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드림워커 [E]

드림워커 1권(상)

2015.02.04 조회 2,264 추천 23


 Prologue
 
 
 
 
 
 오전 5:00 기상
 오전 5:30 신문 배달
 오전 7:30 등교
 오후 4:10 하교
 오후 5:00 아르바이트
 오후 11:00 퇴근
 오전 1:00 취침
 
 하루 네 시간의 취침.
 그리고 어김없이 이루어지는 아르바이트.
 삼 년 동안 이어진 나의 삶이다.
 그래서 나는 꿈을 꾸려고 한다.
 이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제1장 꿈의 세계
 
 
 
 
 
 시끄러운 음악이 방 안을 뒤덮는다. 경쾌한 음악과 달리 방 안의 풍경은 초라했다. 다섯 평 남짓한 방 안에는 책상과 옷장이 대부분의 공간을 차지하여 한 사람이 누울 공간밖에 없었다.
 “아침이네.”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는 핸드폰을 확인하는 이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새벽 다섯 시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곧바로 씻고 옷을 챙겨 입은 뒤 집을 나섰다.
 남들보다 일찍 일어난 그는 신문을 배달했다. 아파트 단지부터 시작하여 주택이 밀집한 곳까지 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여섯 시 반이었다.
 찌개를 끓이고 계란찜을 만든 뒤 거실에 잠들어 있는 사람들을 깨우면 가족들의 하루가 시작된다.
 “일어나세요, 엄마. 아영이, 아현아, 아침이야. 일어나라.”
 “으응, 아침이야?”
 “그래, 일곱 시 다 되어간다. 지각 안 하려면 일어나야 돼.”
 “알았어.”
 앳된 외모의 귀여운 소녀 아영은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쌍둥이 언니인 아현은 칭얼거리며 자리에 누워 있다.
 “아현아, 일어나.”
 “으으, 아영이 씻으니깐 좀 더 잘래. 오 분만.”
 “미적거리지 말고 일어나서 좀 도와. 아침부터 오빠만 고생하게 만들 거냐.”
 “……칫, 알았어.”
 툴툴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아현은 입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상을 차렸다.
 찌개와 계란찜, 반찬을 올려놓은 뒤 조심스럽게 잠든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엄마, 일어나세요. 아침 드셔야죠.”
 “아침이니?”
 “네, 일곱 시 다 돼가요.”
 “그래…….”
 힘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한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본격적으로 식사가 시작되었다. 소년은 빠른 속도로 밥을 먹으며 쌍둥이 여동생들 준비물을 체크하고 말을 이어나갔다.
 “이번 달 방세도 문제없을 것 같아요.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괜찮겠니?”
 “네, 아르바이트에서 버는 돈이 있으니까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미안하다, 기준아.”
 “미안하긴요.”
 분위기가 가라앉으려 하자 기준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짐짓 매서운 눈으로 쌍둥이 여동생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얼마 후면 중학교 시험인 거 알고 있으니까 성적표 감출 생각 마. 알겠지?”
 “네, 오빠.”
 “칫! 어떻게 알았대.”
 순순히 대답하는 아영과 달리 아현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은 기준은 깨끗하게 비워진 밥그릇을 들고 설거지통에 넣어둔 뒤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챙겨 들었다.
 “설거지 좀 부탁하마.”
 “오백 원!”
 빠듯한 용돈 사정을 타파하기 위한 아현의 거래 요청이 들어왔지만 예상하기라도 한 듯 가볍게 떨쳐 버리고 의젓한 여동생에게 시선을 옮겼다.
 “부탁한다, 아영아.”
 “응,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오빠.”
 “늦지 말고 집에 들어오고. 특히 아현이 너.”
 지목당한 아현은 기분이 상한 표정이었다. 언니인 자신만 철없는 아이 취급을 하는 것에 불만을 토로했다.
 “내가 아직도 어린애인 줄 알아?”
 “중학교 1학년이면 아직 어린애다.”
 “어린애 아니거든!”
 “그래, 어린애가 아니니 일찍 올 거라 믿고 간다.”
 가볍게 손을 저어 보이고 밖으로 나온 기준은 학교로 향했다. 그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가면 사십 분이 넘게 걸리는 곳이다.
 버스를 타면 십 분 정도 걸려 도착할 수 있지만 집안 형편이 여의치 않아 버스비도 부담이 되는 실정이었다.
 “3학년이 되면 더 일찍 다녀야 할 텐데.”
 걱정을 표하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학교에서의 기준은 평범한 학생이었다. 180cm 정도의 큰 키에 반듯한 모범생 이미지를 지니고 있어 선생님들 사이에서 평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보이는 것과 달리 대인 관계는 원만하지 못한 편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리려고 하지 않아 쉬는 시간에도 혼자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점심시간이 되면 대부분의 학생은 급식을 먹으러 가지만 급식비도 부담감을 느낀 기준은 도시락을 싸와 조용한 곳에서 혼자 해결하고는 했다. 굶는 것이 편한 방법이지만 저녁에도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로서는 점심을 든든히 먹어둬야 했다.
 방과 후 대부분의 학생은 자율학습을 하지만 기준은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아르바이트를 위해 밖으로 나왔다.
 그가 아르바이트하는 곳은 고급 뷔페였는데, 마음씨 좋은 사장님과 지배인을 만나 월급 떼일 걱정 없이 일할 수 있었다.
 평일은 다섯 시간씩, 주말은 풀타임으로 일하고 한 달 중 이틀 쉬는 것을 제하고 월급 백만 원을 받는다. 힘들고 정신없지만 학생 신분으로 이만큼 벌기는 어렵기에 휴일에도 추가 수당을 받으며 일하고는 했다.
 오후 다섯 시부터 저녁 열 시까지 일하고 정리를 마친 뒤 집으로 돌아오면 열한 시 전후가 된다.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오면 반겨주는 것은 어머니와 여동생들이다.
 “오빠, 어서 와. 힘들지?”
 “힘들긴. 내가 열심히 일을 해야 우리 아영이 용돈도 주고 하지.”
 “용돈은 괜찮아. 좀 쉬어. 그렇게 일하면 몸이 안 좋아져.”
 “걱정해 줘서 고맙다.”
 나이에 비해 일찍 철든 여동생이 대견해 머리를 쓰다듬어 준 기준은 아현이 상을 차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녁 제대로 못 먹었잖아. 빨리 먹어. 치우게.”
 “네가 웬일이냐?”
 “칫! 난 이러면 안 되나?
 “안 되는 게 아니라 의외라서. 뿔난 망아지가 드디어 철들었나?”
 “됐으니까 밥이나 먹어! 많이 먹고 돼지나 되어버려라!”
 바락 소리친 뒤 혀를 날름거리는 모습에 웃음을 지은 기준은 자리에 앉아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먹기는 하지만 워낙 시간이 없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다.
 방세와 생활비, 분기마다 내는 공납금을 보태야 하기에 밥 먹을 시간까지 아껴야 하는 실정이다.
 “아현이가 차려줘서 그런지 더 맛있는걸.”
 “그러면 용돈이나 주셔.”
 “아르바이트비 나오면 주마.”
 “정말? 모든 게 계획대로! 헉!”
 두 주먹을 움켜쥐고 기뻐하던 아현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입을 다물며 정색했지만 물은 엎질러져 있었다.
 “설마 그게 목적이었냐?”
 “그럴 리가. 난 오빠를 위한 순수한 마음에 차려줬단 말씀. 호호!”
 가식적으로 웃는 모습이 앙큼했지만 기꺼이 눈감아주었다. 한창 반항기에 들어설 사춘기임에도 분란을 일으키지 않고 이렇게 지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식사를 마친 뒤 뒷정리를 아현에게 맡긴 기준은 씻고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부터 신문 배달을 시작으로 학교생활과 뷔페 아르바이트까지 고된 노동의 연속이다.
 눈을 감기가 무섭게 기준은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이대로는 안 돼.”
 몸이 버텨내지 못하는 걸 느낀 기준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하루하루가 생활고의 연속인 일상에서 잠을 줄이기 어려운 상황이다. 성적에도 신경을 쓰고 있어 학교에서 자는 것도 용납하지 못했다.
 고민하던 그가 찾아낸 방법은 수면의 효율을 극대화시키는 것이었다.
 루시드 드림(Lucid Dream).
 흔히 말하는 자각몽인 이것은 수면자 스스로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채 꾸는 꿈을 말한다. 하루 네다섯 시간을 수면으로 보내는 기준에게 있어 이 시간을 잘 활용할 수 있다면 더 매력적인 것은 없을 터였다.
 아르바이트를 마친 그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루시드 드림에 관련된 자료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정보를 습득하면 바로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어느 정도 단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실망을 감추지 못했지만 집중하여 필요한 정보를 읽어 들였다.
 루시드 드림을 꾸기 위해서는 먼저 리얼리티 체크와 꿈 일기를 통해 단련을 해야 했다.
 리얼리티 체크는 꿈과 현실을 구분하는 것으로,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을 봄으로써 이곳이 현실이 아닌 꿈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일련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꿈 일기는 꿈을 꾼 내용을 공책에 적음으로써 꿈의 내용을 자각하여 꿈을 잊어버리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짧은 시간의 수면으로 최대의 효율을 내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를 필수적으로 해내야 했다. 꿈을 자각하되 짧은 수면 동안 오랜 시간 휴식을 취했다고 속임으로써 피로를 최소화시키는 것이 목표였으니 말이다.
 이 두 가지가 병행되는 가운데 루시드 드림을 꾸기 위해서 딜드와 와일드라는 방법이 존재한다.
 딜드는 꿈을 꾸는 도중 꿈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루시드 드림으로 전환하는 것을 말한다. 꿈을 꾸면서 리얼리티 체크를 해주어야 하는데 쉬워 보이지만 단련이 필요한 작업이기도 했다.
 리얼리티 체크와 꿈 일기를 병행하며 해야 하기에 습득이 빠르면 며칠 안에 가능하지만 늦으면 몇 달이 걸리기도 한다.
 와일드는 비몽사몽 상태에서 곧바로 루시드 드림을 꾸는 것을 말하는데, 이완기-과도기-안정기를 거치며 루시드 드림으로 넘어간다고 한다.
 “와일드를 위해서는 딜드의 단련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난 비몽사몽 경우가 많으니 곧바로 와일드가 가능하지 않을까?”
 정보 습득을 마친 기준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매력적이지만 몇 달이라는 시간 동안 단련해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나마 빠르면 며칠 내에 가능하다는 사실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다.
 “손해 볼 건 없으니 해보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기에 기준은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딜드보다 와일드를 선택한 것은 평상시의 생활과 대입해서 그렇다.
 아침 일찍 일어나 신문 배달을 하고 밤늦게까지 아르바이트를 한 뒤 돌아오면 남는 것은 피곤뿐이다. 지금 이 생활에 적응하기 전에 피곤해서 서서 잠들 뻔한 것을 감안하면 비몽사몽 상태에서 진입하는 와일드가 그에게 더 적합한 방법이었다.
 몸에 힘을 빼고 있으니 의식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서서히 잠에 빠져드는 듯 의식은 있되 몽롱한 상태에 빠져서 이곳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힘들어졌다.
 ‘현실? 꿈? 현실? 꿈? 꿈, 꿈이지.’
 잠에 빠져들면 제대로 된 사고가 불가능해진다. 그것은 기준 또한 마찬가지였다.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고, 주변 상황을 인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곳이 꿈의 세계라는 것을 인정하고 몸에 힘을 빼자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정신이 또렷하게 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무겁게 느껴지던 몸도 가벼워졌다.
 ‘여기가 꿈이라고?’
 무심코 방 안에 있던 시계에 시선을 옮기자 분침과 시침, 초침 삼십여 개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만으로도 확연한 꿈의 세계라는 것이 확인된 셈.
 움직임이 자유롭고 자신이 루시드 드림을 꾸고 있다는 사실이 확신으로 다가오자 기준은 미소를 지으며 침대에 누웠다.
 ‘이게 성공하기만 하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눈을 감은 뒤 수면을 취하려고 하자 곧바로 몸이 무거워지며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째각, 째각, 째각, 째각.
 그 후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귓가에 들려오는 초침 소리에 기준은 눈을 떴다. 그리고 시계를 바라보았지만 어지럽게 흩어져 있어 지금이 몇 시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피곤하니 좀 더 자자.’
 꿈의 세계라는 것도 망각한 채 다시 잠에 빠져드는 기준. 이어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지만 또다시 초침 소리에 깨어나고 말았다.
 이후 몇 번 더 같은 현상이 반복되었다. 잘 만큼 자게 되고 피로가 말끔히 풀리자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설마 영원히 있는 건 아니겠지?’
 루시드 드림을 처음 시도해 보았기에 겁이 들었다. 만약 깨어나지 못하게 되면?
 두려운 마음은 전염병처럼 급속도로 번져 전신을 잠식했다.
 마음속의 감정이 격해지기 시작하자 불같은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이 터질 때 마침내 흘러나오지 않던 육성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해야 되는 거냐고?”
 그 순간 세계가 변하기 시작했다. 순백의 공간이 어그러지기 시작하더니 또렷했던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헉? 하아!”
 거친 숨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기준은 아직 어두운 주변 환경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찔했던 루시드 드림의 경험을 떠올리며 머리맡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몇 시지?”
 시간을 확인하는 순간 기준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4:00 AM
 그가 잠든 시간이 1시 전후인 걸 감안하면 불과 세 시간밖에 수면을 취하지 않은 것이다.
 당황한 기준은 몸을 일으켜 이리저리 움직여 보였다.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물 먹은 솜처럼 무겁게 느껴지던 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세 시간의 수면으로 이런 효과가 가능하단 말인가?
 한 달에 한두 번 쉬는 날에 잠을 푹 자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몸이 가벼웠던 적은 없다.
 “루시드 드림의 효과?”
 서서히 밝아지는 표정. 이게 루시드 드림의 효과라면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을 손에 넣었다고 할 수 있다.
 자리에서 일어난 기준의 입가로 미소가 번져 나갔다.
 
 기준은 스스로를 이기적이라 생각한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꾀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지만 그보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며 자신의 이익을 중시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부정적인 단어지만 그는 이기적이라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그가 추구하는 이기심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다.
 생활에 여유가 없으니 다른 사람에게 주는 관심 또한 사치였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이 가끔씩 흔들릴 때가 있었다.
 “꺄아! 도둑이야!”
 찢어지는 여성의 비명 소리와 함께 요란한 엔진 음이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리니 오토바이를 탄 2인조 강도가 이른바 날치기를 한 상황이었다.
 소리를 지른 여인은 사십 대 초반 정도로 보였는데 차림새를 보아 넉넉하지 않은 삶인 듯했다.
 사람이 많지 않은 길이었기에 오토바이는 맹렬한 기세로 돌진했고, 사람들은 앞을 가로막을 생각조차 못하고 분분히 비켜섰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기준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도의상 도와야 함이 옳았지만 그의 이기심은 자신과 관련 없는 일에 나서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삭막하잖아?’
 자신을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의롭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눈앞의 불의를 보고 외면하면 사람이 지니고 있어야 할 최소한의 도덕심조차 없다는 뜻 아닐까.
 여인의 모습으로 보아 살림이 넉넉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지금 빼앗긴 돈이 큰 타격이 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해보자.’
 결심을 굳히는 순간 오토바이가 그의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달려서 쫓아갈 수 없었기에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그대로 집어 던졌다.
 구두와 유니폼이 든 가방은 정확하게 오토바이 뒤에 탄 강도의 머리에 작렬했다.
 “억!”
 끼이익!
 외마디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며 오토바이가 미끄러지면서 거세게 흔들렸다. 멈춰 선 오토바이를 보는 순간 달려든 기준이 강도 녀석을 후려쳤다.
 “이 새끼가!”
 욕설이 터져 나왔지만 기준은 한 녀석만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가방을 가진 놈만 묶어둘 수 있다면 일을 해결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때 빡!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드기처럼 떨어지지 않는 기준을 향해 헬멧을 휘두른 것이다.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손에 쥔 힘을 풀지 않고 잡아 물고 늘어졌다.
 “이, 이 자식! 진짜!”
 헬멧을 휘둘렀던 녀석은 끝까지 떨어지지 않는 기준을 보며 당혹스러운 음성으로 중얼거리다가 오토바이를 타고 도망쳤다.
 그사이 은행에서 나온 무장 경관이 쓰러져 있는 강도를 제압했다. 상황이 종료되자 다리에 힘이 풀린 기준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후우!”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총각.”
 “나쁜 놈을 잡는 건데 당연히 나서야죠. 소중한 돈이잖아요?”
 웃어 보이는 모습에 아주머니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르바이트 시간이 다 되어 가야 한다고 말을 했지만 한사코 놓아주지 않았다.
 어떻게든 보답을 하고 싶어 하는데, 넉넉해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보고 한몫 챙기려 할 정도로 궁핍하지는 않았다.
 잡아끌다시피 그를 데리고 간 곳은 근처에 위치한 빵집이었다. 그곳에서 여러 개의 빵을 구입하여 감사의 인사를 표시했다.
 차마 그것까지 거절할 수 없었던 기준은 봉지를 받아 들고 아주머니와 헤어졌다. 뒤통수를 맞는 등 여러모로 고생을 했지만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뿌듯했다.
 정신없이 서빙을 하며 움직이다가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낀 기준은 인상을 찡그렸다.
 “무슨 이상이 있는 건 아니겠지?”
 가끔씩 지끈거리는 두통이 느껴졌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날은 조금 달랐다.
 루시드 드림을 꾸기 위해 자리에 누운 기준은 평소와 다르게 진행되는 것을 깨달았다.
 꿈의 세계라는 자각을 할 틈이 없었다. 몸이 붕 뜨는 느낌과 함께 어디론가 빨려들어 가는 느낌을 받았다. 곧이어 새하얀 빛이 눈을 어지럽히더니 푸른 하늘이 두 눈에 담겼다.
 고개를 아래로 내리니 거대한 성이 눈에 들어왔다.
 중세시대를 연상시키는 성안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분주히 움직이며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얼마나 구경했을까.
 주변 풍경이 빨리 감기 하는 것처럼 뒤바뀌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나무가 우거진 숲이었다. 점점 깊은 곳으로 들어가자 목책에 둘러싸인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준의 시선이 고정된 것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집이었다.
 그곳에는 중년 부부와 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소년이 살고 있었다.
 소년의 이름은 유델.
 기준은 새로운 세계와 조우하게 되었다.
 
 남들이 보기에 기준은 집안 형편이 좋지 않은 평범한 고등학생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기준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을 간직하게 되었다.
 꿈에서 본 세계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였다.
 그곳에서 기준은 유델이라는 소년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다.
 유델은 기준보다 세 살 어린 열다섯의 어린 소년이었다. 산골 마을 출신인 그는 사냥꾼인 아버지와 상점을 하고 있는 어머니를 두어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냥꾼이 되겠다며 매일같이 수련하는 유델의 하루하루는 기준의 것과 달리 행복한 나날이었다.
 기준이 사는 곳과 다른 이곳은 중세시대의 배경에 유사 인종과 몬스터가 존재하는 세계였다.
 유델은 사냥꾼이 되고자 다양한 공부를 하였다. 산을 타는 법과 간단한 약초술, 몬스터의 종류 등을 익혔고, 글공부를 병행해 나갔다.
 그의 시야를 함께 공유하는 기준은 유델이 습득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유델의 아버지는 산골 마을 사냥꾼에 불과했지만 젊은 시절 용병으로 활약하여 돈을 모아 용병계를 은퇴한 성공한 인물이었다.
 그가 가르치는 검술은 살기가 짙었지만 당장 실전에 적용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렬했다.
 기준은 그것을 눈여겨보며 익히길 주저하지 않았다.
 잠이 들 때마다 기준이 겪는 유델의 시간은 정확히 하루였다.
 많은 것을 보고 습득하게 되니 기준은 또래에 비해 훨씬 성숙한 사고를 가지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의 마음에 드는 이유는 따로 존재했다.
 “전혀 피곤하지 않으니.”
 유델의 하루를 겪고 나면 전날 쌓였던 피로가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남들이 모르는 그만의 비밀은 무척 매력적인 것이었다.
 
 그날은 유난히 운수가 나쁜 날이었다.
 점심시간이 되고 학생들이 급식소로 향할 무렵, 기준은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들고 교실을 나섰다. 그가 주로 밥을 먹는 곳은 학교 건물 뒤쪽에 있는 작은 정자였다.
 그곳에 도착한 그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인적이 드물던 그곳에 뉴스로만 보던 학교 폭력의 실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세 명의 학생이 한 명을 둘러싼 채 험악한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었다.
 눈에 띄어 조용한 학교생활이 망가질까 싶어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한 녀석이 그를 발견하곤 소리 높여 불렀다.
 “이리 와라!”
 못 들은 척하고 걸음을 옮기니 어깨를 움켜쥐는 손길과 함께 살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꺄! 내 말 안 들리냐?”
 “관련 없는 일이니 상관하고 싶지 않은데.”
 “뭐? 이 새끼 말하는 거 봐라. 너도 와, 새꺄.”
 냉정히 끊어서 말하는 기준의 모습에 녀석은 입가에 비웃음을 짓더니 어깨를 잡아끌었다.
 가까이서 보니 기준은 이 녀석들이 제법 전문가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몸을 웅크리고 있는 학생은 왜소한 체격이었는데, 교복 곳곳이 더러웠지만 구타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기준이 다가오자 녀석들은 눈을 빛냈다. 180cm에 달하는 그의 덩치는 작은 것이 아니었지만 순순히 끌려오는 것을 보니 덩칫값도 제대로 못하는 녀석이라 판단했다.
 겁을 주면 알아서 길 것이라 생각하며 사뭇 위압적인 어조로 말을 꺼냈다.
 “야, 돈 있냐?”
 “돈 없는데.”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태연한 기준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압박했다.
 그러나 정작 그 모습을 바라보는 기준은 그 모습이 무섭기는커녕 우습기만 하였다. 비록 꿈이라고는 하나 유델은 목숨을 걸고 짐승을 사냥한다. 동급생의 어설픈 압박 따위가 먹힐 리 없다.
 “돈이 없는 걸 없다고 하지 뭐라고 하냐?”
 “하! 아무래도 이것처럼 되어봐야 정신을 차리려나.”
 뒷말을 작게 중얼거리며 웅크리고 있는 학생을 발로 건드린 녀석이 건들거리는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짓고 지척에 도달했을 때, 녀석은 가볍게 이죽이더니 그대로 주먹을 날렸다.
 기습적인 공격이기에 피하기 힘들었다.
 평소라면 말이다.
 주먹이 날아오는 순간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녀석의 모습이 슬로우 비디오처럼 느리게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약한 학생이나 괴롭히지만 양아치 노릇을 하고 있는 놈의 주먹이 이렇게 형편없을 리 없다.
 지금 그가 겪고 있는 상황은 마치 고속열차에서 바깥 풍경이 느리게 지나가는 것처럼 보고 있는 둘 사이 시간의 흐름이 달랐다.
 이상하다고 느낀 순간 기준의 중심이 앞으로 기울어지며 놈의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고 있었다.
 “꺽!”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놈의 몸이 기울어졌다. 명치가 적중당하면서 순간 호흡 곤란이 찾아온 것. 거기에 그치지 않고 무릎으로 놈의 허벅지를 찍어버렸다.
 형편없이 널브러지는 녀석의 모습을 본 다른 놈들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기준은 그들이 달려들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정확히 급소만 노리는 그의 주먹은 논다 하는 고등학생이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두 녀석을 보며 기준의 눈이 거세게 떨렸다.
 싸움 한번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자신이 능수능란하게 양아치 녀석들을 제압한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것은 녀석들에게 당하고 있던 학생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눈을 크게 뜨고 기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우!”
 가볍게 숨을 몰아쉰 그는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학생을 힐끗 보다 그대로 몸을 돌렸다. 아등바등하지 못하고 양아치 녀석들의 노리개로 전락한 이와 상종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의문이 담긴 목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머릿속이 복잡하게 헝클어졌다.
 남들에 비해 작지 않은 체구를 지녔다고는 하나 상대했던 녀석들 모두 비슷한 체구였고, 그보다 훨씬 싸움 경험이 많을 것이다.
 기준이 그들에 비해 앞서는 것은 꿈의 세계에서 간접적으로 겪은 혹독한 수련과 살벌한 실전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머릿속에 박힌 것일 뿐, 실제로 겪어보지 않았기에 크게 도움될 것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일어난 일은 그로서도 쉬이 넘길 수 없었다. 자신이 녀석들을 쓰러뜨릴 때 사용했던 수법은 꿈속의 유델이 아버지에게 익힌 체술이었다.
 꿈속에서 보았던 체술이 마치 몇 년 동안 익힌 것처럼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꿈속의 체험을 현실에서 재연하는 일이 가능하다?
 그전까지만 해도 꿈의 세계는 자신만 겪는 특이한 현상이며 짧은 시간 수면을 취해도 피로가 말끔히 회복되는 것이 전부라 생각하던 기준에게, 이번 일은 큰 충격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닐 수도 있지만 시험을 해봐도 나쁘지 않겠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홀로 사냥을 떠난 유델은 그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능숙한 실력을 선보였다.
 기준보다 두 살이나 어리지만 죽이지 못하면 죽는 세계에서 살아온 유델의 손속은 과감하고 거침없었다.
 단호하기까지 한 그 모습을 보면서 기준은 느끼는 것이 많았다.
 지끈!
 ‘뭐야?’
 사냥이 끝나갈 무렵, 기준은 강렬한 두통을 느꼈다. 그동안 꿈의 세계에서 고통을 느껴본 적이 없다.
 ‘이건 대체?’
 유델에 빙의하듯 얹혀 있는 자신을 강렬하게 잡아끄는 흡인력에 기준은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자 했다. 하지만 몸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유델이었기에 불가능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고개를 갸웃거린 유델은 기준이 원하는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강렬한 파장이 느껴진 곳은 작은 동굴이었다. 몸을 웅크리고 들어가야 할 정도로 작았지만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지고 있었다.
 “뭐지?”
 이상함을 느낀 유델은 방향을 바꿔 걸었다. 오랫동안 방치된 듯 짐승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알 수 없는 끌림을 느낀 그는 몸을 웅크려 안으로 들어갔다.
 “이상한데?”
 동굴 안은 생각 외로 깊었다. 흡인력이 발휘되는 것처럼 끌려가듯 안으로 걸음을 옮긴 유델은 어느덧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잔뜩 웅크리고 있던 몸이 어느새 꼿꼿하게 펴지고 있는 것을 그는 깨닫지 못했다.
 “이, 이건…….”
 동굴 끝에 도달했을 때 유델의 입은 크게 벌어지고 말았다.
 그가 서 있는 곳은 거대한 공동이었다. 수백 명의 사람이 서 있어도 부족하지 않을 거대한 공동 중앙에는 작은 언덕이 존재했고, 그 위에 한 자루의 검이 꽂혀 있었다.
 홀린 표정으로 다가간 유델은 검에 손을 뻗으려다가 멈칫했다.
 검 앞에는 예전 주인이 적은 듯 날카로운 예기가 느껴지는 글씨가 패에 새겨져 있었다.
 
 [목표가 있는 자, 꿈이 있는 자, 신념이 있는 자, 뽑아라.]
 
 글에 새겨져 있는 강렬한 기운은 유델을 휘감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전율에 휩싸인 그는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은연중 자신이 저 검을 감당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멍한 눈으로 바라보던 유델이 결정을 내린 듯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욕심과 체념 두 감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그의 감정은 고스란히 기준에게 전해졌다.
 ‘이건 기연이라 불리는 것 아닌가? 왜 취하지 않는 거야?’
 유델의 감정에 기준은 어이가 없었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남들이 말하는 기연이라 불리는 것임이 분명했다.
 천운이 따르지 않으면 찾아오지 않는다고 알려진 기연이었다.
 그것이 눈앞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취하지 않는 유델의 행동이 답답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목표와 꿈, 신념이 복잡할 이유가 있어? 그럴 필요가 없어.’
 기준 또한 패에 새겨져 있는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검의 주인이 주인을 선별하기 위한 자격 요건에 지나지 않았다.
 유델에게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족을 부양하겠다는 목표가 존재했고, 사냥꾼이 되겠다는 꿈이 존재했으며, 가족을 보호하고 정의를 따르겠다는 신념을 품고 있다.
 어렵게 생각할수록 어려운 것이지만 간단하게 생각하면 간단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돌아가자. 내 것이 아니야.”
 결국 뒤로 물러서는 유델을 보며 기준은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와 다르기에 생각하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후우!’
 동굴 밖으로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에 기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굴러 들어온 행운을 제대로 움켜쥐지 못한 유델에게 혀를 찼다.
 스스로의 가치를 폄하하고 행운을 걷어차는 행동이 마음에 들 리 없었다.
 ‘자질을 갖추고 노력을 기울이지만 그것뿐이었다니…….’
 오늘의 충격에서 벗어나고 싶었는지 유델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것으로 꿈의 세계는 끝. 현실로 돌아온 기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시간을 확인하니 평소보다 이른 시간이었다.
 “멍청한 녀석.”
 누구는 그런 행운을 발견하지 못해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내고 있다. 포근한 엄마와 톡톡 쏘는 아현, 성숙한 아영이 있기에 힘을 내어 살아가지만 다른 이들이라면 포기했을지 모를 혹독한 삶이다.
 “근본적인 마음가짐이 바뀌어야 돼. 실력을 갖췄으면 뭐 하나. 후우.”
 만약 자신이 현실에서 유델과 같은 환경이 주어졌으면 어떨까 생각을 해본다. 마나를 활용해 검술과 체술을 익히는 생활과 부족하지 않은 집안 환경, 모든 것이 만족스러울 것이다.
 “결국 그 정도로 끝난다면…….”
 꿈의 세계는 기준에게 많은 정보를 가져다주었다. 유델이 익히고 있는 검술과 체술을 익히고 있기에 마법이라는 것도 보고 싶은 것이 그의 솔직한 생각이었다.
 “마법을 현실에서 사용할 수만 있다면 나쁘지 않을 텐데.”
 마법을 익히고 그것을 토대로 현실에 응용할 수만 있다면 돈을 벌 기회는 무궁무진하다.
 내심 유델이 세상에 나아가 마법을 접하고 익히길 바랐지만 그의 소심한 면을 알아버린 기준은 극심한 허탈감을 느꼈다.
 그 순간 그는 멈칫했다.
 한 가지 잊고 있던 사실이 그의 뇌리를 강타하며 등골이 서늘해졌다.
 “잠깐, 내가 어떻게 유델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이지?”
 소름이 번져 나갔다.
 
 꿈의 세계에서 벌어진 변화는 기준으로 하여금 꿈과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불안함을 느끼게 했지만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고심하던 그는 결심을 굳히곤 두 여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여긴 왜?”
 아현은 양 볼을 부풀린 채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옆에 선 아영은 궁금증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의아한 표정을 짓기는 마찬가지였다.
 두 여동생을 데리고 온 곳은 뒷산에 있는 공터였다. 간단하게 운동할 수 있는 이곳은 아침 시간에나 사람이 있을 뿐 이후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가르쳐 주고 싶은 것이 있어서……."
 “뭘 가르치려고? 가르치려면 집에서 가르쳐도 되잖아.”
 방과 후 곧바로 집에서 불려 나온 탓에 아현은 짜증을 부렸다. 평소라면 엄하게 말했을 기준이지만 고개를 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가르치고 싶어도 집은 좁아서 안 돼. 나도 없는 시간 내서 부른 거니까 불만스러운 표정 그만 짓고.”
 “뭔데?”
 “호신술.”
 “뭐?”
 “호신술이라고.”
 그의 말에 아현과 아영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무슨 뜻이야? 갑자기 호신술은 뭐고? 지금 장난해?”
 “자세한 설명이 필요해요.”
 다급하게 묻는 아현과 달리 아영은 차분한 어조로 설명을 요구했다. 고개를 끄덕인 기준은 자신의 생각을 천천히 털어놓았다.
 “인연이 닿아 호신술을 익히게 되었다. 남들이 말하는 비전이라 불리는 건데, 그분에게 허락을 받아서 가족에게 전수할 수 있게 되었다. 알다시피 요즘 여자들이 다니기 험한 세상이기도 하고.”
 기준의 말에 둘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에 잠기는 아영과 달리 아현은 코웃음을 쳤다.
 “헹!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 내가 믿을 줄 알고?”
 “그럼 내기를 해볼까?”
 “내기?”
 “그래, 내가 이 자리에 서 있을 테니 넌 손발을 이용해서 날 밀어내기만 하면 돼. 십 분 안에 밀어내면 용돈 오만 원 줄게.”
 “오, 오만 원? 좋아, 할게! 십 분도 필요 없어! 오 분이면 충분하니까!”
 넉넉하지 않은 가정 형편이어서 늘 용돈이 부족한 아현에게 기준의 제안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눈을 반짝이는 그녀와 달리 아영은 조용히 상황을 주시했다.
 “대신 너도 약속해라. 해내지 못하면 군말 없이 호신술을 익히기로.”
 “알았어. 그럼 바로 간다? 이얍!”
 영악하게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현은 두 손을 뻗고 달려들었다. 기준의 키가 크기는 하지만 체중을 실어서 밀어버리면 못 넘어뜨릴 것도 없었다.
 ‘어려워. 언니가 이길 것 같은데. 오빠가 거짓말을 한 걸까?’
 아영이 보기에도 기준이 밀려날 것이 당연할 것 같은 상황이었다.
 득달처럼 달려들었지만 그 순간 손을 뻗은 기준이 아현의 어깨를 잡고 가볍게 힘을 주니 달려들던 그녀는 몸의 중심이 기울어지며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아얏!”
 “네 성격을 내가 모를 것 같냐?”
 “이익!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이를 갈며 폴짝 뛴 아현은 독 오른 살쾡이처럼 달려들었다. 손발을 어지럽게 흔들었지만 그 모습을 보며 기준은 입꼬리를 말아 올릴 뿐이었다.
 기준이 익힌 체술은 실전적인 면이 극히 강화된 것이다. 무기를 잃어버렸을 때 간단한 움직임을 통해 적을 제압하는 호신술은 현대 여성이 익히기에 적합했다.
 십 분이라는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다.
 승부는 진즉에 갈렸다. 아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기준을 바라보았다.
 “하악! 학! 학! 마, 말도 안 돼!”
 그녀의 두 눈에 경악이 담겨 있었다. 공언했던 것처럼 기준은 정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온갖 수를 써서 밀어버리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기준은 몸 전체를 이용하여 가볍게 자신을 흘려버렸다. 그리고 상황마다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부분을 툭툭 건드리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 어떻게 익힌 거야?”
 “아는 사람을 통해 우연히 익혔다. 내 말이 거짓이 아니란 걸 알겠지?”
 둘이 고개를 끄덕이자 만족한 기준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비인부전이라 칭해지는 무술이다. 복잡하지 않지만 효율적인 면이 극대화되어 있고 살상력이 높아. 위험한 상황에서 상대를 제압하는 데 도움이 될 거다.”
 “익히면 나도 무공 고수가 될 수 있는 거야?”
 “갑자기 무슨 무공 고수?”
 기준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아현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물었다.
 “비인부전이라며? 그거 무공 전수할 때 하는 말 아니야?”
 “세상에 무공이 어디 있나. 그냥 효율적인 무술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 칫! 무공인 줄 알았는데.”
 가치를 높이기 위해 가져다 붙인 것이 엉뚱한 상상을 유발하게 만든 셈이었다. 코웃음을 친 기준은 그녀의 상상을 가볍게 부숴주었다.
 “무공은 무슨. 어쨌든 약속했으니 앞으로 한 시간씩 익히도록 해.”
 “칫칫!”
 위력을 직접 목격했지만 형편없이 당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양 볼에 바람을 넣는 아현이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기준은 당근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말을 덧붙였다.
 “효과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구나. 이 무술은 성장 촉진에도 효과가 있다.”
 “저, 정말? 거짓말 아니지?”
 “익혀보면 알 거다.”
 “그럼 익힐래! 아영아, 우리에게 희망이 생겼어!”
 또래보다 작은 체구가 늘 불만이었던 아현은 기준이 내민 미끼를 물었다. 조용하던 아영 또한 두 눈을 빛내며 의욕이 담긴 표정을 하였다.
 여동생들의 귀여운 모습에 기준은 미소 지었다.
 “그럼 간단하게 시범부터 보여주마.”
 
 
 
 
 
 제2장 경계의 선
 
 
 
 
 
 기준의 하루는 예전보다 훨씬 바빴다.
 최근 들어 하루에 한 번씩 체술과 검술을 연습하면서 부쩍 체력이 좋아지게 되었다. 그것을 바탕으로 아침에 배달하는 신문의 양을 늘려 나갔다.
 한 달이 지났을 무렵 그 양은 두 배 이상이 되었지만 소모되는 시간은 비슷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현상을 규명할 수는 없었지만 기준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하루 한 시간의 연습이었지만 신체적인 능력이 상승함에 따라 다른 쪽으로 돈을 벌 궁리를 하게 되었다.
 “격투 계열로 한번 나가볼까?”
 꿈의 세계는 기준에게 여러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학교 내에서 양아치 녀석들을 손쉽게 제압한 것도 그 중 하나였다. 정확한 원인은 규명되지 않았지만 남들보다 뛰어난 힘임에는 틀림없었다.
 기준은 농담처럼 중얼거리는 한편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실없이 웃었다.
 능력만 갖추면 돈을 버는 방법이 다양해진 시대에서 남을 때리며 돈을 버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아침에는 신문 배달을 하고 저녁에는 뷔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늘어난 체력에 따라 일하는 효율이 늘어나 확고한 신임을 얻게 되었다.
 학교생활도 어렵지 않게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가 학교 뒤에서 양아치 세 명을 때려눕혔다는 소문이 은밀하게 돌면서 더 이상 집적거리는 녀석은 없었다.
 건드리지 않으면 가만히 있으니 굳이 자극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덕분에 학교생활이 편해졌으니 그로서는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돈을 더 벌 수 있으면 좋겠는데. 하다못해 재혼이라도 하시면.”
 최근 들어 어머니의 몸이 좋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식당에 나가 일을 하시는 어머니는 하루 종일 고된 노동으로 지쳐 집에 돌아오면 곧바로 잠이 든다.
 그 모습이 안쓰러운 기준이었다. 어머니는 아직까지 고운 미색을 갖고 있어 마음만 먹으면 재혼도 어렵지 않아 보였다. 넌지시 재혼을 권한 적도 있지만 어머니가 단호하게 거절했기에 그 이후로 더 권유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볼 때면 학교를 자퇴하고 본격적으로 돈을 벌고 싶은 생각이 강해졌다.
 그렇다고 해도 아들이 대학에 가서 번듯한 직장을 갖길 원하는 어머니의 바람을 알고 있으니 함부로 행동하기도 어려웠다.
 “대학이라…….”
 머릿속이 복잡하게 헝클어지는 기분에 인상이 찡그려졌다. 살인적인 등록금부터 시작하여 적어도 이 년이라는 시간 동안 공부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은 학벌이라는 것이 중요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기에 단호히 아니라고 말하기 어렵기도 했다.
 “고민 되네.”
 수많은 고민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격투가의 길을 단호히 버리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마법이라도 익힐 수 있으면.”
 다양한 응용 방법을 떠올리니 아깝기만 했다.
 가능할 것 같기도 하지만 아직까지는 어려운 이야기였다.
 
 기준이 마법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근래 들어 일어나기 시작한 변화 때문이다.
 꿈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시간의 축이 서서히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잠에 들면 꿈의 세계에서 겪는 시간은 정확히 하루였다. 하지만 유델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되면서 시간의 축은 일정한 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바뀌었다.
 짧으면 반나절이고 길면 사흘이라는 시간을 꿈의 세계에서 보냈다.
 현실 세계에서 잠이 들면 꿈의 세계로 진입하게 되고, 유델의 시점에서 하루를 겪는다. 말이 하루지 아침에 깨고 저녁에 잠들기까지의 시간을 말한다.
 유델이 잠들면 기준의 의식 또한 사라지고 원래의 세계로 돌아오고 현실의 시간은 아침이 된다.
 다른 변화는 유델과의 동화였다.
 처음에는 그의 감정 변화를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어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이 순서대로 동화되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감각의 동화가 아니라 별개의 개체로 세상을 접했다면 점차 유델이되 기준이 되어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유델이 이룬 성취가 현실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기준은 이러한 변화를 당황스러워하면서도 내심 기회라 여겼다.
 만약 그가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면 여러 가지 잡생각이 많아 극도의 혼란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를 도와 집안 살림을 하고 돈을 벌어야 했기에 또래보다 성숙한 사고를 할 수 있었다.
 그에게 있어 꿈의 세계는 혼란의 대상이 아니라 남들이 알지 못하는 보고이자 새로운 기회의 장이었다.
 그 기회는 동시에 그에게 실망을 안겨다 주기도 하였다. 유델의 감정을 느끼게 되면서 평범한 사냥꾼으로 남고자 하는 그의 포부에서 명확한 한계를 깨닫고 말았다.
 ‘어떻게든 마법을 배워야 한다.’
 유델과 모든 감각을 공유하고 있기에 그가 마법을 배우게 되면 기준 또한 자연스럽게 마법을 익힐 수 있게 될 터였다.
 기회는 어느 날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하루를 끝마치고 잠에 빠져들면서 꿈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 당연한 일과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유델의 감각을 공유하면서 그의 감정이 머릿속으로 스며든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여느 날과 달랐다.
 ‘이건? 설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기준에게서 경악의 감정이 퍼져 나갔다. 동시에 유델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단지 예상했을 뿐이다.
 감정을 느끼게 되고, 감각을 차례대로 공유하게 되면서 언젠가 한 번쯤 이렇게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한 적이 없다면 거짓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실현될 줄 몰랐다.
 유델, 아니, 유델의 몸을 차지한 기준은 몸을 일으켰다.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던 그의 눈은 경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정말 몸을 차지하게 되다니.”
 상상만 해왔던 일이다.
 꿈의 세계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소위 말하는 판타지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여러 가지 생각을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만약의 가능성이지만 자신이 유델의 몸을 차지하게 될 경우 이곳 사람들이 할 수 없는 발상으로 실현할 수 있는 것이 무궁무진하였다.
 그러나 막상 유델의 몸을 차지하게 되자 여러 가지 복잡한 상념으로 인해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언제까지고 유델의 몸을 차지하고 있을지 기약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평민 출신인 자신이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지 체감이 되지 않았다.
 창문으로 향한 기준은 시간이 새벽인 것을 깨닫고는 옷을 챙겨 입었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는 거겠지.”
 수많은 생각이 소용돌이치며 혼란을 안겨다 주었지만 한 가지 사실만큼은 절대 잊어버릴 수 없었다.
 그것은 그가 유델에게 실망한 것이기도 하며, 또 하나의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몸을 차지하면 가장 먼저 행동하고자 했던 것이기도 하다.
 집을 나선 기준은 곧바로 산을 탔다.
 그가 향하는 곳은 유델이 한 번 방문한 적 있는 던전이었다.
 당시 그는 눈앞의 기연을 포기하는 유델의 행동에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눈앞의 기회를 보고도 잡지 못하는 행동이 답답했고, 신분의 한계를 명확히 긋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던전 입구에 도착한 기준은 망설이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방이 어두컴컴했지만 기연에 몸이 달은 그의 걸음은 거침없었다. 얼핏 보면 작은 산짐승이 살 법한 동굴이었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기연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다.
 “아…….”
 유델의 시야를 빌려 보기만 했던 광경을 직접 보게 되자 기준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사람의 눈을 사로잡는 모습에 홀린 표정의 기준이 한 걸음씩 다가갔다.
 정신을 차렸을 땐 그의 눈앞에 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향한 것은 유델을 단념하게 만들었던 검 앞의 패였다.
 
 [목표가 있는 자, 꿈이 있는 자, 신념이 있는 자, 뽑아라.]
 
 보는 것만으로 영혼을 자극하는 강렬함이 느껴졌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이지만 기준은 그것이 생전의 검호의 힘이라 여겼다.
 검을 다루는 자 중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가히 신의 경지에 근접한 자가 존재한다고 들었다.
 그들의 일격에 산과 바다를 가르는 것은 물론 영혼마저 갈라 상대를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고 들었다.
 “유델이 왜 물러났는지 알 것 같군.”
 검에 욕심이 났을 테지만 눈앞의 패를 보는 순간 영혼을 옥죄는 강렬한 압박감을 느꼈을 것이 분명했다.
 기준 또한 그것을 보는 순간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강렬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유델이 물러섰던 것은 패에서 느껴지는 강렬함 때문이 아니라 검호의 의지가 전하는 목표가 있는 자, 꿈이 있는 자, 신념이 있는 자에 해당하지 못해서 그렇다.
 “하지만 난 달라.”
 스스로 납득시키듯 중얼거리는 기준의 두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어릴 적 아버지를 여의고 어린 두 여동생과 힘겹게 일하는 어머니를 보아오며 자란 그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자신에게 한 가닥 기대를 품고 살아가시는 어머니와 자신만 바라보는 두 여동생을 보며 포기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매일 한계를 드나드는 어려운 삶이었지만 버텨내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내일이라는 희망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 희망은 누구도 줄 수 없다. 오로지 자신이 쟁취하여 따내는 것이기에 기준은 유델처럼 이 기회를 부담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에게 찾아온 절호의 것으로 생각했다.
 “목표? 꿈? 신념? 다 필요 없어. 내게 필요한 것은 힘, 그것뿐이야.”
 흔들리지 않는 표정으로 손을 뻗은 기준은 검을 움켜잡았다.
 그러기가 무섭게 푸른빛이 발산되기 시작하더니 점점 강렬해지며 공동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는 시야를 앗아갈 정도로 강렬한 푸른빛에 인상을 찡그리며 눈을 감았지만 검을 잡은 손의 힘은 풀지 않았다.
 잠시 후, 빛이 옅어지며 시야를 회복한 기준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스르릉 하는 소리가 들리며 뽑힌 검의 검신은 짙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시리도록 파란 검신을 홀린 듯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 황홀함이 서렸다.
 “아름다워.”
 사람의 혼을 앗아가는 검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 탐욕을 자아냈다.
 정신없이 검을 바라보던 기준의 귓가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시선을 옮기니 그의 발치에 작은 먼지가 널브러져 있었다.
 긴 세월 동안 검을 지탱하고 있었을 언덕은 먼지로 부서지고 있었다. 움푹 파이는 곳에서 내려온 그는 먼지 틈 사이로 여러 권의 책을 보고 놀란 표정을 했다.
 “책이라고?”
 다가간 그는 먼지를 털어버리고 책을 살폈다.
 세 권의 책은 기연을 증명이라도 하듯 검술서와 검술 교본, 마나 연공법이었다.
 환한 표정을 지은 그는 공동 한쪽에 앉아 곧바로 책을 펼쳐 들었다.
 “아……!”
 책을 읽는 순간 그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가 얻은 검은 고대 시대의 유물로, 기사시대에 존재하던 검이다. 마법의 정화라 불리는 마도공학이 집결된 검은 검을 다루는 자로 하여금 마나를 끌어들이고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였다.
 가장 먼저 체내에 마나를 끌어들이는 마나 연공법 책을 살피던 기준의 두 눈에 짙은 흥미가 자리했다.
 “무공이랑 비슷한 면이 있구나.”
 유델이 공부했던 것과 책에 적혀 있는 마나 연공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곳의 마나 연공법은 달리 보면 무협의 심법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다른 점이 존재한다면 이곳의 마나 연공법은 무협에서 말하는 동공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모르고 있던 기준은 이곳의 마나 분포도가 무협 세계보다 풍부했기에 동공으로 충분했을 것이라 판단하며 마나 연공법에 대한 개념을 정리했다.
 마나를 체내에 끌어 모으기 위해서 정해진 움직임으로 검을 휘두르는 것이 마나 연공법이다.
 정신을 집중하고 검을 휘두르면 대기에 존재하는 마나가 자연스럽게 의지를 따라 움직이게 되는데, 수많은 움직임 속에서 오랜 세월 이루어진 시행착오 끝에 마나를 체내에 끌어 모으는 효율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마나 연공법이다.
 마나 연공법은 검술과 밀접한 연관성이 존재했다. 마나를 체내에 끌어 모으는 것이 끝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기사시대 검호들은 체내에 존재하는 마나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연구를 거듭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마나 연공법과 검술의 일체였다.
 마나 연공법이 마나를 끌어들인다면 검술은 마나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마나의 자유로운 수발을 위해 체내에 마나 로드를 개척하기 시작했고, 불필요한 마나를 끌어다 씀으로써 적은 양으로 큰 효과를 발휘하게 되었다.
 이러한 수법은 이곳의 개념과 무협 소설의 무공 개념이 비슷하여 놀랍기도 하면서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다.
 “이런 게 있을 줄은 몰랐는데.”
 정신없이 마나 연공법 책을 본 기준은 참지 못하고 곧바로 검을 들었다가 자리에 앉았다.
 당장에라도 마나 연공법을 익히고 싶었지만 백여 가지가 넘는 동작을 단번에 외우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마나 연공법의 개념을 정리한 뒤, 검술편을 보려던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시간이 늦은 것 같네.”
 새벽이 지나 아침이 되었다면 가족들이 걱정할 게 분명했다.
 자신의 가족이 아니었지만 유델이 느끼던 감정까지 고스란히 느꼈기에 가족으로서의 정이 존재했다. 책과 검을 챙겨 든 그는 해가 중천에 떴음을 확인하곤 곧바로 집으로 내려왔다.
 그러자 나무를 패고 있는 건장한 체격의 중년인이 그를 반겼다.
 “어딜 갔다 오는 것이냐?”
 “수련 겸 해서 산에 다녀왔어요.”
 “그래? 흐음, 그 검은 뭐고?”
 유델의 아버지 필립은 기준이 들고 있는 검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산에서 주웠어요. 골동품으로 쓸 만한 것 같아서요.”
 “그럴 수도 있겠지. 네 일은 스스로 할 수 있을 테니 알아서 하도록 해라.”
 “네, 알겠습니다. 바로 옷 갈아입고 도와드릴게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기준은 도망치듯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장작 패는 것을 도운 기준은 아버지 필립과 함께 아침을 들었다. 어머니는 왕성한 그의 식욕에 놀랐지만 이제 다 커서 어른 몫을 한다며 오히려 좋아하셨다.
 그 모습이 기준에게는 무척 낯설었다.
 기억을 갖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에게는 아버지가 없었다. 그리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어머니는 매일같이 일을 나가셔야 했다.
 생계에 보탬이 되고자 일찍부터 아르바이트 노선에 뛰어든 기준에게 있어 가족 간의 화목한 분위기는 생소하면서도 간질간질한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나쁘지는 않지만 내 것 같지는 않아.’
 분명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이 행복은 유델의 것. 마땅히 그가 누려야 하는 것이고 이방인인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점은 확실했다.
 그래서 기준의 결심은 확고했다.
 이곳에서 얻은 기연을 확실하게 얻어내어 자신은 물론이고 유델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일을 추진하겠다는 점이다.
 “후우!”
 양심에 찔렸지만 그것이 조금이라도 유델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며 스스로 납득했다.
 
 “이거였어, 마나를 느낀다는 것이?”
 사흘 동안 기준은 마나 연공법의 움직임을 외우고 처음으로 마나 연공법을 펼친 기준은 희열에 휩싸여 몸을 떨었다.
 어린 시절부터 필립의 수련으로 마나를 느낄 수 있는 기감이 열려 있는 유델의 신체였다. 기본 바탕이 만들어졌기에 마나 연공법을 익히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감각을 공유하고 있지만 마나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감을 잡지 못하던 그는 마나 연공법을 펼침으로써 그것이 어떤 기분인지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막혀 있던 전신의 구멍이 뻥 뚫리며 동반하는 상쾌함은 맹세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쾌감이었다.
 체내로 밀려드는 마나는 강렬한 파도와도 같았다. 연이어 몰아치며 불순물을 밀어내고 정순한 기운으로 가득 채워 나가면서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을 듯한 자신감을 함께하게 해주었다.
 그날, 기준은 모든 것을 잊고 마나 연공법에 시간을 할애해야만 했다.
 뒤늦게 귀가한 그를 보고 필립이 한 소리 했지만 마나 연공법이 주는 효능에 빠져든 기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사흘 동안 마나 연공법에 심취하여 어떻게 시간이 흘러갔는지 자각하지 못할 정도였다.
 일주일 동안 유델로서 시간을 보낸 뒤 꿈의 세계에서 벗어나고 잠에서 깨어난 기준은 웃었다.
 극심한 허탈감이 그의 전신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허무하네.”
 일주일 동안 마나 연공법으로 기초를 닦아놓은 뒤 검술을 익히려던 순간에 돌아오고 말았다.
 그것이 허탈했다.
 이제 막 재미를 붙이려던 찰나에 강제로 멈추게 되었으니 오죽하겠는가.
 멍한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그의 눈에 천천히 초점이 맺혔다. 일주일의 성과가 사라졌지만 머릿속의 지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걸 이곳에서 익힌다면?”
 이미 현실과 꿈의 세계는 마나 분포도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한 직후였다. 마나 연공법은 무림 세계의 심법과 달리 풍부한 마나 분포를 바탕으로 창안된 것이기에 효과가 발휘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해보지 않고서 포기하는 것은 일렀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기준은 부지런히 준비하다가 멈칫했다. 현실에서 자신은 마나 연공법에 시간을 할애할 만큼 넉넉한 형편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열흘이었지만 유델로서의 삶은 현실의 감을 잊어버리게 만들 정도로 달콤했다.
 “잊으면 안 되지. 난 유델이 아니라 한기준이다. 잊지 말자.”
 표정을 굳힌 뒤 자리에서 일어난 그의 표정에는 결연함마저 서려 있었다.
 
 열흘이라는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그동안 기준의 생활에 변화가 생겼다.
 마나 연공법을 외웠기에 이곳에서 마나 연공법 수련을 시작한 것이다. 목검을 구하여 본격적인 수련에 착수했지만 예상했던 것처럼 대기의 마나 분포도가 달라 마나를 체내에 쌓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꿈의 세계에서 쌓아놓은 마나를 토대로 운용을 해보았지만 그 양은 극히 미미했다.
 “뭐든지 처음이 힘든 법이지.”
 사흘 동안 아무런 진척이 없자 포기할까 생각했지만 처음이 가장 힘들다는 말을 떠올리며 이를 꽉 물고 마나 연공법에 매달렸다. 그리고 열흘이 지나자 마침내 효과를 볼 수 있었다.
 미미하지만 마나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아주 작은 발전이었지만 그것만으로 기준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마나를 느끼고 그것을 체내에 쌓을 수 있는 길을 만든다면 꿈의 세계만큼은 아닐지라도 마나를 다루게 되는 것이 가능하다.
 또 다른 변화는 더 이상 꿈을 꾸지 않게 된 점이다.
 수면을 통해 꿈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었지만 지난 열흘 동안 잠에 빠져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기상 시간은 비슷했지만 그 어디에도 꿈의 세계로 진입하는 통로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준은 다시는 꿈의 세계로 들어서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진한 아쉬움을 느껴야만 했다. 만약 마법을 익히고 이 세계에서 마법을 발현할 수 있다면 큰돈을 벌 기회가 생겼을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좋게 생각하자.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잖아? 나에게 이런 기연이 생긴 것도 좋은 일이야. 욕심내지 말자.”
 꿈의 세계에 들어서지 못하는 이유가 다름 아닌 욕심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자 그것을 다스리는 데 힘을 쏟아야만 했다.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 꿈의 세계로 들어서지 못한 지 보름이 되었다.
 학교를 끝마치고 돌아온 기준은 방 안에 있는 아현의 표정을 보고 멈칫했다.
 “오빠 왔어?”
 “응,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무슨 말이야? 내 표정이 어때서?”
 아무렇지 않은 듯했지만 찰나에 일어난 표정 변화를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는 물론 아영마저 표정이 좋지 못한 것을 확인한 기준은 무슨 이유인지 궁금했지만 대놓고 질문하기 어려웠다.
 없는 살림에 불평불만을 가급적 드러내지 않는 두 여동생이다. 예민한 시기인 사춘기에 참고 견뎌주는 것만으로도 기준은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 감정이 어느새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자 기준은 두 여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 휴가를 가족을 위해 쓰기로 마음먹었다.
 “오늘 외식할까?”
 “갑자기 무슨 외식?”
 “해본 지 오래된 것 같으니 외식 한번 하자고.”
 “괜찮아?”
 “무리하지 않아도 돼요.”
 아현과 아영이 한목소리로 걱정을 표했다. 입가에 미소를 지은 기준은 어깨를 펴며 말했다.
 “내가 그 정도도 못해줄 것 같아? 외식 한 번 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으니 걱정 말고 가자.”
 “으응.”
 “괜찮은데…….”
 마지못해 승낙하는 아영과 달리 아현의 입꼬리는 서서히 말려 올라가고 있었다. 좋아하는 모습에 미소 지은 기준은 시간을 확인한 뒤 말했다.
 “저녁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준비하고 있도록 해. 다섯 시에 나갈 테니까.”
 “알았어! 히히, 예쁘게 입어야겠다. 아영아, 가자.”
 “응.”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아영이었지만 오랜만의 외식이 나쁘지 않은 듯 아현의 손에 순순히 끌려갔다.
 행복한 표정을 짓는 둘을 보며 기준은 자신이 그동안 신경 써주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함을 느껴야만 했다.
 다섯 시가 되자 아영과 아현은 귀엽게 차려입고 나왔다. 옷가지가 많지 않지만 눈썰미가 좋아 시장에서 저렴하게 파는 옷으로 나름대로 꾸민 두 사람이다.
 매일 보던 교복 차림과 다른 산뜻한 모습에 기준이 미소 지었다.
 “이렇게 보니까 귀여운데?”
 “헹! 내가 우리 중학교 마스코트라고!”
 “마스코트는 무슨. 귀여워서 봐줬다.”
 “헤헷! 오빠도 귀여운 걸 아는구나?”
 평소라면 강하게 반발했을 테지만 외식은 통통 튀는 여동생을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밖으로 나온 세 사람이 향한 곳은 인근에 위치한 시장이었다.
 외식이라기에 잔뜩 기대한 둘은 시장으로 향하는 기준의 모습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살짝 실망한 표정을 하고 말았다.
 시장에 먹을 곳이라고 해봐야 분식집, 혹은 저렴한 치킨이 전부였던 것이다. 그것으로도 평소와 다른 기분을 낼 수는 있지만 외식이라는 거창한 이름에 비해 실망스러운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둘의 예상은 산산조각 났다.
 기준이 도착한 곳은 분식집도 치킨집도 아니었다. 옷 가게 앞에 도착한 그는 두 여동생을 안으로 이끌었다.
 “들어가자.”
 “엥?”
 “오, 오빠, 여긴 왜?”
 “중학교 입학한 지 시간이 꽤 흘렀는데 신경 써주지 못한 게 미안해서 사주는 거야.”
 사실 기준은 두 여동생이 왜 그렇게 어두운 표정을 짓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밖으로 나오고 시장에 들어오면서 둘이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옷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다면 눈치를 팔아먹은 것만도 못하리라.
 그제야 둘의 시무룩한 표정이 무슨 이유인지 깨달은 기준이었고, 여동생들의 기를 세워주고자 출혈을 각오하고 옷 가게로 향한 것이다.
 사려 깊은 두 여동생이 그마저 순순히 납득하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기에 입학 선물이라는 그럴싸한 명분을 만들어야 했다.
 ‘피곤하게 굴긴.’
 선물을 하기 위해 이유까지 만들어야 했지만 기준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혔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미안했다. 많은 것을 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는 자신의 무능력함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도착한 이곳도 중고등학생들이 좋아할 법한 메이커는 아니지만, 디자인과 품질이 괜찮은 데 비해 가격이 저렴한 곳이었다.
 “대신 너무 비싼 건 안 돼.”
 “알았어. 아싸! 옷이다!”
 쾌활한 외침과 함께 안으로 들어서는 아현과 달리 아영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기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괜찮은 거예요?”
 “괜찮아. 그러고 보니 말하지 않았구나? 이번에 아르바이트비가 올랐어.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또랑또랑한 두 눈을 보며 미소 지은 기준이 아영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려운 형편 때문에 나이에 비해 일찍 철이 든 그녀였다. 그 모습이 든든했지만 때로는 아현처럼 어리광을 피우는 모습이 보고 싶기도 하였다.
 “이럴 땐 걱정하는 모습보다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호의에 따르는 것이 좋아. 오빠로서 한 번쯤 해주고 싶기도 했으니 말이야. 알겠지?”
 “네, 감사합니다, 오빠.”
 “그래, 그렇게 말해야 예쁘지.”
 다소곳하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아현을 보며 기준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옷 가게에서 옷 여러 벌을 사 든 기준은 내친김에 메이커 신발까지 사주는 출혈을 감수했다.
 예상 외 지출이기는 했지만 전혀 아쉬움이 없었다. 이 작은 사치는 그가 스스로에게 주는 상이었다. 꿈의 세계에서 이 세상 누구도 갖지 못한 마나 연공법을 익히게 되었고 남들보다 월등해진 체력을 토대로 더 많은 것을 해낼 바탕을 만들 수 있었다.
 지금은 궁핍하지만 앞으로 더 많을 것을 해낼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생겼고, 무관심했던 여동생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해결한 뒤 두 여동생에게 왕 대접을 받는 기준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맺혔다.
 힘들지만 오빠 노릇이라는 것이 전혀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제3장 운명의 교차점
 
 
 
 
 
 두 여동생에게 큰 씀씀이를 보이며 왕 대접을 받았지만 후폭풍은 강렬했다.
 용돈으로 쓸 돈을 대부분 써버린 기준은 준비물 마련할 돈조차 부족한 것을 느끼며 혹독한 생활고를 겪어야만 했다.
 마나 연공법을 토대로 마나를 사용할 수 있게 되면 어떻게 활용할지 연구를 해보았지만 신체적인 능력으로 해낼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아직 학생이라는 틀에 갇혀 있기에 그런지도 몰랐다.
 ‘막노동을 하기도 어려워. 학교를 그만두지 않는 한 돈을 벌 기회는 많지 않겠어.’
 며칠 동안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결국 그가 내린 결정은 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지금 상태를 유지하자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바라는 것은 좋은 대학에 가서 번듯한 직장을 다니는 것이지만 평범한 사람과 궤를 달리하기 시작했기에 다른 길을 걸어야만 했다.
 마법을 익혔다면 사업을 구상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믿을 수 있는 것은 마나 연공법을 바탕으로 한 신체 능력뿐이었기에 기준은 답답함을 느꼈다.
 ‘다시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생각할수록 꿈의 세계에 대한 아쉬움이 커져가기만 했다.
 하지만 눈을 떴을 때 낯설면서도 익숙해진 풍경에 기준은 당황한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그에게 난감함을 느끼게끔 했다.
 ‘어째서?’
 저번과 다른 느낌.
 유델의 몸을 차지하면서 머릿속으로 그의 기억이 물밀 듯이 밀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으으.”
 유델의 기억이 머릿속을 파고들면서 강렬한 두통이 느껴졌다.
 처음 세상을 자각했을 때부터 시작하여 용병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각지를 돌아다녔던 기억, 마을에 정착하여 아이들과 어울려 놀던 기억, 마을 제일 사냥꾼인 아버지를 동경하여 수련하던 기억.
 유델이 살아왔던 모든 기억이 기준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 과정은 기준에게 있어 헤아릴 수 없는 강렬한 고통을 선사했다.
 어찌나 고통이 심했는지 입에서 앓는 소리만 흘러나올 뿐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짧은 찰나의 순간마저 억겁처럼 느껴졌다.
 가위에 눌린 것처럼 의식은 존재하되 몸이 통제에 따르지 않았다.
 간헐적으로 몸을 떨며 고통을 표현하던 유델의 몸짓이 잦아든 것은 날이 밝아올 무렵이었다.
 처음에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점점 감각이 돌아오자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으으.”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육체는 정신의 통제에 따르지 않았다. 그 상태로 한동안 가만히 있던 유델이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은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였다.
 “하아! 하아!”
 조심스럽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편 뒤 자리에서 일어나 숨을 몰아쉬었다. 고통이 가시자 머릿속이 복잡하게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가장 큰 화두는 주체가 되는 자신 한기준과 유델의 상관관계였다.
 “난 한기준이야. 그럼 유델은? 나와 유델은 다른 사람 아니었나?”
 수없이 반문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이 복잡할 뿐이었다.
 그것은 마치 청소년기에 겪는 자아정체성의 혼란 같았다. 유델은 자신이 현대 세계에서 살아가는 한기준인지 아니면 이 세계의 구성원인 유델인지 확신을 내리지 못했다.
 불과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한기준과 유델은 별개의 존재였다. 각기 현대 세계와 이곳에서 다른 존재로 살아가던 둘의 접점은 기준이 꿈을 통해 유델의 삶을 겪는 일방통행적인 면이 강했다.
 기준은 유델의 존재를 깨닫고 그가 자신과 별개의 존재라 생각했지만 유델은 기준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벌어진 두 기억의 합일은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기준은 밀려드는 유델의 기억에 당혹스러움을 느끼는 정도였지만 육체의 주인인 유델은 달랐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하던 기준의 존재가 자신의 기억 속으로 밀려들어 오자 극심한 혼란을 느꼈다.
 어릴 적 사냥꾼인 아버지를 동경하여 사냥꾼이 되고자 했던 유델은 오로지 한길만 보고 수련에 정진한 소년이었다.
 현대 세계 청소년기에 겪는 자아정체성 혼란 따위는 그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준의 기억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난 한기준이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유델이다. 달라지는 건 없어. 달라지는 건.”
 두 개의 기억 속에서 우위를 점한 것은 기준이었다. 이미 유델의 삶을 지켜보았고 그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에 기준은 유델을 포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에 반해 기준의 존재에 면역이 전혀 없는 유델의 기억은 정신의 붕괴를 막고자 기준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는 것을 선택했다.
 “후우.”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만 기준은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어릴 적부터 힘든 삶을 살아왔기에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됐다. 그랬기에 기준은 급변하는 주변 환경을 받아들이는 데 탁월했다.
 당혹스러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현실을 납득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진 기준은 눈을 감고 확신을 내리듯 말을 이어나갔다.
 “이곳에서 난 유델이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고자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집을 나섰다.
 잡생각이 많을 땐 몸을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곧장 비밀 장소인 공동으로 향한 그는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까지 수련에 매진하다가 산을 내려왔다.
 저녁을 먹고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던 유델은 아침 일찍 일어났다.
 어제까지만 해도 깨질 듯이 아프던 머리는 괜찮아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 여전히 정리가 되지 않은 생각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집 밖으로 나온 유델은 장작을 패고 있는 필립을 발견하곤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일어나셨어요?”
 “그래, 요즘 매일같이 바쁘게 움직이더니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냐?”
 “아, 수련을 열심히 하느라고요.”
 “그래? 열심히 해서 나쁠 건 없지. 하지만 사냥에 있어 중요한 건 경험이란 걸 알아야 된다.”
 퉁명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유델은 감회가 새로웠다.
 기준의 어린 시절,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다. 그래서 어릴 적 그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생활고로 힘들어하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자라온 그는 감히 불만을 표현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어려운 생활을 벗어나고자 했고, 지금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만든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없는 현실과 달리 이곳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있었고 생활 또한 풍족했다.
 부족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라난 유델의 성격은 밝고 구김살이 없어 기준의 원래의 성격과 상당 부분 달랐다.
 그래서일까?
 필립을 대하는 유델의 태도에는 떨쳐내지 못한 어색함이 묻어 있었다.
 “뭐하냐? 할 일 없으면 장작이나 패.”
 “아, 네. 그럴게요.”
 도끼를 집어 든 유델은 장작을 패기 시작했다. 마나 연공법을 익히면서 체내에 쌓인 마나는 운용하지 않았음에도 신체 능력을 강화시켜 주는 효과를 발휘했다.
 결을 정확하게 내리찍을 때마다 장작은 이등분이 되어 바닥에 놓였다.
 “수련을 헛되지 하지 않았구나.”
 “그렇죠, 뭐.”
 “어디서 기연이라도 얻은 것 같은데…….”
 필립의 말에 유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이 복잡하게 헝클어졌다.
 두 사람의 기억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하나 필립은 유델의 아버지다. 하나뿐인 믿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기준의 자아는 경계를 표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을 할까?’
 용병의 삶을 살아온 필립이라면 마나 연공법에 대한 이해도가 빠를 것임이 분명했다. 실력도 지금보다 진보할 것이기에 가르치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유델은 납득할지 모르나 아직까지 필립이 아버지라기보단 유델의 아버지라는 느낌이 강했다.
 “기연은 무슨, 그냥 열심히 수련해서 그래요.”
 “수련이 배반하는 법은 없지. 하지만 수련도 실전과 조화가 되어야 가장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걸 알아라.”
 “네, 명심할게요.”
 장작을 팬 뒤 아침을 먹은 유델은 곧바로 공동으로 향했다. 마나 연공법을 숙달시켰으니 이제 검술을 익힐 차례였다.
 유델이 익히는 마나 연공법은 마나를 끌어들이는 것으로 임무를 완수하는 지금 시대의 것과 달리 마나를 운용하여 검술과 일치시키는 역할까지 맡고 있다.
 그리고 검술 또한 최강의 기사는 존재할 수 있지만 최강의 검술은 존재할 수 없다는 모토 아래 창안된 것이다.
 기본 검술이되 고급 검술이기도 한 고대 검술은 뚜렷한 특징을 띠고 있는 각 명문가의 검술과 달리 기초적인 틀을 제시하고 스스로 길을 개척하는 것을 유도했다.
 검술을 익히는 사람에 따라서 검의 특성은 무한히 달라질 수 있다.
 힘을 내세우는 자, 민첩함을 내세우는 자, 경험을 내세우는 자 등 수많은 특성이 검술을 발휘하는 시전자에 따라 달라지기에 고대 시대에서는 함부로 검술의 방향을 단정 짓지 않았다.
 유델이 익힌 검술은 거대한 틀에 속했다.
 철저한 기초 단련을 바탕으로 검술을 익히는 자로 하여금 자신의 특징을 깨우치게 유도하였기에 검술을 익히면 익힐수록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속도인가.”
 폭발적인 힘이 나오는 근육이 많지 않았기에 유델의 검술 방향은 민첩함에서 비롯되는 속공이 주류를 잇게 되었다. 실전 검술을 익힌 그의 검은 일정한 형식보다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형태로 발전했다.
 검술을 익히고 마나 연공법을 익힘에 따라 그가 가진 특징은 점점 뚜렷해지고 있었다.
 유델은 자신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두 개의 기억이 섞이면서 정신적인 혼란을 느끼고 있을 시기였다.
 그것을 혹독한 육체 단련으로 털어냄으로써 수련에 몰두하고 나아가 충돌하는 두 개의 기억을 훌륭히 융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나날이 발전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필립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며 평가를 재조정했다.
 “본격적으로 사냥을 데리고 가도 되겠어.”
 아직은 어리다고 판단하여 산짐승 사냥에는 참가시켰지만 몬스터 사냥에는 데리고 다니지 않던 그다. 하지만 성인이 멀지 않은 아들을 보면서 본격적인 실전 경험을 쌓게 해줘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도 수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유델을 반긴 것은 가족뿐만이 아니었다.
 갈색 머리에 귀여운 외모를 가진 소녀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유델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델!”
 “아아!”
 낯선 소녀의 모습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유델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그녀의 정체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소녀의 이름은 에이미.
 백 가구도 되지 않는 산골 마을에서 가장 예쁘다고 평가받는 소녀다.
 촌장의 딸이기도 한 그녀는 궁핍한 산골 마을 출신답지 않게 밝은 성격을 지니고 있어 주변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그리고 일찍이 유델과 함께 혼인을 약속한 사이기도 하다.
 에이미 아버지인 촌장과 필립은 마을에서 절친한 사이였기에 비슷한 연령대의 자식들을 맺어주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에이미는 아버지의 그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필립은 마을 제일 사냥꾼이고 집안에 제법 돈을 모아두었음도 알고 있다.
 언제고 마을을 벗어나 화려한 도시에서 살길 희망하는 그녀였기에 유델은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짝이었다.
 무엇보다 유델 또한 마을 내 또래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다.
 호리호리한 몸으로 인해 얕볼 수도 있지만 체술과 검술을 익혔고, 산짐승 사냥을 통해 실전을 경험한 유델은 또래 중에서 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남자였다.
 몬스터의 침입에 노출된 마을에서 제일 매력적인 혼처는 가정을 지킬 수 있는 강한 남자였다.
 집안도 부유한 편이고 강한 힘을 지닌 유델은 마을에서 가장 예쁜 자신의 남편감으로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 그녀였다.
 유델 또한 그녀에게 호감을 표했기에 지금과 같은 반응은 실망을 사기에 충분했다.
 “뭐야, 내가 반갑지 않은 거야?”
 “반갑지. 갑작스러워서…….”
 “오랫동안 보지 못한 것 같아서 보러 왔어. 요즘 바쁜가 봐?”
 “그런 편이야. 수련 중이라서.”
 무뚝뚝한 모습에 서운함을 느낀 에이미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도 아무 소식이 없는 건 너무했어.”
 “미안. 급한 거라서.”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돼?”
 예쁨을 받고 자란 에이미는 독단적인 면이 강했다. 그리고 자기 기준으로 판단을 내리는 버릇이 있었다.
 유델에게 있어 수련은 일상이었지만 에이미는 혼인을 약속한 그가 자신에게 좀 더 관심을 가져주길 바랐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서운함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미안. 식사부터 하자. 배고프네.”
 “칫!”
 전혀 진심이 담겨 있지 않자 에이미는 표정을 찡그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필립이 기어코 한마디 했다.
 “유델, 모처럼 에이미가 왔는데 그 태도가 뭐냐.”
 “죄송해요.”
 “앞으로 좀 더 상냥하게 대해주도록.”
 “알겠습니다. 미안해.”
 “알았으면 앞으로 잘해.”
 정중하게 사과를 하자 그제야 못 이기는 척 사과를 받아주는 에이미였다.
 하지만 그녀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던 기준의 자아는 그 모습을 무척 불쾌하게 받아들였다.
 
 “마나 연공법을 무공처럼 할 수 있도록 해야겠어.”
 고대 시대는 훗날 사가들이 기사시대라 부를 정도로 마나 연공법과 검술이 발달한 시기였다. 전설이지만 당시에는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그랜드 마스터가 실존했다고 할 정도로 기사들의 실력이 뛰어났다.
 유저, 엑스퍼트, 마스터를 넘어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다다른 기사는 만부부당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최강의 신위를 발휘한다.
 고대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마도시대가 멸망하게 되면서 문명의 암흑기를 보낸 뒤 지금에 이르렀다.
 앞선 두 시대의 유물을 출토하여 복원에 성공한 뒤 마나 연공법과 마법이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아직까지 이전 시대를 따라잡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유델이 얻은 마나 연공법과 검술은 고대 시대의 것으로 활용도가 무궁무진했다. 거기에 이 세계가 아닌 현대 세계의 기억을 가진 기준이 함께했기에 응용의 폭은 더욱 넓었다.
 특히나 예전부터 판타지와 무협의 차이를 논하면서 ‘왜 마나를 무공의 기처럼 다루지 못할까?’라는 의구심을 가졌던 기준은 마나 연공법을 무협 소설의 심법처럼 활용하여 마나를 수족처럼 다루고자 했다.
 “가능해.”
 마나 로드를 개척하여 마나의 순환이 자유로워지고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그것을 오러로 발현할 수 있게 된다.
 유델이 원하는 것은 마나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능력이다.
 체내의 마나를 원하는 방향을 향해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면 적은 양의 마나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될 것임이 분명했다.
 마나 연공법에 매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워낙 효율이 좋고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기에 마나의 순환이 점점 자유로워지고 있었다.
 “어려워. 하지만 가능해.”
 무기를 통해 오러를 발현하는 게 손에 비해 쉬운 것은 예기가 흐르는 방향으로 마나를 원활하게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주먹은 예기가 존재하지 않아 마나 컨트롤의 정교함과 보다 많은 양의 마나를 필요로 한다.
 그가 가장 먼저 하고자 하는 것은 검이 아닌 주먹으로 오러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과 낮은 곳에서 높은 곳을 바라보는 것에는 차이가 존재할 것임이 분명했다.
 주먹으로 오러를 발현하면 다른 무기에 오러를 발현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것이 된다. 쉬운 것에 맛을 들이면 어려운 것을 하기 힘들지만 어려운 것을 해내면 다음의 어려운 것도 두려움 없이 맞설 수 있다.
 체내에서 자유롭게 순환하는 마나를 컨트롤하며 조금씩 응축시키기 시작했다.
 우웅! 우우웅!
 강렬한 공명음이 울려 퍼지며 주먹이 격렬하게 떨려왔다.
 “큭!”
 덜 개척된 마나 로드에서 통증이 느껴졌지만 유델은 개의치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주먹으로 오러를 일으키는 것뿐.
 검이 팔의 연장선상이라면 먼저 손으로 오러를 일으키면 연장선상의 일은 당연한 것이 된다.
 ‘내보내고 응축한다. 하지만 손은 감싸고 응축하는 게 맞아.’
 주먹은 검같이 강도가 세지 않다. 검과 주먹이 부딪치면 베이는 것은 당연히 주먹이다.
 하지만 오러에 감싸여 있는 주먹이라면?
 강도 조절에 따라 능히 검과 맞설 수 있게 될 것이다.
 유델이 노리는 것은 오러를 체내에 응축시킴으로써 위기 상황에 신체를 보호하고 맨손으로도 적과 싸우기 위함이었다.
 고지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는 것처럼.
 주먹에 오러를 발현하기 위해 유델은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고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마침내 노력이 빛을 발했을 때, 안에서 응축된 오러는 답답한 숨통에서 해방되는 듯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콰콰콰콰!
 “아아.”
 짧은 순간이지만 두 주먹에 어린 푸른빛을 본 유델의 얼굴에 감격스러움이 묻어 나왔다.
 주먹으로 오러를 발현할 수 있으니 검 같은 무기로 오러를 일으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만족의 미소를 지은 유델은 집으로 향했다.
 그가 유델이 된 지 석 달째 되던 날 일어난 일이었다.
 
 잠에서 깨어나자 그를 반긴 것은 익숙하지만 낯설게 느껴지는 방 안이었다.
 몸 하나 간신히 뉘일 수 있는 잠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돌아왔군.”
 어떻게 된 연유인지 그도 알 길이 없었다.
 꿈에서는 유델, 현실에서는 한기준.
 관망하는 것에 불과하던 꿈의 세계에서 유델과 하나가 되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마나 연공법과 검술을 얻고 장족의 발전을 이루게 되었지만 구체적으로 해명되지 않은 삶은 기준에게 설렘과 혼란을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어떠한 이유로 이곳과 꿈의 세계를 오고 가는지 밝혀진 것은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간직하지 못한 비밀을 간직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자신에게 또 다른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현재 자신이 체득하고 있는 것은 마나 연공법뿐이다. 그리고 이번에 새로 알아온 것은 기초 검술뿐.
 꿈의 세계와 달리 마나 연공법이 제 궤도에 오르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했고, 검을 익히기 위한 몸도 만들어야 했다.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사실이 아쉬움을 자아내게 만들었지만 기준의 표정은 밝았다.
 아직까지 그의 인식은 꿈의 세계보다 이곳을 원래 자신이 살던 세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열심히 하다 보면 잘 되겠지.”
 긍정적인 사고야말로 힘든 하루를 버텨낼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아침 일찍 신문 배달을 마치고 돌아온 기준은 두 여동생을 깨운 뒤 어머니를 깨우려고 하다가 파리한 안색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일어나세요.”
 “벌써 아침이야?”
 대답하는 음성에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힘없이 웃는 모습을 보며 기준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피곤해서 그런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아니야. 어제 잠을 제대로 못자고 일했더니 그러네.”
 단호히 거부하는 어머니의 모습에 기준은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어머니를 눕히며 말했다.
 “일은 오늘 쉬세요. 몸이 안 좋으신데 어떻게 나가시려고요.”
 “하지만 비울 수 없단다. 비우게 되면…….”
 어머니의 안색이 흐려졌다. 식당에 나가 일을 하는 그녀가 받는 월급은 120만 원에 달한다. 처음 80만 원에서 시작했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출근하여 쉬지 않는 성실함을 보였기에 그나마 이만큼 오른 것이다.
 하지만 신뢰라는 것이 쌓기는 어려워도 무너뜨리기는 쉬워서 한 번 무너지게 되면 그다음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간신히 안착한 직장에서 신용을 잃을 수 없었기에 그녀는 무리를 해서라도 나가고자 했다.
 기준은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안이했던 자신의 태도를 자책했다.
 ‘이런 멍청이.’
 두 여동생을 챙기는 것으로 만족했던 자신의 행동에 욕이 저절로 나왔다. 아무리 자신이 옆에서 돕는다 한들 모든 압박감을 받는 것은 어머니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안이하게 풀어진 자신의 모습에 화가 치밀었다.
 그렇다고 자식을 위해 한 푼이라도 더 벌겠다고 움직이려는 그녀를 말리기가 힘들었다.
 자신이 좀 더 능력이 있었더라면.
 자신이 좀 더 돈을 벌 수 있었더라면.
 어머니가 그토록 고집하는 학벌이라는 것과 생활고 사이에서 기준의 갈등은 깊어만 갔다.
 입을 꾹 다문 기준의 고민이 깊어질 무렵 밥을 먹고 있던 아현이 다가와서 소리쳤다.
 “엄마! 내가 대신 나갈게! 그러니까 오늘은 쉬어!”
 “무슨 소리야? 넌 집에 와서 공부해야지.”
 “공부를 매일 하는 줄 알아? 엄마가 아픈데 하루 정도는 대신 해줄 수 있어.”
 의젓하게 말하는 아현의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하지만 어머니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렴. 아직 어린애가 무슨…….”
 “칫! 어린애 아니거든? 키도 엄마보다 크고 요즘 힘도 엄청 세졌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대답한 아현이 기준에게 눈짓하자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아현이가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 컸는데 하루 정도는 괜찮잖아요? 딸을 믿어 봐요.”
 “그래도 아직 어린앤데…….”
 “때로는 믿어줘야 해요. 아현이가 해낼 수 있다고 하잖아요. 오늘 아르바이트 일찍 끝내고 아현이가 잘하나 보러 갈 테니 오늘은 쉬세요. 알겠죠?”
 “맞아, 엄마. 괜히 아르바이트 하겠다는 말 안 할 테니 그냥 쉬어. 내일은 엄마가 하면 되잖아.”
 평소 두 딸이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하면 학을 떼던 어머니였기에 아현은 그것을 파악하고 사전에 잘라 말했다.
 설득을 거듭하는 아들과 당당한 딸의 모습에 갈등하던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만 부탁할게.”
 “믿어! 완전 잘해서 엄마보다 잘한다는 말 들어야지.”
 통통 튀는 아현을 보며 어머니는 힘없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등굣길에 나서자 아영은 걱정스러움이 담긴 표정으로 아현에게 말을 꺼냈다.
 “언니, 괜찮겠어?”
 “뭐가?”
 “오늘 엄마 대신 일 나간다며?”
 “아, 그거? 그러기로 했어. 한 번쯤 해봐야 하는 거 아니겠어?”
 당찬 모습이 믿음직스러워 보일지 모르나 아영의 눈에는 걱정뿐이다.
 “그래도 걱정되는데.”
 “걱정은 무슨! 열심히 하면 다 잘돼. 내가 그 정도도 못할 것 같아서?”
 “언니가 어려울 것 같으면 내가 대신할까 싶어서 말했어.”
 “대신은 무슨! 넌 나보다 공부 잘하니까 확실하게 공부해 둬. 난 공부보다는 움직이는 쪽을 좋아하잖아? 사회 경험 일찍 해본다고 생각하지, 뭐.”
 의젓한 모습이었지만 둘은 불과 몇 분 차이를 두고 태어난 쌍둥이다.
 가늘게 눈을 뜬 아영이 단숨에 말의 핵심을 짚어냈다.
 “그런다고 공부 대충 할 생각 마.”
 “으윽! 누, 눈치챘어?”
 “중간고사가 며칠 남지 않았는데 그런 말을 하니 수상할 수밖에. 성적표 나오면 엄마한테 드릴 거야.”
 “악! 안 돼!”
 비명을 지르며 거부 반응을 보이는 아현이었지만 아영은 쐐기를 박았다.
 “행여나 일을 해서 성적 떨어졌다는 말 하면 안 돼.”
 “망했다.”
 아현의 표정이 침울하게 변했다.
 
 학교가 끝나고 곧장 아르바이트 장소로 향한 기준은 지배인에게 부탁하여 평소보다 두 시간 정도 일찍 끝낼 수 있었다.
 뒷정리를 하지 않았기에 평소보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기준의 발걸음은 집으로 향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백 평 가까이 되는 커다란 기사식당이었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멈춰 선 기준은 가게 안의 상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저녁 시간이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식당 안에는 상당수의 사람이 밥을 먹고 있었다.
 대부분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였는데 그중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앳되지만 귀여움이 물씬 풍기는 소녀는 다름 아닌 아현이었다.
 음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을 기준은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았다.
 아저씨들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능숙하게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나르는 아현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어린 동생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좋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후우.”
 마음이 갑갑해져 옴을 느끼며 시간을 확인한 기준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기준이 왔니?”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기준을 반겨준 것은 가게 주인아주머니였다. 가족이 그나마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그녀 덕택이었기에 기준의 태도는 무척 공손했다.
 “그사이 또 컸네? 자주 좀 들르렴.”
 “네, 시간이 되면요. 아현이는 아직 일이 안 끝났나요?”
 “안 그래도 방금 전 끝났단다. 지금 옷 갈아입고 있고.”
 “폐는 안 끼쳤나요?”
 “폐는 무슨, 싹싹하고 일을 잘해서 정식으로 채용하고 싶을 정도란다. 그나저나 정란이는 괜찮니?”
 정란은 어머니 이름이다. 중년의 나이지만 미색이 고와 이곳을 찾는 이들 중 상당수가 그녀를 보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일 정도였다.
 주인아주머니는 정란의 몸이 안 좋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기준의 표정이 찌푸려지며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아영이가 보살피고 있는데 괜찮아지셨는지는 잘…….”
 “후우! 정란이가 그렇게 된 게 내 탓 같기도 하고. 마음이 안 좋네.”
 “곧 나아지겠죠.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늘 신세 끼치는 걸.”
 “어, 오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옷을 갈아입은 아현이 기준을 발견하곤 환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오늘 잘했어?”
 “완전 잘했지! 아주머니도 칭찬해 주셨다니깐.”
 “너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야. 행여나 아르바이트할 생각은 말고.”
 “칫! 오늘 완전 잘했단 말이야. 그렇죠, 아주머니?”
 토라진 표정을 짓다가 답을 구하듯 묻자 그녀는 기준의 눈치를 보며 난색을 표했다.
 “폐 끼치지 말고 가자. 오늘 감사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수고하세요!”
 인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남매는 밤길을 걸었다.
 5월에 접어든 날씨는 긴팔을 입기에도 반팔을 입기에도 애매했다.
 말없이 걸음을 옮기던 아현은 아직 쌀쌀한 밤 날씨에 몸을 떨었다.
 “으으.”
 “추워?”
 “그런 건 아닌데 좀 무리하긴 했나 봐. 헤헷!”
 이제 중학교 1학년인 아현이 여섯 시간 가까이 일하는 것은 중노동이었다. 기준에게 호신술을 배웠다고 하나 일반인의 범주를 벗어나긴 힘들었기에 힘에 부칠 수밖에 없었다.
 “힘들다는 걸 알겠지?”
 “응. 오늘 일하고 엄마한테 미안했다? 매일 늦게 온다고 불평불만이었는데. 그동안 엄마 일하는 걸 너무 쉽게 생각했나 봐.”
 어려운 살림살이 때문에 정기적으로 자신도 일을 하겠다고 말하던 아현이다.
 그럴 때마다 정란과 기준이 엄하게 꾸짖으며 못하게 가로막았지만 그럴수록 아현의 반발심은 커져만 갔다.
 그러다 우연찮게 접하게 된 오늘의 아르바이트는 아현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쉬지 못하고 분주하게 움직이며 일할 땐 느끼지 못했지만 일이 끝나고 긴장감이 풀리자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힘들지?”
 “응. 나 오빠가 존경스러워졌어. 이런 일을 내 나이 때부터 해내다니.”
 평소에는 툴툴거리며 매사에 불만이 많았지만 넘치는 에너지가 빠진 아현은 고분고분했다.
 “존경스럽긴 무슨. 난 남자잖아. 여자보단 체력이 좋으니 이 정도는 거뜬해.”
 “그런가? 그럴지도. 헤헤! 아!”
 힘겹게 걸음을 옮기던 아현의 몸이 기우뚱거리자 황급히 그녀의 몸을 받쳐준 기준은 고심하다가 그녀의 앞에 몸을 웅크렸다.
 “업어줄게.”
 “엥? 나, 난 괜찮아. 요즘 많이 먹어서 무겁기도 하고.”
 오빠이긴 하나 남자에게 업히는 것이 부끄러웠는지 아현은 드물게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기준은 듣는 시늉도 하지 않고 말했다.
 “힘드니까 빨리 업혀. 너 걷는 모습 보면 내가 위태롭다.”
 “칫! 무거워도 뭐라 하지 마.”
 “그런 말할 일 없으니까 걱정 마라.”
 “정말 후회하면 안 돼? 정말 정말?”
 “알았으니까 빨리 업혀.”
 기준의 강권에 아현은 결심을 내린 듯 그의 등에 업혔다. 등이 묵직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체술과 마나 연공법을 통해 신체 능력이 발달되어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렵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기자 아현이 놀란 목소리를 냈다.
 “어어? 안 힘들어?”
 “별로 안 무거운데?”
 “정말? 어느 정도인 것 같은데?”
 아현의 목소리에 은근한 기대감이 서렸다. 아닌 척해도 자신이 무겁게 느껴질까 싶어 걱정을 하는 것이다.
 “한 80kg 정도?”
 “뭐? 그 정도 아니거든!”
 “농담이다, 농담. 절대 무겁지 않으니까 그만 바동거려. 힘드니깐.”
 기준의 몸이 기울자 아현의 발버둥이 잦아들었다. 두 팔을 목에 두른 그녀는 내려앉는 눈꺼풀을 힘겹게 붙들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있으니까 아빠한테 업힌 것 같다. 우리 집도 아빠가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면 남들처럼 휴일에 소풍도 가고 놀이동산에도 가고 방학 때는 해수욕장도 가고…….”
 평소 원하던 것을 하나씩 늘어놓는 그녀의 말에 기준은 마음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피곤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잠에 빠져든 것이다.
 “사정이 나아지면 원하는 거 모두 해줄 테니 걱정 마.”
 작게 중얼거린 그것은 스스로에게 하는 강한 다짐과도 같았다.
 
 다행히도 그날 이후 정란은 몸이 어느정도 회복되어 움직이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안색은 여전히 좋지 않아 휴식을 취할 것을 권했지만 하루를 쉬면 생계가 어려워지기에 정란은 기준의 권유를 물리치고 일을 하러 나갔다.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자 걱정이 된 기준이었지만 그로서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마나 연공법을 꾸준히 펼쳐 기초를 다지고 검술을 익히는 것뿐이었다. 신체적인 능력 향상은 크게 기대할 수 없지만 깨달음은 다르다. 이곳과 꿈의 세계, 양쪽에서 살아가기에 남들보다 두 배의 시간이 주어지는 셈이다. 남들보다 좋게 주어진 조건을 활용하고자 틈틈이 시간을 내어 수련에 매진했다.
 그사이 중간고사를 치렀다.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고 있지만 기준의 성적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반에서 5등, 전교 17등이다.
 아영은 어려운 형편에도 전교 1등을 하여 정란을 기쁘게 만들었다. 그에 비해 성적이 떨어지는 아현은 성적표를 감추기 위해 애를 썼지만 그마저도 상위권에 속하는 준수한 성적이었다.
 생활고를 염려해야 하는 나날이었지만 기준은 지금 이 생활이야말로 참으로 평온하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공부하고 일을 하기에 내일을 꿈꿀 수 있고, 남들이 지니지 못한 비기를 지녔기에 더 나은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기준은 이러한 나날 속에서 자신을 발전시킬 수만 있다면 가난을 탈출하는 것도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한 평온도 오래가지 않았다.
 
 뷔페에서 일을 하고 있는 기준에게 집에서 연락이 왔다. 일을 하는 도중이라 곤란했지만 거듭 걸려오는 전화에 인적이 드문 곳으로 자리를 옮겨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화를 받기가 무섭게 그의 귓가에 다급함이 실린 아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어, 엄마가 쓰러졌어! 어떡해? 흑!”
 “뭐, 뭐? 기다려! 곧바로 갈 거니까! 119에 신고해!”
 순간 머리가 텅 비어버리며 벼락같은 충격이 전신을 휩쓸었다.
 몸을 가누지 못하며 비틀거리던 기준은 멍하니 서 있다가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쓸 틈도 없이 곧바로 몸을 돌렸다.
 “기준아! 어디 가는 거야!”
 지배인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달렸다.
 그의 두 눈은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제4장 밝혀진 진실, 동기 부여
 
 
 
 
 
 집에 도착하니 가족들은 이미 응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간 이후였다.
 숨 돌릴 틈도 없이 기준은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어찌나 다급했던지 택시를 탈 생각도 못한 채 기준은 쉬지 않고 달리고 또 달렸다.
 “하아! 하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개의치 않고 뛰고 또 뛰었다. 체술과 마나 연공법으로 일반인보다 뛰어난 체력이 바탕이 된 기준은 먼 거리를 단숨에 주파해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곧바로 응급실로 향한 기준은 사색이 된 채 병실 앞을 서성이는 아현과 아영을 발견하곤 걸음을 빨리했다.
 “아현아! 아영아!”
 “오빠! 흑! 엄마가 쓰러졌대. 어떡해?”
 두 여동생은 기준의 품에 안겨 앙앙 울었다.
 나이에 비해 의젓하다고 하나 이제 중학교 1학년에 불과하다. 힘든 가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성숙한 모습을 보여왔지만 가정을 지탱하던 엄마가 쓰러졌다는 사실은 마음을 거세게 뒤흔들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기준 본인도 가슴이 거세게 요동쳤지만 두 여동생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등을 토닥여 주며 안심시킨 그는 간호사를 보곤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제가 김정란 씨 가족입니다.”
 “잠시 따라오세요.”
 “어머니는 괜찮으신가요?”
 “어느 정도 안정되셨어요.”
 안정되었다는 말에 기준과 두 여동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따라오라는 간호사의 제스처에 기준이 뒤따르며 당부했다.
 “너희들은 병실에 들어가서 어머니를 보살펴 드려. 내가 들어가서 이야기를 들을 테니까.”
 “으응.”
 그녀들을 뒤로하고 기준은 의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안정되었다는 말과 달리 의사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내심 안도하던 기준은 그 모습을 보곤 알 수 없는 불안함에 휩싸였다.
 “어머니는 나을 수 있으신가요?”
 그것은 그의 염원이 담긴 물음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위암 말기입니다.”
 “…….”
 “암세포가 너무 퍼져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치료하기에는 너무 늦었으니 편히 쉬면서 남은 삶을 정리하시는 게…….”
 뒤에 이어지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해머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텅 비어버렸다.
 그제야 어머니가 어째서 그토록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는지 알 수 있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원에 들르지 않은 건 하루라도 일을 거르면 힘겨워질 생계를 걱정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자신들 때문인 것이다.
 좀 더 여유가 있고 사정이 넉넉했더라면 어머니는 초기에 치료를 받고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임이 분명했다.
 ‘우리 때문에 어머니는…….’
 눈시울이 시큰했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자신은 가장이다. 이럴 때일수록 의연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흔들리지 않는 기둥이 존재해야 주변이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의사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병실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아현과 아영에게 극진히 간호 받는 모습을 보며 기준은 아무 말도 못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정란의 모습은 볼품없었다. 몸은 앙상하게 말라 있었고 얼굴엔 짙은 음영이 드리워져 있었다. 여동생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미소를 짓고 있지만 그 속에는 전혀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침묵하는 기준을 보며 정란이 물었다.
 “기준아, 왜 그러니?”
 “몸은 좀 괜찮으세요?”
 “괜찮단다. 이렇게 쓰러지면 안 되는데.”
 “푹 쉬세요. 기왕 쉬는 거 어머니가 하고 싶은 것 하시면서요.”
 “그러면 생활비는 어떻게 하니.”
 “제가 벌 거예요!”
 목소리를 높이자 주변 시선이 기준에게 집중되었다. 정란도 처음 보는 아들의 모습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준은 자신이 생각한 바를 털어놓았다.
 “제가 아르바이트를 더 하면 돼요.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건강이니까 쉬시는 게 좋고요. 그러지 않으면 저랑 애들이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러니 푹 쉬세요. 아시겠죠?”
 “그래, 그렇게 할게.”
 강경한 아들의 모습에 정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끝까지 고집을 부리지 않자 기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뿐, 그녀를 위해 기준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일이 걱정되는데…….”
 “엄마, 걱정하지 마. 엄마가 아플 동안 내가 대신할 테니까.”
 “넌 공부해야 하잖니.”
 “공부도 열심히 하고 일도 하면 돼. 걱정되면 엄마가 금방 나으면 되니까. 빨리 나아. 알았지?”
 “힘내볼게.”
 걱정 섞인 아현의 말에 정란은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조용히 지켜보던 기준은 자신이 아르바이트하는 곳에 아무 말도 않고 뛰쳐나왔다는 걸 깨닫곤 말했다.
 “일단 뒷수습을 하고 올게요. 아현이랑 아영인 어머니 잘 보살펴 드려.”
 “응, 나한테 맡겨.”
 “네.”
 활기찬 두 여동생의 대답에 기준은 병실을 나설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서려 있는 걱정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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