들의 모습을 관찰했다.
 
 기사들은 왼쪽 허리춤에 칼을 차고, 가벼운 가죽 갑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가슴과 관절 등 급소에 철을 덧대어 방어력을 높인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전부 모이자 촌장은 영주의 앞에 공손하게 무릎을 꿇었다. 그것을 본 마을 사람들도 너도나도 엎드렸다. 마치 쓰러지는 도미노를 보는 듯했다.
 
 오직 도하만이 멀뚱거리며 서 있었다.
 
 누군가에게 무릎을 꿇는 일은 난생처음인 데다가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그래서 잠시 망설이고 있었는데, 사니델이 깜짝 놀라 그의 얼른 어깨를 내리눌렀다.
 
 도하는 뒤늦게 주춤주춤 엎드렸다.
 
 다행히 영주는 별말이 없었다.
 
 “촌장은 일어나라. 그래, 올해 작황이 좋다고?”
 
 “네, 맞습니다. 모두 영주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내가 한 일이 뭐가 있겠는가? 햄들이 대지의 신께 잘 보인 덕분이지. 그래도 그렇게 말해 주니 나도 기쁘긴 하군. 차후 더 분발하도록! 앞으로도 지켜보겠다.”
 
 영주는 손을 저어 촌장을 물리고 마을 사람들을 일어서게 했다. 자리에 선 사람들은 여전히 고개를 조아린 채 저벅거리는 영주의 발자국을 듣고 있었다.
 
 문득 도하의 앞에 스윽 그림자가 졌다. 갑자기 어두워지자 궁금해진 도하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영주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콧수염을 쓰다듬고 있었다.
 
 “너는…… 이곳 사람이 아니군?”
 
 “네?”
 
 “감히 나에게 두 번이나 묻게 할 셈인가.”
 
 도하가 흘깃 사니델을 곁눈질하니 그야말로 사색이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아까 무릎을 늦게 꿇은 탓인 듯했다. 된통 걸렸다고 생각한 그는 최대한 허리를 굽혔다.
 
 “네, 영주님. 저도 어디에서 왔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숲 속에서 오크를 만나 도망치다가 머리를 다쳐 기억을 전부 잃어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
 
 “흠. 그런가?”
 
 대답을 들은 영주는 옆의 기사에게 눈짓했다. 도하는 알아들었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기사를 보고, 이 웃기는 종자들이 무슨 일을 꾸미는지 궁금해했다.
 
 ‘뭔 수작질이야?’
 
 그런데.
 
 “헉!”
 
 도하는 난데없이 슉! 쏘아진 은빛 섬광에 눈을 질끈 감았다. 섬광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저 무언가가 번쩍여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을 뿐이었다.
 
 이내 눈을 뜬 도하는 목젖에 딱 달라붙어 한 줄기 피를 뽑아내는 칼날의 싸늘함을 인지했다. 섬광은 도하의 동체 시력을 넘어 날아든 한 자루의 검이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본 사니델은 얼음처럼 굳어 입만 우물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놀랐다 하더라도 당사자인 도하에 비할 바가 되겠는가!
 
 “저, 저, 저기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영주는 무시하며 기사를 바라봤다.
 
 “로슨, 어떤가?”
 
 “형편없습니다. 다가오는 검을 보고 눈을 감은 걸 보면 훈련을 받은 자도 아니옵고 반사 신경 따위도 일반적인 수준입니다. 역시 첩자라고 보기엔 어렵습니다.”
 
 “음! 괜한 기우였군. 이걸로 놀란 마음을 추슬러라.”
 
 그러면서 영주는 은화 하나를 꺼내어 손가락으로 튕겼다. 도하의 바로 앞에 떨어진 은화가 팽이처럼 핑그르르 돌아갔다. 반들반들한 면이 눈 덮인 바닥을 비추었다.
 
 도하는 영주의 태도에 눈앞이 새하얘지는 경험을 했다. 뒤늦게 찾아온 공포나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다. 자신이 거지라도 된 듯 심한 모멸감 탓이었다.
 
 “……!”
 
 열이 확 뻗친 도하가 막 고개를 발딱 세우며 무언가 외치려는데, 사니델이 타이밍 좋게 그의 소매를 꽉 잡고 아래로 거칠게 내리 끌었다.
 
 균형을 잃은 도하는 타오르는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봤다. 사니델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정말 간절한 얼굴로 고개를 마구 저어 대고 있었다.
 
 ‘핫!’
 
 그런 사니델을 본 도하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무런 훈련도 받은 바 없고, 거기에 맨손이기까지 한 도하였다. 그런데 완전무장한 기사들과 수십이 넘어가는 병사들에게 따지고 덤벼들어서 뭘 어쩌자는 것인가!
 
 ‘내, 내가 미쳤지.’
 
 다행히도 영주 일행은 식당으로 가는 데만 정신이 팔려 도하의 발작을 눈치채지 못했다. 기사 한 명만이 고개를 슬쩍 돌려 도하를 노려봤을 뿐이었다.
 
 사니델은 다리에 힘이 풀린 도하를 부축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문을 닫자마자 커다란 꿀밤을 먹였다.
 
 “윰! 윰은 도대체 목숨이 몇 갠가요!”
 
 “미,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그만.”
 
 “정말 간 떨어질 뻔했다고요! 만약 그때 누가 봤으면 우린 물론이고 리아넨까지 큰일 날 일이었어요. 가장 무서운 죄가 귀족 모독인 거, 모르세요?”
 
 “귀족모독죄?”
 
 “아차…….”
 
 도하의 되물음에 사니델은 이마를 짚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설명해 준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날 저녁, 도하에게 귀족 제도를 주제로 여러 가지 것들을 알려 줬다.
 
 이 세계에서 귀족, 특히 영지를 가진 영주의 권한은 그야말로 막강 그 자체였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나 때려죽이지는 않지만, 그것도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어디까지 ‘하지 않는’ 것이지 ‘못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하는 더없이 진지한 태도로 설명을 경청했다.
 
 예전에도 그녀가 왕정 주의를 주제로 말해 줬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배알이 뒤틀려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 어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
 
 그러다 오늘, 도하는 영주의 방문에서 깨달았다. 간단했던 그 설명에 자신의 목숨 줄이 걸려 있다는 것을 말이다. 도하는 집중력을 최대로 높여 귀를 기울였다.
 
 “기사도 귀족은 아니지만 준귀족 대우를 받아요. 그러니 절대 도발하면 안 돼요. 특히 그들의 주군을 욕했다가는 죽을 각오를 해야 해요. 기사에는 견습하고 평기사, 자유기사, 그리고 근위기사가 있는데요…….”
 
 사니델의 강론은 새벽까지 계속됐다.
 
 
 
 막 한파가 끝난 이른 봄.
 
 “사니델, 사니델!”
 
 봄보리를 파종하던 사니델이 누군가의 다급한 부름에 하던 일을 멈추고 허리를 폈다. 마을 쪽을 바라보니 아이들을 돌보는 할머니가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슈멜 할머니, 왜 그러세요?”
 
 “아이고! 리아넨이 아프고 난리가 났어!”
 
 “네에?”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해진 사니델은 호미도 내팽개치고 리아넨에게 뛰어갔다. 옆에서 이웃들에게 양해를 구한 도하도 서둘러 뒤를 따라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리아넨의 주변은 온통 토사물로 가득했다. 뒤늦게 달려온 다른 아이의 부모들이 혹 전염병인가 싶어 아이들을 안고 부리나케 도망갔다.
 
 “리아넨, 리아넨! 괜찮니? 엄마 알아보겠어?”
 
 사니델은 리아넨의 작은 손을 잡고 연신 물었다. 눈을 살펴보니 그래도 의식은 있는 듯했다. 하지만 탈수로 말미암아 고개를 끄덕여 줄 힘까지는 없는 것 같았다.
 
 도하도 눈물로 젖은 리아넨의 얼굴에 마음이 아팠다. 어제까지만 해도 어설픈 발음으로 아빠, 아빠하고 부르던 애가 축 늘어져 있으니 그렇게 가여울 수가 없었다.
 
 사니델이 토사물을 닦는 사이, 도하는 치료사를 부른 뒤 갈아입힐 옷을 가지러 집으로 향했다. 다녀와 보니 치료사가 한창 진료 중이었다.
 
 “음…….”
 
 50대 후반의 치료사는 리아넨의 이마에 손을 얹고 근엄하게 살폈다. 도하는 속이 탔다. 기껏 민간요법 정도나 알고 있을 치료사를 신뢰하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살아온 나이만큼의 연륜이 붙은 것인지, 진찰을 마친 치료사는 크게 위험한 병은 아니라며 대수롭잖게 말했다. 상한 것을 먹어서 이리된 것이라고 했다.
 
 “큰 병은 아니니 걱정 마라. 어린애면 누구나 몇 번쯤은 걸리는 거니까. 말린 약초를 줄 테니 와서 받아 가고. 물 끓일 때 같이 넣어 끓이고, 애한테 먹여.”
 
 “가, 감사해요, 치료사님!”
 
 “별거 아니래도. 고마우면 약초 값이나 잘 쳐주고.”
 
 “네! 물론이죠!”
 
 치료사의 대답에 한숨 돌린 사니델은 연신 사의를 표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도하에게 제법 많은 돈을 쥐어 주며 치료사에게 가져다주게 했다.
 
 도하와 사니델은 맑은 물에 약초를 넣고 푹 끓여 리아넨에게 먹였다. 제법 썼지만 대견하게도 어린 리아넨은 불평 한마디 없이 꼴깍꼴깍 잘도 받아 마셨다.
 
 도하는 그런 아이를 걱정스러우면서도 흐뭇한 얼굴로 바라봤다. 문득 여동생이 떠올랐다. 어렸을 적 몸이 좋지 못했던 그녀는 약을 달고 살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여동생도 약이 쓰다고 불평한 적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도하가 입안에 사탕을 쏙 넣어 주면 새침한 얼굴로 혓바닥을 날름거리고는 했었다.
 
 ‘도윤아, 밥은 잘 먹고 있냐?’
 
 도하는 먹먹한 가슴으로 여동생을 생각했다.
 
 
 
 “윰, 윰! 제발 일어나 줘요! 리아넨이 많이 아파요!”
 
 “으으, 리아넨이!?”
 
 몸을 흔들어 대는 손길이 귀찮은 듯 뒤척이던 도하가 벌떡 일어났다. 벽난로의 장작은 아직도 기세 좋게 타오르고 있었다. 잠들고 한 시간 정도가 지난 듯했다.
 
 “리아넨!”
 
 도하는 재빨리 다가가 리아넨의 상태를 살폈다.
 
 저녁 무렵부터 열이 떨어지기 시작해서 이제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이마는 불덩이처럼 뜨겁고 안색은 새파랬다. 몸은 경련까지 일으키고 있었다.
 
 “어, 어, 어떡해요, 윰!”
 
 “자, 잠깐만. 진정해 봐요.”
 
 도하는 그렇게 말하며 냉정해지려 노력했다.
 
 ‘아빠!’ 하고 뒤뚱뒤뚱 걸어 다니던 아이가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으니 도하도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마저 당황하면 리아넨은 누가 돌보겠는가!
 
 짧은 고민 끝에, 도하는 우선 리아넨의 기도를 확보했다. 제대로 눕힌 뒤 고개를 뒤로 젖혀 숨을 쉬기 편하게 만든 다음 입안에 이물질이 없는지를 확인했다.
 
 ‘어, 어?’
 
 하지만 별 소용이 없는지 이번에는 게거품까지 흘러나왔다. 도하는 정말이지 돌아버리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겨우 인공호흡의 순서를 기억해 냈다.
 
 도하가 막 리아넨의 가슴에 양손을 얹는데, 다행히도 콜록! 하는 기침과 함께 호흡이 돌아왔다. 청색증으로 질려 있던 입술과 얼굴도 제 색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덜덜 떨리던 발작도 잦아들다 이내 사라졌다.
 
 “휴우.”
 
 “리아넨, 리아넨은 괜찮은 거예요?!”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그런 거 같아요.”
 
 “흐윽! 리아넨…….”
 
 도하는 주저앉아 울음 짓는 그녀를 대신해 수건을 적셔 와 더러워진 리아넨의 입 주변과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 줬다. 그리고 한 시간 정도 상황을 지켜봤다.
 
 이대로 나으면 좋으련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다시금 오한과 고열이 찾아왔다. 도하는 약초 달인 물을 먹이려다 리아넨을 조심스레 안고 언덕을 내려갔다.
 
 치료사는 곤히 잠들어 있는지 문을 두드려도 나오지 않았다. 도하는 포기하지 않고 발로 쾅쾅 찼다. 문이 부서질 정도가 되자 치료사가 마지못해 기어 나왔다.
 
 “자넨 잠도 없어? 이 밤중에…….”
 
 “지금 잠이 문제가 아닙니다! 리아넨이 또 아파요!”
 
 “약 지어 준 거 먹이지 않았나?”
 
 “먹였습니다. 그런데 새 증상이 나타났어요. 자다가 갑자기 몸을 떨면서 숨을 못 쉬고, 얼굴이 파래지더니 입에서 거품이 나왔습니다. 이게 도대체 뭔 일인지…….”
 
 치료사는 골몰하다가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잠시 리아넨을 살펴본 그는 천장에 매달려 있는 말린 약초 몇 개를 뜯어다가 나무 절구에 넣어 가루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천에 담아 도하에게 건넸다.
 
 “애가 도대체 왜 이러는 건가요?”
 
 “아, 그 있어. 내가 지금은 기억이 잘 안 나서.”
 
 치료사는 귀찮은지 하품을 해 대며 손을 내저었다. 명백한 축객령이었지만 도하는 이대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는 리아넨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기억이 안 난다니요! 책 같은 건 없나요?”
 
 “그런 건 없어. 못 믿겠으면 처먹질 말든가!”
 
 조심스러운 질문에, 치료사는 역정을 내며 방 안으로 들어가려 걸음을 돌렸다. 자신이 이렇게 엄포를 늘어놨으니 도하가 툴툴거리면서도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햄들의 유일한 치료사였다. 농사일을 하다 보면 수시로 다치고, 아이는 매일같이 아픈 법이었다. 그러니 그에게 밉보여서 좋을 것 하나 없었다.
 
 괜히 강짜를 놓으며 치료해 주지 않거나, 해 줘도 대충 처방하면 몸이 재산인 농부만 손해였다. 그래서 그는 햄들에서 촌장 다음가는 권력가였다.
 
 하지만 도하는 치료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이질적인 인간이었다. 만약 도하 본인이 아팠다면 ‘그런가 보다’ 하고 순순히 넘어가고 약이나 받아 갔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 아픈 것은 리아넨이었다. 도하가 첫 걸음마를 보고, 첫 옹알이를 듣고, 매일 품에 안아 재우며 성장을 고스란히 지켜봐 왔던 아이였다.
 
 하물며 도하는 아는 사람 한 명 없이 낯선 세계에 팽개쳐진 조난자였다. 그런 그에게 아빠라고 불러 준 아이였다. 리아넨은 은인의 딸 그 이상의 존재였다.
 
 도하는 막 들어가려던 치료사의 어깨를 꽉 잡아 강제로 뒤돌아보게 한 뒤 시선을 마주쳤다. 업화처럼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치료사를 꿰뚫듯 노려봤다.
 
 그리고 또박또박 물었다.
 
 “애가, 왜 이러는지, 아십니까?”
 
 “큼. 그, 그게…….”
 
 “그럼 전에, 리아넨과, 비슷한, 증상을, 본 적은요?”
 
 “……물론 있지. 그러니까 내가 처방을 내렸잖은가.”
 
 치료사는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돌렸다.
 
 뒤늦게 달려와 둘의 대치에 안절부절못하던 사니델이 충격받은 얼굴로 입가를 가렸다. 치료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쯤, 그녀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됐고. 리아넨을 치료할 방법은 있는 겁니까?”
 
 “허어! 이 정도면 사제님에게 보여 줘야 하네.”
 
 “사제?”
 
 도하는 이제야 순순히 실토하는 치료사의 말에 의문이 들어 되뇌었다. 설마 사제에게 가서 안수기도라도 받으라는 말인가? 이 아픈 애를 데리고?
 
 막 울컥하려던 도하는 곧 사니델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이해했다. 이곳은 도하가 살던 곳과는 전혀 다른 세계, 종래의 상식이 무시되는 세상이었다.
 
 그녀가 말하길, 이 세계에는 진실로 신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들의 대리자인 사제는 신에게서 직접 힘을 부여받아 기적에 가까운 힘을 행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그 힘을 신성력이라고 불렀다. 신성력은 사제와 신관들이 사용할 수 있으며, 죽어 가는 병자를 일으켜 세우는 치유의 이적을 행사할 수 있다고 했다.
 
 “사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야 신전에 있지. 영주성에 있는.”
 
 치료사를 놓아 준 도하는 리아넨을 안아 들고 집으로 돌아가 아침이 올 때까지 정성스럽게 간호했다. 치료사가 준 약을 먹이려다 몸에 좋은 석청만 타 먹였다.
 
 다행히 열은 내렸지만, 발작의 공포는 여전했다.
 
 ‘분명히 간질병 같은데.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를 하나도 모르니까 돌아 버리겠네. 아니, 여기 사람들이 간질이 뭔지나 알까? 많이 걸리니 알긴 알겠지?’
 
 고민하던 도하는 치료사에게 찾아가 간질병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물었다. 낮이라고 어깃장을 놓으려던 그는 도하의 손에 들린 손도끼를 보고는 순순히 대답해 줬다.
 
 결론적으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반나절이 지나자 리아넨은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여전히 밥도 먹지 못할 만큼 심한 오한과 발작이 비주기적으로 찾아와 아이와 사니델, 도하 모두를 괴롭혔다.
 
 그 사이 치료사는 리아넨이 신벌을 받았다고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리고 다녔다. 그나마 전염병이라고 안 한 것이 다행이었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좋지 못했다.
 
 우연히 그 말을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도하가 대번에 손도끼를 가지고 뛰쳐나갔다. 아마 사니델이 말리지 않았다면 치료사의 머리가 쪼개졌을 터였다.
 
 상황은 이래저래 악화 일로를 걷고 있었다.
 
 
 (잠자는 용 1권 2화에서 계속)

댓글(12)

말해뭐해    
대여해서 볼만 합니다.
2018.03.11 12:56
용서받은자    
ㅗ ㅗ
2018.03.12 00:10
다크라이    
중간중간 2번정도 뜬금없이 전환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도 필력이 나쁘지않고 쓸데없는 기술명 난무도 없고 전개도 괜찮고 볼만한 소설.
2018.03.14 01:46
borislee    
대여기간 내내 읽기가 정말 힘이 드네요
2018.04.02 14:40
이소룡뺨쳐    
원래대로라면 15권 정도 분량도 충분할것 같은데 중간중간 너무 빠른 전환이 못내 아쉽습니다. 그만큼 더 많이 보고 싶은 내용의 소설이었습니다. 재미있게 잘 보고 갑니다.
2020.01.03 01:25
명뷁    
대여하서 볼만하지 않습니다 보지마요
2020.05.28 21:42
명뷁    
진짜로 쓰레기 입니다 전체대여한 미친짓 해서 기분 드럽내요 2권까지는 그래도 읽을만한대 3권오면 뭐야 이거 갑자기왜 개연성없고 진행내용이 왜이래 하실겁니다 진짜 쓰레기 보지마요
2020.05.29 06:35
명뷁    
거짓이라 생각되면 3-2,3-3 만 대여해서 댓글 보시면 아시게 될겁니다
2020.05.29 06:37
뿌꾸shkim    
ㅅㅂ 이것도 소설이냐 ㅠㅠ 돈 아까비
2020.05.29 20:58
브롱스    
1권보고 전체대여할까했는데 윗분들 덕에 3-2 한편 대여 300원에 손절완료요 감사합니다
2020.05.29 22:52
0 / 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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