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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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난유세 1권-1

2015.01.09 조회 470 추천 3


 序
 
 지난 백 년간 강호에서 가장 큰 혈겁(血劫)은 무엇인가?
 모두 다르게 생긴 사람들이, 역시 다르게 생긴 입을 열어 하는 말은 한결같다.
 무혼지겁(武魂之劫)!
 한 명의 광인(狂人)으로 인해 강호에 군림하던 열 명의 절대자가 쓰러지면서 발생한 미증유(未曾有)의 겁난을 칭함이었다.
 만일 그때 현재 오성(五聖)이라 불리는 기재들이 때맞추어 강호에 출현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강호는 어떻게 되었을까?
 강호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하다 저절로 일어나는 몸서리에 밤잠을 설친 적이 있을 것이다.
 광무혼(廣武魂)!
 혈겁(血劫)의 주인공이며 강호 십대마인(十大魔人)의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
 무혼지겁은 오성이 그를 죽임으로써 막을 내렸지만,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를 생각하며 몸서리치는 사람이 많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벌써 무혼지겁을 십여 년이 넘은 옛일로 기억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 피의 역사가 반복되지 말란 법은 어디에도 없지 않는가?
 지금 강호는 지극히 조용하지만, 어딘가에서 새로운 겁난의 싹이 자라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바로 그대의 옆에서도……
 
 노인과 중년인.
 그들은 벌써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때로는 반대하고, 때로는 무릎을 치며 찬성한 끝에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한 것 같았다.
 “어쨌든 힘든 시간이었네.”
 노인은 탁자 위에 산더미같이 쌓인 기록들을 보면서 말했다.
 그는 무척 깊은 감회를 느끼는 듯했다.
 하지만 중년인의 감회는 그보다 더한 것 같았다.
 “처음엔 불가능해 보였는데…… 결국은 이루어지는군요.”
 “그래…… 이젠 이 내용을 하나로 모으는 일만 남았네그려.”
 무언가에 대한 기록으로 빽빽하게 쓰여진 종이들을 쓰다듬으며 노인이 말했다.
 “문제는 그 작업을 벌일 공간이지.”
 “그자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필요하겠군요.”
 “그래, 그 문제만 해결되면 일 년 정도면 충분히 책으로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네.”
 “혹 염두에 두고 계시는 곳이 있으십니까?”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숨는 장소는 나에게 맡기고 자넨 자네가 맡은 바를 충실히 행하게.”
 중년인은 묵묵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지금의 그로서는 이것이 가장 절실한 긍정의 몸짓이었다.
 “믿네. 자넨 능력이 있으니……”
 노인의 몸은 이제 막 문을 돌아 사라져 버릴 듯했다.
 중년인이 급히 물었다.
 “그런데 어디에 숨으실 생각이십니까?”
 노인은 웃었다.
 웃으며 말없이 등잔불을 바라보았다. 불꽃이 피어나는 바로 아래쪽에 묘한 음영이 생겨나 있었다.
 “일 년은 넘기지 않을 것을 약속하겠네.”
 그리고 노인은 완전히 사라졌다.
 등잔 밑.
 노인이 방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시선을 준 곳이었다.
 
 1․
 총관 황무와 흑령방주 고황
 
 「비밀스럽게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우선 다른 일을 크게 벌여라.
 큰일에 감추어진 작은 일은 보이지 않는 법이므로.」
 만박의 말 중에서`……
 
 이른 봄의 새벽!
  겨울의 한기가 마지막 몸부림을 치는 시간이었다.
 바람이 제법 쌀쌀한데도 창문을 모두 열어 둔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한 사내가 보였다.
 턱 주위를 덮은 수염과 구레나룻 때문에 실제 나이보다 들어 보이는 얼굴! 왼쪽 눈썹 옆으로 흐릿하게 남겨져 있는 검흔(劍痕)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수염을 모두 제거한다면 서른두 살 먹은 사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내를 본 사람은 누구나 그가 고집스런 눈빛을 하고 있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사실은 눈빛뿐 아니라 실제 심성도 마찬가지였다.
 오죽하면 서원의 원주인 만박(萬博)이 실종된 지 벌써 일 년이 지났건만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겠는가?
 
 ─`그는 나의 벗이지만 우상이기도 하오. 그는 결코 남에게 납치당할 사람이 아님을 난 믿고 있소.
 
 사내의 이런 주장은 만박에 대한 그의 믿음이기도 했지만, 또한 자신의 신념에 대한 고집이기도 했다.
 어쨌든 만박이 사라진 일 년 동안 춘추서원(春秋書院)이 큰 동요 없이 강호에서 버텨 온 배후에는 그의 공헌이 가장 컸다.
 그리고 오늘 그가 도(刀)의 날에 기름을 칠하는 이유도 춘추서원을 위한 그의 공헌을 하나 더 늘리는 데 있었다.
 
 오른손에 힘있게 잡힌 참마도(斬魔刀)는 그의 신분을 뜻했다.
 철담마도(鐵膽魔刀) 황무(黃武)!
 춘추서원의 총관! 그러나 그의 임무 대부분은 강호의 무력(武力)이 춘추서원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었다.
 그가 앉은 의자 옆에는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 누르스름한 봉서 하나가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으나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했다.
 황무는 한 가지 일을 시작하면, 그 일이 끝나기 전까진 다른 일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봉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하인이 봉서를 전하고 갔지만, 황무는 겉봉조차 읽어 보지 않은 채 탁자 위에 던져 버렸다.
 자신의 이름이 겉봉에 쓰여진 봉서를 받으면 궁금증에서라도 읽어 보련만, 황무의 경우는 확실히 달랐다.
 한참 동안 정성들여 기름칠한 황무는 도를 도집에 넣은 뒤 몸을 일으켰다.
 “시간이 되었군. 기다리거라, 고황(高荒)!”
 외모만큼이나 딱딱한 말만 남긴 채 황무는 방을 나섰다.
 
 * * *
 
 하인들은 보통 아침과 점심 사이와 저녁과 취침 시간 사이에 잠깐씩 들어와 황무의 방을 소제(掃除)한다.
 하지만 하인은 오늘, 점심 시간이 지나서야 황무의 방에 들어왔다.
 총관이 일이 있어 서원을 비웠음을 알기 때문이다.
 두 번의 청소를 한 번으로 끝내려는 생각!
 하인은 먼지를 털고 바닥에 떨어진 먼지를 쓸어 내다가 문득 탁자 위에 놓인 봉서를 보았다.
 “아직도 보지 않으셨네.”
 그는 중얼거리면서 봉서를 들었다.
 ‘황무 친전’이라 쓰여진 겉봉은 손을 댄 흔적조차 없었다.
 하인은 피식 웃었다.
 과연 황무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봉서를 다시 탁자 위에 놓으려 할 때 돌연 방문 앞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 시간에 네가 총관의 거처에서 무얼 하고 있느냐?”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힘이 있었다.
 단심서생(丹心書生) 최오(崔五).
 춘추서원의 부총관으로, 황무가 총관이면서도 무력과 관련되는 일을 주로 처리하고 있어, 부총관인 최오가 총관이 해야 할 나머지 일들을 모두 도맡고 있는 것이 실정이었다.
 하인은 깜짝 놀라 봉서를 손에서 놓쳐 버렸다.
 특별히 죄를 지은 것은 아니었으나, 두 번의 청소를 한 번으로 대신하려는 자신의 의도가 들킨 것 같아 불안했기 때문이다.
 하인이 대답을 않고 슬그머니 손에 든 봉서만 탁자 위에 내려놓자 최오는 다시 물었다.
 “그 봉서는 무엇이냐? 총관께 전해진 것이냐?”
 “그렇습니다요, 나으리.”
 최오의 눈빛이 약간 강해졌다.
 총관에게 전해진 봉서를 일개 하인이 들었다 내려놓은 행위는 확실히 수상했기 때문이다.
 “감히 네가 총관에게 전해지는 글을 보았단 말이더냐?”
 다분히 문책하는 어투였다.
 상황이 이리 되면 하인으로서는 서둘러 변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닙니다요. 제가 직접 전해 드린 봉서이온데, 총관께서 읽지 않으신 채 출타하셔서 그저 겉봉만 한번 슬쩍 본 것뿐입니다요. 용서하십시오.”
 최오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서원에 들어오는 모든 서신은 부총관인 자신을 통해 전달되고 있었다. 한데 총관에게 직접 전해진 서신이 있었다니……
 “봉서는 언제 온 것이냐?”
 “새벽녘입니다요. 해가 채 뜨기도 전에, 헤헤, 제가 전원(前園)을 쓸러 나갔을 때 복면을 한 사람이 나타나서…… 꼭 총관께 직접 전하라면서……”
 은자 두 냥을 받았다는 말은 생략하는 하인이었다.
 평소의 최오라면 말꼬리를 흐리는 하인의 태도에서 이상한 기미를 눈치챌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다른 생각에 잠겨 있어 그 점은 무시해 버리고 말았다.
 “복면인이라…… 외부인이 침입했었단 말이냐?”
 “절대 아닙니다요. 절 밖으로 불러 내서…… 봉서만 제게 전한 뒤, 그는 바로 떠났는뎁쇼. 그래서…… 보고드리지 않았사온데…… 용서해 주십시오, 나으리.”
 최오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봉서 쪽으로 손을 뻗었다.
 겉봉을 살펴본 그는 다시 하인에게 물었다.
 “총관께서는 언제쯤 흑령방(黑靈幇)으로 향하셨느냐?”
 “묘시경이었습니다요. 언제나처럼 굳은 표정으로 참마도(斬魔刀)를 굳게 움켜쥐고 나가셨습니다.”
 최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봉서를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그분답구나. 일단 임무를 맡으면 그 일이 끝나기 전까지 다른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점이…… 언제 돌아오신다 하시더냐?”
 “저, 저로서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요.”
 문득 최오는 피식 웃었다.
 봉서를 살피느라고 하인으로서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했던 자신의 실태(實態) 때문이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자신이 움직이는 시간을 보고할 리가 없지 않겠는가?
 질문은 항상 대답하는 상대방의 위치를 염두에 둬야만 한다.
 “이 봉서 말이다, 복면인이 전해 주면서 무슨 이상한 기미는 없었느냐?”
 “무슨 말씀이십니까요?”
 “혹시 서두르거나 초조해 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나 말이다.”
 하인은 한참 생각하더니 무릎을 치면서 말했다.
 “아아, 그러고 보니 자꾸만 뒤를 힐끔거리면서…… 맞습니다요! 은자 두 냥도 서둘러, 던지듯 건네 주고는…… 흡!”
 하인은 자신이 실언했음을 깨닫고 안색이 변했다.
 놀라서 최오를 바라보니 다행히 그는 자신이 돈을 받고 심부름을 했다는 사실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하인은 최오의 눈치를 살폈다.
 상당한 시간 동안 최오는 뭔가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윽고 하인에게 물었다.
 “흑령방주 고황은 결코 만만한 자가 아니다. 그렇지 않느냐?”
 “그, 그렇습니다만……”
 “실력이 있으니 감히 우리 서원의 사학사(史學士) 한 명을 죽였겠지.”
 “그, 그것은 저는 잘……”
 “총관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빨리 돌아오실 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
 “……”
 하인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했건만, 최오는 계속해서 질문을 퍼부어 댔다. 그 질문은 모두 하인으로서는 대답하기 힘든 질문들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최오의 말투는 질문이 아니라 자신에게 던지는 일종의 확인 절차였다.
 그렇게 몇 번 혼자말인 양 중얼거리던 최오는 왼손을 들어 오른손에 들린 봉서를 함께 잡았다.
 부욱!
 “그, 그러시면…… 그건 총관의……”
 하인이 말릴 새도 없이 봉서는 찢겨졌다.
 봉서의 안에 든 서신을 읽어 가는 최오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하인을 보며 말했다.
 “서원의 연락망을 총동원해서 총관에게 연락을 취하라. 마침 우방(友邦)인, 소림의 대지(大智)와 무당의 창허(蒼虛)가 서원에 계시니 그들에게도 연락을 전하라.”
 과연 서신의 내용은 무엇인가……?
 
 흑령방이 많은 부(富)를 축적하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강호에 아주 많았다. 그 부의 대부분은 전(前)방주였던 고창(高
 創)에 의해 형성되었음도 세인(世人)들은 알고 있다.
 하지만 고창이 형성했던 부를 훨씬 능가하는 재보와 전답을 현방주인 고황(高荒)이 모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선부(先父)와는 달리 고황은 치부(致富)를 비밀리에 수행했기 때문이다.
 고창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나이 서른둘에 흑령방의 방주 직위를 물려받았던 고황도 이제 사십을 넘기고 있었다.
 
 깡마른 체형에 눈빛이 매서운 사내.
 젊은 나이로 방주에 취임한 이래, 오직 한 가지 일에만 매달렸던 자.
 흑령방주 고황은 지금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남에게 알리지 말아야 한다. 돈없는 자들은 질시하기를 좋아하거든. 얼마를 벌건 남이 모른다면, 흐흠, 부러워하는 자도 없겠지.”
 고황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책장을 넘겼다.
 각지에 흩어진 자신의 비밀 기업에 대한 금전적 상태가 새겨진 장부였다.
 기루와 주루, 그리고 포목상 등등.
 그 중에서 가장 많은 수입을 걷어들이는 건 뭐니뭐니 해도 고리대금업을 주로 하는 전장(錢莊)이었다.
 전장의 돈줄은 도박장이었다.
 돈을 잃어 눈이 뒤집힌 자들에게 고리로 돈을 빌려 주고는 주먹으로 걷어들이면 이익이 쏠쏠했다.
 “역시 현금 장사다. 기루도 꽤 짭짤하지만 밑천이 많이 든단 말씀이야.”
 만족스런 미소를 짓던 고황은 장부 사이에서 한 장의 서찰을 발견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아직 남아 있었나?”
 
 <절심산(切心散)에 대해 아시는지요. 모르신다면 오천 냥을 제게 주시길 바랍니다.>
 
 그는 서찰을 보내 왔던 구(具)씨 성을 가진 서생 놈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춘추서원 소속의 사학사(史學士)라 밝힌 구(具)는 지금은 물론 세상에 없다.
 과로로 인한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고황과 만난 지 불과 나흘 만의 일이었다.
 고황의 오른손이 위로 슬쩍 들리나 했더니 서찰은 곧 한 줄기의 먼지로 변해 사라졌다.
 고황은 장부를 덮고 몸을 뒤로 기댔다.
 의자의 폭신함이 전신을 안락하게 감싸 왔다.
 고황은 구(具)를 만났을 때의 일을 찬찬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 * *
 
 “참 비옥한 땅이로군요.”
 갓서른에 접어든 듯한 얼굴의 구(具)는 그렇게 어두(語頭)를 열었다. 고황은 그가 보냈던 서찰을 이미 본 후였으므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선친(先親)께선 한때 이 땅을 원주인에게 되돌려주셨던 적이 있었지요? 무상(無償)으로 말입니다.”
 고황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소. 하지만 내가 곧 되돌려 받았지. 선부는 당시 임종이 가까웠던 탓에 제정신이 아니셨소.”
 고황의 아버지 고창이 일 년만 더 살아 있었더라면 흑령방의 재산이라곤 정원에 뒹구는 돌멩이들뿐이었으리라.
 고황의 말에 구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임종에 가까워서라니요? 선친께선 돌연사(突然死)하시지 않으셨던가요?”
 “그렇게 알려졌지만 이전부터 징조가 있으셨소. 피와 땀으로 모은 재물을 그처럼 마구 풀어 버렸던 것도 좋은 예가 아니겠소?”
 짜증이 섞인 목소리였을 것이다. 고황은 항상 선친의 죽음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얼굴색이 약간, 아주 약간 변하곤 하므로.
 “당신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요?”
 고황의 말에 구는 기분 나쁘게 웃었다.
 어쩐지 비웃는 듯한 웃음이었다.
 웅장하고 화려한 흑령방의 건물들을 보면서 구는 뭔가 흑심이 깃들인 웃음을 지었다.
 “건물들이 모두 크고 웅장합니다. 지을 때도 그랬겠지만 유지하기에도 많은 돈이 들겠군요.”
 “내게는 능력이 있소. 충분히 감당할 수 있지.”
 “물론 그러시겠지요. 하지만 선친께서 물려주신 재산이 없었더라도 그게 가능했을까요?”
 구가 비웃듯 말하자 고황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그는 고함을 지르듯 내뱉었다.
 “물론이오! 무혼지겁(武魂之劫)을 넘기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나의 기업이오. 선부가 남기신 재산보다 내가 일구어 낸 재산이 훨씬 많단 말이오.”
 “그런가요? 하긴 무혼지겁 당시 당신의 처세는 본받을 만했지요. 그런데 왜 지금에 와서 이처럼 어리석어졌단 말입니까?”
 “무슨…… 뜻이오?”
 고황은 가까스로 목소리를 진정시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구는 또다시 예의 비웃음을 지어 보였다.
 “선친께서는 참으로 시기 적절하게 돌아가셨지요. 사인(死因)은 아마 심장 마비셨지요?”
 ‘이, 이놈이……!’
 고황은 분노해 몸을 떨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내부가 움직였다. 단전(丹田)에서 뜨거운 기운이 한 줄기 흘러나와 둘로 나뉘더니 양손으로 흘러갔다.
 손바닥이 불에 덴 듯 달아오름을 느끼면서 고황은 말했다.
 “당신은 아는 게 너무 많소. 하지만 세상을 오래 살려면 때론 모르고 넘어가야 하는 일도 있음을 몰랐구려.”
 
 복용한 사람은 누구나 심장이 멈춰 죽게 되지만, 아무리 사인을 철저히 조사하더라도 심장 마비 외의 징후(徵候)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절독이 바로 절심산(切心散)이었다.
 누구라도 이 절심산에 대해서 묻는 자는 고황의 손에 죽어야 했다.
 때문에 고황의 손이 앞으로 움직였다. 구 서생의 머리를 노리고서, 매우 빠르게……
 터져 오르는 피분수는…… 발생하지 않았다.
 웃음. 구 서생의 입가에 매달린 웃음을 본 고황은 손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제게는 믿을 수 있는 친구들이 많지요. 제가 이틀 내에 서원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아시겠습니까?”
 구의 담담한 말에 고황은 힘없이 손을 내리고 신음했다.
 “얼마…… 얼마를 원하는가?”
 “오천 냥, 그 정도면 큰 부담은 아니 되실 것입니다.”
 
 * * *
 
 고황은 칠천 냥을 냈다.
 하지만 구 서생은 그 돈을 써보지도 못했다. 며칠 후 심장 마비를 일으켜 죽었기 때문이다.
 고황의 아버지였던 고창과 똑같은 죽음이었다.
 “사실 남의 피땀을 탐낸다는 건 나쁜 일이지. 심장이 부담을 느낄 만도 하겠지.”
 고황이 그렇게 혼자 중얼거릴 때 왈칵 방문이 열렸다.
 들어오는 사내는 고황의 오른팔인 혈겸(血鎌)이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혈겸은 인사조차 생략하고 급한 어조로 말했다.
 “호연도방(浩然賭房)에 일이 생겼습니다. 한 놈이……”
 고황은 지체없이 몸을 일으켰다.
 
 제정신을 가진 수하가 상전의 방안으로 허겁지겁 들어오는 데는 그렇게 행동할 만한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수하 역시 함부로 주인의 생각을 방해해서는 안 됨을 잘 알고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고황의 침착한 질문은 돋보였다.
 “무공이냐, 아니면 도박술이냐?”
 고황이 일을 처리하는 방법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수하를 문책하기에 앞서 일이 일어난 호연도방으로 서둘러 향하는 것도 그 중의 한 예였다.
 질문은 걸어가는 도중에 한다. 먼저 알아보고 나서 나중에 문책해도 그다지 늦지는 않을 것이므로.
 호연도방은 도박을 하는 곳으로 무림인들이 많이 드나든다.
 당연히 도박으로 돈을 많이 긁어 가는 손님이 있다거나, 무공으로 행패를 부리는 자가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문제가 되지 않겠는가?
 고황의 질문에 혈겸 역시 효과적인 답을 했다.
 “도박입니다. 속임수를 찾아 내지 못해 아직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직’이란 말은 무공에 대한 시험은 하지 않았다는 의미.
 혈겸의 대답에 고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호연도방은 자신이 관할(管轄)하는 도방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였다.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것은 아니냐?”
 “그렇게 보기에는…… 꼭 물주(物主)보다 하나 높은 숫자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고황은 속으로 냉소(冷笑)했다. 오랜만에 자신의 도박 실력을 보일 상대를 만났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도방으로 들어설 때 고황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고수를 만나 설레는 도박꾼의 심정은 결전을 앞둔 무사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고황의 가슴속을 훑고 지나가는 오랜만의 투지. 그 투지에 감염(感染)된 어조로 고황이 물었다.
 “지금까지 놈이 따간 돈은 모두 얼마나 되느냐?”
 “그, 그것이…… 만 이천 냥을 상회(上廻)합니다. 제가 떠나올 때 그 정도였으니, 지금쯤은……”
 고황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하지만 마음속의 투지는 더욱 타올랐다.
 여태껏 자신에게 싸움을 건 자는 많았다. 돈을 따려 든 자도 많았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심지어 살아남지도 못했다.
 끼이잉 열리는 문.
 멀리, 앉아 있는 도박꾼의 모습을 보면서 고황은 냉정한 어조로 외쳤다.
 “이만 냥을 준비하라. 내가 나선다!”
 
 “와아`─ 대단하군, 정말!”
 구경꾼들의 함성은 더욱 커졌다.
 그도 그럴 것이, 호연도방의 물주를 상대로 스물한 번째 연이은 승리를 기록한 사람은 여태껏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일만 오천 냥이나 되는 돈을 따간 사람도 물론 없었다.
 웃음을 띠며 판돈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다 놓는 사내.
 얼굴을 온통 덮고 있는 수염 때문에 정확한 나이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좋군, 오늘은 정말 운이 좋아! 자, 한판 더 해봅시다.”
 사내는 웃으며 이천 냥을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사내 앞에 앉은 물주의 얼굴은 이미 사색에 가까웠다.
 “나, 나는……”
 평소 불패도(不敗賭)라고도 불리던 호연도방 제일의 도박사(賭博士)가 바로 그였다.
 하지만 지금은 손마저 가늘게 떨 정도로 긴장한 상태.
 대답조차 명확히 하지 못하고 자꾸만 문 쪽을 힐끔거리는 모습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수염 가득한 사내가 차게 웃었다.
 “계속할 생각이 없다면 난 이만 일어서겠다.”
 이 말에 화들짝 놀란 불패도는 급히 손을 저었다.
 “아, 아니오. 하겠소이다. 하, 하지만 판돈을 조금 내리는 것이…… 한판에 배, 백 냥 정도를 하시면……”
 사실 판돈은 누가 보기에도 너무 높아져 있었다.
 처음에 닷 냥으로 시작되었던 것이 지금은 삼천 냥을 넘기고 있었던 것이다.
 도박꾼으로서의 필수 조건은 평정심(平定心)이다.
 그러나 너무 많이 잃은 불패도는 사실 더 이상 마음의 안정을 유지할 수 없었고, 도박을 계속할 여력은 더 더욱 없었다.
 꿀꺽 침을 삼키는 불패도. 판돈을 낮추자는 자신의 말에 대한 사내의 반응을 살펴보는 것이다.
 수염사내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정도의 승부밖에 벌이지 못하다니…… 호연도방이란 이름이 정말 실망스럽다.”
 사내는 천천히 돈을 쓸어 자루에 넣었다.
 그리곤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조소의 빛은 점점 짙어 갔다. 적어도 얼음장같은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절대 그렇지 않소. 불패도는 일반인들의 수준에 맞추기 위해 고용된 사람일 뿐이니…… 우리는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겠소.”
 뜻밖의 음성이 정문에서 들려 오자 사람들은 놀라 돌아보았다.
 혈겸이 한 사람을 수행하며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입가에 미소를 가늘게 매단 그는 고황이었다.
 
 * * *
 
 수근거리는 군웅들.
 구경꾼들의 수근거림은 당연했다.
 고황이 직접 나타나는 일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하긴 만 오천 냥이 넘는 돈을 잃었으니……
 어쨌든 소문으로만 전해지던 고황의 주사위 실력을 직접 볼 수 있게 된 군중들의 수근거림은 상당 시간 동안 이어졌다.
 다시 자리에 앉는 수염사내의 입가에도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어렸다.
 처음부터 만나고자 했던 목표가 드디어 나타났기 때문이다.
 
 달그락, 달그락!
 통 안에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주사위.
 “한판에 삼천 냥이라면 상당히 재밌는 도박을 즐길 수가 있는 돈이오.”
 고황은 눈앞에 놓인 육천 냥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각각 삼천 냥씩 내어 육천 냥을 두고 벌이는 한판의 도박은 중인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탁! 탁!
 둘은 동시에 주사위를 탁자 위에 내렸다.
 그 위를 통이 덮고 있으니 숫자는 아무도 몰랐다.
 구경꾼들 틈에서 들리는 마른침 삼키는 소리.
 고황이 말했다.
 “동시에 엽시다. 숫자가 높은 사람이 이기는 것이오.”
 “좋소, 엽시다!”
 둘은 동시에 통을 들어 주사위를 중인들이 보도록 만들었다.
 “아`─`!”
 “와아`─`!”
 중인들은 너나없이 감탄했다.
 각각 세 개의 주사위, 합하여 여섯 개의 주사위는 어느것 하나 예외없이 육(六)을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황은 싱긋 웃었다.
 “동점이로군. 그럼 규칙대로 판돈은 배로 올라가오.”
 망설임없이 고황은 육천 냥의 은하전장(銀河錢莊) 전표를 판돈 안으로 던져 넣었다.
 수염사내의 동작 역시 그보다 조금도 늦지 않았다.
 말없이 은자를 세더니 육천 냥을 던져 넣었다.
 다시 통 안에서 돌아가는 주사위.
 
 달그락! 다다다`─`
 주사위가 통에 부딪히는 소리는 좀 전보다 더욱 빠른 박자로 들려 왔다. 구경꾼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두 도박 고수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돌아가는 손길을 주시했다.
 탁! 탁!
 마침내 두 손이 주사위통을 탁자 위에 놓았다.
 고황은 한 번 더 웃어 보이며 말했다.
 “이번에도 동시에 엽시다. 얼마나 높은 숫자를 만들어 냈는지 궁금하군.”
 그와 수염사내의 손이 치워지자 구경꾼들 사이에서 울려 나오는 감탄성으로 도방 안이 시끄러워졌다.
 “저, 저럴 수가!”
 두 사람이 기록한 숫자는 각각 육십삼 점씩.
 각기 세 개씩 돌린 주사위는 하나도 예외없이 깨어져 일부터 육까지의 숫자를 모두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한 주사위가 이십일 점이란 숫자를 모두 드러내도록 깨뜨리는 도박술은 확실히 감탄의 경지를 넘는 것이었다.
 고황이 얼굴을 굳히더니 말했다.
 “자, 다시 판돈을 두 배로 올립시다.”
 망설임없이 일만 이천 냥에 해당하는 돈을 내놓는 고황이었다.
 수염사내는 표정없는 얼굴로 은자를 세어 보더니 말했다.
 “은자가 모자라는군. 육천다섯 냥뿐이외다.”
 고황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귀하가 도방에서 딴 돈이 일만 오천 냥이니…… 그럼 원래의 밑천은 다섯 냥뿐이었단 말이오?”
 수염사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황은 차갑게 말했다.
 “겨우 다섯 냥으로 나와 도박을 했단 말이오?”
 “그렇지만 내겐 일만 오천 냥이 있었지.”
 “도박으로 딴 돈이질 않소?”
 “그래도 일단 딴 이상 내 돈이니까.”
 고황의 입꼬리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웃음인 듯하지만 사실 매우 화가 났다는 표시였다.
 그는 수염사내가 허리에 차고 있는 칼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칼은 보검이오?”
 “보검은 아니지만 내겐 소중한 물건이지.”
 “보검이 아니라면 소용없소. 아, 그럼 이렇게 합시다. 당신의 도박 실력은 쓸 만하니 내가 그 손을 사겠소. 당신의 오른손을 걸면 모자라는 돈을 내가 보충해 주겠소.”
 수염사내는 굳은 어조로 말했다.
 “내 손이 그 정도의 가치가 있겠소?”
 “당연히 있지. 철담마도의 오른손은 칠천 냥보다도 훨씬 가치가 있소.”
 중인들이 또다시 술렁거렸다.
 춘추서원의 총관, 철담마도 황무!
 총관이라기보단 춘추서원에 적대하는 강호 세력과 싸우는 것이 주임무인 그의 이름은 강호에 상당히 알려져 있었다.
 
 2․
 사람의 손은 두 개
 
 「실수는 용서될 수 없다. 하나, 부지런한 자의 실수는 용서된다.
 때로는 그것을 가장하는 자의 실수 또한.」
 만박의 말 중에서……
 
 수염사내, 황무는 말없이 눈만 끔벅였다.
 한참이 지나 그가 입을 열었다.
 “내 오른팔의 가치는 확실히 칠천 냥을 넘는다 생각되오. 때문에 내 손을 판돈으로 건다면 내가 손해일 것이오.”
 고황은 비웃듯 말했다.
 “당신이 손해 보는 느낌이 든다면 나도 판돈을 더 걸 의향이 있소.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황무는 왼손을 천천히 들어 고황의 목을 가리켰다.
 그 와중에도 오른손은 여전히 참마도(斬魔刀) 주위를 맴돌고 있어 여차하면 도세를 발동할 준비를 갖추었다.
 황무의 왼손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은 고황은 잠시 흠칫했다.
 그러나 곧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하, 당신의 손과 내 목숨을 바꾼다면 이번엔 내가 더 손해가 아니겠소? 역시 불공평한 도박인걸.”
 황무가 지체없이 말을 받았다.
 “나 역시 목숨을 걸지.”
 긴장된 침묵이 흘렀다.
 허공에서 부딪치는 두 강호고수, 두 도박고수들의 시선에 불꽃이 튀는 듯했다.
 고황의 머리가 천천히 아래위로 움직였다.
 “좋소, 나도 걸겠소!”
 
 도박에 걸 수 있는 최고의 판돈은 무엇인가?
 바로 자신의 목숨이다.
 한판으로 생명을 정하는 것이야말로 도박의 끝이 아니겠는가? 도박꾼으로서 생명을 건 도박을 했다면 진정한 한판을 벌였다 자랑해도 좋을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라는 최고의 긴장을 경험하는 도박!
 원래 도박이란 인생을 갉아먹는 것이다.
 때문에 안락한 삶을 오래 유지하고 싶다면 애초부터 도박을 하지 않는 편이 훨씬 좋으리라.
 고황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목숨을 걸었다.
 황무는 처음부터 고황에게 시비를 걸기 위해 이곳에 왔다.
 어렴풋이 그 사실을 짐작한 고황은 목숨을 건 도박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만일 피한다면 상대방은 또 다른 무리한 요구를 해올 것이므로 고황은 도박을 받아들였다.
 그는 새로 가져 온 주사위를 천천히 잡아 가며 말했다.
 “당신의 도는 참마도요. 그런데 혹 당신의 별호에도 ‘마(魔)’자가 들어가지 않소?”
 참마도(斬魔刀)란 마를 베어 버린다는 뜻. 그런데 철담마도(鐵膽魔刀)란 황무의 별호에도 ‘마’ 자가 들어 있으니, 곧 자기 자신을 벨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황무도 그 풍자(諷刺)를 깨달았으련만 안색의 변화가 전혀 없었다.
 그저 주사위를 통에 넣어 천천히 돌리기 시작할 따름.
 고황은 그런 황무의 눈을 쳐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좀 전, 두 판의 도박으로 우린 이미 스스로의 실력을 증명한 바 있소. 원하는 숫자는 무엇이나 만들어 낼 수 있으니 단순히 높은 수를 만들어 내는 승부는 의미가 없소.”
 황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황을 쳐다보기만 했다. 마치 어서 말하라고 재촉하는 듯.
 고황은 속으로 인상을 쓰면서 말을 이었다.
 “때문에 난 두 가지 규칙을 더 넣었으면 하오. 우선 깨어지거나 변형되는 주사위가 있다면 판을 무효로 하자는 것이오.”
 “그 점은 찬성하오.”
 “두 번째 규칙에는 보다 큰 묘미가 있소.”
 
 이때였다.
 돌연 구경꾼들 사이에서 큰 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젠장, 더럽게 말이 많군! 어서 규칙을 말하고 판이나 벌일 것이지! 이 몸께서 술도 마시지 못하고 구경하고 있는 것이 보이질 않소?”
 고황은 눈썹을 꿈틀하며 얼굴을 돌렸다.
 구경꾼들 사이로 때에 절은 옷을 아무렇게나 걸친 거지 하나가 눈에 띄었다.
 고황이 눈짓을 하기도 전에 혈겸이 몸을 날려 그 거지의 멱살을 잡아채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아이쿠! 마, 말로 합시다.”
 거지는 다급하게 외치며 바닥을 뒹굴었다.
 이런 점 때문에 고황은 혈겸을 믿는 것이다.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일처리를 하는 혈겸이기에, 사전에 전갈없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오더라도 화를 내지 않는 것이다.
 “우리 대결이 흥미를 많이 유발시키나 보오. 구걸하던 거지까지 들어와 구경하는 것을 보면 말이오.”
 말하면서 고황은 손을 들어 주사위를 돌리기 시작했다.
 다다다다`─`
 황무 역시 주사위를 돌렸다.
 한참 동안 말없이 주사위만 돌리자, 황무의 눈에 초조한 빛이 일어났다.
 문득 숨을 짧게 내쉰 뒤 황무가 물었다.
 “두 번째 규칙은 언제 말할 것이오?”
 고황은 속으로 은밀하게 웃었다.
 사실 일 대 일의 도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심적인 기선 제압이었다.
 그는 일부러 두 번째 규칙에 대해 말하지 않음으로써 황무의 마음을 초조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때문에 그는 기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 두 번째 규칙의 묘미(妙味) 때문에 우리 도박은 더욱 흥미로워질 것이오.”
 일부러 천천히 말을 돌려서 했다.
 상대방의 마음속에 조급함이 약간이라도 더 만들어지기를 바라면서.
 “세 개의 주사위를 부수지 않고 만들어 낼 수 있는 최고 점수는 십팔 점이오. 그것은 다른 어떤 수도 이길 수 있지. 하지만 난 그 십팔 점을 최저점인 일 점이 이기는 것으로 하길 제안하오.”
 언뜻 듣기에 이 두 번째 규칙은 별것이 아니라 여겨진다.
 하지만 두 사람은 주사위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이 규칙은 묘미를 갖게 된다.
 무조건 높은 사람이 이기도록 한다면 둘 다 십팔 점을 만들어 내 비기게 된다.
 즉 삼육십팔 점은 최소한 비김은 보장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일 점, 즉 한 번에 주사위 세 개를 쌓고 가장 위의 눈을 일로 만들어 십팔 점을 이긴다는 규칙을 적용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만일 최소한 비김을 보장받기 위해 십팔 점을 만든다면 상대의 일 점에 지게 된다.
 하지만 일 점은 다시 십팔 점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점수에게는 패배하고 마는 것이니……
 ‘확실히 이 방법은 절묘하군. 오직 주사위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긴 하지만.’
 황무는 속으로 뇌까렸다.
 주사위는 쉴새없이 통 안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고황은 몇을 만들까?
 열여덟 종류의 숫자 중에서 십팔은 한 가지를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이긴다.
 반면 일은 십팔을 제외한 나머지 숫자에게 모두 지고 만다.
 확률로 따진다면 당연히 십팔을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만일 상대가 일을 만든다면……
 확률이란 결과를 모를 경우에나 적용되는 말이었다.
 만들어 내는 숫자를 정할 수 있다면 확률은 의미를 잃어버린다.
 황무의 등에 땀이 흘러내렸다.
 이 판에 걸린 판돈은 목숨이기 때문이다.
 상대는 이길 경우의 수가 가장 높은 십팔을 만들까?
 그렇다면 자신은 일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만 상대가 십팔이 아닌 다른 수를 만든다면……?
 그때 자신은 십팔을 만들어야만 이기는 것이다.
 다다다다`─`
 주사위는 계속 통 안을 맴돌았다.
 긴장된 두 사람의 목숨도 그 통 안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미루더라도 언젠가는 맞이해야만 하는 순간이 인생에는 존재하는 법이다.
 인생처럼 도박도 한자리에서 맴돌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언젠가는 결판이 나야 하며, 언젠가는 주사위를 멈추어야 한다.
 결국 통은 탁자 위로 내려졌다.
 탁! 탁!
 긴장이 끝간데없이 호연도방 안을 헤집고 다녔다.
 
 “이번에도 통을 우리가 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생각하지 않으시오?”
 고황의 말에 황무는 동의했다.
 “통을 여는 순간 속임수를 쓸 수도 있으니…… 바람직하지 않겠구려. 그럼 어떤 사람을 시켜 통을 열 생각이오?”
 고황은 차갑게 웃으며 혈겸을 불렀다.
 “아까 끌고 나간 거지를 이리로 데려오라.”
 혈겸은 아직도 호연도방 앞을 기웃거리고 있는 거지를 다시 잡아 끌고 들어왔다.
 화려한 탁자 위.
 역시 화려한 모양과 색채를 갖춘 호연도방 특유의 주사위통을 응시하며 서 있는 거지의 모양은 그 모든 것들과 부조화스러웠다.
 “통은 이자로 하여금 열도록 하겠소. 그것이 가장 공평할 것이오.”
 고황의 말에 황무는 다시 한 번 더 동의(同意)했다.
 거지는 손을 가늘게 떨면서 통을 잡았다.
 고황은 자신있는 어조로 말했다.
 “내 것부터 먼저, 가능하면 천천히 열라. 구경하는 사람들이 충분한 긴장감을 맛볼 수 있도록 말이다.”
 마침내 고황의 주사위는 결과를 드러냈다.
 “아`─`!”
 “아니, 저럴 수가`─`!”
 구경꾼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주사위는 세 개가 하나로 쌓여 있었고, 가장 위의 것은 일(一)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가능한 숫자들 중에서 가장 낮은 숫자였다.
 고황은 태연하게 말했다.
 “가장 낮지만 십팔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지. 자, 이제 다른 통을 열어라. 최대한 느리게.”
 고황은 태연했지만 황무는 태연하지 못했다.
 구경꾼들이 보기에 그는 긴장으로 팽팽하게 굳어 있는 듯했다. 이 한판에는 생명이 걸려 있기 때문이었다.
 과연 그의 주사위는 어떤 숫자를 나타내고 있을까?
 
 첫 번째 주사위가 드러나자 중인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켜야 했다.
 너무 천천히 움직여 보는 사람을 감질나게 만드는 거지의 손이 처음 드러낸 주사위는 육(六)을 나타내고 있었다.
 고황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걸린 것이 목숨이므로 당신은 함부로 모험을 할 수 없었을 것이오. 아무리 고민해도 결론은 하나지. 십팔이 모든 숫자 중 가장 높으며 상대방이 일(一)만 아니면 무조건 이길 수 있다는 것. 난 이렇게 목숨을 거는 도박을 수십 번 했지만 상대방의 선택은 언제나 한결같았소.”
 두 번째 주사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육!
 고황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과연 일 점을 만들고도 안심할 수 있을까? 만일 일 점이라면 상대방이 약간의 실수만 하더라도 지게 되오. 대부분의 사람은 목숨을 건 도박에서 상대방이 그렇게 위험한 숫자를 만들 리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지. 하하, 그리고 그것이 내가 노리는 바란 말씀이오. 우린 어떤 숫자든 자유롭게 만들 수 있으니……”
 황무의 안색은 더욱 딱딱해졌다.
 거지 역시 긴장되는지 손의 움직임이 더욱 더뎌졌다.
 심장 뛰는 소리 외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가운데, 마침내 세 번째 주사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 하나 남김없이 감탄음을 내는 구경꾼들.
 황무의 안색은 여전히 딱딱했다.
 그는 표정보다 더욱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목숨을 건 도박은 마침내 판가름이 났군.”
 
 혈겸이 천천히 황무의 뒤로 돌아갔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고황의 입가에 매달려 있던 미소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죽게 된 사람이 웃을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불신의 표정으로 고황은 마지막 주사위를 노려보았다.
 오(五)!
 황무의 숫자는 육, 육, 오의 십칠 점이었다.
 “실수? 아니면……”
 고황의 질문은 흡사 신음 같았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믿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
 황무는 고개를 흔들었다.
 “실수가 아니오. 십팔은 일이 나오지 않으면 일단 지지는 않지. 마찬가지로 십칠도 십팔이 아니라면 일단 지지는 않소. 똑같은 조건이란 말이지.”
 “내가 만일 십팔을 내었다면?”
 “그럴 가능성이 적다 생각했소. 내기하기 전 당신은 십팔과 일에 대해 규칙을 만들었소.”
 황무는 표정의 변화 없이 말을 이었다.
 “두 숫자, 즉 일과 십팔은 은연중에 뇌리에 남아 있게 되지. 선택할 때 당신은 스스로가 만들었던 규칙을 기억하게 될 거요. 당신은 자신도 모르게 두 숫자를 기억할 거요. 둘 중에는 십팔이 지니, 십팔을 피하고 싶어지겠지. 당신은 역의 역을 찔렀지만 내가 다시 그 역을 노리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오.”
 황무의 말대로였다.
 고황은 황무가 십팔이나 일 중 하나를 택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둘 중에서 높은 일을 만들었던 것인데……
 두 번째 주사위가 육을 드러내는 순간까지 고황은 참으로 의기 양양했다.
 그러나 지금은 나락으로 떨어졌으며 목숨마저 잃게 생겼다.
 도박에서 졌으니 곧 상대방에게 줘야 할 것이다.
 고황의 손이 천천히 위로 들려졌다.
 스스로 판돈을 변제하기라도 할 셈인가?
 목숨을 스스로 끊을 작정인가?
 
 고황의 오른손, 흑령장(黑靈掌)을 담은 그 손은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자살하기 위한 움직임은 결코 아니었다.
 꽈앙!
 탁자를 덮친 흑령장은 그것을 산산조각냈다.
 자연 그 위에 놓여 있던 주사위도 부서졌을 것이다.
 놀라 뒤로 마구 물러나는 거지의 모습은 우습기조차 했다.
 고황은 잃었던 웃음을 되찾고 난 후 말했다.
 “이번 판의 묘미는 첫 번째 규칙에도 숨어 있었지.”
 
 ─`깨어지거나 변형되는 주사위가 있으면 판은 무효.
 
 황무의 미간이 좁아졌다.
 “결과에 승복하지 않을 생각이군.”
 “규칙은 규칙 아니겠소? 주사위는 이미 깨어졌으니 이번 판은 무효요.”
 “고황이 도박과 무공에 제법 명성이 있음은 천하가 알고 있지. 하지만 억지 부리는 솜씨는 더욱 절묘하군.”
 황무의 야유에도 고황은 입가의 웃음을 풀지 않았다.
 사실 야유를 많이 받았다고 해서 죽은 사람은 여태껏 아무도 없었으니까.
 “철담마도 황무가 이런 도박 솜씨를 지녔음은 나 역시 미처 몰랐소. 시비를 걸었던 건 당신이 먼저였으니 날 너무 나무라지 마시오.”
 그의 양손이 검게 변했다.
 흑령장이 기운을 더해 가며 양손에 집중되는 모습.
 황무는 곁눈질로 혈겸의 위치를 가늠하면서 차갑게 말했다.
 “불복하고 날 협공할 셈인가?”
 “그렇지는 않소. 당신은 한마디 말 속에 잘못된 지적을 두 가지나 했구려.”
 여전히 흑령장을 돋운 상태로 고황은 고개를 저었다.
 “첫째, 난 협공을 하지 않소. 이곳은 내 도박장이니 난장을 만들 수는 없지 않겠소? 그리고 두 번째로, 불복이란 단어는 날 매우 불쾌하게 만드는구려.”
 한 발 앞으로 나서면서 고황은 말을 이었다.
 그가 움직이자 바닥에 새겨진 발자국 하나가 뚜렷하게 나타났는데, 그것은 그의 내공이 고강함을 말해 주는 표시였다.
 앞으로 나선 행동은 공격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무언중의 시위였다. 나의 힘이 이러하니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뜻의……
 “주사위가 깨어졌으니 규칙에 따라 판이 무효가 된 것뿐이오. 판이 무효니 당연히 승부 역시 비긴 셈이지.”
 황무는 오른손에 잡은 참마도의 손잡이를 힘있게 움켜쥐었다.
 
 많은 사람들이 흥미 진진한 눈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에게는 지금의 상황이 결코 안심하고 구경이나 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싸움이 일어나면 무공이 없는 자들은 크게 다치리라.
 슬금슬금 밖으로 피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남아서 구경을 즐기는 사람은 크게 두 부류였다.
 다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들과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
 눈을 끔벅이며 황무와 고황을 번갈아 바라보는 거지는 둘 중 어디에 속할까?
 호기심이 목숨을 걸 만큼 중요하다는 말인가?
 거지는 단순히 상황을 쳐다보는 정도에서 벗어나 천천히 그 상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손에는 어느 틈에 구했는지 술병 하나가 들려 있었고, 그 병에 든 술을 마시는 거지의 표정은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일촉즉발의 긴장이 감도는 장내!
 고황은 비록 싸움이 없을 것이라 말했으나, 그 말은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황무의 손에 들린 도에서도 점점 도기(刀氣)가 강하게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거지가 상황이 그러함을 알지 못하는 듯 둘 사이에 끼여들었다.
 살기가 미친 듯 일어나는 순간, 거지의 입이 열렸다.
 “이쪽 분에게 물어 볼 말이 있소.”
 
 의외의 상황에 접하면 살기가 감소한다.
 황무의 살기가 약해졌고 그 점은 고황이 더욱 심했다.
 거지는 고황을 가리키며 말했었으니까.
 고황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말이냐?”
 “주사위가 깨져서 판이 무효가 되었다고 말했는데……”
 거지는 술을 한 모금 더 들이키더니 말을 이었다.
 “만일 판이 무효가 아니었다면 판돈을 내어 놓을 의향이 있으셨소?”
 “물론이다. 나 고황은 약속을 지킨다.”
 이것은 다분히 진실되지 못한 말이었지만 고황은 자신있게 말했다.
 이미 깨어진 주사위!
 그런데 그 여섯 개의 주사위가 거지의 오른쪽 소매 안에서 떼구르르 굴러 나올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바닥에 놓인 주사위는 호연도방 특유의 무늬를 갖고 있었다.
 고황의 얼굴이 가면을 뒤집어쓴 듯 딱딱하게 굳어질 때 거지는 매우 통쾌한 웃음을 지었다.
 “크헤헤, 이것으로 아까 한 대 맞은 빚을 갚게 되었군. 확인해 보시오, 방주. 아까 당신이 굴렸던 주사위가 맞는지.”
 고황은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황무가 번개같이 움직여 주사위를 손에 쥐었기 때문이다.
 고황이 다시 부수려 들까 겁난다는 듯이.
 
 “이제 판은 다시 효력을 갖게 되었군.”
 황무의 음성은 득의한 감정을 반영하는 듯 낭랑했다.
 “방주는 어서 판돈을 내게 주시오.”
 고황은 대답하지 않았다.
 거지 따위에게 만들어 준 원한도 이런 식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인가?
 한참 후 그는 눈짓으로 혈겸을 불렀다.
 여차하면 출수하여 황무를 뒤에서 공격하려던 혈겸은 영문을 모른 채 고황의 곁으로 돌아왔다.
 고황은 힘없이 황무에게 물었다.
 “당신은 왜 내 목숨을 탐하는 게요? 내가 당신에게 죄를 지었던 적이 있소?”
 황무는 차갑게 대답했다.
 “내겐 없지만 내 수하에게 있었소. 구 서생을 기억하오?”
 물론, 고황은 기억했다.
 생각이 절심산(切心散)으로까지 미치자 고황은 더 이상의 질문을 포기했다.
 계속 묻는다면 자신의 죄를 스스로 천하에 알리는 꼴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좋소. 내가 졌으니 대가를 지불하지. 하지만 조금 늦게 지불하는 건 상관없다고 생각되오.”
 “너무 늦어서는 곤란하오. 판돈의 지불은 하루를 넘기지 말아야 하오.”
 “하루를 넘기지 않겠소. 오늘밤 지불하겠소.”
 황무는 잠시 생각했다.
 이자는 또 어떤 계략을 꾸미고 있는 걸까?
 “어디서 지불할 생각이오?”
 “내 집에서. 당신은 흑령방에 와서 판돈을 받아 갈 의향이 있으시오?”
 황무는 또다시 생각에 잠겼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오늘밤 자시에 찾아가겠소. 판돈을 확실히 준비해 두길 빌겠소.”
 고황은 아무런 대답 없이 몸을 돌려 호연도방을 떠났다.
 고황이 구경꾼들 사이로 걸어가자 그들이 분분히 비켜서는 모습은, 마치 바다가 갈라지는 듯했다.
 
 “흐흐, 영악한 것! 지금쯤 어떤 수단으로 생명을 연장시킬까 궁리하겠지. 고황의 영악함을 따라갈 사람은 천하에 별로 많지가 않지.”
 거지는 고황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황무는 그런 거지를 보면서 차갑게 말했다.
 “적어도 당신은 고황을 능가할 것이오.”
 거지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엥? 무슨 말씀이시오? 난 그저 당신을 도와 주려고 애썼을 뿐인데…… 게다가 나 정도로 어떻게 고황을 능가한단 말이오?”
 “만일 계속 부인하겠다면 당신의 정체를 밝힐 수도 있소. 그것은 당신도 원하지 않겠지요?”
 거지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말투마저 전과는 완연히 달랐다.
 “날 알아보았는가?”
 “처음부터 알아보았소.”
 “그런데도 날 위협하는가?”
 “당신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에 한 말일 뿐이오.”
 거지는 몸을 꼿꼿이 세우더니 말을 이었다.
 “난 자네를 도와 주었네. 그런데도 이런 대접밖에 못 받다니, 참으로 서운한 일이 아닐 수 없군.”
 황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불패도(不敗賭)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 황무는 자신이 땄던 은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은자를 네게 주겠다. 대신……”
 불패도는 눈을 크게 뜨고 황무의 말을 경청했다. 은자의 양은 엄청났으므로 누구라도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다.
 “대신 저분께 스무 동이의 술을 사다 드려라. 가장 향기롭고, 가장 독한 술로 스무 동이다. 알겠느냐?”
 황무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거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고함을 질렀다.
 “술을 사준다고 내가 당신을 도와 줄 것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오히려 반대요. 절대 도와 주지 말 것을 부탁하는 술이외다.”
 황무의 음성이 멀리서 들려 왔다.
 이 말은 진실이었다. 황무는 정말 거지의 도움을 받기 싫었다.
 다른 누구보다도 이자의 도움은 싫었다.
 
 잠시 후 거지는 술독 사이에 파묻혀 흥얼거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다섯 동이의 독주를 비우는 그를 보고 사람들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지만 아무도 거지를 방해하지 못했다.
 스무 동이의 술값은 삼만 냥이 넘는 것이었으므로.
 거지는 껄껄 웃으며 다시 한 동이의 술을 비웠다.
 “크하하, 철담마도의 본 모습은 소문보다 훨씬 뛰어나구나! 크하하, 정말 유쾌하구나. 이런 날은 마셔야지. 마구 마셔야지, 아암. 크하하하!”
 술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밤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거리는 어둠의 장막에 덮여 앞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흑령방 근처에만 오면 어둠의 장막은 사라진다. 당신은 불야성(不夜城)이란 말의 뜻을 실감하게 되리라.
 쾌락을 찾아 오가는 사람들 사이를 황무는 천천히 걸었다.
 자시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천천히 걸어야만 흑령방에 당도하는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정확한 시간이군요.”
 혈겸이 낮과는 딴판으로 황무를 공손히 맞이했다.
 황무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안내를 받아들였다.
 담장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는 길.
 문득 담장 너머에서 사내와 여인네의 웃음 소리가 까르르 들려 왔다.
 황무의 미간이 약간 움직였다.
 혈겸이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더라도 장사를 멈추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방주가 오늘날의 부를 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담장이 왼쪽으로 휘어졌다.
 자연 둘의 발길도 왼쪽을 향해 돌았다.
 “천하인들이 아는 것은 전대 방주 때부터 있었던 주위의 도방과 기루들뿐일 겁니다. 하지만 현방주님께서 일구어 낸 비밀 도박장과 기루들이 사실 훨씬 더 많습니다.”
 황무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는 혈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말했다.
 “협상인가?”
 “무, 무슨……?”
 “재산의 많음을 알려 주는 이유는 무엇이지? 목숨 대신 내어 놓을 수 있는 것들이 많음을 알려 주자는 의미인가?”
 혈겸은 고개를 숙였다.
 “과연 대단하시군요. 그렇습니다. 만일 대협이 판돈을 다른 것으로 받고 싶으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춘추서원의…… 재정이 좋지 못함을 알고 있습니다.”
 황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한숨과 더불어 말했다.
 “고황은 좋은 수하를 두었군.”
 
 황무는 오른손으로 도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리곤 지나가는 말인 듯 물었다.
 “아까 자네는 내가 묻지 않았는데도 내 마음을 짐작하고 대답을 해주었네. 대단한 능력이 아닐 수 없지.”
 혈겸은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과찬이십니다.”
 “또 협상 내용을 돌려서 말해 내가 먼저 말을 꺼내게 만들었으니, 이것 또한 능력이 있음이지.”
 “감당할 수 없는 칭찬이십니다.”
 황무는 고개를 숙인 혈겸을 보면서 싱긋 웃었다.
 “이 정도의 능력을 가진 자네를 보면서 난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네.”
 “무슨 생각이십니까?”
 “내가 오리란 것을 알고 있었으니 틀림없이 대비책을 세웠을 것이네. 지금 같은 회유가 아닌 물리적인 대비를. 그렇지 않나?”
 혈겸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서 빛이 크게 일었다.
 “과연 철담마도!”
 “역시 준비했군. 자, 어서 시작해 보지. 난 기다리고 있으니.”
 황무의 말에 혈겸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 말뜻은 협상을 거부하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되겠습니까?”
 “정확히 그런 뜻이지.”
 혈겸은 쏜살같이 뒤로 물러났다.
 화려한 주변 건물들과는 대조적으로 수수하게 지어진 작은 삼층건물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혈겸.
 황무의 손에서 참마도(斬魔刀)의 도기가 폭풍처럼 일어났지만 혈겸을 막을 수는 없었다.
 혈겸이 서 있던 땅바닥에서 폭우정(暴雨釘)이 마구 솟구쳐 올라왔기 때문이다.
 황무가 쫓지 못하도록 계산이 있었던 듯.
 혈겸을 공격하기 위해 내뿜었던 도세를 폭우정을 제거하는 일에 사용한 황무는 허공에서 몸을 한바퀴 돌렸다.
 황무는 사뿐히 바닥에 내려앉으며 크게 외쳤다.
 “흑령방이란 이름은 강호사에 길이 남겠구나. 고황, 넌 언제쯤 정정당당하게 날 맞이할 생각이냐?”
 그의 음성이 웅웅거리면서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으하하하`─`”
 돌연 고황의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난 삼 층에 있다. 만일 세 개의 관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다면…… 내 목숨을 받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으하하하……!”
 사실 이런 경우에 웃음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뻔뻔스러움을 웃음 속에 감추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의외로 많은 법이다.
 황무는 안색을 엄중히 하고는 삼층건물을 바라보았다.
 분명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황무는 두렵지 않았다.
 자신은 결코 고황 따위의 계략에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황무는 담담한 신색으로 문을 열고 음모가 도사린 삼층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철컹!
 황무를 삼켜 버린 철문이 둔중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삼 층에 도달했을 때 황무의 옷은 다섯 군데가 찢겨져 있었다.
 일, 이 층에 도사리고 있던 위험들이 남겨 준 흔적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위험했던 적은 없었다.
 옷만 찢겨졌지 살갗은 전혀 상하지 않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 관문인가?”
 굉장히 큰 철문!
 중앙에는 손바닥 모양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철문 안에서 고황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곳에 손바닥을 대고 문을 열면 당신은 모든 관문을 통과하게 되오. 단 한 손만 사용할 것. 내가 혼자 열 수 있는 최대의 힘을 계산해 만든 철문이니…… 문을 열면 당신의 내공이 나보다 월등함을 증명하는 셈이지.”
 
 황무는 차가운 눈빛으로 오른손을 철문에 대었다.
 끼이이잉`─
 내공을 돋우어 밀자 철문이 울리기 시작했다.
 철문의 무게와 인간의 내공이 싸우면서 울려 나오는 소리는 마치 고양이의 울음 소리처럼 날카로웠다.
 그리고 잠시 후,
 끼이익!
 철문은 천천히 움직였으며 마침내 열렸다.
 열린 틈 사이로 땅바닥에 단정하게 앉아 있는 고황이 보였다.
 이제 황무는 마침내 고황에게서 판돈을 받아 내게 된 것이다.
 사학사 구의 복수와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의 처형을 동시에 행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황이 과연 저렇게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는 성격의 인물일까? 이제까지 해왔던 일들로 본다면 결코……!’
 황무는 지체없이 몸을 옆으로 날렸다.
 휘이잉!
 혈겸의 낫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
 조금만 늦었더라도 철문 옆에 숨어 있던 혈겸의 낫이 자른 것은 공기가 아니라 황무의 살과 뼈였을 것이다.
 
 황무의 참마도법은 강호에 명성이 높다.
 몸을 피한다 싶은 순간, 그의 오른손은 이미 참마도를 뽑아 들고 혈겸의 낫을 노릴 정도였다.
 혈겸 정도의 실력으로는 감히 그와 겨룰 수가 없다.
 참마도의 공세에 놀란 혈겸이 급히 초식을 바꾸자, 도와 낫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쨍!
 두 무기 중 하나가 허공으로 날았다.
 부딪치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만 것이다. 황무는 눈을 크게 떴다.
 허공으로 날아간 것이 자신이 참마도였으므로.
 
 “독을 썼구나!”
 황무는 크게 외치면서 공력을 돋우어 오른손으로 침범하는 독기(毒氣)를 막으려고 애썼다.
 그 모습을 보면서 고황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것이 바로 마지막 철문의 효용이지. 먼저 두 번의 함정은 사실 마지막 함정을 의심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역할에 불과했으니까.”
 그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혀를 찼다.
 “쯧쯧, 이제 어쩌겠소? 철담마도의 우수(右手) 도법은 매우 유명하지만 그 손은 이미 못쓰게 되었지. 어떡하시겠소?”
 황무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가까스로 오른손에 독기를 억눌러 두기는 했지만 그 덕분에 오른손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가락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데 어떻게 힘을 주어 도를 잡겠는가?
 고황은 황무가 놓쳤던 참마도를 집어 들었다.
 “무기도 없는 적을 상대로 싸우면 비겁하다는 소리를 듣게 되겠지. 옛소, 도를 주겠으니 어디 한번 받아 보시구려!”
 참마도는 빙글빙글 돌면서 허공을 날아 황무에게로 다가왔다.
 거의 동시에 고황의 흑령장과 혈겸의 낫이 달려들었다.
 평소 참마도를 잡았던 황무의 오른손은 독에 의해 마비된 상태였다.
 
 번쩍!
 순간적이지만 눈을 멀게 만들 듯한 밝은 빛이 방안에서 일어났다.
 정신을 차린 고황은 자신의 양 어깨가 허전함을 느꼈다.
 멀리 허리가 양단된 혈겸의 시체가 보였지만, 그것보다 자신의 어깨에서 전해져 오는 고통이 우선이었다.
 “크아악! 내, 내 팔!”
 고황이 울부짖자 황무가 차갑게 말했다.
 “인간에겐 팔이 두 개 있지. 명심하도록 해라.”
 물론 고황도 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한다 하더라도 양팔이 동등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했다.
 게다가 오른손보다 왼손이 더욱 빠르다니……!
 강호에 황무의 우수(右手) 도법이 유명한 것은 모두 헛소문이었던가?
 “다, 단 일 초에 나와 혈겸을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넌 실력을 숨겨 왔구나……!”
 고황은 고통 속에서 가까스로 이처럼 말했다.
 황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누군가를 닮았다고 고황은 생각했다.
 
 ─`널 한 번은 살려 둔다. 하지만 다시 만나면 내 손에 죽으리라!
 
 오래 전에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던 사람.
 처음 보는 순간에도 고황은 그에게서 죽음의 공포를 느꼈었다.
 ‘서, 설마 이자가……!’
 문득 무서운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참마도를 들고 있는 황무의 왼손을 쳐다보면서 고황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 당신은 혹시……?”
 그러나 고황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황무의 참마도가 그의 목을 긋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데구르르 바닥을 구르는 고황의 수급.
 핏속을 뒹구는 그의 얼굴이 담고 있는 표정은 누구라도 쉽게 간파할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공포였다.
 흑령방주 고황!
 그의 악명은 강호에 높았지만 마침내 춘추서원의 총관이며 제일고수인 황무의 손에 죽고 말았다.
 구(具) 서생의 복수였다.
 
 3․
 낙양으로
 
 「세상은 한 사람의 말은 믿지 않는다. 하나, 세 사람의 말은 믿는다.
 세상에 알리고 싶은 일이 있다면 우선 그것을 알릴 사람을 모으라.`」
 만박의 말 중에서……
 
 <무혼지겁(武魂之劫)을 조사하면서 몇 가지 의문점이 생겼네.
 그 많은 혈겁들을 광무혼(廣武魂) 한 사람이 저질렀다는 사실을 나로서는 믿기가 매우 힘들었네.
 난 더 많은 기록과 숨겨진 비사(秘事)들을 알기 원했으며, 자네도 알다시피 그것들을 얻기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았었네. ……中略……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무혼지겁에는 확실히 이상한 점이 몇 가지 존재하네.
 불과 십 년밖에 지나지 않은 일에 대한 기록이 강호에 너무나 적게 남아 있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러하네.
 물론 무혼지겁으로 인해 생명을 잃었던 사람이 너무나 많은 탓에 기록이 망실(忘失)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네만, 난 다른 가정을 세워 보았네.
 그 가정을 좀더 깊숙이 파고들려는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복면인들에 의해 난 납치당하고 말았지. ……中略…… 일 년간 갖은 노력 끝에 한 명을 포섭할 수 있었네.
 그를 통해 서신을 보내니, 부디 날 찾아 주게.
 내가 있는 곳은 나로서도 도저히 알아 낼 길이 없네.
 다만 낙양(洛陽) 근처라는 것만 짐작할 따름일세.
 이자들의 힘은 무서우니 부디 조심하게.
 난 이들이 아마도 무혼지겁에 얽힌 비밀과 연관이 있는 자들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네.>
 
 황무는 마른침을 삼키며 서신을 내려놓았다.
 그의 안색은 더할 나위 없이 어두웠다.
 황무 옆에 조용히 서 있는 서생, 부총관 최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감히 제가 먼저 뜯어 보았습니다. 용서하시길…… 한 가지 일에 빠지시면 다른 것은 돌보지 않는 총관의 품성을 감히 미리 짐작했습니다.”
 황무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로서는 책망이 아니라 몇십 번이라도 칭찬해야 할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물었다.
 “누구, 누구에게 이 사실을 알렸는가?”
 “현재 본 서원에 와 계신 소림의 대지 대사와 무당의 창허 도인에게 알렸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강호 각파에 보내는 연락은 총관께서 돌아오신 후로 미루어 두었습니다.”
 황무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지 대사와 창허 도인이 모여 있다지?”
 “그렇습니다. 낙양 근처의 문파에 대한 조사 보고를 제가 할 예정입니다.”
 
 * * *
 
 “원주를 납치할 만한 힘을 갖춘 문파를 선별해 보기 위해선 우선 현무림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최오는 나직하지만 힘있는 어조로 말했다.
 그는 원형의 탁자 앞에 서 있었고, 탁자에는 세 명이 둘러앉아 있었다.
 한 명은 당연히 황무였으며, 다른 두 명은 소림의 대지와 무당의 창허였다.
 그들은 이십대 중반의 젊은 고수였으며 차기 소림과 무당을 짊어질 인재로 촉망받는 존재들이었다.
 패기와 신념을 갖춘 두 젊은 고수!
 그들은 십 년 전의 무혼지겁이 끝난 후 새롭게 나타난 후기지수(後期之秀)들의 수좌 격이라 할 수 있었다.
 그들 세 사람 앞에서 최오는 현무림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아는 사실이었지만 최오의 말을 중단시키는 사람은 없었다. 알고 있는 내용도 한 번 더 검토해 보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해 낼 수도 있는 법이니까.
 “백 년래 강호에서의 최대 변란이라 일컬어지는 것이 무혼지겁입니다. 그전까지 강호에 군림하던 열 명의 절대고수, 십절(十絶)이 모두 그 무혼지겁으로 목숨을 잃고 오직 한 사람, 무혼지겁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광무혼(廣武魂)만 살아남았습니다. 그에 의해 차후 일 년간 천하는 겁난(劫亂)에 휩싸였습니다……”
 
 십 년 전, 열 명의 절대고수 십절이 이끄는 천하(天下) 오패(五覇)라 불리던 다섯 개의 엄청난 세력이 천하를 독패하고 있었다.
 열 명 중 어느 한 사람이라도 능히 소림장문인과 무당장문인의 합벽을 당해 낼 수 있다는 십절!
 그들이 한꺼번에 만인총(萬人塚)에서 몰사당하는 일이 발생할 줄이야 누가 짐작이나 했으랴?
 음모를 꾸민 광무혼만이 십절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천하를 상대로 혈수를 뻗치기 시작했다.
 그 후 일 년간 천하는 차마 표현하지 못할 겁난에 휩싸여 몸부림쳤다.
 강호의 고수는 과반수가 사상(死傷)당했으며, 특히 절정고수라 일컬어지는 자들은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다.
 마침내 강호가 광무혼의 혈수 아래 떨어지게 될 무렵, 그들이 나타났다.
 다섯 명의 젊은 고수들.
 갓이십을 넘긴 그들은 오수(五秀)라고 불렸으며, 엄청난 무공으로 광무혼의 세상을 압박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사부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 천하인들은 왜 그들이 그토록 큰 힘을 지닐 수 있는지를 깨달았다.
 십절 이전 강호상에 우뚝 섰던 세 명의 고수들.
 흔히 삼기(三奇)라 불렸던 기인들의 제자들이 바로 오수였던 것이다.
 
 무혼지겁이 시작된 지 일 년.
 광무혼은 천하를 장악하기 일보 직전에 오수에 의해 좌절되고 만다.
 그리하여 무혼지겁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열흘!
 광무혼의 모든 음모를 분쇄한 오수는 삼기가 남긴 모든 힘을 동원하여 광무혼을 추격한다.
 마지막 날, 태산 아래에서 광무혼은 이천 근의 폭약과 더불어 자폭하고, 마침내 천하를 덮었던 무혼지겁은 종말을 맞는다.
 이들 오수가 바로 오늘날 오성(五聖)이란 칭호로 불리는 다섯 성인의 전신이다.
 
 “……이상이 십 년 전 무혼지겁의 개략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강호 세력은 세 갈래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목이 마른지 미리 준비된 물을 한잔 마신 최오가 말을 이었다.
 “우선 첫째는 오성이 이끄는 오성련(五聖聯)으로, 현강호에서 가장 큰 힘을 자랑합니다. 또한 모두가 아시다시피 당금의 평화기를 주도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소림(少林)의 뇌불(雷佛)!
 무당(武當)의 염도(炎道)!
 개방(幇)의 취개(醉)!
 송하림(松霞林)의 만유(慢儒)!
 그리고 천화궁(天華宮)의 선향(仙香)!
 이들 다섯이 모인 힘을 오성련이라 하며 그 힘과 대적하려는 힘은 강호 어디에도 없음을 천하는 알고 있었다.
 
 “두 번째 갈래는 무혼지겁을 겪으면서 살아남은 방파들입니다. 그들은 강성했던 옛모습을 많이 잃긴 했지만 경험을 바탕으로 점차 힘을 기르고 있습니다.”
 황무가 상대했던 흑령방 같은 경우가 이에 속한다.
 이전의 힘이 강했건 약했건, 무혼지겁 같은 대혈겁을 겪으면서도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이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칭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강함을 자랑하는 몇몇 방파라 하더라도 오성의 힘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 현실.
 천지회(天地會)와 금룡궁(禁龍宮), 그리고 유령전(幽靈殿)이 그 중에서도 강했다.
 
 “세 번째 갈래는 신생 문파입니다. 십 년 내로 성장할 고수들이 이끄는 세력은, 물론 오성보다는 약하지만 두 번째 갈래의 수좌 격인 천지회 등보다는 오히려 강하다 할 수 있습니다. 무혼지겁을 당하지 않아 힘의 축적이 상대적으로 쉬웠던 까닭이 클 것입니다.”
 춘추서원도 여기에 속한다.
 원래 강호 방파라 하기엔 어색했지만 만박과 총관인 황무가 들어오면서 문파 전체를 새롭게 정비, 단순한 사학사(史學士)들의 모임에서 당당한 강호 방파로 서도록 만들었다.
 그 외 광명전(光明殿)과 월곡(月谷)이 강했다.
 하지만 신흥 방파들은 기존의 강호 거목들이 무너진 힘의 공백 상태 속에서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자라나고 있는지라, 기실 어느 방파가 강하고 약하고를 딱 잘라 말하기 어려웠다.
 검증이 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긴 설명이 지난 후 최오는 숨을 돌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설명을 듣고 난 황무가 물었다.
 “힘을 가진 문파들, 감히 원주를 납치할 담량을 갖춘 문파들이 낙양 주위에 몇이나 있는가?”
 “낙양 근처에는 강호문파가 모두 열한 개가 있습니다. 하남성까지 범위를 늘린다면 훨씬 많은 숫자가 되겠죠.”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는 듯 최오의 대답은 막힘이 없었다.
 “그 중 원주님을 소리없이 납치할 수 있는 고수를 지닌 문파는 셋입니다. 아무리 넓게 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셋이나 된다는 말씀입니까?”
 여태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대지(大智)가 놀라 최오에게 물었다. 소림의 후기(後期)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재로 평가받는 그였다.
 최오는 심각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중 둘은…… 솔직히 가능성이 없습니다. 저는 천지회(天地會)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최오는 중간에 약간 말을 끊었다.
 그 이유를 황무는 알 것 같았다.
 낙양 주위에 존재하는 무림 방파 중 가장 강한 문파를 고르라면 어린아이라도 쉽게 할 수 있으므로.
 대지 역시 최오의 말속에 숨은 의미를 짐작하고 말했다.
 “저희는 개의치 마시고 편안히 말씀하십시오.”
 수도하는 사람답게 담담한 어조로 대지가 말했다.
 “가능성이 없다는 두 문파는 혹 송하림(松霞林)과 개방의 낙양분타를 말씀하심이 아니신지요?”
 최오는 답하지 않고 조용히 머리만 숙였다.
 사실 당금의 강호에서 오성련에 속하는 두 문파를 의심한다는 건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지와 창허는 소림과 무당의 제자.
 오성련에 속하는 두 문파가 아닌가?
 말하기 곤란해 하는 상대의 속내를 대신 짚어 주는 대지의 행동은 그런 면에서 매우 대범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황무가 말했다.
 “비록 두 분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나, 송하림과 개방의 정대(正大)스러움은 천하가 인정하는 것. 어찌 그 문파를 의심하게 두겠소이까? 만일 강호에 알려지지 않은 숨은 세력이 아니라면…… 역시 천지회일 것이외다.”
 말을 마친 황무는 은밀히 최오에게 눈짓을 보냈다.
 최오는 급히 다음 말로 옮겨 갔다.
 
 “천지회의 회주는 둘입니다. 파천공(破天公)과 열지모(裂地母)란 자들입니다.”
 최오의 빠른 화제 전환은 국면을 어색한 분위기에서 벗어나도록 만들었다.
 아무리 대지와 창허의 수양이 깊다 한들 그들은 아직 젊은이에 불과했다. 자신의 문파와 관련있는 이름이 의심의 대상이 된다면 기분이 나빠짐을 피하기 힘들지 않겠는가?
 때문에 최오는 황무의 눈짓을 받자마자 천지회에 대한 얘기로 화제를 돌렸던 것이다.
 한 가지 목표를 잡으면 그 목표를 일단 철저히 추구해 보는 것이 황무 특유의 일처리 방법이었다.
 지금과 같은 경우, 그 방법은 적절했다.
 천지회가 의심이 가면 일단 철저히 조사해 보는 것이다.
 만일 혐의가 없다면 그때 가서 다른 의심을 가져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단, 춘추서원에서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비밀만 보장된다면……
 말하지 않아도 이미 천지회에 대한 조사를 마쳐 둔 최오의 솜씨는 그래서 충분히 칭찬받을 가치가 있었다.
 이런 인재(人材)가 춘추서원의 살림을 도맡아 주는 덕분에 황무로서도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춘추서원을 위협하는 강호 세력과 싸울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최오의 말이 이어졌다.
 “아시다시피 이들은 무혼지겁을 겪어 낸 문파입니다. 원래의 천지회는 십절에 속하던 파천제(破天帝)와 열지후(裂地后)가 이끌던, 천하 오패(五覇)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랬다.
 하지만 파천제와 열지후가 광무혼의 음모에 의해 죽은 이후 천지회는 지리멸렬, 그 세력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오성에 의해 겁난이 수습된 직후 파천제와 열지후의 제자라면서 나타난 두 인물이 다시 천지회를 소집했다.
 신분이 이전 회주보다는 낮음을 상징하기 위해 그 별호조차 파천공(破天公)과 열지모(裂地母)였다.
 
 “원주께서는 무혼지겁의 뒤에 음모가 숨어 있는 것 같다고 서신에서 말씀하셨네. 그 음모란 무엇일까?”
 천지회에 관한 설명을 모두 듣고 난 황무는 턱의 수염을 매만지며 최오에게 물었다.
 하지만 사실 그 질문은 좌중의 세 명 모두에게 던진 것이었다.
 여태껏 조용히 있던 창허가 입을 열었다.
 “혹, 무혼지겁에 관여했던 주모자들이 살아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어쩌면 광무혼(廣武魂)이 아직 살아 있는지도 모르지.”
 옆에 앉은 대지가 혼자말인 듯 나직이 중얼거렸다.
 황무는 실소(失笑)하면서 말했다.
 “그럴 가능성은 없소. 내 생각으론 무혼지겁이…… 광무혼 혼자만의 음모가 아니었다는 의미라고 여겨지오. 그리 되면…… 무혼지겁의 모든 책임을 광무혼 혼자에게 물은 셈이니, 다른 음모자는 지금쯤 어디선가 다른 악업을 쌓고 있을 게 아니겠소.”
 문득 최오를 돌아보며 묻는 황무. 단심서생 최오에 대한 그의 신임(信任)을 알 수 있게 하는 장면이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최오는 고개를 잠깐 숙이며 답했다.
 자신의 의견을 물어 준 황무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제 생각도 총관과 동일합니다. 원주께서도 서신의 머리에서 무혼지겁이 광무혼 혼자 저질렀던 일이라고는 보기 곤란하다는 뜻을 밝히셨습니다. 어쩌면……”
 미간을 약간 찌푸리면서 그는 말을 이었다.
 “어쩌면 무혼지겁을 꾸민 것이 광무혼 혼자가 아니었고, 누군가 조력자가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이 여태껏 살아 있다면…… 그렇다면 원주를 납치할 충분한 이유를 갖게 되겠지요.”
 대지와 창허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한동안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그들이 입을 열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대지,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자를 징벌하겠습니다.”
 “창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무혼지겁을 직접 겪지는 않았으나 그때의 처참함을 충분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생명을 바쳐서라도 또 다른 겁난을 막겠습니다.”
 그들의 안색은 단호한 결심으로 굳게 변했다. 하지만 표정만은 더없이 성결(聖潔)했다.
 강호를 겁난으로부터 구해 낸 오성련(五聖聯), 강호 정의를 위한 숭고한 무인 정신의 구현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황무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서서 포권했다.
 그들의 말이 만박(萬博)을 찾는 일에 최선을 다해 도와 주겠다는 의미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원주를 대신해 감사드리오, 두 분. 언젠가는 원주께서 직접 두 분께 감사의 말을 하실 수 있게 되기만을 바랄 뿐이외다.”
 비록 나이가 자신보다 어리다 하나 소림과 무당의 후기를 노리는 두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 *
 
 구조고도(九朝古都) 낙양(洛陽).
 동주(東周)가 처음 도읍한 이래 아홉 왕조가 이곳에 도읍을 정했기에 불려지는 말이다.
 낙양성 안을 흐르는 낙하(洛河)는 물살이 거셌다.
 그렇지만 강바닥이 깊이 팬 탓으로 물이 제방을 넘는 일은 없었다.
 그 낙하를 건너는 다리가 바로 그 유명한 천진교(天津橋)였다.
 맑은 하늘.
 대갓집의 공자로 보이는 두 청년이 천진교를 바라보면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바로 이 다리가 낙하의 여신이 지혜를 써서 만들었다는 다리란 말인가?”
 멀리서 온 듯, 구경하기 위해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청년이 물었다.
 덥지 않은 날씨임에도 손에 부채를 쥔 다른 청년이 여유있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여신께서는 선녀처럼 아름다운 여인으로 나타나 강 가운데 배를 대고 낙양의 돈 많은 청년들을 유혹했다네.”
 “수많은 청년들이 그 아름다움에 홀렸겠구먼.”
 “두말할 필요도 없지. 너도나도 여신과 사귀길 원하자, 여신은 그들에게 조건을 제시했다네.”
 “무슨 조건인가?”
 멋으로 든 부채를 한 번 탁 치며 시간을 끌어 상대의 감질맛을 증가시킨 청년이 말을 이었다.
 “강 가운데…… 그러니까 저쪽쯤일 걸세. 배를 중간에 정지시킨 여신은 동전을 던져 배 가운데의 막대를 맞추는 자와 사귀겠다고 말씀하셨네.”
 “별로 멀어 보이지 않는데…… 나라도 맞출 수 있어 보이는데?”
 유람 온 청년의 말에 부채청년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 같은 백면서생은 말할 것도 없고, 제법 무공을 갖춘 자들조차 한 명도 성공하지 못했다네. 아마 여신이 암암리에 손을 쓴 탓일 것이네.”
 “그럼 한 명도 막대를 맞추지 못했는가?”
 “그래, 단 한 명도.”
 “애꿎은 동전만 배 위에 쌓였겠군.”
 “쌓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배 전체를 덮어 버리다시피 했다고 하네. 여신의 아름다움에 반해 너도나도 동전을 던졌기 때문이지.”
 “그럼…… 그 동전은 모두 어찌 되었나?”
 유람청년이 묻자 부채청년은 웃으며 손을 들어 천진교를 가리켰다.
 “저기 있지 않나? 천진교를 지은 돈은 바로 여신이 마련해 주신 것이라네.”
 유람청년은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신기한 얘기로군. 그 후 여신은 다시 나타나지 않으셨나?”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네.”
 “한번 나타나면 좋겠군. 그럼 이 유(柳) 모(某)가 전재산을 동전으로 바꾸어서라도 막대를 맞춰 볼 텐데……”
 
 “정말로 원한다면 내가 정보를 줄 수도 있지.”
 갑작스레 들려 온 말에 유(柳)라는 서생은 몸을 돌렸다.
 손에 술호로를 든 거지 한 명.
 술을 얼마나 마셔댔는지 코에 주독(酒毒)이 올라 붉은 반점이 가득했다.
 황무가 호연도방에서 만났던 거지였다.
 유 서생의 놀란 표정은 곧 화난 표정으로 바뀌었다.
 “딸기코! 당신이 조금 전 내게 말했소?”
 거지는 자신의 뒤를 한번 둘러보더니 말했다.
 “이곳에는 나말고 아무도 없으니 당연히 내가 말한 것이로군. 그러나저러나 그 딸기코란 명칭은 근사한걸. 앞으로 그걸 내 이름으로 삼아야겠군.”
 딸기코가 자신의 말에는 제대로 답하지 않고 혼자 중얼거리자 유 서생은 화가 치밀었다.
 부유한 집에서 철없이 자란 대부분의 청년은 힘없는 사람을 멸시하는 일에 익숙한 것이다.
 “감히 거지 놈 따위가 나와 말장난을 해? 죽고 싶은 게냐?”
 딸기코는 당연히 고개를 흔들었다.
 “세상에,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을…… 멀쩡하게 생긴 놈이, 쯧쯧! 넌 나에게 낙하의 여신을 만날 방법부터 묻는 게 순서가 아니겠느냐?”
 그러고 보니 딸기코는 아까……?
 유 서생이 화를 참으며 물었다.
 “정말이냐? 정말 여신을 만날 수 있느냐?”
 딸기코는 억지로 화를 참고 있는 유 서생의 표정이 우스워 참기 힘들다는 얼굴로 빙긋이 웃었다.
 “물론이지. 만날 수 있고말고. 은자를 세 냥 정도만 축낸다면, 당신은 여신을 만날 수 있지.”
 
 부채청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 서생이 딸기코에게 서둘러 은자를 건네 줄 때도, 그리고 딸기코가 오늘밤 자정에 이곳으로 나오면 여신을 볼 수 있다 말할 때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심지어 눈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멀어지는 딸기코의 뒷모습을 눈이 빠지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딸기코가 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게 되자 부채청년은 긴 한숨을 토해 냈다.
 극도의 긴장감이 해소되는 듯한 안도의 한숨이었다.
 ‘나타날 때와 멀어질 때 아무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이 추운행(秋雲行)의 귀를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고수가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부채를 든 청년, 추운행의 상념은 유 서생이 등을 치는 바람에 깨어졌다.
 “하하, 은자 세 냥을 들여 좋은 정보를 얻었네. 자네도 밤에 같이 와 보지 않으려는가?”
 추운행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는 밤에 와서, 매일 밤 자정 낙하에 나타나는 활낙신(活洛神)을 만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유 서생은 그녀를 만나서는 안 되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를 만나러 올 강호인들을 만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추운행은 유 서생의 어깨를 툭툭 쳤다.
 “우리가 만난 지 꼭 반나절이 지났군.”
 “그렇군. 낮부터 자네가 안내해 준 덕분에 낙양 구경을 잘할 수 있었네. 정말 고맙게 생각하네.”
 “나 역시 마찬가지라네. 자네 덕분에 입이 심심하지 않았지. 휴우, 하지만……”
 유 서생은 추운행이 한숨쉬는 영문을 몰라 눈만 크게 뜰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추운행이 낙하를 한번 둘러보더니 말했다.
 “활낙신이 밤마다 낙하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벌써 사흘이 지났네.”
 “뭐라구? 그럼 자네는 여신이 나타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단 말인가?”
 “물론일세. 하지만 전설 속의 여신과 다른 점은, 그녀가 제시하는 것이 자신과 사귀는 것이 아니라 보검이라는 데 있지.”
 “그, 그런! 그럼 활낙신이란 존재는 강호 여인이란 말인가? 여신이 아니라……?”
 추운행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전설상의 여신도 강호인이었는지 몰라. 어쨌든 그 보검은 매우 귀한 것인지라 수많은 강호인들이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고, 더불어 공기도 점점 험악해지고 있네.”
 유 서생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입만 벌리고 있었다.
 그런 유 서생의 어깨를 추운행은 두 번 두드려 주었다.
 “세 냥이 아깝더라도 결코 밤에 나오지 말게. 강호인들 중 일부는 생명의 존귀함을 전혀 모르니 말이네.”
 “그, 그럼 자네도 강호인인가?”
 추운행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내 나직하나 힘있는 어조로 유 서생에게 말했다.
 “많은 강호인들이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으니…… 목숨이 아깝다면 결코 밤에는 낙하(洛河)로 오지 말아야 하네.”
 유 서생은 추운행의 마지막 말을 듣기 위해 목을 길게 빼야만 했다.
 어느새 추운행이 허공으로 뛰어올라 사라졌기 때문이다.
 놀란 유 서생은 고개를 흔들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나, 날아갔다! 정말로 그는 강호인이었구나!”
 다리가 후들거렸다.
 
 멀리서 걸어오는 세 사람의 모습이 유 서생의 시선에 잡힌 것은 그때였다.
 ‘저들도 강호인일까? 도사와 승려와 속인이 같이 걸어가다니……! 서둘러 객잔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오늘밤은 꼼짝도 하지 말아야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유 서생은 걸음을 서둘렀다.
 태평객잔(太平客棧)으로 돌아간 유 서생은 방문을 꼭 닫아걸고는 날이 샌 후에야 밖으로 나가겠다고 결심했다.
 절경을 보는 일이 아무리 좋다 하나 생명을 걸 만큼 좋지는 않다. 때문에 유 서생의 이런 결정은 매우 적절했다.
 
 * * *
 
 수염으로 얼굴을 덮은 속인(俗人)이 앞장서 걷고, 약간 뒤에서 승려와 도사가 나란히 따라간다.
 이런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신기했다.
 걷는 길과 추구하는 목표가 확연히 다른 세 사람이 일행을 이루는 경우는 찾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문득 앞장선 사람의 입술을 덮은 수염이 흔들렸다.
 “앞에 태평객잔이 보입니다. 오늘밤은 저기서 쉬시도록 하시지요.”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했기 때문에 숙소를 정할 때가 된 것이다.
 황무의 말에 대지와 창허는 두말없이 찬성했다.
 
 방 세 개를 계약하고 황무는 식탁 옆에 앉았다.
 대지와 창허도 곧 합석했다.
 음식을 주문한 뒤 황무는 문득 생각이 난 듯 말했다.
 “두 분도 활낙신에 대해 들으셨소? 걸어오다 보니 낙양 성민들이 온통 그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더이다.”
 무림인은 귀가 밝다.
 굳이 의도하지 않아도 주위 사람들의 대화가 귀에 들어오게 되는데, 말하는 자들이 강호인이 아니라면 더욱 쉽게 들을 수가 있었다.
 “듣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낙양에 들어서자마자 그 얘기로 귀가 따가웠습니다.”
 “도대체 그 활낙신이란 여인이 갖고 있는 보검이 뭐랍니까?”
 창허 도사가 질문했지만 황무는 답할 수 없었다.
 들은 바가 없으니 알 리도 없지 않겠는가?
 이때 멀리서 나누는 두 사람의 대화가 일행의 귀에 들어왔다.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는 대화였다.
 
 “아, 그렇다니까! 틀림없이 그 검이라구. 젠장, 이거 술이 떨어졌잖아!”
 바닥에는 술병 대여섯 개가 뒹굴고 있었다.
 술병들 사이에서 주독으로 붉게 변한 코를 벌름거리면서 열변을 토하는 거지 하나!
 딸기코의 말을 재미있게 듣고 있던 군중들 중 하나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어조로 물었다.
 “사실이라면 왜 오성련에서 움직이지 않는 게요?”
 그의 말에 대답할 생각은 않고 거지는 손에 든 술병을 바닥까지 비워 버렸다.
 입맛만 다시며 입을 다문 거지를 보면서 그에게 질문했던 구경꾼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딸기코가 아닌 점원을 향한 고함이었다.
 “여기 술 한 병 더 갖고 오너라. 젠장, 오늘 정말 대단한 술귀신을 만났군!”
 점원이 준비하고 있었던 듯 바로 술병을 들고 왔다.
 그라고 거지가 하는 얘기에 관심이 없겠는가?
 “꿀꺽, 꿀꺽!”
 거지가 목을 축이기를 기다리다 지친 구경꾼이 채근했다.
 “자, 어서 말해 보시오.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왜 오성련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오?”
 만족스런 표정으로 입에서 술병을 뗀 거지가 싱긋 웃었다.
 웃으면서 그는 고개를 저었다.
 “오성련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누가 그랬지? 그들은 이미 움직였어. 증거도 있다구.”
 “움직였다고! 정말이오?”
 “그럼! 믿기지 않는다면 저쪽을 보라구.”
 그의 손이 천천히 움직이더니 황무와 함께 앉은 대지와 창허를 차례로 가리켰다.
 중인들의 눈도 그쪽으로 향했다.
 대지와 창허의 눈에 놀람의 빛이 어렸으나, 황무만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앉아 있었다.
 그는 이 거지를 벌써 만난 적이 있는 까닭이다.
 
 “그러니까 저 승려가 바로 소림의 대지 대사이시며, 또 한 명은 무당의 창허 도장이지. 헤헤, 뭐 아직 어린 탓으로 대사니 도장이니 하는 말이 어울리진 않지만, 곧 그 말이 어울리는 재목으로 성장할 기재들이란 강호의 소문은 뭐 여러분도 익히 아실 테고……”
 거지의 긴말이 끝나자 대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미타불…… 보잘것없는 빈승을 그처럼 쉽게 알아봐 주셨음에도, 저로선 고인(高人)을 알아뵙지 못하고 있으니 부디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누구시온지……?”
 거지는 몸을 약간 움직여 대지의 고개인사를 피했다.
 “난 인사받을 자격이 없는 몸이지. 그냥 딸기코라고 부르면 된단 말이야.”
 “빈승으로서는 고인의 참된 신분을 알 자격이 없다 생각하십니까?”
 대지의 음성이 약간 딱딱해졌다.
 그 사실을 느꼈는지 딸기코는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그건 절대 아니지. 별로 말할 만큼 자랑스런 이름이 아니라서……”
 그는 말꼬리를 흐리더니 손으로 황무를 가리켰다.
 “굳이 알고 싶다면 그에게 물어 보게나. 내 입으로 말하는 건 쑥스러워서……”
 
 황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당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고 확신하오?”
 “당연한 소리지. 그럼 날 모른단 말인가?”
 “짐작은 하고 있소.”
 “그 짐작이 맞을 것이네.”
 황무는 입을 다물고 딸기코를 한참 노려보았다.
 딸기코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자넨 날 흡사 원수를 대하듯 쳐다보는구먼. 한 번 자네를 도와 주기까지 했는데…… 너무 심하지 않나?”
 황무는 쓰게 웃었다.
 “삼만 냥에 달하는 은자로 술을 사드렸는데도, 여전히 갚을 은혜가 남았다 생각하시는 게요?”
 “아니, 그건 아니지. 충분히 보답을 받았다네. 다만…… 새로운 은혜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의미일세.”
 “그런 일은 없을 것이오.”
 “장담할 수는 없을걸? 이미 한 번 은혜를 입었으니 분명 또 은혜를 입을 것이네. 은혜라는 것은 원래 처음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버릇이 되는 법이거든.”
 논리적인 말은 아니었다.
 게다가 딸기코가 황무를 도와 줬던 것도 사실 황무로서는 별다른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황무로서는 뭐라 말하기가 곤란했다.
 거지의 말은 횡설수설하는 듯했지만 황무의 말을 막아 버리는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의 화술과 심기(心機)는 보기와는 달리 대단한 것인지도 모른다.
 황무는 남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도 검이 탐나서 여기 왔소?”
 딸기코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결코 아니야. 탐난다기보다는 그냥 호기심이 좀 일어서…… 사실 충천검(衝天劍)이라면 어느 누가 호기심을 갖지 않겠는가?”
 황무뿐 아니라 대지와 창허 역시 하나같이 놀랐다.
 ‘그 검’이란 칭호가 아니라 검의 정확한 명칭을 들은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지와 창허 두 사람을 보니…… 굳이 내가 나설 필요는 없을 듯하군. 활낙신의 일은 자네 둘이 처리해 주게.”
 딸기코는 누가 뭐라고 할 사이도 없이 밖으로 달려나갔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그의 신법. 그 와중에도 술이 남은 술병은 잊지 않는 용의 주도함.
 그 모습을 본 대지는 누군가를 떠올리곤 깜짝 놀랐다.
 “설마 그분이란 말이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저런 모습으로 다니신단 말이오?”
 황무를 돌아보면서 두 가지 질문을 동시에 던지는 대지!
 황무로서는 고개를 끄덕여야 할지, 아니면 저어야 할지 몰라 입을 열어 말로써 대답했다.
 “확실히 그 사람이오. 하지만 저런 몰골로 다니는 이유는 나로서도 알 수가 없군요.”
 
 4․
 활낙신 영영
 
 「음모는 강호 어디에나 있다. 진실로 성공적인 음모란
 이미 마련된 남의 계획을 얼마나 잘 활용하는가에 달려 있다.」
 천지회에 들어갈 때 황무의 생각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그분이 취개(醉)시라면……”
  대지는 곤혹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게다가 그 검이 정말로 충천검(衝天劍)이라면 가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옆에 섰던 창허가 머리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전 대사(大師)처럼 무림의 일에 정통하지가 못합니다. 대체 그 충천검이란 게 어떤 물건이온지……”
 “명검이며 보검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그 검의 주인을 일러드리는 것이 충천검에 대한 가장 빠른 설명이 될 것입니다.”
 “대체 누구이기에……”
 대지 대사는 굳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충천검의 주인은 그만큼 유명한 인물이기에.
 “바로 광무혼이었습니다.”
 일행은 입을 다물었다.
 
 혈혈수라(血血修羅) 광무혼(廣武魂)!
 젊은 시절 옥수검(玉手劍)이라 불렸으며, 절정의 좌수검으로 십절 중에서도 우뚝 섰던 고수.
 그러나 너무 뛰어남은 인성(人性)을 망치기도 한다던가?
 갓스물을 넘긴 나이로 강호 절정고수로 군림하던 그는 엄청난 음모로 강호를 겁난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가 썼던 검이 바로 충천검이었다.
 
 잠시 후 충격이 가시자 황무가 입을 열었다.
 “정말 충천검이라면…… 활낙신이란 여인은 광무혼과 연관이 있을 것이오.”
 그의 표정은 매우 딱딱했다.
 “만일 광무혼과 관련이 없다면 원주가 서신에서 시사했던 암중 음모자의 존재 가능성이 더욱 커지겠지요. 여인은 둘 중 어느쪽이든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대지는 황무의 말을 듣고 나더니 조금 표정이 풀렸다.
 “그렇다면 오히려 다행이군요.”
 황무에게도 밤에 활낙신을 만나러 가야 할 이유가 있음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자신과 창허는 취개가 떠나며 활낙신을 찾을 것을 부탁했기 때문에 꼭 자정에 낙하로 나가야만 했다.
 그러자면 황무의 일을 도와 주기로 한 처음의 약속을 약간 변경해야 했으므로 망설였는데, 황무가 천지회를 조사하는 일을 미루더라도 활낙신의 충천검에 대해 조사하자 하니 다행이라 말했던 것이다.
 창허 또한 황무에게 예를 표했다.
 “저희의 입장을 헤아려 주시니 감사합니다.”
 황무는 옆으로 몸을 옮겨 창허의 예를 피하며 창 밖을 보았다.
 어두웠지만 아직 시간이 조금 있었다.
 “그녀는 항상 자정에 나타난다 하니 한 시진 정도의 여유는 있군요. 전 잠깐 밖에 나가 일을 보고 오겠습니다. 제가 돌아오면 같이 낙하로 출발하시지요.”
 대지와 창허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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