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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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골무적 1권-1

2015.01.09 조회 1,805 추천 15


 序
 강하고 약함
 
 천지간에 존재하는 수많은 검.
 모든 검을 아우르고, 모든 검을 발밑에 두는 검이 존재하니, 일컬어 무적검이다.
 무엇이 강하고 무엇이 약한가.
 모든 것이 상대적이니 약함도, 강함도 모두 마음에서 비롯되는 법.
 하지만 그 누가 진정으로 강하고 약함의 구분을 깨닫고 있단 말인가?
 하여, 무적검이 비로소 그의 손에서 출현했을 때, 세상은 아무도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
 
 
 제 一 장
 운명을 바꾼 사내
 
 운명선이 달라졌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운명을 바꾸었다.
 
 
 운명을 바꾼 사내
 
 쏴아아아아― 철퍽!
 파도는 먼 바다의 바람을 그대로 간직한다.
 바람 속에 깃들었던 이국의 냄새를 머금은 채 다가오는 파도에는 바람의 힘이 녹아 있는 것이다.
 지금 조금씩 거칠어지는 파도는 커다란 바람이 멀리서 몰려옴을 알려주고 있었다.
 육지의 융기를 타고 빠르게 달려오던 산자락이, 깎여 나간 듯 가파르게 경사지면서 절벽을 이루는 곳.
 온통 암벽으로 이루어진 절벽 면이 바다와 접하는 무진포에 지금 바람이 점점 거세어지고 있었다. 조금씩 높아지는 파도에 선착장에 매어놓은 어선 한 척이 빠르게 요동쳤다.
 대낮임에도 하늘은 어둑했다.
 무진포에서도 가장 노련한 어부 중의 한 명인 장씨는 말리기 위해 널어놓았던 그물을 걷은 뒤, 배를 단단히 고정시키기 위해 선착장으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바람이 거세지면 흔들리던 배가 바위에 부딪혀 부서질지도 모르니, 아예 모래사장 쪽으로 배를 돌려 그 위로 가능한 끌어올려 둘 심산이었다.
 “젠장! 폭풍우가 몰려올 때마다 이게 무슨 고생이야? 자식 놈들은 고기잡이를 시키지 말아야지. 차라리 편안히 농사를 짓는 편이… 헉!”
 농사꾼이 어부의 사정을 모르듯 어부 또한 농사꾼의 사정을 알 리 없다. 철없는 투정을 늘어놓으며 선착장으로 걸어가던 어부 장씨는 무심코 절벽을 바라보다가 눈을 부릅떴다.
 사람이 있었다.
 바다에 접해 있는 절벽!
 아래는 온통 몰아치는 파도요, 뾰족한 암초 천지라 떨어지기만 하면 반드시 죽고 말기에, 인근 뱃사람들이 절망벽(切望壁)이라 부르는 가파른 절벽에 한 사람이 매달려 있었다.
 “저, 저런 미친…….”
 그는 맨손으로 절벽에 매달려 있었다.
 두 손가락으로 절벽에 튀어나온 돌부리를 잡아채며 조금씩 위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장씨는 놀라 절망벽 가까운 곳으로 달려가면서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무슨 미친 짓이오? 아래는 암초투성이요. 파도가 겹치며 항상 소용돌이치는 곳이라 떨어지면 뼈도 못 추린단 말이오.”
 장씨의 목청은 뱃사람들 사이에서도 알아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절망벽에 붙은 사내는 듣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는 계속 절벽을 올랐으며,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낡아빠진 옷을 걸치고 봉두난발의 머리칼에 수염을 길게 기른 사내였다. 절망벽 가까이 다가간 장씨는 비로소 그 사내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사내의 이름은 정소운이었다.
 
 정소운은 마을 주민이 아니었다.
 어젯밤에 이곳 무진포를 찾아온 낯선 사람이었다.
 오래전 처를 여의고 자식조차 없어 혼자 몸으로 살아가는 장씨는 자신의 집에서 그를 하룻밤 재워주었었다.
 정소운은 무척 초췌하고 지쳐 보였다.
 거칠게 변한 겉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커다랗고 깊어 보이는 눈이 어쩐지 겁이 많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가느다란 손목과 근육이 거의 없는 정소운의 팔뚝을 보며 장씨는 엔간히 운동을 싫어하는 녀석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는 어두워 보였다.
 그리고 다짜고짜 장씨에게 절망벽의 전설에 대해 물었다.
 무진포에는 전설이 전해온다.
 절망벽을 다른 도움 없이 오직 맨손으로 올라가는 영웅이 출현하는 날, 바다가 뒤집어지면서 수만 길 바다 속에 잠자던 해룡이 하늘로 올라가리라는 전설이었다.
 그리고 절망벽에 올라선 사람은 하늘이 정해놓은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가 있다고 했다.
 정소운이 그 전설에 대해 물을 때, 장씨는 정소운 또한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수많은 젊은이들 중의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는 절망벽의 전설을 듣고 이 무진포를 찾아온 것이리라.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절망벽을 찾아왔다가, 절망하고 돌아섰던가?
 자신의 인생에 만족하지 못하는 자들은 일종의 겁쟁이다.
 그들 중에, 목숨을 걸고 절망벽을 오를 정도로 큰 용기를 지닌 사람은 여태껏 없었다.
 때문에 장씨는 간밤에 정소운에게 절망벽의 전설을 얘기해준 다음 그 사실을 잊었다.
 잊은 채 폭풍우에 대비하기 위해 그물을 걷으러 나온 것이다.
 한데 폭풍우가 몰아치기 시작하는 가운데, 절망벽에 매달린 사람이 있는 것이다.
 겁 많아 보이는 눈동자와 가느다란 손목을 지닌, 남들보다 오히려 유약해 보이는 정소운이 절망벽에 매달려 조금씩, 조금씩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미, 미친 건가? 죽고 싶어 환장을 했는가? 이제 곧… 포, 폭풍우마저 휘몰아칠 터인데.”
 장씨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절망벽에 매달린 정소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장씨의 말에 호응이라도 하듯 바람은 거세졌다.
 쿠오오오오―!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수평선 쪽에서 나타난 먹구름은 무섭게 기세를 뻗치더니 순식간에 모든 하늘을 덮어버렸다.
 콰르릉!
 뇌전이 치더니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씨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배를 모래사장 위로 끌어올려 놓아야 한다는 사실도, 그물을 걷어야 한다는 사실도 모두 잊고 말았다.
 아직도 정소운은 절벽을 오르고 있었다.
 한 손, 한 손 뻗으며 위로 올라갔다.
 온몸이 비에 젖고 있지만, 정소운은 멈추지 않았다.
 바람이 거세지면서 파도 또한 매우 높아져 장씨의 고깃배를 삼킬 듯했으나 장씨는 여전히 움직일 줄 몰랐다.
 그는 주먹을 힘껏 쥐고 절벽을 오르는 정소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더, 조금만 더…….”
 장씨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정소운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맨손으로 절망벽을 오르면, 먼 바다에서 용이 하늘로 솟구치고 절벽을 오른 사람은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전설은 어쩌면 그저 전설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절벽을 맨손으로 올라가는 정소운이란 사내는 전설이 아니라 분명 현실이었다.
 
 ―자네는 무엇 때문에 절망벽에 관심을 두나? 무슨 이유로 운명을 바꾸고 싶은 건가?
 
 간밤에 지나가듯 물었던 장씨의 말에, 정소운은 나직한 음성으로 대답했었다.
 
 ―친구가 죽었어요. 나는 그 친구를 정말 좋아했지요.
 
 정소운은 자신이 무척이나 약하며 겁도 많다고 하였다.
 그렇게 태어났다고 말하였다.
 그 운명을 바꿀 수만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노라고 또렷한 어조로 말하였었다.
 “아아, 나라면 이렇게 몰아치는 비바람이 아니더라도 단지 절벽에 매달려 있다는 것만으로도 겁에 질려 손조차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정소운. 겁이 많다고 하더니 거짓말이었나?”
 장씨는 절망벽을 올라가는 정소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옴을 느꼈다.
 
 바람은 거셌다.
 바람은 정소운이 절벽에 튀어나온 돌부리를 잡고 위로 올라가려 할 때마다, 그의 몸을 거세게 흔들어 멀리 절벽 아래로 날려버릴 기세였다.
 내리는 비는 손가락을 미끄럽게 만들었다.
 정소운은 이를 악다물고 있었다.
 “…나 무서워, 무쌍아. 정말 무서워.”
 정소운은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절벽을 올랐다.
 친구의 이름은 초무쌍. 그리고 초무쌍은 이미 죽었다.
 정소운의 손가락은 피투성이였다. 손가락뿐 아니라 팔뚝도 마찬가지로 성한 곳을 찾기 어려웠다.
 조금이라도 절벽에 더 달라붙기 위해 정소운은 맨발로 절벽을 오르고 있었는데, 보이지 않으나 느껴지는 고통으로 미루어 발가락 역시 손가락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 내가 얼마나 무서운지… 무쌍아, 너는 알지? 너만은 알고 있지, 응?”
 하지만 정소운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쉬지 않고 손을 움직였으며, 조금씩 절벽 위로 올라갔다.
 번쩍!
 뇌전이 치면서, 공교롭게도 한 줄기의 벼락이 정소운이 오르고 있는 절망벽의 위쪽에 작렬했다.
 꽈드드드등!
 거대한 암반이 갈라지며 절망벽에서 떨어져 나왔다.
 “……!”
 정소운은 눈을 부릅뜨고 그 광경을 올려다보다가, 다급히 몸을 절벽에 붙였다.
 암반이 떨어져 내린다.
 다행히 암반은 정소운의 등을 지나쳐 파도 속으로 떨어졌으나, 뒤이어 떨어져 내려온 돌멩이들 중 하나가 정소운의 등을 강하게 때렸다.
 뻐―억!
 “큭!”
 정소운은 돌부리를 잡았던 손을 놓치고 말았다.
 주르륵 미끄러지는 절벽의 표면은 비에 젖어 미끄럽기 그지없었다. 몇 번이고 손가락을 움직여 튀어나온 돌을 움켜잡으려 했으나 그때마다 정소운은 실패하고 말았다.
 아래는 까마득한 절벽.
 이대로 떨어지면 소용돌이에 휩쓸려 암초에 갈가리 찢겨진 살점 조각으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물고기의 먹이가 되겠지.
 정소운의 눈앞으로 절벽 표면 중 유난히 어두운 부분이 스치듯 지나갔다.
 그 어두운 부분이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 따위는 없었다. 정소운은 오른손을 손목까지 힘껏 그 어두운 부분에 쑤셔 넣었다.
 뿌드드드득!
 어쩌면 팔목의 뼈가 그대로 부러져버렸는지도 몰랐다.
 하여간 정소운은 바위 사이 움푹한 곳에 오른손을 넣을 수 있었고, 가까스로 추락을 면했다.
 손끝에서 머리끝까지 도저히 말로 표현하지 못할 고통이 밀려왔다.
 “나는… 차라리 죽고 싶어. 지금… 이 고통보다는 죽은 후의… 안식이 더 편할 것 같아. 하지만…….”
 정소운은 이를 악물었다.
 고통은 고통일 뿐이었다.
 고통은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다만 죽음이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징조일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아. 내겐 죽을 자격조차… 없다는 걸. 네… 원한을… 네 복수를 갚은 후에야 비로소 내게 자격이 생긴다는 걸… 알고 있어.”
 정소운은 다시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부러진 듯한 오른 손목은 돌부리를 잡는 대신, 바위 사이의 틈에 집어넣었다. 그렇게 정소운은 또다시 절벽을 기어올랐다.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해. 어차피 죽은 목숨이니까 무서운 건 하나도 없지. 이게 바로 내가 용기를 내는 비결이야. 이른바 투명구심. 목숨을 던져서 용기를 얻는 비결이라구.
 
 그 말을 할 때의 초무쌍은 웃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두 번 다시 초무쌍은 웃지 못한다.
 정소운, 자신을 바라보며 말을 걸지도 못한다.
 초무쌍은 죽었다.
 바람과 비는 더욱 거세졌으나 정소운은 쉬지 않았다.
 비가 정소운의 눈을 때린 뒤 바닥으로 흘렀는데, 그 빗물 속에 정소운의 눈물도 함께 섞여 있었다.
 하지만 정소운은 어느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울면서 또한 웃었다.
 고통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졌지만, 그 고통의 강도만큼 굳건해지는 자신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기에 정소운은 웃기 시작했다.
 
 장씨는 꼼짝도 못하고 아래에서 정소운이 절망벽을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암반이 떨어져 정소운의 등을 때렸을 때, 그는 정소운이 꼼짝없이 아래로 떨어져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소운은 살아남았다.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다시 절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새 저녁이 오고 그리고 밤이 되었다.
 낮에도 어둑했던 세상은, 밤을 맞이하자 아예 칠흑으로 변해 간간히 하늘과 땅을 잇는 뇌전의 불빛만을 유일한 광채로 지니게 되었다.
 장씨는 정소운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자리에서 떠날 수가 없었다.
 추위와 배고픔을 잊은 채 장씨는 계속 서 있었다.
 지금 천지간을 통 털어 아무도 모르는 투쟁을 정소운 혼자서 벌이고 있는 것이다.
 오직 장씨 자신만이 유일하게 그 투쟁을 지켜보는 사람이었고, 유일하게 그를 응원하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장씨는 떠날 수가 없었다.
 간간히 터져 나오는 뇌전의 불빛을 통해 조금씩 위로 올라가는 정소운을 확인하면서 장씨는 굳어버린 듯 그 자리를 지켰다.
 그리하여 다시 새로운 아침이 밝았다.
 폭풍우 속이라 세상은 그다지 밝아지지 않았으나, 장씨가 뇌전의 빛을 빌리지 않고 정소운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는 밝아졌다.
 햇살은 없었으나, 장씨는 그 마음속에 환한 빛이 비춰오는 느낌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한바탕의 긴 숨을 내쉬면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소운의 손이 마침내 절망벽의 가장 위쪽에 닿은 것이다.
 
 “하악― 하악― 하악― 하악!”
 거친 숨소리.
 고막이 얼얼할 정도로 가쁜 호흡과 심장박동은 정소운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소리치고 있었다.
 
 ―해냈어. 너는 해냈다. 마침내 올라왔다.
 
 정소운은 몸을 폈다.
 두 팔을 넓게 벌리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파도는 거대한 해일로 변해 무진포를 집어삼킬 듯 닥쳐오고 있었다.
 그 파도가 작아 보였다. 무서운 폭풍우와 이글거리는 뇌전도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정소운은 가슴을 넓게 펴고 세상이 떠나가라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런 거다! 나는 이미 죽은 거다! 나는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거다!”
 정말이었다.
 정소운은 잃을 것이 없었다.
 “최악의 경우래 봤자, 나는 무쌍을 만나러 가는 거다. 으아아아아―!”
 비는 더욱 심하게 내리고 뇌전은 세상을 삼킬 듯했다. 하지만 가슴을 펴고 서 있는 정소운만은 삼킬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소운은 뚜벅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갔다.
 “이제… 더 이상!”
 내려다보는 바다는 소용돌이치는 거대한 괴물이었다.
 정소운은 다시 한 걸음 더 앞으로 걸어갔다.
 “이제 더 이상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정소운은 땅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두 손을 앞으로 펴고 머리부터 바다를 향해 뛰어들었다.
 “보고 있니, 무쌍아? 내게 힘을 줘. 저 괴물 같은 바다를 극복해낸다면 나는 세상 그 무엇에도 지지 않을 거야. 나는 벌써 죽어 있으니 나를 죽일 사람도 세상에는 없을 거야. 조금만 기다려줘. 네 복수는 내가 할게. 그런 다음에 우리 꼭 다시 만나자.”
 우리 다시 꼭 만나자!
 콰아아아아아아아―!
 가장 거대한 파도가 절망벽을 두드린 다음, 정소운의 신형을 삼켜버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소운의 모습을 지켜보았던 어부 장씨는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의 배는 파도에 이미 부서져 버렸지만 장씨는 그것조차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절망벽을 맨손으로 올라가는 사람이 마침내 나타난 것이다.
 정소운은 그런 후에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어 거대한 파도 속에 삼켜져 버린 것이다.
 뇌전이 몇 차례 우르릉거리더니 까마득한 수평선 멀리 거대한 용오름이 일어났다.
 바다에서 일어나는 돌개바람이 무서운 기세로 바닷물을 하늘로 빨아올리는 장관!
 모든 뱃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용오름이야말로 물속에 웅크리고 있던 용이 비로소 하늘로 승천하는 것이라고.
 그날 이후, 장씨는 만나는 사람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그날 밤의 얘기를 해댔다.
 그날 자신은 분명히 한 영웅을 보았다고.
 그는 바다 속의 해룡을 불러 타고 하늘로 승천하였으며, 언젠가 다시 돌아와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운명을 바꾼 한 영웅을 그는 분명히 만났으며 자신의 집에서 하룻밤 묵기도 하였다고 장씨는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그리고 일 년과 두 달이 더 흘렀다.
 
 * * *
 
 “으아! 춥다, 추워!”
 휘우우우웅―!
 거친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눈발이 하늘과 땅을 모두 덮으며 날리는 가운데, 보이는 것이라곤 눈뿐인 산등성을 뽀득뽀득 밟으며 걸어가는 사람이 있었다.
 두툼한 솜옷을 걸치고 귀마개까지 했건만 그러고도 추위에 못 이겨 가뜩이나 작은 체구를 한껏 움츠린 유생 차림의 사십대였다.
 동그란 눈이 무척 현명해 보였지만, 살짝 위로 올라가 있는 입꼬리는 나이답지 않은 장난기를 머금고 있었다.
 “떠그랄!”
 곽통천(郭通天)은 설상화를 신었음에도 자꾸만 눈 속에 빠지려고 하는 자신의 발을 느끼며 툴툴거렸다.
 “공야노반, 이 빌어먹을 자식! 하필이면 이런 날이냐? 이렇게 춥고 눈보라 치는 날을 잡아서 사람을 움직이게 만들다니.”
 곽통천은 덜덜 떨면서 걸어갔다.
 뒤쪽으로 그가 지나온 족적이 눈보라에 금세 사라져, 그의 모습은 마치 은백의 눈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섬 같았다.
 곽통천은 문득 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하기사 공야 그놈을 원망해서 무엇 하랴. 철없던 나이 스물에 일었던 파문 하나를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잘못된 길임을 알면서도 나아가야 하는 나 곽통천의 업보가 실은 가장 큰 것을.”
 곽통천은 눈보라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모든 것은 인연과 운명의 끈을 따라 돌아가고 또한 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이 산속의 눈보라도, 아직 끝내지 못한 내 철없던 시절의 애증도, 그리고 내 시린 발도 모두가 인연에 얽혀 다가오고 멀어지는 것이니, 내 누구를 원망하며 또한 탓할 수 있단 말인가?”
 곽통천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길게 내뱉더니 돌연 히죽 웃었다.
 “히이, 이렇게 말하고 나니까 내 스스로 생각해도 유식한 티가 줄줄 흐르는걸. 끌끌!”
 혼자 중얼거리고 혼자 웃어대던 곽통천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거친 눈보라 속에서 무언가를 느꼈고,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눈보라는 은색의 장막 같았다. 그 장막을 뚫고 수십 개의 등불들이 다가왔다. 등불은 곧 안광을 발하는 동물의 눈임이 밝혀졌는데, 그 눈의 주인은 유난히 푸른빛의 털을 가지고 있는 늑대 떼였다.
 “처, 청랑(靑狼)! 백수의 왕 호랑이조차 피해간다는 놈들이다. 으으, 이렇듯 무리를 지어 나타나다니.”
 천산의 겨울은 길다.
 겨울이 긴 만큼 먹을 것은 부족했고, 잔뜩 굶주린 늑대들의 눈에 곽통천은 맛있는 진수성찬쯤으로 보일 터였다.
 크르르르르―!
 낮게 목을 울리면서 늑대들은 곽통천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곽통천은 이마의 식은땀을 닦으며, 오른손을 들어 육효(六爻)를 짚기 시작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진언을 중얼거리며 육효를 뽑아본 곽통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참, 이상하네. 아무리 짚어보아도 오늘 나 곽통천의 운세에는 살(煞)은커녕 별다른 위험조차 없다. 오히려 평생 다시 보기 힘든 귀인을 만날 좋은 운세인데 난데없이 청랑의 떼라니. 이게 무슨 일인고?”
 눈 덮인 설산 깊숙한 곳에서만 살아가며 극한의 추위를 견뎌가는 동안 늑대들의 피부는 음기를 흡수하게 된다.
 흡수된 음기는 산속의 음기에 저항하면서 늑대의 털을 푸르스름한 청광을 지니게 바꾸는데, 그렇게 바뀐 늑대들의 가죽은 호랑이의 이빨로도 쉽게 잘리지 않을 만큼 질기게 변한다.
 그것이 바로 청랑이었다.
 청랑 떼는 천천히 다가오더니, 곽통천의 십여 장 앞에서 멈추었다.
 곽통천은 말로는 두렵다고 했으나, 몸을 떨지는 않았다. 물끄러미 늑대 떼를 바라보며 머리를 긁었다.
 “어떻게 된 노릇이지? 드디어 나 무불지(無不知) 곽통천의 신산술(神算術)도 맛이 갔다는 건가? 하긴 뭐, 육십 평생을 써먹었으니 영험이 떨어질 때도 되었지.”
 겉으로 곽통천은 마흔 이상은 돼 보이지 않음에도 육십 평생이라 말하였다. 자신의 나이를 스스로 속일 이유는 없을 것이다.
 곽통천은 늑대 떼를 바라보고 있었다.
 늑대 떼가 갈라지며 중앙에서 가장 크고 푸른빛이 강하게 감도는 늑대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청랑왕(靑狼王)! 호랑이나 곰도 일격에 물어 죽인다는 영수(靈獸)가 모습을 드러낸 건가? 한데 이상하구나. 네 녀석이 내뿜는 살기는 어쩐지 나를 향하는 게 아닌 듯 느껴진단 말이다.”
 “비켜주시겠소?”
 목소리는 느닷없이 곽통천의 뒤에서 들려왔다.
 곽통천은 움찔 놀라며 서둘러 옆으로 비켜섰는데, 그곳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걸레와 다름없는 옷을 걸치고 눈 위에 맨발로 서 있는 사내는, 머리카락과 수염이 정신없이 늘어져 얼굴과 눈을 가리고 있었다.
 다만 두 팔뚝에 둘둘 가죽을 말고 있었는데, 추위를 막기 위한 용도는 아닌 듯 보였다.
 “그걸로 늑대의 이빨을 막을 참인가? 청랑의 이빨은 그야말로 날카로운 비수와 다를 바 없네. 단단한 쇠가죽도 단숨에 뚫을 정도로 예리하다네.”
 “걱정 마시오.”
 사내는 두 팔뚝에 묶은 가죽을 이와 나머지 한 손을 이용해 단단히 고정시키며 말했다.
 “이 가죽 역시 청랑의 것이니 단단하기로 따지자면 마찬가지니까.”
 “……!”
 사내는 곽통천을 지나 앞으로 걸어갔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청랑의 떼들이 나직한 울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서기 시작한 것이다.
 곽통천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청랑은 두 마리 이상 모이면 백수의 제왕이라는 호랑이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전해진다.
 그런 청랑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
 ‘청랑들이 물러나? 저 청년은 누구인가? 손의 가죽이 청랑의 것이라면 저 청년은 계속 청랑을 사냥해왔다는 것인가? 그것 때문에 청랑들이 겁을 먹고 물러나는 것인가?’
 하지만 한 마리, 청랑왕만은 물러나지 않고 이빨을 드러낸 채 으르렁거렸다.
 ‘알겠다. 청랑왕이 나타난 것은 모두 저 청년 때문인 거구나. 청년이 계속 제 동족을 도륙하자 청랑왕이 나설 수밖에 없었구나.’
 청년은 천천히 다가갔고, 청랑왕은 제자리를 지키며 낮게 울었다.
 곽통천은 혼자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헤헷! 곽통천아, 곽통천아. 너는 왜 이렇게 똑똑해버리냐? 보지 않고도 마치 본 것처럼 상황을 분석해내고 있지 않느냐? 게다가 점괘도 봐라. 벌써 위험은 없이 지나치고 있지 않냐. 그리고 귀인… 으잉, 귀인이라고? 저 봉두난발에 거지꼴을 한 청년이 귀인이라고?’
 사내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사내와 청랑왕 사이에 살기가 증폭되었고, 터질듯 팽팽한 긴장감이 가득 차올랐다.
 어느 순간 그 살기가 터져 나갔다.
 캬앗!
 산을 울리는 울부짖음과 함께 청랑왕이 몸을 날렸다.
 눈보라 속에서 은빛으로 번뜩이는 이빨이 번갯불처럼 다가와 청년의 왼쪽 팔뚝에 그대로 박혔다. 같은 청랑의 가죽으로 막기는 했으나, 그래도 청년의 팔뚝에서는 피가 튀었다.
 곽통천은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청랑왕의 이빨은 아무리 청랑의 가죽이라 해도 완전히 막아내지는 못한다. 괜찮은가, 청년? 청랑의 이빨에는 화독(火毒)이 있어 몸이 데는 듯 뜨거울 터인데.”
 청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대답할 여유도 없었다.
 청년은 자신의 왼쪽 팔뚝을 물고 있는 청랑왕과 밀고 당기는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청년이 피식 웃었다.
 “좋다. 눈 속에서 얼어붙었던 피가 이제야 겨우 풀리는 기분이구나, 청랑왕, 겨울 동안 끝내지 못했던 승부를 오늘 결판낸다. 불만 없지?”
 늑대에게 마치 사람처럼 말을 거는 청년을 보며 곽통천은 눈을 부릅떴다.
 ‘겨울 동안? 가만 저 녀석, 가만있어도 얼어 죽기 십상인 이 산속에서 겨울 내내 청랑 떼와 싸워왔다는 건가?’
 곽통천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한참 동안 고개를 갸웃거리던 곽통천은 머리를 두 손으로 부비며 말했다.
 “젠장! 그걸 알기에는 내가 가진 정보가 너무 부족하군. 곽통천아, 곽통천아. 이것이 너의 한계로구나. 결국 네놈의 신산술은 알 만한 것만 알 뿐이로구나.”
 순간 늑대의 울음소리가 다시 한 번 터져 나왔다.
 커엉!
 굵은 근육덩어리의 목을 흔들어, 청랑왕은 깨물고 있던 청년을 멀리 날려버렸다.
 청년의 몸이 눈 위에 떨어져 몇 바퀴 굴렀다. 청년은 즉시 몸을 일으켰지만, 그런 청년을 향해 청랑왕은 곧장 다시 몸을 날리고 있었다.
 땅을 박찰 때 뒤로 튄 눈덩이들이 거센 눈보라와 합쳐져 흰색 눈의 안개로 주변을 온통 덮었다.
 “오너라!”
 청년의 주먹이 청랑왕의 얼굴을 마주쳐갔다.
 꽈―앙!
 청랑왕의 턱이 옆으로 돌아갔으나, 강철도 자를 듯한 앞발은 청년의 얼굴을 그대로 할퀴어버렸다.
 피가 튀었다.
 하지만 청년은 뒤로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한 발 앞으로 나가며 청랑왕을 껴안았다.
 눈 위에서 청랑왕과 청년은 한 몸이 되어 뒹굴었다.
 피가 허공으로 솟구치고, 눈 바닥을 물들이며 분홍빛의 문양을 여기저기 만들었다.
 곽통천은 식은땀을 흘리며 청년의 싸움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격식도 없다. 배운 바 없는 그야말로 막싸움일 뿐이다. 하지만 한 가지, 저 청년은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구나. 어떤 고통도 개의치 않는구나. 아아, 놀라운 기세다. 그 기세가 청랑 떼를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주변의 청랑 떼들은 ‘끼이잉’ 하는 낮은 울음을 삼키며 꼬리를 내리고 있었다. 자신들의 대장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음에도 감히 끼어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짐승은 사람보다도 훨씬 기세에 민감하다.
 그들은 이성이 아닌 본능으로 자신보다 강한 살기와 적의를 느낀다.
 그래서 두려움을 느낀 상대에게는 감히 먼저 덤벼들지 않는다.
 그때 엉켜 있던 청년과 청랑왕의 몸이 다시 떨어졌다.
 몇 번이나 부딪치고 주먹으로 때리며, 발톱으로 할퀴기를 반복하던 둘은 조금 떨어진 채 서로를 노려보았다.
 청년의 두 팔뚝을 감았던 청랑의 가죽은 이미 거의 헤집어진 상태였다. 청랑왕은 자세를 낮게 낮추고 으르렁거렸다.
 청년은 청랑왕을 노려보더니 돌연 몸을 펴면서 허리춤의 허점을 노출시켰다.
 “좋아. 오너라, 청랑왕. 이제 마지막이다!”
 캬아앗―!
 청랑왕이 웅크렸던 몸을 펼치며 달려들었다. 허리춤에 드러난 허점을 청랑왕의 날카로운 이빨은 결코 놓치지 않았다.
 “미친! 일부러 허점을 보여준다는 건가? 너무 위험해!”
 곽통천의 놀람에 찬 고함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청랑왕의 이빨은 청년의 허리를 파고들었다. 피가 튀기고 청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청년은 신음소리 하나 흘리지 않고 양손을 마주 잡아 손망치를 만들더니, 곧장 낭왕의 뒤통수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꽝! 꽝! 꽈―앙!
 머리를 얻어맞은 청랑왕의 몸은 심하게 흔들렸고, 그 바람에 청년의 허리에서 뿜어지는 피의 양은 오히려 더 늘어났다.
 고통도 심해질 것이다.
 뒤통수를 맞고 있는 청랑왕은 이빨을 풀지 않았다.
 “어, 어리석다, 청년! 늑대는 죽기 전에는 한 번 깨문 이빨을 절대로 풀지 않는단 말이다! 피, 피를 너무 많이 흘리면 자네가 먼저 죽게 된다.”
 청년은 곽통천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그는 곽통천이라는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청년은 오직 자신과 싸울 적, 즉 청랑왕만을 생각했고 지금 이 순간 청랑왕의 머리와 그 머리를 내려치는 자신의 손망치만을 인식하고 있었다.
 꽝! 꽝! 꽝! 꽝! 꽝! 꽝! 꽝!
 눈보라를 뚫고 둔탁한 소음은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피가 튀기고 청랑왕의 머리는 흔들렸다.
 곽통천은 그 끔찍한 광경에 식은땀을 주르륵 흘리며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달려가 청년을 돕고 싶었지만, 결코 도울 수가 없었다.
 청년의 눈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싸움은 청년의 싸움이었고 다른 사람은 감히 끼어들 여지가 없어 보였다.
 꽝! 꽝! 꽝! 꽝! 꽝! 꽝! 꽝!
 청년은 물론 곽통천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그의 외침을 듣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아직까지 자신의 인식 안으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모든 힘과 정신을 오직 청랑왕에게만 집중하기 위함이었다.
 청랑왕은 청년의 허리를 깨물고 있었다.
 날카로운 은빛의 이빨은 절대로 열리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꽝! 꽝! 꽝! 꽝! 꽝! 꽝! 꽝! 꽈―앙!
 마침내 청랑왕의 눈빛이 흐려지더니, 어느 순간 이빨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풀린다 싶은 순간, 늑대의 이빨 사이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끼―잉!
 그 와중에도 청년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더욱 부릅뜬 눈으로 미친 듯이 손망치를 휘둘렀고, 머리를 격타하는 소음은 눈보라 속에서 끊이지 않고 울려 퍼졌다.
 청랑들이 주춤거리며 더욱 뒤로 물러났다.
 곽통천마저 청년의 기백에 압도당해 추위를 잊은 채 서 있었는데, 마침내 청랑왕이 바닥에 쓰러졌다.
 청랑왕은 더 이상 숨 쉬지 않았다. 뒤통수가 깨어진 채 뇌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피는 청년의 허리춤에서도 흘렀다. 커다랗게 덜어져 나간 살점 안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고, 참혹하게도 내장마저 일부가 삐져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청년은 웃고 있었다.
 삐져나오는 내장을 손으로 밀어 넣으면서도 청년은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헤헤. 헤헤헤. 크헤헤헤헷!”
 청년은 더없이 통쾌해하고 있었다.
 작은 웃음소리는 어느덧 커져 파안대소로 변해 주변을 울렸다.
 “하하하! 푸하하하하하하―! 네놈이 비록 죽기 전까지 이빨을 풀지 않는다지만, 나 정소운 역시 죽을 때까지는 주먹을 멈추지 않아. 결국은 내가 이겼지 않나, 응?”
 청년은 시선을 돌렸다.
 그 눈빛을 받자, 사방의 청랑 떼들이 놀란 강아지마냥 달아나기 시작했다.
 곽통천은 청년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당신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렸소. 게다가 늑대의 이빨에 서린 독기가 몸에 들어갔을 테니 서둘러 응급조치를 하지 않으면 위험하오.”
 청년은 비로소 곽통천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뿐으로 다시 시선을 돌린 청년은, 낭왕의 시체를 향해 몸을 굽혔다.
 웬만한 소보다 큰 낭왕의 몸뚱이를 청년은 두 손으로 집어 들더니, 그 목을 이로 물어뜯었다.
 콰직!
 둔탁한 소리와 더불어 청년의 이는 낭왕의 목 혈관을 파고들었고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아직은 따뜻한 피를 청년은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꿀꺽, 꿀꺽, 꿀꺽.
 목을 타고 넘어가는 피의 흐름을, 곽통천은 청년의 목 움직임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청년의 목은 그다지 굵지 않아 강해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곳저곳에 나 있는 상처로 인해 함부로 무시하지 못할 인상을 심어주고 있었다.
 얼마나 먹었을까?
 청년은 마침내 청랑왕의 시체를 다시 내려놓았다.
 만족스러운 듯 트림을 내뱉으며 청년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피는 피로 보충하면 되는 것이지. 아아, 배부르다.”
 눈보라에 의해 청년의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마침내 본 모습이 드러났다.
 곽통천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젊을 거란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로……. 한데 기이하다. 눈이 크고 입술이 갸름한 이 청년의 상은 전형적인 겁쟁이 상이 아닌가? 아무리 관상을 살펴도 졸장부의 운명을 피할 수 없거늘!’
 곽통천은 청랑왕의 시체를 다시 한 번 보았다.
 청년은 호랑이를 물어 죽인다는 청랑왕과 맨손으로 싸워 마침내 청랑왕을 죽였다. 겁쟁이며 졸장부인 사내로서는 이뤄낼 수 없는 일이었다.
 “자, 자네의 이름은 무엇인가?”
 “…기억나지 않소. 하지만… 내 친구는 예전에 나를 정소운이라 불렀던 것 같소.”
 정소운은 품에서 붕대를 꺼내 허리의 상처를 힘껏 동여맸다.
 그리고 다시 품속에 손을 넣더니 날카롭기 그지없는 한 자루의 비수를 꺼내 들었다.
 곽통천은 정소운을 보며 물었다.
 “자네는 본래 칼을 지니고 있었군. 한데 왜 그 칼은 쓰지 않은 건가? 청랑왕과 싸울 때 칼을 썼더라면 훨씬 쉬웠을 터인데.”
 “칼을 쓰면… 죽는다는 실감이 무뎌지니까.”
 “……!”
 정소운은 칼을 이용해서 낭왕의 배를 익숙한 솜씨로 가르기 시작했다. 겨울 내내 여러 번 해본 일이기 때문이다.
 배를 헤집어 쓸개를 베어낸 정소운은 그걸 입속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지독하게 쓴맛이 입속을 채웠을 테지만, 정소운은 인상조차 찡그리지 않고 청랑왕의 가죽을 벗겨가기 시작했다.
 “쓸개를 씹는다면 확실히 늑대 이빨 속의 독을 해독할 수 있을 테지. 자네는 늑대와의 싸움에 매우 익숙하군.”
 곽통천의 말에 정소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 년하고도 아마 몇 달이 더 지났을 거요. 그 시간 동안 나는 내내 청랑 떼와 싸워왔으니까. 내가 처음 이 산에 들어왔을 때, 늑대는 나를 자신들의 먹이로 생각했지. 하지만 끝내 내가 그놈들을 먹어치웠소.”
 곽통천은 말없이 서 있었다.
 마침내 청랑왕의 가죽을 완전히 벗겨낸 정소운은 그 가죽을 어깨에 메며 곽통천을 힐끗 보였다.
 “청랑 떼는 이제 두 번 다시 사람에게 덤벼들지 못할 거요. 그들은 이미 겁을 먹었으니까. 한데 당신은 왜 길을 가지 않고 거기 서 있소?”
 “자네의 손을 볼 수 있겠는가?”
 “……!”
 정소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은 이상한 사람이군. 무엇 때문에 내 손을 보려는 거요?”
 “손금을 보고자 함이네. 나는 곽통천이라는 사람으로, 사람의 관상과 운명을 어느 정도 볼 줄 안다네. 내가 보는 자네의 관상은… 이런 말하기는 좀 뭐하지만 겁이 많고 소심하여, 어쩔 수 없는 졸장부의 상(相)이라네. 특히 어릴 때 육친과 관련되는 큰 사건을 겪어 그 소심함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운명일세.”
 “…….”
 정소운은 곽통천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나는 겁이 많은 단소귀 정소운이오. 내가 여덟 살 때, 부모님은 사고로 돌아가셨소. 나는 그걸 내 눈으로 직접 보았고 그 후로 더욱 죽음이라는 것이 두려워졌었소.”
 “그러니 자네의 손금을 좀 보여주지 않겠는가? 다른 의도는 없네. 그저 내 눈이 정말로 틀린 것인지 확인하고 싶어서일 뿐이네.”
 정소운은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손금을 찬찬히 바라보던 곽통천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더니, 급기야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만 같았다.
 “이, 이럴 수가… 아아… 이럴 수가…….”
 정소운의 손바닥에는 큰 상처가 많았다.
 그중 가장 큰 상처를 가리키며 곽통천이 물었다.
 “이 상처는… 어, 어떻게 생긴 것인가?”
 “절벽을 오르다가 떨어질 뻔한 적이 있소. 오른손을 바위틈에 박아 넣어 겨우 떨어지는 신세를 면할 수 있었지. 아마 그때 생긴 상처인 모양이오.”
 “아아… 운명이 바뀌었다. 본래 졸장부의 운명을 타고 났으나, 그 손금이 이 상처와 크고 작은 다른 상처들로 인해 전혀 다르게 바뀌었다.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운명은 본래 무슨 수로도 바꿀 수 없는 것인데, 그대는… 그대는 그 운명을 바꾼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이런 일은 본래 불가능하다.”
 곽통천은 식은땀을 흘리며 정소운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소운이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운명이니, 숙명이니 하는 것에 대해 나는 아는 것이 별로 없소. 하지만… 죽은 사람이라면 운명이라는 것이 아무 소용없지 않겠소?”
 “……!”
 “일 년이 조금 넘는 지난 세월 동안 나는 실로 수백 번을 고쳐서 죽고 또다시 죽었소. 어느 날 문득 나는 나의 고통과 나의 죽음을 모두 실감할 수 있게 되더군. 그러나 놀랍게도 내 마음속에서 일체의 두려운 것이 사라지고 말았소.”
 곽통천은 비로소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런 것이로구나. 자네는 자신의 의지로 하늘이 정해준 명운에서 벗어난 것이로군. 아아, 이 얼마나 오묘한 하늘의 안배인가? 아니, 사람의 의지인가? 귀인을 만날 것이라는 나의 점괘는 과연 거짓이 아니었구나.”
 정소운은 고개를 들어 눈보라가 조금씩 그치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씨가 좋군. 나는 이제 산을 내려가려 하오. 당신은 아직도 내게 볼일이 끝나지 않았소?”
 “아, 미안하네. 이제 가도 좋네. 먼저 내려가게. 나는 이곳에서 조금 더 머물다 가겠네.”
 정소운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눈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곽통천은 걸어가는 정소운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의 신형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 속에 서 있었다.
 이윽고 정소운이 보이지 않자,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는 당신이 정한 운명을 스스로 벗어나고 말았군요. 이것 또한 당신이 본래 정하신 안배란 말입니까? 어쨌거나 이제 그의 앞날은 저의 신산술로서도 도저히 점쳐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어쩌면… 저 녀석이야말로 이미 정해져버린 일련의 피보라 속에 등장한 유일한 구원일지도 모르겠군요. 하늘이여!”
 
 * * *
 
 정소운은 천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보고 싶은 사람이 많았으나, 그중에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은 초무쌍이었다.
 하지만 초무쌍은 이미 세상에 없다.
 어릴 때부터 그를 돌봐주고 끝내 그의 생명마저 구해준 친구는 영원히 불길 속에 묻히고 말았다.
 세상은 그를 잊었다.
 하지만 정소운이 어찌 초무쌍을 잊을 수 있는가?
 어린 시절부터 초무쌍이 목숨을 잃기 전까지의 그 모든 시간들은 정소운은 단 한순간도 잊지 않았다.
 잊을 수가 없었다.
 
 
 제 二 장
 단소귀 정소운
 
 이 칼
 소독 끝났습니다.
 고통은 그다지 길지 않을 겁니다, 형님.
 
 
 단소귀 정소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까?
 생각 같아선 함박눈이 펄펄 내리던 십이월의 하늘 아래에서 내가 첫 탄생의 고고성(呱呱聲)을 터뜨리던 그날부터 모두 말하고 싶다.
 부모님은 강보에 싸인 나를 보며 이 아이가 어서 자라 남들은 상상도 못할 훌륭한 일을 해내기를 바라셨던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세상의 일이라는 것은 대부분 의도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나는 약골로 자라났다.
 또래에 비해 키는 제법 컸으나, 뼈마디가 가늘고 목도 가늘어 걸어갈 때면 꼬챙이에 커다란 머리만 간당거리는 꼴이라고 아이들은 나를 놀렸다.
 우리 집은 부유한 편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매우 가난하여 산자락에 짚과 판자로 지어놓은 오두막에서 살았다.
 나와 두 분 부모님!
 그렇게 세 사람이 살던 어린 시절의 집은 머리를 숙이고 방에 들어가야 했고, 누우면 어른들의 다리가 벽면에 닿을 정도로 좁았다.
 하지만 나는 행복했다.
 두 분은 나를 무척 아껴주셨으니까.
 약초를 캐다 파시던 아버지는 산을 다녀오실 때면 이런 저런 산과일들을 따와서 내 입에 넣어주곤 하셨다.
 그중에서도 작고 빨간 산딸기가 나는 제일 좋았다.
 
 여덟 살 때 비가 많이 내렸다.
 많아도 너무 많이 내려 뒷산이 흔들리더니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돌과 흙더미가 덮쳐왔고, 우리 집도 무너졌다.
 나는 그때 잠들어 있었다. 그래서 중간이 어떻게 되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흙더미 밖으로 나와 있었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는 모두 바위와 흙 사이에 파묻혀 계셨다.
 두 분은 너무 고통스러워 하셨다.
 나를 구하기 위해 밖으로 밀쳐내다가 두 분 자신은 미처 피하지 못하셨던 모양이다.
 부모님은 그렇게 돌아가셨다.
 마을 어른들이 나를 구출했을 때, 부모님은 내 앞에서 고통에 잔뜩 일그러진 모습으로 흙 속에 잠겨 있었고 나는 미친 듯이 울고 있었다고 한다.
 나는 고아들을 돌보는 곳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초무쌍을 만났다.
 여덟 살 때의 일이다.
 그곳에는 나와 같은 처지의 아이들이 많았다.
 아이들은 외로워했고, 외로운 만큼 거칠었으며, 거친 만큼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아버지, 어머니가 고통 받는 모습을 나는 보았다. 아프면, 너무 많이 아프면 사람은 죽는다는 사실을 나는 직접 겪었다.
 죽음은 내게 두려움이었다.
 고통 또한 마찬가지로 두려워지고 말았다.
 나는 맞는 것도 싫지만 때려서 남을 아프게 하는 것도 싫어 싸움을 피하기 시작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것 때문에 나는 오히려 더 많이 맞게 되었다.
 때려도 반항하지 않는 아이.
 언제부터인가 내 이름은 정소운이 아니라 단소귀(胆小鬼)가 되어 있었다.
 겁쟁이라는 뜻이다.
 단소귀 정소운을 때려보지 않거나 혹은 놀려보지 않은 아이는 고아원에 아무도 없었다.
 언제나 아이들에게 놀림당하거나 혹은 매를 맞았는데 딱 한 번 반항한 적이 있었다.
 그날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생일이었다.
 뒷산에 올라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산딸기를 따왔고, 그걸 어머니의 무덤에 가져다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 산딸기를 우리가 대팔(大八)이라고 부르던 네 살 위의 형이 빼앗아 먹었다.
 나는 처음으로 달려들었고, 또한 처음으로 정말로 죽을 정도로 매를 맞았다.
 그때 초무쌍을 처음 만났다.
 초무쌍은 이틀 전 처음으로 내가 있던 고아원으로 왔는데, 언제나 조용히 뒤쪽에서 자신의 일만을 하던 녀석이었다.
 대팔이 나를 넘어뜨리고 배를 타고 올라 내 얼굴을 두드릴 때, 초무쌍이 대팔에게 달려들었다.
 대팔의 주먹은 우리의 주먹보다 두 배는 컸다. 발은 더 커서 세 배는 되었을 것이다.
 대팔은 나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초무쌍을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찼지만, 초무쌍은 나와 달랐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울지도 않았으며, 끝까지 달려들었다.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초무쌍은 대팔을 향해 달려들고 다시 달려들었다.
 마침내 초무쌍의 박치기가 대팔의 코를 부쉈고, 대팔은 코피와 울음을 함께 터뜨렸다.
 초무쌍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지만, 곧 깨어났다.
 깨어났을 때 그는 우리 고아원의 새로운 대장이 되었고, 또한 나의 친구가 되어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 용감해? 아프지 않아? 어쩌면 그렇게 맞으면서도 달려들 수 있어?”
 아마도 내가 열 살이던 때의 어느 날에 그렇게 묻자, 초무쌍은 나를 성의 안쪽으로 데리고 갔다. 외곽에 있어 주변이 황량한 우리의 고아원과는 달리, 성안에는 볼 것이 많았다.
 무쌍은 그 많은 볼거리들을 그냥 지나쳐, 나를 크고 화려한 집 앞으로 데려갔다. 그 집의 대문이 잘 내려다보이는 나무에 올라가더니, 내 손을 잡고 나무 위로 끌어올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큰집의 대문이 열리고 아름다운 아줌마 한 명이 다섯 살가량의 사내아이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잘생긴 꼬마였다.
 “내 동생이야. 이름은 초무경이라고 해. 물론 지금은 초무경이 아니라 단무경이겠지만.”
 손이 귀한 단씨 집안에서 양자를 들이려 했다고 한다.
 초무쌍은 자신을 원하던 그 집에 자기 대신 동생을 들어가도록 했고, 그 후로 시간이 날 때마다 한 번씩 동생의 모습을 보러 성안에 들어온다고 했다.
 하지만 한 번도 동생의 앞에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초무쌍은 말했다.
 “지금 내 모습을 보면 내 동생이 쪽팔리지 않겠어? 언젠가 나는 정말로 멋진 사람이 될 거야. 세상에서 제일 잘난 사람이 되어서 동생을 데리러 갈 거야. 멋진 모습으로 당당하게 말할 거야. 내가 너의 형이다. 만약에… 내가 실패하면, 내가 멋진 놈이 되지 못하면 그때엔 네가 나서서 무경이를 돌봐주면 좋겠다, 소운아.”
 그날 이후부터 무경은 초무쌍만의 동생이 아닌 우리들의 동생이 되었다.
 무쌍이 나타난 이후 고아원 안에서는 더 이상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겁이 많았고 싸우는 것이 무서웠다.
 무쌍은 하루도 싸움을 거르지 않았으며, 싸움이 없는 날은 나무 인형을 만들어 두들기고, 어디서 구해왔는지 진짜 칼을 휘두르면서 땀을 흘리기도 했다.
 어제 진 상대방이 있으면 무쌍은 오늘은 이겨야 직성이 풀렸으며, 오늘 진 상대방은 내일이면 반드시 이기겠다는 결심으로 매일을 살았다.
 열네 살이 되었을 때 주변의 불량배들도 녀석만은 건드리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고아원을 떠나야 하는 때가 다가왔다.
 “함께 낙양으로 가자. 널 때리다가 나한테 맞았던 대팔 기억하지? 그 형이 연락을 보내왔는데, 낙양의 칠보가에 가면 우리들이 할 만한 일이 많다더라.”
 그때쯤에는 나 역시도 낙양의 칠보가가 어떤 곳인지를 알고 있었다. 소위 흑회 내지는 흑사회라고도 불리는 뒷골목이 바로 칠보가였다.
 나는 따라가지 않았다.
 내게는 따로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사람에게 맞는 것도 무섭고, 때리는 것도 마찬가지로 무서웠던 나는 학문을 배우고 싶어 했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열네 살 때의 일이었다.
 그리고 이 년 후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초무쌍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세상에 기댈 것이 없는 고아가 학문을 배운다는 자체가 사실 말도 안 되는 선택이었다.
 나는 마을 서당을 찾아 잡일을 하는 대신에 책을 볼 것을 원했고 허락도 받았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니 글 한 줄 읽을 여유조차 없었다.
 나는 철저히 무시당했다.
 글공부를 하러 온 사람들에게 있어 나는 그저 일하는 머슴이었다. 머슴이 글을 배우려 든다는 자체를 그들은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결국 나는 그곳을 그만두었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술집의 점소이로 살아가던 내 앞에 초무쌍이 다시 나타났다.
 검정색 장포를 멋들어지게 걸친 무쌍은 오만 냥짜리의 전표를 내 앞에 내어놓았다.
 “기억나? 우리들의 동생 무경이.”
 나는 당연히 기억했다.
 “내가 일을 해서 돈을 좀 벌었다. 그런데 돈을 어디에 써야 할지를 모르겠더라. 학문을 배우고 싶다고 했지? 이거 써라. 대신 부탁이 있어, 소운아. 우리 동생 무경이 말이다… 만약 내가 나중에 그 녀석 앞에 설 수 있을 정도로의 자랑스러운 형이 되지 못한다면, 그때에는 네가 대신 그 녀석의 형이 되어다오. 부탁한다.”
 오만 냥은 매우 큰돈이었다. 인근에서 가장 크다는 중문학림(重文學林)에 들어가기에 충분한 돈이었다.
 무쌍이 무경을 핑계 댄 것을 나는 안다.
 녀석은 나를 도와주고 싶어 했고, 내가 자존심 상해할까봐 무경의 핑계를 댄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중문학림에 들어갔다.
 글공부를 시작한 이후, 무쌍은 두 달에 한 번씩은 꼭 나를 찾아왔다.
 올 때마다 그는 많은 돈을 내어놓았다.
 나는 그 돈을 함부로 쓰지 않았다.
 무쌍이 그 돈을 어떻게 모았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내가 아는 건 오직 하나였다.
 무쌍이나 나처럼 세상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이 돈을 벌기란 실로 쉽지 않다는 사실!
 나는 정말로 꼭 필요한 곳에만 돈을 썼고 나머지는 모두 모아두었다.
 중원에서 가장 크며 신용도 좋다는 만금전장에 돈을 보관하고 내 수결도 등록하였다.
 사실 수업료 이외의 돈은 그다지 필요 없었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 다른 일을 하지 않고서도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고, 무쌍에게 고맙기 그지없었다.
 열여덟이 되었다.
 그날… 그 일이 일어났다.
 내 인생과 무쌍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사건은 내가 열여덟의 생일을 맞던 칠월의 네 번째 날에 학림의 수업을 마치고 나오던 저녁 무렵에 시작되었다.
 
 * * *
 
 “정소운… 소운 형님 맞으시죠?”
 중키에 비쩍 마른 이십대 후반의 사내가 막 강경실(講經室)을 나서는 정소운을 향해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정소운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이제 열여덟의 생일을 맞는 그를 형님이라고 부르는 이십대 후반의 사내는 이마와 뺨에 짙은 칼자국 흉터를 지니고 있었다.
 “정 학사, 아는 사람이야?”
 스스로 학사라 부르는 학생들의 낯 뜨거움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는 정소운은 지나가면서 묻는 동료들을 향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유 학사. 이분이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야.”
 “잘못 보지 않았습니다. 소운 형님이 아니시란 말입니까?”
 사내는 다시 한 번 물었고 정소운은 미간을 찡그렸다.
 “제 이름이 정소운이 맞기는 해요. 하지만 저는 아저씨… 그쪽을 모르는데요.”
 사내는 한 번 히죽 웃더니 고개를 숙였다. 입꼬리만 위로 올라가고 눈은 전혀 웃지 않는 매우 특이한 웃음이었다.
 “저 기억 못하시겠습니까? 일 년 전쯤에 무쌍 형님을 따라 낙양에 놀러오셨을 때, 잠깐 뵈었는데요.”
 정소운은 그제야 그가 누구인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쌍칼?”
 “맞습니다. 저 쌍칼입니다. 핫하하하!”
 쌍칼이 박수를 치며 웃었다.
 뒷골목의 호칭은 절대 나이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초무쌍은 정소운에게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이 비록 낙양 칠보가에 가장 어린 나이로 들어갔지만, 언젠가는 모든 낙양에서 가장 큰 대형이 될 거라는 말을 그는 자주 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정소운의 말에 쌍칼이 다시 한 번 웃었다.
 “오늘 생일이시죠?”
 “아!”
 정소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쌍이 절 데려오라고 보냈나요? 낙양에 큰일이 생겨서 당분간은 몸을 빼기도 어렵고 연락도 어려울 거라고 며칠 전에 전갈을 받았는데.”
 “네, 일이 좀 생겼지요. 큰형님은 오지 못하셨습니다. 대신 저더러 융숭하게 대접해드리라더군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소운 형님.”
 정소운은 자신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쌍칼이 자꾸만 형님이라 호칭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계속 말을 낮추라 했으나 쌍칼은 그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무쌍 형님의 친구 분이시니 제게는 형님이십니다. 하여간 따라오십시오. 극진히 모시겠습니다.”
 쌍칼을 따라가면서 정소운은 문득 생각나는 것을 물었다.
 “그런데 무쌍은 그쪽에서 신분이 어떻게 되죠?”
 “대두목이십니다. 낙양의 암흑가는 모두 우리 용파 조직에게 복종하였지요. 핫하, 두 달 전의 일입니다.”
 정소운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가 피식 웃었다.
 “왜 웃으십니까?”
 “아니오. 너무 놀라서 웃었어요. 나이 열여덟에 벌써 낙양의 대두목이라니. 정말 대단하긴 한데… 어쩐지… 하하하, 좀 어울리지 않아서요.”
 쌍칼도 빙그레 따라 웃었다.
 “그렇지요. 나이에 비하면 좀 어울리지 않지요. 하하하, 어울리지 않아요.”
 
 * * *
 
 그때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챘어야 했다.
 쌍칼은 두 번이나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강조했고 그 속에는 숨은 뜻이 있었다.
 그날 나는 쌍칼의 대접 속에 그야말로 천상을 맛보았다. 난생처음 마셔보는 술은 쓰면서도 달콤했다.
 무쌍이 보내온 돈을 아끼느라 채소만 먹어댔던 내 위장은 온갖 기름진 음식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한 여인이 들어왔다.
 스물 두셋 정도나 되었을까?
 태어나서 처음 본다고 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였고, 그 아름다운 얼굴 아래에 붙은 몸뚱이에는 거의 옷을 걸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 여자는 자신을 목단이라 소개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서서히 잠들었다.
 교태로운 웃음.
 부드러운 살결과 향기 가득한 숨결.
 나는 극락에서 웃어대는 꿈을 꾸었다.
 이윽고 깨어났을 때는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나는 벌거벗은 채 침상에 누워 있었다.
 끈적끈적한 느낌에 옆을 돌아본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목단이 가슴에 칼 한 자루를 깊숙이 꽂은 채 죽어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내 손은 피투성이였다.
 나는 천상에서 잠들었다. 그리고 지옥에서 깨어났다.
 그때 문이 열리고 두 눈을 부릅뜨고 경악한 쌍칼이 들어왔다.
 “목단! 목다안―!”
 쌍칼의 뒤를 따라 들어온, 독사라는 자와 망치라는 자의 중얼거림을 통해서 나는 목단이 쌍칼의 부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다시 문이 열렸고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무쌍이었다.
 
 * * *
 
 “목단은 쌍칼이 작년에 맞이한 여자다. 뒷골목 사람들의 목숨이라는 건 언제 끊어질지 모른다. 때문에 정식 혼인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바닥의 사람이 일 년씩이나 한 여자를 데리고 살았다면 그건 완전히 그 사람의 여자라는 뜻이라고 봐야 옳다.”
 초무쌍은 창밖을 내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소운은 그 뒤쪽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였다.
 초무쌍이 그를 돌아보았다.
 “정말로 기억나지 않나? 왜 목단이 그런 모습으로 죽어 있는지 말이야.”
 정소운은 고개를 흔들었다.
 초무쌍은 답답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쌍칼의 말로는 네가 어제 취한 뒤로 자꾸만 목단에게 치근덕거렸다고 한다. 어제 우리 용파 조직에 좀 안 좋은 일이 있었어. 우리 밑에는 모두 여덟 개의 작은 조직이 있고 그들을 팔로(八路)라고 부른다. 그 조직을 각각 맡아 관리하는 팔로두(八路頭) 중에는 제삼, 제칠, 제팔 로두가 가장 충성스러웠지. 그 세 명이 모두 피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아!”
 “밤중에 그 연락을 받고 쌍칼은 급히 돌아왔었다. 한데 지금 나와 함께 돌아와 보니 이런 일이 벌어진 거다. 결국… 너는 책임을 피하기 어려울 거야.”
 “몰라, 무쌍아. 나 정말로 하나도 기억이 안 나.”
 “…어쨌거나 한 여자가 죽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부두목 쌍칼의 여자가 죽었어. 누군가는 이 일을 책임져야만 한다.”
 “채, 책임? 어… 어떻게……?”
 “…….”
 초무쌍은 정소운을 잠시 바라보더니, 밖을 향해 외쳤다.
 “독사, 거기 있냐?”
 초무쌍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리고 독사가 들어왔다.
 길게 찢어진 뱀눈이 독사라는 별명과 잘 어울렸다.
 “부르셨습니까?”
 “손을 내밀어 봐라.”
 초무쌍의 말에 독사는 머뭇거리며 왼손을 내밀었다.
 새끼손가락과 약지가 잘려 나가고 없었다.
 “……!”
 눈을 크게 뜨는 정소운을 보며 초무쌍이 말했다.
 “나라에 법이 있듯 뒷골목에도 뒷골목만의 법이 있다. 독사는 내 밑에서 일하다가 작년에 한 가지 큰 실수를 범했고 스스로 그 책임을 졌다. 내가 그렇게 명령했다. 소운아, 나는 내 밑의 아이들과 너를 다르게 취급할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나는 대두목의 자격이 없게 되는 거다.”
 정소운은 잘려 나간 독사의 손가락을 보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그럼 나도 손가락을……?”
 “휴우, 그건 나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 일의 피해자는 쌍칼이니까, 쌍칼이 알아서 결정하겠지.”
 “……!”
 “과연 공평하십니다, 무쌍 형님.”
 정소운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쌍칼이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 차가운 눈빛을 번뜩이며 쌍칼은 천천히 걸어왔다.
 “저는 형님이 친구라서 편을 드실 줄 알았지 뭡니까? 한데 공평하시군요. 좋습니다. 그래야 우리의 대두목답지요. 마음에 듭니다.”
 정소운은 부르르 떨며 쌍칼을 바라보았다.
 “나, 나를… 어떻게… 할 거죠?”
 “너는 내 여자를 겁탈하고 죽였다. 하나의 목숨에는 당연히 하나의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것 아닌가? 네놈이 죽지 않는다면 내 명예는 어디서 찾는단 말이냐?”
 정소운은 몸이 떨려 말을 이을 수조차 없었다.
 “나는… 나… 나는…….”
 정소운은 도움을 청하려는 듯 초무쌍을 보았지만, 이런 경우에는 초무쌍으로서도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밖으로 걸어 나갔다.
 “배웅하지 않겠습니다, 형님. 할 일을 끝마친 후에 그때 다시 찾아뵙지요.”
 쌍칼의 차갑기 그지없는 시선은 정소운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은은한 붉은 빛이 도는 비수 두 자루가 잡혀 있었다.
 그를 쌍칼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만들었던 한 쌍의 혈월비였다.
 쌍칼은 천천히 정소운을 향해 다가섰다.
 공포에 아득히 질려 정소운이 정신을 잃으려는 찰나에, 막 문을 열고 나가던 초무쌍이 고개를 돌렸다.
 “…술 한 잔 하지 않으려나, 쌍칼?”
 
 * * *
 
 쌍칼이 밖으로 나가고, 망치와 독사가 나를 지키고 있었다.
 그때 나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나는 부들부들 떨면서 공포에 질려 죽음이 영원히 내게 다가오지 않기를 바랐으며, 또한 차라리 한시라도 빨리 다가오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나는 무력했다.
 나는 본래 약골이고 겁쟁이다.
 
 * * *
 
 술잔 두 개가 각자의 앞에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먼저 잔을 들지는 않았다.
 어두운 방 안을 밝히기 위해 탁자 위에는 초 한 자루가 놓여 있었는데, 계속 불꽃이 흔들리며 두 사람의 그림자를 펄럭이게 만들었다.
 초무쌍과 쌍칼.
 초무쌍은 쌍칼을 보고 있었고 쌍칼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에 들린 혈월비를 보고 있었다.
 “…너였냐?”
 초무쌍의 말에 쌍칼이 고개를 들었다. 눈은 웃지 않고 입꼬리만 올라가는 예의 웃음을 히죽 머금으면서 쌍칼은 되물었다.
 “뭐 말입니까?”
 “최근 조직에서 의문스럽게 죽어간 아이들이 많다. 어제는 세 명의 노두들이 죽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조직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다는 점이다. 그들을 죽인 자들은 정식으로 무공을 익힌 자들이다. 시체에 나타난 흔적이 그것을 증명한다. 나는 누군가 조직 내부의 사람이 외부의 적과 결탁하여 이런 일을 저지르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흐흠! 머리 좋으시군요, 형님.”
 “너였느냐?”
 “…….”
 “원하는 게 뭐냐? 내게 무엇을 원해 이런 짓을 꾸몄나? 도대체 무엇 때문에 소운이를 함정에 빠뜨렸나?”
 쌍칼은 다시 한 번 웃었다.
 그의 얼굴과 팔뚝에는 칼로 그은 상처가 가득했다.
 그 상처 중에 싸움에서 적에게 당한 것보다 스스로 그은 것이 더 많음을 모르는 용파 조직원들은 없다.
 쌍칼은 피 냄새를 좋아했고 남의 피를 뿌리지 못하면 자신의 피를 보아서라도 그 마음을 푸는 자였다.
 초무쌍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낙양의 암흑가를 쌍칼이 일통할 것이란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데 초무쌍이 나타나면서 가장 먼저 쌍칼을 복속시켰고, 그 후 쌍칼은 이인자가 되었다.
 “형님이 무슨 말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원하는 건 간단합니다. 우리의 용파 조직이 좀 더 원활하게, 좀 더 조직적으로 운용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원활하지 못한가?”
 “형님을 존경합니다만, 우리들 뒷골목 사람들은 좀 더 뒷골목다울 필요가 있는 것 아닙니까? 형님이 용파 조직을 맡으신 후부터 사실 너무 빡빡합니다. 계집장사를 금하고, 아편을 못 다루게 하고, 거기다가 도박까지 금지시키면 도대체 우리는 어디서 돈을 법니까? 조직을 위해서는 좀 더 능률적인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이를 테면 너와 같은… 그런 말이냐?”
 “형님이 굳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뭐, 애써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
 초무쌍은 쌍칼을 노려보더니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용파 조직을 넘기마.”
 쌍칼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웃지도 않은 채 그는 말했다.
 “뭐 조직 관리는 매우 귀찮은 일이지만 형님이 하라시면 해야죠. 제가 형님을 위해서 해드릴 수 있는 일이 혹시 있습니까?”
 “…소운을 살려다오.”
 쌍칼은 머리를 긁적였다.
 “정말 의외네요. 겁 많은 책벌레일 뿐인데, 쯧쯧. 이렇게 쉽게 용파 조직을 포기하시다니요? 이래서 평소에 제가 늘 주장하는 겁니다. 우정 따위는 본래부터 쓸모없는 물건이라고요.”
 “…작은 집 하나면 된다. 다시는 낙양으로 돌아오지 않고 조용히 살겠다. 내 말 믿을 수 있지?”
 쌍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믿고 말구요. 하지만 말입니다, 형님. 이 쌍칼은 믿지만 다른 녀석들은 믿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가령 형님이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거라고 믿는 놈들이 있다 보면 용파 조직은 분열되고 말 겁니다. 그건 나쁜 상황이잖습니까, 형님?”
 초무쌍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주면 좋겠느냐?”
 쌍칼의 손에는 혈월비가 잡혀 있었다.
 한 쌍의 혈월비 중 한 자루를 잡더니, 쌍칼은 탁자 위에서 타오르는 촛불에 그 칼날을 달구었다.
 “발뒤꿈치 근육을 잘라버리면 그 사람은 평생 힘을 쓰지 못하다고 하네요. 맞습니까?”
 “……!”
 혈월비는 벌겋게 달아올랐다.
 초무쌍의 얼굴도 함께 달아올랐다.
 뜨거운 칼날을 입김을 불어 식히며 쌍칼은 다시 웃기 시작했다.
 “저 쌍칼, 욕심 많은 놈 아닙니다. 두 다리 중의 하나면 됩니다. 다리를 저는 사람이 또다시 두목으로 돌아올 거란 생각은 조직원들도 하지는 않을 테니, 이것으로 용파 조직은 영원할 겁니다. 이 칼, 소독 끝났습니다. 고통은 그다지 길지 않을 겁니다, 형님.”
 
 * * *
 
 고통스러운 기억은 오래는 더듬고 싶지 않다.
 내 생일의 다음 날, 나는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쌍칼이 들어왔을 때, 나는 너무나 겁에 질려 오줌을 지릴 뻔했다.
 쌍칼의 손에 혈월비가 들려 있었다.
 하지만 내 피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피는 칼날에 이미 묻어 있었다.
 “나가봐라, 정소운. 친구를 너무 잘 두었구나, 너는!”
 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피는 무쌍의 것이었다.
 아아, 나를 구하기 위해 무쌍은 대체 어떤 희생을 치렀단 말인가?
 나는 미친 듯이 달려갔다.
 무쌍은 일어서지도 못하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의 왼쪽 발뒤꿈치는 피투성이였고, 바닥은 그가 흘린 피로 흥건했다.
 “아아! 뭐냐, 그런 표정은? 어차피 뒷골목 생활도 지겹던 참이다. 그간 많이 벌어먹었잖냐? 그런 표정 짓지 말라니까. 그냥… 왼발이 조금 다친 것뿐이다.”
 그날 무쌍을 부축하여 나의 집으로 향하면서 나는 울고 또 울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제 무쌍은 두 번 다시 제대로 걷지 못할 것이다.
 평생을 절름발이로 살아갈 것이다.
 나는 약했다. 천상 약골인 나는 울고 또 울면서도 쌍칼에게 복수할 생각을 하지도 못하였다.
 “미안하다, 소운아. 이제… 나는 너를 돕지 못해. 그러니까 네가 좀 해주어야겠다. 모두 이제 너의 짐이 되었어. 글공부를 열심히 해라. 꼭 성공해다오. 내가 하지 못했으니 너라도 이뤄다오. 우리 무경이 말이다. 그 앞에 자랑스럽게 나타날 수 있도록, 우리의 동생을 다시 꼭 찾아올 수 있도록 도와줘.”
 그래, 무쌍아. 뭐든지 할게.
 너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게.
 그 말을 목 안으로 삼키며 나는 울고 또 울었다.
 집으로 돌아와 자리에 눕히니 무쌍은 그대로 잠이 들어 깨어날 줄을 몰랐다.
 무쌍의 잘려 나간 왼쪽 발뒤꿈치와 그곳에 칭칭 감겨진 붕대를 보며 나는 또다시 눈물만 뚝뚝 흘렸다.
 “걱정 마, 무쌍아. 내가 노력할게. 네 몫까지 노력해서 꼭 네가 무경의 앞에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게 만들어줄게.”
 하지만 나는 한 가지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쌍칼!
 자신보다 어린 사람을 이 년 동안이나 두목으로 모시며 몸을 굽히고 살아온 사내다.
 무쌍이 낙양을 얻자마자 곧장 배신한 사내다.
 무쌍을 제거하기 위해 나를 이용하였고, 나를 이용하기 위해 자신을 사랑했던 여자를 죽여 버릴 수 있는 자가 바로 쌍칼이었다.
 그는 지독하게 무섭고 지독하게 잔인했다.
 그와 같은 사내가 아무리 작은 후환이라도 남겨둘 리가 없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어야 했다.
 그날 밤, 일단의 무리가 나의 집을 찾아왔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무리들이었다.
 
 
 제 三 장
 살아남아라. 명령이다
 
 잘 들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살아남아라, 무조건
 이건 명령이다.
 
 
 살아남아라. 명령이다
 
 정소운은 천산 아래로 내려왔다.
 고통스러운 과거를 회상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때로는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떠올려야만 하는 기억이 있다.
 그 증오를 기억하기 위해서.
 친구의 따스하던 손과 그 손을 놓게 만들었던 적들의 잔혹한 미소를 잊지 않기 위해서.
 잠시 잦아들었던 눈보라는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후우우우우우웅―!
 그 바람소리를 뚫고 희미한 소음이 들려왔다.
 따아앙! 따아앙!
 앞쪽으로 마을이 있었다. 화북촌이었다.
 소리는 화북촌의 거리 입구에서 시작되어 정소운을 향해 다가왔다.
 쇠가 쇠를 때릴 때 나는 소리!
 그 소음이 정소운으로 하여금 회상을 잠깐 멈추게 만든 것이다.
 마을에 대장간이 하나 있었다.
 
 * * *
 
 따아앙― 따앙! 따아앙― 따앙!
 쇠망치는 규칙적으로 붉게 달구어진 쇠를 두드렸다.
 화북촌의 입구에 위치한 대장간은 그다지 크지 않았으나, 울려나오는 소리만은 우렁차기 그지없었다.
 화로에서는 거센 불길이 타오른다.
 벌건 불은 화로의 옆에서 망치를 휘두르는 커다란 체구의 중년인의 눈에 반사되고 있었다.
 너무나 오랜 세월을 불과 더불어 살았던 후유증일까?
 중년인의 몸은 붉은 근육으로 가득했는데, 기이하게도 머리와 턱 그리고 온몸에 한 오라기의 털도 없었다.
 머리카락도 없고 수염도 없으며 솜털조차 없었다. 눈 위에는 심지어 눈썹도 없어 그야말로 완벽한 무모인(無毛人)이었다.
 중년인의 이름은 공야노반이었다.
 공야노반은 십오 년 전 화북촌으로 넘어와 자리를 잡았는데, 그 십오 년 동안 화북촌을 비롯한 인근의 다섯 마을이 쓰는 농기구는 대부분 그의 손을 통해 만들어져 왔다.
 공야노반이 지금 한 덩이의 쇠를 두들기는 이유는 건너 마을의 양 노인이 부탁한 두 자루의 호미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쇠를 달구고 식히고 두드려 연성과 강성을 함께 좋게 만든 뒤에, 다시 둘로 나누어 호미를 만들어낼 참이었다.
 한동안 쉬지 않고 규칙적으로 망치를 휘두르던 공야노반은 잠시 망치질을 쉬고 하늘을 보았다.
 눈발이 다시 거세지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건 온통 눈뿐이었다.
 천산의 웅장한 봉우리들은 뿌연 눈의 장막 속에서 하늘과 동화되어 장엄한 광경을 연출하였다.
 “가을이다 싶었는데 어느새 겨울이다. 겨울이다 싶더니 허구한 날 눈만 휘날리는구나. 젠장, 봄은 도대체 언제 온단 말인가? 오기나 할 것인가?”
 공야노반은 쇳덩이를 다시 불속에 넣고 달구기 시작했다. 불은 파란 중심을 간직한 채 타올랐다.
 “오늘따라 불길이 묘하게 거세다. 날씨가 추운 까닭인가? 아니면 내 마음에 변화가 있는 것인가?”
 무거운 안색으로 중얼거리던 공야노반은 갑자기 장난스런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후후후! 그나저나 곽가 이 녀석, 지금쯤 화가 잔뜩 나 있겠구나.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을 골라 오라고 말하였으니 죽을 노릇일 게다. 하지만 이놈아, 어떡하겠느냐? 우리가 이제 다시 만날 수밖에 없지 않으냐? 십오 년 전에 세상의 곳곳에 뿌려놓은 씨앗들이 서서히 강호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단 말이다.”
 공야노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헛기침했다.
 “으음, 이렇게 말하고 보니 내가 강호의 안녕을 남몰래 걱정하는 강호의 숨은 기인이사 같군. 음음음!”
 혼자 중얼거리며 심각해졌다가 웃기를 반복하는 모습이 묘하게도 누군가를 닮아 있었다.
 공야노반은 달군 쇠를 끄집어냈다.
 달아오른 쇠를 망치질 하던 공야노반은 문득 표정이 크게 변해 손을 멈추었다.
 “……!”
 공야노반은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이 내려치던 쇳덩이를 내려다보았다.
 평생 동안 모든 정과 열을 불과 쇠에 바쳐온 사람이 바로 공야노반이었다. 다른 사람은 느끼지 못하나, 공야노반만은 지금 자신의 쇳덩이 위로 번져나가는 차갑기 그지없고, 날카롭기 그지없는 푸른빛의 기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살기였다.
 비할 바 없는 살기가 어디선가 전해왔고, 그 살기에 감응(感應)하며 자신의 쇳덩이 역시 살기를 뿜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공야노반은 길게 탄식했다.
 “내가 검을 만들지 않은 지가 벌써 십 하고도 다시 오 년! 한데 이 무슨 기묘한 일인가? 아무리 살기가 지독하다 하나, 쇠가 저절로 그 살기에 감염되고 말다니. 아아, 이 쇠는 이제 병장기로밖에는 만들어지지 못한다. 병장기가 되고 난 후에도 실로 많은 생명을 앗아갈 것이니 이것은 모두 누구의 잘못인가?”
 공야노반을 시선을 들었다.
 천산 자락을 타고 내려오는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강한 살기는 그에게서 뻗어오고 있었다.
 낡아빠져 걸레와 다름없는 옷을 걸치고 머리카락과 수염을 아무렇게나 기른 사내였다.
 그는 화북촌의 입구에 자리 잡은 공야노반의 대장간을 향해 망설임 없이 걸어오고 있었다.
 어깨에 푸른빛이 감도는 가죽을 잔뜩 올린 채였다.
 그는 바로 정소운이었다.
 “뭐야, 저 자식? 지금 내 앞에서 감히 머리카락 길고 수염 긴 걸 자랑한다는 거냐? 하여간 어서 오너라, 이놈. 나의 쇠를 망쳐버린 놈. 혼쭐을 내주마.”
 공야노반은 잔뜩 화가 난 모습으로, 다가오는 정소운을 쏘아보았다.
 
 * * *
 
 대장간에 들어가려던 나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강한 기세가 앞에서 쏘아져 나왔다. 살기와 다른 느낌이었다.
 나를 해치려는 기세는 아니었으나, 그러면서도 내 발길을 끈적끈적하게 묶는 그 감각은 일종의 적대감이며 배척감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느낌은 한 사람에게서 시작되고 있었다.
 불길 앞에 앉아 망치를 휘두르는 사람.
 
 * * *
 
 화르르르르―!
 불길은 뜨겁기 그지없었다.
 공야노반은 그 불길 속에 쇳덩이를 넣어 다시 한 번 달구면서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입구에 정소운이 서 있었다.
 대장간의 입구에 선 채로 들어오지 않고 그렇다고 가버리지도 않는 정소운의 존재는 공야노반의 신경을 계속 건드렸다.
 불길 속에서 쇳덩이를 뽑아, 공야노반은 다시 한 번 망치질을 시작했다. 본래 호미가 되어야 했던 쇳덩이는, 지금 공야노반의 망치질에 의해 조금 다른 형태로 변화되고 있었다.
 정소운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대장간의 입구에 선 채로 물끄러미 공야노반의 작업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공야노반은 문득 망치질을 멈추었다.
 “젠장맞을 놈! 네놈 때문에 신경이 쓰여서 일을 할 수가 없다. 들어올 거라면 냉큼 들어오고 들어오지 않을 거면 썩 꺼져버려라."
 공야노반은 정소운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정소운은 이제는 움직임을 멈춘 공야노반의 망치를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
 “들어가고 싶소. 하지만 들어갈 수가 없소.”
 “두 발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게냐? 발이 있거늘 왜 들어올 수 없단 말이냐?”
 “당신의 그 망치 때문이오.”
 “망치?”
 “들어간다면, 당신의 그 망치가 내 발을 노리고 날아올 것만 같소.”
 “……!”
 공야노반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정소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그는 확실히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다가오면서 기묘한 살기를 내뿜어 자신의 쇳덩이를 오염시켜버린 정소운.
 공야노반은 그러한 정소운의 발등을 망치로 찍어버릴까 하는 생각을 잠깐 가졌었다.
 “설마 네놈에게 나의 기세를 느낄 정도의 감각이 있단 말이냐? 나는 믿지 않는다.”
 공야노반은 다시 힘껏 쇠망치를 휘둘렀다. 쇠로 된 망치가 쇳덩이를 두드렸다. 쇳덩이는 부딪히며 보다 강해졌고, 점점 모양을 갖추어 갔다.
 “하여간 들어오지 못하겠다면 어서 꺼져라. 방해받고 싶지 않다.”
 “가지 못하오. 나는 칼이 필요하오.”
 공야노반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내가 만드는 것은 농기구뿐이다. 병장기는 절대 만들지 않는다.”
 “그럼 지금 당신의 손에 잡힌 그것은 무엇이오? 검이 아니란 말이오?”
 공야노반은 자신이 집게로 붙잡고 있는 쇳덩이를 힐끗 쳐다보았다.
 불에 달군 뒤 다시 두드리고 있는 쇳덩이는 확실히 검의 모양을 갖춰가는 중이었다.
 “이것은 버릴 물건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버리시오.”
 정소운은 어깨에 메고 있는 청랑의 가죽 모두를 공야노반의 대장간 안으로 던져 넣었다.
 공야노반이 냉소했다.
 “청랑의 가죽이냐? 제법 돈이 될 만한 물건이지.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테지만 내게는 필요 없다.”
 뒤이어 던져진 더욱 크고 단단해 보이는 푸른색의 가죽을 보자 공야노반의 눈빛은 비로소 흔들렸다.
 “청랑왕의 가죽? 이것을 어디서 구했느냐?”
 “내기 직접 벗겨냈소.”
 정소운은 품에서 동전 삼 문을 더 끄집어냈다.
 “이것까지 합하면 나의 전 재산이오. 당신이 굳이 만든 다음에 버리려는 그 검을 내게 버려주시오.”
 공야노반은 동전 세 개를 내밀고 있는 정소운의 손과 팔뚝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어느 곳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뒤이어 공야노반은 정소운의 허리춤에 만들어져 있는 심한 상처도 볼 수 있었다.
 “네가 청랑왕을 죽였느냐?”
 “그렇소.”
 “가죽의 상태로 보아, 이건 벗겨낸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허리의 상처는 청랑왕과 싸우다가 입은 것인가?”
 정소운은 허리의 붕대를 떼어냈다.
 내장까지 스며 나올 정도로 지독했던 상처가 놀랍게도 벌써 꽤 아물어가고 있었다.
 “이빨에 물렸소. 많이 나은 편이오.”
 공야노반은 잠시 정소운의 상처를 살피더니 물었다.
 “대체 청랑왕과는 언제 싸웠느냐?”
 “오늘 낮이었소.”
 “……!”
 공야노반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헛소리! 겨우 저녁이 다가오는 시간이다. 불과 몇 시진 만에 상처가 나을 정도로 청랑왕의 이빨이 힘이 없더란 말이냐?”
 “나도 잘은 모르겠소. 산속에서 수련할 때 나의 몸은 다치면 다칠수록 상처가 빨리 아물기 시작했고, 지독하게 다쳤다 나은 후에는 오히려 힘이 강해짐을 느꼈소.”
 공야노반은 미간을 찌푸린 채 정소운의 전신을 살피더니, 쇳덩이를 다시 불 속에 넣어 달구었다.
 “웃기는 놈. 네놈이 이 쇳덩이라도 된단 말이냐? 불에 달굴수록, 두드릴수록 강해지는 쇳덩이 말이다.”
 공야노반은 갑자기 오른손을 빠르게 뻗어 정소운의 왼쪽 손목의 맥을 잡았다.
 “……!”
 놀라운 동작이었다.
 공야노반의 오른손이 움직인다 싶은 순간에 정소운의 왼쪽 손목은 이미 잡혀 있는 것이었다.
 멀쩡히 보면서도 잡힐 수밖에 없을 정도로 쾌속한 금나수!
 이런 시골의 대장장이가 지니고 있기에는 너무나 뛰어난 수법이었다.
 정소운은 잡힌 손목이 시큰하면서 온몸의 힘이 빠져나감을 느꼈다.
 “뭘 하려는 거요?”
 “네게 피해는 없을 것이다. 네 몸의 상태를 살피려는 것뿐이야. 잠시 후에는 놓아주마.”
 공야노반은 미미한 진기를 흘러 넣어 정소운의 몸 내부를 살피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야노반의 눈이 커졌다.
 “…말도 안 돼. 몸 전체에 내공이 넘치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내공이 하나도 없다. 아아, 이런 모순 된 상황이 있을 수 있는가? 누군가 막대하기 그지없는 내공을 네 몸에 밀어 넣었건만 너는 그 내공을 도인하지 못했구나. 단전으로 도인되지 못한 내공이 헛되이 전신의 경맥으로 퍼지고 말았다. 한데 어떤 계기로 인하여 그러한 내공이 네 피부와 근육, 그리고 골수에 스며들기 시작하였구나.”
 공야노반은 눈을 크게 뜨고 머리를 흔들었다.
 “아아,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하여간 그런 이유 때문에 네 피부조직의 재생이 빨라졌으며, 상처가 쉽사리 아무는 것이다. 아마… 근력도 급격히 강해지고 있으리라. 그렇지?”
 “이제 그만 놓아주겠소?”
 정소운이 힘껏 손을 뿌리쳤다.
 “엇!”
 정소운의 손목을 놓친 공야노반은 눈을 부릅떴다.
 그가 전개한 쇄운금룡(碎雲禁龍)의 금나수법은 정소운의 맥혈을 제대로 움켜잡고 있었다.
 때문에 본래 정소운은 공야노반의 손을 밀어내기는커녕 왼손을 움직이기조차 힘들어야 마땅했다.
 한데 정소운은 손을 떨치는 것만으로 결국 공야노반의 금나수를 풀어낸 것이다. 아무리 공야노반이 방심하고 있었다 해도, 이건 확실히 놀라운 결과였다.
 “어이가 없다. 내 다른 사람의 내공을 전수받아 너와 같은 나이에 믿기지 않는 내공을 성취한 사람의 이야기는 몇 번 들어보았다. 하지만 내공을 이용해 외공을 단련하다니. 이러한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아아, 정말 알 수가 없구나. 대체 네가 우연히 익히게 된 이러한 수련법이 앞으로 어떤 효능을 만들어낼 것인가? 나뿐만 아니라 세상의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공야노반은 마치 신기한 물건을 구경하듯 정소운을 찬찬히 살폈다.
 “너에게 내공을 불어넣어 준 사람이 누구인지를 물어도 되겠느냐?”
 정소운은 고개를 저었다.
 “나의 은인은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내게 알려주셨소. 내겐 고마우신 분이지만, 당신과는 관련이 없소. 우리는 그저 검에 대해서만 이야기합시다. 저 쇠는 이제 충분히 달구어졌지 않소?”
 “아!”
 공야노반은 서둘러 쇠를 끄집어냈다.
 백열하는 쇳덩이를 다시 두드리기 시작했다.
 “좋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너라. 발등은 찍지 않으마. 그 동전 삼 문은 넣어둬라. 나는 필요 없으니까.”
 공야노반은 무슨 이유인지 갑자기 매우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검을 만들어주마. 어차피 못 쓰게 된 쇳덩이니 만들어서 네놈에게 버리도록 하마. 갑자기 네놈이 나의 칼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보고 싶어졌다. 물론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청랑 떼는 인근 주민들의 골칫거리였다. 내가 호미를 만들어주려 했던 양씨 노인 역시 작년에 두 아들을 청랑 떼에게 잃었다. 내가 네게 검을 만들어주는 이유에는 청랑왕을 죽여 마을 주민의 근심을 들어준 것에 대한 보답도 들어 있다.”
 정소운은 대장간의 안으로 들어왔다.
 공야노반은 계속 망치질을 했고, 정소운은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검에는 무수한 종류가 있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망치질 소리에 맞추어 공야노반은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물건을 베고 자를 수 있는 일반의 검에서부터, 스스로 빛을 발하는 보검! 주인을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다는 신검! 천인의 피를 묻히고 만인의 혼을 흡수하여 탄생한다는 마검! 귀기를 호흡하고 귀신을 부린다는 요검! 그리고 한번 출현하면 하늘의 기운을 거슬러 천기마저 바꾸어놓는다는 천검!”
 물속에 들어가 식어가는 쇠를 바라보면서 공야노반이 물었다.
 “그중 네가 원하는 검은 어떠한 종류이냐?”
 정소운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내가 원하는 검은 오직 한 종류요.”
 “한 종류?”
 정소운의 눈이 살기로 번뜩였다.
 “적들의 목을 딸 수 있는 검!”
 공야노반이 정소운을 돌아보았다.
 잠시 후 그는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더니 다시 쇠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푸하하하! 옳다. 정말로 옳다. 신검이니, 마검이니를 떠들며 좋은 검을 구하고자 하는 자들은 사실 검을 모르는 자들이다. 허영에 찬 놈들이지. 살인자에게 있어서 검은 살인의 도구다. 진짜 검을 원한다면 살인할 수 있는 검을 택해야만 한다. 그것이 옳다. 하지만…….”
 공야노반의 눈빛이 강해졌다.
 그는 이제 검의 모양을 거의 갖추어가는 쇳덩이를 다시 한 번 불에 넣고 가열하였는데, 기이하게도 그의 눈빛과 불길의 일렁거림이 일치하고 있었다.
 “…너는 반드시 한 가지를 명심해야만 한다. 사람의 목을 따는 것은 검이지만, 그 검을 휘두르는 것은 팔이다. 그리고 팔을 움직이는 것은 바로 검을 든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을 말이다.”
 “……!”
 정소운은 눈을 크게 뜨고 공야노반을 보았다.
 공야노반은 다시 쇳덩이를 망치로 때리며 검을 만드는 마지막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이상하구려.”
 정소운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는 그와 비슷한 말을 분명히 들어본 적이 있소.”
 “푸하하하! 네놈은 예전에 아주 훌륭한 검수를 만났던 적이 있는 게로구나. 어떤 분야의 깨달음이건 마지막 순간에 이르면 비슷한 모양새를 띠기 마련이다. 운이 나빠 보이는 놈인데 기이하게도 운이 좋군. 평범한 사람이라면 평생을 살아도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한 번 만날 수조차 없는 법이란다.”
 공야노반은 웃으며 계속 망치질을 이어갔다.
 “하하하! 옛일이 생각나는 게냐? 과거란 그런 것이지. 잊고 싶으나 잊을 수 없고, 잊고 싶지 않다면 오히려 잊게 되는 것이 과거지. 네놈의 과거에는 대체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더냐? 무엇이 지금의 네놈을 만들었더냐?”
 정소운은 나직한 탄성을 발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잊고 싶은, 하지만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과거의 기억들이 다시 한 번 그의 머릿속에서 펼쳐지기 시작했다. 다친 초무쌍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던 그날 밤에 일어났던 그 일들이!
 
 * * *
 
 그날 밤은 유난히 어두웠다.
 별빛조차 숨어버린 칠흑 같은 밤이었는데 나의 마음은 그 암흑보다 더욱 어두웠었다.
 잠든 초무쌍을 내려다보며 나는 차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낙양의 뒷골목에서 무쌍은 얼마나 힘든 전쟁을 혼자 치러왔었던가?
 그렇게 노력하여 그가 만들어온 돈으로 나는 편안히 공부를 하였다.
 겁쟁이며 약골이라는 핑계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모든 짐을 무쌍에게만 지어왔었다. 이제 그 짐을 내가 가져야 할 순서가 되었다.
 그의 손을 잡고 하염없이 눈물 흘리다, 앉은 채로 잠시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내 주변으로 세 사람이 보였다. 검은 복면을 쓰고 몸에도 검은 장포를 걸친 세 사람은 모두 같은 모양의 검을 등에 메고 있었다.
 나는 무공에 대해서는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나타난 순간, 무공에 전혀 문외한인 나조차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단순한 칼잡이들이 아니었다.
 전문적으로 무공을 익힌 자들이며 그것도 일반 무공이 아니라 상당한 경지의 무공을 익힌 자들이었다.
 문득 무쌍의 말이 생각났다.
 “네 잘못만은 아니야. 어차피 내가 물러나야만 할 상황이었어. 세 명의 노두들과 은밀히 죽어간 조직원들을 해친 무공은 놀라운 것이었어. 쌍칼 새끼, 나를 몰아내기 위해 외부의 누군가를 끌어들인 모양인데, 내가 보기에 우리로선 감당하기 불가능한 터무니없는 놈들 같아. 그러니… 나로서도 물러날 수밖에. 그 외부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 나는 물러나려 생각 중이었어.”
 이 세 사람은 그렇다면 그 ‘외부의 누구’에 해당하는 자들인가?
 세 사람은 천천히 다가왔다.
 겁먹은 나는 사시나무처럼 떨기만 할 뿐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어차피 움직여도 죽을 것이다. 달아나려고 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나는 죽음이 다가오기 전부터 이미 체념했고, 앉은 채로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였다.
 하지만 무쌍은 달랐다. 그는 체념하지 않았다.
 복면을 쓴 세 명의 검수가 다가오는 순간, 잠든 줄 알았던 무쌍이 벌떡 일어나 그들을 향해 무엇인가를 뿌렸다.
 “칠보단장산이다!”
 칠보단장산은 호흡으로 들이마시기만 해도, 일곱 걸음을 걷기도 전에 죽게 된다는 지독한 독이었다.
 세 명의 복면 검수들은 놀라 호흡을 멈추었다.
 무쌍이 뿌린 것은, 그러나 독이 아니었다.
 흔하디흔한 미혼향이었다.
 어쨌건 복면 검수들이 잠시 당황한 틈을 이용해, 나와 무쌍은 창문을 부수고 달아날 수 있었다.
 뒤이어 벌어진 그 참혹한 도주와 추격!
 아아, 나는 정말로 그 일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다.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흐른 지금까지도 내가 절대로 잊지 못하고 기억해야만 하는 한 가지는, 그날 밤 무쌍이 얼마나 용감하게 싸웠는가이다.
 멀쩡한 몸임에도 비틀거리는 나를, 위험에서 구하기 위해 그는 또 얼마나 처절하게 날뛰었던지!
 왼쪽 다리를 쓰지 못하는 몸으로, 무쌍은 피투성이가 되어 주변에서 달려드는 복면인들과 싸웠다. 싸우며 우리는 함께 달아났다.
 무쌍은 정식으로 무공을 익힌 적이 없다.
 하지만 목숨을 돌보지 않고 날뛰는 무쌍의 기백에, 무공을 익힌 복면 검수들마저 약간은 움츠려 들었다.
 우리는 뒷산으로 달아나 미친 듯이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포위망은 처음부터 달아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나와 무쌍은 새벽이 밝아오는 시각에, 십여 명의 복면 검수들에 의해 포위되고 말았다.
 앞에는 복면 검수들이 있고, 우리의 뒤로는 까마득한 절벽이 존재했다.
 절벽의 아래는 미친 듯이 흐르는 급류.
 떨어지면 몸뚱이는 성치 못할 것이며, 운이 좋아 물속으로 떨어진다 해도 급류에 휘말리면 급류 곳곳에 존재하는 바위에 부딪혀 몸이 산산조각 부서질 터였다.
 새벽 햇살은 희망을 뜻한다던가?
 하지만 그날의 새벽에, 우리는 희망이 아니라 절망을 맛보고 있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나의 손을 무쌍이 힘껏 잡았다. 그리고 나직이 내 귀에 속삭인 그 음성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영원히 잊지 못한다.
 
 ―살아남아라,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건 명령이다.
 
 * * *
 
 “헤헤헷, 이제 다 달아나신 건가?”
 히죽거리며 걸어오는 사람은 독사였다.
 밤새 뒤를 쫓아온 듯, 손에는 아직도 타오르는 횃불을 들고 있었다.
 정소운과 초무쌍은 뒤가 절벽이라 더 달아나지 못했고 그런 그들의 앞을 복면 검수들이 막고 있었다.
 앞과 뒤! 어디로도 달아날 방법은 없었다.
 독사가 다가올 때, 초무쌍이 움켜쥔 손을 통해 종이 한 장을 정소운에게 쥐어주었다.
 “살아남은 후에 펴 보아라.”
 지금 펴 보면 안 되는 종이란 말인가?
 정소운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초무쌍을 쳐다보았다.
 “우리의 두목,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되셨나, 응?”
 독사는 왼손을 눈앞에서 흔들어 보이며 웃었다.
 두 개의 손가락이 잘려 나간 그 왼손이었다.
 “내 잘못을 따진다면서 손가락을 자르실 때, 우리 두목은 기백이 넘쳤지. 그 기백은 어디에 버리셨나?”
 “흐흐흐, 이제 두목이라고 부르며 안 된다. 이미 쫓겨난 데다가 불쌍한 절름발이가 되었지 않나? 그러니까 우리는 그를 조금은 가엾게 여겨줘야 한다구.”
 독사의 뒤로 한 사람이 더 걸어왔다. 덩치가 꽤 크고 팔뚝이 두꺼운 그는 손에 커다란 기름통을 하나 들고 있었다.
 “…망치…….”
 초무쌍이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부르자, 망치가 갑자기 인상을 썼다.
 “쓰벌, 기분 나쁘네. 어린 새끼가 어디서 어른 이름을 함부로 불러. 내가 니 친구냐?”
 망치는 초무쌍의 친구가 아니었다. 독사와 망치는 쌍칼의 심복이었고, 쌍칼은 초무쌍의 수하였다.
 망치는 인상을 쓰며 초무쌍을 노려보다가, 이윽고 옆으로 비켜섰다.
 독사와 망치가 양옆으로 비켜선 사이로 쌍칼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뭐 하는 짓이오, 초무쌍? 우리는 분명히 약속하지 않았었나? 그 집에 조용히 머물기로 말이오. 약속을 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여기까지 나온 거요? 당신이 이렇게 약속을 저버리면 나 또한 약속을 지킬 수가 없지.”
 초무쌍은 망치의 손을 보고 있었다.
 망치의 손에 들린 기름통에서는 코를 찌르는 냄새가 풍겨왔는데, 바로 흑유(黑油)의 냄새였다. 깊은 땅에서 솟는다는 흑유는 단숨에 불이 붙어 모든 것을 태우는 물건이다.
 “집안에 얌전히 있었다면? 그럼 복면 검수들을 시켜 날 죽인 다음에, 아예 집 전체를 태우려고 했던 건가, 쌍칼?”
 쌍칼은 히죽 웃었다.
 “이런 산속에서 불타 죽는 것보다는 그래도 집안에서 편안히 타 죽는 것이 훨씬 편하지 않겠소?”
 초무쌍은 쌍칼을 노려보았다. 쌍칼도 지지 않고 초무쌍을 바라보았는데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뒤엉켰다.
 초무쌍이 갑자기 고개를 떨구었다.
 쌍칼의 눈을 피한 그는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
 쌍칼은 의외라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일이오? 우리 두목 초무쌍은 목이 잘릴망정 무릎을 꿇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소운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
 초무쌍이 두 손을 앞으로 모으며 애원했다.
 “소운은 그저… 공부하는 학사일 뿐이다. 그는 복수 따위는 꿈도 꾸지 못한다. 녀석이 얼마나 약골인지 너희들도 잘 알지 않나? 부탁한다.”
 독사가 쌍칼을 보며 말했다.
 “형님, 이 절름발이 새끼가 아주 웃깁니다. 아직도 어른들에게 반말인데요. 어떻게 하면 주제 파악을 더 잘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요?”
 초무쌍이 부르르 몸을 떨더니 고개를 숙였다.
 “…부탁…드립니다.”
 정소운은 부들부들 몸을 떨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말만이 끊임없이 맴돌았다.
 
 ―살아남아라,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건 명령이다.
 
 독사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야 뭐 어렵진 않지. 단소귀 정소운 같은 놈이야 살려두어도 후환은 없을 거야. 하지만 초무쌍, 사람이 그러면 못 써. 부탁을 하려면 무언가 성의를 보여줘야지. 성의 말이야.”
 독사는 두 손가락이 잘린 왼손을 초무쌍의 앞에서 다시 한 번 흔들어 보이며 웃었다.
 “이 손가락을 자르도록 했을 때, 네가 했던 말 기억나지? 잘못을 사죄하려면 성의를 보여야 한다, 응?”
 “…소, 손가락을… 자르라는… 건가?”
 “이자라는 게 있단 말씀이다, 초무쌍. 흐음, 그러니 손목 정도가 적당하겠지? 쌍칼 두목, 어떻습니까. 우리 옛날 두목이 손목 자르는 모습을 한 번 구경해볼까요?”
 초무쌍과 정소운이 부르르 몸을 떨 때, 쌍칼은 뺨의 상처를 긁으며 웃었다.
 “그것도 좋은 생각인 것 같다.”
 “제게 그보다 더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망치의 목소리였다.
 망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오더니 손에 든 기름통을 위로 들어 단숨에 초무쌍의 전신에 부어버렸다.
 “……!”
 정소운이 눈을 부릅뜰 때, 쌍칼과 독사는 망치의 의도를 깨닫고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그런 거냐? 그런 뜻이냐?”
 “재미있겠구나, 망치. 기왕 가져온 흑유니까 어떻게든 사용하는 편이 좋다, 이 말이지? 푸하하하하!”
 쌍칼과 독사는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웃었다.
 초무쌍은 이를 악물고 두 사람을 노려보았는데, 망치는 어느새 쌍칼이 들고 있던 횃불을 대신 손에 들었다.
 “초무쌍, 네놈은 평소에 늘 말하곤 했었지? 의지만 강하다면 무엇이건 이겨낼 수 있다고 말이다. 지금 한번 시험해보자. 이렇게 하면 어떠냐? 불이 붙고 나서도 네놈이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면 네 친구를 살려주마. 겁쟁이 단소귀를 살게 해주마. 하지만 단 한 번이라도 비명을 지른다면 네 친구의 목숨은 없다. 자신 있느냐?”
 망치는 내기를 좋아한다.
 특히 다른 사람이 목숨을 걸고 내기를 벌이는 것을 구경하기를 무엇보다 좋아한다.
 정소운의 목숨으로 내기를 걸면서 망치는 웃고 있었다.
 초무쌍은 쌍칼을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꼭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쌍칼?”
 입술을 푸들거리며 초무쌍이 묻자, 쌍칼은 웃었다.
 그의 웃음은 입꼬리는 웃되 눈가는 절대로 웃지 않는 특이한 것이었고, 잔혹함을 제대로 느끼도록 만들어주는 웃음이었다.
 “나 쌍칼은 후환을 남기는 성미가 아니거든. 앞으로 나를 상대하는 놈들은 부디 한 가지만은 명심해주면 좋겠어. 나 쌍칼은 내 머리통 위에 누군가를 올려놓는 걸 체질적으로 싫어해. 만약 그런 놈이 있다면 언젠가는 지금처럼 밟아줘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지. 그런 놈이 바로 나 쌍칼이라는 사실을, 죽어 염라대왕에게도 꼭 전해주려무나, 초무쌍.”
 초무쌍은 한참 동안 쌍칼을 노려보았다.
 그의 두 주먹은 너무나 힘껏 쥐어진 탓에, 손톱이 손바닥을 뚫어 피가 흘렀다.
 초무쌍은 이윽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던져라.”
 놀란 정소운이 초무쌍을 바라보는 순간, 망치는 망설임 없이 횃불을 던졌다.
 화르르르르!
 불길은 순식간에 타올랐다.
 초무쌍은 정말로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온몸이 불길에 휩싸이기 시작하는 순간, 초무쌍은 힘껏 움켜쥔 주먹을 입속으로 구겨 넣어 비명을 막았다.
 그 모습 그대로 초무쌍의 눈길이 아주 짧은 순간 정소운을 향했다.
 그리고 초무쌍은 달려갔다.
 완전히 불길에 휩싸인 몸으로 초무쌍은 절벽을 향해 달려갔고, 그대로 뛰어내렸다.
 커다란 불덩이!
 타오르는 초무쌍의 몸뚱이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은, 차라리 아름다웠다.
 처절한 만큼 아름다웠다.
 비명소리는 끝내 들려오지 않았다.
 부릅뜬 정소운의 눈꼬리가 찢겨나가 피가 흘렀다.
 정소운은 초무쌍의 마지막 눈빛을 보았다.
 그 눈빛이 외치던 마지막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아무래도 잔꾀에 당한 것 같은데요, 쌍칼 두목.”
 “독사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두목.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으니, 젠장! 비명소리를 어떻게 듣겠습니까?”
 망치와 독사가 입맛을 다시며 쌍칼을 보았다.
 쌍칼은 웃었다.
 “중요한 것은 초무쌍이 죽었다는 사실이다. 잘 죽었구나. 정말 잘 죽었어. 이놈이 살아 있었다면 나는 평생을 악몽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설령 다리병신이 되어 있다 해도 그건 마찬가지다.”
 “저 겁쟁이 자식은 이제 어떻게 할까요?”
 세 사람의 시선이 모두 정소운을 향했다. 그들은 초무쌍의 비명을 듣지 못한다면 정소운을 살려주기로 약속했었다.
 하지만 쌍칼이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면 오늘의 상황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겠는가?
 정소운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의 아랫도리가 축축하게 젖으며 냄새를 풍겼다. 정소운은 오줌뿐만이 아니라 더한 것을 아랫도리에 갈기고 만 것이다.
 그는 미친 듯이 떨며 눈물을 흘렸다.
 “초, 초무쌍은… 흑흑, 초무쌍은…….”
 처음에는 입술이 떨려 제대로 말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털썩 무릎을 꿇은 후, 정소운은 그야말로 목이 터져라 외치기 시작했다.
 “초무쌍은 개새끼다!”
 “……!”
 쌍칼과 독사, 그리고 망치가 서로 마주보았다.
 “초무쌍은 개새끼다! 호로 개잡놈이다―! 잘 죽었다. 정말로 잘 뒈졌다. 초무쌍은 개새끼다! 호로 개잡놈이다―! 살려주세요, 쌍칼 형님. 어르신, 제발…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흑흑흑흑흑!”
 
 ―살아남아라. 이건 명령이다.
 
 * * *
 
 아직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나의 몸은 미친 듯이 떨려온다.
 시큼한 그 무엇이 뱃속에서 올라와, 나는 그대로 토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토하지 않았다. 대신 목이 터져라 외쳤다.
 “초무쌍은 죽일 놈이다. 개잡놈이다!”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무쌍의 마지막 눈빛도 나와 함께 미친 듯이 외쳐댔다.
 
 ―살아남아라! 무조건 살아남아라!
 ―명령이다! 이건 명령이다!
 
 얼마나 외쳤을까?
 정신을 차렸을 땐 시간은 낮을 지나 다시 저녁을 향하고 있었고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쌍칼과 독사, 그리고 망치는 내게 오줌을 한 바탕 싸버린 후에, 껄껄 웃으며 사라져갔다.
 나는 토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다 토하고, 내장까지 다 토하여 나는 그대로 텅 비어버리고 싶었다.
 친구의 죽음.
 그 죽음을 앞에 두고 혼자 살아남기 위해서 욕을 퍼부었던 단소귀 정소운.
 누가 나와 같은 놈을 두려워하겠는가?
 나와 같은 놈 하나를 살려둔다고 해서 후환이 생길 거라 생각할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오히려 겁에 질려 똥오줌을 지려버린 겁쟁이의 목을 자른다면 자신의 손이 더러워질 거라 생각할 터였다.
 나는 타고난 약골이었다.
 또한 겁쟁이였다.
 쌍칼은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으며 본래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두려워한 사람은 오직 무쌍이었다.
 이제 무쌍은 죽었다.
 흑유를 몸에 끼얹은 채 불길 속에 타들어가면서 절벽에서 떨어져 내렸다.
 나는 살아남았다.
 무쌍의 명령대로 나는 살아남았다.
 무쌍을 욕하며, 그 대가로 나는 겨우 살아남았다.
 손바닥을 펴서 무쌍이 마지막으로 남긴 쪽지를 읽어보았다.
 거기에는 쌍칼이 끌어들인 복면 검수들의 무공 내력에 대한 것이 단 두 글자로 적혀 있었다.
 
 <華山>
 
 설마 구파 중의 하나인 화산파란 말인가?
 명문 중의 명문인 화산파가 낙양 뒷골목 암흑가의 다툼에 무슨 이유로 끼어들었는가?
 나는 무쌍이 무엇 때문에 이것을 말로 하지 않고 굳이 쪽지로 전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무쌍은 용파 조직 내부의 반역 움직임을 조사하다가 화산파의 개입을 눈치 채었음이 틀림없다.
 화산파라면 당연히 무쌍으로서는 당해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만약 무쌍이 미리 화산이라는 이름을 입 밖에 내어 말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쌍칼이 나를 살려놓는다 해도, 복면 검수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화산파가 낙양 용파 조직의 일에 간섭했음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그들은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기에.
 나는 무쌍이 건네준 쪽지를 접어 입에 넣었다.
 꾹꾹 씹어 삼켰다.
 나는 산속에 서 있었고 주변은 천천히 어두워졌다.
 실로 암담한 기분이었다.
 약골에 겁쟁이.
 가느다란 팔목과 근육이라곤 하나 없는 마른 몸.
 내가 무슨 수로 복수를 한단 말인가?
 하지만 또한 어찌 복수를 하지 않을 수 있는가?
 나의 친구가 내 앞에서 죽었다.
 무쌍의 처참한 원과 한을 이미 내 눈으로 똑똑하게 보았다.
 세상은 이윽고 또다시 어두워졌다. 그때의 내 마음 역시 세상의 어둠과 마찬가지로 칠흑과 다름없었다.
 어두운 마음의 한구석에 조용히 불길이 타올랐다.
 증오!
 복수!
 기억해라, 소운아. 정소운아.
 이 약골 놈아.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는 거다.
 네 목숨은 이제 네 것이 아니다.
 너는 무쌍의 명령으로 살아남았으니, 네가 해야 할 일은 오로지 무쌍의 복수뿐이지 않은가?
 
 
 제 四 장
 구패검주(求敗劒主)
 
 세상을 떠돌며
 패배를 구한다.
 나를 이기는 자, 무적이 될 것이나
 끝내 나를 패배시키지 못한다면
 세상은 내 앞에 엎드려야 할 것이다.
 
 
 구패검주(求敗劒主)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느냐?”
 공야노반의 음성에 정소운은 문득 회상에서 깨어났다.
 두 눈에 뿌연 습막이 차올라 있었다.
 “울었느냐? 아니면 내가 작업하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불길의 빛에 눈이 부셨느냐?”
 정소운은 대답하지 않고 말없이 공야노반의 작업 모습을 바라보았다.
 공야노반은 검을 만들기 위한 마지막 작업에 들어가 있었다.
 진정한 장인이라면 검을 만들 때 모든 정성을 쏟고 모든 기력을 다한다. 때문에 공야노반처럼 중얼거리거나, 주변을 살피거나 혹은 이런 저러한 일에 신경을 쓰지 못한다.
 하지만 공야노반은 검을 만들면서 계속 정소운을 살폈으며, 정소운과 말을 나누기도 했다.
 과연 그는 검을 만들면서 혼을 쏟지 않는 것일까?
 그는 만들어서 버릴 검이라고 말했었다. 그러한 검에 정성을 쏟는 것은 장인으로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의미일까?
 정소운은 문득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공야노반은 여태껏 단 한 번도 풀무질을 하지 않았다.
 그는 쇠를 화로 속에 집어넣은 뒤 단지 눈으로 노려보았을 뿐이었는데, 기이하게도 불길은 그가 원하는 형태로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공야노반의 전신에는 털이 하나도 없고, 붉은 근육만이 땀에 절어 번들거렸다.
 정확한 나이를 알 수는 없지만, 공야노반의 피부는 윤기가 있고 두 눈은 매우 밝은 정광을 지니고 있었다.
 한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빛이 사라져갔다.
 놀랍게도 망치질이 이어질수록 공야노반의 모습은 빠르게 늙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것은 무슨 조화인가?
 
 “자아―! 마지막 과정이다.”
 공야노반이 집게로 들어 올린 검은 이제 거의 완성단계에 접어들어 있었다. 공야노반은 그 검을 석회수 속에 집어넣었다.
 치이이이이이이―!
 검이 비명을 질렀다.
 아니, 비명을 지르는 쪽은 아마도 뜨거운 검을 싸안은 물일 것이다.
 정소운은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검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었지요? 그렇다면 검을 만드는 것 또한 마찬가지인 건가요? 검이 신검이 될는지, 마검이 될는지, 혹은 요검, 천검이 될는지 또한 모두 그 검을 만드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의미가 되는 건가요?”
 공야노반은 정소운을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흐흠, 생긴 것과는 확실히 다른 놈이군그래. 오래 걸리긴 했으나 내 말을 알아들었단 소리로구나. 옳다. 너는 이 검이 살인자의 검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지? 나는 살인자가 아니다. 살인자는 너다. 마땅히 이 검에 스며들어야 하는 것은 나의 마음이 아니라 너의 마음이다. 너의 살기다.”
 정소운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는 비로소 공야노반이 자신을 은연중에 유도하여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음을 깨달았다.
 “…내게서 살기가 뻗어나갔던가요?”
 “너와 같은 몰골을 갖춘 놈에게 어찌 원한이 없겠느냐? 원한이 있다면 어찌 살기가 없겠느냐? 걱정하지 마라. 아주 속속들이 잘 스며들었으니까. 네놈의 검이니 네놈의 살기가 스며들어 있는 것은 정말로 당연하다.”
 “…….”
 정소운은 말없이 공야노반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정소운은 문득 낮에 산에서 보았던 곽통천이란 사람을 떠올렸다. 그 또한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으며, 이 두 사람은 묘하게도 닮은 구석이 있었다.
 ‘내가 일 년 이 개월 만에 다시 세상으로 나오며 처음으로 만난 두 사람이다. 내가 이 사람들을 만난 것은 우연인가? 우연이 아니라면…….’
 “무슨 생각을 하는 게냐, 놈? 이제는 살기를 뿜을 필요 없다. 하지만 긴장해야 한다. 곧 너의 검이 완성될 터이니… 우웃! 이, 이건 생각보다 조금 빠르구나!”
 물속에서 강한 빛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공야노반은 검을 끄집어 올렸는데, 검은 무섭게 요동치며 스스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후우우우우우우―웅!
 “손가락을 물어뜯어. 피가 필요하다.”
 공야노반의 다급한 외침에 정소운은 망설임도 없이 검지의 끝 살점을 깨물었다.
 “네 피를 기억시켜야 한다.”
 뚝뚝 떨어지는 핏물을 검신에 떨어뜨리자, 검은 순식간에 그 피를 흡수했다. 만족스러웠는지, 검의 울음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검의 울음이 완전히 사라지고 검의 요동 또한 가라앉았다.
 공야노반은 안도한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이제 검은 너의 살기를 기억했고 또한 너의 피를 기억했다. 울음이 사라진 것은 검이 너를 주인으로 인정했다는 의미다. 이것으로 영원히 네놈만의 검이 된 셈이다. 어쩌면 네놈이 죽음을 맞는 그 순간에, 이 검 역시 산산이 부서져버릴지 모른다. 검의 이름을 생각해두었느냐? 무엇으로 하겠느냐?”
 정소운은 말없이 한동안 공야노반을 바라보았다.
 스스로 울고 피를 통해 주인을 인정하는 검은 가히 신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소운은 검을 만들어내는 그 짧은 순간에 공야노반의 피부가 갑자기 윤기를 잃고, 눈빛이 흩어졌다 생각한 것이 착각이 아니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노려보고 있을 때 저절로 거세지던 화로와, 공야노반의 호흡과 어울리던 불길 또한 결코 우연한 결과가 아니었던 것이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보다시피 산골의 대장장이다. 나는 네게 이 검의 이름을 물었지, 내 이름을 물어보라고 하지 않았다.”
 공야노반은 정소운이 가져왔던 청랑왕의 가죽을 가늘고 길게 잘랐다. 그 가죽으로 검의 손잡이 부분을 칭칭 감았다.
 검집도 없었다. 검날에서 번뜩이는 빛조차 거의 없었다. 검은 투박했고 가치가 없어 보였다.
 이 검이 조금 전 무서운 빛을 발하며 울부짖었다는 사실을, 직접 보았던 정소운마저도 믿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 검을 다시 내밀며 공야노반이 물었다.
 “아직도 검의 이름을 정하지 못하였느냐?”
 “…아닙니다. 정했습니다.”
 정소운은 사실 벌써부터 생각해두고 있었다.
 “무쌍으로 하겠습니다. 가장 친한 친구의 이름입니다. 저는 앞으로 두 번 다시는 무쌍을 제 손에서 놓지 않을 생각입니다.”
 정소운은 검을 힘껏 움켜잡았다.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공야노반이 껄껄 웃기 시작했다.
 “우스운 놈이구나. 청랑의 가죽은 비싸다. 호랑이 가죽보다 오히려 값을 더 받을 수도 있지. 그 가죽을 이처럼 많이 받고, 버려야 할 쇠로 검을 만들어준 것뿐이다. 도대체 무엇이 은혜라는 거냐? 푸하하하하!”
 정소운은 고개를 조아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공야노반을 향해 깊숙이 절하였다.
 “…….”
 그런 정소운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던 공야노반이 정색하며 말했다.
 “네놈이 진정으로 나에게 은혜를 입었다 생각한다면 내 부탁을 한 가지만 들어주겠느냐?”
 정소운은 고개를 들었다.
 “어떤 부탁입니까? 무엇이건 노력하겠습니다.”
 공야노반은 털 하나 없이 매끄러운 자신의 머리와 턱을 매만지며 빙그레 웃었다.
 “그 수염을 깎아. 머리도 좀 짧게 자르고. 나처럼 털 하나 없는 사람 앞에서 유세 떠는 게냐, 놈? 하여간에 네놈의 나이가 나보다 더 들어 보인다는 건 심하게 기분이 나쁘단 말이다. 수염을 깎고 머리를 자르자면 오늘밤은 어쩔 수 없이 내 집에서 머물러야겠군. 하지만 조용히 자야 한다. 나 또한 오늘 실로 오랜만에 검을 만드느라 무척 피곤하다. 깊이 자고 싶어. 생각해보니 아직도 너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구나. 이름이 무엇이냐?”
 “정소운입니다.”
 “좋다, 소운. 나는 공야 늙은이라고 부르면 된다. 우리 오늘밤 정말로 죽은 듯이 함께 잠들어 볼까. 푸하하, 정말로 오랜만에 피곤하구나. 피곤하니 기분이 매우 좋다.”
 
 그날 밤 정소운은 공야노반의 대장간에서 묵었다.
 대장간의 뒤에 딸린 방에서 정말로 오랜만에 정소운은 편안히 잤다.
 좁고 낡은 방이었지만, 일 년 이 개월을 산속에서 지냈던 정소운에게는 비단금침처럼 안락했다.
 다음 날, 새벽 일찍 칼집조차 없는 검을 등에 메고서 정소운은 다시 대장간을 나섰다.
 눈보라는 여전했다.
 차가운 세상을 향해 다시 걸어가는 정소운의 얼굴은 어느새 수염이 깨끗이 깎이고 머리카락도 단정히 정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옷은 낡고 거친 옛날의 옷 그대로였다.
 공야노반은 옷장을 열어 보이며 자신이 젊었을 때 입었던 옷들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고 했었다.
 그러나 정소운은 거절했다.
 낡고 남루하여, 썩은 냄새마저 풍길 정도인 그 옷은 초무쌍이 사주었던 옷이다. 갈아입고 싶지 않았다.
 수염을 깎아버린 정소운의 얼굴은 일 년 전과는 많이 변해 있었다.
 하지만 큰 눈과 얇은 입술은 여전하여 겁이 많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만약 상처투성이인 그의 손과 몸뚱이를 보지 않는다면, 정소운을 옛날과 똑같은 단소귀로 여길 정도였다.
 하지만 정소운은 이미 변하였다. 외모는 약간 바뀌었지만 그의 마음은 형언하지 못할 정도로 크게 바뀌었다.
 ‘나는 약하다. 약골로 태어났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이미 강하여졌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하나. 무쌍의 명령을 지키지 못하는 것뿐이다.’
 
 ―살아남아라. 이건 명령이다.
 
 정소운은 살아남았다.
 치욕을 참으며 겨우 살아남았다.
 하지만 과거의 단소귀 정소운은 이미 죽었다.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것은 죽은 채로 살아남아 있는 정소운이었으며, 전혀 새로운 정소운이었다.
 그에게는 할 일이 많았다.
 
 
 다음에 계속...

댓글(4)

NetLiving    
크 설명충 도사...
2015.12.22 01:50
OTlL    
감탄글 쓰려했는데 위에글 보고 뭐쓸지 잊어먹음 ㅋㅋㅋㅋ
2015.12.28 23:02
다크라이    
막 만든다고 신조어가 되는것은 아니다. 개그맨이 개그민다고 유행하는것은 아닌것처럼
2017.05.17 12:25
댓님    
그렇게 배를잃고 거지가돼고 그날의 기억만 이야기하다 죽기전에 왜 내가 배를 않올렸을까 후회하겠지 하기싫었을거야 아마
2017.05.18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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