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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대전기 1권-1

2015.01.05 조회 13,123 추천 136


 프롤로그
 
 서울 도서관.
 열람자는 모두 퇴실하였다. 책을 정리하는 직원들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어느새 퇴근 시간이 가까워 온 것이다.
 바쁘게 책을 정리하던 직원들 중 안경을 쓴 창백한 안색의, 이십 대 후반의 청년이 있었다.
 “우욱!”
 청년은 책을 정리하다 갑자기 헛구역질을 하였다.
 직원들은 모두 깜짝 놀라 청년을 보았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자 청년의 얼굴이 붉어졌다.
 “임신했냐?”
 옆에서 일을 도와주던 사서가 농담 삼아 말을 던졌다.
 “죄송합니다. 어제 과음을 해서…….”
 청년, 강인한은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병원이라도 가 보지그래? 요즘 들어 계속 헛구역질을 하던데.”
 “체중도 많이 빠진 것 같아.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병원에 가 봐. 내 동기 놈은 어제 병원에 갔더니 암이라더군. 일 년만 일찍 병원에 갔어도 괜찮았을 거래. 그렇게 되기 전에 후회하지 말고.”
 중년 사서가 강인한을 보고 타이르듯 말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강인한은 책을 정리하며 말했다.
 바늘 끝같이 좁은 경쟁을 통과하고 사서가 된 지 이 년이 지났다.
 외부인이 보기에 사서 자리는 의자에 앉아 세월아 네월아 하는 신선놀음처럼 보인다.
 그러나 수서(책을 구입하는 일), 정리(책을 일반인이 이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일), 열람(자료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일) 같은 일들은 겉으로 보기에만 편하지 거의 중노동에 가까웠다.
 ‘과로 때문이겠지.’
 그는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고 다시 책을 정리하며 생각했다.
 
 “간암입니다.”
 의사가 말했다.
 강인한은 눈을 끔벅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와서 진료를 받았다. 그런데 간암이란 것이다.
 그는 헛기침을 하였다. 암이란 말을 듣는 순간 목이 꽉 막혀 왔다.
 “흠흠. 간암이라구요?”
 “예.”
 의사는 짐짓 무심한 얼굴로 대답했다.
 “방사선치료와 약물요법을 번갈아 하면 완치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희망을 가지십시오.”
 강인한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는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당시의 경험으로 의사의 이런 반응이 뭘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드라마에선 주인공의 병세가 심각하면 의사가 동정에 찬 얼굴로 호들갑을 떤다. 그러나 현실에선 오히려 짐짓 무심한 태도를 취한다. 환자는 의사의 태도에 민감하다. 환자를 절망에 빠뜨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희망을 가지라고 한다. 희망을 가져야 할 정도로 상태가 안 좋다는 뜻이다.
 병원을 나오는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의사의 말이 조금씩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휴직서입니다.”
 강인한은 초췌한 얼굴로 하얀 봉투를 내밀며 말했다.
 “알았네. 일은 걱정 말고 힘을 내게.”
 도서관장은 동정에 찬 얼굴로 말했다.
 그는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며칠간 쉬었다가 도서관에 나왔다. 무슨 일이냐고 캐묻는 동료에게 암에 걸렸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그 이야기가 어느새 사방으로 퍼진 것이다.
 “감사합니다, 관장님.”
 그는 관장에게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사표를 쓰면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한다. 들어갈 돈이 태산인데 사표를 낼 수가 없었다. 한 명이 비면 그만큼 일이 힘들어진다. 직원이 그만둬야 다른 직원을 충원한다. 휴직계를 내면 충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휴직 처리를 해 주니 그저 고마울 뿐이다.
 사무실로 들어가서 짐을 꾸렸다.
 “저, 이걸…….”
 여직원이 망설이다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그는 봉투를 보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직원들끼리 모았어요. 적은 돈이지만 치료비에라도 보태 쓰시라고…….”
 “고맙습니다.”
 속에서 무엇인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성격이 내성적이라 항상 사람들 사이에서 겉돌았다. 그런데 이런 배려를 해 준다. 이런 것이 사람 사는 정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고맙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힘내게.”
 “여기 일은 걱정 말고.”
 “건강해져서 돌아와.”
 사람들이 그에게 덕담을 건네며 격려하였다.
 ‘몸이 아프면 마음이 약해진다더니…….’
 그는 입술을 깨물며 도서관을 나왔다.
 계속 있으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집에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빈방이 그를 맞이했다.
 텅 빈 방을 보며 그만 한숨을 쉬었다.
 일제시대 때 그의 집안은 만석지기라고 하였다. 할아버지가 워낙 한량이라 그 많은 돈을 기생집에 다 쏟아 부었다고 한다.
 덕분에 가난하게 자란 아버지는 돈에 한이 맺혔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장사를 시작하셨다. 상재(商材)가 있으셨는지 만석지기는 아니지만 천석지기 정도로 재산을 회복하셨다.
 그즈음에 어머니를 만나 결혼을 하시고 그를 가졌다.
 남부럽지 않은 재산에 귀여운 아들을 가졌으니 아버지는 행복하셨다. 그런데 거기에 마가 끼기 시작했다. 그만 암에 걸리고 만 것이다.
 암을 치료하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으셨다. 그러나 백약이 무효.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말았다.
 아버지의 병을 치료하느라 재산을 절반 이상 까먹었다. 그래도 남겨진 재산은 제법 되었다.
 그 돈을 잘 굴렸으면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금전 감각이 없으셨다. 돈을 굴려 어떻게든 뭘 하려고 해 보셨지만 하는 일마다 족족 실패하셨다. 덕분에 남은 재산을 모두 탕진하게 되었다. 결국 남은 것은 삼 층 집 하나뿐이었다.
 그러다 어머님마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르고 짐을 정리하는데 어머님의 명의로 된 보험을 발견하였다. 뜻밖에도 어머니는 생명보험을 들어 놓으신 것이다.
 덕분에 보험회사에서 어머님의 생명 값으로 이억 원을 지급받았다.
 어느새 소식을 들었는지 같이 사업을 하자고 찾아온 친척도, 동창도 있었다. 그러나 그 제의를 모두 거절하였다.
 그는 자신이 사업에 재능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성격이 내성적이라 부잣집이라고 해서 잘난 척을 하지 않았다. 왕따는 아니지만 나서서 뭘 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자신은 그저 책을 좋아한 소심한 남자였을 뿐이다.
 
 -장래 소원이 무엇이냐?
 
 젊을 적의 아버지가 물었다.
 
 -서점 주인요.
 
 어릴 때의 그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웃음을 터트렸다.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고 한국대학 문헌정보학과에 들어갔다. 그리고 어릴 적의 소원과 비슷한 도서관의 사서가 되었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 거창한 꿈은 아니지만 소원은 이룬 셈이다.
 삼 층 집에서 일층과 이층은 전세로 놓았다. 다달이 들어오는 은행 이자도 있었다. 사서로 받는 월급도 있으니 검소하게만 살면 평생 돈 걱정 안 하고 살 수 있었다.
 나름대로 평탄하게 흘러가던 인생이 이렇게 틀어져 버린 것이다.
 “노력해 봐야지…….”
 그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젊은 놈이 이렇게 죽을 수야 없지 않은가.
 
 휴직을 한 뒤 병원에 출근 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방사선치료와 약물치료를 병행하였다. 치료의 부작용 탓에 머리가 뭉텅뭉텅 빠져나갔다. 그러나 헛구역질은 더욱 심해졌다.
 온갖 부작용에 시달리며 치료를 감행해도 암은 악화되어 가기만 했다.
 단단했던 가슴이 여자의 가슴처럼 둥그스름하게 변해 갔다. 아침마다 일어나던 물건이 서지 않았다.
 간은 인체에서 가장 바쁜 생화학 공장으로 그 기능이 일천 가지나 된다. 간암이 진행되며 그 기능이 망가지자 내분비 이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병원 치료가 효과가 없자 민간요법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버섯과 지렁이, 마늘 같은 식품들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러나 아무리 먹어도 병엔 차도가 없었다.
 죽음을 실감하게 되자 마음이 점차 초조해져 갔다. 그러다 결국 종교에 의지하게 되었다.
 
 기도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가 다닌 곳은 중년의 여인이 원장으로 있는 기도원이었다. 원장은 믿습니다를 목이 쉬도록 외치며 사람들의 몸을 피가 나도록 때리고 긁어 댔다.
 환자들은 어린 양처럼 그런 원장의 손에 몸을 맡겼다.
 간증 시간이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단 위로 뛰어나와 눈물 콧물을 흘리며 북한이 김정일 수령을 찬양하는 것처럼 원장님의 은혜로 암을 고쳤네 결핵을 고쳤네 어쩌네 소리를 질렀다.
 환자들은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자신들에게도 주의 은혜가 강물처럼 내리기를 원했다.
 원래 진정한 종교란 현세를 충실히 살며 내세의 안녕을 기원하는 법이다.
 병을 고치려고 기도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인지상정이나 그게 가능성이 없다면 내게 병을 주신 신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고 남은 생을 충실히 살아가는 게 진정한 종교이다.
 병을 고치는 것은 믿음이 강해서고, 못 고치는 것은 믿음이 약해서다. 신앙의 유무를 이런 식으로 판단하는 종교는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몰랐다.
 죽음이 다가오자 그저 급한 마음에 신을 만병통치약으로 취급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누가 탓하랴. 그게 인간의 마음인 것을.
 원장은 안수기도를 하며 환자들의 몸을 시뻘건 속 근육이 드러나도록 후벼 팠다.
 그러나 환자들은 조금도 통증을 내색하지 않고 믿습니다만 목이 쉬도록 외쳐 댔다. 정말 신앙의 힘이란 위대한 것이다.
 그는 거기에 끼어들어 믿습니다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러다 매독에 걸리고 말았다. 기도원의 원생 중에 매독에 걸린 환자가 있었다. 그 환자의 매독이 원장의 손을 통해 그에게 옮은 것이다.
 그 사건이 아니었다면 그는 거기서 죽을 때까지 믿습니다를 외쳤을 것이다. 병 고치러 왔다가 병을 얻은 것이지만 다행이라면 다행인 셈이다.
 
 기도원을 나온 후 항생제를 먹어 매독은 치료했다. 그러나 암은 여전히 낫지 않았다.
 죽음을 실감하게 되자 더욱 제정신이 아니게 되었다.
 인간은 불치병에 걸리면 부인-인정-체념-평정의 단계를 밟아 나간다. 그러나 그는 부인-인정의 단계에서 더 이상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했다. 체념을 하지 못하니 점점 삶에 매달리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피골이 상접해 갔다. 죽음이 가까워지자 눈이 미친놈처럼 번들거렸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허무하게 죽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않은가?
 전국 팔도를 모조리 돌며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갔다.
 굿 한 번에 기본이 오백만 원이고 부적 하나에 기본이 백만 원이었다. 알토란 같은 적금을 깨서 매일같이 제사를 지내고 부적을 태워 재를 먹었다. 그러나 암은 여전히 착실하게 그의 몸을 갉아먹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순간 예전에 읽은 책 중 ≪단학 수련기≫가 생각났다.
 단학(丹學)*!
 웰빙 바람이 들어 유명해진 심신 수련법 중 하나였다. ≪단학 수련기≫란 그 단학을 수련한 사람들이 적은 수련 체험기였다.
 그 체험기에는 단학을 수련하니 아랫배가 뜨거워지네 어쩌네 몸에 기운이 도네 어쩌네 암을 수련으로 고쳤네 하는 말이 실려 있었다.
 그게 생각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당장 서점에 달려가 단학이니 요가니 하는 책을 한 보따리 사서 읽었다. 그리고 내용을 어느 정도 이해하자 골방에 틀어박혀 수련하기 시작했다.
 
 한 달 정도 수련을 하자 아랫배에서 기감(氣感)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희망을 느끼고 죽기 살기로 수련을 하였다. 그렇게 석 달이 지나자 몸 안에서 기운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뿐. 더 이상의 진전이 없었다.
 다시 책을 들춰 보니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다. 마음을 급하게 먹을수록 진전이 더 느려진다 그랬다. 하지만 당장 죽을 판이다. 어떻게 마음을 급하게 먹지 않을 수가 있을까.
 심신쌍수(心身雙修). 단학은 마음공부와 몸 공부를 동시에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마음공부를 해야겠다 싶어 성경부터 시작해서 장자니 노자니 하는 책들을 사서 책갈피가 해지도록 읽었다. 그러나 병세가 심해지자 마음공부도 도루묵. 죽음의 공포는 더욱 심해졌다.
 이러단 안 되겠다 싶어 단학1과 요가를 가르치는 수련원을 돌아다니며 정식으로 수련을 하였다.
 정성과 시간을 들인 보람이 있어서인지 수련은 착실하게 진전이 되었다.
 그러나 암은 여전히 그의 몸을 갉아먹어 갔다.
 죽기 살기로 수련을 하면서 기공의 효과와 한계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기공은 몸의 저항력을 강하게 해 줄 뿐 암을 완치할 정도로 큰 치료 효과를 보여 주지 못했다.
 물론 기공 수련을 해서 암을 치료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민간요법으로 암을 치료한 사람이나 기도를 해서 암을 치료한 경우처럼 몇 안 되는 기적의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는 없는 일. 계룡산 같은 데 들어가면 아직도 수련을 하는 도인들이 많다고 하였다.
 전국 팔도를 돌며 도인들을 만나서 기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무당을 만나 굿을 한 것의 재판인 셈이다.
 도인들도 절반은 사기꾼이었다. 기 치료 한 번 하는 데 수백만 원씩 요구하였다.
 보험금과 집을 팔아 달라는 대로 주고 기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어차피 저승 가면 쓰지도 못할 돈이 아닌가.
 그렇게 돈과 정성을 들이며 도인들을 만나다 보니 자연히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있었다.
 가짜는 그렇다 치더라도 진짜 도인들도 강인한의 암을 고치지는 못하였다.
 세상은 소용이 있는 것은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기공이 말기 암마저 치료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효과를 가졌다면 세상은 기공을 익힌 사람 천지일 것이다.
 기공이 대체 의학의 한 지류에 불과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기 치료를 받는데 오히려 몸은 더 약해졌다.
 머물던 암자의 늙은 중이 그걸 보고 혀를 차더니 개떡 같은 소리를 해 댄다.
 “삶은 구름 한 점의 일어남이요, 죽음은 구름 한 점의 흩어짐이다. 뜬구름 자체는 본래 실이 없나니 죽고 사는 것 역시 이와 같도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스님! 젊은 놈이 살려고 노력하는 것도 죄입니까? 짐승도 태어난 이상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버럭 소리를 지르고 짐을 꾸려 절을 나왔다.
 그렇게 계룡산의 삼불봉에서 용문폭포 쪽으로 내려오던 길이었다.
 성질을 내며 내려오다 보니 체력 배분을 못 하였다. 덕분에 용문폭포 쪽으로 내려오다 하체의 힘이 빠져 용소(龍沼) 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는 몸을 허우적거리며 물에서 나오려고 하였다. 그러나 배낭의 무게 때문에 몸이 떠오르지 않았다. 멀리서 관광객들의 외침이 아득하게 들려왔다.
 그때 바닥에 시커먼 구멍이 열렸다. 그 구멍에서 흡력(吸力)이 발생하여 그의 몸을 빨아들였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의식이었다.
 
 주석
 
 1. 단학(丹學) : 현존하는 최고의 호흡법서는 기원전 380년, 전국시대 초기에 나온 ≪행기옥패명(行氣玉佩銘)≫이다. 여기엔 한 공법의 전체 연공 과정이 빠짐없이 쓰여 있다.
  신체를 움직임으로 기를 유도하는 도인법(導引法)이 체계를 잡은 것은 기원전 1000년에 나온 중국의 ≪황제내경(皇帝內經)≫이다. 도인법이 양생법(養生法)의 단계를 넘어 기공(奇功)의 체계를 갖춘 것은 노자와 장자 시대부터였다.
  기공은 내단술, 단학, 또는 단도(丹道)로 발전하게 되는데 ≪황제음부경(皇帝陰符經)≫,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 ≪태평경(太平經)≫ 등을 그 근간으로 삼는다. 단학이 실제적인 기초를 확립하게 된 것은 위백양의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부터다.
  중국에 단학이 있는 것처럼 한국에도 단학이 있다.
  환인(桓因)은 동방 최초의 선조(仙祖)였고, 한국의 원시종교는 신도(神道)와 선도(仙道)였다. 이것은 삼국시대로 내려와 국선(國仙), 혹은 풍류도로 발전한다.
  조선시대에 정염은 ≪단가요결(丹家要訣)≫을 남겼고 이지함은 ≪복기문답(復氣問答)≫을 남겼다. 곽재우는 ≪복기조식진결(服氣調息眞訣)≫을 남겼고 권극중은 ≪참동계주해(參同契註解)≫를 남겼다.
  허준의 ≪동의보감≫ 내경편(內勁篇)에도 육자기결, 오장도인법 등 무려 마흔여 가지의 기공법과 호흡법이 있다. 단학은 이렇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수련법이다.
 -건강 기공-
 
 
 이계에서 살아남다
 
 강인한은 눈을 떴다. 이른 아침 잠에서 막 깨어난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하체가 축축했다.
 뒤를 보고 상황을 파악한 순간 멍한 기분이 단번에 날아갔다.
 그는 호수의 가장자리에 상체만 걸치고 있는 것이다.
 황급히 밖으로 기어 나왔다. 그리고 물에 젖은 배낭을 벗고 아름드리나무 둥치에 몸을 기대어 휴식을 취하였다.
 휴식을 취하자 마음에 여유가 돌아왔다. 그제야 그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마치 아프리카의 밀림처럼 아름드리나무가 울창한 숲이었다. 그 숲의 한가운데 그가 빠져나온 맑은 물이 찰랑이는 호수가 보였다.
 “꿈인가?”
 햇살을 받은 호수는 은빛으로 출렁였다. 물고기들이 은빛 물결 위로 뛰어오르는 게 보였다.
 계룡산을 내려오며 용문폭포에 빠졌다. 그런데 눈을 뜨고 보니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장소에 와 있는 것이다.
 “빌어먹을.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군.”
 의사한테 암 선고를 받았을 때가 기억이 났다. 암 선고를 받자 가슴이 북처럼 두근거렸다.
 마치 그때처럼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는 지금 영문도 모른 채 엉뚱한 장소에서 조난당한 것이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억지로 불안감을 가라앉혔다. 여기서 패닉에 빠지면 끝장이라는 자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 침착하자, 침착해. 별거 아니야. 그저 낯선 곳에 있는 것뿐이야.”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배낭을 메고 걸어가려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예전에 본 재난 소설이 떠오른 것이다.
 한 무리의 인간이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조난당했다. 패닉에 빠진 일행은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다 한 명씩 죽어 버리고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한 주인공은 살아남았다.
 지금의 상황과 똑같지 않은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배낭을 풀어 물건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배낭엔 양말과 팬티, 러닝셔츠 같은 속옷류, 일인용 텐트, 나침반, 칼과 라이터, 실과 바늘, 가스버너, 작은 가스 통 몇 개, 코펠, 랜턴, 봉지에 싼 잡곡밥과 감자와 당근, 카레 가루, 라면 같은 부식이 있었다.
 팔도의 산을 다 돌아다니다 보니 야영을 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항상 야영 준비는 완벽하게 했다.
 다행히 부식들은 모두 검은 비닐봉지로 싼 덕분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나머지 물건들을 햇살 아래 말렸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자 내놓은 물건들은 순식간에 말라 버렸다.
 라이터를 켜 보았다. 물기는 다 말랐는데 라이터가 아예 켜지지가 않았다. 작은 가스통을 버너에 집어넣고 스위치를 돌려 보았다. 찰칵 소리만 날 뿐 버너도 불이 붙지가 않았다.
 ‘불이 없군.’
 그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조난을 당한 상태에서 불이 없다. 죽으라는 소리나 매한가지가 아닌가.
 ‘이럴 때 책에는 어떻게 나와 있더라? 불을 어떻게 피우는 거지?’
 이럴 때 그가 믿을 만한 것은 어릴 때부터 읽은 수천 권의 책밖에 없었다.
 가장 먼저 기억이 난 것은 카스타네다의 ≪인디언 옥수수≫란 책이었다.
 ‘그건 아니야.’
 한참 동안 그 책의 내용을 더듬어 보던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인디언 옥수수≫는 인디언의 약물과 종교, 가르침을 다분히 신비주의적인 관점에서 푼 책이지 조난당한 상태에서의 생존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자연에 미친 사람≫은?’
 ≪자연에 미친 사람≫은 톰 브라운이 지은 책이다. 톰 브라운은 어릴 적에 인디언에게서 자연에서 지내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아무런 도구 없이 숲에서 지낸 체험기를 ≪자연에 미친 사람≫이란 책에서 설득력 있게 적었다. 그 책에서 저자는 자신이 숲에서 지낸 경험을 진솔하게 풀어 놓았다. 하지만 거기에도 불을 피우는 방법은 나와 있지 않았다.
 ‘그럼 뭐가 있지?’
 그는 계속 기억을 더듬었다.
 명상을 오래 하다 보면 기억을 사진첩처럼 분류해 이미지대로 저장하는 요령을 배운다. 덕분에 그는 필요한 기억을 제때에 불러올 수 있는 것이다.
 ‘그래. 시튼의 ≪숲살이(The book of woodcraft)≫가 있었군.’
 동물 문학가로 유명한 시튼은 인디언 문화와 숲살이에 대해서도 전문가였다. 그가 지은 ≪숲살이≫란 책엔 숲에서 지낼 때 필요한 여러 유용한 도구를 만드는 법이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는 기억을 떠올리며 ≪숲살이≫에 적힌 대로 불 피우는 도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숲살이≫에 적힌 불 피우는 도구는 원시인이 긴 막대기 밑에 마른 나뭇잎을 두고 막대기를 양손으로 비벼 마찰열로 불을 일으키는 방식과 흡사했다.
 다른 점은 활시위를 만들어 그 활시위의 줄에 나무 막대기를 한 바퀴 감고 활시위를 앞뒤로 움직여 마찰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면 손으로 나무 막대기를 비비는 것보다 더욱 많은 마찰을 일으켜 불붙이는 게 더욱 수월해진다.
 그는 활처럼 굽은 나뭇가지를 구해 운동화 끈을 묶었다. 곧게 뻗은 나무 막대기를 구한 뒤 주머니칼로 겉면을 대강 다듬었다.
 마른 낙엽을 구해 나무 막대기 밑에 깔았다. 그리고 활줄을 나무 막대기에 앞뒤로 밀고 당기기 시작했다.
 책에는 숙련자의 경우, 삼십 초 안에 불을 붙일 수 있다고 나와 있었다. 그러나 삼십 초는커녕 삼십 분이 지나도 불이 붙지 않았다.
 “빌어먹을!”
 강인한은 활줄을 팽개치고 한숨을 쉬었다. 이론과 현실은 너무나 많은 차이가 났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지.”
 그는 다시 활시위를 붙잡고 입에 단내가 나도록 비볐다.
 최소한 불을 피우는 요령은 알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
 얼마나 움직였는지 손에 물집이 잡혀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그렇게 무려 두 시간을 끙끙대자 간신히 마른 나뭇잎에 불이 붙었다.
 불씨를 기반으로 모닥불을 피웠다.
 옷을 모두 벗어 모닥불 옆에 두고 말렸다.
 옷을 모두 벗어도 여름이라 그런지 그다지 춥지 않았다.
 그는 타오르는 불을 묵묵히 보다 마른 나뭇가지 하나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버너를 켠 다음 불붙은 나뭇가지를 위에 댔다. 그렇게 스위치를 몇 번 돌리니 버너가 정상으로 작동되었다.
 라이터도 같은 과정을 반복하니 정상적으로 작동되었다. 물에 젖은 버너나 라이터는 이런 식으로 하면 다시 살아난다는 것도 책으로 보아 알고 있었다.
 “책이 날 살려 주는구나.”
 책이 아니었다면 젖은 배낭을 들고 사방을 헤매다 체력을 모두 소진하고 탈진되었을 것이다.
 그동안 읽은 수천 권의 책이 큰 도움이 된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책이 도움이 되어 주면 좋겠는데…….”
 그는 손에 잡힌 물집을 바늘로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얼굴은 어두웠다.
 불씨 하나 살리는 데도 이렇게 힘이 든다. 지식을 아는 것과 그 지식을 활용하는 것은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단 낫지. 힘을 내자, 강인한!”
 그는 짐을 정리하고 자신을 격려하며 길을 떠났다.
 하늘은 푸르다 못해 쪽빛이었다. 오색의 새가 나무 위에서 우짖었다. 나무에는 주먹만 한 파란색과 연분홍이 섞인 열매가 열렸다. 처음 보는 과일이었다.
 바닥의 돌을 들어 열매를 향해 던졌다. 돌에 맞은 열매가 땅에 떨어졌다.
 땅에 떨어진 열매를 집어 먹었다. 달콤한 과즙이 입 안에 퍼졌다. 단것이 몸에 들어오자 기분이 안정되었다.
 처음 먹어 보는 나무 열매, 처음 보는 새들. 처음 보는 숲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대체 어떻게 이런 곳에 떨어지게 됐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마음에 여유를 찾자 다시 불안감이 새록새록 솟아올랐다.
 ≪숲살이≫엔 길을 잃었을 땐 언덕 위나 나무 위, 아니면 다른 높은 곳에 올라가 일단 지리를 파악하라고 하였다. 가장 나쁜 것은 겁내는 것. 진짜 무서운 것은 추위나 굶주림이 아니라 두려움이라 그랬다. 두려움 때문에 일시적인 경험이 영원한 비극이 된다. 그러니 침착하게 행동하라고 했다.
 ‘…그렇게 적혀 있었지. 그리고 뭐라더라?’
 높은 곳에 올라가면 동료가 있는 야영지를 살펴보라고 하였다. 동료를 찾을 수 없다면 불을 피워 연기로 자신의 위치를 알리라고 하였다. 혹은 총을 쏘아 총소리로 자신의 위치를 알리라고 하였다.
 ‘일단 높은 곳에 올라가 상황을 파악하자.’
 그는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근처의 높은 나무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크윽!”
 방금 물집을 터트린 손으로 나무껍질을 움켜잡으니 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는 억지로 통증을 참으며 나무를 기어 올라가다 일 미터도 못 올라가 떨어지고 말았다. 꼬리뼈가 더럽게 아팠다.
 그는 손으로 엉덩이를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욕을 퍼부으며 발로 나무를 걷어찼다.
 “악!”
 그는 발을 잡고 깡충깡충 깨금발을 뛰었다. 이성을 잃은 탓에 너무 세게 걷어찬 모양이었다.
 다행히 통증 덕분에 제정신이 들었다. 이성을 찾으니 예전에 본 소설 중에 주인공이 나무를 올라가던 장면이 떠올랐다.
 허리띠를 풀어 나무에 둘렀다. 그리고 허리띠 양쪽을 팔목으로 감고 당기며 나무를 올라가기 시작했다.
 삼 미터를 올라가니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육 미터를 올라가니 사타구니가 저릿저릿했다. 그렇게 십일 미터를 올라가니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군에서 유격 훈련을 할 때 교관이 인간이 가장 공포심을 느끼는 높이가 십일 미터라고 이죽거리며 말한 게 떠올랐다.
 빌어먹을, 아닌 게 아니라 십일 미터를 올라가니 온몸에 소름이 끼쳐 왔다. 유격 훈련 때와는 달리 이곳엔 아무런 안전장치가 없는 것이다.
 십일 미터까지 올라가니 옆으로 툭 튀어나온 어른의 허벅지만 한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허겁지겁 그 가지에 엉덩이를 걸쳤다. 어느새 그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바람에 몸을 식히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으음…….”
 저절로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광활한 수해(樹海)가 지평선을 메우고 있었다.
 도무지 사람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어두운 얼굴로 나무에서 내려왔다. 천생 사람을 발견할 때까진 이 밀림에서 혼자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그는 도시에서 자란 도시인이다. 도시인이 과연 숲에서 혼자 살아남을 수 있을까?
 ‘최선을 다해 봐야지.’
 나무에서 내려와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해가 뜨는 곳을 향하여 일직선으로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섬뜩할 정도로 맑은 공기가 폐에 밀려 들어왔다. 그러면서 단전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강인한은 자신의 신체 변화를 느끼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걷거나 앉거나 눕거나, 언제나 습관적으로 단전에 정신을 집중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기운을 쌓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걸으면서 하는 호흡은 정좌보다 효율이 낮다. 제대로 정좌를 하고 호흡 수련을 해도 이만한 기감을 느끼려면 적어도 한 시간은 걸려야 한다.
 걸음에 맞춰 호흡에 정신을 집중하였다.
 단전이 점점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러면서 하복부에서 뿌득하게 충만감이 들었다.
 이만한 느낌을 얻으려면 최소한 세 시간 이상은 정좌 수련을 해야 한다. 그런데 불과 몇 걸음 걷는 사이에 이런 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숲이라 그런가?”
 공해가 가득한 도시와 산은 기의 밀도가 다르다. 이 정도의 숲이라면 당연히 기의 밀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단전이 충실해지자 불안감이 사라지며 마음에 여유가 생겨났다.
 하단전은 인체의 중심이자 마음의 근본 자리다. 하단전이 든든해지니 저절로 마음이 안정되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고 그는 더욱 단전에 정신을 집중하고 걸었다.
 그렇게 계속 걸어가며 주위를 살피는데 커다란 짐승 발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그 발자국을 본 강인한의 얼굴이 굳어졌다.
 발바닥이 어른 손바닥만 한 크기의 짐승 발자국이었다. 저 정도 크기의 발자국이라면 호랑이보다 크다는 이야기다.
 “황당하군. 이계에라도 떨어졌나…….”
 도서관에서 숱하게 본 판타지 소설들이 생각났다. 사람이 살지 않는 야생의 숲이 아닌 이상 저만한 크기의 짐승이 돌아다닐 리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본 책을 떠올리며 발자국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생존에 대해 적은 수많은 책들 중엔 짐승의 발자국을 구분하는 방식이 도면까지 포함하여 자세히 나와 있었다.
 발자국엔 발톱 자국이 없었다. 그것은 발톱이 밖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안으로 숨었다는 뜻. 갯과의 짐승이 아니라 고양잇과의 짐승이라는 이야기다.
 앞 발자국과 뒤 발자국이 겹쳐 있다. 앞발을 디딘 곳에 뒷발을 디뎠다는 뜻이다. 풀을 바람에 날려 보았다. 바람이 앞에서 뒤로 불었다.
 단단한 곳을 밟으며 바람을 마주하여 냄새를 없애고 걷는 것. 이것은 영락없는 맹수의, 그것도 고양잇과 맹수의 습성이었다.
 그의 얼굴이 신중해졌다.
 여기까진 추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이 문제다. 발자국의 뒤를 쫓아갈 것인가? 아니면 발자국을 피해 도망갈 것인가?
 불을 피워 보고 느낀 것이지만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 불 피우는 것을 잘못하면 손바닥이 까질 뿐이지만 여기서 잘못 판단하면 죽는 것이다.
 “일단 발자국의 뒤를 추격하자.”
 단전이 충실해지자 배포가 커졌다.
 강원도 철원, 최전방에서 현역으로 군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군대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지 짐승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 짐승의 발자국을 보고 그 크기나 정체를 추론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처음이니만치 초식동물을 육식동물로 잘못 추론했을 수도 있다. 그 실체를 확인하지 못하면 내내 공포에 떨 수밖에 없다. 바람이 앞에서 뒤로 불어 그의 냄새를 없애 준다는 것도 마음을 추적 쪽으로 굳히는 데 한몫을 하였다.
 바람에도 길이 있어 항상 부는 곳으로만 분다. 짐승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고 바람 길로 이동한 것이고 그는 지식을 통해 그것을 알고 짐승을 추적할 결심을 굳힌 것이다.
 그는 발자국의 뒤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발자국은 바람 길을 일직선으로 걸었다. 그것을 본 그는 더욱 긴장하였다. 젊은 맹수는 발자국이 안으로 모아지고 직선으로 이동한다. 늙은 맹수는 발자국 사이가 벌어지고 갈지자로 이동한다. 발자국으로 보면 놈은 젊은 놈이었다.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끝을 칼로 뾰족하게 다듬었다. 그리고 단전에 정신을 집중했다. 단전에서 뜨거운 기운을 느끼자 침착성이 되살아났다.
 나뭇가지를 창처럼 세워 들고 소리가 안 나도록 발끝으로 걸으며 발자국을 쫓았다.
 그는 그렇게 삼십 분을 걷다 얼어붙은 얼굴로 섰다.
 오십 미터 앞,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발자국의 주인을 본 것이다.
 등을 보인 채 넙죽 엎드려 있는 시커먼 짐승은 언젠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본 흑표범 같았다. ≪내셔널 지오그래픽≫과 다른 점은 저 흑표범은 다른 흑표범이나 호랑이보다 두 배가량 더 크다는 것이었다.
 놈을 보자 저절로 발이 후들후들 떨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려다 멈칫했다.
 흑표범은 배를 땅에 깔고 앞을 주시하고 있었다. 눈앞의 먹잇감에 신경을 쓴 나머지 강인한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서 소리를 내면 놈의 주의를 끌 것이다
 흑표범의 오십 미터 앞엔 물소와 흡사하게 생긴 동물이 느긋하게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흑표범은 물소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물소가 귀를 쫑긋 세우자 흑표범은 몸을 더욱 낮추었다.
 강인한은 숨소리를 죽이고 굳은 듯이 서서 그 광경을 보았다. 그가 인기척을 내 물소가 도망치면 표범의 분노는 자신에게 향할 것이다.
 흑표범의 꼬리가 몇 번 흔들린다 싶더니 유선형(流線型)의 몸이 우아하게 대지를 박찼다. 지면에 검은 선이 그어진다 싶더니 어느새 흑표범의 몸이 물소의 몸 위로 올라왔다. 다음 순간 흑표범의 날카로운 발톱이 물소의 목에 박혔다. 그리고 기다란 송곳니가 물소의 두꺼운 가죽 피부를 뚫고 동맥을 끊어 버렸다.
 물소는 몸을 뒤틀며 구슬프게 울었다. 그러다 끝내 흑표범의 공세를 감당치 못하고 대지에 몸을 뉘었다.
 흑표범은 단검같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물소의 배를 갈랐다. 그리고 김이 펄펄 풍기는 내장을 파먹기 시작했다.
 그는 그것을 보며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 자기도 모르게 나뭇가지를 밟았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며 와삭! 하는 소리가 났다. 흑표범이 물소를 먹다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사타구니 사이가 뜨뜻하게 젖어 왔다. 흑표범과 눈이 마주치자 그만 오줌을 지리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제자리에 똑바로 서서 흑표범을 노려보았다. 여기서 눈을 피하면 놈은 자신을 덮칠 것이다.
 그러자 흑표범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물소를 뜯어 먹기 시작했다. 맹수는 배가 부르면 사냥을 하지 않는 법이다.
 그것까지 확인한 그는 천천히 눈에 안 보이는 쪽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다.
 숨이 턱에 찰 때까지 달렸다. 그렇게 달리다 표범하고 거리를 완전히 벌린 후에야 걸음을 멈추었다.
 “헉, 헉, 도대체 뭐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방금 본 광경을 생각하였다.
 놀랍게도 표범의 송곳니는 턱 밑으로 길게 나 있었다.
 “지구가 아니야.”
 지구의 어떤 곳에도 저런 동물은 없었다. 지구는 매스미디어가 극단적으로 발달한 세계였다. 만약 저런 짐승이 발견되었다면 세상은 벌써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
 예전에 본 판타지 소설처럼 판타지 세계로 떨어졌는지, SF소설처럼 다른 행성으로 떨어졌는지 모른다. 어쨌건 여기가 지구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제길, 정말 목숨을 걱정해야 할 판이군.”
 판타지 세계라고 반드시 인간이 살란 법은 없다. 어쩌면 인간이란 존재는 아예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정말로 목숨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극도의 긴장이 풀리자 식욕이 느껴졌다. 밥을 먹고 싶었지만 맹수를 보니 불을 피울 엄두가 안 났다.
 근처의 과일나무에서 과일을 몇 개 따 먹었다.
 “다행히 굶어 죽을 염려는 없군.”
 어른 주먹만 한 과일 세 개를 먹으니 배가 든든했다. 숲은 온통 과일 천지니 굶어 죽을 염려는 없을 것 같다. 배가 부르고 긴장이 풀리니 졸음이 솔솔 밀려왔다. 그는 주변의 나무 위로 올라가 등나무 넝쿨로 나뭇가지와 몸을 단단히 묶고 잠을 청하였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깼다. 밤새 한기가 뼈마디 사이로 스며들어서 그런지 일어나자 온몸이 덜덜 떨려 왔다.
 정신을 차린 그는 불쾌한 기분을 억누르고 언제나와 같이 습관적으로 단전에 기운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는 깜짝 놀랐다. 하복부 전체가 온통 뜨거워져 있었다.
 단전에 더욱 정신을 집중하였다. 뜨거운 기운이 단전에 뭉치며 단전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럴 수가!”
 강인한은 나뭇가지에서 내려와 나무 아래서 정좌를 하고 본격적으로 운기를 하기 시작했다.
 여태껏 이만큼 기운을 모은 적이 없었다. 어느 정도 기운이 모이면 암세포가 모조리 기운을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단전에 정신을 집중하며 호흡을 하였다. 뜨거운 기운이 단전에 하나로 뭉치더니 콩알만큼 작고 단단한 기운이 형성되었다. 기운이 하나로 뭉쳐 형태를 갖추는 단두(丹頭)라는 것이다.
 단두는 하복부를 좌충우돌 움직이더니 꼬리뼈 쪽에 있는 미려혈(尾閭穴)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단두가 형성되자 자연적으로 다음 단계인 선도에서 말하는 개관전규(開關展竅)의 단계. 임독과 양맥을 뚫는 단계가 시작된 것이다.
 시뻘겋게 달군 부젓가락으로 꼬리뼈를 지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러면서 단두는 밑으로 조금씩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끝내 미려혈을 뚫어 버렸다.
 초보자가 단두를 형성하자마자 단번에 미려혈을 뚫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나 그는 단두가 형성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미려혈을 뚫어 버렸다.
 강인한은 수많은 도인들을 만나 기 치료를 받으며 임맥과 독맥의 주요 혈도와 기경팔맥을 한 번 이상씩은 뚫어 버린 상태였다. 즉 길이 생성되지 않은 게 아니라 길은 생성되었는데 돌아다니지 않아 먼지가 낀 상태인 것이다.
 집을 팔아 만든 돈으로 도인들을 만나 기 치료를 받은 것이 아주 헛고생은 아니라는 것이다.
 단두는 미려혈을 뚫자 열기를 잃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호흡을 무식(武息 : 호흡을 긴장되고 무겁게 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그러자 흩어지던 단두가 다시 뭉치며 열기로 바뀌었다.
 그는 기공류의 책을 한 수레 이상 읽었다. 기운을 형성시키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지 일단 기운을 형성한 이상 그것을 운행하는 요령은 숙지한 상태였다.
 다시 형성된 단두는 경추 4, 6번 부위의 협척혈을 뚫고 올라가 뒷머리 부분의 옥침혈(玉枕穴)에서 막혔다.
 도인들은 다른 기경팔맥은 다 뚫어 주었어도 옥침혈만은 뚫어 주지 않았다. 옥침혈은 뒷머리의 움푹 들어간 곳으로 뇌와 연결된 혈도였다. 이 혈도는 잘못 건드리면 뇌를 손상당해 광인이 되는 것이다.
 옥침혈에서 막힌 단두는 점점 기세를 잃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호흡을 문식(文息 : 부드럽고 유유한 호흡)으로 바꾸고 기운을 송곳처럼 날카롭게 만들었다.
 날카롭게 변한 기운은 끊임없이 옥침혈을 두들겼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다. 귀가 먹먹해지면서 코에서 시뻘건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기운으로 옥침혈을 두들겼다.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르는 것이다.
 머릿속으로 꽝! 하는 울림이 들리며 옥침혈이 뚫려 버렸다. 동시에 입 안에 꿀같이 단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이것이 선도에서 말하는 옥액단정(玉液丹精)이라는 것이다.
 옥침혈을 뚫은 기운은 정수리를 거쳐 임맥을 타고 내려와 단전으로 들어왔다. 단전으로 들어온 기운은 처음과는 달리 끈적끈적한 기운으로 변하였다. 소주천이 완성되며 기운이 원기(元氣)에서 진기(眞氣)로 변한 것이다. 소주천이 완성이 되자 온몸이 후끈해지며 으슬으슬한 기운이 싹 사라졌다.
 운기를 마치고 일어났다. 온몸이 상쾌했다.
 ‘잘하면…….’
 그가 단학으로 암을 고치지 못한 것은 기가 신체의 치유 능력을 키우는 속도보다 암 세포가 몸을 장악하는 속도가 더 빠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 빠르게 기가 모이면 사정은 다르다.
 잘하면 암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이다.
 운기를 하며 몸을 점검하는 그의 얼굴엔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과일을 몇 개 따 먹고 걸으면서 계속 운기를 하였다. 운기를 할수록 임맥과 독맥의 통로가 더욱 넓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하루 만에 임맥과 독맥의 길이 완전히 열렸다.
 다음 날이 되자 임맥과 독맥을 돈 기운이 자연스럽게 기경팔맥을 돌기 시작했다. 계룡산에서 미리 길을 뚫어 놓은 덕분에 대주천을 자연스럽게 완성한 것이다.
 진전이 빠르자 신이 났다. 그래서 사람을 찾는 것보다 수련에 더욱 신경을 썼다.
 그러던 어느 날 호수에 들어가 목욕을 하였다. 그러다 자신의 가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여자처럼 둥그스름하게 변한 가슴이 다시 남자의 가슴으로 형태가 바뀌어 가고 있었다. 망가졌던 간의 기능이 회복되어 가고 있는 것. 즉 암이 서서히 치료가 되고 있는 것이다.
 숲에 온 지 일주일째 되는 날에 눈이 답답해 안경을 벗었다. 그래도 주위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숲에 떨어진 지 한 달째 되는 날이었다.
 그날도 운기를 하면서 걸었다. 어느새 해는 중천에 떴다. 시원한 기운이 온몸을 맴돌았다. 언제부터인가 더운 낮엔 시원한 기운이 온몸을 운행하고 밤엔 반대로 따스한 기운이 온몸을 운행하였다. 덕분에 추위와 더위를 조금씩 덜 타게 되었다.
 몸의 변화에 신기해하며 걷다 그는 앞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고양잇과 짐승의 발자국이 바로 앞에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계에 떨어진 첫날에 본 흑표범의 발자국이었다.
 ‘요즘 자주 보는군.’
 그는 무심히 그 발자국을 밟고 지나가려다 그만 흠칫하였다. 생각해 보니 오늘 아침에도 흑표범의 발자국을 본 것 같았다. 아니, 아침뿐만 아니라 전날 저녁때도, 전날 점심때도 이 발자국을 보았다.
 수련에 정신이 팔려 이렇게 자주 흑표범의 발자국을 보고도 무심히 지나친 것이다.
 ‘날 주시하고 있다.’
 등골에 찬 기운이 돌았다. 맹수의 습성에 대한 책의 내용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다. 여기서 행동의 변화를 보이는 것은 습격의 빌미를 주는 것이다.
 평소와 마찬가지의 보폭으로 길을 걸으며 흑표범의 발자국을 자세히 관찰하였다.
 예상대로 흑표범의 발자국은 길게 반원을 그리고 있었다.
 놈은 자신의 뒤를 밟고 있는 것이다.
 어느새 바람이 등 뒤에서 자신 쪽으로 불어오고 있었다. 수풀이 바스락거리며 소리를 냈다. 짐승의 누린내가 훅 끼쳐 왔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물소를 잡아먹은 그 흑표범이 자신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온몸의 세포가 일제히 열리며 공포의 페로몬을 발산하였다.
 ‘도망가면 잡힌다!’
 본능은 도망치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직감은 도망치면 잡힌다고 말하였다.
 그는 직감의 충고에 따라 도망치려는 본능을 억제하고 오히려 흑표범에게 돌진했다.
 흑표범의 모습이 순식간에 몇 배로 커졌다. 호랑이보다 최소한 한 배 반은 더 큰 동체. 햇빛을 받아 날카롭게 빛나는 이빨들, 흉악하게 튀어나온 송곳니, 살의로 무장한 노란 눈!
 먹잇감이 오히려 돌진하자 흑표범의 눈엔 한순간 당혹감이 스쳤다. 그러나 그 당혹감도 잠시, 짐승의 눈은 흉포한 살의로 가득 찼다.
 점프!
 흑표범의 뒷발이 허공을 박찼다. 거대한 덩치가 우아한 호선을 그리며 강인한에게 돌진했다.
 이것을 기다렸다!
 그는 도루를 하는 것처럼 땅으로 몸을 날렸다. 그의 몸이 땅을 주르륵 미끄러지며 간발의 차이로 흑표범의 몸 아래로 빠져나왔다.
 그는 흑표범의 뒤에 착지했다. 그리고 관성의 힘으로 인해 비틀거리며 몇 걸음 앞으로 걸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력을 다해 앞으로 달렸다.
 크렁!
 흑표범은 밀림을 뒤흔드는 포효를 내지르며 강인한을 덮쳤다. 둘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압축되었다. 흑표범은 땅을 박차고 강인한의 등을 긁었다.
 촤악!
 강인한은 배낭을 짊어지고 있었다. 배낭이 발톱에 갈라지며 속에 있던 내용물들이 쏟아져 나와 흑표범의 머리를 때렸다. 흑표범은 깜짝 놀라 멈칫거렸다.
 그는 더욱 속도를 올려 달렸다.
 흑표범의 뜨거운 숨결이 다시 뒤에서 느껴졌다. 필사적으로 주변의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는 첫날과는 달리 양손과 양발을 사용해 순식간에 십 미터를 올라갔다. 그리고 가지 위에 앉아 간신히 몸을 안정시켰다.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고통스럽게 숨을 몰아쉬었다. 폐가 달군 숯을 집어넣은 것처럼 뜨거웠다.
 흑표범은 식식거리며 나무 주위를 돌아다녔다. 그러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이를 드러내며 캬악거렸다. 그러더니 나무 둥치에 발톱을 박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고양잇과 동물은 원래 나무를 잘 탄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넝쿨들과 그 건너편 나무가 눈에 띄었다.
 ‘저걸 잡고 건너갈까?’
 영화에서 보던 타잔처럼 넝쿨을 잡고 나무 사이를 이동할 수 있을까?
 ‘안 된다.’
 그는 냉정한 마음으로 계산했다.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 설령 성공해 건너편 나무에 안착하더라도 표범이 밑으로 내려와 다시 건너편 나무 위로 오르면 그만이다. 나무 사이의 거리가 다른데 영화처럼 연속적으로 나무 위를 계속 이동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러다 떨어져 다리라도 부러지면 표범의 밥이 될 뿐이다.
 어느새 표범은 발치까지 올라왔다.
 ‘어차피 짐승일 뿐이다.’
 강인한은 허리띠를 풀어 끝을 손에 단단히 감았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표범을 향해 힘껏 휘둘렀다. 허리띠의 쇠 부분이 표범의 머리를 정통으로 때렸다. 표범은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었다.
 그는 다시 한 번 허리띠를 힘껏 휘둘렀다. 요령이 붙어 그런지 두 번째는 좀 더 빠르게 허리띠를 휘둘렀다.
 쐐액!
 허리띠는 공기를 찢으며 표범의 머리를 정통으로 때렸다.
 캬웅!
 중심을 잃은 표범은 고통에 찬 신음을 뱉으며 등부터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나 몇 번 바닥을 구르더니 벌떡 일어나 나무 주위를 돌며 강인한을 노려보았다. 유연한 표범의 근육이 충격을 모조리 흡수한 것이다.
 강인한은 표범을 노려보며 채찍을 휘둘렀다. 채찍이 나무에 맞아 짝! 하는 소리가 나자 표범은 몸을 움찔거렸다.
 표범은 이를 드러내고 강인한을 노려보다 꼬리를 늘어뜨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제야 강인한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죽음의 위기를 벗어나자 온몸이 덜덜 떨려 왔다.
 
 
 사람을 구하다
 
 강인한은 나무에서 내려와 찢어진 배낭을 챙겼다. 그런데 배낭이 손안에서 자꾸 미끄러졌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손을 덜덜 떠는 것을 알았다.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것이다.
 심호흡을 몇 번 하니 단전이 뜨거워지며 이성이 돌아왔다.
 “무기를 구해야 해.”
 이성이 돌아오자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었다.
 이번엔 운이 좋아 살았다. 하지만 다음에도 운이 좋으리란 법은 없다. 자신의 몸을 보호할 기본적인 무기는 있어야 한다.
 “창을 만들어 볼까?”
 긴 나뭇가지를 구해 끝만 날카롭게 다듬으면 바로 창이었다.
 “아니야. 창을 쓰다간 개죽음을 당할 거야.”
 창 한 자루 가지고 그런 맹수와 싸우라는 것은 차라리 죽으라는 소리다.
 “활을 만들면 어떨까?”
 활이라면 안전을 확보하고 싸우는 원거리 무기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하지만 주머니칼 하나로 쓸 만한 활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 그는 자신이 읽은 수많은 책들을 떠올리며 이런 상황에서 사용할 만한 무기를 궁리했다.
 그러다 그는 무릎을 치며 탄성을 토했다.
 “그렇군. 슬링(Sling)*이 있었어!”
 기다란 끈의 중간에 적당한 크기의 천을 덧댄다. 그 천에 돌을 올려놓고 끈을 빙빙 돌려 날린다. 그러면 원심력에 의해 돌은 멀리 날아간다.
 구조가 간단하니 쉽게 만들 수 있다. 게다가 원거리 무기니 충분한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싸울 수 있다.
 만들기 쉽다고 위력마저 약한 게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다윗은 골리앗을 돌팔매로 쓰러뜨렸다. 이 돌팔매를 날린 도구가 슬링이다. 제대로 사용하면 전사 한 명을 골로 보내는 무기인 것이다.
 거기까지 떠올리고 배낭을 뒤져 보았다. 배낭이 찢어진 바람에 안의 내용물은 모두 날아가고 없었다. 하지만 배낭의 주머니 안엔 실과 바늘, 주머니칼이 들어 있었다.
 칼로 배낭 조각을 적당한 크기로 잘랐다. 실과 바늘을 사용해 허리띠의 중간에 배낭 조각을 꿰매었다. 이걸로 원시적이지만 슬링을 만든 것이다.
 “이게 정말 책에서 본 대로의 위력을 발휘할까?”
 막상 만들어 보니 너무 볼품이 없었다. 볼품이 없는 모습을 보니 걱정이 앞섰다.
 “걱정은 나중에. 일단 실험을 해 봐야지.”
 과거에 책에서 본 슬링을 던지는 요령을 떠올렸다.
 일단 배낭 조각에 돌을 올려놓고 한 손으로 받친다. 다른 한 손으로 끈의 양쪽 끝 중 한쪽을 둘째손가락에 건다. 그리고 돌 받침 역할을 했던 손을 떼고 머리 위에서 휘둘러 돌을 가속시킨 다음 던진다. 그럼 목표로 한 곳에 돌이 날아가는 것이다.
 책에 쓰여 있는 요령대로 슬링을 던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형편없이 빗나가던 돌멩이들이 시간이 지나자 목표물에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땀이 온몸을 적실 정도로 연습을 하자 슬링에 맞은 나무의 몸통이 푹푹 패어 나갔다. 이 정도면 사람의 머리라도 충분히 깨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도면 쓸 만하겠어.”
 그걸 보고 그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만한 무기라면 충분히 제 몫을 할 것이다.
 슬링을 만들고 찢어진 배낭을 다시 실과 바늘로 꿰맸다. 그리고 흘린 물건을 찾기 위해 흑표범에게 쫓기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랜턴과 버너, 속옷 같은 것들이 자신과 흑표범의 발자국 양옆으로 드문드문 떨어져 있었다. 그것들을 챙겨 배낭에 넣으며 계속 흑표범의 발자국을 따라갔다.
 그렇게 한참 동안 발자국을 거꾸로 따르다 그는 놀란 얼굴로 우뚝 섰다.
 ‘그러고 보니…….’
 흑표범과 자신의 발자국은 백 미터 이상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자신은 무려 백 미터 이상 흑표범의 추적을 뿌리친 것이다.
 “내가 이렇게 빨리 달렸나?”
 단거리달리기 선수도 아니고 보통 사람이다. 보통 사람이 표범의 추적을 백 미터 이상 뿌리친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게다가 허리띠를 사용해 간신히 올라갔던 나무를 단번에 올라와 버렸다.
 “육체의 기능이 향상되었구나.”
 대주천을 이루며 육체의 기능이 향상되었다는 뜻이다.
 “그럼 암도 치료가 되고 있는 것이군.”
 몸의 기능을 이렇게 바꿀 정도로 강력한 기운이라면 암세포도 치료하고 있을 것이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육체가 근육질로 바뀌는 것을 보고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결과를 눈으로 확인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한결 가뿐한 걸음으로 발자국의 뒤를 쫓으며 물건을 챙겼다.
 얼추 물건을 다 챙기고 다시 길을 떠나려던 그는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표범의 발자국이 넓게 반원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놈은 나를 노리고 있다.’
 인간에게 당한 것을 분하게 여긴 것일까? 놈은 자신의 주위를 큰 원을 그리며 돌고 있었다. 그를 다시 노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갈을 주머니에 가득 채웠다. 그중 하나를 슬링의 천에 집어넣고 발자국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도망치면 안 된다.’
 등에는 눈이 없다. 도망치다 조금이라도 주의가 흐트러지면 놈의 먹이가 될 것이다.
 ‘내가 먹잇감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인식시켜야 해. 그것만이 사는 길이다.’
 아무리 덩치가 크고 흉폭하다 해도 습성으로 보면 고양이다. 고양이는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고 인식을 하면 덤비지 않는다.
 놈이 그런 습성이라는 게 본질. 놈의 무서운 겉모습은 그 본질을 가리는 포장에 불과하다.
 슬링으로 놈의 뼈 한두 개는 부러뜨릴 정도로 강력한 타격을 줘야 한다. 그래야 놈은 자신을 강한 적이라고 인식하고 덤빌 생각을 못 할 것이다.
 흑표범의 모습이 떠오르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그는 추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먼저 발견하여 아픔을 줘야 한다.
 그것만이 자신이 사는 길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을 하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강하고 흉폭해도 본질은 고양이. 고양이는 상대가 강하다고 인식을 하면 도망친다. 보통 사람이라면 두려움 때문에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을 것이다. 설령 거기까지 생각을 했더라도 감히 맹수의 뒤를 쫓을 엄두는 못 냈을 것이다.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거기에 걸맞은 해답을 찾는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 죽음의 공포를 억누른다.
 대주천을 이루며 그는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도 변해 가고 있었다.
 오감을 곤두세우고 주변을 경계하며 바람 길을 따라 발자국을 추적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발자국을 쫓다 얼어붙은 듯이 서 버렸다.
 자신이 쫓던 표범의 발자국 옆에 사람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이계에 온 뒤 처음으로 인간의 존재를 만난 것이다.
 발자국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모두 신발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그리고 발가락 사이가 벌어져 있었다.
 그걸 본 그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맨발이라는 것은 신발을 만들 정도의 문명이 아니라는 의미다. 발가락 사이가 벌어졌다는 것은 숲에 완전히 적응을 하였다는 뜻이다.
 즉, 아프리카의 원시 부족 정도의 문명을 가졌다는 뜻이다. 그 정도 문명의 사람이 자신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는 일이다.
 속도를 늦추고 바람이 자신을 향해 불 때만 발자국을 추적했다. 처음엔 두 쌍에 불과했던 발자국이 갈림길을 지날 때마다 점점 많아졌다.
 흑표범의 발자국이 깊어졌다. 자신을 쫓던 흑표범이 발자국의 주인을 인식하고 도망친 것이다.
 인간의 발자국은 발가락 쪽이 땅에 깊이 들어갔다. 인간들도 흑표범의 뒤를 따라 달린 것이다.
 이십 미터를 더 추적하자 흑표범의 발자국 위에 핏방울이 보였다. 핏방울은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땅에 넙죽 엎드려 포복을 하며 앞으로 나갔다. 그렇게 다시 십 미터가량을 전진하자 발자국의 주인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죽 옷을 입은 자들이 창을 들고 흑표범의 주위에 몰려 있었다. 흑표범은 창에 찔렸는지 온몸에 구멍이 뚫린 채 땅에 누워 있었다. 중간에 있던 가죽 옷이 돌칼로 흑표범의 배를 가르고 가죽을 벗겼다.
 현대인보다 머리 하나 정도 작은 체구를 가진 자들이었다. 가죽 옷 위로 드러난 팔다리는 인간보다는 짧지만 근육질이었다. 중간의 가죽 옷이 표범의 가죽을 벗기자 다른 가죽 옷이 나와 흑표범의 머리를 잘라 들었다.
 “취익! 우크루!”
 “취익! 카쿠르!”
 다른 가죽 옷들이 흑표범의 머리를 보고 기쁜 듯이 소리치며 몸을 흔들었다.
 그제야 가죽 옷들의 얼굴을 확인한 강인한의 얼굴이 굳어졌다.
 가죽 옷들의 머리는 돼지 머리와 흡사했다.
 그는 인간이 아니라 오크를 만난 것이다.
 오크들은 흑표범의 머리를 자르고 가죽을 벗겨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강인한은 숨은 곳에서 나왔다.
 “정말 큰일이군.”
 그는 오크들이 떠난 방향을 보며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인간의 가장 무서운 적(敵)은 같은 인간이라고 한다.
 이성이 없는 동물은 지혜를 동원하면 어떻게든 대응이 가능하지만 동등한 이성을 가진 인간에겐 그런 대응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옷을 만들어 입고 무기를 사용한다. 인간과 비슷한 지능을 가졌지만 종이 달라 대화가 통하지 않는 종족.
 최악의 상대를 만난 것이다.
 놈들의 거처와 행태를 알아야 대책을 수립한다. 그는 오크의 발자국을 쫓기 시작했다. 한 시간 정도 여유를 두었으니 들킬 염려는 없었다.
 갈림길에 접어들 때마다 수많은 발자국들이 합류했다. 사냥을 한 후 돌아오는 길인 것 같았다. 계속 발자국의 뒤를 쫓던 그의 얼굴에 놀란 빛이 떠올랐다.
 발자국들 사이에 신발 자국이 있었다.
 놈들은 맨발이었다. 신발을 신는 다른 종족이 있다는 뜻이다. 신발 자국들은 하나같이 질질 끌려 있었다. 오크들한테 이 신발의 주인들이 강제로 끌려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는 더욱 걸음을 빨리했다. 한 시간가량 떨어져 있으니 속도를 올려 봤자 아무 소용이 없고, 신발의 주인이 인간이더라도 구할 방법이 없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게 아니다.
 
 속도를 올려 삼십 분 정도 추적했을 때였다. 길에 신발 하나가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들어 살펴보았다. 가죽으로 만든 밑창에 끈을 묶도록 돼 있는 샌들이었다.
 떨어진 신발 옆에 손자국이 선명히 나 있었다. 그리고 손자국 옆에는 피가 떨어져 있었다. 그것을 보니 정경이 대강 그려졌다.
 신발의 주인은 넘어져 바닥에 손을 짚었다. 오크들은 신발의 주인을 걷어찼다. 신발의 주인은 피를 흘렸다. 오크들은 피를 흘리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신발의 주인을 끌고 갔다.
 마음이 급해졌다. 더욱 속도를 올려 발자국들의 뒤를 따랐다. 수많은 신발 자국 중 유독 하나의 신발 자국이 갈지자를 그리고 있었다. 갈지자를 그리는 신발 자국의 옆엔 손자국이 자주 보였다. 신발의 주인은 점점 지쳐 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속도를 올려 뒤를 추적하다 신발 한 짝이 벗겨진 여인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이계에 온 뒤 처음으로 본 같은 인간이었다.
 그는 황급히 여인의 상태를 살폈다.
 금발에 하얀 피부, 오뚝한 코, 튀어나온 광대뼈. 유럽인의 외모를 가진 여인이었다. 밀레의 만종이란 그림에서 본 것처럼 수수한 농부의 옷을 입었다. 여인의 가슴엔 창 자국이 나 있었다. 창에 가슴이 찔려 죽은 것이다.
 바람이 불어 여인의 치마가 펄럭였다. 치마가 펄럭이자 아무것도 안 입은 하체가 드러났다. 그 하체는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걸 본 강인한은 이를 악물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강 짐작이 갔다. 놈들은 여인을 끌고 가다 강간하였다. 신체 구조가 다른 놈이 강간을 하니 몸이 멀쩡할 리 없다. 여인은 강간의 충격 때문에 제대로 걸음을 못 걸었다. 그러자 오크들은 여인을 죽여 버린 것이다.
 그는 여인의 옷을 바르게 정리하고 수풀 속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여인을 향해 합장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불교를 믿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인의 죽음을 보니 이렇게라도 명복을 빌어 주고 싶었다.
 그는 여인의 시체를 뒤로하고 계속 발자국의 뒤를 쫓았다. 그러다 오크의 군락을 발견했다.
 수십여 개의 동굴이 뚫려 있는 거대한 절벽이었다. 사오십 마리 정도의 오크들이 그 동굴을 출입하고 있었다. 가끔가다 동굴로 여자들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서구인의 외모를 가진 여인들이었다. 그 여인들은 모두 오크들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는 숨을 죽이고 오크들을 관찰하다 그 자리를 떠났다.
 “여인들을 구해야 해!”
 그 모습을 관찰한 후 내린 결론이었다.
 인간이 다른 종족에게 노예로 잡혀 있다. 같은 인간으로서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인간이 있다는 것은 인간의 문명이 있다는 뜻이다.
 언제까지 숲에서 혼자 지낼 수는 없는 노릇. 숲에서 빠져나가 인간들의 도시로 가기 위해서도 저 여인들의 존재는 필요하다.
 문제는 현재로썬 아무런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흑표범을 사냥할 정도로 무기 쓰는 법에 능숙한 근육질의 오크가 무려 오십 마리. 자신이 아무리 날고뛰는 재주가 있어도 그런 놈들을 혼자 이길 수는 없었다.
 “책에선 대주천을 이루면 힘이 강해진다는데…….”
 기공류의 책엔 대주천을 이루면 여러 가지 능력이 생긴다고 적혀 있다. 물론 육체의 능력은 상당히 향상되었다. 그러나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큰 능력이 생긴 것 같지는 않았다.
 ‘그건 과장된 말일까?’
 현대인들도 단학을 수련하고 이삼 년만 지나면 소주천을 이룬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십 년 정도 수련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대주천을 이룬다. 그러나 그렇게 대주천을 이룬 사람들이 특별한 능력을 얻은 것을 보지는 못했다.
 ‘책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 수레가 넘는 선도 서적이 모두 공통되게 대주천을 이루면 특별한 능력이 생긴다고 하였다. 대주천을 이루자 육체의 능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된 것을 봐도 아주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문제는 현대라는 환경이다.’
 선도(仙道)는 사람[人]이 산(山)에 들어가 닦는 도이다. 즉 자연이 발달하여 기의 농도가 짙지 않으면 대주천을 했다 해도 실제로는 수련의 정도가 아주 낮은 것이다.
 지구는 산업혁명을 이루며 급격히 자연을 파괴하였다. 덕분에 기의 밀도가 낮아 아무리 수련을 하여도 그런 능력을 얻을 수가 없다. 반면에 이 세계는 기의 밀도가 매우 높다. 그러니 수련을 하면 그런 능력을 얻을 수가 있다. 당장 몸에 일어난 변화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내 문제는 깊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한참 동안 생각하다 얻은 결론이었다.
 대주천을 이루었다지만 실제로 제대로 수련을 한 것은 몇 달이 되지 않았다. 혈맥은 모두 열었지만 쌓아 놓은 기의 양, 즉 공력(功力)은 부족하다는 것이다. 기반이 될 공력이 부족한데 능력이 생겨날 리가 없었다.
 “축기(築氣), 기를 모아야 한다.”
 축기, 즉 공력을 쌓으면 능력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는 오크 부락에서 일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거처를 정했다.
 그리고 오크들의 동태를 감시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련에 열중하였다.
 그가 읽은 책에는 강장공(체질을 근본적으로 강화시키는 공법), 참장공(하체와 단전을 튼튼하게 만드는 공법), 내양공(오장육부를 튼튼하게 만드는 공법) 등 몸을 단련하는 공법이 수없이 많았다.
 그는 축기를 하는 한편 그런 공법들을 차례로 수련하였다.
 한 달이 지나자 숨을 한 번 몰아쉬면 단전에서 뜨거운 기운이 용솟음쳤다. 아무리 뛰어도 지치지 않았다. 몇 번 발을 구르면 순식간에 나무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때부턴 나뭇가지 사이를 건너뛰기 시작했다. 둥그런 나뭇가지 위에서 중심을 잡는 게 힘들어 수없이 나무 아래로 떨어졌다. 덕분에 팔다리가 부러져 버렸다. 숲에 먹을 게 풍족하지 않았더라면 굶어 죽었을 것이다.
 삼 개월이 지나자 몸이 점점 가벼워졌다. 그때부터 원숭이보다 빨리 나무 사이를 이동할 수 있었다.
 공법만큼 정성을 기울여 수련한 게 슬링을 다루는 법이다.
 아무리 몸이 튼튼해도 칼에 찔리면 피가 난다.
 무술이라곤 군대 태권도밖에 익히지 않았으니 근접전으로 오크를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시간이 나는 대로 틈틈이 슬링 날리는 연습을 하였다. 나중엔 오십 보 밖에서도 목표물을 정확하게 맞히게 되었다. 하지만 거기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힘이 늘어나니 그 힘을 못 이긴 허리띠가 그만 끊어져 버린 것이다.
 탄력이 있기론 사슴의 힘줄이 제일이란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그는 사슴을 잡을 결심을 하였다.
 ‘천생 덫을 놓아야겠군.’
 ≪숲살이≫엔 덫을 만드는 법이 도면까지 자세히 적혀 있었다. 대주천을 이룬 뒤 두뇌의 기능도 활성화되었다. 덕분에 도면의 상세한 부분까지 모두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끝을 뾰족하게 다듬은 나무창을 준비한 뒤 숲에 나 있는 짐승의 발자국들을 추적하였다.
 숲에는 수많은 동물이 남긴 발자국들이 있었다. 그 발자국들 중엔 흑표범 같은 거대한 맹수의 발자국들도, 갯과의 짐승들이 무리를 지어 다닌 발자국들도 있었다.
 그는 그 발자국들 중에 사슴의 발자국을 골라냈다. 이계에 떨어진 지 거의 일 년이 지났다. 이제 발자국들을 보고 그 짐승의 형태와 습성을 어느 정도 분류할 수 있었다.
 그렇게 계속 발자국을 골라내다 갯과 짐승들의 발자국을 보는데 머릿속으로 섬광이 스쳤다. 여인들을 구할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이다.
 ‘일단 사슴을 잡고…….’
 목표한 사슴의 발자국을 찾아낸 후 그 발자국을 계속 추적했다. 그러면서 사슴이 일정한 경로를 지나다니는 것을 알았다.
 사슴이 지나다니는 경로 몇 군데에 덫을 만들어 놓았다. 이틀이 지나자 예상했던 대로 사슴이 덫에 잡혔다.
 덫에 걸려 버둥거리는 사슴의 숨통을 단번에 끊었다.
 예전의 그라면 사슴을 죽이는 데 많이 망설였을 것이다. 숲에서의 생활에 나름대로 적응을 한 것이다.
 고기와 가죽은 따로 챙기고 힘줄을 모두 뽑아 음지에 말렸다. 말린 힘줄을 몇 겹으로 꼬고 가죽을 덧대 제대로 된 슬링을 만들었다.
 그 슬링으로 계속 돌을 날리는 연습을 하였다. 나중엔 백 보 거리의 목표물도 백발백중. 오십 보 안은 나무판자도 박살 낼 정도로 위력이 커졌다.
 그즈음, 수련이 더 이상 진척되지 않았다. 수련이란 대나무를 뚫는 것과 같다고 한다. 성장과 정체가 반복되는 과정의 연속. 성장의 과정이 끝나고 정체의 과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제 시작해야겠군.”
 아무리 수련을 해도 능력엔 부족함을 느꼈다. 하지만 진척이 안 되는 수련을 언제까지 붙잡고 있을 수는 없다. 이쯤에서 수련을 멈추고 여인을 구할 궁리를 해야 했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늑대 새끼들이 햇살 아래 몸을 뒹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사냥 나갔던 늑대들이 하나 둘 돌아왔다. 늑대 새끼들은 꼬리를 흔들며 어른 늑대들을 맞이했다. 어른 늑대들은 물고 온 고기들을 늑대 새끼들 앞에 내려놓았다. 늑대 새끼들은 꼬리를 흔들며 어른 늑대들이 가져온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공터는 뼈를 씹는 소리로 요란했다.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늑대들의 주위에 있는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그 나뭇가지 사이에서 눈이 번뜩였다.
 
 강인한은 나무 위에서 침착한 얼굴로 늑대들을 관찰하였다. 키가 인간의 허리까지 올 정도로 큰 놈들이었다. 그런 놈들이 무려 칠십 마리 이상 모여 있었다. 놈들이 풍기는 살벌한 기운 덕에 다른 짐승들은 얼씬도 하지 못했다.
 슬링에 돌을 재어 늑대들을 향해 날렸다.
 쐐액!
 돌은 화살처럼 늑대들에게 날아갔다. 그 돌에 얻어맞은 늑대들의 머리가 깨져 피가 줄줄 흘렀다.
 흥분한 늑대들은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다!”
 강인한은 나뭇가지 위에서 일어나며 손을 흔들었다. 늑대들은 크르렁거리며 그가 있는 나무로 접근했다.
 그걸 본 강인한은 넝쿨을 잡고 나무에서 나무 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늑대들은 크릉거리며 강인한의 뒤를 추적했다.
 나무에서 나무 위를 달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 뒤를 쫓는 늑대들의 동작도 점점 빨라져 갔다.
 계속 나무 위로 달리던 강인한은 나무를 건너뛰다 그만 미끄러져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커엉!
 그걸 본 늑대들은 속도를 올려 강인한의 뒤를 추적했다. 인간과 짐승의 거리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오크들의 거처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렸다. 순찰을 돌던 오크들이 당황한 얼굴로 이쪽을 보는 게 보였다. 그 순간 그는 다시 땅을 박차고 재빨리 주위의 나무 위로 올라갔다.
 강인한의 모습을 놓친 늑대들은 일제히 오크들을 덮쳤다.
 늑대들이 보기엔 인간이나 오크나 똑같은 두발짐승이었다.
 “취익! 카르크!”
 “취악! 카라다!”
 오크들은 후음(喉音)이 섞인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늑대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들은 오크들이 마을에서 달려와 늑대들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크들은 암컷과 아이들을 동굴에 밀어 넣고 늑대들과 어울려 싸우기 시작했다. 오십 마리의 오크와 칠십 마리의 늑대가 한데 어우러져 마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는 나무 위에서 차가운 얼굴로 그 광경을 관찰하였다. 창에 찔린 늑대들은 피를 흘리며 절룩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오크들의 몸도 늑대들의 발톱에 찢겨 피투성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는 그 광경을 보다 슬링을 날리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돌멩이는 오크의 머리를 두부처럼 파고들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오크의 머리가 폭탄에 맞은 듯이 터져 버렸다. 제대로 만든 슬링의 늘어난 힘이 결합해 이런 위력을 보인 것이다.
 갑자기 동료의 머리가 터지자 오크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덮친 늑대들은 오크들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그는 전황을 살피다 오크가 밀린다 싶으면 늑대를 향해 슬링을 날렸고, 늑대가 밀린다 싶으면 오크에게 슬링을 날렸다. 그렇게 몇 번의 과정을 반복하자 늑대와 오크들은 이성을 잃고 날뛰었다.
 그 틈을 타 강인한은 나무에서 내려와 여자들이 숨어 있는 동굴로 들어갔다. 늑대와 오크들은 들어가는 강인한의 존재를 조금도 의식하지 못했다.
 
 “취익. 마다카?”
 동굴을 지키던 오크가 그를 보더니 놀란 얼굴로 창을 겨누었다. 오크들은 외부의 습격이 있으면 항상 몇몇이 남아 암컷들을 지킨다.
 강인한은 그 오크를 향해 슬링을 날렸다. 뻑! 하는 소리와 함께 오크의 머리가 단번에 박살 나 버렸다.
 그는 피를 흘리며 쓰러진 오크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인간과 비슷한 몸을 보니 마치 살인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이다.
 “빌어먹을!”
 기분이 더러웠다.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오크의 몸을 타 넘고 황급히 목표했던 동굴 안으로 달려갔다.
 짚이 깔린 동굴 안엔 인간의 여자들이 두려운 얼굴로 한곳에 모여 있었다.
 “마다카!”
 그를 본 인간 여자들 중 누군가 놀란 얼굴로 외쳤다.
 “어서 나오시오! 시간이 없소!”
 강인한은 초조한 얼굴로 여자들을 향해 손짓을 하며 말했다. 푸른 눈을 한 여인이 강인한의 뜻을 눈치 채고 여자들을 향해 뭐라고 소리를 쳤다.
 여자들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하나 둘 일어났다.
 강인한은 여자들을 데리고 동굴 밖으로 나왔다.
 오크들은 늑대들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러다 강인한이 여자들을 데리고 나오자 놀란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틈을 드러낸 오크들을 향해 늑대들이 다시 덮쳤다. 오크들은 할 수 없이 늑대들과 다시 싸우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강인한은 여자들과 함께 그곳을 탈출하였다.
 
 오크들의 소굴을 뛰쳐나와 여인들을 재촉해 계속 도망쳤다. 그렇게 한나절을 도망치자 체력이 약한 여인들은 거친 숨을 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여인들이 쉬는 틈에 강인한은 주변을 살펴보았다. 오크들은 늑대와 싸우느라 정신이 없는지 아직까지 쫓아오지 않았다.
 여인들은 불안한 얼굴로 강인한을 힐끔거렸다.
 강인한은 미소를 지으며 여인들을 안심시켰다.
 여인들은 모두 다양한 머리 색에 다양한 눈동자 색을 가지고 있었다. 피부도 백인들처럼 희었는데 공해가 없어 그런지 살결이 모두 아주 매끄럽고 고와 보였다.
 강인한이 여인들을 관찰하는 동안 여인들도 강인한을 관찰하였다. 그중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여인이 그를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다카?”
 마다카?
 오크가 자신을 보고 부른 외침. 이 여인들이 자신을 보고 부른 호칭이었다.
 강인한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다카가 무엇을 지칭하는 줄은 모른다. 그러나 자신을 보고 마다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그게 자신에게 어울리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인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인들은 훅하고 놀란 숨을 쉬더니 자신들끼리 뭐라고 떠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강인한을 존경에 찬 얼굴로 보았다.
 그는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강인한.”
 “카리마.”
 여인들이 강인한의 말을 따라 했다. 그는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다시 말했다.
 “강, 인, 한!”
 “캉, 인, 한!”
 여인들이 말을 따라 했다.
 “붙여서 불러 봐요. 강인한.”
 “카리만.”
 “카리만.”
 “마다카 카리마!”
 “마다카 카르마!”
 여인들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따라 말했다.
 “끄응.”
 강인한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 이상 구개음화를 거쳐 이름이 바뀌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당신들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강인한은 손짓 발짓을 동원해 그들의 이름을 물었다.
 강인한의 손짓을 이해한 여인들이 서로 마주 보더니 자신의 이름들을 댔다.
 “밀라.”
 “마리.”
 “스아니.”
 “제이미.”
 ‘영어와 비슷하군.’
 여인들의 발음이 영어와 비슷했다.
 그는 손짓으로 여인들의 거처를 물었다. 보디랭귀지가 통했는지 여인들이 손짓으로 자신의 마을을 가리켰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그녀들을 마을로 안내하겠다고 손짓으로 말을 하였다. 여인들은 그를 향해 고맙다고 고개를 숙였다.
 여인들은 그를 이끌고 남동쪽으로 길을 떠났다. 여인들의 뒤를 따르는 그의 마음은 설레였다. 그는 드디어 인간의 마을로 들어가는 것이다.
 한참 길을 걷는데 여인들 중 덩치가 작은 푸른 머리 여인의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것을 신호로 다른 여인들의 배에서도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배고파요?”
 그는 배를 쓰다듬으며 입에 무엇을 집어넣는 시늉을 하며 여인들에게 물었다.
 여인들은 그의 손짓을 보더니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보고 그는 근처의 나무에 다가가 팔뚝으로 나무를 힘껏 후려쳤다. 지름이 이 미터가 넘는 나무가 흔들거리더니 과일들이 우르르 떨어졌다. 호흡을 멈추고 진기를 끌어 올려 신체를 단단하게 만드는 경기공(硬奇功)이었다. 순간적으로 무쇠만큼 단단해진 팔로 나무를 후려쳐서 이만한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마다카 카세르!”
 “마다카 카세르!”
 그 광경을 본 여인들은 놀란 듯 훅 하고 숨을 들이쉬더니 자기들끼리 뭐라고 떠들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여인들에게 과일을 먹으라고 손짓을 하였다. 여인들은 잠시 주저하다 하나 둘 과일을 먹기 시작했다. 그를 보는 여인들의 시선이 좀 더 우호적이고 친밀감 있게 바뀌었다.
 ‘마다카가 뭐지?’
 무슨 행동을 할 때마다 마다카란 말이 붙어 다닌다.
 그는 말과 손짓으로 마다카가 무슨 뜻인지 물어보았다.
 여인 중 한 명이 나뭇가지로 바닥에 숲을 그렸다. 그리고 그를 한 번 가리키더니 숲 옆에 사람을 그렸다.
 ‘숲에 사는 사람?’
 여인은 다시 그 사람이 활을 쏘는 그림을 그렸다. 그가 쏘는 활에 짐승들이 맞아 쓰러졌다.
 ‘궁수?’
 여인은 다시 사람이 검을 들고 짐승을 사냥하는 모습을 그렸다. 사람이 검을 휘두르자 맹수들이 쓰러졌다.
 ‘사냥꾼?’
 그리고 다시 여인은 그를 가리키며 마다카라고 말했다.
 다시 손짓으로 대화를 몇 번 하고 나니 마다카가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마다카는 숲에 사는, 활과 칼을 잘 쓰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런 숲에서 짐승들을 사냥하며 산다면 당연히 활과 칼을 잘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것일 것이다.
 마다카라 불리는 숲의 종족이 따로 있다는 것을, 자신이 그 종족으로 오해받고 있다는 것을 강인한이 알 리 없었다.
 
 여인들의 얼굴은 침울하기 그지없었다. 오크 마을에 끌려온 지 벌써 사 개월이 지났다. 그들은 그동안 오크들에게 당할 대로 당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여인들의 얼굴은 평정을 되찾았다.
 그녀들이 사는 마을은 숲을 개간하여 먹고사는 개척민 마을이었다. 개척민 마을에선 생존이 제일의 덕목. 꼼짝없이 죽을 줄 알았는데 살아남았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여유를 찾은 여인들은 호기심이 어린 얼굴로 강인한을 보며 소곤거렸다.
 어둠의 숲은 몇 개의 나라를 합친 것 이상으로 넓다. 그 숲에는 강한 순서에 따라 중심부에서 바깥쪽까지 고르게 온갖 짐승들이 분포해 살아간다.
 숲 외곽 쪽에 사는 짐승들은 약육강식의 숲의 세계에서 밀려나온 패배자들이다. 그러나 마다카는 어떤 인간들도 함부로 못 들어가는 숲의 중심부에 사는 숲의 부족이다.
 숲의 부족과 외부인은 서로 교역을 하지 않고 소가 닭을 보듯 서로를 대한다. 숲의 부족은 바깥세상에 나오지 않고 외부인들도 굳이 위험한 숲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바깥에 나온 숲의 부족은 어떤 용병이나 기사보다 뛰어난 전사로 그 명성을 날렸다.
 그런 마다카가 자신들을 구했다. 여인들의 관심이 향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숲의 부족은 입는 것도 다른가 봐.”
 여인들 중 나이가 어린 밀라가 숲의 부족의 옷차림을 보고 중얼거렸다. 숲의 부족이 입은 옷은 그들이 입은 옷과는 아주 다르게 보였다.
 “숲의 부족은 전부 벌거벗고 하체만 가리고 다닌다고 했어. 혹시 숲의 부족 주술사가 아닐까?”
 제이미가 뒤를 흘끔거리며 소곤거렸다.
 “아니야. 숲의 부족 주술사는 동물의 뼈로 만든 목걸이를 찬다고 그랬어. 숲의 부족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부족이라 들었어. 저런 식으로 옷을 입는 부족이 있나 보지.”
 그녀들이 바라보자 강인한은 그녀들을 안심시키려는 듯 씨익 웃어 보였다.
 “카르티카는 아닌 모양인데?”
 카르티카란 어떤 명목으로든 숲의 부족에서 쫓겨난 사람을 말한다. 카르티카는 부족에서 쫓겨나 그런지 대부분 무뚝뚝하고 퉁명스럽다. 저렇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 카르티카는 없었다.
 “혹시 카르타고가 아닐까?”
 카르타고는 숲의 부족에서 제일가는 강자를 말한다. 카르티카뿐 아니라 카르타고도 가끔 숲의 바깥으로 나온다. 숲의 부족에서 쫓겨나 갈 데가 없어 나오는 게 아니라 숲의 부족의 인정을 받고 세상 구경을 하러 나오는 것이다.
 “아까 팔뚝으로 나무를 후려치는 것을 봤지? 카르타고가 틀림없어!”
 팔뚝으로 아름드리나무를 후려쳐 과일을 떨어뜨렸다. 그 정도의 능력이라면 카르타고가 틀림없었다.
 게다가 이런 숲에서 활도 칼도 없이 맨손으로 돌아다닌다. 카르타고가 아니면 맨손으로 숲을 돌아다닐 리가 없다.
 카르티카 한 명이 용병 열 명의 몫을 해낸다고 한다. 카르타고는 그런 카르티카 열 명 이상의 힘을 가졌다고 한다. 그녀들은 그런 카르타고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카르마, 당신은 카르타고예요?”
 말리는 손짓과 발짓을 동원해 카르마라는 마다카에게 물었다.
 검은 머리의 마다카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들은 경외 어린 얼굴로 마다카를 보았다.
 
 강인한과 여인들은 이틀 동안 북동쪽으로 계속 걸었다.
 이틀 동안 여인들과 수화로 계속 대화를 나누며 숲과 하늘, 태양 같은 단어들을 하나 둘 배우기 시작했다.
 여인들이 글을 모르는 것을 보고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숲이나 하늘. 태양이란 단어를 가르쳐 달라고 나뭇가지를 내밀자 받아 든 여인은 글씨가 아닌 그림으로 사물을 표현한 것이다.
 ‘문명의 수준이 높지는 않군.’
 문명의 수준이 높으면 농부나 여자도 글을 배운다. 이 여인들이 글을 배우지 않았다는 것은 이 세계의 문명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참 동안 걷던 여인들이 피곤한 듯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나이가 어린 밀라라는 여인이 끝내 주저앉고 말았다. 다른 여인들이 일어나라고 재촉을 했다. 그러자 밀라는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강인한은 그녀의 발을 보고 혀를 찼다. 그녀의 발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무려 이틀 동안 낮엔 한 번도 쉬지 않고 걸었다. 군인들도 이렇게 행군을 하면 지친다. 게다가 그녀들이 신은 신발은 튼튼한 운동화가 아니라 헐거운 샌들이다. 발이 엉망이 되는 게 당연하다.
 그는 밀라를 번쩍 안았다. 여인들이 깜짝 놀라 강인한을 보았다. 그는 여인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소녀를 근처의 시냇가로 데려가 발을 깨끗이 씻기고 주물러 주었다. 밀라는 목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여인들이 경악에 찬 얼굴로 그를 보았다.
 긍지 높은 마다카가 여자의 발을 씻기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는 여인의 발을 씻긴 후 다른 여인들을 손짓으로 불렀다. 여인들은 모두 당황하여 어찌할 줄 몰랐다. 그러나 강인한이 계속 손짓을 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강인한에게 다가갔다.
 강인한은 시냇물에 여자들의 발을 씻긴 후 차례로 주물러 주었다. 여자들은 모두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는 여인들의 발을 힘주어 주무르며 혈맥이 통하고 피로가 풀리게 하였다. 그리고 여인들의 샌들의 끈을 조절해 발에 알맞게 맞춰 주었다.
 여인들은 그가 하는 대로 몸을 맡기고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자, 이제 갑시다.”
 강인한은 다시 그녀들에게 길을 떠나자고 손짓으로 말했다. 여인들은 서로를 마주 보더니 다시 길을 떠났다.
 
 그녀들은 그때부터 강인한에게 친근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이 친절한 전사가 그녀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하루를 더 가다 보니 멀리서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을은 숲을 경계로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각기 창이나 쇠스랑을 들고 그 울타리에서 순찰을 돌고 있었다. 그러다 여인들을 보고 놀란 얼굴을 하였다. 여인들은 반가운 얼굴로 소리를 지르며 마을로 뛰어갔다.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뛰어나왔다. 여자들의 가족이 여자들을 껴안고 눈물을 흘리며 반겼다. 여자들은 손짓 발짓으로 그동안의 경과를 설명하였다.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경외와 존경에 찬 얼굴로 강인한을 보았다.
 강인한은 뒷머리를 긁으며 사람들의 시선을 받았다. 한국에서의 그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타입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니 당황스러웠지만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촌장으로 보이는 늙은이가 그를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음식을 준비해 손짓으로 먹으라고 하였다.
 강인한은 촌장이 먹으라는 음식을 보고 입을 벌렸다.
 촌장이 준 음식은 검은 빵과 짚이 둥둥 뜬 풀죽 같은 음식이었다. 그 풀죽 같은 음식은 투박한 나무 그릇에 담겨 있었다.
 그는 촌장이 준 빵을 씹어 보았다. 빵이 아니라 모래를 씹는 것 같았다. 나무로 만든 숟가락을 들어 풀죽을 먹어 보았다. 속에서 구역질이 치밀어 올라왔다.
 한국에서라면 개도 안 먹을 음식이었다. 마을 처녀들을 구한 자신에게 이런 음식을 먹으라고 갖다 준 것이다.
 강인한은 촌장을 보았다. 촌장은 미소를 지으며 계속 먹으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것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이 세계의 수준을 대강 알 것 같았다.
 강인한은 음식을 먹는 시늉을 하다 숟가락을 놓았다. 촌장은 손짓으로 계속 먹으라고 하였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배를 문지르며 배가 부르다는 시늉을 하였다.
 그러자 촌장은 품에서 빨갛게 익은 과일을 하나 꺼내 더러운 옷에 쓱쓱 비비더니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그 과일을 먹으며 뒤집힌 속을 달랬다.
 ‘영락없는 중세 시대군.’
 중세 시대의 농노와 농부들은 대맥으로 만든 검은 빵을 먹었다. 그리고 가축이 먹는 귀리에 우유를 끓여 만든 풀죽을 쑤어 먹었다고 한다. 이들이 내놓은 음식이 영락없는 그것이었다.
 중세 시대에 글이라는 것은 일부 특권층만 아는 것이었다. 자신이 구해 준 처녀들은 모두 글을 모르고 있었다.
 숲이 지척에 있는데 과일을 귀하게 여긴다. 치안이 발달하지 않았거나, 수확한 것을 모두 영주 같은 권력자에게 빼앗긴다는 이야기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군.’
 저쪽 세계에선 어차피 고아인 몸이다. 집마저 팔아 버렸으니 지낼 곳도 없다. 힘이 강해졌다지만 현대 세계에선 쓸모없는 능력. 이 힘으로 차력 쇼나 하며 지내란 말인가.
 그런 판국에 사람이 사는 마을을 보니 이 세계에서 적응을 하며 지내볼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의식주에서 기본적인 생활수준이 너무 차이가 나니 갑갑하였다.
 억지로 음식을 먹은 후 시냇물에 가서 목욕을 하였다.
 그는 묵은 때를 벗고 시냇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창백했던 과거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햇볕에 그을려 살은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몸을 구성하는 근육이 모두 세세한 부분까지 발달이 되어 있었다.
 외모는 더욱 젊어져 십 대 후반으로 보였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와 있었다. 치료의 부작용으로 절반 이상 빠진 머리였다. 그 머리가 어느새 다시 자란 것이다.
 그는 시냇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홀린 듯이 보다 가슴을 쓰다듬어 보았다. 손 밑으로 탄탄한 근육이 만져졌다. 간이 회복되지 않았다면 호르몬 분비가 불균형해져 이 정도의 근육이 생성되지 않는다. 어느새 간암이 완치가 된 것이다.
 ‘살아났구나…….’
 그는 멍한 얼굴로 시냇물을 보며 생각했다.
 이 세계에 오니 단학의 진도가 너무나 빨리 나갔다. 그래서 희망을 가지고 단학에 정성을 기울였다.
 중간부턴 여인들을 발견하고 그녀들을 구하기 위해 더욱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여인들을 구하는 데 워낙 정신이 팔리다 보니 암에 대해선 잊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몸이 완치가 된 것이다.
 시냇물을 보는 강인한의 얼굴엔 서서히 기쁨의 빛이 어렸다.
 혼자서 감격을 삭일 때였다.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뒤를 돌아보니 푸른 머리의 처녀가 얼굴을 붉히며 새 옷을 풀밭에 내려놓았다. 그가 입은 옷은 너무 낡아 못쓰게 된 것이다.
 그는 시냇물에서 나와 소녀가 준 옷을 들었다.
 수풀 이곳저곳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까악 하는 소리가 났다. 여자들이 수풀에 숨어 그를 훔쳐보다 알몸을 보고 소리를 지른 것이다.
 그는 얼굴을 붉히며 옷을 가지고 사람들이 안 보이는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이 세계도 잘 적응하면 살 만하겠군.’
 그는 옷을 입으며 생각했다. 공해가 없어 그런지 마을의 처녀들은 하나같이 곱고 예뻤다. 그런 처녀들이 자신을 보고 아이들처럼 소리를 지르다니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힘이 세다는 것은 이쪽 세계에선 미덕이었다. 잘만 하면 어떻게든 살 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을 입고 자신의 복장을 살펴보았다. 꺼끌꺼끌한 천으로 만든 헐렁한 튜닉이었다. 신발은 가죽으로 만든 밑창에 끈을 달아 놓았다. 천으로 만든 허리띠가 튜닉에 딸려 왔는데 허리띠의 한쪽엔 가죽 주머니와 단검이 매달려 있었다. 그는 허리띠로 튜닉을 묶고 가죽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그 주머니엔 자신의 소지품들이 모두 들어 있었다. 다음으로 그는 단검을 뽑아 보았다. 햇살에 단검의 칼날이 하얗게 빛났다.
 단검을 보자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복장에 단검이 포함되어 있다. 이 세계의 치안이 그리 좋지는 않다는 뜻이다.
 옷을 입고 마을에 들어가니 촌장이 자신의 마을에 머물러 달라고 손짓으로 부탁을 하였다. 맹수와 몬스터가 숲에서 자주 출몰하니 도와 달라는 뜻이었다.
 고개를 끄덕여 승낙을 하였다. 이쪽 세계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른다. 이쪽 세계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알려면 이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강인한이 승낙을 하자 사람들의 얼굴에 기쁜 빛이 떠올랐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맹수가 습격하는 마을이었다. 그 같은 전사가 마을에 머문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마을엔 남는 집이 없었다. 그래서 그를 딸린 식구가 적은 농부 가족과 함께 지내게 하였다.
 
 이불을 덮고 자리에 누웠다. 어느새 밤이 깊었다. 낮에 하도 고생을 한지라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하지만 눈은 말똥말똥하고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인간의 거처에서 잠을 자는 것이다. 이불의 부드러운 촉감이 오히려 어색했다.
 “아아…….”
 “흐흠…….”
 그때 옆방에서 신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남녀가 일을 벌일 때 나오는 신음이었다.
 그 소리를 듣는 강인한의 얼굴이 붉어졌다.
 농부 가족의 집엔 벽이 없었다. 지저분한 천으로 방과 방 사이를 가려 그걸로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것이다.
 ‘이거 제대로 적응하려나 모르겠군.’
 강인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시간이 지나자 신음이 사라졌다.
 그는 눈을 감고 장을 청하였다.
 막 잠이 들 때였다. 온몸이 근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몸을 긁자 벼룩들이 그의 몸에서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이거 정말 간지러워 미치겠군.’
 얼마나 간지러운지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는 몸에서 피가 나도록 손으로 피부를 마구 긁어 댔다. 그때 벽 역 할을 하는 천이 펄럭이더니 하얀 손이 그의 등을 어루만졌다.
 깜짝 놀란 그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시냇물에서 목욕을 할 때 옷을 가져다준 푸른 머리의 처녀였다. 그녀는 부부의 딸이었다. 처녀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그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그는 속으로 기함을 토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여자를 안을 것인가.
 그는 여자의 손을 부드럽게 밀치며 거절의 뜻을 표하였다. 여자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계속 그에게 접근하였다. 그녀의 손이 하체로 들어가자 그는 기겁을 하며 그 손을 잡았다.
 그가 더욱 단호한 태도로 거절의 뜻을 표하자 여자는 서운한 얼굴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억지로 다시 누워 잠을 청하는데 주먹만큼 커다란 바퀴벌레가 그의 몸 위를 기어 다녔다.
 ‘이 세계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 모르겠군.’
 강인한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주석
 
 * 슬링(Sling)
  슬링은 ‘투석(投石) 끈’이라고 불리는 무기로, 끈 가운데 탄환을 싸는 가죽이나 천이 있고 그 끝에 끈이 붙어 있는 안대 같은 모양이다.
  구조는 매우 간단해서 전체 길이는 일 미터가량이고 무게는 0.3kg이 채 안 된다.
  슬링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속한 국가와 고대 이집트 파라오의 군대 그리고 고대 그리스로 계승되었다.
  슬링이 무기로서의 유용성을 갖는 것은 활이 관통력으로 적을 살상하는 것과는 달리 탄환의 충격으로 적을 쓰러뜨리는 것이며, 방어 도구가 금속으로 만들어졌다고 할지라도,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활은 상대를 관통해야 하지만 슬링은 명중하기만 하면 그 부분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예를 들면 팔이나 다리에 명중시켜 그 부분의 뼈를 부러뜨려 중상을 입힐 수 있는 것이다.
  크세노폰은 그의 저서 ≪소아시아 원정기(Anabasis)≫에 로도스 섬의 투석병(돌팔매병)이 장궁을 갖춘 페르시아의 궁병보다 더 낫고 사격의 정확성에서도 우월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투석병은 궁병에 비해 간격을 넓게 잡아야 하고 활보다 열등하다고 여겼지만, 사실은 앞뒤 간격을 넓게 잡을 필요도 없이 밀집대형으로 대항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제정 로마 시대의 트라야누스 황제는 투석병을 세워 부대를 밀집대형으로 취했다.
  그러나 슬링을 효과적으로 다루는 데는 활보다 훨씬 조직적인 훈련이 필요했다.
  기나긴 슬링의 역사도 크로스 보우처럼 강화된 활의 등장으로 차츰 정규 무기로서의 위치가 미약해져 갔다. 그리고 어느샌가 전쟁터에서 그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판타지 라이브러리
 
 
 감옥에 갇히다
 
 스코필드 성.
 테이블 위엔 비슷한 양식의 두 개의 두루마리가 놓여 있었다.
 매서운 눈을 가진 삼십 대 후반의 남자가 그 두 개의 두루마리를 번갈아 가며 심각한 얼굴로 읽었다. 그는 스코필드 영지의 영주인 바이탄 남작이었다.
 바이탄 남작의 옆엔 로브를 입은 매부리코의 늙은이가 눈을 빛내며 앉아 있었다.
 바이탄 남작은 다 읽은 두루마리를 늙은이에게 건넸다. 그리고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쳤다. 깊은 생각에 잠겼을 때 하는 특유의 표현이었다.
 “흠…….”
 늙은이는 두루마리를 읽으며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스코필드 영지의 하나밖에 없는 마법사이자 바이탄 남작의 유일한 참모인 콘라드였다.
 바이탄 남작은 콘라드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이제 슬슬 몸을 일으키실 때가 된 것 같군요.”
 콘라드가 말했다.
 
 일라니엘 왕국을 제국으로 끌어올린 위대한 황제, 샤를마느 대제大帝가 혼수상태에 빠진 지 십 년이 지났다.
 대제를 대신해 섭정을 맡은 황제의 장자 이솔라 황자는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그 그늘에서 다른 황자들은 저마다 계승권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황자들이 거느린, 혹은 황자들을 등에 업은 세력들은 암중으로, 혹은 노골적으로 싸우기 시작했다. 싸움은 점점 격해졌고 세력들은 저마다 자기편을 늘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다 드디어 그에게까지 포섭의 권유가 온 것이다.
 바이탄 남작은 야망이 큰 사내였다. 스코필드 영지는 일라니엘 제국의 가장 촌구석, 어둠의 숲에 인접한 영지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몬스터가 쳐들어오고 땅은 메말라 소출이 나오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런 쓰레기 같은 영지에서 세월을 보낼 수는 없었다.
 그는 황제가 쓰러지자 기회가 온 것을 직감했다. 그때부터 영지민을 쥐어짜 세금을 배로 늘렸다. 세금을 못 내는 놈들은 주저 없이 노예로 팔아 버렸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기사를 후히 대접하고 용병들을 모집했다. 그리고 그들을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두 개의 두루마리는 1황자 이솔라와 2황자 유트로에게 온 것이다.
 각기 자신의 편에 들라는 내용이었다. 이 구석진 곳의 영주에게 손길을 내밀 정도로 황자들은 세력에 목말라 있다. 드디어 그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눈을 감고 있는 바이탄 남작의 얼굴은 은은히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그만큼 흥분하고 있는 것이다.
 ‘하긴 오래 참았지.’
 콘라드는 그런 바이탄 남작을 보며 생각했다.
 바이탄 남작은 열두 살 때 시중드는 시녀가 자신의 발치에 물을 쏟자 바로 목을 베어 버릴 정도로 폭급한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무려 십 년이란 기간을, 때를 기다리며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이쪽입니다.”
 콘라드는 두 개의 두루마리 중 하나를 내밀었다. 샤를마느 황제의 장자인 이솔라 황자가 보낸 밀서였다.
 “이쪽인 이유는?”
 “권력 승계의 명분은 항상 장자에게 있습니다. 세력의 힘이 균등할 때는 명분이 있는 쪽이 유리하지요.”
 “하지만 이솔라 황자는 무능하지 않소?”
 “무능한 게 아니라 지나치게 마음이 착한 거지요. 난세에 걸맞은 황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에겐 명분이 있고 황태후가 있습니다. 유트로 황자는 난세에 걸맞게 똑똑하고 영리하지만 사람을 낮추어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쓸모가 없어지면 버림을 받을 것입니다.”
 “명분이 있는 쪽이 낫겠군.”
 한참을 생각하던 바이탄 남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렁줄을 당겼다.
 그러자 눈이 실처럼 가는, 영리해 보이는 기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스코필드 영지의 기사단장인 치아니였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기사들과 용병들을 모두 모아라. 그리고 감독관을 데리고 마을을 모두 돌며 열다섯 이상의 사내들은 남김없이 징발해라! 때가 되었다!”
 “드디어!”
 치아니의 눈이 빛났다.
 
 숲을 개간해 먹고사는 화전민 마을이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밭에서 힘겹게 일을 하고 있었다. 각박한 삶을 사는 사람답게 마을 사람들의 손은 나뭇등걸처럼 거칠었다.
 그 화전민 마을로 한 무리의 사람이 들어왔다.
 남색의 튜닉에 푸른 모자를 쓴 비대한 사내를 선두로 한 기사와 병사들이었다.
 “아이고, 나으리. 어서 오십시오.”
 일을 하던 사람들은 모자를 벗고 뚱뚱한 사내를 향해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면서 불안한 눈으로 뒤에 있는 기사와 병사들을 흘낏거렸다. 사내가 병사들을 데리고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뚱뚱한 사내는 사람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통통한 손으로 얼굴의 비지땀을 닦으며 말했다.
 “인사는 됐으니 사람들을 불러 모으게.”
 “아직 세금 낼 때가 되지 않았는데…….”
 “그 일 때문에 온 게 아니야. 마을 사람들을 모두 불러. 다른 할 말이 있으니.”
 “알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급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사람들이 하나 둘 집에서 나왔다.
 나온 사람들은 불안한 얼굴로 통통한 사내와 병사들을 번갈아 보았다.
 통통한 사내는 감독관이었다.
 감독관은 농민에게 일을 시키고 세금을 부과하는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이다. 그는 영주를 대신해 농민을 처형할 권한마저 가지고 있다.
 그러니 저승사자보다 무서운 존재가 감독관이다. 그 감독관이 하인 몇 명만 데리고 오던 여느 때와는 달리 병사들을 데리고 온 것이다.
 항상 거들먹거리던 평소와 달리 기사들을 대하는 감독관의 태도는 몹시 공손하였다.
 사람들이 다 모인 것을 확인한 감독관은 손에 든 두루마리를 양쪽으로 펼치더니 크게 읽었다.
 “곡식과 생명의 여신 네미의 가호를 받은 위대한 일라니엘 제국의 군주 샤를마느 폐하가 네미 여신의 가호에도 불구하고 안티네미 여신의 시기를 받아 병마를 앓으신 지 어언 십 년이 다 되었다. 샤를마느 폐하가 혼수상태에 빠지신 까닭에 바른 뜻을 밝히지 못하셨지만, 제국의 황권은 폐하의 장자이신 이솔라 전하께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다른 황자들이 안티네미 여신의 유혹을 받아 황권의 적법성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일로 논쟁을 벌이길 어언 오 년, 이제 말이 아닌 창과 칼로 대화를 할 정도가 되었도다. 우리 스코필드 영지의 영주이신 바이탄 남작은 이 사태를 애석히 여겨……. 그러니 어서 창을 들고 위대한 대업에 동참하여라.”
 감독관은 내용을 다 읽고 두루마리를 접었다.
 농민들은 눈을 끔벅거리며 감독관을 보았다.
 그런 농민들을 한심하다는 얼굴로 보며 감독관이 말했다.
 “듣고도 모르느냐? 너희를 병사로 징발한다는 이야기다. 어서 무기를 챙겨라. 시간이 없다.”
 농민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러다 모두 힘없는 걸음으로 각자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농민들은 솜으로 안을 채운, 갑옷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솜옷과 목창을 들고 마을 앞으로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영주는 그 영지민에 대해 재판권과 처형권, 징집권이 있다. 즉 생사여탈의 모든 권한이 있는 것이다. 그런 영주의 징집권을 거부할 권리가 영지민들에겐 아예 주어지지 않았다. 영주가 죽으라면 영지민은 죽는 시늉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죽어야 하는 것이다.
 농민들의 창은 색과 길이가 제각각이었다. 이 시대의 병사는 징집령이 떨어지면 스스로 무기를 장만해야 한다.
 기사들이 병사들을 향해 눈짓을 하였다. 병사들은 창을 들고 마을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행여 징집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잡기 위해서였다. 그런 병사들이 들고 있는 창도 제각각. 그들 또한 다른 화전민 마을의 농민들이었다.
 기사들은 영지에 속해 있는 다섯 마을에서 쓸 만한 장정들을 모조리 데려가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어느새 모두 병사의 무리에 합류하였다.
 “여보, 제발 무사히 돌아오세요.”
 “여보, 이걸 가져가세요. 주먹밥이에요. 배고플 때 드세요. 흑흑흑.”
 “이건 애들 먹여.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무슨…….”
 “얘야, 이걸 가져가거라. 사제의 축복을 받은 부적이다. 이것만 있으면 창과 칼이 널 피할 것이다.”
 “어머님, 너무 걱정 마세요.”
 가족들이 모두 병사들에게 달라붙어 있는지라 장내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기사들은 얼굴을 찌푸리고 그런 소란을 지켜보았다.
 그 혼란의 중간에서 한 청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 소란을 지켜보고 있었다.
 기사들의 눈이 그 청년에게 쏠렸다. 장정들이 모두 병사의 무리에 합류하자 마을의 사내는 그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니 자연히 눈에 뜨인 것이다.
 이제 막 소년기를 벗어난 듯한 청년이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특이하게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대는 왜 징집에 응하지 않는가?”
 병사들의 선두에 있던 기사들 중 가장 앞에 서 있는 기사, 치아니가 물었다.
 “난, 이 영지 사람, 아니다.”
 청년은 말이 서투른 듯 아주 투박하게 말했다.
 기사들은 흥미로운 얼굴로 청년을 보았다.
 검은 머리와 검은 눈, 갈색의 피부를 가진 인간은 이 대륙에서 북부인밖에 없다.
 서부인은 대부분 눈동자 색과 머리색이 다양하다. 반면 북부인은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북부인의 이목구비는 다른 서대륙인처럼 선명하고 뚜렷하다. 다만 햇볕에 오래 노출되어 피부가 갈색에 가까울 뿐이다. 그러나 저 청년의 이목구비는 일반적인 북부인과는 다르게 오밀조밀하였다.
 ‘동대륙인인가?’
 기사들의 선두에 있는 기사는 그런 청년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했다.
 서대륙 건너편에 있는 동대륙인이 저런 외모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허, 죽고 싶으냐? 감히 뉘 앞에서 반말이냐?”
 기사가 생각에 잠긴 사이 감독관이 청년의 무례를 질책하며 채찍을 휘둘렀다.
 청년은 한발 뒤로 물러섰다. 채찍이 청년의 발치에 떨어지며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 서슬에 아낙네와 여자들은 어깨를 떨었다. 그러나 청년은 멀뚱한 얼굴로 감독관을 보았다.
 그걸 본 감독관은 정말 분노했다. 영지민들은 그를 저승사자처럼 두려워한다. 감독관은 그런 대접에 익숙해져 있다. 그런데 청년은 소가 닭을 보듯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건방진 놈!”
 감독관은 청년의 얼굴을 향해 채찍을 휘둘렀다. 감정을 담아 휘두르는, 제대로 된 채찍질이었다. 청년은 얼굴을 찌푸리며 한 손을 들었다. 감독관의 채찍이 청년의 팔목에 휘리릭 감겼다.
 감독관은 채찍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채찍은 청년의 팔목에 감겨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감독관의 얼굴이 붉어졌다.
 청년, 카르마는 감독관을 노려보았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 뚱보가 채찍을 휘두르나?
 노려보는 카르마의 눈엔 노기가 어렸다.
 카르마는 채찍에 감긴 팔을 홱 잡아당겼다. 감독관의 몸이 앞으로 딸려 오다 넘어져 버렸다.
 그 광경을 보는 농민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생사여탈의 권한을 가진 감독관에게 평민이 반항을 하였다. 이 시대의 기준으로 보면 정말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이다.
 기사들이 굳은 얼굴로 일제히 칼을 뽑았다. 전쟁은 시작도 안 했는데 이런 하극상이 벌어졌다. 놈을 죽여 흐트러진 군기를 잡아야 한다.
 그런 기사들을 본 카르마의 얼굴도 굳어졌다. 자신은 아무 잘못도 안 했다. 그런데 뚱뚱한 놈이 채찍을 휘두르더니 뒤이어 기사들이 칼을 꺼내는 것이다.
 그들의 대치를 보던 늙은 촌장이 나서서 말했다.
 “아이고, 기사님들, 저 사람은 이제 산을 내려온 마다카입니다.”
 기사들의 얼굴에 놀란 빛이 떠올랐다.
 마다카는 어둠의 숲에서 사는 숲의 부족을 말한다. 숲의 부족원은 어지간한 용병 서넛쯤은 단숨에 무찌를 정도로 강하다고 알려져 있다. 눈앞의 사내가 그 마다카라는 것이다.
 ‘어쩐지…….’
 그제야 치아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다카는 알려진 것보다 알려지지 않은 것이 더 많은 신비의 종족이었다. 그런 마다카라면 이런 외모를 가질 수 있다.
 다른 기사들도 청년을 관찰하다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의 몸은 상당한 단련을 한 듯 나이에 맞지 않게 근육으로 꽉 짜여 있었다. 농사일로 단련하기엔 불가능한 근육이었다. 게다가 청년은 칼을 뽑는 기사들을 보고도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았다. 한낱 평민이 검을 보고 이럴 리가 없다.
 “칼을 집어넣어라. 마다카라면 세상의 예절을 모를 것이다.”
 치아니가 말했다.
 그러자 기사들은 혀를 차며 칼을 집어넣었다.
 마다카는 전사로 이름이 높지만 야만인으로도 이름이 높다.
 치아니는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다.
 “마다카가 어떻게 이 마을에 머물러 있지?”
 “얼마 전에 우리 마을의 처녀들이 어둠의 숲에 있는 오크들에게 끌려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이 마다카가 처녀들을 불쌍히 여겨 오크들에게서 구해 주었습니다.”
 “이 마다카 혼자서 말이냐?”
 “예, 나으리.”
 기사들의 얼굴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어둠의 숲은 알려진 곳보다 알려지지 않은 곳이 더 많은 험지였다. 이 마을도 어둠의 숲의 가장 외곽을 개발하여 만든 마을이었다.
 그 어둠의 숲에 사는 오크라면 다른 지역의 오크보다 최소한 두 배는 더 강하다. 그 오크가 모여 사는 마을이라면 기사단이 모두 몰려가도 토벌을 할까 말까이다.
 그런데 이 마다카가 혼자 힘으로 오크들에게서 사람들을 구해 주었다는 이야기다.
 “마다카, 이름이 무엇인가?”
 치아니가 다시 물었다.
 “카르마.”
 카르마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강인한이란 이름이 구개음화를 거쳐 자연스럽게 카르마로 바뀐 것이다.
 예의 없는 말에 성질 급한 기사들이 다시 검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촌장이 허리를 굽실거리며 말했다.
 “아이고, 나으리들. 카르마는 이제 막 우리말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말이 서투르더라도 이해해 주십시오.”
 “검을 집어넣어라. 괜한 시비를 벌일 필요는 없다.”
 기사들은 못마땅한 얼굴로 카르마를 보다 검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치아니가 말을 이었다.
 “마다카 카르마, 그대가 한 행동은 아주 무례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몰라서 그렇다고 이해를 하겠다. 마다카는 세상에 나오면 항상 그 무용(武勇)으로 인해 세상에 명성을 날렸다. 어떠냐? 우리 영지에 있는 것도 인연일 터. 우리의 싸움에 함께 참여하지 않을 테냐? 보수는 섭섭지 않게 주겠다.”
 카르마는 고개를 갸웃하며 옆 사람을 보았다. 옆에 있던 사람이 천천히 기사의 말을 반복하여 들려주었다.
 “무례… 무용… 이해… 무슨 뜻이냐?”
 카르마는 다시 옆 사람에게 물었다. 옆 사람은 손짓 발짓으로 그 말뜻을 전해 주었다.
 그제야 기사의 말뜻을 이해한 카르마는 얼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한참 동안 기사의 제의를 생각하던 카르마는 고개를 저었다.
 “싫다.”
 전쟁이라면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반대편 진영도 같은 인간이다. 몬스터나 맹수를 토벌하여 사람을 돕는 일이라면 몰라도 살인을 하라니. 남의 나라, 남의 전쟁에 끼어들어 살인을 할 마음은 없었다.
 기사들은 선두 기사의 제의를 거절한 카르마를 건방지다는 표정으로 보았다.
 “인연 끝났다. 난 이만 떠나겠다.”
 그런 기사들의 얼굴을 보고 카르마는 말했다. 마을에 머문 지 어언 두 달이 되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마을 사람들과는 정이 들었다. 하지만 권력자와 앙금을 남긴 채 마을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기사들을 비켜 지나가려고 하였다. 그때 치아니가 말을 몰아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카르마는 눈살을 찌푸리며 치아니를 보았다. 그러자 치아니가 묘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넌 갈 수 없다.”
 “왜 갈 수 없는가? 난 이 영지에 소속된 사람이 아니다.”
 카르마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니다. 이 영지의 모든 것은 영주님의 것. 이 영지에서 나는 소출을 먹은 이상 너도 영주님의 소유다. 그러니 우리와 함께 전쟁에 나서야 한다.”
 “단장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기사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단장의 말은 농노를 뜻한다. 농노는 빚이 많아 자신의 몸을 판 사람이거나 죄를 지어 노예가 된 사람을 말한다.
 아무 관계가 없는 타인이 그 지역의 소출을 먹었다고 어떻게 그 영지의 노예가 된단 말인가?
 단장이 한 말은 이 시대의 기준으로 봐도 다소 무리가 있는 말이었다.
 “아, 자넨 남부가 고향이라 마다카에 대한 소문은 못 들었겠군.”
 치아니는 흥미로운 눈으로 카르마를 보며 말했다.
 “소문요?”
 “그래. 마다카는 성격이 억세기 그지없지만 일단 상대에게 복종을 하면 그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충성을 바친다. 일단 꺾기만 하면 쓸 만한 부하 한 명을 얻는 것이지.”
 세상에 퍼진 마다카에 대한 소문은 대부분 용맹하지만 단순한 전사이자 야만인이었다. 게다가 카르마는 말까지 서툴렀다. 그것이 카르마를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단순한 사람으로 오해하게 만든 것이다.
 “난 너희들에게 복종하지 않는다.”
 카르마는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카르마는 우리 영지의 공기를 마시고 음식을 먹었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의 소유다. 내가 그것을 힘으로 증명하지.”
 치아니는 카르마의 말을 흉내 내며 말에서 내렸다. 농노와 농민은 아무리 많아 봤자 화살 받이에 불과하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전력은 기사와 용병. 그러니 한 사람의 용병이 아쉬운 판국이다. 마다카는 뛰어난 전사이다. 그를 자신들의 진형에 합류시킨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치아니는 말에서 내리며 검을 뽑았다.
 “누가 놈에게 검을 주게.”
 흥미진진한 얼굴로 사태를 구경하던 기사들 중 한 명이 카르마의 발치에 검을 던져 주었다.
 카르마는 굳은 얼굴로 발치에 떨어진 검을 보았다. 저자가 자신을 향해 왜 검을 겨누는지, 자신이 왜 검을 들고 싸워야 하는지 지금 벌어지는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검을 들어라.”
 치아니가 말했다. 카르마는 발치에 떨어진 검을 들었다. 손에 느껴지는 묵직한 감촉이 무척 낯설었다.
 치아니는 미소를 지으며 카르마에게 검을 겨누었다. 그 검에서 살을 저미는 예기가 풍겨 왔다.
 카르마는 물었다.
 “나와 싸우자는 것인가?”
 치아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카르마가 말했다.
 “난 검을 다룰 줄 모르니 내 식대로 싸우겠다.”
 “마음대로.”
 카르마는 허리에 차고 있던 사슴 가죽 힘줄을 꼬아 만든 슬링을 들었다.
 ‘저게 뭐지?’
 기사들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그것을 보았다. 무기는 그 필요성에 의해 발전한다. 슬링은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에서 그 환경에 맞추어 발전한 무기였다. 역사의 발전 방향이 다른 이 세계에는 슬링이란 무기가 아예 없었다.
 사슴 힘줄을 몇 겹으로 꼬아 만든 기다란 끈. 그 중간에 덧댄 둥글고 널찍한 사슴 가죽. 저 단순하기 짝이 없는 도구로 무슨 싸움을 한단 말인가?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카르마는 단단한 자갈을 들어 사슴 가죽 위에 놓았다. 그리고 머리 위로 슬링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기사들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명성이 자자한 숲의 부족이 돌멩이나 만지작거리나?”
 치아니는 검을 들고 카르마에게 다가왔다. 카르마는 머리 위로 슬링을 빙빙 돌리며 간격을 벌렸다.
 카르마의 얼굴엔 긴장의 빛이 스쳤다. 몬스터나 맹수와는 싸워 본 적이 있지만 인간과 싸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돌팔매를 돌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며 벌이 날갯짓하듯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다. 치아니는 그 소리를 무시하며 카르마에게 접근했다. 그 순간 카르마는 슬링을 날렸다.
 슬링에서 벗어난 돌멩이는 빛과 같은 속도로 치아니에게 날아갔다.
 상상을 벗어난 속도를 보고 치아니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는 다급히 검을 들어 돌멩이를 걷어 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돌멩이는 한발 빨리 치아니 갑옷의 견갑 부위를 때렸다. 뻑! 하는 소리와 함께 견갑이 안으로 움푹 파였다. 어느새 치아니의 왼쪽 팔이 힘을 잃고 덜렁거렸다.
 활의 유효사거리가 이백 보라면 슬링의 유효사거리는 그 절반인 백 보에 불과하다. 그러나 활이 관통력으로 사람의 몸을 꿰뚫으면 슬링은 탄환의 타격력으로 상대의 뼈를 부러뜨린다.
 사정거리는 활에 비하면 짧으나 위력은 훨씬 높다는 말이다. 아무리 갑옷으로 몸을 보호했더라도 피와 살을 가진 인간. 육체가 견딜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은 타격을 받았으니 뼈가 부러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크윽!”
 치아니는 부러진 왼쪽 어깨를 오른손으로 감싸 안고 무릎을 꿇었다. 극도의 통증으로 그의 얼굴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 순간 카르마는 뒤도 안 돌아보고 어둠의 숲을 향해 달려갔다.
 “멈춰라!”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카르마는 숲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스코필드 성의 중앙 홀.
 홀의 안쪽, 상단의 의자엔 바이탄 남작이 앉아 있었다. 그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앞을 보았다.
 치아니를 비롯한 한 무리의 기사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치아니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다. 신관이 치료를 해 줬지만 그의 어깨는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것이다.
 바이탄 남작의 얼굴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에서 점차 분노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명색이 기사단장이란 것이 한낱 돌멩이에 당했다는 말이지. 스무 명이 넘는 기사들이 놈이 도망치는 것을 보고만 있었고.”
 기사들의 얼굴이 치욕으로 인해 붉게 변했다.
 출진을 앞두고 영지의 기사단장이 돌멩이에 맞아 어깨뼈가 부러졌다. 그 광경을 수많은 병사들이 봤으니 소문이 퍼질 것은 불문가지. 기사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것이다.
 “숲의 부족은 과거에 소드 마스터도 죽였습니다. 이제 소드 익스퍼트에 입문한 단장이 당했다고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지요.”
 옆에 있던 콘라드가 미소를 지으며 바이탄 남작을 달랬다.
 “그것은 한낱 전설이 아닙니까? 그 전설에서도 놈들이 일대일로 소드 마스터를 죽였습니까? 떼로 몰려 비겁하게 기습을 하였지요!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지 않습니까. 명색이 기사단장이란 위인이 돌멩이에 당했습니다!”
 바이탄 남작의 입에선 불이라도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
 오래된 야망을 위해 이제 첫걸음을 떼려는 참이다. 그런데 첫 시작부터 애먼 놈이 초를 친 것이다.
 “한낱 야만인이 떼로 덤벼든다고 당하는 존재가 소드 마스터입니까? 치아니 단장의 갑옷을 보십시오.”
 콘라드는 길길이 날뛰는 영주를 달래며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바이탄 남작은 분노를 억누르고 치아니 단장의 갑옷을 보았다. 치아니 단장의 갑옷의 어깨 부분은 안으로 움푹 파여 있었다.
 “보십시오. 석궁도 아니고 한낱 돌멩이로 갑옷을 저렇게 우그러뜨리고 상대의 뼈를 부러뜨렸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그렇군.”
 간신히 성질을 누그러뜨린 바이탄 남작이 말했다.
 칼도 뚫지 못하는 게 기사들의 금속 갑옷이었다. 메이스 같은 타격 무기도 타격력을 신체 내부로 전달하기만 하지 갑옷 자체를 저렇게 우그러뜨리진 못한다. 그런데 한낱 돌멩이로 저런 타격을 주었다는 것이다.
 “일이 벌어진 직후 놈의 거처를 뒤져 보았습니다. 이런 물건이 나오더군요.”
 콘라드는 대기하고 있던 하인을 손짓해 불렀다. 하인이 삼십 센티미터 길이의, 앞부분이 투명한 유리로 된 뭉뚝한 원통을 가져왔다.
 그는 원통을 받아 앞부분을 눌렀다.
 투명한 유리 부분에서 불이 켜졌다.
 사람들은 훅 하고 숨을 들이쉬며 그 불을 보았다.
 “마법이다.”
 기사들 사이에서 숨죽인 소리가 터져 나왔다.
 콘라드는 보란 듯이 그 물건을 높이 쳐들고 말했다.
 “파이어 볼 같은 마법이 아닙니다. 불의 마법을 봉인한 스크롤도 아닙니다. 앞에 작은 돌기를 눌렀는데 이렇게 불이 들어옵니다. 놀랍게도 이 불은 뜨겁지도 않습니다. 기사의 갑옷을 우그러뜨리는 무기가 있습니다. 이런 이상한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습니다. 숲의 부족에겐 우리가 모르는 무엇이 있다는 말이지요.”
 “모르는 무엇이라니?”
 “제 생각엔 마다카들이 고대의 던전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아티팩트나 그 무기의 존재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 무기가 보기에 단순하다고 단순한 무기 같습니까? 인간이 검을 만들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단순해 보이지만 그 정도 위력을 갖춘 무기를 만들려면 수백 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마다카가 그런 문명을 가졌다곤 믿지 못하겠습니다.”
 던전이란 말에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어둠의 숲 안쪽은 아직 미지의 영역이었다. 마다카 같은 존재가 아니고서야 누구도 어둠의 숲을 들어가지 못한다. 던전을 발견했다고 해도 이상한 게 아니다.
 사람들의 눈이 탐욕으로 물들었다. 던전이 있다면 그 안에는 어떤 보물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놈은 이미 숲 속으로 도망가지 않았소?”
 “마을 사람들을 심문해 보았습니다. 놈은 바깥세상을 구경하러 숲에서 나왔다고 하더군요. 그럼 이 정도의 일로 돌아가진 않았을 것입니다. 눈치를 보다 다시 밖으로 나오려고 하겠지요. 그때 기회를 봐서 잡으면 됩니다.”
 “알겠소. 모두 콘라드의 말을 들었겠지? 이번에는 놈을 절대 놓치지 말도록.”
 바이탄 남작은 기사들을 노려보았다.
 “알겠습니다. 이번엔 저희들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잡겠습니다.”
 기사들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병사들은 숲을 수색하였다. 기사들이 살기등등한 얼굴로 병사들을 지휘했다.
 카르마는 나무 위에 숨어서 그 병사들을 지켜보았다. 나무가 하늘까지 맞닿아 있는 숲이었다. 수색이라 하여도 나무 위까지 일일이 올라갈 수는 없는 일. 그가 숲에 들어온 이상 잡기는 틀린 것이다.
 낮 동안 숲을 수색하던 병사들은 날이 이슥해지자 마을로 돌아갔다. 이 숲은 어둠의 숲과 연결돼 있다. 맹수와 몬스터 천지인 숲에서 밤을 보내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밤이 되자 밤 짐승들이 하나 둘 출몰하기 시작했다. 재칼과 비슷하게 생긴 콜드렉 무리가 사람 냄새를 맡고 그가 있는 나무 주위를 돌았다. 별빛을 받아 도깨비불처럼 눈이 빛나는 콜드렉 무리를 보는 카르마의 얼굴엔 짜증이 어렸다.
 ‘어떡하지? 숲을 가로질러 다른 곳으로 갈까?’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둠의 숲은 밝혀진 부분만 아프리카 대륙만 한 넓이였다. 게다가 밝혀진 부분보단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더 많았다. 자칫 길을 잃어버리면 죽을 때까지 못 나올 수도 있다.
 ‘여기서 좀 더 기다려야 되겠군.’
 징집이 끝났으니 이제 조금만 있으면 출진을 할 것이다. 그때까지 기다렸다 도망치면 될 것이다.
 수색이 점점 뜸해졌다. 그러다 사흘이 지나자 수색이 완전히 멈추었다.
 나흘째 되는 날, 병사들이 기사들과 함께 마을 밖으로 떠나는 것이 보였다.
 그것까지 확인하고 그는 숲에서 나왔다.
 
 
 다음에 계속...

댓글(9)

금검무적    
열왕대전기.우앙.
2016.02.09 00:31
녹아버린    
열왕대전기... 한때 책방에서 기다리고 봤었는데.
2016.06.04 09:26
너솔    
시작과 중간은 그럴싸한데 마무리가 아주 요상한 작품입니다 ㅡ 추천하기 어렵겠습니다
2018.01.20 05:13
김영한    
황권이란 표현은 영.. 왕국이면 왕권이지, 왕국에서 황권은 또 뭐야.. 과거의 대한제국이라는 허황된 표현 때문인지 이후로 왕국을 높이기 위해 황국이라는 표현을 종종 쓰이는 게 보이는데 보기 불편..
2018.09.24 10:23
소설독파    
다시보기 마무리가 참 아쉽네요
2019.02.09 04:26
SGNerzhul    
아프리카 2배 이상 수준의 숲이 강수량 문제도 있지만.. 존재한다치고, 중세 인간이 아프리카 만큼이라도 파악가능하다니ㄷㄷ
2019.04.20 15:12
FLOVE    
아니 근접전을 못할거같아도 목창정도는 일단 만들어서 가지고다녀야지ㅋㅋ 대책이없는 주인공일세ㅋㅋ
2019.10.18 07:35
쩔었어    
책으로 한번 읽고 옛 생각이 나서 한번더 정주행합니다. 강추합니다.
2020.01.17 00:18
소년점푸    
작가가 이젠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내 생에 기억나는 작품중 하나다.
2022.07.08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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