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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1권-1

2015.01.27 조회 1,806 추천 13


 * 나는 살수다 *
 
 나는 살수다. 나는 부모의 얼굴을 모른다. 내가 세상에 대해 눈을 떴을 때. 내 주위에 있는 것은 온통 검은 암흑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인가를 죽여야 손에 쥘 수 있는 먹을 것이었다. 그리고 암흑 속에서 울리는 음성이 전부였다. 나는 기억하는 것이 없다. 그저 본능대로 죽이고 먹고 자고 할 뿐이다. 내가 살수라는 것을 인지 한 것은 내가 암흑의 공간을 빠져나온 후였다. 벌써 십년도 지난 일이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가리켜 존재하지 않는 달. 십삼 월이라 불렀다.
 
 무정 십삼 월-!!
 
 그것이 내 이름이다. 세상은 나를 일러 살수를 죽이는 살수라고 불렀다. 그리고 나에게는 열두 명의 적이 있다. 그들에 관해 내가 아는 것은 그들이 십이월이라 불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적이라는 것이다.
 
 일월 - 목월(睦月)
 이월 - 여월(如月)
 삼월 - 앵월(櫻月)
 사월 - 맹하(孟夏)
 오월 - 포월(蒲月)
 육월 - 차월(且月)
 칠월 - 상월(相月)
 팔월 - 엽월(葉月)
 구월 - 현월(玄月)
 십월 - 해월(亥月)
 십일월 - 중동(仲冬)
 십이월 - 가평월(嘉平月)
 
 십이 살수. 십이월. 내가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은 이것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죽여야 한다. 나를 창조한 이들이 나에게 그들 십이 명을 죽이면 자유를 주겠다고 했다. 나에게 선택이란 애초부터 없었다. 나에게 주어진 것은 죽이거나 죽거나 하는 것이다. 나는 무정한, 존재하지 않는 열세 번째 달.
 
 무정 십삼 월이다.
 
 @
 
 십이 년 전.
 한 어두운 공간이었다. 그 공간은 대략 둥근 우물 같은 모습이었다. 둥근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미끄럽고 손에 잡을 것이 없는 둥근 원형의 암흑. 그곳에 다섯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이었다.
 "잘 들어라. 이제 곧 굶주린 들개를 풀 것이다. 모두 다섯 마리다. 그 다섯 마리를 죽이고 먹어라. 앞으로 열흘간 일체의 음식은 없다."
 위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렸다. 아이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주춤 뒤로 물러섰다. 아이들의 맞은편에 작은 한 공간이 보였다. 자신들의 팔뚝 굵기의 쇠로 보이는 기둥이 촘촘히 박힌 곳에 두 눈을 반짝이며 으르렁 거리는 존재가 있었다.
 "꿀꺽·········."
 "으음."
 "흐- 으윽!!"
 아이들은 제각각 다른 모습을 보였다. 마른 침을 삼키며 긴장하거나. 등을 차가운 한기가 스민 벽에 기대며 눈을 반짝이거나. 아니면, 겁에 질려 몸을 부들부들 떨거나. 모두 다른 모습이었다. 그런 다섯 아이의 이마에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십부터 이십오까지.
 "크르렁!!"
 "으르릉!!"
 뚝. 뚝.
 길쭉한 입에서 섬뜩한 송곳니가 살가죽을 뚫는 것처럼 솟아 나왔다. 그리고 끈적끈적할 것 같은 침이 바닥으로 한 방울씩 떨어졌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굶주림으로 홀쭉한 배를 네 다리로 지탱한 야성의 본능이 반짝였다. 반짝, 반짝 빛나는 반딧불 같은 열 개의 빛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올려라--."
 무미건조한, 딱딱한 음성이 위에서 들렸다. 그리고 서서히 그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위로 올라갔다.
 턱!
 턱!
 모두 다섯. 거친 털과 날카로운 이빨이 어둠 속에서 번뜩이며 자신들의 앞에 선 하얀 다섯의 먹이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디디며 천천히 옆으로 퍼졌다.
 "으으·········."
 "사, 살려 주세요---."
 "시, 싫어 어-----."
 "후욱·········후욱!"
 다섯 아이는 자신들이 감당해야 할 눈앞에 있는 상대를 보고 몸을 떨었다. 그리고 한 아이가 다섯 아이와 거리를 두며 떨어졌다. 그러자 다섯 마리 들개가 무리에서 빠져 나온 아이를 향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척!
 아이는 배를 바닥에 대고 납작 엎드렸다. 그리고 고개는 들고 자신을 노려보는 들개를 주시했다.
 
 복종!!
 
 아이는 자신의 몸을 최대한 들개의 아래로 두며. 들개에게 자신은 복종의 의사가 있음을 알렸다. 그러자 들개들은 천천히 다시 남은 네 명의 아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신들보다 키가 크다. 하지만 느껴졌다.
 
 약하다!!
 
 너무나 약하고 허약하다!!
 
 야성의 본능은 들개들에게 눈앞에 선 다섯 아이는 단지 먹이일 뿐이란 것을 말해 주었다. 아이들은 빈손으로 자신의 안면을 가렸다.
 "크- 왕!!"
 순간, 한 마리 들개가 몸을 허공으로 띄웠다. 그리고 네 아이들 중 가장 앞에 선 아이의 팔을 물었다.
 "아- 아아악!!"
 아이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들개가 문 팔뚝에서 뜨거운 붉은 피가 이내 콸콸 흘렀다. 그러자 들개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붉디 붉은 피 냄새가 야성을 부추키는지 들개들이 이내 한 아이에게 모두 달려들었다.
 "크- 으으으!!"
 한 들개가 길쭉한 입을 벌려 아이의 목을 가차 없이 물었다. 그리고 본능에 따라 머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아이는 허공을 향해 남은 한 팔을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이내 다른 늑대들이 아이의 팔을 물었다.
 "컥, 컥·········!"
 아이는 숨을 쉬기가 어려운지 창백한 눈으로 다른 아이들에게 살려 달라는 애절한 눈빛을 던졌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은 일제히 다른 곳으로 피하며 자신들에게 닥친 죽음의 손길에 몸을 거세게 떨었다. 그 사이 한 아이를 바닥에 쓰러뜨리고 다섯 마리의 들개가 고개를 그 아이에게 박고 연신 머리를 흔들었다.
 "크- 앙!"
 "크- 아앙!!"
 "깽!"
 먹이를 앞에 두고 들개들의 서열 싸움이 벌어졌다. 누가 먼저 먹이를 먹을 것인지를 두고 서로 머리를 들이면서 거세게 다투었다. 그 사이 바닥에 엎드렸던 아이가 살며시 움직였다. 아이는 늑대가 나온 공간으로 조금씩 기어갔다.
 스 스슥!
 "후후, 이십 삼호가 제법이군. 들개들의 은신처로 몸을 숨긴다라·········."
 "어쩔 수 없겠지요. 벌거벗은 나신에 손에는 아무 무기도 없습니다. 상대는 굶주린 들개. 피하는 것이 상책이지요."
 두 복면인이 위에 서서 그 아래를 보았다. 그리고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흥미로운 듯한 눈빛을 반짝였다.
 "하지만. 잠시일 뿐이지. 다른 아이들이 모두 죽은 후에는 제 놈 차례일 테니."
 "글쎄요. 제가 생각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다른 것?"
 "네."
 "그게 뭔가?"
 한 복면인이 자신의 옆에 선 다른 복면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다른 복면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본능입니다."
 "본능?"
 "네. 야생에는 한 가직 규칙이 있습니다."
 "무슨 규칙인가?"
 "살기위해서 죽입니다. 그리고 먹지요. 배가 부르면 더는 다른 먹잇감을 발견해도 죽이지 않습니다."
 "크크·········과연 그럴까?"
 복면인은 자신의 말을 부정하는 듯한 여운을 남기는 다른 복면인을 보며 알 수 없다는 눈빛을 반짝였다. 그리고 복면인은 무심한 눈길로 아래를 바라보았다. 피 맛을 본 들개들이 연이어 아이들을 덮치는 것이 보였다.
 "크- 아앙!"
 "크- 아아악!"
 "크르릉!"
 "아아악--!!"
 들개들이 내뱉는 섬뜩한 울음소리와 아직 부모의 품이 필요한 어린 아이들이 내지르는 비명소리가 울렸다. 비명 소리는 이내 벽에 부딪쳐 공명을 만들었다. 그리고 긴 여운을 끌며 울려 퍼졌다.
 '우, 움직이면 죽는다.'
 이마에 이십삼 이란 번호가 새겨진 한 아이가 두려운 눈빛을 흘리며 몸을 최대한 낮추었다. 그리고 있는 듯 없는 듯 주변의 공간에 자신을 동화 시켜려 노력했다.
 "크- 아앙!"
 "크르르!"
 아이의 눈에 자신이 사냥한 먹이로 머리를 들이미는 한 들개를 향해 거칠게 입으로 물어뜯으려 하는 한 들개가 보였다. 들개의 송곳니 사이로 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너덜거리는 한 조각의 살이 보였다.
 '우욱········."
 아이는 자신의 목으로 올라오는 덩어리에 급히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리고 최대한 목으로 치밀어 올라오는 것을 다시 삼키려고 했다. 그런 소년의 눈에 게걸스럽게 머리를 들이대고 먹잇감을 뜯어 먹는 들개가 보였다.
 "흠. 이십 삼호가 보기보다는 생존력이 강하군."
 "예. 아주 탁월합니다. 무엇보다도 저기 보십시오. 늑대들의 눈에 띠지 않으려고 스스로 주변 공간에 동화되려고 본능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복면인은 자신의 수하인 듯한 다른 복면인의 말에 아래를 보면서 두 눈에 이채를 띠었다.
 "제법이야. 이대로 열흘 동안 내버려 두게."
 "여, 열흘 동안 말씀입니까?"
 "그러네. 과연 저 다섯 마리의 들개들과 어떻게 같은 공간에서 생존할지. 아주 흥미롭네."
 "알겠습니다. 십이 령."
 "수고하게."
 "네."
 복면인은 십이 령이라 부른 복면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십이 령이란 복면인은 이내 천천히 돌아서며, 다른 복면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남은 한 복면인이 우물처럼 생긴 공간을 보며 중얼거렸다.
 "살아남는다면 풍족하게, 배불리 먹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로 들개의 먹이가 되겠지."
 복면인은 더 이상 관심이 없는지 이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복면인의 등 뒤에서 간간이 들개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로부터 삼일 후 우물 같은 공간에 한 아이와 다섯 마리의 들개의 동거가 묘한 대치를 이루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랐다. 이마에 이십삼이란 번호가 새겨진 아이는 스스로 들개가 되었다.
 "크- 아앙!!"
 아이는 최대한 들개들과 똑같은 소리를 내려고 했다. 스스로 들개가 되어 들개들의 무리에 끼어들려고 했다. 들개들이 남은 아이들의 시신을 뜯을 때. 아이는 먹지는 않았지만 입을 가져다 되었다. 그리고 스스로 다른 들개에게 몸을 밀었다. 그러자 밀린 들개가 소년을 향해 으르렁 거리며 경고했다.
 "크르릉!!"
 아이는 지지 않겠다는 듯 들개가 내는 으르렁거림을 내며 들개에게 머리를 들이대었다. 그러자 들개는 일순 당황하는 듯 했다. 그러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몰랐다. 아이의 전신에 크고 작은 상처가 늘어났다. 그와 함께 차츰 들개들의 무리가 섞이기 시작했다.
 
 무리의 습성.
 개나 늑대들은 무리를 이룬다. 그리고 우두머리가 항시 존재했다. 차단된, 단절된 공간에서는 무리의 습성이 자연스럽게 강화가 된다. 그리고 우두머리에게 한 번 도전한 개나 늑대는 철저하리만큼 응징을 당한다. 그러나 배를 드러내 더는 싸울 의사가 없음을 나타내면. 이내 공격을 멈춘다. 그리고 자신의 무리에서의 서열을 결정 지워준다.
 
 "크- 아앙!"
 한 마리 들개가 자신에게 도전한 한 아이를 향해 몸을 날렸다. 아이는 두발과 두 다리를 최대한 활용해 옆으로 몸을 피했다. 하지만 직립 보행을 하던 인간으로서 사지를 개나 늑대처럼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덥석!
 콰- 아악!
 어깨에서 뜨거운 고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망설여서는 안 되었다. 아이는 이내 자신의 어깨를 물어뜯는 들개의 목을 자신의 이빨로 물었다.
 콰- 악!
 연약한 아이의 이빨은 늑대의 가죽만 겨우 물었을 뿐이다.
 "크르········."
 들개는 자신의 송곳니가 아이의 어깨 깊숙이 박힌 것을 느끼며 득의에 찬 눈빛을 흘렸다. 그리고 자신의 목을 문 아이의 이빨이 약함에 아이를 비웃듯이 바라보았다.
 찍-!
 찍- 이이익!
 들개는 자신의 머리를 흔들었다. 자신이 만들어 낸 상처를 더 크게 넓게 만들어야 했다. 들개는 철저하게 야생의 본능에 따라 행동했다.
 '아프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온다. 흐- 으으········!'
 아이는 자신의 뇌리에 전해오는 고통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직이었다. 좀 더 버텨야 했다.
 '너무 약하지도. 너무 강하지도 않은········.'
 아이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들개와 동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감당할 수 없는 적을 만났을 때, 저항한다는 것은 무의미 했다. 오히려 강한 적의 일원이 되는 것이. 주위의 환경과 공간에 동화 되는 것이 살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아이는 느끼고 있었다. 다시 이틀 후, 들개들은 아이를 무리의 하나로 받아 들였다. 아이는 철저하리만치 들개들의 습성에 동화 되었다. 그 모습을 본 두 복면인은 어이가 없었다. 두 복면인은 이십 삼 호라 부르는 아이의 본능적인 동화력에 놀랐다.
 "어처구니가 없군. 겨우 여덟 살이 된 놈이 저렇게 쉽게 들개들과 동화를 이루다니."
 "십이 령. 이십삼 호는 본능적으로 주어진 환경에 놀랍도록 빠르게 적응합니다. 그 능력 하나만으로 이곳 생존관은 이미 통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네 의견은 그럼."
 "네. 다음 관문으로 보내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 열흘이 지나지 않았다."
 "압니다. 십이 령. 하지만 이십삼 호를 열흘이 될 때까지 방치하는 것은 저희의 손실입니다."
 십이 령이라 불린 복면인은 자신의 옆에 선 다른 복면인의 말에 고민하는 듯 했다.
 "다음 관문으로 보낸다·········."
 "십이 령. 어차피 생존 능력에 관한한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 이십 삼 호입니다. 그 점을 살펴 주십시오."
 "으음·········."
 십이령은 한참이나 고심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좋아. 다음 관문으로 보내게. 그곳에서 죽는다면. 그 또한 이십 삼 호의 운명일 테지."
 "알겠습니다."
 복면인은 십이 령에게 고개를 숙인 후 슬쩍 고개를 돌려 아래에 있는 이십 삼호를 바라보았다. 그런 복면인의 눈에 흥미로운 눈빛이 반짝였다.
 
 
 "으으·········."
 이제 여덟 살 정도의 소년이 신음을 흘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런 소년의 눈에 사방이 밀폐된 한 석실이 들어왔다.
 "깨어났으면 일어나라."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음성을 들렸다. 소년은 순간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희미했다. 천장에서 흐린 빛을 뿌리는 한 작은 야명주가 석실을 밝혔다.
 챙그랑!
 맑은 소성과 함께 바닥으로 무엇인가가 던져졌다. 소년은 자신이 누인 석실의 바닥에서 일어나며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약 한 자 정도의 비수였다.
 "집어라."
 소년은 천천히 손을 앞으로 뻗어 비수를 잡아갔다. 그리고 눈동자를 빠르게 굴리며 자신의 주변을 훑었다. 소년은 자신의 앞에 한 복면인이 서 있음을 느꼈다. 그는 어떠한 기척도 내지 않았다. 단지 착 가라앉은 듯 한 눈빛을 반짝이고 있을 뿐이었다.
 "잘 들어라. 두 번 말하지 않는다."
 "·········."
 소년은 자신의 모든 신경을 귀로 집중시켰다. 그런 소년의 귀로 복면인의 음성이 끊이지 않고 들렸다.
 "비수의 목적은 적을 찌르거나 베는 것이다. 즉, 적과 거리가 없는 근접전에서 적을 죽이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비수를 쥐는 것에는 모두 세 가지 방법이 있다."
 복면인은 비수의 손잡이를 들고 팔과 함께 앞으로 뻗었다.
 "자법(刺法)이라는 것이다. 이 방법은 적을 찌르거나 베는데 유용하다. 하지만 방어를 도외시한 공격 위주의 방법이다."
 복면인은 다시 비수를 위로 하고 잡았다.
 "이것은 정법(正法)이라고 한다. 적의 공격을 방어하면서 찌르거나 베는 일반적인 방법이다."
 복면인은 손에 들린 비수를 빙글 돌렸다. 그러자 비수의 끝이 아래로 향했다.
 "역법(易法)이란 것이다. 이것은 주로 방어를 염두에 둔 방법으로 방어와 함께 적의 신체를 이렇게 내리찍는다."
 휘- 익!
 스 팟!
 복면인은 한 발을 앞으로 내밀며 상체를 숙였다.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비수를 빠르게 찍었다.
 "이 세 가지 방법이 가장 일반적이고 효과적인 비수를 쥐는 법이다. 세 가지 모두를 배우려고 하지 마라. 단, 하나를 선택해 집중적으로 익혀라. 이틀을 주겠다. 살아남고 싶으면 세 가지 중 하나를 네 것으로 최대한 빠르게 습득해라."
 복면인은 말과 함께 품속에서 두 개의 환약으로 보이는 것을 바닥으로 던졌다.
 "이틀 분의 벽곡단이다. 물은 없다. 어차피 이틀 후에 네가 죽는다면 물조차 아깝다. 하지만 살아남는다면. 다시 물을 마실 수 있겠지."
 복면인은 말과 함께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석실의 한 쪽 벽이 열리며 한 공간이 나타났다. 공간에는 다른 두 명의 복면인이 손에 검을 쥐고 서 있었다. 그리고 다시 복면인의 뒷모습이 다시 닫히는 벽에 의해 서서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소년은 천천히 바닥에 나뒹구는 두 개의 환약을 소중히 집어 들며, 그 중 하나를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손에 비수를 쥔 채 두 눈 가득 생존의 의지를 불태웠다.
 
 @
 
 스 슥. 슥.
 얼마 후, 한 소년이 밀폐된 공간에서 발을 움직이고 있었다. 소년은 짧은 보폭으로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소년은 손에 비수를 역으로 쥐며 한 발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허공을 찍었다.
 휙-!
 소년은 비수로 허공을 내리찍으면서 다시 비수를 올려치듯이 들며, 비수의 날로 허공을 아래에서 위로 갈랐다.
 휘- 익!
 소년은 그 자리에서 뒤꿈치를 들고 뱅글 뒤로 돌며, 비수의 날을 좌측으로 눕힌 채, 허공을 좌에서 우로 팔로 휘둘렀다. 그러자 허공에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과 함께 비수의 섬뜩한 날이 스쳐 지나갔다.
 쉿-!
 소년은 자신의 움직임을 머리로 생각하는 듯, 적절히 몸의 체중을 앞뒤로 이동시키며 몸을 움직였다.
 "분명 그 복면이 발을 내디딜 때 뒤꿈치를 들고, 발가락이 있는 발의 앞쪽을 지면에 대었다. 이렇게 했던가?"
 소년은 전날 자신에게 비수에 관해 설명한 복면인의 발놀림을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런 소년의 움직임이 서툴렀지만, 차츰 안정이 되어 갔다. 그와 함께 소년은 자신의 손에 들린 비수를 한시도 떼어 놓지 않았다.
 휘- 리리릭!
 비수의 손잡이가 소년의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에서 차츰 빠르게 움직였다. 소년은 자신의 손에 들린 비수를 여러 번에 걸쳐 자세를 바꾸어 가며 자신에게 가장 안정적인 자세를 찾는 듯 했다.
 "공격 그리고 방어. 그 사이의 틈을 이용해 다시 반격."
 소년은 비수를 들고 움직이며 눈앞에 자신 또래의 가상의 적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비수를 가르친 복면인의 실력을 가상의 적에게 대입시켰다.
 "살아남는다. 반드시········살아서 이 지옥을 빠져 나간다."
 소년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스스로 최면을 걸듯이 중얼거렸다.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른다. 다만, 세상이 내 눈에 들어 왔을 때 나는 이 지옥에 있었다. 그리고 보았다. 내 눈앞에서 허무하게 죽어간 아이들을········."
 소년의 맑아 보이는 두 눈동자에 그간 죽어간 다른 아이들의 모습이 망막에 맺혔다.
 "단, 하나의 감자를 던져 주고, 아이들 사이에 싸움을 유발하며, 극한의 투쟁심을 심어주고. 수없이 각종 독사와 들개 그리고 늑대들과 싸움을 붙였다."
 소년은 자신을 교육시켰던 한 복면인을 머리에 떠올렸다.
 
 복면인은 약 백 명의 아이들이 선 앞의 다소 높은 곳에 서서 자신의 아래에 있는 소년들을 바라보았다. 소년들이 선 곳은 원형의 격투장 같았다. 바닥에 깔린 모래에는 진득진득한 피가 모래와 함께 엉켜 붙어 있었다.
 "잘 들어라. 너희는 우리 살막의 살수 후보생들이다. 너희들 중 오직 열 명만이 살아남는다. 너희는 이 순간부터 사람이 아니다. 단지 살아 숨 쉬는 짐승일 뿐이다. 살고 싶으면, 자신에 대해 알고 싶다면. 끝까지 살아남아라."
 복면인은 그 말과 함께 한 알의 감자를 바닥의 모래에 던지며 아이들을 맨손으로 서로 싸우게 했다.
 
 부르르-!
 소년은 자신의 과거를 상기하며 두려운 듯 흔들리는 눈동자와 함께 몸을 떨었다.
 "주, 죽기 싫어········죽기 싫어."
 소년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감쌌다. 그런 소년의 귀로 죽어가며 비명을 지르던 아이들의 비명성이 들렸다.
 ""사, 살려줘요."
 "아, 안 되 에---."
 "어, 엄마 아아---."
 소년의 과거를 돌아보는 눈동자에 늑대의 밥이 되어 죽어가는 아이들이 보였다.
 "으- 아아아아악!!"
 소년은 양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며 석실이 떠나가도록 비명을 질렀다.
 
 무섭다!!
 너무 무섭다!!
 
 소년은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체감했다. 소년은 자신이 보았던 그런 죽음이 두려웠다. 자신이 그렇게 되는 것이 너무나 두렵고 무서웠다.
 "시, 싫어. 나, 나는 죽기 싫어. 주, 죽지 않을 래."
 소년은 후들거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다시 비수를 휘둘렀다.
 휘- 익!
 휙-!
 소년은 비수를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자신이 살 확률이 높다는 것을 그간의 경험으로 알았다. 죽기 싫다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소년의 의식에서 오로지 비수를 끊임없이 휘둘러야 한다는. 하나의 절대적인, 한 생각만을 강요했다.
 휙-!
 휙-!
 소년이 손에 쥔 비수를 휘두르며 발을 움직이는 동안, 천장에 박힌 야명주 옆의 작은 반짝이는 것이 천천히 소년의 움직임을 쫓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작은 거울인 듯 했다. 그것은 소년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후후. 이십 삼 호의 움직임이 좋군.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말이야."
 서너 명의 인영이 의자에 앉아 자신들의 앞에 놓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운 거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크큭! 하지만 저기를 보라구. 백 삼십 구 호의 손놀림에 비하면 아직도 멀었어."
 한 복면인이 손가락으로 우측의 한 거울을 가리켰다. 그러자 복면인들의 눈에 그 거울로 쏠렸다.
 "호오, 제법인데. 그래. 마치 비수가 손에 착 붙어 있는 것 같은데."
 "이 봐. 백 삼십 구호는 손목의 신경과 근육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유달리 발달한 아이라구."
 "흠. 선천적으로 손목이 발달했다. 하긴 그렇지 않으면 저런 움직임은 설명이 안 되겠지."
 복면인들의 눈에 한 소년이 보였다. 소년의 손에서 허공을 누비는 비수는 아주 자연스럽고 부드러웠다. 그리고 빠르고 강렬했다. 한 순간 비수에 힘을 싣는 모습이 제법 비수를 다뤄 본 듯 보였다.
 "킥킥! 하지만 이쪽에 있는 칠십 이 호는 아주 젬병이군."
 "그래. 어디········."
 "흐흐········. 천상 죽은 시체와 다를 바가 없군. 그래."
 복면인들은 좌측에 있는 한 거울을 향해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그 거울에는 비수를 잘 움직이지 못해 바닥으로 연신 떨어뜨리는 한 소년이 보였다. 소년은 비수가 두려운 듯 했다.
 "병신 새끼. 그렇게 비수를 무서워하다간 곧 죽을 것이다."
 "크큭! 당연하지. 저런 놈은 우리 살막에는 필요 없어."
 복면인들은 칠십 이 호라 부르는 소년을 바라보며 입가에 진득한 살기가 묻어나오는 듯한 음성을 흘렸다.
 "병신 새끼."
 복면인들은 자신들의 뒤에서 들리는 음성에 흠칫했다. 하지만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저런 새끼를 계속 키우는 것은 우리 살막의 손실이다. 이백 팔 호."
 "네."
 앞에 앉은 한 복면인이 입을 열었다. 그의 소매에는 이백 팔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뒤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오직 앞에 자리한 거울들을 보며 대답했다.
 "십삼 령에게 통고해라. 저 놈. 칠십 이호의 평가를 앞당기라고 말이다."
 "네. 팔 령."
 이백 팔호는 자신의 등 뒤에 자리한 팔 령을 향해 대답하며, 자신의 옆에 있는 지필묵을 향해 손을 뻗어 갔다.
 "빌어먹을. 살막 최고의 살수라는 십혼살의 일원인 내가 이런 곳에서 젖비린내 나는 애새끼 보모 노릇을 하고 있다니. 이게 다 그 놈들 때문이다. 십이월. 뿌- 드득!!"
 팔령은 자신이 속한 살막의 적. 십이월을 머리에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젠장, 어디서 갑자기 뚝 떨어졌는지도 모르는 놈들.'
 팔령은 자신의 머릿속에 지난 십오 년의 세월이 빠르게 흘러가는 것을 느꼈다.
 
 과거 십오 년 전 강호는 살막이란 사상 최강의 살수 조직이 있었다. 살막은 천하의 거의 모든 살수문의 정점에 선 최강의 조직이었다. 그런 살막에 갑자기 도전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적월사!!
 붉은 달로 불리는 그들은 십이월이란 전대미문의 살수들을 내세웠다. 처음에는 살막도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행적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십이월은 구파 일방과 무림 오대 세가 그리고 각 성의 패주를 자처하는 거물들만을 노렸다.
 "적월사의 뒤에는 조정이 있다. 원 조정이 무림을 멸망시키려 한다."
 "사, 살수들을 죽여라. 아, 안 그러면 우리가 죽을 것이다."
 "살수들을 죽이자--. 죽여---."
 강호인들은 적월사의 십이 살수. 십이월의 살수에 공포를 느꼈다. 그들 십이월의 손에 무수한 이들이 죽어 나갔다. 그것도 거물이라 불릴 만한 이들이. 결국 강호 무림은 적월사이건 아니건 살수들이라면 무차별로 공격해 죽였다.
 "적월사를 없애라. 그놈들 때문에 강호에서 더는 살수행을 할 수 없다. 반드시 이 세상에서 없애라--."
 살문 종주를 자처하는 살막은 분노했다. 적월사의 살행은 자신들에 대한 도전으로 비쳐졌다. 그리고 천하의 그늘 뒤에서 두 살수 조직 간의 살수 전쟁이 일어났다. 하지만 살막은 밀렸다. 그것은 너무 허무하다 할 정도로 어이 없이 무너졌다.
 
 "뿌드득! 내부에서 정보가 새고. 그놈들 십이월!! 그 개자식들에게 단 한 수도 견디지 못했지."
 팔 령의 눈에 섬뜩한 안광이 번뜩였다. 팔 령은 천천히 한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만졌다.
 '내 가슴에 남아 있는 이 상처. 구월. 현월!!'
 팔 령은 자신에게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적을 머리에 떠올렸다. 호리호리한 몸. 그리고 무심한, 동공이 보이지 않는 백안. 소름끼치는 한 순간의 섬광.
 파르르!!
 팔 령은 자신의 손을 쥐며 암암리에 손을 떨었다. 지금도 무서웠다. 자신의 적 현월이.
 "하지만 저놈들이········저놈들이 완성이 된다면."
 팔 령은 자신의 앞에 보이는 거울에 비친 무수한 소년들을 향해 두 눈을 부릅뜨며, 기대가 어린 눈빛을 반짝였다.
 "크크크········살수를 죽이는 살수!! 일천 명의 소년들을 거르고 걸러 단 열 명의 살수를 창조해 낸다. 새로운 십혼살!!"
 팔 령은 눈에 선했다. 전대미문의 살수를 죽이는 최강의 살수. 십혼살을 앞세우고 적월사의 십이월을 사냥하는 모습이 너무나 눈에 선하게 잡혔다.
 "흐흐········기다려라. 현월. 네 몸을 갈기갈기 물어뜯을 지옥의 개들이 곧 네놈을 찾아 갈 것이다. 우리 살막이 창조해낸 최강의 살수가········."
 팔 령의 눈가로 섬뜩한 살광이 번뜩였다. 증오라는 이름의········.
 
 얼마 후, 칠십 이호라는 소년은 한 마리 날렵해 보이는 피 빛 혈안의 새를 마주하고 있었다. 칠십 이 호와 새가 마주보는 곳은 무척이나 넓었다. 바닥에는 석판이 깔려 있었고 석판의 틈 사이에는 붉긋한 혈흔이 가득 남아 있었다.
 "네 앞에 있는 새는 대막의 혈응조다. 놈은 배가 고프면 대막에 사는 늑대건 사람이건 가리지 않고 덤비는 놈이다. 죽여라--. 죽이지 못하면 네놈이 죽는다."
 어디선가 한 줄기 음성이 들렸다. 그러자 칠십 이호는 몸을 떨었다. 자신과 약 십여 장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한 나무 막대 같은 곳에 앉은 혈응조의 덩치는 자신과 비슷했다.
 "으으········."
 칠십 이 호는 겁에 질려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혈응조의 피 빛 눈동자는 칠십 이 호에게 섬뜩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차갑고 무심하며 자신에 대한 본능에 따라 희번덕거리는 눈동자는 절로 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풀어라--."
 한 줄기 차가운 음성과 함께 탁 하는 무엇인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함께 퍼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혈응조가 허공으로 깃털을 날리며 날아올랐다.
 캬----.
 섬뜩한 혈응조의 짧은 울음소리와 함께 허공 이십여 장의 위에 혈응조가 맴을 돌았다. 혈응조는 자신의 아래에 존재하는 것에 맹렬한 탐식의 본능을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턱. 턱. 턱.
 "헉, 헉."
 칠십 이 호는 최대한 혈응조를 자신의 전면에 두려고 했다. 그러나 혈응조의 움직임을 따라 잡을 수는 없었다. 칠십 이호는 끊임없이 원을 그리며 혈응조의 움직임을 자신의 눈에 담으려 했다. 그러자 입에서 거친 숨이 빠져 나왔다.
 쇄- 애액!
 순간, 혈응조가 허공을 가르며 칠십 이 호를 향해 허공에서 쇄도했다. 그러자 칠십 이 호는 헉 하는 단말마를 삼키며 급히 손에 들린 비수를 앞으로 내밀었다.
 '오, 온다.'
 칠십 이 호는 자신의 망막 가득 맺히는 거대해 보이는 혈응조의 모습에 두 눈 가득 두려움을 떠올렸다.
 쉬- 이잇!
 혈응조는 칠십 이 호의 지척에서 몸을 돌았다. 허공의 공기의 흐름을 타는 듯한 활공의 수법을 펼치는 듯 순식간에 칠십 이 호의 옆을 돌며 스쳤다.
 "크- 아아악!"
 칠십 이 호는 자신의 옆구리가 뜯겨 나가는 듯한 고통에 다급히 소리를 질렀다.
 쨍그랑!
 칠십 이 호는 고통으로 인해 자신이 쥔 비수를 놓치며 급히 옆으로 몸을 옮겼다. 빨랐다. 혈응조는 너무나 빨랐다. 흔히들 순식간에 당했다는 표현만큼이나, 혈응조는 빨랐다.
 카- 아아아!!
 칠십 이 호의 귀에 혈응조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혈응조는 조롱하는 듯 했다. 자신의 속력을 쫓아오지 못하는 칠십 이 호의 능력을 아는 듯 기뻐하는 것 같았다.
 똑. 똑.
 칠십 이 호의 허리에서 피 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또다시 선명한 또 하나의 혈흔을 만들었다.
 "크- 흐윽!"
 칠십 이호는 몸을 비틀거리며 어느새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혈응조가 허공에서 그것을 보며 뱅글거리며, 큰 나선의 움직임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차츰 칠십 이 호를 향해 아래로 내리 꽂혔다.
 쇄- 애액!
 칠십 이 호는 자신을 목표로 허공에서 빠르게 쇄도하는 혈응조를 살피기에 바빴다. 하지만 눈으로 혈응조의 빠른 움직임을 쫓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자 혈응조는 그런 칠십 이 호의 사각을 파고드는지. 칠십 이 호의 어깨를 스쳐 지났다.
 파 팟!
 "아- 아아악!!"
 촥-!
 칠십 이 호의 어깨가 혈응조의 발톱에 찢어지며 가는 핏줄기가 허공으로 뿜어졌다. 그리고 이내 바닥으로 튀며 새로운 혈흔을 만들어내었다. 그 사이 혈응조는 다시 빠른 움직임으로 비틀거리는 칠십 이 호에게 쇄도했다.
 콰 드득!
 "크- 아 아 악!!"
 허공으로 칠십 이 호의 비명이 울렸다. 우두둑 거리는 소리와 함께 칠십 이 호의 어깨로 어린아이의 팔뚝 굵기의 혈응조의 발톱이 박혔다. 그리고 후욱 하는 소리와 함께 혈응조가 퍼드득 하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런 혈응조의 발톱에는 칠십 이 호가 고통에 가득 찬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서 사지를 버둥거렸다.
 "으- 아 아 아 아 아 악········!!!"
 퍼- 어 어 어 억!
 혈응조는 상당한 높이까지 상승한 후 이내 자신이 붙잡은 먹이를 놓았다. 그러자 허공에서 긴 비명성과 함께 칠십 이 호가 아래를 향해 곤두박질 쳤다. 그리고 이내 바닥에는 차마 보기가 어려운, 목불인견의 고기 조각들이 널렸다. 그러자 혈응조가 날개를 접으며 바닥에 내려앉았다.
 탁. 탁. 탁.
 캬----!
 혈응조의 부리가 바닥을 찧는 소리와 함께 승리에 환호하는 울음소리가 허공에 길게 메아리쳤다.
 "풉!! 영리한 놈이군. 먹이를 추락시켜 단숨에 절명시킨다········."
 한 줄기 짧은 실소와 함께 혈응조의 공격 수법에 다소 감탄한 듯한 음성이 울렸다.
 "십삼 령. 혈응조는 대막에서는 하늘의 재앙이라 불리는 놈입니다. 척박한 대막의 풍토에서 처절하리 만큼 냉혹한 생존을 통해 살아남은 놈입니다."
 "하긴, 그 정도 되는 놈이니. 늑대를 먹이로 삼고 사람들에게 달려들겠지. 후후, 하여튼 이번 평가에서 혈응조를 선택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렇습니다. 십삼 령. 혈응조의 빠른 움직임을 쫗을 수만 있다면. 웬만한 움직임은 다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십삼 령이란 불린 이는 다른 이의 음성에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단지 단 한 마디를 내뱉었을 뿐이었다.
 "치워라."
 "네."
 두 사람의 음성은 그것으로 더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허공으로 먹이를 쪼아 먹는 혈응조의 게걸스러운 부리가 내는 소리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한 소년이 움직이고 있었다. 소년은 발뒤꿈치를 들고 발의 앞쪽을 이용해 자신의 체중을 옮겼다. 소년은 무척이나 느리게 자신의 무게 중심을 이동시켰다. 그와 동시에 소년의 손에 쥐여진 비수가 허공을 스치며 낮은 파공성을 일으켰다.
 쉿-!
 소년은 자신의 발이 나아감과 손에 들린 비수의 움직임을 일치시키려 했다. 자신의 발이 뒤로 물러날 때, 손에 거꾸로 쥔 비수의 날이 팔뚝에 바짝 붙었다. 소년은 자신의 적이 앞에 있는 듯 그 팔뚝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막으려 했다.
 휘- 이익!
 소년은 몸을 낮추면서 몸을 회전했다. 그와 함께 비수의 날이 팔뚝에서 불쑥 튀어나온 듯이 허공을 갈랐다.
 쉬- 잇!
 소년은 이내 자신의 몸을 가다듬으며 섰다. 그런 소년의 이마에는 이십삼이란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소년은 지친 듯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리를 살짝 벌렸다. 그리고 양손을 마주 벌리며 비수를 우수에서 좌수로. 좌수에서 다시 우수로 느리게 던지고 받았다. 그리고 차츰 빠르게 양손을 오가며 비수를 이동시켰다.
 휙--!
 휙--!
 소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신경을 끌어 모았다. 소년, 이십 삼호는 모든 신경을 양팔로 집중시켰다. 그런 이십 삼 호의 귀로 낮은 파공음이 끊이지 않고 들렸다.
 휙-!
 휙-!
 "아악········크윽!"
 챙그랑.
 이십 삼호는 일순 비수를 놓치며 양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맨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신음했다. 그런 이십 삼호의 발치에는 한 자루 비수가 어둠속에서 자리하고 있었다.
 스 윽!
 이십 삼호는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비수를 주웠다.
 '뭐, 뭔가 나만의 것이 있어야 해. 그, 그래야 살아남을 수가 있어.'
 이십 삼호는 내심 다른 이는 모르는 자신만의 한 수를 만들려고 했다. 그간 숱하게 지켜보았다. 죽어 나가는 자신의 또래 소년들을, 그들 중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소년들은 자신만의 숨겨둔 한 수가 있는 소년들이었다.
 "어, 어떻게········."'
 이십 삼호는 자신만의 한 수를 위해 여러 번에 걸쳐 각각의 자세를 취하며, 손에 들린 비수를 내찔렀다. 하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십삼 호는 문득 자신의 소매 안으로 비수를 감추었다. 그리고 팔을 내려 비수가 소매를 빠져 나오는 순간, 한 발을 강하게 석실 바닥을 치듯이 밟으며 앞을 향해 비수를 내찔렀다.
 쇅---!
 한 순간 비수에 이십 삼호의 모든 힘이, 비수의 끝자락으로 모이며 허공의 한 점을 꿰뚫었다.
 파- 아앙!
 허공의 공기가 터지며 파공성이 허공에 퍼졌다. 그러자 이십 삼 호의 얼굴이 활짝 펴지며 입가에 만족한 미소가 스르르 떠올랐다.
 "이, 이거야. 바로 이거야-. 하하하하!!"
 이십삼 호는 자신이 펼친 한 수가 마음이 드는지. 커다란 웃음을 허공으로 흘렸다. 그 순간 거울에 비친 이십 삼호의 모습을 지켜보던 팔 령은 입가에 씩 미소를 지었다.
 "제법이군. 발경을 이용해 단 한 수의 찌르기를 펼치다니. 제법이야."
 팔 령은 거울에 비친 이십 삼호의 모습에 재미있는 듯 했다. 그런 팔령의 시선이 다른 쪽에 있는 거울을 향했다. 거울에는 백 삼십 구호의 모습이 비쳤다. 백 삼십 구호는 바닥을 무척이나 부드럽게 미끄러지듯이 움직였다. 백 삼십 구호의 손에 들린 비수는 유연하게 허공을 누비며, 허공에 흐르는 공기의 흐름을 타는 듯 했다.
 "흠. 타고 났군. 비수뿐 아니라 검을 다루는 데에 가장 이상적인 신경을 타고 난 놈이야."
 팔 령은 백 삼십 구호와 이십 삼호를 번갈아 보며 눈빛을 번뜩였다. 팔 령은 자신의 앞에 있는 복면인들을 바라보며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무미건조한 음성을 흘렸다.
 "이백팔 호."
 "네, 팔 령."
 한 복면인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그러자 팔 령은 턱짓으로 자신의 눈에 보이는 두 거울을 가리켰다.
 "심삼 령에게 전해라. 이십 삼호와 백 삼십 구호를 서로 비무 하게 하라고 해라. 생사투다."
 이백 팔호는 팔 령의 말이 의외인 듯 몸을 움찔거렸다. 그러자 이 백 팔호의 옆에 있던 복면인들이 놀라 팔 령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팔령이 수하들의 그런 기척을 아는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두 놈 중 이긴 놈은 다음 관문으로 보내라. 우리에게는 강한 놈만이 필요하다. 그리고."
 팔 령은 말을 끊고 고개를 돌려 백 삼십 구호와 이십 삼호를 보며 중얼거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럼없이 상대를 죽일 수 있는 살수다. 명심해라. 강한 놈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놈이 강한 것이다."
 팔 령의 말에 다른 복면인들은 이내 시선을 돌려 다른 일을 하는 척 했다. 그 사이 이백 팔호는 몸을 돌려 팔 령의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삭, 사 삭.
 한 소년이 빠르게 지면을 훑으며 자신의 손에 들린 비수를 움직였다. 비수는 소년의 손에서 살짝, 살짝 각도를 바꾸며 흔들렸다. 그러자 순간 비수가 두어 개로 늘어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런 소년의 이마에는 백삼십구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뱅그르르.
 한 순간 소년의 손등을 타고 비수가 회전했다. 백 삼십구라는 글자가 새겨진 소년은 일순 비수의 손잡이를 잡아채며 몸을 회전했다. 그와 함께 회전하는 힘을 빌려 비수로 자신의 옆 공간을 가르며 지나쳤다.
 쉬- 잇!
 섬뜩한 파공음이 비수의 끝을 따르며 허공으로 퍼졌다. 백 삼십 구호는 다시 비수를 허공으로 던지듯이 회전하며 일어섰다.
 탁-!!
 백 삼십 구호는 일어서며 자신의 가슴 어림에서 도는 비수를 낚아챘다.
 "후우-----!!"
 백 삼십 구호는 길게 숨을 내쉬며 자신의 주변을 은연중에 살폈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서며 한 쪽에 자리한 돌로 된 침상으로 걸어갔다.
 
 "팔 령이 그리 지시 했다고."
 "네. 십삼 령."
 이백 팔호는 대답과 함께 자신의 앞에 앉은 십삼 령이란 복면인의 기색을 살렸다. 그러자 이백 팔호의 눈에 십삼 령의 검미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젠장, 이럴 줄 알았다. 염병········.'
 이백 팔호는 자신을 향해 눈가에 살기를 띠어가는 십삼 령을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꿀꺽.'
 이백 팔호의 목젖이 꿈틀거리며 목으로 무엇인가가 넘어가는 듯 보였다. 그러자 십삼 령의 음성의 고저가 없는 음성이 흘러 나왔다.
 "두 놈 다 쓸 만한 놈들이라는 것을 팔 령은 알고 있나?"
 "그, 그것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다만."
 "강한 놈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놈이 강한 놈이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십삼 령은 이백 팔호의 말에 살기를 거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우리들 살수지. 알겠다. 팔 령의 말씀. 내 알아들었다고 전해라."
 "네. 그럼."
 이백 팔호는 십삼 령에게 고개를 숙인 후 등을 돌렸다. 그러자 심삽 령은 자신이 앉은 탁자 위에 놓인 작은 종을 손에 들었다.
 딸랑!
 작은 종소리가 울리자 한 복면인이 벽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찾으셨습니까?"
 "가서 이십 삼호와 백 삼십 구호의 기록을 가져와라."
 "네."
 복면인은 벽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인 후 다시 벽으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십삼 령은 자신의 몸을 뒤로 기대며 중얼거렸다.
 "두 놈 중 누가 가장 살수에 어울릴까? 크크········."
 심삼 령은 두 눈을 감고 머릿속에 이백 팔호가 전한 팔 령의 말을 떠올렸다.
 '강한 놈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놈이 강한 것이다.'
 십삼 령은 문득 머릿속으로 일반 강호 무인과 살수의 차이가 혹 팔 령의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무인은 오직 승부에만 집착하지. 하지만 살수는 상대의 죽음만 생각한다."
 십삼 령은 불연듯 이십 삼호와 백 삼십 구호를 맞붙였을 때 과연 누가 살아남을까? 궁금했다. 그 사이 벽에서 한 복면인이 나타나 두 개의 두루마리를 십삼 령이 앉은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순간 바닥으로 꺼지는 듯이 신형이 아래로 스르르 사라졌다. 십삼 령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두 두루마리를 바라보았다. 두루마리에는 이십삼이라는 숫자와 백 삼십 구호라는 숫자가 쓰여 있었다.
 탁. 스르르.
 십삼령은 백 삼십 구호라고 쓰인 두루마리를 들고, 두루마리를 묶은 줄을 풀었다.
 촤- 르르르.
 십삼령은 두 손으로 두루마리를 펼쳐 읽었다.
 "········귀주 소가장의 둘째 아들이라. 흠. 이미 사라진 그렇고 그런 무가. 응? 삼대조가 비검진천 소녕악이라고."
 십삼령은 백 삼십 구호의 인적 사항에 눈빛을 반짝였다. 그리고 역시나 하는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역시 유전이었군. 한 때 강호에서 이름깨나 떨친 조상에게 물려받았군. 생존 능력 중. 판단력 상. 속을 잘 드러내지 않는 놈이라······이런 놈일수록 음흉한 구석이 많은데. 음········."
 십삼령은 다시 두루마리를 말았다. 그리고 자신의 탁자에 내려놓으며 그 옆에 있는 두루마리를 들고 읽었다.
 "········부모도 죽은 떠돌이 유민의 자식이라. 생존 능력 상. 판단력 상. 말이 없다라········."
 십삼 령은 내심 이십 삼호의 기록에 자신의 머리에서 한 줄기 불길한 예감이 스치는 것에 흠칫했다.
 '으음. 말이 없다 라면. 천생 반골이나 마찬가지인데.'
 십삼 령은 과거 자신이 교육 받은 것을 상기했다.
 
 '········살수의 적은 바로 그 자신이다. 살행을 나가기 전에 자신의 감정과 모든 생각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 하지만 간혹 그런 대법을 통해 감정과 생각을 죽여도 돌발적으로 행동하는 살수가 있다. 바로 평소에 침묵을 하는 살수다. 아무 말이 없이 침묵을 유지하는 살수만큼 무서운 살수는 없다. 그런 살수는 언제 어떻게 어디로 튈지 모른다. 간혹 우리 살수 중에 배신자가 생기는 일이 있다. 바로 침묵하는 살수가 그런 배신자가 되는 것이 태반이다········.'
 
 말이 없다는 것만큼 신경이 쓰이는 자는 없다. 그 속을 전혀 알 수 없다. 그런 만큼 어떤 상황 하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측 불허다.
 "풉! 내가 쓸데 없는 생각을 하는군. 이십 삼호가 끝까지 살아남을 지. 중간에 죽을 지도 모르는데. 내가 너무 앞서 생각을 하는군."
 십삼 령은 입가에 실소를 지으며 두루마리를 다시 말았다. 그라고 탁자에 놓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다시 제 자리에."
 "예."
 십삼 령의 말과 함께 바닥에서 한 복면인이 일어나 탁자의 두 두루마리를 집어 들었다. 십삼 령은 어느새 자신이 있던 석실의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런 심삼 령의 뒤로 다시 사라지는 복면인이 보였다. 그리고 석실은 정적 속에 잠기며 서서히 고요해져 갔다.
 
 
 * 나는 살고 싶어 *
 
 
 세 사람이 서 있었다. 그들은 둥근 원형의 공간에 서 있었다. 그들이 서 있는 공간은 바닥에 석판이 깔렸고 사방으로 벽돌이 층층이 쌓인 둥근 공간이었다. 그런 공간의 중앙에 한 복면인이 서서 양쪽을 번갈아 보았다. 복면인이 서 있는 양쪽에는 이마에 이십삼과 백삼십 구라는 숫자가 이마에 새겨진 두 소년이 서 있었다. 두 소년은 두 눈 가득 긴장의 눈빛을 띠었다. 그러자 복면인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일체의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듯한 음성을 흘렸다.
 
 "단, 한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복면인은 말과 함께 두 자루의 비수를 자신이 서 있는 바닥으로 내던졌다.
 쨍그랑!
 쨍!
 바닥으로 두 자루의 비수가 부딪치며 날카로운 소성을 일으켰다. 그러자 두 소년의 눈빛이 반짝이며, 바닥에 떨어진 비수를 향했다.
 "잘 해 보도록·········."
 휘-이익!
 복면인은 함께 함께 신형을 날려 위로 솟구쳤다. 그러자 두 소년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두 소년은 중앙으로 한 발씩 발걸음을 떼었다. 그러자 두 소년의 머리 위에서 복면인이 물끄러미 두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복면인의 두 눈가에 진득한, 흥미가 이는 듯한 눈빛이 흘러 나왔다. 그 사이 두 소년은 서로 약 일, 이장의 거리를 두고 마주 섰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은 채 상대방을 주시했다.
 '어, 어떻게 하지.'
 '누구든지 비수를 먼저 줍는 사람이 유리한데.'
 두 소년은 내심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아차 실수하는 날에는 곧바로 죽는다. 그 사실이 두 소년을 긴장시켰다.
 '기, 기회를 잡아야 한다.'
 이마에 이십삼이란 숫자가 새겨진 소년은 내심 기회를 엿보았다. 그것은 맞은편에 선 백삼십 구란 숫자가 새겨진 소년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 우리 가, 같이 잡는 것이 어때."
 백삼십 구호라 불리는 소년이 자신의 앞에 선 소년을 보며 제안을 던졌다. 그러자 이십삼 호로 불리는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소년은 서로를 경계하면서 조금씩 다가갔다. 한 발, 한 발 걸음을 내디디며 상대방의 일거수일투족에 온 신경을 곤두 세웠다.
 "후후·········."
 복면인은 그런 두 소년을 내려다보며 섬뜩한 실소를 흘렸다. 그러자 그의 뒤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저벅. 저벅.
 복면인은 그 소리에 천천히 돌아섰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 자신과 똑같은 복장을 한 복면인이 보였다.
 "오셨습니까? 팔 령."
 "오랜만이야. 십삼 령."
 복면인은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심삼 령이라 부른 복면인을 보며 반가운 듯한 음성을 흘렸다. 그러자 심삼 령의 몸이 순간 움찔거렸다.
 '젠장. 이 작자가 이런 말을 할 때에는 반드시 피를 보는데.'
 십삼 령은 자신에게 살가운 음성을 흘리는 팔 령의 안색을 은밀히 살폈다. 그러자 팔 령은 십삼 령을 지나쳐 두 소년이 보이는 위치까지 걸어갔다. 그러자 십삼 령은 조심스러운 모습으로 그의 뒤에서 다소 떨어진 자리로 걸어갔다. 그 사이 두 소년은 지척에 다 달았다.
 슥!
 이십삼 호는 천천히 자신의 앞에 있는 비수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손을 내뻗으며, 두 눈은 자신의 앞에서 똑같은 모습을 보이는 백삼십 구호를 바라보았다.
 턱!
 이십삼 호는 비수의 자루가 자신의 손에 잡히자 순간 그 느낌에 잠시 시선이 비수로 쏠렸다. 그 때였다. 쉭 하는 소리와 함께 아직 비수를 잡지 않은 백삼십 구호의 발이 안면을 향해 날아들었다.
 퍼-억!
 "컥!"
 이십삼 호는 안면에서 느껴지는 아픔에 짧은 신음성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이십삼 호는 순간 급히 비수의 자루를 한 손으로 움켜쥐며 옆으로 몸을 뒹굴었다. 이십삼 호는 가급적 자신을 공격한 백삼십 구호와 본능적으로 거리를 두려고 했다.
 데굴. 데굴.
 이십삼 호는 어느 정도 백삼십 구호와 거리를 벌렸다고 생각이 되자. 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십삼 호의 눈에, 그 사이 비수를 손에 쥐고 자신에게 빠르게 다가오는 백삼십 구호의 모습이 보였다.
 타타타탁.
 이십삼 호는 급히 좌측으로 뛰었다. 백삼십 구호는 우수에 비수를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좌측이다. 우측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몸을 돌려야 한다.'
 이십삼 호는 백삼십 구호의 좌측에서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 움직였다. 그러자 백삼십 구호는 이십삼 호의 움직임에 당황했다. 백삼십 구호는 이십삼 호의 움직임을 따라가기 위해 좌측으로 몸을 틀어야 했다.
 "영리한 놈이군."
 팔 령은 이십삼 호의 움직임을 보며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듯한 음성을 흘렸다. 그러자 십삼 령이 팔 령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광경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팔 령. 하지만 먼저 지칠 것입니다. 백삼십 구호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이십삼 호의 움직임을 쫓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하지만 조금이라도 이십삼 호의 움직임을 놓친다면."
 팔 령은 말과 함께 입가에 끈적끈적한 살기가 엿보이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자 십삼 령은 팔 령의 음성에 잠시 몸을 흠칫했다. 팔 령의 음성에서 살기가 묻어나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대로는 승부를 내기 쉽지 않다.'
 백삼십 구호는 천천히 조금씩 벽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이십삼 호는 백삼십 구호의 그런 움직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로지 백삼십 구호의 좌측을 파고들며 허 점을 노렸다. 그렇게 약 일각 정도 흘렀을까? 이십삼 호의 눈가가 떨렸다. 그제야 백삼십 구호의 몸이 벽에 가까이 붙은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쉽지 않을 거야. 좌측은 포기 해."
 백삼십 구호는 이십삼 호의 당황하는 눈빛을 보고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십삼 호는 백삼십 구호의 좌측에 멈추어 섰다.
 '제기랄. 좌측을 파고들 수가 없잖아.'
 이십삼 호는 백삼십 구호의 몸 가까이에 있는 벽을 힐끗거렸다. 좁았다. 만약, 자신이 파고든다면 자칫 움직임에 제약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자 백삼십 구호가 이십삼 호를 향해 돌아섰다. 그러자 두 소년은 서로 좌우측에 벽을 둔 채 마주 보았다.
 '이제 이겼다. 좌측으로 파고들지는 않을 거야. 분명 우측을 노리겠지. 이십삼 호가 우측으로 움직이는 순간. 그 순간에 공격한다.'
 백삼십 구호는 정면의 이십삼 호를 바라보며 내심 자신이 공격할 순간을 저울질했다.
 '바, 방법이 없을까?'
 이십삼 호는 자신의 앞에 웅크린 자세로 서서 자신을 보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짓는 백삼십 구호를 바라보았다.
 '배. 백삼십 구호는 자, 자신이 있어.'
 이십삼 호는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백삼십 구호의 눈에서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았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흘러 내렸다.
 '이, 이대로 주, 죽을 수 없어.'
 이십삼 호는 자신에게 조금씩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기 위해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그 때 이십삼 호의 눈에 우측을 힐끗거리며, 거리를 재는 듯한 백삼십 구호의 눈길이 보였다.
 '우, 우측을 노리고 있다. 내, 내가 우측을 빠져나가는 것을 노리고 있다.'
 이십삼 호는 백삼십 구호의 눈빛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몸을 가늘게 떨었다. 두려웠다. 그리고 무서웠다. 그 때 백삼십 구호가 조금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공허한 허공으로 울려 퍼지는 백삼십 구호의 발자국 소리가 섬뜩하게 들렸다. 그러자 이십삼 호는 몸을 격렬하게 떨었다. 한 눈에 보아도 두려움과 공포로 떠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백삼십 구호의 안면에 득의에 찬, 승리를 확신하는 낯빛이 스르르 떠올랐다.
 "멍청한 놈입니다."
 십삼 령은 이십삼 호를 보며 비웃었다. 그러자 팔 령은 눈에 이채를 띠며 이십삼 호를 바라보았다.
 "십삼 령. 과연 그럴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팔 령."
 "후후, 살수란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자네는 아직 모르는 모양이군."
 "네에?"
 십삼 령은 팔 령의 말에 안면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하지만 팔 령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무심한 눈으로 이십삼 호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이십삼 호가 움직였다.
 파 팟!
 그러자 백삼십 구호의 몸이 한순간 빠르게 우측으로 틀어지며, 한 발을 내디딤과 동시에 우측의 팔이 둥근 원을 밖으로 그렸다. 하지만 그 비수의 끝에는 이십삼 호는 없었다.
 "허억!!"
 백삼십 구호는 단말마의 음성과 함께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눈에 이십삼 호가 자신의 좌측으로 파고드는 것이 보였다. 백삼십 구호는 재빨리 몸을 틀며 내지른 우수를 거두어 들였다. 그 순간 이십삼 호는 우측 발로 힘껏 벽을 박차고 있었다.
 파 팟!
 이십삼 호는 우측 발로 벽을 박차고 백삼십 구호를 향해 자신의 몸을 허공으로 날렸다. 그러자 그 순간 백삼십 구호가 몸을 낮춘 채 빠르게 우측의 비수를 내찔렀다.
 쉿--!
 이십삼 호는 자신의 아래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비수를 느끼며, 이내 비수를 역수를 돌려 잡아, 백삽십 구호의 좌측 어깨를 빠르게 내리찍었다.
 푹. 푹.
 "크-아악!"
 털썩.
 떼구루루.
 이십삼 호는 백삼십 구호의 어깨를 빠르게 두 번 내리찍고, 이내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급히 자신의 몸을 굴렸다. 그 사이 백삼십 구호는 좌측 어깨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급히 이십삼 호를 향해 몸을 틀었다.
 후-다닥!
 이십삼 호는 급히 일어나며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보던 십삼 령의 눈가에 놀란 눈빛이 스쳤다. 그런 십삼 령의 귀로 팔 령의 음성이 들렸다.
 "봤나? 살수는 무공으로 상대를 상대하지 않아. 무공보다는 이게 먼저야."
 팔 령은 자신의 뒤에 있는 십삼 령을 보지도 않은 채, 자신의 우수의 검지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를 툭툭 쳤다.
 "상대가 생각하는 대로 끌려 다니는 살수라면. 일찌감치 죽는다네. 상대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것이 바로 살수네. 잘 보아두게. 좀처럼 보기 힘든 재미있는 광경이니."
 "예에!!"
 십삼 령은 팔 령의 등을 보며 내심 욕 찌꺼기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을 무시하며, 흡사 가르치는 듯한 음성을 흘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놈. 이십삼 호는 정말 타고난 살수의 본능 같은 것을 가지고 있을 지도·········.'
 십삼 령은 팔 령의 어깨 너머로 이십삼 호를 보며 두 눈가에 감탄한 듯한 눈빛을 반짝였다.
 "크-으으·········이십삼 호. 으- 드드득!!"
 백삼십 구호는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몸을 잔뜩 움츠린 이십삼 호를 보며 이를 갈았다.
 "어, 어쩔 수 없었어. 나, 나는 사, 살고 싶어."
 이십삼 호의 검은 눈동자에 깊은 욕망이 엿보였다. 단지 살고 싶다는, 죽기 싫다는 강한 생의 집착이 엿보였다.
 "비, 빌어먹을·········나, 나도 마찬가지란 말이야 아-----!!"
 타 탁.
 백삼십 구호는 이십삼 호를 바라보며 일갈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십삼 호를 향해 몸을 날렸다.
 
 
 쉬-이잇!
 백삼십 구호의 움직임은 빨랐다. 한 순간 이십 삼호의 면전으로 쇄도했다. 백삼십 구호는 이십삼 호를 향해 전력으로, 비수를 쥔 손을 뻗었다. 그러자 이십삼 호는 순간 멈칫했다.
 "흑-!"
 무섭다!!
 자신을 노려보는 백삼십 구호의 눈이 두렵기 그지없었다. 자신을 죽이고자, 그 자신이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 찬 눈빛이 무서웠다. 백삼십 구호의 살안(殺眼)은 순간 이십삼 호를 얼어붙게 했다. 그 사이 백삼십 구호는 빠르게 이십 삼호의 목젖을 향해 비수를 찔러 갔다.
 '다, 다가온다.'
 이십삼 호의 눈에 자신을 향해 비수를 찔러오는 백삼십 구호의 모습이 들어왔다. 백삼십 구호의 모습은 느리게 이십삼 호의 눈으로 파고들었다.
 '피, 피해야·········.'
 이십삼 호는 자신의 향해 다가오는 섬뜩한 비수의 끝을 보고, 머리에 피해야 한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무서움으로 몸은 굳어져 있었다. 그 사이에도 백삼십 구호의 비수는 자신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이, 이대로는 죽는다.'
 이십삼 호는 겁에 질려 다급히 자신의 몸에 명령했다.
 '우, 움직여--. 제에발·········.'
 하지만 몸은 이십삼 호의 의지에 등을 돌렸다.
 "응?"
 팔 령은 백삼십 구호의 움직임에 몸이 굳은 듯 멍하니 선 이십삼 호를 보며, 눈가에 의아한 눈빛을 띠었다.
 '죽겠군.'
 십삼 령은 내심 이십삼 호를 보며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이십삼 호는 천천히 몸을 떨며 자신의 좌수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입으로 좌수를 가져갔다.
 꽈-아악!!
 순간, 팔뚝을 파고드는 이빨로 인해 좌수의 팔뚝을 타고 고통이 일시에 뇌리로 치달았다. 그 순간 이십삼 호는 다가오는 백삼십 구호의 비수를 피해, 백삼십 구호의 좌측으로 몸을 튕기듯이 날렸다.
 휙-!!
 이십삼 호가 백삼십 구호의 좌측을 향해 몸을 날린 순간. 백삼십 구호의 비수가 이십삼 호의 발목을 스쳤다.
 사-악!
 낮고 섬뜩한 소리와 함께 가느다란 피 줄기가 허공에 뿌려졌다. 그러자 한 조각 베어진 천 자락이 허공에 나풀거렸다.
 "크-으으으·········."
 이십삼 호는 발목이 시큰거리며 고통이 엄습하자. 이내 바닥을 구르며 신음성을 흘렸다.
 떼구루루.
 이십삼 호는 몸을 바닥에 급히 굴려 다가온 백삼십 구호를 피하려고 했다. 동시에 백삼십 구호와 거리를 벌리려 했다.
 "씨바알--!!"
 백삼십 구호는 욕설과 함께 자신의 우측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진각을 행하듯이 우측 발에 힘을 주어 바닥을 찍었다. 그와 동시에 몸을 좌측으로 회전하며, 바닥을 구르는 이십삼 호를 향해 몸을 날렸다.
 휘-익!
 백삼십 구호는 자신의 몸을 날려, 몸 전체로 허공에서 이십 삼호를 덮쳤다.
 빙글!
 순간, 백삼십 구호의 손에 쥐여진 비수가 회전했다. 비수는 섬뜩한 날을 아래로 향하며 그대로 이십삼 호를 찍어갔다.
 쉿!
 짧은 파공음이 허공에서 아래로 향하자. 이십삼 호는 자신의 등 쪽으로 섬뜩한 느낌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푸-욱!
 "크-아아악!!"
 이십삼 호는 자신의 등으로 파고드는 비수가 일으키는 고통에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몸을 뒤집으며 두 발로 거칠게 자신의 위에서 덮친 백삼십 구호를 걷어찼다.
 퍽! 퍽! 퍽!
 "큭·········!"
 백삼십 구호는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을 걷어차는 이십삼 호의 필사적인 발길질에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순간, 가슴과 배를 이어주는 명치에 우연히 이십삼 호의 발이 와 닿았다.
 퍽!!
 "커-억!"
 백삼십 구호는 순간 숨이 막히며 호흡이 끊기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이십삼 호의 등에 꽂힌 비수를 잡은 손을 놓았다. 그러자 이십삼 호는 뒤로 바닥을 기어갔다. 그러자 바닥으로 등에서 피가 흥건히 배어나오며, 긴 혈선을 그렸다. 그 사이 이십삼 호의 발길질에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호흡을 가다듬던 백삼십 구호가 급히 이십삼 호의 뒤를 쫒았다.
 휙!!
 순간, 이십삼 호의 손에 쥔 비수가 백삼십 구호를 향해 위협하듯이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백삼십 구호는 멈칫했다. 자신의 손은 빈손이었기 때문이다.
 "허, 헉!"
 이십삼 호는 거친 숨을 토하며, 등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그러자 팔 령이 그런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비릿한 음성을 흘렸다.
 "멍청한 놈. 제법 비수를 다루는 놈이라, 한 수가 있을 줄 알았더니. 저렇게 어이없게 손에 든 무기를 잃어버리다니."
 십삼 령은 팔 령의 음성에 슬쩍 그의 눈치를 살피며, 아래에 있는 백삼십 구호를 향해 눈을 돌렸다.
 '놈. 당황하고 있구나.'
 십삼 령의 눈에 가늘게 몸을 떠는 백삼십 구호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 백삼십 구호는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다급한 기색을 내보이고 있었다.
 "승부는 났군."
 그런 십삼 령의 귀로 팔 령의 냉혹한 음성이 들렸다.
 "이, 이십삼 호."
 백삼십 구호는 바닥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이십삼 호를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으으으·········."
 이십삼 호는 등에서 뇌리를 향해 파고드는 고통에 신음성을 흘렸다.
 "나, 나는·········."
 백삼십 구호의 음성이 떨렸다. 그와 함께 백삼십 구호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그런 백삼십 구호의 눈에, 마침내 바닥에서 일어선 이십삼 호의 모습이 보였다. 이십삼 호는 고통으로 안면을 있는 대로 다 일그러뜨렸다.
 "·········."
 이십삼 호는 말없이 자신의 앞에 선 백삼십 구호를 응시했다.
 "나, 나···나도 어, 어쩔 수 없었어. 나, 나도 살고 싶었어."
 백삼십 구호의 음성이 떨렸다. 그러자 이십삼 호의 눈가가 망설임으로 파르르 떨렸다. 자신의 등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생각하면 그대로 앞에 선 백삼십 구호를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백삼십 구호의 음성에 망설여졌다. 자신 또한 백삼십 구호와 같은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 팔 령의 음성이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들렸다.
 "죽여라·········이십삼 호. 죽여라--."
 팔 령의 싸늘한 살기가 느껴지는 음성이 재차 이십삼 호를 다그쳤다.
 "놈을 죽여라-. 이십삼 호. 그렇지 않으면 네가 죽는다."
 이십삼 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자 백삼십 구호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흐흑! 이, 이십삼 호. 사, 살려줘--. 제발·········."
 이십삼 호는 몸을 비틀거리며 천천히 백삼십 구호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두려움에 사로잡힌 백삼십 구호는 뒤로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으-흐흑! 이, 이십삼 호."
 이십삼 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이십삼 호는 앞으로 조금씩 다가가고 있었다. 그러자 순간 백삼십 구호가 공포에 사로잡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앞으로 뛰어가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아마도 도망칠 곳을 찾는 듯 했다.
 "버러지 같은 놈."
 팔 령은 백삼십 구호의 그런 모습에 경멸을 하는 듯한 음성을 흘렸다. 그리고 이십삼 호를 향해 다시 소리쳤다.
 "빨리 죽여라-. 이십삼 호. 어차피 놈은 죽는다. 놈에게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는 고통 없이 빨리 죽이는 것이다."
 이십삼 호는 자신의 귀에 들리는 팔 령의 음성에 손이 떨렸다.
 '주, 죽여야 해. 아, 안 그러면 저자들이 날 죽일 거야.'
 이십삼 호는 벽에 등을 기대고 자신을 눈물 젖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백삼십 구호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나 나나 어차피 이 안에서는 누군가에게 죽어. 무슨 말인지 알지."
 백삼십 구호는 이십삼 호의 말에 수긍하는 듯한 눈빛을 띠었다. 하지만 살고 싶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은 살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찼다.
 털썩!
 백삼십 구호는 그 자리에 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이십삼 호를 보며 손바닥을 싹싹 비볐다.
 "사, 살려 줘. 으응! 이, 이십삼 호. 제발. 흐흑!"
 이십삼 호는 처절 하리 만큼 살고자 하는 백삼십 구호의 말에 심하게 동요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보던 팔 령이 가혹한 음성을 흘렸다.
 "앞으로 백을 세겠다. 그 안에 백삼십 구호를 죽이지 못하면, 이십삼 호. 너 또한 백삼십 구호와 함께 죽는다. 십삼 령---."
 "예. 팔 령."
 "숫자를 세어라--."
 "네. 하나·········둘·········셋·········네·········."
 십삼 령은 빠르게 숫자를 세어 나갔다. 그러자 이십삼 호의 눈가에 다급한 눈빛이 떠올랐다.
 타타탁!!
 이십삼 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와 함께 허공을 가르는 한 줄기 섬전 같은 것이 나타났다. 이십삼 호의 우측 발이 앞으로 뻗어나가며 우측 팔목과 일직선상에 놓인 비수가 한 순간 백삼십 구호의 목을 파고들었다.
 푹!!
 살을 파고드는 짧은 파육음과 함께 백삼십 구호의 눈이 부릅떠졌다.
 "끄르르륵!!"
 백삼십 구호는 두 손으로 자신의 목을 파고든, 이십삼 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가래가 끓는 듯한 소리를 흘렸다.
 "미, 미안해. 나, 나는 살고 싶어."
 이십삼 호의 나지막한 음성이 백삼십 구호의 귀에 스며들었다. 그 와중에도 십삼 령의 숫자를 세는 음성을 계속 이어졌다.
 "서른 둘·········서른 셋·········서른 넷·········."
 이십삼 호는 백삼십 구호의 양손에 붙잡힌 우측 팔을 재빠르게 비틀었다.
 휘-익!
 "컥!!"
 쑤욱!
 이십삼 호는 팔을 비틈과 동시에 뒤로 비수를 빼내었다.
 촤-아악!
 백삼십 구호의 목에서 섬뜩한 선홍 빛깔이 피가 안면에 튀었다. 이십삼 호의 손은 덜덜 떨렸다. 그 떨림은 이내 전신을 타고 흐르며, 한 줄기 전율 같은 느낌을 뇌리로 전했다.
 쿠-웅!
 묵직한 소리와 더불어 백삼십 구호의 몸이 앞으로 쏠리며, 이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러자 이십삼 호의 귀에 팔 령의 음성이 들렸다.
 "수고 했다. 이십삼 호. 너에게 이틀간의 휴식과 특식을 약속한다. 십삼 령-."
 "네. 팔 령."
 "내 말대로 이십삼 호에게 특식을 주고. 이틀 간 푹 쉬게 해라."
 "네. 알겠습니다. 팔 령."
 십삼 령이 고개를 숙이자. 팔 령은 잠시 이십삼 호를 일별했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이내 사라져 갔다. 그러자 십삼 령이 고개를 돌려 이십삼 호를 바라보았다.
 "운이 좋았구나. 이십삼 호. 거처로 돌아가 쉬어도 좋다."
 십삼 령의 말과 함께 한 쪽 벽에 작은 입구가 스르르 나타났다. 그러자 이십삼 호는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그 입구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혐오스럽다. 이십 삼호는 자신이 혐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백삼십 구호가 자신에게 살려 달라던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신은 지금 잘 구워진 닭을 양손에 쥐고 입으로 뜯어 먹고 있었다.
 "흐흑! 우걱····우물, 우물."
 눈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도 입으로는 닭고기를 씹고 있었다. 얼마 만에 먹는 고기인 줄 몰랐다.
 맛있다!!
 입에서 씹히는 잘 구워진 닭고기의 맛이 신경을 타고 뇌리로 전달되었다. 맛있다는 그 느낌이 뇌리에 전달이 되면서도 백삼십 구호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눈으로 눈물이 흐르지만 입으로는 닭고기를 뜯으며 맛있다고 느끼는 자신이 너무나, 너무나 혐오스럽기 짝이 없었다.
 "사, 살아야······쩝쩝! 흐-으흑!"
 이십 삼호는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 잘 알았다. 그간 숱하게 보아온 것이 죽어가는 자신과 같은 아이들이었다. 이십 삼호는 닭고기를 뜯어 먹으며 소매로 자신의 눈가의 눈물을 닦았다.
 "새·········생각하지 않을 거야·········절대 생각하지 않을 거야."
 이십 삼호는 내심 스스로에게 다그쳤다. 생각하지 마라. 생각하면 다음에는 주저하게 된다. 죽은 백삼십 구호의 망령을 떨쳐버리지 못하면 다음에는 자신이 죽게 되리라는 것을 직시했다.
 "냠냠, 우물····우물."
 이십 삼호는 머리에서 백삼십 구호를 지우려고 했다. 그런 탓에 일부러 닭고기를 먹는 것에 집중했다. 그렇게라도 백삼십 구호에게서 벗어나야 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말이다.
 "맛있어·········흐흑! 맛있어. 너무 맛있단 말이야----."
 이십 삼호는 자신에게 꾸준히 닭고기가 맛있다고 각인시켰다. 그리고 닭고기를 뜯는 것에 집중했다.
 
 "후후, 제법이지 않나?"
 팔 령은 자신의 옆에 선 십삼 령을 향해 낮은 음성을 흘렸다. 그러자 십삼 령이 벽에 난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제법입니다. 팔 령. 살수라면 자신이 죽인 대상에 대한 기억은 빨리 지우는 것이 낫지요. 그래야 다음 청부를 맡아 행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맞아. 어설프게 자신의 감정에 동요된다면 살수로서 존재 가치가 없지. 그런 면에서 보면 저 이십 삼호는 제법 살수의 티가 나지."
 팔 령은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 팔 령의 귀에 십삼 령의 음성이 들렸다.
 "팔 령. 조만간 아이들은 연무지관에 듭니다. 물론 어느 정도 수준까지 무공을 익힐 때까지 일체 생사투나 시험은 없습니다만. 솔직히 이십 삼호의 자질은 무공을 익히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흐흐·········평범하다. 이 말인가?"
 "네. 팔 령. 이미 목표로 했던 백팔십 명의 살수 후보는 어느 정도 가려졌습니다. 그 아이들 대부분이 선천적으로 무공을 익히기에 적합하거나, 살수에 대한 자질이 탁월한 아이들입니다."
 "모두 일천 명."
 팔 령의 두 눈에 섬뜩한 안광이 번쩍거렸다. 그러자 그 눈빛을 본 심삼 령이 순간 몸을 흠칫했다.
 "그 중에서 모두 백팔십 명이 선발된다. 흐흐, 하지만 오직 단 열 명만이 최후에 살아남게 된다. 오직 열 명의 차대 십혼살이."
 팔 령은 말과 함께 다시 한 번 석실 안의 이십 삼호를 향해 눈을 돌렸다.
 "이십 삼호. 네가 과연 그 열 명 중의 하나가 될지. 아니면, 중간에서 도태될지. 그 모든 것은 네가 하기 나름이다. 클클클!"
 십삼 령은 내심 팔 령의 말에 불복했다.
 '무공은 자질이다. 무에 선천적인 자질을 타고나지 않으면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우리 살막의 모든 역량이 총 동원된. 이른바 살수를 죽이는 살수. 살사(殺死)의 관문은 통과하지 못한다.'
 순간, 팔 령이 십삼 령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는지 나직한 음성을 흘렸다.
 "심삼 령."
 "네. 팔 령."
 "살수는 말이지. 타고 나는 것이 아니야. 살수는 만들어지고 다듬어지는 것이다. 이른바 창조라는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면서 사람을 죽일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놈은 없다. 명심해 두도록 하게. 내 평생에 걸쳐 깨달은 것 중의 하나이니깐."
 팔 령은 말과 함께 몸을 돌려 어두운 암도를 천천히 걸어갔다.
 뚜벅. 뚜벅.
 암도를 걸어가는 팔 령의 등을 바라보며 심삼 령은 두 눈가에 매서운 안광을 번쩍였다. 그리고 석실을 한 번 흘낏거린 후 이내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헉, 헉! 차, 찾아야 해. 배, 백삼십 구호의 그 빠른 몸놀림과 손놀림의 비밀을."
 이십 삼호는 필사적이었다. 전날 자신과 싸웠던 백삼십 구호의 빠른 몸놀림과 손에서 비수가 춤을 추는 것 같았던 그 손놀림을 찾고자 했다.
 휘-익!
 이십 삼호는 자신의 발을 빠르게 내디디며 손에 든 비수를 앞으로 찔렀다.
 쉿!
 "아, 아니야. 백삼십 구호는 이보다 더 빨랐어."
 이십 삼호는 이내 다시 자신이 내디딘 발을 거두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발을 살짝 들며 앞으로 내디뎠다.
 휘-익!"
 "아니야·········이게 아니야--. 으-아아아."
 휘-익!
 쨍그랑!
 이십 삼호는 자신의 발의 움직임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비수를 석실을 벽에 집어던지며 양손으로 머리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석실의 바닥에 주저앉으며 고함을 쳤다.
 "아니야. 이게 아니야. 흐- 어엉엉!! 흑! 차, 찾아야 해. 찾아야 살 수가 있어 어----."
 이십 삼호는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전신을 거세게 떨었다. 그런 이십 삼호의 눈에 귀기라고 해도 좋을 섬뜩한 안광이 번뜩였다.
 "나는 살 거야. 절대 죽지 않을 거야. 살래. 살고 싶어. 흐-어엉엉!!"
 이십 삼호는 주저앉은 채 자신의 머리를 석실의 바닥에 가져다 대었다.
 무서웠다!!
 자신도 언젠가는 백삼십 구호처럼 그렇게 죽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살고 싶다!!
 그 욕망이 이십 삼호를 채찍질했다.
 "죽기 싫어·········죽기 싫어·········죽기 싫어·········."
 이십 삼호는 끊임없이 되 뇌였다. 그리고 이를 악물며 천천히 다시 일어섰다. 그런 이십 삼호의 눈에 짐승의 눈처럼 반짝이는 눈빛이 어렸다.
 "다, 다시·········사, 살려면 바, 반드시 백삼십 구호의 그 빠른 움직임의 비밀을 찾아야 해."
 이십 삼호는 다시 처음부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이십 삼호의 몸이 일으키는 소리가 석실에 나직이 울려 퍼졌다.
 
 
 한 소년이 자신의 앞에 있는 하얀 짐승을 노려보고 있었다. 짐승은 온몸이 눈처럼 하얗고 그 머리는 마치 호랑이 같았다. 그러자 소년의 머리 위에서 차분한, 감정의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 음성이 들렸다.
 "팔십 구호. 눈앞에 있는 놈은 설산에서만 서식하는 설표다. 설산에서는 저 놈을 당해낼 놈이 없다. 범이라 할지라도 눈 속에 숨어 공격하는 아주 교활한 놈이다. 죽여라--. 시각은 일다경이다. 시간을 넘기면 네놈은 죽는다."
 소년은 귀가에 들리는 그 음성에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그리고 입가에 냉혹해 보이는 차가운 음성을 흘렸다.
 "크크·········사령. 날 걱정하는 거요. 아주 고마운 말씀이구려."
 사령이란 불린 인영은 아래에 선 소년의 음성에 순간 움찔했다. 그런 사령의 두 눈에 언뜻 두려움이란 감정이 스쳤다.
 '개새끼. 비록 내가 인정한 놈이지만. 저놈을 보고 있자면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올라.'
 사령은 자신이 낙점한 팔십 구호를 보며 살인에 대한 충동이 이는 것을 가까스로 자제했다. 그가 파악한 팔십 구호는 선천적으로 살수가 되기에 적합한 심성과 자질을 타고 났다. 그런 까닭에 사령은 팔십 구호에 대한 작은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자칫 자신이 죽을 지도 모른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크-아앙!"
 설표가 어슬렁거리다가 순간 펄쩍 몸을 허공으로 띄웠다. 하지만 팔십 구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차가운 두 눈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설표를 노려보았다.
 '흐흐········보인다.'
 팔십 구호는 자신의 눈에 설표의 모든 움직임이 그대로 다 보이며 느껴졌다. 그것은 선천적으로 팔십 구호가 타고난 두 눈 덕분이었다. 그랬기에 팔십 구호는 다른 수많은 아이들을 재치고 살아남았다. 그리고 마지막 시험을 지금 치르고 있었다.
 스윽.
 팟!
 팔십 구호는 자신의 몸을 아래로 깊이 낮추었다. 그리고 재빨리 설표의 아래로 몸을 날렸다.
 번----쩍------!
 팔십 구호는 설표의 아래를 스치며 맞은편 바닥에 한 손을 지지대 삼아 몸을 굴렀다. 그리고 그 힘의 여력을 이용해 재빨리 몸을 일으켜 뒤돌아섰다.
 꽈앙!
 설표의 몸이 한 순간 바닥으로 떨어졌다.
 "크-아아앙!!"
 설표는 자신의 배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울부짖었다. 바닥에 쓰러진 설표의 배에는 가는 혈선이 보였다. 그리고 그 가는 혈선에서 한 두 방울의 피 방울이 조금씩 새어나왔다.
 싸악!
 팔십 구호는 자신이 든 비수에 흐르는 가는 설표의 피를 혓바닥으로 천천히 핥았다. 그리고 설표를 노려보았다. 그런 팔십 구호의 눈은 마치 백안(白眼)처럼 차가웠다.
 설표는 몸을 꿈틀거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팔십 구호가 안긴 고통에 화가 나 두 눈에 붉은 빛을 줄기줄기 내뿜었다.
 "흐흐·········."
 팔십 구호는 그런 설표를 뚫어지게 살폈다. 그러자 설표의 척추를 중심으로 가죽 밖으로 꿈틀거리는 그 움직임이 한 눈에 다 들어왔다.
 '와라-. 네놈 같은 놈들이 어떻게 사람을 공격하는지. 그간 숱하게 보아 왔다. 허공으로 도약하는 순간이 가장 큰 약점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팔십 구호는 그간 다른 아이들과 함께 늑대와 곰 그리고 호랑이까지 혼자나 아니면 다수의 무리를 지어 상대해 보았다. 그 경험으로 팔십 구호는 설표의 약점이 배라는 것을 알았다. 무릇 네 다리로 걷는 척주 동물에게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배다. 그런 탓에 야성에서 상대에게 졌음을 알리는 수단으로 가장 큰 약점인 배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크르릉-!"
 설표는 낮게 울음을 토했다. 그러자 다시 팔십 구호의 주변을 어tm렁 거리며 공격의 기회를 노렸다.
 "덤벼."
 팔십 구호는 설표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는 듯한 기세를 흘리며 차츰 자신의 뒤에 있는 벽으로 조금씩 물러섰다. 그런 팔십 구호의 움직임을 설표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듯 보였다.
 "크-르르릉!!"
 설표는 팔십 구호의 자신을 도발하는 듯한 모습에 성이 나는지 천천히 다가서고 있었다.
 "알아·······팔십 구호. 저 놈은 설표를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알아. 틀림없어."
 사령은 조금씩 뒤로 물러서며 설표를 도발하는 팔십 구호의 모습에 불안했다. 뭔가 섬뜩한 것이 자신의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런 사령의 손가락이 허리춤에서 가늘게 떨렸다.
 "크-아앙!!"
 순간, 설표가 허공으로 도약했다. 그러자 팔십 구호는 어느새 자신의 등 뒤에 벽을 놓고. 급히 몸을 아래로 스르르 낮추며 몸을 웅크렸다. 그러자 설표는 갑자기 나타난 벽에 당황하는 듯 했다.
 쾅! 쾅!
 설표의 양 앞발이 벽에 박힐 듯이 부딪쳤다. 순간, 아래에 있던 팔십 구호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설표의 목덜미 바로 그 밑을 향해, 두 손으로 비수를 잡고 젖 먹는 힘까지 쥐어짜며 찔렀다. 그러자 팔십 구호가 몸을 튕기는 듯한 힘과 팔십 구호가 실은 힘이 일직선으로 설표의 목덜미 바로 아래를 향해 밑에서 쏟아 올랐다.
 푸-우우욱!!
 비수가 설표의 목덜미 깊숙이 파고드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크-와아앙앙!!"
 설표의 고통스런 울부짖음이 뒤이어 들리자. 비수의 끝에 느껴지는 설표의 생명의 맥박에 짜릿한 흥분과 희열이 손목을 타고 전신으로 스며드는 듯 했다.
 휘-리릭!
 "크-아앙!!"
 푸 푹!
 팔십 구호는 비수를 잡은 양손으로 비수를 뒤틀었다. 그러자 설표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울었다. 그러자 팔십 구호는 비수를 자루까지 깊숙하게 설표의 목덜미로 밀어 넣었다.
 "크-아아아앙앙!!"
 설표는 자신의 목 아래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참기 어려운지 비명 같은 울음소리를 흘렸다. 그러자 팔십 구호가 설표의 목 아래에 자신의 머리를 바짝 갖다 대며 중얼거렸다.
 "흐흐·········새끼. 그간 우리들을 배불리 쳐 먹었지."
 팔십 구호의 눈가에 서늘한 차가운 눈빛이 솟구치며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천천히 떠올랐다.
 
 
 "으으으·········."
 사령은 팔십 구호가 흘리는 음성을 다 듣고 있었다. 팔십 구호의 음성을 듣는 순간 사령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한 순간 몸이 급격히 차가워지며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파, 팔십 구호. 저, 저놈 설표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우, 우리들에게 하는 말이다.'
 사령은 팔십 구호의 음성에 전신에 소름이 쫙 돋는 것을 느꼈다.
 '위, 위험한 놈이다.'
 사령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팔십 구호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감당하기에 너무 버거운 팔십 구호였다.
 
 
 "헉, 헉!"
 이십 삼호는 거친 숨을 쉬고 있었다. 온몸이 땀에 절어 천근만근처럼 무거웠다. 그럼에도 쉬지 않았다. 살아남으려면 움직여야 했다. 움직여야 단 일할이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휙-!
 스윽!
 한 발을 내딛자 몸이 종전보다 빨라졌다. 이십 삼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비, 비밀은 바, 발끝이었어."
 이십 삼호는 작은 단초를 하나 발견했다. 지금까지 얼마나 반복적으로 발을 앞으로 내디뎠는지 모른다. 발바닥 전체를 이용하고, 발꿈치를 이용하며, 심지어 발가락을 이용해서 발을 내디뎌 보았다. 그리고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드디어 몸의 움직임이 빨라지는 단초를 잡았다.
 "하하·········하하핫----!!"
 기뻐하는 웃음소리가 석실에 메아리쳤다. 그리고 또 다시 이십 삼호의 발은 앞으로 내디뎌졌다. 다리는 가늘게 경련하고 있었다. 얼마나 발을 내디뎠는지. 다리는 통증과 함께 경련으로 이상이 있을지도 모름을 경고했다. 하지만 이십 삼호에게 그것은 자신이 살아 숨 쉰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살 수 있어. 나, 나는 살아남을 수 있어."
 자신이 살 수 있다는 아주 가는 희망의 한 끝을 부여잡고.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휙!
 휙!
 석실에 이십 삼호가 발을 앞으로 내딛는 소리가 울렸다. 그런 이십 삼호를 심삼 령은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징그러운 놈이다. 마치 살고자 꿈틀대는 벌레처럼, 그것이 더 화가 난다. 죽어서도 벌써 죽어야 했을 놈인데. 생존!! 살아남는 다는 것 그 하나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버러지 같은 놈.'
 십삼 령의 이십삼 호를 바라보는 눈은 경멸과 그가 예상한 것을 벗어나는 것에 화였다. 십삼 령은 언제부터인지 이십삼 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이 꺼려하는 팔 령이 이십삼 호에게 관심을 주기 시작했을 때부터 였던 것 같았다.
 "빌어먹을 새끼들."
 십삼 령은 팔 령과 이십 삼호를 싸잡아 욕설을 내뱉었다. 그에게는 둘 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이었다. 십삼 령의 눈가에 스물 스물 살기라는 이름의 차가운 감정이 스며들고 있었다.
 "이십 삼호."
 십삼 령의 아주 낮은 음성이 천천히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며 허공으로 사라져갔다. 그런 십삼 령의 눈에 살고자 몸부림치는 이십삼 호라는 한 소년의 결렬한 움직임이 보였다.
 
 
 * 죽음의 공포 *
 
 
 깊고 깊은, 심연의 침묵이 한 밀실에 흘렀다. 그 암흑의 검은 심연에 모두 열 명의 복면인이 앉았다. 그들의 눈에는 아무런 빛도 감정도 없었다. 오로지 존재!! 그 자체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원형의 석탁에 둘러앉아 침묵했다. 머리 위에는 어린아이 머리만한 야명주가 탁하고 흐린 빛을 아래로 뿌렸다. 그러자 야명주의 불빛 아래에 자리한 인영 중 소매에 일(一)자가 수놓인 복면인이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모두 일 천이었다."
 복면인의 입에서 새어나온 음성에 다른 아홉 명의 복면인들의 복면이 순간 일그러지듯이 구겨졌다. 그러자 복면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웃는다!
 그들은 그렇게 웃고 있었다. 자신들이 기대하고 원한 것을 마침내 손에 쥐었다.
 "십 령."
 "네. 일령."
 "모두 몇 명인가?"
 "백팔십 명입니다. 하지만 세 아이가 남았습니다."
 소매에 열십(十)자가 새겨진 복면인의 말에 다른 아홉 명의 복면인들이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묻는 것이다.
 십 령이라 지칭된 복면인은 일령을 보며 일체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이령께서 십육 호를 아직 내놓지 않고 계십니다. 아울러, 사령께서도 팔십 구호를 그대로 방치하고 계십니다. 또한, 팔 령께서도 이십 삼호에게 특식과 함께 이틀간의 휴식을 주셨습니다."
 십 령의 말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다른 여섯 명의 복면인들이 짙은 살기를 흘렸다.
 바로 분노였다.
 살기는 이내 밀실의 공간을 장악한 채 세 복면인을 압박했다. 그러자 일령이 무심한, 차가운 음성을 낮게 흘렸다.
 "이령. 설명을."
 그러자 소매에 이(二)자가 새겨진 복면인이 일체의 미동도 없이 입을 열었다.
 "아까워서 입니다."
 "좀 더."
 일령은 이령의 설명이 미흡하다고 여겼다.
 "십육 호는 무공에 있어서 가히 천고의 기재라 할 수 있습니다. 백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무재입니다."
 "그 이유는?"
 "아이들에게 공통적으로 가르친 비수법을 십육 호는 모두 세 가지 무공으로 재창출 했습니다."
 이령의 음성이 나온 순간. 다른 아홉 명의 복면인들이 쓴 복면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러자 일령이 한 손을 들며 이령에게 말없이 눈빛을 보냈다.
 "십육 호는 비수법을 던지는 비도법. 그리고 자신의 옷을 찢어 꼬아 만든 줄로 비수를 묶어 비추법을. 또한, 비수를 무릎과 팔꿈치에 숨겨 공방시 접근 전용의 암기법으로 사용했습니다."
 일령은 이령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른 여덟 명의 복면인들은 침묵했다. 일절 움직임이 없었다.
 "사령."
 "팔십 구호는 위험한 반골입니다."
 스스스슥.
 소매에 사(四)자가 새겨진 복면인의 말에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밀실에 빠르게 퍼져갔다.
 항의.
 다른 복면인들은 사령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사령은 눈동자에 옅은 두려움을 떠올렸다. 순간, 다른 아홉 복면인은 그 모습에 의문이 든 눈빛을 번쩍였다. 사령은 다른 아홉 복면인의 무언의 재촉에 빠르게 입을 열었다.
 "팔십 구호는 타고난 살수입니다. 흔히 우리 살수를 가리켜 비정, 잔혹, 무정한 존재라고 합니다만. 팔십 구호는 거기에 더 붙여 잔인함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사령은 말과 함께 두 눈에서 섬뜩한 살의를 흘리며 일령을 똑바로 응시했다.
 "제거를."
 스으으.
 스 슥.
 다른 여덟 명의 복면인들의 손이 올라갔다. 하지만 일령은 미동하지 않았다.
 "팔십 구호. 통과. 제거 불허한다."
 사령은 일령과 다른 여덟 명의 복면인들이 반대하자. 이내 절망적인 눈빛을 띠며 다시 냉정한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그 때였다. 미리 말을 하기도 전에 팔 령이 입을 열었다.
 "이십 삼호는 생존! 그 하나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특식과 이틀의 휴식을 부여한 것은, 비수의 사용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인 백삼십 구호를 제거했기 때문입니다."
 "그 외 특이 사항은?"
 "없습니다. 단지 있다면. 살기 위해 발버둥 친다는 것 뿐."
 일령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흥미.
 일령은 팔 령의 말에 강한 흥미를 느꼈다. 비수의 사용에 천부적인 다른 아이를 죽인 이십 삼호가 단지 살기 위해 발버둥 친다는 것. 그 자체가 흥미를 끌었다.
 "십 령."
 "네."
 "백팔십 명과 세 아이가 남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연무 과정에 들어갈 백팔십 명의 아이 뿐이다. 백팔십 명 중 최하위 세 놈과 십 육호, 팔십 구호, 이십 삼호. 이 세 아이와 생사투를 시켜라. 살아남는 아이가 백팔십 명의 아이들 속에 속하게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일령은 그 말을 내뱉고 침묵했다. 그런 일령의 전신에서 검은 기류가 스물 거리며 피어올랐다. 그것은 살아 있는 듯. 연기라도 되는 듯. 일종의 용연기공(庸煙氣功)이라도 되는 듯. 살아 움직였다.
 "십오 년이다. 적월사에게 우리 살막이 암흑의 뒤안길을 내 주고. 심연의 어둠속으로 몸을 숨긴지가."
 아홉 복면인은 일령의 말에 전신에서 차가운 살기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우리 살막의 십혼살이 막주를 잃고 다시 살막의 재건과 적월사의 말살을 위해, 살사의 관문을 만들고. 모두 일천의 아이들을 모은 지가."
 밀실에 그들 십 인의 복면인들의 무형의 살기가 허공에 휘몰아치며 거센 압박감을 사방으로 뿌렸다.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 십이월!!! 그 최강의 열두 살수를 죽일 수 있는. 살수를 죽이는 살수!! 새로운 살막의 십혼살을."
 일령은 두 눈동자에서 섬뜩한, 소름이 끼치는 듯한 눈빛을 흘리며 다른 아홉 복면인을 일일이 한 명씩 마주보았다. 그러자 그들 십 인의 복면인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
 
 쉿---!
 빠르다!
 순간, 이십 삼호의 몸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휘릭-!
 그리고 몸이 빙글 회전했다. 이십 삼호는 이내 발의 무게 중심을 발 뒤꿈치로 이동했다.
 슥----!
 이십 삼호의 몸이 뒤로 미끄러지듯이 밀려났다. 그리고 몸이 밑으로 살짝 숙여지더니. 이내 튕기듯 좌측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휘잇--!
 타 탁!
 이십 삼호는 발로 바닥을 차며 두 번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그리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왔다.
 "아, 알았다. 발의 빠른 움직임이 몸의 움직임을 좌우한다. 그리고 무게 중심의 빠른 이동과 발바닥의 굵은 살이 박히는 부분. 이 세 가지가 맞물릴 때. 몸은 빨라진다."
 이십 삼호의 입가로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이십 삼호는 그 자리에 서서 양발을 어깨너비로 편안하게 벌렸다.
 "후- 우웁!!"
 이십 삼호는 호흡을 가다듬고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한 쪽 팔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휙---!!
 그 순간 떨어뜨린 팔의 소매 자락에서 한 자루 비수가 떨어지며 곧바로 이십 삼호의 손바닥 안으로 스며들었다.
 휘리릭!
 그러자 이십 삼호는 재빨리 손을 위로 들며, 손바닥의 비수를 허공으로 튕겼다.
 텅--!
 비수가 허공으로 튀어 오르자 이십 삼호의 손바닥과 손이 비수의 자루를 연신 잡고 튕기며 돌렸다. 그에 따라 비수는 빠르게 회전하며 이십 삼호의 손목을 따라 돌고 이내 팔뚝을 타고 흘렀다. 이십 삼호는 가볍게 팔뚝을 위로 튕겼다. 그리고 비수의 자루가 아래로, 그 날이 허공으로 일직선이 되었을 때. 팔뚝을 뒤로 빼다. 이십 삼호는 팔뚝이 뒤로 빠지자 곧 손등으로 비수의 자루를 쳐, 비수를 자신의 앞으로 눕혔다.
 탁. 탁. 탁.
 순간, 이십 삼호의 손목이 빙글 한 바퀴 회전했다.
 빙그르르----!
 이십 삼호는 회전한 손바닥과 손목이 만나는, 살집이 두툼한 부분으로 빠르게 비수의 자루를 밀었다.
 쇄액--!
 비수를 섬뜩한 파공음과 함께 빠르게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리고 이십 삼호의 손가락 끝이, 나아가는 비수의 자루 끝부분을 톡 하며 쳤다.
 빙글--!
 비수수는 이내 나아가던 힘이 아래로 떨어지는 힘으로 바뀌었다.
 착-----!
 이십 삼호의 손바닥이 아래로 비수의 날이 떨어지는, 비수의 자루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이내 이십 삼호의 몸이 숙여졌다. 이십 삼호는 몸을 숙이며 그 자리에서 한 바퀴 회전했다.
 빙그르르--!!
 팩--!
 팩--!
 팩--!
 회전하는 이십 삼호의 손의 비수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를 일으켰다. 이십 삼호는 회전하는 힘을 모두 비수에 실으며 그렇게 다시 몸을 일으켰다.
 스슥!
 "후우웁--!"
 이십 삼호는 몸을 일으킨 후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런 이십 삼호의 두 눈에는 자신감과 함께 이제 자신은 살 수 있다는 희망이 보였다.
 "나는 백삼십 구호의 몸의 움직임을 따라 갈 수는 있어도. 그 비수의 움직임은 따라가지 못해. 내가 백삼십 구호를 죽일 수 있었던 것은 운과 백삼십 구호의 어깨를 먼저 공격했기 때문이야. 그래서 백삼십 구호의 비수의 움직임을 포기하고. 대안으로 찾은 것이 바로 변화!! 비수를 결코 손에 쥐지 않는다. 끊임없이 비수가 허공에서 노니는 것처럼. 튕기고. 밀며, 잡고, 돌린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변화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해. 그, 그래야 백삼십 구호의. 그 빠른 움직임을 대신할 수 있는 내 것을 얻을 수 있어."
 이십 삼호는 본능적으로 백삼십 구호의 비수의 그 빠른 움직임을 따라갈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찾고 또 찾고 또 다시 찾은 것이 바로 빠르다는 것을 대신하는 현란함.
 즉, 변화다.
 "사, 상대의 시야를 흔들어야 해. 그래서 내가 먼저 상대를 부상을 입혀야 해. 그, 그래야 상대가 날 쉽게 죽이지 못해. 그래야 내, 내가 상대를 쉽게 죽일 수 있어."
 이십 삼호는 누구이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하고. 또, 자신이 죽여야 하는 상대가. 이십 삼호는 두렵고 두려웠다.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죽는다.
 그 생존의 절대 법칙은 이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또한,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무섭고 두려웠다.
 '주, 죽여야 해. 내, 내가 살려면 죽여야 해.'
 이십 삼호는 삶에 대한, 살고 싶다는 욕구와 함께 누군가를 죽여야 자신이 살 수 있다는 사실에 차츰 살의(殺意)에 눈을 뜨고 있었다. 살고 싶다는 욕구가 불러온 살의.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는 공포. 이십 삼호는 자신 스스로를 세뇌하고 있었다.
 '죽여야 해···········죽여야 해···········죽여야 내가 살아···········내가 사, 살려면···········주, 죽일 거야.'
 공포와 두려움이 점차 인간의 감정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이십 삼호의 마음에 차츰 죽음에 대한 격렬한 공포가 자리 잡으며, 이십 삼호의 인성을 파괴하고 있었다.
 
 "후후, 결국 네놈도 변하는 구나. 두 눈에 옅은 살기를 드리우는 것을 보니···········크크크."
 팔 령은 작은 홈을 통해 살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죽이려는 이십 삼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런 팔 령의 입술 사이로 살소(殺笑)가 낮게 흘러 나왔다.
 "앞으로 네놈이 어떻게 변할지. 흥미진진하구나. 이십 삼호."
 팔 령은 다른 아이들처럼 살의를 띠어가는 이십 삼호를 보며, 앞으로 이십 삼호가 어떻게 살아남을 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자신을 포함한 살막의 십혼살이 원한 백팔십 명의 아이들은 이미 살의를 넘어서 살기를 품고 흘릴 줄 알았다.
 "다른 아이들에 비하면 네놈은 조족지혈이다. 단 일각도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더 재미있다. 이십 삼호. 네놈의 그 탁월한 생존 능력이 어떻게 표출될 지. 기대하는 바가 크다. 흐흐흐···········."
 팔 령은 입가에 한 줄기 섬뜩한 실소를 흘렸다. 그리고 내심 자신에게 떨어진 이십 삼호와 백팔십 명의 아이들 중 최하위에 속하는 백십 이호와의 생사투가 불연듯 묘한 흥분과 희열로 다가왔다.
 "클클클클!!! 보고 싶다. 너무나 보고 싶어. 안달이 날 것 같다. 이십 삼호. 네놈이 과연 백십 이호의 손에 죽을 지. 아니면 백십 이호를 죽이고 어떻게 살아남을 지. 너무 조바심이 난다. 크-히히힛!! 큭큭!!!"
 팔 령은 자신의 심중에 이는 쾌감을 느꼈다. 죽고 죽이며 피가 튀는 생과 사가 갈리는 생사투. 그것을 이십 삼호가 어떻게 헤쳐 나올지 너무나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그런 팔 령의 입에서 섬뜩한 차가운 실소가 흘렀다.
 "흐흐흐···········."
 소름이 끼친다. 잔혹한 악마의 웃음이 어두운 암도에 나직이 울리며 스며들었다.
 
 두 소년이 서로 마주보고 섰다. 그런 두 소년의 눈빛이 어둠속에서 반짝였다. 두 소년의 눈에 떠오른 것은 바로 살기였다. 두 소년은 살기를 띤 눈으로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두 소년 사이에 한 줄기 눈에 보이지 않는 흐름이 생겨났다. 그것은 진득하며 끈끈한, 온몸에 소름이 돋아오를 듯한 팽팽한 죽음의 기운. 바로 그것이었다.
 "십육 호. 사십구 호. 단, 한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시작해라."
 빙굴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한기를 머금은 듯한. 짙은 살기가 뭉클거리는 음성이 들렸다. 그러자 두 소년 십육 호와 사십구 호가 느릿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아앗!
 발끝이 딱딱한 바닥을 끌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손에 든 비수가 어둠속에서 스슥 거리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비수는 두 소년에게 짙은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피를 갈구하는 듯. 혀를 날름거리는 듯한 느낌을 두 소년에게 주었다.
 "꿀꺽·········."
 두 소년의 대치에 소매에 열십자가 새겨진 복면인이 침을 삼켰다. 그러자 복면인의 목젖이 꿈틀거리며 바짝 긴장감을 조여 왔다.
 스-으으.
 십육 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한 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천천히 맞은편의 사십구 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사십구 호는 비수를 자신의 입가로 가져갔다.
 싸-아악!
 섬뜩한 비수가 혀 바닥을 훑으며 그 날에 피를 묻혔다. 그러자 십육 호가 그 모습에 눈을 반짝였다.
 기선제압.
 사십구 호는 은연중에 십육 호의 심령에 죽음의 공포를 각인시키려 했다. 그로 미루어 보아 사십구 호는 이런 종류의 생사투에 능숙한 듯 했다. 하지만 십육 호는 사십구 호의 그런 행동에 흔들리지 않았다. 무심한 죽은 듯한 눈동자를 사십구 호에게 고정시킨 채 느리게 천천히 다가갔다.
 '의왼데·········이렇게 하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절로 몸을 움찔거리면서 굼뜨던데.'
 사십구 호는 이제까지 자신이 항상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방법이 십육 호에게 통하지 않자 내심 불안했다. 그 와중에도 십육 호는 천천히 느린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새끼. 속으로는 쫄고 있으면서·········.'
 사십구 호는 다가오는 십육 호를 보며, 그가 속으로는 두려움에 떨고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북돋았다. 그와 함께 사십구 호는 십육 호의 다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런 사십구 호의 눈은 한순간의 틈을 노려 승부를 결정짓는 뱀의 눈과 흡사했다. 고개를 들고 혀를 날름거리며, 상대에게 위협을 가하고 상대 흔들리는 순간 전광석화 같은 날렵한 움직임으로 무는.
 독사.
 그것이 바로 사십구 호의 정체이자 그의 싸움 방식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사십구 호는 상대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십육 호는 이미 죽어 있었다. 마음이·········.
 '크크·········재미있는 놈이구나.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이냐? 십육 호. 살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이냐? 클클! 좋겠지. 잃을 것이 없는, 모든 것을 버린 놈처럼 두렵고 무서운 놈은 없으니까? 흐흐·········.'
 십육 호는 자신이 이 자리에 서기 전. 자신에게 비웃음을 흘렸던, 이령을 떠올렸다.
 '·········.'
 하지만 마음속에는 어떠한 감정이나 느낌이 일어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자신은 차츰 마음이 죽어가고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자신도 몰랐다. 주위에 난무하는 죽음의 공포와 눈에 일상사처럼 보이는 선홍빛. 그 섬뜩한 죽음의 느낌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자위 수단일 줄도 몰랐다. 그것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자신을 주위와 격리 시켰다.
 무심.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아무 감정이나 느낌이 없었다. 십육 호는 천천히 사십구 호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좀 더 가까이·········조금만 더.'
 사십구 호를 먹이를 노리며 허공을 맴도는 매처럼 그렇게 다가오는 십육 호를 바라보았다.
 단, 한순간의 틈.
 생과 사가 갈리는 그 틈을 사십구 호는 기다리고 있었다.
 
 "으으·········."
 십 령은 두 소년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을 흘렸다. 자신의 기감에 느껴지는 팽팽한 긴장감과 살기는 그가 겪은 과거의 기억을 머리에 떠올리게 했다.
 '둘 다 대단한 놈들이다. 이런 긴박감은·········그 놈 죽음의 사월 맹하와 싸운 이래 처음이다.'
 십 령은 두 소년에게서 과거 자신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화인을 남긴 십이월 중 죽음의 달이라 불린 사월 맹하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부르르.
 손가락 끝이 자신도 모르게 떨렸다.
 불끈.
 우드득!
 온 힘을 다해 움켜쥔 손의 마디뼈가 소리를 낸다.
 "겨,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사월!!!"
 십 령의 눈가에 짙은 죽음의 눈동자가 희번뜩 거리며 스르르 움직였다.
 
 '이 때다.'
 사십구 호는 다가오던 십육 호가 일순 바닥에서 우측 발을 떼는 순간 모든 힘을 발로 모았다. 그리고 앞으로 튀어나갔다.
 팟!
 그런 사십구 호의 눈에 우측 발이 허공에 뜬 채 눈동자가 흔들리는 듯한 십육 호의 모습이 들어왔다.
 쉬-잇!
 한 줄기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사십구 호의 우수가 십육 호의 심장을 향해 뻗었다.
 '이겼다.'
 사십구 호는 자신의 비수가 곧장 십육 호의 가슴 좌측 아래. 심장이 위치한 곳으로 빠르게 쇄도하는 것을 보며,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갑자기 십육 호의 우측 발이 급히 옆으로 벌어지며, 십육 호가 자신의 좌측 팔을 엉거주춤하게 들었다. 그러자 십육 호의 좌측 겨드랑이가 보였다.
 스 슥.
 삭.
 십육 호는 몸을 살짝 우측으로 흔들었다. 그러자 사십구 호의 비수는 곧장 십육 호의 좌측 겨드랑이를 스치며 그대로 뒤로 빠졌다.
 꽈-악!
 "큭·········!"
 십육 호는 빠르게 자신의 좌측 겨드랑이로 빠지는 사십구 호의 손목을, 재빨리 좌측 팔을 몸 쪽으로 붙이며 잡았다. 그러자 사십구 호는 당황했다. 그리고 급히 뒤로 자신의 손목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빠지지 않았다. 십육 호가 이를 악물며 모든 힘을 좌측 팔에 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십육 호는 무심한 눈으로 손목을 빼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십구 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흐-윽!'
 사십구 호는 자신을 보는 십육 호의 그 무심한 눈에 순간 두려움이 들었다.
 쉬-이익!
 퍼-억!
 순간, 십육 호의 비수의 자루 끝이 빠르게 허공을 지나 사십구 호의 가슴에 자리한 명치에 박혔다.
 "커-헉!"
 사십구 호는 비수의 자루 끝에 있는 날카롭고 뾰족한 부분이 자신의 가슴을 찌르자. 일순 숨이 막혔다. 십육 호의 모든 힘이 비수의 자루 끝에 실렸는지. 호흡이 흐트러지고 전신의 힘이 쭈-욱 빠지는 것 같았다.
 사-아아앗!
 명치에 박힌 비수가 그대로 가슴을 타고 턱으로 솟구쳤다. 그와 함께 비수의 날이 옷을 가르며, 그대로 가슴을 그어올 렸다.
 촥--!
 "크-아아아악!!"
 피가 튀고 사십구 호가 고통에 내지르는 비명성이 허공에 울렸다. 가슴을 지나 자궁, 선기, 천돌혈이 자리한 일직선상을 비수가 가르며 이내 턱밑까지 치고 올라왔다.
 사-각!
 섬뜩한 소리와 함께 턱이 갈라지는 듯한,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찾아왔다.
 "끄-아아악!!"
 사십구 호는 그 고통에 못 이겨 비명을 마구 질렀다. 이제 승부 자체가 문제가 아니었다.
 죽는다.
 사십구 호는 죽음이 자신에게 찾아 온 것에 절망했고 두려워했다.
 "잘 가라."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딱딱하고 평범하기까지 한 음성이 귀에 들렸다.
 푸-우욱!
 "끄르르륵!!"
 사십구 호는 비수의 날 끝이 자신의 연약한 목덜미를 깊숙이 파고들자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자유로운 한 손으로 십육 호의 옷을 움켜잡았다.
 꽉!
 그러자 십육 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십육 호는 자신의 옷자락을 움켜쥐며 자신을 바라보는 사십구 호의 눈빛에 동요를 일으키는 듯 보였다.
 꾸-꾹!
 하지만 행동은 달랐다. 십육 호는 비수를 쥔 손에 더 힘을 주었다. 그러자 비수는 더 깊숙이 사십구 호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이···이건 마, 말이·········.'
 사십구 호는 죽어가면서도 내심 자신에게 찾아온 죽음을 납득할 수 없었다. 살아남는 것은 자신이어야 했다. 이제껏 그래왔기 때문이었다.
 
 "흐흐·········이제 알겠군. 십육 호. 저놈은 철저하게 적수공권의 박투술이 뛰어난 놈이었군. 그래서·········."
 십 령은 십육 호와 사십구 호의 생사투를 보면서 십육 호의 장기를 알 수 있었다.
 "멍청한 놈."
 십 령은 차츰 바닥으로 쓰러지는 사십구 호를 무심하게 쳐다보았다.
 "박투술이 뛰어난 놈에게 거리를 좁힐 시간을 주다니·········."
 십 령은 조금 전 십육 호가 왜 천천히 사십구 호에게 다가가 한 발을 떼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십육 호는 지능적이었다. 자신의 장기를 살리기 위해 사십구 호와의 거리를 없앴다. 그리고 발을 들어 상대방의 공격을 유도했다.
 적이 공격한다.
 그것을 미리 알고 있다면. 이미 승기는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적이 공격할 것을 알면서 가만히 있을 사람은 없다. 그리고 적의 공격을 미리 방어할 준비를 하고 곧바로 역공을 펼칠 수 있다면.
 "후후, 저처럼 죽지."
 십 령은 말과 함께 이제 바닥에서 연신 몸을 퍼덕이는 사십구 호를 바라보았다. 사십구 호는 비수가 목덜미에 꽂힌 채 연신 퍼덕퍼덕 거렸다. 그리고 바닥으로 피가 배어나오는지. 물 같은 것이 스르르르 빠져나오는 것이 눈에 보였다.
 
 '·········."
 아무 느낌이 없다.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한 아무런 감정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텅 빈 것 같았다. 십육 호는 무심한 눈으로 바닥에 쓰러져 죽어가는 사십구 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십육 호는 천천히 한 쪽 무릎을 숙여, 사십구 호의 목덜미에 박힌 자신의 비수를 뽑았다.
 슥.
 순간, 피가 비수가 파고들었던 구멍으로 콸콸 터지는 듯이 솟구쳤다. 그리고 이내 바닥으로 흘러들며 뜨거운 김을 피워 올렸다.
 
 "승자는 너다. 십육 호. 돌아가도 좋다."
 십육 호는 자신의 귀에 들리는 음성에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자 자신의 머리 위에 선 복면인이 보였다.
 '흐윽! 무, 무슨 놈의 눈동자가·········.'
 십 령은 자신의 바라보는 십육 호의 눈동자에 내심 깜짝 놀랐다. 흡사 죽은 사람의 눈처럼 무심했다.
 "꿀꺽·········."
 십 령이 침을 삼키자 목젖이 연신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그런 십 령의 눈에 몸을 돌려 천천히 걸어가는 십육 호의 뒷모습이 눈에 보였다.
 
 @
 
 그 시각, 또 다른 곳에서는 팔십 구호가 다른 한 소년과 생과 사를 다투고 있었다.
 휙-!
 휙-!
 뺨으로 비수가 연신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자신의 비수 역시 상대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삭-!
 작은 소리와 함께 자신의 상대인 육십 삼호의 앞섶이 비수에 베어져 나갔다. 그러자 육십 삼호는 화들짝 놀라며 급히 뒤로 물러났다.
 '병신.'
 팔십 구호는 이내 앞으로 튀어 나가며 뒤로 물러서는 육십 삼호에게 바짝 다가갔다. 그리고 재빨리 비수로 육십 삼호의 비수를 든 손목을 아래에서 위로 그어 올렸다.
 사-앗!
 핏!
 육십 삼호의 비수를 든 손목에서 가는 피 줄기가 허공으로 튀며, 이내 육십 삼호의 비수가 손을 떠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히-이익!"
 육십 삼호는 자신의 손목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느낄 수 없었다. 자신의 눈앞 지척에 자신을 죽이려는 팔십 구호가 바짝 다가와 있었다.
 "사, 살·········."
 푹-!!
 육십 삼호의 입이 열리는 순간. 팔십 구호의 비수가 육십 삼호의 심장에 꽂혔다. 그리고 팔십 구호는 다른 한 손으로 육십 삼호의 등을 자신에게 당겼다.
 턱-!!
 팔십 구호는 그런 힘의 여력을 이용해 자신의 비수를 보다 깊이 육십 삼호의 심장으로 박아 넣었다.
 "병신. 일찌감치 뒈져--."
 팔십 구호는 자신의 입을 육십 삼호의 귀가에 바짝 대고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육십 삼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크-으으·········."
 핏-!!
 푸-하하학!
 탁탁.
 팔십 구호가 육십 삼호의 심장에 박힌 자신의 비수를 힘차게 뒤로 빼며,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육십 삼호의 심장에서 피가 허공으로 폭발하듯이 터져 나왔다.
 터-어엉!!
 팔십 구호는 육십 삼호가 선 채 그대로 앞으로 쓰러지는 보며 입가에 씩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뒤돌아섰다. 그러자 팔십 구호의 눈에 두 복면인이 보였다.
 "사령은 알겠고. 다른 한 사람은·········?"
 팔십 구호는 입을 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사령의 옆에 선 복면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삼령이라고 한다. 팔십 구호. 돌아가 쉬어라."
 "뭐, 그러지."
 팔십 구호는 삼령을 바라보며 장난스러운 듯한 음성을 흘렸다. 하지만 팔십 구호의 눈은 달랐다. 팔십 구호의 눈에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진 것은 바로 증오라는 이름의 감정이었다. 팔십 구호는 몸을 돌려 천천히 걸어갔다. 그런 팔십 구호를 삼령과 사령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당혹감.
 지금 이십삼 호가 느끼는 감정이다. 자신의 앞에 선 상대가 바로 여자였기 때문이다. 가녀린 가는 어깨선. 가냘퍼 보이는 몸. 마치 마른 나무가 선 듯한 모습.
 '어, 어쩌지·········.'
 이십삼 호는 막상 자신이 죽여야 하는 상대가 여자라는 것에 동요했다.
 '죽, 죽여야 해. 아, 아니면 내, 내가 죽어야 해.'
 살고 싶다.
 그 간절한 욕구는 이심삼 호에게는 절대였다.
 
 '호, 이 자식은 좀 약해 보이는데·········역시 그 방법이.'
 백십이 호.
 그렇게 불리는 소녀는 이십삼 호를 보며 자신을 지금까지 살아남게 한 방법을 생각했다.
 "살려줘·········."
 백십이 호의 입에서 나온 음성. 순간, 이십삼 호의 눈빛이 흔들렸다.
 '토, 통한다.'
 백십이 호는 자신의 수법이 이십삼 호에게 통한다는 것을 확신했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 한다·········죽인다. 죽이고 나서 울더라도, 나 자신을 혐오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는 오직 살아남는 것만·········죽여야 한다·········죽여야 내가 산다·········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이십삼 호는 주문을 외웠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상대를 죽일 때.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 듯 주문을 외웠다.
 살기 위해서.
 
 "사, 살려줘·········응? 제발. 흑!"
 백십이 호는 온몸으로, 얼굴 모두를 무기 삼아 동정심을 끌어내었다.
 '호홋! 병신. 너희 사내라는 놈들은 다 똑같아.'
 
 백십이 호.
 사창가에서 태어난 아이.
 
 백십이 호의 인적 사항은 그것이 다였다. 백십이 호는 자신이 아는. 상대방의 심리를 파고들었다.
 
 '죽여야 한다·········죽여야·········죽인다·········죽인다.'
 이십삼 호의 마음에서 차츰 동요가 가라앉았다. 그리고 살기 위해서 죽인다는, 어쩔 수 없다는 자기 위안이 자리하기 시작했다.
 
 다 간다.
 백십이 호는 자신의 소매 속에 감춘 비수의 싸늘한 촉감을 느끼며, 이십삼 호에게 조금씩 접근해 갔다.
 "살려줘-. 사, 살려만 주면. 하, 하라는 대로 다 할 게. 응."
 백십이 호는 다가가며 발이 걸린 듯 몸을 앞으로 살짝 숙였다.
 덜 여문 두 개의 봉우리.
 하지만 이십삼 호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단지 살아남는다. 라는 것 외에는·········.
 
 "흐흐·········지 놈도 사내라고."
 십삼 령은 이십삼 호와 백십이 호. 두 사람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언제부턴가? 이십삼 호가 눈에 거슬렸다. 아둥 바둥 살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보기 싫었다.
 "킬킬킬! 백십이 호. 역시 네 위장술은 일품이다. 큭큭!"
 심삼 령은 생사투가 있기 전 백십이 호의 인적 사항을 보았다. 그리고 알았다. 상대의 동정을 유발하고. 상대의 심리를 이용 머리를 흔든다. 그리고 죽인다. 그것이 칠십이 호의 수법이었다.
 
 "이, 있잖아- 우. 우리 둘 다 사는 방법이 있을 거야. 마, 맞아. 분명히 있을 거야. 그, 그러니까·········."
 백십이 호의 입은 쉬지 않았다. 그리고 눈빛은 가라앉은 채 살기를 드리웠다. 암암리에·········.
 
 가깝다.
 그리고 더 가까워진다. 죽인다. 내가 살기 위해.
 이십삼 호는 비수를 빙글 돌렸다.
 역수.
 비수의 날은 아래로 손을 자루를 잡은 채 살짝 가슴 위로. 발끝은 들고 앞은 바닥에. 그리고 몸을 낮추며 몸의 무게 중심을 낮춘다.
 이십삼 호는 천천히 다가오는 백십이 호의 모습을 살폈다.
 '보이지 않아.'
 이십삼 호는 찾았다. 과연 어디에 비수를 숨기고 있는지.
 "이, 있잖아-. 너, 너어 여, 여자가 어떤·········."
 백십이 호는 다가가며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챘다. 이십삼 호는 흡사 살인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뭐, 뭐야-.'
 당황스럽다. 이십삼 호의 반응이 판단하기 어렵다.
 '꿀꺽.'
 침이 목젖을 타고 흐른다.
 확률은 반반.
 자신의 판단에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죽이거나. 죽거나.
 상황은 반전되었다. 백십이 호는 더는 가까이 이십삼 호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어떻게 하지.'
 백십이 호는 갈팡질팡했다. 이제까지 자신의 위장술이 통하지 않은 상대는 없었다. 매 번 성공했고. 스스로도 확신을 가졌다. 하지만 눈앞의 상대. 이십삼 호는 다르다.
 다르다.
 그것이 백십이 호를 혼란스럽게 했다.
 '빠, 빨리 결정을·········헉!!'
 쉬-익!
 빠르다!
 이십삼 호가 백십이 호의 흔들리는 눈빛에 선제공격을 가했다.
 거리 약 삼 장.
 한, 두 번의 도약으로 이십삼 호는 백십이 호의 목덜미를 찍어갔다.
 '피하기에는 늦다.'
 순간, 백십이 호의 몸이 우측으로 튀어나가며 바닥을 굴렀다.
 떼구루루
 쉭--!
 이십삼 호는 비수는 텅 빈 허공을 찌르자 망설이지 않고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다시 일 장의 거리를 두었다.
 "대, 대체 왜 이래·········응?"
 백십이 호는 자신의 위장술을 끝까지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십삼 호의 뇌리에 백십이 호의 말은 전달되지 않았다.
 '죽여야 내가 산다·········죽여야 내가 산다·········죽여야 내가 산다·········.'
 이십삼 호의 뇌리에 끝없는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슥.
 이십삼 호는 몸을 낮추며 죽이기 위한 순간을 노렸다.
 '토, 통하지 않아.'
 백십이 호는 자신의 위장술이 통하지 않는다. 라는 확신이 들었다,
 "제기랄. 통할 줄 알았는데 말이지."
 거칠다.
 백십이 호는 소녀답지 않는 거친 말과 함께 혀를 날름거리며 자신의 윗입술을 핥았다.
 "어쩔 수 없네. 호호홋!!"
 백십이 호는 빠르게 자신의 소매에서 비수를 빼들었다. 그리고 빠르게 자신의 옷을 찢어갔다.
 찌-이익!
 찌-이익!
 이십삼 호는 순간 튀어나가려고 했다. 그러다가 백십이 호의 눈을 스치는 눈빛을 보았다.
 '함, 함정일 수 있다.'
 상대는 바보가 아니다.
 이십삼 호는 그런 판단을 내렸다. 그 사이 백십이 호는 나신이었다.
 
 "으응? 호, 그런 수법을 쓰겠다."
 십삼 령은 백십이 호의 수법에 잠시 흥미가 일었다.
 나신.
 아직 덜 여물었지만. 사내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한 늘씬한 소녀의 나신.
 '꿀꺽·········.'
 흔들렸다. 백십이 호가 발을 떨 때마다 시선이 본능적으로 가는 두 곳.
 흔들렸다.
 보지 않으려고 할수록 신경이 간다. 이십삼 호는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죽을 수 있다·········죽을 수 있다·········죽을 수 있다.'
 스스로에게 죽음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
 출렁출렁.
 백십이 호가 옆으로 움직일 때마다 앞에 있는 두 개가 흔들렸다.
 "호호홋! 이거 어쩌지."
 백십이 호의 눈에 요기가 어린 듯 살기가 번뜩였다. 백십이 호는 이십삼 호의 주위를 빠르게 원을 그리며 돌았다. 자신의 비장의 수법이 가장 효과적으로 상대에게 통할 수 있는 방법이다.
 타타탁.
 이십삼 호는 앞으로 튀었다. 그러자 백십이 호는 순간 당황했다. 너무 갑작스러웠다. 백십이 호가 주춤하는 사이. 이십삼 호는 급히 반전했다.
 "죽인다."
 짧고 짙은 살의가 물씬 풍기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죽인다. 아니면 내가 죽어. 나, 나는 죽기 싫어.'
 죽기 싫다는 강한 생존 의지가 이십삼 호의 눈에서 살기가 흐르게 했다.
 "이 새끼- 뒈져----!!"
 타타탁.
 백십이 호는 정면 승부를 걸었다. 자신의 비장의 수법도 통하지 않는 이상 정면 승부밖에 없었다. 백십이 호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자 이십삼 호 또한 마주 달려 나갔다.
 타타탁.
 점차 가까워졌다.
 쉭-!
 백십이 호의 비수가 심장을 목표로 찔러왔다.
 '변화.'
 이십삼 호는 역수를 쥔 비수를 손바닥 안에서 회전시켰다. 그리고 이내 비수의 끝을 손바닥으로 쳤다.
 쉿-!
 이십삼 호의 비수가 백십이 호의 좌측 눈을 목표로 다가갔다.
 "컥!!"
 백십이 호는 아직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지만. 자신의 좌측 눈을 목표로 다가오는 비수가 순간 무서웠다.
 사람의 눈은 묘하다. 거리가 있어도 눈과 가까워지는 것에 본능적으로 눈은 감겨지게 되어 있다. 그리고 아주 위험한 것으로 뇌는 판단하고 받아들인다.
 백십이 호는 본능적으로 좌측 눈을 감으며 몸을 움찔했다. 그러자 백십이 호의 비수는 이십삼 호의 좌측 어깨를 찔렀다.
 "으-드드득!"
 무시.
 이십삼 호는 이를 악물고 갈았다. 그리고 좌측 어깨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무시했다. 그리고 비수의 자루 끝을 재빨리 밑에서 위로 손가락 끝으로 쳤다.
 빙글.
 비수가 돌며 비수의 날이 아래로 갔다.
 탁!
 이십삼 호의 손이 비수의 자루를 잡은 채 그대로 백십이 호의 심장으로 꽂혔다.
 푸------욱!
 "캬-아아아악!!!"
 비수가 깊숙이 심장으로 파고드는 것과 동시에 백십이 호가 고통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십삼 호는 백십이 호의 비명을 듣는 순간. 비수를 뒤로 뺐다.
 휙!
 촤----악!
 뜨거운 피가 허공으로 분출했다. 그러자 이십삼 호의 손에 역수로 쥐여진 비수가 백십이 호의 목젖을 스쳤다.
 쉬--이잇!
 "끄륵!!!"
 목에서 가는 혈선이 나타나고 혈선은 이내 벌어져 피가 허공과 이십삼 호의 얼굴로 튀었다.
 타타탁.
 이십삼 호는 얼굴에 피 방울이 튀자 이내 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백십이 호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터-어엉!
 즉사!
 
 "비. 빌어먹을 년."
 십삼 령의 입에서 욕설이 나왔다. 어이없게도 자신의 마지막 수법이 통하지 않자. 생각 없이 정면승부를 걸었다.
 "어리석은 년. 자신의 수법이 안 통한다고 모든 것을 다 포기하다니. 그럴 때 일수록 더 냉정해야 하는 것이 바로 살수인데."
 십삼 령은 천천히 자신에게 고개를 돌리는 이십삼 호를 마주보았다.
 싫다.
 마치 거울의 자신을 보는 것 같다.
 싫다.
 십삼 령은 이십삼 호의 모습에서 자신이 과거에 겪었던 것들을 머리에 떠올렸다. 십삼 령 또한 이십삼 호와 비슷한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통과. 돌아가서 쉬어도 좋다."
 이십삼 호는 십삼 령의 말에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잠깐 바닥에 죽은 백십이 호에게 눈을 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다시 걸어갔다. 그런 이십삼 호를 십삼 령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 십삼 령의 눈에 짙은 광기가 번뜩였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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