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장침 먹는 깡촌 명의

글자 먹는 장침-1

2022.02.22 조회 84,126 추천 1,154


 [덕천한의원]
 
 읽기조차 힘들 정도로 오래된 현판이었다. 거미줄까지 제대로 얽혔다. 대문의 경첩은 아예 녹가루 투성이었다.
 
 ‘여기구나?’
 앞마당의 살구나무만은 포스가 제대로였다. 엄청나게 컸다. 언제 심은 건지 완전 고목급에 살구도 주렁주렁 맺혔다. 옆으로 펼쳐지는 봉긋한 향나무도 눈을 편안하게 한다.
 
 주변을 돌아보았다. 앞 도로는 제법 넓지만 차도 잘 다니지 않는다. 한 때는 산천군에서 첫 손에 꼽히던 면 소재지였지만 이웃 면으로 새 도로가 나면서 깡촌으로 변한 곳... 한참을 봐도 보이는 건 찰랑거리는 햇살 뿐, 오가는 인적조차 뜸했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심각했다.
 동네 한 바퀴가 10분이면 족할 것 같았다.
 
 철커덩.
 대문을 밀자 경첩의 비명이 찢어졌다.
 
 “앗.”
 그 문을 넘는 순간 튀어나온 철문 쇳조각에 다리가 걸렸다. 두 팔을 흔들며 발악을 하지만 중력의 힘을 당하지 못하고 마당과 키스해버렸다.
 
 ‘그래도 잔디까지 깔린 정원이다.’
 큰아버지 말이 스쳐갔다.
 
 이게 잔디란 말이지?
 무릎만큼 자란 이 풀이?
 그래도 풀냄새는 괜찮았다. 그냥 누워 하늘을 보았다. 주렁주렁 열린 살구가 보인다. 머잖아 익을 각이다. 각도를 틀자 처마가 나왔다. 검은 기와 위로 옹기종기 늘어선 어처구니가 정답다.
 코 옆으로 작은 들꽃들이 남실거린다. 은은한 향기도 난다. 마당 상태는 엉망이지만 잠시나마 힐링이 되는 것 같았다. 그 시선 위로 제비가 날아들었다.
 
 ‘제비?’
 벌떡 일어났다. 제비집을 직접 보는 건 삼십여 년을 사는 동안 처음이었다.
 “제비야, 안녕? 나 이 집 주인이야.”
 강모가 손을 들어보였다. 제비는 벌레를 물어오느라 바빠 강모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걱정마라. 월세 달라는 소리 안 할 테니까.”
 풀을 헤치고 마루에 닿았다. 마루 앞에 세월 물든 섬돌이 깡총하다. 21세기에 골동품급 섬돌이라니... 그래도 싫지는 않았다.
 
 마루 위에는 먼지가 켜켜이 쌓였다. 한 발을 올려놓으니 풀썩 자지러진다.
 진료실과 대기실, 방으로 통하는 문은 양철판으로 막혔다. 두툼한 아날로그 열쇠뭉치를 꺼내 하나하나 풀었다. 문짝 크기의 양철판을 들어내는 것도 일이었다. 그렇게 진료실 안으로 첫발을 딛었다.
 
 [神醫보다 仁醫]
 
 맞은 편 벽에 걸린 액자가 보인다. 증조할아버지의 친필 좌우명이다. 어린 강모가 딱 한 번 놀러왔을 때였다. 액자를 보며 뜻을 설명했다. 강모가 어려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증조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액자는 거미줄 투성이다. 그나마 반쯤 기울어 떨어지기 직전이다. 바로잡으려 하자 반대 쪽까지 기울어버렸다. 낡은 의자를 놓고 겨우 바로잡았다.
 책상 먼지를 쓸고 바닥에 떨어진 명패도 바로 놓았다.
 
 [원장 길창덕]
 
 강모의 증조할아버지다. 잘 나가는 제약회사 스템셀바이오의 기반이 되었던 분. 그분의 손길이 끊인 한의원에 컴백한 강모였다.
 “충성, 증손자 길강모, 한의사로 공중보건의 복무를 마쳤습니다. 오늘자로 한의원의 대를 잇게 되어 이에 신고합니다.”
 거수경례를 마치고서야 명패를 바꾸었다.
 
 죄송합니다.
 양해를 구했다.
 
 [원장 길강모]
 
 서울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강모가 만든 건 아니었다.
 
 서울 남부교도소에서 공중보건의 소집해제를 마치기 직전, 굴지의 제약회사 스템셀바이오의 총괄본부장인 큰아버지가 강모를 불렀다. 고문변호사를 대동하고 있었다.
 “곧 제대지?”
 “예.”
 “할아버지께서 네게 가업을 맡기셨다. 돌아가신 증조할아버지의 뜻인 건 너도 알 테고?”
 큰아버지가 내민 건 이 한의원의 등기부등본이었다. 강모 앞으로 명의이전이 끝나있었다.
 “이건 그 앞산. 가업 잘 이으라고 아버님께서 특별히 주신 거야.”
 쓸모없는 산으로 불리던 임야가 부록으로 붙었다.
 
 할아버지는 치매로 투병 중이다. 회사와 집안의 대소사는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 고모가 좌우하고 있었고 세 사람은 일편단심으로 강모와 그 동생 승모를 좋아하지 않았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 회사의 뿌리는 바로 그 한의원이다. 네 사촌형제들이 의사지만 한의사가 아니니 가업을 이을 수 없어, 게다가 우리 회사가 성장하면서 뿌리 보전에 대한 필요성도 대두되고 있고.”
 “......”
 
 “서울에서 대략 한 시간 반, 멀다면 멀지만 그래도 원장 아니냐? 사통팔달한 곳이고 풍광도 좋아. 근방에 한의원이나 의원도 없으니 완전독점이지. 명의로 소문나면 번잡한 서울보다 더 좋을 수도 있어.”
 큰아버지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어떤 이유로도 가업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내용은 간단했다.
 “여기다 사인하면 됩니다.”
 큰아버지 통보가 끝나자 변호사가 사인할 여백을 짚었다.
 강모가 사인을 했다. 말이 좋아 가업이지 각서 한 장 쓰고 먹고 떨어지라는 뜻과 다르지 않았다. 숨겨진 계산은 생약사업진출이었다. 그러자면 스토리가 필요했다.
 
 [100년 가업을 이어가는 뚝심의 제약회사]
 
 그럴 듯 하다. 할아버지와 큰아버지의 계산을 강모도 모르지 않았다.
 
 “이건 내 선물.”
 큰아버지가 명패를 내밀었다. 사옥을 나오면서 바로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새 출발을 불손한 선물과 함께 하고 싶지 않았다.
 
 책상의 명패는 해병 수색대에 근무 중인 승모가 친구 편으로 보내준 선물이었다.
 
 가업을 받는 건 증조할아버지 때문이었다. 가난한 집에서 시집온 어머니. 증조할아버지의 대를 이을 것으로 보였던 한의사 남편을 결혼 5년 만에 돌연사로 잃었다.
 ‘처음부터 근본이 없어 싫더라니.’
 ‘남편 잡아먹은 년.’
 시집 식구들의 모진 박해를 받았다. 어머니와 강모 형제를 지켜준 건 증조할아버지였다. 그분은 늘 강모네 편이었다.
 
 “이놈도 제 애비처럼 내 대를 이을 모양일세. 침통을 집었어.”
 돌잔치 때 나온 증조할아버지의 탄성이었다. 어린 강모를 안고 어깨춤을 추었다.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 고모의 아들딸들이 다 비켜갔던 침통이었다.
 “그래그래, 요즘은 한의학이 찬밥이지만 증손자 중에서도 한 놈 정도는 내 뒤를 이어야지.”
 증조할아버지는 강모가 세 살 때 하늘로 떠났다. 유언에 의해 화장을 했고 선산에 유해를 뿌렸으니 영혼조차 다시 볼 일이 없었다.
 
 공기 좋네?
 차라리 속은 편했다.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고모 식구들의 회사 승계 전쟁 안 봐도 되고.
 이렇게 저절로 힐링이 되는 곳.
 
 강남에 개원해서 간 쓸개 빼놓고 강남 사모님들께 비만침이나 동안침 놓으며 알랑거리는 거 보다 좋을 지도 몰라. 돈은 밥 먹고 살만큼만 벌면 되지, 뭐.
 강남의 한양방통합병원에서 한방전문의 과정을 마친 강모였다. VIP 환자들에게 엄청 시달렸다. 그렇기에 자기 최면으로 깡촌 합리화 방어막을 한 겹 둘렀다.
 
 ‘올 시간이 지났는데?’
 마당으로 나온 강모가 시계를 확인했다. 미리 주문한 한의원 현판 택배를 기다리는 것이다. 밖이 살짝 소란스러워졌다. 택배가 온 모양이었다.
 
 “......?”
 잔디를 헤치고 나오던 강모가 소스라쳤다. 택배가 아니었다. 대문 앞에 경찰 오토바이가 쓰러졌다. 두 사람이 엉성하게 깔렸다. 그중의 한 사람, 경찰이 강모를 향해 권총을 겨눴다.
 
 “꼼짝 마. 손들어.”
 “도둑 맞잖아? 못 보던 놈이야.”
 겨우 몸을 추스른 아저씨 하나가 경찰 뒤에서 소리쳤다. 깡마른 체구에 초록 새마을 모자, 검은 장화가 인상적이었다.
 “저 도둑 아닌데요?”
 “닥쳐. 도둑 아닌데 왜 남의 집에 침입했어?”
 새마을 모자 아저씨가 눈을 부라렸다.
 
 “여기 제 집이에요.”
 “얌마, 이 집은 길창덕 선생 집이야. 옛날옛날에 팔도 명침명의로 날리던 길창덕 한의사.”
 “제가 증손자예요. 집은 제가 물려받았고요.”
 “엥?”
 새마을 모자가 경찰을 바라보았다.
 “진짜입니까?”
 경찰이 물었다.
 “그렇다니까요. 그러니까 그 총 좀 치우세요.”
 강모가 민쯩을 내밀었다.
 “일단 파출소로 갑시다.”
 경찰이 권총을 거두었다.
 
 “아, 씨...”
 짜증과 함께 다리를 전다. 보아하니 초임 순경이다. 도둑인 줄 알고 많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서두르다 오토바이와 함께 쓰러진 게 틀림없었다.
 피시시.
 오토바이 시동은 걸리지 않았다.
 “아, 이거 또 말썽이네.”
 경찰이 오토바이를 걷어찼다.
 
 “맞는데?”
 신원조회를 마친 양 경사가 이 순경을 바라보았다. 이 순경은 조금 전 강모를 겨눈 그 사람이었다.
 “맞다는 데요? 이분도 한의사고요.”
 이 순경이 새마을 모자에게 전달을 했다.
 “그러니까 이 양반이 길창덕 선생님 증손자인데 증조할아버지 대를 이어 우리 면에 한의원을 개업하려고 귀향을 했다?”
 “길강모 씨 말에 의하면...”
 
 “워매, 환장하겠네. 그게 말이 돼? 길창덕 선생 죽은 지 어언 20여 년, 자식들은 서울에서 엄청 큰 제약회사로 떼돈 버느라 바빠 코빼기도 안 비치던데 이 깡촌에 뭣하러? 막말로 우리 강산면 사람들 다 합쳐야 몇이나 된다고?”
 “이장님, 가업 이으러 왔다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야 한의원 생기면 나쁠 거 없잖아요.”
 새마을 모자의 정체가 드러났다. 그는 이장이었다.
 
 “그만 가봐도 됩니까?”
 강모가 일어섰다.
 “그러세요.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이 순경의 사과를 받으며 밖으로 나왔다.
 
 “저기.”
 돌아가는 강모의 뒤에서 이장이 손짓을 까닥거렸다.
 “저요?”
 “진짜 한의원 다시 하는 거요?”
 “그렇습니다만.”
 “혹시 때려부수고 요양원 같은 거 지으려는 건 아니고?”
 “아닌데요?”
 “진짜?”
 “예.”
 “그럼 언제 문 열어요?”
 “왜요?”
 “아, 왜는? 침 좀 맞으려고 그러지. 길 선생님이 명침명의셨으니 그 씨가 어디 가겠어?”
 “다친 데 있어요?”
 “아까 오토바이랑 넘어지면서 발목이 삐었는지 시큰거리네. 원래도 안 좋던 곳인데... 여기 한의원은 읍내나 가야 있으니...”
 “......”
 “그쪽 신고하느라 그런 건데 좀 안 될까?”
 눈빛이 쌔하다. 시골 사람들 텃세 심하다는 말은 들은 바였다.
 
 “저기 평상에서 기다리세요.”
 등나무 앞 평상을 가리키고 차로 돌아왔다. 침은 차 안에 많았다. 먼지투성이 한의원으로 갈 수 없으니 평상에서 침을 놓았다.
 바지를 걷고 발목의 구허혈과 발목 위의 현종혈, 무릎의 양릉천혈에 침을 꽂았다. 삔 데 많이 쓰는 혈자리였다.
 
 “장침이 아니네?”
 이장 반응이 퉁명스럽다.
 “요즘 누가 장침 놓습니까?”
 “거그 증조할아버지는 장침만 썼는데?”
 “......”
 “어째 별로 안 시원한데?”
 이 말에는 살짝 찔렸다. 고백하자면 강모의 침술 실력은 평균 아래 쪽이었다.
 “침값은 얼마 쳐드려?”
 “됐습니다.”
 “그럼 공짜 침 맞은 대신 비밀 하나 알려줄게.”
 모자 챙을 뒤로 돌린 이장이 강모의 귀로 다가왔다.
 
 “실은 말이지...”
 “예?”
 강모의 눈빛이 튀었다.
 “살구나무에 글자 먹는 귀신이 붙었으니까 베어버리라고요?”
 “그렇다니까. 경찰도 안 믿지만 증거가 있어. 보여줄 수도 있고.”
 “증거요?”
 “그래서 우리가 베려고 했는데 남의 나무 베면 교도소간다고 해서 그냥 뒀어. 보여줘?”
 이장의 표정은 진지하고 또 진지했다.
 
 이러면 보는 수 밖에.
 
 
 *** 이 작품은 현대판타지소설입니다. 한의학 이론을 주로 하였으나 소설로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

작가의 말

새 작품으로 인사를 드립니다.

다음 편 있습니다. 

댓글(131)

난의향기    
잘 보고 갑니다.
2022.02.22 10:47
朝霞    
다시 보니 반갑습니다.ㅎㅎ
2022.02.22 11:19
g2**************    
잘보고갑니다 작가님
2022.02.22 11:24
까칠한곰S    
잘 보겠습니다..쪽지가 와서 그대 완전 하고 있습니다
2022.02.22 11:38
아사아    
그쪽 신고하느라 그런건데???? 어이가없네... 지가 병신짓해놓고 피해자한테 뒤집어씌우네
2022.02.22 13:34
yeom    
잘 보고 갑니다.
2022.02.22 21:09
수진자    
감사 ~
2022.02.22 21:16
윈나우    
응원합니다!~
2022.02.23 08:13
조카    
왔숑???
2022.02.23 10:25
묘한인연    
신작 축하드려요.
2022.02.27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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