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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류검사 1권(상)

2015.02.10 조회 1,947 추천 11


 프롤로그
 
 
 
 
 
 본래 화산파(華山派)는 천하의 명산인 수려한 서악 화산의 정기를 바탕으로 각 봉우리에 뿌리를 내려 성장해 왔다.
 화산파는 구파 중에서도 제법 높은 자리를 차지해 왔으며 또한 오악검파(五嶽劍派)의 수장이자 하나의 문파이며 특히 무림에서는 검공에 조예가 깊어 화산검파(華山劍派)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런 거대한 문파가 오늘날 마교의 엄청난 대군에 밀려 그 존재마저 지워질 위기에 몰리리라고는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휘잉-
 바위산 정상 부근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딛고 서 있는 노인, 그는 저 아래 불길에 휩싸여 활활 타오르는 본산 건물을 바라보며 통한의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설마하니 마교의 세력이 이곳까지 뻗칠 줄은 몰랐다. 장문인 목유성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고 또 탄식할 뿐이었다.
 ‘아……! 이 일을 어찌할꼬.’
 자신의 대에 이르러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던 화산파가 끝장나게 생겼으니 혀 깨물고 자결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당장 죽을 생각은 없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으니.
 그는 애써 정신을 차리고는 바로 앞에 있던 돌탑을 완력으로 부쉈다. 그 안으로부터 조심스럽게 흑단목 상자를 꺼내 들고 뭐라 중얼거린 것도 잠시, 그는 한 손으로 상자를 품에 안은 채 다른 손으로는 흰 천으로 둘둘 말린 검을 쥐고 바위 산 정상 너머로 홱 사라졌다.
 
 * * *
 
 신비한 안개가 서려 있는 협곡, 그곳은 화산파의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존재했던 성역으로서 위급한 상황에서는 오직 장문인만이 출입할 수 있는 곳이다.
 전설에 따르면 시조께서 신기의 영기가 가득 흐르는 대지에 정확한 혈을 찾아내어 결계 진법을 형성한 것이 바로 이 협곡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조화로 우연찮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지대가 만들어졌다.
 더욱 믿어지지 않는 일은 선대 장문인들 중 누군가 이미 저곳을 통해 다른 세계를 여행했다는 것, 그리고 그와 같은 기상천외한 경험은 오직 후대 장문인들에게만 은밀히 전해 내려왔다.
 결계 진법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만든 것으로써 20년이 지나면 절로 풀리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세계로 이동했던 자는 반드시 20년 후에 원래 세계로 돌아오도록 되어 있었다.
 잠시 후, 결계 안으로 들어온 목유성.
 그의 앞, 사람 키 높이 정도의 허공에는 영롱한 빛이 감도는 조그만 공간이 보였다.
 그는 그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바로 앞에서 잠시 멈칫거렸으니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세계에 발을 들여 놓는 것이 두려웠던 모양이다.
 장문인 목유성이 이곳을 찾은 이유는 화산파(華山派)의 모든 역사와 정수가 담긴 비급서들과 보검 하나를 추려서 다른 세계로 피신하려 했음이다.
 전설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지금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단 20년만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다면 당장 보물들을 마교인들에게 빼앗기지 않아도 되었다.
 결국…….
 그는 굳은 결심을 한 채 푸른 공간으로 뛰어 들었다.
 구멍이 그를 완전히 집어 삼켰다.
 푸른빛은 금세 사라졌다.
 파팟―!
 
 
 
 
 제1장 하류검사의 습성
 
 
 
 
 
 지드는 일찍이 어린 시절부터 검술에 뜻이 있었기에 무작정 세상 밖으로 뛰어나와 강한 검사가 되고자 온갖 노력을 했다. 하지만 20대 중반이 넘도록 이렇다 할 성취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 10년 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나름대로 검술 정진에 집중을 하려 했지만, 천성적으로 다소 인내심이 부족하고. 남을 잘 속이는 사기성마저 있는데다가 검술 재능 역시 일반인들보다도 크게 떨어졌다.
 그러다 보니 묵직한 검사로서의 자질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하다못해 검사라면 그 누구도 들어가기를 꺼려하는 삼류 용병 집단에서조차 받아 주지 않았다. 지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농사나 짓는 것뿐,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10년 전 제법 거액을 훔쳐서 가출했던 그의 귀환은 그다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에는 부푼 꿈을 안고 마을을 떠나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으며 정말이지 밑바닥부터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을 해 왔다. 이제 와서 무슨 낯짝으로 가족을 볼 수 있을 텐가.
 예상대로 가족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지드 스스로는 세상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방랑 검사라 우겼지만 수척한 몰골과 걸레 조각을 엮어 입은 차림새 등으로 보건데 동냥을 하는 거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도 어머니만큼은 아무 탈 없이 돌아와 준 셋째를 진심으로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여러 날이 지났지만 지드는 딱히 이렇다 할 일 없이 빈둥빈둥 지내고 있었다. 낮에는 방바닥에 누워 식사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다 밤에는 선술집에 들러서 옛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마을을 떠나 겪었던 얘기를 해 주는 것이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게다가 지드의 말주변이 워낙 좋아서인지 순박한 시골 친구들은 진짜 그가 대단한 검사의 삶을 살아온 줄 알고 있었다. 세상에 회의를 느낀 나머지 삶은 고향에서 보내고 싶다는 말까지 믿을 정도였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지드의 모든 행동과 습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일까. 가족들만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열심히 일하고 땀을 흘려야만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아버지. 그 아버지의 그 높은 뜻을 이어받아 당당히 농부의 대를 이으려는 큰형. 그런 큰형의 취지에 전적으로 공감한다며 나름 충성을 다하는 일벌레 둘째 형. 더구나 막내마저 그 분위기에 편승하려는 듯 어린 나이에 온갖 허드렛일을 척척 해내고 있었으니, 지드만이 그들의 숭고한 정신에 위배되는 이질적 존재라 할 수가 있었다.
 정말이지, 어쩌면 10년 전 가출했던 당시 분위기와 이리도 똑같단 말인가. 그나마 어머니가 중간에서 중재 역할을 하시지 않았다면 지드는 벌써부터 견디지 못하고 쫓겨났을 것이다.
 어머니.
 그렇다. 지드는 어머니 때문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착한 인품을 지니고 계신 어머니는 지드에게 항시 부드럽게 대했고 설령 큰 사고를 쳤다 할지라도 화보다 자식의 안위를 더욱 챙기셨다.
 지드가 제아무리 철이 없다 할지라도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던지 결국 고향에 돌아온 지 두 달 만에 직업을 가지기로 했다.
 지난 10년 동안 그가 배운 것이라고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익힌 잡식성 검술밖에 없었으니 그쪽 방면으로 생각해 볼 일이었다.
 세상 밖에서는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도 않은 형편없는 능력이라지만 이런 산골 마을에서는 제법 쓸모가 있을 거라 확신했다.
 결국 지드는 아이들을 가르치기로 했다.
 
 * * *
 
 휘잉-
 마을이 한눈에 보이는 언덕배기 위에 갈색 머리칼의 청년 지드가 있었다. 그 앞으로 30여 명의 아이들이 부동자세를 하고 서 있다.
 지드는 당당한 자세로 고개마저 빳빳이 치켜들고 제법 근엄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쭉 훑어보더니만 대뜸 한마디 했다.
 “돈들 가져왔냐?”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지드는 허리춤으로부터 가죽 주머니를 꺼내더니만 입구를 활짝 열어서 흙바닥에 던져 놓는다.
 툭!
 그러고는 무슨 이유인지 뒤로 돌아선 채 다시 말문을 열었다.
 “보지 않을 테니 각자 성의를 표시하기 바란다.”
 “…….”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사실 아이들은 지드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10년 전 지드가 가출하던 날 여기 모인 아이들 대부분이 아장아장 기어 다니는 어린애들이었으니 당연했다.
 다만 부모님이나 마을 형들로부터 지드에 대한 얘기를 들었고 바깥세상에서 제법 잘 나갔던 검사라는 사실만 알 뿐이었다.
 그런 그가 마을회관에 공지를 붙여 검술 지도를 하겠다고 하니 저마다 호기심에 들떠 이곳까지 올라온 것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돈 얘기를 하다니. 순박한 아이들로서는 조금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너희들이 옆 동네 애들과 전쟁 중에 있다는 거 다 안다. 그리고 지난 일 년 동안 연전연패해서 서쪽 경계 부근 붉은 나무 구릉지마저 빼앗겼다는 사실…….”
 지드는 갑자기 격앙이 되었는지 두 주먹을 쥔 채 부들부들 떨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대체 왜 저러나 하고 이상한 얼굴들을 했다.
 “정말 슬픈 현실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군. 대체 네 녀석들의 실력이 얼마나 형편없었으면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전투 지휘부이자 심장부를 그리 쉽게 적들에게 넘겨 줄 수 있는 거냐!”
 이 대목에서 아이들은 숙연한 표정으로 고개마저 떨어트렸다. 그런 심리를 예상했다는 듯 지드 역시 더욱 진지한 자세로 말문을 계속 이어 갔다.
 “사실 난 너희들에게 검술을 가르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한번 생각을 해 봐라. 세상을 주유하며 수많은 강자들과 생사를 오가는 대결만 수십 번을 한 내가 뭐가 아쉬워 이런 시골에 내려와서까지 이런 일을 하겠냐?”
 “…….”
 아이들의 마음에 동요가 일어났는지 저마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앞에서 열변을 토하는 지드의 말에 숙연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난 이 한 몸 바쳐 네 녀석들에게 희생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너희들은 내 후배들이자 훗날 이 마을을 책임질 꿈나무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검술을 가르침에 있어서 강습료 따위는 단 한 푼도 받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의례 같은 것이 있는 법! 특히 스승과 제자들의 연을 맺는 과정은 너무도 신성하기에 서로 간에 정을 나누기 위한 그 어떤 물건들이 오가야지만 나름대로 형식이 갖추어진 것이라 할까. 흠, 대충 이 정도 얘기 했으면 알아들었을 테니 지금부터 공식적인 절차에 의한 식을 거행하겠다. 자! 그럼 시작하지.”
 지드는 다시 등을 돌렸고 그 뒤로는 확 벌어진 가죽 돈주머니만이 흙바닥 위에 놓였을 뿐이다. 아이들은 그제야 꼼지락거리며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지드는 아이들에게 검술 기본자세부터 가르치고는 바위 뒤로 숨어서 돈 주머니를 확인했다.
 그리고 굳어지는 표정.
 ‘엉? 이게 뭐야!’
 동전…… 세 개.
 하늘을 우러러 탄식의 한숨을 내뱉고 마는 지드, 3페니라면 술 한 잔 값 정도랄까. 지드는 맥이 푹 빠졌는지 그 자리에서 아예 누워 버렸다.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상공이 보인다.
 당장에라도 마른하늘에서 돈벼락이라도 떨어진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소원이 있다면 엄청난 거금을 들여서라도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검술 스승을 만나 못다 이룬 꿈을 이루는 것이었다.
 하지만 돈은 고사하고 누워 있으니 잠만 스르르 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 지드를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 보니 아이들 서너 명이 그 앞에 서 있었다.
 “뭐야.”
 “저, 저희 언제까지 같은 자세로 있어야 해요?”
 순간 지드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애들에게 기본자세를 취하게 한 뒤에 자신은 바위 뒤에서 잠이 들었으니 말이다.
 부리나케 공터로 나가 보니 아이들은 저마다 비 오듯 땀을 뻘뻘 흘리며 한 가지 자세에 집중하고 있었다.
 “자, 그만!”
 아이들은 너무 힘이 들었는지 제자리에서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지드는 아이들에게 잠시 휴식을 취하게 하였다.
 다시금 시간이 지나고 지드는 아이들을 공터 중앙으로 집합시켰다.
 “검술의 길은 이렇듯 멀고도 험한 것이다. 난 초반부터 그걸 몸소 깨닫게 하려고 했다는 점 깊이 이해해 주기 바란다. 자! 다음 단계는 검술 기본 두 번째 동작으로 ‘막고 찌르기’인데 지금부터는 정신 바짝 차리고 따라해 봐라.”
 지드가 미리 준비한 목검으로 몸소 시범을 보였다.
 슥.
 붕!
 검을 눕혀 방어 자세를 취한 뒤 곧바로 사선으로 한 번 휘두르는, 아주 간단한 연속 2회 동작이었다. 아이들 역시 너무 쉽다는 듯 그대로 따라했다.
 하지만 그들 중 한 아이만이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어색함을 느꼈던 걸까. 결국 소년이 동작을 멈추고 주춤거리자 지드의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넌 따라하지 않고 뭐 하는 거야.”
 소년이 용기 있게 말했다.
 “저기…… 기본 이 연속 동작이 조금 이상해서요.”
 지드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뭐라! 지금 이상하다고 말했냐!”
 소년은 다소 겁먹은 듯 겨우 대답했다.
 “네.”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제가 배운 거하고 달라서요.”
 “……배운 거라니?”
 “우리 지역 총관님께서 기본자세를 가르쳐 주신 적이 있었는데, 그분께서는 기본 연속 동작을 할 때 반드시 보폭도 함께 움직여야지만 그 흐름이 자연스럽고 공격력 또한 훨씬 강해진다고 그랬습니다.”
 순간 뜨끔했던가.
 ‘뭐야, 이 자식? 총관한테 배웠다고? 에이, 설마…… 총관이 뭣 하러 이런 가난한 꼬맹일 가르치겠어?’
 지드가 일부러 화가 난 듯 윽박지르듯 말했다.
 “너 이놈의 자식! 지금 내가 가르치는 검술이 요즘 유행하는 변형된 기본자세라는 걸 알기나 하냐?”
 소년이 아까보다도 더욱 이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기본자세란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는 아주 기초적이고 단순한 동작인데, 변형을 되었다니요? 처음 들어보는 것 같은데요.”
 처음에는 소년이 다소 어수룩해 보여서 대충 넘어가려 했는데 이제 보니 생각보다 똑똑한 놈이 아닌가. 아이들 역시 소년의 말에 공감하는지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지드는 당황한 나머지 큰 소리로 외쳤다.
 “너 이놈! 스승이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야지 꼬박꼬박 말대꾸야! 좋다, 내가 옳은지 아니면 네가 옳은지 직접 대련을 해 보면 그 결과가 나오겠지.”
 대련이라는 말에 아이들은 놀란 듯했고 개중에는 겁먹는 아이까지 있었다. 설마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끝까지 들이댈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늘 그렇듯 세상은 지드의 얄팍한 잔머리를 항상 앞서 나갔다.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화, 확인이라니!”
 “대련을 통해 직접 알고 싶습니다.”
 지드의 인상이 구겨졌다.
 ‘뭐야? 이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은……!’
 그때 소년이 목검을 들고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왔다. 그러자 지드 역시 고개를 바짝 쳐들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너, 안 봐준다?”
 “…….”
 소년이 겁먹은 표정을 지어 보이자 지드가 살살 달래면서 말했다.
 “다시 생각해 봐라. 너 그러다가 다치면 집에서 뭐라 둘러댈 거니? 스승이 애들 팼다는 소문이 나돈다면 내 꼴이 뭐가 되겠냐.”
 소년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절대로 스승님 얘기하지 않을 겁니다.”
 “정말 내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내가 얘기하지 않든지 말든지 엄마가 꼬치꼬치 캐물으면 어떡할 거냐. 사실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꼭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니냐? 웬만하면 그냥 들어가라.”
 그러자 소년이 지드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궁금한 건 참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설령 스승님의 목검으로 맞는다 할지라도 변형된 기본자세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확인하고 싶습니다.”
 지드는 내심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거 완전 독종이네. 젠장!’
 결국 지드는 목검을 고쳐 잡고 준비 자세를 취했다. 대결에 앞서서 지드는 어깨까지 내려온 금발에다가 파란 눈동자에 총명기가 가득한 녀석에 대해 궁금했다.
 “너, 이름이 뭐냐.”
 “아르콘입니다.”
 “아르콘?”
 그러자 아이들 중에 누군가 소리쳤다.
 “걔가 대장인데요, 지금까지 일대일 대결에서 한 번도 지지 않았어요!”
 그 말에 지드가 긴장을 했다.
 ‘어쩐지…… 제길!’
 곧이어 둘은 기본자세만으로 간단한 대결을 하기로 했다. 지드는 상체만을 이용한 기본자세 2연속 동작이었고 아르콘은 보법(步法)을 이용한 동작.
 파팟!
 탁! 탁! ……팍!
 “욱!”
 털썩!
 검술 대련은 너무도 싱겁게 끝이 났다.
 처음부터 준비자세 없이 엉거주춤한 동작으로 목검을 휘둘러 친 지드에 비해 아르콘은 보법을 이용한 신속한 동작으로 상체를 숙이며 재빠르게 안으로 파고들어 갔다.
 이에 지드는 허를 찔린 듯 가슴팍에 큰 충격을 받고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아아…….”
 고통에 찬 신음도 그렇고 넘어져 있는 폼도 볼썽사납다고나 할까. 아이들의 표정이 실망감이 점차 증폭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세상에서 잘 알려진 검사라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건만 그의 실체가 저러하니, 아이들은 다소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이윽고 하나 둘 자리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들 세 명만이 아직도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지드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중 한 아이가 말했다.
 “내 돈 돌려 줘요.”
 “…….”
 사람 팔자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다고 할까. 지난번 아이들 앞에서 개망신 당한 일이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그의 입지는 이제 절벽에 매달린 신세가 되었다. 언제 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질지 몰랐다.
 더군다나 가뜩이나 집안에서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터에 지드의 입지는 더 이상 내몰릴 공간조차 없을 판이었다.
 급기야 아버지는 가족 회의를 열고는 셋째 지드의 향후에 대해 의논하기로 했다. 참으로 암울한 회의였다. 지드가 밥벌어먹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으니 말이다.
 이제 와서 농사일을 가르치려 한들 진득하지 못한데다가 인내심마저 턱없이 부족하니 오히려 일에 방해만 될 건 뻔했다. 부업이라고는 하루벌이 목축업 일이나 사냥을 통한 짐승 가죽 팔기 따위가 있었지만 그 역시 지드에게는 벅찬 일이었다.
 결국 회의는 한 가지 결론만을 내고 끝났다.
 되는대로 살아라.
 지드에게 가장 어울릴 법한 신조였다. 그 후로 지드는 되도록 바깥출입을 자제하고 몇 달을 집안에서 보내야만 했다. 이미 마을의 웃음거리가 되어 버린지라 선술집은커녕 동네거리마저 활보하지 못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몇 번이고 다시 집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20대 중반 나이에 별다른 기술도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혹독한 일인지, 지드는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요즘 들어 가장 참기 힘든 것은 가족들의 무관심이었다. 이제는 지드가 뭘 하든 말든 신경을 쓰지 않으니 한집안에 지내지만 어디 사막에 홀로 떨어진 느낌이었다.
 요즘 따라 우울증마저 기승을 부리니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올 때면 이곳 2층 베란다에서 거꾸로 뛰어내려 바닥에 대가릴 박고 죽고 싶은 심정도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삶 자체를 건성으로 살아온 그에게는 그런 진중한 용기조차 없었던 것이다.
 ‘이젠 뭘 하지.’
 뭘 하긴 해야 할 텐데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방구석에 틀어박혀 창밖을 내다보며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수도 없이 떠올렸지만 다른 한편으로 떠오른 생각은 어떻게 하면 공돈이 생겨 술 한 잔 들이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스스로의 미래보다 당장 목마르고 답답한 심정을 달랠 수 있는 술이 먼저 생각나는 인생.
 정말이지, 먹구름이 잔뜩 껴서 우중충해진 저 어두운 하늘이 그의 앞길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그는 침대에 누워 무심코 탁자 위에 놓인 향초를 보았다.
 그래도 어머니께서는 이틀에 한 번씩 꼭 들판에서 꽃을 따다가 저렇듯 화병에 꽃아 주신다. 그저 눈물이 나도록 감사할 뿐이었다.
 주륵.
 그런 생각이 드니 이번엔 진짜 눈물이 나왔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간난 아기 때 말고 평생 단 한 번도 흘려 본 적이 없는 눈물이라는 것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드는 손으로 직접 눈물을 훔쳐보며 살피기까지 했다.
 ‘나…… 지금 우는 건가.’
 삶 자체가 뻔뻔했지만 이제야 철이 든 걸까, 아니면 서러운 마음에 복받쳐 감정을 이기지 못했던 걸까. 잔머리꾼인 그에게도 최소한의 진중함이라는 것이 존재했던 모양이다.
 순간 지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배낭을 꺼내어 옷가지를 대충 꾸려 넣고 그의 유일한 재산이자 보물 1호인 녹슨 철검 한 자루를 등에 찼다.
 그러고는 열려진 창가 밖에 보이는 저 멀리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뭔가 결의를 다졌다.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검술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수련한다면…….”
 새벽녘, 그가 현관을 나설 때 난데없이 하늘로부터 굉음이 들려왔다.
 우르릉! 쾅! 우두둑!
 쏴아…….
 모처럼 큰마음 먹고 길을 나서는데 하필 폭우가 쏟아질게 뭐람. 지드는 뭐라 투덜대며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이왕이면 좋은 날씨에 나서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순간 그가 다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니지.’
 그의 짧은 인생 대부분이 조금만 장벽에 부딪치면 이렇듯 뒤로 미루거나 포기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오늘은 뭔가 깨달음을 얻고 나서는 마당에 날씨를 탓하다니. 아직도 철이 들지 않았던가!
 그는 잠시 주춤하다가 입술을 꽉 깨물고 다시 발길을 계단 아래로 힘차게 내딛었다. 저 멀리 산맥에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지만 일단 무작정 들어가 보기로 했다.
 장대비가 걷히고 구름 사이로 햇살이 드넓은 대지 이곳저곳을 강렬하게 비추니 그야말로 장관이 따로 없었다.
 이렇듯 대자연이 만들어내는 세계는 언제 보아도 오묘해 보였다. 지드는 이제 막 구릉지를 지나 제법 비탈진 바위 능선을 오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절벽 모퉁이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웅성거림.
 “정말 믿어지지가 않아! 우리가 처음으로 이겼단 말이야.”
 “그게 다 대장 덕분이지!”
 “맞아, 아르콘은 윗동네 애들 여럿을 상대하고도 이기더라. 정말 대단해!”
 아이들의 말소리가 커지더니만 모퉁이로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필 그곳으로 가려던 지드와 마주칠 게 뭐란 말인가.
 “엉……? 저 아저씨는?”
 “사이비 검사!”
 “하하! 맞아, 맞아. 그 아저씨가 맞아!”
 “근데 여긴 뭣 하러 올라온 거지. 또 검술을 가르치려고 그러나? 큭큭!”
 “아니면 돈주머니를 풀고 지난번처럼 사기를 치려는 거겠지.”
 “그건 아닐걸? 실력이 들통 났으니까, 구걸이라 하면 모를까.”
 그러자 지드가 불끈했다.
 “이놈의 자식들이, 지금 어른을 놀리는 거냐!”
 “어른도 어른 나름이지. 쳇! 우리 아빠 얘기 들어보니까 저 아저씨 삼류 검사도 아니고 그보다도 아래인 하류 출신이래. 아마 나랑 붙어도 내가 이길 수 있을 거 같은데?”
 지드는 애들한테까지 이런 수모를 당해 보기는 처음이었는지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때마침 대장 아르콘이 재빨리 나서서 아이들을 만류했다.
 “다들 그만해! 아무리 모자라 보여도 저분은 우리 마을 어른인데 최소한 예의는 지켜야지. 당장 길을 비켜 드려.”
 아르콘이 말하자 아이들이 두말없이 그의 명령에 따랐다. 지드는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비좁은 통로를 지나가서 모퉁이로 잽싸게 모습을 감추었다.
 잠시 후, 아이들의 인기척이 완전히 없어지자 그제야 지드는 절벽에 기댄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
 아이들의 놀림보다도 대장이라는 아르콘 녀석의 말이 왜 더 얄미울까.
 아무리 모자라 보여도 저분은 우리 마을 어른인데.
 가뜩이나 삶의 무게가 무거운 판에, 그 잘난 녀석의 한마디는 자신의 영혼을 아예 바닥에 곤두박질친 기분이었으리라.
 
 * * *
 
 3일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 지드는 집을 뛰쳐나온 것을 무척 후회했다. 그 옛날 가출했을 때에는 돈도 있었고 그럭저럭 사람들 살 만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검사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생활했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혼자 지내는 중이었다.
 괜히 겁도 나고 공포심마저 느껴졌다.
 애석한 일이지만 그의 하류 검술 실력으로는 날짐승조차 잡기 어려웠으니 육질을 맛보는 것은 처음부터 단념해야 했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들판과 숲속을 뒤지며 열매를 따먹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담력이 약한 그에게 어둑어둑해지는 저녁부터 그 이튿날 해가 뜰 때까지는 너무나 고통스런 시간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유독 귀신이나 괴물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 제일 먼저 대가리를 모포 속으로 박고 덜덜 떨던 그였는데, 어른이 되고서도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탁탁. 화르르-
 지드는 모닥불을 때면서도 주변으로부터 들려오는 새소리와 풀벌레 우는 소리에 심장이 두근거렸고 그 큰 눈방울은 주위를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런 담력을 가지고 왜 집을 나왔는지 스스로를 자책하기까지 했다.
 결국 그가 선택한 일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하룻밤만 잘 버티자.’
 자는 둥 마는 둥, 지드는 그저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며 어서 날이 밝기를 기도했다.
 이튿날.
 짹짹-
 동쪽 산마루에 햇살이 드리우자 지드는 부리나케 짐을 챙겼고, 산 아래 숲으로 향했다. 이왕 돌아가기로 결심한 이상 더 이상 주저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마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나름대로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 보려고 이곳까지 들어왔는데, 또다시 집으로 돌아가 원래의 습성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자체가 그로서는 몹시도 슬픈 일이었다.
 저벅저벅.
 축 늘어진 어깨. 힘없는 발걸음. 태양이 중천에 떠오를 무렵, 그는 다소 갈증이 났고 근처 강을 찾아서 쉬어가기로 했다.
 콸콸-
 얼마 전에 내린 폭우 영향인지 강 상류 지역에는 여전히 힘찬 폭포 줄기들이 높은 지대로부터 줄기차게 쏟아져 내렸다.
 그는 청명한 하늘빛을 고스란히 담은 맑은 물을 두 손으로 담고 목을 축였다.
 후루룩.
 “맛 좋고!”
 바로 그때, 오른편 바위 틈새 사이로 뭔가가 햇빛에 번쩍였다.
 지드는 무심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게 뭐지?”
 지드는 호기심 어린 표정을 하고 직접 가서 확인해 보기로 했다. 잠시 후 그는 바위 안쪽으로부터 검 한 자루를 발견하고는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와우!”
 제법 묵직했다. 칼집에 새겨진 기묘한 문양들을 볼 때 첫눈에 예사롭지 않은 검이라는 것을 그냥 알 수가 있었다.
 순간 지드는 가슴이 쿵쾅거렸고, 재빨리 주변을 살펴보았다. 사방은 쥐죽은 듯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그제야 지드는 바위 안쪽에 쭈그려 앉아 검을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거참, 희한하게 생긴 검이네.”
 사실이 그랬다. 그가 보아왔던 반듯한 검들과는 그 모양새부터 달랐다. 검집은 한쪽으로 휘어져 있는데다가 생전 보지도 못한 문자 같은 것이 손잡이 바로 위쪽에 금박으로 새겨져 있었다. 이질적인 느낌이 팍팍 드는 가운데 그는 아예 검을 뽑아 보기로 했다.
 슥-
 쩡!
 눈부신 푸른빛 섬광과 함께 들려오는 기묘한 음, 지드는 너무 놀라 그만 검을 놓치고 말았다.
 웅!
 “헉! 뭐야.”
 쨍그랑-!
 잠시 시간이 흐르고 지드는 다시 검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뭔가 신비함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검날은 엷은 하늘색 금속으로서 그 면에조차 기묘하고 섬세한 문양들이 보였고, 면 아래 부분에는 붉은색으로 뭔가가 새겨져 있었다.
 지드는 너무나도 선명한 빨간 색채 문양에 자기도 모르게 집중했고, 대체 이게 뭐를 나타내는지 의아해 했다.
 “대체 이건…… 무슨 문양이지.”
 문양이라기보다도 복잡한 기호에 가깝다고나 할까. 혹시라도 마법사 주문을 위해 걸어 놓은 주술적 기호가 아닌가도 생각해 보았다.
 순간 그는 심장이 철렁해져 다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곧이어 입가에 미소를 드리웠다.
 “그나저나 이거 비싼 검 같은데 내다 팔면…… 흐흐!”
 순간!
 들려오는 파공음!
 쌕! 파팟!
 갑작스레 나타난 한 형체에 지드는 깜짝 놀라 뒤로 벌렁 자빠지고 말았다.
 “어이쿠!”
 꽈당!
 그는 뒤로 넘어지면서도 엄청난 기세에 눌려 숨이 턱 막혔고 두 손으로 가슴을 쥐어짰다.
 “컥!”
 지드 앞에 모습을 드러낸 존재는 흰 수염을 펄펄 날리는 조그만 체구의 노인이었다. 지드는 재빨리 신형을 추슬렀고 경계의 눈빛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누, 누구세요?”
 “…….”
 노인은 안광이 폭렬하듯 무섭게 지드를 노려보기만 했다. 지드는 아무래도 검 주인 나타났나 싶어 벌써부터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도 지드는 노인의 생김새와 차림새가 너무나 이질적이라서 호기심이 일었다. 쫙 찢어진 눈매에다 튀어 나온 광대뼈는 정말이지 처음 보는 이상한 인종이라 보아도 무방했다. 게다가 이상야릇한 복장은 또 어떤가.
 그것보다도 이마가 훤히 보이도록 머리를 뒤로 넘겨서 붉은 끈으로 묶은 모습은 계집애들이나 하는 머리치장 같아 보였으니 지드의 머릿속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그때 노인이 다짜고짜 따지듯 물었다.
 “너, 내 칼 만졌지!”
 지드는 노인의 위압감에 두려움이 일면서도 습성대로 일단 부인하고 볼 일이었다.
 “아, 아니요.”
 “거짓말하면 죽는다.”
 “저, 정말입니다!”
 그러자 노인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검과 칼집을 집어 올리더니만 아까보다도 더욱 화난 얼굴로 지드는 노려보았다.
 “이렇게 칼집이 뽑혔는데도 거짓말할 거냐!”
 “…….”
 순간 말문이 막히고만 지드, 그는 괜히 거짓말을 했나 싶어 벌써부터 후회감이 밀려왔다. 상황을 보니 당장에라도 노인의 검에 목이 싹둑 베여 이곳에서 개죽음을 당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노인의 검날이 서서히 자신의 목덜미를 향해 다가왔다.
 ‘칼 한 번 만진 게 뒈질 짓인가! 빌어먹을.’
 지드는 내심 대항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뭔가 보이지 않는 힘에 눌려 꼼짝 못하고 있었다. 차가운 금속이 살갗에 닿자 그는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아! 개 같은 내 인생, 결국 이렇게 종치는군.’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지난 일들이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그려졌다. 참으로 한심한 인생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차라리 잘됐다 싶은 심정도 있었다.
 솔직히 노인의 정체가 뭐라고 칼 한 번 만졌다는 이유만으로 사람 목숨을 해치기까지 하나 따질 의향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삶의 집착이 사라져 있었다.
 “…….”
 하지만 눈을 감은 채 운명의 순간을 기다려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려치려면 빨리 칠 것이지, 왜 이리 뜸을 들인단 말인가.
 세상에 쉬운 것이 없다더니, 죽는 것도 왜 이리 힘든지.
 시간이 조금 더 흘러서야 지드는 아주 조심스럽게 눈을 떠보았다.
 놀랍게도 그의 코앞에 노인이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실실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흐흐.”
 지드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자 노인이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놀랬지?”
 “…….”
 “장난이었다. 허허허!”
 ‘뭐, 뭐야, 이 영감.’
 “거참, 희한한 놈일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다니 말이야. 이 세계에 떨어진 지 십칠 년이 지났지만 너 같은 놈은 처음이다.”
 지드는 멍하니 노인을 바라볼 뿐, 노인 역시 지드를 빤히 쳐다보며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하더니만, 잠시 후 다시 말문을 열었다.
 “젊은 녀석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구만. 그나저나 이 깊은 산중에는 왜 올라온 겨.”
 “…….”
 지드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노인이 버럭 소리 질렀다.
 “내 말이 말 같지 않은 거여? 여기 왜 왔냐니까!”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목소리 컸던가. 지드가 깜짝 놀라 얼떨결에 대답했다.
 “수, 수련하려고요!”
 “수련이라고?”
 “네.”
 “뭔 수련?”
 “검술…… 수련이요.”
 “검술이라…….”
 노인은 지드의 등 뒤 배낭 밖으로 삐져나온 철검을 확인하더니 그제야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청루각(靑樓閣)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녀석이 제법 담력은 있어 보이는군. 사나운 짐승들이 가득한 산중에 혼자서 겁도 없이 들어오다니.”
 지드가 이번에도 의아스런 얼굴을 했다.
 “천…… 누…… 각? 그게 뭔데요.”
 묘한 발음에다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노인의 이상하게 생긴 외모와 차림새에 놀랐고, 이어 그의 요상한 말투와 가끔 들어보지도 못한 용어를 말할 때에는 전혀 딴 세상에서 뚝 떨어진 존재처럼 느껴졌다.
 ‘대체…… 이 노인 정체가 뭐야?’
 “터를 잡으려면 여기 강가 근처가 좋을 거여.”
 노인은 한마디 하더니만 냅다 검을 집어 들고는, 반대편 능선 아래로 다가가더니 훌쩍 뛰어내렸다.
 홱!
 지드는 잠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노인이 사라진 능선 부근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그곳은 수십여 미터나 되는 절벽이었다.
 혹시라도 지드는 노인이 자살이라도 했는지 아래 지면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그 어떤 흔적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다만 협곡과 맞닿은 숲 안쪽으로부터 연기가 모락모락 나고 있을 뿐.
 설마하니 노인이 저곳에……?
 
 
 
 
 제2장 무공 한번 배워 볼 텐가
 
 
 
 
 
 어느덧 해가 서산의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이었다.
 지드는 벌써 여러 시간째 한 장소에 조용히 앉아서 뭔가 깊은 고심을 하고 있었다. 이대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조금 더 버텨 볼 텐가.
 사실 그가 이곳에 미련을 두게 된 계기는 아까 낮에 보았던 노인 때문이었다. 깊은 산중에 사람 하나 있음이 그렇게 큰 힘이 될 줄은 몰랐었다.
 더군다나 노인은 성질이 괴팍해 보였지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물론 조금 더 두고 볼 일이지만 말이다.
 툭!
 결국 등에 멨던 배낭을 바닥에 풀어 놓는 지드. 어차피 독한 마음으로 여기까지 들어온 이상에야 이번만큼은 무언가를 얻어 가야겠다는 굳은 의지가 불타올랐다.
 어차피 하류검사!
 돌아 가봐야 천대와 멸시만 받을 뿐, 아까 낮에 만났던 기묘하게 생긴 노인이 무슨 짓을 하든 차라리 죽더라도 여기서 죽는 게 낫다 싶었다.
 
 * * *
 
 늘 이런 식이었다. 하루가 지나기 무섭게 지드는 어제 내렸던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뭐든지 준비성 없이 대충 넘어가려는 습관이 지금과도 같은 낭패를 맛보게 할 뿐이었다.
 애초 집을 나오기로 결정한 이상 최소한 식기라든지 여타 혼자서 지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생필품 등을 가져왔어야 하는데 그의 배낭 안에는 옷가지, 모포 그리고 비를 가릴 만한 천막 한 조각이 전부였다.
 그나마 챙겨왔던 이틀분의 식량은 어젯밤에 다 먹어치운 데다 산악 지역에서 지내 본 경험이 전무한 지드였다.
 수련은커녕 당장 먹을거리를 찾지 못하고 최악의 경우 굶어죽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지드는 내심 한탄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탁!
 홧김에 애꿎은 배낭을 발로 차 버리는 지드, 하류검사가 아니라 인생 전체가 하류 습성이 진하게 배여 있는 느낌이었으리라.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한 가지 재능만큼은 존재했다. 역설적일지 모르겠지만 매사 준비성 없고 진지함 없이 편한 대로 살아온 대신 어부지리(漁父之利)로 얻어진 능력이랄까.
 잔머리.
 잔머리에도 급수가 있다면 지드의 수준은 거의 대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삶을 여태껏 버텨 온 것도 그때그때마다 반짝하는 잔머리 덕분이었다.
 다만 한 가지, 지드 스스로는 자신이 퍽 총명한 줄 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날 오후, 강가 둔덕과 숲 지대로 이어지는 경계 가운데에 제법 큰 바위가 우뚝 솟아 있었는데 비를 가리는 지붕이 천연적으로 형성되어 있는지라 지드는 일단 그곳을 숙영지로 삼았다.
 가져온 그늘 가리개는 칼로 잘라서 각 양옆에 쳐 놓았으니 그런대로 지낼 만했다. 대충 거처를 완성하자 가장 중요한 식량원을 확보하기로 했다.
 사나운 짐승이 가득한 숲속으로 들어가서 사냥하기는 좀 그랬는지 강을 살펴보기로 했다.
 첨벙첨벙.
 강 수위는 허리춤까지 올라왔지만 이상하게도 투명한 물속에는 물고기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이 상류지역인데다가 저만치 보이는 곳이 강이 흘러가는 폭포 지점이라서 그런가?
 지드는 조심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
 잠시 후, 그는 폭포 아래 제법 넓게 펼쳐 강줄기 광경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와우!”
 곰들이 강 곳곳에서 물줄기를 헤치고 올라오는 연어들을 잡느라 정신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바로 여기 폭포수 아래가 강 수원의 마지막 종착지인 듯 해마다 이 시기에 곰들은 연례행사처럼 영양가 많고 맛있는 연어 잔치를 벌이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야만 충분한 단백질과 지방질을 축적하여 겨울 내내 충분히 잠을 잘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어쨌든 지드 입장에서 본다면 눈이 번쩍 뜨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눈앞에는 그야말로 식량들이 잔뜩 널려져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곰들 때문에 걱정스러웠지만.
 잠시 후.
 슥!
 강가 수풀 틈으로 갈색 머리가 조심스럽게 내밀어졌다. 지드였다.
 지드가 이곳을 택한 이유는 저 앞쪽 유독 덩치 큰 곰 한 마리가 자신의 영역을 넓게 차지하고는 계속해서 연어를 툭 쳐서 강가에 던져 놓으니 나름대로 연어를 훔치기에 좋은 위치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담력이 약한 지드는 막상 행동하기가 겁이 났는지 선뜻 나서지를 못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걸리면 죽음인데…….’
 가장 좋은 자리에서 자신의 영역을 차지한 곰은 강 하류의 곰들과는 그 겉모습이 달라도 한참 달라 보였다. 뭐랄까, 차원이 다르다고 할까.
 엄청난 몸집에 붉은 털, 게다가 한쪽 눈마저 없는 광폭한 인상은 그저 보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였다.
 그런 녀석이 잡아 올린 연어를 낚아채야만 하니, 사실 이 짓은 목숨을 건 모험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쩌랴, 당장 굶어 죽을 판인데.
 지드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지드는 아주 조심스럽게 수풀을 가르고 연어들이 팔딱팔딱 뛰는 강가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붉은 곰은 여전히 연어 사냥하는 데 정신이 없었으니 이대로 살금살금 가서 한 마리만 슬쩍 해 오면 되는 일이었다.
 슥.
 운이 좋았는지 지드는 연어 한 마리를 가슴에 안을 수가 있었고 다시 뒤쪽으로 향했다. 바로 그때였다. 허벅지만 한 연어가 갑자기 요동을 쳤다. 지드는 당황하여 그만 연어를 놓치고 말았다.
 팔딱!
 “어이쿠!”
 털썩.
 그때 애석하게도 사냥에 열중해 있던 붉은 곰이 지드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곰은 지드를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다.
 순간 지드는 심장이 철렁했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지드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는 붉은 곰!
 첨벙첨벙!
 지드는 바닥에 떨어진 연어를 다시 집어 들고 수풀 속으로 줄행랑을 쳤다. 붉은 곰은 흥분했는지 울부짖기까지 했다.
 크앙!
 지드는 혼비백산하여 무조건 앞만 보고 뛰었다.
 “아이고, 사람 살려!”
 하지만 이걸 어쩌나. 냅다 뛰어간 방향이 안타깝게도 막다른 길이었다. 생각해 보니 이곳은 아까 조심스럽게 내려왔던 바위 절벽이 아니던가.
 “젠장!”
 순간 지드의 눈에 보이는 것은 절벽 아래 보이는 바위 틈새였다. 뒤에서는 붉은 곰에게 거의 잡힐 듯 거리가 좁혀져 있었으니 연어를 안은 상태에서 절벽 위로 올라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그가 선택한 곳은 좁은 바위 틈새였다.
 크아앙!
 “헉!”
 곰의 앞발이 그의 뒤통수를 치기 일보직전! 지드는 틈새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미끄러지듯 들어갈 수 있었다. 찰나 발톱을 드러낸 곰의 앞발이 보였다. 앞발이 지드의 목덜미를 향해 힘차게 휘둘러졌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지만 천운이 따른 모양이었다. 다행이도 입구 틈이 비좁았는지 곰의 몸통이 막혀 앞발 역시 지드의 코앞에서 멈추었다.
 하지만 지드 역시 뒤로 더 이상 물러날 공간이 없었고 눈앞에서 마구 휘젓는 곰의 무시무시한 발톱만을 바라보며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의 가슴 안쪽에는 아직도 팔딱팔딱 뛰는 연어가 안겨져 있었다.
 제법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상황은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참으로 끈질긴 놈이 아닐 수 없었다.
 고작 연어 한 마리 훔쳤다고 이리도 치사하게 나온단 말인가. 붉은 곰은 벌써 여러 시간째 바위 틈새 입구 앞에서 아예 코를 들이박고는 지드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끔 끔벅거리는 눈꺼풀이 졸린 듯 보였지만, 그 눈매만큼은 자기 식량을 훔친 인간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듯 맹수의 흉폭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동굴 안에서 보이는 바깥은 어느덧 해가 져 버려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무섭기도 하고 배도 고프니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지드는 이를 악물고 참기로 했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깨고 나면 곰이 포기하고 사라져 있겠지 하는 바람으로.
 찌르르. 찌르르.
 풀벌레가 우는 늦은 밤, 아니 푸르스름한 기운이 도는 이른 새벽녘이랄까. 지드는 비린내가 코를 찔러 문득 잠에서 깼다.
 일어나 주변을 살펴보니 온통 캄캄했고 가슴에는 커다랗고 미끈미끈한 연어 한 마리가 안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지드는 전방의 입구를 살펴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이었지만 무언가가 입구 앞을 가로막고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절망의 그늘이 또다시 엄습해 왔다.
 “빌어먹을!”
 곰 새끼가 아직도 가지 않고 입구를 지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말이지, 성질 같아서는 이빨로 저놈의 주둥아리와 대갈통을 마구 물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연어 수십 마리 중 고작 한 마리 집어 왔다고 어찌 저리도 집착을 한단 말인가. 아무리 짐승이라지만 이건 너무한 게 아닌가.
 그때 지드는 한여름 밤에 점점 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생선 한 마리를 꼭 안고 바위틈에 처박혀 있는 자신의 신세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말 못하는 짐승에게조차 박대 받는 기분이랄까.
 정말 더럽다 못해 한탄스러웠고 눈물마저 찍 나오려고 했다. 급기야 그는 입구 쪽에다 분통을 터트리듯 뭐라 외쳤다.
 “젠장! 이 치사하고 더러운 곰 새끼야! 난 지금 굶어 뒈지기 일보직전인데 요거 한 마리도 못 주냐? 이거 좀 같이 나눠 먹자는 데, 뭐가 그리도 억울하냐! 이 빌어먹을 곰 새끼야!”
 지드는 말하면서도 너무나 격앙되고 흥분했는지 연어를 들어 올리더니만 그 비린 몸통을 아작아작 씹어 먹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 안에서 굶어 죽을 팔자! 잘 먹고 죽은 귀신 때깔이라도 곱다던데 생선이 썩기 전에 실컷 먹고 나 뒈지자. 흑!”
 우적우적. 쩝쩝!
 꿀꺽.
 그동안 세상 살아오면서 겪었던 서럽고 원망스런 일들마저 봇물 터지듯 했다. 그야말로 지드는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되어 계속해서 연어를 무식하게 씹어 삼켰다.
 비린내고 뭐고 없었다. 그런 몸부림은 스스로에 대한 자학에 가까웠는지 대가리마저 마구 흔들며 마치 개처럼 연어의 몸통 여기저기를 물어뜯었다.
 “어차피 개 같은 내 인생!”
 정말 스스로를 그렇게 느꼈던가.
  “그래 난 지금부터 개다. 왈! 왈!”
 비린 생선을 날 것으로 물어뜯고 먹으며, 마치 개라도 된 양 왈왈 울부짖는다.
 한마디로 실성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때 입구로부터 들려오는 낯익은 음성!
 “그 안에서 뭐 하는 겨?”
 순간 지드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
 “미쳤냐?”
 그제야 지드는 음성의 주인공을 알 수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존재는 지난번 만났던 그 노인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여기 있었단 말인가!
 “미쳤냐고 묻잖아!”
 “……아니요.”
 “그럼 나와 봐.”
 지드가 바위 틈새로부터 조심스럽게 주변 눈치를 살피며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바로 앞에는 노인이 뒷짐을 진 채 마치 미친놈 보듯 자신을 살피고 있었다.
 노인은 아까 지드가 혼자서 떠든 내용을 모두 들었는지 갑자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쯧! 훔쳐 먹을 게 없어서 짐승 것을 훔쳐 오다니.”
 “…….”
 노인은 퉁명스럽게 한마디를 하고는 강둑 언덕으로 향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멀뚱히 쳐다보는 지드, 아까부터 미리 입구 앞에 서 있었던 걸까?
 그럼 왜 인기척도 없었을까.
 그때 다시 노인의 칼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왕, 뭘 훔쳐 올 때에는 퇴로를 확실히 확보한 뒤에 하는 것이 좋을 거여. 바위 절벽이 뻔히 가로막고 있음을 알고도 그런 무모한 짓을 하다니, 어째 이 세계 인간들은 하나같이 정상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없는고. 쯧!”
 며칠 후.
 지난번 연어 사건 이후 지드는 처음으로 녹슨 철검을 들고 강가 모래무지로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부터 본격적인 검술 수련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손에는 2년 전 거금을 들여 구입한 어느 가문의 비전이라는 검술 교습서가 들려 있었으니,
 지드는 그 책 내용대로 기본자세부터 착실히 시작하리라 굳게 마음먹었던 것이다.
 태양은 강렬하게 내리쬐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날이었다.
 이렇게도 좋은 날, 강물에 첨벙 뛰어들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지드는 내심 강한 의지를 불태우며 뜨겁게 달구어진 검의 손잡이를 과감하게 잡았다.
 검을 멋지게 들어 올리려는 순간, 오른편 강둑 바위 위에 누군가가 있음을 발견한다.
 ‘……노인.’
 자그마한 체구의 그는 똥 싸는 폼으로 쪼그리고 앉아서는, 지드가 뭘 하나 노골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아닌가.
 이에 지드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부담도 어느 정도 느꼈는지 가슴 부위까지 올렸던 철검을 내렸다. 그러고는 멋쩍은 듯 발로 땅을 툭툭 차며 일부러 딴청을 했다.
 ‘구경이라도 났나?’
 지드는 그가 얼른 다른 곳으로 가주기만을 기다리며 계속해서 딴 짓을 했다. 하지만 노인은 마치 공연장에라도 온 듯 여전히 쪼그리고 앉아서 이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찌 남의 일에 저리도 관심이 많은지, 벌써 한 시간 째다.
 지드는 사람이 저런 자세로 저렇게 오래 견딘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정말이지 같은 자세를 계속 취하고 있었다.
 결국 지드가 참다못해 제법 정중히 말했다.
 “다른 곳으로 가 주면 안 되겠습니까!”
 노인이 짧게 답했다.
 “싫은데.”
 “싫다니요! 남 뭐 하나 엿보는 것이 취미인가 보죠?”
 “응.”
 “…….”
 그만 할 말을 잃고 마는 지드. 대체 생긴 것 자체부터 기묘한 영감이, 하는 행동도 영 정상은 아닌 것 같았다. 그저 한눈에 봐도 심술이 덕지덕지 달린 고집불통 노인이라는 것을 그냥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진짜 이러실 겁니까?”
 “내가 뭘.”
 “신경 쓰여서 수련하기가 좀 그렇잖아요.”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하려던 거 해 봐.”
 “거기서 빤히 쳐다본다는 것 자체가 방해가 아니고 뭡니까?”
 “수련하는 녀석이 왜 남의 눈치를 보냐. 그냥 자기 할 일 하면 되는 거지.”
 “…….”
 생긴 대로 괜히 심술을 부리는 것이 분명했다. 사실 여기가 주인 없는 깊은 산중이니 다른 곳으로 가라 할 권리도 없었다.
 생각해 보니 저 영감이 지켜본다고 한들 별 상관도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은 그저 수련에만 집중하면 그만인 것이다.
 척!
 지드는 바위 앞에 검술 교본을 첫 장을 잘 보이도록 펴 놓고는 거기 나온 그림대로 철검을 들어 올려 본격적인 수련에 임하기로 했다.
 첫 시작인 만큼 다짐도 새로웠다. 꽉 다문 입술과 결의에 찬 눈빛도 부족해, 지드는 검과 하나가 되기 위해 모든 힘을 모아서 수직 일도 동작에 집중시켰다.
 힘이 너무 과했던가!
 온몸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였고 기다란 검날은 자연스럽게 떨림 증세가 일어났다.
 부들부들!
 정말이지, 오늘만큼은 꾀를 부리지 않고 나름대로 익혀 왔던 기본자세에 전력을 다하기로 했던 지드였다.
 얼굴은 빨개졌고 굵은 핏발마저 툭툭 튀어나왔다. 어쩌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노인을 의식해서인지 평소 때보다 의욕이 큰 것 같았다.
 드디어 지드가 검을 머리 위로 서서히 들어 올리고 수직 일도를 하기 위해 모든 힘을 모았다.
 그때, 지금껏 잠자코 있던 노인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조금 더 힘쓰면 똥 싸겠군.”
 “…….”
 정말 작은 목소리였는데 지드의 귀에는 크게 들렸던가. 갑작스런 방해에 지드는 흐름이 끊겼는지 그만 검을 지면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철렁!
 지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냅다 검을 집어서 다른 곳으로 가려 했다.
 그러자 노인이 외쳤다.
 “어딜 가는 거여?”
 “신경 끄시죠?”
 “웬만하면 거기서 계속하지 그래?”
 “영감님이 방해했잖아요!”
 그러자 노인이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내가 언제?”
 “방금 전에요!”
 그제야 노인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걸 들은 거여?”
 “관두죠, 내가 딴 곳으로 가면 그만이니까.”
 “그 자식, 귀도 밝네.”
 “…….”
 지드는 더 이상 말대꾸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며 다른 곳으로 향했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
 삭! 슥!
 지드의 철검은 제법 무거운 중급이라 할 수 있다. 길이 또한 웬만한 어른의 어깨 높이까지 오니 그럭저럭 긴 편이었다.
 비록 지드가 하류 계열에 속하는 검사라지만 양손으로 검을 잡고 이리저리 휘두를 정도의 실력은 있었다. 물론 그의 검 동작들은 하나같이 제각각이었고 너무 힘을 주어서 그런지 무척이나 무겁고 느리게 보였다.
 붕! 부웅!
 검날이 허공을 가른다지만 마치 쇠몽둥이 느낌이 난다고 할까. 정말이지 섬세한 구석은커녕 당장 무기를 뺏고 그만두게 하고 싶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드는 땀을 뻘뻘 흘리며 나름대로 열심히 수련하고 있었다.
 애석한 일이지만 그는 자신이 수련 교본에 나와 있는 동작을 그대로 따라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일종의 자아도취랄까?
 “하하, 됐어! 바로 이 동작이야! 젠장, 이렇게 쉬운 걸 지금에야 깨닫다니!”
 지드는 흡족한 얼굴로 교본의 첫 장을 넘겼고 이어 두 번째 장들의 그림들을 살펴보았다.
 “생각보다 첫 장을 쉽게 마스터했으니 해 지기 전까지 아예 두 번째 장까지 습득을 해 버릴까? 흐흐!”
 바로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성.
 “놀고 있네.”
 “…….”
 이번엔 또 뭐란 말인가.
 순간 지드의 인상이 팍 찌그러졌다. 그렇지 않아도 혹시 영감이 어디선가 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대체 뭡니까!”
 “…….”
 지드는 노인을 찾으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노인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정말 따라다니면서 이럴 겁니까? 남의 뭘 하든 말든 도대체 영감이 무슨 참견입니까!”
 “…….”
 “왜 아무 말이 없습니까!”
 “…….”
 노인의 음성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아마도 가 버린 모양이었다.
 지드는 기분을 잡쳤는지 책을 덮고 돌아 갈 준비를 했다. 그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씩씩거렸고 뭐라 씨불이기까지 했다.
 “앞으로 수련도 마음 놓고 못하게 생겼네! 이거, 뭔가 대책을 세워야지 안 되겠어.”
 그 이튿날 오전.
 오전의 햇빛 아래 제법 가파른 바위 절벽을 오르는 지드, 오늘만큼은 노인의 방해를 받지 않으려는 듯 한적한 수련 장소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은근한 미소마저 번졌으니 아마도 자신을 찾으려고 허둥대는 노인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던 모양이다.
 “후후!”
 정상 부근을 거의 다 올라갈 무렵이었다. 고작해야 30여 미터밖에 안 되는 높이지만 그는 낑낑대며 겨우 도착했다.
 이제 마지막 고지에 한 팔을 올려놓고 정상에 등극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누군가 바로 위에서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는 것이 아닌가.
 “흐흐.”
 순간 지드는 깜짝 놀라 위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노인이 언제 올라와 있는지 씩 웃고 있었다.
 “헉!”
 지드는 당황한 나머지 손을 놓쳤고 균형을 잃어 그만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아아악!”
 
 * * *
 
 낡은 신전이었다.
 가슴 부위를 하얀 천으로 돌돌 만 청년과 그를 돌보는 노인이 보였다. 청년은 지드였다.
 노인은 아직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지드의 부상당한 몸 여기저기에 손수 구한 약초 즙을 바르고 있었다. 다행히 부상 정도는 그리 심하지 않았지만 노인은 뭔가 충격을 받은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볼 때부터 정상적인 놈은 아니라고 여겼지만, 녀석의 신체 또한 가관이로다.”
 노인은 약초 즙을 다 바른 뒤에 이번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팔과 어께 부근의 근육을 직접 만져 보거나 눌러 보며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지드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고 가슴 부위가 하얀 천에 꽁꽁 쌓인 채 침대에 누워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여긴 어디지?”
 “깼군.”
 그제야 눈앞에 노인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고 지드는 깜짝 놀랐다.
 “헉!”
 “뭘 놀라는 겨.”
 “내,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죠?”
 “절벽에서 떨어져 뒈지기 일보직전인 네놈을 내가 이리 데려왔다.”
 순간 지드는 가슴 부위의 통증이 심하게 올라옴을 느꼈다.
 “욱!”
 하지만 반면 이곳을 나가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드는 억지로 몸을 꿈틀거렸다.
 “저 여기서 나갈 겁니다!”
 “가만있어, 아직 뼈가 붙지도 않았구먼.”
 “…….”
 노인의 말에 지드가 잠잠해졌다.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흐르는가 싶더니만 노인이 무슨 이유인지 지드를 노골적으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지드는 그런 노인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애써 그 눈길을 피했다.
 이윽고 들려오는 노인의 음성.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지난 십칠 년 동안 오로지 무림으로 돌아갈 생각뿐이었는데, 네 녀석을 보니 조금 갈등이 생기는구나.”
 “…….”
 저 이상하게 생긴 영감이 이번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정말 지드는 노인의 이상한 억양과 처음 들어보는 말뜻에 쉽사리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자신을 치료해 준 것은 고마웠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경계의 눈빛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노인이 지드의 몸을 천천히 훑어보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네놈의 신체가 탐이 난다, 이 말이야.”
 순간 지드가 경악에 찬 얼굴을 했다. 설마하니 저 노인이 엉큼한 생각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혹시 변태!’
 정말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때 노인이 손으로 지드의 팔뚝을 만지려 했다.
 지드는 기겁을 하며 외쳤다.
 “헉! 만지지 마요!”
 “갑자기 왜 그러는 겨?”
 “내 몸에 손끝 하나 대면 진짜로 가만 안 있을 겁니다!”
 노인이 피식 웃었다.
 “허허, 미친놈.”
 노인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은근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지드는 더욱 불안해지기만 했다.
 “영감! 그렇게까지는 안 봤는데 이제 보니!”
 그때, 노인이 갑자기 진중한 얼굴을 했고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너 말이야, 무공(武功) 한번 배워 볼 텐가.”
 무공.
 무공이란 단어의 뜻을 모르는 지드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노인이 뭔가 수작을 부린다고 느꼈는지 다시 발작을 했다.
 “무공인지 뭔지 그딴 거 다 필요 없으니까 당장 보내줘요!”
 노인은 지드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동문서답했다.
 “이 세계에도 이런 독특한 근골이 존재하다니, 거참 정말 신기한 일이야.”
 노인이 잠시 뭔가 숙고하는가 하더니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다! 이렇게 된 바에, 뭐 이 세계에서 제자 하나 만드는 것도 괜찮을 법한데.”
 지드는 대체 저 영감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여전히 멍한 심정이었다.
 “제자라니……?”
 
 
 
 
 제3장 차라리 배를 째쇼!
 
 
 
 
 
 뜨거운 뙤약볕을 피해 나무 그늘 아래 등을 기대어 쉬고 있는 지드, 그 옆에는 물이 그득 담긴 철통 두 개와 지게가 있었다.
 그는 아까부터 무슨 골몰을 하는지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대체 하루에 몇 번이나 물을 길어 날라야 하는지 벌써부터 눈앞이 캄캄했다.
 신전 뒤뜰에 있는 엄청나게 큰 철통에다 물을 가득 채우려면 아마도 수십 번은 들이부어야 할 것이다.
 “나 참, 이 짓을 계속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군!”
 아무래도 왠지 모르게 속은 기분이었다.
 벌써 두 달이 넘었건만 수련은커녕 온갖 잡일들만 시키고 있지 않은가! 이젠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오를 만도 했다.
 영감이 가르쳐 주겠다던 무공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것들도 수련이라나?
 매일같이 물지게 지기.
 나무 구해 오고 장작 패기.
 식사 준비하고 설거지하기.
 그리고 기타 등등…….
 ‘아! 정말.’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지만 지난번처럼 잡혔다가는 이번엔 진짜 큰일 날 것만 같았다.
 그동안 지드는 몇 번이나 탈출하려고 계곡을 내려갔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노인은 귀신처럼 어느새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오후의 태양 볕은 세상을 더욱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계곡과 언덕 위에서 왔다 갔다 물지게를 나르는 지드, 그는 철통에다 열한 번째 물을 붓고는 힘없이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이젠…… 때려 죽여도 이 짓거리 못하겠다.”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워 모포를 얼굴까지 뒤집어 쓴 지드는 좀처럼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 수 있었는데, 하지만 곧이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으니.
 “당장 일어나지 않고, 뭐 해!”
 “음, 으음…….”
 지드는 너무 피곤해서 누가 깨우는 것조차 몰랐다. 곧이어 얼굴에 찬물이 확 쏟아졌다.
 “헉!”
 자다가 물벼락을 맞은 지드가 벌떡 일어났다.
 “뭐, 뭐야!”
 잠시 후, 지드가 완전히 정신을 차리자 노인이 다그쳤다.
 “일 시작해!”
 “아직…… 날도 새지 않은 캄캄한 밤중인데…….”
 “지금은 새벽이야!”
 “새벽이나 밤이나.”
 가뜩이나 힘겨운 하루 일과이건만 몇 시간이 앞당겨졌다는 사실은 지드를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하지만 정작 힘든 과정은 지금부터였다.
 노인이 묵직해 보이는 무언가를 바닥에다 던졌다. 지드가 깜짝 놀란 채 그 물건을 살펴보았다.
 “이…… 게 뭡니까?”
 “철편 갑옷.”
 “철…… 편…… 갑옷?”
 “오늘부터 그거 입고 일 시작해.”
 “설마 이 쇳덩어리들을 입으라는 겁니까……?”
 “빨리!”
 “피곤해 죽겠는데 갑자기 이게 뭡니까!”
 “꾸물거리면 또 맞는다?”
 영감이 하라면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래저래 사는 삶이니 말이다.
 지드는 마지못해 철 조각 옷을 집어 들었다.
 순간 그의 표정이 일시에 굳어지고 말았다.
 “욱!”
 너무 무거웠다.
 “설마, 이걸 몸에 걸치라는 얘기는 아니겠죠?”
 “그놈 말 더럽게 많네. 입으라면 입을 것이지!”
 “사람이 어떻게 이런 것을 입고 다닙니까!”
 태양이 중천이 떠오를 무렵.
 끙끙!
 어디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싶었더니, 바로 지드가 마당을 가로질러 장작들을 나르며 내는 신음이었다.
 한 발 한 발 겨우 옮길 때마다 지드는 오만 가지 인상을 다 찡그리며 뭐라 투덜거렸다.
 끙! 끄응!
 순간 앞으로 고꾸라지는 지드, 철편 갑옷의 무게 때문인지 오늘 반나절 동안 넘어지기를 수백 번은 넘는 것 같았다.
 철퍼덕!
 더군다나 이런 차림으로 장작을 패고 물지게를 길어 오라니! 정말이지 미쳐도 곱게 미칠 것이지, 어찌 사람을 이리도 고생시킨단 말인가.
 그는 너무 지친 나머지 마당 한복판에 누워서 잠시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누운 채 하늘을 보니 세상이 온통 파랗게 보였다.
 몸이 너무 고되었는지 눈물이 고이려고 했다.
 대체 무슨 놈의 팔자가 이리도 꼬였기에 이제는 이리도 힘든 고생을 한단 말인가.
 이건 하류 삶도 아니다. 차라리 노예나 마찬가지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지드는 철편 갑옷의 옆구리 고리를 풀기 시작했다.
 툭, 툭.
 노인은 만일 이걸 벗을 시엔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를 몇 번이나 했지만 지드는 이미 반항하기로 굳은 결심을 한 모양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노인이 언제 왔는지 모르지만 지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금 뭐 하는 겨.”
 지드는 평소 때와는 다르게 매우 진지해 있었고 그대로 누운 채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보면 모릅니까?”
 “뭘?”
 “앞으로 이따위 옷 입지 않을 겁니다.”
 “어쭈?”
 “어쭈 뭐요! 누가 겁날 줄 알고?”
 “너 미친 겨?”
 “그래, 미쳤수다!”
 “죽고 싶어서 환장했군?”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쇼!”
 “뭐라!”
 “어차피 막 가는 인생! 그동안 노인이 심심해 보여서 이 어린놈이 장단이라도 맞추는 척했지만 이제는 그런 짓들도 질립니다! 이십 대 청춘이 끝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검술을 수련해 볼까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다 부질 없는 짓이라고요! 난 태어날 때부터 꼬인 인생이었고 어차피 이렇게 죽을 운명이었으니까!”
 노인이 이번엔 다소 인상을 굳히며 타이르듯 말했다.
 “웬만하면 좋은 말로 할 때 일어나지, 그래?”
 별 반응이 없자 지드는 조금 더 강수를 두어 아예 허연 배를 들어 내보이기까지 했다.
 “차라리 배를 째쇼!”
 “뭐라!”
 “검술에 한 맺힌 불쌍한 내 인생! 마지막에는 검으로 죽고 싶었거든요.”
 지드는 괴로워하는 척하다가 곁눈질로 노인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
 놀랍게도 노인의 표정이 숙연해져 있었다.
 “듣고 보니 젊은 나이에 고생을 많이 했었군.”
 “그런 셈이죠.”
 “그렇다고 아까운 목숨을 버릴 것까지야 있나.”
 영감의 입에서 동정 어린 말이 나오자 지드는 일말의 희망이라도 생기는 것 같았다.
 “사실 막상 죽는다고 생각하니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도 같네요.”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
 “스승님도 제가 이러길 원치 않는 것 같은데, 죽기로 한 거 다시 생각해 볼 용의는 있습니다.”
 “다시 생각해 볼 용의가 있다라. 허허, 그거 반가운 소리군.”
 지드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드디어 지드는 가슴에 품고 있었던 말을 하기로 했다.
 “여기서 나간다면 인생을 다시 멋지게 살 수 있을 텐데요.”
 그 말에 노인이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더니만 잠시 고민을 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지드의 심장은 조마조마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노인이 할 수 없다는 표정과 함께 말문을 열었다.
 “내가 도와주지.”
 지드의 눈빛이 반짝였다..
 “진짜요?”
 “뭐, 어려운 일은 아닌 거 같은데.”
 지드의 안색이 밝아지는 순간이었다.
 “감사합니다!”
 “뭘 감사해? 죽고 싶다는 거 도와준다는데.”
 “헉!”
 노인이 가슴 안쪽으로부터 시퍼런 단검을 꺼내 들었을 때, 지드는 숨이 턱 막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그게 뭡니까!”
 “보면 몰라? 단검이지.”
 “그걸로 뭘 어떻게 하려고요!”
 “아까 배째라며?”
 그만 할 말을 잃고 마는 지드, 단도의 날이 유난히 시퍼렇게 보였다.
 “…….”
 “보아하니 네 녀석은 인내심이 없고 조금만 힘들면 포기를 잘하는 것 같은데. 여기서 나가 봐야 또다시 하류 인생으로 살 테고, 그때가 되면 또 죽고 싶다고 징징거릴 것이 뻔하단 말이여. 그래서 말인데, 여기서 그냥 끝내는 것이 좋지 않겠냐?”
 노인이 다가오자 지드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자, 잠깐만요!”
 악마가 따로 없었다. 노인의 사악한 표정을 보니 진짜 단검으로 배를 가르고도 충분했다. 지드는 철편 갑옷의 고리를 잽싸게 채웠다.
 찰칵, 찰칵!
 그리고 냅다 일어나더니만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손으로 노인의 어깨를 감싸며 실실 쪼갰다.
 “하하. 정말 순진하시네! 농담 한번 해 본 건데 그걸 진짜로 받아들이다니요.”
 “지금 뭐 하냐?”
 “인상 좀 펴시죠. 거참, 무섭게시리…… 헤헤!”
 지드는 바닥에 떨어졌던 장작들을 주워서 헐레벌떡 뒤뜰로 향했다. 그 모습은 뒤뚱뒤뚱한 것이 마치 치질 걸린 오리의 걸음을 보는 것 같았다.
 철편 갑옷 때문에 거동이 무척 힘들었지만, 지금 그에게는 뒤에서 단검을 들고 서 있는 영감탱이가 더욱 두려웠으리라.
 그때, 노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오늘부터 내공심법을 시작할 테니까, 점심 먹고 신전으로 들어오너라.”
 지드가 가다 멈추어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건 또 뭐죠?”
 “그걸 익히기 시작한다면 철편 갑옷이 한결 가볍게 느껴질 거다.”
 
 * * *
 
 “……다시 말하지만 내공이란 호흡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부터 시작하느니라.”
 노인의 말에 지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숨쉬기를 말하는 거군요.”
 “네놈이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숨쉬기는 아니다.”
 “그럼 뭡니까?”
 노인은 애써 차분한 심정으로 다시 설명했다.
 “뭐, 호흡하는 방법이긴 한데, 고도로 숙련시킨다고 말할 수 있지. 그걸 토납(吐納)술이라 한다. 단전호흡 역시 그에 속한다고 볼 수 있지.”
 “…….”
 지드는 벌써 한 시간째 영감이 뭔 말을 떠드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노인 역시 한어(漢語)의 개념을 이 세계 언어로 풀이해서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결국 노인은 설명하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냥 그런 줄 알아. 어차피 내가 하란 대로 하면 되니까.”
 “숨쉬기 말이죠?”
 순간 노인의 음성이 높아졌다.
 “숨쉬기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는 겨! 일단 나처럼 해 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노인, 그런 그의 모습에 지드가 요상한 얼굴을 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저렇게 이상한 폼으로 앉는 사람을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하라면 해야 하는 신세인지라.
 지드는 바닥에 철퍼덕 앉고는 노인의 자세를 따라하려 했다. 하지만 생전 처음 하는 가부좌가 결코 쉬울 리가 없었다. 자꾸 옆으로 자빠지니 말이다.
 “에구!”
 “처음엔 어려울 겨. 하지만 자꾸 습관을 들이면 괜찮아질 거여. 이것도 중요한 수련법 중 하나지.”
 “…….”
 참으로 이상한 소리만 늘어놓는 영감탱이다. 그냥 철퍼덕 앉아 있는 것이 도대체 뭔 놈의 수련법이란 말인가!
 “눈을 감고 정신은 오로지 호흡법에만 집중하는 겨. 숨을 천천히 들여 마시고 최대한 가늘게 뱉어 내는 것부터 시작한다.”
 지드는 하는 수 없이 말대로 입을 헤 벌린 채 숨을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잠시 후.
 “…….”
 제법 정적이 오래 흘렀다. 지드는 대충 가부좌 자세 비슷하게 앉은 채 눈을 감고 스승에게 지시받은 대로 토납(吐納)의 기본 단계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시간이 흐를수록 다리가 저려 왔고 몸이 찌뿌듯해 견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점심 식사 후의 식곤증 때문에 눈이 절로 감기면서 도저히 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쿵!
 결국 앉은 자세 그대로 고꾸라지고 마는 지드, 놀랍게도 머리를 바닥에 박고 잠이 들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 지드는 문득 불편함을 느꼈는지, 아니면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는지 눈을 뜨고 말았다.
 어찌나 피곤했으면 바닥에 침까지 질질 흘렸던가. 지드는 다시 자세를 고쳐 잡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로 옆에는 영감이 처음 그 자세로 여전히 가부좌를 튼 채 고요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와! 세상에, 앉아서 자는 사람도 다 있네?”
 지드가 노인 앞으로 슬금슬금 다가와서는 얼굴을 빤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이상한 인간으로 보인 모양이었다. 생긴 것부터 시작해서, 바닥에 철퍼덕 앉은 자세는 너무나 이채로웠기에 지드는 자기도 모르게 스승을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싶었던 것이다.
 “진짜 잠이 들었을까? 혹시 실눈을 뜨고 있을지도…….”
 지드가 손을 들어 노인의 얼굴 앞에서 마구 흔들어 보았다.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유난히 호기심이 많은 지드는 이번엔 노인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귀를 기울여 보았다.
 그러니 숨소리를 가늘게 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역시 잠에 깊게 든 걸까?
 지드는 그만 자기도 모르게 씩 웃고 말았다.
 “역시…… 그럼 그렇지. 후후!”
 바로 그 순간이었다.
 빡!
 “어억!”
 노인의 이마가 지드의 마빡을 들이박아 버렸던 것이다. 두 손으로 대갈통을 감싸 쥔 채 뒤로 나자빠져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데굴데굴 구르는 지드.
 “아아! 아악!”
 노인은 기가 찬 듯 지드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세상에 별의별 잡놈이 다 있다지만 대체 저 자식은 어떤 족속이여!”
 
 * * *
 
 휘잉!
 어느덧 계절이 흘러 그토록 무더웠던 여름이 가 버렸다. 이제는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부는 초가을로 접어드는 시점이었다.
 지드는 철편 갑옷이 휘날릴 정도로 언덕을 뛰어 올라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지만 그토록 무겁게 느껴졌던 쇳덩이들이 이제는 한층 가벼워졌다.
 정말로 지난 한 달간 내공심법인지 숨쉬기인지를 매일 쉬지 않고 꾸준히 했던 것 때문일까?
 헉! 헉!
 아직은 숨이 차오르고 힘도 들었지만 확실히 한 달 전과는 분명한 차이가 느껴졌다.
 지드는 언덕에 아무렇게나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 그러다 보니 울컥 속상한 마음이 올라왔다.
 며칠 전부터 노인은 자신의 혈도인지 뭔지를 열어 준다면서 온몸 곳곳을 손가락으로 푹푹 찔러 넣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이만저만 고역이 아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는 그냥 몸으로 때우며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다.
 사실 참을 수 없는 것은 이상한 약초를 끓여 달인 검은 약물을 삼키는 것이었다.
 살다 살다 그렇게 역한 냄새와 쓴맛은 처음이었다. 영감 말로는 무림에서조차 구하기 힘든 영약이라는데 지드 입장에서는 요상한 물약을 제조해서 자신을 실험 대상삼아 억지로 먹인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드, 녀석에겐 여전히 자신이 영감한테 속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구심이 머리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이대로 그 약들을 주는 대로 강아지처럼 받아먹다가는 큰일 날 수도…….’
 그렇다.
 철편 갑옷을 입혀서 체력을 키워 준다는 것은 그냥 구실일 뿐, 영감의 의도는 다른 데 있을 수 있다.
 분명 스승과 제자의 서약을 할 때 그 자신의 입으로 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검사로 만들어 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넉 달이 지나도록 검술은커녕 검 한번 쥐어 보지 못했다. 그러니 이대로 쇳덩어리나 철렁거리며 삶을 마감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커져 갈 수밖에.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지드는 자리에서 냅다 일어났다.
 “왜 검술을 가르쳐 주지 않는지 직접 물어봐야겠다!”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지드, 나이가 이십 대 중반이건만 그의 모습은 여전히 철없는 아이에 가깝다고나 할까?
 신전의 앞뜰.
 “그래서 그거 따지러 온 거여? 아직 이르다니까!”
 “저…… 검술의 기본 정도라도…….”
 “네놈의 내공이 밑바닥 수준이라서 검법(劍法)에 입문하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니라.”
 “그냥 가르쳐 줘요!”
 “안 돼.”
 “왜요!”
 “허! 그놈 참, 스승이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야지!”
 이건 뭐, 들은 척도 안 한다. 지드는 냅다 바닥에 확 누워 버렸다.
 털썩!
 “안 가르쳐 주면 오늘부터 이대로 누워 꼼짝하지 않을 겁니다!”
 노인이 다시금 혀를 내둘렀다.
 “어째…… 하는 짓이 꼭 그따위냐?”
 “배운 게 이것밖에 없어서요.”
 노인의 인상이 굳어졌다. 결국 그가 누워서 진상을 부리는 지드에게 가까이 가서는 호통을 치듯 말했다.
 “어라, 이 녀석 봐라? 정녕 네놈이 간덩이가 부은 게군. 좋아,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노인이 냅다 발길질을 하려 하자,
 바로 그 순간! 지드가 기다렸다는 듯 노인의 왼쪽 다리를 잡는 것이 아닌가.
 홱!
 “뭐야, 이거 안 놔!”
 “제발요!”
 지드는 노인의 한쪽 발을 두 손으로 꽉 쥐어 아예 가슴에 파묻고는 막무가내로 졸랐다. 노인의 입에서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절대 놓지 않으려는 심산이었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밑바닥 삶을 살아오면서 터득한 최후의 방법이었다.
 뭐라도 붙잡고 죽자 살자 매달리기!
 “놔!”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못 놓습니다!”
 참으로 엉뚱한 녀석이랄까. 노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한편으로 녀석으로부터 연민의 정이 느껴지는 것은 뭐란 말인지.
 절실하게 배움을 얻고자 매달리는 제자의 끈질김에는 그로서도 박하게 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
 그렇다고 지금 이 순간 녀석의 말을 그대로 들어주었다가는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자주 일어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적당한 안을 제시함으로써 찰거머리 같은 녀석을 떼어 놓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알았으니까, 놔라.”
 “정말요?”
 “그려.”
 “나중에 딴말하지 않는 거죠?”
 지드는 여전히 못미더웠는지 한 손으로 다리를 꽉 붙잡은 채 다른 한 손을 들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노인이 의아스런 얼굴을 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여?”
 “약속!”
 “…….”
 그 이튿날 오전, 신전 근처 숲속 공터.
 홱홱! 홱홱!
 지드는 아까부터 노인이 이상한 동작들을 펼치는 광경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검술에 앞서 반드시 익혀야 할 호신술이라나?
 노인은 이 동작들을 완벽하게 배운다면 그때 검술을 시작하겠노라고 확실히 약속했다. 이에 지드는 노인이 이번에도 연막을 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찝찝해 하였지만 한 번 더 믿어 보기로 했다.
 하지만 노인의 호신술인지 뭔지 하는 것들이 그다지 신빙성이 가지 않았으니 내심 못미더운 표정을 할 수밖에.
 ‘대체 뭐지……?’
 잠시 후 노인이 동작을 끝내고는 지드에게 다가왔다.
 “보았느냐.”
 “네.”
 “어째 대답이 시원치 않은 겨.”
 “그냥요.”
 “이건 소림오권(小林五拳)이니라. 호랑이, 표범, 뱀, 원숭이, 학의 움직임을 따라 이루어진 권법이지.”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지드.
 “꼭 배워야 합니까.”
 “뭐라?”
 “검술 가르쳐 주기 싫으면 싫다고 솔직히 말하시죠?”
 “…….”
 노인이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그 유명한 소림오권이 아닌가. 무림 세계를 전혀 모르는 지드에게 있어 소림오권은 무공에 입문하기 위한 적절한 초반 절차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저렇게 받아들이다니.
 더구나 이런 깊은 뜻조차 모르고 있다니.
 마음 같아서는 당장 한 대 패 주고 싶었다. 허나 노인은 애써 끓어오르는 심정을 가다듬고 진중한 음성으로 다시 말문을 열었다.
 “방금 전 동작들을 제대로 깊이 익힌다면 검을 든 자들조차 당하지 못하는 겨.”
 “물론 그러시겠지요.”
 노인은 녀석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공터 중앙으로 나섰다.
 “이리 나와서 따라해 봐.”
 “뭐, 하라면 해야죠.”
 지드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공터 중앙으로 나갔고 노인이 펼치는 동작들을 건성으로 따라했다.
 잠시 후 노인이 두 팔을 길게 늘어트리고 이상한 걸음걸이의 원숭이 흉내를 냈을 때에는 그만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았다.
 “후후! 푸하하하!”
 “…….”
 노인이 하던 동작을 멈추고 녀석을 노려보았다.
 사실 이 세계의 관점으로 본다면 녀석을 탓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권법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니.
 하지만 녀석의 행동 하나하나가 밉살스러운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
 노인이 인상을 팍 쓰며 호통을 쳤다.
 “입 다물지 못할 겨!”
 목소리에 제법 중후한 공력(公力)이 실렸던가. 깔깔거리던 지드가 움찔 놀라 순식간에 안색이 굳어졌으니,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지드의 표정은 마치 겁에 잔뜩 질린 토끼와도 같았다.
 “…….”
 결국 노인은 이쯤에서 수련의 강도를 대폭 높이기로 했다.
 무림에서의 스승의 위치는 하늘이 아니던가.
 이 세계의 문화의 어떻든 간에 지드같이 말 많고 잔머리만 잔뜩 있는 녀석은,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팍팍 돌리는 것이 약이다.
 올 들어 세 번째 폭설이 내리기 시작했다.
 지드는 꽁꽁 얼어붙은 빙판 위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두 손을 들어 하얀 눈을 잡으려 했다.
 수척한 몰골에 비쩍 마른 팔뚝과 손마디는 그가 지난 두 달 동안 얼마나 혹독하게 수련 당했는가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정말이지 죽고 싶을 정도로 너무나 힘들어서 포기하고픈 심정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조차 사치일 정도로 스승은 자신을 마구 내둘렀다.
 새벽에 일어나 철편 갑옷부터 착용하기.
 가부좌 자세로 단전호흡을 통한 내공심법 익히기.
 아침 식사 대신 약초 달인 물 먹기.
 무거운 도끼로 장작 패기.
 계곡 아래 강가에서 물 길어 오기.
 점심 식사.
 신전 뒤 높은 바위정상에 열 번 왔다 갔다 하기.
 소림오권 수련하기.
 마당에 기둥 세워 놓고 권법 연습하기.
 저녁 식사.
 장법(掌法) 배우기.
 오전에 이은 2차 내공심법에 집중하기.
 보법(步法) 수련하기.
 스승으로부터 직접 한어(漢語, 무림 언어) 배우기.
 장작 지피기.
 잠자리에 들기 전에 냉수마찰하기.
 이 중에서 장법 배우기는 최근에 포함된 항목이었고, 한어를 배우는 것은 그래야만 구결심법을 암기하고 운용할 수 있다고 해서 억지로 배우는 것이었다.
 하루 일과가 이렇다 보니 지드가 자는 시간은 불과 네 시간 정도랄까.
 그 외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사실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빡빡한 수련 일정을 견디지 못하고 벌써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드는 약초 물 복용과 꾸준한 단전호흡, 그리고 가끔 스승이 혈도를 짚어 주며 진신을 불어넣어 준 덕에 수련을 하면 할수록 체력이 향상됨을 느낄 수 있었다.
 눈발이 벌써 발목까지 덮기 시작했다.
 지드는 냅다 물이 가득 담긴 물지게를 들쳐 메고는 계곡 위 신전으로 향했다.
 타다닥!
 경쾌한 발걸음이었다.
 철편 갑옷에 제법 무거운 물지게를 지고서도 일반 사람의 뜀박질보다도 더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그것도 산악 지형의 오르막길을 말이다. 지드는 반년 전 허약했던 자신을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이 그렇게도 기쁠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노인이 무슨 마법이라도 부린 걸까? 이젠 숨조차 차오르지 않을 정도였다. 단번에 산 정상까지도 올라갈 기세였다.
 잠시 후, 신전 안.
 노인은 지드가 내려놓은 물통 두 개를 살펴보더니 눈썹이 다소 치켜 올라갔다. 이유인즉 각각 통 속에 물이 반 정도만 차 있었던 것이다.
 결국 노인은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을 반만 떠 온 겨?”
 “아뇨, 가득 채웠는데 급하게 올라오다가 흘렸습니다.”
 “한심한 녀석! 보법을 배운 지 두 달이 되어 가는데 아직도 중심을 잡지 못하는 거냐.”
 “말씀드렸듯이 뛰어 올라오느라고…….”
 “시끄러, 이놈아. 무공의 초기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유연함이거늘! 신체 균형 하나 잡지 못하는 주제에 뭘 배우겠다고 안달이냐.”
 순간 지드는 울상이 되어 버렸다.
 그동안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열심히 수련한 이유는 오로지 검법을 배우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일이 검법을 시작하기로 한 첫날이건만!
 스승은 이번에도 트집을 잡아서 시일을 연기하려는 연막작전을 펼치는 게 분명해 보였다.
 “설마 이번에도 검법 수련을 뒤로 물리려는 건 아니겠지요?”
 “내가 보기엔 아직 멀었어.”
 “정말 이래도 되는 겁니까? 분명 내일부터 검법 수련을 하기로 했잖아요!”
 “잔말 말어! 내일부터는 다른 수련을 시작할게다.”
 “다른 수련이라니요?”
 “내일 가보면 알아.”
 그리고 다시 아침이 밝았는데, 지드는 모처럼만에 잠을 충분히 잤는지 기지개를 활짝 펴고 상쾌하게 일어났다.
 오늘은 새로운 수련이 시작되는 날이기에 노인이 이른 새벽부터 깨우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과연 어떤 과정이 기다리고 있을지 내심 불안한 마음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긋지긋한 노인의 음성이 뒤뜰 창고로부터 들려왔다.
 “이리 와 봐!”
 “당장 갑죠.”
 하지만 그 당당한 기세도 잠시, 지드는 뒤뜰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통나무 기둥 수십 개가 불규칙한 간격으로 박혀 있는 것이었다.
 “저건 뭐죠?”
 “앞으로 당분간은 저 위에서 수련해야 할 것이다.”
 “……저 위라니요?”
 “각 통나무 위에는 네가 겨우 발을 디고 서 있을 만큼의 공간이 있다. 좌우나 앞뒤로 움직일 시 각각의 통나무 단면을 밟고 균형을 잡아야지만 지상으로 추락하지 않을 수 있다.”
 그제야 지드는 스승의 뭘 뜻하는지 알 수 있었는데 동시에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생각보다 쉬워 보였을 까?
 저 정도라면 지금 당장 올라가서 마구 뛰어다녀도 될 법 했다.
 하지만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던가.
 스승의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기둥 위 수련에 임할 시에는 반드시 철편 갑옷을 착용하고 물지게에 물을 가득 채운 후 올라가야만 한다.”
 순간 지드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30㎏가 넘는 철편 갑옷이야 이제는 숙달이 되어 그런대로 넘어갈 수 있는 문제라 친다 해도, 물이 가득 담긴 물지게를 지고 저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은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그건 좀.”
 애석한 일이지만 스승의 얘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보다시피 기둥 밑바닥에는 날카로운 자갈들이 가득 채워져 있으니 떨어지면 꽤 아플 거다. 수련 방법은 간단하다. 내가 여기서 돌멩이를 던지고 너는 피한다. 그게 끝이다.”
 지드가 기겁을 하며 반문했다.
 “도, 돌멩이라니요!”
 노인은 그의 말을 일축했고 갑자기 허리를 숙여 미리 준비해 온 돌무더기로부터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당장 물지게를 지고 저 위로 올라가라.”
 “스승님! 이, 이건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여기 코앞에서 맞을 겨, 아니면 저 위로 올라갈 겨?”
 “…….”
 홱! 탁!
 “억!”
 결국 돌멩이를 두어 번조차 피하지 못하고 물지게와 함께 추락하는 지드. 바닥에 깔린 무식하게 크고 날카로운 자갈 덕분에 그의 고통스런 비명이 메아리치듯 인근 계곡을 울렸다.
 “끄으으으으으으!”
 앞으로 기나긴 겨울이 남았건만 봄이 찾아올 때까지 지드의 비명은 단 하루도 빠짐없이 들려왔다. 다만 그 횟수가 처음보다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으니,
 그래도 상당한 진전이 있는 모양이었다.
 
 
 
 
 제4장 화산파에서 가장 독보적인 검법서
 
 
 
 
 
 정확히 3개월 하고 15일이 지났다. 신전 뒤뜰 통나무 기둥 수련장으로부터 지드의 비명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고 허공을 가로지르는 파공음과 착지할 때 나는 경쾌한 소리만이 간간히 들려왔다.
 탁!
 홱! 홱! 홱! 홱! 홱!
 타다닥!
 연속 다섯 번의 돌팔매질에도 지드는 절묘한 몸놀림과 높은 도약 동작들로 모두 다 피할 수 있었다. 기둥 위에서 그처럼 고도의 균형을 잡는다는 것은 보법의 중간 단계에 이르렀다는 증거일 수도 있었다.
 노인이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드디어 성공했군. 허허!”
 그러자 지드가 지상으로 사뿐히 뛰어내리더니만 노인 앞으로 다가왔다.
 “이것도 확인하셔야죠.”
 노인은 그 말에 물지게에 걸려 있는 두 개의 물통을 살펴보았다.
 예상대로 통은 여전히 가득 차 있었다. 물을 전혀 흘리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이것으로 이번 수련은 마치겠다.”
 지드는 너무 기쁜 나머지 물지게를 벗어 버리자마자 허공에 주먹을 내지르며 환호성을 질렀다.
 “야호!”
 하지만 노인은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그다지 기쁜 얼굴을 하지 않았다. 눈치가 빠른 지드 역시 뭔가 불안했는지 잽싸게 다가와서 말문을 열었다.
 “이제 검법을 가르쳐 주시는 거죠?”
 노인이 지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직 관문이 하나 더 남았다.”
 얘기를 듣는 순간 지드는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는지 휘청거렸다. 정말이지 검술 한번 배우는 게 이다지도 어려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사실 지드는 지난 기간 동안 얻어진 발전에 대해 간과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오로지 검술에만 집착을 하다 보니 그럴 수 있다지만 현재 녀석의 성취도는 무림으로 치면 웬만한 방파 중급 무사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었다.
 그 정도에 이르려면 적어도 4, 5년에 해당하는 수련 기간이 필요하다. 채 반 년도 안 돼서 여기까지 이른 것은 성취도 빠르단 소리였다.
 어쨌든 이번만큼은 노인 역시 지드에게 다소 미안한 감이 있었는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번 관문만 끝내면 정식으로 검법(劍法) 과정을 시작할 것이니 한 번만 참고 견디어라.”
 “…….”
 지드는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옛날 같았으면 뒤로 자빠지고 고집을 부렸을 텐데.
 그도 수련을 통해 나름대로 정신적인 수양을 쌓았던 모양인지, 의외로 스승의 말을 따르는 분위기였다.
 이윽고 말문을 여는 지드.
 “네, 그렇게 하죠.”
 “이번엔 마지막 기초 과정이니 만큼 조금은 어려울 게다.”
 “어차피 넘어야 할 산이라면 넘어야겠죠. 그나저나 어떤 관문인데요?”
 “미리 준비해 놓았으니까 따라와라.”
 노인이 발걸음을 옮기자 지드가 그의 뒤를 따라 나섰다. 노인은 쭉 바위 산 쪽으로 향했는데, 이에 지드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어디 가는 거죠?”
 “가 보면 알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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