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영혼의 계약 [E]

영혼의 계약 1권(상)

2015.02.05 조회 734 추천 8


 프롤로그
 
 
 
 
 
 가난과 무능력으로 점철된 나의 인생이 어느덧 마지막 기로에 섰다. 저 끝도 보이지 않는 절벽 밑으로 한 발짝만 내딛으면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갈 것이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가난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부모가 가난했기에 나 또한 가난했다.
 가난은 나에게서 배움의 기회를 박탈했다. 어린 시절부터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만 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는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막노동꾼으로 살았다.
 일생에 단 한 번, 나에게도 기회가 온 적이 있었다. 사랑…….
 너무도 달콤했던 그때 그 시간은 영원히 치유할 수 없는 깊은 상처만 남겨놓고 망각의 그늘 속에 파묻혀버렸다.
 그때부터 나의 방황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술에 절어 막노동으로 모은 재산을 깡그리 날리고 길거리를 방황하며 행려병자로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보내는 질시 어린 시선은 말 그대로 고통이었다. 이제 그런 고통은 더 이상 겪지 않아도 된다.
 어느 날, 나는 피를 토한 채 길거리에 쓰러져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사람들의 신고로 난생처음 앰뷸런스를 타보았다. 나 같은 행려병자가 갈 곳은 무료로 치료해주는 국립병원뿐이었다.
 비좁은 6인실 병실에 드러누워 삼시 세 끼 제공되는 밥을 얻어먹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행복을 느꼈다. 다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의사는 나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 가혹한 선고에 나는 아무런 말없이 병원을 나섰다.
 희망 따위는 더 이상 없었다. 제대로 된 삶을 한순간도 살아보지 못한 나에게 세상은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
 소용돌이치는 거센 바람이 야윈 내 몸을 흔들어댄다. 바람에 떠밀려 죽나, 스스로 발을 놀려 떨어져 죽나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오직 죽음뿐이다.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그래서 자살에 대한 두려움도 없다.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바로 지옥이었기에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고 미련조차 없었다.
 다만 한순간도 내 마음대로 살아보지 못한 것이 억울할 뿐이다. 그 때문에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것인지도 몰랐다.
 혹시 악마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다음 생에는 내 멋대로 살 수 있는 힘과 기회를 얻는 조건으로 나는 망설임 없이 악마에게 영혼을 내어줄 것이다.
 하지만 악마가 뭐가 아쉽다고 나 같은 사람의 영혼을 받겠는가.
 나는 이승에서의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두 눈을 감은 채 천천히 한 걸음을 내딛었다.
 눈을 감고 걸어가는 이 시간이 너무도 길게 느껴진다.
 오른발, 왼발, 오른발…… 아직도 대지에 발이 닿아 있다.
 나는 다시 한 번 숨을 고른 후, 한 걸음을 내딛었다. 이제 내 몸을 받쳐줄 대지는 더 이상 없었다.
 후오오옹!
 거센 바람이 추락하는 나의 몸을 두들긴다.
 절벽을 향해 걸었던 시간만큼이나 추락하는 시간도 길게 느껴진다.
 환생은 믿지 않는다. 그러나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게 된다면 부디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길 빌었다. 정말로 악마라는 존재가 있어 영혼을 원한다면, 소망을 이루어주는 대가로 나는 웃으면서 영혼을 팔 것이다.
 몸은 계속해서 추락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떨어지는 시간이 꽤 길었다.
 그 순간, 엄청나게 확대된 지면이 수직으로 솟구치며 내 육신을 꿀꺽 삼켰다. 나는 ‘억!’ 소리와 동시에 의식의 끈을 놓쳐버렸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이봐, 일어나라구!”
 난데없이 누군가 내 몸을 발로 차는 것 같았다.
 눈 뜨기가 귀찮았기에 나를 깨우려는 자의 행동에 짜증이 치밀었다.
 ‘빌어먹을 새끼! 왜 건들고 지랄이야.’
 나는 속으로 지금의 편안함을 방해하는 존재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날 깨우던 존재는 나의 바람과 달리 더욱 강한 발길질을 가해왔다
 “이봐, 일어나! 네가 나를 불렀잖아! 네가 원하는 삶을 주겠다.”
 내가 원하는 삶을 준다는 말에 순식간에 원망과 짜증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죽었다. 절벽에서 뛰어내렸고, 마지막 순간 거대하게 보이던 지면과 사정없이 부딪쳤다.
 죽은 자, 나는 죽은 자다.
 그런데 그런 나를 깨우고 있는 존재…….
 나는 죽기 전에 악마를 찾았다. 내 영혼을 팔아넘길 악마를 애타게 찾았다.
 “악마…… 인가?”
 칙칙한 색깔의 옷을 입은 창백한 안색의 20대 남자가 나를 보며 미소 짓고 있다.
 “그렇다. 네가 그토록 찾았던 악마다. 반갑지 않으냐?”
 “당신…… 당신이 정말 악마인가?”
 “그렇다.”
 “나와…… 계약을 맺을 것인가?”
 “당연하지. 그렇지 않다면 내가 왜 널 찾아왔겠는가? 그러니 어서 계약을 하지. 요즘은 어찌된 게 너무 바빠서 오래 얘기할 시간이 없다.”
 나는 두려움과 설렘을 억누르고 말했다.
 “내가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삶과 힘을 줄 수 있소?”
 악마가 미소 짓는다.
 그 섬뜩한 미소에 두려움을 느꼈지만 외면하지는 않았다.
 기회!
 지금 이 순간은 나에게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인 것이다.
 “당연히 부와 명예를 모두 가지게 될 것이다. 또한 너의 부와 명예 그리고 생명을 노리는 적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힘 또한 얻게 될 것이다.”
 악마의 대답에 나는 뛸 듯이 기뻤다.
 “당신이 말한 것들을 나에게 주시오. 대신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당신에게 받치겠소.”
 악마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나는 그 미소가 싫었지만 악마가 마음을 바꿀까봐 두려웠다.
 “나에게 어떤 것을 줄 텐가?”
 나는 악마의 물음에 내가 가진 것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한 가지를 제외하고…….
 악마는 여전히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어서 빨리 악마에게 네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겠다고 말하라며 아우성쳤다.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내 영혼뿐이오. 만약 당신이 내게 새로운 삶을 준다면 삶이 끝나는 날, 당신에게 내 영혼을 바치겠소.”
 악마가 씨익 웃었다.
 그 모습이 천사의 미소처럼 아름답게 보였다. 나는 어미를 바라보는 굶주린 아기 새가 되어 악마를 응시했다. 결국 악마는 내 영혼을 받기로 했다.
 나는 악마의 허락이 떨어지자 너무도 기뻤다. 신은 나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떠밀었지만 악마는 나를 희망이란 구름에 태워주었다.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어서 빨리 새로운 삶이 주어지기만을 기다리며 악마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런 나의 시선을 받으며 악마가 입을 열었다.
 “첫째, 너를 부와 명예를 지닌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게 해주겠다. 둘째, 어둠의 기사 넷을 네 임의대로 소환하여 수족처럼 부릴 수 있도록 해주겠다. 그리고 이건 조금 파격적인 제안인데……. 1억 번째 계약자인 너에게 특별히 은혜를 베풀겠다. 아주 간단한 일이다. 10만 명의 인간을 죽여 그 영혼을 바친다면 너와의 계약은 없었던 것으로 해주겠다. 아주 파격적이지 않은가? 겨우 10만이야. 10만의 인간을 죽이면 넌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더불어 어둠의 기사 넷도 영원히 네 소유가 될 것이다. 어때, 할 수 있겠나?”
 나는 악마의 말을 재차 확인했다.
 “10만의 인간을 죽이면 내 영혼을 당신에게 바치지 않아도 되고, 더불어 당신이 얘기한 어둠의 기사 넷을 영원히 내 소유로 할 수 있다고? 그게 정말이오?”
 나는 악마의 마지막 제안을 머리에 새기며 온몸을 떨었다. 악마에게 내 영혼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 10만 명의 인간만 죽이면 그에게 받은 힘이 영원히 내 것이 되는 것이다.
 “흠, 말귀를 상당히 잘 알아듣는군! 그래, 겨우 10만의 목숨을 바치는 대가로 네 영혼의 자유와 힘을 동시에 얻는 거지. 어때, 구미가 당기지?”
 악마는 뭐가 그리 좋은지 비릿한 미소가 점점 커지더니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나는 그 웃음에 거부감이 들었다. 진실성이 결여된 그 웃음이 악마의 말을 의심케 만들었다.
 그러나 이 기회를 놓치기가 너무나 아까웠다. 나는 악마의 웃는 낯을 보며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마지막 조건을 충족시킨다면 당신이 말한 것처럼 영혼의 자유와 어둠의 기사라는 존재를 나에게 영원히 줄 수 있소?”
 순간 악마의 웃음이 멎었다. 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흠, 의심이 많은 녀석이군. 악마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맺은 계약은 반드시 지킨다. 악마인 내가 이런 말을 해서 뭣하지만 믿어라.”
 그 말에 나는 잠시 혼란을 느껴야만 했다. ‘악마’와 ‘믿음’이란 말은 서로 너무 안 어울린다. 그러나…….
 “좋소! 당신과 계약을 하겠소. 당신은 당신의 말에 기필코 책임을 져야 할 것이오.”
 나는 악마와의 계약을 수락하고 말았다. 여기서 시간을 더 끈다면 악마가 사라질까봐 두려웠다.
 악마의 두 눈에서 지독한 어둠의 기운이 발산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입이 벌어지더니 위엄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골르트멧아시 푸머! 나의 이름으로 계약이 성사되었음을 알린다.”
 나는 그 엄중한 목소리에 주눅이 들어 몸을 떨었다.
 “이제 너와의 계약이 성사되었다. 너의 영혼에 계약의 인이 새겨졌다. 또한 네가 언제든지 소환 가능한 어둠의 기사 넷이 네 영혼에 봉인되었다. 네가 원하면 언제든 그들이 나타나 강력한 조력자가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10만 명의 인간을 죽이는 날, 너의 영혼에 새겨진 계약의 인은 사라지고 어둠의 기사들만 남을 것이다. 참, 한 가지! 10만의 인간을 죽이는 일 말인데…….”
 악마는 잠시 말을 끊고 나를 응시했다. 나는 악마의 뒷말이 궁금해서 급히 입을 열었다.
 “말하시오.”
 “반드시 네 손으로 직접 죽여야 한다. 크하하하하!”
 악마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광소를 터뜨리더니 어느새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악마의 마지막 말이 귓가를 울렸다. 나는 사실 내 힘이 되어줄 어둠의 기사들로 하여금 10만의 목숨을 빼앗을 생각이었다. 때문에 악마의 마지막 말이 섬뜩한 느낌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나는 사람은 닥치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사라진 악마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좋다! 10만이 아니라 100만이라도 죽일 테다!”
 순간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어디선가 뻗어 나온 강력한 힘이 내 몸을 끌어당겼다.
 그렇게 악마와 영혼의 계약을 맺은 나는 어디론가 속절없이 끌려갔다.
 
 일그러진 공간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곳에 사라졌던 악마가 다시 나타났다.
 그의 입가에는 여전히 비릿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악마는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인간이여, 너의 보잘것없는 영혼 따위는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변화될 너의 영혼은 원하지. 미쳐라! 인간이여, 너의 자유를 위해 다른 인간의 생명과 피와 원독을 가득 담고 오너라. 어차피 네놈은 10만의 인간을 죽일 수 없을 것이다. 어쭙잖은 인간의 감성을 지닌 너는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다. 먼 훗날, 1억 번째 퍼즐의 마지막 열쇠가 되어 내 앞에 다시 나타나거라. 내가 바라는 어둠의 영혼이 되어 나를 기쁘게 하라. 너와 함께 영천계에 나의 왕국을 세우리라. 크크크, 크하하하!”
 악마는 조금 전에 자신과 계약한 인간이 10만 명의 인간을 죽이지 못할 거라고 여겼다. 10만이란 숫자는 결코 적은 게 아니다.
 설사 정말로 10만 명을 죽인다 해도 악마로서는 별 상관이 없다. 단지 수많은 인간의 원독과 피로 얼룩진 광전사의 영혼이 되어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
 악마의 눈은 공간 저 너머의 영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그가 만난 인간은 1억 번째 영혼의 퍼즐을 맞춰줄 마지막 열쇠였다.
 
 
 
 
 제1장 뮤란트의 이방인
 
 
 
 1
 
 그가 정신을 차린 뒤, 스스로를 인지한 것은 10세의 생일을 맞았을 때였다.
 그는 자신의 주위 환경이 상당히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데릭 가이어스.
 이것이 그의 이름과 성이다.
 성이 있으니 당연히 귀족이다. 그것도 백작가의 단 하나뿐인 정통성을 지닌 후계자.
 데릭이 태어난 이곳은 뮤란트 대륙이다. 2제국 8왕국 3소왕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간 외에도 유사종족과 몬스터가 존재하고 드래곤이라는 강력한 존재도 함께한다.
 다만 드래곤의 존재는 인간의 역사에 그리 자주 등장하지는 않았다. 역사에 기록된 것 중 가장 최근에 등장한 것이 700년 전, 멸망한 아티아 왕국의 수도를 박살냈다는 기록 외에는 인간의 역사에 직접적으로 등장한 사례가 없다.
 그러니 데릭이 한평생 대륙을 쑤시고 다녀도 드래곤을 만날 일은 극히 희박하다. 전설에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처럼 인간으로 유희하는 드래곤이라면 또 모를까.
 어쨌든 데릭은 백작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것도 대륙에 존재하는 2개 제국 중 하나인 아슈라인 제국에.
 “데릭, 내일부터 너는 제국의 수도에 있는 아슈레인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생활하게 될 것이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기사의 가문으로 검과 함께 이 제국을 수호해왔다. 너 또한 대 가이어스가의 후계자로서 능력을 쌓기 위해 열심히 수련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근엄한 표정의 칸슈타인 가이어스 백작의 명이 떨어졌다.
 데릭의 아버지다. 각성 전에 남아 있던 기억 속의 아버지란 존재는 무척이나 근엄하고 완고함을 표방하는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데릭이 태어난 후로 한 번도 그를 안아주거나 미소조차 지은 적이 없는 인물.
 각성을 하기 전의 데릭이 아버지를 보는 시선은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각성을 한 지금은 그저 자신에게 좋은 가문을 선사해준 존재로만 보였다.
 어느새 데릭은 전생의 그로 돌아간 것이다. 이기적이고 폐쇄적이며 다혈질적인 존재로.
 “알겠습니다, 아버지. 그럼 언제 떠나는 것입니까?”
 데릭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며 백작을 쳐다보았다.
 딱 부러지는 그의 물음에 백작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런 표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일모레 떠나면 된다. 나머지는 집사인 크레인이 알아서 해줄 것이다.”
 할 말이 끝났다는 듯 백작의 시선은 책상 위에 놓인 서류더미로 옮겨졌다.
 데릭은 그런 아버지에게 간단히 목례만 하고 서재를 나섰다. 전생에서도 그랬지만 현생에서도 아버지란 존재와는 전혀 인연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탓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저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생각…….”
 그를 낳고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그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아버지의 말을 각선 전의 데릭이 다섯 살 때 들은 적이 있다.
 데릭은 이 말에 깊은 상처를 받고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가.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다. 겉모습만 어린아이일 뿐.
 아무튼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는 아버지는 여전히 자신을 미워하는 듯했다. 아니, 증오한다고 해야 할까?
 다만 자신을 내치지 않는 것은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이기에 마지못해 침묵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런 부자관계가 오히려 더 나은 듯싶다. 어쭙잖은 정 따위는 버리기로 작정했으니까.
 영주성은 데릭의 아카데미 입학으로 인해 부산했다.
 가이어스가의 영지에서 제국의 수도까지는 마차로 석 달이 걸리는 거리다.
 제국의 땅덩어리가 워낙 넓기에 도시와 도시 사이의 관도에도 몬스터가 가끔 등장한다고 했다. 때문에 힘없는 자에게 여행이란 있을 수 없다. 죽고 싶은 자가 아니라면 말이다.
 이틀 후, 데릭은 가문의 깃발이 꽂힌 마차에 올랐다.
 그의 시중을 들기 위해 하인과 하녀 그리고 4클래스 마법사가 동승했다.
 하인의 이름은 지크, 하녀의 이름은 세실로 앞으로 아슈레인 아카데미에서도 데릭의 시중을 들 사람들이다. 마법사는 영지전속 마법사로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여 이번 여행길에서 호위임무를 맡았다. 이름이 케이브라고 했다.
 그리고 데릭을 수도까지 호위할 세 명의 기사와 50명의 병사도 따라붙었다.
 긴 행렬이 내성인 영주성을 벗어나 외성에 들어서서 마을의 대로를 천천히 가로지른 다음 마을을 둘러싼 외성벽의 문으로 향했다.
 내성 혹은 영주성이라 불리는 곳에는 푸른 장미 기사단과 마법사, 성의 제반업무를 담당하는 이들과 하인들이 살았고 외성에는 일반주민들이 산다. 그리고 외성 밖에는 농노들의 마을이 있다.
 행렬은 마을 주민들의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벗어났다.
 외성문 앞에 당도한 일행의 선두에 서 있던 호위단장 퀘이크의 간단한 통고와 함께 성문이 열렸다.
 마차는 농노들이 살고 있는 몇 개의 마을을 뒤로한 채 천천히 속도를 올렸다.
 아직은 겨울이다. 하지만 내년 3월에 있는 입학식에 참석하려면 그 전에 아카데미에 도착해야 한다.
 날짜는 아직 많이 남아 있었지만, 겨울이란 계절은 여행을 하기에 상당히 불편한 계절이다.
 다행히 마차 안은 온기를 발산하는 난방장치가 되어 있어 밖에서 차가운 바람을 가르는 기사들이나 일반병사들보다는 한결 수월했다.
 보통은 귀족이 탄 마차 안에 하인과 하녀가 함께 탈 수 없지만 날씨가 매서운 관계로 데릭은 그들을 동승케 했다.
 데릭은 주변경치를 음미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지난 10년간 한 번도 영주성을 벗어난 적이 없다. 하나밖에 없는 후계자의 안전문제로 언제나 내성에서만 지내야 했다. 아버지의 눈치를 보면서…….
 그러다 10세의 생일날 각성함과 동시에 아카데미 입학이란 명분과 함께 바깥세상으로 나서게 된 것이다.
 때마침 어제 영혼 속에 종속된 어둠의 기사 넷을 소환했었다. 어둠의 기사답게 온통 검은색의 갑옷을 두른 그들이 내뿜는 강력한 투기를 느낀 일부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적의 침입이라며 영주성을 발칵 뒤집어놓았다는 사소한 문제를 제외하면 데릭은 자신에게 종속된 어둠의 기사들이 마음에 들었다.
 그들이라면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충분히 자신을 지켜줄 수 있을 것이란 강력한 믿음이 생겼다. 그리고 간단한 대화 후, 그들의 사용법(?)을 알게 되었다.
 어젯밤에 본 어둠의 기사들을 떠올리며 적당한 흔들림이 느껴지는 마차에서 밖의 세상을 보았다.
 백색의 눈에 뒤덮인 평야가 끝도 없이 펼쳐진 모습.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많은 영주민들이 땀 흘리며 일하는 곳이 될 땅.
 앞으로 그에게 주어질 재산이다. 그의 땅이다. 전생에 땅 한 평조차 없었던 그에게 거대한 땅이 생긴 것이다. 물론 지금은 아버지의 소유지만…….
 데릭은 눈을 감으며 앞으로의 계획을 구상해보았다.
 ‘10만의 인간을 죽이면 된다고 했지? 이 손으로, 나의 힘으로…….’
 악마와의 계약을 상기하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이렇다 할 힘이 없었기에 아슈레인 아카데미에서 실력을 쌓은 뒤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그동안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상받는 의미에서 맘껏 즐기기로 했다. 지금은 누가 봐도 10세의 꼬맹이이기에.
 데릭은 감았던 눈을 떴다. 넓은 마차 안에 네 명이 타고 있었지만 오히려 여유 공간이 많이 남았다.
 앞에 불편하게 앉아 긴장하고 있는 하인과 하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옆자리에서 졸고 있는지 꾸벅거리는 마법사도 쳐다보았다.
 ‘이 셋을 죽이면 9만9천9백97명이 남나?’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들을 쳐다보았다. 물론 데릭은 이들을 죽일 마음은 없다. 이들은 그의 명을 따르는 존재이니까.
 
 가이어스 영지를 떠난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사람들에게 들었던 몬스터나 산적 혹은 그 비슷한 에피소드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너무도 지루하다 싶을 정도의 여정이었다.
 마을에 들어설 때마다 느꼈지만 평민들이 귀족을 대할 때 그들의 눈빛에는 두려움과 조심성이 강하게 배여 있었다. 처음에는 그들의 모습이 재미있었지만 자주 보아서 그런지 이제는 면역이 되었다.
 평민들에게 있어 귀족이란 하늘에 존재한다는 천족만큼이나 어렵고 땅속 깊이 산다는 마족보다도 더 두려운 존재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지는 신분제에 얽매여 그들은 평생을 귀족을 위해 봉사하는 존재로 살 것이다. 아니, 스스로 그 봉사를 원해서 하진 않을 것이다. 힘을 가진 귀족들이기에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재수 없으면 귀족의 눈 밖에 나서 어느 이름 모를 황야에서 늑대밥이 된다 해도, 어디 가서 하소연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인생을 사는 존재들이다.
 데릭은 몇 개의 마을을 지나며 평민들의 삶에 짜증이 치솟았다. 비위생적인 식습관과 현대의 노숙자를 방불케 하는 차림새.
 전생에 그는 평범 이하의 소시민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나 언제나 몸가짐만큼은 깨끗이 했다. 약간의 결벽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언제 빨았는지도 모를 옷과 때에 찌든 손발, 그리고 누런 이를 드러낸 채 입 냄새를 풍겼다. 귀족들이 왜 저들을 더럽다고 하는지 알 것 같다.
 지저분하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저들도 언제나 깨끗한 옷을 입으며 깨끗한 곳에서 살고 늘 몸을 청결히 하고 싶을 것이다. 안 그런 이도 있을지 모르지만 아마 대체로 그런 삶을 바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여 그들에게 그런 사치는 돌아가지 않는다. 삶 자체가 너무도 고단하기에 삼시 세 끼 먹을 것을 걱정하는 저들에게 그런 일은 생각조차 못할 먼 나라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봐야 데릭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물론 평민이라고 해도 여자들은 그나마 나았다. 귀족이나 그 아래에서 일하는 하인들보다는 지저분했지만.
 수도로 이어진 관도를 달리며 주변 풍광과 가끔씩 스쳐지나가는 여행자들이나 상단을 보았다.
 피곤에 지친 그들의 얼굴 어디에서도 삶에 대한 활력 따위는 없었다. 그저 일상에 지친 무표정한 모습뿐이었다.
 데릭이 살았던 전생의 세계나 이세계라고 규정지은 이곳이나 삶의 질이 조금 다를 뿐이지 그 외에는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먹고살기 힘든 세상, 배고픔이 만연한 세상, 철저한 신분제로 미래가 없는 사람들의 표정은 언제나 어두워 보였다.
 데릭은 스스로의 관찰력에 찬사를 보내고 싶었다. 하긴, 너무도 지루한 여행길에서 이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면 지겨워서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데릭은 그들의 삶이 어떻든 그들을 돕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다만 너무 심심하고 무료하기에 나름대로 그들의 삶에 대해 평가해본 것뿐이다.
 데릭은 이렇게 좋은 신분과 환경에서 태어나게 해준 이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순간 또다시 떠오른 10만이란 숫자!
 이 숫자만 생각하면 마음이 조급해진다. 당장 신분을 이용해 도착하는 마을마다 사람들을 잡아들여 쓱삭하고 싶은 살심이 솟구쳤다.
 평민들 따위야 백작가의 후계자라는 지위를 이용해 얼마든지 없앨 수 있다.
 그러나 그 숫자가 만만치 않고, 혹시 모를 이변이 발생할 수 있기에 애써 급한 마음을 달랬다.
 데릭은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든 10만의 목숨을 취하고 악마와의 계약을 파기하여 자신의 영혼을 내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에 봉인된 어둠의 기사들이 있지만, 그 힘 외에도 스스로를 지킬 정도의 힘은 길러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각성하기 이전에도 집에서 기초적인 가문의 검을 사사 받았다.
 비록 여섯 살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4년 밖에 교육을 받지 못 했지만, 기초적인 것은 충분히 익혔다. 덕분에 체력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
 비교 대상이라고 해봤자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지만…….
 덜컹.
 갑자기 마차가 움직임이 멈추자 마차 안에 있던 일행들의 몸이 한쪽으로 쏠렸다.
 호위단장을 맡은 퀘이크가 말을 몰아 데릭이 앉은 창가 쪽으로 다가왔다.
 데릭은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퀘이크에게 마차가 멈춘 이유를 물었다.
 “무슨 일이지?”
 “소영주님, 관도에 사람들의 시체가 널려 있습니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퀘이크는 정색하며 답했다.
 시체가 관도에 있다는 기사의 말에 두 하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고 마법사의 표정 또한 굳었다.
 “무슨 일인지 빨리 알아보도록! 해가 지기 전에 다음 마을에 들어가야지. 이 추운 날 야영을 할 수는 없잖아!”
 시체 따위야 수백 구가 길가에 널브러져 있다 해도 그를 위협하지는 못한다. 다만 걸리는 것은 죽은 자보다 그들을 죽인 자들이 자신을 노리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래봤자 자신을 해하지는 못하겠지만…….
 어느새 데릭은 어둠의 기사들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는 거만한 표정으로 퀘이크를 보며 말했다.
 “알아서 처리해!”
 “알겠습니다.”
 이 시대에 기사라는 작위를 받기 위해서는 최소한 소드익스퍼트 초급 정도의 실력은 지녀야 한다.
 데릭의 눈앞에 있는 퀘이크도 그 정도 실력은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강할 수도 있고…….
 데릭이 그 정도의 실력을 쌓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을 훈련해야 할 것이다.
 
 
 2
 
 40대 중반의 다부진 체격에 눈매가 부리부리한 퀘이크는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본 뒤 수하기사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는 이번 호위단에 합류한 두 명의 젊은 기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이 재빠른 동작으로 마차를 둘러싸고 한 명의 기사가 병사 열 명을 거느리고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는 곳으로 향했다.
 데릭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혹시 있을지 모를 기습에 대비해 영혼 속에 봉인되어 있는 어둠의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면 어디든 소환이 가능한 존재들이다.
 영혼의 끈으로 연결된 어둠의 기사와 그는 생각만으로도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주위를 둘러보고 무장한 이들이 있으면 제거하라.’
 ‘네, 주군!’
 절제된 음성이 데릭의 머릿속에 울리기 무섭게 나타난 어둠의 기사는 군마를 소환하여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일체의 소음도 없이 움직이는 그들의 애마가 신기했다.
 데릭은 믿음직스런 어둠의 기사와 퀘이크를 비교해보았다. 오거와 오크의 차이라고 할 정도로 그 위세와 능력의 차이가 많을 것이다.
 겉모습에서 느껴지는 위압감 또한 비교가 되지 않았다. 어둠의 기사야말로 데스나이트와 같은 최강의 기사라는 선입견을 품고 있는 데릭은 퀘이크와의 비교 자체가 어둠의 기사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죽음의 기사와 어둠의 기사가 같은 말일까?
 그러나 곁에 나타난 방해자로 인해 더 이상 그 생각을 이을 수 없었다.
 “소영주님, 주위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해 한 명의 기사와 열 명의 병사들로 하여금 다시 조사토록 하겠습니다.”
 퀘이크였다.
 “알아서 하도록!”
 데릭은 짤막하게 대꾸하고 창문을 닫았다.
 ‘어떻게 됐지?’
 그는 사념으로 어둠의 기사에게 뜻을 전했다.
 ‘주위에 무장한 30여 명의 인간들이 있습니다, 주군. 어떻게 처리할까요?’
 관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의심되는 존재에 대한 보고에 데릭은 즉시 화답했다.
 ‘모두 처치한 다음에 귀환하라.’
 ‘알겠습니다!’
 오늘 30명의 목숨이 그의 명령으로 사라진다. 자신이 직접 죽일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그에게는 아직 그런 힘이 없다.
 하루속히 힘을 길러야 한다.
 ‘어차피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다만 그것이 언제, 어디서인지가 문제일 뿐이다.’
 데릭은 스스로를 정당화시키려 했다.
 오늘 죽음을 맞게 될 자들은 단순히 육체의 죽음이지만, 데릭은 자칫 영혼의 소멸을 가져올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자신의 계획의 더 비중을 두기로 결심했다.
 
 마차는 관도를 달려 한 시간 만에 꽤 큰 규모의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과 대화를 나누는 퀘이크의 모습이 보였다.
 잠시 후, 정복을 입은 자가 나타나서 퀘이크와 몇 마디를 나누었고 일행은 마을 안으로 진입했다.
 마을 중앙에 위치한 크기가 제법 큰 여관에 묵기로 했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마친 데릭은 의자에 앉아 창밖에 펼쳐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반짝이는 별들이 곧 쏟아져 내릴 것처럼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때였다.
 똑똑.
 “누구냐.”
 “소영주님, 저 세실입니다. 식사를 가지고 왔습니다.”
 아카데미에서 그의 시중을 들게 될 세실이 쟁반을 들고 들어섰다.
 따뜻한 양고기 스프와 매콤한 소스가 곁들여진 치킨요리 그리고 신선한 야채와 과일이 있었다.
 탁자에 상을 다 차리자 세실은 고개 숙여 인사한 뒤에 조용히 방을 나섰다.
 데릭은 음식이 차려진 탁자로 향했다.
 숟가락과 포크, 나이프를 이용해 음식을 먹다가 문득 전생에 먹었던 김치가 생각났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얼마 후.
 똑똑.
 “누구냐?”
 “퀘이크입니다, 소영주님.”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선 호위단장 퀘이크가 간단히 목례했다.
 “무슨 일이야?”
 “소영주님, 아무래도 일정을 조금 늦추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데릭은 잠옷의 단추를 하나씩 채우며 굳은 표정의 퀘이크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어제 관도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이 마음에 걸립니다.”
 “어제 일어난 일과 우리 일정을 늦추는 것이랑 무슨 상관이야?”
 “어제 관도에 죽어 있던 자들의 사인은 판명되었습니다만, 문제는 그들을 죽인 자들 역시 몰살당해버렸다고…….”
 “강도 따위가 죽은 거랑 우리 일정이 늦춰지는 게 무슨 상관이지?”
 짜증이 일었다. 한 달여 동안 마차를 타왔기에 다소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피로만 가득 쌓인 데릭은 오랜만에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제대로 된 식사를 마친 다음 숙면을 취하려 했지만 퀘이크의 등장으로 방해를 받자 기분이 상했다.
 그는 퀘이크의 제안을 단호하게 잘랐다. 하루 속히 수도에 도착해 지겨운 마차여행을 끝내고 싶었다.
 “강도들은 카이슨 백작 휘하의 기사 30여 명이 주살한 것으로 사료됩니다. 문제는 백작가의 기사와 정규군 30명 역시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방금 전에 찾아온 이 마을 치안대장의 얘기를 종합해볼 때 상당한 실력을 가진 인물인 것 같습니다. 그런 인물이 저희를 공격한다면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할 상황에 직면할지도 모릅니다. 저에게 있어 소영주님의 안위는 무엇보다 우선이기에 감히 말씀드립니다.”
 심각한 표정의 퀘이크를 보며 데릭은 오늘 낮에 어둠의 기사가 보고한 내용을 생각해보았다.
 30명의 무장한 인간들에 대한 얘기와 지금 앞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퀘이크가 들려준 얘기, 두 개의 얘기가 전혀 무관할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신들을 위협할 것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이런 말을 퀘이크에게 할 수는 없겠지만…….
 데릭은 자신이 예상했던 것만큼 어둠의 기사가 강하다는 확실한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기일이 남았다지만 여행 중에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 이곳에서 마냥 지체할 수는 없으니 내일 아침 식사를 마치는 대로 출발하도록!”
 데릭은 퀘이크의 의견을 묵살했다.
 “하지만 혹시…….”
 “그만! 퀘이크 경도 피곤할 텐데 내일을 위해 그만 휴식을 취하시오.”
 데릭은 단호하게 말했다.
 “명령이시라면…….”
 퀘이크는 간단히 목례한 뒤, 방을 나섰다.
 
 세실이 아침을 들고 들어왔다. 스프와 호밀빵, 과일이 전부인 간단한 아침이었다.
 아침을 간단하게 먹는 것이 습관인 데릭은 음식을 대충 먹고 차를 한 잔 마셨다.
 모든 준비를 마친 일행은 서둘러 마을을 출발했다.
 긴장된 표정으로 굳어 있는 병사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목숨은 누구의 것이든 소중한 법이다. 특히 자신의 목숨은…….
 마을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입구의 초소를 지나쳐야 한다. 어제 저녁에 보았던 것보다 상당히 많은 이들이 그곳에 모여 있었다.
 어제의 일로 마을 전체에 비상령이 떨어진 것이다.
 퀘이크가 초소근무를 맡은 이와 몇 마디 나눈 뒤에야 데릭 일행은 마을을 벗어날 수 있었다.
 “저…… 소영주님, 괜찮을까요?”
 50대 초반의 마법사 케이브가 넌지시 물었다. 기사들의 떼죽음을 들어서 알고 있는 그로서는 지금의 일행들이 미덥지 않은 눈치였다.
 하긴, 기사가 끼어 있는 정규군 30명이 몰살당했다는 말을 들었으니…….
 다만 그 내용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데릭으로서는 그의 걱정하는 모습에 작게 미소까지 보이며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알고 있는 자와 모르고 있는 자의 심리는 이래서 다르다.
 한나절 동안 관도를 달리던 일행의 분위기가 어느덧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망각의 동물인 인간의 능력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저 멀리 거대한 숲 호르나가 보였다.
 끝없이 펼쳐진 이 숲속에는 많은 몬스터를 비롯한 유사종족인 엘프가 살고 있다고 전해진다. 숲 외곽은 그럭저럭 나무꾼이나 사냥꾼들이 들어설 수 있지만, 조금만 더 깊숙이 들어가면 중대형 몬스터의 공격을 받는 숲으로 유명하다.
 잘 정비된 관도는 그 숲을 빙 돌아서 있었다. 당연히 마차가 달릴 수 없는 숲을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시간도 넉넉하니까.
 그들 앞으로 몇 명의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지난 한 달여 동안 관도에서 만난 무수한 어쭙잖은 여행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그들은 마차를 발견하고 길가로 비켜섰다.
 평민이 귀족의 행차를 막았다가는 오로지 죽음뿐이다. 귀족모독죄라는 명목이다.
 데릭은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기에 그들을 얼핏 볼 수 있었다.
 전사복 차림의 단단한 체격을 가진 두 남자와 가녀린 몸매를 지닌 여자, 그리고 중년사내였다. 중년사내는 마법사의 상징인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마차는 그들을 지나쳐 먼지를 일으키며 관도를 내달렸다.
 “보통의 여행자들 같아 보이지는 않네.”
 데릭은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 말했다. 마법사와 전사가 포함된 여행자라면 당연히 모험가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전사 두 명과 강해 보이는 마법사와 뭔가 있어 보이는 여자라……. 여자는 혹시 사제가 아닐까요?”
 한 달간 여행하면서 이렇다 할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 케이브가 입을 열었다.
 데릭은 사제라는 말에 호기심이 일었다.
 “여자가 사제라고?”
 “네, 소영주님.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망토 사이로 얼핏 본 복장이 사제의 복장과 비슷해 보였습니다. 저 파티의 구성원을 보니 상당히 강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특히 마법사가…….”
 그 짧은 찰나에 네 명을 모두 파악한 케이브에 대해 데릭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검사도 아닌 마법사의 눈썰미가 이렇게 좋을지는 상상도 못했다.
 데릭이야 어릴 적부터 검술을 수련한 관계로 안법수련을 통해 보통사람들보다 시력이 좋지만, 마법사가 안법 같은 걸 수련한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눈이 상당히 좋군, 케이브 경.”
 “아닙니다. 관심이 있어서 유심히 보았을 뿐입니다.”
 데릭은 케이브와 함께 방금 전에 스쳐지나간 사람들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창밖을 보았다. 대인관계에 약한 그의 모습이 또다시 배어나오고 있었다.
 한편 기사 퀘이크는 이번에 소영주의 호위단장으로 뽑힌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싸가지 없는 말투도 그렇고, 나이답지 않은 거만한 태도도 눈에 거슬렸다.
 그러나 주군의 아들이고 훗날 자신의 주군이 될 것이기에 속으로만 삼켜야 했다.
 어젯밤의 일도 그렇고, 지난 한 달간 자신을 마치 하인 대하듯 해온 소영주의 말투도 상당히 거슬렸다.
 평민으로서 기사가 되긴 힘들다. 그런데 자신은 그 힘든 과정을 거쳐 칸슈타인 백작에 의해 발탁되어 영지의 기사로 임명되었다.
 그때만 해도 세상을 전부 얻은 것 같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지난 한 달간은 그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여정이었다.
 ‘칸슈타인 백작님도 하대를 하지 않는데!’
 이제 갓 열 살의 꼬맹이가 귀족이란 이름으로 자신을 하인처럼 대하는 것이 상당히 짜증났다.
 특히 아이 같지 않은 그 차갑고 섬뜩한 눈빛!
 어젯밤에 자신의 의견을 무시한 그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훗날 백작의 직위가 저 마차에 타고 있는 어린 녀석에게 돌아간다면 가이어스가는 커다란 위기에 봉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마음은 곁에 있는 두 젊은 기사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아마도 저 어린 소영주를 위해 진심으로 충성을 바칠 기사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기사로서의 본분만 지킬 것이다. 퀘이크는 하루속히 수도에 도착하기만을 바랬다.
 그리되면 최소한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까지는 저 거만한 소영주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애마를 재촉했다.
 말을 달리는 와중에 그는 방금 전에 본 네 명의 인물들이 생각났다.
 그들을 보았을 때 검사의 본능이 위험신호를 알려왔다. 혹시 저들이 어제 이곳 백작가의 기사와 병사들을 해친 게 아닐까 생각하며 그들의 행동을 예의 주시했었다.
 자신과 맞붙어도 전혀 밀릴 것 같지 않은 두 명의 전사와 마법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을 발견했을 때 혹시 저들이 비켜주지 않으면 상당히 피곤할 것 같다는 생각에 긴장된 마음으로 길을 비켜달라고 요구하려는 순간, 다행히 그들이 먼저 길을 터주었다.
 순간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불어내는 스스로를 보며 자신도 이제 늙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사들의 몰살로 인해 아직까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3
 
 데릭 일행은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모습을 감출 때쯤 야만테란에 들어섰다.
 상주인원 20만에 하루 유동 인구수만 수만에 이르는 이 도시는 수도 바이란으로 향하는 다섯 곳의 관문 중 하나다.
 3층 이상의 건물이 즐비했으며, 거리는 깨끗한 복장을 갖춘 사람들로 붐볐다. 여태까지 보아온 더러운 모습의 사람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소영주님? 도시 전체에 활력이 넘쳐나는 것 같습니다. 도로도 잘 정비되어 있고 사람들의 표정도 상당히 밝은 것 같군요.”
 케이브는 이곳이 마음에 드는지 연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런 것 같군.”
 가이어스 영지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거대도시의 모습에 지크와 세실도 꽤나 상기된 표정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케이브처럼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일행은 도시 한복판에 위치한 여관들 중 꽤 고급스런 외양을 지닌 여관 앞에 멈추었다. 출입문 앞에 서 있던 종업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저희 ‘백색의 상아’를 찾아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 묵어갈 테니 방을 준비하고 식사도 준비해주게.”
 호위단장 퀘이크가 말에서 내리며 말했다.
 잠시 후 여관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나와 기사들의 말고삐를 잡았다.
 처음에 인사한 종업원이 조심스레 마차 문을 열었다.
 마차에서 내린 데릭은 간단하게 굳은 몸을 풀었다.
 어둠이 조금씩 밀려드는 도시에 조명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대리석을 깔아놓은 여관에 들어섰다.
 퀘이크가 모든 절차를 마쳤는지 종업원이 방을 안내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종업원이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목욕을 먼저 하고 싶군.”
 “알겠습니다. 곧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종업원의 깍듯한 모습에 데릭은 흡족했다.
 1층과 2층은 식당을 겸했고, 나머지 3, 4, 5층은 숙박시설이 구비되어 있었다.
 잠시 후 목욕을 마친 데릭은 세실에게 식당에서 식사할 거라고 말했다.
 방으로 올라오면서 본 2층 식당은 상당히 고급스런 분위기로 중앙에 무대 같은 것도 있었다. 이제까지 보았던 여관과는 격이 달랐다.
 2층 식당에 내려온 데릭은 쉽게 일행들을 찾을 수 있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식당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용케 좋은 자리를 하나 차지하고 있는 일행들을 발견한 데릭은 그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식탁 주변에는 퀘이크를 비롯해 두 명의 젊은 기사와 케이브가 자리하고 있었다. 일행들 중 유일하게 데릭과 한 식탁에서 식사할 수 있는 지위를 갖고 있는 자들이다.
 “어서 오십시오, 소영주님.”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취하는 그들을 보며 데릭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자신을 따라 같이 내려온 지크와 세실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크, 세실. 너희도 가서 식사를 하여라.”
 “예.”
 “네.”
 둘은 공손히 인사한 뒤 1층 식당으로 향했다.
 “소영주님, 오늘의 스페셜 메뉴로 시켰습니다.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케이브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없어. 그런데 모두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무슨 일이야?”
 “하하! 소영주님, 운 좋게도 오늘 아리안의 공연이 있다고 합니다. 제국 내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유명한 음유시인이죠.”
 “그렇게 대단한 자인가?”
 “예, 그리고 남자가 아니라 여자입니다. 상당히 젊은 아가씨죠.”
 년이란 얘기군!
 케이브의 말에 퀘이크를 비롯해 젊은 두 기사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젊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데릭이 살았던 전생의 청춘은 언제나 빈곤한 현실에서 오는 불만으로 인해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냈다.
 식탁에 기본요리가 차려진 다음 와인 잔들이 데릭을 제외한 네 사람 앞에 놓이고 붉은색 포도주가 그 잔들을 채웠다.
 데릭 앞에는 과일주스가 놓여 있었다. 그도 술을 한 잔 하고 싶었지만, 현재 나이에 대한 자각으로 꾹 참았다.
 귀족가의 자식이건 평민의 자식이건 어린아이에게는 술을 주지 않는다. 물론 여기서 그가 억제로 마시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을 테지만…….
 술이 한두 잔씩 들어가고 식탁 위에 빈 그릇이 생기면서 식당 안의 분위기가 조금씩 시끄러워졌다.
 데릭은 자리를 털고 일어날까 생각하다가 이 세상의 대중음악이 궁금하여 그냥 더 앉아 있기로 했다.
 땅땅.
 맑은 금속성이 식당에 울려 퍼졌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30대 중반의 남자가 무대에 섰다.
 “오늘도 저희 백색의 상아를 찾아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인사를 올립니다. 이번에 저희 여관에서는 여러 손님께 감사의 뜻으로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음유시인이신 아리안 님을 초대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천상의 목소리라는 격찬을 받고 있는 아리안 님의 노래를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아리안 님을 모시겠습니다.”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졌다. 데릭이 앉아 있는 식탁도 예외는 아니었다.
 적당한 알코올로 인해 자신들이 있는 자리를 망각하는 두 젊은 기사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그들을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데릭도 그들을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또한 호기심이 일었기에 무대로 시선을 옮겼다.
 라이브 공연은 태어나서 처음, 아니 전생에서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로서도 조금은 흥미가 있었다.
 갈색의 긴 생머리를 묶고 분홍색 레이스가 달린 백색의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하프처럼 보이는 악기를 안고 무대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휘파람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열렬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예쁘군!’
 데릭은 여자의 미모에 감탄했다. 10년만 더 나이를 먹었어도 첩으로 들일 텐데 하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부드러운 악기 소리가 조용히 실내로 퍼지며 흥분한 이들의 함성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악기의 선율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여인의 입에서 너무도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따사로운 햇살이 대지를 비출 때
 이름 모를 들꽃이 기지개를 켤 때
 영혼 깊숙이 간직된 이름 없는 그리움이 싹을 틔울 때
 우리 곁에는 언제나 사랑이 깃들어 있음이니
 메마르고 황폐했던 감정이 가슴 한 편에 자리 잡을 때
 그때 바람은 우리의 가슴을 깊이깊이 파고들어
 상처받은 몸과 영혼을 안식의 세계로 인도함이니
 뜻도 모를 우리의 삶이 부질없음을 느낄 때
 그대와 나 사이의 애틋한 사랑의 열매가 맺혀
 진실로 기쁜 자, 진실로 얻은 자 되어
 우리의 마음 깊이 새겨집니다
 진실한 기쁨, 진실한 사랑
 언제나 마음속에 맴돌겁니다
 
 아리안의 목소리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딱 한 사람, 데릭을 제외하고…….
 ‘뭔 소리?’
 데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를 벗어났다.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 것을 아무도 모르는 듯했다. 아니, 알면서도 모른 체하는 것 같았다.
 방으로 들어선 데릭은 창문을 열고 도시의 야경을 감상했다.
 하늘의 달과 별은 여느 때처럼 은은하게 빛났으며, 차가운 바람은 훈훈한 방 안의 공기를 차갑게 식히고 있었다.
 “에취!”
 분위기 깨는 기침소리와 함께 데릭은 창문을 닫고 이를 닦기 위해 세면장으로 향했다.
 
 데릭은 감기에 걸렸다.
 그래서 아침에 출발하기로 한 일정이 취소되고 여관에 며칠 더 묵기로 했다.
 미열과 함께 콧물이 줄줄 흘렀다. 쪽팔렸다.
 세실은 세면장을 들락날락하며 찬물에 수건을 헹궈 소영주의 이마를 식혀주었다.
 어젯밤 분위기 좀 잡으려고 창문을 열어놓은 게 실수였다.
 퀘이크와 케이브가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크는 퀘이크의 명에 의해 사제를 모셔오기 위하여 조금 전에 여관을 나섰다.
 세실은 계속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케이브 님, 마법으로 치료가 가능하지 않습니까?”
 퀘이크는 케이브를 쳐다보며 말했다.
 자신의 임무는 데릭을 안전하게 아카데미까지 호위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떠한 형태가 되었든지 안전하게 사고 없이.
 그러나 감기는 의외의 복병이었다.
 “마법으로 치료할 수 있는 병이 아닙니다. 신전의 사제라면 모를까 마법으로 치료는 불가능합니다, 퀘이크 경.”
 난처한 표정을 지은 케이브는 고개를 저었다. 검에 상처를 입거나 타박 혹은 근육통 같으면 자신의 마법으로도 충분하지만, 감기 같은 병은 마법으로 치료가 불가능했다.
 “하루 이틀 정도 쉬면 괜찮아질 테니, 그만들 나가.”
 모두의 걱정스런 눈빛을 받으니 데릭은 거북한 느낌이 들어 세실만 남기고 모두 내보냈다.
 “으음……!”
 한기가 들어 몸이 잠시 떨렸다. 벽난로에 불꽃이 활활 타오르며 방 안의 공기를 데우고 있었지만 몸속 깊이 들어온 한기를 몰아내지는 못했다.
 ‘젠장! 아직 한 명도 못 죽였는데 여기서 내가 먼저 죽는 거 아냐?’
 데릭은 더럭 겁이 났다.
 해야 할 일이 있고 가진 게 많은 그는 죽음을 두려워했다. 전생의 그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
 이 세상의 의술은 참으로 낙후되어 있다. 그 흔한 두통약조차 없으니 말 다한 것이다.
 물론 민간요법으로 전해지는 비법이 있긴 하지만, 지금 여기서 민간요법을 실행할 정도의 지식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다.
 한 가지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대도시에 속하는 야만테란이기에 신전과 함께 사제들도 존재할 것이란 점이었다.
 데릭은 지크가 사제를 데리고 오면 지금의 고통도 사라질 거라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참았다.
 ‘젠장! 이 몸이 어떤 몸인데…….’
 데릭은 속으로 멍청한 자신의 행동에 화를 냈다. 이제까지 단 한 번도 감기에 걸린 적이 없던 몸이 감기에 걸렸다는 게 짜증났다.
 4년간 매일 하루에 여섯 시간씩 검술을 수련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보통의 아이들보다 체력이나 면역력도 강해 단 한 번도 감기에 걸린 적이 없었다.
 그런 자신이 찬바람을 조금 맞았다고 하룻밤 사이에 감기가 걸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에취!”
 기침과 함께 콧물이 흘렀다.
 세실이 재빠른 동작으로 콧물을 닦아주었다.
 쪽팔리고 화가 났다.
 은연중에 폼생폼사를 지향했던 자신의 삶에 커다란 오점이 남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소영주님, 괜찮으십니까?”
 세실이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얘가 언제부터 나를 이렇게 걱정했지?’
 데릭은 그런 세실을 멀뚱히 쳐다보다가 아파오는 머리 때문에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세실은 아침의 일을 떠올렸다. 언제나 그러했듯 일찍 일어나 어린 주인의 시중을 들기 위해 방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몇 번을 두드려도 아무런 응답이 없자 문을 열고 들어선 그녀는 죽은 듯 누워 있는 소영주를 보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간간이 신음소리를 내는 그를 보며 기겁한 그녀는 침대 곁으로 달려가 소영주의 이마에 손을 대고 상태를 확인했다.
 온몸이 불덩어리였다. 의식도 없는 소영주를 본 세실은 두려움에 몸을 떨어야 했다. 그가 잘못되면 자신은 물론 가족들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었다.
 세실은 거칠게 방문을 열고 호위단장인 퀘이크와 마법사 케이브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지크를 찾았다.
 멍청한 지크는 잠이 덜 깬 모습으로 그런 세실을 쳐다보며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지크, 주인님이 아프셔! 빨리 신전에 가서 사제님을 모셔와! 빨리!”
 세실의 말에 화들짝 놀란 지크는 알몸인 것도 잊은 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대충 옷을 입고 달려 나갔다.
 ‘신이시여, 소영주님께서 무사하시길…… 제발!’
 세실은 신을 향해 간절히 기도했다.
 소영주가 진심으로 걱정이 되어서 그런 게 아니라 자신과 가족을 위한 기도였다.
 소영주의 방으로 돌아온 세실은 어릴 적 자신이 감기를 앓았을 때 어머니가 해주었던 방법대로 찬물에 수건을 헹궈 데릭의 이마를 식혀주었다.
 이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그런 세실을 보며 퀘이크와 케이브는 마른 입술에 침을 묻히며 걱정스레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소영주가 의식을 차렸는지 의식을 차린 소영주가 작은 신음소리와 함께 특유의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퀘이크와 케이브를 내보냈다.
 아무리 귀족이라지만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반말을 해대는 소영주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세실은 감히 그런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못했다. 아니, 그런 표정조차 지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의식을 차린 소영주를 보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크가 두 명의 사제를 데리고 여관에 도착했다.
 퀘이크와 케이브도 사제들과 함께 소영주의 방으로 들어섰다.
 사제들은 데릭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신성력으로 치료를 시작했다.
 “이제 괜찮아질 겁니다.”
 두 사제 중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자가 말했다.
 확실히 사제가 신성력을 발휘한 뒤, 데릭은 두통과 한기가 사라졌다.
 사제가 신성력을 발휘한 뒤 데릭은 두통과 한기가 확실히 사라짐을 느꼈다.
 ‘만병통치약 같은 신성력…….’
 데릭은 기회가 닿으면 사제를 한 명 고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사제님.”
 그는 사제를 향해 인사했다.
 그 모습에 두 사제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데릭은 어색한 분위기에 헛기침을 하며 그들을 흘겨보았다.
 “다행입니다. 모든 게 브이란 님의 축복입니다.”
 브이란이라는 신은 대륙의 5대신 중 하나로 평화를 상징하는 신이다.
 “아, 브이란 님의 사제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데릭은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킨 채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닙니다. 사제로서 당연히 해야 할 도리를 한 겁니다. 참으로 예의가 바른 도련님이시네요.”
 순간 황당한 표정을 머금는 퀘이크와 케이브, 세실.
 데릭은 그들 중 퀘이크를 보며 말했다.
 “퀘이크 경, 사제 분들께 보답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아…… 알겠습니다, 도련님.”
 평소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보이는 퀘이크였다.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그들이 돌아가고 방에는 다시 데릭과 세실만 남았다.
 “귀찮으니까 너도 이만 네 방으로 돌아가라.”
 데릭은 타오르는 벽난로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세실은 자리에서 일어나 목례를 하고 방을 빠져나갔다.
 데릭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현기증이 일어 다시 주저앉았다.
 ‘젠장!’
 육체의 나약함에 다시금 짜증이 밀려왔다.
 이 허약한 육체!
 이왕 환생할 거 드래곤으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어둠의 기사 소환!’
 생각만으로 소환되는 어둠의 기사들.
 좁지도 넓지도 않은 방에 네 명의 어둠의 기사가 소환되었다.
 검은색 풀 플레이트메일로 무장한 네 명의 기사가 데릭 앞에 환상처럼 나타났다.
 한쪽 무릎을 굽힌 채 예를 표하며 데릭을 바라보고 있는 기사들.
 데릭은 스스로에 대한 짜증스런 마음에 이들을 소환했다.
 소환된 어둠의 기사들을 보며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것을 물어보았다.
 ‘너희에게도 이름이 있느냐?’
 이들과의 대화는 생각만으로도 가능하기에 무척 편하다.
 ‘저희에겐 이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군의 종일뿐입니다.’
 기사들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목소리, 똑같은 속도로 대답했다.
 하나가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 것은 데릭만의 착각일까?
 ‘그래? 그렇다면 내가 너희에게 이름을 부여해주겠다.’
 ‘주군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데릭은 그들 하나하나를 관찰했다. 비슷한 체형에 비슷한 분위기와 비슷해 보이는 힘의 강약. 하나가 분신술을 사용한 것 같은 착각마저 일으킬 정도다.
 까짓것 대충 불러서 편하면 되겠지.
 데릭은 일일이 그들의 앞에 다가서며 이름을 불러주었다.
 ‘우측부터 챤, 바로, 람, 이온! 이제부터 그것이 너희의 이름이다.’
 ‘주군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어둠의 기사들은 상당히 감격한 모습을 보였다.
 투구를 쓴 이들의 표정은 알 수 없지만 영혼의 떨림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들의 느낌이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이름 하나 지어주었을 뿐인데, 저렇게 기뻐하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 밀려오던 짜증이 조금은 희석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데릭은 어둠의 기사들에게 각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록 명령했다.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알아본 결과 그들은 데릭에게 종속되기 이전의 기억은 없다고 했다. 그저 현재의 주인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만이 각인되어 있단다.
 그리고 이름을 지어준 것을 계기로 그들은 데릭을 새로운 의미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누군가 충성하라고 명령하여 충성하던 것을 넘어서서 스스로의 의지로 충성을 다하겠다며 영혼의 맹세를 했다.
 이름 하나 지어주었다고 감격한 이들이 영혼의 맹세까지 하다니. 주인에게서 받은 이름까지 내걸고…….
 “챤, 바로, 람, 이온! 이제 귀환하도록 하라.”
 데릭은 생각이 아닌 목소리로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귀환시켰다.
 그들을 소환할 때 체계적인 명령전달을 위해 지어준 이름이 악마가 종속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 자들이 아니라 진실로 데릭의 영혼에 속한 존재로 거듭나게 한 것이다.
 물론 데릭 자신은 이런 점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이틀을 더 백색의 상아에서 묵은 데릭 일행은 다시 수도로 향했다.
 감기는 사제들이 손을 쓰고 하룻밤이 지나서 나았지만 혹시 모를 후유증을 대비해야 한다는 호위단 총책임자인 퀘이크의 의견으로 인해 이틀을 더 묵어야 했다.
 
 
 
 
 제2장 당파싸움
 
 
 
 1
 
 “끄아아아아!”
 칙칙한 암흑의 영들의 기운으로 가득 찬 악마궁 한 곳에서 악마의 절규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자신과 오래전에 계약을 맺어 휘하로 받아들인 네 개의 영혼이 자신과 맺은 종속의 사슬을 끊고 사라져버린 것이다.
 악마는 주변을 미친 듯이 휩쓸었다.
 “크악! 이 빌어먹을! 그, 그놈이 어떻게 비밀을 알았단 말인가? 어떻게 그 비밀을…….”
 악마는 자신과 반쪽짜리 계약을 맺고 뮤란트 대륙에 환생한 존재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데릭에게 종속된 어둠의 기사들은 결코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종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자신과 연결된 종속의 사슬을 끊고 사라졌다.
 자신과 연결되었던 종속의 사슬을 끊고 한시적으로 정해준 어리석은 영혼에 완전히 종속되어버린 것이다.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저주는 뮤란트에 환생한 인간의 영혼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한다.
 안타까웠다. 어둠의 기사들이 해방되면서 반쪽짜리 계약을 맺었던 그자의 영혼 또한 자신과의 계약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휘하에 있던 강력한 어둠의 기사들을 그자에게 내준 것이 실수였다. 1억 번째 영혼을 취할 수 있다는 기쁨에 눈이 멀어 주지 말아야 할 존재들을 건네주다니!
 악마는 스스로를 저주했다. 영겁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실수를 저지른 자신을 자학했다.
 순간 악마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잃어버린 네 개의 영혼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
 악마는 급히 어둠의 공간을 열었다. 수많은 언어가 어둠의 공간을 가득히 맴돌고 있었다.
 악마는 그중에서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언어의 계약은 아직 유효하다. 어둠의 공간에 남아 있었다. 반쪽짜리 계약을 맺을 때 사용되었던 언어!
 이 언어를 이용하면 1억 번째 계약을 맺은 녀석이 죽었을 때 놈의 영혼과 다시 만날 수 있다.
 악마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잃어버린 네 개의 영혼이 다시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마인 자신이 뮤란트 대륙에 환생케 한 그 영혼에게 간접적으로 행사할 수 있었던 모든 연결고리가 끊어지긴 했지만, 나약한 인간으로 환생한 그자 스스로 10만 명의 인간을 죽일 수는 없을 것이라 위안을 삼으며 그자가 수명이 다해 죽은 다음 다시 만나게 되길 간절히 바라였다.
 그자가 계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빌미로 그자의 영혼을 자신에게 귀속시키고, 더불어 그자의 영혼에 속해 있던 어둠의 기사들도 다시 회수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놈과 다시 만났을 때 놈이 귀속을 거부한다면……. 하긴, 제까짓 게 강해져봤자…….”
 미친놈처럼 발광하며 혼자서 떠드는 악마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이들은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흉측한 동상들만 존재할 뿐.
 그런데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내 이름을 걸고 녀석의 기사가 된 존재들과 언젠가는 맞붙어야 하나? 빌어먹을! 놈이 저주받은 존재인 천사족의 마음씨를 가지고 있기만을 바라야 하나?”
 악마는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스스로를 자학하며…….
 
 가이어스 영지를 출발한 일행이 수도 바이란에 들어선 것은 95일 만이었다. 입학식은 불과 3일이 남았다.
 여행을 하며 몇 건의 자그마한 사건이 일어나긴 했지만, 호위단의 기사와 병사들이 무난히 처리할 수 있었던 일이었기에 별 어려움 없이 바이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이들로서도 해결할 수 없는 자연적인 요인으로 인해 10여 일간 발이 묶인 것을 제외하면…….
 “이제 겨울도 다 지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법사 케이브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 것 같군.”
 “이제 3일 후면 아카데미에 입학하시게 됩니다. 필요하신 물품을 사려면 시간이 촉박하겠습니다. 내일 제가 아카데미에 들러 필요한 것들을 알아오겠습니다.”
 “그래.”
 케이브와 3일 후 있을 아카데미 입학식을 주제로 이야기하는 도중에, 앞으로 3일간 묵을 여관에 도착했다.
 인구 50만에 하루 유동인구만 해도 20만에 달한다는 제국의 수도 바이란은 실로 웅장하고 거대했다.
 화려한 건축물이 줄지어 섰으며, 공원과 호수가 도시 곳곳에 위치하여 사람들에게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있었으며 여흥을 즐길 연극만 전문적으로 공연하는 건물도 꽤 많았다.
 숙박업 또한 상당히 발달하여 돈과 권력을 가진 이에겐 세상에 다시없을 천국과도 같은 곳이 바로 바이란이었다.
 돈과 지위를 가지고 있는 데릭에게도 당연히 이곳은 천국이었다.
 수도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여관을 잡은 일행은 데릭의 명으로 하루의 자유시간을 허락받아 몇몇 병사를 제외하고 도시 구경을 나섰다.
 만족할 만한 식사와 잠자리로 인해 그동안 여행 중에 받았던 피로를 말끔히 씻은 데릭도 상쾌한 기분으로 도심 여기저기를 구경했다.
 당연히 한 명의 기사와 두 명의 병사가 호위로 따라붙었고 세실과 지크도 뒤따랐다.
 깨끗한 도로와 정갈한 사람들을 대하자 데릭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이면 당연히 그에 따른 불필요한 존재도 생기기 마련이다.
 “소매치기다! 잡아라!”
 사람들 사이로 이리저리 피하며 자그마한 인형이 빠른 속도로 내달리고 있었다. 그 뒤로 병사들로 보이는 가죽 갑옷을 입은 자들이 소매치기를 쫓고 있었다.
 인형은 어느새 데릭의 근처로 접근하고 있었다.
 데릭은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그보다 소매치기와 더 가까이 있던 존재가 그의 먹이를 낚아챘다.
 합법적으로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좋던 기분이 돌아서고 있었다.
 기회를 놓친 데릭은 자신을 방해한 존재를 노려보았다.
 금발의 소년이었다. 복장이 제법 고급스러운 것이 귀족가의 자제로 보였다.
 소년의 뒤에는 두 명의 기사가 호위하고 있었는데 퀘이크만큼 강할 것 같았다.
 언젠가부터 데릭의 기준은 퀘이크를 중심으로 높낮이를 평가하고 있었다.
 “놔! 이거 놓으란 말이야!”
 금발의 소년에게 붙잡힌 소매치기는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그러나 소매치기의 발악은 금발소년의 무릎치기 한 번에 잠잠해졌다.
 퍽.
 금발 소년의 무릎이 소매치기의 명치에 작렬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 상당히 깔끔한 동작이었다.
 충격을 받은 소매치기는 그 자리에서 기절해버렸다.
 바닥에 쓰러진 소매치기의 얼굴이 데릭의 시야에 잡혔다. 쓰러지면서 녹색의 모자가 벗겨졌다. 기다란 빨강색 머리카락이 허공으로 비상하며 창백하고 갸름한 얼굴이 드러났다.
 여자였다. 아니, 소녀였다.
 소매치기를 쓰러뜨린 금발 소년도 그 정체를 파악하고 당황했는지 쓰러지려는 소녀를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한발 늦었다.
 풀썩.
 소녀는 먼지를 일으키며 쓰러졌고 뒤이어 소녀를 쫓던 병사들이 도착했다.
 “헉헉! 엄청 재빠른 녀석이군!”
 병사들은 숨을 몇 번 몰아쉰 다음 쓰러진 소매치기를 바라보았다.
 기절한 소매치기를 일별한 병사는 여유가 생겼는지 지금의 상황을 만든 금발 소년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금발 소년은 멍한 표정을 지으며 병사들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쓰러진 소녀만 주시하고 있었다.
 이 시대는 여자를 보호하는 것이야말로 남자의 로망!
 특히 귀족가에서 자라며 고리타분한 예의범절이라 불리는 것들을 어릴 적부터 세뇌당한 자는 감히 여자에게 손찌검을 하는 짓 따위는 상상도 못하는 일이다.
 물론 그 여자라는 개념에 속하는 인물은 자신과 비슷한 신분의 귀족 여성을 말한다.
 멍청하고 고지식한 일부 귀족 아이들 혹은 청년들은 모든 것들을 여과 없이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들은 그 여자의 범주에 모든 레이디가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여자를 구타하는 남자를 천하게 생각하는 것이 이 시대 귀족가 젊은 남자들의 보편적인 사고방식이다. 저 금발 소년이 비록 소매치기라지만 자신이 여자를 때려 기절까지 시킨 것에 대해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했다.
 각성하기 이전의 데릭이었다면 역시 저런 얼빠진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전생의 기억을 각성한 그는 기회다 싶어 단칼에 베려고 했다.
 당연히 죄책감 따위는 느끼지 않았을 테고…….
 “감사합니다. 실례지만 어느 가문의 자제분이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병사는 조심스런 말투로 금발 소년의 신분을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금발 소년은 아무 말 없이 쓰러진 소녀만 응시하고 있었다.
 옆에 있던 호위기사가 병사들에게 한마디 하자 병사들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금발 소년의 행동을 추켜세웠다.
 병사들이 소매치기 소녀를 압송하자 주위 사람들도 흥미가 떨어졌는지 하나둘 자리를 뜨고 금발 소년도 어디론가 사라져갔다.
 “소영주님, 가시지요.”
 세실이 데릭을 보며 길을 재촉했다.
 데릭은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아카데미의 입학식이라는 이름하의 고문이 끝나고 모든 신입생들은 선배들의 안내를 받아 각자의 기숙사로 향했다.
 데릭을 호위하기 위해 따라왔던 기사들도 세실과 지크만 남겨두고 모두 영지로 돌아갔다.
 귀족 자제만을 위해 만들어진 아카데미에 걸맞게 규모나 시설 면에서 웬만한 대저택보다 훨씬 좋았다.
 1인 1실로 기숙사가 주어졌으며, 식사 또한 평민들은 엄두도 못 낼 만큼 화려했고 학생들의 수발을 들어줄 하인들이 머물 숙소도 아카데미 내에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세실과 지크는 데릭의 수발을 원활히 들기 위해 자신들이 알아야 할 사항들을 배우기 위해 입학식이 시작되기 전에 아카데미 관계자를 따라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데릭은 안내해준 선배에게 간단히 인사한 뒤 앞으로 7년간 살게 될 공간을 확인했다.
 
 한 달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은 더 이상 불지 않았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복장 또한 밝고 가볍게 변했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후로 한 달 동안 데릭은 마음에 들지 않는 몇 가지 일을 제외하고 너무도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
 황제 직속 기사단인 붉은 독수리 기사단을 견학하고, 아카데미 총학생회 회장을 맡고 있는 반스크렌 공작가의 차남이 마련한 파티에 참석. 며칠 후 크레미언 후작가의 손자인 프레이슨 선배가 주최한 파티에도 참석, 그 밖에 여러 크고 작은 파티 등에 참석하는 데 한 달이란 시간을 허비했다.
 처음에는 원래 이렇게 모든 파티에 참석해야 되는 줄 알았지만 본인이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허탈했는지 모른다.
 애늙은이들 틈에서 되지도 않는 말을 주워들으며 맞장구치는 것은 상당한 고역이었다.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지만 데릭은 나름대로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들 모두 데릭과 비슷한 사회적 지위를 지녔거나, 혹은 더 높은 자들도 있었기에 행동이나 말을 조심해야 했다.
 막 대해도 되는 이들 틈에서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했던 데릭으로서는 너무도 불편했다. 소녀답지 않게 성숙한 숙녀처럼 행동하는 계집애들 때문에 더욱 짜증이 일었다.
 그런 여자애들을 마치 자기가 그녀들의 기사라도 된 것처럼 대하는 소년들을 볼 때면 너무도 느끼해 화까지 치밀었다. 그리고 늘 이런 자리에 앉아 있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 뒤로 두 번 다시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다. 많은 초대장이 왔지만 지크를 시켜 정중히 거절했다.
 교육 방식은 아카데미가 지닌 역사에 비해 매우 단순했고, 학생들 개개인에 대해 상당한 자유를 허용했다.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기초 체력 훈련, 12시까지 궁정 예절과 예법 교육, 점심 식사 후 병법이론 두 시간, 그리고 오후 5시 수업종료 시간까지 기마술과 검술을 익혔다.
 수업에 참석하든 그렇지 않든 교사들은 상관하지 않았다. 일신의 힘은 스스로 키워야 한다는 게 기사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누군가 시켜서 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초대 아카데미 설립자 판트 드레인의 유지를 받들어 학생들에게 엄청난 자유를 부여했다.
 그런데 왜 아카데미를 건립한 것인지 이해를 못하겠다. 좋은 의미로 자신의 뜻을 남겼을 판트의 유지는 이상한 방향으로 악용되었다.
 너무도 단순하고 획일적인 교육일정은 졸업하는 순간까지 거의 비슷하다고 한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수업종료 후에는 자유로운 개인시간이 주어진다. 이때는 외출도 허용된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외박을 했고 어떤 학생들은 기숙사를 버려두고 집에서 통학하는 아이들도 상당수였다.
 아카데미에 공부를 하러온 것인지 놀기 위해 온 것인지 참으로 헷갈렸다. 망조가 들린 학교라고 생각했다.
 이런 학교가 제국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제국의 검이자 방패를 양성하는 최고 교육기관의 규율이 이 모양인데, 용케도 아카데미에서는 매년 괜찮은 실력의 졸업생들을 배출한다는 것이다. 뮤란트 대륙 제일의 불가사의가 아닌가 싶다.
 정규수업을 마치는 종이 요란하게 울렸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시내에 쇼핑을 나가거나 사교모임을 갖거나 파티에 참석한다며 함께할 동료들을 모아서 움직였다.
 무슨 대단한 모험이라도 하러 가는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소년들을 보며 데릭은 제국의 장래가 심히 염려스러웠다.
 파티……. 하루도 쉬지 않고 열리는 게 파티다. 흰 분을 떡칠한 소녀들과 그에 못지않게 반들반들 기름칠을 한 소년들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느끼한 말들을 주고받는 모습을 상상…….
 ‘젠장, 상상하고 말았다. 휴-!’
 그러나 이러한 녀석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주 간혹 늦은 시간까지 검술을 수련하는 학생들도 있다. 이런 이들이 있어 제국의 권세가 유지되는 것이다.
 아니, 아카데미가 그 명맥을 잇고 있는 것이다.
 “357…… 499…… 500…… 790…… 천!”
 데릭은 정면 베기 천 번을 끝으로 보통의 목검보다 조금 더 무겁게 제작한 수련용 목검을 바닥에 내려놓고 양팔을 벌린 채 몇 번의 심호흡을 한 뒤 바닥에 주저앉았다.
 매일 수업이 끝나고 저녁식사를 한 후 기초수련을 한다. 어릴 때부터 해오던 것이라 하루라도 빠지면 뭔가가 허전함이 들어서 잠이 안 올 지경이었다.
 흐르는 땀방울이 비가 오듯 바닥에 떨어졌다.
 “소영주님, 수건 여기 있습니다.”
 지크가 수건을 건네주었다.
 수건을 받아 든 데릭은 얼굴과 몸을 대충 닦고 그것을 다시 지크에게 넘겨준 뒤 기숙사로 향했다.
 지크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목검을 들고 그의 뒤를 따랐다.
 두 개의 갈림길이 나타났다. 우측은 기숙사로 향하는 길이고, 좌측은 학생들이 데려온 하인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하인들은 정규교육이 끝난 이후에는 절대 기숙사에 들어갈 수 없다.
 데릭은 지크에게서 목검을 받아 기숙사로 향했다.
 데릭은 아카데미에 입학한 후 말을 더욱 아꼈다. 한마디 하면 열 마디의 수다로 달려드는 짜증나는 인간들이 이 아카데미에는 넘쳐나고 있었다.
 이곳이 기사들을 양성하는 명문 아카데미인지 심히 의심이 들 정도로 학생들은 수련이나 수업은 뒷전이고 서로 간의 인적 교류만이 본분인 듯이 행세했다.
 어린놈들이 벌써부터 저렇게 설치니 나중에는 얼마나 골치 아픈 인사들로 변할지 심히 염려스럽다.
 ‘이 아카데미, 정말 기사 아카데미 맞는 거야? 모사꾼이나 협잡꾼 양성소 같으니……. 제국의 앞날이 심히 걱정되는 구나.’
 애국과 매국의 차이는 앞 글자 하나뿐이라고 평소 생각해온 그로서는 자신이 이런 말을 중얼거렸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데릭은 밀려오는 짜증을 털어내듯 고개를 몇 번 세차게 흔들어댔다.
 ‘생각 말자. 내 앞가림하기도 바쁜데!’
 데릭은 더 이상 이 학교나 학생들의 장래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제국이 망하든 학교가 망하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2
 
 다음날, 아침을 먹고 수업을 받기 위해 3수련관으로 향하는 데릭을 부르는 이가 있었다.
 “이봐!”
 아슈레인 아카데미의 상징과도 같은 푸른색 교복을 입은 금발 소년이었다. 데릭보다 상급생으로 보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데릭은 소년을 쳐다보았다.
 “혹시 네가 가이어스 백작가의 후계자인가?”
 얼굴이 상당히 눈에 익었다.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어느 이름 모를 파티에서 보았을지도…….
 “제가 데릭 가이어스입니다.”
 데릭은 소년을 정면으로 쳐다보며 무뚝뚝하게 답했다. 아침부터 자신을 귀찮게 하는 녀석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데릭에게는 대체로 사람을 평가하는 절대기준이 있다.
 나의 적, 아니면 부하!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존재는 적도 부하도 아니다. 어정쩡한 위치에 있는 존재였다.
 “반갑다. 나는 알폰소 포로이라고 한다.”
 “…….”
 데릭은 말없이 알폰소 포로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금발 소년을 응시했다.
 “하! 듣던 대로 상당히 과묵한 성격이군. 어쨌든 반갑다.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이 되면 모임에 나오지 않을래?”
 “포로이…… 포로이 후작가?”
 그러자 허탈한 웃음이 알폰소의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뭐, 뭐야. 그럼 이제까지 내 가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포로이 후작가의 도련님이십니까?”
 “맞아, 알드렉스 포로이 후작님이 나의 아버님이시다. 그리고 나는 그분의 셋째 아들이고. 이제 되었냐? 이제 내 신분을 알았으니 오늘 방과 후, 내가 주최하는 모임에 참석할래?”
 “……아뇨.”
 “뭐?”
 “…….”
 “다시 말해봐. 잘못 들은 것 같으니까.”
 데릭은 작게 한숨을 불어내며 말했다.
 “안 갑니다.”
 “정말? 내 초대를 거부한다는 건가?”
 ‘나 정말 기분 나빠요’라고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금발 소년과 그런 소년을 아무렇지도 않게 쳐다보는 데릭의 묘한 신경전이 작은 스파크를 일으켰다.
 “가도 됩니까?”
 불편하다. 3일에 한 번 꼴로 파티에 참석해달라는 자들 때문에 짜증이 났다.
 보통은 하인을 통해 초청 의사를 전달했지만 지금처럼 당사자가 직접 초대한 것은 처음이다. 물론 동기들이 파티에 함께 가자고 제의한 것은 제외하고.
 데릭은 가이어스가의 하나뿐인 후계자다. 언젠가는 백작이 된다는 뜻이다.
 정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지 상당히 오래되었지만 가이어스 가문은 꽤 유명한 가문이다. 초대황제를 도와 나라를 세우는 데 일조했고, 몇 번의 전쟁에 참여하여 수많은 공을 세움으로써 명실상부 제국의 검이라 불릴 정도로 명성 있는 가문이다.
 만약 데릭의 할아버지가 황제가 내려준 후작의 작위를 거절하지만 않았다면 벌써 후작가가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제국 내에서는 꽤 알아주는 가문의 후계자인 것이다.
 “이런, 상당히 과묵하고 사교성이 결핍된 후배로군. 선배로서 명령이다. 모임에 나와라.”
 강압적이며 고압적인 어조. 거기다 선배라는 무기까지 들이밀었다.
 이런 부류의 인물은 떼어내기가 쉽지 않다. 동기 같으면 대련을 핑계로 두 번 다시 까불지 못할 정도로 밟아주겠지만 선배라는 점에서 걸렸다. 그리고 어쨌든 자신의 가문보다는 높은 집안이다.
 “거절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거절했다. 여기서 순순히 물러나줬으면 하고 바랐다.
 그때 수업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수업이 끝나고 찾아오는 것이 좋을 것이다.”
 협박인가?
 데릭은 선배를 올려다보았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데릭은 시간이 아까웠지만 일단 참석하기로 마음먹고 답했다.
 “알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그럼 나중에 수업 마치고 쉼터에서 보자.”
 금발소년은 자신의 뜻을 이룬 것이 흐뭇한 듯 유유히 사라졌다.
 
 점심시간 이후로 몰려들기 시작한 먹구름이 어느새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던 비는 금세 굵은 물줄기가 되어 대지를 두드렸다.
 오후에 잡혀 있던 승마실습이 취소되었다. 대신 나머지 시간은 역사와 병법에 대한 이론수업으로 대체되었다.
 이론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나선 아이들은 하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분분히 자리를 뜨고 있었다.
 “소영주님!”
 지크가 우산을 들고 다가왔다.
 데릭은 그에게서 우산을 건네받았다.
 “지크, 아카데미 내에 있는 쉼터란 곳을 알고 있어?”
 지크는 잠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조심스레 대답했다.
 “소영주님, 쉼터는 학교 내에 있는 것이 아닌데요. 밖에 쉼터라고 불리는 식당이 하나 있습니다만…….”
 “쉼터란 곳이 식당이라고?”
 “네, 제가 알고 있기로 쉼터라고 불리는 곳은 그곳 외에는 없습니다.”
 “알았다. 오늘은 수련을 하지 않을 테니, 넌 그만 돌아가서 쉬도록 해라.”
 “예, 소영주님.”
 데릭은 기숙사로 돌아와 책상서랍에 넣어둔 지갑을 꺼냈다. 학교에서는 돈이 필요 없지만 교문 밖을 나서면 필요하다.
 데릭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다음 기숙사를 나섰다.
 교문을 나선 지 5분도 지나지 않아 쉼터라 불리는 식당을 찾을 수 있었다.
 3층짜리 석조건물로 상당히 고풍스런 느낌을 주고 있었다. 정문 앞에 커다란 글씨로 ‘쉼터’라고 적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종업원으로 보이는 자가 우산을 받아주었다.
 “예약하셨습니까?”
 종업원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보통 식당을 찾는 이들은 아카데미 학생들과 그와 연관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귀족의 자제들만 다닐 수 있는 아카데미의 특성상 그들과 연관된 자들 역시 대부분 귀족이다.
 자기 같은 평민이 자칫 실수하여 기분이라도 상하게 하면 큰일 나는 것이다.
 지금처럼 어린 소년이 와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특히 아카데미의 교복을 입은 학생이라면…….
 “손님, 죄송합니다만 오늘은 손님들이 많아서 일부 예약석 외에는 자리가 없습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알폰소 포로이란 분을 아나?”
 “아, 알폰소님을 찾아오신 겁니까? 저 혹시…… 가이어스가의 도련님이십니까?”
 데릭은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떡였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종업원은 그를 3층으로 안내했다.
 3층 레스토랑은 가장 비싼 자릿값을 받는 곳으로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앉을자리조차 없는 곳이다. 3층에 비해 2층과 1층은 귀족들의 우월의식을 만족시켜주지 못해 한산한 편이다.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알폰소가 자리한 식탁에 도착했다.
 데릭을 발견한 알폰소가 자리를 권했다.
 데릭은 말없이 그가 권한 자리에 앉았다.
 알폰소가 자리한 곳에는 네 명의 소년과 두 명의 소녀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옅은 화장에 화려한 무늬와 레이스가 달린 파티복을 입은 소녀와 푸른 교복을 입은 알폰소를 포함한 다섯 명의 소년.
 “그럼 내가 정식으로 소개하지.”
 알폰소가 그들에게 데릭을 소개한 뒤 자리에 앉아 있는 자들을 소개시켜주었다. 대부분 안면이 있는 자들이었다.
 “반가워요.”
 “반갑다.”
 간단한 인사말이 오간 뒤, 데릭은 옆에 앉은 알폰소를 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무뚝뚝하고 투박한 데릭의 물음에 알폰소는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식탁에 놓인 초를 들어 종업원을 불렀다. 그리고 데릭의 의사도 묻지 않은 채 음식을 시켰다.
 “식사부터 하지.”
 알폰소의 말이 끝나자 데릭의 맞은편에 앉은 소녀가 말을 꺼냈다.
 “데릭님은 학교생활이 마음에 드세요?”
 방금 소개받은 두 명의 소녀 중 하나인 가리에 파이블이다.
 “네.”
 “어머나, 알폰소 님에게 들었던 것처럼 무척이나 무뚝뚝한 분이군요.”
 “이런, 가리에가 먼저 말을 걸다니 놀랄 일이군.”
 칼튼 유일이 과장된 표정과 행동으로 데릭과 가리에를 보며 말했다. 10대 후반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체격이 좋았고 얼굴도 조숙해 보였다.
 “어머! 칼튼 오라버니,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꼭 서커스에 나오는 어릿광대 같아요, 호호!”
 “하하!”
 “호호호!”
 데릭은 그들을 뚱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칼튼의 모습에 웃는 그들을 보며 서커스단의 어릿광대를 본다면 웃다가 죽지 않을까 생각했다.
 바보나라에 온 것 같다. 왜 이 자리에 왔는지 후회되었다.
 종업원이 음식이 든 수레를 끌고 왔다.
 “오늘 저희 레스토랑의 스페셜 메뉴인 송아지 허벅지살로 만든 스테이크입니다.”
 모두의 앞에 음식을 내려놓은 뒤, 종업원은 다시 물러갔다.
 “자, 들지! 오늘은 내가 내는 거니까.”
 “알폰소 네가 내야 하는 건 당연하잖아. 안 그래, 데릭?”
 칼튼의 입에서 스스럼없이 데릭의 이름이 나왔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가장 성격이 좋았다.
 “참, 말 놔도 되지? 뭐, 내가 나이도 많고 선배이기도 하니까.”
 “편하실 대로…….”
 데릭은 말끝을 흐렸다.
 “우리도 말 편하게 해도 될까?”
 가리에는 옆에 앉아 있던 통통한 소녀가 말했다.
 “좋을 대로…….”
 알폰소가 스테이크를 썰며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흠, 이제 보니 뒷말을 흐리는 버릇이 있구나? 좋지 않은 버릇이다. 남자는 자고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당당하게 하는 것이 좋아.”
 알폰소의 지적에 두 소녀는 자신들만의 대화에 빠져 까르르 웃었다.
 소녀들의 웃음이 상당히 거슬렸다.
 그런 데릭의 표정에 식탁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려 애쓰는 칼튼과 자신을 꽃이라고 생각하는 두 소녀의 어색한 웃음소리…….
 짜증스럽다고 말하고 싶었다. 속에 있는 소리를 해볼까 생각했지만 역시 말하지 않는 게 좋을 듯싶어 침묵을 지키기로 했다.
 이런저런 잡다한 이야기로 화제를 삼아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셨다.
 데릭은 그들의 대화에서 겉돌았다. 그가 아는 얘기도 별로 없었다.
 소녀들은 주로 옷과 보석 그리고 연극배우와 음유시인, 문학에 대해 이야기했고, 칼튼은 아카데미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이런저런 것들을 들춰내 흉을 보았다.
 “저를 부르신 용건을 말씀해주시죠, 알폰소 선배님.”
 데릭의 말에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알폰소의 입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좋아, 그럼 말하지. 데릭 가이어스, 넌 어느 쪽이지?”
 알폰소의 말에 이번에는 모두의 시선이 데릭에게 고정되었다. 실없는 농담을 하던 칼튼의 표정도 사뭇 진지해졌고 골빈 애들처럼 까르르 웃던 소녀들도 조용히 그를 응시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알폰소는 데릭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좋아, 네가 아카데미에 입학한 지 한 달이 넘었다. 그동안 넌 많은 이들의 파티에 참석했다. 혹시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공부는 등한시하고 매일 파티에 열을 올리는 이유를 알고 있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관심도 없습니다.”
 “하긴, 어린 너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나도 솔직히 마음이 내키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알아두어라. 우리의 부모님들은 귀족이다. 그리고 우리도 귀족이지. 언젠가는 우리 모두 제국의 정치판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너 또한 예외는 아닐 것이다. 물론 너는 영지에서 평생 머물 생각을 하고 있다 해도 어느 쪽이든 적을 두고 있어야 한다. 참고로 현재 너의 부친 칸슈타인 가이어스 백작님은 귀족파에 적을 두고 계신다. 여기 모인 녀석들의 집안도 모두 귀족파다. 그럼 너는 어느 계파에 속한 자이겠나?”
 데릭은 아무 말 없이 찻잔에 남아 있는 차를 한입에 털어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와 상관없는 얘기군요. 그리고 두 번 다시 이런 일로 저를 부르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경고성 멘트를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라, 데릭 가이어스! 지금 선택하지 않으면 넌 외톨이가 될 것이다. 네가 갈 곳은 귀족파밖에 없다.”
 확신에 찬 알폰소의 말에 데릭은 실소를 머금었다.
 ‘지금 장난하냐? 이 빌어먹을 자식아, 나는 그딴 거 관심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힘을 길러 내 손으로 10만 명을 죽여 악마로부터 자유를 찾는 거란 말이야! 그런 내가 유치하게 애들 당파놀이에나 빠져야겠냐? 그럴 시간 있으면 조금이라도 더 수련해서 한 명이라도 더 죽이겠다.’
 데릭은 하고 싶었던 말을 하지 못한 채 돌아서야 했다.
 분노에 떠는 일행의 기운이 느껴졌다.
 식당에 있던 사람들이 흥미로운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만사가 귀찮았다. 이런 사소한 일에 시간을 낭비했다는 것에 화가 날 뿐이다.
 학교로 돌아온 데릭은 수련하기 위해 목검을 들고 실내수련장으로 향했다.
 빗방울은 여전히 굵었다.
 
 
 3
 
 데릭은 알폰소의 제의를 거절한 뒤, 한동안 접근하는 이들 때문에 짜증이 났다.
 그러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그를 찾는 발길이 끊겼다. 아는 체를 하는 이들도 없었다. 소위 왕따라는 것을 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저들은 왕따의 대상을 잘못 선택했다.
 데릭은 귀찮게 하는 존재들이 없어 한동안 자신을 지배하고 있던 짜증스런 기분이 말끔히 사라졌다.
 그러나 되살아나는 기분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터졌다.
 평소처럼 정규 수업을 마치고 수련장에서 기초검술을 연습하고 있었다. 평소대로라면 지크가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세실이 불안한 표정으로 지크 대신 수건을 들고 서 있었다.
 “지크는?”
 세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말해라.”
 세실은 지크의 상황을 말해야 할지 어쩔지 고민했다. 지크가 해야 할 일을 자신이 하게 된 경위는 하인 숙소 폭행 사건의 피해자가 바로 지크라는 사실…….
 “저, 소영주님…… 사, 사실은…… 흑흑!”
 “울지 말고 말해.”
 짜증이 난 데릭은 그녀에게 윽박지르며 사건의 경위를 재촉했다.
 그녀의 말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알폰소와의 일 이후로 지크와 세실은 자신들의 동료로부터 왕따는 물론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알음알음 폭행을 당했다. 그러다 상황이 심각해져 강도 높은 폭력을 당했고, 결국 움직이지 못할 정도가 되어 세실이 대신 시중을 들기 위해 온 것이다.
 “……그렇게 된 일이에요. 죄송해요, 소영주님…… 흐흑!”
 데릭은 그녀를 돌려보내고, 이번 일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귀족 아이들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그렇지 않다면 두 달이 넘게 잘 지내던 세실과 지크가 갑자기 다른 이들로부터 폭행을 당할 이유가 없다.
 어디부터 손을 써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기분 같아서는 하인들 숙소로 찾아가 엎어버리고 싶었지만, 그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지크와 세실이 당했다는 것을 알고도 모른 척하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은 지크와 세실만 당했지만 언젠가는 그 대상에 자신도 포함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겠지만…….
 지크와 세실을 집으로 돌려보낼까도 생각해보았지만 둘이서만 그 먼 곳까지 가라는 것은 나가 죽으란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다른 귀족들처럼 수도에 저택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데릭은 벤치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돈을 주고 해결해볼까? 아니야.’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 방법은 오히려 좋지 않다.
 ‘어떤 방법이 좋을까.’
 밤을 새우며 고민했지만 이렇다 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수면부족으로 인해 신경이 몹시 날카로워졌다.
 ‘일단 벌이고 보자.’
 무책임하게 중얼거리며 본관 2층의 행정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하인들이 머무는 숙소를 관리하는 자를 찾았다.
 아랫배가 상당히 처진 40대 중반의 사내가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나왔다.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아, 우선 앉으시죠.”
 데릭은 소파에 앉으며 중년사내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두툼한 턱선을 타고 한 방울씩 허벅지로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데릭 가이어스라고 한다.”
 “네, 그런데 무슨 일로……?”
 “알고 있을 텐데.”
 데릭이 행정실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사람들의 시선은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데릭은 난처한 표정을 짓는 그들을 보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비록 아카데미 행정실에서 사무를 보고 있다지만 이들도 평민이다. 평민이라면 누구나 귀족들과의 자리를 거북스럽게 여긴다.
 특히 눈앞에 앉아 있는 중년사내는 정도가 더 심했다.
 “혹시 하인들 숙소에서 일어난 폭력사건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중년사내 크리어는 어제 일어난 폭력사건을 떠올리며 앞에 앉은 소년의 눈치를 살폈다.
 ‘귀족가의 자제만 아니라면……!’
 그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하인 하나가 얻어맞았다고 직접 찾아온 귀족 소년이 신기했다. 이런 사소한 일로 직접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그로서는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일반적인 귀족이라면 하인이 맞았다고 해서 지금처럼 쪼르르 달려와 따지지 않는다. 그런데 눈앞의 귀족 소년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일밖에 없다.
 어떻게든 원만하게 마무리 지어 눈앞의 소년을 돌려보내야 한다. 그러나 좀처럼 생각이 나질 않는다.
 “내 하인이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맞았다고 하더군. 이번 일은 우리 가문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생각되어진다. 그가 누구든, 어떤 신분을 지녔건 가이어스가의 사람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나 데릭 가이어스, 내 이름을 걸고 어제 있었던 폭행사건의 범인을 잡아 나에게 데려오길 정식으로 요청한다.”
 귀족이 자신의 성과 이름을 건다는 것은 상당히 중대한 일이다. 하인들 간의 사소한 폭행사건에 가문과 자신의 이름을 거는 소년을 보며 역시 어린아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론 멋지게 보였다.
 크리어는 머리를 굴렸다. 일생일대의 고비를 맞은 것이다.
 지금의 상황을 보면 눈앞의 귀족 소년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 폭행에 가담한 하인들이 누군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더욱 난처했다.
 귀족들은 간혹 사소한 일로 피바람을 일으키기도 한다. 특히 가이어스가라면 지금은 지방 영지에 칩거한 채 정계 진출을 하고 있지 않지만 여전히 알아주는 명문가 중 하나다.
 그런 가문의 후계자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이번 사건의 주동자를 붙잡아오라고 한다.
 하지만 그들 또한 대 귀족가의 하인들인지라 섣불리 행동할 수도 없다. 오거 싸움에 고블린 등 짜부라진다는 속담처럼 크리어는 자신이 고블린의 처지가 되지 않을까 싶어 걱정부터 앞섰다.
 앞에 앉은 소년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아도 문제고, 소년의 말대로 그들을 잡아다 바쳐도 문제다.
 사소한 일로 치부했던 일이 엄청 커질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크리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동료라고 생각한 이들이 시선을 회피했다.
 그들도 보통일이 아니라고 느낀 것이다. 귀족 간의 다툼에 끼어들었다가는 목숨조차 부지하기 어려운 것이 평민이다. 그리고 여기 있는 이들도 그저 그런 평민들이다.
 크리어는 마음을 굳게 먹고 말했다.
 “저, 도련님…… 당장은 그들을 잡을 수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런 사소한 일로 인해 그들을 잡아 도련님께서 처벌하신다면 그들의 주인 분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질 수 있습니다.”
 크리어는 말을 돌리며 어린 귀족 소년이 무엇이 중요한지를 생각해보게 했다. 한낱 하인의 일로 직접 움직이는 멋진 귀족 소년의 장래를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분명히 말했다. 내 이름을 걸었다고. 그리고 감히 네가 나에게 훈계를 하다니. 귀족모독죄가 어떤 건지 너부터 당해봐야겠군.”
 크리어는 눈앞의 소년이 미친 오거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도 피해가 돌아가리란 것을 예상하면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 소년의 모습에 호감이 갔다.
 크리어는 속으로 절규하며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행정실에서 잡일을 하는 이들을 시켜 어제 폭행사건의 가해자들을 잡아오라고 명했다.
 침 넘어가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릴 정도로 행정실 안은 고요했다.
 크리어는 이제 자기 선에서 해결하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불똥이 튀지 않기만을 바랐다.
 ‘젠장, 이 중요한 때 행정실 책임자란 양반은 어디 간 거야?’
 괜스레 자리에 없는 상관을 탓했다.
 
 일곱 명의 하인이 행정실로 끌려왔다. 불안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그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사실 그들은 주인의 명을 받아 실천한 죄밖에 없다. 같은 하인의 입장에서 지크란 녀석이 안 되긴 했지만 주인의 명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지크의 주인이 자신들 앞에 굳은 표정으로 서 있다.
 “너희들이 가이어스가의 사람을 상하게 했단 말이지? 우리 가문이 그렇게 우습게 보였나?”
 일렬로 서 있던 그들은 키가 가슴 어림밖에 오지 않는 소년의 말 한마디에 몸을 떨어야만 했다.
 “요, 용서를……!”
 데릭은 이들을 적당히 주물러(?) 준 뒤 일을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이 커지면 자신에게도 결코 이롭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화난 귀족 소년이 자신들을 쳐다보자 하인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
 죽이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신분을 가진 소년.
 한편으론 지크가 부럽기까지 했다.
 그들은 이곳으로 끌려오기 전에 각자 주인에게 이 사실을 알려줄 것을 동료 하인들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정작 주인이 찾아와서 도움을 줄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나는 너희들을 용서할 수 없다. 할 말이 있으면 해봐라.”
 “제발 자비를…….”
 “용서해주십시오.”
 자비와 용서를 구하는 하인들.
 데릭은 고개를 돌렸다.
 “네 이름이 뭐지?”
 데릭의 물음에 화들짝 놀라는 하인 숙소 행정담당자.
 “크, 크리어라고 합니다, 도련님.”
 “크리어, 저들에 대해 어떤 징계를 내릴 수 있지?”
 데릭은 아무래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저들을 징계했다가는 품위 유지가 어려울 것 같아 크리어를 보고 물었다. 솔직히 하인들이 조금은 불쌍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번 같은 경우에는…… 저들을 아카데미에서 추방할 수 있으며, 저들의 주인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크리어의 말에 행정실로 끌려온 하인들의 얼굴에는 희망이 떠올랐고, 데릭의 얼굴은 구겨졌다. 그가 원하는 처벌은 그런 게 아니다.
 “나는 저들이 아카데미에서 제 발로 걸어 나가게 하고 싶지 않아. 더구나 손해배상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나의 가문이 그렇게 궁핍하지도 않고 말이야.”
 데릭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행정실 문이 벌컥 열렸다. 아카데미 학생들만 입을 수 있는 푸른 교복을 입은 소년들이 우르르 들어섰다.
 한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데릭도 익히 알고 있는 자들이다.
 행정실 안의 분위기가 살벌하게 변하고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크리어는 오늘의 일진을 한탄하며 소년들에게 용건을 물었다.
 “어, 어쩐 일이신지……?”
 소년 중 한 명이 나서며 말했다.
 “나는 고로니 제이언이다. 내 하인이 이곳으로 끌려왔다고 해서 찾아왔다.”
 10대 중반의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지닌 소년이 말했다. 나머지 소년들도 각자 신분을 밝혔다.
 말은 크리어에게 했지만, 시선은 데릭에게 꽂혀 있었다.
 데릭은 그들의 시선이 짜증스러웠다.
 “선배들이 저들의 주인입니까?”
 “그렇다. 우리가 주인이다.”
 소년들 사이에 팽팽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크리어는 자신이 나설 자리가 아니라는 듯 슬쩍 뒤로 물러섰다.
 ‘빌어먹을!’
 그는 자기 앞에서 신경전을 벌이는 소년들을 욕했다. 기분 같아서는 모조리 쫓아내고 싶었지만 그에겐 저들을 제지할 아무런 힘이 없다.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은 행정실 책임자가 또다시 원망스러웠다.
 고로니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소년이 거만한 표정으로 데릭을 보며 말했다.
 “네가 데릭 가이어스인가?”
 “저를 알고 있는 것을 보니 이번 일이 결코 우연은 아닌 것 같군요.”
 그러자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고로니.
 “흠, 어린 녀석이 눈치는 있군. 좋아, 말해주지. 우리는 귀족파다.”
 “그렇다면 이번 일은 저를 겨냥한 것으로 봐도 되겠군요.”
 데릭의 물음에 고로니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비겁하군요. 기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자들의 마음이 시정잡배보다 못하니 말입니다. 선배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군.”
 “뭐, 뭐야!”
 “이 자식이!”
 고로니 뒤에 서 있던 소년들은 흥분했는지 연신 삿대질을 하며 몰아붙였다.
 방금 데릭은 교칙에 위배되는 말을 했다. 선배에 대한 예의를 어긴 것이다.
 그들은 그 점을 부각시키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것이 데릭의 가슴 깊이 잠재하고 있던 화약에 불을 붙였다.
 “나 데릭 가이어스, 오늘부로 아카데미를 자퇴하겠다.”
 갑작스런 폭탄선언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냉각되었다.
 이왕 내뱉은 말이다. 데릭은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에 막가기로 작정했다.
 “이제 너희는 나의 선배가 아니다. 나와 채무관계가 있는 자들일 뿐이다. 귀족파라고 했나? 오늘의 일은 결코 가볍게 넘기지 않겠다.”
 데릭은 스스로 미친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말을 마치고 그들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갑작스런 폭탄선언에 모두 당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특히 거만한 표정이던 고로니는 자기 뜻대로 일이 풀려가지 않을 때나 짓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상대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계획을 세운 스스로를 탓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서기엔 너무 늦었다.
 “그럼 넌 더 이상 아카데미의 학생이 아니니까,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겠군. 이곳은 아카데미 학생 외에는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다. 그러니 넌 당장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군, 데릭 가이어스!”
 고로니의 말에 데릭은 이를 악물었다.
 “고로니 제이언, 이 모욕은 피로써 갚겠다!”
 데릭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고로니를 물고 늘어졌다.
 “뭐, 뭐야! 저 자식 지금 결투신청을 한 거야?”
 뒤에 서 있던 멍청하게 생긴 소년이 고로니에게 물었다.
 ‘내가 바보냐? 나보다 덩치도 크고 나이도 많으며 더 강할지도 모르는 놈에게 목숨을 건 결투를 신청하게?’
 데릭은 결투 쪽으로 상황이 반전되지 않도록 고로니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런, 내 말을 오해했군. 솔직히 열 살짜리 꼬마인 내가 어떻게 나보다 서너 살이나 많은 자를 상대로 결투를 하겠어? 내 말은 가문의 이름을 걸고 전쟁을 하자는 말이다.”
 몹시 당황한 고로니의 표정이 보였다. 그것은 다른 소년들도 마찬가지였다.
 데릭은 제이언가가 어떤 가문인지는 몰라도 무력이라면 어느 가문과도 맞붙어 이길 자신이 있다고 확신했다.
 가문의 이름을 건 전투를 하기 위해서는 가주나 혹은 직계후계자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문제는 고로니 자신이 가문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공개적으로 전쟁선포를 하게 되면 귀족들은 보통 가문의 체면 때문에 상대해줄 수밖에 없다. 공개석상에서 자신의 가문이 밀리는 모습을 보이면 다른 귀족들의 비웃음을 사게 된다.
 그러니 여기서 고로니가 물러선다면 자신의 가문은 가이어스가의 아래라고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과 같다.
 데릭의 극단적인 발언에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던 고로니가 말했다.
 “좋다! 그 말을 후회하게 해주겠다.”
 일은 벌어졌다. 더 이상 수습하는 것은 어려워졌다.
 그러고 보니 데릭은 눈앞에 서 있는 녀석의 가문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찌되겠지. 나에게는 어둠의 기사들이 있으니 설마 지기야 하겠어?’
 중얼거리며 소년들 틈을 비집고 행정실을 나섰다.
 밖에 몇몇 소년들이 서 있었다. 그 중에는 알폰소와 칼튼도 보였다.
 칼튼이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 그러나 알폰소의 제지로 뒤로 물러서며 입을 다물었다.
 지금 데릭의 머리는 복잡했다. 한낱 하인 하나 때문에 가문간의 전쟁을 선포하고, 게다가 스스로 아카데미를 자퇴하겠다고 했으니!
 집에 돌아가서 아버지를 대할 생각을 하니 난감했다.
 ‘젠장!’
 그러나 돌이키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그를 지켜보는 눈들이 너무 많았다.
 그들을 뒤로하고 하인 숙소로 간 데릭은 몸이 불편한 지크를 위해 신전의 사제를 불러 치료케 했다.
 그의 모든 행동을 전해 들었던 세실과 지크가 상당히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소, 소영주님! 소인 때문에…… 정말 죄송합니다.”
 지크가 울먹이며 무릎을 꿇었다.
 “그만! 지크, 세실, 짐을 싸라. 고향으로 돌아가자.”
 “소영주님, 다시 생각해보시는 게…….”
 세실이 주저하며 데릭에게 행동을 돌이키라고 말했다.
 “나의 이름과 가문을 걸고 한 맹세다. 내가 아무리 어리다지만 가이어스가의 사람은 내 손으로 지킨다. 그리고 내가 한 말은 기필코 책임진다.”
 데릭은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치며 창밖을 응시했다.
 솔직히 그도 돌이킬 수만 있다면 돌이키고 싶었다. 고치겠다고 마음먹은 전생의 성질이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것이다.
 이미 주워 담을 수 없을 만큼 사태는 커져버렸기에 여기서 숙이고 들어가면 아카데미의 생활은 계속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자신과 가문에 오점을 남기는 짓이다.
 그렇게까지 가문에 대한 애착은 없지만 그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훌륭한 밑천이다.
 
 
 
 
 제3장 몬스터 토벌전
 
 
 
 1
 
 수도에서 여관을 잡은 뒤,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구입했다. 가진 돈이 넉넉하지 않아 용병은 고용할 수 없었다. 다만 말 두 필이 딸린 4인용 마차를 구입할 수 있는 게 전부였다.
 그 먼 길을 호위도 없이 간다는 게 결코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세실이나 지크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데릭은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에게는 어둠의 기사들이 있으니까.
 여행에 필요한 물건을 사는 동안 지크는 틈틈이 마차를 운전하는 연습을 했다.
 물건을 사고 흥정하는 일은 데릭으로서도 어색한 일이었다. 상인이 달라는 대로 다 주는 그를 대신하여 세실이 흥정하는 일을 도맡아했다.
 그리고 나흘째가 되던 날, 그들을 태운 허름한 마차가 수도 바이란의 성문을 나섰다.
 수도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위성도시는 수도방위의 목적과 수도로 몰려드는 인구의 분산을 위해 세운 도시들이다. 그리고 이 도시들은 황제 직영지다.
 치안 상태는 최상으로 위성도시가 생긴 이래 몬스터를 봤다는 인간이 손에 꼽을 정도이고 도시도 활력에 가득 차 있었다.
 위성도시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오전에 필요한 물품을 구매했다. 물품이라고 해봤자 여행에 필요한 육포와 곡물가루, 모포 그리고 파충류와 벌레 등을 쫓는 약초가루가 전부였다.
 그리고 데릭은 가지고 있던 서너 벌의 옷을 처분한 뒤 여행에 편한 옷을 구입했다. 세실에게는 치마 대신 여행자용 바지와 셔츠를 사주었다.
 “도련님,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응!”
 마차는 부드러운 출발을 보였다.
 처음 며칠간은 지크의 운전미숙으로 상당한 곤욕을 치렀다. 그러나 지금은 실력이 많이 향상되어 출발이나 정차시 흔들림이 많이 줄었다.
 데릭은 지도를 펼쳤다.
 솔직히 지도를 볼 줄 모르지만 여행자 상점의 주인이 공짜로 주어 가지고 있었다. 다만 지도상의 지명을 보고 대충이나마 길을 잃지 않고 제대로 가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젠장!’
 데릭은 금세 지도를 던져버리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마차 안은 짐마차라고 오인할 만큼 여러 물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4인실 마차인데 두 명이 타면 알맞을 공간밖에 없었다.
 세실이 마부석 옆으로 가고 없어 데릭은 맞은편 좌석에 발을 올린 채 느긋하게 창밖 풍경을 감상했다.
 군데군데 무리지어 있는 나무와 작은 숲들이 보였다. 하늘은 맑았고 흰 구름은 어디론가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지금 처한 상황이 어렵지만 않았다면 한쪽에 자리를 펴고 낮잠이라도 자고 싶었다.
 제국은 도로가 발달하여 관도를 따라 이동하는 게 좋다. 관도는 가끔씩 각 도시나 마을에 상주하는 병사들이 정찰을 돌기에 위험도가 덜 하지만 관도를 벗어나는 길은 상당히 위험하다.
 가끔씩 상단이나 모험가들을 구경할 수도 있었다. 이동 중에 마을을 그냥 지나치거나 찾지 못했을 때는 관도 옆에서 노숙을 했다.
 마을과 마을 간의 거리를 모르는 그들은 운 좋게 마을에 들어서면 여관에서 쉬며 제대로 된 음식을 먹었다.
 노숙할 때 관도 옆에 시냇물이라도 흐르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물을 찾기 위해 관도를 벗어나 노숙을 하고는 했다. 그때마다 데릭은 지크와 세실 모르게 어둠의 기사를 소환하여 주위를 경계토록 했다.
 낮에 관도에서 강도들을 만났을 경우 어둠의 기사를 소환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고민도 막상 상황에 부딪치자 자연스레 해결했다.
 처음 강도를 만났을 때 공포에 질린 세실과 지크 앞에 검은색 갑옷을 입은 기사가 나타나 강도들을 쫓아주었다.
 그렇게 매번 위험에 처할 때마다 나타나는 어둠의 기사들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는 두 사람의 모습에 데릭은 절로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지금처럼 무장을 한 강도들 앞에서도 지크와 세실은 전혀 위축됨이 없이 강도들을 바라보았다.
 데릭은 가죽갑옷을 걸친 채 검과 도끼, 창 등을 들이대는 강도들을 처리하기 위해 어둠의 기사 중 챤을 소환했다.
 그러나 데릭은 한번쯤 실전을 경험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일단 챤을 대기시킨 다음 자신이 불리해지면 처리하라 명하고 강도들 앞으로 나섰다.
 그의 등장에 놀란 것은 세실과 지크였다.
 “소영주님! 마차 안에 계시지 왜 나오셨습니까?”
 세실의 얼굴색이 변하며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뭐야, 평민 차림의 아이더러 소영주라니. 어떻게 된 년 아냐?”
 강도들은 세실이 부른 호칭에 비웃음을 날리며 그녀를 이상한 여자로 몰아갔다.
 “감히! 이분이 뉘신지 알고…….”
 분노에 몸을 떠는 지크.
 “이봐, 어린 마부! 저놈이 누구지?”
 산적 중 검을 든 자가 앞으로 나서며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지크에게 물었다.
 “잘 들어라. 저분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가이어스 백작가의 후계자이신 데릭 가이어스 님이시다. 네놈들 따위가 감히 건드려서는 안 되는 분이시다.”
 지크가 자랑스럽다는 듯 외쳤다.
 ‘저놈…… 바보인가?’
 데릭은 지크를 보았다. 자신의 생각이 맞는 것 같았다.
 ‘저놈, 진짜 바보다. 저런 놈을 위해 아카데미를 자퇴하고 전쟁까지 선포하다니.’
 “휴! 그만 열 올려라.”
 “하하하!”
 “재수 없는 귀족가의 도련님이라고?”
 “이번 기회에 스스로 고귀하다고 떠들어대는 족속의 피 맛을 봐야겠군. 크크!”
 지크는 분한지 손에 들려있는 채찍을 꽉 움켜쥐었다.
 그에게 있어 소영주는 하늘같은 존재다.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주었고 상처 입은 몸도 사제로 하여금 치료케 해주었다.
 그런 소영주를 앞에서 대놓고 욕하는 저들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품고 있던 두려운 생각이 어느새 싹 달아나버렸다.
 그런 점에서는 세실도 마찬가지인 듯 강도들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정말이지, 못 봐주겠군. 야비한 귀족 따위에게 빌붙어 사는 쓰레기들…….”
 강도들은 세실과 지크의 모습에 비아냥거리면서도 한편으로 귀족을 위해 목숨을 내거는 그들이 신기했다.
 일반적으로 귀족은 평민이나 그보다 밑에서 잡일을 하는 존재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한다. 그저 수동적인 노동력만 제공할 뿐이지 지금처럼 목숨이 걸린 일에는 나서지 않는다.
 그런 일반론이 깨지자 강도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별종들인가 보군.”
 그들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지금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다.
 “좋아, 저 꼬마 귀족이 다른 귀족들과는 다른 것 같으니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대신 마차와 돈을 내놓아라.”
 우두머리로 보이는 검을 든 자가 인심이라도 쓰듯 말했다.
 그제야 현실 감각이 돌아왔는지 세실과 지크의 얼굴이 조금씩 두려움에 물들어갔다. 그리고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는 둘의 행동…….
 ‘녀석들, 어둠의 기사를 기다리는 모양이군.’
 데릭은 왼쪽 허리춤에 차여진 검 손잡이를 잡았다.
 목숨이 오갈 수 있는 위험한 실전이 벌어질 것이다. 평소보다 두 배 이상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몸도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진 느낌이었다.
 이래서는 검을 뽑기도 전에 기절하지 않을까 심히 걱정되었다.
 ‘이게 바로 목숨을 건 실전이란 걸까?’
 덜컥 겁이 난 데릭은 챤에게 명령을 내려 눈앞에 있는 강도를 죽이라고 했다.
 데릭은 자신의 나약한 모습에 저도 모르게 살심이 치솟았다.
 ‘못난 놈! 이래서야 어떻게…….’
 데릭은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나머지는 챤이 알아서 할 것이다.
 잠시 후 비명성이 터졌다. 세실과 지크의 비명도 함께 들렸다.
 데릭은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챤의 검이 움직일 때마다 강도들의 머리나 몸통이 반으로 깨끗이 절단되면서 피를 뿜었다.
 순간 구역질이 솟구쳤다. 데릭은 마차 문을 박차고 나가 먹은 것을 전부 토했다.
 눈앞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너무도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 그의 정신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전생에 영화에서나 이런 장면을 본 것과 실제로 눈으로 보는 것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온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세실과 지크는 그런 두려운 장면을 대하고도 용케 정신을 차렸는지 소영주를 안정시키며 마차를 이끌어 무사히 다음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데릭은 여관을 잡고 저녁마저 거른 채 침대에 누웠다.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광경이 눈앞에 떠올랐다.
 ‘젠장, 이래서야 어떻게 사람을 죽인단 말이야. 그것도 10만 명을……. 도저히 자신이 없다. 도저히…….’
 데릭은 악마가 마치 선심을 쓰듯 베풀어준 것이 결코 은혜가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그 정도의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무래도 악마에게 영혼을 뺏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손으로…… 나만의 힘으로…… 도저히 승산이 없다.’
 데릭은 절망했다.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모를까, 검으로 인간의 살을 가르고 머리를 자르고…….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올라오고 온몸이 전기에 감전된 듯 떨렸다.
 “젠장!”
 모든 것이 부질없게 다가왔다.
 
 수도를 떠난 지 두 달이 흘렀다.
 데릭은 한 달 보름 전에 일어난 사건 이후 어둠의 기사를 전부 소환하여 세실과 지크 모르게 줄곧 마차를 호위하게 했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세실에게 건네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알아서 사게 하고 멍하니 하루하루를 보냈다.
 이런 모습에 처음 세실과 지크는 염려되어 그를 달랬지만 한 달여가 흐르자 그들도 지쳤는지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다.
 데릭은 롱소드를 팔아버렸다. 검 자체에 혐오감이 들어 도저히 지니고 있을 수가 없었다.
 ‘어떡하지?’
 줄곧 머릿속에 맴도는 이 한마디 때문에 그는 지난 한 달 보름 동안 거의 폐인처럼 지냈다.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악마에게 빼앗길 영혼이다. 이번 생이 끝나면 모든 게 끝나는 것이다.
 패배 의식이 육체와 정신을 깊숙이 잠식해버렸다.
 이 감정을 벗어나려고 챤을 시켜 사람을 잡아오게 한 뒤 죽여 보려고도 했다. 직접 몇 번 하다보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도저히 죽일 수가 없었다.
 공포에 떠는 눈동자!
 살려달라고 간절히 애원하는 목소리에 손이 머리의 명령을 무시했다.
 그래도 자신의 영혼을 악마로부터 지켜내야겠다는 생각에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고통에 찬 비명성과 뜨거운 액체가 그의 몸을 적셨다.
 얼마나 오래 검을 휘둘렀는지 모른다. 심신이 너무나 지쳐 검을 떨어뜨리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주저앉은 그의 몸을 적시고 있었다.
 ‘주군, 정신 차리십시오!’
 그때 들려온 챤의 음성에 데릭은 붕괴되어가는 정신의 끈을 간신히 붙잡았을 수 있었다.
 지크는 그런 소영주가 걱정스러웠다. 한 달 보름 전에 있었던 일로 인해 어린 주인의 안색이 몰라보게 수척해졌다. 오만하고 자신감에 가득 차 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두려움에 젖은 소년만 남아 있었다.
 지크도 그때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곤 했다. 그런데 자기보다 어린 주인이 그 현장을 목격했으니 오죽할까 싶었고 평소라면 감히 상상도 못할 행동과 말로 주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도 모두 소용이 없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하루 종일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영주를 볼 때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저 하루 속히 스스로 이겨내기만을 바랐다.
 어쨌든 그 일이 있은 후, 여행길은 순조로웠다. 더 이상 앞을 막아서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대로 한 달 정도 더 가다보면 고향에 도착할 수 있다는 생각에 지크는 고삐를 움켜쥔 채 말들을 독려했다.
 ‘영주님이라면 소영주님을 예전의 모습으로 돌릴 수 있을 거야!’
 예전처럼 오만하고 자신감에 찬 당당한 소영주를 하루 빨리 다시 볼 수 있게 되길 간절히 바랐다.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