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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정벌기 1권-1

2015.01.14 조회 3,068 추천 17


 작가의 말
 
 제 인생에서 작가의 말을 쓰는 날이 오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판타지를 너무 좋아하여 오랫동안 즐겨왔던 제가 우연한 기회에 ‘유조아’라는 사이트를 알게 되면서 막연하나마 저의 글을 써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처음 연재하던 날, 많은 분들이 조회해주는 것이 신나서 몇 번이나 조회수를 확인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출판 제의가 들어온 후 사실은 글쓰기가 더욱 어려웠습니다. 나름대로 자기만족으로 즐기며 쓰던 글을 지면을 통해 많은 분들과 함께할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는 부담감에 쉽게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가장 힘들어하던 순간에 제게 답을 주신 분들은 다름 아닌 제 글을 읽어주시는 유조아의 많은 분들이셨습니다. 아마 그분들의 충고와 격려가 없었다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 쪽지까지 보내주시며 좋은 의견을 제시하고 충고해주신 많은 분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분들께 거듭 감사드리며 답장을 제대로 드리지 못하고 댓글을 거의 달아주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글을 연재하면서 제 생활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수년간 즐겨오던 RPG게임을 그만두었습니다. 군주라는 자리를 맡고 있던 저의 게임 정리에 가슴 아파하고 안타까워했던 친한 동생들을 생각하면 제 마음도 무겁습니다. 그들에게 언제 한번 정말 멋있는 게임소설을 쓰겠다고 약속합니다.
 두 번째로, 아빠의 책이 나온다고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다니는 딸의 모습에 아빠로서 뭔가를 보여주는 듯해 정말 기쁩니다. 출판되기를 가장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은 제 딸이지 않나 싶습니다.
 끝으로 이제 판타지소설을 원 없이 빌려 봐도 잔소리하지 않는 제 아내의 모습을 보며 또 다른 행복감(?)을 맛보곤 합니다.
 “민지야, 아빠는 지금 공부하니까 방해하지 마. 알았지.”
 “이상하다! 왜 아빠는 방바닥에 누워서 공부해?”
 어떤 작가의 작품에서 읽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는 않습니다만 제가 ‘이계정벌기’를 연재하는 도중 읽었던 작품 중, 자신 스스로가 만족하지 못해서 상당한 분량의 원고를 다 삭제하고 다시 쓰기 시작했다는 글이 기억납니다. 그분의 글을 읽는 순간 받았던 강한 충격은 제가 글 쓰는 동안 계속 따라다닐 화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계정벌기’는 초보 작가의 첫 작품입니다. 세상에 나와 처음 쓰는 소설이기에 많은 애착이 갑니다만 그 만큼 많이 부족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정말 열심히 썼습니다.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고민하며 발전하는 저의 모습을 애정으로 지켜봐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저에게 출판의 기회를 준 도서출판 동아에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매일 밤, 제 가게(PC방)를 찾아와 옆에서 지켜봐주며, 글 쓰다가 막힐 때면 제 대화 상대가 되어준 동생 ‘펜던트’와 ‘빗나갔습니다’, 그리고 ‘이쁜 창언’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항상 제 자신부터 만족하는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술탄제로였습니다.
 
 
 여행의 시작
 
 녹음이 짙은 우거진 숲 사이로 새벽 공기를 가르며 몇몇 인영이 나타났다 빠르게 사라졌다.
 하늘색 상의에 감청색 하의, 얼핏 보기에 개량한복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특수훈련을 받는 것처럼 그리 가파르게 보이진 않았으나 오르막임이 분명한 산비탈을, 마치 평지를 달리듯 뛰어올라가고 있었다.
 그들의 진행방향에서 일어나는 잔가지의 떨림이 없었다면 아무도 그들의 종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의 빠르기였다.
 “휴~ 다 올라왔다.”
 “오늘도 1등은 철민이군.”
 “아! 좋다. 늘 느끼는 거지만 여긴 정말 기분 좋은 곳이야.”
 “저기 굽어보이는 산등성이며 지척에 있는 듯한 하늘, 그리고 그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이 상쾌한 공기!”
 20대 초반 정도 되었을까? 사내 네 명은 누가 봐도 일행임을 알 수 있는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으며, 붉은 천으로 뭉툭하고 기다란 무언가를 등에 메고 있었다.
 떠드는 것도 잠시, 그들은 다 같이 숨을 고르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상야릇한 체조를 시작했다.
 분명 구령소리가 없음에도 그들이 하는 동작 하나하나가 절도 있는 것으로 보아 하루 이틀 함께한 것이 아닌 듯했다.
 시간이 흐르자 화려하고 커다란 동작은 아니었지만, 천천히 그리고 묵직한 분위기를 조성하던 체조는 끝났다.
 “철민 형, 담배 하나 피우고 하죠.”
 “야, 이놈아! 방금 대자연의 정기를 받은 놈이 담배 타령이냐?”
 “에~ 명석이 형은 담배를 안 피우니까 그러죠. 담배의 깊은 맛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다 안다고요. 연기가 체내 깊숙이 파고 들어와 폐에 자극을 주고, 또 두개골에 묘한 기분을 안겨주다 뱉어낼 때 그 자욱한 연기를 바라보며 얻는 카타르시스! 크윽, 좋다!”
 철민이라 불린 자와 또 다른 사내는 두 사내의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슬며시 지어보이더니, 한쪽에 세워놓았던 붉은 천을 풀어 무엇인가를 꺼냈다.
 길이는 1미터 40센티미터 정도에, 마치 기와집의 처마처럼 완만하게 휘어졌고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진 목검 한 자루였다.
 “기훈아, 수련 시간 중에는 절대 금연인 것 몰라? 네가 정녕 피오동 나무의 참맛을 느껴볼 테냐?”
 “에헤헤. 호준이 형, 왜 그러세요? 농담이에요. 형님들을 따라서 여름방학 내내 수련했는데 제가 그걸 모르겠어요?”
 “호준아, 기훈이가 너무 무리해서 정신이 없나본데, 오늘은 대련이나 한 번 하는 게 어떠니?”
 “명석이 형, 정말 왜 그래요? 철민이 형, 명석이 형 좀 말려줘요!”
 “크크크. 명석이 네 생각도 그러니? 내가 보기에도 그렇다. 철민아, 오늘은 대련 중심으로 수련하는 게 어때?”
 명석과 호준의 대련 얘기에 크게 놀라 손사래를 치는 기훈과 그들 셋을 보며 슬며시 눈웃음치는 철민.
 이들 네 명은 대학의 전통무예동아리 회원들로서 민족무예의 오묘한 멋에 매료되어 방학이면 깊은 산에 들어가 함께 수련하는 절친한 선후배와 친구 사이였다.
 올 여름에도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이들은 지리산으로 들어와 합숙수련을 행하고 있었다.
 “먼저 본국검법과 제독검법, 예도부터 수련하자.”
 “정타 2천 개는 오늘 하루만 안하면 안 될까요?”
 “흠. 역시 기훈이가 대련을 원하는군.”
 “아니, 제 말은요. 오늘 하루는 3천 개를 하고 가자는, 뭐 그런 얘기입니다.”
 “큭. 하하하!”
 정타 2천 개는 이들이 검법 수련을 하기 전에 항상 먼저 시작하는 기본훈련이었다.
 눈앞에 가상의 타격점을 설정한 다음, 목검을 휘둘러 정확히 그곳을 가격하는 것으로, 마지막 순간에 그 타격점에서 검을 멈춰야 했다.
 대부분의 검법에서도 가장 먼저 시작하는 것으로, 검 끝이 흔들리는 초보자들이 그 타격점을 향해 아주 천천히 검을 휘두르면 10번 중 한두 번밖에 성공하지 못하는 훈련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검을 정확히 세우기 위해서는 타격점에 타격하는 순간, 손목을 비틀어야 하기 때문에 이 동작이 숙달될수록 검 끝이 날카로워지면서 폭발적인 위력이 붙게 된다.
 2천 개의 정타를 쉬지 않고 대충 아무렇게나 하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힘과 근지구력을 요구하는데, 이들은 정확한 타격점에 멈춰 세우면서 2천 개의 정타를 빠른 속도로 내려치고 있었다. 실로 오랜 세월 검을 쥐고 매일 수련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얍!”
 “하잇~”
 동아리 회장을 맡고 있는 정철민은 한의학과를 다니고 있으며 부모님 역시 부부한의원을 운영하고 계셨다. 게다가 일찍이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혁혁한 전과를 세운 무장이 그의 조상이었기에 가문대대로 무예가 내려오는 집안이었다. 그 영향으로 그는 어릴 때부터 민족무예를 자연스레 익힐 수 있었다.
 동아리 부회장 문호준은 아버지가 체육관 관장을 하는 덕에 어릴 때부터 태권도를 익혔으며, 중고교 학창시절에는 전국체전에서도 입상한 경력이 있었다. 그는 청렴결백한 법관을 꿈꾸는 법대생이었다.
 총무인 차명석은 180을 훌쩍 넘는 키와 커다란 덩치로 언뜻 보면 깍두기아저씨를 연상시키는 외모이지만, 소탈한 성격에 누구하고도 잘 어울리는 미대생이었다.
 막내 이기훈은 2학년 기수장으로 잘생긴 외모에 유쾌하고 명랑한 성격인데다 언변도 능해 항상 주위에 여자가 끊이지 않는 일명 ‘작업남’이었다. 그는 공대생으로 매우 뛰어난 손재주와 눈썰미를 지니고 있어서 주변 친구들 사이에서 맥가이버로 통했다.
 정타 2천 개의 훈련이 끝난 후, 본국검법과 제독검법, 예도까지 시전하던 이들은 서로 돌아가면서 상대의 동작들을 지적하고 상의하면서 한참동안 수련을 계속했다.
 “자, 이제 오늘 오전 수련은 이것으로 마치고 그만 내려가자.”
 “호준의 검이 정말 예리해진 것 같아. 이번 수련에서 호준이가 가장 많이 변한 것 같은데, 부럽다.”
 “그러고 보니 이제 하산도 정말 며칠 안 남았네. 이번 여름합숙은 정말 열심히 해보려고 했는데…….”
 “그러게요, 명석이 형. 너무 아쉬워요.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좀 더 열심히 하는 건데.”
 “어, 우리 막내가 웬일이니?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피~ 명석이 형이랑 호준이 형은 절 너무 어리게만 보는 것 같아요. 저도 어엿한 2학년의 기수장이라고요.”
 “크크크. 그럼, 차기 동아리 회장님을 그렇게 띄엄띄엄 보면 안 돼지.”
 “그렇죠? 역시 철민이 형밖에 없다니까요. 제가 여기서야 막내 취급당하지만 학교에 가면 1학년들한테는 정말 하늘같은 대선배이고, 우리 동기들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믿을 만한 친구이자…….”
 기훈의 자기자랑이 늘어지는 동안, 나머지 사내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산 아래로 신형을 날리며 소리쳤다.
 “기훈아, 알지? 꼴찌가 식사당번과 설거지하는 것. 오늘은 처녀봉 지나서 내려간다. 빨리 와~”
 “우왕. 너무해요~ 오늘도 당하다니. 크윽.”
 그랬다. 이들은 항상 수련이 끝나면 달리기 시합을 해서 꼴찌가 식사당번과 설거지까지 도맡아야 했다.
 오늘도 변함없이 기훈이가 꼴찌일 테고…….
 
 내리막길을 달려가는 네 명은 거의 평지나 다름없는 속도로, 아니 더 무서운 속도로 치달렸다.
 사실 내리막길이 막상 쉬운 것 같지만, 가속도가 붙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특히 산길의 경우에는 일반인들이 중심을 잃어 나무 같은 것과 충돌할 위험이 있었기에 평지에서 달리는 것처럼 계속 달릴 수 없었고, 전속력을 내는 것도 불가능했다.
 반면 오르막길은 일반인도 전속력을 낼 수는 있지만 쉽게 지치고 힘들었다.
 하여간 이들은 이렇게 산을 오르내리는 것도 수련의 하나로 생각해 꾸준히 했기에 이런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깊은 산속에 나 있는, 등산로로 보기에는 조금 애매한 다듬어지지 않은 조그만 길을 달려가며 간혹 튀어나오는 나무와 뿌리 등을 가볍게 요리저리 피해가는 그들의 모습은 날다람쥐를 연상시켰다.
 “형들, 같이 가요. 아이, 진짜.”
 산길을 쉬지 않고 뛰어가는 동안 일행들 옆으로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한여름에 작열하는 태양은 이곳 지리산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수련을 마치고 곧바로 여기까지 힘껏 달려왔기에 이들의 온몸은 땀으로 목욕한 것처럼 흠뻑 젖어 있었다.
 철민을 시작으로 호준과 명석, 그리고 기훈까지 옷 입은 그대로 계곡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헉헉. 형들 다 반칙이에요. 나만 빼놓고! 올림픽에서도 부정 출발은 실격패라는 거 알죠?”
 기훈은 한참 뒤떨어진 것을 만회하기 위해 전속력으로 열심히 뛰어왔기에 그의 호흡은 그들 중 가장 가빴다.
 “후훗. 기훈아, 우선 호흡부터 조절해. 호준이나 명석처럼 수련한대로 호흡법을 하는 게 몸에도 좋아.”
 철민의 지적에 기훈도 호흡법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보통 격한 운동을 하고 나면 급하게 숨을 들이켜곤 하지만, 사실 이런 호흡법을 통해 숨을 들이켜고 마시는 게 체력회복에도 좋고 호흡도 빨리 안정된다.
 몇 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다들 가쁘던 숨도 안정되고 비 오듯 흐르던 땀도 물에 씻기자 하나 둘씩 계곡 밖으로 나왔다.
 “명석아, 오늘 점심 메뉴가 뭐지?”
 철민과 호준은 궁금한 듯, 기훈은 무슨 소리인가 의아해하며 명석을 쳐다보았다.
 “수련 기간도 며칠 안 남았고, 남은 짐을 정리할 겸 해서 참치찌개를 준비했어.”
 “우와! 얼마 만에 먹는 고기냐? 첫날 삼겹살과 카레 먹은 후로는 계속 풀뿐이었는데. 크크크. 오늘은 포식하겠네.”
 “하긴, 우리가 무예 수련하러 왔지, 도 닦으러 온 것도 아닌데 그동안 너무 심했지?”
 “하하하! 맞아. 매일 김치만 먹으려니까 죽겠더라.”
 명석의 호들갑에 기훈은 그제야 선배들이 자기를 골탕 먹였다는 걸 깨달았다.
 “에~ 뭐예요? 다 짜고 그런 거예요? 안 그래도 내가 꼴찌인데 오늘은 출발도 늦어서 또 설거지까지 하는구나 생각했는데.”
 “후후. 우리 기훈이가 그동안 너무 고생을 많이 해서 오늘은 형들이 해주려고 했지.”
 “쳇! 전 철민이 형마저 그럴 줄은 정말 몰랐어요.”
 “미안해, 기훈아. 그래도 재미있었어. 크하하하. 오늘 무지 빠르더라. 너 달리는 게 완전히 올림픽 메달감이야.”
 철민을 시작으로 명석과 호준까지 거들고 나서면서 지리산의 이름 모를 계곡이 남자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그러게. 평소보다 더 잘 달리던데.”
 “말도 마라. 오늘 같게만 달리면 기훈이가 매번 1등하겠더라.”
 옷에서 흘러 떨어지던 물줄기가 가늘어지면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모두들 계곡가의 돌밭을 베고 드러누웠다.
 “모두들 힘들었을 텐데 불평 없이 잘 따라줘서 고마워.”
 “우리도 좋아서 하는 건데 철민이 네가 고생했지.”
 여름방학이 다 끝나가기에 이들의 수련도 며칠 후면 마무리하고 지리산을 떠나야 한다.
 철민은 서로가 격려하고 힘든 수련을 이겨내며 많은 성과를 얻을 수 있었기에 친구들이 정말 고마웠다. 이런 좋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게 대학 들어와서 얻은, 가장 큰 보람이리라.
 서로가 이번 수련에서 느낀 점과 서로의 장단점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어! 저게 뭐지?”
 “엥? 뭘?”
 “뭘 보고 그러는데?”
 일행 중 오른쪽 끝에 누워 있던 명석은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곧 다른 세 명은 의아해하며 그의 손이 향하고 있는 계곡 건너편을 바라봤다.
 “뭐가 있다고 그래요? 명석이 형, 또 장난치는 거죠?”
 “아냐. 저기 좀 봐. 바위 옆에 구멍 같은 게 안 보이니? 철민아, 이쪽으로 와서 한번 봐. 여기서는 잘 보이거든.”
 “도대체 뭐가 있다는 거야. 난 안 보이는데?”
 “명석아, 나도 안 보이는데.”
 명석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을 친구들이 발견하지 못하자 답답한 듯 자기 가슴을 두세 번 가볍게 치더니 계속 손으로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명석아, 천천히 설명해봐. 우선 주변에 찾기 쉬운 것부터 시작하자.”
 “저기 바위틈에 난 나무가 보이니?”
 “응, 그래.”
 “응, 보이는데.”
 “응.”
 명석이 눈에 금방 들어오는 나무를 얘기하자 다른 세 명이 동시에 대답했다.
 “거기서 왼쪽으로 30미터쯤 지나서 툭 튀어나온 바위 보이지?”
 “응, 바위까지는 나도 보여.”
 “거기에서 위로 20미터쯤 올라가봐. 나뭇잎 사이로 동굴 같은 게 있잖아?”
 “아~”
 “와! 저런 게 있었네.”
 “짐승들이 살던 굴일까요?”
 “일단 한번 올라가볼까?”
 철민의 제안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계곡을 건너기 시작했다.
 산속에서 무료한 생활만을 해왔기에 그 동굴은 호기심이 왕성한 20대 청년들에게 많은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첨벙첨벙.
 “야! 물 튀어. 천천히 좀 와.”
 “어차피 버린 몸인데 명석이 형은 뭐가 무서워요?”
 다들 넘치는 호기심을 주체 못해서인지 계곡의 얕은 곳을 건너는 발걸음이 상당히 빨랐다.
 동굴이 잘 보이는 지점에 올라선 철민은 동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처음 보는 것이기에 동굴로 올라가는 방법과 위험성 등을 체크하며 그곳의 실체를 조금이라도 파악하려는 모습이었다.
 지상으로부터 30미터쯤 위에 있는 바위벽에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만한 틈이 나 있었는데, 계곡 밑에서 동굴로 바로 올라가는 것은 위험해 보였지만, 동굴 입구 옆에 튀어나온 바위 덕에 언덕 위에서는 조금만 신경 쓰면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밑에서 바라보자니 동굴 입구는 자연적으로 생겨난 듯 가공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바로 밑의 틈에서 자라난 나무에 의해 동굴 입구 대부분이 가려져 있는데다 맞은편 숲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기에 누가 일부러 쳐다본다 해도 바위가 조금 진한 것처럼 생각할 듯했다.
 아마 그러한 이유로 그들이 계곡에서 그렇게 씻고 놀았음에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일단 저 언덕 위에서 내려오면 어렵지 않게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응. 일단 언덕 위로 올라가자.”
 철민의 생각에 다들 동의하는지 호준이 앞장서며 언덕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눈앞에 보이는 동굴이었지만, 언덕을 통해 돌아가다 보니 그 거리가 상당했다.
 “형들, 저거 혹시 무슨 보물창고 같은 것이 아닐까요? 아니면 무슨 유적이라든지? 영화에서 보면 그런 것이 많이 나오던데, 설마 지리산 호랑이굴은 아니겠지요? 푸하하하.”
 “야, 만약 보물이 나오면 제일 먼저 동굴을 발견한 내가 더 갖고 가는 거야. 알았지?”
 “지리산에는 삼성동처럼 옛날부터 무예나 도를 닦으신 분들이 많이 있었으니까, 그런 분들이 계신 건 아닐까?”
 언덕을 따라 올라가는 동안 각자 기대어린 상상을 하며 동굴 근처를 찾았다.
 계곡가에서 이미 동굴을 발견하고 올라왔어도 언덕에서 내려가는 길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몇 번이나 여기인가 싶어 내려갔지만 동굴로 내려가는 길을 찾을 수는 없었다.
 포기하려다가 겨우겨우 어렵사리 찾은 동굴 입구도 사람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분명 계곡 밑 개울가로 떨어지는 낭떠러지처럼 보였던 곳에 조그만 관목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 밑 1미터쯤 아래로 두 평 남짓하게 튀어나온 바위 옆에 동굴 입구가 있었다.
 “야, 이렇게 있으니 누가 이 밑에 동굴이 있다고 상상이나 하겠어?”
 “난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줄만 알았어요.”
 호준을 필두로 철민과 명석, 기훈 순으로 바위를 향해 뛰어내린 다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연스럽게 동굴 안으로 머리를 숙이며 들어갔다.
 동굴 입구는 그럭저럭 빛이 들어와 사물의 식별이 가능했지만, 보기보다 깊은 듯 그들의 시선에 비친 안쪽은 캄캄한 암흑 천지였다.
 한 2~3미터쯤 조심스레 들어가던 호준이 몸을 반듯이 세우기 시작했다. 그곳 내부는 입구와 다르게 점차 높아지면서 넓어지는 것 같았다.
 안으로 들어간 일행은 점점 암흑 속으로 묻혀갔다.
 “너무 어둡네. 라이터가 켜지려는지 모르겠다.”
 “이 정도 시간이면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을 텐데, 그래도 잘 안 보이네.”
 제일 선두에 선 호준은 라이터가 젖어서 불이 잘 안 붙는지 순간적으로 빛이 번뜩거리다가 사라졌다.
 “내 라이터는 괜찮을 거야.”
 철민이 자신의 지포라이터를 켠 후에 다른 두 사람이 갖고 있는 일회용 라이터에 불을 붙였다. 그러자 동굴 안은 세 개의 라이터가 불빛을 비추며 그나마 주변의 어둠을 몰아냈다.
 “저기 호롱불이 있네?”
 “저런 게 왜 있지? 정말 사람이 살았던 동굴인가?”
 “일단 저기에 불을 붙여볼까? 오래된 것 같은데 켜지기나 하려는지.”
 “호롱불에 불은 어떻게 붙이냐? 누구 알아?”
 기름이 남아 있었는지 잘 붙지 않던 호롱불이 심한 그을음 냄새와 함께 빨간 불꽃을 일으키며 동굴 안을 밝혔다.
 철민은 호롱불을 들고 동굴 안을 빙 돌아보았다.
 동굴 안은 30여 평 남짓한 공간이었는데, 곳곳에 오랜 시간 인적이 끊겼던 듯 벌레와 박쥐들의 배설물로 가득했다.
 동굴 안을 찬찬히 살피던 철민의 눈에 한쪽 구석 바닥에 깔려 있는 가마니 비슷한 것과 약간 조잡한 취사도구 등이 보였다.
 “사람이 안 산 지 오래된 것 같은데?”
 “철민아! 다시 한 번 저쪽 좀 비춰볼래?”
 명석이 가리킨 곳엔 먼지가 뿌옇게 낀 시체 한 구가 거미줄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보였다.
 죽은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심하게 부식된 옷가지를 걸쳤으며 뼈가 일부분 훼손되어 있는 시신은 간신히 가부좌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으슥한 동굴에 시체마저 나타나자 기훈은 공포를 느꼈다.
 “으윽. 이거 귀신이 나오는 것 아닐까요?”
 약간 겁먹은 기훈의 말에 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철민은 다시 한 번 호롱불을 돌리며 동굴 내부를 둘러보았다.
 약간의 옷가지가 심하게 부식되어 그 형태만 남긴 채 동굴 벽에 걸려 있었고, 몇 개의 쇠말뚝이 동굴 한쪽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지금의 모양과는 사뭇 다른 태극기가 벽 한가운데 겨우 형태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변해 매달려 있었다.
 “뼈의 부식 정도와 치아 상태를 봤을 때는 죽은 지 60년 정도 되는 것 같아. 정확하지는 않지만.”
 시신을 조심스레 살펴보던 철민이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아무래도 한의학을 전공한 터라 그간 몇 차례 시신을 본 적이 있는 그가 조심스럽게 사망 추정 연대를 유추해냈던 것이다.
 죽은 시신 옆에는 직접 짜서 만든 조그만 책상과 책장이 있었으며, 벽에는 검 두 자루와 활이 걸려 있었다. 오래되어 먼지와 좀이 슨 책 9권이 책상 위 한쪽에 놓여 있었고, 한 권의 책은 펼쳐져 있었다.
 “일단 경찰에 신고해서 가족들에게 연락해야 하지 않을까?”
 “죽은 지 60년 정도 되었다면 일제시대인데, 가족을 찾을 수나 있을까?”
 “저기 검과 활이 있는 걸 보니, 무예를 연마하던 분 같은데.”
 “일단 시신은 훼손하지 말고 인적사항을 알 수 있는지 한번 찾아보자.”
 한동안 시신과 태극기, 그리고 검과 활을 주시하던 일행들은 마냥 머뭇거리고만 있을 수는 없기에 시신의 신원을 확인하자는 의견을 모았다.
 동굴 안에 있는 물건 중, 그나마 시신의 신원과 관련하여 조그만 단서라도 찾을 수 있는 것이 책뿐이었기에 철민은 책상 위의 책을 집어 들었다.
 “휴~ 먼지 대단하다.”
 “철민이 형, 천천히 좀 털어요.”
 “무상심경, 천지풍보, 신수신법, 기문진식도해총서, 폭풍검법, 뇌전검법, 옥류천검법…….”
 철민은 책상 위의 책을 한 권씩 들어가며 제목을 읽더니 한 번씩 펼쳐보았다.
 무상심경에는 인체해부도와 비슷한 여러 장의 그림이 실려 있었고, 다른 책도 그림과 함께 많은 한자들이 써 있었다.
 위의 4권과 달리 밑에 3권은 그림이 없는 대신 중간, 중간 한시가 새겨져 있는 부분이 많았다.
 “철민 형, 밑에 있는 책은 뭐예요? 이 사람도 여기서 무예를 수련하던 분인 것 같은데?”
 “글쎄? 내가 보기에도 여기 책들은 무공서적 같은데, 책장 안 서적들도 꺼내볼까?
 “철민아, 들고 있는 책은 나한테 줘봐.”
 “응, 여기.”
 철민은 자신이 들고 있던 책 7권을 명석에게 건네주며 책장 위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책 중 제일 끝에 있는 두 권을 뽑아들었다.
 책장 위에 올려져 있던 책도 총 9권뿐이었는데, 책상 위에 있던 책들보다는 먼지가 덜 내려앉았는지 보관 상태가 훨씬 좋았다.
 “음… 이 책은 절대자연무형검법과 파천무공. 이 책들도 무공서적 같은데 바닥에 펼쳐진 책을 볼까? 마지막까지 본 책인 것 같은데.”
 책장에서 꺼낸 두 권의 책도 무공서적임을 확인한 철민은 책상에 펼쳐진 책을 조심스레 털어가며 살펴보았다.
 “마지막 책은 제목이 심하게 훼손돼서 잘 모르겠다. 무슨 일기 같아.”
 “철민아, 그럼 일기를 읽다보면 저 시신에 대해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읽어볼까? 그런데 이 책은 펼쳐져 있어서 많이 훼손된 것 같다.”
 그 책의 뒷장들은 종이의 여백이 빈 공간으로 남아 있는데다 펼쳐진 부분까지만 글이 써져 있었고, 중간에 날짜가 써져 있었기에 그것을 본 철민이 일기라고 추측했던 것이다.
 
 00년 4월 초사흘.
 간악한 일본제국의 우리민족 말살정책이 더욱 기승을 부린다.
 여염집에서 솥과 숟가락마저 빼앗아가 전쟁 물자를 만든다고 하니, 나라 잃은 조선 민초들의 그 고난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민족의 얼과 혼을 짓밟아 말살하고자 갖은 탄압을 자행하던 일제가 이제는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는 물론이거니와 고대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무예마저 압살하고자 하니, 실로 인간의 탈을 쓴 야수와 다를 바가 없다.
 많은 동지들과 우국충정 인사들이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승냥이 같은 일제의 군대와 왜경의 총칼 아래 피를 흘리며 쓰러져가건만, 불초 우민한 나는 이곳 심산유곡에 파묻혀만 있는 듯해 하늘 보기가 심히 부끄럽다.
 …민족무예의 혼을 일깨우고자 하건만 왜 이리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지 원통하기만 하다. 절대자연 무형검을 얻지 못했지만 나의 연자는 얻을 것… 일찍이 조선의 □□□□□□□ □□□□ □□□□□□□ □□□□□□ □ □□ □□□ □□□□□ □□□ □□□□ 광복과 민족무예의 계승을 위한 □□ □□□□ □□□□□□ □□□
 천지신명의 보살핌이 있었□□□□ □□□ □□□□ □ □□□□□□□□ 하나의 기연을 얻어 □□□ □□ 자연의 기를 집적할 수 있는 진을 만들□□□□□□□ □□□ □□□ □□□□ 해서 설령… 이곳에 설치하였으나 □□□ □□□□□□□□□□□□ □ □ □ □ □ □
 아! 천지신명의 뜻이 □□□□□□ □□□□□□□ 나의 뜻을 이루기에는 □□□□□□□□□□ □□□ 이 어찌 □□□□□ □□□ 아쉬울 뿐이다.
 …지금은 천기가 닿지 않아… 예측을… 태초에 풍만하던 금수강산의 정기가 강도 일제의 민족정기 말살 계획의 일환 □□□ □□□□□□□□ □□ □□□ □□□ □□ 그나마 이곳 지리산의 쇠말뚝은 내가 모두 제거□□ □□□
 훼손된 자연의 기운과 정기가 돌아오기에는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야만 하기에 천기를 살펴보니… 네 명의 연자여… 차원의 여행자여… 조선인이라면… 조선이 갈라져 분단될 것이나, 70년 안에 완전한… 통일조선이… 세계의 중심… 평화와 평등… 될 것이니 안심하라. 그대들 4인의 희생 속에… 이곳 조선의 왜곡된 정기가 비로소… 나의 선택이 그대들을 원치 않는 여행의 시작을 초래하게 되나 조선을 구하기 위함이니 원망하지 말지어다.
 □□□□ 모여들어 엄청난 내공의 증진 외에 예상치 못한 □□□□□ □□□ 차원의 □□ 왜곡되어 □□□□ □□□□ 방랑자가 될 것이다.
 백두대간의 정기가 집약되어 형성된 절대절진 □□□□□□은 누구를 □□□ 구슬을 쥐고 있어야… 그대들, 4인의 운명이로다. …것이다. 아쉬운 것은 나의 안배가 연자의 여행을 막을 수는 없기에 새로운 세상에… 구슬은 없어질 것이나… 집약된 기운은 내공으로 화하여…
 …이를 준비했으니 낯선 세상일지라도… 잊지 말아주기를 부탁한다. 책들도 조그만 힘이 되어줄 것이다. 직접 가르치… 아쉽지만…
 …천기의 뜻에… 대성하리라.
 아! 머나먼 시간이 흘러 □□□□ □ 찾아올… 연자여… 나의 시신은 찬란한 자연 정기의 빛에 의해… 화장이… 죄 많은 일생을 마칠 것이니, 육신의 평화가… □□□ 재가 되어 혼이 되고 바람이 되어 떠돌고 싶을 뿐, 더 이상… 나를 용서해주고 부디 차원의 여행… 마쳐 대륙에 새로운 세상 대동을 열기 바란다.
 
 “중간, 중간 훼손되어 많은 것을 알 순 없지만 민족무예를 계승하고자 하신 선배 무예인 같은데…….”
 철민이 이윽고 읽기를 멈추자 이들 네 명 모두에게 침울함과 엄숙함이 묻어나왔다.
 “우리 민족의 무예가 이리도 심하게 단절된 게 일본 놈들 때문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말 또 다시 화가 나네.”
 “그런데 우리가 찾아올 걸 알고 있었나? ‘4인의 연자여’라고 나온 게 꼭 우리들을 얘기하는 것 같지 않니?”
 “나도 그런 기분이 들었어.”
 “어디 여행할 수밖에 없으니 원망하지 말고 잘 다녀와라, 하는 게 아무래도 자기 후손이나 아는 사람에게 한 말이지 않을까?”
 “지금은 어두워서 그렇지만 밝은 데로 나가서 보면 희미하게라도 좀 더 많은 글자들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아. 일단 나가자.”
 그들은 일제의 만행에 분노하며 알 수 없는 4인의 연자와 차원의 여행이라는 글이 가슴에 걸렸지만, 지금으로서는 당장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일단, 우리 저분의 소원대로 화장할 수 있게 준비하자.”
 철민이 말을 꺼내자 모두들 시신 곁으로 다가섰다.
 “형, 전 숙소로 가서 뭐라도 가져올게요.”
 기훈은 자신의 라이터를 꺼내더니 철민과 명석, 호준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막내인 기훈이 화장하기 위한 재료와 뼛가루를 받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하고 술이라도 한 병 가져오려는 듯했다.
 “그래, 기훈아. 그렇게 해주면 고맙지.”
 라이터를 습관적으로 틱틱거리며 켜던 기훈은 철민의 승낙이 떨어지자 동굴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갑작스럽게 바닥을 쳐다봤다.
 “어? 이게 뭐지? 바닥에 웬 구슬이…….”
 바닥에는 네 개의 구슬이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기훈은 라이터 불을 비추어가며 네 개의 구슬을 모두 집었다.
 구슬은 맑고 투명한 모양에, 안에는 영롱한 빛이 나는 결정체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으며 크기는 골프공만했다.
 구슬소리에 안쪽에 있던 세 명은 고개를 돌려 기훈의 손바닥을 쳐다보았다.
 “정말 구슬이네. 어릴 때 한두 번 갖고 놀아본 적도 있는데. 이건 정말 크고 예쁘다.”
 명석은 기훈의 손바닥에 올려져 있던 네 개의 구슬 중 세 개를 집어 들며 호준과 철민에게도 하나씩 건네줬다.
 “야, 여기 동굴 바닥에 무슨 조각이 되어 있는 것 같은데, 문양 같기도 하고…….”
 그러나 호준의 얘기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동굴 전체에 알 수 없는 소음이 나며 바닥에 새겨진 조각, 아니 문양에서 파란빛이 번뜩거리더니 광채를 뿌리기 시작했다.
 귓가를 울려대는 윙윙 소리와 함께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섬광이 번뜩이더니 이들 네 명의 주위로 영롱한 빛 무리가 뭉쳐지고 있었다.
 동굴 안을 온통 푸른빛으로 휘감은 불빛에 60년을 버텨왔던 시신은 재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이미 죽었기에 어떤 표정도 지을 수 없었던 해골이 재가 되어 사라지는 순간, 빙그레 웃었던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어지럽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럽다.
 잔상들과 알 수 없는 흐름의 소용돌이가 눈앞을 휙휙 스쳐지나갔다. 팔랑개비처럼 휙휙 돌아가는 몸을 의지로 제어한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했다.
 공상영화 속에 나오는 머리만 비대하게 큰 화성인과 닮은 사람들도 얼핏 보이는 것 같았고, 황량한 사막도 순간 보였다가 사라지더니 어느새 깊고 깊은 바다를 한참이나 내려가야만 했다.
 몸이 터져버릴 것 같은 압력이 전신을 세차게 눌렀다.
 그들은 육체가 이길 수 없는 고통에 차라리 혼절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손을 따라 몸 안으로 들어오는 한줄기 청량한 느낌이 한 가닥 정신을 붙들고 놔주지 않았다.
 뭔가 얘기를 꺼내고 싶었지만 입 안에서만 맴돌 뿐 어떤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온몸의 피가 머리로 솟구치는 고통에 의식이 가물거리며 숨쉬기도 힘들었다.
 숨이 턱 막히는 순간에도 남아 있는 가족과 친구들을 생각하며 눈을 떠야만 한다고 마지막 발악을 했지만 하나둘씩 눈꺼풀이 감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서서히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이들의 뇌리를 지배했다.
 심해의 압력 속에 터져나갈 듯했던 이들의 몸뚱어리는 이제 형체마저도 유지할 수 없는 것처럼 머리 부분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마지막 남은 머리마저 터져나갈 듯 심하게 흔들리더니 어느새 얼음구덩이에 완전히 처박혀버린 네 개의 머리통이 보였다.
 투명하다 못해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얼음 속에서 사람의 뼈대가 형성되었다.
 주변의 얼음 결정을 빨아들이는 듯 뼈대의 모습이 점점 골격을 형성하는 동안, 얼음은 한 방울의 물도 흘리지 않으며 급격히 녹아 사라졌다.
 머리와 뼈만 붙어 있는 네 개의 물체가 어디선가 시작된 광풍의 회오리에 말려들며 끊임없이 회전을 거듭했다.
 엄청난 광풍의 중심으로 빨려 들어간 네 개의 물체가 빛보다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골격 사이에서 뭔가가 이글이글 타오르다가 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온 공간을 휘몰아치던 광풍이 수천 장 높이의 허공에서 뭔가 떨어지자 그 무한한 회전력을 상실한 듯 서서히 소멸해갔다.
 수천 장 높이의 상공에서 떨어진 네 개의 물체는 곧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용암 속으로 푹 처박히고 말았다.
 터져 나올 듯 넘치는 에너지를 자랑하던, 용암 속에서 흘러나온 마그마는 닿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태우며 녹여버렸다.
 끓어오르는 용암의 한가운데에 처박혔던 네 개의 물체가 다시 떠오르면서 네 명의 인간은 온몸이 타들어가고 생성되었다가 다시 타들어가는 고통의 반복 속에 신음하고 있었다.
 그들의 사지를 태우던 그 새빨간 용암은 이내 온전하게 붙어 있던 머리마저도 삼켜버렸다.
 용암에 먹히고 타들어갔다가 또 다시 생성되던 그들의 신체는 벌겋게 달궈진 모습에서 점차 맑고 투명한 모습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한편, 끓어오르던 용암은 그 에너지와 열기를 잃어갔다.
 
 
 낯선 세상
 
 “끙. 아~ 머리야.”
 철민은 약한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고개를 연신 흔들며 정신을 차리던 그는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둘러봤다. 바로 옆에는 기훈이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고, 명석과 호준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누워 있었다.
 철민은 고통스런 혼란 속에서도 친구들이 무사하기에 그나마 안심했다.
 그는 방금 전에 겪었던 일은 꿈이었으리라 생각하면서도 그 처절한 고통에 다시 한 번 몸서리가 쳐졌다.
 철민은 움직이기만 해도 미미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옆에 쓰러져 있는 기훈에게 다가가 그를 흔들었다.
 “기훈아, 기훈아~ 정신 차려.”
 그가 몇 차례 흔들어대자 기훈은 작은 신음성과 함께 눈을 떴다.
 순간, 철민의 동공이 크게 확대되었다.
 “기훈아~ 너 기훈이 맞아?”
 “아, 철민 형, 왜 그래? 지금도 머리가 어지러워 죽겠는데. 아!”
 아직 자신이 정신을 다 차리지 못해 헛것을 봤다고 생각한 기훈은 고개를 연신 흔들더니 다시 한 번 철민을 쳐다보았다.
 “헉! 형, 형 머리가? 아니 눈이? 옷은 어디로 간 거지?”
 둘은 어리둥절하게 서로를 쳐다보다가 이내 자신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다시 주변 풍경으로 얼굴을 돌린 그들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명석과 호준에게 시선이 박힌 듯 고정되었다.
 명석으로 보이는 사람은 진한 갈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고, 호준인 듯싶은 사람은 눈부신 은빛 머리칼을 휘날리고 있었다.
 철민의 머리카락 역시 찬란한 광채의 황금빛으로 변해 있었다. 물론 본인 역시 자신의 머리가 변했을 거라 예상했으나 무슨 색으로 변한 것인지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기훈의 머리칼은 고운 보라색으로 변해 간혹 부는 바람에 나풀거렸다.
 “기훈아~ 일단 명석이랑 호준부터 깨우자. 가자.”
 “네. 제가 호준이 형 깨울게요.”
 “야~ 명석아 일어나! 정신차려봐.”
 “호준이 형, 눈 떠 보세요.”
 철민과 기훈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명석과 호준을 살살 흔들면서 신체의 몇몇 부위를 마사지하듯 어루만지며 주물렀다.
 “아~ 머리야.”
 “아~ 아, 끔찍했어.”
 명석과 호준이 고개를 흔들다가 뒷목을 부여잡으며 서서히 일어났다.
 “아, 죽는 줄 알았네. 괜찮니, 철민아?”
 철민을 쳐다보던 명석의 동공은 역시 커질 대로 커져버렸다. 철민과 기훈을 번갈아보던 명석은 호준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자기 몸을 살펴보았다.
 옆에 있던 호준도 헉! 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주변의 명석과 기훈, 철민, 그리고 자기 몸을 번갈아 훑어보았다.
 “헉! 너희… 들? 괜찮은 거야? 왜, 왜 그렇게 변한 거야? 우리 혹… 혹시 죽은 거냐?”
 철민은 말까지 더듬는 명석을 쳐다보며 먼저 말을 꺼냈다.
 “다 괜찮아. 명석아, 호준아, 진정해~”
 “지금 뭔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우리의 신체에 변화가 생긴 것 같아. 옷도 다 타버린 것 같고. 너무 생생한 방금 전의 고통은 꿈이 아닌 것이 확실해.”
 “저는 물론이고 철민 형, 명석 형, 호준 형까지 모두 머리색과 눈동자가 변했어요. 육체도 원래와는 다른 것 같고요. 다들 살펴보세요.”
 철민과 기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호준과 명석은 다른 세 사람의 얼굴과 머리를 살피다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철민 형, 정말 이상해요. 분명 어제 수련하다가 맞아서 팔뚝이랑 허벅지에 멍이 들었는데, 지금은 눈 씻고 찾아봐도 안 보이네요?”
 “어? 철민아, 내 손 좀 볼래? 그때 첫날 와서 식사 당번하다가 불에 덴 흉터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
 “몸은 그렇다 치고, 우리 옷은 어디 갔지? 쪽 팔리게.”
 기훈이 일행들에게 자신의 팔뚝을 내밀며 보여주더니 멍이 사라져서 기분이 좋은 듯 웃기까지 했다.
 명석은 주변을 둘러보며 옷을 찾았으나 그들 주위에는 옷이 없는 대신, 10권의 책들만 나뒹굴고 있었다.
 “자, 다들 조용해봐. 진정하고.”
 철민의 얘기소리에 부산하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모두가 멈추며 주목했다.
 “일단 여기는 우리가 수련했던 지리산이 아냐. 저 나무들을 봐. 아무리 지리산이라고 해도 저렇게 크고 굵은 나무들이 이렇게 사방에 널려 있진 않아. 더구나 생전 처음 보는 것들이고. 게다가 날아다니는 새도 이상해. 여긴 분명 지리산, 아니 한국이 아냐.”
 “그래. 여기 공기도 뭔가 다른 것 같아. 숨 쉴 때마다 상쾌하고, 뭔가가 용솟음치는 것 같지 않아? 지리산이 좋았다고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숨 쉬는 것 자체가 너무나 자연스럽고 무의식적인 행위라서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그들은 호준의 얘기를 듣고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기에 자연스레 수긍했다.
 “철민아, 호준아, 여긴 어디일까? 우리 살아있기는 한 걸까?”
 덩치와는 다르게 명석의 걱정 어린 소리가 이어졌다.
 “글쎄? 여기가 어디인지… 다만 그 동굴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밖에…….”
 철민이 말끝을 흐리자 나머지 세 명도 시무룩해졌다.
 세 사람의 기운 잃은 표정을 보던 철민이 일어섰다가 다시 앉았다. 뭔가 말하려고 했던 그가 자신이 나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마. 뭔 일 있겠니? 우리 네 명이 함께 있는데. 머지않아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그래. 일단 힘내자! 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 했어.”
 “옷은 입어야지. 이러다가 사람들이라도 만나면 우리 모두 정신병원 내지는 영창행이야.”
 일어섰다 앉은 철민의 엉거주춤함에 다른 친구들이 슬며시 미소 짓다가 그의 말에 대꾸하며 서로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혼자가 아닌 넷인데다 서로를 따르고 신뢰할 수 있는 친구이거나 선후배 사이였기에 힘이 생겼다.
 “일단 여기가 어딘 줄은 모르겠지만 내일 알아보기로 하고, 날이 곧 어두워질 것 같은데 만일을 대비해 쉴 수 있는 공간과 먹을 것을 찾아보자. 과일 같은 거라도…….”
 “옷은 없겠지? 타잔처럼 팬티라도 입어야 할 텐데…….”
 철민의 얘기에 다른 세 사람도 걸음을 옮기며 따라나섰다.
 주변은 점점 어두워져 갔다. 그들은 낯선 곳에서 밤을 보낼 준비가 전혀 안 돼 있는 상태였으니, 우선 살기 위해서라도 움직이며 뭔가를 찾아야 했다.
 
 낯선 산길을 헤매던 철민 일행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이슬이나 비를 피할 수 있는 둔덕을 발견하곤, 나체로 일정에 전혀 없던 새로운 야영 준비를 해야 했다.
 일단 한의대생인 철민이 그나마 다른 사람보다 나을 거라는 생각에 기훈과 함께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나갔고, 그동안 호준과 명석은 잠자리와 불을 피우기 위한 준비를 했다.
 철민과 기훈은 처음 보는 열매들이라 먹을 수 있는 것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새들이 사과와 배를 합쳐놓은 듯한 열매를 먹는 것을 발견하고, 그 과일을 한 아름씩 가지고 야영지로 정한 둔덕으로 돌아왔다.
 주변에서 마른 풀을 충분히 구한 호준은 명석과 함께 불을 피웠다. 영화에서 본 그대로 마찰열을 이용해 점화시키는 방법이었는데 쉽게 성공할 수 있었다.
 너무 쉽게 불을 피운 것이 이상했지만 낯선 곳으로 온 충격이 너무 컸기에 그들은 자각하지 못했다.
 명석은 과일을 먹던 초반에는 행여나 이상이 없을까 조심스레 조금씩 맛만 보더니 혀끝에 녹아들어가는 시원함과 달콤함, 그리고 온몸에 퍼지는 상큼함을 느끼곤 허겁지겁 먹어댔다.
 생전 처음 맛본 과일 맛에 모두들 감탄하며 즐거워하는 동안 산속에 밤이 찾아왔다.
 
 사실 철민과 친구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그들이 겪은 차원 이동은 사람과 같은 생명체가 견뎌낼 수 없는 고통과 압력이 있었다.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해체되고 결국에는 분해되어 차원의 틈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오직 드래곤과 신족, 마족만이 그 고통과 압력을 견뎌낼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들 일행은 백두대간의 대부분의 정기가 수십 년간이나 모여들어 형성된 자연정단을 손에 쥐었기 때문에 차원의 뒤틀림 속에서도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의 육체가 재구성되어 임독양맥은 물론이고 체맥과 세맥까지 타통됐으며, 자연정단의 정기를 몸에 받아들이는 기연 중의 기연을 얻을 수 있었다.
 만일 자연정단이 없었다면 이들은 당연히 차원을 이동하다가 아무 흔적 없이 소멸되었을 것이며, 또 반대로 차원의 이동을 겪지 못했다면 자연정단을 흡수하기는커녕 오히려 인간의 신체로 담아낼 수 없는 막대한 자연정기에 한줄기 물로 녹아내렸으리라.
 물론 이 사실은 누구도 모르고 있었기에 그들은 뭔가 알 수 없는 변화가 생겼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예를 닦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바라마지 않는 금강불괴지신이 되어 검과 도 등의 무기에도 상처입지 않는 금강지체와 수화불침의 불괴지체로 변해버렸다.
 게다가 차원이동의 후유증으로 그 어떤 독에도 중독되지 않는 만독지체를 이루었으며, 자연정단의 정기를 흡수한 덕에 하단전이 완전히 개방되었다.
 중단전의 문도 열려 그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상단전마저 열리는 생사경에 도달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더구나 자연정단이 모두 용해되어 그들의 단전을 꽉 채우고 있었으니, 실로 이갑자의 내공을 담은 절대불멸의 전사였다. 무공의 단계로 표현하자면 몸에 지니고 있는 내공이 현경의 수준에 이른 것으로 절대불멸의 무적전사로 탈바꿈한 것이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신체에다 이갑자의 내공은 검강을 팍팍 뿜어낼 수 있을 정도이니, 이들이 만일 무공마저 깨우치게 된다면…….
 
 타다탁.
 모닥불이 타오르고 마른나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으며, 조그만 둔덕에 옹기종기 잠자는 인간 넷이 보였다.
 밤하늘에 떠 있는 두 개의 달빛에 반사되어 보이는 그들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이국적이었고, 단순하게 잘생겼다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할 정도로 묘한 매력이 풍겼다.
 그들은 모든 사내라면 갖기를 원하는 강인함이 물씬 피어나면서도 험상궂지 않았다. 오히려 부드럽고 따뜻한 기운마저 넘쳐나니 미남과 쾌남의 장점을 합쳐 놓은 듯했다.
 잠시 눈을 붙이던 철민은 옆에 있는 친구들이 깰까봐 조심스레 일어났다. 조금씩 사그라지던 모닥불 불씨는 시간이 흘렀음을 상기시켜주듯 거의 소멸해가고 있었다.
 철민은 잘라진 마른나무를 몇 개 집어넣어 불을 다시 살리고는 품안에서 책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깊은 숲속의 새벽이라고는 하나 두 개의 달빛과 모닥불이 피워져 있어 글을 보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물론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 하더라도 철민은 신체가 재구성되어 보통사람의 시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해버렸기 때문에 글을 읽을 수 있으리라.정작 철민 자신은 모르고 있지만.
 “처음부터 읽어볼까? 분명 우리가 이곳으로 오게 된 연유가 있을 거야.”
 책 중 표지가 없고 일기라고 추정되는 책을 찾아 한 장, 한 장 읽어가던 철민이 어느덧 손을 떨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런 진식이 있다니, 정말 가능하단 말인가? 책에 나온 내용을 정말 믿어야 하나? 우리가 넘어온 것이 그분의 안배라는 것도 믿을 수 없고…….”
 다시 책을 넘기기 시작하던 철민은 어느 부분에 이르러 내용을 반복해서 읽는 듯 한참 동안이나 그 장을 넘기지 않고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렇군! 그럼, 우리가 시공간뿐만이 아니라 차원마저도 초월하여 이동했다는 얘기인가? 아, 육체가 재구성되고 단전에 넘쳐나는 이 기운이 소설 속에서나 가능할 것으로 여겼던 현경을 바라볼 수 있는 경지이건만, 우리가 살아온 세상이 아닌 낯선 곳이라니.”
 철민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때 그의 곧고 굳은 어깨에 누군가의 손이 올려졌다.
 “철민아.”
 “아! 호준아, 잠자지 않고 뭐해?”
 “철민이, 넌 왜 안 자는데?”
 둘의 시선 속에 서로의 생각을 읽었을까? 아니, 서로가 너무나 잘 통하고 상대방을 훤히 알고 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철민아, 나도 다 알아. 여긴 우리가 살던 지구가 아냐. 하늘에 달이 두 개나 떠 있다는 것이 그걸 말해주고 있잖아. 여기가 어디라고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다른 세상이야. 우리가 발견한 동굴 바닥에 새겨져 있던 그 진식에서 빛이 나던 순간…….”
 잠깐 숨을 고르던 호준이 다시 얘기를 꺼냈다.
 “너, 지금 혼자서 미래와 우리들을 걱정하고 있었다는 거 다 알아. 하지만 너 혼자가 아냐. 내가 있잖아.”
 “우리도 있잖아요.”
 “나를 빼놓다니, 매우 섭섭한걸.”
 자는 줄 알았던 명석과 기훈이 어느덧 모닥불 근처로 다가와 철민과 호준 옆에 앉았다.
 “그래. 우리 넷이 힘을 합치면 뭐가 두렵고 무섭겠니? 그 어떤 어려움도 우리들이 힘을 합치면 헤쳐 나갈 수 있을 거야.”
 친구들의 난데없는 등장과 그들이 한 말에 철민은 가슴에 쌓여있던 많은 부담감을 털어낼 수 있었다. 옆에 있는 친구들과 함께 힘과 지혜를 모아나간다면 그 어떤 시련과 고난이라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서로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신뢰를 담고 말이다.
 “우선 내가 이 책에서 알아낸 것을 얘기해줄게. 나도 책을 처음부터 읽어가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게다가 마지막 부분은 어두운 동굴 안에서보다 글자가 훨씬 더 많이 보여서 뜻을 대부분 알 수 있었어. 나는 다 읽었으니까 돌아가면서 한 번씩 읽어봐.”
 철민의 얘기에 다른 세 명은 지금 그가 하는 말이 자신들의 운명과 연관되어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언제까지 부정만 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순 없기에 조용히 철민을 주시했다.
 “너희들도 느끼는 것처럼 여기는 지구가 아냐. 아니, 지구 사람들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차원의 세상이야. 우리는 시공간을 넘어 차원까지 이동한 거야. 우리가 동굴에서 봤던 그 시신은 민족무예의 계승자로, 일제의 민족혼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민족무예 계승자에 대한 탄압과 구금, 살인의 위협 속에 민족혼과 민족무예를 지키고자 하셨던 선배 무예인이셨어. 민족무예를 연마하고 수련하던 과정에서 자연의 정기가 고갈됐는데, 그 이유가 일제의 민족정기 말살계획으로 백두대간 곳곳에 말뚝을 박아 정기가 심하게 훼손됐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해결하고자 하신 분이야. 게다가 천기까지 읽을 수 있을 정도의 무인이자 도인이셨지.”
 “아! 언제가 신문에서 본 기억이 나요. 일본 놈들이 우리나라의 기운을 끊고자 전국 곳곳에 쇠말뚝을 박았다고. 그리고 그 쇠말뚝을 뽑기 위한 무슨 단체나 모임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 맞아. 그분은 몇 개의 말뚝을 뽑다가 그것을 다 뽑기도 전에 대자연의 기운은 물론이고, 민족의 정기마저 다 소멸할 것 같다고 생각하셨던 거지. 그래서 우리나라의 단전 부근에 해당하는 지리산에 들어가 진식을 그린 다음, 자연의 기운과 민족의 정기가 말살되지 않도록 그것을 유지하시고 계셨던 거야.”
 그들에게 일제의 만행에 대한 분노가 다시 생겨났다. 36년간의 결코 짧지 않는 기간 동안, 그들이 우리 민족 모르게 얼마나 많은 해코지를 했을 것인가 하는 생각에 소름마저 끼쳤다.
 “그 과정에서 대자연의 정기가 모여들고 축적되어 자연정단을 형성한 거야. 그분은 자신이 끝까지 진식을 지키고자 했지만 천수가 다함을 알고 안타까워하며 연구하다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셨어. 지리산으로 모인 대자연의 정기가 다시 삼천 리 금수강산을 돌며 다시 회전해야 우리 민족의 정기가 완전히 되살아난다는 것을 깨달은 거지.”
 “그럼, 진식을 다시 파훼시켜야 한다는 것인가?”
 “응. 그런데 일제에 의해 곳곳에 박힌 말뚝이 어느 정도 제거되어 대자연의 흐름이 원활해지는 것은 일제 패망 후에도 몇 십 년이 지나야 되는 일이었고.”
 “진식을 파훼하지 않으면 무슨 문제가 생기는데?”
 “우리나라의 정기가 단전에 해당하는 지리산에만 모이다보니 반도의 남녘에 해당하는 남한은 발전하는데, 북한은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되어 힘들어지는 거야. 그리고 정기가 한쪽으로 쏠리면서 민족의 힘이 합쳐지지 못하고.”
 “엥? 그럼, 자연과 민족의 정기가 자꾸 한쪽으로 쏠려서 남북한이 격차가 발생하고 통일이 되지 못한다는 얘기야?”
 “응. 비슷해. 그래서 그분이 설치한 진식이 설치 후, 60년이 지나면 파훼해서 다시 대자연의 정기가 백두대간을 따라 순환하게 해야 했지.”
 단순한 진식에 그런 어마어마한 힘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 진식의 힘에 의해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세상으로 이동해버린 당사들이기에 안 믿을 수도 없었다.
 “그럼, 앞으로 진식을 파훼하면 우리나라에는 좋은 일만 생기겠네? 통일도 되고?”
 “이미 진식은 파훼되었어. 그 아래에 있던 네 개의 구슬이 자연정단이고 그것을 우리가 집어 들면서 진식이 파훼된 거야.”
 “진식이 파훼된 것이 지금 우리하고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거지?”
 철민의 얘기를 계속 듣던 명석이 갑자기 뭔가를 깨달은 듯 급하게 물었다.
 “맞아. 우리가 모여진 자연정단을 진식에서 들어냄으로써 진식이 파훼되었고, 단전으로만 모여들던 백두대간의 정기가 요동치면서 그 엄청난 힘이 차원의 틈을 열어 진식 안에 있던 우리를 차원 이동시켜 버린 거지. 그 분도 자연정단을 손대는 순간, 진식이 파훼되면서 차원이동이 실현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살아생전에는 진식의 파훼 시간이 다가오지 않음을 깨닫고 자신의 부족한 천수를 안타까워했어.”
 철민의 얘기가 계속되는 동안 호준과 명석, 기훈의 얼굴에는 놀란 표정들이 여러 번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그럼. 철민아, 차원이동이 실현될 것을 알았다면 우리가 어디로 간다는 것, 그리고 돌아가는 방법 등에 대해서도 적어놓지 않았을까?”
 명석의 난데없는 얘기에 호준과 기훈마저 눈빛을 초롱초롱거리며 행여나 하는 일말의 기대감을 갖고 철민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미안하다, 명석아.”
 “없구나? 없는 거지?”
 “휴~ 없는 거예요? 정말로?”
 명석과 기훈의 낙담하는 소리가 이내 들려왔다.
 “철민아, 네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책에 나온 것은 그것뿐이야?”
 호준 역시 돌아가고픈 마음이 그들과 다를 바 없었지만 방법을 찾지 못해 더욱 안타까워하는 철민의 속마음을 알기에 나서서 말했던 것이다.
 “아냐. 그분은 천기를 살펴보며 60여 년이 지난 후에 우리가 찾아올 것을 알고 우리를 위해 몇 가지 안배를 해놨어.”
 “그게 뭔데?”
 “진식을 설치한 당사자가 진식을 깨고 차원이동을 겪어야 했지만, 그렇지 못함을 미안해하면서 우리민족의 무예를 집대성한 무공서적과 검법들을 남겨놓았던 거야. 책상과 책장에 있던 책들은 똑같은 책을 두 부씩 남겨놓은 거고.”
 “왜 똑같은 책을 두 부씩 남겨놓은 거지?”
 “한 부는 우리가 가져가고 다른 한 부는 그대로 남기를 바라신 거지. 다른 누군가의 손에 발견되어 우리 민족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면서.”
 “다른 안배는 뭔데?”
 “차원이동의 충격 속에서 우리가 소멸될 수도 있기에 자신의 모든 내공을 분산하여 자연정단에 분산해서 심어놓아 그것이 자연스럽게 우리 몸 안으로 흘러갈 수 있게 안배해놓은 거야. 그래서 우리가 차원이동의 후유증을 극복하면서 목숨을 유지한데다 자연정단을 융해하는 기연과 신체가 재구성되어 금강불괴지체까지 이룬 거지.”
 “기연? 기연이라고? 그리고 금강불괴지체는 전설이나 소설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가능한 얘기였어?”
 “응. 자연정단은 2갑자 이상의 내공 증진을 가져오는 대자연의 신기로 자연정단을 흡수하여 용해하게 되면 자연스레 하단전을 튼튼하게 세우고 2갑자의 내공, 그리고 중단전의 문을 여는 신비한 비보야. 게다가 우리는 차원이동의 후유증으로 신체가 재구성되었고. 우리의 머리와 눈동자가 바뀐 것은 신체가 재구성될 때 손에 쥔 자연정단의 특성에 따라 변한 것 같아. 이 부분은 내 추측이야.”
 계속되는 철민의 얘기에 다른 세 명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자신들의 방문을 예견하여 차원이동을 대비한 안배를 해놓다니. 자신들의 몸속에 2갑자의 내공이 있다는 얘기는 더더욱 믿을 수 없었다.
 “믿기지 않지만 내가 잘 이해한 건가 들어봐. 철민아, 진식은 60년이 지나면 깨는 게 우리 민족에게 득이 된다. 그런데 설치한 당사자는 그때까지 못 살고 죽는다. 그래서 천기를 살펴보니 우리가 오는 것이 예상됐다. 우리는 예상대로 가서 진식을 깼는데 그때 어쩔 수 없이 얻게 되는 것이 자연정단이었다. 그게 있어서 우리가 진식이 깨지는 후유증으로 발생한 차원의 이동을 견뎌냈고 엄청난 내공의 소유와 신체가 재구성되는 기연을 얻었다. 그런데 그것은 다 우리가 올 것을 예상한 그 사람이 안배를 했기 때문이다. 낯선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게 덤으로 몇 권의 무공서적을 남겼으니 그것을 배워라. 그리고 자기도 차원이동이 될 줄은 알았지만 어디로 어떻게 되는지는 모른다. 그러니 미안하지만 잘 살아라. 그 내용이 맞니?”
 너무도 황당한 일의 연속으로 명석의 말투가 곱지 않았지만 제대로 이해한 것 같았다.
 누구라도 우연히 만진 물건에 의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당하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상한 세상에 홀딱 벗고 떨어진다면 명석보다 더한 반응이 나올 것이다.
 “응. 믿기지 않겠지만 그렇게 나와 있어. 그리고 다들 호흡법을 실시해보면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거야.”
 철민의 이야기가 끝나자 호준과 명석, 기훈은 누구랄 것 없이 그간 해왔던 호흡 수련법을 시전했다.
 간단한 운기토납법이지만 정해진 리듬 속에 숨을 내쉬면서 들이마신 숨을 일 주천시키면 피로회복이 빨라지며 상쾌한 느낌을 주기에 꼭 수련시간이 아니더라도 평소에 다들 즐겨했었다.
 “정말 이 기운은 뭐지? 뭐라 말할 수 없이 상쾌한데.”
 “아! 정말 알 수 없는 기운이 꿈틀거리네. 몸을 공중에 띄울 수도 있을 듯한데.”
 명석은 단전에서 올라오는 엄청난 힘에 자신도 모르게 발을 굴렀다. 그러자 몸이 2미터 이상 솟구쳤다.
 명석의 모습을 보고 기훈도 마찬가지로 몸을 띄우자 무협영화에서나 나오는 동작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행해졌다.
 “잉~ 좋다! 이왕이면 나는 3갑자 주지. 형들이나 한 번 이겨보게. 크크크크.”
 다들 호흡 수련법을 마치자마자 느낀 새로운 기운에 한 마디씩 했다.
 “이제 새로운 세상에 온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지?”
 “호준아, 옷부터 입어야 하는 게 우선 아닐까?”
 “하하하. 명석 형의 말이 정답이네.”
 “하하하하.”
 차원이동 후 처음으로 밝게 웃는 네 사람이었다.
 “우린 지금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차원으로 떨어져버렸고, 우리가 돌아가는 방도를 찾기 위해서라도, 아니 살기 위해서라도 9권의 책에 있는 무예를 연마하면서 행여 있을지 모를 위험에 대비해야 해. 그리고 또 이곳 생활에 적응하면서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봐야 할 거야.”
 “그래. 철민의 말대로 해야지. 다들 걱정하지 마. 이 차명석의 사주에는 객사는 없다고 그랬어. 오히려 여난이 끼여 있어서 문제라 그랬지. 크하하하.”
 “하하하.”
 “하하. 명석 형, 예전 그 똥배 나왔을 때라면 못 믿는데 이제는 믿어야 하나? 크하하.”
 “하하하~”
 모두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치며 숲속 깊은 곳까지 울려 퍼질 때, 저 멀리 여명이 밝아오며 서서히 그 찬란한 서광을 비추기 시작했다.
 
 새로운 세계의 첫날 아침은 향후 일정을 논의하기 위한 그들의 토론으로 시작되었다.
 오고가던 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철민 일행이 결정한 것은 다음과 같았다.
 일단 이곳이 어떤 세상인지 살펴보고 그에 따른 대처를 강구하자는 것과 두 번째로 자신들의 안전과 건강을 위해 무예수련을 열심히 하자는 것.
 “자, 과일을 각자 나누어 담고 한번 돌아다녀보자. 여기도 사람은 살지 않을까?”
 “혹시 모르니까 목검 대신 이걸 들고 다녀보자.”
 철민이 먼저 일어서자 다른 일행들 역시 과일을 몇 개씩 챙기고 남는 것을 베어 먹으면서 따라나섰다. 철민과 친구들은 어느새 커다란 나뭇잎과 줄기 등으로 얼기설기한 팬티를 만들어 입었으며 왼쪽 어깨에는 조잡하지만 가방 비슷한 것을 만들어 책과 과일 등을 나누어 담아 메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방금 구한 나무가 지팡이 겸 호신무기로 들려 있었다.
 어디 사진 속에서나 봤음직한 거대한 아름드리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 이곳의 경치는 보면 볼수록 신기할 뿐이었다.
 빽빽한 나무 군림 사이로 어렵게 길을 잡아가던 일행들은 한참 동안 숲을 누비고 다녔지만 여전히 숲의 가운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휴~ 정말 가도 가도 나오는 것은 나무뿐이네.”
 “그나마 다행이지. 우리가 떨어진 곳에 남극이나 북극처럼 얼음만 있다고 생각해봐라? 그것도 홀딱 벗고. 크하하하하.”
 “그럼, 거기서는 뭘로 옷을 만들어 입어야 하지? 에스키모처럼 곰을 잡아야 하나?”
 막내 기훈에게서 투정 같은 소리가 나오자 명석은 자신들의 나뭇잎 팬티를 보며 무슨 상상을 하는지 크게 웃었다. 철없는 기훈은 아예 명석의 얘기에 빠져들어 곰곰이 고민까지 하는 것이 명석의 눈에는 곰처럼 보였다. 그랬기에 더욱 웃었다.
 일행의 선두에 서 있던 철민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댔다.
 “쉿! 조용히 좀 해봐. 저 앞쪽에서 인기척이 나는 것 같아. 한번 가보자.”
 “아, 무슨 괴물 같은 것이 나오는 건 아니겠지?”
 드디어 새로운 세상에서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과 호기심, 그리고 약간의 조바심으로 철민이 앞장서자 명석과 기훈, 그리고 호준이 따라나섰다.
 30미터쯤 앞으로 나아가자 방금 전에 들렸던 소리의 주인공인 듯한 정체불명의 무리들을 볼 수 있었다.
 150~160센티 정도의 조금 작은 키에 통통하면서도 우람한 인간의 체격을 하고 사나운 돼지의 얼굴 위로 날카로운 송곳니를 갖고 있는 그들은, 어림잡아도 30여 명은 되어 보였다.
 “헉! 저거 오크잖아? 영화나 소설에 등장하는 오크처럼 생겼는데.”
 “엥. 정말 소설에서 나오는 오크같이 생겼네. 우리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니지?”
 “완전히 판타지 소설 속의 한 장면이네. 소설대로라면 저것들이 우리한테 덤빌 텐데…….”
 그들 앞에 나타난 두 발로 걷는 돼지 같은 것들은 판타지소설에서 묘사하는 오크들과 너무도 흡사했다. 더구나 취익거리는 특유의 음성까지 들려오자 그들은 더욱 황당해졌다.
 “우리가 정말로 판타지 세상에 온 것 아닐까?”
 “설마 다른 차원이라 해도 판타지 같은 세상이 실제로 존재할 줄이야.”
 “저놈들이 우리한테 덤벼들 것 같은데, 싸워야 하나? 일단 말을 걸어볼까?”
 오크들은 철민과 친구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눈앞의 인간들이 약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자신들보다 더 좋은 무기와 방어구를 착용하고 있고,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저렇게 나뭇잎 팬티만 입고 산속을 돌아다니는 인간은 본 적이 없었던 터였다.
 “취익! 취~치~잇! 인간이다! 음식이다~”
 “취익~칙! 네 마리다. 취이~칙! 복 받은 날이다.”
 “취익~취익~ 신선한 음식이다.”
 “취익~ 누가 벌써 다 벗겨놓았다? 맛이 간 인간은 아닐까?”
 오크들은 난데없이 나타난 철민 일행을 보며 대단히 반가워했지만 의심 또한 들었다. 간혹 동족 중에 잘못된 음식을 잡아먹고 죽어가거나 배를 아파하면서 하루 종일 똥만 퍼질러 싸는 불결한 오크가 있었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전 정철민이라고 합니다. 대한민국, 아니 코리아에서 왔습니다.”
 철민이 약간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취익! 저것들 뭐라고 하는 거냐? 취익~”
 “취익! 인간들이 곱게 죽는 것 봤냐? 취익.”
 “취~칙. 위대한 오크전사의 힘을 보여주자.”
 “취~칙. 아무래도 좀 상한 인간이다. 먹고 탈나지는 않을까?”
 고개 숙이며 인사하는 인간을 보거나 들어본 적이 없는 몇몇 오크는 눈을 예리하게 빛내며 철민과 그 친구들을 찬찬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반면 대부분의 오크들은 누구랄 것 없이 각자 가지고 있던 병장기를 꺼내들었다.
 그들은 배틀엑스부터 돌도끼, 펄션에 롱소드까지 온갖 잡다한 무기로 무장하며 익숙한 솜씨로 철민 일행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철민 형, 쟤들은 오크라니까요. 저것들은 몹이에요. 온라인게임을 하면 나오는 제일 허접한 것들이에요. 당연히 말이 안 되죠. 여긴 다른 세상인데.”
 “기훈아, 역시 저런 오크들과는 대화가 안 되겠지. 저 뒤에 서 있는 오크들은 말이 통할 것도 같았는데.”
 대부분의 판타지 소설에서도 오크는 인간들과 공존할 수 없는 몬스터로 나왔다. 행여나 싶은 마음에 대화를 시도해봤던 철민도 자신의 목검, 아니 몽둥이를 돌려 잡았다.
 “일단 각자 사방을 점하고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려 공간을 확보한 후 돌파하자. 다들 조심해.”
 오크라는 몬스터가 소설이나 게임 속에서는 너무나 상대하기 쉬운 몬스터였지만 실제 오크와 싸워본 적이 없는 철민과 친구들은 소설 속에 묘사되는 오크들의 전투 수준을 떠올리며 조심스레 움직였다.
 먼저 자연스럽게 이들 네 명은 동서남북의 한 방향을 차지하며 서로의 등을 의지한 채 오크를 마주보았다.
 가장 중앙에는 철민이 섰고 뒤에는 호준이, 그리고 왼쪽으로는 명석이, 오른쪽으로는 기훈이가 자리했고 저마다의 손에는 자신들의 지팡이가 목검 대신 들려 있었다.
 “취익~ 곧 죽을 것들이 뭐라고 떠드는 거냐?”
 “취익~칙. 일단 상한 음식이라 해도 사냥부터 하고 보자.”
 “취익~칙. 인간들 무기도 변변찮다.”
 오크들은 숫자도 적고 무기도 형편없었으며, 옷마저 입지 않은 철민 등을 보며 기세등등하게 달려들었다.
 30마리 중, 대장으로 보이는 오크가 가장 먼저 베틀엑스를 휘두르며 철민에게 다가왔다. 대부분의 오크가 나무 조각과 철판 등을 얼기설기 엮어 겨우 몸을 가린 것에 불과했다면, 이 녀석은 무두질을 충분히 하여 보기에도 제법 모양새가 갖추어진 레더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다.
 녹이 슬었으며 사이사이 이빨마저 빠진 베틀엑스에는 살점덩어리가 잔뜩 말라붙어 있었고, 핏자국 등이 얼룩져 있어 보기에도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였다.
 휘~익.
 도끼날이 바람을 가르며 철민의 두개골을 깨부술 듯 무섭게 날아와 머리 근처까지 근접했다. 철민은 몸을 조금 틀어 목과 어깨 사이에 약간 비스듬히 걸쳐놓았던 몽둥이를 그대로 회전하면서 오크의 머리를 가격했다.
 철민의 몽둥이가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원을 그리면서 재차 오크의 머리 부분, 정확하게 말하면 귀 바로 위에서 얼굴 안쪽으로 조금 들어온 부분을 빠르게 가격했다. 두 번의 연이은 타격을 받은 오크대장이 약간의 살점과 피를 흘리면서 쓰러지더니 부르르 몸을 떨다가 이내 절명했다.
 조금 전에 시전한 철민의 검법은 제독검법의 기본적인 공격으로 자연스러운 회전을 통해 원심력을 극대화시켜 강력한 베기를 자랑하는 검법이었다.
 비록 나무 몽둥이라고는 하나 오랫동안의 수련과 차원이동에 의해 신체가 재구성되었기 때문에 평범한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파괴력을 낼 수 있었다. 게다가 이곳의 중력이 지구의 것보다 약간 가벼워서 안 그래도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그들의 동체 신경과 반사 신경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비록 30 : 4의 압도적인 수적 열세의 싸움이었지만 철민은 물론이고 막내 기훈까지 여유 있는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취익! 인간은 네 명뿐이다.”
 “취~칙! 한꺼번에 공격하라.”
 대장이 쓰러졌음에도 불구하고 본능에 충실한 오크들은 아직도 수적 우세를 믿고 계속 덤벼들었다.
 쉭익! 쉭익!
 두 개의 숏엑스가 회전하며 호준의 안면을 향해 날아왔다. 숏엑스를 집어던진 두 마리의 오크는 쓰러진 다른 오크들의 무기를 줍기 위해 순간 몸을 숙였다.
 호준은 쓰러져가는 오크의 뒷목에 강한 일격을 날려 마무리하다가 자신에게 날아오는 두 개의 숏엑스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망설이는 것은 잠시, 그는 오른발을 뒤로 움직여 몸의 중심을 이동시켰다. 날아오는 숏엑스가 그를 스쳐지나간다 싶을 때쯤 커다란 기합소리를 내며 숏엑스의 나무 손잡이 부분을 정타로 강하게 눌러 찍어 땅에 떨어뜨렸다.
 다른 오크의 무기를 집어 들고 자신에게 달려오는 오크를 본 그는 사람의 키를 훌쩍 뛰어넘을 정도의 높이까지 뛰어오른 다음, 몽둥이를 자신의 머리 뒤로 넘겨 들고는 최대한의 파괴력을 낼 수 있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더니 달려오는 오크의 머리 한가운데로 몽둥이를 위에서 힘껏 내려쳤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오크의 두개골이 벌어지며 하얀 뇌수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올라왔다. 호준이 미처 예상치 못할 정도의 파괴력이었기에 그것의 세례를 피할 수는 없었다.
 피범벅이 된 호준은 달려오던 다른 오크의 기운을 느끼자마자 왼발을 들어 금계독립세의 자세를 취했다. 그리곤 몽둥이를 빠르게 회전해 달려오던 오크의 목을 짧게 가격하더니, 다시 반대로 회전하여 생긴 커다란 원심력으로 다시 한 번 그곳을 가격했다.
 1미터 이상 공중에 떠서 날아가던 오크는 땅에 처박히자마자 혀를 빼물고 쓰러졌다.
 “호준아, 조심해. 이놈들은 몬스터야. 사정을 봐주면 안 돼.”
 호준이 피를 뒤집어쓰고 놀라서 멍하니 있자 명석이 소리쳐서 그의 정신을 일깨워주었다. 지금 그들이 상대하는 것은 인간을 잡아먹는 몬스터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오크를 죽이지 않으면 죽는 것은 그들이 될 것이니 말이다.
 네 명 중 가장 키가 크며 덩치가 좋은 명석은 오크보다 더욱 오크다운 흉흉함으로 한 마리씩, 한 마리씩 착실히 처리하고 있었다.
 불과 몇 분밖에 흐르지 않았는데도 오크 20여 마리가 이미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췩~익. 안 되겠다. 한 명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자.”
 “칙~칙! 인간들 강하다. 그러나 우리는 더 강하다.”
 “저기 칙~칙 팬티에 구멍이 난 놈이 췩~ 가장 만만한 것 같다.”
 오크들은 아직도 수적 우세를 믿는 건지 그들의 종족이 20여 명이 쓰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냥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들 조심해. 몇 마리 안 남았지만 이놈들이 어느 한쪽으로 몰려올 것 같아.”
 오크들의 수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철민이 소리쳤다.
 그 순간, 우드실드를 들고 있던 오크를 시작으로 남은 10마리가 동시에 덤벼들었다.
 “칙~칙! 팬티에 구멍 난 놈부터 죽여라.”
 “췩~직! 한 놈부터 먼저 잡자.”
 달려들던 오크들은 철민에게 한 마리, 명석과 호준에게 두 마리씩 막히고 말았지만 나머지 5마리는 기훈에게 덤벼들었다.
 “기훈아, 조심해.”
 기훈의 위급함을 보며 달려가고자 했던 철민은 우선 자신의 눈앞에서 디바이더를 휘두르고 있는 오크에게 목검을 힘차게 날렸다.
 그는 자신이 가장 자신 있게 할 수 있으며 가문에서 내려온 비기인 화령검법의 화결식을 시전해 내리쳐오는 디바이더의 날을 옆으로 비껴내고 바로 경결식을 펼쳐 오크의 인중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
 그가 워낙 어릴 때부터 수련해온 가전무예라 기수식부터 발검에 이르기까지 몸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는 화령검법의 이번 공격은 그의 의도와 무관하게 단전의 내공이 검결에 실리면서 빛살처럼 빠른 그 뭔가를 쏘아냈다. 오크의 얼굴은 그의 검에 닿지도 않았는데 완전히 짓이겨져 버렸다.
 “오냐! 이놈들 다 덤벼라. 내가 17 : 1의 다굴도 붙었던 사람인데 돼지 다섯 마리가 두렵겠냐?”
 기훈은 크게 소리치며 호기 있게 맞섰지만 말과 다르게 서서히 밀리고 있었다.
 오크 두 마리가 가장 먼저 달려와 날린 펄션과 배틀엑스를 연속적으로 튕겨낸 기훈은 갑작스럽게 날아오는 숏엑스를 뒤늦게 발견하고 멈칫했다.
 만일 기훈이 날아오는 숏엑스를 막아내거나 튕겨낸다면 뒤이어 그의 목과 배를 향해 들어오는 또 다른 디바이더 두 개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 설령 용케 그것을 피하거나 막아낸다 하더라도 처음 튕겨낸 두 자루의 펄션과 배틀엑스가 그의 몸뚱어리를 발기발기 찢을 것이었다.
 기훈은 대련과 시합은 많이 해보았지만 피가 튀기고 살점이 떨어지는 실전은 처음 겪어보는 것이기에 자신도 모르게 망설이고 있었다. 만일 처음부터 손속을 더욱 잔인하게 해서 오크 두 마리를 확실히 제압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위기상황까지는 도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숏엑스와 디바이더를 보며 더 이상 망설였다가는 가망이 없다는 것을 느낀 기훈이 크게 심호흡하며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왼쪽에서는 철민이 재빠른 동작으로 오크 한 마리를 처리하더니 기훈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기훈은 철민의 시선과 한순간 짧게 마주치더니 곧바로 고개를 돌려 두 눈을 부릅뜨고 회전하며 작은 포물선 형태로 날아오는 디바이더를 쳐다봤다.
 “이얍!”
 그는 크게 소리치면서 모든 힘을 짜내 숏엑스를 튕겨냈다.
 뒤이어 곧바로 들어오는 두 자루의 디바이더는 막아낼 틈도 없이 기훈의 몸에 꽂혀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오크 한 마리를 처리하고 주변을 둘러보던 철민은 기훈의 다급한 상황을 확인했다.
 날아오는 것이 숏엑스 하나뿐이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만 거의 비슷한 속도로 쳐들어오는 두 자루의 디바이더는 철민이라도 피할 방법이 없어 보였다.
 기훈이 숏엑스를 피한다면 디바이더 역시 그를 쫓아올 것이고, 공격 방향을 정하기 위해 잠시 주춤거리는 다른 두 마리 오크가 펄션과 배틀엑스를 이용하여 퇴로를 점할 것이었다.
 기훈에게 급히 달려가던 철민은 순간 그의 눈과 마주쳤다.
 기훈의 눈은 철민에게 숏엑스를 막겠으니 철민에게는 뒤이어 들어오는 두 자루의 디바이더를 막아달라고 부탁하는 것 같았다.
 철민은 두 자루의 디바이더를 시간 안에 막아낼 수 있을지를 걱정하며 마음이 다급해졌다. 자신의 느낌대로 기훈이 숏엑스를 막아내고는 가장 먼저 달려들었던 두 마리 오크의 움직임에 따라 들고 있던 몽둥이를 움직여 나가는 것이 보였다.
 철민은 두 자루의 디바이더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아니 신경 쓸 수 없는 기훈을 보며 자신의 몽둥이를 앞으로 내뻗었다. 그가 막아내는 속도보다 두 자루의 디바이더가 기훈의 몸을 관통하는 것이 더 빨라보였기에 절절한 안타까움을 느껴야 했다.
 아! 검의 기운을 뿜어내 막을 수만 있다면…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철민의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과 느낌들이 스쳐지나갔다.
 철민은 아끼는 후배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마음을 온통 그의 몽둥이 쪽으로 모았다.
 두 자루의 디바이더가 기훈의 몸을 파고들던 그 순간, 금색 찬란한 검강이 철민의 몽둥이에서 솟구쳐 나와 두 자루의 디바이더를 잘라내더니 두 마리의 오크까지 양단해버렸다.
 뒤이어 재차 공격하고자 대기하던 다른 두 마리의 오크마저 눈부신 금빛 검강으로 가볍게 목을 베어버렸다. 실로 눈 깜짝할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숏엑스를 집어던지고 다른 무기를 주워 기훈에게 달려들던 오크는 그 자리에 멈춘 채 노린내 진한 오줌을 누고 말았다.
 철민의 검강은 한참 접전을 펼치던 호준과 명석, 그리고 오크들마저 얼이 빠진 채로 멈칫거리게 했다. 오크들은 철민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취익! 인간이 아니다!”
 “취익! 무시무시한 인간이다!”
 “취익! 도망가자.”
 그나마 운 좋게 살아남은 세 마리의 오크들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갔다.
 철민의 검강에 호준과 명석이 순간적으로 넋을 잃었다고 하지만 기세가 오른 그들이 오크 한 마리씩을 처리하지 못할 실력은 아니었기에 추격해서 죽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기훈이 행여 다치지 않았나 싶은데다 의미 없는 살생은 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들이 도망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이들이 놔준 오크들은 후에 오크 최대의 용사로, 사선에서 살아남은 위대한 오크로 대대로 칭송받았으며, 그들의 증언에 의해 이 전쟁터는 오크 최대의 성전으로 어린 오크들의 성인식 필수코스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에팔렌 산맥의 생활
 
 “기훈아, 다친 데는 없어?”
 “저는 괜찮아요. 그보다 철민 형.”
 “철민아, 방금 금빛 광채는 어떻게 된 거야?”
 철민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일말의 안도감과 더욱 진한 호기심과 놀라움이 담겨 있었다.
 “글쎄? 어떻게 된 것인지… 나도 이해를…….”
 “단지 기훈이가 위험하니 내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아~ 철민아! 일단 축하해. 방금 전 그건 분명히 검강이야. 너무도 찬란한 금빛 검강!”
 “맞아. 철민아, 말로만 듣던 검강을 네가 시전한 거야.”
 “형, 축하해. 근데 그것 정말 어떻게 한 거야?”
 “나도 잘 모르겠어.”
 검을 익히는 과정에 자신의 내공을 검에 주입하여 이를 뚜렷이 표출하고 그 어떤 물체도 무 자르듯이 자를 수 있는 것이 검강임을 그들도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다만 너무나 비현실적이기에 상상속의 경지거나 먼 옛날에나 있었을 법한 일로 치부해버렸다.
 그러나 그들이 단전에 2갑자 내공이 있기 때문에 내공의 운용 방법만 알면 그 정도의 검강은 식은 죽 먹듯 할 수 있다는 것을 자신들은 아직 깨닫지 못했다.
 “일단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잘 수 있는 곳을 찾자. 지금의 나로서도 뭐라고 확실히 말할 수가 없어.”
 “명석 형, 이놈들이 들고 있던 검은 챙겨가요. 우리도 이런 세상에서 살아나려면 몽둥이보다 검이 더 필요할 것 같은데.”
 오크와의 전투를 끝낸 철민과 친구들은 대충 주변을 정리하며 그들이 들고 있던 무기와 가방으로 쓸 만한 것들을 챙겼다. 그러나 그들은 오크가 입었던 것을 입고 싶진 않았기에 갑옷 같은 옷 종류는 벗기지 않았다.
 
 그들은 숲속에서 한참을 헤맸지만 아직도 숲의 한가운데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또한 걷는 동안 오크와의 전투에 관한 것과 자신들이 지금 있는 이곳이 판타지 세상이 아닌가 하는 대화를 나누었으나, 그들이 실제로 살아 있는 생명체의 목숨을 전투를 통해 죽인 경험은 오늘이 처음이었기에 아직도 흥분해 있는 상태였다.
 철민과 친구들은 판타지 세상에 온 이상 앞으로 더욱 강하고 무서운 몬스터들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무공을 열심히 배워야겠고 결심했다.
 “형들, 제가 형들 몰래 배운 절대의 호신강기를 보여주려고 그랬는데 아깝네요. 다음번에는 꼭 구경하세요.”
 꽁.
 “아얏!”
 호준의 알밤에 기훈은 아픈 척 머리를 싸매며 오만 인상을 찌푸렸다.
 “이 녀석아, 절대의 호신강기를 배운 놈이 이런 알밤에 그리 아파하냐?”
 명석이 까불던 기훈에게 핀잔을 주며 얘기하자 호준은 마치 알밤을 먹인 이유를 가르쳐주려는 듯 한마디 했다.
 “기훈아, 진형을 구축해서 싸우는데 너 혼자 그렇게 튀어나가면 어떻게 해? 혼자서만 튀어나갔으니 그런 위험한 상황을 초래한 거 아냐?”
 “호준 형, 미안해요. 저도 아는데 막상 여러 마리가 몰려오니까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되더라고요. 처음이라 그래요. 다음에는 잘할게요. 헤헤헤.”
 “하여간 기훈, 너만 보면 내가 불안해죽겠어. 하마터면 이런 곳에서 크게 다칠 뻔했잖아.”
 “명석 형, 미안해.”
 기훈은 자기 스스로도 느끼는 것이 많았기에 겉으로는 계속 웃어대면서도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했다. 전의 전투 상황에서 철민의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최소한 중상은 면치 못했을 것이다.
 호준과 명석도 미안해하는 기훈을 보며 더 이상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내공이 2갑자에 이르고 금강불괴지체를 이룬 자들치고 너무 소심한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들은 언제쯤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끝이 없을 것 같던 숲속을 한 시간 정도 더 헤매고 나서야 그들은 산비탈 옆에 지어진 저택 한 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기 집 같은 게 있는데.”
 “아! 살았다. 사람들을 만나면 말이 통할까?”
 “일단 가보자고.”
 사방을 둘러볼 수 있는 지형에다 보기에도 튼튼한 나무와 돌로 쌓은 건물 외벽이며, 육중한 나무를 사용하여 이중삼중으로 보완한 문 등을 보면 비바람은 물론 몬스터의 공격에도 견뎌낼 수 있도록 튼튼하게 지어진 집이었다.
 더구나 한쪽에는 그리 크지 않은 옹달샘이 흐르고 있는데다가 그 옆에 초등학교 운동장만한 평평한 공간이 형성되어 있어서, 마치 영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외국 캠프장을 찾아온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나 주변에 쌓여 있는 먼지나 거미줄 등이 벽이나 천정 같은 곳에 나풀거리는 것으로 보아 인적이 끊긴 지 최소 몇 달 정도의 시간이 흐른 듯했다.
 조심스레 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간 철민 일행을 가장 먼저 반긴 것은 꾸밈없고 튼튼하게 생긴 식탁과 주방 및 조리시설이었다.
 저택은 네 개의 방과 한 개의 거실 및 주방, 그리고 창고로 배치되어 있었다.
 “와~ 이 정도면 근사한데? 유스호스텔 정도는 되겠어.”
 “장작도 어느 정도 있고 샘물도 있는 게 우리들이 충분히 살아가면서 버틸 순 있겠어.”
 “근데 여기는 누구의 집이었을까?”
 “먼지가 가라앉고 아무 흔적도 없는 것을 보면 사람이 최소 몇 개월은 없었던 것 같아.”
 모두들 건물 내부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방 두 개에는 침대 및 가재도구가 몇 개 놓여 있었고 다른 방은 간단한 가재도구만 있었는데, 옷장처럼 생긴 벽 안에는 낡았긴 해도 여러 벌의 옷이 있었다.
 창고에는 꽤 묵은 밀과 옥수수 등의 식량과 곡괭이, 삽, 망치 같은 연장들도 들어 있었다.
 거실에는 몇 권의 서적도 있었는데, 그들이 알지 못하는 글이라 전혀 그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일단 저택의 주인이 오면 우리 사정을 얘기하고 당분간은 여기서 생활하자.”
 “이 세상에 아는 사람이나 가볼 곳도 없는데 그나마 이런 곳을 발견했다는 게 행운이지.”
 “아, 난 피곤하고 찝찝하니 목욕부터 할래.”
 “그런데 명석 형, 주인이 와서 돈을 달라고 하면 어떡하지?”
 각자 다른 말을 꺼내고 있었지만 발길은 모두 집 밖의 옹달샘으로 향했다.
 다들 전투를 치르면서 오크의 피로 몸 이곳저곳을 물들였을 뿐만 아니라 산길을 헤매면서 먼지까지 뒤집어쓴 상태였기에 행색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집안에 있던 그릇이며 옷가지를 챙긴 후에 옹달샘으로 나와 빨래와 목욕을 하고 들어와서야 철민 일행들은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주방의 식탁에 둘러앉은 그들은 과일을 꺼내먹으며 자연스럽게 회의를 했다.
 “오늘은 다들 놀랐을 거야. 오크가 나오는 걸 보면 우리는 판타지 소설 속에나 나오는 그런 세상으로 차원 이동한 것 같아.”
 “정말 판타지와 비슷한 세상이라면 오크보다 더욱 무서운 트롤,오우거 등의 몹이나 드래곤도 있을 거 아냐?”
 “내 생각에 가장 심각한 문제는, 아직까지 우리 실력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점과 이 세상에 살아가는 다른 인간들의 실력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우리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이야.”
 “정말 마법이 난무하고 검을 든 사람들이 설치는 세상이라면 이방인이나 마찬가지인 우리들은 목숨 부지도 장담하지 못할 거야. 지금 실력으로는…….”
 “난,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쯤인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이 산을 벗어나기보다 이곳에서 살아가며 차근차근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철민이 잠시 얘기를 멈추고 자신의 친구들을 차례대로 쳐다보자 다들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우리가 가져온 무공서적들과 몸 안의 내공 등을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무예실력을 키우면서 장기간의 여행을 위해 차분하게 준비하자.”
 “그래. 여기 남아 있는 식량만 가지고는 우리 네 명이 버틸 수 없으니, 생존을 위한 채집과 사냥도 해야겠지?”
 “집 안을 뒤져보면 더 많은 것이 나올 거야. 우리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없다면 우리가 직접 만들면 되고.”
 “다들 어렵고 힘들겠지만 우린 혼자가 아니라 네 명이잖아.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격려해준다면 잘 해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회의라고도 할 수 없었지만 앞으로 살아가기 위한 서로의 준비와 생각들을 나누다보니 어느새 많은 시간이 흘렀다.
 모두들 생각에 잠겼다. 차원이동을 했다고 해도 여기도 인간이 있을 테니 지구와 비슷하거나, 아니면 그 이상의 문명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 속에서 영웅 대접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했다. 한편으로는 아직도 차원이동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지구의 어디쯤일 거라는 착각도 했다.
 실로 오늘 오크하고의 전투는 그들에게 단순한 전투 이상의 의미를 가져다주었다.
 이들은 정말 어디인 줄도 모르는 곳에 정을 붙이며 살아가야 했다. 누구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니 포기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곳에 뼈를 묻을 수도 있음을 생각하며 자신들이 정말 차원 이동했음을 실감한 것이다.
 평소의 성격과는 다르게 눈까지 감으며 깊은 생각을 하던 기훈이 다른 일행들에게 소리쳤다.
 “형들~ 잠 좀 잡시다.”
 
 울창한 숲속의 널찍한 공터에 네 명의 인간들이 모였다.
 예전에는 숲이었지만 얼마 전에 나무를 베어내고 불을 지른 듯 바닥에는 아직도 까만 흔적이 남아 있었다.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네 명의 몸은 모두 허공에 1미터쯤 둥둥 떠 있는 상태였으며, 그들의 주변 바닥에는 이상한 모양의 선과 돌들이 일정한 규칙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그들은 지난 몇 개월간 숲속의 외딴 저택에 살고 있는 철민과 그의 친구들이었다. 철민 일행은 지리산에서부터 그들과 함께한 9권의 무공서적을 연구하며 무예를 연마하는 중이었다.
 9권의 책 중 무상심경은 내공에 관한 책이었다. 곳곳에는 인체의 모든 혈과 체맥, 세맥 등이 그려져 있어 내용의 이해를 돕고 있었다.
 차원이동 후 2갑자의 내공에 환골탈태까지 한 그들이라 기의 순환이 원활하게 되어 무상심경의 내용을 아주 쉽게 이해하고 배울 수 있었다.
 무상심경을 통해 단전에 축적되어 있는 기를 자신의 의지대로 사용하게 되면서 그들은 다른 8권의 무공도 익힐 수 있었다.
 무상심경의 또 다른 효능은 운기조식을 통한 기를 조금씩 축적하는 다른 내공과 달리, 폭발적인 내공의 축적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이는 빠른 내공의 성취를 위해 만들어낸 일종의 속성법이었지만 마교의 것과는 다르게 정순한 대자연의 기만 취할 수 있었다. 따라서 부작용은 없었다.
 지구의 부족한 기는 다른 것에 비해 조금 빠른 속도로 내공을 축적하는 성과만 안겨주었다. 하지만 이곳의 기는 지구와 달리 넘치고도 남았기에 철민과 친구들의 내공은 무서운 속도로 증진하고 있었다.
 운기조식을 하는 이들에게 대자연의 풍만한 기는 급속도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지만 그 속도만큼의 기는 다시 이들의 바닥에 설치되어 있는 뭔가에 의해 다시 그만큼 채워주고 있었다.
 차 한 잔이 다 식어갈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 밝은 신광이 번뜩이면서 그들의 눈이 떠지더니 허공에 둥둥 떠 있던 몸은 바닥에 가부좌 상태로 조용하게 착지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3갑자 내공이 되겠는데?”
 “단전이 더 커져야 그 이상의 내공을 받아들일 수 있는데, 단전은 왜 더 안 커지지?”
 “단전은 깨달음을 얻어야 더 커지지. 우리는 환골탈태를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단전이 확장되고 중단전이 열렸기에 4갑자까지 내공을 쌓을 수 있지만 그 이상부터는 깨달음이 있어야 가능해?”
 “철민 형, 인간의 몸에 담을 수 있는 내공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요?”
 “무상심경에 의하면 내공의 크기가 중요하다고 나와 있지만 그것은 중단전까지야. 상단전이 완전히 열리는 생사경의 경지에 들어가면 몸 안의 내공도 5갑자까지 늘어난다고 해. 그러나 그것보다는 자연에 떠도는 정기를 바로 이용할 수 있는 단계이므로 어디서든지 내공이 절대 부족하지 않는 신의 경지가 된다고 적혀 있어.”
 “그럼, 우리는 4갑자가 한계이고 깨달음을 얻어야만 상단전이 열리면서 현경 이상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소리네요.”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 않을까? 상단전이 열리지 않아도 5갑자 또는 그 이상의 내공을 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오랜 수련을 통해 단전을 키워간다면.”
 “그렇다고 해도 중단전까지 열린 사람의 5갑자와 상단전까지 열린 사람의 5갑자 내공에는 어떤 차이가 존재하지 않을까요?”
 “글쎄.”
 “그런데 여기 대륙의 사람들은 어느 정도 실력을 가지고 있을까?”
 “언젠가 나가보면 알겠지. 그 동안은 수련이나 열심히 하자고.”
 다른 8권의 서적 중 천지풍보는 하늘과 땅을 누비는 바람이란 뜻의 보법을 다루고 있었다.
 신수신법에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묘용을 살린 신법이 적혀 있었는데, 가장 상승의 신법은 ‘청룡비’로 청룡이 날아다닌다는 뜻이 붙을 정도의 속도와 시전거리가 특징이었다.
 파천무공은 장법, 각법, 지공, 투척술 등의 무공을 다룬 책으로 하늘도 깨버린다는 뜻의 파괴력이 굉장한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철민과 친구들은 기본적으로 다 알아야 할 무공들이라고 생각하여 다 같이 배우며 익혔다. 그러나 기문진식도해총서는 기문진식과 병진 편으로 갈라져 있었는데, 그 분량도 막대했고 섬세함을 요구했기에 철민과 명석만이 익혔다.
 다른 네 권은 검법을 다루고 있었다. 철민은 절대자연무형검법을 선택했으며, 호준은 옥류천검법, 명석은 뇌전검법, 기훈은 폭풍검법을 익혔다.
 지구에서 민족무예의 수련으로 검법에 대한 기본기가 잡혀 있던 이들은 금강불괴지체를 이룬 신체와 이곳 차원의 특성에 힘입어 빠른 내공의 성취와 함께 무서울 정도로 성장해갔다.
 
 주변을 온통 녹색으로 물들일 정도로 싱싱한 녹음을 자랑하던 깊은 산속의 나무도 계절의 변화에는 당할 수 없는지 서서히 울긋불긋하게 물들어가는 가을이었다.
 에팔렌 산맥의 깊은 산속에 사내들의 기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변의 산새들은 이미 익숙해져 있는 듯 그들의 우레와 같은 기합성이 터질 때마다 잠시 움찔할 뿐 별로 놀라지 않았다.
 20대 초반의 건장하고 매끈한 몸매를 가진 네 명의 사내들 주위로 아지랑이 같은 안개들이 피어올랐다.
 금색과 은색의 안개들은 사내들의 주변에서 풍겨 나오는 듯싶더니 어느새 사라졌다. 자세히 보면 사라진다기보다 네 명의 사내들이 각자 흡수하는 것처럼 보였다.
 “철민 형, 대단해요. 벌써 이기어검술을 펼칠 수 있다니…….”
 “호준이도 얼마 안 있으면 가능할 것 같은데? 그런데 기훈이, 너는 검강을 발출하여 일순간 폭발시킬 때 조금 힘든 것 같다?”
 “네. 검강을 분출해서 칼처럼 사용하는 것은 이제 익숙해졌는데 그것을 쏘아 보내는 탄자결 6장부터서는 이해가 아직 잘 안 돼요.”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몸이 이해를 못하는지 내공 운영도 조금 벅차고…….”
 “그건 기훈아, 네가 아직 제4장 화자결의 운영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철민이나 호준도 그 단계에서는 처음에 그런 모습을 보였었잖아?”
 “명석아, 내가 보기에는 기훈이가 탄자결 운영에 조금 막히는 게 내공이 부족해서 그런 것 같아.”
 “우린 모두 내공이 3갑자를 넘어섰지만 기훈은 아직 3갑자에 조금 못 미치잖아. 그것 때문에 결국 극심한 내공을 소모하는 탄자결의 운영에 있어서 차이가 나는 것 같은데?”
 “내 생각도 호준과 비슷한걸. 명석이, 네 지적이 일리는 있지만 기훈이 제4장 화자결을 펼치는 것을 보면 대단히 능숙하다고.”
 “이미 기훈이도 화자결은 11성의 경지를 넘어 12성 대성을 바라보는데…….”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내공이 3갑자를 넘어서고 검강에다 이기어검술을 펼친다니?
 그렇다! 철민과 일행들은 산속에 집을 발견하고 그곳에 정착하면서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무공을 연마했던 것이다.
 그들이 2갑자의 내공을 가지고 온 것이 몇 달 전인데, 벌써 3갑자 내공을 넘어섰다니?
 사실 평생 무공을 연마하는 무림인도 자신의 깨달음과 성취를 수제자에게 잘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의 깨달음을 토론까지 하면서 공유했으니, 어찌 무림인의 성취 속도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지리산에 시전되어 있던 대자연의 정기를 모은 진식과 비슷한 진식을 기문진식도해총서에서 발견한 철민과 명석은 삼라만상 정변 대 흡식진이라는 진식을 설치했다.
 철민과 명석이 설치한 진식은 지리산에 있던 차원이동을 보내 버릴 정도의 어마어마한 위력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자신들이 머물고 있는 산맥의 자연정기를 끌어오는 역할을 해주었다. 게다가 그들이 무상심경 수련을 통해 대자연의 정기를 뽑아 가면 그만큼의 정기를 다시 끌어 모으는 역할을 했다.
 대자연의 정기가 지구보다 수십 배나 풍부한 이곳의 기운은 불과 8개월의 시간에 불과했지만 이들 철민 일행에게 1갑자 이상의 내공 증진을 가져다주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자연의 정기를 끌어 모으고 있었다.
 현재 무공 성취가 가장 뛰어난 철민은 3갑자가 넘는 내공에 하단전 및 중단전의 완전한 개방으로 현경의 최상승 단계에 도달했으며 검강의 운영, 유지, 분출은 물론이고 이기어검술까지 펼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호준 역시 3갑자가 넘는 내공에 중단전의 개방이 급속히 이루어지고 있는 과정으로 이기어검술 직전의 단계인 현경의 상승단계에 와 있었다.
 명석 또한 3갑자의 내공과 검강을 자연스럽게 구사하며 분출 폭발하는 천일무공 제6장 탄자결까지 깨우쳐 현경의 중간 경지에 올라섰다.
 막내 기훈도 3갑자 조금 못 되는 내공에 무공 수준은 명석에게 그리 떨어지지 않는 현경의 초입 단계에 들어서 있었다.
 명실상부한 현경 반열의 4대 고수들이 있는 에팔렌 산맥이야말로 앞으로 이곳 뮤어대륙에 몰아닥칠 대격변기의 진원지임을 대륙의 그 어떤 존재도 아직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천장에 마법등이 촘촘하게 박혀 있어 대낮 같은 어느 동굴 안.
 눈부신 은발에 로브를 걸쳐 입은 노인이 차를 음미하며 티 테이블에 걸터앉아 있었다.
 간혹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게 상당히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아미리우스 님.”
 “오! 테실리안, 어서 오게. 기다리고 있었네.”
 “차 한 잔 마실 텐가? 맛과 향이 참 좋다네.”
 은발의 노인이 방금 들어온 20대 중반 정도의 붉은 머리 여인에게 차를 건넸다.
 신화 속에 나오는 여신의 몸매가 이럴까? 풍만하면서도 지나치게 크지 않은 가슴이 여인이 움직일 때마다 그 뽀얀 우윳빛 윤곽을 상당 부분 드러내고 있었으며, 잘록한 허리에 살짝 걸쳐져 있는 가죽치마와 장화는 묘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그래, 요즘은 인간 마법사로 유희를 즐기고 있다고?”
 은발노인은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인자한 표정으로 붉은 머리의 여인에게 근황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인간 마법사는 무슨 뜻일까?
 “네. 테실로 왕국 궁중 수석마법사의 6서클 마스터로 행세하고 있습니다.”
 테실리안이라 불린 여인이 대답했다.
 “그런데 어인 일로 저를 부르셨습니까?”
 “아! 차 맛이 어떤가? 향도 참 좋지?”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에팔렌에 좀 다녀왔으면 좋겠어.”
 “에팔렌 산맥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래. 이곳에는 뮤어대륙의 에팔렌처럼 마나가 풍부한 곳이 없지.”
 “저도 몇 번 가본 적이 있습니다만?”
 “얼마 전부터 이상한 마법진이 설치된 듯하네.”
 “마법진이라니, 대체 무슨?”
 “글쎄? 나도 불과 얼마 전에야 느낀 걸세. 에팔렌 산맥의 풍부한 마나가 특정한 어느 한곳으로 계속 흘러들어가고 있어.”
 “네? 거대한 산맥의 마나가 한곳으로요? 계속?”
 “음. 그렇다네. 처음에는 나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네 달 동안 한 번도 끊이지 않고 계속 흘러가더군. 특이한 것이 아침에는 급격히 빨려가고 그 외에는 서서히 빨려가고.”
 “헉! 이런 말도 안 되는… 마족의 소행입니까?”
 “글쎄… 다만 마나의 빨려 들어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어. 아마 30년 안에 에팔렌 산맥의 대부분 마나가 모일지도 모르겠어.”
 “그럴 수가? 그 정도의 마나라면 필시 마족일 것입니다.”
 “마족이 마계의 문을 열고 그리 오랫동안 중간계에 있었다면 내가 알 수 있었을 텐데, 전혀 그런 기운을 느끼지 못했으니…….”
 “제가 당장 가보겠습니다.”
 “껄껄껄. 그럴 줄 알았네.”
 “가서 마법진을 당장 폐쇄시키고 마족 놈들을 소멸시키겠습니다.”
 “아냐~ 아냐. 그 정도의 마법진이라면 마족이 본신으로 현신했거나 한둘이 아닐 수도 있어. 일단 알아보고 바로 내게 와주게나.”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놈들이 그 정도의 마법진을 에팔렌 산맥에 왜 하나만 만들어 설치한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중간계 곳곳에 그런 마법진을 새겼다면 대혼란이 일어났겠지. 보고 오기 전에는 모든 것이 추측에 불과할 뿐이니, 자네가 수고스럽지만 가봐야겠네.”
 “알겠습니다! 저 레드드래곤 테실리안, 로드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껄껄껄. 고마우이. 조심하고, 일단 조사가 주요 임무임을 잊지 말게…….”
 로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안에 빛 무리가 일렁거리는가 싶더니 어느덧 테실리안은 사라지고 없었다.
 “허허. 성격하고는… 차는 마시고 가지. 테실리안, 그 아이라면 큰 무리 없이 조사할 수 있겠지. 과연 누가 무슨 목적으로 그런 마법진을 설치했다는 말인가?”
 로드로 불린 눈앞의 노인은 1만년을 넘게 산 실버족의 고룡으로 드래곤 로드였다.
 
 “에이, 너무해요. 한 번도 안 봐주고.”
 “기훈아, 무공수련에 봐주는 게 어디 있어?”
 “난 호준 형이랑은 안할 거야. 너무 아파.”
 “푸하하하. 호준아, 좀 봐주지 그랬어?”
 “명석아, 그게 아니고 이 녀석이 갑자기 검강을 뽑아내잖아.”
 “피~ 충분히 피할 수 있으면서. 호준 형은 봐주는 게 없다니까.”
 철민은 그런 셋의 모습을 보다가 다시 눈을 감고 참선에 들어갔다.
 무상심경의 구절은 생각할수록 너무 심오했다. 그의 내공은 이미 3갑자를 넘어섰고, 무공 및 검법도 지구에 있을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진전을 이뤘지만, 요 근래에 들어와 알 수 없는 벽에 부딪히고 있는 기분이었다.
 철민은 계속 무상심경의 구절을 되풀이해서 떠올려봤지만 막히는 이유를 찾을 수 없어 답답했다.
 “형, 우리 경공 시합해요?”
 “우리가 처음 여기로 차원 이동해왔던 곳까지 갔다 오기. 어때요?”
 “자식, 내공 3갑자가 되었다고 완전히 형들을 우습게 아는데, 좋다. 하자!”
 “호준 형, 같이할 거죠?”
 “난 싫어.”
 “왜요, 또?”
 “철민이 혼자서만 열심히 무공 수련하는 꼴은 볼 수 없잖아. 나도 무공연마 좀 해야겠다.”
 “피! 두 분이서 잘해보세요.”
 “자, 오늘 내기에서 지는 사람이 미노타우르스 잡아서 소갈비를 만드는 거예요.”
 “크하하하. 오늘 기훈이 덕에 소갈비 먹겠는데.”
 명석과 기훈이 떠드는 소리가 멀어지면서 둘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화살 같은 속도로 사라졌다.
 그런데 소갈비라니? 미노타우르스가 애들 장난감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푸하하. 이번에는 질 수 없지. 형들 몰래 내가 잠도 안자고 신수신법을 얼마나 열심히 연마했는데.”
 기훈의 신형이 잠깐 보이는가 싶으면 어느새 한 점이 되어 사라졌다. 그리곤 십여 장 밖에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지면서 뒤따라오는 명석과의 거리를 점차 벌려나갔다.
 신수신법은 백호비상이라는 수법으로 백호가 먹이를 잡기 위해 덮치는, 순간의 비상처럼 신속하기 그지없었다. 나무들이 울창한 숲에 가장 잘 어울리는 신법이었다.
 “이런. 기훈이 어느새 저기까지? 그를 얕잡아봤다가는 내가 오히려 지겠는걸.”
 기훈의 신형이 어느 한 지점에 나타날 때쯤, 그의 진행 방향 앞 허공에 하얀 빛의 물결이 나타나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뭔가가 나타났다.
 퍽! 쿵!
 “아악.”
 “아이쿠!”
 백호비상을 구사하면서 뒤쳐지는 명석을 힐끔 쳐다보던 기훈은 난데없이 허공에 나타난 물체와 영문도 모른 채 충돌했다.
 충돌의 순간, 기훈이 반사적으로 내공을 운영하여 충격을 줄이기는 했지만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추락에 의한 2차 충격은 기훈이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물컹거리면서 뭔지 모를 편안함과 쿠션감이 느껴졌다.
 손 안에 잡히는 기분 좋은 물컹거림에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면서 주물럭거리며 고개를 들던 기훈은 자신 밑에 깔린 채 입만 쫘악 벌리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여인을 발견했다.
 워낙 예기치 못한 상황이었기에 기훈의 입도 동시에 쫙 벌어지고 말았다.
 사고가 정지되고 황당함이 이성을 지배하는 동안에도 기훈의 두 손은 본능적으로 물컹거리는 것을 계속 주물럭거렸다.
 짝! 짝!
 “으악!”
 눈에 불이 번쩍이고 고개가 휙휙 돌아갈 정도로 뺨을 연이어 두 대나 맞은 기훈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그는 먼저 당혹감과 왠지 모를 진한 아쉬움을 느꼈다가 뺨을 맞았다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분노감이 솟구쳤다.
 기훈은 여인 위에서 허겁지겁 일어난 후, 일단 고개를 숙이며 사과의 말을 꺼내려고 했으나 끝맺을 수 없었다.
 “죄송합… 헉!”
 이글거리는 불덩이 몇 개가 어디선가 나타나더니 그를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심상치 않는 기운에 급히 천지풍보로 위기를 피하고 다시 사과하려 했으나 이미 그쪽으로도 또 다른 불덩이 몇 개가 날아와 피해야 했다.
 “여보세요~ 고의가 아니에요. 오해입니다.”
 그는 차라리 불덩이 몇 개 맞고 말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그가 피한 불덩이가 그를 지나쳐 뒤에 있는 아름드리나무를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깨부수다시피 했기에 포기했다.
 “아가씨, 진정하시고 제 말 좀 들어보세요.”
 휙휙.
 퍼펑.
 “아가씨, 잠시만.”
 “#$##%$#.”
 명석은 그 황당한 모양을 뒤에서 처음부터 지켜보다가 기훈의 주물럭거림에 심한 안타까움과 분노, 억울함, 부러움을 맛봐야 했다. 그러다 여인의 매서운 공격을 보며 안도와 통쾌함까지 느끼면서 그 여인 곁으로 다가섰다.
 한편, 테실리안은 텔레포트 직후 난데없이 나타난 인간 사내가 자신과 충돌한 것도 모자라서 가슴을 만지고 주물럭거렸다는 데에 극심한 분노를 느꼈다.
 그러나 아무리 3서클 파이어 볼이라지만 드래곤인 그녀가 날린 파이어 볼을 쉽게 피하는 모습을 보고 눈앞의 존재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다.
 “오냐. 그래 좋다. 그럼, 이것도 피해봐라. 라이트닝 볼트!”
 “#$%#$%&@###.”
 “이런 미천한 인간이 뭐라 지껄이는 거냐?”
 “#%%%%&&*.”
 기훈은 푸르스름한 전기 다발 같은 빛 무리를 아슬아슬하게 피하면서 계속 소리쳤다
 “아가씨, 오해에요~ 미안… 해… 이크!”
 기훈이 라이트닝 볼트를 피하는 동안 테실리안 옆으로 간 명석은 짐짓 목소리를 깔더니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아가면서 말을 꺼냈다.
 “아가씨, 진정하십시오. 저 녀석이 비록 싸가지가 없지만 염치는 있는 놈입니다.”
 “@#$%%%%.”
 “이제 그만하시고 화를 푸시지요?”
 “#$%&*#####&*(*.”
 “말이 안 통하는 거 같으니 답답하네. 저, 레이디? 세뇨리따?”
 테실리안은 말 같지도 않은 이상한 소리를 내는 사내가 눈앞에 얼쩡거리자 더욱 분노하여 눈앞의 사내도 같이 날려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넌 어디서 나타난 뼈다귀야? 저리 꺼져. 콘 오브 콜드!”
 테실리안의 손에서부터 고깔 형태의 냉기가 쏟아져 나오더니 명석의 주위로 부챗살처럼 쏘아져나갔다.
 5서클 마법이지만, 인간은 주문 영창뿐 아니라 시약을 필요로 하는 고난이도 마법으로 용언마법하고는 조금 다른, 드래곤 본연의 마법이 펼쳐졌다.
 명석은 공기마저 급속하게 얼며 자신에게 쏟아져오는 지독한 냉기를 느끼며 피하기보다는 막는 것을 선택했다.
 그는 무상심경의 구결을 이용하여 자신의 주위에 호신강기를 세우더니 극음의 내공인 빙백장을 발출해 콘 오브 콜드를 소멸시켜버렸다.
 “이런, 오크 똥버러지 같은 놈. 그래, 이것도 막아봐라. 체인 라이트닝! 그리고 얍삽이 네놈은 이거나 먹어. 블래스트 파이어 볼!”
 새로 나타난 명석마저 자신의 마법을 막아내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테실리안은 6~7서클 마법을 마구 난사했다.
 “프리스 매틱 스프레이! 울트라 클라우드 킬!”
 테실리안이 구사하는 마법으로 인해 조용하던 에팔렌 산맥에는 커다란 폭음과 화염, 메케한 연기까지 피어올랐다.
 “이 여자, 완전히 막무가내잖아. 미친 거 아냐?”
 “모르겠어요? 재수가 없으려니까.”
 “피해.”
 퍼엉. 펑펑펑!
 주변은 흙더미와 불붙은 나무 조각이 떨어지며 먼지들이 뿌옇게 찼기 때문에 사물을 전혀 식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바로 전의 8서클 마법 마나미사일은 범위는 좁지만 순간 파괴력은 블레스에 버금갈 정도였다. 게다가 마법을 시전한 테실리안도 이번만큼은 자신 있었다.
 테실리안이 4서클의 컨트롤 윈드를 시전하여 먼지를 말끔히 걷어내자 앞쪽에 기훈과 명석이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 오연히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명석과 기훈은 폭발이 일어나기 전에 범위에서 벗어나 조금 방심하고 있다가 첫 폭발 이후 시차를 두고 터진 세 차례의 여폭에 급히 호신강기를 일으켜 충격을 막았다. 그러나 먼지를 피할 수는 없었다.
 “기훈아, 안 되겠다!”
 “호, 장난이 아닌데?”
 기훈과 명석은 목검을 꺼내들고 검강을 일으켰다.
 오크들에게 뺏은 많은 무기들은 그간의 수련에 다 부러지고 파괴되었다. 철민과 친구들이 내공을 조절하는 세기를 가늠하지 못해 검강을 분출하는 과정에서 무기들이 견디지 못하고 다 터져나갔던 것이다.
 결국 그들 네 명은 도끼로 찍어도 잘 들어가지 않는 강철목을 발견하고 자신의 수도로 직접 잘라내 검을 만들었다.
 목검도 여러 차례 부러지고 터져나가 수차례나 새로 만들어야 했기에 철민과 친구들의 무공 세기도 더욱 가다듬어졌으며, 수지신공이 거의 예술의 경지까지 올랐다.
 특히 명석이 미대 출신답게 목검에 각각 하나씩 특이한 문양이나 조각을 새겨주기도 했는데, 자신의 목검에는 그리스신화에 나올 듯한 나신의 여성상을 새겨 놓았으며, 기훈의 검에는 몰래 ‘차카게살자’라는 익살스런 문구까지 새겨주었다.
 그들은 싸울 의사가 전혀 없었기에 피하거나 막아내기만 했으나 조금 전 같은 공격이 이어진다면 맨손으로 막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테실리안 역시 두 인간의 주변으로 모여드는 막대한 마나의 양과 3미터 이상 솟아오른 검강에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더구나 검강은 여느 소드마스터들의 것과 다르게 마나가 몇 겹이나 중첩된 것이 느껴졌기에 긴장해야 했다.
 “크크크. 니들이 믿고 있는 게 있었구나.”
 “@#$%& @#$%6.”
 “인간!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
 “이젠 늦었다. 하찮은 인간들을 용서해주기에는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구나.”
 “#@$%&%.”
 “명석 형, 역시 말이 안 통해요.”
 “그러게 한 번만 만지지, 왜 여러 번 만져서 화나게 만들어?”
 “인간에게 궁극의 9서클 마법을 쓰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구나. 레드드래곤 테실리안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눈앞의 존재를 지워라. 헬플레임 붐!”
 “준비해. 이번 공격은 우리 두 사람의 내공을 합쳐 강기막을 형성해야 할 것 같다.”
 “아무래도.”
 강력한 마나의 회오리가 테실리안을 중심으로 휘몰아치더니 지옥의 열화 같은 불덩이가 무수히 생성되어 합쳐졌다. 그리고는 두 개의 커다란 구체를 그리면서 기훈과 명석에게 쏘아져 날아갔다.
 “무상심공 폭풍강탄막!”
 “무상심공 극빙수호막!”
 기훈과 명석은 전신 내력을 쏟아 부어 두 개의 강기막을 형성했으나, 테실리안은 그 모습을 보며 입가에 조소가 담긴 비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9서클 궁극의 마법을 막아내며 버티겠다는 인간이 무지한 것인지, 담대한 것인지 아리송해졌다. 9서클 마법은 그에 상응하는 9서클 마법으로 같이 맞받아치지 않고서는 막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테실리안은 자신이 시전한 마법의 모습을 감상하는 여유까지 부리고 있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구체가 안에서 수없이 자기폭발하며 기훈과 명석에게 다가갈 때쯤, 갑작스럽게 유성처럼 쏟아져오는 거대한 강기 덩어리가 뒤에서 날아오는 구체를 저 멀리 허공으로 날려버리더니, 테실리안의 머리 주위에서 선회하기 시작했다.
 테실리안이 강기의 덩어리를 쳐다볼 때, 또 다른 호신강기막을 형성하는 호준의 기합성과 함께 거대한 폭발음이 들렸다.
 하나는 명석과 기훈 앞에서, 하나는 허공에서…….
 허공의 구체는 이글거리는 불덩이가 터져나가면서 수없이 작은 내부 폭발을 일으켰다.
 밝은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너무도 선명한 불빛을 내던 불덩이들은 아름답게 천천히 소멸해갔다. 분수 불꽃을 수백 배 크게 터트린다면 마치 저러한 모습이리라.
 기훈과 명석 앞에서 터진 구체는 세 개의 절대호신 강기막을 뚫지 못하고 그 주변을 따라 돌며 지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갈아엎었다.
 찰나에 벌어진 일들이었지만 이 모든 것을 지켜본 테실리안은 커다란 정신적 공황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녀로서도 쉽게 어쩌지 못하는 궁극의 9서클 마법을 막아내고 무력화시키는 존재들이 있다니… 새로 나타난 두 명도 분명 인간이었다.
 “허억! 이런 일이… 하잘 것 없는 인간들이 어찌 이런 실력을 갖고 있다니… 한 명도 아니고 네 명이나…….”
 테실리안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는 다시 한 번 그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녀는 행여 마족인가 싶어 유심히 살폈지만 그들에게 어둠의 마력은 전혀 느낄 수 없는 대신 자연의 느낌만이 강하게 묻어났다.
 “당신들, 혹… 혹시 신족인가요?”
 테실리안은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말을 높이고 있었다.
 그녀에게 그 어떤 적의도 찾아볼 수 없자 철민은 이기어검술로 계속 선회하던 검을 회수하며 잡아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는 두 눈이 찢어질 정도로 부릅떴다.
 어찌 단순한 목검 따위로 그런 어마어마한 마나덩어리를 만들어내고 마나를 중첩시킬 수 있는 것인지, 더구나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만일 자신이 폴리모프를 해제하고 본신의 상태로 그들과 싸운다 해도 조금 전의 마나덩어리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위력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계속 선회할 수 있을 정도로 자유자재의 움직임이라면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수천 년을 살아오면서 레드드래곤 특유의 힘과 강함만을 추구했던 테실리안으로서는 에이션트급에 이르고 나서야 처음으로 공포를 맛보았다.
 그녀의 두 눈이 다시 한 번 앞에 있는 사람들을 천천히 응시하다가 철민 앞에서 멈췄다. 네 명의 인간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강자들이었다.
 “당신들은 정녕 인간이 맞습니까?”
 테실리안은 자신이 한낱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여겼던 인간에게 높임말을 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 당신들은 인간이 맞습니까?-
 “헉! 어디서 소리가?”
 철민은 자신의 머릿속을 울리는 음성에 놀라서 테실리안을 쳐다보았다.
 -제 물음에 답을 머릿속으로 떠올려주십시오. 말이 아닌 뜻을 읽어내는 마법입니다.-
 철민은 신기하게 생각하면서도 행여나 싶은 마음에 전음을 보내봤다.
 -네. 우리는 인간입니다.-
 -헉, 인간이라고? 이건 무슨 마법인가?-
 테실리안은 놀라서 물었지만 말투는 어느새 평대로 바뀌어 있었다.
 -전음이라는 저희들의 무공입니다. 언어가 아닌 뜻을 읽는다는 마법에 한번 시도해본 건데 의사가 전달됐으니 다행입니다.-
 -무공? 검술 같은 것을 말하는가?-
 -검술은 무공의 한 종류에 불과합니다만 그렇게 이해하셔도 상관없습니다.-
 -허~ 인간들의 검술, 아니 무공에도 이런 게 있다니 보면 볼수록 특이한 능력이구나?-
 -네… 그런데 왜 저희와 다투셨나요?-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인간. 저기 있는 인간 중에 한 명이 갑작스럽게 나와 부딪쳐서…….-
 상황을 설명하려던 테실리안은 그 이후 내용들은 차마 말로 꺼내기가 어려웠다. 아무리 드래곤이라지만 인간 여자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상태였다.
 하지만 마법의 특성상 그녀가 머리에 떠올린 것이 그대로 철민에게 전달되어버렸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슬쩍 철민을 쳐다보았다.
 -아! 그런 일이… 정말 죄송합니다. 아마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닐 겁니다. 제가 대신해서 사과드리겠습니다.-
 -아아, 아니다. 나에게도 잘못이 있다.-
 도도하고 고고한 드래곤의 입에서 인간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면 그 어떤 존재가 믿을 것인가?
 테실리안은 다시 한 번 얼굴이 빨개지면서 철민을 훔쳐보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여버렸다.
 -그런데 당신은 혹시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인가요?-
 -아~ 난 레드드래곤인 테실리안 쿤 루밀리아다, 인간이여.-
 -드… 드래곤이요? 드래곤이란 존재가 실제로 있다니… 아, 정말 판타지… 아! 실례했습니다. 정철민이라고 합니다.-
 그녀가 드래곤이란 존재를 알고 인간이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테실리안은 눈앞의 인간이 놀라는 이유가 공포에 떠는 비굴함이 아닌 드래곤이라는 존재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드래곤이란 존재를 전혀 모르는 것처럼 말하는군.-
 -드래곤이란 존재가 있지 않는 곳에서 살다가 와서 조금 놀란 것뿐입니다.-
 철민과 테실리안을 지켜보던 호준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철민에게 물어봤다.
 “철민아, 지금 뭐하는 거니?”
 “전음으로는 눈앞의 여자, 아니 드래곤과 의사전달이 가능한데?”
 “그래? 나도 해볼까?”
 “뭐, 괜찮겠지. 한번 해봐.”
 기훈과 철민이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테실리안은 눈앞의 철민을 다시 주시했다.
 그를 인간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뛰어날 정도의 용모인데다 그녀의 9서클 마법을 간단히 파훼시켜버리는 정도의 무서운 실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마나가 엄청나게 중첩되어 생성된 검강과 그 검강이 맺힌 검을 자유자재로 비행시킬 수 있는 특이한 능력 또한 눈앞에서 봤으니, 그녀가 본체로 현신한다 해도 이겨낼 수 없을 정도의 실력자가 틀림없었다.
 그녀는 끝까지 승부를 겨뤄 이겨야 하는 평소의 성격과는 달리 눈앞의 남자와는 싸우고 싶지 않았다.
 -인간? 드래곤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 했는가? 그런 것이 중간계에 있는가?-
 -우리는 이 세상의 인간이 아닙니다.-
 -드래곤, 반갑다. 나는 호준이야.-
 그때, 호준의 전음이 들려왔다.
 테실리안은 눈앞의 인간들을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를 능가하는 실력에 이 세상의 인간들이 아니라니… 혹시 그들은 신족이 아닌 ‘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레드드래곤 테실리안이다.-
 -그래? 반가워. 앞으로 싸우지 말고 잘 지내자. 보기 흉하다.-
 -…당신은 누구인가?-
 -나는 호준이라고 해. 보아하니 싸움 좀 한다고 까부는 것 같은데, 그러다 다칠지도 몰라.-
 테실리안은 호준의 건방진 말에 화가 났지만 잠시 머뭇거렸다. 분명 중간계의 인간이 아닌 이상 인간은 어디에도 살지 않는다. 더구나 인간이 이 정도로 강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눈앞에 있는 금발이 ‘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신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준의 말투는 그녀의 그런 판단을 더욱 부채질했다.
 분명 신과 신족이 강림한 것이라 판단한 테실리안이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맞아떨어졌다. 그녀의 9서클 마법도 간단하게 무력화시키는 것이 신이 아니고서야 그럴 수 있겠는가?
 -정철민 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테실리안으로 불러주세요.-
 -네. 테실리안 님, 저도 그냥 철민으로 불러주세요. 드래곤이라는 존재가 정말로 있을 줄은…….-
 -대륙의 인간들은 모두 드래곤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는데?-
 -하하하. 우리는 이 세상의 인간이 아니라니까.-
 테실리안은 호준의 말을 듣고 자신의 판단이 맞았음을 더욱 굳혀 말투를 바꿨다.
 명석과 기훈은 철민과 테실리안이 빤히 쳐다보면서 마법과 전음으로 얘기를 나누는 것을 모르기에 이상하게 생각하며 가만히 지켜만 봤다.
 특히 조금 전까지 분쟁의 원인을 야기하고 테실리안의 마법을 호되게 겪었던 그들은 테실리안의 얼굴이 순간순간 붉어지며 몸까지 배배 꼬자,
 “아주 쇼를 해라, 쇼를…….”
 “혹시 백년, 아니, 천년 묵은 여우가 아닐까?”
 “그러게요. 돼지에 늑대랑 소 닮은 몹도 있는데 구미호라고 없겠어요?”
 둘은 죽이 맞아서 테실리안을 씹어댔다.
 
 어느 정도 오해가 풀리며 네 사람만의 보금자리로 안내받은 테실리안은 기훈의 사과도 받아들이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테실리안은 특히 철민 일행이 다른 차원에서 왔다는 얘기에 깜짝 놀랐다.
 그녀가 아는 차원은 중간계, 정령계, 마계, 신계가 전부였다. 그러나 철민이 그것은 작은 뜻이고 그들은 보다 더 큰 뜻의 차원에서 왔다고 하자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른 차원이 있는 것은 알지만 중간계가 여러 개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중간계라는 것이 인간이 사는 세상을 말하는 것 같은데, 우린 여기 중간계가 아니고. 흠… 쉽게 말해 우리는 이 별의 사람이 아니고 다른 별에서 온 거예요.-
 -별이라면? 하늘에 떠 있는 별?-
 -네. 우리는 이 우주에 존재하는 무수한 별 중에 지구라는 곳에서 왔죠.-
 -별에서 왔다면 당신들은 신?-
 “아… 미치겠네.”
 사실 철민도 더 이상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도 처음 해보는 차원이동일 뿐더러 신계, 마계, 중간계, 정령계라는 구분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상식으로 아는 우주의 개념에서 볼 때 테실리안의 구별은 같은 별 내부에 있는 시공간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명하다가 지친 철민은 이 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관점에서 볼 때 자신들은 외계인이고 우주인이라고 정리했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우주인이 철민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테실리안도 드래곤이라고는 하지만 우주의 개념은 모르고 있었다.
 우주의 개념은 8,000년 이상 나이 먹는 고룡급에서나 이해할 수 있는데다, 각 일족의 수장과 드래곤 로드만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개념이었다.
 -당신들을 알기 위해서라도 전 이곳에 조금 머물러야겠군요.-
 -우리도 이 세상을 알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데 테실리안 님이 계신다니 잘됐네요.-
 -내가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있나요?-
 -이 세상에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몰라요. 대화도 당신하고 하는 것이 처음이에요.-
 -드래곤에게 그 정도는 쉬운 일이죠.-
 테실리안은 철민 일행이 가장 필요로 하는 이곳 뮤어대륙의 정보를 전달해주기 위해 지식전이 마법을 걸었다.
 그들에게 이곳의 공용어 및 기본적인 지식을 전이시킨 테실리안은 아공간을 열어 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서적 100여 권을 건네주었다.
 또 집안 곳곳을 둘러보면서 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마법(마법등 설치, 온도조절마법, 보존마법 걸린 음식을 창고에 가득 쌓아주는 등)을 세심하게 설치해주었다.
 10일 동안 그녀는 철민 일행과 같이 살며 그들의 무공에 경악도 하고, 불타오르는 승부욕에 철민과 몇 번의 대련도 하면서 그들과 많이 친해졌다.
 대련의 결과는 항상 테실리안의 완패였지만 말이다.
 
 어느 날 테실리안은 머지않은 시일 안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얘기하며 로드에게 보고하기 위해 그곳을 떠났다.
 “형들, 여긴 완전히 중세 유럽 시대에요.”
 “응, 그러게. 공작, 후작, 백작… 뭐, 그런 귀족하고 평민, 노예로 구분되어 있네.”
 “크크크. 말을 마라. 엘프에 오크까지… 여기 정말 판타지 소설 같은 데야.”
 “무슨 묘인족에 수인족 등등 다른 유사인류도 북부 산악지대에는 있데.”
 그간 테실리안이 건네준 100여 권의 책들을 보며 뮤어대륙에 대해 알아가던 그들은 많은 부분에 놀라워하며 신기해했다.
 “형들, 여기 뮤어대륙에서 우리의 실력은 어느 정도 될까요?”
 “그러게. 아마 강자 축에 들어가지 않을까?”
 “우리 정도면 소드마스터, 아니 전설상의 그랜드마스터 정도일 것 같은데.”
 기훈과 명석의 얘기를 들으며 철민이 천천히 말을 꺼내기 시작했고, 옆에 있던 호준도 주목하기 시작했다.
 “현재 이곳 뮤어대륙에는 12명의 소드마스터와 7명의 6서클 마스터 마법사가 표면상으로는 최고 강자들로 알려져 있어.”
 “2개의 제국과 1개의 신성제국에 각각 두 명의 소드마스터가 있고, 나머지 6명은 왕국에 한 명씩 있지. 13개의 왕국이 있으니까 7개의 왕국에는 소드마스터가 없다는 소리이고……”
 “6서클 마스터 마법사는 마도왕국으로 불리는 마티즈 국에 두 명 있고, 2개의 제국에 한 명씩 있으며, 다른 세 명은 왕국에 한 명씩 있는데 특이하게도 세피아 국은 왕국 중 소드마스터와 6서클 마스터 마법사가 있어 왕국 중에서는 제일 강국이지.”
 뮤어대륙의 공용어를 익히면서 테실리안이 준 책들을 한 달 정도 읽어가면서 철민 일행은 이곳 대륙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들을 습득해갔다.
 
 거대한 대륙인만큼 단 한 번도 통일되어 본 적이 없는 뮤어대륙은 현재 2개 제국과 1개 신성 제국에, 13개 왕국과 5개의 공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사회구조는 왕족, 귀족, 평민, 노예의 4계급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노예는 물론이고 평민의 생사여탈권까지 귀족들이 쥐고 있을 정도로 계급간의 격차가 심한 사회구조였다.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평민은 왕의 직접적인 통치보다는 귀족의 영지에 속해 귀족의 통치를 받는 간접 통치를 대부분 받고 있었으며, 평민들은 대부분 교육받을 기회가 없기에 문맹률이 높았다.
 신성제국은 주신 아리안을 국교로 설정한 제정일치의 국가였고, 대부분의 나라는 종교에 대한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으며, 몇 개의 왕국만 국교로 특정 종교를 정하기는 했으나 종교에 대한 선택은 자유로웠다.
 지구와는 다르게 풍부한 마나(대자연의 정기)의 영향으로 마법이라는 학문이 발달하여 마법사의 보유 숫자가 각국의 국력을 가늠하는 중요 지표 중 하나로 여겨질 정도였으며, 엘프들에 의한 정령술이라는 것도 존재했다.
 군사구조는 검을 수련하고 연마한 기사단의 숫자와 기사단의 질이 최고급 중요전력으로, 각국은 기사단을 늘리고 기사들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 국력강화에 가장 위력한 방법이었다.
 기사단은 왕국직속의 기사단과 귀족들에게 귀속된 기사단으로 나눌 수 있으며, 신성제국은 특이한 게 신성력을 바탕으로 한 신성기사단을 운영하고 있었다.
 기사들의 수준은 검을 오랫동안 써온 사람을 소드유저, 그리고 그 위로 소드익스퍼트라 해서 그 수준부터 기사의 칭호를 부여하고 있었다.
 소드익스퍼트 초급은 검기를 느낄 수 있는 단계, 중급은 검기를 운용할 수 있는 단계, 상급은 검기를 무기에 휘감는 단계, 최상급은 검기의 집결체인 검사를 품어낼 수 있는 단계로 나누고, 그 위로는 소드마스터라 해서 어느 나라에서든 귀족의 작위를 부여할 정도로 존경과 대우를 해주고 있는 실정이었다.
 소드마스터 초급은 검강을 1미터 내외로 뽑아내는 단계, 중급은 2미터 내외로 뽑아내면서 검사를 외부로 분출하여 쏘아 보낼 수 있는 단계, 상급은 검강을 3미터 내외로 뽑아내면서 검강을 1~2회 외부로 쏘아 보낼 수 있는 단계, 최상급은 보다 강력한 검강을 3미터 넘게 뽑아내면서 검강을 3~5회 외부로 쏘아 보낼 수 있는 단계로 분류하고 있었다.
 소드마스터 이상의 단계를 그랜드마스터라 지칭했는데, 그 기준은 저마다 달랐다.
 검강의 유지 시간이 길어지는 단계니, 검강을 쏘아 보낼 수 있는 횟수가 자유로운 단계니, 검강이 실린 칼을 날려 다시 받을 수 있는 단계니 하며 분류자마다 약간씩의 차이가 있었는데, 공통점은 뮤어대륙 역사상 딱 한 번 그러한 존재가 모습을 보이며 나타났다 사라졌다는 기록이 있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수준으로 유희 나온 드래곤이거나, 드래곤이 마법과 결합한 마법검이라고 아예 규정하고 그랜드마스터 급의 무위를 보인 그 기록은 아예 무시하는 게 대륙의 사정이었다.
 이곳 대륙의 분류대로라면 철민과 호준은 그랜드마스터이고 명석과 기훈은 소드마스터 최상급의 단계에 있는 것이다.
 
 
 인연의 시작, 드래곤과의 합숙
 
 “로드시여, 이제 가도 되지 않겠습니까?”
 검은머리에 어딘지 모르게 차가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20대의 준수한 청년이 아미리우스에게 말을 건넸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이계의 차원에서 왔다고는 하나, 어차피 인간… 이렇게 찾아가주는 것만으로도 영광일 텐데, 가시지요?”
 금발머리를 찰랑거리며 방금 물에서 나온 듯 촉촉함을 풍기는 여자 엘프가 말을 받으며 아미리우스를 쳐다보았다.
 “로드리시안, 그래도 나는 호기심이 일어난다네. 마법이 아닌 순수한 검술만으로 검강을 머금은 칼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이를 인간이 조종할 수 있다니…….”
 진한 은발에 신관들이나 걸칠 옷을 입은 노인이 금빛머리의 여자 엘프를 쳐다보며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테실리안도 꺾었다는 플라이 검법 말인가?”
 녹색머리에 망토마저 진한 녹색으로 껴입은 레인저 복장의 20대 청년이 자신의 롱소드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받았다. 마치 옆에 있으면 한판 대결하자고 나설 태도였다.
 “아르키메데스, 잊은 건가? 테실리안이 그에게 패배했다는 것을? 아니면 우리 레드일족의 전투력을 우습게 본다는 얘기인가?”
 검은색 로브에 붉은 머리와 붉은 눈동자를 갖고 있는 엘프 마법사가 좀 전의 레인저 사내를 쳐다보며 강렬한 안광을 번뜩거렸고, 흥분하는 엘프 마법사 옆에는 푸른 머리와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여자 엘프 마법사가 쳐다보며 자리에 앉기를 권하고 있었다.
 조금 소란한 각양각색의 6명의 엘프와 인간들을 바라보며 드래곤 로드 아미리우스는 말을 꺼냈다.
 “우리는 이곳 중간계에, 아니 헬리본성에 일찍이 한 번도 없었던 다른 차원의, 다른 우주의 존재들을 만나기 위해 가는 것이네. 다른 우주의 존재가 이곳 중간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중간계의 최종 수호자이자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주신에게 부여받은 드래곤으로서,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간다는 말이네.”
 중간계의 최종 수호자이자 중재자의 역할을 하기 위한 임무수행이라는 아미리우스의 말에 6명의 엘프와 인간들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그들, 다른 우주의 이계의 존재가 갖고 있는 힘은 비록 인간이라고는 하나,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갖고 있고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은 모르네. 우리는 이계의 방문자가 갖고 있는 의도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이곳 헬리본성 중간계의 조화와 균형을 깨트리는 존재라면 막아내야만 하네. 테실리안에게 타차원의 방문자가 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난 주신에게 여러 차례 면담을 요청했지만 나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네. 다만 대천사장을 통해 어제야 주신의 뜻만 전달받았네.”
 “로드시여, 주신의 뜻이 무엇입니까?”
 6명의 엘프와 인간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경건한 자세로 아미리우스에게 물었다. 드래곤 로드라고는 하나 그 앞에 있는 이들 6명 역시, 드래곤의 각 일족을 대표하는 수장이었다.
 평상시 같으면 이러한 자세를 보이지 않지만 지금은 신의 뜻을 전달하는 대리자의 역할을 로드가 하는 것이기에 공손한 자세를 취했던 것이다.
 “너의 뜻이 나의 뜻이니, 행하지 않고 이룰 수는 없다. 이는 태초의 맹약이 한 번도 어겨지지 않았고, 어겨지지 않음을 뜻하는 또 다른 증표니라…….”
 아미리우스가 얘기한 신의 뜻을 들은 각 수장들은 헛바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드래곤인 자신들로서도 도저히 풀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르자 아미리우스는 각 수장들을 바라보며 얘기를 꺼냈다.
 “일단 한번 가서 만나봐야 하지 않겠는가?”
 “다른 우주의 존재라고 특별한 대접입니까, 로드님.”
 “알 수 없는 신탁의 주인공들이 궁금하지 않은가?”
 “다른 우주의 존재에게 창조신의 신탁이 내릴 리가?”
 “태초의 맹약에 예언한 그 날이 다가오지 않았으면 하는데…….”
 마지막에 아미리우스가 끝을 흐린 말을 들은 각 수장들은 표정이 급격하게 얼어붙었다.
 어찌 모르겠는가? 드래곤의 각 수장과 로드에게만, 그리고 정령왕과 대천사장 이상에게만 전해지는 ‘라르망의 날’을…….
 “오! 이제 오는군.”
 로드의 레어 한쪽에서 밝은 빛 무리가 출렁거리다 사라지면서 테실리안이 텔레포트해왔다.
 “레드일족의 테실리안이 로드님과 각 수장님들을 뵙습니다.”
 테실리안이 아무리 에이션트급 드래곤이라지만 에이션트급에 오른 지 겨우 200년밖에 지나지 않았기에 로드와 각 일족의 수장에게 예의를 취했다.
 “차 한 잔 대접했으면 하지만 너무도 오래들 기다린 듯한데 바로 가는 게 어떻겠는가?”
 “네, 저는 상관없습니다. 가시지요.”
 커다란 빛 무리가 일렁거리다가 사라지며 로드와 수장들, 그리고 테실리안의 모습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에팔렌 산맥의 어느 한 지점에 아미리우스를 비롯한 각 수장들과 테실리안이 나타났다.
 “바로 저기만 돌아가면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이 나옵니다.”
 이미 이전에 방문해서 집안 곳곳에 마법까지 걸었던 테실리안이기에 이곳의 좌표는 알고 있을 텐데, 어찌하여 바로 집 안으로 텔레포트하지 않았을까?
 “아! 너무도 정순한 마나들이 저쪽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군. 이정도의 양이면 인간들이 담아내기는 어려울 텐데……”
 “역시 보통의 인간들은 아닌가봅니다.”
 “난 마나를 빨아들인다는 그 신기한 마법진도 한번 보고 싶습니다.”
 한마디씩 얘기하며 걸어가던 그들의 몇 미터 앞에 네 명의 인간이 막아서며 나타났다.
 그들이 앞을 막아설 때까지 어떤 기척도 감지해내지 못한 아미리우스와 수장들은 내심 당황했다.
 “철민, 저에요. 테실리안~”
 “아, 테실리안 왔군요. 어서 와요. 그런데 이분들은?”
 “로드님과 각 일족의 수장님들이세요. 철민과 나눌 얘기가 있어서 같이 모시고 왔어요.”
 “로드님과 수장님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 정철민이라고 합니다. 일단 저희들 집으로 들어가시지요.”
 철민 일행이 앞장서며 길을 안내했다.
 “여기부터는 저희들이 밟고 간 길로만 따라와 주십시오. 조심해야 할 진식이 펼쳐져 있어서…….”
 철민의 음성과 함께 그 일행은 속도를 줄여 아미리우스 일행이 충분히 따라올 수 있게끔 천천히 족적을 땅에 새겨가며 걸어갔다.
 아미리우스가 주변을 보니 약간 미묘한 변화가 느껴졌지만 위험함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마법결계를 펼쳐놓은 듯싶어 한편으로는 가소로움까지 느껴졌지만 굳이 그들의 성의를 무시하고 싶지 않아 그들의 족적만 밟고 따라갔다. 사실 다른 드래곤들의 속마음도 비슷했다. 어디서 보잘 것 없는 마법결계를 펼쳐놓고 드래곤의 수장인 자신들 앞에서 같잖은 행동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에 불쾌함까지 들었다.
 특히 호기심 많기로 유명한 그린드래곤의 수장 아르키메데스는 철민 일행의 건방진 행동을 응징하고 자신들이 드래곤임을 깨우쳐주고자 가운데쯤 와서 일부러 진식의 한가운데로 뛰어 들어갔다.
 아르키메데스의 그런 행동을 바라본 다른 수장의 얼굴에는 장난기 가득 실린 미소가 얼굴 만면에 피어났다. 드래곤 로드의 얼굴에도 미소가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유독 테실리안만 왠지 모를 걱정의 시선으로 아르키메데스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드래곤들은 아무도 모르리라. 철민과 호준, 명석, 기훈의 입가에도 장난기 진한 미소와 눈웃음이 생겼다가 눈 깜짝할 새 사라진 것을…….
 아르키메데스가 한 발을 떼는 순간, 그의 신형이 모두의 시선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철민 일행도, 아미리우스 일행도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냥 묵묵히 걸어갔다.
 사실 드래곤들이야 당연히 아르키메데스가 보란 듯이 마법결계를 깨고 나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몇 걸음 안가 진식은 끝났고 그때서야 철민은 기훈을 바라보면서 얘기했다.
 “기훈아, 가서 모셔와.”
 “응. 다녀올게.”
 기훈은 장난까지 치며 대수롭지 않게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아미리우스와 수장들은 진식 밖으로 나와서 뒤를 돌아보았다. 어떠한 변화도 없었고 그러한 낌새도 못 차린 그들로서는 조금 전과 다를 바 없는 주위 풍경을 보며 약간의 의아함과 노기까지 생겨나고 있었다.
 그들 수장들의 두 눈은 진식에서 사라진 아르키메데스를 쫒아갔다. 좀 전에 갑자기 사라졌던 아르키메데스의 신형이 수장들의 눈에 훤히 보였다. 물론 주변의 풍경도 훤히 보이고…….
 철민의 안내에도 불구하고 한낱 미천한 인간에게 드래곤의 위대함을 직접 몸으로 깨우쳐주고자 진식 안으로 당당히 들어간 아르키메데스는 8,000년에 가까운 그의 전 용생(?)에 걸쳐 최초이자 최대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허나 아르키메데스는 모를 것이다!
 지금 자신이 뛰어든 진식이야말로 귀신도 가둬둔다는 ‘절대불귀’의 치우 때부터 내려온 ‘항마척사봉멸진’임을…….
 일찍이 고구려의 을지문덕장군이 수나라의 30만 대군을 살수로 끌어들여 3천 명을 제외하고 다 척살했던 살수대첩에서 펼쳤던 진식이 천년도 더 지난 지금 이곳 뮤어대륙에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들의 눈앞에 빤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아르키메데스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지 빈 허공을 향해 마법을 난사하고 있었다.
 아르키메데스의 두 눈은 낭패감과 당혹감에 짙게 물들어 있었다.
 도대체 허공에 무엇이 있기에 마법을 난사하는 것인지, 그리고 어찌하여 마법이 미처 위력을 발휘하기도 전에 소멸되어 버리는 건지…….
 실상 항마척사봉멸진 역시 다른 진식과 마찬가지로 허상이었다. 그러나 허상임에도 불구하고 진에 갇힌 자가 상상하는 데미지나 물리력이 그대로 전달된다는 점과 일종의 공간왜곡으로 갇힌 자의 저항이 공간의 다른 곳으로 전이되어 가는 과정에 소멸되어 버려서, 진에 갇힌 자는 자신의 전신 내력을 다 쏟아 부으면서 허상과 싸워 지치다가 자신의 상상에 의해 쓰러져가는 무서운 진식이었다.
 이런 무시무시한 진식은 엄청난 대자연의 정기가 모인 곳과 몇 가지의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펼쳐질 수 있는 경천동지의 진식이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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