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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혈황제가 애견인이 된 사연 001화

2022.05.17 조회 30 추천 1


 밤의 정령의 귀여운 손짓이 나무를 검게 물들이는 어느 깜깜한 날. 나무 오두막에 옹기종기 모인 어린아이들이 저마다 각색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남자아이는 겁에 질려 입술을 꾹 다물었고 여자아이는 늙은 아낙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아낙은 핏빛 황제가 나오는 동화책을 읽었다.
 동화책 속 찬란한 황제의 머릿결이 금빛에서 핏빛으로 일렁일 때마다 적군의 목이 댕강, 댕강 나뭇잎을 뭉쳐 만든 공처럼 가볍게 하늘 위로 도약했다.
 
 “빨리 안 자면 붉은 황제가 와서 댕강, 한다!”
 
 늙은 아낙이 두 손을 호랑이 발톱 모양으로 들어 올리고 겁주면 아이들은 까르륵, 소리를 내며 잠자리로 달아났다.
 
 “근데 정말 붉은 황제는 열 살에 마수를 잡았어요?”
 “잡았다 뿐이겠어, 어마어마한 황제는 새틴산맥 따위 단숨에 날아올라 쫓아오지!”
 
 아낙이 아이들을 따라 달리니 그들이 새된 비명을 지르며 침대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때 오두막의 작은 문이 어떠한 허락도 없이 벌컥 열렸다.
 맨발에 허름한 옷차림으로 뒷머리를 긁으며 들어온 것은 ‘하렌’이었다. 그는 소란스러운 아이들을 보며 피곤하다는 얼굴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어머, 왔어요?”
 
 하렌을 발견한 늙은 아낙은 아이들을 쫓아 삐걱거리는 나무판자 위를 달리다가 멈춰 섰다. 아이들은 어느새 이부자리에 들어간 채 호기심 가득한 두 눈만 빼꼼 내놓고 있었다. 하렌과 눈이 닿으려 하자 아이들은 서둘러 눈을 감아 버리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저들끼리 숨죽여 킥킥댔다.
 
 “예, 왔습니다.”
 “이번에는 오래 나가 계시는 것 같더니 이제 완전히 끝이 났나 봐요.”
 
 ‘술 냄새가 고약해!’
 
 아낙의 말을 이어 이불 속에서 남자아이가 작게 떠드는 소리가 하렌의 귀에 똑똑히 잡혀 들어왔다. 그러나 모른 척 고개를 내젓고 마는 그였다.
 
 “다른 분들은 함께 안 왔나 봐요?”
 “예. 술판이 길어질 모양이라. 그럼 평안한 밤 되십시오.”
 “그래요. 긴 전투로 피로했을 텐데. 어서 쉬시지요.”
 
 하렌이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아낙이 옆으로 비켜서며 길을 터 주었다. 그가 작은 오두막을 가로지르는 소리가 삐걱삐걱 크게도 울렸다. 침대가에 다다른 하렌은 손을 뻗어 이불 밑에 있을 아이의 머리통을 거칠게 어루만져 주고 그 옆의 문으로 빠져나갔다.
 등 뒤로 문을 닫자 앞에 거대한 산줄기가 나타났다. 밤의 신의 가호를 받는 듯 어둠에 먹힌 세상 속에서도 한 치의 존재감도 잃지 않은 당당한 자태였다. 그곳에서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과 산새의 울음이 마치 그를 유혹하는 듯했다.
 
 “하아······.”
 
 깊게 숨을 들이쉰 하렌은 깊은 숲속에서 전해져 온 상쾌한 기운을 제 몸속에 들이려 노력했다. 두 눈을 감고 들판 가운데 선 하렌의 몸을 거대한 새틴산맥의 정기가 휘감는 듯했다. 일순 그가 검은 공기를 가르고 노란 눈을 번뜩였을 때 그는 더 이상 인간의 자태를 취하고 있지 않았다.
 그가 떠나간 오두막 안에서는 붉게 타오르는 모닥불 앞으로 바닥에 버려진 동화책이 불의 연기에 속살을 펄럭이고 있었다.
 그 안에는 주홍빛 불그림자에 잠식된 황제의 잔상과 황제의 발밑으로 댕강 잘린 채 짓밟힌 검은 개의 머리가 피처럼 붉은빛을 뚝뚝 떨구고 있었다.
 
 
 * * *
 
 
 ‘개’로 변한 하렌은 선술집 위에서 흔들리고 있는 ‘비스티아’ 팻말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예상보다 꽤 긴 전투로 지쳤을 법도 한데 그들은 여태 술판이 한창이었다.
 거대한 날붙이가 맞부딪치며 자아내는 굉음과 전사들의 함성. 날붙이가 예리하게 살을 가르는 사악, 소리와 아릴 정도로 후각을 자극하는 쇠 비린내를 잊게 할 것이 저들에게는 음주인 듯했다.
 ‘나한테는 전부 흙냄새만 못하지만.’
 맨발을 축축하게 적시는 진한 흙 내음을 음미하며 하렌은 그리 생각했다. 더 망설일 것도 없이 그는 당장 거대한 새틴산맥 속으로 뛰어들었다.
 마수의 잦은 출현으로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된 지역, 새틴산맥. 그곳은 여전히 일반인에게는 목숨을 걸고 발을 들이밀어야 하는 곳 중의 하나였지만, 하렌에게는 동네 뒷산만큼 편하고 익숙한 곳이었다.
 그의 기억이 온전한 순간부터 이곳은 그의 터전이었다. 새틴의 모든 곳에서 뿜어져 오는 냄새는 어쩐지 그리운 느낌을 잔뜩 안겨 주는 것이었다.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거친 발바닥에 차오르는 젖은 흙의 감촉과 털을 간질이는 바람 모두를 즐겼다. 오늘처럼 한잔 거나하게 걸치고 난 뒤에는 사람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새틴산맥의 질주를 참을 수가 없었다.
 어느새 깊은 숲속 호수에 도착해 시린 표면을 눈에 담아냈다. 황홀감에 젖은 그는 풀밭 위에 털썩 주저앉아 빤히 호수를 감상했다. 온통 검게 물든 풀도 하얀 달빛에 빛나는 호수도 전부 만족스러웠다.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분위기가 호수를 점령했다. 한참 구경하다 의례 행사처럼 가까이 다가서 표면을 핥아 올렸다. 술기운이 깃든 목울대는 심한 갈증을 유발했고 청량한 호숫물은 끝내 주게 맛있었다.
 
 “!!”
 
 한참을 갈증 난 목을 축이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그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펄쩍 뛰었다. 전혀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옆쪽에 검은 인영이 나타나 있던 것이다.
 기척에 예민한 ‘개’의 모습으로도 기척 한 자락 느끼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마주한 인영에 털에 감긴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이곳은 마수가 거주하는 곳이기도 했으나 한창 전쟁 시 묻어 놓은 트랩 탓에 사람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금방 경계의 빛으로 몸을 낮추자 그쪽에서도 기척을 느낀 것인지 움직임을 멈춰 냈다.
 
 “누구냐.”
 
 서늘한 목소리는 밤의 공기를 사악 가를 정도로 냉담했다. 그 시린 목소리에 움찔한 몸이 절로 뒤로 움직였다. 그러자 털이 풀에 스치는 바스락 소리가 팽팽한 공기를 가득 메우고 말았다.
 이런, 하고 몸을 피할 새도 없이 하렌이 서 있는 위치로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날아왔다.
 하렌은 거의 본능적으로 몸을 한껏 낮춰 머리 위를 스쳐 가는 섬광을 피했다. 바르르, 정확히 등지고 서 있던 나무에 꽂힌 단검이 몸을 떨었다.
 그를 확인하자 몸이 긴장으로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개······?”
 
 목소리가 그 존재가 가까이 다가왔음을 알렸다. 가장 밝은 별이 뜬 방향을 주시하자 곧 그쪽에서 검은 로브로 몸을 감싼 사내가 나타났다. 경계의 빛을 가득 담은 하렌의 노란 눈과 호수보다도 더 시리게 빛나는 푸른 눈이 공기 중에서 맞부딪쳤다.
 차가운 눈빛에 놀란 하렌은 네 발에 힘을 잔뜩 주고 부리나케 반대 방향으로 도약했다. 그러나 너무 급하게 움직이려 한 탓인가, 그만 몇 걸음도 채 가지 못해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하렌은 사내가 보는 앞에서 추하게 흙바닥을 뒹굴고 말았다.
 
 “깽!”
 
 젠장, 그렇구나. 잔뜩 취한 탓이었다. 그제야 깨달은 하렌은 그냥 넘어진 것도 아니며 ‘깽’ 하고 온 산맥을 다 울려 버린 제 목소리에 낯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서둘러 꼬인 네 다리를 풀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다시 달아나려 고개를 들었을 때 어느새 앞에 그가 다가와 있는 게 보였다.
 그의 깊은 눈은 올곧게 자신을 향해 오고 있었다. 오도 가도 못 한 채 몸을 잔뜩 낮추고는 경계의 빛을 잔뜩 담아서 정체 모를 사내를 훑어 냈다.
 젊어 보이는 얼굴과 검은 밤의 공기에도 가려지지 않는 금색 머리. 달빛에 반짝이는 푸른 눈.
 
 “······.”
 
 그가 도대체 왜 여기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하렌이 알기로 금발의 푸른 눈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바로 동화 속에 등장하는 아틀란스의 황제, ‘레스 닉 아틀란’. 아름다운 금빛 섬광과 함께 핏빛 안개를 불러일으킨다는 무시무시한 황제. 온통 붉게 물든 세상 속에서도 유일하게 황제의 금색 머리칼만은 고고한 빛을 잃지 않는다고 전해지고는 했다.
 하렌은 검은 로브에 분명히 박힌 금빛 단추를 노란 눈으로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즉위 후 바로 가이아의 변두리 영토를 차례대로 침투하고 있다는 소문의 잔인한 침략자.
 전장에서 그의 서늘한 푸른 눈과 마주치면 그대로 몸이 굳어 버린 후, 눈을 떴을 땐 바닥에 뒹굴고 있는 제 몸뚱어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 요즘 전장에 돌고 있는 소문이었다.
 순간 떠오른 동화 속, 잘린 개 머리를 짓밟고 있던 황제의 모습이 머릿속에 스쳐 가자 온몸이 오싹해졌다. 주춤 몸을 물린 하렌은 경계의 목소리를 냈다.
 
 “으르릉······.”
 “쉬이.”
 
 잔뜩 경계하고 있는 머리 위로 문득 그의 시야를 반쯤 가리며 커다란 손이 드리웠다.
 순간적으로 머리 위로 다가온 손에 하렌은 저도 모르게 이를 세운 채 커다란 손을 깨물고 말았다.
 콰직, 얇은 피부에 날카로운 이빨을 박아 넣는 생생한 감각을 느끼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한낱 짐승 따위가 감히 황제의 손을 문 것이다. 이건 당장에 잡혀 죽임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침묵이 더 무서워서 천천히 입을 벌려 박힌 이빨을 빼어 내자 훅, 강한 피 향이 끼쳐 올라왔다.
 
 “······.”
 
 그러나 손을 물린 당사자는 조용하기만 했다.
 그의 시퍼런 눈이 가만히 손을 내려다보았다. 잠시간 멀쩡해 보였던 그의 하얀 피부에서 일순 송골송골 붉은 피가 맺히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홍수를 이룬 것이 썩은 낙엽 위로 진한 방울을 흘려 내었다.
 슥···. 그가 찬찬히 눈을 들자 하렌은 마치 얼음에 온몸이 묶인 것처럼 꼼짝할 수가 없었다. 마주친 눈은 얼어붙은 호숫물처럼 차갑기 그지없었다. 전장에서 그와 눈이 맞으면 굳어 움직일 수 없게 된다는 말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죽나? 강한 공포심이 몸을 짓눌렀다. 하렌은 배가 축축한 땅에 가 붙을 정도로 자세를 한껏 낮췄다.
 그가 재차 손을 뻗어 오자 원치 않았음에도 죽음의 공포로 몸이 떨려 왔다. 머리로는 달려 도망쳐야 한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굳은 몸은 덫에 걸린 생쥐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질끈 감은 두 눈 위로 그의 손이 점점 가까워져 온다는 게 느껴졌다.
 
 “······!”
 
 그리고 푹, 하고 머리 위로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머리 위에 올라간 커다란 손은 좌우로 부드럽게 움직였다.
 털 사이사이로 가느다란 손가락이 얽혀 들어오는 순간 살짝 눈을 떠 올렸다. 그러자 환한 달빛 아래로 찬란한 미소와 함께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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