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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마졸 귀환록 [E]

마졸귀환록 1권 (1)

2014.12.19 조회 16,863 추천 212


 Prologue
 
 내 나이 열다섯 생일날.
 스스로를 ‘천마’라 칭하는 이에게 육신을 빼앗기다.
 
 열여섯 봄.
 오러를 깨우치다.
 
 열여덟 여름.
 마스터에 이르다.
 
 스물둘 가을.
 전쟁터로 향하다.
 
 서른셋 겨울.
 제국을 건국하다.
 
 그리고 서른다섯…… 다시 봄.
 그가 떠나다.
 .
 .
 .
 드디어 육신을 돌려받다.
 1. 귀로
 
 육신을 차지한 날, 그가 내게 말했다.
 “너를 내 졸개 1호라고 부르겠다.”
 살기 위해 넙죽 엎드렸다.
 
 ***
 
 다그닥. 따각. 따그닥…….
 나귀가 이끄는 수레에 앉아 느긋이 풍경을 감상하던 노인이, 두 눈 가득 이채를 띠며 전방을 주시했다.
 저 아래 산자락을 걸어가는 사내를 발견한 까닭이었다. 오래도록 나귀와 길을 거닐다 보면 사람이 절로 반가워진다.
 산적의 위협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유달리 치안이 좋은 장소가 바로 이곳 ‘루마니언’ 지방이 아니던가. 이곳의 임시 대영주인 ‘로사테인’ 자작이 주기적인 토벌을 한 덕분에, 산적들은 쉽사리 터를 잡지 못했다.
 노인이 나귀를 몰아 전방의 사내에게 접근하자, 사내가 슬쩍 그를 돌아봤다. 언뜻 30대 중반쯤이나 되었을까? 그리 큰 특징이 없어 보이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는데, 가까이서 지켜보니 생각보다 큼직한 신체가 그나마 눈에 띄었다.
 “스테일 남작령으로 가는 길인가?”
 노인의 질문에 사내가 잠시 노인을 바라보며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무스탄’ 영감님.”
 “……나를 아나?”
 고개를 갸웃거린 무스탄이 사내를 유심히 관찰했다. 하지만 상대의 정체가 선뜻 떠오르질 않았다. 이에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접니다, 제튼 반트.”
 “반트? 제튼? 제튼…… 제튼 반트?”
 그 순간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얼굴이 있었다.
 “설마…… 홀든네 장남?”
 부친 ‘홀든 반트’의 이름이 나오자 제튼이 쓴웃음을 지었다.
 “예, 제튼입니다.”
 “끼놈!”
 그 순간 나귀를 치던 무스탄의 지팡이가 허공을 갈랐다.
 딱!
 “아얏!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제튼이 눈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무스탄의 지팡이가 정수리를 치고 간 까닭이었다.
 “놈! 성인식을 치르기가 무섭게 가출을 하더니, 무려 20년 동안이나 집에 연락 한 번이 없어? 네 이놈! 네놈 때문에 케나가 얼마나 슬퍼했는지 아느냐?”
 정확히는 22년이었다.
 부친에 이어 모친 ‘케나 반트’의 이름까지 언급되자, 제튼의 눈가에 잠시 그늘이 내려앉았다. 그때 또다시 지팡이가 날아들었다.
 “아얏! 아야야얏! 어우, 영감님! 아파요, 아파!”
 재빨리 안색을 바꾼 제튼이 앓는 소리를 해 댔다.
 “너는 더 맞아도 싸다. 이리 와, 어서!”
 “아오! 그렇게 매질을 해 대는데 누가 갑니까.”
 “이노~ 옴!”
 무스탄의 호통소리가 산자락을 뒤흔들었다.
 
 푸닥거리는 30여 분을 더 이어지고 나서야 끝맺을 수 있었다.
 “허억! 헉! 이놈. 내 10년만 더 젊었어도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야.”
 그 소리에 새삼 세월의 무게가 느껴졌다.
 ‘어느새 80이 넘으셨구나.’
 그가 가출 할 즈음 60을 넘겼던 무스탄이었다. 그래도 당시에는 나이답지 않게 제법 탄탄한 체구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 덩치가 저리 쪼그라들다니. 과연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는 모양이었다.
 ‘어느새 저리 늙으셨구나.’
 그래도 80이 넘었다고 여기기엔 과할 정도로 건강해 보였다.
 “이제는 손주들 재롱 보면서 쉬셔야지, 뭘 또 그렇게 열심히 돌아다니십니까?”
 “아직 두 다리가 썽썽한데, 무슨 재롱이냐. 그리고 손주들 다 커서 재롱부릴 놈들도 없다.”
 “증손주는요?”
 “막내가 요 앞전에 성인식 치렀어.”
 할 말이 없었다. 성인식 치른 증손주에게 재롱을 부리라고 할 수야 없지 않은가.
 “타라.”
 무스탄이 그렇게 말하며 수레 뒷칸으로 손짓했다.
 “그렇잖아도 먼 길 오느라 무릎이 쑤셨는데, 잘됐네요.”
 “에라이, 벌써부터 하체가 그리 부실해서야 뭐에 써먹을꼬.”
 “끄응…….”
 당최 한 마디를 이기기가 어려웠다. 제튼이 앓는 소리를 내며 짐칸에 올라탔다.
 “어여 가자. 어여 가.”
 나귀를 툭툭 건드리자, 마치 알아듣는 양 나귀가 다시 길을 나섰다. 그걸 유심히 지켜보던 제튼이 물었다.
 “눈에 익네요.”
 “당연하지. 네놈 가출하기 전에도 이놈이었으니까.”
 “저 태어나기 전에도 저 녀석 아니었습니까?”
 “맞어.”
 “……저 녀석 대체 나이가 얼마나 되는 겁니까?”
 못해도 37살은 넘었으리라.
 “자꾸 저 녀석이라고 하는데, 욘석이 네놈보다 연배가 높다.”
 “끄응…….”
 그렇다고 ‘저분’이라고 할 수는 없잖은가. 재차 앓는 소리가 흘렀다. 그런 제튼을 향해 노인이 물었다.
 “뭐 하느라고 20년이나 연락 한 번 없었어?”
 이 갑작스런 질문에 잠시 동안 침묵이 내려앉았다. 잠시 기다려주던 무스탄이 생각보다 침묵이 길어지자 호통을 쳤다.
 “입에 꿀 발랐어? 왜 말이 없어?”
 “거참, 분위기 잡을 시간은 좀 주셔야죠.”
 “뭐 잘한 게 있다고 분위기를 잡아. 퍼뜩 말 안 해?”
 “그다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냥 세상이 보고 싶어서 가출했고, 그러다 전쟁이 나자 용병으로 좀 뛰다가, 전쟁 끝나서 못 본 세상을 마저 돌아보고 온 것이죠.”
 “썩을 놈. 너무 요약했잖아.”
 “하핫!”
 어색하게 웃으며 제튼이 애써 대답을 피했다. 이에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푸욱 내쉰 무스탄이 재차 나귀를 건드렸다.
 “어여 가자꾸나. 이 못난 놈이 또 도망치기 전에, 당장 집에 붙들어 놔야지. 이랴.”
 그 말에 제튼이 쓴웃음을 지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드디어 집이구나.’
 서른일곱 초여름.
 무려, 22년 만의 귀향이었다.
 
 ***
 
 아루낙 마을은 스테일 남작령의 서쪽에 위치한 소규모의 마을로, 마을 대다수의 사람들이 소작으로 지내는 보통의 평범한 마을이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마을인 것이다.
 하지만 제튼에게 있어서 아루낙 마을은 세상의 그 어떤 마을이나 영지, 왕궁들보다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무려 22년간 떠나 있었던 그의 고향이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많이 바뀌었구나.’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무려 22년을 떠나온 고향이 아니던가. 강산이 두 번은 바뀌었을 시간이 흐른 것이다. 그러니 마을의 변화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리라.
 ‘과거에는 소국의 구석진 영지였다고 해도, 지금은 제국의 남작령이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새로워진 풍경들을 맘껏 감상했다.
 ‘그래도 군데군데 옛 모습이 남아 있구나.’
 제국의 위엄을 살리려는 것인지, 5층 이상의 특제 건물들이 하나둘 세워지고 있었으나, 그래도 아직은 촌락의 모습이 여전했다.
 “크게 변한 건 없지?”
 “과거보다 마을 크기가 넓어졌는데요?”
 언뜻 그 규모가 소규모 영지에 버금가는 것 같아 보였다.
 “겉보기에만 그렇지, 솔직히 사람 수는 고만고만해.”
 고개를 끄덕이며 마을의 변한 부분들을 차분히 감상하는데, 문득 저 멀리 그리운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저도 모르게 코끝이 시큼해졌다.
 ‘……집도 많이 변했구나.’
 지붕의 색이나 문의 크기, 그리고 형태 등이 조금씩 바뀐 것이 보였다. 하지만 옛 모습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 그의 집이라는 건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수레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무스탄이 이를 힐끔 쳐다보더니 나귀를 멈춰 세우며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라.”
 이에 제튼이 침을 꼴깍 삼키며 수레에서 내려섰다. 집이 눈앞에 나타나자 심장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답지 않게 양다리가 바르르 떨리며 자꾸 휘적거리는 게 아닌가.
 “저 부실한 하체를 어찌할꼬. 쯧쯧!”
 무스탄이 한 소리를 하자 그제야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쓴웃음을 머금은 그가 애써 다리를 바로 세우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고맙습니다.”
 “어여 가 봐. 이랴.”
 무스탄이 그 말과 함께 나귀를 툭 하니 건드렸다. 곧이어 나귀가 다시 움직이더니, 바로 좌측에 보이는 자그마한 상점의 뒷문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곳이 바로 무스탄의 집이었다.
 상점을 보자 즐거웠던 옛 추억들이 떠올랐고, 덕분에 한결 마음이 편안해진 그가 호흡을 가다듬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집으로.
 ‘집으로…….’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생각보다 거리가 금세 가까워지더니, 오래토록 그리워했던 장소가 순식간에 코앞이었다.
 꿀꺽!
 연신 마른침을 삼키며 손을 들었다. 놨다. 같은 동작을 쉴 새 없이 반복한다.
 선뜻 문손잡이를 잡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망설이고 있는데, 문득 등 뒤에서 그리운 향기가 밀려들었다.
 “누구……?”
 갑작스레 들려온 음성에 숨이 턱 하니 막혀 버렸다. 당연했다.
 ‘어머니!’
 그토록 듣고 싶던 목소리가 다가드는데, 어찌 호흡이 제대로 돌아가겠는가. 텁텁한 가슴을 부여잡으며 애써 고개를 뒤로 돌렸다.
 ‘아……!’
 무어라 말을 해야 할까? 그 곱던 얼굴 위로 어느새 주름이 새겨지고, 금발 가득 빛을 내시던 머릿결에 흰머리가 하나둘 피어 있었다.
 아낙네 치고는 크신 체구라서, 동네 사내들도 깜짝깜짝 놀라게 하셨건만, 어느새 그보다 작아져서 그를 올려다보고 계셨다.
 세월의 무게에 쪼그라든 듯 전보다도 작게 느껴졌다. 물론, 그의 신장이 커진 탓도 있었다.
 “아…… 으…… 아아…….”
 차마 말을 내뱉지 못한 채 자꾸 주저하고 있자, 경계하던 모친이 의아한 듯 그를 쳐다본다. 그러더니 이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이 보였다.
 “……아들?”
 결국 알아보셨나 보다. 그 한마디를 듣기가 무섭게 무릎이 풀리면서, 두 눈 가득 물길이 열려 버렸다.
 “어허어어엉!”
 울부짖는 그를 향해 모친이 다가왔다.
 “정말…… 정말 아들이니?”
 그녀도 많이 놀랐던지, 음성이 흔들리고 있었다. 목이 메여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으로 외쳤다.
 ‘어머니!’
 이를 듣기라도 한 걸까? 모친의 걸음걸이가 더욱 빨라지는 게 보였다. 덕분에 모자의 거리는 순식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제튼이 양팔을 활짝 벌리며 모친을 맞이했다.
 휘익.
 그 순간 모친이 좌측으로 지나쳐 갔다.
 ‘응?’
 의문은 잠시였다. 뒤로 고개를 돌리며 시선으로 모친을 좇는데, 그를 지나친 모친이 문 옆에 걸린 대빗자루를 양손에 움켜쥐는 게 아닌가.
 ‘어? 어어…… 어?’
 어버버 하는 사이에 모친의 빗자루가 허공을 갈랐다.
 파악!
 빗자루는 정확히 정수리를 강타했다.
 “커헉! 이게…… 무슨?”
 그 충격에 막혔던 말문이 트이며 눈물이 쏙 들어갔다.
 ‘대체 왜?’
 두 눈 가득 불을 뿜고 있는 모친의 모습에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게 느껴졌다.
 “어…… 엄마?”
 그토록 부르고 싶던 단어가 절로 새 나왔다. 물론 오는 내내 상상했던 것과 달리, 정중한 높임말도 아니고, 연습해왔던 것처럼 아름다운 외침도 아니었다.
 “끼랴~ 앗!”
 비상하는 매가 저러할까. 모친이 화려하게 허공을 날아오르며 양손을 크게 휘두르는 게 보였다. 22년간 연락 한 번이 없어 그토록 속을 태웠던 아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세월의 울분이 가득 담긴 빗자루가 사납게 포효했다.
 따아아악!
 “크헉! 엄마? 아…… 아니, 어머니? 어라, 이게 아닌데?”
 당황해서 다급히 외쳐 불렀으나, 그에 대한 답변으로 빗자루만 날아들 뿐이었다.
 “어…… 엄마? 우와아악-!”
 그의 나이 서른일곱.
 아직은 맴매를 맞는 나이였다.
 2. 귀환
 
 아름답지 못한 상봉은 부친 홀든의 등장으로 겨우 끝맺을 수 있었다.
 겨우 집 안에 발을 들인 제튼을 향해 부친이 묻는다.
 ‘뭐 하다 왔느냐?’
 눈으로 질문을 던져오는데,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정말……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어지간한 사내 못지않게 괄괄한 모친과 소극적인 성격 때문에 말문 개방이 드문 부친까지, 22년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여태껏 변하지 않은 풍경이 남아 있었다.
 가까스로 눈물을 삼키는데, 뒤통수가 뜨끔해졌다.
 따악!
 “뭐 하고 있어? 아버지가 물으시잖아. 빨리 대답 안 해?”
 참 신기했다.
 ‘어떻게 저 눈으로 하는 대화를 다 알아채시는 건지.’
 제튼의 경우에는 독특한 공부 덕분에 머리가 열리면서 남다른 눈치를 지니게 되었고, 그로 인해 문제없이 읽을 수 있었던 것이지. 만약 그게 아니었더라면 반반의 확률로 못 알아먹었을지도 몰랐다.
 실제로 가출 전에는 가끔 부친과 의사소통이 안돼서 얼마나 속을 끓였던가.
 남자 같은 모친과 소녀 같은 부친.
 ‘정말…… 이렇게 어울리는 부부도 드물 거야.’
 더 재미있는 건, 부친의 청춘시절 이 소극적인 태도에 동네 처자들이 자지러졌다는 것이다. 태도와 달리 겉보기에는 더없이 남자답게 생겼으며, 동시에 제법 준수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음미남이니 뭐니 하는 명칭까지 붙었다는데, 이런 부친의 본성을 알아 본 유일한 존재가 바로 모친이었다. 얼음미남 이미지에 처자들이 함부로 접근하지 못 하는 사이, 모친의 저돌적인 대시가 이어졌고, 결국 부친을 자빠트리는 데 성공한다.
 따악!
 순간 상념을 끊어 내는 고통이 또다시 터져 나왔다. 뒤통수를 부여잡은 제튼을 향해 모친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아버지가 묻잖아!”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제튼이 부친을 바라봤다. 여전한 눈빛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는 게 보였다.
 ‘뭘 하다 왔느냐?’
 ‘끄응…… 말로 좀 해주시면 좋을 텐데.’
 하지만 이게 기억 속 부친의 모습이기에 이내 웃을 수 있었다.
 따악!
 “웃어?”
 모친의 서릿발 같은 음성에 눈물이 찔끔 나왔다.
 ‘어우! 그래, 엄마는 원래 이랬지.’
 부친과 마찬가지로 여전한 모친의 모습에 눈물이 났다. 결코 아파서 흘린 눈물이 아니었다.
 
 제튼의 이야기는 사실 별거 없었다.
 “성인식을 치르고 나니까 문득 더 넓은 세상이 보고 싶더라구요. 말씀을 드려도 반대하실 것 같아서, 그래서 그냥 어린 마음에 생각도 없이 가출을 해 버린 거죠. 지금 생각해도 참 철이 없었던 것 같네요. 하핫……! 그렇게 세상 좀 돌아다니는데, 갑자기 전쟁이 나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용병으로 좀 뛰다가, 전쟁이 끝나자 못 본 세상을 마저 돌아보고 온 거죠.”
 무스탄에게 했던 이야기에 그저 살만 좀 더 붙였을 뿐이었다. 쓴웃음을 지어 주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언뜻 보여 주기 위한 의도로 지은 미소였으나, 실제로도 감정이 묻어나온 탓에, 완전한 거짓이라고 할 수만은 없었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고, 그러다 괜한 질문이 오가다 보면 내용의 허점이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부러 대화를 짧게 끝내고자 한 것이다.
 “고생…… 많았다.”
 문득 부친의 말문이 열렸다. 하루에 한 마디 듣기도 어렵다는 부친의 음성이었다. 이는 즉 제튼의 의도가 들어 먹혔다는 뜻이기도 했다.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자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는 것이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제튼이 슬쩍 모친을 바라봤다. 다행히 그 성격과 달리 부친에게 껌뻑 죽는지라 모친도 마무리를 지으려는 듯, 표정을 풀고 있었다.
 덜컹!
 그 순간 대문이 벌컥 열렸다.
 “오빠!”
 “형!”
 “대체 뭘 하다 이제 온 거야?”
 순간 뒷목이 뻐근해졌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는 동생이 있었다.
 그것도 무려 세 명이나.
 “뭘 하느라고 22년간 연락 한 번 없었어?”
 ‘끄응…….’
 원점으로 돌아가 버린 상황에 두통이 몰려왔다.
 
 한 차례 더 똑같은 이야기가 반복되었다. 하지만 동생들은 부친보다 모친을 더 닮아 저돌적인 성격을 지닌 듯, 쉴 새 없이 질문을 퍼부어 댔다.
 “형, 좀 더 자세히 설명 좀 해 봐.”
 “용병이라니, 오빠가 용병 일을 했단 말이야? 어디인데?”
 “오빠, 전쟁이 끝나고 바로 왔어도 좋잖아. 그런데 왜 이제야 온 거야?”
 오랜 시간이 흘러 나타난 오라비건만, 마치 일주일 만에 만난 것 같은 이 친밀함은 무엇이란 말인가. 언뜻 그들의 표정에서 ‘노력’을 하는 흔적이 엿보였다.
 ‘녀석들…….’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무래도 집에 오기 전, 서로 입을 맞추고 온 모양이었다. 그가 어색해할까 우려해 일부러 상황을 요란하게 만들자고 한 것 같았다. 다 커 버린 동생들의 배려가 가슴을 뜨겁게 두드렸다.
 다들 서른 근처의 나이일 텐데 마치 어린아이처럼 재잘거리며 애를 쓰는 것이 참으로 고맙고 또 미안했다.
 그의 눈시울이 슬쩍 붉어질 무렵 모친이 앞으로 나섰다.
 “그만!”
 동시에 동생들의 질문 공세가 멈췄다. 입을 딱 다문 그들을 바라보며 모친이 외쳤다.
 “거기까지. 더 이상의 질문은 없다. 끝! 궁금한 게 있더라도 지금은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부친이 그러하기로 했으니 모친이 이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족들은 모친의 말을 무시하지 못한다. 그렇게 자라 왔고, 또 그렇게 키워 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 스스로도 쉼 없이 떠드느라 조금은 힘겨운 상태이기도 했기에 모친의 제지가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었다.
 “다들 자리에 앉아라. 오랜만에 모였으니 다 같이 밥이나 먹고 가라.”
 그 말에 오랜만에 모인 가족들이 식탁에 빙 둘러앉았다. 헌데, 이상한 점이 제튼의 눈에 띄었다.
 ‘하나, 둘, 셋…… 여섯?’
 아무리 계산해도 숫자가 안 맞았다.
 부엌에 있는 모친을 제외하면 부친과 제튼, 그리고 세 명의 동생까지 분명 다섯이어야 하건만, 거기에 한 명이 더 끼어있는 게 아닌가. 제튼이 침을 꼴깍 삼키며 물었다.
 “누구…… 시냐?”
 생전 처음 보는 소녀가 식탁에 함께하고 있었다.
 “누구시기는, 네 동생이지!”
 부엌에서 모친이 외쳤다.
 “동…… 생?”
 황당했다. 그도 그럴 게 눈앞의 소녀는 아무리 나이를 잘 쳐줘도 10대 후반이었다. 그가 일찍 장가를 갔더라면 저만한 딸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기에 더욱 이 상황이 황당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몇 ……살?”
 제튼의 물음에 소녀가 조심스레 답했다.
 “스…… 스물하나요.”
 “쿨럭!”
 헛기침이 튀어나왔다. 어려도 너무 어렸다. 거기에 더해서 외모도 과하게 어려 보인다. 일명 동안외모라고 하던가? 게다가 그 나이가 또 충격이었다.
 ‘스물하나?’
 그가 가출하고 난 뒤에 바로 태어났다는 소리가 아닌가.
 ‘엄마…… 아빠…….’
 그를 찾는다고 동네방네 뛰어다니며 마음고생이 심했을 거라 여겼건만, 그가 가출하던 해에 꽃 같은 여아를 잉태하셨을 줄이야. 묘한 배신감에 울컥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가 부엌 쪽으로 시선을 던지는데, 마침 모친도 이쪽으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뭐? 왜? 어쩔 건데?”
 주륵!
 결국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 원래 이런 분들이셨지.’
 그의 등 뒤로 남동생이 다가와 슬며시 속삭였다.
 “그래도 한 보름은 찾는다고 고생하셨어.”
 ‘영감님!’
 무스탄은 모친이 엄청나게 오래 슬퍼하셨다는 식으로 말을 전했었다. 헌데 겨우 보름이란다. 그에게 맞은 정수리가 괜히 억울했다.
 ‘끄응…….’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이내 웃음도 뒤따랐다.
 ‘큭! 그래. 원래이랬지.’
 정말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
 
 새 아침이 밝았다. 세상은 변함이 없었으나, 그의 세계는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했다.
 ‘고향의 공기…….’
 22년 만에 찾은 그의 방에서, 열다섯 그 어린 무렵으로 돌아가 잊어버린 세월을 그리며 꿈을 꿨다. 물론 눈 감기가 무섭게 아침이 찾아왔고, 꿈은 그저 적막으로 끝맺었음을 알았다.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오랜 시간 염원해 왔던 고향 집에서 고대하던 그의 방에 누워, 그토록 바라던 잠자리를 가진 것이다.
 “내 방도 많이 변했네…….”
 전날 저녁에도 느꼈던 부분으로, 과거의 흔적이 별로 남아 있질 않았다.
 “하긴, 켄트 그 녀석이 좀 부잡하기는 하지.”
 그가 가출한 뒤로, 방은 남동생 ‘켄트’가 물려받았다고 한다. 그와 7살이나 차이가 나는 켄트의 기억은 항상 상처로 가득했다. 누군가에게 맞고 다녀서 상처가 난 것이 아니라, 혼자서 뛰어놀다 자빠지고 구르고 부딪쳐서 생긴 상처들이었다.
 한번은 마법사 흉내를 낸다며 지붕에서 ‘플라이’라고 외치며 뛰어내렸던 적이 있었는데, 당시 켄트의 나이가 5살이었다. 결국 왼쪽 발목이 부러져서 두 달간 앓아누웠는데, 더 놀라운 건 이러고도 또 그 비슷한 짓을 여러 번 반복했다는 점이다.
 이런저런 사건 때문에, 동네에서 유명한 개구쟁이로 낙인찍혔고, 제튼은 바로 이 부분을 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녀석이 벌써 애 아빠라니.”
 저녁 무렵, 식사를 하면서 많은 이야기가 오갔고, 그러면서 다양한 변화들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우선 그와 5살 차이가 나는 장녀 ‘프릴’이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는 것과, 차남 켄트가 한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10살 차이가 나던 차녀 펠다도 3년 전 혼인을 해서 알콩달콩 깨가 쏟아지게 살고 있다는 점이었다. 비록 아직 아이는 없었으나, 신혼기분을 아직도 만끽하고 있다며 한껏 자랑하는데, 진심으로 행복해 보여서 함께 기뻐할 수 있었다.
 조카를 비롯하여 다른 식구들은 따로 날을 잡고 보여준다 했다. 아이들이 아직 어린 데다가 적잖게 낯을 가린다는 제수씨도 있었고, 야간까지 일을 하느라 바쁜 매제들의 사정도 있기에 그러라고 하며 보내주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제튼의 머릿속으로 또 다른 동생이 떠올랐다.
 “포나.”
 새롭게 생긴 여동생의 이름이었다. 자식 또래의 여동생이라는 점이 참으로 난감했으나, 또 한편으로는 크게 나쁘지 않았다.
 막내 덕분에 부모님이 그의 존재를 좀 더 빨리 떨쳐 낼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녁을 먹고 헤어지기 전, 켄트가 그에게 다시 귓속말을 건네줬었는데, 그 내용이 또 반전이었다.
 <사실, 엄마는 형 가출하고 난 뒤로도 형 생각을 많이 하셨어.>
 보름만 찾다가 포기한 건 따로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 남매를 키우기 위해서는 일을 쉴 수가 없으셨기에 보름 이상은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장남의 가출이 안타까웠으나, 남은 세 아이를 돌보려면 보름 이상은 쉴 수가 없었다. 그들 집안도 여타의 마을 주민과 마찬가지로, 이곳 영주의 땅을 빌려서 농사를 하는 소작농이기 때문에 쉬는 만큼 벌이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결국 홀로 애만 태우셨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 막내 포나가 태어나고, 살림살이가 더욱 빠듯해지자 제튼은 자연스레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그저 아들이 원해서 한 가출이니 잘 지낼 거라고 믿으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내 온 것이다. 간간이 신전을 찾아 기도를 올리는 것, 그것이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전날 보여 주었던 모친의 매질에는 이와 같은 다년간의 맘고생이 한껏 담겨 있었으리라. 원래 모친은 좋아도 화를 내고 슬퍼도 성질을 부리는 성격이지 않던가. 그 매질의 양만큼 그를 생각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엄마만큼 아빠도 변함이 없으셨지.”
 식사 시간 내내 부친은 아무런 말 없이 그를 묵묵히 챙겨주셨다. 그 독특한 부친만의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그리웠던가.
 그가 창문을 벌컥 열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고향의 공기…….”
 시원한 아침공기가 폐를 가득 채운다.
 “좋구나!”
 우렁찬 외침과 함께 새 아침이 시작되었다.
 
 아침 식사는 부모님과 제튼, 그리고 막내 포나가 함께 모여서 했다. 기억 속 풍경과는 조금 달랐으나,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게 중요했다. 나쁘지 않다 여기며 막 식사를 시작하는데 문득 모친이 물어왔다.
 “앞으로는 뭘 하며 지낼 거냐?”
 그 물음에 제튼이 막힘없이 대답했다.
 “좀 쉬려고요.”
 “아주 쉬게 해 줄까?”
 모친의 표정으로 보아 좋은 뜻이 아닐 듯싶었다. 어색하게 웃은 제튼이 재빨리 이야기를 더했다.
 “사실, 농사를 지어 보려고요.”
 모친 케나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너 내어 줄 땅 없다.”
 “어차피 소작이면서…….”
 따악!
 꿍얼거리는 제튼의 머리 위로 별이 떠올랐다.
 “쓸데없는 소리. 쯧!”
 입술을 비죽거린 제튼이 다시 식사를 시작하며 말했다.
 “그동안 모아 둔 돈으로 땅 좀 구해 보려고요.”
 “……돈을 모았다고?”
 모친의 의문성에 제튼의 눈이 실처럼 얇아졌다.
 “설마, 제가 그냥 딩가딩가 놀러만 다녔다고 생각한 건 아니죠?”
 “아니…… 원래 용병들이 하루 벌어 하루 놀고 그러잖아.”
 맞다. 개처럼 벌어서 개같이 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이 항상 함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용병들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지 흥청망청 쓰는 용병들의 행태가 유난히 눈에 띄어 불쾌감을 주는 탓에 그러한 인식이 강하게 남은 것뿐이지, 꼬박꼬박 저축하는 용병들 역시 적잖게 있었다.
 “용병이라고 다 놀아난다는 생각, 그거 정말 편견입니다.”
 손을 까딱거리며 거만하게 자세를 잡는다. 그 순간 모친이 별을 선물했다.
 따악!
 “아얏! 정말…… 머리 나빠지면 어떡하려고 자꾸 머리를 때립니까?”
 “더 나빠질 머리나 있냐?”
 “끄응!”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너 자신을 잘 아는구나.”
 어느 고명한 철학자가 그랬다.
 ‘너 자신을 알라.’
 제튼은 자신을 알아도 너무 잘 알았다.
 “흠흠! 식사나 하시죠.”
 더 말해 봐야 별만 챙길 것 같아서 대충 이야기를 끝맺어 버렸다. 다행히 모친도 식사에 전념하면서 평온한 아침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식사가 끝나자 부모님들은 일터로 향했고, 포나 역시도 등교를 위해 바깥으로 나서며, 집에는 제튼 홀로 남아야만 했다. 당장 할 것 없으면 집안일이라도 하라는 모친의 명에 설거지를 하던 제튼이 문득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테룬 아카데미라…….”
 바로 옆, 스테일 남작령에 위치한 교육기관이었다. 등교 시간은 오전 10시까지로, 이른 아침부터 후다닥 달려 나간 까닭은 매 시간마다 정기적으로 마을과 남작령을 오가는 ‘순환마차’를 타기 위해서였다.
 아카데미!
 이는 귀족들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 ‘교육’을 가르치는 배움의 전당이었다. 사실 귀족만의 전유물이라 규정지을 수는 없었으나, 그 비싼 등록금과 학비 때문에 평민들은 감히 꿈도 꾸기가 어려웠다. 때문에 귀족들만이 이용할 수 있었고, 종래에는 귀족 후계들의 ‘사교장’이라 불리며 온전히 그들만의 공간으로 굳혀진 것이 바로 아카데미였다.
 헌데 그런 아카데미를 다닌다?
 그것도 일반 평민인 포나가?
 “……정말 맘에 안 드는 짓만 해 댔는데, 이건 그나마 마음에 드는 행동이었지.”
 제튼이 실소하며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제국 아카데미 사업.”
 이것은 평민들에게도 기회를 주기 위해 대제국이 시작한 하나의 거대 사업이었다.
 좀 더 손쉽게 숨겨진 인재를 찾고 추려 내어 제국의 동량으로 만들기 위해 펼친 원대한 계획의 일환으로써, 기존 귀족체제의 아카데미 사업을 한 번에 무너트리는 대륙적 행사였다.
 방법은 간단했다.
 대륙 곳곳에 아카데미를 세우는 것이다.
 또한 등록금 역시 극도로 내림으로써 아카데미의 문턱을 낮추며 평민들의 눈높이에 기준을 잡았다.
 물론 아카데미 자존심이 있기에 가격을 아주 낮출 수는 없었다. 하지만 평민을 위한 정책이기에 너무 비싸게 굴어서도 안 된다. 그렇게 조율을 한 결과 적정선이 나왔다.
 평민 4인 가족 기준으로, 세 달 생활비 정도가 책정된 것이다.
 “분명, 파격이었지.”
 기존 금액의 10분의 1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를 반박하고 나설 수는 없었다. 제국 아카데미 사업을 주도하는 이가 바로 제국의 ‘영웅’이기 때문이었다.
 절대적 무력으로 전장을 누비는 전신!
 그가 앞장서서 펼치는 서민정책이었다. 감히 반대를 하며 나설 귀족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했다. 그는 적에게 무자비한 만큼 아군에게도 잔학하기 그지없는 폭군이었다. 귀족들은 바로 그 폭군의 만행에 이미 수차례 학을 뗀 적이 있었다.
 두려움!
 어느 누가 감히 막아설까. 오히려 아부에 찬양까지, 영웅을 향해 알랑방귀를 뀌느라 정신들이 없었다.
 사실, 더 파격적인 건 따로 있었다.
 아카데미 건설은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부터 이뤄졌다는 점이었다. 물론 전쟁의 막바지에 돌입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전쟁 중이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제멋대로라고나 할까. 훗!”
 제튼이 재차 실소하며 그릇들을 내려놓았다. 언뜻 보아하니 물을 많이 사용한 듯, 항아리에 물이 절반 이상 떨어져 있었다. 나중에 떠 놔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릇들을 챙겼다. 그렇게 정리를 하면서도 머릿속은 여전히 앞서의 내용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서민을 위한 정책이라…… 웃기지도 않는 소리.”
 그는 영웅이 한 행동을 칭찬하되 영웅을 칭송하거나 치켜세워 줄 생각은 없었다. 영웅이 어떠한 목적으로 이런 사업을 시행했는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염병. 부익부빈익빈(富益富貧益貧)이 너무 지랄 같으면 재미없잖아. 우리 좀 더 재미지게 놀아 보는 거야. 없는 애들도 대가리 좀 키워서 판을 흔들어 봐야 쫄리는 맛이 있지 않겠어? 위에 놈들은 똥줄 타는 맛에 환장하고, 아랫놈들은 원래 똥줄이 타서 환장하니. 어때? 나의 이 완벽한 계획이. 한 10년 정도만 지나도 아주 개판이 될 것 같지 않냐? 케헤헤헷-! 이 정도는 되어야 진정한 개지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니라.>
 오로지 제튼, 그만이 알고 있는 영웅의 진심이었다.
 사실 귀족들에게 이런 마음을 털어놔도 누구 하나 반박할 사람은 없었다. 그의 매서운 주먹 아래 진정한 철권정치를 몸소 깨우쳤기 때문이다. 귀족들은 도리어 함께 웃는 시늉을 하며 배꼽까지 잡아 댈 게 분명했다.
 “천마…….”
 조용히 영웅의 이름을 불러 본다.
 누군가에게는 전신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마신이고, 어느 누군가는 악귀라 했고, 마귀라 했으며, 정신병자에 사이코라 불리던 존재.
 하지만 이곳 대제국에서만큼은 오로지 영웅으로 불리는 자.
 그에 대한 비화를 이토록 세세히 알고 있는 까닭은 간단했다.
 “내가 영웅?”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였다.
 “큭! 나이면서 내가 아니지.”
 언제고 그의 육신을 빼앗고 그의 영혼을 구석에 몰아넣었던 다른 세상의 절대자.
 천마(天魔)!
 차원의 경계를 넘어 그의 육신에 강림한 이계의 지존.
 “잠깐 빌린다더니, 무려 20년이나 해 처먹을 줄이야.”
 지긋지긋한 시간이었고, 악몽 같은 나날이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고 했던가? 아니, 그보다 더하려나?”
 집주인 쫓아내고 세입자가 집문서를 챙기는 꼴이었다.
 “무림(武林).”
 천마가 살던 세상으로 이곳의 황제와 같은 위치에 올라 있었다고 했었다.
 “아니, 신인가.”
 황제보다 더 높았다.
 기이한 종교의 주인으로서 이 대륙의 교황과 달리 그곳에서는 교주라 불리는데, 신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경배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신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뒤통수를 맞아서 이곳으로 건너 온 것이 아니겠는가.
 역천무한대법진(逆天無限大法陳)!
 그의 수하들과 적도들이 합작하여 만들어 낸 진법이었다.
 “이곳 세상으로 치면, 마법결계 정도 되려나.”
 그 결계 속에 갇혀 버린 것이다. 이에 열이 받은 천마가 한계까지 힘을 개방했고, 뒤이어 진법과 천마의 힘이 부딪쳤다. 그로 인해 시공의 균열이 일어나며 차원의 붕괴가 시작되더니 그 틈새 속으로 천마의 영혼이 빨려들었다. 이내 차원의 경계를 넘어 제튼이 사는 이곳, 대륙 ‘파라니안’으로 건너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안착한 곳이 제튼의 육신이었다.
 육신의 주인 제튼과 이계의 영혼 천마.
 하지만 황당하게도 영혼의 대치는 천마의 압승으로 끝났다.
 태양과 반딧불!
 둘이 지닌 영혼력의 차이는 그 정도로 어마어마하여 제튼은 감히 올려다볼 엄두도 낼 수가 없었다.
 운이 좋았다고 할까? 갑작스런 차원이동으로 천마 역시 적잖게 지쳐 있었고, 그 때문에 제튼을 소멸시키는 것까지는 힘에 부쳤다고 한다. 덕분에 제튼이 생존할 수 있던 것이다.
 이후 천마가 보여 준 태도는 실로 놀라웠다.
 ‘절대자가 괜히 절대자가 아니란 걸 알았지.’
 갑작스레 이세계로 넘어와 버린 그 상황에 당황할 법도 하건만, 그는 대범하게 이를 받아들여 버렸다. 오히려 능숙하게 제튼의 육신에 담긴 기억까지 읽어 내더니 단번에 이 세상에 적응을 해 버리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대뜸 이따위 말을 지껄인다.
 <아주 잠깐, 딱 10년만 즐기다가 갈 테니 좀만 참아라.>
 “설마, 그 두 배나 살다가 갈 줄이야.”
 자신의 영혼을 소멸시키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상황인지라 그 제안을 덥석 받아들여야만 했다.
 기력을 회복한 뒤, 언제든지 소멸시키는 게 가능했을 텐데도 이렇게 살려 줬다.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하나?”
 지난 20년의 세월을 생각하면 오히려 욕을 한 바가지 부어 주고 싶었다.
 천마가 자그마한 소왕국을 ‘대’제국으로 끌어올리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의 육신이 얼마나 많은 살인과 죄악을 쌓는지도 볼 수 있었다.
 악마!
 그가 본 천마는 영웅이 아닌 희대의 악인이요, 마인이며, 세기의 마왕이었다.
 “어릴 적에는 영웅이 되는 걸 꿈꿨는데.”
 하지만 현실 속의 영웅은 꿈처럼 아름답지 못했다.
 그것이 천마이기에 그런 것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것인지는 모른다. 단지 20년의 세월 속에서 꿈과 환상이 깨어졌다는 것, 현실은 지독하다는 것, 악마는 존재한다는 것, 오로지 그런 것만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20년 세월의 보상이라…….”
 주먹을 꾸욱 움켜쥔다. 미지의 거력이 그 안에서 약동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 힘은 세월의 보상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쌓은 것이었다.
 ‘내가 지닌 이것으로도 충분해!’
 물론 이 힘을 지니게 된 경유를 따져 본다면 결국 천마가 있었기에 가질 수 있던 것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가 육신을 지배하면서 남긴 힘은 따로 있었다.
 천마신공(天魔神功)!
 무림 최강의 지존신공이라 하였다.
 “내게는 필요 없는 것.”
 그래서 버렸다. 아니, 가뒀다. 봉인했다.
 꿈틀!
 지금도 육신 한편에 잠들어 코골이를 하는 놈의 숨소리가 들렸으나, 애써 무시하며 생활하고자 했다.
 “태양과 반딧불.”
 처음 천마와 그의 관계는 그러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태양과 달!”
 여전히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으나, 이걸로도 충분했다.
 천마신공이 아니더라도 이미 그는 절대적 존재라 불리기에 아깝지가 않았다.
 “그래서 뭐?”
 자신도 천마처럼 이능을 부리고 권력을 휘두르며 황제처럼, 아니 황제보다 더 대단하게 마치 신처럼 군림해야 할까?
 “……무의미한 짓.”
 20년의 세월에 깨달은 건 하나였다.
 “그냥 평범하게 사람다운 삶을 사는 게 최고지.”
 영웅? 다 개나발 부는 소리였다.
 “한 명을 죽이면 살인자, 만 명을 죽이며 영웅이라고?”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였으나, 그는 그 살인이 정당화되어 영웅으로 격상되는 현장을 똑똑히 목격했다.
 자신의 육신이 첫 살인을 하고, 곧 수십의 적도를 찢어발기더니, 이내 수백의 목숨을 휘둘러서 수천의 핏물을 쏟아 냈고, 수만을 악몽으로 이끌어 결국에는 수십만의 공포를 쌓아 버렸다.
 “그게 인간이 할 짓이냐?”
 사람이고 싶다, 살아 있고 싶다, 사랑하고 싶다, 사랑받고 싶다.
 괴물로 불리고 악마라 불리다 마왕이 되었고 마신이 되었다
 “부디, 평범하게 살다가 가자.”
 그저 그렇게 지낼 수 있으면 충분했다.
 20년 세월을 빼앗긴 것이 분하지도 않냐? 그 세월의 보상으로 영웅의 모든 것을 누려도 되지 않느냔 말이다!
 누군가 이리 외칠지도 모른다.
 “인육을 썰면서 피로 가득 채운 술잔을 들고, 뼈로 빗은 의자에 앉아 저주가 새겨진 망토를 두르고, 악마의 얼굴을 연기하라고?”
 가운뎃손가락을 발딱 세워 주고 싶었다.
 “천마 말로는 욕이라고 하던데, 확실히 욕 같기는 하네. 이렇게 보니 곧휴 모양이 맞기는 맞네, 달랑달랑 한 게. 큭!”
 천마의 멜랑꼴리한 설명이 떠올라 잠깐 실소한 제튼이 이내 그릇들을 챙겨 들었다.
 <그만한 힘을 지니고 그따위 삶을 살겠다고?>
 아련하니 바람결에 지긋지긋한 음성이 실려 온다. 아니, 어쩌면 회상의 연장인지도 몰랐다.
 “곧 사십을 바라보는데 더 이상 요란하게 살고 싶지는 않수다.”
 간접경험이라고 해도 20년의 세월 동안 갈 데까지 가 봤다. 달갑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남들이 못 해 본 건 죄다 해 봤다.
 “주로 나쁜 쪽이지만……. 큭!”
 <이봐,이봐, 그래서 넌 안 돼. 그만한 힘을 가지고서 겨우 그거라니. 쯧쯧! 그래서야 마두는커녕 마군, 아니 마인도 못 돼! 그따위 심보로 무슨 마왕이며 마신이냐.>
 웃음이 나온다.
 “그러니 난 평생 ‘마졸(魔卒)’이나 한다고 하지 않소.”
 <쯧쯧쯧! 글러먹었어. 어쩌다 이런 놈을 거뒀는지.>
 정확히는 거둔 게 아니라 거둬진 거였다. 물론 주종 관계는 바뀌어 버렸으나 굳이 진실을 풀자면 그러했다.
 “어차피 이제는 내 시대요. 당신의 시대는 갔소.”
 어둠이 물러간 자리로 새 아침이 찾아왔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을 것이오. 내게는 현실과 미래가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잠시 허공을 올려다본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눈에 비쳤다. 절로 실소가 흘러나왔다.
 “큭!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고개를 휘휘 흔든 제튼이 걸음을 내디뎠다.
 “웃차! 일해야지, 일. 아직도 할 일이 태산인데 이러고 있을 틈이 어디 있나.”
 집안일이란 게 의외로 쉽지가 않았다. 청소에 빨래, 그리고 걸레질까지. 휴식은 그 이후에나 맛볼 수 있는 달콤한 과실이었다.
 “개방귀 뀌는 소리를 지껄였더니 괜히 입이 심심하네.”
 문득 생각해 보니 달콤한 과실을 먼저 따 먹은 다음에 일을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제튼의 발걸음이 바삐 부엌으로 향했다.
 3. 동검패
 
 집안 청소를 끝내고 나니 어느새 태양이 하늘 중앙에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중간중간 집어 먹은 음식들이 있어서 크게 배가 고프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점심이라는 생각에 재차 입이 심심해진 것이다.
 “외식이나 한번 해 볼까나.”
 집밥을 먹을까도 싶었으나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이 아닌가.
 “추억의 맛집 탐방도 나쁘지는 않겠지.”
 이내 어슬렁거리며 바깥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식사 시간대 임에도 불구하고 한산한 거리가 유난히 인상적이었다.
 ‘시골은 시골인가.’
 대다수가 소작을 하다 보니 이처럼 점심때 따로 움직이는 이들의 수가 그리 많질 않았다.
 “역시 도심지와는 다르네.”
 점심시간만 되면 우르르 대이동을 하는 도시의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렇게 고향의 모습을 이리저리 살피며 걷는데, 생각보다 길이 어지러운 게 아닌가. 전체적인 마을의 도로 모양이 미묘하게 바뀌어 있는 까닭이었다. 22년 세월이 가져다준 미묘한 혼돈이었다. 그의 기억이 너무 오래된 거라는 부분도 혼란에 한 팔 거들어 줬다.
 추억과 현실은 엄연히 다른 법이었다.
 “이거 참, 여차하면 길 잃어 먹게 생겼네.”
 그나마 목적지가 거의 직선이나 다름없는 위치에 있어서 걱정은 없었다. 그렇게 쭈욱 나아가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가 코앞이었다.
 “허……!”
 터져 나오는 탄식. 추억의 맛집이 있던 자리 위로 웬 거대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딱 봐도 5층은 되어 보이는 건물이었는데, 제국의 영지로 분위기를 맞춘다며 세운 건물인 듯싶었다.
 “파소 할머니의 수프는 더 이상 맛볼 수 없는 건가…….”
 그보다는 파소 할머니의 걸쭉한 욕설이 그리웠다. 이 인근 영지에서는 소문난 욕쟁이 할머니가 아니던가. 덕분에 자연히 그녀의 음식집도 이름이 알려졌고, 그 맛이 남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남작령에서는 손에 꼽히는 맛집으로 유명해지기까지 했었다.
 “하긴, 할머니도 이제는 연세가 있으실 테니.”
 대충 무스탄과 비슷한 연세일 것이다. 무스탄이야 워낙 장사였으니 문제가 없으나, 그녀는 달랐다. 그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할머니인 것이다.
 ‘단지, 입이 좀 걸어서 그렇지. 큭!’
 추측컨대 연세 때문에 장사를 하기가 어려우니 땅을 팔고 물러난 모양이었다.
 ‘아니면 말고…….’
 어쨌든 더 이상 예전 모습이 아니라는 건 확실히 느껴졌다.
 “아쉽네.”
 새삼 동네가 변했다는 사실에 쓴웃음이 새 나왔다.
 “그래도 다른 영지보다는 사정이 나으려나.”
 전쟁의 최후방지대에 위치해 있던 덕분에, 옛 모습을 이 정도라도 유지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전방지대에 있던 영지들의 경우에는, 폐허가 된 영지에 새로 건물을 쌓아올려 옛 모습은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뭐, 그 덕분에 상당히 세련된 영지들로 완성되었지.’
 수많은 장인들의 기술력과 엄청난 노동자들의 힘으로 순식간에 건축물을 완성시켜 버렸다.
 “할머님 댁이 어디였더라?”
 아직 살아 계실까? 문득 궁금해져서 찾아가 보기로 결심했다. 혹여 돌아가셨다면 인사라도 한번 드리고 올 생각이었다.
 “저 방향이었던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정확히 5분 뒤, 그는 길을 잃어버리게 된다.
 
 제튼은 난감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주변을 살폈다. 눈에 익은 건물들이 몇 개 보인다. 하지만 눈에 익었다고 믿어서는 안 되었다. 추억 속의 풍경을 연상하고 걷다가 지금 이 꼴이 난 게 아니던가.
 “거참…… 설마 정말로 길을 잃을 줄이야.”
 장난처럼 했던 이야기가 현실이 되어 버렸다.
 “그 작자 말마따나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여기서 ‘그 작자’란 천마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 이름을 아는 이가 없기에 굳이 천마라는 이름을 언급해도 상관은 없었으나, 습관처럼 이리 부르는 것뿐이었다.
 “오빠?”
 그 순간 들려온 음성에 제튼의 귀가 쫑긋 섰다. 시선을 돌려보니 여동생 프릴이 있는 게 아닌가.
 “설마, 나 보러 여기까지 온 거야?”
 그녀의 물음에 제튼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그렇지, 뭐.”
 길을 잃어버렸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장남의 자존심이 있지!’
 “여행하느라고 지쳤을 텐데 뭘 여기까지 찾아오고 그래. 나중에 그이와 애들 데리고 찾아 간다니까.”
 “흠흠, 장남이 되어서 동생들만 찾아오게 할 수는 없잖아.”
 이왕지사 거짓말을 하기로 한 것, 뻔뻔하게 철면피를 깔기로 했다. 그 말에 프릴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이는 일터에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아서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애들은 보여 줄게. 옆집에 잠깐 맡겨 놓고 왔는데, 온 김에 같이 보러 가자.”
 제튼이 슬쩍 손을 빼 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니, 됐어. 오늘은 그저 네 얼굴만 보러 온 거니까 나중에 다시 네 남편이랑 함께 만나자.”
 “그냥 애들 얼굴만 보고 가.”
 “애들이 낯가림을 좀 한다면서. 괜히 나 혼자 가서 놀라게 하느니, 나중에 가족들 다 있을 때 만나는 게 부담도 덜 되고…… 여하튼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리 말하며 연신 엉덩이를 빼는 제튼의 모습에 프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제튼의 의견을 따라 준다.
 “오빠 생각이 정 그렇다면야…….”
 안도의 한숨을 내 쉰 제튼이 조심스레 제 손을 내려다봤다.
 ‘수십만을 살해한 이 손으로 조카들을 만지라고?’
 물론 그 핏빛 어둠에 잠식당하지는 않았다. 커져 버린 영혼력 덕분인지 어둠에 먹힐 걱정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왠지 꺼려지는 느낌이 남아 있었다. 가족들과 함께하는 것도 사실 찝찝함의 여운이 존재했으나, 이곳으로 오는 내내 털어 버린 덕분에 문제가 없던 것이다.
 하지만 조카는 또 사정이 달랐다.
 ‘좀 만 더…… 조금만 더 시간을 다오.’
 그렇게 생각하며 프릴과 작별인사를 나눈다.
 “애들이 기다리니까 이만 가 볼게.”
 “조심해서 들어가.”
 인사를 마치며 돌아서는데, 문득 제튼의 얼굴에 진한 고뇌가 떠오른다.
 ‘여기가 어디더라…….’
 여전히 그는 길을 헤매는 중이었다.
 
 길을 잃었으나 걱정은 없었다. 도심지처럼 거대한 영지도 아니고 그저 촌동네 영지에 속한 마을 중 하나일 뿐이었다. 여차하면 위로 올라서 방향을 가늠하면 되는 것이다.
 이참에 고향 구경이나 더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느긋이 걸음을 옮겨 갔다.
 ‘파소 할머니께는 다음에 찾아가야지.’
 굳이 다음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돌아다니다 발견하면 그때 들어가도 되는 것이다.
 그렇게 이리저리 헤매며 10여 분쯤 나아갔을까?
 다그닥, 다그닥.
 저 앞으로 큼직한 마차가 하나 보였다. 저게 정말 마차인가 싶을 정도로 거대한 마차였는데, 저게 바로 그 유명한 순환마차였다. 최대 수용인원은 30명으로, 각 마을에서 마을로 이동하는 교통수단이었다.
 그리고 이 순환마차를 끌고 있는 네 마리의 말이 보였다. 보통의 말과는 달리 유난히 커다란 체구가 위압적이었는데, 그 위로 마치 전쟁터에서나 입힐 법한 기괴한 갑주를 걸치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혈마(血馬)…….’
 저 갑주는 말의 독특한 외형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몬스터의 피를 먹여서 키운 놈들로, 어릴 적부터 트롤의 피와 오우거의 피를 주기적으로 음식에 섞여 먹이며 자체적인 치유력과 근력을 한껏 끌어올린 놈들이 바로 저 ‘혈마’였다.
 피를 먹여 키웠기에 혈마라 이름을 지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사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무림에 있을 때 자주 까불던 놈 이름이 혈마라고 했던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좀 불쌍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혈마라는 저 말은 몬스터의 피를 먹여서 키운 까닭인지 그 부작용으로 흉측한 외모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못생긴 놈’과 같은 의미로, ‘이 혈마 같은 놈’이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물론 과한 변이가 있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단지, 몬스터 피의 부작용인지 유난히 힘줄이 도드라진 정도뿐이었다.
 하지만 그 힘줄이 수십, 수백개가 울뚝불뚝 돋아나 있으면 징그럽고 흉측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갑주는 그런 징그러울 만큼의 외형을 감추기 위한 방편이었다.
 여하튼 이러저러한 이유로 족히 열두 마리 이상의 말이 필요할 법한 순환마차를 단 네 마리로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순환마차를 잠시 감상하고 있노라니 저도 모르게 씁쓸한 표정이 떠올랐다.
 ‘역시…… 제국에서는 어디를 가도 피할 수가 없군.’
 저 순환마차 역시 천마의 발상으로 인하여 만들게 된 것이고, 저 독특한 말 역시도 천마의 호기심에 탄생한 녀석들이었다.
 제국에는 이처럼 곳곳마다 천마가 부린 호기심의 결정체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피할 수 없는 과거의 잔재련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그의 발걸음이 어느새 순환마차 쪽으로 나아간다.
 “남작령에 들를 일이 있었지.”
 마차를 보자 해야 할 일이 생각났다. 이참에 해결하고 오는 게 나을 듯싶었다.
 길 잃은 김에 쉬어 가자는 생각으로 결정한 게 아니었다. 결코!
 
 마차가 멈추며 사람들이 내리고, 기다리던 마을의 사람들이 올라타는데, 생각보다 그 숫자가 많질 않았다. 평일이고 특별한 시간대가 아니기에 이용 횟수가 적은 것이다.
 그렇게 올라타고 보니 순환마차 안에는 총 24명의 인원이 착석해 있었다. 좌우로 늘어진 좌석은 이미 가득 찼기에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야 했다.
 그렇게 자리를 잡고 앉은 뒤, 바닥에 박힌 고리에 손을 건다. 그게 바로 손잡이였는데 마차가 흔들리면 그걸 잡고 버티라고 설치를 한 것이다.
 ‘오랜만에 타 보는군…….’
 사실 그 자신은 처음 타 보는 거였다. 단지 천마가 타던 것을 구경한 적이 있을 뿐이었다.
 “이럇!”
 앞쪽에서 마부가 채찍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출발인가.’
 덜컹거리는 움직임과 함께 마차가 이동을 시작했다. 보통 천막으로 천장을 덮어 놓는데, 날이 좋아 활짝 열어 놓아 그런지 지나는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느리군.’
 실소가 나왔다. 전마로 사용하기 위해 키웠던 말들이 이런 마차를 모는 이유였다.
 힘도 좋고 체력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속도가 느리다. 물론 말 특유의 기본적인 속도는 있었다. 하지만 비대한 근육 때문인지 일정 속도 이상이 나오질 않았다.
 대신 그 지구력이 대단해서 장거리 보급운송에 최적화가 되었고, 지금처럼 순환마차로 활용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게 풍경을 감상하며 앉아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기이한 시선이 느껴지며 뒤통수를 간지럽혔다.
 뭔가 싶어서 돌아보니 웬 여인이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뭐지?’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여인이 슬쩍 엉덩이를 밀며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러더니 대뜸 옆으로 붙으며 묻는다.
 “……제튼, 오빠?”
 ‘나를 알어?’
 기억에 없는 여인이었다. 연령대도 그와 맞지가 않아 보였다. 얼핏 봐도 2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게, 둘째 여동생 펠다와 비슷한 나이 또래였다. 아무리 기억을 뒤적여 봐도 나오는 얼굴이 없어서 조심스레 물었다.
 “누구…… 신지?”
 “역시! 제튼 오빠구나?”
 박수까지 치며 좋아하는 그녀의 모습에 슬쩍 얼굴이 붉어졌다. 그도 그럴 게 여인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커서 순환마차 안의 모든 이들이 시선을 집중시킨 까닭이었다.
 여인도 시선을 느낀 듯 얼굴을 살짝 붉히며 속삭인다.
 “저 모르시겠어요?”
 ‘모르니까 물어봤지, 알면 물어보겠니?’
 이런 제튼의 모습에 여인이 실망한 듯 한숨을 내쉬더니 슬쩍 한 마디를 더한다.
 “오줌싸개.”
 뜬금없는 소리에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무언가를 떠올린 듯 제튼의 동공이 점차 확장된다.
 “오줌싸개 헨몬! 헨몬 웰븐?”
 이번에는 제튼의 음성이 커져 버렸다. 다시 시선이 모이자 입을 막으며 어깨를 웅크린다. 그러며 조심스레 여인의 눈치를 살피는데, 여인이 씨익 웃는 게 보였다. 그 순간 좌측에 홀로 파이는 보조개가 묘하게 눈에 익었다.
 “설마…… 그…….”
 “세레나요.”
 “그래. 헨몬의 여동생 세레나!”
 이제야 생각났다. 여인, 세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속삭였다.
 “펠다에게 들었는데, 정말로 돌아오셨네요?”
 “……펠다에게 들었다구…… 요?”
 “예. 펠다 집이 저희 옆집이거든요.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제튼이 어색하게 웃었다. 세레나를 겨우 기억해 내는 데 성공했으나, 헨몬의 여동생이라는 점이 묘하게 양심을 찌른 것이다.
 그도 그럴 게, 어릴 적 얼마나 괴롭히고 놀려 댔던가. 그나마 다행이라면 머리가 좀 굵어질 즈음에는 서로 친해져 나름 잘 지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여동생 앞이라서 그런지 좋았던 기억보다 괴롭히던 기억이 먼저 떠올랐다. 그래서일까? 여동생에게 말을 놓기가 쉽질 않았다.
 “설마, 제 오빠한테 한 짓 때문에 그러세요?”
 정확히 찌르며 들어오는 세레나의 이야기에 슬쩍 시선이 돌아간다.
 ‘난 그 작자와 달리 양심이 살아 있는 인종이니까.’
 그 작자는 물론 천마였다. 그는 양심을 거세한 인간이다. 아니, 종 자체가 다르다. 이게 솔직한 제튼의 심정이었다.
 “으음! 그땐 정말, 죄송했습니다.”
 이어지는 사과에 세레나가 실소하며 손을 흔들었다.
 “동네에서 소문난 개구쟁이더니, 오빠도 나이를 먹긴 먹었나 보네요.”
 남동생 켄트를 개구쟁이니 뭐니 했지만, 그게 다 보고 배운 것이 있었기에 나온 행동이다. 사실 동네 개구쟁이 마스터는 제튼이 먼저 선착이었다.
 “무슨 옛날 일 가지고 그러세요. 그리고 나중에 헨몬 오빠하고 친하게 지냈던 것 기억해요. 오빠 덕분에 헨몬 오빠가 그나마 집밖으로 나돌 수 있었는걸요. 그러니 괜한 맘 쓰지 말고 편하게 말 놓으세요.”
 “그…… 그럴까?”
 이 정도까지 양보해 주는데 존대를 쓰면 그건 또 예의가 아니다.
 ‘신사라면 덥석 무는 미덕이 있어야지.’
 겨우 말을 놓으며 침을 꼴깍꼴깍 삼키는 제튼의 모습에, 세레나가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왠지 유쾌한 아가씨군.’
 이런 재미난 여인이 기억의 구석진 곳에 있을 줄이야. 의외였으나 또 한편으로는 당연하다 여겨졌다.
 ‘너무 어렸지…….’
 그가 한창 뛰어놀던 당시에는 겨우 아장거리던 세레나였다. 간간이 헨몬의 집을 찾아갔다가 몇 번 스치듯 얼굴을 본 게 전부였다.
 ‘그나마 귀여워서 기억하고 있었지.’
 사실 그녀가 기억에 남았다기보다 그녀의 언니가 기억에 남은 것뿐이었다. 제튼보다 세 살 많던 웰븐가의 장녀 ‘셀린 웰븐’의 얼굴이 그녀에게서 어렴풋이 비친 까닭이다. 한쪽만 파인 보조개가 특히 그러했다.
 그녀는 동네에서 소문난 미인이었다. 어릴 적 은근히 좋아라하던 마음이 있었던 것인지 제법 기억이 선명했다. 어쩌면 셀린의 관심을 끌고 싶어서 헨몬을 그리 괴롭혔던 걸지도 몰랐다.
 “펠다와 동갑이던가?”
 한번 발동이 걸리자 흐릿해진 기억이 하나둘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차녀 펠다와 어울리던 것을 가끔씩 봤던 게 생각났다.
 “예. 기억하고 계셨네요?”
 “이제 조금 떠올랐어. 그보다, 어떻게 한 번에 나인 줄 알아봤어?”
 “헤헷! 사실 오빠가 제 첫사랑이에요. 그러니까 한 번에 알아본 것 아니겠어요?”
 “그…… 그래?”
 “풋! 농담이에요. 뭘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여요.”
 “끄응!”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켄트 오빠와 많이 닮으셔서 한번에 알아본 거예요.”
 “켄트와 내가?”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꺾는다. 켄트는 누가 봐도 부친과 친가 쪽을 닮은 전형전인 미남상이었고, 그는 친가보다는 외가 쪽을 닮은 굵직한 남성상이었다.
 “잘 보면 닮은 데가 많아요. 눈이라든가, 입술, 그리고…….”
 세레나가 차근차근 설명을 하는데, 너무 집중을 한 것일까? 어느새 둘의 거리가 가까워져 있었다. 고개를 들이미는 그녀의 모습에 제튼이 슬며시 허리를 빼며 말했다.
 “그…… 그래, 닮았나 보다. 형제니까, 형제니까 그럴 수 있지.”
 당황하는 그의 모습에 세레나가 배꼽을 잡았다.
 “푸훗! 오빠 너무 순진하시다.”
 “끄응…….”
 완전히 가지고 놀고 있었다. 쓴웃음을 지은 제튼이 화제 전환 겸 질문을 던졌다.
 “남작령에 가는 길이야?”
 순환마차는 남작령으로 바로 가는 게 아니라, 중간중간 마을을 거쳐서 남작령으로 향한다. 그 때문에 이리 묻는 것이었다.
 “예. 아무래도 오늘쯤해서 합격자 발표가 나올 것 같아서요.”
 “합격자 발표?”
 의아한 듯 쳐다보자 세레나가 허리춤에 양팔을 얹으며 당당히 가슴을 폈다.
 “에헷! 제가 이래 보여도 제국 아카데미 사업의 수혜자랍니다.”
 “아카데미 사업의…… 수혜자?”
 “예. 호홋! 2년이나 일찍 조기 졸업을 했지요.”
 그러면서 재차 가슴을 활짝 펴는데 안타까운 심정이 들었다.
 ‘가슴이…… 방어적이구나…….’
 눈시울을 붉히며 제튼이 재차 물었다.
 “조기 졸업?”
 “예. 원래 6년 교육인데, 제가 워낙 우수해야죠.”
 그러며 콧대를 세우는데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진다. 공격력이 약한 콧대를 본 까닭이다.
 ‘미인은 미인인데, 군데군데 조금씩 아쉽네.’
 그래도 동네에서는 손에 꼽힐 미녀이리라. 단지, 제튼이 제국적 미녀들을 원 없이 봐 왔다는 게 문제랄까?
 “왠지 불쾌한 눈빛이네요.”
 세레나의 한마디에 뜨끔한 제튼이 손사래를 치며 말문을 열었다.
 “이야~! 대단하네, 대단해. 감탄한 거야. 내가 원래 감탄하면 눈빛이 좀 요상해지거든. 하…… 하핫!”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으나, 어찌 잘 넘어간 듯 세레나가 다시 콧대를 세우고 있었다.
 “당연하죠. 제국 아카데미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이제 겨우 5년째인데, 벌써 졸업장을 탔으니까요.”
 확실히 대단했다. 아카데미의 6년 교육이라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천마 덕분에 서민들에게도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으나, 그곳은 결코 자비롭지만은 않았다.
 배움의 전당이지만 배움의 전장이기도 했다.
 스승은 가르치고 학생들은 배운다.
 그뿐이지만 가르치는 수준이 워낙 높았다. 서민을 위해 만들었다고 하나, 명사들은 기본적으로 과거 아카데미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었다.
 물론 억지로 눈높이를 낮추고 서민들과 마주 보려 노력하기는 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의 가르침은 어려웠고, 학생들은 따라가기 위하여 매일같이 도서관을 오가며 공부에 전념해야만 했다.
 그러고도 따라오지 못하면 낙오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진급을 하지 못한 채 한 학년을 다시 다녀야 하고, 그런 식으로 경고가 두 번 쌓이면 퇴학 처분이 된다.
 퇴학자는 1학년부터 재교육이었다.
 이 어려운 전장 속에서 정규 졸업도 아니고, 1년 조기 졸업도 아닌, 2년 조기 졸업을 했다는 소리다.
 물론 기존 귀족들의 아카데미에 비하여 수준을 낮췄다고는 하나, 그래도 아카데미였다. 가르칠 건 다 가르친다는 소리였다.
 귀족들이 어릴 적부터 가정교사를 들여가며 배웠다는 걸 생각한다면, 4년 만에 이 모든 학업을 이뤄 낸 세레나는 그야말로 천재라고 불러야 마땅했다.
 “그런데, 합격자 발표라니?”
 제튼의 물음에 세레나가 슬며시 얼굴을 붉히는 게 보였다.
 “할 수 있다면……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해 보고 싶어서요.”
 바로 옆 자작령의 ‘모던 아카데미’에 원서를 냈다고 한다.
 “테룬 아카데미가 아니라?”
 남작령에 위치한 테룬 아카데미를 언급하자 세레나가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나온 곳이 바로 테룬 아카데미예요.”
 기왕이면 다른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가르치고, 또 배우고 싶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사실 테룬 아카데미는 조금 규모가 작은 편이라서 모던 아카데미에 원서를 넣었어요.”
 우편배달부가 집으로 통지서를 보내 준다고는 하나, 아루낙 마을은 내일이나 모레쯤에 배달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 기다리기에는 마음이 너무 급했다. 때문에 직접 남작령에 위치한 영지 중앙 우체국에서 합격자 발표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만약…… 떨어졌으면 어쩌려고?”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하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활짝 웃는데, 왠지 그 미소가 유달리 눈부시게 보였다.
 
 어느새 순환마차는 저 멀리 남작령에 접어들고 있었다. 바닥에 앉아 있어서 시야가 낮은 탓인지 정확한 확인은 어려웠으나, 그래도 주변 풍경과 저 멀리 솟구친 산맥의 흐름으로 대략적인 위치는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빠는 남작령에 뭐 하러 가는 거야?”
 문득 세레나가 새로운 질문을 던져 온다. 오는 사이 제법 이야기를 나눈 덕분인지, 그녀의 말투는 한결 편안해 보였다.
 갑작스런 물음에 뭐라 답할지 고민하던 제튼이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진실을 털어놓았다.
 “일거리 좀 구하려고 왔지.”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일하게? 이야~! 정말 어른이 되기는 됐나 보다.”
 “내가 너보다 한참 어른이란다.”
 “그런 사람이 가출해서 20년이 넘게 연락 한 번이 없어?”
 “……끄응!”
 반박할 수 없는 약점을 쑤시고 들어온다. 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일을 할 건데?”
 “그건 비밀.”
 말해줘도 상관없었으나 일처리가 끝나고 확정이 되기 전까지는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까 뭐 할지는 확실히 정하고 가는 거구나.”
 “이야~! 똑똑한데. 그걸 금세 눈치채다니.”
 “엣헴!”
 콧대를 세우는 그녀의 모습에 실소하고 있을 즈음, 마차가 드디어 멈춰 섰다. 남작령에 들어가기 위한 성문에 도달한 것이다.
 이곳에서 잠시 내려 성문 경비병에게 신분증을 보여 줘야지 통과가 가능했다. 이내 마차의 인원들이 전부 내리고 하나같이 품 안에서 목패를 꺼내든다.
 성인 장정의 손가락 두 개 크기의 납작한 직사각형 목패, 그게 바로 보통 평민들이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서 들고 다니는 ‘신분증’이었다. 각 출신과 성명 등이 앞과 뒤로 나뉘어서 적혀 있었는데, 평민들과 달리 귀족들은 금이나 은, 그리고 동을 사용하여 계급의 특별함을 과시하고는 했다.
 어느새 제튼의 순서가 되었는데, 웬일인지 제튼의 얼굴을 본 경비병이 깜짝 놀라는 게 아닌가. 바짝 긴장한 모습을 본 제튼이 쓴웃음을 지으며 가벼운 눈짓과 함께 고개를 흔들었다.
 저들이 그에게 경례를 하려 한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그 가벼운 동작으로 경비병을 물리며 성안으로 들어선 제튼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필 세레나가 이 요상한 상황을 눈에 담은 게 아닌가.
 ‘끄응…… 그걸 볼 줄이야.’
 눈치가 비상한 그녀였다. 게다가 머리도 좋다. 분명 이상하다는 걸 느꼈으리라.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눈빛이 보였으나, 애써 무시하며 순환마차에 올랐다.
 “뭐야?”
 당연히 이를 내버려 둘 세레나가 아니었다. 냉큼 그의 소매를 움켜쥐더니 물어 온다.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을 떨었다.
 “마차 출발하겠다. 가자.”
 일견 단호하다 싶을 정도로 거리를 두려하는 모습에, 할 수 없다는 듯 세레나가 한발 물러섰다. 그러면서도 의심의 눈초리는 거두지 않았다.
 ‘분명, 뭔가 있어!’
 연신 따끔거리는 뒤통수에 제튼의 입가에 쓴웃음이 머물렀다.
 ‘내 실수지…….’
 얼마 전 귀향길에 이곳을 통과하면서 있었던 일로, 그가 지니고 있는 신분증 중에서 가장 낮은 등급의 신분증을 하나 꺼내 들었는데, 그게 이곳에서는 특별한 신분증이었던 듯싶었다.
 검패!
 그가 꺼내어 든 신분증이었는데,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이 시대 기사들의 신분증이었다.
 보통 평민들이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서 들고 다니는 걸 신분증명패, 또는 줄여서 ‘명패’라고 한다.
 그렇다면 검패는 어떠한가?
 우선 둥글납작한 외형을 지니고 있다. 거기에 앞뒤로 나뉘어 정면에는 세 개의 검이, 뒷면에는 출신국가의 마크가 진하게 새겨져 있었다.
 정면 세 개의 검이 지닌 뜻은 이러했다.
 -신과 주군, 그리고 스스로에게 당당하여라.
 뒷면의 국가 마크의 주변으로는 명패처럼 각자의 출신 및 성명을 적을 수 있는데, 이는 개개인의 자율의사에 따라 바뀔 수 있었다. 굳이 비밀을 고수하려는 이들의 경우에는 그 명성이나 신뢰도 등을 따져서 아무것도 새기지 않을 수도 있었다.
 금, 은, 동, 목.
 총 네 종류의 검패가 존재하는데, 우선 가장 최하위의 것이 바로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기사가 아니라, 그들을 시중드는 견습기사들이 지니는 것으로써, 목검패는 명패와도 그리 큰 차이가 없어서 실상 검패로도 취급하지 않는 게 보통이었다.
 그리고 동검패.
 이는 정식 기사를 뜻하는 것으로, 준남작의 신분도 함께 겸용하는 준귀족의 신분증이기도 했다.
 그 위의 은검패.
 여기서부터는 정식으로 귀족의 자격을 인정받게 된다. 최소 남작위부터 자작위까지 인정되는 게 바로 이 은검패였다.
 마지막으로 금검패.
 실로 귀한 것으로,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위 귀족의 자격을 증명하게 된다. 최소 백작위 이상을 인정하는 것이니만큼, 그 주인의 능력에 따라서는 공작위도 충분히 노려볼 수 있는 게 바로 이 금검패였다.
 그리고 얼마 전, 제튼은 이런 검패들 중 하나를 이용해서 이곳을 통과했었다.
 동검패!
 그가 지닌 검패였다.
 사실, 그 외에도 은검패와 금검패까지 목검패를 제외한 세 종류의 검패를 모두 지니고 있었다.
 <가출했다가 20년 만에 돌아가는 놈이 여태껏 자리도 못 잡고 있었어 봐, 얼마나 쪽팔리겠냐. 그러니까 요런 것 하나쯤 떡하니 들고 가야 체면이 서는 거다.>
 천마가 무림으로 돌아가기 직전 그의 직속수하를 시켜 만든 것으로, 서류상으로도 아무 하자가 없는 완벽한 검패였다. 굳이 금, 은, 동의 세 종류를 모두 만든 이유는 각각의 상황에 맞춰 사용하라는 의미였다.
 <결국 네놈 그 소심한 성격에 동검패나 찔끔거리며 사용할 게 뻔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받아 놔라. 마지막 정리라고 생각하고 지니고 있어.>
 비록 마음에 안 드는 존재였으나, 미운 정을 생각해서 하나쯤 품고 있자는 생각을 해 버렸다. 그렇게 은검패와 금검패는 녹여서 환전하고, 동검패만 이렇게 품은 것이었다.
 어쩌면 그의 이런 행위를 예상하고 세 종류를 맞춰 줬는지도 몰랐다. 그러지 않고 동검패만 줬더라면 그것도 이미 녹여서 환전해 버렸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세 개를 받았기에 하나는 남은 것이다.
 하지만 설마 이 동검패가 이런 문제를 가져올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에휴~! 설마, 이곳에서는 동검패가 은검패와 동급일 줄 누가 알았나…….’
 경비병들의 빠릿빠릿한 모습을 보라, 괜히 속이 쓰리고 애가 탔다.
 ‘빌어먹을 촌동네!’
 그냥 동검패가 아닌, ‘대제국’ 동검패였다. 천마의 배려 덕분인지 이곳에서는 제국전쟁의 ‘최전방’에 투입된 영지가 없었고, 덕분에 이 근방에서는 제국의 이름으로 새롭게 발급된 동검패는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 영주의 호위기사가 은검패를 지녔다고 하는데, 그건 제국이 아닌 왕국 시절의 은검패로, 속된 말로 한 끗발 떨어지는 것이다.
 ‘소문이 나지 않도록 부탁을 하기는 했는데……. 끄응! 모르겠네.’
 언제고 그의 동검패가 알려질지도 몰랐다.
 ‘그냥 용병패나 내밀 걸 그랬어.’
 그래도 고향에 오는 건데, 좀 더 당당하자는 생각에 내민 동검패가 제대로 말썽거리가 되어 버렸다.
 여전히 그의 뒤통수를 쏘아보는 세레나의 눈초리에 괜히 위가 아파 왔다.
 ‘아…… 천마. 썅!’
 떠난 뒤에도 그를 괴롭게 한다. 차원을 넘어 그를 저주하는 재주가 있나보다.
 
 순환마차가 멈춰 선 곳은 남작령의 중앙광장에 있는 분수대 앞이었다.
 “하차~!”
 마부의 외침과 함께 우르르 사람들이 순환마차에서 내렸다.
 “그럼, 이만 수고해라.”
 제튼은 하차하기가 무섭게 세레나와 작별인사를 했다. 아무래도 성문 앞에서의 일 때문에 빨리 자리를 피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세레나가 무어라 제대로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이미 제튼은 저 멀리 걸어가고, 아니 도망가고 있었다.
 “흐음…….”
 그 모습이 더욱 세레나의 신경을 건드렸을까? 그녀의 매서운 눈초리가 제튼의 뒷모습을 마지막까지 쫓아왔다.
 
 빠르게 중앙광장을 벗어난 제튼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벽 한쪽에 기대어 섰다. 그러면서 슬쩍 뒤쪽을 바라봤다. 혹여 세레나가 뒤를 쫓는지 살피는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녀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재차 가슴을 쓴 제튼이 한결 편안해진 모습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영주성으로 가야겠지?”
 한 차례 대면을 한 적은 있었다. 아무래도 얼마 전 이곳을 지날 당시, 제국 동검패로 인하여 자그마한 소란이 일었고, 그 때문에 영주와 직접 마주치게 된 것이다.
 ‘에휴~! 또 쓸데없는 소리나 안 했으면 좋겠는데.’
 대제국전쟁의 기사!
 이 호칭이 주는 메리트가 생각보다 큰 모양인지, 그를 향해 끊임없는 러브콜을 보내왔었다.
 천마의 배려로 인해 이 인근에서 대제국전쟁을 거쳐 낸 기사를 찾아보려면, 저 옆의 자작령 정도는 가야 볼 수 있었다. 얼마 전 남작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그나마도 그 숫자가 채 10명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도 인근 영지를 관할하는 대영지인데 겨우 10명이라니. 쯧!’
 보통 백작위 이상은 되어야지 대영주의 자격을 얻지만, 이 근방에는 백작위를 얻은 이가 없었다. 그 때문에 자작령이 대영지가 되어 인근 영주들을 관리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상황이 이러하니 제튼의 희소가치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 빌어먹을 것!’
 제튼이 품 안에서 동검패를 꺼내 든 뒤, 그 뒷면의 마크를 가만히 살폈다.
 칼레이드 왕국이 칼레이드 제국이 된 이후 사용하게 된 ‘그리폰’의 문양이 눈에 띄었다. 왕국 시절에는 와이번을 사용했었는데, 제국이 되면서 그리폰으로 바꾼 것이다.
 와이번과 그리폰!
 바로 이 차이가 왕국 시절의 검패인지, 제국 발행의 검패인지를 확인시키는 기준점이었다.
 ‘천마가 탈 것으로 애용하던 녀석이 제국의 수호신이 되다니.’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였으나, 동시에 제국에서 천마가 지닌 위치를 깨닫게 만들어 주는 내용이기도 했다.
 ‘이미 준비하고 있겠지?’
 그가 성문을 통과했다는 보고가 이미 영주의 귀에 들어갔으리라.
 ‘에휴~!’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 보이는 영주성 정문으로 남작의 집사가 마중 나와 있는 게 보였다.
 ‘내가 올지 안 올지 어떻게 알고……. 쯧!’
 만약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집사가 직접 영지를 돌아다니며 그를 찾았으리라.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생각했으나, 그래도 얼굴에는 웃음을 그려 냈다. 어느새 집사가 그를 발견한 까닭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먼저 다가온 집사가 허리를 깊이 숙여 온다. 그 모습에 제튼도 마주 예를 갖췄다. 그러면서 묻는다.
 “영주님을 뵈러 왔는데, 혹시 뵐 수 있겠습니까?”
 집사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환영했다.
 “들어오시지요. 그렇잖아도 기다리고 계시던 참입니다.”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릴 뻔했으나, 애써 미소를 유지한 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확실히 이곳에서는 대제국 동검패의 힘이 크긴 큰 모양이었다. 그가 온지 30분도 지나지 않았건만, 영주와의 만남이 즉각 이뤄지다니.
 ‘쯧…… 용병패를 썼어야 했어.’
 새삼 후회가 물밀듯 밀려왔다.
 
 유난히 옆으로 성장해 버린 ‘덩어리’의 소유자, 그게 바로 ‘루테츠 스테일’ 남작 고유의 인상이었다.
 듣기로는 어렸을 때 약을 잘못 먹어서 저리되었다는데, 하는 짓을 보면 결코 그렇지가 않았다.
 “우걱우걱! ……그러니까, 꿀꺽! 우리 스테일 남작령의 대표 기사가 되, 꿀꺽! 되어 보는 게 어떻겠나.”
 보라. 한 마디 끝내기가 무섭게 먹고 삼키고 씹고 뱉어 내는 저 어마어마한 역량을. 그야말로 ‘위’ ‘대’ 한 남자가 아닌가.
 ‘먹던지 말하던지, 제발 하나만 해 다오.’
 성질 같아서는 저 복부에 전사경을 먹여 있는 걸 다 토해 내게 하고 싶으나, 아쉽게도 그는 천마가 아니었다.
 ‘조용히 살고 싶다고…….’
 그런 생각으로 영주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이제는 검을 놓고 싶습니다.”
 “허어…… 꿀꺽. 그거 참 아쉽구만. 챱챱챱.”
 여전히 먹으면서 대화를 나누는 영주의 신기 속에서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졌다.
 “자네 같은 인재가 검을 놓다니. 챱챱. 저번에 말했던 것처럼, 꿀꺽. 정말 농사나 지으려는 생각인가?”
 “예. 이제는 피 대신 흙을 만지고 싶습니다.”
 그 정중하고도 간절한 어투에 루테츠 남작이 돌연 식사를 중단하며 시선을 마주치는 게 아닌가. 진심이 통한 것일까? 남작의 표정이 언뜻 굳어 가는 게 보였다.
 “꺼어어억~!”
 아니다. 그저 빠른 소화가 이뤄지고 있던 것뿐이다. 시원한 방출과 동시에 그의 폭풍식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썩을…….’
 자꾸만 나오려는 욕설을 삼켜 내며 제튼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트림 공격에 표정이 살짝 구겨진 까닭이다. 각종 요리들이 잘 버무려진 놈의 향기가 너무 강렬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작의 이야기는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챱챱. 농사를 지으려면, 꿀꺽. 땅이 있어야 하는데, 쓸 만한 땅은 있고? 챱챱.”
 “그 문제 때문에 남작님을 뵙고자 한 것입니다.”
 “호~ 오, 챱챱?”
 “땅을 좀 얻었으면 합니다.”
 “챱챱. 내 땅을?”
 “예. 쉽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동검패의 권한과 합리적인 가격을 토대로 토지를 구하고자 합니다.”
 사실, 평민이 땅을 얻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영주의 허락이 없으면 절대 구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 위치가 준귀족의 신분으로 상승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준귀족 이상부터는 일정 영역 이상의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기본 권한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동검패를 지니면 기사로서의 최소 권한이 보장되면서 그럴싸한 땅덩어리를 구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하나 발생한다.
 “자네는, 챱챱. 검을 놓는다 하지 않았나? 꿀꺽.”
 기사로서 은퇴를 한다는 건, 동검패의 권한의 일부를 내려놓는 것과 같다. 정년을 마치고 물러나거나 신체적 결함으로 물러나는 게 아닌 이상, 일부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제튼의 은퇴는 제한적인 영역에 있는 것이었다.
 “많은 땅을, 챱챱. 구하기는 어려울 텐데? 꿀꺽.”
 물론 돈을 어마어마하게 투자한다면 또 이야기가 달라진다.
 “돈 많나? 챱챱.”
 제튼이 쓴웃음을 지었다.
 ‘돈이야 많지.’
 단지 그중에서 제대로 쓸 수 있는 게 없을 뿐이다. 결국 잠깐 용병생활을 하며 벌어들인 돈으로 해결을 봐야 하는데, 땅을 구입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딱 최소 금액만 갖춘 상태였는데, 그 정도로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는 데 무리가 있었다.
 ‘자소작농이 아닌 자작농 한번 돼 보자.’
 자소작농은 자작과 소작을 겸임하는 것인데, 땅이 부족한 자작농들이 땅을 대여해서 소작도 함께하는 경우를 뜻했다.
 “솔직히 제가 가진 자금이 좀 부족합니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건데……회색들판을 구입할 수 있겠습니까?”
 “그곳을? 챱챱?”
 남작의 눈이 동그래졌다.
 “거긴, 챱챱. 자갈밭인데?”
 “그러니 가격도 싸지 않겠습니까.”
 “챱챱. 정말 괜찮겠나?”
 “땅을 고르는 작업이 오래 걸리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비싸지는 않으니까요.”
 제튼의 말에 남작이 고민을 거듭한다. 개간되지 않은 회색들판이라고 하나, 그래도 어쨌든 땅을 넘긴다는 건 여러모로 생각을 하게 만드는 문제였다.
 ‘그냥 팔기는 아쉬운데…….’
 순간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챱챱. 좋아, 팔도록 하지. 꿀꺽. 단!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군. 챱챠챱!”
 “……제안이라니요?”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4. 투 잡
 
 땅을 얻었다. 회색들판이라 불릴 만큼 돌맹이로 그득한 엉터리 토지였으나, 어쨌든 제튼 반트의 이름으로 땅을 구입한 것이다. 부친의 이름으로 구하고 싶었으나 아무래도 평민이 얻을 수 있는 땅과 준귀족의 신분으로 얻을 수 있는 땅의 가격 차가 크기에 그의 이름으로 등록한 것이다.
 “하아! 후우~! 에휴…….”
 하지만 어쩐 일인지 제튼의 표정은 전혀 기뻐 보이질 않았다. 오히려 한숨과 근심이 가득해서 당장이라도 땅이 꺼질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분명,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회색들판이라고는 하나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무려 3배나 넓은 토지를 얻었으니 박수까지 쳐 가며 좋아해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자꾸만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챱챱. 일 한번 해 보게. 챱챱.>
 그의 밑에서 일할 생각이 없다고 재차 말을 하려는데, 남작 왈!
 <시간 강사. 챱챱. 일인데. 챱챱. 어떤가?>
 여동생이 다니는 테룬 아카데미 기사학부의 시간 강사를 해 달라는 제안이었다.
 원래 구상은 제튼을 밑에 두고서 주변 영주들에게 자랑을 하는 것이었으나, 제튼의 완고한 거절에 계획을 조금 변경한 모양이었다.
 -내 영지의 아카데미에는 제국 동검패의 기사가 강의를 한다.
 기존 계획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제법 끗발이 설 것 같았다. 자작령에 위치한 모던 아카데미에도 제국 검패의 기사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왕국시절 은검패를 지녔던 기사들은 다수 있었다.
 하지만 제국 검패의 소유자는 없던 것이다.
 “미치겠네.”
 한참 고민하는 그에게 남작이 재차 조건을 제시했다.
 <챱챱. 내 제안을 받아들이면, 챱챱. 땅을 두 배로 내어 주지. 챱챱챱.>
 갈등의 심화과정에 이르고, 그 즉각 남작이 결정타를 날렸다.
 <세 배!>
 콜이었다. 대답하고 난 뒤에야 아차 싶었으나, 이미 입 밖으로 뱉어 버린 이상 주워 담는 건 불가능했다. 평민 간의 거래도 아닌 귀족과의 거래다. 실수? 그딴 건 생각할 수도 없었다.
 “어찌한다.”
 어차피 주 1회에 2시간밖에 안 되는 짧은 강의였다. 제튼의 앓는 소리에 남작이 사정을 봐준 것이다.
 “쯧! 생긴 것과 다르게 성격은 좋아서……. 젠장.”
 성질머리를 부리기에는 남작이 제법 괜찮은 영주였다. 먹는 모습을 보면 정말 뭐 저런 개돼지가 다 있나 싶겠으나, 그가 사는 풍경을 본다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영주성 어디에도 사치품이 없었지.’
 먹는 것을 제외하고는 헛되게 돈을 부리는 경우가 없었다. 게다가 이곳으로 오는 와중에 이리저리 귀동냥으로 들은 이야기도 제법 있었다.
 얼핏 듣기로는 소작세금을 3:7로 나눈다는데, 대부분 영지의 세금 비율이 4:6에서 5:5인 것을 감안한다면, 그는 확실히 좋은 영주가 틀림없었다.
 “어우! 생긴 건 악덕 영주인데, 하는 짓은 뭐 그따위야!”
 잘해 줘도 난리였다.
 “쯧…… 어쩔 수 없나.”
 뒷머리를 긁적거린 제튼이 한숨을 푸욱 내쉬며 허공을 올려다봤다. 맘에 안 드는 조건이었으나, 겉보기와 달리 선해 빠진 영주의 제안을 더 이상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테룬 아카데미라…….”
 저 한쪽의 낮은 지붕 너머로 우뚝 솟은 시계탑이 하나 보인다. 좀 더 정확히는 시계탑 주변에 적힌 문구가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테룬 아카데미!
 그가 가야 할 목적지였다.
 품 안에는 방금 막 제작한 따끈따끈한 영주의 추천장이 김을 내고 있었다.
 “끄응…… 미치겠네.”
 왠지 발길이 무거워졌다.
 
 ***
 
 테룬 아카데미.
 스테일 남작령에 세워진 배움의 터전으로, 인근 영지의 아카데미들 중에서는 손에 꼽히는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물론, 그래 봤자 겨우 5년이었으나 제국 아카데미 사업의 초창기부터 뛰어들었다는 걸 생각한다면, 그래도 최전선에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구석진 영지에 있는 탓에 별로 아는 이들이 없다는 게 흠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그 외형만은 제법 그럴싸하게 갖춰져 있었다. 영주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인근 영지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자작령의 모던 아카데미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인맥의 차이, 혹은 계급의 차이, 또는 자금의 차이.
 자작령의 모던 아카데미는 외형에 어울리는 내실을 다지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남작령의 테룬 아카데미는 외형은 봐 줄 만했으나, 내부는 상당히 부실한 상태였다.
 남작은 주변 영지를 돌아보며 제법 실력이 있는 이들을 초빙하고자 했으나, 이미 대부분이 자작의 요청에 의해서 모던 아카데미로 가 버린 것이다.
 모던 아카데미 역시 제국 아카데미 사업의 초창기 멤버였다. 동일선상에서 출발했기 때문일까? 실력자 초빙에서 급이 낮은 남작이 밀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외적인 모습과 달리 내적인 요소에서 모던 아카데미와 차이가 나 버리게 된다.
 “그래서, 자네가 그 내부격차를 줄이기 위한 카드라 이건가?”
 제튼은 자신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노인의 말에 쓴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과장이십니다. 그저 영주님께서 저를 좋게 봐 주신 거지요.”
 굳이 동검패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제튼의 심정을 헤아려 준 모양인지, 영주도 굳이 추천장에 동검패에 대한 기록을 자제했고, 덕분에 이처럼 대답하는 것이었다.
 “자네가 설마 그 동검패의 기사인가?”
 헌데 노인의 입에서 대뜸 감추려 한 내용이 튀어나온다.
 “그 표정은 뭔가? 우리 영지에 제국 동검패의 기사가 나타났다고 소문이 자자하기에 한번 추측해 본 것인데, 정답인가?”
 뒷목이 뻐근해졌다. 영주는 이미 동네방네 소문을 다 내고 다닌 모양이었다.
 ‘이…… 이 개돼지 버그베어 새뀌익-!’
 속에서는 열불이 솟구쳤으나 입가에는 미소를 유지한다. 하지만 내, 외부의 감정적 차이 때문일까? 어색한 미소가 그려지고야 말았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똥 씹은 표정을 내보이는 건 안 될 말이었다.
 그도 그럴 게 눈앞의 노인장이 바로 이곳 테룬 아카데미의 교장인 ‘아스트 어거르만’이기 때문이다.
 초면부터 틱틱거리는 저 태도에 불만을 가질 수도 있겠으나, 꼬장꼬장하게 생긴 저 노인장의 위치를 생각해 본다면 그 정도는 이해하고 넘어가 줄 수 있었다.
 ‘여동생 학점을 생각한다면 참아야지!’
 물론 평범한 삶을 위해서도 버텨야 했다.
 ‘썩을……. 계급이 깡패지!’
 게다가 하필이면 노인의 신분이 무려 남작이란다. 제법 이름난 명사로 학문에 뜻을 둔 이들이라면 누구나 알 정도라는데, 아쉽게도 제튼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까막눈일 뿐이었다.
 남작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상당한 명성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저 수도권 아카데미에서도 그를 초빙하려 했다고 할 정도였다니, 분명 가벼운 수준은 아닐 것으로 여겨졌다.
 헌데 이런 대단한 자가 어찌 모던 아카데미가 아니라 테룬 아카데미에 있는 걸까? 이유는 간단했다.
 “확실히 나쁘지는 않군. 자네가 정말 동검패의 기사라면 그 빌어먹을 난쟁이 ‘토파스’를 물먹여 줄 수 있겠어.”
 토파스 마루단!
 모던 아카데미의 교장으로 아스트의 숙적이었다. 출발 전 영주에게 둘 사이의 이야기를 간단히 들었는데, 그 내용이 황당했다.
 ‘여자 하나를 두고 삼각관계로 빠졌다고 했나?’
 원래는 아주 절친한 동문이었다는데, 하필 사랑이라는 놈에게 홀려서 하루아침에 원수가 되어 버린 것이다. 더 서글픈 건 따로 있었다.
 ‘결국 여인은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고, 두 사람은 닭 쫓던 개가 되었다던가.’
 그 부분이 더욱 서로를 자극했나 보다.
 <너만 없었으면 그녀는 내게 왔을 거다.>
 <내가 할 소리! 너 때문에 그녀가 도망갔다!>
 니가 나쁜 놈 내가 잘난 놈 하며 티격태격 싸우다가 어느새 50년이 흐른 것이다.
 ‘그 오랜 시간을 투닥거리다니. 정말, 징글징글하다!’
 이런 제튼의 불순함 심정을 느꼈던지 아스트의 두 눈이 매섭게 불을 뿜었다.
 “왜 대답이 없나?”
 “……예?”
 아무래도 너무 깊은 상념에 빠지면서 아스트의 질문을 흘려버린 모양이다. 눈살을 찌푸린 아스트가 재차 물었다.
 “난쟁이 놈을 제대로 찌부시킬 수 있냐고 물었잖아?”
 ‘듣기로는 150세르(cm)를 겨우 넘는다던데, 거기서 더 찌그러트리면 드워프도 비웃습니다.’
 물론 속마음일 뿐이다.
 “그…… 글쎄요.”
 확답은 하지 않았다.
 ‘설렁설렁할 생각이라서 자신하기는 어렵겠네요.’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아스트가 제튼을 살폈다.
 “열심히 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영주 추천이고 나발이고 볼 거 없이 개작살을 내버릴 테니까. 알지? 내가 영주의 스승이면서 그놈 부친과 친우였다는 거.”
 몰랐다. 지금 알았고 덕분에 더욱 기어야 함을 깨달았다.
 ‘하아……! 조용히 살기가 왜 이리 힘드냐.’
 과거와는 다른 의미로 피곤해지는 순간이었다.
 
 어디서부터 꼬인 것일까?
 그저 가볍게 고향의 맛집인 욕쟁이 파소 할머니의 수프로 점심을 때우려던 일정이었다. 그러던 게 어느 틈에 순환마차로 이어지더니 이렇게 남작령까지 도달했고, 결국에는 아카데미 강사라는 말도 안 되는 자리에까지 도착해 버렸다.
 ‘어버버버…….’
 멍해지는 느낌이랄까? 교장 아스트와의 면담을 무사히 마치고 나오는 제튼의 표정은 언데드 몬스터들의 표정과 매우 닮아 있었다.
 “기사학부라…….”
 기사학부 학부장 선생님을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누라는 아스트의 명령이 떨어졌다. 아직 정식 발령이 난 것도 아닌데, 벌써 직장생활이 시작된 느낌이었다.
 “이제는 ‘투 잡’ 시대라니까.”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농사에 시간 강사 일까지, 예정에 없던 일이 더해져 두 종류의 직업을 가져 버렸다.
 아직 자작농이 아닌 탓에 확실히 부수입이 필요하기는 했다.
 “좋게좋게 생각하자.”
 한숨을 푸욱 내쉬며 걸음을 옮기는데, 저 앞에 표지판이 보였다. 표지판이 알려 주는 방향으로 쭈욱 길을 올라가니, 지붕이 있는 큼지막한 대형 연무장이 하나 나타났다.
 “허…… 아낌없이 투자를 했다더니, 허언이 아니었네.”
 남작의 말이 새삼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보통 기사들의 연무장은 평범한 흙바닥이나 들판을 정돈해서 사용하는 게 평균이었다. 그 때문에 비가 오거나 눈이 올 때면 대부분의 훈련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는 했다.
 이런 부분을 대처하기 위해서, 고위 귀족들은 지붕식 대형 연무장을 설치해 훈련일정의 빈틈을 메우는 방법을 도입했다.
 상당히 괜찮은 방식으로 마법사들의 도움을 얻는다면, 상급 기사들의 대련도 가능할 만큼 튼튼한 연무장도 제작이 가능할 정도였다.
 ‘단지……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가서 문제이려나.’
 그 정도로 엄청난 거금의 연무장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지붕이 있다는 건 매우 중요했다.
 ‘게다가 3층 건물이라니.’
 비록 마법 강화는 없었으나 층층이 연무장을 설치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투자였다.
 ‘정식 기사도 아니고, 꼬꼬마들 연무장으로는 과할 정도지.’
 오러의 발현이 아니고서는 연무장에 이상이 생길 이유가 없었다.
 잠시 연무장의 위용에 감탄하던 그가 입구 쪽으로 발을 들였다. 연무장 외곽으로 길게 복도가 뚫려 있었는데, 그 복도를 가로지르면 연무장에 들어갈 수 있는 구조인 듯싶었다.
 “어라?”
 연무장을 살피던 제튼의 두 눈이 이채를 띠었다.
 ‘포나?’
 의외의 장소에서 여동생을 발견한 것이다.
 ‘기사학부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동생에게서는 기사들의 마초적인 향수가 풍기질 않았던 까닭이다.
 ‘차라리 마법사라면 모를까.’
 어리둥절한 한편으로 여동생의 훈련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어설퍼. 힘도 없고, 중심도 안 잡혔고. 으음…… 눈은 왜 감는 거니?’
 여러모로 살펴봐도 빵점이었다.
 ‘분명 3학년이라고 들었는데?’
 3학년 실력이 저렇게 엉망일 리는 없다. 아무리 아카데미의 수준이 낮을지언정 저럴 수는 없는 것이다.
 ‘어라? 이것 보게.’
 그러고 보니 포나 혼자만이 아니다. 전체적으로 훈련을 하는 아이들의 수준이 매우 낮았다. 좋게 표현해서 그렇지, 안 좋게 이야기하자면 아주 ‘저질’이었다.
 ‘들고 있는 목검에 대한 모욕이랄까?’
 여동생도 포함된 이야기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진실을 외면할 수는 없지 않은가.
 “뭘 하시는 거죠?”
 그때 옆에서 들려온 음성이 그의 상념을 깨웠다. 2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핑크빛 머릿결의 여인이었다.
 “그래, 이거지!”
 저도 모르게 튀어나와 버린 한마디. 여인이 의아해서 쳐다보자 깜짝 놀란 제튼이 제 입을 틀어막았다.
 ‘에구머니나.’
 여인의 마초적인 자태에 입이 제멋대로 움직여 버린 것이다. 딱 봐도 기사라는 게 느껴지는 여인이었다. 앞서 연무장의 엉터리 훈련에 심적 충격이 컸던 모양인 듯, 여인의 자태에 절로 탄성이 터져 버렸다.
 입을 가린 제튼의 시선이 여인의 전신을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
 ‘제법인데.’
 마초적이라고 표현하기는 했으나 어느 모로 봐도 여자였다. 그것도 제법 예쁘다는 평가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미녀다. 그런 미인의 전신으로 은연중에 드러난 근육라인이 묘한 매력을 자아낸다.
 남성의 것과 달리 날렵하게 빠진 굴곡들이 침샘을 절로 자극했다.
 찌릿!
 너무 대놓고 살폈던 모양인지, 여인의 날카로운 시선이 제튼을 찔러 왔다.
 “흠흠!”
 괜한 헛기침과 함께 시선을 슬쩍 피했다.
 “누구십니까? 참관일도 아닌데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오다니, 대답 여하에 따라서 구속을 해야 할…….”
 “여기 직원입니다.”
 제튼이 재빨리 말을 끊으며 대답했다. 왠지 복잡해지려는 상황에 재빨리 해답을 던진 것이다.
 번쩍!
 돌연 은빛 섬광이 허공을 가르며 뻗어 나왔다. 어느새 그의 귀밑에 바짝 붙어 있는 검날이 보였다.
 “허튼소리 마시죠. 제가 이곳의 직원인데, 당신 같은 교사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군요.”
 제튼이 양팔을 들어 올리며 항복의 자세를 취했다. 그러면서 다급히 외친다.
 “정말입니다. 여기, 내 안쪽 주머니, 왼쪽 가슴께에 보면 그걸 증명할 수 있는 물품이 있습니다.”
 여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의 몸을 만지고 싶지는 않군요. 그러니 직접 꺼내십시오.”
 ‘끄응…….’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렇게 못난 얼굴은 아닌데. 쳇!’
 슬금슬금 품을 뒤져 종이를 하나 꺼냈는데 교장이 내어 준 임명서였다.
 “여기, 이걸 보면 아시겠지만 보름 후부터 이곳에서 시간제 강사로 일하게 되었다는 증명서입니다.”
 외곽에 교장의 인장이 떡하니 박혀 있었다. 여인이 휙 하니 증명서를 빼앗더니 읽어 내려간다.
 얼마쯤 지났을까? 여인의 살벌한 눈빛이 한층 매섭게 타오르는 게 보였다.
 ‘어째서?’
 ‘앗, 뜨거!’라 하는 얼굴로 제튼이 시선을 피하는데, 여인의 싸늘한 음성이 날아들었다.
 “당신이 바로 그 동검패의 기사로군요.”
 ‘젠장! 동네방네 아주 신 나게 나팔을 불었네.’
 남작에 대한 원망이 새삼 솟구쳤다. 거기에 더해 떡하니 그의 정체를 밝혀 버린 교장에 대한 욕지기도 꾸역꾸역 올라왔다. 애써 화를 삼켜 낸 제튼이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물었다.
 “이, 이제 확인됐으니 이 검을 좀……. 꿀꺽!”
 그 말에 여인의 눈가에 이채가 떠오른다.
 “정말 소문의 그, 동검패를 지닌 기사가 맞습니까?”
 제국에서 인정한 기사라면 이 정도 공격은 피해 내야 하지 않은가.
 ‘살기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괜한 관심만 끌 것 같아서 여전한 웃음으로 대답을 회피했다. 그 모습에 여인의 눈가에 더욱 진한 주름이 잡혔으나, 이내 한숨과 함께 검을 회수하는 게 보였다.
 “레이나 스테일, 기사학부 교직원입니다. 좀 전에는 실례했습니다.”
 딱딱한 어투의 말투가 그녀의 현재 기분을 대변하는 듯했다. 헌데 요상하게 걸리는 단어가 있었다.
 ‘……스테일?’
 설마 싶은 마음에도 선뜻 묻지 못하고 침만 꼴깍꼴깍 삼키는데, 그녀의 음성이 이어진다.
 “학부장님을 만나러 오신 모양인데, 따라오시죠.”
 증명서를 전부 읽었기에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 뒤를 따르는 제튼의 표정이 복잡 미묘하게 변해 갔다.
 ‘정말로 스테일 남작의 딸?’
 그 질문이 너무나 하고 싶은데 할 수가 없으니 속이 타는 것이다. 질문의 내용을 잘못 해석하면 무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정말로 그녀가 남작의 딸이라면?
 ‘말도 안 돼!’
 그 외형에 이런 미녀라니.
 ‘이건, 거의 창조마법의 영역이잖아.’
 차마 내뱉을 수 없는 비명성이 그의 목울대를 쉴 새 없이 찧어 댔다.
 
 얼마나 걸었을까? 연무장 주변으로 나 있는 복도의 동선으로, 연무장의 여전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간간이 지나치는 창문으로 보이는 것이었으나 여동생이 있는 까닭인지 그 잠깐의 틈에도 자꾸만 시선이 돌아갔다.
 이런 그의 모습을 눈치챈 것인지 레이나가 물어 왔다.
 “수준이 너무 낮아서 실망했습니까?”
 핵심을 정확히 찔러 오는 그녀의 질문에 제튼이 쓰게 웃었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난감한 까닭이다. 어쨌든 그녀는 이곳의 선생이고, 저 아이들은 그녀의 제자가 아니겠는가.
 “저 아이들은 일반학부의 아이들입니다.”
 ‘일반학부?’
 행정학을 비롯한 경제학 무역 경영 회계 등, 일상생활에 쓰이는 교육부를 통틀어 일반학부라 칭한다. 마법이나 검술 등은 따로 특수학부라고 부르고는 했다.
 “일반학부는 고학년이 되면 필수적으로 체력단련 수업을 들어야 합니다.”
 고학년이란 4~6학년을 말했다. 너무 책상에만 앉아 있다가 허약해지는 아이들이 속출할까 우려해, 교장의 독단으로 만들어진 테룬 아카데미만의 독특한 교육방침이란다.
 ‘포나는 3학년 아닌가?’
 다행이 이러한 의문도 이어지는 내용에 담겨 있었다.
 “저 아이들은 아직 고학년은 아니지만 일찌감치 체력단련 수업을 들으면서 고학년을 대비하는 아이들입니다.”
 고학년 때 듣게 되는 체력단련은 필수과목인 만큼 상당히 힘들었다. 때문에 필수가 아닌 선택과목으로 체력단련을 미리 해 놓는 것이다.
 “아무래도 필수과목보다 여유가 있어서 선택과목으로 일찌감치 경험을 해 놓는 겁니다.”
 갑작스런 체력단련으로 근육통에 시달리며 한동안 수업을 제대로 못 듣는 고학년 선배들이 제법 있었다고 한다. 이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3학년 이하 학생들끼리 내린 특단의 대책이 바로 저것이었다.
 ‘그런 거였나.’
 제튼이 고개를 끄덕이며 포나의 옆모습을 쳐다봤다. 열심히 땀을 흘리고는 있었으나, 확실히 근육통에 시달릴 정도로 치열하게 하고 있지는 않았다.
 ‘적당하군.’
 딱 그 정도였다. 그래도 저렇게 1년여를 하고 난다면 어느 정도 체력이 붙을 것 같기는 했다.
 “저기입니다.”
 문득 들려온 레이나의 음성에 제튼의 고개가 돌아갔다. 저 멀리 ‘학부장실’이라는 명패가 시선에 들어왔다.
 “그럼 이만.”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레이나가 발길을 돌렸다.
 “또 봐요.”
 제튼이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으나, 그녀는 돌아보는 기색도 없이 그렇게 휙 하니 복도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거참, 딱딱하기는.’
 뒷머리를 긁적거린 제튼이 학부장실로 걸어갔다.
 
 캐로 스타푼.
 테룬 아카데미 기사학부의 학부장을 맡고 있는 노기사로서 무려 은검패를 지니고 있는 실력자이기도 했다.
 물론 제국 검패는 아니었다. 과거 왕국시절에 발급받은 것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검패라는 사실이 그를 무시하지 못하게 만든다.
 오러 발현!
 왕국시절, 은검패를 지니기 위한 조건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오러란 마법사들이 지닌 마나와 같은 것으로, 기사를 초인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는 미지의 기운이었다.
 제국이 되어 버린 지금은 동검패의 기사들도 오러를 발현하는 이들이 있다고 하는데, 과거에는 은검패 이상은 되어야지 다다를 수 있는 게 오러 발현의 경지였다.
 학부장 캐로는 이 경이로운 영역에 올라선 것이다.
 그것도 무려 20년도 더 전의 일이니, 그가 얼마나 강할지는 더 말해 무엇하랴.
 ‘확실히 대단하긴 하네. 익스퍼트 중급이라니. 시골 영지에서는 보기 드문 실력자네.’
 내심 감탄사를 터트린 제튼이 조심스레 시선을 내리깐다. 그의 앞에서 무섭게 노려보는 캐로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흐음…….”
 사납게 그를 훑어보는 캐로의 눈초리가 몸 곳곳을 찌르고 지나갔다.
 ‘은퇴한 지 10년도 더 되었다더니, 여전히 현역 못지않은 기세네.’
 지금 캐로는 시험을 하고 있었다. 눈빛과 분위기, 그리고 호흡 속에 세심한 기세를 담아 제튼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튼은 가차 없이 밟혀 주는 중이기도 했다.
 ‘쓸데없이 튀지 말자.’
 최대한 조용히 살고 싶은 탓에 제 실력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자네가 정말 제국 동검패의 기사라고?”
 의심의 눈초리가 내리꽂힌다.
 ‘애매할 겁니다.’
 제국 동검패의 기사 중에서도 가장 하위 그룹의 수준, 딱 그 정도의 실력만 내비쳤다. 상황이 이러하니 캐로도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울 것이다.
 가장 하위 그룹이라면, 왕국 시절의 동검패와도 그다지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내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하지 말아 주오~ 부디!’
 그의 의도대로 된 것일까? 슬쩍 훔쳐본 캐로의 표정 가득 실망감이 역력했다.
 ‘조~ 오아쓰!’
 계획대로 됐다. 여기서 완벽을 가하려면 이마 위로 땀방울도 송글송글 그려 줘야 한다. 혈류를 자극해서 체내의 열기를 올리자 진득한 땀방울이 올라왔다.
 “으음…….”
 실망스런 리액션이 비친다.
 ‘됐다!’
 10점 만점에 11점이었다.
 ‘1점은 노력상.’
 잠시 후, 기대하던 음성으로 의도하던 대사가 흘러나온다.
 “그만…… 나가 보게.”
 더 할 말이 없다는 저 태도를 보라.
 ‘여기서 잘리기까지 했다면 더 완벽했겠지만, 그럴 수는 없겠지.’
 남작과 교장을 거쳐 온 임명장을 무시하는 건 무리이리라.
 ‘오히려 너무 부실하게 보였다가는 더 의심을 살 수도 있으니 딱 이 정도가 적당하지.’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지내는 거다.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크하~! 멋진 내용이야.’
 천마가 살던 세상 어딘가에 위치한 나라의 속담이라는데, 참으로 명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쳤다는 걸 한껏 어필하기 위하여 어깨를 추욱 늘어트린 채 그렇게 힘겹게 학부장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향했다.
 그렇게 학부장실의 문이 닫히고, 이 모습을 한심하니 바라보던 캐로의 눈빛이 돌변한다.
 ‘재미있군.’
 그는 오래전 은퇴를 한 기사다. 교장 아스트와의 친분으로 인해 다시금 검을 들었으나, 전처럼 피를 보는 행위가 아닌 교육을 위한 것이기에 이 자리에 서기로 결심할 수 있었다.
 제국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즈음에 물러났으니, 얼추 10여 년 정도의 시간을 일반인들의 틈에 섞여서 살아왔다.
 그 기간을 기사로서의 권위도 내려놓으며 최대한 평범하게 지냈다.
 기사의 능력을 지니고 평민으로서 살아온 것이다. 특별한 힘을 품고 범인의 시점에서 살아왔던 경험 때문일까?
 작게나마 그는 ‘사람’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숨기는 게 있어.’
 기사의 눈으로 제튼이라는 사내를 봤다면, 그 실망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컸으리라. 하지만 조금 특별해진 그의 시선이 제튼이란 사내를 달리 보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단지, 보여진 모습보다 ‘조금 더’ 무언가가 있다는 정도? 딱 그 정도까지 생각이 확장된 것이다.
 ‘적어도 반? 아니지. 한 수? 그 정도는 더 높게 쳐도 되겠군.’
 덕분에 보여 졌던 모습보다 아주 ‘조금 더’ 나은 실력으로 상향평가 될 수 있었다. 제튼의 땀 연기가 너무 일품이라 그 이상은 생각하기가 어렵기도 했다.
 물론 이 정도로 세부적인 사항은 몰랐다. 그래도 속이려 한다는 걸 알았기에, 그 의도대로 더욱 실망스런 모습을 보여 줬다. 하지만 너무 감추려는 태도가 괘씸하여 더욱 부려 먹어 주기로 결심해 버렸다.
 ‘그래도 명색이 아카데미 강사직인데, 날로 먹으려 하면 안 되지.’
 제튼의 의도대로 되기는 했으나, 방향이 조금 틀어진 듯싶었다.
 
 ***
 
 어찌어찌 학부장을 잘 속여 넘기고 나온 제튼이었으나, 아직 더 큰 문제가 남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엄마 아빠한테 뭐라고 말씀드리지?’
 부모님들에게 어찌 밝혀야 할지가 고민되었다. 비밀로 하고 싶었으나 결국 알려지게 될 터였다. 남작 덕분에 깔리기 시작한 소문은 얼마 안 가서 그의 마을로도 넘어올 것이고, 그즈음에는 대충 아카데미를 다니는 학생들을 통해 그의 소식도 전달될 것이 분명했다.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가족인 포나를 통해서 전해지게 되리라. 포나 역시 아카데미의 학생이기 때문이다.
 뒷머리를 긁적거린 제튼이 슬쩍 창밖으로 보이는 시계탑을 쳐다봤다. 아카데미 중앙에 높게 솟아 있어서, 어느 위치에서건 확인할 수가 있었다. 게다가 네 방면에 전부 시계를 설치해 놓은 덕분에 어디서건 시간 확인이 가능했다.
 어느새 오후 4시가 다 되어 가고 있는 게 보였다. 대개 선택이 아닌 필수 과목의 경우에는 오후 4시를 기점으로 종료가 된다. 선택과목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개설되어 있기에, 저녁 8시까지도 수업이 있었다.
 ‘포나는 몇 시쯤에나 끝나려나?’
 아직 연무장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여동생이 보였다. 기왕 온 김에 기다렸다 같이 들어가려고 생각한 것이다.
 ‘우선 기다려 보자.’
 동생과의 어색한 공기를 흩어 버리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시간을 가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팔짱을 낀 채 복도 한편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어느새 4시 정각이 되면서 시계탑에 설치된 종이 울린다.
 대앵…… 대~ 앵…….
 과연, 그 시간에 딱 맞춰서 연무장의 훈련도 종료를 알리는 게 보였다. 이내 가벼운 인사말이 오가고 학생들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포나 역시 그 무리에 끼어 있었다.
 “아!”
 그를 발견한 듯, 깜짝 놀라서 탄성을 내지르는 게 보였다.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인물을 만나자, 그녀답지 않게 목소리가 커진 것이다. 제튼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여기는 무슨 일로……?”
 좀 전의 외침이 거짓말처럼 다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다. 그런 그녀의 곁으로 함께하던 여학생들이 묻는다.
 “이 아저씨는 누구예요, 언니?”
 “삼촌이에요?”
 뜬금없는 언어폭력에 제튼의 어깨가 휘청거렸다.
 ‘아저씨라니.’
 물론, 나이가 서른일곱이니 그 단어를 피할 수 없음은 안다. 하지만 막상 들으니 매우 슬픈 명칭이지 않은가. 게다가 삼촌이라니. 연달아 터진 치명타에 미소도 꺾여버렸다.
 “오…… 오빠야.”
 그녀의 소심한 대답에 소녀들이 화들짝 놀라며 제튼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묻는다.
 “아닌데. 포나 언니 오빠는 더 곱상하게 생긴 미남인데.”
 “그러게. 저 아저씨는 아무리 봐도 좀…….”
 ‘좀 뭐?’
 확 하니 성질을 내버릴 뻔했다. 부친을 닮은 켄트와 달리 모친의 핏줄을 진하게 이어받은 탓에, 제튼은 덩치도 제법 컸고 선도 굵었다.
 “큰오빠야.”
 “어머! 언니, 오빠가 둘이셨어요?”
 “그런데 나이 차가 너무 나는 거 아니에요?”
 소녀들의 재잘거림을 계속 듣고 있으려니 슬슬 뒷목이 뻐근해져 왔다.
 “저희 먼저 갈게요.”
 다행히 소녀들이 먼저 자리를 피해 주면서 무릎이 꺾이는 것ㅁ까지는 막을 수 있었다.
 “험한 일을 하시나 봐. 얼굴이, 때깔이, 어머 어쩜…….”
 “저번에 본 오빠는 그 나이에도 피부가 그렇게 좋으시던데.”
 멀어지는 소녀들의 마지막 타격에 잠깐 오금에 힘이 풀리기는 했으나, 그래도 애써 무릎을 바로 세웠다.
 “애…… 애들이 유쾌하구나.”
 제튼이 어색한 미소를 그려 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애들이 아직 어려서.”
 “아니,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하…… 하핫!”
 확실히 조금 전 소녀들이 어리기는 했다.
 ‘16~17세?’
 아카데미의 입학 기준이 15세 이상이라는 것을 떠올린다면, 아마도 열여덟 정도일 것 같았다. 포나와 같은 수업을 듣는다는 건 저 아이들도 3학년이라는 소리기 때문이다.
 “애들이 이제 겨우 1학년이라서 그러니 이해해 주세요.”
 “1학년?”
 의외의 대답이 나와 버렸다.
 “3학년인 너와 같은 수업을 듣고 있는데?”
 “선택 과목은 학년 관계없이 누구나 신청 가능해요.”
 “그…… 그래?”
 아무래도 아카데미에 대한 지식이 좀 더 필요할 듯싶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제튼을 바라보며 포나가 슬쩍 처음의 질문을 되새긴다.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잠깐 볼일이 있어서 들렀지.”
 아카데미에 볼일이라니. 의아해서 바라보는데 제튼이 조심스레 답을 해 준다.
 “보름 뒤부터 이곳에서 일을 하게 되었단다.”
 “일이라면……?”
 “시간 강사라고나 할까.”
 잠시 이해하지 못했음일까? 포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보였다. 그렇게 1초, 2초…… 정확히 5초쯤 지났을 때, 그녀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기 시작했다.
 “예에에엣?”
 그 시원스런 반응에 제튼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
 
 이제 겨우 7~8세쯤 되었을까? 딱 봐도 빈약한 체구의 어린 사내아이가 힘겨운 몸짓으로 숨을 몰아쉬며 길을 걷고 있었다.
 헌데 그 모습이 너무 과할 정도로 힘겨워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등 뒤로 무언가를 한 보따리 메고 있는 게 아닌가.
 보따리?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었다.
 소년보다 더욱 어려 보이는 4~5살 또래의 어린 여아가 등 뒤에 업혀 있었다. 어찌하여 저 어린아이들이 이 넓은 광야를 가로지르며 나아가는 것일까?
 “오빠…… 괜찮아?”
 문득 등 뒤에 업힌 여아가 조심스레 입을 연다. 그 물음에 소년이 애써 기운찬 목소리를 내지르며 외쳤다.
 “헉! 허억……! 당연하지. 오빠가 겨우 이 정도로 지칠 것 같아?”
 하지만 숨소리가 너무 거칠었다.
 “미안해, 괜히 나 때문에…….”
 “걱정 말라니까. 허억…… 헉. 이 오빠는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해 줄 수 있다고 했잖아.”
 그렇게 애써 활기를 내비친 소년이 돌연 힘찬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걱정하는 동생을 안심시키려고 있는 힘 없는 힘 죄다 끌어 쓰며 활력을 내비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속되지 못하고 걸음은 느려지고 호흡은 가빠지기 시작했다. 괜히 무리를 한 탓에 더욱 빠르게 체력이 떨어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멈추지는 않았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언제고 지나쳤던 길이다. 덕분에 기억할 수 있었다.
 ‘저 언덕만 넘으면…….’
 아이의 기억이 맞다면 분명 저 너머에 목적지가 존재하리라. 그리고 잠시 뒤, 언덕에 오른 소년의 두 눈에 새로운 활기가 깃들었다.
 ‘보인다!’
 드디어 바라던 장소가 눈에 비쳤다. 아직도 상당한 거리가 남아 있었으나, 그래도 눈에 들어왔단 것 하나만으로도 기운이 샘솟았다.
 ‘스테일 남작령!’
 등 뒤로 자그마한 약동이 느껴진다. 소녀도 그와 같은 것을 본 모양이다. 아마도 웃고 있으리라. 동생이 웃고 있으리란 생각 때문일까? 소년의 입가에도 한 줄기 따뜻한 미소가 내려앉았다.

댓글(13)

나문가    
일주일중 하루2시간 일하는데 너무 과거를 의식하네요... 그
2015.08.31 22:28
골든라이언    
정말 비싸게 받네... 안본다.
2015.09.05 13:43
멀보긴    
이거 중간에 쥔공 바뀌지안나? 그뒤로 짱나서 안봤는디
2016.01.21 23:39
파울러스    
아 전개 겁나 갑갑허네
2016.07.17 20:40
widxoei    
나이
2016.07.21 21:17
X105S    
혼잣말소름..
2016.07.21 23:27
엠텍    
아..머냐 이런게 책으로나오냐
2016.07.25 15:10
헤이맘보    
잘난척할때는 잘난척도 좀해라 뭐이렇게 순수해
2016.07.29 19:50
Sabio    
먼 혼자생각이 이래 많아. 행동은 못하고 생각만 하는게 답답해서 못보겠다. 난 달라 중2병도 병맛이고
2016.08.14 17:05
바보안해    
쥔공 묶어서 후두려 패고 싶다
2017.06.17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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