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무림맹 부대주가 너무 강함

서장

2022.05.11 조회 62,547 추천 1,174


 1화
 
 
 
 
 협(俠)과 의(義)를 위해 무(武)를 행한다.
 그런 이들이 모인 곳이 바로 무림(武林)이라.
 협의를 추구하는 자들이 모인 곳의 이름도 자연스레 정해졌다.
 
 무림맹(武林盟).
 정파는 무림맹의 깃발 아래에 모여 협의를 지켜왔다. 정파의 구심점이자 상징이었던 무림맹.
 
 그 찬란했던 명예가 무색할 정도로 무림맹은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다름 아닌 정파 무인들의 손에.
 
 화르륵!
 
 드높던 전각들은 용솟음치는 화마에 뒤덮여 굵은 불씨만 애처롭게 토해냈다.
 
 “무림맹이 불타는 모습을 보니 정파에 뿌리내린 낡은 의협도 재가 되는 듯하군. 후련하다.”
 
 백천성주의 웃음소리에 화답하듯 전각을 불태우는 화염이 거칠게 들썩였다.
 
 “권왕. 자네와 구협회에 감사해야겠지. 그대 같은 인재들이 맹에서 대거 이탈해준 덕분에 대계가 훨씬 쉬워졌다.”
 
 싸라기눈처럼 떨어지는 불씨가 어둠 속을 서글프게 날아다녔다. 그중 하나가 권왕의 손바닥에 내려앉았다. 온기를 느낄 새도 없이 단숨에 사그라드는 불씨.
 
 권왕(拳王), 황보성은 떨어진 자그마한 불씨를 그대로 힘껏 쥐었다. 지금의 무림맹처럼 식어버린 불씨를 거머쥔 주먹이 잘게 떨렸다.
 
 ‘나와 구협회 때문에 무림맹이 무너졌다고?’
 
 전각의 잔해 속에 처박혀 있던 황보성은 눈을 번쩍 떴다. 전신 곳곳으로 피를 쏟으면서도 기어코 몸을 일으켰다.
 백천성주는 질린다는 얼굴로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권왕. 정말 잡초 같군. 쓰러질 생각을 하지 않아. 구협회의 협객들도 이러했지.”
 
 백천성주는 뒤편에 있는 두 구의 뭉개진 시신을 곁눈질했다.
 시신들의 정체는 방금까지 자신과 함께 권왕을 상대로 합공을 벌였던 고수.
 
 처음에는 권왕을 상대로 초월경 고수 셋이 합공하는 것은 너무나 과하다고 여겼다.
 권왕 또한 초월경 고수였으나, 비교적 나이가 어려 쌓아온 경험과 세월이 미천했으니.
 
 그런데 결과는 백천성주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막여권제(漠餘拳帝)는 머리가 터졌고 흑유창왕(黑釉槍王)은 가슴이 뭉개져 죽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백천성주도 극심한 내상으로 낯빛이 창백했다.
 
 권왕이 강호를 상대로 제 무공을 꼭꼭 숨긴 걸까. 아니면 그저 역량을 잘못 파악한 것인가.
 어느 쪽이든 권왕이 장차 천하제일을 논할 잠재력을 지닌 사내임은 분명했다.
 
 “그분께서 봉문 중인 사대세가와 구파일방이 아닌 자네와 구협회를 왜 눈여겨보셨는지 이제야 알겠군.”
 
 백천성주가 ‘그분’을 언급하자 황보성의 입가가 비틀리며 피로 붉게 물든 치아가 드러났다.
 정파의 새로운 절대자인 백천성주가 호칭을 높일 만한 인물이 대체 누가 있을까.
 
 황보성은 서로 접점이 전혀 없던 세 명의 절대고수가 동시에 움직인 이유를 깨달았다.
 
 “네놈들을 움직이는 배후가 따로 있었나? 빌어먹을 강호. 뭔 놈의 암중 세력이 이리도 많아.”
 
 황보성은 전신으로 피를 흩뿌리면서도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위선자. 네놈을 찢어 죽이고 배후도 뭉개겠다.”
 
 “그건 힘들 것이다.”
 
 백천성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방에서 무수한 숫자의 고수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며 장내를 채워갔다.
 백천성(白天城)을 비롯하여 무림맹을 무너트리기 위해 참전한 수많은 정파의 정예들.
 
 이들이 등장했다는 것은 무림맹 본성 곳곳에서 전투를 벌이던 구협회가 전멸했다는 의미였다.
 
 ‘다들 먼저 가버린 거냐.’
 
 권왕을 죽이기 위해 모인 고수들이 동시에 내공을 일으켰다. 흉포한 기파가 번개를 품은 흑운처럼 사납고도 넓게 퍼져나갔다.
 
 우웅!
 
 기파에 이어서 대기를 무겁게 가라앉히는 살기도 겹겹이 쌓였다. 그렇게 이루어진 거대한 파랑은 오롯이 황보성에게 집중됐다.
 
 밀집된 기운에 대기마저 거칠게 출렁였으나 황보성의 육신은 찰나의 미동도 없었다. 도리어 보란 듯이 근육이 팽창하며, 강철과 같은 매끈함을 뽐냈다.
 
 “으하하하!”
 
 눈앞의 압도적인 광경에도 황보성은 호기로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보란 듯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후우웅!
 
 그저 주먹이 쥐어졌을 뿐이다.
 두 주먹에서 터져 나온 강맹한 경파가 태풍처럼 거세게 휘몰아쳤다. 밀려드는 기파의 물결을 단숨에 찍어 눌렀다.
 황보성은 태산과 같은 중후함을 온몸으로 과시했다.
 
 “수백, 수천의 쭉정이들이 힘을 합한들 본인의 주먹에 비하면 한없이 가벼우니.”
 
 황보성은 만인 앞에서 모든 것을 불태운 마지막 기세를 드러냈다.
 맹수의 갈기처럼 거칠게 휘날리는 머리칼. 그 사이로 드러난 두 눈은 태양을 품은 듯 맹렬하게 빛났다.
 
 “그렇기에 내가 권왕이다.”
 
 웅혼한 목소리는 몰락하는 무림맹 전역으로 울려 퍼졌다. 선언과 함께 묵직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썩어빠진 무림맹을 뛰쳐나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바꿨어야 했나?’
 
 의협을 저버린 무림맹은 더는 무림맹이라 할 수 없었다.
 
 사부의 말을 들으며 동경해왔던 무림맹이 아니었기에 망설임 없이 저버렸으나, 어쩌면 무림맹도 외면하지 않고 구해야 할 대상이었을까.
 
 사색에 빠져든 찰나에도 황보성의 묵직한 걸음은 멈추는 법이 없었다.
 
 쿵!
 
 발을 앞으로 뻗을 때마다 뼈와 근육이 삐거덕거렸고, 전신의 상처는 피를 울컥 쏟아냈다.
 황보성은 멈추지 않았다. 흔들릴지언정 나아갔다.
 
 독고연.
 묵사량.
 남궁선희.
 진운.
 
 그 외에도 무수히 떠오르는 이름들.
 구협회의 친우들을 떠올릴 때마다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었다.
 수많은 이름이 황보성을 내달리게 했다.
 
 그런 와중에 지금까지 살아왔던 짧은 삶이 주마등처럼 황보성의 주먹을 스쳐 지나갔다.
 지금껏 걸어온 행보를 되돌아보고 나서야 황보성은 깨달았다.
 
 “하!”
 
 정파의 의기는 꺾였고 아직 뜻이 남은 무인들이 뭉칠 구심점은 없었다.
 
 구협회는 부족했고, 무림맹은 망가졌다. 하지만 두 곳 모두 구심점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 그렇기에 백천성주가 이 둘을 동시에 없애려는 것이리라.
 
 ‘구협회와 함께 무림맹을 일으켜 세워야 했다. 외면하지 말아야 했다.’
 
 지난 과오를 인정하는 황보성은 가슴이 쑤셨으나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도리어 황보성의 두 발은 보다 선명한 족적을 남기며 앞으로 뻗어나갔다.
 장엄한 기세를 터트리며 돌진하는 황보성을 본 백천성주는 표정을 굳혔다.
 
 “죽여라! 권왕의 죽음으로 무림맹의 끝을 고하리라!”
 
 쏴아아!
 
 백천성주의 고함에 수많은 고수의 병장기에서 일제히 빛무리가 터졌다. 그러자 사방에 내리깔린 어둠이 순간적으로 밀려났다.
 
 머리 위로 수십, 수백의 절기가 셀 수 없이 쏟아지니, 마치 유성우와 같았다. 온갖 경험을 한 황보성의 눈에도 너무나 아득한 광경이었다.
 황보성은 도리어 전신 근육을 사납게 부풀렸다. 포기라는 단어는 황보성에게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었다.
 
 ‘지난 과오를 깨달았다면 이제 고쳐야지.’
 
 황보성은 그 기회를 스스로 만들 셈이었다. 지금까지 단련해온 주먹으로.
 
 어느새 눈 앞을 가리는 환한 빛을 향해 그저 느릿한 속도로 주먹을 내질렀다.
 육체는 이미 한계에 달해 죽어가고 있음에도 수천, 수만 번을 내질렀던 주먹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정권(正拳).
 
 권왕(拳王)이 지금껏 걸어온 무도(武道)의 상징.
 황보성은 마지막까지 권왕으로서 죽고자 했다.
 
 마지막 주먹이 올곧게 뻗어나가 빛무리를 터트렸다.
 
 권왕의 시야가 서서히 희미해질 때.
 
 ‘이상하다.’
 
 생전 처음 보는 신비로운 빛.
 그 빛을 보니 마치 별세계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황보성은 저도 모르게 그 빛을 향해 조금씩 손을 뻗었다.
 
 권왕의 손과 빛무리가 마침내 닿는 순간.
 
 사아아!
 
 상서로운 무지갯빛으로 산란하는 휘광이 권왕을 품어 안았다. 느껴보지 못했던 황홀함.
 
 권왕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황보 부대주. 황보 부대주?”
 
 귓가로 들리는 카랑카랑 목소리에 황보성의 눈매가 떨렸다.
 
 “황보 부대주... 이봐! 황보성!”
 
 황보성은 눈을 번쩍 떴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천장이었다. 무림맹의 뇌옥이었다.
 
 “징계로 뇌옥에 갇힌 인사가 여유롭게 잠이나 퍼질러 자고 있군.”
 
 연달아 귓가로 쏘아대는 음성에 황보성은 그제야 천장에서 눈을 뗐다. 철창의 밖에 있는 중년인을 유심히 쳐다보던 황보성의 굵은 눈썹이 치솟았다.
 
 “형법당주?”
 
 이미 죽은 인물이 왜 멀쩡히 살아서 툴툴대고 있단 말인가. 눈앞에 있는 형법당주의 머리를 으깬 장본인이 바로 본인이니 착각일 리는 없었다.
 
 ‘죽어서 저승에 왔나?’
 
 그게 아니라면 이 상황이 설명되지 않았다.
 머릿속이 혼란해진 황보성이 무심코 시선을 내렸다. 왜 갑갑한 느낌이 드는가 했더니 두 팔은 수갑으로 봉해진 상태였다.
 
 “이건 또 뭐야.”
 
 귀찮은 눈으로 수갑을 내려다보던 황보성은 그대로 힘을 줬다. 두 팔의 근육이 요동치며 부풀더니 수갑이 잘게 떨렸다.
 
 끼긱!
 
 수갑이 애처로운 쇳소리를 토하더니 조금씩 비틀어지는 게 눈에 보였다.
 
 “어? 그만!”
 
 기겁한 형법당주가 급히 철창을 열고 들어와서 작은 열쇠를 꺼냈다.
 
 “오늘로 징계도 끝이니 기다리면 알아서 풀어줄 것을 왜 부수려 하는가?”
 
 내공이 제압된 상태에서 순수한 외공으로 수갑을 비트는 근력.
 형법당주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형법당주는 이미 망가진 수갑을 보며 혀를 차면서도 급히 말을 덧붙였다.
 
 “징계는 끝났으나 맹주님과 면담이 있네.”
 
 황보성이 또 돌발행동을 벌이는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맹주와 면담?”
 
 “하아. 절검문의 일 말일세. 자네를 석 달 동안 뇌옥에 썩게 만든 그 일 말이야. 잊었나?”
 
 살짝 벌어졌던 황보성의 입술이 꾹 닫혔다.
 
 절검문. 잊을 리가 없었다. 황보성이 썩어가는 무림맹에 질려서 떠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으니. 하지만 이 일은 한참이나 과거에 벌어진 일이 아닌가.
 
 “이건 마치...”
 
 어떤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황보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곤 재빠르게 내부를 관조했다. 빠르게 확인을 마친 황보성은 깊은 한숨을 흘렸다.
 
 권왕이라 불렸던 절대고수의 내부치고는 너무나 초라했다. 내공, 외공, 전체적인 상태가 모두 그러했다. 그저 후기지수의 수준에 불과했다.
 
 ‘설마 내가 과거로 온 건가?’
 
 이미 죽었던 형법당주도 그렇고, 절검문의 일도 마찬가지. 과거에 이미 지나갔던 일이 다시 재현되고 있었다.
 
 ‘어떻게?’
 
 황보성은 마지막 순간, 온 세상을 가득 채웠던 신비로운 무지갯빛을 떠올렸다.
 단순히 무인들이 쏟아낸 검기나 권기의 다채로운 빛깔이 합쳐졌다 하기에는 느껴지는 격이 달랐다.
 무지갯빛에 휩싸인 순간, 마치 다른 세계에 선 듯한 상서로운 이질감이 아직도 생생했다.
 
 “이봐. 황보 부대주. 괜찮나?”
 
 황보성이 침중한 얼굴로 꿈적도 하지 않자 옆에서 지켜보던 형법당주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형법당주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황보성은 벌떡 일어났다.
 
 “갑시다. 맹주전으로.”
 
 과거로 돌아왔다는 가정이 떠오르자 지금의 모든 상황이 알맞게 들어맞았다.
 
 황보성은 일단 부딪쳐 보기로 했다.
 쓸데없이 앉아서 고민하기보다는 직접 겪어보는 것이 성미에 맞았다.
 
 ‘만약 정말 과거로 돌아온 것이라면... 전생의 과오를 바로잡아야겠지.’
 
 한껏 복잡해진 얼굴로 지하 뇌옥에서 올라와 형법당을 빠져나온 황보성이 눈을 찌푸렸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볕이 너무나 밝은 탓이었다.
 그 밝은 햇빛을 등지고 삐딱하게 서 있는 미인을 보고 황보성은 다시금 확신했다.
 
 권왕이었던 자신이 지금 무림맹 철풍대 부대주 시절로 회귀했다는 것을.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품에서 숨을 거뒀던 저 여인을 다시 만날 리 없었다.
 
 그 기쁨에 반응하듯 황보성의 어깨 근육이 꿈틀거렸다.
 
 “이 멍청한 부대주...”
 
 까칠한 미인의 목소리에 황보성은 눈을 찌푸리면서도 입꼬리를 올렸다. 여러 감정이 복받친 탓이었다.
 
 “연 누님.”
 
 “연 누님?”
 
 황보성의 목소리를 들은 독고연은 아미를 좁히더니 싸늘한 웃음을 흘렸다. 그와 동시에 독고연의 옷자락이 거칠게 나부꼈다.
 
 쿵!
 
 시원하게 다리를 뻗어 진각을 밟은 독고연의 전신에서 흉포한 기세가 움텄다.
 
 “오랫동안 햇빛을 못 봤더니 미쳤니?”
 
 “음?”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 튀어나왔다.

댓글(21)

풍뢰전사    
내부에서 바꾼다라 ... 기존의 권력을 누가 놓으려 하지 않는 이상 힘들듯 ... 건필하세요
2022.05.14 18:51
aurola    
잘 보고 갑니다.
2022.05.16 00:29
kr***    
회귀까지 했는데 바꾸는게 불가능은 아니겠죠. 정치질이 이 작품의 묘미가 되려나요. 검이 아니라 권이어서 망설여졌는데, 일단 첫편만 봐도 막 끌림.
2022.05.24 16:13
도수부    
건필입니다
2022.05.26 15:55
세비허    
잘 보고 갑니다 건필 하세요
2022.05.28 05:31
학교    
재미있어요.
2022.05.28 12:26
as********    
잘 보고 갑니다.
2022.05.29 15:32
gutanaridd    
21화까지본감상 재밌음 몰입도좋음
2022.05.31 01:46
물물방울    
최후의 1인이 회귀트럭도 없이 마구마구 회귀를 하는군요. 그리고 연재시작을 축하합니다. 시작은 미미해도 끝은 창대하리라.
2022.06.05 03:10
가온빌런주    
회귀무협이군요,. 잘 보겠습니다.
2022.06.06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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