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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문 1권-1

2014.12.30 조회 4,489 추천 38


 서장 폭풍의 사나이
 
 수라마검(修羅魔劍) 손우곤(孫宇坤)!
 그는 당금 강호가 배출해낸 최절정의 고수 중 하나였다.
 사람들은 그를 백 년 내의 마도제일검사(魔道第一劍士)라고 불렀다. 그의 수라단홍검(修羅斷虹劍)에서 뿜어지는 빛살 같은 칠절마왕검법(七絶魔王劍法)은 수십 년간 적수를 만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조용히 한 사나이가 찾아왔다. 허름한 백의에 녹슨 철검(鐵劍)을 찬 그 사나이가 비무(比武)를 청해 왔을 때 손우곤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하나 그는 웃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백의인의 단 일검(一劍)에 피를 토하고 쓰러지며 그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외쳤다.
 “다…… 당신은 누구요?”
 백의인은 자신의 녹슨 철검 끝에 방울방울 흘러내리는 핏방울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화군악(華君嶽)!”
 그것이 수라마검 손우곤이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마지막 말이었다.
 
 무영마장(無影魔掌) 전무극(展無極)!
 그는 오직 쌍장(雙掌)만으로 강북무림계(江北武林界)를 석권한 일대의 고수였다. 수백 번의 생사를 건 격투 중 그는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한데 자신의 사십 세 생일을 맞는 날, 그는 한 장의 하얀 배첩을 받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비무를 청하오. 화군악 배상(華君嶽 拜上).
 
 전무극은 그 배첩을 바라보며 한참을 웃다가 친구들을 술자리에 남긴 채 잠시 밖으로 나갔다. 바로 화군악이라는 이 겁 없는 미친놈을 때려잡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친구들이 살아 있는 그의 모습을 본 마지막 순간이었다.
 
 진궁(陳穹)이 그 사나이를 처음 본 것은 어느 이름 모를 허름한 산봉에서였다. 마치 한 개의 바위처럼 그 사나이는 묵묵히 서 있었다.
 비무첩을 받고 산정(山頂)으로 올라온 진궁은 장대한 체구를 백의에 감추고 산발한 머리를 들어 오연히 천공(天空)을 바라보고 있는 그 사나이에게서 난생처음 느껴보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귀하가 화군악이오?”
 산서성(山西省) 제일의 고수로 알려진 혈화도(血花刀) 진궁은 자신도 모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리고 그 사나이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진궁은 자신이 신(神)을 보았음을 느끼고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
 
 청천벽력(靑天霹靂)!
 구주천하(九州天下)가 온통 한줄기 노도와 같은 폭풍에 휩싸여 버렸다.
 한 사나이가 나타난 것이다.
 허름한 백의 한 벌.
 무표정한 얼굴에 냉막함을 가득 담고 녹슨 검 하나를 허리에 달랑 매단 채 그는 나타났다.
 아무도 그의 일검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내로라하는 절정의 고수자(高手者)들만 찾아다니며 비무를 하건만, 아무도 그의 비무행(比武行)을 멈춰 세울 수가 없었다. 그는 무(武)의 신(神)으로 여겨졌고, 무적(無敵)의 초인(超人)으로 불리었다.
 오직 그 하나로 인해 백 년 동안 잠잠하던 강호가 온통 풍운으로 뒤덮였고, 일협쌍마삼기사절(一俠雙魔三奇四絶)로 대변되던 당금 강호의 최고 고수의 서열이 송두리째 뒤흔들렸다.
 흡사 한줄기 거대한 폭풍처럼 나타난 사나이!
 그는 과연 누구인가?
 
 
 제1장 천하제일(天下第一)
 
 一. 미녀(美女)
 
 그 사나이가 온 것은 해가 막 서산마루를 넘어가려 할 때였다.
 세상을 온통 핏빛으로 물들이는 석양의 긴 그림자를 밟으며 그는 장원(莊院)으로 들어섰다. 허름한 백의, 장대한 체구. 머리를 산발해 장발을 어깨에 늘어뜨린 채 허리에는 녹슨 장검 한 자루를 차고 그는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걸음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하나 몹시 규칙적이어서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는 일정한 보폭을 떼며 넓은 연무장(練武場)의 한가운데로 들어섰다. 반경 삼십여 장이나 되는 연무장의 주위에는 청의무복(靑衣武服)을 걸친 장한들이 수백 명이나 늘어서 있었다. 하나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의 시선은 경외(敬畏)와 두려움의 빛을 띤 채 허름한 백의사나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백의사나이는 연무장의 중앙에 우뚝 선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그의 입에서 나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섬전창(閃電槍) 섭자웅(葉子雄)은 어디 있느냐?”
 그의 목소리는 비록 그리 크지 않았으나 그것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이한 힘이 실려 있어 듣는 사람의 가슴을 떨리게 했다.
 해는 이미 서산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희미한 잔광(殘光)이 그의 철탑 같은 몸과 산발한 얼굴에 비치니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공포스럽고 거대하게 느끼게 했다.
 섭보옥(葉寶玉)은 그 백의인의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서 시력을 돋구었다.
 보면 볼수록 가슴이 떨리는 모습이었다. 산발한 머리는 금시라도 휘날려 귀신의 호곡성(呼哭聲)을 울릴 것 같았고, 희미하게 드러난 얼굴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굳어 있어 정녕 석고상을 보는 듯했다.
 하나 그녀는 조금도 두렵지가 않았다. 그녀는 태어난 이래 단 한 번도 남을 두려워해 본 적이 없었다. 남자에 대해서는 더 더욱 그러했다. 세상의 어떤 남자라도 그녀를 한 번 본 후에는 그녀에게 두려움을 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마치 오랜 장마 끝에 떠오른 태양(太陽)처럼 화사하고 아름다웠다. 그녀가 나타나면 주위의 모든 것이 빛을 잃어버렸다.
 그녀의 나이가 열일곱이 되었을 때 그녀는 가급적이면 다른 사람들의 앞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 그녀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누구나가 얼굴을 붉히고, 말을 더듬고, 눈이 게슴츠레해지기 때문이었다.
 단 한 사람의 예외가 있었다.
 그는 그녀를 볼 때마다 얼굴을 붉히지도, 말을 더듬지도, 눈이 게슴츠레해지지도 않았다. 다만 온화한 미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그 사람은 지금 그녀의 뒤에 우뚝 선 채 그녀와 마찬가지로 백의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비단으로 된 청의(靑衣)를 입은 준수한 중년인이었다. 청의 중년인은 문득 고개를 돌려 섭보옥을 바라보았다.
 “너는 그의 걸음걸이가 무척 특이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그의 음성은 진중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섭보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는 마치…….”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혀로 붉은 입술을 살짝 적시며 입을 열었다.
 “자[尺]로 잰 듯 걷고 있군요.”
 청의 중년인은 담담하게 웃었다.
 “공교롭게도 네 말은 아주 정확했다. 일전에 확실히 누군가가 저 사람의 보폭을 자로 잰 적이 있었지.”
 “그런 쓸모없는 일을 한 사람이 누군지 알겠군요. 그는 필시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한다는 평지풍파객(平地風波客) 사마결(司馬缺)이겠지요?”
 “그렇다. 사마결은 무려 한 달간이나 저자의 뒤를 몰래 따라다니며 발자국의 흔적이 남아 있을 때마다 자로 그 간격을 쟀다. 한 달 동안 그는 천이백열아홉 번을 쟀는데, 결과는 언제나 똑같았다. 그의 보폭은 정확하게 한 자 일곱 치였다. 조금도 더 걷거나 덜 걷지 않고 언제나 일정하게 한 자 일곱 치를 유지했지.”
 섭보옥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청의 중년인의 표정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인간이라면 그럴 수 없지. 그럴 수 있다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사실을 뜻한다. 그것은 저자의 전신(全身)이 완전히 자신의 의지(意志)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이다.”
 “의지의 지배라고요?”
 “그렇다. 아무리 무공이 높은 무예의 달인(達人)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몸을 자신의 생각대로 완전하게 움직일 수는 없다. 하나 만약 누군가가 자신의 전신을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다면, 그자야말로 무(武)의 신(神)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섭보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청의 중년인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우내십대고수(宇內十大高手) 중의 한 사람이며, 한평생 누구를 두려워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항상 냉정하고 자신만만했으며, 한 번 창을 잡으면 천하에 적수가 없는 무적(無敵)의 고수였다.
 하나 지금 그녀는 마음 한구석에 불안이 솟구치는 것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가 다른 사람을 이토록 칭찬하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또한 이처럼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하는 것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마음속의 불안을 씻으려는 듯이 청의 중년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지만 아버님의 상대는 되지 않겠지요?”
 청의 중년인은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아직 내 몸을 완전한 의지의 지배 하에 두지 못했다.”
 청의 중년인은 갑자기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 또한 그녀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사실 저자의 소문을 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십 중 칠팔의 승산(勝算)이 있다고 생각했다. 한데 직접 그를 보게 되니…… 아무래도 자신이 없구나.”
 그녀의 안색이 조금 더 파리해졌다.
 청의 중년인은 두툼한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너는 내가 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여자다. 여인(女人)의 몸으로 천하제일의 자리에 오르기는 무척 어렵다. 여인은 남자에 비해 선천적으로 체질이 뒤지기 때문이지. 하지만 너라면 충분히 여중제일인(女中第一人)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청의 중년인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나직하나 굳은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만일 내가 패하거든 너는 즉시 길을 떠나거라.”
 섭보옥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화산(華山)의 태극동(太極洞)에 가면 동곽선생(東廓先生)이란 분이 계시다. 네가 내 복수를 하고 싶거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분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아버님…….”
 섭보옥의 영롱한 눈가에 뿌연 물막이 피어올랐다. 청의 중년인은 온화하나 엄격한 눈으로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응시했다.
 “군자(君子)는 자신을 알아주는 자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법이다. 나의 목숨은 이미 무도(武道)의 정신(精神)에 바친 것이다. 너라면 나의 마음을 잘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
 이어 그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밀치며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내가 바로 섭자웅이오!”
 일협쌍마삼기사절의 십대고수 중 창절(槍絶)로 알려진 섬전창 섭자웅은 백의인을 마주 보고 우뚝 섰다.
 
 
 二. 기재(奇才)
 
 산정(山頂)의 바람은 차가웠다.
 모용수(慕容修)는 불어오는 산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무릎을 꿇은 채 아버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화군악은 칠십 년 전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로 이름을 떨쳤던 화씨세가(華氏世家)의 유일한 혈맥이다. 당시 화씨세가는 천하일통(天下一統)의 야망을 품었다는 이유로 전 무림인들의 협공을 받아 무너졌지.”
 모용화린(慕容化麟)은 자상한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언제 보아도 모용수는 준수했다.
 나이 세 살 때 처음 글을 읽기 시작했고, 다섯 살 때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독파했으며, 일곱 살 때는 벌써 스스로 시(詩)를 지었고, 나이 열두 살 때는 더 이상 가르칠 사람이 없어서 그 뒤로 오 년 동안 천하의 서고(書庫)를 돌아다니며 온갖 서적을 탐독한 일대의 천재가 바로 모용수였다.
 자신의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모용수는 정녕 고금제일(古今第一)의 기재라 할 만했다. 모용화린은 자신에게 그런 아들이 있다는 것에 대한 뿌듯한 기쁨과 함께 씁쓸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화군악은 당시 혈겁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화비홍(華飛虹)의 손자이다. 그는 다섯 살 때부터 검을 잡았고, 이십 세 때는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룰 만큼 뛰어난 무예의 경지에 올라섰으며, 나이 삼십에 천하무적(天下無敵)이 된 것이다. 내가 알기로는 당금 무림에서 그의 적수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모용화린은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일협쌍마삼기사절을 합쳐 우내십대고수라고 부르지만, 그들의 무공 수준은 같다고 할 수가 없다. 얼마 전에 화군악에게 쓰러진 사절(四絶) 중의 섬전창 섭자웅은 비록 천하의 고수이지만 쌍마(雙魔)나 삼기(三奇)에 비하면 손색이 있다. 쌍마나 삼기도 일협(一俠)에게는 한 수 뒤진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일협만이 화군악과 겨룰 수 있을 것이다.”
 모용화린의 별빛같이 서늘하게 빛나는 눈은 준수한 모용수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다.
 “너는 그들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래야만이 비로소 천하제일(天下第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용수는 말없이 귀를 기울였다.
 휘이―이―잉!
 다시 한차례의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그의 백의와 머리에 맨 두건을 휩쓸고 지나갔다.
 모용수가 태어나기 전에는 천하제일의 기재라 불리었던 모용화린은 임풍옥수 같은 아들의 모습을 응시하다가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너는 이제 화산으로 가야 한다. 태극문(太極門)의 무공만이 화씨세가의 무공과 겨룰 수 있다. 네 머리라면 충분히 태극문의 절기를 익혀 화군악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어디선가 바람 사이로 나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천문서생(天門書生) 모용화린(慕容化麟)! 화군악이 왔소.”
 그 음성은 비록 나직했으나 이상한 힘이 실려 있어, 바람을 타고 아주 멀리에서 들려왔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지척에서 외치는 듯했다. 모용화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한곳을 바라보았다.
 “정각에 나타났군.”
 모용수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하나 그의 몸은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모용화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그를 내려다보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네 지혜는 확실히 천하제일이다. 네가 방심하지만 않는다면, 너는 십 년 내로 내 복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용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모용화린의 음성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모용수는 바람을 맞으며 한동안 무릎을 꿇고 있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용화린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모용수는 벌겋게 핏발 선 눈으로 산정의 저 너머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는 아주 똑똑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두 번 다시 자신의 부친이자 우내십대고수의 삼기(三奇) 중 하나인 천문서생 모용화린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을…….
 
 
 三. 도객(刀客)
 
 도(刀)는 날카로웠다. 무시무시한 칼바람을 내며 질풍처럼 회전하고 있는 도는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순식간에 상대를 베어 넘길 것 같았다.
 슈슈슈슈슈―!
 사방 천지가 온통 칼날로 인해 시퍼렇게 변해 버린 것 같았다.
 하나 미친 듯 휘몰아쳐오는 칼바람 속에 우뚝 서 있는 백의 사내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허리에 찬 장검을 뽑지도 않았고, 두 눈마저 감은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파파파파파―!
 칼날이 다시 찰나간에 열여섯 번의 변화를 일으키며 무시무시한 도광(刀光)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누가 보기에도 도광 한복판에 서 있는 백의 사내의 몸은 순식간에 피를 뿌리며 쓰러질 것만 같았다.
 번―쩍!
 그 순간, 사방을 뒤덮은 섬뜩한 도광 사이로 한줄기 하얀 광채가 번뜩였다. 그것은 마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 가닥 뇌전(雷電)이 이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도광은 어느새 씻은 듯이 걷혀졌다.
 그와 함께 도광 속에 갇혀 있던 백의 사내의 모습이 다시 드러났다.
 어느 틈에 뽑아 들었는지 백의 사내의 오른손에는 녹슨 장검이 쥐어져 있었다. 장검의 끝부분에서 한 방울 한 방울씩 진한 선혈이 흘러내렸다.
 백의 사내는 천천히 장검을 허리춤에 집어넣은 후 몸을 돌려 사라져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시무시하게 도를 휘두르던 사람은 그가 사라져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의 몸은 썩은 고목이 벼락을 맞듯 맥없이 땅에 쓰러졌다.
 그제야 위지혼(慰遲魂)은 천천히 그 사람에게 다가갔다.
 쓰러진 사람의 미간에는 두 치가량의 검흔(劍痕)이 나 있었고, 그 사이로 미미한 혈흔(血痕)이 내비치고 있었다.
 그 사람은 억지로 눈을 떠 위지혼을 바라보았다.
 “자…… 잘 보았느냐?”
 그의 입에서 미약한 물음이 흘러나왔다. 위지혼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의 입가에 거의 알아차릴 수도 없는 희미한 경련이 일어났다.
 “이…… 인간의 무예에는 무엇이든 허점이 있기 마련이다. 화씨세가의 검술은 전문적으로 이 허점을 노리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막을 수가 없다. 하…… 하나 칠십 년 전 화씨세가가 혈겁을 당했을 때 그들의 무공을 깬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태극문의 창시자인 태극천자(太極天子)다…….”
 쓰러진 사람은 숨이 가쁜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미약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태극천자가 죽은 후 그의 절기를 익힐 만한 인재(人才)가 없어서 태극문은 비록 몰락의 길을 걸었지만 당금의 문주(門主)인 동곽선생은 태극천자의 무공을 익히는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어 그는 흐릿한 눈으로 위지혼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야수를 연상시키는 위지혼의 차갑고 무심한 눈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 냉정한 태도와 거친 모습에 쓰러진 사람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그려냈다.
 “너…… 너는 천부의 승부 감각을 지니고 태어난 놈이다. 그 감각에 태극천자의 무공이 합쳐진다면…… 화군악을 물리칠 수 있을 것…… 이…… 다…….”
 그의 목소리가 점차 약해지다가 나중에는 끊겨버렸다. 아울러 그의 고개 또한 힘없이 수그러졌다.
 위지혼은 식어가는 그의 몸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거의 들리지도 않는 음성으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당신은 내게는 훌륭한 사부였소, 우문황(宇文荒)! 하지만 당신은 패했소.”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눈이 밀림 속에서 포효하는 맹수의 그것처럼 무시무시하게 번쩍거렸다.
 “나는 절대로 패하지 않을 것이오. 누구에게도…….”
 우내십대고수의 일인(一人)이자 천하제일의 도(刀)의 명인이라 불리는 도절(刀絶) 홍황도(洪荒刀) 우문황의 시체를 뒤로하고 위지혼의 몸은 조금씩 멀어져갔다.
 
 
 四. 대협(大俠)
 
 번우량(飜宇亮)은 몸을 굳힌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를 가장 아껴주고 사랑해 주던 그의 할아버지는 차디찬 시신이 되어 그의 눈앞에 쓰러져 있었다.
 번우량은 자기의 눈으로 보고도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아는 한, 그의 할아버지는 천하에서 가장 강한 열 명의 고수 중 하나였고, 온 천하인들의 존경을 받는 대협객(大俠客)이었다.
 그런데 누가 감히 할아버지를 죽일 수 있단 말인가? 건곤일수(乾坤一秀) 번일악(飜一岳)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존재한단 말인가?
 한참을 충격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번우량은 문득 할아버지의 가슴이 유달리 불룩한 것을 보고 조심스레 품속을 뒤져보았다. 과연 그곳에는 그에게 보내는 번일악의 서신(書信)이 있었다.
 낯익은 번일악의 필체를 대하자 번우량은 반가움에 앞서 눈앞이 뿌얘지는 것을 느꼈다.
 
 -우량!
 네가 이 글을 보고 있을 즈음이면 아마도 이 할애비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 같구나. 네게는 미처 알리지 않았다만 나는 화군악의 비무첩(比武帖)을 받았다.
 이제 일 각(一刻) 후면 그가 이곳으로 올 것이다.
 나는 아직 직접 그를 만난 적은 없지만 승패를 예상할 수는 있다.
 우내십대고수의 무공은 일협인 신주대검협(神州大劍俠)을 제외하고는 거의 백지 한 장 차이인데, 벌써 세 명이 그에게 쓰러졌다. 그중에는 나와 같이 삼기(三奇)에 속해 있는 천문서생 모용화린도 있다.
 그들이 별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쓰러진 것으로 보아 나도 화군악의 적수는 되지 않을 것 같구나.
 그래서 마지막으로 너에게 이 글을 쓴다.
 네 부모가 죽은 후 나는 너를 손자라기보다는 나의 분신(分身)처럼 키워왔다. 너는 내 기대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인물로 자라왔다. 너의 대범한 성격과 넓은 포용력, 불의(不義)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미는 장차 나를 능가하는 천하제일의 대협(大俠)이 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것이다.
 하나 한 가지 불안스러운 점이 있구나. 네가 노부의 복수에 눈이 어두워 화군악에게 무모한 도전을 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다.
 화군악의 무공은 단순히 화씨세가의 무공을 완성한 것뿐만이 아니고 자신의 천부적인 능력과 엄청난 노력으로 상상을 불허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러 있다. 그는 그야말로 무(武)를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좋을 인물이다. 그와 같은 무공의 소유자는 앞으로 두 번 다시 나타나기 힘들 것이다.
 나는 원칙적으로는 네가 노부의 복수를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네 무공으로는 도저히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 네가 정 복수를 하고 싶다면 한 가지 방법은 있다.
 만물(萬物)에는 상극(相剋)하는 것이 있듯이 천하제일로 알려진 화씨세가의 무공에도 유일하게 극성되는 무공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는 거의 몰락해 버린 태극문의 무공으로…… 후략(後略).-
 
 번우량은 편지를 꽉 움켜잡았다.
 편지가 그의 손에 먼지가 되어 흩날릴 때, 그의 눈가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五. 고수(高手)
 
 화창한 날씨였다.
 조자건(趙紫巾)은 반쯤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눈부신 듯 눈을 몇 번 껌벅거렸다.
 ‘드디어 오늘이군.’
 그는 천천히 침상에서 일어나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침의 차갑고 청명한 공기가 폐 속 깊숙이까지 가득 밀려들어왔다. 그러자 마음이 개운해지며 무슨 일이든지 자신 있게 해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햇살은 찬란했고, 날씨는 청량하니 미풍에 꽃향기가 실려왔다. 조자건은 고개를 들어 눈을 찌를 듯한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천천히 숨을 불어내며 중얼거렸다.
 “오늘은 정말 좋은 날씨로군.”
 그때 갑자기 그의 앞쪽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며 그의 말을 받았다.
 “확실히 좋은 날씨로군. 살인(殺人)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이지.”
 조자건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자신의 앞에 불쑥 나타난 인물을 힐끗 바라보았다.
 “당신은 살인을 할 생각이오?”
 나타난 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꼭 한 사람을 죽이고 싶네.”
 “누구를 죽이겠다는 거요?”
 인영은 힘주어 두 글자를 내뱉었다.
 “자네.”
 조자건은 그 말에 놀라기는커녕 도리어 무엇이 즐거운지 활짝 웃었다.
 나타난 인영은 돌연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이곳에 올 때는 정말 자네를 죽이고 싶었네. 하지만 막상 자네의 얼굴을 보니 선뜻 손이 움직여지지 않는군.”
 인영은 다시 그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자네는 왜 그렇게 바보 같은 일을 했나? 자네 눈에는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졸장부로 보였단 말인가?”
 조자건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인영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질책하듯 말했다.
 “섬전도(閃電刀) 서귀(徐鬼)의 무공이 제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나는 그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네. 내가 서귀의 동생을 죽였으니 그와의 결투는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일세. 죽든지 살든지 오직 내 일이란 말일세. 그런데도 자네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를 찾아가 결투 약속을 하다니 자네 눈에는 내가 그렇게도 겁쟁이로 보였단 말인가?”
 조자건은 문득 입을 열었다.
 “당신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소. 진표(秦豹)가 장부 중의 장부라는 건 삼척동자라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
 “그런데 왜…….”
 조자건은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당신은 서귀의 동생을 죽일 때 심하게 다쳐서 도저히 서귀의 상대가 되지 못하오. 만약 당신이 서귀와 싸우다가 죽는다면 당신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세 명의 어린 동생과 늙은 노모는 누가 부양을 한단 말이오?”
 진표는 얼굴을 실룩이며 그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의 말은 잘 알겠네. 하지만 나의 노모는 나를 죽음이 두려워 회피하는 졸장부로 키우지는 않았네. 내 동생들도 내가 친구를 대신 사지(死地)에 보내는 비겁자가 되는 걸 원하지 않을 걸세.”
 그는 침중하게 얼굴을 굳혔다.
 “더구나 서귀는 이곳 하남성(河南省)에서는 누구나가 첫손가락을 꼽는 도객일세. 자네는 서귀의 단 한 칼도 받아낼 수가 없네.”
 조자건은 빙긋 웃었다.
 “나는 당신의 말대로 서귀의 상대가 될 수 없을지 모르오. 하지만 내게는 나를 바라보며 사는 어린 동생들도, 또 부양해야 할 노모도 계시지 않소. 일이 잘못되어 내가 서귀에게 당하더라도 슬퍼할 사람은 별로 없소. 그러니 이번 싸움은 당연히 내가 나서야 하는 것이오.”
 진표는 항상 냉막하고 무표정하게 굳어 있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비록 마음속으로는 조자건의 말을 강하게 부정하고 싶었으나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가슴이 너무도 답답해 눈을 부릅뜨고 조자건을 노려보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네는 정말 한심한 작자로군. 고집불통이야! 게다가 어리석고 무모하기 짝이 없네. 자네는 세상을 아직 절반도 살아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겠다는 건가?”
 조자건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나는 한심하고 고집불통일지는 모르지만 어리석지는 않소. 또 무모하지도 않소. 서귀가 비록 절정고수이지만 승부란 반드시 무공의 우열(優劣)만으로 판가름나는 것은 아니오. 그러니 쉽게 결과를 속단하려 들지 마시오.”
 진표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무어라 입을 열려 했지만 조자건은 손을 흔들었다.
 “더 이상 말하지 마시오. 이미 서귀와 나는 오늘 정오에 흑석평(黑石坪)에서 겨루기로 했소. 그러니 당신은 미시(米時)까지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흑석평으로 와서 내 시체를 거두어 내 형님께 보내주시오.”
 진표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입술을 실룩거리며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한 자 한 자 씹어 뱉듯이 말했다.
 “자네는 정말 바보일세. 어쩔 수도 없는 멍텅구리야. 만일 자네가 서귀에게 죽는다면 자네를 지옥 끝이라도 쫓아가 가만두지 않겠네.”
 조자건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하겠소. 꼭 살아서 당신 앞에 다시 나타나겠소.”
 
 흑석평은 전체가 거대한 검은 암반(岩盤)으로 된 평평한 공지였다.
 정오 무렵.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살을 받으며 한 사람이 흑석평의 좌측 공터에 나타났다.
 날이 제법 무더운데도 전신에 검은 옷을 걸친, 키가 훌쭉하게 큰 인물이었다. 얼굴이 말처럼 길쭉했고, 눈은 작고 삼각형인데 끊임없이 악독한 빛이 흘러나와 마치 한 마리의 독사를 연상케 했다. 흑의인의 옆구리에는 가늘고 기다란 장도(長刀)가 한 자루 매달려 있었다.
 흑의인은 흑석평의 중앙에 와서 우뚝 선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그의 시선이 한군데에 딱 멎었다.
 흑석평의 주위에는 울창한 송림(松林)이 우거져 있었다. 그 송림의 그늘 아래 한 사람이 길게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누워 있던 인영은 흑의인과 눈이 마주치자 빙그레 웃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흑의인과는 대조적으로 하얀 백의를 입고 이마에는 자색 두건(頭巾)을 질끈 동여맨 인영이었다. 이제 막 소년티를 갓 벗은 백의청년은 팔짱을 낀 채 느릿느릿 걸어왔다. 눈이 마치 밤하늘의 유성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백의청년은 흑의인의 일 장 앞까지 다가와서 다시 빙긋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바로 섬전도 서귀요?”
 흑의인, 하남성 일대에서는 우는 아이도 울음을 그치게 할 만큼 명성이 자자한 섬전도 서귀는 냉혹한 눈으로 백의청년의 전신을 쓰윽 훑어보았다. 소름이 오싹 끼치는 무시무시한 안광이었다.
 “네가 진표 대신 나와 겨루겠다고 한 조자건이란 놈이냐?”
 조자건은 그의 차가운 눈빛을 받고도 별로 당황하는 빛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서귀의 얼굴에 엷은 비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되는군. 듣자 하니 철혈객(鐵血客) 진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떤 싸움이든 피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내가 두려워 이런 어린아이를 보내다니…….”
 조자건은 차분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아니오. 진표는 졸장부가 아니고 나도 어린아이가 아니오. 그는 당신과 싸울 수 없는 사정이 있고, 그래서 내가 대신 나선 것이오.”
 서귀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그의 비쩍 마른 손은 어느새 허리춤에 찬 칼자루를 잡고 있었다.
 “아무래도 좋다. 우선 너를 죽인 후 진표를 찾아가 내 동생의 복수를 하겠다.”
 그의 전신이 마치 한 자루의 칼날처럼 예리한 기운을 뿜었다. 조자건은 여전히 팔짱을 풀지 않은 채 꼼짝도 않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혜성처럼 차고 맑았으나, 두려워하는 빛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제법 기가 살아 있는 놈이로군.’
 서귀는 그 눈길에 마음 한구석이 약간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고 칼자루를 힘껏 움켜잡았다.
 쐐액―!
 어느새 그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장도가 빛살처럼 조자건을 향해 날아들었다. 과연 섬전도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눈부신 출수(出手)였다.
 조자건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옆으로 몸을 날려 도를 피했다. 하나 이 서귀의 섬전일별(閃電一瞥)이라는 초식이 너무도 빠르고 갑작스러웠는지라 미처 완벽하게 피하지 못하고 왼쪽 팔뚝에 칼이 스치고 말았다.
 피가 솟구치며 그의 왼팔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서귀는 조자건이 가벼운 부상만을 입은 채 자신의 벼락 같은 일도를 피하자 뜻밖인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놈! 제법이구나. 하지만…….”
 그는 두 눈에 살광을 번뜩이며 더욱 사납게 질풍처럼 도를 휘둘렸다.
 쐐애애액!
 날카로운 도풍(刀風)과 함께 희뿌연 도광이 밀물처럼 조자건의 전신을 덮어갔다. 그 공격이 어찌나 무섭고 빨랐던지 조자건은 손 한 번 내밀지 못하고 연거푸 주춤주춤 뒷걸음치며 도를 피했다.
 하나 순식간에 다시 몸에 세 개의 핏줄기가 그어졌다. 조자건은 약간 눈살을 찌푸렸을 뿐 신음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파파파파……!
 서귀의 칼이 다시 무시무시한 쇳소리를 내며 날아들었다.
 채 십 초(十招)도 되지 않아 조자건의 전신은 단 한 군데도 상한 곳이 없을 만큼 피로 얼룩졌다. 조자건은 사력을 다해 피했으나 서귀의 장도는 단 한 차례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이 매섭게 그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
 조자건의 백의는 이미 시뻘건 피로 범벅이 되어 혈의(血衣)처럼 변했고, 움직일 때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내린 핏물이 바닥을 붉게 적셨다. 조자건은 연신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버텨내고 있었다.
 서귀는 금시라도 쓰러질 것 같던 그가 자신의 칼에 여러 차례 격중되고도 쓰러지지 않자 놀랍기도 하고 불 같은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좋다! 이놈. 언제까지 네놈이 쓰러지지 않고 견디나 보자!’
 서귀는 눈을 흉악하게 번뜩이며 자신의 절기인 섬전십팔도(閃電十八刀) 중에서도 위력이 막강한 섬전추혼(閃電追魂)의 식으로 사납게 도를 휘둘렀다.
 파앗!
 다시 조자건의 가슴이 쩌억 갈라지며 피분수가 뿜어져나왔다. 조자건의 훤칠한 신형이 휘청거렸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서귀의 칼이 무서운 도광과 함께 옆구리로 날아들었다.
 조자건은 허겁지겁 옆으로 피하며 바닥을 굴렀다. 하나 어느새 그의 옆구리는 두 치쯤 찢어져 있었다. 서귀의 눈에서 악독한 빛이 뿜어져나왔다.
 “애송이 놈! 이제 끝이다!”
 서귀의 도가 미친 듯이 흔들리며 사방이 온통 도영(刀影)으로 뒤덮여 버렸다. 그것은 바로 섬전십팔도 중에서도 삼대절초(三大絶招) 중 하나인 섬전광망(閃電光網)이었다.
 바로 그때 갑자기 조자건이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그 동작이 어찌나 빠르고 민첩했던지 지금까지 비틀거리며 사경(死境)을 헤매던 사람의 행동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서귀는 흠칫 놀라 급히 도의 방향을 바꾸려 했다. 그 순간, 바닥에 엎드려 있던 조자건의 몸이 벌떡 일어나며 폭죽(爆竹)처럼 그의 코앞으로 달려들었다. 서귀는 미처 피할 틈이 없이 번개같이 도를 앞으로 찔러댔다.
 푹!
 그의 도가 사정없이 조자건의 왼쪽 어깨를 관통하여 몸의 뒤까지 삐죽 튀어나왔다.
 하나 그 순간, 서귀는 눈을 부릅떴다.
 “헉……!”
 지금까지 오른손을 숨기고 있던 조자건이 오른손을 불쑥 앞으로 내민 것이다. 그 손안에는 어린아이의 팔뚝만한 쇠꼬챙이가 섬뜩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쇠꼬챙이는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서귀의 목을 꿰뚫어버렸다. 실로 눈 깜박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끄으으…….”
 서귀의 목구멍에서 사람의 소리 같지 않은 괴이한 울림이 흘러나왔다. 그의 눈은 경악과 불신으로 툭 불거져 있었다. 그는 조자건을 노려보다가 벼락 맞은 고목처럼 맥없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털썩!
 그제야 조자건은 비틀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어깨에는 아직도 서귀의 칼이 깊숙이 꽂힌 채 흔들거리고 있었다.
 조자건은 입술을 깨물고 장도를 뽑았다.
 쭉!
 핏줄기가 하늘 높이 솟구치며 칼이 뽑혀나왔다. 조자건은 뽑힌 칼을 바닥에 대고 몸을 지탱한 채 서귀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처음부터 정상적인 싸움에서는 자신은 도저히 서귀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변변치 못한 무공으로는 서귀의 빠르고 악독한 칼을 피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몸을 걸고 도박을 한 것이다.
 그는 서귀의 칼에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단 한 번도 반격을 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서귀는 그에게 반격할 힘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놓았다. 그때가 바로 조자건이 노리던 순간이었다.
 조자건에게는 오직 단 한 번의 기회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 기회를 놓치면 서귀는 방심을 하지 않을 것이며, 조자건은 더 이상의 기회를 잡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쪽 어깨를 희생하면서까지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서귀는 쓰러졌다. 승부(勝負)란 반드시 무공에 의해서만 판가름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서귀는 죽는 순간에야 깨달았을 것이다.
 
 조자건이 금시라도 쓰러질 듯 휘청이는 걸음으로 흑석평을 벗어났을 때, 멀리서 한 사람이 그를 향해 마구 달려오고 있었다.
 상반신을 붕대로 친친 동여맨 이십대 중반의 강인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그는 달려오다가 피투성이가 된 채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는 조자건을 발견하자 몸을 우뚝 멈춰 세웠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조자건은 툴툴거렸다.
 “무얼 보고 있소? 나는 더 이상 서 있을 힘도 없단 말이오.”
 청년, 진표는 황급히 다가와 조자건을 부축했다. 그는 눈이 부신 듯 몇 번이나 눈을 깜박거렸다.
 “지독하게 다쳤군…….”
 조자건의 몸을 자세히 살피고 난 진표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너무도 낮게 가라앉아 있어 쉰 것처럼 들렸다.
 조자건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아무리 심하게 다쳤어도 서귀보다는 낫소.”
 그제야 진표는 생각이 떠오른 듯 급히 물었다.
 “서귀는 어떻게 됐나?”
 “서귀는 나보다 많이 다치지는 않았지만 두 번 다시 일어날 수가 없게 되었소.”
 조자건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진표를 쳐다보았다.
 “당신 말대로 오늘은 정말 살인을 하기에는 좋은 날씨였소.”
 
 
 제2장 형제여행(兄弟旅行)
 
 一. 출발(出發)
 
 조자건의 하루 일과는 매우 단순했다.
 우선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차가운 물로 냉수욕을 한다. 이어 산세(山勢)가 험악하기로 유명한 환원산(環轅山)으로 가서 나무를 가득 해 온다.
 아침식사를 한 후 이 나무들을 땔감으로 쓰기 위해 천 번의 도끼질을 한다.
 저녁에는 간단한 육합권(六合拳)을 정확한 동작으로 백 번 반복해서 연습을 하는 것으로 하루의 무공수련을 마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싱겁기조차 한 이 방법은 그의 형인 조립산(趙立山)이 계획한 것이었다.
 조립산은 조자건의 유일한 혈육(血肉)이었다. 조자건의 나이가 아홉 살이 되었을 때, 그들 형제는 고아(孤兒)가 되었다. 그때 형인 조립산은 조자건에게 물었다.
 “너는 장래에 무엇이 되고 싶으냐?”
 조자건은 어린 나이에도 당돌하게 대답했다.
 “나는 천하(天下)에서 제일(第一)가는 고수(高手)가 되고 싶어요.”
 조립산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는 다만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좋다. 너를 천하제일고수로 만들어주겠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그 대신 너는 지금부터 내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한다.”
 조자건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립산이 가장 먼저 조자건에게 시킨 일은 하루에 열 번씩 다른 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구경하라는 것이었다.
 무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홉 살 때부터 조자건은 형을 따라 무림인들이 싸우는 곳마다 찾아다니며 그들의 결전(決戰)을 구경했다. 아무리 멀고 험한 곳이라 하더라도 무림인들의 결전이 있는 곳이면 그들 형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조자건의 나이가 열세 살이 되었을 때 조립산은 더 이상 그를 데리고 다니지 않았다. 그 대신 조자건은 스스로 싸움터를 찾아다녀야만 했다. 조자건은 무림인들의 결전이 벌어진다는 소문이 들리면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가 그들의 결전을 자세히 관찰했다.
 십 년(十年) 동안 그는 셀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싸움을 보아왔다.
 그리고 육 개월 전인 그의 열아홉 번째 생일 날, 조립산은 다시 그에게 말했다.
 “더 이상 싸움 구경을 하지 않아도 좋다. 이제부터는 무공을 익히기 시작해라.”
 조립산이 지시한 것은 아침에 천 번의 도끼질을 하고, 저녁에는 무림의 삼류무사(三流武士)들조차도 배우기를 꺼려하는 시시한 육합권을 반복해서 백 번씩 연습하는 것이었다. 조자건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가 저녁마다 볼품없는 육합권을 정성 들여 연마하는 것을 보고 모두 비웃었다.
 하나 조자건은 단 한 번도 싫어하는 빛이 없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묵묵히 조립산의 지시대로 행동을 했다.
 진표는 전에 이런 조자건이 답답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해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
 “자네의 재질은 내가 알고 있는 인물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네. 그런데 왜 이런 시시한 무공에 아까운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있나? 자네는 설마 이런 방법으로 천하제일고수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건 아니겠지?”
 그때 조자건은 빙긋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물론 믿지 않소. 내가 믿는 건 나의 형님이오.”
 조자건은 자신의 형이 결코 쓸데없이 자신에게 이런 일을 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조립산은 한 달에 한 번, 혹은 두 달에 한 번씩 아무 예고도 없이 집에 들러 그의 진도(進度)를 살펴보고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는 하루나 이틀 있다가 다시 아무런 말도 없이 훌쩍 어디론가로 떠나버리곤 했다.
 조자건은 형이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는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형을 진정한 사나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진정한 사나이라면 일단 자기가 하겠다고 결심한 일이 있으면 누가 뭐라 해도 하고야 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늘 형이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왔다.
 
 다음날 아침.
 조자건은 아침 일찍 나무를 하기 위해 환원산으로 갔다. 환원산은 천하에서 가장 험준한 산 중의 하나였다. 산세가 워낙 험악하여 길이 수레바퀴처럼 구불구불하기 때문에 환원산이란 이름이 붙은 것이다.
 나무를 한 짐 가득 지고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의 전신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상처가 다시 터져서 동여맨 붕대에 피가 잔뜩 배어나왔다.
 그가 나무를 가득 짊어지고 내려오자 마침 그의 집으로 오던 진표가 입을 쩍 벌리고 그를 쳐다보았다.
 “아니…… 자네, 정신이 있나?”
 그는 급히 다가와 강제적으로 조자건의 어깨에서 나뭇짐을 건네받았다.
 조자건은 별일 아니라는 듯 빙긋 웃었다.
 “오늘은 약간 힘이 드는군.”
 진표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멀거니 그를 쳐다보았다.
 “약간 힘이 든다고? 침상에 꼼짝 않고 한 달을 있어도 나을까 말까 한 사람이 아침부터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 오다니……. 자네 미쳤나?”
 “나는 귀가 먹지 않았으니 그렇게 고래고래 악을 쓰지 않아도 되오. 그리고 내 뼈다귀는 그런대로 쓸 만해서 하룻밤 자고 났더니 제법 견딜 만하오.”
 “견딜 만하다니……. 그러다 상처가 덧나기라도 한다면 자네는 한평생을 침상에 누워서 지내야 될 걸세.”
 조자건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진표는 다시 무어라고 입을 열려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그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조자건의 모옥은 허름했지만 정갈하고 깨끗하게 손질되어 있어 우아한 풍취를 느끼게 해 주는 곳이었다.
 진표는 조자건이 세수를 하고 방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말없이 그에게 수건을 내밀었다. 조자건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빙그레 웃었다.
 “아무래도 당신은 요즘 들어 부쩍 잔소리가 심해진 것 같소. 하지만 내 몸의 상태는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소. 나무를 해 오는 것이 무리였다면 나는 산에 올라가지 않았을 거요.”
 진표는 퉁명스런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래도 자네는 갔을 거야. 자네는 천하에서 제일가는 멍텅구리에다 고집쟁이거든.”
 “그런 줄 알면서 왜 나와 사귀고 있는 거요?”
 “그거야 나도 자네와 똑 같은 멍텅구리에 고집쟁이니까 그렇지.”
 조자건은 피식 웃었다.
 “그 말은 맞는 것 같소. 그런데 나는 지금 몹시 시장한데 당신의 음식 솜씨는 아직 녹슬지 않았소?”
 진표는 버럭 화를 냈다.
 “나보고 자네 아침상을 차려오라는 건가? 이 철혈객 진표가 기껏 남의 음식 시중이나 들고 있을 사람 같은가?”
 하나 잠시 후, 밖으로 나간 진표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자, 어서 들게.”
 뚜껑을 여니 달콤하면서도 고소한 냄새가 진하게 풍겨나왔다. 그것은 인삼(人蔘)과 대추에 제비꼬리를 넣어 끓인 연자탕(燕子湯)이었다. 조자건의 집에는 인삼은커녕 대추도 없으니 그것들은 필시 진표가 미리 준비해 온 게 분명했다. 조자건은 사양하지 않고 맛있게 연자탕을 먹었다.
 진표는 묵묵히 옆에 지켜 서서 조자건이 식사하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불쑥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은 수염을 기르고 체구가 우람한 흑삼인이었다. 흑삼인의 나이는 대략 삼십대 중반으로 보였는데, 남자답게 생긴 용모에 눈빛이 아주 강렬했다.
 그를 보자 진표는 곧 자리를 비켜주기 위해 빈 그릇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흑삼인은 조자건의 유일한 친형인 조립산이었던 것이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조립산은 이번에도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 돌아왔다. 하나 조자건은 반가운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형님!”
 조립산은 묵묵히 상처투성이인 조자건의 전신을 쓸어보았다.
 한동안 그는 쏘는 듯한 시선으로 조자건의 상세를 바라보고 있다가 불쑥 물었다.
 “그 상처들은 어떻게 된 거냐?”
 조자건은 담담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어제 한 사람과 결투를 했습니다.”
 “상대는 누구였느냐?”
 “섬전도 서귀였습니다.”
 조립산의 눈빛이 조금 더 강렬해졌다.
 “서귀의 칼은 제법 빠르지. 그는 어떻게 되었느냐?”
 “다시는 빠른 칼솜씨를 자랑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조립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짤막하게 말했다.
 “걸을 수 있겠느냐?”
 조자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길을 떠날 준비를 해라.”
 조자건은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조립산에게 그런 걸 묻는다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일이다.
 조립산이 알려주고 싶었다면 처음부터 어디로 간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알려주고 싶지 않다면 어느 누가 물어보아도 그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조립산은 그런 사람이었다.
 조자건은 곧 행장(行裝)을 꾸렸다. 행장이래 보았자 간단한 옷가지 몇 벌과 약간의 은자가 전부였다. 그는 부유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집 안에 있는 물건들은 아무리 가난한 도둑이라도 훔쳐갈 가치조차 없는 것들이었다.
 조립산은 묵묵히 조자건이 행장을 꾸리는 것을 보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믿을 만한 사람에게 이 집을 맡기도록 해라.”
 그 말에 조자건은 몸을 움찔했다.
 전에도 그는 조립산을 따라 여행을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하나 그 기간은 보통 십 일 안팎이었고, 길어야 한 달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집을 부탁하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번 여행은 다른 때와는 약간 다른 모양이었다.
 행장을 다 꾸린 후 조자건은 밖으로 나왔다. 문밖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진표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또 여행을 떠나려고?”
 조자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집을 좀 맡아주시오. 훔쳐갈 물건은 없으니 가끔 먼지나 청소해 주면 될 거요. 그것도 귀찮으면 그냥 내버려두고.”
 “이번에는 좀 오래 걸릴 것 같은가 보군. 어디로 가려는가?”
 “그건 아직 모르겠소.”
 “올해 안으로는 돌아오겠지?”
 진표는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조자건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모르겠소.”
 진표의 얼굴에도 아쉬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보다 다섯 살이나 어리지만 목숨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을,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유일한 친구와 조금이라도 떨어져 있기가 싫었던 것이다.
 하나 그는 마음속의 서운함을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밝게 웃었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길 바라겠네.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조심하게.”
 “자당(慈堂)께는 못 뵙고 간다고 말씀 전해 주시오.”
 “알겠네.”
 두 사람은 뚫어지게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러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돌렸다.
 진표는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고, 조자건은 조립산과 함께 길을 떠났다.
 하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그들이 다시 만나기까지 그토록 오랜 세월이 걸리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二. 괴인(怪人)
 
 평강(平江).
 평강은 하남성의 중부, 복우산(伏牛山)의 초입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다. 이곳은 복우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요로(要路)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주루와 객잔이 성행했다.
 
 사방이 땅거미로 어둑어둑해질 무렵.
 평강에서 가장 큰 영빈루(迎賓樓)로 들어서는 두 인영이 있었다.
 그들은 흑의와 백의를 걸친 대조적인 인상의 인물들이었다.
 흑의인은 얼굴에 수염이 가득했고, 체구가 우람했으며 당당한 기상을 풍기고 있었다. 그에 비해 백의인은 이목구비가 남달리 수려했고, 눈빛이 별빛처럼 반짝이는 준수한 청년이었다.
 그들은 바로 길을 떠난 조립산과 조자건 형제였다.
 하나 그들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그들이 형제라는 사실을 좀처럼 믿으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외모나 풍기는 이상이 너무도 판이하기 때문이었다.
 일전에 진표도 이것이 궁금해서 조자건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자네의 형님과 자네는 정말로 친형제가 분명한가?”
 조자건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우리는 같은 부모 밑에서 한 핏줄을 이어받은 사이오.”
 “나도 내가 어리석은 질문을 한다는 걸 알고 있네. 하지만 두 사람이 너무 닮은 곳이 없어서 말일세.”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 없소. 형님은 아버지를 닮았고, 나는 어머니를 많이 닮았기 때문에 그런 거요.”
 “그랬었군. 하지만 한 가지만은 두 사람이 똑같네.”
 “그게 무엇이오?”
 진표는 메마른 얼굴에 피식 웃음을 떠올렸다.
 “두 사람이 모두 엄청난 고집불통이라는 것일세.”
 “하하……. 그건 아마도 우리 조씨문중의 혈통 때문일 것이오. 선친(先親)께서도 세상에 둘도 없는 고집쟁이셨소.”
 
 조립산과 조자건은 주루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는 음식을 주문했다.
 그들이 간단한 음식을 시키고 몇 젓가락 먹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등 뒤로부터 극히 나직한 음성으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구려. 무림 역사상 그자와 같이 단시일 내에 이름을 떨친 자를 나는 아직껏 들어 본 적이 없소.”
 “이(李) 형의 말이 맞소. 그는 진정 무서운 자요.”
 그러자 또 다른 사람이 뒤이어 말했다.
 “뭐가 진정 무섭다는 거요?”
 “그 무적초자(無敵超子) 화군악의 무공도 무공이지만 그의 손속 또한 매우 잔인해서 아직까지 그와 겨루어 살아남은 사람이 없으니까 그렇지.”
 “정말 그와 겨룬 사람들이 모두 죽었단 말이오?”
 “그렇다네. 벌써 수라마검 손우곤을 시초로 해서 무영마장 전무극, 혈화도 진궁, 철필선생(鐵筆先生) 노자량(路子良), 태행일괴(太行一怪), 통비신수(通臂神手) 황무(黃戊), 독목염라(獨目閻羅) 여궁회(余宮會), 음조(陰爪) 혁상(赫喪) 등 흑백양도의 절정고수들뿐 아니라 얼마 전에는 천하최강의 고수라는 우내십대고수 중의 섬전창도 꺾였다지 않나?”
 조자건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등 뒤에서 그리 멀지 않은 탁자에 세 사람의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모두 청의를 입었는데 하나같이 이목이 청수하여 신태비범한 모습들이었다.
 조자건은 조립산에게 나직하게 소곤거렸다.
 “저들이 누군지 아십니까?”
 조립산은 세 중년인을 흘끗 보고는 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저들은 이 일대에서 제법 명망(名望)이 높은 고수들인 하남삼수(河南三秀)이다. 왼쪽부터 산수재(算秀才) 고경명(古卿明), 삼절서생(三絶書生) 마종기(馬宗綺), 신기수사(神機秀士) 이환(李桓)이라고 부른다. 저들 중에서 신기수사 이환은 제법 재주가 많은 사람이지.”
 그때 마침 이환이 말을 잇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건 내가 얼핏 들은 이야기이지만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말인데……, 사절(四絶) 중의 홍황도마저 얼마 전에 무적초자에게 쓰러졌다는 소문이 있소.”
 그 말에 고경명과 마종기는 깜짝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게 정말이오?”
 “믿을 수 없군. 홍황도라면 사절 중 최고의 고수가 아니오?”
 이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소곤거렸다.
 “그렇소. 홍황도 우문황은 비록 사절에 속해 있지만 삼기(三奇) 보다 오히려 강한 고수요. 그의 무공은 거의 쌍마(雙魔)에 필적한다고 했는데 그마저 패했다는 소문이 있으니 무적초자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지 않소?”
 “아…… 정말 놀라운 일이오. 우문황은 백 년 내 제일도객(第一刀客)으로 불린 고수였는데…….”
 마종기가 다시 물었다.
 “그럼 그 무적초자 화군악의 무공은 과연 천하무적이란 말이오?”
 이환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직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이르오. 무학(武學)의 길이란 하늘 밖에 또 다른 하늘이 있듯이 그 층계가 부지기수요. 따라서 각기 남이 흉내내지 못하는 절예들을 모두 한두 가지씩은 가지고 있어 현금(現今)의 무림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천하무적이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오.”
 “하지만 그가 홍황도마저 꺾었다면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니겠소?”
 “홍황도가 비록 도(刀)의 일면에서는 천하무적이라고 불리었지만 무학이 어찌 도법뿐이겠소? 더구나 아직 당금 무림의 최고 고수라는 일협(一俠)과 쌍마가 있으니 속단하기 어렵소.”
 “아아…… 그렇군!”
 마종기가 다시 탄성을 터뜨렸다.
 이환은 더욱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사실 일협부터 사절까지 뭉뚱그려 우내십대고수라고 말하지만 그들의 무공은 서로 상당한 격차가 있소. 예를 들어 사절 중의 홍황도는 삼기보다 오히려 고강하다고 알려져 있고, 삼기 중의 제일인자(第一人者)인 천기노인(天機老人)은 같은 삼기 중의 다른 두 사람을 합친 것보다 더 강한 인물이오.”
 이환은 갈증이 나는 듯 술을 한 잔 들이켠 후 말을 이었다.
 “특히 이것이 일협과 쌍마에 가서는 더욱 심해서 천기노인과 홍황도를 뺀 다른 고수들은 쌍마와 상당한 차이가 있고, 쌍마 또한 일협에는 모두 한참 뒤진다고 하니 아무리 무적초자라도 일협에게는 쉽사리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울 거요.”
 “아! 그렇다면 일협의 무공은 얼마나 대단한 것일까요?”
 “글쎄……. 나도 직접 그를 본 적은 없지만 그의 무공은 거의 천인합일(天人合一)에 이르러 있다고 하오.”
 “만일 그와 무적초자가 싸운다면 이 형은 누구에게 더 점수를 주고 싶소?”
 마종기의 질문에 이환은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무척 어려운 질문이구려. 그들은 각기 두 번 다시 나오기 힘든 불가일세(不可一世)의 인물들이니 우리 같은 사람들로서는 쉽게 승패를 가늠하기가 어렵지 않겠소? 아마 만에 하나 그들이 격돌한다면 그거야말로 경천동지할 무림사(武林史) 이래 최고의 격투가 될 거요.”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고경명이 상상만 해도 흥분이 되는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말했다.
 “만일 그들이 결투를 벌이게 된다면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공전절후(空前絶後)의 결투를 구경하고 말 테요.”
 “그거야 이를 말이오? 그런 일생일대의 구경거리를 놓칠 바보가 어디 있겠소?”
 마종기가 껄껄 웃으면서 술잔을 쳐들었다.
 “자, 그런 꿈 같은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하고 술이나 듭시다.”
 조자건은 묵묵히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조립산을 돌아보았다.
 “그 일이 과연 꿈 같은 일일까요?”
 조립산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조자건도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식사에 열중했다.
 식사를 마치고 주루를 나오자 어느덧 밖은 어두어졌다.
 하나 그들은 객잔에 머무르지 않고 어두운 밤길을 계속 걸어갔다.
 그동안에도 조립산은 그들의 목적지가 어딘지에 대해 조금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조자건은 어림짐작으로 자신들이 복우산중(伏牛山中)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들이 복우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은 완전히 어두워져서 한 치 앞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조립산은 걸음을 멈출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조자건은 말없이 조립산의 뒤를 따라 칠흑같이 어두운 산길을 올라갔다. 주루를 나올 때부터 그들은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으나 조자건은 조금도 어색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조립산은 평소에도 반드시 필요한 말만 하는 성격이었고, 조자건 자신도 별로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들 형제는 하루 종일 함께 있으면서도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 형제가 서로 서먹서먹하거나 거리가 먼 사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세상의 다른 어떤 형제들보다 우애(友愛)가 돈독했고, 서로를 끔찍이 아끼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형제에 대한 정을 나타냈다.
 구 년 전 조자건이 겨우 열 살의 철모를 어린아이였을 때, 하루는 조립산이 지시한 일을 하지 않고 엉뚱한 놀이에 열중한 적이 있었다. 조립산은 그에게 매일 당시(唐詩)를 열 개씩 암기하라고 했는데 그때 그는 마을 어린이들과 들불놀이를 하다가 그만 당시를 외우지 못했던 것이다.
 조립산은 그에 대한 벌로 그에게 커다란 물동이를 지운 채 하루 종일 마을 밖을 돌게 했다. 그 일은 열 살의 어린아이에게는 너무나 힘에 겨운 일로, 조자건은 꼬박 열흘 동안이나 몸져누워 있어야만 했다.
 그때 조립산은 열흘 만에 간신히 침상에서 일어난 조자건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너는 나에게 매일 당시(唐詩)를 외우겠다고 약속을 했다.
 도둑질을 했을지라도 네가 당시를 외웠다면 나는 너를 꾸짖지 않았을 것이다.
 남자는 무릇 자신이 한 번 내뱉은 말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날 이후 조자건은 단 한 번도 자신이 내뱉은 말을 어겨본 일이 없었다.
 삼 년 전 조립산이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불쑥 조자건을 찾아왔을 때, 조자건은 그를 방 안에 남겨두고 한참 동안 밖으로 나갔었다.
 다시 돌아온 그는 자그만 술상을 들고 들어왔다. 술상 위에는 칠색향병(七色香倂)과 오향장육(五香漿肉), 녹두활어(綠豆活魚)의 요리와 소도자(燒刀子)라는 술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조립산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과 술이었다. 또한 일반인들은 좀처럼 구경하기 힘든 가장 비싼 음식이기도 했다.
 조립산은 돈도 없는 빈털털이인 조자건이 무슨 수로 이런 값비싼 음식들을 장만할 수 있었는지 조금도 묻지 않았다. 조자건 또한 자신이 음식값 대신 근처에서 가장 큰 요리집인 수강관(水江館)에서 한 달 동안 막일을 해 주기로 했다는 것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다만 그날은 조립산의 서른한 번째 생일날이었고, 그는 형에게 생일상을 대접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사실 이런 일들은 너무도 사소한 것이라 구태여 떠들 가치도 없는 것들이었다. 하나 이런 사소한 일들은 그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말보다는 보이지 않는 행동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나타내주는 것이기도 했다.
 
 복우산은 진령(秦嶺)의 동부산맥으로, 일명 천식산(天息山)이라고도 한다. 복우산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산의 형태가 꼭 소[牛]가 엎드려 있는[伏] 형상 같기 때문이었고, 천식산은 산이 너무 높고 가팔라서 하늘도 이곳을 보고 한숨을 내쉰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초경이 가까워올 무렵.
 조립산과 조자건은 복우산의 어느 험준한 골짜기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골짜기는 형세가 몹시 기이하여 흡사 하늘의 천신(天神)이 예리한 도끼날로 찍어놓은 듯 가파른 절벽 사이에 협소하게 위치해 있었다. 골짜기의 입구로 들어서자 양쪽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하늘 끝까지 뻗쳐올라 있어 아찔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골짜기로 들어갈수록 길은 조금씩 넓어졌으나 지형은 오히려 더욱 험준해져 기암괴석과 울창한 수림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 제대로 걸어가기도 힘이 벅찰 지경이었다.
 조자건은 한참이 지나서야 그 암석군(岩石群)과 수림(樹林)들이 그냥 무질서하게 늘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이한 진식(陣式)을 이루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오행진(五行陣) 같기도 했고 팔괘진(八卦陣) 같기도 했으나, 오행진도 아니고 팔괘진도 아니었다.
 그것을 알려준 사람은 조립산이었다.
 “이것은 무극연환미혼진(無極連環迷魂陣)이라는 것이다. 통과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정신없이 헤매다가 엉뚱한 곳으로 빠져나가버린다. 너는 내 발자국을 그대로 밟고 따라오너라.”
 조립산은 연환보법(連環步法)을 밟으며 앞으로 전진해갔다.
 조자건은 신중한 동작으로 조립산의 뒤를 바짝 따라갔다. 일 각쯤 지나자 그들은 무극연환미혼진을 통과할 수 있었다. 암석군과 울창했던 수림들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그들의 눈앞에는 높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절벽이 우뚝 서 있었다.
 절벽의 한쪽 끝에는 시커먼 동굴이 입을 쩍 벌린 채 그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조립산은 서슴없이 동굴을 향해 다가갔다. 그때 갑자기 동굴 안에서 괴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귀하는 누구요?”
 조립산은 짤막하게 말했다.
 “나요.”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동굴 속의 인물은 짤막한 탄성을 터뜨렸다.
 “아! 조(趙) 대협…….”
 조립산은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조자건도 묵묵히 그를 따라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동굴 안은 너무도 어두워서 바로 앞에서 걸어가는 조립산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밤이 아니라 밝은 대낮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외지고 깊숙한 동굴 속이라면 칠흑같이 어두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어두운 동굴 속에서 기거하는 사람이 있다니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쿵!
 잠시 다른 생각을 하다가 조자건은 조립산의 뒷등에 부딪쳤다.
 조립산이 걸음을 멈추었던 것이다.
 조자건은 앞을 바라보다가 흠칫 놀랐다. 동굴은 어느새 끝나 있었다. 동굴의 끝에 한 명의 괴이한 인물이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조자건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그 인물을 알아본 것은 그가 어렸을 적부터 특수한 훈련을 해서 안력(眼力)이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괴인은 전신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였다.
 그의 안색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괴인은 좀처럼 햇살을 받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안색이 창백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상한 것은 그의 눈동자였다. 그의 눈동자도 흰색이었다. 신비스러우리만치 흰 눈동자. 검은 부분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놀랍게도 동굴 속의 괴인은 장님이었던 것이다.
 
 
 三. 심등(心燈)
 
 괴인은 조립산이 서 있는 쪽으로 얼굴을 쳐들었다.
 “조 대협의 신태(神態)는 옛날과 조금도 다름이 없구려.”
 이 말을 듣자 조자건은 괴이한 느낌이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괴인은 분명 앞이 안 보이는 장님인데도 마치 정상적인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닌가? 조립산은 나직한 음성을 입을 열었다.
 “당신도 여전하오. 그동안 잘 있었소?”
 “이곳은 물을 구하기가 좀 힘들 뿐, 나머지는 모두 괜찮소. 나는 지금 아주 만족하게 지내고 있소.”
 조자건은 괴인의 얼굴에 진정으로 안락하고 만족한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는 것을 보고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누구라도 이런 어둡고 후미진 동굴에서 생활하라고 한다면 단 하루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고 말 것이다. 하나 괴인은 이런 동굴에서 지내는 것에 커다란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만족이란 원래 상대적인 것이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부족함을 모르고 지내는 사람도 있다. 자신이 안락하고 편안하게 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곳이 차디찬 동굴 속이든, 호화로운 궁궐이든 마찬가지인 것이다.
 괴인은 다시 물었다.
 “조 대협과 동행한 사람은 누구요?”
 조자건은 내심 흠칫 놀랐다.
 그는 원래 동굴 안으로 들어올 때부터 단 한 마디도 입을 열거나 기척을 내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었다.
 장님은 보이지 않는다. 소리가 없으니 장님은 물론 들을 리도 없었다. 그런데도 괴인은 동굴 속에 들어온 사람이 몇 명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조립산은 짤막하게 말했다.
 “내 동생이오.”
 괴인은 다시 물었다.
 “조 대협이 이곳에 온 것은 과거의 빚을 청산하기 위해서요?”
 조립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처음으로 무표정하던 괴인의 얼굴에 어떤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은 어찌 보면 격동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희열 같기도 한,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야릇한 표정이었다. 괴인의 얼굴은 다시 무표정해졌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소?”
 조립산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나직이 되물었다.
 “당신의 심등대법(心燈大法)은 완성되었소?”
 “그렇소.”
 “내 동생에게 심등대법을 전수해 주시오.”
 괴인은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탄식을 했다.
 “지난 십일 년 동안 이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소. 조 대협은 한 달 후에 다시 와서 그를 데려가시오.”
 조립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는 조자건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동굴을 벗어났다.
 조립산의 몸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제야 괴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 이름은?”
 “조자건이오.”
 “좋은 이름이군. 몹시 젊은 것 같은데 몇 살인가?”
 “스물이오.”
 조자건은 대답을 하면서도 내심 자신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정말 장님일까, 아니면 가짜일까? 정확한 대답을 얻을 수 없었다. 조자건은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가서 보자 조자건은 비로소 눈앞의 괴인이 틀림없는 장님이라고 단정했다. 괴인의 눈동자는 완전히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 이런 눈동자를 지니고 있을 리 없다. 설사 흉내를 내고 싶어도 불가능하다.
 괴인은 홀연 입을 열었다.
 “자네는 내 눈동자를 보고 싶나?”
 조자건은 깜짝 놀랄 뻔했다.
 이 사람은 비록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한 쌍의 신비스럽고 괴이한 눈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몸 어딘가 은밀한 곳에 감추어진 눈으로 어느 누구의 일거일동도 놓치지 않고 보는 것 같았다.
 괴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는 좀 더 자세히 보고 싶나?”
 사실 조자건은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었다. 괴인은 그의 마음까지 꿰뚫어보는 모양이었다.
 “자. 갖고 가서 자세히 살펴보게.”
 그는 손가락으로 한쪽 눈을 뽑았다. 그러자 그의 눈은 즉시 검은 구멍으로 변했다.
 잿빛 눈동자.
 유리로 만들었는지 수정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손바닥에서 굴러다니는 눈동자는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설사 그것이 가짜 눈이라는 것을 빤히 안다 해도 상대방은 역시 가슴이 철렁할 것이다.
 괴인은 넌지시 물었다.
 “이젠 똑똑히 보았나?”
 조자건은 끝내 길게 숨을 불어냈다.
 “그렇소.”
 “될 수 있는 한 자세히 보게. 이것은 내가 한 가지 실수를 범한 대가이기 때문일세.”
 괴인의 창백한 얼굴에 홀연 한줄기 비통한 기색이 떠올랐다.
 “십일 년 전에 한 사람을 잘못 본 탓으로 비록 눈을 잃었지만 그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네. 잘못을 범하면 거기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 하며 누구를 막론하고 예외일 수는 없기 때문이지.”
 조자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라면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자건은 괴인이 어떻게 해서 두 눈을 잃었는지 알고 싶었으나 묻지 않았다. 그 일이 괴인으로서는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쓰라린 기억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괴인의 음성은 눈동자와 같이 죽어 있었다.
 “눈이 먼 후에 나는 내 눈을 대신할 무언가가 필요했지. 그래서 만들어낸 것이 바로 심등대법일세. 이것을 익힌 후 나는 내가 두 눈을 잃어버린 것이 오히려 더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네.”
 “그건 무엇 때문이오?”
 괴인은 계속 손바닥에 있는 눈동자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눈은 비록 많은 것을 볼 수 있지만 반면에 더 많은 것을 보지 못하네. 하지만 심등대법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눈으로 볼 수 없는 것까지도 볼 수 있네. 지금 나는 눈을 잃기 전보다 훨씬 더 모든 사물을 객관적으로 주시할 수 있게 되었네. 내가 두 눈을 잃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오묘한 세계를 알 수 있겠나?”
 조자건은 내심 그의 말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인간의 눈이란 사물의 겉을 보여줄 수는 있어도 그 내면의 진실한 모습은 보여줄 수가 없는 것이다.
 괴인은 천천히 들고 있던 눈동자를 자신의 눈에 박았다. 한 쌍의 잿빛 눈동자는 조자건을 응시하는 것만 같았다.
 한 쌍의 가짜 눈동자.
 그것은 과연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조자건은 잠시 그의 죽어 있는 눈동자를 주시하면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두 눈이 멀쩡한데 그것을 익힐 수 있겠소?”
 “한 가지 방법을 쓰면 가능하네.”
 “그게 무엇이오?”
 “바로 이것일세.”
 돌연 괴인은 번개같이 조자건을 향해 양손을 휘둘렀다.
 파파파파팍!
 그 속도와 역량은 너무도 가공스러워서 조자건이 아니라 천하의 어느 누구라 해도 피해내지 못할 것이었다. 물론 조자건은 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괴인의 양손이 번뜩인 순간, 조자건은 발끝 소양혈(少陽穴)부터 찍히기 시작해 눈 깜박할 사이에 정면 예순네 군데의 크고 작은 혈도가 전부 찍혔다. 그러더니 괴인은 오른손을 살짝 떨쳐 조자건을 가볍게 허공으로 날렸다. 그리고 이번엔 그의 등 뒤 예순네 군데의 혈도를 전광석화처럼 찍었다.
 그 수법의 기묘함과 속도의 빠름은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괴인이 눈이 안 보이는 장님인 것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정말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사람 몸에는 서른여섯 군데의 대혈(大穴)과 아흔두 군데의 소혈(小穴)이 있으며 절반 이상이 치명적인 급소였다. 그런데 조자건은 모든 혈도를 찍히고 만 것이다.
 그러나 조자건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몸만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을 뿐 정신은 도리어 더욱 맑아졌다. 순식간에 조자건의 전신혈도를 찍고 난 후에야 비로소 괴인은 손을 멈추었다. 괴인은 숨결조차 가빠지지 않은 채로 바닥에 쓰러진 조자건에게 얼굴을 돌렸다.
 “기분이 어떤가?”
 놀랍게도 조자건은 말을 할 수가 있었다.
 “나쁘지는 않소.”
 괴인은 그런 상황을 예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더욱 좋아질 걸세.”
 조자건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어 동굴 천장을 응시한 채 다시 물었다.
 “나는 언제쯤 움직일 수 있소?”
 “하루, 혹은 며칠이 걸릴지도 모르지. 자네의 체질이 어떠냐에 달려 있네.”
 “이게 심등대법이오?”
 괴인은 그 말에는 대꾸도 없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익숙해지면 그 기간이 더 단축될 수도 있네. 그래서 모든 혈도를 찍히고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때 자네는 이곳을 나갈 수 있네.”
 “몹시 이상한 방법이군요.”
 “앞으로 자네는 더욱 이상한 일들을 경험하게 될 걸세.”
 괴인의 말은 사실이었다.
 다음날 정오가 되어서야 조자건은 겨우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꼬박 반나절 동안이나 그는 혈도가 찍힌 채 석상처럼 차디찬 동굴 바닥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조자건은 알지 못했지만 그것은 괴인이 예상했던 것보다 배 이상 빠른 시간이었다. 괴인은 그의 재질이 제아무리 좋다 해도 몸을 움직이려면 적어도 이틀은 걸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굳어진 몸을 주무르며 바닥에서 일어나려 하자 괴인은 그가 피할 사이도 없이 다시 백스물여덟 군데의 혈도를 모두 짚어버렸다. 조자건은 다시 반나절 동안을 꼼짝도 않고 누워 있어야만 했다.
 그가 다시 움직일 기미를 보이자 어떻게 알았는지 괴인은 재차 그의 혈도를 찍었다. 이러기를 몇 차례나 거듭했는지 모른다. 식사는커녕 물도 마시지 못한 채로 조자건은 계속 괴인에게 혈도를 찍힌 채 차가운 동굴바닥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
 눈 깜박할 사이에 열흘이 흘렀다.
 그동안에 조자건이 먹은 것이라고는 이삼 일에 한 번씩 괴인이 복용시켜주는 우유같이 뿌연 액체가 전부였다. 그 액체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먹으면 며칠을 굶어도 별다른 허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 조자건은 문득 자신의 몸에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눈, 코, 입을 비롯한 칠공(七孔)과 전신의 모공(毛孔)으로 체내의 배설물들이 모조리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의 전신은 마치 땀 같기도 하고 진흙 같기도 한 시커멓고 끈적끈적한 오물들이 배출되어 악취를 풍겼다. 그런데 그 배설물들이 몸 밖으로 빠져나감에 따라 그는 전신이 날아갈 듯 개운해지고 신비한 힘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말로만 듣던 전설상의 환골탈태(換骨脫胎)나 벌모세수(伐毛洗髓)를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 현상은 보름간이나 계속되었다.
 그 다음 벌어진 변화는 조자건 자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체내의 혼탁한 기운들이 체외로 배출되자 그의 신경조직과 피부세포는 더할 나위 없이 민감해져서 주위의 공기가 파동치는 것까지 감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머릿속이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이 맑아지며 칠흑같이 어두웠던 동굴의 내부가 구석구석까지 아주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동굴 벽에 벌레가 기어가는 소리조차 천둥치듯 귓속으로 세세하게 들려왔다. 그제야 비로소 조자건은 괴인이 말한 오묘한 세계가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심등대법은 하늘을 가르고 바다를 뒤엎는 신공절학(神功絶學)은 아니었으나, 천하의 그 어떤 무공심법도 따를 수 없는 절묘함을 지니고 있었다.
 이 심등대법은 괴인이 천축(天竺) 황교(黃敎)의 비전(秘傳)인 마등심법(魔燈心法)과 마교(魔敎)의 유마환영대법(幽魔幻影大法)을 융합하여 십여 년의 각고 끝에 완성해낸 초상승의 내가심법(內家心法)이었다. 이것은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감각들을 개발해서 극대화(極大化)하는 고도의 수법이었다.
 인간의 감각 능력이란 원래 무한(無限)한 것이다. 하나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음으로 인해 점차로 능력이 쇠퇴해지고 결국에는 단순히 보고, 듣고, 느끼는 지극히 원초(原初)적인 감각만이 남게 되었던 것이다.
 이 퇴보해 버린 감각 능력에 자극을 주어 격발시킴으로써 사물을 감지하는 능력을 최대 한도로 끌어올리는 것이 심등대법의 요체(要諦)였다. 그것은 불문(佛門)에서 말하는 천이통(天耳通)이나 천안통(天眼通) 등, 소위 불가육통(佛家六通)을 훨씬 뛰어 넘는 경지이다.
 심등이란 이름 그대로 마음[心] 속에 등불[燈]을 켠 듯 주위의 모든 사물을 환하게 통찰할 수 있다고 한 데서 붙여진 것이었다.
 이 심등대법을 만들기 위해서 괴인은 무려 십 년이 넘는 세월을 인간 세계와 완전히 격리된 채 지내야만 했다.
 무림인이란 원래 자신의 절기를 목숨보다도 아끼는 부류들이었다. 그런데 괴인은 자신이 오랜 세월 동안 고심참담한 끝에 완성한 심등대법을 선뜻 조자건에게 전수해 주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물론 괴인이 조자건의 형인 조립산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대체 괴인과 조립산 사이에는 어떤 은원이 있는 것일까?
 
 
 제3장 무적기공(無敵奇功)
 
 一. 철벽(鐵壁)
 
 조립산이 온 것은 정확히 한 달 후였다.
 처음 올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주위가 칠흑같이 어두운 이경 무렵에 불쑥 동굴 속으로 들어왔다. 조자건은 괴인과 나란히 선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립산은 조자건의 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조자건은 한 달 전과 별로 달라진 곳이 없었다. 다만 입고 있던 의복이 몹시 남루해지고 전신에서 악취가 풍긴다는 것 외에는…….
 하나 조립산은 조자건의 피부에 기이한 윤기가 흐르고 그의 눈에서 신기(神氣)가 흐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심등대법은 어느 정도 수준이오?”
 조립산이 불쑥 묻자 괴인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앞으로 일 년 내에 나와 비슷한 경지에 도달하게 될 거요.”
 조립산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으로 당신과 나는 서로 아무것도 빚진 게 없게 되었소.”
 “그렇소.”
 조립산은 조자건에게 고개를 까닥거리며 몸을 돌렸다.
 “가자.”
 조자건은 묵묵히 괴인을 바라보았다.
 괴인도 조자건을 응시하고 있었다. 괴인의 잿빛 눈동자에는 아무런 표정도 담겨 있지 않았지만 조자건은 한줄기 감정의 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니면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을까?
 조자건은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언젠가 꼭 이 빚을 갚겠소.”
 괴인은 고개를 저었다.
 “빚은 모두 청산되었네.”
 “당신과 형님과의 빚은 청산되었는지 모르지만 당신과 나 사이의 빚은 아직 청산되지 않았소.”
 “자네는 내게 빚진 게 없네. 내가 심등대법을 전수해준 것은 자네 형님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였네.”
 조자건은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그걸 말하는 게 아니오.”
 괴인은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그럼 내게 무슨 빚을 졌다는 건가?”
 “나는 당신에게 모두 열두 방울의 종령석유(鐘靈石乳)를 빚졌소.”
 그 말을 듣자 괴인의 얼굴에 씁쓸한 고소가 떠올랐다.
 “자네는 알고 있었군.”
 “그렇소. 나는 이미 알고 있었소.”
 괴인은 지난 한 달 동안 이삼 일에 한 번씩 조자건에게 우유빛 액체를 복용시켰다. 그 액체는 바로 천하에 보기 드문 영약인 종령석유였다. 그것은 인세(人世)에서는 좀처럼 구경할 수 없는 진귀한 것으로서, 무림인이라면 누구나가 단 한 방울이라도 얻기를 갈망하는 성약이었다.
 심등대법을 익히기 위해서는 체내의 모든 혼탁한 기운을 체외로 배출해야 한다.
 하나 음식을 먹게 되면 아무리 혼탁한 기운을 배출해도 소용이 없다. 그것은 어떤 음식이든 그 속에는 인간의 정(精)과 기(氣)를 감퇴시키는 성분이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종령석유를 마심으로 해서 조자건은 아무것도 먹지 않고도 견딜 수가 있었고, 특히 내공(內功) 방면에 말할 수 없는 효험을 보았다.
 괴인은 조자건에게 심등대법을 전수해 주겠다고 했지 종령석유까지 복용시켜주겠다고 하지는 않았었다. 조자건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열두 방울의 종령석유는 이미 그의 몸속에서 완전히 용해되어 몸 구석구석까지 퍼져 있었다.
 따라서 조자건은 엄연히 괴인에게 열두 방울의 종령석유를 신세지게 된 것이다.
 빚을 졌으면 당연히 갚아야 한다. 이것은 조자건의 철칙(鐵則)이고 신조(信條)였다. 누구도 그의 신조를 깨뜨릴 권리가 없고, 그럴 능력도 없다.
 조자건은 떠나갔다.
 그는 비록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나갔지만 괴인은 그가 언제고 반드시 자신을 다시 찾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그가 누구인지 아느냐?”
 산을 내려오면서 조립산은 불쑥 조자건을 돌아보며 물었다.
 조자건은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그의 이름은 독고붕(獨孤鵬)이다. 십여 년 전만 해도 그는 강북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수공(手功)의 고수였다. 하지만 십일 년 전에 그는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해 두 눈을 실명(失明)했지.”
 “그자가 누굽니까?”
 “사천당문(四川唐門)의 고수인 천수비호(千手飛狐) 당력(唐靂)이다. 내가 독고붕을 처음 보았을 때 그는 당력의 육혼망(戮魂芒)을 두 눈에 맞은 채 사경(死境)을 헤매고 있었다.”
 “…….”
 “나는 그를 약성(藥聖) 난자림(蘭子林)에게 데리고 갔다. 독고붕은 꼬박 이십 일 동안 혼수상태로 헤매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 뒤로 그는 쭉 이곳에서 지내왔다.”
 “그는 당력을 찾아가지 않았습니까?”
 “독고붕은 당력에게 복수하려 했으나 그런 몸으로는 당력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가 심등대법을 만들게 된 것도 당문의 암기(暗器)에 대항하기 위해서였지. 하나 오 년 전에 당력은 당문의 가주(家主)가 되었고, 독고붕은 복수를 포기해야만 했다. 그는 아마 저 안에서 평생을 마칠 것이다.”
 사천당문은 오랫동안 강호무림에 혁혁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무림세가(武林世家)였다. 그들의 암기와 독술(毒術)은 무림인들에게는 공포(恐怖)의 대상이었고, 당문이라는 말만 들어도 안색이 변하게 했다.
 당문의 가주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당문 전체를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천하의 어느 누구라 해도 단신(單身)으로 당문 전체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조자건은 묵묵히 허공을 응시했다.
 하나 그의 눈빛은 어둠 속에서도 유난히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에게 열두 방울의 종령석유에 대한 빚을 갚을 방법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 방법이 무엇인지는 오직 그 자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
 
 강호에는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이 장강의 모래알처럼 많이 있다.
 하나 그들 중에서 철벽무적(鐵壁無敵) 악교(岳矯)처럼 기이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적어도 한 가지 방면에서는 천하무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의 무공은 사실 그리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나 그는 이십여 년 동안 셀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싸움을 했으나 아직 심각한 상처를 입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가 상대한 자들이 약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 중 태반은 당금 강호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절정고수들이었다.
 그런데도 악교가 별다른 부상 한 번 당하지 않는 것은 순전히 그의 외문무공(外門武功)이 상상을 불허하는 경지에 이르러 있기 때문이었다. 웬만한 도검으로는 그의 피부에 흠집조차 낼 수가 없었다. 제아무리 가공할 장력에 격중당해도 악교는 오뚜기처럼 벌떡벌떡 일어나고는 했다.
 그가 그 방면에 더욱 노력을 기울인 결과, 그의 외문무공은 철포삼(鐵布衫)에서 육신갑(肉身甲)을 넘어 나한기공(羅漢氣功)을 지나 전설적인 강기일식(剛氣一息)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니 어느 누가 그와 겨루려고 하겠는가?
 나중에는 그가 아무리 시비를 걸어도 그와 싸우려는 사람이 없었다.
 기고만장해진 악교는 어느 날 한 사람에게 도전을 했다. 그의 도전을 받은 상대는 한마디로 거절을 했다.
 
 ―당신은 내 적수가 아니오.
 
 하나 악교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의 강제적으로 상대에게 덤벼들어 싸움을 걸어왔다. 마침내 그 인물은 악교의 도전을 받아들여 비무를 했다.
 결과는 참담한 것이었다.
 악교는 단 일 초 만에 갈비뼈 다섯 개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상대가 손속에 사정을 보지 않았다면 악교는 즉사했을 것이다.
 악교는 간신히 석 달 만에 부러진 갈비뼈를 다시 이어 붙일 수 있었다. 하나 한 번 무너진 그의 자존심은 영영 되돌릴 수가 없었다.
 악교는 그 길로 폐관(廢關)에 들어가 침식을 잊고 무공에 전념을 했다.
 목표는 오직 한 가지였다.
 
 ―어떠한 무공에도 깨어지지 않는 천하최강의 외문무공을 만들고야 말겠다!
 
 그것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리라 결심했다.
 삼 년이 지나자 악교는 어떤 한 가지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오 년이 지나자 마침내 악교는 한 가지 무공을 창안할 수 있었다.
 그것은 무림역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절대무쌍(絶對無雙)한 위력을 지닌 외문무공이었다. 그것은 기존의 외문무공의 단계를 넘어선 전혀 새로운 차원의 무공이었다.
 하나 악교는 이내 절망하고 말았다. 비록 창안은 했으나 그는 그것을 익힐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첫째는 그의 나이가 너무 많았고, 둘째로는 그는 이미 여러 가지 외문무공을 익히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그 외문무공에 적응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절망에 빠져 폭음(暴飮)을 했고, 점차 폐인(廢人)이 되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악교는 대낮부터 술에 취해 길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때 그의 앞으로 한 쌍의 발이 나타났다. 악교는 고개를 쳐들고 발의 임자를 올려다보다가 얼굴을 흉하게 일그러뜨렸다.
 발의 임자는 그에게 난생처음 패배의 치욕을 안겨주었던 바로 그 인물이었던 것이다.
 솟구치는 분노와 절망감으로 몸을 떠는 악교의 귓전으로 그 인물의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일어나시오, 악교. 당신은 이렇게 쓰러져서는 안 되오.”
 악교는 멀거니 그 인물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인물은 묵묵히 그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아직 할 일이 있소.”
 악교는 주독(酒毒)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양손을 들어 보이며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소…….”
 “당신이 피땀을 흘려 만들어낸 그 기적의 무공을 이대로 묻혀버릴 셈이오?”
 악교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어지며 몸에서 경련이 일어났다.
 그 인물은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을 내뱉었다.
 “당신은 절대 그럴 수 없소. 당신이 이대로 사라져버리면 강호무림에는 결코 제이의 철벽무적이 나타나지 않을 거요.”
 악교의 몸에서 땀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결코 더워서 흘리는 땀이 아니었다. 그 인물은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악교는 스스로의 힘으로 바닥에서 일어났다. 덜덜 떨리는 손을 허공에 허우적거리면서도 필사적으로 일어나서 어깨를 쭉 폈다.
 항상 술기운 때문에 흐릿했던 악교의 눈에서는 횃불 같은 안광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악교는 그런 눈으로 눈앞의 인물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한 사람을 구해 오시오. 나이는 이십 세 미만, 아직 정식으로 어떤 무공도 익히지 않았고, 어떤 고통에도 견딜 수 있으며, 낙타처럼 끈질긴 지구력을 가진 남자를……. 그에게 나의 불괴연혼강기(不壞練魂剛氣)를 전해 주겠소.”
 그 인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라졌다.
 그와 헤어진 후 악교는 제일 먼저 뜨거운 물을 한 솥 가득 준비한 후 그 안으로 들어갔다.
 칠주야(七晝夜)를 꼬박 그는 장작불이 활활 불타오르는 가마솥에 들어가 있었다. 몇 년 동안 그의 몸을 갉아먹었던 주독은 그로 인해 몽땅 빠져버렸다.
 그런 다음 악교는 근처의 산야(山野)를 뛰어다니며 허약해진 체력을 가다듬었다. 틈틈이 영양가 있는 음식과 보약을 복용하여 이전의 자신으로 되돌아오려고 애를 썼다.
 그동안에 그는 몇 가지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했다.
 우선 그는 근처 시장에서 질 좋은 대나무들을 닥치는 대로 긁어모았다. 그가 모은 대나무는 무려 수천 개에 달했다. 사람들은 그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많은 대나무를 사 모으는지 몰라 궁금해했으나 그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두 번째로 그는 몇 가지의 약재(藥材)를 있는 대로 사들였다.
 그 약재들은 합기(合肌), 취수정(翠髓精), 재생조(再生爪), 속단수유(續斷茱萸), 견혼수(牽魂水) 등 주로 부러진 뼈와 근육을 잇는 데 사용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가 사들인 양은 수백 명의 환자들을 치료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세 번째로 그가 사들인 것은 수백 개의 징과 꾕과리, 북, 피리, 그리고 거울이었다.
 악교는 이것들을 사기 위해서 자신의 집과 전답(田畓)을 비롯한 모든 재산을 처분해야만 했다. 하나 그는 추호도 망설이거나 아까운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십여 일 동안 긁어모은 것들을 모두 가지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가 대나무 가지와 약재, 그리고 악기 등을 산더미처럼 가지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무엇을 하려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 후에 그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점차 시일이 흐르자 그의 존재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져갔고, 마침내는 아무도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하나 한 사람만은 그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바로 악교를 패배시키고, 그에게 다시 재활(再活)의 의지를 불어넣어준 그 인물이었다.
 그의 이름은 조립산이었다.
 
 ***
 
 조립산이 다시 악교를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일 년 후였다.
 다시 만난 악교는 이미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폭음과 절망으로 찌들었던 과거의 모습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대신에 그는 야인(野人)처럼 수염과 머리를 가득 길렀고, 몸에는 짐승의 털가죽을 걸치고 있었다. 털가죽 밖으로 드러난 피부는 갈빛으로 그을려 강철 같은 근육이 드러났다.
 악교는 형형한 눈으로 조립산을 응시했다.
 “당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소.”
 그는 조립산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즉시 물었다.
 “내가 말한 사람을 데리고 왔소?”
 조립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몸을 비켜섰다.
 악교의 시선은 곧장 조립산의 뒤에 서 있는 백의청년에게로 고정되었다.
 한동안 악교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백의청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의 눈가에는 이내 흡족한 빛이 떠올랐다.
 조립산이 데리고 온 인물은 모든 면에서 그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었다.
 그는 한창의 젊은이였고, 체구가 건장했으며 눈빛이 유성처럼 맑았다. 특히 고집스럽게 다물어진 입매무새는 의지견정(意志堅定)해 보였고, 단단한 턱은 강인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악교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과연 당신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구려. 가서 일 년 후에 다시 오시오.”
 처음으로 조립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오래는 기다릴 수 없소. 석 달 내로 끝마쳐주시오.”
 악교의 눈살이 잔뜩 찌푸려졌다.
 “일 년이라는 것도 이자의 재질이 최고 중의 최고라는 가정 하에서 말한 거요. 다른 사람이었다면 십 년 내로는 어림도 없다고 말했을 거요.”
 조립산의 음성은 여전히 무뚝뚝했다.
 “그에 대해선 내가 더 자세하게 알고 있소. 석 달이면 그에게는 결코 모자라는 시간이 아니오.”
 악교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제아무리 천하에 다시 없는 기재(奇才)라 해도 석 달 안에 나의 불괴연혼강기를 익힐 수는 없소.”
 조립산은 더 이상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악교를 쳐다보다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석 달 후에 다시 오겠소. 그때까지 그가 불괴연혼강기를 익히지 못했다면 당신에게 다른 인재를 찾아주겠소.”
 악교는 멍하니 멀어져가는 조립산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러다가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 고집과 광오한 기질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군.”
 그때 이제껏 아무 말도 없던 백의청년이 담담히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에게 그런 기질이 없다면 그는 더 이상 조립산이 아닐 것이오.”
 악교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옳은 얘기다. 저게 바로 조립산다운 점이지.”
 그는 백의청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그를 잘 알고 있느냐?”
 백의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그에 대해 자세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거요.”
 악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그도 그런 말을 하더군. 너는 대체 누구냐?”
 조자건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빙긋 웃었다.
 “나는 마침 그의 친동생이오.”
 
 
 二. 강기(剛氣)
 
 악교는 외문무공에 관한 한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인자(天下第一人者)였다.
 그는 천하에 산재해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외문무공을 익혔으며, 그 수는 무려 서른여섯 가지에 달했다. 한 사람이 한 방면의 무공을 그 정도로 익힌 예는 광활한 무림에서도 일찍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기인(奇人) 중의 기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외문무공의 단계는 모두 다섯 가지로 분류된다.
 가장 아래 단계의 무공들로는 철포삼(鐵布衫), 십삼태보횡련(十三太保橫練), 금종조를 꼽을 수 있다. 이 단계의 무공들은 피부를 단단하게 할 수는 있지만 내장을 보호하지 못해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을 만나면 여지없이 격파당하고 만다. 더구나 각기 조문이라고 하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어서 이 조문을 격중당하면 중상을 입거나 즉사해 버릴 수가 있다.
 다음 단계는 육신갑(肉身甲)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몸의 피부를 갑옷처럼 단단하게 만드는 경지이나 철포삼 등과 다른 점은 몸에 치명적인 조문이 없다는 것이다. 이 육신갑을 이루어야만 진정으로 외문무공에 입문(入門)했다고 할 수가 있다.
 육신갑의 대표적인 무공으로는 횡가철문전(橫架鐵門栓)을 꼽을 수 있다.
 그 다음으로는 기공(氣功)을 이루어야 한다.
 기공이란 기(氣)로써 몸을 보호하는 경지로, 단순히 육체적인 노력만으로 익힐 수 있는 철포삼이나 육신갑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종류이다. 기공을 이루어야만 내가중수법을 당해도 견뎌낼 수가 있다.
 악교는 기공 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나한기공(羅漢氣功)을 익혔다.
 기공을 극치에 이르도록 연마하면 기를 체외로 뿜어내어 하나의 보이지 않는 벽(壁)을 만들 수가 있다. 이것을 강기(剛氣)라고 한다. 이 강기는 비단 자신만을 보호해 줄 뿐 아니라 남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 외문무공을 이 강기일식(|氣一息)의 단계까지 연마한 사람은 백 년 내로 열 명도 되지 않았다.
 외문무공의 마지막 단계는 전설상의 경지인 금강불괴(金剛不壞)이다. 내가무공(內家武功)을 극치로 연마해도 금강불괴에 이를 수가 있다.
 사실 이 금강불괴야말로 무공을 익히는 모든 무림인들의 꿈이며 최후의 목표였다. 무림역사상 금강불괴에 도달한 사람은 아직 없었다.
 악교가 팔 년 동안 폐관하여 만들어낸 무공은 불괴연혼강기라 했다. 이것은 단순히 강기를 일으켜 전신을 보호하는 수준을 넘어서 인간의 혼(魂)까지 단련하는 것이었다.
 악교는 이미 육체적으로 터득할 수 있는 외문무공을 모두 완성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조립산의 일격에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삼 년 동안 그 이유를 숙고(熟考)한 끝에 악교는 한 가지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육체적인 수련은 한계가 있고, 그것을 뛰어넘으려면 다른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악교는 그것을 정신(精神)의 단련이라고 믿었다. 육체와 정신이 혼연일체(渾沿一體)가 되어야만 비로소 최상의 무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악교는 이 정신을 단련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리고 오 년 후에 그 방법을 완성해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정신, 즉 혼(魂)을 강기에 도입하여 어떠한 공격으로부터도 자신을 완벽하게 보호하고 종국에는 금강불괴를 이룩하는 것이다.
 ‘불괴연혼’이란 바로 혼을 단련해서 금강불괴를 이룩한다는 뜻이었다. 이 불괴연혼강기는 기존의 어떠한 외문무공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심오한 경지를 담고 있었다. 때문에 다른 외문무공을 익힌 사람은 이 전혀 새로운 무공에 적응을 할 수가 없다. 마치 이미 색(色)이 칠해진 종이 위에는 다시 그림을 그릴 수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또한 이것을 익히려면 극도의 인내와 끈기를 필요로 한다.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고통이 뒤따르기 때문이었다.
 불괴연혼강기는 ‘강신(剛身)’, ‘연혼(練魂)’, 그리고 ‘불괴(不壞)’의 세 단계로 나뉘어져 있다.
 ‘강신’이란 육체를 최고의 경지까지 단련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우선 많이 맞는 것이었다.
 
 조자건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우뚝 서 있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반경 삼 장 정도 되는 협소한 석실이었다.
 이런 좁다란 석실에서는 제대로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 것이다.
 쉬익!
 갑자기 바람을 가르는 예리한 음향과 함께 어디선가 기다란 물체 하나가 빠른 속도로 그의 몸을 후려쳐왔다. 조자건은 자신의 등 쪽으로 차가운 기운이 무섭게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꼈으나 꼼짝도 않고 우뚝 서 있었다.
 쫘악!
 비단폭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우뚝 서 있던 조자건의 몸이 휘청거렸다.
 “으음…….”
 그의 등줄기에는 어느새 시뻘건 핏자국 하나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방금 그의 등을 강타하고 지나간 것은 회초리같이 가느다란 대나무였다.
 대나무의 길이는 이 장에 달했고, 그것이 쏘아져오는 속도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좁다란 석실에서는 도저히 날아오는 대나무를 피할 수가 없었다.
 쫘악!
 다시 어둠 속에서 대나무 하나가 불쑥 나타나 그의 어깨에 기다란 핏자국을 만들어놓고 사라졌다.
 대나무에는 막강한 힘이 담겨 있어 살짝 스치기만 해도 살이 갈라 터질 것 같았다. 그런 대나무가 한 치의 사정도 없이 알몸뚱이를 정면으로 가격했으니 그 고통을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그런데도 조자건은 인상을 찌푸리며 가끔 짤막한 신음만을 토해낼 뿐 비명을 내지르지 않았다. 순식간에 그의 몸은 예고도 없이 날아드는 수십 개의 대나무에 의해 피투성이가 되어 버렸다.
 쫘악! 쫙!
 흡사 수십, 수백 개의 채찍이 훑고 지나간 듯 그의 전신은 붉은 흉터로 얼룩졌다. 아니, 가늘고 기다란 대나무는 채찍보다 오히려 더욱 매서웠다.
 대나무란 놈은 기이한 놈이었다. 그것은 휘어질지언정 부러지지 않고 쪼개질지언정 갈라지지 않는다.
 다른 회초리는 일정 시간 사용하면 부러지거나 잘라져 쓰지 못하게 되지만 대나무로 만든 회초리만은 그렇지 않았다. 쓰면 쓸수록 대나무 회초리는 잘게 쪼개져 더욱 무서운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또한 가죽으로 만든 채찍이 주로 피부에 상처를 입히는 반면, 대나무 회초리는 근육과 혈맥에 강한 충격을 준다. 그 차이는 간단한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다.
 대나무 회초리의 날아드는 속도와 힘은 아주 규칙적이었다.
 대나무 회초리는 조자건의 전신이 단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이 만신창이가 되어서야 겨우 멈춰졌다.
 “으음…….”
 조자건은 이미 혈인(血人)이 된 채 바닥에 누워 사지를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때 석실의 문이 열리며 악교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보니 대나무는 그가 휘두른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휘두른 것일까?
 그는 벌레처럼 꿈틀대면서도 억지로 일어나려는 조자건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약실(藥室)로 들어가서 몸을 씻어라. 한 시진 후에 다시 시작한다.”
 조자건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석실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악교의 눈에는 기이한 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정말 끈질긴 놈이다. 다른 사람 같으면 최소한 서너 번은 기절했을 텐데 버티어내다니……. 과연 조립산의 아우답구나.’
 그는 잠시 우두커니 서 있다가 석실의 한쪽 구석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수백 개의 대나무 다발이 활처럼 휜 채로 묶여 있었다. 그 다발을 묶은 끈들은 작은 구멍을 통해 밖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제 보니 악교는 밖에서 이 끈들을 교묘하게 조종하여 대나무를 쏘아 보냈던 것이다. 사람이라면 시간이 흐를수록 지치게 되고 속도도 떨어질 것이다. 하나 이런 장치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나무의 날아드는 속도와 힘이 일정했던 것이다.
 대나무들은 엄지손가락 굵기에 길이는 대략 이 장 남짓했다.
 거의 원형으로 휘어진 대나무들이 풀어지며 세차게 휘둘러지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설사 황소라 해도 그 대나무에 맞으면 살이 갈라지고 뼈가 으스러지고 말 것이다.
 그런데도 조자건은 벌써 열흘째 이 가공할 대나무 세례를 맞으며 견디고 있었다.
 그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근골(筋骨)이 남달랐고 그의 참을성이 사막의 도마뱀처럼 강인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악교가 특수하게 제조한 약수(藥水)에 힘입은 바가 컸다.
 조자건은 온몸이 칼로 저미는 듯 고통스러웠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비틀대는 걸음으로 석실을 나와 뒤로 돌아갔다. 석실의 뒤쪽에는 다시 조그만 석실이 있었다. 석실 안에는 그리 크지 않은 연못이 있었다. 기이하게도 연못의 색깔은 거무튀튀했다.
 그것은 연못이 아니었다. 바로 악교가 특수 제조한 약수(藥水)였던 것이다. 그 약수는 스물여섯 가지의 진귀한 약재를 혼합한 것으로, 찢어진 살을 돋게 하고 근육과 뼈를 단단하게 하는 점에서는 천하의 어떤 것도 따를 수 없는 신묘함을 지니고 있었다.
 조자건은 천천히 약수 속으로 들어갔다. 상처 사이로 약수가 스며들어 참기 힘든 고통이 뒤따랐다. 하나 익숙해서인지 금세 편안한 마음이 되었다. 그는 약수 안에 편하게 몸을 뉘며 두 눈을 감았다.
 
 그가 약실로 들어가는 기간은 점점 더 길어졌다. 그의 피부는 수백 번이나 갈라져 터졌다가 다시 아물었고, 그러는 와중에 점차 기이한 윤기를 띠게 되었다.
 대나무를 맞아도 더 이상 핏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엷은 자국만이 잠깐 보였다가 사라질 뿐이었다. 그 자국도 시일이 지날수록 점차 희미해졌다.
 하나 그럴 수록 그의 몸은 점차 강인해져서 나중에는 대나무가 그의 몸을 후려쳐도 상처는커녕 오히려 대나무가 튕겨나가 부서져버렸다.
 그제야 악교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제 강신의 수련은 끝났다. 내일부터는 연혼으로 들어가겠다.”
 그것은 조자건이 수련을 시작한 지 꼭 한 달째 되는 날이었다.
 
 ***
 
 ‘연혼’이란 혼을 단련하는 것을 말한다.
 ‘연혼’을 위해서는 조금 시끄러운 방법이 필요하다.
 
 꽈꽝! 꽝!
 째째쨍!
 삐이익! 삑!
 마치 천지가 개벽(開闢)하는 듯한 굉음이었다. 적어도 귀머거리가 아니라면 이와 같은 엄청난 소음 속에서는 그대로 고막이 터져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수백, 수천 개의 북과 꽹과리, 징, 피리 등이 오 장도 안 되는 좁은 석실 안에서 일제히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석실의 벽은 특수한 재질로 만들어져서 소리를 흡수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증폭시키는 작용을 했다.
 차라리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너무도 소리가 커서 어떤 소리가 울리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조자건은 그 소음의 소용돌이 속에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하나 단정이라는 말은 지금의 그에게는 별로 어울리지가 않았다. 그의 얼굴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고, 몸은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끊임없이 꿈틀거렸다. 그가 지금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는 아무도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너무도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머릿속이 그대로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귀라도 막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두 손을 깍지 껴서 가슴 부위에 얹은 채 한 가지 구결을 암송해야 했기 때문이다. 구결은 정확히 천 개의 글자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구결의 전반부 백 글자는 불문(佛門)의 금강심법(金剛心法)이었다. 다음 백 개의 글자는 도가(道家)의 청정무구결(淸淨無垢訣)이었고, 그 뒤로 유가(儒家)의 한령심법(瀚靈心法), 속가(俗家)의 내첩지력(內貼之力), 마도(魔道)의 강룡탁비혼(薑龍鐸飛魂) 등의 구결이 이어져 있었다. 그것은 천하무림에 산재한 수많은 심법들 중 가장 위력이 뛰어나고 심오한 열 가지의 심법 구결이었다.
 그 구결들은 하나같이 까다롭기 그지없어 범인(凡人)들은 백 년을 외워도 이해할 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하물며 머리가 빠개질 정도로 시끄러운 소음의 와중에서 이 구결을 암송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조자건은 정신을 집중하여 구결을 암송하려 했으나 도저히 열 글자 이상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석실의 사방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북소리와 꽹과리, 피리 소리들은 아무렇게나 울리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도 엄연한 하나의 음악이었다. 항마신고(降魔神鼓)와 음마상문경(陰魔喪門磬), 경혼소(驚魂簫), 구천신마적(九天神魔笛) 등 최고의 음공(音功)을 담고 있는 이 음악은 이미 오래전에 절전(絶傳)된 것으로 알려졌던 풍도악부(豊都樂府)였다.
 풍도란 곧 저승을 말한다. 듣는 사람은 누구나가 저승으로 직행한다고 해서 풍도악부란 이름이 붙은 것이다. 그 위력이 너무도 살인적이고 결과가 참혹했기 때문에 무림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것을 펼치는 것을 금지시켜 지난 백 년 동안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다.
 천여 개의 악기가 불어내는 풍도악부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가공할 위력을 담고 있었다. 조자건이 정신을 가다듬고 마음을 보호하는 데 천하에서 가장 탁월한 열 가지 심법구결을 암송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는 진작에 피를 토하며 즉사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 그가 단 한순간만이라도 구결 암송을 중지한다면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내건 행위라고밖에는 볼 수가 없었다.
 계속 구결을 암송하든지 아니면 풍도악부에 의해 저승으로 가든지 하는 두 가지 길밖에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무모한 방법이었지만 또한 혼을 단련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혼이란 곧 정신이다. 정신은 마음에서 나오며, 어떠한 상태에서도 부동지심(不動之心)을 이루어야만 비로소 혼 또한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
 
 ‘불괴(不壞)’란 최고로 단련된 육체와 정신을 합일(合一)시켜 어떠한 무공에도 부서지지 않는 최강의 신체(神體)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천하에서 가장 희귀한 물[水]이 필요하다.
 
 욕조는 한 사람이 들어가기에는 너무 커 보였다.
 넓이도 다른 욕조보다 훨씬 넓었지만 무엇보다도 아주 높아서 웬만한 어른이라면 그 안에서 있어도 거의 가슴까지 닿을 것 같았다.
 욕조 속의 물은 티 하나 없이 맑았고, 물은 아주 시원하고도 깨끗했다. 누구라도 이런 큰 욕조에 담겨 있는 맑은 물을 본다면 첨벙 뛰어들고 싶은 욕구를 느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조자건은 일단 행운아였다.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머리끝까지 물속에 담그고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하나 사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를 부러워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너무나 투명해서 욕조 바닥까지 똑똑히 보이는 이 물은 보통 물이 아니었다.
 이것의 이름은 왕수(王水)라 했다.
 왕수는 천하의 어떤 독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었다. 그것은 이 왕수가 엄청나게 무겁기 때문이었다. 한 방울의 왕수는 그것보다 백 배나 큰 철보다 오히려 더 무겁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왕수를 마시면 살 수가 없다. 왕수가 몸에 들어가면 그 엄청난 무게 때문에 내장을 비롯한 혈맥들이 모두 터져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조자건의 전신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왕수에 잠겨 있었다. 아마 보통 사람이라면 욕조에 들어가는 즉시 왕수의 무게에 짓눌려 짜부라들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 조자건은 달랐다.
 그는 비단 몸이 짜부라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숨을 쉬지 않고도 그 속에서 견딜 수가 있었다. 그것은 그가 불괴연혼강기를 익혔기 때문이었다.
 불괴연혼강기를 익히게 되면 숨을 쉬지 않고도 오랜 시간을 견딜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몸 자체에 기이한 강기벽(|氣壁)이 생겨 왕수가 그의 몸에 닿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왕수는 천하에서 가장 무겁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신체의 각 부분이 골고루 강한 압력을 받는다. 그 압력의 세기는 제아무리 막강한 무공이라도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그 압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불괴연혼강기를 끌어올려야만 한다. 만약 단 한순간만이라도 소홀히 한다면 그의 전신은 그대로 짜부라들고 말 것이다. 끊임없이 고통을 참으며 불괴연혼강기를 끌어올리는 동안에 그의 정신과 육체는 자연히 혼연일체(渾沿一體)가 되어 어떠한 상태에서도 불괴연혼강기가 그의 몸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즉, 그가 의식하고 있든 의식하지 않든 불괴연혼강기는 항상 그의 몸에 펼쳐져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조자건이 불괴연혼강기를 펼쳐내고 있는 이상 왕수는 그를 어쩔 수가 없었다.
 하나 강기벽이 왕수의 무게마저 제거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는 온몸으로 가해지는 엄청난 압력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이미 강신으로 인해 피부가 강철같이 단단해지지 않았다면 그의 살은 쩍쩍 갈라져 터지고 말았을 것이다. 또한 연혼의 단련을 받지 않았다면 더 이상 고통을 참지 못하고 정신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악교는 욕조 밖에서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조자건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지난 몇 개월 사이에 그는 몰라보게 쇠약해져 있었다. 뺨은 훌쩍했고, 눈두덩은 쑥 들어가 있었다. 단단한 근육으로 뭉쳐 있던 강철 같은 몸도 비쩍 말라져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
 누구라 해도 매일같이 수만 번의 회초리질을 하고 천여 개의 악기를 불어댄다면 그처럼 변하고 말 것이다. 그의 몸에서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오직 그의 두 눈뿐이었다.
 그의 두 눈은 기이한 열기(熱氣)로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지금의 그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내 손으로 불괴연혼강기가 완성되는 것을 보아야 한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생사(生死)는 도외시한 지 이미 오래였다. 오직 자신의 눈으로 필생(必生)의 심혈(心血)을 기울였던 사상최강(史上最强)의 외문무공을 볼 수만 있다면 그는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여한(餘恨)이 있을 리 없었다.
 그는 비록 욕조 속에 들어가 있지 않았으나 그의 마음은 조자건 대신에 자신이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조자건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볼 때마다 그는 마치 자신이 그런 고통을 받고 있는 것처럼 몸을 떨었다.
 조자건은 그의 분신(分身)이었다. 그는 조자건을 통해서 자신이 이룩하지 못했던 것을 이루려고 하고 있으며, 이제 그 소망은 머지 않아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때서야 비로소 그는 자신의 인생(人生)이 보람 있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철벽무적(鐵壁無敵)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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