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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컵라면의 3분 소설

이충선일기 1부

2022.02.12 조회 3,210 추천 85


 이충선은 고수였다.
 
 얼마나 고수인가 하면, 강남과 강북, 새외와 황궁의 모든 고수들이 인정할 정도의 고수였다. 그는 천하에 이름난 고수들 거의 모두와 대련하여 이겼고, 단 한 번도 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말하길 그는 역사서에도 이름을 남길 고수라 했다.
 
 그러나 이충선은 그 경천동지할 무술 실력에 비해 돈 버는 일에는 젬병이었다. 그럭저럭한 집안에서 태어났던 그였기에 평생 쓰기만 하고 벌지를 않자 곧 입은 옷 한 벌과 함께 거리로 나앉을 날이 가까워지게 되었다.
 
 “이럴 수는 없어. 나 같은 고수가 굶어 죽게 생겼다니?”
 
 자존심을 버리고 부잣집 경호원이나 돈을 받고 무술을 가르쳐볼까도 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버려지면 그게 자존심이던가? 그는 결국 이도 저도 하지 못하고 오늘 아침 식사까지 거르게 되었다.
 
 아내가 그의 등짝을 후려쳤다.
 
 “이 인간아! 쌈박질이나 잘하면 뭐 해! 이렇게 무능력한 당신하고는 도저히 못 살아!”
 
 그녀는 당장 짐을 싸서 세 살 난 딸아이와 함께 친정으로 떠나버렸다. 이충선은 그들을 잡지 못했다. 그래도 친정으로 떠나면 밥은 배부르게 먹겠지 싶어서였다.
 
 *
 
 정오의 햇살이 마루에 드러누운 이충선을 보드랍게 감싸 안았다. 누워있는 그의 옆으로는 시장에서 오늘 아침 본인의 검을 팔아치우고 사 온 술병들이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드르렁드르렁 소리까지 내며 쳐 자는 이충선을 한 남자가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중얼거렸다.
 
 “저딴 놈이 천하제일인이라고? 강호의 수준이 바닥을 치는군.”
 
 그 남자는 이충선에게 다가갔다. 흔들어서 깨울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충선에게 열 걸음 정도 다가간 순간, 그 남자는 바싹 굳어버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한가지 본능만 떠오르고 있었다.
 
 ‘움직이면 죽는다!’
 
 그렇게 그가 꼼짝도 못 하고 서 있는 동안 드르렁거리던 이충선은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있는 힘껏 턱을 벌리며 하품을 했다. 쩍 벌어진 그의 입에서 나는 술 냄새가 고약했다.
 
 그의 느긋한 움직임은 일어나서 기지개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는 그 이후에야 발견했다는 듯 마당에 멀거니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뉘시오?”
 
 남자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장도경이라고 합니다.”
 
 이충선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미안하지만 누군지 모르겠는데. 나하고 대련했던 사람인가?”
 “아닙니다.”
 “뭐, 그럼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유명인사신가? 난 그런 거 잘 몰라서.”
 
 장도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유명해지면 곤란한 사람입니다.”
 
 이충선의 눈가가 조금 찌푸려졌다.
 
 “뭐 하는 사람인데 곤란하시오?”
 
 장도경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난 도둑입니다.”
 
 이충선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장도경은 그 맹해보이는 표정과는 다르게 지금 눈 하나 잘못 까딱이면 목이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장도경의 도둑 인생과 무림인으로서의 감각 모두가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허, 참. 그래, 도선생께서 이 빈털터리의 집엔 무슨 일이신가? 뭐 비급이라도 숨겨져 있다고 들으셨나?”
 
 어처구니없다는 듯 갸우뚱거리는 이충선의 눈은 여전히 맹했고, 머리카락은 엉망이었으며, 옷차림도 풀어헤쳐 있었지만 그의 자세는, 자연스럽게 서 있는 그의 자세는 그가 대답을 잘못하면 네놈의 골통을 깨부숴주겠다 말하고 있었다.
 
 “···그 빈털터리에게 볼일이 있습니다.”
 “무슨 용무?”
 
 장도경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저하고 돈 되는 일 하나 해보시지 않겠습니까?”
 
 그 순간, 이충선이 이 도둑놈의 머리통을 당장 때려 부수지 않은 것은 불법적인 일을 해서라도 돈이 필요한 이유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지금 그는 자칫 잘못하면 다시는 세 살 난 딸아이의 웃음을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 아이의 어미가 절대 만나게 해주지 않을 것이기에. 그는 그래서 도둑놈을 죽이지 않았다.
 
 “···돈이 얼마나 되는데?”
 
 장도경은 점점 압박감이 사라져가는 것을 느끼고 슬며시 미소 지었다.
 
 “금괴를 궤짝으로 벌어들일 일입니다.”
 
 이충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장도경의 눈을 보고는 말했다.
 
 “무슨 일인지 말해보게.”
 
 *
 
 장도경의 계획은 간단했다. 그러나 쉽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사는 도시, 항주의 성주를 터는 것이었다.
 
 “자네 미쳤나? 관인을 건드리고 무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건가?”
 
 장도경은 웃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꽤나 호탕한 웃음소리였다.
 
 “우리가 건드려도 그는 아무 행동도 못 할 것입니다. 적어도 양지에서는 말이지요.”
 
 이충선은 그 말에 뭔가를 짐작하고는 신음을 흘렸다. 장도경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요. 난 그 탐관오리의 은닉재산을, 놈이 백성들의 피땀을 쥐어짜 만든 비자금을 훔칠 생각입니다.”
 
 이충선은 자신의 앞에 놓은 술잔을 들이켰다. 장도경이 사는 술이었다. 씁쓸하면서도 어딘가 달달한 느낌이 끝내주는 술이었다.
 
 “···그건 어쩌면 북경으로 가는 세금 마차를 터는 것보다 위험한 일이야.”
 “그래서 그 세금 마차보다 더 많은 보물을 얻겠죠.”
 
 장도경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돈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이 한탕만 잘하면 평생 일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 형은 아무 걱정 없이 지금처럼 무예만 단련하며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부인과 아이에게 아쉬운 소리 한 번 할 필요도 없어지고요.”
 
 이충선은 잠시 침묵했다. 장도경의 말대로 된다면 그보다 좋을 수 없긴 했다.
 
 “···자세한 계획이나 말해보게. 그래봐야 걸리면 다 헛짓거리지 않나.”
 
 
 장도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성주 조유명은 단순하고 폭급한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항주와 이 일대를 다스릴 수 있게 된 것은 자신보다 더 높은 놈들의 뒤를 잘 핥아서이죠. 그 뒤를 닦을 전표를 잔뜩 바쳐서이기도 하고요. 뇌물로 높은 자리에 올라간 놈답게 그놈도 금전을 어마어마하게 밝힙니다. 그는 자기 밑의 관리들에게 뇌물을 요구하고, 그걸 바치지 않은 관리는 꼬투리를 잡아 관직에서 내쳐버렸죠. 그러니 관리들은 온갖 수를 써서 백성을 쥐어짜고, 그들의 신음에는 전혀 신경 쓰질 않는-”
 “그만. 그딴 배경 말고 본론이나 말하게.”
 
 이충선은 이 도둑놈의 사족을 끊었다. 무슨 도둑이 백성들의 신음을 들먹이는 모를 일이었다. 뭐, 의적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일까? 개소리가 따로 없었다.
 
 그것은 본인의 도덕과 윤리에 어긋난 일을 하면서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자기자신을 속이는 머저리들의 논리였다. 성주가 악인이건 아니건 지금 그들이 계획하는 것은 도둑질이었다. 그건 변하지 않는다는 게 이충선의 생각이었다.
 
 장도경은 중간에 말이 끊겨서 조금 기분이 상한 듯 보였다. 하지만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그런 그에게 장괴륜이라고 손발처럼 쓰는 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장도경은 술잔을 들어 들이켰다. 목이 타는 것처럼 보였다.
 
 “그놈은 조유명의 부하답게 정말 악독한 놈이었는데, 그 악행을 나열해봐야 시간만 아까우니 본론만 말하겠습니다. 그 개자식은 내 형이었습니다.”
 “형?”
 “예. 내 친형.”
 
 장도경은 빈 술잔을 내려놓고 잠시 멍하게 바라보았다. 이충선은 냉큼 그 술잔을 가득 채워주었다. 잔이 차자 바로 다시 한입에 털어 넣은 장도경이 말을 이었다.
 
 “그놈이 개자식인 것은 가족인 나도 알고 조유명도 알았습니다. 하지만 말 잘 듣는 개자식이어서 조유명은 그를 잘 키웠죠. 둘은 거의 십 년쯤 함께 온갖 나쁜 짓을 하며 사람들을 등쳐먹었습니다. 하지만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는 말이 있듯이, 결국 조유명도 장괴륜을 내치는, 내쳐야만 하는 날이 왔습니다. 개자식 장괴륜은 그래도 자신이 곱게 죽지 못할 것은 잘 알았죠.”
 
 장도경은 잠시 눈을 감고 자신의 형을 떠올렸다. 그의 머릿속에 단어 몇 마디가 지나갔다. 개자식. 잘 뒈졌다.
 
 “···그는 나에게 편지 한 장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본인의 죽음을 직감하고 남긴 그 편지에는 조유명의 비자금 위치와 그 장소의 위험 요소를 모두 정리해 두었지요. 그는 내가 도둑질로 연명하는 걸 알고 있었으니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습니다.”
 
 위험하게 빛나던 장도경의 눈이 이제는 거의 유리알처럼 번들거렸다.
 
 “내가 다 털어버리길 바란 게지요.”
 
 이충선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지금 장도경이 자기 형의 죽음에 화를 내는 것인지, 아니면 도둑놈 인생에 다시 없을 도둑질에 흥분한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자라면 조금 험하게 불러도 형에 대한 애정이 남은 인간이고, 후자라면 뼛속까지 도둑놈인 또라이였다. 그리고 사실 이충선에겐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 일이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계획이었다.
 
 가능한 계획인가, 아닌가.
 
 “계획에 대해서나 말해보게.”
 “이 일의 중요성과 보안을 위해 이 형에게 알려줄 수 있는 것은 이 형이 할 일과 동업자 둘에 관해서입니다.”
 “동업자? 우리 둘이 할 것 아니었나?”
 
 장도경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우리 둘이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이형. 그리고 두 명보다는 네 명이 더 많은 보물을 들고 도망칠 수 있을 겁니다.”
 
 장도경은 다시 술을 털어놓고 잔을 엎었다.
 
 “더 안 마시려고?”
 “석 잔이면 충분합니다. 자, 이 형이 할 일과 일이 대충 돌아가는 과정을 알려드리죠.”
 
 성주 조유명의 비고는 그의 별장에 있었다. 그 별장은 항주에서 반 시진 떨어진 작은 호수 주변에 있었는데, 일단 동업자들 모두 기본은 하는 도둑들이라 별장을 관리하는 하인들에게 들킬 일은 없을 것이라 했다.
 
 문제는 보물창고의 문과 문지기로, 기관 장치인 문은 동업자 하나가 열 것이었다. 이충선이 할 일은 문지기를 처치하는 것.
 
 “문지기가 누군데 날 끌어들인 것인가?”
 “강시입니다.”
 “강시?”
 
 강시는 옛 도사들이 전장에서 죽은 병사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기 위해 만들어진 술법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사악한 자들에 의해 술법이 변형되었고, 작금의 강시란 온갖 약과 독, 술법을 이용해 만든 전투 병기를 뜻했다.
 
 “진짜 강시?”
 “진짭니다. 심지어 거의 전설 취급을 받던 천강시입니다. 그 무위를 가늠하기 힘들지요.”
 
 이충선이 헛웃음을 흘렸다.
 
 “거기 뭐 여의주라도 숨겨놓았나? 전설의 강시가 겨우 문지기나 한다고?”
 “그 안에 정확히 뭐가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아니, 확실한 게 있긴 하죠. 황금이 한 무더기 있을 것이란 사실.”
 
 이충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황금 한 무더기면 사신하고도 한 판 싸워볼 만하지.”
 
 장도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바로 시작할 것입니다. 대문을 열어두십시오. 그리고 이 술, 맛있게 드시고요.”
 
 이충선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고, 장도경은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그가 떠난 후 이충선은 앞에 놓인 잔에 입술도 대지 않았다.
 
 *
 
 이충선은 마루에 앉아 밤하늘에 빛나는 달과 별을 바라보았다. 그 검은 바탕의 반짝이는 별들은 분명 아름다웠지만, 지금 이충선에게는 그저 요란하고 난잡한 빛의 산란 정도로 보일 뿐이었다.
 
 물론 그는 진짜 어지러운 것은 스스로의 마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그의 마음을 탁하게 만드는 것은 당연하게도 그와 장도경이 계획하는 도둑질이었다. 이충선은 이제라도 그 도둑놈들을 모조리 때려죽이고 다 없던 일로 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그에게는 돈이 필요했고, 도둑질은 부자의 경호원이나 코찔찔이들의 무술선생보다는 자존심이 사는 일이었다.
 
 충선은 웃었다. 남들 다 하듯이 윗사람 밑에서 일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면서 남의 재물을 훔치는 것에는 별다른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 얼마나 패악한 놈인가?
 
 언젠가 그가 알던 사람이 술에 취해 한탄하던 말이 있었다. 무림인들이란 결국 양민들보다 칼 쓰고 주먹 쓰는 법에 조금 익숙할 뿐인 왈패들이라고.
 
 이 무림의 고수라는 놈들은 거의 모두 그러할 터였다. 일신의 무술 실력 하나 믿고 평범한 사람들에게 온갖 패악질을 부리는 불한당들. 그러다 어느 날 뒷골목에서 칼 한 방 맞고 쓰러져 죽어갈 인생들. 술에 취해 무림인의 본질에 한탄하던 그 사람도 몇 년 전부터 소식이 끊겼다. 무려 뇌룡장이라며 거창하게 불리던 양반도 그렇게 갔다. 무림인의 삶이란 그랬다.
 
 그리고, 충선은 그런 무림인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소문난 놈이었다.
 
 그 사실에 자부심을 느껴본 적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와 생각해보니 그런 것도 아니었다. 자부심이 없다면 삐뚤어진 고집도 없었을 테니까.
 
 그의 아내 말이 옳았다. 그는 싸움 말고는 잘하는 것 없는 무능한 남편이었다.
 
 충선은 흐리게 미소 띤 얼굴로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맛이 뭐 이래.”
 
 제일 싼 찻잎을 구해왔더니 떫어 빠진 게 도저히 먹을 만한 차가 못 되었다. 제일 중요한 향조차 엉망이니 그냥 들풀이나 뜯어와 끓이는 게 더 나을 지경이었다.
 
 그때 조용히 집 대문이 열렸다. 충선은 장도경이 시킨 대로 대문을 잠그지 않았다.
 
 곧이어 슬며시 열린 대문으로 장도경, 난쟁이, 복면을 쓴 여인이 들어왔다. 난쟁이 사내는 들어오자마자 이충선을 보고는 감격에 겨운 얼굴로 다가왔다.
 
 “오오··· 이충선 대인! 이렇게 대인을 뵙다니···! 정말 반갑소! 난 유원이라고 하오!”
 “날 아시오?”
 
 유원이라는 남자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다.
 
 “물론이지요! 천하제일인이라고 불리는 사내를 어찌 모르겠소? 평소 대인을 흠모해 왔소이다!”
 
 키는 이충선의 허리쯤에 이르는데, 얼굴은 중년을 넘어 노인을 향해가는 사내였다. 등에는 큼직하고 네모난 나무 상자를 배낭처럼 메고 있었고, 허리와 팔다리에는 작은 주머니와 끈에 묶인 크고 작은 도구들이 보였다.
 장도경이 설명했다.
 
 “우리 동업자입니다. 유원이라고 하고 잠겨있는 문을 열어줄 사람입니다.”
 
 그 뒤에 복면을 쓴 여인은 목에 쫙 붙는 검은 옷을 입고 소매와 발목을 동여매 흩날리지 않도록 한 복장이었다. 허리에는 가죽띠 하나를 감고 있었는데, 덕분에 아주 가는 허리가 돋보였다. 그 가는 허리와 아래에서 확 넓어지는 하체 덕분에 대단히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물론 얼굴은 안 보였지만.
 
 “다 구경하셨나요?”
 
 이충선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뭐요?”
 
 복면 위로 드러나는 여인의 눈이 아주 차가워 보였다.
 
 “내 몸 구경이 끝났냐는 말이에요.”
 “아, 그렇소. 아주 보기 좋군.”
 
 이충선의 대꾸에 여인은 이제 그를 노려보기 시작했고, 장도경과 유원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만하십시오, 오늘 우리가 모인 것은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오.”
 
 장도경의 말에 여인은 고개를 돌리고는 이충선을 바라보지 않았다. 충선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장도경과 나머지 두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시오, 도 선생들.”
 
 장도경은 웃었다.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도 제자.”
 
 충선은 크게 웃었다. 장도경은 이제 당신도 도둑이 될 것이라 말한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는 도둑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아주 큰 한탕을 할 것이다. 두 번 다시 도둑질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큰 한탕을.
 
 *
 
 장도경은 이충선에게 복면 하나와 야행복을 건넸다.
 
 “이제 진짜 도둑이 된 기분이군.”
 
 그 말에 난쟁이 유원만 웃었다. 이충선이 장도경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 시간에 성문은 어떻게 통과할 생각인가? 관인 중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나?”
 
 장도경이 웃었다. 자신만만한 미소였다.
 
 “여기서 더 사람이 끼어들면 난잡하고 관리하기 힘들어질 뿐입니다. 일단 따라오십시오.”
 
 일행은 이충선의 집을 나서서 항주의 복잡한 뒷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어둡고 지저분한 담벼락 길 여기저기를 쏘다니던 장도경은 어느 낡은 집 앞에서 멈춰 섰다.
 
 “여기 우리 길이 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낡고 부서진 가구들이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그나마 벽에 붙어서 있는 옷장이 그나마 좀 멀쩡해 보였다. 그리고 장도경은 바로 그 옷장 앞에 서서 뭔가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옷장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몇 번 울리더니, 곧 그가 힘을 줘 옆으로 밀자 깊고 어두운 통로가 나타났다.
 
 “자, 가시지요.”
 
 복면여인과 난쟁이는 의심하는 기색도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장도경이 뒤에 선 이충선을 바라보았다.
 
 “들어가시지요.”
 
 이충선은 그 장도경의 얼굴을 가만 바라보다가, 먼저 안으로 들어간 이들처럼 자연스럽게 통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통로는 어둡고 약간 축축했다. 제일 앞에 있는 유원이 횃불을 들고 있었는데, 통로가 상당히 좁았던 탓에 뒤에서 따라가는 이들에게는 앞에서 요란하게 흔들리는 횃불의 그림자와 빛 말고는 뭐 잘 보이는 것도 없었다. 일당은 그 어두운 길을 한참이나 걸어갔다.
 
 어느 순간에 제일 앞에서 앞장서던 유원이 중얼거렸다.
 
 “여기는 지나갈 때마다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은 기분이야.”
 
 복면여인과 장도경은 그 말을 듣고도 아무런 대꾸가 없었고, 처음 이 길을 가는 이충선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때 유원이 다시 말했다.
 
 “그렇게 느껴지지 않습니가, 이 대인?”
 
 충선은 그 질문에 조금 떨떠름한 기분을 느끼며 대답했다.
 
 “어, 그런 것도 같소만. 여긴 너무 어둡고 길군.”
 
 유원은 그딴 대답에도 적당히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후 일당은 말없이 한참을 더 나아갔고, 마침내 통로를 빠져나와 웬 산 중턱에 빼꼼 나와 우두커니 서게 되어서야 크게 숨을 내쉬었다.
 
 “우리 지금 항주를 빠져나온 것인가?”
 “그렇습니다. 원래 있던 자연 동굴과 연결한 비밀통로지요.”
 
 이충선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의 생각에 이 통로는 대단히 위험하고 불법적인 행동의 결과였다. 관군에게 걸리면 짧게 생각해봐도 사형이었다. 항주의 보안과 방어에 구멍을 뚫어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러면 또 뭐 어떠한가? 어차피 도둑질하러 가는 길에 그런 것은 따지지 않기로 했다. 어느 쪽이 되었건 걸리면 죽는 것은 마찬가지일 듯했으니까.
 
 장도경은 통로를 빠져나와 거침없는 걸음으로 한쪽 풀숲으로 다가갔다. 그 풀숲을 조금 헤치고 나아가자 말 네 마리가 프르륵거리며 서 있었다.
 
 “갈 길이 멉니다. 타십시오.”
 
 일당은 거기서 말을 타고 다시 한참을 달려 성주의 별장이 보이는 언덕 위에 도착했다. 저 아래 호수를 바라다보는 산마루에 길게 늘어져 있는 별장이 보였다. 별장은 별과 달빛을 희미하게 반사하며 자신의 몸 대부분을 어둑한 그림자 속에 감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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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2)

conatus    
푸하하 내가 첫댓글이다
2022.02.12 10:44
네플리카    
오우쮓 3분컵라면
2022.02.12 11:46
용마전기    
강호협객 컵라면이 돌아온건가...
2022.02.13 16:05
용마전기    
아니 왜 이상한 제목에 비해 쓸데없이 글이 좋은건데 ㅋㅋㅋ
2022.02.13 16:07
시즈리드    
외전은 정말 한편으로 끝이었군요 ㅠㅠ
2022.02.19 08:05
컵라면.    
3분 소설은 비정기 연재입니다. 이것저것 써보고는 있는데 한 편이 마무리되는 게 없네요. 금방 또 올려보겠습니다.
2022.02.19 10:42
dasol1207    
밤에 먹는 컵라면 같은 글이군요
2022.02.20 18:12
마법사의밤    
첫 문단에 세외라는게 그 북해빙궁같은 애들이 있는 지역을 말하는거라면 새외 아닌가요?
2022.02.22 07:58
컵라면.    
이럴수가... 이거 참 부끄럽네요. 감사합니다.
2022.02.22 08:31
괴도애기    
잘 봤습니다
2022.03.24 12:36
0 / 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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