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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마스크 1권-1

2015.01.08 조회 762 추천 8


 프롤로그
 
 대륙에 데스마스크가 나타난 건 마도공작 헬사온에 의해서다.
 그는 남쪽의 작은 섬나라 레이옴 출신인데, 그곳은 오래 전부터 가문의 귀족이 죽으면 얼굴 가죽을 벗겨 마스크를 만들고 몸은 수장했다. 레이옴의 귀족들은 이렇게 만든 데스마스크가 가문을 지켜 준다 믿었고,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헬사온은 제국 메이슬란에서 그가 만들어 낸 올마이티 아머와 뛰어난 마법으로 남작 위를 받아 정식 귀족이 됐다. 그리고 30년 동안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르며 수많은 적을 물리쳤고, 마침내 공작 위에 올랐다.
 사람들은 그를 마도공작이라 불렀고, 그의 마법과 올마이티 아머를 찬양했다. 그의 영향력은 제국뿐 아니라 대륙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는 수많은 데스마스크를 만들었는데, 레이옴에서 만든 것과는 사뭇 달랐다. 데스마스크는 죽은 자의 영혼을 깃들게 해 영원히 함께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마도공작 헬사온은 공작이 되기까지 상대해 온 원수들의 얼굴로 그것을 만들었고, 그 안에 영혼을 가뒀다. 그중에는 백작은 물론 한 나라를 다스렸던 왕의 얼굴도 있었다.
 그는 매일 밤 잠자기 전, 침실 벽에 걸어 놓은 그것들을 보고 웃었다. 무도회가 있으면 데스마스크 중 하나를 쓰고 참석했으며, 그때마다 마스크의 얼굴 주인이 어떤 일을 했으며 그를 어떻게 처치했는지 이야기했다.
 헬사온을 반대하는 자들은 그의 만행에 치를 떨었지만, 추종하는 자들은 그의 영향을 받아 원수를 죽이면 데스마스크를 만들어 무도회에 쓰고 다녔다.
 레이옴에서 좋은 의미로 만들어졌던 데스마스크는 그렇게 원수를 죽이면 자랑하기 위해 만드는 문화로 변질됐다.
 
 
 1. 되돌아온 영혼
 
 “크음.”
 한 남자가 인상을 찡그리며 일어나더니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고 좌우를 둘러봤다.
 칠흑같이 어두운 실내, 창문 하나 보이지 않는 음침한 곳.
 남자는 왼손으로 바닥을 더듬었다. 손끝에 오돌토돌한 돌이 만져졌다.
 “뭐지, 오랜 잠을 잔 것 같은 이 기분은.”
 남자의 앳된 목소리가 어두운 실내를 울렸다.
 어지럽고 몽롱한 것이, 수일간 깨지 못하고 잤을 때와 느낌이 흡사했다.
 천천히 일어서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옆구리에서 커다란 고통이 느껴졌다.
 “크윽! 젠장! 뭐야, 날 죽인 상처인가?”
 남자가 놀라며 옆구리로 손을 가져갔다.
 “잠깐, 날 죽인 상처?”
 이상한 걸 느끼고 멍하니 있던 남자가 갑자기 바닥에 쓰러졌다.
 “아이쿠, 나 죽네! 어떤 놈이 옆구리에 구멍을 낸 거야!”
 바닥에 누워 왼손으로 옆구리의 상처를 눌렀다.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피 묻은 옷이 빳빳하게 말라 있었다.
 코끝에 비릿한 피 냄새가 느껴지더니 어둡던 실내가 그제야 희미하게 보였다. 마치 오감이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하나둘씩 돌아오는 것 같았다.
 정좌한 조각상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데 기억이 없군.”
 몽롱한 정신을 깨우기 위해 고개를 흔들고는 다시 조각상을 바라봤다. 코가 있어야 할 자리엔 두 개의 구멍만 있고, 눈이 있어야 할 곳도 마찬가지였다. 입술이 없어 이가 드러났고, 얼굴 근육이 그대로 드러나 보기 흉했다.
 생긴 것과 다르게 조각상은 실력 있는 예술가의 솜씨인지 매우 정교해서 살아 있는 사람을 보는 듯했다. 특히 옷 주름의 모양과 불에 타다 만 듯한 로브 자락의 섬세한 표현은 조각을 잘 모르는 남자가 봐도 놀라울 따름이었다.
 가슴은 파이어볼에 맞아서 탄 것처럼 움푹 파여 있고, 얼굴은 데스마스크를 만들기 위해 가죽을 벗긴 것 같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평범한 조각상이 아니었다.
 “뭐야, 죄를 지은 자의 모습을 조각한 것인가?”
 그 순간 땅에 떨어진 가면 하나를 발견했다.
 남자는 옆구리의 상처를 의식해 천천히 손을 내밀어 가면을 들고 조각상의 얼굴에 대봤다.
 눈과 코, 입의 위치가 딱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니 조각상의 얼굴에 맞춰서 가면을 만든 것 같았다.
 손을 떼자 얼굴에 붙어 있던 가면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고는 갑자기 심하게 일그러지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원상태로 돌아왔다.
 남자는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봤다. 가면은 아무 이상이 없었다.
 착각이라 생각하고 뒤돌아 문을 바라보니 횃불이 타오르며 복도를 밝히고 있고, 문에 나 있는 구멍을 통해 들어온 빛이 미약하게나마 실내를 밝히고 있었다.
 남자는 옆구리의 고통을 참으며 천천히 걸어가 문을 밀어 봤다.
 끼이이이.
 귀에 거슬리는 마찰음이 들리며 문이 열렸다.
 “뭐야, 날 죽이려 했으면서 문은 잠그지 않았다? 아니, 잠깐. 왜 계속 날 죽이려 했다고 생각하는 거지?”
 남자는 희미한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크윽!”
 갑자기 머리가 쪼개질 것처럼 아팠다.
 천천히 복도를 따라 걸었다. 저 멀리 보이는 문이 닫혀 있었지만 잠겨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겨우 문에 다다라 손으로 밀어 보니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다행이라 여긴 남자는 문을 지나 계속 걸었다. 긴 복도 중간 중간에 횃불이 있어 걷기에 무리는 없었다.
 복도는 약간 오르막길이었다. 서너 개의 문을 통과하자 오르막 계단이 나왔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옆구리의 상처에서 심한 고통이 느껴져 중간에 잠시 쉬고 다시 올라갔다.
 긴 계단이 끝나고 또 하나의 문을 지나가자 창문을 통해 햇빛이 들어오는 복도가 나타났다.
 그때 남자는 한 가지 마법이 떠올랐다.
 “내가 정신이 없군. 상처가 났으면 마법으로 치료하면 될 걸. 큐어.”
 남자의 실력이라면 큐어 마법쯤은 우스웠다. 그런데 상처에 가져간 손에서 빛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남자가 몸속을 살펴봤다.
 “으힉! 마나가 다 어디 갔지?”
 깜짝 놀란 남자는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하지만 기억이 희미해서 뭐가 문제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멍청이가 된 것 같았다.
 그때 복도 반대편에서 한 사내가 걸어왔다. 등에 긴 창을 걸쳤고, 하프 판금 갑옷을 입었다. 투구는 쓰지 않고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걸어오던 사내가 쓰러질 듯 말 듯 한 남자를 발견했다.
 “쉴츠 아닌가? 요새 보이지 않더니 무슨 일이 있는가?”
 지하에서 올라온 남자가 옆구리의 상처를 만지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 별일 없네. 그런데 쉴츠라니, 누구지?”
 “누구긴, 자네 아닌가.”
 “나?”
 지하에서 올라온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네 옆구리의 상처는 뭔가? 누가 이런 짓을! 이봐, 얼굴은 또 왜 그래? 어서 치료하러 가지!”
 사내가 쉴츠를 부축하고 재빨리 움직였다.
 “크윽! 빌어먹을. 쉬, 쉴츠라니. 난 헬…….”
 “설마, 파인델 일행 짓인가! 젠장, 그놈들 도가 지나치군.”
 사내는 쉴츠를 업고 빠르게 달렸다.
 “너도 힘을 키워라. 언제까지 약한 모습을 보일 텐가.”
 “젠장! 악! 천천히 좀 달려. 옆구리의 상처가…….”
 “좀만 참아.”
 하지만 사내는 쉴츠의 말은 무시하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젠장, 천하의 헬사온보고 약하다고 지껄이다니.”
 “헬사온 그 악귀 소리는 뭐하러 꺼내는 건가. 그보다 조금만 참지. 다 왔네.”
 악귀, 악귀라니?
 쉴츠는 부조리함을 느꼈다. 그것이 무엇인지 떠올리려 하면 두통이 강해졌다.
 사내가 쉴츠를 업고 도착한 곳은 여러 가지 약초와 시약이 가득한 치료실이었다. 그곳에서 로브를 입은 남자 세 명이 여러 가지 실험을 하고 있었다.
 “메이실렌, 쉴츠를 치료해라.”
 “말크 님, 무슨 일…… 이런, 쉴츠 님을 어서 이리로!”
 메이실렌이 쉴츠의 옆구리 상처를 보고는 시약과 약초를 한쪽으로 밀어내고 탁자 위에 공간을 확보했다. 말크가 재빨리 쉴츠를 그곳에 올려놓으니 메이실렌이 그의 옷을 찢고 옆구리의 상처를 살폈다.
 “상처가 생긴 지 이틀 정도 지났군요. 치명상은 아니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것 같습니다. 체온이 급격히 하락했고, 얼굴이 창백한 것이 피가 모자라 죽었어도 하등 이상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치료는 가능한가?”
 “네. 상처 치료하고 원기만 회복하면 될 듯합니다. 잠자는 영혼이여 돌아오리라. 깊이 잠드는 신을 여기에 부으소서. 슬립.”
 메이실렌이 주문을 외우며 품에서 은색 가루를 꺼내 허공에 뿌렸다. 반짝거리며 쉴츠의 몸 위로 떨어진 가루가 이내 사라지더니 주변에 마나가 생겨났다.
 ‘뭐야, 마나가 부족해서 마나 가루를 뿌리며 마법을 펼치다니. 고작 견습 마법생이 내 상처를 살피…….’
 그러나 쉴츠의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약해진 정신력으로 1서클 슬립 마법을 버티지 못하고 잠든 것이다.
 메이실렌은 약초 중 몇 가지를 골라 시약과 함께 손에 쥐고 주문을 외웠다. 곧 작은 알갱이가 만들어졌다. 그것을 가루로 만들어 일부는 쉴츠의 옆구리에 집어넣고, 일부는 상처 주위에 발랐다. 그리고 또다시 한참 동안주문을 한참 동안 외우더니 두 손을 옆구리에 댔다.
 “큐어.”
 메이실렌의 이마에 땀이 흘러내렸다.
 곧 두 손에서 빛이 나더니 가루가 스며들며 상처가 빠르게 아물어 갔다.
 “하루 푹 주무시고 깨어나면 이것을 먹이십시오.”
 메이실렌이 작은 알약을 건넸다.
 “역시 자네의 마법은 훌륭하군. 그 상처가 순식간에 낫다니 말이야.”
 말크는 다시 쉴츠를 업고 밖으로 나왔다.
 
 쉴츠는 깨어나자마자 두 손으로 머리를 만졌다.
 “크윽, 빌어먹을 두통!”
 천천히 일어나며 주변을 둘러봤다. 넓은 침대를 제외하곤 구석에 놓인 옷장 하나와 책상 그리고 벽에 걸린 풀 플레이트와 무거워 보이는 검 한 자루, 방패 하나가 전부였다.
 “빌어먹을. 여긴 어디야!”
 그는 머리를 매만지며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두통과 함께 어지럼증이 몰려와 비틀거렸다.
 고개를 드니 파랑, 보라, 노랑 색 유리로 만든 천장이 보인다. 색유리를 통과한 햇빛이 형형색색으로 실내를 비추었고, 좌우 벽에는 천지를 창조하는 신의 모습을 그린 벽화가 가득했다.
 “여긴 아르테놀스 성이잖아. 내가 왜 여기 있지?”
 쉴츠는 의아해하며 복도 끝에 다다랐다.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있어 내려갔다.
 아치형 입구를 지나자 거대한 광장이 나타났다.
 3층 높이의 천장엔 돔 형태의 유리가 덮여 있고, 중앙에 커다란 샹들리에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빛을 여덟 방향으로 보냈다. 그 빛은 주변에 있는 작은 샹들리에에 반사되며 광장 전체를 밝혔다.
 저 멀리 2층에는 책장에 책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옆엔 수많은 갑옷과 검, 도, 창이 시대별로 놓여 있어 오래된 박물관 느낌을 풍겼다. 젊은 남녀들이 책을 보고 있었고, 검을 허리에 차고 걸어가는 자들도 여럿 보였다.
 광장 중앙엔 커다란 분수가 있고, 그곳에서 방사형으로 물이 나와 호수를 이루었다. 주변을 감싼 바위 위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남녀도 있고, 책을 읽는 자들도 있었다.
 “야, 쉴츠. 너 죽었다는 소문이 있던데, 살아 있네?”
 지나가던 젊은 청년 하나가 쉴츠를 보고 말한 후 가던 길을 계속 갔다.
 “쉴츠라니? 내 이름은…….”
 “야, 인마! 너 무사하구나! 역시 명줄이 긴 쉴츠야.”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잡놈들이 계속…….”
 그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이려던 순간이었다.
 “야!”
 한 남자가 부르자 쉴츠는 그쪽을 바라봤다.
 빠악!
 손바닥이 날아와 쉴츠의 머리를 때렸다.
 “용케 살아났네? 거봐, 내가 뭐랬어. 이놈 악운에 강하다니까.”
 남자가 옆에 선 드레스 입은 여자를 보며 말했다.
 “그러게. 파블레로의 말대로네. 글로리 브레이크의 규칙대로 살아남은 자의 생명은 질기다더니, 후훗.”
 여자가 쉴츠를 바라보며 웃었다.
 “크윽, 아무리 네놈들이 어리다지만 더 이상은 참지 못한다! 나와라, 핸드 파이어!”
 쉴츠가 4서클 공격 마법을 외치며 오른손을 뻗었다. 곧 불의 손이 나타나 사방을 감싸 버리리라.
 그러나 예상과 달리 주변에는 정적이 흘렀다.
 “하, 하하.”
 “크하하하하!”
 “뭐야, 저놈. 제가 무슨 대마법사라도 되는 줄 아나 봐.”
 “으하하하! 그것도 핸드 파이어라니. 제가 무슨 40년 전에 죽은 헬사온이라도 되는 줄 아나 봐. 저놈 미쳤다. 하하하하!”
 주변에서 쉬거나 걷던 자들이 쉴츠의 행동을 보고 크게 웃었다.
 “푸하하하! 야, 쉴츠.”
 쉴츠의 머리를 때린 파블레로가 말했다.
 “너 정신을 똥통에 빠트리고 다니냐? 응? 나에게 핸드 파이어를 펼쳐? 물론 펼쳐질 리 없지만, 잠깐! 그러고 보니 날 공격하려고 했단 말이네?”
 “파블레로, 쉴츠가 꿈꾸다 일어나서 그랬나 봐. 봐 봐, 잠옷 차림이잖아.”
 “아나세, 그래도 이놈 용서할 수 없어. 감히 날 공격하려 했다 이거지?”
 파블레로가 허리에서 검을 꺼냈다.
 “결투다, 이 녀석!”
 그러고는 왼손의 장갑을 벋어 강하게 휘둘렀다.
 짜악!
 커다란 소리를 내며 장갑이 쉴츠의 얼굴을 때리고는 땅에 떨어졌다. 그때까지도 쉴츠는 마법 발현을 위해 오른손을 내민 상태로 굳은 듯 가만히 있었다.
 “자, 잠깐. 40년 전 죽은 헬사온?”
 쉴츠가 작게 말했다.
 “허! 이 녀석 봐라. 그러면서 결투를 피하려고? 어림없다! 난 이미 결투를…….”
 “잠깐, 잠깐만!”
 쉴츠가 파블레로를 밀치고 어딘가로 급히 뛰어갔다.
 “네놈, 결투를 피했다! 네놈의 명예는…….”
 그는 파블레로가 뭐라 지껄이든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뛰었다.
 “빌어먹을. 왜 이제야 떠오르는 거야. 쉴츠라니, 내 이름이 쉴츠라니!”
 그는 뛰면서 몸속을 살펴봤다.
 심장에서 느껴져야 할 여덟 개의 서클은커녕 마나 한 톨 없었다.
 달리면서 왼손을 눈앞으로 가져갔다. 어리디어린 손이다.
 오른손으로 얼굴을 만져 봤다. 쭈글쭈글해야 할 피부 대신 탱탱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머리카락의 일부를 잡아 눈앞으로 가져왔다. 검붉은 색 머리카락이 아니라 은갈색의 황금빛 머리카락이다.
 “떠올랐다. 빌어먹을. 기억이 떠올랐어.”
 그가 달리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아치형의 기둥 마흔두 개로 만든 복도가 보였다. 그 끝에 커다란 헬사온의 초상화를 걸어 놓아 복도를 걷는 이가 보며 경외감을 느끼도록 했다. 그런데 지금은 초상화가 없다.
 쉴츠는 개의치 않았다. 주변이 어떻게 변했든 그의 아르테놀스 성이 누구에게 넘어갔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 지하에서 본 조각상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최대한 빠르게 달려 지하로 내려갔다.
 옆구리의 상처가 떠올랐다. 그런데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겠다. 어디서 태어났으며,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쉴츠라 했던가.
 마치 오래전부터 그렇게 불린 것처럼 익숙한 걸 보니 기억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계단을 내려가니 횃불이 밝히고 있는 복도가 나타났다.
 네 개의 문을 지나자 그가 깨어났던 곳이 보였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조각상이 보였다.
 재빨리 바닥에 떨어진 가면을 들어 얼굴에 대고 유심히 바라봤다.
 익숙한 얼굴이다. 체격도, 입고 있는 옷도……. 조각상인 줄 알았는데 사람이 돌로 변한 것이다.
 가슴에 파인 것을 봤다.
 “빌어먹을, 역시 블레이드 서클에 당한 상처가 틀림없어.”
 최고의 소드 마스터만이 펼칠 수 있는 블레이드 서클, 닿는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거대한 오러의 집합체.
 “이건 바로 나, 헬사온의 시체잖아!”
 너무 놀란 그가 크게 외쳤다.
 “크크크큭. 크하하하.”
 쉴츠가 크게 웃었다.
 그는 조각상의 얼굴에 댔던 가면을 들어 자신의 얼굴에 썼다.
 “으하하하하! 병신들, 멍청한 놈들. 나 헬사온의 얼굴로 데스마스크를 만들다니, 네놈들은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 크하하하하!”
 쉴츠가 웃느라 바닥에 누웠다.
 “내 몸에 칼을 찌른 놈들, 기다려라. 제국의 황제 에홀엠의 자손들이여, 기다려라. 내게 한 짓의 열배로 값아 주마. 하하하하!”
 하하하하!
 그의 웃음이 복도를 통해 크게 울려 퍼지더니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2. 배신의 대가
 
 30년 전, 제국 메이슬란에 그로잉 캐슬이라는 교육기관이 만들어졌다. 수도에서 남쪽에 위치한 위성도시 필프로에 있으며, 조건만 갖추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다.
 그곳은 헬사온과 대혈전을 치르며 수많은 인재들이 죽자, 부족한 마법사와 기사, 행정관을 키우는 것을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그로잉 캐슬은 헬사온의 성에 만들어졌다. 그곳을 밀라네스 하우작 백작이 다스리고 있으며, 그의 이름을 따서 밀라네스 성이라 불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로잉 캐슬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했다.
 
 쉴츠는 자기 방에 들어와 침대에 앉아 육체의 신상 내역을 떠올렸다.
 쉴츠 가네시안. 가네시안 백작가의 둘째 아들.
 “이런, 염병. 가네시안이면 내게 밉보였다가 구석 변방으로 몰려난 자작 가문이잖아. 그런데 어떻게 백작 가문이 된 걸까?”
 그가 마음을 진정하고 천천히 기억을 떠올리려 했다. 하지만 어떻게 백작 가문이 됐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이 가물거려. 이대로라면 주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할 텐데, 앞으로 문제가 많겠어. 하긴, 데스마스크로 이 몸에 들어온 것만 해도 성공이지. 크크크크.”
 영혼을 봉해 만드는 데스마스크, 반대로 영혼을 꺼낼 수도 있다. 그 방법이 너무 어렵고 알려지지 않았지만 헬사온은 그걸 해냈다.
 쉴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아보고, 주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아까 보았던 광장의 서고로 향했다. 헬사온이 살던 곳이기에 길은 알고 있었다.
 주변의 벽화나 정원의 나무를 보며 세월의 흐름을 짐작해 보니 30년에서 50년쯤 흐른 것 같았다.
 그는 광장의 서고에 도착하자마자 오른쪽 벽으로 향했다. 서기관 한 명이 책상에 앉아 뭔가를 적고 있었다.
 “지금이 에홀엠왕 27년으로부터 몇 년이 흘렀지?”
 “네놈은 쉴츠 아니더냐?”
 “묻는 것에나 대답해!”
 “이놈 봐라. 내게 꼬박꼬박 고개 숙여 인사하던 놈이 두 눈을 번쩍 뜨고 반말을 하고 있네?”
 서기관이 책상에서 일어나자 오히려 쉴츠가 당황했다.
 “이놈이, 감히 귀족에게!”
 쉴츠가 크게 소리쳤다. 그가 들어간 육체는 백작가의 둘째 아들이었으니까.
 “뭐? 크흡. 푸하하하! 네 이놈, 쉴츠야. 네가 꿈을 꾸고 있는 게냐 아니면 미친 게냐? 평민으로 살아간 지 4년이 흘렀으면 이제 적응할 만도 하지 않느냐, 쯧쯧.”
 “뭐?”
 쉴츠가 놀란 얼굴로 서기관의 얼굴을 바라봤다.
 “때끼! 이 어린것아, 빼앗긴 가문을 되찾지 못할망정 미치지는 말아야지. 하긴, 네놈의 상황을 보면 그동안 버틴 것도 대견하지.”
 서기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홀엠왕이면 전대 폐하의 이름이지? 27년이면…….”
 서기관이 손가락을 굽혔다 펴며 계산을 했다.
 “그때로부터 43년이 흘렀구나.”
 서기관이 말한 후 조용히 책상에 앉았다.
 “볼일 끝났으면 어서 가라. 저기 널 괴롭히는 파인델이 오는구나.”
 그가 왼쪽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쉴츠는 가문을 빼앗겨 평민이 되었다는 사실에 놀라 제자리에 서서 움직일 줄 몰랐다.
 ‘쯧쯧, 쉴츠 이 육신의 인생도 그리 평탄하지만은 않았군. 눈에 띄는 행동은 당분간 자제해야겠어. 힘을 되찾기 전까진 과거의 나는 없다고 생각하자.’
 그가 뒤돌아 걸으려 할 때 멀리서 파인델이 그를 발견하고 재빨리 다가왔다.
 “어이, 쉴츠. 여기 있는 걸 보니 옆구리의 상처는 다 나았나 봐? 역시 글로리 브레이크의 율법은 대단해.”
 “글로리 브레이크?”
 쉴츠가 두 번째 들어보는 낯선 단어를 되물었다.
 “그래, 인마. 너 몰라? 글로리 브레이크의 율법대로 살아남은 자는 죽음이 비껴갈 것이며 원령들이 모여들어 능력을 줄 것이다. 실제로 그 율법이 생겨난 이래로 벌써 세 명이나 가문의 이름을 되찾는 사건이 있었지.”
 “그렇군. 그럼 난 이만 가 보지.”
 쉴츠는 남들 다 아는 글로리 브레이크의 율법이 뭔지 모른다. 그래서 길게 대화하면 이상한 걸 느낄까 봐 자리를 피하려 했다. 또한 왠지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았다.
 “어쭈, 형님을 보고 그냥 가려고? 죽다 살아나니 눈에 뵈는 게 없나 보네. 응?”
 파인델이 손으로 쉴츠의 왼쪽 어깨를 툭 쳤다.
 “왜 아니꼬운 눈초리로 보는데? 또 옆구리를 지져 주리?”
 “내 옆구리의 상처를 낸 놈이 너로구나.”
 “어허허, 이놈 봐라. 말이 짧네. 글로리 브레이크의 율법이 맞는지 또 실험해 볼까? 이 자식아!”
 파인델이 마지막엔 크게 외치며 주먹을 휘둘렀다.
 “흥!”
 쉴츠는 코웃음을 치며 그의 주먹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런데 파인델의 주먹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뭐야, 이 둔한 몸은?’
 헬사온은 위대한 마법사였지만 검술에도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었다. 또한 주먹을 내지른 파인델은 이제 겨우 17세. 간단하게 피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쉴츠의 몸은 둔했다.
 빠악!
 파인델의 주먹이 쉴츠의 왼쪽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크억!”
 그가 옆으로 넘어지며 책장을 밀자 뒤로 기울어지더니 다른 책장을 밀었다. 그러자 도미노처럼 나머지 다섯 개의 책장이 모두 넘어졌다.
 우르르르!
 책이 쏟아지며 사이사이에 있던 사람들이 깔렸다.
 “꺄악!”
 “으악! 뭐, 뭐야!”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파인델 공자, 이 일을 어찌할 것인지요?”
 서기관이 곤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의 신분으로 파인델에게 책임을 물을 순 없었다.
 “흥! 이놈이 원래대로 돌려놓을 테니 걱정 마라.”
 그가 넘어진 쉴츠의 가슴을 발로 차며 말하고는 자리를 피했다.
 “크윽.”
 쉴츠는 가슴을 움켜쥐며 바닥에 앉았다.
 ‘이런 빌어먹을 놈이. 오냐, 감히 나 헬사온을 건드렸다 이거지?’
 그는 두 눈을 감고 집중했다. 몸속의 마나가 전무하니 시전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주변의 마나를 끌어오려는 생각이다. 그러나 곧 인상을 찡그렸다.
 “이런, 둔재를 봤나.”
 쉴츠의 몸은 마나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화를 내는 걸 보니 기운이 넘치나 보군. 쉴츠, 이곳을 빨리 정리해 놓아라.”
 서기관이 말했다.
 “네 이놈! 감히 나 브렐베이크를 책장에 깔리게 하다니!”
 책장 사이에 있다가 변을 당한 남자가 일어나 쉴츠에게 다가와 외쳤다.
 “저놈 쉴츠잖아? 또 사건을 일으켰나 봐.”
 “쯧쯧, 글로리 브레이크의 율법에 가문이 망했다더군.”
 주변에서 쉴츠를 보고 이야기했다.
 그가 천천히 일어나 주변을 훑어봤다.
 “저놈의 눈초리 봐.”
 “표독스러운 표정이야. 하긴, 가문의 멸망도 억울할 텐데 한때 경쟁했던 가문의 자녀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니 참기 힘들 테지. 곧 자살할지도 몰라.”
 쉴츠는 크게 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과거의 헬사온이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참아야 한다. 보아하니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것 같다. 그러니 더 참아야 한다.
 그는 이를 악물고 감정을 다스렸다. 곧 넘어진 책장으로 걸어가 똑바로 세우고는 쏟아진 책을 정리했다.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갔다.
 쉴츠는 책을 정리하다가 ‘엘사드본경의 검에 대한 이론’이란 책 표지를 봤다.
 “크크크크큭.”
 쉴츠가 낮게 웃었다. 그 책은 블레이드 서클로 헬사온의 가슴에 상처를 낸 자가 쓴 것이었다.
 “크하하하하하.”
 주변에선 드디어 쉴츠가 미쳤다고 떠들어 댔다.
 “다시 시작한다. 내 이름은 쉴츠. 멸망당한 가문의 둘째 아들. 둔하디둔한 몸의 소유자.”
 그가 작게 말하며 책을 빈 곳에 넣었다.
 “어이, 쉴츠. 수군거리지 말고 빨리 정리해. 곧 랄프 자작님이 오실 거야. 그럼 또 한바탕 난리가 날걸.”
 서기관이 말했다.
 “오우거 부랄 같은 선생…… 어?”
 쉴츠는 말하다가 랄프 자작의 외모가 떠올랐다.
 동그란 얼굴에 대머리, 화를 내면 핏줄이 그물처럼 핏발 서 몇몇 사람들 사이에서 오우거 부랄이라는 별명을 가진 선생. 그로잉 캐슬에서 검술을 가르치는 검술의 대가.
 “이놈아, 그런 말 듣고 누가 고자질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잔말 말고 어서 책장 정리나 서둘러라.”
 서기관이 말했다.
 “쳇, 알았다.”
 “이놈이 또 반말이네.”
 “거참, 당신이 나이가 많지만 나도 많이 참고 있는 거라고. 그리고 같은 평민이잖아. 그냥 넘어가자고.”
 쉴츠는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쯧쯧.”
 서기관은 더 이상 쉴츠에게 말 걸지 않았다.
 쉴츠는 책장을 정리하고는 자기 방으로 향했다.
 
 혼자 있게 된 쉴츠는 몸의 상태를 살피고, 그다음 주변의 상황을 알아볼 계획을 세웠다. 특히 헬사온이 죽은 후 43년동안 무슨 일이 있었으며 주변 정세가 어떻게 변했는지 알아야 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마치 검을 쥔 기사처럼 팔을 좌우로 움직이며 현란하게 발을 놀렸다.
 그러다 곧 헐떡이며 침대에 몸을 던졌다.
 “헥헥, 빌어먹을. 쉴츠 이놈, 형편없는 몸을 가졌잖아. 검에 대한 소질은 꽝이야. 17년 동안 뭘 한 거야? 뭐, 그래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크흐흐흐. 원래 난 마법사였으니까.”
 이번엔 주변의 마나를 감지하려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별수 없군. 괴롭겠지만 몸속의 마나를 소비해야겠어.”
 그는 호흡을 멈추고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까지 버텼다. 몸이 괴로워하며 빨리 숨 쉬라고 외쳤다. 하지만 그는 계속 참았다. 머리가 어지럽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때 주변의 마나를 느껴 보았지만 여전히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일어나 제자리에서 달렸다. 여전히 호흡은 하지 않았다. 일반인이었다면 이미 쓰러졌을 테지만 그는 강한 정신력으로 버텼다.
 그렇게 또다시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 코로 천천히 숨을 내뱉고 입으로 숨을 쉬었다. 충분히 몸이 회복되자 다시 숨을 멈추고 제자리 뛰기를 했다.
 땀이 흐르고 입술이 파래졌다. 전신에서 힘이 빠져 곧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러나 멈추지 않고 같은 행동을 계속 반복했다.
 그렇게 식사 한 끼 할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그의 몸속에 있던 마나가 모두 소비되어 텅텅 비었다. 그러자 마나가 그의 몸으로 조금씩 스며들었다.
 “푸하아. 하아, 하아. 아무리 둔재라 할지라도 마법사는 될 수 있지. 흐흐흐.”
 겨우 마나를 느낀 쉴츠가 가쁘게 숨을 쉬었다.
 잠시 후 충분히 쉬었다고 생각한 그는 몸속의 마나를 소비하고 채우고 또 소비하는 일을 반복했다. 이렇게 하다 보면 몸이 마나에 익숙해지고 쉽게 느끼게 된다.
 쉴츠는 몸의 채질을 바꾸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그로잉 캐슬에서 어떻게 교육받으며, 운영되는지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서였다. 이틀 동안 지하에 기절해 있어도 별다른 일이 없는 걸 보니 나가지 않아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실제로 그로잉 캐슬은 스스로 움직여야 한다. 그 누구도 뒤처지는 자를 끌어 주지 않는다.
 
 쉴츠는 하루 동안 방 안에서 같은 일을 하고 나서야 배고픔을 느꼈다. 하지만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다시 하루가 지났을 때 드디어 주변의 마나가 느껴졌다. 이때 그로잉 캐슬의 운영 방식과 쉴츠의 주변 상황에 대해 몇 가지 떠올랐다.
 “오호라, 여긴 검술과 행정 중심으로 가르치고 마법은 뒷전이로군. 그리고 하우작 학장이 내 후견인인가? 일단 그를 만나 봐야겠어.”
 그는 이틀 만에 문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다리의 힘이 풀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젠장, 일단 뭐 좀 먹어야겠네.”
 천천히 일어나 식당으로 향했다. 다행히 위치가 떠올랐다.
 점심시간이 지났지만 남은 음식으로 겨우 주린 배를 채웠다.
 다시 학장실로 가는데 대여섯 명의 무리가 쉴츠 옆을 지나갔다. 한데 마지막 40대쯤 된 남자에게서 마나의 기운이 느껴졌다.
 ‘마법사? 하지만 강하진 않군.’
 무리의 가슴엔 독수리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는데, 황실 사람이란 표식이었다. 그걸 본 사람들이 말했다.
 “야, 저들이 암흑마왕 헬사온의 시체를 옮기려는 자들인가 봐.”
 “헬사온의 난을 기억하는 의미로 그 시체를 공개한다더니 사실이었군.”
 ‘뭐, 헬사온의 난?’
 그 말을 들은 쉴츠는 황당했다. 또한 암흑마왕 헬사온이라니, 그가 살아 있을 땐 마도공작이라 불리며 수많은 사람이 칭송했었다.
 ‘빌어먹을 놈들. 가만히 있는 날 배신하고 죽인 놈들이 뭐? 헬사온의 난? 이놈들이 감히! 오냐, 역사는 이긴 자가 써 나가는 법, 날 완전히 악마 취급하고 있다 이거지?’
 그들은 지하로 향했고, 곧 쉴츠가 깨어난 곳에 다다랐다. 몇몇 사람들이 헬사온의 시체 공개 여부가 궁금해 따라왔는데 그중에는 쉴츠도 있었다.
 돌로 변한 헬사온의 시체를 이리저리 살피던 마법사가 몇 가지 보호 마법과 강화 마법을 펼쳤다.
 그 모습을 본 쉴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나라의 원수로 취급한다지만 마법사의 마법이 형편없었다.
 헬사온의 시체를 마법으로 들어 밖으로 가져왔다. 마법사가 땀을 뻘뻘 흘리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계속 무리를 살펴보던 쉴츠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요 근래에 대한 몇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확인차 재빨리 성 입구로 향했다. 그곳에 세 명의 병사가 있고, 성 옆에 작은 막사가 있었는데, 다섯 명의 병사와 기사 한 명이 쉬고 있었다.
 쉴츠가 재빨리 기사가 입고 있는 갑주를 바라봤다.
 “뭐야, 이놈은?”
 기사가 쉴츠를 보고 말했다.
 “훌륭한 올마이티 아머군요. 요즘에도 아머를 만드는 곳이 있습니까?”
 기사의 갑주는 그리 좋은 것이 아니지만 쉴츠는 상대방의 기분을 맞추려고 거짓말을 했다. 기사는 행색과 언행으로 보아 쉴츠를 평민이라 생각했다.
 “네놈이 그걸 왜 묻는 거냐?”
 “전 갑주 제작자가 꿈입니다.”
 “그럼 내게 물을 게 아니라 시니컬즈 후작님을 찾아가야 하지 않겠느냐.”
 “시니컬즈? 혹시 애슬터 시니컬즈 그놈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놈아, 후작님에게 놈이라니! 네놈이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아, 아닙니다. 그분이라고 말한다는 게 헛나왔군요. 그럼 이만.”
 쉴츠가 재빨리 달아났다.
 “저놈 봐라. 여기 학생 같은데 올마이티 아머 제작이 꿈이라니?”
 기사는 쉴츠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아 이상히 여겼다.
 
 “애스터 시니컬즈 이놈, 아직 살아 있었구나. 크흐흐흐, 날 배신하고 내가 만든 올마이티 아머를 가져간 거로군. 고작 남작 새끼가 후작이 됐다니. 후후후, 배신의 열매치곤 매우 달콤하잖아.”
 빠르게 달리던 쉴츠가 말했다.
 현제 애스터 시니컬즈 후작은 제국에서 유일하게 올마이티 아머를 만드는 공방을 가졌다. 그가 만든 것은 제국의 모든 기사가 착용했고, 타국에서 만든 것보다 훨씬 성능이 좋아서 그 수에 따라 나라의 국력이 상승했다. 그래서 타국에 판매하는 수를 황실에서 조절할 정도였다.
 쉴츠는 이번엔 치료실로 향했다. 시약과 약초를 이용해 치료 마법을 연구하는 곳이며, 며칠 전 쉴츠가 옆구리의 상처를 치료받은 곳이기도 했다.
 “당신은 몇 서클입니까?”
 안으로 들어간 쉴츠는 연구 중인 마법사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넌 쉴츠 아니더냐. 또 상처를 입었느냐?”
 “이곳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가 누구입니까? 아니, 그보다 황실의 궁정 마법사가 몇 서클입니까?”
 “네놈이 그걸 왜 묻는 거냐?”
 “지금 시대의 마법 수준을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마법사의 가슴을 유심히 바라보며 서클을 느껴 보니 미세하게 세 개의 서클이 느껴졌다. 교육기관의 마법사 수준치곤 너무 낮아 쉴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법사의 난 이후 제국의 마법사는 반으로 줄었지. 그리고 이젠 기사를 집중적으로 양성하는 시대니까 마법사는 대접받지 못하지.”
 “그럼 마법사가 대우받는 나라가 있습니까?”
 “가이테스 제국이 가장 좋지. 거긴 마법사의 난에서 자유로웠으니까.”
 “그곳의 최고 마법사는 누구입니까?”
 “사일렌 애펄스 후작이지. 그나저나 그건 왜 묻는 거냐?”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쉴츠는 마법사의 물음엔 답하지 않고 치료실을 나왔다.
 “가이테스 제국의 사일렌 그놈도 살아 있군. 내게 대항한다며 형편없는 마법사들을 끌어모으더니. 드래곤이 사라지니 오우거가 산을 차지한 꼴이로군.”
 쉴츠는 씁쓸했다. 잘나가던 자신은 배신당해 죽고, 못 나가던 그는 영화를 누리니 기분 좋을 리가 없었다.
 메이슬란 제국은 헬사온을 죽이고 10년 후 마법사의 숙청이 이뤄졌다. 그때 대부분의 실력 있는 마법사들이 목숨을 잃거나 제국을 떠났고, 메이슬란은 기사의 나라가 되었다. 그래서 제국의 궁정 마법사라 할지라도 6서클이 최고였다. 헬사온이 8서클의 끝에서 10년을 머물다가 9서클의 초입에 들 무렵 배신당해 죽었으니, 그때 시절과 비교하면 마법사의 수준이 현저히 낮았다.
 
 쉴츠는 이번엔 학장실로 향했다. 입구에 두 명의 병사가 보초를 서고 있었다.
 “네놈은 쉴츠가 아니더냐.”
 “학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학장님께서는 널 만날 정도로 한가하신 분이 아니다.”
 “제 후견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절 만나는 게 문제되는 건가요?”
 “후견인? 후훗, 말이 좋아 후견인이지. 네놈은…… 아니다. 어린 네게 할 말이 아니구나. 들어가 봐라.”
 쉴츠는 병사의 말을 듣고 이상함을 느꼈지만 신경 쓰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우작 학장님, 쉴츠입니다!”
 병사가 크게 말했다.
 “네놈이 여긴 뭐하러 왔느냐.”
 학장의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그걸 느낀 쉴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학장은 쉴츠를 쳐다보지 않고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제 가문에 대해 여쭤 볼 게 있…….”
 “네놈의 가문에 대해 내가 말해 줄 건 아무것도 없다.”
 학장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제가 어렸을 때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가문…… 으응?”
 학장의 얼굴을 본 쉴츠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여든 살쯤 된 노인의 얼굴이 어디서 많이 본 듯했다.
 “네놈, 무례하구나!”
 고개를 내밀고 빤히 바라보는 쉴츠를 향해 학장이 소리쳤다.
 “호, 혹시…… 이파넬 남작?”
 “뭐?”
 쉴츠의 말을 들은 학장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이놈! 감히 백작인 나에게 남작이라고 하다니. 밖에 누구 없느냐! 이놈을 끌고 가 곤장 100대의 형벌을 내려라!”
 학장의 말에, 문밖에 있던 병사 둘이 들어와 쉴츠를 끌고 갔다.
 ‘하, 하하하. 하우작 백작이 이파넬 남작이었구나. 저놈도 죽지 않고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니.’
 “크크크큭.”
 쉴츠는 병사들에게 끌려가며 낮게 웃었다.
 밀라네스 이파넬 남작은 헬사온의 근위대장이었다. 제국에서 헬사온을 칠 때 첫 공격을 했으며, 성문을 열어 준 자였다.
 헬사온이 죽고 황제는 그에게 하우작이라는 성과 백작이라는 직분을 내렸다. 그리고 헬사온의 집과도 같은 아르테놀스 성을 주었는데, 하우작 백작은 밀라네스 성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곳이 지금 쉴츠가 있는 곳이다.
 “크큭, 크하하하.”
 쉴츠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 속에는 허탈함과 분노가 가득했다.
 “쉴츠, 이놈아. 그러다가 학장님께서 더 큰 벌을 내리실라. 조용히 해라.”
 “크하하하하!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구나. 으하하하하!”
 쉴츠는 곤장 100대를 맞으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3. 잃어버린 감정
 
 곤장 100대의 형벌은 꾀 끔찍했다. 엉덩이와 허벅지가 찢어져 피가 철철 흘렀고, 퉁퉁 부어 열흘 동안 걸을 수 없었다. 거기다 치료까지 거부되어 쉴츠는 방에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자 시종을 시켜 근대사 역사서를 모두 가져오게 해서 읽었고, 꾸준히 호흡 참기를 하며 몸의 체질을 바꿨다. 어느 정도 거동이 가능해지자 상체 훈련을 위해 팔굽혀펴기를 하며 호흡을 참았다. 그렇게 계속하자 몸에 마나가 드나드는 것이 꽤 부드러워졌다.
 몸이 거의 나을 무렵엔 몸속에 들어온 마나를 모아 심장에 1서클을 만드는 시도까지 했다. 아직 몸이 마나를 받아들이지 못해 실패했지만 마법을 시작한 지 열흘 만에 이 정도까지 발전한 것은 대륙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쉴츠는 근대사 책을 읽을수록 화가 났다. 그를 배신한 제국의 황제나 그의 명령을 받던 여러 귀족들이 요직에 앉아 떵떵거리며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밤낮 쉬지 않고 훈련을 했다. 어느 정도 육체의 기억이 돌아왔고, 주변 상황도 상당 부분 파악했다. 그럼에도 방을 나가지 않았다. 그로잉 캐슬이 어떤 교육을 하든 이미 헬사온이 가진 지식의 수준이 더 높았기에 필요 없었다.
 
 몸이 거의 회복되자 방을 나와 광장으로 갔다. 헬사온의 시체가 놓여 있고, 몇몇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었다. 옆에는 머리말과 더불어 짧은 설명글이 있었다.
 
 [희대의 악마 마공작 헬사온]
 
 설명글은 짧았는데 흑마법을 사용하는 악마의 마법사로, 제국의 황제를 노린 역적이라는 내용이었다.
 그걸 본 쉴츠는 씁쓸했다.
 가진 힘이 제국의 황제보다 컸던 그다.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뭇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고, 9서클 초입에 들기 직전의 마법은 대륙의 모든 마법사들이 우러러보는 경지였다. 또한 그가 개발한 올마이티 아머는 기사의 힘을 비약적으로 증폭시키니 모든 귀족들이 헬사온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했고, 타국의 국왕들은 몰래 밀약을 하기도 했다.
 헬사온이 악마 혹은 마공작으로 불린 이유는 그가 전장에서 보인 잔인함도 있지만 흑마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올마이티 아머의 제일 중요한 마나석을 어둠의 세계에 있는 마석으로 사용했는데, 그중 최고의 마석은 중급 악마가 낳은 칼시안의 알이었다.
 그는 이것을 구하기 위해 자주 어둠의 세계에 내려갔고, 또한 그가 9서클 초입에 들 정도의 서클과 마나를 가지게 된 것도 그곳에서의 훈련 덕분이었다.
 쉴츠는 헬사온의 시체에 다가가 살며시 얼굴을 만졌다. 가죽이 뜯겨 징그러울 법도 하건만 쉴츠은 성물을 만지듯 했다.
 얼굴 옆에는 데스마스크가 허공에 떠 있었는데, 간단한 염력 마법진을 이용해 띄워 놓은 것이다.
 그것을 들어 헬사온의 얼굴에 댔다.
 쉴츠는 인상을 찡그렸다. 증오와 분노, 가련함이라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이놈아, 만지지 마라!”
 어느새 경비병이 다가와 쉴츠의 몸을 당기며 말했다.
 “쳇! 구경하라고 놓은 거 아니오.”
 “구경은 여기 밖에서 해라.”
 경비병이 주변에 둘린 작은 울타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쉴츠는 몸을 물린 후 다시 헬사온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느새 데스마스크는 염력 마법진의 영향으로 제자리에 돌아가 있었다.
 “이놈 눈빛 봐라, 마치 존경하는 눈초리네? 저놈을 보고 과거의 치욕스러운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뜻이지, 존경하라고 전시하는 것이 아니다.”
 “흥! 제 눈빛이 어때서 그럽니까? 그리고 과거의 치욕스러운 역사라니요?”
 “헬사온의 난을 모르느냐? 너 제국 사람이 아니구나.”
 경비병이 말하며 창을 쥐었다.
 “잘 압니다. 다만 치욕스러운 역사인지 의아할 뿐이죠. 그때 제국은 대륙 최고가 아니었습니까?”
 지금은 폴라리스 제국과 가이테스 제국이라는 경쟁 국가가 있다.
 “이놈아, 네가 저 악마를 존경하니 그렇지. 그런데 너 문제가 있구나. 저 악마를 존경하다니.”
 “아뇨.”
 쉴츠가 헬사온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전혀 존경하지 않습니다. 그는 실패자입니다.”
 쉴츠는 주먹을 꽉 쥐었다. 살아생전 겪은 노정이 그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 끝은 배신과 죽음 그리고 나락까지 떨어진 명예.
 “뭐 하나 이룬 것 없는 실패한 놈.”
 쉴츠는 그 말을 끝으로 광장을 벗어났다.
 경비병이 잠시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제자리로 갔다.
 
 쉴츠는 그로잉 캐슬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살아생전 만들어 놓은 연구소나 실험실을 찾아다녔다. 몰래 감춰 놓은 곳도 있기에 혹시나 발견되지 않은 곳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낱낱이 파헤쳐져 비밀 공간은 사라지고 없었다.
 쉴츠는 마지막으로 하늘의 성으로 향했다. 주변보다 두 배 이상 우뚝 솟은 탑인데, 그곳에 올라가면 도시 전체가 보였다.
 그는 탑의 꼭대기에서 오른쪽에 난 계단으로 올라갔다.
 ‘먼저 온 손님이 있군. 설마 여기도 발각됐나?’
 그가 재빨리 올라가니, 한 여인이 계단 끝 난간에 서 있었다. 그 너머는 낭떠러지였다.
 휘이이잉!
 매서운 바람이 불어와 옷자락이 펄럭였지만 여인은 요지부동이었다.
 쉴츠는 여인의 발 위치를 유심히 바라봤다.
 “왜 여기엔 문이 없을까?”
 여인이 말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푸른색 단발머리가 바람에 휘날리며 나부꼈다.
 “실수로 떨어지기라도 하면 마법을 부리지 않는 한 즉사할 거야. 이 계단은 왜 하늘로 향하려다가 끝난 걸까?”
 여인이 쉴츠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다행히 이곳의 비밀은 모르는구나. 크크크.’
 “몰라. 돈이 없어서 만들다 말았나 보지. 아니면 하늘로 향하는 계단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시도만 했거나.”
 쉴츠가 대강 둘러댔다.
 “하늘로 향하는 계단, 그거 어감이 좋은데? 쉴츠, 그런데 네가 여긴 웬일이야?”
 쉴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육체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나 눈앞의 여인이 누구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순간 가슴이 답답하고 꽉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여인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못난 놈, 둔제인 것도 모자라 마음도 주체 못 하는 형편없는 놈이었군.”
 쉴츠가 육신의 마음 상태를 평가했다.
 “뭐?”
 “아니다.”
 그는 여인의 짧은 물음을 뒤로하고 아래로 내려왔다.
 여인이 쉴츠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쉴츠는 방으로 돌아와 계속 훈련을 했다. 식사도 시녀에게 부탁해 가져오게 했다. 이렇게 열흘 동안 훈련만 계속하자 학장이 시녀를 통해 편지를 전달했다.
 펼쳐 보니 몇 줄 안 되는 문장이 있었다.
 
 [이곳은 그로잉 캐슬, 장차 제국의 인재들을 길러 내는 곳. 배울 생각이 없는 자는 내쫓는다.
 
 밀라네스 하우작 학장]
 
 “젠장, 학장 배신자 놈이!”
 쉴츠는 당장 학장실로 갔다. 저번에 봤던 경비병 둘이 앞을 지키고 있었다.
 “쉴츠 넌 당분간 학장실 출입 금지다. 썩 물러가라.”
 “학장에게 중요한 말이 있어서 만나 봐야겠어.”
 “마지막 경고다. 당상 꺼져라. 안 그럼 널 붙잡는 수밖에 없다.”
 “중요한 말이 있다고!”
 쉴츠가 크게 외쳤다. 경비병이 몸으로 밀치며 물러나게 했다.
 쉴츠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다만, 경비병과 몸싸움을 하기엔 육신이 형편없어 뒤로 물러나 자리를 지켰다. 그가 다가오지 않자 경비병들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차 한 잔 먹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들여보내라!”
 안에서 학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흐흐흐, 오래 산 내 경험에 따르면 노력하면 반드시 이뤄진다. 단, 이뤄질 때까지 인내할 수 있으냐가 중요하지.”
 쉴츠는 그렇게 말하고는 열린 문으로 들어갔다.
 “뭐, 열일곱 살인 주제에 오래 산 경험? 저 녀석 정말로 미쳤나?”
 경비병이 쉴츠의 뒷모습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학장실로 들어온 쉴츠가 여전히 뭔가 적는 것에 열중인 학장 앞에 섰다.
 “당신이 내 후견인으로 알고 있소. 얼마요, 내 가문이 맡긴 돈이.”
 “이놈 보게나. 흘흘흘. 곤장 100대를 맞고서도 정신 차리지 못했구나.”
 학장이 집필을 멈추고 쉴츠를 바라봤다.
 “네놈의 할아버지와 나는 친구 사이였지. 그 친구가 죽을 때 널 내게 부탁하며 한 말이, 그로잉 캐슬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주란 것이었지. 그러나 이곳은 대부분 귀족들이 들어오는 곳이며, 평민이 들어오기 위해서는 상당한 금액이 필요하지. 허나 너희 가문은 멸망해서 돈이 없어. 그렇다고 그 돈을 내가 지불하는 것도 웃기지. 그래서 내가 어떤 방법을 썼을 거 같은가?”
 학장이 쉴츠의 표정을 바라보더니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훗, 내가 친히 너의 후견자가 되어 준 것이다. 학장이 후견자라. 그 정도면 돈이 없더라고 이곳에 들어올 자격이 되지. 그걸로 난 네 할아버지의 부탁을 들어줬지. 나와 네 사이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다. 그러니 착각하지 마라. 이곳에서 역경을 이겨 내고 가능한 모든 것을 배우는 것도, 반대로 모든 걸 포기하고 쫓겨나는 것도 네 몫이다. 크흘흘.”
 학장이 말하며 다시 펜을 들어 잉크를 찍었다.
 “내가 해 줄 말은 이게 다니 나가 보아라.”
 “빌어먹을! 내…….”
 쉴츠가 소리치려다 급히 입을 다물었다. 천하의 헬사온이 마치 구걸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쉴츠는 몸을 돌려 학장실을 나갔다.
 학장이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래, 처음부터 시작한다. 그때도 가진 것 없이 밑바닥에서부터 공작의 자리에까지 올랐어. 이 정도로 물러날 내가 아니지. 난 헬사온이라고.”
 방으로 돌아온 쉴츠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보다 학장 놈의 면상을 갈겨 버려야겠어. 크흐흐, 내가 이곳을 나갈 때 기대하라고.”
 그는 당분간 그로잉 캐슬에 남아 있을 생각이었다. 밖에 나가면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하고, 그러면 훈련할 시간이 줄어든다. 여기서 적당히 수업에 참석하면 먹고 자는 문제는 해결된다. 또한 이곳에 남겨진 것을 취해야 한다. 그건 하늘로 오르는 계단 끝에 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쉴츠는 마법의 쉼터라는 곳을 찾아갔다. 그곳엔 삼십여 명의 10대 젊은이들이 모여 있고, 30대 후반의 선생이 커다란 돌판 위에 분필로 그림을 그려 가며 마법의 발현을 설명하고 있었다.
 “자네는 못 보던 얼굴인데, 누구인가?”
 선생이 물었다.
 “행정부에 있던 쉴츠입니다.”
 “뭐? 행정부?”
 선생이 다시 물었다.
 “저놈 뭐야?”
 “행정부에 있었대.”
 “그럼 마법학부에 왜 왔대?”
 주변 아이들이 소곤거렸다.
 “마법에 관심이 좀 있어서 왔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쉴츠가 선생에게 말했다.
 “마법에 관심이 좀 있어서? 그래서 행정학부에 있다가 마법학부에 왔다고?”
 선생이 말하며 인상을 구겼다.
 “키키키킥, 방금 한 말 들었어?”
 “저놈 미친 거 아냐? 조금 관심 있다고 이룰 수 있는 마법이었다면 누구나 마법을 배웠겠다.”
 쉴츠는 기왕 배우는 척이라도 할 것이라면 마법 쪽이 낫겠다 싶어 마법학부로 왔다. 43년 동안 여러 마법사들의 연구는 계속되었을 테니 그 지식이나 얻어 볼까 싶어서였다.
 “그로잉 캐슬에선 배움의 벽이 없다 들었습니다. 제가 온 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쉴츠가 물었다.
 “그건 아니지. 하지만 자네 나이에 조금 관심 있다고 시작하기엔 무리가 많은 학문이라네. 시간 낭비할 것 같아 충고하네. 행정학부에서 배우던 것을 마저 배우게.”
 “그곳엔 제가 배울 것이 없습니다.”
 “거참, 오만한 학생이군. 그렇다면 이곳이 아니라 10세 미만의 학생들이 있는 꿈나무 마법 교실로 가 보게. 그런 곳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선생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크크큭, 잘 찾아보면 5세 미만의 아이들로 구성된 걸음마 마법 교실도 있지 않을까요?”
 “아냐, 아냐. 그보다 마법에 좀 관심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란 것도 있을 거야. 차라리 거기에 나가는 게 낫지 않을까? 수준이 비슷할 테니까. 하하하하!”
 주변 학생들이 쉴츠의 말을 비웃었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미 이런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고, 비록 17세의 몸에 환생했지만 그의 눈에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들이었다.
 마법 수업은 다시 진행되었다. 쉴츠는 맨 뒤에 앉아 팔짱을 끼고 설명을 들었다.
 사흘 후 쉴츠는 더 이상 마법의 쉼터에 나오지 않았다. 그곳은 아직 1서클도 이루지 못한 자들을 위한 기초반이라 쉴츠가 얻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 무렵 그는 1서클을 이룰 모든 준비를 마쳤다. 그동안의 노력으로 주변의 마나를 끌어올 수 있고, 몸이 마나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서클을 만들지 않았다. 헬사온으로 살았을 때 그가 8서클에서 9서클로 넘어가지 못한 이유가 마나가 부족해서였다.
 1서클을 이룰 때 적은 마나로 만든 것이 2서클을 이룰 때도 그대로 적용됐고, 이런 식으로 8서클까지 이어지다 보니 9서클을 만들 마나가 모여들지 않았던 것이다. 대륙에는 인간이 9서클을 이룬 기록이 없는데, 모든 마법사가 이런 문제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쉴츠는 이 문제를 깨닫고, 1서클을 만들 때 최대한 많은 양의 마나로 만들기 위해 아직 서클을 생성하지 않은 것이다.
 
 이번엔 1서클 이상을 이룬 자들이 모여서 실습하며 이론을 배우는 마법의 푸른 연못이란 곳에 갔다. 그곳은 그로잉 캐슬 뒤편 연못에 만든 공터였는데, 실제 마법을 펼치는 훈련장이기도 했다.
 “자네가 그 쉴츠인가?”
 그곳에 가자마자 선생으로 보이는 자가 물었다.
 “그 쉴츠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쉴츠인 건 맞습니다.”
 쉴츠가 말했다.
 “저놈이야. 행정부에 있다가 마법에 관심 좀 있다고 마법 배우겠다는 놈!”
 “뭐야, 그럼 사흘 만에 기초반 마스터하고 이리로 온 건가? 크크크큭.”
 주변에서 쉴츠를 두고 소곤거렸다.
 “이곳은 기초반을 수료하지 못하면 올 수 없는 곳이네만?”
 “그렇습니까? 하지만 그곳엔 배울 게 없어서…….”
 선생의 말에 쉴츠가 대답했다.
 “우하하하하!”
 “크크크큭. 들었어? 배울 게 없대. 역시 사흘 만에 기초를 마스터한 거야.”
 또래 아이들이 웃고 떠들었다. 그런데 그중 한 소녀가 고개를 숙인 채 나오더니 쉴츠의 손을 붙잡고 푸른 연못에 있는 커다란 나무 뒤로 갔다.
 “야, 너 미쳤어?”
 “누구?”
 “뭐? 내가 누구냐고? 맙소사, 너 정말로 미쳤구나.”
 푸른색 단발머리에 마법사의 로브를 입고 있는 소녀가 머리를 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하늘로 향하는 계단에서 봤던 여자애잖아?’
 “쉴츠, 나도 네 사정을 알아. 이곳에서 참기 힘든 괴롭힘을 당하는 것도 알아. 가문의 복원도 복수도, 네가 짊어진 짐이 너무 크다는 것도 잘 알아. 하지만 열일곱 살에 마법이라니, 너…….”
 소녀가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 순간 쉴츠는 심장이 강하게 뛰었다. 가슴이 갑갑해지고 호흡이 가빠졌다. 여전히 소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너는 마법을 배울 수 없는 체질이잖아.”
 “뭐?”
 “잊었어? 네 가문은 대대로 마법을 이어 온 명가였잖아. 네가 세 살이 되었을 때 널 마법사로 키우려고 했지만 마나에 버림받은 아이라 결론짓고 포기했잖아.”
 “마나에 버림받은 아이라니? 마나에 선택받은 셀렉터는 있어도 그런 체질은 없다. 그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노력 여하에 따라 마법을 배울 수 있지. 단지, 재능에 따라 올라갈 수 있는 경지가 다를 뿐. 물론 그 경지도 노력 여하에 따라 허물 수 있지만.”
 “무슨 소리야. 그런 주장을 하는 마법사는 아무도 없어. 마법사는 천 명 중 한 명만 될 수 있을 정도로 재능이 중요하다고.”
 “다 헛소리고 잘못된 주장이야…….”
 쉴츠가 말할 때였다.
 “에나멜, 네 말대로 이자가 마나에 버림받은 것이 확실한가?”
 어느새 선생이 다가와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네, 선생님. 이자의 성이 가, 가멜시안입니다.”
 그녀가 말하는 도중에 불안한 표정으로 쉴츠를 바라봤다. 다행히 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가멜시안이면 마법으로 유명한 백작 가문이 아니더냐?”
 “네. 그 가문에서 마법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쉴츠라 했나?”
 마법 선생이 쉴츠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 아이들이 이곳에서 모든 배움을 마치고 각자 가문으로 돌아갈 때까지 네가 1서클 마법이라도 펼치면 네 주장을 믿겠다.”
 선생이 수업을 받던 아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수업 듣는 것을 허용한단 말씀이로군요.”
 “듣는 건 가능하지만 난 널 없는 아이 취급할 것이다.”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에나멜, 잊었느냐? 나도 17세 때 마법을 시작했고, 둔재라 손가락질받았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선생의 말을 들은 쉴츠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네가 있고 싶은 곳에 있으면 될 것이다.”
 선생이 말한 후 아이들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쉴츠…….”
 에나멜이 쉴츠를 바라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쉴츠도 그녀를 바라봤다.
 휘이이잉.
 바람이 불어와 옆의 나무를 흔들자 잎사귀가 떨어졌다. 그중 한 개가 쉴츠의 금빛 머리카락에 붙었다.
 에나멜이 손을 들어 나뭇잎을 치웠다. 그녀의 몸에서 상큼한 향기가 주변에 퍼졌다.
 “난 널 도와줄 수 없어. 미안해.”
 그렇게 말한 그녀가 뒤돌아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가만히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쉴츠가 입을 열었다.
 “저 여자는 누굴까? 날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은데. 그리고 육체의 마음이 썩 좋지 않군. 낯선 느낌이야.”
 바람이 불어와 다시 나무를 흔들었다. 잎사귀가 호수 위에 떨어지며 작은 파장을 일으켰다. 그 파장은 곧 호수 전체로 펴져 갔다.
 
 쉴츠는 오전에 있는 마법 수업 외엔 모든 시간을 방에서 보냈다. 밖에 있어 봤자 할 일도 없고, 오히려 괴롭히는 자를 만나면 골치 아파지니 차라리 방 안이 편하고 좋았다.
 그는 마나 감각을 넓히고, 몸에 들어온 마나를 제어하며 몸속에 마나의 통로를 만들었다. 이제 시작 단계지만 완전히 이루고 나면 한 번 호흡할 시간에 9서클 마법을 발동할 마나 량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쉴츠가 9서클 진입에 실패한 또 다른 이유는 몸이 한 번에 받아들이는 마나량의 한계 때문이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훈련했지만, 9서클을 이루기 전에 죽었다.
 이번엔 그때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쉴츠는 라이트 마법을 펼쳐 봤다. 서클이 없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위력이 약했지만 가볍게 성공했다.
 “흥! 마법은 누구나 펼칠 수 있다. 단지 방법을 모를 뿐.”
 그는 마법 훈련을 계속하면서 몸의 단련도 빼먹지 않았다. 건강한 몸을 가져야 마법 실력도 느는 법이다. 헬사온 시절 검술에 손을 댄 것도 몸의 훈련을 위해서였다.
 그는 그때 기억을 떠올리며 간단한 검술 연습을 했다. 오러를 다루는 기사만큼은 아니지만 몸을 지킬 정도의 실력을 갖추려는 것이다. 하지만 쉴츠의 육체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병신 같은 몸이로세. 크크큭. 뭐, 나름 성취도는 높겠군.”
 반사 신경이 매우 늦고, 천성적으로 뼈가 약하며, 시력과 청력도 좋지 않았다. 다시 말해 검이 버린 둔재 중의 둔재였다.
 “그러고 보니 마법에도 버림받아 검에도 버림받아, 하늘이 내린 몸이로세. 크크크크.”
 쉴츠는 개의치 않았다. 헬사온 시절에도 어렸을 때 검과 마법에 재능이 없다는 소릴 자주 들었다.
 그는 서고에서 책을 읽는 것도 쉬지 않았다. 특별한 책을 제외하곤 40년 이전에 쓰인 책들 위주로 읽으며 시대의 변화를 알아 갔다. 그러다 메이슬란 제국의 글로리 브레이크 제도에 관한 글을 발견하고 서둘러 읽어 내려갔다.
 “뭐, 이따위 제도가 있어. 이건 왕권 강화를 위한 것이잖아.”
 쉴츠가 책을 덮었다.
 “제국의 귀족들은 다 병신이군. 제 살 파먹는 제도를 통과시키다니, 크흐흐흐.”
 글로리 브레이크는 공식적으로 영지전을 허용하겠다는 제도다. 단, 하위 귀족이 상위 귀족에게만 영지전을 통보할 수 있으며, 이긴 자는 진 자의 제산 중 반절을 가져가고 나머지는 왕에게 귀속된다. 그리고 진 자의 가문을 이을 후손은 죽이지 못한다.
 이 제도에 의해 하위 귀족은 힘만 있으면 언제든 상위 귀족으로 올라갈 수 있으며, 상위 귀족은 하위 귀족과 영지전을 치르며 덩치를 키울 수 있다. 그렇게 귀족들은 서로 이기기 위해 가문의 힘을 키웠는데, 이는 결국 제국의 힘이 커지는 결과를 내놨다. 하지만 쉴츠가 보기엔 왕권 강화를 위한 제도였다.
 “뭐야. 그럼 글로리 브레이크의 율법에 따르면 패자의 가문에서 한 명의 목숨을 보장하는데, 그게 나란 말이잖아? 거참, 키우던 개 잡아먹고 새끼 한 마리만 남겨 둔 꼴이로세, 크흐흐. 당장은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오래가진 못할 제도야.”
 쉴츠는 다시 책을 펼쳐 계속 읽었다.
 
 마법의 푸른 언덕에서 받는 수업은 별다른 게 없었다. 헬사온 사후 새로운 마법이라도 있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퇴보했다. 특히 제국 메이슬란은 마법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서 배우는 학생들도 대부분이 남작의 자녀이거나 평민이었다. 덕분에 쉴츠를 괴롭히는 자들은 없었지만 맨 뒤에 앉아 수업을 듣는 그를 좋게 보진 않았다.
 마법 실험은 대부분 화염 계열에 국한되어 있다. 가장 살상력이 강하고 광범위하게 피해를 줄 수 있기에 서클이 낮아도 대우받는 계열이다 보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쉴츠는 다르게 생각했다. 마법을 이해하기 위해선 다양한 마법 공부가 필수였고, 고서클에 오르고자 한 계열만 공부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학생들의 1서클 파이어 마법이 호수 위에 나타나 숨 한 번 쉴 동안 타오르고, 2서클 파이어볼이 날아가 작렬한다. 완성된 마법이 아니기에 위력이 낮지만 학생들은 그걸 보고 환호하고 기뻐한다. 각자 가진 마나를 완전히 소비하면 수업이 끝난다.
 수업은 비교적 단순했다.
 “자, 내일부턴 밖에 나가 현장에서 몬스터를 잡아 볼 것이다. 세 명이 한 조가 되어 움직일 테니 각자 마음에 맞는 친구들끼리 조를 편성해 보아라.”
 선생의 말에 학생들은 서로 대화하며 조를 편성했다. 마침 쉴츠를 제외하고 스물한 명이었기에 일곱 조가 나왔다.
 “저 아이는 어느 조에서 데려갈 것인가?”
 선생이 쉴츠를 보며 물었다.
 “선생님, 쟤는 마법도 펼치지 못하는 놈 아닙니까. 이번 수업에선 빠져야 되지 않을까요?”
 “아니다. 이미 조는 완성되었으니 일반인 한 명 데려간다고 그리 달라질 건 없지. 에나멜, 너희 조가 가장 강하니 데려가라.”
 “선생님, 저 애는 얼마 전까지 행정 수업을 받던…….”
 “크크큭. 왜 그래, 에나멜? 옛 약혼자여서 그런 건가?”
 에나멜이 일어나서 외칠 때 같은 조에 있던 한 남학생이 말했다.
 쉴츠는 그 말을 듣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가슴이 꽉 막혀 숨쉬기가 거북해졌다.
 “카멜, 이제 그 일은 상관없어. 단지 몬스터를 잡으러 가는 데 마법도 모르는 자를 데려간다는 건 너무 위험해.”
 “선생님도 허락했잖아. 어이, 우리 조에 와라. 내 이름은 카멜. 여기 있는 놈들과는 다르게 자작 가문을 이어받을 아르시안 가문의 장남이다.”
 그가 쉴츠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아르시안 가문이면 제2의 궁정 마법사 직을 이어 온 백작 가문이었는데 마법사의 난 이후 쇠락했나 보군. 하긴, 그 가문은 나와 호의적이었는데 멸망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지.’
 “난 쉴츠, 어찌 됐든 잘 부탁하지.”
 쉴츠가 카멜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 순간 카멜이 손을 끌어당겨 쉴츠의 몸을 앞으로 쏠리게 하더니 뒤로 돌아가 왼손으로 그의 목을 잡고 올렸다. 카멜의 몸에 스트롱 마법이 걸려 있어 가능했다.
 “부탁하긴 뭘 부탁해. 넌 앞으로 우리 조에서 시종이 될 텐데. 크크큭. 친구들, 이놈이 우리 짐과 옷을 들고, 식사 당번이 될 테니 우리 조에 들어오는 것에 찬성이지?”
 “나야 좋지. 밖으로 나갈 땐 신경 쓸 게 많아서 시종을 데려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잘됐네.”
 “테이츠는 찬성이고, 에나멜 넌 옛 연인이니 찬성이지?”
 카멜의 물음에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하하하. 아직도 연정이 남아 있었나? 연인인 파인델이 알면 한동안 난리치겠는걸.”
 “카멜, 이상한 말 지껄이면 나도 가만있지 않는다.”
 에나멜이 일어서며 말했다.
 “어이쿠, 여장부 납시었네. 하하하하!”
 카멜은 쉴츠를 내려놓고 마법의 푸른 언덕을 벗어났다. 에나멜도 관심 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이런, 분위기가 좀 삭막하군.”
 한 남자가 넘어진 쉴츠의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내 이름은 테이츠. 멜라시안 자작가의 둘째지. 원래 우리 가문은 검술로 유명한데 내가 워낙 마법을 좋아해서 마법사가 되려고 하지. 그 바람에 가문에선 이단아 취급받지만, 하하하하. 그럼 내일 아침에 보자고, 친구.”
 테이츠가 쉴츠의 어깨를 두 번 다독이고는 마법의 푸른 언덕을 벗어났다.
 “모두 해산하고, 내일 아침에 조끼리 모여 있어라. 일정은 그때 알려 주마.”
 마법 선생이 말하자 학생들이 모두 흩어졌다. 쉴츠를 바라보던 에나멜이 할 말이 있는지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 푸른 언덕을 벗어났다.
 “어린놈들이라 되도록 신경 쓰지 않으려 했는데 슬슬 짜증 나려고 하는군.”
 혼자 남은 쉴츠는 몸에 묻은 흙을 털어 내고는 뒤따라오는 자가 있는지 주의하며 걸었다. 몇몇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알은체를 했으나 쉴츠는 기억나지 않아 무시하고 계속 걸었다.
 곧 하늘의 성에 도착했다. 주변을 살펴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후 하늘로 이어진 계단에 올라갔다.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난간이 나타났고, 계단은 더 이상 없었다. 그러나 쉴츠는 난간을 넘어 허공에 왼발을 디뎠다.
 휘이이잉!
 바람이 불어오며 쉴츠의 옷자락이 펄럭였다. 아래엔 그로잉 캐슬의 크고 작은 성이 보였고, 주변엔 산이라고 하기엔 작고 언덕이라고 하기엔 큰 대지가 필프로의 도심지까지 여러 갈래의 길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의 왼발이 천천히 아래로 움직였다. 발끝이 바람에 날려 이리저리 흔들렸다. 난간에 걸친 오른발이 떠올랐다. 순간 쉴츠의 몸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왼발이 허공에 멈췄다.
 휘이이잉!
 매서운 바람이 쉴츠의 발을 움직이려고 애썼지만 무언가에 고정된 그의 발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난간을 넘어 오른발을 왼발 옆에 붙이자 그의 몸이 허공에 떴다.
 그가 오른발을 내밀었다. 아무것도 없건만 그의 발은 마치 계단을 올라가듯 허공을 디뎠다. 왼발을 올리니 그의 몸이 한 계단 올라갔다.
 조심스러워하던 발이 빠르게 움직이자 그의 몸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헬사온은 성안에 여러 연구 시설을 만들었지만 그중 딱 한 군데만큼은 허공에 만들었다. 헬사온이 죽은 후 귀족들이 그의 성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이곳만큼은 발견되지 않았다.
 쉴츠는 계속 계단을 올라갔다. 곧 그의 몸이 희미해지더니 사라졌다.
 바람이 구름을 밀어내는 것도, 저 멀리 새들이 날아가는 모습도 평상시와 똑같은 하늘이었다.
 
 쉴츠가 일루전 마법진을 넘어오자 보이지 않던 계단이 나타났다. 팔뚝만 한 가지가 이리저리 엮여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나무의 뿌리였다.
 쉴츠가 걸어갈수록 계단의 뿌리는 두꺼워졌고, 그 끝에는 커다란 나무가 허공에 떠 있었다. 계단이 끝나는 곳엔 사람 한 명이 들어갈 만한 문이 있었다.
 곧 쉴츠는 문 앞에 섰다. 오른손을 내밀어 문 중앙에 툭 튀어나온 구슬을 만져 보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는 주변의 마나를 모았다. 서클이 없어 느렸지만 이내 그의 의지대로 마나가 뭉쳐지더니 오른손으로 향했다.
 그가 다시 구슬을 만졌다.
 “쳇! 역시 쉴츠의 육신으론 들어갈 수 없군. 마나도 부족해서 그놈을 깨우기엔 어려울 것 같아. 뭐, 급할 건 없지. 앞으로도 여긴 발견될 것 같지 않고, 설사 발견된다 할지라도 차원의 틈에 뿌리내린 혼돈의 나무를 어찌하진 못하겠지. 그 안에 있는 하늘정원은 더더욱 마찬가지고.”
 쉴츠는 아쉬움을 달래고, 뒤돌아 계단을 내려갔다. 곧 그의 모습이 사라지더니 허공에 나타났다. 일루전 마법진을 벗어나자 뿌리로 만들어진 계단도 혼돈의 나무도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허공을 걸어 하늘의 성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 끝에 한 여인이 놀란 눈으로 쉴츠를 바라보고 있었다.
 “젠장, 에나멜!”
 쉴츠가 보이지 않는 계단을 빠르게 달려 내려왔다.
 “세, 세상에. 어, 어떻게…….”
 에나멜은 그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쉴츠가 뛰어올라 계단 끝에 있는 난간에 착지했다.
 “방금 너…… 읍!”
 “조용히 해.”
 쉴츠가 에나멜의 입을 재빨리 막고 주변을 살펴봤다. 그녀 외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젠장, 하루빨리 마나 감각을 넓혀야 이런 실수를 하지 않겠어.”
 “읍, 읍.”
 “이 여자를 어떻게 하지? 아악!”
 에나멜이 입을 막은 쉴츠의 손을 깨물었다.
 “아악! 제, 젠장. 하늘에 흐르는 기운이여, 땅에서 움직이는 기운이여. 그 흐름을 끊어 모든 것을 멈추리니, 서버런스.”
 쉴츠가 재빨리 주변의 마나를 모아 마법을 펼쳤다. 곧 그의 손에서 모든 감각이 사라졌고, 더 이상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마법을 느낀 에나멜은 깜짝 놀랐다. 쉴츠는 그녀의 입을 더 세게 막으며 더 이상 손을 물지 못하게 했다.
 “왜, 내가 마법을 부리니 놀라운가? 크크큭, 너와 많은 대화를 하고 싶지만 중요한 걸 들켜 버렸으니 미안하지만 죽어 줘야겠다. 땅의 기운을 받은 금광석이여, 그 힘이 하늘 높이 승천하리다. 내 앞에…… 아악!”
 마법 주문을 외우던 쉴츠가 고함을 지르더니 뒤로 나자빠졌다. 어느새 에나멜의 왼손엔 깨진 구슬이 쥐여 있었는데 번개 마법을 담아 둔 1회용 마법 무구였다.
 “젠장, 마법 내성이 아예 없는 저질스러운 몸이로군.”
 쉴츠가 재빨리 일어나며 에나멜을 바라봤다.
 “잠깐! 쉴츠, 진정해. 일단 대화가 필요한 거 같아.”
 “대화는 무슨!”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쉴츠가 다가가려 했다.
 “오지 마! 소리칠 거야. 그럼 아래 있는 경비병이 듣고 달려오겠지. 지금 당장 소리치지 않는 건 너와 대화하고 싶기 때문이야. 그리고 이거.”
 그녀가 붉은 구슬을 꺼냈다.
 “알람 마법이 담겨 있는 구슬이야. 이걸 깨트리면 여자의 비명보다 열 배는 더 큰 소리가 울려. 아까 이걸 깨트리지 않은 이유도 대화하고 싶기 때문이야.”
 그녀가 빠르게 말했다.
 “여자라 하찮게 봤는데 의외로 상황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군. 좋아, 할 말이 뭐지?”
 쉴츠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물었다.
 “일단, 너 방금 마법을 펼친 거야?”
 그녀가 쉴츠의 왼손을 가리켰다. 아까 그녀의 입에 물려 손에서 피가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왜, 내가 마법을 펼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너, 마나에 버림받아 절대 마법을 부릴 수 없을 텐데…….”
 “하하하! 그런 엉터리 주장을 믿다니. 마나에 버림받는 존재는 없다. 세상 그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 마나인데, 버림받다니? 하하하하!”
 “하지만 천 명 중 한 명만이 마법사가 될 수…….”
 “지금 날 보고도 그런 주장을 믿나?”
 “아, 알았어. 그럼 아까 너 저 허공에서 날아온 거 맞지?”
 그녀가 계단이 끝난 난간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것도 마법이야? 하지만 비행 마법은 4서클에 있잖아. 설마 너 4서클이야?”
 그녀의 말을 들은 쉴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여기서는 하늘만 보이니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내 모습이 날아온 것처럼 보일 만도 하지.’
 “그동안 너 힘을 숨기고 있던 거야? 그것도 모르고 내가 널 오해하고 있었던 거야?”
 그녀가 쉬지 않고 계속 물었다.
 잠시 생각하던 쉴츠가 입을 열었다.
 “하나씩 대답하자면, 방금 난 허공을 날아온 건 아니야. 2서클 워크 마법이다. 잠깐 허공이나 물 위를 걷게 하는 마법이지. 그리고 4서클이라니, 당치도 않지. 굳이 말하자면 무서클이고, 2서클까진 마법을 부릴 수 있지. 그리고…….”
 쉴츠가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너라면 가문이 멸망하고 혼자 남았는데 네 힘을 주변 사람들에게 다 알릴 텐가?”
 “아니, 꼭꼭 숨길 거야. 그래서 내가 전혀 위험하지 않은 존재라고 속일 테야.”
 “그래, 맞아. 또 궁금한 게 있나?”
 “한 가지. 아까 날…….”
 그녀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쉴츠를 바라봤다.
 “죽인다고 한 거 진심이야?”
 “널 진짜로 죽일 생각이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해.”
 쉴츠가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에나멜이 마법을 부리는 줄 알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으나 겁만 주려는 걸 알고 긴장을 풀었다.
 “오늘 일은 비밀이지?”
 “당연하지.”
 “꼭 지킬게. 그리고 널 응원할게.”
 “뭐?”
 “내일 아침에 일찍 와. 넌 다른 아이들과 어울릴 자격이 있어.”
 그녀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진짜 미안해. 그때 널 버린 건 내가 널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어. 지금도 사과밖에 할 수 없어. 미안하고 또 미안해. 하지만 내 마음을 알아줘. 꼭이야.”
 에나멜이 두 눈을 글썽이며 말하더니 이내 뒤돌아 하늘의 성을 내려갔다. 쉴츠는 그녀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쉴츠 이 육신의 인생이 평범하지 않은 건 알겠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나저나 진짜로 죽이려 했는데…….”
 주먹을 쇠처럼 단단하게 만든 후 그녀의 머리를 내리치려고 했었다.
 쉴츠가 오른손을 바라봤다.
 “흥! 이 육체가 저 여자를 좋아했던 게 틀림없어. 연인 사이라고 했으니 확실하겠지. 멍청한 놈, 그런 감정에 놀아나니 쓰레기 같은 미래가 기다리는 거다.”
 쉴츠는 하늘의 성을 내려갔다.
 하늘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오더니 사라진 에나멜과 쉴츠의 자리를 맴돌았다.
 
 
 4. 지하 미로 미드웨이
 
 방으로 돌아온 쉴츠는 최대한 모을 수 있는 양의 마나를 모아 심장 주변을 감쌌다.
 “진짜 전투였다면 주문 외우는 사이에 내 목이 날아갔겠지.”
 아까 에나멜의 입을 가리고 마법을 펼칠 때가 떠올랐다.
 “어린놈들이 날 대하는 것을 생각하면 내일 당장 싸움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지. 서클을 만들어야 할까?”
 그는 모은 마나를 흩었다가 다시 모으길 여러 번 반복하며 계속 고민했다. 그러다 헬사온 시절 떠올린 한 가지 가설이 생각났다.
 “무속성의 서클이라. 그건 이론으로만 끝났는데. 하지만 그게 된다면 흑마법과 백마법, 원소 마법 등 속성을 가리지 않고 마법을 펼칠 수 있을 텐데…….”
 현제 쉴츠가 끌어온 마나는 양의 마나다. 이대로 서클을 만들면 양의 속성을 띤 서클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되면 흑마법은 펼치기 어려워진다. 이 문제로 헬사온 시절 흑마법을 펼치기 위해 수많은 피를 봐야 했다.
 “흠, 어차피 내 마법은 흑마법이 필요해. 그러나 흑마법을 들키면 또 대륙의 공적이 되겠지.”
 제국의 황제나 귀족들이 헬사온을 배신한 이유는 정치적인 문제였지만, 그를 칠 수 있었던 명분은 흑마법을 펼치기 위해 수많은 인명을 해친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쉴츠는 그때처럼 똑같은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다.
 “음의 마나는 인명 피해 없이 모으려면 어둠의 세계로 가야만 해. 하지만 거긴 영혼의 소멸을 각오해야 할 정도로 위험한 곳이야. 그냥 좀 더 많은 마나를 모아 커다란 서클을 만들자. 정상적인 방법으로도 9서클까지 오를 수 있는 이론을 가지고 있어.”
 생각을 정리한 그는 심장에 모여든 마나를 흩었다. 하지만 무속성 서클의 효능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푸른 언덕으로 간 쉴츠는 시비를 피하기 위해 구석에 있는 등나무 밑에 혼자 있었다. 두 눈을 감고 주변의 마나가 움직이는 것을 느끼며 훈련했다. 재능이 없고, 늦게 시작했으니 다른 사람보다 몇 배로 노력해야 했다.
 하나둘씩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런데 검을 든 자들이 무리 지어 나타났다.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
 “오늘 있을 체험을 조금 바꿔 몬스터 토벌을 한다! 검술부 학생들과 함께하니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선생이 큰 소리로 말했다.
 “에에? 선생님, 견습 마법생이 토벌이라니요.”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놈들과 함께라니.”
 마법 학생들 중 몇 명이 반대 입장을 내비쳤다.
 “시끄럽다! 특히 이번엔 갈레사온 공작의 셋째 아레리사 공녀가 함께하니 그리 알아라.”
 “아니, 그 콧대 높은 여자가 여길 뭐하러 온답니까?”
 “제길, 그러면 체이컬드 친위대도 함께하겠군요. 도대체 우릴 데리고 어느 정도 규모의 몬스터 토벌을 하실 건가요!”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언성을 높였다.
 주변을 둘러보던 선생이 입을 열었다.
 “아레리사 공녀가 함께하는 토벌대에 힘을 보태 주라는 학장님의 지시가 계셨다. 너희들은 후방에서 마법 지원만 해 주면 될 테니 위험한 일은 없을 거다. 오히려 저 녀석들이 위험하지.”
 마지막에 선생이 뒤에 모여들고 있는 검술부 학생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학생들과 선생이 뭐라 하든 쉴츠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주변의 마나를 느꼈다. 그런데 마나 덩어리 하나가 쉴츠에게 다가왔다.
 ‘이제야 사람의 마나를 좀 느낄 수 있군.’
 쉴츠가 눈을 뜨며 고개를 돌렸다.
 “어이쿠, 이게 누구야! 이 쥐새끼가 요기 숨어 있었네?”
 “파인델이란 개새끼군.”
 “뭐라고? 이놈이!”
 파인델이 소리치며 쉴츠의 멱살을 잡아 올리자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또 옆구리를 지져 주랴? 크크큭.”
 “병신, 에나멜과 연애질이나 할 것이지 여긴 뭐하러 왔냐?”
 쉴츠는 파인델에게만큼은 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소란스러워질 것을 알면서도 입에서 하고 싶은 말이 막 나왔다.
 “네놈이 감히 귀족을 능멸해?”
 파인델이 그대로 쉴츠의 몸을 땅에 내리꽂았다. 그 순간 쉴츠는 몸을 움츠려 충격을 최소화했다.
 “지금도 네 녀석이 귀족인 줄 착각하나 본데, 크흐흐. 죽어라, 쥐새끼야!”
 파인델이 전투용 부츠를 신은 발로 쉴츠를 마구 밟았다.
 “윽! 크읍!”
 쉴츠는 신음을 참았다. 그때 매직 미사일 한 방이 날아와 파인델의 몸에 맞았다.
 팡!
 공기가 압축됐다가 퍼지는 소리가 울리며 그가 옆으로 밀려났다. 싸움을 말리기 위해 공격력을 약하게 해서 쏜 것이다.
 “어이, 파인델. 저 녀석 우리 조원이거든. 그만하지?”
 “맞아. 저래서야 몬스터 토벌에 함께할 수나 있겠어?”
 카멜과 테이츠가 다가와 말했다.
 “흐흐흐, 방금 매직 미사일을 쏜 놈이 카멜 너냐?”
 파인델이 검을 움켜쥐며 물었다.
 “맞아. 그래서 결투라도 해 보게?”
 “파인델, 정신 좀 차리지. 주변을 봐 봐. 모두 여길 주목하고 있다.”
 테이츠의 말에 파인델이 주변을 둘러았다. 백여 명 이상의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엔 마법부 선생도 있고, 검술부 선생도 있었다.
 그로잉 캐슬의 선생들은 학생들의 세력다툼엔 끼어들지 않는다. 대부분 귀족들의 자제이기 때문에 선뜻 손댈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마법이나 검이 오가는 싸움이 일어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물론 쉴츠처럼 상대가 평민이라면 역시 끼어들지 않는다.
 카멜과 테이츠 모두 자작의 자제였기에 선생들이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레리사 공녀가 나타났다!”
 “저기 봐. 주변에 있는 자들이 체이컬드 친위대이다.”
 한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중앙에 로브를 입은 여인이 있고, 주변엔 검을 든 자들이 호위하듯 서 있었다. 중앙의 여인이 갈레사온 엘사드본 공작의 셋째 아레리사 엘사드본이다.
 그녀는 마법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인 갈레사온 공작이 마법을 배척하는 메이슬란에서 태어난 것을 안타까워해 한숨을 쉰 것이 천 번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그래서 그녀는 어렸을 때 마법의 나라 가이테스로 가서 공부를 했다. 적대 관계인 나라에서 마법을 배웠기에 메이슬란 귀족들이 좋게 보지 않았지만 공작은 친교를 위해 친딸을 보낸다는 명분으로 그녀를 보냈고, 제국의 황제도 허락했다.
 아레리사 공녀가 쉴츠와 일행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내 앞에서 검을 꺼내려는 자가 누구인가요?”
 아직은 앳된 목소리지만 나름 권위 있게 울려 퍼졌다.
 “파인델, 아레리사 공녀님을 뵈옵니다.”
 “카멜, 아레리사 공녀님을 뵈옵니다.”
 “테이츠, 아레리사 공녀님을 뵈옵니다.”
 남자 세 명이 각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그런데 쉴츠는 가만히 서 있었다.
 “네 이놈, 감히!”
 공녀의 바로 옆에 서 있던 친위대가 쉴츠를 보며 외쳤다.
 “괜찮아요. 존경심이 없는 자에게 억지로 행동하게 하면 반항심이 생기는 법. 그보다 아까 내가 보는 곳에서 검을 꺼내려 했던 자가 당신입니까?”
 공녀의 존댓말이 파인델을 압박했다.
 “아, 아니옵니다. 그저 상황이 그렇다 보니…….”
 “상황이 어떠했단 말입니까? 저 멀뚱하게 서 있는 자를 발로 밟지 않은 것이 검을 꺼낼 상황이었군요.”
 공녀가 쉴츠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옵니다. 그저 버릇없는 평민을 혼내 주려…….”
 “시끄럽습니다. 누구든지 제 앞에서 검을 꺼내고 싶거든 그렇게 하십시오. 대신 5서클 마법사 아레리사의 마법을 보게 될 것입니다.”
 존댓말로 나무라는 묘한 그녀의 음성이 주변에 울려 퍼졌다.
 “공녀님의 나이가 올해 18세 아니던가? 저 나이에 5서클이라니.”
 “가이테스 제국에서 왕자와 혼인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더라. 그 이유가 공녀님의 마법 때문이라던데?”
 주변에서 그녀에 대해 소곤거렸다.
 쉴츠는 유심히 그녀를 바라봤다.
 “확실히 저 나이 때 5서클이면 마나의 선택을 받은 셀렉터로군. 하지만 잘못 배웠어. 5서클에서 10년, 6서클에서 30년을 허송세월하다가 7서클 초입에 들고 죽겠군.”
 쉴츠가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의 자질을 평가하듯 말했다.
 “뭐라고 했나요?”
 쉴츠의 말 일부를 듣고 아레리사가 소리쳤다.
 ‘아차! 생각만 한다는 게 소리 내 버렸군. 평소 혼자 있다 보니 혼잣말하는 버릇이 들었어.’
 “당신이 방금 나에 대해 평가를 했습니까!”
 그녀가 소리쳤다.
 “아니오, 평가가 아니라 사실을 말한 것이오.”
 “네 이놈! 감히 공녀님께 말하는 버릇이 그게 뭐냐!”
 옆에 있던 친위대가 검을 꺼내며 쉴츠의 목에 갖다 댔다.
 “존경심이 없는 내가 말을 높여야 하오?”
 쉴츠가 친위대가 아닌 공녀를 보며 말했다.
 그때 아레리사는 쉴츠가 한 말 중 셀렉터란 단어가 떠올랐다.
 “셀렉터를 알고 있습니까?”
 “알다마다. 몰랐다면 당신을 평가하지 않았겠지.”
 그녀는 쉴츠의 서클을 느껴 보려 했다. 하지만 서클은커녕 마나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마법사는 아닌 것 같군요.”
 그녀의 목소리가 한풀 꺾인 듯했다.
 “이제 배우는 학생이니 그로잉 캐슬에 있는 것 아니겠소.”
 “이놈, 말버릇이!”
 친위대가 오른발로 쉴츠의 가슴을 걷어찼다.
 파악!
 “크읍!”
 전투 부츠를 신고 있었기에 평범한 육체를 가진 쉴츠가 버티기엔 충격이 너무 컸다.
 “케스파 님, 괜찮아요. 3년 후 제가 6서클에 들면 당신을 죽일 것입니다. 이름이 뭔가요?”
 “내 이름은 쉴츠. 평민이라 성은 없소.”
 “평민이래!”
 “어찌 평민이 공녀님에게 저리 무례할까?”
 주변 사람들 중 쉴츠를 모르는 자들이 소곤거렸다.
 “흥! 3년이 되기까지 목숨이나 잘 보존하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그녀가 학장실을 향해 걸어갔다. 곧 친위대가 함께했고,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잠시 후 몇 명이 쉴츠에게 다가갔다.
 “이봐, 너 대단한데?”
 “그 배짱, 죽여준다. 특히 공녀의 말을 인용해 ‘존경심이 없는 내가 말을 높여야 하오?’라고 할 때는 심장이 오그라드는 줄 알았다, 짜식아.”
 카멜과 테이츠가 말했다.
 “쉴츠, 괜찮아? 상처 좀 봐. 어서 치료해야겠어.”
 무리 중에 끼여 있던 에나멜이 다가와 말했다.
 “에나멜, 넌 네 연인이나 챙기지그래?”
 카멜이 파인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팔짱을 끼고 쉴츠와 무리들을 아니꼬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파인델, 무사하니 다행이야. 아까 그 공녀, 검사들을 매우 싫어한다더라.”
 에나멜이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흥!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마라. 나도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명령 때문에 널 만나는 것이다. 그러니 네 옛 연인이나 챙기지?”
 파인델이 살며시 검을 만졌다. 진짜로 에나멜이 쉴츠를 챙기면 당장 뽑을 기세였다.
 그걸 본 에나멜이 파인델의 팔을 잡아끌었다.
 “공녀가 학장을 만나러 갔으니 몬스터 토벌을 하기까지 잠깐 시간이 있을 거 같아. 우리, 호수로 가자.”
 그녀가 파인델을 데리고 마법 실험을 하는 푸른 호수로 갔다.
 “쯧쯧, 가문끼리의 정략혼이라니. 그나저나 너도 참 곤란하겠어.”
 테이츠가 쉴츠를 보며 말했다.
 “왜?”
 “왜라니? 뭐, 상관없나? 그럼 됐다. 어처 치료나 하러 가지.”
 “그래, 우리 조의 하인 놈이 이리 부상을 당해서야 짐을 들 수 없잖아. 크크크.”
 테이츠와 카멜이 쉴츠를 데리고 치료실로 향했다.
 
 아레리사 공녀는 황궁에 머무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수도의 남쪽에서 몬스터가 출몰한다는 소리를 듣고 직접 몬스터 토벌을 하겠다고 나섰다. 처음엔 그녀의 아버지 갈레사온 공작이 반대했지만 마법을 업신여기는 제국에서 인정받으려면 가야 한다는 딸의 설득에 넘어가고 말았다. 대신 근처에 있는 그로잉 캐슬에 들러 그곳 학생들에게 도움을 받도록 했는데, 타국에 있던 딸에게 장차 제국을 이끌어 갈 아이들과 친분을 쌓게 하려는 의도였다.
 또 한 가지, 미리 조사해 본 결과 몬스터 출몰 지역에서 반드시 확인해 봐야 하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그곳엔 지하 미로가 하나 있는데, 과거 수백 년 전부터 잊을 만하면 근처에서 몬스터가 출몰하곤 했다. 그곳은 300년 전부터 완전히 파헤쳐져 몬스터가 없었고, 주변은 안전지대였기에 어디서 몬스터가 나타나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하 미로를 의심하고, 어둠의 세계인 지옥과 연결된 곳이라 생각해 ‘미드웨이의 문’이라 불렀다. 특히 해골 늑대가 자주 출몰했는데 그 몬스터는 지옥의 하급 몬스터였다.
 
 아레리사 공녀와 함께 그로잉 캐슬의 학생들이 지하 미로 근처에 도착했다.
 공녀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몇 가지 보호 마법을 펼쳤고, 친위대가 천막을 쳤다. 이를 본 그로잉 캐슬의 선생들도 학생들에게 안전지대 안에 천막을 치도록 명령했다.
 쉴츠는 지하 미로 미드웨이의 문을 떠올리며 과거 기억을 떠올렸다.
 “맞아. 43년이 흘렀으니 몬스터가 출몰한 것이었군.”
 고개를 돌려 그로잉 캐슬의 선생들에게 지시하는 아레리사 공녀를 바라봤다.
 “내 짐작이 맞는다면 저 여자의 힘으론 부족할 텐데. 말해 줘야 할까?”
 “뭘 말해 줘?”
 쉴츠의 마지막 말을 들은 에나멜이 손에 두 개의 그릇을 들고 왔다. 안에는 이제 막 끓인 따뜻한 수프가 들어 있었다.
 “파인델이 이 모습을 보면 가만있지 않을 텐데.”
 “흥! 어차피 그놈도 나도 서로 혼인할 생각 없어.”
 “정략결혼은 가문의 힘을 키우는 매우 좋은 방법이지. 특히 귀족들의 경쟁을 부추기는 글로리 브레이크 제도가 있는 메이슬란에선 말이야.”
 쉴츠는 파인델과 에나멜의 관계를 알아본 적이 있다.
 파인델은 백작가였고 에나멜은 자작가였지만, 에나멜의 가문은 최근에 글로리 브레이크의 율법에 따라 백작가와 영지전을 치러서 이겼다. 그래서 그녀의 가문은 곧 백작가가 된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문제는 그녀의 가문이 흡수한 백작가와 친분이 있는 후작가가 복수를 노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 후작과 적대 관계에 있는 파인델 가문과 그녀의 가문이 힘을 합치기 위해 자녀를 정략결혼시키려는 것이다.
 “넌 아무렇지 않아?”
 쉴츠가 에나멜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흥! 글로리 브레이크의 율법대로 멸망한 가문은 그대로 둬도 퇴보하게 될 터, 난 그런 가문에 미련 없어.”
 쉴츠는 육체의 가문이나 상황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나에 대해서 괜찮은 거야?”
 “네가 뭘? 내가 마법 부리는 걸 알고 있다는 거? 신경 쓰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널 죽일 순 없잖아.”
 “아니…… 그, 그래. 그럼 됐어.”
 에나멜이 뭔가 말하려다가 말았다.
 쉴츠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 미드웨이의 문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이곳은 내가 흑마법을 연구했던 곳. 오랜 시간 동안 관리가 되지 않아 봉인이 풀렸겠지. 아무래도 밤에 몰래 들어가 봐야겠어. 내 흔적만 지우고 나와야지.’
 헬사온이 어둠의 마나를 쌓는 방법 중 하나가 지옥의 존재를 불러내 마나를 흡수하는 것이다. 그중 미드웨이의 문은 수백 년 동안 흑마법사들이 몰래 사용해 온 소환진이 있는 곳이다. 지금 상태로 5서클 마법사인 아레리사가 들어가면 소환진을 눈치챌 것이며, 미드웨이는 헬사온 시절 그의 영역이었기에 죄목이 하나 더 늘어날 것이다.
 쉴츠는 다른 건 다 상관없지만 헬사온이 쌓은 명성이 사라지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아레리사는 그로잉 캐슬의 마법생들을 데리고 미드웨이의 문에서 이백 걸음 떨어진 곳에 커다란 회오리 마법진을 만들었다. 그리고 여덟 방위에 안쪽으로 끌어당기는 마법진을 그렸는데, 마법진이 발동될 때 안에 있으면 회오리 마법진으로 끌려가게 된다.
 이후 각 조를 새로 편성해 주변을 돌아다니며 몬스터를 찾았다. 상대할 수 있는 몬스터면 현장에서 바로 처리했고, 상대할 수 없을 경우 마법진으로 이끌었다. 그러면 아레리사가 마법진을 발동해 몬스터들을 안쪽에 가뒀다.
 쉴츠도 조에 편성돼 두 번 몬스터를 마법진으로 이끌었다. 모두 어둠의 세계에서 하급인 해골 늑대였는데, 이곳 대륙에선 중급을 넘어서는 무서운 몬스터였다. 미리 준비한 성스러운 물 알카에나의 눈물을 가지고 있었기에 해골 늑대의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
 인명 피해가 없는 건 아니었다. 지옥의 파수꾼이라는 케르베로스가 가끔 출몰했는데 녀석에겐 알카에나의 눈물도 소용없었다.
 “으악!”
 한 검사가 케르베로스의 입에서 쏘아진 불에 닿자 순식간에 전신이 불에 감싸였다.
 “……하여 나타나리라. 워터!”
 1서클 견습 마법생이 미리 외워 둔 마법을 펼치자, 불에 감싸인 검사의 머리 위에서 물이 나타나 쏟아졌다.
 촤악, 지이이이이!
 불과 물이 만났다. 물은 불을 끄려 했고, 불은 물을 끓여 증발시키려 했다.
 승자는 불이다. 지옥의 파수꾼 케르베로스의 불은 일반 불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뜨거웠다.
 “하압!”
 용기 있는 한 학생이 검으로 케르베로스의 엉덩이를 찔렀다.
 카앙!
 쇠보다 단단한 가죽과 근육을 가진 케르베로스는 조금도 상처를 입지 않았다.
 케르베로스가 꼬리를 휘둘러 채찍처럼 검을 든 학생의 몸을 휘어 감았다. 꼬리 끝에서 붉은 불씨가 나타나더니 곧 커다란 불로 변했다.
 화르르르!
 “크아아아!”
 화마가 학생의 전신을 집어삼켰다.
 “모든 움직임이 멈추리라, 시스!”
 멀리서 아레리사가 달려와 미리 외워 둔 마법을 펼쳤다. 날뛰던 케르베로스의 행동이 이내 돌처럼 굳어졌다.
 크아아아아!
 포효하자 입에서 불이 나와 사방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나를 바라보리라, 나를 쫓으리라. 어펀드!”
 그녀가 또 다른 마법을 펼치자 케르베로스가 아레리사를 노려보며 포효하더니 몸을 결박한 시스 마법을 깨트렸다. 그리고 바로 그녀를 향해 빠르게 달렸다.
 “빨라지리라, 헤이스트!”
 몸에 마법을 부린 그녀가 품에서 방석처럼 생긴 천을 꺼내 그 위에 앉았다. 곧 허리 높이로 떠오른 그녀의 몸이 빠르게 날아갔다. 뒤에선 케르베로스가 분노하며 그녀를 쫓았다.
 그녀가 미리 만들어 놓은 마법진을 빠르게 지나가자 케르베로스도 그 위를 지나갔다.
 “스러스트!”
 케르베로스가 마법진을 벗어나기 직전에 그녀가 시동어를 외웠다.
 쏴아아!
 마법진에서 빛이 나더니 강력한 바람이 불어와 케르베로스를 중앙에 있는 커다란 마법진으로 밀어냈다. 안에서는 회오리바람이 맹렬하게 불며 케르베로스의 몸을 허공에 띄웠다. 발이 땅에 닿지 않으니 마법진을 빠져나올 수 없다.
 “와! 공녀님 만세!”
 “아레리사 공녀님 만세!”
 주변에서 그녀를 찬양했다.
 “꽤 하는군. 제법 영리해.”
 쉴츠도 그녀의 전투를 보고 칭찬했다.
 마법진 안에는 제법 많은 수의 몬스터가 회오리바람에 이끌려 허공에서 돌고 있었다.
 “이게 바로 마법이다!”
 그녀가 팔을 높이 들며 외쳤다.
 “저 여자, 마법에 애착이 강하군.”
 “그럼. 내가 존경하는 두 명 중 한 명인걸.”
 에나멜이 다가와 말했다.
 “나머지 한 명은 누군데?”
 “마도공작 헬사온.”
 “뭐?”
 쉴츠가 깜짝 놀랐다.
 “그분의 끝이 좋지 않았고, 그 결과 메이슬란이 마법사를 배척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분이 이룬 업적은 사라지지 않아. 특히 9서클 초입에 들었다는 사실은 모든 마법사들이 경배하고도 남을 커다란 업적이잖아.”
 ‘끙. 9서클 초입에 들 뻔했지 들진 않았는데.’
 쉴츠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변방의 섬나라 레이옴에서 시작해 제국의 공작 자리에 올랐잖아. 만일 그가 살아 있었다면 제국 메이슬란은 마법사의 나라가 되었을 거야. 그리고 대륙을 평정했을지도 몰라. 지금쯤이면 9서클 마스터가 되었을 테니까. 그런 분을 어느 누가 대적하겠어?”
 “글쎄, 즐거운 상상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지. 그는 실패자야. 동료에게 배신당해 그가 만든 올마이티 아머를 입은 기사에게 찔려 죽었지. 또한 모든 업적이 무너지고 악마의 마법사라고 불리잖아.”
 빠드득.
 마지막에 쉴츠는 이를 갈았다.
 “하지만 마법을 하는 자들이라면 그분을 공경하지 않을 수 없어. 나도 그리고 저기서 열광하는 공녀님도.”
 에나멜이 사람들 사이에서 환호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흥! 이제 더 뛰어난 사람이 나타날 거다.”
 “그게 누군데? 설마 저 공녀님?”
 “아니, 저 여자는 7서클이 한계야.”
 “어떻게 그리 자신하지?”
 “글쎄……. 산봉우리에서 아래를 바라보면 능선이 다 보인달까.”
 “치! 꼭 자기가 산봉우리에 오른 사람처럼 말하네.”
 “크크크큭.”
 쉴츠가 말없이 웃었다.
 
 아레리사는 5서클 익스플로전을 펼치기 위해 오랫동안 주문을 외웠다. 이제 5서클 초입이라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그녀가 거의 모든 마나를 사용해 마법을 펼쳤다.
 콰아아앙!
 마나가 서로 충돌해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회오리바람에 묶여 있던 몬스터가 그대로 소멸됐다. 사방으로 땅이 파여 파편이 튀었고, 그려 놓은 마법진도 날아갔다.
 그녀의 마법을 본 학생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선생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이 정도 규모의 마법을 볼 리가 없으니 기억에 자세히 새겨 두려는 것이다.
 “휴, 오늘은 푹 쉬세요. 내일 오후에 미드웨이로 들어갑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친위대가 다가와 부축했다. 지친 그녀가 천천히 걸어 천막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학생들은 보고 들은 것을 서로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쉴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효율적인 마법 활용을 아는 아이였다. 생각 같아서는 키워 보고 싶었다.
 아쉬운 것은 첫째, 서클이 너무 작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서클을 늘리기는 쉽지만 마지막 서클이 작아 고서클을 만들기 어려워진다.
 ‘모든 서클을 파괴하고 다시 시작하면 가능해. 셀렉터이니 마나 모으는 것엔 천부적이겠지. 내 지도가 있다면 9서클이 가능할지도 몰라.’
 그러나 쉴츠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대륙에 9서클은 그 혼자여야만 하는 건 둘째 치고 적이 될지도 모르는 아이를 키워 줄 순 없다. 그는 배신자를 모두 처단해야 했고, 그들은 제국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밤이 어둑해지고 달이 하늘의 중심을 넘어갈 무렵, 쉴츠가 조용히 일어났다. 주변 학생들은 전날 몬스터를 잡는다고 고생했기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숙소를 나와 미드웨이로 향했다. 구름에 살짝 가려진 달 빛만이 겨우 길을 비추었지만 쉴츠는 익숙한지 빠르게 걸어갔다.
 미드웨이는 무너진 성전 지하에 있다. 과거 흑마법사들이 대우받던 시절에 지어진 어둠의 신전이었는데, 처음엔 흑마법사들이 들켜선 안 될 중요한 것을 감추기 위해 만들었다고 전해졌다. 하지만 미드웨이가 낱낱이 파해쳐지고 몬스터 외엔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몬스터를 가두고 여러 실험을 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듯 시간이 지나면서 몬스터들이 모여들었다. 다만 어둠의 세계 몬스터들도 출몰해 가끔 연구 정신이 투절한 마법사나 귀족이 찾아왔지만, 그들이 얻은 것은 몬스터와의 싸움뿐이었다. 헬사온도 그중 한 명이었다.
 쉴츠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를 생각하며 무너진 신전을 살펴봤다. 좌우에 부서진 커다란 기둥 네 개가 보였고, 중앙에 반쯤 무너진 신전 입구가 있었다. 그리로 들어가자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좌우 두 개가 보였다. 지하에서 하나로 이어지는 계단이기에 바로 왼쪽 계단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계단 중간쯤에 시커먼 액체가 녹아내린 것을 발견했다. 달빛이 가려져 거의 보이지 않아 그게 무엇인지 알 순 없었다.
 쉴츠는 손가락으로 살짝 찍어 코에 가져다 댔다.
 “시궁창 냄새가 나는 것을 보니 어둠의 몬스터가 녹아내린 것이군. 나보다 먼저 온 자가 있어.”
 계단 벽을 자세히 살펴보자 검에 파인 흔적이 몇 개 있고, 한쪽엔 폭발한 흔적도 있었다.
 쉴츠는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먼저 온 자가 누구인지는 뻔하다.
 “5서클 계집이 여길 온 목적은 따로 있었군. 흥!”
 계단을 내려가 몇 개의 문을 통과하자 기다란 복도가 나타났고, 맨 끝에 세 개의 입구가 보였다. 미로의 초입이다.
 쉴츠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중앙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또 복도가 나타났고, 그 끝에 두 개의 입구가 보였다. 쉴츠는 바로 왼쪽으로 향했다.
 그 순간 갑자기 땅이 울렸다.
 쿠르르르르.
 “멍청한 놈들. 미노타우로스를 깨워 버렸군. 고생 좀 하겠어. 크크.”
 헬사온 시절 미로를 완전히 파악했다. 그래서 어디로 가면 몬스터가 없고, 원하는 목적지까지 빠르게 갈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오히려 침입자를 염려해 마법형 몬스터를 더 배치했고, 미로를 변형시켜 놓기도 했다.
 수십 개의 복도와 문을 지나 미로의 끝에 다다르자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맨 끝에 붉은빛을 내는 작은 항아리가 있는데 광장을 밝히고 있었다.
 “역시, 생각대로 봉인이 느슨해져 마나가 흘러넘치는군.”
 항아리로 다가가자 어둠의 마나가 느껴졌다.
 “적어도 50년 동안 모인 마나라 그런지 양이 상당하군. 이것이 몬스터들을 불렀겠지.”
 쉴츠는 손으로 항아리를 잡았다. 그러자 붉은빛이 그의 손을 따라 머리로 이동했다.
 “흥, 어딜!”
 그가 강력한 의지로 밀어내자 붉은빛이 항아리 속으로 들어갔다.
 “의도하지 않게 오래 묵은 다크가쉬를 얻다니, 흐흐흐.”
 흑마법사들은 이런 항아리를 몇 개 가지고 있다. 지하수에서 물이 터져 나오듯 어둠의 마나가 나온다 해서 그것을 다크가쉬라 칭했다. 그 안에는 어둠의 세계 생물이나 곤충 혹은 작은 동물이 봉해져 있는데, 그들이 조금씩 어둠의 마나를 흘려 보냈다. 흑마법사들은 그것으로 몸속에 마나를 쌓았다. 쉴츠는 더 이상 어둠의 마나를 쌓을 일이 없어 이곳에 봉해 둔 것이 약 50년 전 일이었다.
 항아리 아래엔 작은 마법진이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매우 선명했다. 그곳에서 지옥의 조재들이 소환됐고, 다크가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다크가쉬에 더 이상 봉인할 공간이 없자, 소환된 해골 늑대나 케르베로스가 밖으로 나돌아 다니게 된 것이다.
 재빨리 마법진을 지운 후 항아리를 들고 나가려 할 때였다. 광장의 입구가 열렸다.
 “젠장, 들은 말과는 너무 다르잖아!”
 “파인델, 너무 그러지 마. 그래도 무사히 목표 지점에 도착했잖아.”
 중무장한 남자 둘이 들어오며 말했고, 그 뒤로 여섯 명의 남녀가 더 들어왔다.
 “흥! 아레리사 공녀, 아무리 우리가 가문의 편지를 받고 당신을 도와주고 있다지만 알릭과 필립이 죽은 걸 책임져야 할 거요. 그들은 각각 자작 가문의 장자였으니, 당신의 아버지가 공작이라도 귀족 회의 때 불리한 일을 당할 거요.”
 파인델은 표정이 어두운 아레리사 공녀에게 말했다.
 그녀 좌우엔 상처 입은 친위대원이 두 명 있고, 그 뒤로 마법사로 보이는 남녀 두 명이 있었다. 그 외에는 모두 그로잉 캐슬의 검사부 학생들이었다.
 “넌 누구냐!”
 왼팔에 붕대를 감은 남자가 쉴츠를 발견하고 외쳤다.
 “빛이여, 주변을 밝혀라. 라이트.”
 여자 마법사가 손에 든 구슬을 강하게 쥐며 말하자 약하게 빛나던 빛이 강해지며 광장을 환히 밝혔다.
 “에나멜?”
 쉴츠는 마법을 부린 여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다시 가슴이 답답해지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아니, 네놈은 쉴츠 아니냐. 네가 왜 여기 있지?”
 파인델이 쉴츠를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 물건 위험해요. 어서 내려놓으세요.”
 아레리사가 쉴츠의 품에 있는 다크가쉬를 보고 말했다.
 쉴츠는 공녀를 포함해 일행들을 쭉 훑어봤다.
 “뭐야, 카멜도 있군. 가장 실력 좋은 놈들만 모아 온 건가? 단순한 몬스터 토벌이 아닐 것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이게 목적이었나?”
 쉴츠가 다크가쉬를 오른손에 쥐고 내밀었다.
 “쉴츠 네놈이 어떻게 여기 있는지 모르지만 좋은 말 할 때 그걸 내놓지.”
 파인델이 검을 들고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잠시만. 저자가 혼자 몸으로 어떻게 우리보다 먼저 왔을까요?”
 아레리사가 말했다.
 “흥! 공녀, 대화는 나중에 하자고. 크흐흐.”
 파인델이 쉴츠 앞으로 다섯 보까지 다가갔다. 몬스터의 피에 젖은 그의 갑옷에서 은은한 빛이 났다.
 “올마이티 아머?”
 쉴츠가 말했다.
 “후후후, 지금의 나를 이길 자는 없다. 설사 저 공녀라 할지라도.”
 파인델이 자신 있게 말했다.
 실제로 올마이티 아머를 입은 검사를 웬만해선 마법사도 당해 낼 수 없다. 또한 미로에 들어왔을 때 앞장서 몬스터를 물리친 자가 파인델이기도 했다.
 “크하하하! 스스로의 힘이 아닌 마법 무구에 기댄 힘은 오래가지 못하는 법.”
 쉴츠가 말하며 주변을 살펴봤다.
 “입은 살았군. 네놈이 그 항아리를 들고 여기 있다는 건 흑마법사와 관계가 있다는 뜻이지. 널 죽일 이유는 충분하군. 그냥 죽이고 빼앗으면 되겠어.”
 파인델이 천천히 쉴츠에게 다가갔다.
 ‘젠장! 공녀가 왔을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올마이티 아머를 입은 파인델이라니. 저 뒤의 두 명도 올마이티 아머를 입었군.’
 공녀 친위대 중 한 명과 파인델 뒤에서 검을 쥐고 있는 검사부 학생이 각각 아머를 입고 있었다.
 ‘에나멜과 카멜도 마법 무구로 무장했군. 오랜 시간을 두고 이번 일을 계획했겠어. 그렇지 않고서야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잡아먹을 것 같던 놈들이 같이 올 리가 없지. 지금 내가 싸우는 건 무리다.’
 파인델이 검을 들어 올렸다.
 “잠깐, 파인델!”
 에나멜이 크게 외쳤다.
 “쉴츠, 네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서 그걸 버려. 그것에 영혼이 잠식되면 넌 죽게 되고, 대륙엔 커다란 재앙이 내릴 거야.”
 그녀가 쉴츠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흥! 에나멜 넌 나서지 마라. 네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
 파인델이 그녀에게 코웃음 치며 검을 들어 올렸다.
 “안 돼, 파인델! 그를 죽이지 마!”
 “시끄럽다, 에나멜! 넌 누구 편인 거냐!”
 파인델이 쉴츠에게 달려갔다.
 “땅의 기운이여, 단단해져서 모든 걸 막으리라. 스톤 윌!”
 에나멜이 재빨리 주문과 시동어를 외치자 손에 들린 구슬에서 강력한 빛이 났다. 곧 라이트 마법이 사라지고, 땅에서 사람을 가릴 정도의 벽이 튀어나와 파인델을 막았다.
 “파인델, 다크가쉬를 들고 있는 자를 죽였다간 빠져나온 영혼이 잠식돼. 그럼 우린 목숨 건 싸움을 해야 해.”
 에나멜이 외쳤다.
 “그녀의 말이 맞습니다. 무식하게 힘으로만 해결하려는 놈은 가문을 말아먹기 딱 좋지요.”
 아레리사 공녀가 걸어오며 말했다.
 “쉴츠라고 했지요? 이번 일은 나중에 물을 테니 일단 그걸 내려놓으세요. 그건 당신이 가질 물건이 아닙니다.”
 그녀가 쉴츠의 오른손에 있는 다크가쉬를 바라보며 말했다.
 쉴츠는 어떻게 할지 계속 생각했다.
 과거 헬사온이었다면 다 죽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럴 힘이 없다. 또한 다크가쉬는 쉴츠의 품에서 벗어나는 순간 다시 붉은빛을 낼 것이고, 쉴츠를 제외한 다른 이가 만지면 바로 영혼을 잠식당해 주변 일대가 파멸할 수도 있다. 저들은 절대 이 물건을 감당할 수 없다. 그렇다고 지금 상황을 하나하나 설명하기엔 고위급 흑마법사만 알 수 있는 지식이었기에 그러지도 못했다.
 “흥! 에나멜 네년은 약혼자인 내 편을 드는 것도 모자라 네 가문이 멸망시킨 자까지 편들어 주는 건가? 크크큭, 그래도 옛 약혼자였다 그건가?”
 “파인델, 지금 상황에서 옛 이야기를 꺼낼 시간 없어. 쉴츠, 어서 그걸 내려놔.”
 에나멜이 쉴츠를 바라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잠깐. 에나멜의 가문이 멸망시킨 자를 편들다니?”
 잘 이해하지 못한 쉴츠가 파인델에게 물었다.
 “뭐야, 내 말을 이해 못 하는 거냐? 너 설마 머리가 돈 거냐? 어떻게 네 가문을 멸망시킨 여자의 말을 듣지?”
 파인델이 의아한 듯 말했다.
 “잠깐. 내 가문이 에나멜의 가문에 멸망했다고?”
 “거참, 그걸 정말 잊어버린 거냐? 미쳤군. 자기 가문의 원수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아 있는 거냐? 하긴. 어쩐지 마법 학부에 들어가서 원수의 딸과 어울리더니 기억을 잃었군.”
 쉴츠는 에나멜을 바라봤다. 여전히 가슴이 갑갑하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녀가 살며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게 다가오기에 날 용서한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잠깐. 그러니까 에나멜 네가 내게 했던 미안하다는 말이 그런 뜻이었나?”
 쉴츠는 몇 번 그녀를 만났을 때의 상황이 떠올랐다.
 “이 갑갑한 마음, 두근거리는 마음이 어쭙잖은 사랑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크큭, 크하하하하!”
 쉴츠라는 육체에 남아 있는 감정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애써 무시했다. 자신과는 상관없으니까.
 충격을 받은 쉴츠가 잠시 몸을 휘청거렸다. 그때 육체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디서 태어났으며, 어떻게 자랐고, 가문의 상황과 글로리 브레이크의 율법대로 어떻게 멸망했는지 알게 됐다. 그리고 눈앞의 에나멜과의 관계도 떠올랐다.
 ‘그렇군. 내 아버지와 에나멜의 아버지 사이가 틀어지고 10년 만에 벌어진 영지전, 샤이먼스 자작가의 뒤를 봐준 애슬터 시니컬즈 후작. 잠깐. 애슬터면 나를 배신하고 제국에서 유일하게 올마이티 아머를 만드는 자가 아니던가. 그놈이 뒤에 있었군.’
 쉴츠는 떠오르는 기억을 되찾기 위해 집중했다. 주변에서 뭐라 말을 하고 있지만 전혀 듣지 않았다.
 ‘내 가문의 땅에 있는 탄광 때문이야. 거기서 올마이티 아머 제작에 필수인 미스릴이 발견됐어.’
 쉴츠의 가문인 가멜시안 백작가와 에나멜의 가문인 샤이먼스 자작가는 원래 사이가 좋았다. 서로 영지가 붙어 있어서 교류도 많았다.
 어느 날 가멜시안 백작령에 있는 탄광에서 미스릴이 발견됐다. 백작 가문에선 이를 비밀로 하고 개발했지만, 애슬터 시니컬즈 후작이 이를 알고 장기 계획을 세웠다.
 그 결과 10년 만에 두 가문은 틀어지고, 후작의 지원을 받은 샤이먼스 자작가는 글로리 브레이크의 율법대로 가멜시안 백작가에 영지전을 선포하고 전쟁을 치렀다.
 전쟁은 길지 않았다. 백작가를 도와주려는 세력이 있었음에도 미처 도움을 주지 못했다.
 글로리 브레이크의 율법대로 살아남은 마지막 후손은 쉴츠였다. 이유는 가장 능력이 형편없다는 것이다.
 두 가문이 사이가 좋았을 때부터 같이 뛰어놀던 쉴츠와 에나멜이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자 둘은 멀어졌고, 에나멜은 쉴츠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미스릴 광산을 얻은 애슬터 후작은 샤이먼스 자작가를 등한시했다. 그러자 원래대로라면 백작가가 될 규모와 힘을 가진 샤이먼스 가문이지만 자작가로 남기로 했다. 백작가가 되면 글로리 브레이크 제도를 이용한 백작 가문 급의 자작 가문들이 치고 들어올 것을 생각해서였다.
 ‘내가 왜 이 육체에 들어왔는지 의아했는데 이제 이해가 됐어. 연인에게 배신당한 마음 그리고 가문의 멸망과 복수.’
 쉴츠가 에나멜을 바라봤다.
 “크흐흐흐흐. 크하하하하.”
 모든 게 기억나자 갑갑한 가슴과 두근거리는 심장이 배신자를 눈앞에 둔 육체의 발버둥이라는 걸 알았다.
 헬사온의 기억도 떠올랐다. 그가 개발한 올마이티 아머 중 가장 좋은 것을 친구이자 동료들에게 보급했다. 그것이 자신의 가슴을 찌르는 검이 되어 돌아왔다.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해 제국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었던 밑거름이지만 결국은 헬사온의 가슴을 후벼 팠다. 황제가 헬사온을 두려워해서 꾸민 짓이다.
 헬사온이 가진 걸 동료와 친구들, 그가 키우던 제자들이 서로 나눠 가졌다. 그리고 황제는 왕권을 강화하게 위해 귀족들 간의 분쟁을 이끌 글로리 브레이크 제도를 만들었다. 귀족들은 대부분 찬성했다. 하위 귀족은 힘만 기르면 쉽게 상위 귀족이 될 수 있고, 상위 귀족은 하위 귀족을 잡아먹을 명분을 만들어 주는 제도였으니까.
 모든 기억이 돌아오고, 모든 상황을 알게 된 쉴츠는 가슴에 분노의 불길이 일었다. 육체의 분노와 헬사온의 분오가 서로 합쳐져 더욱더 큰 불길이 되었다.
 “크하하하하하!”
 쉴츠의 웃음 속에 분노와 노여움이 가득했다. 웃고 있지만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얼굴이었다. 하지만 웃고 있었다.
 “이놈 갑자기 왜 이래?”
 파인델이 말했다.
 “쉬, 쉴츠.”
 에나멜이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봤다.
 “으하하하하하! 가증스러운 것들, 하찮은 것들. 감히 날 대적하다니.”
 쉴츠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그의 정신이 혼란스러워지자 다크가쉬가 은은한 붉은빛을 발했다.
 “어서, 저자에게서 다크가쉬를 떼어 내세요!”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아레리사가 깜짝 놀라며 외쳤다.
 “그 팔을 잘라 주지.”
 파인델이 빠르게 검을 휘두르며 다가왔다.
 그때 쉴츠의 몸이 순식간에 붉은 기운에 휩싸였고, 곧 정수리로 모여들더니 이내 사라졌다. 다크가쉬 안에 봉인된 수많은 존재 중 가장 강한 자가 쉴츠의 몸에 완전히 깃든 것이다.
 “크아아아아아!”
 쉴츠가 고함지르자 주변으로 어둠의 마나가 퍼져 나갔다.
 “죽어랏! 하압!”
 파인델의 갑주에서 은은한 빛이 나더니 그의 힘을 강하고 빠르게 만들었다.
 촤악!
 그의 검이 긴 궤적을 남기며 쉴츠의 오른쪽 어깨를 자르려 했다.
 카앙!
 어느새 쉴츠의 몸은 쇠처럼 단단해졌다.
 “젠장, 이놈 왜 이래!”
 파인델이 얼얼한 손을 쥐며 뒤로 물러났다.
 “큰일이야. 다크가쉬에게 잠식당했어. 케스파, 부탁해요.”
 “네, 공녀님.”
 아레리사 공녀의 말에 케스파가 앞으로 나섰다.
 그가 입은 올마이티 아머에서도 은은한 빛이 났다. 하지만 파인델과 다르게 그 빛은 검으로 흘러들어 갔다. 곧 오러가 검 주변을 둘렀다.
 “하압!”
 케스파가 빠르게 돌진하며 검을 휘둘렀다. 어두운 주변이 오러의 빛으로 환해졌다.
 눈이 검의 궤적을 따라가려 했으나 어느새 검은 저 멀리 움직인 후였다.
 촤악!
 케스파의 검이 정확히 쉴츠의 목을 베었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그런데 어느새 사라진 쉴츠의 몸이 뒤에서 나타났다.
 “크크크크큭.”
 쉴츠가 음흉하게 웃으며 왼손을 내밀자 검은 구름이 형성되며 주변에 퍼졌다.
 “포이즌 포그. 모두 물러서세요!”
 아레리사 공녀가 외쳤다.
 “흥, 마법사는 마법을 부릴 때가 가장 취약한 법.”
 파인델이 이때를 노리고 빠르게 돌진했다. 하지만 그의 검에는 케스파처럼 오러가 없었다.
 “하아압!”
 그가 고함을 지르자 올마이티 아머에서 붉은빛이 생성되어 검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오러 대신 붉게 타오르는 불이 그의 검을 감쌌다.
 파이어 블레이드, 마법검이 되어 쉴츠의 몸을 공격해 갔다.
 화르륵!
 불꽃이 검은 안개를 소멸시켰다. 그 안에 있던 독이 불의 뜨거운 기운에 타들어 갔다.
 “크크크큭, 멍청한 놈.”
 쉴츠가 작게 말하며 입을 크게 벌렸다.
 쏴아아!
 드래곤의 브레스만큼은 아니지만 뜨거운 불기둥이 쏘아져 나와 파인델의 몸을 덮쳤다.
 “크아아아악!”
 파인델이 고함지르며 땅바닥을 굴렀다. 올마이티 아머가 제아무리 모든 마법 공격을 방어한다지만 노출된 얼굴과 목, 양팔과 다리가 빠르게 타들어 갔다. 그리고 갑옷이 붉게 달궈지더니 살에 눌어붙어 파인델의 피부를 녹였다. 올마이티 아머였지만 뜨거운 기운엔 취약한 하급이었다.
 케스파가 빠르게 달려들어 불기둥을 회수하는 쉴츠의 입에 오러를 감싼 검을 찔러 넣었다.
 “카악!”
 쉴츠가 뒤로 물러나며 입에서 피를 흘렸다.
 “……하여 빛을 밝히리니, 어둠을 속박하리라. 홀리 라이트!”
 아레리사가 아까부터 외우던 주문을 완성하고 시동어를 외쳤다. 그러자 성스러운 빛이 나타나 쉴츠의 몸을 감쌌다.
 “케스파, 이것으로 가슴을 찔러.”
 아레리사가 단검을 던졌다. 검신에 마법 문자가 가득 적혀 있고 손잡이가 투명했다. 안에는 흰색 액체가 담겨 있었다. 다크가쉬에 점령당한 사람을 대비해 제작된 단검이었다.
 케스파가 쉴츠에게 돌진하며 가슴에 단검을 박았다.
 “크아아악!”
 쉴츠는 입을 크게 벌리고 고함을 질렀다.
 단검이 폭발했다. 손잡이에 있던 흰색 액체가 쉴츠의 가슴을 적셨고, 일부는 상처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붉은 기운이 입에서 빠져나왔다.
 “다크가쉬를 깨트려!”
 아레리사가 외쳤다.
 붉은 기운이 다크가쉬로 들어가려 할 때 케스파가 검을 휘둘러 다크가쉬를 깨트렸다. 갈 곳을 잃은 기운이 허공을 떠돌다가 가까이 있는 케스파에게 다가가려 했다.
 “흥, 어딜! 어둠을 정화하리라. 스피시!”
 아레리사가 품에서 흰색 가죽으로 만든 책을 꺼내며 짧은 주문과 시동어를 외쳤다.
 쏴아아!
 책에서 밝은 빛이 쏟아져 나와 붉은 기운을 감쌌다. 그러자 떠오르는 햇빛에 아침 안개가 사라지듯, 기운이 사라졌다.
 쿵!
 쉴츠가 넘어졌다. 단검에 찔린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쉴츠!”
 에나멜이 다가가 그의 몸을 돌아눕혀 가슴이 위로 향하게 했다. 그때 그녀의 오른쪽에 사지와 얼굴이 다 타 버리고 몸뚱이만 남은 파인델의 시체가 보였다.
 다크가쉬가 깨지자 붉은 기운이 여럿 나타났다. 아레리사가 같은 방법으로 모두 소멸시켰다.
 “케스파, 이자를 데리고 나가세요. 나머지 사람들은 파인델의 시체를 가지고 가세요.”
 “공녀님, 전 친위대입니다. 공녀님 곁을 지키겠습니다.”
 아레리사의 말이 끝나자 케스파가 말했다.
 “괜찮아요. 이제 이곳은 위험하지 않습니다. 전 조사해 볼 것이 남아 있으니 먼저 움직이세요. 특히 쉴츠 저자가 아직 죽지 않았으니 빨리 가서 치료하세요.”
 그녀의 말에 사람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지하 미로에 들어오며 표시를 해 놨기에 나가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혼자 남은 아레리사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구석에서 작은 궤짝을 발견했다. 기쁜 마음에 열어 보니 안에서 두 권의 책과 작은 주머니가 있었다.
 주머니 안에는 음식으로 추정되는 것이 들어 있었지만 다 썩어서 정확히 구별할 수 없었다.
 아레리사는 들뜬 마음으로 책을 훑어봤다. 한 권은 미지의 대륙 ‘알카모어 여행기’라는 소설책이었고, 다른 한 권은 이해하기 힘든 문자와 도형 그리고 여러 사물의 그림으로 이뤄진 연구서 같았다.
 “이건 미완성된 헬사온의 3세대 올마이티 아머 연구일지야!”
 그녀는 빠르게 책을 읽어 내려갔다. 중간에 모르는 문자가 있어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런 곳에 그분의 마법 연구서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지. 그래도 이거라도 건졌으니 다행이야.”
 그녀의 얼굴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실내를 좀 더 뒤져 보자 벽 뒤에 공간이 있는 걸 발견했다. 바로 벽을 부수니 책상 하나와 책장이 나타났다.
 기쁜 마음에 재빨리 달려가 책을 모두 살펴봤다. 하지만 흔히 구할 수 있는 책들뿐이었다.
 “이곳이 그분의 마지막 던전이니 더 이상 얻을 건 없겠네. 스승님이 원하시는 책은 결국 얻지 못하는 건가…….”
 아레리사는 부숴진 벽을 나왔다. 미련이 남는지 고개를 돌려 책장을 바라봤다.
 “8서클 마법서는 헬사온 그분과 함께 사라진 것인가.”
 아레리사의 마법 스승은 가이테스 제국의 궁정 마법사 바이올렛 울파스 후작이다. 그녀는 여자의 몸으로 후작의 작위를 얻었고, 마법에 전념하느라 결혼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아레리사를 자식처럼 키웠다.
 그녀는 대륙에 두 명밖에 없다는 7서클 마스터 중 한 명인데, 8서클로 올라갈 지식이 없어 오르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그래서 헬사온이 가졌다는 대륙 유일의 8서클 마법서를 찾는 데 10년 이상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또 다른 7서클 마스터는 가이테스 제국의 사일렌 애펄스 후작이다. 그는 헬사온이 남긴 마법 관련 서적을 가장 많이 모은 자이기도 했다.
 아레리사는 미련을 버리고 실내를 빠져나왔다.
 
 다음 날 아침, 몬스터 토벌을 하겠다고 나선 그로잉 캐슬 학생들과 아레리사 일행은 마지막으로 주변을 돌아보며 남은 몬스터를 처치하고 임무를 마쳤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밤에 있었던 일을 알지 못했다.
 
 “뭐라? 알릭과 필립도 모자라 파인델까지 죽었다고? 크으, 그는 백작 가문의 아들이야.”
 그로잉 캐슬의 학장 하우작 백작이 깜짝 놀랐다.
 “네, 다크가쉬에 있던 어둠의 존재에 감염된 동료의 손에 죽었답니다.”
 아침마다 결재할 보고서를 들고 오는 집사가 말했다.
 “아레리사 공녀가 있지 않았더냐!”
 “그게, 애들이 돌아와야 정확히 알 것 같지만 쉴츠가 그 안에 있었답니다.”
 “쉴츠, 그 아이가 왜 거기 있지?”
 집사의 말에 학장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 쉴츠의 손에 파인델이 죽었답니다.”
 “뭣이!”
 학장이 아까보다 더 크게 놀랐다.
 
 파인델의 죽음은 그로잉 캐슬 전체에 퍼졌다. 하지만 모두 크게 놀라기만 할 뿐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몬스터 토벌한다고 죽은 이가 파인델만 있는 건 아니었다. 총 여섯 명이 죽었고, 한두 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중 알릭과 필립, 파인델이 미드웨이에서 죽었으나 그 사실을 아는 자는 극히 드물었다.
 
 알카페 스웨트 백작, 그는 파인델의 아버지다. 평소 근엄하고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만 보이며, 제국에서 소드 익스퍼드 상급에 달하는 검술로 유명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땅에 놓인 올마이티 아머를 보자 넋을 잃은 사람처럼 입을 벌리고 눈의 초점이 흐려졌다.
 아머의 양어깨 사이에 있어야 할 곳엔 타다 만 해골이 있고, 팔과 다리는 전부 타 버려 아예 없었다.
 알카페 스웨트 백작이 손가락으로 아머의 옆구리 아래쪽을 살짝 문대자 그슬림이 벗겨졌다. 거기엔 파인델 스웨트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쉴츠라고 했더냐.”
 낮은 목소리, 하지만 목이 메어 쉰 소리처럼 들렸다.
 “아레리사 공녀의 말에 따르면 사고라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다크가쉬 안에는 사람의 몸에 들어가 마음대로 조종…….”
 “쉴츠라고 했더냐!”
 백작이 크게 소리치며 집사의 말을 끊었다.
 “아, 네! 그, 그렇습니다. 글로리 브레이크의 율법대로 살아남은 가멜시안가의 둘째입니다.”
 “알았다.”
 백작이 작게 말한 후 바닥에 놓인 올마이티 아머를 바라봤다. 바람이 열린 창문으로 들어와 백작의 옷가지를 흔들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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