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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 브레이커 1권

2015.06.25 조회 5,575 추천 47


 #프롤로그
 
 아직도 생각난다.
 그날 밤.
 하늘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기묘한 빛의 오로라가 펼쳐졌다.
 무수히 많은 별똥별이 떨어졌다.
 그리고 나의 귓가엔 청량한 여자의 목소리가 이렇게 속삭였다.
 
 [해당 차원은 차원의 전장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차원의 전장이라고?
 뭔 소리?
 
 [잠재 능력을 각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목소리.
 그 목소리는 여태까지 그냥저냥 될 대로 되라고 살아왔던 나, 유진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인간 유진호
 
 [라온 익스프레스]
 
 이삿짐을 가득 실은 트럭이 단지에 들어섰다.
 6월의 하늘은 맑고, 아침인데도 더위가 훅 밀려온다.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되려나 보다.
 유진호는 트럭의 보조석에서 내렸다. 헤진 목장갑을 나누어 끼고, 담배를 빼물었다.
 “9층이죠?”
 운전석에서 내린 김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903호. 오늘 짐은 유독 많으니 고생 좀 하겠어.”
 “인부들은 언제 온대요?”
 “뒤 차 타고 온대. 15분 정도 있으면 도착할 거야.”
 “대충 가벼운 짐만 옮기고 있죠, 그럼.”
 김 씨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거 젊은 놈이 요령 피울 줄 몰라서 어디다 쓰누? 이럴 땐 좀 쉬어도 돼.”
 “젊긴요. 저도 벌써 서른넷입니다.”
 김 씨가 호통을 쳤다.
 “이 짜식이 복에 겨운 소릴 하는구먼? 난 예순둘이다! 네놈은 젊은 거야!”
 진호가 피식 웃었다.
 “저 혼자 할 테니 아저씬 좀 쉬셔요. 어제도 야간 뛰고 오셨죠?”
 “죽겠어, 아주.”
 김 씨가 담배를 뻑뻑 피우며 한숨을 내쉬었다.
 김 씨는 야간엔 대리운전을 했다. 김 씨뿐만 아니라 이삿짐센터에서 일하는, 나이가 좀 있는 사람들은 다 주간 야간 겸업을 했다.
 그만큼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었다.
 “전 그냥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셔서요.”
 
 “끙 차!”
 진호가 이삿짐이 가득 담긴 박스를 집어 들었다.
 “젊어서 그런지 힘도 좋아.”
 동료 김 씨가 히죽 웃으며 진호의 어깨를 토닥였다.
 김 씨는 흰머리가 가득한 노인이었다. 육십 대를 넘어선 그의 이마에는 주름이 가득 져 있었다.
 진호가 스물네 살 때 이삿짐센터 일을 시작했으니, 같이 일한 지 십 년째다.
 “젊으니까 그렇죠, 뭐.”
 “운동 했었다며?”
 “예?”
 “자네가 저번에 그랬잖아? 술자리에서 말이야. 십 년을 같이 일했는데, 그건 그때 처음 들었구먼.”
 아.
 진호는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슨 운동을 했기에?”
 진호는 씁쓸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김 씨는 머쓱해져 허허, 웃었다.
 “뭐, 그냥 궁금해서 말이야. 신경 쓰지 마.”
 아무래도 좋다는 얼굴로 진호가 말했다.
 “하긴, 이제는 별 상관없죠. 복싱이요.”
 “복싱?”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김 씨가 손뼉을 쳤다.
 “아, 권투 말하는 건가? 그 홍수환?”
 “예. 권투요.”
 김 씨는 진호를 따라오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대신 눌러 주었다.
 “헌데 지금은 안 하누?”
 “이제 못 해요, 그러니까 이러고 있죠.”
 진호는 씁쓸함 가득한 얼굴로 조용히 웃었다. 김 씨는 궁금한 것이 더 있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나이가 들면서 눈치라는 것이 늘었다.
 같이 일한 시간이 십 년인데, 그 사이에 복싱의 ‘복’ 자도 꺼내지 않던 진호였다.
 사연이 있을 것이다.
 젊은 나이에 이렇게 고된 일을 하는 것이 안쓰러웠지만, 별수 없는 일이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은 없으니까.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진호와 김 씨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9층을 누르고,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뭔가를 생각하던 진호가 문득 입을 열었다.
 “한국 페더급 5위까지 갔었죠. 복싱은 진짜로 열심히 했었거든요. 재능도 있다고 생각했고요.”
 김 씨는 진호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은 짧고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이목구비도 또렷하니 멀끔하게 잘 생겼다.
 키도 적당히 크다. 체구가 그렇게 큰 것은 아니지만, 온몸이 근육으로 탄탄하게 다져져 있어 무척 다부지게 생겼다는 인상이 들었다.
 “근데 제게는 신체적 결함이 있었어요.”
 김 씨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반문했다.
 “그게 뭔고?”
 “유리 턱이요.”
 “유리 턱?”
 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턱이 약하다는 말이에요. 일반인보다 훨씬 더. 일상생활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죠. 헌데 복싱에서는 그게 매우 큰 약점이에요.”
 복싱에 대해서 잘은 몰랐지만, 김 씨는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구먼.”
 “그래서 맞지 않는 복싱을 해야 했죠. 풋워크를 통한 빠른 이동 그리고 회피가 제 복싱의 핵심이었어요. 뭐, 그 때문에 펀치가 약했지만요.”
 풋워크란 발놀림을 말한다. 스텝, 즉 발을 얼마나 잘 놀리느냐를 말한다.
 “잘나갔죠. 신문에도 실리고 뉴스에도 나왔어요, 한국에서도 세계를 노려볼 인재가 나타났다고요.”
 “오호.”
 김 씨가 놀랍다는 듯 진호를 쳐다보았다.
 “대단한걸?”
 “여태껏 모든 펀치를 다 피해 왔지만, 한 방만은 피하지 못했죠. 딱 한 방이었어요.”
 진호는 눈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박스를 쥔 손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딱 한 방요. 턱을 허용한 챔피언의 한 방. 모든 게 끝나는 한 방이었죠.”
 “턱이라는 곳이 그렇게 약한 곳인가?”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턱은 급소거든요. 유리 턱에게는 더욱 그렇죠. 제대로 맞으면 뇌가 울려요. 온 사방이 어질어질 해지면서 속이 울렁거려요. 그리곤 새카만 세상이 찾아오죠.”
 진호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챔피언은 강했다.
 타이틀 매치 때, 턱에 강력한 어퍼를 맞았다.
 7라운드 1분 21초.
 챔피언의 모든 펀치를 피해냈다고 생각했다. 곧, 내가 챔피언이 될 수 있다는 짜릿함이 전신을 지배해 왔다.
 그 순간이었다. 찰나의 틈을 파고든 챔피언의 펀치.
 맞을 거라곤 생각조차 못 했던, 그래서 더욱 대비하지 못했던 펀치.
 정신이 아찔했다.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면서, ‘꽈지직’ 하는 소리가 천둥처럼 귓가를 강타했다.
 그것은 ‘복싱 생활의 끝’을 알리는 소리였다.
 23살, 여름.
 매미가 우렁차게 울던 그날, 진호의 복서 생명은 끝났다.
 
 한국 복서의 삶은 비참하다.
 환경은 열악하고 늘 부상을 당할 수 있는 위협에 시달린다. 파이트 머니로는 생활비조차 버겁다.
 그 와중에 치명적인 부상까지 얻었으니 은퇴는 기정 사실.
 방황하던 시절, 고등학교도 자퇴한 진호였다.
 복싱에 인생을 걸었는데, 그 복싱을 할 수 없는 몸이 됐으니 사실상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고작해야 막노동이나 시간제 알바.
 그래서 24살에 은퇴하고 시작한 일이 바로 이삿짐센터 일이다.
 체력 하난 자신 있었다.
 일은 고되고 삶은 팍팍했다. 그래도 일했다. 묵묵히, 죽은 듯이. 그렇게 십 년이 흘렀다.
 주간, 야간 가리지 않고 일했다. 일하고, 일하고 또 일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정도 살 만해졌다. 최소한의 비용을 제외하면 모두 적금에 부었다.
 진호는 그 후로 묵묵히 짐을 옮길 뿐이었다.
 가슴 속을 끓게 만드는 복싱의 열정은 이제 마음 한 켠으로 사라지고, 시리도록 차가운 현실이 그를 마주했다.
 
 일은 저녁까지 계속됐다. 오늘따라 짐이 많다. 인부들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일이 점점 빨라졌고, 결국 환한 달이 뜬 열 시가 돼서야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인부들이 서로에게 인사를 하며 갈 길을 간다. 누구는 가족에게로, 또 누구는 다음 일터로 떠날 시간이다.
 진호도 김 씨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수고했다. 요새도 야간 뛰나?”
 “아뇨. 관둔 지 꽤 됐습니다. 슬슬 힘들더라고요.”
 “나도 그래. 대리 운전도 슬슬 접을 때가 됐어, 재수 없게 졸다가 사고 내면 골로 가는 거거든. 가족이 웬수지, 환갑 넘은 노인네가 무슨 개고생인지 모르겠어. 간만에 술이나 한잔할까? 오늘은 내가 사지.”
 진호는 씩 웃었다.
 “그럴까요?”
 결국 새벽이 될 때까지 김 씨와 술을 먹었다. 오랜만에 먹는 술은 진호를 기분 좋게, 또 울적하게 만들었다. 비틀대면서 집에 가는 골목에 선 진호가 두 팔을 들어 올려 파이팅 자세를 만들었다.
 정말 열심히 했다, 복싱.
 열심히 했었다.
 인생을 걸고 했었다. 이제와 미련이라는 것은 크게 남지 않았지만, 습관이 돼 매일 연습한다.
 “쉭! 쉭!”
 허공에 원투 펀치를 날리고, 몸을 숙여 상체를 좌우로 흔들거렸다.
 “후욱!”
 진호가 허리를 비틀며 왼손을 올려쳤다.
 “…….”
 이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비틀비틀.
 주머니를 뒤적이며 담배를 찾았다. 담배 연기가 까만 하늘로 올라간다.
 골목길의 담벼락에 허리를 기댄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따라 달이 밝다. 평소보다 훨씬 큰 달이 진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밤하늘의 조각구름이 달을 스쳐 지나간다. 한 폭의 그림 같은 밤이다.
 “쓰벌!”
 욕지거리를 내뱉어 본다. 이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은 진호가 큭큭 웃었다.
 “어?”
 그 순간.
 진호는 눈을 비볐다.
 “어어?”
 하늘이 물들고 있었다. 하얀 도화지 위에 잉크 한 방울이 떨어진 것처럼, 물들어 가고 있었다.
 이내 온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기묘한 일이었다. 하늘이 붉게 물들다니?
 화아악!
 그리고 온 사방에 오색찬란한 오로라가 생겨났다. 아름다우면서도 섬뜩한 광경이었다.
 그 다음엔 별똥별이 떨어졌다. 그야말로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유성우가.
 그 별똥별 중 하나가 진호에게 떨어지고 있었다.
 “…….”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진호가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비틀대는 온몸이 비명을 질렀지만 이를 악물고 달렸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싸늘하게 굳어가는 그 기분은 마치 수술대 위에서 마취약을 맞은 듯했다.
 이제 눈앞에까지 날아든 별똥별. 그것은 이글이글 불타는 구체였다.
 몸이 반응하기도 전에, 별똥별은 진호를 덮쳐왔다.
 “으아아악!”
 눈을 질끈 감는다.
 재수가 없으려니 별일이 다 있다. 죽기 싫다. 대체 이게 무슨……
 
 [해당 차원은 차원의 전장으로 선정되었습니다!]
 
 “……?”
 헌데 고통이 없다. 고통 대신 귓가에 들려오는 청량한 여자의 목소리.
 당신은 누구?
 
 [고유 능력을 각성하셨습니다!]
 
 눈을 떠 보니 사방은 그대로였다. 하늘의 붉은색은 이미 사라졌고, 오로라와 별똥별 역시 그랬다.
 “꿈……?”
 술김에 꿈이라도 꾼 건가?
 그렇게 생각하기엔 지나칠 정도로 리얼한데.
 술이 단방에 깬 기분이다. 시야가 또렷하게 돌아왔다.
 헌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는 일들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었다.
 
 [플레이어 421]
 [아이디 : 유진호]
 [등 급 : 미정]
 [고유 능력 : 체술 강화 - 5단계 금제]
 
 그의 눈앞에 글자가 떠오른 것이다. 선명하게.
 진호가 다급히 주춤주춤 물러섰다.
 
 [플레이어 421, 유진호. 등급 테스트가 시작됩니다!]
 
 “뭐라고?”
 등급 테스트라니?
 아니, 그걸 떠나서 대체 지금 누가 말하고 있는 거야?
 
 [차원의 틈이 열립니다!]
 
 [5]
 [4]
 [3]
 [2]
 [1]
 
 [크리쳐(Creature)들이 생성되었습니다.]
 
 ***
 
 [테스트 전용 배틀 필드가 형성됩니다.]
 [‘타임 스톱(Time stop)’ 룰이 적용됩니다.]
 [‘리커버리(Recovery)’ 룰이 적용됩니다.]
 [‘네버 다이(Never die)’ 룰이 적용됩니다.]
 
 시간이 멈춘 것 같다.
 “……!”
 그렇게 느낀 것은 기우가 아니었다. 정말 시간이 멈춘 것이다. 단적인 예로 간간이 들려오던 자동차 소리가 아예 사라졌다. 조용히 들려오던 가정집의 목소리가 없다.
 사방은 적막 그 자체.
 바람도 멈췄다.
 온 사방이 정지해 버렸다.
 진호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뭐야? 대체 무슨 일이지?”
 이상한 일이다. 분명 꿈은 아니다. 꿈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이것은 현실.
 찌직
 그리고 허공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균열은 조금 더 커졌고, 이윽고 사람 크기만큼 벌어졌다.
 쩌어억!
 그 사이로 무수히 많은 손가락들이 나타났다.
 “시팔! 대체 뭐냐고!”
 손가락들은 좌우로 균열을 벌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괴상한 생명체 하나가 고개를 쓱 내밀었다.
 
 #등급 테스트
 
 [크리쳐(테스트용)]
 [Lv.1 아크]
 
 크리쳐, ‘아크’라는 이름이 떡하니 머리 위에 올라와 있는 그 생명체.
 “에……. 크리쳐? 아크?”
 그것의 머리는 개미핥기와 흡사했다. 색은 짙은 회색. 마치 코끼리의 피부를 보는 것 같은 피부의 생김새.
 그러면서도 몸통은 이족보행의 그것이다. 두 팔, 두 다리, 네 개의 손가락과 네 개의 발가락.
 전신은 회색 털에 뒤덮여 있는데, 언뜻 봐도 상당한 근육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로 아크.
 크리쳐 중에선 가장 하급의 크리쳐다. 진호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을 리가 없다.
 아무튼 그런 크리쳐가 균열 속에서 속속 등장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생전 처음 보는 크리쳐의 형태에 조금 당황했고, 놈들이 자신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다는 것에 두 번 당황했다.
 “와, 완전 호러잖아.”
 호러 영화의 한 장면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진호는 주춤주춤 물러섰다.
 문득 몸이 생각 이상으로 가볍다는 것을 느꼈다. 늘 피곤에 술에 찌들어 있던 정신도 맑았다.
 진정하자.
 진정, 진정.
 진호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당연히 쉽지 않다. 저런 괴물들을 목전에 두고 어찌 진정할 수 있단 말인가.
 꿀꺽
 타임 스톱 룰이라고?
 잘은 모르겠지만 최대한 이성적인 판단을 해 보자.
 
 ‘타임 스톱’
 시간이 멈춘다.
 
 ‘리커버리’
 회복
 
 ‘네버 다이’
 불사(不四)
 
 뭔가가 이 세 가지 ‘룰’을 적용시켰다.
 시간이 멈췄고, 회복이 될 것이며,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룰’이라고 했다.
 “크르릉!”
 “끼리릭!”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아크들이 진호를 쳐다본다.
 스팟!
 우선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
 ‘도망치자.’
 놈들의 반대편으로 냅다 달렸다.
 후우우우웅!
 “헐!”
 대단한 일이 벌어졌다. 분명히 7미터는 떨어져 있는 거리를 단 두 걸음 만에 주파한 것이다.
 이상하게도 온몸이 근질근질 했다. 전신에 힘이 가득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해 본다. 온몸 뿌듯하게 강렬한 기운이 넘실거린다.
 “이, 이상한걸.”
 파파파팟!
 그 순간, 아크들이 진호에게 돌진해 들어왔다. 화들짝 놀란 진호가 힘껏 도약했다.
 “어어어어!”
 그리고 경악했다. 2미터는 족히 넘을 높이를 점프한 것이다.
 “미친!”
 그리고 높은 담장에 머리를 박았다. 머리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화악!
 그 순간, 진호의 머리에 하얀빛이 서렸다. 그리고 고통과 피가 말끔하게 사라졌다.
 
 [리커버리 룰 적용]
 [모든 상처가 빠르게 치유됩니다.]
 
 그러면서 들려오는 청량한 여자의 목소리.
 이게 바로 ‘리커버리 룰’이란 말이지?
 좋다.
 진호는 투덜대면서 바닥으로 착지해 아크들을 노려보았다.
 이 상황을 이해하는 것은 진작 포기했다.
 어쩌면 현대 과학, 판타지 소설에서나 나오는 마법, 마약을 하고 볼 수 있는 환상, 기타 등등의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중에서 진호가 알고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아크들은 이제 진호의 목전에 닿아 있다.
 끼리링!
 아크 하나가 진호의 머리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진호는 머리를 살짝 왼쪽으로 움직였다. 주먹은 아슬아슬하게 진호의 왼쪽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쾅!
 그리고 담장을 때렸다. 엄청난 괴력이다.
 하지만 담장은 멀쩡했다.
 ‘타입 스톱’이 된 상태에서, 사물은 파괴가 되지 않나?
 “에라 모르겠다.”
 진호는 잡념을 지웠다.
 이 위협적인 공격을 제대로 맞는다면, 그냥 아픈 걸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커버리 룰’이라는 것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만약에 저 무지막지한 공격을 받아 얼굴 절반이 날아가면? 그런데 ‘리커버리 룰’로는 제대로 치료가 되지 않는다면?
 망한다.
 인생이 망한다.
 안 그래도 꽈배기처럼 꼬이고 꼬였던 인생이 아예 망해 버린다.
 “해보자!”
 당장 생각할 수 있는 방법.
 아크들과 싸우는 것이다.
 어떻게?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으로!
 결단을 내림과 동시에 허리를 새우처럼 숙였다. 어느새 양팔은 파이팅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스응! 스응!
 그리고 상체를 좌우로 흔들었다.
 몸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가볍고 빠르다.
 진호의 상체가 좌우로 흔들거리며 이어지는 아크의 주먹을 피해냈다.
 반사적으로 주먹이 움직였다. 오른손이 아크의 복부를 후려갈긴다.
 퍽!
 끼릭!
 반응이 있다?
 진호는 재차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고, 선두의 아크에게 왼손을 뻗었다.
 퍽!
 왼손을 빠르게 회수하며 오른손 펀치를 날렸다.
 퍽!
 복싱의 기본이라는 ‘원투 펀치’다. 원투 펀치를 직격으로 얻어맞은 아크가 기괴한 비명을 질러대더니, 가루처럼 흩어졌다.
 
 [크리쳐(테스트용) 아크를 처치하셨습니다.]
 
 놈들이 죽는다.
 처치가 가능하다. 이 단순한 사실을 확인한 진호의 호흡이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했다.
 탁, 탁
 굳어있던 두 발이 조금씩 스텝을 밟았다.
 진호는 복서 시절, 아웃복서 타입의 복서였다. 존경하는 선수는 메이웨더, 무하마드 알리.
 그 선수들의 경기를 보면서 꿈을 키워 왔다. 따라가고자 해도 따라갈 수 없는 별세계의 그들을 목표로 복싱을 했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
 세상 모든 아웃복서들의 우상이 한 말이다.
 진호가 살아가는 현실에선 불가능.
 “흐음.”
 하지만 이곳에선……. 신체능력이 말도 안 될 정도로 어마어마해진 이곳에선.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두 발이 빠르게 움직였다.
 자신도 모르게 최면을 걸었다. 이곳은 링이다. 사각의 링이다.
 나는 할 수 있다.
 이길 수 있다.
 
 때앵!
 
 머릿속의 공(경기 시작과 끝을 알리는 종소리)이 울렸다.
 
 슥! 슥!
 진호의 몸놀림이 엄청나게 민첩해졌다.
 진호의 복싱은 ‘맞지 않는’ 복싱.
 맞으며 한 방에 상대를 제압하는 복싱을 ‘인 파이팅’이라고 한다면, 진호의 복싱은 ‘아웃 파이팅’이다.
 아웃 파이팅 스타일의 복서를 ‘아웃복서’라고 한다.
 아웃복서 유진호.
 최대의 강점은 특유의 풋워크. 그리고 회피에 특화된 동체시력.
 약점은 약한 펀치력. 때문에 ‘빠르게 많이’ 때리는 것이 진호의 복싱.
 아크들의 움직임도 빨랐지만, 진호의 움직임은 더욱 빨랐다. 진호는 발을 움직여 아크들과의 거리를 벌렸다.
 끼리리릭!
 그리고 쫓아오는 아크의 머리에 칼날 같은 라이트 훅이 꽂혔다. 진호의 주먹이 원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이어지는 레프트 훅!
 팡! 팡!
 이번엔 좀 더 묵직하다. 놈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허리를 직각으로 꺾었다. 진호는 그대로 가느다란 주둥이(개미핥기의 그것)를 꽉 움켜쥐었다.
 “으라라랍!”
 그리고 냅다 던졌다. 힘이 얼마나 세진 건진 모르겠다.
 크리쳐는 상당히 묵직했으나, 던지지 못할 정돈 아니었다.
 으지직!
 끔찍한 소리와 함께 크리쳐의 주둥이가 뜯겨 나가며 놈의 신형이 담장에 처박혔다.
 파스스스!
 “으익!”
 결코 기분 좋은 감각은 아니었다.
 몸서리를 치며 뜯겨 나간 주둥이를 내팽개쳤다. 신기하게도 뜯겨 나간 주둥이에는 피가 묻어 있지 않았고, 땅으로 떨어지며 희미하게 흩어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흡!”
 한숨 돌릴 새 없이 허리를 뒤로 꺾었다. 스웨이(상체를 뒤로 빼며 공격을 회피하는 기술)란 기술이다. 눈앞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아크의 주먹.
 “……!”
 그 모습이 자못 생생하다.
 
 두근
 가슴이 두근거리며 뛰었다.
 
 후우웅!
 허리를 잔뜩 젖힌 진호의 오른손이 날아들어 놈의 팔꿈치를 후려쳤다.
 빠각!
 묵직한 소리와 함께 팔이 기형적으로 꺾인다.
 탓, 탓!
 발을 놀려 놈의 몸 뒤편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했다. 날아갈 듯 가볍다. 몸이 너무 가볍다. 지금이라면 하늘이라도 날아오를 수 있을 것 같다.
 탓!
 왼발로 땅을 강하게 디디며 주먹을 날렸다.
 쿵! 쿵!
 아크의 등짝에 울려 퍼지는 묵직한 타격음.
 진호의 오른손이 바람처럼 움직였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짜릿하다. 다시 진호가 땅을 박차고 뒤로 튕겨나가듯 움직였다.
 쿵! 쿵! 쾅!
 오른손 두 번, 왼손 한 번.
 링 위에서 이 정도의 싸움을 할 수 있다면, 진작 세계 챔피언을 먹었을 것이다. 이어지는 잽!
 퍽퍽퍽퍽!
 진호의 왼손이 송곳처럼 아크를 찔러댔다. 이것이 바로 잽, 복싱의 기본기이자 대표적인 견제기. 보통 큰 위력을 발휘하기는 힘든 기술이지만, 현재 진호의 상태에서 잽의 위력은 어마무시 했다.
 잽잽잽잽!
 잽이 이어졌다.
 쾅! 쾅!
 그리고 오른손이 아크의 몸통에 직격으로 두 번 꽂혔다. 이놈도 처치 완료.
 이번엔 땅을 박차고 뒤로 튕겨나갔다. 백 스텝!
 그리고 마지막 아크에게 주먹을 뻗었다.
 쾅!
 왼손 잽이 놈의 머리를 후려쳤다. 왼손을 회수하면서, 골반을 강하게 틀었다.
 오른쪽 어깨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생생한 근육의 힘이 온몸을 짜릿하게 잠식해 왔다.
 발끝.
 허리.
 어깨.
 팔꿈치.
 체중을 실은 힘이 신체 부위 부위를 지나며 점점 가중돼 갔다.
 후우우웅!
 콰앙!
 날아드는 오른손 펀치! 전신의 체중을 묵직하게 실은 오른손이 쭉 뻗으며 아크의 머리를 강타했다.
 라이트 스트레이트.
 합쳐서 ‘원투 펀치’.
 끼이이이익!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지며, 마지막 아크가 사라졌다.
 “허억, 허억…….”
 진호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던 진호가, 파이팅 자세에서 두 팔을 내렸다.
 “헉, 헉…….”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펀치력을 링 위에서 사용할 수 있었다면, 세계 챔피언이고 기네스북이고 다 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자 예의 그 청량한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속삭였다.
 
 [테스트 종료]
 [테스트 전용 배틀 필드가 해제됩니다.]
 [‘리커버리(Recovery)’ 룰이 해제됩니다.]
 [‘네버 다이(Never die)’ 룰이 해제됩니다.]
 [‘타임 스톱(Time stop)’ 룰이 해제됩니다.]
 
 [플레이어 421, 유진호의 테스트 결과]
 [등급 : B급 - 탱커 or 딜러]
 
 [플레이어 421, 유진호의 상태가 활성화됩니다.]
 [레벨 : 1]
 [플레이어 등급 : B급 - 탱커 or 딜러]
 [고유 능력 : 체술 강화 - 5단계 금제]
 [고유 패시브 스킬 : ??? - 일정 조건 달성 후 개방]
 
 샤아아악!
 
 “……어?”
 진호는 두 눈을 비볐다.
 어느새 멈췄던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저 멀리서 자동차 소리가 들렸고, 가정집에선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호는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헉 헉…….”
 숨이 차다. 그리고 온몸에선 땀이 흘러나와, 전신이 흠뻑 젖어 있었다.
 이것은 꿈인가?
 상상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술기운이 만들어 낸 환상인가?
 하지만 이 기묘한 감각은, 그가 느꼈던 상황들이 꿈이나 상상 혹은 환상이었다는 헛소리들을 잠식시키기에 충분했다.
 “허어…….”
 진호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주먹에 와 닫는 묵직한 촉감.
 아크들에게 틀어박히던 주먹. 그리고 방금 전까지 눈앞을 스쳐 지나갔던 아크들의 공격.
 아직 사라지지 않은 그 촉감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대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6월의 밤바람이 불어, 진호의 몸을 식혀 주었다.
 
 그것은 기묘한 일들과 함께 시작됐다.
 하늘은 붉게 물들고, 별똥별이 비처럼 내렸다.
 오로라가 찬란하게 펼쳐졌다.
 그날 밤.
 유진호의 삶은 완전히 바뀌게 된 것이다.
 
 #새로운 삶
 
 “킥킥킥, 빌어먹을 새끼들. 엿이나 처먹어!”
 꿈인가.
 확실히 꿈이다.
 진호는 눈을 비볐다. 꿈임은 확실하다. 그러니까 저 앞에서 욕지거리를 내뱉는…… 그러니까 자신과 똑같이 생긴 분신을 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은 확실히 꿈이다.
 사방은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 휑한 사방은 뭔가에 의해 초토화된 듯, 을씨년스러운 바람만 불고 있었다.
 진호와 똑같이 생긴 사내의 앞에는, 검은 머리의 사내가 서 있었다.
 “샤벨, 돌이킬 수 없는 실수는 하지 마라.”
 샤벨?
 그게 내 이름? 뭔가 굉장히 이국적인걸.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면 뭐, 어쩔 건데? 큭큭큭큭, 한판 붙어 봐? 엉?”
 모르긴 몰라도, 유진호와 똑같이 생긴 ‘샤벨’은 굉장히 난폭해 보였다.
 그 얼굴은, 서글픔과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군.”
 검은 사내가 침울한 어조로 뇌까렸다.
 “잔말 말고 한판 떠 새꺄, 애초에 네놈 꼴 보기 싫었다. 크핫하하하! 차원의 주인, 이 개새꺄! 이참에 네년도 골로 보내 주마!”
 번쩍!
 일순간, 빛이 사방을 메웠다.
 화아아아악!
 몸이 빨려 든다.
 빨려 들어간다.
 어디론가.
 어디론가.
 
 ***
 
 “헉!”
 진호는 벌떡 일어났다. 온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기억을 되짚어 보자. 어젯밤, 기묘한 일을 겪고 집으로 돌아왔다.
 너무 피곤해서 씻지도 않고 잠들었지. 그리고 이 꿈을 꾼 것이다.
 몇 시지?
 시계를 보니 오전 8시.
 다행이 오늘은 일이 없는 날이다. 조금 더 자야지. 진호는 다시 드러누웠다.
 꿈이 너무 생생했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기분이었다.
 샤벨.
 이 샤벨이라는 이름은 진호의 머릿속 깊은 곳에 박혔다. 샤벨, 샤벨.
 무척 익숙한 이름이다. 어디서 들었더라?
 
 다시 잠들었다 일어나니 오전 10시.
 태생이 부지런하고 복서 시절의 습관이 몸에 그대로 배어 있는 진호였다.
 간단히 몸을 풀고, 트레이닝복을 입은 뒤 집을 나섰다.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신다.
 자, 그럼 조금 달려 볼까.
 
 어제 아크들과의 일전에서 느낀 몸의 가벼움은 느낄 수 없었다. 넘치는 힘도 사라졌다. 몸은 확실히 평상시의 그대로 돌아왔다.
 ‘고유 능력. 체술 강화라고 했었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문일 것이다. ‘체술 강화 - 5단계 금제’란, 바로 크리쳐가 나타났던 차원의 틈에서만 발휘된다는 얘기 같다.
 금제란 건 뭘까.
 뜻은 안다. 5단계로 능력이 봉인돼 있단 소리다.
 누가 속 시원하게 말해 주면 좋으련만.
 머리가 너무 복잡해 다리에 힘을 주고 속도를 올렸다. 익숙한 골목길을 뛰어 시내로 나왔다.
 “흐음.”
 ‘능력’이라는 것이 적용되지 않아도 오늘은 몸 컨디션이 매우 좋다.
 조금 더 템포를 올려 볼까.
 시내를 삼십분 동안 달리자 한강이 보인다. 숨이 가쁘긴 한데 기분은 점점 더 나아지고 있었다.
 역시 땀을 흘리는 것이 좋다.
 한강 도로를 따라 쭉 달렸다.
 그나저나, 컨디션이 왜 이렇게 좋지?
 좋다. 한 템포 더 올리자.
 아침 공기는 맑았고, 사람들이 드물어 더욱 속도를 냈다.
 그렇게 한참을 더 달린 뒤에야 멈춰 섰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잔디밭에 주저앉아 버렸다.
 “하아, 하아.”
 오늘따라 몸의 컨디션이 좋다. 좋아도 너무 좋다.
 타이틀 매치 때 얻어맞은 턱뼈는 스물세 조각으로 갈기갈기 쪼개졌다.
 네 번의 수술을 받았다.
 그 후로 몸을 가혹하게 움직이면 턱이 아팠다.
 심하게 아프진 않다. 적어도 복싱처럼 강하게 얻어맞는 운동을 하지 않는다면 안전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으니까.
 아무튼 아릿하게 아파오는 턱의 고통은 이미 진호에겐 익숙한 감각이었다.
 헌데 그 통증이 없다. 일말의 통증도 없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턱을 만졌다. 아릿하게 느껴지던 통증이 하나도 없다.
 “이상한걸.”
 하지만 가끔은 이런 날도 있었다. 통증이 없는 날. 진호에게는 행운과도 같은 날이다.
 진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몸을 풀었다. 간만에 템포를 높여, 온몸의 근육이 놀랐을 거다. 이럴 땐 가만히 앉아 쉬는 것보단 적당한 스트레칭이 더 도움이 된다.
 스트레칭을 끝내고, 진호는 파이팅 자세를 취했다.
 지금부터는 섀도우를 할 거다.
 섀도우 복싱(Shadow Boxing).
 섀도우 복싱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거울을 보거나, 트레이너와 함께 자신의 자세를 교정시켜 가는 것. 자세는 빠른 풋워크와 펀치력을 위한 기본이기에 굉장히 중요하다.
 둘째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상의 상대와 싸우는 것이다. 주로 과거 링 위에서 대전해 본 상대를 떠올리는 것이 대다수다. 이는 복싱에 숙달된, 자세가 몸에 배어 있는 복서들이 이용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진호가 하려는 ‘섀도우’는 두 번째의 종류였다.
 “후욱, 후욱.”
 진호가 숨을 고르며 가상의 상대를 만들어냈다. 머릿속에서 만들어 낸 상대는, 진호와 타이틀 매치를 치렀던 챔피언.
 머릿속에서 수천, 수만 번을 싸워 본 챔피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길 수 없었던, 바로 그 챔피언이었다.
 훅 훅!
 진호가 빠르게 스텝을 밟으며 허공에 원투 펀치를 날렸다. 허리를 좌우로 흔들고, 가상의 챔피언이 날리는 묵직한 펀치를 피해냈다.
 훅! 훅!
 피한다.
 피한다.
 180초.
 즉, 3분이 1라운드에 해당한다. 진호는 말없이 몸을 움직이며 가상의 챔피언과의 싸움을 계속했다.
 피하고, 피하고, 피하고 또 피한다. 1라운드, 2라운드, 3라운드가 지나갔다.
 4, 5, 6라운드가 순식간에 끝나고 운명의 7라운드가 시작됐다.
 7라운드 1분 21초.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던 진호의 발이 멈췄다. 허공을 송곳처럼 찌르던 주먹도 그대로 정지.
 “퓨후…….”
 이윽고 주먹을 내린 진호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의아한 얼굴로 턱을 툭툭 쳐 본다. 아무렇지도 않다.
 아무리 섀도우일 뿐이라지만, 전신을 움직이는 격렬한 복싱. 맞지 않을 뿐, 그 움직임은 상당히 강렬하다. 턱의 통증이 없으려야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렇지 않다.
 “어?”
 더 세게 쳐 본다.
 “으잉?”
 긴가민가한 얼굴로 꽤 세게 때려 본다.
 “…….”
 세게 때렸기에 아픈 건 사실이나, 그것은 수술을 마친 회생불능의 턱이 아니었다.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턱은 아주 튼튼하게, 그리고 깔끔하게 치료돼 있었다.
 “……리커버리?”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제의 그 ‘리커버리 룰’.
 그것 때문인가?
 볼을 꼬집어 보았다. 허벅지도 악 소리가 나도록 세게 꼬집어 본다.
 “……헐.”
 확실한 것 하나.
 이건 현실이다.
 지금 서 있는 이 세상은, 진호에게 있어 분명한 현실이었다.
 쿵쾅쿵쾅
 덜덜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담배를 꺼내 한 개비 빼물고 불을 붙이려던 진호. 문득 그것을 입에서 떼어내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유난히 숨도 안 차고 컨디션이 좋았지.
 “설마…….”
 이 컨디션은 복서 생활을 할 때도 베스트 컨디션과 맞먹는다. 아니, 오히려 그 이상이다.
 턱도 나았다.
 감이 왔다. 술과 담배에 찌들어서 썩어가던 몸이, 그 전으로 돌아온 것이다.
 전성기 시절, 매우 건강하고 힘차던 그 시절의 몸으로.
 진호는 담뱃갑을 구겼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바 아니지만, 이 정도면 확실히 신의 선물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어.”
 담배는 오늘부로 끊는다.
 진호의 선택은 확실히 좋은 선택이었다.
 리커버리는 진호의 턱을 강철처럼 튼튼하게 치유해 줬다. 담배에 찌든 폐도, 술에 찌든 간도 튼튼해졌다.
 그뿐인가?
 진호는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의 나이는 20대 초반의 그것으로 돌아가 있었다.
 얼굴에 가득하던 주름과 세월의 흔적들이 사라졌다. 맨들맨들한 피부는 탄탄하기 그지없었다.
 23살의 그 시점으로.
 몸이 시간을 역행하여 완벽하게 전성기 시절의 그것으로 돌아간 것이다.
 
 #심판의 링
 
 진호는 가만히 서서 옷걸이를 몸에 가져다 댔다.
 “흐음…….”
 정신 나간 듯이 일만 하며 살아왔던 10년.
 그 시간을 보상받고 싶었다.
 10년의 시간을 회귀했다는 것을 안 그날, 집에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는데 눈물이 났다.
 10년 동안 산 옷이 세 벌뿐이다. 겨울용 잠바, 여름용 반팔, 트레이닝복.
 왜 이러고 살았나 싶었다. 그놈의 돈이 뭐라고 아득바득 모으려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옷을 사러 왔다.
 이렇게라도 자축하고 싶었다.
 “이건 어떠세요?”
 옆에선 여점원이 친근한 어조로 또 다른 옷을 건넸다. 얼핏 봐도 앳된 기가 남아 있는 것이 이십 대 초반.
 옷을 쳐다보던 진호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애 같지 않나요?”
 “애 같다니요?”
 점원의 반문에 진호는 아차, 싶었다. 그렇다. 지금은 2014년.
 시대는 바뀌지 않았지만, 진호는 23살의 그 시절로 돌아갔다. 속내는 서른넷의 노땅이지만 겉은 스물셋의 파릇파릇한 청춘이란 말이다.
 누가 봐도 애다.
 그제야 진호는 자신이 들고 있는 옷을 쳐다보았다. 줄무늬 죽죽 가 있는, 묘하게 촌티가 나는 흰색 남방. 지극히 자연스럽게, 일에 찌든 노땅들이나 입는 옷을 골라 들었다.
 누가 봐도 이걸 입으면 시골 농부가 될 거다.
 “그게 요즘 패션입니까?”
 진호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점원이 들고 있는 것은 검은색 반팔 티셔츠와 청바지였다.
 “요즘 패션이라고 하긴 뭐 하지만요. 손님들 또래 분들이 많이 찾는 종류거든요? 데님 팬츠와 포켓 티셔츠요.”
 데님이 뭐지?
 “데님이 뭔가요?”
 “청바지를 말하죠.”
 점원이 친절하게 청바지를 흔들며 생긋 웃었다.
 아, 그리고 보니 어디서 본 것도 같다. 요즘은 청바지를 데님이라고 한다면서?
 진호의 심기는 영 불편했다. 사실 패션의 ‘패’ 자도 모르던 진호였기에, 영 거북했다. 이런 걸 입어도 되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데님 팬츠, 포켓 티셔츠.’
 말도 어렵다.
 저런 걸 입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쳐다볼 텐데, 라는 생각도 들었다.
 “일단 한번 입어 보세요.”
 억지로 떠밀리다시피 해 탈의실로 향한 진호. 헌데 입고 보니 몸에 딱 맞는 게, 나쁘지 않았다.
 쭈뼛쭈뼛하며 탈의실을 나오자 점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잘 어울리시는데요?”
 “그, 그래요?”
 진호는 거울을 보았다. 그리고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맞는 말이다. 정말로 잘 어울렸다.
 인터넷이나 TV로만 보던 대학생 패션이 바로 이런 느낌일 것이다.
 앞뒤로 움직이며 요모조모 살펴보던 진호가 씩 웃자, 점원도 기쁘다는 듯 웃었다.
 “이런 패션에는 검은색 계열 스니커즈가 어울리거든요. 메이커는 상관없이 밑창이 하얀 검은색 계열 스니커즈면 충분하고요, 또 손님 같은 경우는 머리도 좀 다듬으셔야 할 것…….”
 진호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해 온 수첩에 점원이 말하는 것들을 모조리 적었다.
 “손님은 몸매가 굉장히 좋으신 편이니, 자신감을 가지셔도 좋을 거예요!”
 점원의 말에 진호가 고개를 숙였다. 하긴, 복싱으로 다진 몸은 그야말로 군살 하나 없는 탄탄함 그 자체다. 진호의 경우 신체의 밸런스가 특히 좋았다.
 “어……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이제 대학교 들어가셨나 봐요?”
 “예?”
 점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패션에 신경 쓰는 건 아주 좋은 거예요. 옷만 갈아입었는데도 손님 분위기가 확 바뀌셨거든요. 여름방학을 기점으로 확 바뀌는 거죠!”
 “어……. 그런가요?”
 진호는 자신이 입고 왔던 옷을 떠올렸다.
 목이 다 늘어난 쥐색 티셔츠, 집 앞 슈퍼 갈 때나 입을 법한 고무줄 반바지, 먼지와 흙이 잔뜩 묻은 낡은 운동화. 생각해 보니 한숨이 나온다.
 
 “감사합니다! 또 들러 주세요!”
 활기찬 여점원의 목소리를 들으며, 진호는 걸음을 옮겼다. 내친김에 신발도 샀다. 왼손에는 쇼핑백 하나가 들려 있었다. 낡은 옷가지가 든 쇼핑백이다.
 “십사만 원이라…….”
 거금이다. 진호에게 있어서 옷 두 벌과 신발을 사는 데 20만 원이라는 돈을 쓰는 것은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물론 백화점인지라 비싸게 주고 산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기분은 좋았다.
 머리도 잘랐다.
 머리 자르는 데 2만 원이나 달란다. 눈물이 찔끔 나올 뻔했다, 그동안 머리는 4천 원짜리 동네 미용실을 이용해 왔으니까.
 아무튼 이게 요즘 다들 하고 다닌다는 투블럭? 인가 란다.
 거울을 보니 그럴듯하다.
 십 년 동안 개처럼 일해서 번 돈, 약 2억. 거금이라고 보면 거금이겠지만 정말 한 푼 안 쓰고 일해서 모은 돈이었다.
 주간에는 이삿짐센터 일을 했고 야간에는 퀵배달 알바를 했다.
 그렇게 한 달에 두서 번 쉬어 가며 일하면, 월급이 250 정도가 나온다.
 그중 방세 30, 생활비 20을 빼면 남는 돈이 200.
 정말 200만 원씩 매달 꼬박꼬박 적금에 부었다.
 지금은 퀵배달 알바를 하지 않았지만, 이 년 전까진 정말 하루에 네 시간만 자고 일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가끔은 이런 것도 필요하겠지.”
 돈이 아깝단 생각은 조금 들었으나 기분은 확실히 좋았다.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이건…….”
 문득 쇼핑백을 내려다본다. 여기에 담겨 있는 것은 허름한 옷가지들.
 버릴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 옷들을 입고 생활했던 과거들을 버리고 싶진 않았다. 땀에 전, 그리고 세월에 젖은 소중한 물건들이었다.
 
 간만에 여유를 부렸다.
 비싼 ‘아메리카노’라는 커피도 마셨다. 이 쓴 걸 왜 사천 원이나 주고 사먹는 지 모르겠지만, 이런 것이 요즘 다들 누리는 생활이다.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테이블에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쁘게 사는 사람들이 보였다.
 진호도 저렇게 살아 왔다. 정말 치열하게, 악을 쓰고 살아 왔다.
 그래서 앞으로 가끔은 카페에 와서 맛없는 커피라도 천천히 마시는 여유를 부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살짝 눈을 감는다.
 밖은 덥다. 무더위가 도시를 강타했다. 이 안은 시원한걸, 역시 에어컨이 좋아.
 얼굴엔 저도 모르게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아- 좋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퀘스트가 갱신되었습니다.]
 
 그때, 청량한 목소리가 진호의 귀에 속삭였다.
 
 “……잠깐이라도 평화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는데.”
 진호가 살짝 미간을 구겼다.
 퀘스트라고?
 
 [퀘스트명 : 카페 수비]
 [등급 : C급]
 [보상 : 약간의 현금(한화), 경험치,
 소량의 카오스 스톤(Chaos Stone)]
 [적용 룰 : 네버 다이(Never die),
 타임 백 (Time back),
 멘탈 플렉서빌리티(Mental Flexibility)]
 [플레이어 : 유진호]
 [난입 여부 : 가능]
 
 이번엔 목소리와 동시에 진호의 눈앞에 이러한 글자가 떠올랐다.
 
 [인근 플레이어 1명]
 [난입 의사 없습니다.]
 
 인근에 플레이어가 한 명이라고? 누구? 아니, 그보다 이 퀘스트 거부는 어떻게……?
 
 [레벨1 플레이어에겐 거부권이 없습니다.]
 [레벨 5를 달성하시면 1일 1회 ‘거부권’을 받습니다.]
 
 이건 좀 쇼킹한걸. 진호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저번에 본바, 이 ‘퀘스트’라는 것이 끝나면 세상은 원래대로 돌아간다.
 “죄다 제멋대로군.”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이런.”
 카페의 사람들이 흘끔흘끔 쳐다보는 게 느껴진다.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이다. 이 미워할 수 없는, 청량한 목소리가.
 
 [차원의 틈이 열립니다!]
 
 [5]
 [4]
 [3]
 [2]
 [1]
 
 하지만 속수무책.
 
 [크리쳐(Creature)들이 생성되었습니다.]
 
 [퀘스트 전용 배틀 필드가 형성됩니다.]
 [‘타임 백(Time back)’ 룰이 적용됩니다.]
 [‘네버 다이(Never die)’ 룰이 적용됩니다.]
 [‘멘탈 플렉서빌리티(Mental Flexibility)’ 룰이 적용됩니다.]
 
 찌직! 찌직!
 사방에서 차원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꺄아아아악!”
 삽시간에 온 사방은 아비규환.
 모두가 도망치는 그 순간에도, 진호는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카페 테이블 위에 앉아서, 다리를 꼰 상태로, 아메리카노를 입에 가져다 대면서.
 ‘타임 백’
 시간이 돌아간다.
 생각해 보자면 ‘퀘스트가 시작되기 직전’으로 시간이 돌아간다- 라는 추측이 그럴듯하다.
 ‘네버 다이’
 불사(不死)!
 진호가 우려하는 점은 ‘퀘스트 실패’를 했을 경우다. 실패 시, 어떻게 되는 걸까?
 그 점은 우선 나중으로 미루자.
 마지막으로 ‘멘탈 플렉서빌리티’
 해석하자면 ‘정신적 유연성’ 정도이려나.
 이것이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룰’로 적용된다. 분명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일 것이다.
 
 찌익, 찌익
 
 생각하던 와중에도 카페 내부의 사방에선 차원이 찢어지며 크리쳐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흐음.”
 고기도 씹어 본 놈이 맛을 안다고, 이미 저놈들을 한번 겪어 보니 조금은 여유로운 진호. 역시 경험이란 중요한 법이다.
 
 [첫 실전입니다.]
 
 진호는 갑자기 떠오른 눈앞의 글자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플레이어의 인터페이스는 세 가지입니다.]
 [인벤토리], [능력], [개인정보]
 
 “인벤토리.”
 말을 하자, 허공에 네모난 가방이 나타났다. 서류 가방의 느낌이라고 보면 편할 정도의 큼직하고 검은색의 가방이었다. 그 가방이 위아래로 열리며, 수납장 같은 속을 드러냈다.
 아무것도 없군.
 “능력.”
 같은 가방이지만 색이 노란색이다. 두 개가 있다. 손을 가져다 대자 확대돼 확인이 용이했다.
 
 [능력 - 체술 강화 : 5단계 금제]
 [능력 개방 - 0단계 - 근력 강화 : 근력의 200%가 상승합니다.]
 [고유 패시브 스킬 : ??? - 일정 조건 달성 후 개방]
 
 그제야 왜 저번에 아크들을 상대로 그렇게 싸울 수 있었는지 알았다. 근력의 200%가 증가했다는 말은, 진호의 근력이 두 배가 됐다는 말이다.
 “개인 정보.”
 마지막 개인 정보는 진호의 현 상태를 보여주었다.
 
 [이름 : 유진호]
 [레벨 : 1]
 [플레이어 등급 : B급 - 탱커 or 딜러]
 [상세보기 : 비활성화 - 레벨2 달성 시 개방]
 
 탱커 or 딜러.
 탱커 혹은 딜러라는 말인가? 이 점은 온라인 게임의 직업 구조와 매우 흡사하다.
 
 찌익, 찌직
 
 사방의 차원의 틈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얼추 가늠해 본다.
 크리쳐의 수, 족히 서른이 넘는다.
 
 [크리쳐]
 [Lv.3 사무론]
 
 이번 크리쳐는 저번 크리쳐와는 사뭇 생김새가 다르다.
 레벨도 전번의 레벨1 ‘아크’와는 달리, 3이다.
 놈들은 마치 들개 같은 형태를 띠고 있었다. 들개보다 이빨이 훨씬 길어, 윗니가 아래턱을 덮을 정도로 늘어졌다.
 크기는 약 1미터.
 개라고 보기엔 거대하다.
 크르르릉!
 온 사방의 사무론들이 진호를 보고 울부짖었다.
 
 사무론들은 조직적이었다.
 세 무리로 나뉜 사우론들.
 그중 두 무리가 사방의 사람들을 쫓아 달렸다.
 “꺄아악!”
 “살려 줘!”
 그리고 사방의 사람들을 물어뜯었다. 그야말로 사냥에 가까운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사방에 피가 튀었다.
 “미, 미친!”
 진호가 경악했다. 당연하다. 사람이 죽는 것은 TV나 뉴스로만 봐 왔던 그다.
 보통의 사람들은 이 상황에서 미쳐 버릴 것이다.
 
 [멘탈 플렉서빌리티(Mental Flexibility) 룰이 적용되었습니다.]
 [정신과 사고력이 유연해집니다.]
 
 헌데 이번은 다르다. 진호의 정신이 육체를 탈주하려는 찰나, 룰이 적용된 것이다.
 “잠깐만.”
 생각해 보니 당장 사람들이 죽어 나가, 흔히 ‘멘탈 붕괴’가 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퀘스트를 클리어하면 ‘타임 백’이 적용될 거고, 그렇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
 매우 합리적이고 당연한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네버 다이’ 룰은 나에게만 적용되나본데.”
 방금 전의 상황에서 해낼 수 있는 최고의 분석이었다. 진호의 눈이 반짝 빛났다.
 죽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은 이 사건이 벌어지기 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어느 것보다 강렬한 메리트.
 마음이 홀가분해진 기분이다.
 크릉!
 우선 선두에서 달려드는 사무론들을 처치하는 게 우선이다.
 “스읍-.”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아메리카노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에어컨의 찬 공기에 미적지근해진 아메리카노가 특유의 쌉쌀한 맛을 남기며 목을 타고 넘어갔다.
 크르릉!
 사무론 세 마리가 진호를 쳐다보았다. 놈들과의 대치 시간은 짧았다. 곧바로 놈들이 달려든 것이다.
 아웃복서의 생명은 빠른 발놀림이다.
 상대의 공격을 피하고,
 크르릉!
 진호는 살짝 몸을 비틀어 선두의 사무론을 피했다. 그리고 오른발로 땅을 박차고 뒤로 튕겨나가는 듯한 백 스텝을 사용했다.
 사무론들과 거리를 벌리고, 스텝을 밟았다. 파이팅 자세를 취했다.
 오른팔을 뻗어 놈들과의 거리를 가늠한다. 그리고 왼팔은 굽혀 주먹이 턱을 확실하게 보호할 수 있게 만든다.
 탁 탁
 두 발이 지면과 붙었다 떨어지며 몸이 점점 활기를 되찾아 갔다.
 ‘등급 테스트’ 때 느꼈던 몸의 가벼움과 치솟는 힘이 다시 되돌아왔다.
 
 [‘능력 개방 - 0단계 - 근력 강화’가 적용됐습니다.]
 
 털컹! 쨍그랑!
 사무론들이 카페 내부의 가구며 유리창을 마구 깨부쉈다. 개중 몇 마리는 창밖으로 나가, 도심에서 사람들을 마구 깨물어댔다.
 
 [멘탈 플렉서빌리티 룰이 적용되었습니다.]
 [정신과 사고력이 유연해집니다.]
 
 또다시 떠오르는 메시지. 진호는 이를 악물었다. 사람들이 죽는 것, 더 죽을 것, 다치는 것.
 그것을 진호는 막을 수 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선, 저들의 ‘당장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
 “집중, 집중.”
 집중했다.
 다시금 최면을 건다. 이곳은 링이다. 사각의 링이다.
 가로 7미터 20, 세로 7미터 20.
 링 내에서 나는 무지막지하게 강하다!
 무슨 공격이든 피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덤벼!”
 진호가 포효하듯 소리쳤다.
 그 순간.
 
 [강력한 플레이어의 자신감은 링 위에서 최고조에 달합니다. 사각의 링, 그곳은 심판의 단두대가 될 것입니다.]
 [특수 스킬 : ‘심판의 링’이 생성되었습니다.]
 [스킬 생성 시 발동 조건과는 상관없이 1회 시전됩니다.]
 
 스킬이 추가되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진호의 머리 위에는 ‘심판의 링’이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글자는 진호의 머리 위에서 증발하듯 하늘로 사라졌다.
 화아악!
 진호의 몸을 중심으로 가로 10미터, 세로 10미터의 빛으로 만들어진 사각형의 바닥이 생겨났다.
 슝! 슈슝!
 그리고 사각형의 모서리마다 기둥이 솟아나고, 로프가 만들어졌다.
 “이건……?”
 아주 익숙한 것이다. 복싱 링, 그것이 만들어진 것이다.
 때앵!
 그리고 매우 선명한 공 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릉?
 공 소리를 들은 사무론들의 행동이 이상하다. 뭔가에 홀린 듯, 링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인근의 사무론들뿐만 아니라 카페 밖에서 사람들을 물어뜯던 사무론들까지 죄다 몰려들었다.
 
 [심판의 링 위에서 플레이어는 강력한 심판자가 됩니다. 공 소리에 도발당한 크리쳐들은 링 위에 올라가 당신에게 심판당할 것입니다!]
 
 게임의 스킬 해설과도 같은 메시지들.
 링 위로 올라온 사무론이 열 마리다. 아무래도 이 링 위에는 열 마리의 수용 제한이 있는 모양이다.
 꿀꺽
 진호는 침을 꿀꺽 하고 삼켰다. 링 위에서 싸우는 것은 쌍수 들어 환영이다.
 그러나 가로 세로 10미터의 좁은 링 위에 열 마리의 적이 들어와 있다는 것은 그렇게 썩 환영할 만한 일은 아니다.
 보통 복싱 경기에서 사용하는 링은 가로 세로 7미터 20의 직사각형 링.
 그보다 약간 더 크다곤 해도 열 마리의 사무론이 들어오자 비좁아진 것이다.
 크르릉! 크릉!
 기다렸다는 듯 두 마리의 사무론이 좌우로 달려들었다. 진호는 풋워크를 구사하며 두 사무론의 날카로운 엄니를 피해냈다.
 “에라, 모르겠다!”
 머리 굴릴 시간이 없다. 싸우자.
 회피는 진호의 특기.
 아무리 좁은 링 위에서라도 피하는 것 하난 자신 있다.
 
 놈들은 확실히 레벨1이던 ‘아크’들과는 달랐다. 아크들은 그저 맹목적인 공격을 한다면, 놈들은 지능적으로 덤벼들었다. 좌우로 달려드는 공격을 피하자, 앞뒤로 교차 공격을 펼쳤다.
 스윽!
 진호가 머리를 흔들며 정면의 공격을 피하고
 파팟!
 빠른 발놀림으로 정면의 사무론의 뒤쪽으로 이동했다. 오른발을 축으로 원을 그리며 이동하는 풋워크는 선수 시절 죽도록 연마하던 풋워크였다.
 퍽! 퍽!
 이동하며 진호의 왼손과 오른손이 움직였다. 빠른 원투 펀치.
 캐개갱!
 정면의 사무론의 뒤통수에 날카로운 펀치가 꽂히며, 후방의 사무론과 부딪혔다. 두 사무론의 엄니가 서로의 몸에 깊숙한 상처를 남긴 채 바닥에 나뒹굴었다.
 쉿쉿!
 잽 두 번,
 펑! 쾅!
 원투 펀치.
 다시 풋워크를 밟으면서, 횡 이동. 다시 원투. 원투는 복싱의 기본이다. 철저하게 몸에 새겨져 있었다. 무의식 속에서도 뻗어져 나가는 주먹은 정확하게 사무론들을 타격했다.
 라이트 어퍼.
 다시 어퍼.
 원투.
 상체를 흔들면서 공격을 피한다.
 정면으로 들어온다고?
 몸을 한껏 뒤로 젖혔다. 스웨이. 이 정도는 쉽지. 지금 한껏 탄력을 받았거든.
 티잉!
 젖혀진 허리가 로프에 기대어져 탄력을 받아 도로 앞으로 튕겨 나온다.
 그 탄력을 이용한 강력한 라이트 스트레이트.
 빠악!
 깨개갱!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무론이 나가 떨어졌다.
 묵직한 손맛에 전신이 짜릿짜릿하다.
 이건 카운터다. 아프지?
 캐갱, 캥!
 사방의 사무론들이 진호의 주먹을 맡고 산화돼 갔다. 진호의 몸이 점차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어째 느낌이 좋은걸.’
 팡! 쾅! 쾅! 쾅!
 오른손 스트레이트를 던지면서 왼손 어퍼, 그리고 연이은 오른손 스트레이트가 들어갔다. 빠르게 회수한 오른손이 또다시 뻗어져 나간다.
 그리고 파이팅 자세로 돌아와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스웨이.
 상체를 뒤로 젖혀 사무론들의 발톱을 피한다. 그 상태에서 백 스텝!
 투웅!
 진호의 몸이 로프에 닿아 탄력을 받았다.
 비정상적인 움직임이 가능한 이곳에서만 가능한 일.
 리드미컬한 풋워크와 펀치에 점점 탄력이 붙었다.
 이런 느낌,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었다.
 싸우면서 무아지경에 빠지게 되는 경험은 흔치 않으니까. 그저 말로만 들어 봤었다.
 ‘천사’를 보았다고 한다.
 환한 사각의 링 위에서 비추는 조명.
 그 빛은 무아지경에 빠진 복서들의 눈에 ‘천사’로 보인다. 천사를 따라 무아지경의 깊은 곳으로 가게 된다고 한다. 정신을 차려 보면 쓰러져 있는 상대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잠재 능력의 발현.
 몸에 새겨진 복싱을 여과 없이 펼칠 수 있는 특별한 무대가 된다는 말이다.
 ‘평생 한 번 올까 말까 한 일.’
 이라고들 했다.
 사무론들이 연신 쓰러져 갔다. 어느새 링 위의 사무론은 한 마리도 남아있지 않았다.
 
 [크리쳐 사무론을 처치하셨습니다.]
 [크리쳐 사무론을 처치하셨습니다.]
 [크리쳐 사무론을 처치하셨습니다.]
 [크리쳐 사무론을 처치하셨습니다.]
 [크리쳐 사무론을 처치하셨습니다.]
 
 [레벨 2를 달성하셨습니다.]
 
 정말 신들린 듯 싸웠다. 주먹을 내지르고 회수하고 움직였다.
 온몸이 정말 기분 좋을 정도로 달아올랐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도 좋다- 고 생각할 정도로.
 캥! 캥! 캐앵!
 처절할 정도로 엄청난 개 잡는 소리가 들렸다.
 “허억, 허억…….”
 정신을 차리자, 사방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거친 숨을 헐떡이며 사라져 가는 마지막 사무론만이 존재했을 뿐.
 
 ‘정신 차려 보면, 쓰러져 있는 적을 보게 되지.’
 
 그 말 그대로다. 진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털썩 주저앉았다.
 머리가 어질어질 하다.
 스팟!
 [‘심판의 링’이 해제됩니다.]
 피슈슛!
 심판의 링이 연기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졌다.
 문득 진호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뭐지?”
 ‘심판의 링’이 있던 곳에 즐비하게 널린 기묘한 돌덩어리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은 손톱만 한 돌멩이였다. 형태는 각양각색이다. 구슬마냥 동그란 것도 있었고, 사각형, 삼각형, 육각형까지 매우 다양했다.
 반짝반짝 빛이 났는데, 마치 반딧불이의 불빛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손을 가져다 대자, 사방의 돌멩이들이 진호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왔다.
 “어어, 어?”
 
 [카오스 스톤 30개를 획득하셨습니다.]
 
 “카오스…… 스톤?”
 카오스 스톤이라 불린 돌멩이들이 진호의 인벤토리 창으로 사라졌다.
 
 [퀘스트를 클리어하셨습니다!]
 [퀘스트명 : 카페 수비]
 [등급 : C급]
 [보상 : 현금 -> 한화 21만 원을 획득하셨습니다.
 경험치 -> 경험치 120을 획득하셨습니다.
 카오스 스톤 -> 30개를 획득하셨습니다.]
 [퀘스트 전용 배틀 필드가 해제됩니다.]
 [‘네버 다이(Never die)’ 룰이 해제됩니다.]
 [‘멘탈 플렉서빌리티(Mental Flexibility)’ 룰이 해제됩니다.]
 [‘타임 백 (Time back)’ 룰이 해제됩니다.
 -> 룰 적용 : 퀘스트를 시작하기 전으로 회귀합니다.]
 
 샤샤샤샷!
 온 사방이 일그러지며 시간이 역행하기 시작했다. 망가졌던 기물들이 망가졌던 순서의 역순으로 수리됐다. 산산조각 났던 테이블이 원상태로 돌아왔고, 조각난 유리창들이 제대로 달라붙더니 깔끔하게 변했다.
 사방에 죽어나갔던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윽.”
 물론 그 광경은 그다지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속에서 울컥 하고 구토가 나올 것 같아, 눈을 감아 버렸다.
 사방에 난자하던 혈흔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아수라장이 됐던 길거리는 평화를 되찾았다.
 “하, 하하.”
 진호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안도의 한숨이 밀려왔다.
 “다행이다아…….”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나기가 싫다.
 “저, 손님?”
 고개를 돌려 보니, 카페 알바생이다. 사무론에게 가장 먼저 뜯겨 죽은 여자 말이다.
 흠, 멀쩡하게 복구됐군. 다행이야.
 알바생은 난처하단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어……. 카페 한복판에서 이러시면…….”
 “예?”
 그제야 사방의 환경이 눈에 들어오는 진호. 카페의 사람들이 진호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있는 진호의 모습이 이상하긴 했을 터.
 “…….”
 뭔가 억울한걸.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 당신들을 복구시켜 줬는데, 이러기야?
 물론 말은 목 밖으로 나오지 않고, 성대 안쪽에서 머물다가 꿀꺽 삼켰을 뿐.
 이런 말은 상식적으로 이해조차 되지 않을 테니까. 정신병자로 오인받기 십상이다.
 “아, 예, 예.”
 자리에서 일어선 진호. 테이블로 가 앉으려는데, 알바생이 또다시 난처하단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저어…….”
 “아, 왜요?”
 알바생이 얼굴을 붉혔다.
 “저어……. 손님 옷이…….”
 “옷?”
 고개를 내려 자신의 옷을 점검한다. 사무론의 날카로운 엄니와 발톱에 스쳐 갈기갈기 찢긴 ‘포켓’ 티셔츠 그리고 중요 부위를 아슬아슬하게 가릴 정도로 조각난 ‘데님’ 청바지.
 그래, 당연하지. 힘들었다고.
 이제 이 옷도 복구가…….
 ‘음?’
 타임 백 룰은 이미 적용됐다. 근데?
 “……왜 복구가 안 돼?”
 알바생이 당황했다. 그래, 처음이겠지. 눈 감았다 뜨니 멀쩡한 청년 하나가 옷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 나 미친놈이요 하고 앉아 있는 꼴일 테니.
 진호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
 “죄, 죄송합니다 손님…… 부탁드려요. 제발…….”
 알바생은 이제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진호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바가 아무 죄도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낡은 옷이 든 쇼핑백을 집으면서 진호가 덧붙였다.
 “저, 정신병자 아닙니다. 변태도 아닙니다. 이상한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미친놈이 어디 나 미친놈이요, 하던가. 알바생은 이제 겁에 질렸다.
 “이, 이, 이, 이거, 노, 놓고 가시는데요.”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땅바닥에는 오만 원권 다섯 장과 만 원권 한 장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 퀘스트 보상이구나.’
 돈을 준다더니 정말로 돈을 준다. 21만 원이라는 돈이 그렇게 많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 위험성 때문이었다.
 C급의 퀘스트.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이 죽어 나가는 퀘스트. 그것이 C급.
 게다가 자신의 목숨이 언제든 위험해질 수 있다는 부담감과 압박감.
 목숨을 건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매력적인 가격이 아니었다.
 진호는 돈을 챙겨서 카페를 빠져나왔다. 얼굴이 후끈거렸다. 극도의 창피함이 밀려왔다.
 
 ***
 
 진호가 열이 잔뜩 오른 상태로 백화점에 들어갔다. 성큼성큼 걸어 아까 옷과 기타 등등을 샀던 매장으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어머?”
 여점원이 반갑게 그를 맞다가 화들짝 놀랐다. 진호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아까, 랑, 똑같은, 걸로요.”
 문득 주머니 속에 꽤 다량의 현금이 들어 있다는 것을 떠올린 진호.
 “셔츠는, 두 개, 주세요. 후아, 열 받는다.”
 “예?”
 “같은 걸로 다시 주세요.”
 “어…….”
 점원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옷을 고르러 들어가자, 진호는 더욱 화가 났다. 아까는 그렇게 빠릿빠릿하더니 지금은 왜 이렇게 굼뜬 건지.
 진호는 잔뜩 화난 얼굴로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었다.
 “어?”
 어느 샌가 셔츠와 바지는 원상복귀 돼 있었다. 대체 언제?
 아까는 화가 나서 얼굴이 달아올랐다면, 이번엔 무안해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한참을 뒤적이던 여점원이 곤란하단 얼굴로 돌아왔다.
 “저 손님! 죄송한데 같은 사이즈가…….”
 여점원이 다시 나와 진호를 불렀을 때, 진호는 이미 백화점 밖으로 도망친 뒤였다.
 ‘미안합니다!’
 
 ***
 
 “흐읍…….”
 진호는 묵직한 짐을 들어올렸다. 오늘의 이삿짐은 상당히 많았으나, 힘은 전혀 들지 않았다. 몸의 컨디션이 굉장히 좋았고, 또 힘이 넘쳤다.
 젊은이란 이런 것인가.
 한껏 도취될 법했지만, 진호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조금 힘든 점이 있다면 바로 이것.
 “신기하네 그려.”
 김 씨가 신기하다는 듯, 진호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이 젊어졌다는 것은 여러 가지 부작용을 수반했다. 평소 진호를 알던 사람들에게 일일이 설명하기도 귀찮았다.
 “요, 요새 피부과가 좋긴 좋네요.”
 서른넷의 진호가 스물셋의 파릇파릇한 얼굴로 바뀐 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인간관계가 폐쇄적인 진호인지라 알아보는 사람이 드물었다는 점이다.
 이는 이삿짐센터의 일이라는 특이성에 기인한다.
 주 단위, 혹은 며칠 단위로 인부가 바뀌는 것이 이곳 업계의 생리였다.
 대다수가 일용직을 당일 채용하기 때문이다. 김 씨나 진호처럼 오래 진득하게 일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머리를 잘라서 그렇게 느끼는 건가? 자네 전체적으로 많이 젊어진 것 같은걸. 우리 아들이라고 해도 믿겠어?”
 “원래도 아들 또래 아닙니까, 제가.”
 “그런가?”
 김 씨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도 히죽 웃었다.
 “한대 피우고 하지그래?”
 진호는 고개를 저었다.
 “담배 끊었습니다.”
 “담배를?”
 “술도 같이요.”
 김 씨가 입을 쩍 벌렸다.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자네 어디서 머리라도 얻어맞았나?”
 진호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래, 얻어맞았었지. 별똥별에게 아주 강렬한 한 방을.
 “비슷하네요.”
 알 듯 모를 듯한 진호의 말에 김 씨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이, 진호는 씩 웃으며 짐을 옮길 뿐이었다.
 어느새 시간은 열두 시 반.
 “머릴 어떻게 얻어맞은진 모르겠다만, 밥 먹고 해!”
 김 씨가 진호의 뒤에 빽 소리쳤다.
 
 #튜토리얼 모드 종료
 
 “개인정보.”
 차원의 틈이 열리지 않아도, 명령어 세 개는 확실하게 먹힌다.
 
 [이름 : 유진호]
 [레벨 : 2]
 [플레이어 등급 : B급 - 탱커 or 딜러]
 [상세보기 :
 힘 3 민첩 10 통솔 1
 체력4 지능 1 지혜 1
 지휘1 기술 1 맷집 1
 매력1 행운 1 저항 1
 …….]
 
 상세보기로 볼 수 있는 ‘스텟’은 기괴할 정도로 다양했다. 언뜻 봐도 백여 개 가까이 돼 보이는 스텟들.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진호의 눈에 또 다른 메시지가 떠올랐다.
 
 [상세보기의 ‘스텟’ 중, 3개를 선택해 주세요.]
 
 3개를 선택하란다. 어쩐지 너무 많다 싶었다.
 진호는 조금 고민하다가, 이내 너무 당연한 것을 고민하고 있었단 것을 깨달았다.
 힘, 민첩, 체력.
 유독 다른 스텟들보다 수치가 높다.
 “힘, 민첩, 체력.”
 그러자 진호의 ‘상세보기’ 창에서 힘, 민첩, 체력을 제외한 스텟들이 사라졌다.
 
 [힘, 민첩, 체력 3개의 스텟 중, 우선순위를 설정해 주세요.]
 
 그 다음 메시지는 우선순위 설정이라고 한다. 이거 정말 게임 같잖아?
 게임이라고 하니 기분이 묘하다.
 “흐음.”
 진호는 팔짱을 낀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은 아파트 옥상.
 오늘의 이사는 최근 들어 가장 높은 층인 32층이다. 32층의 창문으로 짐을 실은 트레인을 올리면 저 아래가 까마득하게 보인다. 창틀에 발을 걸치고 짐을 옮길 때도 아찔하다.
 정확히는 아찔했었다, 여태까진 말이다.
 그것은 발을 헛디디면 ‘죽음’이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일 거다.
 헌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진호는 이미 진짜 ‘죽음’이라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했었다. 그리고 그 죽은 자들이 태연하게 재생돼 가는 것 역시 목격했다.
 어쩐지 그런 것들에 무덤덤해진 요즘이었다.
 “게임이라…….”
 진호는 옥상의 난간을 딛고 서 있었다.
 하늘의 태양은 뜨겁다. 바람은 오늘따라 선선해 상쾌하기 그지없다.
 게임이라. 다시금 되뇌던 진호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좋다.
 진호는 본인의 플레이 스타일을 떠올렸다. 극도의 쾌속을 추구하는 회피형 아웃복서.
 맞지 않고 때린다.
 “민첩.”
 그리고 쾌속에는 충분한 체력이 뒷받침 돼야 한다. 매일매일 줄넘기를 하고 달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회피란 고도의 몸동작. 소모되는 에너지가 상당하다. 고로 체력이 중요하다.
 “체력.”
 마지막으로, 힘이 필요하다. 아무리 아웃복서라도 일정량 수준의 데미지는 필요한 법.
 “힘.”
 
 [1순위 - 민첩 : 1스텟 포인트로 1스텟 상승.
 
 [2순위(체력)는 1순위의 2배, 3순위(힘)는 4배의 스텟 포인트 소모로 1스텟을 올릴 수 있습니다.]
 
 [스텟 포인트를 1 획득하셨습니다.]
 
 어떤 구조인지 알 것 같다. 레벨이 1 오를 때마다 1의 스텟 포인트를 준다, 이 말이지. 진호는 망설임 없이 1스텟을 민첩에 투자했다.
 문득 ‘카오스 스톤’이 생각났다.
 “인벤토리.”
 인벤토리 창에서 카오스 스톤을 꺼냈다.
 
 [아이템 : 카오스 스톤(60개)]
 [등 급 : 노말]
 [???]
 
 어디다 쓰라는 건지, 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진호. 그 다음은 스킬 차례인가?
 
 [스킬 : Lv.1 심판의 링]
 [발동 조건 : ???]
 [반경 10미터의 링을 만들고, 강력한 도발 효과를 발휘합니다. 시전자는 심판의 링 위에서 10%의 회피율 증가 효과를 얻습니다.]
 
 현재 진호가 가지고 있는 스킬의 성능은 이러했다. 헌데 발동 조건이 문제였다. 사무론들과의 일전 때는……
 ‘스킬 생성 시 발동 조건과는 상관없이 1회 시전됩니다.’
 라고 했었나.
 “아, 모르겠다. 머리만 아프다.”
 뭔 비밀이 이렇게도 많은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진호가 옥상 문을 열었다. 휴식 시간은 여기까지.
 다시 일할 시간이다.
 
 ***
 
 “수고들 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의 일 역시 늦은 밤이 돼서야 끝났다. 김 씨는 대리운전 때문에 부랴부랴 움직였고, 다른 인부들도 저마다의 일로 바빴다.
 그들과는 이제 다르다.
 일에 쫓기듯 숨 가쁘게 살던 인간 유진호는 달라졌다.
 진호는 여유로움을 즐겼다. PC방도 들렀다.
 ‘차원의 전장’에 대해 검색해 보고, ‘카오스 스톤’에 대해 검색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정보는 전무하다.
 포기하고 인터넷을 깔짝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놀아본 놈이 놀 줄 아는 법이다. 놀기와 거리가 멀던 진호의 지난 시간들은 그를 피폐하게 만들고 있었던 모양이다. 피식피식 웃으며 피시방을 나섰다.
 좀 더 노는 법을 익혀야지.
 남들만큼 즐겁게 그리고 여유롭게 사는 법을 배워야지.
 문득 차원의 전장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장 내에서 주먹을 휘두를 때, 진호는 뭔가 살아 있다는 기분을 느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싸우고 싶다.
 -강해지고 싶다.
 왠지 모를 투쟁심이 솟았다.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이런 기분은 대체 왜 드는 걸까?
 몸이 근질근질 했다.
 쉭쉭!
 허공에 주먹을 날려 본다.
 -샤벨.
 그 이름이 귓가에 아른거리는 건 대체 뭣 때문일까? 여러 가지로 싱숭생숭한 밤이었다.
 -차원의 주인.
 프로이트가 말했다.
 꿈은 현실에 일어난 사건의 표출일 뿐, 상상의 산물이 아니다.
 인상 깊은 구절이라 새기고 또 새겼던 말이다.
 또한 꿈이란 것은 본디 잠에서 깨는 그 순간부터 소실되기 시작하는 파편의 기억.
 하지만 진호가 꾼 꿈은 시간이 지날수록 생생해져만 갔다. 머릿속에서 그때의 그 이미지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뭔가가 있어.”
 불확실하지만, 확언할 수 있는 말이었다.
 여름의 밤바람이 훅 밀려왔다.
 낮의 상쾌함과는 달리, 끈적거리면서도 불쾌한 바람이었다.
 진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밤거리를 걸었다. 생각을 정리해 보자.
 “레벨이 오름에 따라 단서를 주는 것 같은데.”
 신빙성 있다. 아이템이니 스킬이니 ??? 표시가 붙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일정 레벨이 달성되면 개방되는 식인 것 같았다.
 “좋다.”
 뭔진 몰라도 좋다.
 아무리 봐도 ‘게임’ 같은 이 시스템. 좋든 싫든 진호가 얽혀 버린, 현실 속의 또 다른 현실.
 “레벨을 올린다.”
 올려 보면 알겠지. 진호는 그렇게 생각을 갈무리했다.
 밤거리를 휘청휘청 걸었다. 어쩐지 술이 당기는 밤인걸.
 
 ***
 
 그날 이후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일주일 동안 클리어한 퀘스트가 여섯 개.
 진호의 레벨은 4였다.
 모든 스텟은 민첩에 투자했다.
 4에서 며칠 정체하면서 퀘스트 두 개를 클리어했으니, 조만간 레벨 5를 달성하지 싶었다.
 사실 퀘스트들은 원 패턴들이었다. 주로 차원의 틈이 열리고, 크리쳐 등장, 퇴치.
 여섯 번째 클리어 땐 완전한 여유를 찾은 진호가 전투를 압도했다.
 여섯 번의 퀘스트를 통해서도 ‘심판의 링’의 발동 조건은 알지 못한 상태였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가 있다.
 진호에겐 익숙한 시간들이었다.
 진호는 혼자가 편했다. 사람들과 부대낄 땐 사실 늘 불편했다. 누군가의 말을 맞춰 주는 것에도 서툴렀고, 누군가의 감정을 읽는 것도 서툴렀다.
 늦은 밤.
 진호는 가벼운 트레이닝복을 입고 집을 나섰다.
 “훕, 훕, 훕, 훕.”
 몸을 풀었다. 앉았다 일어났다 스무 번, 팔 벌려 뛰기 스무 번, 쪼그려 뛰기 열 번.
 다리를 쭉 늘리고, 팔을 앞 뒤로 움직였다.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며 몸의 근육들을 풀었다.
 그리고 주머니에 돌돌 말아 넣었던 줄넘기를 꺼내들었다. 최근엔 잘 안 하지만, 줄넘기는 복서의 필수 운동이었다. 체육관에 입문했을 때 가장 먼저 배운 것이 줄넘기였지.
 줄넘기를 시작했다.
 탁, 탁, 탁, 탁
 요는 손목을 움직이며 리드미컬하게 뛰는 것이다. 발꿈치를 들고, 손은 허리에 꼭 붙여야 한다.
 3분을 1회로 잡고, 3회 하는 것이 기본.
 그것을 반복한다.
 이것이 바로 로프 스키핑(Rope skipping).
 진호의 생명인 빠른 풋워크의 기본이 되는 운동이다. 그렇게 30분가량을 줄넘기에 열중했다.
 처음엔 죽도록 힘들었었지, 줄넘기.
 하지만 계속해서 하다 보니 익숙해졌고, 이제는 크게 힘들다는 기분이 들진 않는다.
 훙, 훙, 훙, 훙
 줄을 넘기는 속도가 빨라졌다.
 훙훙훙훙!
 줄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제법 짜릿하게 귓가에 울려 퍼진다.
 몸놀림이 굉장히 민첩해졌다는 것은, 스스로가 가장 잘 느끼고 있었다.
 땀을 쭉 빼면 기분이 좋다. 줄넘기를 하면 땀이 금방 배어 나와 좋다.
 “후우.”
 줄넘기를 마친 진호가 씩 웃으며, 마무리 운동을 했다. 다시 다리를 풀어 주고, 스트레칭을 했다.
 그리고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간만에 등산을 할 생각이었다. 자주 가던 뒷산을 오를 생각이다.
 진호네 집 뒤에 위치한 이름 없는 산은 그렇게 부담되지 않는 높이였고, 산을 오르며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낮이나 해지기 전의 저녁 즈음엔 주민들이 자주 찾는 곳이지만, 진호가 산의 입구에 다다를 무렵엔 달이 중천에 뜬 한밤중이었다.
 서울의 매캐하고 후덥지근한 공기를 피해 산에 올라, 그만의 장소로 향했다.
 등산로를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난 곳.
 하지만 진호에게는 굉장히 익숙한 비밀 장소였다.
 
 산의 밤은 시원했다.
 진호는 인기척이라곤 하나도 없는, 어둠에 뒤덮인 숲 속에 드러누웠다.
 한참을 그렇게 드러누워 있었다. 나무 사이로 보름달이 떠올랐다.
 어둠을 밝히는 달빛 아래, 진호는 말없이 누워만 있었다.
 늘 입는 트레이닝복 상의엔 두둑한 현금이 들어 있다.
 좀 더 뭉그적대고 싶었지만, 생각난 김에 돈을 꺼내 보자.
 “어디 보자…….”
 진호는 주머니 속에서 돈을 꺼냈다. 오만 원권이 스물다섯 장. 만 원권이 열 장.
 합이 135만 원.
 거기다 이삿짐센터 일을 하면서 모은 돈이 일주일에 40만 원.
 합이 175만 원.
 일주일 수익으로 생각해 보니 정말 큰돈이었다.
 오늘 밤은 꽤 시원섭섭한 밤이었다.
 십 년을 넘게 일해 온 이삿짐센터를 그만 두었기 때문이다. 우선 당장 퀘스트를 통해 얻는 현금이 이삿짐 일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퀘스트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예측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단례로 어제의 퀘스트는 이사하는 트레일러 위에서 생겨났다.
 12층 높이의 트레일러 위에서 싸우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타임 백 룰’
 한 개가 적용됐기에 심적 부담은 확실히 덜했다. 하지만 별로 떠올리고 싶진 않았다.
 김 씨가 사무론들에게 처참하게 물어 뜯겨 죽는 모습이 생생하다. 물론 퀘스트를 클리어했기에 ‘타임 백’ 룰이 적용돼 김 씨는 복구됐지만.
 “복구, 라.”
 스스로 내뱉고도 섬뜩한 말이다. 진호는 몸서리를 쳤다.
 “암튼, 그런 걸 또 보고 싶진 않으니까. 진짜 죽는 게 아니라곤 해도 말이야.”
 아무튼.
 일전에 겪어 본바, 진호가 입고 있는 옷이나 주변의 사물 혹은 사람들은 타임 백 룰에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진호는 팔을 들었다.
 오른팔을 타고 길게 남아 있는 상흔.
 사흘 전 크리쳐에게 입은 상처다.
 적용 룰은 ‘타임 백.’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다. 즉, 시간을 회귀하더라도 플레이어가 크리쳐에게 입은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누적치.”
 
 [누적치 -4]
 
 대신 누적치라는 것이 쌓인다.
 크리쳐에게 공격을 당하면, 그것이 ‘누적치’라는 것으로 쌓인다.
 덕분에 현실로 돌아오면 아무리 큰 상처를 입어도 이렇게 흉터로만 남는 모양이다.
 진호는 돈을 갈무리해 집어넣고, 휴대폰을 꺼냈다. 스마트폰은 요금제가 부담이긴 해도, 확실히 여러 모로 편리하다니까.
 메모장 기능을 활성화시키고 글을 적기 시작했다.
 
 [타임 스톱 – 차원의 틈 안의 시간이 멈춘다. 오직 플레이어와 크리쳐만이 움직일 수 있다. 타임 스톱 룰이 지속되는 동안, 사물이나 사람 등은 파괴되지 않는다.]
 
 [타임 백 – 시간이 되돌아간다. 플레이어와 크리쳐 말고도 사람들 모두가 그 안의 시간 속에서 움직이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그 순간, 시간이 되돌아간다.
 **주의점** 플레이어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다. 부상에 각별히 조심할 것.]
 
 [네버 다이 – 죽지 않는다. 하지만 플레이어만 룰에 영향을 받는다.]
 
 “대강 이 정돈가.”
 며칠간을 시끄럽게 보냈다. 틈만 나면 퀘스트니 뭐니, 장난 아니었지.
 진호는 간만에 홀가분하고 편안한 기분으로 다시 드러누웠다.
 편하다.
 좋다.
 기분이 좋다.
 한참을 그렇게 드러누워 있었다.
 조만간 레벨5를 달성할 것이다. 퀘스트라도 하나 받게 된다면, 레벨을 올릴 수 있겠지.
 “아무튼, 조용하니 좋다.”
 
 [특수 퀘스트가 갱신되었습니다.]
 
 “…….”
 기다렸다는 듯 들려오는 청량한 목소리에 진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시도 조용히 있게 놔두질 않는구나.”
 응?
 헌데 말하는 것이 어째 묘하다.
 “특수 퀘스트……?”
 
 ***
 
 [퀘스트명 : 사소한 일전]
 [등급 : 특수]
 [보상 : 약간의 현금(한화), 경험치,
 소량의 카오스 스톤(Chaos Stone)]
 [적용 룰 : 타임 백(Time back)]
 [플레이어 : 유진호]
 [난입 여부 : 가능]
 
 캐개갱!
 이제 익숙해진 사무론들을 처치하는 진호. 이곳은 눈 감고도 오르던 뒷산의 비밀 장소다.
 적용된 룰은 ‘타임 백’.
 사무론은 스무 마리가 좀 안 됐다. 이 정도는 가볍지. 충분히 상대해 왔으니까.
 이젠 익숙한 자세로 하나하나 사무론들을 처치해 나간다. ‘심판의 링’ 스킬의 발동 조건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렇게 저렇게 연구해 봐도 모르겠다.
 아무튼 차근차근 처치해 가던 사무론들이 한 마리 남았을 무렵이었다.
 ‘특수 퀘스트라더니?’
 거창하게 ‘특수’라는 단어까지 붙여 놓고, 지나치게 심플하단 느낌이다.
 물론 이 정도가 끝이라면 진호는 좋다.
 진호는 한껏 무서운 얼굴을 하고 사무론을 노려보았다. 밤하늘의 달빛이 최고조를 달렸다.
 끼잉
 갑자기 사무론 한 마리가 전의를 상실한 듯, 꼬리를 말았다.
 “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사무론들은 늘 호전적이고 전투적이었다.
 놈들의 턱까지 길게 내려오는 윗니와 날카로운 발톱은 굉장히 위협적이다.
 끼이잉
 헌데 지금은 마치 겁에 잔뜩 질린 듯한 모양새였다.
 “나한테 겁먹었냐?”
 무심결에 말했지만, 사무론의 시선은 진호를 향해 있지 않았다.
 그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몸을 바들바들 떨 뿐. 이쯤 되니 잔악무도한 사무론이라고 해도 안쓰러울 정도였다.
 진호도 사방을 두리번거려 본다. 아무것도 없는걸.
 그때였다.
 
 [???가 난입했습니다.]
 
 ‘난입’이라는 단어를 듣는 그 순간, 진호가 갸우뚱하며 반문했다.
 “난입?”
 난입의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진호의 퀘스트에 누군가가 들어왔다는 것.
 그런데, 누가?
 답은 역시 나와 있다. ‘???가.’
 문제는 그 ???가 누구냔 말이다.
 “플레이어?”
 깨갱 깽!
 사무론이 부리나케 달리기 시작했다. 마치 사자를 발견한 사슴처럼,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온몸의 털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었다.
 “……?”
 그 순간, 등이 싸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크리쳐들과 마주했을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색다른 느낌.
 오싹
 그것은 진호가 복서 시절 링 위에서 이따금씩 느꼈던 감각이었다. 머리로 이해하기 전에 움직여야만 했던, 그 감각을 마지막으로 느꼈던 때는 타이틀 매치 때.
 챔피언의 강력한 어퍼가 날아오기 직전 머리가 아닌 몸이 느낀 그 섬뜩함.
 
 [플레이어의 뛰어난 육감은 오감을 넘어 선 초감각입니다. 플레이어는 반경 10미터 이내의 살기를 탐지할 수 있습니다.]
 [특수 스킬 : 식스센스가 생성되었습니다.]
 
 탓!
 바닥을 박찬 진호가 냅다 앞으로 굴렀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스엉!
 그리고 진호가 방금 전까지 서 있던 허공이 반으로 갈라졌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등장한 한 사내.
 바람처럼 나타나,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리고 바닥에 침을 퉤 하고 뱉었다.
 “헉, 헉.”
 진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에게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는 전신이 새까맸다. 예전 일본 만화에서 자주 보던 닌자의 복장이라고 하면 비슷할 것 같았다.
 “누, 누구?”
 눈코입도 명확히 보이지 않는 사내. 달빛을 받아 번뜩이는 것은 양손에 든 날카로운 무언가.
 사내는 양손에 단검을 들고 있었다.
 무기다.
 무기를 들고 있는 플레이어다.
 그리고 왜인진 모르겠지만, 진호에게 악의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까닥, 까닥
 사내가 마치 진호를 도발하듯 오른손가락을 움직였다.
 다짜고짜 싸우자는 건가.
 오싹!
 이번엔 진호의 왼쪽 허벅지가 오싹하다.
 
 [식스센스 발동]
 
 메시지가 뜸과 동시에 진호가 백 스텝을 밟았다.
 탁!
 뒤로 튕겨나가는 진호. 진호의 몸이 큼직한 밑동을 가진 나무에 부딪혔다.
 쿵!
 나무가 요란하게 흔들리며 나뭇잎들이 하나둘 떨어져 내렸다.
 스팟!
 그리고 진호의 앞에 사내가 나타났다. 사내의 양손에 들린 단검이 빠르게 허공을 훑었다.
 스엉! 스엉!
 진호가 잽싸게 구르며 다시금 공격을 피해냈다. 고개를 돌리자, 하늘에서 떨어지던 나뭇잎들이 산산조각 나 바닥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소름이 끼친다. 진호는 부들대는 몸을 부여잡고 똑바로 섰다.
 무기를 든 사람을 상대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동안 사람과의 싸움은 링 위에서만 해 왔다.
 룰이 적용되는 복싱 링 위에서.
 ‘칼을 든 상대와의 싸움법은?’
 복싱 체육관에서 이런 건 가르쳐주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복싱 체육관에서 늘 듣던 말은 있었다.
 ‘복싱을 배운 이상 네 두 주먹은 흉기다. 사람을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흉기. 절대로 민간인에게 주먹을 휘두르지 마라. 그냥 맞아 주는 게 나아.’
 젠장.
 그때는 납득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는 별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진정하시죠. 대체 왜 저를 공격하시는 겁니까?”
 우선은 말로 푸는 게 제일.
 진호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저 멀리 서 있던 사내가 빠르게 진호에게 접근해 왔다.
 호의는 분명히 아닐 것이다.
 말이 통하질 않는다.
 스엉! 스엉!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
 
 [식스센스 발동]
 
 발동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고, 그 정도는. 진호는 재빠르게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파이팅 자세를 취했다. 왼손의 단검을 피하고, 상체를 뒤로 젖혔다.
 스어엉!
 앞 머리카락이 단검에 베여나갔다. 이마도 살짝 스쳤다. 핏방울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다행이다.
 아슬아슬한 차이로 공격을 피해낸 것이다.
 
 [???에게 공격받았습니다.]
 [???의 이름이 공개됩니다!]
 [이름 : PK NPC]
 
 “PK NPC?”
 진호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잠시 생각을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할 것 같은데.
 
 [식스센스 발동]
 
 오싹!
 이번엔 목덜미가 오싹하다. 진호는 허리를 있는 힘껏 뒤로 젖혔다.
 스웨이!
 단검의 찌르기를 회피한 진호가 몸을 비틀었다. NPC건 뭐건, 아무튼 상대는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 이대로 맞아 죽을 순 없다.
 후우웅!
 진호의 오른손이 잽싸게 움직였다. NPC의 복부를 꿰뚫을 듯 꽂히는 오른손 펀치.
 스팟!
 하지만 NPC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진호의 오른손은 허공을 후려쳤고, NPC가 진호의 뒤에서 나타났다.
 “흡!”
 정신없다.
 스엉! 스엉! 스엉! 스엉!
 빠르게 베어오는 단검. 단검의 베기가 눈앞을 아찔하게 만든다.
 섬뜩한 소리를 느끼며, 그저 직감적으로 몸을 움직일 뿐이다. 허리를 비틀고, 백 스텝, 스웨이, 마지막 공격은 오른발을 축으로 원을 돌며 피해냈다.
 ‘흐음……’
 생각보다 공격이 매섭진 않다. 눈앞이 아찔할 정도로 쾌속을 추구하는 상대였다.
 헌데 그 공격을 계속해서 보다 보니, 묘한 감정이 생겨난 것이다.
 ‘어쩐지 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공격을 계속 보다 보니 그 공격의 흐름이 보였다. 어느 타이밍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효율적으로 저 공격을 피할 수 있을지, 그 타이밍이 보였다.
 NPC가 템포를 늦추지 않고 다시 달려들었다.
 스엉! 스엉!
 매섭다.
 매서운 건 맞는데, 어쩐지.
 ‘이렇게 피하면 될 것 같다.’
 진호는 왼발을 뒤로 빼고 허리를 왼쪽으로 비틀며 뒤로 살짝 빼냈다.
 “……!”
 NPC는 당황한 듯했다. 너무도 간단하게 공격을 피해 버리니 말이다.
 “아니지, NPC가 당황할 수 있다는 게 더 신기한걸.”
 진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한번 보이기 시작한 공격은 계속해서 보였다.
 이번엔 뒤로 한 걸음, 상체를 좌측 하단으로 숙인다. 그 다음 백 스텝.
 스엉 스엉 스엉!
 다시 아슬아슬하지만 분명하게 피해지는 공격.
 “오호.”
 피할 수 있다.
 아무리 무서운 공격도, 피하면 그만이다.
 자신감이 생기자, 여유도 생겼다.
 휙, 휙, 휙, 휙.
 피하고 또 피했다.
 
 [공격 회피 횟수가 누적 1000회를 돌파하였습니다.]
 [플레이어의 고유 패시브 스킬 : ‘회피 포인트’가 개방됩니다.]
 [지금부터 플레이어의 모든 스킬은 ‘회피 포인트’를 코스트로 사용합니다.]
 
 “어……?”
 무아지경에 빠져 공격을 피하는 사이 떠오른 메시지. 진호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스킬 : ‘심판의 링’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소모 회피 포인트 : 50]
 [현재의 회피 포인트 : 130(유지 시간 100초, 갱신 시 유지 시간 초기화)]
 
 이제야 알겠다. 진호의 스킬 ‘심판의 링’은 회피 포인트를 소모하는 모양이었다.
 그동안 ???로 표기됐던 것은, 아직 패시브 스킬을 각성하지 못했기 때문인 모양.
 그리고 쌓인 회피 포인트의 유지 시간은 100초.
 심판의 링, 이라는 스킬을 사용하려면?
 진호는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심판의 링.”
 그저 감이었다.
 쏴아아!
 하지만 정확한 방법이었다.
 쿠구구궁!
 진호가 서 있는 곳을 기점으로 반경 10미터의 사각형 바닥이 만들어졌다.
 카페에서의 퀘스트 이후로 처음 사용해 보는 심판의 링. 진호가 탄성을 내질렀다.
 “아!”
 링이 완성되고, 진호의 머리 위에 하얀빛이 내려왔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가슴이 뛰었다.
 생명을 위협받는 이 상황에도 가슴이 두근거리다니,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쩐지 좋다.
 이곳.
 이 링 위.
 여긴 내 구역이거든.
 진호는 씩 웃었다. 진호가 로프에 양팔을 올린 채 NPC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까닥, 까닥
 손가락을 까닥이며 상대를 도발했다.
 “덤벼!”
 
 때-앵!
 
 공이 울렸다.
 
 ***
 
 [퀘스트를 클리어하셨습니다!]
 [퀘스트명 : 사소한 결전]
 [등급 : 특수]
 [보상 : 현금 -> 한화 28만 원을 획득하셨습니다.
 경험치 -> 경험치 220을 획득하셨습니다.
 카오스 스톤 -> 50개를 획득하셨습니다.]
 [퀘스트 전용 배틀 필드가 해제됩니다.]
 [‘타임 백 (Time back)’ 룰이 해제됩니다.
 -> 룰 적용 : 퀘스트를 시작하기 전으로 회귀합니다.]
 
 [레벨5를 달성하셨습니다!]
 
 “하아…… 이게 사소하단 말이냐.”
 진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힘든 상대였다. NPC건 뭐건, 갑자기 죽어라 달려드는 건 또 뭐람?
 일어날 기력이 없어 드러누워 버리는 진호.
 하지만 아직 마음 놓고 쉴 수는 없는 모양이다. 드러누운 진호의 몸 위로 오로라가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쓰벌. 이번엔 또 뭐야!”
 날쌔게 움직이려다가, 멈춰 섰다.
 어쩐지 그 기운이 무척 익숙했기 때문이다.
 샤아아아!
 어둠에 가득 찬 숲을 비추는 오로라는 신비 그 자체였다. 진호는 온몸의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위협적이지 않은, 그냥 포근한 기분이었다.
 
 [튜토리얼 모드를 마치셨습니다.]
 
 그런 진호의 귀에 울리는 경쾌한 목소리. 명랑한 이 여자의 목소리는 정말 들어도, 들어도 싫지 않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치유가 되는 기분이라고 할까.
 근데 뭐라고?
 튜토리얼 모드?
 
 [본 게임에 진입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1차 금제 개방
 
 본 게임이란다.
 지금까지가 튜토리얼이었단다.
 “이 망할 년이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진호의 이맛살이 잔뜩 찌푸려졌다.
 
 [본 게임에서는 두 가지의 룰이 밴(Ban) 즉, 금지됩니다.]
 [룰 밴 : 타임 스톱, 네버 다이]
 
 경쾌한 목소리는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또한 본 게임에서는 ‘배틀 포인트’를 걸고 플레이어 간의 PvP와 PK가 가능합니다.]
 
 정신 나간 거 아냐? 진호가 코웃음을 쳤다. 오호라, 그러고 보니 좀 전에 NPC가 난입한 건, 그걸 미리 알려주기 위한 예방 학습이라 이건가?
 안 해!
 안 한다! 정신 나갔냐?
 “안 ㅎ…….”
 육성으로 내뱉으려는 순간. 진호의 마음이 움찔, 하고 쓰려왔다.
 -본 게임으로 들어가는 것을 포기한 순간, 나는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유리 턱에, 술과 담배에 찌든 서른네 살의 유진호로. 지금까지의 기억은 모두 잊고, 평범하고 끔찍한 나날에 만족하며 살아가야 하겠지
 이렇게 진호가 스스로 생각한 것이다. 그런 자신에게 놀란 진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이 게임은 그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 즉, 나는 얻을 게 많다. 이런 걸 원해 왔잖아?-
 
 [본 게임에 진입한 플레이어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혜택이 주어집니다.]
 [1. 튜토리얼 모드의 10배 이상에 달하는 퀘스트 보상 금액
 -> 경험치 및 카오스 스톤의 보상은 기존치]
 [2. 카오스 스톤을 이용한 차원의 물품 구매]
 [3. 현실 반영 능력]
 
 설명은 머릿속에 각인되듯 기억됐다. 진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누구? 내 안에서 누가 말하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 청춘을 날려버리고, 일만 개처럼 하는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난 싸우고 싶다. 가슴이 두근대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진호의 생각은, 진호의 마음을 반영했다.
 진호는 문득, 자신이 ‘차원의 전장’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흐음…….”
 뭘까?
 방금 전까진 아무런 기억도 하지 못했는데, 불현듯 떠오르는 이 기억들은 뭘까?
 생각해 봐도 잘 모르겠다. 단언컨대 진호는 이러한 상황에 처한 것이 이번 처음이었다.
 “이상해.”
 인간 유진호.
 그가 살아왔던 기억들은 머릿속에 생생하다.
 하지만 진호의 머릿속의 또 다른 기억.
 그것은 볼펜 자국 위에 덧칠한 화이트의 표면에, 살짝살짝 보이는 글자와도 같았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은 드는데 확실하게 어떠하다, 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문득 꿈이 떠오른다.
 “샤…… 벨?”
 샤벨.
 자신과 똑같이 생겼던 그 이름, 샤벨.
 -나는 회피의 달인. 모든 것을 피할 수 있다.-
 진호는 팔짱을 꼈다.
 “흐음.”
 그리고 고민했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기억. 고개를 갸우뚱거려 보기도 하고,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해 보기도 했다.
 마침내 물구나무서기를 해, 발끝을 나무에 대고 한참을 있었다.
 결국엔 나무 밑동에 앉아 눈을 감고 생각 속으로 빠져 들었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트레이닝복을 뚫고 모기들이 진호의 온몸을 물어뜯어 댔다.
 네 시간
 다섯 시간
 여섯 시간
 
 ***
 
 부모는 진호를 고아원에 버렸다. 그래서 고아원에서 자랐다. 고등학교 때 방황했고, 고3 자퇴 후 복싱을 시작했다.
 그 후로 복서로 살았다. 힘들었지만 즐거웠던 기억이었다.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길이 보이지 않아 유학을 가거나, 대학원에 진학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고작 사무직 하나 뽑는 데 토익, 토플, 토익 스피킹까지 필요하단다.
 세상은 어느새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고학력자들이 그들만의 리그의 레벨을 높여가는, 괴물들의 시대.
 그 한가운데 유진호가 서 있었다.
 고등학교 중퇴에, 나이를 먹어 버린 스물네 살의 유진호가.
 운동선수는 모든 시간을 운동에 할애해야 한다.
 모든 운동이 그렇고, 복싱은 유독 그렇다.
 복싱의 신은 한눈을 파는 자에게는 참혹할 정도로 무심하다. 타이틀 매치를 앞둔 세 달 전부턴, 짬짬이 하던 아르바이트도 관뒀다.
 그저 순수하게 복싱에 매진했다.
 공부? 자격증? 토익, 토플? 또 뭐?
 또래들이 주문처럼 주절거리는 취직의 요소들을, 운동선수들은 갖출 수 없다.
 그래서 더욱 운동에 매진한다. 영혼을 다 바쳐서, 모든 혼을 불태우며.
 동갑내기들이 취업난에 시달릴 때, 진호는 멍하니 서 있을 뿐이다.
 선수 생명이 끝난 운동선수의 말로가 이러하다. 한 해에도 수십, 수백의 운동선수가 빛을 보지 못하고 마침표를 찍는다. 진호의 마침표는 생각보다 너무 빨리 찾아왔다.
 처음으로 시작한 알바는 편의점 알바였다. 그 다음은 피시방, 노가다, 퀵배달.
 운동선수로서의 유진호.
 그리고 민간인 유진호.
 이 갭은 생각보다 컸다.
 복싱이 완전히 사양의 길을 걷는 그 순간부터, 어쩌면 정해져 있는 수순이었을지 모른다.
 눈을 감으면 아릿한 고통과 함께 번쩍이는 찰나의 순간이 아른거린다.
 챔피언의 강력한 라이트 어퍼.
 그 한 방.
 단 한 방.
 모아놓은 파이트 머니는 수술비로 들어갔다. 태생부터 고아였고, 복싱을 잃은 진호에게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고교 중퇴, 나이 스물넷.
 사회 경험 없음.
 몸을 움직이면, 정신없이 혹사시키면 머리는 개운해진다. 지난 수년간 그래 왔다.
 일했다.
 묵묵히, 생각을 지우면서. 낮밤 가리지 않고 미친 듯이 일했다.
 그리고 그날.
 하늘을 본 그날 밤.
 유성우가 쏟아지던, 그때.
 진호는 알게 모르게 희열을 느꼈다. 가슴속의 무언가가 벅차오르는 것 같았다.
 다시 싸우게 해 줘!
 다시 싸우게 해 줘!
 다시, 나를, 링 위에 올려 줘!
 그건 누구의 감정이었을까?
 현실의 유진호?
 아니면, 화이트로 덧칠해지기 전 볼펜 자국처럼 선명하던 또 다른 ‘유진호’?
 
 ***
 
 어느새 동이 텄다. 어두침침하던 사방이 환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그제야 진호가 눈을 떴다.
 그리고 결단을 내렸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결론은 그랬다.
 몇 시간을 곰곰이 생각해 봐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파헤쳐 보고 싶어졌다. 희미한 기억 저편, 화이트로 덧칠해 놓은 그것을 긁어 보고 싶어졌다.
 “확실한 거 하난 알겠다.”
 진호는 씩 웃었다.
 “난 약하지 않다.”
 가슴에 치솟는 이 자신감. 뭐든지 해낼 수 있다는 정체불명의, 하지만 묘하게 신뢰가 가는 자신감.
 본 게임에 들어가는 것이, 마치 고향에 돌아가는 것처럼 설렜다.
 마치 진호가 처음 복싱 링에 선 그 순간처럼.
 그저 기대감과 두근거림이 공존했다. 기분 좋았다. 발끝이 찌르르 울리는 것이, 어서 싸우고 싶다고, 싸우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본 게임으로 들어간다!”
 진호가 크게 소리쳤다.
 
 [본 게임에 진입합니다.]
 
 기다렸다는 듯 들려오는 경쾌한 목소리.
 
 [축하합니다!]
 [플레이어 421, 유진호]
 [본 게임으로 진입합니다.]
 
 진호의 사방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하얀 기운. 그것이 진호의 몸을 덮어갔다.
 쏴아아아아!
 이루 말할 수 없는 뿌듯함이 온몸을 맴돌았다.
 
 [고유 능력 : 체술 강화의 1단계 금제가 개방됩니다.]
 [능력 - 체술 강화 : 5단계 금제]
 [능력 개방 - 0단계 - 근력 강화 : 근력의 200%가 상승합니다.]
 [능력 개방 - 1단계 - 약점 간파 : 상대의 급소가 보입니다.]
 [고유 패시브 스킬 - 회피 포인트 : 상대방의 공격을 회피하면 회피 포인트가 1 쌓입니다. 쌓인 포인트는 100초간 유지되며, 회피 포인트 1이 쌓이는 순간 갱신됩니다.]
 
 체술 강화가 1단계 개방됐다.
 약점 간파.
 음, 괜찮다.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복서 시절 진호를 끈질기게 괴롭혀 왔던 것은 펀치력.
 아웃복서가 약한 펀치력을 가진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래서 진호는 카운터와 상대의 약점을 공략해 펀치를 집중시키는 방식을 택했다.
 진호의 빠른 발과 손은 그걸 가능케 만들었다.
 
 [배틀 포인트 100점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배틀 포인트를 받았다.
 배틀 포인트는 플레이어 간의 PvP 혹은 PK를 통해 획득할 수 있다.
 정확히는 상대의 배틀 포인트를 빼앗아 오는 것이다. 빼앗길 수도 있다.
 -배틀 포인트는 플레이어의 등급, 즉 ‘랭크’를 올리는 데 사용된다. 높은 랭크의 플레이어일수록 얻을 수 있는 게 많지.-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 게임에 참여한 플레이어는 현재 스텟의 30%가량의 현실 반영 효과를 얻습니다.]
 [현실 반영에는 액티브 및 패시브 효과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좋다.”
 화아악!
 어느새 사방의 어둠이 가시고, 진호의 몸을 둘러싼 빛 역시 사라졌다.
 그때.
 별도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본 게임 특수 적용!]
 [전대 전장 우승 팀, ‘리세르크’의 본 게임 특수 룰 적용!]
 [본 게임에서는 한 가지의 룰이 추가됩니다.]
 [룰 추가 : 리저렉션(Resurrection)]
 
 “전대 전장 우승 팀……?”
 
 [지금부터 플레이어는 다른 플레이어를 알아봅니다.]
 
 마지막 한 마디가 끝나고, 모든 것이 마무리됐다.
 
 ***
 
 [이름 : 유진호]
 [레벨 : 5]
 [플레이어 등급 : B급 - 탱커 or 딜러]
 [상세보기 :
 힘 3 민첩 15 체력 4]
 
 [고유 능력 : 체술 강화 – 5단계 금제]
 [개방 - 0단계 - 근력 강화 : 근력의 200%가 상승합니다.]
 [개방 - 1단계 - 약점 간파 : 상대의 급소가 보입니다.]
 
 [보유 액티브 스킬 : 심판의 링 Lv.1]
 [보유 패시브 스킬 : 회피 포인트 Lv.1, 식스센스 Lv.1]
 
 진호의 현 상태를 종합하자면 이렇다.
 “그렇단 말이지.”
 기지개를 쭉 폈다. 15라는 민첩 스텟.
 레벨5까지의 모든 스텟을 민첩에 줬다.
 그 결과.
 “햐.”
 진호는 뒷산에서 가장 높은 나무 꼭대기에 올라와 있었다. 쉽지 않았다.
 고작 15의 민첩 스텟과 4의 체력, 3의 힘 스텟.
 그것의 30%가 현실 반영이 됐으니, 별로 큰 수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나무는 평소에도 악을 쓰고 기어오르던 나무. 그것을 오르는 것이 상당히 수월해졌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진호는 허리를 쭉 폈다. 그리고 찬란하게 내리쬐는, 6월의 아침 햇살을 맞이했다.
 나무 꼭대기에선 저 아래가 훤히 보였다.
 서울이 손에 잡힐 듯 조그맣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호는 그대로 한참을 서 있었다.
 
 #차원 상점
 
 진호는 인터넷 창을 뒤적이고 있었다. 마우스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딸깍딸깍
 클릭을 하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려 퍼졌다. 진호는 입을 쩍 벌린 채, 마우스를 움직이고 있었다.
 “세상에…….”
 홈페이지의 메인에는 큼직하게 글자가 적혀 있었다.
 
 [차 원 상 점]
 
 진호는 상점에서 판매되고 있는 아이템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었다.
 “레이저 검…… 550000 카오스 스톤.”
 별의별 게 다 있다. 놀라운 점은 이 세계에서 볼 수 없었던 것들이 그곳엔 다 존재한다는 것.
 클릭, 클릭.
 더블클릭해 레이저 검의 메뉴로 들어가자, 자세한 설명들이 들어 있었다.
 “어떤 사물이든 한 방에 녹일 수 있는 레이저 검입니다…… 사용에 필요한 플레이어 레벨은 50, 장검 마스터리 필요……. 와, 이건 완전 제다이네…… 엉?”
 그 밑에는 빨간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현 차원에서는 사용 불가]
 [구매한 물품은 문명 등급이 같은 차원에서만 사용 가능합니다.]
 김샜다.
 “즉, 내가 살고 있는 이 지구라는 차원 말고도 여러 차원들이 존재한다는 말이겠군.”
 이젠 놀라울 것도 없다.
 그동안의 일들은 충분히 이 비현실을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놀라웠으니까.
 “어디 보자…….”
 사이트 메뉴에는 여러 가지들이 존재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카테고리를 클릭했다.
 
 [현 차원 : 차원 21 ‘지구’]
 
 지구에서 사용 가능한 물품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단검, 장검, 대검…….”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들은 ‘검’ 종류였다. 검마다 다양한 능력치와 가격이 붙어 있었다.
 예를 들면 이렇게.
 
 [아이템 : 거친 장검]
 [아이템 레벨 : 1]
 [능력치 : 공격력 10]
 [내구도 : 50/50]
 [제 한 : 장검 마스터리 Lv.1 이상. 레벨 5 이상]
 [가 격 : 500 카오스 스톤]
 
 “흐음, 그렇구나.”
 그 밑에는 [사용 불가 : 장검 마스터리 미보유] 라는 말도 동시에 적혀 있었다.
 문득 궁금하다.
 “그럼 현실의 칼, 총 같은 건 차원의 틈에서 못 쓴단 소린가?”
 -차원의 틈에서는, 퀘스트나 크리쳐를 통해 얻은 아이템 혹은 차원 상점의 아이템을 사용해야 한다. 현실의 모든 장비는 차원의 틈 속에서 제 구실을 하지 못하지.-
 말하자마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으흠.
 “만약에 내가 차원의 틈 속에서 파괴된 건물의 잔해라든가, 음 그래. 쇠파이프나 돌덩어리 같은 걸 들고 싸울 수도 있잖아? 그때도 마스터리 스킬이 없으면 사용할 수 없나?”
 -마스터리 스킬이 없어도, 차원의 틈 내에서 얻을 수 있는 무기들은 충분히 사용 가능하다. 하지만 그 위력이나 활용력은 마스터리 스킬을 보유한 플레이어들에게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렇단 말이지.
 이쯤 되니 고민이다. 진호는 복싱 말고는 다룰 줄 아는 무기가 없었다. 검도라도 했으면 모를까, 복싱은 순수한 체술을 겨루는 스포츠.
 우선 검류를 넘기며 다른 아이템들을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다양한 아이템들이 있었다.
 몽둥이, 창, 봉, 검, 도, 도리깨, 철퇴, 쇠사슬로 시작한 구형 무기들.
 뒤쪽으로 가자 총, 바주카포 등의 현대식 무기들이 등장했다.
 헌데 거기에는 빨간색 줄이 찍찍 그어져 있는 게 아닌가?
 “뭐지?”
 설명을 읽어 보자.
 
 [차원 21, 지구의 장비 밴(Ban)]
 [총기 및 중화기 등, 현대식 무기 일체]
 [-전대 리그 우승 팀 ‘리세르크’-]
 [**전대 전장 우승 팀 ‘리세르크’의 밴 설정으로 21차원 지구의 현대식 무기 일체는 판매가 금지됩니다.**]
 [**차원의 틈 내에서 획득할 수 있는 ‘현대식 무기 일체’가, 장비 밴에 의해 사용 불가로 바뀝니다.**]
 
 “오호.”
 룰 밴뿐만 아니라 장비 밴도 있는 모양이다. 헌데, 전대 전장 우승 팀이라니?
 본 게임으로 들어오는 그날에도 들은 이름이다.
 리세르크.
 “전대 전장 우승 팀…… 이라.”
 그렇다면 이전에도 전장이 열렸단 말이고, 거기서 우승했다는 말이 된다.
 이 리세르크라는 팀은 현재의 전장에 두 가지의 룰과 밴을 적용시켰다.
 추측컨대, 우승 팀의 특권인 모양이다.
 ‘리저렉션’ 그리고 ‘현대식 장비 밴’.
 이들은 대체 누굴까?
 골똘히 생각하던 진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들의 정체는 중요하지 않다.
 당장의 현재가 중요하다.
 “팀이라.”
 동료들과 함께 싸워야 한단 말인가?
 누구와?
 답은 나와 있다. 분명히 플레이어들과, 일 것이다.
 “방식은 알겠군.”
 동료를 만들어 팀을 구성하라.
 그리고 팀 대 팀으로 싸워라.
 그제야 진호는 자신의 직업이 ‘딜러 or 탱커’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클래식한 RPG 게임의 직업군을 토대로 한 건가? 아니면 최근 유행한다는 AOS 게임?
 “나는 어떤 종류에 적합하지?”
 생각해 본다.
 딜러? 탱커?
 그렇다면 힐러 등의 기타 직업군도 존재한단 이야긴데.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의자에서 일어선 진호가 침대 위에 쓰러졌다.
 “푸하, 머리 아프다.”
 그리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칼은 어떻게 쓰는 거지? 식칼은 만져 본 적 있는데, 단검이나 장검 같은 경우는 영 생소하다.
 칼을 든 상대와 싸울 때는?
 천장을 본 채 파이팅 자세를 취한 진호.
 피한다.
 쉭 쉭!
 진호가 보유한 마스터리 스킬은 아무것도 없었다. 말인 즉, 상점에서 판매하고 있는 무기 종류는 사용할 수 없다는 것. 진호는 무기를 다루는 법은 전혀 몰랐다.
 그때, 떠오른 생각.
 -플레이어의 마스터리 스킬은 플레이어의 고유 능력에 영향을 받는다. 체술 강화형의 플레이어는 무기 마스터리를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
 맙소사.
 절망적인 말이긴 했다. 무기의 효율성은 이미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진호는 복싱 관장이 말했던 것을 항상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리 대단한 무술가라도, 총과 칼 앞에선 무위를 발위하기 힘들다.’
 그렇다.
 그 말이 맞다.
 적어도, 현실에서는 말이다.
 현실에는 스킬이라는 것도, 스텟이라는 것도, 고유 능력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저 순수한 효율과 강력함으로 치면 무기가 최고다.
 물론 지금의 ‘본 게임’은 리저렉션 룰이 적용돼 있는 상태.
 본 게임의 리저렉션 룰은, 모든 퀘스트에 동시 적용이 됐다.
 “흐음…….”
 리저렉션 룰의 설명은 이렇다.
 ‘플레이어가 죽었을 때, 죽음의 패널티를 1/2로 완화시키고 안전 장소에서 부활한다.’
 즉, 영구한 죽음은 본 게임에서 없다는 이야기다.
 진호는 생각했다.
 “영구한 죽음이 없다. 말인 즉, 플레이어 간의 싸움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룰이야.”
 오히려 섬뜩하다. 본 게임에선 ‘배틀 포인트’를 건 PK가 일어날 것이다.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가 되겠군.”
 그렇다면 죽음의 패널티란 무엇일까?
 “경험치의 50% 감소, 소지한 카오스 스톤의 50% 드랍, 배틀 포인트의 50% 드랍.”
 세 가지로 축약할 수 있다. 진호의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은 아직은 이것이 전부.
 “이 게임의 목적은 대체 뭐지? 대체 누가? 왜?”
 또다시 머릿속에서 뭉클뭉클 솟구치는 의문들. 이것들은 알 수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진호가 벌떡 일어나 두 팔을 쫙 펼쳤다.
 “시팔, 모르겠다! 현실을 고민하자.”
 당장 현실을 고민해야 한다.
 다시금 되뇌며 진호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렇다면, 내게 맞는 장비는 뭘까.”
 다시 상점을 뒤졌다.
 무기가 안 된다면, 방어구라도 찾아보자.
 
 “으억!”
 플레이트 메일은 지나치게 무거웠다. 450 카오스 스톤이나 주고 산 플레이트 메일.
 전신을 철갑으로 치덕치덕 덧댄 무식한 갑주였다. 그 무게는 어마어마했다.
 “이건 안 돼.”
 불행 중 다행인 점은 차원 상점의 장비가 ‘청약 철회’가 된다는 점일까?
 플레이트 메일을 청약 철회한 진호.
 
 [하급 플레이트 메일 : 450 카오스 스톤]
 [차원의 틈에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장비는 청약 철회가 가능합니다.]
 [청약 철회를 하시겠습니까?]
 
 “예, 예.”
 그 다음으로 입어 본 것은 가벼운 경갑. 재질은 가죽으로, 후면에 얇은 철판을 덧댄 것이었다.
 생김새는 조끼와 비슷하다. 목을 살짝 덮는, 아주 가벼운 갑옷이었다.
 “이건 마음에 드네.”
 
 [아이템 : 질긴 경갑 상의]
 [아이템 레벨 : 1]
 [능력치 : 방어력 10]
 [내구도 : 50/50]
 [제 한 : 레벨 5 이상]
 [가 격 : 450 카오스 스톤]
 
 그 후로 다른 것들을 다 입어 보아도, 경갑만큼 진호에게 맞는 갑옷은 없었다.
 가죽 옷은 경갑과 별 체감의 차이가 없으면서도 방어력이 훨씬 떨어졌고, 천 옷은 볼 가치도 없었다.
 차원 상점의 아이템들은 하나같이 기본 아이템들이었다.
 아이템의 레벨은 1이었고, 별다른 부가 옵션이 붙어 있지는 않았다.
 적어도 이 ‘본 게임’이 진호가 해 본, 그리고 대다수의 게임들 같은 시스템을 차용했다면 분명히 아이템에 다른 옵션들이 붙을 것이다.
 “사냥 혹은 퀘스트.”
 그렇다.
 사냥 혹은 퀘스트. RPG 게임에서 흔히들 사용하는 소재가, 진호의 현실이 된 것이다.
 진호는 결국 경갑을 구매했다.
 하의도 있었지만, 하의까지 구매할 카오스 스톤은 없었고 인간의 급소는 상체에 몰려 있다. 남성의 경우 하체에 치명적인 급소가 존재하지만 말이다.
 결국 경갑 상의를 구매하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생각해 보니, 완전히 중세풍 RPG 게임이잖아.”
 현대식 무기가 일체 밴(Ban)당하고, 장비류 아이템들은 죄다 중세풍이었다.
 플레이트 메일만 봐도 그렇다.
 영화에서나 보던 기사들의 갑옷 아니던가.
 “으흠.”
 
 띠링!
 
 그때, 진호의 모니터가 반짝 빛났다.
 “음?”
 차원 상점에 들어와 있는 진호의 화면에, 둘둘 말려 있는 양피지 하나가 나타났다. 그것을 클릭하자, 양피지가 쭉 펴지며 네모난 편지로 바뀌었다.
 
 [초 대 문]
 
 “초대문?”
 
 [매달 월말, 0시 00분]
 [비밀상인 포우가 차원을 방문합니다. 비밀상인 포우는, 차원 상점에서 구매할 수 없는 특수 장비부터 각종 아이템들을 판매합니다.]
 [포우의 메시지 : 말일 0시 00분, 신촌 거리. 달빛이 가장 밝게 비치는 곳에서 보자고.]
 
 .
 .
 .
 .
 .
 
 오늘따라 달이 밝은걸.
 비밀 상점의 단서는 총 네 가지였다.
 “신촌 거리, 가장 달빛이 밝게 비치는 곳.”
 그 다음은 이렇다.
 “시각은 0시 00분. 날짜는 월말.”
 그렇다면 이제 시간은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이틀 동안 신촌 거리를 헤매었다. 그 과정에서 몇 번의 퀘스트를 받았다.
 전체적인 퀘스트는 그냥 똑같았다. 이전과 이후의 다름은 그저 등장 크리쳐의 변화뿐이었다.
 Lv.5 네온 스네이크
 네온 스네이크는 이름답게 네온빛으로 빛나는 몸을 가진 뱀이었다.
 몸 길이는 3미터에 육박하고, 둘레 역시 30센티미터에 근접하는 괴물 뱀이다. 텔레비전에서 흔히 보던 아나콘다와 비슷하다고 보면 편했다.
 퀘스트를 수행하는 진호의 모습이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
 진호는 평소보다 더욱 심플한 옷을 갖춰 입었다. 마치 조끼처럼 만들어진 옷은, 진호의 목과 심장 부분을 확실하게 보호해 주는 경갑이었다.
 “450 카오스 스톤이나 주고 산 보람은 확실히 있구만.”
 신체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고 걸친 듯 걸치지 않은 듯 매우 가볍다. 진호의 타입에 있어 최고의 효율을 만들어 주는 갑주는 역시 경갑이었다.
 물론 가벼운 만큼 방어력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진호에겐 더할 나위 없는 아이템이다.
 이윽고.
 ‘타임 백’ 룰이 적용된 퀘스트가 완료됐다.
 
 [퀘스트를 클리어하셨습니다!]
 [퀘스트명 : 뱀 떼]
 [등급 : C급]
 [보상 : 현금 -> 한화 220만 원을 획득하셨습니다.
 경험치 -> 경험치 420을 획득하셨습니다.
 카오스 스톤 -> 50개를 획득하셨습니다.]
 [퀘스트 전용 배틀 필드가 해제됩니다.]
 [‘리저렉션(Resurrection)’ 룰이 해제됩니다.]
 [‘타임 백 (Time back)’ 룰이 해제됩니다.
 -> 룰 적용 : 퀘스트를 시작하기 전으로 회귀합니다.]
 
 경험치와 카오스 스톤의 보상은 그대로였지만, 모든 나머지 보상들이 10배로 뻥튀기됐다.
 진호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220만 원의 현찰을 챙겼다. 돈 벌기 참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슷!
 퀘스트가 완료되고 필드가 사라지자 진호의 몸을 덮고 있던 경갑 역시 사라졌다.
 “확실히 퀘스트 내에서만 적용이 된다, 이 얘기지.”
 진호는 다시 신촌 거리를 배회했다.
 오늘은 토요일.
 신촌 거리를 오는 것은 실로 오래간만이다. 그동안은 의도적으로 신촌이나 홍대, 명동 등을 피해 왔다. 그런 곳에 입고 나갈 옷도 변변찮았을뿐더러, 괜히 분위기에 도취해 돈을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괜찮다.
 마음에 든다, 이 거리가.
 신촌의 밤거리는 화려했다. 사방에서 패션쇼를 하듯, 잘 차려입은 젊은이들이 거리를 걷고 있었다. 음악 소리, 불빛 그리고 열기.
 아메리카노 잔을 든 진호는 빨대를 입에 문 채 신촌을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일단 달빛이 비치는 곳.
 가장 달빛을 많이 받는 곳.
 북적대는 인파의 한가운데에 서서 한참을 두리번거려 보아도 잘 모르겠다.
 
 생활은 날이 갈수록 윤택해졌다. 하루에 한 번씩 퀘스트가 걸려도 200만 원의 현금이 들어온다. 무척 편리한 부분은 이렇다.
 “인벤토리.”
 인벤토리 창에 현금을 보관할 수 있다는 점. 다른 사물들은 인벤토리에 보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현금만은 보관이 가능했다.
 “하긴.”
 은행 계좌에 매일같이 수백에서 수천씩 입금이 된다면? 누가 봐도 이상할 것이다.
 지금이야 퀘스트로 200만 원을 받지만, 나중에 얼마를 받을진 아무도 모른다. 무척 거금이 될 수도 있겠지.
 그 거금을 무조건 은행 계좌에 집어넣는 것은 그렇게 현명한 판단은 아니었다. 국세청에서 의심을 품고 달라붙어 조사하기 시작하면 굉장히 난감해질 터.
 아무튼 돈이 많으니 마음이 편했다.
 벌써 현금으로 3천만 원가량이 모였다. 갑자기 불어난 돈에도 불구하고 진호의 소비 생활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돈을 가치 있게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가치 있게 쓰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장 사치를 부리는 곳은 역시 옷. 그리고 각종 맛있는 음식을 사먹는 데에도 쓰였다.
 진호의 하루는 굉장히 규칙적이었다.
 아침에는 무조건 10킬로미터 이상을 달렸다. 체련 단련은 멈추지 않는다.
 달리기 후에는 늘 섀도우 복싱을 했다.
 오후가 되면 집을 나서서 온 사방을 돌아다닌다. 그동안 가고 싶었던 곳들을 쏘다닌다. 퀘스트가 걸리면 퀘스트를 클리어한다.
 단조롭지만 만족스러운 생활이었다.
 “본 게임은 뭔가 달라지는 건 줄 알았는데 말이지.”
 진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
 
 드디어 6월 말일. 수요일이었다.
 수요일 밤은 한산했다. 신촌 역시 평소보다 사람이 적었고, 달은 그 어느 때보다 휘황찬란하게 떠 있었다.
 “슈퍼 문이라고 했던가.”
 슈퍼 문.
 평소의 두 배가 넘게 커다란 보름달이었다. 사람들은 신기하다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진호는 그 사이를 휘적휘적 걸었다. 머릿속에는 ‘달빛’에 대한 생각이 가득 차 있었다.
 달빛을 가장 많이 받는 곳.
 신촌 거리 내에서.
 시간은 0시 00분.
 6월 말일, 바로 오늘.
 시계를 본다. 손목시계는 현재 시각이 11시 31분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제 앞으로 29분 남았다.
 조급함이 밀려왔다.
 그동안 신촌 거리를 그토록 돌아다니면서도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저기를 배회하던 그때.
 인파를 헤치며 지나가던 진호의 귀가 번쩍이는 목소리가 있었다.
 “옥상에 올라가서 보면 좋을 텐데.”
 “그러게. 오늘 달빛이 엄청 밝아서, 높은 데서는 분위기 끝내 줄걸?”
 어?
 진호는 다급히 돌아섰다. 사이좋게 팔짱을 낀 연인이 서 있었다.
 어?
 맞다.
 왜 이 당연한 걸 모르고 있었지?
 진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았다.
 신촌 거리에서 가장 높은 건물.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살피던 진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래, 그래!”
 의아한 표정을 짓는 커플들을 뒤로 한 채, 진호가 달렸다.
 -본 게임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점. 그것은 자만심, 방심, 플레이어다.-
 그 순간, 진호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일단은 마음이 급하니 패스.
 진호의 시야에 잡히는 거대한 저 건물.
 달린다.
 이 근방에서 가장 높은 곳.
 신촌 거리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H 백화점으로.
 
 신촌 H 백화점.
 이 주변에서 가장 큰 건물이자 가장 높은 건물.
 진호는 시계를 보았다.
 11시 54분.
 다행히 시간엔 늦지 않은 것 같다만, 가장 큰 난제가 진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
 백화점의 문은 굳게 닫힌 지 오래다. 12시가 다 돼 가는 깊은 밤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 멍청아. 으이구, 멍청아.”
 진호는 자신의 머리를 콩콩 쥐어박았다. 진작 백화점에 들어가 옥상에 가 있었으면, 지금쯤 이런 상황에 처하진 않았을 텐데.
 어째 기운이 빠진다. 어깨가 축 쳐진 진호.
 백화점 앞에 털썩 주저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퀘스트가 갱신되었습니다.]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오는 퀘스트 메시지.
 
 [퀘스트명 : 비밀상인 포우]
 [등급 : 없음
 -> 본 퀘스트는 멀티 스페셜 이벤트입니다.]
 [보상 : ???]
 [적용 룰 : 리저렉션(Resurrection)
 킬링 필드(Killing Field)
 타임 백(Time back)]
 
 [플레이어 : 유진호 외 34명]
 [난입 여부 : 가능(0시 00분 이후 난입 불가)]
 
 “멀티…… 스페셜 이벤트?”
 진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시계를 보았다. 11시 59분.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사람들이 가득한 곳이다. 다행이다, 놓치면 어쩌나 싶었는데.
 초침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55초, 56초, 57초……
 부아아앙!
 그때, 진호의 뒤쪽에서 요란한 폭음이 들려왔다.
 폭탄?
 아니. 폭탄은 아니다. 그래, 이건 엔진 소리다.
 다급히 고개를 돌리자, 수염이 덥수룩한 한 사내가 거대한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들고 있었다.
 “꺄아아악!”
 도로로 난입한 오토바이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좌우로 갈라졌다.
 “어, 어어, 어……?”
 다급히 진호가 피하자, 오토바이는 그대로 건물과 추돌사고를 일으켰다.
 콰아아앙!
 
 #플레이어를 조심하라
 
 12시 정각, 퀘스트가 시작됐다.
 스스스
 진호의 몸에 하얀 기운이 몰려들었다.
 
 [차원 아이템이 발동됩니다.]
 
 이윽고 하얀 기운은 진호의 상체를 보호하는 경갑으로 변했다.
 “…….”
 진호는 백화점과 추돌사고를 일으킨 사내가, 자욱한 연기 속에서 걸어 나오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내의 얼굴엔 약간의 그을음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 수염이 지직거리며 타오르고 있었을 뿐.
 어째 사내는 태평해 보였다.
 “오, 그쪽도 플레이언가?”
 “괜찮습니까?”
 “그럼.”
 물어본 즉시 진호는 납득했다.
 차원의 틈이 열렸다.
 틈이 열리는 순간, 진호는 경갑을 착용한 상태가 됐다. 말인 즉, 차원의 장비를 입은 상태가 됐다는 것.
 사내 역시 마찬가지일 거란 소리다. 게다가 차원의 틈 내에선 플레이어의 스텟과 스킬이 온전히 발동된다.
 “쿨럭, 쿨럭!”
 털보 사내는 두꺼운 갑주를 입고 있었다.
 진호가 차원 상점에서 보았던 플레이트 메일이다. 보기만 해도 튼튼해 보인다.
 “거참. 평소에도 줄기차게 지나다니던 곳인데, 왜 이제야 깨달았는지 모르겠어.”
 사내는 털털한 이미지 그대로였다. 별것 아니라는 듯, 몸에 가득히 쌓인 먼지와 잔해들을 털어냈다.
 사내의 머리 위에는 녹색으로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김명민]
 그때, 불현듯 진호의 머릿속에 뭔가가 생각났다.
 -플레이어의 이름은 PK 횟수에 따라 색이 달라진다. 녹색이었던 이름이 PK를 통해 머더러 포인트를 올리면서 점차 붉은색을 띠게 되지. 머더러 포인트가 오름에 따라 죽음 시의 패널티가 증가한다.-
 음, 그렇군.
 ‘그렇다면, 그러한 패널티를 감수하고도 PK를 하는 이유는?’
 자문자답이라고 해야 하나.
 속으로 생각하고, 그 생각에 대한 기억이 불현듯 떠오른다.
 -플레이어를 PK하게 되면, 그 플레이어의 카오스 스톤과 경험치 그리고 배틀 포인트를 일정량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지.-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한 김명민, 저 사람은 머더러 포인트를 쌓은 사람은 아니란 소리군.
 그러고 보니 재밌다. 진호는 문득문득 자신이 모르고 있던 ‘기억’이, 마치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는 듯하단 생각이 들었다.
 뭔가를 궁금해하면, 어떤 것들은 원래 알고 있었는데 잊어먹고 있었다는 듯 불현듯 생각나는 것이다.
 아무튼 유용한 것은 당연하다. 궁금함을 바로 바로 풀어주니까.
 문제는 이것이 모든 것에 발동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어떤 것은 불현듯 생각나는 반면, 어떤 것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약점 간파 발동]
 
 플레이어를 만나자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진호의 ‘약점 간파’가 발동됐다. 김명민의 몸을 겹겹이 둘러싼 플레이트 메일, 그중에서 약점의 부위가 반짝였다.
 ‘겨드랑이’
 양쪽 겨드랑이가 약점인가. 하긴, 겨드랑이까지 철판으로 덧대 버리면 움직임이 무척 불편할 것이다.
 “김명민이요. 플레이어는 처음 만나보는데, 반갑습니다.”
 김명민이 친근한 미소를 머금으며 손을 내밀었다. 진호는 그의 손을 맞잡으며 악수를 했다.
 “유진호입니다.”
 김명민은 덥수룩한 수염이 인상적인, 매우 거구의 사내였다. 마치 옛날 wwe 레슬러인 헐크 호건을 보는 것 같았다. 언뜻 봐도 키는 2미터에 육박한다.
 거기다 상당히 뚱뚱한 체형인 남자가 겹겹이 플레이트 메일을 껴입었으니, 굉장히 위압적이었다.
 슬쩍 사내의 등 뒤를 본다. 사내의 덩치가 무색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방패가 걸려 있었다.
 방패의 재질은 나무다. 굉장히 허름한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값싼 아이템인 모양이다.
 “그쪽도 쪽지를 받으셨소?”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원 상점을 웹서핑하다가 받은 초대장.
 진호뿐만 아니라, 다른 플레이어들에게도 전해진 모양이었다.
 ‘최소 서른다섯.’
 퀘스트가 발동될 때의 말은 그랬다.
 서른다섯의 플레이어가 한 공간에 있다.
 “이런 적은 처음인데……. 플레이어들과 만나 본 적 있소? 나는 아직도 감이 잘 잡히지 않아서…….”
 김명민이 자못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저도 처음입니다.”
 확실히, 진호 같은 경우는 드문 것 같았다.
 ‘다들 나처럼 자연스럽게 정보가 생각나는 게 아닌가?’
 흐음.
 진호는 턱을 매만졌다. 이게 정말이라면, 진호는 마치 치트 키에 버금가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휘유, 벌써부터 숨차다. 튼튼해 보여서 이 갑옷을 산 건데, 무겁고 덥기만 하군 그래.”
 김명민은 덥다는 듯 부채질을 했다. 그리고 백화점 내부를 쳐다보았다.
 확실히 요모조모 뜯어 봐도 인상 좋은 옆집 아저씨의 느낌이다.
 머리를 긁적이는 그의 모습을 보니 이내 안심. 진호는 문득 사방을 둘러보았다.
 플레이어라면 응당 머리 위에 이름이 떠올라야 하는데,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다.
 “플레이어들은 모두 백화점 안에 있는 모양이군.”
 “그런가 봅니다.”
 김명민이 추돌사고를 일으킨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백화점의 정문이 있었다.
 김명민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살짝 겁난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저길 들어가야 하는 거겠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덩치에 안 맞게 겁난다는 얼굴을 한 것이 묘하게 어울렸던 것이다.
 “그래야 할 것 같네요. 적어도 여기서 달빛을 보기는 그른 것 같거든요.”
 아닌 게 아니라 백화점 건물에 가려 달빛은 한 줌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무서운데.”
 “별수 없죠.”
 진호와 명민은 무수히 많은 구경꾼들을 헤치고 정문으로 들어갔다.
 “와, 저거 봐. 영화 촬영하나?”
 “엄청 무거워 보이지?”
 구경꾼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으며 스마트폰을 잡고 있었다. 필시 동영상을 찍으려는 것 같은데…….
 “어? 나 와이파이 안 잡히는데?”
 “엘티이도 안 잡혀. 왜 이러지?”
 “동영상 녹화는 되고 있나?”
 구경꾼들의 목소리에 누군가가 동조했다.
 “차원의 틈에선 현실의 모든 장비가 먹히질 않더라고.”
 명민이 어깨를 으쓱이며 진호에게 말했다.
 진호는 명민의 뒤를 따라 백화점 내부로 들어가면서 현 퀘스트의 ‘룰’에 대해 생각했다.
 킬링 필드.
 죽음의 땅이라……
 그 즉시 진호의 머릿속엔 새로운 기억이 생겨났다.
 -킬링 필드 룰 위에서, 플레이어들 간의 PK는 머더러 포인트를 생성하지 않는다. 이곳에선 플레이어를 조심해야 한다.-
 오싹한 룰이군.
 그렇다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란 말이렷다. 분명히 죽더라도 다시 살아날 테니, 아직은 죽음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와 닿진 않았다.
 하지만 패널티가 상당하다. 경험치 50%, 카오스 스톤의 50%, 배틀 포인트의 50%를 드랍한다고?
 안 죽는 게 상책!
 “으스스한걸.”
 김명민이 덩치에 맞지 않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백화점 내부는 암흑 그 자체.
 1층은 의류 매장이었는데, 사방에 서 있는 마네킹들은 제법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식스센스는 발동되지 않았다.’
 즉, 진호의 반경 10미터는 안전하다는 이야기. 하지만 불안하다.
 아까부터 쭉 그랬다. 뭔가가 불안하다.
 근본 없는 불안함은 진호의 내부에서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이윽고 전신을 뒤덮었다.
 ‘흠.’
 감이란 무섭다.
 진호는 링 위에서 몇 번이나 이 ‘감’이라는 것의 도움을 받았다.
 이것은 순수한 직감.
 아무런 근거도 없는 스스로의 느낌.
 그 ‘감’이 말하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라고.
 철컥, 철컥
 김명민이 뒤뚱뒤뚱 걸어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쳐다보았다. 그 순박한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왜 그러나?”
 ‘착각인가.’
 어깨를 으쓱해 보인 진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별거 아닙니다.”
 그들은 1층을 지나 2층으로 향했다. 전원이 완전히 꺼져 있어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멈춰 버린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올라가던 두 사람. 묘한 적막이 감돌았다.
 “어디 사나?”
 침묵이 지겨웠는지 김명민이 친근한 어조로 물었다. 진호는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서울 살죠.”
 “그래? 젊어 보이는데, 몇 살이야?”
 반말이 크게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의 모습과 지극히 어울려서이리라.
 확실히 김명민은 굉장한 호감형이었다.
 진호는 온몸을 덮어올 정도로 끈적끈적한 불쾌감을 애써 날리며 대답했다.
 “스물세 살이요.”
 서른네 살이라고 곧이곧대로 말할 필욘 없겠지.
 “그래? 한창이구먼. 난 마흔둘이네. 아무튼,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지. 잘 지내 보자고.”
 다시 묵묵히 걷던 김명민이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헌데, 나와는 달리 무척 심플한 모습인걸? 고유 능력이 체술 계열이라도 되나 봐?”
 “아, 예. 그쪽은요?”
 “난 보면 알잖나, 무식해 보이잖아? 하하. 이놈의 방패도 무거워 죽겠단 말이야, 별 쓸모도 없는 것 같고.”
 봐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진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무거워 보이긴 하네요.”
 방패는 김명민의 몸을 원형으로 가리고 있었다. 그 거대한 덩치를 완벽하게 가릴 정도로 크니, 무게는 말할 것도 없으리라.
 “운동했나봐?”
 “예.”
 김명민은 유쾌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래? 무슨 운동? 난 예전에 역도를 잠깐 했었지.”
 “복싱이요.”
 “복싱?”
 김명민은 두 주먹을 들어 올리더니 슉슉 허공에 내질렀다.
 “이야, 복싱 좋지. 멋있잖아? 예전에는 복싱도 좋아했는데 말이야. 그럼 체술 강화도 복싱 계열이겠는걸? 캬~ 멋있지. 그럼, 복싱.”
 김명민은 껄껄 웃었다.
 “레벨은 5인가 봐. 그 갑옷, 나도 상점에서 본 적 있거든. 차라리 그걸 입을 걸 그랬어.”
 진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긴 것과는 달리 수다스러운 타입인가.
 4층,
 5층,
 6층,
 7층.
 계단을 계속해서 넘어갈수록 진호는 약간의 의구심을 가졌다.
 진호야 몸이 가볍고, 이쯤은 가벼운 운동 정도로 생각할 수 있었다. 걸친 옷도 가벼운 가죽 재질이었다. 평소 하던 운동량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김명민은 그렇지 않다.
 철제 갑주는 무겁다. 진호가 한번 구매했다가 환불한 적이 있을 정도로 엄청 무겁다. 나름대로 힘 스텟이 3인데, 입고 난 뒤 움직이기가 정말 버거울 정도로 무겁다.
 ‘확실히 몇 십 킬로그램은 족히 나갈 거야.’
 김명민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진호. 숨이 하나도 거칠어지지 않고,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김명민.
 분명 백화점 밖에선 덥다고 부채질까지 하던데?
 그리고 좀 전에도 방패가 무겁다고 했잖아?
 ‘흐음.’
 묘하게 예리해진 관찰력이었다.
 ‘힘 스텟 때문인가?’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긴 하다. 힘이 높으면 그럴 법했다.
 ‘지나치게 예민한 건가.’
 플레이어를 처음 봐서 그런 건가?
 8층.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김명민이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어허, 이거 보게.”
 9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가 막혀 있었다. 셔터가 내려와 있던 것이다. 김명민은 셔터를 툭툭 쳐 보더니, 낭패라는 듯 혀를 찼다.
 “별수 없군. 돌아 가야겠는걸…….”
 돌아서 가?
 그 큼직한 방패로 그냥 때려 부수면 될 텐데. 진호가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니, 잠깐만.’
 진호의 안색이 변했다. 가슴이 철렁,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플레이어는 처음 만나 봤다면서, 어떻게 체술 계열이니 뭐니 하는 걸 물어보지?’
 생각해 보니, 김명민은 처음부터 진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나이, 고유 능력, 레벨.
 적어도 김명민은 지금 진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셈이다.
 플레이어 유진호는 복싱을 베이스로 한 ‘체술 강화’를 고유 능력으로 가지고 있다.
 레벨은 5, 무기를 다룰 수 없다.
 반면 진호는 김명민에 대해 알고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역도를 했었다? 그리고 나이가 몇이다?
 그게 진짜인지 알 게 뭐람?
 그리고 혼자다.
 
 오싹
 
 그 순간이었다.
 
 [식스센스 발동]
 
 목덜미가 오싹해왔다. 살기 감지, 식스센스가 발동된 것이다.
 최소 십 미터 내에 누군가가 살기를 품고 있다. 누가?
 진호는 걸음을 멈춰 섰다. 사방은 어둠에 휩싸여 있다.
 -플레이어를 조심해야 한다.-
 아까의 그 생각.
 그것이 가슴에 틀어박혔다. 강렬한 비수가 되어, 심장을 산산조각 내어 놓을 듯 쓰라렸다.
 “돌아서 가야겠어, 크흐흐.”
 그리고 돌아서는 김명민. 그 얼굴에는 아까의 순박함은 온데간데없었다.
 비열함과 사악함. 그것이 공존하는 얼굴이었다.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크흐흐흐.”
 김명민이 등짝에 메고 있던 방패를 들어올렸다.
 “요번 달은 운이 좋아, 생 초짜가 걸리다니 말이야.”
 젠장.
 진호가 이를 악물었다.
 두근, 두근
 아까부터 몸을 짓누르던 불쾌감이 이것 때문이었나.
 
 오싹!
 
 [식스센스 발동]
 
 다시 오싹하게 저려오는 목덜미. 진호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후우웅!
 엄청난 속도로 날아드는 방패였다. 나무 방패라지만, 저 무식한 힘으로 얻어맞으면 죽어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상체를 잔뜩 젖혔던 진호가 원상태로 돌아오며, 이를 갈았다.
 “젠장.”
 킬링 필드 룰.
 그 룰에 대해 알고 있었다. 머더러 포인트가 오르지 않는단다. 머더러, 즉 ‘살인자’.
 머더러 포인트가 오르지 않는다는 것은, 합법적인 PK가 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방심, 자만심, 플레이어를 조심하라.-
 젠장.
 방심했다.
 플레이어를 조심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자만심 역시 가지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동안은 위기를 겪지 못했으니까.
 현실보다 비약적으로 강해진 자신에게 도취돼, 크리쳐들을 상대하며 자만심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 유성우가 한 번 더 내렸다지? 요번 달이 플레이어가 유입되는 마지막 달일 거야.”
 김명민이 비열한 미소를 머금은 채 진호에게 뚜벅뚜벅 걸어왔다.
 철컥, 철컥
 플레이트 메일이 만들어내는 쇳소리가 제법 가슴 철렁하게 다가왔다.
 “인간이란 영악한 동물이라서, 본 게임에 들어와 일주일이면 이 바닥 생리를 다 꿰어 버리거든. 하지만 생 초짜라면 말이 다르지. 좋은 경험 했다 치라고.”
 김명민의 말에 의하면, 진호가 유성우를 보았던 그날이 처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적어도 몇 달에 걸쳐 내리는 유성우.
 유성우가 내릴 때마다 플레이어는 늘어났을 테지. 머릿속으로 정리를 마친 진호가 파이팅 자세를 취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멍청하게도 저 덩치 큰 여우에게 홀렸다.
 ‘릴랙스, 릴랙스.’
 냉정을 되찾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링 위에는 불문율이 있다.
 ‘냉정함을 잃는 자가 먼저 무너진다.’
 “후우, 후우.”
 숨을 고른 진호.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주먹을 세게 쥐면 안 된다. 쥘 때는 가볍게, 펀치를 먹이는 그 순간 강하게 쥔다. 타격 시 펀치의 힘을 높이기 위한 방법이다.
 진호는 왼발을 살짝 앞으로 움직여, 무릎을 굽혔다. 왼쪽 무릎의 체중을 실은 잽이 언제든지 튀어나갈 준비를 마쳤다.
 오른발은 뒤꿈치를 든다. 이제 진호는 어떤 공격이 날아오더라도 대응할 수 있다.
 “꼴에 운동 좀 했다 이거냐? 그래 봐야 복싱이지, 권투 말이야. 낄낄낄! 고유 능력 중에 가장 하급이라는 체술계! 무기도 들지 못하는 네놈이 날고 기어 봐야 소용없어!”
 가소롭다는 듯 김명민이 저벅저벅 다가왔다.
 진호는 조용히 김명민을 노려보았다.
 자고로 말 많은 놈들 중, 정말로 강한 놈은 없다. 진짜 강자는 따로 있다.
 오싹!
 복부를 노린 방패 공격.
 후우우웅!
 그걸 피해내려는 찰나.
 오싹!
 등줄기가 오싹해 온다.
 ‘한 놈이 아니었나?’
 탓!
 망설임의 시간은 0.1초. 본능이 움직이는 대로 땅을 박찬 진호가 왼쪽으로 튀어나갔다.
 파파팟!
 그 자리 위에 가지런히 꽂히는 화살 두 발.
 ‘궁사가 있다.’
 어둠 속에서 날아오는 화살은 무시무시하다. 게다가 적은 진호의 식스센스 사거리 밖에 있을 것이다.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해, 반경 10미터의 식스센스가 발동되기 전까진 위치를 알 수가 없다.
 냉정해져야 한다.
 냉정, 냉정.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진호가 머리를 굴렸다. 9층의 셔터를 막아놓은 것을 보니, 작정하고 유도한 모양인데.
 에스컬레이터 계단을 다시 내려가려던 진호가 이를 갈았다. 그곳에선 장검을 든 사내 하나가 걸어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한 팀이군.’
 말 안 해도 알 수 있었다.
 다급히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천장 부분에 선명하게 박혀 있는 네모난 마크.
 사람 하나가 달리는 듯한 자세를 취한, 그 마크는 분명 비상구.
 진호가 냅다 비상구로 달렸다.
 오싹오싹!
 오른쪽 옆구리, 등!
 진호가 땅을 박차고 앞으로 굴렀다.
 파팟! 팟!
 날아와 박히는 화살 세 발. 식스센스가 없었으면 진작 죽었을 것이다.
 두근, 두근
 가슴이 불길하게 뛰었다. 비상구의 출입문 앞에 선 진호의 온몸이 불길함을 감지했다.
 진호는 비상구의 손잡이를 돌리고, 문을 발로 박찼다. 입구로 들어가려는 진호의 발걸음이 일순 멈췄다.
 ‘누군가 있다.’
 다급히 뒤로 빠진다.
 화르륵!
 그 순간, 비상구 문밖에서 화염이 쏟아졌다. 마치 전쟁 영화의 화염 방사기처럼, 불이 쏟아져 나왔다.
 “으헉!”
 간발의 차였다. 코끝이 아릿할 정도로 뜨거운 기운이 실내를 강타했다.
 화르륵! 화르륵!
 그 후 몇 번을 더 불길이 치솟았다.
 “마법사?”
 마법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불길.
 “젠장, 별의별 게 다 있다니까.”
 이내 매캐한 연기가 자욱하게 실내에 퍼졌다. 눈물이 찔끔 나오고, 콜록콜록 기침이 나왔다.
 “야, 이 멍청한 새끼야! 쿨럭쿨럭, 으억, 눈 아파!”
 저 뒤에서 김명민의 비명이 들려왔다.
 진호의 눈이 빛났다.
 ‘이놈들, 오합지졸이다.’
 팀이긴 하되, 호흡을 맞춰 본 적이 없는 오합지졸임이 분명했다.
 띠리리리리링!
 자욱한 연기가 스프링클러에 닿아, 사방에 요란한 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쏴아아아아!
 잠시 후 화재 진압을 위한 물이 쏟아져 내린다. 스프링클러에서 분수처럼 물이 뿜어져 나왔다.
 이 틈이 기회다.
 진호가 냅다 비상구 쪽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식스센스는 발동되지 않는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도, 시야를 확보하지 못한 그 상황에서도 식스센스가 발동되지 않는다는 점은 진호의 마음을 홀가분하게 만들었다.
 탓! 탓!
 빠른 발걸음으로 비상구를 통과한 진호가, 문을 쾅! 하고 닫았다.
 자욱한 연기 그 뒤에는, 천 옷을 입은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검은 스포츠머리에 삐쩍 마른 남자. 시커멓게 죽은 눈 밑이 인상적이었다.
 “어, 어?”
 남자가 입을 쩍 벌렸다. 놈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이름.
 [김진성]
 그 이름이 주황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진호를 본 김진성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다급히 계단을 내려가려던 김진성.
 “망할 새끼!”
 그 뒷덜미를 진호가 낚아챘다. 현재 진호의 근력은 200% 상승해 있는 상태. 비쩍 마른 성인 남성의 체중을 들어 올리는 것쯤은 쉽다.
 “사, 살려줘.”
 김진성은 겁에 질려 있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킬링 필드는 그런 룰이다.-
 그 순간,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 진호는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무슨 말인진 알겠다.
 꾸욱
 주먹을 움켜쥔 진호. 놈의 이름을 보아하니, 플레이어를 여럿 죽인 모양이다. 머더러 수치가 올라, 이름이 주황색으로 변해 있었으니까.
 여기서 놈을 해치워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 없다.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해 줄지도 모른다.
 그래.
 사실 진짜 살인도 아니다. 이놈들은 부활할 테니까.
 하지만-
 진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처음부터 태연하게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 말을 들은 김진성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진호는 지금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겪는 과도기에 도달해 있었다.
 요는 ‘죽느냐’, ‘죽이느냐’다.
 첫 플레이의 플레이어들은, 다른 플레이어들을 죽이는 것에 대해 굉장한 죄책감을 갖고 있다.
 그것을 이용하면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진성이 최대한 애처로운 눈을 하며 진호를 쳐다보았다.
 “사, 살려줘. 나도 이러고 싶진 않았는데……. 김명민 저 자식이 해코지할 게 두려워서…….”
 진호는 무거운 눈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사람이 살아오면서 확립하게 되는 가치관 그리고 윤리관.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러한 것처럼, 진호 역시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직은’ 싫다.
 ‘아직은. 하지만…….’
 하지만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을 것이다.
 가차없이 제거할 것이다.
 “너, 운 좋다 오늘. 가서 로또 사라.”
 생각을 정리한 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결론 내린 부분을 계속해서 고민하지 않는 것이 진호의 강점.
 “살려줘, 제발!”
 “알았다, 안 죽여. 걱정 마라.”
 “저, 정말?”
 김진성이 헤벌쭉 웃었다. 그러면서도 검디검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진호가 뒤돈 사이, 다시 한 번 마법을 사용할 생각이다. 아직 레벨 10에 불과한 김진성이었지만, 웬만한 플레이어 하나를 태워 죽이는 데는 충분하다.
 “그래. 정말이다.”
 진호는 짧게 대꾸했다.
 분명히 사람을 죽이는 것은 싫다.
 하지만, 진호는 그렇다고 해서 당한 것을 그대로 참아 넘기는 위인 또한 아니었다.
 주먹을 다시 말아 쥐었다.
 “억울해 마라. 지금은 못 해도, 김명민과 나머지들 역시 조만간 이렇게 될 테니까.”
 당한 것을 참아 넘기는 것.
 그것은 호구다.
 뻑!
 진호의 오른손이 김진성의 옆구리에 틀어박혔다.
 “억?”
 비명을 지르는 김진성. 굉장히 아플 거다, 아무리 맨주먹이라지만 근력 강화가 돼 있는 상태니까. 혀를 길게 내민 채 식은땀을 흘리는 김진성.
 “왜, 왜…… 살려준다면서…….”
 끊어질 듯한 목소리를 뒤로 한 채 한 방 더.
 뻑!
 이번엔 우지직, 하는 소리가 같이 들려왔다.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다.
 “끄헉, 사, 살려 줘!”
 김진성이 비명을 질렀다. 진호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오른손으로 김진성의 멱살을 바꿔 쥐었다.
 이번엔 진호의 왼손이 날아들었다.
 뻐억! 뻑!
 강력한 두 방의 펀치. 이 역시 김진성의 옆구리에 직격으로 꽂혔다.
 “으아아악! 커헉…….”
 왼쪽 갈비뼈 역시 우드득,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그제야 진호가 씩 웃었다.
 “내가 당해 봐서 아는데, 이 정도로 사람 안 죽는다.”
 갈비뼈가 부러지는 격통은 어마어마하다. 숨 쉬는 것도 버거울 정도로 아프다.
 걷는 것도, 말하는 것도 불가능할 정도로 아픈 것이 갈비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음에 근접한 상처를 입는다는 말은 아니다. 같은 부위를 반복해서 더 때리지 않는 이상, 골절된 부위는 생명과 지장 없다.
 같은 곳을 더 때린다면야 부러진 뼈가 장기를 찢을 수 있다. 그럼 위험하다.
 하지만 진호처럼 적당히 부수다 말면, 더럽게 아프기만 할 뿐.
 “어억, 어버버…….”
 털썩!
 그런 김진성을 바닥에 내팽개친 진호.
 김진성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이, 진호는 비상구의 계단을 타고 달렸다.
 10층,
 11층.
 저 밑에서 쾅!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새끼 어디 갔어, 라는 고함 소리와 비명 소리도 들렸다.
 “옥상은 12층.”
 진호는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다리에 힘을 주고 더욱 빠르게 달렸다.
 마지막 계단을 올라, 옥상으로 향하는 문 앞에 선 진호.
 살짝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끼이익!
 
 #쌍둥이
 
 문을 열자마자 느낀 것.
 “윽!”
 진호가 눈을 가렸다. 온 사방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순수한 하얀빛이었다.
 눈을 가렸던 손을 살짝 치우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달이 굉장히 커져 있었다.
 슈퍼 문이 달의 두 배 크기라면, 지금의 달은 거의 다섯 배 이상의 크기.
 그만큼의 달빛이 쏟아져 옥상 위는 낮과 다름없을 정도로 밝았다.
 챙! 챙!
 그리고 그 달빛을 받아 성스러운 느낌까지 드는 옥상엔 싸움판이 벌어져 있었다.
 
 ***
 
 다섯 무리의 플레이어들. 그들은 서로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한 무리당 다섯 명의 플레이어.
 즉, 5인 1팀의 구성을 하고 있었다.
 멤버를 볼까.
 우선 한 무리의 선두에 서 있는, 플레이트 메일을 입은 플레이어는 분명 ‘탱커’. 방패를 앞으로 향해, 묵직함이 가득해 보인다.
 저 모습은 김명민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그 바로 뒤쪽 포지션으로 검을 들고 있는 플레이어는 ‘딜러’. 플레이트 메일이 아닌, 진호와 같은 경갑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 뒤쪽엔 천 옷을 입은 플레이어. 무기로 들고 있는 것은 ‘스태프’라고 하는 지팡이다. 누가 봐도 ‘딜러’, 마법사.
 마지막으로 제일 마지막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두 명의 플레이어였다.
 한 명은 검을 들고, 다른 한 명은 십자가 모양의 지팡이를 들고 있는 플레이어였다.
 “전통적인 포지션 양식에 따르면, 힐러?”
 그 지팡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빛은 탱커의 상처를 치유했다.
 맞다, 힐러.
 그렇다면 후방 포지션의 검을 든 딜러는, 방어력과 체력이 약한 힐러와 마법사를 보호하는 역할일 것이다.
 진호는 흥미로운 얼굴로 그들을 관찰했다.
 “이건 완전 AOS 포지션이잖아?”
 탱커가 1선.
 근접 딜러가 2선.
 마법사, 힐러가 3선.
 그리고 3선을 보호하기 위한 딜러가 존재.
 최근 유행하는 AOS 게임의 한타(5:5로 팀 배틀을 벌이는 것) 포지션이 아닌가?
 아무리 게임을 잘 모르는 진호라고 해도, TV를 틀기만 하면 방송되는 ‘리그 앤드 레전드’라는 게임을 모를 정도로 문맹은 아니었다.
 전 세계를 휩쓴 AOS 게임이 아니던가. 이 포지션은 진호가 TV를 보면서 자주 접하던 포지션이었다.
 그 순간.
 그들의 시선이 동시에 진호를 향했다. 총 25명의 시선이 진호에게 집중됐다.
 옥상으로 올라온 플레이어의 레벨 대를 가늠하는 듯했다.
 “뭐야, 쪼렙이잖아?”
 누군가의 목소리와 함께, 그들은 동시에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다시 그들의 싸움이 시작됐다.
 아무래도 진호는 위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뭐, 뭐 인마?”
 발끈한 진호가 소리치려는 찰나, 진호의 머리 옆으로 가느다란 실 하나가 내려왔다.
 실 끝에는 다이아몬드 모양의 추가 매달려 있었다.
 톡 톡
 그게 진호의 뺨을 건드렸다.
 “엉?”
 위를 올려다보았다.
 옥상으로 이어지는 문은 옥상에서 불룩 튀어나와 있는 네모난 구조물로 만들어져 있었다.
 즉, 문의 위로 약 4미터 정도의 높이를 가지고 있는 직사각형의 구조물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 위에서 실 한 오라기가 내려왔다. 실의 끝에서, 한 남자가 얼굴을 빼꼼히 내밀었다.
 “잡아요, 그거.”
 진호가 반문했다.
 “이거를?”
 “네. 잡아 봐요.”
 진호가 잠시 망설이던 순간.
 쾅!
 옥상 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그 안에서 씩씩대며 나타난 것은……,
 “김명민.”
 김명민이었다. 그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잔뜩 충혈된 눈으로 진호에게 소리쳤다.
 “요 미꾸라지 같은 자식!”
 후우웅!
 그리고 날아드는 방패!
 진호는 다급히 몸을 숙여 방패를 피한 후, 얼굴에 왼손 잽을 먹였다.
 팟! 팟!
 빠르게 꽂히는 잽 두 방. 큰 데미지는 입히지 못 하지만,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따가운 두 방이다.
 “크앗!”
 김명민이 눈을 질끈 감은 사이, 진호는 실을 잡았다. 잡는 순간 진호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뭐, 뭐야. 어디 갔어, 이 새끼야!”
 눈을 비빈 김명민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
 
 직사각형의 구조물.
 그 위에는 두 명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똑같이 생긴 두 사내.
 무척 어려 보이는 두 명이었다.
 “싸, 쌍둥이?”
 왼쪽의 사내가 피식 웃었다.
 “쌍둥이 처음 봅니까?”
 오른쪽의 사내 역시 피식 웃었다.
 “보통은 처음 볼걸?”
 두 사내가 서로를 마주 보더니 키득대며 다시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빼꼼 내밀어, 저 아래의 김명민을 쳐다보았다.
 “어? 저거 저번 달의 그 돼지 새끼 아냐?”
 “맞다, 그 돼지 새끼네.”
 진호가 그들과 같이 고개를 빼꼼 내밀며 물었다.
 “저놈을 압니까?”
 “아냐고요?”
 두 사내가 서로를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아주 잘 알죠! 상놈의 새끼!”
 아무래도 악감정이 있는 모양이다. 아래를 쳐다보던 두 사내가 다시 돌아앉았다.
 “보아 하니, 뻑치기 당할 뻔한 모양이죠? 초보 같은데.”
 뻑치기?
 “그거 뭐, 자기도 초보자인 척하고 유인해서 PK하는 거 말하는 거예요. 초보자는 쉽게 속거든요.”
 왼쪽의 사내가 말하자, 오른쪽의 사내가 받았다.
 “우리도 저번 달에 당할 뻔했죠. 다행히 도중에 눈치채고 도망쳤지만.”
 상습범이었던 모양이다.
 문득 궁금하다.
 ‘플레이어에게 배틀 포인트를 취하는 방법이 PK뿐인가?’
 곧바로 떠오르는 생각.
 -결투 신청, 그리고 PK가 있다.-
 결투 신청은 상대 플레이어에게 ‘결투 신청’을 해 승부를 벌이는 것. 승리한 플레이어가 패배한 플레이어의 배틀 포인트를 취한다. 머더러 포인트가 쌓이지 않는다. 물론 결투를 거부할 수도 있다.
 PK는 말 그대로 플레이어 킬. 주로 퀘스트 갱신 시 난입하거나, 일상생활 중 마주칠 경우 벌어진다. 상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PK가 가능하다. PK를 할 경우, 차원의 틈이 생겨나며 적용 룰은 ‘리저렉션’ 하나뿐. 당연히 머더러 포인트가 쌓이며, 거부는 불가능하다.-
 일목요연하게 머릿속에 정리가 됐다.
 즉, 지금처럼 ‘킬링 필드 룰’이 아닌 이상 PK는 머더러 포인트를 쌓는다.
 ‘그렇다면 머더러 포인트를 쌓았을 때의 장점과 단점은?’
 -장점으로는 머더러 특유의 스킬이 생긴다는 점. 머더러 포인트가 늘어날수록 특유의 스킬은 강력해지지. 반면 단점으로는 막대한 죽음 패널티를 들 수 있다.-
 머더러 플레이어를 PK할 시 머더러 포인트는 생성되지 않으며, 머더러 플레이어의 카오스 스톤 및 배틀 포인트를 최대 100%까지 획득할 수 있지. 때문에 머더러는 공동의 적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음.
 여기까지 보통의 온라인 게임들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쌍둥이는 희한한 것을 본다는 듯, 진호를 관찰했다. 혼자 자못 진지한 표정을 짓다, 아! 이제 알겠군 이라는 표정을 반복하는 진호가 이상한 모양이었다.
 “몇 주 전에 유성이 떨어졌다죠? 그쪽은 그때 참가한 분인가 봐요?”
 “예? 아, 예.”
 생각을 갈무리한 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장이 열린 지 얼마나 됐습니까?”
 “이제 3달째예요. 1달에 한 번, 월초에 플레이어가 유입되니까요. 들리는 바로는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하던데, 초보자는 딱 죽기 좋은 시기죠.”
 맥이 탁 풀렸다.
 맞다!
 진호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플레이어를 조심하라.
 방금도 방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큭큭큭, 저 돼지에게 화끈하게 데이신 모양인데. 이봐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당신 죽이려고 했으면, 이 위에서 죽였지, 굳이 끌고 와서 죽일 이유가 있나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겠다는 투로, 오른쪽의 사내가 짓궂게 웃었다.
 “비밀상인의 초대장은 본 게임에서 레벨 25 미만의 플레이어들에게만 전송되거든요. 그러다 보니, 장소에 오는 플레이어들은 두 부류로 나뉠 수밖에 없어요. 숙련자와 초보자.”
 왼쪽 사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받았다.
 “딱 보면 알죠. 그쪽은 초보자. 장비를 보니 그냥 초보가 아니라 생 초보자. 게다가 비주류 빅3 능력자. 눈 깜빡하면 죽기 십상이죠. 저 돼지에게 벌써 당할 뻔했잖아요? 남 일 같지 않아 구해 준 거예요.”
 생각해 보니 그도 그렇다.
 진호는 두 사내를 유심히 살폈다.
 김명민을 만났을 때의 그 끈적끈적한 불안감이 전혀 없었다. 상쾌한 기분이 가득할 뿐이다.
 아까부터 느꼈던 감.
 이 감을 믿어도 될까?
 그때, 진호의 귓가에 청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식스센스를 보유한 플레이어의 뛰어난 육감은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읽어 냅니다. 오감을 초월한 육감을 믿으세요. 이제 플레이어의 식스센스는 반경 10미터의 살기뿐만 아니라, 분위기까지 읽어 냅니다.]
 [특수 스킬 : 식스센스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스킬 : Lv.2 식스센스]
 [발동 조건 : 10미터 이내의 살기 및 분위기 감지]
 [플레이어의 반경 10미터 이내의 살기 및 분위기를 감지합니다.]
 
 이제야 감이 잡힌다. 식스센스의 영향인 모양이다. 아무튼, 이 쌍둥이에게서 불안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말인 즉, 이 두 사람은 진호에게 적대적이지 않단 소리.
 “휴우…….”
 이제야 한숨 돌릴 수 있겠다.
 “전 정일식입니다.”
 왼쪽의 사내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저는 정이식이요.”
 오른쪽의 사내 역시 히죽 웃으며 말했다. 도통 똑같이 생겨 구분이 잘 안 됐다.
 “이름을 대충 지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시죠? 맞아요. 우리 부모님께서는 이름을 대충 지으셨죠.”
 일식이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우리 밑으론 쌍둥이 여동생이 있거든요?”
 세상에.
 진호가 놀랍다는 얼굴로 그 둘을 쳐다보았다.
 “쌍둥이 여동생이 또?”
 “그래요.”
 “이름이 한나, 두나죠.”
 일식과 이식이 번갈아 가면서 말했다. 진호가 피식 웃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전신이 싹 하고 풀리는 기분이었다.
 일식과 이식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우리 소개는 여기까지.”
 그리고 그 둘이 동시에 진호를 쳐다보았다.
 “그쪽은?”
 진호는 마치 영화 속에서나 존재할 법한, 독특한 그들이 왠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살짝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유진홉니다.”
 
 ***
 
 “우린 여기가 벌써 세 번째니까요, 아무래도 나름대로의 요령을 터득했죠.”
 일식의 말을 이식이 받았다.
 “킬링 필드가 펼쳐진 지역은 무법지대예요. 우리 같은 하자품들은 몸 사리는 게 최고죠. 괜히 죽어서 손해 볼 거 없잖아요?”
 진호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저 아래를 쳐다보았다. 치열하게 싸우는 다섯 파티들.
 개중 두 파티는 이미 전멸 위기였다.
 후방으로 침입한 단검을 든 플레이어에 의해 힐러와 마법사가 끊긴 파티는 그대로 끝.
 마법사와 힐러는 그 특성상 근접 딜러들에게 지극히 취약하다.
 사방에 피가 튀었다.
 푹!
 단검에 찔린 플레이어 하나가 줄줄 피를 흘리다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마치 크리쳐가 사라지듯이.
 잠시 뒤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다.
 저것이 플레이어의 ‘죽음’인가.
 일식이 부러움 반, 두려움 반의 시선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진호는 방금 전 그들이 말했던 ‘비주류 빅3’란 것이 궁금했다.
 “그러고 보니, 비주류 빅3라는 게 뭐죠?”
 “차원의 전장 내에서, 플레이어들은 고유 능력을 각성하게 되죠.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생겨요.”
 일식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쓰게 웃었다.
 “고유 능력의 불균형이죠. 저들처럼 무기나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전투 능력이 비약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가장 하급의 능력 중에는 세 가지 계열이 있어요.”
 세 가지?
 “뭐길래요?”
 진호의 반문에 일식이 대답했다.
 “체술계, 지력계, 기교계.”
 “체술계는 체술이 세지고, 기교계는 잡다한 것들을 다루는 것에 특화되죠.”
 이식이 씁쓸한 표정으로 자신의 와이어를 매만졌다. 이식은 기교계였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은 피아노 줄같이 가느다란 와이어.
 일식과 이식의 말에 문득 궁금해졌다.
 “그럼, 지력계는요?”
 일식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버프요.”
 의외다.
 버프라 함은 진호도 능히 알고 있는 것. 기본적으로 온라인 게임 내에서 우대받는 직업군이 아니던가?
 “물론 버프 성능은 크게 나쁘진 않아요. 그렇다고 좋은 것도 아니지만요. 즉, 현 시점에선 1인분으로 치기는 아쉽다는 평이 대다수예요. 저길 봐요. 팀 구성이 5인이죠?”
 그렇다.
 5인 팀.
 “구성원은 탱커 하나, 딜러 셋, 힐 하나. 모두가 전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잖아요? 구성원을 하나 빼고 버프를 넣더라도, 딜러가 빠져야 돼요. 근데 그러기엔 애매한 구성이죠. 딜러 셋 중 하나는 힐러를 보호하는 역할이거든요.”
 일식은 지력계였다.
 “요는 얼마나 효율적이냐, 입니다. 사실 버프가 없어도 큰 상관은 없어요. 차라리 지천에 널린 딜러나 탱커를 하나 더 넣어 힐러를 보호하는 게 이득이죠. 힐러를 뺄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기교계는 생존 능력은 높지만 파티에 주는 도움이 제로.”
 “그래서 비주류 빅3입니다. 차원의 전장에서, 비주류 능력자가 됐다는 건 꽤 끔찍한 패널티죠. 아무도 팀으로 끼워 주지 않거든요.”
 쌍둥이의 말에, 그제야 진호는 왜 그 세 가지가 하급으로 치부되는 지 깨달았다.
 저 밑의 휘황찬란한 플레이어들. 저 플레이어들처럼 팀 파이트를 할 시에 패널티를 가지는 비주류들.
 “저 밑에는 주류 계열들이 몰려 있어요. 방어계, 공격계, 마법계, 정신계…… 뭐, 다들 중상급 이상으로 쳐 주는 애들이네요. 아, 저기 변신계도 하나 있군요. 저게 진국이에요, 보면 재밌거든요.”
 일식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크리쳐가 있었다. 머리 위에 플레이어라는 것을 증명하는 이름이 떠 있는 크리쳐였다.
 “크리쳐?”
 진호의 반문에 일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크리쳐 종류로 변신하는 애들이죠. 쟤는 ‘아크’로 변신했네요. 레벨이 낮은가 봐요.”
 실로 다양한 능력들의 향연이었다.
 “쟤네랑 싸우면 금방 죽을 거예요. 그래서 우린 여기서 때를 기다릴 겁니다.”
 “저놈들이 싸우다 자멸하는 때를.”
 말을 마친 일식과 이식은 숨죽인 채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쌍둥이는 저 밑의 플레이어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그들과의 접촉을 피하고자 했다.
 두근, 두근
 하지만 진호는 아랫동네의 싸움을 보며,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들의 능력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무기의 위력은 충분히 알고 있다.
 마법의 위력 역시 충분히 알고 있다.
 위력을 알고 있기에, 무기를 들지 못하는 것이,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큰 패널티가 되는 것인지도 알고 있다.
 그런데 이 기분은 뭘까?
 싸우고 싶다.
 가슴을 찢고 튀어나올 것만 같은 투쟁심은 뭘까?
 이런 기분은 진호의 또 다른 기억, 그곳에서 비롯된 것들일까?
 잠시 생각하던 진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이건 온전히 나의 생각이다.
 유진호의 생각이다.
 오싹!
 순간, 진호의 왼쪽 어깨가 오싹하고 시려왔다.
 [식스센스 발동]
 진호는 다급히 자신의 어깨와 일직선으로 앉아 있는 일식을 잡아 당겼다.
 “억? 무, 무슨 짓…….”
 피우웅!
 그곳을 훑고 지나가는 화살!
 간발의 차였다. 일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싹오싹!
 이번엔 머리와 오른쪽 어깨. 진호는 이식을 옆으로 밀쳤다.
 “으억!”
 이식이 오른쪽으로 납죽 엎드렸다. 또다시 그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화살 두 발.
 진호는 벌떡 일어나 사방을 살폈다. 어디지? 어디서 쏘는 거지?
 그러다 저 멀리, 옥상 저편에서 화살을 겨누고 있는 궁사를 발견했다.
 아까 그놈이다.
 화살을 연사하는 방식. 아까는 어둠 속에 가려져 형체를 보지 못했지만, 지금은 보인다.
 그놈이 확실하다.
 “이 망할 쥐새끼, 거기 숨어 있었구나!”
 김명민이 소리쳤다.
 탓!
 그때, 김명민의 우직한 등짝을 밟고 신형 하나가 재빠르게 도약했다.
 이내 진호와 쌍둥이 앞에 착지한 플레이어.
 “이런.”
 진호가 혀를 찼다.
 아까 그놈이다. 에스컬레이터의 아래에서 걸어 올라오던, 검을 든 그놈.
 “키키키, 역시 벌레들끼리는 통하는 게 있나?”
 사내가 비열하게 웃으며 장검을 빼들었다.
 
 [이현규]
 
 아까 마법사였던 김진성보다 훨씬 이름이 붉다. 김진성이 주황색이었다면, 이놈은 핏빛.
 새빨갛다.
 “히, 히이익!”
 일식과 이식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래쪽의 싸움은 점점 극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서로의 몸에 칼을 쑤셔 넣고, 마법을 던지고 있었다.
 모두가 정신없이 싸우는 사이.
 진호와 쌍둥이는 최악의 상황에 봉착했다.
 유진호 - 체술계
 정일식 – 지력계
 정이식 – 기교계
 비주류 빅3라는 비주류가 한 자리에 뭉친 것이다.
 [약점 간파 발동]
 진호의 눈에, 이현규의 약점이 보였다. 놈은 경갑을 상하의 모두 착용한 상태였다. 진호의 것과는 다른, 좀 더 견고해 보이고 매우 세련된 모양의 경갑이었다.
 ‘레벨이 몇일까?’
 진호보다 높은 것은 확실하다.
 ‘손목, 어깨.’
 검을 사용하는 상대, 손목을 제압하면 검을 사용할 수 없다. 그리고 목과 가슴을 보호하는 것이 주된 목적인 가벼운 경갑. 그것은 목까지 올라오는 조끼의 형태다. 특성상, 어깨가 훤히 빈다.
 ‘우선 손목부터 제압한다.’
 마음을 잡은 진호.
 탓, 탓
 파이팅 자세를 마친 진호가 스텝을 밟았다.
 “복싱?”
 어처구니없다는 듯 이현규가 실소를 흘렸다.
 오싹!
 그 순간 진호의 하반신을 노린 일검. 이현규의 검은 정확히 진호의 왼쪽 허벅지를 향해 뻗어져 나왔다.
 쉭, 쉭!
 진호가 오른발을 축으로 반 바퀴를 빙글 돌아 찔러져 나온 검을 피했다.
 “어?”
 하지만 검은 기묘한 궤도로 진호의 움직임을 따라왔다. 그리고 매우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오른쪽 허벅지를 그었다.
 스으윽!
 “억!”
 따끔함과 동시에 흘러내리는 피. 따뜻하게 하반신이 젖어오는 기분에 등골이 오싹하다.
 맞는 것은 익숙하다. 하지만 칼에 베이는 것은 절대로 다시 느끼고 싶지 않은 감각이었다.
 “젠장, 헤이스트! 스트랭스!”
 일식이 욕설을 내뱉으며 진호에게 양손을 뻗었다.
 샤샤샥!
 그 순간, 일식의 왼손과 오른손에서 하얀빛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플레이어 ‘정일식’의 버프 스킬 발동!]
 [헤이스트 : 공격 속도와 이동 속도가 증가합니다.]
 [스트랭스 : 힘 스텟이 3 상승합니다.]
 
 스트랭스의 체감은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헤이스트의 체감은 확실했다.
 진정, 진정.
 평정심을 되찾자.
 목표는 저 검을 쥔 손목.
 헤이스트의 기운을 타고 평소보다 빨라진 진호.
 송곳 같은 원투 펀치가 날아들었다. 하지만 이현규는 여유롭게 검을 들어 진호의 원투 펀치를 피했다.
 원투 펀치가 허공을 가르는 사이, 이현규의 검이 다시 진호에게 쇄도했다.
 쐐애액!
 오싹오싹!
 뿐만 아니라 옆구리를 찌르고 들어오는 화살 한 발!
 진호는 바닥을 박차고 뒤로 튕겨 나갔다. 백 스텝.
 “비융신!”
 그런 진호를 이현규가 비웃었다. 왜?
 “아차!”
 깨달음은 곧바로 찾아왔다. 백 스텝 후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이곳은 좁은 직사각형 구조물 위.
 폭이 가로 3미터, 세로 약 2미터로, 상당히 비좁은 곳이었다.
 백 스텝을 사용한 진호가 허공에서 허우적댔다. 이내 아래로 추락하는 진호.
 “이게 웬 떡이냐!”
 아래에 있던 김명민이 환호하며 달려들었다.
 “잡아요!”
 그때, 이식의 와이어가 날아들었다. 실 줄기같이 가는 와이어지만, 이때만큼은 진호에게 있어 금 동아줄과도 같았다. 와이어를 쥐자마자 진호의 몸이 다시 위로 끌려 올라갔다.
 후우웅!
 진호가 사라진 허공을 나무 방패가 스치고 지나갔다.
 “빌어먹을!”
 김명민이 포효하는 소리를 뒤로 하고 가까스로 올라온 진호에게 다시 검이 쇄도했다.
 섬뜩한 소리가 세 번 울려 퍼졌다.
 푹! 푹! 스엉!
 “아악!”
 “컥!”
 일식과 이식의 복부가 찔리며 허공으로 피가 튀었다. 나머지 하나의 소리는 진호의 팔뚝이 깊게 베이는 소리였다. 그마저도 진호가 피했기에 그 정도지, 피하지 않았으면 팔뚝이 그대로 잘릴 뻔했다.
 ‘강하다.’
 이현규는 어마어마하게 강했다.
 스엉! 스엉! 스엉!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섬뜩한 바람 소리가 다시금 진호의 사방을 압도해 왔다.
 미친 듯이 상체를 좌우로 흔들었다.
 ‘손목!’
 다시 이현규의 손목을 향해 날아가는 진호의 라이트 훅.
 퍽!
 이번엔 적중!
 “윽!”
 하지만 비명은 이현규가 아닌, 진호 쪽에서 내뱉었다. 그 찰나의 순간 이현규가 몸을 뒤로 빼며 검신을 들이댄 것이다. 그대로 주먹을 검신과 맞부딪친 이현규가 진호의 상체를 길게 그었다.
 “킥킥킥. 눈물겹구나, 루저들은.”
 이현규의 비웃음.
 스엉!
 피시시싯!
 
 [아이템 : 질긴 경갑의 내구도가 25 깎였습니다.]
 
 아이템의 내구도가 손상됐다는 소리와 함께 진호의 상체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처음은 따끔하다.
 고통은 서서히 찾아왔다.
 누군가 말했다.
 죽음은 두렵지 않지만 그 과정이 두려운 것이라고.
 진호는 그 말을 절실히 느꼈다. 플레이어는 죽으면 부활하지만,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의 고통은 그대로다.
 그나마 다행인 점?
 일식의 버프를 받아, 죽음에 임박할 치명타는 피했다는 것.
 “크헉!”
 이현규가 가소롭다는 듯 검을 다시금 내지르면서 말했다.
 “고작 레벨 5짜리 체술쟁이가 어딜 반항해? 그냥 얌전히 죽어, 이 새끼야!”
 푹!
 ‘끅!’
 고통을 삼켰다.
 침착, 침착.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하고 새어나왔다. 아프거나 두려워서가 아니다. 그저 검에 당한 격통에 몸이 절로 반응해 버린 것이다.
 울렁이는 시야가 검의 궤도를 정확히 짚어 냈다.
 잠깐 망설였다.
 아주 찰나의 시간이었다.
 이내 진호는 결심했다.
 ‘이판사판이다.’
 검이 찌르는 궤도는 정확히 진호의 복부 중앙. 여길 찔리면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푸욱!
 
 살짝 몸을 틀어 살을 내어 준다면-
 
 이번엔 검이 진호의 왼쪽 옆구리를 관통했다. 진호는 옆구리를 관통하는 검을 느끼며, 주먹을 찔러 넣었다.
 쾅! 쾅!
 격통이 치밀어 올랐다. 대신, 이현규가 검을 들고 있는 왼쪽 어깨에 원투 펀치가 제대로 꽂혔다.
 
 -뼈를 취할 수 있다.
 
 “억?”
 이현규가 단말마를 지르며 입을 쩍 벌렸다.
 “……누구 맘대로 루저래?”
 진호가 입가에 피를 질질 머금으면서도 회수한 오른손을 다시 뻗으며 소리쳤다.
 쿵!
 이현규의 복부에 묵직한 오른손이 꽂혔다.
 “너 같은 새끼는.”
 “윽!”
 크진 않지만 묵직한 충격에 이현규가 살짝 허리를 꺾은 그 순간, 진호의 오른손이 다시 움직였다.
 “좀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쾅! 쾅!
 진호의 오른 주먹이 두 번 이현규의 어깨를 후려쳤다. 한 번은 숏 어퍼, 두 번째는 스트레이트다.
 울컥!
 허리를 비트는 스트레이트. 쑤셔 박혀 있던 검이 빠져나가며 피가 울컥 울컥 새어나왔다.
 “큭큭큭.”
 진호가 씩 웃었다. 이현규가 검을 쥐던 왼쪽 어깨가 기괴하게 꺾여 버린 것이다.
 드디어 통했다.
 “끄아악! 이 빌어먹을 벌레 새끼가…….”
 비명을 지르는 이현규. 그런 그의 목에 가느다란 와이어가 날아들었다.
 둘둘둘, 와이어가 목에 휘감긴다. 고개를 돌려 보니, 배를 움켜쥔 채 창백한 안색을 한 이식이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와이어를 단단히 매어 잡고 있었다.
 “으랍!”
 그리고 짧은 기합과 함께 일식이의 이단 옆차기가 이현규의 몸에 작렬했다.
 “꾸웨에엑!”
 돼지 멱따는 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붕 떠오른 이현규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이내 4미터의 아래로 추락한다. 하지만 놈의 목에는 와이어 줄이 칭칭 감겨 있다.
 아주 가늘고, 질긴 와이어가.
 “크아아압!”
 일식과 이식이 피를 토하면서 와이어를 냅다 잡아당겼다. 추락하던 이현규의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와이어 줄이 강하게 조여졌다.
 “꺽, 끄르륵!”
 이내 이현규의 몸이 축 늘어지며, 가루가 돼 산산히 흩어져 갔다.
 그 순간 이식의 머리 위에 ‘Kill!’이라는 글자가, 동시에 일식과 진호의 머리 위에는 ‘Assist!’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어시스트!]
 [머더러 플레이어 : 이현규를 처치했습니다.]
 [머더러의 죽음 패널티가 30% 상승합니다!]
 
 [이현규의 경험치가 80% 드랍됩니다.]
 [이현규의 카오스 스톤이 80% 드랍됩니다.]
 [이현규의 배틀 포인트가 80% 드랍됩니다.]
 
 이현규가 허공에서 가루가 돼 사라지고, 그 가루는 일식과 이식 그리고 진호에게 날아왔다.
 마치 흡수되듯 진호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오는 가루들.
 
 [어시스트 보상 : 획득한 총량의 25%를 받습니다.]
 [배틀 포인트를 150 획득하셨습니다.]
 [카오스 스톤을 610 획득하셨습니다.]
 [경험치를 1200 획득하셨습니다.]
 
 킬은 총량의 50%, 어시스트는 나머지 50%를 나눠 갖는다. 진호의 눈앞에 정신없이 메시지들이 떠오르는 그 순간.
 쐑 쐑! 쐑!
 오싹!
 궁사가 화살을 날렸다.
 이현규와 싸울 땐, 적은 화살을 날리기 힘들다. 아군을 맞힐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이현규와 떨어지게 되면 거리낄 게 없어진다.
 날아드는 화살은 총 세 방. 진호의 식스센스가 분명 감지를 했건만, 모두 피할 수는 없었다.
 몸은 충분히 엉망진창이었으니까.
 푹! 푹!
 옆구리, 무릎.
 화살이 가차 없이 날아와 박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목덜미를 노린 화살은 피해 냈다는 점일까.
 “크악…….”
 눈앞이 새하얘질 정도의 격통이 뒤따랐다.
 “아, 안 돼!”
 “젠장!”
 일식과 이식이 절규했다.
 쐐애애액!
 다시 한 발의 화살이 날아드는 그 순간. 기적과도 같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비밀상인 포우’가 차원 21 지구에 도착했습니다.]
 
 [‘비밀상인 포우’의 새로운 룰 적용!]
 [리커버리(Recovery) 룰이 적용됩니다.]
 [평화의 시대(Age of peace) 룰이 적용됩니다.]
 
 하늘의 달은, 어느새 열 배 이상의 크기로 팽창해 있었다. 그만큼 비치는 달빛 역시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찬란함을 뽐냈다.
 진호는 흐릿해져 가던 시야가 빠르게 되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전신을 뒤덮던 격통이 서서히 멎고 있었다.
 옆구리와 무릎을 꿰뚫었던 화살이 빠져나왔다.
 진호를 향해 날아들던 한 발의 화살도, 이내 힘을 잃고 비실거리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이스!”
 일식과 이식이 환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쌍둥이의 복부도 치료돼 있었다.
 -평화의 시대 룰은, 차원의 틈 내에 절대적인 평화를 만들어낸다.-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
 “아아!”
 그리고 진호는 보았다.
 무서울 정도로 거대해진, 그래서 선명하게 보이는 달 표면 위로 달려오는 마차 한 대를.
 마차는 마치 환상처럼 찬란한 달빛 위를 달려오고 있었다.
 
 ***
 
 마차는 달빛을 타고 내려와, 옥상에 섰다.
 히히히힝!
 잡티 하나 섞이지 않은 백마 두 마리가 요란하게 울며 앞발을 번쩍 치켜들었다.
 
 “햐, 다행이다.”
 진호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전신의 기운이 쭉 빠져나가며 긴장이 풀렸다.
 일식과 이식이 그런 진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진호는 그런 그들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고비 넘겼군요.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쌍둥이가 진지한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든 쌍둥이의 눈은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근데, 초보자 맞아요?”
 “아닌 거 같은데.”
 쌍둥이가 동시에 말했다.
 “예?”
 진호의 반문에 쌍둥이가 진호의 양 옆에 찰싹 붙으며 입을 열었다.
 “처음 봤거든요.”
 “체술계가 공격계를 이기는 거 말이에요.”
 “레벨도 높은 놈이었는데.”
 “거기다 머더러이기도 하고 말이죠.”
 정신 산만한 쌍둥이였다. 진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기, 말할 땐 좀 길게, 한 사람만. 골 울립니다.”
 쌍둥이가 멋쩍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저흰 너무 놀라서요, 분명히 레벨5 장비를 입고 계신 분이 15짜리를 상대로 싸우는 게요. 이현규 그놈, 레벨은 크게 높지 않아도 유명한 머더러 거든요. 어중간한 레벨에서 레벨 업을 멈춘 후, 초보자 위주로 PK하는 악질이에요.”
 이어진 일식의 말에 진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레벨 10 차.
 공격을 피할 수도 없고, 웬만한 공격은 다 막아 버리는 게 이상하다 싶었다.
 솔직히 일식과 이식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와이어가 날아들지 않았더라면, 혹은 버프가 없었더라면 진작 칼에 찔려 죽었을 것이다.
 “대단해요.”
 “짱이에요.”
 “…….”
 진호는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
 “저희 목숨도 구해 주셨고요.”
 “그것도 두 번이나!”
 쌍둥이의 두 눈은 밤하늘의 별빛처럼 빛났다. 마치 새끼 강아지 같았다.
 “흠, 흠.”
 부담스럽다.
 진호에게 있어서 이런 상황은 상당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진호는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비밀상인 포우가 나타난 그곳을 쳐다보았다.
 마차라.
 요즘 보긴 힘든 모습이다.
 놀이공원이나 특정 이벤트가 있지 않는 한, 거의 쓰이지 않는 것이 마차 아니던가.
 “어디 보자…….”
 옥상 위에 남은 플레이어는 열일곱 명.
 
 [차원 상점의 구매자 순서는, 현 퀘스트에서 배틀 포인트를 얼마나 많이 획득하였는가를 기준으로 합니다.]
 
 [배틀 포인트를 획득하지 못한 플레이어는 현 퀘스트에서 제외됩니다.]
 
 진호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어쩐지, ‘킬링 필드’라는 룰이 괜히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 플레이어들을 PK하고, 더 높은 배틀 포인트를 획득한 순으로 구매 순서가 정해지는 모양이었다.
 쌍둥이들에게도 그 메시지가 뜬 모양이다.
 “와…….”
 일식이 두 눈 가득 그렁그렁 눈물을 머금었다.
 “세 달 만이다.”
 쌍둥이가 서로를 얼싸안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진호는 괜히 뿌듯했다.
 “저번 달에는 끝까지 살아남긴 했지만, 배틀 포인트가 없어서 제외됐거든요.”
 “저저번 달에는 바로 죽었고요.”
 문득 쌍둥이의 시선이 김명민 일행에게 향했다.
 “이이, 이런 빌어먹을!”
 김명민이 왈칵 화를 내며 방패를 마구 휘둘렀다. 저 멀리 활을 든 궁사 역시 고개를 절레절레.
 그들의 몸이 가루가 돼 서서히 흩어져 가고 있었다. 저들은 배틀 포인트를 획득하지 못했다.
 “흥, 초보 등처먹으려더니 꼬시다, 새꺄!”
 일식이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며 혀를 날름거렸다. 이식 역시 질 수 없다는 듯 양손으로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었다.
 “착하게 살아, 짜샤!”
 김명민은 분통 터진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너네, 다음에 보자! 요 빌어먹을 쥐새끼들!”
 이내 방패 끝부터 사라지던 김명민의 신형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진호는 왜 김명민들이 그토록 자신을 죽이고 싶어 했는지를 깨달았다.
 김명민의 팀 구성은 총 넷.
 탱커 – 김명민.
 궁사 – 이름 모를 플레이어.
 그리고 머더러였던 ‘김진성’, ‘이현규’. 둘다 딜러.
 이들 조합에는 힐러가 없다. 게다가 머더러가 둘!
 옥상으로 올라온다면, 팀을 구성한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가장 먼저 죽을 것이다. 머더러의 죽음 패널티는 상당한 수준이었으니까.
 그래서 공동의 사냥감이 될 확률이 매우 높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진호를 굳이 8층까지 끌고 와 죽이는 것도 이해가 간다.
 “혹시라도 내가 실력을 숨긴 플레이어였는지 가늠하기 위해서였군.”
 물론 그렇다고 해서 15레벨의 플레이어가 5레벨의 플레이어를 죽였을 때 동급 플레이어를 죽인 만큼의 배틀 포인트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약간이라도 얻을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레벨 업을 15에서 멈춘 것은, 5레벨 플레이어에게서도 배틀 포인트를 얻을 수 있는 맥시멈 한도 선이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뭔가를 물어보며, 방심한 플레이어가 개인정보를 술술 말하게 한다. 그리고 확신이 들었을 때 처리한다. 아주 안전하고 확실하게.
 참으로 치밀하고도 의심 많은 성격이다.
 김명민.
 이현규.
 김진성.
 ‘그리고 궁사의 이름은 모르겠는데.’
 아무튼.
 요주의 인물이다. 진호는 몇 번이고 놈들의 이름을 머릿속에 새겼다.
 
 [생존 플레이어 : 15명]
 
 이윽고 옥상에는 진호 일행을 포함한 열다섯의 플레이어가 남았다.
 
 ***
 
 [차원 상점이 열렸습니다!]
 
 차원 상점이 열리는 것은 굉장한 장관이었다.
 마치 천사가 강림한 듯했다.
 마차의 사방이 활짝 열리며 환한 빛과 함께 걸어 나온 남자.
 가는 두 눈과 넓적한 귀. 거무죽죽한 피부.
 머리는 베이지 색. 입은 옷은 중세 노예상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허름하다. 누덕누덕 기워 입은 옷을 입고 저벅저벅 걸어 나오는 사내의 이름은 포우.
 비밀상인 포우.
 천사와는 영 다른, 그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저게 포우?”
 진호는 의외라는 듯 반문했다. 이름만으로 생각해 보면, 굉장히 고귀한 이미지였는데 이렇게 보니 굉장히 수더분하단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가 봐요. 저도 실물은 처음 보거든요.”
 일식이 속삭였다.
 
 “으갸갸갸갸! 아이고 죽겠다!”
 포우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펴며 옥상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포우의 언어는 신기했다. 한국어도, 영어도, 일본어도, 중국어도 아니었다.
 진호가 살면서 가장 괴상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랍어였는데, 아랍어의 뉘앙스도 아니었다.
 그냥 노래를 부르는 듯 자연스럽고도 신비한 언어였다. 더욱 신비한 점은……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겠다는 거지.”
 혼잣말을 되뇌는 진호였다.
 포우는 옥상 위의 플레이어들을 하나하나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이 있어, 그가 쳐다보면 플레이어들은 저도 모르게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흐음.”
 포우는 하나하나 플레이어를 보며 별 관심 없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진호와 마주친 그 순간.
 “……!”
 아주 잠깐 그의 눈이 기묘하게 변했다가, 이내 되돌아왔다.
 포우는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키는 그렇게 크지 않지만, 허리가 휘어 구부정하다.
 그렇게 모든 플레이어들을 한 번씩 훑어본 포우가 흥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신사 숙녀 여러분, 흥흥. 이번 달에도 우리 비밀 상점을 찾아 줘서 고마워, 흥흥흥.”
 포우는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리고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내 이름은 포우, 차원을 넘나드는 수상한 사나이. 여러분에게 좋은 것을 가지고 있는 비밀상인. 고객이 원하면 어디든 가지.”
 옥상 위의 플레이어들은 그런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을 한눈에 받는 것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 포우가 천천히 걸었다.
 “구매할 수 있는 아이템은 하나씩이야. 흥흥, 알지? 그리고 여기서 구매한 아이템들은 거래가 안 돼. 그것도 알지? 가격은 무척 싼 편이라구. 흥흥흥.”
 포우는 말을 무척 빠르게 했다. 중간중간 흥흥거리는 콧소리를 집어넣어 마치 노래처럼 들렸다.
 “안 사면 안 됩니까?”
 누군가의 목소리.
 포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사도 돼.”
 그리고 덧붙였다.
 “하지만 한 번 내 물건을 산 사람은, 흥흥. 다신 살 수 없어. 그리고 사든 안 사든 한 번 나랑 만난 사람은, 다시는 나를 만날 수 없어. 당연하잖아? 매번 같은 사람이 와서 사 가면 재미없단 말이야. 그건 불공평해. 흥흥, 내 말이 틀렸나?”
 일리 있는 말이다.
 진호는 팔짱을 낀 채 포우의 말을 들었다.
 생각해 보면, 이러한 차원 상점이라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강자들이 독점할 수도 있다.
 하지만 플레이어 당 딱 한 번만 살 수 있다면?
 기회는 다양하게 돌아갈 것이다.
 포우는 다시 히죽히죽 웃었다.
 “흥흥흥, 이 차원은 꽤 재미나단 말이야. 현대식 무기가 일절 금지란 말이지, 흥흥. 덕분에 싸움이 길어진다구. 난 총 싸움은 재미없더라. 제일 재미있는 건 불 구경, 싸움 구경 아니겠어? 흥흥흥.”
 포우는 히죽히죽 웃으며 덧붙였다.
 불만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그러자 포우가 빽 하고 소리쳤다.
 “불만 있음 꺼져! 갈 차원 많아! 꺼져버려!”
 이내 침묵.
 진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재미있는 사람 같다.
 “자, 질문 있는 사람?”
 이마에 손을 얹고 쓱 다시 사방을 훑은 그가 만족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없으면 장사할 시간이 됐다는 말이겠지, 흥흥흥.”
 다시 마차를 향해 돌아선 포우.
 포우가 오른손을 살짝 들어 올리자, 플레이어들의 눈앞에 네모난 화면이 생겨났다.
 마치 SF 영화에서나 볼 법한, 홀로그램이라고 표현해야 적합할 듯한 그 화면 속엔 각양각색의 아이템들이 진열돼 있었다.
 진호가 화면에 손을 대자, 짜릿한 반동과 함께 손가락이 튕겨 나왔다.
 “엉?”
 
 [비밀 상점의 아이템은 플레이어당 1개 구매 가능합니다.]
 [플레이어 유진호의 구매 순번은 14번입니다.]
 [현재 대기열…… 13.]
 
 “전 13번이네요.”
 이식이 아무래도 킬을 먹었기에 진호보다 한 단계 높은 모양이었다.
 “전 15번. 끼얏호!”
 쌍둥이는 서로 하이파이브를 하며 흥겨움에 취했다. 그렇게 덩실덩실 춤을 추던 쌍둥이가 멈칫하더니, 쪼르르 달려와 진호의 뒤에 숨었다.
 “음?”
 “저기 쟤들 있죠? 쟤들이 서대문 부근에서 떠오르는 팀이에요.”
 일식이 소곤거리며 한 무리의 파티를 가리켰다. 다섯 명 한 팀.
 다섯 명 모두가 생존한 팀이었다.
 “저놈이 거기서 가장 무서운 놈이고요.”
 이식이 말을 받았다.
 “이름, 강현. 레벨은 24예요. 포지션은 딜러, 역시 모든 게임의 꽃은 딜러죠.”
 진호는 강현을 쳐다보았다.
 강현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내였다. 무척 어려 보인다. 몇 살이지?
 “나이는 쉰다섯. 검도 사범이었대요, 생긴 거에 속으면 안 돼요. 아시다시피 리커버리 룰로 다들 전성기 시절로 돌아가잖아요?”
 하긴, 진호 역시 그랬다. 서른넷의 진호는 스물세 살의 전성기 시절로 돌아갔지.
 강현의 허리에는 검은색의 한기가 감도는 목검이 매어져 있었다.
 목검이라.
 그러고 보니 진호는 일식과 이식을 쳐다보았다. 리커버리 룰, 이들에게 역시 적용됐을 터.
 “아, 저흰 원래 열아홉입니다.”
 “지금이 전성기인 모양이에요.”
 쌍둥이가 씩 웃었다.
 “그렇군요.”
 진호는 그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렇든 저렇든, 유쾌한 쌍둥이였다.
 
 서서히 옥상 위의 플레이어들이 차원 상점에서 저마다의 물품을 구매해 갔다.
 어떤 이는 검을, 어떤 이는 방패를, 어떤 이는 갑옷을.
 간혹 액세서리나 스크롤 등을 사 가는 사람도 있었다. 진호는 가지고 싶었던 갑옷과 팔목 보호대 등이 하나둘 사라져 가는 것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아이템의 옵션이나 가격을 볼 수는 없다. 순서가 오지 않은 플레이어는 그저 생김새만 볼 수 있을 뿐.
 “아!”
 그럴듯한 생김새의 경갑 상의를 사간 사람은 강현이었다. 짙은 묵색에 음각으로 호랑이가 새겨진 멋들어진 경갑이었다.
 진호는 안타까움 가득한 얼굴로 탄식했다.
 갑옷을 구매하자, 신기하게도 플레이어들의 눈앞에 떠 있던 화면에서 아이템이 쑥 하고 빠져나왔다.
 “흐음…….”
 하지만 별 감흥이 없다는 듯, 강현은 아이템을 인벤토리 창에 집어넣은 채 옥상의 문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하나둘 플레이어들이 사라지고 이제 옥상 위에는 쌍둥이와 진호만 남았다.
 이식이 먼저 아이템을 골랐다.
 얼굴 가득 설렘이 차올랐다.
 “헐, 우와, 헐…….”
 이식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한참을 이것저것 뒤적이며 찾았다.
 이식이 구매한 것은 얇은 철사였다. 돌돌 말려 있는 철사는 매우 유연해 보였고, 반투명하게 빛났다.
 포우는 흥얼거리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진호를 쳐다보았다.
 “자, 이제 네 차례.”
 진호가 잠시 머뭇거리자 포우가 쓱, 하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사기 싫음 말아도 돼, 흥흥.”
 뭐, 일단 사지 않더라도 구경 정도는 해도 되겠지.
 
 ***
 
 화면 속의 아이템들은 그제야 진호에게 그 정보를 보여줬다. 하나하나 쳐다보던 진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입을 쩍 벌렸다.
 “세상에.”
 일식이 왜 그렇게 흥분했는지 이해가 됐다.
 진호가 본 차원 상점의 아이템들보다 훨씬 좋아 보이는 아이템들이 가득했다.
 물론 레벨25 미만의 아이템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호에겐 별세계였다.
 하나하나 아이템들을 살펴보았다. 각종 무기류를 군침만 삼키며 넘어갔다. 어차피 착용할 수 없는 무기는 휴지조각만큼의 가치도 없다.
 당장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
 가장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
 “오.”
 있다.
 그것은 장갑이었다. 짙은 묵색의 장갑.
 
 [아이템 : 사룡의 장갑]
 [아이템 레벨 : 4]
 [능력치 : 공격력 50]
 [내구도 : 100/100]
 [제 한 : 체술계 플레이어. 레벨 20]
 [가 격 : 1000 카오스 스톤]
 
 충분히 구매할 수 있는 가격.
 진호가 차원 상점의 웹 페이지를 뒤졌을 때도, 장갑이나 호조(칼날이 튀어나와 있는 장갑형 무구) 역시 있었다.
 물론 가격대가 맞지 않아, 가지고 있던 카오스 스톤으로 가장 효율적인 경갑 상의를 사긴 했었다.
 결과적으로 그 경갑 덕에 이현규의 일검도 버텨낼 수 있었으니,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무튼.
 이게 좋겠군.
 -이라고 생각하던 진호의 시야에 기묘한 것이 보였다.
 “음?”
 휘황찬란한 보물들 사이, 화면의 저 멀리 구석에 홀로 내팽개쳐져 있는 아이템 하나.
 반짝반짝 빛나는 다른 것들과는 달리 그것은 짙은 회색의 칙칙함을 뿜어냈다.
 생김새는 마치 허공에 붕 떠 흐느적대는 실 뭉치 같았다.
 “흐음…….”
 진호는 뭔가에 홀린 듯, 그것을 집어 들었다.
 
 [아이템 : 회색 주문]
 [아이템 레벨 : ???]
 [능력치 : ???]
 [내구도 : ???]
 [제 한 : ???]
 [가 격 : 1000 카오스 스톤]
 
 1000 카오스 스톤.
 진호의 수중에 있는 것은 때마침 1100 카오스 스톤. 살 수 있는 가격이다.
 헌데 아이템이 대체 뭐 하는 건지도 알 수가 없다.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당연히 다른 아이템을 구매해야 한다. 경갑류나 액세서리 등, 살 물건은 많다.
 가격대는 마침 다행히도 진호가 가지고 있는 1000 카오스 스톤을 벗어나지 않는다.
 싸다고 하더니, 진짠가 보다.
 하지만 진호는 뭔가 끌린다는 감정을 느꼈다.
 끌린다.
 아주 강하게 끌린다.
 “이게 뭐 하는 물건이지?”
 질문과 동시에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에 익숙해졌던 진호. 헌데 이번엔 조금 당황스럽다.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는다.
 “흐음…….”
 느낌이 이상하다.
 
 두근
 
 아이템을 본 순간, 가슴이 뛰었다.
 
 두근두근
 
 “…….”
 진호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밝디밝은 이 밤이 상당히 반가웠다.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뭔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의 기억을 되찾게 해 줄 매개체가 될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정확히는 ‘샤벨’.
 그의 기억을.
 잠시 망설인다.
 하지만 그 망설임의 시간은 짧았다.
 진호는 회색 주문을 선택했다.
 쑤우욱!
 화면 밖으로 회색의 실 뭉치가 빠져나왔다.
 
 [현재 보유한 카오스 스톤은 1100개입니다.]
 [-1000개의 카오스 스톤을 소모하셨습니다.]
 
 그때 진호의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이내 진호의 화면 밖으로 빠져나온 회색 실 뭉치가 손에 들어왔다.
 “호오.”
 포우가 놀랍다는 듯, 진호를 쳐다보았다.
 이내 씩 웃었다.
 “그렇군, 역시……. 그렇단 말이지. 흥흥흥.”
 “왜 웃습니까?”
 진호의 반문에 그는 어깨를 으쓱였을 뿐이다.
 
 마지막은 일식의 차례였다.
 아이템들을 뒤적이던 일식이 갑자기 억, 하는 소리를 내뱉었다.
 곧 둘둘 말려 있는 양피지 하나가 화면 밖으로 빠져나왔다.
 조심스럽게 꺼내 마치 보물처럼 품속에 꼭 끌어안는 그것은 분명히 양피지 두루마리였다.
 포우는 이번에도 의외라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음? 그걸 어떻게 찾아냈지?”
 “흐흐, 다 방법이 있죠.”
 일식이 양피지를 꼭 쥐었다.
 “흥흥흥, 좋아. 좋아, 좋아. 재미있구만.”
 문득 하늘을 보니, 열 배는 넘게 팽창해 있던 달이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다.
 “요번 달은 재미있구만 그래, 흥흥흥.”
 포우는 재미있다고 연신 되풀이해 말하며 히죽히죽 웃었다.
 “고객들에게 물건도 다 팔았고, 이만 갈 시간이군. 흥흥.”
 포우는 특유의 리드미컬한 걸음걸이로 마차를 향해 걸었다. 마차 앞까지 걸어간 포우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이 진호에게 향했다.
 “…….”
 “음?”
 진호 역시 그쪽을 보자, 포우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단 말이지…….”
 그 묘한 시선.
 이내 포우는 씩 웃었다. 그리고 마차에 올라탔다.
 히히힝!
 다그닥, 다그닥!
 백마들이 말굽으로 바닥을 밟았다. 그러자 말들과 함께 마차가 다시 하늘로 떠올랐다.
 마차는 올 때 그랬던 것처럼, 달빛의 끝을 타고 달렸다.
 그리고 이내 하나의 점이 되어 사라져 갔다.
 
 [비밀상인 포우가 차원 21, ‘지구’를 떠났습니다.]
 [리커버리(Recovery) 룰이 해제됩니다.]
 [평화의 시대(Age of peace) 룰이 해제됩니다.]
 
 하늘의 달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에 걸맞게 밝기 역시 줄어들어, 달이 평소의 크기로 돌아왔을 즈음엔 옥상 역시 평소처럼 변했다.
 “휴, 좋다.”
 “오늘 운수대통이야.”
 쌍둥이가 하이파이브를 하고 서로 팔짱을 낀 채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기괴한 춤을 추었다.
 진호는 그런 그들이 재미있어 킥킥 웃으며 구경했다.
 모두가 만족했다.
 아니, 만족할 뻔했다.
 
 끼익
 
 옥상 문을 열고 들어서는 다섯의 플레이어를 보기 전까진 말이다.
 “이런 젠장!”
 그들을 보자마자 일식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기다리고 있었구만.”
 이식 역시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
 그들 무리 가운데, 불만이 가득 찬 듯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강현의 얼굴이 보였다.
 아까 그 팀이다.
 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저벅저벅 걸어왔다.
 “미안하다.”
 일식이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채 대꾸했다.
 “미안하면 보내 주시지.”
 덩치 큰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도 우리만의 고충이 있다. 고통 없이 보내 주마. 반항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선심 쓰는 듯한 말투.
 이들은 애초에 진호 일행을 죽일 생각이었다. 그렇다. 이곳은 야생 그 자체.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것이 당연한, 그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할 수 없는 곳이다.
 본 게임은 그런 곳이다.
 잠깐 잊고 있었다, 풍족한 나날에 만족해서.
 그때, 벽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삐딱하게 꺾은 강현이 입을 열었다.
 “그냥 가지그래?”
 진호 일행이 아닌, 본인의 일행에게 한 말이다. 그러자 선두의 남자가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강현, 우린 지금 배틀 포인트가 절실해. 그리고 미안하지만 차원의 전장은 야생 그 자체다. 약자가 살아남기 힘든 것은 어쩔 수 없어.”
 진호는 팔짱을 낀 채 그들을 쳐다보았다.
 빨간 머리 여자, 덩치 큰 사내, 강현, 비쩍 마른 남자, 흰 옷을 입은 조용한 여자.
 다섯 명.
 “빌어먹을!”
 “빌어처먹을!”
 쌍둥이가 분통을 터트렸다.
 남자가 저벅저벅 걸어와 허리춤의 검을 뽑아드는 순간.
 “그럼 그쪽 체술계라도 보내 주지? 딱 보니 초보잔데, 배틀 포인트도 안 줄 거다.”
 강현의 이어지는 말에 남자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더니, 이내 끄덕였다.
 “그렇군. 아무리 그래도 무고한 플레이어를 죽이는 건 유쾌하지 못한 일이니.”
 그때 빨간 머리를 한 여자가 빽 소리쳤다.
 “오빠! 무슨 소리야? 나 레벨 15잖아! 5짜리 초보라도 배틀 포인트 받는다고! 나 줘, 내가 먹을래!”
 앙칼진 목소리에 강현이 더욱 얼굴을 찌푸렸다.
 “좋지 못하군. 나는 손대지 않겠다.”
 “흠…….”
 남자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선심 썼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쪽은 가라.”
 “가라?”
 진호가 반문했다.
 “그래. 그쪽은 가라.”
 쌍둥이가 체념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래요. 굳이 같이 죽을 필욘 없겠죠. 고마웠어요.”
 그렇군.
 합리적인 선택이다, 이 말인가?
 “흐음…….”
 생각해 본다.
 합리적이다.
 저들의 횡포는 야생의 법칙에 의거하면, 냉혹한 먹이사슬의 법칙이다.
 지극히 당연하며, 화 낼 필요가 없다.
 릴랙스, 릴랙스
 이내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가라니 간다.”
 진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옥상으로 통하는 문 옆에 기대 서 있는 강현을 쳐다보았다.
 강현의 얼굴엔 불만이 가득했다. 진호는 피식 웃음이 나오는 것을 깨달았다.
 저 사람은, 자신과 같은 과다.
 비겁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정당당한 승부를 원한다.
 진호는 걸음을 옮기며, 회색 실 뭉치를 던졌다 받았다를 반복했다.
 진호가 그를 스쳐 지나가자, 강현은 살짝 눈을 감았다.
 끼익
 문을 열자,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계단을 향해 한 걸음 내딛는 진호의 눈에, 바닥에 버려진 담배꽁초가 들어왔다.
 “…….”
 그것을 보고 처음으로 든 감정은 ‘반가움’이었다. 샤벨이라는 기억의 잔재를 늘 떠올리던 진호에게, 그 담배꽁초는 유진호 스스로의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 매개체였다.
 문득, 옛날이 생각났다.
 
 [네놈, 꽤 난처해 보이는구나. 좀 도와주랴?]
 
 .
 .
 .
 .
 .
 
 15년 전.
 19살의 진호는 망나니였다.
 
 1999년, 11월.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다.
 하루 걸러 결석하던 고등학교에서 잘리고, 길거리를 배회하며 싸움을 했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에겐 돈을 뜯고 수틀리면 주먹이 날아갔다.
 당시의 진호는 미친개라고 불리며, 성질 더러운 양아치 중의 양아치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렇게 활개를 치고 다니니 사방에 적을 만드는 것이 인지상정.
 그날도 평소와 같은 날이었다.
 다만 그날은 상대가 지나치게 많았다.
 십팔 대 일.
 인근 고교생 열여덟이 뭉쳐 작정하고 진호를 노린 것이다.
 자업자득이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멋들어지게 이기는 스코어였지만, 현실에선 달랐다.
 진호는 죽도록 싸웠다. 딱히 연습하지 않아도, 타고난 몸놀림과 동체시력은 잠시나마 그들과 대등하게 싸우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체력이 바닥나면서 유효타를 허용하기 시작했다.
 퍽! 퍽!
 복부, 머리, 팔, 다리 할 것 없이 짓밟히기 시작했다. 까만 밤하늘이 샛노래지고, 온 사방이 빙글빙글 돌 정도로 얻어맞았다.
 얻어맞고 또 얻어맞아 아, 이쯤 되면 죽겠구나 라는 생각을 할 때가 되자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불현듯 생각났다. 빌어먹을 고아원을 나오고 나서, 엇나가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더라?
 한 달만 더 버티면 졸업인데, 잘려 버린 고등학교가 생각났다.
 시팔, 될 대로 되라지.
 퍽 퍽
 사방의 소리까지 울렁거렸다.
 얻어맞는 그 소리마저 무감각해질 그 즈음.
 그 사람이 나타났다.
 
 “네놈, 꽤 난처해 보이는구나. 좀 도와주랴?”
 
 삐걱대는 고개를 돌리자, 누군가가 서 있었다. 흐릿한 눈을 비볐다.
 뭐가 묻어 나온다. 냄새는 비렸고, 끈적끈적했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사십 대의 중년 남성.
 허름한 트레이닝복과 덥수룩한 턱수염이 인상적이었던 그 사람.
 “킥…… 킥킥……. 꼬, 꼰대…… 오지랖 떨지 말고…… 갈 길 가쇼. 쿨럭!”
 진호는 그 와중에도 키득대며 웃었다.
 “에잉…… 사내새끼들이 비겁하게 다구리나 놓고 말이야. 요즘 애들은 아주 기본이 안 됐어.”
 그는 혀를 쯧쯧 하면서 진호의 앞으로 걸어가더니, 쪼그려 앉아 진호의 머리를 살폈다.
 “귀에서 삐익~ 하는 소리 안 들리냐?”
 들리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군.”
 “아, 당신 뭐야?”
 “당할 만한 놈이니까 패는 거예요! 아저씨 갈 길 가세요!”
 험악하게 윽박지르는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중년인은 그저 히죽 웃을 뿐이었다.
 “너희들, 나랑 내기 하자.”
 “뭔 내기? 안 꺼져요?”
 중년인은 능글능글 웃었다.
 “너희들 중 한 명이라도 내 옷깃을 스치면, 그대로 사라져 주마. 그게 아니면, 이놈 나한테 넘겨.”
 “아오, 이 꼰대가 미쳤나!”
 참다못한 학생 하나가 주먹을 휘둘렀다. 중년인이 가볍게 한 걸음 물러서며 피해냈다.
 “이이익! 야, 저 꼰대부터 조져!”
 “……!”
 그리고 진호는 그때 처음 보았다.
 공격을 회피한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것인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열여덟을 상대하는 중년인의 움직임은 지극히 효율적이고 부드러웠다.
 흐릿하던 진호의 시야에도, 그것은 확실하게 보였다. 그 모습이 진호의 가슴으로 날아와 쿵! 하고 박혀 버렸다.
 덜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는 진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피에 절어, 찌그러진 담배 갑에서 반쯤 부러진 담배를 간신히 입에 물었다.
 온몸이 비명을 지른다.
 라이터의 부싯돌 소리가 약하게 들려왔다. 진호의 온 정신은 중년인에게 쏠려 있었다.
 십 분 이상을 완벽하게 피하던 중년인이 문득 멈춰 섰다.
 “헥, 헥…….”
 고등학생들의 절반 이상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더 해볼 테냐?”
 가쁜 숨을 몰아쉬던 학생 하나가 물었다.
 “다, 당신 뭐야?”
 “나?”
 중년인은 두 팔을 하늘로 쭉 뻗으며 에구구, 하고 죽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히죽 웃었다.
 “지나가던 삼십 대 아저씨, 요 망나니 새끼들아.”
 진호는 의식이 가물가물해져 가는 그 순간에도 키득키득 웃었다.
 시발, 꼰대 삼십 대였어?
 중년인은 진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냐?”
 어느새 하늘에선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밤거리엔 적막만이 감돌 뿐이었다.
 “어린놈의 새끼가 나쁜 건 죄다 골라 배웠군. 담배 꺼, 인마.”
 꼰대, 나 한 모금도 못 피웠어. 아깝다고.
 하지만 이내 진호가 담배꽁초를 바닥에 떨궜다.
 “싸움 좀 하더라.”
 중년인은 씩 웃고는 뒤돌아 걸었다.
 “주먹질 한번 제대로 해 보고 싶으면, 따라 와라.”
 
 1999년 11월 4일.
 관장님을 만난 그날, 진호의 인생이 바뀌었다.
 비틀대면서 걷던 그날 밤의 골목이 아직도 생생하다.
 살짝 기울어 있던 전봇대.
 골목의 좌우에 서 있던 차량.
 저 멀리 눈꽃이 매달려 있던 나뭇가지.
 하얀 입김.
 그리고 세상 그 어느 것보다 든든하던 관장님의 등.
 문득 그가 뒤 돌아서며 빽 소리 질렀다.
 “꽁초는 줍고 와야지, 짜샤!”
 
 .
 .
 .
 .
 .
 
 진호는 허리를 굽혀 바닥의 담배 꽁초를 주웠다.
 “큭큭큭.”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이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감성적이 됐다.
 어느 순간부턴가, 그렇게 된 것 같다. 한동안 잊었다고 생각했다, 빌어먹을 관장님.
 “별수 없군.”
 다시 계단을 올라, 옥상 문을 열었다.
 겁에 잔뜩 질려 있는 쌍둥이와, 그들에게 다가서는 네 명의 플레이어가 보였다.
 “음?”
 벽에 기대 서 있던 강현이 의외라는 듯 진호를 쳐다보았다. 진호는 흘끗 그를 보며, 씩 웃었다.
 잠시 목청을 가다듬고, 큰 소리로 외쳤다.
 “비겁하게 다구리나 놓고, 요즘 애새끼들은 기본이 안 됐어! 안 그래?”
 “…….”
 강현이 고개를 숙였다.
 “……동감이다.”
 그의 얼굴엔 미소가 번져가고 있었다.
 진호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새겼다. 빨간 머리 여자, 덩치 큰 사내, 비쩍 마른 사내, 하얀 옷을 입은 여자. 거기다 강현.
 다섯이 한 팀.
 “겁 없는 놈이군, 살려 보내 줘도 다시 돌아오다니.”
 그중, 덩치 큰 사내가 몸을 홱 돌렸다. 진호는 그들에게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너희들 얼굴 다 기억해 뒀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까닥였다. 검지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쿡쿡 찌르며 읊조렸다.
 “-이름도 기억해 뒀다.”
 빨간 머리 여자가 뒤돌아보더니 빽 소리쳤다.
 “너 뭐야! 뒈지고 싶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진호는 가슴을 쭉 폈다.
 “나?”
 그리고 두 주먹을 말아 쥐었다.
 입가엔 즐겁다는 듯, 미소가 걸려 있었다.
 “지나가던 삼십 대 아저씨, 이 망나니 새끼들아!”
 
 #주문 각인
 
 진호는 회색 실 뭉치를 꺼냈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것이, 날아다니는 해파리 같기도 했다. 아무튼 그것을 만지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주문 각인을 시작하시겠습니까?]
 [효과 : ???]
 
 효과를 아직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기왕에 사 버렸다. 두말할 것 없다.
 “예.”
 스륵, 스륵!
 회색 실이 허공에서 길게 풀렸다. 하늘하늘 허공에 떠 있는 실이, 진호의 몸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다시 떠오르는 메시지.
 
 [사용 기록이 존재합니다.]
 [기존의 정보를 불러오시겠습니까?]
 
 “……!”
 사용 기록이 존재한다고?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끌리는 느낌을 받았었다.
 분명히 이 아이템은 샤벨과 유진호 자신을 잇는 매개체가 될 것이라는, 강력한 느낌이 들었다.
 “불러오겠다.”
 
 [정보를 불러오는 중입니다…….]
 
 이내 실은 진호의 오른팔로 움직였다.
 “음?”
 그리고 오른팔을 칭칭 감았다.
 샤아악!
 이내 진호의 피부 속을 파고들 듯 빛나더니, 오른팔에 선명한 문신 자국으로 변했다.
 “문신?”
 진호의 오른팔에 새겨진 각인은 마치 회오리 같았다. 손가락 끝을 시작으로 팔꿈치 부근까지 이어진 회오리.
 두껍고 진한 회색으로 만들어져 있는 그것은, 총 다섯 바퀴를 빙글빙글 도는 문신이었다.
 
 [해당 주문 : 회색 주문의 정보가 활성화됩니다.]
 
 [주문 : 회색 주문]
 [종류 : 공격]
 [등급 : 5]
 [제한 : 무기 착용 불가]
 
 [주문 각인을 계속 진행하시겠습니까?]
 
 어어?
 이건 좀 망설일 필요가 있겠는걸. 진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아이템은 분명 ‘샤벨’과 연관돼 있다. 그리고 주문 자체가 공격형의 종류를 띠고 있다.
 유추해 보자면 ‘회색 주문’의 문신은, 공격형인 무언가가 될 수 있을 것.
 요컨대 무기를 대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내 진호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진행한다.”
 
 [주문 각인 완료]
 
 [주문 각인 : 극점 타격]
 [플레이어의 오른손이 상대의 급소를 타격할 때마다 1스택의 데미지를 누적합니다. 총 5스택을 누적시켰을 때, 다음 공격은 지금까지 가한 피해를 한 번에 추가로 줍니다.
 **무기를 사용한 타격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패시브 스킬 : 각인 마스터리가 생성되었습니다.]
 
 각인 마스터리의 설명을 읽어보았다.
 
 [각인 마스터리 : 주문 각인을 최대 3개 저장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기존에 저장한 주문을 해제할 수 있습니다. 동일한 주문을 중첩하여 저장할 수는 없습니다.]
 [각인 마스터리를 가지고 있는 플레이어는 모든 무기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좋군.”
 소감은 짧았다.
 이 정도면 무기의 공백을 메우고도 남지 싶었다. 어차피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이제 다른 것을 해결해 볼까.
 진호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나?”
 일식이 자못 진지한 어조로 소리쳤다.
 “지나가던 삼십 대 아저씨다, 이 망나니 새끼들아!”
 그리고 입을 쭉 내밀고 두 팔을 들어올렸다.
 “쉭쉭! 쉭쉭!”
 “으으억! 으억!”
 일식은 이식에게 주먹을 휘둘렀고, 이식은 그거에 맞고 연신 으억, 으으억, 하는 소리를 냈다.
 “…….”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던 진호는 고개를 숙였다. 머리카락을 잠깐 쥐어뜯고, 마지막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암튼 짱 멋졌어요, 형님.”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진호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진호는 관장님이 아니었다. 그렇게 멋지고 세련되고 아름답게 피하지 못했다.
 한 10초 간 선방했다. 하지만 그 후, 죽었다.
 정확히는 빨간 머리 계집의 불덩어리 한 방에 골로 가 버렸다.
 고통은 진짜였다. 전신이 타들어가는 격통은 다시 겪고 싶지 않은 끔찍한 고통이었다.
 가물가물해져 가는 시야의 마지막에, 강현이 보였다.
 ‘또 보자, 멋진 놈.’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은 그랬다.
 아무튼.
 진호는 눈을 감고 놈들의 모습을 상기했다. 그리고 목을 좌우로 꺾었다.
 “싸워 보자 이거지.”
 너네, 사람 잘못 건드렸어. 진호가 자못 섬뜩한 얼굴로 읊조렸다.
 쌍둥이는 어느새 진호의 양 옆에 찰싹 붙었다. 진호는 양 옆의 쌍둥이들을 밀어냈다.
 쌍둥이가 하도 살갑게 굴어, 진호는 쌍둥이들에게 말을 편히 하는 상태였다.
 “좀 비켜라, 덥다.”
 ‘죽음’
 눈을 떠 보니, 평소 자주 가던 뒷산의 비밀 장소였다. 아무래도 플레이어가 죽음에서 ‘리저렉션’ 룰로 살아나게 되면, 자신만의 장소에서 부활하는 모양이었다.
 “형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저희만 믿으십쇼.”
 도통 믿음은 가지 않는다.
 피식
 하지만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근데, 대체 뭘 믿고 나한테 그러는 거냐? 나 레벨 낮아. 게임을 잘 아는 것도 아니고, 또 비주류잖아.”
 진호의 질문에 쌍둥이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진호에게 말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우릴 도와준 플레이어는, 형님이 처음이었거든요. 요 세 달간 말이에요.”
 “그렇게 애정에 굶주렸냐.”
 진호가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애정이라기보단.”
 일식이 진호의 왼쪽 팔에 팔짱을 꼈다. 후다닥 달려온 이식이 진호의 오른쪽 팔에 팔짱을 꼈다.
 “이 무법지대에서 로맨티스트를 만난다는 행운을 잡은 거죠.”
 “그냥 걔들 하는 짓이 못마땅했을 뿐이다.”
 진호는 이런 상황이 영 불편했다.
 혼자 살아가는 것에 익숙했다. 혼자 밥 먹고, 커피도 마시고, 조용한 시간을 갖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혼자만의 조용함이 좋았다.
 동료.
 이 단어의 어감은 참 좋다. 하지만 썩 믿음직스러운 단어는 아니었다.
 아주 오랫동안 동료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래, 굳이 꼽자면 15년 전.
 그땐 진호에게도 동료라는 것이 있었다.
 문득 관장님이 생각났다.
 길거리에서 얻어터졌던 그날, 체육관으로 향한 그날 밤.
 
 [꼰대. 왜 나를 구해준 거요?]
 
 그때 그는 분명히 이렇게 대답했었지.
 
 [그냥 네놈의 느낌이 좋아서.]
 
 무심한 듯, 하지만 가슴에 와 닿았던 그 한마디. 가슴이 울렸었다.
 진호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모르는 아저씨 따라가지 말라고 배우지 않았냐?”
 진호의 물음에 쌍둥이가 동시에 대답했다.
 “그냥, 형님 느낌 좋아서요. 뭔가 착 달라붙으면 잘될 것 같은 느낌?”
 “…….”
 쿵!
 그 가벼운 대답에 진호의 심장이 쿵! 하고 멈춰 버리는 것 같았다.
 
 [사람이란 다른 사람을 어디서 어떻게든 만나게 되지. 네놈은 사회성이 부족해. 지금이야 혼자서 다 할 수 있을 것 같지? 세상이 만만하지? 하지만 나중 가 봐.]
 
 언젠가 관장님은.
 
 [혼자보다, 같이 노는 게 더 재밌지. 언젠가 네놈도 느끼게 될걸?]
 
 이렇게 말하셨지.
 
 그런가.
 진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늘따라 꼰대 생각이 나네. 잘 살고 계시려나.”
 진호를 복싱에 입문시켜 놓고, 그렇게 훈련시켜 놓고.
 땀과 눈물을 같이 쏟아 놓고선.
 타이틀 매치가 시작되던 그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 관장님. 흔적조차 없어져, 찾을 수 없던 관장님.
 어디로 가 버렸을까?
 그동안 기억에서 잊었다고 생각했건만, 갑자기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진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늘어지게 기지개도 폈다.
 온몸에 잠자고 있던 근육들이 움직이며, 두둑이는 뼈 소리가 났다.
 그리고 눈을 떴다.
 몸이 개운하다.
 “나도.”
 진호는 피식 웃었다.
 “느낌 좋다. 잘 지내보자.”
 뭐, 이런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유진호.
 나이 34세.
 10년 만에 동료라는 것을 만들게 된 순간이었다.
 
 ***
 
 진호는 아메리카노 잔을 들었다. 아메리카노도 아이스가 있다고 해 아이스를 마시던 참이었다.
 한 모금 마신 진호가 물끄러미 잔을 내려다보았다.
 “커피는 훨씬 조금 들었고, 얼음만 많은데 왜 가격은 500원이 더 비쌀까?”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죠.”
 일식이 히죽 웃으며 레모네이드를 마셨다.
 이식은 그 옆에서 조심스럽게 에스프레소 잔을 들고 있었다.
 눈곱만 한 잔에 곰 쓸개보다 쓴 액체가 담겨 있는 에스프레소.
 도전해 봤다가 실패한 종류다.
 “그거 사람이 먹을 게 아니던데?”
 진호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그 잔을 가리켰다.
 이식은 검지를 까닥였다.
 “아는 사람만 아는 묘미입니다.”
 독특한 쌍둥이들과 카페에 앉아서 시간을 때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무튼, 진호는 얼음 하나를 와그작 씹으며 쌍둥이들에게 입을 열었다.
 그들이 한자리에 모여 차 한잔을 하는 이유.
 
 ‘죽이는 계획이 있어요.’
 
 그 발단은 일식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죽이는 계획이 대체 뭔데?”
 일식은 좌우를 살폈다. 이식 역시 좌우를 살폈다.
 이내 쌍둥이가 동시에 진호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일식이가 비밀 상점에서, 죽이는 걸 찾았거든요.”
 “그러니까 그 죽이는 게 뭔데?”
 진호의 반문에 일식과 이식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던전이요.”
 대답은 의외였다.
 “던전?”
 “네.”
 던전이라.
 던전이 뭔지는 안다. 차원의 전장의 퀘스트를 해결하면서, 이쯤 되면 던전이 존재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던전이 정말 있었군.”
 “그냥 던전은 많아요. 다만 출입하기가 힘들 뿐이죠. 서울 부근엔 네 개가 있거든요.”
 진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식이 말을 이었다.
 “헌데 그 네 개의 던전 모두, 장악하고 있는 팀들이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놈들은 던전에 플레이어들을 출입시켜 주는 대신, 입장료를 받아요.”
 “얼만데?”
 “한 명당 1억이요.”
 풉
 커피를 허공에 뿜었다. 진호는 테이블에서 티슈 세 장을 꺼내 이식에게 내밀었다.
 “미안하다. 그런데, 1억이라고? 제정신인가?”
 일식이 이식을 보며 낄낄낄 웃으며 대답했다.
 “형님, 잘 생각해 보세요. 퀘스트 한 번에 얼마 벌죠?”
 그러고 보니.
 “최소 200.”
 “레벨을 조금만 올려도 3~400은 벌어요. 한 달이면 1억 벌고도 충분히 남죠. 즉, 플레이어들에게 있어 ‘실제 화폐’는 현실에서처럼 그렇게까지 어마어마하게 큰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아요.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내고 던전에 들어가는 플레이어들도 부지기수죠.”
 흐음.
 이건 플레이어들의 또 다른 사회다. 진호는 팔짱을 꼈다.
 “근데, 던전뿐만이 아니에요. 더 큰 이득은 ‘흑소금’입니다.”
 “흑소금?”
 일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걸 정제해서 스텟 포션이라는 걸 만들어요. 그래서 누구나 4대 팀에 들어가고 싶어 하죠.”
 머리 아프다.
 진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4개의 팀은, 어디를 말하는 거야?”
 얼굴을 대충 닦은 이식이 대답했다.
 “현 서울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팀들이죠. 서울 내 던전은 총 네 곳에 있는데요, 서대문, 명동, 신촌, 홍대. 이렇게 몰려 있어요.”
 일식이 가방에서 종이를 한 장 꺼내더니 슥슥 글자를 적어 나갔다.
 “이게 지금 서울의 판도예요.”
 
 신촌 - ‘카이저’
 명동 - ‘몬스터’
 홍대 - ‘카멜’
 서대문 - ‘사도’
 
 “현 서울을 주름잡는 네 팀이죠. 아무튼, 던전이 그만큼 들어가기 힘든 곳이다 이 말입니다.”
 일식이 으스댔다.
 “그런데?”
 “제가 저번 비밀 상점에서 산 양피지 있죠? 거기에 바로 던전 위치가 적혀 있다는 얘기죠.”
 “오호?”
 진호가 의외라는 듯 일식을 다시 보았다.
 “헌데 1회용이라는 게 문제예요. 그놈들이 가지고 있는 던전은 횟수 제한이 없죠.”
 “그렇군. 근데 너, 그걸 어떻게 찾아낸 거야?”
 “전 머리가 좋으니까요.”
 “응?”
 일식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자신의 관자놀이 부분을 검지로 꾹 눌렀다.
 “전 다른 건 다 못해도, 닥치고 외우는 건 잘합니다. 한국 수능 공부는 어차피 외우면 장땡이거든요? 그래서 스크롤들의 겉 표면을 다 외웠죠.”
 “겉 표면을?”
 일식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스크롤들은 그것들마다 겉 표면의 무늬가 달라요. 미묘하지만 고유의 패턴만 알고 있으면 감별이 가능해요. 그걸 다 외우다 보니, 스킬이 생겼어요.”
 “일식이 스킬 중의 하나예요, ‘특수 감별’. 미확인 아이템을 감별할 수가 있어요. 정확히 어떤 거다- 라고 말해주기보단, ‘등급’을 알려주죠.”
 쌍둥이의 말에 그제야 이해가 됐다.
 진호는 턱을 긁으며 얼음을 하나 더 입에 털어 넣었다. 던전이라고 했지.
 팔짱을 끼고 생각 속에 잠겼던 진호가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랐다.
 “아, 그런데. 이 ‘게임’ 속에선 계속해서 레벨 업만 하는 건가? 딱히 직업 구분, 이런 건 없어?”
 “당연히 있죠.”
 이식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25레벨에서 1차 각성을 해요. 각성을 하면 머리 위에 이름과 함께 직업명이 떠요. 그리고 35레벨에 2차 각성, 50레벨에 3차 각성. 뭐, 이런 식으로 넘어간다나 봐요.”
 역시.
 아무래도 차원의 전장에서 몇 달 구르던 쌍둥이인지라, 다양한 정보들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 직업 구분이라는 건, 역시 존재하는 부분이었다.
 여태껏 진호가 그런 플레이어를 보지 못한 것은, 행동반경 내에서 그렇게 고레벨의 플레이어를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밀상인 포우를 만나던 퀘스트에서도 그랬다.
 ‘25레벨 미만.’
 이라는 자격 제한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분명 그 시기에 지금과는 다른 강력함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
 “아직까지 3차 각성을 했다는 플레이어는 들어본 적 없어요. 하지만 그에 근접한 플레이어는 한 명 있죠.”
 쌍둥이는 좌우를 다시 살폈다.
 그 얼굴에 사뭇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완전 미치광이인데요, 그놈 만나면, 정말 발에 불이 나게 뛰어야 해요. 아시다시피 10레벨 차이가 나는 플레이어는 배틀 포인트 등을 얻을 수가 없잖아요?”
 그렇다.
 진호가 고개를 끄덕이나 일식이 몸서리를 쳤다.
 “근데 걔는 그런 거 없어요. 그냥 보이는 플레이어는 다 죽여요. 아무리 저레벨이든 어떻든 상관 안 해요. 으, 우리도 한 번 만났었죠. 완전 사이코예요.”
 “그놈 이름이 뭐였더라?”
 이식이 생각이 잘 안 난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박재우?”
 쌍둥이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박재우. 그나마 요샌 이 근처에 안 나타난다니 그나마 다행이죠.”
 “그렇군.”
 진호는 짧게 대꾸했다.
 현실에서도 사이코패스가 많다. 힘을 가졌다면 정말 모든 것을 해 볼 수 있는 이 세계에서, 그 성향이 펼쳐진다면 제법 끔찍할 것이다.
 진호가 생각을 정리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린 슬슬 준비를 해야겠군.”
 
 #뜻밖의 조우
 
 뭔가를 하려면 과정이라는 게 필요하다.
 예를 들어 복싱을 시작한다고 하면, 주먹을 쓰는 법보단 기초 체력을 다지고 시작한다.
 로프 스키핑(줄넘기), 러닝 등의 기본 트레이닝을 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어차피 기본이 돼 있지 않으면 더 위로 올라갈 수가 없다.
 
 “스트랭스! 헤이스트! 바이탈!”
 슝슝! 슝!
 일식의 손에서 뻗어져 나온 흰 기운이 진호의 몸으로 쑥쑥 틀어박혔다.
 “형님, 파이팅!”
 일식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진호가 피식 웃었다.
 
 진호 일행에게 그 ‘기본’은 레벨을 올리는 일이었다.
 
 ***
 
 쇡쇡! 쇡!
 사방의 네온 스네이크는 스물다섯 마리.
 ‘여유롭다.’
 사방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진호는 여유로움을 만끽했다.
 “벤딩!”
 본래 벤딩이란 복서들이 시합이 시작되기 전, 주먹을 보호하기 위해 복싱 밴디지란 붕대로 감는 것을 말한다.
 진호가 얻게 된 액티브 스킬이기도 했다.
 이는 회피 포인트를 소모하지 않는 노 코스트(No Cost) 스킬이다. 또한 스킬 레벨이 존재하지 않았다.
 
 [스킬 : 벤딩]
 -> 플레이어의 팔꿈치에서 주먹에 이르기까지 벤딩이 적용됩니다. 벤딩이 적용된 부위의 충격 완화율은 30%입니다.]
 
 촤라라락!
 허공에 양팔을 든 진호.
 그의 양팔에 바람이 몰려들더니, 이내 하얀 붕대들이 소용돌이치듯 휘감겼다.
 “좋군.”
 만족스럽다.
 오른손의 붕대 위로는 선명한 회색의 줄이 다섯 바퀴. 주문 각인이 드러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진호의 주문 각인.
 
 [약점 간파 발동]
 
 눈에 확연히 드러나 보이는 네온 스네이크들의 약점. 놈들의 약점은 다름 아닌 머리끝에 박혀 있는 네모난 광석.
 이 광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네온 스네이크들의 색을 오색찬란하게 만든다.
 슛슛!
 진호의 오른손이 빠르게 움직이며 네온 스네이크들의 머리끝에 박힌 광석들을 강타했다.
 펑! 펑!
 광석이 펑펑 터져나가며 네온 스네이크들이 하나둘 배를 까뒤집고 쓰러져 갔다.
 우우웅!
 그 순간, 진호의 오른손을 감고 있는 붕대가 회색으로 물들었다.
 
 [극점 타격 - 1단계 차징]
 [극점 타격 - 2단계 차징]
 
 다섯 바퀴의 문신 중, 두 개가 회색으로 달아오른 것이다.
 
 [식스센스 발동]
 
 오싹오싹!
 오른쪽 팔꿈치와 왼쪽 허벅지. 진호는 여유롭게 백 스텝을 하며 공격들을 피해갔다.
 후우웅!
 묵직한 꼬리를 날리는 네온 스네이크. 진호의 머리를 향해 쇄도하는 뱀의 공격을 끝까지 지켜보다가, 꼬리가 머리에 닿는 그 순간.
 차갑고도 매끄러운 뱀 피부의 촉감을 느끼는 진호의 뺨이 부드럽게 왼쪽으로 45도가량 움직였다. 힘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부드럽게 따라 움직인 것이다.
 스으윽
 꼬리가 부드럽게 피부를 타고 미끄러져, 이내 뺨을 스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공격의 데미지는 0.
 이것이 바로 슬리핑(Sleeping).
 공격을 맞는 그 순간, 타격 부위를 회전시키며 데미지를 0으로 만들어 버리는 고급 회피 기술이다.
 
 [슬리핑 발동]
 
 그동안엔 이 기술을 사용하지 못했다. 하지만 ‘차원의 전장’에 충분히 익숙해지고, 레벨도 올랐기에 진호의 움직임에도 자신감이 붙은 것이다.
 휘리릭!
 진호의 뒤쪽에서 와이어가 날아왔다. 와이어의 끝에는 날카로운 비수가 달려 있었다.
 퍽!
 그것이 진호와 멀찍이 떨어져 있는 네온 스네이크의 이마 언저리에 맞았다.
 휘릭!
 와이어는 다시 회수돼 이식의 손으로 돌아갔지만, 비수가 박혔던 자리는 빨갛게 자국이 남아 있었다.
 마치 레이저 라이플의 조준점같이 남아있는 빨간 자국.
 휘리릭!
 다시 날아든 와이어가 진호의 등에 박혔다. 와이어의 끝에 역시 비수가 달려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몸에 박히자마자 가루가 돼 사라졌다.
 
 [플레이어 ‘정이식’의 스킬 발동!]
 [스킬 : ‘이쪽이다!’
 -> 타깃으로 설정된 목표에게 원거리 타격을 가할 수 있습니다.]
 [지속 시간 : 15초]
 
 쉿쉿!
 ‘이쪽이다’의 지속 시간은 15초.
 진호가 주먹을 날리는 사이, 이식의 와이어가 사방으로 날아들었다.
 양손으로 날리는 와이어는 동시에 두 마리씩의 네온 스네이크들을 타격했다.
 사방의 네온 스네이크들의 머리 위에 빨간 조준점들이 생겨났다.
 진호가 날쌔게 주먹을 휘둘렀다.
 퍽퍽! 퍽! 쾅!
 지극히 근거리 위주의 공격을 할 수밖에 없는 진호에게 있어, 이식의 ‘이쪽이다!’는 굉장히 유용한 스킬이었다.
 
 [스킬 : ‘심판의 링’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그리고 메시지가 뜸과 동시에 외쳤다.
 “심판의 링!”
 쿠구궁!
 사각의 링이 만들어지며 하늘에서 환한 빛이 내려왔다. 반경 10미터의 사각 링.
 로프가 만들어지고, 이내 사방에 찬란하게 울려 퍼지는-
 때앵!
 공 소리.
 마무리가 되지 않은 네온 스네이크들이 모조리 링 위로 기어 올라왔다.
 진호는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살폈다.
 
 [심판의 링 : 지속 시간 3분 59초]
 
 지속 시간 4분, 쿨 타임 15분.
 진호의 공간이다.
 심판의 링은 사방의 크리쳐들을 도발하는 광역 도발의 효과를 가지고 있다. 최대 수용은 10마리.
 또한 도발한 이들을 링 안에 가둬 두는, 홀딩 역할을 하기도 했다.
 모든 것이 좋은 이 스킬은, 외부나 내부에서 허용량 이상의 데미지를 받을 경우 지속 시간이 지나지 않아도 해제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퍽 퍽!
 우우웅!
 연달아 급소를 가격하는 오른손에, 이윽고 다섯 바퀴의 극점 타격이 모두 모였다.
 
 [극점 타격 - 5단계 차징]
 [풀 차징 상태입니다.]
 
 진호의 오른손에 감겨 있던 붕대들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팽창했다.
 “휴우.”
 남은 네온 스네이크는 두 마리.
 취익! 취익!
 진호를 경계하듯, 혀를 날름거리던 거대한 뱀들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두 뱀의 몸이 겹치는 그 순간.
 진호의 오른손이 바람처럼 튀어나갔다.
 위이이이잉!
 오른손을 휘감고 있던 붕대들이 일제히 풀리며 소용돌이가 만들어졌다.
 그것은 오른손의 문신을 타고 빙글빙글 돌고 있는 회오리였다.
 이내 오른손의 끝이 네온 스네이크의 몸통에 닿았다.
 콰아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네온 스네이크 두 마리의 몸통이 일시에 꿰뚫렸다.
 “스톱!”
 진호가 소리쳤다. 그러자 이식과 일식이 와이어를 타고 나타났다.
 “몇 초냐?”
 “3분 15초요.”
 진호는 낭패라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5초밖에 못 줄였네.”
 “그래도 신기록이에요.”
 
 스파팟!
 
 사방의 퀘스트 전용 배틀 필드가 사라지며, 보상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아무리 잘 피했다고 해도, 퀘스트를 하며 가끔씩 다치기도 한다.
 그 부분은 이렇게 해결된다.
 
 [차원의 틈에서 얻은 데미지가 누적됩니다.]
 [누적치 : -1]
 
 누적치만큼의 흉터가 남는다. 이 누적치는 ‘힐링 포션’이나 힐러 계열의 ‘힐링’으로 치유된다.
 예를 들어 팔이나 다리 절단 등의 치명상을 입은 플레이어도 누적치로 표기가 되며, 현실로 돌아올 때는 멀쩡하게 붙어 있다.
 다만 그 누적치만큼의 흉터가 몸에 남으며, 다시 차원의 틈으로 들어가게 될 때 누적치만큼의 스텟 감소가 있다.
 아무튼.
 이번 퀘스트의 보상에서 주목할 점은 다음과 같다.
 
 [3인 팀으로 퀘스트에 진입하셨습니다.]
 [보상이 1/3로 줄어듭니다.]
 
 팀.
 이것은 온라인 게임의 ‘파티’와 같은 것이다. 팀은 총 5명까지 꾸릴 수 있고, 팀을 결성하게 되면 퀘스트 보상 등에 동시 진입이 된다.
 
 [팀 : (현재 팀명이 설정돼 있지 않습니다.)]
 [팀장 : 유진호]
 [팀원 : 정일식, 정이식]
 
 이것이 현재 진호와 쌍둥이의 팀.
 물론 보상이 1/3이 되는 것도 인지상정.
 평소 진호 혼자서도 손쉽게 클리어하는 ‘네온 스네이크’들을 셋이서 잡는 것은 인력 낭비다.
 하지만 이 쌍둥이와 함께라면, 굉장한 시너지를 낼 수 있었다.
 버프?
 와이어?
 물론 그것도 있지만, 더욱 유용한 것.
 그것은 이 쌍둥이가 가지고 있는 정보들이었다.
 무력을 발휘하기 힘들었기에, 야생의 세계인 이 차원의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쌍둥이가 갈고 닦은 것.
 바로 3개월에 걸쳐 쌓은 ‘정보’.
 “휴, 바로 바로 다음 장소로 이동해 볼까요?”
 
 진호는 눈앞에 떠 있는 ‘팀 정보’의 하단에 존재하는 ‘상세보기’를 눌렀다.
 
 [팀 : (팀명 미정)]
 [합계 배틀 포인트 : 800]
 [팀 등급 : E]
 [E 등급의 팀 버프는 없습니다.]
 
 팀원들의 합계 배틀 포인트는 팀 등급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팀 등급은 ‘팀 버프’를 해당 팀에게 부여한다.
 때문에 팀에겐 배틀 포인트가 필요하다. 아주 절실하게. 강현의 일행이 했던 말에 새삼 공감했다.
 
 지금 삼인방이 서 있는 곳은 인근 고등학교의 옥상이었다.
 쌍둥이는 이내 주머니 속에서 지도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학교가 위치한 곳에 X 표를 찍찍 그었다.
 “이제 이쪽 부근은 다 클리어헸네요.”
 X 표시는 20개가 넘어갔다. 서울 방방 곳곳 구석구석을 돌았다.
 “역시 우리 추측이 맞았어요.”
 진호는 스마트폰의 메모를 뒤적였다.
 
 [퀘스트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1. 플레이어에게 직접 부여되는 ‘특수’ 퀘스트
 2. 랜덤 지역에 무작위 생성되는 ‘등급’ 퀘스트]
 
 [‘등급’ 퀘스트는 진입한 플레이어의 레벨에 따라 그 난이도가 바뀐다. 어느 순간부터 ‘사무론’이 아닌 ‘네온 스네이크’가 등장하듯, 조만간 퀘스트의 크리쳐가 바뀔 듯.]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현재의 추론은 그랬다.
 “그래. 그래서 간혹 이런 차원의 틈 밀집 지역도 존재하게 되는군.”
 이 옥상 위.
 보통은 자물쇠로 잠겨 있는 고등학교의 옥상 위. 이곳에, 눈에는 보이지 않는 차원의 틈이 세 개 밀집돼 있었다.
 “네. 랜덤 지역에 생성된 차원의 틈이 클리어되지 않으면, 얼마든지 그 인근에 또 다른 차원의 틈이 생길 수 있죠. 아쉽게도 우리는-.”
 쌍둥이가 동시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 둘이선 퀘스트를 클리어하기가 너무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퀘스트가 걸렸다 하면 ‘자동 실패’를 만들었어요. 퀘스트를 실패하면 누적치 -10을 받으면서 룰은 그대로 적용되거든요.”
 “크리쳐들의 공격을 받지 않는 지역에서 한 삼십 분 있으면 저절로 ‘퀘스트 실패’가 되더라고요. 물론 몇 번은 죽기도 했죠. 그러면서 차원의 틈을 만난 지역을 표기해 놓은 거였는데.”
 이식이 말을 마치고, 지도를 접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뭐, 이제 와 유용하게 쓸 수 있으니 대 만족이네요.”
 실제로 그랬다.
 쌍둥이와 호흡을 맞춘 지 이제 일주일.
 쌍둥이들의 레벨은 17, 진호의 레벨은 13을 달성한 상태.
 그동안의 성장 동선을 보았을 때 경이로울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이유는 단순하다.
 하루에 하나 만나기 힘들던 차원의 틈을 무더기로 클리어할 수 있었으니까.
 인기척 드문 곳에 생성된 차원의 틈은 의외로 많았고, 쌍둥이들은 그렇게 생성된 곳들을 표기해 놓은 것이다.
 이쯤 되니 쌍둥이들이 지난 3개월간 얼마나 고행의 길을 걸어 왔는지 알 법도 했다.
 “그럼 너네는 세 달 동안 레벨이 10이었던 거냐?”
 진호의 반문에 쌍둥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뇨. 12까지 올린 적도 있었어요. 계속 죽다 보니 떨어진 것뿐이죠. 비주류다 보니 아무도 팀에 끼워 주려 하지 않았으니 우리끼리 해결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그렇군.”
 “그나저나, 이번엔 아이템을 꽤 떨궜는데요?”
 이식이 수거한 아이템들을 살펴보며 히죽 웃었다.
 오늘로 차원의 틈 클리어에 전념한 지 일주일. 그들의 손에 사라져 간 네온 스네이크가 오백 마리에 육박한다.
 혼자 사냥했더라면 능히 20레벨을 찍고도 남았을 법했다.
 아이템들도 상당히 떨어졌다. 카오스 스톤은 두말할 것 없다.
 
 [아이템 : 가벼운 가죽 바지]
 [아이템 레벨 : 1]
 [능력치 : 방어력 20]
 [내구도 : 50/50]
 [제 한 : X]
 
 아직 크리쳐 레벨이 낮아서 그런지 좋은 아이템은 떨어지지 않았으나, 가끔은 괜찮은 것이 떨어지기도 한다.
 
 [아이템 : 바람의 오브]
 [아이템 레벨 : 3]
 [능력치 : 공격력 50, 마나 100]
 [내구도 : 50/50]
 [제 한 : 오브 마스터리 Lv.1 이상, 레벨 10 이상]
 
 진호는 오브를 들어 일식에게 내밀었다.
 “축하한다. 네 거다.”
 “감사, 감사!”
 일식이 냉큼 아이템을 가져갔다. 이식은 손가락을 쪽쪽 빨며 한숨을 내쉴 뿐. 어차피 저레벨 아이템이라 좋은 옵션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이렇게 수거한 아이템들은 즉석에서 분해가 가능하다. 아이템을 분해하면 카오스 스톤이 나온다.
 “꼴랑 10개 주네요.”
 아이템 레벨1 가죽 바지를 분해하자 10개의 카오스 스톤이 나왔다.
 아무튼 카오스 스톤을 차곡차곡 모았다. 주로 모으는 사람은 진호였다.
 그날그날 모은 카오스 스톤의 총액을 삼등분해 나누는 형식이다.
 “슬슬 움직이자. 비 쏟아지면 곤란할 테니.”
 진호의 말에 쌍둥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어제 일기예보에도 없었던 먹구름이 가득했다.
 오후 1시의 하늘은 잿빛으로 물들어,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듯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뭔가 좀 이상한데요?”
 이식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
 뭔가 좀 이상했다.
 오늘따라 사방에는 묘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공기가 눅눅한 것이, 진호의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불길함이 찔끔찔끔 새어 나왔다.
 하늘은 시시각각 어두워졌다. 마치 검은색 잉크를 뿌린 것처럼, 하늘 위에서 번져 나가는 것 같았다.
 수초가 지나자, 이내 온 사방이 깜깜해졌다.
 “……지금 몇 시?”
 “한 시요.”
 “……오후 한 시예요.”
 꼴깍
 심상찮다.
 
 삼인방이 부랴부랴 학교를 나와 시내로 접어들었을 무렵, 하늘에선 검은 비가 내렸다.
 쏴아아아아아!
 온 세상을 물속에 잠재워 버리려는 듯, 어마어마한 폭우가 몰아쳤다.
 콰과광! 꽈광!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천지가 울릴 정도의 굉음이었다.
 “날씨가 미쳤다.”
 일식이 중얼거렸다. 진호 역시 동감하는 바다. 이렇게 정신 나간 날씨는 실로 간만이었다.
 문득, 진호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기억.
 
 치직- 치지지직
 이상하게 머릿속에 이미지가 잡혔다. 마치 화질 나쁜 흑백영화를 보는 것처럼, 머릿속에 노이즈 가득한 영상이 삐걱대며 재생되고 있었다.
 
 .
 .
 .
 .
 .
 
 두근, 두근, 두근
 
 .
 .
 .
 .
 .
 
 흑백 영상 속에 유진호가 누워 있었다. 아니, 샤벨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 저것은 샤벨이다.
 이곳은 어디?
 그래, 꿈에서 보았던 그곳이구나. 황무지가 된 그 땅이구나.
 샤벨의 전신은 피로 범벅이 돼 있었다. 그의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가 바닥에 고여 흥건했다.
 쏴아아아아
 그곳에서도 비가 내렸다.
 먹물처럼 찐득하고 새카만 비가.
 
 -기억해 둬라, 샤벨.-
 
 피투성이가 돼 쓰러진 샤벨에게 읊조리는 이는, 검은 그림자의 사내였다.
 모든 것이 암흑 그 자체. 그저 형상으로만 존재하는 이.
 
 -주인을 거역한 네게, 자유란 없다.-
 
 중간이 잘려 버린 영화의 엔딩 장면을 보는 듯. 누군가의 칙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너무나도 기괴했고, 언어는 생소했다.
 이윽고.
 그의 모습이 흩어져 갔다.
 비바람이 불었다. 그 모습이 몹시 익숙하다.
 흩어져 가는 그를 보려고 눈을 가늘게 뜬 순간.
 
 싸아아아!
 
 머릿속의 흑백영화가 끝나 버렸다.
 
 .
 .
 .
 .
 .
 
 문득 하늘을 올려다본 진호가, 입을 쩍 벌렸다.
 검은 비가 내리는 허공에 커다란 균열이 가 있었다. 그 균열은 진호가 본 그 어떠한 균열보다 거대했다.
 찌지직!
 그 사이가 점점 벌어졌다. 차원이 찢어지는 소리가 자못 섬뜩하게 귓가에 메아리쳤다.
 “세, 세상에!”
 “저게 뭐지?”
 시민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뱉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사이로 새빨간 눈동자 하나가 나타났다. 눈동자 하나가 비밀상인 포우를 만났을 때의 달처럼 거대했다.
 그 섬뜩한 눈동자가 이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
 그 순간.
 모두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데이 브레이크(Day break)]
 [차원 웨이브가 몰아칩니다!]
 
 [5]
 [4]
 [3]
 [2]
 [1]
 
 쿠우우우우웅!
 
 요란한 폭음과 함께 세상이 번쩍였다.
 쐐애애애액!
 날카로운 바람이 온 세상을 헤집어 놓았다. 눈앞이 아찔하고 속이 울렁거렸다.
 평탄하다고 생각했던 본 게임의 세계를 우습게 본 결과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진호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뜻밖의 조우가, 결코 우연이 아님을.
 
 [데이 브레이크가 시작됩니다!]
 [적용 룰 : 리저렉션(Resurrection)
 타임 백 (Time back)]
 
 [5]
 [4]
 [3]
 [2]
 [1]
 
 [차원 게이트가 열렸습니다.]
 
 #검은 새벽 : 사혼의 비룡
 
 데이 브레이크(Day break).
 “새벽.”
 일식이 중얼거렸다.
 그렇다. 데이 브레이크란 ‘새벽’이란 뜻이다.
 새벽이라.
 진호는 냉정해지기 위해 애썼다.
 
 찌지직!
 
 이윽고 허공의 거대한 차원이 완전히 찢어졌다.
 촤라라락!
 그곳에서 거대한 쇠사슬이 세 갈래로 뿜어져 나왔다. 굵기가 사람 머리통만 한, 길고 긴 쇠사슬이었다.
 쿵! 쿵! 쿵!
 그것들이 건물을 부수고 땅속 깊숙이 박혔다.
 이윽고 차원의 틈을 비집고 거대한 형체가 대가리를 내밀었다.
 굉장한 흉터가 가득한 그것.
 그것은 엄청나게 큰 회색의 도마뱀 머리였다. 헌데 그 모습이 무척 기괴했다.
 놈의 머리는 세 갈래의 쇠사슬로 칭칭 묶여 있었는데, 그것이 고통스럽다는 듯 고래고래 포효하고 있었던 것이다.
 크허허허허헝!
 
 [‘차원 보스 : 사혼의 비룡’이 등장했습니다!]
 
 비룡이 포효하자, 비룡의 거대한 머리를 필두로 세 개의 차원의 틈이 생겨났다.
 찌지지직!
 그 틈을 비집고 크리쳐들이 쏟아져 나왔다.
 
 [데이 브레이크]
 [검은 새벽의 차원 레이드가 시작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크리쳐들은 평균 레벨 대가 10~30 대로 매우 다양했다.
 그것은 차원의 틈 퀘스트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었다.
 “……쌍둥이.”
 진호가 달려오는 크리쳐들을 보며 물었다.
 “여태껏 이런 상황에 처해 본 적은?”
 일식이 부들부들 떨었다.
 “없…… 네요.”
 없었다.
 지난 3개월간, 차원의 전장에서 이런 사태가 벌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렇게 거대한 크기의 보스가 등장한 적도, 그리고 이토록 엄청난 규모의-
 “……이거 차원의 틈 퀘스트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필드가 넓어요. 도시 전체라고 봐도 무방하겠는데요?”
 차원의 틈이 생겨난 적도 처음이다.
 이식 역시 얼굴빛이 어두웠다. 그런 와중에 진호는 냉정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데이 브레이크.
 이것은, 넓은 차원의 틈을 생성하고 ‘차원 보스’라는 레이드 몬스터를 등장시켰다.
 즉, 룰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전체적인 느낌은 차원의 틈과 비슷할 것이다.
 
 콰과광! 쾅!
 천둥 번개가 내려치며, 사방의 건물들이 우수수 무너져 내렸다.
 
 아무리 건물이 부서지고-
 
 끼루루룩!
 기괴한 크리쳐들이 사람들을 도륙했다.
 “꺄아아아악!”
 “살려 줘어어!”
 
 -사람들이 죽어도, 룰에 의해 시간은 되돌아간다.-
 
 게다가 저 거대한 ‘비룡’을 진호 일행만 상대하도록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 다른 플레이어들도 존재할 것이다.
 아무튼.
 진호는 심호흡을 했다.
 지금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물밀 듯 쏟아져 나오는 크리쳐들을 상대하는 것.
 
 쏴아아아아
 
 검은 비는 계속해서 내렸다.
 캬하항!
 그리고, 진호 일행에게 달려들기 시작한 크리쳐들은 그동안 보아 온 크리쳐와는 다른 종류였다.
 
 ***
 
 [크리쳐]
 [Lv.15 매드 캣]
 
 이번 크리쳐는 고양이였다.
 “이번에도 거대하군.”
 다만, 진호의 독백처럼 거대한 고양이. 크기로 보자면 1미터에 육박했던 들개인 ‘사무론’과 비슷했다.
 캐애앵!
 헌데 그 부피감이 남달랐다.
 전신의 털을 빳빳하게 세운 매드 캣. 거대한 신체가 두 배 가까이 뻥튀기 된 것 마냥 커졌다.
 까만 털에 새빨간 눈을 가진 고양이는 무시무시한 발톱과 날카로운 꼬리를 가지고 있었다.
 두 입 사이로 삐져나온 이빨이 제법 섬뜩하다.
 게다가 사방에서 내리는 검은 비는, 그 모습을 더욱 증폭시켰다.
 전신에 묻는 비가 싫은 듯, 몸을 부들부들 떨며 포효하는 매드 캣들.
 
 [약점 간파 발동]
 
 매드 캣의 약점은?
 진호의 눈에 매드 캣의 복부가 들어왔다. 전신이 새카만데, 복부만 유독 하얀 털이 돋아 있었다.
 그렇군. 약점은 복부.
 꺄옹!
 매드 캣의 날카로운 이빨이 진호에게 쇄도했다.
 “일식이, 버프 돌려!”
 “스트랭스, 헤이스트, 바이탈!”
 세 가지 버프가 진호의 몸으로 스며들어왔다. 일식이 뒤로 쓱 빠지며 오른손을 한 번 더 휘둘렀다.
 “윈드!”
 샤샤샹!
 
 [플레이어 ‘정일식’의 스킬 발동!]
 [스킬 : ‘윈드’
 -> 민첩 스텟이 3 증가합니다.]
 
 진호의 몸에 바람이 스며들었다. 이번에 레벨 업을 하며 얻게 된 버프 스킬이다.
 끼릭, 끼릭
 이식 역시 두 개의 와이어 끝에 단검을 부착시키고 있었다. 와이어 끝의 다이아몬드처럼 생긴 추에는 홈이 파여 있어, 이식의 단검과 부착이 가능했다.
 “이식이는 나랑 간다.”
 “가죠, 형님.”
 진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땅을 박찼다.
 탁! 탁! 탁!
 “벤딩.”
 달려가는 진호의 양팔에 바람이 깃들며, 붕대들이 감기기 시작했다.
 세 번의 도약으로 매드 캣들에게 접근한 진호가, 빠른 잽으로 놈들의 적대치를 단숨에 끌어냈다.
 캬하하하하항!
 “약점은 배 쪽의 하얀 털 부분이다. 조준 잘해!”
 휘리릭!
 일식을 끌어안고 있는 이식의 와이어가 무너져 내린 건물의 3층 높이에 걸렸다.
 이윽고 쌍둥이가 3층 높이로 이동했다.
 끼릭끼릭
 와이어에 다시금 단검을 부착하는 이식.
 “일식아, 쟤들 싫어하는 게 뭐지?”
 일식은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크리쳐들의 정보를 주워 모아 암기한 적도 있었다.
 “마늘.”
 싫어하는 것은 마늘.
 “좋아하는 건?”
 “빛나는 것. 혹은 가지고 놀 공. 생긴 게 저래도 고양이 특성이랑 똑같아. 가장 환장하는 건 역시 개다래나무겠지?”
 이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빠르게 사방의 건물들을 훑었다. 그 와중, 이식의 눈에 장난기가 가득 스몄다.
 “그렇단 말이지. 아무튼 넌 여기 있어. 버프 리필만 꾸준히 해 주면서, 살아만 있어.”
 “응.”
 일식이 주먹을 내밀었다. 이식이 일식의 주먹에 자신의 주먹을 가져다 대고, 와이어를 반대편 건물 쪽으로 날렸다.
 “…….”
 이식이 떠나는 걸 보며 일식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마따나, 자신의 역할은 굉장히 적었다.
 버프를 건다.
 그런데 그 후는?
 적어도 지금, 일식은 뭔가 더 도움이 되고 싶었다.
 일식은 생각했다.
 내가 좀 더 도움이 될 만한 일이 뭐 없을까?
 
 캐캐캥!
 매드 캣의 날카로운 발톱이 진호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피했다.
 다행이다.
 따끔한 감각이 진호의 머리를 빠릿하게 일깨워 주었다. 한 줄기 핏물이 귓불을 타고 턱으로 흘러내렸다.
 또옥!
 핏물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진호가 다시 폭발하듯 앞으로 달려들어 갔다.
 팟팟파파팟!
 잽으로 다섯 마리의 매드 캣의 시선을 잡았다.
 회피 포인트를 쌓아야 한다.
 확실히 레벨 대가 15인 매드 캣은 진호로서 원활하게 회피하는 것이 손쉽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버거운 것도 아니다. 네온 스네이크들에게 익숙해졌던 감각이, 매드 캣들에게 맞춰지기까지 적응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았다.
 스어엉!
 발톱에 스쳐도 팔다리가 찢어질 것이다. 진호는 눈앞으로 스쳐 지나가는 발톱을 보며, 생각했다.
 상체를 좌우로 흔들었다. 몸이 리듬을 타는 듯 움직였다.
 머릿속으로는 음악을 떠올렸다.
 곡은 어떤 게 좋을까?
 그래, 되도록 신나는 걸로.
 탁, 탁
 진호의 몸이 점점 가볍게, 리드미컬하게 움직였다. 오른쪽 어깨를 뒤로 빼고 상체를 왼쪽으로 숙였다.
 쉭! 쉭!
 두 번의 공격을 회피한 진호가 오른발을 축으로 반 바퀴 회전하며 냅다 앞으로 튀어나갔다.
 이제 진호는 온 사방의 매드 캣들과 조우했다. 상하좌우 모든 방향에서 공격이 날아왔다.
 이쯤 되면, 우선 공격은 포기한다.
 모든 힘을 회피에 쏟는다.
 집중, 집중.
 피하지 못하면 죽는다.
 죽음을 목도한 진호의 집중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됐다. 마치 카페에서 사무론들을 처음 상대할 때처럼, 진호의 눈빛이 매서운 독기를 머금었다.
 
 [뛰어난 플레이어의 회피 능력은, 상대를 분노케 합니다. 회피, 그것은 또 하나의 탱킹 능력으로 다듬어질 것입니다!]
 [특수 스킬 : ‘레피드 복싱’이 생성되었습니다.]
 [스킬 생성 시 발동 조건과는 상관없이 1회 시전됩니다.]
 
 진호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른 것도 그 순간이었다. 진호는 곧바로 발동되는 ‘레피드 복싱’을 체감했다.
 
 [빠르게, 더욱 빠르게. 공격을 회피할 때마다 상대방은 플레이어에게 강력한 적대감을 형성합니다. 적대감이 오르면 오를수록 플레이어의 회피 능력은 극대화됩니다!]
 
 레피드 복싱.
 이 다섯 글자가 진호의 머리 위로 슝! 하고 나타났다. 다섯 글자는 머리 위에서 점점 하늘로 사라져 가며, 스킬이 발동되었음을 알렸다.
 파아아아!
 그리고 진호의 반경으로 십 미터를 그리는 회색 파동이 뿜어져 나갔다.
 이윽고.
 진호의 몸이 잔상을 남기며 움직였다.
 동시에 매드 캣들의 머리 위에 네모난 게이지 바가 생겼다.
 휙!
 공격을 피하자,
 캬하하항!
 화가 난다는 듯 매드 캣들이 울부짖었다. 이것이 바로 크리쳐들의 적대감 수치를 표기하는 것 같았다.
 
 휘리릭!
 퍼퍼퍼퍼퍽!
 이식의 양손에서 와이어가 불을 뿜었다. 매드 캣들의 허점이 발견되면, 여지없이 날아와 박혔다.
 이윽고 놈들의 배에는 빨간색 조준점이 하나씩 남았다. 그 상태에서 이식이 두 개의 와이어를 동시에 날렸다.
 “형님, 떨어지셔도 됩니다!”
 진호가 고개를 끄덕이고 백 스텝을 연달아 해, 순식간에 매드 캣들과의 거리를 벌렸다.
 
 [플레이어 ‘정이식’의 스킬 발동!]
 [스킬 : ‘이쪽이다!’
 -> 타깃으로 설정된 목표에게 원거리 타격을 가할 수 있습니다.]
 [지속 시간 : 15초]
 
 왼손의 와이어는 진호에게 꽂혔고, 오른손의 와이어는 매드 캣들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캬하항?
 헌데 반응이 요상하다. 놈들이 마치 발정이라도 난 양, 침을 질질 흘리며 몸을 배배 꼬는 것이 아닌가?
 어리둥절해 있는 진호의 옆에, 와이어를 타고 이식이 슥 내려왔다.
 “형님, 고양이가 가장 환장하는 게 뭔지 아세요?”
 “……뭔데?”
 이식은 씩 웃으며 나무 막대기 하나를 흔들었다.
 “요거죠. 개다래나무. 저어기, 애완동물 샵 하나가 있더라고요.”
 
 매드 캣들을 상대하는 것엔 점차 요령이 붙었다. 벌써 서른 마리가 넘는 매드 캣들이 혀를 빼물고 사라져 갔다.
 진호 일행은 승승장구하고 있었지만, 사방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꺄아아악!”
 비명 소리에는 점점 이골이 나고 있었다.
 “이, 이상하다. 왜 발포가 안 되지?”
 당혹스럽다는 듯한 경찰들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진호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
 차원의 틈 내에서는 총기 및 현대식 중화기 일체가 사용 불가. 경찰들의 총도 크리쳐들 앞에선 무용지물.
 즉.
 이 차원의 틈 안에서, 플레이어는 절대적인 강자로 군림할 수 있다.
 쿠구궁! 쿠궁!
 사방의 건물이 하나하나 무너지는 소리 역시 등골이 오싹하다.
 그나마 다행인 점?
 대가리를 내밀고 있는 비룡이,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
 하지만 찢어진 차원의 틈에서 쏟아지는 크리쳐들은 아직도 가득했다.
 진호는 저 멀리, 비룡을 쳐다보았다.
 놈의 눈은 탁했다. 진회색으로 물들어, 생명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짙다.
 “…….”
 어쩐지 낯설지가 않다. 저 비룡, 분명히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그때.
 3층 건물에서 망을 보던 일식이 빽 소리쳤다.
 “형님, 조심하세요!”
 
 일식의 말에 반사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본 진호.
 문득 진호는 저 멀리서 하늘을 덮을 정도로 커다란 담요가 떨어져 내리고 있다, 라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이내 그것은 점점 더 구체화됐다.
 “하하…….”
 그리고 실소를 흘리며 달렸다.
 콰아아아아앙!
 온 사방을 진동시키며 떨어져 내린 것은, 매드 캣보다 열 배는 족히 될 정도의 고양이었다.
 
 [크리쳐 헤드]
 [Lv.20 페르샨]
 
 “크리쳐 헤드, 특정 크리쳐의 우두머리를 말해요!”
 일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놈, 분명히 매드 캣들의 우두머리일 것이다.
 
 [식스센스 발동]
 
 진호의 명치 부근이 오싹하게 저려왔다. 다급히 땅을 박차고 뒤로 빠졌다.
 파팟!
 그 사이로 날아와 꽂힌 것은.
 “뭐지 이게?”
 마치 화살 같은 거대한 털 한 가닥.
 쿵!
 그 큼직한 앞발로 땅을 내려찍는 페르샨.
 캬하하항!
 온 사방이 쩌렁쩌렁 울리는 페르샨의 울음소리가, 전신을 마비시켰다.
 “애완용으로 키우면 타고 다니기 좋겠네.”
 일식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앞발로부터 머리끝까지의 크기 약 4미터, 몸 길이는 약 10미터.
 끔찍할 정도로 거대한 고양이였다.
 우지지직!
 콘크리트 바닥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검은 비가 내리는 도로 위.
 그 위에 털썩 주저앉은 페르샨이 혀를 날름거렸다.
 
 [약점 간파 발동]
 
 페르샨의 약점은 역시 매드 캣들과 마찬가지로 배. 헌데 덩치가 워낙 커서 그런지, 몇 군데 더 보였다.
 “복부, 뒷다리, 하체 부근.”
 크기는 끔찍했지만, 사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페르시안 고양이나 다름없었다.
 특유의 샛노란, 살기가 가득 담긴 눈동자만 아니었다면 제법 귀여워 보였을 법도 했다.
 진호가 빠르게 일식과 이식에게 손짓했다.
 “저놈 약점은 배와 뒷다리 그리고 하체 부위다.”
 “넵.”
 혀를 날름거리던 페르샨이 두 눈을 번쩍 뜨며 날카롭게 포효했다.
 캬하하항!
 파파팟!
 
 [식스센스 발동]
 
 진호는 옆의 이식을 밀치고, 상체를 길게 뒤로 빼냈다.
 서 있던 자리에 길쭉한 털이 꽂혔다.
 두 주먹을 맞부딪친 진호가 일식에게 소리쳤다.
 “일식이, 공략 알지? 큰 소리로 말해 줘!”
 “넵 ,형님. 저놈, 덩치는 산만 한데 생각보다 허점이 많아요. 우선 가까이 붙어서 앞발의 공격을 무력화시키는 게 좋습니다!”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호와 이식이 동시에 튀어나갔다.
 먼저, 진호가 진입해 들어갔다.
 진호가 페르샨의 얼굴 가까이, 마치 날아가듯 붙었다.
 캬항!
 페르샨이 그 거대한 상체를 들어 올리며 앞발을 내질렀다. 덩치에 맞지 않게 빠르다.
 진호는 그대로 땅을 박차며 오히려 페르샨의 몸 쪽으로 파고 들어갔다.
 진호에게 시선이 쏠린 사이, 이식의 와이어가 요란하게 날아들었다.
 푹푹푹푹!
 확실히 이식의 와이어 다루는 기술은 감탄할 만했다. 귀신처럼 정확히 꽂히는 단검들.
 그 단검들은 페르샨의 약점 부위를 정확히 찔러냈다.
 탁!
 진호가 왼발로 땅을 강하게 내디디며 하체의 힘을 허리로 끌어냈다.
 그 허리를 살짝 비틀며 오른손으로 힘을 전달했다.
 “훅!”
 짧은 기합과 함께 오른손 어퍼가 페르샨의 복부에 꽂혔다. 후우웅, 하며 오른손에서 바람 소리가 났다.
 퍽!
 
 [극점 타격 - 1단계 차징]
 
 캐개갱!
 반응은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쐐애액!
 날카로운 꼬리가 날아왔다. 살짝 피해 주고, 주먹을 빼고 다시 한 번 어퍼.
 퍽!
 “형님! 그리고 그놈 주특기가 털 날리기랑 꼬리치기예요!”
 다시금 고개를 끄덕인 진호.
 물러서서 망설임 없는 원투 펀치.
 “쉿쉿!”
 퍽! 쾅!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극점 타격의 스택이 모여 갔다. 진호의 오른손이 한 번 더 급소를 가격한 그 순간.
 
 [극점 타격 - 5단계 차징]
 [풀 차징 상태입니다.]
 
 위이이잉!
 폭발할 듯 부풀어 오른 오른손을 내질렀다.
 쿠구궁!
 꺄아아앙!
 묵직한 소리와 함께 페르샨이 펄쩍 뛰었다. 동시에 전신의 털을 빳빳하게 세웠다.
 
 [식스센스 발동]
 
 전신이 오싹해 왔다.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까 보았던 털을 이용한 공격일 것이다.
 양쪽 눈, 코, 입, 목, 손가락, 팔, 다리.
 전신이 오싹 오싹.
 탁!
 망설이지 않고 땅을 박찼다. 백 스텝으로 빠르게 빠져나려던 진호.
 퍽!
 그때 재차 날아든 페르샨의 꼬리가 진호의 등을 후려쳤다.
 “컥!”
 회피 능력이 뛰어난 진호라지만, 방어 능력은 약하기 그지없다. 진호는 골이 웅웅 하고 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파파파파팟!
 그리고 날아드는 털.
 파팟!
 세 개의 털이 몸에 꽂혔다.
 “큭.”
 털은 진호의 왼쪽 어깨와 양 뺨을 꿰뚫었다. 아주 얇은 바늘이 몸을 관통해 버린 느낌이었다.
 후우웅!
 그 위로 페르샨의 묵직한 앞발이 날아왔다. 발의 무거움도 무섭지만, 그 끝의 칼날처럼 날카로운 발톱도 무섭다.
 가까스로 피해낸다.
 편해지는 시간은 아직도 요원하다.
 
 [식스센스 발동]
 
 다시금 발동되는 식스센스. 이번에도 전신이 오싹하다. 최대한 날아오는 털들에 대해 집중해 본다.
 ‘하나, 둘, 셋, 넷……. 총 다섯 발.’
 한 번에 날아오는 털은 다섯 발. 털이라고 해서 맥없는 털이 아니다. 바늘처럼 날카롭고 화살처럼 빠르다.
 3층에서 실눈을 뜬 채 거리를 가늠하던 일식이 진호와 이식의 몸을 향해, 마치 투수가 야구공을 던지듯 모션을 취했다.
 흰 구체가 날아들었다.
 슝, 슝, 슝!
 버프들이 진호와 이식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파파파팟!
 기다렸다는 듯 날아드는 털들을 끝까지 쳐다보던 진호. 머릿속에 그 이미지를 철저히 새겼다.
 오른쪽 다리를 뒤로 빼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슝슝!
 두 발의 털이 진호의 눈앞에서 스쳐 지나갔다. 그 다음 스웨이.
 허리를 뒤로 잔뜩 젖힌다.
 슝슝!
 두 발 역시 눈앞에서 스쳐 지나갔다.
 푹!
 하지만 한 발은 피하지 못했다.
 진호의 레벨은 아직 13.
 모든 스텟을 민첩에 주었다곤 해도, 이렇게 근거리에서 화살 같은 공격을 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피하지 못한 한 발이 진호의 왼쪽 팔꿈치를 찔렀다.
 “칫.”
 힐러가 있었다면 좋으련만.
 일식의 버프가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다급히 인벤토리 창에서 힐링 포션 하나를 꺼냈다.
 차원 상점에서 한 개에 100 카오스 스톤을 주고 구매할 수 있는 그것은, 상당히 유용한 아이템이었다.
 힐링 포션.
 상처가 치유되는 물약.
 그 치유력은 상당하다. 다만 한 번 먹는 데 상당한 카오스 스톤이 들어간다는 점과, 한 번 먹으면 1분간 재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 문제다.
 ‘지금 먹으면 곤란하겠는데.’
 진호는 고개를 살짝 내저으며 힐링 포션을 집어넣었다.
 아직 왼쪽 어깨와 팔꿈치다. 주된 공격을 담당하는 오른손과 다리가 멀쩡하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
 하지만 조금은 막막하다.
 이놈을 어찌 처리하지?
 생각은 나중으로.
 진호의 왼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잽, 잽, 잽, 잽!
 송곳 같은 오른손 잽이 페르샨의 복부를 찔렀다.
 캬하하항!
 가소롭다는 듯 페르샨이 앞발을 내질렀다. 가볍게 피하고 다시 놈의 복부 쪽으로 돌진했다.
 아웃복서 타입의 진호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파이터 타입의 공격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아웃복서이기에 더욱 그쪽의 방식을 잘 알고 있었다. 직접 상대해야 했으니까. 물론 잘 안다는 것과 잘 하는 것은 다른 개념이긴 했지만.
 아무튼 진호가 다시 복부 쪽으로 파고들자, 페르샨이 열 받는다는 듯 귀가 찢어지도록 포효했다.
 
 [회피 포인트 : 100 달성]
 
 100이 넘어갔다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진호가 소리쳤다.
 “레피드 복싱!”
 파아아!
 레피드 복싱이 다시금 발현되며 회색 기운이 뿜어져 나갔다.
 풀쩍!
 그 순간 페르샨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 육중한 몸이 용케도 수 미터의 허공으로 점프한 것이다.
 “헐.”
 고양이 특유의 유연한 몸이 갑자기 넓적해지며 진호의 온 사방을 덮쳐왔다.
 그 짧은 순간, 진호의 등에 이식의 단검이 날아와 꽂혔다.
 
 [플레이어 ‘정이식’의 스킬 발동!]
 [스킬 : ‘이쪽이다!’
 -> 타깃으로 설정된 목표에게 원거리 타격을 가할 수 있습니다.]
 [지속 시간 : 15초]
 
 이식이 만들어 놓은 포인트를 향해 진호가 주먹을 휘둘렀다.
 잽! 잽! 잽! 잽!
 빠르게 5개의 극점 타격을 모으고,
 진호는 극점 타격이 가득 모인 오른손을 쭉 뻗었다.
 쿠구구궁!
 페르샨의 푸짐한 뱃살에 진호의 극점 타격이 뿜어져 나갔다.
 휘리릭!
 그리고 이식의 와이어가 날아와 진호의 허리를 휘감았다.
 “푸핫하하!”
 이식이 오른손의 와이어를 잡아당겼다. 진호가 땅을 박차고 와이어의 힘에 끌려갔다.
 캬하하하항!
 아프다는 듯 비명을 지르는 페르샨.
 페르샨이 철푸덕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놈이 정신을 차리기 전, 진호가 냅다 달렸다.
 휘릭!
 다시금 날아든 이식의 와이어가 인근의 콘크리트 조각을 칭칭 감았다.
 “으라아압!”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페르샨의 뒷다리 쪽으로 날려 보냈다.
 쾅!
 뒷다리 하나에 직격!
 탁탁탁!
 진호가 그런 페르샨의 뒤쪽으로 달려가, 빠르게 주먹을 꽂아 넣었다.
 쾅! 쾅!
 두 번의 풀 차징이 직격으로 들어가자, 페르샨이 뒷다리를 절기 시작했다.
 이식이 왼손의 와이어를 던져 또다시 콘크리트 조각을 칭칭 감은 뒤, 냅다 페르샨 쪽으로 날렸다.
 또다시 직격!
 캬하하항!
 애처로운 비명과 함께 뒷다리가 꺾여 버렸다.
 “나이스!”
 훌쩍!
 하지만 다시금 도약하는 페르샨. 한쪽 뒷다리가 꺾여, 점프력은 약했지만 훨씬 더 위협적이었다.
 콰과광!
 눈먼 앞발에 그나마 간신히 서 있던 3층 건물의 허리가 부러졌다.
 휘리릭!
 그 페르샨의 나머지 뒷다리에 이식의 와이어가 감겼다.
 캬하하항!
 당혹스러운 페르샨의 비명. 이식이 냅다 달려, 그나마 멀쩡하던 전봇대를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으라라라랍!”
 힘차게 당기는 이식.
 페르샨이 고꾸라지고, 그 위로 무너지는 건물의 잔해가 덮쳐왔다.
 콰과과과광!
 “휴우.”
 진호가 그 잔해 위로 올라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힘든 상대였다.
 그리고 다시 저 멀리, 울부짖는 비룡을 쳐다보았다.
 기시감(旣視感)일까?
 어쩐지 익숙한 이 감각은 뭘까?
 
 온 사방을 뒤덮을 듯 쏟아져 나오는 크리쳐들이, 일순 멈칫했다.
 플레이어들이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쉽지 않군.”
 검은 목검을 꼬나든 강현이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강현의 팀이 움직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플레이어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데이 브레이크라니. 뜬금없이 대체 뭘까? 짜증나 죽겠어.”
 빨간 머리를 한 여자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투덜댔다.
 
 [강 윤]
 
 강현은 그런 그녀의 머리를 토닥였다.
 “강현, 우리 빨리 움직여야겠다. 재수 없게 ‘사도’ 놈들 만나면 저승길이야. 안 그래도 그놈들이 우리 벼르고 있을걸?”
 강현은 검은 목검을 들어 저 멀리, 비룡을 겨누었다.
 “쉽지 않겠어.”
 
 플레이어들이 등장하자 전세는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진호는 뚫어져라 비룡을 쳐다보았다.
 문득, 죽은 눈을 하고 있는 저 비룡과 시선이 마주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욱신!
 “윽.”
 진호의 오른팔이 갑자기 저릿하게 아파왔다.
 페르샨에게 당한 상처?
 아니다. 오른팔은 필사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애썼다. 다행히 왼팔을 내어주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욱신!
 
 기시감(旣視感)일까?
 
 쏴아아아아아!
 
 검은 비는 계속해서 내렸다.
 이윽고, 비룡의 머리가 움직였다.
 
 ***
 
 입을 쩍 벌린 비룡이 요란하게 포효했다.
 크허허헝!
 그와 동시에 눈에 보일 정도로 선명한 음파가 쫙 뻗어져 나갔다.
 “뭐, 뭐지?”
 “튀어요, 형님!”
 쌍둥이가 부리나케 움직이는 와중에도, 어찌된 영문인지 진호는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비룡의 포효, 공포 상태이상.-
 불현듯 떠오른 생각 때문이었다.
 “으아아악!”
 “꺄아악!”
 온 사방이 난장판이 됐다. 사람들의 눈에 짙은 공포가 강림했다. 온몸이 그대로 멈췄다.
 가위에 눌린 것 같았다.
 쌍둥이 역시 마찬가지.
 “히이이익!”
 쌍둥이가 진호의 뒤에 숨어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들의 머리 위에 검은색 해골 모양이 떠올랐다.
 “…….”
 하지만 진호는 멀쩡했다. 재미있는 점 하나, 크리쳐들 역시 그 공포에 반응한다는 것.
 진호는 팔짱을 낀 채 비룡을 쳐다보았다.
 이 공포.
 하지만 전혀 두렵지 않은, 오히려 친숙한 감각.
 기묘한 감각이었다.
 그것은 진호를 마치 부르는 듯한 감각이었다.
 이리 오라고, 이리 오라고 부르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진호는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온 대기에 가득한 공포가, 진호 앞에서 썰물 갈라지듯 사라져 갔다.
 그대로 한 걸음 더.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진호가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모든 생각이 사라지고 세상에 비룡과 진호 둘만 남았다.
 온 사방이 새하얗게 변하며 진호의 걸음이 빨라졌다.
 이내, 진호가 몸을 숙였다.
 그리고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달리기 시작했다.
 목표는 저 멀리의 비룡이다.
 탁, 탁, 탁, 탁!
 사방의 사물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진호의 온 시선이 비룡에게 집중됐다.
 “말해 봐.”
 진호가 조용히 읊조렸다.
 “네놈, 정체가 뭐냐?”
 
 ***
 
 “…….”
 사내는 전신이 오싹한 감각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마치 가위라도 눌린 듯, 전신의 세포가 공포에 울부짖고 있었다.
 “흐음…….”
 그렇게 한참을 서 있던 사내.
 특이한 점은, 인근에서 대치하고 있던 크리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것.
 한참을 그러고 있던 사내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툭툭 털었다.
 드디어 ‘공포’ 상태이상이 풀렸다.
 “젖는 건 질색인데.”
 사방의 비는 그런 사내의 심기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더욱 힘차게 내렸다.
 쏴아아아아!
 크르릉!
 그와 동시에 사내의 사방에서 공포에 질려 있던 크리쳐들이 이빨을 드러냈다.
 
 [김현민]
 
 현민은 오른손을 쭉 뻗었다.
 그의 몸을 타고 한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윽고 오른손을 타고 시퍼런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프리즈.”
 쩌저저적!
 크리쳐들이 얼어붙었다. 젖는 것을 싫어하는 현민의 성격과는 달리, 그의 능력은 비 오는 날에 특화돼 있었다.
 “데미지만 좀 나오면 정말 좋겠는데.”
 현민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쉽게도 데미지를 주는 것보단, 상대를 빙결시켜 버리는 메즈(Mez)기에 특화된 그였다.
 “염병할.”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타고 얼음으로 된 기괴한 형상이 만들어졌다.
 크리쳐들을 따라 얼어붙은 그 모양새가 마치 분수를 보는 듯했다.
 크르륵?
 얼음 속의 크리쳐들이 두 눈을 멀뚱멀뚱 뜨며 울었다. 제법 답답한 모양이었다.
 현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귀찮게 굴지 마라. 한번 왔다 한번 가는 인생, 편하게 좀 살고 싶다.”
 오늘은 유독 재수가 없는 날이었다.
 담배가 떨어져 편의점으로 나가려던 차, 하늘에서 차원이 찢어졌다.
 “아이고, 세상에.”
 천지가 뒤집히고 우렁차게 비가 내렸다. 현민은 품속에서 담배를 꺼냈다.
 입에 물려던 차, 물에 푹 젖어 버린 담뱃갑을 보며 이를 갈았다.
 다시 터덜터덜 걸었다.
 꽤 큰 체구에 멀끔하게 생긴 사내, 현민의 얼굴에는 그야말로 권태로움과 지겨움만이 가득했다.
 아아, 귀찮다.
 “응?”
 탁, 탁, 탁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 발자국 소리인가?
 크리쳐?
 현민이 흘끗 옆쪽을 바라보았다.
 “……?”
 파파파파팟!
 물 위를 달리듯, 현민을 지나쳐 순식간에 사라져 가는 사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이고, 바쁘기도 하셔라.”
 이내 심드렁.
 크르릉!
 헌데 바쁜 것은 그 사내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응?”
 그 사내가 몰고 온 크리쳐들이 수십 마리였다. 사내를 쫓던 크리쳐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현민을 쳐다보고 있었다. 현민은 손에 쥐고 있던 담뱃갑을 내팽개쳤다.
 “이런, 젠장!”
 크리쳐들은 어느새 현민에게 적대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꿩 대신 닭이라 이거냐?”
 그의 양손에 가득 얼음의 기운이 몰려들었다.
 “프리즈!”
 그리고 왼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쩌저저적!
 삽시간에 그의 앞에 직경 3미터의 얼음벽이 세워졌다. 그리고 뒤돌아 오른손을 허공으로 뿌렸다.
 “아이스 로드!”
 쩌저적!
 저 멀리까지 얼음으로 된 길이 생겨났다. 현민이 이마 가득히 힘줄을 실룩이며 침을 퉤, 하고 뱉었다.
 “야, 이 새꺄, 거기 안 서?”
 빽 소리를 지르며 그 길에서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허억, 허억…….”
 진호는 어느새 비룡의 코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새삼 그 크기에 압도당했다. 비룡의 머리는 그 높이가 5층 건물에 맞먹었다.
 멀리서 봤을 땐 그저 엄청나게 크구나, 했지만 가까에서 직접 보니 그 위압감이 남달랐다.
 그리고 이미 한 팀이 공격을 진행하고 있었다.
 
 [약점 간파 발동]
 
 약점 간파가 발동됐지만, 진호는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었다.
 “약점이 없다?”
 
 쿠루룽! 쿠궁!
 그 거대한 머리가 차원의 틈에서 삐져나온 채, 꿈틀거렸다. 꿈틀거릴 때마다 온 사방이 흔들거렸다.
 쾅! 쾅!
 공격하고 있는 팀은 하나.
 그중 선두에 서 있는 사람은 의외로 여자였다.
 
 <파이터>
 [윤진서]
 
 “면역!”
 그녀가 날카롭게 소리치자, 후방에 서 있던 힐러가 지팡이를 내밀었다.
 슝!
 그녀의 몸에 하얀 결계가 둘러졌다.
 
 크허허허헝!
 
 이어지는 비룡의 포효가 사방을 휩쓸었다.
 방패를 든 플레이어가 몸집보다 거대한 방패를 내밀어 포효를 막아냈다. 윤진서의 몸의 결계가 효과가 있었는지, 잠시 움찔한 그녀가 다시 움직였다.
 이어지는 공격.
 이번엔 방패병의 뒤에 숨어 있던 마법사였다. 마법사의 지팡이가 움직이자 허공에서 불덩어리가 쏟아져 내렸다.
 쾅! 쾅! 쾅! 쾅!
 
 진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뭔가에 홀린 듯, 여기까진 왔다. 헌데 이제부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때였다.
 “거기, 비키쇼!”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뒤를 돌아보자, 한 무리의 팀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 선두에 선 남자가 진호에게 말했다.
 남자가 입은 경갑의 어깨 부근에는 까마귀가 새겨져 있었다.
 
 <소드 맨>
 [기유성]
 
 “초보 같은데, 이런데 오면 죽어요. 가쇼.”
 한창 바쁘게 움직이던 윤진서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빽 소리 질렀다.
 “뭐야, 그쪽은. 은혜도 모르는 후레 상놈 아냐?”
 기유성이 피식 웃으며 레이피어를 빼들었다.
 “그쪽은 천둥벌거숭이 계집이 아니시던가?”
 “오늘 내가 기어코 네놈 대가리를 터트려 주지. 어때? 당장이라도 한판 뜨자고.”
 여자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에겐 진호가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서로를 노려보며 두 눈을 이글이글 태우고 있을 뿐.
 쩌저저적!
 그때, 진호의 뒤쪽으로 미끄러지듯 등장한 현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시벌, 카이저랑 사도잖아?”
 카이저?
 사도?
 진호는 곰곰이 생각했다. 어디서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인데…….
 
 [신촌 - ‘카이저’
 명동 - ‘몬스터’
 홍대 - ‘카멜’
 서대문 - ‘사도’]
 
 아.
 신촌과 서대문의 던전을 소유하고 있다는 팀.
 “저들이 사이가 좋지 않습니까?”
 진호가 그에게 묻자 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앙숙으로 유명하지. 원래 ‘카이저’는 2개 팀으로 구성돼 있었는데, 2번 팀이 떨어져 나와 ‘사도’가 된 거걸랑.”
 현민은 여자를 가리켰다.
 “쟤가 신촌 ‘카이저’의 대장이야. 체술계 플레이어론 유일무이한 애지. 성격이 아주 더럽다고 소문이 났어. 그리고…….”
 이번엔 남자에게 손가락이 향했다.
 “쟤는 서대문 ‘사도’의 대장. 겁나 빠른 쾌검술을 사용한다던데, 안 맞아 봐서 모르겠지만, 엄청 아프겠지?”
 진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근데……. 누구?”
 현민은 씩 웃었다.
 “응, 나는 김현민…… 이 아니고, 이 새끼야. 아까 네놈이 끌고 온 크리쳐들 땜에 죽다 살아난 사람이다!”
 진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정신이 팔려 있어 신경을 못 썼습니다.”
 “뭐, 이 새끼야 한번 싸워 보자 이거…… 응?”
 진호가 즉각 사과를 하자, 김현민이 얼척 없다는 얼굴을 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진호가 짧은 사과를 반복했다.
 “어…… 그래.”
 
 쿠우웅!
 그때, 비룡이 입을 쩍 벌렸다. 이번엔 입 안에서 거대한 사슬들이 뿜어져 나왔다.
 촤라라라라락!
 진호는 이번에도 가만히 서 있었다. 저 사슬 역시 익숙한 느낌이었고, 무엇보다 식스센스가 발동되지 않았다.
 파파파팟!
 사슬들은 귀신같이 진호 인근을 제외한 곳으로 쏟아져 내렸다.
 얼떨결에 사슬 세례를 피한 김현민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젠장, 기유성! 싸우는 건 다음으로 미루자! 일단 저놈부터 공략하자!”
 윤진서는 예쁜 얼굴과는 달리, 아주 입이 거칠었다. 하얀 피부 위로 도드라지는 까만 단발머리, 그리고 동그랗고 큰 두 눈과 거친 입은 굉장히 언밸런스였다.
 기유성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지만 별수 없지.”
 이윽고 두 팀이 전투태세를 갖췄다.
 쿵, 쿵, 쿵, 쿵
 어느새 그들의 온 사방에 크리쳐들이 나타났다. 셀 수도 없이 빼곡한 크리쳐들 사이, 진호는 살짝 고개를 기울인 채 비룡을 올려다보고만 있었을 뿐.
 
 -……ㅅ……-
 
 귓가에 어렴풋이 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ㅅ……ㅑ……-
 
 진호가 한 걸음 더 앞으로 걸어간 순간,
 콰아아아앙!
 비룡의 턱 부근에 강력한 공격이 꽂혔다.
 찌지직!
 효과가 있었는가?
 비룡의 미간 사이에 적중한 마법이 비룡의 살덩어리를 한 웅큼 뜯어냈다.
 그때였다.
 
 [약점 간파 발동]
 
 진호의 약점 간파가 발동됐다.
 
 비룡의 미간이 반짝이는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진호의 시야가 훅! 하고 넓어졌다가 확! 좁아졌다. 사방의 시야가 새하얗게 변하며, 오직 그곳만 눈에 들어왔다.
 쾅! 쾅! 쾅!
 연달아 마법이 날아들었다.
 쿵!
 윤진서의 매서운 발차기가 턱에 적중했지만, 비룡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군.’
 진호는 깨달았다.
 저놈의 유일한 약점, 그것이 바로 저 미간의 틈이다.
 후우웅!
 비룡이 그 거대한 머리를 움직였다. 번쩍 든 머리가, 이내 땅바닥으로 내리꽂혔다.
 콰앙!
 천지가 진동하며 비룡의 머리에서 사슬들이 뿜어져 나왔다. 온 하늘을 빼곡히 덮는 사슬의 비였다.
 “막앗!”
 윤진서가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방패를 든 플레이어가 앞으로 나서 공격을 막아냈다.
 쿠구구구궁! 와지직!
 하지만 이번 공격은 녹록지 않다.
 방패가 와지직 와지직 소리를 내며 부서져 갔다.
 “젠장, 어쩐지 오늘 운세가 안 좋더니 이대로 뒈지는구나.”
 김현민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박수를 쳤다.
 짝!
 그리고 바닥을 짚었다.
 “프리즈!”
 쿠구구궁!
 바닥에서 솟구치는 얼음벽. 얼음벽이 두껍게 진호와 현민의 앞을 막아섰다.
 진호는 뒤를 쳐다보았다. 카이저 팀의 세 명이 사슬에 꿰뚫려 죽었다.
 사도 쪽은 더 심하다. 모두 죽고, 사슬에 맞아 팔 하나가 뜯겨 나간 기유성만이 절규하고 있었을 뿐.
 “이런 빌어먹을!”
 “갑자기 뭐야? 이런 패턴은 없었잖아!”
 윤진서 역시 온전치 못했다.
 체술계 특유의 빠른 몸놀림으로 치명상은 피했지만, 그녀 역시 옆구리를 사슬이 관통한 후였다.
 쿵! 쿵! 쿵! 와자작!
 그리고 김현민의 얼음벽 역시 무너져 내렸다. 그 순간, 진호가 움직였다.
 
 [식스센스 발동]
 
 진호가 김현민의 허리를 잡고 앞으로 튀어나갔다.
 오싹오싹
 오른쪽 팔꿈치, 명치.
 몸을 반쯤 틀고 김명민을 똑바로 세웠다. 사슬들이 간발의 차이로 김명민의 앞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 어, 엉?”
 오싹오싹
 왼쪽 허벅지, 오른쪽 발등, 목덜미.
 “빙벽!”
 진호가 짧게 소리치자 어리둥절해하던 김현민이 빠릿하게 움직였다.
 “프리즈!”
 쿠구구궁!
 솟구치는 얼음 기둥. 사방에서 내리는 사슬의 비는 모든 것을 초토화시킬 기세로 내리고 있었다.
 “허리 숙여!”
 날카롭게 소리치자, 김현민이 바로 허리를 숙였다. 이미 상황 파악 끝!
 이놈 정체가 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말만 잘 들으면 살아남는다!
 쐐애액!
 사슬이 스쳐 지나가며 등골이 오싹했다.
 날아드는 사슬 비 속.
 진호에게는 보였다.
 그 사이, 짙은 회색으로 죽어있는 비룡의 눈이.
 
 -ㅅ……ㅑ…….ㅂ……ㅔ…….ㄹ…….-
 
 그리고 놈이 말하고 있었다. 이번엔 확실히 들려왔다.
 “오냐!”
 그리고 현민의 등을 밟고 도약했다. 이어 얼음벽의 꼭대기를 밟았다.
 탁, 탁, 탁, 탁
 날아드는 사슬들을 밟고 계속해서 도약한 진호가 이윽고 사룡의 눈과 동일한 눈높이에 올라섰다.
 마지막 도약으로 사룡의 머리 위에 올라선 진호.
 그의 눈에 푹 파여진 미간이 보였다. 비룡의 속살은 새카맸고, 생명의 미동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주먹을 꽂아 넣었다.
 크허허헝!
 포효하지만 진호에겐 공포 상태이상이 통하질 않는다. 이상한 일이지만, 의문은 뒤로.
 우우우우웅!
 극점 타격이 풀 차징되며 오른손이 부풀어 올랐다.
 “훕!”
 주먹을 꽂아 넣는 진호.
 파파파팟!
 검은 살과 피가 튀어나오며 진호의 얼굴과 온몸을 적셨다. 그 순간, 진호의 주먹이 뭔가 딱딱한 물체에 닿았다.
 직감적으로 그것을 잡았다.
 “……?”
 쿵! 우르릉! 쿵!
 놈의 머리가 요동치며 진호를 떨구기 위해 애썼지만, 진호는 어떻게든 버텼다.
 우지직!
 이윽고 비룡의 미간 사이에서 딱딱한 물체가 뜯겨 나왔다. 진호의 손에 쥐어진 그것은, 육각형의 물체.
 
 [사혼의 파편을 제거하였습니다.]
 
 동시에 모든 플레이어들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제거자 : 유진호]
 
 크허허허헝!
 비룡이 울부짖었다.
 그 짙은 회색의 죽은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내 검은 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진호가 멍하니 서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귓가에 뭔가가 들려 왔기 때문이다.
 눈앞에 기묘한 형상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ㄷ……ㅗ……ㅁ…….ㅏ…….ㅇ…….-
 
 .
 .
 .
 .
 .
 
 -샤벨, 도망쳐.-
 
 “어?”
 
 -여긴 내게 맡기고. 나 용족(龍族)이야, 12차원 최강의 탱커란 말씀!-
 
 눈앞의 형상에서, 회색 머리를 한 사내가 씩 웃고 있었다. 그 얼굴은 인간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파충류를 닮아 있었다.
 양 팔꿈치의 뼈가 튀어나와 마치 통파를 연상시켰고, 손톱과 발톱은 뾰족했다.
 하체로 삐져나온 굵직한 꼬리가 인상적이다.
 그때, 영상의 저 멀리서 새카만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찐득하고 기분 나쁜 구름이었다.
 회색의 사내는 양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와라, 차원의 주인. 모조리 막아내 주마!-
 
 촤라라라락!
 그리고 그의 온몸에서 쇠사슬이 뿜어져 나갔다.
 
 .
 .
 .
 .
 .
 
 진호가 현실로 돌아오자, 비룡의 회색 눈이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이내 검은 비가 멎었다.
 하늘의 먹구름도 사라졌다.
 이윽고 여름 특유의 뙤약볕이 내리쬐었다. 세상이 환하게 변해 버렸다.
 촤라라락!
 이내 비처럼 내려 있던 사슬들이 차원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데이 브레이크가 종료되었습니다.]
 [사혼의 비룡이 본 차원으로 퇴각합니다!]
 
 쿠구궁
 그 거대한 비룡의 머리가, 다시 차원의 틈을 타고 사라져 갔다.
 서서히 희미해져 가는 비룡의 머리.
 “…….”
 비룡의 거대한 입가가, 살짝 휘었다.
 그 모습이 회색 머리를 한 용족 사내의 모습과 오버랩되는 것은 착각일까?
 욱신!
 오른팔이 아파왔다.
 진호는 그 오른팔을 비룡의 피부 위에 대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 떠오르는 기억들, 그리고 지난 시간들이 마구 섞여 혼란스러웠다.
 욱신!
 가슴이 아프다.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파왔다. 단검으로 쿡쿡 찌르듯, 숨 쉬기 힘들 정도로 아팠다.
 이내 비룡이 사라지고, 진호의 통증도 멎었다.
 “억!”
 그리고 시작된 추락. 워낙 거대하던 비룡의 머리 위에 서 있던 진호였다.
 그 비룡이 완전히 사라진 지금, 5층 높이의 건물에서 맨몸으로 뛰어내리는 셈이다.
 “…….”
 아무리 민첩 스텟이 높아도, 그건 무리다. 그때, 저 밑에서 김현민이 소리쳤다.
 “거기! 이거 타고 내려 와!”
 김현민이 허공으로 손을 뿌렸다.
 “아이스 로드!”
 
 #던전 입장
 
 쿠구궁! 쿠궁!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도시가 재건돼 가고 있었다. 그 속도는 매우 빨랐다.
 무너진 건물들이 부서진 역순으로 말끔해지는 것을 보는 것은, 언제 봐도 질리지 않을 장관이었다.
 오른팔이 뜯겨 나간 채 이를 갈던 기유성이 하늘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유진호, 이런 빌어먹을 새끼!”
 막타를 기가 막히게 쳐서, 레이드 아이템을 쏙 빼간 유진호.
 그놈은 그후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다.
 기유성의 절규에 가까운 고함만이 사방에 울려 퍼졌을 뿐이다.
 
 ***
 
 대한민국의 플레이어는 총 1000여 명.
 추측컨대, 이 중 850명 정도는 서울에 존재하고 150명 정도가 각 지방에 존재한다.
 절대다수의 플레이어가 서울에 존재하는 이유?
 간단하다.
 물자 교류 및 정보 교류가 활발하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들끼리의 물자 교류는 주로 카오스 스톤 혹은 현금으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아이템 레벨 5의 장검을 구매한다면, 카오스 스톤을 지불하거나 현금을 지불하면 된다.
 물론 카오스 스톤은 현금에 비해 다량을 입수하기가 어렵기에 시세는 현금이 훨씬 높은 편이었다.
 정보의 교류 또한 그렇다.
 질 높은 정보는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도 고가에 거래되곤 했다.
 가끔 생성되는 랜덤 던전의 위치나 아이템의 조합법 등은 굉장한 고가였다.
 
 플레이어들은 퀘스트를 통해 레벨 업을 하거나, 던전을 돌며 레벨 업을 한다. 레벨을 올릴수록 강해지는 것은 당연하고, 특정 레벨에 도달하면 각성을 한다.
 플레이어들의 사회 역시 인간 사회와 동일하다.
 그들끼리 정보를 공유하고 집단을 만들어낸다.
 마음이 맞으면 팀을 만들어 활동하는 플레이어도 많다. 개중 특별히 강한 자들이 있는 것은 인지상정.
 기본적으로 플레이어가 됐을 때 개방되는 고유 능력이 존재하고, 플레이어의 랭크가 있다.
 예를 들어…….
 “윤진서. 특이하게 S랭크인 체술계 플레이업니다. 베이스는 킥복싱. 체술계임에도 불구하고 쾌속이 아닌 힘 위주의 싸움을 해요. 체술계엔 속도에 비중을 둔 플레이어가 많은 것을 생각하면 특이한 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팀 카이저의 대장이죠.”
 쌍둥이의 정보는 유용했다.
 제한된 플레이어의 수만큼, 정보란 생각 이상의 힘을 발휘한다.
 “팀이라고 해서, 꼭 다섯 명뿐이란 이야기가 아니에요. 실제로 카이저는 근 오십 명에 달하는 대규모 팀입니다. 그래서 1군, 2군으로 나뉘어 있었어요.”
 윤진서를 필두로, 현재는 떨어져 나가 ‘사도’가 된 2군 팀을 제외한 25명이 현재의 카이저다.
 카이저의 특징은 갑옷 위의 독수리 마크.
 “데이 브레이크 땐 윤진서 일행 다섯만 움직이고 있던 모양이에요. 예측컨대, 사도 놈들이랑 5:5 배틀을 하려던 모양입니다.”
 “잠깐. 5:5 배틀과 PK는 다른 건가?”
 진호의 반문에,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
 -팀 배틀은 전용 필드가 펼쳐진다. PK와는 다른 개념이다.-
 “아아, 그렇군.”
 “……?”
 진호는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쌍둥이에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다. 계속해.”
 
 기유성.
 S랭크, 공격계. 베이스는 펜싱. 극도의 쾌검사(快劍士). 서울을 사분하는 팀 중 하나인 ‘사도’를 이끌고 있다.
 이들 역시 25명의 인원을 가지고 있는 팀.
 특징은 까마귀 마크.
 서울을 사분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것. 개인의 힘을 떠나 팀의 시너지가 상당하다는 말이다.
 
 이들뿐만 아니라 나머지 팀 두 개.
 몬스터 그리고 카멜 역시 그 정도의 인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우선 몬스터.
 이 팀은 모든 구성원이 ‘변신계’ 능력자들로 구성돼 있다는 것이 특징. 팀의 성향 자체가 수비적이라, 선뜻 먼저 싸움을 거는 일은 없다.
 그저 가지고 있는 구역에만 충실할 뿐. 이들은 갑옷 위의 해골 마크로 구분하면 쉽다.
 문제는 카멜.
 알려진 정보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최근 팀의 수뇌부들이 물갈이됐다는 것. 굳이 특징이라고 치면 당연하게도 낙타 마크.
 우선 직면한 상황에 가장 필요한 정보는 그 정도.
 진호는 냉정하게 현실을 분석했다.
 지금 전력으로 그들과 붙었다간?
 “필패.”
 단 한 마디로 압축 가능한 상황이다. 그들의 팀은 개개인의 기량 역시 뛰어나지만, 팀플레이에 특화된 조합이다. 탱, 딜, 힐의 조합에 충실하다.
 지금 진호의 팀은 전력이 부실하다.
 아직 5인 팀을 완전히 갖추지 못했다는 것도 그렇지만, 현재의 팀 구성도 그렇다.
 일종의 서포터 역할을 하는 구성원이 둘이나 된다. 그리고 메인 딜러이자 탱커는 진호의 몫.
 중요한 건, 진호 일행의 조합에는 각기 하자가 있는 능력자들만 모였다는 점.
 그 부분을 상쇄할 시너지를 만들어 내야 한다.
 
 플레이어로 살아간다는 것?
 장점은 많다.
 우선, 금전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돈 많이 번다. 때문에 풍족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현실에서 특정 종목에 있어선 최강자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진호는 마음만 먹으면 사상 최고의 복서, 각종 격투기 선수가 될 수 있다.
 또한 최고의 단거리 계주 선수가 될 수 있으며 기네스북의 수십 종류 기록을 갱신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단점은?
 가장 큰 단점.
 원래는 고려하지 않아도 됐지만, 이제 와서는 고려해야 하는 것.
 언제 어디서나 현실의 위협을 받아야 한다는 것!
 “결론 났다.”
 회의를 마친 진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결론 났네요.”
 “우리 너무 강한 놈들을 적으로 둔 거 아닐까요?”
 쌍둥이의 불안한 얼굴에, 진호가 자못 미안해졌다.
 “미안하다.”
 “세상에, 막타를 빼 먹었으니 그놈들이 그렇게 열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에요.”
 일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문제만 될 일도 아니에요.”
 이식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물론 형님이 막타를 드셨지만, 경험치는 팀이었던 우리가 나눠 가졌으니까요. 우린 성장이 급했어요. 급성장을 했으니,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겠죠.”
 제법 어른스럽다. 하지만 자못 섬뜩한 말이기도 했다.
 “어차피 그놈들은 못 잡았어. 그대로 뒀으면 전멸이었을 거다.”
 진호는 짧게 덧붙였다.
 “물론 그놈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겠지.”
 결론적으로 서울을 사분하는 팀 중, 두 개를 적으로 등졌다. 카이저 쪽에서도, 사도 쪽에서도 진호 일행을 수소문하고 있다는 소문이다.
 ‘윤진서는 그나마 낫다.’
 하지만 기유성 쪽은 아니다.
 ‘그놈은, 좀 위험해.’
 말마따나 카이저 쪽은 그렇게까지 호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사도 쪽은 무시무시한 공격성을 띠고 있었다. 사도에 밉보인 뒤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플레이어가 꽤 된다고 들었다.
 “아무튼 결론은 하나다.”
 쌍둥이가 동시에 대답했다.
 “당분간 잠수 타죠.”
 잠수를 타 버리는 거다.
 깊고 깊은 심해 속으로 쏙 숨어 버리는 거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도피해 버리는 것은 아니다.
 삼인방에게는 카드가 하나 남아 있었으니까.
 효과적으로 숨는, 그리고 더 강해질 수 있는 히든카드가.
 
 ***
 
 한밤중.
 삼인방은 조심스럽게 골목길로 빠져들었다.
 조용히, 조용히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최근엔 밖의 어디를 다닐 때도 그렇게 했다. 본 게임에 들어오고 나서, 한창 자각이 없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이쯤 되니 등골이 오싹했다.
 ‘만일 주거지나 행동반경을 적에게 들킨다면?’
 현피라는 말이 있다.
 온라인 게임 시절 자주 통용되는 단어였는데, 현실 PK라는 웃지 못할 합성어다.
 그 현피라는 것이 삼인방에게 있어선 현실이 됐다. 말마따나 현실에서 죽는다고 가정해 보자.
 현실에는 룰이 없다.
 즉, 죽으면 끝이다. 모든 게 끝!
 그 감각을 기유성을 보며 느꼈다. 그놈의 눈에 짙은 살기를 느꼈다.
 좋지 않아.
 진호는 속으로 말을 삼켰다.
 최근 살던 집을 버리고 새로운 집을 구했다. 버렸다고 해도 월세는 꼬박꼬박 내고 있었다. 기존에 사용하던 계좌에서 매달 빠져나갈 테니까.
 그 정도의 금액은 전혀 부담이 되지 않았다. 이제 진호에겐 돈이 많다.
 문제는 그 안전성이다.
 소위 구글링이라고 하는 신상 캐기가 자연스럽게 정착한 지금, 그 집은 언제 플레이어들이 들이닥쳐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다.
 하지만 삼인방에겐 최후의 한 수가 남아있었다.
 일식이 양피지를 쭉 펼쳤다. 비밀 상점에서 구매한 그 양피지다.
 “위치는 용인. 어디 보자……. 이쯤인데요.”
 이식이 쓱 고개를 내밀었다.
 양피지 위에는 경기도 용인시의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그중, 한 포인트에 점이 찍혀 있었다.
 삼인방을 태운 택시가 밤길을 달렸다.
 “근데, 너희 집에는 별말 안 해도 되냐? 나야 혼자 사니까 상관없다지만.”
 쌍둥이는 말이 없었다. 그러다 일식이 먼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상관없어요.”
 그렇다.
 누구에게나 밝히기 싫은 비밀이 있는 법. 진호는 더 이상 캐묻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아이템 : 사혼의 파편 - 회색 사슬]
 [아이템 레벨 : ???]
 [???]
 [???]
 [거래가 불가능한 아이템입니다.]
 
 비룡에게서 획득한 아이템은 이렇다. 단 하나, 저것뿐이었다. 비룡을 잡은 것도 아니고 퇴치한 것이다.
 퇴치라곤 해도, 그 경험치는 엄청났다.
 13이었던 진호를 20레벨, 그리고 떨어져 있던 쌍둥이들 역시 20레벨을 만들 수 있었으니까.
 “흐음…….”
 어디다 쓰는 물건일까?
 진호의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은 또다시 침묵을 일관하고 있었다.
 ‘과거의 동료?’
 회색빛의 용인, 12차원 최강의 탱커라고 씩 웃던 그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아직은 모르겠다.’
 대강의 궤도는 눈에 잡혔으나 확신이 들지 않았다.
 
 경기도 용인시.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놀이대공원이 위치하는 곳.
 때는 여름, 그곳의 워터파크가 한창이다. 한밤중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지도의 포인트는 놀이대공원의 바깥쪽에 위치한 허름한 공중전화 박스.
 희한한 일이다. 공중전화 박스가 던전이라니?
 공중전화 박스 앞으로 향한 삼인방.
 일식이 조심스럽게 스크롤을 들었다.
 “자, 찢습니다?”
 찌지직!
 스크롤이 찢어지며, 하얀빛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그 빛이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좌표 1225, 3211]
 [장소가 일치합니다.]
 
 그와 동시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A급 인스턴트 던전 스크롤을 사용하셨습니다.]
 [인스턴트 던전은 1회용 던전으로, 한 번 클리어 후 재도전이 불가능합니다.]
 
 [인스턴트 던전 : 놀이대공원에 입장합니다.]
 [팀이 존재합니다.]
 [현재 팀원 : 3명]
 [동시에 입장하시겠습니까?]
 
 이번엔 팀장인 진호에게 따로 메시지가 떴다.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팀으로 던전에 입장합니다.]
 
 메시지와 동시에 공중전화 박스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인 것처럼 물컹거렸다.
 이윽고 공중전화 박스 안에 뭔가가 생겨났다.
 그곳에 생겨난 것은 하얀 구체의 문.
 
 [던전 출입구가 생성되었습니다. 출입과 동시에 소멸되며, 출입구는 안전 지역에 랜덤 생성됩니다.]
 
 .
 .
 .
 .
 .
 
 문에 들어서자 나타난 것은 산처럼 거대한 놀이기구들이 가득한 놀이공원이었다.
 환호성이 들리며 폭죽이 터지는 놀이공원.
 마치 애니메이션에서나 나올 법한 환상적인 곳이었다.
 놀이기구마다 가득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잠시 의문이 든다. 여기가 놀이공원? 그건 알겠다. 그런데 이 상황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놀이기구가, 사람이 타기엔 지나치게 크다는 생각 안 드냐?”
 “그러고 보니…….”
 삼인방이 여지껏 봐 왔던 그 어떤 것보다 거대하다. 저기 저 바이킹을 보라. 사람이 타기엔 지나치게 거대하다. 최소 두 배 이상의 크기.
 저쪽의 회전목마는 어떤가?
 말이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같이 생동감 있으며, 그 역시 보통 말보다 세 배는 크다.
 “…….”
 진호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플레이어가 되면서 촉이라는 게 굉장히 발달한 진호였다. 그 촉이 말하고 있었다.
 끼이익!
 딸칵!
 어느새 회전목마도, 관람차도, 바이킹도 멈췄다. 오색 빛으로 환하던 놀이공원의 불이 일순간 꺼졌다.
 
 [던전 퀘스트가 갱신되었습니다.]
 
 [퀘스트명 : 조각 말]
 [등급 : B급]
 [보상 : 약간의 현금(한화), 경험치,
 소량의 카오스 스톤(Chaos Stone)]
 [적용 룰 : 리저렉션(Resurrection)]
 
 [퀘스트명 : 피의 피에로]
 [등급 : B급]
 [보상 : 약간의 현금(한화), 경험치,
 소량의 카오스 스톤(Chaos Stone)]
 [적용 룰 : 리저렉션(Resurrection)]
 
 [퀘스트명 : 놀러 온 크리쳐들]
 [등급 : B급]
 [보상 : 약간의 현금(한화), 경험치,
 소량의 카오스 스톤(Chaos Stone)]
 [적용 룰 : 리저렉션(Resurrection)]
 
 퀘스트가 마구 떠올랐다. 헌데 의문점 하난, 리저렉션 룰밖에 없다는 것.
 -인스턴트 던전은 기존의 퀘스트와 같이 현실의 배경이 아닌, 독립된 공간이다. 따라서 타임 백 룰이 적용되지 않는다.-
 이젠 알겠다.
 그때, 삼인방의 앞에 동그란 고깔 무늬의 공이 하나 굴러왔다. 크기가 어림잡아 지름 이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공이었다.
 일순간, 그것이 뿅! 하는 소리와 함께 피에로로 변했다.
 
 [던전 크리쳐]
 [Lv.20 피의 피에로]
 
 “얼추 우리 레벨에 맞춰 들어왔다. 하지만 쉽진 않겠어.”
 진호가 양 주먹을 맞부딪쳤다. 쾅, 쾅!
 “힐링 포션 몇 개지?”
 삼인방의 힐링 포션은 총 50개. 한 개에 100 카오스 스톤이나 하는 것을 모조리 구매했다.
 “슬슬 가 볼까.”
 놀이공원의 저 멀리, 언뜻 봐도 거대한 피에로가 보였다. 큼직한 뒷산 만 한, 투실투실한 팔과 다리가 기묘하게 번쩍이는 놈이었다.
 
 [던전 보스]
 [Lv.40 황혼의 피에로 카잔]
 
 저놈이 보스다.
 놈은 기괴하게 하얀 분장을 한 얼굴 그리고 새빨갛게 칠한 입술을 벙긋거리며 일행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마치 여기까지 와 보라는 듯.
 “가 주지.”
 삼인방이 천천히 던전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
 
 “유진호, 그 개새끼 못 찾았대?”
 “못 찾았다.”
 고급스러운 바(Bar)에 세 사내가 모여 있었다. 검은 단발머리에 날카로운 눈매를 한 사내는 기유성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 사내는 팀 사도의 간부들.
 기유성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디로 튄 거지?”
 “적어도 행동반경이라고 조사된 부근에선 흔적이 없어졌다. 집을 찾지 않은 지도 꽤 된 모양이야, 그 동료라던 건방진 쌍둥이 두 마리도 그렇고.”
 “젠장, 데이 브레이크 이후 일주일짼데. 흥신소에서도 연락 없나?”
 “그놈들도 없다고 한다. 제대로 잠수 타 버렸어.”
 기유성에게 보고하고 있는 사내는 대머리에 근육질의 몸매를 자랑하는 덩치였다.
 
 <디펜더>
 [박현수]
 
 박현수는 서울 최고의 탱커라고 인정받는 플레이어 중 하나. 사도 내에서도 톱 클래스였다.
 “그나저나, 지금 유진호 따위가 중요한 게 아냐.”
 그 맞은편에 앉아서 술잔을 홀짝이는 노란 머리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마그마>
 [인기정]
 
 인기정은 마법계 딜러. 그는 광역 딜링이 특징인 화염계 마법사였다.
 “우리 구역에서 벌써 세 번째라고.”
 “뭐가 세 번째야?”
 박현수가 처음 듣는단 얼굴로 묻자, 인기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좀 일에 관심을 가져라. 우리 구역에서 애들 PK당한 게 벌써 세 번째라고.”
 “PK라니? 우린 보통 5인 1팀으로 다니잖아?”
 “그래, 이 근육 돼지야. 그중에 5번 팀이 몰살당했다고.”
 5번 팀이라면 서대문 경기대학교 부근에서 발견된 랜덤 던전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팀이다.
 “어엉? 거기 박유진이가 팀장이잖아? 박유진이가 있는데도 몰살당했어? 누가 그랬어?”
 박유진은 2차 각성에 근접한 탱커. 사도 내에서도 손꼽히는 플레이어였다. 그만큼 강했고, 단단하고 튼튼했다.
 플레이 방식만큼 성격도 뚝심이 있고 의리 있는 사내였다. 때문에 랜덤 던전 같은 중대사를 맡기기엔 적격이었다.
 그런 그가, 그것도 5인 팀으로 움직이던 그가 당했다는 게 새삼 믿겨지지 않았다.
 “단서가 없어. 카이저 놈들은 확실히 아냐, 그놈들의 방식은 아니다.”
 박현수가 싸늘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럼 몬스터?”
 “이 멍청한 놈아, 몬스터도 아니다. 그쪽이랑은 평화 협정 맺었잖아.”
 “아, 그랬지.”
 “그럼 카멜?”
 “그건 가능성 있다. 그 새끼들 요새 간부진 물갈이돼서 종잡을 수가 없어.”
 갑론을박을 펼치던 와중에, 스마트폰을 확인하던 기유성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 놈이다.”
 “뭐?”
 인기정이 반문했다.
 “한 놈이다. 증거는 없지만 어떤 놈이 범인인지, 대강 감이 잡힌다.”
 “누구야, 그 미친 새끼가?”
 기유성은 말하는 대신 스마트폰을 들어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액정에는 사진이 한 장 찍혀 있었다.
 “방금 신촌 사거리에서 찍혔다. 이 미친 새끼가, 다시 돌아왔구나.”
 사진 속에는 평범한 회사원 하나가 찍혀 있었다. 사람들 인파 사이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사내였다.
 한 손에는 손수건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
 나이는 얼핏 봐도 사십 대. 탈모가 진행 중인지, 어떻게든 머리카락을 옆으로 빗어 훤한 정수리를 가리기 위한 노력이 제법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누가 봐도 평범한 회사원.
 “헉.”
 “헉.”
 하지만 그 사진을 본 인기정과 박유진은 안색을 굳혔다.
 “……사이코패스 새끼잖아? 왜 돌아왔지?”
 사이코패스 박재우.
 지난 한 달 동안 사라져 있던 그가, 다시 서울에 나타난 것이다.
 
 던전.
 
 던전은 보통 세 가지 분류로 나뉜다.
 첫째는 인스턴트 던전이다. 소위 인던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한 번 클리어하면 재도전이 불가능하다. 보통 던전 스크롤을 이용해 입장한다.
 인스턴트 던전은 아직 명확히 밝혀진 것들이 적었다. 애초에 던전 스크롤 자체를 구하는 것이 힘들어서 연구된 바가 많지 않다.
 둘째는 개방형 던전이다. 이는 4대 팀이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얼마든지 재도전이 가능하며 클리어 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던전 리셋이 된다.
 셋째는 랜덤 던전.
 이는 랜덤한 지역에 무작위로 생성된다. 이는 인스턴트 던전일 수도, 개방형 던전일 수도 있다.
 즉, 긁지 않은 로또 복권이다. 만약 재도전이 가능한 던전이라면 먼저 클리어해 던전에 발도장을 찍은 플레이어에게 소유권이 각인된다.
 문제는 클리어하기 직전까진 이 던전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
 
 “새 플레이어 영입은 어떻게 돼 가고 있나?”
 인상을 잔뜩 찌푸린 기유성의 말에, 인기정이 대답했다.
 “신규 팀원 세 명 섭외 중.”
 “직업군은?”
 “우리 요새 메즈(Mez)형 플레이어가 너무 없다. 그래서 그쪽으로 고려중이다.”
 메즈형 플레이어는 팀 배틀 시 굉장히 유용하다. 결정적인 순간 메즈기 한 방은 팀 배틀을 좌우하는 중요 요소였다.
 “싹수 보이는 애들은 있나?”
 “4팀 애들이 물색 중이다. 적어도 A랭크 이상으로 찾고 있어. 갓 본 게임 들어온 플레이어도 상관없겠지. 레벨이야 금방 올릴 수 있으니까.”
 기유성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튼, 우선 랜덤 던전 쪽으로 2, 3팀 보내. 난 따로 박재우를 조사하겠다.”
 바에 앉아 있던 세 사내가 일어섰다.
 “아참.”
 인기정이 돌아서던 기유성을 불렀다.
 “우리 흑소금 시세는 어떻게 하지? 몬스터 애들이 개당 10만 원으로 동결시키자던데.”
 흑소금은 4대 팀이 소유한 던전 내부의 거대한 세계수에서 수확할 수 있는 고유 아이템이었다.
 때문에 던전이 리셋되면, 가장 먼저 팀 사도의 수확원이 던전으로 들어가 흑소금 수확을 해 왔다.
 말이 소금이지 사실상 생긴 것은 작고 검은, 윤기가 나는 구슬이라고 생각하면 편했다. 새끼손톱의 1/3 크기로, 한 개의 크기는 매우 작다.
 주된 용도는 ‘스텟 포션’ 제작. 보유한 3개 스텟 중, 랜덤으로 1이 올라간다. 물론 사용 한도는 존재한다. 최대 사용 한도는 10개.
 보통 플레이어들은 하나를 먹는 것도 힘들었다.
 당연하게도 그 가격이 어마어마했다. 때문에 4대 팀은 어마무시한 돈을 쓸어 담고 있었다.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가장 비싼 아이템 중 하나가 바로 흑소금이었다.
 “지금 카멜 쪽에선 물량을 아예 풀지 않고 있다. 간부진이 바뀌어, 그놈들 성장에 쓰려는 모양이야. 10만 원에 동결시키자고 전해.”
 중요한 것은 랜덤 던전이다.
 만약 그곳 역시 개방형 던전이고, 세계수가 존재한다면 그야말로 대박이다.
 우선 던전 두 개를 소유한 팀으로 이름을 떨칠 수 있다. 그뿐인가? 그곳에서 수확되는 흑소금은? 또 부수적인 입장료 수익은?
 “아차.”
 다시 돌아선 기유성이 짧게 읊조렸다.
 “흑소금 판매는 이번 던전 리셋까지만. 그 다음부터 수확하는 흑소금들은 우리가 사용한다. 지방 쪽 놈들이 서울을 치려고 움직인다는 정보다.”
 인기정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하루 이틀 얘기도 아니잖아?”
 “이번엔 심상찮아. 아무튼, 그렇게 알도록.”
 기유성은 싸늘해진 얼굴로 바를 나섰다. 그리고 걸음을 옮기며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신촌 사거리, 연대 앞 버스 정류장. 일산 방향으로 이동하는 쪽, 현재 박재우 위치 확인.]
 
 “개새끼, 뒈졌어.”
 기유성은 자신의 바이크에 올라타, 스마트폰의 연락 메시지를 보냈다.
 
 [1팀 호출]
 
 부아아앙!
 요란한 엔진 소리와 함께 기유성을 태운 바이크가 밤거리를 달렸다.
 
 ***
 
 진호는 팔짱을 꼈다. 그의 다리 밑에는 섬뜩한 분장을 한 피에로가 눈을 까뒤집고 쓰러져 있었다.
 “휴우.”
 그 뒤로 제법 지친 기색이 역력한 쌍둥이가 고개를 내밀었다.
 “들어온 지 며칠째지?”
 “이 주일 하고도 반이 지났네요.”
 진호는 목을 좌우로 꺾었다.
 숨 가쁜 시간들이었다.
 석상인 줄 알았던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 갑자기 괴성을 지르지, 놀이기구들에서 두 발이 쑥 하고 튀어나오더니 쿵쾅거리며 달려들지.
 사실 처음에는 많이 당황했다.
 크리쳐답지 않게 우스꽝스러운 녀석들을 상대하려니, 방심했던 것도 사실.
 하지만 일격을 허용하고 힐링 포션을 두 개나 사용한 후로 잔뜩 긴장을 했다.
 그리고 일주일, 이 주일이 지난 지금 진호 일행에게 더 이상 크리쳐들은 위협적인 요소가 되지 않았다.
 “포션 얼마나 남았지?”
 일식이 인벤토리 창을 뒤적이더니, 여섯 개를 꺼냈다.
 “이게 전부네요.”
 “흐음……. 괜찮으려나?”
 “괜찮지 않아도 해야죠 뭐.”
 이식이 와이어를 빙글빙글 돌리며 씩 웃었다.
 
 <아크로뱃>
 [정이식]
 
 이식의 머리 위에는 각성명이 떠 있었다. 이식뿐만 아니라 진호 일행 모두가 1차 각성을 완료한 상태였다. 새삼 그 각성명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와이어 액션 1000회.”
 
 <클레릭>
 [정일식]
 “버프 사용 1000회.”
 
 <스피드 스타>
 [유진호]
 “회피 1000회.”
 
 각성의 조건은 각기 1000회의 반복 패턴.
 1차 각성 도달 레벨인 25는 일주일 전에 찍었다. 헌데 이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더욱 던전에 틀어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던전의 모든 크리쳐들을 소탕할 수 있었다. 이제 한 놈 남았다.
 “슬슬 가 볼까.”
 그들의 앞에는 산처럼 거대한 마지막 보스가 남아 있었다.
 
 [던전 보스]
 [Lv.40 황혼의 피에로 카잔]
 
 “헤이스트, 윈드, 스트랭스, 피지컬 업!”
 슝슝, 슝!
 일식의 손에서 하얀 기운이 뭉게뭉게 펼쳐졌다. 왼손에 들고 있던 오브가 파랗게 물들었다.
 
 [플레이어 ‘정일식’의 버프 스킬 발동!]
 [헤이스트 Lv.2 : 공격 속도와 이동 속도가 증가합니다.]
 [스트랭스 Lv.2 : 힘 스텟이 5 상승합니다.]
 [윈드 Lv.2 : 민첩 스텟이 5 증가합니다.]
 [피지컬 업 : 올스텟이 3 증가합니다.]
 
 업그레이드된 버프가 진호의 몸에 힘을 불어넣었다. 1차 각성을 한 후, 일식의 버프는 더욱 업그레이드가 됐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다.
 일식이 이번엔 오른손으로 오브를 바꿔 들었다.
 그 순간, 오브가 까맣게 물들었다.
 “슬로우(Slow)! 커스(curse)! 디지즈(disease)!”
 이번에 뿜어져 나오는 까만색 기운은, 저 멀리 황혼의 피에로 카잔에게 향했다.
 1차 각성의 위력은 뛰어났다.
 일식은 버프뿐만 아니라 디버프를 거는 클레릭으로 각성한 것이다.
 이번엔 이식이 나섰다. 이식이 인벤토리 창에서 이것저것을 꺼냈다. 피에로들이 사용하던 단검 그리고 밟으면 폭발하던 깜짝 상자 등이 튀어나왔다.
 그것을 든 이식이 던전 주변의 돌멩이 하나를 주워 하나로 뭉쳤다.
 우웅!
 
 [아크로뱃 특수 스킬!]
 [정크 에디션(Junk addition) : 주변의 사물 혹은 잡다한 아이템들을 합성해 효과적인 무기를 만들어냅니다.]
 
 [특수 제조품 : 깜짝 트랩]
 
 이윽고 이식의 손에서 ‘깜짝 트랩’이 만들어졌다. 그것은 마치 지뢰를 연상케 하는 아이템이었다. 이식이 그것을 카잔의 앞쪽에 뿌렸다. 하나, 둘, 셋, 넷.
 인벤토리의 모든 잡다한 재료들을 소모해 만들어 낸 깜짝 트랩이 수북이 쌓였다.
 그리고 와이어 두 개를 좌우로 흩뿌렸다.
 촤라락 촥!
 왼쪽의 와이어는 큼직한 가로등에, 오른쪽의 와이어는 회전마차의 기둥에 묶였다.
 그 상태로 팽팽해진 와이어를 뒤로 쭉 당기는 이식.
 “준비 끝!”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팟, 팟, 팟!
 그리고 냅다 달렸다.
 투우웅!
 팽팽하게 당겼던 와이어에서 이식이 튕겨져 나왔다. 허공을 향해 튀어나가며 와이어를 양손에 회수한 이식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꺄-호!”
 목표는 카잔, 저 거대한 피에로다.
 멍하니 허공을 보다가 히죽 웃고,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익살스러운 포즈를 계속하던 카잔이 시선을 진호 일행에게 고정시켰다.
 멀리서는 몰랐는데, 놈의 하체는 큼직한 네모 상자에 매달려 있었다.
 그 거대한 놈의 전신이 들어갈 정도로 큼직한 상자 속에선 스프링이 있어, 놈의 하체를 고정하고 있었다.
 진호 일행을 본 카잔의 익살스러운 표정이 점점 섬뜩해져 갔다.
 쿠우우우웅!
 이윽고 놈이 상자 속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스프링이 짓이겨지는 섬뜩한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콰아앙!
 이윽고 폭음과 함께 놈이 상자 속에서 튀어나왔다. 진호가 파이팅 자세를 취한 채, 상체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스킬명을 읊조렸다.
 “섀도우 복싱.”
 훙, 훙, 훙!
 흔들리는 상체가 서서히 잔상을 남기더니, 이윽고 진호가 두 명이 되었다.
 
 [약점 간파 발동]
 
 날아오는 카잔의 몸, 그중 세 부위가 반짝반짝 빛났다.
 놈의 신체 크기는 거의 5층 건물과 맞먹었다. 그야말로 거대하기 그지없었으나, 진호 일행이 상대해 본 녀석들에 비하면 사실 좀 모자란 감이 있었다.
 일단 피에로라는 몬스터의 특성상, 느릿느릿하고 공격 자체가 치명적이지 않다.
 게다가 약점이 굉장히 명확하다. 놈들은 약점을 공략하면, 다른 부위를 공격하는 것보다 두 배 이상 데미지를 받는 모양이었다.
 “머리, 배, 등 뒤의 스프링과 연결되는 부분!”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오던 카잔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그 육중한 몸을, 진호의 잔상에게 틀었다.
 
 [섀도우 복싱]
 [강력한 도발력을 가진 분신 1체를 만들어 냅니다.]
 
 진호가 씩 웃었다. 진호의 분신이 서 있던 자리로 카잔이 날아와 꽂혔다.
 쿠우우웅!
 땅이 들썩들썩할 정도의 진동이 울려 퍼졌다. 안 그래도 빌딩 크기의 카잔이었다. 놈을 멀리서 보았을 때도 엄청난 크기가 체감이 됐는데, 가까이서 보니 더욱 남달랐다.
 물론 진호는 이식 쪽을 쳐다보았고, 이식 역시 씩 웃었다.
 콰과과과광!
 요란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그곳은 깜짝 트랩이 대거 설치된 위치였다.
 본디 벙어리인지, 당혹스러움 가득한 카잔의 표정이 폭연 사이로 묻혔다.
 휘리릭, 휘릭!
 그 폭연 사이를 뚫고 이식의 와이어가 날아들었다. 이내 놈의 약점 부근에 빨간색 조준점이 생겨났다.
 탁, 탁, 탁!
 세 번의 도약으로 진호가 카잔의 앞에 섰다.
 후우웅!
 놈의 육중한 몸통이 진호를 깔아뭉개기 위해 움직였다.
 “슬로우!”
 하지만 일식의 디버프는 놈의 공격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진호는 망설임 없이 스킬명을 중얼거렸다.
 “레피드 복싱!”
 보통은 회피 포인트가 쌓여야만 스킬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스피드 스타 특수 스킬!]
 [포인트 세이브(Point save) : 전투 시 누적된 회피 포인트가 최대 100까지 세이브됩니다. 다음 전투 시 세이브된 회피 포인트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레피드 복싱이 발현되며, 진호에게 누적돼 있던 회피 포인트가 모조리 사라졌다.
 
 [포인트 세이브로 저장돼 있던 회피 포인트를 모두 소모하셨습니다.]
 
 확실히 전투가 편해졌다.
 1차 각성을 끝내며, 진호는 좀 더 회피 탱커 겸 딜러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기존의 회피 포인트를 세이브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초반 싸움을 우세하게 이끌어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플레이어 ‘정이식’의 스킬 발동!]
 [스킬 : ‘이쪽이다!’]
 
 이쪽이다! 가 걸리자마자 진호의 묵직한 어퍼가 놈의 후방을 타격했다.
 신체 길이가 워낙 거대해, 놈의 머리나 복부를 타격하기란 힘든 일이다.
 때문에 후방의 용수철과 고정된 부분을 노렸다.
 그리고 그 타격은 매번 유효했다.
 퍽퍽퍽
 이어지는 원투 펀치.
 
 [극점 타격 - 5단계 차징]
 [풀 차징 상태입니다.]
 
 그리고 극점 타격.
 싸움이 시작된 지 약 30분.
 평소라면 지쳐 나가떨어질 진호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또 다른 패시브 스킬이 발동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태미너 세이브(Stamina save) 발동!]
 [플레이어의 피로가 1회 회복됩니다.]
 
 쿨 타임이 제법 긴 것이 흠인 반면, 전투 시 이보다 유용할 수는 없었다.
 진호는 양 주먹을 마주치며 소리쳤다.
 “자, 한 번 더 가 볼까!”
 
 ***
 
 싸움은 손쉬웠다. 카잔의 후방을 지탱하던 용수철은 진호의 공격에 의해 끊어질 위기에 쳐했다.
 티잉, 티잉, 티잉
 카잔의 몸이 휘청거렸다. 용수철이 끼릭끼릭 쇳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카잔이 난처하다는 얼굴로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티이잉!
 자꾸 상자 쪽을 쳐다보는 것이 상자 속으로 숨어 버리려는 모양이었다.
 휘리릭!
 이식의 와이어가 날아들어 놈의 목 부분에 칭칭 감겼다.
 “요놈, 어딜 가려고?”
 그때.
 튀이이이잉!
 거대한 쇳소리와 함께 용수철이 카잔의 신체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워낙 급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이식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놈에게 끌려갔다.
 “이런!”
 진호 역시 다급히 달렸다. 이식이 반대편 와이어를 내질러, 인근의 놀이기구를 붙잡았다.
 티잉!
 두 와이어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카잔이 상자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냈다.
 끄응, 끄응
 식은땀을 흘리던 카잔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식이 기를 쓰고 양팔로 와이어를 지탱했으나, 그것도 곧 한계.
 “이이익!”
 이식이 와이어를 잡은 손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더 이상은 무리다.
 “그걸로 일식이 잡아!”
 진호가 빽 소리치며 달리던 방향을 바꿔, 일식 쪽으로 냅다 달렸다.
 그리고 마지막 1차 각성 스킬을 시전했다.
 “섀도우 스텝(Shadow step)!”
 진호의 몸이 마치 엿가락 늘어지듯이 쭉 늘어나더니, 이내 일식의 뒷편으로 이동됐다.
 그 상태로 일식의 몸을 끌어안은 채 달렸다. 연이어 날아드는 이식의 와이어를 아슬아슬하게 붙잡았다.
 “오케이!”
 후우웅!
 이내 카잔이 제 몸을 거대한 상자 속으로 숨겨 버렸다. 그 탄력에 힘입어 진호 일행 역시 그곳으로 질질 끌려 들어갔다.
 쿵! 콰광!
 “억!”
 그 충격이 보통이 아니었다.
 상자 안쪽은 푹신한 스펀지 재질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카잔의 충격을 방지하기 위함인 모양이었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충격으로 즉사해도 시원찮았을 것이다.
 상자라곤 하지만, 그 크기는 카잔이 쏙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로 컸다.
 카잔이 그 큰 팔로, 제 머리를 감쌌다.
 그리고 벙어리인 입모양을 이리저리 바꾸며 뭔가를 읊어댔다.
 “젠장!”
 진호가 다급히 카잔에게 달려들었다.
 그 순간.
 상자 안쪽이 환하게 빛났다.
 
 [피에로 상자!]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는 피에로의 상자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상자 속의 카잔은 해당 지역의 가장 큰 차원의 틈으로 랜덤 이동합니다!]
 
 상자 안쪽에 화면들이 나타났다.
 도시, 시골, 하늘, 바다, 강 할 것 없이 화면들이 마구 나타나며 사방의 환경이 바뀌었다.
 마구 변환되던 장면이 점점 느릿해지더니, 이윽고 하나의 화면에 멈춰 섰다.
 그 화면은 한 장소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것은 진호 일행에게도 익숙한 장소였다.
 서대문역 2번 출구.
 
 [해당 지역으로 이동합니다!]
 
 우우우우우웅!
 상자가 마구 회전하면서 진호 일행의 정신을 쏙 빼놓았다. 그 회전이 멈출 즈음.
 딸깍!
 박스의 윗면이 천천히 열렸다.
 끼리릭, 끼릭
 카잔 역시 움직이려 했으나, 놈과 연결된 용수철이 제 힘을 다 했는지 끊어져 버린 모양이었다.
 쾅!
 남은 힘을 다 해 상자 밖으로 튀어나는 카잔. 하지만 놈이 다시 돌아오진 못했다.
 콰아앙!
 저 바깥에서, 카잔이 땅에 처박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헉, 헉…….”
 진호는 식은땀을 닦으며 상자 안쪽의 용수철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이미 끊어져 버려, 더 이상 카잔의 몸을 지탱하지 못했다.
 
 [던전 보스]
 [‘황혼의 피에로 카잔’을 처치하셨습니다!]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하아……. 무서운 놈이었다.”
 쌍둥이가 동시에 한숨을 내쉬며 털썩 주저앉았다. 헌데 느낌이 묘하다.
 상자를 타고 들어오는 묘한 청량감.
 마치 숲 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아니던가?
 진호가 용수철을 밟고 위로 튀어 올랐다.
 티이잉!
 아찔할 정도로 높이 올라온 진호. 그리고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나…… 무?”
 피에로 상자는 그들을 전혀 생소한 곳으로 데려와 버렸다. 그들을 맞는 것은, 거대한 나무 한 그루.
 
 <세계수>
 [열매 500/500(미수확 상태)]
 
 세계수라 불리는 나무의 나뭇가지마다 깨알 같은 검은색 열매들이 매달려 있었다.
 
 <『룰 브레이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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