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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불멸의 계승자들

1화 벗

2022.01.28 | 조회 2,320 | 추천 36


 충무공(忠武公)이순신(李舜臣)에게는 세상을 등지고 도(道)를 닦던 절친한 벗이 있었다. 그들이 만난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회자되다 성대중(成大中, 1732~1812)에 의해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남았다.
 
 *
 
  2031년, 히말라야 산맥이 연한 네팔의 고산지대에는 몇몇 이방인들이 살았다. 네팔의 원주민 셰르파(Sherpa)족이 사는 곳보다 훨씬 높은 위치였다. 이방인들의 거주는 아주 오래됐고 일대의 원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때를 따라 곡식을 들고 산을 오르거나 네팔의 전통적 식재료 덜까리, 어짜르, 짜트니를 날라다주는 원주민들은 종종 있어왔다. 그 대가로 신비로운 이방인들은 석청과 작은 목각 조형물, 산양의 턱부터 배까지 이르는 최고급 털을 준비해 바꿔줬다.
  네팔 원주민들은 그 거래에 늘 만족해했다. ‘이렇게 많이 주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라는 말에 ‘외지인들을 품어준 관대함에 감사를 표할뿐입니다.’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 결과 이방인 거주지 일대의 많은 원주민들은 곡식과 다양한 식재료를 들고 산을 올랐고 훨씬 풍성한 소득을 품고 산을 내려갔다. 그런 불평등한 거래는 수십 년이나 계속됐고 이제 그들을 경원시하거나 외지인들로 보는 시각은 완전히 사라졌다.
  신비로운 이방인들의 이로움은 일대를 부요하게 하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간혹 해결이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면 원주민들은 산을 올라 부탁했고 이방인들은 결정적 도움을 주곤 했다.
  누군가 높은 산을 오르다 길을 잃어도, 히말라야 늑대나 표범이 출몰해도 이방인들이 해결해줬다. 아이를 잃어버려도 노인이 아파도 주민들은 산을 올랐고 이방인들은 기꺼이 도움을 줘왔다.
  ‘사람이 저렇게 빠를 수가 있어?’
  ‘표범보다 빨라. 그뿐인가? 힘은 또 얼마나 센지 다들 봤지? 바위 들어 올려서 다리가 깔린 애 구해줬을 때 말이야.’
  ‘곰보다도 힘이 센 거 같아. 체구가 그리 큰 편도 아닌데 말이야.’
  이방인들의 괴력과 날램은 산지의 원주민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다. 간혹 더 신비로운 말을 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눈보라치는 산 어디에 사람이 쓰러져 있는지 어떻게 그렇게 쉽게 찾지? 눈에 파묻혀 있었다던데.’
  ‘사람뿐인가? 죽을 지경으로 힘들어 산에 버려두고 온 가방까지 찾아다줬잖아. 위험하다고 그렇게 말려도 귀한 재산이라면서 가져다줬다고.’
  ‘우리 옆집 애는 바위틈에 빠져서 거반 죽어가다가 그분들이 찾아줬었어. 그것도 아주 간단하게 말이야.’
  여기서 한층 더 놀라운 말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우리 삼촌이 숨넘어가실 때가 기억나네. 그분들이 내려오셔서 살려주셨는데, 지금 삼촌은 뛰어다니셔.’
  ‘따뜻한 물하고 알약으로 말이지?’
  ‘자네도 들었겠지만 그걸 줄 때는 꼭 내려와서 아픈 사람들 손을 잡고 참선하는 자세로 한참을 있잖아. 우리가 약만 주셔도 된다고 해도 꼭 직접 내려오신단 말이야.’
  이방인들은 원주민들에게 경탄(驚歎)과 존경의 대상이면서도 늘 겸손했고 검약했다. 도움을 받은 원주민들이 각양각색의 사례를 하려해도 받지 않았고 항상 차만 한 잔 대접받고 올라갔다. 그들은 히말라야의 성자(聖者)였으며 원주민들의 추앙을 받았다.
  당연하게도 원주민들은 그들에 대한 비밀을 지켰다. 부탁을 받은 적이 없었음에도 말이다. 히말라야 일대의 보석인 그들을 외부에 드러낼 이유는 일절 없었다. 그들은 원주민들의 보호자였고 구조대였으며 경찰이었다.
  때로 무장한 밀수꾼들이 마을을 지나면서 폐를 끼치는 일도 있었다. 그때도 원주민들은 산을 올랐고 다시는 불미스러운 일이 반복되지 않았다.
  보석이 집에 있다고 떠드는 사람이 없음처럼 이방인들의 거주지는 그렇게 고산지대의 신비로운 성역(聖域)이 되어있었다. 그 결과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 가던 등반가들은 원주민들에 의해 항상 다른 길로 안내를 받곤 했다.
 
 *
 
  원주민들의 존경을 받는 이방인들의 거주지는 고산지대에서 흔치않은 너른 분지(盆地)였다.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는 깎아지른 절벽이 있었다. 절벽의 높이는 500m에 달했고 그 중간에는 평범한 인간들의 접근을 불허하는 위치에 큰 동굴이 있었다.
  동굴 안에는 간단한 가재도구가 있었다. 오래돼 보이는 서책들도 있었고 네팔과 동양의 전통 악기들도 보였다. 붓과 벼루는 돗자리 위에 펼쳐진 작은 상 위에 있었고 두 개의 찻잔도 함께 보였다. 동굴의 깊은 곳에서 흘러나와 물이 고이는 작은 샘은 소담스러웠고 층이 나눠져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시대에 뒤떨어져보였지만 과학기술의 편리를 추구하는 현대인들은 모르는 편안함이 그 안에 있었다.
  “그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진심이었다.”
  동굴의 깊은 자리에서 울려 퍼지는 웅혼한 소리였다. 청야(淸夜)성은기의 스승 유염(濡染)은 기일(忌日)만 돌아오면 일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친구를 그리워했다. 제자는 언제나처럼 기일에 맞춰 찾아왔고 스승의 추억을 듣고 있었다.
  “진심으로 흉적을 쳐부쉈고 죄인들을 처벌했고 도망자를 죽였으며 백성을 지켰고 군사들을 먹였다. 그에게 있어 충(忠)은 효(孝)였고 일가와 가솔(家率), 수하를 향한 인애(仁愛)였다.”
  제자 역시 진심으로 동의했다. 스승이 물었다.
  “그가 죽을 때까지 손에서 놓지 못하던 충(忠)에 대해 어찌 생각하느냐.”
  제자는 깊이 생각하다 짧게 답했다.
  “당대에 처한 공(公)의 현실에서 최선이자 대의(大義)였다고 봅니다.”
  “어찌 그리 생각하느냐. 그는 조선을 뒤엎을 힘이 있었다.”
  “공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습니다. 임금에게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은 당대의 신하된 자들 모두에게 있었을 겁니다. 물론 공께서도 오래도록 각오하셨을 겁니다.”
  “그렇게 허망하게 죽을 일이냐.”
  스승은 몰라 물음이 아니었다. 제자는 곡진(曲盡)히 답했다.
  “충을 버려 정변(政變)을 벌일 수 없었음은 일기(日記)로 드러납니다. 사직의 신령에 기대셨다 말씀하셨고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분에 넘친다는 표현도 그러합니다. 다른 날 일기에 드러나기로는 수많은 백성과 수하의 죽음을 마주한 장수로서 흉적을 죽여 원수를 갚을 생각만 가득하셨습니다. 다른 걸 생각할 그 어떤 여유도 없었음이 분명합니다.”
  제자의 충무공에 대한 이해는 깊었고 스승은 그걸 기특하게 생각했다.
  “그는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었다. 완벽한 인간의 전형(典型)이며 따뜻한 사람이었지.”
  스승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라는 말에 제자는 동의하기 어려웠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
  은기의 스승은 갑자기 말을 멈췄고 동굴 밖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산세와 하늘을 쳐다봤다. 임진년부터 무술년까지 조선의 강토는 피로 물들었지만 하늘만은 파랬고 깨끗했었다. 나이와 신분을 떠나 충무공과 스승은 친구였고 한반도의 남쪽 바다에서 히말라야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의 세월동안 이어져있었다. 기나긴 삶의 대부분을 산에서 은거하던 스승은 제자에게 말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왜! 그리해야 하냐고.”
  “······.”
  “그는 나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저 죽으려 했고 또 죽으려 했고 그렇게 죽었다.”
  어머니와 아들, 수하들의 죽음을 짊어진 위대한 장수는 진정으로 죽음을 원했다. 필사(必死)는 충무공 이순신에게 생의 법칙이었다.
  “스승님. 공께서는 죽지 않으시고 이렇게 스승님의 가슴에 살아계시지 않습니까.”
  제자의 위로였다.
  벗의 부음(訃音)을 듣던 날, 가슴을 치고 이마를 흙에 짓찧으며 통곡하던 유염은 아직도 살아 있었다.
  “청아.”
  “네! 스승님.”
  “너도 그를 닮았다.”
  “과찬이십니다. 설령 그렇게 여기셨다해도 모두 스승님께 배운 바일뿐입니다.”
  100년이 넘도록 그들은 사제지간이었다. 그때 히말라야 고산지대의 차가운 바람이 동굴 안으로 불어왔다. 그럼에도 네팔의 일상복 타 팔란과 수루와만 입은 그들은 추운기색이 전혀 없었다. 잠시 침묵하던 시간이 흐르고 제자가 그의 스승에게 여쭸다.
  “차를 더 드시겠습니까.”
  “그래.”
  성은기가 고개를 돌려 오른쪽을 보자 작은 화로가 보였다. 잔가지들의 잔불이 남아 온기를 품은 차 주전자가 거기 있었다.
  둥실!
  은기가 손을 뻗자 저절로 허공에 떠오른 주전자가 천천히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
  쪼르륵!
  주전자를 손으로 받아 스승의 잔에 공손히 채워주는 제자는 고요하면서도 단정했다. 안정감을 주는 그 태도는 보석처럼 아름답고 찬란하기까지 했다. 평생의 노력으로 이뤄낸 광휘로운 도력(道力)과 경지는 은은한 불빛처럼 빛났다.
  다시 차 주전자를 모닥불로 보낸 은기는 스승이 또 벗을 추억할까 기다렸지만 아무 말이 없었다. 침묵의 시간은 꽤 길었지만 그들은 느낌을 공유했고 존재로서만 대화하며 잠잠히 있었다. 가끔 불청객들인 고산독수리나 매가 날아오기도 했지만 성은기가 손바닥으로 일으키는 부드러운 바람에 밀려 허공으로 쫓겨나기도 했다.
  푸드덕!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 화가 난 히말라야 그리폰(고산독수리) 한 마리가 연신 날개 짓을 했지만 결국 지쳐서 나가떨어지며 끼에엑 거렸다.
  긴 시간 스승의 침묵을 경청하던 제자가 문득 청했다.
  “스승님. 옛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성은기는 스승에게서 나오는 옛이야기를 오래도록 들어왔다. 불분명한 기록으로 남은 역사가 아닌 당대를 살아왔던 목격자의 증언이었다. 어떤 이야기는 들었지만 또 듣고 싶었고 다른 이야기는 더 상세함을 필요로 했다.
  “무엇을 듣고 싶으냐.”
  “사백님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어찌 그 일이 듣고 싶은 게냐.”
  “더 세세히 알고 싶습니다. 제가 모르던 사형제들이 세상에 나온 것 같아서 말입니다.”
  유염은 제자의 입에서 ‘모르던 사형제’라는 표현이 나오자 웅장하기만 하던 평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근자(近者)에 들리는 전쟁과 소란에 대한 소식 때문이기도 했다. 중국과 일본의 전쟁이 임박했고 대한민국은 중간에 낀 신세였다. 미국의 내부적 붕괴가 가져온 세계사의 지형변화는 피할 수 없는 일이 돼버렸다. 이 시국에 모습을 드러낸 기이한 이들이 있었으니 은기의 물음은 당연했다.
  “모두 내 잘못이었다. 나의 스승이자 너의 사조(師祖)의 명을 온전히 따르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다.”
  유염은 입을 열어 서기 1598년 봄에 일어난 일을 들려줬다.
 
 *
 
  무술(戊戌)년 봄, 유염은 충청도에서 고령의 양친을 모시고 있었다. 그러다 집으로 찾아온 스승의 명을 듣고 양친을 부탁한 채 일본으로 향했다. 임진년에 시작한 전쟁은 정유재란으로 이어졌고 왜군은 여전히 조선 땅에 있었다.
  유염은 배를 타기 전 마음을 나누던 벗을 오랜만에 만나려고 고금도(古今島)의 통제영(統制營)을 찾았다. 두 사람은 술과 피리와 거문고를 즐기며 서로의 마음을 위로했다.
  ‘그대가 그렇게 어려운 길을 가는데 이런 부탁을 할 수밖에 없는 나를 용서하게.’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부탁에 유염 역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자네 어머니의 부음도 미처 듣지 못하고 자네 아들의 부음도 듣지 못한 나를 용서하게. 왜 나를 청하지 않았는가.’
  ‘자네도 늙으신 양친을 모시고 있으니 어찌 청하겠는가.’
  ‘미안하네. 자네의 부탁은 우리 스승의 뜻이기도 하니 일은 필히 완수될 걸세.’
  서로가 서로에게 용서를 구하는 벗들은 진실로 서로를 위로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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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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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릉다라님 건필 하세요~입금 완료 S급 용병의 여운이 아직도 가시지 않습니다. 내심 시즌2가 발행 되길 바랬는데, 제 바램은 바램으로 끝났네요~ㅎㅎ 기회 된다면 다시 밀리터리 작품을 보고 싶어요~
2022.02.03 14:23
부릉다라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2022.02.05 19:55
할젠    
작가님 신작알림 쪽지 보고 왔습니다. 기대되네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입금완료 S급 용병'의 후일담, 또는 짧게나마 외전 희망합니다!
2022.02.05 19:28
부릉다라    
고려해보겠습니다. 찾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022.02.05 19:56
그리워하면    
쪽지보고 왔습니다~ 건필하시길
2022.02.06 01:03
부릉다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_ _)
2022.02.06 12:31
if..    
작가님 오랜만이네요 ㅎㅎㅎㅎ 이번작도 기대하겠습니다^^
2022.02.07 00:21
l천l    
오~오~~~ 기대합니다~~~!
2022.02.14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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