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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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함무라비왕이다.

2022.05.11 조회 5,109 추천 69


 다음 재판을 시작하기 전, 법정 샤마쉬를 둘러보았다. 흑풍 길드 지하에 만들어 놓은 공간.
 
 "비슷하군. 잘 만들었어."
 
 내 기억 속에 있는 바빌로니아 샤마쉬 신전과 유사하다. 아치형의 입구. 옆에는 반인 반수인 라마수가 조각되어 있다. 천정은 높고, 바닥은 회색. 내 의자 위치는 약간 높다. 그리고 습한 지하실 냄새가 난다.
 
 "이거 놔.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한 사람이 끌려 나온다. 익숙한 얼굴. 연쇄 살인범 김영순. 각성 후에는 살인청부업자로 활동했다.
 
 "다시 만났군."
 
 "당신 나 알아?"
 
 물론 김영순은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야차의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에. 놈이 볼 수 있는 건 바빌로니아 숫자 '1'이 쓰인 이 검은색 가면뿐.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지."
 
 당산 파출소에서 내가 직접 잡아넣었다. 정식 등급은 안 받았지만 S급 헌터로 추정. 마력 탄환을 사용하며, 회복능력이 없었더라면 난 이미 죽었을 것이다. 경찰 헌터단 박힘찬 총경도 잡았다 놓친 적이 있고, 피해자를 개 먹이로 던져 주는 등 잔혹함이 상상 이상.
 
 "뭐야? 흑풍길드놈들이 왜?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난 당신들하고 엮인 일이 없어."
 
 양 옆에 내 재판을 도와줄 엘리트 길드원, 마르둑 12명이 도열해있다. 하지만 전혀 주눅 들지 않는 모습. 나는 김영순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비셔스 길드 소속 변호사가 실력이 좋군. 그렇게 사람을 죽이고도 무죄로 나올 수 있다니."
 
 "나에 대해 조사 좀 했냐? 그래. 난 죄 없어. 나라가 그렇게 인정했어. 근데 왜 니가 난린데? 이 가면 쓴 미친놈아!"
 
 엄숙한 공간에 경박한 놈의 목소리가 울린다.
 
 "정말 죄가 없다고 믿는 것이야?"
 
 "아. 진짜라니까!"
 
 거짓말을 하다 보면 자신마저 속이는 경지가 온다. 진짜 죄가 없다는 듯 행동한다.
 
 "심신 미약, 증거 불충분, 독직폭행, 미란다 원칙을 무시한 체포는 정당한 공무집행이 아니라는 2000년 7월 4일 판결을 인용했네. 그 잘난 비셔스 길드 소속 변호사가."
 
 비셔스 길드 변호사가 무죄로 주장한 근거를 봤다. 어차피 결과는 정해진 재판. 구색 맞추기에 불과한 이유들.
 
 "죄는 모르겠고 어쨌든 무죄라고."
 
 "근데 이상한데... 분명 나는 미란다 원칙 고지했었는데."
 
 "니가 뭘 알아? 법관이 안 했다고 인정했고, 네가 현장에 있었던 것도 아니잖아. 대형 길드장은 사람 막 데려다 죽여도 되는 거냐?"
 
 썩었다. 내가 직접 체포했는데, 비셔스 길드 변호사를 쓰니, 했던 사실도 없어지고 무죄가 나온다.
 
 "음. 마르둑들은 잠시 물러가라!"
 
 "옙!"
 
 마르둑들이 사라지자, 샤마쉬에는 제1집정관 칸과 제3집정관 한동현만 남았다.
 
 "내가 현장에서 분명 고지했었다."
 
 나는 야차의 가면을 벗었다.
 
 "자꾸 현장 이야기를 해. 어떻게 네가 거기에 있어!.. 너... 너는? 곰벌레 경찰?"
 
 '아차'싶은 표정으로 날 본다.
 
 "기억나는구나. 연쇄살인범이자 살인청부업자 김영순."
 
 그는 당황한 듯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럼... 네가 함무라비? 근데 그때는 왜 공격을 안 한 거야?"
 
 "너는 내가 묻는 말에만 답하라. 아니면 입을 부술 것이다."
 
 내 말에 칸이 한 발자국 나선다. 그 흉흉한 기세에 김영순은 입을 닫았다. 강한 자에게 엎드리는 본능.
 
 "비셔스 길드에게 무엇을 해줬길래 너를 빼준 것이냐?"
 
 "말해주면 안 죽일 거...입니까?"
 
 칸의 눈치를 보며 드디어 존대한다.
 
 "음. 곱게 죽여준다. 어차피 너는... 어디 한번 보자. 개안(開眼)."
 
 실체진실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 죽인 사람 숫자 127명. 어린아이와 여성도 가리지 않았다.
 
 "127명 죽였네. 휘말려서 불구가 된 사람은 55명. 맞지?"
 
 "어... 떻게?"
 
 정확한 숫자를 맞췄다. 이쯤 되면 피할 수 없다.
 
 "이래도 살기를 바라?"
 
 나는 일어서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마력을 서서히 올렸다. 충분히. 압도적으로. 이 놈도 헌터이기에 마력을 느낄 수 있으리라.
 
 "어떻게... 이런..."
 
 무릎을 꿇는다. 경험해본 적 없는 강대함. 도망칠 수도 없다. 마치 상자 안에 갇힌 느낌. 숨이 막히고, 소름이 돋는다. 다른 차원의 격.
 
 "살려주십시오."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되었다. 살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저자의 선처뿐이다.
 
 "네 정보를 들어보고 내가 판단한다. 유용한 정보라면 살려 줄 것이다."
 
 "비셔스 길드에서 컨택이 들어왔습니다. 제가 죽인 자들 시체를 처리해주겠다고. 단, 조건은 사람을 죽일 때 심장은 상하지 않게 해 달라고."
 
 "심장을 상하지 않게 죽이고, 연락하면 시체 처리를 도와주겠다?"
 
 "예. 그렇습니다. 맞아요."
 
 필사적이다. 살기 위해서. 본인은 무고한 사람들을 쉽게 죽여놓고, 살고 싶어 한다.
 
 "사람 심장이 왜 필요하지? 시체들은 살려서 조직원으로 쓴다지만. 그러기 위해선 심장이 필요한 것인가?"
 
 "저는 진짜 모릅니다. 죽은 사람들을 살려요? 전 그것도 몰랐어요."
 
 자신의 손으로 죽인 자들이 돌아다닌다. 김영순은 그 끔찍한 소리에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렇군. 비셔스가 누군지는 아나?"
 
 "S급 헌터... 아니, SS급인가? 아무튼 그 쯤되는 헌터로 알 고 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정말."
 
 하긴, 비셔스가 알려줄 리가 없다. 비셔스의 정체도 모르는 자. 더 이상 알아낼 것은 없다.
 
 "예. 진짜 몰라요. 그 이상은.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약속은 지키셔야지요?"
 
 김영순은 내 눈치를 보며 말한다.
 
 "고한다. 함무라비 법전 제1조. 살인죄에 대한 처벌과 동해보복의 원칙에 의거, 죄인을 사형시키고 그 재산은 피해자 가족들에게 속한다."
 
 나는 단호하게 선고했다.
 
 "뭐야? 살려주신다고 하셨잖습니까?"
 
 "정확히 14명."
 
 "예?"
 
 "네가 살려준다고 하고 죽인 피해자 숫자."
 
 "무슨..."
 
 "3명."
 
 "예?"
 
 "개 먹이로 던져준 피해자. 개를 세 마리 키우네."
 
 "씨발!"
 
 김영순은 일어나서 손을 나에게 뻗었다. 어차피 살긴 글렀다. 마지막 발악. 마력을 최대한 올렸다. 온몸이 터지도록. 기습은 약자가 강자를 이길 수 있는 전술. 숨을 최대한 들이마셨다. 지하의 습한 공기가 폐 속에 가득 찼다.
 
 "마력 탄환. 궁극! 다연발."
 
 여기에 모든 걸 쏟는다.
 
 -두. 두. 두. 두. 두.-
 
 -펑. 펑. 펑. 펑-
 
 하지만 그의 마탄은 내가 두른 마력을 뚫지 못했다. 기습이 먹힐 차이가 아니었다. 압도적인 격차.
 
 "흑호."
 
 나는 흑호를 소환했다.
 
 -크와왕!-
 
 발에서 어깨까지의 키가 약 3미터. 거대한 검은 호랑이가 울부짖는다. 김영순은 더 이상 저항의 지를 상실한 채, 주저앉았다.
 
 "동해보복의 원칙. 최대한 같은 고통을 준다. 네 녀석이 피해자에게 한 방식대로. 산 채로 잡아먹히거라."
 
 "크크큭! 고상한 척하지 마. 너도 나와 같은 놈이야. 살인마."
 
 갑자기 실성한 듯이 웃는다. 죽음을 각오한 마지막 허세. 꼴 보기 싫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대답 잘하면 노동형으로 대체해줄게."
 
 허세 부리던 김영순의 눈이 빛났다.
 
 "무... 무엇입니까?"
 
 살 희망을 준다. 줄을 던졌다. 그는 필사적으로 잡는다.
 
 "피해자를 고를 때, 무슨 선정 기준이 있어?"
 
 "그런 건 없습니다. 그냥 우연히, 의뢰받아서. 그렇게 선정한 겁니다."
 
 "나도 마찬가지야. 피해자한테만 공감하고 가해자에게 필요 이상으로 분노하는 선택적 사이코 패스. 너도 운 나빠서 내 피해자가 됐을 뿐이야. 뭐 더 할 말 있나?"
 
 "그럴 수가... 솔직히 말했으니 살려주세요."
 
 허세는 모두 깨지고 본모습이 나왔다.
 
 "정확히 14명. 아까도 말했지만 네가 살려준다고 하고 죽인 피해자 숫자."
 
 "씨발! 날 가지고 놀았어."
 
 "먹어. 다리부터."
 
 -크왕!-
 
 "으아악"
 
 "죽어가면서 피해자들의 고통을 느껴보라고."
 
 처참하게 일그러진 얼굴. 삶의 마지막을 직면한 살인범. 피해자들의 고통을 이제야 공감하리라. 아주 조금이나마.
 
 "안돼! 살려줘!"
 
 김영순의 피 끓는 절규가 샤마쉬 높은 천정에 울려 퍼졌다.

댓글(8)

k2***********    
흥미롭네요 잘 읽고 갑니다.
2022.05.13 13:12
행운™    
감사합니다.
2022.05.13 16:13
bomjj    
너무 재미있네요. 다음회가 궁금합니다
2022.06.03 21:57
행운™    
읽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ㅎㅎ
2022.06.03 22:20
極惡無道    
글 시원하고 좋습니다.굿 (^_^)乃
2022.08.19 08:00
행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ㅎㅎ
2022.08.19 10:45
g96640    
음 완결하고 발견해서 다행이다ꉂꉂ(ᵔᗜᵔ*)
2022.09.20 22:24
행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ㅎㅎ
2022.09.20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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