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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성의 여포(1)

2022.05.12 조회 36,019 추천 759


 "좆됐다."
 
 눈 깜짝할 사이 세상이 완전히 변해 버렸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일인지
 원인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이것 하나 만은 확실하다.
 
 "나는 지금 단단히 좆됐다."
 
 분명 어제는 변호사 시험 발표일이었다.
 가채점 결과가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상당히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하비성(下邳城), 현판에 적혀 있는 글씨는 이곳이 어디인지 말해주고
 방 한켠에 놓여있는 화려한 메뚜기 더듬이 모양의 투구와 방천화극은 내가 누구인지 말해준다.
 
 여포. 자는 봉선으로 삼국지 최강의 무장이다.
 호로관 앞에서 혈혈단신으로 18로 제후군을 막아낸 용장이다.
 
 '문제는 여기가 호로관이 아닌 하비성이라는 거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여포는 이곳 하비성에서 최후를 맞는다.
 조조군은 여포를 포위하고도 마땅한 대책을 찾지 못하자 수공을 통해 하비성을 물바다로 만들었고
 이후 여포는 부하들의 배신으로 목숨을 잃는다.
 
 '하아...'
 
 창문 너머로 보이는 물에 잠긴 하비성의 풍경.
 내 최후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평생 믿지 않던 하늘을 이제서야 원망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살아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내가 역사를 알고 있다는 점이다.
 조조군의 포위에도 불구하고 하비성은 그리 쉽게 함락당하지 않았다.
 부하들의 배신만 없다면 한동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여포를 배신한 자들. 그게 누구였지?'
 
 중고등학교 때 많이 읽었던 소설 삼국지.
 없던 기억도 만들어 낼 기세로 그때의 기억을 더듬었다.
 
 '후성! 분명 후성이었다!'
 
 배신자는 한 명이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계기가 된 것은 후성이었다.
 
 '우선 배신을 막아야 한다.'
 
 분명 후성이 말 도둑을 잡고, 그 뒤풀이로 술을 마시다가 여포에게 맞는다.
 이에 원한을 품고 여포를 배신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확인해야 한다.'
 
 마음이 급해진다.
 그리고 그런 마음보다 더 급하게 누군가 방으로 들어온다.
 
 쾅!
 
 방문을 들어온 자는 대뜸 고성으로 화를 낸다.
 
 "장군! 도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여포에게 이렇게 대할 자가 있나?'
 
 "가만히 있지 마시고 뭐라고 답이라도 해 보십시오!"
 "병사들 앞에서 후성장군을 벌하시다니. 제가 분명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장군!"
 
 '이건 뭐지?'
 
 이 사람이 누군지는 알겠다.
 그런데 이 관계는 뭐지?
 진궁.
 여포 최후의 충신 중 하나다.
 그런데 이런 태도는 아니지.
 그래도 내가 주군 아닌가?
 
 "이봐 진궁."
 
 약간의 노기가 섞인 차분한 목소리에 흥분한 진궁이 멈칫한다.
 
 "그 무슨 말을 하려는 지는 알겠는데 자네 태도가 그게 뭔가?"
 
 21세기 꼰대력으로 3세기의 참모를 압박한다.
 
 "네?"
 
 "주군이 뭔가 일을 했으면 그 속뜻을 알려고 노력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으면 반성하며 공손히 그 이유를 알려고 하지는 못할망정
 감히 주군의 방문을 쾅! 소리 나게 열고 들어와 고성을 내다니
 그게 군에 종사하는 참모의 바른 자세인가?"
 
 "아..."
 
 진궁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당황한 채 눈을 크게 떴다.
 
 "내가 후성을 벌한 것은 그가 군율을 어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네의 행동 역시 군율에 반하는데 같은 벌을 받고 싶은 것인가?"
 
 "죄... 죄송합니다. 주군."
 
 진궁은 어리둥절했다.
 여포가 이렇게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던가?
 
 "내가 후성을 벌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네."
 
 "혹 부족한 소신에게 그 이유를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자네가 내 뜻을 읽지 못했다니 실망스럽군."
 
 진궁의 표정이 한순간에 어두워진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여포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는 것은 평생 잊지 못할 굴욕일 것이다.
 그러자 진궁에게서도 반항기가 올라온다.
 
 "그럼 후성장군이 지키던 동문은 어떻게 하실 계획이십니까?"
 
 네놈이 꼬장을 부리는게 아니라면 어디 한번 대답해 봐라.
 그런 진궁의 의도가 느껴진다.
 
 후성은 여포군의 중요 장수이다.
 장료, 위속, 송헌, 후성 여포의 대표 4장군이지만 지금은 각자 맡은 역할을 다 하기에도 벅차다.
 후성의 빈자리는 그만큼 치명적인 것이다.
 
 "후성의 병력과 임무는 모두 고순에게 인계하게."
 
 "고순장군 말입니까?"
 
 "문제 있나?"
 
 "아... 아닙니다."
 
 고순은 진궁이 이전부터 꾸준히 추천하던 인재였다.
 하지만 아무리 말해도 받아주지 않던 여포에게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분 것인가.
 
 "그동안의 공을 고려해서 이번 무례는 용서해 줄 테니 물러가 있게."
 
 "네... 알겠습니다."
 
 진궁은 여전히 의문이 모두 해소되지 않은 상태로 방을 나섰다.
 
 '하... 진짜 좆됐다.'
 
 이미 후성을 팼단 말인가?
 늦어도 너무 늦었다.
 이렇게 된 이상 야반도주가 유일한 답이다.
 여포를 배신한 자는 후성 하나가 아니다.
 후성의 주도로 송헌, 위속이 모두 여포를 배신해서 조조의 앞에 가져다 바친다.
 
 그게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당장 오늘 밤에 시행할 수도 있다.
 
 '잠깐. 지금 나는 어떤 상태지?'
 
 분명히 나는 여포보다 똑똑하다.
 애초에 타고난 재능을 차치하더라도 현대의 교육과정을 밟았다면 이 시대의 천재들보다 훨씬 많은 지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즉 나와 여포는 같으면서도 다른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력은 어떠한가?
 
 여포의 최대 강점이자 현재 여포군을 유지시키는 구심점은 바로 여포 일신의 무력이다.
 그런데 만약 내 두뇌가 여포의 두뇌와 치환된 것처럼 내 신체가 여포의 신체와 치환된 것이라면?
 
 '끔찍하다...'
 
 오랜 변호사 시험 생활은 내 신체를 평범한 대한민국 남성보다 훨씬 낮은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당연히 그런 수준이라면 이 지옥 같은 삼국지 세계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급격히 하락한다.
 
 조심스럽게 방천화극으로 다가가 들어본다.
 이 시기에 무기들은 그 파괴력을 높이기 위해서 무게를 늘릴 수밖에 없었다.
 그 유명한 청룡언월도, 장팔사모 와 같이 방천화극도 평범한 사람이 들기 어려운 무게를 자랑했다.
 
 '제발...'
 
 방천화극을 쥔 손에 힘을 주기 직전까지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제발 가벼워라 제발...'
 
 그리고 마침내 양팔에 힘을 주고 방천화극을 들었다.
 
 '가볍다!!!!!!!!!!!!!"
 
 속으로 쾌재를 질렀다.
 무거워야 할 방천화극이 너무나도 가볍다.
 즉, 이 신체는 여포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생각해보면 내 신체였다면 진궁이 나를 여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희망이 보인다. 살 희망이...'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이내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 수 없는 묘한 어색함.
 그렇다.
 방천화극을 들었지만, 그 모습이나 자세가 너무나 어색했다.
 
 '설마... 머리만 치환된 것인가?'
 
 원래의 여포에서 머리만 나로 바뀌었다는 가정.
 그 가정이 맞아 떨어진다면 여포가 가지고 있던 전투기술에 대한 모든 지식들도 사라진 상태다.
 즉 나는 여포만큼 힘만 센 로스쿨생이다.
 
 '내가 전투를 할 수 있을까?'
 
 다행히 승마는 해본 적이 있으니 말을 타는 것은 어찌어찌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마상 전투?
 이건 완전히 차원이 다른 소리다.
 게다가 여포는 신궁으로 유명한 자인데 활을 쏠 일이 생긴다면?
 끔찍하다.
 당장에 내가 여포가 아니라는 것이 들킬 것이고, 누군가 고문을 통해 내 정체를 알아내려 할 수도 있다.
 
 '하 씨... 이거 사면초가인데...'
 
 하비성을 포위한 조조
 방금 방에서 나간 최측근 진궁
 호시탐탐 배신을 준비 중인 후성, 송헌, 위속
 내가 여포가 아닌 것을 눈치채면 어떻게 행동할지 예상할 수 없는 장료, 고순 등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였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그보다 긴 고민이 있었지만 무엇하나 해결되지 않았다.
 시녀가 가져온 식사는 차갑게 식어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하... 밥맛도 없고;;'
 
 역시나 정적을 깨는 것은 진궁이었다.
 그는 입술을 조금 깨물면서 무언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장군의 뜻을 유추해 보았습니다."
 
 '내 뜻?'
 
 진궁의 말에 의문이 든다.
 그냥 꼬장이었는데 정말 뭔가 있어 보였다는 말인가?
 
 진궁은 조용히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고육지계(苦肉之計)'
 
 어딘가 익숙한 네 글자의 한자가 적혀 있었다.
 
 '어디서 봤더라?'
 
 재빨리 기억을 더듬는다.
 그래 분명 거기였다.
 삼국지 최대의 전투 '적벽대전'
 
 황개는 일부러 주유와 다툰 후 거짓 항복을 통해 적벽대전을 완성시켰다.
 그때 황개가 쓴 계책이 바로 고육지계였다.
 
 '그렇다면 황개가 후성인가?'
 
 진궁은 칭찬받기를 기다리는 학생처럼 조용히 내 표정을 읽으려 했다.
 
 "과연 공대는 내 뜻을 읽고 있었군."
 
 그제야 진궁의 표정이 밝아진다.
 
 "장군의 높은 뜻을 헤아리지 못한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괜히 미안한 미음이 들지만, 연기를 이어 나갔다.
 
 "그럼 후성 장군도 이를 알고 받아들인 것입니까?"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후성, 송헌, 위속 이 세명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네.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는 말이 있지."
 
 "후성장군의 배반을 유도하시는 거군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검지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다 대었다.
 
 "쉿."
 
 진궁은 깜짝 놀라며 자신의 양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고순이 자신의 병력을 빼앗았으니 후성은 애가 탈거야. 자네가 그물을 치게."
 
 "네. 장군."
 
 진궁은 정말 오랜만에 좋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댓글(43)

35******    
시작이 산뜻한데요
2022.05.13 07:33
Woodang    
감사합니다. ㅎㅎ
2022.05.13 08:29
양마루    
건필
2022.05.13 22:57
Woodang    
감사합니다!
2022.05.14 19:50
굽네인간    
진궁은 여포와 완전 상하관계보다는 여포보다 한급 아래의 파트너 관계에 가까움
2022.05.14 03:01
Woodang    
그렇군요. 앞으로 작성에 참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2.05.14 19:50
묘한인연    
뒷풀이//뒤풀이 고순에게 인수하게//인계하게??
2022.05.15 19:23
땃쥐나리    
기대되는 삼국지
2022.05.16 10:25
Woodang    
감사합니다. 최대한 잘 써보겠습니다!
2022.05.16 13:09
n1*************    
수많은 삼국지물을 봤는데 초반 신선한거는 탑쓰리들어가네요
2022.05.17 0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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