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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의 적

2021.07.08 조회 23,302 추천 255


 0. 만인의 적
 
 
 
 때는 봄이었다.
 청명한 아침, 은근한 바람이 꽃 소식을 전했다.
 후원을 거닐기에 더할 나위 없도록 좋은 날씨다.
 
 제갈명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그런 것이지요. 기실 남궁세가의 성세는 기울었다 보는 게 맞습니다. 천하제일가라 뽐낸들, 실상은 휘상(徽商) 무리의 눈치나 볼 따름이니까요. 세가라기엔 표국에 가깝지 않습니까?”
 “······.”
 
 앞장선 제갈민이 쉼 없이 떠들었다.
 특유의 경쾌한 걸음걸이를 따르기에 벅차다.
 타고난 강골인 제갈민에 비해, 제갈명의 체력은 범인 이하인 탓이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제갈민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제갈민 뿐만 아니라, 그들을 수행하는 시종들도 마찬가지였다.
 
 제갈명은 제갈민의 형이며, 제갈세가의 대공자이자 소가주.
 심신이 허약하다는 사실 또한 가문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더불어 가문의 실권과는 더없이 멀어지고 있다는 것도.
 
 노골적인 괴롭힘이었다.
 
 ‘백강만, 백강만 이 자리에 있었어도.’
 
 전속 시종인 백강이 있었다면 이들과 맞서 악다구니를 쳤을 터.
 제갈명은 그 소란을 핑계 삼아 처소로 돌아갔을 것이다.
 
 허나, 백강은 자리에 없었다.
 모친의 기일을 맞아 자리를 비운 탓이다.
 빨리 온다 한들 내일이나 되어야 할 터.
 
 다른 때였다면 이를 악물고 버텼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유달리 두통이 강한 날이었다.
 새벽부터 잠자리가 뒤숭숭하더니, 아침부터 몸이 천근만근이다.
 
 이래서야, 모처럼의 산보 도중에 졸도할 판.
 
 ‘어쩔 수 없나?’
 
 아무래도 소란은 스스로 일으켜야 할 모양이다.
 부실한 체력을 명분으로 삼았다간 조롱의 빌미만 내어줄 뿐.
 그러니, 말꼬리를 잡는 것이 맞다.
 
 “그에 비하면 어떻습니까? 상인과 결탁하지 않고도 사천무림이란 용담호혈에서 우뚝 선 당가말입니다. 기실 천하에 우뚝 선 가문은 우리 당가라 함이 맞을······.”
 “우리 당가?”
 
 제갈명은 걸음을 멈추었다.
 낮은 목소리에 맞춰 사위로 정적이 일었다.
 
 시종들이 멈춰서고, 제갈민은 두 걸음을 더 나아간 후, 제갈명을 돌아보았다.
 준수한 얼굴 위로 난처한 표정을 가면처럼 둘렀다.
 
 “형님?”
 
 눈꼬리 맺힌 웃음이 어색하지 않다.
 그에 제갈명은 늦게나마 눈치챘다.
 
 저 영악한 녀석이 지금껏 도발을 걸어온 것이구나, 하고.
 
 산보의 호흡을 빠르게 당겨 몸을 지치게 만들고.
 신경에 거슬리는 소리를 해서 심중 동요를 이끌었다.
 
 제갈민은 제갈명이 오늘 자신에게 언성을 높이길 바란다.
 아랫사람이 보는 앞에서 소가주가 자신의 허물을 스스로 드러내길 원한다.
 사소한 건이라도 그런 인상이 쌓이고 쌓인다면, 훗날 소가주가 바뀔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계략이라 하기에도 민망한, 유치한 놀음이었다.
 그러나, 제갈명은 그 뻔히 보이는 수작을 피할 수 없었다.
 
 “본가의 이공자가 당가의 슬하를 자처해? 이곳이 당가타(唐家陀)인 줄 아느냐?”
 
 사천당문이라는 외가를 등에 업은 제갈민과는 달리, 제갈명에게는 배경이 없었다.
 모친은 산고로 세상을 떴고, 이를 문제 삼아 그의 외가도 제갈세가와 연을 끊었다.
 
 소가주로서의 자질에도 손색이 있었다.
 총기는 있었지만, 잦은 병치레로 예민해진 성정이 그를 덮었다.
 
 무엇보다 무공을 익힐 수 없는 절맥이다.
 당대 가주에 들어, 무가로서 지위를 드높이기 위해 애를 쓰는 제갈가였다.
 한 발만 잘못 디뎌도 소가주 자리를 잃을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꺼낸 말을 도로 접는다?
 
 지금 당장도 제갈민의 보폭에 맞추는 시종들이다.
 더 얕보이기라도 한다면, 우유부단한 기색을 보인다면, 얼마나 더 큰 수모를 겪게 될지.
 
 칼을 뽑았으면 한 번이라도 휘둘러야 하는 것이다.
 
 “하하. 형님. 소제가 실언했습니다.”
 
 능글맞게 웃으며 무마시키려는 제갈민.
 공들인 도발에 비해 일이 쉽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곧장 각을 세우기보단, 간을 보려던 모양이다.
 
 제갈명이 안도한 기색을 감추곤 이야기를 마무리하려는 차.
 
 “다른 분도 아니고 어찌 형님 앞에서 실례를 범했군요.”
 “뭐?”
 “그게, 그렇지 않습니까?”
 
 제갈민은 조용히 다가와 제갈명의 귓가에 속삭였다.
 
 “외탁이란 말이 불편하실 텐데, 배려가 부족했지요.”
 “······!”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다.
 잠시 잊었던 두통이 더 강하게 엄습했다.
 
 제갈명의 외양이 대부인의 생전 모습을 닮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어려서 잃은 동복형들과 비교해서도 유별나게 모친을 닮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절맥을 타고난 것까지.
 
 하여, 어린 시절부터 문중에 떠돌던 소문이 있었다.
 
 “듣기로 대부인의 가계 또한 군문이라 하던데. 절맥이신 형님이나, 먼저 가신 형님들도 보면 꼭······. 청수한 학자의 그것에 가깝지 않은지.”
 
 대부인은 외가의 친딸이 아니라는 소문.
 무림을 괄시한 외조부가 급히 양녀를 들여 제갈가로 떠넘겼다는 것 말이다.
 
 묻힌 지 십수 년도 지난 고루한 추문을 꺼내든 제갈민은, 비열하게도 웃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네 놈이······!”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휘둘렀다.
 제갈민이 한 발짝도 피하지 않았음에도, 느린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이런, 형님! 괜찮으십니까?”
 
 휘청거리는 제갈명을 보고, 당황한 듯 외치는 제갈민.
 그 와중에 눈가의 조롱기는 여전하다.
 
 “놈!”
 
 눈앞이 벌겋게 변했다.
 자신이, 이 정도로 폭급한 성정이었던가?
 아니다. 아니,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저 요망한 주둥아리를 어떻게든 닥치게 하지 않으면.
 
 제갈명의 눈에 흔들리는 검집이 보였다.
 이복동생의 허리춤에 걸린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신이 봐도 둔해 빠진 동작이었지만, 무공을 익힌 동생은 이를 말리지 않았다.
 
 스릉.
 
 검신이 햇빛을 받아 빛났다.
 동공을 쑤셔 들어오는 빛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아팠다.
 너무 아팠다.
 두통 때문에 미칠 것만 같다.
 
 그래서.
 
 “으아악!”
 
 검을 휘둘렀다.
 
 * * *
 
 눈앞으로 여러 순간이 스쳐 갔다.
 그 모든 장면에서 나는 격동했다.
 
 “하, 좋습니다! 어차피 개 무시 당할 거면, 소가주니 대공자니, 거치적거리기만 합니다! 속이 다 시원하네요!”
 
 나는 대회의전 앞에서 패악을 부리고 있었다.
 혈육에게 칼을 휘두르고도 반성하는 기미를 보이지 않아 소가주 자리를 박탈당한 탓이다.
 문중의 어른들은 수군거렸고, 제갈민의 파벌은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중에 아버지만이 슬픈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백강! 백강! 내가 잘못했다! 돌아와다오! 백가앙!”
 
 나는 불어난 강가에서 백강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가문에서 쫓겨난 나를 끝까지 따른 충직한 심복이자, 친우.
 결국 최후에는 나를 대신에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무책임하게 살아온 대가는 그토록 크고, 아팠다.
 
 “당금 강호에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나는 입교한 연유를 묻는 이에게 그리 답했다.
 제갈세가, 나아가 백도무림에 대한 증오가 내 출사의 명분이었다.
 어쩌면,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자라온 모든 흔적을 불로 태워 정화하는 것이.
 
 “어째서 저입니까? 제게서 무엇을 보고······.”
 
 나는 대군사에게 따지고 들었다.
 숱한 인재들 사이에서 어찌 나를 이군사로 지목하였나.
 명성도 배경도 없는 내가, 정녕 당신 다음가는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던가.
 대군사는 만인 앞에서 내 자질을 인정해주었다.
 
 “베어라!”
 
 내가 이끄는 일군의 포위망 속에서 불타오르는 제갈세가.
 봉두난발이 된 아버지가 외쳤다.
 소리는 처절했으나, 눈빛은 아늑했다.
 내 목을 베어가라. 그래야, 네가 산다.
 
 그리고.
 
 “하아.”
 
 생의 마지막에서 우러른 달은 참 아름다웠다.
 신교가 강호를 일통하고, 교주에게 제갈세가를 달라 청했다.
 교주는 내 청을 들어주었으나, 내 미련이 껄끄러운 모양이었다.
 결국 나는 쓸쓸하게 최후를 맞이하였다.
 
 모든 장면이 스치고 나서야, 깨닫는다.
 
 이것은 주마등이다.
 제갈민의 피를 보고 이십 년이 지난 후의 주마등.
 모든 기억이 제자리를 찾아가며, 풋내 나는 애송이 공자가 완성된 군사가 되었다.
 
 이것이 ‘나’의 삶이다.
 잘못된 선택을 한 이후에야 재능을 꽃피운 탓에 처절하게도 몰락해버렸다.
 
 내 손으로 제갈세가를 지워버렸으나, 반동으로 오는 공허감을 이기지 못했다.
 끝내 가문에 대한 미련을 숨기지 못해 죽어버렸다.
 
 최후에 내 심장을 찌른 이가 이르길.
 
 ‘정파의 것들도, 본교도 모두 등을 돌렸으니, 그야말로 만인(萬人)의 적(敵)이 되신 게지요.’
 
 실로 그러했다.
 
 내가 사랑한 이들은 날 인정하지 아니하였고.
 날 인정한 이들은 날 사랑하지 아니하였으니.
 불혹(不惑)에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미혹(迷惑)의 진창을 헤맸을 뿐이니.
 
 “명아. 명아. 어찌 그리 아둔한 게냐?”
 
 참담한 현실에 탄식이 터져 나왔다.
 
 돌이키고 싶다.
 다시, 제대로 살고 싶다.
 만인에게 내 재능을 선보이고 싶다.
 비록 험하더라도, 올곧은 길 앞에서.
 
 마치, 그 옛날의 제갈무후처럼.
 
 순간.
 암흑 속에서 빛이 일었다.
 
 [破竹之勢桃園結義一騎當千得隴望蜀三顧草廬水魚之交刮目相對五關六斬白眉最良······.]
 
 밤하늘의 무수한 별을 닮은 그것은 아득한 역사 속에서 광채로 남은 고사(故事).
 현묘한 위력이 담긴 문자에 치여 점차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다시, 출사(出師)하라.’
 
 위엄에 찬 명령이 떨어졌다.
 
 * * *
 
 눈을 끔뻑였다.
 문자도, 어둠도, 달도 보이지 않았다.
 
 봄기운이 완연한 오전이었다.
 
 “크으윽!”
 
 앞에 배를 감싸 쥐고 신음하는 소년이 있었다.
 붉게 물든 옷과 환부 주변을 스스로 점혈하는 손길.
 
 기억에 있는 장면이었다.
 
 “어, 어서 의원을!”
 “이공자께서 칼을 맞았다!”
 
 저 소년의 이름은 제갈민.
 내 이복동생이다.
 스무 살의 내게 칼을 맞고 쓰러졌다.
 
 “대공자! 검을 놓으세요!”
 
 익숙하지만, 다시 들을 일이 없으리라 여겼던 목소리.
 고개를 돌리니 시종이 내 허리를 붙잡고 있다.
 
 백강이 살아있다.
 그래, 내가 걱정되어 일찍 돌아왔다 했지.
 
 “맞아.”
 
 살아있다.
 백강의 죽음을 돌이켰다.
 
 주변을 돌아본다.
 
 멀쩡한 연무장.
 살아있는 노복.
 그리고, 주름살 하나 없이 고운 손등.
 
 모두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들.
 
 “돌아왔다.”
 
 나, 제갈명은 젊은 날로 돌아왔다.
 본격적인 파국이 시작된 그 시점으로.

작가의 말

다시 시작합니다!

댓글(15)

아폔    
꿀잼
2021.08.03 02:29
쟈드린    
헐 조금더전으로 회귀할줄알았는데
2021.08.19 23:49
대구호랑이    
잘보고 갑니다~^^
2021.09.16 09:14
Onionmania    
중간에 휙휙 넘기는 부분 좀 더 칸을 띄우거나 점선같은 표시가 필요할 거 같네요 갑자기 휙휙 넘어가서 뭔가 했네
2021.10.04 02:29
너솔    
"불타오는" ?
2021.10.04 03:48
우유더루트    
에고 시작부터 면목 없습니다ㅠ 수정했어요!
2021.10.04 06:49
열파참    
정신나갈거가태요...
2021.10.04 22:46
commander    
순서가 뭔가 두서가 없는게 앞의 내용 잘라내고 회귀전 내용으로 프롤로그 진행후에 회귀한 후에 현재 상황 파악하는 내용으로 시작하는게 나은거 같아요. 시점이 너무 휙휙바뀜
2021.10.08 12:45
as********    
시작이 암울하네 잘 보고 갑니다.
2021.10.08 17:06
작은구름    
한번에 안읽히네요 두번에 읽음
2021.10.10 09:21
0 / 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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