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전직 폭군의 결자해지

1화

2015.01.19 조회 52,013 추천 977


 프롤로그
 
 
 
 
 
 
 
 
 
 내가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해 줄까?
 뭐, 너무 기대는 말고.
 예전에, 한 10년 전에 중학교 2학년인 사내 녀석이 있었어. 집이 좀 잘 사는 걸 빼고는 다 평범하거나 그 이하였던 녀석이지.
 그런데 그렇게 평범하게 살던 이 녀석이 어느 날 학교 도서관에서 이상한 책을 발견해.
 옛날 책 있잖아, 요즘 책처럼 제본된 게 아니라 실로 기워서 만들어진 책 말이야.
 그 책의 제목은 한자로 적혀 있었는데, 쉽게 읽을 수 있었어.
 하늘 천(天)에 꿈 몽(夢), 천몽(天夢)이었거든.
 딱 봐도 너무 오래된 책이라, 대체 중학교 도서관에 왜 저런 게 있나 싶어 녀석은 그걸 뽑아 들었지.
 그리고 무심코 첫 장을 펼치는데······ 팍!
 갑자기 눈앞에 빛이 가득한 거야. 책에서 터져 나온 빛이었지. 그다음 녀석의 기억은 잠시 동안 끊겼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가 당황하며 일어난 게 전부야.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 책, 천몽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뭐,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그때는 책을 분실했다고 혼날까 봐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얼른 도망가는 게 전부였지.
 후후, 중2짜리한테 뭘 더 바라.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은 그때부터야.
 그날 밤 꿈을 꾼 거지.
 어떤 꿈이냐면 꿈속에서 녀석이 어느 초원 유목 부족 부족장의 장남이 된 거야.
 꿈이구나 싶었지만, 그래도 깨지 않았어.
 뭐 그러려니 했지. 녀석도 자각몽이라는 말 정도는 알고 있었을 때였으니까.
 그런데 이상한 건 꿈이 정말 생생해. 마치 진짜 살아 있는 느낌인 거야.
 게다가 너무 자세하기도 하고.
 꿈에서 깬 다음에도 희한하다 싶었지만, 역시나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 생생한 꿈 정도는 누구나 한 번쯤 꿔 보잖아.
 게다가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이상한 꿈을 꾸진 않아서 완전히 잊고 있었지.
 그런데 정확히 일주일이 지난 날 밤에 또 꿈을 꾸는 거야. 또다시 부족장의 장남이 된 거지.
 그것만으로도 신기한데, 심지어 지난번 꿈꾼 다음부터 이어서 꾸는 거야.
 그렇게 두 번째 꿈을 꿨고, 일주일마다 꿈은 이어졌어. 무려 4년 가까이.
 고등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는 시기까지 말이지.
 그 4년 동안 녀석은 초원 유목부족의 장남으로 5년으로 살았고, 부족장으로 25년 정도를 더 살았어. 30년 정도 또 다른 인생을 꿈꾼 거지.
 응? 진부한 소재라고? 또 하나의 현생을 사는 이야기 는 많다고? 맞아. 그렇긴 하지. 그래도 일단 좀 더 들어 보라고.
 30년 동안 이 녀석이 한 일을 대충 추려 보자면 부족장의 장남에다가 자신을 신의 현현이라고 받들어 주는 부족 주술사의 지지 덕분에 잘 먹고 잘 살다가 부족장 자리를 이어받고 나서 초원을 휩쓸었어.
 뭐, 녀석이 앞장서서 휩쓴 건 아니고, 손가락질을 했다는 거지.
 저 부족이 눈에 성가시다 박살 내자. 저 부족 족장 딸이 예쁘다 데려와라. 저 부족이 키우는 말이 탐난다 빼앗자.
 원래 그 녀석의 부족은 상당한 대부족이었고 전사들도 출중한 덕에 그렇게 손가락질하며 명령을 내리는 것만으로도 초원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어.
 그러다 어느 날 이런 생각을 한 거야.
 초원이 다른 건 참 좋은데, 겨울에 너무 추워. 그러고 보니, 여름에도 황량하고.
 그런 단순한 이유로 녀석은 부족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해.
 평소 가지 않던 남쪽까지 내려오니 듣도 보도 못한 부족과도 만났지. 싸울 때도 있었고, 아닐 때도 있었지만, 싸우면 이겼어. 앞에서 말했지만 녀석의 전사들은 출중했거든.
 더 내려가다 보니, 슬슬 밭농사를 하는 사람들이 보여. 그래. 정주사회, 농경사회의 영역에 들어간 거지. 뭐, 그래도 상관있나? 방해하면 싸우고, 눈 깔고 있으면 봐주고, 탐나는 게 있으면 빼앗았지.
 그러다가 녀석은 처음으로 그가 꿈꾸는 세상이 역사의 과거 어느 시점이라는 걸 깨달았어.
 어떻게?
 하늘 맑은 어느 날에 남쪽 먼 곳에 솟아 있는 백두산을 발견한 거지.
 하하하, 뭐가 유치해? 진짜 백두산을 봤다는데.
 아무리 봐도 백두산이더래. 그래서 어떻게 했겠어?
 녀석은 당시 아직 중학생이었어. 그냥 더 내려가면 한반도가 있겠구나 싶었던 거지.
 그래서 더 내려갔어. 어차피 뚜렷한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유람하는 기분이었던 거지.
 방향은 남쪽, 가급적 평야 지대를 통해. 딱 그 기준으로 계속 내려갔어. 그러니 슬슬 만나는 마을이 점점 커지더래.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제법 무장을 갖춘 군대들이 앞을 막아.
 심지어 한 번은 그의 전사들보다 몇 배는 많은 군대가 갑옷에 무기와 방패를 들고 공격하기도 했어.
 좀 긴장했겠지. 그런데 웃긴 건 부족의 전사들이 이겨, 막 이겨.
 비슷한 수일 때는 우리 전사들이 참 잘 싸우네, 그러고 말았는데, 몇 배나 많은 수의 군대마저 이기니 좀 이상해서 조사를 해 봤대.
 물론 시켰겠지, 물어봤거나.
 그래서 알아보니, 그 적들의 무장이 죄다 청동기였던 거야. 청동 알지? 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 이렇게 흘러가잖아.
 녀석은 처음 부족의 장남으로 꿈을 꿀 때부터 철기 무기를 봐 왔던 터라, 그리고 부족에 철을 다루는 대장장이도 있던 터라 당연히 모두 철기를 다룰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지.
 물론, 청동으로 만든 무기라고 해서 약한 건 아니야. 철기 무기라고 해서 요즘같이 세련되게 제련된 것도 아니고.
 그 녀석도 나중에 알았지만, 본래 초기 철기는 청동기보다 오히려 약했다고 하더라고. 근데 그 부족 철기는 아니었어. 왜냐고? 몰라. 아마 부족 대장장이들이 탄소 처리를 잘했든지, 주로 쓰는 철광석에 뭔가 섞여 있어서 일종의 강화 합금이 되었든지 했겠지.
 어쨌든 그 부족 전사들의 철제 무기가 최강인 게 증명된 거야.
 자, 이제 녀석에게 거리낄 게 있겠어?
 그래, 전혀 없지.
 녀석은 그야말로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지. 남쪽으로 가면서 만나는 거의 모든 마을은 모조리 공격했어.
 재물을 약탈하고, 젊은이들을 노예로 끌고 가고, 예쁜 여자는 뭐······.
 응?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현대인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아니지. 녀석은 지금 꿈을 꾸는 중인 거야. 꿈속에서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죄책감이 들겠어?
 좀 생생하긴 했지만, 그냥······ 음, 그래, 게임, 가상현실 게임이라는 걸 하고 있다고 생각한 거지. 아직 그런 건 나오진 않았지만.
 어쨌든 그렇게 약탈과 파괴를 일삼으며 계속 남쪽으로, 따뜻하다 못해 더워 죽겠다 싶을 때까지 내려가니까,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었어. 어느 쪽으로 돌아가려 해도 바다에 막힌 거지.
 그쯤에서 그만 자리 잡고 살 곳을 찾으려는데, 주술사가 점괘가 가리키는 곳이 있다고 하는 거야.
 뭐, 신의 현현이라며 자길 지지해 준 고마운 사람인데, 아무리 헛소리 같은 점괘라고 해도 따라 줘야지.
 그래서 그 점괘대로 동북쪽으로 올라갔어. 숲도 지나고 산도 좀 넘고 계곡을 따라가다 보니까, 어느 순간 작은 평야 지대가 나왔지. 그리고 그곳에 그의 부족이 자리를 잡았어.
 자리를 잡았다고 해서 하던 일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어. 주변에 있는 마을이나 세력을 약탈하고, 그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고, 주변이 정리되면 전사들을 더 멀리까지 보내서 또 약탈하고.
 노예를 부려 궁궐도 만들고, 농사도 시켰어.
 궁의 창고에는 쌀과 옷감이 가득했고, 궐 안 곳곳에 보물들이 놓여 있었어.
 캬아, 아내가 셋에 첩이 넷. 삼처사첩을 이루고도 모자라 궁녀도 한 백 명쯤 더 모았어. 하나같이 미녀들뿐이었지.
 하하, 당연하지. 십 대 사내 녀석이잖아. 밤마다 꿈에서 불타올랐지. 어차피 꿈이잖아.
 그렇게 그곳에서 15년 정도 왕처럼, 아직 왕이라 불릴 시기는 아니었지만, 하여튼 그렇게 군림하다가 죽었지. 아주 행복하게.
 아, 뭐, 위기가 없었던 건 아니야. 처음 내려올 때만 해도 주변은 다 청동기 문명이었고, 녀석의 부족만 철기였는데, 어느 순간 철기가 다 퍼져 나갔어.
 그렇게 좋은 무기로 힘을 키운 주변 세력들이 복수랍시고 한꺼번에 쳐들어오기도 했지.
 다행히 이기긴 했지만, 좀 피해가 컸지.
 하지만 녀석은 현대인이잖아. 게다가 꿈에서 깨고 다음 꿈을 꾸기 전까지 거의 일주일의 시간이 있었으니, 나름대로 대응책을 꾸릴 수 있었지.
 녀석의 전사는 대부분 기마 전사였으니까, 안장에 등자도 달아 줬고, 전마에 편자도 박아 줬지.
 그것만으로도 한참 동안 괜찮았지. 그다음에는 기마 부대만으로는 안 되겠다 싶어, 노예들로 방패 부대를 만들기도 했어.
 그 방법도 나름 괜찮았어. 구식이긴 하지만 망치와 모루 전법을 구현했으니까.
 그러다가 단지 군사력만 키운다고 다 해결될 건 같지 않아서, 종교도 조직화해서 신의 대리자로서 자길 신앙화했고, 약탈 대신 정기적인 조세를 뜯기 위해 행정관들도 뽑아서 보내기도 했어.
 아, 약도 몇 개 만들었어. 소독약 같은 거 말이지. 널리 쓰게 만든 건 아니고, 앞서 말했지만, 신의 대리자처럼 보이려고 독점한 거지. 하하.
 그렇게 조금씩 바꿨어. 그저 TV나 인터넷에서 보고 들은, 거기에 약간의 검색을 통해서 얻은 지식으로 가능했던 일이야.
 물론, 녀석은 지식만 던져 주고 실천하는 건 아랫것들을 시켰지.
 나중에 말년에 우연히 전사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러더래.
 게으르고 방탕하나, 호방하여 수하를 아끼고, 똑똑하여 말을 살찌우니, 따르기에 차고 넘친다.
 하하, 뭐, 그 정도 평가면 되잖아?
 그렇게 꿈속의 삶을 평온한 죽음으로 마치고, 드디어 이어지던 꿈이 끝났어.
 그리고 마지막 꿈에서 깨어난 그날, 녀석은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지.
 깨어나자마자 극심한 두통을 겪은 뒤 정신을 차려 보니 역사가 원래 자신이 알던 것과 비교해 봤을 때, 엄청나게 바뀐 거야.
 원래 고려, 백제, 가야······ 뭐, 그때는 가락으로 더 많이 불리긴 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된 삼국시대에 가야 대신 신라가 자리를 잡은 거지.
 게다가 통일도 고려가 아니라 신라가 했고. 아, 여기서 고려는 고구려를 의미해.
 지금 알고 있는 고려는 없었어. 물론 조선도 없었고, 일제 식민지 시대나 남북 분단도 없었지.
 중간중간 나름 부침을 겪긴 했지만, 고구려가 그러니까, 고려가 2천 년 동안 쭉 현대까지 이어졌거든.
 그런데 그런 역사가 바뀐 거야.
 더 억울한 건 뭔지 알아? 녀석의 집안 사정도 바뀌었다는 거야. 원래 녀석은 평양에 살던 부잣집의 아들이었는데, 이제 서울의 서민 가정의 아들이 된 거야.
 녀석은 땅을 치고 후회했지. 힘들게 일하는 부모님을 보며 죄책감을 가지기도 했고.
 또 하늘을 원망하기도 했어. 솔직히 그럴 만하잖아. 그저 꿈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끔찍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걸 알려 주지도 않고, 남의 운명을 바꾸는 게 어디 있냐 이 말이야.
 녀석은 다시 그 이상한 책, 천몽을 찾아 헤매기도 하고, 실의에 빠져 좌절하기도 했지.
 하지만, 그것도 얼마간이었고, 슬슬 적응했어.
 부모님이 힘든 만큼 등록금이 조금이라도 싼 국립대에 합격하거나 장학금을 받으려고 공부도 열심히 했고, 비록 꿈속이었지만 30년 동안 산 인생 경험이 있었으니, 철이 들기도 한 거야.
 
 “잠깐, 형! 지금 그게 형이었다는 말이에요? 에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디 있어요?”
 3학번 아래 남자 후배가 피식거렸다.
 “그래도 나름 들어 줄 만했어요. 이야기를 몇 년 전에 있었던 두통 신드롬 사태랑 연결한 것도 꽤 참신했고요. 호호. 근데 오빠 소설가 지망생이었어요?”
 똑같이 3학번 아래 여후배의 평이었다.
 그녀가 말한 두통 신드롬 사태란 6년 전, 전 세계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이 동시에 크고 작은 두통을 경험한 사건을 의미했다.
 특히 아시아인들, 그중에서도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두통을 경험했었다. 어째서 그런 동시다발적으로 두통이 일어난 건지 아직도 밝혀진 건 없었다. 물론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지만.
 어쨌든 복학 후에 알게 된 몇몇 후배들과 가진 술자리에서 넋두리를 길게 한 것치곤 평이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고 후배들이 아주 좋아한 건 또 아니지만 말이다.
 녀석들은 그래도 이야기가 재밌었다고 날 위로하며 웃었다.
 나도 마주 웃었다.
 씁쓸했다.

댓글(60)

DarkCully    
호오~즐겁게 읽고 갑니다. 기대 기대
2015.02.01 02:04
musado0105    
잘 보고 갑니다. 건 필하세요^^*
2015.02.10 16:22
북마스터    
아나 이나라가 개판된게 주인공 때문이여 너 일롸 임마!!!
2015.02.12 21:25
별감    
왠지 신라흉노설을 염두해 두고 쓰신듯..^^잼나게 보겠습니당~
2015.02.18 03:59
제국의황제    
잘보고 갑니다^^
2015.02.24 20:02
LunStellar    
주인공이 죽일놈이었네요? 저놈을 쉽게죽이면 안될듯ㅡㅡ
2015.03.02 16:22
클라우드스    
이 스무스한 필력! 오랜만에 느껴보는 소설같은 소설입니다. 잘 보겠습니다!!
2015.03.07 23:28
진리의근원    
철기로 청동기 안 뿌셔집니다. 사실 철로 그 무른 순금으로 된 금괴도 못 잘라요. 안 믿긴다고요? 청동은 없지만 황동은 많이 있죠? 주석잔. 그 주석잔을 텅스텐 코팅된 최신식 식칼로 잘라보셔요. 자르시면 당신은 소드마스터! 철기가 청동기를 이기는 것은 철이 청동을 자르만큼 강도가 강해서가 아니라 구리가 철보다 훨씬 귀해서 입니다. 즉 청동기 시대는 영웅시대입니다. 청동기 칼 청동기 갑옷을 입은 귀족과 개가죽과 당나귀 대퇴골을 든 평민들이 부대를 이루는 청동기 시대는 평민도 철기칼을 든 철기 시대에 그 자리를 내주게 됩니다. 고등학교 때 배웠죠? 청동기 시대는 간석기 시대와 겹친다는 것. 이게 다 구리가 귀해서 그런 겁니다. 말이 길었는데 여하튼 철검으로 청동검 못 자릅니다. 안 믿기면 직접해보셔요.
2015.03.08 00:13
은금    
하하.. 소드마스터 센스 있네요.
2015.03.09 13:46
성불예정    
재미있게 읽었으나 청동기시대에는 윗 분 말씀대로 동이 구해서 무기나 농기구화 시키지는 일이 드물었습니다. 본격적인 금속무장은 철기시대 부터 입니다.
2015.03.11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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