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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이계용자전 개정판 [E]

이계용자전 1-1

2015.05.12 조회 699 추천 4


 1. 서장序章
 
 로스터슬라프.
 물질차원의 하나로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는 차원이었다. 인간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거주민들은 태어났고 죽었다.
 그 안에서야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그게 차원 전체를 아우르는 문제는 아니었다.
 대환란(大患亂)이전까지는.
 대환란은 멸망의 전조였다. 고인 물은 썩고 변하지 않는 것은 세월의 흐름에 삭는 법이다. 로스터슬라프는 다른 차원과 교류할 수 없었다. 몇몇 현명한 이들이 다른 차원의 존재를 가설로 내놓았지만 차원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시간은 몇 천 년 동안 정체했던 차원에 징벌의 철퇴를 내리쳤다. 그 강력한 공격은 파멸로 치닫는 균열을 만들어내었고 대환란이라 부르는 재앙으로 다가왔다.
 대환란은 인간을 마물로 변이시켰다. 그것은 전염병처럼 번졌고… 막을 길은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은 마물로 변하고 다시 그 마물이 다른 인간을 변이시킨다.
 하늘에서 지켜봤다면 오셀로가 연상되었을 것이다. 추가 규칙은 마가 된 자는 다시 인간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
 한번 인외마물이 된 것은 인간으로 돌아오지 못 한다. 그것이 세계의 법칙이었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었고 인류는 멸망의 위기에 몰렸다. 대책은 없었고 미래는 한없이 암울했다.
 멸망하는 것밖에 남지 않았을 때 한 청년이 홀연히 나타났다.
 고작 20대인 청년은 누구도 할 수 없는 짓을 시작했다. 자물쇠가 있다면 열쇠도 마련되었다고 하던가. 청년은 이 사태의 해결책이었다.
 그의 측량할 수 없는 마법, 법칙을 무시하는 힘은 마물이 되었던 인간을 되돌려놓았다.
 동료들과 함께 절망하는 인간들을 일으켜 세운 청년은 최후로 세계의 봉인을 깨뜨렸다. 한 자루의 죽도로 차원의 벽을 쪼개어 다른 차원과의 교류가 가능하게 만드니 로스터슬라프는 균열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청년의 알려지지 않은 출생과 그 압도적인 힘은 무수한 추종자를 양산했다.
 열광치 않는 자가 뉘 있으랴. 피아귀천을 가리지 않고 인간임을 포기해야 되는 대환란. 그 거대한 재난이 청년영웅의 이적으로 멈췄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봉인까지 깨뜨려 재발의 불씨까지 꺼트린 것이다.
 고금을 통틀어 비할 데 없는 위업이요, 초세지걸(超世之傑)이라 불릴 만 한 업적이었다. 인색하기로 이름 높은 기어 제국의 공식사절이 제국창건황제와 같은 급으로 놓은 것만 봐도 세상이 청년에 대한 평가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대환란을 막아낸 청년의 거취에 모든 이의 관심이 쏠렸다. 청년을 추종하는 무리는 구름처럼 많았고 청년 자신의 능력도 역사를 새로 쓰기에 충분했다. 그의 한마디에 사람들은 목숨까지 버릴 각오를 하고 있었다. 인류를 멸망직전까지 몰아넣었던 대환란, 사람을 마로 변이시키는 괴란에서 인류를 구한 대영웅, 그의 말이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 없었다.
 대륙통일을 원한다면 무수한 무장들이 그의 말에 복종할 것이오, 종교를 세운다면 교황부터가 믿을 것이며 책을 쓴다면 굴지의 석학들이 편집을 자청할 것이었다.
 그렇다, 청년은 살아 있는 신화였다.
 그가 신이 되고자 한다면 매우 간단했다.
 내가 신이다, 한마디면 모두가 신으로 섬길 생각이었다. 실제로 그는 여신을 믿지 않았지만 신성마법을 아무 제약 없이 사용했다.
 청년이 신이라는 증거는 대환란을 막아낸 것으로 충분했다. 모두가 유일신으로 알았던 여신의 짝되는 남자라고 주장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상태였다. 이미 교단은 성서의 수정을 위해 펜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청년은 그 모든 자리를 저버리고 은거했다. 남긴 말은 한마디, 아내가 아프니 돌봐야겠다. 그 말에 모두들 하늘이 무너진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시간이 점차 흐르고 세상은 옛날대로 돌아갔다.
 인간들은 욕망에 이끌려 다툼을 시작했고 그 와중에 문화가 꽃피웠다. 대환란이라는 거대한 재앙은 유구한 시간의 흐름에 천천히 잊혀져갔다.
 청년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에 대한 존경심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맹목적인 추종은 사라져 있었다.
 물론 그것은 과거에 비해서이다. 그는 여전히 세계를 구한 대영웅이었고 존경받는 자였다. 청년이 없었다면 지금 살아 숨 쉬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각국은 그가 은거한 마을을 평화지역으로 선포했고 절대 침범치 않을 것을 약조했다.
 은거세월동안 청년, 아니, 이제는 서른을 넘어 마흔에 가까운 영웅은 1남 12녀를 보았다. 딸도 딸이지만 남성상위가 일반적인 사회구조인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대상은 당연히 아들이었다.
 실제로 그 아들은 그 나이치고는 훌륭했다. 어릴 때부터 사교계에 데뷔해서 놀랄만한 처세술과 협상능력을 보여주었다. 아내의 병환이 깊어지는 걸 막기 위해 아버지가 세계를 돌아다니며 약초를 채집하는 동안 아들은 가문을 유지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굉장히 뛰어난 재원이었다.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언제나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당연하다. 그가 얼마나 뛰어나건, 재주가 있건 결국 이 세계에서는 대영웅의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
 애초에 접근하는 이유부터가 영웅의 아들이기 때문에 아닌가? 영웅의 아들이 아니라면 국가의 재상과 종교계의 수장, 상계의 거물들이 관심을 둘 리가 없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말조차 붙여보기 어려운 대영웅의 쉬운 대체품이었다.
 로스터슬라프의 모든 것이 아들을 대영웅의 자식으로밖에 보지 않았다.
 그렇다, 이 이야기는 대환란을 물리친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다.
 신인, 초세지걸, 대영웅, 존엄한 자라는 수식어가 붙는 아버지를 둔 아들의 이야기이다.
 
 
 2. 진입進入
 
 나는 편지가 싫다. 내 앉은 키보다 높게 쌓인 저 편지뭉치를 보라. 누구라도 기가 질릴 것이다.
 “후우.”
 우리 집 거실은 넓은 편이다. 2400미터 계주 달리기를 해도 충분할 정도의 길이다.
 거실 중앙에 ㅁ자 형으로 사람 열은 앉을 수 있는 소파가 있고 그 가운데에 테이블이 놓여 있다. 비싼 자단목으로 만든 이 탁자도 꽤 큰 편이라서 180cm를 넘는 내가 누워도 남는 크기다.
 그리고 테이블 가득 편지뭉치가 쌓여 있다.
 “아… 읽기 싫어.”
 하루일과의 시작이지만 정말 싫다.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왼편 소파에 드러누워 사과를 먹던 여동생이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받았다.
 “왜? 13남매의 유일한 남자이자 맏이로 이 집안의 기둥인 리워드 오라버니가 고작 이런 편지뭉치에 한숨을 쉬는 거야?”
 “… 왜 설명조야?”
 “15세의 나이에서 제국검술대회 4위 입상을 하고 각종 파티장에 아버지의 대리로 나서 차곡차곡 명성을 쌓고 있는 리워드 오라버니가 고작 그런 편지 낭독에 지쳐 보이니 이 비천한 소녀는 몸 둘 바를 모르겠사와요.”
 “알아도 될 것 같거든. 왜 시비조야?”
 여동생 No.2-12명이나 있는 관계로 숫자로 부르는 게 편하다-는 어지간히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
 그런데 내가 저런 히스테리를 상대할 기력이 있는 게 아니거든. 막 돌아와서 지금 잠도 제대로 못 잔 상태다.
 “삼일 비웠다고 이렇게 쌓이다니 너무 한 거 아니냐…….”
 “그 삼일동안 언니랑 희희낙락했잖아. 천벌이지, 천벌.”
 “…….”
 왜 저렇게 까대는지 모르겠지만 무시하자. 중요한 건 이거 읽는 거다, 읽는 거.
 고개를 흔든 나는 가장 왼쪽의 위쪽부터 차례로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각종 찬사와 경구를 제외하면 내용들은 대개 비슷하다.
 초대나 도움 요청, 혼인부탁, 각종 단체의 명예고문 요구. 각종학회에서 인터뷰 요청.
 이걸 내가 처리한다. 음, 아무도 칭찬해주지 않지만 전부 혼자 처리하고 있다. … 아, 진짜 울고 싶어지는군.
 본래라면 잘나신 아버지가 처리해야겠지만 그분께서는 일이 워낙 바쁘셔서 천것들과 얼굴 대할 시간이 없다고 하니 대신 처리해드려야죠.
 여동생이 사과를 씹어 먹던 소리가 끊겼다. 다 먹었나보지. 내가 신경도 쓰지 않고 계속 편지더미에 몰두하자 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무시하니 이제는 작은 목소리가 이어진다.
 “저기, 오빠. 내일 무슨 날인지 기억해?”
 “내일? 어디보자. 확실히 모르겠지만 저녁에 베스 공작 파티에 참석해야 할 걸.”
 이 편지는 왜 글씨가 개발새발이야? 투덜거리며 해독작업을 거치는데 방해가 이어졌다.
 “그것뿐이야?”
 “그럼 뭐가 더 있냐?”
 다음편지로 넘어가려고 손을 뻗는데… 누군가의 늘씬한 다리가 편지뭉치를 맹렬히 가격했고, 수천 장의 종이뭉치들이 공중에서 난데없는 댄스타임을 갖게 되었다.
 “하…….”
 기가 막힌 내가 다리를 뻗은 여동생 No.2를 노려보자 그 원인께서는 되레 이를 박박가는 게 아닌가?
 “콱 나가 죽어버려!”
 이미 죽겠거든. 내가 답할 새도 없이 여동생은 발소리를 쾅쾅 울리며 가버렸다.
 나는 머리와 몸으로 내려앉는 종이들을 털어내고 한숨을 내쉬었다. 간신히 정렬해 놓은 건데 이걸 다시 분류해야 하다니 돌아버릴 것 같다. 중요도 순으로 정리된 건데.
 “후우.”
 울적한 한숨을 내쉬며 소파 밑이며 탁자 아래로 들어간 종이뭉치들을 탁자위로 올려놓는데 누군가 2층에서 내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지는 몰라도 이것 좀 도와줬으면 하는데. 그런 소망을 안고 열심히 작업속행하자 뾰족한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오빠! 언니 울렸지!”
 “뭘 어쩌라고. No.4.”
 “그렇게 부르지 마! 이름으로 부르란 말이야!”
 거 시끄럽군. 도와주지 않을 거면 가버려라. 내가 녀석의 말을 무시하고 편지정렬에 힘쓰자 옆에서 종알종알 떠들어댔다.
 “정말 너무한 거 아냐! 내일 언니 생일이란 말이야!”
 “아, 됐어. 너희들끼리 알아서 해. 사람도 많으니 나 말고 축하해줄 사람도 넘치잖아? 나는 내일 또 집안 대표로 파티에 나가야 한다고.”
 “일! 일! 일! 오빠, 일에 미쳤어? 우리 이름은 멋대로 숫자로 부르면서 다른 여자들은 엄청 공손하게 부르고 아부하면서! 내일 같은 중요한 날에도 집을 비우겠다고? 아빠랑 뭐가 달라!”
 넌 떠들어라. 나는 치울란다.
 “아빠는 엄마 병 때문에라도 그렇다 쳐! 대체 오빠는 왜 그래?”
 “그럼 아버지라도 대신 불러서 축하받던가.”
 적당히 답하자 아까의 공격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던 편지뭉치가 공중에 치솟았다. 좀 전이 짜증났다면 이제는 어처구니가 없다.
 과연 한 배를 타고난 자매랄까. 하는 짓이 똑같구먼.
 “장난해? 언니가 누구한테 축하받고 싶은지 몰라서 하는 소리야?”
 아무래도 이거 상대하지 않으면 오늘 아침은 편지 줍다 끝나겠다. 나는 편지 줍기를 관두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누구한테 축하받고 싶긴. 아버지한테 받고 싶지만 만만한 게 나라서 갈구는 거 아냐?”
 “뭐?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난 지금 이 상황을 만든 네가 제정신이냐고 묻고 싶다만. 일에 미쳤냐고? 나 말고 아무도 안 하잖아? 당사자인 아버지는 뉘 집 개냐는 태도고 어머니들은 다들 직업이 있으시지. 너희들은 노는데 바쁘고. 결국 남는 건 나잖아? 뭐 장자니까 내가 상대하면 다들 납득하고 좋아하더라. 나만 참으면 편한 상황이잖아?”
 뭐 소거법으로 따지면 대민업무(웃긴 표현이지만 지역에 따라서 아버지는 정말로 신 취급을 받는다) 어릴 때부터 내 몫이었다.
 “시끄러워. 아무튼 내일 일 취소해.”
 “그렇게는 못 하겠는데.”
 나는 다리를 꼬며 대답했다. 아아, 이 집안의 성비는 뭐 이리 불평등하단 말이냐?
 어머니 여섯에 여동생 열둘. 남자라고는 아버지와 나뿐이니 이게 여동생들의 간덩이를 엄청나게 부풀려준 모양이다.
 “시끄러. 취소하라면 해. 언니 울잖아!”
 “취소 못 한다니까.”
 나라고 좋아서 아침부터 수천 장의 편지를 일일이 읽고 귀족들 사이에서 억지로 웃으며 생활하는 줄 아냐?
 본래 아버지가 해야 할 일을 전부 내가 도맡아하고 있는데도 칭찬 한 번 해준 적 없으면서.
 “취소하고! 내일 언니 생일 축하하라고!”
 “안 돼. 선약이 있다. 이쪽이 먼저야.”
 네 번째 여동생은 탁자를 엎어버렸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편지뭉치들이 지지대가 반전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수천 장을 헤아리는 종이뭉치들이 마룻바닥에 쏟아진 모습은 장관이라 말을 잊을 지경이었다.
 이를 꽉 악문 여동생은 나를 노려보았다.
 “정말 오빠는 너무해!”
 제멋대로 행동하고 제멋대로 말하고 가버린다. 계단을 부술 기세로 올라가는 여동생의 등을 보던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한숨만 쉬는 인생이구만.
 “좀 봐줘라. 진짜 한계다.”
 안락한 소파에 등을 기댄 나는 눈을 감았다. 막 돌아와서 피로가 쌓여 있는데 사정 안 봐주고 갈구니 확 돌아버리겠다.
 여동생에게 화를 낼 수도 없고 화내도 무의미하지.
 “아, 정말… 돌겠네.”
 한숨을 연거푸 쉬어도 진정되지 않는다. 손가락으로 눈가를 문지르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온다.
 어차피 저들이 바라는 건 아버지다.
 나를 원한다고? 웃기는 소리. 집안이나 집밖이나 별 다를 것 없다. 언제나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다닌다.
 나를 환대하는 사람들, 나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들, 나에게 웃어주는 사람들 모두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단서 때문에 그러는 상황인데 뭘.
 냉막한 데다가 여차하면 막 나가는 성품인 아버지와 달리 부드럽다는 평가를 받는 내 쪽이 다루기 쉽단 거겠지.
 뭐 나도 그 평가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우리 아버지라는 놈은 어찌나 훌륭하신지 사람 개 패듯 패는데 소질이 넘치시는 분이다. 내가 증인이다.
 잡상은 관두자. 지금은 오늘 과제가 먼저다.
 “오빠.”
 눈을 뜨자 소파 오른 편에 No.1, 카렌이 앉아 있었다. 숫자에서 보듯 여동생 중에서 맏이로 그나마 믿음직한 존재다.
 내 서포터로 일을 조금이나마 돕고 있다. 이 편지도 이 녀석 손에서 한 번 걸러진 거고.
 “왜.”
 “화났어요? 목소리가…….”
 “아, 시끄러워. 너도 잔소리 할 거면 가버려.”
 나는 손을 내저어 보이고 탁자를 원상태로 되돌렸다. 크기 때문에 꽤 무겁지만 난 근력이 있는 편이라 수월하다.
 내가 편지를 줍기 시작하자 카렌이 돕기 시작했다. 이런걸 보면 그나마 도움 되는 동생인 건 확실한데.
 “내일… 생일파티 와주지 않으실래요? 그 애는 오빠가 와주길 바라고 있을 거예요.”
 “내일 일은?”
 “다른 애를 보내면…….”
 “누굴? 너 혼자 가서 남자들의 수작질을 당해낼 수 있을 것 같아? 아니면 가겠다고 말해놓고 불참하라고?”
 내 여동생들이지만 다들 예쁜 편이라서… 남자라면 당연히 관심을 갖는다. 거기다가 대환란의 영웅의 딸, 어떻게든 해보려고 수작을 부리는 놈이 천지에 널렸다.
 여동생들이 그런 늑대들을 상대하게 하느니, 그냥 내가 하고 말지. 나야 어릴 때부터 익숙하니까.
 카렌이 돕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거, 뭘 말해도 좋으니까 손은 움직여줬으면 하는데.
 “차라리 사정을 설명하고 불참하는 게…….”
 “됐어. 어차피 너희들이 와주길 바라는 건 아버지지 내가 아니잖아?”
 퉁명스레 대꾸하자 카렌이 입을 닫았다. 으음, 두 번이나 이 꼴이 나서인지 내가 좀 신경질적이 된 모양이다.
 여동생에게 짜증내서 뭘 어쩔 생각이냐?
 “너희들을 굉장히 아끼시는 아버지니 생일은 잊지 않고 돌아오시겠지. 평소에도 그랬고. 나야 있건 말건 상관없잖아?”
 하지만 아버지의 일을 이야기하면 절로 짜증이 난다.
 “왜 그런 식으로 말하세요?”
 “사실 그렇잖아? 도중에 돌아온 너와 달리 나는 밤새 시달리느라 한숨도 못 잤다고. 당장 쓰러질 것 같은데 여동생들의 투정이 연이어지니 성질이 안 나게 생겼어?”
  카렌이 침묵을 지켜주자 좀 화가 진정됐다.
 아, 내가 누구 때문에 한잠도 못 자고 이 고생 하는 거지? 아버지 명성에 먹칠하지 않으려는 내 눈물겨운 노력을 알아줄 사람 어디 없나?
 속으로 투덜거리며 손을 한참 움직이자 간신히 편지를 원래상태 비슷하게 정리했다. 도중에 좀 뒤죽박죽으로 섞인 감이 있지만 그런 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카렌이 올라가지 않고 다시 내 옆에 앉는 게 아닌가? 내 옆이라고 해도 소파가 넓은 관계로 사람 셋은 앉을 거리지만.
 나는 편지를 읽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신경 쓰인다.
 “피곤 할 텐데 올라가봐. 그리고 괜히 화낸 건 미안하다.”
 “아니에요. 단지…….”
 뭘 말하려는지 뜸을 들인다. 나는 편지들을 속독으로 훑으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카렌은 한참 뒤에야 말을 이었다.
 “오빠는 아버지를 너무…….”
 그때 현관문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카렌은 하던 말을 멈추고 문 앞에 가서 정체를 묻자 익숙한 대답이 들려왔다.
 “택배요!”
 또 그건가. 나를 보는 카렌에게 열어 보이라고 손짓하자 현관문이 열리고 건장한 택배원들이 들어왔다. 현관에 정체가 뻔한 노란 자루 열개를 내려놓은 택배원들은 카렌에게 수령인 사인을 받고 가버렸다.
 “후우.”
 나는 읽던 편지를 멈추고 자루로 다가갔다. 보나마나 아버지에게 아부하기 위해 누군가가 금은보화를 보낸 걸 거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 익숙하다.
 그러나 내가 자루를 열기 전에 낌새를 눈치 챈 여동생들이 각자 방에서 튀어나와 자루에 달려들었다.
 머리 좀 굵어진, 그래서 패물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알고 있는 여동생들이 주어진 재물의 분배를 가지고 혈전을 벌일 기세였다. 방치하면 아수라장이 뭔지 구경할 수 있을 거다.
 “잠깐, 다들 멈춰.”
 내 말에도 불구하고 다들 한 치의 양보도 할 기색이 없었다. 탐욕에 불타는 소녀들의 팽팽한 기싸움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누가 손가락만 움직여도 즉시 골육상쟁으로 이어질 상황을 보다 못한 내가 중재에 나섰다.
 “이건 전부 아버지거야.”
 다들 내 말은 무시하지만 아버지 이름은 무겁게 듣지. 과연 예상대로 다들 서로 째려보던 눈빛을 거두고 나에게 항의태세를 갖췄다.
 “말도 안돼요! 오빠!”
 “시끄러! 이건 모두 나와 카렌 언니 거야!”
 “우우, 독재반대! 우리는 노획물의 자유로운 분배권리가 있다!”
 “… 속물.”
 다른 건 다 넘어가도 왜 속물이 나오지? 나는 진중하게 손을 내저어 소란을 잠재우고 딱 잘라 선언했다.
 “이건 죄다 아버지 처리에 맡길 거다. 나를 장자로 인정할거면 따라주시지?”
 이 녀석들은 여동생들 중에서도 비교적 어린 축에 속하는지라 아버지와 장자자리를 대면 알아듣는다.
 재물을 노리던 여동생들은 불만이 있는 눈치로 입을 다물었다. 뭐, 채찍은 이만하면 됐고 다음은 당근이다.
 “물론 구경은 해도 좋아. 그리고 어머니들의 입회하에 장신구를 달아봐도 좋고. 단 쓰고 원위치 시킬 것. 그리고 소유하고 싶다면 직접 아버지 허락을 받을 것. 이정도면 됐지?”
 내 제안에 모두 불만을 삭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건 미봉책이다. 서로 취향이 겹치는 것도 있을 테고 좀 더 예쁜 걸 갖고 싶어 할 테니 분명 분란이 일겠지만 그건 아버지가 알아서 하라지.
 여동생들이 소란스레 자루를 펼치고 장신구를 살펴보는 걸 뒤로 한 나는 다시 소파로 돌아가 편지읽기에 몰입했다. 좀 시끄럽지만 이것 역시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니 익숙하다.
 하지만 카렌이 아비규환에 참가하는 대신 다시 내 옆에 와서 앉았다.
 “너도 저기 참가하지 그래? 장신구 좋아하지 않던가?”
 “아니요, 지금은 좀…….”
 말끝을 흐린 카렌은 편지를 잡고 읽기 시작했다. 중요한 편지는 내게 넘겨주고 적당한 편지는 자기 선에서 답장을 써서 보낼 생각인 모양이다. 물론 큰 도움은 안 되지만 그래도 엄청 고마운걸.
 우리 둘 다 입 다물고 편지 읽기에 몰입하는데 여동생 하나가 나를 불렀다.
 “오빠, 좀 이상한 게 있는데.”
 “적당히 처리해.”
 “좀 봐야 할 것 같은데.”
 퉁명하게 덧붙이는 걸 보니 뭔가 괴상한 게 튀어나왔다는 거다. 나는 편지 한 뭉치를 잡아들고 자루로 이동하면서 읽었다.
 손에 든 편지를 후르륵 읽으면서 자루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매듭이 풀린 자루들은 휘황찬란한 내용물을 활짝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패물, 수석, 조각, 원석, 약초, 금…….
 그리고 여자.
 생물학으로 분류하면 인간 여자다. 화려한 복식을 갖춘 묘령의 여성이 자루 속이라는 악조건을 이겨내고 잘 자고 있었다. 잠시 자루의 통기성을 의심해보던 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보나마나 아버지에게 헌상된 여자겠지.
 “갖다버려.”
 “살아 있는데?”
 “우, 여자를 집밖에 내던지다니. 오빠 실망이에요!”
 “… 바바리안.”
 이 집에 내편은 정녕 없는 것이냐. 하지만 저게 깨어나면 귀찮아질게 뻔하단 말이지? 뭐 일단 놔두고 나중에 처리할까?
 “알았어, 알았어. 아무 방에나 던져 놔. 깨어나면 이야기하지.”
 이름 모를 아가씨의 운명을 결정지은 나는 소파로 돌아갔다. 시간이 갈수록 피곤이 가중되는지라 발이 절로 끌린다. 앉아서 편지를 읽고 있던 카렌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해보였다.
 “오빠, 괜찮아요? 피곤하면 눈 좀 붙이세요.”
 “낭비할 시간 없잖아.”
 그렇게 말하고 앉았지만 역시 한계인 모양이다. 눈앞이 흐려진다. 몇 번 눈을 비벼 봐도 초점이 잘 안 맞는다. 나는 한숨을 쉬고 머릿속으로 주판알을 튕겼다. 합리적으로 판단하건데 좀 자고 보는 게 낫겠다.
 “아……. 카렌. 오늘 오후에 한얼 지방순회 있지? 많이도 못 자겠네. 30분 뒤에 깨워줘.”
 “아, 예. 편지들 봐 둘 테니 편히 주무세요.”
 믿으마. 안락한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로 눈을 감았다.
 
 아버지의 꿈을 꿨다.
 누구나 나를 보면 아버지 이야기를 했고 나는 적당히 맞장구 쳐줬다. 사람들은 신화를 만들어낸 아버지에게 환상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그것을 부수지 않기 위해서 총력을 기울여야 했다.
 아버지는 다정하다느니, 사려 깊다느니 등등을 재료로 거짓된 조각품을 만든다. 실제로 만나면 그런 생각 절대 안 할 테지만 어차피 만날 일도 없을 테니 상관없었다.
 내가 다른 이들 앞에서 아버지에게 바친 찬사 중 단 하나 사실과 다르지 않은 것이 있다면 가정적이란 표현이었다. 환란을 물리친 아버지는 어머니의 병환을 다스리는 데에만 온 힘을 쏟았다. 거기엔 내가 상상도 못 할 금액과 이루 말할 수 없는 노력이 들었다.
 아버지는 그것을 위해 오지를 떠돌며 직접 약초를 캐왔다. 약이 끊긴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점에선 애처가라 할 수 있을 거다. 가정을 위해 헌신했다고 할 수도 있겠고. 어머니가 편찮으시면 내 동생들을 돌보며 안고 재우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나에게 그래준 적은 없지만.
 아버지는 날 싫어한다. 어릴 때의 기억이지만 확실하게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
 잘난 부모에게 태어난 나는 당연히 신성마법의 재능이 있으리라 기대를 받았다. 물론 마법적 재능은 유전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 양친 모두 특이케이스니까 그 유일한 자식에게 기대가 쏠리는 거야 당연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나에게 그런 재능은 없었다.
 애당초 나는 검을 쥐고 휘두르는 쪽에 흥미가 있었다. 주변의 기대를 무시할 수 없어서 억지로 신학을 배워봤지만 양친은 좋은 스승의 재목은 아니었다. 두 분 다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았고 그냥 자연스레 쓰고 계셨으니까. 그리고 제대로 된 스승에게 배워도 마찬가지였다.
 
 너는 신을 믿지 않는구나.
 
 차가운 한마디가 나를 좌절시켰다. 그래, 나는 천성적으로 의심덩어리인 놈이고 대상이 신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굳이 분류하자면 불신자에게 가깝겠지.
 
 마법을 쓰기 위해서 신을 믿는 건 가당치도 않아.
 
 스승은 따끔하게 일침을 놓았고 나는 그에 수긍했다. 사실 별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신성마법 사용을 포기하겠다고 하자 모두들 위로해주었다. 괜찮다고. 그럴 수도 있다고.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검에 재능이 있으니까 상관이 없다고.
 단 한사람을 빼고 모두 위안을 주었다. 하지만 그 한사람이야말로 내 포기를 상냥하게 받아들여주기를 소망한 인간이었다. 그래서 그 말이 더욱 아팠다.
 
 거기까지냐.
 
 명백한 냉소,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가 본 아버지의 웃음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위대한 아버지와 성녀로 불린 어머니를 존경하는 마음이 넘쳐흘렀다. 어렸으니까. 아버지가 차갑게 나를 쳐내도 괜찮았다. 내가 아버지를 좋아했으니까.
 이야기 속에서 나온 아버지는 위대했고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대환란에서 세계를 구한 영웅은 없었고 대신에 냉정한 돌덩이가 있었다.
 
 그 정도밖에 안 되는군.
 
 그 말을 남기고 아버지는 등을 보이고 사라졌다. 그 말에 나는 펑펑 울어버렸다. 결코 아버지에게 용서받지 못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못 나서 아버지를 실망시켰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전부 내 잘못이라고, 모두 내가 무능한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으려 했다.
 머리가 굵어지니까 조금 진실이 보였다.
 나라고 좋아서 여섯 어머니 중에서 하필이면 지금의 어머니 배를 빌어 태어난 게 아니다. 어머니는 나를 낳으시고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되셨다. 그러니 아내사랑이 지극하신 아버지가 미워해도 별 수 없다.
 하지만 그 주체는 아버지 당신 아닌가? 아니면 다들 말은 안 하고 있지만 나는 어머니의 배를 빌어 태어났으나 당신의 자식이 아니었나?
 열 받지 않을 수가 없다.
 반항심, 미움, 증오가 절로 생겨났다. 어린 시절엔 차갑게 대하는 아버지 때문에 많이 괴로웠고 숨어서 운적도 있었다. 나를 미워하는 아버지에게 다가가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언제나 보답은 냉대였다.
 커가면서 나는 언제나 아버지의 아들로 불렸고 반감은 갈수록 커져만 갔다. 대단하신 아버지, 영웅이신 아버지, 망할 아버지. 빌어먹을 아버지.
 그리고 그 자식인 무능한 나.
 나는 없다. 유능한 아버지에게 무능한 자식은 없다. 유능한 아버지와 유능한 아버지의 자식만이 존재했을 뿐이다. 다들 그렇게 본다.
 그래, 이 세계에 있는 이상 나는 어디에도 없어.
 어딜 가건, 무엇을 하건 일생 동안 대영웅의 아들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니겠지.
 
 “후우.”
 나는 천천히 눈을 뜨고 앞쪽을 살폈다. 산처럼 쌓여 있던 편지뭉치들이 사라져 있었다. 게다가 나무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이미 해가 지고 있다. 헉,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놀란 내가 벌떡 일어나자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이 떨어졌다. 누가 덮어준 모양이다. 이런, 얼마나 잔거야?
 좌우를 둘러봐도 넓은 거실 안에는 사람 하나 안 보인다.
 “으음.”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식당으로 향했다. 유명한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이 즐비하게 걸려 있는 복도를 걸어가자 여자애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이 귀에 박혔다.
 “후우.”
 다행히 습격이나 이런 건 아니었나 보군. 몇 년 주기로 멍청한 놈들이 시도하던데 이번에는 아니었나보다.
 그 가능성을 배제하자 바로 다음 문제가 내 마음을 짓눌렀다.
 “하루 종일 잤다면 오늘 스케줄 다 날아간 거 아냐?”
 대체 왜 안 깨운 거지? 혀를 찬 나는 거칠게 식당의 문을 열었다. 지름이 몇 미터는 됨직한 원탁에는 큼지막한 바다가재들이 담긴 냄비가 놓여 있고 원탁의 곡선을 따라 놓여 있는 수십 개의 의자들은 여동생들에게 점령되어 있었다. 여자애 숫자가 많으니 그 소리가 복도까지 울리는 게 당연하지.
 그리고 내가 식당에 들어가자 거짓말처럼 소리가 그쳤다. 여동생들은 한결같이 입을 다물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 오빠. 앉으세요.”
 웃어 보이는 카렌을 무시한 나는 여동생들을 한번 훑어보았다.
 뭐 기세를 보아하니 아까 시끄럽게 굴던 2번, 4번이 연합해서 적대적인 분위기를 조장한 모양이다. 본래 나이 많은 쪽이 적은 쪽에게 힘을 행사할 수 있으니까. 근데 나는 숫자로 치면 0인데 왜 개털취급이지?
 잔뜩 화난 얼굴로 노려보는 4번째를 무시하고 카렌에게 나직이 물었다.
 “너, 왜 나 안 깨웠어?”
 “아, 그건…….”
 아버지 꿈을 꾼 것도 돌아버릴 것 같은데 여동생이란 것들은 하나같이 투정이라니.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거칠어진다.
 “일부러 안 깨운 거냐?”
 카렌은 작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나마 믿을만한 여동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럴 때 비수를 꽂는구나.
 내가 아버지 대리 짓에 얼마나 신경 쓰는지 잘 아는 녀석이 그랬단 말이지?
 “오빠는 지금 너무 무리하고 있어요. 좀 쉬시는 편이…….”
 “누가 너한테 내 몸 걱정해 달래?”
 아버지가 꿈에서 나온 여파가 아직도 남아 있다. 아, 정말… 싫다.
 아버지 대리노릇을 해야 하는 나나 옆에서 시끄럽게 구는 여동생들이나, 날 아버지의 아들로만 보는 세상 모두 다, 다 싸잡아서 싫다.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하나가 쫑알댄다.
 “언니가 생각해주는 데 말투가 그게 뭐야?”
 “끼어들지 마.”
 “뭐야! 정말! 오빠 갈수록 이상해! 아빠랑 있던 예전에는 그렇게 신경질도 안 냈…….”
 순간 이성이 끊겼다.
 정신을 차려보니 카렌의 뺨은 부어 있고 내 팔과 다리는 다른 여동생들이 붙들고 있었다. 그래봤자 어린 여자애들의 힘이다. 무시할 수는 있지만… 나는 내가 벌인 일에 굳어 있었다.
 흥분한 나를 막아서느라 카렌이 대신 맞은 것이다. 하지만 카렌은 나한테 뭐라고 하지 않고 허리를 숙여보였다.
 “죄송합니다.”
 “…….”
 아, 지금 뭘 한 거지? 여동생의 도발에 넘어가서 손찌검을 하려고 한 건가? 내가 여자에게?
 카렌은 허리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다른 녀석들도 분위기를 알아차렸는지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있다.
 카렌의 머리를 내려다보던 나는 몸을 돌려 식당을 빠져나왔다. 식당 문을 쾅 닫자 좀 정신이 든다.
 “아…….”
 진짜 최악이네. 후회가 되지만 되돌릴 수가 없다.
 “왜 하필 그런 꿈을 꿔가지고.”
 나는 다시 복도를 거슬러 올라가 소파로 돌아왔다. 일단, 내일 일도 있으니까 나가 있는 게 좋겠다. 카렌 얼굴 보기도 힘들고.
 
 * * *
 
 오빠가 나가자 카렌은 허리를 바로 세우고 자리에 앉았다.
 “다들 먹어.”
 시끌벅적하던 아까와는 달리 쥐 죽듯이 고요하다. 식기와 그릇 부딪치는 소리만 들릴 뿐. 비록 나이가 어리더라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단 정도는 눈치 챈다.
 ‘오빠가 언니를 때렸어…….’
 다들 눈빛으로 그런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제일 용감한 여동생이 칼받이로 나섰다. 어린 나이에 이런 숨 막히는 분위기를 오래 참기는 어렵다.
 “언니, 괜찮아요?”
 “응, 괜찮아.”
 카렌은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아프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어쨌거나 여동생들에게 걱정을 끼칠 수는 없었다.
 카렌이 평소의 태도를 보여주자 여자애들의 입이 하나둘씩 열렸다.
 “오빠, 나빴어. 언니를 때리고.”
 “정말 왜 저래? 날이 갈수록 이상하게 굴어.”
 “예전에는 안 저랬는데.”
 “… 쓰레기.”
 이대로라면 리워드는 완전히 매장당하게 생겼다. 카렌은 짐짓 웃으며 고개를 흔들어보였다.
 “다들 오빠 험담은 하지 마. 이건 언니가 잘못한 거니까.”
 “하지만 때렸잖아요.”
 “때렸어, 오빠 나빠.”
 뭐 분위기가 호전될 것 같지는 않다. 카렌은 약하게 웃어 보이며 아이들을 달랬지만 이미 리워드의 이미지는 바닥을 기고 있었다.
 확실히 그녀들의 오빠는 갈수록 사람이 이상해지고 있었다. 예전에는 여유 있게 농담하면서 즐겁게 놀아주던 사람이었는데 사람 접대다, 아버지 대리다 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사람이 변한 것이다.
 카렌은 어렴풋하게 이해하고 있었지만 다른 여동생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빠에게 일러야지.”
 “맞아, 언니를 때리다니. 엄마가 여자를 때리는 남자는 고문해야 한데.”
 “아빠에게 혼내주라고 하자.”
 아버지가 연관되면 곤란하다. 수프를 떠먹던 손을 멈춘 카렌은 진지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자자, 다들… 오늘 여기 일은 없었던 거야.”
 다들 불만 섞인 얼굴이었지만 카렌이 엄하게 이르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제야 얼굴을 푼 카렌은 바다가재를 먹기 힘들어하는 어린 여동생들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도와주느라 바쁜지라 정작 자신은 먹지 못해 마지막까지 식당에 남아버렸다.
 “후우.”
 쌓여 있는 설거지거리를 본 카렌은 낮게 한숨을 쉬고 설거지 당번 동생에게 말해야겠다고 결심하며 남은 가재를 잡았다. 이제 식사시간이다.
 “아…….”
 아직 오빠가 안 먹었지. 잠시 망설이던 카렌은 바다가재와 스프를 던 접시를 받침대에 놓고 식당을 나왔다.
 “오빠, 방에 있겠지?”
 정말 몸이 안 좋아보여서 일부러 안 깨운 건데 화나게 한 모양이다. 카렌은 자책하며 목조 계단을 올라 2층으로 향했다.
 2층은 ㄷ자 구조로 되어 있었는데 마지막 끄트머리 방이 리워드의 것이었다.
 “하아.”
 요즘 오빠는 정말 힘들어 보인다. 아이들은 멋모르고 떠들지만 카렌은 리워드의 심사를 어렴풋이 알아차리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어머니들도 이야기 하지 않는 부분이지만 아버지와 오빠 사이에는 어떤 골이 형성되어 있었다. 아마 리워드를 신경질적으로 변모시킨 것도 그것이 원인이리라.
 “너무 무리하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자기 몸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모양인지라 잘 먹지 않고 지낸 덕분에 큰 키에 비해 마른 체형이다.
 오빠의 건강을 염려하며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던 발이 어느새 끝 방에 도달해 있었다.
 “후우.”
 심호흡을 한 카렌은 문을 똑똑 두드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답이 들려오지 않자 카렌은 받침대를 문 앞에 놓아두고 한걸음 물러났다.
 순간 어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천천히 팔을 움직여 문의 손잡이를 살며시 쥔 카렌은 눈을 감고 깊게 호흡했다. 그리고 느린동작으로 문고리를 돌렸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카렌은 순간 이성을 잃을 뻔했다.
 
 로스터슬라프에서 16세면 성인으로 취급받는다. 즉 16번째 생일은 성인식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아이가 16세가 되면 있는 살림, 없는 살림 털어서 크게 잔치를 벌이는 게 이 세계의 풍습이다.
 하물며 세계를 구한 영웅의 차녀가 성인이 되는 날이니 오죽하랴.
 이른 아침부터 세계각지에서 몰려온 축하장과 생일선물이 과장 없이 말해 몇 백 수레였다. 내용물도 다양하고 보낸 이도 다양하다. 값을 헤아리기 어려운 보물부터 아이들이 만든 공예품, 제국의 황제부터 무지렁이 농민까지 한 마음으로 영웅의 딸이 성인이 된 것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뭐 리워드 때는 천단위에 달했으니 이젠 놀랍지도 않지만 그래도 수백 대나 되니 행렬의 끝이 안 보일 지경이다.
 집밖에 나와 생일선물들을 받고 수령증을 써주던 카렌의 얼굴에 문득 그늘이 졌다. 선물이 너무 많아서 쌓아두는 것도 어렵다 같은 이유는 아니다. 이런 막대한 양의 선물을 보관할 장소는 이미 집에 마련되어 있었다.
 그녀 혼자만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리워드의 소재가 오리무중이었다. 다른 가족들이 물어보면 출장이라고 둘러대긴 했지만 조잡한 둘러대기로는 오래가지 못 할 터.
 심경을 짐작해보니 그녀의 얼굴 보기가 마땅치 않아 나간 모양이다. 아마 오빠 성격이라면 오늘 스케줄을 틀림없이 이행하기는 하겠지만…….
 ‘이대로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갑자기 든 예감에 카렌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수령증을 기다리고 있던 택배원이 어리둥절한 표정이자 손을 흔들어 보인 카렌은 허리를 숙인 채로 열심히 펜을 놀렸다. 앞으로 몇 백 장을 더 써야 하니 게으름을 피울 수는 없다.
 “후우…….”
 붉은 입술을 타고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쩐지 가슴이 두근대는 게… 여동생의 생일이라는 경사스러운 날임에도 불구하도 아주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불행히도 카렌의 예상은 적중했다.
 
 집안의 생일행사는 몇 가지 제약이 있었는데 외부인은 참석시키지 않는 게 첫 번째였다. 덕분에 생일파티 자체는 꽤 조촐하게 차려졌다.
 계주달리기를 해도 좋을 넓이의 거실에 선물꾸러미의 탑을 쌓고 갖가지 장식을 달아놓은 게 조촐한 편이라면 배 곪는 아이들이 혀 깨물고 죽을 소리지만 이 집안의 기준으로는 분명 간소한 편이었다.
 여자애들은 좋아라 꺅꺅거리며 선물꾸러미에 소리를 내거나 화려한 빛을 내뿜는 장식들을 달고 있었다. 철이 아직 덜든 애들인지라 어제의 일 따위는 새까맣게 잊었다는 태도다. 그걸 지켜보는 좀 나이든 축들도 어머니들에게 재롱떠느라 여념이 없어서 결과는 별 다를 것 없었다.
 사고가 벌어질 요소는 전혀 없었다고 봐도 좋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세 가지 요소가 결합할 확률이 경미하다는 걸 맹신했달까.
 
 첫째, 집안의 가장인 키워드는 가족의 생일만큼은 꼭 집에 있다. 단, 아들의 생일은 빼고.
 두 번째, 오늘의 주인공인 차녀께서 오라버니에게 대단히 화가 나 있었다. 싸운 것도 싸운 거지만 지금 부재상태라는 게 그녀를 참을 수 없게 했다.
 세 번째가 가장 일어날 확률이 적었지만 그건 어제 발생되어 있었다. 리워드가 여동생에게 손찌검을 했다.
 첫째 요소는 세 번째의 전후사정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그 사실 자체만이 중요하지.
 
 “이거 좀 아픈데 그만하면 안 될까.”
 간만에 돌아온 아버지, 키워드는 거실의 소파에 앉아 여동생 하나를 안아들고 놀아주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머리카락을 뽑히고 있었다.
 선물들의 수납을 마친 카렌이 집안으로 들어오다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제의 오빠와 아버지를 마주하게 했다가는 심상치 않은 결과가 나올 것 같았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빠는 집에 없었다.
 “첫째 딸, 오랜만이군.”
 오랜만에 본 아버지는 웃으며 손을 흔들어보였다. 카렌은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다녀오셨어요, 아버지.”
 “아빠라고 하라고. 아, 그래. 그래. 이거 먹을래?”
 끌어안고 있는 딸의 입에 테이블에 차려진 쿠키 한 조각을 물려주려던 키워드의 손등을 누군가 철썩 쳤다. 그 무례한 행위의 주인공을 살펴보니 오늘의 주인공 아니신가?
 “으음, 둘째야. 아빠의 손등을 치다니.”
 “걔, 말은 안 하지만 쿠키는 싫어해요.”
 아버지에게 쏘아붙인 둘째는 왼편에 앉았다. 키워드는 그 차가운 기세에 내심 움찔했지만 웃는 낯은 그대로였다. 딸들에게 웃어 보이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다. 반대로 딸들이 기쁜 기색이 아니라면 걱정이 된다.
 “생일인데도 전혀 기쁘지 않은 얼굴인데… 무슨 문제라도 있어?”
 둘째는 잠시 망설임이었다. 아버지가 오빠를 싫어하는 거야 어지간한 눈치면 잘 안다.
 이 아버지는 마흔에 가까웠지만 감정 숨길 줄 몰라서… 아내들을 대하는 태도와 딸들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아들을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차이가 났다. 말한다면 곱게 끝나지 않으리라.
 그래도 오빠는 정말 너무했다. 자기 생일에도 불참한데다가 언니까지 때리다니! 아무리 양보해도 이번만큼은 용서가 되지 않았다.
 “오빠가 절 울렸거든요. 생일인데 무시했어요.”
 키워드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아이들을 도와 선물탑 꼭대기에 반짝이는 별을 달던 카렌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등 뒤의 아버지의 분위기가 변했다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무시무시한 뭔가가 격렬하게 분노하는 기세, 마치 맹수가 등 뒤에서 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이러할까.
 “그리고…….”
 카렌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든 다음 말은 막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행동보다 말이 더 빠른 법이다.
 “오빠가 언니를 때렸어요.”
 “맞아요, 아빠! 오빠 혼내줘요!”
 “카렌 언니 엄청 아팠을 거야.”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동생들의 입을 틀어막아봤자 이미 때는 늦었다. 두려움을 이기지 못 한 카렌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어떻게든 그녀의 선에서 막아야 한다.
 맞은 당사자가 간곡하게 말리면 들어 줄 거야. 불안감을 이기지 못 하고 거칠게 뛰는 심장을 달랜 카렌은 뒤를 보았다.
 아버지를 본 카렌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자식이라도 서슴없이 잡아먹을 괴물이 맹렬히 분노하고 있었다.
 
 천장을 올려보기 힘들 정도의 높이를 자랑하는 홀에 연미복과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무리 수십이 섞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벽에 기댄 악단이 그 사이로 아름다운 음악을 불어넣는다. 요란한 웃음소리와 각종 이야기가 음악을 타고 흘러 귓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주최자는 크게 만족하고 있었다. 본래 이런 파티에 누가 참가하느냐는 가문의 세를 측량하는 좋은 장소였다. 비록 중요한 인사가 몇몇 빠졌다고 했지만 거물이 납셔주셨으니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이 하나의 참석자로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주최자는 홀의 중앙에서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이야기를 나누는 백발 청년을 흡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대영웅 키워드의 장자. 그 이름 하나로 오늘 파티는 성공이었다.
 사람을 즐겁게 하는 화술이 꽤 능숙한지 그의 주변에서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뭐 사실 안 즐거워도 웃어야겠지만. 상대는 영웅의 아들이며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다. 누가 저런 알짜배기의 신경을 거슬릴 미련한 짓을 하겠나? 그런 멍청이에게는 초대장을 보내지도 않았다.
 ‘흐음, 역시 탐나는데.’
 주최자는 대영웅의 장자를 훔쳐보며 입맛을 다셨다. 은거한 키워드가 공식석상에 나서지 않은지 20년이 다 되간다. 이제는 그 아들의 시대다.
 비록 그 아버지와 달리 마법을 쓰지 못 한다지만… 꿩 대신 닭이라는 격언도 있잖은가?
 아니지, 이 경우는 닭을 노린 게 아니라 닭에 이어진 용을 노리고 있다고 해야지. 리워드와 딸을 혼인시키면 대영웅과 사돈 집안이 된다.
 비록 은거를 선언했다고 하나 사돈 집안이 위기에 몰려도 손 놓고 있을까? 그 이름만으로 강력한 힘이 된다. 대영웅의 사돈, 실로 좋은 어감이 아닌가? 유비
 인척관계만 만든다면 당장 왕국을 세워도 탈이 없으리라. 세계를 구한, 대적할 자 없는 막강한 무력의 대명사는 활동을 접은 지 이십 년이 다 되도록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실제로 영웅의 아내들의 집안은 제각기 성세를 구가하고 있었다. 한얼의 유가(劉家)는 일약 세계 2위의 상회로 올라섰고 천대받던 이실피르 가문은 귀족에 봉해졌다. 뿐만 아니라 대역적으로 몰렸던 제국의 무신은 그 사위 덕분에 오명을 벗고 만고의 충신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제 영웅은 더 이상 아내를 맞을 뜻이 없어 보인다. 몇몇 멍청한 이들은 아직도 들이대고 있지만 어리석은 짓. 시간이 흐르면 세대가 교체되는 법이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는 그 아들을 누가 손아귀에 넣느냐로 성패가 결정되는 때.
 비록 그 아들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혼담을 거절하고 있다지만… 그의 딸의 미모를 보면 그런 말을 못 하리라.
 게다가 리워드는 분명히 미남이다. 눈처럼 하얀 백발을 길러 눈을 가렸지만 수려한 이목구비 전부를 감추지는 못 한다. 리워드가 어릴 때 지 아비를 빼다 박은 얼굴로 세간의 화제를 모으지 않았던가? 그대로 성장했다면 대영웅, 키워드를 다시 보는 것과 다를 것 없는 생김새 일터.
 그 잘생긴 얼굴을 어째서 감추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딸에게도 못할 짓은 아니다. 아니, 설사 몇 년 사이에 얼굴이 바뀌어 여드름 곰보가 되어 있다 해도 이 혼인은 성사시켜야 했다.
 “자, 그럼…….”
 야망을 위해 리워드에게 접근하려던 주최자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의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이 홀이 넓은 편이라고 해도 삼삼오오 모여 있는 관계로 좁은 곳은 좁다. 즉 직진하기에는 간간히 걸림돌이 존재한다. 하지만 입구에서부터 걸어온 사내는 그런 지형지물에 전혀 개의치 않고 오로지 직진했다.
 “어…….”
 망설이지 않는 사내의 행보에 어깨를 부딪친 귀족남자가 상대를 올려보며 삿대질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침묵이 내려앉았다. 악대는 연주를 잊었고 손님들은 말을 잊었다. 그리고 주최자는 대처를 잊었다. 다들 회색머리칼, 회색 눈을 가진 남자의 정체를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그만큼 예상을 뛰어넘은 충격적인 등장이었다.
 홀 안의 정적에 아랑곳하지 않은 사내는 묵묵히 전진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건 상관없다는 태도다. 그 발자국 소리를 들은 주최자가 화들짝 놀라 그 앞을 가로막았다.
 “키, 키워드공!”
 대영웅은 통행에 방해물인 주최자를 후려쳤다. 세계를 구한 손에 얻어맞은 주최자는 순식간에 기절했다. 다음부터 자랑거리가 하나 늘 것이다. 대영웅의 손아귀에 얻어맞은 뺨이니까.
 몸 바쳐 그 정체를 입증한 주최자 때문에 모두들 사내의 정체를 확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감히 입을 열지 못 했다. 다들 찬사의 말을 바쳐야 했지만, 경의를 표하며 엎드려야 했지만 누구 하나 그럴 생각조차 못 했다.
 지금 세계를 구한 대영웅이 맹렬하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 기세가 어찌나 무시무시한지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겁에 질린다. 그 시선의 끝이 자기에게 향하지 않기를 빌며 숨죽이는 수밖에.
 모두의 자발적인 협력 덕분에 대영웅은 그 아들과 코앞에서 마주하는데 성공했다.
 리워드 곁에 몰려 있던 귀족들은 알아서 분위기를 보고 슬쩍슬쩍 피해버렸다. 평소라면 키워드와 말 한번 나눠보는 게 소원인 자들이지만… 지금 말을 걸었다가는 맞아죽을 것 같으니까.
 “… 아버지?”
 리워드는 굉장히 놀랐다. 아버지가 자신을 찾아오다니?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아니, 앞으로도 있으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전개라서 꿈이라고 생각될 정도다.
 다행히 꿈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몸소 그 증거를 보여주었다.
 키워드의 주먹이 리워드의 면상을 후려쳤다.
 “네가 감히 그러고도…….”
 눈앞이 아찔해진다 싶더니 이미 얻어맞은 후였다. 과연 세계를 구한 영웅, 그 손속의 빠르기가 번개 같다.
 아버지는 아들을 패기 시작했다. 침묵이 내려앉은 홀에 잔잔한 구타 음이 울려 퍼졌다.
 영웅의 아들폭행이라는 전대미문의 광경에 모두들 멍청하게 구경하기 시작했다. 아비가 아들을 구타하는 데 뭐라고 말리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애는 때리지 말라고? 그렇게 말리는 건 좋은데 과연 그럴 베짱이 누구한테 있을까? 저 기세라면 말리다가 휘말려서 같이 얻어맞겠다.
 말리는 이 하나 없이 속수무책으로 얻어맞던 리워드는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는 곤란하다. 어떻게든 수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안면에 세 방, 어깨 탈골, 복부 및 다리에 심각한 사태가 일어났다고 한들 수습이 먼저다.
 “잠깐! 아버지! 일단 이야기부터…….”
 “닥쳐!”
 잘도 놀리는 입에 매서운 주먹을 날린 키워드는 이후 세 번의 회복마법을 사용했다. 즉, 죽지 않을 정도로 팬 다음, 치료 그리고 구타를 반복한 것이다. 쉴 틈도 없이 얻어맞던 리워드는 세 번째 회복마법을 받기 전에 정신을 놓아버렸다.
 “후우, 후우.”
 널브러진 아들을 대려다보던 키워드는 숨을 몰아쉬었다. 지쳐서 그런 게 아니라 흥분을 억제하기 위해서다. 이 이상 패다가는 정말 참지 못 하고 쳐 죽일 것 같았다. 그건 안 되지.
 “젠장.”
 키워드는 의식을 잃은 리워드의 멱살을 잡고 공간이동의 주문을 외웠다.
 
 * * *
 
 “아…….”
 이 모든 것이 꿈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끔 생각할 때가 있다. 그리고 살아오면서 지금이 가장 강렬하게 느끼는 때다.
 하얀 천장을 올려다보던 나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토록 얻어맞았는데도 통증은 없었다. 나는 머리를 흔들고 좌우를 살펴보았다.
 가구라고는 옷장과 침대가 전부인 살풍경한 방, 어머니의 취향을 따라 꽃무늬로 도배한 벽지가 인상적인 방에는 특별히 다를 것이 없었다. 지독한 악몽을 꿨다고 착각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몸의 통증, 그리고 의자에서 졸고 있는 카렌을 보니 그도 아닌 것 같다.
 “카렌.”
 내가 부르자 화들짝 깨어났다. 놀란 눈을 한 카렌을 보며 나는 천천히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카렌은 당황하는 기색임에도 불구하고 간략하게 설명했다.
 
 No.2가 아버지에게 고자질 한 것, 그걸 들은 아버지가 뛰쳐나가더니 한참 뒤에 정신 잃은 나를 업어온 것. 덕분에 어머니들에게 대판 혼났다는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 말리지 못 해서 죄송해요.”
 어차피 일은 벌어졌다. 나는 고개를 거칠게 흔들며 손을 내저었다. 지금은 혼자 있고 싶다.
 “나가.”
 “오빠…….”
 “좀 혼자 놔둬. 제발.”
 내가 강하게 말하자 카렌은 입을 다물고 방을 나갔다. 베개에 등을 기댄 나는 문 닫히는 작은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끝장이군.
 전부 끝났다. 이걸로 대영웅의 아들, 리워드의 가치는 사라졌다. 귀족들 앞에서 그런 꼴을 적나라하게 보였으니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져나갈게 뻔하지. 대영웅의 아들이라는 혈연은 힘을 잃게 될 거다.
 그건 내가 바라는 상황이자 내가 바라는 상황이 아니다.
 앞으로 뭘 하건 이 세계의 모든 이들은 ‘영웅이 미워하는 아들’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나를 보겠지. 그게 당연하다. 본래 세간은 가십에 민감하고 아버지는 모두의 흥밋거리니까.
 “하하하…….”
 어째 기쁘지가 않네. 기껏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굴레를 벗어났는데.
 벗어나긴 뭘 벗어나. 오히려 더 기분 나쁜 형태로 꽁꽁 묶였다. 이걸로 절대 벗어날 수가 없다. 하다못해 석년의 아버지 같군요 같은 소리도 노려볼 수 없게 되었다.
 “노리긴 뭘 노려…….”
 헛된 소망이지. 나름대로 자신 있게 출전한 검술대회에서는 꼴랑 4위. 뭐 4위도 나름 잘 난거지만… 그래봤자 대환란에서 세계를 구해내고 봉인을 깨트린 아버지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우승을 해도 당연시 될 마당에 고작 4위를 했을 때… 수군거리던 소리가 아직까지 잊혀 지지 않는다.
 “하아…….”
 이젠 모르겠다. 앞으로 아버지의 대리로 활동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생각해보라, 아버지가 만인의 앞이라는 상황에도 개의치 않고 나를 패버렸다. 그런데 내 이름이 힘을 유지할까? 유지되면 오히려 이상하지.
 그동안 쌓아올린 내 모든 것은… 전부 아버지라는 이름의 토대에서 시작되었다. 그 기반을 아버지가 붕괴시켜버린 이상 발버둥 쳐봤자 추락은 피할 수 없지.
 “이 세계에서… 내가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안 남은 건가?”
 집안에서 도망친다고? 무리다. 마법의 힘이란 매우 강대하고 이 집안에는 그 스페셜리스트들이 상시 대기 중이다. 어딜 가건 금방 포착된다.
 마법으로 날 찾아내건 말건 무시하고 나를 모르는 한적한 곳에서 정체를 숨기고 산다고? 그래봤자 내 얼굴은… 아버지의 것과 너무 닮아 있다. 비록 머리칼로 눈을 가렸다 해도 다른 부분이 빼닮아 있어서 누구나 아버지를 연상하게 되는 것이다.
 “하하…….”
 뭘 어떻게 해볼 여지가 전혀 없잖아? 내 인생은 아버지로 시작해서 아버지로 끝나잖아?
 “하… ,”
 소리 내어 웃기도 힘들다. 나는 입매를 끌어올려 웃으려 했지만 그것도 마찬가지로 힘들었다. 사실 웃을 상황이 전혀 아니거든.
 “잠이나 잘까…….”
 나는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후우.”
 내가 아버지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기껏 보답이 이거냐.
 
 황량한 땅이다.
 물 한 방울, 습기 하나 없는 땅. 높낮이라고는 없는 지대가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쩍쩍 갈라진 땅에는 풀 한포기 나 있지 않는 이곳에 생명이라고는 나 혼자밖에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흙과 돌뿐. 삭막한 흙바람이 내 뺨을 할퀴고 지나갔다.
 “왜 이런 곳에…….”
 잠시 주위를 둘러보자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히 방금 전까지는 나 혼자였는데 어느새 천연덕스럽게 나타나 있다. 뭐, 뭐지?
 종교종사자들이 즐겨 입는 흰색 토가를 걸친 여자였다. 수수한 갈색머리칼은 목까지 짧게 길렀고 손에는 죽장 하나를 짚고 서 있었다. 짐 하나 없어 보이니 여행자라 보기는 무리다.
 아니, 그전에 이 상황은 아무래도 꿈인 것 같은데.
 “처음 만나는군요.”
 여자가 말을 걸었다. 그 얼굴을 본 순간 나는 강렬한 기시감에 습격당했다. 분명히 이 여자를 만난 적이 없는데 나는 이 여자를 알고 있다. 얼굴 생김새가 누구랑 닮았는데…….
 “시간이 없는 관계로 설명은 자료화면으로 대신하기로 하죠.”
 한숨을 쉰 여자는 죽장을 들어 허공에 갖다 대었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공중에서 확연한 파문이 일더니 변화가 일어났다. 분
 명히 허공이었는데 그녀가 지정하자 다른 곳을 비추어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살아 움직이는 생물들이 소리 내며 움직이는 그림, 바로 내 앞에 존재하는 것 같은 환상이었다. 환상마법인가? 그렇다고 보기엔 너무도 정교했고 현실감이 있었다.
 그리고 보여진 광경은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이형의 괴물들이 인간들을 학살했다. 거인이 팔을 휘두르면 인간 수십이 떡이 되는 과감한 변화에 몸을 맡겼다. 미미한 저항을 손쉽게 부순 아인종의 군대는 인간 마을을 섬멸시켰다.
 남자는 죽이고 아이는 먹고 여자는 강간했다.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인간은 구원을 외치고 신을 부르며 절망하다 종래에는 저주를 퍼부었다. 힘없는 약자는 강자의 폭력에 무력했다. 이내 모두 죽고 폐허만이 남았다.
 인간의 군대가 괴물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힘을 모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일단 머릿수부터 밀렸고 종족의 전쟁수행능력도 월등히 떨어졌다. 무기를 들고 잘 조련된 병사 셋이 마물 한 마리를 상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물은 인간보다 수가 세배는 많았다. 말도 안 되는 수치싸움에서 인간군대는 물러서지 않았고 남김없이 살해당했다.
 저항이 없어지자 다시 인간의 도시가 마물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아까의 축제가 다시 벌어졌다. 남자는 고기고 여자는 여흥이다. 음식은 풍부했고 즐길 거리도 넘쳐났다.
 마물들의 도락은 절정에 달했다. 산발적인 저항은 마물 개개에게 통할지는 모르나 마물군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지옥도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괴물의 군대가 지나간 곳엔 아무것도 살아남지 못 했고 대적할 방도는 없었다. 그리고 학살은 계속 자행되었고 전 세계의 인구는 급격하게 감소했다.
 게다가 죽은 인간의 시체가 언데드로 일어나서 생전의 친인을 학살했다. 죽었던 어머니가 무덤에서 일어나 자식을 뜯어먹는 광경이, 예전에 죽었던 자식이 아비를 찔러 죽인다.
 압도적인 폭력이 세상을 휩쓸고 생존자는 죽지 못 해 간신히 숨을 쉬고 있었다.
 언제라도 죽일 수 있지만 다 죽이면 지루하니까 가지고 놀아지는 장난감의 신세, 순진한 아이들이 죄 없는 잠자리의 날개를 하나씩 잡아 뜯으며 언제 죽을까 내기하고 있는 광경이 떠올랐다. 문제는 여기서 인류는 잠자리라는 현실이다.
 이건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 울고 싶어지고 이빨이 악물렸다. 무서웠다. 아무리 세상이 막 돌아가도 이런 세계에선 사람이 살면 안 된다.
 참혹과 잔혹, 공포와 분노에 지배당한 나에게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 세계를 구해주세요.”
 갑자기… 뭔 소리야? 당황한 나는 상대를 살폈다. 아무래도 꿈치고는 내용이 심상치가 않다. 여성은 내 놀란 기색에 아랑곳하지 않고 설명했다.
 “당신에겐 이 세계를 구할 운명이 있어요. 힘을 잃은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당신을 저 세계로 보내는 정도겠지요.”
 “자, 잠깐만요. 누구시죠?”
 “이름은 예전에 잃어버렸지만 당신의 세계에선 여신이라 불리고 있죠.”
 무, 무릎 꿇어야겠지? 그렇게 하기에는 상황이 좋지 못 하다. 이게 꿈이 아니라 생시라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인데. 시험차 볼을 꼬집어 본 나는 강렬한 통증을 음미할 수 있었다.
 “자, 잠깐만요. 뭔가 착각하시나 본데 세계를 구한 영웅은 제가 아니라 아버지라고요. 얼굴이 닮았다고 뭔가 오해하셨나 본데요.”
 신이라도 실수는 하는 거지. 그러나 내 지적에 여신은 가만히 고개를 젓고 대답했다.
 “제가 정한 분은 당신입니다. 리워드.”
 이름을 알고 있잖아? 자, 잠깐. 그럼 정말 내가 저 세계를 구하라고 날 부른 거야? 뭔가 다른 착오가 있는 게 아냐?
 “죄송하지만 전 아버지와 달라요. 아버지는 믿기지 않는 능력으로 로스터슬라프를 구했지만 저에겐 그럴 능력은 없는 걸요.”
 그래, 나는 아버지에 비하면 한없이 무능하지. 만약 내가 아버지를 뛰어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딴 꼬리표에 시달릴 일은 없었겠지.
 현실은 냉혹하고 나는 무능하다. 이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저 세계는 상황을 타개할 운명을 가진 인간이 없어요. 그래서 당신에게 부탁하는 겁니다. 리워드.”
 아니, 무리라니까. 저런 참경을 보니 돕고 싶다는 마음이 절로 일어나기는 하지만… 구할 자신이 없다.
 대체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도탄에 빠진 세계를 구해내겠냐?
 “어째서 저죠? 아버지나 기타 등등, 저보다 빼어난 자들이 수레로 차고 넘칠 텐데?”
 내가 묻자 여신은 알아들을 수 없는 대답을 했다.
 “당신은 리理로 세계를 구하는 자니까요. 그것이 당신에게 예비된 운명.”
 음, 못 알아듣겠으니 선문답은 관두고…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게 기묘한 꿈이라고 믿고 싶지만 현실일 경우를 대비해서 확실히 해둬야 한다.
 나는 어쩌고 싶은 거지?
 사실 이건 강렬한 유혹이었다. 이계로 가면 더 이상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다. 영웅의 장자가 아니라 리워드로서 존재할 수 있다. 너무나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게다가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내 마음을 흔들었다. 난 내가 도울 수 있으면 당연히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제안은 거절하기 힘들다.
 무엇보다 저 세계는 정말 어떻게든 구하고 싶다. 저런 지옥에서 사람이 살면 안 돼.
 내가 특출난 게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나 저렇게 생각할거다. 내가 가서 도움이 된다면 당연히 하겠다.
 하지만 대체 내가 어떻게 도움이 된다는 거지? 는데 머리가 울렸다.
 “부탁해요. 리워드. 세계를 구해주세요.”
 내 본질을 관통하는 말을 한 여신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지옥에서 신음하는 인류를 폭력에 보고, 그것을 도울 수 없기에 인간에게 부탁하는 여신은 슬퍼하고 있었다.
 그 애처로운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였다.
 
 여신이 직접 나를 지목해서 부탁했다. 그리고 이계로 가면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더 이상 붙지 않는다.
 
 자유로워질 수 있다. 어차피 집은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갈 거다.
 그래, 어차피 이 세계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아. 기껏 해보려던 것도 아버지가 알아서 박살내줬고.
 하지만 저 이계는 무능한 나라도 필요로 하고 있다.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나로서 살아갈 수 있어.
 이건 어떤 의미로는 구원이 아닐까? 내게 주어진 단 한 번의 매력적인 기회 아닐까? 이 제안을 거절하면 나는 다시 내 방에서 눈을 뜨겠지. 그리고 평생 대영웅의 아들이라는 위치에 짓눌리며 살 거다.
 나는 누군가의 아들로서 살고 싶지 않다.
 결정했다.
 “저라도 좋으시다면 해보겠습니다.”
 “부탁해요. 리워드.”
 잠깐만, 누구 닮았는지 깨달았다. 당신, 어머니를…….
 
 “뭐, 뭐야?”
 내가 서서 자는 버릇이 생겼나? 왜 이러지? 고개를 흔든 나는 비틀거리는 와중에도 상황을 파악했다.
 “어?”
 내 방이 아니잖아? 10평짜리인 내 방의 10배는 넘어 보이는 넓은 홀이었다. 원형의 홀의 벽들은 눈 내린 것처럼 새하얀데 타오르는 붉은 태양이 양각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하얀 벽과 대조적인 붉은 색이라 확 눈에 들어온다.
 “어, 어떻게 된 거지?”
 하늘을 올려다보니 이색적인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홀 중앙에 구멍이 뚫려 있는데 거길 통해 햇빛이 들어오는 것이라. 마침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중앙이라서 한 몸에 태양을 받게 되었다. 다른 곳이 비교적 어두운지라 남이 보면 꽤 폼 나는 구도일거다.
 생각해보라. 어두운 홀에서 홀로 광휘에 감싸여 있는 백발의 신비한 미소년! 아, 이거 엄청 그림이 되겠는데?
 “…….”
 헛소리는 그만하자.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러니까 아버지에게 맞고 누워서 잤는데 꿈에서 여신이라고 주장하는 여자를 만났다. 로스터슬라프의 여신교는 신상이 없는지라 본인인지 확인이 힘들었지만 여하간 다른 세계가 위험하다고 구해 달라했고 나는 그래서 가겠다고 승낙했다.
 그리고 깨어보니 여기네?
 “자, 잠깐?”
 이거 다른 세계인가? 분명히 아버지가 세계봉인을 깨트린 이후로 다른 차원으로 이동이 가능하다고 안다. 그 소리대로라면 차원이동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정말 그런건가?
 “으음.”
 고민하던 내 귀에 발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나는 경계태세를 취하고 사방을 휘휘 둘러보았다. 이 홀은 너무 넓어서 소리가 울리는데다가 동서남북으로 통로가 뚫려 있어서 어디서 오는지 모르겠다.
 “아, 근데 세계가 다른데… 말이 통하려나? 그전에 정말로 차원이동인건가?”
 내가 우왕좌왕 하는 사이에 발소리는 더 가까워졌다. 그리고 북쪽의 통로에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방이 비교적 어두운 편인데 그자가 램프를 들고 있어서 확 눈에 들어왔다.
 중 갑옷을 착용했는데도 발소리 외에 다른 소리가 나지 않는다. 갑옷이 좋거나 실력이 대단하거나 둘 중 하나리라.
 점차 거리가 가까워져 상대의 윤곽을 알아볼 수 있게 되자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자잖아?
 나보다 좀 어려보이는 금발의 여성이다. 반짝이는 금발이 어둠 속에서도 찬란한 빛을 뿌리고 있다. 맑은 벽안이 나를 본다. 제법 예쁜 얼굴인데?
 “아…….”
 저쪽도 날 알아차렸는지 눈을 크게 떴다. 램프를 바닥에 내려놓은 소녀는 빠르게 달려와서는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는 고개를 숙여보였다.
 기사가 주군을 대할 때 쓰는 예법이다.
 “오셨네요.”
 비록 큰 목소리가 아니지만 떨리고 있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 말을 알아듣긴 하는구나. 그럼 내가 말하는 것도 통하려나?
 “저기 제 이름은 리워드라 합니다. 제 말을 알아듣나요?”
 내 질문에 여자애는 몸을 일으키더니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뼈를 얼릴 정도로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얼음을 녹일 정도로 따뜻한 사람의 체온이 몸에 닿는다.
 “잘 와주셨어요. 리워드 님.”
 말이 통한다는 걸 확인한 것보다… 그 목소리가 기쁨에 차있다는 게 정말 놀라웠다.
 내 이름을 부르며 기뻐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 모두 나를 아버지의 대용품으로 보고 이용하려 했기에 언제나 가식적인 목소리, 거짓 미소를 보여줬지.
 하지만 이 소녀는 달라. 정말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어. 내가 무능하다고 해도 그 정도는 안다.
 머뭇거리던 나는 소녀의 등에 팔을 둘렀다.
 갑옷의 차가움이 손을 통해 전해져온다. 이것이 꿈이 아닌 현실임을 고하는 촉감.
 나는 이계로 왔다.
 
 
 3. 이계異界
 
 소파와 책장, 의자가 놓여 있는 응접실에 사람들이 다섯 있었다. 나를 포함해서.
 벽에 기댄 채 나를 쏘아보는 청년과 나무의자에 앉아서 책을 보는 로브의 남자. 소파에 몸을 파묻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여사제와 나를 이곳으로 안내해 온 소녀기사 류아.
 아무도 입을 안 여니 내가 먼저 말해야겠다.
 “일단 소개부터 하도록 하죠. 리워드라 합니다.”
 “대거.”
 벽에 기대어 있던 청년이 쥐고 있던 대거를 쓰다듬으며 낮게 말했다. 저건 딱 들어도 가명인데.
 “디터 하인이라고 합니다. 디터라 부르세요.”
 책을 덮은 로브의 사내는 앞선 남자와 다르게 사람 좋게 웃으며 머리를 숙여보였다. 뭐 다들 나이는 안 밝히는 분위기니 편하군. 인간이란건 대부분 나이에 편견을 가지게 마련이라서 밝히면 곤란해진다. 손아래면 얕잡아 보는 게 보통이라서.
 그때 류아가 졸고 있던 사제를 깨웠다. 잠을 깬 사제는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 좌우를 둘러보다가 나와 눈이 맞았다.
 “에티엔이에요. 엘 브레가 님의 종이요.”
 문장내용으로 보면 엘 브레가는 아무래도 신의 이름이겠지. 목에 걸고 있는 초승달 목걸이가 성표인 모양이다.
 “으음.”
 이대로 있으면 이야기가 진행이 안 되잖아? 내가 입을 열려는 차에 류아가 내게 걸어와 막대기 하나를 건넸다.
 “맡아두고 있던 신검神劍 키비타스 테레나예요.”
 일단 받긴 받았지만 어디가 검인지 모르겠다. 30cm정도의 길죽한 원통이다. 음, 칼자루로 봐줄 수는 있는데 정작 검신은 어디 간 거야?
 날 놀리나 해서 좌중을 둘러봤지만 하나같이 진지한 눈이다. 저 에티엔인가 하는 소녀 빼곤……. 또 졸고 있다.
 아, 긴장감 없어. 그 참혹한 영상의 세계에서 만난 인간들이 왜 이리 풀어져 있는 거냐. 잠시 생각하던 나는 입을 열었다.
 “저기… 이거 어디가 검인 거죠?”
 색다른 침묵이 흘렀다. 지금까지가 내 언동을 기다리고 있던 거라면 이번은 당혹한 기색이다.
 후, 여신님, 보내주실 때 이 세계의 지식정도는 주시고 보내셔야죠. 그냥 말만 통하게 하시면 다랍니까?
 다들 당혹한 얼굴인 가운데 홀로 침착한 류아가 부드러운 음색으로 설명했다.
 “그건 알 브레히토 님의 사자이신 리워드 님이 아실 거예요.”
 “…….”
 무책임한 설명인데다가 모르는 이름이 나왔다. 아무래도 문장내용으로 봐서는 신의 이름인가 본데. 로스터슬라프와 달리 이 세계는 신이 하나가 아닌가 보군.
 그런데 나는 여신의 부탁을 받아 온 건데 알 브레히토라니? 다른 이름이라도 되는 건가?
 “… 그게 누구시죠?”
 내가 주저하며 웃자 디터는 난처한 웃음을, 대거는 나를 사납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졸고 있던 사제는 여전히 자고 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류아가 입을 열었다. 다른 이와 달리 당황한 기색이 하나도 없다.
 “으음, 하나씩 일단 설명해드릴게요.”
 류아는 친절한 어조로 하나하나씩 설명했다.
 “이 세계의 이름은 트라이림이에요. 이름을 알 수 없는 창세신의 사후 음양과 사원소를 담당하는 육신이 세계를 돌보셨죠. 그분들은 각기 나라를 하나씩 맡으셨어요. 여섯 개의 국가와 여섯의 신이죠.”
 “그래요? 흐음.”
 신이 여섯에 나라 여섯이라.
 “그런데 16년 전 암흑의 정수가 세계에 나타났어요. 그 이름은 마황. 그는 강대한 마황군과 그 우두머리인 칠단장을 내세워 세계를 파멸로 몰았죠. 압도적인 암흑의 힘 앞에서 모두들 대항하지 못 했고 단숨에 멸망의 위기에 몰렸죠. 그 전황을 더 이상 방관치 못하신 룬 슈테드의 국신이시자 양신(暘神)이신 알 브레히토 님이 지상에 강림하시어 니메로를 죽이셨어요. 하지만 칠단장은 워낙 강대한 존재이기에 그분 또한 사멸을 피할 수 없으셨죠.”
 그리고 나를 보는 소녀기사의 표정이 변했다. 그것은 밤하늘의 별을 보는 얼굴이요, 어둠 속에 피어난 꽃을 돌보는 손길이었다.
 “사멸 직전에 알 브레히토 님은 신검 키비타스 테레나를 남기고 16년 뒤에 이계에서 소환된 이 검의 주인이 세계를 구원하리란 예언을 남기셨어요. 그리고 지금 리워드 님이 오신 거예요.”
 잠깐, 정보량이 너무 많아. 그리고 나는 여신의 말씀을 듣고 왔는데 왜 알 브레히토라는 신이 불렀다고?
 “그리고 이곳은 알 브레히토 님을 섬기던 대 신전이자 룬 슈테드의 영토예요.”
 외워야 할 게 많잖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머리로 인지하는 것과 가슴이 받아들이는 갭을 메울 시간을 달라고.
 한마디로 내가 이 세계의 사람들이 16년 동안 기다려왔던 세계구원자라는 건가?
 “…….”
 아, 머리 아프다. 내가 왜 저런 성대한 역할을 수행해야 하지? 물론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하겠다. 그것이 세계단위라고 저 기본사상은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이건 아냐.
 나름대로 마음을 잡고 왔지만 이런 상황일 줄은 몰랐다. 나는 그냥 조용히 건너와서 세력을 규합하고 마물을 칠 생각이었는데. 똑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이젠 기대 받는 건 질색이다. 그건 아버지의 대리로 지긋지긋하게 했다고.
 누군가의 기대를 받는다거나 그에 부응한다거나 이런 건 정말 질색이란 말야. 실망하는 얼굴들, 목소리는 지긋지긋하다고.
 “저기… 왜 말씀이 없으시죠?”
 “멀미라도 난 모양이지.”
 류아가 묻자 대거가 대답을 가로챘다. 그는 나를 차갑게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네놈 정말 구세용자 맞아? 솔직히 별 볼일 없어 보인다. 게다가 준비된 자라면 당연히 이 세계에 대해서 알고 와야 하지 않나?”
 너무 속을 쉽게 드러내지만 정곡을 찌르는 소리다. 정녕 내가 이 사람들이 10년이 넘게 기다려온 용자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아버지와 달리 난 그런 이름을 가질 정도로 유능하지 않다.
 여신의 말을 받들어 온 것이 사실이지만… 솔직히 기대 받는 입장이 되고 싶진 않다. 기대 받지 않으면 실망시킬 일도 없으니 보통 때라면 잘라 말했을 거다.
 난 아니라고. 뭔가 착오가 있는 거라고. 하지만 도울 수 있다면 돕겠다고. 이 정도로 매듭짓겠지.
 하지만 여긴 다른 세계잖아. 아버지가 없는 곳.
 “대거 님, 예언을 의심하시는 건가요?”
 “아니, 그건 아니지만 이놈은 그다지 강단 있어 보이진 않는데.”
 “아뇨, 저희가 기다리던 분은 리워드 님이 맞아요. 용자의 여덟 검의 이름을 걸고 보증할 수 있어요.”
 류아는 전혀 흔들림이 없는 태도로 자신보다 몇 살이나 더 많을 청년을 밀어 붙이고 있었다. 그 태도에는 한 점의 의심도 없고 눈에는 터럭의 불안도 없다.
 바로 앞에서 나를 이토록 믿어주는 걸 보고 있자니… 거짓말을 해서라도 용자가 돼주는 수밖에 없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 어차피 나는 이 세계를 돕기로 결심했다. 조금의 번거로움은 감수해주자.
 “네, 제가 불려온 자가 맞습니다.”
 아마, 이 말이 앞으로 나를 구속하게 되리라. 하지만 후회하지 않아. 그나마 다행으로 나는 속내를 숨기고 거짓말을 하는 데 일가견이 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서 이 세계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 했어요. 하지만 제가 이 세계를 도우러 온 자인 건 맞습니다.”
 교묘한 말속임수다. 내가 용자라고는 한마디도 안했어. 이 와중에도 일이 틀어질 때를 대비해 발 뺄 구멍을 마련하려는 게 나답군. 뭐 불려온 자는 맞지만.
 내 말에 분위기는 호의적으로 흘러갔다. 디터가 입을 열어 류아를 도왔다.
 “비록 마도를 걷고 있지만 신도를 의심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죠. 아직까지 신의 예언이 어그러지는 일은 보지 못 했으니까요.”
 “흥, 이번에는 어그러졌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말한 대거는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휙 돌렸다. 거참, 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대놓고 시위하는군.
 뭐 나라고 저놈을 마음에 들어 해 줄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앞으로의 움직이는데 있어 이 인원들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한자리에 모아놓을 까닭이 없겠지.
 생각을 정리한 나는 류아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류아 씨.”
 “류아라고 편하게 불러주세요.”
 생긋 웃는다. 으음, 확실히 예쁘게 생겼다. 소녀와 처녀의 중간단계랄까? 성숙함과 발랄함이 절반씩 배분되어 있는게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특히 하늘빛 눈을 응시하고 있으면 기분이 편해진다.
 다음은 디터.
 “잘 부탁해요. 디터 씨.”
 “저야말로. 용자와 한 팀이 되어서 움직일 기회가 생겼으니 즐겁기 짝이 없군요.”
 예상대로 이들은 한 일행이었다. 예언이 있었다면 그에 따른 대비는 해뒀을 테니까.
 그냥 무작정 소환을 기다리기 보단 함께 마황을 물리칠 구성원 정도는 짜둬야 정상이겠지. 그게 이들이라면 이 세계에서 실력 있는 자들이 분명하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졸고 있는 사제를 흔들어 깨웠다. 에티엔은 졸음이 잔뜩 섞인 눈을 비비더니 앞에 놓여진 내 손을 보았다.
 “무슨 뜻이죠?”
 “… 악수인데요.”
 에티엔은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채를 띄고는 내 손을 잡았다. 차가운 철이 손바닥에 달라붙는 느낌이다. 인간치고는 무척이나 차갑다.
 “손이 따뜻하네요?”
 “아, 예.”
 손을 떼자 얼얼한 느낌이 어깨로 올라왔다. 으음, 꽤 특이한 아가씨군. 류아가 소녀라면 이쪽은 처녀랄까?
 비슷한 나이로 보이지만 분위기가 확 다르다. 게다가 이목구비와 피부색이 미묘하게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게 아무래도 혼혈인 것 같다.
 여하간 남은 건 한명인가. 나는 좀 더 목소리를 부드럽게 굴렸다.
 “자, 그럼 잘 부탁합니다.”
 “뭐… 의심한 건 미안하다. 하지만 불안해서야 말이다. 류아가 널 보증한 이상 일단은 믿겠다만.”
 내 손을 잡은 대거는 의외로 솔직하게 사과를 했다. 성격이 나쁘긴 해도 바탕은 괜찮은 편인가 보군.
 여하튼, 이제 단결식도 끝났으니까 다음 행동을 할 차례 아닌가?
 뭐부터 하지? 내가 용자라 입증 받았으니 높으신 분들에게 차례로 소개되는 순서인가? 내가 악수를 마치자 모두들 류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일단 리워드 님의 적응기간인 며칠 동안 제가 지휘할게요.”
 아무래도 류아라는 이 소녀기사는 배경이 있는 것 같다. 몸에 흐르는 기품이나 예절로 봐서는 일개 기사가 아닌 것 같고. 트라이림이 어떻게 기사를 뽑는지는 몰라도 여자가 기사가 되기 쉽진 않을 테니 실력이 있겠지.
 게다가 가려 뽑았을 다른 인간들이 류아의 말에 반박을 안 하는 게 은연중에 그녀를 존중하는 분위기였다. 나이가 제일 어려 보이는데도 이렇다는 건 뒤에 뭔가 있다는 게 가장 쉬운 추측이지.
 류아는 명쾌하게 말했다.
 “그럼 예정대로 움직일까요?”
 “잠깐만요.”
 무슨 예정인거야, 대체. 정보가 없으니 주체로 활동하기 힘들군.
 나는 곤란하단 얼굴을 하고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좀 적극적으로 나서려고 해도 원체 아는 게 없으니까.
 “예정은 좋지만 당장 움직이기에는 제가 좀 피곤한데요. 한 두 시간 뒤에 움직이면 안 될까요?”
 일단 시간 좀 끌고 사태 파악을 해야겠다. 류아는 잠깐 생각하는 얼굴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 시간 뒤에 웨건으로 모여주세요. 그때 출발하기로 하죠.”
 대거와 마법사, 성직자는 고개를 끄덕이곤 방을 나섰다. 류아는 생글 웃고는 내게 목례했다.
 “시간이 되면 부르러 올 테니 편히 쉬세요.”
 “… 저기, 잠깐만요.”
 당신까지 가면 어떻게 해. 애초에 이계에 온지 30분도 안 된 인간을 마구잡이로 돌리는 건 좀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좀 정직하게 나가자.
 “제가 이 세계에 대해서 정보가 굉장히 부족한데요.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내 요청에 소녀기사는 걸음을 멈추고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등을 꼿꼿이 세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어요. 약간만 물어볼 테니까.”
 “으음, 잠시만요. 제가 좀 흥분했네요.”
 내게 양해를 구한 소녀는 자신의 가슴께에 손을 얹고는 몇 차례 심호흡을 했다. 긴장을 숨기지 못 하는 미숙함이 보였지만 어쩐지 그게 마음에 들었다.
 그래, 저 나이라면 저런 반응이 보통이지. 나 같은 가식덩어리가 아니라.
 “됐어요. 질문하셔도 되요.”
 소녀는 진정이 됐는지 등을 의자에 기대고 몸을 편하게 했다. 긴장이 상당히 해소된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가장 궁금한 걸 물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건데요?”
 “줄루요. 그쪽의 오크부족에게 중요정보의 존재가 감지되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활용 가능한 병력을 이용한 양동작전을 해보려고 해요.”
 “음…….”
 지금 막 날아온 사람을 다짜고짜 전쟁터로 밀어 넣겠다는 소리입니까? 아무래도 이들은 내가 이 세계의 정보를 모두 알고 왔다고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류아 씨, 저기…….”
 “편하게 말 놓으세요.”
 “아, 그런 건 나중에 따지기로 하고… 제가 오는 건 정해져 있던 건가요?”
 “날짜가 예언이 되어 있었으니까요.”
 대답하는 류아의 표정이 섭섭함을 진하게 담고 있었다. 평대하라는 걸 대충 넘겨서 그런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군.
 그나저나 이 소녀에게 병력지휘권이 있나? 뭐 예언의 용자와 함께 세계를 구할 일행인데 그 정도의 권한은 있겠지.
 “아, 그런데 아까 전에 여덟 검인가 하는 건 뭐죠?”
 “아, 그건…….”
 류아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홍조가 도는 하얀 얼굴이 너무 귀여워 보인다.
 “전 용자의 첫 번째 검으로 태어났어요. 알 브레히토 님이 용자를 도울 여덟 검을 남기시겠다고 하시면서 제 출생을 예견하셨죠. 그래서 제가 여기에 있는 거예요. 다른 분들은 룬 슈테드 왕실이 리워드 님을 돕기 위해서 모았고요.”
 신탁이란거군. 아무래도 눈앞의 소녀는 도우미로 지정되었다는 것 같다.
 문제가 되는 건 내가 정말 알 브레히토의 불림을 받은 게 맞느냐는 거다. 나는 여신의 명을 받았지 알 브레히토는 오늘 처음 들었다.
 정황상 얼추 맞아 떨어지지만 좀 불안한데. 뭐 여신이 깜빡 잊고 말을 안 해줬다고 생각하면 간단하다만.
 여하튼 다들 이 환란을 타파해줄 사람만을 기다렸고, 내가 그 역할을 맡아버렸는데… 당장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검이야 그럭저럭 다루지만 그 정도로는 쉽지 않을 텐데.
 “후우…….”
 슥.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자 내 손위로 작은 손이 포개졌다. 금속 건틀렛에 감싸인 그 손에서 느껴질리 없는 따스함이 전해져온다.
 내가 류아를 직시하자 그녀는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리워드 님을 만난 건 운명이에요.”
 확실히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목소리다. 조금 불안이 가시기는 한다. 침묵이 감돌자 류아는 내 손을 놓았다.
 “시간이 될 때까지 편히 쉬세요.”
 “…….”
 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류아가 나가자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 상황에 적응이 잘 안 되지만 이곳은 이계다. 말은 통한다. 자다가 여신을 뵙고 그 명을 받아 이 세계에 온 거다.
 임무는 마황타도.
 “으음.”
 현실감이 없었지만 혼자서 가만히 앉아 있으니 점차 확연하게 각인된다. 나는 손을 들어 볼을 세게 꼬집어보았다.
 “아야야…….”
 그래, 지금 이 상황은 현실이고 이곳은 아버지가 없는 이계다. 게다가 나는 이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던 예언의 용자다.
 긍정해버렸으니 그만큼의 업적을 이루지 않으면 안돼.
 “뭔가 딱히 잘나진 것 없지만 말이지…….”
 생각하던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아버지는 무시무시한 힘으로 세계를 구하여 이름을 날렸는데 나는 세계를 구한다는 예언을 받고 시작하는구나. 대체 어떻게 일이 돌아갈지는 모르겠지만 신들도 생각이 있으니까 나를 부른 거겠지.
 일단 눈앞의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 하나씩, 하나씩 가다 보면 길이 보이겠지.
 “그래, 하자.”
 이곳이라면 내 뜻을 마음대로 펼쳐 보일 수 있다. 비록 아버지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지만… 어차피 무를 수 없는 판이다.
 “합리적으로 가자고.”
 혼잣말을 한 나는 허공을 향해 히죽 웃어보였다. 세계를 구하는 용자의 이름을 받아버렸다.
 그럼 그에 걸맞게 행동해줘야지.
 
 큼지막한 바위에 걸터앉아 불침번을 서던 나는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밤하늘의 화폭에는 깨알 같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곳저곳에 풀벌레 우는 소리가 귀에 박힌다.
 왼쪽의 웨건을 보던 나는 오른쪽의 도로를 보았다. 도로로 하루 종일 달린 우리는 옆에 세워두고 노숙을 하고 있었다.
 구세용자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져도 불침번은 서야 되는군.
 도착지는 소규모라도 분명 전장이 될 텐데… 어쩐지 긴장이 안 된다. 비록 내 검술이 봐줄만한 축이라고 하나 손에 피를 묻혀본 적이 없다. 어째야 할까?
 부스럭.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흠칫 놀란 나는 조심스레 허리에 손을 가져갔다. 뭐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사위를 살피자 범인이 드러났다.
 “안자요?”
 자고 있던 에티엔이 짐칸에서 나온 것이다. 불침번을 서는 사람에게 안자냐고 묻다니.
 “에티엔 씨는 안 주무세요?”
 성직자라면 내일 주문을 쓰기 위해서 숙면을 취해둬야 하는 것 아닌가? 에티엔은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다가왔다. 그리고는 나를 빤히 본다.
 왜 이래? 그녀의 시선에 한 점의 흔들림도 없어서 결국 내가 고개를 돌리게 되었다. 시선을 피하자 엉뚱한 소리가 들려왔다.
 “엘 브레가 님을 믿어볼 생각 없어요?”
 “…….”
 정말 엉뚱한 아가씨군. 자다 일어나서 불침번을 서는 사람에게 포교활동이라니. 때와 장소를 가려줬으면 하는데.
 “전 엘 브레가 님이 어떤 신이신지도 모르는데요.”
 하루 좀 넘게 이 세계에 있으면서 느낀 건 정보가 없어도 너무 없다는 거다. 알아야 뭘 해먹지.
 맞서야 할 마황군의 조직도나 수장들의 정보는커녕 나라 이름들도 제대로 모르고 있고 이 룬 슈테드의 마황군 규모도 모른다. 이 상황에서 뭘 어쩌랴?
 “엘 브레가 님은 알 브레히토 님의 여동생으로 음陰의 여신이세요. 라예생트의 수호신이시기도 하죠. 교리는 순리를 중점으로 두고 있어요. 가령 예를 들면…….”
 “저기, 잠깐만요.”
 일단 말을 끊었다. 놔두면 어디까지 나갈지 몰라. 근본적인 취지부터 알아보자.
 “왜 저에게 믿음을 전하시려는 거예요?”
 “생전의 알 브레히토 님과 엘 브레가 님은 사이가 좋지 않으셨어요. 원래라면 제가 당신과 악수를 하지도 않았겠죠. 하지만 당신이 알 브레히토 님의 신자가 아니라면…….”
 “끌어들일 가치가 있다 이거군요. 저에게도 꽤 솔깃한 이야기지만 지금 이 자리에선 논하기엔 좀 어려운 사안이 아닐까 하는데요. 차후에 기회가 있다면 엘 브레가 님의 교리를 들어보고 싶군요.”
 뭐, 흔한 이야기구만. 로스터슬라프에서도 아버지 이름 덕분에 여기저기서 손짓이 많았지. 다 받을 수도 없고 어느 한쪽만 택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서 균형 잡는 짓은 지겹게 해봤다.
 내 말에 에티엔은 잠시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뭘 고민씩이나 해. 차후를 노리라고. 물론 그 기회라는 거 여간해서 안 오고 온다 해도 빠져나갈 테지만.
 “그렇군요. 그럼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할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네, 잘 자요.”
 짐짓 웃는 얼굴로 손까지 살짝 흔들어준 나는 에티엔이 짐칸의 자리로 돌아가자 속으로 마음껏 불평을 해댔다. 여기까지 와서 이런 짓을 해야 하나?
 뭐 생각해보니 안 할 수가 없구나. 모두가 기다려온 전설의 용자, 그것도 마황을 물리쳐 세계를 구한다고 예언된 존재다.
 환심을 사는 건 기본이고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놈들이 부지기수겠지.
 또 이런 일을 해야 하나? 누가 들을까봐 속으로 한탄한 나는 무릎을 당겨 고개를 박았다. 뭐 이름을 가지면 파리가 달라붙는 거야 당연하지. 이 자리를 맡기로 한 이상 불평해도 소용없다.
 근데 큰일 났군. 지금에서야 생각난 건데 올 때는 여신이 보내줬지만 돌아갈 때는 어떻게 가지?
 “으음.”
 모든 일을 끝내고 나면 여신이 다시 되돌려 주실 거야. 암, 그렇고말고.
 일을 꾀하고자 하면 시작과 끝을 확실히 정해둬야 하는데 끝이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거니 불안하군. 뭐 불안해한다고 어떻게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일단 이 문제는 넘기자.
 생각을 매듭지은 나는 벨트에 걸어둔 나무막대를 빼들었다.
 “끄응.”
 이건 대체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고? 류아가 말하길 신검 키비타스 테레나라고 했다. 사용법은 내가 안다고 했고. 근데 난 전혀 모르겠거든.
 나무막대를 돌려보고 눌러보고 만져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무 문양도 없는 단순한 나무막대에 불과하다. 기대하면 안 될 것 같다.
 나는 왼쪽 허리에 찬 바스타드 소드를 내려다보았다. 아까 신전에서 가죽 갑옷과 같이 얻어온 거다. 트라이림에도 손에 익은 무기가 존재하니 다행이군.
 다른 차원이라도 나오는 문화들은 거기서 거기라는 걸까.
 “뭐, 어쩔 수 없나.”
 합리를 기준으로 삼아 대처하는 수밖에.
 그나저나 여기 이계긴 하구나. 내가 아는 것과 전혀 다른 별자리가 배치되어 있는 밤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니 실감이 난다.
 나는 지금 이계로 와서 용자 대접을 받게 되었다. 내용물은 전혀 변하지 않았는데 순식간에 포장만 화려해진 셈이다. 아버지처럼 강력한 힘이 있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그게 아니라 문제지.
 일단 지금은 눈앞의 일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다.
 
 이틀이 지났다.
 류아는 우리들과 헤어져서 군 쪽으로 갔다. 류아가 지휘하는 부대가 앞에서 오크마을을 치는 사이에 우리는 뒤에서 타깃을 제거한다.
 작전의 목표는 오크들의 소탕이 아니라 그들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오우거의 물품을 탈취하는 것이다. 그게 룬 슈테드의 마황군을 상대하는 데 필요한 물건이라는 게 류아의 설명.
 나무가 듬성듬성 자라고 있는 가파른 오르막에는 사람이 다니는 길이 없었다. 하긴 오크마을이 지척인데 등산로가 있을 리가 없다. 푸르른 봄이 내려앉은 조용한 산 속을 대거가 앞서 걷고 디터, 에티엔 나 순으로 오르고 있었다.
 음, 이쪽 일을 일찍 끝내고 류아 쪽을 도우러 가는 게 낫겠지?
 희생을 줄이기 위해선 그편이 나을 터, 나는 일행의 제일 뒤에 걸으면서 그렇게 마음먹었다.
 “으음.”
 체력단련이야 해둔 덕분에 그다지 지치지는 않았지만 말수는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이 파티는 다들 말이 없는데 나까지 입을 다무니 조용해졌다.
 뭐, 하긴 은밀 행동에 말이 많으면 곤란하지만 한마디도 없다는 건 좀 심심하군.
 앞서서 나뭇가지를 헤치며 걷던 대거가 갑자기 멈춰 섰다. 오르기를 관두고 자세를 낮춘 그는 옆걸음질로 이동해서 바위 뒤에 숨었다. 우리 셋이 그 뒤를 따라 바위에 달라붙자 그는 손가락 세 개를 펼쳐보였다. 세 마리라는 표시다. 나는 조심스레 바위 위로 머리를 조금 올렸다.
 거리는 대충 50, 아니, 70미터인가? 우리가 올라가려 한 언덕위에 처음 보는 것 들이 있었다. 나무 등걸에 몸을 기대고 병기를 내려놓은 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인간과 같은 이족보행 생명체. 녹색 피부에 돼지머리를 가진 괴물, 로스터슬라프에선 고신이 여신을 시샘하여 인간을 해하기 위해서 그 근본을 비틀어서 만들어낸 생명체라고 했다. 트라이림에서의 활용용도는 둘째 치고 그 창조의도가 똑같다는 걸 느꼈다.
 저건 인간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종족이다. 체형만 봐도 그런 생각이 딱 들었다. 조잡한 갑옷으로 몸을 가린 그들은 각기 롱 스피어, 그레이트 엑스, 글레이브로 무장하고 있었다. 우리 쪽 인원은 넷. 두 명은 전사에 다른 둘은 주문사용자.
 바람 방향 덕분에 아직 저쪽이 우리를 눈치채지 못 했으니 유리하다. 잠깐, 이거 죽여야 하는 상황인가? 순간 갈등하는데 대거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나 둘, 너 하나.
 그 손가락이 날 향하는 순간 망설이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달리는 게 편하다. 침착해라.
 검을 배우면 언젠가 손에 피를 묻힐 상황이 있을 거라고, 나에게 검술을 지도해준 사키엔 어머니가 예전에 말하신 적이 있었다.
 난 검에 피를 묻혀본 적이 없었지만 지금부턴 익숙해져야 해. 앞으론 계속 이런 일이 있을 테니까. 나는 이러기 위해서 이 세계로 온 거고 그 책무를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고가 몸에 다다르는 순간 거친 숨결이 느껴졌다. 뭐… ? 나는 깜작 놀라 발을 멈췄다. 대체 이 거리를 언제 움직인 거지? 분명히 두 세 걸음 앞으로 뛰었다 싶었는데 어느새 언덕위에 올라서 있었다.
 내가 멍하니 있자 오크들도 멍청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이, 이럴 때가 아냐!
 오른손으로 뽑으면서 마음을 비우고 휘두른다. 나머지는 반복훈련을 익힌 몸이 저절로 따라간다.
 경악으로 일그러진 오크의 목이 하늘로 치솟았다.
 머리 잃은 몸뚱이가 초록색 피를 분수처럼 뿜어낸다. 막대한 양의 출혈이 놈이 기대고 있던 갈색 나무를 녹색으로 물들여 버렸다.
 동료의 죽음에 그제야 정신 차린 오크 둘이 무기를 꼬나 쥐는 순간 둘 다 목에 단검이 박혔다. 대거의 솜씨가 대단한걸.
 “아…….”
 옷에 피가 달라붙어버렸다. 이래서야 곤란한데. 나는 방금 한 일보다는 이후의 일이 신경 쓰였다.
 “괜찮냐?”
 대거가 다가와서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은 말짱한데 몸에 묻은 피가 문제다. 아무리 후방기습이라고 해도 냄새를 그대로 풍기고 다니면 곤란하다. 오크들은 후각이 좋은 편이다.
 “괜찮긴 한데… 이거 냄새 문제 될 것 같은데요.”
 뭐 어차피 인간이나 피나 냄새나는 건 마찬가지겠지만 그래도 피 쪽이 더 자극적 일터. 난색을 표하자 대거가 주머니에서 유리병을 꺼냈다. 그 안에는 끈적끈적해 보이는 녹액이 들어 있었다.
 “이걸 몸에 바르면 될 거다.”
 끄응, 녹색 피 위에 동색의 액즙을 바르는 건 말 못할 기분일 것 같은데. 뭐 이대로 갈 수는 없으니 피가 묻은 오른 손과 어깨에 바르기 시작했다.
 내가 바르는 동안 언덕을 올라 도착한 디터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아까 그 속도는 대단했어요. 과연 구세용자다웠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았는데 어느새 오크가 죽어 있더군요.”
 확실히 아까 그 움직임은 기묘했다. 내가 해놓고도 어떻게 한지 모르겠다. 왜 이러지? 이 세계에 적응하는데 생긴 부작용인가?
 뭐 다행히 도움은 됐지만 마음이 불편하다. 내가 예측 못 하는 변수가 끼어 있다는 게 달갑지 않다. 반대로 움직임이 느려질 수도 있잖아.
 “뭐 키레이카의 검무가들도 저런 움직임을 보인다고 하더군. 길게 이야기할 상황은 아니니까 가지.”
 꽤 흥미로운 이야기였었다. 내 움직임은 그렇게까지 특출난 게 아니었나 보군. 키레이카 라는 나라에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움직임을 하는 인간이 있나 본데? 뭐 한얼의 무투가와 비슷한 건가?
 대거에게 유리병을 돌려준 나는 내밀어진 손의 주인을 돌아보았다. 고와보이는 손에는 하얀 손수건이 들려 있었다.
 “…….”
 에티엔은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쓰라는 건 아닐 테고 나중에 닦아내라는 거겠지. 뭐 일단 받고 나중에 돌려주자.
 손수건을 받아든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이곤 일행의 뒤를 따랐다. 아, 근데 뭔가 억울한 느낌이다.
 산을 넘어가더라도 결국 그 마을은 숲 속에 있을 텐데 왜 나 혼자만 이걸 발라야 돼? 모름지기 기습작전이라면 주변 환경과 비슷한 분장을 해주는 게 예의 아닌가? 게다가 이게 냄새도 퍼지지 않게 해주잖아. 그럼 모두 다 발라야 하는 거 아닌가?
 “후.”
 결코 사심이 있는 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작전의 효율성과 안전성을 고려한 거다. 하지만 지금 안내자는 대거다. 사람을 썼다면 신뢰해야 하고 신뢰하지 못 할 사람은 쓰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생각해도 어딘가 손해 보는 느낌은 남지만.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산을 하나 더 넘었다. 해가 중천에 뜬 걸 보니 약조한 대로 류아 쪽이 전투를 벌이고 있을 터다. 산의 정점에 선 우리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법한 곳은 울창한 숲의 나무들에 가려 볼 수 없었지만 아래 오크마을들은 듬성듬성 보이고 있었다.
 “내려간다. 조심해서 따라와라.”
 대거의 말에 따라 우리는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파르게 올라왔던 만큼 내려가는 경사도 심했다. 오르막과 달리 수풀이 울창해서 오크들이 매복하고 있기 좋아 보였다. 길잡이인 대거도 그걸 염두에 뒀는지 신중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매복을 경계하는데다가 경사가 경사다보니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새가 요란하게 지저귀는 가운데 모두 입을 꾹 다물고 산을 다 내려왔다. 다행히 복병은 없었다. 아까 셋이 전부였던 것 같다.
 우리는 나무들 사이, 사이로 이동하여 오크들의 마을에 접근했다. 굵은 나무들 사이로 통나무로 지어진 움막이 여러 채 보이기 시작하자 대거의 움직임이 절로 신중해졌다.
 한참 눈을 굴리던 대거는 곡선적인 움직임으로 마을의 가장 구석진 집으로 접근했다.
 다른 집보다 두 배는 커 보이고 위치상 마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걸 보아하니 권위자가 기거하는 모양이다.
 집 뒤쪽에서 열 걸음 정도 떨어진 바위에 몸을 숨긴 우리는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살펴본 결과 이 집 근처에는 입구의 보초 둘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 류아가 이끄는 군사들에 대항하기 위해 전부 보냈을 터. 이제 기습해야 되는 건가?
 그때 마침 집에서 뭔가가 나왔다. 놀랍게도 그건 머리가 세 개 달리고 팔이 여섯 개 달린 오우거였다. 2미터 50은 되어 보이는 거구에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는 세 개의 머리, 그리고 각각의 팔에는 그레이트 클럽을 들고 있는 게 그 위세가 무시무시했다. 외양부터가 보는 자를 압도하는 강함이 넘쳐흘렀다.
 “킁, 킁.”
 나와서 좌우를 둘러보던 놈이 코를 씰룩거렸다. 아무래도 낌새가 불안하다.
 이런, 뛰쳐나갈까? 내가 대거를 보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끄응, 이미 들통 난 것 같은데. 오크 둘에 삼두육비의 오우거라. 솔직히 좀 버겁다는 생각이 들지만…….
 애초에 목표가 저놈이었다는 건 이 파티는 저것들을 감당할 능력이 있단 거겠지. 그렇게 판단을 내린 나는 대거에게 눈짓을 하고 바로 다리를 움직였다.
 그 순간 나는 오우거의 앞에 있었다.
 뭐, 뭐야? 왜 이렇게 몸이 빨라? 오우거와 대면식을 한 나는 멍청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그놈도 상황은 마찬가지인지 갑자기 나타난 게 인간인지 식량인지 감을 못 잡는 얼굴이었다. 으윽, 일단 움직여야 한다! 이 말도 안 되는 속도는 나중에 따지자!
 나는 허리의 검을 뽑아서 휘둘렀고 오우거는 반사적으로 방어했다. 야수의 감 덕분에 내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 어?
 오우거의 클럽과 맞붙은 순간 거대한 힘이 느껴졌다. 당연하다. 상대는 흉포한 식인귀 중에서도 머리가 셋 달린 변종이다. 간단히 계산해도 세배의 힘을 가지고 있겠지. 그렇다면 내 쪽이 밀려야 정상이다.
 하지만 내 쪽이 힘으로 오우거를 밀어내고 있었다.
 공격자와 수비자 양측이 당황했다. 오우거는 어디서 튀어나온 고깃덩어리가 힘으로 밀어내니 기가 찼던 것이고 그 실행자인 나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내 몸이 어떻게 된 거지? 미친 거 아냐?
 그때 오우거는 정신을 차리고 나머지 팔을 움직였다. 내 머리통을 향해 두개의 그레이트 클럽이 날아들었다. 힘겨루기를 포기한 나는 뒤로 몸을 굴렸다. 데굴데굴 구르는 내 눈에 기괴한 광경이 들어왔다.
 오우거의 그림자에서 사람이 솟아나고 있었다.
 튀어나온 그것은 팔을 움직여 오우거의 목뒤를 찔렀다. 자세를 바로 잡은 나는 그 기묘한 광경에 눈을 고정시켰다. 경추를 당한 오우거는 괴성을 내지르며 뒤쪽으로 클럽을 휘둘렀다.
 “큭, 저놈 목살이 너무 두꺼운데?”
 그림자가 투덜거리는 목소리는 대거의 것이었다. 저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나? 놀라긴 했지만 상황이 급하다.
 “핫!”
 한방에 보낼 생각으로 머리를 노렸다. 가볍게 뛰어올랐는데 5미터는 뛰어버렸다. 모, 몸이 왜 이러지? 놀란 와중에도 나는 검의 목표를 잡았다. 아래서 허둥거리는 오우거의 머리를 목표로 잡은 나는 그대로 떨어졌다.
 “으아아앗!!!”
 “우오?”
 내 고함에 위를 올려다본 오우거가 팔 두개를 교차시켜 머리를 막고 다른 팔로 나를 공격했다. 하지만 내 낙하 속도가 더 빠르다!
 몸을 두들기는 공격은 날 스치고 지나가버렸고 내가 내리 찍은 검이 클럽을 두동강 내버렸다.
 “합!”
 파육음이 길게 이어졌다. 고기를 다지는 소리와 비슷했지만 그것에선 찾아볼 수 없는 섬뜩함이 있었다. 머리부터 들어간 검이 사타구니로 빠져나온다.
 몸이 세로로 등분된 오우거는 잠시 그대로 서 있다가 반으로 쪼개져서 땅바닥을 굴렀다. 붉은 피가 시야를 메운다.
 “후우, 후우.”
 검을 든 채로 멍하니 숨을 고르고 있자 디터와 에티엔이 당황하던 오크 둘을 잠재우고 집안에 들어갔다. 그 둘의 움직임을 보며 나는 멍하니 손을 내려다보았다.
 “뭐지…….”
 왜 이러지, 내 몸이? 왜 이렇게 이상해진 거지? 상식을 넘어선 속도와 힘이다. 육체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해 있다.
 “으음.”
 그것도 그거지만 허리가 좀 아프다. 피했다고 생각한데 얻어맞은 모양이다.
 얼굴을 구기고 있는데 들어갔던 둘이 뒤에 종이쪼가리를 가지고 나왔다. 저게 목적이었던가? 그걸 배낭에 쑤셔 넣은 디터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목표는 완수했습니다. 근데 몸은 괜찮은 겁니까?”
 “괜찮아요. 좀 당황한 것뿐이니까.”
 오크 때는 당황해서 얼결에 해버린 셈이지만 이번에는 명확히 목숨을 노리고 한 것이다. 나는 검에 피를 묻히게 된 것이다.
 멍하니 상념을 정리하고 있는데 에티엔이 내 몸에 손을 대더니 입을 움직였다.
 “큐어 운즈.”
 손에서 따스한 기운이 전해지더니 마음이 편해졌다. 다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허리를 얻어맞았던 모양이다. 상처가 치유되는 게 느껴진다.
 “아, 고마워요.”
 내가 허리를 만져보고 있는데 디터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부담스러운 눈길을 보내왔다. 대체 왜 저래?
 “가뭇은 칠단장인 니메로의 세 심복중 하나인데 이리도 쉽게 처단하시다니. 과연 용자의 이름을 가진 분답군요.”
 그렇게 대단한 놈이었나? 하긴 이런 힘을 가진 놈이 여섯 개의 무기를 휘두르며 돌진하면 일반 병사야 뭘 해보지도 못 하고 떡이 되겠지.
 아니, 기사라고 해도 대책이 없다. 이렇게 무지막지한 괴물이라니.
 나도 얼결에 물리친 거지 두 번 싸우라면 자신 없다. 애초에 원래의 나라면 이런 괴물에게 잠시도 버티지 못 했을 거다.
 아까 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고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움직이고 뛰어오른 덕분이다. 이건 내 원래 능력으로 이긴 게 절대 아냐.
 내 몸에 어떤 변화가, 육체능력이 말도 안 되게 상승해 있다.
 “으음.”
 호흡을 가다듬은 나는 근처의 아름다리 나무 앞에 섰다. 자세를 바로 하고 호흡을 고른 나는 나무를 향해 주먹을 힘껏 내질렀다.
 쩡.
 기묘한 소리, 생각했던 것과 다른 타격음에 당황한 내가 나무에서 주먹을 떼자 이변이 일어났다. 나무가 움찔거리는 듯싶더니 조각나서 비산하는 게 아닌가?
 내가 한 일이지만 기가 막히기 이를 데 없었다. 믿기지 않는 현실에 입이 벌어진다.
 놀라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바람이 살랑 부는가 싶더니 내가 부순 나무 뒤편의 나무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박살이 나버렸다.
 “…….”
 기가 막힌다. 대체 이게 뭐야? 옆의 디터도 황당하단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당사자도 설명이 불가능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여신의 축복일까? 이런 걸 주실 거라면 좀 언질을 주시지.
 이 힘은 마치 전설의 그것 같다. 그래, 하늘이 내린 축복을 받아, 그 힘을 올바르게 씀으로서 어지러운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용자.
 나는 정말로 선택된 용자가 되어버린 건가? 세계를 구한다고 예언된 자, 그에 걸맞은 힘이 지금 내 몸에 감돌고 있었다.
 그렇게 밖에 볼 수 없었다.
 “힘 자랑 끝났으면 가자.”
 “잠깐만요.”
 팔짱을 낀 대거가 날 못 마땅한 눈으로 노려봤지만 무시했다. 마음이 쿵쾅쿵쾅 거린다. 강해졌다.
 나는 엄청나게 강해졌다. 이 정도라면… 정말 세계도 구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망설일 건 없다. 나에겐 힘이 주어졌다.
 “아뇨. 돌아가지 않습니다.”
 “예?”
 디터가 놀란 눈으로 반문했다. 뭐야, 이 사람들. 이다음 일은 당연한 거 아냐?
 “류아 쪽을 도우러 가죠.”
 당연히 해야 될 행동이다. 대거가 머리를 긁적이더니 떫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임무는 어디까지나 가뭇의 처단과 문서를 손에 넣는 거였다고. 거기에 저건 들어 있지 않아. 게다가 우리가 빠지지 않으면 류아 쪽도 빠질 수 없잖아?”
 맞는 말이긴 한데 맹점이 있는데.
 “저희가 임무를 완수했다는 걸 알릴 연락수단은 가지고 계십니까? 류아가 줬어요? 설사 알아서 빠진다고 해도 퇴각이라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 희생이 클 게 눈에 보이잖아요.”
 대거는 입을 다물었다. 류아는 우리들을 위해서 오크들을 상대하고 있다. 그걸 그대로 놔두고 간다고? 걔 혼자서 싸우게 하고 임무완수라고 외치란 말이냐?
 그건 명백한 잘못이다.
 “저는 류아를 도우러 가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쩌실 거죠?”
 슥.
 에티엔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같이 가겠다는 의미, 속내를 알기 힘들지만 괜찮은 사람인 것 같긴 하다.
 디터는 기지개를 피더니 양손을 뒤통수에 대고 쾌활한 목소리로 입장을 밝혔다.
 “아직 주문 하나도 쓰지 않았으니 하니 같이 가죠. 무엇보다 저는 구세용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싶거든요.”
 이유가 수상하지만 뭐 같이 가준다니 고맙다. 이제 남은 건 불만스러운 얼굴을 한 대거군. 그는 여유가 넘치는 디터를 노려보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추가보수가 없는 일엔 끼어들 생각이 없다. 니들끼리 해.”
 “그래요? 그럼 저희들만 가죠.”
 그렇게 말하고 나는 숲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위치야 부락들을 돌파하면 자연스레 보이겠지. 대거를 설득 하면 좋겠지만 이런 사안은 시간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설득한다고 들어먹을 인간 같지도 않다. 보수 이야기를 하는 거 보니 아무래도 파티원으로 있는 대신에 약속받은 게 있나보군.
 하긴 이런 위험한 짓을 단순히 정의감으로 할 사람은 없다 봐도 좋겠지. 그러니 대거의 태도는 탓할게 못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걷는데 갑자기 대거가 성킁 성큼 걸어오더니 앞지르는 게 아닌가? 걷던 그는 우리들을 돌아보고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젠장, 나중에 추가보수 받아낼지 알아라.”
 이를 빠득빠득 갈아댄 대거는 앞서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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