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몬스터로드 [E]

몬스터로드 1권-1

2015.01.06 조회 2,473 추천 23


 프롤로그
 
 창공을 나는 새는 바람의 친구가 되고
 물가를 가르는 어린 물고기의 발악은 그대로 노래가 된다.
 세상의 모든 일이 평화롭다면
 하늘과 함께 구름을 친구 삼아 술을 마시리라.
 
 - 떠돌이 시인 ‘미산’의 시 중에서-
 
 버려진 땅.
 인간의 손길을 거부하는 어둠의 대지.
 사람들이 몬스터랜드라고 단순한 이름으로 부르는 이 땅은 기존에 가졌던 ‘룰린 섬’이라는 지명을 잃어 버렸고 어떤 이유에선지 대륙 전체에 왕성한 번식을 이루어낸 인간의 능력도 몬스터랜드까지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오직 몬스터만이 존재하는 미지의 섬.
 하지만 섬과 대륙이 연결되지 않은 것을 축복이라 여기지 못하는 어리석은 무리가 있었는데 바로 지능을 가졌다는 인간들이다. 어깨 위에 달아 놓은 머리만 있으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이 종족은 아무도 가지 못하는 미지의 땅을 개척하고 싶었다.
 지금도 여전히 인간의 손길을 거부하는 이 어둠의 세계에 백 년만의 불청객이 찾아들었다. 하지만 만신창이가 되고도 끝까지 항전의 몸부림을 멈추지 않았던 불청객들도 결국은 죽음을 피해 도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후퇴다! 모두 마법진으로 이동하라!”
 어두운 숲 속.
 온몸을 무거운 갑옷으로 도배하고도 모자라 투구까지 눌러쓴 털보기사는 하나씩 쓰러져 가는 부하들을 보며 통한의 후퇴명령을 내렸다. 시원스럽게 뻗은 그의 눈썹은 가늘게 떨렸고 가슴에 자랑스럽게 그려진 린핸제국 제1기사단 문장은 끝없이 초라해졌다.
 황제는 무력을 중시하는 제국답게 늘씬한 롱소드 문양을 기사단에게 하사했지만 이 순간만은 아무런 위용을 떨치지 못했다. 그나마 만약을 대비해 대륙까지 이동할 수 있는 워프존을 만들어 놓은 것이 그들에게는 큰 위안이었다.
 털보기사는 명예를 버리고 부하들의 안전을 택했지만 적을 놓아주지 않는 몬스터들 덕분에 후퇴도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20명이 넘는 그의 부하들은 겨우 7마리의 오우거를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살던 대륙에서라면 간단히 처치했어야 할 몬스터를 지금은 공격은 고사하고 방어를 하면서도 조금씩 상처를 쌓아가는 형국이었다. 불안한 제국의 정세 때문에 기사단의 최고 실력자들이 원정에서 빠진 것이 그들에겐 치명타가 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그들이 전멸하는 시간은 그리 멀지 않은 듯했다.
 “조금이라도 물러서라!”
 그 순간, 다급한 상황을 보다 못한 노인의 칼칼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장의 목소리에도 꼼짝 않던 기사들은 그의 말에 죽음을 각오하고 한 발씩 물러섰다.
 “파이어 월!”
 노인의 캐스팅이 끝나자 기사들과 오우거 사이에 잠시나마 벌어진 틈으로 절묘하게 불벽이 생겨난다. 기사들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화끈한 열기에 급히 뒤로 물러났지만 몇 명은 작열하는 불 속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꾸물거릴 틈이 없다! 어서 후퇴하라!”
 부하들에게 여유가 생기자 털보기사는 다시금 후퇴를 명령했고 그의 뒤에서 ‘파이어 월’을 펼친 린핸제국 궁중 대마법사는 무리한 마법 운용으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깨끗한 하얀 로브에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노인의 백발이 푸근한 인상과 대조적인 모습으로 보였다. 자신의 거처인 궁전에서는 괴짜 노인이라고 불릴 만큼 농담을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그였지만 지금은 그런 여유를 드러낼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테르만님! 일어나세요!”
 테르만이라 불리는 마법사의 옆에는 가늘게 찢어진 두 눈에 눈물을 모으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이름이 히로시로, 테르만의 수제자이자 딸 같은 존재였다. 청색 머리에 어쩐지 믿음이 가지 않는 엷은 눈썹과 보기 좋게 튀어나온 광대뼈가 인상적인 여자였다.
 “히로시, 나도 늙었구나. 날 좀 잡아 주려무나.”
 제자의 부축을 받으며 무거운 몸을 일으키는 그의 눈에 후퇴를 위해 자신의 옆을 스쳐가는 기사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마법은 금방 사라진다. 저놈들의 식삿거리가 될 수는 없지. 어서 가자.”
 테르만은 힘겨운 몸을 가까스로 추스르며 돌아섰다. 그러자 부하의 후퇴를 지켜보던 털보기사가 그에게 다가왔다.
 “테르만님. 제가 모시겠습니다.”
 “관두게. 난 제자가 있으니 기사들과 먼저 마법진으로 가게.”
 자존심이 강한 테르만은 제자의 부축은 인정하면서도 자신을 보호하려는 기사대장의 손길은 거부했다.
 그의 성격을 알고 있는 기사대장은 어쩔 수 없이 퇴각하는 부하들을 따랐다. 기사대장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테르만은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는 제자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위험하니 어서 가자. 무리를 했더니 시원한 맥주가 생각나는구나. 얼른 가서 주방장을 닦달해야겠다.”
 “조심하세요.”
 둘은 빠르진 않지만 쉬지 않고 이동을 강행했다.
 그 시간.
 크아아!!! 쿵! 쿵!
 ‘파이어 월’에 쓰러지지 않고 버텨낸 오우거 2마리가 동료를 죽음으로 이끈 인간들을 빠르게 추격했다. 큰 덩치에 어울리는 발자국 소리는 그들의 움직임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신호음과도 같았지만 도망가는 입장에서는 공포를 느낄 만큼 거대한 소리였다.
 “파이어 버스트!”
 오우거가 바로 등 뒤까지 추격해오자 히로시는 테르만을 부축하던 손을 내려놓고 재빨리 마법을 펼쳤다.
 퍼펑!
 끄윽…
 그녀는 궁중 대마법사의 수제자답게 한 발 앞서 다가오는 오우거에게 깔끔한 마법을 펼쳤고 추격의 숫자를 하나로 줄였다. 하지만 마법사의 약점인 연속공격의 불리함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신체적인 능력이 딸리는 그녀는 나머지 한 마리를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마법을 준비하기에도 벅찬 시간.
 쉭~~
 동료를 잃은 오우거는 자신이 들고 있는 도끼로 믿기 힘들 정도의 커다란 파공성을 울리며 히로시를 위협했다.
 히로시가 죽음의 공포를 잠시나마 느꼈을 때,
 “파이어… 붐!”
 제자를 부축하고 있던 테르만의 힘겨운 캐스팅 소리가 들렸다.
 쾅!
 오우거의 가슴에서 폭발을 일으킨 공격으로 인해 방금 전까지 살아 움직이던 생물은 시체를 남기기도 아까운 듯 잔인하게 분해됐고 그때서야 히로시는 안전한 상태에 이르렀다. 하지만 마법을 펼친 장본인은 비릿한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테르만님!”
 히로시는 스승이 펼치는 마법에 잠시 멍해 있다가 놀라서 소리를 내질렀다. 연약한 손길로 겨우겨우 테르만을 일으키고 남들이 보면 답답할 정도로 힘겨운 발걸음을 움직였다.
 “큭… 히로시…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아무말도 하지 마세요. 일단 마법진까지 가보죠. 힘내세요.”
 거친 숲길을 황궁 최고 마법사와 그의 제자는 겨우겨우 헤쳐 나갔다. 처진 발걸음으로 힘겹게 이동을 계속하던 그들은 온몸이 땀으로 젖는 찝찝함을 느낄 사이도 없이 오직 내지르는 걸음에만 매달렸다.
 그들이 걷는 주위로는 오크들의 시체며 고블린의 잘려진 머리가 굴러다녔지만 오늘 아침부터 지겹도록 보아온 터라 그리 역겹지는 않았다. 사방에 널린 전투력이 약한 몬스터들의 시체는 자신들의 작품이었다. 처음에 오크를 만날 때만 해도 자신만만하던 그들의 행로가 이제는 전투를 일삼는 이들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비참한 모습을 그려내고 있었다.
 “저 나무만 돌면 마법진이 보여요.”
 히로시는 기억을 되살리며 40미터 남짓 남은 거대한 나무를 주시했다.
 “헉헉… 어서 가자꾸나.”
 테르만은 끝이 보인다는 생각에 젖 먹던 힘까지 짜내며 발을 움직였다. 옆에서 히로시가 부축을 하긴 했지만 만신창이가 된 그의 몸으로는 무척이나 먼 거리였다. 그렇게 그들이 목표가 된 나무에 20미터까지 접근했을 때,
 쿠오오오오!!!
 숲 전체를 뒤흔드는 장엄한 괴성이 울려 퍼졌다.
 “미노타우루스…….”
 그들이 바라본 곳에는 빛나는 도끼를 들고 소의 머리를 가진 미노타우루스들이 빨간 눈을 빛내며 있었다. 이 강력한 몬스터들이 노리는 대상이 바로 자신들임을 알아채고 테르만은 죽음이 눈앞에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의 제자는 마치 이런 상황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엷은 미소를 그렸다.
 “호호호!!! 드디어 때가 되었네요. 여기가 마지막이에요. 테르만님.”
 “히로시…….”
 테르만은 갑자기 변해버린 제자의 말투에 머리가 멍해졌다.
 “힘들었단 말이에요. 마법진에 남겨진 기사들에게 변명거리를 만들려면 뭔가 위험한 일이 있어야 하니까요.”
 “무슨……?”
 “모르겠어요? 난 당신의 제자로 평생을 늙어갈 생각은 없단 말이에요. 알다시피 이미 난 6서클을 마스터한 천재 마법사예요. 이 상태라면 다음 황궁 마법사는 내 차례가 된다는 말이죠. 물론 당신이 없어져야 가능하지만.”
 이제 겨우 20대 후반을 달리는 히로시는 분명 천재 마법사라 불릴 만큼 어린 나이였다. 그리고 스승을 바라보는 그녀의 사악한 눈빛은 지금 꺼낸 말이 거짓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호호. 저 녀석들은 당신이 좀 처리해 봐요. 난 이만 가겠어요. 행복한 시간을 즐기세요. 호호.”
 히로시는 그 말을 남기고 스승으로부터 차갑게 등을 돌렸다. 그리고 다급히 뜀박질을 시작한 히로시의 입에서는 테르만을 기절시킬 만큼 충격적인 말이 튀어나왔다.
 “살려주세요! 어디 계세요! 대장님!”
 모든 길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히로시였지만 자신이 길을 잃어버린 듯 소리를 지르며 기사들이 몰려오도록 만들었다. 그녀의 의도는 쉽게 성공했고 테르만의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선 미노타우루스들은 기사들을 경악으로 몰고 갔다.
 “흑흑…! 테르만님은… 저희들을 위해서… 위험을 자청하셨어요……. 저희들에게는 어서 이곳을 빠져나간 뒤… 마법진을 폐쇄하라는 말을 남겼어요.”
 히로시는 거구의 미노타우루스들을 보며 두려움과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기사들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모든 말이 거짓이지만 기사들은 테르만을 구하기 위해 굳이 위험을 무릅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굳어진 얼굴을 풀었다. 그리고 처연히 자신들을 바라보는 노인을 뒤로 하고 그곳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 이럴 수가……!”
 테르만은 자신이 처한 위험보다 아끼는 제자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에 더욱 침통해 했다. 자신의 일행이 완전히 시야에서 벗어나자 테르만은 망연자실한 채 죽음을 기다렸다. 배신을 당한 불쌍한 노인이라고 해서 사정을 봐줄 일이 없는 미노타우루스의 도끼가 힘차게 그의 몸으로 날아들었다.
 몬스터랜드를 침입한 어리석은 인간들은 배신과 절망이라는 인간 내면에 가장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사악함을 끝으로 보여주며 막을 내렸다.
 
 “뭐라 했느냐?”
 린핸제국의 젊고 야심만만한 황제 린핸은 얼굴을 붉히며 부하들을 바라봤다. 만신창이가 된 갑옷과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할 겨를도 없이 자신에게 달려온 충성스런 부하들이었다. 선두에는 수염이 가득한 털보기사와 붉은 피로 물든 로브를 입은 청색머리 마법사가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몬스터랜드는 인간들이 넘볼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느냐!”
 린핸은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부하들이 못마땅하다 못해 허탈하기까지 했다. 군사력만 따진다면 대륙 최고를 자랑하는 린핸제국이었다. 친위대라는 기사단이 따로 있긴 하지만 그들을 제외한 기사단 중에 가장 강한 집단이 제1기사단이다. 그런 그들이 이처럼 비참한 모습을 보이자 또 다른 분노가 일었다.
 “임무 완수는커녕 궁중 대마법사까지 잃고 돌아오다니 그러고도 너희들이 린핸의 최고 기사들이란 말이냐! 그리고 3개의 기사단이 출발했는데 어찌 너희들만 돌아왔느냐!”
 “죄송합니다. 수중몬스터에게 공격을 당하는 통에 다른 기사단은 몬스터랜드에 닿지도 못하고 전멸했습니다.”
 털보기사는 머리를 땅에 박으며 연신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린핸은 고개 숙인 털보기사가 못마땅했지만 나름대로 뛰어난 군주의 자질을 가진 이답게 조금씩 얼굴을 풀었다. 이미 지나간 일은 화를 낸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그들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판단이 서면 적당한 선에서 용서해야 한다. 그것이 린핸이 가진 군주로서의 모습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니 더 이상 추궁하지는 않겠다. 대신 뒷마무리에 최선을 다하도록 하라.”
 “네. 알겠습니다.”
 털보기사는 믿음직스런 목소리로 대답하며 그제야 얼굴을 폈다.
 “저기…….”
 “할 말이 있느냐?”
 린핸은 아직까지 슬픈 모습을 보이는 히로시를 바라봤다. 그녀는 여자가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늘게 몸을 떨고 있는 모습으로도 히로시가 얼마나 큰 슬픔에 잠겨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테르만님의 마지막 말은… 마법진을 폐쇄하라는…….”
 “어째서냐?”
 “혹시 그 사악한 몬스터들이 제국으로 넘어올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에서…….”
 히로시는 속내와 다르게 황제에게 잔뜩 주눅이 든 말투를 뱉어냈다. 모든 일이 자신이 꾸민 일이었지만 가증스러울 정도로 훌륭하게 연기를 소화했다.
 “그 일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해라.”
 “네, 감사합니다.”
 린핸은 오른팔을 저어 부하들이 물러갈 것을 명령했다. 그때 린핸의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황후가 웃으며 말을 꺼냈다. 20대가 갓 넘은 듯한 그녀는 누구도 따라가기 어려운 아름다운 자태와 함께 조금은 사악해 보이지만 매력적인 눈을 가진 여자였다. 얼마 전 이전 황후의 사망으로 인해 황제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녀는 히로시를 빤히 쳐다보며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 마법진은 서로 오고 갈 수 있는가?”
 그녀의 말투는 상대에 대한 존중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전형적인 왕족의 말투였다. 그렇지만 질문을 받은 히로시는 불쾌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흠. 그렇다면 마법진을 폐쇄할 때 한쪽 길만 없애버릴 수도 있는가?”
 “그게 무슨……?”
 히로시는 황후의 말을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내 말은 몬스터랜드에서 대륙으로 넘어오는 길은 폐쇄하되 대륙에서 몬스터랜드로 가는 길은 막지 말라는 말이다. 가능한가?”
 “네. 쉽지는 않지만 가능합니다. 다만 한 번 폐쇄한 길을 다시는 연결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만들려면 몬스터랜드로 직접 가야 합니다.”
 “그건 상관없지.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라.”
 히로시는 황후의 의도를 알 수 없었지만 권력이라는 벽에 막혀 순순히 황후의 의도에 따랐다.
 “황후, 무슨 생각이오?”
 황제의 질문에 황후는 숨겨두었던 속내를 밝혔다.
 “요즘 범죄자들이 많이 늘어나지 않았나요? 그들을 일일이 처형해 버린다면 폐하의 손만 더렵혀진답니다. 차라리 그들을 몬스터랜드로 보내 버린다면 국민들은 살 길을 열어 주시는 황제의 자비로움을 느낄 것입니다. 게다가 사형 집행으로 일어나는 자질구레한 일에 골치를 썩이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그녀의 말대로 한다면 어차피 죽일 사람들에게 선심을 쓰는 것처럼 생색을 내면서도, 실상은 처형과 마찬가지 결과를 얻는 셈이다. 게다가 결과는 같지만 일을 실행할 때 린핸은 자신의 인자함을 조금이나마 내세울 수도 있다. 머리를 굴릴 줄 아는 사람이라면 비릿한 술책이라 치부해 버릴 수도 있겠지만 본래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행동은 속에 담겨져 있는 의미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의미가 더 중요한 법이다.
 “그렇군. 뜻대로 하시오.”
 결국 린핸은 황후의 계획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몬스터랜드와 대륙을 잇는 마법진은 한 쪽에서의 일방통행만이 가능해진 상태에 놓였고 나라에서 정한 중한 범죄자는 모두 몬스터랜드로 내몰리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들이 살아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고 섬을 탈출할 방법도 없었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 관대한 처벌을 받는 것 같지만 예외 없이 죽음이라는 불운한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신세였다.
 
 
 1.여자가 된 남자아이
 
 비릿한 궁전의 벽을 타는 바람은
 역겨운 냄새를 실어온다.
 화려한 와인에 취해 더러운 입을 놀리는
 그대들은 칼칼한 흑맥주의
 정겨움을 아는가.
 -떠돌이 시인 ‘미산’의 시 중에서-
 
 
 10년 후.
 린핸제국의 외곽.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농사를 지을 땅마저 얼마 되지 않는 한적한 시골마을.
 몇 안 되는 마을사람 모두가 농사를 지으며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는 곳. 이웃을 위하는 마음으로 정을 지켜온 사람들.
 그들이 일궈낸 땅의 이름은 제국사람 누구도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토리안이라고 한다.
 오랜 제국전쟁으로 황폐해진 영토였지만 마을사람들의 부지런함으로 위기를 극복한 노력의 땅이었다. 누군가가 빈민을 구제해주길 바라는 어리석은 기다림보다는 스스로의 몸을 학대하며 땀을 흘리는 노력을 선택한 지 이제 5년. 마을사람들의 똘똘 뭉친 한마음은 작은 기적을 일으켰고 결국 시골마을은 예전의 활기차고 평화로운 모습을 완벽하게 되찾을 수 있었다.
 겨우 10여 가구가 살아가는 작은 마을에서도 가장 외곽의 허름한 오두막에는 마흔이 훌쩍 넘어버린 중년사내들이 발을 구르며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이보게. 빈슨. 너무 걱정하지 말게.”
 빈슨이라 불린 중년남자는 친구의 위로에도 여전히 긴장한 얼굴을 펴지 않았다.
 “제발 모두 무사하길…….”
 그는 안타까운 소망을 뱉어냈다. 그리고 빈슨의 옆에서 안타까운 감정을 같이 하는 다른 중년사내들도 뭔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
 “응애!!! 응애!!!!!!”
 중년 사내들이 지키고 있던 오두막 안에서 아이의 힘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사내들의 표정이 밝아졌고 허름한 오두막의 문을 열며 중년여인이 나타났다. 그녀의 입에는 밝은 미소가 그려져 있었고 힘든 일을 마친 듯 땀에 절어 있었다.
 “건강한 남자아이예요. 빈슨씨. 축하해요.”
 그녀의 말에 빈슨의 얼굴은 더 할 수 없는 환희로 물들었다.
 “하하! 축하하네! 빈슨!”
 “이 사람! 마흔네 살 나이에 아빠가 되다니!! 하하!”
 “고맙네. 모두. 고마워.”
 빈슨은 친구들의 축하를 받으며 오두막 안으로 들어섰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환희의 순간. 제국전쟁이 휴전으로 막을 내린 뒤 그 동안의 삶은 노동이 전부였다. 5년이라는 긴 시간을 힘겹게 살아온 자신에게 이런 선물이 안겨지다니! 그는 꿈만 같았다.
 “빈슨씨. 축하해요. 자! 아들을 안아 보세요.”
 빈슨이 오두막을 들어서자 누워 있는 산모의 옆에서 시중을 들던 여인이 그에게 아기를 안겨 주었다. 빈슨은 떨리는 손으로 행여나 아기가 아파할까 조심조심 아기를 받았다.
 “응애!!! 응애!!!”
 여전히 울고 있는 아기의 얼굴 위로 굵은 물줄기가 떨어졌다. 환희의 눈물. 아빠의 눈물. 아기는 자신에게 눈을 맞추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아빠를 보고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여보…….”
 그때 힘이 빠진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빈슨은 아기를 보던 눈을 돌려 자신과 함께 아기를 만든 부인을 바라보았다. 바닥에 누워 축 처진 몸을 했지만 빈슨의 눈에는 천사보다 아름답게 보였다. 빈슨은 무뚝뚝한 평소의 성격과는 달리 아기를 품에 안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고맙소, 여보. 정말 고맙소.”
 울음 섞인 빈슨의 말에 부인은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부부의 눈에는 힘찬 울음을 내뱉고 있는 아기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들은 같이 눈물을 흘렸다. 아기의 얼굴도 온통 눈물에 젖었지만 40 평생에 환희를 처음 느껴보는 중년부부의 얼굴에서도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5년 후.
 “이보게. 빈슨. 언제까지 토리를 여자로 키울 건가?”
 “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저 아이를 전쟁터로 보낼 수는 없으니.”
 빈슨은 친구와 대화를 나누며 멀리 개울에서 물장난을 치는 아이를 바라봤다. 특이하게도 모든 아이들은 여자처럼 보였고 그 중에는 자신의 아들인 토리도 끼여 있었다.
 “난 못해. 어떻게 얻은 자식인데 전쟁터로 보낼 수는 없어.”
 빈슨은 다짐 같은 혼잣말을 남기며 토리가 태어났던 때를 회상했다.
 기쁨, 환희.
 하지만 토리가 태어나고 3일 후 제국기사단의 문장을 단 기사가 마을로 찾아왔고 그때부터 토리는 아들이 아닌 딸이 됐다. 제국기사가 새로 생긴 법이라며 발표한 포고문의 내용은 대강 이런 식이었다.
 
 1. 휴전중인 길딘제국과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기사를 양성한다.
 2. 제국의 모든 남자아이는 5세가 되는 즉시 가까운 성주에게 자질 테스트를 받아라. 이미 8세가 넘은 아이는 테스트에서 제외된다.
 3. 테스트에 합격한 남자아이는 많은 돈을 지불받고 기사단에 합류한다.
 4. 위 사항은 귀족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결국 전쟁에 필요하니 남자아이를 팔라는 말이었다.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토리안에 갑자기 전달된 포고문은 주민들을 밤샘회의로 몰아넣었다. 결국 조건에 해당되는 남자아이를 모두 여자로 키우자고 의견이 모아졌다. 모두 정이 많은 사람들이라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해당된 자식을 둔 부모의 뜻을 따라줬고 5년 동안 별 탈 없이 지내올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들을 여자로 키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6개월 전, 여자로 키웠던 남자아이 한 명이 제국기사에게 들켜 일가족이 모두 붙잡혀가는 일이 있었다. 토리를 포함한 남자아이들은 어른들의 신속한 대처로 몸을 피할 수 있었지만 그때의 악몽은 모두의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남자를 여자로 키우는 일이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마을사람들의 정이 워낙 두텁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갓난아기들이 계속 태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토리는 남자치고 예쁘장한 모습이라 들킬 염려가 덜했지만 혹시나 제국기사의 눈에라도 띄는 날이면 큰 낭패를 볼 수밖에 없었다. 빈슨은 토리처럼 자질 테스트를 받지 않은 아이들에게 어떤 처벌이 가해지는지를 소문으로나마 들어서 알고 있었다.
 몬스터랜드로 보내는 형벌.
 최고의 기사들마저 살아남을 수 없는 무시무시한 곳이라니 아이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결국 죄명은 추방이지만 결과는 사형이다. 간단히 말해, 들키면 사형이라는 말이다.
 빈슨의 눈에 큰 눈망울과 천진한 웃음을 머금은 자기 아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마을의 자랑이 되라는 뜻으로 이름도 토리라고 지은 아이. 테스트를 피하기 위해 여자로 키우기는 했지만 그라고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테스트의 합격 확률이 10퍼센트도 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낮은 확률이라도 토리가 여기에 들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결국 빈슨은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으로 토리를 키워야 했다.
 불안하긴 했지만 빈슨은 지난 5년 동안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토리의 어리광과 이제야 겨우 알아들을 정도로 말하는 자식의 모습이 삶의 전부였다.
 “어쩔 수 없어. 난 저 아이를 떼어놓고는 살아갈 자신이 없으니.”
 빈슨은 그 말을 남기고 자신의 일터로 향했다.
 여름 오후의 평원을 뒤덮고 있는 싱그러운 기운은 자식을 끔찍이 아끼는 아버지의 불안을 서서히 씻겨주었다. 그렇게 빈슨은 애써 불안을 날려보냈다. 토리는 여전히 친구들과 천진한 웃음을 띠며 물놀이를 즐겼다. 그때까지 이 한가로운 풍경에 몰아닥칠 풍파를 예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며칠 후.
 “아빠. 오늘은 일하지 말고 토리랑 놀아주세요.”
 토리는 작은 손으로 빈슨의 바짓자락을 잡으며 응석을 부렸다. 어른을 올려다보는 큰 눈은 기대에 차 있었고 빈슨은 귀여운 아들을 꼭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하. 토리야. 오늘은 헬렌 아주머니 일을 도와주기로 했단다. 마을사람들이 한 번씩 돌아가며 일을 해줘야 가을에 많은 수확을 할 수 있지. 그런데 내가 빠지면 마을사람들에게 피해가 되겠지?”
 빈슨은 토리가 무리한 요구를 하면 항상 친절하게 이유를 붙여 설명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토리에게 짜증을 부린 적도 없었고 애지중지 키웠지만 고맙게도 토리는 응석이 심하긴 해도 버릇이 없지는 않았다.
 “잉. 토리는 아빠랑 놀고 싶어요.”
 토리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가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빈슨은 그런 아들이 너무 사랑스러웠지만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결국 빈슨 부부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서 밭으로 향했고 혼자 남은 토리는 평소처럼 친구들을 찾았다.
 토리안의 아침은 항상 일찍 시작했고 아이들도 나이에 맞지 않게 아침잠이 없었다. 부지런한 천성을 타고난 마을 전체의 분위기가 아이들에게까지 미쳤고 덕분에 아직 일을 하지 못하는 어린이들은 아침부터 친구들과 들판을 뛰놀았다.
 그날도 토리는 옆집에 사는 수잔을 시작으로 항상 같이 놀던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특이하게도 같은 또래의 아이들은 전부 여자였다. 물론 겉모습만 그렇다는 것이고 토리 외에도 하치라는 아이는 남자였다. 얼마 전에 제국군에 잡혀간 남자아이도 있고 어려서 병치레를 하다 죽어버린 아이도 있어서 토리안의 아이들은 그리 많은 수가 아니었다. 그들보다 나이가 많은 아이들이 있긴 했지만 토리안에서는 11살 정도가 되면 어른들과 함께 일터의 잡일을 해야 했기에 놀기 위해 모인 아이들은 적을 수밖에 없었다.
 “토리야. 오늘은 뭐하고 놀래?”
 “음. 어제처럼 냇가에 가서 놀까?”
 토리 곁으로 모인 마을아이들의 숫자는 겨우 7명뿐이다. 그들은 토리의 제안에 눈치를 보며 탐탁치 않은 반응을 보였다.
 “싫어? 그럼 저기 산에 가서 놀까?”
 토리는 마을 맞은편에 있는 작은 산을 가리키며 아이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거기는 아빠가 가지 말라고 했는데.”
 “맞아. 우리 엄마도 가지 말라고 했어.”
 아이들은 저마다 내키지 않는 마음을 표현했고, 지켜보던 수잔은 토리의 표정을 살폈다. 자주색 머리와 귀여운 입매가 인상적인 수잔은 다른 아이들이 토리의 의견을 싫다고 하자 괜히 심술이 났다.
 “너희들은 모두 겁쟁이야. 난 토리랑 산에서 놀래.”
 “그러지 말고 다같이 가자. 어른들은 저기에 몬스터가 나온다고 했지만 난 한 번도 몬스터를 본 적이 없어.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마을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서 놀지 말라고 하는 소리래.”
 토리는 집에서와는 달리 제법 그럴듯한 말을 구사했다. 아이들은 토리의 의견을 더이상 무시하지 못하고 어른들 몰래 산으로 향했다. 아이들이 향하는 산은 특별한 이름도 없는 평범한 산이었고 그리 높지도 않았다. 마을과 조금 떨어져 있긴 하지만 그리 위험한 곳으로 보이진 않았다.
 아이들은 저마다 들뜬 마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했고 짧은 걸음으로 30여 분 만에 산 아래에 도착했다.
 비록 작은 산이라지만 한 번도 어른 없이 올라와 본 적이 없는 아이들은 푸른 물결의 녹색 나무들이 무섭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과연’이라는 무모한 호기심과 야릇한 두려움은 아이들을 산으로 이끌었다.
 두려움으로 긴장한 아이들이 스스로의 경직된 몸을 푼 것은 산의 중턱까지 올랐을 때쯤이었다. 무려 2시간이나 산을 탈 정도로 아이들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체력이 좋았다. 하지만 어른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 체력은 어쩔 수 없어 별로 높아 보이지도 않던 산이지만 겨우 반 정도를 오르는 데에 그쳤다.
 “헉헉… 너무 힘들다. 그만 가자.”
 토리는 이왕 온 김에 산의 정상을 보고 싶었지만 나머지 아이들의 지친 모습을 보고 맥이 풀렸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점심시간이라 집에서 부모님이 걱정하신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토리는 산을 내려가기로 결정했고 울창한 숲과 나무를 실컷 구경한 아이들은 흔들리는 발걸음으로 힘겹게 산을 내려왔다.
 “아무것도 없잖아. 잉~~. 힘만 들고 재미없어.”
 “맞아. 다시는 안 올 거야.”
 친구들의 투정을 들으며 토리도 기대한 것보다 훨씬 심심한 산의 풍경에 기운이 빠졌다. 아이들은 마을을 향해 조심조심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때,
 “비켜라!!!”
 바쁜 말발굽소리와 함께 굵은 중년사내의 외침이 울렸다. 아이들은 갑작스런 외침에 일제히 고개를 돌렸고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는 말을 탄 기사 두 명과 그들에게 쫓기는 녹색야만인이 들어왔다. 오크라 지칭하는 녹색야만인은 곧장 아이들 쪽으로 달려갔고 기사들의 얼굴에는 낭패한 기색이 흘렀다.
 토리와 친구들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녹색 야만인의 모습에 당황하여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너무 놀란 가슴은 아이들의 기본적인 행동까지 멈추게 만들었던 것이다.
 “제길!”
 말 위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기사는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허리에 있던 단도를 집어 들었다. 원래 기사들은 이런 암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는 황실기사단 중에서도 특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전투기술을 익힌 인물이었다.
 쉬익~
 그가 던진 단도는 사람이 던지는 물건이라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긴 파공성과 함께 오크의 뒷덜미를 노렸다.
 퍽!
 꾸엑…
 둔탁한 타격소리와 숨이 끊어지는 숨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오크는 뒷덜미에 단도를 꽂힌 채 앞으로 거꾸러졌다.
 “휴~~~ 다행이군.”
 오크를 처리하고 천천히 아이들이 있는 곳까지 말을 몬 기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단도를 던졌던 기사는 죽어버린 시체에서 자신의 물건을 회수했다. 단도를 뽑는 순간 녹색 피가 분수처럼 튀어 올랐지만 기사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얘들아. 다치진 않았니?”
 기사는 지금까지와 다르게 부드러운 말투로 아이들을 달랬다. 그 기사는 워낙 아이들을 좋아하다 보니 일을 하지 않을 때 항상 아이들이 많은 곳을 찾곤 했다. 그런 기사는 자기 때문에 겁에 질린 아이들을 보며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행동은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하는 자신의 어두운 현실을 잠시나마 피할 수 있는 도피처 역할도 했다.
 “무서워할 필요 없단다. 아저씨는 제국기사단이에요. 자 이리들 와봐. 아저씨가 선물을 가지고 있어요.”
 기사는 자신의 직업과는 어울리지 않게 말안장의 한쪽에서 사탕을 한주먹이나 꺼내들었다. 토리안에서는 사탕이 워낙 귀한 음식이라 아이들의 시선은 자연히 기사가 들고 있는 사탕을 향했다. 그렇지만 워낙 작은 마을의 한정된 사람들만 보아온 아이들은 낯선 사람에게 쉽게 접근할 수가 없었다.
 “이런.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이리 와서 사탕 받아. 아저씨는 나쁜 사람이 아니란다.”
 기사는 아이들이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자 직접 다가가 골고루 사탕을 손에 쥐어 주었다. 그리고 제일 앞에 서 있는 토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이에 맞지 않는 천진한 웃음을 피워 올렸다.
 “귀여운 아이구나. 크면 아름다운 아가씨가 되겠는걸.”
 기사는 아직도 자신의 손에 들린 사탕을 살펴보는 토리에게 무심코 말을 뱉었다. 물론 토리가 남자라는 사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바일. 그만 가지.”
 바일이라는 이름의 기사가 여전히 아이들에게서 시선을 떼어놓지 못하자 지켜보던 다른 기사인 상관이 그를 불러들였다. 직속상관의 깐깐한 성격을 아는 바일은 못내 아쉬워하며 말 위에 올랐고 마지막 인사와 함께 말머리를 돌렸다.
 “얘들아. 조금 전에 보았던 오크나 다른 몬스터를 만나지 않게 조심해라.”
 바일은 마지막까지 아이들에게 아쉬움을 전하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아이들과 멀어지자 잠자코 있던 직속상관이 처음으로 아이들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그 아이들이 그렇게 귀여운가?”
 “하하. 대장님. 당연하지 않습니까? 너무너무 귀엽습니다. 특히 제일 앞에 있던 하늘색 머리를 가진 아이는 정말 귀여웠습니다.”
 “그런가? 내 눈에는 범죄자로밖에 보이지 않더군.”
 바일은 뜻밖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여자가 아닌 아이들이 있더군. 자질 테스트를 피하기 위해 여자아이의 옷을 입고 있는 모양이야.”
 바일은 씁쓸했다. 자신의 상관은 언제 어디서나 원칙을 따지는 사람이다. 일을 할 때에도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는 그는 아무리 귀엽고 어린아이라도 국가의 법을 어겼다면 결코 눈감아 주지 않을 것이다. 바일은 아직도 눈앞에 어른거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깊은 한숨을 뱉었다.
 
 “여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빈슨은 부인의 위로에도 쉽게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신과 부인이 일을 나가면 항상 토리는 마을 친구들과 들판을 뛰놀지만 점심시간을 어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사랑하는 아들이 처음으로 점심시간에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토리의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언제나 폭탄을 안은 심정으로 살아가는 빈슨에게는 겨우 30여 분도 길게만 느껴졌다. 그때 자신이 직접 만든 나무문이 한쪽으로 젖혀지며 애타게 기다리던 아들이 나타났다.
 “토리냐?”
 “네, 아빠.”
 빈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반나절밖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렇게도 가슴 졸이게 만든 아들을 살폈다. 다행히 아무런 이상도 없었고 손에는 사탕을 한가득 들고 있었다.
 “얘야. 어쩌다 늦은 거니? 배고프겠다. 어서 밥 먹자.”
 토리의 엄마는 아들이 늦게 온 것보다 행여 배가 고플까 그것이 더 걱정이었다. 모든 부모의 마음이 그렇듯 작은 일이 항상 걱정인 법이다.
 늦긴 했지만 토리의 귀가로 작은 가정에 다시 예전 같은 평안이 찾아왔다. 중년부부와 어린 아들은 식탁에 앉아 조촐한 점심시간을 가졌고 토리가 숟가락을 놓은 후에야 빈슨이 입을 열었다.
 “토리야. 어쩌다 늦은 거냐?”
 토리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이 없었기에 산에 갔던 일과 기사를 만나 사탕을 받은 얘기를 들려 주었다. 어린아이답게 받은 사탕을 내밀며 자랑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엄마, 아빠, 이거 받아요. 달고 맛있어요.”
 빈슨은 집에 오자마자 자신의 보물 상자에 사탕을 챙겨 넣었던 아들이 이 보물을 선뜻 내어주자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별로 욕심이 나지도 않는 사탕을 입에 넣은 빈슨은 아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꺼냈다.
 “토리야, 전에 아빠가 산에는 가지 말라고 했지?”
 “웅……. 하지만 그렇게 위험하지도 않았어요.”
 “토리야. 아빠가 너에게 하지 말라고 하는 일에는 모두 이유가 있단다. 네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설명을 하지만 토리가 어려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어쩔 수 없이 하지 말라고만 하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토리는 아빠의 부드러운 훈계를 한참이나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부터는 그러지 말거라. 마을에서 너무 벗어나면 위험하니까.”
 “네, 알았어요, 아빠.”
 대답과 함께 다시 입 안의 사탕에 열중하는 토리를 보며 빈슨은 흐뭇한 웃음을 짓고는 늦어버린 일을 위해 밖으로 나섰다. 또다시 혼자가 되어 버린 토리는 조금 전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가던 오크의 얼굴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왠지 그 기사가 멋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입 안에 사탕이 완전히 녹아 없어질 때까지 토리는 짧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대장님. 꼭 규칙대로 하셔야 합니까?”
 바일은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는 대장을 보며 가슴을 쳤다. 자신의 대장은 분명히 규칙을 목숨처럼 지키는 사람이다. 융통성이 없는 것이 흠이긴 하지만 기사로서는 가장 이상적인 사람이다. 그랬기에 바일은 똑같은 말만 반복할 뿐 별다른 문제를 제기하진 못했다. 그렇지만 아직도 귀여운 아이들의 웃음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아이 특유의 천진한 눈을 가졌던 꼬마들.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제국의 어린 기사 양성이라는 법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의 반발이 더욱 심해졌다.
 “대장님. 한 번만 그냥 넘어가 주십시오. 그렇게 어린아이들을 몬스터랜드로 보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 애가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대장님!”
 바일은 평소답지 않게 대장에게 소리쳤다.
 “바일. 난 그 애들을 법대로 처리할 거네. 규칙은 누군가 처음 그것을 어기는 사람이 생겨나는 순간부터 의미가 없으니까. 자네의 마음을 알아. 하지만 그 애도 우리 린핸제국의 국민이지. 국법에서 벗어날 수는 없어.”
 바일은 대장의 부드러운 말투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장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항상 냉정하고 철저한 그에게서 이런 말이 나왔다는 것을 바일은 쉽게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대장의 말 때문에 바일은 더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법을 집행하는 대장의 심정이 자신보다 몇 배 더 괴롭다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챘기 때문이다.
 힘이 빠져 버린 두 기사는 석양이 지는 노을을 배경으로 한적히 울리는 말발굽소리에 몸을 실었다.
 
 일 주일 후.
 두 기사는 자신의 부하인 10여 명의 기사를 이끌며 다시 토리안을 찾았다. 토리안이 멀리 보이는 언덕 위. 기사들은 그곳에서 휴식시간을 가졌다. 부하들이 그늘에 앉아 따가운 햇볕을 피하는 사이 바일과 그의 대장은 조잡한 가구들이 모여 있는 토리안을 주시했다.
 “바일. 내 부모님은 어렸을 적에 오크들에게 돌아가셨네. 겨우 세 마리의 오크를 이길 힘이 나에겐 없었지. 두 분은 오크들이 날 해치지 못하도록 죽는 순간까지 내 몸을 안아 주셨네. 그때 린핸제국의 기사가 한 명 왔지. 그는 오크들을 가볍게 물리치고는 날 거두어 줬어. 난 크면서 항상 생각했지. 오크들도 이기지 못하는 약한 사람들을 지켜주겠다고. 하지만 난 그런 약한 사람을 죽이러 다시 이곳을 찾았네. 과연 내가 오크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
 바일은 아련히 전해지는 대장의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 대장과 같이 생활한 지가 거의 7년에 접어든다. 그런 와중에 이런 대장의 약한 모습은 한 번도 없었다. 그만큼 지금 대장이 얼마나 괴로워하는지를 알기에 바일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난 믿네. 국법은 그리고 내가 모시는 황제는 분명히 국민을 위하는 사람이라고 말일세. 그렇기에 그가 만든 국법을 어기면 더 많은 희생자가 나올 것이라 생각하네. 이것이 나의 유일한 위안이네.”
 대장은 그 말과 함께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지켜보던 바일은 묵묵히 현실을 인정했고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하늘색 머리의 꼬마를 애써 지워 버렸다.
 “자. 이제 그만 출발하세.”
 기사들은 흐트러졌던 마음을 추스르며 위풍당당한 자세로 돌아갔다. 그들의 행군과 함께 가슴 한쪽에 새겨진 린핸제국의 기사 문장이 햇살에 비춰 반짝이기 시작했다. 겨우 열 명이 조금 넘는 숫자이지만 그 위용과 무게는 눈으로도 확인될 만큼 굉장했다. 그렇게 실력 있는 기사들이 이동하는 곳이 조그마한 시골 마을이라는 사실이 안타깝긴 하지만 그들은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안 돼요!”
 “제발… 기사님… 제발 부탁입니다……. 목숨을 내어 달라면 당장 여기서 목숨을 끊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 아이만은… 기사님. 제발… 제발…….”
 항상 조용하던 토리안에 또 다시 풍파가 찾아왔다. 6개월 전에 있었던 일이 똑같이 재현되는 현장.
 토리안의 가장 외곽에 있는 허름한 오두막 앞에는 10여 명의 기사와 함께 울부짖는 부부 두 쌍이 있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덩치 큰 기사의 품에는 하늘색 머리를 가진 토리와 같은 또래의 하치가 들려 있었고 힘없는 부모들은 기사의 발목을 잡으며 눈물로 애원하고 있었다.
 “부탁입니다. 가진 게 없어 드릴 것은 없지만 여기 구질구질한 목숨이라도 가져가시고… 제발 아이만은…….”
 빈슨은 조금 전 단란한 점심식사 도중 토리를 기사에게 빼앗겼다. 이유를 눈치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초라하게 애원하는 길밖에 없었다. 얼굴이 온통 눈물범벅이 된 빈슨은 눅눅한 얼굴에 흙이 묻는 것도 모르고 연신 몸을 굽혔다.
 “가자.”
 그때 기사대장의 입에서는 감정이 배제된 듯한 낮은 목소리의 명령이 떨어졌다. 그 명령이 빈슨의 귀에는 폭탄처럼 들려왔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이대로 쓰러질 수 없었다. 그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기사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빌어보는 일.
 한없이 초라하고 민망한 일이지만 그리고 아들 앞에서 보일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지만 빈슨은 그렇게 해야 했다. 뭐라도 좋으니 아들을 살리고 싶었다. 이미 토리의 엄마는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이제 아들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제발! 부탁입니다! 제발! 제발!”
 그는 절규했다.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모두 담아서 애절하게 절규했다. 눈물이 흘러 얼굴에 묻은 흙을 씻어 주어도 시원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오직 아들이 저 기사의 품에서 빠져나올 수 있기만을 기원했다.
 “가자.”
 하지만 기사대장의 입에서는 다시 매정한 목소리가 흘렀다. 빈슨은 순간 애원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야! 이놈들아!”
 빈슨은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기사들에게 달려들었다. 그 동안 빈슨을 저지하지 않던 기사들은 그가 먼저 공격을 해오자 가볍게 반격을 가했다. 반격이래야 주먹 한 방이었지만, 빈슨은 훈련 받은 기사의 주먹에 정신을 잃었고 그렇게 토리는 아버지가 쓰러지는 광경을 지켜봐야 했다.
 
 2.사람이 살 수 없는 곳, 몬스터랜드
 
 축배를 위한 와인 잔에 붉은 피를 담고
 식사를 준비하는 주방장에게는
 목숨을 식대로 주어라.
 그 뒤에 남는 것이 내 썩어빠진 사상이라면
 내 영혼에 남은 분노를 모두 털어 내리라.
 - 떠돌이 시인 ‘미산’의 시 중에서-
 
 “대장님.”
 “아무말도 하지 말게. 바일.”
 바일은 한 달 전에 일어났던 일을 회상하며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현재 왕국의 수도로 죄인을 호송하는 중이었다. 그 동안 특별한 임무를 받았던 그들은 무사히 범인을 찾아냈고 그 와중에 일어났던 다른 일들에 대한 보고서를 준비해서 수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유독 바일을 신경 쓰이게 하는 일이 있었다. 한 달 전 토리안에서 잡아왔던 아이. 하늘색 머리가 인상적인 토리라는 아이에 대한 처분 때문이었다. 대장은 자신의 기사라는 신분 때문에 아이를 처벌하려 하지만 한 달 가량 지켜봐 온 토리는 결코 범죄자로 분류되어서는 안 될 아이였다.
 처음에는 아빠와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어댔지만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같이 잡혀온 친구를 달래며 남들이 잠드는 시간에만 몰래 눈물을 훔쳤던 아이다. 안타까운 마음에 한 달 후에는 엄마를 만날 수 있다고 하자 그 말만 믿고 꼬마는 지금까지 웃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창살이 있는 감옥 안에서도 순찰을 도는 자신을 보면 항상 밝게 인사를 하던 아이.
 바일은 감옥에서 초췌해져 가는 토리를 보면서 자괴감에 힘들어해야 했다.
 “이보게. 바일. 내가 그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아이의 부모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뿐이네.”
 바일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원칙대로라면 토리의 부모도 처벌을 받아야 했다. 대장이 이렇게 그들을 용서해 주는 것도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제 곧 수도네. 기사단으로서의 위풍을 잃지 말게. 지금 자네 모습은 기사로서의 모습이 아니네.”
 뼛속까지 기사인 대장의 말에 바일은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일 주일 후.
 황궁 앞에 마련된 광장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많은 구경꾼이 몰려 있는 가운데 광장 중앙에는 온몸이 포박 당한 10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나라에서 정한 중한 범죄자들이었고 그 사이에는 토리와 하치도 끼여 있었다.
 둥둥둥둥둥둥.
 “집행을 시작합니다!”
 어디선가 북소리와 함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광장을 울리는 목소리와 북소리를 시작으로 죄인들 앞으로 수염이 시원스레 뻗은 신관이 나섰다.
 “이들은 이미 스스로 자신의 죄를 인정했거나 죄상이 확실히 드러난 자들입니다. 우리 린핸제국의 황제이신 린핸 폐하의 관용으로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합니다.”
 집행을 진행하는 황궁 사람은 구경꾼들을 둘러보며 약간 뜸을 들였다.
 “죄인들은 앞에 있는 신관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시오!”
 진행자의 명에 따라 신관은 제일 앞에 있는 죄인에게로 다가갔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시길 바랍니다.”
 신관은 진중한 목소리로 죄인의 눈을 바라봤다.
 “더러운 녀석들. 내가 죽으면 악마와 계약을 맺겠다. 너희들을 용서하지 않겠다.”
 죄인은 초췌한 눈으로 강한 살기를 드러냈지만 신관은 그런 죄인을 안타깝게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게 한 명씩 죄인들의 마지막 발언이 시작됐고 제일 끝에 앉아 있던 토리와 하치의 차례가 되었다.
 신관은 그 동안 이런 아이들이 잡혀온 것을 몇 번 보았기에 특별히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또다시 이런 아이가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얘들아.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
 토리는 신관의 부름에 맑고 큰 눈을 마주쳤다. 신관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토리의 눈을 외면했다. 너무 맑고 순진한 눈이었다. 그리고 이 아이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음을 직감했다.
 “아빠는 언제 볼 수 있어요?”
 토리는 아직까지도 바일의 말을 믿고 있었다. 죄인을 감시하며 그 말을 듣고 있던 바일은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죽음을 앞둔 어린아이는 아직도 자신의 말을 희망으로 안고 있었다. 죽는 순간까지도 바일에 대한 배신감보다는 왜 자신이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해 당혹해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갈 것이다.
 “너에게 빛의 축복이 함께 하길 바란다.”
 신관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아직까지도 토리의 맑은 눈이 가슴 속에 밟혀 왔지만 막강한 황제의 명령 앞에서 한없이 초라한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집행을 위한 마지막 의식이 끝나자 중무장한 기사 두 명이 광장으로 나와 제일 앞에 있던 죄인을 어디론가 끌고 갔다. 그리고 다른 죄인들이 단체로 다른 방으로 이송되면서 짤막한 광장 의식은 끝이 났다.
 토리는 아직까지 바일의 말을 믿으며 엄마와 아빠를 만날 시간만을 기다렸다. 자신을 묶고 있는 밧줄이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리운 부모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들떠 있었다. 그리고 두 시간마다 같이 있던 죄인들을 기사들이 데리고 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 역시 누군가를 만나러 간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두 시간마다 끌려가는 이유는 한 번에 많은 사람이 몬스터랜드로 가면 그들끼리 협동해서 살 수도 있다는 희박한 확률 때문이었다. 완벽한 마무리를 원했던 황제는 그들을 한 명씩 두 시간마다 몬스터랜드로 보내도록 명을 내렸다.
 거의 하루가 지나갈 동안 토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마침내 자신과 함께 있던 하치도 두 시간 전에 끌려갔고 이제 혼자가 되었다. 토리는 그 동안 다른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말을 걸지 못했던 바일을 보며 참았던 질문을 던졌다.
 “아저씨, 엄마는 언제 만날 수 있어요?”
 바일은 천천히 토리에게 다가갔다. 이미 토리에 앞서 하치가 끌려나간 지도 두 시간이 다 되어 갔다. 그렇다면 토리의 집행도 곧 시작될 것이다.
 “미안하구나. 이걸 받아라. 품에 꼭 간직했다가 스스로를 지키도록 해라.”
 바일은 자신의 품에서 날카로운 단도를 꺼내 토리의 몸을 묶고 있는 밧줄을 교묘하게 끊어놓았다. 약간만 힘을 주면 풀리게 해놓은 밧줄을 보며 바일은 자신이 가장 아끼던 단도를 토리의 품 안에 갈무리했다.
 그때, 죄인들을 끌고 가던 기사가 들어왔다. 토리는 자신의 차례라는 것을 직감하며 재빨리 몸을 일으켰고 그 행동에는 여전히 바일을 향한 믿음이 묻어 있었다.
 토리가 끌려간 곳은 황궁의 가장 외곽에 있는 곳이었다. 집행관 외에는 아무도 발을 들여 놓을 수 없는 곳이었고 죽음으로 가는 문이었다. 토리는 어지러운 문양이 그려진 워프존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워프존 앞에는 눈썹이 가늘고 어쩐지 믿음이 가지 않는 얼굴을 가진 여자마법사가 있었고 기사들은 그녀를 보며 인사를 건넸다.
 “히로시님, 마지막 죄인입니다.”
 “피곤하군요. 어서 마무리하죠.”
 날카로운 여자마법사의 한마디와 함께 기사들은 여러 가지 문양이 새겨진 중앙으로 토리를 이끌었다.
 “엄마는 언제 만나요?”
 토리의 질문에 여자마법사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 동안 몇 번에 걸쳐 겪었던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렸다.
 “거기서 움직이지 마라. 그럼 엄마를 만날 수 있으니.”
 “그럼 빨리 엄마를 불러 주세요.”
 토리의 말에 여자마법사는 기묘한 웃음을 지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공간의 문을 열어 또 다른 대지를 열어라. 워프!”
 여자마법사의 캐스팅이 끝나는 순간 토리는 자신의 몸이 땅 속으로 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눈앞에 보이던 모든 사물이 갑자기 사라졌고 밝아지는 배경 덕분에 한참을 멍하게 있어야 했다.
 토리는 갑자기 달라진 주변을 둘러보며 한참이나 멍한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엄마와 아빠를 만난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토리는 아직까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열심히 자신이 그리던 사람을 기다렸다.
 자신이 어떻게 이 자리에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토리는 울창한 숲과 비릿한 냄새에 정신이 아찔했다. 항상 산에는 가지 말라던 아빠의 말이 숲에 대한 두려움을 안겨줬기에 토리는 발을 움직이지도 못했다.
 토리는 한참을 망설이다 본능적으로 비릿한 냄새를 찾아갔다.
 “으악!!!”
 토리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고 바지가 축축해진 것도 알지 못할 만큼 가슴이 뛰었다.
 “으아!!! 으아!!!”
 버려진 아이가 바라본 곳에는 불과 두 시간 전에 자신보다 먼저 끌려갔던 친구의 머리가 있었다. 몸과 머리가 분리된 채 형체만 겨우 알아볼 수 있는 모습. 얼굴이 반쯤 뭉개져 눈알이 튀어나와 있었고 하치의 것으로 보이는 몸에는 짓눌린 흔적과 함께 내장이 흘러나와 있었다.
 토리는 처음 보는 잔인한 광경에 연신 비명을 질렀고 제발 누군가가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게 해주길 원했다. 친구를 잃었다는 슬픔을 느낄 수도 없을 만큼 토리는 흥분한 상태였다. 그러던 중 바일에 의해 거의 잘려진 밧줄이 끊어졌고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지만 도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기엔 토리가 너무 어렸다.
 그때,
 크아!!!
 멍한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괴성이 들려왔다.
 “어… 어…….”
 그 동안 평화로운 모습만 봐오던 아이에게 지금의 상황은 너무나 가혹했다. 난생 처음 비참한 시체를 본 데다가 이번에는 자신의 몸집의 5배가 넘는 오우거까지 등장한 것이었다. 자신을 노리는 몬스터의 이름이 오우거라는 것도 모르는 토리였지만 오우거가 위험한 존재라는 사실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토리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오우거의 눈에는 작은 아이가 맛좋은 사냥감으로만 비춰질 뿐이었다.
 쉬익~~
 다른 어떤 몬스터보다 파괴본능에 충실한 오우거의 손은 사정이 없었다. 토리의 눈앞으로 자신의 몸집만한 도끼가 다가왔고 곧 자신도 조금 전 보았던 시체처럼 될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꾸엑~~
 그때,
 눈을 질끈 감고 공포로부터 벗어나려던 토리에게 뜻밖의 소리가 들려왔다.
 쿵!
 토리는 바닥에 거대한 무엇인가가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감았던 눈을 떴다.
 “으아!!!”
 하지만 토리는 자신이 눈을 뜬 것을 후회했다. 자신을 죽이려던 오우거는 어깨부터 옆구리까지 사선으로 몸이 분리되어 있었고 그 뒤에는 빛나는 도끼를 들고 있는 황소 같은 몬스터가 있었다.
 토리에게는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구해준 몬스터였지만 황소 모양의 미노타우루스는 가여운 생명을 살리기 위해 오우거를 죽인 것이 결코 아니었다. 오직 오우거가 자신의 적이기에 베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토리의 차례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아이는 또다시 밀려오는 죽음의 그림자에 몸을 떨었다. 하지만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처음 오우거를 만났을 때보다 조금이나마 이성을 찾았다는 점이다. 토리는 무작정 몸을 일으켰고 미노타우루스의 반대방향으로 힘껏 뛰었다.
 쉬익~~ 쒜엑~~ 쿵쿵
 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보이는 토리의 곁에서 많은 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미노타우루스의 큰 발자국 소리와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르는 사람 크기만한 벌레들이 날개를 퍼덕이는 소리. 땅바닥을 스멀스멀 기어오는 징그러운 몬스터도 있었다.
 “으아……! 제발… 제발… 엄마…….”
 꼬마는 안간힘을 다해 뛰었지만 가빠오는 숨과 흐르는 눈물을 어찌하진 못했다. 결국 제대로 앞을 보지 못하고 바닥에 솟아 있는 작은 나무뿌리에 걸려 바닥에 엎어진 토리는 자신을 뒤따르던 몬스터들을 눈으로 확인하고는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토리를 따르던 몬스터는 생각보다 엄청난 숫자였다. 가장 덩치가 큰 미노타우루스부터 바닥의 슬라임 그리고 바닥에 반쯤 몸을 숨긴 채 토리를 따라왔던 놈(Gnome)도 보였다. 사방이 몬스터로 가득 찼고 인간의 능력으로는 상대할 수 없는 숫자였다.
 크아!
 그때 미노타우루스가 갑자기 분노의 괴성을 질렀다. 그리고는 도끼를 옆으로 그어 놈을 그대로 갈라 버렸고 그것을 시작으로 아수라장이 연출됐다. 토리에게는 천만다행으로 몬스터끼리의 전투가 시작된 것이었다.
 사실 이곳 몬스터랜드의 몬스터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끊임없이 전투를 거듭해 왔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입장에서 인간과 몬스터로 모든 것을 구분하지만, 몬스터들 자체적으로는 오우거면 오우거 리자드맨(Lizard Man)이면 리자드맨 모두 각자의 종족이 있는 법이다. 그들은 오랜 세월 전투를 계속해 왔고 같은 종족이 아니면 잔인하게 응징하는 것을 당연히 여겨왔다.
 토리를 쫓아온 몬스터들이 약간 여유가 생기자 함께 추적하던 몬스터가 사실은 자신의 적이라는 사실을 새삼 인지했다. 가장 순발력이 빠른 미노타우루스를 시작으로 서로 피아를 구분하기 힘든 전쟁이 시작됐다.
 꾸엑! 스스스스…
 녹색 피를 뿜으며 몸이 갈라지는 몬스터와 그림자처럼 흩어지는 몬스터도 있었다. 죽음이라는 같은 의식을 진행하지만 마지막 모습은 모두 달랐다. 하늘에서 미노타우루스를 괴롭히던 미스트(Myst)는 언데드 몬스터이면서도 안개 같은 몸을 가진 자신의 특성을 이용해 적의 몸을 감쌀 수 있었다.
 크으으으…
 미스트에게 몸을 제압당한 미노타우루스는 점점 몸을 죄어드는 고통 속에서 정신이 아득해졌고 마지막 발악으로 자신을 감싸고 있던 미스트를 자신의 몸과 함께 두 조각으로 갈라 버렸다. 안개 형태라 충격이 없을 것 같던 미스트는 공격할 때만 드러나는 유일한 약점을 잡혀 소멸되었다. 결국 토리를 따라오던 몬스터는 미노타우루스의 동반자살과 함께 전멸해 버렸다.
 토리는 거듭되는 행운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자신의 운을 기뻐할 만큼 한가롭지 않았다. 얼굴은 온통 녹색과 붉은 피로 범벅이 되었고 아직도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괴롭혔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로 인해 삶에 대한 어떠한 희망도 포기해야만 했다.
 “무… 무서워… 흑흑… 무서워…….”
 꼬마는 몬스터의 피로 물든 몸을 잔뜩 웅크리고 두려움의 눈물을 흘렸다. 항상 자신을 따뜻하게 감싸주던 엄마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아빠의 눈이 그리웠다. 죽음에 맞서 싸우기에 자신은 너무 어리고 초라했다.
 “엄마… 아빠… 어디 있어요? 토리는… 너무… 무서워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작은 아이는 차마 얼굴을 들어 앞을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고개를 들면 조금 전까지 느꼈던 두려움이 더욱 커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몬스터랜드라는 곳은 불쌍한 아이를 배려해 줄 만큼 따뜻하지 않았다.
 탁탁탁탁…
 어디선가 숲의 작은 나뭇가지를 밟으며 급히 뛰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끅… 끅… 끅…
 발자국 소리와 함께 몬스터가 내지르는 역겨운 괴성도 함께 들려왔다. 토리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소리에 다시 고개를 들어야 했고 쉽게 소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으악!!!”
 토리는 온몸이 털로 덮인 늑대가 두 발로 서서 자신에게 뛰어오는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윤기 나는 털에 전사의 강인함이 묻어나는 웨어울프가 아쉽게도 토리에겐 사신처럼 느껴졌다.
 불쌍한 아이는 몸을 더욱 움츠렸다. 그때 품 안에 뭔가 딱딱한 물체가 느껴졌다. 토리는 반사적으로 그 물체를 잡았다. 작은 손에 바일이 줬던 단도가 쥐어졌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미처 반격을 하기도 전에 눈앞으로 짓쳐오던 웨어울프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졌다.
 자신을 공격한다고 생각했는데 웨어울프는 아무런 공격도 퍼붓지 않은 채 토리의 머리 위를 훌쩍 넘어가 버린 것이었다. 이런 상황을 모르는 토리는 시야에서 적이 사라지자 무작정 단도를 앞으로 던졌다. 작은 아이의 힘으로 웨어울프를 해칠 수는 없었지만 일은 예상외로 진행됐다.
 꾸엑!!!
 토리는 단도를 내던짐과 동시에 역겨운 비명소리를 들었다. 놀라서 눈을 뜬 토리의 앞에는 10마리의 초록색 고블린이 있었고, 그 선두에서 빨간색 고블린이 고통 어린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고 있었다. 흔히 고블린로드나 홉고블린으로 불리는 빨간색 고블린은 웨어울프를 추격하다 갑자기 날아드는 토리의 단도에 목덜미를 뚫린 것이었다. 평소라면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웨어울프가 뛰어오른 공간에서 갑자기 날아들었던 칼이라 위험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목덜미가 서늘해지고 난 후였다. 홉고블린이 뛰어들던 속도가 없었다면 목에 단검이 꽂히는 일은 불가능했겠지만 어쨌든 지금 상황은 분명히 토리의 작품이었다.
 끄윽… 끄윽…
 다른 고블린보다 큰 덩치를 가진 홉고블린은 몸을 비틀거리며 끝내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그러자 고블린에게 쫓기던 웨어울프가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그 동안은 숫자에서 밀려 정면으로 맞상대를 하지 못했던 처지였지만 상황이 바뀐 지금 지휘자를 잃은 고블린들은 웨어울프의 전투력에 힘없이 무너졌다.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은 사정없이 고블린을 두 조각으로 만들었고 민첩한 움직임이 눈을 어지럽게 했다. 토리는 웨어울프가 고블린을 학살하는 장면을 멍하게 지켜보았다. 그리고 고블린이 죽고 나면 다음은 자신의 차례가 될 것임을 알고 은연중에 체념하고 있었다.
 끄윽… 꾸엑…
 마지막 남은 고블린의 심장에 앞발을 쑤셔 넣은 웨어울프는 손에 들려 있는 시체를 멀리 내동댕이치고 꼬마를 살폈다.
 “오지 마… 오지 마!”
 토리는 웨어울프의 빨간 눈빛을 대하자 사시나무 떨 듯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몸의 떨림을 끝없이 지속시켰다. 웨어울프는 토리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저리 가! 제발 저리 가!”
 웨어울프는 울부짖는 아이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홉고블린의 시체에서 단도를 빼냈고 녹색 피가 묻은 검신을 깨끗하게 닦았다.
 토리는 웨어울프를 지켜보다가 그의 행동에 적의가 강하지 않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웨어울프가 자신에게로 뛰어오름과 동시에 옆구리에 강한 압박감을 느껴야 했다.
 “으아!!!”
 토리는 힘껏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비명을 지르고 나서도 예상했던 고통이 뒤따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시원한 바람이 느껴지며 자신이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다는 느낌만 들 뿐이었다. 용기를 내어 눈을 떠보곤 자신의 몸이 웨어울프에게 들려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토리를 안아든 웨어울프는 길도 없는 숲 속을 빠르게 지나갔다. 그에게 안긴 인간 아이는 20여 분이 지나자 긴장이 풀린 듯 기절해 버렸고 웨어울프는 아무렇지도 않게 질주를 계속했다.
 내달리던 웨어울프의 움직임이 멈춘 것은 해가 지는 저녁이 되어서였다. 계속해서 일직선으로만 달리던 웨어울프는 해가 질 시간이 되자 숲의 외곽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고 바다가 보이는 숲의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이동을 멈췄다.
 토리는 바닥에 닿는 푹신한 모래에 정신을 차리며 아직 웨어울프가 자신의 주변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렇지만 꼬마는 아무런 질문도 할 수 없었다. 여전히 몬스터는 그에게 두려운 존재였고 아직까지 자신이 살았다는 기분도 들지 않았다. 결국 아이는 두려움에 떨다 깊은 밤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웨어울프는 그런 아이를 지켜보다 해변을 따라 이동을 시작했다.
 그 후로도 그들은 낮에는 숲, 밤에는 해변으로 5일 동안 이동을 계속했고 6일째가 되자 울창하던 숲이 사라지며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공터 안쪽으로 조잡한 울타리가 천막들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보였고 신기하게도 인간들이 그 안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토리를 데리고 온 웨어울프는 인간들이 잔뜩 있는 울타리 안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그리고 중앙에 있는 모닥불 옆에 아무렇게나 토리를 내려놓았다.
 “멜린, 어떻게 된 거야?”
 모닥불을 지키고 있던 덩치 좋은 남자가 토리를 데려온 웨어울프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웨어울프의 몸에서 갑자기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크으으… 뚝. 뚝. 하아…
 알 수 없는 신음과 묘한 소리가 끝나자 멜린이라 불린 웨어울프는 어느새 금발머리를 가진 아름다운 여성으로 변해 있었다. 멜린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토리를 다시 한번 쳐다보더니 자신을 부른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날 도와준 아이야.”
 “무슨 소리야?”
 “그렇게 됐어. 그보다 대장은 어디 있지? 만나봐야겠어.”
 멜린을 바라보던 덩치 큰 남자는 뒤쪽에 있는 천막을 가리켰다. 멜린은 토리를 내버려둔 채 천막으로 향했고 덩치 큰 남자도 그 뒤를 따랐다.
 
 “응… 웅…….”
 토리는 흙으로 덮인 바닥의 불편함을 느끼며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는 아이에게는 어떤 두려움도 절망도 없었다. 하지만 상체를 일으키는 동안 허리에서 피어오르는 아련한 고통은 토리로 하여금 자신의 처지를 둘러보게 만들었다.
 “엄마…….”
 버려진 아이는 주위를 살피며 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때 어렴풋이 보이는 주위 광경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
 토리는 울타리 안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너무나 반가웠다. 지금 자신 앞에 있는 생물은 몬스터들이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그리던 엄마 아빠는 아니지만 자신과 같은 사람이었다. 토리는 지금의 현실이 꿈만 같았다.
 그때 토리를 데려왔던 멜린이 덩치 큰 남자와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를 데리고 다가왔다.
 “이 아이인가?”
 “네. 대장.”
 토리는 자신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대화를 나누는 이들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금발의 예쁜 아줌마와 건장한 아저씨 그리고 뭔가 위압감이 느껴지는 털보아저씨가 토리의 눈에는 그저 좋은 사람들로 보였다.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군. 오늘 저녁에 동료들을 모아놓고 결정하기로 하지. 그 동안은 멜린이 데리고 있도록 해.”
 “알았어. 대장.”
 멜린은 털보사내의 말에 토리를 일으켜 세웠다. 꼬마는 손으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피부에 왠지 모를 안락함을 느끼며 기분이 좋아졌다.
 “꼬마야. 이리로 오너라.”
 멜린은 토리를 이끌고 자신의 천막으로 들어갔다.
 “사람이에요?”
 토리는 용기를 내어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당연히 멜린이 자신은 사람이라고 대답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불쌍한 아이의 추측은 계속해서 어긋났다.
 “아니, 난 인간종족이 아니다.”
 토리는 다시 불안감이 엄습해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멜린을 잡고 있던 작은 손을 급히 뿌리쳤다.
 “그럼……?”
 “난 웨어울프의 전사 멜린이라고 한다.”
 “웨어… 울프?”
 토리는 처음 들어보는 웨어울프란 말에 두려운 얼굴을 풀지 못했다.
 “어차피 시간이 남으니 설명을 해주지.”
 멜린은 예쁜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무표정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차피 어려운 이야기는 모를 테니 네가 알 수 있게 쉽게 말해주지. 나의 종족은 웨어울프다. 평상시에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전투를 시작하면 늑대 모습으로 변하는 종족이지. 그리고 여기는 우리 웨어울프들의 아지트다. 그리고 이건 돌려주지.”
 장황하리라 예상했던 멜린의 설명은 의외로 간단하고 짧았다. 그리고 홉고블린의 목숨을 앗아간 단도가 다시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토리는 모든 걸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들이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과 자신이 아직도 위험한 곳에 있다는 점은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럼… 누나도 몬스터예요?”
 토리는 멜린을 부를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하고 그냥 누나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후후. 누나라? 재밌는 아이군. 그리고 나에게 몬스터냐고 물었나? 인간이 보기에는 자신들과 다르면 모두 몬스터로 보이겠지만 우리의 입장에서는 인간도 몬스터일 뿐이다. 그것도 머리만 좋은 사악한 몬스터로 분류되지.”
 인간을 말하는 멜린의 눈은 적개심으로 가득했다. 사실은 멜린도 태어나서 인간을 처음 보지만 그 동안 들어왔던 인간에 대한 평가는 극악이었다. 도구를 사용하는 머리 좋은 종족, 사악하고 이기적이며 모든 사물에 적대적인 종족, 이것이 웨어울프들이 가진 인간에 대한 인식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토리가 모르는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아니, 토리뿐만 아니라 몬스터랜드를 노렸던 모든 인간들이 모르는 점이었다. 바로 몬스터랜드의 종족들은 대륙의 몬스터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몬스터랜드는 아주 오래전 대륙을 점령하려는 마계의 집결지였다. 그리고 그들을 막고 나선 종족은 에이션트 드래곤들. 무리지어 행동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드래곤들도 마계의 침공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손을 잡아야 했고 뭉친 드래곤들은 그야말로 행성을 날려버릴 정도로 파괴력을 발휘했다.
 그들의 연합에 마계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지만 에이션트 드래곤들도 온전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잿더미가 되었던 몬스터랜드에 다시 숲이 생겨난 이유는 이 땅에 스며든 드래곤 하트의 강력함과 아직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마계의 힘 때문이었다. 결국 숲과 드래곤 하트에 의해 하나씩 몬스터가 생겨났다. 그리고 마계의 힘은 언데드와 오우거 같은 출처를 알 수 없는 몬스터의 출현을 가져다 주었다.
 이제는 드래곤하트의 힘도 마계의 힘도 미세한 정도로 줄어들었지만 이 미지의 힘으로 인해 몬스터랜드의 몬스터에겐 다른 대륙의 몬스터와는 현저히 다른 변화가 나타났다. 가장 큰 변화는 지능과 전투력에서 나타났다. 몬스터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투쟁을 할 수밖에 없었고 필연적으로 그들의 지능이 크게 향상되었다. 또한 대륙의 다른 몬스터보다 훨씬 강력한 전투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거의 매일 전투가 일어나는 곳이었다. 당연히 대륙의 몬스터와는 전투경험 차원에서도 많은 차이를 만들어냈다.
 멜린이 속한 웨어울프 역시 대륙의 웨어울프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웨어울프는 본래 늑대로 변하고 나면 지성이 마비되어 본능에만 의지하는데 몬스터랜드의 웨어울프들은 포악해지긴 하지만 지성이 마비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가장 발전된 언어인 인간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웨어울프뿐만이 아니라 이곳의 모든 몬스터들은 차이가 있긴 하지만 발달한 지능을 가졌기에 그만큼 강력한 몬스터들로 진화했다. 15년 전 린핸제국의 대규모 기사단이 적은 숫자의 오우거를 상대하지 못하고 패퇴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멜린과 토리는 이러한 역사에 대해 아무런 지식도 없는 상태였지만 현재 처한 스스로의 입장에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날 죽일… 건가요?”
 이미 두려움에 익숙해진 아이는 더이상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어쩌면 공포와 두려움에 지쳐 자기도 모르게 죽음을 바라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자신의 감정이 어떤 상태인지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토리는 맑은 눈을 들어 멜린의 얼굴을 바라봤다.
 “싫지 않은 눈이야.”
 멜린은 인간에 대한 이유 없는 적개심을 갖고 있었지만 토리의 하늘색 머리와 맑고 큰 눈이 싫지는 않았다. 자신을 도와줬다는 이유로 무작정 데리고 오긴 했지만 어떤 처분이 내려질지는 아무도 몰랐다.
 “너에 대한 결정은 해가 지면 내려진다. 아직은 아무도 모르지.”
 토리는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흐르지 않을 것 같던 눈물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두려움의 눈물이 아닌 서글픈 눈물이었다. 자신의 운명을 남에게 맡겨야 한다는 서글픈 사실은 어린 토리에게도 충분한 아픔이었다.
 그때 천막 밖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전투 준비!”
 멜린은 크게 울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급히 천막을 벗어났다. 토리는 갑자기 바쁘게 돌아가는 상황을 보며 무심결에 천막 밖으로 나섰다.
 크아…으으… 뚝. 뚝. 크아…
 토리는 무심코 밖을 봤다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30명 정도의 인간 모습을 한 웨어울프들이 울타리 입구에 모두 모여 한꺼번에 자신의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 인간의 피부로 매끈하게 보이던 팔뚝과 발이 길고 매끈한 털로 수북하게 뒤덮여 갔고 시원스런 입술이 앞으로 쭉 튀어나오면서 날카로운 이빨이 솟아났다.
 토리는 변신과 함께 뼈가 두드득거리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자 귀를 막았다. 그들의 변신은 순식간에 이루어졌고 제일 앞에 있던 덩치 큰 웨어울프가 울타리 밖으로 나서자 모두 그 뒤를 따랐다. 토리는 두려웠지만 그들이 뛰는 방향에서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웨어울프들이 향하는 목적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웨어울프의 아지트를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에서 100미터쯤 앞에는 리자드맨들이 대규모로 집결해 있었다. 50이 넘는 숫자였고 조잡하지만 날카로운 칼을 들고 있었다. 몬스터랜드에서 오랫동안 앙숙으로 지내온 리자드맨과 웨어울프의 전투는 아무런 사전예고도 없이 곧바로 시작됐다.
 크아!!!
 토리에게는 털보아저씨로 보였던 웨어울프 대장은 빠르게 적에게 접근하며 제일 선두에 있는 덩치 큰 리자드맨을 공격했다. 토리의 눈에는 두 발로 걷는 도마뱀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리자드맨은 웨어울프보다 덩치가 약간 작긴 했지만 그 투지만은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리자드맨 대장은 칼을 버리고 웨어울프의 앞발을 맨손으로 받아냈다. 뼈가 욱신거릴 정도로 파괴력이 강했지만 부하들의 사기를 위해 모험을 한 것이었다. 이렇게 웨어울프의 아지트를 습격한 것이 최근 들어서만 해도 벌써 열 번을 넘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그들을 쓰러뜨리기 위해 특별한 작전까지 동원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부하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순 없기에 무리를 해서라도 웨어울프 대장과 맨손 힘겨루기에 들어간 것이었다.
 웨어울프 대장은 상대가 갑자기 육박전으로 응수하고 나오자 크게 당황했다. 다른 웨어울프들도 대장이 당황하는 모습에 적지 않게 동요하는 듯했다.
 “크으… 파그잔! 어때? 크으… 오늘은 끝을 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크으…….”
 파그잔이란 이름의 웨어울프 대장은 툭 튀어나온 입을 악다물며 자신을 비꼬는 오랜 앙숙을 바라봤다. 시뻘개진 눈은 금방이라도 불길이 터져 나올 것처럼 이글이글 타올랐다. 서로 손을 잡고 힘겨루기에 들어간 상황에서 상대가 말을 할 정도라면 충분히 여유가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때 파그잔이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대장! 아이들이 위험해!”
 파그잔은 멜린의 외침을 듣고 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언덕을 지나 울타리 입구로 막 들어서는 10여 마리의 리자드맨이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끌어! 하필 갈린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쳐들어 오다니.”
 천막 안에는 아직 어린 웨어울프들이 있었다. 리자드맨의 공격이 가해지는 순간 곧바로 전멸을 면치 못할 게 뻔했다. 번식률이 리자드맨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웨어울프의 입장에서 아이들이 몰살당한다는 사실은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훗날 씻을 수 없는 전력의 차이를 낳게 한다. 그 점을 모르지 않는 파그잔은 급히 천막으로 뛰어가려 했지만 목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리자드맨 대장의 칼에 황급히 방어태세를 갖추어야 했다.
 그 순간,
 “으아!!!”
 토리는 웨어울프의 전투를 지켜보다 갑자기 울타리 안으로 짓쳐 들어서는 리자드맨들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가까이서 본 리자드맨은 실제 도마뱀보다 훨씬 징그럽고 사악한 모습이라 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아무 방향으로나 힘껏 뛰었다.
 작은 아이의 비명소리에 천막을 뒤지려 했던 리자드맨들이 급히 토리의 뒤를 쫓았다. 어차피 그들이 부여받은 임무는 아이들의 학살. 그렇다면 토리도 그에 포함된다. 토리가 진짜 인간임을 알 리 없는 리자드맨들은 단 한 명의 아이도 살려두지 않기 위해 토리를 쫓았다.
 “오지 마! 오지 마!”
 토리는 짧은 발걸음으로 힘껏 뛰었지만 리자드맨의 속도를 이길 순 없었다. 꽤 떨어져 있던 거리가 순식간에 손만 뻗으면 닿을 정도로 좁혀지면서 리자드맨들이 내뱉는 끈적한 숨결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
 토리는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자신의 발을 원망했지만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자신의 눈앞으로 웨어울프들이 만들어 놓은 조잡한 울타리가 크게 나타났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상황. 가장 앞서 쫓아오던 리자드맨은 이제 손을 뻗쳐 토리를 잡으려 했다. 그때 토리의 눈에 조잡한 울타리 밑으로 약간의 틈새가 보였다.
 “으아!!!”
 토리는 스스로의 용기를 북돋는 비명을 지르며 무작정 울타리 틈새로 몸을 날렸다. 좁아 보이던 틈새는 등에 긴 상처를 남기긴 했지만 무사히 토리를 밖으로 이끌었고 갑자기 목표를 놓친 리자드맨들은 작은 아이를 잡기 위해 울타리 입구까지 돌아가야 했다.
 토리를 추격하던 리자드맨들은 숲으로 무작정 뛰어가는 작은 아이를 보고 급히 뒤를 쫓았다.
 “전투에 전념해!”
 리자드맨들이 어린 웨어둘프들을 내버려둔 채 토리를 쫓아가는 모습을 본 파그잔은 급히 명령을 내리며 자신도 전투에 전념했다. 자신들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토리가 벌어준 시간 안에 눈앞의 적을 후퇴시키는 게 최선이었다. 그 점을 모르지 않는 웨어울프들은 맹렬하게 공격적인 전투를 이끌어갔다.
 리자드맨에게 쫓기는 토리는 순식간에 좁혀지는 격차로 인해 다시 리자드맨들의 끈적한 냄새를 맡아야 했다. 겨우겨우 숲 바로 앞까지 도착했을 때, 선두에 선 리자드맨은 토리의 바로 뒤에서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쉬익~~
 토리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소리가 매정하게 울리는 순간,
 크아!!!
 리자드맨은 갑자기 울려오는 괴성에 본능적인 위협을 느껴야 했다. 꼬마를 죽이는 동시에 자신의 목숨도 달아나 버릴 것 같은 예감.
 리자드맨은 본능적으로 칼을 거두었고 빼곡한 숲의 어둠을 뚫고 빠르게 다가서는 무리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리자드맨이 상대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어느 새 자신의 목에 서늘한 발톱이 닿아있었다.
 끄윽…
 녹색 피가 분수처럼 튀며 토리를 노렸던 리자드맨의 목이 바닥으로 굴렀다. 상대의 목을 베어낸 은색 머리의 웨어울프는 자신의 털에 녹색 피가 뿌려졌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동료들과 함께 나머지 리자드맨들을 공격해 들어갔다.
 리자드맨 대장과 대치 중이던 파그잔은 숲에서 나타난 무리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웨어울프 최강의 전투요원들. 부대장인 갈린을 중심으로 한 10여 명의 웨어울프들은 갈린군단이란 별칭을 얻을 만큼 전투에는 탁월한 집단이었다.
 전투가 벌어지면서부터 그들이 없다는 아쉬움이 컸던 만큼 갈린의 등장은 웨어울프들의 사기에 엄청난 보탬이 됐다. 다른 웨어울프들과 달리 은색 털을 가진 갈린은 자신의 동료와 함께 가공할 만한 전투력을 보여주며 토리를 추격했던 10여 마리의 리자드맨을 간단히 압박했다.
 갈린이 리자드맨의 목을 뜯어내다시피하는 것을 시작으로 함께 튀어나온 다른 웨어울프들도 각자의 방식대로 적을 요리했다. 머리를 박살내고는 자신의 털에 묻은 녹색 피를 혀로 날름거리는 웨어울프도 있었고 간단하게 상대의 가슴뼈를 뭉개버리는 대원도 있었다.
 공격 방법은 다르지만 모두가 상대 리자드맨보다 월등한 실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쉽게 드러났다. 10여 마리의 리자드맨이 모두 저 세상으로 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토리가 자신 앞에서 행해지는 무차별 학살을 멍하게 지켜보고 있을 때, 부근에 있던 리자드맨들을 모두 도륙낸 갈린군단은 그대로 전면전이 펼쳐지는 본대열로 합류를 시도했다.
 “크으… 후퇴다! 모두 물러서라! 크으…….”
 리자드맨 대장도 갈린군단의 위력을 알고 있기에 감히 정면으로 상대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오늘의 전투는 원래부터 웨어울프의 어린 생명들을 없애기 위한 원정이었기에 목표 달성에 실패한 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리자드맨들은 천천히 뒷걸음질을 시작했고 갈린군단이 도착했을 때는 숲 속으로 반쯤 몸을 감춘 후였다. 숲의 전투는 웨어울프들에게도 위험한 일이라 더이상 추격은 불가능했다.
 크으… 크으…
 웨어울프들은 아쉬운 전투의 결말에 이를 갈았지만 리자드맨의 비겁한 의도를 저지한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라는 생각에 울타리 안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때까지 혼이 빠져버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토리에게 멜린이 천천히 다가갔다.
 멜린은 토리에게 다가가며 자신의 외모를 다시 인간으로 바꾸었고 부드러운 손으로 토리의 어깨를 만졌다.
 “괜찮냐? 꼬마야.”
 인간 여자로서는 무척이나 딱딱한 말이었겠지만 웨어울프들의 성격으로 봤을 때는 상당히 부드러운 말투였다.
 토리는 멜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지만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아직까지 자신이 처한 현실을 부정하려는 마음이 남았는지 눈앞의 예쁜 누나가 광폭한 웨어울프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어린 토리의 눈에는 리자드맨이나 웨어울프나 모두 몬스터로 보일 뿐이었다.
 “이제 곧 해가 지면 너에 대한 처분이 내려지겠지. 행운을 빈다. 꼬마.”
 토리는 대답 대신 멜린의 부축을 받으며 웨어울프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모두 사람으로 변신한 웨어울프들은 극적으로 나타난 갈린군단에 대한 칭찬을 나누고 있었다. 토리는 은색머리를 가진 사내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강한 두려움을 느꼈다.
 “저 애는 누구지?”
 갈린은 한눈에 토리가 자신과 다른 종족임을 알아봤다.
 “그렇지 않아도 네가 돌아오면 회의를 열려고 했다.”
 “그래? 그럼 여기서 시작하지.”
 토리는 자신을 두고 대화를 나누는 웨어울프의 대장과 부대장을 번갈아 쳐다봤다. 털보사내 대장은 후덕한 인상에 중압감이 느껴지는 분위기였고 부대장은 은색머리의 신비함과 마른 체구의 날카로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특히 날카로운 부대장의 눈빛에는 사람을 오그라들게 하는 살기가 담겨 있었다.
 “자! 모두 모여! 회의를 시작하지!”
 대장은 인간들의 회의방식과는 다르게 서론 없이 곧바로 행사를 시작했다. 의자가 놓인 넓은 방도 없고 말이 샐 염려도 하지 않는 그들은 자연에서 살아온 종족답게 어떤 절차와 환경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모든 웨어울프들이 둥그런 원을 만들자 멜린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자신이 토리를 보게 된 경위와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설명했다. 그렇게 멜린의 이야기가 끝나자 대장인 파그잔의 말이 이어졌다.
 “조금 전에 보았듯이 저 꼬마가 아니었으면 어린 웨어울프들은 모두 죽었겠지.”
 상황을 모르는 갈린군단에게 방금 전의 전투를 상세하게 설명한 파그잔은 마지막으로 결론을 내렸다.
 “자. 우리가 생각할 일은 두 가지다. 하나는 우린 다른 종족을 환영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쭉 그래왔고 특히 인간이라면 살려둘 이유가 없지. 분명히 저 꼬마를 죽여야 한다. 그리고 생각해야 할 나머지 하나는 저 아이는 두 번이나 우릴 도와줬다는 거다. 이유야 어찌됐든 우린 저 꼬마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우린 도움을 받고도 상대를 죽이는 매정한 종족이 아니다.”
 말을 마친 파그잔은 오랜만에 인상을 찌푸리며 고민에 빠져드는 동료들을 모습을 지켜보았다. 웨어울프가 비록 지성을 지니긴 했지만 전투 외의 다른 일에 써먹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게다가 이런 고민은 웨어울프들에게 분명히 처음 있는 일이었고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모두 자신의 의견을 말해라.”
 파그잔의 명령에도 동료들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긴 침묵의 시간이 이어졌고 파그잔 자신도 뚜렷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묵묵히 듣고만 있던 갈린이 매서운 눈을 토리에게 돌린 후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루한 침묵의 시간이 깨졌다. 살기가 담긴 눈빛을 다시 동료들에게로 돌린 갈린은 여전히 엷은 미소를 지우지 않고 말을 시작했다.
 “쉽게 생각하면 되지 않나? 우린 저 꼬마와 같이 지낼 수 없다. 하지만 죽일 수도 없지. 그럼 저 꼬마가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준 후 여길 떠나게 하면 되지.”
 갈린의 말을 듣고 있던 파그잔은 그의 의도를 정확히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슨 소린지 정확히 모르겠군.”
 “간단하다. 저 꼬마는 이 울타리를 벗어나면 당장 죽는다. 그러니 혼자 살아갈 나이가 될 때까지만 돌봐주자는 거지. 물론 기본적으로 살아가는 방법과 전투기술은 가르쳐야 한다. 그러면 우리로서도 최선을 다하는 셈이다.”
 그때서야 파그잔을 포함한 동료들은 갈린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의견에 인간과 같이 지낸다는 찜찜함을 드러내는 동료도 있었지만 분명히 토리 덕분에 어린 웨어울프를 지켰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그럼 언제까지가 좋을까?”
 파그잔은 동료들의 표정을 확인한 후 갈린의 의견을 채택했다. 이것이 웨어울프들의 회의 방식이었고 가장 짧은 시간에 의견을 모으는 절차였다.
 “그건 대장이 결정해야지. 의견에 대해서 문제점이 없는지도 다시 생각해 보고. 난 이런 생각이 귀찮으니 대장이 직접 결정했으면 좋겠군.”
 “그래. 대장이 결정해.”
 “귀찮아. 대장이 알아서 해.”
 갈린을 시작으로 모든 의견은 파그잔이 알아서 하라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어차피 파그잔이 웨어울프의 대장이 된 것은 웨어울프들이 그를 믿었기 때문이다. 몬스터랜드의 선물인 지성은 웨어울프들에겐 권력에 대한 집착보다는 동료를 믿는 축복으로 작용했다.
 “그렇게 하지.”
 파그잔이 결정을 내리자 동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흩어졌다.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가는 웨어울프도 있었고 갈린처럼 울타리를 점검하며 주위를 경계하는 동료들도 있었다.
 웨어울프의 대장은 초조한 모습으로 자신들의 회의를 지켜보던 꼬마를 보았다.
 털썩.
 그때 토리의 몸이 앞으로 쓰러지며 바닥의 먼지를 일으켰고 이상하게 생각한 파그잔이 꼬마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토리의 등을 감싸고 있던 싸구려 천이 길게 찢겨져 나간 게 보였다. 그 사이로 어린아이에겐 참기 힘든 고통을 주었음에 틀림없는 긴 상처가 있었다. 그 작은 몸에서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 토리의 등을 감쌌던 옷은 온통 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파그잔은 출혈 과다로 쓰러져 버린 꼬마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파그잔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연민의 감정. 그는 스스로의 감정에 놀라며 가만히 쓰러진 토리를 들어올렸다.
 
 3.죽지 않는 법을 배워라
 
 붉은 태양을 받아라.
 내 가슴에 묻힌 싸늘한 시체들을 밝은 빛에 실어 조용히 날려주마.
 달빛에 그을린 어둠의 노예들이여.
 이제는 태양을 보며 자신의 죄를 빌어라.
 - 떠돌이 시인 ‘미산’의 시 중에서-
 
 “앞으로 10년 동안 토리는 우리의 동료다. 모두 명심하기 바란다.”
 몬스터랜드의 태양이 다시 시작되는 아침을 예고할 때 웨어울프들은 짧은 회의를 마쳤다. 파그잔은 어제 회의를 마친 후 정신을 잃은 토리의 상처를 돌봐주며 나름대로 결정을 내렸다. 파그잔이 아무리 토리에게 연민을 느꼈다지만 그들은 인간을 동료로 받아들일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결정한 기간이 10년이었고 토리가 15살이 되면 이곳을 떠나게 만들자고 결정했다.
 인간의 정확한 성장 속도를 모르는 파그잔은 웨어울프가 성인으로 인정받는 15살을 마지막으로 정했고 덕분에 토리는 한참 자랄 나이인 10년 후에는 웨어울프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됐다. 어쨌든 토리로서는 당장의 죽음만이라도 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니 몬스터랜드에서 허무한 죽음을 맞이한 다른 인간들보다는 훨씬 행운아인 셈이었다.
 “알았어. 대장.”
 “대장. 이제 가도 되지?”
 파그잔의 진중한 연설이 끝나면 동료들은 항상 귀찮은 일을 마쳤다는 표정을 지었다. 워낙 전투를 좋아하고 전투로 지새우는 종족인 만큼 이런 골치 아픈 일에는 지루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파그잔은 각자 자신이 할 일을 찾아가는 동료들을 보며 토리가 누워있는 천막으로 들어서려 했다. 하지만 자신의 어깨를 잡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몸을 돌려야 했다.
 “갈린. 무슨 할 말이 있나?”
 “그럼 인간에게 전투기술도 가르쳐야 하는 건가?”
 “물론이다.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토리는 앞으로 10년간은 우리의 동료다. 그리고 전투기술을 가르치자고 한 건 네 뜻이 아니었나?”
 갈린은 특유의 엷은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내 말을 오해했군. 난 토리라는 꼬마에게 전투를 가르치는 것에 불만이 없다. 다만 전투를 가르쳐야 한다면 내가 하겠다.”
 파그잔은 뜻밖의 말에 갈린의 얼굴을 살폈다. 웨어울프의 모든 이들은 전투기술이 워낙 뛰어난 갈린을 좋아했지만 정작 본인은 누군가와 친하게 지내는 것을 꺼려했다. 그런 갈린이 귀찮은 일을 직접 맡겠다고 나서니 파그잔의 입장에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굉장히 귀찮은 일이라는 것을 잘 알 텐데. 토리는 인간이라 우리처럼 타고난 전투능력도 없다. 그런데도 하겠다는 건가?”
 파그잔은 다른 동료들은 토리에게 전투기술을 가르치지 않을 것이라 여기며 애당초 자신이 직접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어젯밤 토리의 몸을 살펴보고 내린 결론은 물렁한 근육을 가진 꼬마의 신체로는 웨어울프의 전투기술을 따라오지 못할 것이 뻔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웨어울프가 토리를 가르치는 도중 심한 짜증을 낼 것이 뻔했고 일이 커지면 토리는 10년 동안 외톨이가 되어 버릴 수도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자신이 희생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갈린의 요청은 결코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닌 듯했다. 아니, 갈린은 농담 자체를 하지 않는 인물이다.
 “후후. 재밌을 것 같군.”
 결국 웨어울프 대장은 부대장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고 토리의 전투스승은 갈린으로 결정됐다. 꼬마의 몸이 회복하면 바로 시작하겠다는 말을 남긴 갈린은 정찰을 위해 울타리를 벗어났고 혼자 남은 파그잔은 원래의 계획대로 토리를 만나러 갔다.
 조잡한 천막 안에는 아직도 등에 난 상처로 괴로워하는 토리와 처음 인연으로 꼬마를 돌봐주는 멜린이 있었다. 토리의 등에는 상처를 따라 약초가 덮혀 있었고 그 상처는 평생토록 지워지지 않을 만큼 깊었다.
 “멜린, 이제 나가도 된다. 앞으로 토리는 내가 돌보도록 하겠다.”
 “알았어, 대장.”
 멜린은 괴로워하는 토리를 다시 한번 쳐다본 후 천막을 빠져나갔다.
 “토리. 내 말을 잘 들어라. 넌 앞으로 10년 동안은 웨어울프가 되는 거다. 넌 인간이지만 앞으로 10년은 스스로를 버려라. 넌 몬스터랜드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토리는 등의 고통으로 짜증이 났지만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다른 말이 이해하기 어렵다면 이 말을 명심해라. 살고 싶으면 죽지 않는 법을 배워라.”
 파그잔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입을 다물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꼬마와 대장은 아무런 대화도 없이 오랜 시간을 보냈다. 파그잔이 토리에게 말을 할 때는 꼭 필요한 말이 있을 때였고 가끔씩 몬스터랜드의 전황에 관한 설명을 들려주기도 했다.
 파그잔은 몬스터랜드의 종족 분포와 전황이 토리에게 꼭 필요한 지식이라 생각하고 외우라는 당부와 함께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일 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토리와 파그잔이 한 일은 먹고 자는 것을 빼면 몬스터랜드의 분위기를 몇 번이고 다시 설명하고 듣는 일뿐이었다.
 토리가 파그잔으로부터 전해 들은 몬스터랜드 상황은 이해할 수 없는 것뿐이었지만 억지로라도 외워야 했다.
 현재 웨어울프가 자리를 잡은 곳은 몬스터랜드의 중앙을 기점으로 남쪽이며 ‘죽음의 숲’ 끝 부분의 작은 공터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조금 더 남쪽 숲을 지나면 해안가가 나왔다. 모든 해안가는 머맨과 수중몬스터들이 장악하고 있어 매우 위험했다. 몬스터랜드 중앙에는 ‘공간의 언덕’이라 불리는 작은 언덕이 있는데 이곳은 아무도 접근할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벽이 생성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기본적인 몬스터랜드의 풍경이었고 중요한 점은 그 다음부터였다.
 중앙을 기점으로 북쪽에는 많은 숫자의 오크들이 살고 있었다. 전투력이 약한 오크들은 집단생활을 하며 많은 인구수를 무기로 북쪽에서 제법 탄탄한 방어태세를 구축한 상태였다. 서쪽은 고블린과 코볼트, 동쪽은 뚜렷하게 부각된 집단이 없는 대신 많은 몬스터들이 세력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웨어울프가 속한 남쪽은 리자드맨과 세력싸움을 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겉으로만 보면 단순히 땅따먹기를 위한 세력싸움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실상은 생존을 위해 적을 죽이는 물러설 수 없는 전쟁이었다. 상대 종족을 전멸시키면 그만큼 자신들의 위험이 없어지기 때문에 몬스터랜드의 각 종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적을 섬멸하려고 들었다. 물론 돌아다니는 떠돌이 생활보다 정착해서 전투를 준비하는 편이 도움이 되기에 모두 아지트를 만들었고 그러다 보니 겉보기에는 땅따먹기를 하려는 세력다툼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토리는 몇 번이나 반복되는 파그잔의 말에 저절로 외울 수밖에 없었지만 꼭 필요한 지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직은 어린 나이라 자신도 전투를 해야 한다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렇게 일 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나자 토리는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고 다시 일 주일이 지나 웨어울프와 함께 지낸 지 이 주일째 되던 날에는 침상에서 일어나 아지트 앞의 공터로 나갈 수 있었다.
 “넌 오늘부터 전투기술을 배워야 한다. 갈린이 가르쳐 줄 테니 살고 싶다면 열심히 배우도록 해라.”
 파그잔의 말을 되새기며 공터로 향하던 토리는 잔잔히 부는 바람에 은색 머리를 날리고 있는 갈린을 확인하는 순간, 와락 두려운 마음부터 들었다.
 “후후. 그런 상처로 보름이나 누워 있다니. 일단 필요한 것부터 주지.”
 갈린은 병상에서 일어난 꼬마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 대신 공처럼 둥근 식물을 던져 주었다. 토리는 늦은 회복을 비웃는 말에 기분이 상했다. 토리는 갈린이 던져준 이상한 식물에 눈길도 주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부터 하려 했다.
 “난 아직 어른이 아니…….”
 “그런 말을 들으려는 것이 아니다. 우선 땅에 떨어진 것을 주워라.”
 토리는 갈린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땅에 떨어진 식물을 주웠다. 녹색 식물의 줄기 끝에는 누군가가 꺾은 흔적이 남아 있었고 줄기 위로 주먹의 두 배쯤 되는 공간을 둥근 잎이 감싸고 있었다.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다. 잎을 뚫으면 물을 마실 수 있다.”
 토리는 물이라는 말을 듣자 갈증이 밀려왔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아침의 갈증을 아직 해소하지 못한 상태였다. 토리는 갈린의 말에 따라 식물의 둥근 잎을 손가락으로 찔러 보았다. 하지만 줄기보다 튼튼한 잎의 구조 탓에 구멍 뚫기는 쉽게 성공하지 못했다. 얇은 자국만 남기고 잎을 뚫지 못하는 토리를 보며 갈린은 노골적인 비웃음을 흘렸다.
 “후후, 스스로 물도 마시지 못하는 생물이라니.”
 갈린은 여전히 식물의 잎을 뚫으려 애쓰는 토리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손가락을 세워 둥근 잎의 중앙에 찔러 넣었다.
 푹!
 토리가 들였던 노력에 비해 너무나 허무한 소리였고 결과였다. 갈린이 찔렀던 손가락을 빼자 식물에서는 맑은 물이 흘러나왔다. 잎의 안쪽 공간이 모두 물로 채워진 듯 토리가 갈증을 해소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양이었다.
 몬스터랜드에 특이하게 서식하는 이 식물은 섬 전체에 퍼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이름이 붙어 있지 않았다. 인간은 모든 사물에 대해 이름을 붙이고 구별하려 하지만 몬스터들은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았다. 그저 ‘물을 주는 식물’로 생각하고 필요할 때마다 꺾으면 그만이었다.
 “1분 후에는 나와 전투를 한다.”
 “무… 무슨……?”
 토리는 갑자기 전투라는 말에 갈린을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렸다. 리자드맨의 목을 뜯어내던 갈린의 공격, 아직까지 그때의 장면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아 파그잔이 주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심한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런 갈린과의 전투란 토리에게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토리는 겁이 났다. 이제 겨우 등의 상처가 가려운 정도로 가라앉았는데 다시 죽음의 공포라니. 토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난 누구와 싸워본 적이 없어요.”
 토리는 눈앞의 상대에게 적개심을 잔뜩 드러낸 목소리로 항의를 했다. 하지만 갈린은 토리의 작은 항의를 들어줄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10초 남았군.”
 토리는 자신을 무시하는 갈린이 원망스러웠지만 두려움은 점점 커졌다. 그렇지만 그가 정말로 자신을 공격하리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갈린이 다른 요구를 해오리라고 생각했다. 어린아이로서는 칭찬받을 만큼 깊은 생각이지만 그런 생각도 통하는 인물이 따로 있는 법이다.
 팟!
 토리는 누군가 경쾌하게 땅을 차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목에 심한 충격을 받으며 의식의 끈을 놓았다. 손날로 토리의 목을 정확히 가격한 인물은 당연히 가장 가까이에 있던 갈린이었다.
 “1분이 지났다. 꼬마야.”
 갈린은 기절한 토리를 안아들고 천막으로 이동했다. 뒤에서 잠자코 지켜보던 파그잔은 뭔가 말을 하려 했지만 부대장인 갈린을 믿기로 하고 말없이 뒤를 따랐다.
 “약한 꼬마군.”
 갈린은 푹신한 풀이 깔려 있는 바닥에 토리를 눕혔다.
 “깨어나면 다시 시작해야겠군.”
 누가 들으면 혼잣말이라 생각하겠지만 이 말은 파그잔에게 토리가 깨어나는 대로 보내달라는 말이었다.
 파그잔은 괴로워하는 토리의 숨소리를 들으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웨어울프들은 전투기술을 가르치는 과정에는 절대 참견하지 않는 것이 관습이었다.
 물론 전투를 가르치는 스승이 제자를 죽이는 경우는 없었다. 그리고 정해진 방법도 없고 오로지 수련을 담당하는 성인 웨어울프에게 모든 것이 맡겨져 있기에 파그잔은 갈린에게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파그잔의 안타까운 표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토리는 한 시간쯤 지나자 목을 부여잡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벌써부터 안쪽으로 부어오르기 시작한 목은 침을 삼킬 때마다 찌릿한 고통을 안겨줬고 숨쉬기도 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파그잔은 갈린의 말을 전해야 했다.
 “조금 전 공터로 가라. 갈린이 기다리고 있다.”
 토리는 눈을 뜨자마자 들려오는 소리에 파그잔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기절하고 깨어난 아이를 다시 괴롭혀도 되느냐는 무언의 압력을 실어 보냈지만 파그잔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토리는 아픈 목을 만지며 다시 공터로 향했고 그곳에는 여전히 갈린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일어났나? 꼬마.”
 “내 이름은 꼬마가 아니라 토리예요.”
 “후후. 그런가?”
 토리는 자신을 무시하는 말에 짜증이 났지만 은근한 공포도 함께 느꼈다. 그때 갈린의 입에서는 여전히 자신을 무시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목을 만지고 있군. 아픈가? 하지만 명심해라. 조금 전에 내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면 너는 벌써 죽었다. 혹시 자신의 어린 나이에 대한 특혜를 바라고 있다면 당장 버리도록 해라. 난 너를 어리다고 봐주지 않는다. 그리고 이곳 몬스터랜드에는 어리다고 봐주는 일이 있을 수 없다. 1분 후에 다시 널 공격하겠다. 전투준비를 갖춰라.”
 갈린의 말이 토리의 귀에는 야속하게 들렸지만 이것이 몬스터랜드의 법칙이었다. 서로 먹고 먹히는 전투가 지배적인 전장에서 약한 마음이나 동정은 자신의 죽음과 직결되었다. 그리고 각 지역을 대표하는 오크나 웨어울프들을 제외하고도 몬스터랜드의 곳곳에는 동족의식을 가지지 않은 강력한 몬스터가 즐비했다.
 특히 숲에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은 몬스터가 존재했기에 순간적인 방심이나 판단착오는 곧바로 죽음으로 이어졌다. 갈린의 행동은 이런 생리를 그대로 반영한 가르침이었다.
 어느 순간 어떤 경우에도 적이 있다면 먼저 죽여야 한다. 기회를 놓치면 없어지는 것은 적이 아닌 자신이다. 상대가 어리다고 봐줄 수 없다. 상대가 약하다고 관용을 베풀어서도 안 된다. 죽지 않는 방법은 적을 먼저 죽이는 것뿐이다.
 탓!
 토리가 아무런 반응 없이 갈린을 노려보고만 있을 때, 갈린은 1분이 지나자 약속대로 다시 땅을 차며 앞으로 파고들었다. 토리는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졌지만 자신의 가슴에 닿는 묵직한 충격을 느끼며 다시 의식을 잃었다.
 갈린은 기절한 토리를 다시 한번 들어올렸고 조금 전처럼 천막에다 눕혔다.
 “깨어나면 다시 시작해야겠어.”
 갈린은 파그잔이 들을 수 있게 다시 혼잣말을 뱉은 후 천막을 벗어났고 토리는 두 시간이 지나서야 깨어났다.
 “안됐군. 갈린이 기다리고 있다. 나가보도록 해라.”
 “왜? 왜 날 괴롭히는 거죠? 차라리 그냥 죽여요. 이러지 말고 그냥 죽이라고요!”
 토리는 아픈 목으로 힘껏 소리를 질렀다. 어린 토리는 이들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 당장 전해지는 목과 가슴의 고통이 견디기 힘들 만큼 심했다. 아직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10분의 1도 살지 않은 토리지만 지금 순간은 차라리 죽고 싶었다.
 “차라리… 날 죽이라고요.”
 파그잔은 죽음을 바라는 토리를 보며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은 괴롭더라도 참을 수밖에 없다. 투정을 부릴 만큼 몬스터랜드는 만만한 곳이 아니다. 이제 깨어났으면 갈린에게 가라.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무조건 강해지라는 말밖에 없다.”
 어쩔 수 없이 공터로 나간 토리는 다시 급소를 맞고 천막으로 옮겨왔다.
 
 하루에 세 번.
 토리는 꼬박꼬박 세 번씩 기절을 했다. 갈린의 공격은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토리가 매일같이 기절을 반복한 지 한 달이 지났을 때였다.
 “후후. 벌써 한 달이군. 아직까지 아무런 진전이 없다니.”
 갈린은 여전히 토리를 앞에 두고 도발적인 말을 건넸다. 아직 토리는 갈린의 공격을 피하기는커녕 막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약간의 변화가 있다면 3일 전부터는 토리가 공격을 당하기 직전에 몸을 움찔거린다는 정도였다. 부가적으로 물을 주는 식물의 잎을 뚫기 위해 찌르기와 손가락 단련이 수행되었다.
 “1분이다.”
 갈린은 토리에게 공포의 말이 되어 버린 1분을 꺼내며 말을 끊었다.
 “이… 악마……!”
 토리의 모습에는 그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맑고 순수하던 눈에는 독기가 올라 있었고 순진하던 얼굴에도 날카로운 기운이 나타났다. 이런 변화는 최근에 나타난 것으로 처음 갈린과의 전투 후에는 조금씩 죽어가는 병자의 인상이 되어가더니 이제는 독기를 품은 모습으로 변했다.
 여전히 다른 이들에 비해서는 맑은 눈과 귀여운 외모를 지니긴 했지만 내면에서부터 생기기 시작한 독기는 서서히 토리를 강하게 만들어갔다.
 토리의 옷은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여기저기가 찢어져 겨우 중요한 부분만 가릴 수 있는 누더기가 되었지만 이곳의 인물들은 그런 부분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겨울이 없는 몬스터랜드에서 옷이란 그저 민망한 부분을 가리는 도구일 뿐이었다.
 누더기를 걸친 어린 꼬마는 1분이라는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멍하니 공포의 시간을 기다렸지만 최근에는 토리 스스로 한 가지 생각을 가지게 됐다. 아니 생각이라기보다는 살기 위한 집착이라고 해야 옳았다.
 토리는 매일 같이 급소를 가격당하다 몸의 고통이 심해지면 하루라는 휴가를 받아 다친 몸을 추스렀다. 하지만 상처가 쌓여가면서 하루 만에 몸이 완벽하게 회복될 수 있었던 건 처음의 보름뿐이었고 최근에는 부어오른 목과 몸 곳곳의 상처들이 만성이 되어 언제나 욱신거렸다.
 ‘계속 이러다간 죽을지도 몰라.’
 토리는 스스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어떻게 해서든 갈린의 공격을 막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대로라면 자신이 죽고 만다는 본능적인 깨달음이 스스로를 변화시켰다. 처음에는 죽고 싶다며 풀이 죽었던 토리가 갈린의 계속되는 핍박 끝에 약한 모습을 서서히 떨쳐가기 시작했다.
 팟!
 한 달 내내 토리를 괴롭혔던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토리는 어디로 날아올지 모르는 갈린의 공격을 막아낼 자신이 없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간단하게 기절당한 채 다시 몇 시간을 꿈속에서 보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작은 꼬마의 오기와 살고 싶다는 본능은 처음으로 갈린의 공격에 어떤 행동을 보였다. 토리는 작은 몸을 잔뜩 움츠리며 양팔로 얼굴을 보호했다. 적어도 상체의 급소는 막아보자는 의도였다.
 퍽!
 둔탁한 타격음이 울리고 토리는 얼굴을 보호하던 팔뚝에 강한 통증을 느끼며 뒤로 튕겨져 나갔다. 갈린이 얼굴을 보호하는 토리의 손 위를 그대로 가격했기 때문이다.
 토리는 팔의 감각을 잃어 버릴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평소처럼 기절까지 가지는 않았다. 작은 아이는 축 처진 팔을 이끌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입가에는 해냈다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틀렸다.”
 갈린은 토리가 일어나는 모습을 지켜본 뒤 낮은 목소리를 뱉었다.
 “지금 널 공격한 것이 맨손이 아니라 무기였다면 넌 죽었다. 다시 1분이다.”
 토리는 다시 1분 동안 많은 생각을 했지만 뚜렷한 해결책을 떠올리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팔에 힘이 빠져 방어도 불가능했기에 1분 후의 공격에 토리는 다시 목의 아련한 통증을 느끼며 천막으로 옮겨져야 했다.
 “오늘도 역시 진전이 없었는가?”
 천막에서 토리를 기다리고 있던 파그잔이 갈린에게 질문했다.
 “이제 보이는 모양이더군.”
 갈린은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는 천막을 벗어났다. 앞뒤가 없는 말이지만 파그잔은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웨어울프들이 처음 전투기술을 배울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상대의 공격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보통 어린 웨어울프는 그런 공격을 열흘 정도 기간에 볼 수 있게 되지만 토리는 한 달이 걸려서야 첫 단계를 통과했다. 물론 갈린의 공격이 다른 웨어울프보다 빠르기는 하지만 그 역시 토리를 공격할 때는 모든 실력을 발휘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해야 했다.
 분명 인간의 몸으로 웨어울프를 따라가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수련은 전적으로 갈린에게 달려 있어 토리가 어떤 고문 같은 가르침을 받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강해지고 싶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수련이기에 파그잔은 안타까워하면서도 한 번도 이 일에 끼어들지 않았다.
 
 6개월 후.
 “1분이다.”
 토리는 만신창이가 된 몸이었지만 눈의 독기만은 더욱 진해져 있었다. 웨어울프와 지낸 6개월 동안 토리가 만난 인물은 갈린과 파그잔, 멜린이 전부였다. 기절하지 않은 시간에는 항상 천막에 누워있었기에 다른 웨어울프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적도 없었다.
 그리고 요즘은 거의 공격을 해오지 않는 리자드맨에 대한 경계가 높아져도 토리에게는 매일 같은 일의 반복이었다. 지난 6개월 동안 토리는 상처 때문에 일 주일 동안 병상에 누운 적도 있었고 12시간 동안 기절한 적도 있었다.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은 토리가 갈린의 의도를 알아차리면서 시작됐다. 토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갈린의 공격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고 한 번씩 손을 들거나 몸을 움츠려 그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냈다. 하지만 그런 방어 후에는 여지없이 갈린의 연속공격이 들어왔고 몸에 가해지는 충격은 배가 됐다.
 그러면서 알아낸 갈린의 가르침은 공격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하라는 것이었다. 몬스터의 손은 도끼보다 날카로울 수도 있고 상대의 뼈를 부스러뜨릴 힘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살려면 상대의 공격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 그런 사실을 알아챈 토리는 어떻게 해서든 몸을 움직이려 노력했고 그러면서 갈린이 의도하지 않았던 부분에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빗맞은 부분은 정타보다 치명적이지는 않았지만 고통이 오래갔고 토리가 천막에서 일 주일을 보내는 일도 허다해졌다.
 팟!
 그때 다시 갈린의 공격이 시작되는 소리가 들렸다.
 쉬익~
 토리는 처음에는 알아채지 못했던 갈린의 공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바람을 가르며 팔이 이동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은 불과 한 달 전이었다. 그만큼 이제는 공격에 익숙해졌고 많이 적응이 되었다.
 “흡!”
 토리는 오늘만은 피하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기합과 함께 갈린의 공격을 보며 머리를 숙였다. 갈린의 무자비한 손은 오늘도 역시 목을 노리고 있었고 처음 토리를 수련시킬 때보다 약간은 빠른 속도였다.
 갈린의 손과 토리의 목이 교차점을 이루려는 순간, 그 동안 몸을 대주기만 했던 토리의 목이 갑자기 밑으로 내려갔다. 갈린은 그 짧은 순간에도 눈빛을 빛내며 속도를 더욱 높였지만 그의 공격은 토리의 하늘색 머리카락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허공을 갈랐다.
 “어?”
 토리는 갈린의 공격을 처음으로 피했다는 사실에 자신도 어리둥절해 했다. 자신이 해낸 사실을 믿지 못하는 듯했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야 토리는 자신의 몸 어디에도 타격의 흔적이 없음을 확인하며 기쁜 표정을 지었다.
 “야호!”
 꼬마는 자신의 나이에 어울리게 땅을 힘껏 차며 환호성을 질렀다.
 퍽!
 하지만 그런 환호성이 끝나자 곧바로 둔탁한 타격음이 들려왔고 토리는 배를 부여잡으며 앞으로 거꾸러졌다.
 “멍청하군. 공격을 피했으면 너의 공격이 이어져야 한다.”
 토리는 흐릿해져가는 의식 속에서 앞으로 익혀야 할 또 다른 과제를 받았다. 갈린의 말대로 지금까지는 순전히 방어를 위한 수련이었고 이제는 공격을 배워야 했다. 그렇지만 억울하기도 했다. 한 번도 배워본 적이 없는 전투를 이렇게 무식한 방법으로 익혀야 한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토리는 완전히 기절하기 직전에 갈린을 째려보며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다음날 아침.
 토리는 어제의 수련을 생각하며 눈을 떴다. 첫 번째 공격을 피하긴 했지만 이어지는 갈린의 연속 공격에 정례화된 세 번의 정규 기절을 꽉 채워버리고 말았다. 꼬마는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듯 작은 주먹을 꽉 쥐며 의지를 불태웠다. 상대가 웨어울프든 인간 어른이든 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토리는 파그잔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평소처럼 공터로 향했다.
 갈린은 항상 그렇듯 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런 갈린의 모습은 토리의 눈에 마치 큰 산처럼 비쳤다. 그러나 반드시 뛰어넘어야 할 산이었다. 평생 이뤄낼 수 없을지도 모를 큰 목표를 정해버린 토리는 눈빛을 고쳐 잡으며 갈린의 앞으로 걸어갔다.
 토리는 다가가서 갈린을 보는 순간 평소와 다른 상황이 보였다. 갈린의 오른쪽에는 온몸이 결박당한 리자드맨이 놓여 있었고 자신을 포박한 상대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꽤나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넌 적을 죽여본 적이 있나?”
 갈린은 뜬금없는 질문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
 토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머리 속에는 멜린을 처음 만나 빨간색 고블린을 죽였던 기억을 떠올렸다.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지만 분명히 자신의 손으로 죽인 건 사실이었다.
 “오늘의 수련은 간단하다. 이 녀석을 죽여라.”
 토리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갈린을 노려보았다.
 “그 동안의 전투보다는 훨씬 쉬운 수련이다. 묶여서 저항도 할 수 없는 적을 죽일 뿐이다. 어렵나?”
 “하지만…….”
 토리는 생명을 죽인다는 생각에 원초적인 거부감이 들어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런 일을 시키는 갈린이 그렇게 잔인해 보일 수 없었다. 갈린의 입장에서는 토리를 강하게 만드는 수련이라지만 꼬마가 감당하기에는 분명히 힘든 과제였다.
 “잘 들어라. 이 녀석은 우리의 적이다. 적을 동정하고 싶은가? 적을 살려주고 싶은가? 그 결과가 자신의 죽음이라는 것을 또 한번 말해야 하나?”
 갈린은 평소보다 험한 눈빛으로 토리를 재촉했고 포박당한 리자드맨을 멍한 꼬마의 발치 끝으로 던졌다.
 “죽여라. 살고 싶다면 죽여라. 그것이 이곳에서 살아가는 방법이고 가장 기본적인 수련이다.”
 토리는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는 리자드맨을 내려다봤다. 징그러운 도마뱀의 모습이지만 공포에 질려 있는 마음이 자신에게까지 전해졌다.
 “두렵나? 생명을 죽이는 것이 두렵나? 하지만 잘 생각해라. 다른 생명을 죽이는 것보다는 자신이 죽는 것이 더 두려운 법이다.”
 갈린은 매정하게도 계속해서 토리의 죄책감을 자극했다. 결국 그의 말은 남을 죽이고 네가 살라는 말이었다. 부모의 품에 안겨 어리광을 부리고 있을 나이인 토리에게는 잔혹한 고문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토리는 해야 했다. 더러워도 징그러워도 살기 위해서 해야 했다.
 ‘그래. 어차피 밖에서 만나면 날 죽이려고 했을 몬스터야.’
 분명한 사실이지만 지금 토리의 생각은 스스로를 위로하고 최면을 걸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토리는 너덜해진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몬스터랜드로 오면서부터 지녀온 날카로운 단도를 꺼내들었다. 꼬마의 손은 한없이 떨렸고 그에 따라 눈빛도 심하게 일렁거렸다.
 토리는 넘어져서 꼼짝도 하지 못하는 리자드맨의 목에 서늘한 단도의 날을 댔다. 칼날 끝에 리자드맨의 떨림이 전해져 왔다. 몬스터라지만 그것도 생명이기에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자신과 같이 죽음을 두려워하며 몸을 떨고 있었다. 토리는 망설였다. 자신에게 힘이 있다면 살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 녀석을 살려주면 후에 바로 이 몬스터에게 죽음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몬스터랜드에서 내일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는 점을 토리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결국 토리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손에 힘을 주며 날카로운 단도로 빠르게 리자드맨의 목을 그었다.
 끄윽…
 칼끝으로 무참히 베어지는 살갗의 느낌이 전해졌고 토리의 얼굴로 녹색 피분수가 뿜어져 왔다. 자신의 하늘색 머리가 온통 녹색 피로 젖을 때까지 토리는 리자드맨을 죽인 그 자세 그대로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1분이다.”
 갈린은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1분을 지시했다. 토리는 서서히 고개를 들어 매정한 얼굴의 웨어울프 부대장을 바라봤다. 감정이 없는 얼굴. 왠지 역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의 눈빛이 무섭지 않았다.
 탓!
 1분 후 갈린은 평소처럼 공격을 시도했고 토리는 가만히 그의 행동을 지켜봤다. 토리의 가슴으로 향하는 갈린의 공격이 막 성공할 때쯤 토리는 몸을 옆으로 비키며 단도를 앞으로 쭉 내밀었다.
 팍!
 토리의 손끝에 미세하지만 무엇인가가 닿은 느낌이 들었고 동시에 자신의 머리에도 심한 충격이 전해졌다.
 “효과가 있었군.”
 갈린은 자신에게 뒤통수를 맞고 기절한 토리를 들며 한 손을 옆구리로 가져갔다. 겨우 손톱만한 상처지만 처음으로 토리의 공격이 갈린에게 먹혀들었다. 갈린은 미세하게 새어나오는 피를 손가락으로 닦은 후 혀로 가져갔다. 피의 묘한 맛을 감상하던 갈린은 다시 엷은 미소를 지으며 평소처럼 토리를 천막에다 눕혀 놓았다.
 “아직 멀었다, 꼬마.”
 듣지 못할 줄 알면서도 갈린은 그 말을 남기며 천막을 벗어났고 심한 충격 때문인지 토리는 하루를 꼬박 기절한 채 보냈다.
 다음날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린 토리는 어제 일을 생각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오랜만에 눈가에서 눈물이 흘렀다. 죽어버린 리자드맨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했다.
 살아 있는 생명의 목을 베는 야릇한 불쾌함도 여전히 손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멜린이 언젠가 했던 말처럼 인간도 어쩔 수 없는 몬스터일 뿐일까? 토리는 생명을 죽였다는 죄책감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했다.
 “갈린이 기다리고 있다.”
 파그잔은 토리가 깨어난 것을 확인하고는 평소처럼 똑같은 말을 건넸다. 토리는 갑자기 슬픔보다는 짜증이 밀려왔고 자리를 박차며 갈린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꽤 훌륭한 표정을 하고 있군.”
 토리는 갈린의 인사에 분노를 표출했다.
 ‘모든 일이 눈앞에 있는 이 악마 때문이다.’
 토리의 어린 마음에 맺힌 응어리는 자신을 강하고 독하게 만들어준 인물을 향해 분노를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의 품에 여전히 담겨 있는 단도를 꺼내들었다.
 “후후. 이제야 제대로 된 수련이 가능하겠군. 힌트를 주겠다. 지금까지 내가 했던 공격을 떠올려라. 한 번의 공격이라도 상대의 가장 치명적인 곳을 노려라.”
 갈린은 토리가 칼을 쓰는 것을 인정하며 간단히 공격법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어차피 지금까지의 수련에서 자신의 진짜 실력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아직도 토리가 갈린에게 진짜 상처를 주려면 몇 년이고 지나야 할 것이다. 어제는 토리의 돌발적인 행동에 작은 상처를 입긴 했지만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 다짐한 갈린은 다시 1분을 지시하려 했다. 그때,
 “전원 전투 준비!”
 울타리 입구에서 오랜만에 전투준비 명령이 떨어졌다.
 “후후, 꼬마, 운이 좋군. 오늘은 실전이다. 명심해라. 한 번이라도 상대에게 치명적인 부위를 노려라.”
 갈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울타리 입구로 달려갔고 단도를 손에 쥔 토리도 급히 따라갔다.
 “오늘은 몸 좀 풀겠군.”
 “녀석들, 성인식인가?”
 “무모한 의식이지, 크크크.”
 늑대로 변신한 웨어울프들은 거친 목소리로 상대방에 대한 전의를 피워 올렸다. 그들의 상대는 이번에도 역시 리자드맨이었다. 죽음의 숲을 벗어나 모습을 드러낸 그들은 하나같이 어린 리자드맨들이었지만 기세만은 대단했다.
 이처럼 어린 리자드맨들이 공격해 온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리자드맨 특유의 성인식 때문이었다. 어린 리자드맨들은 일정한 나이가 되면 성인식을 치러 전사로서 인정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그런 성인식은 언제나 죽음을 담보로 치러지며 그들 중 약 절반은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
 “제대로 하는 건 번식뿐이군.”
 파그잔은 리자드맨의 뛰어난 번식력을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웨어울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리자드맨의 번식력은 엄청났다. 하지만 이처럼 무모한 성인식 시험을 치러야 할 만큼 번식에 대한 부작용이 이들에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파그잔은 알지 못했다.
 어디든지 인구가 많아지면 최고 권력자의 지배력을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생겨난다. 생활에 필요한 음식이나 물자조달에도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무조건 인구가 많아서 좋은 것은 아니다. 더구나 몬스터랜드처럼 자급자족이 유일한 생계수단일 때는 적당히 인구수를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인식은 새로 생겨난 어린 리자드맨의 숫자를 줄임으로써 인구를 적절하게 유지하려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물론 살아남은 자들은 같은 종족이라는 강한 유대감과 목숨을 걸고 함께 했다는 전우의식도 갖게 되므로 리자드맨에게 성인식은 반드시 필요한 절차였다.
 이런 리자드맨의 고충을 모르는 웨어울프들은 신난다는 표정으로 파그잔의 출격명령만을 기다렸다. 어차피 어른 리자드맨보다는 형편없는 전투력을 지닌 녀석들이었다. 무조건 정면으로 뛰어들어 신나게 휘저어주면서 살육의 쾌감을 즐기기만 하면 되었다.
 웨어울프들은 벌써부터 어금니에 침을 흘리며 파그잔의 출격소리에 타이밍을 맞추고 있었다. 웨어울프의 울타리 앞에서 함성을 지르는 어린 리자드맨들의 목소리가 이들에게는 ‘날 죽여 달라’는 유언으로 들렸다.
 “모두 쓸어 버려!”
 파그잔은 평소의 침착한 모습을 버리고 전투 종족으로서의 본연의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동료들이 화살처럼 튀어나갔고 갈린은 토리를 품에 안고 리자드맨을 향해 달려갔다.
 “어… 어…….”
 토리는 갈린이 왜 자신을 들고 뛰는지도 모르고 불편한 자세에서 신음소리만 내뱉었다.
 갈린은 리자드맨들의 10미터 앞에 토리를 내려놓더니 살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명령을 내렸다. 은색늑대로 변신한 갈린은 토리에게 거부할 수 없는 두려움을 자아냈다.
 “전투자세를 잡아라. 너에게 감당할 수 있는 적을 만들어 주겠다. 순간의 실수는 바로 죽음이니 알아서 하도록. 네가 죽는다면 난 편해지니 환영할 만하겠지, 후후.”
 갈린은 조심하라는 충고인지 죽으라는 저주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는 이미 살육이 시작된 리자드맨들에게 바람처럼 뛰어들었다.
 전세는 말할 것도 없이 웨어울프들의 압도적인 우세였다. 기세 좋게 함성을 지르던 리자드맨들은 생전 처음 보는 웨어울프들의 민첩한 몸놀림에 우왕좌왕하기 일쑤였고 뛰어난 자질을 가지지 못한 어린 전사들은 광기에 물든 적의 일격도 견뎌내지 못했다. 원래부터 리자드맨들의 전투방법은 단순하다 못해 조잡할 정도였다.
 공격법은 상대의 몸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 정도의 단순함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방어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얼마나 많은 전투경험이 있느냐가 관건인데 지금 막 성인이 된 리자드맨에게는 그런 요소들이 전무하다시피했다.
 머리가 깨지고 가슴이 찢겨지는 살육의 현장에 웬일인지 갈린만은 다른 모습을 보였다. 항상 전투가 시작되면 가장 선두에서 피비린내 나는 참사를 이끌어내던 인물이 오늘만은 그렇지 않았다.
 치명적인 목숨줄은 끊지 않으며 유유히 전투를 벌이던 갈린은 눈앞의 겁에 질린 리자드맨을 보더니 묵직한 팔을 휘둘렀다.
 빡!
 살에 부딪힌다고 믿기 힘든 효과음이 울려 퍼지고 공격을 당한 리자드맨은 한쪽 팔을 축 늘어트리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갈린은 아무런 동요 없이 자세를 낮추더니 다시 공격을 이어갔다.
 빡!
 다시 똑같은 소리와 함께 두 발로 서 있던 도마뱀은 한쪽 무릎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러자 갈린은 리자드맨의 뒷덜미를 잡더니 죽음을 선사하는 대신 뒤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 뒤에서 자신의 명령에 따라 거리를 유지하던 토리를 보며 특유의 엷은 미소를 지었다.
 토리는 갑자기 자신 앞에 떨어지는 도마뱀을 보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크으… 크으…
 아직도 부러진 한쪽 팔과 다리의 고통에 신음을 흘리던 리자드맨의 눈이 붉게 변했다. 그리고 공포를 넘어선 야성 특유의 분노를 표출했다. 아직은 멀쩡한 눈으로 사방을 확인한 리자드맨은 자신의 눈앞에서 바짝 얼어 있는 꼬마를 발견하더니 알 수 없는 괴성을 질렀다.
 크아!!!
 리자드맨은 고통을 참고 한쪽 다리를 이용해 몸을 일으켰다. 두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이미 정신이 나간 듯 쭉 튀어나온 입에서는 찐득찐득한 침이 흘러내렸다.
 크아!!
 상처투성이 도마뱀은 괴성과 함께 아직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꼬마에게 칼을 휘둘렀다. 경쾌한 음색과 함께 휘둘린 칼은 정확히 토리의 목을 노리고 있었고 리자드맨의 입가에서는 잔인한 미소가 묻어나왔다.
 “큭!”
 토리는 멍한 상태에서 갑자기 휘둘러 나오는 칼에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숙였다. 지금까지 지겹도록 반복했던 갈린과의 수련으로 몸에 밴 회피동작이었다. 리자드맨 자신은 최대한 빠르게 휘둘렀지만 토리의 눈에는 장난처럼 느리게만 보였다.
 정신을 차린 토리는 불안정한 자세에서 계속 칼을 휘두르는 리자드맨의 공격을 쉽게 피해냈지만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약간은 몸을 경직시켰다.
 그때,
 “시간이 지나면 너만 불리해진다!”
 갈린의 외침과 함께 토리 앞에 또 하나의 리자드맨이 떨어졌다. 이번에도 팔과 다리가 한쪽씩 부러져 있었고 약간 시간이 지나자 맨처음 리자드맨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이제는 2대 1의 싸움이 되어 버렸다.
 토리는 비록 느릿하긴 했지만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두 명의 합공에 정신이 없었다.
 “윽…….”
 어렵게 공격을 피해가던 토리는 옆에서 휘둘러 나오는 칼에 팔뚝이 약간 찢어지는 상처를 입었다. 뜨거운 느낌과 함께 피가 흐르는 팔을 보면서 토리는 드디어 갈린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죽이라는 거야? 악마! 두고 보자.’
 갈린은 아직도 생명을 죽이는 데 익숙하지 못한 토리를 위해 이런 수련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리고 실전의 경험을 약간이라도 익히게 하고 싶었다.
 갈린의 의도대로 토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손에 쥐고 있던 단도를 고쳐 잡았다. 자신의 목으로 다시 돌아오는 칼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지만 다른 리자드맨의 칼이 자신의 옆구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큭…….”
 토리는 옆에서 갑자기 들어오는 공격에 최대한 몸을 앞으로 튕기며 기습을 피해 넘길 수 있었지만 허리가 약간 베이는 것만은 막지 못했다.
 그러나 토리는 애초의 목적대로 첫 번째 리자드맨에게 다가갈 수 있었고 지체 없이 단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가 노리는 곳은 갈린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었다. 그 동안 수도 없이 갈린에게 당했던 부위였다. 토리의 단검은 리자드맨의 목을 향했다.
 끄윽…
 역겨운 신음과 함께 토리의 얼굴에 녹색 피가 쏟아졌다. 어제도 느낀 적이 있는 역겨운 냄새와 색깔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거부감이 덜했다. 그들이 날 죽이려 했기에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반격을 했다는 변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털썩!
 그때,
 갈린이 보낸 또 다른 리자드맨이 옆으로 떨어지자 토리의 마음도 급해졌다. 시간이 지나 던져진 리자드맨이 정신을 차리면 자신은 또 다시 위험한 싸움을 해야 했다. 토리는 본능적으로 그런 상황을 만들어선 안 된다고 느꼈다.
 “합!”
 토리는 기합과 함께 숨을 멈추며 빠르게 자신의 옆구리를 공격했던 리자드맨에게 파고들었다. 성치 않은 몸으로 공격도 겨우 해내던 리자드맨으로서는 토리의 공격을 피할 겨를이 없었고 심장으로 파고드는 단도의 차가운 검신을 피부로 느껴야 했다.
 끄윽…
 또 다시 이어지는 신음. 온몸이 리자드맨의 피로 뒤덮인 토리였지만 죽음의 행진을 멈추지 않았다. 그도 다른 생물이 자신의 생명을 뺏으려는 상황에 익숙해져 갔기에 이제 막 정신을 차리려는 리자드맨을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크아!!! 후퇴다!”
 그때 성인식에서 죽어야 할 숫자가 채워졌는지 리자드맨 무리에서 후퇴명령이 떨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토리는 자신에게 던져지는 또다른 리자드맨을 볼 수 있었다. 토리는 생각할 것도 없이 먼저 몸을 던지며 일어서려는 도마뱀의 목에 단도를 선물했다.
 세 번째 리자드맨을 처치한 토리는 마지막으로 던져진 도마뱀에게 다가가며 죽음의 숲으로 몸을 숨긴 적군을 확인했다. 하지만 자신은 할 일이 남았기에 축 늘어진 팔에 여전히 단도를 들고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크으… 크으…
 고통에 신음하는 리자드맨. 징그러운 생김새에다 자신의 적임에 분명한 상대였지만 동료에게서 떨어져 낙오된 존재에게 한편으로 동정심도 들었다. 하지만 토리는 꿈틀대며 일어나려는 리자드맨의 뒤쪽에 섰다. 앞에서는 언제 기습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이미 상황이 벌어진 지금, 토리는 적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잔인할 정도로 천천히 리자드맨의 뒷덜미로 단도를 밀어 넣었다.
 
 
 다음에 계속...

댓글(2)

[탈퇴계정]    
오오...
2015.01.27 18:03
천개의가면    
세계 멸망 시키는 것을 즐기는 작가. 지구정복이 어릴적 꿈이였을까? 아무튼 세계나 주인공이 애써 세운 집단을 가차없이 멸망시키는 걸 몇번 보고 나니 별 기대를 안하게된 작가.
2018.07.20 08:17
0 / 3000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