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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신전설 1권-1

2015.01.07 조회 927 추천 6


 제1권: 각성, 인드라의 불꽃
 
 제1화 초인들의 방문
 
 1
 
 타다다다닥
 도시의 대학병원은 언제나 분주하고 소란스럽다. 조금이라도 여유를 부렸다가는 환자 하나의 목숨을 날려버릴 수도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어떻게 된 일인가?”
 “예, 실은 피부이식 수술을 받을 환자가 병원 옥상에서 벼락을 맞았습니다.”
 “뭐, 뭐야?”
 이동식 침대에 환자를 실어온 간호사의 말에 의사는 할 말을 잃었다.
 바깥은 어제부터 시작된 폭우가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고 있었다. 이미 바다와 가까운 남부지방 어딘가는 가옥들이 침수되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피뢰침이 있는 옥상은 대체 뭐 하러 올라간단 말인가?
 “환자의 화상이 심하군. 그런데 이런 현상은……?”
 의사는 환자의 상태를 살피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어린아이인데 얼굴 전체에 심한 화상을 입고 있었다. 그뿐이라면 별일 아니겠지만 몸에서 일어나는 스파크는 생소하기만 했다.
 “이 화상은 벼락을 맞아 생긴 게 아닙니다. 하지만 저 역시 이런 경우는 처음이군요.”
 옆에 서 있던 레지던트가 참견했다. 그 말에 의사는 침대 하단에 붙어 있는 약식 차트를 확인했다. 차트의 내용으로 보아 얼굴 화상을 치료하기 위해 피부이식 수술을 받기로 되어 있는 환자였다.
 “우선 진통제와 영양제를 섞은 링거를 놔주도록 하게. 다행히 숨은 쉬는 모양이군.”
 벼락을 맞았다면 대체로 즉사다. 하지만 다행히 숨이 붙어 있으니 화상 이외에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다만 심한 고통으로 인한 쇼크사가 걱정이다.
 의사의 말에 간호사 하나가 링거를 가져와 능숙한 솜씨로 주사바늘을 꽂으려 했다.
 쨍그랑
 “이, 이런! 이래 가지고야 어디……!”
 그러나 간호사는 깜짝 놀라며 링거를 놓치고 말았다. 바늘이 몸에 닿는 순간 아이의 몸에서 방전현상이 일어나며 그녀에게 전기충격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값비싼 링거가 깨지면서 일순 주위의 시선이 몰렸다. 간호사는 몹시 당황했지만 의사는 관심을 보였다.
 “이거 놀랍군. 사람의 몸에서 발전소처럼 전류가 일어난다니. 무슨 충전지처럼 번개의 전류를 흡수하는 것도 아닐 텐데…….”
 그렇게 의사가 신기해하고 있을 때 한 사내가 달려왔다. 사내는 의사보다 옆에 있는 여인에게 질문했다.
 “어떻게 된 거지?”
 “옥상에서 검술수련을 하다가 벼락을 맞았어요.”
 “그, 그랬군.”
 두 남녀의 말에 의사는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뇌성벽우가 몰아치는 날에 검술수련을 한답시고 옥상에 올라가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의사는 하도 기가 막혀서 여인에게 뭐라고 호통을 치려했다. 그러나 아이의 아버지인 강철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동휘를 집으로 데려가겠습니다.”
 “무, 무슨 소립니까? 지금 이 아이는 벼락을 맞아 위독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이를 병원에 두지 않고 집으로 데려가다니요?”
 “그래서 집으로 데려가는 겁니다.”
 철호는 고집스레 말하며 아이를 들쳐업었다. 아이의 몸에서는 더욱 강한 스파크가 일었지만 별 타격은 없는 모양이다. 의사는 이것이 부모가 지닌 사랑의 힘인가 생각하며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은주야, 어서 가자.”
 “예.”
 아이를 업은 철호는 은주라고 부른 아가씨와 함께 병원을 빠져나갔다.
 의사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도 전혀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니, 그럴 틈이 없었다. 그들은 마치 바람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다만 사라지기 전에 두 사람이 나눈 이상한 대화만이 의사의 귓가를 맴돌았다.
 “어떻게 된 거죠? 동휘가 더 안 좋아진 건가요?”
 “아니다. 나도 확신할 수는 없지만 환골탈태를 하는 것 같다. 어쨌든 우선은 빨리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겠다.”
 의사는 바람처럼 사라진 그들의 여운을 되새기며 중얼거렸다.
 “환골탈태? 나 참, 무슨 무협지도 아니고…….”
 
 인애는 조금 전에 전화를 받고 급히 뛰쳐나간 남편을 기다리며 안절부절못했다. 남편 철호가 알려준 마음을 가라앉히는 호흡법을 시도해보려고 했지만 정신이 부산해서 잘 되지 않았다.
 “하아―! 제발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
 인애는 특별히 믿는 종교가 없음에도 누군가에게 간절히 기도하고 싶어졌다.
 결혼 후 무려 5년이 지나서야 얻은 아들이다. 어렵사리 얻은 자식이라 그런지, 아니면 원래 자식 둔 부모 마음이 다 그런 건지 아들 동휘는 모든 게 특별했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똑똑하고 눈치도 빠르다. 남편은 자기보다 무예에 대한 재능이 더 뛰어난 아들을 두었다면서 좋아했다.
 불행은 어처구니없는 사고에서 시작되었다. 화물트럭이 역주행을 해오는 승용차를 피하다가 아들 곁으로 전복된 일이 있었다. 다행히 차에 치이지는 않았지만 상황은 그에 못지않게 심각했다.
 트럭에 가득 실린 것은 염산이었다. 그것이 동휘의 얼굴에 쏟아졌고, 그 와중에 실명까지 하게 되었다.
 인애가 은주를 만나게 된 것도 그때였다. 만일 은주가 몸을 날려 막아주지 않았다면 동휘는 더 끔찍한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그 후 오갈 데 없는 은주를 집에 들이면서 잠깐의 불협화음이 있었지만 지금은 모든 게 좋아졌다. 동휘는 앞을 못 보고 얼굴까지 흉해졌지만 여전히 밝은 모습이었다.
 잠시의 불행은 가족을 더욱 단단하게 엮어주었다. 그리고 마침 남편이 좋은 소식을 가져왔다. 자신의 피부조직 일부를 배양하여 다른 사람의 상한 피부를 대체하는 방법.
 의술의 발달이 가져온 혁신에 인애는 많은 기대를 했다. 병원에서도 아직 어린아이라서 수술 성공률이 높다고 했다. 그리하여 엄청난 기대 속에서 수술 날짜를 기다려왔다.
 쿠당탕
 현관문이 벌컥 열리더니 남편과 은주가 들어왔다. 남편의 등에 동휘가 업혀 있었는데 온몸에서 스파크가 일었다.
 “여, 여보!”
 “사고가 있었던 모양이오. 지금은 급하니 나중에 얘기합시다.”
 철호는 동휘를 방으로 데려가 눕히더니 밖으로 나와 방문 앞에 버티고 앉았다. 인애는 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남편의 표정이 보통 심각한 게 아니라 물어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병원 옥상에서 검술연습을 했는데 벼락이 떨어졌어요.”
 은주는 언제나처럼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녀의 대답에 인애는 할 말을 잃었다. 얼른 달려가 동휘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남편 철호가 앞을 가로막는다.
 “지금 동휘는 누군가 건드리면 곤란해. 그러니 조금만 참아.”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벼락을 맞았다잖아. 그런데 건드리면 안 된다고? 얼른 다시 병원으로 데려가. 빨리!”
 인애는 철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남편이 청진도(淸眞道)인가 뭔가 하는 무예를 연마하고 있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동휘도 그것을 배운 지 1년이 넘었다.
 그런데 가끔 지금처럼 이해되지 않는 소리를 하곤 한다. 말도 되지 않는 현상을 직접 보여준 적이 많아 다소 신기해하면서 믿어오긴 했지만 지금은 도무지 믿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조금만 기다려줘. 지금은 주변이 너무 시끄러운 것조차 동휘에게는 위험할 수 있으니까.”
 철호는 할 말 다 했다는 듯 눈까지 감아버렸다.
 인애는 억지로 남편을 끌어내고 동휘의 방으로 들어가 보려고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엄마, 그냥 조용히 기다려요.”
 은주가 그녀를 부축해 소파로 데려갔다.
 은주가 인애를 엄마라고 부른 것은 불과 보름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묘한 힘이 있어 정말 딸처럼 느껴졌다.
 “하, 하지만……!”
 “그냥 믿으세요.”
 은주의 담담함에 인애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가라앉음을 느꼈다. 은주의 말이 아니더라도 남편이 한번 마음을 정하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던가? 설마 아버지로서 아들을 죽게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마음을 정하자 이번에는 초조감이 찾아왔다. 과연 동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벼락을 맞았다고 사람 몸에서 스파크가 일어난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가끔 영화에서 그런 장면이 나오긴 했지만 그것은 코믹물에 불과하다.
 우우웅
 그때 동휘의 방에서 묘한 울림이 느껴졌다. 방문 틈새로 강한 빛이 새어나왔다.
 인애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편이 뭔가 중요한 일이라고 했는데 그것과 연관이 있는 듯했다.
 파팡
 챙그랑
 방 안에서 뭔가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인애는 다시 남편을 밀어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묘한 울림은 이제 집 전체로 퍼져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전등과 주방의 그릇들까지 덜그럭거렸다. 불과 1, 2분. 묘한 울림이 지속된 것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인애는 수년간을 기다린 듯 조바심을 참을 수가 없었다.
 퍼엉
 그때 갑작스런 폭음이 울렸다.
 “여, 여보! 어떻게 된 거야?”
 “나도 잘……! 말로만 들었거든.”
 방문이 터져나가면서 인애는 다시 소파로 넘어지고 말았다. 얼른 일어나 철호에게 달려가던 그녀는 부서진 방문 안쪽에 누워 있는 동휘를 발견했다.
 소년은 밝은 광휘에 휩싸여 있었고 화상을 입었던 얼굴은 흔적조차 없이 깨끗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녀는 아들이 멀쩡하다는 것만으로 마냥 행복해했다. 이것이 어머니의 마음이다.
 
 
 2
 
 “오빠, 잘해줄게. 응? 이리 와.”
 “거기 청바지 입은 오빠, 이쪽으로 와서 얘기 좀 하고 가.”
 “나 아직 개시도 못했어. 서비스 잘해준다니까?”
 붉은 조명이 깜박거리는 홍등가 주변. 젊고 예쁜 아가씨들이 대낮부터 노출 심한 옷을 걸친 채 지나가는 남자들을 향해 손짓한다.
 “야, 이 쌍년아! 위에 단추 좀 더 풀러. 넌 가슴에 금칠이라도 했냐?”
 왼쪽 어깨에 장미꽃 문신을 한 껄렁한 인상의 청년이 홍등가를 서성거리다 다소 얌전한(?) 복장의 아가씨에게 호통을 쳤다.
 “어머, 오빠는 괜히 난리야.”
 “뭐? 이게 확! 죽을라고.”
 “아, 알았어! 까짓 거 아예 벗고 있으라고 해도 그대로 할게.”
 아가씨는 싫은 표정을 보이면서도 셔츠 단추를 풀어 가슴을 절반가량 노출시켰다. 그 모습에 청년은 흡족한 미소를 보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래, 그렇게 해야 손님이 들지. 하여튼 저년 가슴이 예술인데 죽어라 가리려고 해요.”
 청년은 입맛을 다시며 건들거리다가 눈앞에 생소한 모습을 발견했다. 즐비한 노점상들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거지였다. 그 모습에 청년은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허 참, 저 새끼가 아예 이 동네 장사를 망치려고 작정했나? 재수 없게 어디 와서 영업을 해?”
 청년은 한가로이 졸고 있는 거지에게 다가갔다.
 거지 옆에는 녹색 빛이 보기 좋은 대나무지팡이가 놓여 있고, 앞에는 동전 몇 개가 담겨진 박카스 상자가 있었다. 반백의 머리를 가진 거지는 척 보기에도 나이깨나 들어 보이는 노인이었지만 얼굴은 왠지 젊고 힘 있어 보이기도 했다.
 “어이, 이봐! 다른 데 가서 장사해. 너 같은 새끼가 앞에 있으면 우리 애들 장사가 안 된단 말이다.”
 그러나 청년의 으름장에도 불구하고 거지노인은 졸음이 쉬이 깨지 않는 모양이다. 그 모습에 청년은 부아가 났다.
 마침 옆에 있는 노점상은 음료수를 파는 곳이었다. 청년은 마치 제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수를 한 통 집어들더니 뚜껑을 열어 노인에게 물을 뿌렸다.
 “어, 어이쿠! 이거 오랜만에 세수를 하네? 뉘신지 몰라도 고맙소.”
 “하! 이 양반 넉살도 좋네. 좋은 말로 할 때 다른 데 가서 영업해. 괜히 피곤하게 만들지 말고.”
 “영업? 미안하지만 나는 팔 물건이 없네.”
 노인은 청년의 말에 대꾸하며 슬쩍 웃어보였다. 그 모습에 청년은 묘하게 화가 났다. 고작 거지새끼가 이 골목의 왕이나 다름없는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청년의 음성은 나직하게 변했다.
 “야, 영업 방해하지 말고 꺼져. 내가 이 골목 차지하면서 몇 놈이나 사시미질을 했는지 알아? 괜히 너 같은 놈한테까지 힘쓰기 싫으니까 당장 꺼져라.”
 “아하, 알고 보니 횟집주인이셨군. 그런데 이 근방에는 횟집이 안 보이는데……?”
 “이 자식이 정말 사람 열 받게 만드네?”
 청년은 노인의 말에 버럭 화를 내며 박카스 상자를 걷어차려고 했다. 그러나 노인의 손이 재빨리 상자를 낚아챘다. 거지노인은 상자를 살짝 기울여보곤 아쉽다는 듯 말했다.
 “이거 생각보다 수입이 적은데? 쯧쯧, 사람들 인심이 너무 야박해.”
 노인의 동작이 워낙 자연스럽고 타이밍마저 절묘해서 원래 상자를 집어 동전을 확인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청년의 화를 더욱 돋우는 일이었다.
 “너 정말 나 무시하는 거냐?”
 “젊은 사람이 말을 너무 막하는 구려.”
 “뭐? 이 자식이……!”
 청년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주먹을 뻗었다.
 사람들은 청년과 노인의 실랑이를 구경하다 청년이 주먹을 날리자 눈을 질끈 감았다. 불쌍한 노인네가 길거리에서 매 맞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퍽
 “아악! 내 주먹!”
 “저, 저런! 조심하지.”
 비명소리에 눈을 뜨고 확인해보니 오히려 청년이 주먹을 감싸 쥔 채 인상을 쓰고 있었다. 거지노인이 옆에 놓여 있던 대나무지팡이를 끌어안을 때 묘하게도 청년의 주먹이 그 지팡이 끝을 향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누가 봐도 거지노인이 지레 겁을 집어먹고 움츠렸는데 청년이 지팡이를 때려놓고 혼자 난리치는 모습으로 보였다.
 “아가리 못 닥쳐?”
 청년은 그렇잖아도 좋지 않은 인상을 더 찡그리며 웃고 있는 사람들을 흘겨보았다. 사람들은 즉시 딴청을 부리거나 각자 제 할 일을 했다.
 거지노인은 청년의 모습에 무섭다는 듯 수선을 피우며 박카스 상자에 든 동전과 대나무지팡이를 집어 들고 줄행랑을 쳤다. 청년은 노인을 뒤쫓고 싶었지만 체면상 그러지도 못했다. 그저 유난히 재수 없는 하루라고 욕할 따름이었다.
 “야 이년들아, 뭘 구경해? 얼른 손님이나 받아!”
 “알았어, 오빠.”
 “칫! 괜히 우리한테 그래.”
 멀찍이 서서 팔짱을 끼고 구경하던 아가씨들이 한마디씩 내뱉은 다음 다시 호객행위를 시작했다.
 
 “흘흘, 아무래도 여기가 맞는 모양이군.”
 거지노인은 밤이 되자 다시 홍등가 골목으로 돌아왔다. 낮에 청년에게 봉변을 당할 뻔했음에도 그런 기억은 이미 뇌리에서 사라진 모양이다.
 낮부터 거지노인의 모습을 지켜보았던 노점상인들이 잠시 걱정스런 눈초리를 보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남의 일에 일일이 참견하기엔 그들의 삶도 치열하고 힘들기 때문이다.
 거지노인이 홍등가에 들어서자 건장한 체격의 스님 하나가 그를 뒤따랐다. 그 모습에 노점상인들은 혀를 차며 수군거렸다.
 “이제 여기도 갈 데까지 갔군. 거지에 스님까지 드나들다니, 원…….”
 “그러게 말이야. 하긴, 스님들이라고 그거 생각이 없겠어?”
 노점상인들은 가사를 걸친 채 당당하게 홍등가로 들어서는 스님의 모습을 양념 삼아 음담패설을 늘어놓았다.
 “흘흘, 역시 어여쁜 꽃들이 많구먼.”
 거지노인은 야한 차림의 아가씨들을 흘겨보며 묘한 웃음을 흘렸다.
 홍등가의 밤풍경은 낮에 비해 더욱 화려하고 색정적인 모습이었다. 낮엔 붉은 조명이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데다 아가씨들 숫자도 적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홍등가의 쇼윈도에는 야한 옷차림의 아가씨들이 상점에 진열된 상품처럼 자신의 육체를 뽐내고 있었다. 어떤 이는 가슴을 절반이나 드러내기도 했고, 또 어떤 여자는 팬티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치마를 걸친 채 뽀얀 허벅지를 노출시키고 있었다.
 거지노인은 누런 이를 드러낸 채 아가씨들의 몸매를 노골적으로 감상하며 지나갔다. 그의 몸은 하도 오랫동안 씻지 않아 쉰 냄새까지 났다. 덕분에 욕정을 풀려고 온 사내들이 코를 감싸 쥐며 자리를 피하기 바빴다.
 “나도 남잔데 불러주는 꽃이 없구먼. 누구 ‘누더기 입은 오빠!’ 하고 불러줄 아가씨 없나?”
 노인이 익살스럽게 소리치자 호객행위에 열중이던 아가씨들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많은 여자들이 웃는 모습에 노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때마침 눈에 익은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에이 썅! 어떤 거지새끼가 영업방해를 한다더니 저 재수 없는 늙은이가 또 왔네? 이봐, 정말 맞고 싶어?”
 “흘흘, 이보게 젊은이. 나이 든 사람에게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는 게 아닐세.”
 노인은 손에 들고 있던 대나무지팡이를 슬쩍 늘어뜨리며 말했다. 그러자 노인의 몸에서 알 수 없는 기세가 일었다.
 청년도 노인의 위압감에 보통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어차피 악과 깡으로 버텨온 인생 아닌가? 더군다나 옆에 동생들도 있다.
 “형님, 저희가 해결하겠습니다.”
 “예, 저런 놈은 그저 주먹이 약이죠.”
 사내들의 숫자는 모두 일곱으로 하나같이 덩치가 크고 인상이 좋지 않았다. 그에 비해 거지노인은 체구도 작고 왜소해보였다.
 노인은 사내들의 위협적인 모습에도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롭게 품에 숨겨둔 소주까지 꺼내 입에 무는 게 아닌가?
 “거 날도 더운데 땀 빼지 말고 비키시게. 나는 찾는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흥, 거지새끼 주제에 무슨…….”
 한 사내가 바닥에 침을 뱉으며 주먹을 날렸다. 노인은 비틀거리며 슬쩍 몸을 틀었다.
 “어머, 저 할아버지 대단하다!”
 “그러게?”
 아가씨들은 노인의 모습에 감탄스러워하며 호들갑은 떨어댔다.
 그도 그럴 것이 노인이 몸을 틀자 묘하게도 타이밍이 맞아 사내의 주먹이 허공을 가른 것이다. 그뿐이라면 모르겠는데 노인은 사내의 주먹을 아예 날아가던 방향으로 잡아 끌어주었다.
 그 바람에 사내는 자신이 주먹을 뻗던 속도에 노인의 힘까지 더해져 무게중심을 잃고 말았다. 순간 노인의 지팡이가 다리를 때렸다.
 “크아악! 이 노인네가 뭔 짓을 한 거야!”
 쓰러진 사내는 노인에게 맞은 다리를 부여잡으며 넘어졌다. 슬쩍 때린 듯 보였지만 보통 아픈 게 아니었다. 반면 노인은 여유로운 모습을 잃지 않았다.
 “저 노인네가……! 야, 태워버려.”
 청년의 말에 노인의 주변은 건장한 사내들로 둘러싸였다.
 거지노인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남은 소주를 단숨에 털어 넣곤 알 수 없는 말을 뇌까렸다.
 “오랜만에 하는 운동이니 끼어들지 마시게.”
 “저 노인네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사내들은 노인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노인도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얼핏 보기엔 술에 만취하여 간신히 움직이는 듯했지만 절묘하게도 사내들의 주먹을 흘리고 할퀴고 밀쳐내며 여유를 부렸다. 사내들은 일단 쓰러지면 자리에서 쉽사리 일어서지 못했다. 노인이 그들을 완전히 쓰러뜨리는 데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좋은 것을 보았습니다. 이곳에서 취선무(醉仙舞)를 다시 보게 되다니…….”
 “흘흘, 이제 보니 소림(少林)의 땡중이구먼. 자네도 백화신녀를 찾는 겐가?”
 사내들이 쓰러진 자리 뒤편으로 스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법 건장한 체격이라 운동선수라고 해도 믿을 만했다.
 “그렇습니다만…… 아무래도 우리 둘 다 같은 목적인 것 같습니다.”
 “그런 모양이군. 이보게, 혹 여기 박혜련이란 처자가 어디 있는지 아는가?”
 노인은 쓰러진 채 신음하는 청년에게 말했다.
 물론 청년이 쉽게 대답할 리 없었다. 이 골목을 차지하느라 칼침을 맞고도 버틴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고작 거지노인의 지팡이에 얻어맞고 쓰러졌으니 부아가 날 만도 하다. 이런 청년의 심정을 노인이라고 모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흘흘흘, 자네 나한테 진 게 분한 모양이군. 그럼 이걸 보시게.”
 거지노인은 청년에게 말하며 지팡이로 슬쩍 땅을 찍었다.
 파팍
 순간 그리 큰 힘을 쏟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바닥을 무려 한 뼘이나 파고들었다.
 “이만하면 내 실력이 자네보다 낫다고 보이지 않나? 내가 비록 거지이긴 하지만 그래도 숨은 고수라네.”
 노인의 말이 아니더라도 대나무 지팡이로 아스팔트 바닥을 한 뼘이나 뚫어버린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하다는 것은 인정해야 했다. 노인이 속한 세계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과 다른 차원의 인물이 아닌가?
 “저, 저 안쪽으로 들어가시면 작은 구멍가게가 있습니다. 아, 물론 거시기를 말하는 게 아니라 물건 파는 가게입죠. 거기서 물어보시면 알려줄 겁니다.”
 “그래, 고마우이.”
 노인은 스님과 함께 청년이 가르쳐준 곳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에 청년의 표정이 몽롱하게 변했다.
 “형님, 저 노인네…… 그냥 보내도 될까요?”
 “닥쳐, 임마! 사나이 황인규, 마음 정했다. 저분을 사부로 모시기로 했어.”
 “예? 사부요?”
 “그래, 못 봤냐? 겉보기엔 약해 보이지만 술에 취하면 무적으로 변하는 모습. 그야말로 기인 중에 기인 아니냐.”
 말을 마친 청년 인규는 다리를 절면서 억지로 일어났다. 통증이 심했지만 사나이의 악과 깡으로 이 정도는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었다. 인규는 약간 벌어진 입에서 연신 신음을 뱉으면서도 노인을 뒤따라갔다.
 
 “호호홋, 이게 누구신가요? 반가운 손님들이 오셨군요.”
 “허허, 그러게 말이오. 이 몸은 갈수록 늙어 가는데 어째 백화신녀께서는 갈수록 더 젊어지시는 것 같구려.”
 “그렇게 부러우시면 개방의 방주 노릇 그만두시고 제 밑으로 들어오세요. 그럼 가르쳐 드릴 테니.”
 “일 없소. 거지 노릇도 힘들어 죽겠는데 어찌 신녀 밑으로 들어가겠소.”
 노인과 스님은 인규의 말을 좇아 무사히 박혜련이라는 여인을 찾을 수 있었다.
 박혜련. 그녀는 홍등가에 있으면서도 좀처럼 손님을 상대하지 않는 여인으로, 골목을 주름잡는 건달들마저 오히려 누님이라고 부르면서 섣불리 건드리지 못하는 인물이다. 용모는 제법 잘나가는 아가씨들보다도 뛰어나 가끔 몸풀기(?) 식으로 나서면 손님이 줄을 잇는다.
 그런데 그녀를 백화신녀라고 부르는 거지노인의 모습이 영 심상치 않다.
 “마침 손님도 있었던 모양이군.”
 “당세민이라고 합니다.”
 “오, 사천당가에서 오셨군. 허허, 마침 당가주의 부탁을 받긴 했는데 직접 사람을 보냈을 줄은 몰랐어.”
 “워낙 사안이 중대해서 그랬습니다.”
 “그런가? 그런데 용케도 한국에 들어왔군.”
 “밀항이죠. 방주께서도 마찬가지이리라 생각합니다만…….”
 “나야 워낙 그런 데 익숙하지 않나? 아, 인사나 나누게. 이 땡중이 작금의 소림사 사대천왕 중 하나인 공무일세.”
 “아미타불, 공무입니다.”
 스님이 공손히 허리를 숙이자 자신을 당세민이라고 밝힌 청년도 포권으로 예를 갖추었다.
 “호호홋, 정말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 모양이군요. 사천당가에 소림, 거기다 개방까지 나서다니 참으로 놀랄 일이군요.”
 “나는 우리가 모인 것보다 신녀의 외모가 더 재미있소. 어찌 여든 넘은 노인네가 아무리 봐도 20대로밖에 보이지 않으니, 원…….”
 “그러게 요령을 가르쳐줄 테니 제 밑으로 오라니까요.”
 “아이고, 이 늙은이를 부려 먹으려고? 그렇잖아도 게을러터진 거지가 회춘한다고 일을 하라면 할 것 같소?”
 “바, 방주님! 저, 정말 신녀께서 여든을 넘겼습니까?”
 당세민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중 깜짝 놀라 끼어들었다. 그의 모습에 노인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꾸했다.
 “자네, 하오문주가 그리 만만한 자리 같나? 약관이 조금 지난 계집이 함부로 맡을 자리가 아니지.”
 “계집이라니, 말을 너무 막하시네요.”
 “내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호기를 부려보겠소? 그냥 이 젊은이의 궁금증이나 풀어 주시구랴.”
 “그러죠. 이봐, 젊은 동생. 우리 하오문에 비전으로 내려오는 방중비법이 있다네. 그걸 이용하면 상대의 기운을 어루만지면서 내 것을 함께 보듬어줄 수 있어. 쾌감도 보통이 아니라 상대는 잘 못 느끼지만 나는 잠자리 상대의 건강을 챙겨주면서 내 젊음도 유지할 수 있지. 뭐, 다른 보통사람인 경우 2, 30명 정도는 상대해야겠지만 동생 같은 공력이라면…….”
 백화신녀가 농염한 모습으로 당세민에게 다가섰다. 그 모습에 개방주가 헛기침을 했다.
 “허험, 신녀께서는 괜히 순진한 청년 그만 놀리시게. 우선 우리가 모인 이유부터 이야기해야 할 것 같으니까. 다들 알다시피 사천당가는 웬만한 일이면 타인의 손을 빌리지 않지. 그럼에도 우리는 사천당가의 부탁을 받았고, 이곳에 모였네. 이것은 일이 생각 이상으로 가볍지 않다는 뜻도 돼.”
 거지노인, 아니 개방주의 말에 백화신녀가 장난스런 표정을 지우며 말을 이었다.
 “아마도 방주님이 원하시는 건 하오문의 정보겠죠. 이곳엔 개방도가 없으니까.”
 백화신녀의 말에 개방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개방의 명맥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중국의 문화혁명 이후부터 거지의 형태로 남아 있진 못했다. 다만 오랜 세월이 만들어준 끈기로 여러 종류의 다른 직업들을 가지게 되었다.
 문화혁명은 중국의 많은 문화를 말살시키거나 약화시켰고, 표면에 드러나 있던 많은 것들을 음지로 숨어들게 만들었다. 그 중 하오문은 문화혁명의 여파로 중국을 떠난 문파다.
 하오문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도들은 가장 가까운 한국을 택했고, 한국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그들은 주로 홍등가와 술집 등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세력을 형성해왔다. 워낙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실질적인 밤의 지배자는 어떤 폭력조직도 아니라 바로 하오문이다.
 “그럼 이제 당가의 입장을 들어야겠군. 일단 이곳에서 백화신녀를 찾으면 대략적인 사정을 알 수 있다고 하더니, 아마 자네를 만나게 하려고 그랬던 모양이군. 대체 무슨 일인가?”
 당세민은 개방주의 질문에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차피 숨길 일도 아니었다.
 
 
 3
 
 흐릿한 가로등 불빛이 드리워진 골목길은 때론 연인들의 키스 장소가 되고, 때로는 몸을 가누지 못하는 취객들의 노래연습장이 되기도 한다.
 “어이, 꼬마! 이리 좀 와볼래?”
 “저요?”
 “그럼 너 말고 누가 있냐?”
 물론 불량배들의 힘자랑 장소가 되기도 한다.
 “왜요?”
 골목을 거닐던 동휘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두 형들이 자신을 부르자 의아한 얼굴로 다가갔다. 아무리 봐도 모르는 사람들인데 자신을 부를 이유가 뭐가 있을까?
 “너, 돈 좀 있냐?”
 “……?”
 “자식이 멍하긴…….”
 “아니…… 왜 나한테 그런 걸 묻는지 이해가 안 돼요.”
 동휘는 생전 처음 겪는 일이라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소년을 부른 두 고등학생은 어이가 없는 모양이다.
 “이거 보기보다 순진한 녀석이네? 야, 잔말 말고 가진 돈 내놔라.”
 “와아, 그러니까 형들 깡패였구나. 나 깡패 처음 보는데…….”
 “뭐, 뭐야?”
 “그런데 뭐 다른 형들이랑 별로 다르게 생기지도 않았네. 난 또 깡패들은 뿔도 나고 주먹에 가시도 있고 그렇게 생긴 줄 알았는데…….”
 동휘의 말에 두 고등학생은 고개를 저었다. 깡패란 말이 화가 나기도 했지만 소년이 워낙 당당하게 행동하자 기가 막혔다.
 “이게 지금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동휘와 말을 나누던 학생이 머리를 쥐어박으려고 손을 들었다. 그때 동휘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의 벌레 한 마리가 둘 사이로 날아들었다. 순간,
 파지직
 동휘의 몸에서 스파크와 함께 방전현상이 일어났다. 둘 사이로 날아든 벌레는 소년의 몸에서 일어난 뇌전을 맞고 바닥에 떨어졌다.
 두 고등학생은 갑자기 벌어진 일에 놀라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하지만 동휘는 너무도 태연했다.
 “어? 이 벌레 되게 이상하게 생겼네.”
 소년의 몸에서 아직 스파크가 사라지지 않아 벌레의 모습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떻게 사람 얼굴하고 똑같이 생겼지? 더군다나 몸이 저절로 없어지네?”
 동휘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두려운 듯 떨고 있는 두 형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형들, 이 벌레 이름이 뭔지 알아요?”
 “모, 몰라.”
 “가, 가까이 오지 마.”
 형들이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자 동휘는 영문을 몰랐지만 그래도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얼른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더니 뭔가를 꺼내 던져주었다.
 “별로 가진 건 없지만 이거라도 받아요. 처음 만나서 무척 반가웠어요, 깡패 형들.”
 동휘는 말을 마치고 신이 난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와아, 아빠한테 가서 자랑해야지? 깡패 형들도 만나고 이상하게 생긴 벌레도 봤다고.”
 소년은 순식간에 골목어귀를 빠져나갔다. 그 모습에 여전히 얼이 빠져 있던 두 깡패(?) 형들은 시간이 조금 지나자 마음을 진정하고 바닥에 떨어진 것을 확인했다.
 “어라? 이거 10만 원 짜리네.”
 “그러게.”
 둘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 손에 쥐어진 10만 원짜리 지폐는 두꺼운 도화지로 만들어졌으며 ‘꾸러기은행’이란 표기가 새겨져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고 웃더니 가짜지폐를 집어던지며 돌아섰다.
 “우리 다른 데 가서 알바하자. 여긴 목이 안 좋은 모양이다.”
 “그래, 어쩐지 이 동네 마음에 안 들었어.”
 둘이 골목어귀를 빠져나가는 동안 동휘는 벌써 집 안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엄마, 아빠, 은주 누나! 나 되게 신기한 거 봤어.”
 “이 녀석, 오밤중에 웬 목소리가 이렇게 크냐?”
 “허헛, 사내 녀석이 다 그렇지 뭐.”
 동휘의 외침에 인애와 철호는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다. 은주는 살짝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골목에서 어떤 깡패 형이 나타났는데 사람이랑 똑같은 얼굴을 가진 벌레가 날아들었거든요. 그런데 번개가 날아가서 얼굴이 탔는데 벌레가…….”
 동휘의 말은 문법이니 하는 자잘한 것은 둘째치더라도 해석불가의 어휘순서로 인해 식구들 모두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결국 철호가 말을 끊었다.
 “동휘야, 아빠가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들어서 그렇거든? 천천히 말해볼래?”
 “응, 알았어요. 내가 집으로 돌아오는데 어떤 깡패 형들이 나한테 돈을 달라구 그러면서 나타났거든요? 근데요, 그때 무슨 벌레가 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요…….”
 여전히 문법을 무시하는 어휘에는 변함이 없지만 식구들은 그런대로 동휘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인애는 아이의 상상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했고, 철호는 동휘가 꽤 대범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은주는 조금 다른 데 관심을 보였다.
 “사람하고 똑같은 얼굴을 가진 벌레?”
 “은주 누나도 신기하지? 그치?”
 “정말 신기하네. 그런 게 아직도 있었다니…….”
 은주가 다소 진지하게 받아들이자 철호도 관심을 보였다.
 “너 혹시 뭐 알고 있는 게 있니?”
 “예, 예전에 산에서 살 때 본 적이 있어요. 아마 인간들의 표현으로 인면충이라고 불렸던 것 같아요.”
 “인면충? 말 그대로 사람 얼굴의 벌레구나. 신기한 일도 다 있군.”
 철호의 말에 은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건 일종의 요괴에요. 비록 작고 힘도 없지만 사람의 혼을 삼킬 수 있거든요.”
 “설마 정말 그런 요괴가 있단 말이야?”
 철호의 물음에 은주는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저도 있잖아요.”
 “하긴, 그렇구나.”
 철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은주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설명을 계속했다. 하지만 그녀가 아는 것도 매우 단편적이었다.
 “사람의 혼 하나를 먹으면 다른 누군가의 몸에 새끼를 낳죠. 그 새끼는 자신이 태어난 육체의 혼을 먹게 되는데, 혼 하나를 다 먹어치우면 어미가 되는 거죠. 그리고 어미가 된 인면충은 자신이 혼을 삼킨 인간의 얼굴 모양을 가지게 돼요.”
 은주의 말에 철호는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설명이 계속되자 안색이 굳어졌다. 최근 방송매체를 통해 들리는 새로운 전염병 증세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인면충이 자라는 육체는 처음에는 구토와 설사 증세를 보이고 나중에는 정신을 잃게 되죠. 그 다음에는 엄청난 땀을 흘리게 되는데, 영혼이 그 벌레에게 잡아먹히기 때문이래요.”
 “호, 혹시 영혼이 다 잡아먹히면 죽는 거냐?”
 “그렇죠. 영혼을 뺏기고도 살아남을 수는 없으니까.”
 “그럼 그걸 예방할 방법은?”
 “죄송해요. 저도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은주가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철호는 이마를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인간이 우주선을 타고 가서 달을 밟는 세상에 무슨 요괴란 말인가? 하지만 은주의 말이니 믿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아빠랑 누나는 바보다. 그런 벌레 따위는 쉽게 해결할 수 있잖아.”
 “쉽게 해결하다니?”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나왔단 말이야. 해충방역시스템 싹쓸어! 여섯 시간 투자로 모든 해충들을 싹 쓸어준다던데…….”
 “그, 그렇구나.”
 철호는 어이가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인면충이 일반적인 해충은 아니잖은가?
 은주는 동휘의 말뜻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머리를 굴렸고, 동휘는 득의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때 철호는 누군가 담장을 넘는 것이 느껴졌다.
 “가만, 누가 우리 집에 들어온 것 같은데?”
 철호는 상대에 대한 호기심을 느끼며 현관문을 열었다. 뜰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 같았다.
 “대체 누구요? 보아하니 좀도둑 같지는 않은데…….”
 철호의 말에 인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둡긴 했지만 정원에 누군가 숨거나 한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때 정원 한쪽 구석에서 세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며 감탄사를 터뜨렸다.
 “과연 대단하군요. 할아버지께서 반드시 도움을 청하라고 했을 때는 잠시 반감이 있었는데 제 생각이 짧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군. 한국에 우리의 기척을 잡아낼 수 있는 자가 있다니.”
 철호는 안색을 굳히며 그들의 면면을 살폈다.
 “무슨 용건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의 집 담을 넘었으면 사과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 이런! 실례했군요. 저는 소림의 공무라고 합니다.”
 “저는 사천에서 온 당세민입니다. 할아버지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흘흘, 나는 개방의 황충이네.”
 그들은 철호의 물음에 각자 자기소개를 했다.
 철호는 상대의 기세를 읽으며 평범한 자들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빠, 누구예요?”
 동휘가 달려 나오면서 호기심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오늘은 신기한 일들을 많이 겪는 날인 것 같다.
 그 뒤를 이어 은주도 함께했다. 그녀의 한쪽 손이 동휘에게 잡혀 있는 것으로 보아 억지로 끌려나온 모양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공무가 자신의 무공을 드러내게 되었다.
 “아, 아니 이 기운은……?”
 공무는 은주를 보더니 불문곡직하고 몸을 날렸다. 그 기세에 은주는 자기도 모르게 동휘를 철호에게 던졌다.
 철호의 손이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동휘를 받아냈다. 그리곤 꽤 재미있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래화 녀석도 은주를 보자마자 저랬지?”
 “아, 래화 형! 그런데 래화 형은 지금 군대에서 잘 지낼까요?”
 “글쎄다. 일단 몸은 튼튼하니까 그런 쪽에서는 별로 힘들지 않겠지.”
 동휘와 철호는 은주에 대해 걱정하는 기색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 공무의 주먹은 무려 여섯 번이나 뻗어나왔다.
 퍼퍼퍼퍼퍼펑
 허공을 수놓은 공무의 주먹은 은주의 몸에 부딪치지 않았음에도 타격음을 일으켰다. 은주는 빠르게 뒤로 물러나며 몸을 회전시켰다. 덕분에 공무의 주먹은 그저 허공만 치고 말았다.
 “허―! 대단하군.”
 공무는 몸의 중심이 앞으로 기울자 그 힘을 이용해 아예 머리를 땅에 처박으면서 공중제비를 돌았다. 그러자 그의 다리가 허공에서 은주를 향해 회전하며 날아들었다.
 “항마연환퇴(降魔連環腿)!”
 공무의 공세는 소림의 비전이었다.
 은주는 그의 공세를 맞아 가볍게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은사(銀絲)가 발출되면서 둥근 막을 만들어냈다.
 공무의 발이 그 막에 부딪치자 회전속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은주는 그 틈을 이용해 다른 방향으로 몸을 피했다.
 “이런 잔재주로 나를 피하지는 못한다.”
 공무는 몸을 세우며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공무가 마음을 단단히 먹은 모양이군.”
 스스로를 황충이라고 밝힌 노인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누런 이를 드러낸 채 웃기 바빴다.
 공무는 은주를 노려보며 공력을 끌어올렸다. 대단한 공력을 지닌 탓인지 벌써 온몸에서 수증기가 모락모락 일었다.
 철호는 뭔가 심상찮음을 깨달으며 인상을 굳혔다. 그때 공무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나왔다.
 “백보신권!”
 고함소리와 함께 가공할 기세가 뻗어나오는 순간 철호의 몸이 쭈욱 늘어나는 듯하더니 은주를 가로막았다.
 쿠콰콰쾅
 “이만하면 됐습니다. 이제 그만하시죠.”
 갑자기 울린 파공성은 야밤의 주택가를 울렸지만 신기하게도 이웃집에서 뭐라고 하는 소리는 없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제각각 다른 이유로 놀라고 있었다.
 “서, 설마 이형환위?”
 “배, 백보신권을 몸으로 막아내다니!”
 “손가락에서 저런 일이……!”
 철호의 오른손이 주먹을 쥔 상태에서 검지와 중지를 곧게 펼친 전형적인 검결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인들이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철호의 두 손가락에서 2미터가량 뻗어 있는 광채 때문이었다.
 “서, 설마 내 생전에 백보신권과 검강을 구경하다니! 하하하핫!”
 개방주 황충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웃음을 참지 못했지만 다른 이들의 얼굴은 몹시 굳어 있었다. 특히 당세민의 심정은 충격 그 자체였다.
 솔직히 철호의 외모는 평범하다 못해 별다른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둠에 파묻힌 정원에서 자신들의 기척을 찾아냈다지만, 일부러 기척을 숨긴 게 아니니 감각이 예민한 자라면 굳이 느끼지 못할 것도 없다.
 그런데 검강이라니!
 놀란 건 공무도 마찬가지였다. 백보신권은 소림의 절학 중의 절학. 몸으로 막는다고 해서 막아지는 게 아니다. 전설에 의하면 100보 바깥의 바위도 단숨에 깨뜨려버린다는 무공이니 그 위력은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일신의 기운을 주먹에 집중하여 단숨에 폭출시키는 무공! 그러니 실제의 공력보다 더욱 가공할 위력을 보이는 건 당연하다. 공무로서도 직접 확인한 바는 없지만 자신의 백보신권에 격중될 경우 설령 상대가 자기보다 갑절의 공력을 지녔다 해도 이길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저 계집은 인간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감싸겠다는 겁니까?”
 “은주가 사람이 아니란 건 알고 있습니다.”
 “……?”
 “천5백 년을 넘게 살아온 거미요괴라고 하더군요.”
 철호의 선언에 공무는 잠시 멍한 얼굴이 되었다. 자신이야 불문의 공력을 지녀 요력을 더 쉽게 느낄 수 있으니, 철호가 모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그게 어쨌단 말입니까? 은주는 지금 사람이 되기 위해 수련을 쌓는 중입니다. 누가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공무스님께는 죄송스런 말씀이지만 만일 은주가 스님을 해치려고 맘먹었다면 이렇게까지 밀렸을 것 같습니까?”
 철호의 물음에 공무는 할 말을 잃었다. 은주는 자신의 공격에 방어만 했지 따로 반격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때로는 방어만으로 자신의 몸을 완벽하게 보호하는 것이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은 달리 말해서 상대가 마음만 먹었다면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혔을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휴우, 시주님의 말이 맞습니다. 요괴도 살아 있는 생명이니 마음속의 악을 버리면 곧 부처님이죠. 은주라고 했나요? 정말 죄송합니다.”
 공무의 사과에 철호와 은주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동휘는 공무와 은주가 왜 싸웠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저 스님, 왜 누나랑 싸운 거야?”
 “스님은 내가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그런 거래.”
 “응…….”
 동휘는 정확한 상황은 모르지만 은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몰랐다는데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는가? 그래도 불만은 남아 있어 입술을 삐죽 내밀고 공무를 흘겨보았다.
 “솔직히 한국에 그 정도의 무공이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아마 시주님이야말로 한국최강의 무인일 것 같군요.”
 “하하핫! 저를 그리 높게 봐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하지만 아쉽게도 이곳엔 저보다 강한 이들이 많습니다.”
 “너무 겸손하시군요.”
 “겸손이 아닙니다. 제가 아는 것 중에 분명 제가 익힌 청진도를 넘어서는 무예가 있습니다.”
 철호의 단정적인 말에 이번에는 당세민이 끼어들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지금 검강을 일으키고 백보신권을 맨몸으로 막아내는 것만 해도 놀라운 경지인데 그보다 더 고강한 무공이라니. 대체 그게 어떤 겁니까?”
 “우선 음자(蔭者)라 불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나라가 고구려, 신라, 백제 등 삼국으로 나뉘어져 있던 시절부터 활발하게 활동했던 이들로, 비록 그늘에 가려져 있는 자들이지만 결코 얕볼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들 개개인의 무공도 보통이 아닌데 드러나지 않도록 활동하니 더욱 두렵지 않습니까?”
 “흠, 일종의 자객 같은 성격을 가졌군요. 그럼 음자가 가장 강하다고 보십니까?”
 “아닙니다. 그들보다 더 강한 자들도 있습니다. 고구려 무장들의 무예인 금정무(金精武)라면 능히 밝은 곳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그늘에 숨은 음자의 공력을 누를 만합니다.”
 “하긴, 상무(尙武)정신이 높았던 고구려라면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렇다면 금정무야말로 천하제일의 무예이겠군요.”
 당세민의 말에 철호는 시라도 읊조리듯 나직이 말했다.
 “냄새도 없고 색깔도 없고 형체도 없는 바람 같으니 그 위력은 오직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되리라.”
 철호의 중얼거림에 다들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철호는 그들의 모습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한국에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말입니다. 산중에 살면서 산과 민족의 정기를 지키다가 민족정기가 손상될 만한 위기가 닥치면 비로소 세상에 나타난다는 존재들이 있죠. 그들이야말로 최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대체 어떤 존재들입니까?”
 “우린 그들을 ‘지킴이’라고 부릅니다.”
 철호의 말에 공무와 황충, 당세민은 머릿속에 ‘지킴이’란 말을 되새겼다. 과연 세상은 넓고 숨은 기인도 차고 넘치는 듯했다. 철호의 말이 다소 과장되었다 해도 청진도의 전승자로서 한 말이니 아주 거짓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안으로 들어가시죠.”
 철호의 말에 다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우선 용건을 먼저 밝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지닌 능력으로 보아 저희 집에 그냥 놀러 오신 것 같지는 않군요.”
 “실은 그게…….”
 철호의 물음에 당세민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제2화 인면충
 
 1
 
 사천당가는 중국 공산당의 문화혁명 당시 가문이 보유하고 있던 뛰어난 의술을 표방하여 살아남을 수 있었다.
 덕분에 다른 무림의 일가가 하나 둘 사라져갈 때 사천당가가 보유한 금력(金力)은 잃었지만 집터는 당가촌이란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당가의 거대한 저택이 헐리고 당가촌으로 변한 이후에도 당가의 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가문의 무공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발전 계승되었고, 암기술은 갈수록 깊은 곳까지 다듬어졌다. 비록 현대식 자동화기들에 비해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가문의 전통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일어난 것은 최근이다.
 “당시 저의 숙부님께서는 본가의 위력을 만천하에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셨고, 다른 어른들은 모두 반대했습니다. 결국 숙부님께선 가문의 비처에 숨겨져 있던 항아리 하나를 훔쳐 달아나기에 이르렀죠. 아마도 그것이 본가의 가장 강한 독물 중 하나라고 여겼던 모양입니다.”
 “그럼 뭔가 다른 것인 모양이로군요.”
 “예, 그렇습니다. 그건 일종의 요괴로서 인면충이란 겁니다.”
 당세민의 말에 옆에서 은주에게 장난을 걸고 있던 동휘가 갑자기 아는 척을 했다.
 “아, 사람의 얼굴을 가진 벌레 말이죠? 저 그거 봤어요.”
 소년의 외침에 당세민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동휘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아는 척을 했다.
 “그러니까 사람의 영혼을 삼키고 사람은 죽게 한다는 거죠? 저도 알아요.”
 “벌써 인면충에 대한 걸 알고 계시는군요.”
 당세민은 소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철호에게 말했다.
 철호가 동휘의 머리를 살짝 쥐어박으며 입을 열었다.
 “이 녀석아, 어른들 말씀하시는데 함부로 끼어드는 게 아니다. 이거 죄송합니다. 실은 저희도 조금 전에 은주에게서 들은 겁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걸 없애지 않고 보관하셨습니까?”
 “우리 가문에서도 그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소멸되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죽여도 죽지 않으니 결국 항아리에 부적을 붙여 가까스로 봉인했던 거죠. 그리고 그 사실은 오직 당가의 가주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습니다. 만일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저도 알지 못했을 겁니다. 가주에 오르지 않는 한 말입니다.”
 당세민의 변명에 다른 이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동휘는 그렇지 않았다. 뭔가 이상했다.
 “어? 제가 그거 없애버렸는데요? 정말이에요. 제가 그거 번개로 없앴어요.”
 순간 당세민을 비롯해 방문객들의 시선이 소년에게 쏠렸다. 어린아이의 상상력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철호의 믿기지 않는 능력으로 보아 사실일 수도 있었다. 물론 납득되지 않는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번개?”
 당세민은 자신이 익힌 한국말이 혹시 잘못된 게 아닌가 생각했다. 다행히 소년이 시범을 보여주었다.
 파지지지직
 동휘의 손에서 스파크가 일면서 뇌전이 발출되었다. 은주는 소년의 뇌전을 보고 얼른 뒤로 물러났다.
 뇌전은 동휘의 손과 손을 오가면서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방문객들은 다들 생전 처음 보는 것이어서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동휘는 어른들이 놀라는 모습을 보더니 흡족해하며 뇌전을 없앴다. 그제야 은주도 다시 소년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 그건 무슨 무공입니까?”
 “무공이 아닙니다. 몇 년 전 저 녀석에게 사고가 있었는데 그 후로 저런 걸 할 수 있게 되었지요. 처음에는 위력이나 방향을 조종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녀석의 의지대로 할 수가 있습니다.”
 “잠시 맥을 좀 짚어봐도 되겠습니까?”
 당세민은 철호에게 묻고 동휘의 맥을 잡았다. 그리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군요. 비록 정제되지는 않았지만 몸속에 흐르는 양강지력이 나이에 맞지 않을 만큼 대단합니다. 이 기운들을 완전히 소화할 수 있게 된다면 엄청난 공력이 되겠습니다.”
 “운이 좋았죠.”
 철호는 당세민의 말에 기분이 좋은지 고개를 끄덕였다.
 당세민의 호기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의 외모는 얼핏 보기에 스무 살 남짓이었다. 나이가 나이니만큼 호기심도 적지 않으리라.
 “그런데 어떤 인연으로 요……! 흠흠! 아니, 이 아가씨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까?”
 당세민은 요괴라는 말을 하려다가 얼른 말을 바꾸면서 물었다.
 철호는 그가 은주에 대해 적당한 호칭을 찾지 못하고 있음을 눈치 챘다.
 “저희는 은주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본래는 은 은(銀)자에 거미 주(蛛)자를 쓰려고 했는데, 제 아내가 이름을 듣고는 구슬 주(珠)자로 알더군요. 그래도 한국식 발음으로는 어느 쪽이나 같아서 그냥 아내의 해석대로 쓰고 있습니다. 아, 얘기가 다른 쪽으로 샜군요. 실은 재작년에 제 아들에게 사고가 있었습니다. 화학약품을 실은 트럭이 전복되면서 하필 그것이 동휘에게 쏟아진 거죠. 그 일로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고 시력까지 잃게 되었습니다. 만일 그때 은주가 없었다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죠. 어디선가 나타난 은주가 동휘를 몸으로 감싸주었거든요.”
 철호의 말에 당세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하면 충분히 은혜를 베푼 셈이랄 수 있었다.
 “당시 저는 은주에게서 요사스런 기운을 느끼고 의심을 하던 차였습니다. 좋지 못한 목적으로 제 아들을 노린다고 생각한 거죠. 그렇게 생각하니 트럭이 전복된 것까지도 은주가 꾸민 일 같더군요. 그래서 저는 은주에게 경고를 했죠. 은주야, 지금부터는 네가 직접 말하는 게 좋겠구나.”
 “예, 저는 원래 지리산 자락에 살고 있던 거미였어요. 운이 좋은 건지 제가 처음 거미줄을 친 곳 뒤쪽에는 꽃이 많이 피었어요. 많은 벌레들이 그 꽃에 욕심을 내고 거미줄을 보지 못했답니다. 덕분에 많은 먹잇감이 제 거미줄에 걸렸고, 다른 종족들과 달리 저는 먹이가 풍부했어요. 꽃이 지고 나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답니다. 꽃이 지고 나니 그 자리에는 단내가 나는 열매가 가득 열렸고, 여전히 많은 먹잇감이 몰려들었거든요.”
 은주는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차근차근 풀어놓았다.
 과실이 풍족한 곳에 거미줄을 치자 각종 곤충들이 몰려들어 매일 먹이를 저장하느라 바쁠 지경이었다. 보통의 거미들은 사나흘을 굶고 지낼 때가 많았는데 은주는 그렇지 않았다.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고도 오히려 먹이가 남아돌았다.
 그녀가 짝짓기를 하고 겨울을 준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거미들 중 일부는 겨울이 되기 전에 짝짓기를 하고 직접 알집으로 들어가는 습성이 있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의 먹이가 부족하기 때문에 자신을 먹이로 주기 위해서다.
 은주도 그런 종류의 거미였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충분한 양의 먹이를 알집에 넣어준 다음 자신을 위해서도 알집 비슷한 것을 만들어 겨울을 났다. 다른 동족들과 달리 한 해를 무사히 보내고 다음 해를 맞게 된 것이다.
 그렇게 비슷한 방식으로 몇 해를 보내면서 몸집은 더욱 커졌고 독성도 강해졌다. 거미줄은 보다 투명하고 가늘어졌지만 오히려 더욱 튼튼하고 끈끈하게 변해갔다.
 심지어 참새나 개구리처럼 제법 큰 짐승도 한번 걸리면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였다. 덕분에 은주는 조금씩 먹이를 바꿀 수 있었다. 제아무리 개구리라 해도 반나절이면 맥없이 죽어갔고, 참새는 뒤로 접근해서 물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수십 번의 겨울을 보내고 나자 마침내 알집을 만들어서 추위를 피할 필요도 없어졌다. 매서운 바람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했고, 겨울 토끼들은 맛 좋은 식량이 되어주었다. 덩치는 자신이 더 작았지만 공중으로 뛰어올라 한 번 물면 그걸로 끝이었다.
 독성은 단숨에 식량을 얻게 해주었고, 겨울의 추위는 부패를 막아주었다. 토끼 한 마리는 한 달 정도를 충분히 견디게 해줄 만한 식량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지리산의 겨울을 거듭 나던 어느 순간인가부터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본능에 의지해왔는데 점차 생각이란 것을 하기 시작했으며, 산속을 흐르던 기운의 일부가 그녀에게 힘을 주었다. 특히 안면의 변화는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람의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아, 인면지주가 된 거로군.”
 “흘흘, 나는 그저 옛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그게 정말 있었다니……. 혹 내단도 있느냐?”
 “…….”
 “방주님, 계속 이야기를 들어보는 게 좋겠습니다. 은주라고 했던가요? 계속 들려주시지요.”
 “예, 알겠습니다.”
 잠시 끊겼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사람의 얼굴을 가지게 된 은주는 처음에는 자신의 얼굴이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우연히 산에 오른 인간들을 발견하고 묘한 충격을 받았다. 신기하게도 자신이 변한 얼굴 모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들이 자신처럼 오랜 세월을 살아온 거미인 줄 알았다. 그러나 생김새가 조금 이상했다.
 “당시 제가 발견한 사람은 두 남녀였습니다. 저와 동족이라면 다리가 여덟 개 있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네 개뿐이더군요. 그것도 앞발은 무척 짧았구요. 지금은 그것이 팔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때는 앞발이 짧다고 생각했습니다. 참 이상하게 생겼다고 생각했죠. 제가 알기로 앞발이 짧은 건 토끼뿐인데 특별히 뒷발로 빨리 뛰는 것도 아니었거든요. 오히려 앞발은 뭔가를 집어 드는 데 사용하더군요. 저는 그들이 너무 신기해서 마음을 읽어보기로 했죠. 저는 사람의 얼굴을 얻은 다음부터 마음의 색깔도 읽을 수 있게 되었거든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마음의 상태는 비슷하게 느낄 수 있답니다.”
 은주가 발견한 두 인간의 마음은 참으로 묘했다. 슬픔과 기쁨, 두려움과 설렘이 뒤섞인 느낌이었는데, 그토록 모순투성이의 감정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어느 순간 그들은 서로의 옷을 벗기더니 뒤엉키기 시작했다. 눈물까지 흘리면서 서로를 탐닉했다.
 “우리는 종족을 남기기 위한 행위를 해도 슬퍼하거나 행복해하지 않는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르더군요. 슬프지만 행복하고 아프지만 기쁜 마음을 가졌죠. 우리처럼 서로 잡아먹지도 않았고요. 아마 그때부터일 거예요. 저는 인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죠.”
 두 남녀는 서로의 육체를 한참이나 탐하다가 횃불을 들고 올라온 다른 사람들에게 붙잡혀갔다. 은주는 단지 다른 종족의 일로 여겼다. 그들이 무슨 이유로 두 남녀를 때리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자신이 나설 일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 후 은주는 자신이 살아온 세월보다 갑절의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다른 생명체로 변신할 수 있게 되었다.
 제일 먼저 신비한 감정을 품고 있던 인간으로 변신해보았다. 무척이나 신기한 마음에 숲 곳곳을 돌아다녔고, 이윽고 인간이 사는 마을 가까이까지 다가갔다.
 마침 손에 도끼를 든 사내가 자신을 발견했다. 사내는 자신의 육체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곧 달려들었고 옷을 벗었다. 하지만 사내는 예전에 보았던 남녀의 감정과는 또 달랐다.
 그렇게 슬프고 아픈데도 아름다웠던 감정이 아니라 더러움과 욕심만 가득한 감정. 그것은 다른 동물들과 다를 게 없었다.
 그래서일까? 은주는 자신도 모르게 본래의 모습으로 변해 사내의 머리부터 씹어먹었다.
 “그것은 제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진 일이었죠. 수컷은 암컷을 얻는 대가로 스스로를 먹이로 주니까요.”
 그 뒤 은주는 사람들에게 쫓기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과 싸워야 했고, 그럴수록 많은 사람들을 해치게 되었다.
 자신이 먼저 공격하지 않아도 이상하게 사람들이 그녀를 공격했다. 때로는 검을 든 사람이 찾아오기도 했고, 때론 술법사가 접근해오기도 했다. 그럴수록 은주는 더 깊은 산중으로 숨어들었다.
 “그래도 덕분에 사람의 말을 많이 배웠답니다. 그 뒤 오랜 세월을 산중에 숨어 살다가 용기를 내어 인간세상으로 나온 거예요. 저는 사람들이 너무 무서워서 모습을 감추고 다녔어요.”
 은주는 처음 인간을 보았던 당시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었다. 가능하면 그 아름다움을 직접 배우고도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런 아름다움은 찾을 수 없었다. 세월의 흐름이 인간을 보다 강하게 만들어주었지만 마음의 아름다움은 오히려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인간들이 잃어버린 부분에 대해 슬퍼하던 은주는 조금 다른 아름다움을 느꼈다. 환하고 밝은 광채로 가득한 아름다움. 그 순수한 선의로 가득한 감정의 빛은 처음 인간을 접했을 때 본 것과는 또 다른 기쁨을 안겨주었다.
 ‘저렇게 환한 빛을 지녔다니!’
 이렇게 감탄하면서 한 어린 인간을 돌아보는 순간 위험이 닥쳤다. 거대한 트럭이 아이를 향해 쓰러지고 있는 게 아닌가?
 은주는 마음속에 빛을 지닌 인간을 죽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 마음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인간에게 어쩌면 저 어린 인간은 소중한 존재가 아닐까? 아니, 인간을 아름답게 만들 마지막 가능성이 아닐까?
 “저는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답니다. 그래서 제 모습을 드러내고 아이를 구한 거죠. 그 아이가 바로 동휘랍니다.”
 은주는 말을 하면서 동휘에게 눈을 돌렸다. 동휘는 졸음에 못 이겨 그녀의 무릎을 베고 잠들어 있었다. 은주는 살짝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랬군요. 비록 인간과는 다른 요괴라지만 말을 듣고 보니 오히려 부끄럽습니다.”
 공무가 합장배례하며 은주에게 사과를 겸해서 말했다. 은주도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받았다.
 그때 황충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 아이를 많이 아끼는 것 같은데 어째서 아까는 멀찍이 떨어진 게지?”
 “동휘의 손에서 뇌전이 일었을 때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그때 말이네.”
 “실은 동휘의 뇌전이 두려워서랍니다.”
 “……?”
 “보통사람들에겐 잠시 기절을 시키는 정도에 불과한데 저에겐 큰 상처를 줘요. 동휘가 일부러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저를 죽일 수도 있답니다.”
 “아니 어떻게 그런……!”
 황충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동휘의 얼굴을 바라보자 공무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렇군요. 본래 뇌전에는 사마(邪魔)를 물리치는 힘이 있습니다. 아마 그래서 그런 모양이군요.”
 “게다가 저희 청진도의 공부는 사악함을 물리치는 데서 시작됩니다. 몸속의 탁한 기운을 몰아내고 마음속의 탁함을 물리친 후에야 비로소 청진도에 입문할 수 있죠. 그런 청진도의 공력과 뇌전의 힘이 합쳐진다면 요마(妖魔)를 소멸시키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철호의 설명이 이어지자 당세민은 허탈한 듯 고개를 저었다.
 “사천당가에서 그 오랜 세월 동안 찾지 못한 해결책이 한국에서는 아주 간단히 찾아지는군요.”
 
 
 2
 
 최씨는 최근 들어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음을 느꼈다. 어찌 생각하면 대수로울 것도 없는 일이다. 매일 끼니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면서 술만 늘었으니까.
 “어이, 최씨! 혹시 낮에 급식 받은 것에서 김치 좀 빼둔 거 있어?”
 “아니, 왜?”
 “왜긴, 안주하려고 그러지.”
 최씨 옆에 제법 말쑥한 차림의 홍씨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그에게 최씨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아직 배가 불렀군. 이런 생활을 하면서 안주나 찾고.”
 “나야 잠시 이러다 말 테니까 익숙해지고 싶은 생각도 없어. 그나저나 김치 있어 없어?”
 홍씨의 물음에 최씨는 품에서 검은 비닐봉투를 꺼냈다.
 최씨도 처음 노숙생활을 시작할 때는 홍씨처럼 말했다. 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이 생활도 끝이라고. 조금만 더 지나면 식구들과 다시 모여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오던 것이지만 어느덧 1년이 지나 이제는 자포자기한 상태다. 아마 홍씨도 곧 그렇게 될 것이다.
 “이놈의 소주 맛은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는구먼. 예전에는 양주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쩝…….”
 “돈이 많았나보네?”
 “돈이야 많았지. 그때는 내가 지나가면 다들 뭐 얻어먹을 거 없나 하고 알아서 꼬리들을 쳤지. 그때 나한테 몸 바치던 년들도 엄청 많았어. 얼굴은 반반해가지고 지가 먼저 꼬리치면서 가랑이를 벌려주는데…… 처녀라고 해도 별수 없더군. 내가 따먹은 처녀만 해도 거짓말 조금 보태서 수천은 될 걸?”
 “혹시 달거리하는 걸 착각한 건 아니고?”
 “떽끼, 이 사람아! 내가 아무렴 그런 것도 구분 못할까?”
 최씨는 홍씨가 허풍을 떤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맞장구를 쳐주었다. 적당히 대꾸해주다 보면 자신도 화려하게 살아온 것처럼 느껴졌다. 과장은 심했지만 돈만 있으면 사랑도 살 수 있다는 말은 맞았다. 아마 홍씨 말대로 알아서 몸 바치는 처녀들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그가 가족과 헤어진 것도 돈이 없어서요, 집도 절도 없이 이렇게 노숙생활을 하는 것도 다 돈이 없어서다. 사랑하는 딸년이 룸살롱에 취직한 것을 알면서도 선뜻 빼내오지 못한 것도 결국 돈 때문이다.
 돈만 있으면 뭐든 가능한데 최씨는 돈이 없다. 그래서 딸년이 자기 애비보다도 더 나이 많은 놈들한테 가랑이를 벌리는 걸 알면서도 말리지 못한다. 마누라가 짐 싸들고 도망갔는데도 찾아오지 못하고, 노모가 죽었을 때는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그래서 홍씨의 이야기가 더 좋았다. 허풍이라도 좋으니 꿈을 꿀 수 있어 행복했다.
 “그래서 지금 자네 품속에 든 그 가방이 회사의 기밀문서다 이건가?”
 “그렇다니까 그러네. 이게 걸리면 세금만 수백억이나 내야 하거든. 그런데 이걸 숨길 데가 마땅해야지. 어쩌겠나? 아예 일부러 부도내고 이 서류는 내가 직접 들고 숨어 다니는 거지.”
 홍씨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 정도의 세금을 낼 기업체라면 어지간한 규모가 아닐 테고, 그 정도 서류쯤 숨길 곳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정 뭣하면 자기 말마따나 돈의 힘을 빌려 그런 장소를 만들어도 되고 말이다. 굳이 이런 생고생은 필요 없겠지만 최씨는 여전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거 부자양반이 고생이 심하네 그려. 나중에 일이 잘 풀리거든 나 좀 잘 봐달라고. 나야 돈도 없고 빽도 없으니 이 기회에 자네 힘이나 빌려야지.”
 “그래, 알았어. 내가 부산에 있는 공장의 경비로 써주지. 사원 아파트도 제공하니까 식구들하고 같이 지내면 되겠구먼.”
 “허허, 고맙네 그려.”
 최씨는 정말로 고맙다는 듯 홍씨의 손까지 잡았다. 홍씨는 잠시 우쭐거리다가 술기운을 못 이겨 곧 잠들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최씨는 피식 웃어버렸다.
 “그래, 그런 환상이라도 품고 살아야 견디지. 아니면 어떻게 살겠나?”
 최씨는 신문지를 구해 홍씨를 덮어주었다.
 여름이라지만 밖에서 자다보면 한기가 느껴진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종이상자와 신문지다. 상자를 찢어 바닥에 깔고 신문지라도 덮으면 어느 정도 견딜 만하다. 거기다 술기운까지 빌리면 금상첨화다.
 “이런, 홍씨를 챙겨주다보니 막상 내 것이 없네?”
 최씨는 자신이 깔고 잘 상자와 신문지를 제공하곤 입맛을 다셨다. 취기야 부족하나마 적당히 올랐지만 그냥 맨바닥에 잘 자신은 없었다.
 최씨는 할 수 없이 몸을 일으켜 적당한 것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한참을 헤매다보니 어느새 낯선 공사장까지 도착해 있었다.
 “어라? 이게 웬 횡재야?”
 최씨의 눈에 띈 것은 하얀 스티로폼이었다. 스티로폼은 따뜻하고 푹신하기까지 해서 종이상자에 비할 바가 아니다. 크기도 몸을 눕히기에 충분했다. 주변에 다른 노숙자들도 많은데 이런 물건이 남아 있다는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최씨는 혹시라도 뭔가를 잘못 밟아 다치지나 않을까 조심하면서 스티로폼을 주우러갔다. 비틀비틀하면서도 용케 스티로폼이 있는 곳까지 무사히 다가갈 수 있었다.
 최씨는 스티로폼을 주워들고 천천히 발을 옮겼다. 그러나 원하던 것을 얻는 순간 긴장이 풀린 탓일까? 그만 철근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어이쿠! 이런 젠장…….”
 다행히 튀어나온 철근에 다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스티로폼이 반으로 쪼개지고 말았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으로 몸을 일으키려는데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다.
 “새로 나온 바퀴벌렌가? 못 보던 놈인데?”
 그의 눈에 띈 것은 바퀴벌레치고 조금 이상했다. 얼굴이 마치 사람 같았다. 모두들 엄지손가락만 했는데 유독 한 놈만 갑절이나 컸다. 그 커다란 놈이 다른 놈들을 한 마리씩 잡아먹고 있었는데, 생긴 게 사람 같아서 그런지 끔찍한 느낌이 들었다.
 최씨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 헛것이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곁에서 벽돌을 하나 집어 들었다. 재수 없는 벌레 따위는 벽돌로 찍어 죽이려는 속셈이었다.
 그때 유독 큰 벌레가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헉!”
 텅
 놈이 고개를 돌리자 묘하게도 눈이 퍼렇게 빛나는 게 아닌가? 최씨는 너무 놀란 나머지 벽돌을 떨어뜨렸다. 순간 벌레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오르더니 풀쩍 솟구쳐 최씨의 얼굴에 달라붙었다.
 “크, 크아아!”
 최씨는 벌레를 떼어내려고 바동거리면서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나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털썩
 최씨의 몸이 공사장 바닥에 너부러졌다. 그런데 잠시 후, 최씨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일어났다. 얼굴에는 벌레가 문 자국도 남아 있지 않았다. 흡족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후후훗, 좋군. 아주 좋아.”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뇌까리던 최씨는 가까스로 구한 스티로폼을 버려둔 채 홍씨에게 돌아갔다.
 
 “에이, 거지새끼가 재수 없게 어디서 자빠져 자?”
 “이봐, 아저씨! 이 양복 어디서 훔친 거야?”
 홍씨를 비롯해 노숙자들은 불량배들을 만나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가끔씩 오가는 불량배들인데 노숙자 괴롭히는 데 재미를 들린 참이었다.
 노숙자들 대부분이 주민등록말소 상태라 법적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 그러니 이유 없는 폭력의 대상으로 그보다 더 좋은 상대가 또 어디 있을까?
 더군다나 노숙자들은 대부분 몸이 약해 그들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덕분에 노숙자들은 보이지 않는 폭력의 희생자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예를 들어 재기의 꿈을 안고 안구와 신장을 팔았는데 돈을 한 푼도 받지 못한다는 식이다.
 그나마 제 발로 찾아가서 사기를 당하는 경우는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탓하면 그만이다. 어떤 이는 길가다 납치를 당해 강제로 신체장기를 빼앗기기도 한다. 아쉽게도 정부에서는 그런 일을 짐작조차 못하고 있다.
 “크흐흣, 우습군. 강자한테는 꼼짝 못하면서 약자들이나 괴롭히자는 건가?”
 “응? 저 새끼는 또 뭐야?”
 “그러게. 죽고 싶어서 환장한 모양인데?”
 최씨가 홍씨를 패고 있는 자들에게 비웃음 섞인 말을 뇌까리자 불량배들 모두가 돌아보았다. 아무리 동네 양아치라 해도 힘깨나 쓴다고 자신하는 자들이 아닌가. 그런 자신들에게 함부로 말을 지껄이자 어이가 없었다.
 “이봐, 아저씨! 민증은 있어?”
 “아마 없을걸? 저 꼬락서니 좀 봐.”
 “그럼 지금 죽여버려도 뒤탈은 없는 거네?”
 불량배들은 과장된 동작을 취하며 겁을 주었다. 그들은 예닐곱 명이 넘었다. 홍씨는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아이고! 제발 부탁이니 저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게. 워낙 술을 많이 마셔서 주사를 부리는 거네. 최씨, 뭐 하는 거야! 어서 잘못했다고 빌어.”
 홍씨는 혹여 최씨가 변이라도 당할까봐 안절부절못했다.
 최씨는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그를 슬쩍 밀쳐내며 말을 이었다.
 “저 애송이들이 사람을 죽인다고? 후훗,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약해 보이는 사람들한테 힘자랑이나 하는 것들이 무슨 배짱으로?”
 “저놈이 지금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불량배 하나가 주먹을 날리며 뇌까렸다.
 하지만 최씨는 별로 당황하지 않고 청년의 주먹을 가볍게 잡아챘다.
 “이런 솜방망이로 여태 잘난 척한 건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먹을 붙잡힌 불량배의 얼굴이 노랗게 변했다. 최씨가 손에 힘을 주었는데 청년의 표정으로 보아 보통 아픈 게 아닌 모양이다.
 “크아아악! 내, 내 손!”
 “아, 미안하군. 내가 힘을 좀 과하게 쓴 모양이지?”
 최씨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청년의 주먹을 뿌리쳤다. 불량배는 아픈 손을 부여잡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으으…… 저, 저 새끼 죽여!”
 청년의 말에 불량배들이 일제히 최씨에게 달려들었다.
 다들 잔뜩 화가 난 듯 혼신의 힘을 다했는데 최씨는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청년들의 주먹을 슬쩍슬쩍 피하면서 복부를 걷어찼다. 최씨가 한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배를 걷어차인 청년들은 바닥에 주저앉으며 토악질을 해댔다.
 “뭐 하나? 민증이 없어서 죽여도 탈이 없을 거라며?”
 “이 새끼……!”
 “어휘력이 부족하군. 욕이라고 아는 건 그뿐인가?”
 “너 정말 죽는다.”
 한 청년이 토악질을 멈추고 최씨에게 달려들었다. 언제 뽑아들었는지 손에 잭나이프가 들려 있었다.
 최씨는 무료한 표정으로 잭나이프가 다가오길 기다렸다 그러다 왼손으로 상대의 오른손목을 잡아 자신의 옆구리를 스치도록 끌어당겼다.
 “후훗, 정말 죽는 게 뭔지 궁금하지 않아?”
 “저, 저런 힘이라니……!”
 최씨는 그저 스스로를 보호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오른손으로 상대의 목을 잡아 졸랐는데 불량배의 발이 공중에 떠 있었다. 오직 팔의 힘만으로 청년의 몸을 들어 올린 것이니 보통 힘이 아닐 수 없었다.
 “함부로 힘자랑하지 말고 꺼져. 알았어? 그리고 이건 내가 보관하도록 하지.”
 최씨는 청년을 집어던지면서 말했다.
 청년이 바닥에 나동그라지며 매섭게 노려보았지만 자신이 상대할 수준이 아니었다. 다른 불량배들도 이글거리는 눈초리로 노려보았지만 최씨는 전리품으로 챙긴 잭나이프를 만족스런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다.
 “개자식! 어디 두고 보자.”
 “마음대로.”
 최씨의 말대로 불량배들은 욕에 대한 어휘력이 많이 부족한 모양이다.
 
 최씨가 불량배들을 혼내준 뒤로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노숙자들은 여느 날처럼 종이상자를 구해 잠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홍씨도 조금씩 노숙자 생활에 익숙해져 스스로 신문과 상자를 가지고 잠자리를 만들었다.
 그런데 최씨에게 혼나고 도망갔던 불량배들이 다른 이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누가 우리 애들 건드렸냐?”
 그들은 뭔가 단단히 결심이라도 했는지 각목과 쇠파이프를 들고 있었다. 노숙자들은 다들 두려움에 질려 한쪽에 얌전히 앉아 있는 최씨를 훔쳐보기만 했다.
 그동안 최씨는 알게 모르게 노숙자들 사이에서 왕 노릇을 하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노숙자들이 알아서 먹을 것을 구해주고 잠자리를 봐주는 등 궂은일을 모두 해준 것이다.
 최씨도 굳이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당연한 듯 혜택을 누리며 책상다리를 한 채 몇 날 며칠이고 그 자세를 유지해왔다.
 “썅! 어떤 새낀지 어서 안 나와?”
 쇠파이프를 든 사내가 가까이 있던 노숙자의 머리를 갈겨버렸다.
 그제야 최씨가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자신이 없으니까 머릿수로 덤비겠다는 건가? 하지만 한 가지만 말해주지. 호랑이는 혼자 있어도 호랑이지만 개는 아무리 뭉쳐봐야 개밖에 못 돼.”
 “뭐? 저놈이 찢어진 아가리라고 아주 나오는 대로 말하네?”
 “너 오늘이 제삿날인 줄 알아라.”
 최씨의 말에 불량배들이 더욱 흥분하여 달려들었다.
 하지만 최씨는 별로 동요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 아니었나?”
 “미친 새끼!”
 제일 먼저 덩치 큰 사내가 각목을 갈겼다.
 최씨는 주먹을 뻗어 각목과 사람의 뼈를 동시에 격파했다. 단 한 번의 주먹질에 각목과 사람이 한꺼번에 쓰러졌지만 최씨가 쉴 틈은 없었다. 오히려 다른 이의 쇠파이프가 뒤에서 머리를 내리친 것이다.
 최씨는 왼발을 축으로 몸을 회전시켜 뒤에서 쇠파이프로 내리치던 사내를 차냈다. 사내는 그의 발길질에 3미터나 나가떨어졌다.
 “썅! 보통이 아니잖아.”
 “그럼 평범한 사람인 줄 알면서 그런 준비를 해왔나?”
 얼굴에 흉터가 난 사내가 품에서 회칼을 꺼내 휘둘렀다. 그가 회칼을 꺼내자 다른 사내들도 사이를 벌려주었다.
 최씨는 사내의 칼질을 피하면서도 시종 여유를 잃지 않았다.
 “네가 저 애송이들 대가리냐?”
 “그래, 내 동생들이다. 솜씨를 보아하니 동생들한테 맡기긴 힘들어 보여서.”
 “어머니 고생이 심했겠군. 저리 많이도 싸질러놓은 걸 보니.”
 “난 동생들처럼 그런 도발엔 넘어가지 않아.”
 사내는 회칼을 횡으로 그으며 달려들었다. 최씨는 사내의 회칼을 피해 몸을 낮추며 축구에서 태클이라도 하듯 왼발을 뻗었다.
 쑤악
 사내는 최씨의 왼발에 걸려 넘어지면서 회칼로 찍어갔다. 최씨는 회칼을 쥔 사내의 오른손목을 낚아채며 관절 구조상 전혀 불가능한 각도로 꺾어버렸다.
 으드득
 “끄응! 여, 역시 대단하군.”
 사내는 손목이 부러졌음에도 고통을 참으며 일어섰다. 얼굴에 식은땀이 나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아픔에도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최씨는 사내의 모습에 감탄한 듯 말했다.
 “보통 독종이 아니군. 꽤 아플 텐데.”
 “이게 아픈 정돈가?”
 사내가 인상을 쓰며 말하자 최씨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럼 어서 병원이라도 가. 아니면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눈치가 빠르군. 어디 가서 술이나 한잔하지. 보아하니 이런 데서 썩히긴 아까운 주먹인데.”
 “나 같은 노숙자가 무슨 돈이 있다고.”
 “내가 사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
 “그래도 싫어.”
 “술뿐 아니라 여자와 잠자리도 제공해줄 테니 따라와.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할 참인가?”
 두 사람의 대화로 미루어 사내가 최씨에게 앞으로 무슨 일을 시키려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다른 노숙자들은 그런 제의를 받는 최씨가 부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어차피 밑바닥 인생이니 차라리 주먹질이라도 할 수 있는 것도 능력 같았다. 어떤 의미에서건 그 역시 하나의 재기가 아니겠는가?
 “환자랑 술을 마시면 내가 불편할 것 같군. 병원부터 다녀와서 말한다면 가지.”
 “미친 새끼, 지랄하네. 알았다. 그럼 나중에 보지. 얘들아, 가자. 그리고 앞으로 여기 있는 사람들 괴롭히지 말고.”
 사내는 다른 이들을 이끌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노숙자들은 최씨의 곁으로 다가와 환호성을 질렀다.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그들이지만 최씨는 또 다른 길을 찾아낸 셈이 아닌가? 부러움과 질투가 섞인 노숙자들의 눈길 속에는 홍씨의 시선도 섞여 있었다.
 “후훗, 인간들이란…… 역시 변한 게 없군.”
 최씨의 입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3
 
 최씨에게 회칼을 휘두르던 사내가 다시 나타난 것은 사흘 뒤였다.
 “많이 다쳤던 모양이군.”
 “손목을 분지른 사람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최씨는 사내의 손목에 채워진 깁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받아쳤다.
 “그럼 다시 말하지. 술이나 한잔 하러 가자고. 물론 여자도 제공한다.”
 “좋아.”
 “그전에 통성명부터 하는 게 순서 아닐까? 난 최동수야. 다들 사시미라고 부르지.”
 “나랑 종씨였군. 최인수네.”
 최씨 아니 최인수는 최동수와 악수를 나눈 다음 가까운 룸살롱을 찾았다. ‘여행자의 길목’이란 제법 운치 있는 이름과 달리 입구부터 시끄러웠다.
 “조용한 방 하나 내줘. 그리고 좀 괜찮은 애들로 들여보내고.”
 “알겠습니다.”
 동수의 말에 웨이터는 그들을 넓은 특실로 안내했다.
 동수의 말에 정말 신경을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방문을 닫자 외부의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일부러 방음시설을 한 모양이다.
 “우선 용건부터 들어보지. 약간 짐작이 가긴 하지만…….”
 “그러지. 솔직히 말해서 우린 건달들이야.”
 “동네 노숙자나 괴롭히면서 건달은 무슨…….”
 “뭐 틀린 말도 아니니 인정하지. 건달이긴 하지만 고작 업소 세 군데 관리하는 게 전부니까. 다른 조직들 입장에서 보면 엄청 애송이야. 인정하긴 싫지만 사실이니 어쩔 수 없지.”
 “그래서.”
 “그런데 자네 얘기를 들은 거지.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대단하더군. 게다가 독한 면도 있고.”
 동수는 기브스를 한 손목을 들어 보이며 멋쩍게 웃었다.
 인수는 그의 말에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니까 장래성 없는 조직에 들어와서 같이 불안한 세월을 보내자?”
 “이왕이면 배팅이 큰 도박이라고 말해주면 고맙겠어. 성공만 하면 몇 배로 돌아올지 모르잖아.”
 “후훗, 성공이라……? 고작 싸움 잘하는 사람 하나로 모든 게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보지?”
 “뭐, 힘들겠지.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
 동수의 말에 인수는 천천히 양주잔을 비웠다. 동수는 인수가 잔을 비울 때마다 재빨리 채워주며 눈치를 살폈다. 잠시간의 침묵이 지나고 난 다음 뭔가 결심한 듯 인수의 입이 열렸다.
 “좋아, 수락하지. 어차피 길거리에서 밤이슬이나 맞으면서 자는 생활은 질렸으니까. 그런데 내 지분은 얼마나 되지?”
 “원한다면 내가 형님으로 모셔줄 수도 있다. 물론 지금과 달리 제대로 된 건달조직으로 키워줄 수 있다는 조건이지.”
 동수의 말에 인수는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그럼 꿇어.”
 인수의 말에 동수는 말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를 인수는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 둘 사이에는 금방이라도 싸움이 벌어질 것 같은 긴장감이 흘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동수는 곧 무릎을 꿇으며 짧게 외쳤다.
 “형님!”
 “후훗, 좋아. 그럼 이제부터 제대로 된 조직을 만들어볼까?”
 인수가 소리 높여 웃었다. 동수는 과연 이것이 잘한 선택인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다음날, 새로운 형님이 된 인수는 몇 되지 않은 조직원들과 함께 가벼운 술자리를 가졌다. 특별히 아가씨를 부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인수를 중심으로 결의를 다지며 한 잔 두 잔 마시는 동안 다들 조금씩 취기가 올랐다.
 그때 인수의 바짓가랑이 밑으로 기묘한 형태의 곤충들이 기어 나왔다. 놈들은 제각각 가까운 조직원들의 얼굴에 달라붙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인수는 자리에 앉아 천천히 술잔을 기울였다. 동수를 비롯해 조직원들도 고함을 지르며 얼굴을 싸안고 뒹굴더니 이내 평정을 되찾고 자리에 앉았다.
 “후훗, 이제 때가 된 모양이군.”
 인수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하찮은 인간들의 세상이지만 이곳에서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육체가 필요하다. 또한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강력한 힘을 소유해야 한다. 다행히 우리는 우리가 차지한 인간들의 육체적인 잠재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너희 스스로도 요력(妖力)을 키우며 이들이 바라던 꿈을 이루어줘야겠다.”
 “알겠습니다, 어머니.”
 “지금 나는 남자의 육체를 가졌으니 어머니라고 부르는 건 옳지 않아. 아니, 아예 이들이 부르는 명칭이 좋겠군. 그래, 지금부터는 나를 형님이라고 불러라. 나 역시 너희를 동생이라고 부르겠다.”
 “알겠습니다.”
 그들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나눈 다음 천천히 술집을 벗어났다. 우선 할 일이 뭔지는 동수가 알고 있다. 가장 가까운 유흥가를 중심으로 하나 둘 세력을 뻗어가면서 힘을 얻어야 한다.
 “인간의 역사는 폭력을 벗어날 수 없지.”
 인수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술잔을 기울였다.
 다음날 인수는 가까운 곳에 사무실을 얻어 ‘인수상사’라는 명패를 붙였다. 그는 우선 자신의 주민등록말소를 해결하여 주민등록증을 재발급 받았고 룸살롱에 다니는 딸도 데려왔다.
 딸의 입장에서는 놀랍기만 했다. 자신이 알던 소심하고 자신감 없던 아버지가 지금은 주먹을 휘두르고 다니는 건달이 되어 있는 게 아닌가?
 유흥가에 있는 동안 딸은 건달들이 얼마나 큰 특혜를 누리는 지 보아왔다. 그런 만큼 아버지의 변신은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말이 많지 않다는 것은 여전했지만 느낌은 판이하게 다른 모습.
 “아빠가 사기를 치고 다니는 건가?”
 딸은 그저 불안하기만 했다. 당연하다. 그래도 더 이상 술을 억지로 마시지 않아도 되고 사내들에게 다리를 벌려주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것만으로도 무능한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수가 상사를 건립하고 딸을 데려오면서 조직의 모습을 만드는 동안 동수가 모아놓은 돈이 거의 떨어졌다. 인수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형님, 오늘 시작할까요?”
 “그래. 그리고 명화는 아빠가 마련해준 집으로 피해 있어라.”
 인수의 고저 없는 말투에 그의 딸 명화는 달리 반박하지 못했다. 아니, 그럴 여지를 주지 않았다.
 인수와 동수는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세부적인 계획을 짰다. 계획이라야 업소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타 조직을 부숴버린다는 정도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여기가 알짜라 이거지?”
 “더군다나 이 녀석들, 조금 구린내가 납니다.”
 “구린내?”
 “아마 마약을 취급하는 모양입니다. 마침 거래를 하나 마치고 자축하는 모양이니 한 번에 치고 들어가면 놈들이 거래한 돈까지 챙길 수 있을 겁니다.”
 “마침 잘됐군. 운영비도 떨어져가던 참인데. 그럼 지금 출발하지.”
 “예.”
 인수의 말에 동수는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갔다. 인수도 뒤따라 바깥으로 나가려다가 슬쩍 뒤돌아서서 지갑을 열었다.
 “이거면 택시비로 충분할 게다. 지금 바로 떠나라.”
 “예.”
 “그래, 그래야 착한 딸이지.”
 인수는 명화가 얌전히 돈을 받아들자 만족스런 미소를 보이며 문을 열고 나섰다. 때마침 문 옆에서 작은 벌레 한 마리가 명화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면 좀 더 말 잘 듣는 딸이 될 거야.”
 인수는 문밖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아빠, 여기 있는 누나들은 왜 다들 옷을 벗고 있는 거야?”
 “더, 더운 모양이구나.”
 “그럼 왜 다른 사람들은 더워도 옷을 입고 다니는데?”
 “그, 그게 말이지…….”
 강철호는 옆에서 쉬지 않고 물어대는 동휘 때문에 난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철호와 동휘는 중국에서 온 손님(?)들과 함께 하오문주를 만나러 왔기 때문이다.
 문제는 하오문주의 거처였다. 철호도 자신이 모르던 또 다른 기인을 만난다는 사실에 많은 기대를 했지만 장소가 홍등가다 보니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것도 아직 어린 아들과 함께했으니 어찌 난감하지 않겠는가?
 그 모습을 재미있게 구경하고 있던 개방주 황충은 마침 낯익은 인물을 발견했다.
 “여어, 젊은이! 오랜만이네.”
 황충이 반갑게 부르자 철호는 누군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어깨에 장미꽃 문신을 하고 팔에 크고 작은 흉터가 있는 것이 홍등가의 창기들이나 등쳐먹는 건달이 분명했다.
 철호는 그런 깡패사내와 황충이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궁금했지만 굳이 신경 쓰지는 않았다. 아니, 그럴 틈이 없었다. 동휘의 난감한 질문만으로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빠, 근데 저기 있는 누나들이 왜 막 오빠 오빠 하면서 다른 아저씨들 불러? 쪽쪽 빨아준다는 게 무슨 뜻이야?”
 철호가 다시 어설픈 변명을 하려는데 조금 전에 본 깡패사내가 황충의 앞을 가로막았다. 갑작스런 사태에 철호는 흥미를 돋우며 황충의 대처를 지켜보기로 했다. 그런데 생각과 달리 다소 엉뚱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사나이 황인규! 사부님을 뵙습니다.”
 “뭐, 뭐야?”
 깡패사내가 황충 앞에 무릎을 꿇으며 사부 운운하는 게 아닌가?
 황충은 어이가 없어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그 모습에 철호는 장난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제자를 거두게 되었군요.”
 “그 무슨 소릴! 나는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그렇군요. 한국에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처음 생긴 제자라 이거죠? 이름이 뭐라고 하셨죠? 아까 황인규라고 들었는데, 축하드립니다. 좋은 스승을 모시게 되셨습니다.”
 철호의 모습에 공무와 당세민은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속사정을 깨닫곤 실소를 머금었다. 철호의 행동은 보복이 분명했다.
 한국에 하오문주가 자리를 잡고 정보를 수집 중이란 말에 철호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마침내 중대한 정보를 얻었다는 말에 동행해도 되겠느냐는 제의를 했었다.
 그때 황충은 장난스런 표정으로 동휘도 데려가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고, 철호는 좋은 경험이라는 생각으로 동의했다. 미처 공무와 당세민이 말릴 틈도 없이 벌어진 일이고, 덕분에 철호는 지금 아주 난처한 상황을 겪고 있지 않은가.
 “아, 사부님과 아는 분이군요. 그렇다면 역시 보통 분이 아니겠군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황 방주님, 제자분이 예의도 바르군요. 참, 좋으시겠습니다.”
 “아, 아니 그게……!”
 황충도 철호가 어떤 심정으로 황인규의 편을 드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지은 죄가 있어 선뜻 화를 내지도 못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공무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흠흠, 업보로다.”
 공무의 말에 황충은 ‘끄응!’ 소리를 내더니 곧 꾀를 냈다.
 “흘흘, 우리는 잠시 볼일을 볼 테니 자네는 있다가 보는 게 좋겠네. 그런데 혹시 아이 보는 거 좋아하나?”
 “아이요? 아, 예! 좋아합니다. 맡겨만 주신다면 제가 잘 돌보겠습니다.”
 황충과 인규의 말에 철호는 얼른 동휘를 끌어당기며 거절했다.
 “우리 아이도 관련된 일이니 지금은 안 되겠군요. 다음에 부탁드리죠.”
 “그런가요? 아, 그렇군요. 고수는 어릴 때부터 키워진다더니……. 그럼 잠시 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인규는 자리에서 일어나 일행들에게 90도로 인사했다.
 그 모습에 철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무협지를 너무 많이 본 모양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당세민이 철호의 말에 동조했다.
 일행들은 앞으로 인규가 어떤 모습을 보일지 무척 궁금했지만 황충은 벌써부터 골치가 아픈 얼굴이었다. 설마 장난삼아 실력을 조금 선보인 정도로 저렇게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
 어느새 인규는 일행들 앞으로 달려가 앞장을 서고 있었다. 볼일이 있다고 했지만 누구를 만날지 벌써 짐작했기 때문이다.
 “에구, 뿌린 대로 거두는 게지.”
 “허허, 이제 깨닫기 시작하는군요. 방주님도 해탈할 때가 다 되어가는 모양입니다.”
 “이거 땡추는 땡추일세. 내가 해탈한다면 아마 부처님이 골머리를 싸잡으실 거 아닌가?”
 “그럴 줄 알고 부처님이 미리 말씀하신 게 있죠. 당신이 아니면 누가 지옥에 가냐고요.”
 황충과 공무가 쓸데없는 말을 주고받는 동안 일행들은 박혜련이란 여자의 집 앞에 도착했다. 혜련은 백화신녀의 또 다른 신분이고 다들 그렇게 알고 있다.
 인규는 그녀의 집 앞에서 크게 고함을 질렀다.
 “혜련 누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호홋, 알고 있어. 얼른 안으로 모셔.”
 일행들은 인규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우와, 저 누나도 무지 이쁘다!”
 “꼬마야, 고맙구나.”
 “저 꼬마 아녜요. 동휘에요, 강동휘!”
 동휘가 백화신녀의 자태에 감탄했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본래의 나이를 알기 때문이었다.
 한편 철호는 자태보다 다른 쪽에 감탄했다.
 “공력이 대단하시군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야말로 보통이 아니시네요. 일부러 시험을 한 제가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과찬이십니다.”
 두 사람의 대화로 모종의 시험이 있었음을 눈치 챈 황충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어보였다.
 “흘흘흘, 검강을 일으키는 상대에게 되지도 않을 공력을 펼친 게로군. 상대를 잘못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지. 검강을 일으키고 백보신권을 몸으로 받아내는 사람한테 그런 짓을 해봤자 망신당하기 딱 좋지.”
 “거, 검강이라고요? 대단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설마 그 정도일 줄은……! 하지만 무공을 익힌 흔적이 보이지 않으니 반박귀진마저 넘어섰다는 말이군요. 오늘 제가 안계를 넓혔습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오늘 또 다른 세상을 보는 것 같습니다.”
 “아아, 그만들 하라고! 두 사람이 그렇게 서로에게 감탄했다면 우리는 자리를 피해줄 테니 둘이서 질펀하게 놀아보든가. 나이가 많은 게 조금 흠이지만 그래도 하오문주 정도면 괜찮은 상대지.”
 철호와 백화신녀와의 대화가 길어질 것 같자 황충이 끼어들었다.
 “호호홋, 방주님 나이도 만만찮은데 무슨 말씀이세요.”
 철호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백화신녀가 주안술 같은 것을 익혔다고 짐작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중국의 문화혁명을 피해 한국까지 와서 조직을 제대로 뿌리내린 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는 것이 이해되기도 했다. 그만한 저력의 문파라면 아직 어린 무인이 맡기엔 다소 어렵지 않겠는가.
 황충 때문에 말이 끊기긴 했지만 대신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처음 인면충이란 말을 듣고 오래 걸리지나 않을까 걱정했죠. 다행히 얼마 걸리지 않았는데 의심되는 조짐을 발견했답니다.”
 백화신녀의 말은 이러했다.
 느닷없이 한 노숙자가 등장해 인근의 불량배들을 규합하여 폭력조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조직은 주변의 유흥가를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해가는 중인데, 다른 거대 조직들마저 그들의 행보에 위협을 느낄 정도다. 특히 그 노숙자에 대해 확인해본 결과 예전에는 별 볼일 없었던 사내라는 것이다.
 “인수상사라는 회사를 차렸다지만 이것은 다른 조직에서도 하는 눈속임에 불과하죠. 더욱이 나이 40을 넘겨서 갑자기 주먹을 쓰기 시작한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고요. 조직원들 대부분이 일반적인 능력치를 넘어선 괴력의 소유자라는 사실도 의심되는 일입니다.”
 백화신녀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40대 중반에 주먹을 쓰기 시작해서 주목을 받는다는 자체부터가 어색한 일이다. 보통의 경우 폭력조직에 처음 입문하는 나이는 중고교생 때다. 자연히 주 행동대원들의 나이는 10대가 대부분인 셈이다.
 고교 시절부터 조직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차근차근 성장해 20대 초반이면 이미 중간보스 급으로 성장한다. 보통 조폭영화에서 나오듯 나이 30대를 넘겨 폭력조직에 가담하고 주목을 받는 일은 거의 실현불가능한 일이다.
 “신예들치고 그만하면 꽤 노장에 속합니다. 아무래도 조사해보는 게 좋겠죠?”
 “그렇군요.”
 철호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뭔가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그 인면충이란 것이 사람의 몸을 잠식해서 잠재된 능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면 아예 처음부터 우리 같은 이들을 선택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니, 꼭 우리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무예를 익혀 몸을 단련한 이들이 더 좋은 대상이 될 텐데…….”
 철호의 말에 공무와 황충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 같은 존재가 흔치는 않겠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그도 아니면 스포츠나 혹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태권도나 합기도 등을 익힌 자들의 육체를 차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 부분은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저희 가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로는 인면충은 어느 정도 공력을 지닌 이들은 쉽게 공략하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설마 고수는 알아본다는 소린가요?”
 “그런 건 아니고, 사람의 몸에 쌓인 공력 자체에 요기를 물리치는 힘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인면충 입장에서는 그런 이들이 꺼려지겠죠. 그 외에도 올바른 신념을 지닌 자들이나 종교적 신앙심이 깊은 자들도 요괴들이 꺼리는 대상이라고 들었습니다.”
 철호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당세민이었다.
 그의 말에 공무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 점에서 인생을 거의 포기한 자들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먹잇감이겠군요. 또 맹목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자들도 마찬가지고요. 이런 점에서 볼 때 오히려 요즘 같은 시대에 더욱 위험한 요물입니다.”
 “그럼 더 이상 망설일 틈이 없습니다. 우선 그들을 조사하러 가보도록 하죠.”
 “좋습니다.”
 철호의 말에 일행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화신녀가 그들에게 핸드폰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되도록이면 실시간으로 정보를 주고받기 위해서였다.
 “세상 참 좋아졌군.”
 황충은 핸드폰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밖으로 나섰다. 바깥에는 여전히 인규가 기다리고 있었다. 황충은 뭔가 도움을 바라는 시선을 보였지만 일행들은 무시해버렸다.
 “차라리 포기하고 한국에 개방분타를 만드시는 게 어떨까요?”
 철호의 은근한 목소리였다.
 
 
 제3화 백설공주와 차력사
 
 1
 
 송화정(松花亭).
 서울의 명물 중 하나라면 전통한옥 양식을 그대로 따른 송화정도 포함될 것이다. 이름처럼 담을 따라 심어진 소나무와 꽃들이 담장 밖으로 그윽한 운치를 드리우고 있다.
 다만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보통사람은 엄두도 못 낼 고급요정이란 점이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경찰경력 15년의 민경수도 마찬가지다. 한 차례 술값이 그의 1년 연봉으로도 감당하기 어렵다면 당연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민경수는 당당하게 송화정 입구를 들어서고 있었다. 그 앞에 고급스런 양복을 걸친 사내가 안내를 하는 중이고, 주위에는 아름다운 미녀들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있었다.
 “허허,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이야. 그나저나 요즘은 내부감사가 심해서 조금 곤란한데…….”
 경수는 곤란하다는 말과 달리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마당의 운치를 즐길 수 있는 정자에 올라앉았다.
 “그냥 술이나 한잔하자는 건데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저희도 알아서 조심했으니 형님한테 해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우선 술부터 한잔 하시죠.”
 경수 앞에 앉은 인물은 대호파라는 폭력조직의 보스인 황대호. 폭력조직의 보스라는 타이틀에 어울리지 않게 얼핏 보기에는 학구적인 타입의 외모를 가졌다. 실제로도 주먹패답지 않은 학식을 지녔다.
 황대호가 손뼉을 치자 고급 한정식에서나 볼 수 있는 음식들이 큰 상 가득 채워져 나왔다.
 경수는 눈앞에 쌓인 음식들을 곁눈질로 슬쩍 내려다보더니 헛기침을 하며 오른쪽을 쳐다보았다. 그가 원하는 게 뭔지 대호가 모를 리 없었다.
 “얼마 전에 새로운 애가 왔다더군요. 오늘 형님이 머리를 올려주셔야겠습니다.”
 대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두 사람 옆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미녀가 하나씩 앉았다.
 경수는 옆에 앉은 여자를 힐금거리곤 흡족한 듯 술잔을 들었다. 여자는 얼른 주전자를 들어 술을 채워주었다. 황색의 투명한 술에서 연한 국화향이 흘렀다. 송화정의 명물인 국화주가 틀림없다.
 “머리를 올려야 제대로 된 기생이라고 할 수 있지.”
 경수는 조선시대의 선비라도 된 것처럼 너스레를 떨었다.
 본래는 아직 처녀로서 기적(妓籍)에 오른 여인과 처음 관계를 맺는 것을 머리를 올려준다고 한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손님과 처음으로 2차를 나가는 것을 말하지만, 경수는 그 정도로도 충분히 기분이 좋아졌다.
 “요즘 사업은 어떤가?”
 “저야 형님이 염려해주신 덕분에 항상 번창일로죠. 다만 제 사업을 거저 삼키려는 것들이 있어 조금 걱정이긴 합니다만…….”
 “날로 먹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예, 실은 인수상사라는 것을 만들고 쌈박질이나 하는 동네 양아치 같은 것들인데…… 기세가 여간한 게 아니군요.”
 “이런, 아직도 그런 놈들이 있나?”
 “아이구, 말씀도 마십시오. 그저 치고받고 싸우면 모든 게 지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저처럼 법을 지키고 사는 사람만 힘들다니까요.”
 대호와 경수는 서로 뻔한 말을 주고받았다.
 둘은 미묘한 공생관계에 놓여 있다. 본래 경수는 대호가 신생조직을 만들어 커나갈 때 수사를 맡았던 자다. 그런데 경수의 수사가 어느 정도 진척되자 대호가 먼저 접근했다. 경수는 무슨 위협을 하려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전혀 다른 조건을 제시했다.
 경수도 만일 대호가 처음부터 돈이나 다른 이익을 내세웠다면 거절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호가 내세운 것은 공적이었다. 그는 다른 조직의 범법행위에 대한 증거와 정보를 제공하고, 경수는 그들 위주의 수사를 한다는 것이다.
 정의감 넘치는 경수로서도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어차피 폭력조직은 어떤 수를 써도 독버섯처럼 다시 자라나기 마련. 차라리 하나를 이용해 다른 것들을 제거해가는 것도 좋을 듯싶었다.
 그 후부터 대호파는 급성장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경쟁상대가 경찰력에 의해 저절로 와해되니 힘들이지 않고도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대호는 교묘하게 자신들의 범법행위마저 다른 조직에 떠넘기곤 했다. 경수도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냥 눈감아주곤 했다.
 하지만 문제는 또 다른 곳에 있었다. 아무리 목적이 좋다 해도 경수의 행위는 엄연히 경찰로서 부정이었다. 작은 부정이 있고 나자 다른 부정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둘 사이의 거래는 조금이나마 동지의식을 주었고 그 후 부패경찰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향응과 금품제공이 자연스러워졌고 대호는 점점 거침이 없어졌다. 그의 정보제공에 따라 경수는 매우 유능한 경찰로 인정받으며 고속승진을 거듭했고, 경수의 승진에 따라 대호도 단속에서 피할 수 있는 정보를 보다 쉽게 얻을 수 있었다.
 특히 놀라운 것은 대호가 워낙 교묘하게 정보와 증거를 넘겨 타 조직이나 경찰에서도 둘 사이의 거래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는 점이다. 아니, 뭔가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조차 허점을 찾지 못했다.
 “그 인수상사란 곳이 대체 뭐 하는 곳인가?”
 “그냥 깡패들이죠. 지들이 무슨 상사씩이나 되겠습니까? 제가 아는 것만 해도 얼마나 끔찍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들은 그저 감옥에서 평생 썩혀야 나라도 평안하죠.”
 “그렇군. 알겠네. 내가 한 번 알아보지.”
 “예, 저도 형님을 도울 수 있는 한 돕겠습니다.”
 “그럼 이제 복잡한 얘긴 그만두고 술이나 마시지.”
 경수는 옆에 얌전히 앉은 여인을 보며 기대에 찬 미소를 지었다.
 대호가 직접 만남을 청할 정도라면 보통 조직이 아니리라. 모르긴 해도 상당한 범법행위를 저질렀을 것이며, 그들의 체포는 대단한 실적으로 평가될 것이다.
 비록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났다지만 공을 세울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아니, 어쩌면 복지부동을 일삼는 현직경찰들과 달리 간부급 경찰이 직접 폭력조직을 소탕했다는 것만으로도 서장직 정도는 쉽게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과연 술맛이 좋군.”
 경수는 술잔에서 풍기는 국화향을 음미하며 다시 한 잔을 비웠다. 취기가 오를수록 묘한 음심(淫心)이 돋았다. 마음이 동하는데 옆에 앉은 건 꽃처럼 예쁜 아가씨가 아닌가?
 경수는 적당히 취기가 오르자 ‘과음은 몸을 해친다’는 핑계를 들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호는 그가 원하는 것을 알고 가까운 호텔로 안내했다. 그가 안내한 곳은 일류급 호텔이었다.
 경수의 빠듯한 월급으로는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곳이지만, 대호 덕분에 좋은 방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형님…… 받으십시오.”
 “뭐 이런 걸 주고 그러나.”
 경수는 대호에게서 작은 봉투 하나를 건네받아 안주머니에 갈무리했다. 액수는 굳이 확인하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분명 적지 않은 금액이리라.
 “그럼 가보게. 아무 걱정 말고.”
 “그럼 형님만 믿겠습니다.”
 경수는 대호를 보내고 예약된 방으로 올라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창문을 열었다. 서울의 화려한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멋있군. 이리 오너라.”
 “예…….”
 함께 들어온 아가씨는 부끄러워하는 듯하면서도 경수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경수는 송화정에서 점잖은 모습을 보였지만 굳이 호텔에서까지 그럴 생각은 없었다.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자연스럽게 접촉을 시도했다. 그녀도 굳이 그를 거절하지는 않았다.
 “예쁘구나. 나이가 어떻게 되지?”
 “스, 스물둘이요.”
 “후훗, 한창때군.”
 경수는 더 이상 춘정(春情)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의 손길이 점차 노골적으로 변해갔고, 그녀 역시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경수의 손이 차근차근 아가씨의 복장을 해체할 때였다.
 딩동
 “뭐, 뭐야?”
 “룸서비스입니다.”
 “이, 이런! 한창 좋았는데…….”
 경수는 다소 상기된 얼굴로 뇌까렸다. 아가씨가 얼른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경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방문을 열어주었다. 서비스를 꼭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호가 일부러 신경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험상 대호의 호의를 받아서 손해가 난 적은 없었다.
 “누, 누구지?”
 그러나 경수의 예상과 달리 그들은 호텔 직원이 아니었다.
 “알면 어쩌려고?”
 그들은 하나같이 건장한 체격을 갖춘 사내들이었다. 슬쩍 목과 주먹을 꺾으며 다가오는 폼이 ‘까불면 죽는다’는 식이었다.
 “이 자식들!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야?”
 경수는 오랜 경찰생활로 몸에 밴 호통을 쳤다.
 경찰신분임을 알면서도 행패를 부릴 자가 몇이나 될까?
 하지만 상대는 처음부터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누구긴 누구겠어. 민경수 형사과장님이지. 그나저나 청렴결백한 형사님이 무슨 돈이 있어서 이런 고급호텔에 아가씨까지 끼고 오셨을까?”
 “네, 네놈들 뭐냐!”
 경수는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비리 사실마저 훤히 꿰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우리? 그야 물론 깡패들이지. 취미로 다큐멘터리 감독 노릇도 하지만 말이야. 어디 한번 볼까?”
 그들 손에 디지털 캠코더가 들려 있었다. 그들은 친절하게도 자신들이 찍은 장면을 보여주었는데, 경수가 송화정에 들어가 대호를 만나고 다시 호텔에 들어오면서 돈을 받는 모습까지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어때, 놀랍지?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편집한 거 봤어? 워낙 거리가 멀어서 둘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만하면 걸작이지?”
 “워, 원하는 게 뭐냐? 혹시 그것을 내게 팔겠다는 거냐?”
 경수의 말에 사내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히죽거렸다.
 “뭐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군.”
 “하긴, 모아둔 돈도 많을 테니 이 정도로 문제되지는 않겠지.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거든. 알아서 생각하고 지금은 즐기쇼. 저 아가씨도 이번 기회에 유명해지면 연예인이라도 될지 모르잖아.”
 “저만하면 좋은 마스크지. 그래 봤자 에로배우밖에 못 해먹겠지만 말이야.”
 두 사내는 딴엔 재미있다고 농담을 지껄였지만 경수가 듣기에는 그저 협박일 뿐이었다.
 “참, 한 가지 빼먹을 뻔했는데 명심하쇼. 당신 딸도 아직 어리긴 하지만 꽤 예쁘더군. 미성년자를 건드리는 게 불법이긴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그딴 거 신경 안 쓰거든?”
 “생각 잘하쇼.”
 사내들은 명확하게 뭘 어쩌란 말도 하지 않고 나가버렸다.
 경수는 상대가 원하는 것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억지로 머리를 짜내야 했다. 하지만 떠오르는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제길, 인수파 녀석들인가?”
 그들은 자신의 약점을 잡았을 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건드릴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경수는 왠지 모를 위기감이 들었고, 그것은 곧 엄청난 성욕으로 돌변했다.
 경수가 성욕을 푸는 시각, 호텔 바깥에서는 인수가 사내들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잘했겠지?”
 “물론입니다. 지금쯤 그 짭새 새끼, 몰카 설치한 것도 모르고 열심히 촬영 당하고 있을 겁니다.”
 “잘됐군. 그럼 저 짭새놈에 관한 것은 여기서 일단락 짓기로 하지. 증거보관에 각별히 신경 쓰도록 하고. 그나저나 세상 많이 좋아지긴 했군. 그럼 지금부터 대호파를 쳐보기로 할까? 건달세계에 경찰을 끌어들였으니 그만한 대가는 지불해야지.”
 “알겠습니다.”
 
 
 2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애송이들.”
 황대호는 담배를 피워 물며 비웃음을 날렸다. 이제 경수가 나섰으니 인수파는 공중분해 될 것이다. 건달세계에서 경찰보다 무서운 게 또 어디 있을까?
 증거확보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건달이 합법적인 사업만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 아닌가.
 그런데 그때였다.
 쿠콰콰쾅
 “무슨 소리야?”
 대호는 사무실에 앉아 있다가 바깥에서 들린 굉음에 소리쳤다.
 “아마 어린 녀석들이 힘자랑을 하는 모양이죠? 곧 끝날 겁니다.”
 “저런 소리를 듣고 사는 것도 지겹군.”
 대호는 귀찮은 듯 중얼거렸다.
 그동안 대호파를 성장시킨 것이 교묘한 전략에 의한 것이라지만 본연의 실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크고 작은 도전에 어찌 다 버틸 수 있었을까?
 더군다나 자신들의 밀고를 의심하는 조직들이 하나 둘이 아닌 바에야 설명할 필요도 없다. 대호는 곧 끝나리라 생각하며 남은 담배를 마저 태웠다.
 콰쾅
 그러나 얼마 못 가서 문짝이 부서지며 낯선 얼굴이 들어섰다.
 “이런! 이거 너무 싱거운데?”
 “뭐, 뭐야, 너희들?”
 “그렇게 소리 지르면 조금 섭섭한데? 우리를 경찰에 넘기려던 놈이 모른대서야 말이 되나?”
 “경찰?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거냐!”
 대호는 상대방의 말에서 대강 짐작하면서도 짐짓 시치미를 뗐다. 하지만 상대는 그의 변명을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다.
 “어디 보자. 요즘 시대가 좋아져서 이런 것도 촬영할 수 있더군. 어디 인터넷에라도 뿌려줄까?”
 상대의 손에 들린 건 디지털 캠코더였다. 그 안에는 자신과 경수가 송화정에서 술을 마시는 장면부터 호텔에 도착하여 돈을 건네는 장면까지 적절히 편집되어 있었다.
 대호는 헛바람을 들이키며 상대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오래전의 일이라면 조작이라고 우기기라도 할 텐데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 아닌가?
 “이것만 있는 게 아냐. 편집해서 가져오기 조금 민망한 것도 찍혔거든. 그 형사양반은 모르겠지만 형사랑 고급술집의 아가씨랑 그렇고 그런 장면이라면 인기 좀 끌 거야. 어디 경찰청 홈페이지에라도 올려주면 어떨까? 아니지, 이건 연출이 아니라 실제니까 포르노 사이트에 올려도 금세 퍼지겠는데? 앞의 내용과 적당히 이어붙이면 더 효과적일 테고 말이야.”
 “대체 뭘 원하는 거냐?”
 어느 틈에 대호는 침착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눈앞의 사내가 저들의 우두머리인 것 같았다.
 하지만 보스는 따로 있었다.
 “건달세계에 경찰을 끌어들였으니 이 지역을 우리가 접수해도 할 말은 없을 텐데? 그렇지 않나?”
 부서진 문 뒤로 최인수가 들어오면서 말했다. 그는 얼핏 보기에도 주먹을 쓸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깡마른 얼굴은 고생깨나 했음 직하고 체구는 허약해 보였다.
 하지만 상대는 바로 주먹 하나로 일대를 평정한 장본인이다.
 “너희 같은 애송이가 내 지역을 차지한다면 도전이 만만치 않을 텐데? 지킬 자신은 있나?”
 “후훗, 기습의 묘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곳까지 치고 들어온 걸 감안한다면 어느 정도는 인정할 만하지 않나? 더구나 우리는 전력의 3분 1도 끌고 오지 않았다고.”
 인수의 말에 대호는 침음성을 삼켰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상대의 조직은 대호파의 실력을 훨씬 뛰어넘는다. 더군다나 자신을 비호하던 경찰의 약점까지 쥐고 있으니!
 “원한다면 1대 1로 붙어줄 수도 있다. 물론 승자에게는 그만한 대가가 있어야겠지.”
 “아니, 됐다. 지금부터 이 지역의 지분을 포기하도록 하지. 주먹 하나로 다른 조직들을 평정한 너에 비해 나는 너무 오래 쉬었거든.”
 “생각보다 현명하군.”
 “칭찬으로 듣지.”
 인수는 대호의 말을 듣자마자 바깥으로 나갔다. 그러자 그에 앞서 들어왔던 사내가 세부적인 내역이 적힌 서류를 내밀었다. 이미 준비가 다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대호는 서류를 살펴보지도 않고 사인했다.
 “졌군. 처절하게…….”
 대호는 무너진 조직의 일부를 어떻게 다시 세울 것인지에 대해 고민했다.
 인수파가 대호파를 공격한 그 시각, 강철호 일행은 황인규의 차를 타고 있었다.
 “혜련 누님이 잘 모시라고 했으니 저만 믿으십시오. 제 어릴 적 꿈이 카레이서였다는 거 아닙니까?”
 백화신녀의 말대로라면 인수파는 상당히 의심되는 이들이다. 인면충의 잠식으로 잠재력을 모두 끌어 쓸 수 있다면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초인이다.
 인간들은 대부분 살아가면서 잠재된 힘의 거의 전부를 사용하지 못하고 죽는다. 그것을 벗어난다면 뛰어난 무공고수나 마찬가지다.
 당세민은 백화신녀의 말을 듣자마자 방구석에 놓여 있던 싸구려 바둑알부터 한 움큼 집었다. 다른 이들이 보았다면 어린애들 장난쯤으로 생각했겠지만 암기로 이름 높은 사천당가의 일원이니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철호 일행이 백화신녀의 집을 나서자 밖에 서 있던 인규가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맞아주었다. 그때 백화신녀가 그에게 부탁했다. 중대한 일이 있어서 그러니 차를 좀 쓰게 해달라고 말이다.
 다른 때라면 인규도 동생들을 시켰겠지만 이번에는 직접 나섰다.
 “그런데 지난번에 술에 취한 것 같으면서 싸우셨던 거 있잖습니까? 그거 무슨 취권 같은 건가요? 제가 우슈를 조금 배워서 알거든요. 그런데 사부님의 동작은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고…….”
 “누가 자네의 사부라는 건가?”
 “물론 사부님 보시기에는 많이 부족하겠지만 사나이 황인규, 한 번 마음을 정하면 끝까지 의리를 지킵니다.”
 “그 의리라는 거 다른 사람한테 지켜도 되니까 나는 좀 제외시켜주게.”
 “아닙니다. 어떻게 사부님을 제외하겠습니까? 제가 못 배워서 무식하긴 해도 최소한 사나이가 그러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죠. 그런데 그 취권 비슷한 거 있잖습니까? 그게…….”
 “그건 취선무라는 무공입니다. 일반인에게 알려진 무예는 아니지만 취권에 비할 바가 아니죠.”
 인규의 집요한 질문에 공무가 끼어들었다. 지금은 황충의 무공이 무엇인지를 놓고 싸울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인면충을 소멸하기 위해서는 동휘를 더욱 신경 써야 했다. 절대의 신공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인면충이지만 소년의 뇌전은 소멸시킬 수 있다.
 “취선무? 헤헷, 뜻은 몰라도 취권보다는 이름이 멋있네요.”
 “야 이 무식한 놈아, 그 정도의 뜻도 해석 못하면서 무슨 놈의 제자냐? 말 그대로 술 취한 신선의 춤 아니냐. 그것을 고작 시정잡배도 배울 수 있는 취권과 비교를 해? 네놈이 지금 그러고도 내 제자를 사칭하고……!”
 “사부님이 드디어 정식으로 가르침을 주시는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뭐, 뭣이 어째? 내가 언제 정식으로 가르쳤는데?”
 “지금 취선무가 무슨 뜻인지 말씀해주셨잖아요.”
 “그, 그건……!”
 황충이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잊자 나머지 일행들은 중대한 싸움을 하러 가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여기저기서 킥킥거리자 황충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운전이나 똑바로 해!”
 결국 참다못한 황충이 고함을 지르자 인규가 고개를 끄덕이며 시원하게 대답했다.
 “예, 사부님!”
 황충은 인규의 넉살에 괴로움을 참지 못해 마구 떠들어댔지만 그렇다고 인규의 입심을 당해내기엔 한참이나 부족했다. 몇 대 쥐어박아서라도 조용하게 하고 싶은데 아쉽게도 운전할 사람이 인규뿐이었다. 황충은 괴로워하면서 왔지만 덕분에 다른 일행들은 지루하지 않았다.
 끼이익
 “뭐, 뭐야?”
 “죄송합니다. 조금 확인할 게 있거든요.”
 인수상사 앞에 급정거한 7인승 밴을 보고 건달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당세민이 앞으로 나섰다. 누군가는 용무를 밝혀야 했기 때문이다.
 “확인? 뭘 확인할 건데?”
 “이곳에 최인수란 분이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잠시 그분을 좀 만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나 참, 우리 사장님이 그렇게 한가한 분인 줄 알아?”
 건달들은 당세민의 말에 비아냥거리며 침까지 뱉었다. 당세민은 그들의 태도에 기분이 조금 상했지만 하찮은 깡패에게 무공을 쓰고 싶지 않아 꾹 참았다.
 그러나 그것을 참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쥐방울만 한 새끼들이 터진 아가리로 씹어대면 전부인 줄 알아? 좋게 말하니까 누굴 호구로 보나?”
 앞으로 나서면서 성질을 부린 것은 인규였다. 악과 깡이라면 누구한테도 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데다 사부로 모신 분의 동료들이다.
 그러나 딴에는 사부님 일행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나선 것이지만 상황은 오히려 나빠졌다. 상대도 인규의 껄렁껄렁한 모습과 어깨의 문신을 본 것이다.
 “저 새끼, 어디 동네 양아치 같은데?”
 “뭐야, 우리가 그랬다고 지들도 소수로 치고 빠질 수 있는 줄 아나보지?”
 “아, 정말 세상물정 모르는 새끼들이네.”
 건달들은 목과 손목을 풀면서 다가섰다. 인규도 거리낄 것 없다는 듯 앞으로 나섰다. 아니, 나서려 했다.
 딱
 “가뜩이나 나쁜 머리를 왜 때리는 겁니까?”
 “이놈아, 왜 일을 크게 벌이는 거냐? 그냥 조용히 물러나면 끝날 일인데…….”
 “그거야 저놈들이 사부님 친구 분들께……!”
 “누가 네 사부야?”
 “그야 당연히 사부님이 제 사부님이시죠.”
 황충이 인규를 뒤로 물리자 다른 이들이 앞으로 나섰다.
 인규는 황충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는데 건달들이 보기엔 화가 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감히 자신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가 아닌가?
 마침 인수가 대호파를 치고 돌아오는 중이었다.
 “무슨 소란이지?”
 그는 때아닌 소란에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예, 저 자식들이 글쎄…….”
 건달 하나가 상황을 설명하려고 하자 당세민이 앞으로 나섰다.
 “혹시 최인수라는 분입니까?”
 “그렇소만, 누구시죠?”
 인수가 되묻는 순간 공무가 앞으로 튀어나갔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와 철호는 인수의 요기를 느꼈던 것이다.
 “네놈이로구나! 동휘야, 얼른!”
 동휘도 사전에 들은 얘기가 있어 얼른 뇌전을 방사했다. 소년의 손에서 뇌전이 방사되자 인수는 가까이 서 있던 건달을 방패로 삼은 채 피했다. 그러면서도 도망갈 틈을 얻기 위해 소리쳤다.
 “저 새끼들, 태워버려!”
 인수의 말에 건달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황충은 히죽 웃으며 대나무지팡이를 어깨에 걸쳤다.
 “몸 좀 풀 겸 타구봉이나 써볼까? 그리고 네놈은 함부로 나서지 말고 저 아이를 잘 지켜라. 알겠지?”
 “예, 사부님!”
 “사부 아니라니까.”
 “하하하, 알겠습니다. 뭐 그렇다고 치죠.”
 “좀 있다가 다시 얘기하자.”
 황충은 인규를 한번 노려본 다음 얼른 타구봉을 들었다.
 인규는 사부가 자신에게 동휘의 안위를 부탁한 것에 대해 내심 흐뭇했다. 이제 자신을 인정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그의 착각에 불과하다. 황충에게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 그를 뒤로 뺀 것이다.
 본인 생각은 다르겠지만 일행들 입장에서 볼 때 인규는 약자다. 그런 그를 함부로 위험 속에 뛰어들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황충은 나름대로 자존심 상하지 않게 하려고 동휘를 지키라는 핑계를 주었다.
 어차피 건달들이 밴 가까이로 다가갈 가능성은 적고, 설사 다가선다 해도 동휘의 뇌전이라면 스스로를 지켜내기에는 충분하다.
 “비켜!”
 인수를 비롯해 몇몇이 도주하는 모습을 보며 공무가 고함을 질렀다. 건달들 입장에서는 그를 비롯해 일행들은 반드시 혼내주어야 할 대상이었다. 건달들은 공무가 사나운 기세로 달려들자 앞을 가로막았다.
 “이 중놈의 새끼가!”
 건달 하나가 얼른 주먹을 날렸지만 공무에게 통할 리 없었다. 그저 손바닥을 뒤집는 간단한 동작으로 건달의 주먹을 비껴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4, 5미터가량이나 튕겨나가게 했다.
 그 모습에 다른 건달이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공무는 몸을 뒤로 젖히면서 다시 발을 뻗었다.
 “크헉!”
 공무가 사용한 것은 소림의 기본무공인 나한십팔권이었다. 비록 기본에 불과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어지간한 건달은 상대할 수준이 안 된다.
 하지만 숫자가 워낙 많아서 그만 인수를 놓치고 말았다. 공무는 으르렁거리며 다가오는 건달들을 향해 권각을 놀리며 착실하게 쓰러뜨려갔다.
 “다른 새끼들도 조져버려!”
 건달들 중 하나가 소리치자 다른 일행들에게도 공격이 가해졌다. 당세민은 눈앞으로 달려드는 건달들을 보면서도 침착하게 바둑알을 꺼내어 튕겼다.
 피핏 핑
 장난처럼 보이는 손놀림에 바둑돌이 날아가더니 건달의 혼혈을 점해버렸다. 고작 바둑돌 하나에 맞았지만 건달들은 그 자리에 정신을 잃었다.
 “대, 대단하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황충의 몸놀림만 봤다가 다른 이들의 움직임을 보자 인규의 눈이 커다랗게 부릅떠졌다. 자신도 나름대로 운동깨나 했다고 자부해왔는데 이것은 차원이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은가?
 “흘흘, 어디 나도 몸 좀 풀어볼까?”
 건달들의 숫자가 줄어들긴 고사하고 오히려 늘어나는 듯하자 황충도 나섰다.
 “야야, 저게 뭔지 알아? 저게 바로 취선무라는 것이거든. 우리 사부님의 무공이 얼마나 멋있냐?”
 “아저씨, 그 얘기 아까 저도 같이 들었는데요?”
 “……!”
 인규는 혼자 신나서 떠들어댔다.
 황충의 동작은 과연 대단했다. 취선무라는 이름처럼 무예라기보다는 차라리 춤처럼 보였다.
 그 동작 하나하나에 건달들이 쓰러졌다. 건달들의 무기도 각목이나 쇠파이프에서 점차 회칼이나 장검처럼 살벌한 것으로 변해갔다.
 인규는 손에 땀을 쥐며 여차하면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편 일행들은 다른 의미로 긴장했다. 만일 조금이라도 힘을 과하게 쓰면 인명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동휘도 한 번 해볼래?”
 그때 난데없이 철호가 말했다.
 그 말에 인규는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아직 어린아이한테 대체 무슨 속셈인가?
 “아, 아니 무슨 소리를……!”
 “동휘야, 나쁜 아저씨들이 너무 많구나. 다행히 저 아저씨들이 모두 손에 쇠를 들고 있어 잘될 것도 같은데…….”
 “알았어요, 아빠.”
 동휘는 철호의 말에 오히려 신난다는 얼굴로 차 밖으로 튀어나왔다.
 철호는 소년을 보호하려는 듯 뒤에 바싹 붙었다. 순간 동휘의 몸에서 강렬한 뇌전이 일었다.
 본래 동휘가 발산하는 뇌전은 스스로의 통제를 따른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통제하지 않으면 일반적인 전기의 성질을 띨 수밖에 없다.
 파지지직
 “끄아아악!”
 “이, 이게 뭐야!”
 소년의 몸에서 발산되는 전기충격은 시중에 나도는 호신용 감전기와 비슷했다. 비록 살상까지는 힘들어도 보통사람을 기절시키기엔 충분했다.
 체질적으로 전기에 강한 사람이 있긴 하지만 약간의 충격은 어쩔 수 없다. 그 실례로 건달들은 이제 고작 20여 명만 멀쩡히 서 있었다.
 “대, 대단하군!”
 “놀라운 능력이긴 하지만 특이한 힘에 너무 의지하면 오히려 무공이 약해질 수 있음을 명심해라.”
 공무와 당세민은 감탄성을 잊지 않았고 황충은 입맛을 다실 뿐이었다.
 동휘는 칭찬을 바라는 눈빛으로 철호를 바라보았다. 철호는 웃는 낯으로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철호의 생각대로 무공을 익힌 일행들은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다. 건달들도 싸울 의욕을 잃었는지 망연자실하게 일행들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이미 상대의 능력을 충분히 본데다 동휘의 뇌전이 준 충격도 만만치 않았다.
 “제자분이 기절했군요.”
 “누, 누가 제자라는 건가?”
 당세민의 물음에 황충이 고함을 질렀다. 그 모습에 다른 이들은 웃는 얼굴로 차에 올랐다.
 그런데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아빠, 운전할 줄 알아?”
 “그, 그게 말이지…… 면허증이 있긴 한데 운전을 해본 적이 없어서…….”
 “그럼 다른 아저씨들도 못해요?”
 “주, 중국에서는 차보다는 자전거를 더 많이 탄단다.”
 “허험, 중은 차를 몰 필요가 없으니까.”
 “그럼 이 아저씨 깰 때까지 기다려야겠네요?”
 동휘의 뇌전에 기절한 인규는 입에 게거품까지 물고 있었다.
 “우리가 너무 성급했던 모양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군요. 조금 더 확인하고 덮쳤어야 하는데…….”
 일행들은 무려 200여 명의 건달들을 상대로 멋진 파이팅을 보여주고도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인명을 해칠 수 없다는 제약에도 불구하고 잘 싸웠고, 동휘의 능력도 확인했지만 그뿐이었다. 타초경사(打草儆蛇)의 우를 범한 꼴이 아닌가? 인규의 차로 철호의 집에 돌아온 일행들은 한숨을 내쉬며 대책을 세워야 했다.
 “그래도 소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최소한 인면충에 잠식당한 인간이 누군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까?”
 “하긴, 그렇군.”
 “뿐만 아니라 인면충에 잠식된 인간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당세민의 희망적인 의견에 철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도 뉴스를 비롯해 각종 언론매체에서는 정체불명의 전염병이 연일 보도되고 있다. 증상을 볼 때 인면충이 확실했다.
 “지금 인면충에 영혼을 빼앗기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감안하면 인수파 전원이 인면충에 잠식당했다 해도 믿을 수 있는 수치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보고 도망간 것은 소수에 불과하죠. 뭔가 다른 게 있는 건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어쩌면 인수파는 우리가 파악한 일부이거나 혹은 다른 목적으로 숨겨둔 행동대원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문제군요.”
 인면충에 관한 가능성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생물의 특성 자체가 각양각색이고 인면충도 요괴이기 전에 또 다른 생명체다. 인면충의 습성이 어떤지 알 수 없으니 이들의 고민은 끝이 없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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